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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말, 충성, 온유, 원수 사랑, 별거
1-7절, 왕의 영광, 악인 제거, 교만
[1-3절]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편집한 [필사(筆寫)한](KJV, NASB, NIV) 것이니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잠언 30-31장을 제외한 잠언의 대부분의 내용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쓴 내용이며, 25장부터 29장까지는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필사(筆寫)한 것이다. 솔로몬은 잠언 3천개를 썼다(왕상 4:32).
하나님께서 하시는 어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다 알 수 없다. 신명기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러나 어떤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이다. 일을 계획하고 행하며 그것을 부지런히 살피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잠언 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로마서 12:8,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이니라].” 나라 일들을 힘써 살피는 왕은 훌륭한 왕이다. 물론 왕의 깊은 마음은 백성이 다 알지 못한다.
[4-5절]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位)[왕위]가 의(義)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불순물이 섞인 은 원석에서 찌끼를 제거하면 은장색이 쓸 만한 순은(純銀)이 나오듯이, 왕의 신하들 중에서 악한 자를 제거하면 그 왕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설 것이다. 악한 자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 비양심적인 자, 아첨하는 자, 남을 해치는 자 등을 가리킨다.
그가 왕에게 약간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나 참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실상 그는 자기 이익을 구하는 자이다. 그는 결국 왕의 나라를 어지럽히며 평안을 무너뜨리고 왕의 명예도 땅에 떨어뜨릴 것이다.
왕의 왕위는, 악인이 제거되고 의인이 세워질 때 견고케 된다. 잠언 16: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잠언 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왕의 보좌와 나라는 공의로 굳게 서며 평안을 누릴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의(義)의 내용은 인자함과 사랑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왕은 백성에게 인자함과 사랑을 실천하여 나라 안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아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나라와 그 왕위는 견고해지고 평안을 누릴 것이다. 잠언 20: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位)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잠언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伸寃)하면 그 위(位)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교회도 비슷하다. 교회에서도 악인들이 징계를 받고 의롭고 선한 자들이 세움을 받을 때 교회는 평안 가운데 든든히 세워질 것이다.
[6-7절]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大人)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왕은 겸손한 신하를 사랑하고 신임할 것이다. 왕 앞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는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나타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더 귀한 사람이 오면 상석을 내어주어야 할 것이며 그러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높이지 말고 낮추라는 교훈을 주신 것이다(눅 14:8-11).
주께서는 겸손에 대해 교훈하셨다. 그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 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20:26-27),
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3:12). 또 사도 바울도 교인들에게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교훈하였고(롬 12:10), 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했다(빌 2:3).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옥 갈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다. 또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고린도전서 4:7,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또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들도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 독생자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다 알려 하지 말고 오직 그를 의지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잘 계획하고 행하고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둘째로,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면 그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해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선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어야 한다. 또 우리는 교회에서 믿음이 없고 악한 자들을 징계하고 의롭고 선한 자들을 세움으로 교회를 견고하고 평안케 해야 한다.
셋째로,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크게 여기거나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주 안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성도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며 사랑해야 한다.
===8-12절, 다툼, 경우에 합당한 말, 책망
[8절] 너는 급거히[성급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수치를 당하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우리는 성급히 나서서 이웃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무슨 일을 파악하고 판단하기 전에 성급히 나서면 수치를 당할 것이다. 잠언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수치]을 당하느니라.” 잠언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또 원고의 말이 옳은 것 같으나 피고가 와서 밝히는 경우도 있다. 잠언 18:17,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사람이 성급히 나서서 다투면 실수하기 쉬운 까닭은 사람이 누구나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식과 이해력은 한계가 있고 사람의 기억력과 판단력도 그러하다. 말의 표현력도 불완전하다. 또 사람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이기 쉽다. 사람이 감정이 앞서면 사리판단력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화가 났을 때는 조금 참고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이 좋다. 그래야 실수를 안 하고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잠언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을 내뱉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또 우리는 노하기도 더디해야 한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그러므로 야고보서 1:19-20도,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교훈하였다.
[9-10절]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남의 은밀한 일’(NASB, NIV)이라는 원문(소드 아케르 )은 “은밀한 일을 남에게”(KJV)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것은 원문의 전통적 읽기이며21) 문맥에도 맞는 것 같다.
사람이 이웃과 가급적 안 다투는 것이 좋으나 부득이 다툴 경우가 있다. 어떤 오해가 있을 때나, 억울하게 비난을 받았을 때나, 또 물질적 손실을 당했을 때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때에 관계된 문제만 변론해야지, 그가 다투다가 알게 되었거나 평소에 알고 있던 상대의 은밀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사적인 문제를 남에게 누설하는 것은 인격의 결함이며 그런 사람은 인격적이지 못하다는 비난과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또 남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치 않는 것은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 예의와 덕이다. 하나님 앞에서 부족이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돌아다니며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고 또 남의 비밀을 누설치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레위기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11절]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상황에 적절하게 말해진 말’을 가리킨다. 그 상황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말이나 동문서답같이 엉뚱한 말이나 주제나 핵심에서 벗어난 말은 별 가치가 없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우에 <21)전통적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소드 에 분리액센트가 찍혀 있고, 아케르 에는 연결액센트(다음 글자와 연결해 읽는)가 찍혀 있다.> 합당한 말은 사리나 이치에 맞고 이성과 양심에 맞고 더욱이 성경에 맞는 말이다. 또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는 그때의 상황과 듣는 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 ‘아로새긴 은쟁반’이라는 원어(마스킷요스 카세프 )는 ‘은으로 만든 전시물, 은으로 만든 조각상’(BDB, KB)이라는 뜻으로 영어성경은 ‘은 그림’(KJV) 또는 ‘은으로 만든 틀’(settings of silver)(NASB, NIV)이라고 번역하였다.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는 매우 아름답고 가치 있어 보이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 할 것이다. 경우에 합당한말이 바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잠언 15:23은,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한다. 의인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 적절하고 유익한 말을 하는 지혜가 있다. 그러므로 잠언 10:20은,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5:28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말했다. 야고보서 1:19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하였다.
[12절]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슬기로운 자 곧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자이다. 슬기로운 자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과 조언을 주며 필요한 경우는 책망도 준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과 같다. 물론, 듣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리 좋은 말도 소용이 없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이라도 그에게는 유익이 없다. 그러나 좀 부족한 전도자나 설교자의 교훈이라도 그 교훈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유익이 있다. 지혜로운 자는 다른 이들의 권면과 충고를 듣는다. 잠언 12:15는,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말한다. 겸손한 자는 어린아이에게서도 무엇을 배울 것이다.
‘금고리’는 ‘금 귀걸이’(KJV, NASB, NIV) 같은 것을 가리키고 ‘정금 장식’은 금목걸이, 금팔찌, 금반지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들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이 그렇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슬기로운 자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고 오히려 사모해야 할 것이다.
잠언 1:8-9는, 부모의 훈계[징계]는 자녀의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요 목에 금사슬이 된다고 말하였다. 또 잠언 3:22는, 지혜의 말씀은 영혼의 생명이 되며 목에 장식이 된다고 말하였고, 잠언 4:9도, 지혜는 그것을 얻은 자의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두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잠언 27:5는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말하였고, 잠언 27:9는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다툼을 가급적 피해야 하지만, 부득이 다툴 때는 성급히 나서서 다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특히 다툴 때 그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웃과 다툴 때 그때 관계된 문제만 말하는 것이 옳고, 감정이 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대방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감추고 싶은 부족과 실수가 있고 그것을 덮어두는 것은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 예의와 덕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 우리는 상황에 부적절한 말을 삼가고, 경우에나 상황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한다.
넷째로,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다.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잘 들으면 자기에게 큰 유익과 복이 된다.
===13-16절, 충성, 거짓 자랑, 인내, 절제
[13절] 충성된(네에만 )[충성된, 변함 없는, 믿을 만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친낫 쉘렉 )[눈(雪)의 차가움]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원문에는 ‘얼음 냉수 같다’는 말이 앞에 나와 강조되어 있다. ‘얼음 냉수’는 오늘날 말로 하면 얼음 띄운 물이나 냉장고에 넣었다 뺀 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추수하는 날은 추수하느라고 땀 흘리고 덥고 목마른 날이다. 그때 얼음 냉수는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 것인가.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주인에게 이러하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주인의 마음을 얼음 냉수같이 시원케 할 것이다. 충성이란 자기가 맡은 일을 이루기 위해 변함 없이, 초심을 잃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용두사미(龍頭蛇尾) 즉 처음에는 거창하게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조석변이(朝夕變移) 즉 아침하고 저녁하고 마음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작심삼일(作心三日) 즉 결심한 것이 3일밖에 못 가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은 충성이 아니다.
충성된 사자는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교회의 직분자들, 목사, 장로, 권사, 교사 등에게 적용될 것이다. 보낸 자와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당회와 교인들을 통해 일꾼들을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은 영혼 구원의 전도와 목회의 일이다. 특히 전도는 신약교회의 최대의 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일꾼들로 부르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맡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주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계 2:10).
[14절]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라는 원문(이쉬 밋할렐 베맛탓 솨케르 )은 ‘거짓된 은사(gift)를 자랑하는 자’(KJV)라는 말이거나 ‘선물을 거짓되이 자랑하는 자’(NASB)라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지 않은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자이거나 남에게 선물을 준다고 거짓말로 자랑하는 자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즉 성령의 은사는 남에게 자랑하라고 주신것이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지도 않으신 은사를 받은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허위 광고, 과장 광고와 같다. 그것은 거짓이며 허풍이다. 그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다. 거짓된 은사를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다. 그것은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고 바람도 불지만, 비올 듯한 모양만 있고 비를 뿌리지 않는 것과 같다. 유다는 그의 서신에서 거짓 교사들을 “바람에 불려 가는 물 없는 구름”이라고 묘사했다(유 12). 우리는 거짓 교사들의 허풍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또 남에게 선물을 주지도 않으면서 선물을 줄 것처럼 거짓말하는 것도 악한 일, 불신실한 일이다. 우리는 무슨 선한 일이든지 조용히, 은밀히 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나 남에게 구제할 때 자랑하거나 선전하거나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히 하라고 교훈하셨다(마 6:1-6). 메시아께서는 다투지도 않으시고 외치지도 않으시고 아무도 길에서 그의 소리를 듣지도 못하리라고 예언되었다(마 12:19).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생활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무슨 봉사를 하든지 야단스럽고 떠들석하게 자기를 선전하면서 하지말고 조용하게, 은밀하게, 겸손하게 해야 한다.
[15절]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예푸테 )[그 말에 설득 당하나니](be persuaded)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관원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때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포기하면 일이 그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인내가 필요하고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자존심과 감정을 버리고 상한 마음을 버리고 참고 인내하며 자신의 정직하고 정당한 소원을 계속 간청하면 마침내 관원이 설득 당하여 그의 말을 받아줄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말씀하신 불의한 재판관과 한 과부의 비유의 내용이기도 하다. 한 과부가 낙심치 않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간절히 탄원하여 응답 받은 것처럼, 오래 참고 관원에게 간청하면 좋은 응답을 얻을 것이다.
본문은 또,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유순한 말이 뼈같이 딱딱한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뜻이다.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한다. 성질을 내는 과격한 말은 상대방을 노하게 만들며 그의 마음을 더 닫게 만든다. 그러나 유순한 대답은 상대방의 노를 쉬게 하며 닫힌 마음도 조금씩 열 것이다. 물은 가장 약한 물질이지만, 못 들어가는 곳이 거의 없고 날카로운 바윗돌도 깎아서 부드럽게 만든다. 유순한 말도 이와 같다. 온유는 성도의 덕이며 하나님의 종들의 덕이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디모데후서 2:24-25,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 . .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16절]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잠언 24:13에서는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고 말했으나, 본문은 꿀을 과식하면 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절제에 대한 교훈이다. 꿀뿐 아니라, 모든 맛있는 음식이 다 그러하고 세상의 모든 즐거운 일들이 다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좋은 것들을 절제 있게 사용해야 한다. 절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덕의 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관해 전하였다(행 24:25).
절제는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 . .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실상,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무하다(전 1:2). 그러므로 시편 39편은 모든 사람이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다고 표현하며 우리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였다(시 39:6-7).
사도 바울은,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저것을 다 폐하실 것이라고 말하였다(고전 6:12-13).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임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느니라”고 말하였다(요일 2:15-17).
물론, 금욕주의가 대안은 아니다. 전도서는 사람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중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허무한 세상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교훈했다(전 2:24; 5:18; 9:9).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딤전 4:1-5).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자가 되어 그가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잘 수행하고 끝까지 완수함으로써 우리를 세우시고 그의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야 한다.
둘째로, 거짓 은사를 자랑하거나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다.
우리는 세상일이나 신앙생활이나, 기도도 구제도 허풍으로나 자기를 자랑하면서 하지 말고 조용하고 충실하게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감정적으로 행하지 말고 범사에 인내하며 온유하고 유순한 말로 자기 의견을 말함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
오래 참으면 관원도 그 말에 설득 당한다.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는다.
넷째로, 우리는 꿀을 적당히 먹고 과식하지 말아야 한다.
허무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이 있으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의 즐거움을 적당히 누리며 범사에 절제해야 하고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17-20절, 이웃 왕래, 거짓 증거, 불신실, 동감
[17절]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호카르 라글레카 밉베스 레에카)[네 발을 네 이웃의 집으로부터 드물게 하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본문은 사람이 이웃집에 자주 드나들지 않고 드물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교훈한다.
이웃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은 자기의 일에 충실하지 못하고 남에 대한 말도 하기 쉽다.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또 사람마다 개인의 시간 계획이 있고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 사람에게 30분 혹은 1시간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큰 일이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게 행동하지 말고 남을 생각하고 예의를 가져야 한다.
남의 시간을 필요로 할 때에는 먼저 정중히 양해를 구해야 하고 전화가 필요한 경우에도,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하신 이웃 사랑의 원리에 맞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상대를 배려한다(고전 13:4-5).
그러나 상대방의 구원을 위한 접촉이나 방문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상대방의 영혼 구원은 가장 귀한 일이므로 그 일을 위해서 접촉하고 방문하는 것은 우리가 기회를 잡아 힘써야 할 귀한 일이다.
본문은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한다. 특별한 일 없이 이웃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이웃에게 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야지 귀찮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선하고 흠 없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18절]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그 이웃에 대해 거짓말로 비난하는 자는 그 이웃을 방망이로 때리고 날카로운 칼로 베고 뽀족한 화살로 쏘아 찔러 죽이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하셨다(출 20:16). 거짓말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행동이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뱀을 통해 거짓말로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를 범죄케 하였고 아담과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창 3장).
주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마귀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남을 치는 거짓 증거는 교만과 미움에서 나온다.
교만은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만들며, 미움은 남을 해치고 죽이게 한다. 미움과 살인은 멸망의 죄악이다.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했다(요일 3:15).
성경은 거짓말하는 자와 살인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되고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22:15,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1:8,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19절] 환난 날에 진실치 못한 자(보게드 )[배신자, 불신실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쉔 로아 )[나쁜 이](NASB, NIV)와 위골(違骨)된 발(레겔 무아뎃 )[뒤뚝거리는(tottering) 발](BDB) 같으니라.
‘진실치 못한 자’ 즉 배신자, 불신실한 자는 양심적으로 행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 입장을 바꾸고 관계를 변하는 자이다.
그는 우리가 부요하고 형통할 때는 친근히 하다가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즉 물질적 어려움이 있고 환경적 재난이 닥칠 때에는 등을 돌리는 자이다.
환난 날에 배신자, 불신실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나쁜 이와 뒤뚝거리는 발과 같다.
이나 발은 몸에 꼭 필요한 지체지만, 나쁜 이는 음식을 씹는 기능을 잘 못하는 이며 뒤뚝거리는 발은 걷는 기능을 잘 못하는 발이다.
그것들은 쓸모 없고 오히려 통증이 있어서 고통과 짐이 되는 지체들이다.
이와 같이, 환난 날에 배신자, 불신실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쓸모 없는 일이며 오히려 마음에 고통과 짐이 되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님 안에서 신실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그의 진리 안에서 의리를 지키고 변함 없이 사랑하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사랑엔 거짓이 없고(롬 12:9), 또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사람은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아니고 때때로 우리를 배신하고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다.
주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요 2:24).
[20절]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소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
추운 날에는 옷을 더 입어야지 옷을 벗으면 더 춥다. 또 소다에 식초를 부으면 부글부글 끓고 열이 나고 이산화탄소 즉 탄산가스와 더불어 유해물질이 발생하여 눈이나 피부에 해롭다고 한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위로하기는커녕 그의 마음을 더 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지 말고 은밀히 그를 위해 기도하든지 혹은 함께 기도해야 하며 또 그에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성도는 고난 중에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다른 사람과 마음을 같이해야 한다. 그것이 온유와 겸손의 마음가짐이요 사랑의 마음가짐이다.
욥은,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말했다(욥 30:25).
사도 바울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한다”(고전 12:26),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 하였다(롬 12:15-16).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같은 생각을 가지며] 체휼(體恤)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 하였다(벧전3:8). 우리는 서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고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영혼 구원을 위한 접촉 이외에는 이웃에게 폐가 되거나 부담을 주는 방문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일이나 영적인 일이나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웃에 대해 거짓말로 증거하여 이웃을 치거나 찌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남을 치는 거짓 증거는 교만과 미움에서 나온다. 우리는 교만과 미움을 버리고 겸손히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셋째로, 환난 날에 불신실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나쁜 이와 뒤뚝거리는 발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신실한 친구가 되어야 하고 환난 날에 신뢰할 만한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사람을 믿거나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해야 한다.
넷째로,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초를 부음 같다.
우리는 이웃과 생각과 감정을 같이하여 그가 울 때 함께 울고 그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야 한다. 그것이 온유함과 겸손함의 마음가짐이요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가짐이다.
