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2.1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17.변화산의JC변형=영광스러운왕의대관식.아버지와하나이신JC_Q믿음_그무한능력.기도와금식_그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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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하나님의 진리말씀과 하나되어...assuredly and, most solemnly)...영(심령, 내적 자아로)과 진리로(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대로) ...really and truely 

##전파된 복음, 곧 믿음의 말씀<the word of faith :: 그리스도께서 구주시며(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으로서의 권능, 주권, 위엄을 가지신 분임을 깨달아 인식하고 시인함) 하나님이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선포된 말씀>을 귀기울여 들음으로써(hear) 바로 그대로 마음에 믿고(believe and trust in : ) <그리스도 예수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되심과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곧 마음에 믿고 구주로 영접한 바 입으로 고백하여 시인하면> 구원을<영생에 이르는 구원>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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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의 믿음의 상승, 증강 단계 :: 1>[도우시는] 주님을 신뢰, 앙망, 의지하는 믿음 :: belief [ :: believe (trust) in, rely on, cling(adhere) to God]...하나님을 앙망하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주 이름 불러 하나됨 그 안으로 믿어들어감의 신뢰/앙망하는 믿음 ==>2>[산을 옮기는, 발휘되는] 하나님의 전능한 믿음 :: faith, 내주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믿음(하나님의 전능한 믿음 = Faith....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신자안에서 찾으시는 믿음이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산을 옮기는 믿음 faith이다) :: 이를 위해 기도와 금식 통해 <전존재, 목숨 걸고> 주님을 추구하라 하심!!

-----------[관련 성구..개역개정/AMP]-------

[마17:20]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20 He answered, “Because of your little faith [your lack of trust and confidence in the power of God]; for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c]if you have [living] faith the size of a mustard seed, you will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f it is God’s will] it will move; and nothing will be impossible for you. 

[요4:23-24]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3. But a time is coming and is already her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from the heart, the inner self] and in truth; for the Father seeks such people to be His worshipers. *24.  God is spirit [the Source of life, yet invisible to mankind], and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truth.” 

[요5:24, 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4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the person who hears My word [the one who heeds My message], and believes and trusts in Him who sent Me, has (possesses now) eternal life [that is, eternal life actually begins—the believer is transformed], and does not come into judgment and condemnation, but has passed [over] from death into life.  *25.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a time is coming and is [here] now, when the dead wi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ose who hear it will live.

[롬10:8-15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8 But what does it say? “The word is near you, in your mouth and in your heart”—that is, the word [the message, the basis] of faith which we preach—  *9.  because if you acknowledge and confess with your mouth that Jesus is Lord [recognizing His power, authority, and majesty as Go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10.  For with the heart a person believes [in Christ as Savior] resulting in his justification [that is, being made righteous—being freed of the guilt of sin and made acceptable to God]; and with the mouth he acknowledges and confesses [his faith openly], resulting in and confirming [his] salvation. *11.  For the Scripture says, “Whoever believes in Him [whoever adheres to, trusts in, and relies on Him] will not be disappointed [in his expectations].” *12. For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Jew and Gentile; for the same Lord is Lord over all [of us], and [He is] abounding in riches (blessings) for all who call on Him [in faith and prayer]. *13.  For “whoever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in prayer] will be saved.” *14.  But how will people call on Him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 And how will they believe in Him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will they hear without a preacher (messenger)? *15. And how will they preach unless they are commissioned and sent [for that purpose]? Just as it is written and forever remain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of good things!”



개역개정]마17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시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죽음과 부활을 다시 이르시다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성전세를 내시다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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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장 (개요)

내용별로 살펴보면,

Ⅰ.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그리스도(1-13).

Ⅱ. 능력과 은총으로 어린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그리스도(14-21).

Ⅲ.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

1. 자신의 고난을 예고하심(22, 23).

2. 세금을 지불하심(24-27).

여기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의 빛을 갚아 주시고 사망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멸하여 파괴시키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 이와 같이 본 장에는 놀라우리 만큼 잘 짜여진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우신 의도가 몇 가지로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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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심(마 17:1-13)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머지않아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공관복음의 세 저자들은 모두 이 변형의 사건을 그 약속의 말씀과 연결을 짓고 있다. 

마치 그리스도의 변형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특별한 사람과 열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요, 또한 그의 나라의 광채와 사랑도 그의 택함 받은 거룩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다. 

베드로는 이 변형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벧후 1:16)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변형은 이러한 서언(전제)에 의해 적절히 소개된 그의 능력의 발산이요, 그의 오심에 대한 귀중한 암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비천하신 가운데 계셨을 때, 비록 그의 신분은 주로 굴욕과 고통의 신분이었지만, 그의 영광의 신분이 그 속에서조차 조금씩 드러났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 가운데서도 더욱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하였고 또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탄생과 세례 받으심, 시험, 그리고 그의 죽으심은 그의 겸손(비천)하심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실례들이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각각 어떤 영광의 신호와 천국의 미소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겸손하신 그의 일련(series)의 공적인 사역은 바로 이곳 변화산, 그 공적인 사역의 한가운데에서 그의 영광을 발견하는 데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가 하늘에 계셨을 때 지금과 같이 내려오신 것과 같이, 그가 지상에 계셨을 때도 [하늘에] 올라가실 수가 있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변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Ⅰ. 여기에 제시된 그의 변형의 배경(1절).

1. 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엄숙한 대화를 나누신지(마 16:21). "엿새 후"이다. 

누가는 "이 말씀하신 후 8일쯤 되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만 6일을 말하며, 7일째 밤이 되면 8일을 말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변형되시기 전 6일 동안 무엇을 말씀하시고 행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와 같이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하였다"(계 8:1)는 것이다.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때에조차" 머지않아 특별한 일을 행하시리라는 것을 기대해야만 한다.

2. 장소. "따로 떨어진 어떤 높은 산"이었다. [갈릴리호수 남서편 저지대 16km위치,588m높이 다볼산으로 생각함] 그리스도께서 산을 택하신 이유는,

(1) 은밀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는 따로 산에 가셨다. 

왜냐하면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기우지 못하지만, 산 위에 있는 두 세 사람은 쉽게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처는 대개 산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시기 위하여 한적한 장소를 택하신 것은 그의 모습이 영광 중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그의 현재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심으로써 그는 그의 겸손을 나타내려고 하셨으며, 또한 우리들에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있어서 은밀함을 가지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통을 가지려는 자들은 이 세상과의 교제나 사업에 종종 물러나야만 한다. 

그들은 혼자 있을 때 보다 덜 외로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2) 아래에 있는 저속한 것들보다 높은 곳에 있는 고상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과 더불어 변형되는 교제를 맺으려고 하는 자는 세상에서 물러나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마음을 들어 올려서 "위에 것을 찾아야만"한다. 그는 "이리로 올라 오라"고 부르신다(계 4:1).

3. 그 변형의 증인들. 그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갔다.

(1) 그는 세 사람, 즉 그들이 본 것을 증거 하는 데 필요한 완전수의 사람을 데리고 가셨다. 

왜냐하면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할 수"있기 때문이다.(역주:마 18:16).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습을 분명히 나타내셨지만 너무 대중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으셨다. 

"모든 백성에게 나타내시지 않고 미리 택하신 증인들에게 나타내신(행 10:41) 것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로 하여금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역주:요 20:29).

(2) 그가 이 세 사람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제자들 중에서 가장 주요한 제자들이었고, 또한 다윗의 자손이 되기에 가장 합당한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은사와 은혜 면에서 뛰어났던 것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었으며, 그의 은밀한 생활의 증인들이 되도록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그와 함께 있었다(막 5:37). 

그들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의 고민에 대해 증인이 되어야만 했으며, 또한 이 변형의 사건은 그들로 하여금 그 일을 준비케 하도록 하기 위해 행해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그와 함께 당하는 고난을 위한 좋은 준비가 된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들은 저 세상에서 그의 영광을 보기 위한 준비가 된다. 

바울은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지만 동시에 많은 계시를 받았다.

Ⅱ. 그 변형의 방법(2절).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의 육신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의 외형과 겉모습은 크게 달라지셨다. 

그는 영(a spirit)으로 변화되시지는 않으셨다. 다만 연약하고 수치스럽게 나타나셨던 그의 육신이 지금은 능력과 영광 속에 나타나신 것뿐이다. 

그는 "변형되셨다"(metamorfovw). 즉 "그의 모양이 달라지신 것이다." 

세속적인 시인들은 변형에 대한 이야기, 특히 그들의 잡신들의 변형에 대한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세상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잡신들을 모욕하고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들로써 모두가 거짓되고 어리석은 것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변형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쫓은 것이 아니요, 우리가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고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러나 그가 육신 가운데 계셨을 때는 "종의 형상"(morfh;n douvlou) 을 취하셨다(빌 2:7). 

그는 그의 신격의 영광을 감추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그의 변형 가운데서 그 베일을 벗기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morfh'/ qeou')나타나셨으며(빌 2:6),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보여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형체를 바꾸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선포하는 위대한 진리는 바로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요일 1:5), "빛에 거하시며"(딤전 6:16), "빛을 입으신다(시 104:2)"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내시려 할 때에 그는 "빛"으로 나타내셨다. 

그 빛은 모든 보이는 것들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요, 창조사역 중 첫 번째 피조물이요, 영원하신 성부를 가장 비슷하게 닮고 있다. 

그리스도는 "빛"이시다. 그가 세상에 계셨을 때 그는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발견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요 1:5, 10). 

그러나 이때에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였다.

그의 변형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1. "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 

얼굴은 몸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얼굴로 사람을 알 수 있다(또한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을 보고 누구인지 알게 된다-역주). 

