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마28장
===살아나시다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경비병의 보고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제자들에게 할 일을 분부하시다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엑수시아....부활하사 그 어떤 제한도 더 이상 받지 않은 분, JC뜻대로 하실 수 있는 무제한적 자유]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보십시오, 나는 이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behold, I am with you all the days until the consummation of the age......and lo, I am with you always [remaining with you perpetually—regardless of circumstance, and on every occasion], even to the end of the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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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8:18...바이-가쉬 야후슈아 비예다바르 알레이헴/엘로힘 레오메르 나탐 리 콜-쉴탄 베-샤마임 우-베-아레츠 ] ...[마28:19...베-아탐 레쿠 엘-콜-하고임 바-아쇼 탈미딤 우-테발르템 오탐 레솀-하-아브 베-하-벤 우-루아흐 하-코데쉬] ... [마28:20...베-라마드템 오탐 리-쉐모르 에트-콜-아쉬르 체비티 에트켐 베-힌네 아노키 이트켐 콜-하야밈 야드-케츠 하-올람 아멘]
[마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베-아탐 레쿠 엘-콜-하고임 바-아쇼 탈미딤 우-테발르템 오탐 레솀-하-아브 베-하-벤 우-루아흐 하-코데쉬] == Q 믿는자, 곧 제자된 엘로힘들로 하여금 [그 안에 계신 아버지-아드님 성령으로 완전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성숙케 하라... == ##베-아탐<바브, 알렙-타브-멤>--Q의 모든 속성 담긴 그릇 ##레쿠<라멛-카프-바브(중)>--가르침 그대로 수용/적용되고 영적 변화 이룸 ##엘-콜-하고임<알렙-라멛, 카프-라멛, 헤이-김멜-바브(상)-요드-멤> = Q의 가르침괴 인도 받고, 성령의 호흡하심으로 사는, 엘로힘들 ##바-아쇼<바브, 아인-쉰-바브(상)> --Q의 영분배/부으심 받고 그분의 인격으로 창조함 받아 연결된자 ##탈미딤<타브-라멛-멤-요드-달렛-요드-멤>--가르침 받은 그대로, 완전한 복사판 이룬바, 구별됨의 사역 받아 완전케 된자 ##우-테발르템<바브(중), 테이트-베이트-라멛-타브-멤>--지혜의 풍성함으로 인도함 받아 완성된 그릇 ##오탐<알렙-타브-멤>--Q속성이 그대로 담겨진 그릇 ##레솀-하-아브<라멛-쉰-멤, 헤이, 알렙-베이트>--Q의 인도따라 부어주심 충만한 그릇안에 계신 아버지 ##베-하-벤<바브, 베이트-눈>--아드님 ##우-루아흐 하-코데쉬<바브, 레이시바브(중)-헤이트, 헤이, 코프-달렛-쉰> --성령
[고후13: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헤세드 하-아돈 야후슈아 하-마쉬아흐 베-아하비트 하-엘로힘 바-헤브라트 루아흐 하-코데쉬 임-콜르켐.아멘]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동행하심이 함께 하시기를..아멘 == ##헤세드<헤이트-싸멕-달렛...은혜> ##하-아돈<헤이, 알렙-달렛-바브(상)-눈...주님> ##야후슈아<요드-헤이-바브(중)-쉰-아인...예슈아> ##하-마쉬아흐 <헤이, 멤-쉰-요드-헤이트...메시아/기름부음> ##베-아하비트 <바브, 알렙-헤이-베이트-타브.....완전/온전한 사랑> ##하-엘로힘 <헤이, 알렙-라멛-헤이-요드-멤....엘로힘> ##베-헤브라트 <바브, 헤이트-베이트-레이시-타브...교통하심> ##루아흐<레이시-바브(중)-헤이트...Q의 영> ##하-코데쉬<헤이, 코프-달렛-쉰...거룩한> ##임<아인-멤...함께>-콜르켐<...동행...카프-라멛--카프-멤> ##아멘<알렙-멤-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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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자에게 부여된 불가침의 자격/신분-권위/권한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통제/침범 불가능한 그의 행동의 자유'를 의미하는 헬라어 '엑수시아'(exousia)]]
.....이는 성경에서 "특별히 특별한 권위를 받아 지닌 사람이 "그가 속한 바 그 나라 권한으로 그 나라 밖애서도 자유로이" 행동할 개인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다른 나라와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그 나라의 권리 또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엑수시아ἐξουσία와 뒤나미스δύναμις...– 개역(개정)에서의 번역문제
[개역(개정)]판 신약에서 ‘권위’, ‘권세’, ‘권능’ 등의 원어를 살펴보면 ‘엑수시아ἐξουσία’이거나 ‘뒤나미스δύναμις’인 경우가 많다. .
......그런데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자격이나 권리 등의 뜻이고, ‘뒤나미스δύναμις’는 실제적인 힘이므로 이 두 낱말은 잘 구분하는 것이 필요한데 [개역(개정)]은 ‘권위’, ‘권능’, ‘권세’ 등을 일관성없이 사용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에 읽을 때 어려움이 있다.
......일차적인 원인은 번역자가 두 낱말의 의미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데 있겠지만(신학적인 이유), 그 한자어들이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불분명성도 그 못지 않은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어휘 자체의 문제)
.......한자 ‘權(권)’은 ‘자격’, ‘판단/판정’ 등의 뜻을 갖고 있어서 이 한 음절만으로 ‘엑수시아ἐξουσία’를 나타낼 수 있다. [개역개정]에서는 달라졌지만 [개역]에서는 그 예들을 찾을 수 있다.
//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1; 개역개정은 ‘권한’) //
//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 9:4-6; 개역개정은 ‘권리’) //
//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히 13:11; 개역개정은 ‘권한’) //
.........여기에 ‘힘’의 뜻을 갖는 ‘威(위)’, ‘勢(세)’, ‘能(능)’ 등이 붙어서 ‘권위’, ‘권세’, ‘권능’이 되었으니 이 낱말들은 출생부터 구별되어야 할 두 개념이 붙어 있는 말이다. 이런 낱말들을 사용하여서 구분하여 나타내야 할 말들의 대응어로 삼는 것은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시작하는 것이다.
..........미리 요약하면, ‘엑수시아ἐξουσία’의 번역에는 ‘권위’나 ‘권세’보다는 차라리 ‘권리’나 ‘권한’이 나아 보이고 아예 ‘자격/신분’으로 옮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정]역에서는 ‘권리’나 ‘권한’을 비교적 더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미흡하다.
======‘뒤나미스δύναμις’의 주된 의미로 ‘권능’이나 ‘권세’로 볼 수 있는데 어감상 오해의 소지가 좀 줄어들겠지만 이 역시 (dynamic, dynamite로 용례가 확장되고 있지만, 집중적-폭발적-기적적 능력)으로서의 공급 받는바 ‘능력’이나 ‘힘’으로 번역하면 좋을 것 같다.
>>1.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공급-부여해 주신바, 행동과 말에 있어서 참되게 자유로이 행할 수 있는바] 자격, 영역, 소속, 원천 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제한 받지 않고 어떤 일/말을 할 수 있는 자격/신분이 있을 때 엑수시아가 있는 것이다. ......위에 보인 것처럼 ‘권리’나 ‘권한’으로 옮기는 것이 좋고 영어로는 authority, right, capacity 등이 적당하다. ‘권능’으로 번역하는 것은 거의 오역이라고 본다. 몇 본문들을 살펴본다. 본문은 모두 [개정개역]이다.
(본문1)//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 //.....여기 ‘권능’은 오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힘’이나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중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병행본문은 ‘권세’로 옮겨서 좀 낫지만 두 경우 다 권리나 자격으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 //
(본문2)//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9:8) //......본문1에서 마태복음의 이어지는 이 본문의 ‘권능’ 역시 마찬가지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을 말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본문3)//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 //.....이 본문도 마찬가지다. 얼른 생각하면 뒤나미스δύναμις가 어울릴 것 같은 자리인데 엑수시아ἐξουσία가 사용되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축사와 신유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주신다.
===아래는 [엑수시아]를 ‘권위’ 또는 ‘권세’로 번역한 예들로, 다행히 문맥의 뜻을 붙들고 있다.
//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 21:23) //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
//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 //
>>2.‘뒤나미스δύναμις’는 실제로 나타난/나타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인 동력으로서] 공급하시는 바 근원적 힘이며, 그래서 어떤 상태나 위치를 변경시킬 수 있는, 표현하고 드러나게 하는, 크고 작은 실제 능력이다. 그런 뜻으로 사용되지 않을 때에는 힘이나 능력을 실제로 소유하거나 발휘할 수 있는 존재나 인격을 가리킨다.
===‘권능’으로 자주 번역되지만 다른 낱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능력’이나 ‘힘’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역은 (그 근원이시며 공급하시는 분의) power, might, strength, ability 등으로 옮기는데 복음서에서는 자주 (결과로서) miracle로 번역한다. .....뒤나미스의 유사/유의어로는 크라토스(개인 아니라 모여진, 대중-집단적 힘/세력/통치력/인권-...데모크라시가 유래됨) κράτος, ::: 이스퀴스(힘>능력...타고난 신체적 힘이나 전인적-개인적 힘/능력의 의미로 주로 사용) ἰσχύς, ::: 에네르기아(운동력, 활동력) ἐνέργεια 등이 있다.
(본문1)//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이 ‘권세’는 애매한 번역이다. ‘능력’ 또는 ‘힘’으로 옮기는 것이 낫다. 가이사가 갖고 있는 힘이 실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갖고 계신 힘이 실제적이고 진짜 힘이라고 교회가 고백하는 것이 이 송영의 의미이다.
(본문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 //....이 본문의 ‘능력’은 뒤나미스δύναμις의 뜻을 잘 드러낸 번역이다. 뒤나미스는 실제로 작용하거나 작용할 수 있는 힘이다. 사두개인이 믿든 믿지 않든 부활의 능력이 아버지께 있다. 아버지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실제적인 능력이므로 부활도 실재다.
(본문3)//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이 ‘재능’ 역시 뒤나미스δύναμις의 번역어이다. 대부분의 영역은 ability로 번역하였고 SLT는 power로 번역하였다. 주인이 종에게 달란트를 맡길 때는 그 달란트를 다룰 수 있는 ‘능력’따라 맡긴다.
(본문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권능’은 증인이 될 수 있는 ‘자격/권위’가 아니라 증인이 되는 ‘힘’이다. 제자가 될 자격/권위 – 엑수시아ἐξουσία – 는 주께로부터 받고 (그렇게 그리스도로 실제 살아 가는, 살아계신 그분의 삶 그대로 사는바 반사-반영-달구어진 담지자인 제자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실지로 사는자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의 담지자이기에, 늘 새오리 그 안에 담아주시며 전하라 하시는 그 복음 = 생명 말씀그리스도를 전파하여 넘겨줌, 그 능력이야말로 뒤나미스임] 증인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받는다. 성령께서 주시는 증인 능력은 실제적인 능력이다.
......아래는 다소 다른 낱말이 사용된 경우들이다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퓔레 = 대문/문. πύλη’)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
//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카텍수시아조=카타+엑수시아조..압제하다, 권세 부리다) κατεξουσιάζω’)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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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장 (개요)
앞 장(章)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흑암의 권세들과 교전하시고, 그들의 공격을 받으시고, 또한 그들을 맹렬하게 공격하신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승부는 막상막하인 것처럼 교전 당사자들 사이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드디어 승리는 적군 편으로 기울어졌으며, 우리의 챔피온은 그들 앞에 쓰러지고 말았다.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사로잡히게 하셨고 그의 영광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셨다. 무덤 속에 계신 그리스도는 다곤의 신전 속에 있는 법궤와 같다. 흑암의 권세는 마음대로 세도를 부릴 것처럼 보여졌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자다가 깬 자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같이 깨어나셨다(시 78:61, 65).
본 장(章)에서 우리의 화평의 왕은 또 다시 전렬을 가다듬고 무덤에서 나오고 계시며, 정복자 아니 정복자 이상이신 그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계시다. 법궤는 일개 죄수이지만 다곤은 그 앞에서 쓰러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거룩하신 주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종교의 한 주요한 근원이 되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반드시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증거는 사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는데 본 장(章)에 나오는 것은 그 중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보다 더욱 많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사실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보면,
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천사의 증거(1-8).
Ⅱ.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자들에게 나타나심(9, 10).
Ⅲ. 파수를 보고 있던 원수들의 보고(11-15).
Ⅳ.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또한 그가 그들에게 주신 사명(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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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시다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의 부활(1)(마 28:1-10)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부활에 관하여 "천사"와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 하신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만일 그 일이 그렇게 일어난 것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백성들이 증언할 수 있도록, 즉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직접 보았던 것처럼, 천사에 의해 돌이 굴러지고 그리스도의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났더라면 그 사실은 논쟁할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쉬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마음을 열고 주를 앙망하며 그분의 놀라우신 지혜를 신뢰함으로써 이제 유한하고 연약한 우리의 믿음을 친히 배려하셨음을 믿도록 하자.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로 하여금 "일어나신"(risen)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시는"(rise) 그분을 보게 하지는 않으신 무한하신 지혜에 대해 따지러 들지 말자.
그의 성육신이 신비였던 것처럼 이 "두 번째 성육신"(만일 우리가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즉 그리스도의 몸을 [차원을 초월하여 시공간의 제한을 넘어선,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의 빛으로 옷 입으신] 존귀한 신분으로 "새롭게 만든"이 부활도 신비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은밀하게 행해졌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과 그가 "하신 말씀"에 의해 확인된 그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셨다(눅 24:6, 7 -44 ; 막 16:7) ; 막 16 : 7).
이 사실에 대하여 이제,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야만" 한다. 내용별로 살펴본다면,
Ⅰ. "신실한 여자들"이 "무덤에 옴."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들은 "언제"왔는가?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왔다(1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시간을 결정하고 있다.
(1) 주님은 그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살아나셨다.
그 시간은 그가 종종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이었으며, 또한 그는 그 시간을 지키셨다.
그는 제 6일 저녁때에 장사되었고 다음주 첫날 새벽 아침에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그는 무덤에 약 36시간 내지 39시간 동안 머물러 계셨다.
