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마16장
###제자도= <좁은 문, 좁은 길>십자가의 도 =JC와의 합일의 길...자기=옛사람=거짓자아, 그 표현은 (자아의)생각-관념-사고-이견... 이것이 처리되게 하기 의한 고난의 섭리를 껴안고 감수함 통해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을 구현케 됨
--자기(혼생명으로 사는 옛자아 : 자기 의-자기자랑-주장-선호-취미-소유-관계-삶의 우선순위가치의미목표보람, 이 모든 것)를 부인하고[내려 놓음... 불식하고 무시함...JC와 그분의 모든 말씀과 부딛히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전적으로 오직 하나님, 그리스도, 그분의 패러다임-성품-본성따라 살며, 창조주하나님이시요, 각 생명의 참주인이신 그분의 처리하심따라 처리함], 자기십자가를 지고[제자도의 길 = 믿는 이, 제자들 각자가 짊어지고 가야 할 바 십자가고난죽음의 좁믄 문-좁은 길...]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본받아...죽기까지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며] 따라 감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다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이르시다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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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슈아<요드-쉰(우)-바브(중)-아인>...에서의 "요드-쉰(우) ..예쉬, 또는 이쉬/야쉬" 그 묵상 :: 한편으로는, 전능의 엘 Q, 그 손의 사역하심으로 형상-진리-생명를 증생 성도의 샤마임 안에 부어주심...이로 인해 '베레_시트<베이트-레이시-알렙_쉰(우)-요드_타브>'를 이루시는바 Q의 모든 형상-진리-생명 충만히 채움받아 공급하는 통로된!!, 참생명의 동역자/은사자='쉬이<쉰(우)-요드>'가 나타남 통해 함께 [기꺼이/자원함으로/기쁨으로 십자가로 나아가 처리됨/비움/채우시는바 그 부활 생명의 영으로 살아감을 배워 누리며 공급하는 통로 되게 하시는바, 이제 아버지께로 귀일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뜻을 완성케 하고 계심..., 즉, "이쉬-야쉬-예쉬"의 누림을 참되게 알고 그 사랑으로 껴안고 열납하심 인해 부어주시는, 그 하나됨 안의 안식-평강/희열/황홀-매력/매료/매혹됨-누림 체득/경험하여 깨닫고 누리는 매일-매순간마다!!, 잊지말것은 ((Q의 소원 = 열망/갈망을 알아드림의 기도-동역/동행은 그 누림의 선순환에로 이끌바, 그분의 원하심 그대로 이루시도록 그분의 이끄심-인도 그대로 [완전히 열어-비워-내어드림의 순복/순종 --->이로써 형제자매 섬김 이루게 하실바, 저절로 주님이 "이제, 우리, 일어나서-가자-말하거라"-하시는 그대로 기꺼이 움직임]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여전히 무익한 종입니다" 고백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주예수님께서 이루신바 그분의 대가지불을 생각해볼때.."사람의 대가지불이란... 태양과 반딧불을 비교함 보다도 못한 것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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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시트, 그 완성..유한한 시공 차원을 사는 인생에게 열어주시며 공급하시는 절대진리..]...사람은 "하-야-밈"으로 사는 샤레츠('샤마임'은 '하_마임'과 에하드-다바크 상태//아레츠는. 샤마임과 에하드로 지으셨음 : 아레츠 안에 두신바 본연의 모든 기능 작동 위해 아레츠를 덮고 있던 '하-마임'성분을 한곳에 모아 '아레츠를 드러나게 하셨음' 따로 모아둔 '하_마임'이 바로 '얌밈' = 아레츠의 안식은 날마다 새로이 "하_마임"을 공급 받아야 쉼이 있음, 엘로힘(판박이, 반쪽. 반려-동반자-함께 멍에 맨, 참제자)을 산출하는자는 바로 원판 엘로힘 JC.. --아레츠로 아레츠 되게 하는 것은 참빛-참생명 TUQ, 원초적 아담. 곧 속사람-아담의 생생한 실존=샤레츠에서, 아레츠(땅-혼)의 담당기능[네페쉬-하야 = 부활생명의 그 영을 호흡함으로써, '에트'로 조성됨]--->발아된 생명 자각, 부활생명의 그 영따라, 생명 누림-생명 성장/성숙 과정이자, 생명 산출케 하는 체레브[십자가]를 체득함 통해 날마다-매순간마다 새로와지도록!!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노라, "주 예수 이름 부름으로써' 거치게 하고 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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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호흡하사 불어넣어주심 + 동시에 "아버지와의 달렛의 구별됨-열린 교통 이뤄 살아가는바"의 영생의 생명수 , 곧 마르지 않는 생명샘의 솟아 넘침으로, (생명말씀이신) 여호와 그분 자신[그 생명-인격]을, 분배하여 주심으로써 결합한 하나 이룬, 그 거처(하_마임으로 살아가는 샤레츠) -- 참사람 아담을 산출하심.((이는, 계21:1-5((--중생성도ㅡ 내가 보나니--새 하늘과 새 땅을 보도다...보좌에 계신이가 말씀하시길르,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를 날마다/매순간마다 "아멘"의 현재 누림으로 적용하며 누리게 하심이니..바로 혼의 생생한!!, 실지적 구원/구출, redemption임...이것을 현재-지금-여기서부터 그 언제 어디서나 "주예수님 이름 부름으로써" 누림 가능!!-->그 산출된 아담=중생 성도=은, 참생명의 은사자(=쉬이/샤이]로서 CJ로 살며, CJ를 살아내며 공급하는 자라, 곧 Q께서 소망-교통하심 그대로 CJ를 이 땅에서 실지로 살아내는 모본/선각자, 십자가로 조성-빚음-다루심-대치됨 사는 참제자-그리스도의 신부/어린양의 아내/반려-함께 명에 맨 자, 부어주신바, 부활생명의 영으로 살아감 온전히 이루는자라, ...이제 죽을 몸(모든 세포-조직-장부, 하나하나에까지)에 예수 생명이 넘쳐남을 알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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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4:10, 11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베노세임 베콜-에트 미타트 하아돈 야후슈아 비게비아테누 레마안 이갈루 감=하예이 야후슈아 비게비아테누// 키 아나흐누 하하임 메쑤림 타미드 라메베트 바아부르 야후슈아 레마안 이갈루 감-하예이 야후슈아 비베사헤누 베사르 하테무타]
-- @베노세임<바브(수하2),눈-신(좌우.하수2)-알렙(하)-요드-멤> @베콜-에트<베이트(중,하)-카프-라멛, 아인(하2)-타브> @미타트<멤_요드-타브_타브> @하아돈<헤이, 알렙-달렛-바브(상)-눈> @야후슈아<요드-헤이-바브(중)-쉰(우,하3)-아인> @비게비아테누<베이트(중,하)_김멜(하수2)-바브(하)-요드(점)-타브(좌2)-눈-바브(중)> @레마안<라멛-멤-아인-눈> @이갈루<요드_김멜(중)-라멛-바브(중)> @감-하예이<김멜-멤, 헤이트-요드(점)-요드> @야후슈아<요드-헤이-바브(중)-쉰(우,하3)-아인> @비게비아테누<베이트(중,하)_김멜(하수2)-바브(하)-요드(점)-타브(좌2)-눈-바브(중)
-- @키<카프(중,하)-요드> @아나흐누<알렙(우하수2)-눈-헤이트(하수2)-눈-바브(중)> @하하임>헤이_헤이트-요드(점)-요드-멤> @메쑤림<멤(하수2)-싸멕-바브(중)-레이시-요드-멤> @타미드<타브(중,좌하)_멤-요드-달렛> @라마베트<라멛_멤(중)-바브(하3)-타브> @바아부르<베이트(중)-아인(우하2)-베이트-바브(중)-레이시> @레마안<라멛-멤-아인-눈> @이갈루<요드_김멜(중)-라멛-바브(중)> @감-하예이<김멜-멤, 헤이트-요드(점)-요드> @야후슈아<요드-헤이-바브(중)-쉰(우,하3)-아인> @비베사레누<베이트(중,하)_베이트(하수2)-신(좌)-레이시(하2)-눈-바브(중)> @베사르<베이트(중,하수2)-ㅅ신(좌)-레이시> @하테무타<헤이_타브(중)-멤-바브(중)-타브-헤이>
[마16:24-26...((제자도))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바요메르 야후슈아 엘-탈미다이브 이쉬 키-야흐포츠 랄레케트 아하라이 예카헤쉬 베아츠모 웨나사 에트-첼루보 웨할라크 아하라이
...@바요메르<바브-요드(점), 알렙-멤-레이시> @야후슈아<요드-헤이-바브(중)-쉰(우)-아인> @엘-탈미다이브<알렙-라멛, 타브_라멛-멤_요드-달렛-요드-바브> @이쉬<알렙-요드-쉰(우)> --@키-야흐포츠<카프-요드, 요드-헤이트-페이-체데>..*하폐츠<헤이트-페이-체데> @랄레케트<라멛_라멛-카프_타브> @아하라이<알렙-헤이트-레이시-요드> --@예카헤쉬<요드-카프-헤이트-쉰(우)> @베아츠모<베이트_아인-체데-멤-바브(상)> @웨나사<바브, 눈-신(좌)-알렙> @에트-첼루보<에트, 체데-라멛-바브(중)-베이트-바브(상)> @웨할라크<바브,헤이-라멛-쿠프> @아하라이<알렙-헤이트-레이시-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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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메드=제자<라멛_멤-요드-달렛>....[전해들은바 복음에 대해] 심사숙고한 끝에!! 절대적 신뢰로 따라가기로, 마음 열고 공급-분배말씀, 그 안의 진리("하-마임-절대진리말씀..샤마임 품음" +"얌밈..아레츠를 덮고 있던 말씀-바다-((아레츠의 생명 산출 둥지 역할-기능 위해)) 일정하게 날마다 덮으실 필요가 있음'' = "하_야밈((하늘과 땅의 절대 진리는 영원유일무이한 생명진리임)) 받아들여 그대로 수용/적용-조성/대치됨에 이르도록 허용함으로써 엘Q의 사역하심으로써 "달렛=부활생명의 영=CJ의 영='베레시트'를 그대로 이루시는, 실제의 그영..바로 그분과 결합한 하나"로 사는 실존
#탈미다이브=제자화 = [베레시트] 그대로 온전한 변화 이뤄 그리 사는 참제자 원판이신 CJ의 제자됨 ..**탈미딤<타브_라멛_멤-요드-달렛_요드-멤> **엘-탈미다이브<알렙-라멛, 타브-라멛_멤-요드-달렛_요드-바브>..공급말씀, 곧 Q의 말씀으로 제자화가 일어남!!, ^^라멛=공급 ==> 멤-채움,==->달렛=구별(변화무쌍한 이땅의 그 어떤 환경-상황-형편-처지를 맞닥뜨리든지!! 주이름부름으로써 동심합치로 교통하며 말씀 적용할바 진리 그대로 살아냄의 담지자-마음-그릇) **야도=[상호 완전한 열림-교통]맡기다/위임하다<요드-달렛-요드..앞의 요드는 주님, 뒤의 요드는 우리>.. (주님의 친히 일하사 사역-조성하심 "곧 그 참생명-관계적 인격 Q"이 그대로 막힘없이 넘쳐흘러 공급하여 나타나심 되도록) 허용해드리라(살아계시는 분, 주로 주 되시게 함)....이것이 Q, 그분을 알고(알렙...앎)-->되고(베이트...됨)==>살아냄(김멜...삶)이다.. 이것이 "베레_시트<베이트-레이시-알렙_쉰(우)-요드-타브>"에서 "베이트-레이시-알렙"의 창조하신바를 "쉰(우)-요드-타브"의 위임하심 그대로 , 바로 이 "야도<요드-달렛-요드>로써 이루게 하시는바, 이땅에서 제자된 우리가 이루도록 하신 부분이다...이때 꼬리의 *이브<요드-바브> = 예수/여호와를 (그분의 현현!!) 의미.... 즉, Q말씀으로 조성된바, 그 참제자의 삶을 통해 Q의 말씀을 사셨던 예수. 곧 여호와의 흘러나옴, 곧 그분의 현현 나타남이니, [알렙에서 쉰(우)까지에 이르도록 사역하시는 분 = 이쉬<알렙-요드-쉰(우)>] 진리-말씀-불-빛 그 여호와를 산출하고 계심이다!!
#이-하페츠/요_히페츠<요드_헤이트-페이-체데>..진정한 만족-기쁨으로 기꺼이-자원함-참생명의 소망, 그 간절함으로.
#랄라케트<라멛_라멛-카프-타브>..가르치시고 조성하신바 그대로 온전히 이룬자 만드심 *라일라<라멛-요드-라멛>..[승승장구케 하실수도 있으나], 반드시 (때때로) 역경-환난-고난의 "밤"을 거치게 하시는바!!(다만 영에 속한자로서, 영 안에 머물며 깨어 기도하라..겉보기에 긍정적 사건에서도-또는 부정적 사건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말지니..결국 거기서도!! 반드시 예비하신바, 주님 발견-더 얻게 하시기에..), 설령, 밤중이라도[앞의 라멛=진리 공급, 뒤의 라멛=조성].. 신뢰하며 맡겨드릴바인데....*라크<라멛-쿠프>.."Q께서 친히 말씀하며 사역하고 계심에 대해 신뢰함으로, 곧 [아멘]함으로써!!(결코, 그분을 제한하지 말라..건전한 궁금증-호기심은, 여쭈어 보면 '주님의 시간에' 깨달아 알게 해 주신다!!...진정한 질문, 곧 생명을 질문하라!!) = 동역!!(할라크..헤이트-라멛-쿠프)..그 결과는, 말씀하신바 그대로 생생하게 나타남=이룸!!....이렇게 주님의 그 길 걷는, 동행하는 제자 만드심
#아하리/아하라이<알렙-헤이트-레이시-요드> *아하<알렙-헤이트>=형제..*아헤르<알렙-헤이트-레이시>..Q의 부활생명이 그영의 실제 *아헤리<알렙-헤이트-레이시-요드> 그영의 흐름으로 나타남.
#이카헤쉬/예카헤쉬<요드-카프-헤이트-쉰(우)>..Q 손의 사역하심-조성하심으로 나타난 생명의 형상..
#베에체모<베이트_아인-체데-멤-바브(상)>. *에쳄=뼈<아인-체데-멤> *첼렘=형상<체데-라멛-멤>.'베레시트'그대로!!, 생명나무에 관계된 진리, 곧 발아된 생명나무[=에츠]의 가지가 나무로부터 공급받는 교통으로 받아들인바[평강 상실/새어나감 유도하는바, 세상-세속의 삿됨에 대해서는 금식!! --비례물시!!--보고듣는것마다 영적으로 먹는행위임에 유의하라--인정/고백하고 속히 주께로 돌이키라] 진리의 참생명-인격화가 온전히 이뤄짐..
#웨나사<바브, 눈-신(좌)-알렙>..내적 존재 안의 Q생명이 그대로 육체 입은 실존 안에서 귀중히 받들어져 살아감 됨..