그러한 광채가 그의 얼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에 자신의 얼굴을 "수치와 침 뱉음에서 숨기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행하실 때,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선명하고 찬란하게 빛났다. 왜냐하면 그는 의의 태양이시요,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모세의 얼굴은 되받아 비추는 달빛과 같이 빛났지만, 그리스도의 얼굴은 본래적인 고유의 빛인 해와 같이 빛났다. 그런데 그 빛이 보다 더 영광스럽게 느껴진 것은 그 빛이 말하자면 검은 구름 뒤에서부터 갑자기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2.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의 모든 몸은 그의 얼굴과 같이 변하였다. 따라서 그의 옷의 구석구석에서 흘러나오는 광채들은 그를 더욱 희고 빛나게 해 주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매우 희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얇은 수건으로도 쉽게 가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광채는 너무도 강하였기 때문에 그의 옷들도 빛나게 되었던 것이다.

Ⅲ. 변형의 동반자.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수천만의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그 강림의 모형으로써 지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나타난 것이다"(3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그를 수종들고 있는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등 세 사람이 "지상에서 증거하기"위해 있었던 것처럼 하늘에서부터 증거할 사람이 있어야만 했다. 

따라서 여기에 그리스도의 나라의 생생한 유사점이 있는데, "완전케 된 의로운 자들의 영혼들"이 이 나라에 소속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멸망 받지 않고 다만 분리된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때가 이르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여기 있는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인데, 그들은 그 당시에 가장 뛰어났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사십 주야를 금식했었으며, 그 밖의 이적들을 행하였고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떠날 때에도 유별했던 자들이었다. 

엘리야는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여 죽지 않았으며 또한 모세의 몸은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몸은 썩지 않도록 잘 보존되었다가 지금의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모른다. 유대인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기억하면서 존경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에 대하여 증거 하러 왔으며 또한 그에 관한 소식들을 천상 세계에 전하기 위하여 왔다. 그들로 말미암아 율법과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겼으며, 그에 대하여 증거를 하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제자들은 그들을 보았으며 또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제자들은 그들의 대화나 혹은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교시에 의하여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임을 알게 되었다.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천국에서 서로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축복 받은 성도들과 교제를 가지시며, 영화롭게 된 천국의 시민과는 누구와도 생소하게 대하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그의 선지자의 임무를 인침 받으셨기 때문에 이 두 위대한 선지자들이 그에게 자신들의 모든 영예와 인기를 양도함으로써 그를 수종 드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기"(히 1:2) 때문이다.

Ⅳ.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얻은 큰 기쁨과 만족. 

베드로는 평상시와 같이 나머지 제자들을 대표하여 말하였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베드로가 여기에서 나타내려고 한 것은,

1. 그들이 이 대화에서 얻은 즐거움이었다.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옵니다." 거칠고 불편하며, 황량하고 싸늘한 높은 산이라 할지라도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옵니다." 그는 자기 동료 제자들의 감정까지 말하고 있다. 여기 있는 것은 "나"에게만 좋을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좋사옵니다 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이 은총을 혼자만 독점하려고 욕심을 내지 않았으며, 기꺼이 그들도 이에 참석시키려 하였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에게 말씀드렸다. 

경건하고 열심 있는 애정은 그 자체를 주 예수님 앞에 쏟아 놓기를 좋아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영혼은 그에게 가서 이와 같이 말하기를 좋아한다. 즉,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이 말은 그들에게 이러한 은총을 허락하시는 그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의 뜻이 암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지는 것은 기독자들의 큰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다. 

주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그들이 거룩한 산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좋게 여겨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이곳, 우리를 임명하여 데리고 온 "여기에"있는 것이 좋사옵니다. 조용히 물러나서 홀로 그리스도와 함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시 27:4)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선지자와 더불어 의견을 교환하시는 것에 대해 듣거나 또는 율법의 모든 제도들과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또 어떻게 그 안에서 성취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2. 거기에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고 싶어하는 그들의 소원(4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게 하소서." 여기에는 베드로가 다른 곳에서 많이 말했던 것처럼 그의 연약성과 선의(善意)가 섞여져 있으며, 신중함은 결여되어 있으나 간절히 소원하는 열심히 잘 나타나 있다.

(1) 그들은 천적(天的)인 일들과의 이러한 대화에 열심 하였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크게 만족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믿음으로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자는 평생토록 주의 전에 거하기"를 소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박힌 못"(스 9:8)과 같이 항상 거기에 거주하는 것이 좋다. 여행하는 사람보다는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되어 거룩한 규칙 속에 거하는 것이 좋다. 

베드로는 이 산이 천막을 짓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 천막을 지으려고 하였다. 

이는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세키나"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초막을 지었던 것과 같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모세, 엘리야를 위하여는 각각 초막을 짓겠다고 하였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지신과 자기 동료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만 그의 주님과 천국의 손님들만을 크게 존경하였음을 나타내어 준다.

그는 이러한 좋은 분들과 더불어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차가운 땅에 그냥 누워 자도 만족하게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주님의 머리 둘 곳만 있다고 하면, 그 자신은 아무렇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 그렇지만 이러한 열심은 그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크게 노출시켰다. 

모세와 엘리야에게 무슨 천막이 필요하겠는가? 그들은 축복 받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곳은 '굶주림도 없고 햇빛도 필요 없는 곳"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최근에 자신의 고난에 대해 예고하셨으며, 그의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것을 받으리라는 각오를 하도록 명령하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을 잊고 있든지, 아니면 그것을 미리 막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벗어나 영광의 산에 초막을 짓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는 "주여, 그리마옵소서"라고 말을 함으로써 바로 며칠 전에 책망을 듣고서도 여전히 그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십자가 없는 면류관을 기대하는 경향이 선한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아직 그가 싸워야 할 싸움을 다 싸우지도 않고,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마 20:21) 자기가 달려가야 할 길도 다 달려가지 않았으면서도 이것을 상급으로 꼭 붙잡으려고 했다. 

우리가 만일 이곳 지상에서 천국을 찾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목표에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그네나 순례자(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환경 가운데 있는 나그네요 순례자들이다)들이 집 짓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지속적인 도시를 기대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합당치 못한 제안에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을"(눅 9:33)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제안을 그리스도께서 지혜롭게 처리해 주시도록 전폭적으로 일임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위해 초막을 지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만 한다.

베드로가 말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 영광이 사라지는 것이 그것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 큰 일들을 약속한 자는 그들 자신의 경험에 의해 곧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Ⅴ.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님에게 주셨던 영광스러운 증거.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났을 때 그는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받으셨다"(벧후 1:17). 

이는 마치 왕이 대관식 때에 왕의 제복을 입고 나타날 때 영광의 존칭이나 왕적인 칭호를 선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큰 위로를 주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왕적인 칭호는 그의 중보직을 통하여 주어진다. 

따라서 그는 환상 가운데서 그의 보좌를 둘러싼 언약의 표인 무지개를 동반하고 나타나셨다(계 4:3).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구속주가 되는 것이 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온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그것은 어떻게 전달되었으며, 또한 어떤 방법으로 소개되었는가?

(1) 구름이 있었다. 

우리는 종종 구약에서 구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visible)인 표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서 시내산에 강림하셨다(출 19:9). 또한 구름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출 34:5; 민 11:25). 

그는 구름 가운데 회막에 임재하셨고 후에는 성전에 임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중에 계신 곳에 성전이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거기에서 그 자신이 임재하고 계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우리는 구름의 신비로운 조화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하늘과 땅 사이의 많은 교제와 전달이 구름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구름에 의하여 수증기는 올라가며, 또한 비는 내려온다. 따라서 하나님은 "구름으로 그의 수레를 삼으신다"고 말해진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구름을 타시고 산에 내려 오셨다.

(2) 그것은 빛나는 구름이었다. 

율법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의 표적을 삼으신 것은 대개 두텁고 어둑컴컴한 구름이었다. 

그는 짙은 구름 가운데서 시내산에 강림하셨다(출 19:16). 그는 "먹물처럼 캄캄한 데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열왕기상 8장 12절을 보라. 

그러나 "우리가 이른 곳은 흑운과 흑암으로 덮인 산"이 아니라(히 12:18), 빛나는 구름으로 덮인 산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는 둘 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 시대는 흑암과 공포와 속박의 시대인 반면에 신약 시대는 빛과 사랑과 자유의 시대였다.

(3) 구름은 그들을 가리웠다. 

이 구름은 그리스도의 눈부신 빛의 광채를 제자들을 위하여 막아 주었다. 구름이 아니었더라면 제자들은 도저히 그 빛의 위력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구름은 마치 모세가 그의 얼굴이 빛날 때 그의 얼굴을 가리워 준 수건과도 같았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실 때 그들의 신체적인 구조를 고려하신다. 이 구름과 그들의 눈과의 관계는 비유와 그들의 이해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비유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것들에 의하여 영적인 일들을 전달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4)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구름 기둥 가운데서 말씀하셨다"(시 99:7). 

그런데 여기에서는 모세에 의해 율법이 전달될 때 있었던 것과 같은 뇌성이나 번개, 또는 나팔소리가 없었으며 다만 조용하고 작은 음성만이 들려왔다. 또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을 때와 같이 강한 바람이나 지진도 없었다(왕상 19:11, 12). 모세와 엘리야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마지막 날에 그의 아들에 의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던" 증인들이었다. 

이 음성은 이전의 영광보다는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들려왔다(벧후 1:17). 그 지극히 큰 영광은 비록 구름으로 가리웠지만, 거기에서 음성이 흘러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롬 10:17).

2. 하늘로부터 들려온 증거는 어떤 것이었는가? 

