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마18장
===천국에서 큰 사람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마태복음 18장 (개요)
복음서란 요약하여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정리해 놓은 기록이다. 앞에 있는 장(17장)은 그의 행하심에 관한 것이었고 본 장(章)은 그의 가르치심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본 장(章)의 교훈들은 그리스도께서 일시에 말씀하신 하나의 계속된 교훈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각각 다른 경우에 말씀하신 것인데, 유사한 것끼리 여기에 함께 모아 놓은 것이다. 본 장(章)의 내용 개요는 다음과 같다.
Ⅰ. 겸손에 관한 교훈들(1-6).
Ⅱ. 실족케 하는 것에 관한 총괄적인 교훈(7). 특별히,
1.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실족케 하는 경우(8, 9).
2.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실족케 하는 경우(10-14).
3.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실족케 하는 경우.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1) 권고 받아야 할 중상 모략죄(15-20).
(2) 용서받아야 할 개인적인 오류들(21-35).
그리스도의 설교가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살펴보자. 그는 신비스러운 것들을 계시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단지 분명한 의무들을 강조하셨다.
특히 그 의무들은 혈과 육을 매우 거스리는 것들이다.
=====
겸손에 관한 교훈(마 18:1-6)
그리스도는 전무후무한 겸손의 모형이셨으며, 또한 그것의 설교자이셨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언제라도 겸손할 것을 명령하셨고 또한 권장하셨다.
Ⅰ. 겸손에 관한 이 교훈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제자들 간에 누가 더 크냐하는 합당치 못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에게 와서 말하기를" 그들 중에서 "누가 천국에서 제일 크니이까?"하고 물었다(그들은 이러한 질문을 직접적으로 그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였다. 막 9:34).
그들이 말하고 있는 뜻은, "어떤 성품을 가진 자가 크니이까?" 한 것이 아니라(그런 뜻의 질문이라면 온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은사와 직분이 가장 빼어나는가를 그들은 알아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가장 큰 자의 이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하늘 나라와 메시야의 나라와 이 세상에 있는 그의 교회에 대하여 많이 들어왔고 또 많이 가르쳐 왔다. 그렇지만 아직도 천국의 분명한 개념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현세적인 왕국과 그것의 외형적인 허례와 권세만을 꿈꾸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최근에야 그의 고통 당할 일과 그 후에 있을 영광, 즉 그의 부활을 예언하셨었다. 그들은 그 영광의 부활이 있게 되면 그때로부터 그의 나라가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이야말로 천국에서 자기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찍 말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던 다른 경우에서도 제자들 간에는 이러한 종류의 논쟁이 있었다(마 20:19, 20; 눅 22:22, 24).
그리스도는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셨지만, 자신의 영광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말씀만을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한 마디의 말씀만을 귀담아 들었으며, 다른 말씀들은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능력과 은혜를 받아 그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을까 라고 묻는 대신에 "그와 함께 그의 나라에서 다스릴 때 누가 제일 큽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많은 사람들은 특권과 영광에 대해서는 듣거나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수고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생각하는 것은 기꺼이 지나쳐 버린다.
그들은 영광의 면류관을 많이 바라보기 때문에 멍에와 십자가는 잊어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바로 그러한 일을 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에서는 누가 제일 크니이까?" 하고 물었던 것이다.
1. 제자들은 그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자들을 크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제사장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참으로 선한 자들이 참으로 큰 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마침내 그처럼 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세상에서는 비천하고 가난하였을지라도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2. 제자들은 천국에도 계급과 상하 계층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모든 성도들이 다 존귀하게 되지만 그러나 동등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한 별은 다른 별과 영광 면에서 차이가 있다."
다윗의 모든 관리(용사)들은 모두 30인의 영걸들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 영걸들은 모두 첫 3인의 시위대 장군들은 아니었다.
3. 제자들은 그들 중에 몇 명만이 최고의 주지사(또는 장관)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왕 되신 주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에 와서는 인내와 고난 가운데서 그의 동역자가 된 자들에게만 존귀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
4. 제자들은 각자가 자신의 잘난 점만을 내세우면서 누가 제일 큰가를 논쟁하였다.
베드로는 언제나 수석 발언자였으며 또한 천국열쇠가 주어져 있었다. 그는 주님의 집에서 국무대신이 되어 가장 큰 자가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유다는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비록 지금은 말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장차 재무장관이 되어 가장 큰 자로 지명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시몬과 유다(가룟 유다는 아님)는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혈육의 군주들로서 높은 자들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요, 왕의 총애를 받는 자였으므로 큰 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안드레는 제일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자이므로 그 역시 하늘 나라에서도 큰 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자기의 분수에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을 어리석게 탐하여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기가 쉽다.
Ⅱ. "누가 가장 크니이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을 나무라시면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을 교회의 머리요 지상의 최고 대행자들로 삼으시려는 의향을 가지고 계셨다면, 그에게 주어진 기회가 마침 좋기 때문에 그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도록 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억측들과는 전혀 동떨어진다. 그의 대답은 그 문제 자체를 불허하시고 오히려 정죄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결코 그러한 권위나 우월한 지위를 그의 교회에 두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 권세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모두가 강탈자들이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지위를 제자들에게 주시기는커녕 그들이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을 엄하게 책망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겸손해지기를 가르치고 계신다.
1. 표적(sign)으로 가르치심(2절). "예수께서 한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옛날 선지자들처럼 흔히 표적에나 알기 쉬운 예화를 들어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겸손은 익히기가 매우 힘든 교훈이기 때문에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이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왜 이 어린아이를 표적으로 사용하셨는가를 마음에 새기게 된다. 곧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물들(예화나 표적 등)은 영적인 목적에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저를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 어린아이들과 더불어 장난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인이나 위인이라고 해서 어린아이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그들이 어른들에게 교훈을 주는 말을 해 주기도 하며,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볼 때에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 자신도 어렸을 때에 선생들 중에 계셨었다(눅 2:46).
2. 이 표적에 근거하여 설교를 하심. 그의 설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겸손의 필요성(3절).
그의 말씀의 서두는 엄숙하였으며, 자신의 말씀에 경청하고 동의할 것을 명하고 계시다.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인 내가 말하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① 주님께서 요구하시고 주장하신 것은 무엇인가?
첫째, "너희는 돌이켜야 한다. 즉 너희들이 천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적합한 자가 되기 전에 먼저 너희의 마음과 기질과 너희 자신, 그리고 천국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너희 안에 있는 교만과 야망, 명예욕과 권세욕들을 회개하고 극복하며 개조시켜야 하며 또한 참된 자신을 회복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에게는 본래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변화되는 영혼의 첫 번째 변화, 그것외에도 종종 있게 되는 타락의 길에서 다시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속발되는 변화가 있게 되는데, 이는 JC를 빼어닮음의 성화와 영화,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죄로 말미암아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모든 발걸음은 회개를 통하여 다시금 바른 길로 돌이켜야만 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것을 회개하였을 때 회심을 하게 되었었다.
둘째, 너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회심의 은혜는 우리를 어린아이와 같이 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의 부정적 측면들, 곧]*지혜에 대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우둔하게 만든다든지(고전 14:20..우매무지완악고집), *변덕스럽게 세상풍조에 휩쓸리게 방치한다든지(엡 4:14..변덕스러운 세상가치에 미혹/요동), *장터에서 노는 어린아이들과 같이(마 11:16...선포된 바 복음진리말씀을 오락농담거리삼게) 반응한다는 부정적 의미를 취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는 점들이란, 적극적 긍정적 의미에서 보자면,
*1.JC, 곧Q 말씀 배움에 있어서 어린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갈망함, 곧 "신령하고 순전한 말씀의 것을 사모"(벧전 2:2...진리말씀 사모함)해야 하며
*2.어린아이와 같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으며, 하늘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실 줄을 믿어야 하며(마 6:31.전지전능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의지함)
*3.어린아이와 같이 악의가 전혀 없고 남을 해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고전 14:20..오직 청결한 사랑을 따라 지혜로 행함),
*4.다스림에 순복하고 명령을 잘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갈 4:2..진리말씀에 대해 잘 배우며 모든 온유와 겸손으로 순종하기를 배움)는 적극적, 긍정적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별히 뜻하고 있는 바는 무엇보다도 기독자는 마땅히 [바로 JC는 승천후에도 스스로를 소자라 칭하시듯]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1.어린아이들은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위엄을 부리지 않으며, 귀족의 자식일지라도 거지의 자식과 더불어 함께 어울리며 논다(롬 12:16).
*2.어린아이는 걸레 조각과 같은 누더기 옷을 입을지라도 따뜻하기만 하면 비단 옷을 입은 어린아이의 화려함을 시기하지 않는다.
*3.어린아이는 높은 자리를 탐내거나 세상에서 크게 출세할 계획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는다."
바로 그러함따라 기독자마다 그와 같이 "행하여 젖뗀 아이가 그 어미품에 있음같이 심령으로 고요하고 자신을 평온케 해야 할"(시 131:1, 2) 것이다.
*4.어린아이가 몸이 작고 키가 적은 것과 같이 우리는 영적으로 또한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적고 또 작아야만 할 것이다.
[주님없이는 절대적으로 극악무도한, 전적인 무-공허-혼돈-사망-가장 비참한 존재이기에, 다른사람은 어찌하든지 주님만이 내 모든 것 되심..주님 얻고 그안에서 발견되는 것만이 내 모든 유일한 소망, 지고지선의 진복..주님인도따라 어디로든지 동행하며 따라가려 함을 인정..] 이러한 성품만이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나은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 준다. 유년기는 한창 배우는 시기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어린아이처럼 배우는 자의 자세가 필요하다.
② 주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강조를 하셨다.
[심령의 가난함-죄를 애통해 함-JC말씀을 잘배우고따름-오직 하나님의 의, JC를 절대적으로 갈망함, 곧 의에주리고목마름]의 겸손함이 없이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항시 두려워함으로 "(그의 안식에)미치지 못할까"를 염려해야만 한다(히 4:1).
제자들이 그 질문을 했을 때(1절) 그들은 천국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질투심을 가지고 있음을 깨우쳐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보다 나은 성품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곳으로 결단코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교회에서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실은 제일 못난 사람들이며 "전혀 무능력한 자로 드러날" 뿐이라는 사실이다. [[오직 말하는 자는 하나님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라!!...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우리 주님은 본문에서 교만과 욕망의 위험성을 보여 주시려고 하신다. 어떠한 맹세를 사람들이 했을지라도 그들이 이 죄를 범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과 그의 거룩한 산에서 쫓겨나게 했으며, 또한 우리가 교만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교만으로 높아진 사람들은 마귀의 정죄에 빠지게 된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만 하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듭나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하며," 또한 "거룩하신 아기인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승천 후에도 "거룩한 아이[소자] 예수"(행 4:27...작은 자..KJV::thy holy child Jesus,)로 불리우고 계시다.
(2) 그는 겸손에 뒤따르는 명예와 승진을 가르치시고 있다(4절).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이고도 경이스러운 대답을 해 주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 사람은 비록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경멸을 받지 않을까 염려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매우 수줍어하는 마음씨를 가진 사람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승진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그러한 사람이 천국에서는 큰 자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가장 겸손한 기독자만이 가장 훌륭한 기독자이며,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의 은총 안에서 가장 존귀한 자이며, 신적인 은혜를 교통하는 데 가장 적합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저 세상에서도 그를 가장 즐거워하는 자이다.
[자기가 죄인중 괴수이며, 지극히 비천함가운데 있음을 자각하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다고 인정하기에 주님의 사랑의 크나큼안에 자신을 투신하는 자]그들은 [진질로 진실로] 큰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찾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두루 살피고 계시기 때문이다.
분명히 가장 겸손하고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존경받기를 전혀 구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기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특별히 돌보아 주신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주장을 지지해 주시며, 그들을 보호해 주시며, 그들의 염려하는 것을 선처해 주시며, 그들이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곧 회복케 될 것을 아실 것이다.
한편, 부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처럼 [겸손과 비하]공과를 기꺼이 배우기를 꺼려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혹시나...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미리, 짐짓 추측하거나 지레짐작하면서] [홀대당할까봐] [그 마음에 미리] 염려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JC께서는 예방백신주사를 놓어주고 계신다.
① 아무도 그들을 영접해 주지 않을 것으로 염려한다.
그러나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겸손한 자들에게 베풀어진 친절과 온유로 영접함은 모두 그리스도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그는 간주하신다.
[JC로부터 오는 영적 동질감과 열린 바 그 영적 민감성의 하나됨]바로 JC안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을 [알아보고 존귀히 여기며] 영접하고 정중히 대우하는 자들은 결코 그로 하여금 그의 겸허함을 인하여 실족케 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를 사랑해 주고 우정을 나누며 서로 도와 그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힘쓰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위하여 이렇게 대접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를 영접함은 더 나아가 바로 그의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하며 영접하였다고 여기신다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지로 이러한 일들을 합당하게 받으시고 갚아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된 자가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여질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되, 각 지체들 특히 가장 비천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돌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교회의 전체 가족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의 자녀까지도, 또한 더 나아가 의식으로나 무의식중에서라도 하나님,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심령의 가난한, 세상의 지극히 작은자까지도 찾아가 손수 돌보신다.