#베에체무<베이트_아인-체데-멤-바브(중)> '베레시트;그대로 [아담의 형상=첼렘.. 그대로 본떠서] 거듭난 중생 성도의 [중심에 베레시트 알기에, 성령과 동심합치 이뤄 찬동하는바] Q의 참생명-인격 가진 엘로힘 판박이=생명나무 본체로부터 발아된 생명가지=참제자 산출 원하심
#에트-첼레우보<에트, 체데-라멛-바브(중)-베이트-바브(상)> *첼레브=십자가<체데-라멛-베이트>..십자가에 속한 Q의 형상은 그 무엇보다도 겸손!! = 체휼의, 전가받고 대신 희생예물로 드려짐 위한 참된 개방 + 수용/용납 위해, "자기 부인/자기 십자가 짐" 주님으로부터 배움 ==>내려놓음-비움/내어줌/전가 받아 번제의 희생예물로 드려짐(카탄-소알-요단..nothing-nobody) ==>부활생명진리의 영으로서 산출-발아됨 ..이로써 "베레시트 그대로 되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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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키 헤하페츠 레하치르 에트-나페쇼 토바드 나페쇼 밈멘누 웨하메아베드 나페쇼 레마아니 후 이메차에나
... @키<카프-요드> @헤_하페츠<헤이_헤이트-페이-체데 *하페츠=기뻐하다=즐기다=누리다>..JC께서 그리하셨듯!!, TUQ이름 부르며! 음미하라, 노래하라, 흥얼거리라, 그분이 노래하시게 하라, 성령 안에서 호흡함=누림=기쁨, 결합한 하나 그 삶 누림, 그 영속적 기뻐함으로/기꺼이/자원함으로써 @레_하치르<라멛_헤이-체데-요드_라멛 *첼=Q형상<체데-요드-라멛>>..호흡하는 매순간마다 깨어 있어서 행할바, 구주와 하나라..Q의 의-구주, 중생 성도, 나의 의-구주!!...생명나무의 발아된 생명가지의 정체성 분명한 제자됨.. @에트-나페쇼/네페쇼<에트, 눈-페이-쉰(우)-바브(상) *네페쉬=혼 =마음/그릇> 에트-네페쇼 안에 베_에체모[CJ형상=첼렘, 거기서 발아된 빼어난 가지]로서의 인식, 그 자각이 반드시 분명히 들어가 있어야 진실로 완전히 열어주신 그영의 움직임을 인식케 됨, 그로 인해 그분 생명을 호흡함, 그리하여 그 부어주시는 것마다 육화되게 하시며 저절로 영생의 매순간 참되게 살아낼 수 있음("뼈 중의 뼈"가 됨)....Q의 참생명-관계적 인격으로 대치된 제자, 성령께서 자신을 열어 부어주신 모든 형상 그대로 육화 이루신바, 영에 속한자의 자각 가운데 살며, 내재하시는 그분이 마음에 감동-움직임 주심따라, 또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심따라, 바로 그 말씀만을 말하며 진리-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의 통로를 살아가는, 온전한 참제자.. ---@토바드<타브_알렙-베이트-달렛>...'베레시트'그대로, TUQ과 '달렛=결합한 하나', 그 새로움!!, 영생의 매순간-날마다 그리할바, 풍성-부요-충만-교통-공급 실제 나타남 @나페쇼<눈-페이-쉰(우)-바브(상)>...바로 동심합치의, 그 유일무이-무궁한 절대진리말씀, 그 안에 거하시는 TUQ의 생명-인격 그대로!!.체득-자연스럽게 흘러내림. @밈멘누<멤-멤-눈-바브(중) *만나<멤-눈> =예수의 모든 속성> ---@웨하메아베드<바브, 헤이_멤-알렙-베이트_달렛 *아베드<알렙-베이트_달렛>=아버지 뜻, 진리 그대로!!> @나페쇼<눈-페이-쉰(우)-바브(상)> @레마아니<라멛_멤_아인-눈-요드 *마안=[진리를]분출하는 샘/분천<멤-아인-눈>> @후<헤이_바브(중)-알렙>..호흡하는 매순간마다 Q들이마시고-내쉼.. @이메차에나<요드_멤-체데-알렙-눈-헤이 *마차=진리가 이끄는바[모든 진퇴-멈춤마다] 하나되어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나아감/이끌다<멤-체데>>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 키 마-요일 하아담 쉬이케네 에트-콜-하올람 웨히셰히트 에트-나페쇼 오 마-이텐 하아담 피드욘 나페쇼
... @키<카프-요드> @마-요일/요에일<멤-헤이, 요드(점)_바브(상)-아인_요드-라멛>.. #마-요일/요에일<멤-헤이. 요드_바브(상)-아인_요드_라멛>...[진리 + 생명 호흡해내심의] Q 사역 통해 나타난바, (그 참제자, 발아된 생명나무, 그 가지의 어떠함이!!) 바로 Q의 참생명-관계적 인격으로 온전히 (빚어지고 다루심 받아) 대치됨 이룬바라 주가 쓰시기에 (조금도 지장없이) 유용한 참제자 @하아담...참사람 바로 그다!!.. @쉬이케네/셰이_카네<쉰(우.하3)_요드(점..창1:1,2의 "페네이"의 그 요드)-코프-눈(하3)_헤이 .*쉬칸 = 기꺼이 전심으로, (반디불이 정도의 대가지불!..그러기엔 그분의희생은 태양이라 할 수 있지만, 대가지불로 여겨주시며... 모본을 따라 나아감>..#쉬이_카네<쉰(우, 하3)-요드(점,하)_코프-눈(하3)_헤이 *칸<코프-눈 :: 체득 위해 기꺼이 대가지불하고자 함> *쉬이/셰이=은사<쉰(우,하3)-요드(점,하)>...TUQ께서 부어주신 형상-진리-생명, 그 모든 것을 충만하게 체득함 통해 나타난바 은사/진리-형상-참생명의 은사자...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원하시는바, 쓰시기에 합당한] 그 사람 됨 위해 전존재 기울여(=투자하여) 열망하며 맡겨드려 전심으로 하나되어 따름으로써(=카나<코프-알렙-눈-헤이>) (*칸<코프-눈>=간(공간)=모본 삼음)..이것이 바로 "페니<페이-눈-요드>-페니"이니, Q과 사람이 서로 얼굴보듯!!, (은사, 그 사람을 통로로 삼아) 말씀하시는 TUQ 그분자신을 가득히 채우사 친히 나타나심을 의미--이때, 참생명 Q 공급 통로가 됨 = "큰자가 작은자를 [눈높이를 같이하여, 진리로] 섬긴다"란 의미..(여기서, "은사"는 신령함 그 자체라..달란트와 혼동해서는 결코 안됨..*달란트 하나=에하드(생명), 둘=연합, 다섯=풍성-넘치는-요동 없는-책임지는 생명) @에트-콜-하올람<에트, 카프-라멛, 헤이_아인-바브(상)-라멛-멤>..*에트-콜<알렙(하3)-타브, 카프<중>-라멛> :: 창1장 내용 전부가 참제자-엘로힘과 그 판박이 만드는 얘기임 *올람=영원/멍에<아인-바브(상)-라멛-멤>..주와 함께 하나의 멍에 맨자마다, 주와 함께 영생누림. @웨히셰히트<바브,헤이_쉰(우)-헤이트_요드-타브> @에트-나페쇼 @오<알렙-바브(상)> @마-이텐<멤-헤이, 요드-타브-눈> @하아담 @피드욘/페디욘=구속<구원,redemption of soul..<페이-달렛-요드-바브(상)-눈> @나페쇼<눈-페이-쉰(우)-바브(상)>...*올람=영원/멍에<아인-바브(상)-라멛-멤>..주와 함께 하나의 멍에 맨자마다, 주와 함께 영생누림 *에트-콜<알렙(하3)-타브, 카프<중>-라멛> :: 창1장 내용 전부가 참제자-엘로힘과 그 판박이 만드는 얘기임.. *히셰히트<헤이_쉰(우)-헤이트_요드-타브>..'베레시트' 그대로, Q께서 호흡해내심으로써, 부어주시는 형상(진리)마다 부활생명의 그영인바, 바로 그것을 살아냄 = 이것은, 위임<쉰(우)-요드-타브...쉰-요드 사이에 '헤이트'를 넣으심>, *야도<요드-달렛-요드>의 (동심합치로..먼저 우리에게 내밀어주신, 주님의 그 손을!! 우리의 손 내밀어 붙잡아 동행함의) 발휘하는 참믿음 통해서 이루고 계심 *에트-네페쇼<알렙-타브, 눈-페이-쉰(우)-바브(상)> *오<알렙-바브(상)>..Q의 모든 속성 하나하나마다 생명-형상-진리인바, 그분의 참생명-인격의 근본..바로 성령께서 열어주사 공급하심이니.. 그분께서 제자의 마음-입에 넣어주신바, 진리-호흡(=마<멤-헤이>)를 또한 말함으로써 살게 하시는바, 바로 그분 자신의 생명-인격을 공급함(=*이텐<요드(점,하)-타브(중)-눈>) 됨.. *페디욘=구속/구원<페이(중)-달렛-요드-바브(상)-눈>..."달렛"그안에는 마르지않는 분천, 곧 생명샘이 포함되어 있음..'예슈아'의 십자가 사건 믿음 통한 구원은 "단회적=영속적=총체적(전존재-영혼몸 통틀어)"구원인 반면..'페디욘'의 구원은 혼(아레츠-네페쉬)의 구원, 곧 [이 세상 떠나는 그 순간까지...주님으로만 충만 지속 위해...부활생명의 구주CJ의 영, 곧 실제의 그영께서 말씀 열어 적용하시는바] 매순간-날마다-시시때때마다 반복되는 "참 생명 삶 살기 위해!!, 신진대사적으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신진대사적!!] 구출인것!! = 이중의 "타브", 곧 '베레시트'와 '메라헤페트' 그 자체가 동시에 열림을 의미 ......이를 위해 "빛[=알렙-바브(상)-레이시]으로 오신" 주님은 " (요7:37-38.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4: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무시로 성령 안에서 = 영 안에서, 영으로 돌이켜] 주이름 부름으로써 중생 성도 마음 안에서 넘치도록 샘솟는 물을 길어올려 마시게 하고 계심..이로써 늘 충만-감동된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는 쏘페르가 되고!!.. 썩을 육체 조차 부활생명의 영으로 충만한 상태가 됨[= 말씀이 영으로부터 혼을 통과하여 육신을 온통 점유함...혼을 온통 점유-통과함 없이는!! 순전한 말씀의 혼잡화/각색화 함이 일어나서 자기와 남을!! 종교의 영으로 실족케 하며 오히려 종노릇 하게 되는 일이 나타날 수 있음 ], 곧 제2의 성육신으로 지칭하고 있는것임 --- *에트-네페쇼<알렙(하3)-타브, 눈-페이(중)-쉰(우)-바브(상)> +*오<알렙-바브(상)> +*마-이텐<멤-헤이, 요드-타브-눈> +*피드욘/페디욘<페이(중)-달렛-요드-바브(상)-눈>...일상생활중에 주예수님 이름 부름-앙망-응시-주목-누림-고백= 타고난 삿됨 감수성 더욱더 민감 + 처리 점점 더 용이해짐..((차원-영역의 창조주, 초월적 주님이시니, 그분께 합당하게!!...동심합치의 믿음으로)) 주님 들이마시고, 주님 이름 부르기...((24시간 동행--잘때나 깰때라도-무시로!!)) [=484.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 ((바사르-구프의, 세포-조직-장부에 이르도록까지!!, 주님 임재로 젹셔지는바)) 제2의 성육신 이루도록!!...사랑으로 동심합치로 동행하며 살아가기에도 짧은 인생이다!! [요8:31, 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그리스도의 교회는 Q의 = 하늘에 속한바 참생명-진리-지혜-사랑의 나라이지...결코, 종교가 아님에 유의하라....((선악시비를 그치라.. 다만 진리 앎 인해!!, 해방-자유함 안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라)) ..종교의 영에 다시는 예속되지 말라..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키 벤-하아담 아티드 라보 바케보드 아브이브 임-말르아카이브 와에즈 예살렘 레콜-이쉬 케마아세후
----@키<카프(중,하)-요드> @벤-하아담<베이트(중)-눈, 헤이-알렙-달렛-멤> @아티드<아인-타브(하)-요드-달렛>...발아된 생명가지로서 내가 그렇듯 너희도 그러한바.. @라보<라멛-베이트-바브(상)-알렙> @바케보드<베이트(중, 하)_카프(하수2)-베이트-바브(상)-달렛> @아브이브<알렙-베이트(하)-요드-바브>..아버지의 말씀(=여호와) @임-말르아카이브(아인(하)-멤, 멤-라멛(하수2)-알렙-카프-요드-바브>..Q나라의 일.. @와에즈<바브(수2),알렙-자인> @예살렘<요드(수하2)_쉰(우)-라멛(중,하2)-멤 *이쉬<요드-쉰(우)> = (마땅한) 대가를 기쁨으로 지불하다>...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이루실바.. @레콜-이쉬<라멛(수하2)-카프-라멛, 알렙(하)-요드-쉰(우)> @케마아세후<카프(중,하수2)_멤-아인(우하2)-신(좌,하2)-헤이-바브(중)>..기꺼이 Q께 동의해드림으로써..껴안을바..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아멘 오메르 아니 라켐 키 예쉬 베오메딤 포 아쉬르 로-이트아무 타암 미타 아드 키-이르우 에트-벤-하아담 바 베말쿠트
--@아멘<알렙-멤(하2)-눈>..."예"-"전적으로 /틀림없이" "그렇습니다"..Q의 절대진리 확신/붙듦, 그 현재적 생명 확장-증대-실현-앙망/기대/기다림.. @오메르<알렙-멤(하2)-레이시>.."이르심/말씀하심" 그대로 이루십니다.. "이르시다" ==엘로힘-샤마임-아레츠, 곧 전존재 기울여서. @아니<알렙(우하2)-눈(하)-요드>..나, 내 전존재 곧 Q의 생명 걸고 동의합니다....(발화자의)생명 걸고 그대로 담보함으로써.. @라켐<라멛-카프(하3)_멤>..(제자 만드심 지속진행((전존재 열어 수용/적용/빚어다루심-조성/변화/대치/채움 주 보시기에 이미 성화 이룬바 그 그릇 완성하고 계심) @키<카프(중,하)-요드>..진행하시는 성령과 동심합치, 그대로 행함.. @예쉬<요드(하2)-쉰(우)>..대속구주예수님께서 이미 대가지불하셨음이니.. @베오메딤<베이트(중)_아인-멤(수하2)-달렛(하)-요드-멤>..성령안에 동심합치로 거함_분배말씀안의 진리로 세우신바(발아된 생명가지, 결합한 하나-다바크의 절대 믿음)주 임재앞에 일편단심의, 수종 위해 일어서서 있으라 @포<페이-헤이>..성령께서 움짖여 말하게 하심, 그대로 만 말하는 실존 살지니.. @아셰르<알렙(우하수2)-쉰(우,하3)-레이시>...엘로힘-샤마임-아레츠 그대로 이룬바, 진복의 존재로다.. @로-이트아무<라멛-알렙, 요드(하)-테이트(수하2)-아인(우하수2)-멤-바브(중)>..공급말씀의 Q, 친히 일하심의 참생명지혜의 분배말씀, 그 안의 진리를 그대로 적용-하나 이루시나니.. @타암<테이트-아인-멤>..참생명 지혜를 넘치게 하신바, 분배하신 생명가지가, 그분의 담지자/그릇 되도다.. @미타<멤(하)-타브-헤이>..진리로 온전케 된 실존 만드신바라.. @아드<아인-달렛> 곧, 진리의 증인 만드심이라.. @키-이르우<카프(중,하)-요드, 요드(하)-레이시(하수2)-알렙-바브(중)>..조성하고 이루신 그대로 행하라...친히 일하시는 실제의 그영따라 다바크로! 동행할지니.... @에트-벤-하아담<알렙(하3)-타브, 베이트(중, 하3)-눈, 헤이_알렙-달렛-멤>..Q의 진리-형상(모든 속성-성품-생명-인격-일하심의 내용)으로 낳으신바, 참 인성의 그 아들, 곧 결합한 하나로 행하는바, 신성하신 그분의 담지자이니.. @바<베이트(중)-알렙>..Q께서 거하심이요 @베말쿠토<베이트(중,하수2)_멤-라멛(하수2)-카프-바브(중)-타브-바브(상)>..거하심 인해, 진리말씀으로 공급하심 그대로 새겨지는바, 성령과 결합한 하나라, 원판엘로힘 예슈아의 판박이 만드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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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16:1~12 막8:11~21 요8:6 으눅11:16 눅21:11 이고전1:22 마12:38
*2.눅12:54,55
*3.눅12:56 마12:28 눅19:44
*4.마12:39 마4:13 마21:17
**6.고전5:6~8 갈5:9 눅12:1
*8.마26:10 마6:30
*9.마15:16 마14:17~21
*10.마15:34~38
**12.마17:13 마5:20 마23:3
*13.마16:13~16 막8:27~29 눅9:18~20
*14.마14:2 막6:14 눅9:7 막6:15 눅9:8 마17:10 막9:11 요1:21
**16.요11:27 마1:17 신5:26 수3:10 시42:2 렘10:10 단6:20 호1:10 행14:15 고후3:3 딤전4:10 히3:12 마14:33
*17.요1:42 요21:15~17 마13:16 고전15:50 갈1:16 엡6:12 히2:14 이고전2:10 고전2:12 마11:25 요6:45
*18.마10:2 요1:42 엡2:20 계21:14 마7:24 마11:23 욥38:17 사38:10
*19.사22:22 계1:18 계3:7 마18:18 요20:23
*20.막8:30 눅9:21 마17:9 마12:16
*21.마16:21~28 막8:31~9:1 눅9:22~27 마17:12 마17:22,23 마20:17~19 마1:18 마20:18 눅13:33 마17:12 마17:22,23 눅24:7 마27:63 요2:19
**23.마4:10 마13:41 롬8:5 빌3:19 골3:2 빌2:5
*24.딤후2:12,13 마10:38,39
**26.눅12:20 시49:7,8
*27.마24:30 마25:31 마26:64 단7:10 단7:13 슥14:5 요1:51 행1:11 살전1:10 살전4:16 유1:14 계1:7 신33:2 마13:41 롬2:6 롬14:12 고후5:10 히9:27 벧전1:17 계2:23 계20:12 계22:12 행10:42 고전3:8
*28.요8:52 히2:9 마10:23 마23:36 마24:34 눅23:42
========**단(라이스) 지역에서 북동쪽에 헬몬산이 위치...헬몬산과 단 지역 사이에는 가이사랴 빌립보가 있다.===
마태복음 16장 (개요)
16장에는 그리스도의 이적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단지 그의 네 가지 담화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다. 내용별로 살펴본다면,
Ⅰ. 하늘로써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던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대해 답변하심(1-4).
Ⅱ.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대해 제자들과 대화하심(5-12).
Ⅲ. 자신이 그리스도이심과 그 위에 세워진 교회에 대해 그들과 대화하심(13-20).
Ⅳ. 제자들을 위한 그의 고난과 그를 위한 제자들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심(21-28).
이 모든 말씀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기록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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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써 오는 표적에 대해 바리새인과 논쟁(마 16:1-4)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더불어 대화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사도행전 23장, 7, 8절에 나타난 대로 그들 사이에서 분쟁이었었지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데 있어서는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훈은 영들의 존재와 미래의 상태(천국이나 지옥)를 부인하였던 사두개인들의 오류(사이비)와 이단을 뒤집어엎었으며 또한 장로들의 유전을(말씀에 육을 따라 무언가를 더하였음) 빙자한 큰 사기꾼들이었던(영혼사냥!)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폭력, 그리고 위선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와 기독교는 사방에서 반대를 받게 된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Ⅰ. 그들의 요구와 그 의도.
1. 그들의 요구한 것은 하늘로써 오는 표적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이것을 보여 줄 것을 소원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표적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고 확신을 가지게 될 것처럼 표면적인 구실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이러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으며, 이는 단지 그를 책잡으려고 하는 강퍅한 불신앙에 불과하였다.
그들이 구실삼아 요구한 것은,
(1) 그들이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는 다른 그 밖의 표적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표적들을 보아 왔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은 모두가 표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그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기"(역주:요 3:2 참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표적으로 만족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이 선택한 표적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즉 그들은 병들고 슬픈 자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을 구원해 주었던 표적들을 업신여겼으며, 교만한 자들, 곧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그 어떤 특별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줄 것을 강조하였다.
신적 계시의 증거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환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지혜에 의해 선택되어야만 한다.
이미 주어진 증거는 편견을 가지지 않은 자들의 이해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며, 헛된 공론을 펴는 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의도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멸시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수단과 특권들에 의해 믿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이 간사하다는 증거(실예)이다. "만일 우리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믿게 되지 않을 것이다".
(2) 그것은 [자기들이 요구하는 범위내에서만 나타내는 바]하늘로써 오는 표적이어야만 한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졌을 때 행해졌던 것과 같은 이적을 통하여 그의 사명을 입증하도록 요구하였다.
즉 그들이 요구한 하늘로써 오는 표적이란 우뢰와 번개, 그리고 음성들, [듣고 보는 이마다 당장 죽을 것같이 공포에 떨게 하는 그 어떤 것들!]이었다.
그런데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표적이나 무서운 것들은 영적이고 위안을 주는 복음의 섭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친절-온유-긍휼-다정다감함으로 오셔서]접근해 있기때문이며(롬 10:8), 따라서 [말씀에 따라 오는] 이적들의 성격도 그러함이 마땅하며, 또한 [예전에 여호와의 영광, 그 엄위함을 계시하기 위해 시내산에서 보여졌던 바]이러한 이적들(히 12:18)을 드러내셨을 때와는 전혀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그 의도는 그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서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공중의 권세 잡은 왕"과의 제휴라고 비웃고 말 것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그들도 그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자신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이스라엘이 행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다(고전 10:9). 그들의 사악함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들이 하늘로써 오는 [여러가지]표적을 가졌을 때, 그들은 "그가 광야에 식탁을 예비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다.
그가 광야에서 식탁을 예비한 지금에 와서 그들은 "그가 우리에게 [자기들이 요구하는 범위에 한정된]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줄 수 있느냐?"라고 말하면서 그를 시험하였다.
Ⅱ. 이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만하지 않도록" 그는 "그들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셨다"(잠 26:5). 그의 대답에서,
1.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표적을 간과해 버린 사실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하였다(2, 3절).
그들은 하늘 나라가 이미 그들 사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적을 찾고 있었다. "주님이 이곳에 계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의 불신적인 조상들은 이적이 그들의 일용한 양식이었을 때도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또는 안계신가?"라고 반문하였다.
이것을 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피시고 계시다.
(1) 그들은 다른 일, 특히 자연적인 천기의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하고 정확하였다.
"너희는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을 징조요, 아침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궂을 징조임을 알고 있다."
관찰과 경험에 의해 알 수 있는 일반적인 규칙이 있는데, 이런 것들에 의해 앞으로의 일기에 대해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제2 원인(second causes)이 작동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 결과를 보고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 활동에 있어서 매우 일정하며 또한 그 자체가 불변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름이 평평하게 뜬것을 보고는 알지 못하지만"(욥 37:16), 구름의 모양을 보고 어떤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오래 전에 천기에 관하여 "점성가들이나 별을 보는 자나 월삭을 예고하는 자들"의 무모하고 우스광스러운 예언을 뒷받침해 주지는 않으며,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이것들로 말미암아 속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는 "씨뿌릴 때와 거둘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이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청우계(weather-glasses)나 다른 방법에 의해 천기 변화의 직접적인 표적과 전조를 알기 전까지는 때와 계절에 관한 것을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하시는 대로 천기를 변화시키며,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는 천기는 우리로 하여금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2)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마음은 완악하고 어리석었다.
"너희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느냐?"
① "너희는 메시야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홀은 유다에게서 떠났으며, 다니엘이 말한 때와 주간은 만기가 다 되었지만, 그들은 유의를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이나 백성들이 그에게로 모여든 사실은 "천국이 가까이 이르렀으며," 이것이 곧 "그들이 환영해야 하는 날"임을 분명히 암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시대의 표적들을 보고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들은 도덕적인 예언을 할 수 있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섭리의 동기와 방법들을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의사들이 어떤 징후를 보고 사람의 병을 알아내는 것처럼 잇사갈 사람들이 그러한 표적들을 보고 이스라엘이 장차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측정하고 알아내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그들의 절호의 기회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며 또 [억지로 고집부리면서 마음을 완고하게 함으로써]분별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바람이 그들에게 시원하게 불어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폭풍 속으로 휘말리게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예레미야 8장 7절, 이사야 1장 3절을 보라.
셋째,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표적을 무시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규정하는 표적을 추구하는 것은 큰 위선이다.
② "너희는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에 대해 마땅히 임하는 너희 자신의 파멸을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화평의 복음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피할 수 없는 파멸을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함으로써 말미암아 초래되는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이다.
2. 그는 그들에게 다른 표적 주시기를 거절하고 있다(4절).
앞에서도 그는 똑 같은 말씀으로 거절하셨다(마 12:39). 동일한 불법을 고집하는 자들은 동일한 책망을 받을 것임을 각오해야만 한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1) 그들을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교인이요 동행자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를 배반하고 그와 맺은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간음한 여자처럼 행동하면서도 자신은 아무런 악도 행하지 않았다(잠 30:20)고 생각하는, 말하자면 "그들 자신이 보기에만 깨끗한 자들"이었다.
