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마19장
===이혼에 대하여 가르치시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시다
13.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재물이 많은 청년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Matthew 19 Amplified Bible
==Concerning Divorce
*1. Now when Jesus had finished saying these things, He left Galilee and went into the part of Judea that is beyond the Jordan;
*2 and large crowds followed Him, and He healed them there.
*3 And Pharisees came to Jesus, testing Him and asking, “Is it lawful for a man to divorce his wife for just any reason?”
*4 He replied, “Have you never read that He who created them from the beginning made them male and female,
*5 and said, ‘For this reason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be joined inseparably to his wife, and the two shall become one flesh’?
*6 So they are no longer two, but one flesh. Therefore,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let no one separate.”
*7 The Pharisees said to Him, “Why then did Moses command us to give her a certificate of divorce and send her away?”
*8 He said to them, “Because your hearts were hard and stubborn Moses permitted you to divorce your wives; but from the beginning it has not been this way.
*9 I say to you, whoever divorces his wife, except for sexual immorality, and marries another woman commits adultery[a].”
*10 The disciples said to Jesus, “If the relationship of a man with his wife is like this, it is better not to marry.”
*11 But He said to them, “Not all men can accept this statement, but only those to whom [the capacity to receive] it has been given.
*12 For there are eunuchs who have been born that way from their mother’s womb [making them incapable of consummating a marriage];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been made eunuchs by men [for royal service];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b]made themselves so for the sake of the kingdom of heaven. He who is able to accept this, let him accept it.”
==Jesus Blesses Little Children
*13 Then children were brought to Jesus so that He might place His hands on them [for a blessing] and pray; but the disciples reprimanded them.
*14 But He said, “Leave the children alone, and do not forbid them from coming to Me; for the kingdom of heaven belongs to such as these.”
*15 After placing His hands on them [for a blessing], He went on from there.
==The Rich Young Ruler
*16 And someone came to Him and said, “Teacher, what [essentially] good thing shall I do to obtain eternal life [that is, eternal salvation in the Messiah’s kingdom]?”
*17 Jesus answered, “Why are you asking Me about what is [essentially] good? There is only One who is [essentially] good; but if you wish to enter into eternal life, keep the commandments.”
*18 He said to Jesus, “Which commandments?” And Jesus answered, “You shall not commit murder;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You shall not steal;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19 Honor your father and mother;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at is, unselfishly seek the best or higher good for others].
*20 The young man said to Him, “I have kept all these things [from my youth]; what do I still lack?”
*21 Jesus answered him, “If you wish to be perfect [that is, have the spiritual maturity that accompanies godly character with no moral or ethical deficiencies], go and sell what you have and give [the money]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follow Me [becoming My disciple, believing and trusting in Me and walking the same path of life that I walk].”
*22 But when the young man heard this, he left grieving and distressed, for he owned much property and had many possessions [which he treasured more than his relationship with God].
*23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it is difficult for a rich man [who clings to possessions and status as security]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24 Again I tell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who places his faith in wealth and status] to enter the kingdom of God.”
*25 When the disciples heard this, they were completely [c]astonished and bewildered, saying, “Then who can be saved [from the wrath of God]?”
*26 But Jesus looked at them and said, “With people [as far as it depends on them]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The Disciples’ Reward
*27 Then Peter answered Him, saying, “Look, we have given up everything and followed You [becoming Your disciples and accepting You as Teacher and Lord]; what then will there be for us?”
*28 Jesus said to them,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in the renewal [that is, the Messianic restoration and regeneration of all things] when the Son of Man sits on His glorious throne, you [who have followed Me, becoming My disciples] will also sit on twelve thrones, judging the twelve tribes of Israel.
*29 And everyone who has left houses or brothers or sisters or father or mother [d]or children or farms for My name’s sake will receive many times as much, and will inherit eternal life.
*30 But many who are first [in this world] will be last [in the world to come]; and the last, first.
==Footnotes
Matthew 19:9 Some early mss add the phrase “...and he who marries a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Matthew 19:12 This may refer to a personal vow of celibacy.
Matthew 19:25 These declarations of Jesus directly contradicted the teaching of the Pharisees that God bestows wealth on those He loves and chooses. If the rich were not automatically granted entrance to God’s kingdom, how could the common man ever be welcomed?
Matthew 19:29 One early mss adds or wife.
=====
마태복음 19장 (개요)
본 장(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의 본거지를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의 해안 지방으로 옮기심(1, 2).
Ⅱ. 이혼 문제에 관하여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시고, 제자들에게 이혼할 수 있는 경우를 말씀해 주심(3-12).
Ⅲ.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여 안수하심(13-15).
Ⅳ. 젊은 부자 청년과 대화하심(16-22).
Ⅴ. 세상에서 부유한 자들이 구원받기 어려운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이 확실히 받을 보상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대화하심(23-30).
=========
사역의 본거지를 옮기심(마 19:1-2)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역의 장소를 옮기신 것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요단강 건너 유대지경 = 데가볼리 + 베레아지역 ::: 요단동편의 구분.....메롬호--갈릴리호수--요단강--사해를 기준으로 드라고닛-데가볼리-베레아로 구분해 볼 수 있음...
*1. 요단강동안경계를 기준으로 상부2/5 및 갈릴리호수 동남부2/5까지는 데가볼리(데가볼리지역은 요단 서편까지 약간 더 확장되어 갈릴리접경에 이어짐),
*2.요단강 동안하부3/5(애논지역)에서 사해동북부해안 상1/2(아르논강 북부지역일부까지)에 이르는 베레아지역 (=요단건너 해변길)
*3.갈릴리호수 동북부3/5에서 헬몬산까지는 드라고닛지역(그 상부는 이두레), 한편,
*4.갈릴리지역은 상부는 메롬호에서 하부는 요단서편 상2/5의 데가볼리지역에 이어지면서 대략적인 반원형을 이룸))
1. 그는 갈릴리를 떠나셨다.
그는 갈릴리에서 자라나셨으며, 그의 인생의 대부분을 그 외딴 초라한 지방에서 보내셨다.
그는 단지 명절이나 절기 때에만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자신을 거기에서 나타내셨다.
그가 거기에 오셨을 때 그에게는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와 이기적인 기사가 오히려 더욱 눈에 띄었고 또한 신빙성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가 유대 지방에서 가장 교양이 없고 세련되지 못한 지방인 북쪽 갈릴리의 촌사람 행색을 하는 것은 그의 낮아지심의 한 실례였다.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나타나셨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리에서 주로 자신의 설교의 대부분을 전파하셨고, 대부분의 이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말씀을 마치고 갈릴리를 떠나셨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작별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갈릴리에 다시 오신 것은 부활하신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갈릴리에서 다 마치시기까지는 그곳을 떠나지 않으셨다. 마치신 후에야 그곳을 떠나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종들은 그들의 증거를 마칠 때까지는 세상에서 부름 받아 저 세상으로 가지 않는 것처럼 ((특별한 인도하심이 없다면)) 다른 장소로 옮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계 11:7).
목회자들이 임지를 옮기기 전에 그의 말씀 선포가 끝마쳐져야 한다는 이 사실은, 임지를 옮길 때 자기들의 기분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누가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이 그곳에 있는데도 다른 어떤 곳에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겠는가?
2. "그는 요단강 건너 유대 해안지방에 이르셨다."
이는 "그들이 갈릴리에서처럼 예수님을 찾아 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민족들을 향하여 위치하고 있던 가나안의 그 지역들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갈릴리는 "이방인들의 갈릴리"라고 불리었으며, 수리아인들이 요단강 건너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비록 몸은 유대 민족의 테두리 안에 있었지만 그의 눈이 이방인들을 향하고 있었으며, 그의 복음도 역시 그들을 겨냥하였고 그들에게로 더욱 가까이 오고 있었다.
3. "큰 무리가 그를 쫓았다."
실로가 있는 곳에 백성들은 모여들게 마련이다. "주님의 구속받은 자들"은 "어린양이 가는 데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계 14:4).
그리스도께서 떠나실 때, 그를 따라가는 것이 최상책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존경심의 발로이기는 하지만 그를 계속 괴롭히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안일함을 구하지 않았으며, 이 군중들이 얼마나 천박하고 경멸스런 존재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선을 행하기에 쉴 겨를도 없으셨다."
이는 무리들이 따르기 때문에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병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왜 그리스도를 따랐는가 하는 이유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갈릴리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자기들을 도와주실 수 있고 또한 기꺼이 도와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이 "의의 태양이 떠오르는"곳은 어디서나 그의 날개 아래에서 병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도 그의 병을 고치셨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까지 오게 되면 그것이 거치는 것이 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애쓰지도 않으시고 울지도 않으실 것이다."
--------
이혼 문제(마 19:3-12)
바리새인들과 변론함으로써 이혼 사건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반박하는 이야기를 매우 참을성 있게 귀담아 들으셨으며, 그것을 자신의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데 이용하셨다.
Ⅰ. 바리새인들이 던진 질문(3절).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까?"
그들이 이와 같이 질문한 것은 그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며, 그에게서 배우기 위하여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이 이혼 문제에 대하여 그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상반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신 일이 있으셨다(마 5:31, 32).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정면으로 이혼 문제를 논박하려고 하신다면 바리새인들은 이를 미끼로 삼아 그에 대하여 이 지방 사람들의 반감과 분노를 일으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들이 탐닉하고 있던 한 가지 자유인 이혼 문제를 제한시키고 누리지 못하게 하려 하는 자에 대하여는 살기에 찬 분노를 터뜨려 왔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훈의 말씀 중에서 어느 것에 의해서나 또는 이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잃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즉 그들의 시험은 다음과 같이 계획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이혼은 불법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혼을 허락하고 있던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는 원수라고 그를 비난하려고 했으며 만일 그가 이혼은 합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의 교리와 가르침이 메시야의 교리나 가르침에 기대된 완전성을 결여한 것으로 헐뜯어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혼이 묵인되고는 있었지만, 다소 엄격한 사람들은 이혼을 그리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허용하였지만,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이혼의 사유를 어떤 것으로 정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의견 대립이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결혼문제로 인한 소송사건이 그 당시 허다하였는데, 때로는 매우 복잡하고 난처한 경우도 있었다.
그 사건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저촉되어 일어난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욕정과 어리석음에 의하여 생긴 것들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흔히 이혼 문제에 있어서 자기들이 좋을 대로 합의 이혼해 버렸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질문은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결혼전에, 남자는 전혀 모르는 바 아내의]간음한 연고가 있을 때에는 아내를 버리는 것이 인정되었지만 지금과 같이 일반적으로 난잡한 사람들에 의하여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행해지고 있는 이혼 행위도 인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부도덕한 사람들은 매우 사소한 이유일지라도 남자 편에서 생각해 볼 때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면, 예를 들어 여자가 보기 싫어지기만 해도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이혼을 묵인하여 허락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신 24:1)이다.
그들은 이 성경 말씀을 매우 광범위하게 해석하여, 아무런 연고가 없어도 그 여자가 미워지고 싫어지면 그것을 이혼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Ⅱ.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양심과 도의에 관한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는 않으셨으나, 매우 효과적인 충분한 대답을 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자의적인 이혼들을 묵인하는 원리들을 단호하게 논박하심으로써 이것이 결코 합법적이 아님을 밝히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합리성을 결여한 법칙을 제시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진리나 근거가 없이 자기의 판단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즉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하여 완벽하게 하나로 결합이 되었을 때는 어떠한 경우를 물론하고 경솔하게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 그들의 결합이 신성한 것이라면 쉽게 풀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결합을 증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로 말씀하시고 계시다.