즉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위대한 복음의 비밀이 계시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과 똑 같은 것이었다(마 3:17). 또한 이 음성은 사람이 죄를 범하여 타락한 이래로 하늘로부터 지상에 전해졌던 소식들 중에서 최고의 소식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니"(고후 5:19)라고 위대한 교리와 취지를 함께 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위대한 사람들이요 천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은 단지 종들에 불과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종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모세는 경솔하게 말을 한 일이 있고, 엘리야는 감정에 이끌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기뻐하셨다.

 모세와 엘리야는 종종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화목케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모세는 위대한 대언자였고, 엘리야는 우대한 개혁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대언은 모세의 것보다 훨씬 우세하며, 그의 개혁은 엘리야의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난 음성과 동일한 내용을 반복한 이 음성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 왕에게 동일한 꿈을 꾸게 한 것이 곧 사실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던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하나님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처럼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가 틀림없이 그것을 이행하시겠다는 다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그 사실에 유의할 것을 고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이러한 음성이 들려진 것은 그 때가 바로 그가 시험을 받으러 가시지 직전이었으며 또한 그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말씀이 반복된 것은 그가 고난을 받으려는 바로 직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로부터 공관복음서는 그의 고난의 날 수를 계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지금부터는 비로소 전에 하지 않았던 말씀을 제자들에게 미리 들려주기 시작하셨다. 또한 그가 변형사건 기록 직후부터 바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9:51). 

그러므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이 그때 반복된 까닭은 그로 하여금 십자가의 두려움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또한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거침돌에 대해 무장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난이 넘치기 시작할 때 위로는 더욱 풍성하게 주어진다(고후 1:5).

(2) 복음이 요구하는 큰 의무. 

즉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는 유익을 얻는데 필요한 조건.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만을 좋아한다. 단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귀로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없다!!....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너의 전존재의 중심인 영으로 그 말씀속의 성령, 곧 참생명을 영접하고 너의 모든 것 삼고 그로 인해 조성되며 영원한 일치됨 이루도록 하라 ). 

우리는 그를 경청하며, 그를 위대한 선지자요 선생으로 믿어야만 한다. 즉 위대한 왕이시요 입법가이신 그의 말씀을 듣고 또 그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그를 경청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뜻과 심정]을 알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들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날에 아들로만(아들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들려온 이 음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이 구름 속에서 말씀되어진 것 같이 권위 있게 해 주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계시를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다만 그리스도 앙망함과 신뢰로 주와 연합하여 하나된 영으로 맏음으로 JC께 나아가라, JC를 신뢰함가운데 그의 이름 부르며 깨달음 얻기를 추구하는 자마다 말씀안의 성령께서 열어 알게 하여주신 그대로 행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이 선지자를 일으켜 세우리라"(신 18:18)는 예언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리스도는 지금 영광 중에 나타나셨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는 그를 경청해야 할 이유를 더욱 깨닫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그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보지만 말고 그를 경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던 그들의 시야는 즉시 구름에 의해 가리워져 버렸고 그들의 해야할 일은 오직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진정 JC를 믿는자들이란 진실로 그러하다, "우리는 들은 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하노라"(고후 5:7).

모세와 엘리야는 지금 그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이다. 지금까지는 "그들에게 들을지어다"(눅 16:29)로 말해지고 있다. 

제자들은 주님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위하여 초막을 지으려고 함으로써 그들과 그리스도를 동등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제자들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제자들은 그들이 말한 내용에 대해 알고 또 그것을 듣기를 몹시 갈망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보다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더 듣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안 된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것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즉, 모세나 엘리야가 아닌,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 모세와 엘리야는 그곳에 있었지만, 이 말에 동의하는 듯 잠잠히 있었다. 그들은 반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세상에서 선지자로서의 인기를 아무리 얻었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을 기쁨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들 중에 뛰어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너희와 잠시동안만 머무른 것은 섭섭히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Ⅵ. 이 음성을 듣고 제자들이 당한 두려움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격려.

1. 제자들은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였다"(6절). 

너무도 강한 빛이 갑작스럽게 비추이면, 사람들은 그것에 놀라 제정신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죄를 범하고 에덴동산에서 그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현현을 대하게 될 때 이를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에게 아무런 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어떤 것을 듣기를 매우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은밀한 곳에서 맑은 날씨가 생겨날 때,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다"(욥 37:22)는 사실이다. 

주님의 음성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는가에 대하여 살펴 보라(시 29:4).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말씀사역자들)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위협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풍성한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영광과 영달을 얻으셨다고 해서 연약함으로 둘러싸인 자기 백성들에 대한 관심을 누그러뜨리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존귀의 신분을 가지고 계실 때에도 가장 비천한 참된 신자들을 동정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크게 위로를 주는 일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는 어떤 일을 하셨는가?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셨다." 

그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두려움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붙잡아 주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곧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경우에 [직접] 그의 오른손을 요한과 다니엘에게 얹으셨었다.(계 1:17; 단 8:18; 10:18). 

그리스도께서 손을 대시면 흔히 병이 치료되었으나 여기에서는 힘을 북돋아 주고 용기를 주고 있다.

(2) 그는 어떤 것을 말씀하셨는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7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때 경외로 인한 두려움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지만, 놀라움으로 인한 두려움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합당치 않은, 쓸데없는]두려움은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또한 이에 뒤따르는 그의 은혜의 능력으로 선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그 어느누구도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이 말은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이유 없는 두려움은 [이미 주께서 믿늦이들마다에게 주신 바 된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이름부르면서 의지하여!!] 우리가 거기에 굴복하여 엎드리지 말고 일어서서, 그것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만 한다면 곧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보고들은 것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들은 두려워하기보다는 기뻐할 이유가 더 많았지만 아직도 그들에게는 이러한 경고가 필요하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오히려 힘을 내고 기뻐해야 할 때 놀라게 되는 일이 흔히 있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는 하늘로부터의 명령을 받고 난 후, 그리스도에게서 들은 첫 번째 말씀은 "두려워 말라"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심부름을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원수의 손에서 구출을 받음으로써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도록"하기 위한 것이다(눅 1:74, 75).

Ⅶ. 환상이 사라짐(8절). 

제자들은 몸을 일으켜 머리를 쳐들었다. 

그때 "제자들이 눈을 들어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 하더라."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져 버렸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들은 없어지거나 감추어져 버렸다. 그들은 이 변형의 사건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는 날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그들이 꿈에서 본 그의 외적인 화려함을 가지고 공적으로 나타나는 날이 외기를 고대하였다. 그들은 얼마나 실망하였는가를 살펴 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이 세상에서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가지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장 귀한 영광이나 기쁨은 이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지게 마련이요, 하나님과의 은밀하고 깊은 교제의 영광과 기쁨도 잠시동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항상 계속되는 잔치가 아니라 순간적인 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신적인 은혜의 현현과 장래의 영광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볼 수 있는 은혜를 받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즉시로 사라지고 만다. 하나의 천국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이 [이 땅과 하늘, 곧]두 개의 천국을 기대한다는 것은 분수에 지나친 일이다. 지금 "그들은 예수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를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들은 예수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를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질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머무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선지자들은 영원히 살지를 못한다"(슥 1:5). 우리는 목사들의 설교도 끝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히 13:8).

Ⅷ. 산을 내려왔을 때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대화들(9-13).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9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거룩한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가지고 또한 그 교제를 인하여 만족을 얻어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을 하게 되지만, 그곳은 우리가 항상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도성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우리 앞에는 [약속하신 바] 우리가 다시는 내려오지 않아도 될 영광과 기쁨의 산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산을 내려올 때에 예수님도 함께 내려오셨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특히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때에 우리는 반드시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HS의 임재-내주하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계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난, 무시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2. 그들은 내려오면서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거룩한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우리가 종사하는 일에 합당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는 사실이다. 

덕을 세우는 데((EDIFICATION:: 사랑=자비, 곧 체휼-친절-온유함으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상호 위로와 격려는 주앞에 선 단독자로서 진리말씀안에서 참된 능력과 힘의 원천이신 JC를 바라보고 믿음을 발휘하여 동행하도록 서로서로 위로-격려하며, 일깨워 고양시킴으로써 모본이신 JC를 빼어닮도록,그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까지 자라가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 필수적인 유익한 대화는 특별히 좋은 것이지만, 반대로 지저분한 대화는 다른 때보다 더욱 나쁜 것이 된다. ((모든 제자마다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는 표지판이요 작은 목자됨을 잊지말라!!))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이 환상을 당분간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분부하심(9절).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만일 그들이 그 변형의 사실을 널리 전파했다면, 그 신빙성은 지금 박두해 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해 곧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변형에 대한 전파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연기되면 그 사건과 그의 부활에 따르는 영광이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뒷받침해 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는 자신을 현현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사역들이 충분한 설득력과 확실한 증거로써 나타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역들을 짜임새 있게 배열하심으로써 서로가 보완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하셨다. 매사는 적절한 때를 만나야 아름답게 되는 법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 왕국의 적절한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그 이전의 모든 사건은 예비과정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서론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변형의 사건이 부활보다 앞서 일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부활 때까지는 증거로써 소개될 수 없는 것이다(그것은 벧후 1:16-18 에 의하여 많이 주장된 것처럼 보인다). 

부활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은 확실한 것이 되었으며, 완전한 진리로 입증되었다. 그리스도의 때는 그 자신을 현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최상의 때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때에 유의를 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제자들이 이의를 제기함(10절).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엘리야가 그렇게 잠깐 머물다가 홀연히 가버린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율법은 우리들에게 메시야가 왕국을 세우기 바로 직전에 엘리야가 세상에 공공연하게 오리라고 가르치나이까? 모든 사람들이 고대하는 엘리야의 도래는 은밀해야만 합니까?"라고 그들은 주님께 말하였다. 