(2) 그는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를 거절하고 계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3) 그는 그들에게 선지자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 표적은 그들에게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즉 이 표적이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사도에 의해 이방인들에 전파하실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신적 사명의 마지막이면서도 최고적인 증거들을 예비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교만한 자들의 환상은 만족함을 얻지 못하지만 겸손한 자의 믿음은 후원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그들의 불신은 피할 수 없는 멸망을 가져오며 "모든 입은 닫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논쟁은 갑자기 끝나 버렸다. 즉 "그는 저희를 떠나가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시험하려는 자들과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다투려고 하는 자들에게서 곧 떠나가 버리신다.
그는 그들을 돌이킬 수 없는 자로 내버려두셨다. 즉 "그냥 두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그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며, 자신들의 처분에 맡겨 두시는 것이2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를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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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을 경계하심(마 16:5-12)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떡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데, 다른 많은 대화에서와 같이 그는 제자들에게 영적인 문제에 대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시지만, 제자들은 그가 육신적인 문제를 말씀하고 계신 줄로 오해하였다.
이번 경우, 오해의 배경은 그들이 강 건너에 가서 함께 먹을 양식을 배에 싣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배를 타고 간 것을 말한다.
흔히 그들은 먹을 떡을 함께 가지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종종 들판에 있을 경우가 허다하였기 때문이다.
빈들에 있지 않을 때는 그것들이 번거로운 일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떡 가져가기를 잊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그들 제자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더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그렇게 되었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긍정적 의미에서)종종 이와 같이 세상일에 대해 무관심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Ⅰ.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경고가 있는데, 그것은, 즉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이다.
그는 지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더불어 대화하셨으며, 또한 그들이 이러한 정신을 가진 자들임을 아셨을 때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과 절대 상종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제자들은 위선자들을 가장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대적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인 것처럼 꾸미는 바리새인들과 또한 진리를 자유스럽고 편견이 없이 추구한다고 자처하는 사두개인들을 대적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고는 "삼가 조심하라"고 이중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타락한 원칙들과 행위들은 누룩에 비교되고 있다. 그들은 누룩과 같이 시큼하고 부풀며 퍼졌다.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서나 그들은 들끊어 올랐다(역주:야단법석을 떨며 소동을 피웠다). [[소란과 분란을 일으키는 교훈을 말하는 이들을 분별하라!!]]
Ⅱ. 이 경고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7절).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경솔함과 건망증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으로 [느슨하게, 피상적으로] 쉽게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제 그들의 핵심을 놓쳐버리게 만든 생각들을 따라가 보자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과 하시는 대화에 너무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잊어버리고 만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들은 떡을 자급자족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친우들의 신세를 져야 했던 바,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에게 그것을 요청하거나 "그들의" 구제금을 받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오해한 것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아니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제자들을 먹인다는 구실을 붙여 그들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했기 때문인 것 아닐까.
또는 제자들이 그것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더불어 교제하거나 그들과 함께 먹지 말라(잠 23:6)는 뜻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식사자리에서 제공했던 바, 그들의 떡은 위험한 것이 아니었으며(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그들과 더불어 잡수셨다, 눅 7:36; 11:37; 14:1), 오히려 [참된 의미에서]그들의 원칙(규율)이 위험하였던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하심.
1. 그는 이 곤란한 상황에서 그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과 그러한 일을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믿지 않은 제자들을 책망하기고 계신다(8절).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떡이 없음으로 당황하여, 너희 선생이 너희가 필요로 하는 만큼 채워 주실 수 있으며, 또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걱정했던 것 같이 그들의 준비성 없음에 대하여 책망하시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부모들이나 주인들은 그들의 자녀나 하인들이 건망증에 대해 화를 내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다른 때에 조심하도록 타이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의 의무에 대해 잊어버리기가 쉽다. "우연히 지나쳐 버렸다"(우연히 잊어버렸다)는 말은 잘못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다.(정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떡 가져오는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해 쉽게 용서하셨다. 그리고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오히려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적은 믿음이었다.
(1) 주님께서는 비록 빈들이라고 할지라도 제자들이 먹는 문제에 대해 그를 의지하고 또한 그것에 불안하게 생각지 않기를 원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비록 제자들이 자신들의 부주의와 잘못으로 궁핍과 곤궁에 빠져들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 그를 신뢰할 것을 재촉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가난한 자들에게 우리 자신이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지 않도록 하자.((항상 나눠주기를 힘쓰자!!)
"가난한 자,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나보다 어쩌면] 낫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생각할 때에만 부족한 것이 없게 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거기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물론, 때때로)혹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궁핍할 때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2)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근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선한 사람들이 그들의 세상일에 연약하고 무능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들을 자칫하면 책망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에 관하여 지나치게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사에 대하여, 먹고사는 일에 대하여...]지나치게 부주의해서도 안되며, 그 극단 사이에 중용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둘 중에서도 특히 세상일에 지나치게 염려(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합당치 못한 일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떡이 없음으로 염려하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궁핍하거나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오히려 불안해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러한 궁핍과 어려움이 꼭 필요한 연단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우리를 위해 염려해 주시는[우리를 위하시며, 해결해 주시는]" 주님께 맡김으로써 무거운 염려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이다.
(3) 제자들이 최근에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그들의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을 직접 체험하였으면서도 그를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불신이 극도에 달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8, 9절).
제자들은 떡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위하여 떡을 마련해 주실 수 있는 분(예수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물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샘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하지도 못하느냐.[기억하고 또 기억나게 하소서!!]"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종 그들의 이해심이 부족하고 곧잘 잊어버리는 것 때문에 책망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자비스럽고 이적적인 식사를 거듭 제공하였던 사실에 대해 잊어버리고 말았느냐? 즉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떡 일곱 덩이와 몇 마리의 생선으로 사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사실을 기억지 못하느냐? 너희가 얼마나 많이 주었는가는 기억하라."
이 바구니들은 법궤에 보관되었던 만나 항아리와 같이(출 16:32), 하나님의 자비심을 오래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식사의 부스러기들은 지금 진수성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많이 그들을 먹이실 수 있으셨던 주님은 지금 필요한 것으로 그들을 먹이실 수 있으셨다.
그들의 몸을 위한 식사는 그들의 신앙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으며(시 74:14), 따라서 그들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으므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현재의 염려와 불신으로 말미암아 당황하게 되는 것은 이전에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해 적절하게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의 경고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계시다(11절).
"너희는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뇨?"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신적인 일을 더디 이해하고, 잘못 이해하는 사실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들이 오랫동안 은혜의 방편을 누려 왔을 때는 더욱 그러해야만 한다.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신 것은,
(1) 제자들이 자기들처럼 그가 떡에 대하여 염려하시는 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음식과 음료수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2) 제자들이 그의 설교 방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주님께서 비유법으로 말씀하신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였던 무리들과 같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마 13:13).
Ⅳ.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책망을 하심으로써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심(12절).
"그제야"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뜻을 "깨달아 알게"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드러내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두드러지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이 누룩에 대해 깨닫도록 그가 말씀하신 바를 되풀이하여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속에 있는 지혜의 영을 통해 가르치시며, 말씀 속에 있는 계시의 영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캐어내고 또한 약간의 오류를 거친 후 찾아낸 진리들은 매우 귀중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명백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제자들은 JC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그들의 교훈과 방법에 비유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나 방법은 부패하고 사악한 것이었지만, 그것들은 누룩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쉽사리 침투해 들어가서 "좀과 같이 먹어 치우는"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인도하였고 또한 명성도 얻었지만, 그들의 오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큰 해독을 끼치며 귀중한 영혼을 오염시켰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사두개인들의 누룩과 같은 무신론과 자연신론, 또한 바리새인의 누룩과 같은 교황주의를 찾아 볼 수 있는데, 모든 기독자들은 이 두 가지 누룩에 대해 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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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 고백(마 16:13-20)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에 관하여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사사로이 대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은 가나안 땅의 최북단에 위치한 가이샤랴 빌립보 지방에서 있었다.
가장 구석진 곳이었으므로 아마 다른 지방에서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을 것이며, 그곳에서 주님은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한가하게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역자들은 그들의 공적인 사역에서 여유가 생기면 그들의 가족들과 더불어 단란한 시간을 가지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문답을 하고 계시다.
Ⅰ. 그는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떠한가를 질문하고 계시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 그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 명칭은,
(1)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그의 일반적인 명칭이다.
그는 당연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다(눅 1:35).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여자에게서 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왕궁에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최고 칭호에 의해 구별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는 했지만 인자라는 칭호에 의해 알려지게 되실 것이다.
에스겔도 종종 그 자신을 낮추게 하기 위해 인자라는 명칭으로 (주께) 불리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부르신 것은 그가 겸손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2) 중보자이신 그에게 붙여진 특별한 명칭이다.
그는 다니엘의 환상에서 "인자"로 알리워졌다(단 7:13), 나는 메시야, 즉 예언된 인자이다. 그러나.
2. 그는 자신에 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묻고 계시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그 뜻의 의미는 "그들이 나를 메시야로 인정하더냐?" 이다..(나는 이 구절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인자라도 하더냐?"로 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묻지는 않고 계시다.
그들은 주님께 대해 편협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를 속이는 자 또는 사탄과 연합한 자라고 말하였다.
오히려 "사람들이[서민, 즉 일반인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멸시하였던 서민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신 것은 아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시는 주님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환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그 자신의 칭찬을 듣기 원하여 하신 것은 아니다.
즉 그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그 자신이 그러한 분이심을 나타냄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복음 전파의 성취를 갈망하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서민들은 주님과 더불어 대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제자들과 더불어 더욱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서민들이 말한 바를 제자들에게서 더울 잘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보고 추측하도록 내버려두셨다(요 10:24, 25).
이제 주님께서는 그의 사도들이 그의 이름으로 행한 이적을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기 위해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것이다.
3. 이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 그에게 답변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를 "다윗의 자손"(마 12:23), 또는 큰 선지자(요 6:14)라고도 불렀다. 제자들이 말한 것은 그들의 견해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 견해들은 각기 다르다.
즉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다. 그러나 진리는 바꾸는(자기자신의 어떠함을 따라 받아들여 인식되기때문에, 사람마다) 사람에 의해 서로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결과적으로 분쟁케 하려고 오셨다(눅 12:51).
그리스도를 한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제나름대로 그에 대해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즉 "여러 사람이 여러 마음을 가진 것이다."
그를 그리스도(즉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은(실은 모든 증거가 그리스도=메시야 임을 나타내고 있는데도, 일부러 인정하지 않고 고집부림따라) 끝없는 미로에서 방황하였으며, 또한 불확실한 추측과 무모한 가설을 뒤쫓았던 것이다.
(2) 그 견해들은 (나름대로)훌륭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들의 최선의 판단에 의해 그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견해들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적들의 감정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사랑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를 따랐던 자들의 소박한 생각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를 최고로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3) 그 견해들은 모두가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중의 한분)"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요나에 대해 생각하였던 것처럼 메시야가 그의 공적인 전파 이전에 부활하셨다는 그릇된 견해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혹은 그들의 견해는 옛 것에 대한 지나친 가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특출한 사람이 그들 세대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리스도는 다시 소생한 옛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4) 그러한 견해들은 고의적인 오류에 근거한 그릇된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교훈들과 이적들은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잘 나타내어 준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엄청나게 그의 모습이 초라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오히려 그를 그보다 못한 자로 인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①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 하나이다."
헤롯이 그렇게 말하였으며(마 14:2), 그 주위에 있는 자들도 그가 말했던 것처럼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 견해는 그들이 가졌던 견해, 즉 순교자로 죽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마카비 2서 7장 9절에 있는 것같이 안티오커스에 대한 답변에서 일곱 아들 중 둘째 아들이 언급한 내용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즉 "법을 위해 죽은 세상의 왕은 영원한 생명에로 일으킴을 받게 될 것이다.")
② "더러는 엘리야라 하나이다."
이것은 분명히 "보라,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마 4:5)는 말라기에 대한 예언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그리스도와 같이)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며, 그 자신이 최고 이적, 곧 승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③ "더러는 예레미야라 하나이다."
그들이 예레미야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처럼 종종 우셨기 때문이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셨는데"(렘 1:10), 그들은 이것이 메시야의 개념과 일치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④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 말은 그들의 조상은 선지자들에 대해 매우 훌륭한 환대를 하였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 준다.
그렇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은 자들의 후손"들이다(마 23:29).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지방 중의 하나인 나사렛에서 온 예수가 그의 사역들을 통해 나타내 보여 주듯이 비범한 사람임을 인정하려고 했지만, "그는 메시야가 아니라 옛 선지자 중의 하나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Ⅱ.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 "너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러면 너희는 보다 낫게 말할 수 있느냐?"
1.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가르침을 받았다.
즉 그리스도와 친밀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다른 사람들보다 지식과 은혜의 방편들을 더욱 많이 누려온 자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분명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일에 대해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들보다 그리스도와 더욱 친근한 자들은 그에 관하여 보다 참된 생각을 가져야만 하며, 다른 이들보다 그에 대해 좋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2.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훈련을 받았으며, 따라서 그들 스스로가 진리를 깨닫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하였다.
"천국 복음을 전파해야 할 너희들은 너희를 보내신 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JC의 사역자는 보내심을 받기 전에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며, 또한 그는 어떤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점검을 받아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JC에 대해 잘 모르거나 틀린 생각을 가진다면 어떻게 그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인정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마음속으로, "우리는 주 예수님이 누구이며 또 어떤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는 우리에게 귀한 분이신가? 그는 우리가 보기에만 사람의 대장이 되시는가? 우리의 영혼은 그를 사랑하는가?" 등에 대해 질문을 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옳고 그름에 따라서 그에 대해 좋게 말할 수도 있고 나쁘게 말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질문이었는데, 이에 대한 답변은 어떤 것이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이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16절).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의 앞서의 질문에 대해 몇몇 제자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은 대로 그에게 대답을 하였다.
또한 그들 제자들의 명의로 베드로가 답변을 하였을 때 그들은 이에 동의하였으며 의견을 같이 하였다.
베드로는 이런 경우에 앞장을 서서 말하는 기질이 있었으며, 어떤 때는 잘 말하지만 어떤 때는 실수할 때도 종종 있었다.
어떤 단체를 보면 그 가운데서 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온정이 있고 대담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의 대변인처럼 말하였던 그 밖의 사도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요한"(막 9:38), "도마, 빌립, 유다"(요 14:5, 8, 22)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로마교회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베드로를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가장 우선적이고 탁월한 사도로 치켜세우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베드로에 대한 편견을 수정해야만 한다. 단지 베드로에 대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을 대표해서 임기웅변으로 앞장서서 말하였고 그것도 "이 경우에 한 번"(prohac vice) 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영구적인 명령자나 대변인이 아니라 이 경우에만 의장이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답변은 짧았지만 그것은 완전하고 참되고 적절한 답변이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자의 신앙 고백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헌신의 행동이 유발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벙어리이며 또한 죽은 우상과는 반대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즉, "영생을 알고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 모든 문제에 대한 결론이다.
① 사람들은 그를 "한 선지자, 그 선지자"(요 6:14)라고 불렀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를 그리스도, 즉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로 인정하고 있다. 즉 그를 위대한 선지자, 제사장, 교회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다.
참된 메시야는 족장들에게 약속되었으며, 또한 그들은 그를 "장차 오실 자"로 믿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해 가졌던 생각과는 정반대의 겉모습을 지닌 분 JC를, 제자들이 [참되게]믿는 것은 진정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②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이미 죽었던 엘리야나 예레미야의 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 즉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며 그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 "세상의 생명"이 되게 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으며 또한 믿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는 하나님과 동일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다.
그의 신적인 성품이 지금 육신의 구름 속에 가리워 있었지만, 그 속을 꿰뚫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본 자들이 있었다.
그러면 우리도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뜨거운 열정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그에게 말하도록 하자.
주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2)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답변을 칭찬하심(17-19절).
여기에서 베드로는 성도와 사도로서 응수를 받고 있다(역주:성도와 사도로서 칭찬을 받고 있다).
① 성도로서(17절).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듣고 매우 만족하셨다.
그의 신앙 고백은 매우 분명하였고,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만일에"나 "그런데"라는 전제 조건이 없는 고백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지식이나 은혜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숙달됨은 그에게 바람직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이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어디서 받았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계시다.
복음의 희미한 여명 시대에 이 진리를 처음 발견하고 그것을 믿는 것은 매우 위대한 일이었다.
"사람마다 이러한 지식을 가질 수 없었으며,"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첫째, 베드로는 그 지식의 행복을 가졌던 것이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그의 출신과 가문, 즉 그의 부모들의 비천함과 그의 혈통의 낮은 신분을 일깨워 주고 계시다.
그는 "바요나"─즉 "비둘기의 아들"이었다(어떤 사람은 그렇게 해석한다).
그가 "찍혀서 나온 반석"임을 상기시키심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출신이 번혀 고귀하지 않으며 또한 그가 발탁된 것은 전적으로 신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도록 하려 함이다. 그를 구별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였다.
성령을 받은 자는 그들의 아버지이신 분을 기억해야만 한다(삼상 10:12). 주님은 그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심으로써 성도로서의 큰 행복을 깨닫게 하고 계시다. 즉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
여기에서 유의할 것..., 참된 성도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복되다고 선포하신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라는 사실이다.
그가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 그들이 복이 있게 된다.
"베드로야, 너는 즐거운 소리를 아는 행복한 사람이다"(시 88:15). "너희 눈은 복이 있도다"(마 13:16).
모든 행복은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동반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은 그 영광을 마땅히 가지셔야만 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다. 네가 이것을 알게 된 것은 네 자신의 지혜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이나 정보에 의해서도 아니다. 이 빛은 인간의 천성이나 교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기독교는 계시된 종교이며, 계시된 바 그 기원을 하늘에 두고 있다.
기독교는 철학자들의 학식이나 정치가들의 정책에 의해 주어진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하늘로부터 주어진 종교이다.
2.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그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빌 1:29).
"내 아버지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하셨으므로" 너는 복되도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에게 대한 또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분명한 표식이며 참된 행복의 견고한 기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큰 은혜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가운데서 [육적]교만과 허영에서 나온 어떤 것, 즉 간교한 죄를 간파하셨는데, 이것은 [성령따라 JC이름부르며 깨어 있음으로 인해 경계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선한 의무에 혼합되기 쉬운 죄, 일종의 자부심-자긍심일 가능성이 높다.
선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들에 대해 큰 자부심이나 자긍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경계하고 물리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된 것이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 대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사에 의해 성취된 것임을 생각해야만 한다. 즉, 우리 스스로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시 115:1; 고전 4:7).
②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도나 사역자로 여겨(!) 약속을 주심으로써 대답하고 계시다(18, 19).
베드로는 교회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에게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 의도된 약속이 그에게 지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에게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손해볼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그는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극치의] 존경이며 [극상의 진정한] 예배인 바 그리스도에 대한 이 위대한 신앙 고백, 바로 이것에 근거하여 주님은 이 왕적이며 신적인 헌장에 조인하고 공포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적 통일체(body politic)는 통합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 신랑과 신부와의 연합인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세상에 교회를 가지고 계셨으며, 그 교회는 약속된 후손(창 3:15)의 반석 위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약속된 후손이 왔으므로 교회는 기독자로서의 새 헌장을 가져야만 하며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그 헌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큰 지주(支柱)인 이 말씀이 왜곡되고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침입을 당하게 되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귀는 그 말씀을 왜곡시키기 위하여 간교함을 사용하였으며, 그 약속까지도 왜곡시켰다(시 91:11. 마귀는 하나님 자신의 의도를 변경시키려고 하였다. 마 4:6).
마귀가 이처럼 성경 말씀과 그 약속을 왜곡시키려 한 것은 그것들이 분명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는 그것들에 대해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헌장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그 목적은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교회 설립을 승인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교회의 머리요 통치자이시며, 모든 심판권을 위임받으셨으며,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신다.
이에 따라서 그는 아버지에게서 권위를 받으셨으며, 선택된 자의 구원을 떠 맡으셨다.