1.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관하여 바리새인들 자신의 성경 지식에 호소하고 있다.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그들이 읽어서 익히 알고 있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논증을 하면 매우 유리할 때가 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창 1:27; 5:2)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즉 어떻게, 누가, 무엇으로,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하나님은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한 남성을 위해 한 여성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취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택하여 취할 수 있는 다른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들의 결합이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였다. 그러므로 그 하와를 쫓아내어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그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에 어긋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이 문제를 간단하게 암시만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이 읽은 바 그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언급하심으로써 그 말씀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의미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나머지 피조물도 수컷과 암컷으로 창조되었지만 그 말씀은 그들 중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으며 오직 인간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남녀간의 결합은 이성적이며 단지 감각을 즐겁게 하거나 움직이자를 보존 번식시키는 것 이상의 고상한 목적들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녀간의 결합은 짐승들의 암수간의 결합보다 훨씬 밀접하고 확고한 것이다.
또한 짐승들은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간에 배우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남녀를 표현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단수로 되어 있다(창 1:27).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역주:이를 흠정역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시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이 구절을 보면 "그를"과 "그들을"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그들이 둘이 되기 이전에 창조시는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언약에 의하여 다시 하나로 되었을 때 그 하나됨은 더욱 밀착되고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결혼의 기본법.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5절).
남편과 아내간의 촌수는 부모와 자식 간 보다 더 가깝다.
그러므로 부자(父子) 사이의 관계가 쉽게 깨뜨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혼의 결합 관계는 더욱 깨뜨려 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연고가 있다고 해서, 아니 어쩔 수 없는 연고가 있다고 해서 자식이 자기 부모를 죽게 내버려두거나 부모가 자기 자식을 길거리에 내버려도 좋은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남편 된 자는 자기 아내를 더구나 쫓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사이는 혈통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작정하여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그 관계는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보다 더욱 가깝고 그들의 결합은 더욱 강하다. 왜냐하면 한 남자가 자기의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화합하게 될 때에 부자 간의 관계는 결혼에 의하여 완전히 대체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로 말미암은 결과로서 결혼이라는 결합은 혈연 관계가 낳은 최대의 결합인 부자(부모-자녀) 관계보다 더욱 우세하다.
3. 결혼 계약의 성질. 결혼은 인격의 결합이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고 한 몸이다."
한 사람의 자녀들은 그 자신의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의 아내는 자기 자신이다.
부부간의 결합이 부부간의 경우보다 더 밀접한 것 같이,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인체내의 각 지체들 간의 상호 관계와도 같다.
바로 이 점은 남편들이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요, 또한 그들이 자기 아내들을 쫓아 내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아직껏 자기 자신의 몸을 미워하거나 그것을 잘라 내거나 또한 잘라내려 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잘 가꾸며 귀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들 둘이 이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한 아내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 아담을 위하여 한 하와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추론하시기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필이다.
"즉 그는 함께 멍에를 매게 하셨다"는 뜻으로 그 말씀의 뜻은 매우 깊다.
하나님 자신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무흠한 상태로 제정하셨다. 결혼과 안식일은 하나님이 가장 먼저 정하신 규례들이다.
결혼은 교회의 고유한 규례는 아니고 세상에 속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제정하여 인치셨고 또한 여기에서도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하여 인준되었음으로 결혼은 경건된 것으로 다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성별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결혼의 규례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해 양심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면 부부간의 의무를 서로 잘 이행할 수 있게 되며 결과적으로 위로가 넘치게 될 것이다.
(2)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여 짝지어진 것이므로 결코 인간의 어떤 규제에 의하여 나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그것을 나누어서도 안 된다.
남편 자신이나 정부의 어떤 관리도 이 둘 사이를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것을 행할 권위를 주신 일이 결코 없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말 2:16)고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짝 지워 주신 것을 나누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하나의 일반 원칙이다.
Ⅲ.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대 질문.
이 반대 질문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한 [일리있는]질문이다.(7절).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즉 "그런 경우에도 아내를 쫓아내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이혼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성경의 근거를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인정하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 내에서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은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에게 난제요 큰 거침돌이 된다는 사실이다.
모세는 자기를 택정하신 분에게 충성하였고 또한 주님에게서 받은 말씀만을 명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모세가 명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는 다만 "허용"에 불과한 것이었다(신 24:1). ((실은 명령은 아니었다!!))
그리고 모세가 말한 바 그 말씀은 이혼 그 자체를 장려하려는 것보다는 그것이 지나치지 않도록 억제하려고 계획된 것이었다.
(*유대인 학자들도 그 법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혼은 진중을 기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즉 특정한 이유가 있어야 되고 이혼증서가 반드시 작성되어야 하며 그리고 사법상의 모든 정식 서류를 구비해야만 한다. 그 이혼증서는 자기 아내의 손에 직접 전해 주어야 하며 또한 그들이 다시 합해지는 재결합은 명백히 금지되었었다.)
Ⅳ. 이와 같은 반대 의견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1.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셨다.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신 24:1)을 "명령"으로 보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허용" 또는 "묵인"으로 보고 있다.
경건하지 못한 세속적 인간들은 한 치를 주면 한 자를 달라고 하기 쉽다.
즉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에 관하여 불가피하게 묵인한 것을 가지고 명령한 것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모세의 하나님께서 백성을 통치하는 행정상의 정치적인 법으로 주신 것이다.
또한 이혼이 묵인된 것은 세속 정부의 여러 가지 사정에 기인하였다.
결혼으로 말미암은 결합은 자연법이 아닌, 강제법에 의한 결과로써 너무도 엄격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를 따라 자기의 거룩성을 침해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이혼을 폐지시키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이혼을 허용하게 된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음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것은 결코 바리새인들이 특출하거나 신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내어버림을 허락하였느니라."
모세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목이 곧음"을 인하여 불평한 바 있다(신 9:6; 31:27).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목이 곧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들 백성들 상호 간에 목이 곧고 마음이 완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난폭하고 잔인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들의 아내가 밉고 싫증이 나는 데도 이혼을 못하게 할 경우에는 그 아내들을 잔인하게 취급하여 구타하고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살해까지 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세상에서 가장 완악한 사람은 자기 아내를 학대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특히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악명이 높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아내들을 쫓아내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나약하고 불쌍한 아녀자들이 학대를 당하여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는 것"(말 2:13)보다는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더 나았다.
미친 사람과도 같이 목이 곧고 광란에 사로잡힌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조금 양보하여 이혼을 허락해 주는 것은 더 큰 재난을 예방할 수 있다.
강제법[상대적 선을 추구.. 허용이나 묵인]은 자연법[절대적 선을 추구..계명]을 보존시키기 위하여 폐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목이 곧고 비열한 자들이어서 그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마음을 완악하게 먹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혼하는 자유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너희"는 그 당시 살고 있던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후손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미리 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규례와 섭리를 인간의 본성과 기질에 적합하게 하시되 두려워하게 하셨다.
계속해서 본문에 보면 모세의 율법은 사람의 완악한 마음을 고려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을 치유해 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돌 같은 딱딱한 마음을 제거하고 살결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되었으나, 복음에 의해서는 죄를 정복하게 된 것이다.
2. 그들에게 최초의 결혼제도의 의의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규례 중 어떠한 것에든지 부패성이 개재되면 그 부패성은 그 제도가 처음에 제정될 당시의 것으로 올라감으로써 일소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떤 사본이 오류 투성이일 경우 원본에 의해서 검토되고 수정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주님의 성만찬에 관하여 고린도교회 내에 여러 가지 의견이 난립하고 있을 때 그들의 의견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처음 그 성만찬을 주님이 베푸시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였다(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
진리는 언제나 처음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구해야만 한다(렘 6:16). 그리고 후대의 견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기의 표준들에 의해서 개혁을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한 법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9절).
이는 그가 이전에 말씀하신 것과 일치한다(5:32).
그 때에는 그 말씀이 설교 가운데서 언급되었었고, 지금은 변론 가운데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1) 음행의 경우에만 이혼을 허락하였다.
이혼을 반대하는 율법의 동기는 바로 이것이다."저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러므로 만일 아내 된 자가 음행을 행하여 음행한 남자와 한 몸을 이루게 되면 그 율법의 동기는 종식되고 또한 그 율법도 종식된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음행은 사형에 해당하였다(신 22:22).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좀 완화시켜서 사형대신 이혼으로 벌을 받게 하신 것이다.
(*휘트비(Whitby)박사는,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porneiva(음행)란 단어를 [혼전에 범하였으나 결혼 후에야 발견된 부정한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혼 후에 행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서 이혼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2) 그 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혼을 불허하고 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는 그들의 질의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으로써 이혼이 합법적이 아님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복음 시대는 다른 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혁의 시대"이다(히 9:10).
그리스도의 법은 인간을 그의 최초의 순수성으로 회복시켜 준다.
사랑, 특히 부부간의 사랑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던 계명이다.
자의적인 이혼 때문에 뒤따르게 되는 가족과 국가의 불행, 혼란, 무질서 등이 어떠한 것인가를 고려해 보면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법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기독교가 세속적인 일에 있어서도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를 알 수가 있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까닭에 이혼을 허락하였고, 그리스도의 법은 이혼을 금하였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은 온유하고, 결코 유대인처럼 완악하지 않게 될 것을 기대케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화평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 용서를 받고 또한 용서받기를 소원하는 자들처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후로는 "우리를 내어 보내지'(사 50:1) 않을 것을 확신하는 자들처럼 서로를 용서해 준다면 결코 이혼이란 있게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들은 그들의 남편들에게 순종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생명의 은혜를 이어받을 자로서 함께 산다면 이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이요, 이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법이다.
Ⅴ. 제자들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법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10절).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제자들 자신들도 이혼하는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이혼이 결혼 생활에서 얻는 안락함을 보전하는데 편리한 방편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라진 어린아이들처럼 그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게 되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내던져 버리겠다는 식이다.
즉 그들이 원할 때 자기들이 아내를 내어버릴 수 없다면, 그들은 아내를 처음부터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 하시고는 그들을 축복하셨다.
즉 이와 같이 완전히 한 몸으로 결합된 자들이 복 되도다 선언하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부패한 본성은 제약을 참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속박을 산산조각 내기를 좋아하며, 자기 자신의 정욕을 위한 자유를 누리기를 기뻐한다.
둘째, 사람이 [주께서 누리도록 허용하신] 세상의 즐거움을 그 안에 섞여 있는 십자가와 같이 고난 때문에 [스스로]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심술궂은 일이다. 이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고 하여 우리가 세상을 뛰쳐나가야 한다는 것과 같다. 또는 어떤 유익한 직업이나 지위조차도 그 안에 우리가 예속되어야 할 의무[나 책임]를 지워 준다고 해서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고 [떼쓰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하여 내뱉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생각을 [영적 사려분별을 통해 조화롭게] 맞추어야 하고 그것이 주는 낙을 인하여 감사하며, 그것이 지니고 있는 십자가를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신 것처럼 양자를 서로 병행시키고 그것을 선용해야만 한다.(전 7:14).
만일 결혼이라는 멍에를 기쁠 대는 내 벗어버리지 않아도 좋은 것이라면 "그러므로" 우리는 멍에를 메지 않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멍에를 메어야 할 때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그 멍에에 자신을 맞추려는 결심을 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혼은 가장 불필요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Ⅵ. 이 이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11, 12절).
1. 어떤 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인정하셨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말한 것을 [또한] 인정하셨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라."
