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3장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많은 무리가 나아오다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열두 제자를 세우시다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예수와 바알세불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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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개요)
본 장(章)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류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Ⅰ.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심과 그일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헤롯당과 연합(1-6).
Ⅱ. 병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으려고 사방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에게 몰려 나아옴(7-12).
Ⅲ.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열두 사도들을 임명하심(13-21).
Ⅳ. 예수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참람되게 트집을 잡는 서기관들에게 예수께서 답변하심(22-03).
Ⅴ.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깝고 다정한 가족으로 대하심(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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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기적과 군중(막 3:1-12)
이 앞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우리 주 예수께서는 먼저 회당에서 그리고 다음에 바닷가에서 일하시기에 분주하셨다.
이는 당신께서 어느 한두 곳에만 제한해서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나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 곳이 회당이거나 그 어느 다른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 중에 주님이 같이 계시리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일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롬 10:13) 주께서 만나 주시고 축복해 주신다.
믿는 자들이 어느 곳에서나 기도하기를 주께서는 원하시는 것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주께서 행하신 사실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Ⅰ.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에 그는 거기에 주어진 기회를 잘 포착하여 선한 일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그 전하신 복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아니면 적어도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 일임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하시었다.
우리는 마태복음 12장 9절에서도 이 말씀을 살펴보았다.
1. 그 병자의 입장이 가련하였다. 그는 "손 마른"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병든 손으로는 그는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이 가련한 사람들은 마땅히 동정을 받은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도울 수 없는 분은 마땅히 도움을 받아야 한다.
2. 구경꾼들은 그 병든 사람에게나 대 의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나 매우 불친절하였다.
그 불쌍한 병든 이웃을 위해 협조를 보이는 대신 그들은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그의 병 고침을 받는 일에 방해를 놓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일 지금 안식일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병을 고친다면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그리스도를 송사하려는 눈치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비참한 입장에 놓여 있는 불쌍한 병든 몸을 일반적인 치료 방법으로 치료해 주려는 외과 의사나 내과 의사에게 방해를 놓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주 부조리한 짓이었을 것인데 하물며 아무런 육체적 노동이 아니라 다만 말씀한 마디로 병을 치료해 주시는 주님께 방해를 놓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더 어리석은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 구경꾼들에게 아주 신사적으로 대하셨다.
그리고 먼저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공격에 방어의 태도로 임하시었다.
(1) 예수께서 그들의 잘못된 심판에 대하여 잘못을 깨우쳐 주려고 일하시었다.
그는 그 병든 사람에게 "일어서라"고 명하시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모습이 더욱 잘 나타나게 하여 그들로 그에게 대하여 동정심이 일어나게 하기 위함이요, 만일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그런 불쌍한 사람을 고쳐 주시려는 주님을 송사하려고 한 자기들의 일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께서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시었다.
"안식일에(지금 내가 행하려고 하는)선을 행하는 것과, (너희들이 지금 행하려고 하는)악을 행하는 것, 그리고(지금 내가 행하려고 하는) 생명을 구하는 것과(너희들이 지금 행하려고 하는)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얼마나 훌륭한 질문인가?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질문이 자기들을 궁지에 몰아 넣을 것임을 알고 "잠잠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적인 행위에 대해서 참으로 완고하였음을 주의하라. 그들이 진리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에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그들이 저항하지 못할 때에는 곧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2) 그들이 빛에 대하여 반대하자 주께서 그들의 완고함을 슬퍼하시었다(5절).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예수께서 주시한 죄는 "저희 마음의 완악함"과 그가 행하신 기적의 증거에 대한 그들이 무감각성, 불신앙을 주장하는 그들의 완고한 고립이었다.
우리는 잘못 말해진 것을 듣는다. 그리고 잘못 행해진 것을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고통의 근원과 심령의 무지와 완악함을 보신다.
①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어떻게 노하셨나 살펴보자.
"저희를 둘러보시었다".
왜냐하면 그 곳에는 많은 무리가 모였고 그들은 예수를 둘러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노하심으로" 둘러보시었다. 아마도 그의 노가 그의 용모에 나타나신 것 같다.