그 설립 허가장은 베드로의 손에 주어졌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교회와 연관된 구약의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처럼 신앙과 거룩함이 탁월한 특별한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에게 우선권(최고직)을 부여하지 않으셨으며, 더욱이 그 계승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의 헌장은 여기에서 대리자인 베드로에게 교부되었는데, 이 헌장은 그 속에 구체화되고 내포된 목적에 따라서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의 유익을 위해 교회에서 사용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약속된 것은,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정치적 통일체(body poiltic)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체제와 명칭에 의해 통합되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구별되어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것은 "너의" 교회가 아닌, "나의" 교회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였던 베드로는,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기업에 대해 주인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오직 그의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 속에 사는 자들도 다 그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선택된 남은 자들이 모인 곳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표제를 지니고 있다.
(1) 교회의 설립자와 창시자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교회는 그리스도가 설립자가 되시는 성전이다(슥 6:11-13).
여기에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와 고레스의 모형이다(사 44:28). 그 재료와 솜씨는 그의 것이다. 그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영혼 속에 교회를 더 첨가시키시며, 또한 교회를 살아있는 돌(벧전 2:5) 위에 세우시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건축물"이다. 건축은 점진적으로 행해진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건축에 있어서 집과 같이 "형상"(in fieri)에 지니지 않는다.
신적인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을 책임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교회가 잘 지어지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준다.
(2)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는 "이 반석"이다.
건축가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공사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 기초가 썩어버린다면 그 건물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초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 기초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다른 기초 위에는 교회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 28장 16절을 보라.
① 교회는 "반석"위에 세워진다.
즉 세월이 오래 흘러도 못쓰게 되지 않고 건물이 무겁기 때문에 가라앉지도 않는 견고하고 강하고 영구적인 기초 위에 새워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래 위에 그의 집을 세우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폭풍이 일어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반석은 높다(시 61:2).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과 동일한 위치에 세워지지 않는다. 반석은 크고 넓다. 교회의 기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크면 클수록 더욱 견고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 기초가 좁은 것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② 교회는 "이" 반석 위에 세워진다.
너는 "베드로라". 베드로라는 뜻은 "돌이나 반석"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처음 베드로를 불렀을 때(요 1:42) 그 명칭을 부여하셨으며, 여기에서는 그것을 확인하고 계시다.
"베드로야, 너는 [반석]네 이름의 의미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있다. 너는 [바위처럼]견고하고 실속 있는 제자이며, 불변적이고 참을성이 있으며, 또한 통솔력을 가지고 있는 제자이다. 베드로란 이름 그대로 강함과 견고함이 너에게 있도다. 너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견해에 조금도 현혹되거나 요동됨없이 현재의 진리에 굳건히 서 있구나"(벧후 1:12).
이 의미심장한 이름을 언급하신 것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리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반석이라는 말을 사도 중에서 우두머리인 베드로 자신이라고 해석한다.)
첫째,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열두 사도 중에서 [자기 임의대로 다스리는 왕같은] 지도자는 결코 아니었으며, 그들 중 손위의 사람이었지만 그들보다 월등한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지고 있다(엡 2:20). 그 건축물의 첫 기초는 그들의 사역에 의해, 사역 가운데서 놓여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에 새겨진다"(계 21:14)고 말해지고 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회개시키고(행 2:) 더 나아가 이방인을 회개시킴으로써 교회의 첫돌을 놓은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제한된 의미에서] 어떤 의미에서 그는 기초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게바"는 기둥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갈 2:9). 그러나 단지 건물의 첫돌을 놓은 사람을 교회의 기초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에 첫돌을 놓는 일은 일시적인 행동에 불과하며, 기초를 놓는 일만이 영구적인 일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이 로마 교황의 위선적인 교리를 지지해 주는 근거는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지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의 계승자들, 최소한 로마 교회의 주교들에게까지도 그 지도권이 이어져 내려올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로마의 주교들이 실제로 베드로의 자리를 계승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도 문제가 되겠지만, 기독교의 진리에서 볼 때 그들의 이러한 전통성의 추론은 재론할 가치도 없는 천부당 만부당한 것이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이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너는 베드로라. 너는 돌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반석 위에(자신을 가리키면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
아마도 그가 "그 자신의 몸이 성전임을 말씀하셨을 때" "이 성전을 헐라"(요 2:19)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손을 가슴에 얹으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에 그가 계셨던 곳이 성전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말을 듣고 오해를 하였던 것이다.
그처럼, 여기에서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들어 자신이 반석임을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가 베드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 줄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리스도만 이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되신다고 말하는 많은 성경 구절들에 의하여 설명되어져야만 한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 베드로전서 2장 6절을 참조하라.
그리스도야 말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기독교회의 기초자이시며 또한 그 기초이시다.
그는 뭇영혼을 이끌어 내시며, 자신에게로 모으시는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연합되어 있으며, 그를 의지하고 영원히 신뢰하는 것이다.
셋째, 어떤 사람은 이 "반석"이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 고백했던 신앙 고백이라고 해석하며,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고 있다.
베드로가 고백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 고백은 참으로 훌륭하였고 극히 중요하다.
나머지 제자들도 그의 신앙 고백에 동의를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이 위대한 진리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1. 이 진리 자체를 없애버린다면 보편적(universal)인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일종의 속임수이며 단지 하나의 환상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너희 믿음도 헛것이요,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그대로 있으리라"(고전 15:14-17).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그를 소유한 자들은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 속이는 자이거나 속임을 당한 자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2. 겉보기에 교회로 보이는, 어떤 특정한 교회가 있는 바,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나 신앙 고백을 그 교회에서 제거해버린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지 못하고 불신 상태와 신분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즉 교회가 일어서느냐, 또는 무너지느냐를 판가름하는 조항이 되는 것이다. 즉 "구원의 문을 돌리는 중요한 돌쩌귀(hinge)"가 되는 것이다.
결국 바로 그 신앙고백을 붙들지 않고 내버리는는 자는 기초를 붙잡지 않기때문에 끊어져 말라 내버려지게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기독자라고 자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위대한 진리의 확실성 위에 설립된 성스러운 단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위대하며, 지금까지 승리를 해오고 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교회가 세워질 때 그 교회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음부의 권세(또는 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진리를, 더나아가 이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를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
(1) 이것은 교회가 대항해야 할 원수를 가지고 있으며, 그 파멸과 전복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 원수는 "음부의 문(권세)," 즉 음부의 도성으로 표현되고 있다(이 도성은 하늘에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과 직접적으로 반대가 된다).
이 음부의 도성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마귀의 권세라고도 할 수 있다.
음부의 문은 마귀의 왕국의 권세와 교활함, 즉 용의 머리와 뿔이며, 마귀는 이러한 것을 가지고 "어린 양"과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음부의 문에서 나오는 것들은 음모와 모략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복음의 진리를 반대하거나 복음의 규정을 타락시키거나 선한 사역자나 기독자를 박해함으로써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다.
즉 간사하게 이끌리는 체하거나 강제적으로 시키게 하는 방법(이러한 것은 종교의 순수성에 위배되는 일이다)을 사용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이름을 말살하거나(시 83:4), "아이를 삼키려고 하거나"(계 12:9), 이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음부의 문(권세)의 악한 음모인 것이다.
(2)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교회의 원수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고 있다.
세상이 지속되는 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교회를 가지실 것이며, 흑암의 권세가 아무리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진리와 규율들은 교회에서 인정되고 보존될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시 129:1, 2).
이것은 어떤 특정한 교회나 교회 지도자가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또한 이단이 되거나 파멸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록 순수성과 광채에 있어서 그 정도가 일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쨌든 계속적으로 존속할 것이며, 따라서 그 상속권도 결코 해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여자가 비록 광야에서 살지라도 (계 12:14),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을 것이며(고후 4:9),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는 사는도다"(고후 6:9).
교회는 어떤 특정한 싸움(국지전)에서는 패할 수 있지만 주요한 싸움(전면전)에서는 "큰 승리자"가 될 것이다.
"특별한 성도들은 믿음으로써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받는다"(벧전 1:5).
넷째, 이 헌장의 또 다른 목적은 교회의 질서와 통치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다(19절).
도시나 단체가 설립이 될 때 행정관리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해 임명되고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통치체제가 없는 도시는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 정치의 제정은 여기에서 열쇠를 교부함으로써 또한 그들에게 매고 풀 수 있는 권한을 줌으로써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가 마치 천국문의 유일한 문지기이거나 또는 다윗의 후손에게만 소속된 다윗의 열쇠를 가진 것처럼 그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니, 이러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도하고 통치하도록 모든 사도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에게 사역적인 권세로 주어지고 있으며, 복음의 규칙을 따라 어떤 특별한 모임이나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제사장이 된 우리 모든 사람들은 축복 받은 사도 베드로 대신에(in persou of) 천국 열쇠를 받았다"
열쇠는 단지 맨 처음 베드로의 손에 주어졌을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에게 맨 처음으로 신앙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행 10:28).
왕이 자치지구에 현장을 수여할 때 지방장관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재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그들로 하여금 사실을 심리하고 법에 따라 결정하며, 대법원에서 정규적으로 행해진 것처럼 확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교회를 설립하실 때 질서와 통치를 유지하고 또한 그의 법이 적절하게 집행되는가를 살피게 하기 위하여 사역의 직분을 임명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그는 "내가 그 열쇠들을 이미 주었다"거나 "지금 주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이것은 그의 부활 후에 주실 것임을 나타낸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그러한 선물들을 주셨다(엡 4:8).
그때에 이 권세는 베드로에게만 아니라 남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실제적으로 주어졌다(마 28:19, 20; 요 20:21).
그는 열쇠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그 열쇠들을 주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왜냐하면 사역자들은 그들의 권세를 그리스도에게서 받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모든 권세는 그의 이름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고전 5:4).
1. 여기에서 위임된 권세(권한)는 영적인 권세이다.
그것은 "천국," 즉 교회에 속한 권세이며,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는 복음 시대에 속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사도적이고 치리적인 권세도 이러한 권세에 속한다.
여기에 표현된 권세는 사회적이고 세속적인 권세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사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일"들에 대하여 가르쳤다(행 1:3).
2. 여기에서 주어진 것은 곧 열쇠의 "힘"(권세)인데, 이것은 어떤 장소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는 관례적인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또는 집주인이 청지기에게 "때를 따라 그 집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거나"(눅 12:4) 또는 필요할 때 가족의 규칙을 따라 거절하도록 창고 열쇠를 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역자들은 "청지기"이다(고전 4:1; 딛 1:7). 다윗 집의 "열쇠"를 가졌던 엘리아김은 "집"을 다스렸다"(사 22:22).
3. 여기에서 위임된 권세는 "매고 풀 수 있는," 즉(열쇠의 은유법을 따른다면) 닫고 열 수 있는 권세이다.
바로 집의 주인이었고 창고지기였던 요셉은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 하였다"(시 105:21, 22).
집의 창고나 보고가 닫히게 될 때 그들은 묶이게 되는 것이다. 즉 내가 너에게 불과 물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노라.
그러나 그 집의 창고나 보고가 다시 그들에게 열리게 될 때 그들은 그 속박에서 해방되어, 비난을 면하게 되며, 그들의 자유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4. 여기에서 위임된 권한은 그리스도께서 적절한 지배권을 인정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권세(권한)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청지기들의 판결을 그 자신이 시인하심으로써 정당화하실 것이다.
즉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옳고 그르든 간에 교회의 모든 단점을 인정하시겠다는 말씀은 아니다.
말씀에 따라 즉 열쇠를 옳은 방법으로 돌리면 당연히 문이 열리듯이 이러한 것이 하늘에서 보증이 되는 것이다.
즉 신실한 사역자의 입에 있는 복음의 말씀은 사람의 말로 간주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되며 또한 이와 같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살전 2:13; 요 12:20).
그러면 "천국 열쇠는 어떤 열쇠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1) "지식"의 열쇠라고 불리우는 "교훈"의 열쇠이다.
"너희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진실하고 책임감 있게 세상에 설명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하여 너희는 임명장, 즉 신임장을 받게 될 것이며, 매고 풀 수 있는 완전한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러한 표현은 금지나 허락을 의미하였다.
불법적인 일들에 대해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일은 "매는"것이요, 합법적인 일들에 대해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일은 "푸는"것이었다.
이제 사도들은 이와 같은 특별한 권세를 가졌다.
모세의 율법에 의해 금지된 어떤 일들, 즉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등의 일들은 지금 허락이 되었으며 또한 모세 율법에 허락이 된 이혼과 같은 일은 지금 금지되었다.
또한 사도들은 이것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권한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그들의 말들을 취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아무 것도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때 이 능력은 실천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임명된 직임자(officers)로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모든 사역자들에게 나타내어진(암시된) 일반적인 권세가 있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2경 말씀을 따라 "무엇이 선한 것이며, 주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그들에게 일반적인 권세가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두 선포하는"자는 이 열쇠를 잘 쓰는 자이다(행 20:27).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열쇠를 주신다고 하신 것은 율법사들이 창안하였던 관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관습에 의하면 율법사는 율법책을 취하여 읽는 권한을 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책이 보관되어 있는 상자의 열쇠를 손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매고 푸는 것"은 그들의 책이 두루마리로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실로 매어 그 두루마리를 닫았으며, 열때는 그 실로 풀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할 때 백성들에게 복음의 책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를 사도들에게 주시고 계시다.
이 능력의 실천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3장 46절, 18장 6절을 보라.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한 모든 자에게는 용서와 화평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와 저주를 전파할 때 그들은 이 "매고 푸는" 권세에 따라 행동하였다.
(2) "천국 열쇠"는 "훈련"의 열쇠인데,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의 개성과 행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 근거하여 앞서 말한 교훈을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수여된 권세는 법률적(입법적)인 것이 아니라 재판적(사법적)인 것이다.
법관은 법을 만들 수 없고 단지 법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며, 그 원인에 대한 결과를 편견 없이 조사한 후에 이에 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쇠의 권세"이며, 교인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이 권세와 그 특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모든 족속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될 것이다."
사역자들은 "명하심을 받은 자들을 잔치 석상에로" 들여보내야 하며 또한 거룩한 교제를 하기에 분명히 합당치 못한 자들은 들여보내지 말아야 한다.
②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교인의 자격을 상실한 자들을 추방하거나 내쫓는, 즉 매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복음의 약속들의 적용과 그것들의 표적을 믿지 않는 자들을 거절하는 일이다.
베드로가 박수 시몬(그는 세례를 받기는 하였다)에게 하였던 것처럼, "쓰디쓴 뿌리와 불법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로 하여금 분깃을 얻지 못하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하여 "매는 일"이다.
③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한 번 내쫓겼으나 회개할 때에 다시 받아들여 회복시킬 권세를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이 매었던 자를 풀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회개한다면 사죄의 약속이 그들에게 해당된다고 말해 줄 수 있다.
사도들은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이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
만일 사역자들이 능숙하고 신실하다면 외모만을 보고도 그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다(행 8:21; 고전 5:1; 고후 2:7; 딤전 1:20).
다섯째,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 일에 대하여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계시다(20절).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고백한 내용을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 몇 가지 이유로는,
1. 이 때는 그의 나라를 위한 준비의 때였기 때문이다.
지금 전파된 가장 큰 내용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따라서 이 내용이 지금 강조되어야 하며, 그것이 곳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회개의 교리와 같은 것을 강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천국"이 실제적으로 설립되었다는 이러한 위대한 진리는 지금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매사는 그것이 적당할 때 아름다운 법이며, 또한 "네 일을 예비하라, 그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잠 24:27)라는 말씀은 참 좋은 충고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일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려고 하셨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이 자신에 대해 증거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의 하시는 일들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원하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증거는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증거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며, 그는 이러한 것을 강조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5장 31, 34절을 보라.
그는 많은 이적을 나타내 보이셨으므로 다른 증거들을 보이려고 하지 않으셨다(요 10:25, 38).
3. 만일 그들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2:8).
4.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단언할 수 있기 전까지는 이 사실에 대해 선포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위대한 진리는 그것들이 충분히 입증되기 전에는 상당한 박해를 받게 되는 법이다.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이시라는 큰 증거는 그의 부활이었다. 부활하심으로써 "그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그러므로 신적인 지혜(역주:지혜스러운 그리스도)는 이 진리가 확실히 입증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5. 이러한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는 자는 필수적으로 지금 사도들이 가진 것보다 더 큰 분량의 성령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지기 전까지는 그들이 이 사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보류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시고 성령이 부으신 바 되었을 때, 우리는 베드로가 집 모퉁이에서 말한 내용, 즉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내용을 지붕 위에서 선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행 2:36).
침묵을 지켜야 할 때가 있는 반면에 말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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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예고(1)(마 16:21-23)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Ⅰ. 그리스도께서 그의 수난을 예고하심.
비로소 그는 그의 수난을 예고하기 "시작"하셨으며, 이때로부터 그는 종종 그것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이미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의 고난에 대해 암시를 주었다.
또한 그는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그의 수난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것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셨으며," 또한 그것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지금까지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일체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매우 약하였으며, 또한 이상하거나 우울한 말을 듣고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지식에 있어서 성숙하였고 신앙에 있어서도 강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점진적으로 그의 마음을 계시하시며, 그들이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하게 빛을 비추신다는 사실이다.
"이 때로부터," 즉 그들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완전한 신앙 고백을 그에게 한 그때로부터, 그는 이러한 수난의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어떤 진리를 발견한 것을 아셨을 때 다른 진리를 가르치셨다. "가진 자에게는 더 주어지게 될 것이다."
맨 처음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리들을 확고히 하게 한 다음 더욱 완전함에 이르는 교리를 가르치신 것이다(히 6:1).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신앙 위에 잘 기초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믿음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한꺼번에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질 수 없다.
그들의 현재 상황에 맞도록 적당한 때에 적절하게 말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고난에 대해 그 환경과 특색을 자세히 예고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1) 그가 고난 받게 될 장소.
그는 거룩하고 주요한 성읍인 예루살렘에 가서, 거기에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한다.
그는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보냈지만, 죽을 때는 예루살렘에서 죽어야만 하였다.
거기에서는 모든 제사가 드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하신 희생 제물이신" 그는 그곳에서 죽으셔야만 한다.
(2) 그는 누구에 의해 고난을 받게 되는가?
그들은 곧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대 산헤드린 회원들이었으며, 백성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찬미하는데 앞장을 서야만 했던 자들이 그를 매우 박해하였던 것이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대한다고 공언하였고 또한 자칭 거룩한 성품을 가졌다고 내세운 성경에 박학한 자들이 그가 실제로 오셨을 때 이와 같이 천대한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로마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맨 처음 선동자였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언급하고 계시다.
(3) 그가 받으실 고난은 어떤 것인가?
"그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실 것이다."
그의 원수들의 악독한 잔인성과 그의 끈질긴 인내는 그의 고난의 다양성과 중복성을 나타내 보여 주며(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그 고난의 극한성을 말해 준다.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곧 그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많은 고난은 죽지만 않는다면 견딜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난의 전제가 없는 죽음은 한결 덜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받고 그 후에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4) 그의 모든 고난의 행복 된 결과는 무엇인가?
그는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고난을 미리 예고하시면서 장차 뒤따르게 될 영광을 말씀하셨다(벧전 1:11).
그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그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였다. 따라서 그가 이 사실을 언급하신 것은 제자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그 수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가 십자가를 참으시고 그 수치를 개의치 않으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그 앞에 놓인 즐거움"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사실에 유의해야 하며 그의 영광에로의 과정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눈여겨보면서 그 보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2. 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고난을 예고하셨는가?
(1) 그것은 그들이 영원한 섭리와 동의(역주:예지와 예정)의 소산물(product) 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영원전부터 성부와 성자 사이에 합의를 본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였다."
그 일은 "확고한 섭리와 예지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자신의 자발적인 감수성과 자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의 고난은 그에게 놀라운 것이 못되었으며, 덫과 같이 그에게 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고난에 대해 확실하고 분명하게 예견을 하였으며, 이것은 그의 사랑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요 18:4).
(2) 그것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나라의 영원한 위엄과 권세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오류를 시정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를 메시야로 믿으면서도 제자들은 세상에서의 위엄과 권세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또 다른 교훈, 즉 십자가와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아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아마도 제자들은 그들이 메시야 왕국의 후원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은 그 왕국의 가장 큰 원수와 박해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 스스로가 전파하였던 천국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그릇된 오해는 시정되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분명하게 취급을 받아야만 하며, 이 세상에서 큰 일들을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아야만 한다.