이는 이혼을 금지하기 위하여 독신을 장려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에게 성욕을 절제하는 은사를 받아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계속하여 독신으로 머물러 산다면(고전 7:1) 자기들의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주님의 일을 위하여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고전 7:32-34) 염려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 염려에 대해 보다 덜 고민하게 되고, 그 대신 보다 나은 일들을 하는데 마음과 시간을 쏟아 바칠 수가 있다.
은혜가 증가하는 것은 가족이 늘어나는 것보다 나으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지는 교제는 다른 어떤 교제보다도 먼저 취해야 할 교제가 아닌가!
2. 그리스도께서는 결혼을 금하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으로 보시고 그것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극소수만이 이 말을 받을 수 있다. 그 누구도 이 말을 받아, 결혼하지 않고 지낼 수 없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의 십자가를 반드시 저야 하며, 그 십자가를 피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화형을 당하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 [무절제한 음욕은 지옥의 불길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결혼하기에 부적당한 것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
(1)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된 것은 재난이다.
나면서부터 고자이거나 사람에 의하여 고자가 된 자 또는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없어서 고민하는 자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재난을 상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은 미덕이다.
그러한 미덕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의 것이다.
이는 결혼을 하는데 육신적으로 부적당한 것이 아니라 심적으로 부적당한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 구절을 오해하여 어리석고도 사악하게 육체적으로 자신을 고자로 만든 자들이 있다).
결혼 생활에서 얻는 모든 즐거움에 대하여 거룩한 무관심에 도달하고 그 즐거움들을 전적으로 금할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안에서 확고하게 결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신을 고자로 만든 것이다.
그들은 금식과 극기하는 모든 수단들에 의해서 결혼에의 모든 정욕을 억제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이 말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저들이 결코 결혼하지 않겠다는 서원에 의해서 자신들을 얽매어 놓아서는 안 된다.[이것은 교만이며 치우침이다!!!] 다만 그들이 지금 마음으로만 결혼하지 않을 것을 결심해야 한다.
① 독신 생활에 대한 이러한 결심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말을 받지 못하고 "타고난 자라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써 어떤 자에게 주어져 있으나 다른 어떤 자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독신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경험에 의하여 이 은사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 37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에는 자신을 그렇게 지킬 수 있을 만큼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의지를 다스릴 만한 능력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라도 거짓된 은사를 자랑하지 않도록 [항상!!]주의해야만 한다(잠 25:14).
② 독신 생활은 천국을 위하여 결심되어야만 한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 중에는 모든 의무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이기적인 무뚝뚝한 기질을 만족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다른 정욕과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보다 많은 자유를 얻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미덕이기는커녕 사악한 악덕이다.
그러나 신앙을 위하여, 그렇지만 (교황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공적을 쌓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마음을 지켜 신앙의 봉사에 전심전력하는 수단으로써 부양가족을 거느리지 않게 되면 우리는 보다 많은 선행들을 할 수가 있다.
그때에만 하나님께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그 결심을 인정하기고 합당하게 여기신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독신생활이라는 그 조건은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택하여 전념할 만하다. 또한 그 조건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도 가장 좋다.
천국을 위하여 우리가 준비하고 그 천국에 우리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적합한 조건이 바로 독신생활이다.
즉 천국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하고 신앙의 열심을 격려할 목적으로 결단하는 독신생활은 우리 자신과 영혼을 위하여 가장 좋은 환경이요 조건이다.
---------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심(마 19:13-15)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데리고 오는 몇 명의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신 사실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자들의 신앙.
본문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의 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한 두 살 된 어린아이들로서 팔로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매우 어린아이들인 것 같다.
이에 관한 본문의 설명은,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13절)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그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자들은 그들의 부모나 보호자나 유모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1.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존경심과 그의 은총과 축복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증거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또한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케 함으로써 더욱 영광을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의 풍성함과 차고 넘치며 그칠 줄 모르는 그의 충만에 대한 존귀를 돌려 드려야 한다.
우리가 그를 존귀케 하는 최선의 길은 그를 최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2. 그들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최대의 애정을 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축복과 기도를 받으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보다 잘될 것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나 왕으로는 간주하지 못하였을지 모르나 선지자로는 여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축복을 높이 평가하고 간절히 바랐었던 것이다.
다른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병들었을 때 치료를 받으려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왔으나 이들 부모들은 자녀들이 현재 아픈 것과 아니지만 오직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데리고 온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슬픔을 당하여 그리스도에게로 가지 않을 수 없기 전에, 즉 평상시에 우리자신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고 또한 우리 자녀들을 그에게 데리고 가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우리가 괴로움을 당할 때 그리스도를 찾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우리가 그를 의지하고 또한 그가 베풀어주시는 은택을 기대하며 산다는 것을 그에게 아뢰는 것은 그를 크게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그들은 주 예수께서 그들에게 안수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바랐었다.
안수는 특별히 부모가 자녀들을 축복할 때 사용되는 의식이었다.
야곱은 요셉의 자녀들을 축복할 때에 안수하는 의식을 사용하였다(창 43:14).
안수는 능력과 권위가 수반된 사랑과 친근감을 나타내어 주며 또한 축복의 효력에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이를 위해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안수하신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어린아이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축복을 필요로 한다.
또한 그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언(代言)에 이해관계가 있는 자들로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옴을 받을 수가 있다.
둘째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와져야 한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상책은 그들을 주 예수님께 맡겨 그에 의해 감화를 받게 하고 또한 기도를 받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들을 위해 축복을 빌어 줄 수 있을 뿐이요, 그 참된 축복을 [실지로]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다.
Ⅲ. 우리 주 예수님의 은총.
1. 그는 제자들을 책망하셨다(14절).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계속적으로 범한 실수를 바로 잡아 주고 계신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신앙을 가진 부모들의 자녀들은 천국에 속한 자들이며, 보이는 교회의 회원들이다.
천국은 "성품이나 감정"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연령에 있어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다.
그들에게도 옛날 유대인들 사이에서와 같이 보이는 교회의 회원권이 있다. "너와 네 자손들에게 맺는 언약이 이것이니,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2)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스스로 올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로 데려옴을 받는 어린아이들을 항상 기쁘게 용납해 주신다. 이는 곧,
① 어린아이들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관심을 표명하셨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도 첫 아담이 지은 죄의 악한 영향에 참여하였으므로 둘째 아담이 베푸는 은혜의 풍성함에 참여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바울이 말한 바 고린도전서 15장 22절과 로마서 5장 14, 15절 말씀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값 주고 사신 바 된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② 그리스도께서는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그들을 산 제물로 드린 부모들의 신앙을 보셨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소망에 대한 관리인들로서 자녀들을 위해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온 것을 아이들의 행위로 [여기시고]받아 주시는 것이다.
③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아이들을 금하고 그가 용납하시는 자들을 제외하려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것이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주님의 기업에서 쫓아내며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分誼)가 없다"(수 22:27 참조)고 하며, 또한 어린아이들에게 저들이 세례 받아야 할 물을 금한다.
그런데 아이들도 [말씀대로 진정] 약속이 성취된다면(사 44:3)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2. '그는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여," 그가 바라던 대로 향하셨다.
'그는 그들 위에 안수하셨다." 즉 그들을 축복하신 것이다.
믿음이 매우 강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붙잡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붙잡힌 바 되어서 살며(빌 3:12),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그의 아신 바 되어(갈 4:9) 산다.
가장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얕보지 말라!!)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손을 내밀어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안수하여 자기 것으로 삼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행하신 후에 거기서 떠나가신 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볼 만한 것이 있는 것 같다(15절).
이는 마치 그가 거기서 충분히 행하신 것으로 간주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그때에 그의 양 무리인 어린양들의 권리를 그와 같이 옹호해 주심으로써, 그의 왕국에서 기업을 이어받을 자의 자격을 위해 이 규정을 정하신 것이다.
--------
젊은 부자 청년과 대화하심(마 19:16-22)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어떤 부자 청년간에 오고 간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부자 청년은 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말을 걸어왔다.
본문에는 그를 "어떤 청년"(20절)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필자는 그를 "어떤 귀족"(gentleman)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원이었기 때문이다(눅 18:18).
그는 행정관이었고 또한 그 지방의 치안판사였다.
아마도 그는 나이에 비해서 능력이 훨씬 뛰어났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 나이에 행정관이 될 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청년 귀족은 매우 정당하게 천국에 대하여 흥정을 하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Ⅰ. 그 청년 귀족은 천국을 매우 정당하게 흥정을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친철하고도 부드럽게 대하여 주셨다.
1. 그 청년 귀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각하게 말을 걸어옴(16절).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보다 더 탁월하고 중대한 질문은 있을 수 없다.
(1) 그는 그리스도에게 존칭을 썼다.
선한 선생님이여. 이 명칭은 다스리는 자가 아니고 가르치는 선생을 뜻한다.
그 귀족 청년이 그를 "선생님"이라 부른 것은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순종과 자원을 뜻한다.
그리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한 것은 그 선생님에게 대한 그의 특별한 애정과 존경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마치 니고데모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와 이 관원보다 더 그리스도를 존경하여 부른 예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사람의 품위와 지위는 그 사람을 더욱 예절 바르게 해 준다.
이 관원이 그리스도의 외모가 심히 초라하였지만 그에게 존칭을 사용한 것은 그가 귀족다운 자였음을 드러내어 준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자기네들의 선생을 "선한"이라는 낱말을 곁들여 인사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그 관원이 그리스도에 대해 지니고 있는 존경심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선생님이요, 선생 중에 가장 훌륭하신 선생님이시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와 같이 잘 가르치지는 못한다. 그는 그의 선하심 때문에 더구나 특출하시다.
"그는 온유하시고 무지한 자를 크게 불쌍히 여기시며, 또한 그의 마음은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2) 그 관원은 매우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로 왔다(그 문제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시험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왔다.
그의 질문은 이렇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말 가운데 나타난 것을 보면,
① 그는 영생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천국 복락을 준비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저 세상에서 그 천국 복락이 예비 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② 그는 그 자신도 영생복락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리라는 것을 자신에게 확신시키고 싶었으며, 이 세상의 어떤 기쁨보다 더 나은 영생을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 청년 귀족과 같은 젊은 높은 지위를 가진 자가 저 세상에 대해서 그와 같이 관심을 가지고 염려한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부자들은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 자기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하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 그의 영혼과 영생에 대하여 염려하는 한 부자 청년이 있었다.
③ 그는 이 영생복락을 얻으려면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우리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곧 영생을 구한다"(롬 2:7).
우리는 행하되, 선한 일을 행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분영하고도 확실한] 영생의 유일무이한 약조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하나님으로] 믿어 영접한 자마다,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은 영생을 얻는 약속된 방법이다(히 5:9).
④ 그는 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할 작정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영생을 누리는 것이 어떠한 것이며,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얻게 되는 것을 기뻐한다.
천국은 이러한 거룩한 침노를 당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가 누구냐?"고 묻지만, 우리의 가장 큰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니까?"이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히 행복하며,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청년 귀족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대답도 해 주지 않고 돌려보내는 일을 결코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렇게 대답을 해 주는 것이 그에게는 큰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17절).
그의 대답을 살펴보면,
(1) 그는 그 청년 귀족의 신앙을 친절하게 도와주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부르느냐?" (역주:우리 성경에는 "어찌하여 내게 선한 일을 묻느냐?"로 되어 있음)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책망할 의도로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청년이 그를 [참되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한 말 가운데서 그의 신앙을 알아보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듯하다.
그 청년 귀족은 그리스도를 단지 한 선한 인간으로만 취급하여 존경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선한 하나님으로 알아 섬기도록 그 관원을 이끌어 주고저 하셨다. 왜냐하면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곧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서투르게 말해진 것이나 서투르게 잘못되어진 일을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로 활용하신다.