===21-24절, 원수 사랑, 참소하는 혀, 다투는 여인
[21-22절]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본문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는 교훈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원수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셨고 오래 참으셨고 구원하셨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주께서도 비슷한 내용을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전통 본문). 누가복음 6:27-28,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도 바울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다(롬 12:20-21).
핀 숯을 머리에 놓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핀 숯이 쇠를 달구듯이 그의 선행이 원수의 마음을 감동시켜 회개케 하고 변화시킴을 뜻할지도 모른다.
원수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상대방에게 악을 행했는데 상대방은 자기에게 선을 행하기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가 그래도 변하지 않으면 그가 원수에게 한 선행이 도리어 그의 머리에 놓여진 하나님의 진노의 숯불이 된다는 뜻도 포함할 것이다.
본문은 또 네가 원수를 선대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사랑의 선행에 대해 상을 주실 것이다.
[23절] 북풍이 비를 일으킴같이 참소하는 혀(레숀 사세르 )[은밀한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일으킨다’는 원어(테콜렐 )는 ‘가져온다’(NASB, NIV)는 뜻이거나(BDB), ‘몰아낸다’(drive away)(KJV)는 뜻이다.
<22) ‘은밀한 혀’는 ‘은밀하게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혀’라는 뜻이라고 본다(BDB). >
한글 본문은, 북풍이 비를 일으키듯이, 은밀하게 남을 헐뜯는 혀가 비난당하는 당사자나 바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분노케 만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혹은, 본문의 뜻이, 옛날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북풍이 비를 몰아내듯이, 노한 얼굴은 남을 헐뜯는 혀를 몰아내느니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팔레스틴 땅의 북풍은 보통 비가 없는 바람이라고 한다. 팔레스틴 땅에는 보통 서풍이나 남서풍이 비를 가져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문은,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은밀히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을 듣지 않고 그 앞에서 화를 내면 그는 다시 와서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디모데전서 3:11은, 사람이 장로와 집사가 되려면 그의 아내들이 참소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24절]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21:9도 같은 말씀이다.)
잠언 21:19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비슷한 내용을 말한다.
다투는 여인은 성격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람은 자기의 욕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하고 다툰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불만도 없고 다툼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경건함과 선함과 온유함 등의 덕성에 있다.
<22) ‘일으킨다’는 원어(테콜렐 )는 ‘가져온다’는 뜻이거나(헬라어70인역, BDB), ‘몰아낸다’(drive away)는 뜻이라고 보인다(헬라어 시마쿠스역, Vg, 카일-델리취, 유대인 학자들 아벤 에즈라, 죠셉 킴치).>
여성의 가치도 그러하다. 성경은 특히 여성의 덕으로 하나님을 경외함, 덕스러움, 선행, 온유함, 조용함 등을 든다.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12:4는, “어진[덕스러운]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또 디모데전서 2:9-10은,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고 말하고, 또 베드로전서 3:4는 “[너희 단장은]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성경은 검소함, 절제, 근면 등을 여성의 덕으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예쁜 것이 큰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나, 실상 사람의 외모보다 그의 영혼이 더 중요하며 그 영혼이 그의 인격을 형성한다.
사람의 인격이 그 외모보다 훨씬 중요하다.
결혼의 행복은 가정의 평안과 사랑에 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지만, 사람 편에서 겸손과 온유, 사랑과 인내를 갖춘 선한 인격이 필요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끝까지 그에게 선을 베풀어야 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남을 비난하지 말아야 하고 또 우리에게 와서 은밀히 남을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화를 내어 쫓아내는 것이 좋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나쁜 일이요 그런 것을 방치하는 것도 나쁜 일이다.
셋째로,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외모에보다 인격성에 두어야 한다. 모든 여성도들은 경건과 선함과 온유함의 덕을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
===25-28절, 좋은 기별, 의인의 굴복, 영예, 마음 제어
[25절]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도시에 나가 학원에서 청소하고 일하면서 공부하던 학생이 대학 입학 소식을 부모님께 전해드렸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라, 시골에서 아들의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부모님의 기쁨은 참으로 컸을 것이다.
죄인들은 목마른 자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셨다(사 55:1). 주께서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6).
죄인들은 세상에서 사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나 죄 문제의 해결과 영생에 대해서 알지 못하여 <그들의 영혼이 이미 죽어 있는, 시한부로> 목말라 있다.
천국 복음은 먼 땅에서 오는 가장 좋은 소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소식이며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할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사람이 전적으로]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하나님의 복음은 목마른 자들에게 생수와 같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수가성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요 4:10, 14).
[26절]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우물이나 샘은 먹는 물이다. 의인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
잠언 10:11은,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고 말한다. 물이 흐리어짐과 더러워짐은 물을 못 먹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의인이 의를 지키지 못하고 악인의 위협과 핍박에 굴복하여 불의를 용납하고 타협하고 절충하는 일이 있다.
경건했던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죽음의 위험 때문에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었다.
사도 베드로는 주께서 잡히신 날 밤에 사람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었다. 그것들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크게 실망시킬 만한 일들이었다. 그런 일들은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참사랑-생명의 구주, 신랑이신 하나님이 마음 아파 하신다!!>
사람들은 의인의 말과 행위를 통해 의가 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악인이 득세할 때 탄식한다.
잠언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이나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앙과 의를 지키기를 원하신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사자굴의 위협과 풀무불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했다(단 3장, 6장).
주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5:10-11).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그들을 경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을 때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했다(행 4:17-20).
[27절]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꿀은 달고 맛있는 좋은 음식이다. 성경은 지혜를 꿀에 비유하였었다.
잠언 24:13-14는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 . .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고 하였다. 또 다윗이나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표현하였다(시19:10; 119:103).
여기 본문은 영예를 꿀에 비유한다. 영예는 좋은 것이며, 불명예나 수치는 나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 하나님의 친구-자녀-백성-기업-소유-기쁨-누림은 바로 믿는이의 다함 없는 영원 진실 무궁한 영예임을 알라!!>
그러므로 잠언 22:1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라고 말했고, 전도서 7:1도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말했다.
로마서 2:7도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갚으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은 꿀을 적당히 먹어야 한다고 교훈한다. 잠언 25:16은,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 그 중에서도 영예에 대한 균형-중용-질서-조화, 곧>절제를 교훈한 것이다. 그것은 음식에서 뿐 아니라, 영예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영예는 좋은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에 대한 욕심을 품는 것은 좋지 못하다.
사람들은 영예를 위해 외식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남에게 악을 행하기도 한다. 그것은 세상적 욕심이며 세상 사랑이다.
전도서 1:2는 “[세상의 일들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말하였고, 또 요한일서 2:15-17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했다.
[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마음’이라는 원어(루아크 )는 ‘영’이라는 뜻이다.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 등 영의 활동이다.
<루아흐는, 사람 안에 창조하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심 통해 조성되었고 오직 하나님의 참 생명, 조에Zoe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여기에 하나님 자신의 모든 영광-이름-어떠하심의 모든 것을 담아 공급하신다)...바로 하나님의 이 말씀으로 살도록 창조하신 영, 생각-감정-의지 등 혼적 활동 기능을 가진 영, 곧 내적 사람 전반을 의미하는 바, 좁게 보자면 생각 자리가 마음이라 할 수 있다!!...영의 기능으로서는 직관-양심-영교 등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영과 마음을 제어하고 다스린다는 말은 절제를 가리킨다. 자신을 절제하는 사람은 좋은 인격자이다. 그는 마음의 의지 곧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이다. 이사야 26:3은, “주께서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않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은 외부인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인 것과 같다. 그는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과 세상의 악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벽 곧 바른 우주관, 인생관, 가치관이 필요하고 경건과 의의 생활규칙이 필요하다.
또 경건과 의를 실천할 힘과, 불경건과 죄를 버릴 힘이 필요하며, 끊을 것은 끊고 피할 것은 피하고 힘쓸 것은 힘쓰는 결단력과 절제가 필요하다.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한다. 우리는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고(고전 6:12; 10:23), 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하였다(고전 9:25).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에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실상,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며(갈 5:22-23)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덕성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먼 땅에서 오는 좋은 소식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적으로 목마른 죄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이 구원의 좋은 소식을 널리 전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둘째로,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물의 더러워짐 같다.
우리는 악인 앞에 굴복하지 말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과 의를 지키고 범죄치 말고 본을 보이며 고난도 각오해야 한다.
셋째로, 꿀을 많이 먹는 것은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은 헛되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예와 영광은 좋은 것이지만, 세상 영광을 구하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우리는 세상적 영예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좋은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늘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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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미련한 자, 게으른 자
===1-3절, 미련한 자의 영예, 까닭 없는 저주, 막대기
[1절]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팔레스틴 땅은 여름이 곡식을 추수하는 때이다. 여름에 눈이 오면 곡식을 추수하고 타작하는 데 큰 지장이 될 것이며 채소들은 다 얼어버릴 것이다.
비는 씨를 뿌리거나 곡식이 익는 계절인 초겨울과 초봄에 와야 적당하다. 그러므로 여름에 눈이 오고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은 적당치 않고 오히려 지장이 된다.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같이, 미련한 자에게 는 영예가 적당하지 않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그의 계명대로 살지 않는 자이다. 그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고 악하며 거짓되다.
영예를 얻는 것은 예를 들어 교회의 직분과 사회의 직위를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치 않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함으로 그 직분을 어그러뜨린다.
그는 그 직분과 직위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져서 더 큰 잘못을 범한다. 그는 그 직분과 직위를 남용하고 오용한다.
파사 왕 아하수에로의 신하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심히 노하여 그와 그의 유다 민족을 다 멸하려고 계획하였고(에 3:5-6), 또 집뜰에 50규빗[23미터] 되는 나무를 세워 그를 그 나무에 달아 죽이려고 계획하였었다(에 5:14).
초대 교회 때에도,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주의 종들을 대접지 않고 악한 말로 비방하고 대접하는 자들을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았다(요삼 9-10).
[2절]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저주는 하나님께서 상대방에게 재앙을 내려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악인에게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 임하기를 기원하는 것은 공의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정당성이 있다. 시편의 많은 저주의 시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시편 6:6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또 시편 7:16은 악한 자의 잔해(殘害)[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까닭 없는 저주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자에게 재앙을 기원하는 것 같은 정당성 없는 저주를 가리킨다.
그런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 재앙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며 그는 불의하고 부당한 재앙을 내리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므로 이방인 선지자 발람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다(신 23:5).
또 시므이는 다윗 왕을 저주하였으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저주 까닭에 선으로 자기에게 갚으실 것이라고 말했다(삼하 16:12).
(한걸음 더 나아가!!...미움과 저주는 사랑 충만한 마음, 그 활력과 사랑의 능력을 흐뜨러 뜨리기에) 정당한 저주라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신약 성도들에게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사랑하며 그를 축복하라고 교훈하셨다. 누가복음 6:27-28,“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또 사도 바울도,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고, 악에 대해 보복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며 악한 자에게 끝까지 선을 베풀라고 교훈했다(롬 12:14, 19-20). 그것은 우리가 지옥 갔어야 할 큰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으로 구원 얻었기 때문이다.
[3절]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재갈’은 말을 어거하기 위해 입에 가로로 물리는 쇠토막을 가리킨다. 말이나 나귀 같은 이성 없는 짐승에게는 재갈과 굴레와 채찍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이 그것들을 제어하고 순종케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과 다르며 사람은 말로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고 권면하고 책망도 한다. 사람은 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상대방이 마음을 닫지만 않는다면, 그에게 자기의 마음과 뜻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닫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미련함이 조끔씩 있다. 미련한 자는 무지와 고집, 교만과 완고함이 있다. 그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미련한 아이에게 부모의 매가 필요하듯이, 미련한 자에게는 채찍이나 매나 막대기가 필요하다. ((믿는이도 어느정도 어리석고 연약함이 늘 있기에!! 이처럼 믿는이 스스로는 하나님께 순복함, 성령께 자원함으로 복종하는 것이 숙달됨=영적 성숙이 어렵기에, 전적으로 속사람을 다루시는 주님의 생명과 사랑의 연단이 반드시 필요하다...온전한 생명 성숙과 열매 맺음 이것을, 주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알며 사랑하며 섬김 원하며, 신뢰함으로 구하라!!))
잠언 10:13,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잠언 18:6, “그[미련한 자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잠언 19:29,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미련한 어른들의 등에 필요한 막대기는 하나님의 징계의 고난을 가리킨다.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히브리서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편 32:9는,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여름에 눈이 오고 추수 때에 비가 오듯이,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않다.
미련한 자는 그 영예를 남용하고 오용한다. 우리는 영예를 구하지 말고 지혜를 구해야 한다.
둘째로,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다.
우리는 까닭 없는 저주를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셋째로,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이다.
우리는 미련함을 버리고 온유함과 순종심을 가져야 한다.
===4-6절, 미련한 자에 대한 대답
[4절]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계명을 알지 못하고 행치 않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교만하고 자신을 높이고 남을 멸시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사랑한다.
그는 돈을 자랑하고 집을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하고 외모를 자랑하고 세상 권세를 자랑한다.
그런 사람은 흔히 뭐니뭐니 해도 세상에서는 건강이 최고라든가 돈이 최고라는 등의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미련한 자의 말들에 동의하여 “물론, 그렇죠”라고 대답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틀린 말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와 정반대로 가르친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시편 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사야 40:6, 8,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5절]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우리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말에 대해 대답하지 않고 잠잠해야 할 때가 있으나, 하나님의 진리에 관계될 때, 또는 침묵하면 상대가 오히려 <자기의 미련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분수에 지나치게 스스로 자랑하고 뻐기면서>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길 수 있을 때 ((반드시 영 안에서, 입에 넣어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침묵하실 때도 있었지만, 필요한 때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그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에 대해 비난하고 금하였을 때,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다(눅 13:15-16).
또 유대인들이 간음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 율법대로 돌로 칠 것인가를 질문하였을 때, 그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8:7).
이것은 그들의 말로써 그들의 부족을 깨우치신 사건이었다. 사람은 남의 잘못은 잘 보고 또 정죄하지만, 막상 자신도 정죄를 당할 만한 부족한 자임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묻자, “나도 한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되물으셨다(마 21:23-25). 그럼으로써 그는 어리석은 자들의 시험하는 질문의 입을 지혜롭게 막으셨다.
[6절]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자(者)는] 자기의 발을 베어버림이라. 해를 받느니라.
누구 편에 기별한다는 것은 <자기의 뜻과 의향을 , 신뢰하는 이에게 맡겨서> 전달 받는 상대방에게 자기의 뜻을 전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에는 편지나 전화, 혹은 문자나 이메일이 있어서 전하는 일이 쉽지만, 예전에는 사람을 직접 보내어 전하게 하였다.
전달자의 임무는 자기를 보내는 자의 말과 마음을 충실히 전하는 것이다. 그런 데 미련한 자 편에 (곧 미련한 자에게 맡겨서) 기별하는 자는 자기의 발을 베어버림과 같다. 발을 베어버림과 같다는 말은 전할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보내는 자의 전하는 뜻이 바르게 전달되지 않고 변질되고 왜곡되어 그를 보낸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해를 입는다.
이것은 목사와 교사, 또 넓게는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해야 할 진리의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稱義)의 복음이요 또 구원받은 자들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게 하고 온전케 되게 하는 성화(聖化)의 교훈이다. 말씀의 봉사자들과 모든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롭고 충성된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딤후 4:3-5).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충실한 전달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따라 이단 사상들을 전하고, 병 고침과 물질적 부요함의 복을 가르치는 설교를 하고, 내세에 대한 소망보다 현세에 대한 관심만 전하며, 또 요즈음에는 예화가 가득하고 유머가 있는 재미있는 설교를 함으로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지 못하는 일이요 도리어 하나님의 일에 해가 되고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말에 동의하여 대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잠시라도 어리석은 자들의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헛된 말에 동의하지 말고 그 어리석음에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말에 대하여 침묵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성경에 근거해 바르게 대답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어리석은 자의 생각과 말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우쳐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잘못을 모를 것이다.
셋째로,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자는 자기 발을 베어 버림같이 해를 받는다.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지혜롭고 충성된 자들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성경적 기독교가 밝히 증거되게 해야 한다.
===7-9절, 미련한 자의 잠언과 영예
[7절]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다리는 걷는 기능을 하는 중요한 신체기관이다. 다리가 튼튼한 자가 건강한 자라고 한다. 사람은 적당한 영양섭취와 충분한 운동으로 다리를 건강케 해야 한다.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려 있다. 저는 자는 다리를 가지고 있으나 그 다리가 제 구실을 못하는 자이다.
본문은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이 저는 자의 힘없이 달려 있는 다리와 같다고 말한다. 입은 음식을 먹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특히 말을 하는 기관이다. 잠언은 교훈적이고 유익한 말을 가리킨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별 교훈이 되지 못하고 별 유익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미련한 자는 온 세상의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사람의 삶의 규칙으로 주신 그의 계명을 알지 못하므로, 그의 잠언에 가장 중요한 것 곧 경건과 도덕성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그 입으로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바르고 유익한 충고를 주고, 또 위로와 격려를 주고 때로는 책망도 한다.
잠언 10:21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고 말하며, 잠언 12:18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같다”고 말하며, 잠언 15:4는 “온량한[건전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덕스러운 말을 하라고 교훈한다.
에베소서 4:29는,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한다.