믿는 이가 JC를 앙망하며 말씀과 성령의 인도따라 이끄시는대로 자비-온유-친절로 그리스도의 사랑가운데서 위로-격려-보살핌의 손길을 베푸는 바, 그 [심령이 가난한 자요 무력한] 그 어린아이가 세상에서는 극히 보잘것없다 여김받고 멸시천대버려짐 당할수록 그 손길속에 담겨있는 선의(善意)는 그리스도에게는 더욱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여기심이 된다. 믿는 이가 그들 자신 스스로를 위하여 행함이 적으면 적을수록 반비례하여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더욱 더 큰 영광드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그와 같이 여기신다.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개인적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다면, 우리는 결코 그를 충분히 영접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심령이 가난한 자와 함께 있다." 그들은 그가 영접해 주시는 자들이다(마 25:35-40 을 참조).
② 그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을 배신할까 염려한다.
가장 천박한 사람들은 겸손한 자들을 짓밝기를 좋아한다. 천박한 자들마다 그들의 특성상, Vexat censura columbas─즉 비둘기에게서조차 비난할 조건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미리 간파하시고 말씀의 경고로 예방하고 계신 것이다(6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일 그의 어린 소자 중 하나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들은 매우 위험스럽게 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하고 계시다.
이 말씀은 그의 소자들의 둘레에 불담(a wall of fire)을 만들어 보호하심을 말하고 있다. 그들을 해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눈동자를 해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
첫째, 가상적인 범죄.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어린아이들은 비록 어리고 작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함이 되며, 또한 자신의 주장을 그에게 아뢰게 된다.
그러므로 그 어린아이들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믿음으로] 동참할 때에 그도 역시 그들의 억울함(wrongs)에 동참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비록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위대한 사람들과 동일한 특권을 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심지어 교역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어린아이들을 [꾀어] 범죄케 하거나(고전 8:10, 11), 또는 그들의 의로운 영혼을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하며, 그들을 낙담시키고 그들의 온순한 마음씨를 이용하여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실족케 함의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를 때가 있다.
이처럼, 가장 좋은 사람들(여기서는 어린아이-역주)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대접을 받게 될 때가 종종 있다.
둘째, 이 범죄에 대한 형벌.
이것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6절)는 말씀에 암시되어 있다.
그 죄는 가증한 것이며, 그 파멸은 비례적으로 극심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자는 차라리 극악한 죄인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는 편이 낫다. 그 형벌은 [당장은] 육체만을 죽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 하라.
1. 지옥은 바다의 깊은 곳보다 더 나쁜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밑이 없는 못이요, 불이 이글거리는 호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깊은 바다 속에서도 오히려 편하게 쉬었던 요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욘 2:2, 4, 9). 그러나 지옥에서는 한 가닥의 위로도 찾아 볼 수 가 없다. 거기에는 영원히 위로가 없다.
2. 저항할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는 재판장 되신 하나님의 심판이 "목에 달리운 연자 맷돌"보다 더 신속하고 분명하게 그들을 가라앉게 할 것이요, 더욱 굳게 조일 것이다. 거기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구렁(눅 16:26)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어린 소자들을 실족케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실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가장 무서운 선고인 "화있을진저"(교만한 박해자들은 최후에 이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를 받게 될 이유가 되는 것이다.
-------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하여(마 18:7-14)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실족케 하는 것 또는 장해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Ⅰ. 일반적인 언급(7절).
그리스도께서는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나서 보다 일반적으로 실족케 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계시다. 실족케 하는 죄란,
1. [유혹이나 위협에 의해서] 선한 것으로부터 악한 것에로 사람들을 꾀어 죄를 범하게 만드는 경우와,
2. [재난을 당하게 하여] "의로운 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경우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족케 하는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계시다.
(1) 실족케 하는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있게 마련이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는 위험이 있을 것으로 확신할 때에는 보다 더 튼튼하게 무장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어떤 사람이 실족케 하는 것을 부득이한 것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족케 하는 여러 가지 원인들을 미리 알려 주시기 위함이다.
사탄의 교활함과 사악함, 인간의 심령의 연약함과 부패함 그리고 인간의 우매함을 생각해 볼 때 실족케 하는 일들이 실제로 없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롭고 거룩한 결말들(ends)을 인간들에게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온전한 자들이나 온전치 못한 자들이 모두 다 드러나도록 하셨다."(고전 11:19; 단 11:35 참조).
주님께서도 이미 유혹하는 자들과 핍박하는 자들과 시험에 들게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경계를 해야만 한다(마 24:24; 행 20:29, 30).
(2) 실족케 하는 것은 화를 불러오는 것들이며 또한 그것들의 결말은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 실족케 하는 것에는 두 가지 화가 뒤따른다.
① 실족케 함을 당하는 자들, 즉 부주의하고 경계가 허술한 자들에게 미치는 화.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믿음과 거룩함을 역행하는 장애물과 방해물들은 인류의 악이요 전염병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파멸이다. 이 세상은 사악한 세상이며, 허물과 죄와 유혹과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거침돌들과 낭떠러지와 거짓 안내자들로 가득찬 위험한 길을 여행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고 거기에서부터 건져냄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실족케 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함을 받으며, 또한 이 모든 거침돌들에 의해 넘어지는 데서 도우심을 받는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실족케 하는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② 고의적으로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 미치는 화,
"그러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것이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 변명의 구실은 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죄악들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케 하시지만 그것이 죄인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족케 하는 자들이 범죄 할 때에는 화가 미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 앞에는 죄가 대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은 그들이 정죄 받은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움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치 "죄를 범한 여로보암이 다른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케 한" 경우와 같다.
이 재앙(화)은 재판법의 경우와 비슷하다(출 21:33, 34 -; 22:6), 그 법에 의하면 구덩이를 파거나 불을 놓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모든 손해를 배상해야만 했다.
크게 실족케한 반기독자들은 죄인들을 미혹케 하고(살후 2:11, 12) 성도들을 핍박한 것(계 17:1, 2, 6)으로 화를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값진 영혼들이 가진 영원한 이익을 파괴하고 값진 성도들의 특권을 망쳐놓은 자에게서 반드시 손해배상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피와 "성도들의 피"는 "하나님 보시기에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의 열매, 즉 그들에 의해 행해진 손상에 대해 함당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Ⅱ. 구체적인 언급.
1.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경우.
이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를 실족케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그러한 경우에 그 손과 발은 찍어 내버려야 한다(8,9절).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이 말씀을 하신 일이 있다(5:29, 30). 그 때는 특별히 제7계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보다 더 일반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혈과 육에 대하여는 매우 불쾌한,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매정스러운 말씀들은 반복하여 우리에게 돌려질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해도 불충분할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여기에는 어떤 것이 명령되었는가 ?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지체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불가피하게 우리를 죄짓게 하였을 때, 우리는 그 "눈"이나 "손, 발"을 제거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① 죄에 대한 많은 강렬한 유혹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 자신의 눈과 손이 우리를 실족케 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마귀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미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 자체가 선하고 또 선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심령의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덫이 되고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고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한다.
②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합법적으로 우리를 죄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그 지체를 제거해야만 한다.
첫째, 우리의 내적인 정욕은 그것이 우리에게 눈이나 손과 같이 귀중한 것일지라도 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느니라"(갈 5:24).
"죄의 몸은 멸망 받아야 한다." 부패한 습성이나 성향은 반드시 제지되고 못박아져야만 한다. 달콤한 사탕처럼 혀 밑에서 굴려지는 애지중지하는 정욕은 마땅히 증오심을 가지고 제거되어야만 한다.
둘째, 죄를 범하게 하는 외적인 동기들을 피해야만 한다.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손을 잘라내고 눈을 뽑아 버리는 듯한 큰 상처를 우리 자신에게 입힌다해도 단호히 이를 피해야만 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 땅을 떠난 것은 우상 섬기는 데 미혹을 받을까 두려워해서였다. 또한 모세가 바로의 궁전을 떠난 것도 그곳의 죄악된 환락에 빠지게 될까 두려워해서였다.
그들에게는 오른손을 잘라내는 듯한 아픔이 있었다. 선한 양심을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귀중한 것도 단호히 잘라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2) 이 명령은 어떤 권유의 말씀에 의거하여 요구되고 있는가?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장래의 상태(신분), 즉 천국과 지옥에서부터 그의 논증을 이끌고 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범죄 하는 것을 제지할 수 있는 강한 설득력을 발휘하고 계시다. 그 논증은 사도의 것과 동일하다(롬 8:13).
①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두 눈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죄악된 육체와 또한 아도니야처럼 나면서부터 부패한 성격에는 아무런 침범도 가해지지 않게 되기 때문에 언제나 즐겁기는 하겠지만, 결국은 "지옥 불에 던지우게 될" 것이다.
②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불구의 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불구가 된 죄의 몸을 뜻한다. 그렇지만 기껏해야 이 세상에 사는 동안만 불구인 것이다.
옛 사람의 오른손이 잘리워지고 그의 오른 눈이 잘리워지고 그의 오른 눈이 뽑혀져서 그 주요 기능들이 마비되고 그 힘이 쇠약해져 버린다 해도 그것은 괜찮다. 아직도 한쪽 눈과 손이 남아 있어서 그것만 가지고도 살아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 생명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권세는 빼앗기고 만 것이다"(단 7:12). 그리고 그 육체에 가해진 치명적인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을 것이다.
2.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경우.
특히 그리스도의 어린 소자들을 실족케 하는 경우. 이에 대하여는 우리가 주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하고 계신 말씀은 6절에서 하신 말씀에 준하고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
(1) 경고의 말씀.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의 원수들이 비록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지체에 대해 악을 행할 때 그들을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것처럼, 교회의 지체 높은 자들이 교회의 어린아이들을 무시한다면 그러한 자들을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다.
"누가 큰 자인가를 논쟁하는 너희는 삼가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여기에서 문자적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2,4절에서 말씀하셨다. 즉 믿는 자들 중 매우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의 권속에 속하며, 따라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비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즉 참되지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심려의 구조나 외형적인 조건에 있어서 어린아이와 같고 그리스도의 무리들 중 어린양과 같은 자가 곧 소자이다.
①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순전한 자들이 조롱거리가 되듯이(욥 12:4)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약점들을 조소하거나, 그들을 경멸에 찬 눈초리로 멸시하거나, 그들이 어떻게 되든지 내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식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삼가야만 한다. 즉 "그들이 실족케 되고 마음에 크게 상처를 입고 넘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우리는 결코 어린아이들을 괴롭히고 당황케 하는 일들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는 이러한 죄는 우리가 크게 주의해야 할 것으로 성경에 강조되어 있다(롬 14:3, 10, 15, 20, 21).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속이거나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비위를 맞추도록 강요해서도 안 된다. 사람을 향해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머리를 숙이도록 하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존경을 받는 것은 진실하고 양심적인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양심에 근거하고 있다.
② 우리는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주의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거나 부지중에 그들을 멸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몹시 미워하고, 그들을 내어쫓으면서 말하기를 "주를 영화롭게 할지어다"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삼가 그들을 업신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가 업신여길 때에 네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2) 주의할 것을 강요하는 이유.
우리는 이 어린아이들을 하찮은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그들은 무시 못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세상은 멸시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고 자신의 사랑 받는 존재들로 아끼는 "그러한 자들"을 우리는 멸시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들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① 천사들이 그들을 수종 들고있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그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세계에서 되어지고 있는 일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진실하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에 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첫째, 그들은 어린아이들(소자)의 천사들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어린이들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2).
천사들은 어린이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히 1:14). 또한 그들은 어린이 주위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팔로 안아 떠받들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성도는 개별적으로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개개인의 성도는 필요에 따라서 천사들의 수호를 받는 다는 것을 믿는다면, 개별적으로 수호 천사를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본문은 오직 특별하게 어린아이들에게만 적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많이 업신여김을 당하고 버림을 받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자기들의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그들은 믿음으로 하늘의 천군 천사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들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수행원과 호위병으로 훌륭한 인물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반면에 교회의 어린아이들은 영광스러운 천사들의 수종을 받고 있다. 이는 그들의 위엄을 뜻하기도 하는 한편 그들을 업신여기고 경멸하며 욕하는 자들이 당할 위험을 나타내 보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처럼 수호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 원수가 된다는 것은 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은 유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모두 우리의 천사들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① 천사들의 영속적인 행복과 영광을 뜻함.
하늘 나라의 행복은 하나님을 본래의 모습대로 얼굴을 대면하여 보며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 있다. 즉 하나님을 뵈옵는 데 천국의 행복이 있다.
천사들은 이 행복을 아무런 장애 없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땅에서 우리들을 수종들 때에 심사숙고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full of eyes within-즉 그들 안에 눈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말을 할 때에도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계 4:8; 눅 1:19).
이러한 표현의 말들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어린아이들의 천사들의 특별한 위엄과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센 천사들이 약한 성도들을 돌보아 주는 것처럼, 나라의 방백들은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1:14).