또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즉 "메시야의 부활과 또한 그것과 더불어 있게 될 그의 왕국의 시작이 가까이 이르렀다고 한다면, 엘리야가 올 때에 우리가 기대하는 바 그 영광스런 서론과 서막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라고.

율법의 공적인 해석자들이었던 서기관들은, "보라,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말 4:5)의 성경 말씀을 따라 이러한 말을 하였다. 제자들이 한 말은 그 당시 서기관들의 말을 성경 말씀으로 여겼던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말이었다. 

한편 오늘날 우리들도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들에게 전하여 준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교역자가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사람의 말로'(살전 2:13)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구약에서 들은 말씀과 조화시킬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시기를 고대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또한 유의할 것..., 우리가 성경의 난제들로 말미암아 고심을 하게 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이해력을 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진리들을 잘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그리스도에게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3) 이 반대 질문에 대한 답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가르침을 구하라, 그러면 가르침을 주실 것이다.

① 그리스도께서 예언의 말씀을 인정하고 계시다(11절).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이 점에 있어서는 너희들의 말이 옳다." 

그리스도는 구약에 이미 예언된 말씀들을 변경하거나 무효로 만들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성경의 존엄과 권위를 훼손하거나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주께 여쭙는 자마다]  충분하고도 넉넉하게 오염과 오해의 화장을 제거하거나 벗겨낼 수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약의 예언들은 참되고 선하며, 또한 우리는 그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들을 그릇되게 해석하며, 그것에서 잘못된 추리를 하기도 한다.

엘리야는 장차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할 것이다. 이는 그가 와서 모든 일을 그 [타락]이전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말이 아니라(세례 요한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일을 성취시키리라는 뜻이다(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모든 일이란 그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과 엘리야가 올 것에 대한 모든 예언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회복하러 왔다. 즉 타락한 신앙을 부흥시키고 "아비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이키게 하려고"왔다. 이것이 곧 모든 일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요한은 모든 일들을 회복하기 위하여 회개를 전파하였다.

② 그리스도는 그 사실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오리라"고 말한 것은 참되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서기관들이 말할 수 없는 "엘리야가 이미 와있다"(12절)고 말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종종 성취되며, 그것이 이미 성취되었음에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감지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그 약속이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묻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엘리야는 이미 와 있으되, 그들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약속된 엘리야요, 메시야의 선구자[선두주자,forerunner]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비평하는 데만 분주하였기에, 시대의 징조를 [꿰뚫어 통찰하여]봄, 곧 성경이 성취되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적용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사실이다. 

태양(the SUN itself) 그 자체이신 그분이 "세상에 왔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계명성(새벽별.morning star..역주:세례 요한)을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임의로 그를 대우하였다." 만일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거나 요한을 목베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2:8). 그들은 세례 요한을 조롱하고 핍박했으며, 마침내는 그를 죽였다. 요한을 죽인 것은 헤롯의 소행이었지만, 본문에 보면 믿음 없는 유대인 전체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다. 특히 서기관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이 요한을 처형할 수는 없었지만, 헤롯의 소행을 기쁘게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엘리야(여기서는 세례 요한)가 그를 경건되게 기다리는 척하던 사람들에 의해 욕을 보고 죽임을 당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메시야 자신이 그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리라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고난은 다른 모든 고난의 생소함을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는 사실이다(요 15:8). 

그들은 세례 요한의 피로 자신들의 손을 물들였을 때, 이미 그리스도에게도 똑 같은 행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들을 대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자신을 대우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순교자들의 피로 취한 그들은 여전히 "피를 달라, 피를 달라"고 울부짖고 있다(행 12:1-3).

(4) 궁금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상세한 답변을 듣고 이에 만족하게 됨(13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그리스도는 요한의 이름을 들어 말씀하시지는 않고 그에 대해서만 말해 줌으로써 그가 그들에게 이전에 말한 "이 사람이 엘리야라"는 말씀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은 유익한 교수법이다. 그러한 방법은 선생이 없다고 하더라도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단편적 지식들을 서로 관련짓게 하여 스스로 배우고 기억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우는 자들은 지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식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할 때에 의심의 구름은 사라지고 그릇된 생각들은 시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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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마 17:14-20)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간질병과 귀신에 들린 아이를 이적적으로 치유하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Ⅰ. 고통에 잠긴 아버지가 자기 아이의 처지에 대해 그리스도께 침울하게 말씀 드림.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신 산에서 내려오신 바로 직후에 일어났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영광을 받으셨다고 해서 우리의 궁핍과 불행을 무관심하게 방치하시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하셨던 그 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 위엄을 나타내려고 하시지 않았으며, 또한 그 누구도 쉽게 그에게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리들을 친절히 대하셨다.

이 불쌍한 아버지의 요구는 매우 절박하고도 끈질긴 것이었기에,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무릎을 끓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깨닫는 자들은 매우 진지하게 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결사적으로 씨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어린아이의 아버지는 두 가지를 호소하고 있다.

1. 자기 아이의 고통(15절).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온유한 아버지는 자녀들의 고통을 쓰라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자신들의 분신(分身)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때는 신실하고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한다. 아마도 이 아이는 병 때문에 스스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두 가지 이유는 때때로 그들은 연약하여 기도할 수 없으며, 또한 때로는 무엇보다도 사악하여 스스로가 기도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경우에도 주님은 들으신다는 것을..

(1) 이 아이의 병세는 매우 처참하였다.

 "그는 간질로 심히 고생하였다." 

간질병은 원래 달(moon)이 바뀔 때마다 일어난다(역주:간질병은 달과 관계가 있다하여 lunatic라고 부른다). [이 병증에 대한 고대적 이해... 마귀는 신적인 허락을 받아 간질병을 일으키며, 적어도 그것을 더욱 악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 아이는 사탄의 손아귀에 잡혀서 자주 물과 불에 넘어졌다. 그럴 때마다 이 아이는 매우 고통을 느꼈으며, 평상시보다 더 괴로워했다.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는 마음을 괴롭게 하는 육신의 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왜냐하면 마귀가 해치려고 목표하는 것은 바로 영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병의 증상만을 보고 "그는 간질병에 걸렸습니다"라고 애원하면서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근본적] 치료를 하기 위하여 마귀를 꾸짖으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원인을 치유하셨다. 

이와 같이 주님은 영적인 치유를 하신다.

(2) 그 질병의 증상은 너무도 심하였다.

 "저가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그 질병으로 인하여 그가 넘어지게 되었다면, 악한 마귀는 그를 물과 불에 넘어지게 하였다. 이와 같이 마귀의 소유가 되고 마귀의 힘에 사로잡힌 자는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다.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2. 제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한 것을 하소연함(16절).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들을 내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마 10:1, 8). 그때에 그들은 성공을 거두었다(눅 10:17). 

그런데, 지금은 아홉 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많은 군중들 앞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실패를 허용하신 것은,

(1) 그들을 겸손하게 하고 그만을 의지하게 하며, 그가 없이는 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2) 그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조력자들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때 그리스도의 존귀만이 막 다른 골목에서 도움을 줄 수가 있다. 

게하시의 손에 있는 엘리사의 지팡이는 어린아이를 살리지 못할 것이다. 그 자신이 와야만 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종종 원천 되신 그에게 오도록 하기 위하여 저수지를 메마르게 하실 때가 있다. 도구들(여기서는 제자들-역주)이 실패한다고 해서 그의 은혜가 작용을 못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은혜는 그들에 "의해서"가 아닐지라도, 그들 "없이도" 역사 하게 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먼저 사람들을 책망하셨고 그 후에 마귀를 책망하심.

1. 그는 자기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을 꾸짖으셨다(17절). 

"믿음이 없고[아피스토스 : JC영접-절대신뢰/절대의지/절대기쁨-추구하여 전심전력기울여 따름의 결단적 믿음(신실함)이 없는] 패역한[(히)타푸카.(마음-눈-입)고집불통: 괴팍-사악-심술궂은 + 왜곡/혼미-타락/배역한: (히)아카쉬..미3:9) (헬)디아스트레포] 세대여!"라고.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셨다. 

아마도 특별히 마가복음 9장 14절에 언급된 것과 같이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인 것 같다. 그 서기관들은 제자들이 힘겨운 일을 당하여 속수무책인 것을 보고 제자들을 비난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실 수 없으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자유케하심의 구원과 복음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신앙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도 믿음이 적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는 그러한 사역들을 행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능히 이 일을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믿음이 없고 패역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믿음이 없는 자들은 패역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패역함은 가장 악한 죄이다. 믿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지만,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은 패역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이 없고(시 95:9), 패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신실함이 없었기 때문이다(신 32:20).

그는 두 가지 일에 대하여 그들을 책망하셨다.

(1) 그는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있었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너희는 내가 언제나 육체로 너희와 함께 있기를 원하느냐? 너희 백성들은 제자들의 행위에 의지하고 또 너희 제자들은 성령과 그들의 임무에 의지하여 합당하게 행할 수 있도록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였느냐? 내가 언제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하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혼자 걷는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느냐?"라고.

(2) 그는 그들을 오랫동안 참으셨다.

 "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① 은혜의 방편을 향유하고 있는 자들의 불신앙과 패역함은 주 예수님에게 큰 슬픔이 된다. 

이와 같이 그는 광야에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행을 참으셨다(행 13:18).

② 그리스도께서 패역하고 믿음이 없는 백성들을 오래 참으시면 참으실 수록, 그는 그들의 패역함과 불신앙을 더욱 불쾌하게 여기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아니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그처럼 오래 참으시거나 인내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아이를 고쳐 주셨으며, 또한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고쳐 주셨다. 