마찬가지로 그는 잘 말해진 것이나 잘 행하여진 것도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로 활용하신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해석은 우리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낫다.
예를 들면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내게 먹을 고기를 주었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그것이 내게 준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었다"(마 25:35-4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이 청년으로 하여금 자기를 하나님으로 알게 하든지, 아니면 자기를 "선한"이라고 부르지 않게 하든지 하고자 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언제든지 주어지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만 돌려 드리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신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선하다"고 부른다면 모든 선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옴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모든 면류관은 그의 보좌 앞에 놓여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만 선하시다는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원천적으로, 처음부터, 변함없이 선하지 않다.
그의 선하심은 그 자신에게서 또한 그 자신으로부터 나오며, 피조물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선의 원천이시다. 그 물줄기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역주:선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 "모든 샘들(모든 은사와 선물들)은 하나님 안에 있다"(약 1:17 참조).
그는 가장 위대한 선(善)의 전형이요 본보기이시다. 그에 의해서 모든 선이 측정되어야 한다. 그를 닮고 그의 마음에 합하는 것은 선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있어서도 우리 예수님은 "그의 영광의 광채"이셨으며(그의 선하심은 그의 영광이다), 또한 "그의 인격의 분명한 형상"이시다. 그러므로 [바르게 깨달아] 그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적절하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그의 습관을 솔직하게 보게 하신다.
그는 먼저 자기를 선하게 보는 그 생각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되심을 변증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처럼 쓸 데 없는 변론을 벌이다가 중심 된 문제를 놓치고 곁길로 나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대답을 요약하면 "네가 영생[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이다.
① 제안된 목표는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청년은 질문할 때에 영생에 대하여 말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대답하실 때에 [참]생명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이는 우리에게 영생이 유일한 참된 생명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그 영생에 관한 말들은 이 "생명"이라는 단어들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행 5:19,20).
현재의 육신적 생명이 생명(영생)으로 불리우는 예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는 "생명으로"에서와 같이 "생명"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영적인 생명이 영생의 시작이요 전조적인 까닭이다.
그 청년은 그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수 있는가를 알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어떻게 하면 그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그에게 말씀해 주시고 있다.
우리는 그 영생을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함으로써만 얻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 때까지는 아직 충분하게 계시되지 아니한 하나의 신비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뒤로 미루고 계시는 것이다.
"생명, 곧 영생에 들어가는" 방법은 순종함에 의해서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는 영생에의 자격을 "얻게"되며, 우리의 증거인 순종에 의해서 그것을 "입증"한다.
즉, "믿음에 덕을 더함으로써"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우리에게 넉넉히 주신다"(벧후 1:5, 11).
그리스도는 [실지로!!]우리의 생명이시요, 성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시다. 또한 하나님을 보며, 그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이시다. 그는 유일한 길이시다.
그러나 믿음의, 발휘되는 그 생생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말씀, 곧 계명]순종과 행함의 의무 완수(날마다, 죽는순간까지.. 친히 공급해주시는 사랑에 이쳐지고 충만함받아 사랑에 겨워 자원함의 사랑으로 반응하며 행하는 것이기에 하나도 지루함이 없으리라는 것은 정말 타당하다!!...오직 사랑안에 깨어 있되 교만과 방심을 버리도록 하고 주바라기로 살라)는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죽을 때에 이 길로 장래의 생명에 들어가게 되며, [마침내] 마지막 심판날에는 완전히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오직 사랑으로 인침받아 충만케 되어 사랑으로 자원하여 반응하기를 소망한 바)그들의 의무를 다 행하는 자들만이 오직 그때에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잊지말라!!
(바로 그리함으로써 저절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가는 바) 부지런하고 충성된 종만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할"수가 있게 된다. 그 기쁨은 곧 그의 영생, 영원생명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삶속에서, 바로 그렇게 구주JC를 믿는] 우리는 생명에 들어가고 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 : 3).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평화와 위로와 기쁨을 얻는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반드시 신실하게 순종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② 지시된 그 방법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자신의 모든 것을 기울여 아낌없이 다 쏟아 아드님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주께서 (그분의 선하심-인자하심-신실하심을 따라) 그 크신 사랑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믿는 우리에게 준수하면 얻게되는 구원의 길로써 주신 바]계명들이 우리에게 계시되고 알려진 대로 하나님의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방법이다. 이 속에 있는 신실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복음의 완전이시요 또한 우리가 회개할 때 용서해 주시기 위해 준비된 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회개를 얼마나 자주 결여하고 있는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정죄하는 권세에서 구함을 받는다. 그러나 그 율법의 명령하는 권세는 중보자의 수중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권세 아래에서 그 수중에서 아직도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다(고전 9:21). 즉 법 아래 있는 것이지, 언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계명들을 지키는 것"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큰 계명이기 때문이다(요일 3:23).
그리고 모세의 율법 중의 하나는 큰 선지자가 세움을 받을 때 백성들이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가 행복하게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계명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계명들을 지켜야"한다.
지키되 우리의 길로 삼아 그 계명들 안에서 행하며, 우리의 규례로 삼아 그 계명들을 떠나지 않으며, 그 계명들을 우리의 보물처럼 간직하고 우리의 눈동자처럼 조심스럽게 보존해야 한다.
③ 그 청년이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하는가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가 지켜야 할 몇 가지 계명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18, 19절).
"그 청년이 묻자오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려고 하는 자들은 그 계명들을 부지런히 조사하여 그것들이 어떠한 것들인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할 것을 결심하였었다(스 7:10).
"모세의 율법에는 여러 가지 많은 계명들이 있었습니다. 선한 선생님, 그들 중 계명인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어느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합니까?"
이것이 젊은 청년 귀족의 질문 내용이다.
이 질문에 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몇 가지 계명의 이름을 들어 말씀하고 계신다. 특별히 둘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들을 언급하신다.
첫째,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에 관한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둘째, 우리 자신과 이웃의 순결에 관한 것인데 순결은 생명과 같이 우리에게 귀한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
셋째, 우리 자신과 이웃의 재물과 또한 외형적인 재산[권리]에 관한 것인 바, 이는 물건을 가질 수 있는 법(法)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다. "도둑질하지 말라."
넷째, 진실에 관한 것으로 우리 자신과 이웃의 명예와 관계가 있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자신을 위해서도 말고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도 하지 말라. 대개 이 계명은 백지 조항으로 되어 있다.
다섯째, 존속 관계의 의무에 관한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섯째, 사랑에 대한 포괄적인 율법에 관한 것이다. 이는 이 모든 의무들의 원천이요, 요약이다.
여기에서 이 모든 의무들이 파생되는 것이며, 여기에 모두 기초를 두고 있고, 이 모든 의무들이 성취되는 것도 이 포괄적인 사랑의 율법 안에서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갈 5:14, 롬 13:9). 그러므로 이는 "최고의 법"이다(약 2:8).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계명이 여기에 있는 것은 둘째 돌비의 요약으로써가 아니고 계명의 특별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탐내지 말라"(마가복음에는 "속여 횡령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결손이나 손실을 입힘으로써 내 자신에게 유익이나 보탬이 되도록 꾀하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라는 취지로 그들은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탐내는 것이요, 내 이웃보다도 내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며 또한 나 자신이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그를 대접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서 둘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들만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이는 마치 첫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들은 덜 중요하다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둘째 돌비의 계명들만을 열거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지금 모세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자들이 가르칠 때에 이 계명들을 전적으로 무시하였거나, 또는 크게 부패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강조하였지만, "의와 인과 신," 즉 둘째 돌비의 계명의 핵심은 버렸다(23:23).
그들의 가르침은 의식적인 것에만 치우쳤으며, 도덕적인 것은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가장 소홀하게 다룬 것을 가장 힘 주어 강조하신 것이다.
진리와 의무가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는 서로 밀쳐내려고 해서는 안 되며 또한 각각 자기의 위치를 알아서 분수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평행의 원리는 밀쳐냄을 당할 위험이 있는 것을 돕도록 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을 반대를 받고 있거나 매우 무시를 당하고 있는 그 진리를 위함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청년과 우리 모두에게 도덕적인 정직이 참된 기독교의 한 필수적 요소임을 가르쳐 주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정직에 대해 유의토록 하신 것이다.
단순히 도덕적인 사람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지만 비도덕적인 사람은 확실히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근실하고 의로우며 경건하게 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첫 돌비의 계명들은 그 안에 종교의 기본 요소들을 더 많이 지니고 있지만, 둘째 돌비의 계명들은 그 안에 종교의 증거들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우리의 빛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타오른다." 그러나 그 빛은 이웃을 사랑할 때 "빛난다."
Ⅱ. 그 청년이 영생에 미치지 못하고 실패한 두 가지 요소.
1. 그는 교만과 자기 자신의 공로와 힘에 대한 헛된 자만심으로 말미암아 실패하였다.
이 자만심은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가를 그에게 말씀하였을 때 그는 매우 건방지게 대답하기를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지켜 왔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하였다(20절).
(1) 그 청년은 율법을 외부로 드러나는 죄만을 금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라면 그는 참 말을 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수님도 그 점을 알아 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를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가 그를 사랑하셨다"라고 되어 있다(막 10:21).
그러므로 아직까지 그 청년은 그리스도의 호감을 사고 있었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고 있었다.
사도바울 자신도 그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였던 것, (그 무흠한 것이 그리스도에 비하면 찌꺼기와 같이 불순한 것이지만) 곧 율법 준수는 인간의 기본도리요 마땅한 바이기에 무익한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앞에서 하나의 공로이자 특권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가 이 모든 계명들을 준수한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두 행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지켰사오니," 그가 계명을 지킨 것은 "어려서부터"였으며 또한 일상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람이 큰 죄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는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손은 외형적인 오염으로부터 깨끗하면서도 그는 그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영원히 멸망하는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청년이 도달한 바, 여기에조차도 이르지 못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자칭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낌이 합당하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오기는 해왔지만 어려서부터 사기와 불법과 술 취함과 거짓 증거 등을 일삼아 범하여 온 바 진정한 통회-자복-돌이켜 떠나기로 결단-적용함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기에, 그 청년이 자기가 더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 것은 칭찬할 만하였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충족시키는 데는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생각하였던 바, 그래서 그것을 알고자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 한, 그것을 기꺼이 교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까지 그가 알고 싶어하는 바를 [모두 다, 정말 참되게]알지 못하였고,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나아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주시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모세의 율법을 향상시키고 완성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청년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계율들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연마하고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 그가 말한 이 말 가운데서 그는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해석하신 대로 율법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는 여러 가지로 이 모든 계명들을 범하였던 것이다.
그가 만일 율법의 깊은 뜻과 영적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더라면 그는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한숨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 모든 것을 범하였나이다. 저의 죄를 사함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했으리라.
② 그가 한 말에는 교만과 헛된 영광의 기미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믿음의 법에 의하여 절대배제되는(롬 3:27) 자만심이 가득차 있다. 그 자만심은 의롭게 되는 것을 불가능케 한다(눅 18:11, 14).
그 청년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을 과대평가 하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신앙을 고백하여 칭찬을 받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으나 실은 그것이 그의 신앙고백을 합당치 않은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그가 말한 것은, 예수님에게서 가르침을 더 받겠다는 간청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현재의 완전성을 칭찬해 달라는 요구와 자기에게 부족한 점이 있으면 지적하여 보여달라는 일종의 도전이었던 것이다.
2. 그는 현재의 세상과 거기서 누린 바 세상 향락을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 점은 바로 그가 예수님과 의견을 달리한 제거할 수 없는 치명적인 거치는 바위였다.