② 그것은 천사들이 영속적으로 성도들을 섬길 것을 뜻하고 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행할 바를 하나님께로부터 명령받기를 기대하고 있다. "종의 눈들이 자기 주인의 손을 주목하고 있다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오거나 갈 준비가 되어 있듯이, :: 시123:2...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천사의 눈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를 깨닫고는, 그 날개 가진 천사들은 재빨리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날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번개불같이 빨리 왕래한다"(겔 1:14). 우리도 이후에 천사들처럼(눅 20:36)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게 된다면 천사들이 행하는 대로 우리도 지금 우리가 행할 것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다(행 9:6).
②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한 은혜로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11절).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 바로 이 때문에,
첫째, 어린아이의 천사들이 아이들을 수종들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는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계획에 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천사들의 수종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사들은 우리와 화목케 되었다. 천사들은 인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찬양할 때에 자신들의 것도 그곳에 첨가시킨다.
둘째, 바로 이 때문에 어린이들은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잃은 자들인 그들, 다시 말하자면 길을 잃고 당황하는 어린아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사 66:3) 오셨기 때문이다. 또는 어린아이와 같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도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① 우리의 영혼은 본래적으로 길 잃은 영혼들이다.
마치 여행자가 길을 잃고 방황하며, 기결수가 판결을 받고 낙담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로부터 그가 마땅히 받으셔야할 섬김을 받지 못하셨으며 존귀도 받지 못하셨다.
②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우리의 본분을 다시 감당케 하며, 우리의 특권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영적으로 영원히 전락하여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③ 바로 이것은 믿음이 부족하고 약한 신자들이 업신여김을 받거나 실족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처럼 귀하게 여기신다면 우리도 그들을 천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처럼 자기 자신을 부정하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들의 신앙성장과 위로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부정해야할 것이다. 이 논증은 로마서 14장 15절, 고린도전서 8장 11, 12절에서 강조되고 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또한 그의 마음이 그 구속사업에만 전념하셨다면 그는 분명히 그 구속사업을 방해하는 자들, 즉 하늘을 향하여 전진하는 자들을 방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커다란 구원의 계획을 꺾는 자들을 혹독하게 다루실 것이다.
③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어린아이들의 안녕을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12-14절).
그리스도의 논증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을 유의하여 보라.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들의 종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들의 구주이시다. 또한 그들의 존귀함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이다.
"아무도 저희를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첫째, 12절, 13절에는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양 일백 마리를 가진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래서 그 주인이 그 잃은 양을 찾았을 때, 그는 길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고 있다. 그 한 마리를 잃었을 때의 두려움과 그것을 찾았을 때의 놀라움이 그 기쁨을 더해 주고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적용될 수 있다.
① 일반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 관하여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과 같이 하나님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천사들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과 같다.
그리스도는 몹시 피곤하신 중에서도 방황하는 인간을 찾아 산을 넘고 냇물을 건너며 헤메다가 그를 찾았다. 그를 찾은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하늘에서는 남아있는 천사들보다 돌아온 죄인들을 인하여 더욱 크게 기뻐한다.
② 거침돌이나 간계에 의하여 실족케 되거나 길을 잃은 개별적인 신자들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백에 하나라도 곁길로 나가게 되면(양들은 곧잘 거침돌이나 간계에 의해서 곁길로 떨어져 나간다), 그 한 마리를 인하여 크게 걱정하면서 찾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돌아올 때는 크게 기뻐하면서 맞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마리에게 가해진 불법적인 행위는 매우 혹독하게 징계되는 것이다.
이 어린 소자들 중의 하나를 찾게 됨을 인하여 하늘에서 기뻐한다고 한다면 그들을 실족케함을 인하여 하늘에서는 진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는 그의 양무리 전체뿐만 아니라 그 무리에 속한 어린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은혜롭게 관심을 두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양 무리의 숫자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 중에 한 마리만 없어도 이를 쉽게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하신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쉽게 양이 길을 잃도록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전보다 더욱 세심하게 그의 양떼를 개별적으로 아신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내기"때문이다(요 10:3). 이 비유의 완전한 해석에 관하여는 에스겔 34장 2,10,16,19절을 참조하라.
둘째, 이 비유의 적용이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여기에는 보다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어느 누구라도 잃어져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오히려,
① 이 소자들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그의 뜻이다.
그는 그 구원을 계획하셨고 거기에 심혈을 기울여 오셨으며 또한 그것을 성취하실 것이다. 그의 말씀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그 계획을 촉진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행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② 그의 뜻은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까지, 특히 가장 못난 것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두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양떼 중 한 두 마리가 실족하거나 미혹 당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이거나 염려할 것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것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③ 소자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멸망할 위험에 빠지게 하는 부당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요, 하나님을 크게 격노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요, 하나님을 크게 격노케 하는 자들임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인 성도들이 짓밟히거나 멸망하는 것을 결코 묵과해버리지 않으시며 또한 자기의 존귀에 대하여 크게 질투하신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의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사 3:15 , 참조; 시 76:8, 9)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19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으며, 14절에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시다. 이는 그가 자기의 못난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심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와 같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어린 소자들의 안전에의 근거를 말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아버지 되시는 분은 자기의 자녀들을 모두 돌보신다. 그러나 특별히 어린 자식들을 더 귀여워하신다(창 33:13).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이시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이므로 그는 그 자녀들에게 부여된 존엄성을 알고 계신다. 또 하늘은 능력의 장소이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보복조치를 취하실 수가 있다. 그들의 증인이 하늘에 있고(욥 16:19), 그들의 재판장이 거기계시다(시 68:5)는 이 사실은 실족함을 당한 어린 자녀들을 위로해준다.
-------
권고 받아야 할 죄(마 18:15-20)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실족케 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시고 나서 그들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실족케 함을 당하게 될 경우, 즉 그들에게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할 경우에 그들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다.
이 죄는 개인적 명예훼손이나 권리침해, 재산피해, 더 나아가 공적 중상모략 행위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 때에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경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이것이 공적인 중상 모략에 관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 때에는 교회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데 힘 쓸 것을 당부하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두 가지 면에서 이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으로 볼 경우,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 형제가 너의 약한 심령을 상하여 슬프게 한다든지(고전 8:12), 너를 모욕한다든지, 너에게 야비한 욕설을 퍼부어 너에게 범죄하는 경우, 또한 그가 너의 이름을 거짓된 소문이나 고자질하여 더럽히는 경우, 또한 너의 권리를 침해한다든지, 아니면 너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주는 경우, 레위기 6장 2,3절에 열거된 범죄들 중에 하나라고 범하는 경우, 공의와 자비, 친족의 양육 의무 등의 법을 어기는 경우, 이러한 여러 경우들은 모두 우리들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 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그리고 어떤 때는 미숙한 탓으로 매우 불행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에 준수되어야 할 규칙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무엇보다 먼저 주께 말씀드리고 그 때를 구하라, 면담을 요청하고 직면할 그 때에도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임재안에 안겨서 주로부터 오는 평강과 온유함으로 그 사람을 살펴 그 마음이 안돈되었는지 확인하고...부드럽게 타이르되,그의 잘못을 주님의 빛아래서 드러내어 말해주라...이때, 너의 그 손상입은 심정의 상함에 대하여 주의 깊게 경청/전적으로 유감을 표명 +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가를 영으로 살피라....If your brother sins, go and show him his fault in private; if he listens and pays attention to you, you have won back your brother)."
이 말씀을 레위기 19장 17절과 비교해 보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권고하라." 즉, "만일 네가 너의 형제에 의하여 명예 훼손을 당하여 기분이 나쁘게 되었을 때 너희 분한 생각이 속에서만 품는 악의가 되지 않도록 하라"(그 악의는 마치 속으로 피가 터져 흐르는 상처가 위험하듯이 가장 위험하다). 오히려 너의 분함을 관대하고도 무게 있는 권고로써 풀어버려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곧 없어지게 해야만 한다. 그의 등뒤에서 그를 헐뜯지 말고 "그를 반드시 권고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가 너에게 상당히 부당한 행동을 가했을 때는 그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너는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개인적으로 책망해야 한다. 만일 그가 너의 말을 잘 들어준다면 그의 허물을 누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그를 격노케 할뿐이며 그 책망을 보복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잠언 25장 8,9절과 일치한다. "너는 급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치 말라. 변론은 조용하게 그리고 평화적으로 하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그것은 참으로 다행하고 좋은 일이다. 그리고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 되며 논쟁은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한 끝맺음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게 되며 도리어 친구들과의 다툼이 변하여 우정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그가 만일 듣지 않거든 즉, 그가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을 때에는 낙담하지 말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인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사건을 잘 설명하여 그를 설득시키려고 할 때에 그가 어떻게 말하는가를 시험하여 보라"
그 증인들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보다 더 잘 들을 것이다. 만일 사려 깊은 말이 그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두 세 증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다(Plus vident couli quam oculus-즉 여러 개의 눈은 한 개의 눈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그들의 말에 더 잘 설득되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게 될 것이며 결국은 내가 회개하노라고 말할 것이다."
3.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즉 그 증인들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 때에는 교회에 말하라. 즉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여러 직원들, 또는 너희들이 속해 있는 모임 가운데서 가장 지위 높은 사람들에게 말하라.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 사건을 화해시키는 심판관이 되게 하라. 그리고 아직 당장은 관원들에게 고소하거나 소송 영장을 청구하지는 말아라."
여기에 관해서는 사도 바울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 전서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성도들 앞에서가 아니고 불의한 세상 사람들 앞에 가서 송사 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있다(1절). 그리고 성도들이 세상일에 (3절) 속하는 지극히 작은 일들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2절).
너희는 혹시 "우리가 말해야할 대상인 교회가 누구냐?"고 물을지 모른다. 사도바울은 5절에서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 말하고 있다. 그는 교회 중에 그러한 사건들을 충분히 판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들로 인정받는 지혜로운 자들이 있음을 반어적(反語的)으로 말하기를,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하찮은 자들을 세우느냐?"(4절)고 한다.
이 규칙은 세상의 정부가 이방인들이나 적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을 때 특별히 필수적인 것이었다.
4. "만일 그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고, 그들의 판정에 불복하며 계속적으로 자기의 부당한 행위를 고집한다든지 오히려 너를 해하려고 할 때에는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 즉 법에 호소를 하라.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최후의 방책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일단 그 사건을 타협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시험해 보고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그와의 우정이나 친교를 깨뜨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너는 결코 그를 보복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가 다시는 그러한 부당 행위를 할 기회를 엿보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 너는 그를 싸매어 주고 그와의 교재를 지속시키려고 하겠지만 그가 원치 않을 때는 결국 그 교제가 파기되고 말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번 나를 속이거나 비방한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지만 두 번째 또 그런 짓을 한다면 그 때는 내 자신의 잘못이다.
Ⅱ. 중상 모략의 죄로 볼 경우,
이 죄는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범죄이며, 연약하고 유순한 자들에게는 가장 사악한 실예요 또한 나약하고 겁 많은 사람에게는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형제들의 연약함을 잘 감당해 주라고 말씀하신 후, 여기에서 그들의 연약함을 구실로 삼아 사악한 짓을 할 때에는 그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말 것을 주의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울 것을 계획하시고,,
1.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시키시려고 여기에서 각별히 주의를 주고 계시다.
교회는 죄악을 추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자체를 정결케 하고 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마치 생수의 근원과 같다. 복음의 그물이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함께 양육하고 있는 한 교회에는 정화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2. 교회의 평화와 질서를 보존시키기 위하여 주의의 말씀을 주고 계신다.
즉 각 지체가 자기 자신의 위치와 의무를 깨달아 교회의 순수성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보존되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1) 본문에서 가정된 실례는 어떤 것인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① "범법자는 형제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일원이다. 즉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너와 함께 기도 드리고 또한 그와 함께 네가 정기적으로든지 아니면 수시로 든지 하나님께 함께 예배를 드린 자이다."
여기에서의 유의할 것... 교회의 법규는 교회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회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신다"(고전 5:12, 13).
어떠한 범법행위가 우리에게 가해졌을 때 그 범법자는 우리의 한 형제임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 형제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좀 더 신중하게 사건을 처리하도록 해 준다.
② "그 죄는 너에게 가해진 범법 행위이다 너희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는 경우, 즉 그가 기독자인 너에게 불법 행위를 범하여 허물이 있을 경우를 말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 대한 모든 죄는 그의 백성들에게 범하는 범법 행위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존귀함에 대하여 참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서로 밀접한 이해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가해진 허물을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되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에게 가해진 허물을 신자들은 자신들에게 되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 69:9).
(2) 이 경우에는 어떤 조처가 취해져야 하는가?
① 준수되어야할 규칙들(15-17절).
이 방법대로 실천해야만 한다.