그리스도의 노는 하나님의 노와 같이 당신 자신에게는 추호의 불안도 없고 전적으로 우리에게서 기인하는 노인 것이다.
죄인들의 범하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몹시 불쾌하게 하는 것임을 유의하라.
화를 내면서도 죄는 범하지 않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바와 같이 오직 죄에 대해서 노하는 길이다.
마음이 완고한 죄인들은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게 될 때에"(계 6:17)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두려워 떨도록 하라.
②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동정하셨나 살펴보자.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광야에서 그들이 조상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 사십년 간 근심하시었다.
우리 주 예수께 있어서 죄인들이 자기를 자신의 멸망에 치우치는 것을 보거나, 그들의 죄의 각성이나 죄로부터 회복되는 방법을 완강히 부정하는 것을 보는 것은 큰 슬픔임을 기억하라.
그것은 주께서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심령의 완악함이나 타인들의 심령의 완악함이 우리들에게 슬픔이 되는 좋은 이유이다.
4. 그리스도께서 병든 자들에게 대단히 친절히 대해 주셨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어라."
(1)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가지고 우리를 가르치는 점은 제 아무리 반대가 빗발치듯 요란하게 우리의 진로를 방해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굳은 결의를 가지고 밀고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을 공격하기보다는 차라리 때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일과 쾌락과 편익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비록 정당하지 못한 어떤 공격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하는 민족에서 우리 자신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노하심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부드러웠다.
그럼에도 이 불쌍한 사람을 고쳐 주지 않고 그대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 싼 모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무릅쓰고 그를 고쳐 주신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여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불쌍한 영혼들에게 이루어진 신유의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었다.
우리의 손들은 영적으로 메말랐다. 우리의 영혼들은 죄로 말미암이 힘을 잃고 약해져 선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병 고쳐 주시는 큰 날은 안식일이며 신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장소는 회당이다.
신유의 능력은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신유에 있어서 복음적 명령은 여기에 기록된 바와 같다. 그리고 그 명령은 합리적이고 정당하다.
비록 우리의 손이 메말랐다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의 손을 우리 스스로 내밀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시도해 보아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손을 내밀어 그리스도를 붙들고 영생을 취하여야 하며 그 손을 들어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열심을 다하여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능력이 나타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치유해 주실 것이다. 비록 우리의 손이 메말랐다 하여도 우리의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병 고침을 못 받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과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여 고침을 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과 은혜와 더불어 마땅히 모든 영광을 받아야 할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대단히 야비하게 그리스도를 대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자비를 베푼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의 사랑을 진작시켰어야 마땅할 것이며,
그러한 기적의 역사는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이 믿음을 진작시켰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는 고사하고 교회의 사도인 체하는 바리새인들과 애국자인 체하는 헤롯당들은 그들이 서로 대적관계이었음에도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였다"(6절).
선을 행하기 위해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우리의 주님께서 그렇게 하심같이 고통을 당하더라도 선을 행하도록 명심하자.
Ⅱ. 그리스도께서 바다에 나가셨을 때에 그 곳에서도 선을 행하셨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를 "죽일" 기회를 찾고 있는 동안에, 주께서 그 곳을 빠져 나오셨다. 이것은 환난을 당할 때에 우리의 안전을 위해 자리를 옮겨야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더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예수께서 그 곳에 물러가실 때에 어떻게 무리들이 따라 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들이 예수에게 증오심을 품을 때에 그들은 예수를 자기들 지방에서 내어쫓았다.
그러나 한편 다른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참 진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가 어디로 가시든지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미워한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에게 향한 그들의 존경심을 무시할 수 없었다.
큰 무리가 전국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들을 좇았다. 갈릴리와 같이 먼 북부 지방에서도, 유대와 예루살렘과 같이 먼 남부 지방에서도, 아니 저 이두매 지방에서도, 요단강 건너편과 같이 먼 동부 지방에서도 그리고 두루와 시돈 근처와 같은 서부 지방에서 예수에게 모여 왔다.
(1)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였나 살펴보도록 하자(7, 8절).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자신들을 맡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의 하신 큰 일을"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큰 일을" 행하신 그 위인을 보기 원해서 나왔을 것이고, 어떤 다른 이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서 "큰 일을" 해 주시기를 바라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큰 일"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동기가 됨은 고려할 만한 문제임을 유의하자.