(1) 그 청년이 받은 바 실험(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율법의 범위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이 말씀이 그 자신을 발견케 하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청년이 율법을 자만스럽게 순종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중단하셨다.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네가 온전해지려고 한다면 네가 율법을 순종할 때 신실하였음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신실성은 복음의 완전임),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에 첨부한 것에까지 도달하고자 한다면 네가 생명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완전하게 행복해지고 싶다면 와서 나를 따르라."
왜냐하면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규정하고 있는 바는 선을 쌓는 일에 관한 일도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완전성도 아닌 바,. 그것은 참되게 믿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결단하고 그 안에 걷는 바 필수불가결한 의무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지금까지 우리 모두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입증하고 마침내 영생의 상속자가 되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것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
①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귀와 재물보다 반드시 먼저 천국의 보화를 실지로 참되게 좋아해야 한다.
하늘의 영광은 [실지로 그러하다!!] 이 세상의 영광에 앞서 훨씬 탁월한 것으로 여기고, 사려분별통해 판단하며 간절히 생각하며 구해야 한다.
지옥 대신에 천국을 취하는 것은 우리자신의 공로나 덕택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도 그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또한 그 새 예루살렘을 도피성으로 삼기를 기뻐할 것이다. 또한 그 도피성을 여분으로 갖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단을 내림으로써 이 세상보다 오히려 그 도피성을 취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걸음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써,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존귀케 하고 그를 섬기는 데 있어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바 모든 것을 처분해야만 한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구제하는 일이 매우 급박할 때는 가진 것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마치 초대 교회가 행하였던 것처럼 이 명령을 준수해야 한다(행 4:34).
경건 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너희가 절약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절약해서 쓰되, 모든 여분의 물건들을, 더 나아가 별로 쓸모가 없는 것들도 팔아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는 그러한 물건을 미련 없이 팔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세상것에 애착을 두지 않고 경멸하는 것과 또한 가난한 자들과 가난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모두 구원을 위한 필요 조건들이다.
재력을 가진 자들은 구제를 통해,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또한 우리의 형제들을 불쌍히 여긴다는 사실을 증거해야만 한다.
이것으로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25:35).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믿는 대로 행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세상정욕과 탐심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청년을 가장 용이하게 공략하고 있고, 향후에도 공략할 가능성이 있는 죄가 바로 탐심이었음을 아셨다.
그 청년은 그가 소유한 제물은 정직하게 번 것이었지만, 그것을 영생을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불신실함을 드러낸 것이다.
어쩌면, 이 명령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과도 같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그들이 받은 바 가장 강력한 은혜로 시험하시는 것과 같이(아브라함아,...네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내가 네게 지정하는 한 산에서 제물로 드리라!!), 위선자들은 그들의 가장 강력한 부패로 시험하신다.
둘째,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버렸거나, 또는 잃었거나를 막론하고 투자한 모든 것을 저 세상에서 충분히 보상을 받으리라는 소망을 신뢰해야 한다. "너희는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라."
우리는 보이지 않는 복락을 인하여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 복락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바쳐드린 바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해 줄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주어라"는 명령은 참으로 행하기 힘들고 난처한 것으로 들린다.
그러므로 거기에 대한 이의가 곧 제기된다. 즉 "자선은 집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곧 바로 추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신 것이다. (결코 잃어버림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은 그의 명령들을 용이한 것으로 만들어 주며, 그의 멍에를 견딜 만한 것이 되게 하며, 기쁘고 상쾌하고 안락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보지 못하는 것을 보증하고 있는 바이나 진정 참된 생명과 관련된] 이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소유를 팔아서 빈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그 명령이 그의 자선과 세상을 경멸하는데 대한 시험이었던 것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보는 것같이 하여 그 가치를 제대로 붙드는 신앙인지) 그 청년의 신앙을 (그 정도와 참됨이 어떠한지) 시험한 것이었다.
② 우리는 주 예수님의 지도와 다스리심에 완전히 맡겨야 한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여기에서 그 청년에게 나를 좇으라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언제나 곁에서 그를 수종들며 따르라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의 어떠하심을 진정 빼어닮을 수 있기에!!))
그러므로 이는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을 때 그들의 생계를 꾸리기 위한 직업을 포기했던 것처럼, 그 청년도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를 파는 것이 그를 좇는데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좇을 때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은 것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의 규례와 명령들을 당연히 준행해야 하며 엄격하게 그를 본 받아야 하며, 기쁘게 그의 뜻에 순종해야 하며, 올바르게 순종하여 그의 법도들과 그의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의 모든 것을 행할 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만을 의지하고 그와 비교해 볼 때 다른 모든 것은 분토처럼 여겨야 하며, 특히 그리스도보다 우위를 차지하려는 것이 있으면 철저하고도 단호하게 배격하고 정말 분토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준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완전히 좇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준다 해도 우리가 와서 그리스도를 좇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기 위하여 나의 모든 재산을 바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들에서만이(그 이하일 수는 없다) 구원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조건들은 매우 쉽게 무리가 없는 것들로써 구원을 받을 자들에게는 어쨌든 힘든 것이 아니다.
(2) 그 청년은 본색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말씀은 그의 헛점을 찔렀다(22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
① 그는 부자였으며, 또한 그의 재산을 사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말 가버렸다. 그는 이러한 조건에서는 영생을 얻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하며, 또한 크게 애착하는 유혹을 매우 강하게 받고 있다.
세상 재물이 미혹하는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부자일수록 더 욕심을 내어 재물을 모으려 한다.
재물이 늘어날 때 그 재물에 애착할 위험이 짙어진다(시 62:10).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이라고는 두 렙돈 뿐일 때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명령을 받았으면, 또는 밀통에 밀가루 한웅큼과 항아리에 약간의 기름밖에 없을 때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가난한 선지자에게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 시험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험들은 극복되었었다(눅 21:4; 왕상 17:14).
이는 곧 세상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 사랑이 가장 절박한 궁핍보다도 더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어 당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둘째, 이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멀리하게 한다.
그런데 그들은 겉으로는 마치 그를 가까이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인다.
많은 재산이란 그것을 초월하는 자들에게는 천국 가는 데 크게 도움을 주지만, 그 재물을 사랑하는 데 휘말려드는 사람들에게는 그 많은 재산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큰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그가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가버린 것을 보면 그는 매우 정직하였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조건을 마음으로 응락할 수 없었기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척하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던 것이다.
이는 데마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데마는 "의의 길을 알고 난" 후에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리고 돌아서 버렸었다(딤후 4:10 참조).
그러므로 그 청년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위선자는 아닌 것이다.
②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근심하며 갔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마음이 크게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지기가 싫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지은 죄로 인하여 파멸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즉 근심하며 그리스도를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간 것을 참되게 깊이 후회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후회한다면 그리스도에게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보라, 스스로 든든하게 여겼던 그 청년의 재물이 그를 시험하는 것이 되었을 때 그것은 그를 "근심케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의 모든 소유가 없어지고, 그의 영생에 대한 모든 소망도 역시 없어지게 될 때 그 슬픔(근심)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부한 것에 대한 경고(마 19:23-30)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방금 자기에게 왔다가 슬픈 기색을 하며 가버린 그 부자 청년의 경우를 놓고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Ⅰ. 그리스도께서 부자가 구원 얻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이 경우를 들어 가르쳐 주심(23-26절).
1. 본 장(章)에 나오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타인의 타락과 위해(危害)를 자신을 위한 경고로 삼는 것은 유익하다는 사실이다.
(1)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하셨다(23, 24절).
주님은 이 말씀을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가난하여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상적인 재물을 소유한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천국가는데 방해물은 더욱 더 적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점을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현재의 자기들의 처지에 만족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다소 가난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부유한 환경에 있는 자들이 당하는 유혹과 시험을 받지 않게 된 것을 만족스럽게 여겨야 한다.
만일 가난한 자들이 부유한 자들보다 이 세상에서는 훨씬 더 어렵게 살고 있지만, 그로 말미암아 더 나은 세계인 천국에 보다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불평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이 23절에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국에 이르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그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천국가는 길이시며 그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재물은 천국가는 데 가장 큰 말썽거리 중에 하나라고 하신 것이다.
24절에서도 거듭 반복하여 이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예수님께서 이처럼 두 번이나 거듭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를 듣고 깨닫기를 싫어하고 더구나 믿기를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① 부자가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그리스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다.
즉 부자는 현재나 미래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모든 사람에게 좁은 길이다.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도 좁은 문이다. 그러나 특별히 부자들에게는 더욱 좁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경우보다 더 많은 의무들이 그들에게는 지워져 있는 반면 그들은 그 의무들을 거의 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더욱 많은 죄들이 그들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바, 그들은 그 죄들을 거의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는 그들이 물리쳐야 할 커다란 시험과 유혹이 있다. 그것들은 매우 교묘하고 간사한 것이어서 그들의 미소에 매혹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의 재산과 이윤과 시간과 기회들을 최대로 이용하여 더 많이 긁어모으는 데만 온통 마음이 쏠려 있다.
그러므로 부자가 이러한 난관들을 극복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한량없이 크신 은혜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께서는 부자가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이 지극히 곤란하여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절).
이 말씀은 속담을 빌려 표현한 것인데 인간의 기술이나 능력으로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뜻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부자로 하여금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배교자(히 6:4, 5)와 악에 익숙한 자(렘 13:23)가 구원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의인도 겨우 구원을 얻을진대").
하물며 특별한 어려움까지 겹친자의 경우는 구원 얻는 것이 너무도 곤란하고 어려운 것이어서 불가능하다고까지 표현되는 것이다.
부자가 된 사람이 자신의 재물에 마음을 쏟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요일 2:15; 약 4:4).
첫째, 천국 가는 길이 "바늘귀"에 비교된 것은 매우 적합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바늘귀는 찾기도 힘들고 실을 꿰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둘째, 부자가 짐 싣는 짐승인 "낙타"에 비교된 것도 매우 적합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부자는 낙타가 짐을 그의 등에 잔뜩 실은 것처럼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그 짐을 낙타처럼 나르지만 실은 자기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는 그 재물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며, 결국에는 곧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재물은 짐이나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화있을진저…,) 그들은 무겁게 짐진 자들이기"(합 2:6) 때문이다.
약대는 겉모양은 크지만 보기 흉한 짐승이다.
(2) 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놀랐으며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25절).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진리들을 많이 말씀하셨었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크게 놀랐으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몰랐는데, 그 진리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말씀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놀란 것은 그들의 연약함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문제성을 알아차린 데서 비롯된 질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구원의 길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만인 구원론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한 분이신가를 생각할 때 "매우 적은 소수의 사람만이"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다고 놀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생각할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며, 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찬양을 받으시리라는 것을 알고서 더욱 크게 놀라고 만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으리이까?"
왜냐하면 너무도 많은 사람이 부유하고 큰 재산들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부유해지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며 또한 많은 재산들에 크게 애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재물이 부유한 자들에게 방해물이 된다면, 부유치 못한 자들에게 있기 쉬운 교만과 사치는 그들에게 위험스런 것이 아닐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부자들이 진리의 흐름을 거슬러 반항하는 이유인 것이다.
2. 부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26절).
"예수께서는 저희를 바라보셨다."
즉 그의 제자들을 유심히 쳐다보신 것이다. 이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여 부자들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맹신적인 사고방식을 고쳐 주시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이미 재물로 인한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천국을 향하여 순조롭게 가고 있는 자들로 바라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저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는 위대한 진리의 총괄로써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된 능력을 훨씬 능가하여 역사 하실 수가 있다. 곧 그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창 18:14; 민 11:23).
사람들이 당황할 때 하나님은 당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은 무한하시고 당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진리는 다음과 같이 적용되고 있다.