(3) 그것은 제자들이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받게 될 최소한의 슬픔과 두려움을 예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당하셨을 때 제자들은 어떤 고난도 받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들의 선생이 죽음을 당한다면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미리 알리신 것은 그들이 이에 따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미리 경고"하신 것은 그들이 "미리 무장"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Ⅱ.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그에게 간함.
그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하였다.
아마도 그는 앞에서와 같이 나머지 제자들의 감정을 대변하여 말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중요한 대언자였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간하였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엄청난 사실로 말미암아 약간 마음이 들뜨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그로 하여금 이전보다 더욱 담대하게 만들었다.
크게 진보하는 가운데에서 침착하고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 베드로가 그의 선생을 만류하거나 그에게 충고를 한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가 고난받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리스도는 (어쩌면) 베드로가 "이 일이 결코 미치지 않으리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하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누가 하나님에게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들로 하여금 이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섭리가 복잡하게 엉키거나 서로 충돌하는 것 같거나 엇갈리는 것처럼 보여질 때 우리는 신적인 뜻에 대해 일체 언급을 하지 말고 [오로지 약속된 말씀만 붙들고] 묵묵히 따라가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그가 행해야 하실 바에 대하여 잘 아신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사가 될 수 없다(롬 11:34).
2. 베드로가 그의 고난을 열렬히 반대하고 십자가의 거침돌에 대해 이와 같이 놀란 것은 육적인 지혜의 기미가 농후하였다(역주:육적인 생각에서 이와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안일하게 잠자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타락한 성품이다.
우리들은 자칫하면 그 고난들이 불편한 현재의 생활과 연관된 것으로 여겨 버리기 쉽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함으로써 그 고난을 잘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롬 8:18).
베드로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라.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금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차마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주여, 제발 당신의 몸을 생각하십시요"라고도 읽을 수 있다.
즉 제발 당신의 몸을 아끼십시요. 그러면 누구도 당신을 잔인하게 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을 돌보십시요. 그러면 이 일이 결코 당신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이 두려워한 것처럼 고난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를 자신의 힘으로 측량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그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인간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당신과 같이 백성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 백성을 두려워하는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지는 결코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은 만일 필요하다면 당신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우리편에 설 사람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셨다(23절).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이 성을 내게 할지라도 그들에게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책망하시거나 어떤 행동을 하신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는 어떻게 그의 분노를 표시하셨는가?
그는 베드로에게로 돌이키시면서 성난 얼굴로(아마도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간청에 대해 생각해보실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그 시험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박을 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사실에 대해 얼마나 분개하셨는가를 나타내 보여 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품에 않으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두 경우에는 각각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시험을 당하게 될 때에는 곧 그 자신의 원래 모습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에게 대하듯 답변하셨다(마 4:10).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사탄은 간교하게도 우리들이 가장 사랑하고 믿는 친구들의 손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탄은 하와를 통해 아담을, 아내를 통해 욥을, 여기에서는 사랑하는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를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간계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 되며, 아무리 사탄이 우리를 선동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죄에 대해 경계를 함으로써 그 궤계와 유혹을 대항해야만 한다.
심지어 우리의 친구들의 친절한 호의도 사탄에 의해 종종 악용될 수 있으며, 우리에게 대한 유혹으로 이용될 수 있다.
(2)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은 친구나 제자나 교역자들에게 그들의 직무를 단념케 하는 사탄의 음성을 재빨리 파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하는 사람보다는 말해진 내용에 대해 더 유의를 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탄이 뱀으로 말할 때나 성도로 말할 때에 그 목소리를 잘 분별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로 하여금 좋은 일을 못하게 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을 꺼리게 하는 자는 모두 사탄의 말을 하는 자이다.
(3) 우리들의 친한 친구가 친절을 가장하고 잘못되게 말하거나 행동할 때는 주저하지 말고 신실하게 책망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잘못된 호의에 대해 칭찬하지 말고 책망해야만 한다. "신실함은 친구에게 상처를 준다." 이렇게 때리는 것은 호의로 간주되어야만 한다(시 141:5).
(4) 죄로 이끄는 유혹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를 단호히 물리쳐야만 하며, 그것과 더불어 교제를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
2. 그리스도를 불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해롭지도 않고 오히려 친절한 호의를 보이는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왜 그와 같이 분개하셨는가? 그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1)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즉 너는 나를 방해하는 자이다(이와 같이 읽을 수 있다). "너는 내 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일에 조급하셨으며 또한 그의 마음도 거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괴롭고 힘겨운 임무를 방해하고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려고 하는 베드로의 간언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속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그로 하여금 그 일을 그만 두도록 애쓴 자들은 매우 상냥하고 현명하게 그에게 접근하였다.
베드로는 그가 어려움에 처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거절하였던 때에도 그의 일을 못하게 방해한 지금 만큼 혹독한 책망을 받지는 않았다.
전자는 친절함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친절함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 우리를 방해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 들으려 하지 않을 때는 마음에 굳은 결심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 준다.
롯과 같이 "나로 당신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는 굳은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자신의 안일과 안전보다는 우리의 구원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기쁘시게 하지 않으셨기"(롬 15:3) 때문이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베드로가 충고한 것과 같이 그 자신을 돌보시기(아끼시기)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버리시기(사용하시기) 위함이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왜 "사단"이라고 부르셨는가를 살펴 보라.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원에 대해 철천지원수인 마귀에게서 오는 것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후에 사악하게 그의 임무를 말살하려고 유다 속에 들어갔던 바로 그 사탄이 여기에서는 베드로를 내세워 주님의 임무를 그만두도록 종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① 위대하고 선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은 친구와 원수로부터, 안과 밖으로부터 방해와 반대를 받을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② 우리의 의무를 계속적으로 이행해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자는 우리를 방해하는 자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의무가 요청되는 것이 고민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된다.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 일하며 또한 고난을 받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은 "사탄이며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다.
(2)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경외하고 그를 위해 열심히 고난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실제로 그러한 일을 당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일보다는 오히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기가 쉽다.
그들은 스스로 그러한 일들을 즐기며 또한 그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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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예고(2)(마 16:24-28)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받아야 하며 또한 그 고난을 기꺼이 받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 후 여기에서는 그들도 역시 고난을 받아야 하며 또한 기꺼이 그것을 받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시고 있다.
이 구절들은 비중이 큰 말씀들이다.
Ⅰ. 여기에는 제자 된 자가 갖추어야할 신분이 규정되어 있으며 또한 그 조건이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에 근거하여 제자로서의 영예와 특권을 가질 수가 있다(24절).
주님께서 이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것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이 규칙에 의해 그들이 자신의 진실성을 시험해보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곧 그를 따르면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를 부르셨을 때 그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를 의무적으로 따르는 자이며,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라야만 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지, 베드로가 그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지금 간언하는 것처럼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양이 목자를, 종이 주인을, 병졸이 상관을 따르듯이 그를 따라가는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목표로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천국의 영광을 동일한 목표로 삼는 자이다.
또한 그가 걸어가신 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자는 그의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으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행동에 순응하면서, "어린양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이다.
2.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자에게 크게 요구되는 일이 무엇인가?
"아무든지 오려거든"-즉 누구든지 기꺼이 오려거든," 이 구절은 임의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즐겁고 단호하게 할 것을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자신의 뜻보다는 다른 사람의 뜻에 의해 제자가 되거나 또는 우연히 제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자원자가 되기를 원하신다(시 110:3).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내 제자가 아닌 어떤 사람이 나에게로 오려는 생각을 굳게 지키고 있다면, 또 내 제자인 너희가 역시 나에게 붙어있으려 생각한다면, 바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지켜야 한다. 즉 너는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난 가운데서도 나를 따라야만 한다. 즉 너는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나를 따라야만 한다. 따라서 너희가 앞일을 내다보고 앉아서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조건의 뜻은 무엇인가?
(1) "자기를 부인하라."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그 자신을 아낄 것을 충고하였으며 또한 동일한 처지에서 충고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자신을 "아끼지"(돌보지) 말고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다.
그들이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하는 이유는 그의 출생과 생애와 죽음이 모두 자기 부정과 포기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빌 2:7, 8).
만일 자기 부정이 어려운 일과이며 혈과 육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그것은 우리 앞에서 또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속과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체험하시고 실천하신 우리 주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종은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그 자신을 부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근본적인 법이며 또한 배워야 할 최초의, 그리고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근본적인 법이며 또한 배워야 할 최초의, 그리고 가장 큰 과목이다. 그것은 "좁은 문"이며 "좁은 길"이다.
우리는 그 밖의 다른 모든 좋은 과목들을 배우기 위하여 거기에서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적으로 부인해야만 하며, 우리 자신의 모습에 경탄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해심에 치우쳐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일을 추구하거나 우리 자신의 목표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크게 부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그의 뜻, 그의 영광, 그리고 세상에서 그와 관계된 일을 위하여 부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와 그들의 반성을 위해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만 하며,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육체의 정욕을 부인해야만 한다.
(2) "자기 십자가를 져라."
십자가는 여기에서 보통 사람이나 기독교인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위해 지워지고 있다.
섭리에 의한 고통, 의로 말미암은 핍박, 좋은 일을 하거나, 또는 나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이다.
기독자들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된 의미에서 볼 때 "십자가"라고 불리 우는 것이 적절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졌으며 또한 그가 우리 앞에서 그것들을 참으신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달게 받게 하며 그것들의 두려움을 제거해 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각기 그의 십자가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기대해야만 한다.
각자는 행해야 될 특별한 고통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짐이 가장 무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몫이며, 그 공통적인 몫 중에서 각자는 그의 특별한 분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무한하신 지혜자께서 우리에게 정하고 주권적인 섭리가 우리에게 지워 주신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우리의 십자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생각하고, 따라서 그것을 환영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 자신의 십자가보다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더 잘 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최선의 것이며, 또한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만 한다.
②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지워 주신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형벌을 선고받은 죄인은 그 자신이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했던 로마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구레네 시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갔을 때 이 구절은 설명되었다.
첫째, 십자가는 우리가 가는 길에 놓여 있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십자가를 만들수는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십자가를 순순히 져야만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든지 또는 벗어버리기 위하여 의무의 길에서 이탈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조급하고 무분별하게 우리의 십자가를 밑으로 끌어내려서는 안 되며, 그것들이 우리가 가는 길에 놓여 있다면 마땅히 그것들을 져야 한다.
우리는 그 십자가가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봉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이 되거나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고통을 잘 극복해야만 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장해물"을 극복함으로서 그 고통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것들 중에 그 어느 것도 나를 요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 십자가가 무거울지라도 그것을 지고 계속하여 나가야만 한다."
둘째, 우리가 해야만 할 것은, 그 십자가(그것은 재산이나 돌, 찌르는 것일 수도 있다)를 참아야만 할 뿐 아니라, 그 밑에서 잠잠해야만 하며 그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큰 특권으로 여길 수 잇게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은 나쁜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견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기에"라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 있는 "영광을 기뻐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부인할 때에 당연히 뒤따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의 즐거움이나 이 세상의 특권들을 부인하지 않으려는 자는 그것들이 밀어닥칠 때 자기의 십자가를 지려는 마음을 결코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와 같이 살려고 결심하자 않는 자는 그 자신 속에 자기는 결코 순교자로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라고 틸로츤(Tillotson) 주교는 말하였다.
(3) 특별히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난받는 성도는 예수를 바라보아야만 하며, 또한 고난을 받을 때에 그에게서 지시와 격려를 받아야만 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견딜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 "앞에서"(before), 우리를 "위하여"(for), 십자가를 견디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다.
그는 무거운 십자가의 끝, 즉 저주의 십자가의 끝을 견디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들을 위해 그 밖의 다른 부분을 가볍고 쉽게 하였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그것을 질 수 있으며, 또한 거룩함과 순종의 모본을 따라 그리스도를 뒤따라가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을 모방하려고 애써야만 하며, 매사의 그의 모본을 따라 순응해야만 하며, 그들이 나가는 길에 어떤 것이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선행을 하는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나를 쫓을 것이니라."
그것은 (동일한 것을 거듭 반복하여 말씀하심)인 것처럼 보인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히 "누구든지 신앙 고백을 함으로써 나를 따라오려거든, 또한 그렇게 하여 제자의 칭호와 자격을 얻으려면, 참으로 나를 쫓으라. 그렇게 하여 제자의 일과 의무를 행하라"이다.
또는 "누구든지 처음부터 좋게 나를 따라 오려고 출발한다면, 끝까지 참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갈렙이 행하였던 것처럼 "주를 끝까지 따르는"일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그를 쫓아가야만 한다.
Ⅱ. 여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이 법에 순종하고 또한 이 한계에 도달하도록 설득하는 논증이 있다.
자기 부정이나 고난을 참는 일은 어려운 과목(lesson)이며, 만일 우리가 혈육과 타협한다면 이것들을 배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과만 타협하고 화목하고 주도권을 드리자.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하시는 충고가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자.
그는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1.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우리의 현재 선택에 의존되어 있는 영원(eternity)의 중요성(25절).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인정함으로써 "제 목숨을 잃는 것을 만족히 여긴다면, 그것을 찾을 것이다."
"우리 앞에는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축복과 저주가 놓여져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① 가장 그럴 듯하게 꾸미는 배교자에게 임하게 될 불행.
이 세상에서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그것이 죄에 의한 것이라면 다른 세상에서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일시적인 목숨을 보존하고 일시적인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버리는 자는 정녕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아 영원히 그것에 의해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배교와 불법에 의해 제 목숨을 구원했다고 그러한 것이 정당한 구실이 될 수는 없다. 자기 보존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지막 자기 파괴에서 입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한 목숨은 잠시동안에 불과하며, 그렇게 해서 피한 죽음은 잠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잃어버린 그 목숨은 영원하며, 뜻밖에 만난 죽음은 가장 비참한 죽음이요 불행의 완성이며, 일체의 선과는 영원히 단절된 것이다.
사람이 배신함으로 비록 지위와 명성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얻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지각 있는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한 다음 자기의 본심을 말하고, 충고를 해야 한다.
② 가장 위험스러운 일을 당하면서도 값지게 지조를 지킨 자들에게 임하게 될 유익.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더 나은 세상에서 무한히 훌륭하게 "그것을 찾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첫째, 대개 목숨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의 일을 할 때에, 또 그 이름을 위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잃게 된다.
또는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 방법들을 부인하느니 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함으로써 잃게 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는 수천만 명의 피로 날인(조인)되어 우리들에게 전하여지고 있다.
그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지만"(욥이 다른 경우에 말한 것처럼), "그들의 생은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증거"와 그들의 의무를 인하여 투쟁하였으므로 매우 값있는 자들이다(계 20:4).
둘째,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도 잃었지만, 마지막 날에 그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잃어버린 즐거움은 이 세상에서 도로 찾게 될 수 있다(막 10:30).
그러나 잃어버린 목숨은 이 세상에서 도로 찾을 수 없으며, 그것은 다른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시대에 있어서 고난받는 성도들을 뒷받침해 준 신앙적인 기대였다.
그들이 목숨에 대해 위태롭게 느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발견하였던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웃으면서 교수대로 가게 하였고, 노래하면서 처형대에 서게 하였으며, 또한 원수들의 극악무도한 형벌도 "가벼운 고통"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2) 처형대에 놓여있는 영혼의 가치성과 그것에 비교되는 세상의 무가치성(26절).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제 목숨"은 "제 영혼이다"(역주:흠정역에는 "영혼"으로 되어있음)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생명"이기 때문이다(창 2:7).
이것은 일반적인 법칙, 즉 사람이 무엇을 얻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 얻은 소유물을 즐길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불멸적인 영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죽음에 의해 잃어버린 영혼은 온 세상의 소득으로도 도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첫째, 각 사람은 그 자신의 영혼(또는 목숨)을 가지고 있다.
영혼은 생각하고 추리하는 사람의 불멸적인 기능으로써 회상과 예상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머지않아 몸에서 분리되어 작용을 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목숨)은 그 지배와 소유적인 면에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영혼은 내 것이다"라고 하셨으므로 우리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으며 우리와 관련되었다는 점에서만이 우리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속할 때이다.
둘째, 영혼(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또한 그렇게 위험성이 있다. 영혼을 잃게 되는 것은 그 영혼이 가장 선한 것에서부터 가장 악한 것에로 영원히 분리될 때이다.
그 때에 영혼은 죽을 수 있을 만큼(ao far as a soul can die) 죽게 된다(역주:아주 죽어버리지는 않을 정도로 죽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그 때에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분리가 되어, 그의 분노와 저주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사람은 그가 지옥에 있기 전까지는 결코 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역주:내버림을 받게 되면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만일 영혼이 잃어버린 바 된다면, 그것이 죄인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사람이 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그가 분명히 제 목숨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고 또한 유일하게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을 멸시하기(호 13:9) 때문이다.
죄인이 죽는 것은 그가 마땅히 죽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피가 그의 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의 영혼(목숨)은 온 천하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우리의 영혼은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귀와 명예, 그리고 쾌락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이것들보다 더욱 값어치가 있다.
"온 천하"를 한쪽에 놓고 또 한쪽에는 "한 영혼"을 놓고 저울로 달아보면, 비료도 안 될 만큼 "온 천하"쪽이 위로 올라가게 되어, 결국 무게를 재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물을 이와 같이 판단하신다. 그는 유능하신 재판장이시다.
그는"영혼"(목숨)의 가치를 알 만한 이유를 가지고 계시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그들을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세상을 경시하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다섯째, 세상을 얻는 것이 곧 영혼(목숨)을 잃는 것이 될 때가 종종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인 것을 추구하고 진작시키기 위해 전폭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염려함으로써 그들의 영원한 중대사를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나 세상을 열심히 뒤쫓아가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파멸과 멸망에로 빠지게"한다.
여섯째, 영혼(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은 엄청난 상실(a loss)의 때문에 온 천하로도 그것을 메꾸거나 상쇄할 수 없다.
만일 세상(천하)을 얻었다 할지라도 제 목숨을 잃어버린 자는 스스로 악조건의 거래를 한 자이며, 결국 말할 수 없는 손해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가 잔액을 계산하고 이득과 손실을 비교하게 될 때, 그는 자신이 예상했던 이익 대신에 그의 모든 의도와 목적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돌이킬 수 없도록 파산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한 번 목숨(영혼)을 잃어버린, 그것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불될 수 있거나 영수될 수 있는 "재평가"(ajntavllagma)가 없다. 보상되거나 상쇄될 수 없는 상실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목숨)을 구속하기 위하여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 목숨을 도로 찾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시고 난 후에 그 영혼들이 세상에 대해 너무 소홀히 생활한 나머지 그것들을 잃게 된다면 그들을 얽매이게 하는 저당 증서는 결코 말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 영혼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거나 값을 지불할 수는 도저히 없으며, 구속의 평등성은 영원히 배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회를 선용하여, 스스로 잘 처신하는 것이 좋은 일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고난을 받는 일에 있어서 몇 가지 격려를 하고 계시다.
(1)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때 그의 영광을 보리라는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27절).
이러한 일들의 나중, 즉 세상 끝 날과 그 때의 영혼들의 표정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사물들의 현재 상태에 대해 다른 생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때에 나타날 것으로 사물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지금 나타나야 할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역주:우리는 어떤 사물이 그 때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마음속으로 상상한다면 현재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며, 그것이 곧 그 때에 나타나게 될 모습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확신을 주는 데 가장 큰 격려가 되는 것은 진정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실이다.
① 그의 재림은 그의 영광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라."
어떤 고통이나 위험가운데 처한 그의 제자들이 겸손의 신분을 가지신 그리스도, 비천하시고 초라하시며 "사람에게 비난을 받으시고, 백성들에게 멸시를 당하신" 그를 바라볼 때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의역).
그러나 천상 세계의 모든 위엄과 권세를 갖추시고 영광 가운데 오시는 우리 구원의 대장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활력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그를 위하여 일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인자가 장차 오리니" 그가 여기에서 자신을 그의 겸손한 신분의 칭호(그는 "인자"이시다)로 부르시는 것은 그가 그러한 신분을 인정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가 세상에 처음 오실 때는 그의 자녀의 비천함을 입으셨으며, 그들과 같이 육신의 형상을 가지셨다.