그는 "그 아이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패역하고 또한 그리스도도 기분이 몹시 상하였지만 그 아이를 돌보아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화가 나실지라도 결코 불친절하지 않으시며, 또한 가장 불쾌할 때에라도 비천한 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닫아버리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모든 다른 도움과 구원이 허사가 될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접해 주시며, 우리는 그의 능력과 자비 안에서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나타난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형(典型)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는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시도때도 없이 불에도, 물에도 넘어뜨려 아이의 몸을 상하게 하는]사탄의 세력을 깨뜨리신다(18절).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으므로 그의 명령을 뒷받침할 수가 있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의 능력, 즉 그의 입에서 나오는 능력 즉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날선 칼(계 19:21)로 사탄을 이기신다는 사실이다. 

사탄은 오랫동안 그 간질병 걸린 어린아이를 지배해 왔지만 그리스도의 책망을 견디어낼 도리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정사와 권세들을 깨뜨려 버리신 사실은 그것들과 더불어 싸우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준다(골 2:15). 

유다 지파의 사자(그리스도)는 삼킬 자를 찾아 으르렁거리는 사자(마귀)에게 너무도 힘든 적수가 될 것이다.

(2) 그는 자녀들의 비통의 원인들을 제거하신다.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그것은 즉각적이고 완전한 치유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 영혼이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는 부모들에게 용기를 준다. 

그는 그들을 고쳐 주실 수 있으며 또한 기꺼이 그 일을 하신다. 

자녀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쳐 주어라. 

그의 말씀은 영혼 속에 견고히 자리를 잡고 있는 마귀의 요새를 파괴할 수 있는 일반적인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꾸짖음이 마음 깊은 곳에 이르게 되면 사탄의 세력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Ⅲ. 이때에 제자들과 나눈 그리스도의 담화.

1. 제자들은 그들이 이때에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던 이유에 대하여 질문하였다(19절). 

"이 때에 제자들은 조용히 예수께 나아왔다"...[너 예수께 조용히 나아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섬겨야 하는 사역자들은 그와 개인적인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 목적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그들의 공직 수행상의 연약한 점과 부족한 점, 또한 어리석은 것과 결핍된 점들을 개탄하면서 그러한 허물들의 원인을 그리스도에게 묻기 위함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따로 조용히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잘 선용해야만 한다. 

또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어보았던 그러한 질문들을 자리에 누워 곰곰이 되새기면서 물어보아야만 한다. 

어찌하여 우리는 그때에 그렇게도 우둔하고 경솔하였습니까? 어찌하여 우리는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습니까? 

그렇게 질문함으로써 그 원인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실수했던 일들을 올바르게 시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실패했던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계시다.

(1)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적은 때문이었다"(20절).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의 아버지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 때는 병고치지 못한 것이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는 제자된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사실은 양편 모두에게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보다는 내 잘못에 대해 더 잘 들어야 하며, 어떤 일을 실수하였을 때 그 실수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탓이라고 여겨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 것이 다른 때와는 달리 은혜가 없고 크게 감동을 주지 못하였을 때 교인들은 교역자를, 교역자는 교인들을 탓하기 쉽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각자가 "그것은 내 탓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합당한 일이다. [내탓이요, 내탓이요, 이는 전부 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사역자들은 비난을 받을 때에 각자에게 필요한 말씀의 꼴을 충실히 먹여야 하며,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라는 말씀을 가르쳐야만 된다.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믿음은 연약하고 적은 것에 불과하였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① 믿음이 (있다 하지만, 믿음의 생동력과 활기, 곧) 그 힘과 능력, 그리고 활동성을 결여할 경우 그것은 차라리 "불신앙"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이다. 

믿음은 없지만 차마 "불신자"라고 부르지는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② 신앙 생활에는 엉망이 되고 곁길로 자주 나가게 되며 선한 일의 열매가 전혀 없게 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계기로 삼아 제자들에게 능력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지금과 같이 믿음이 적게 되지 않도록 하셨다.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너희는 이적 기사를 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20절)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싹이 움터 나올 때 힘있게 솟아 나오는 강력으로서 겨자씨의 질(quality)을 말한 것으로 생각한다.)

"너희들이 죽어버리거나 맛을 잃어버린 신앙이 아닌, 힘있게 자라나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면 너희들은 이와 같이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한걸음 더 깊이 나아가 모든 믿는 이안에 한영되어 내주하사, 살아 생동하는 JC, 그분의 약속말씀 그대로 이루며 행하심을 붙드는 참된 믿음, 곧 그리스도의 그 믿음!!]겨자씨의 양(quantity)을 가리키는 말이다. 

"너희들이 한 알의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이 비록 모든 씨들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과 같은 것일지라도 너희들은 이적 기사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이란 일반적으로 모든 신적인 계시를 확실히 믿고 순종하며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요구되는 신앙은 특별 계시를 그 목적으로 삼는 신앙인데, [모든 상황과 환경, 모든 차원을 초월하여 기독자의 영과 하나되어 내주하여 살아계시며 동행하시는 JC, 바로 그분자신을 친밀히 알고 의지하며 교통하기에, 신실하신 그분이 약속하신 그대로 그분의 이름으로 명하는 바 그대로 이루심-이루어짐을 붙드는, 살아 생동하는 믿음으로서 바로 그리스도의 믿음이다!!그리스도께서는 특별 계시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그들이 전파했던 교훈을 확증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었다. (이것은 이미 70인전도대 파송시에 확인되었던 바이다!!)

제자들에게는 바로 이 계시에 의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어찌함인가!!)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사명이 유효하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든지, 아니면 그 유효성이 첫 번째 사명을 수행할 때 다 소비되었으며 그들이 그들 선생에게 돌아왔을 때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들의 사명이 박탈당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들의 주님께서 그들 중 세 명의 수석 제자들과 함께 따로 산에 가시면서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따라오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과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 아홉 명과 계시지 않은 것이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이나 그들과 함께 하셨던 주님의 능력을 의심케 했는지도 모른다.[구주JC, 나 여호와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어쨌든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 그분의 이름은 그분자신이시다!!) [시공의 모든 차원을 초월하여 JC를 믿고 영접한 자의 마음보좌안에 내주하시고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는 바, JC를 의지하는 자마다에게 주신 바 강력한 그 이름을] 실제적으로 의존하거나 확신하지 않았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거나 주어진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불쾌하게 만든다. [그것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기에!! 추호도 의심없이!! 불굴의, 요동없는, 견고한 심지로 붙들어야만 하며 발휘되어야 한다!!

너희가 신실하게 이러한 신앙을 조금만이라도 가진다면, 그리고 너희들에게 주어진 능력을 참으로 신뢰한다면 "이 산을 명하여 옮길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속담 형식의 표현으로써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내용의 뜻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JC로부터 보냄받은 곳 그 어디에서라도, 천하에 두루 다니며] 모든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사명을 받았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마귀들은 보통 마귀들보다 훨씬 간악하고 끈질긴 마귀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곧 JC자신이시다!!)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들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이 점에 대해 확신을 주기 위하여 그들이 충분히 할 수 있었던 것을 보여 주시고 계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살아있는 능동적인 믿음은[절대신뢰-절대긍정-절대기쁨-절대사랑!!] 산들을 옮길 수 있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에 의해서만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약속된 [살아계신 바로 그분]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과 능력을 결속시켜 주는 것은 믿음이다.

(2) 그 병이 다른 병보다 고치기 어려운 난치병이었기 때문이다(21절).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못하느니라. 물이나 불에 자주 넘어지게 하는 이런 종류의 악랄한 마귀는 보통의 방법에 의해 쫓겨나가지 않으며, 다만 간절한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너희는 이 점에서 부족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①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들은 정사와 권세들이지만 어떤 것은 보다 강력하여서 그들의 세력을 깨뜨리기가 무척 힘이 든다.

② 때때로 사탄의 특출한 힘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의지(견고하고 굳센 심지)가 꺾여서는 결코 안되며, [오히려 그러한 경우일수록 JC이름을 부르며 불굴의 의지로 활활 타오르도록 하되, 임전무퇴-백절불굴-일사각오의 기도와 금식으로 믿음의 주께 나아가 공급받음으로써 그리하라]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고 더 증가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21절의말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산을 옮길 만한 이러한 종류의 신앙은 간절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없으며, 그 믿음이 성장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능력을 발휘하여 큰 역사를 이룰 수도 없다."

③ 금식과 기도는 우리를 대항하는 사탄의 세력을 꺾고 우리의 힘을 북돋는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이다. 

금식은 기도를 효과 있게 하는데 퍽 유익하다. 그리고 금식은 기도할 때 필요한 낮아짐(비하)의 증거요 실예이며, 또한 부패한 습성을 억제하고, 기도 시에 육체의 영혼을 거스리지 않고 도울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수단이다. 

인간의 영혼에 자리잡은 마귀의 세력이 육체의 본성과 체질에 의해서 더욱 강화될 때에 금식은 육체를 억제시키기 위해 기도에 수반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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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예고(마 17:22-23)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자기의 수난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이전에 수난에 대해 예고를 하기 시작하였다(16:21).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것임을 아시고 그는 그것을 반복할 필요성을 느끼셨다. 어떤 것들은 "하나님께서 한 두 번 말씀해서는 사람들이 전혀 깨닫지 못할" 경우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관하여 예언하신 내용. 

즉 그는 배반을 당하시고 죽임을 받으셔야만 하였다. 그는 이미 이전에 그에게 생겨질 모든 일을 완전히 아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구속을 위한 사역을 기꺼이 수행하셨다. 이는 그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 이전에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예견하였으며,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그에게는 모든 일이 용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배반을 당하여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는 장차 "넘기우게 될 것이다"[이 말씀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행 2:23; 롬 8:32) 넘기우리라고 읽혀지고 이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대로 해석한다면 이 말의 뜻은 가롯 유다가 그를 배반하여 제사장들의 손에 넘겨주고 또한 그들은 로마 군병들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뜻이 된다. 