첫째,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그의 허물을 지적하여 권고하라. 그가 너에게 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그에게로 가라. 마치 의사가 혼자를 찾아가며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가 듯이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한 사람의 죄인을 돌이켜 회개케 하는 데는 아무리 많은 수도가 든다고 하더라도 그 수고를 끝까지 감당해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허물을 지적하여 권고하라. 즉 그가 행한 바를 회상시켜 자기의 행위가 악하였음을 깨닫게 하고 그의 가증된 소행을 드러내 보여 주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람들은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허물들에 대해서 권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사실이 명확하고 또 그 과실이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그 두 가지는 함께 적용되어야만 한다. 큰 죄들은 때로 양심을 속인다. 그리하여 잠시동안이나마 양심을 흐려놓아 양심을 멍청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양심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필요하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칼로 베었을 때 그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 주었었다. 그러나(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해 주기까지는 우리아 장군의 일로 인하여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의 허물을 지적하여 권고하라. e[legxon aujto;n ─즉 그에게 논증을 하라." 즉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으로 그의 허물을 권고하라."
허물이 분명하고 큰 경우에는, 또한 우리가 허물이 있는 그 사람을 권고할 만한 입장에 있고 또 권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권고를 해도 해를 끼칠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우리는 온화하고도 신실하게 사람들에게 그들의 부족함과 허물된 점을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권고는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권고는 규범(명령)으로 준행되어야만 한다.
"권고는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개인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그를 책망하기보다는 회개케 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지켜 져야할 유익한 규범은 우리의 형제들의 허물을 당사자 자신들에게 먼저 말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책망을 하는 것보다 권고를 하게 된다. 즉, 죄를 더 이상 범치 않게 하고 자기의 의무에 더욱 충실케 하는 것이 된다. 범죄한 사람이 그를 권고하는 자가 자신의 허물을 지적하여 말할 때에 자기의 구원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권고해 줌으로써 자기의 명예까지 염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그 범죄한 자는 크게 감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즉 "네 말에 유의한다면─, 만일 그가 책망을 받고서 깨달음이 있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너는 죄와 파멸에서 그를 구원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는 보람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다"(약 5:19, 20).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영혼을 회개시키는 것은 영혼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이다(잠 11:30).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일을 힘써 행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으로 알고 노력해야만 한다. 한 영혼을 잃는 것이 천하를 잃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한 영혼을 얻는 것은 분명히 적지 않은 유익이 되는 것이다.
둘째, 개인적인 권고가 도무지 통하지 않을 때에는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16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그것이 당장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고 해서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에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고 절망적인 경우에서도 승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 권고해 본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식으로 단념하여 말하지 말라. 계속하여 다른 방법들을 강구해 보아라. 목을 곧게 하는 자들일지라도 흔히 권고될 수 있으며, 강력하게 반대하는 자들일지라도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면 설복되는 수가 있다."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일을 할 때에는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갈 4:19) 감당해야만 한다. 어린아이가 해산되는 것은 많은 진통과 아픔이 있은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너와 함께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
1. 너를 도와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네가 데리고 간 그 사람들은 네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매우 적합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해줄 수도 있고 또한 너보다도 훨씬 더 사려 깊게 일을 잘 마무리지을 수가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선을 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권고를 할 때에도 우리의 의무를 잘 이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2. 그를 감동시키기 위하여,
"그는 두 세 사람에 의하여 반증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자신의 허물을 인하여 보다 더 쉽게 고개를 숙일 수가 있는 것이다"(신 19:15).
여기에서 유의할 것... 자신의 불미스러운 행동이 일반적인 범죄와 명예 훼손이 된 것을 아는 자들은 회개하여 개심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선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지만 "모든 사람이 비방하는" 선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더욱 힘들다.
즉 악명 높은 사람이 자신의 죄악 된 것을 자백하고 새 사람되는 것을 찾아보기가 이 세상에서는 힘들다.
3. 후에 교회 앞에 그 사건이 제기될 때에 그의 행동에 대해 증인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어떤 혐의가 충분히 입증될 때까지는 어떤 사람도 완고하거나 고집이 센 자라는 교회의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
셋째,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즉 전혀 겸허해지지 않으면, "그때에는 교회에 말하라"(17절).
어떤 사람들은 심령이 완고하여 설득력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도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도 전혀 불치의 사람으로 단념해 버려서는 안 된다. 다만 사건을 보다 더 널리 공개하여 더 많은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공적인 책망이 있기 이전에 반드시 개인적인 권고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신사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하면 보다 더 거칠고 가혹한 방법들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딛 3:10). 또한 설득을 받아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는 자들은 그 죄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일은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잡음이 없이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으로임하며, 율법을 준행함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다.
2. 개인적인 권고로서 설득되지 않을 때에는 공적인 책망이 있어야만 한다.
교회는 피해를 입은 자들의 이의를 신청 받아 죄를 범한 자의 죄를 책벌해야 하는데, 그 원인의 시비를 공정하게 조사한 후에 그들 사이를 판단해야 한다.
"교회에게 말하라."
모든 불화를 종식시키고 모든 범죄들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된 그리스도의 명령 그 자체가 큰 논쟁의 대상이 되고 또한 심령의 부패로 인하여 그것이 도리어 불화와 불법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유감 천만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어떠한 교회를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점이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정부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 있었던 유대인의 산헤드린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8절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기독교 교회를 말씀하고 계심이 분명하다.
그 당시 기독교 교회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었지만, 바야흐로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에게 말하라. 그 교회는 범법자가 사는 공동체의 특정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에게 말하라는 말의 뜻은 사건의 공소 사실들을 접수하도록 쌍방간에 동의하여 인정한 대표들에게 그 사건을 알리는 것이다. 즉 교회의 치리자들은 목사나 장로, 집사 등이나 아니면 회중의 수뇌들이나 대표들 또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말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이 사건을 조사한 연후에 이의 신청이 하찮은 것이거나 이유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 이의 신청자를 책망할 것이요 그것이 옳고 정당하다고 인정되면 그 범법자를 책망하여 그를 회개케 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쉽게 책망하는 일을 마무리지어 가부간에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1. "법적인 절차를 밟아 엄정하게 되어질 뿐만 아니라."
2. "큰 권위를 가지고 판결 짓기 때문이다."
교회나 또는 직책상 권징하는 자인 목사로부터 책벌을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제도나 그의 전권대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매우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 "그가 만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즉 그가 권고를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허물을 부끄러워하거나 그 허물들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를 교회의 공동체에서 추방하고 특별한 직위에서 해고시키고, 교회의 회원권을 박탈하고, 모든 회원들로 하여금 그와 상종하지 않도록 경고하여 그가 자기의 죄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며, 교회원들은 그의 죄에 물들거나 그로 인하여 비난받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사회의 질서나 규범을 무시하거나 사회를 비난하는 자들은 그 사회의 명예와 특권을 박탈당하며, 그들이 회개하고 승복하여 다시금 그 사회에 자신들을 화해시키기까지는 버림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명예를 옹호하고 그 순수성을 보존하며, 범죄하는 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과 개심을 기하기 위하여 이 방법을 택하셨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마귀 자식이나 저주받은 자들로 여기거나 또는 매우 절망적인 존재로 여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언젠가는 다시 돌이킬 수 있고 용서받아 영접될 수 있는 존재로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며, 그를 원수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 형제로서 권고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사람에 관하여 고린도교회에 명한 사도 바울의 지시는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규범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러한 사람은 "그들 중에서 추방"(고전 5:2) 되어야 하며, "사탄에게 내 주어야"(4절) 한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추방당하게 되면, 사탄의 왕국에 속한 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교인들은 그러한 자와 사귀지도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11, 12절).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가 겸손해지고 개심이 된다면 그는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져야 한다.
② 이들 규칙에 따라서 교회의 모든 재판 소송을 재가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서명하신 위임장이 바로 18절의 말씀이다.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만 말씀하신 이 말씀을 여기에서는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는 교회의 모든 충성스러운 직위를 맡은 자들에게와 모든 세계의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선포하고 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 교회를 치리 한다고 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키시며, 목회자들이 말하고 행한 것을 재가하여 그것이 자기 자신에 의하여 말해지고 행해진 것으로 간주하실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첫째, 그는 교회의 책벌 판결을 인정하실 것이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교회의 견책이 정당하게 그리스도의 강령을 따른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영적인 판단은 교회의 견책에 동조할 것이다.
교회의 견책은 다른 모든 책벌보다 뼈아픈 것으로서 예를 들면 버림받은 유대인들이 당하는 것과 같은(롬 11:8) "혼미한 심령"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규례와 명령이 무시당하지는 않으시지만, 교회가 완악하여 범법한 자들에게 내린 의로운 재판 판결을 "아멘"으로 동의하여 주시는 까닭이다.
교만하여 교회의 판결을 경멸하는 자들은 그 판결을 매우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법정에서 그들의 형벌이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법정에 상소를 제기한다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거기에서는 그들에 대해 확정 판결이 내려져 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회중에서" 추방된 자는 이제 심판 날에 "거기에 들지 못할 것이다"(시 1:5).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정당하게 사탄에게 넘겨 줄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거나 그들을 영접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실수나 시기로 인하여 교회의 견책이 부당할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여 추방된 자들을 은혜롭게 찾아 주실 것이다(요 9:34, 35).
둘째, 그는 교회의 면죄 판결을 인정하신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를 하라.
1. 어떠한 교회의 견책도 다시는 풀 수 없도록 단단히 매지는 못한다.
그래서 죄인이 회개하고 개심 하면 교회의 책벌은 다시 해제될 수 있고 또한 풀어져야 한다. 처벌의 목적을 달성한 그 벌은 그로써 충분한 것이므로 그때에 범법자는 용서되어야 하고 또한 위로를 받아야만 한다(고후 2:6, 7).
지옥과 천국사이 이외에는 건널 수 없는 고정된 구렁텅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2. 범법자들이 회개하여, 교회에 의해서 다시금 교회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때 하늘에서 죄가 면해지는 위로를 얻을 수가 있다.
책벌이 완고한 자들에게 공포심을 주는 것처럼, 면죄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격려를 해 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앞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고후 2:10)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교호의 판결을 인지(認知)하실 뿐만 아니라 확정 지워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부여해 주신 바 큰 명예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주장된 구절의 말씀들을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교회의 기도를 응답하실 준비를 하나님께서는 하고 계신다(19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①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충성스럽게 기도하는 모든 야곱의 자손의 간구에 적용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헛되게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믿음의 기도에 대한 은혜로운 응답의 약속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본문의 이 말씀은 합심하여 드리는 연합기도를 특별히 권하고 있다.
"여러분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보다도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가 훨씬 많은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천국의 어떠한 법도 간구 하는 자의 숫자를 제한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한 신자들의 연합 기도와 그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공통된 제목의 기도를 더욱 귀하게 여기시고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만일 신자들이 동일한 기도를 합심하여 드리고 어떤 특별한 사명에서 서로 약속하여 시은소에 모여 함께 기도한다면, 또는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떤 특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한다면, 그들은 매우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대해서 일반적인 관심을 가지시는 것 외에도 특별히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가 되고 합심하는 것을 크게 기뻐하신다(대하 5:13; 행 4:31 , 참조).
② 특별히 매는 일과 푸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에 적용된다.
이 약속의 말씀은 특별히 더욱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본문을 고찰해 보면,
첫째, 교회의 권장하는 권력은 한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거기에 관계하고 있는 두 사람의 손에 있다.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고린도 교인이 쫓겨남을 받도록 되었을 때 교회가 함께 모였으며(고전 5:4), 많은 사람들에게서 벌을 받았었다(고후 2:6).
그처럼 중요한 사건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낫고, 많은 모사가 있는 곳에 안전함이 있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권장하는 일을 합심하여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허물을 제거할 임무를 맡은 자들 사이에 원한과 분노가 있게 되면 그것은 커다란 허물이 된다.
셋째, 기도는 언제나 권징하는데 수반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확정지어 주시기를 구하지 않고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16장 19절에서 말씀된 바 있는 매는 일과 푸는 일은 말씀전파에 의하여 되어졌으나 지금의 말씀은 기도에 귀착되고 있다.
복음 사역자들은 이 말씀과 기도에 온전히 자신들을 쏟아 넣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판결하는데 의견이 일치하여 한가지 사건을 결정지으면 그대로 될지니라"(마치 목회자들이 재판관이나 땅 주인들인 것처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들이 합심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그로부터 너희가 그것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인들을 돌이켜 회개시키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는 반드시 기도가 수반되어야 한다. 기도 없이 권징이나 권고를 해서는 안 된다(약 5:16 , 참조).
넷째, 교회의 정당한 책벌에 대한 재가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가 전원 일치의 청원을 하게 되면 이는 하늘에 상달되어 응답을 얻을 것이다.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즉 하늘에서 매이기도 하고 풀리우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그에게 드리는 모든 호소와 간구를 재가하실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그는 여기서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말씀하고 계시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비록 우리가 기대한 것과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해도 좋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허물이 있는 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를 백성으로 삼으시고 영접해 주신다.
"주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신"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가 아니고, 그에게 죄를 범한 자기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였다.
(2)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심(20절).