그러나 그가 두 번째 오실 때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가 처음 오셨을 때는 보잘 것 없는 제자들을 동반하셨지만, 그가 두 번째 오실 때는 영광스러운 천사들을 동반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딤후 2:12)...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고 JC를 영접하여 구원받은 자는, 단지 구원받은 변치 않는 사실에 만족하여 영적 어린아이상태로 그냥 남아 있으려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보혈능력안에서 말씀하심과 내주하사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따라 더욱 더 분발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그분께 합당한 단독자인 신부요 교회의 지체, 전도자로서 살아가며, 주께서 예비하신 성숙성장의 온전함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참되게 빼어닮은, 합당한 신부됨에 도달케되기를 힘쓰며, 더 나아가 바울사도가 바로 그렇게 소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바요 시작하사 열어놓으신 바로 그것,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JC와 함께 하는 고난을 기쁘게 견딤과 참음을 통해(=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함), 구원받은 자로서 자신의 삶 전체를 제단에 감사의 전제물(=관제물)로 부어드리기까지 소원하게 되는 바)구원의 완성,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함을 앙망해야 한다!!]]
② 재림은 우리의 관심사(우리와 관계된 중대한 문제)로 간주될 수 있다.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세상 권력자들보다 더욱 탁월하게 보상과 형벌을 실시하시기 위하여 재판장으로서 오실 것이다.
사람의 재판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판을 기대하는 믿음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둘째, 그때에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얻은 소득에 따라서 보상을 받게 되지 않고, 그들의 행한 일과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으며, 또 무슨 일을 했는가에 따라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날에 배교자의 반역은 영원한 파멸에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며, 신실한 자의 지조(정절)는 생명의 면류관으로 보상받게 될 것이다.
셋째, 그날을 가장 잘 준비하는 길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재판장 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친구로 삼을 수 있으며, 또한 그때에 이러한 일들은 계산될 때에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사람들의 행위에 따른 보상은 그날까지 보류된다.
이 세상에서는 선과 악이 제멋대로 판결되는 것처럼 보여진다.
지금 우리는 배교적인 행동이 즉각적으로 형벌을 받거나 신앙적인 행동이 하늘로부터 즉각적인 격려를 받는 것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날에는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고 올바르게 시행될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딤후 4:6-8).
(2) 이 세상에 그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28절).
그 나라는 매우 가까이 와 있으므로 그와 함께 있는 어떤 자들은 죽기 전에 그것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시므온이 육신으로 오신 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처럼, 여기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나라에 임하시는 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죽음은 느낄 수 있다. 그 두려움은 나타내 보여지며, 그 쓰라림은 맛보게 될 수 있다)는 확약을 받고 있다.
마지막 날에 그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러나 때가 찬 지금 그는 자신의 나라, 즉 그의 중재적인(mediatorial) 나라에 오셨다.
그의 영광은 이 일이 있은지 며칠 후 그가 변화하실 때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 보여졌다(마 17:1).
그때에 그는 자신의 왕복(왕이 입는 옷)을 입고 시험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령의 부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실과 복음 교회의 설립, 예루살렘의 파멸, 기독교를 가장 쓰라리게 박해하였던 유대인들의 나라의 제거 등을 가리킨다. 이분이 바로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인자"이셨다.
그때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 멸망후까지 살았던 것을 직접 목격하였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① 그들의 사업은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설립하는 일에 채용되었다.
어떠한 반대를 만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수행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노고에 대해 알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므로써 그들은 위로 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고난받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확신을 가짐으로써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성도는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나라가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가 그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고난을 즐거움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② 그들의 주장은 변호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보상(보복)이 될 것이며, 그들의 핍박자는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다.
③ 이것은 머지않아 곧 현 시대에 행해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교회의 구원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는 더욱 즐거움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보라, 재판장이 문 앞에 서 있도다."
현재 구름이 낀 때에 생존하게 될 자들이 더 좋은 날을 보게 되리라는 사실는 은혜라고 말해질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교회의 기쁨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은 진실로 바람직한 일이라는 사실이다(단 12:12).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이 아닌, "몇"(some) 사람만이 살아서 그러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대해 유의하라.
몇 사람만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 밖의 사람들은 광야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나라를 살아서 보게될 자가 "누구"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것을 앎으로써 죽는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사람"이 보게 될 것이라(역주:우리말 개역에는 "볼 자들도")고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재판장이 문 앞에 서 있도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인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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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제 16장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 이들은 종교, 정치, 사회적인 사상 및 의식면에서 서로 극단적인 대립 관계를 띠고 있는 자들이다.
이런 이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함께 온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대적하기 위하여 세상이 어떻게 그들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연합할 수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시 2:2).
특히 본문 '호이 파리사이오이 카이사두카이오이',(* )로서 두 집단을 지칭하는데 관사(* , 호이)가 하나만 사용되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온전히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12:28-45과 1-20등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비교적 객관적 자세로 예수의 능력이나 율법에 대한 예수의 진리를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들과 사상 및 이념, 주의, 주장이 전혀 다른 사두개인들과 연향하여서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적대감이 더욱 더 깊어지고 노골화되었음을 암시한다.
@예수를 시험하여 - '시험하여'의 헬라어 '페이라조'(* )는 '조사하다', '입증하다', '유혹하다'등의 뜻이 있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 광야에서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던 말과 같은 것이다(4:1).
그들은 예수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좀 더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1) 처음부터 자기들의 기존 신앙 체계만 고집하는 선입관을 가졌던 동시에 (2) 예수를 무조건 음해(陰害)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 - 그 당시 랍비들은 지상에서 연출되는 각종 이적들은 사단과 그 수하의 졸개들에 의해서도 능히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대신 하늘로부터 전해진 이적들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그들은 예수에게 모세의 때에 내려졌던 만나 사건(출 16장;요 6:32)이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인해 허와 달이 멈춰졌던 사건(수 10:12-14), 사무엘 시대의 우뢰 사건(삼상7:10) 및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 사건(왕상 18:30-40)과 같은 초자연적인 하늘의 기사들을 요구했던 것이다(chrysostom). 이러한 요구에 응할 때에만 그들은 예수의 신적 (神的) 진정성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속깊은 저의는 그러한 이적의 유무(有無)와는 관게없이 어떻게든 예수를 넘어지게 하려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눅 16:31). 따라서 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과연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야인지 당신 스스로 입증해 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표적'(* , 세메이온)이란 '표시', '이적' 등의 뜻으로서 결정적이고 놀라운 증거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과 함께 12:38에서도 예수께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했었다, 그러나 진정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나 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하고도 온전한 믿음이었다(고전1:22,23).
@청하니(* , 에페로테산) - 이 말의 원형 '에페로타오'(*)는 요청하다는 뜻외에 '심문하다', '갈망하다'는 뜻도 있다. 더욱이 이 '에페로타오'는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어떤 중요한 판단을 위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그리스도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근거로 삼을 자료가 될 것이었기 때문에 심문하듯 예수를 다그쳤던 것이다.
=====16:2
@대답하여 가라사대 -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막 8:12는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And he sighed deepiy in his spirit, and saith, KJV)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듸의 악하고도 편협한 질문의 저의(底意)를 깨달으시고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 심령 깊숙한 곳에서 탄식하신 것을 가리킨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 이처럼 저녁하늘이 붉으면 맑은 아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열대와 극 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된 현상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하늘의 변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변화들을 통해 때의 징조를 예측했다고 한다(Virgil, Pliny). 그리고 심지어 랍비들은 기상의 변화에 따른 각종 생활의 지혜를 교육했으며, 신년(新年)에는 그 해의 강우량을 예측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연계의 제현상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흐리면(* , 스튀그나존) - 이 말은 주로 침울한 감정이 얼굴로 표출된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막 10:22). 그런데 가끔 분위기나 기후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어 매우 짙은 어두움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어둠침침한 상태를 나타낸다.
@날이 궂겠다 - 이를 표현한 원어 '케이몬'(* )은 단순히 찌푸린 날씨가 아닌 폭풍우 치는 날씨를 Emt한다. 본문에서는 문맥상 날씨의 궂은 정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궂은 날씨가 어김없이 찾아들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고도 볼 수 있다.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 '천기'(* ...,토 프로소폰 투 우라누)란 '하늘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제현상'(the face of the heaven)을 의미한다.
@시대의 표적(* , 세메이아 톤 카이론) - 여기서 시대를 뜻하는 '카이론'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어떤 특정한 시점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유대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야의 초림 내지는 재림의 매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에 관한 비밀한 정보들을 여러가지 표적들(signs)을 통해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의 때에 대한 긴박한 선포(막 1:15),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의 마지막 주간의 도래(단 9:1-27장), 유대 전역에 걸친 메시야 도래에 대한 기대감 고조(눅 2:26, 38), 예수께서 친히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자신을 증거하고 이적을 베푸신 사실(12:8,32;13:37;24:30;눅 17:22-35) 등을 통해 시대를 분별할만한 중요한 표적들을 제시하셨다.
한편 본문에서 '시대의 표적'(signs of the times)은 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 등을 나타내시기 위해 특별히 보여주시는 것으로 전자는 단순한 물리적 차원의 현상을, 후자는 그 이면에 신적(神的) 목적이 있는 영적 차원의 현상을 가리킨다. 특히 후자, 즉 표적이란 성육신하신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새 시대의 증거를 가리킨다.
우리들의 세계는 영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이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 차원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박식하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결코 전인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16:3
@악하고 음란한 세대 - 악하고 음란하다는 말은 동의어를 반복하여 강도의 뜻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음란자라는 말이 특히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범죄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점에 착안하여 악하다는 말은 각 개인의 심성이 츙악하고 추하게 타락된 상태를 가리키고 음란하다는 말은 그런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충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Watchman Nee).
@표적을 구하나 - 표적을 구한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여러 기회에 순전한,즉 공정하고 진실한 심령을 가진 자들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각종 표적을 때에 맞게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문졔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즉 이미 그 마음에 순결성을 상실하고 편견과 독단에 의하여 진리를 통찰할 능력을 상실한 자들이 이미 충분한 표적과 가르침이 주어졌음에도 악한 의도로 표적만 계속 구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없느니라 - 표적을 보여 달라는 자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구체적 표적을 당장 보여주는 것도, 그렇다고 표적을 안 보여 주신 것도 아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만 이해되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표적을 안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모든 표적 중의 표적, 즉 요나처럼 자신도 3일동안 죽으셨다 살아날 것을 강력히 암시한 것으로서(욘 1:17) 분명 결정적 표적을 제시하신 것인데, 다만 그것이 미래형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는지 간에 예수의 이 대답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일종의 파라독스(paradox)처럼 들렸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이 표적은 예수께서 어려움에 직면하실 때마다 제시하신 것으로서(12:38-40;요 2:18-22),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부활의 확실한 증표가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필연적으로 주어질 심판의 전조(前兆)가 될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당장 보여주지 않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만을 언급하신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들어줄 경우 잘못된 그들의 비신앙적 욕구와 호기심을 들어 주는 것이 되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과 사역을 행하시는 뜻, 즉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되심과 당신이 전하신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해 표적을 행하신다는 뜻에 위배 되기 때문이다. (2) 스스로 죄의 길에 서서 마음의 눈을 닫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표적은 그들의 비신앙적인 욕구와 호기심을 일시적으로 채워주는 표적이 아니라 그듸의 인습적 관념을 극적으로 깨뜨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줄 결정적 표적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저희를 떠나 가시다 - 이는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교제를 끊으시고 멀리 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런 교제의 단절은 1차적으로는 인간 관계의 단절이지만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축복 교훈의 기회의 박탈이라는 측면도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먼저 죄인들을 찾아가시어 가르치셨지만 그들이 끝내 거절할 때에는 3년 밖에 안 되는 공생애의 특수성을 고려하시어 곧 그들을 떠나시곤 했다.
=====16:5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건너편으로 갈새 - '마가단' 지경(15:39)의 반대편 또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13절) 가기 위해 '벳새다'가 있는(막 8:22) 갈릴리 호수 북동편으로 가는 것으로 추정된다(15:39;16:13). 이에 제자들만 간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더불어 동행하셨다(6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마가단에서 황급히 출발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 당시 마가단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긴장 상태가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때 제자들의 수중에는 배 안에 있었던 오래된 한덩이 떡만 있었을 뿐이었다(막 8:1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 누룩(malt)란 다른 음식물에 들어가 그 음식물을 발효시키는 효소이다. 즉 누룩이 들어가면 음식물은 본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한다.
성경은 이점에 착안하여 주로 나쁜 관점에서 타인에게 강한 정신적 전염을 시키는 것을 누룩으로 묘사하고 있다(출 12:5;레 2:11;고전 5:6-9;갈 5:9).여기서 누룩은 율법과 계명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일반 백성을 인습적으로 오도(misleading)하는 당시 교권주의 자들의 잘못된 교훈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12절). 한편 본문에서 누룩이 단수로 쓰였는데 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모두에게 걸린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누룩이란 측면에서 한 통속(通俗)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각각의 특징상 바리새인의 누룩은 전통과 외적 시식에만 치중하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예수의 메시야성(性)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모세 오경 외의 모든 성경과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하고, 특히 사단의 실체와 부활 교리를 부인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 함으로써 철저히 현실지상주의적인 삶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부류의 누룩은 시대를 초월하여 극단의 보수와 극단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 실로 참 신앙인은 이 두 양극 우(愚)를 극복하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신앙과 끝임없는 자기 개혁을 통하여 그리스도 복음의 순수성을 확립해 가야 한다.
한편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막 8:15에는 '사두개인' 대신 '헤롯' 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치, 경제적으로 우위(優位)를 점하고 있었던 사두개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헤롯당원으로 활용했던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16:7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사실을 알 수 있다. (1) 예수 말씀의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의 어리석음 (2)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적 교훈을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께서 다시 설명해 주셔서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8-11절) 등이다.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 지금 영의 눈이 어두워진 재자들은 예수께서 가르친 교훈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실수로 빚어진 현상적인 문제에 집착하여 떡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일반적인 떡의 모양과 크기는 둥글며 지름이 약 15cm, 두께가 약 1.5cm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보통 밀기울을 빻은 소맥분(小麥分)으로 만들어졌으나(삿 6:19;삼상 28:24;왕하 4:41), 때로는 보리 가루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민 5:15;여하 2:10;요 6:9).
한편 이는 6절의 예수의 영적 교훈을 이 땅의 현실적 문제에 대한 지적으로 받아들인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를 드러내 주는 구절이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아직 이들이 예수의 참 정체, 즉 예수께서 신적 메시야이시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건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이신 사건에 연이어 일어난 것임을 고려할 때 예수의 능력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는 아직도 심각한 상태이며, 더 나아가 예수께서 영원과 절대의 구원 문제에까지 권능과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의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과 오해는 이 당시 제자뿐만 아니라 현대의 신자들 중에도 많음을 발견한다. 즉 예수께 영원한 절대적 구원이 아닌 이 땅의 빵과 권력의 축복만 요구하는 기복(圻福)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어리석음과 오해를 재연시키고 있다.
=====16:8
@예수께서 아시고 - 여기서 '아시고'(* , 그누스)는 체험적 앎보다 직관적으로 인식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예수는 제자들의 대화를 전해 듣거나 엿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에 있는 생각들을 직관적으로 통찰하시고 계셨음을 나타낸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끔 사용하신 독특한 표현이다(6:30;8:26;14:31). 이는 '믿음이 없는'(17:17)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그들이 예수의 인격과 신분을 믿긴 믿되 그분의 능력 또는 역사(役事)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거나(14:31) 잊고서 생각치 않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Clarke). 그리스도는 당선의 사람들에게 온전하고도 전적인 믿음을 바라고 계신다(히 11:6).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 예수께서는 그들의 물질 중심의 사고를 질타(叱咤)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바른 시각을 지니도록 인도하시려 하셨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진리를 조금도 파악할 수가 없다(히11:1,2)
=====16:9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이성적 깨달음 또는 지적 인지(認知,perception)를 가리킨다. 이는 곧 제자들이 예수께서 베푸신 교훈과 각종 이적을 접하고서도 아직 이성적 지식으로 완전히 수납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영한 말이다(15:16). 이는 곧 이적을 경험하는 그 자체가 전인적인 지식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진정 성령의 내적 조명(illumination)없이는 진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요 14:26).
@몇 바구니 - 여기 '바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피노스'(* )는 여행자들이 지니고 다녔던 조그마한 손바구니를 가리킨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적 급식(給食) 사건(14:13-21) 뒤에 제자들이 그 남은 떡 조각을 거둬들일 때 사용했던 용기이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광주리'(10절)란 말과 대조되어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사건이 본질적으로 다른 각각의 두 이적이었음을 확연히 보여준다.
=====16:10
@몇 광주리 - '광주리'에 해당하는 원어 '스퓌리스'(* )는 장년(壯年)이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릴 수 있을 만큼의 큰 바구니이다(15:37;행 9:25).
이는 9절에서 말하는 '바구니'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칠병이어 사건 때 사용되었던 것이다(15:32-38).
@기억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 제자들을 질책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기억'해야만 했던 그 순간에 과거의 이적적 체험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즉 그들은 예수의 두 이적 사건 흘러간 과거의 일로 간과해버렸지 그것을 산 경험, 산 지식으로 수용하여 현실 생활에 재현, 재생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부터 과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기적 사건들을 대대 후손에게 전하고 기억하도록 하는 종교 교육을 시행했었다(신 7:18,19;32:7;대상16:12,13:시 77:11;78:4,11;105:5,6;106:7,13,21).
=====16:11
@어찌 내 말한 것...깨닫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는 거듭해서 제자들의 잘못된 인식과 무지를 책망하고 계신다.
사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미 주어진 수많은 증거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인위적인 표적만을 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교훈'을 질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지금 예수와 그가 베푸신 이적을 믿지 않는 바로 그러한 불신앙적 태도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들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그 이적들이 지닌 중요한 의미들을 확실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두 급식 사건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다시 기억토록 촉구하셨뎐 것이다.
=====16:12
@그제야 제자들이...깨달으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가들에게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하나 설명하며 진리를 깨치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대신 당신이 주신 계시를 그들이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영적 훈련을 통해 성슥한 제자로 자라게 하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 이는 위로부터 내려온 참계시와는 반대되는 인본주의적 교훈을 가리킨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시자요 전통주의자들로서 자기 힘으로 얻는 의(義)를 강조하였다. 특히 그들의 의식과 유전은 위선적이며, 이율 배반(二律背反)적인 것으로 마침내 영적인 무지와 전인적인 죽음을 초래하게 만든다(눅 12:1). 이에 비해 사두개인들은 모세 5경시 권위만 인정하고 부활과 영생과 사후의 영원 세계 및 귀신의 실재를 거부하는 현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기복주의적 이론가들이었다(행 23:8). 특히 그들은 실천적인 면에서 언행이 불일치한 위선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제사장 계급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교묘한 합리주의적 교훈을 통해 백성들을 미혹했다(6절).
=====16:13 <현재의 가이샤랴빌립보>
@가이사랴 빌립보 -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방,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가이사랴 '와는 구별된다(행 10:1).
따라서 본문의 가이사랴 빌립보나 갈릴리 호수 북방 약40km지점, 헬몬산 기슭 해발 약 345m에 위치한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이다(막 8:27). 이 마을은 원래 조그마하였으나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빌립(눅 3:1)에 의해 확장되었다.
한편 그는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곳을 '가이사랴 '라 하였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추가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라 불렀다. 이곳 주민들은 데부분이 이방인으로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그중 원주민들은 바알을, 헐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野獸)의 신(神)인 '판'(pan)의 산당을 지었으며 헤롯은 가이사 아우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의하여 이곳에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러한 우상의 땅에서 예수 제자들에게 당신이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곳에서도 무리들을 위해 봉사하시기도 했지만 주된 사역은 12제자에게 국한되었다.
@물어 가라사대(* , 에로타) - 여기 헬라어 '에로타'는 행위의 시작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묻기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중간 결산하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 수난 사건을 위하여 제자들을 훈련시킬 필요성을 느끼시고 그들에게 제자로서의 핵심적 사항을 문답식으로 교육시키셨다.