그리스도는 배반을 당하여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졌던 것"이다. 하나님이시면서도 ㅇ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기에 그들과 인연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어쩌면 그들이 그를 멸절하고자 하였더라도 일말의 연민의 정과 관용을 기대할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고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을 구원해 주기 위해 왔으므로 그들에게서 어쩌면 존귀와 감사를 기대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를 핍박하고 죽인 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2) "그들은 그를 죽이리라." 

그들의 분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이 목마르게 찾고 있는 것은 그의 피, 즉 그의 보배로운 피였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마 21:38)".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스도가 속죄의 제물이라고 한다면 그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 이는 피흘림이 없으면 아직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역주: 히 9:22).

(3) "그는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리라." 

그렇지만 그는 그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 앞에 있는 기쁨"인 그의 부활에 대해 암시해 주셨다. 

그 기쁨을 예상했으므로 '그는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 이 부활은 그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도 크게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제 삼일에 살아난다고 하면 그가 제자들과 떨어져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게 되고 또한 그의 귀환은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다." 

여기에는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의 인격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역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였으며, 또 오해를 하였다. 

베드로는 이전과는 달리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감히 하지 못하였는데(마 16:22), 이는 그가 그때에 심히 책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베드로나 다른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한가지로 그들의 주님의 슬픔이 자신들의 비극이요 또한 자신들의 죄와 허물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고 크게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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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세의 문제(마 17:24-27)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세금을 바치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Ⅰ. 어떻게 세금이 고지(告知)되었는가?(24절)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의 사역의 본거지인 가버나움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대부분 가버나움에 머물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이곳으로 물러가셨던 것은 그의 납세의무를 기피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곳으로 오셔서 기꺼이 지불하려 하셨다.

1. 고지된 세금은 로마 관원들에게 바치는 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적인 세금은 세리들에 의해 엄격하게 징수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세금은 회당세로서 반 세겔(약 15펜스-영국의 화폐단위)이다. 

그 세금은 누구나 다 내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그 돈으로 예배 비용을 충당하였다. 그것은 "생명의 속전"(출 30:12)등으로 불리웠다. 

이 세금은 종종 그러했었지만 지금은 엄격하게 징수되지 않았었으며, 특별히 갈릴리 지방에서는 전혀 징수되지 않았었다.

2. 그 고지(告知)는 매우 정중한 것이었다. 

수금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역사 때문에 그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 그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가버나움이 고향인 베드로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유숙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집주인으로서 전갈을 받기에 가장 적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그의 선생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질문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그가 만일 세금 바치기를 거절하면 그는 성전 예배에 불만을 가진 자요, 또한 그의 제자들은 "조공과 잡세와 부세"(스 4:13)를 전혀 드리지 않는 무법한 자들로 몰아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그를 고소할 조건을 찾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세금을 내라고 할 때 무척 조심스럽게 말한 듯하다. 즉 그들은 그가 혹 세금을 면제받을 특권이라도 있으면 굳이 강요하지 않겠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베드로는 이러한 세금 고지에 대해 그의 선생을 대신하여 즉각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예, 물론 바쳐야지요. 나의 선생님은 세금 내시는 것을 그의 생활의 철칙으로 삼고 있으니, 안내실까 염려하지 마십시요."

(1) "그는 율법 아래 나셨다"(갈 4:14). 

그러므로 그는 생후 40일 되었을 때 이 법을 따라 세금을 내셨으며(눅 2:22), 지금은 "종의 형체를 입으신 자"(빌 2:7, 8)로써 그의 낮아지신 신분으로 세금을 바치셨다.

(2) 그는 "우리를 위해 죄 아래 나셨다. 

그리고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졌다"(롬 8:3). 지금 성전에 바치는 이 세금은 "생명을 위한 속전"(출 30:15)이라고 불리 운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서 "죄인의 모양으로 나타나기 위하여" 구속해야할 죄를 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쳤다.

(3) "그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였다."(마 3:15). 

그는 이와 같이 하심으로써 다음과 같은 본을 보이셨다.

①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롬 13:7).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으므로 그 나라의 직분을 맡은 자들은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할 권리가 없다. 

사람들은 세상 관원들에게 세금을 바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②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공적 예배의식을 위해 봉헌하는 본을 보여 주셨다. 

우리가 영적인 열매를 얻게 되면 우리는 마땅히 물질의 열매를 되돌려 갚아야 한다. 

지금 성전은 도적의 소굴이 되었고 또한 성전에서의 예배는 대제사장들의 가르침이나 교리와는 정반대로 겉치레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이 세금을 바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합법적으로 부과된 교회세에는 교회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납부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탐욕과 악의를 가리우는 데"(벧전 2:16)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금을 바치셨으니 누가 감히 예외를 주장하겠는가?

Ⅱ. 세금 문제는 어떻게 논쟁이 되었는가?(25절) 

그 논쟁이 수금원들과 더불어 행해지지 않은 것은 그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와 더불어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하셨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왜 세금을 내는가를 베드로에게 충분히 납득시키고 또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베드로는 수금원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를 앞질러 자신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한 확증을 보여 주심으로써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지식 없이는 결코 공격을 할 수 없다.

1. 그리스도는 세상 임금들이 세금 걷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시고 있다. 

그들은 나그네들이나 예속된 나라의 국민들이나 그들과 거래하는 외국인들에게서는 세금을 걷지만, 자기들의 가족인 자녀들에게는 징수하지 않는다. 

부모와 자녀들 간에는 재산을 공동 소유하며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든지, 그들에게서 어떤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이는 마치 오른손이 왼손에게 세금을 내리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 그는 세상 임금들의 세금 징수방법을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물의 상속자이시다. 

성전은 그의 전이며(말 3:1), 그의 아버지의 집이며(요 2:16), 그 성전에서 "그의 집 맡은 아들로서 그는 충성을 하였다"(히 3:6). 

그렇더면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당연히 성전의 예배 의식을 위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처럼 자신의 본래 권리를 먼저 명백하고도 분명하게 주장하셔서 입장을 밝히신 후에 (그 바탕위에서 다른사람들이 오해나 억측으로 교묘히 호도하지 못하도록 자원하여 내려 하시는 바)그리스도는 이 세금을 내는 것이 [결코]하나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직위를 약화시키거나 또한 자신이 그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셨다. 

이와 같은 자녀들의 면세 범위는 주 그리스도 자신의 경우보다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양자 삼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마귀의 종노릇하는 데서는 자유의 몸이 되지만, 세상일들에 있어서 세상 관원들에게 예속된데서는 자유스럽지 못하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법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즉 "모든 사람은(성도들도 예외가 아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복종하라.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

Ⅲ.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은 어떻게 지불되었는가?(27절)

1. 왜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면세의 대상이시면서도 그 권리를 포기하고 세금을 바치셨는가?─그것은 즉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베드로 외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적은 문제인 세금 내는 것을 가지고 아직은 감추인 비밀인 그 진리를 경솔하게 드러낸다고 하는 것은 그 큰 진리의 가치를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와의 논쟁을 일단 멈추시고 생각하시기를, 만일 그가 지금 세금 내는 것을 거절한다면 사람들이 그와 그의 가르침을 오해하게 될 것이요, 또한 그에게서 발길을 다 돌려버리게 될 것임을 아시고 세금을 내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지각 있고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키기보다는 차라리 권리를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여 우리가 해야할 [마땅한] 의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이적들은 사람들을 오해케 하고 넘어지게 했지만, 그는 계속적으로 그들을 가르쳤고 이적들을 베푸셨다(마 15:12, 13).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을 거스리게 하는 편이 더 낫다>. 

우리는 세상적인 이해 관계에 있어서 물의를 일으키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자신들의 이익을 때때로 부정하는 편이 낫다. 바울은 그렇게 하였다(고전 8:13; 롬 14:13).

2. 그는 이 세금을 바치기 위하여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가? 

즉 그는 물고기의 입에서 돈을 얻어내어 세금을 바치셨다(27절).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나 있다.

(1) 그리스도의 빈곤. 

그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지만, 세금을 지불하는 데 필요한 15펜스(반 세겔)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아마도 그는 무료로 병자들을 치유하셨던 모양이다. 

"우리를 위하여 그는 가난하게 되신 것이다"(고후 8:9). 

그의 생활비는 헌금에서 충당되었고(눅 8:3), 특별한 경비 지출은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메꾸셨다. 

그는 유다에게 명하여 그가 지니고 다니는 돈주머니에서 이 세금을 지불하도록 하시지 않았다. 

그 돈은 생계를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을 포함한 공동체를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특별한 사정을 인하여 그 돈을 지출하도록 명하지 안으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능력 많으심. 

그의 능력은 물고기의 입에서 세금에 충당시킬 돈을 꺼내실 때 나타났다. 

그의 전능하심이 그 돈을 그 물고기의 입에 넣어두었든지, 아니면 그의 전지 하심이 그 돈이 거기 있는지를 알았든지 간에 결국은 한가지로 귀결이 된다. 

즉 그것은 그의 신격과 그가 만군의 여호와이시라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는 거리가 먼 피조물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명령하에 놓여져 있으며, 또한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그 발아래 있다(시 8:6). 

그는 이 세상에서도 자신의 지배할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또한 자신을 지금의 낮아짐의 신분에 순응하기 위하여 그는 천사의 손에서 그 돈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물고기의 입에서 그것을 위하기로 하셨던 것이다.