그리스도께서는 신자 개개인에게 임재하고 계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세 사람들이 권징을 위해서든지, 종교적 예배를 위해서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어떤 행사를 위해서든지 가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을 두고 이 약 속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거룩한 목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이에 의해서 정해지고 지도되고 그리고 장려된다.
① 모임들은 이에 의해서 정해진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교적인 모임들로써 대개는 가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뜻은 이러한 모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인간을 교화(敎化)하고 세상에 종교의 외관을 남겨두기 위해 시작되고 보존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기도에 특별한 응답을 주시려고 할 때에는 성회를 모이게 하셨다(욜 2:15, 16). 대규모의 그리고 많은 수의 집회를 위한 자유나 기회가 없을 경우에 하나님의 뜻은 두세 사람이라도 함께 모여 그들의 성의를 나타내는 데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종교 행사에 있어서 하려고 하는 바를 할 수가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으신다.
② 모임들은 이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도록 지도가 된다.
교회의 권징을 실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야 한다."(고전 5:4).
그 이름이 그들로 하여금 땅에서는 권세를 행하게 하며, 하늘에서는 합당한 것이 되게 해 준다. 예배를 위해 모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표시해 주는 그의 임명장을 가지고서, 즉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모든 처소에서 그를 부르는 모든 신자들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모여야 한다.
우리가 함께 모이되 성령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의지하고 그의 공로와 의를 의지하며, 그리스도를 아버지께로 가는 우리의 길이요, 아버지께 우리의 대변자이심을 실제로 믿고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기 위해 모일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게 된다.
③ 모임들은 이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임재의 확신을 가지고 장려된다.
"그들 중에 내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무소부재하시다. 그러나 이 말씀은 특별한 임재에 대한 말씀이다. 그의 성도가 있는 곳에 그의 성소가 있고,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곳은 그가 영원히 쉴 곳이요(시 132:14), 그가 다니시는 곳이다(계 2:1). 그는 우주 가운데 있는 태양처럼 그들 가운데 계시어서, 그들에게 생명과 힘을 주시고, 그들을 새롭게 하시며 또 위로해 주신다. 즉 그들의 심령 안에 계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로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심령으로 더불어 임재하시는 것을 뜻하며, 본문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한 것이다. "나도 있으니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있겠다"는 뜻만 아니라 "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그가 먼저 오셨고 그들보다 먼저 임재해 계시므로 그들이 거기서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승천하실 때에도(마 28:20),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이 약속의 말씀을 반복해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셨다는 것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임재를 믿음으로 간구하고 신뢰하여도 좋을 것이다. "내가 있느니라"는 이 말씀은 옛날 구약 시대의 회막과 하나님의 성전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인 "세키나"와 동의어이다(출 40:34; 대하 5:14).
단지 두 세 사람만이 함께 모이는 경우일지라도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계신다. 이 사실은 소소의 모임에 큰 격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수의 모임은,
첫째, 선택된 자들만이 모이는 경우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비밀 예배와 전체 회중의 드리는 공중 예배 외에도 때로는 두세 사람만이 모여서 상호 간에 협조하여 협의하고 공동으로 합심하여 기도하기 위하여 모일 수도 있다.
이는 공중예배를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합치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소수의 모임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실 것이다.
둘째, 강압으로 인하여 두세 사람의 소수만이 모이는 경우이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모이지 못하는 경우, 그래서 두 세 사람만이 겨우 모이는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운데" 계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예배드리는 자의 숫자 때문이 아니고, 그들의 신앙과 진실된 헌신 때문이다.
그러므로 숫자는 두 세 사람으로 가장 적을지라도 예배의 중심 인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자리를 함께 하시면 그들의 모임은 마치 그 숫자가 삼천 명이나 되는 것처럼 고귀하고 즐거운 일이다.
--------
용서받아야 할 개인적인 허물(마 18:21-35)
본문에 있는 대화의 말씀은 분명히 개인적인 허물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개인적인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에 속한다.
Ⅰ. 이 문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21절).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될까요?"
1. 베드로는 그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에 이 교훈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바가 있다(6:14, 15). 베드로는 그 교훈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의 형제에 대하여 원한을 품거나 복수를 꾀해서는 안 되고 다만 언제나 변함없이 친구가 되어 주며, 그가 당한 손해를 금방 잊어 벼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는 것은 큰 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눅 17:4) 하루에 일곱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동안에 일곱 번 용서해 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일곱 번이나 그를 비난하고 배신하였다고 가정할 때 그는 화해되기를 간절히 원하였으면서도 그는 그와의 교제를 포기하고 더 이상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잠언 24장 16절, "의인이 일곱 번 넘어진다"는 말씀을 깨달았던 것 같다. 아니면 아모스 2장 1절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서너 가지 죄에 관한 말씀"을 깨달은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의 부패된 본성에는 선한 일에 인색하고 신앙적인 일을 너무 많이 할까 염려하며, 특히 자기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염려하는 습성이 있다.
Ⅱ.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즉각적인 대답.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그리스도께서는 결코 횟수를 한정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 숫자는 분명히 무한대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범한 허물들을 헤아려 그 횟수를 따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나쁜 습성 중에는 우리가 용서해 준 권리 침해들을 헤아려 놓았다가 일정한 한도가 차면 보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헤아리신다(신 32:34). 왜냐하면 그는 재판장이시요, 복수하는 일이 그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심판의 보좌에 침범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헤아려서는 안 된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평화를 보존하는 데는 횟수를 헤아리지 않고 권리 침해 행위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여러 번 용서를 베푸셨다(시 78:38, 40).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권리 침해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으로 삼아 그것이 우리 몸에 베일 때까지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Ⅲ. 우리의 권리를 침해한 죄를 용서해 줄 필요성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계속하여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다.
비유는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데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의무를 강조하는 데 유용하다. 왜냐하면 비유는 곧 잊혀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겨 주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은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옵시고'에 대한 해설이다.
자기의 형제를 용서해 주는 자만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용서받는 것을 기대할 수가 있다.
본문의 비유는 "천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천국은 교회와 그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복음의 규범에 의한 통치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이요, 그의 법정이다. 그는 그 안에 계시며, 거기에서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종들로서 적어도 그에게 소유되어 있고 또 채무관계로 얽매어 있다. 대체로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그의 권속들로부터 얼마나 많이 분통터지는 일들을 당하고 계시며 또한 그의 종들은 얼마나 패역하고 완악한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의 비유에 나타난 세 가지 내용이 있다.
1. 빚진 종에게 보여 준 주인의 엄청난 관용.
종에 대한 순수한 동정심에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줌(23-27절).
(1) 우리가 범한 모든 죄는 하나님께 진 빚이다.
이 빚은 물건을 사고 팔 때 계약하는 당사자들처럼 대등한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진 빚이 아니고 상급자에게 진 빚이다.
이 빚은 종이 서약증서를 박탈당할 때 영주에게 진 빚이나, 또는 법률 위반이나 치안을 문란케 함으로 인하여 부과된 벌과금과 같으며 종이 주인 섬기기를 그만 두거나 주인의 재산을 탕진하거나 계약서를 위반하거나 위약금을 맡음으로 인하여 주인에게 종이 진 빚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이다. 우리는 배상금을 지불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형법상의 처벌을 받게 된다.
(2) 이 빚들을 기록해 둔 회계장부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빚들을 곧장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임금은 "그 종들과 회개하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자신의 양심에 의하여 우리와 계산하신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을 대리한 회계사인데, 그 회계사는 우리와 회계하려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자기 죄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제일 먼저 묻는 질문 중에 하나는, "너는 내 주님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느냐?"
양심이 뇌물로 매수되지 않는 한 그것은 참된 말을 할 것이며, 모든 빚을 계산하게 되는 다른 정해진 날이 있다. 그때 이 모든 회계서들을 떼게 되는데, 어떤 것은 이월되고 어떤 것은 기각된다. 그리고 그때에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 계산서를 결산하여 줄 것이다.
(3) 죄의 빚은 매우 큰 빚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죄로 인하여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가 회계하기 시작했을 때 첫 체납자들 중 한 명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문은 피할 길이 없다. 너의 죄는 반드시 너를 찾아낸다. 그 빚은 일만 달란트였는데, 그것은 막대한 금액이며 계산하면 1,875,000파운드(pounds)나 된다.
이는 왕의 몸값(역주:포로로 되거나 인질이 되었을 때 지불하는 금액)이나 한 왕국의 특별 세금에 해당되는 액수로서, 종의 빚으로는 너무도 많은 금액이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어떤 것인가?
① 죄의 본질은 극악하다.
죄는 달란트이다. 이는 돈이나 무게를 계산하는데 사용된 단위 중 가장 큰 것이다. 모든 죄는 한 달란트의 짐이요 "납 한 달란트는 악이다"(슥 5:7, 8).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인 우리에게 맡겨진 주인의 소유 재산은 한 달란트였다(25:15). 즉 금 한 달란트였다. 그런데 그 달란트를 모두 땅에 묻어 버렸든지 아니면 대개의 경우 낭비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한 달란트씩 빚지고 있다. 이 한 달란트가 우리의 계산서를 고액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② 죄의 숫자는 막대하다.
그 수는 일만으로서, "우리의 머리털보다 더 많다"(시 40:12). "누가 자기의 허물의 수를 헤아릴 수 있으며 그가 얼마나 많이 죄를 범하였는가를 말할 수 있2으리요?"(시 19:12)
(4) 죄의 빚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우리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그는 값을 것이 없는지라."
죄인들은 지불이 불가능한 채무자들이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갈 3:22)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한 파산 선고를 알리는 법령이다. 금이나 은으로도 우리의 빚을 갚지 못한다(시 46:6, 7). 희생 제물로도 갚지 못한다. 우리의 선행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신 것이기에, 속전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무력하여 우리 자신을 도울 수가 없다.
(5) 하나님께서 엄격하신 공의로 우리를 취급하시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불 불능의 채무자로 정죄를 받아 마땅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빚을 강제로라도 회수하여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를 완전히 파멸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공의는 속죄물을 요구하며, 법의 판결은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currat lex). 그 종은 자기의 낭비벽과 자행 자지함에 의하여 이 빚을 진 것이므로 마땅히 그것을 자기가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주인은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했다. 그는 갤리배(옛날 노예나 죄수들에게 젓게 한 군함)의 노예로 팔려 감옥에서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모든 죄인들이 받게 되는 것, 즉 "죄의 삯"에 관한 것이다.
① 팔리게 됨.
"자신을 팔아 사악한 짓을 행하는" 자들은 팔리워서 속상(贖賞)해야 한다. 죄에게 노예가 된 자들은 진노(wrath)에게 노예가 된 자들이다. 노예로 팔리운 사람은 모든 인생의 즐거움을 박탈당하고,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의 모진 목숨뿐, 그는 자신의 불행을 되씹으며 감수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저주받은 죄인들의 처지를 말해 주고 있다.
② 갚아야 됨.
그렇지만 보잘 것 없는 몸값은 엄청난 죄의 빚을 도저히 충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죄인들을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속상(만족)되어 가지만 결코 모두가 속상되지는 못한다.
(6) 자기 죄를 깨달은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은혜를 간구 할 수밖에 없다.
그 종은 이 명령을 받자, 그의 주인 되신 임금의 발아래 엎드리어 "'그에게 절을 하였다"(어떤 사본에는 '그에게 탄원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주인에게 애걸복걸하였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26절). 그 종은 이전에 벌써 자기가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회개를 하도록 부름을 받을 때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죄인들은 대개 어떤 감화력 있는 말이나 깜짝 놀랄 만한 섭리 또는 임박한 죽음에 사로잡혀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의 앞에 나아갈까?"(막 6:6)하고 탄식할 때까지는 자기들의 조를 용서받는 일에 무관심하다. 얼마나 간단하고도 잠깐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교만한 자들을 그의 발 앞에 끓게 하시는가!
아합왕으로 하여금 굵은 베옷을 입게 하고, 므낫세 왕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바로 왕으로 하여금 자기의 허물을 고백케 하고, 가룟 유다로 하여금 은 삼십을 되돌려 주게 하고, 시몬 마가로 하여금 애원케 하고, 벨사살과 벨릭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하셨다.
아무리 무디고 목이 곧은 심령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앞에 죄목을 나열해 놓으면 낙담케 되는 것이다. 이 종은 그의 죄의 빚을 부인하거나 갚지 않으려거나 또는 도망쳐 버리려고는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① 그는 시간을 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내게 참으소서."
하나님께서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그 인내하심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우리를 구원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집행 유예는 사면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회개함에 이르는 것"(롬 2:4)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하등의 자비를 베푼 것이 되지 못한다.
② 그는 갚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잠깐만 "참아 기다리소서. 제가 당신께 모든 것을 갚겠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정죄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들이 하나님께 범한 허물에 대해서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치 부채를 일부만 지불한 파산자처럼 "자기의 허물을 위하여 자기의 맏아들"(막 6:7)을 드림으로써 빚을 청산하려는 자들과 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쓰며(롬 10:3) 갚을 길이 없으면서도 (25절) 모든 것을 갚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가 죄를 범한 것을 아는 죄인들일지라도 교만을 버리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죄인인 것을 깨달으면서도 아직 겸손해지지 않는다.