그가 그렇게 오래 머물러 계셨던 것은 그가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더 이상 머물러 계시지 않으신 것은 그로 하여금 "썩음을 보지"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삼일만에 살아나신 것은 선지자 요나의 모형에 부합하시고(마 12:40.....요나의 표적, 곧 부활의 주하나님, 하나님의 참생명,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심!!), "여호와께서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로다"(호 6:2)라는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2) 그는 "유대인의 안식일 이후에" 살아 나셨으며, 유대인의 안실일, 그것은 유월절─안식일(passover-sabbath)이었다.
그 날 종일을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것은 유대인의 절기와 의식적인 법의 다른 부분들을 폐지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의 백성들은 이러한 규례들을 지키지 말아야 하며, 그가 "무덤에 계실"때 하셨던 것 이상으로 유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엿새 되던 날"에 그의 일을 마치셨다. 그는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레 되는 날, 곧 유대인의 유월절-안식일에 그는 [무덤속에서] 휴식을 취하셨고, 다음 주 첫날에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셨고 새로운 역사를 수행하셨다. 그러므로 "새 달"(new moon)이나 "유대교적인 안식일"과 관련하여 우리를 판단하지 말게 하자.
이러한 것들은 실로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그 "본체"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또한 성도들이 무덤에 누워있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육체를 쉬는] 안식일임을 살펴 볼 수 있다(이와 같이 유대인의 안식일은 육체적으로 쉬는 날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 "자신의 일에서부터 쉬었다"(욥 3:17).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기인되고 있다.
(3) 그는 "첫날"에 살아나셨다.
첫날에 하나님께서는 "빛이 흑암에서부터 빛날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이 날에 세상의 빛이신 그는 무덤의 흑암에서부터 빛났다.
[구약의] 제 칠일 안식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기에, 그것은 "주의 날"로 불리운(계 1:10) 제 일일 안식일에[곧 기독자의 안식일인 일요일 새벽] JC의 부활안에서 이제 다시 일어났으며, 그 이후로 신약 전체에서 이날 이외의 다른 날이 결코 [주간의 첫날, 독 주님의 날/주의 날]제일일 안식일외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신약 전체에서 이날 이외의 다른 날이 언급되지 않았으며, 또한 이 날은 종종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기독자들이 경건한 모임에서 모든 교회가 함께 기념, 준수하고 있다(요 20:19, 26; 행 20:7; 고전 16:2).
만일 이스라엘이 북방 나라로부터 구출된 사실이 애굽에서 구출된 사실에 대한 기억을 말소시켰다고 한다면(렘 23:7, 8), 하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신 역사의 영광을 무색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보라, 안식일은 창조 역사의 "완성"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제정되었다(창 2:1).
사람은 그의 반역에 의해 "완전하신" 역사를 깨뜨렸으며, 이 완전하신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고 "천지"가 다시 "끝나게"되고 그들 중의 무질서한 "무리"들이 새롭게 형성되고, 이 일이 행해진 날이 "복되고 거룩케 되어지며" 또한 그로 말미암아 제 칠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결코 완전히 교정되지 않았다.
그 날에 살아나신 바로 그분에 의하여(by), 그분을 위하여(for) 만물들은 처음에 창조되었고 지금 새롭게 창조되었다. [[JC를 믿는 우리는 JC안에서 거듭난/중생한 새로운 인류이다!!]]
(4) 주님께서는 그 날이 "되려는 미명에" 살아나셨다.
"셋째 날"이 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는 시간, 즉 그의 부활을 위해 정해진 바로 그 시간에 그는 "살아나셨다."
그의 백성들에게서 물러가신 후 그는 적당한 "속도"로 돌아오고 계시며 또한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짧게 줄이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비록 잠시 동안 그들은 "그를 보지 못하게 될"것이지만 "잠시 후"에는 "그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따라서 그는 가능한 그 잠시 동안의 기간을 준수하셨다(사 54:7, 8).
그리스도께는 새 날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 무렵, 곧 "날이 새려는 미명에" 살아나셨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또 다시 비취었다(눅 1:78).
그의 수난은 밤에 시작되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낮12시부터 오후3시까지] 해는 어두워졌었다. [오후3시경 운명하신] 그는 [어두워져 가는]저녁 미명에[유대인의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 무덤에 놓여졌었다.
그러나 그는 해가 막 떠오르는 찰나에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왜냐하면 그는 "광명한 새벽별"(계 22:16), 즉 "참 빛"이시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이 기독자의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또한 "내가 이른 아침에 그를 찾으리라." 말한 다윗의 본보기를 따른 것이다.
2. 무덤에 왔던 자들은 누구인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인데, 그 두 여자는 주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전에 "십자가를 향해 앉았던" 것처럼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었던 자들"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들의 신앙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여전히 그를 갈망하여 찾고 있었다.
동정녀 마리아가 그들과 함께 있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그녀를 자기의 집에서 돌보았던 "사랑하는 제자"(요한)가 "그 무덤에 통곡하러 가려고 하는"것을 만류하였을 것이다.
그 여인들은[막달라 마리아, 알패오의 아내 마리아, 살로메, 요안나] 무덤안에까지 그리스도를 따라 들어가서 장사됨을 확인하였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무덤 "에"(to), 또한 무덤 "안에"(in)까지 따라 온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마다 "어두운 무덤 가운데 놓여져 있을"때 그가 그들을 동일하게 돌볼 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음을 기억하라.
무덤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무덤 속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과 무덤은 그들 사이에 있는 사랑의 줄을 약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3. 그들은 그 새벽 미명에, 무엇을 "하려고 왔는가?"
다른 복음서 기자는 그들이 죽은 몸에 기름을 바르기 위하여 왔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마태는 그들 떠나 있는 동안 무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려고 왔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대제사장들이 거기에 파숫군을 두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그것을 보려고 왔을 수도 있다.
그들이 간 것은 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였던 주님을 또한 번 방문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남은 정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의 부활 약속말씀에 대해 어떤 생각도 전혀 없이 무덤에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전에 그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무덤을 찾는 것은 기독자들에게 매우 유용하며, 또한 그 무덤이 그들에게 친근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특별히 주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 것이 그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죄가 매장되어버린 것과 우리의 성화에 대한 모본, 그리고 그 "흑암의 땅"에서까지 찬란히 빛나는 구속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증거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Ⅱ. 그들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남(2-4절).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방법에 대한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알아야만 할 부활의 방법만이 여기에서 설명되고 있다.
1. "큰 지진"이 있었다.
그가 운명하셨을 때 "그를 받아들였던" 땅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가 살아나신 지금 "그를 단념하였던" 땅은 그가 존귀하게 되실 때 기뻐 뛰었다.
이 지진은 사망의 줄을 "풀고" 무덤의 쇠사슬을 "떨쳐버리며" 또한 "만국의 보배"를 소개하는 것처럼 진동하였다(학 2:6, 7).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표식"이었다. 이로써 "하늘이 즐거워할" 때 "땅"도 역시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유의되었다.
그것은 일반적 부활 때에 땅에 주어지게 될 "전조"였으며, 그 때 땅이 더 이상 "살인자들을 덮어두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산들과 섬들이 옮겨지게 될 것이다.
에스겔서의 기록을 보라,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할" 때에 골짜기에서는 "소리가 나고 움직였다"(겔 37:7).
지금 세워진 바 된 그리스도의 왕국은 땅을 진동시켰으며, "그것을 무섭게 흔들었다."
성결하게 되고 이로써 영적인 생명에로 일으킴을 받은 자들은 그것이 행해지는 동안 "두렵고 놀랐던" 바울처럼 자신의 가슴속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천사들은 종종 우리 주 예수님의 탄생 때나 그가 시험받을 때, 그가 고민하실 때 종종 그를 보살폈다.
그러나 십자가 상에서는 그를 보살피는 천사를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버리셨을"때, 천사들은 그에게서 물러가 버렸다.
그러나 땅의 기초가 있기 이전에 그가 가지셨던 영광을 다시 찾으신 지금, 보라,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섬기고 있다."
3. 천사는 와서 돌을 문에서부터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 자신의 힘으로 능히 "그 돌을 굴려낼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가 천사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하심은, 그에게 전가된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실 임무를 가지셨고 또한 그러한 전가된 죄 때문에 사로잡힌 바 되셨으므로 그는 [손수]감옥을 부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마땅한 "법적인 해제(discharge)"를 하늘로부터 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는 감옥을 부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수종드는 천사가 "돌을 굴려내고" 감옥문을 열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이 일은 만일 그가 "완전하신 대속"을 이루지 않으셨다면 결코 행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우리 대신 내어 줌을 당하셨으므로 그는 "또 다시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살아나셨던"것이다.
그는 우리의 빛을 지불하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또한 우리의 채무가 소멸되었다는 증서를 주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의 죄의 ''돌"은 우리 주 예수님의 무덤문에 "굴러져" 있었다(큰 돌을 굴리는 것은 "범죄"를 나타내는 것이다. 삼상 14:33).
그러나 그 신적 공의가 만족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천사는 그 돌을 굴려버리라는 사명을 받았다.
천사는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 무덤으로부터 "돌을 치웠던" 자들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천사는 그의 해방에 대한 하늘의 승낙과 그로 말미암은 하늘의 기쁨을 암시하였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바벨론과 같이 "그의 죄수들의 감옥을 열어 주지" 않으려고 그 돌을 인봉하였다. 왜냐하면 이 때는 "그들의 때"였기 때문이다.
"약탈한 물건을 전능자에게서 탈취할 수 있느냐?"
그러나 사망과 흑암의 모든 권세는 빛과 생명의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는 비록 그것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봉"(역주:아마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인을 쳤을 것이다)이었지만, "그 인봉을 깨뜨릴" 권세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비록 그들이 그렇게 큰 권력자의 모임 그 자체였고 무덤입구의 돌에 찍힌 인은 그 권력을 표상했지만, 천사는 "[인봉된] 그 돌을 굴러내 버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권능자의 속박들은 제거되고 있다. " 천사가 "돌을 굴러내 버리고" 그 위에 앉은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장애물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승리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천사는 거기에 앉아 있으면서, 또 다시 무덤에 놓여있는 돌을 굴리기 위하여 지옥의 모든 권세들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원수들의 반대에 대항하여 그의 휴식의 보좌와 심판의 자리를 일으켜 세우고 계시다. "여호와께서는 홍수 위에 앉아 계신다."
천사는 마치, 원수들의 "사나운" 파숫꾼들을 놀라게 하면서 무덤을 지키는 파숫꾼처럼 앉아 있었다.
그는 여자들을 기다리면서 앉아 있었고 그들에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4. 그의 "형상은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었다"(3절).
이것은 "색깔의 차이"를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invisible) 세상의 영광들"의 볼 수 있는(visible) 현현이었으며, 이것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찬란하고 눈부신"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수직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마치 "번개 불"과 같았다. "그는 번개를 번득이사 그들을 흩으신다"(시 144:6).
그의 옷이 "흰" 것은 순결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하늘의 궁전은 "깊은 슬픔에 잠겼으며" 이것은 "해가 어두워지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나셨을 때 그들은 또다시 "찬미의 옷"을 입었다. 이 천사의 영광은 지금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변화하실 때 그에 대해 표현되었던 것과 동일한 묘사이기 때문이다(마 17:2).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셨을 때 그는 그 영광의 베일을 벗으셨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이 되는 부활 시에 나타나게 될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5. "수직하던 자들은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4절).
그들은 "군인들"로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만큼 담대한 자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천사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무서워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심판하려고 일어나셨을 때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는 탈취를 당하게 되었다"(시 76:5, 9).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친구들에게는 즐거움이 되지만, 그의 원수들에게는 두려움과 혼란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떨었다." 이 말은 2절에서 “지진”이라는 말에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 "땅"이 흔들릴 때에, 거기에서 살고 있는 이러한 "땅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흔들렸다." 한편 위에 있는 일들에서 자신의 행복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비록 땅이 옮겨진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이 없게 된다."
수직하던 자들은 그들이 지키던 자가 살아났을 때 또한 그들이 파수를 보던 자들이 그와 함께 일어나게 되었을 때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수행하고 있었던 자신들의 임무가 실패로 돌아 간 것을 알고는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무덤에 있는 죽은 사람을 지키도록" 이 곳에 배치되었다. 이 일은 분명히 전에 자신들이 맡았던 일들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일이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곧 무서워 "떨며 죽은 자"와 같이 되어 버릴 연약한 마음을 가진 겁쟁이들에게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감히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전능한 천사"에 의해 공격을 받은 것을 알았을 때 심히 놀라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을 "두렵게"함으로써 그들을 "쳐부수신다"(시 9:20).
Ⅲ. 이 천사가 여자들에게 전한 소식(5-7절).
1. 그는 "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5절).
특별히 조용하고 쓸쓸하게 무덤 가까이 이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무덤에 앉아 있는 천사를 그들이 본다는 것은 실로 여자인 그들에게는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천사는 즉시 그들을 "무서워 말라"는 말로 안심시키고 있다.
그 수직하던 자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자와 같이 되었지만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시온에 있는 죄인들로 하여금 무서워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렇게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아브라함의 신실한 자손들은 "무서워하지 말라." '선을 행하는" 사라의 딸들은 어찌하여 "놀라 무서워하느냐?"(벧전 3:6). "너희는 무서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을 듣고 놀라지 말라. 이는 너희가 전에 너희 주님이 살아나리라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 무서워하지 말라. 이는 그의 부활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떤 해를 가하거나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할까봐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는 무서워 말라. 이는 너희가 예수를 찾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문에 너희가 친구들임을 알고 있다."
"내가 온 것은 너희를 놀라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예수를 찾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만일 그들이 그를 부지런히 찾으면 "그를 찾게 될" 것이며 또한 그가 그들의 "인자하신 보상자"이심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열심히 찾는 그 믿음을 하늘은 살피시고 유의하신다. "나는 너희가 예수를 찾는 줄 아노라."
또한 분명하게 이러한 말씀과 같이 "선한 말과 위로하는 말씀으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구나."
천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칭찬하기보다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너희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여전히 그를 찾는구나,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호의를 간직하고 있구나."
여기에서 유의할 것..., 참된 신자들은 "비록"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을지라도 그를 사랑하고 찾으며 또한 그가 그렇게 못박히셨기 "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찾는다는 사실이다.