① 베드로는 낚시질을 하여 그 물고기를 잡아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적을 행하실 때릴지라도 근면과 노력을 장려하기 위하여 수단을 사용하시려고 하셨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무엇인가를 자기 힘으로 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의 소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고 또한 책임 맡은 직분에서 부지런해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실 때도 수단을 베푸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해 주실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를 위하여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② 물고기는 그 입에 돈을 물고 올라왔다. 

이는 곧 순종할 때 주어지는 순종의 보상을 뜻한다. 

주님의 명령을 지킬 때나 그것을 지킨 후에는 "큰상이 있다"(시 19:11).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가 이와 같이 낚은 사람들은 올라왔다. 마음 문을 열고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의 손길은 그의 종들을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있다.

③ 그 돈은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세금만을 꼭 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너는 한 세겔을 얻으리니 그것으로 나와 너 두 사람을 위한 세금으로 갖다 내어라". 

그런데 한 사람의 세금은 반세겔이었다(출 30:13). 그리스도는 한 잎의 동전을 가지고도 아주 손쉽게 한 자루의 돈을 만드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고 현재 쓸 것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여길 것과 또한 그날 그날을 막 벌어먹고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신하지 말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시다. 

그리스도는 그 물고기를 그의 돈 맡은 자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의 창고요, 보배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오늘 쓸 것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과 베드로의 세금만을 지불하셨다. 이는 아마도 오직 "그"만이 세금을 할당받았고 지금 그에게만 세금을 내라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며, 다른 제자들은 이미 냈거나 다른 곳에서 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 숭배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만을 위하여 세금을 내어 주신 이 사건을 큰 신비로 생각하여 마치 이 사건이 베드로를 전체 교회의 머리요 대표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처럼 해석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로 그의 세금을 내어준 이 사실은 우월성(supereriority) 이라기 보다는 예속 (subjection)의 징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 들이라고 자처하는 교황들은 세금을 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징수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 돈을 낚았다. 그래서 그 일부를 자기 몫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자들"은 그와 함께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와 함께 빛날 것이다. "너와 나를 위하여 주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하여 지불한 것은 빚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베드로를 위하여 지불한 것은 그에게 베푼 호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이 세상의 재물을 많이 모아 가지고 의롭게 살뿐만 아니라 친절을 베풀어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하고 우리의 동료들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다 많은 선을 행할 수 없다면 그 많은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명령들, 곧 그의 위임장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 결과는 여기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완수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는 말과 행함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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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제 17장

=====17:1

@엿새 후에 - 이는16: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구이다. 

즉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16:16)과 그의 수난 예고(16:21) 및 도래할 심판(16: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광휘를 예고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팔 일쯤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9:28). 

이는 마태가 예수께서 앞 부분을 말씀하신 후의 기간의 첫째 날과 마지막째 날을 뺐는데 반해,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일자와 본 변형 사건일을 모두 가산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일 것이다(Hendriksen). 더욱이 누가는 '팔일 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통해 대략적 시간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하튼 이 날은 16장의 사건이 있은 후 만 6일, 곧 온전한 한 주간이 경과한 때를 가리킨다(Wyciffe). 

실로 예수께서는 그 한 주간이 완료하는 시점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J. P. Lange).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상징적 숫자 개념에 따라, '엿새'는 완전한 수요, 일상과 노동에의 숫자로 볼 수 있으며, '엿새 후'는 곧 '이레(7)'로 승리의 완전 수요,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슷자로 볼 수 있다(The Pulpit Commentry). 예수께서는 참안식과 천국이라는 새 지평을 이제 여시고 계신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 이 세 사람은 전직(前職) 어부 출신들로서(눅 5:10) 예수께서 주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시던 자들이다(26:37;막 5:37;13:3;눅 8:51). 물론 이들의 피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런 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무(責務)를 맡기시었다. 

실로 두, 세 사람의 증거야말로 진실된 중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신 19:15;요 8:17;고후 13:1). 더욱이 예수께서 증인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시킨 것은 혹시 발생하게 될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아직은 침묵의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9절). 

한편 이들 3인의 제자는 이제 12제자 중 에서도 핵심 구성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런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3인의 제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10:2의 주석을 참조하라.

@따로(* , 카트이디안) - 문자적으로는 '따로 떨어져서', '개인적으로'(privately)이다. 이는 그들에 대해 예수의 영적이고 내밀한 친밀감을 암시한다.

@높은 산 -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近距離)라는 점에서 '예벧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W. Ewing).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근접성을 (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고 있다(Wyliffe, Clarke, Carr). 

헬몬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신 3:8;대상 5:23), 시룐(신3:9)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참조, 시 133:3). 이 산은 구약에서는 '시온산'(신4:48)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족장의 산'이라는 뜻인 '예벧 에쉬 쉐이크'(Jebel esh Sheikh), 또는 '설산'이란 뜻인 '예벧 에트 탈'(Jebel eth Thalg)등으로 지칭된다.

=====17:4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기에서 '주'(* , 퀴리오스)란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통치하는 자', '결정권을 가진 자', '주인'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영예의 칭호로써 일반적으로 부르는 주 존칭이었다.

한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이 말에 대하여 '랍비'(* ,선생, 막9:5) '에피스타테스'(* , 곁에서 서 있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주인, 통치자, 눅 9:33)로 각각 묘사되었다. 이 이유는 3절의 '모세와 엘리야'의 기록순서에 대한 이유와 같은 것 같다. 

한편 눅 9:33에는 베드로의 강력한 요청과 관련하여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떤 강제적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주위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즉흥적인 말을 한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말은 그가 다음 몇가지 점에서 잘못 인식한 것임을 보여 준다. (1) 예수께서 아직 당신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 즉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이미 그 영광을 얻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고자 했다는 점(히2:9, 10). (2) 산 아래에는 아직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지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안식(安息)을 취하고자 했다는 점(14-20절). (3)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전파된 다음에야 영광스러운 세계와 안식이 오는데 그 세계의 안식을 미리 구했다는 점(24:14;행 1:8) 등이다.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 베드로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시하지 않고 예수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 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구는 심히 육신적이요 인간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심'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21-23).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사실을 이미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수난과 대조되는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주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무지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초막 - 이는 헬라어로 '스케나스'(* )로서 '장악', '천막' 등을 의미한다. 

당시에 아랍인들은 존귀한 자가 왔을 때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하여 장막을 쳐주곤 했다 한다(왕하 4:9,10). 

만약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초막치기를 제의했다면, 그는 아마 이 안전한 산상에서 지금 전개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휘와 영적 계시를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이 지체되거나 아예 무산되기를 소원하는 잠재적인 바램에서 이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명절의 하나인 장막 절기의 회상이라는 점이다(레 23:42, 43). 이 절기는 종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에 감사하며, 메시야 시대의 임박한 개시를 인식하고 장막짓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cARSON). 그러나 후자의 견해는 전체 문맥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하리이다 - 이는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스런 위치에서 예수와 동등시 취급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자의적 판단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과 자신의 동료 제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들로서의 그 세 사람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이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세 분을 수종드는 자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7:6

@제자들이 듣고...심히 두려워하니 - 본 구절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께서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영광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의 절대적인 공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앞에 선 죄악된 인간의 통상적인 느낌이다(사 6:5;마 14:27;28:5,10).

=====17:7

@예수께서 나아와...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 이는 예수의 다함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 보이는 행동이다(사 6:5-7;단 10:9, 10:계1:17).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깊은 공포에 휩싸여 있던 제자들의 산란(散亂)한 심령을 넉넉히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 사랑과 신적 권위에 입각한 예수의 이중 명령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공포의 자리를 떨고 일어날 뿐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완진히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셨다(14:27). 이 이중적 명령은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자 오직 당신만이 인간이 지닌 심연의 공포를 제거하실 수 있음 보여 주는 것이었다

=====17:10

@그러면 어찌하여 - 여기서 '그러면'(* , 운)은 논리적 연결사 또는 추정(推定) 불변사로 사용되어 앞의 사건과 바로 이어지는 질문의 내용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앞의 함구령과 연관된 제자들의 질문을 이끄는 말로 사용되었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제자들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출현과 계속되는 예수의 함구령에 그 근원이 있다. 

사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말 3:1;4:5 등에 근거하여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주장했었다(M Eduyoth 8:7; M Baba Metzia 3:5). 따라서 엘리야가 출현하지 않는 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진정성은 의심받게 마련이었다. (1) 변화산상에서의 엘리야 출현은 에언된 말 4:5의 성취인지, (2)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마땅히 공표해야 하는데도 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이다.

=====17:12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임의로 대우하였도다 - 예수께서는 여기서 당신의 삶을 예표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두 가지 면을 제시, 비교 하셨다. 즉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눅 1:17)으로서 왔던 세례 요한을 영적으로 무지했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로 (1)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으며 오직 소수만이 그의 선구자적 메시지에 귀기울였다. 또한 그를 (2) '임의(任意)로 대우하였다'. 즉 그를 메시야의 선구자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배척, 박해하고 끝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 까닭은 자명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세례 요한이 그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완수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맡으신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셨던 예수께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예수는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왔으되 세상이 당신을 알아보고 환영하기는 커녕(요 1:9-11) 오히려 배척하며 끝내는 죽음에 내어줄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임의로'(* , 호사 에델레산)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지'(whatever they wished)를 의미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등을 거스릴 때 사용되는 말로서, 결국 임의로 행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임을 암시한다.