(2)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랐는가 살펴보자(10절).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나보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여기에 표현한 "병에 고생하는 자"의 "병"에 대한 원어는 "마스티가스(3148)"인데 이것은 "징계" "징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병"은 우리의 범죄의 대가로 받도록 계획되었고 우리로 그렇게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그런 범죄에 대하여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다시금 그런 범죄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도록 경고를 하는 것이다.
이런 징벌 아래에 놓여 있는 자들이 예수에게 나아왔다. 이런 징벌은 병을 심부름꾼으로 보내어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묻게 하고 우리의 대 의사이신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도록 하는 것이다.
"핍근히 함이더라."
병든 자들은 서로 예수에게 더 가까이 있고 먼저 고침을 받으려고 밀치고 야단들이었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청원자들로서 예수의 은혜를 받으려고 예수 앞에 엎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져 주심에 의하여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병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만지기를 갈망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실례를 그들은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3)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효과적으로 일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떠한 준비를 갖추셨나 살펴보자(9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 제자들은 전에 어부들이었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어선 몇 척이 있어 "작은 배를(언제나) 등대하도록" 하여 예수를 배에 모시고 같은 해변 이곳 저곳으로 다녔다.
그것은 예수께서 어느 한 곳에서 필요한 용무를 급히 마치셨을 때에 그를 쉽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실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와 주시기를 요구하는 그런 곳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핍근을 피하고 용이하게 빠져나가실 수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군중을 피하는 것이다.
2. 예수께서 바닷가로 물러가시어 얼마나 풍성한 선을 행하셨나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바닷가로 물러 가셨을 적에 게으름을 피기 위해 물러가신 것도 아니고, 그를 귀찮게 따라 다니는 무리들을 보내기 위함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찾아 나오게 된 그 목적을 친절하게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네가 나를 찾는 것은 허사다"라고 말씀하실 분이 결코 아니시다.
(1) 여러 가지 병이 효과적으로 치유되었다.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었다"(막 1:34).
각종 질병으로 앓고 있는 병자들을, 아무리 수가 많고 다양하다 하더라고 예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시었다.
(2) 마귀들이 효과적으로 정복당하였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보면" 그 앞에서 두려워 떤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은혜를 간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위해서 "그 앞에 엎드려"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의 공포에 의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하게 된다(11절).
아무런 은혜도 받을 수 없는 마귀가 자주 이 고백을 하게 될 때에 그 신앙 고백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 귀한 진리가 부정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큰 일들을 하심으로서 당신에게 찬사가 돌아오기를 바라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당신에게서 그러한 혜택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었기" 때문이다(12절).
예수께서는 마치 신문에 요란스럽게 광고를 내듯이 그들의 병 고침을 받은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서두르지 말고 당신 자신이 행하신 그 큰 일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할 것이며, 그 일들의 소문이 저절로 퍼지어 그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두라고 경계하신 것이다(막 1:28; 2:12).
그리고 병고침을 받은 그들이 그런 소문을 퍼뜨려서 그들이 크게 은혜를 받았다는 자만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할 것이며 그런 사건들의 보도를 전하려는 대 기자들이 되라고 권면하시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칭찬할 만한 일을 하고 그 일 때문에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으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훌륭한 마음이 우리 안에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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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제자 선택(막 3:13-21)
위 성경 구절들을 아래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Ⅰ.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수행자들이 되게 하고 기회 있는 대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열두 사도들을 택하셨다.
1.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심에 대한 소개.
"또 산에 오르사." 예수께서 산에 오르신 목적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다(눅 6:12).
사역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조용한 곳을 찾아가 진정한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예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지만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그 기준은 당신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이었다(14절).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부름에 합당하게"(엡 4:1) 생각하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않으시고(삼상 16:17), "부르시"기에 "합당하게" 생각하는 자들과 그가 "부르신" 그 일에 "합당하게" 여기는 자들을 택하시었다.