2. 천사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 확증하고 있다."
그 말은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하였다(6절).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만일 거기에 "살아나셨다"는 말이 첨가되지 않았다면 그를 찾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은 되지 못할 것이다.
주목하라. "그가 살아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곳에서 그를 찾는 것은 실망케 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위로 가운데서 그를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살아나셨다."
우리는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경청하지 말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에도" 계시지 않고 "저기에도"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을 때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살아나신" 자이신 그를 찾아야만 한다.
(1) 그에 대해 "육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를 찾아서는 안 된다.
"육체를 따라 그리스도를 안 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를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아니한다(고후 5:16).
그가 육신을 가지셨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육신은 이제 "영광스럽게 된 몸"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나 그림을 만드는 자(역주:천주교처럼)들은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우리가 그와 함께 교제하는 것은 그의 말씀 안에 있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롬 10:6-9).
(2) 우리는 큰 "존경심"과 "겸손한 마음," 그리고 그의 영광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그를 찾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들어올리셨으며 그에게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무릎과 모든 영혼은 "그 앞에 꿇어야만" 한다.
(3) 우리는 그를, 하늘에 속한 마음 곧 "천적(天的)인 마음"을 가지고 찾아야만 한다.
이 세상에 우리의 집을 만들려고 하면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할 때, 우리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여기에 두지 말고 "역시 일어나서 위에 있는 것들을 찾도록 하자"(골 3:1-3; 빌 3:20).
천사는 이 여자들의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들어 두 가지 사실을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① "그의 말씀"은 이제 "성취되었으며," 그들은 이것을 "기억해야만"한다.
즉 "그는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천사는 이것을 신앙의 적절한 목적으로 단언하고 있다.
"그는 전에 그가 살아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너희는 그가 진리 그 자체이심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나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대할 수 있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가 너희에게 장차 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믿기를 주저하고 있느냐?"
그리스도의 말씀은 "현재의 고난"이나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이거나 간에 우리의 기대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결코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바를 기억한다면,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덜 놀라게 될 것이다.
이 천사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이미 받은 것 이외의 다른 복음을 그가 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천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를 입증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② 그들은 지금 "빈 무덤"을 들여다보려고 하였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너희가 들었던 바와 너희가 본 바를 함께 놓고 비교해 보라. 그러면 너희는 믿게 될 것이다. 너희는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은 것을 보면서 그가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고 있다. 너희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와서 그 곳을 보라. 그러면 너희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가 거기에서 도적질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하라... 와서 신앙의 눈으로 "주님의 누우셨던 곳을 보는"것은 우리에게 퍽 유용하며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자신을 낮추신 그의 사랑의 표식을 살펴 보라.
그는 얼마나 "쉽게 그 자리(누우신 곳)"를 만드셨고 또한 우리를 위해 거기에 누우심으로써 얼마나 "영광스럽게" 되셨는가를 살펴 보라.
우리가 누워야만 할 무덤을 바라볼 때, 그것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하여 주님이 누우셨던 무덤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수리아 사본에는 "우리의 주님"이 누우셨던 곳이라고 되어 있다. 천사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를 "그들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들은" "그에게서 이름이 명령되기" 때문이다.
3. 천사는 "그들에게 그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할 것을 명령하고" 계시다(7절).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라."
그들은 무덤을 보고 천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있는 것도 좋은 일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임무가 부여되었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었다"(왕하 7:9).
비록 그들이 위로에 대한 "선(先) 점유권," 즉 그것을 "처음 맛본 자"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 "점유권"을 가져서는 안 되며 문둥병자(왕하 7:9) 이상으로 자신들의 안일만을 도모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말하러 가야만 한다."
주의할 것..., 우리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즐기는 것에 앞서 다른 사람에 대해 공적으로 유용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맨 처음으로 "그 소식을 들어야"만 한다.
그 소식을 듣고 "당황하게 될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이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도들의 즐거움을 기대하고 계신다.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라."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그들은 너희의 보고를 믿을 것이다.
① 이는 현재 슬픔 가운데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때는 그들에게 있어서 슬픔과 두려움에 가득 찬 실망의 때였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게 될 것인가 !
② 이는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더욱 질문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소식이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먼저 전해진 것은 그들이 사로잡혀 있었던 어리석은 행동으로부터 그들을 일깨우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를 찾게 하고, 그가 그들에게 나타날 것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일반적인 암시는 보다 밀접한 탐구를 조장시킨다. 그들은 이제 그에 대하여 듣게 될 것이지만, 머지 않아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점진적"으로 나타내고 계시다.
(2) "그 여자들"은 그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 파송되고 있으며, 따라서, 말하자면 "사도들 중의 사도들"로 임명되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와 무덤에까지 꾸준하게 그를 따라간 그들에게 대해 주어진 영예와 보상임과 동시에 그를 버린 제자들에게 대한 책망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택하시고 계시며, 또한 "흙으로 만든" 질그릇에 뿐만 아니라 "연약한" 그릇에도 보배를 담아두신다.
"여자"가 악한 천사의 꾀임에 빠져 "먼저 죄에 빠진 것"(딤전 2:14)처럼, 이 여자들은 선한 천사의 명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범죄로부터 구원되었다는 것을 먼저 믿게 되었다.
이는 이와 같이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이것은 그들의 영원한 칭송이다) 그들의 성(sex)에 대한 비난을 없애도록 하기 위함이다.
(3) 그들은 이 심부름을 "빨리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왜 서둘러야만 했던가? 그 소식이 시들해지거나 아무 때라도 그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 그들은 지금 슬픔 가운데 빠져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둘러서 이 기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해 주려고 하였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하여 자신을 낮추고 있었을 때 가브리엘 천사는 위로의 소식을 가지고 "빨리" 날아가도록 명령을 받았다(단 9:21).
우리는 언제나 준비를 갖추고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나아가야만 한다.
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시 119:60).
② 우리의 형제들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하여 또한 고통을 당하는 자와 같은 자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하여.
좋은 소식, 복된 것을 지금 주기를 지체하지 말라. "가서 다시 오라. 그러면 내일 내가 주리라고 말하지 말라." 지금 빨리 주라.
(4) 그 여자들은 "갈릴리에서 그를 뵈오리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에서 그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에게 (몸소) 나타나셨다. 이것은 갑작스럽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반적인 약속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80내지 100마일 떨어진 갈릴리로 지정되었었다.
① 이는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못하고(아마도 올라올 수 없었던). 갈릴리에 머물러 있었던 그의 제자들에게 대한 "친절"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거기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려고 그 곳으로 가려고 하셨다. "나는 네 행위와 네가 거하는 곳을 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거하는 곳을 아시며, 그 곳에 방문하실 것이다.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승귀(exaltation)가 매우 중요하다 하더라도 JC는 그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제자들 중 그 하나라도 결코 잊지 아니하시며 또한 많은 은혜의 방편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는 그들에게 손수 찾아가셔서 기꺼이 은혜스럽게 "자신을 나타내실"것이다.
② 이는 아직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면서" 감히 대중 앞에 나타나려고 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제자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부활후에 함께 만날 장소로 갈릴리를 택하신 이유였으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아시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또한 가장 위험이 적은 곳을 지정하셨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엄숙하게 자신이 그들에게 말했던 것이 진리임을 확증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너희는 그것을 확증할 수 있고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느니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견고하게 되었다"(히 2:2).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율법을 수여하실 때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그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복음 시대에 그러한 전달 방법을 철폐하려고 하셨으므로(왜냐하면 "하나님이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려고" 하지 않으셨으며[역주:히 2:5 참조], 또한 그들을 복음 전파자로 임명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 천사는 "지금"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증시키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으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실을 세상에 전하도록 그들 손에 내맡기었다(고후 4:7).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고 말할 때 그는 마치 그들이 이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로 말미암아 비난을 받게 되는 것과는 자신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것을 그들에게 내맡기고 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임무를 다 수행하였다. 즉 나는 신실하게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제 너희는 그것을 들어다 보며, 또한 위험할 때에 그것을 믿어라. 너희가 그것을 듣던지 또는 멀리하던지 간에 나는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주목하라..., 자신의 임무를 신실하게 이행한 하나님의 사자들은 그 성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에 대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행 20:26, 27).
Ⅳ. 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무덤을 떠남"(8절).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은 어떤 마음과 기분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떠났다." 즉 같은 시각에 같은 마음에 무서움과 기쁨이 엇갈린 이상야릇한 마음을 가지고 떠났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들은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덤 속으로 인도되고 그 천사를 보고 그것에 관하여 그들과 더불어 말한 것은 무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너무도 "좋은" 것임으로 진실이 아니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기쁨이며," "큰 기쁨"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즉 그것은 그들의 큰 "무서움"이었다고 말해지지는 않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거룩한 두려움은 기쁨을 수반하고 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자는 그를 "즐거움"으로 섬긴다.
(2) 영적인 기쁨인 두려워 떠는 것과 혼합되어 있다(시 2:11).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완전한 사랑과 즐거움뿐이다.
2. 그들은 어떻게 서둘렀는가?
"그들은 달려갔다." 그 무서움과 기쁨은 그들의 발걸음을 더욱 민첩하게 하였다.
그 천사는 그들에게 "빨리 갈" 것을 명령하였으며 그들은 "달려갔다."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자는 머뭇거리거나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좋은 소식으로 "마음이 부풀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의 길로 급히 달려나가야"만 한다.
3. 그들은 어떤 임무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들은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뛰어갔다.
그것이 그들에게 즐거운 소식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동일한 위로를 가지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달려나갔다.
주의하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늘과 더불어 가졌던 그들의 아름다운 교제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앞장을 서야만 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행하시고" 말씀하셨던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야만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기쁨은 오른손에 가지고 있는 연고와 같이 그것을 노출시키게 될 때 그 연고가 발라진 소마다 향기를 내게 될 것이다.
삼손은 꿀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그의 부모에게 가지고 갔다.
Ⅴ.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증거를 확증시키시려고 그 여자들에게 나타나심(9, 10절).
이 열심 있는 선한 여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 소식을 맨 처음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처음으로 보았다.
천사는 그리스도를 보려고 하는 자들에게 갈리리로 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이르기 전에, "여기에서도" 그들은 살아계셔서 그들을 보고 있는 "그를 찾았다."
주목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종종 그의 말씀보다 더 나으며 결코 더 나쁘지는 않으시다.
종종 그의 백성들의 신앙적인 기대를 원하시지만 결코 실망하지는 않으신다. 여기에 보면,
1.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들에게 나타나심.
"그들이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쌔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셨다."
주목하라...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의무를 수행할 때에 은혜스럽게 찾아와 만나 주시며, 또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상봉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며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하던" 것이었다(아 6:12).
유의하라...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그들에게 접근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붙잡으려고 "깊은 곳으로 내려 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또는 "하늘로 올라 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승천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까이" 계셨으며 또한 여전히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
2.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인사.
평안하뇨.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옛 "영어의 인사하는 형"을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평안하뇨"의 뜻이 바로 그것이며 또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히브리의 인사에 해당되는 헬라의 인사하는 형이 여기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1) 주님께서 그의 승귀의 신분에 들어가신 때에까지 우리와 우리의 행복에 대하여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다.
그는 비록 존귀하게 되셨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로하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2)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교제를 가지실 때 사용하셨던 자유스러운 태도와 고상한 친근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의 의미는 "너희는 기뻐하라"이다. 그들은 "무서움"과 "기쁨"에 싸여 있었다.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의도는 그들의 기쁨을 고무시키며("너희는 기뻐하라." 9절) 또한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시기("무서워 말라." 10절) 위함이었다.
기억하라. JC도께서 원하시는 뜻은 그의 백성들이 매우 즐거워하는 백성이 되며 또한 그의 부활이 그들에게 풍성한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3. 그 여자들이 주님에게 드린 사랑에 넘치는 존경.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와 같이 그들은,
(1) 주님을 위하여(for)가지고 있었던 "존경과 영예"를 표시하였다.
그들은 그의 발아래 엎드려 존경의 자세를 취하였으며 또한 지금은 존귀하게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를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경배하였다."
(2) 주님께 대하여(to) 가지고 있었던 "사랑"과 "호의"를 표시하였다.
그들은 그를 "붙잡았으며" 또한 "그를 놓지 않았다"(아 3:4). "주 예수님의 발"은 그들에게 얼마나 "아름다운"것이었는가!(사 52:7).
(3) 그의 부활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지금 그들이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복음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해야만 하며, "경외"함으로 그의 발에 엎드려야만 하며, 믿음으로 그를 "붙잡아야"만 하며, 사랑과 즐거움으로 그를 우리의 마음에 가까이 모셔야만 한다.
4.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심(10절).
우리는 그들이 주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환영하는 마음과 존경심을 충분히 나타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도 천사가 말했던 것 이상은 아니었다(5, 7절). 왜냐하면 그는 "그의 종의 말을 응하게 하실 것이기"(사 44:26)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방법은 그들이 전에 "그의 천사들," 즉 사역자들로부터 들은 동일한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주님께서는 그들이 두려움을 어떻게 책망하고 계시는가.
"무서워 말라."
그들은 그의 부활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하여 듣고 보았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죽은 자가 살아났으므로 어떠한 해를 입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소식은 비록 이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참되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은 그이 백성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함이시며 또한 그 사실은 그들의 두려움을 충분히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2) 그는 어떻게 그들의 메시지를 되풀이하고 계시는가?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갈 채비를 하라고 말하라. 거기에서 그들은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교제가 있다고 하면 "그 만남을 약속하시는" 분은 바로 그이시며 또한 그는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영예를 상실하였다. 그 성은 "소란"하였기 때문에 그는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시고 계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함께 가자"(아 7:11).
그러나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가 그의 제자들을 "그의 형제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가서 "내 형제들," 즉 그와 가까이 있었던 그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사람들(왜냐하면 그들로 모두 그의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마 12:50)에게 말하라.
주님께서는 여기에서와 요한복음 둘째 장 17절 이외에는 그가 부활하실 때까지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 적이 없으셨다.
그는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그의 형제"로 선포되었다.