(7)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순수한 동정심에서 겸손한 자들의 조를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27절).
그 종의 주인은 그를 정당하게 파멸시킬 수도 있지만 자비를 베풀어 그를 놓아 보냈다. 그 주인은 만족한 만큼 빚 갚음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빚을 탕감해 줌으로써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이다. 그 종의 간구는 "내게 참으소서"였지만 그 주인의 응답은 완전 탕감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① 죄 사함은 하나님의 긍휼, 즉 그의 온유하신 긍휼에서 기인한다(눅 1:77, 78).
그 종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27절). 하나님의 긍휼의 동기는 자신의 속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다. 그가 긍휼을 베풀려고 마음 먹으셨기 때문에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비참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편적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독생자를 보내어 그들을 위한 보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정하게 회개한 자들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만을 독생자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심령이 상하게 되며 또한 죄를 깊이 뉘우치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중한 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신다.
그 빚은 막대한 금액이었지만 주인은 "전부를 탕감하여 주셨다"(32절). 우리의 죄는 양적으로는 무수히 많고 질적으로는 매우 악하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탕감될 수 있다.
③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곧 그 빚진 자를 놓아 보내는 것이다. "그가 그를 놓아 보내며."
채무관계가 무효로 되고 심판도 취소된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기까지는 자유롭게 활보하지 못한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주인은 그 종에게 빚진 자로서의 벌과금을 모두 탕감하여 청산해 주기는 했지만, 종으로서의 그의 의무는 면제하지 않았다.
죄 사함은 우리의 순종의 의무를 연기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켜 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쓸모 없는 종들로 하여금 그를 계속하여 섬기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따라서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어 그를 섬기게 하기를"(눅 1:74, 75) 기뻐하신 것을 은총으로 간주해야 한다.
"나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이는 당신이 나의 멍에를 푸신 연고라."
2. 종의 주인은 그에게 관용을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동관에 대하여 혹독하고 매정하게 대하였다(28-30절).
본문의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요구할 때에는 관용을 베풀면서도, 자기 자신의 소유를 요구할 때는(즉 자기 빚을 받아낼 때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자기의 권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며, 그러한 행위는 때때로 사실상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된다.
Summun jus summainjuria ─즉 자기의 권리 주장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부당 행위가 된다. 배상 자체나 공적인 이익을 위하지 않고 법이 허락한다고 해서 in terrorem ─ 즉 공포를 주기 위한 단순히 보복하려는 목적과 완악한 인간의 심령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손해 배상 청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에 어긋난다.
빚진 자가 도저히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되매 그를 감옥에서 망하도록 하려고 빚 돈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이웃 사랑은 전혀 가지지 않고 돈만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 준다(느 5:7).
(1) 주인이 탕감해 준 "일반 달란트"에 비하면 그 종이 받아낼 그 빚은 매우 하찮은 액수이다.
"그는 저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금액은 3.5파운드(pound)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우리가 사람들에게 지은 허물이나 죄는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한 것에 비하여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들과 같은 인간인 어떤 사람에 대하여 행해진 허물들은 단지 "데나리온이나 티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행해진 허물들은 "달란트나 들보나 낙타"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부당한 행위를 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부당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행하는 부당 행위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고 그것을 더욱 악화시키거나 보복을 꾀하여서는 안 된다.
다윗은 자기에게 가해진 냉대나 모욕에 대해서는 무관하였다. "나는 귀머거리처럼 듣지 않았나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가 하나님께 범한 죄를 인하여는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 죄들 때문에 "눈물이 강이 되어 그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2) 그의 빚 독촉은 지나치게 혹독하였다.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자만하고 성미가 고약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의 주장하는 바가 정당하기만 하면 그 방법이 혹독하고 잔인하다 할지라도 무방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그 빚진 자의 목을 졸라매지 않고서도 요구할 수 있고, 영장을 발부하거나 집달리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종의 태도는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오만한가! 그렇지만 그의 정신은 얼마나 비열하고 야만스러운가! 그가 만일 그 주인에게 진 자기 빚 때문에 감옥에라도 가게 되어서 그의 사정이 아주 긴박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자기가 동관들에게서 받아야할 빚을 독촉할 만한 이유가 있었겠고, 또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사람들은 절박한 필요성보다도 교만하고 악한 까닭에 빚진 자들을 혹독하게 취급한다.
(3) 그 빚진 자는 엎드려 애걸하고 있다.
"그의 동관"은 같은 동료였지만 그의 긍휼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의 발아래 엎드렸다." 이미 마치 그 채권자인 종이 이전에 자기 주인에게 진 엄청난 빚 때문에 간청하였던 것처럼, 이 빚진 동관도 자기의 하찮은 빚 때문에 그에게 간구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잠 22:7).
여기에서 유의할 것... 자기의 빚을 갚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채권자에게 매우 공손해야 하며 또 최대한으로 그들에게 가장 높은 존칭들을 사용해 주어야 한다. 빚진 자들은 채주들에 화를 내어서는 안 되며, 그들을 험담해서도 안되며, 채주들이 혹독하게 굴더라도 절대로 비난해서는 안 되며, 오직 자기들의 사정을 하나님께만 간구해야 한다. 그 불쌍한 동관이 간구한 것은 "나를 참아 주소서"이다. 그는 정직하게 그 빚을 인정하고 그의 채주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달라고만 애걸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채무의 보류는 그것이 면제는 아니지만 때로는 긴요하고 은유한 관용의 일종이다. 우리는 권리를 주장할 때에(빚이나 손해 배상을 받아내는 것 등) 완고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서둘러서도 안 된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4) 그 채주는 매우 격하여 있었다(30절).
"허락하지 아니하고" (즉 참아 주지 않았다), 무자비하게 옥에 가두었다. 그는 얼마나 오만하게 자기에게 그처럼 간구 하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동료를 유린해 버렸는가! 얼마나 그는 잔인하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그 동료를 취급하였는가! 사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무자비한 채주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집어삼키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데서 기쁨을 누리고(삼하 20:19), 그들의 가난한 채무자들의 뼈를 취하는 데서 의기양양해 한다.
(5) 다른 동료 종들은 이를 매우 걱정하였다.
"그들은 심히 민망하게 여겼다"(31절). 그들은 채주의 잔인성과 채무자의 비참함을 인하여 심히 민망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의 동료 종들의 죄와 괴로움은 우리에게도 슬픔과 고민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형제들 중에 누군가가 잔인성과 야만성에 의하여 맹수 노릇을 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또는 권력을 가진 자가 비인간적인 권력 행사를 하여 모든 사람을 노예화시키는 폭군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그 채주인 동료 종이 으르렁거리는 곰처럼 날뛰고 벌레를 유린하듯 채무자인 동료를 짓밟는 것은 인간성과 종교의 존엄성에 대해서 열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솔로몬은 어떤 눈으로 "학대받는 자의 눈물"과 "학대하는 자의 권세"를 보았는가를 살펴 보라(전 4:1).
(6) 이 사실은 주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이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라." 그들은 그 도료 종을 면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을 잃고 격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을 찾아가 그 학대받는 친구 종을 위하여 그 학대하는 채주 종을 제재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경우마다 우리를 기도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사각한 자들의 사악함이나 눌린 자들의 억울함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하소연과 이의는 하나님께 아뢰어 그의 처분에 맡겨져야 한다.
3. 자기 종이 범한 잔인성에 대한 그 주인의 정당한 분노.
종들도 그 잔인성에 대하여 민망스럽게 여겼는데, 하물며 동정심이 우리의 경우보다 한없이 많으신 그 주인은 더욱 하지 않겠는가?
(1) 그 주인은 자기 종의 잔인성을 어떻게 책망하였는가?(32, 33절)
"악한 종아!"
여기에서 유의할 것...무자비한 것은 사악함이요, 가장 큰 악이라는 사실이다.
① 그 주인은 자기가 그에게 베풀었던 그 긍휼을 인하여 그 종을 책망하였다.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하나님의 은총을 잘 감당하는 자들은 결코 책망을 받지 않지만, 그 은총을 역이용하는 자들은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만 한다(마 11:20).
주인이 탕감해 준 것은 빚 전부였으며, 그것도 거액의 빚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죄가 많은 곳에 사죄의 은총이 넘치는 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는가"(눅 7:47)를 언제나 생각해야만 한다.
② 그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자기의 동관에게 긍휼을 베풀 의무가 있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긍휼을 받은 자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Dat ille veniam facile, cui venia est opus ─ 즉 사죄를 필요로 하는 자는 쉽게 용서를 베푼다 Senec. Agamemn. 그 주인이 그 종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그는 자기의 동관의 고통에 보다 더 동정적이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동일한 고통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더 잘 알아준다는 말대로 우리는 우리의 형제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는 것이 좋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의 심정을 잘 알아주었다. 이는 그들이 나그네로 지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종은 자기에게 붙들린 빚진 자의 심정을 그에게 완악하고 혹독하게 대하기에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 종은 그 주인의 관대한 마음씨를 본받아 따랐어야 함을 가르쳐 주었다.
왜냐하면 그 종은 그 주인의 관대한 마음씨를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죄함 받은 은총을 깊이 깨닫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당연히 형제를 용서하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찬다. "모든 빚들을 면제하는" 희년의 나팔소리는 속죄일 마지막 날에 크게 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형제를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그 주인은 자기가 탕감해 준 것을 취소하여 그 판결을 환원시켰다(34절).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종의 사악함은 지독하였지만 그 주인은 다른 벌을 대리지 않고 빚을 갚도록만 하셨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한 벌은 어떤 것인가? 죄를 용서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용서받지를 못하게 돈다. "그는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종이 자기 동료 종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를 옥에 가두는 것이었지만 그 자신은 옥졸들에게 넘기워질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멸시키는 진노의 위력은 어떠한 피조물의 힘이나 진노보다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의 양심이 느끼는 가책과 공포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옥졸들과 같다. 왜냐하면 양심은 결코 죽지 않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실행하는 자들인 마귀들은 지금은 죄인들의 유혹자이지만, 영원히 죄인을 괴롭히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 종은 그가 모든 것을 갚을 때까지 감옥으로 보내어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빚은 결코 일부만 지불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완전히 탕감되든지 아니면 완전히 면제되든지 해야만 한다. 하늘에 있는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 속죄를 인하여 전부 탕감을 받았으나 지옥에 있는 영벌에 처한 죄인들은 모든 것을 갚도록 벌을 받았다.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 범해진 죄과나 허물은 명예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결코 감소액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지불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죄인 자신에 의해서든지 아니면 그의 보증인에 의해서든지 그 죄과는 속량되어야 한다.
Ⅳ. 비유의 전체적 적용(35절).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리스도께서 본문에서 하나님께 붙여드린 명칭은 19절에서도 사용되었다. 19절의 말씀은 위로를 주는 약속에 관한 것이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런데 본문의 경우는 19절과는 달리 가공할 만한 위협을 주는데 그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부성적(父性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의로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준엄하거나 혹독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통치 아래에서는 항상 그를 경외하면서 지내야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다.
1. 용서의 의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진실 되게 우리에게 허물이 있는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를 올바르게 그리고 합당하게 용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떠한 악의도 심중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서로 간에 또는 어떤 사람에게 악의를 품고 있어서도 안 된다. 어떠한 보복에 대한 계획도 심중에 꾀하여서는 안 되며 그것을 바라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화려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복수할 기회를 노린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죄과가 있는 자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간구 해야 한다.
2. 용서치 않을 때의 위험.
"내 천부께서도 이와 같이 하시리라."
(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자신의 죄 용서를 변개(變改)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복음의 진의에 따라서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는 거부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들은 아합왕처럼 겉으로는 겸손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탕감받은 상태에 있다고 스스로 믿고 죄 사함 받은 은혜와 위로를 함부로 남용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제넘게 건방진 자들에게 경고할 목적으로 용서의 은총을 몰수하는 예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실하되 겁 있는 자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용서의 은총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안전책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자는 소망을 가질 것이다. 자기 형제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의 죄를 참되게 회개치 않은 사람들이다. 또한 참되게 복음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빼앗기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뿐이다(눅 8:18).
(2) 이 말씀이 가르치는 바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는 사실이다.
우리가 정당하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는 것은 사죄와 화평에 반드시 필요하다. 긍휼은 하나님과 성부 앞에서 순수하고 흠이 없는 종교의 기본 요소요 위로부터 주신 바 관대하고 쉽게 청원을 들어주는 지혜의 기본 요소이다.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자기들의 형제를 무자비하고 혹독하게 취급하기를 고집하다가 심판날 어떻게 응답을 받게 되는가? 그들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자기 자신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아멘
===
마태복음 제 18장
=====18:1
@그때에 - 막 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신 때이다.