(1)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 것인가의 문제에 적용됨.
"누가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제자들이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어떤 피조된 능력에 의해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으되," 즉 사람의 지혜는 인간 영혼의 구원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 전혀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하며, 인간의 능력도 역시 그 구원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실패한다.
어떠한 피조물도 인간 영혼의 구원에 필요한 변화를, 자력에 의해서든지 타력에 의해서든지 일으킬 수가 없다.
사람으로서 인간의 성향을 바꾼다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강하며,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에는 그것이 너무도 완악하며, 의지를 꺾기에는 그것이 너무도 완고하여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재창조요 부활이기에 인간으로서는 이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철학이나 의학이나 정치학으로도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일이 다 가능하여 할 수가 있느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 구원 사역의 시작과 과정과 완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달려 있는 바 그 능력은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있다.
믿음은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되며(엡 1:19), 그 능력으로 보호된다(벧전 1:5).
욥은 하나님의 설득력 있고 죄를 깨닫게 하며 자신을 낮추게 하시는 은총을 체험하였을 때 무엇보다도,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아오니"(욥 42:2)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2) 특별히 부유한 사람들의 구원에 적용된다.
그러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이것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가운데 있으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아니고 세상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정욕과 탐심, 곧 이 세상의 유혹들로 포위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속죄와 구원은 절망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진정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손수 은혜를 베푸심으로 친히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완전 충족성에 의하여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부유하였던 소수의 사람들이 천국에 이르게 되면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의 영원한 기념비들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이 말씀 가운데는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근심하며 가버리고 없지만 이 부자 청년을 위하여 은총을 준비해 두셨음을 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를 지금 설득하여 보다 나은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하지 않았었다.
Ⅱ. 베드로는 이 경우를 들어 "그들이"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를 질문함.
베드로는 이 청년이 그리스도와 절교케 되었던 이들 조건들에 도달하였는지를 점검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쫓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음을 자각하였다(27절 이하).
여기 본문에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대답을 기다리는 희망과 그들에게 대답해 주신 그리스도의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다.
1. 그리스도에게 건 제자들의 기대와 희망.
베드로는 다른 나머지 제자들의 이름으로, 그들이 의존하였다는 사실을 표명하고 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보리고 주를 쫓았아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리스도께서 그 청년에게 약속했던 바는 그가 만일 모든 것을 팔아 버리고 와서 그를 좇으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면 베드로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1) 그들이 그 조건들에 충분히 도달했는가의 여부를 알고자 함.
그들은 모든 것을 팔지는 않았었다(왜냐하면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아내들과 부양해야 할 가족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렸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있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 소유가 그들에게 방해물이 될 때는 그것을 포기했었다.
구원받게 될 자들의 자격이 어떠한 것인가를 대하여 우리가 들을 때, 우리의 관심은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러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 조건의 주된 목표와 의도에 있어서 그들이 거기에 도달했기를 소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 하시어 세상과 보이는 것들을 그리스도와 보이지 않는 것들과 비교하여 찌꺼기처럼 여겨 버리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규칙이 정하여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부름을 받은 대로 할 수 밖에 없다.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라고 베드로는 (무심코!!)말하였다.
이는 얼마나 가소로운가! 그들이 버렸던 "모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극히 하찮은 것이었다. (실지로는)그들 중에 하나만이 세관의 직위를 그만 두었을 정도였다.
베드로와 대부분의 다른 제자들은 단지 몇 척의 조각배와 그물과 또한 몇 가지 부속품들을 버렸을 뿐이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버린 듯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봉사나 고난, 손실, 희생 등을 대단한 것으로 오해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크게 빚진 자로 여기기 쉽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그들을 꾸짖지 않으신다. 그들이 버린 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었지만, (어찌보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것"으로써 마치 과부의 두 렙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는 많은 재산이나 다름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이 그를 따르기 위하여 그들의 모든 소유를 버렸다는 사실을 너그럽게 인정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대로" 받으시기 때문이다.
(2) 따라서 그들은 그 청년이 모든 것을 팔면 그가 받게 될 "그 보화를" 기대해도 좋은지의 여부를 알고자 함.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우리가(그 청년은 자격이 없으므로)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을 기대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참된 몫을 알아보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았고," 모세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가 선을 행하되 참고 견디면," 그 몫을 구할 수 있도록 우리 앞에 그 몫이 놓여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기 위해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것을 묻도록 우리를 격려하신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을 손해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이익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들을 목적으로 삼고서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는 것은 소망과 신뢰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래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종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섬김에 의하여 눈에 보이게 확연한 이익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로 인하여 결국은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을 알았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에게 말하기를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손실과 희생을 보상해 주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수고한 것을 생각하고 그들의 삯을 따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를 섬기되 자기의 공로를 내세워 그와 흥정하지 않는 것이 그를 존귀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그리스도를 떠나 자기 소유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이 어느 것을 택하며, 어느 것을 신뢰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할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위선과 배교행위에 의하여 어떤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을 볼 때에 우리가 우리의 신실함과 충실함에 "의하여"("인하여"가 아님...우리는 신실함과 충실함이 전혀 없고 다만 주께서 은혜로 공급해 주실뿐이기에..) 은혜로 말미암기를 바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또한 그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보다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길만한 많은 이유를 알게 된다.
2. 제자들과 또한 그들의 신앙과 순종의 발자취를 따르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약속들.
베드로가 한 말 가운데 있는 헛된 영광이나 헛된 희망들에 관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간과하시고 그것을 지적하여 추궁하실 만큼 그는 과격하지 않으시다.
다만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약속"의 증서를 주고 계신다.
(1) 그리스도의 직계 추종자들에게 주시는 약속(28절).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른 첫 번째 사람들로서 그에게 존경심을 확실하게 표명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하늘에 있는 "보화" 뿐만 아니라, "높은 지위"까지를 약속해 주고 있다.
여기에 있는 구절을 보면 그들은 천국에 있는 높은 지위의 근원이 되시는 그로부터 신임장과 특허장을 받고 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과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쫓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으리라."
① 특허장의 전문(前文), 또는 신임자의 "약인(約因)"임.
이는 평상시와 같이 그들의 예배의 일과이다. "너희들은 세상이 새롭게 된 때에 나를 좇았으므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신 그 때가 새롭게 된 때요, 개혁의 때였다(히 9:10). 그 때에 낡은 것은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모든 것이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좇은 것은 교회가 아직 태동 단계에 있으며, 복음의 성전이 건축 중이었으며, 사도들의 직위에 해당하는 권위와 권세보다는 사도로서 해야 할 일과 봉사가 더 많았던 때였다.
그런데 그들은 언제나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그를 좇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좇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높은 지위의 표시를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일찍부터 좇으며, "새롭게 된 때에 그를 좇은" 제자들처럼, 그들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신뢰하는 자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신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그를 좇기 위하여 "모든 것"을 그들이 버린 것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를 "좇은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버리는 것보다 좇는 것이 실제로 더 주요한 문제이다.
② 그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는 "시기."
"지금 현재" 즉시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은 지금과 같은 상태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그들은 비천한 신분으로 지내야 한다.
"그러나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는 그들의 신분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서 주장하기를 새롭게 되는 때를 해석하여 "지금 나를 좇은 너희들도 새롭게 되는 때에 그와 같이 고귀하게 되리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새롭게 되는 때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고 또한 모든 것은 새롭게 회복된다."
은혜 가운데 중생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요 3:3) 영광 가운데 중생에 참여케 된다. 왜냐하면 은혜가 첫째 부활인 것과 같이(계 20:6) 영광은 둘째 중생이다.
그런데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까지 제자들이 하늘에서 높은 지위에 앉는 것은 연기되는 바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첫째, 그들은 그때까지는 그들의 영광스러운 승진을 기다려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주님의 영광이 지연되는 한 우리의 영광도 또한 지연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소망"(롬 8:19)을 기대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 영광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인내 가운데서 살고 일하고 참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러한 지연에 의하여 연단을 받아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승진하여 그의 영광 가운데로 나아가실 때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동참해야 한다.
제자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높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역주:바늘 가는 곳에 실이 가듯이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리워 영광 중에 계시면 거기에 부응하여 제자들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임).
제자들도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았으므로 통치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금세와 내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계시는 곳에" 있어야 하며(요 12:26), "그와 함께 나타나야 한다"(골 3:4).
이는 곧 우리가 버리고 희생한 손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게 한 지연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인 본전"만이 아니라, "높은 이자"까지 합하여 받게 된다.
그 기나긴 항해는 고되기는 하지만 돌아 올 때는 만선(滿船)이 되게 하는 것이다.
③ 이로 말미암아 허가된 높은 지위.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약속의 특별한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다소 어렵지만 내 생각으로는 많은 성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성부의 우편에 계셔서 그의 영과의 보좌에 앉아 계실 그 때에 사도들은 성령으로 권능을 받은 것이다(행 1:8).
제자들은 현재의 신분보다는 훨씬 나아지게 되어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자신들이 보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며, 그들은 판사석에 앉아 있는 재판관처럼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기들이 맡은 바 사명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율법을 공포할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인(갈 6:16) 신자가 다스림을 받게 되고, "육신을 따라 된 이스라엘"은 불신앙 가운데 행하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신앙 가운데서 계속 지내다가 정죄함을 받게 된다.
그들에게 주어진 지위와 권세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로 설명될 수 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렘 1:10), "네가 그들을 국문하겠느냐?"(겔 20:4)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단 7:18), 계시록 12장 1절에는 그리스도의 교리를 "열두 별의 면류관"으로 부르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 나타나실 때(24:31), 그는 사도들을 보내어 유대 민족을 심판하도록 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그 성이 멸망될 때 그들이 예언한 바가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어떤 사람들은 그 약속이 유대인들의 개종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개종은 적그리스도가 멸망한 후 세상 끝 날에 있으리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휘트비(Whitby) 박사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그 약속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대한 사도들의 통치를 가리킨 말이지만, 사도들 자신의 몸의 부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과 그들이 세상에 전한 바 순수성과 지식을 회복하고 되살림으로써 또한 주로 그들의 복음을 자신들의 신앙의 표준과 자신들의 생활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통치하는 것을 뜻한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약속은 충분히 성취되는 것이 확실하다.
그 때에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지만," 특별히 열두 사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배석판사들로서 "마지막 대 심판날"에 심판하게 된다.
그 때에 모든 세상은 그들의 마지막 심판을 받게 되고 또한 사도들은 그 판결을 재가하고 성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이름이 불리워진다. 이는 사도들의 수가 지파들의 수와 하나님의 계획대로 동일하고 사도들이 유대인들로서 그 지파들과 가장 밀접하며, 그러면서도 그들에 의하여 가장 혹심하게 핍박을 받은 연고이다.
또한 그것이 뜻하는 바는 성도들이 육신이나 인간의 뜻으로 맺어진 친지들을 마지막날에 심판하고 그들이 친절을 베풀었던 자들까지 심판하게 됨을 말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을 심판하였던 그들의 핍박자들 역시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의 일반적인 의도는 하늘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광과 위엄을 보여 주는 데 있다.
그 영광과 위엄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이 당한 수치를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이 땅에서 많이 수고하고 많이 고난당한 자들에게는 보다 정도가 높은 영광이 주어진다.
사도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 한시도 쉴 틈이 없이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보좌에 앉아 편안히 쉴 수 있다.