"죽은 자로부터 처음으로 살아나셨으므로 많은 형제들 중의 맏형"이 되셨으며, 그의 부활의 형상 가운데 함께 심기워진 모든 자들의 "맏 형"도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죽으시기 전에 하셨던 것처럼 그의 제자들과 지속적으로 또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에게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내 형제들에게 가라"고 사랑스러운 칭호를 붙이고 있다.
이는 그의 존귀한 신분을 얻는 것에 대하여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리이다"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들은 수치스럽게도 그가 고난을 받을 때 그를 "버렸다."
그러나 그가 이를 용서하고 잊어버릴 수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여 그는 계속적으로 그들을 "만나려고" 의도하시며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두가 "그의 형제"이므로 그들도 서로가 "형제"이었으며 또한 형제로서 사랑해야만 한다.
그들을 그의 형제로 인정하심으로써 그는 그들에게 큰 존귀를 더하셨으며, 동시에 그 존귀 가운데서 겸손의 실례를 보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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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병의 보고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리스도의 부활(2)(마 28:11-15)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욱 증거해 주는, 파수보던 원수들의 고백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증거를 더욱 확고히 해 주는 두 가지 고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그들(파수꾼들)은 "목격자"였으며 또한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부활의 영광을 직접 보았다. 또 한 가지는 그들은 그의 부활을 저지하고 방해하도록 그 곳에 배치되었던 "원수들"이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Ⅰ. 이 증거는 어떻게 대제사장들에게 "고해졌는가"(11절).
그 여자들이 "제자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게"될 소식을 가지고 그에게 "가고 있을 때," 그 군병들은 "대제사장의 얼굴을 부끄럽게 할" 동일한 소식을 그들에게로 가지고 갔다.
주요한 직책을 맡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그들을 채용했던 자들에게 그들을 실망케 할 보고를 드렸다.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였다."
즉 지진이 일어난 일,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낸 일,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서 살아서 나온 일들을 낱낱이 고하였다.
이와 같이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가장 명백하고 확고하게 대제사장에게 보고되었다. 그와 같이 죄책감을 깨닫게 하는 마지막 수단이 그들에게 제공되었다.
우리는 그 사실이 얼마나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였고 또한 유대의 원수들과 같이 얼마나 그들을 "낙담시켰는가"(느 6:16)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마땅히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죽인 것에 대하여 회개했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불신앙 가운데서 강퍅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그 불신앙아래에 인봉되고 말았다.
Ⅱ. 그 사실은 그들에 의해 어떻게 일축되고 억제되었는가?
그들은 회의를 소집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그들 편에서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것을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오는 수치감을 막아 보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를 죽게 하였다. 또한 그의 부활의 증거가 나타났으므로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그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사악한 일을 자행했던 그들은 또 다른 죄를 궁리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박해자들의 저주의 일부분인 "죄악에 죄악을 더"하는 죄에 스스로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시 69:27).
그들이 토의한 결과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군병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말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1. 그들은 "군병들에게 돈을 주었다."
사람이 돈을 받고 무슨 사악한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아마도 유다에게 주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군병들에게 주었던" 것 같다.
이 대제사장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돈을 사랑하였으며 그것을 나누어주기를 몹시 싫어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항하는 사악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그 돈을 마구 썼다. 아마도 그들은 군병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들에게 돈을 주었을 것이며 또한 그들은 그들의 특권을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들이 거짓말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많은 돈"이 지불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인의 부활 시에 보상을 받는다는 약속을 가지고 있었지만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적은 돈도 매우 아까워하였다. 우리는 나쁜 동기를 위해 그렇게 많이 쓰여지는 것을 보게 될 때 좋은 동기를 위해 인색하지 말도록 하자.
2. 그들은 "그들에게 거짓말하도록 시켰다"(13절).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하라."
서투른 임시 변통은 전혀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서투른 임시 변통이었다.
(1) 그 속임수는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혼동되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잠을 잤다면" 어떻게 그 일에 대해 알 수 있었겠으며, 또한 누가 왔었는지를 말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려고" 깨어나 있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을 막기 위하여" 모두를 깨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맡은 유일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이 연약하고 비겁하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제자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구출하는 것과 같은 무모한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감히 나서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러면 왜 그 제자들이 살고 있었던 집을 열심히 수색하거나 또는 그 시체를 찾기 위하여 다른 수단들을 동원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사람들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는 얄팍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그럴 듯한 것이었다면,
(2) 이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 군병들에게 그들의 양심을 거스리면서 고의적인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것은 사악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고의적인 죄를 짓도록 끌어들이는 자는 자신들이 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심을 타락시키며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출입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3)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위대한 교훈을 전복시키려고 한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치유를 거부한 죄였으며, 결과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행해진 것"을 제자들의 못된 짓으로 돌림으로써 "성령을 거스린" 모독죄였다.
그러나 군병들이 "파수를 볼 때 조는 것"에 대한 로마법(이것은 매우 엄한 죄였다. 행 12:19)에 의해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총독에게 중재할 것을 약속하였다.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우리는 그가 그 사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또한 그들은 근래에 총독을 얼마나 쉽게 움직일 수 있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세상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과 같은 일, 즉 실제로 이 군병들이 잠을 잤고 제자들이 예수를 훔쳐 갔다면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분명히 그 제자들의 비행을 엄중히 처벌해 줄 것을 총독에게 건의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군병들을 안전히 보살피겠다는 말은 분명히 거짓말임이 입증되고 있다.
그들은 빌라도의 공의의 검으로부터 그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는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을 좋아하고 이를 실행하는 자들은 목을 겨누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검으로부터 그들을 지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수행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을 약속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 음모는 짜여졌다. 그 음모는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① "속이기를 즐겨한" 자들은 돈을 받고 그들이 가르친 대로하였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행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기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전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기독교가 넘어지는 것을 보기를 기뻐하며, 필요하다면 그것을 넘어뜨리는 데 협조를 한다. 그들은 "돈을 받았다." 그들이 목표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뿐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돈은 사악한 유혹을 하는 데 미끼가 된다는 사실이다. 돈을 벌려고 고용된 사람은 돈을 위하여 진리를 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는 그의 부활이며 또한 그 누구도 이 군병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돌을 굴려내는 것을 보았으며, 소수라치게 놀라지만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몸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보고 죄책을 느끼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왜곡하도록 시킴을 받았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아무리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증거라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을 깨닫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② 미혹 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 군병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신임하였고 또 그것을 널리 퍼뜨렸다.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그 속임수는 충분히 그 목적을 성취하였다. 계속적으로 불신앙을 고집하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논쟁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이 제자들이 와서 그를 훔쳐가 버렸다"고 대답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엄숙한 대화문이 작성되었는데(져스틴 말터는 유대인 티포와의 대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산헤드린 공의회가 이 일에 관하여 흩어져 있던 모든 유대인들에게 보낸 것인데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할 것을 자극하고 있다. 즉 그 내용은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를 매장하였을 때, 그 제자들이 밤에 와서 그를 무덤에서부터 훔쳐갔다"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를 전복시키고 그의 제자들이 본래부터 악인인 것처럼 꾸밈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한번 거짓말이 행해졌을 때, 그 누구도 그 거짓말이 얼마나 멀리 퍼지며 얼마나 오래 지속이 되며 그것이 얼마나 해를 끼칠 것인가를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 "이 말이 두루 퍼지니라"는 구절을 다른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즉, "이와 같이 백성들을 속이려고 한 대제사장들의 간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군병들 사이에 있었던 공모 사실과 거짓말을 하도록 돈이 주어졌다는 소문들이 두루 퍼졌으며, 유대인들 가운데 이야기되었다.) 왜냐하면 어느 모양으로도 진리는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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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할 일을 분부하시다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에게 사명이 주어짐(마 28:16-20)
이 복음서 기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몇 가지 일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이 사실을 서둘러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다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엄숙한 것으로써 그가 죽으시기 전과 부활하신 후에도 거듭 거듭 약속되고 명령된 것들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Ⅰ. 제자들은 어떻게 그 명령을 따라 주님이 나타나신 곳에 모였는가?(16절)
"그들은 갈릴리로 갔다." 즉 그리스도를 한번 뵙기 위하여 먼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보람된 일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예루살렘에서 몇 번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갈릴리로 가서 그를 보려고 하였다.
1.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본 주님을 갈릴리까지 가서 뵈온다는 것은(특히 그들은 승천 전까지 예루살렘으로 곧 돌아와야만 하였다) 불필요한 일인 것 같이 보였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고 그것들을 거스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자는 그가 약속하시는 장소까지 그를 따라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뵈온 자는 갈릴리까지 가야만 한다.
2. 왜냐하면 그것은 공적이요 일반적인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고 사사로이 그와 더불어 대화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하여 모여 있었던 엄숙한 모임에 참석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들이 행한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가 우리가 기회가 있을 때 공중예배에 참석하지 않게 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며,"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산"으로써, 그가 변화되셨던 바로 그 산이 아닌가 한다. 그들은 거기에서 은밀하게 만났으며, 아마도 이것은 그가 존귀하게 되시고 윗 세상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Ⅱ. 그들은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말미암아 어떤 감동을 받았는가(17절).
이 때는 그가 "일시에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신"(고전 15:6)때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맨 처음에 먼 거리에서 공중 위에 계신 그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ejvfqhv ejpavnw ─ 즉 그는 오백여 형제에게 위에서 보여졌다 :: 그들은 이 원문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가까이 나아올"때까지 어떤 사람에게 의심을 주었다(18절). 그 후에 그들은 만족하게 되었다. 여기에 보면,
1. 그들은 "그를 경배하였다."
그들 중의 대부분이 그를 경배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모두가 그에게 엄숙히 영광을 돌렸다. 이것은 존경하는 외적 표식에 의해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신앙의 눈으로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그를 경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다.
2. 그러나 "어떤 사람," 즉 그 때 거기에 참석하였던 자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의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경배"하는 자들 중에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실한 자들의 신앙은 매우 약하고 흔들릴 수 있다.
그들은 ejdivstasan ─ 즉 의심하였다. 즉 어느 것이 무거운지 말하기 어려울 때 평형 저울과 같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의심들은 후에 없어졌으며, 그들의 신앙은 완전한 확신에까지 성장하였으며, 또한 제자들이 "믿기 전에 의심하였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존귀를 한층 더 높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쉽사리 믿어버렸다거나 또는 미혹을 받았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저 "질문하였고 만사를 시험해 보았으며" 그 후에야 비로소 "참된"것을 "굳게 붙잡았으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Ⅲ.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비록 의심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 때문에 그들을 거절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멀리 서 계시지 않고 가까이 "나아 오셨으며" 흔들리는 저울을 고정시키시고 그들의 신앙이 의심을 정복케 할 수 있는 확실한 부활의 증거를 제시하셨다.
그는 "나아 오셨으며" 또한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듯이 친근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맡기려고 하는 사명에 완전히 만족할 수 있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를 위해 말씀드리려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신" 주님은 그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가까이 나아 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세상에 있는 그의 나라의 위대한 헌장을 나누어 주셨으며, 그들을 그이 대사로 파송하셨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신임장을 교부하고 계신다.
이 대헌장을 개봉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일들을 살펴 볼 수 있다.
1. 우리 주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직접 받은 사명.
누군가가 어떤 권세로 그 일을 하며 누가 그 권세를 주었느냐고 묻게 될 때를 대비하여 그들에게 "권세를 부여하려고" 사실 때 여기에서 그는 우리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 말씀은 매우 위대하신 말씀이며, 그 이외에는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로써 그는 기독교의 위대한 근원인 중보자로서의 그의 우주적인 통치를 강조하고 계시다. 그는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는 "어디서부터" 이 권세를 받으셨는가?
그는 그 권세를 스스로 취하거나 빼앗지 않으셨다. 그 권세는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근원, 따라서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분에게서 합법적으로 물려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시 2:6), 그에게 관을 씌우셨다(눅 1:32). 그는 아버지와 동등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권세는 본래적으로 또한 필수적으로 "그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보자이시며 신인(神人)이시기 때문에, "모든 권세는 그에게 주어졌다"
한편으로는 그의 사역의 "보상"으로써(그가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놓이셨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목적을 "따라" 주어진 것이다.
그에게 이 "권세가 주어진 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여생을 주게 하려 하심이다"(요 17:2). 즉 보다 효과 있고 완전하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에게 권세가 주어진 것이다.
이 권세는 그의 부활시에 더욱 두드러지게 맡겨졌다(행 13:33). 그는 이전에 "죄를 사하시는 권세"(마 9:6)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제 "모든 권세"는 그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는 이제 "친히 나라를 물려받기 위하여"(눅 19:12), 즉 "오른편에" 앉기 위하여 가실 것이다(시 100:1). 그것을 매입하셨으므로 이제는 소유한 일만이 남아 있다.
(2) 그는 이 권세를 "어디에"가지고 계시는가?
즉 우주로 생각할 수 있는 "하늘과 땅"에 가지고 계시다. 그리스도는 오직 유일하신 우주의 왕이시며 "만물의 주"이시다(행 10:36).
그는 "하늘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그는 천사를 지배하시는 통치권을 가지셨다. 천사들은 그의 겸손한 종들이다(엡 1:20, 21). 주님께서는 그의 속죄와 대속을 인하여 그의 아버지께 중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셨다. 그는 공급자로서가 아니라 요구자로서 간구하신다. "아버지여, 주옵소서."
그는 또한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대속 제사로써 하나님을 설득하시고 나서 그는 화해의 역사로써 사람들을 설득하시며, 권세를 가진 자로서 그들을 대하신다. 그는 실로 모든 주장(causes)들과 인격(persons)에서 최고의 중재자와 통치자가 되신다. "그로 말미암아 왕들은 통치를 한다."
모든 영혼은 그의 것이며, "모든" 마음과 "무릎"은 그에게 "엎드려야만" 하며, "모든 혀"는 그가 "주님이심을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 주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가 그들에게 맡기신 권위에 대해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명을 수행케 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을 볼 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해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2. 그가 파송하시는 자에게 맡긴 사명.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 이 사명은,
(1) 본래 "사도들," 즉 그리스도의 왕국에 있는 주요 장관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기초를 놓은 건축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제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따른 자들은 "보좌에 앉히우셨다"(눅 22:30). "너희는 가라." 이 말씀은 "아들아, 일하라 가라"와 같이 명령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격려의 말씀, 즉 "가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를 보내지 않았느냐?" 가서 이 일을 실행하라.