[8절]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물매’는 투석구(投石具) 즉 돌을 멀리 정확하게 던지는 기구이다.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과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지에서 사용한 무기의 하나로서 2미터 정도의 가죽끈의 중간을 넓게 하고 거기에 돌을 싸서 끈의 양끝을 모아 잡고 돌리다가 한쪽 끝을 놓아 돌을 날리는 도구이다. 앗수르 사람들은 발 앞에 계란 모양의 돌을 쌓아 놓고 던졌으며 애굽 사람들은 목에다 돌을 담은 그물을 걸고 던졌다고 한다. 사사기20:16은 사사 시대에 베냐민 사람들 중에 물매를 던져 정확하게 맞히는 자들이 700명이나 있었다고 증거한다. 사울 시대에 소년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 물매를 사용하였다(삼상 17:40). 당시 목자들은 양을 해치러 오는 짐승을 막는 도구로 물매를 썼던 것 같다.
본문은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이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의와 선을 행치 않는 자, 거짓되고 악한 자, 비양심적인 자이다.
영예를 준다는 말은 직분을 주고 중요한 책임을 맡긴다는 뜻이다. 직분은 <목표하는, 중요한>일을 하기 위해 주는 것이며 일을 위해 필요하다.
돌을 물매에 맨다는 말은 돌을 날려보낼 수 없음을 말한다. 물매가 <목표물을 맞추기 위해 돌을 날려보냄의>물매로서의 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미련한 자는 그의 미련함, 곧 그의 교만과 악함과 거짓됨 때문에 그의 영예 즉 그의 직분을 잘 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을 어그러뜨리고 해를 끼친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또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열왕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했다.
오늘날 교회 직분자들과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미련하고 무익한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9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술 취한 자는 바른 정신, 건전한 정신, 제 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이 술 취하면 실수하고 범죄하기 쉽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말했다(엡 5:18).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는 위험하기 그지없다. 바른 정신을 가진 자는 가시나무를 불쏘시개로나 쓸 것이다. 그러나 술 취한 자는 그것을 지팡이인 줄 알고 잡음으로 자기 손을 상할 것이다. 그의 손은 베이고 찔리고 찢길 것이다. 또 그가 그것을 사용하여 남을 치면 남에게도 같은 해를 줄 것이다. 그는 그것으로 남의 몸을 베고 찌르고 찢어 큰 상처를 입힐 것이다.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이와 같다. 잠언은 교훈의 말이다. 미련한 자는 그의 미련함을 말로 나타낸다. 그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말을 하며, 그 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덕스럽고 건설적인 말이 아니고, 남에게 해를 주고 마음의 상함을 주는 말이다.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한다”고 말하며, 잠언 15:4는 “패역한 혀는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가 그렇다.
야고보서 3:8-9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미련한 자의 혀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2:1은,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하며, 에베소서 4:29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저는 자의 다리가 힘없게 달려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아무 유익이 없는 말을 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어 남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
미련한 자는 직분을 맡아도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우리는 미련한 직분자, 봉사자가 되지 말고 지혜롭고 충성된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주신 선한 봉사의 직무를 잘 감당해야 한다.
셋째로,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와 같다.
그것은 자신에게 해가 되고 남에게도 해를 준다. 우리는 우리의 입을 지켜 악한 말을 금하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0-12절, 미련한 자
[10절] 장인(匠人)이 온갖 것을 만들지라도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
본문은 여러 뜻으로 번역되는 구절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 뜻은 어느 정도 이해된다.
‘장인’이라는 원어(라브 )는 ‘크신 자[하나님]’(KJV), ‘장인(匠人)’(게세니우스), 혹은 ‘궁인(弓人, 활 쏘는 자)’(NASB,NIV) 등으로 번역된다.
또 ‘만들지라도’라는 원어(메콜렐 )는 ‘만드는 자’(BDB, KJV) 또는 ‘상하게 하는 자’(KB, NASB, NIV)로 번역된다.
‘지나가는 자’라는 원어(오베림 )는 ‘범죄자’(KJV) 또는 ‘지나가는 자’(NASB, NIV)라고 번역된다.
옛날 영어성경(KJV)은 “모든 것을 만드신 크신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자도 보응하시고 범죄자들도 보응하시리라”는 뜻으로 번역하였고, 히브리어 학자 게세니우스는, “장인이 온갖 것을 만드나,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범죄자를 고용함과 같으니라”는 뜻으로 번역했다(한글 개역성경과 비슷함).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은, “모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궁인(弓人)처럼, 미련한 자를 고용하거나 지나가는 자를 고용하는 자가 그러하리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어느 번역이 바른 번역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근래의 영어성경 들이 문맥상 적절해 보인다. 본절은 미련한 자를 고용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같이 별 유익이 없거나 범죄자를 고용하는 것같이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에 그 일에 적합한 자를 잘 심사하여 고용해야지, 아무나 고용해서는 그 일을 잘할 수 없고 더욱이 미련한 자에게 일을 맡기면 오히려 심신의 고통과 해를 당할 것이다.
[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개는 음식이 나쁘든지 속이 안 좋든지 하면 토할 것이다. 또 토한 것은 위액과 섞여서 냄새도 이상하고 맛도 이상할 것이다.
그렇지만 매우 훈련된 개가 아니면, 개는 얼마 후 배가 고프면 그것을 또 먹는다. 개들은 지혜가 없어 욕구와 충동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다 그러하다. 짐승은 지혜와 생각이 없고 도덕성이 없다.
미련한 자는 이와 비슷하게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한다. 미련한 것이 무엇인가? 불경건한 것이나 우상숭배 같은 것, 또는 부도덕한 것, 즉 남을 비방하는 것이나 음란한 것이나 거짓된 것 등이 미련한 것이다. 또 헛된 것들, 즉 돈을 사랑함, 세상을 사랑함, 명예를 사랑함, 사치와 허영, 과도한 쇼핑, 지나친 외모 치장 등이 미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욕구가 있고 정당치 않은 욕구가 있다. 의식주의 기본적 필요는 정당하고 또 결혼도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이지만, 음란이나 알코올 중독, 탐욕과 사치와 허영 등 무엇이든지 절제치 못하고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행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한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늘 거역하였다(신 9:7, 24).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또’ 혹은 ‘다시’ 범죄하였다고 증거했다(삿 3:13; 4:1; 6:1;10:6; 13:1). 시편 78:17, 40-41,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
[12절]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참 지혜는 사람이 하나님을 창조주와 섭리자로 바로 아는 것과 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죄인이며 의(義)와 사랑이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바로 아는 것이다. 거기서 참된 겸손이 나온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은 무지하고 교만한 자의 모습이다. 그것이 곧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의 현인도 “네 자신을 알라”고 말하였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실상 우리의 가진 지식은 지극히 작은 분량에 불과하다. 지구는 우주에서 작은 점에 불과하며, 한 개인은 그 지구에서 작은 점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의 작은 부분도 잘 모르고 있다. 인생은, 마치 권위 있는 폐암 전문의가 자신이 폐암에 걸린 줄 모르고 있다가 폐암으로 죽는 것과 같다.
사람은 심히 무지하고 죄악되고 연약하다.
본문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보다 더 못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줄 모르며,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3-4, 6).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궁인처럼 해가 된다.
우리는 미련한 자, 곧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악한 자가 되지 말고 그런 자를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특히 교회는 하나님의 일에 미련한 자를 세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개가 그 토한 것을 먹듯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한다.
죄성이 미련함이며 사람 속에는 죄성이 있고 우리 속에도 그것이 남아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뿐이다.
셋째로,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미련한 자보다 더 못한 자이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지혜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로마서 12:16,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3-16절, 게으른 자
[13절]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언 22:13도 비슷한 내용이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할 일을 충실히, 부지런히 하지 않는 자이다.
게으른 자는 길이나 거리에 사자가 있다고 핑계를 댄다.
예상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겁을 내면서 해야 할 선한 일을 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사실상, 사자는 보통 숲이 있는 들판에 있고 길거리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일에는 항상 예기치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설령 위험이 있어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사람이 교통사고의 위험 때문에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많은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성도가 하는 일에는 악한 자들의 방해가 있다.
그러나 성도는 항상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고난과 위험을 각오하고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고 격려하셨다(수 1:6-9). 잠언 28:1은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셨다(사 41:10).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권면했고(고전 15:58) 또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교훈했다(고전 16:13).
성도는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하나님의 전진갑주를 입고(엡 6:10-11) 담대히 신앙생활을 하고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14절] 문짝이 돌쩌귀[경첩, 힌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뒹구적거리느니라].
단잠은 좋은 것이며 하루에 약 7-8시간의 적당한 수면은 보약이라고 한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편안하게 누워 잤다고 시편에서 말했다(시 3:5; 4:8). 솔로몬은 시편 127편에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고 말하였다(시 127:2).
그러나 지나친 잠은 게으름의 표시이며 그렇게 잠을 자는 사람은 가난해질 것이다. 잠언6:9-11,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자기의 할 일에 충실한 자는 지나치게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다. 할 일이 많은 세상인데 게으르게 잠만 잘 수 없을 것이다.
야곱은 하란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할 때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다고 말했다(창 31:40).
잠언 31장에 보면,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하게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들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는다고 묘사되었다(13, 15, 27절).
사도 바울은 전도 사역을 할 때 많은 고난을 당하였고 자지 못한 때도 많았다고 간증하였다 (고후 6:4-5; 11:27).
[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찰라카스 )[‘품, 겨드랑이’23) 혹은 ‘그릇’(BDB, KB, NASB, NIV)] 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언 19:24와 같은 말씀이다. 본문은, 게으른 자가 그 손을 품에 넣고 입으로 올리기도 괴로워한다는 뜻이든지,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는 뜻이다. 게으른 자는 손끝도 까딱하기를 싫어하고 숟가락질하기도 힘들어한다. 그러나 성도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해야 한다.
근면은 사람을 <23) 헬라어 70인역, 아퀼라역, 심마쿠스역, 유대인 주석가 킴치, KJV.>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음식물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9).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12:24는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했고(롬 12:11), 또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했고 또 세월을 아끼라고 교훈하였다(엡 4:28; 5:16).
[16절] 게으른 자는 선히(타암 )[사려 깊게, 분별력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게으른 자는 또한 교만하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겸손히 순종하지 않는다.
잠언 3:7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말했다. 잠언 12:15는,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8:2는,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고 말하였다.
또 잠언 26:12는,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고 말한다. 성도는 주 안에서 담대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문짝이 경첩을 따라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뒹구적거린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자기 일에 충실한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 한다. 우리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게으른 자는 사려 깊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 우리는 미련하고 게으르고 교만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17-20절, 간섭, 속임, 말쟁이
[17절]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우리는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다툼, 우리와 상관 없는 다툼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툼에 간섭하는 사람은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다.
사람이 개의 귀를 잡으면 개에게 물릴 것이다. 사람이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것은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사람은 각자 자기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가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특히 남의 다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잘 모르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은 복잡하다. 여러 가지 이해 관계뿐 아니라, 심리 문제, 감정 문제가 얽혀 있기 마련이다. 또 사람은 생각보다 거짓되고 악하며 자기 합리화에 명수이다. 사람은 매우 외식적이고 가증하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지 시시비비를 가리고 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는 냉철한 이성과 선한 양심과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법관들은 원고와 피고의 말을 다 들어보고 여러 증인들의 증언들과 여러 증거들의 사실 여부와 그 신빙성을 검토하고 여러 정황을 확인하고 추론하고 모든 점들을 다 검토한 후, 최종적 판결을 내린다.
그러므로 잠언은,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말했다(잠 18:17). 또 주께서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확증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15-16).
또 사도 바울은,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말하였다(딤전 5:19).
[18-19절]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전쟁 상황도 아닌데, 남에게 횃불을 던지거나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자는 정상적 사람이 아니고 미친 사람일 것이다.
미쳤다는 말은 이성과 양심이 그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상식에도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예의가 없는 자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남에게 해를 끼친다.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다고 하는 자도 그러하다.
남을 속이는 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다. 속이는 것은 큰 악이다. 속이는 자는 건전한 인격자가 아니다. 거짓은 마귀의 죄악이다.
또 우리는 남을 불쾌하게 만들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농담도 삼가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5:4는,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교훈하였다.
성도는 정상적인 인격자, 건전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정상적인 인격자는 남을 해치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다.
성도는 남에게 악을 행치 말고 오히려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며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해서도 참고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성도는 사랑의 인격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성경은 가르쳤다(고전 13:4-6).
또 성경은 성도의 성숙한 덕이 절제하는 것과 근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딤전 3:2). 성도는 자제심과 건전한 정신을 가져야 한다.
[20절]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말쟁이는 이 집 저 집 다니거나 전화나 문자로 남의 말을 잘하는 자이며 말의 실수가 많은 자이다. 그는 자기가 들은 말에 무엇을 더하여 전하기도 하며 중요한 내용들을 빠뜨리거나 잘못 해석하거나 왜곡시키기도 하고 거짓말도 해서 사람들 간에 다툼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을 많이 교훈하였다.
레위기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잠언 10:19,“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언 16:28,“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8:8,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야고보서 1:19,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우리는 말에 신중하고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고 남의 일을 간섭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웃을 속이거나 해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성과 양심을 따라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쉰다.
우리는 말쟁이가 되지 말고 말을 더디하고 신중하게 하고 말에 온전한 자가 되고 말로 남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약 3:2; 엡 4:29).
===21-23절, 다툼, 남의 말, 악한 마음
[21절]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숯불 위에 숯을 더하거나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면 불이 더 잘 탄다.
싸움을 좋아하는 자는 말다툼을 더 일으킨다. 잠언 20:3,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다툼은 몸의 죄성과 세상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 . .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 . .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야고보서 3:14-15,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고 온유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다툼을 피하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해야 한다.
로마서 12:9-10,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에베소서 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디모데전서 3:3, “(감독의 자격 요건으로)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야고보서3:17-18,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22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주로 남의 흠과 부족, 실수와 잘못을 말하는 것, 남을 비난하는 것, 남을 깎아 내리는 것, 수군거리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런 말들은, 대체로 확인할 수 없는 말, 불확실하고 헛된 말이 많고 거짓된 말도 많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속이고 거짓말하고 두루 다니며 남을 비방한다고 책망하였다(렘 9:4).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쓴 편지에서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았고 그들이 더러운 이익을 취하려고 정당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뜨렸다고 말하였다(딛 1:10-11).
남에 대한 말들, 특히 남의 약점을 흉보는 말들은 맛있는 별식 같아서 사람의 기억 속에 잘 남는다. 이만큼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나쁜 말은 잊어버릴수록 좋은데 도리어 잘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인격자는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런 사람과도 멀리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출 23:1),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라”(레 19:16)고 말씀하셨다.
잠언 11:13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고 말하고, 또 잠언20:19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마 7:1, 3).
[23절] 온유한(돌레킴 )[열렬한](BDB, KJV, NASB, NIV)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케세프 시김 )[은 찌꺼기](BDB)을 입힌 토기니라.
‘열렬한 입술’이라는 말은 마음이 없이, 마음과 다르게, 남을 위하는 듯한, 남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듯한 말을 열렬히 하는 입술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부와 아첨이요 속과 겉이 다른 것 즉 외식이다.
사람이 말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 거룩하고 선한 행위가 없다면, 그는 이런 자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런 사람은 은 찌꺼기를 입힌 토기(土器)와 같다. 은 찌꺼기를 입힌 토기란 진짜 은그릇이 아니고 은으로 도금한 질그릇을 가리킨다. 그것은 그렇게 가치가 있지 않다. 외식자의 열심은 무가치하다.
물론 말은 중요하다. 자기 의사를 말로 잘 표현하는 것은 장점이다. 또 사람은 악한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선하지 못하고 악하다면 그는 위선자에 불과하다.
겉보기에는 고상한 것 같으나 실상 천박한 인격에 불과하다. 사람은 외모나 말보다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나 말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마음을 보신다.
사무엘상 16:7,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의 마음은 본래 심히 부패되어 있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엡 4:23-24). 구원은 마음의 거룩한 변화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
우리는 다툼을 좋아하지 말고 성령의 지혜를 따라 화목을 도모해야 한다.
둘째로,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
우리는 남의 흠과 부족을 지적하는 말 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하고 또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자를 친근히 하지도 말아야 한다.
셋째로, 열렬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은 찌꺼기를 입힌 질그릇이다.
우리는 마음이 없이 아부와 아첨의 아름다운 말이나 외식하는 말을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바르고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24-28절, 미운 감정, 함정을 팜, 거짓말과 아첨
[24-26절] 감정(憾情)[언짢은 마음] 있는 자(소네 )[미워하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거짓]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궤휼로[거짓으로] 그 감정[언짢은 마음,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미워하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거짓을 품는다. 그는 말로는 그럴 듯하게 꾸미고 마음 속에는 악을 품는다. 말로는 악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나 마음으로는 미움과 악심을 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선하고 좋아 보이지만, 그 마음 속에는 미움, 시기, 질투, 거짓, 중상모략, 교만, 난폭함, 탐욕 등 많은 악이 있다.
다윗은, 시편 55:21에서,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고 말하였고, 시편 62:4에서는, “[저희가]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의 미움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들이 거짓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들의 미움은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날 것이다.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은 다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정정당당하게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무슨 잘못이 있으면 즉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뉘우치고 고쳐야 한다.
[27절]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악한 자는 이웃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파고 돌을 굴린다. 이런 악은 사람의 미움과 악한 마음과 이기적 욕심에서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그 악행대로 갚으신다. 남을 해치려고 구덩이를 파는 자는 자신이 거기에 빠질 것이요, 남을 해치려고 돌을 언덕 위로 굴려 올리는 자는 도리어 그 돌에 자신이 치여 다칠 것이다. 남에게 악을 행하는 자는 자신이 비슷한 해를 당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하나님께서는 함정은 함정으로, 돌은 돌로 보응하실 것이다. 여러 성경 구절들은 이 진리를 증거한다.
시편 7: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시편 9:15-16,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시편 10: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시편 57:6,“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것이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28절] 거짓말하는 자[혀](KJV, NASB, NIV)는 자기의[그것이]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거짓말하는 혀는 그것이 해한 자를 미워한다. 거짓말은 남에게 해를 준다. 그것은 남을 미워하는 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이 가득한 이스라엘 사회에 대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라고 하셨다(렘 9:3-6, 8).