여기에서는 속박과 고통과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거기에서는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된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법정으로 끌려갔지만, 거기에서는 재판석에 나아가 앉게 된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사도들을 유린하였지만, 거기에서는 사도들이 그 지파들 앞에서 유린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희생한 그들의 손실을 모두 갚아 주기에 충분한 보상이 아니겠는가?"(눅 22:29)
④ 이 신임장에 대한 인준.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아멘이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다. 내게는 이 신임장을 인준해 줄 권세가 있다. 내가 그것을 말하였노라.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취소될 수가 없느니라."
(2) 그리스도를 쫓기 위하여 그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린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약속이 있음.
그 약속은 사도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성도들에게 이 지위와 상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염려해 주심으로 그들 중에 아무도 그로 말미암아 손해를 보지 않는다(29절).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이든지 버리는 자는 받으리라."
① 여기에 열거된 그리스도를 위한 손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유익 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
그런데 그는 이 구절의 말씀에서 특별한 실례들을 열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장 힘든 것만을 열거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사도들이 행한 것처럼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집을 등지고 황막한 곳에서 방황하며 유리한다고 하면 그들은 상당히 많은 것을 버린 셈이다. 또는 그리스도를 좇기 위하여 자기들과 동행하기를 거부하는 가족들을 버리는 것도 상당한 희생이다.
이것들은 유약한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버리기가 매우 힘든 것이기에 특별히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형제, 자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또는 자식" 그리고 전토가 곁들어 열거되고 있다. 이 전토에서 나오는 산물은 가족을 부양하는 수단이었다.
첫째, 이러한 것들의 손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초래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것을 갚아 줄 아무런 의무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보금자리를 떠나 방황하는 새처럼 일시적인 기분이나 정욕을 인하여 형제나 아내나 자식을 버렸다. 그것은 죄악스러운 유기(遺棄)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부양하면서 우리의 선한 양심을 보존할 수는 도저히 없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을 버린다면, 우리는 그들을 버리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가족들에 대한 염려와 의무를 중단하지 않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며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중단하겠다고 결심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뜻과 영광을 목적하고 이를 행하면 이것도 그와 같이 보상을 받는 것이 된다.
순교자와 신앙고백을 하는 자를 만들어 주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동기이다.
둘째, 큰 손실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갚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왜냐하면 그 손실이 아무리 큰 것일지라도 그는 그것을 갚으실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핍박하는 자들의 야만성을 생각해 보라! 저들은 무죄한 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충성한다는 한 가지 죄 때문에 그들이 가진 모든 소유를 탈취해 버렸었다.
그러나 핍박당하는 자들의 인내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그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바닷물로도 진압할 수 없는 불길과도 같았다.
② 이 손실들에 대한 보상이 확보됨.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어 왔고 그를 신뢰해 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로 인하여 손해를 본 사람은 없다.
그로 인하여 놀랄 만한 유익을 얻지 못한 사람은 단 한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고난 당하는 종들을 보상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해 당하지 않게 구해 주시며, 나아가서는 그들에게 충분히 상을 주시겠다고 지금 확실하게 약속하고 계신다. 지금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그들의 손실 명세서를 작성하여 제출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받을 것이다.
첫째, "이 세상에서 백 배나 받는다."
때로는 "같은 것"으로 받는다. 즉 그들이 버렸던 바로 그것들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받는 종들을 위하여 그들이 버린 친구들(이들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친구로 삼은 자들임). 또한 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들에게 친구가 된 자들임)을 일으켜 세운다.
사도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주고 그들을 후대하여 주며, 그들에게 저들의 마음 문들을 활짝 열어 준 사람들을 만났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 배나 받되" 잃었던 것을 그 종류대로 다 받으며 훨씬 값지고 귀한 것으로 받는다.
그들이 받는 바 은총은 더해지고 그들의 위로는 넘치며 그들은 하나님의 많은 사랑의 표들을 받게되며 그와 더욱 충분한 고통을 가지게 되며, 장차 나타날 영광을 보다 확실하게 미리 보고, 보다 기쁘게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이렇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내나 자식들에게서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위로를 백 배나 얻었다고.
둘째, "내세에 영생을 받게 된다."
앞서 약속된 배상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된다. 한 되 빌려주고 두 되 받는 것도 큰 이익인데, 하나 대(對) 백이란 너무 과분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에 약속된 "생명"은 생명의 모든 최상의 위로와 모든 "영원한" 것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약속과 관련짓고 그 약속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것으로 믿고 그를 신뢰할 수만 있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것이 너무 벅차서 못하겠다든지 어떤 것은 견디기에 너무 힘들다든지, 어떤 것은 버리기에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된다.
마지막 절에서 우리 주님은 어떤 사람이 가질지도 모르는 오해, 즉 영광을 받아 뛰어나게 된 것이 시간상으로 선행하는 것을 능가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신다(역주:많은 영광을 얻었다고 해서 시간상으로도 그 사람이 꼭 먼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임).
오히려 그것은 은혜의 양과 정도 문제이다. 결코 시간상의 문제가 아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엇갈리게 행사하신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들과 총명과 자들에게 숨기신 것을"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
불신하는 유대인들을 물리치시고, 믿음 있는 이방인들을 용납하신다.
천국의 기업은 세상의 기업이 일반적으로 연령순으로 주어지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주어진다.
본 절은 다음 장에 나오게 될 다른 설교의 제목이다.
===
마태복음 제 19장
=====19:1
@이 말씀을 마치시고 - 마태븍음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는 다섯 설교의 다섯 종결 문구(ending formula)중의 네번째 것으로 앞장(18장)의 설교가 끌났음을 의미하는 문구이다. 이로써 공생애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셨던 갈릴리 사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뒨다. 이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으로 죽으시기 약 한달전으로서 대략 A.D.29년 2-3월경의 일로 추정된다. 한편 본서에 언급된 다섯 종결문구는 본문 이외에 7:28;11:1;13:53;26:1에 나오고 있다.
@갈릴리에서 떠나 - 3차에 걸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주간을 맞이하실 때까지 사마리아를 경유하지 않고 유다와 베레아를 순회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전도하신 기사이다.
따라서 19-20장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 입성까지 도중의 기사로, 보통 '베레아 전도'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이 전도사역은 갈릴리에서의 출발(1절)로 시작되어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기름부음(26:6 ff.;막 14:3)으로 끝난다.
이 기간 동안에도 예수는 역시 계속해서 민중들로부터는 기대와 환호를 받았으며, 유대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로부터는 질시(疾視)와 모함과 배척을 받으셨다.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 - 이곳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이는 평행구절 막 10:1에서는 분명히 이 지방이 베레아인 것처럼 보이지만 눅9:5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지경을 통과하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도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1) 요단 동편 베레아로 가셨다(Plummer, D.A.Carson, Carr). (2) 요단강 서편 사마리아를 지나 가셨다(Delitsche,Weiss)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대체로 베레아 방문설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잔치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다른 수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베레아를 지나(유대인들은 '거룩치 않은 땅'으로 생각한 사마리아를 피하여 대신 베레아로 통과하곤 하였다..,요 4:9) 예루살렘에로의 순례여행을 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요단강 동편이 베레아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은 그 당시에는 유대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 '건너편'이라는 표현인 '페란'(* )이 바로 뒷 단어인 '유대'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페란'과 '유대' 사이에 접속사 '그리고'(* , 카이)가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여 '요단강 건너편과 유대에 이르시니'로, 각각 독립 구문으로써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2) 유대 지경이라는 표현은 그 '구역'을 의미하는 코스트(coast)가 아니라 '경계'를 뜻하는 보더(border)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요단강 건너와 유대지경(사실은 '경계')은 동격으로 보아 베레아가 유대지방은 아니라 그 경계임을 드러내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한편 베레아란 이름의 뜻은 헬라어 문자그대로 '건너편'(*, 페라이아)으로, '요단 저편<동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 베레아는 그 남쪽경계가 헤롯의 요새인 마케루스(Machaerus)로 세례 요한이 처형된 곳이며(14:1-12), 북쪽의 경계는 야르묵(Jarmouk)강까지로 비교적 넓고 비옥한 지역으로서 예수 당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통치하에 있던 구역이었다.
=====19:2
@큰 무리가 좇거늘 - 마가의 평행 구절에서는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막 10:1) 이라고 표현한 것에 비해서 마태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동사 '좇다'(*, 아콜루데오)를 통해 그 무리들이 보통의 군중들이 아니라 예수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임을 시사하고 있다.
보통 이 동사는 '따르다', '제자가 되다' 등의 의미로 갈릴리에서 베레아까지 예수를 따라온 무리들이 결국 예루살렘으로 까지 계속 예수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제자무리'들 임을 나타낸다. '제자됨'을 나타내는 이 동사는 21절과 27절에서도 다시 사용되고 있다.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 이적기사가 많은 마가복음에 오히려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라고 되어있고, 설교기사를 선호하는 듯한 마태복음에 도리어 '병고침'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마태의 19장 본문의 내용이 설교가 아니라 주로 설화 부분이기 때문에 마태가 의도적으로 마가의 본문을 수정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A.W.Argyle).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의 주요 세 사역인 가르치심(teaching)이 갈릴리 뿐만 아니라 이 베레아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함으로써, 선포자(18장의 설교)요 예언자의 모습을 갖춘 메시야로서 예수의 완전한 사역을 설명하려는 마태의 노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Gerhardson).
=====1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 예수의 소문이 헤롯과 예루살렘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전해짐으로써(14:1) 그곳의 산헤드린에서 급파된 진상조사단인 이 바리새인들은 사마리아를 제외한 전지역과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를 시험하고, 비방(誹謗)했으며, 모함(謀陷)할 요소를 찾기에 분주했다(9:1-13;12:1-21;15:1-20). 그리고 본문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종교회의와 로마 당국에 고소할 거리를 찾아 신학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지금 예수가 머물고 있는 베레아 지역은 땅이 비옥(肥沃)하고 경제력이 타지역보다 상당히 앞서 있는 참으로 평화로운 전원풍의 지역으로서 유대적 교권주의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의 선교 활동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곳에까지 찾아와서 적대행위를 일삼았을 뿐 아니라 무리를 충동질하여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들의 현재 위치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부정한 결혼 문제로 세례요한이 처형된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들이 제기한 이혼에 대한 문제는, 곧 바로 예수의 처형을 획책하려는 음모(陰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들은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처럼 보이는 이혼법에 관한 난제를 제시함으로써 예수를 정치적 곤경에 몰아 넣으려고 하였다.
@시험하여 -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시험당하거나 유혹받은 것은 맨 처음 사단에 의해서이고 그후에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에 의해서였는데(4:1, 3;16:1;22:18,35), 이는 모두 그의 메시야적 권위를 시험하거나 도전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시험의 형식과 내용은 언제나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가', '불가'를 묻는 방법으로 예수께서 만일 '옳다' 하여도, 아니면 '그르다' 말씀하셔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애매한 문제에 대한 답변 요구가 대부분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양자택일의 흑백논리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고 논제의 본질을 그대로 파헤치심으로써,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시험은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 이는 문자적으로 '어떠한 원인으로든지'라는 뜻이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같은 질문은 규율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自律性)을 부여하고 있는 힐렐학파가 취한 태도와 학설에 근거해서 제기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힐렐과 쌍벽을 이룬 샴마이학파에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일정한 이혼 사유가 규정되어 있었으며, 계약을 맺고 들어간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J.R.Muller).
새번역에서는 이 문구가 '이유가 있으면', 공동번역에서는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번역이 본문 해석상 가장 적절한 것 같다. 한편 NIV의 'for any and every reason'이란 번역은 공동번역의 표현과 잘 어울린다.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그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 사상에 주류를 이루는 랍비 학파인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는 특히 이혼 문제로 해서 크게 대립되어 있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다 이혼을 인정하였는데, 물론 [그 중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경우의 이혼만을 인정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하다 주장하였다.