그 첫째 질문이 예수 자신, 곧 인자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같은 질문에 앞서 먼저 성부 하나님께 자신의 앞 일을 의탁하시는 기도를 드리셨다(눅 9:18). 실로 중요한 시점이 이를 때마다 예수는 이처럼 마음을 하늘로 향하시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이를 직역하면 '나는 스스로를 인자로 부르는이, 사람들은 나를 무엇이라 표현하는가 ?'이다. 이에 비해 마가와 누가는 '인자'란 용어를 생략하고 있다(막 8:27;눅 9:18). 여기서 어느 형태의 질문이 본래의 것인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만이 이 칭호를 사용하신 것과, 이 칭호로서 예수자신의 칭호로서 메시야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본서의 형태가 원형이라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아마 마가와 누가는 이방 출신 독자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이 칭호를 삭제하고, '나'라는 1인칭 칭호만을 쓴 것 같다.
한편 여기서 인자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실 때 즐겨 표현 하신 말씀 중의 하나이다. 이 말씀은 사복음서에 81번, 공산 복음서에만 69번 나오는이, 단 두번의 경우(눅 24:7;요12:34)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인자'라 표현하신 데에는 (1) 당신께서는 하나님의 위격과 성품을 가지신(요5:26), 즉 '신성의 모든 강만이 육체로 거하신'(골 2:9)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완전한 사람이심을 암시한다. (2) 예수께서 단 7:13, 14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구약에서 예시하고 있는 구원자이신 메시야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키 위해 오신 이심을 암시한다(21절;20: 18,19,28). 더 자세한 내용은 눅 5:24의 강해 '인자의 개념'을 참조하라.
여하튼 예수께서 하신 이 질문은 당신의 생대를 마감하시면서 당신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 던진 신앙 고백적이며, 종말론적인 물음이다. 실로 이 물음은 예수를 믿든 믿지않든 호흡이 있는 인격들이면 예시없이 대답해야만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담은 곧 그의 현재와 미래를 영원히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16:14
@더러는 - 백성들이 '인자'이신 예수께 대하여 온전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비록 대부분이 다시 오기로 약소된 예언자적 인물이나 메시야와 연관이 있는 인물로 이해하고는 있었었만 아무도 예수의 메시야성을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이하를 살펴보면 제자들은 사람들의 견해가 '예수께 호의적이다'라는 사실을 보고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인상을 준다. 그 예로 그들은 예수를 소위 '바알세불' 또는 죄인의 친구(11:19)라는 일부 극단적인 견해들은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레 요한 - 하나님을 위해 가장 최근에 폭발적인 영과 능력(눅 1:17, 80)으로 일한 자이며 그의 메시지가 예수의 천국 선교 메시지와 거의 일치했던(4:17) 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분봉왕 헤롯 빌립처럼(14: 1, 2) 예수의 능력과 행하신 역사를 보고 과거 세례 요한의 능력과 복음 전파의 폭발적인 영향력을 기억한 데에서 기인(起因)되었다. 이것은 또한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부활 신앙관에서도 비롯되었다(14:2).
@엘리야 - 구약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백성들의 타락과 종교적 불의를 꾸짖었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왕상 19:10), 말라기에서 바로 그가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에 그분의 선구자로서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고 기록되었다(말 4:5, 6). 특히 그는 죽음을 경험치 않고 승친(昇天)했기 때문에(왕하 1:11) 이러한 기대는 더욱 고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11:14).
한편 이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를 엘리야로 오해한 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보지 못한 비신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듯하다.
@예레미야 -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며(렘 9:1;14:17;31:16;애 1:2, 16) 애쓴 선지자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지으셨던 예수와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눅 19:41). 또한 예레미야의 죽음과 연관된 유대인의 후기 전승 및 구약 외경 마카비 하(下) 2:1-12;15:14, 15 등에 의하면 그가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에 그분의 선구자로 와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저희를 다시 긍휼로 받으시기까지 장막, 언약궤, 분향단 등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할 자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카미그낙(J. Carmignac) 같은 학자는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예수도 이스라엘에 대해 부정적 예언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예레미야와 같은 비운(悲運)의 선지자로 보였을 것이라 주장한다.
@선지자 중의 하나 - 이 말은 그 당시 종말론적 기대들이 매우고조되어 있었음을 입증한다. 그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모세(신 18:15), 이사야(에스드라하 2:18), 에스라(에스드라하 14:9)처럼 다시 부활하여 일련의 종말을 예비하는 큰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평행구인 눅 9:19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위의 분위기를 더욱 확중적으로 제시해 주고있다.
=====16: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는 헬라어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 이(* )로서 직역하면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이다. 이는 분명 예수께서 앞의 견해들(14절)에 대해 못마땅해 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 정확히,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가라는 물음을 제자들에게 던지신 것이다.
특히 여기서 '너희는'( , 휘메이스)은 2인칭 복수 형태의 강조적 표현으로서 예수께서 한 두 제자에게만 질문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12제자들 각자에게 관심을 두시고 강조하여 질문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신앙의 주관성과 구원의 개별성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 볼 수 있다(겔 18:20).
베드로의 고백은(16절) '너희'라는 복수 인칭으로 질문하신 예수시 물음에 대해 자신을 위시한 12세자 모두를 대신한 예언적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16:16
@시몬 베드로 - 사실 베드로는 부르심을 입은 이후 그의 적극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에 따라 예수 앞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남보다 앞서 나서는 등의 열성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베드로는 다른 동료 제자들이 주저하며 마음속으로 베드로와 동일한 신앙 고백을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 담대하고도 신속하게 천금(千金)갈은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한편 '시몬'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 있다(4:18).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신앙고백 사건을 통해 시몬에게 '게바'(수리아 명칭으로서 반석이라는 뜻), 곧 '베드로'(게바와 동일한 의미어인 헬라어 명칭)란 이름을 새로이 부여하셨다.
한편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까지 자신의 인간적 열성을 나타냄으로써 계속 실패했으나(23절;17:4, 5;26:31-35, 69-75),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이후에는 제자들 가운데서 항상 우선이 되어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며(행 2:14;3:3-7;4:8;8:14)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은 역할을 하였다(갈 2:9).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주 예수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완벽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기독교 신조(信條)의 핵심을 이른다. 이 고백 가운데에 예수의 인성('그리스도')과 신성('하나님의 아들'), 에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의 본질적 신분 등이 담겨 있다.
물론 베드로의 이 고백은 전혀 새롭고 획기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전에 몇몇 제자들(요 1:41, 49)과 가버나움에서 무리가 예수를 떠나 갈 때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것이다(요 6:69). 그러나 예수의 초기 사역 당시(4장)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단순히 정치적 측면에서 받아 들이려 했던 대중들의 기대를 회피하시기 위해 그러한 신앙 고백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특성 및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오류들(14절)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 요구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쉬)는 단순히 2인칭 대명사인 '당신'을 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마쉬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여 하나님의 종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의 인성(人性)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21절;20:28;눅24:7).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제사장, 왕, 선지자들이었다(출29:29;30:30;삼상 16:13;26:11;왕상 19:16;시 89:20;사 45:1). 따라서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왕,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실 참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1;눅1:32, 33;행 3:22, 23;히 4:15;5:6,10).
한편 본문에는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앞에 관사 '호'(* )가 붙어 있는데 이는 예수, 바로 그분이 일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능가하는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구원자, 곧 메시야가 되심을 힘주어 강조하는 표현임과 동시에 그분의 절대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이와 더불어 '살아계신'(* , 토 조온)이란 '내재적 생명이 충만하신 ', '영원히 생존하시는'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실로 이러한 표현은 오직 영원자존적 존재이신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요 5:26;살전 1:9)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탁월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분의 신성(神仙)을 강조하는 말로서 그분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 받으신 분(요 7:28, 29;8:18,19)이요, 하나님과 하나되신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점(요 5:17,18;10:29,30 33)등을 나타낸다.
=====16:17
@바요나 시몬아 - 여기서 '비'(* ,바르)는 아람어로서 '아들'을 뜻하며, '요나'(* )는 시몬베드로의 아버지로 히브리어 '요하나'(* , John,요한으로도 부름, 요 1:42)의 축소형이며, '비둘기'라는 뜻이다. 그리고 '시몬'(*)은 베드로의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베드로의 원래의 이름을 부르신 것, 즉 새 이름인 '베드로'(요 1:42)라 부르시지 않고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뒤의 말씀과 연관시켜 볼 때 매우 의미가 크다 하겠다.
실로 그의 천연적인 신분인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서의 시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 신분, 지식 등과 같은 탁월성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 그의 옛 이름을 그의 아비의 이름과 더불어 사용하신 것이다.
@네가 복이 있도다 - 신약성경에서 유일회적(唯一回的)으로 한 개인에게 국한시켜 사용된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의 정도를 뛰어 넘어 탁월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이다.
한편 베드로가 받은 축복의 종류는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특별한 계시의 은총을 누린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사실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원문이는 바로 뒤이어지는 말 앞에 축복의 이유를 밝히는 '호티'(* , 왜냐하면, for)가 첨가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 여기서 '알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토'(*)는 '계시하다', '보여주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실로 하나님의 이러한 계시의 산물(産物)로서의 영적지각 능력이 있을 때에만 인간은 온건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헐육(* , 사르크스 카이 하이마) - 이를 직역하면 '육신과 피'를 의미한다. 이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된 인간 그 자체와 그의 본성적인 재능, 지식, 지혜 등을 뜻한다(갈 1:16;엡 6:12;히 2:14).
베드로의 이러한 천연성으로서는 도무지 영적 진리를 간과(看過)할 수 없어 것이다. 즉 타락한 이성, 거듭나지 못한 분별력으로는 복음의 비밀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 이는 베드로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의 대구이자 그가 말한 고백의 진정성을 인정하신 것이다.
여하튼 영적 진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영적 능력의 소지자에게 한정적(限定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고전 2:11-14). 이러한 영적 분별력이야말로 베드로가 받은 '복'의 핵심적 요소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본질적 관계성 및 그 각 위의 상호 교호적(interaction)인 인격성 그리고 각 위(位) 사이의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내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하셨다(11:27;20:23:26:39, 42).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초월적 신분 강조키 위해 '하늘에 계신'이란 말로 수식하고 있다(5:34).
=====16:18
@또 내가 네에게 이르노니(* ,카고 데 소이 레고) -이를 직역 하면 '또한 나도 네게 이르노니'이다.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요...'라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거나 하신 것처럼 나도 베드로 너에게 한 가지 진리를 말하겠노라는 의미로 이해할수 있다McNel).
@너는 베드로라 - '베드로'란 헬라어로 '페트로스'(* )로서 '돌' 또는 '반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돌멩이, 돌덩이' 등을 의미한다. 이는 아람어 '게바'(요1:42;고전 15:5;갈 1:18)에 해당하며, 이 '게바'는 예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름이다(4:18). 예수께서는 일전에 그를 향해 이같은 이름을 주실 것이라 예언하셨는데(요1:42), 이제 그것을 실현하시고 계신 것이다.
@내가 이 반석(盤石) 위에 - 앞에 제시된 '페트로스'가 남성형 고유 명사인데 비해 여기의 '반석'(* , 페트라)은 여성형 일반명사로서 '바위 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 때문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을 동일시하려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반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베드로는 단순히 '돌'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중언한 바처럼 예수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는(벧전2:5-8)견해이다(Augustine, Gander, Lenski, Luther).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자도 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도 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2)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처럼 이 말이 교황의 수장권(收藏權)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견해이다(H.M. Riggle, J. Gibbons). 즉 볘드로는 예수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모든 교회와 천국의 전권을 위임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한하고 유흠(有欠)한(23절) 자가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고전 3:11) 모든 신앙 고백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갈 2:9;엡 2:29;벧전 2:5). (3) 계시된 진리, 곧 베드로가 증거하는 신앙고백을 뜻한다(Allen, Calvin, Jerome, Clarke, Robinson). (4) 로마 카톨릭의 극단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반발이 아니라면 베드로 그 자체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이다(Bruce, Plummer).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페트로스'와 '페라'가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시어(詩語)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헬라어의 기초가 되는 아람어는 두 경우 모두 '게바'로 사용되고 있다. 즉 '너는 게바라, 내가 이 게바 위에...'로 표현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이름으로도, 또한 반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람어와 같은 어원인 시리아어로 기록된 '페쉬타 사본'(Peshhitta)에는 이 두 단어가 두 구절 속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 주석은 (3), (4)의 견해를 절충한 것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16-19절 강해 '베드로의 신앙고백 해석'부분을 참조하라.
@내 교회 - 이는 헬라어로 '무 텐 여클레시아'(*, the church of me)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 나와서 다시 아담에게 돌아가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산출되어서 다시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될 것을 시사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창 2:20-25;엡 5:22-32). 한편 여기에서 '교회'란 '에크'(* , ...로부터)와 '칼레오'(* , 부르다)의 합성어로서 교회가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구성되었음을 암시한다(요 1:16,19).
한편 70인역(LXX)의 '에클레시아'는 '집회', '회의', '모임' 등의 뜻인 히브리어 '카할'(* )을 번역한 것으로, 이 히브리어 명사는 본래 여러 종류의 집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나 (Munchen), 점차 하나님의 백성, 곧 여호와의 성별된 무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졌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카할'은 매우 광의적(廣義的)으로 사용되어서 반드시 '에클레시아'로만 번역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가끔 '회당', '군중'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편 70인역에서 일반적으로 '회당'에 한정되어 번역되는 용어로는 '에다'(* , 연합된 회중이란 뜻)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된 적이 없다. 따라서 본문에 '에클레시아'가 사용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및 회당에 대한 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문의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카할'과 같이 넓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사실 뒤에 이어지는 '세운다'는 개념 조차도 구약에서 연유된 것이다(룻 4:11;삼하 7:13;시 28:5;118:22;렘 1:10;암 9:11). 이와 관련해서 래드(G. E. Ladd)는 자기의 에클레시아를 세우겠다는 예수의 선언은 예수에 의해 확립된 공동 단체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관계임을 시사해준다. 바로 이 공동 단체가 장차 새계시와 연관을 맺게 되는 '믿음의 눈을 지닌 신실한 남은 자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이제 자신이 메시야로 인정되자, 자기의 에클레시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한편 본문의 구절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을 은연(隱然) 중에 드러내고 있다는데 그 중요점이 있다. 실로 여호와의 백성은 이제 이 땅에 오시고, 신앙 고백되어진 메시야의 백성이 된다. 비록 당시 쿰란 공동체가 스스로를 언약 백성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는 오직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에클레시아라 말씀하신다, 정녕 예수를 믿고 그의 피로써 확립된 새 언약의 백성만이 그의 에클레시아라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26:28).
이와 더불어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교회'와 그의 '나라'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Hill). 이 두 단어는 서로 상이한 개념, 즉 전자는 '백성', 후자는 '지배', '통치'의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닌다(13:28-30, 36-43). 그렇다고 해서 이 양자를 완전히 구별된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Walvoord). 왜냐하면 메시야의 통치는 메시야의 백성을 불러내어 구분하기 때문이다. 메시야의 나라는 메시야에 의해 세워지고, 그 백성은 바로 그곳에 모이게 된다. 또한 예수의 에클레시아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최종의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는 역사에 나타난 전초 기지이다.
실로 그 나라가 최종 완성될 때 메시야의 백성은 그 나라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풍성한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세력도 메시야가 친히 세우신 교회를 제거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완성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세우리니(* ,오이코도메소) - 헬라어 원문에서는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가 행한 신앙 고백의 실체위에 장차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암시한다.
사실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기원을 가진다. (1) 근원적인 기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안에는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 자신의 은헤를 나타내기 위하여 교회 조직이 이루어졌다(엡 1:3-6).(2) 역사적 기원. 그리스도의 예언(8절)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신약 교회가 성립되었다(행 2:2-4;4:32). 구약에 이미 '교회'라 불리우는 광야의 이스라엘 무리가 있었지만(행7:38) 이는 장차 주님께서 세우실 교회의 예표(豫表)였고, 실제는 주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들 위에 임하신 오순절 때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근거하여 새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로 연합하여 주님의 몸, 즉 교회가 되게 하셨다(행 2:1-4;4:32;고전 12:13).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여기에서 '음부'란 헬라어로 '하데스'(*)로서 '지하 세계, '죽은 자의 거처'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히브리어로 선인과 악인이 구분없이 들어가는 '죽은 자의 영역'이란 뜻의 '스올'(* )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어둡고 소외된 장소로서 매우 높고 단단한 성벽과 문으로 둘러처져 있기 때문에 인간을 한 번 받아들이면 다시는 내어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권세'(* , 퓔라이)란 문자적으로 '대문'이란 뜻이다. '음부의 권세'란 '음부의 문'(gate of Hades)이라는 의미로서, 음부로 들어가는 문에는 항상 죽음이 따르게 된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 및 이와 유사한 표현들은 정경(욥 17:16;38:17;시 9:13;107:18;사 38:10)이나, 유대인의 외경에서(솔로몬의 지혜서 16:13;마카비 3서 5:51;솔로몬 시가서 16:2), 또는 이방 문서에서도(Homer,Iliad 9. 312;Odyssey 11. 277; a Schylus Agam 1291;Euripedes Hecuba 1) 자주 나타나는데, 쓰일 때마다 이 말은 사망과 임종을 의미한다. 따라서 RSV는 본문의 구절을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the powers of death shall not prevail)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이기지 못하리라'를 나타내는 '카티스퀴수'(*)은 '대항하여 힘을 겨루다'는 뜻의 '카티스퀴오'(*)의 직설법 미래 3인칭 형태로서 결국 죽음의 세력이 교회의 한 부분도 이길 수 없거나, 비록 잠시 이긴다 하더라도 곧 패망하여 영원히 굴복할 것이라는 강한 암시(暗示)를 제공하고 있다. 실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설립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육체적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문'을 깨뜨리시고 죽음의 정복자로서(롬 6:9;계 1:18) 군림하시기 때문이다(Alford).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생존하셔서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保證)이 되실 뿐 아니라 교회의 영속성의 영원한 지지자(支持者)가 되신다(고전 5:50-58).
=====16:19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본문은 사 22:22에서 유래한 내용으로서 그곳에는 다욋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절대 주권을 예언하고 있다(계 3:7).
한편 여기 '열쇠'는 청지기로 임명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창고관리에 대한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표식, 문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천국'은 지금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교회, 곧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장차 세워질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대상에 대해서 몇 가지 대별(大別)되는 견해가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으로서 베드로 한 사람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고, 역사적으로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그 권한이 계속 부여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하여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A.J. McClain).(3)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더욱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견해이다(Plummer). (4) 12사도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12사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Wycliffe, Hendriksen). 이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천국(교회)은 궁극적으로 유대인들(행 2:14)과 이방인들(행 10:1-11;15:7, 14)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28:18-20).
그렇다면 '천국의 열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가 계시에 의혜 점차 깨달아지는 천국 복음을 선포함으로써(4:23)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열어 주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행 2:14-39;3:11-26;4:11, 12:8:20-23) 바로 이런 방법으로 주께서는 교회에 구원 받은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행 2:45), 자기 교회를 강건하게 세우시는 것이다(18절). 이와 더불어 '천국의 열쇠'가 매고 풀 수 있는 통제권이 따르는 것으로 보아 공개적이고도 심각한 범죄를 범한 자에게 교회를 통한 천국의 축복을 금할 수 있는 치리 및 입법 통제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행 8:21;고전 5:1-13).