참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다. 로마서 12:9는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혹시 자신에게 손해가 되어도 진실을 말해야 하며 때때로 그에게 충고도 하고 책망도 해야 한다. 그것이 형제에 대한 참된 사랑이다.
또 아첨하는 입도 남에게 패망을 일으킨다. 아첨은 상대가 부족이나 잘못이 있어도 부당하게 그를 칭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아첨은 상대를 기분 좋게 하겠지만,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 상대방을 패망하게 하는 것이다.
진실한 자는 결코 아첨하지 않는다.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한다. 말하기 거북한 때에는 침묵할 수도 있겠으나 필요한 경우는 충고나 책망을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말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의 마음에는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고 그가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결국 그의 미움의 악은 사람들 앞에 드러날 것이다.
둘째로, 남을 해치려고 함정을 파는 자는 그 함정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그 돌에 치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믿고 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거짓말하는 혀는 그것이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킨다.
진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거짓말하지 말고 아첨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사랑을 품고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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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면책, 충고, 목양
===1-3절, 자랑, 칭찬, 분노
[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알 수 없다는 말씀은 우리의 지나간 날들을 통해서도 깨닫고 느끼는 바이다. 세상에는 날마다 질병, 폭력, 살인, 강도, 사기, 교통 사고, 실직, 화재, 홍수, 태풍, 지진, 해일, 전쟁 등의 소식들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살고 있으니까 살고 있는 것이지,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고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다.
전도서 9:12는,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고 말한다. 재앙은 갑작스럽게 닥친다.
주께서는 한 어리석은 농부가 풍년을 맞아 곡간을 넓히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눅 12:16-20).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미래의 평안을 자기 손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윗은 시편 31:15에서 “내 시대[시간들]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했다.
야고보서 4:14-16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교훈하였다.
[2절]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
칭찬은 사람의 덕과 인품, 능력, 행위와 업적을 인정해 높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자랑은 어리석고 헛된 일이다. 그것은 명예를 구하는 교만한 욕심이다.
잠언 25:27은,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말할 때, 하늘에서 “느부갓네살 왕아, 나라의 위(位)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는 소리가 있었고 그가 왕위에서 물러나는 일이 일어났다(단 4:30-31).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을 높이고 칭찬하는 자들이었다. 고린도후서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베드로후서 2: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유다서 16, “이 사람들은 . . .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지혜자는 그 지혜를, 용사는 그 용맹을,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자(仁慈)와 공의를 세상에 행하는 자이심을 깨달은 것을 자랑하라고 말했다(렘 9:23-24). 주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3:12).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말했고(고전 13:4), 또 그는 자기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했다(엡 3:8).
[3절]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경외함이 없고 그의 진리와 교훈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믿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 자이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사리분별력이 없다.
미련한 자는 노하기를 잘한다. 잠언 12:16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낸다”고 말한다. 사람이 쉽게 화를 내면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기 쉽다. 또 미련한 자는 모든 일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화를 낸다. 또 그는 절제심이 없다. 그는 자기의 노를 자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의 분노는 돌보다, 모래보다 무겁다고 본문은 표현한다. 미련한 자가 분노하면 그 분노를 막거나 가라앉히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미련한 자가 분노하면 그와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고 그런 때에는 법과 경우와 원칙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지혜자는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책망을 들을 때라도 오래 참고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고칠 기회로 삼는다.
그러므로 잠언 12:15는,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말하였다. 또 잠언 12:16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14:29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고 말했다. 또 야고보서1:19-20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헛된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의 뜻만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타인으로 우리를 칭찬하게 하고 우리 입으로 자신을 칭찬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을 높이고 칭찬한다. 우리는 명예를 추구하는 교만한 욕심을 버리고 항상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셋째로, 미련한 자의 분노는 돌과 모래보다 무겁다. 쉽게 노하는 자는 미련하다. 우리는 범사에 오래 참고 자기 부족 고치기를 힘써야 한다.
4-7절, 투기, 면책, 배부른 자
[4절]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분노는 상대방이 자기를 해롭게 했다고 생각할 때 생기며 까닭 없는 분노는 미움에서 생긴다. 성경은 까닭 없는 분노를 정죄한다. 주께서 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2)(전통본문). 미움과 분노는 살인으로 발전한다.
요한일서3:15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했다.
투기, 즉 시기, 질투는 분노보다 더 나쁘다. 투기는 상대가 잘되는 것을 싫어해서 생기는 미움의 감정이며 정당성 없는 경쟁심이다. 그런 것이 왜 더 나쁜가?
첫째, 그 이유가 부당하기 때문이다. 투기는 미워할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정당성 없이 미워하고 시기하여 마침내 그를 살해하였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당한 이유 없이 미워하고 시기하였다.
둘째, 투기는 대체로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투기하는 자는 미움의 감정을 숨기고 악을 도모한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속으로 상대방을 미워하고 해치려 한다. 투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파괴적이다. 요셉의 형들은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 요셉을 미워했고 그를 죽이려 했고 마침내 그를 이스마엘 상인에게 종으로 팔았다.
셋째, 투기는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 식어진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증가된다. 그것은 결국 상대방이 망하거나 죽어야 만족될 것이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시기가 그러했다. 그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예수님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도 그러하였다. 그들의 감정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5절]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사람이 사랑이 없으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며, 남이 잘못을 해도 상관치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형제를 미워하고 남을 해치기도 할 것이다. 아부하는 것도 참된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형제로 회개치 못하게 만든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의 잘못을 오래 참고 그에게 권면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 것이다. 특히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면책은 상대의 면전에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을 고치고 바른 사람이 되게 한다. 책망을 잘 받은 자는 평안과 형통함을 얻을 것이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것이 매우 악한 일이라고 면책했을 때 다윗은 즉시 회개하였다(삼하 12:7-13). 또 사도바울은 안디옥에서 사도 베드로를 면책하였다(갈 2:11). 그러나 면책은 어려운 일이다.
면책하는 자는 상대방에게 미움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심지어 죽을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이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책망하였는데, 그 일로 인해 그는 옥에 갇혔고 마침내 목베임을 당하였다(마 14:1-12).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이 바른 말씀을 전한 까닭에 핍박을 받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마 21:35-36; 23:37).
면책을 할 때 주의할 점도 있다. 우리는 면책을 할 때 겸손과 온유로, 너무 감정적이지 않게 해야 하며, 또 상대방을 정말 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6절]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친구’는 ‘좋아하는 자’라는 뜻이다. ‘통책’이라는 원어(페차 )는 ‘상처’라는 뜻이다(BDB, KJV, NASB). 친구가 책망함으로 마음에 받은 상처를 가리킨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친구가 진짜 좋은 친구이다. 사람은 참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를 책망할 수 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이며 큰 사랑이고, 또 그런 사람은 진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일 것이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잠언 25:12는,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고 말하였다. 또 전도서 7:5 는,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의인의 책망을 달게 받아야 한다. 시편141:5는,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다. 원수는 자기에게 유익이 있으면 입맞추는 문안 인사뿐 아니라, 칭찬의 말, 아첨의 말도 하며 또 그런 일을 자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에서 난 것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다. 악인은 진리를 따라, 혹은 신앙 양심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이익을 따라 언제나 변한다. 잠언 26:24-25는, “감정 있는 자[미워하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고 말하였다. 가룟 유다는 3년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으나 어느 날 은 30에 주님을 배신하였고 주께서 잡히시던 밤 그를 잡으려 파송된 무리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와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어 그가 예수임을 알려주었다(마 26:47-49).
[7절] 배부른 자(네페쉬 )[영혼]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네페쉬)[영혼]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본문은 육신의 양식에나 영혼의 양식에나 다 적용된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한다. 꿀은 가장 단 음식이지만, 배가 부른 자는 그것도 별로 먹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배가 부른 아이들은 반찬 투정만 할 것이다.
그러나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달다.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은 한 끼만 굶어도 잘 먹을 것이다. 장염으로 몇 끼 굶고 링거 주사만 맞던 아이가 흰죽을 먹도록 허락되니까 얼마나 잘 먹는지, 자기 것을 다 먹고 동생 것까지 먹으려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논산훈련소의 훈련병들에게 밥은 꿀맛이었다. 반찬이 좋아서가 아니고 고된 훈련 후 배가 고파서이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탈출하고 남한에 들어온 자들의 증언들에 의하면, 그들은 개구리를 잡아먹고 심지어 쥐도 잡아먹고 지렁이도 말려서 먹었다고 한다. 주린 자에게는 쓴 것도 달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마음이 가난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은 부족한 설교자의 설교라도 비평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달게 듣는다. 또 사모하는 자마다 큰 은혜를 받을 것이다. 잠언 2:4-5,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마태복음 5:3, 6,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분은 잔인하고 노(怒)는 홍수 같으나, 시기와 질투는 그것보다 더 심하다. 우리는 분노하는 일을 매우 자제해야 하고 특히 시기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 좋은 인격자가 될 것이다. 시기는 큰 죄악이다. 사랑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고전 13:4).
둘째로,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고 친구의 책망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권면하되, 필요한 경우 사랑과 온유의 마음으로 책망도 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런 책망을 싫어하지 말고 잘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좋은 친구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셋째로,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달다. 우리는 영적으로 배부른 자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와 그의 은혜와 지혜와 그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8-10절, 안정, 친구의 충고, 이웃 사랑
[8절] 본향(메코모 )[그의 장소(KJV), 그의 거처(BDB), 그의 집(NASB,NIV)]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새의 보금자리는 새 집인데, 거기에 어미새가 있고 형제들이 있고 잠자리가 있고 안전함이 있다. 새가 보금자리를 떠나면 외로운 떠돌이 새가 되고 친구들이 없고 어린새라면 어미새의 보호가 없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사나운 새나 짐승에게 잡아먹힐 위험도 있을 것이다.
집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이 그와 같다.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사람이 집을 떠나면 모든 게 불편하며 고생이다. 사람이 고향을 떠나면 외롭고 위험하다. 조국을 떠나 해외로 이민을 가면 외롭고 서러울 때가 많다. 이와 같이, 교인이 본 교회를 떠나면 평안치 못하고 신앙적으로 방황하고 마귀의 시험과 죄에 빠지기 쉽다. 참된 목사와 진실하고 좋은 성도들이 있는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행복하다.
사람이 왜 집을 떠나는가? 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둘째 아들은 육신의 즐거움과 세상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갔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다(딤후 4:10).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배신하였고 주의 제자들의 무리를 떠나갔다.
세상 욕심을 가진 자들이나 명예심이나 직분에 대한 욕심이 충족되지 않는 자들은 때때로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참 믿음이 없거나 마귀의 시험에 빠진 자들이다. 교회나 교인들을 욕하며 떠나가는 자들도 있다.
요한일서 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러나 이런 일들은 다 범죄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영적 낭패이다.
[9절]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그의 친구의 즐거움은 진심의 충고로부터 나오느니라](KJV, NIV).
기름과 향은 향유와 향품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냄새가 좋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좋은 냄새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지만, 나쁜 냄새는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며 심한 경우는 구토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답다. ‘충성된 권고’라는 원어(메아찻 나페쉬 )는 ‘영혼의 충고 즉 진심의 충고로부터’라는 뜻이다. 친구의 진심의 충고는 충고받는 자에게 즐거움이 된다는 뜻이다. 때로는 위로와 격려, 때로는 권면과 책망을 하는 친구의 진심의 충고는 상대방에게 기쁨과 유익을 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피차 권면하라고 교훈했다. 골로새서 3: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1, 14,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히브리서3:12-13,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0절]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사람은 친구나 이웃과의 좋은 관계에서 살아야 된다. 친구나 이웃을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그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충고하고 또는 책망할 수 있으나, 그를 비난하거나 그에게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본문은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버린다는 말은 그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무관심하고 그를 배신하고 비방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는 것 등을 뜻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9:18).
본문은 또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한다. 환난날은 경제적 큰 곤란을 당했거나 어떤 큰 걱정거리가 생겼을 경우 등을 가리킬 것이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그에게 누와 폐를 끼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또 본문은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고 말한다. 가까운 이웃이란 거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까운 이웃을 가리킬 것이다. 특히 신앙 안에서의 친구는 가족관계보다 더 가깝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아버지가 원수처럼 여기는 다윗을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였다. 그것은 그가 다윗에게서 진실한 신앙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귀한 친구이시다. 또 예수님 믿는 교우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주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또 그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다. 우리는 영육의 안정을 가져 안정된 가정과 국가, 특히 바른 교훈과 사랑이 있는 교회를 가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듯이 친구의 즐거움은 진심의 충고에서 나온다. 우리는 진심의 충고를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친구와 우리 아버지 친구를 버리지 말아야 하고 환난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11-14절, 지혜, 재앙, 보증, 축복
[11절]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
부모가 자녀에게 가지는 중요한 소원은 ‘지혜를 얻으라’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 즉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 지혜를 얻는 것이 복이다.
잠언 3:13-14,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이것은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다 적용되는 진리이다.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자녀가 지혜를 얻으면 복되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은 기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라고 표현하였다(요삼 4).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 ‘나를 비방하는 자’는 문맥상 자녀 문제로 비방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 교육을 잘못시켰다거나 자녀에게 본을 보이지 못하였다고 비방하든지,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비방하는 것 등을 말한다.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는 말은 우리의 자녀들이 지혜를 얻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가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함께하심과 복을 얻음을 증거함으로써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겠다는 뜻이라고 본다.
[12절]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잠언 22:3도 거의 비슷하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한다. ‘재앙’은 사나운 짐승이나 무서운 전염병이나 폭도들이나 핍박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여러 해 동안 도망 다녔다. 선지자 엘리야는 자기를 죽이려는 왕후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호렙산으로 도피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당하면 피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사도 바울도 때때로 핍박을 인해 피신하였다.
그가 처음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기를 공모하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을 때, 제자들은 밤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다메섹 성에서 달아 내렸다(행 9:23-25).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재앙을 보고도 나아가다가 해를 받는다.
그러나 신자가 진리를 위해, 의를 위해 싸워야 할 때가 있고 순교를 각오하며 나아가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고난 때문에 전도의 일이나 기타 하나님의 일들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도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다(행 5:41-42). 핍박을 두려워해 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겁하고 불충성된 자가 될 것이다. 디모데후서 1:8,“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4:5,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3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 잡힐지니라.
잠언 20:16도 거의 같다. ‘타인’이라는 원어(자르 )는 ‘모르는 자, 낯선 자, 외인’을 가리키며, ‘외인들’이라는 원어(노크리야 )는 ‘낯선 여자, 즉 음녀’를 가리킨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혹은 잘 알지 못하는 여자 혹은 음녀를 위해 보증이 되면, 그 옷을 빼앗기고 그 몸도 볼모 잡힌다, 즉 상대방의 종이 된다고 말한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보증은 우리에게 육체적, 물질적 큰 손실과 낭패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이것도 지혜의 교훈이다.
성경은 우리가 남의 빚의 보증이 되는 일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며 금했다. 잠언 6:1-5,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잠언 11: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잠언 17: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맹세하며]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 22: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맹세하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그러므로 구제할 마음과 힘이 있지 않다면, 또 보증한 금액을 갚을 능력이 있지 않다면, 남의 빚 보증이 되는 것은, 선한 행동일지는 모르나,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14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
이른 아침에 혹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큰 소리로 그의 이웃 혹은 그의 친구(레아 )(KJV, NASB)를 축복하는 것은 진심의 축복으로 여겨지지 않고 도리어 저주처럼 여겨진다.
참된 사랑과 축복은 무례하게 표현되지 않고 예절 있게 표현되어야 한다. 참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고린도전서 13:5,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요일 3;18).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을 축복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 시편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119:147,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예수께서는 새벽 아직 어두울 때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막 1:35).
그러나 반대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다윗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불러 그를 붙들고 입을 맞추며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였다(삼하 15장). 그것은 후에 그가 아버지를 대항해 반역을 일으키려는 마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압살롬의 최후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창세기 17:1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에서, 어떤 왕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했는지, 악하게 행했는지 평가하며 기록하였다. 우리는 사람 앞에 살지 말고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크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자녀가 지혜를 얻으면 부모의 마음은 기쁨을 얻을 것이며 비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른이든지 아이든지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그를 경외하고 그의 뜻에 순종해 의롭고 선하게 삶으로 복을 얻고 기쁨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는다. 우리는 재앙을 피해야 할 때는 피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와 의를 위해 싸울 때는 핍박과 순교를 각오하며 싸워야 한다.
셋째로, 다른 사람을 위해 보증이 되는 자는 자기 옷과 몸을 볼모 잡힐 것이다. 그는 육신적, 경제적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우리는 특히 잘 알지도 못하는 자를 위해 또 갚을 힘도 없으면서 보증을 서서는 안 된다.
넷째로,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된다. 우리는 경박한 말을 하지 말고 예의 있는 말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 앞에서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
15-19절, 다툼, 교제의 유익, 충성, 마음
[15-16절] 다투는 부녀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본문은 다투는 아내에 대해 말한다. 사람은 생각이 다를 때 다투지만, 좀더 깊이 보면 불만 때문에 다투며 그 불만은 욕심에서 생긴다. 욕심이 있으면 무슨 일에든지 만족함이 없고 불평하게 되고 다투게 된다. 또 사람은 교만하고 남을 멸시하고 시기 질투할 때 다툰다. 그러므로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다툴 것이 없다.
여인의 다툼은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 그 다툼은 계속적이고 쉽게 중단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람을 제어하기 어려운 것 같이,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같이 제어하거나 막기가 어렵다.
그러면 다투는 여인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심령의 변화와, 성품과 습관의 변화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교만과 시기와 질투심을 버리고 남을 멸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 자족함과 사랑으로 자신을 단장하기 전에는 다툼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것밖에 없다. 그러나 부득이 한 경우에는, 별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언의 몇 구절은,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지붕 한 모퉁이에서나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잠 21:9, 19; 25:24).