성진세는 매년 아달월(태양력 2-3월) 15일 경에 한 번씩 내는 것이므로(출 30:11-16) 구체적으로 이 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니산월, 태양력 3-4월 14일경) 한 달 전일 것이며 제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로 들어가려고(19:1) 하실 무렵이었을 것이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이 질문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발생한 것으로(막 9:33;눅 9:46), 마가는 제자들이 노중(路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였다고 전한다(막 9:33).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으나 제자들은 잠잠하고 아무말도 뭇하였다고 한다(막 9:33-37). 한편 누가는 예수께서는 그때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술하고 있다(눅 9:40-48).
이를 정리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이 논쟁하는 것을 아시고(누가), 그들에게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해졌고(마가), 바로 그때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했다고(마태)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자리 다툼과 세속적 권력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고(16:16), 또한 세 제자만 변화 산상에서의 영광스런 주의 광휘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17:1), 베드로만 성전세 사건과 연루된 사실(17:24-27) 등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수께서 세상 임금이 그의 아들에게서는 관세와 정세(政勢) 등의 세금을 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만 비겨서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도 결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세금을 내실 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새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부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대에 따라 제자들의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이 발생되었는데 본문의 말씀 '누가 크니이까'는 이러한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면화 된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는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18:2
@한 어린아이를 불러 - 유명한 '어린아이 교훈'으로 아이들은 위한(for) 교훈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through) 어른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이전 시대와 그 당시만해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가장의 재산 몰록에 들어갔을 뿐 결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진무구한 특성이 바로 천국 시민의 자격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전설에 의하면(Nicephorus) 이 어린아이는 훗날 안디옥의 감독이자 순교자가 된 익나티우스(Ignatius), 내지는 버려진 고아(Paulus) 또는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 한 아이(Boten) 등으로 추측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한편 1세기 후반부의 디오그네투스의 편지(Diognetus Epistle)는 크리스챤은 어린아이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마가의 기록(막 9:36)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작은 아이 하나를 표본으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그 아이를 친히 안으시기까지 하셨다.
이는 하찮게 보이는 생명체 하나하나에게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신 드넓은 사랑을 보여주신 행동이다.
=====18:3-9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주앞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 )는 '스스로 돌이키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2:38).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결단코 천국에 둘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 이사야50-53장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연상케 하는 말씀이다.
"자기를 낮추다'의 헬라어 동사"타페이노오"는 단순한 의미의 겸손이 아니라 멸시,천대, 굴욕 둥올 묵묵히 견디고 참아내며 끝까지 겸손함올 의미한다.
따라서 천국시민의 자격으로서 의 자기를 낮춤이란 하나님의 말씀올 전하고 실천함으로 진리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멸시를 당하는 것조차도 기뻐하는 상태를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장차 예루살렘에서 모욕과 조롱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주넘의 길올 그대로 따르는 깃임올 의미한다(빌 2:5-8)
=====18:10
@소자...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저희 천사들이 - 성경은 국가(단 10:13;12:1), 교회(계 1:20), 개인을 위한(행12:15) 수호(守護) 천사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수호 천사'는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페르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을 사람들을 위한 봉사자로서 생각한다.
이처럼 천사들이 구원을 상속받은 자들에게 봉사하도록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히 1:14).
워필드(Warfield)의 의견에 의하면 본문의 말씀, 즉 '소자들의 천사들'은 사후의 그들의 영을 의미하며 타스커(Tasker)에 의하면 '저희의 영적인 짝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절의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영적 실존으로서 현재 하늘에서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워필드(Warfield)의 학설은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여하튼 천사들의 수종은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는 비천해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결코 업신여김을 받을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영혼들을 위해 수호하는 천사를 제공하셨다는 교리가 발전되었다(시 34:7;91:11;눅 15:7-10).
@하늘에서...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각 성도들을 수종하는 천사들이 동시에 어떻게 하늘에서 천부(天父)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Gregory)는 천사가 각 성도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수종드는 동시에 내적 관조를 통한 희락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의 시선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말로 본문의 난해점을 해결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수호 천사는 '하나님 면전의 천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이 수호하는 영혼들의 안녕을 구원함으로써 그 이중적 사역을 감당한다고 한다.
어떻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마치 왕정 체제하에서의 신하의 배알(拜謁)처럼 매우 각별한 예우와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왕하 25:19;에 1:14;렘 52:25). 즉 수종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큰 영광을 부여받은 존재들에게 당신의 백성의 수직(守直)을 명하셨다. 이는 결국 천사들의 위상(位相)의 탁월성을 강조하기보다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보호의 충만성과 완전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11(없음)
본문은 2류 사본에 해당하는 A. D. 4-9세기의 언셜체 사본이나 수리아역 및 라틴 벌게잇(Vulgate) 역에는 눅 19:10에서 그 내용을 전입(轉入)한 본문('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권위있는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이 빠져 있다.
여하튼 2류 사본의 기록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문맥상 생략된 본문의 내용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소자들'의 존귀성을 논하기 위한 서언(序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8:13
@만일 찾으면 - 이 말은 잃어버린 양 가운데는 찾지 못할 양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실로 잃어버린 양이 자신을 찾는 주인의 애절한 음성을 외면하고 끝끝내 제 고집대로 행동한다면 그 주인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 겸손히 주인의 음성을 듣는 양에 대해서만은 주인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찾고 찾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이다.
@더 기뻐하리라 - 아흔 아홉마리보다 한마리를 더 아낀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이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흠 아홉마리보다 더 불쌍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배려를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약한 자녀에게 더 큰 애정과 보살핌을 주듯이 말이다. 더욱이 '찾는 수고'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찾은 기쁨'이 비례적으로 상승하게 마련인 것이다.
=====18:14
@잃어지는 것은...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부정적 의미의 '잃어지는 것'(멸망)은 이 말의 긍정어 '찾음을 당하여 영생을 얻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의 뜻은 무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딤전 2:4). 하나님 나라에서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그 자리에 참예하는 성도들이 있다(Bachmann).
따라서 잠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 성도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미래의 결론은 이 소자들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교훈으로 되돌아 간다(3-6절).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함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 소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개개에 대한 이 사라은 전체 양떼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전체 양떼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앞에서는 '어린아이' 또는 '소자' 등의 말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부터는 '형제'라는 말이 앞의 그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반복 사용되고 있다(15, 21, 35절).
한편 유대인의 용법에서는 형제라는 말이 '같은 종교를 가진 자', '같은 종교적 공동체의 일원'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믿음의 동료', '신앙의 동지'로 번역될 수도 있다. 예수는 이제 메시야 공동체, 즉 주를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 행해진 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 궁극적 범죄가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도덕적 범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비록 한글 개역 성경과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생략되었으나 라틴 벌게잇(Vulgate)역을 위시한 권위있는 제문서들에서는 '네게 대해'(* ,에이스 데)라는 말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바로 뒤 이어지는 문장을 살펴보면 본문의 죄라는 것이 다른 형제를 멸시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 이 명령은 실족한 자를 잃지 않기 위한 제 1단계의 작업으로서 죄 지은 형제르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동시에 가능한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권고하다'는 말씀은 단순히 꾸짖다의 의미인 '에피티몬'(* )이 아니라 '노출시키다', '빛으로 가져오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과 확신을 주다'란 뜻의 '엘렝코'(* )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권고의 의미는 죄에 대한 심판이나 책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무엇이 죄악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 또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 형제의 잘못을 정당하게 꾸짖고 개도(開導)하는 것(요 8:46;딤전 5:20)을 말한다. 즉 그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판단, 질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다시 참 형제로 얻기 위함이다(고전9:19-22;벧전 3:1).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형제와의 첫 화해 작업에 해당한다(레19:17).
@만일 들으면...얻은 것이요 -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책망을 듣는 경우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의 잘못을 권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지혜와 조심성과 자기 부정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며 그 무엇보다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진지한 노력을 통해서 형제적 친교를 회복하고 그 주의 제자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노력은 정녕 필요하다(눅 17:3, 4;살후 3:14, 15;약 5:19, 20).
=====18:17
@듣지 않거든(* , 파라쿠세) - '무심코 듣다', '무시하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신중히 듣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는 자세로 건성으로 듣거나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사 65:12).
@교회에 말하고 - 범죄한 형제가 회개치 않아 개인적인 해결이 실패한 경우 제 3단계이자 마지막 조치(措置)로서 교회가 공식 개입하며 범죄한 그 형제를 권면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교회'란 18, 19절의 특권을 살필 때 그 당시 존재하던 유대인의 회당으로 보기 보다는 아직 구체적으로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지금 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16:18). 실로 교회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전형으로서 진리 전수의 터전이자, 모든 신앙인들의 성결한 교제의 장(場)이요, 신앙 훈련과 성숙의 도장이어야 한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이방인과 세리'는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유대의 회당이나 기타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즉 '단체 밖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은 이 말을 '너에게 있어서 그가 이방인과세리처럼 되게 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각 교인이 범죄한 형제에게 대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므로,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에서의 징계를 넘어 사회적 책벌(責罰)까지 부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각각의 교인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일절 금하고 범죄한 형제와의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하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와의 접촉을 피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라는 압력을 '죄지은 그 형제'에게 가함으로써 또 다시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18:19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 여기서 먼저 '두 사람'이란 예수의 제자된 자로서, 연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數)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견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견해가 있다.
최근에 던컨 엠 데레트(J. Duncan M. Derrett)는 주장하기를 합심한 두 사람이란 '죄 지은 자와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자'로서, 그 두 사람은 교회의 결의를 기초하여(18절) 상대방의 요구하던 권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게 되는 바로 땅에서 합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합심하다'의 뜻인 동사 '쉼포네오'(*)가 '어떤일을 의논하여 합의 보는 것'이라고 하는 사설은 데레트의 주장을 밑받침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두 사람'을 믿는 자들가운데서 친교나, 합의, 합심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로서 이해한다. 또한 '합심'이란 헬라어 '심포네오'가 '교향악'(Symphony)이란 말의 어원이란 점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듯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해 내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단순히 '마음의 일치,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사람의 일치는 물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처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 각 개인에게 임제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적으로 임재하신다. 즉 이 땅에서 겸손한 두 영혼의 일치된 기도는 하늘 아버시께서 그것들을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시고 교회가 지닌 특권(18절:16;19)에 해합당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F. R. Fay).
@무엇이든지 구하면 - 프리지크(Preisigke)에 의하면 '구하다'의 뜻인 동사 '아이테오'(* )는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것'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본문의 구절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이는 18절에서 거론된 형제의 범죄 내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심 속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하신다.
=====18:20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 '내 이름으로'라는 의미의 헬라어 '에이스 토 에몬오노마'(* )의 문자적인 뜻은 '내 이름과 관련해서', '내 이름 안에서'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 2,3인이 모인 것 또는 2,3인이 모여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는 것 그리고 예수를 사랑하며 연합하기를 열망하여 예수를 자기 소원과 신앙의 궁긍적 대산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인 것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토라(율법)의 말씀이 이야기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유대 랍비의 속담집(Aboth 3:3)에서처럼 그리스도인 2, 3인이 예수의 말씀을 서로 나누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든지 막론하고 예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 암시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이름으로 연합한 무리들을 향하여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영원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다(28:20). 이는 예수의 영원한 현존성과 편재성 및 무변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18:21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본문은 현재의 죄 문제(15--20절)와 결부된 죄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실 성도들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더불어 죄인을 용서하는 이 양자를 조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와 평행 본문인 눅 17:3, 4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너는 용서하라"로, 회개가 용서의 전제로 되어 있으며 일곱 번이 최종 숫자로서 거론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마태의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는 아니며 베드로가 언급한 일곱이라는 숫자도 예수의 의해 단번에 부정되었다. 따라서 마태는 용서의 법은 누가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관대하고 너그러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용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아페소'(* )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악행자가 회개하여 죄 자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상관없이 기독자는 즉시 상대방의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베드로의 이 적극적인 제안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암 1:3;2:1;Jome 86b).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번에 의해 거부되었다.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다.
여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70*7(490)로 보는 학자도 있고(Erasmus, Jerome, Alford, Grotius등) 70인역(LXX)에 의한 창 4:24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워 70+7(7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Augistine, Ewald, Origen, Bengel 등).
여하튼 490번이든, 77번이든 본문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Wycliffe)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즉 형제들 간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인데, 이는 23-35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 4:24의 복수의 횟수(일흔 일곱번)보다 또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고 큰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르는(엡 4:32;골 3:13)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A. W. Argyle).
진정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代置)시켜 놓으셨다(McNeile).
=====18:23
@천국은...과 같으니 -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앞절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화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비유늬 형식은 13장의 천국 비유와 같으나 비유의 내용은 25:31 이하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이 지상의 현존하는 사회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천국'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 여기서 '종들'(* , 둘로이)이란 문자적으로 노예들은 가리키지만 임금에게 빚진 돈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들이 아니라 왕의 영토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 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장관(Satraps) 혹은 영주라고 보아야 한다(Herodotus).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 상속자들이 얼마나 많이 죄용서함을 받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과장된 신분과 빚을 예시 하셨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 제시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회계하려 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 )은 '계산(*,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 , 쉬나이로)'의 의미로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을 살피는 것을 말하지만,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실로 말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에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고후 5:10).