그들은 "나라를 취하거나" 또는 자기에게 모이라는 명령을 국가에 선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가서 복음을 그들의 문전에 전해야만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임재"를 보고 이에 탐닉하여 거기에 매달렸으며 그들의 모든 즐거움과 소망을 그 위에 세웠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그를 따르지 못하도록 그들을 떼어놓으시고 다른 일을 수행하도록 그들을 두루 보내고 계시다.
"마치 독수리"가 제 새끼를 날도록 하기 위하여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것"처럼(신 32:1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전 세계로 흩어 보내시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어지럽히신다.
(2) 이 사명은 그들이 계승자들, 즉 복음 사경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데, 그들의 임무는 시간적으로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시대적으로 이어가면서 전달하는 것이며 또한 장소적으로는 세상 끝까지 나라에서 나라로 나아가하는 것이며 둘 다 필수적인 것이다.
복음사역에 대한 구약의 약속은 계승되도록 이루어져 있다(사 59:21). 이 약속도 그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까지 그들과 더불어 항상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승천 시에 사도나 선지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목사와 교사들"에게 주셨다(엡 4:11). 이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① 그의 사명은 얼마나 멀리에까지 넓혀지고 있는가?
즉 "모든 족속들," 가서 "모든 족속"2으로 제자를 삼으라. 그들은 각처로 함께 모여 가서는 안 되며, 이의 없이 복음의 빛을 가장 잘 "퍼칠" 수 있는 방법으로 흩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임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유대인과 더불어 맺어진 언약은 이제 폐지되고 취소되어야만 한다.
이 말씀은 오랫동안 보이는 지상교회로부터 이방인들을 배제해온 중간 담을 깨뜨렸다. 한편 사도들은 처음 보내심을 받았을 때 이방인의 길로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모든 족속들"에게로 파송되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졌으며, 불신앙과 패역으로 말미암아 내어쫓김을 당한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내어 쫓김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전파하였던 구원은 "보편적인 구원"이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와서 "죄사함"의 특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기독교는 국가의 조직에 연관이 되어져야만 한다.
이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며, 그 왕들은 교호의 양부(養父)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② 이 사명의 주요 의도는 무엇인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다. 마데튜사테 - 즉 그들을 제자들로 삼으라. [그럼으로써]최선을 다해 그 나라들을 기독교 국가들로 삼으라.(되게 하라)" "나라들에 가서, 요나가 니느웨에 한 것이나 다른 구약 선지자들이 한 것처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비록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그러한 심판을 받으리라는 기대를 해야 하지만)가 아니라, "가서 그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왕국을 세우심으로써 족속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학교를 세우심으로써 족속들을 그의 학생으로 삼으시며, 흑암의 권세를 대항하시려고 전쟁을 수행할 군대를 모으심으로써 땅의 모든 족속들을 그의 군기 아래로 징집하신다.
사도들이 해야만 할 일은 각처에 기독교를 세우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세상의 강한 영웅들의 성공은 이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족속들(나라들)을 정복하였으며,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였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족속들을 정복하였으며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③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이 해야할 임무(가르침).
첫째, 그들은 "세례를 줌"으로써 "제자들로 삼아야만" 한다.
"모든 족속들에게로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그들 가운데서 이적을 행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나오도록 설득하며, 그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나오도록 하라. 그 후에 그들을 물로 씻음으로써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교회에 들어오도록 인정하여라."
그들을 물 속에 들어가게 하든지 또는 물을 붓거나 뿌리도록 함으로써 그렇게 하라. 아마도 물을 붓거나 뿌리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은 대부분 그렇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부으리라"(사 44:3)와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딛 3:5, 6) "내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리리라"(겔 36:25). "그가 열방에 뿌릴 것이다"(사 52:15) 등이 있다. 이것들은 "족속들에게 세례를 주는" 이 사명에 대한 예언처럼 보여진다.
둘째, 이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만 한다. 즉,
1. "사람에게서"가 아닌, "하늘로부터 온 권위로써" 시행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사역자들은 우리의 "창조"와 "구속"에 한 가지로 참예 하셨던 삼위격(三位格)으로부터 온 권위에 의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국의 큰 인치심(seal)을 받은 사명을 맡고 있는데, 그 인치심은 비록 육적인 눈으로는 이를 제정한 자와 같이 "형상이나 용모"를 보지 못하지만 그 규례에 대해 존귀를 더해 주고 있다.
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시행되어야만 한다.
매사는 기도에 의해, 특별히 세례의 물에 의해 성결케 되어야만 한다. 믿음의 기도는 성례식과 더불어 그 광채요 아름다움, 즉 그 사명과 효능이 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능케 할 수 있다. 그러나,
3. 이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행해져야만 한다.
이것은 기독교와 세 계약의 첫째 원리의 "요약"으로 삼아졌으며, 이것을 따라 옛 선조가 작성되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엄숙하게,
(1)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관한 성경 계시에 "동의함"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며,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위격 가운데는 "태어나게 하신(begets) 아들"과 이 둘의 거룩한 "영"(성령)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름들"(names)로 세례를 받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name)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것은 분명히 "이 셋은 하나"이며 "그들의 이름은 하나"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이곳의 "기독자의 세례"와 "기독자의 축복"(고후 13:14)에서 "삼위"가 분명히 구별되게 언급된 것은 삼위일체 교리의 분명한 증거이며 교리의 모든 역사를 통해 그것이 순수하고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왜냐하면 기독자의 "모임"에서 이 두 사실(세례와 축복)보다 더 위대하고 장엄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2)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계약 관계에 대한 우리의 "동의"를 고백하게 된다.
세례는 "성례식," 즉 "맹세"이다. 세례식은 "맹세하여 말하는" 예식이다. 세례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보좌를 차지하려는 하나님과의 경쟁자인 세상과 육신을 포기한다는 "단념"의 맹세이다.
또한 세례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그의 것"으로 맡겨버리는 것, 즉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을 그의 뜻에 의해 지배받도록 하며 또한 그의 은혜 가운데서 행복을 누리게 되도록 맡겨버리는 "충성"의 맹세이다.
"우리는 그의 사람들이 되었으며," 따라서 관례상 충성의 맹세가 드려지는 것이다. "세례"는 "토지권"이나 "양도권"이 집과 토지에 대해 주어지는 것처럼 "사람"에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① 세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즉 그의 "영원히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왜냐하면 여기에서 주요하게 의도된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로 믿으며, 우리의 창조자이시요, 보존자이시요, 은혜자이신 "우리의 아버지"로 믿으면서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격려하고 움직이시는 "우리의 소유자"이신 그에게 우리 자신들을 맡길 수 있으며, 우리를 지배하시는 우리의 최고 "통치자"이시며 또한 우리의 "최고 선"이요 "최종"의 목적이신 그에게 자신들을 맡길 수 있다.
② 세례는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시행되며, 아버지와 "관련"이 되어 있다.
세례는 특별히 "주 예수의 이름으로"시행되었다(행 8:16; 19:5). 세례 가운데서 우리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동의"를 나타낼 수 있으며 또한 도마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지자와 제사장, 왕으로 삼으며,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구원받으며 지배를 받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③ 세례는 "성령"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성령의 위격(位格)과 우리의 구속을 수행하시는 그의 직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성화자(sanctifier)요 교사요 인도자요 위로자이신 그의 행동과 역할에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와 같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 가운데 등록이 된 자는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은 두 가지 일들을 나타낸다.
1. "제자들," 즉 세례를 받은 "모든 기독자들"의 의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하며 또한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가 보내신 자들의 가르침에 순응_순종해야만 한다.
우리들이 보이는 교회(지상 교회)에 들어감을 얻게 된 것은 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제자들"로 삼으셨을 때 그는 "우리와 함께 행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군사들"을 그의 봉사를 위해 "훈련시킬 수"있도록 "모집하고 계시다."
세례를 받은 자들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1) 그리스도의 명령을 그들의 규율로 삼는 일.
"신앙의 법"이 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다고 말해진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 이 법에 "매여"지며 또한 그것을 "순종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바를 "유의"하는 것.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적절한 "순종"은 꾸준한 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잘 유의"를 하지 않는다면 실수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순종할 때에 우리는 그 명령을 바라보아야만 하며 또한 주님에게 하듯이 행해야만 한다.
(3) 예외 없이 그가 명령하신 "모든 일"에 유의하는 것, 즉 "도덕적"인 모든 의무들과 "제정된" 모든 규례들에 유의를 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만일 보편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면 "신실한"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의 온전하신 뜻 가운데에 완전히 서야"만 한다.
(4)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잡아매며 그 명령에서부터 "감소" 시키거나 또는 그 명령에 "첨가"시키지 말 것.
(5) 그가 그의 학교에서 교사로 임명한 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법에 의한 자신들의 의무에 대하여 배울 것.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학교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그의 사역자들의 의무.
그것은 즉 그리스도의 명령을 "가르치며," 그의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해석하며, 순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명령들을 특별한 경우에 적용시킬 때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창작품을 가르쳐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기독자는 "그것들"의 지식 안에서 "단련"을 받아야만 한다.
이로써 "주요한" 사역이 교회에 "제정"되고 있으니, 이는 "우리가 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까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르치기" 위함이다(엡 4:11-13).
하늘의 상속자들은 그들이 장성하기까지 "가정 교사와 관리자 아래" 있어야만 한다.
3. 여기에는 이 사명을 수행할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함께 임재하실 것이라는 보장이 기록되어 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위대하고 고귀한 약속은 "볼지어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그것에 유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에 유의하라. 너는 그것에 대해 확신할 수 있고 과감히 신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에게 약속된 호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장차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I will be)가 아니라 "있으리라"(I am).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내가"라는 이름으로 그의 사도들을 보내셨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그들을 떠나려고 하셨다(계 1:8 참조). 그의 육신적인 임재는 이제 그들에게서 옮겨지려 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을 슬프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육신적인 임재보다 더욱 그들에게 편리한 "영적인" 임재를 보장하고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즉 "나의 영이 너와 함께 있으리라."
즉 보혜사가 너희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요 16:7).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너희를 거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군(prince) 미가엘이 했다고 말해지는 것처럼(단 10:21) 나는 너희의 편이 되어 너희를 굳게 하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너희를 떠나거나 멀리 있지 아니하리라. 나는 큰 도움이다(시 46:1).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들을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세우도록 하기 위하여 보내셨는데, 이것은 매우 큰 임무였다. 그 때에 그는 적절하게 그가 그들과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하셨다. 이는,
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직면하게 될 난관 가운데서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너희를 후원하기 위하여 너희를 변호하기 위하여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가 봉사하거나 고난 중에 있을 때 위로하고 존귀케 하기 위하여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가 불이나 물을 통과할 때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강단이나 감옥에서도 불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② 이는 이 위대한 임무를 "성취시키기" 위함이다.
"볼지어다. 내가 족속들을 제자로 삼는 일, 즉 사탄의 강한 사슬을 끌어내리고 주 예수님을 위해 보다 강한 고리(holds)를 만들기 위한 너희의 사역을 효과 있게 만들기 위하여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종교적으로 국가적인 규례들을 뜯어고치며 오랜 관습의 흐름을 바꾸는 일은 가망성이 없는 일처럼 보였다. 즉 그들이 시대의 사조(경향)에 직접적으로 반대가 되는 교훈을 "설정"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제자가 되도록 설득하는 것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 호의의 계속성. 즉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① 그들은 그의 "영구적"인 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항상", 즉 "매일," 날마다 "나는 안식일이나 그 외의 날들, 좋은 날이나 궂은 날, 겨울이나 여름날에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한 날, 한 시 동안도 그의 교회나 사역자들에게서 떠나지 않으신다. 만일 그가 떠난 그러한 날이나 시간이 있었다면, 그들은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로 그는 그들에게 "가끔" 나타나셨으며, 아마도 한 주에 한 번이나 전혀 나타나지 않으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중단 없이 그의 영적인 임재를 계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해 주고 계시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입에"까지도 가까이 임하며,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까지도 가까이 임하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구원자"는 종종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사 45:15)이시다. 그러나 결코 영영 자신이 떠나버리시는 하나님은 결코 아니다. 종종 "흑암 가운데" 계시지만 "멀리" 계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② 그들은 "세상 끝 날까지," 즉 그의 영구적인 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앞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세상이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기간을 향하여 재촉되고 있다. 그 때까지 기독교는 이 세상의 일부분에서나 다른 부분에서 "보존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도 계속적으로 그의 사역자들에게 임재하실 것이다.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즉, 곧 죽을 그들과 함께 있지 않고,
첫째, "너희와 너희의 저서"와 함께 있으리라.
신약 성경에는 그것들을 존재케 하고 그것에 의해 오묘한 결과를 낳게 하는 신적인 능력이 수반되어 있는데, 그러한 일들은 세상 끝 날까지 지속이 될 것이다.
둘째, 너희와 "너희의 계승자들"과 함께 있으리라.
즉 너희와 교회의 몇 세대에 걸친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함께 있으리라. 이 사명이 확장되는 모든 사람들, 때 맞추어 부르심을 받고 보내심을 받아 이와 같이 "세례를 받고 가르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있으리라.
"세상 끝"에 오고 그 나라가 아버지 하나님께 넘겨질 때 사역자들이나 그들의 통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 그들은 계속될 것이며 또한 성직 임명의 위대한 의도는 이행될 것이다.
사도들에게 말씀되었던 "내가 너희를 남겨두거나 버리지 않겠노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모든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말씀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두 가지 엄숙한 작별 인사를 하신 것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그 작별 인사는 각각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그 한가지는 여기에 있는 것처럼 그가 제자들과 더불어 개인적인 대화를 마치려고 하실 때 하신 것으로써, "볼지어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나는 너희를 떠나가지만,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또 하나는 그의 사랑하는 제자의 펜(pen)에 의해 성경 말씀을 마치려고 하실 때 하신 것으로써,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나는 잠시 동안 너희를 떠나지만 또 다시 속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계 22:20).