[17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철은 철을 날카롭게 한다. 쇠망치는 칼날을 때려 날카롭게 만든다. 이와 같이 사람은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얼굴로 나타난다. 사람은 친구와의 교제와 대화를 통해 그의 생각이나 지혜나 식견이 많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또 그의 침체된 마음이나 둔해지고 비활동적이었던 마음이 힘을 얻고 활동적이게 될 수 있다.
본문은 친구와의 교제의 유익에 대해 말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의 교제의 유익에 대해 많이 교훈했다. 전도서 4:10-12,“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4,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히브리서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도 바울은 동역자 빌레몬을 통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고 (몬 7),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를 통해 위로를 얻었고(골 4:11), 오네시보로도 그를 자주 기쁘게 하였다고 말하였다(딤후 1:16).
[18절]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무화과나무를 지킨다는 것은 영양 공급을 잘 받도록 물과 비료를 주고 가지를 적절하게 쳐주고 또 병충해에 걸리지 않도록 벌레를 잡고 필요하면 약을 치고 또 도적이나 개구쟁이 아이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을 말한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을 것이다. 농부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그는 수고의 대가를 얻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을 것이다. ‘시종한다’는 말은 ‘시중들다, 수종들다, 수행하다’는 뜻이며, 주인 곁에서 그를 보호하고 충실히, 지혜롭게, 부지런하게 그를 돕고 섬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런 종은 영화를 얻을 것이다. 주인은 그를 사랑하고 신임하고 그를 존중하고 그에게 좋은 상을 주고 또 중요한 일을 맡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이치가 비슷하다.
우리의 주인은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을 수종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노아처럼(창 6:22), 아브라함처럼(창 22:12), 모세처럼(출 40:16), 여호수아와 갈렙처럼(민 14:24)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존중하시고 귀한 직분을 주시고 지혜와 능력을 더 많이 내려주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21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이단과 불의]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증거하였다.
[19절]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원문을 직역하면, “물에 비친 얼굴이 자기 얼굴이듯이,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속하느니라”이다. 영어성경들은 ‘속한다’는 말(라 )을 ‘비추이다’(reflect)라고 번역하였다(NASB, NIV). 물이나 거울에 비친 얼굴은 우리 자신의 얼굴이지 남의 얼굴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은 그 자신의 마음이며,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됨됨이, 곧 사람의 인격은 그의 마음에 있다. 그의 마음은 그의 인격을 드러내며 증거한다.
잠언 23:7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사람 됨됨이]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악한 사람은 악한 마음을 가진 자이며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을 가진 자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사람들은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 출생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마음에서 모든 악한 것들이 나온다(마 15:19). 그러므로 심령의 변화가 필요하다. 구원은 심령의 변화이다. 중생(重生)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엡 4:22-24).
성화는 심령의 계속적 변화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날마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잠 4:23).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다투는 아내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며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같이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같이 어렵다. 우리는 다투는 인격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득이 진리의 싸움을 싸울 때가 있겠으나, 평소에는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둘째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성도의 교제는 많은 유익이 있다. 불평과 남의 험담이나 하는 악한 교제도 있으나, 서로 권면하고 위로 격려하는 교제는 유익하다.
셋째로,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가 그 열매를 먹듯이, 자기의 주인을 수종드는 자는 영광을 얻는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동행하고 성경에 기록하신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교훈을 순종함으로써 주 하나님을 섬기며 수종들면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넷째로, 물에 비친 얼굴이 자기 얼굴이듯이,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속한다. 마음은 곧 그의 인격이다. 우리는 본래 죄악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구원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선한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20-22절, 눈의 만족, 칭찬, 미련한 자
[20절] 음부(陰府)(스올 )[‘무덤’ 혹은 ‘지옥’]와 유명(幽冥)(아밧도; 아밧돈 과 같은 말)[‘멸망’ 혹은 ‘멸망의 장소’](BDB)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무덤과 지옥은 만족함이 없다. 아담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묻혔지만 무덤은 여전히 넉넉하고 지옥도 그러하다. 무덤과 지옥의 수용 용량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사람의 눈은 만족이 없다. 사람의 눈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반영한다. 전도서 1:8은,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한다. 요한일서 2:16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즉 눈으로 보는 욕심]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한다. 돈으로 사는 좋은 것들, 좋은 옷들, 다이아 반지나 진주목걸이 같은 금은패물들, 좋은 차, 좋은 집 등이 다 그러할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육신의 눈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하였다(고전 9:25). 또 그는 성령의 열매에 절제를 포함시켰다(갈 5:23). 또 우리에게 자족함이 필요하다.
잠언 5:18-19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라”고 말하였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하였고(딤전 6:8) 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말하였다(빌 4:11).
[21절]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도가니(crucible)와 풀무(furnace)는 원석을 제련하는 도구이다. 그것은 금과 은을 찌꺼기와 분리시켜 순금과 순은을 만든다. 이와 같이, 본문은 칭찬이 사람을 시련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칭찬받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을 높인다. 그는 하나님께 돌릴 감사와 영광을 가로채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헤롯 왕은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추켜세울 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므로 주의 사자가 곧 쳐서 벌레가 먹어 죽었다(행 12:22-23).
그러나 우리는 칭찬받을 때 자신의 부족과 연약한 점들을 먼저 생각하고 또 그 칭찬을 사양하고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만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깨닫고(고전 15:10), 또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 잠언 17:3은,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일은 다 우리의 마음을 단련시키는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주의 종들에게 많은 고난을 주셔서 그들을 단련시키고 사용하신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 없이 다니고 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고생을 하였고(고전 4:11-13), 또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다(고후12:7). 이와 같이, 칭찬도 사람을 단련시킨다. 우리는 칭찬을 들을 때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 칭찬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22절]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성경에서 미련한 자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를 가리킨다. 곡물은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으면 껍데기인 겨와 알갱이가 분리된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절구에 찧듯이 고난을 당해도 잘 깨닫지 못하고 변화되지 않는다. 미련한 자의 미련함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되어 있어서 그 죄성이 잘 제거되지 않는다. 인류 역사는 범죄와 실패의 역사이며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역사도 그러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반복해서 실패했다(시 78:17, 40-41).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그의 기적들을 보고도 열 번이나 그를 시험하였고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민 14:22).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복된 실패를 증거한다. 그 책에는 “또” “다시”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3:12; 4:1; 6:1; 10:6; 13: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렘 17:9),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듯이, 악에 익숙한 인생은 선을 행할 수 없다(렘 13:23).
미련한 자의 미련을 벗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성령의 중생(重生)시키시는 역사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음으로 그의 보배로운 피로 단번에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이제 우리 속에 오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즉 그의 감동과 책망과 위로로 조금씩 거룩해지며 미련함과 죄성(罪性)을 극복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 무덤은 끝없이 사람을 삼키며 지옥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사람의 눈과 마음의 욕심은 한이 없고 만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족함과 절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
둘째로,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한다. 칭찬은 사람을 교만케 한다. 우리는 남 칭찬하기를 조심하고, 우리도 칭찬받기를 좋아하지 말고, 또 칭찬받을 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셋째로,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죄성과 미련은 뿌리가 깊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미련함과 죄성을 극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3-27절, 생업에의 근면, 재물의 헛됨, 근면의 유익
[23절]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농사와 목축은 아담 때로부터 시작된 가장 오래된 일이다.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을 쳤다. 양떼와 소떼를 치는 목축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적 생업이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은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애굽 왕에게 자기들의 생업이 목축이라고 말하였다(창 46:32). 네 양떼를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은 각자 자신의 생업과 직업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9). 사람이 땀 흘려 일하며 자기의 생업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야곱은 하란에서 20년 동안 양과 염소를 칠 때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다고 말했는데(창 31:38-40), 그것은 본이 될 만한 삶이었다. 바울도 이런 점에서 본이 되었는데,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했다(행 20:34-35).
게으른 것은 악한 일이다. 잠언 6:6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하였다. 잠언 18:9는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敗家)하는[멸망하는] 자의 형제니라”고 말하였다. 신약성경도 게으르지 말고 근면해야 할 것을 가르쳤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했고(살전 4:11), 또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고 교훈하였다(살후 3:10-12).
우리는 세상의 일들뿐 아니라, 신앙생활이나 봉사생활에 있어서도 부지런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1). 우리는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이나 가정적으로 기도하는 일이나 주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교회로 모여 예배드리는 일이나 성경공부와 찬양과 봉사와 전도 등의 하나님의 일들에 열심을 품고 일해야 한다.
[24절]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돈은 영원하지 않다. 잠언 23:5는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했다. 사업가는 사기나 사고로 파산하기도 한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도 그러하다. 한때 권력과 영광을 누렸던 자가 후에 감옥에 들어가고 수치를 당하는 일이 종종 있다. 전도서의 말씀대로, 세상의 모든 일은 헛되다(전 1:2). 사도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였다(벧전 1:24). 또 사람이 놀고 먹기나 하고 게으르고 자기 일에 충실치 않으면 재물이 줄어들고 가난과 궁핍이 찾아오며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25-27절]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어린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 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만드셨고 사람이 그것을 다스리며 누리게 하셨다. 땅의 씨 맺는 채소들, 나무의 열매들, 물고기들과 가축들은 다 사람에게 먹을 양식이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고 공급해주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금만 부지런하면 그들이 기르는 소와 양의 먹이를 준비할 수 있고 농사와 목축을 통해 자신들을 위한 먹을 것과 소득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이 목축을 잘 하면 거기에서 옷도 생기고 밭을 사는 값도 생긴다. 생업에 부지런한 것은 각자에게 유익이 된다. 자기 직업에 부지런한 사람은 먹을 양식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입을 옷이나 농사지을 땅이나 거처할 집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게으르면 모든 좋은 것을 얻을 수 없고 의식주에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한다.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게으름은 가난의 원인이지만, 근면은 물질적 안정과 부요의 원인이 된다. 물론 거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건강과 환경적 평안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병을 주시고 농작물에게 가뭄이나 홍수를 주시고 가축들에게 유행병을 주시면 모든 수고가 복이 되지 못하고 불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물질적 복을 주실 때에는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을 전제하고, 그럴 때 물질적 유여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잠언 21:5도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소떼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직업에 마음을 두고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게으르며 음식을 먹는 것은 좋지 않다.
둘째로, 재물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이 세상 것들, 즉 세상의 부귀와 권세와 영광이 헛됨을 알아야 하고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한 자가 세상에서 먹고 살게 하셨다. 농사도 목축도 그러하다.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아 물질적 소득과 여유를 얻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세상에서도 많이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8장: 의인, 악인 칭찬, 경책, 구제
1-4절, 담대함, 학대, 악인 칭찬
[1절]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이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며 의와 선을 행하는 자이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 그것은 그의 양심의 불안과 가책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의 법이다. 악인은 하나님께서 내리실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그들을 치셔서 그들이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그들을 미워하는 자가 그들을 다스릴 것이며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레 26:17).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악인에게는 마음의 평안도, 몸의 건강도, 환경적 안정도 없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은 일리가 있다. 도둑은 밤에 편히 잠을 못 잔다. 악인은 늘 불안한 삶을 산다. 그러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 그것은 양심의 평안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도우시고 지키시고 원수를 갚아주실 것을 믿고 또 체험한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였다(시 3:5-6). 그래서 주의 사도들은 핍박 중에도 담대히 전도했고 순교의 자리에도 나아갔다(행 4-5장). 우리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담대함을 얻는다(요일 3:21).
[2절]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나라에 죄가 있으면 주관자, 즉 교만하여 우두머리 노릇하려는 자들, 소위 뱃사공들이 많아진다. 사람의 죄악된 본성 속에는 교만이 있고 거기에서 불순종의 죄가 나오며 그 결과는 무질서와 분쟁과 분열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0-21에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 .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의가 있으면 사람들은 겸손의 미덕을 갖추고 계명에 순종하며 사회의 질서를 지킨다. 사람이 부족하고 불완전해서 갈등이 있기도 하나 토론하고 논쟁한 후에 평안을 찾을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총회는 오랜 시간의 교리적 논쟁 후에 일치된 마음을 얻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이다(갈 5:22-23).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엡 4:1-3).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온유하고 유순하다(약 3:17). 우리는 다 이런 지혜와 덕을 사모해야 한다.
명철과 지식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사회의 참 지도자가 될 만하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도 좋은 직분자이다. 그런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그 나라가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 나라는 질서가 유지되고 의가 세워질 것이며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형통할 것이다. 잠언 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잠언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伸寃)하면[원통함을 풀어주면] 그 위(位)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3절]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가난한 자는 자신이 가난해 보았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사정을 보통 더 잘 동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도 가난한 자이면서도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참으로 인정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인격이 매우 나쁜 사람이며 아마 인격 형성이 매우 잘못된 사람일 것이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와 같다. 태풍이나 허리케인 같은 것은 폭우를 동반한다. 그런 폭풍우가 지나가면 농작물이나 집들이 크게 손상된다. 가난한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지는 못할 망정, 그를 학대하다니 얼마나 나쁜 마음인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선하고 착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18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멸시한다. 그러므로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다. 악인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잠언 12:10은,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고 말한다.
의인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않는다. 의인은 도리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선대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자들의 마땅한 바이다. 잠언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잠언 14:31,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인의 선행에 대해 복을 주실 것이다.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했다.
[4절]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율법을 버린 자는 율법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으로 존중치 않고 무시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무시하는 자이며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치 않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악인을 칭찬한다. 악인은 율법을 어기는 자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노여워하시는 자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악한 자를 칭찬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충고하고 권면하고 책망할 일인데, 율법을 버린 자는 그를 칭찬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2에서 “저희가 이 같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말했다. 구약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러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들이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다고 말하였다(렘 23:14).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에게 평안을 선포했고,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셨다(렘 23:17; 겔 13:22).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한다.
‘대적한다’는 원어(이스가루 )는 ‘다툰다’는 뜻이다(BDB, KJV, NASB). 율법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존중하고 지키는 자이다. 그는 악인과 동감하지 않고 그의 악을 칭찬하지 않고 그와 교제하지 않고 그와 의견의 충돌이 있고 그와 다툰다. 그는 악인에게 충고하고 권면하고 책망할 것이며 마침내 그와의 교제를 끊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 우리는 불안한 악인이 되지 말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의와 선을 행함으로 사자같이 담대한 의인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오래 지속된다. 우리는 범죄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과 지혜로 교회를 세워야 한다.
셋째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않는 폭우같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고 선대해야 한다.
넷째로,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율법을 지키고 악인을 칭찬하지 말고 악인에게 권면하고 책망하고 필요할 때 교제를 끊어야 한다.
5-8절, 공의, 온전함, 지혜, 고리 대금
[5절]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악인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게 사는 자이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한다. 공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는 공의를 저버린 자이므로 심령이 어두워 공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공의를 깨달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뜻과 공의를 깨닫는다.
그는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의 저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119:18).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자신의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고(요 7:17) 또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그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며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26; 16:13).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27에서, 모든 신자들 속에 성령께서 기름처럼 부어지셨고 그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했다.
실상, 여호와를 찾는 자는 진리의 지식을 포함해 모든 좋은 것들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는 자 곧 그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신다. 시편 34:8, 10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했고, 시편 107:9는,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말했다.
[6절] 성실히(베숨모 )[온전하게, 순전하게, 흠 없이]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익케쉬 )[바른 길로 가지 않고 비뚤어지게 행하는,사악하게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온전하게, 흠 없이 행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경건하게, 정직하게, 도덕적으로 흠과 점이 없이 온전하게 사는 것을 가리킨다. 흠 없이, 온전하게 행하는 가난한 자는 비뚤어지게, 사악하게 행하는 부자보다 낫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사람의 생명은 그의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눅12:15). 값비싼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즐기며 살았던 부자는 거지 나사로보다 못한 자이었다. 그는 죽은 후 지옥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압제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약 2:5-7).
사람의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돈이 많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사랑이다. 또 돈에 관해서는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6:7-8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사는 자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 즉 믿음과 계명 순종으로 사는 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마 6:16-33). 그러므로 성도들의 생활 규칙은 오직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7절]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메빈 )[명철한, 총명한] 아들이요 탐식자(졸렐림 )[탐식자, 낭비하는 자, 방탕한 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율법은 사람의 행위 규범 곧 생활 규칙이다. 그것을 지킨다는 말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고 그것을 보수하고 믿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지혜로운 아들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인생의 정로(正路)를 깨닫고 분별하며, 또 평안과 행복의 길을 붙들고 불행과 멸망의 길을 분별하고 피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는다(잠 13:20).
탐식자는 돈을 벌 줄 모르고 돈을 쓰기만 잘하는 자, 사치하고 연락하며 허랑방탕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 사람들과 사귀는 사람은 나쁜 영향을 받고 낭패를 당할 것이다. 잠언 13:20은,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는다’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15:33은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한다. 탐식자와 사귀는 자는 그의 아버지에게 수치와 마음의 고통을 드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친구 때문에 악한 영향을 받아 악해져 탐식자가 되고 낭비하는 자가 되고 방탕한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근면하게 사는 것이다. 근면은 사람의 정로(正路)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명하셨다(출 20:9). 사도 바울도 신자들에게 “종용하여[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명했다(살후 3:10). 성도는 또한 검소하고 절약하며 살아야 한다. 음식도 먹을 만큼 만들어 먹는 것이 좋다. 그래야 가난한 이웃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8절] 중한 변리로(베네쉐크 우베사르비스 )[고리대금과 변리로[(BDB, KJV)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고리대금으로 자기의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합당치 않은 일이다. 고리대금은 가난한 자들을 상대하여 돈을 빌려주고 많은 이자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재산을 늘이는 바른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리대금을 금하셨다. 레위기 25:36-37, “너는 그에게 이식[고리대금](KJV)을 취하지 말라,” “너는 그에게 이식[고리대금]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빌려주지] 말라.” 재산을 늘이는 정당한 방식은 각자의 직업에서 근면하게 일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고리대금으로 자기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의인들에게 주신다. 욥은, “[악인이] 비록 은을 티끌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할지라도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욥 27:16-17). 잠언13:22도, “선인(善人)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고 말했다. 악인들은 망할 것이며 그 재산은 결국 의인들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신명기 15장은, 우리가 가난한 형제들에 대해 반드시 손을 펴서 그의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고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그에게 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7-11절).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28에서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악인은 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그의 모든 뜻과 공의를 깨닫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얻기를 원한다.