영화로우신 예수께서 그렇게 하심은 "당신의 눈에 선하심"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신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자유스러운 지배자이기 때문이며 그의 은혜는 그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3. 부르심의 효능.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어" 그들을 무리들로부터 구분하여 당신 옆에 세우셨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주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계신다(요 17:6).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게(그에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그에게로) 올 것이다"(요 6:37).
그들을 부르시는 것은 그의 원하시는 뜻이다. 그리고 즐겨 나올 수 있는 마음을 주신다.
"그의 백성이 그의 능력의 날에 즐겨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쾌히 예수에게 나왔을 것이다. 그 이유는 현세의 예수와 더불어 화려와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그들이 그 일에 있어서 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들에게 허락된 더 나은 일들에 대해서 그러한 전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주께 자기들이 속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일에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4. 이 부름의 목적과 의도.
주께서 "얼 둘을 세우셨으니"(아마 유대인들이 행하는 예법대로 안수를 하셨을 것이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여"
그의 가르침과 생활 방식과 인내에 대한 증인들이 되게 하고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충분히 깨달아서 그것을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인데, 특히 기적에 대한 사실을 증거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예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주께서 그들에 대하여 예정하신 대로 알맞은 자격을 갖추도록 하기에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아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파송을 받기 전에는 복음을 전파하여서는 안되었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랫동안 친밀한 사귐을 가지고 그러한 자격을 그들이 갖출 수 있기까지에는 그들은 보냄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랫동안 교제를 가져야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5.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시었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지상의 어느 위인보다도 아주 뛰어난 귀한 명예를 제자들에게 허락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을 임명하여 "병을 고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시었다(15절에 "병을 고치며"라는 부분 우리 한글 개역판에는 나와 있지 않다─역자 주).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던 그 권세는 기본적인 권세였음을 보여 준다.
주께서 이 권세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그의(내) 아버지 집에"(요 14:2) "아들"로서 소유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권세를 다른 사람들에게 수여하실 수 있는 것이다.
법률에는 "그 자신이 다만 한 사람의 수임자일 때에는 타인에게 그 직권을 위임할 수 없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 안에 생명"의 원천을 소유하고 계셨으며 측량할 수 없이 성령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고전 1:27)에게 이 권세를 주실 수 있는 것이다.
6. 제자들의 이름과 주 .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수를 따라서 "열 둘을 세우셨다."
여기에 나열되어 있는 제자들의 이름은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서열대로 되어있지 않으며 또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대로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나열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베드로의 이름은 제일 먼저 나와 있고 가룟 유다의 이름은 맨 나중에 나와 있다.
여기에서는 마태의 이름이 도마의 이름 앞에 나와 있다.
아마 이런 순서로 부름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마태가 자신의 이름을 도마의 뒤에 나타내었다.
마태는 자기의 성직 수임 순서의 우선권을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뒤에 두고 있다.
이 사도들의 명단에서 오직 마가복음이 주목을 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 하셨다"는 것이다(17절).
아마도 그들은 크고 훌륭한 음성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있었거나 우레 소리와 같은 능력 있는 전도자였거나 또는 그보다도 오히려 이 별명을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동료들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더욱 활동하게 한 그들의 열심스럽고 의욕이 넘치는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말하기를 이 두 제자들은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고 부른(히 12:26) 특별히 뛰어난 복음 전도자들이 될 만하였다.
그럼에도 그 "우뢰의 아들" 중의 하나인 요한은 그의 서신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사랑과 온유로 충만하였고 예수의 사랑스러운 제자였다.
7. 주와 더불어 물러나서 함께 하면서 그에게 더욱 집착하는 제자들.
"집에 들어가시니"(이 말씀은 흠정역에는 19절에 나와 있으며 They went into a House라고 표현되어 있어 제자들이 예수와 더불어 집에 들어가신 일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역자 주) 이제 이 배심은 배심 명부에 등록되었으므로(배심은 열두 배심원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열두 제자를 배심에 비유해서 말한 것 같다─역자 주)
그들은 똑 같이 있어서 그들의 증언을 들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특수 전문 학교의 부서를 정하기 위해 같이 "집에 들어" 갔다. 그리고 그를 즐겁게 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가룟 유다에게 돈 가방을 맡긴 것 같다.