이 말씀을 보면 그는 성을 내면서 헤어지지 않고 사랑하면서 헤어지신 것과 또한 우리가 그와 더불어 교제를 계속하고 그를 기대하는 것이 그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한 단어가 더 남아 있는데, 그것은 "아멘"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책 끝에 있는 "끝"(finis)과 같이 결어(結語)를 의미하는 부호가 아니라 의미심장한 뜻을 가지고 있다.
1. 이 말은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이 약속에 대한 확증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의 "아멘"으로써, 그 안에서 모든 약속은 "예(Yes)와 아멘"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며, 또한 있을 것이다. 나는 아멘이시요 충성된 증인이다. 너희는 이 사실에 대해 확신하도록 하라." 또는,
2. 이 단어는 교회가 그들의 소원과 기도와 기대에 있어서 그것과 일치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복음 전도자의 "아멘"이다. 즉 주님, "그렇게 되기를 빕니다"이다.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아멘"은 그것들을 기도로 돌리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역자들과 함께 하며 그의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며 또한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있을지라도 그의 백성의 모임에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진심으로 그것에 "아멘"이라고 말하도록 하자. "그렇게 되어질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자.
주여, "당신께서 우리로 하여금 소망하게 하신 이 말씀이 당신의 종들에게 기억되도록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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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제 28장
=====28: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 `다하여 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읖세 데'(* )는 일반적인 시간 지시사로서 `이제...후에'(after)라는 말이다. 이를 근거로 본문을 좀더 정확히 묘사하면 `이제 안식일이(완전히) 지난 후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막 16:1, 2; 눅 24:1; 요 20:1). 그렇다면 저녁 해질 때(오후 6시경)를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본 상황이 깊은 밤을 거의 다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의 문턱에 이미 들어선 때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의 이 날을 기념했고 점점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다(요 20장 주제 강해 `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를 참조). 이제 길고 무거웠던 율법의 시대는 마감되고 부활의 주를 중심으로한 새 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에.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은 오늘날의 일요일, 즉 주일을 뜻한다. 즉 이날은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주일로 대체되어 지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 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으니 바로 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을 성수(聖守)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요 20:19,'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 참조).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안식일을 한 주간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개념에 따른 표현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답습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안식일 대신 `주일' 곧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포스코'(* )의 원의미는 `날이 새다', `날이 밝아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적 어법으로 사용 되었을 때 그 의미는, (오히려)하루 24시간이 시작되는 해질 때를 뜻한다. [눅 23:54에서도 금요일 저녁을 표시하기 위하여 `에피포스코'가 동일한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유대적 어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 16:2에 보면 `아나테일란토스 투 헬리우'(* ) 즉 `해돋는 때에'로 되어 있어 저녁이 아닌 아침 시각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눅 24:1에서도 `오르드루'(* ), 즉 `새벽'으로 되어 있어 그 시각은 마가복음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아피포스코'는 분명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새벽, 먼동이 트는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공관복음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활 사건이 안식일이 완전히 끌난 그 다음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 이미 예수의 무덤을 확인한 바 있는(27:61) 두 여인이 무덤을 찾아 왔다. 그 여인들은 안식일 동안에는 멀리 걷고자 아니했을 것이므로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간에는 무덤을 찾은 사람들을 기록함에 있어 다음과 갈은 차이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따라 많은 논의가 분분하다.
=====28:2
@큰 지진이 나며 - 2-4절은 마태만의 특수한 기록들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빈 무덤'의 발견만을 언급하지만 본문에서는 여인들이`큰 지진'과 친사가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한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주는것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27:51; 출 19:18; 시 68:8; 행 16:26; 히 12:26). 따라서 여기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부활의 이면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역사하셨음을 의미한다(엡 2:5,6). 27:51에서의 지진이 하나님의 구원의 보증이신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이자 더 나아가 그 한계를 드러내고만 율법 구세대(舊世代)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본문에서의 지진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 질서의 구원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진과 돌의 굴림은 예수의 부활의 시점을 알려 주거나 부활한 예수를 무덤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이적들이라기보다 오히려 여인들과 다른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알게 하며 더 이상 죽음 아래 머물러 있을 수없는 예수의 부활의 혼적을 친히 목도하게 하기위함이었다(McNeil). 실로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떨치시고 생명이 충만한 상태로 부활하시어(벧전3:18) 변화된 몸을 입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의 유무(有無)에 상관없이 무덤벽을 조용히 통과해 나가셨던 것이다요 20:19).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 여기 언급된`천사'(1:20-23;18:10)에 대해서는 마가(`하얀 옷을 입은 한 청년')보다 마태와 누가가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사적 존재들은 자주 구약 성경에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으로, 그같은 표현상의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언급한 `청년'은 `천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Lane, Jos, Antiq.V,277).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서는 그 천사가 `하나'인 데 비해 누가와 요한에서는 `둘'로 묘사되었데 이 차이 역시 본 사건이 초가연적 기사라는 점에서 각각의 경험과 그 기술하고자 하는 도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봄이 적당 하리라고 생각된다.
@그 위에 앉았는데 - 여기`앉았는데'(* , 에카데토)란, 미완료 시상으로서 마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게속 앉아있는 모습을 묘사한 바 그 천사는 예수 부활의 산 증인으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증, 보존하는 일을 수행했던 일종의 영광스런 도구였던 것이다.
=====28: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 천사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번개 같은 행상'이라는 묘사는 천사의 몸에서 매우 밝고 환한 광채가 나고 있었다는 것과 `눈 같이 흰 옷'에서는 그 존재의 순결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예수의 변형되신 모습(17:2; 막 9:3)을 연상케 하며 그밖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묘사한 것과 흡사하다(단 7:9; 10:6; 계1:13,14).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초자연적인 천사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거룩성과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천사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마다 다양하게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16:5)으로,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24:4)으로, 요한복음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24:4)로 되어 있어 천상적(天上的)존재의 신비를 다양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28:4
@수직하던 자들이...무서워하여 떨며 - 무덤을 지키도록 배치된 자들(27:64-66)이 지진과 더불어 일어난 천사의 임재 앞에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들이 예수의 처형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직,간접적의로 듣고 보고 하여 무덤에 묻힌 자의 실체(實體)가 큰 의미를 둘 만큼 대단치 않은 존재라고 방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고, 또 그들의 어리석은 보호벽(무덤)을 뚫고 예수는 부활셨던 것이다. 진정 그들의 두려움은 죄인이 이성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공포였다(창 3:10).
한편 본문의 `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세이스데산'(* )은 `혼들다'는 뜻의 `세이오'(* )의 제 1과거수동형으로 `흔들리게 되었다'는 뜻을 가지는데 27:51 에서 땅의 진동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앞에 선 죄인들의 실존적 모습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사 6:4,5).
이와 더불어 본문에는 수직하던 자들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보고하는데, 아마 그들은 상상을 초월한 눈앞의 이적들에 압도당하여 잠시 혼절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갈은 잠시간의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 곧장 성내로 달려가 그들의 목격담을 전하게 된다(11절).
진정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훼방꾼이 아니라 너무도 확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고 만 것이다. 참고로 계 1:17에는 사도 요한이 부활의 주님을 볼 때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28:5
@너희는 무서워 말라 - 천사는 먼저 여인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여기서는 `너희는'(* , 휘메이스)이라는 대명사가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색이 되어있는 무덤지기들은 배제된 채 여인들에게만 무서워 말라는 말이 주어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두려움에 방치되어 버려질 사람이 있고 두려워 말라고 하는 선택적 위안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못 박히신 예수를...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 천사는 여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천사의 말에서 강조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에수'이다. 즉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강조는 분명한 죽음이 분명한 부활의 전제(前提)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있다 함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결코 외릅게 고립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감찰하시며 함께 하고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에 대한 여인들의 신실함이 인정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28:6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 하나님의 천사는 계시의 중개자로서의 임an를 띠고 있다. 복음서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뜻을 전달시켜주기 위해 천사가 꿈에 나타났었는데(1:20 ff). 이와 평행을 이루어 복음서의 마지막에 계시의 중개자로서 또다시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리며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그의 말씀하시던 대로'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으로 12:40; 16:21; 17:23; 20:18, 19절에서 예언한 `부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여기 계시지않고'라는 말은 그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로하는 말이므로 예수가 죽어서 무덤 안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제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바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 `그가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은 예수의 자력(自力)적인 행위를 강조한 말로서 예수의 신적 전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는 몇몇 성구들(16:21; 17:23; 롬 6:4; 8:11)에는 부활이 성부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의 결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공동 협력에 의한 신적인 승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대목으로 `빈 무덤'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의 `빈 무덤'을 인정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28:11-15). 사실 예수가 죽어서 누이었던 자리에 있지 않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즉 예수가 부활했거나 아니면 적대자들의 말처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를 횹쳐갔다고 하는 적대자들dml 주장은 상호간에 모순을 드러내는 바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게 된다(13절 주석참조). 그렇다면 유일한 하나의 가능성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분은 확실히 자신의 예언대로 부활하셨고 죽었던 그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이다(빌3:21).
=====28:7
@빨리 가서 -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그 무덤 앞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천사들은 그 여인들에게 예수 부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황급히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었다. 이는 분명 권유가 아니라 촉급한 명령이었다.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 본문과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7에서는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을 분리시켜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가 마가보다는 베드로를 더 우호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금의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던 부활의 예언을 망각하고 있거나 불신하고 있었던 제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일 수 있기 때문인데, 마가는 베드로를 따로 분리시켜 그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베드로의 대표적 불선을 상기시키고있는 것이다(26:69-74). 실로 베드로는 세번에 걸쳐서 예수를 부인하기까지 했었던 것이다(14:66-72). 그에 반해 마태는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지 않고 제자들 속에 포함시켜 말함으로써 제자들 모두의 공동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것이다. 혹 이 말씀이 책망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실망 가운데서 고독해하고 있을 제자들에게 보내는 기쁨의 소식이라고 해도 베드로에 대한 특별성이 언급되지 않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주의 부활'이라고 하는 기쁨의 소식은 각각의 제자들 모두에게 동일(同一)한 기쁨이 됨을 말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 천사가 여인들에게 거듭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제자들이 이 말씀을 전해들었다면 그들은 아마 26:32의 말씀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를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 따른 성취에 앞서 유대 지경에서 여인들과 엠마오의 두 제자및 소그룹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당신의 공식적인 현현은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갈릴리에서 두 번 나타나시게 된다(16-20장; 요21장). 이제 갈릴리는 더 이상 어둠과 소외의 현장이 될 수 없었고 복음과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행 10:37).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딩신의 제자들을 대부분 부르셨던 갈릴리를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런(행1:11) 처소로 만드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가시나니'(* , 프로아게이)는 현재 진행적인 의미가아니라 생생한 미래를 나타내는 말로써 예수께서는 약속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는 뜻이다(1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특별히 본문의 `일렀느니라'(* , 에이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적 선언시에 흔히 사용하던 문구이다. 따라서 천사의 이 말은 계시의 중개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종결 문구인동시에 예수의 부활이 확증적임을 선포하고 있다.
=====28:8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들은 여인들의 혼합된 심리 상태를 묘사해 주고 있다.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8 에서 여인들의 상태를 `놀람', `두려움'의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본문에서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대비(對比)시킴으로써 한편은 천사의 임재를 위시한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예수의 부활소식에 접하여 `큰 기쁨'을 느끼고 있음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건을 체험할때 생겨나는 심리 상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바 초자연적 사건 앞에 인간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으나, 그 사건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자각할 때 한없는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통일되면서 인간은 진정한 신앙적 희열을 느끼게 된다.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 이 부분도 막 16:8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천사가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말(7절)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본문에서는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들은 후 `큰 기쁨'에 차서 천사의 고지(告知) 사항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와 마태의 교훈적 강조점이 다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마가는 예수의 측근들에게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로마의 혹독한 탄압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날 위기에 처해있는 마가의 공동체에게 제자들처럼 나약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동시에 신앙을 지키지못한 성도들에게는 제자들도 실패했었기 때문에 평범한 신앙인들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일이므로 한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반면 마태 공동체의 경우는 마가에 비해 덜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어두운면보다는 예수의 부활의 기쁨을 기념하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뜻에서 기쁨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다.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 예수의 부활 증거로 '빈무덤'에 이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현현(顯現)하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현현을 최초로 목격하는 행운을 부여받은 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여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며 단지 재산 목록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던(출 20:17)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께서 부활 후 처음으로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이자 부활의 증인으로 인정하셨음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서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여인을 택하심으로 최초의 범죄자 하와의 후손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변하여 큰 소망과 위로가 되게 하셨다(Chrysostom). 한편 예수의 인사말 `평안하뇨' 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인 헬라어 `카이레태'(* )의 번역으로 `기뻐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인사말은 일찍이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때 제자들이 근심하게 될 것이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고 하셨던 예언을 생각나게 해주며 예수 부활 소식을 들었던 여인들이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인 상태에 있었듯이(8절) 예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 에게 있어서도 근심과 기쁨의 감정을 교차케 해주는 역설적 사건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이 말씀은 이제는 두려워 말고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자들이...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이와 같은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인 존경과 경외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다. 즉 이 여인들의 이 갈은 행위는 결단코 공포나 어떤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취한 피동적인 경배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방금 전해들은 그 여인들이 변화된 예수의 영광스런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신적인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심히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경배였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잡고자 했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요20:17,17)이 여인들의 행위(온전한 경배로서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짐)를 기쁘게 용납해 주셨던 것 같다. 이로써 그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체를 눈으로 보고 또 손으로 만지는 가장 확실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될 수 있었다.
=====28:10
@예수께서 가라사대 - 본문은 표면상으로 5-7절의 천사의 말을 다시 예수께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수께서 천사의 말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다음의 사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천사가 여인들에게`무서워 말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지진이 일어나며 무덤문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 앞에서 무서워하는 여인들을 안심(安心)시키는 것임이 자명하다(5절). 그것에 비해 지금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은 여인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안심을 했고 이제는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여인들이 예수를 보았때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마냥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반가움과 기쁨이 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인들에게 전해진 `무서워 말라'는 말은 무덤에서의 사건과 갑작스러운 예수와의 대면에 의한 여인들의 공포를 일소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그녀들의 주를 잃은 절망감이라고 볼 수있다. 그리고 주를 잃은 절망과 두려움은 아직도 예수의 부활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무리들 그리고 더 넓게는 마태 공동체에게 더 심했을 것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무서워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직접적 대상인 여인들을 넘어 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위로(慰勞)의 말씀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하였다(7절).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말하라고 한다. 어떤 학자들(Lange, Wycliffe)은`내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11제자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형제들'에 대한 본서의 용례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태는 5:22-24; 18:15; 23:8 등에서 `형제들'이라는 말을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친교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했었다. 그리고12:49, 50 에서는 `내 형제'라는 표현을 11사도를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네 형제들'은 11제자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으며,예수의 부활 소식은 11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으로 확대되어 전해져야 했던 것이다(Stonhouse, Witness of Matthew, pp. 176-177).