둘째로, 온전하게 행하는 가난한 자는 악하게 행하는 부자보다 낫다. 우리는 불법하게 행하며 물질적 부를 얻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온전하게 살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리기를 원한다.
셋째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지혜자가 되고, 탐식자를 사귀어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근면하고 검소하며 절약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렇지 못한 자와 사귀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고리대금으로 재산을 늘이는 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재산을 쌓는 것이다. 우리는 바르게 벌고 선하게 써야 한다.
9-12절, 율법 청종, 온전함, 명철, 의인
[9절]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경외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을 수 있고(롬 10:17)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는데, 그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니 어떻게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겠는가? 사람이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 잠언 1:24-28은,“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귀를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며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잠언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사무엘상 15:22-23,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주 예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마 11:15; 13:9, 43; 눅 8:8; 14:35).
[10절]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테미밈 )[완전한 자들, 온전한 자들,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는 복을 얻느니라.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남도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가 하는 행위와 같다. 그런 일을 행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공의의 징벌과 보응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공의의 벌로 갚으신다.
본문은 “[그러나] 온전한 자는 복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그의 뜻을 순종하며 의롭고 선하게 사는 자이다. 그는 남에게 악을 행치 않는 자이다. 그는 결코 남을 악한 길로 이끌지 않고 오직 선한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온전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고(창 17:1) 예수께서도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8).
노아는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자이었다(창 6:9). 욥도 완전하고 정직한 자이었다(욥 1:1). 우리의 성화의 목표는 인격적 온전함이다. 온전한 자는 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복 주신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편 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道)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욥도 복을 얻었다.
[11절]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겨도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를 살펴 아느니라.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 사람은 돈이 많으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교만해지기 쉽다. 주위에 아첨하는 친구도 그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일을 거든다. 그러나 그는 참 지혜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본문은 “[그러나]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부자]를 살펴 아느니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가 다 명철한 자는 아니다. 가난해도 어리석은 자일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을 통해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많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2:5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고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다고 말하였다.
명철한 가난한 자는 부자를 살펴보고 그가 물질적 부요가 전부인 줄 알고 교만하고 허무한 자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모든 육체가 풀이요 그 모든 영광이 들의 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사 40:6).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소망 외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전 1:2).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외에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실상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요 6:27).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부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만 소망해야 한다. 잠언 23:4-5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했고, 디모데전서 6:17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교훈하였다.
[12절] 의인이 득의(得意)하면(알라츠 )[(뜻을 이루어) 기뻐하면] (BDB, KJV)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교훈을 행하는 자들은 의인이다. 의인들이 잘되고 높임을 받고 다스리면 그 나라와 백성에게 큰 영광이 있을 것이다. 잠언 11:10은,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29:2는,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고 말했다. 경건하고 정직한 다윗이 통치했을 때 이스라엘 나라에는 큰 영광이 있었다. 에스더서에 보면, 경건하고 의로운 모르드개가 악한 하만을 대신해 높임을 받았을 때, 수산 성은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였고 유다인들에게는 영광과 기쁨이 있었다(에 8:15-16).
그러나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숨는다. 잠언 28:28,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일어난다’는 말은 세력을 잡는 것을 뜻한다. 악인이 세력을 잡을 때에 아첨꾼들이나 기회주의자들은 나설 것이지만, 진실한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않고 숨는다. 그것은 악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양심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게, 합리적이지 않게, 자기 이권을 따라, 자기 감정을 따라 말하며 행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상대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 시대는 어두운 시대이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모친 악한 여자 아달랴는 그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왕의 씨들을 다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다. 그때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는 고모의 도움으로 성전에서 숨기어 자랐다. 독재 권력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같은 이가 통치하면 선한 사람들은 숨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들으신 바 될 것이다.
둘째로,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자기의 함정에 빠져도 온전한 자는 복을 얻는다. 우리는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행에 대해 벌하시고 온전한 자의 의롭고 선한 삶에 복 주신다.
셋째로,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겨도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를 살펴 안다. 우리는 부자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넷째로, 의인이 뜻을 이루어 기뻐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숨는다. 우리 교회에 의인들이 많으면 기쁨과 큰 영광이 있으나 악인들이 많으면 사람들이 숨을 것이다. 사회도 그러할 것이다.
13-16절, 자복, 경외, 악한 관원
[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다. 죄를 짓고도 안 지었다고 속여 말하며 자신의 범죄를 감추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은밀한 일을 다 보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이다(전 12:14). 사람은 죄를 지으면 결코 복되지 않다. 여리고 성 정복 시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물건들 중에 시날 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킬로그램 정도와 600그램쯤의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그의 장막의 땅 속에 감추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하게 하셨고 아간과 그 가족은 죽임을 당했다(수 7장).
그러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것을 미워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실제로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죄 없는 자는 하나도 없다. 단지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자가 있고 회개하지 않고 용서를 받지 못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죄의 용서와 기도의 응답과 도우심을 받을 것이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았을 때 즉시 그의 죄를 인정했고 용서를 받았다(삼하 12:7, 13). 그는 시편32편에서,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말하였다(시 32:3, 5). 또 삭개오도 회개할 때 구원을 얻었고(눅 19:8-9), 십자가상의 한 강도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 예수께 긍휼을 구할 때 그 날 낙원에 들어감을 얻었다(눅 23:41-42). 요한일서1:9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14절]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항상 경외하는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복되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나 들을 때에 겸손과 두려움으로 받고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간혹이나 주일에만이 아니고 평소에,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사람은 복되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렸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안 지으려고 애썼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왕의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고도 여전히 날마다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던 다니엘도 이방 나라에서 왕의 인정과 높임을 받았다.
그러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진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란 마음이 높고 닫혀 있고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예수께서 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은 자이다. 그는 재앙에 빠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재앙에 빠지게 하셔서 그 높은 마음을 낮추시고 그 완고함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롯의 사위들은 경건한 장인 가까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다가 결국 소돔 성 사람들과 함께 유황불비에 멸망을 당했고, 예루살렘 성의 시민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하다가 마침내 다 멸망을 당하였다.
[15절]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쇼케크 )[배회하는(BDB, KJV), 돌진하는(rushing)(NASB)] 곰 같으니라.
부르짖는 사자나 먹이를 덮치려고 배회하거나 돌진하는 곰은 참으로 무서운 짐승이다. 가난한 백성들을 압제하는 악한 권력자와 관리들은 그와 같다. 선한 통치자는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고 그들을 공평하게 다스리겠지만, 악한 통치자는 부자에게는 아첨하고 너그럽게 대하나 가난한 자는 무시하고 압제하고 강탈하고 억울하게 만들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부자들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도 만드셨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신다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다 보시고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악한 통치자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부자들에게 아첨하고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학대하고 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이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이시요 보호자이시다. 시편68:5는,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억울한 눈물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며, 압제하는 악인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하였던 아합 왕을 전쟁에서 죽게 하셨고 그의 아들들 70명을 하루아침에 죽임 당하게 하셨다.
[16절]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베차 )[불의한 익]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무지한 치리자’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직무와 또 자신의 부족을 알지 못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다. 그는 선함과 친절, 긍휼과 인정이 없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권위만 내세우고 자기 감정대로 행하며 남을 부당히 취급하며 압제하고 학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또 사랑은 유하고 교만치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다(고전 13:4-5).
우리는 불의한 이익을 좋아하지 말고 미워해야 하고 정당한 소득으로 살며 자족해야 한다. 이런 자는 불만이 없고 항상 절제하며 감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다(행 24:25). 권세자는 탐욕을 품고 사치하는 삶을 살기 쉽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장수한다’는 말은 ‘그의 날들을 연장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는 심령에 평안을 얻을 것이다.
탐욕은 불만을 낳으나 자족함은 감사와 평안을 낳을 것이다. 자족하며 사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도 몸의 건강과 장수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그러한 통치자의 나라는 평안하며 그의 통치 기간도 오랠 것이다. 잠언 29:4는,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29:14는,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伸寃)하면 그 위(位)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했다. 또 그러한 경건한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도 누릴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감추지 말고 하나님 앞에 진실히 고백하고 용서를 얻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지만 마음을 강퍅케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행해야 하고 마음을 강퍅히 하여 재앙에 빠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같다. 세상의 권세가 있다고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관원은 참으로 악하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넷째로,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지만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한다. 우리는 선함과 친절, 자족과 절제로 살아야 한다.
17-20절, 피흘림, 온전함, 토지 경작, 충성
[17절]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타마크 )[막지(KJV, 한글개역), 붙들지(BDB, KB)] 말지니라.
본문은 ‘사람의 피를 흘린 자’를 정죄한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며 하나님의 인격적(지정의를 가진), 도덕적 형상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살인은 매우 큰 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요 그의 가장 존귀한 창조물을 짓밟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9:6은,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살인 자체뿐 아니라, 또한 마음의 미움, 시기와 질투, 입술의 독한 말, 거짓된 비방, 중상모략 등도 심히 악한 것이다. 그것들은 결국 살인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하였다(요일 3:15).
본문은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말한다(KJV, 한글개역). 이 번역은 살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그런 자는] 죽을 때까지 도피자가 되리라”고 번역했다(NASB, NIV). 살인자는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 악을 보복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를 막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함정에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지 말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하나님의 징벌은 반드시 임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전에도 세상에서 그의 공의를 드러내시며 악의 확산을 막으실 것이다.
[18절] 성실히(타밈 )[온전히, 정직히(uprightly)(KJV), 흠 없게(NASB,NIV)]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온전히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경건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이었다(창 6:9). 욥도 하나님 앞에서 순전(완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욥 1:1).
온전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은 특히 고난으로부터의 구원, 즉 질병이나 궁핍이나 원수들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선한 인도하심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능력과 지혜,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며 원수들의 공격이나 예기치 못한 위험한 일을 막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질 것이다.
사곡히 행하는 것은 계명에 순응하지 않고 부정적이고 비뚤어지게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인격의 큰 결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오랫동안 그냥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곧, 머잖아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순수하게, 순진하게, 무슨 일이나 가급적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물론 무슨 일이든지 조심하고 살피고 시험하고 확인하는 것은 지혜이지만, 항상 부정적이게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시편 32:2는, “마음에 간사(奸詐)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나다나엘에 대해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좋게 평가하셨다(요 1:47).
[19절]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레킴)[헛된 것들(BDB, NASB), 허랑방탕한 것들]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잠언 12:11에도 비슷하게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고 말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수고를 하는 자, 즉 자기의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는 먹을 것이 많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수고한 만큼 거둘 것이다. 많이 수고하면 많이 거둘 것이고 적게 수고하면 적게 거둘 것이다. 시편128:1-2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복은 수고한 자에게, 수고한 만큼 주어진다. 사람이 부지런히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 사람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되었다(창 3:19).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출 20:9).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했고, 데살로니가전서 4:11은,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허랑방탕한 것들을 좇는 사람은 궁핍함이 많을 것이다. 허랑방탕한 것들을 좇는 사람은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의 헛된 것을 구하며 방탕하게 사는 자이다. 그런 자는 크게 궁핍할 것이다. 주의 비유에서 허랑방탕해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탕진했던 탕자는 흉년이 오자 돼지 쥐엄열매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해졌었다(눅 15:13).
[20절]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닉카 )[깨끗하지, 죄가 없지,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충성된 자’는 믿음이 있고 믿을 만하고 거짓이 없는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믿음이 있고 믿을 만한 자, 진실하고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자가 되라고 교훈한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주실 것이다. 그는 심령의 평안과 기쁨, 몸의 건강, 물질의 여유, 아내와 자녀들 등 가족의 복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바이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 성읍에서와 들에서의 복, 자녀의 복, 토지 소산의 복, 우양(牛羊)의 복 즉 사업의 복, 떡반죽 그릇의 복 즉 음식의 복, 또 들어와도 받고 나가도 받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신 28:1-6).
그러나 속히 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짧은 시간에 부자 되려고 하기 때문에, 부정당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돈을 모으려 하는 자이다. 사람들은 왜 정정당당하게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명 순종의 의(義)보다 이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를 원하는 욕심 때문이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의로운 생활규칙인 계명을 어기는 자마다 정죄를 받으며 하나님의 내리시는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의롭고 정당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며 그를 막을 자가 없다. 우리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악을 행치 말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온전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비뚤어지게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질 것이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가짐이 너무 부정적이고 비뚤어지지 말고 좀 순수하고 순진하고 순전한 자,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질병이나 궁핍이나 원수들의 핍박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나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직업의 일들을 부지런히 해야 하고 허랑방탕한 것들을 좇지 말고 그런 자들과도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과 의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심령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의 여유, 가정적, 사회적 평안을 누릴 것이다.
21-24절, 불공정, 욕심, 경책, 도적질
[21절]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사람의 낯을 보아준다는 말은 상대방의 얼굴 때문에 공정하지 않게 판단하여 불의를 용납하고 지지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무슨 일이나 바르고 공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옳은 것은 옳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말하고 악한 것은 악하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라”고 말씀하셨다(레 19:15). 잠언의 여러 구절들은 우리가 공의로운 판단을 하라고 교훈한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18:5,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잠언 24:23,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잠언 28:4,“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유다 왕 아사는 모친이 우상숭배를 하므로 징벌하여 태후의 지위를 폐하기까지 하였다(왕상 15:13). 그것은 의로운 일이었다.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는 원문은 “그러나 사람은 한 조각 떡 때문에 법을 어기는도다”(NIV)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 말씀은 사람이 작은 이익 때문에 공정치 않은 판단을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판사가 권력자의 압력이나 이권 제안이나 부자들의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는 세상의 이익을 초월해야 하고 항상 공명정대하게 살아야 한다.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한 것이 낫다(잠 16:8).
[22절]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악한 눈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눈이다. 그런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다. 그는 부자를 부러워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얻으려는 욕심을 가진 자이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돌아본다. 잠언 21:26,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구제]하느니라.” 잠언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악한 눈이 있는 사람은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가난함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한다. 왜 악한 눈이 있는 자에게 가난함이 임하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을 홀로 주관하신다. 악한 자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하다가 큰 낭패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0:17은,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자갈]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교훈하였다. 사람이 불의하고 거짓되게 얻은 재물은 그에게 복이 되지 않고 도리어 화가 된다.
선악의 문제는 눈의 문제 곧 마음의 문제이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지식의 문제요 가치관의 문제이다. 우리는 선한 마음과 선한 눈, 즉 바른 지식과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마태복음6:19-34에 보면, 주께서는 몇 가지 요점들을 교훈하셨다:
(1) 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2)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3) 눈은 몸의 등불이다, (4) 탐심은 눈[마음의 눈]을 어둡게 한다, (5) 사람은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6) 음식과 옷을 염려하지 말라, (7)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23절]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떠도는 풍문과 추측으로가 아니고, 사실에 근거하고 성경적, 이성적 판단으로 상대방의 부족이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은 그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책망을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책망을 듣는 자는 당장에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지만, 책망은 결과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적받고 책망받는 내용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지고 자신에게 부족과 잘못이 있다고 깨달으면 고치게 될 것이다. 친구의 책망은 자신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상대방을 책망하는 것은 그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망 듣기를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1:23은,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고 교훈하며, 잠언 6:23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하고, 또 잠언 19:20은,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고 말하였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는다. 혀로 아첨하는 말은 당장에는 듣기 좋고 기분이 좋을 수 있으나, 우리의 잘못이나 부족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도리어 우리가 옳다고 착각에 빠지게 만들며 우리로 교만케 만든다. 거짓 선지자들이나 나라의 간신들은 아첨하는 말을 잘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를 책망하는 자는 우리의 좋은 친구일 것이다.
[24절]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가잘 )[강탈하고](KJV, NASB, NIV)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이쉬 마쉐키스 )[(도덕적으로) 부패시키는 자(BDB), 파괴하는 자(KJV, NASB, NIV)]의 동류니라.
본문은 부모의 물건, 즉 부모의 토지나 집이나 귀중품이나 현금을 강제로 빼앗고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자를 정죄한다. 부모의 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모의 소유와 자녀의 소유는 구별되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준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은 자녀의 것이 아니다. 자식이 부모의 것을 취하는 것도 도적질이다.
본문은, 부모의 물건을 강탈하고도 죄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라고 말한다. 그는 부모에게 악을 행하고 부모를 해치는 자, 부모의 인격과 재산과 행복을 파괴하는 자이며 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도덕적 질서를 파괴하는 죄인이며 악인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고(출 20:12) 또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명하셨다(레 19:3). 사도 바울은 “(자녀나 손자들로)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가르쳤다(딤전 5:4). 불효는 큰 죄악이며, 부모의 물건을 강탈하는 것은 단순한 불효 이상의 매우 큰 죄악이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하며 남에게 선을 베풀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도 포함한다. 부모 공경의 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 관계의 계명 중 첫째 계명이다. 경건은 윤리의 기초이며 가정 윤리는 사회 윤리의 시작이다. 가정 윤리가 바로 서야 사회 윤리가 바로 설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해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공정한 판단을 하고 작은 이익 때문에 범죄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 임할 줄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셋째로,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 사랑을 받는다. 상대방을 책망하는 것은 그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는 친구에게 충고도 하고 책망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부모의 물건을 강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이다. 부모의 재산과 자녀의 재산은 구별되어야 한다. 성경은 사유재산을 인정한다. 자녀는 부모의 돈이나 재산을 강탈해서는 안 된다.