Ⅱ. 끝임 없는 무리들이 예수에게 모여들어 복음을 들었다(20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그들은 누구의 보냄을 받지 않았고 무리하게 그리스도에게 접근하지도 않았다.
어떤 이는 이런 목적으로 왔을 것이고 어떤 이는 저런 목적으로 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는 그 간청자들을 되돌려 보내지 않으셨고 그들을 환영하고 그 각 사람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었다(창 41:16).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넓힌 사람들은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에게 미치는 큰 불편을 쉽게 견딜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선을 행하는 기회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식사를 건너 띠기를 원하고 있음을 명심하라.
열심 있는 청중들과 열심 있는 설교자가 그렇게 만남으로서 상호간에 용기를 북돋아 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지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고 침입하고" 있다(눅 16:16).
이것이야말로 포착할 가치가 있는 일확천금의 호기였다. 그러므로 주를 위시하여 제자들은 이 좋은 기회를 포착하려고 식사도 기꺼이 뒤로 미룰 수 있었다. 좋은 기회를 잃지 말라.
Ⅲ. 예수에게 관한 그 친속들의 염려에 대하여 살펴보자(21절).
가버나움에 있는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21절).
1.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이 예수를 존경하기보다 비난하는 하나의 어리석고 부조리한 염려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이 일을 의심하였거나, 그러한 암시를 받았으므로 그러한 암시를 그들이 믿고, 예수가 마음이 산란해져 있으므로 그를 붙들어 어두운 방에 감금해서 제 정신이 돌아오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예수의 친척들 중 대다수가 예수를 믿지 않고 인색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요 7:5).
그들은 어떤 이들이 예수의 지극한 열심에다 씌워 논 악의적인 누명을 듣고 예수가 미쳤다는 판단 아래 그를 붙들어다 감금하고 활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미친 자"들로 취급을 받았다(왕하 9:11).
2. 어떤 이들은 이 이이 그 진상을 바로 파악한 염려와 행동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원어 "엑세스테(1839)"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그리스도께서 허약해지셨다. 무리들 때문에 식사를 못하시는 때가 자주 있었으므로 허약해지셨다. 그는 무리들 때문에 질식하실 수도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기적을 나타내는 효능이 그에게서 많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우의적인 폭력을 행사하여 예수로 하여금 잠시동안 쉬시도록 하자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의 고통을 당하는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도 공격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일에 용기와 열심을 가지고 일하려는 자들은 그들의 원수들로부터 아무 근거 없는 잔인한 방해와 그들의 친구들의 잘못 판단된 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그 양면공격에 대해서 철저한 방어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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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오해(막 3:22-30)
Ⅰ. 여기에는 서기관들이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가지고 뻔뻔스럽고 불경스런 낙인을 찍는 일과, 그렇게 함으로서 기적을 행하는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의 믿음을 헛되게 하고 무효하게 하며 자기들이 그런 나타나는 역사에 대해 그를 신복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어색한 구실을 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서기관들"이었다(22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그 진로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긴 여행을 통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오류를 범하기 위해 그러한 고통을 자처했던 것이다.
그들은 가장 경건하고 가장 학식이 많은 서기관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들은 아마 예루살렘에서 "주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기 위해 진지한 의논을 하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흉계를 꾸밀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에 대한 명성은 지방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는 서기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이 생각나게 하기까지는 그리스도의 기적에 관한 그런 야비한 암시는 상상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는, 그리스도가 귀신 추방하는 일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바알세블에 지폈"으며, 바알세블과 연합하여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빗대어 말했다.
이러한 경우에 한 가지 계교가 있는데 그것은 사탄이 쫓겨나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동의를 얻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방식에 있어서 이상한 의심을 줄 만한 원인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권세가 있는 자"와 같이 기적을 행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바와 같은 그러한 권세를 그들이 소유하게 된다 하여도 결코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려고 결심하게 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반대에 대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나타내기 위한 대답을 주시었다.
1, 사탄은 대단히 교활해서 그의 소유를 결코 자발적으로 포기하지는 않는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 낼 수 있느냐. ……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23-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저들이 잘못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고 우의적으로 다정하게 그들을 대하시었다.