한편 마태는 무엇때문에 갈릴리의 부활 현현에 관한 기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마태복음 전체를 꿰뚫는 두 가지 주제와 관련이 있다. 첫째, 메시야는 천대(賤待)받는 지역에서 나와(2:23) 그 천대받는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4:15, 16).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5:3).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유대인 중에서도 무시당했던 여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증인으로 삼으신 것이다(1,5-7절; 27:55, 56). 둘째, 이방의 갈릴리(4:15)는 마태복음에서 이방 선교라는 차원높은 주제와 잘 조화된다는 것이다(1:1; 2:1-12; 4:15,16; 8:5-13; 10:18; 12:21;13:17;15:21-28; 24:14).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 즉 이방선교를 준비하는 것이다(18-20절).
=====28:11
@여자들이 갈 제 - 본 구절은 4절 내용과 연결된다. 즉 여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전하러 가는 동안, 잠시 혼절했던무덤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지금껏 되어진 일을 고하기 위해 성내로 내리달렸다.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 여인들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과 대비되어 무덤지키던 자들에 의해 대제사장들에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중요한일을 빌라도에게 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파슷군들이 로마의 병사라기 보다는 성전 소속의 사병들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Carson). 그러나 27:65에 언급하였듯이 이들 파숫군들은 예수의 무덤을 지키도록 유대인들에게 인계된 빌라도 휘하의 로마 군병들이었음에 분명하다. 실로 그들은 산헤드린의 명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곧장 산헤드린에게로 가서 자신들이 지금껏 경험한 사실을 대체적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보고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보고는 부활을 눈으로 직접목격했다는 내용이기보다 지진, 천사, 빈 무덤등 능히 부활이라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Bonnard). 한편 대제사장들은 파슷군들로부터 무덤에 있었던 신비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을 것이고,그들은 직감적으로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지각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이기도 했으므로(12:38;26:67, 68),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 했어야 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전혀 반대의 양상을 나타낸다.
=====28:12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 파숫군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여 예수의 부활을 은폐(隱蔽)하고 거짓 유인비어를 퍼뜨릴 계략을 펴고 있다. 뿐만아니라 일찍이 예수를 죽이려고 유다를 은 삼십에 매수했던(26:14, 15) 저들은 이제 또 부활한 예수를 다시 매장시키려고 `많은 돈'으로 파숫군들을 매수하고 있다. 여기서 그 돈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총독을 매수하기 위해서는 그가 만족할만한 더 많은 뇌물이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Wettstein)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은 진리에 있지 않았고 오직 편법(expedience)과 백성들의 여론에 있었던 것이다.
=====28:13
@그의 `제자들이...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소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러나 저들의 조작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음이 곧 드러난다. 즉 잠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무덤지키는 파숫군들이 엄격한 규율을 어기고 잠잤다고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설령 잠이들었다 하더라도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믿기는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겁많고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 공포에 떨던 제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의 무덤을 열어 젖힐 용기를 가졌겠는가? 또한, 가정해서 유대 당국자들이 제자들의 범죄 사실을 입증해 주는 어떤 증거를 갖고 있었다면 왜 기소하지 못했단 말인가? 한편 고대 세계에서 무덤에 해를 입히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고. 때로 는 사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편이었다. 가이사(Caesar)의 나사렛 비문(NazarethInscription)은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물론 이 비문과 예수의 사망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무덤 보호 규율은 상당히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B.M.Metzer). 여하튼 저들이 퍼뜨린 소문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잔꾀에 지나지 않음이 곧 드러난다.
=====28:14
@총독에게 들리면 - 이는 군인 의무규정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Meyer).
@우리가 권하여 - 문자적으로`우리가 설득하여'가 된다. 즉 유대 지도자들은 이 일이 어렵게 되면 무덤 파수 임무를 맡았던 군병들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에 충실했노라고 말로써 설득할 뿐 아니라 빌라도의 마음을 뇌물로 설득(매수)하려 했던 것이다.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 실로 파숫군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사실을 빌라도가 안다고해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초에 무덤을 지키는 일은 빌라도가 지시한 일도 아니거니와(27:64,65), 대제사장들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돈으로 빌라도를 매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방법은 그 당시에 유효하고도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28:15
@오늘낱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 본문에서 `오늘날 까지'라 함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인 A.D.50-70년경을 뜻한다. 그런데 A.D. 150년경에 초대 교부 저스틴(Justine Martyr)이 쓴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cum Tryph., 108)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유포되기 시작한 거짓말이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기독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니 이 거짓말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소위 `도적설'이라는 부활 이설(異說)로 남아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 한편 A.D.165년 경에 기록된 베드로 복음서 11:46-49에 의하면 군인들과 장로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대인 -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표현법을 마태가 사용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구분이 될 정도로 나뉘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본문에서 마태는 기독교인과 대별되는 말로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28:16
@열 한 제자 - 27:5에서 보도된대로 열 둘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죽었으므로 열 한 제자만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갈릴리.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나타내 보이셨는데 마지막선고 명령이 주어지는 곳으로 갈릴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본서 뿐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방의 상징이자(4:15), 예수의 주된 관심사인 소외(疏外)된 사람들 즉,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유대교의 거짓된 종교인들로부터 기만당하는 민중들의 도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쨌든 마태는 갈릴리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명령(7,10절; 26:32)에 집중하기 위해 예수의 유대 현현 등과 같은 다른 기사들을 모두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 이 산은 예수께서 이미 명하셨던 곳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과연 그 산이 어떤 곳인지(혹 다볼 산 또는 팔복산이라고도 하나 확실치 않다) 복음서에서 찾아내기는 어렵다. 예수께서는 분명 부활 이후 몇번의 현현 중에 이미 제자들과 당신이 익히알고 있는 산을 지명하셨음에 틀림없다. 실로 산은 하늘과 지상이 만나는 곳으로 하늘의 대명령을 땅에 선포하신 지상 명령에 (the Great Commission)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예수의 가르침이 베풀어지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장소가 바로 산이었기 때문이다(5:1; 8:1; 17:1,9;24:3; 26:30). 구약에서도 산은 매우 중요한 곳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었고(출3:2이하)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다(출 32:15). 여하튼 예수의 지상 명령(18-20절)과 갈릴리의 한 특정 지역이 관련된것은 예수의 비참한 배경과 이방 선교라는 본서의 대주제와 함께 연결된다(10절). 한편 많은 권위있는 주석가들은 본문의 이 장면을 고전 15:6에 바울이 기술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사건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 이유로 이곳 소집에 대하여는 3회에 걸친 예고가 주어졌으며(7, 10절; 26:32) 그것은 지상 대명령을 (18-20절) 전달하신 회집이었고 갈릴리는 로마 정부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간섭을 쉽사리 피할 수 있는 곳으로서 500여명의 군중이 일거(一擧)에 모이기에 적합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28:17
@예수를 뵈옵고 - 물론 11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목격한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모인 500여명의 형제 가운데 많은 수가 예수의 부활체를 처음,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상태로 목도하였을 것이다.
@경배하나 -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 )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9절; 2:8; 4:9). 또한 이 단어는 `절하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9:18; 14:33; 15:25)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을 `절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본문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패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승리하신 분으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은 다른 곳(눅 24:10,11; 요20:24-29)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보고도' 의심한 본절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난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첫째 난제는 그 의심하는 자가 11제자 중에서인지 아니면 500명 형제중에서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여기서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프로스쮜네오'가 단순히`무릎을 꿇다',`...에게 경의를 표하다'는 약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경배(敬拜)하다'는 뜻 으로 사용되었다면 `11 제자들'과 `오히려 의심하는 자'는 다른 두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배(예배)하는 자가 예수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리가 없고, 또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을리 없겠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의 확실한 목격자였던 마태는 그가 그때 그곳에 없었던 본서의 독자들이 의심을 제기할지도 모를 위와 같은 사항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실들에만 기억을 돼살려 생생히 묘사했던 것으로 보인다(8절). 한편 이러한 문제점을, `오히려...있더라'(* ,호이데)의 읽기를 `...자는 없더라'(* , 우데)는 읽기로 고침으로써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는 큰 무리가 있는 읽기이다(Beza 사본, Bornemann). 두번째 난제는 의심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제쳐 놓고라도, 도대체 왜 의심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 `에디스타산'(* ,<더러는> 의심하였다)은 신약에서 이곳과 14:31에서만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불신앙이 아닌 망설임을 뜻한다(`비록 더러는 주저하였으나',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I.P. Ellis). 어쨌든 주저한 자들이 11제자 외의 다른 사람들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왜 의심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여기에 대해 혹자는 (Hendriksen, Grosheide, Filson, Walvoord) 부활을 의심한 것이아니라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제시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예수가 부활후의 현현에서 항상 즉시로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생시(生時)와 변화상태와의 너무 큰 차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과연 그가 예수인가?'하고 의심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파르쿠르스트(L.G.Parkhurst,Matthew 28:16-20 Reconsiderd, p. 179)는 의심한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나 혹은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를 경배함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18절의 말씀으로 그러한 주저하는 마음을 쫓아버렸다고한다. 이와 유사하게 건드리(Gundry)는 말하기를 17-20절은 오직 예수의 말씀만이 의심을 쫓아낼 수 있다(심지어 부활 현현조차 의심을 쫓아내지 못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마태의 근본 의도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 18절은 17절이 아니라 19절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18절이 17절의 의심을 쫓아버린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Dunn,Jesus p.124). 적어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여기 본문이 눅 9장이나 요 21장에서처럼, 모든 의심이 제거되었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하튼 마태의 기사가 간결하기 때문에 마태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11제자가 아니라 그밖의 다른 제자들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불신앙과 공포에서 신앙과 기쁨에로의 변화는 주저하는 중에 서서히 나타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적어도 이미 두번이나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베드로는 적어도 3번, 도마는 1번) 11제자는 이 새로운 현현에 마주쳐 즉시 경배할수 있었겠으나 다른 제자들은 머뭇머뭇 주저(躊躇)했다. 실로 그들은 거듭된 예수 자신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는 절망에 휩싸였고, 당분간 완전한 신앙에로 복귀하기까지 의심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태는 다음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오순절의 성령 충만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태의 간결한 기사는 이 사실을 이미 전제한다. 왜냐하면 어떤 복음서 기자도 그 구속사의 획기적인 사건을 간과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의 주제적 관심들을 오직 주님의 선교 지상 명령에 집중시키고자 그 사건을 생략한 것이다.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아마 본문 이하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 많은 말씀으로 그들의 실추(失墜)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먼저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시아'(* )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 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를 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였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 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 것이다.
=====28:19
@너희는 가서 - 여기 `가서'(* , 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형 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 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2:8,13; 9:13; 11:4; 17:27;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258-67).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6) 예수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한다. 이는 이제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Hare, Walker).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Trilling,Hubbard,John p.Maier). 사실 마태가 '족속'(* , 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된다. 한편 `제자를 삼아(* , 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 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주고 -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 17)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 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 고후 13:13; 요일 3:23,24)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Trinty)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이름'(* , 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것은 삼위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 에서 `...으로'(* ,에이스)에 관해 몇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 , 엄격히는 `안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한편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 )는 `잠근다'(왕하 5:14; 시 68:23), `씻는다'(막7:4; 눅 11:38; 딛 3:5)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침례' 또는 `세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실 중요한 것은 `침례'냐 `세례'냐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란 죄사함을 받고(막16:16) 메시야의 게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Sign)라는 사실이다 (Beasley-Murray, Baptism pp.90-92).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 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邁進)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디다케)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쳐'(*, 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딤후2:2).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eyewitnesses')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earwitnesses)을 낳게 된다(O'Brien pp.264ff.).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되었다.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볼지어다(* ,이두) -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23).`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臨在)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까지'(* ,헤오스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24:3). 그리고`항상'(* , 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게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parousia)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喜樂)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3:1-26:5).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즉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런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날까지'는 종결되지 않는 미완(未完)의 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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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9가지열매..갈5:22-23]: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벧후1:5-7...그리스도의 성품학교] : 미덕지절인경우사
믿음(살아생동하는,발휘되는 믿음, Faith) ==>덕(탁월함, 담대함과 용기/도전, Excellency) ==>지식(하나님-사람-사물에 대한 참지식, Knowledge) ==>절제(죄성/육신-세상과 타협하지 않음, 몸을 쳐서 복종시킴-Self-restriction0 ==>인내(참아내며 견뎌 이겨냄, Endurance)==>경건 ==>형제우애==>사랑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장 : 신앙인격발달의 8단계....글리슨 주니어.]
기본적신뢰(Basic trust)-->자율성(Automacy..긍정적 마인드)-->주도성(Initiaty..선택의지결정/탐구)-->덕성(탁월성.Excellency..진취성/담대함)-->근면성(Industry...끈기/견인)-->성실성(Faithfulness...성취/책임감)-->정체성(Identity...영적신분확인)-->소명감(Integrity.통전성/온전성...사랑하기)
**에릭슨 심리사회적 성격 발달8단계
기본적신뢰(Basic trust)-->자율성(Automacy..긍정적 마인드)-->주도성(Initiaty..선택의지결정)-->근면성-->자아정체성-->친밀감-->생산성-->자아통일감
[[죽은 자를 살리심]] ::: 나인성과부의 아들(눅7:11~23) ---야이로의딸(마가복음 5:21-24,35-43)---베다니의 나사로(요 11:25~27)
**이중적 성육신 : 하나님이 육신을 입어 세상에 오심-->부활로 차원을 초월한 , 제한받지 않는 새로운 몸을 입으셨음
**이중적 구원 : 부르심/구원 --> 택하심/JC의 영광에 참여함을 마침내 완성하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사 HS으로 내주하시는 JC를 나의 주-하나님으로 믿고 거듭남/중생안으로 살아감의 은혜(=구원의 시작) ===>새로운 영적 참자아로 사는 삶 가운데, 전개되는 모든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 함은 그 모든 고난마다 동참-체휼하시는 JC를 체득함으로써 그분의 완전/온전하심안으로 빼어닮아가며 마침내 그분의 영광에 참여함 열어주심때문임 = 구원의 완성
====십가가죽으심과 부활증인된 여인들]]===
[[요안나]]..