25-28절, 탐심, 자기 신뢰, 구제, 악인
[25절]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기름지게(KJV), 형통하게(NASB, NIV)] 되느니라.
‘탐하는 자’라 원어(레카브 )는 ‘교만한 자’(KJV), ‘거만한 자’(NASB), ‘탐하는 자’(NIV)라는 뜻이다(BDB). 이 말은 잠언 21:4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는 말씀에서는 ‘교만한 것’이라고 번역되었다. 두 가지 뜻이 다 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교만하거나 탐심이 있으면 다툰다. 그러므로 잠언13:10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하였고, 야고보서 4:1-2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하였다.
사랑과 온유, 겸손과 절제에서는 화합과 일치와 단합이 있지만, 교만과 미움과 욕심에서는 갈등과 다툼과 분쟁만 일어난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
교만하고 탐욕적인 자는 하나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의지하는 자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자이다. 그는, 교만과 탐심을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지 않을지라도, 풍족하게 되고 형통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음식과 옷]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26절]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다(렘 17:9). 그러므로 그런 마음을 믿는 자는 무지하여 죄악된 일에 빠지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로 가고 자기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시키며 자기 욕심을 따르며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다. 심지어 경건하고 바른 생각과 소원을 품은 자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소원을 이룰 수 없다. 베드로는 예수께 죽을 때까지 그를 따르겠다고 고백했으나 여종 앞에서 그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돈이나 세상 권세나 기타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성경말씀의 교훈대로만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이다. 그렇게 하면, 그는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 어려움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건지시기 때문이다.
그는 아파도 건강의 회복을 얻을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 건강의 길이다(잠 3:7-8). 그는 실직해도 다시 취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는 궁핍함이 없을 것이다(마 6:33).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당해도 다시 일어날 것이며, 원수의 핍박이 심해도 보호함을 얻을 것이며, 위험한 길을 만나도 피할 길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도우실 것이다(시 91:1, 3).
온 세상이 홍수로 멸망할 때,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을 얻었고, 욥은 큰 재앙에서 승리하였고, 다윗은 극심한 고난을 이기고 왕이 되었고, 다니엘은 심지어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구원을 얻었다.
[27절]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며 명령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교훈하기를, 함께 거하는 가난한 형제에게 반드시 구제하라고 하였다(신 15:7-10). 또 주 예수께서도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교훈하셨다(눅 12:33).
의인은 구제에 힘쓰는 자들이다. 시편 37:21은,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10에서 증거하기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하였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을 것이다. 신명기 15:10은,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했다. 시편 37:25-26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말했다. 잠언 11:25도,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했고, 잠언 19:17도,“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빌려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고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을 것이다. 마태복음 25:31-46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 예수께서는 형제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구제하지 않은 자들이 장차 지옥에 던지우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운 말씀을 하셨다. 야고보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라고 말하였다(약 4:17).
[28절]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무시하고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해치고 남의 소유를 강탈하는 자이다. 악인이 일어난다는 말은 악인이 윗사람의 인정을 얻고 세력을 얻고 사회에서 공직에 등용되거나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어 활동하며 활개치는 것을 말한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는다. 잠언 28:12도,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고 말했다. 아모스 5:13은,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양심과 양식이 있고 어느 정도 도덕성이 있다. 사람이 숨는 이유는 악인과 어울림으로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하기 싫고 또 그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싫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한 악인이 멸망하면 다른 악인들이 두려워하며 잠잠하거나 회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58:11은 악인들이 징벌을 받을 때 사람들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것이라고 했고, 이사야 26:9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악인이 멸망하면 숨어 있던 의인들이 나타나고 등용되고 활동하게 되기 때문에 의인이 많아질 것이다. 역대상 12:22는,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공의로 통치할 때 사람들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함으로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다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마음이 교만한 자나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과 욕심을 버리고 겸손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이다. 우리는 자기 마음도 믿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함으로써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으나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을 것이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렇게 행하는 자는 복되지만 구제하지 않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넷째로,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진다. 세상은 악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의인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29장: 의인, 왕, 자녀징계
1-4절, 완고함, 의인, 지혜, 공의
[1절]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엔 마르페 )[회복하지 못하리라].
자주 책망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지적을 받고 책망을 들을 때 잘못을 고치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이 곧은 사람, 즉 그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의 교만과 완고함을 나타낸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악에 악을 더하는 일이며 자신의 심히 악함을 증거할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그러하였다. 신명기 9장은 그들의 광야 생활을 증거하기를, 목이 곧고 항상 거역하고 하나님의 법을 속히 떠났다고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백성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때때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자는 갑자기 패망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만, 마침내 징벌하실 것이다. 욥기 21:13은, “[악인이]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갑자기] 음부[지옥]에 내려가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 멸망에서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가 병에 걸렸으면 낫지 못하며, 파산하였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망을 받을 때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즉시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한다(계 3:19).
[2절]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할 것이다. 의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선하게 사는 자들이다. 우리 나라에 정치계, 법조계, 교육계, 경제계, 예술계 등 사회의 각계각층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도덕성이 있는 의인들이 많이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성도들 즉 구원 얻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와 그 직분자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순종하는 의인들이 많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원하신다(엡 5:26-27).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는 것은 거기에 불의와 불법이 없고 악과 거짓이 없고 싸움과 분열이 없고 서로 위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인격적 교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 사회에서는 그런 이상적 교제를 기대할 수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교회들만큼은 그런 교제가 실현되어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넘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할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행하는 자이다. 그는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거짓되며 탐욕적이다. 또 그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남을 해친다. 이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때때로 지도자들이 된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자들이 직분을 얻고 교회를 다스리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외식하며 탐욕적이었고 부정과 불법이 가득하였다(마 23:25, 28).
그러나 그런 때에 그 백성들은 탄식할 것이다. 경건과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이성과 양심에 반대되는 일들이 많아지고 의인들이나 가난한 자들이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또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하였다고 느끼기 때문에, 백성들은 탄식할 것이다.
[3절]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창녀]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하느니라.
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며 그것이 지혜이다. 지혜를 사모하는 자녀는 아버지를 즐겁게 할 것이다. 경건한 아버지는 자기 자녀가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고 또 그가 도덕적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자녀가 경건하고 정직하고 착하고 진실하게 살면, 그것은 아버지의 기쁨이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계명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도 들어 있으므로 자녀가 계명대로 부모를 공경하면 그가 복될 것이므로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창녀를 사귀는 사람은 재물을 없이할 것이다. 창녀는 돈을 위해 자기의 몸을 파는 자이다. 그러므로 창녀를 사귀면 재산을 탕진할 것이다. 잠언 6:25-26은,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창녀를 사귀는 아들은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고 부모를 섬길 경제적 힘도 잃어버리고 때로는 부모의 재산까지도 탕진할 것이다.
성도들은 지혜를 얻어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 아내로 만족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3-5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고 말했고, 베드로전서 2:11은, “영혼을 거스려[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했다.
[4절]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이쉬테루모스 )[기부금을 강요하는 사람](BDB)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법은 공의로 다스리는 것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이며, 그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만 섬기며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 등이다.
왕이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면 그 나라가 견고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교만하면 그의 계명을 거역하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탐심을 가진다. 불의는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혼란시키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고 결국 나라를 쇠약케 할 것이다. 그러나 왕이 불의한 자를 제거하고 공의를 세우면 나라가 잘될 것이다. 공의는 가정과 사회를 견고케 하여 서로 돕고 돌아보는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곳이 되게 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라에 복을 주셔서 그 나라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
그러나 뇌물이나 기부금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킨다. 왕이 뇌물 받기를 좋아하면 신하들은 왕에게 뇌물 바치려고 자기들도 뇌물 받기를 좋아하게 되며, 그러면 그 나라는 뇌물 왕국이 되고 도덕적 해이가 심하고 부정부패가 많은 혼란한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또 그런 나라는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돌아보는 일에는 인색하고 지도자들이나 백성이 사치하고 연락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런 나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합법을 빙자한 과도한 세금 징수도 바르고 선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만다. 우리는 자주 책망을 받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겸손히 달게 받고 힘써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
둘째로,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한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의로운 사람들과 우리 교회에 의로운 교인들과 직분자들이 많기를 기도해야 나라와 교회가 평안할 것이다.
셋째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버지를 즐겁게 하여도 창녀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한다.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결혼을 귀히 여기고 정욕을 따라 행치 말고 절제 있게 살아야 한다.
넷째로,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킨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지도적 인물들이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평안할 것이다.
5-8절, 아첨, 악인의 범죄, 의인, 경멸
[5절] 이웃에게 아첨하는(칼라크 )[부드러운 말을 하는,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아첨은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부정직하거나 지나친 칭찬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 곧 그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진실한 칭찬이라도 사람을 교만케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잠언 27:21은,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말하였다. 하물며, 부정직하고 지나친 아첨의 말은 상대방을 교만케 만들고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게 만들고 자신의 부족을 보지 못하고 착각에 빠지게 만들고 마침내 그로 하여금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거짓된 입맞춤은 행동으로 하는 아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잠언 27:6은 말하기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했다.
우리는 물론 이웃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아첨하는 말로 하지 말고 진실한 말로 해야 한다.
또 필요한 때는 충고와 책망도 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잠언 28:23은,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1, 14에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교훈했고, 히브리서 3:13은,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교훈하였다.
[6절]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악인은 악을 행하며 범죄하지만 그의 범죄하는 것은 자신에게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올무나 덫은 새나 짐승을 잡는 도구이다. 올무가 된다는 것은 속박을 당하고 종이 되고 결국 죽는 것을 말한다.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자신에게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스스로 죄의 종, 마귀의 종, 슬픔과 두려움의 종이 되게 하고, 사망의 종, 멸망의 종, 지옥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34). 바울은 우리가 과거에 사망에 이르는 죄의 종이었다고 말했다(롬 6:16). 애굽 왕 바로는 강퍅한 마음으로 범죄하다가 장자까지 죽는 재앙을 당했고 나중에 홍해에서 죽었다고 보인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목매어 창자가 터져 죽었다.
그러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한다. 의인은 범죄해도 즉시 회개하고 돌이킨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지적과 책망을 들었을 때 즉시 회개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째 울 때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심히 통곡했다(막 14:72; 마 26:75). 회개한 의인은 또한 노래하고 기뻐한다.
의의 길에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며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안과 기쁨이다(롬 14:17). 마게도냐 교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가졌다(고후 8:2).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시련 중에서도 크게 기뻐하였다(벧전 1: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빌 4:4).
[7절]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자이며, 하나님의 뜻은 이웃 사랑과 구제를 포함한다. 가난한 자들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억울한 사정이 많겠지만, 의인은 그들의 사정을 알아준다. 그는 어떤 사건을 판단할 때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따라 하지 않고, 이성적, 양심적으로 공명정대하게 하며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동정하고 돕는 것이다.
의인 욥은 말하기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査實)[변호]하여 주었다”고 했다(욥 29:15-16). 시편 37:26은, “[의인은]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말하였다. 주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이 주의 제자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굶주렸거나 헐벗었거나 나그네 되었거나 병들었거나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다고 칭찬하시며 천국으로 영접하실 것을 말씀하셨다(마 25:35-40).
그러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다. 악인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무시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욕심을 따라 행하는 자이다. 그는 공의에 대한 관심이 없고 이웃 사랑과 구제에도 관심이 없다. 그는 교만과 욕심이 있고 남을 미워하고 속이고 해치며 파괴한다. 그러나 그 결말은 멸망이다. 잠언 28:27은 “[가난한 자를]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했다. 주께서도 마태복음 25장에서 마지막 날에 악인들이 주의 제자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굶주렸거나 헐벗었거나 나그네 되었거나 병들었거나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았다고 지적되며 지옥의 형벌이 선언될 것을 말씀하셨다(마 25:42-45).
[8절] 모만(侮慢)한(라촌 )[경멸하는]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경멸하는 자는 교만하여 남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경멸하는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한다. 그런 자는 명예심 즉 자기를 높이려는 욕심을 가진 자이다. 교만함에서는 다툼만 나온다. 잠언 13:10,“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교회 안에도 교만한 자들이 있으면 다툼이 일어나고 무질서와 혼란이 생긴다.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 하고 다투었을 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마 20:26). 빌립보서 2:3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했다.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한다. 슬기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결코 악을 행하지 않는 자이다. 그런 자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오래 참는다. 슬기롭고 온유 겸손하고 오래 참는 자는 노를 그치게 한다.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15:18은,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회의를 하며 다수결 원칙을 택한다. 그것은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고 소수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줌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일치와 단합을 지키는 방법이다. 거기에 겸손과 인내와 양보심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할 때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투었을 때, 기드온은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며 겸손히 대답함으로써 그들의 노를 풀었었다(삿 8:1-3).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이웃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고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게 아첨하는 말을 하지 말고 진실한 말을 하고 필요한 때는 충고와 책망도 해야 한다.
둘째로,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한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주 예수님을 믿고 의의 길만 걸으며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함으로 의인으로 살고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의 사정을 알아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경멸하는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해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한다. 우리는 성읍을 어지럽히는 교만한 마음과 남을 경멸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오직 온유와 겸손과 인내심을 가진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9-12절, 다툼, 피 흘림, 노함, 거짓말
[9절]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이지만,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하고 악하고 거짓되게 사는 자이다. 그는 불효하고 남을 미워하고 죽이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탐낼 것이다.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라는 구절은 원문에 “그가 노하든지 웃든지”라고 되어 있다. 만일 여기의 ‘그가’ 지혜로운 자를 가리킨다면, 이 구절은 “그가 노하여 미련한 자를 책망하든지 아니면 웃으며 말하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지혜로운 자를 무시하고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다툼은 그침이 없을 것이다. 만일 여기의 ‘그가’ 미련한 자를 가리킨다면(NASB, NIV), 이 구절은 “그가 감정을 드러내면서 노하든지 아니면 상대방을 비웃든지”라는 뜻일 것이다. 미련한 자는 여하튼 말로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다툼은 그침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자와 다투면, 미련한 자가 변하여 미련함을 버리고 지혜를 얻기 전에는 그 다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은 미련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일을 계획했다.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였고 형식적인 재판을 하였다. 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압박하여 예수님을 정죄하게 했다. 그들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의 결심을 교묘하게 실행하려 할 뿐이었다.
[10절]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그러나 정직한 자들은 그의 생명을 염려하느니라](NASB).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라는 원문은 ‘피의 사람들’이라는 말로서 다른 사람들의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 명시된 대로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악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며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이기도 한다.
온전한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성심으로 순종하는 성도를 가리킨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온전한 자를 미워한다. 왜냐하면 그의 생활이 자신들의 생활과 너무 다르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죄악됨이 더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미움은 마귀적 성품이다. 미움은 곧 살인이다. 요한일서 3:15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천국을 확신하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마 10:28).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NIV)는 구절은 “그러나 정직한 자들은 그의 생명을 염려하느니라”(NASB)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정직한 자들’(원문)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르고 선하게 사는 자들이다. ‘그의 생명’은 ‘온전한 자의 생명’을 가리킨다고 본다. ‘찾는다’는 원어(바카쉬 )는 죽이려고 찾는다는 뜻도 되지만, 본문에서는 그런 의미보다 보호하려고 애쓴다는 뜻이 더 나아 보인다. 경건한 요나단은 친구 다윗을 지키려고 애썼고(삼상 19-20장), 경건한 오바댜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굴에 숨겨 보호하였다(왕상 18:3-4).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의 목숨을 지키려 애썼다(롬 16:4).
[1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낸다. ‘그 노를 다’라는 원문(콜 루코)은 ‘그의 모든 영(심령)’이라는 말이다. 원어에 ‘영’이라는 단어(루아크 )는 ‘심령, 의향, 기분, 감정, 노(怒)’라는 뜻도 있다(BDB). 영어성경들은 ‘생각’(mind)(KJV), ‘기분’(temper)(NASB), ‘노’(anger)(NIV)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하였다.
사람이 자기의 심령을 다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그 심령과 기분과 감정을 다 드러낸다. ‘다 드러낸다’는 말은 필요한 때가 아닌 때에 조심 없이 자기 감정을 다 드러낸다는 뜻이다.
사람의 감정이 항상 선한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자신이 원치 않는 나쁜 감정, 남을 미워하는 감정, 괜히 짜증스러운 감정이 생길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모든 감정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다 덕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것을 다 드러낼 필요가 없다. 특히 화가 났을 때 사람은 자기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노를 억제한다고 말한 것이다.
잠언 12:16도,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6:32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생각, 의향과 기분, 감정, 특히 노한 감정을 억제한다. 그는 꼭 필요한 때에 그것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19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교훈하였다.
[12절]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信聽)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니라.
통치자가 거짓말을 들어주면 그를 섬기는 측근들은 악을 포용하고 점점 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겉으로는 선한 척하지만, 실상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이 많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분별하고 거짓말에 대해서는 엄벌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진실이 있는 나라, 도덕성을 중시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유다 멸망기에 그 사회에는 거짓이 가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너희는 각기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네 처소는 궤휼[거짓]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궤휼로 인하여 나 알기를 싫어하느니라”(렘 9:4-6).
그러나 거짓말은 마귀의 죄악이며(창 3장; 요 8:44) 제9계명에 정죄된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미워하신다.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거짓말은 지옥 갈 죄악이다(계 21:8).