실로 이 땅의 교회에서 치리(18:17;딛 3:10)는 천국의 통제권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8:12). 이로써 원소유자이신 예수께서 인간에게 위탁하신 '천국의 열쇠'는 사도들을 위시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인정과 함께 자신들의 사역을 수행하고 그 권위를 세 우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땅에서...매면 히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 이처럼 대치되는 전통적인 랍비들의 용어 사용법에 의하면 '매다'(* , 데세스)란 '금지하다' 또는 '금지하여 불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풀다'(* , 뤼세스)란 '허락하다' 또는 '허락하여 합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고 한다. 즉 그들은 이 용어를 어떤 행동의 규율을 부가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대치되는 두 용어를 응용해 유대인들은, 인도적이고 자유스러운 힐렐(Hillel) 학파의 랍비들과 엄격하고도 보수적인 샴마이(Schammai)학파의 랍비들의 '묶은'것들을 '푼다'는 말을 통해 두 학파간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본문의 '풀고', '맨다'는 말은 여러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를 베드로의 수장권(首長權)과 절대적 권한을 가리킨다고 한다. (2) 특별히 죄를 면제하는 권한을 가리킬킨다는 견해이다. (3) 단순히 교회에서 행동의 규범, 곧 허락과 금지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4)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교회 치리권과 그의 권위의 탁월함을 근거로 해서 그가 제정하는 규칙과 그의 사도적 권위에 합당하게 권면하고 실행한 내용들이 하늘에서도 인정되고 비준(比準)될 것이라는 견해이다(Josephus). 물론 이 견해는 베드로의 권세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그리고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요, 처음으로 놓인 돌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는 견해이다. 결국 베드로는 '구원사적 수위직'(salvation historical primacy)을 차지하게 된 것이며, 그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이 놓여지고 또한 매고, 푸는 권한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 제도나 사제주의 및 성직자의 독재 개념은 본문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한편 메시야의 종말론적 백성인 교회가 천국의 열쇠, 곧 매고 푸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면, 그 일의 하나는 앞에 언급된 대로 진리 선포와 사도적 권위예 의한 권위와 권면 이외에 신앙 고백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징(權懲) 일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사를 추적해 보면 분명 권징은 사도들, 장로들, 나아가서 온 교회의 특수한 임무임을 알 수 있다(고전 5:1-13;고후 13:10;딛 2:15;3:10 ,11). 더욱이 권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 고백을 근거하였을 뿐 아니라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대망하는 무리들로 구성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스스로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사실 교회가 담당한 진리의 참된 선포는 이 권징을 전제한 것이며 또한 이를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16:20
@이에(* , 토테), - '그리고 나서', 그 때에'(then)를 의미한다,
이는 시각적인 연속성을 강조한 말로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지닌다.
@제자들을 경계하사...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는 사실이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자 예수께서 즉각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1)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로서 그들은 스승이 스스로를 나타내신 방법과 한계성 안에 머물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을 회심케 하고 천국 시민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이같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하는 것이다. (2) 제자들의 욕망에 찬 생각들을 잠재우시기 위해서였다. 비록 당시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이 되어졌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고난받는 메시야 상(像)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메시야 도래의 선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곧 이어지는 베드로의 실수는(22절) 이같은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실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예수의 사역의 본질과 그분이 가르치신 천국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3)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적인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각종 이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다(요 6:14, 15).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經綸)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방해하는 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에서 예시된 메시야를 그의 정치적인 욕구, 즉 현재 외부(로마)의 압제(壓制)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혁명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다(요 12:34;행 1:6).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리실 경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할 당신의 사역의 노정에 더웅 더 혼선만 빚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당신 자신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막 3:12).
=====16:21
@이때로부터 -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시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이후부터라는 말씀이다.
한편 이 표현은 여러 학자들(Lohmeyer, Stonehouse, kingsberry)이 주장하는 것처럼 본서 가운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두 부분(4:17)가운데 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일대 변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부터 예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공개적으로 거듭 역설(力說) 하심으로써(17:12, 22, 23;20:19;26:12) 제자들로 하여금 '그매'를 준비하게 하셨다.
@예루살램에 올라가 -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증심이요, 구약 율법 교육과 각종 종교적 의식의 중심지이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오신 예수께서는 바로 이곳이 당신의 수난의 현장이 될 것엄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이 준비되고 있는 예루살렘에 욜라 가셔야만 했던 것은 그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한 바였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26:54;눅 24:26, 46). 즉 예수께서는 예비된 고난의 잔을 능등적으로 수용하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인류의 구원자요 소망이 되실 것이었다(막 10:45;요 1:29;고후 5:21).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이들은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 부류의 무리들이다(2:4). 그런데 마태가 특별히 이들 각각을 여기에 언급한 데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즉 '장로들' 이란 유대의 열두지파들 가운데에서 재덕(才德)을 겸비하고 존경받는 행정 지도자들이며, '대제사장들'이란 일반적으로 구약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으로서 나오는 '사독'(왕상 2:35)의 후예들로서 사두개인들 가운데서 배출되어지는 선민 이스라엘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들이었고, '서기관들'이란 '율법사'(22:35;눈 7:30;10:25;11:45, 46, 52) 또는 '교법사'(눅 5:17; 행 5:34)로 불리우는 자들로서 율법 보존과 백성의 종교교육을 담당했던 무리들이다. 따라서 이 세 부류의 공회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종교를 대변하는 무리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마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종교계 전체가 예수를 배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Nosgen).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핵심적인 사역의 내용을 일컫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백성 대신 죽음의 형벌을 맛보셔야만 했다. 그러나 죽으심 그 자체가 당신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만약 성경의 복음이 예수의 대속 희생에서 그쳤다면 그것은 사랑과 희생의 복음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구원과 승리의 복음은 못되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제 삼 일에'란 '사흘반에'(막 8:31)란 표현과 동일한 것으로서 반드시 72시간(24*3) 꽉찬 때라는 의미보다는 오혀려 하루 중 일부를 하루로 계산하여(Hendriksen) 이뤄지는 사흘째 되는 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로소(* , 에릍사토) - 이는 '시작하다'는 뜻의 '아르코'(*)의 부정과거로 예수 생애가 새로운 국면(局面)에 접어들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 예수를 위한 베드로의 인간적인 열정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붙들고'(* , 프로스라보메노스)란 '프로스'(* , 옆으로 )와 '람바노'(* , 손에 취하다 , 사로잡다 )의 합성어의 중간태 분사로서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을 나타내준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8:32의 수리아 시내 사본(Syriac Sinaitic)에는 본 장면을 '그가 마치 예수를 불쌍히 여기기나 하듯이'라고 표현하여 베드로의 인간적이며 정적(靜的)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서 '간하여'(* , 에피티마오)란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rebuke) 등의 뜻을 갖는다.
이는 베드로가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직후 예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예고말씀을 듣자 책망조로 예수의 뜻을 가로막고, 어떻게든 그분의 뜻을 돌이키려고 훈육(訓育)한 행실을 보여준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 히레오스 소이 퀴리에) - 본문은 헬라어 '히레오스'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히레오스'를 '호의를 가진', '자비로운', '은혜로운' 등으로 보아 '주여 이 일이 당신에게 정녕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주여,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Gracious to you, Lord)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히레오스'가 히브키어 '하릴라'(* ,결코...않다)와 같은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더 많다. 이는 70인역(LXX)에서 흔히 쓰는 용법으로서, 누구와 맞서는 상황에서 '결코'(never), '그 일이 당신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실 것입니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베드로는 메시야되신 예수를 인류구속을 위한 고난의 종(사 53장)으로 이해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만것이다(Wycliffe). 결국 베드로의 이 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예수에 대한 열정적이고도 직선적인 사랑을 나타낸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왜곡하고 구속사의 큰 흐름을 거스리는 인간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구속 사역의 참의미와 영원한 메시야 왕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혈기방자한 인간의 감정을 내세을 때 사단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일이 결코...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우메 에스타이 소이 투토) - 이틀 직역하면 '이일이 결코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this never shall be to you)이다.
이는 마치 베드로 자신이 그 일의 발생을 미연(未然)에 방지할 수 있는 자인 것처럼 단호한 부정의 의지를 피력(披瀝)한 것이다.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 혹자는(B.F.Meyer) 이를 '예수께서 베드로를 외면하시며(등을 돌리시며)'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문맥 전개상 조화되기 어렵다. 오히려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기 위해 그를 향해 돌아서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갈은 세 가지의 호된 비난을 하신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 이 명령은 예수께서 사단과 직접 대면(對面)하셨을 때 이미 하신 바 있다(4:10).
한편 이는 베드로 자신이 사단이라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단에게 이용받은 도구, 즉 사단이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가까이 왔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사단은 살아있는 생물, 특히 사람들을 매개체(媒介體)로 자신이 목적하는 바에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창 3:1-5;요 13:27;행 5:3;계12:9).
한편 이 꾸짖음은 단순히 사단의 도구가 된 베드로가 예수의 시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헛된 생각이 예수가 추구하는 길에 놓인 장애물이 되므로 그 길에서 즉시 제거되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이는 베드로로 하여금 제자의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요구로 볼 수 있는데, 사실 제자란 따르는 존재이지 주의 뜻을 거스리고, 이끄는 자가 아닌 것이다(막 1:17, 20;8:34).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스칸다론 무에이) - 이를 직역하면 '너는 나에게 장애물(방해물)이다'(you are an offense to me)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를 결코 넘어뜨리게 할 수는 없으나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고 훼방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통해서 교묘하게 덫을 놓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조금전만해도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반석'이라 부르셨다. 그러나 사단의 도구로 전락(轉落)한 지금 그를 다른 종류의 '반석', 곧 장애물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벧전 2:8). 마치 사단이 예수에게 고난없는 영광과 왕권을 제공하려 했던 것처럼 메시야가 승리자요 정복자로 오실 것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기대감을 그대로 지닌 채 이제 사단과 똑같은 방해 요소로 등장하고만 것이다.
한편 베드로가 오해함으로써 예수에게 넘어지는 자가 되었던 그 고난의 메시야 개념은 예수의 부활 후에는 다른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리끼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고전 1:23).
@하나님의 일...사람의 일 -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섭리한 바대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21절)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 곧 예수가 수난의 현장에 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집착(執着)했던 것이다.
실로 그는 철저히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세속적 관점에서 예수의 수난 사건을 평가함으로써 결국 예수에게 크나큰 수치와 장애를 안겨 주고 말았다(Chrysostom).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스숭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참된 제자의 요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당신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치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 , 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움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좇을 것이니라(* , 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16:25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 여기서 '목숨'(* , 프쉬케)이란 '영혼'(soul), '생명' 등을 의미한다. 이는 목숨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 및 인격의 중심 또는 그 사람의 자아까지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나친 애착을 갖고 육체적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거나(히 2:15) 인격적 자아, 곧 지성, 감정, 의지 등을 고수(固守) 보존함을 뜻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위배되는 일로서 종말에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상실(喪失)하게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종말론적이며 존재론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10:39).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자아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우면 그는 오히려 종말에 이르러 영원한 생명의 환희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정녕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께서 참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 역설적 진리가 가능한 것이다(요 11:25, 26;15:1-7). 예수의 참제자는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일시적 생명을 단호히 버릴 줄 아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하다. 한편 본문예서 '찾으리라'는 말은 '구원하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무엇을 '얻는다'는 말보다 더욱 완전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암시한 다. 즉 이 '구원'은 뜻밖의 구원을 의미한다(외경 지혜서 5:2).
=====16:26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 , 제미오데)이란 '해를 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 )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얻고도'(* ,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롤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 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른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왕상 18:21;히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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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오리니 -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24절;10:24, 25) 장차 있을 당선의 재림과 심판을 제시함으로써 제자들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도록 다시 한 번 고무(鼓舞)시키셨다. 한편 여기서 예수와 더불어 오게 될 천사들은 예수의 사자(使者)들이며 종말적 추수 때에 심판의 대행자들(agents)로서 수종들 것이다(13:41;24:31;25:31, 32).
@아버지의 영관으로(* , 엔 테독세투 파트로스,아투루) - 이를 직역하면 '그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거하실 때도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골 2:9)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당신의 십자가(24절)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된 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안에 거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아버지의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란 그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말인 동시에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부여하신 초월적 특권을 강조하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권한'을 가진 것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것에 대한 확실한 중거이다.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 여기에서 '행한'(* ,프랖시스)은 '행한 일(행 19:18), '기능', '활동'(롬 12:4)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 개인에게 주어진 직임을 온전히 수행했는지(눅 12:47, 48;고전 3:12-14;계 20:13)에 관한 평가가 근거가 되는 실천적 삶을 일컫는다.
한편 비록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 할지라도(엡 2:8) 각 개인은 종말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서 현세의 삶에 대해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고후 5:9). 즉 예수께서는 형벌과 더불어 행위에 따른 적절한 상급을 주실 터인데, 이는 각 사람의 일한 대로 주어지는 차등적(差等的)이며 조건적인 것이다(고전 3:8;딤후 4:6-8;계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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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 본문은 인자, 곧 예수의 오심과 그분이 지닌 왕권의 실재성을 강조한 것으로(Wycliffe) 임박한 예수 자신의 수난과 또한 각 제자들의 수난의 현장에서도 결코 두려움 없이 제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권면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본문은 상당히 난해한 구절로 여겨져 왔으며, 그런 만큼 그 해석이 다양하다. (1) 막9:1과 연관시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말할 때 이미 도래했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다(C.H. Dodd). 그러나 이것은 '보다'는 말을 왜곡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견해이다. 더욱이 마태는 마가의 표현인 완료분사(*, 엘레뤼뒤이안, '이미 왔다')와는 달리 현재분사(* , 에르코메논)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 해석으로는 적절치 못하다. (2) 부활 사건 또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Calvin, Grotius). 이 해석이 설득력이 있기는 하나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죽기전에 설명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문맥상으로 충분치 못하다. (3)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보기도 한다(Gaechter, Clarke, Westein). 그러나 바로 앞절(27절)이 예수의 졔림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4) 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본다(Allen). 그러나 예수의 선교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으로(마28:20), '여기 섰는 자들'이 죽기 전에 그 선교적 사역이 완수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급하다. (5) 얼마 후에 있을 변화산 사건을 예고한 것이라 본다(Bengel, Chrysostom, Hilary). 그러나 이 사건이 불과 얼마 후에 일어날 것이라면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진지한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나 '여기 섰는 자들중 죽기 전에...'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터무니 없다. 더욱이 변화산상에서의 3제자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과 본문의 공개적 가르침과는 문맥상 일치를 이룰 수 없다(17:9). 이상의 견해들 보다 (6) 본문을 좀더 일반적 언급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갈다. 즉 본문은 부활, 오순절 등의 특수한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 후 여러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이 나타날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그 예로 제자들의 급증과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거기 섰던 자들'중 다수는 예수의 복음이 로마 제국 전역에 확산되는 것과 개종자들을 풍성히 거두어 들이는 수확의 현장을(9:37,38) 목격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공관복음에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의 유연성(flexibility. 3:2;10:23;12:28)과 본문의 문맥에 잘 어울린다. 한편 본문에서 '그 왕권을 가지고'(*, 엔 테 바실레이아 아우투)란 직역하면 '그의 왕국으로'가 된다. 이 말은 결국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왕국에 속한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지니시고 오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특별히 '왕국'에 해당하는 '바실레이아' (* )라는 말이 '왕국', '나라'라는 뜻 외에 '왕권', '왕의 통치' 등의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이 땅에 '왕으로서 통치하시기 위해 영광과 위엄을 지니시고 오실 것을 강조한 말이라 볼 수 었다(Hendriksen). 이는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롤 물리치시고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시고, 또한 오순절 성령을 통해 각 심령들에 영웡히 임재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하늘 우편에 거하시며 당신의 교회를 친히 다스려가심으로써 당신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해 가고 계신다(엡 1:19-23;빌 2:9;벧전 1:3;계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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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 : 7-21]] 하나님의 의, 목표를 향한 달음질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표준새번억]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NASB] But whatever things were gain to me, those things I have counted as loss for the sake of Christ.
[AMP] But whatever former things were gains to me [as I thought then], these things [once regarded as advancements in merit] I have come to consider as loss [absolutely worthless] for the sake of Christ [and the purpose which He has given my life].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표준새번역]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우리말성경] 내가 참으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 인해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NASB} More than that, I count all things to be loss in view of the surpassing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m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but rubbish in order that I may gain Christ,
[AMP] But more than that, I count everything as loss compared to the priceless privilege and supreme advantag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and of growing more deeply and thoroughly acquainted with Him—a joy unequaled]. For His sake I have lost everything, and I consider it all garbage, so that I may gain Christ,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표준새번역]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는 의, 곧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로서 난 의입니다
{NASB} and may be found in Him, not having a righteousness of my own derived from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faith in Christ, the righteousness which [comes] from God on the basis of faith, [AMP] But whatever former things were gains to me [as I thought then], these things [once regarded as advancements in merit] I have come to consider as loss [absolutely worthless] for the sake of Christ [and the purpose which He has given my life].
[AMP] and may be found in Him [believing and relying on Him], not having any righteousness of my own derived from [my obedience to] the Law and its rituals, but [possessing] that [genuine righteousness] which comes through faith in Christ, the righteousness which comes from God on the basis of faith.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표준새번역]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NASB]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eing conformed to His death;
[AMP] And this, so that I may know Him [experientially, becoming more thoroughly acquainted with Him, understanding the remarkable wonders of His Person more completely] and [in that same way experience]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which overflows and is active in believers], and [that I may share]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y being continually conformed [inwardly into His likeness even] to His death [dying as He did];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표준새번역]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우리말성경]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
[NASB ] in order that I may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AMP] [d] so that I may attain to the resurrection [that will raise me] from the dead.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표준새번역]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 나는 이미 얻었거나 이미 온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좇아갑니다. 이는 나도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NASB]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it], or have already become perfect, but I press on in order that I may lay hold of that for which also I was laid hold of by Christ Jesus.
[AMP]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it [this goal of being Christlike] or have already been made perfect, but I actively press on [e]so that I may take hold of that [perfection]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and made me His own.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표준새번역]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우리말성경] 형제들이여, 나는 그것을 붙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만은 말할 수 있는데,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NASB] Brethren, I do not regard myself as having laid hold of [it] ye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reach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AMP] [f]Brothers and sisters, I do not consider that I have made it my own ye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reach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표준새번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해 푯대를 향해서 좇아갑니다.
[NASB] I press on toward the goal for the prize of 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
[AMP]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heavenly] prize of 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혹시 무슨 다른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내시리라는 것입니다.
[NASB] Let us therefore, as many as are perfect, have this attitude; and if in anything you have a different attitude, God will reveal that also to you; [AMP] All of us who are mature [pursuing spiritual perfection] should have this attitude. And if in any respect you have a different attitude, that too God will make clear to you.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표준새번역] 어찌했든지,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같은 길로 계속 나아갑시다.
[우리말성경]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그 길을 좇아갑시다.
[NASB] however, let us keep living by that same [standard] to which we have attained.
[AMP] Only let us stay true to what we have already attained.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표준새번역]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십시오.
[우리말성경] 형제들이여, 모두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는 것처럼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NASB] Brethren, join in following my example, and observe those who walk according to the pattern you have in us.
[AMP] Brothers and sisters, together follow my example and observe those who live by the pattern we gave you.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표준새번역]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차례 말했던 것처럼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NASB] For many walk, of whom I often told you, and now tell you even weeping, [that they are] enemies of the cross of Christ,
[AMP] For there are many, of whom I have often told you, and now tell you even with tears, who live as enemies of the cross of Christ [rejecting and opposing His way of salvation],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표준새번역]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말성경]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요, 그들의 영광은 자신의 수치에 있으며 그들은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NASB] whose end is destruction, whose god is [their] appetite, and [whose] glory is in their shame, who set their minds on earthly things. [AMP] whose fate is destruction, whose god is their belly [their worldly appetite, their sensuality, their vanity], and whose glory is in their shame—who focus their mind on earthly and temporal things.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표준새번역]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는 그 곳으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로부터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NASB] For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from which also we eagerly wait for a Savior, the Lord Jesus Christ;
[AMP] But [we are different, because]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from there we eagerly await [the coming of] the Savior, the Lord Jesus Christ;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표준새번역]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말성경] 그분은 만물을 그분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NASB] who will transform the body of our humble state into conformity with the body of His glory, by the exertion of the power that He has even to subject all things to Himself.
[AMP] who, by exerting that power which enables Him even to subject everything to Himself, will [not only] transform [but completely refashion] our earthly bodies so that they will be like His glorious resurrected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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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랴빌립보...오늘날 바니아스] 메롬호수는 갈릴리호수 북쪽에 있는데 시내로 갈릴리호수와 연결됨...메롬호수 북서쪽에 헬몬산이 위치....즉, 헬몬산과 메롬호수(=오늘날 훌라호수) 사이 중간지점에 가이사랴빌립보가 있음 : 여기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베드로가 고백했었고....또한, 고넬료가 하늘로부터 직접 성령세례를 받고서, 이방인전도의 새로운 이정표요 전환점을 연 곳이기도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