그는 또한 저들이 꾸며 낸 문제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여 "모든 입을 막고" 말았다(롬 3:19).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마귀의 왕국에 분쟁을 일으켰고 마귀의 권세를 파괴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추세를 취하였으며, 인간의 영혼 안에 잠재해있는 마귀의 세력을 박살내는 것이 분명하였다.
또한 인간의 몸으로부터 마귀를 추방함으로써 당신의 교리를 확증하고 수립하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불경스러운 계획으로 오셔서 그런 일을 행한다고는 추측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탄은 어리석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세력에 직접 대항하여 싸우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마귀와 더불어 접전하시게 되면 사람의 몸에서나 영혼에서나 어디서든지 마귀들을 만나게 되면 그 악한 세력들을 공격하시게 된다(27절).
그리스도의 계획은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상에 있는 악한 세력들을 사로잡아, "그 세간을 늑탈"하시어 당신을 섬기도록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강한 자를 결박"하신 것이며 제 마음대로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며"(막 1:34). 제 마음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므로(막 1:25, 34) 마귀의 세력을 항복시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위험스런 말들을 함부로 말하고 있는 그들에게 주의를 주시기 위해 두려운 경고를 하시었다.
아무리 그들이 자기들의 한 마에 대해서 단순한 추측이라고 말한다든지, 자유로이 생각할 수 있는 언어의 자유성을 들어서 그 책임을 가볍게 하더라도, 그들이 만일 자기들의 그런 불경스런 말을 계속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운명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말은 최후에나 처방이 나올 수 있는 그러한 죄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추측하였던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그들의 죄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와 회개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다.
누가 감히 그러한 변변치 않은 구실을 가지고 그러한 강한 죄의 각성을 외면한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셨으니 제 아무리 큰 죄나 큰 죄인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약속은 사실이다(28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욕하던 많은 사람들이(이 일은 인자이신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죄였으므로 한결 더 무거운 것이다) 용서의 자비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하고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들이 한 말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시는데 그들은 더러운 귀신으로 말미암아 행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30절).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의 모든 은사에 대한 믿음은 안중에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 모든 성령의 은사의 나타나는 역사를 헛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뒤에 그 곳에는 더 이상 증거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하심을……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게 됨을 모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보상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휴식이나 용서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영원한 형벌의 절박한 위험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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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형제들(막 3:31-35)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고 계실 때에, 혈육에 의해서 예수와 친족되는 분들은, 예수에게 무례한 일을 범하게 되었다(그들은 예수께서 그 당시에 그분의 적소에 계심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집안으로 들어가서 예수의 전하는 복음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 서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무례한 말을 듣기 위해 그분이 하시던 복음의 일을 그만 두어야만 하는 것처럼,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려"(31,32절) 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와는 직접 상관하지 않고 그가 하던 일을 중단하게 할 목적으로 사람을 보내어 불러내려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따라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한 생보다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 더 귀한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예수께서는 이 일을 증거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간섭하는 것은 다만 예수 자신에게 지장만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예수와 같이 일을 해 보았더라면, 그들은 예수께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구주로서 이 복음 사업을 하려고 하였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2.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친족들이 누구임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관심을 보여 주었다.
이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때에 그러한 것처럼 당신의 모친에게 대해서 비교적 무관심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인간들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숭배심을 갖기 쉽기 때문에 그 어머니에게 지나친 숭배심을 갖지 않도록 미연에 방비하고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같이 보인다.
우리가 누구에게 가져야 할 숭배심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고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 곧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최상의 존경을 보여 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동등할 수 없고 그 다음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시었다.
이 말씀은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사랑과 관심의 표명이다(33-35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될 좋은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만 말씀을 듣는 자만되지 말고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할 좋은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성도들이 서로 존경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가깝게 연합하고 있는 자들과 친족의 관계를 갖는 것이나,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고 있는 그런 자들과 더불어 우리가 교제를 갖는 일은 확실히 좋은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뼈와 살이"되는 그리스도의 친족들을, 또한 "왕자 같은"(삿 8:18, 19)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화가 임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서 열심히 탄원하실 것이며 그들의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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