윤리의 기본은 의와 사랑과 진실이며, 의와 사랑은 진실에 기초해서 권장되어야 한다. 진실이 존중되는 사회는 악을 제재하고 징벌할 수 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롬 12:9).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하였다(엡 4:25).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그 다툼이 그침이 없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지혜자가 되어야 하고 또 미련한 자와의 다툼은 그침이 없는 줄 알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나 정직한 자는 그의 생명을 염려한다.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고 해하려 하지 말고 그의 생명을 아끼고 지키고 보호하는 정직하고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한다. 우리는 자신의 기분과 감정, 특히 노한 감정을 통제하고 절제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때만 나타내는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통치자가 거짓말을 들어주면 그의 신하들은 다 악하게 된다. 거짓말은 마귀의 죄악이다. 윤리의 기본은 의와 사랑과 진실이며, 의와 사랑은 진실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는 거짓말을 미워하고 멀리해야 한다.
13-16절, 가난한 자, 왕, 꾸지람, 악인
[13절] 가난한 자와 포학[국한문 성경, ‘포악’(暴惡)]한 자(테카킴 )[압제하는 자들](BDB, NASB, NIV)가 섞여 살거니와(니프가쇼 )[서로 만나거니와](BDB)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본문에서 압제하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부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와 압제하는 포학한 부자가 섞여 살고 있고 서로 오며 가며 만난다. 세상에서는 인격과 도덕성과 재산정도가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고 서로 오며 가며 만난다.
세상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다 만드셨다. 잠언 22:2는,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하고, 또 욥기 31:15도,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셨다. ‘빛’은 생명과 이성과 지식을 가리켰다고 본다. 산 사람은 눈에 빛이 있고 죽은 사람은 그 눈에 빛이 없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이성과 지식도 주셨다.
그는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치 않으시고 각양의 좋은 것들을 그들에게 주셨다(마 5:45; 약 1:17).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부자나 권세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했고, 잠언 17:5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했다. 창조자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남을 멸시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며 사는 것이다.
[14절]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진실히] 신원(伸寃)하면(쇼페트 )[재판하면](KJV, NASB, NIV) 그 위(位)[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옛날에 왕은 통치자이며 재판관이었다. 진리의 재판, 진실한 재판은 법과 이성과 양심에 따라 공의롭고 공정하게 재판하는 것을 말한다.
좋은 왕은 가난한 자를 진실하게 재판한다. 가난한 자는 사회적 약자이며 그는 때때로 부자나 권세자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다. 물론 율법은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있지만(출 23:3), 가난한 자가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한 일과 해를 당하지 않도록, 왕은 바른 재판, 공의롭고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은, 왕이 가난한 자를 진실하게, 공정하게 재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잠언 20:28은,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位)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고 말하고, 잠언 29:4는,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케 되는가? 왕이 법에 충실하면 그 나라는 질서 있는 나라가 되고 안정을 얻을 것이다. 또 백성들은 그 왕을 지지할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이성과 양심이 있기 때문에 왕이 이성과 양심에 맞게 공의롭게 재판하면 백성은 그것을 기뻐하고 그 왕을 지지하고 따를 것이다. 또 무엇보다, 하늘에 계신 공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왕과 그런 나라를 복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한다. 왕이 의로우면 그 나라가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평안하였고, 왕이 악하면 반역과 사회적 혼란이 그치지 않았다.
[15절] 채찍(쉐벳 )[매]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본문은 자녀 교육의 방법에 대해 벌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자녀에게 벌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의 본성이 어리석고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악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8:21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하였고,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하였다. 주 예수께서도 사람의 마음에서 각양의 죄악들이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그러므로 교훈이 필요하고 책망과 매도 필요한 것이다. 물론 어른에게도 책망의 교훈이 필요하고 징계의 고난이 필요하다. 시편 119:67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매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잠언 13:24는, “초달을 차마[매를 들지]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22:15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했다. 또 잠언 23:13-14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자식을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이 어미를 욕되게 한다고 말한다. 임의로 하게 버려둔다는 것은 타고난 본성대로 살게 내버려둔다는 뜻이다. 사람은 죄악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본성대로 살게 버려두면 범죄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벌을 받게 되며, 그것은 부모에게 고통과 수치가 될 것이다.
[16절]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천국은 의인만 있는 곳이며 지옥은 악인만 있는 곳이지만, 세상은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살고 있는 곳이다.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그를 무시하고 그의 계명을 거역하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진다. ‘죄’라는 원어(페솨 )는 ‘법을 어기는 것’을 가리킨다. 악인이 많아지면, 부모를 거역하는 일이 많고,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욕이 많은 사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고 잘 지키는 사회는 의와 도덕성이 있는 사회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법을 지킴이 없는 사회는 의와 도덕성이 없는 사회이다. 노아 시대가 그러했다. 그때에 사람들은 음란했고(창 6:2) 강포했다(창 6:11, 13). 소돔과 고모라 시대도 그러했다. 그때에 사람들은 매우 음란했고(창 19:4-7) 또 교만했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았다(겔 16:49-50).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가나안 일곱 족속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매우 음란했다(레 18장). 하나님께서는 그런 시대들에 그 악한 자들에게 직접 개입하셔서 그들을 엄하게 심판하시고 징벌하셨다.
본문은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망할 것이다. 시편 1:6,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멸망을 볼 것이다. 시편 37:34, “악인이 끊어질[죽을]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시편 58:10,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시편91:8,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망함을 성도에게 보이시는 까닭은, 성도에게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와 하나님의 존재와 공의의 통치를 확신시키시기 위해서이며 또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을 증거케 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압제하는 자에게 생명과 지식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만드셨다. 그러므로 부자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왕의 왕위는 견고할 것이다. 세속 국가의 통치자들은 공의와 선으로 백성을 잘 다스려야 한다. 우리는 그 통치자들이 법과 이성과 양심에 따라 잘 통치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며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 자녀 교육에는 교훈과 책망과 매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녀를 임의로 하게 버려두지 말고 책망하며 잘 교육해야 한다.
넷째로,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며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볼 것이다. 의와 도덕성이 없는 사회는 멸망할 사회이다. 악인들은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들이 의인들의 모임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17-20절, 자녀 징계, 이상(異像), 종, 말에 조급함
[17절] 네 자식을 징계하라(얏세르 )[징계하라, 바로 잡으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본문은 “네 자식을 징계하라”고 말한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필요할 때는 매도 때리고 바로 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성경을 통해 자녀 징계에 대해 많이 교훈하셨다.
잠언 12:24, “초달을 차마[매를 들지]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지옥]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본문은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면 자녀가 부모를 평안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자녀가 악하게 살면 부모에게 근심과 고통이 될 것이나, 자녀가 징계를 받고 바른 인격, 선한 인격이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부모의 근심 걱정이 사라질 것이다. 징계를 통해 좋은 인격이 된 자녀는 부모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줄 것이다. 자녀가 잘되지 못하면 부모에게 슬픔과 근심이 될 것이지만, 자녀가 잘되면 부모에게 평안과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0:1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고 말했고, 잠언 23:24는,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고 말했고, 또 잠언 17:25는,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말하였다.
[18절] 묵시(黙示)(카존 )[이상(異像, vision)]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해이해지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黙示)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은 오늘날에 성경말씀이나 성경적 설교와 교훈을 가리킨다. 성경말씀이 없고 성경적 설교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게 될 것이다.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경건과 도덕성이 없고 해이해지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뜻한다. 사사 시대가 그러하였다.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실한 강론도, 실행도 없었다고 보인다. 사사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한 것이다(삿 17:6; 21:25). 그 결과, 이스라엘 사회는 우상숭배와 음란의 풍조가 많았다(삿 17-19장).
사무엘이 어린 때에도 그러하였다. 사무엘상 3:1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異像, 카존 )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말한다. 그때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고 아버지의 교훈을 듣지 않았고 아버지 엘리도 그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고 그들의 행위를 금하지 않았다(삼상 2:22, 25, 29; 3:13, 14).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도 배교적인 시대가 있었다. 엘리야나 미가야의 시대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없고 성경적 설교가 없다면, 그 시대는 얼마나 더 어둡고 배교적일까!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되다. 율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법이다. 신명기 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시 1:1-3; 시 119:1).
[19절]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종은 왜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않는가? 그 까닭은 사람의 본성 속에 교만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고집을 부리고 주인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본문은 종에게 적당한 책망과 벌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요나 같은 선지자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고 니느웨로 가는 대신에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배를 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센 풍랑을 일으키셨고(욘 1:4) 요나는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지웠다. 그것은 하나님의 벌이었다(욘 1:12).
종만 징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도 그러하다. 아이들의 속에도 교만과 부모를 무시함과 제 생각과 고집이 있다. 그러므로 책망과 매가 필요하다.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사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우리는 본성이 교만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 생각과 고집을 부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매가 필요하다. 시편 119:67, 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러면 좋은 종은 어떤 자인가? 우선 겸손하고, 주인을 존중하고, 제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어떤 좋은 생각이 있을 때는 기회를 보아 겸손히 제안하고, 주인의 뜻을 잘 이해하여 온전히 순종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이다. 좋은 성도도 그러하다.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20절]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언어는 마음의 표현이다. 언어의 조급함은 마음의 조급함을 나타낸다. 언어에 조급한 사람이 미련한 자보다 더 못한 까닭은 어떤 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한 후에 말하지 않고 그런 생각과 판단을 하기 전에 말부터 먼저 나오므로 실수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 10:19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말한다.
상대가 마음이 상할지 어떨지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또 잠언 18:13은,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9:2는,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5:28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7:27은,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심령이 침착한] 자는 명철하니라”고 말한다. 또 야고보서 1:19는,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말에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면 그가 부모를 평안케 하고 마음에 기쁨을 줄 것이다. 자녀를 성경말씀으로 바르게 교훈하고 징계하는 부모는 그 자녀로 인해 평안과 기쁨을 얻을 것이다.
둘째로,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해이해지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귀히 여기고 성경적 설교를 귀히 여기고 성경을 많이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지키는 복된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이 된(롬 6:22) 우리는 매를 맞을 때 비로소 순종하지 말고 평소에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충성하는 좋은 종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언어에 조급한 사람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더 바랄 것이 있다. 우리는 언어에 조급한 사람이 되지 말고 범사에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 중에 한번 더, 깊이,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21-24절, 종, 노, 교만, 도둑질
[21절]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파나크 )[지나치게 떠받들면, 제멋대로 하게 하면(pamper)](BDB, NASB, NIV)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이예 마논 )[아들이 되리라(Langenscheidt, KJV, NASB), 감사하지 아니하리라](BDB)].
종은 주인을 섬기는 자이다. 그는 신분과 의무, 즉 종이라는 신분과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의무가 정해져 있다. 그런데 본문은 종을 어렸을 때부터 제멋대로 하게 버려두면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고 감사치 않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교만해져서 자기 신분과 의무를 잊어버리고 자기 위치를 벗어나서 주인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본문은 종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준다. 종은 너무 잘해주거나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종도 인격적으로 대하고 무시하는 말이나 무리한 지시나 부당한 책망을 하지 말아야 하며 필요한 경우 그를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에 관한 한, 주인은 그를 엄격하게 다루어야 하며 주인은 그에게 무엇을 지시하고 점검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며 또는 책망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종들이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과 위치를 알고 우리의 임무를 다해야 하고 다한 후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해야 한다(눅 17:10). 우리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계 2: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적절히 훈련시키실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고 칭찬과 격려도 하시지만, 징계도 하실 것이다.
[22절]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언 14:17은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 어리석은 일들 중의 하나가 다툼이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킬 것이다. 잠언 15:18도,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사람은 감정적 존재이므로 때때로 노하며 그럴 때 상대방이 그 노를 받아주지 않으면 쉽게 다툼이 될 것이다.
또 분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을 것이다. 사람이 분노하면 남을 욕하고 비방하기 쉽고 미워하고 살인까지 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셨을 때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교훈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그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로 끌고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었다(눅 4:28-29). 주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형제에게 [까닭 없이](전통사본)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2).
갈라디아서 5:20은,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의 죄악들의 목록 중에 두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노하기를 더디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한다. 잠언 14:29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다”고 말하고, 잠언 16:32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31-32에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 또 야고보서 1:19-20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교훈했다.
[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사람은 교만하면 낮아지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물리치시고 벌하시기 때문이다. 잠언 3:34는, “진실로 그[하나님께서]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신다”고 말한다. 잠언 11:2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고 말하고, 잠언 16:18과 18:12는 사람이 교만하면 멸망이 뒤따른다고 말한다. 시편 18:27은, “[주께서]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라고 말하고, 이사야 2:12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리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벌하실 것이며, 사람들도 교만한 자를 멀리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그를 존귀케 하시기 때문이다. 잠언 3:34는,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5:33과 18:12는 겸손이 존귀의 앞잡이라고 말한다. 즉 사람이 겸손하면 존귀케 된다는 뜻이다. 베드로전서 5:6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한다.
또 사람들도 겸손한 사람을 좋아할 것이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부족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족과 결점이 많은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바된 자들이다.
[24절] 도적[도둑]과 짝하는 자(콜레크 )[함께 나누는 자, 함께 일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맹세함을 들어도 직고(直告)하지(나가드 )[말하지, 알리지] 아니하느니라.
직접 도둑질하는 사람뿐 아니라, 도둑질을 돕는 사람도 같은 부류의 사람이며 같은 책임을 지고 같은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도둑질 뿐만 아니라, 다른 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의 죄를 돕는 것은 그 죄를 짓는 것과 같이 나쁜 일이다.
도둑과 짝하는 자, 도둑과 함께 도둑질한 물건을 나누는 자는 자기 영혼을 미워하는 자이다. 도둑질은 십계명의 제8계명을 범하는 죄악이다(출 20:15). 도둑질이나 도둑질을 도운 것은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고 벌을 받을 일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의를 행하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지만, 죄를 짓는 것은 결국 자기의 영혼을 해롭게 한다. 불의한 돈은 자신에게 화가 된다. 그러므로 잠언 20:17은,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자갈]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말했다. 가난한 의인이 부요한 악인보다 낫다.
본문은, “그는 맹세함을 들어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맹세함을 듣는다는 것은 도둑에 대하여 아는 바를 고백하라고 맹세시키는 말을 듣거나, 도둑이나 그를 도운 자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도둑질한 자에 대해서나 자신이 그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는다. 그는 도둑이나 그와 관계된 자신의 죄행(罪行)에 대해 솔직하게 증언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든지, 혹은 “나는 모른다”고 거짓말한다. 그는 더러운 욕심 때문에 양심이 불량하고 더러워져 있고 무디어져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한다. 주인은 종을 너무 잘해주거나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지혜롭게 잘 다뤄야 한다. 또한 아랫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잘 지키고 자기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둘째로,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을 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다.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겨야 한다.
셋째로,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며 또 다 부족한 죄인이기 때문이며 또 성도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고 도둑과 짝하지도 말고 항상 정직하게 일해야 한다. 정직하게 버는 적은 소득이 불의한 많은 소득보다 낫다.
25-27절, 사람을 두려워함, 참 주권자, 미움을 받음
[25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사람은 상대방의 기분 상함과 미움이 자기에게 신체적, 물질적 해가 되고 심지어 목숨의 위협이 될까봐 그를 두려워하고 겁낸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린다. 사람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그를 의지할 때 정직하게 살 수 있지만 사람을 두려워하면 범죄하고 타협하게 된다. 사울 왕은 아말렉을 다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나 백성을 두려워하여(삼상 15:24)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써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삼상 15:23). 요한계시록 21:8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지옥에 던지울 자들 중에 포함시켰다.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담대함을 얻는다. 다윗은 시편 3:6에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잠언 28:1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한다.
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죄와 시험과 환난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다윗은 시편 23:4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고 지켜주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또 다윗은 시편 25:15에서,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했다. 잠언 18:10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 안에 안전함이 있다.
[26절]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미슈파트 이쉬 )[사람의 판단(KJV), 사람의 공의(NASB, NIV)]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주권자’는 통치 권력을 가진 왕이나 통치자를 가리킨다. 주권자가 무슨 일이든지 해줄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친근히 하려 한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장관들과 국회의원들이나 시장 등 권력자들에게 은혜를 구하며 그들을 친근히 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의 판단 혹은 공의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 ‘사람의 판단’이라는 말은 도움을 줄지 여부에 대한 주권자의 판단을 가리키며, ‘사람의 공의’라는 말은 간청한 사람의 사건에 대한 공의로운 처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주권자가 그의 도움을 구하는 자에 대해 판단하고 도움을 주는 여부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에게 은혜를 구한 자의 일의 진행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경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홀로 다스리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마 10:29). 그러므로 잠언 21:1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洑)[수로]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말하고, 또 잠언 16:1도,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11은 하나님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또 그러므로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하나님]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교훈한다.
[27절]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불의한 자는 악인에게는 사랑을 받을지 모르지만, 의인에게는 미움을 받는다. 의인은 악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101편에서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고 말하였다(시 101:3, 5). 우리가 의인이라면 우리는 불의한 자를 인정하거나 돕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정직한 자는 의인에게는 인정을 받고 존경과 사랑을 받지만, 악인에게는 미움을 받는다. 악인은 그를 미워하고 비방하고 해치려 한다. 가인은 의로운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마침내 들에서 그를 쳐죽였다. 다니엘의 악한 동료들은 경건하고 의로운 다니엘을 미워하여 죽일 공모(共謀)를 하였다. 타락한 위선적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십자가에 죽이기를 공모(共謀)하였다.
악인이 의인을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악인이 어두움을 좋아하고 빛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이거나(요 3:20), 의인 때문에 자신의 악함이 드러나고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체면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요 7:7). 또는 의인이 하나님의 복 받는 것을 시기하기 때문이거나(마 27:18; 요 12:19) 사탄이 악한 자를 충동하여 의인을 미워하게 하고 또 의인을 낙망시키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범죄하도록 활동하기 때문일 것이다(눅 22:3; 요 13:29).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악인의 미움과 핍박과 시험을 이길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죄와 시험과 환난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의 판단과 공의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 우리는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불의와 악을 버리고 의롭게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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