=====17:15

@주여 - 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 )인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퀴리오스'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용어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8:2;17;4) 이런 관점에서 마가는 이때의 호칭을 단순히 '디다스칼로스'(* ,선생님)로 기술하고 있다(막 9:17).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막 9:21과 눅 9:38에 근거해 보면, 이 아들은 그 아비의 외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질병을 않고 있었다. 이러한 아들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비는 예수의 측은 지심(惻隱之心)에 호소한다. 실로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병자, 모든 죄인의 회복과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간질 - 이는 헬라어 '세레니아조마이'(* ,)로서 '달의 침범을 받다'(strucken by moon), '미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대인들이 간질병을 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데서 기인된 듯 싶다. 간질병은 보통 5-10분 동안 발작하는 병으로서, 이 병이 발작할 때에는 환자는 갑자기 나뒹굴며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막 9:20)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도 한다.

@심히 고생하여(* , 카코스 파스케이) - 문자적으로는 '심하게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 병의 증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음 암시한다.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이는 간질병 환자의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돌발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위험성을 호소한 말이다. 한편 막 9:22에 따르면 귀신에 의해서 이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자해(自害)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실로 귀신과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평온하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악한 습성과 파괴적인 경향대로 그 인격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평형 감각마저 앗아감으로써 자멸을 유도하곤 한다.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 환자의 아비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으나 예수의 변화산 행(行)으로 인해 만나지 못하고 대신 남은 아홉 제자들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제자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었다(10:1;눅 10:17). 그러나 그 같은 권능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었으며, 또 오직 온전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제자들의 실패는 13:54-19:2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주제이다(1416-19, 26, 23, 33;16:5, 22;17:4, 10, 11). 결국 이러한 실패는 제자들이 진보와 실패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14:26, 27, 31). 실로 이것은 천국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마술과는 달리,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그 자신의 믿음의 여하를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17:20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 '믿음이 적은'은 사본들에 따라 어떤 사본은 '아피스토스'(* , 믿음이 없음, unfaith) 또다른 사본은 '올리고피스토스'(*, 믿음이 부족함,little-faith, poor-faith)로 각각 표기하고 있다. 이 중 17절에 제시된 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는 책망과의 조화를 위해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좋다. 그러나 비록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해도 본문에서는 믿음이 적음을 지적한다기 보다 그들의 믿음이 결핍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Bonnard). 실로 적은 믿음은 아무리 하찮더라도 겨자씨와 같이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게 마련이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그 어떠한 결과도 산출해 낼 수 없다. 

한편 마가는 본문과 기도의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다(막 9:29). 사실 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를 믿고 인정하는 자의 특권이요 의무라는 점에서 마가의 보고는 적절하다 하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예수께서 새릅고도 중요한 교훈을 말씀하실 때,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5:18).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 겨자씨는 보통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팔레스틴 지방 또는 지증해 연안 등지에 많이 자라며 최대로 성장하면 약 3-4.5m의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한다. 이것은 '니코티아나 그라우카'(Nicotianaglauca) 혹은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겨자나무는 원줄기와 몇개의 곁줄기로 자라는데 원줄기는 새가 앉아도 부러지지 않을만큼 강하다고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국 믿음이 지닌 생명력과 감추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녕 믿음은 무한한 자생력을 지닌 것으로,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찮을 정도일망정 그 있고 없고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그 뜻을 믿는 것으로서(Wyciffe) 자기 신뢰나 신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따라서 겨자씨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가시화(可視化)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믿음일 때에만 가능하다. 한편 공관복음에서는 겨자씨에 대한 언급이 다섯번 나온다(13:31;17:20;막 4:31;눅 13:19;17:6).

@이 산을 명하여...옮길 것이요 - 겨자씨와 산은 표면적으로는 크나큰 대조를 이루며 '옳기는 것'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온전히 보존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지속하면 그 믿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주권적인 방법에 의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이뤄내고야 만다. 즉 겨자씨 믿음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꿇임없이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을 이 땅에 실현하게 한다. 한편 여기에서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難題) 등을 함측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21:21, 22:사 40:4;49:11;54:10;막 11:23;눅 17:6;고전 13:2).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카이우덴 아뒤나테세이 휘민) - 문자적으로 '그리고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and noting shallbe impossoble to you)이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능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그 효력은 지금도 유효(有效)하다(19:26;빌 4:13;히 11;1).

=====17:22

@갈릴리에 모일때에 - '모이다'(* , 아나스트레포데논)란 '거류하다', '머물다', '살다' 등의 뜻인 '아나스레포'의 헌현 분사다. 이는 예수께서 수 주간을 팔레스틴 북단에 머무시다가 다시 헤롯 안디바의 영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접근해 들어오셨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갈릴리 복귀는 예루살렘으로의 최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작업이었다. 한편 막 9:30은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라고 기록 함으로써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지 않으시고 윗 갈릴리의 한적한 사잇길을 통해 자신의 고향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북쪽으로 헬몬산 근방에 위치한 티타니(레오테스)강, 서쪽으로 갈멜산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 에스드렐론 평원, 동쪽으로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등으로 구성된 남북 약 96km, 동서 약 48km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헬몬산 아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 지방으로 오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 같다(24절;막 9:30).

@예수께서...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더해 말씀하신 두번째 예언이다(16:21). 여기서 '넘기워'(*, 파라디도스다이)란 두 가지 점에서 애매 모호(曖昧模糊)하다. (1) 이는 '넘기다', '배반하다'는 뜻일 수 있는데, 문맥에 따라서 강한 의미 가질 때는 후자의 뜻이고, 한 의미를 가질 때는 전자의 뜻을 가진다. (2) 수동형('넘겨주다')을 취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넘겨 주신 것인지(Origen, Clark),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인지(Bengle) 모호하다. 여하튼 본문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같은 다양한 견해는 조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본문의 '사람들의'란 말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대제사장(16:21) 또는 십자가 처형에 관여한 이방인들(20:19)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수난 고지(受難告知)는 순전히 믿음이 부죽한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일을 뚜렷이 기억하게 된다(눅 24:^).

=====17:23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 예수께서는 패역한 인간들의 순간적인 승리('죽음을 당하고')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를 대비시켜 닥쳐오는 당신의 삶을 정확히 예시 하셧다. 즉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들의 모든 궤계(詭計)와 포악(暴惡)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결국 이 논지의 초점은 승리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죽음을 필연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 막 9:32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소식에 온 정신이 쏠려 그 이후에 있을 영광스런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계시의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수난의 참의미를 이해하는 완전한 신앙에로 발전하여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겠으나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계시의 동시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요16:16-22).

=====17:24

@가버나움 -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에 이 성읍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텔 훔'이란 곳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곳은 예수의 선교 사역의 중심지였으나(8:5-15;9:2-8;18:1-5), 회개하지 않고 교만함으로서 인해 예수의 책망받는 지역이기도 하다(11:23). 이제 예수께서는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리 방문하셨다.

@반 세겔 받는 자들이 - '반 세겔'이란 헬라어로 '디드라크마'(*)로서 '두드라크마'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 드라크마는 헬라어인 하루 품삯을 나타내는 동전 명칭으로서 유대인에게도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1/4세겔로 취급되었다. 한편 이 '반세겔'은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내었던 생명의 속전, 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여호와께 바쳤던 양과 같은 것이다(출 30:11-16).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의무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바벨론 포수 후 그 의무는 20세이상된 자로서 3/1세겔로 조정되었다(느10:32). 예수 당시에도 느헤미야의 수정된 의무조항에 따라 매년 유월절 전인 봄에(아달월 15일) 모세 당시의 환율에 의해 계산, 부과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반세겔을 바꾸려는 환전상으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이 환전상들은 그 수수료로 인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반세겔은 로마에 바치는 공공의 세금이라기보다 당시 주로 성소의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여기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 호이 타디드라크마 람바논테스, those receiving the didrachmas)은 일반적으로 국세를 거두는 '세리'(* , 텔로나이)와는 다르다(9:10). 이것은 반 세겔을 거두는 자들이 신분상 로마 위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을 위해 거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 이는 세금 징수자들이 이미 예수와 베드로 등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와 더불어 성전을 대하시는 예수의 태도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들은 예수께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17: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히나 데 메 스칼달리소멘 아우투스) - 직역하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하여'(But that we may not offend them)가 된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율법 위에 계신 분으로서 율법이 정한 바 그 의무 조항을 능히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겸비(兼備)해지기를 원하셨다(3:15). 

한편 본문의 '오해케 한다'는 '스칸달리소멘'은 단순히 넘어뜨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함정에 빠뜨려 치명적인 피해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성전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야기될 상황, 곧 예수가 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을 율법으로 파괴하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하여 마침내 당신의 복음을 먼저 배척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방적 조처로서 성전세 납부를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겸비의 모범을 따라 훗날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절제와 겸비의 도를 가르치게 된다(고전 8:13;9:12,22).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 성전세 조달을 위한 예수의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다. 이로써 우리는 동전 한 닢이 고기 입 속에 있음을 미리 아시는 예수의 전지성(全知性)과 그 동전을 이미 있게 하신 다자신의 전능성(全能性)을 알수 있다(Wycliffe). 

한편 신약에서는 낚시 기사가 이곳밖에 없고 대부분은 그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여하튼 예수의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의 요구에서 면죄되시지만, 율법에 순종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적 방식으로 예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수난 예고(22, 23절) 바로 뒤에 위치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겸비를 다시 생각케 한다. 즉 그분은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오병 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능력자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쓸데없이 남으로 오해케 하지 않으시려고 이러한 이적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11:28-30;12:20). 이같은 겸손의 교훈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및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한 세겔(* , 스타테르) - 그리이스에서 통요되던 금화로서 대략 4드라크마, 곧 한 세겔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이면 1인당 반세겔이 요구되는 성전세 두 사람분을 납부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적은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가장 정확한 은혜로 채워진다.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 '나와 너'란 예수와 베드로가 비록 하나같이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내시는 것이며, 베드로는 그 근본이 죄인된 인간이요 사망에 처헌 자로서 생명의 속전 곧 성전세를 내야 할 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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