....십자가 앞의 여인들 : 주의 모친 마리아, 큰 야고보의 모친 살로메(세베대의 아내), 작은 야고보와 마태, 요세(요셉)의 모친 마리아(=알패오(글로바)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주의 모친 마리아 외에 나머지 네 여인이 부활아침에 무덤을 찾았음..
1. 인적 사항
① 요안나는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신다'라는 뜻. ② 헤롯 안디바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눅 8:3).
③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후 전도자로서 삶(눅 8:2).
2. 시대적 배경
예수 당시 헤롯안디바(B.C.4-A.D.39년)가 통치하던 갈릴리 지역의 주민이었음.
3. 성품
① 병고침을 받고 소유를 주께 드리며 평생을 전도자로 산 것으로 보아 감사할 줄 아는 헌신적인 여성(눅 8:3). ② 예수님 사후, 제자들조차도 도망간 상황에서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으로 찾아간 것으로 보아 용기 있고 실천적인 신앙을 소유한 자(눅 24:3). ③ 예수의 죽음에도 변절치 않고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무덤을 찾고, 또 예수의 부활을 맞아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증거할 정도로 지조 있고, 변치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
4. 주요 생애
구사와 결혼(눅 8:3)..예수께 치유 받음(A.D. 28년..눅 8:2)...모든 소유로 주를 섬김(A.D. 28-30년..
눅 8:3)..예수의 죽음 목격(A.D. 30년...눅 23:44-49)..향품과 향유를 갖고 예수의 무덤을 찾음(눅 24:1)..
예수의 빈 무덤 목격(눅 24:3)..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증거(눅 24:9)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후 헌신적으로 예수를 섬긴 여제자. ② 예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들 중의 하나.
6. 평가 및 교훈
① 주님께 치유함을 받고 자기의 소유를 주께 드려 감사한 요안나의 갸륵한 마음씨는 구속의 은총을 입고도 이에 감사하기는커녕 불평과 원망이 습관화된 현대의 신앙인 들에게 감사하는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눅 8:3).
이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받는 자들로서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겠 다(살전 5:18).
② 요안나는 예수의 죽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모든 제자들이 도피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주님의 무덤까지 찾아갔다(눅 24:3).
이는 오늘날 환경과 여건에 따라 쉽게 신앙과 불 신앙의 탈을 번갈아 바꿔 쓰는 현대의 신자들에게 신앙의 정절이 무엇 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몸을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신앙의 절개를 지킬 줄 아는 담대한 신앙인이 되자.
③ 끝까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요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 중 하나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눅24:1-12).
이와 마찬가지로 변함 없이 주님을 섬기는 자들 역시 마지막 날에 구원의 반열에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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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들 :
------40일 동안 부활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며, 권능의 영 부어지기까지 예루살렘 떠나지 말 것과, 당신의 <육안으로는 보이지않는 영원한 임재>에 대한 감각을 배우게 하심.
1>향품을 시신에 바르기 위해 함께 미명에 일어나 나가 동틀녁에 무덤에 당도한 이들 4명의 여인들..
====1. 막달라마리아(마28:1, 막16:1. 눅24:10, 요20:11-18)...2.야고보와 요세(알패오 또는 글로바의 아들들 -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 불림)의 모친 마리아(=다른 마리아 마28:1, 막16:1 눅24:10 )..3.요안나(헤롯왕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눅24:10)..4.예수의 이모(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의 모친) 살로메(막16:1, 눅24:10)
===<마태복음>큰 지진-강림한 천사가 무덤 막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서 주예수의 부활 고지하고 갈릴리에서 만나실 약속 전함. : 막달라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과 갈릴리에서 보리라>하는 이 소식을 <마가의 다락방으로>전하러 달음질하는 동안 부활예수 만남(막달라마리아가 맨처음으로 주님을 알아봤을 가능성있음 그렇지 않다면 그 때 당시는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가능성 있음 : 왜냐하면 마가는 막달라마리아가 최초로 부활예수를 만난 자임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 --천사가 전한 동일한 약속을 재확인시켜주심 --마가의 다락방으로 직행..
===<요한복음>막달라마리아의 전언(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는데 사람이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다)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막달라마리아와 함께 무덤을 방문, 머리쌌던 수건이 개켜져있음과 세마포는 있는데 시신 없음을 확인, 의아해 하며 그들은 <다락방으로>돌아감,,,
---막달라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면서 구푸려 무덤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무덤속의 시신 놓였던 자리의 머리편과 발편에 선 두 천사의 존재 확인, 두 천사가 그녀의 우는 까닭을 물음(반어법적 질문),, <주의 시신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대답하고 이어서 자기 뒤에 인기척 느껴 뒤돌아 봄.. <우는 이유와 누구를 찾는지 >물으시는 그가 부활예수이심을 즉시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여겨서 <주님의 시신 옮겨간 곳 알려달라>고 요청,, 주님이 그녀의 이름을 친밀한 음성으로 부르실 때 바로 그분이 부활예수임이신 줄 깨달아 알아봄..(부활예수께서 이제 영원한 속죄위해 자기의 피를 하늘성소에 드리려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 얘기 하심) --->막달라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그 말씀 전함..
2>베드로(눅 24:34)
3>엠마오도상의 글로바와 다른제자(눅24:13-35)
4>도마가 없는 동안 10명의 사도에게 나타나심(눅24:26, 요20:19 -- 생명의 성령 불어넣어주심)
5>도마 포함한 11사도가 함께 있을 때 나타나심(막16:14, 요 20:26)
6>디베랴바다에서의 어부출신의 7제자들(요21:1-24)
7>갈릴리 산 위에서의 모든 제자들(마28:16)
8>500여형제들(고전15:6)
9>주의 형제 야고보(고전15:7 --회심하고서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역할.)
10>예루살렘 근처(감람원)에서 11제자들(막16:19, 눅24:50, 행1:3-12, 고전15:7),
##<성경> 마 28: 1 - 10.....예수의 부활
예수께서 장사된 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무덤을 방문한 여인들이 이를 확인한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1. 예수의 부활(1-8절)
1) 부활의 날(1절):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일이 지난 뒤’.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저녁 6시까지다. ‘안식 후 첫날’은 현재의 일요일로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이 후로 기독교는 안식일(토)을 성일로 지키던 전통에서 벗어나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의미로 일요일을 성일로 지키게 되었다.
‘미명’은 ‘빛을 내다’, ‘날이 밝다’는 뜻으로 일요일 새벽 해 돋는 시간을 가리킨다.(막16:2)
여기에서 ‘다른 마리아’는 글로바(알패오)의 아내이며 야고보와 요셉(요세)의 어머니인 마리아(27:56, 막16:1)를 말하며, 같이 동행한 여인들로는 일곱 귀신 들었던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세베대의 아들들의 모친) 살로메, 헤롯왕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가 함께 했다.
이들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예수의 무덤을 찾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16:21, 17:23, 20:19) 이로 인해 옛 언약의 안식일(토)을 폐지하고 새 언약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된 것이다.(행20:7, 고전16:2, 계1:10) 이 날은 세상의 참 빛 되신(요1:9) 예수께서 어두운 무덤의 권세를 물리치고 온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신 날이다. (창1:3)
2) 천사들에 의해 열려진 돌문(2-3절): 예수께서 친히 돌문을 열고 나아오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천사들이 이렇게 하도록 하신 것은 예수의 부활이 하늘로부터 임하는 영광이며 하나님의 역사임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이 완전함을 선포하신 것이다(롬6:9.고전15:54-57).
3) 예수의 부활 소식을 확정하는 천사(5-6절):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그 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무덤을 찾아 왔던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위로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곳에 계시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그의 말씀대로 부활하셨음을 증거하면서 (16:21, 20:19, 막8:31, 눅18:33) 누우셨던 장소를 확인해보라 하신 것이다.
4) 부활의 예수를 전하라고 명하는 천사(7-8절): 여인들에게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 소식을 알리라고 하셨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시니 그 곳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이다. 이 때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실망과 슬픔에 싸여 있을 때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고후1:3-7) 그들을 만나 그들에게 귀한 사명을 맡기고자 한 것이다. (마28:16-20. 행1:8-9)
*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고 영생의 첫째 부활을 소망하는 성도가 되자.
2.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시공을 초월한 부활의 몸 입은 부활예수(9-10절)
1) 여인들을 위로하심(9-10절): *아마도 막달라마리아는 홀로 다락방으로 향하여 달음질 치고 나머지 여인들은 자기들 집으로 갔던것일까?
**어떻든간에 부활의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무덤에서 돌아가는 여인들에게 ‘평안하뇨’하시며 도중에 직접 문안하셨다. 이는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인사말로서, 기뻐하라는 뜻이다. 즉 근심에서 기쁨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무서워 말라’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바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진 두려움을 잔잔하게 하시고 평안을 주려 하신 것이다. ‘형제들’은 제자들을 말한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를 고통 가운데 홀로 두고 자기들만 피하여 도망간 자들이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면서 갈릴리 그 곳에서 만나고자 한 것이다. 자신을 버린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사랑의 진면목을 보여주셨다.
2)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마가는 막달라마리아가 최초로 부활예수 만났음을, 전승에서는 베드로가 최초로 부활예수 만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막16:9,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간 후 동산에서 개인적 만남의 기술 추가 :요20:11-18), :막달라마리아는 2회 만났을 가능성.
---막달라마리아, 다른 마리아, 살로메 요한나를 : 무덤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함께(마28:9-10),
---두 제자를 엠마오 도상에서(눅24:13-32)
---베드로를 예루살렘에서(눅24:34), : *개인적 만남임..제자들이 부활의 날 저녁 다락방에서 모이기 그전에.
---열 제자들을 (도마 제외)다락방에서(눅24:36-43), :부활의 날 저녁에..
---열 한 제자를 (도마 포함) 마가 다락방에서 (요20:24-29), :7일 지난 두번째 주일 저녁.
---일곱 제자를 갈릴리 디베랴호수에서(요21:1-14), : 베드로를 회복시키심..
---사도와 오백여 형제를 갈릴리의 다볼산(변화산)에서(마28:16-20) 일시에 만나심 : 마28:19-20의 선교의 대사명 주심..
====== 10여 차례 나타나시어서(이로 인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현존하며 동행하는 그분의 임재 경험 통해 내주하는 임마누엘 성령 신뢰하기를 가르치심)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의 감람산-감람원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계속 기도한다면 권능의 성령을 보내어 옷입게 하여주실 것 약속하시고 성령이 임하면 권능를 받아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명하셨다.(행1:4-8)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증거하는 성도가 되자.
---예수님은 예언한 말씀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10여 차례 부활하신 주님으로 나타나 보이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부활 신앙을 소유하여 주님 재림하실 때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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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증인들]
....아마도 (사랑 충만한) 막달라마리아가 (가장 먼저 무덤을 홀로 찾아와...무덤 안치되었음을 확인한 후 이제 무덤을 찾아와서 향품 바르기로 셋 또는 네사람이 의견 일치를 보았고, 그런데 누가 돌문 열어줄꼬 걱정하며 향품 준비하였으리라) 돌문 열린 것 확인 -->일단 제자들에게 알림(베드로와 요한이 이를 확인하고 돌아감)-->한편, 막달라 마리아는<요안나, 살로메,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막16:1, 눅24:10..로 보이는> 여인들과 함께 <향품 바르려>무덤을 다시 방문 --->[무덤 속에서 천사를 만남] 세(두) 여인 먼저 돌아가고, <슬픔에 싸여>뒤에 처진 막달라 마리아는 비밀히 <홀로> 무덤안에서 두 천사와 부활예수를 함께 만남/갈릴리에서 보자는 구주의 전언을 받아 제자들에게로 돌아가면서 세(두) 여인을 만나서 힙류.-->이 사실을 돌아가고 있는 (반신반의하면서?) 세여인들에게 전언(그랬을 것으로 추측!!), 함께 제자들에게 구주 말씀<갈릴리에서 만나자>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구주를 (그들과 함께 막달라마리아는 다시 만났으며, 또 구주 말씀을 재차 들은 것임!!) 만나 경배하고 구주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함께 전함 ::: <눅24: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막16:1에서는 살로메로 지칭됨-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교제하심<눅24:13-35> 구주이심 깨닫고 돌아와 다락방에 합류하여 증언--->안식후 첫날<부활의날>저녁, <문이 닫힌> 마가 다락방에 나타나심<먼저 10제자>, 7일이 지난 두번째주일, <문이 닫힌 마가다락방에> 도마 포함 11제자에게 다시 나타나심.....::따로 추가<고전15:5-8>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의 날, 태어난 지 제8일 할례의 말, 안식일 다음날, 추수한 첫 곡식 한단을 요제로 드리는 날
<<요제의 날>>레23:10, 11, 15-[안식일 다음날...안식일은 제 7일째였기에 안식일 다음날은 이제 그 주간의 첫날이며, 동시에 새로운 부활 주님 안에서의 첫날이기도 함...이것이 요20에서 성취된 예언임]에,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요제(앞뒤로 흔듦..부활을 의미)로 드렸는데, 첫열매의 그 단은 부활 안에 첫 열매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음(고잔15:20, 23) [--이에 반해, 거제란 위아레로 흔드는 동작으로서 승천하시는그리스도를 예표함]
<<할례의 날...창17:12>>...남아마다 태어난지 8일째에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음 :: 의미--천연적 출생의 옛창조를 끝내고 부활한 생명과 그 합당한 본성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골2:11, 12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우리는 모두 그분의 십자가로 할례받았음을 선언하고 있음.. 부활은 전적으로 새 창조 안에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공포하시려 의도하신 바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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