@임금과 같으니 - 여기 '임금'은 자신의 통치권하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특히 35절과 연관되어 '천부' 곧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18:24
@일만 달란트 -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으로서(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 이었다. 이 일만 달란트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천 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더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액수는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한정수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대금(大金) 또는 많은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한정수에 해당한다.
@빚진 자(* , 오페이레테스) - 먼저 여기의 '빚'은 공금에서 횡령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금액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미처 다 상납하지 못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아켈라오가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600달란트를,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하였다'(Lenski)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 죄를 상징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오페이레테스'라는 헬라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언급된 바, 그곳에서는 '죄'(* ,오페이레마)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죄와 부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 : (1)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으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 (3) 죄는 쌍방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유사점:(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게.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된다, (3) 죄나 부채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나님에 의해 취소, 용서받을 수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 하리라"(사 43:25).
그런데 본문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 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려 사람의 죄악을 말소시키는 일을 담당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議認)은 예수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충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하나를 데려오매 -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치 않고 묻어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두 철미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18:25
@다 팔아 갚게 하라 - 이러한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단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노예의 값은 많아야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성경에도 명기되어 있는 일반적인 법이었다(레 25:39;왕하 4:1;느 5:5;사 50:1암 2:6;8:6). 물론 그런 노예들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어졌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을 파는 것은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절망적이 상황과 그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요구조건을 내세운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녕 그 임금에게는 그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Chrysostom). 한편 이 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전적 무능한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파산(破産)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18:26
@엎드리어 절하며(* , 프로세퀴네이) -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키는 고대 세계의 예법이다.
특별히 본문의 헬라어는 미완료 과거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엎드려 절하는 동작이 끊임없이 상대방으로부터 정을 일으킬 정도로 실행도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것이 빚의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 참으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오'(*)는 '먼', '긴'의 뜻인 '마크로스'(* )와 '강한 감정 ,분노'를 뜻하는 '뒤모스'(* )의 합성어로, 그 빚을 임금 자신의 분노나 격정을 일으키기 전에 그 일을 오앳동안 잊으시라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Trench). 이 채무자는 임금에게 그의 막대한 빚을 갚을 시간을 간구하였지만 이는 어떤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임금의 노여움과 그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려는 임기 응변에 지나지 않는다.
=====18:27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 종에 대한 임금의 첫번째 시혜(施惠)로서 그 근본 동인(動因)은 임금의 측은 지심(惻隱地心)이었다.
물론 종이 취한 겸손한 자세나 애절한 간구, 및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솔한 실토도 이번 시혜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겠으나 그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원인은 바로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눅 15:20).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하에 달려 있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긍휼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름11:30-32).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임금이 베푼 두번째 시혜이다. 즉 임금은 종이 간구한 것 (시간적인 여유, 조절) 이상의 것(완전한 탕감)을 약속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빚'(* , 다네이온)이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겨난 부채라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해 상당히 자비로운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탕감하다', '용납하다'의 뜻인 '아피에미'(* )는 주인의 자비나 지불 기한의 연장에 대한 채무자의 간청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즉 '아피에미'는 보통 '용서하다'(forgive)로 번역되는 말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을 퇴거시켜 멀리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12) 그것을 멀리 쫓아 보내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예시해 주고 있다.
실로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탕감해 주는' 임금의 행위는 석방과 사죄의 두 법적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칭의는 (1)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판단즉 '불쌍히 여김'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지 죄인의 간청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2) 이 한 번의 선언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단번에 탕감받은 것이다. 이 의인(議認)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의해,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에의 단 한번의 선언으로 가능하다(롬 8:33).(3) 그러나 우리의 의인(義認)됨에 있어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일정한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나님의 진적인 은혜와 사랑에 의한 것이다(요일 4:10).
=====18:28
@그 종이 나가서 - 시간적으로 그리오래지 않은 때를 암시하고 있다. 이때는 임금으로부터의 탕감 은혜를 받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의 시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종은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신의 용서받은 감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실로 그 받은 바 은혜를 적절히 나누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그분이 설정한 기회가 아닐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 예수 당시의 1데나리온은 보병이나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로서, 6000분의 1 달란트에 해당한다.
따라서 1백 데나리온은 1만달란트에 60만분의 1에 불과한,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다.
여기서 24절의 1만 달란트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일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이며 동료인 인간에게 범한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금액이다.
한편 본문의 '동관'이란 문자적으로는 동료 종이라는 뜻으로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붙들어 목을 잡고 - 여기서 '목을 잡고'에 해당하는 원어 '에프니겐'(*,)은 미완료 과거 능동형으로서 '그의 목을 조르기 사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제로 얼마 안 되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을 빚진 동관을 대하는 탕감받은 종의 난폭하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태도는 26절의 엎드려 절하면서 자비를 구하던 자세와는 완전히 다름 모습이다. 실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열반적인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법정에서 채무자의 목을 잡고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F. R, Fay). 따라서 목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상대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暴行)중에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빚을 갚으라(* , 아포도스 에이 티 오페일레어스) - 문자적으로는 '만약 빚진 것이 있다면 갚으라'고 하는 의미로서, 프릿취(Fritzsch)와 올스하우젠(Olshgausen)은 헬라어외 정중한 표현에 속하는 '에이 티(*)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이 말이 그 요구를 부드럽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의 이 말은 '네가 가진 것이 있으니 갚으라' 혹은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는 칼날같은 강요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임금이 그 자신에게 베풀었던 회계의 기회를 그는 자신의 채무자에게 전혀 부여하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채무자와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그를 만나자 마자 무조건적으로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8:29
@엎드리어 간구하여(* , 파레카레이)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그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는 26절의 존엄한 부복(府伏)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단순히 허리가 굽어지도록 간청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 이 말은 조금 전 그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26 절) 좀더 현실적인 간청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부채였지만 이 동관의 부채는 100여일의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의 부채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과의 이 호소는 그 종으로 하여금 조금 저느이 자신의 처지를 기억시키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 부정문에서 미완료시제가 쓰이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가 거절했다(허락치 않았다)'는 동사의 미완료형인 '우크 에델렌'(* )은 22:3에서와 마찬가지로 채무자가 계속적으로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자가 용서하기를 싫어하여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하여 준 임금에 비해 그 종의 마음이 얼마나 딱딱하고 완고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별히 허락하다'는 뜻의 헬라어 '델로'(* )는 '사랑하다'는 뜻을 내포한 단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방의 하찮은 소청이라도 들어 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사랑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이웃의 눈물젖은 호소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27절과 대조가 되는 구절이다.
임금은 그를 놓아 보내었으나(석방)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채무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투옥). 25절의 경우와 같이 가족과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여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채무액이 소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신 이 경우에는 돈을 지급할때까지 사람을 구속하는 일이 언급되었는데(5:25, 26 참조) 고대 사회에서는 채무로 인해 사람을 투옥시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Deissmann).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이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옥에 갇힌다고 하는 일은 억울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헐값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오백 데나리온에 팔렸으므로 그의 빚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람을 파는 일이 불법이듯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구속하는 일도 역시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나 임금에게 빚의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채무자의 지불 기한 연장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시켜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가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실로 받은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자는 참사랑을 모독하는 자이다.
=====18:32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 첫번째 부름의 회계에의 호출이었다면 이번 두번째의 부름은 정죄와 심판에의 호출이었다.
실로 이 지상에 모든 불의한 자, 형제 사랑을 외면하는 자는 언제가는 이 두번째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사 63:4). 이 부름 이후에는 영원한 투옥과 영원한 형벌만이 있을 뿐이다.
@악한 종아 - 25장에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중에 대해 주인이 책망한 말을 연상시키는 말이다(25:26). 형용사 '악한'이 붙은 이 말은 왕의 유죄 선고를 의미한다(7:23;25:41;눅 19:22). 즉 이 한마디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사(特赦)의 은전은 상실하게 되었다. 어욱이 이 '악한 종'이란 말이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 중에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이 채권자가 그의 큰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네가 빌기에(* , 파레카레사스) - 이 헬라어는 '간청하다'의 뜻인 '파레카레오'(* )의 부벚자 과거형으로 여기에서는 26:53에서와 같이 '단순히 한 번 간청한 것으로 충분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동작이 일어난 것만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을 사용한 것은 용서해 준 것이 빚진자의 계속적인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18:33
@불짱히 여김과 같이...불쌍히 여김이 - 이는 '받아들인 자비'와 그가 '행했어야 할 요가 있는 자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첫번째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자비로서 두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첫번의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도가 엄청난 것임에 비해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로서의 두번째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도리이고, 또 은혜와 감사의 정도로 지극히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자비가 있다. 이 세번째 자비는 벴겔(Bengel)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관대하신 보상(benigna talio)을 의미하는 것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말과 같이 성도가 장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마땅치 아니하냐(* ... , 우쿠 에데이세) - 의문사 '우크'(*, 아니하냐)에서 강조하고 있는 긍적적 대답은 이 악한 자의 최후의 양심의 가책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부여된 처지는 오로지 자신의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 데이)때문이다. 더구나 미완료형 '에데이'(* )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탕감받은 이 사람에게만 계속적으로 부여된 도덕적 의무가 바로 형제,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땅한 일을 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18:34
@주인이 노하여 - 여기서 '노하여'(* , 오르기스데이스)란 '자극 아 격분하다'는 뜻으로 불의하고 매정하 동관의 처신이 주인의 감정을 크게 훼손시킬 정도로 크나큰 잘못이었을 보여 준다. 이는 결국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반영,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진노하실 것인가에 대한 매우 적절한 예시이다. 정녕 형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잊은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은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를 책망하실 것이다.
@그 빚을 다 같도록 - 접속사 '헤오스 후'(* )는 '...까지'의 뜻으로, 제한된 어느 시점까지의 도달 가능성을 암시한다.
바로 이 문장에 의해서 '연옥설'(煉獄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본문의 사악한 동관은 감옥에 갇힌 이후라 할지라도 그가 혹시 빚을 다 갚은 이후에 또 다른 일이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본문의 제한적 용법에 근거해서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가 연옥의 상태로, 그 이후에는 회개한자는 천국으로, 회개치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의 자리로 ,옮기게 될 것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크리소스롬(Chrysostom)이 이야기 하였듯이 이 문장은 일정한 시점의 한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즉 본문의 '빚을 모두 갚는 일이 발생하기까지'라고 하는 말은 영구적인 불가능성을 말하는 가장 강한 표현이 된다. 따라서 주인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곳에 있으리라'고 한 말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나오지 못하리라고 하는 종신형인 무기 징역을 선언한 것이다. '악한 종'(32절) 이라고 하는 유죄선고에 이어 이제 그에게 마땅한 형량(形量)이 선고된 것이다. 이러한 종신형은 영원토록 불타고 있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Meyer).
한편 주인의 선고는 그 자신의 1만 달란트의 빚에 따라 형벌이 주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주인이 노한 것은 바로 그가 같은 동료의 죄를 탕감치 않는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형벌받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부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는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은 것 때문이었다. 정녕 베푸는 사랑이 없는 자는 받은 사랑을 등한시,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끝날의 심판 때에 극한 형벌을 언도 받을 수밖에 없다(25:41-46).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 '옥졸'의 뜻인 '바나니스테스'(* )는 '고통을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옥을 지키는 간수인 '데스모 퓔라크스' )가 아니다. 여기서는 결국 사악한 동관의 고통스럽고 처절한 투옥 기간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옥졸'이라는 말 신에 '형리'로 표현하고 있는데,이는 본문 해석에 충실치 못할 표현이다. 한편 '바사니스타이'가 왕의 시위병을 의미한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수종들고 있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옥졸들은 죄인을 그들 손으로 고문하고 매를 때리는 역할 뿐 아니라 지옥 형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는 사역을 맡은 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종말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천사들이 이 세상에 와서 가라지들을 골라 불에 처넣는다고 하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13:20).
==========
===하나님의 지고지선, 완전한 아가페사랑의 3가지 측면===
@@은혜( 십자가로 이루신 구속/회복의 사랑)를 통하여 주님과 화목함(하나됨)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자신의 모든 것을 (믿음을 통해) 누리도록 하심으로 평강안으로 이끄심.....
@@긍휼을 통하여 체휼하시는 사랑(환난과 고난, 역경 중, 특히 죄인괴수의 자각가운데 전적으로 무력한 피조물로서 도움없이 살 수 없음 호소할 때, 불쌍히 여겨 친히 아파하며 동감/동정/공감하사 동행/인도하며 일으켜 세우심)으로 평강안으로 이끄심.....
@@평강(임마누엘하나님이 반석-방패-산성/요새-목자 되심 믿고 붙듦으로 인해 조성된 생명의 번성번영창대케 됨, 그것을 통해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의 근원이신 주님 발견하고 그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여 동행하며, 주뜻 안에 하나되어 살아감)....이 평강으로 인해 참된 형통, 곧 하나님의 지고지선의 진복의 실제의 어떠함이 나타남
====
@@고의적 비고의적 잘못들 용서못함-->원한/쓴뿌리(비통감)-->분노/미움/증오(탓함)-->폭력 또는 탈진/우울/자책(악순환--무력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