이들의 이혼에 대한 생각은 신 24:1에 근거하고 있다. '에르와트 다바르'(* ), 곧 '수치(羞恥)되는 일'이라는 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수치'(indecency)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즉 샴마이학파는 수치를 '간음'(姦淫)과 같이 엄청난 정도의 것으로 해석했는데, 물론 성경 본문은 수치가 반드시 간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간음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은 죽음이었지 이혼이 아니기 때문이다(신 22:22).
마찬가지로 '수치되는 일'이 아내의 '간통에 대한 의심'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이는 아내가 간통한 사실을 밝히고 싶을 경우에는 저주를 내리게 하는 쓴 물을 아내에게 마시우게 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민 5:5-31).
따라서 '수치되는 일'은 바로 간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내의 순결 문제 등과 같은 상대 남편에게 큰 충격이 되는 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율법의 근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란 남편이 아내에게 떳떳하게 이혼증서를 써 주고 이혼을 요구할 만한 충분하고도 객관적인 사유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한편 힐렐학파는 이 '수치'란 단어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실제의 죄든 아니면 상상속의 범죄이든지간에 [어떤 이유로든지 아내가 싫어지는 경우까지 포함하여...주로 남편의 입장과 감정만을 고려하여, 남편이 불쾌감을 느끼거나 마음이 편치 못하면 아내에게 전적으로 그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정도로]모든 종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지극히 사소한 잘못'까지도 포함시키고 있었다(예를 들어 음식이 상한 일이라든지) (심지어) 남편에게 자기 아내보다 더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다든지 또는 어떤 이유로든지 아내에게 대해 더 이상 애정이 생기지 않는 것 등의 부당한 일까지도 이혼 사유로 인정해서 남편의 이혼 요구가 있는 경우 아내는 이혼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예수 앞에 제기된 물음은 바로 신 24:1에 대한 힐렐의 해석에 동의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였다.
만일 예수가 힐렐학파의 주장을 따른다고 한다면 그의 대적자들은 샴마이학파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예수가 도덕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라고 공박할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엄격한 샴마이학파의 편을 들면 그들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 자신의 친절과 자비 행위는 바로 위선'이라고 선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샴마이나 힐렐의 견해를 모두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비록 엄격한 샴마이학파라 할지라도 이미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
@사람을 지으신 이가...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 유대인들은 신 24:1을 이혼의 합법적 근거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創造)하셨는가를 환기시킴으로써 창조의 원리(창 1:27)를 통해서 이혼의 절대 불가성과 아울러 결혼의 신성함과 영구성을 강조하시고자 하였다. 특히 본문의 '본래'라는 말은 남.녀의 근본적인 창조 목적을 소개하고자 하는 강한 암시가 내포된 말이다.
실로 결혼의 법은 하나님의 섭리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과 생명 유지의 법이었다(고전 7:25-38). '여호와께서는 이혼을 미워한다'고(말 2:16) 선포한 말라기 선지자와 같이 예수는 창 1:27의 말씀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것인 동시에 창조때부터 여자와 남자는 하나의 몸에서 잠시 분리되었으며,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으로 다시 한 몸을 이루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19:5
@이러므로 - 창 2:24에서의 이 말(for this reason, NIV)은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고 서로를 위해서 지음 받은 짝으로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임'을 아담이 깨달은 데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남자와 여자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관계되고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정녕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결혼에 있어서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동시에 창조 때에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창 1:27의 말씀, 즉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合)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하는것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 남녀 한 쌍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요구 조건이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淸算)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온전히 합일을 이루는데 그 어떠한 장애 요인도 있을수 없다는 뜻이다. 그와 더불어 두 사람의 독립적 인격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창 2:24).
@합하여(* , 콜레데세타이) - 이는 '아교로 붙이다', '연합하다'는 뜻을 지닌 원어 '콜라오'(* )의 단수 미래 수둥태로서 '완전히 달라 붙어 뗄래야 뗄 수 없게 될것이다'는 의미이다. 이는 부부란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결합체가 아니라 영원히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합일체라는 뜻이다.
@한 몸이 될지니라 - 남자와 여자와의 결합을 정신이나 혼만의 결합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육체(* , 싸릌스)의 결합으로 본 성경의 이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실제로 결혼에 의하여 남녀는 그 몸이 유기적(有機的)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한 몸'이란 결혼을 단순히 정신적인 결합(한 정신)으로 봄으로써 구체성(육체리 합일)을 상실한 공허한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요소들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두 사람을 결코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 그 자체, 곧 단순히 성적 합일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과 영혼이 전제되지 않는 육체는 순전히 쾌락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한 몸'이란 육체를 근간으로 한 전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과 생명의 지배를 받는 한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를 루이스 에이 바비에리(Louis A. Barbieri Jr.)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보다 더 높은 관계로의 부르심'이라고 표현하였다.
=====19:6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 - 한마디로 천생연분이라는 말이다. 한편 여기서 '짝지어 주다'란 말은 '결합하다', '함께 멍에를 메다'는 말의 헬라어 '쉬쥬그뉘미'(*)가 사용되었다.
이 헬라어는 부정 과거형 직설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끝나버린 단 한번의 과거 사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이미 발생되어 버린 일이므로 어떤사람도 그 연합을 나눌 수 없다는 의미가 강하다.
더욱이 이는 무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여 짝지어 주신 그 일이 영원히 진리(질리)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또한 '짝지어 주신것'이라고 하는 말에는 관계대명사 '호'(* )의 중성 단수형이 사용됨으로써 부부는 벌써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단수 관계대명사 '호'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명확히 짝지어 주신 '것'(What)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입법(立法)하신 결혼법을 말하는 동시에 그 법이 단지 아담과 하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녀의 결혼관계에 적용됨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당위론적인 진술이다.
맥네일(A.H. McNeile)은 '모든 결혼한 부부는 아담과 하와의 결합(結合)의 재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실로 이혼이란 인간의 사악한 의지의 반영일 뿐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는 둘이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편 유대 용어로 결혼을 나타내는 말은 '키두신'(* )인데, 이 말은 성별(性別), 헌신의 의미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바쳐진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W. Barclay). 부부란 서로에게 바쳐진 몸이요 [세상을 떠날 때까지]계속해서 헌신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몸'된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키두신'이다.
그러므로 헌신된 제물로서의 부부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으며, 또한 둘로 나뉘어진 '키두신'은 이미 '키두신'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의해 분리된 부부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라고 하는 정죄를 받는다.
정녕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람(남자)과 아내를 한 몸으로 [상호간에 서로에게, 또한 한 몸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결혼으로 맺어진 신성한 관계를 해치는 그 어떠한 분열 의사도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반(反)하는 것이다.
=====19:7
@어찌하여 모세는 -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신 24:1을 들어 다시 한 번 예수께 공격하였다.
실로 율법주의자(律法主義者)에게 있어서 모세는 그들의 최고 가치기준이며 원리였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모세가 말한 것'이라고 하면 이성적 판단이 정지된채 무조건적으로 그 말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22, 28, 32)라고 하심으로써 매번 모셰에 대해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하며 율법 정신을 왜곡하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셨다.
구속사의 전개상 메시야의 그림자에 불과한 모세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실체(實體)이신 예수의 시대가 이제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며 그분의 말씀도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어리석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최소한의 규정을 담고 있는 모세 율법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이 말을 한 것이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에서 모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 그 당시 히브리인 남편들은 단지 구두(口頭)로 아내와의 이혼을 합법화(合法化)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혼 사유가 발생하면 신24:1-4의 율법 조문에 근거하여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줌으로써 그 이혼을 공식화할 수 있었으며, 그와 더불어 이혼 사실에 대한 공적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간 이혼사실을 공중예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혼을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 실제적인 목적은 (1) 합리적 이유를 들어 아내 내어 버리기를 쉽게 생각하는 남편의 방종(放縱)을 막고, (2) 신실치 못한 아내에 대한 자비의 수단, 즉 그 아내에게 미칠 각종 불이익과 공개적 형벌을 미리 예방하고 아내로 하여금 자유케 하려는 데 있었다.
사실 당시만해도 법적으로 여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던 남자가 이혼 증서를 준비할 권한과 그 약정을 폐기해 버릴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종이가 흔하지 않았던 고대에서는 나무잎 위에 '자신의 아내가 이제는 어떤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라는 내용을 적어 여자에게 주었으나 나무잎이 시들게 되면 그 내용이 희미해져서 잘 알 수 없게 되는 폐단이 있어서 후에는 작은 돌, 양피지, 종이의 순으로 이혼 증서의 재료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혼의 허용은 점차 이혼의 남용(濫用)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시키게 됨으로써 이 이혼 문제는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큰 고민 거리가 되었다.
유대의 어떤 랍비는 성전의 쟤단 앞에서 초혼의 아내와 이혼하는 자를 위해서 매일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19:8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허락하였거니와 -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 스크레로카르디안)이란 '거칠고 잔인하며 완고한 마음' 또는 '말라붙은 마음'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타락한 심성(心性)을 반영해 주는 말이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이 마련한 결혼법을 지킬만큼 순수하다거나 신앙적 열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아내를 내쫓기 위해 심하게 학대(虐待)하거나, 살해할 의사까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모세는 [극심한 아내 학대 결과 살인까지도 야기시킬 수 있는] 상호 저주와 미움, 불목과 불화의 갈등 가운데서 남녀가 함께 기거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갈라서는 '작은 악'을 허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모세는 이혼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어쩔 수 없이 부득이] 묵허(黙許)한 것이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극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허용된 이혼을 빌미로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은 '작은 악'을 스스로 인정하는 수치였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결혼법에는 '본래' 이혼의 허용이나 그 가능성에 대해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아내의 수치되는 일(* , 에르와트 다바르, 신 24:1)을 보았을 경우에라도, 반드시 이혼하라고 명령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것을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만] 허용했을 따름이다. 이혼은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아니다.
따라서 이혼이 성립될 것인가 말것인가의 여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기본입장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이혼은 모세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용인되거나 ] 허용된 중립적인 것이 결코 아니기에, 이혼 시도 자체가 이미 사람의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이혼은 본래의 하나님의 창조질서(創造秩序),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상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혼에 대한 모세의 본래적인 생각이었으리라..
이에 대해 빈센트(Vincent)는 말하기를 '최초에 제정된 결혼법은 결코 폐지되거나, 또다른 법으로 데체된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효력을 지닌다'고 설명한 바 있다.
=====19: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 모세의 권위를 초월한 예수께서 친히 당신의 권위(權威)로 절대적 윤리(倫理)를 가르치셨다.
@음행한 연고 - 음행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포르네이아'( )이다. NIV에서는 음행을 '결혼한 사람들 간의 성적(性的)인 관계에서의 부정'(marital unfaithfulness)으로, KJV에서는 미혼 상태의 남녀간의 '사통'(私通, fornication)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학자들은 이 음행이라는 말을 (1) 결혼이 금지된 촌수 내에서의 결혼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Baltensweiler) (2) 겔다드(Mark Geldard)와 같은 사람은 KJV의 번역과도 같이 결혼 전의 부정으로 본다. (3) 또한 플레밍(Fleming)과 시갈(Sigal)은 '포르네이아'가 단순히 간음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4) 또 다른 견해로는 '포르네이아'가 무분별(無分別)하고 방종하며 집요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문란한 성생활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 한번의 잘못된 부정 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계속되는 이러한 부도덕(不道德)한 아내의 성생활도 이혼사유가 될 수 있는데, 이는 결혼의 연합을 깨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의 근친상간의 결혼은 이미 합법적인 결혼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으며, (2) 결혼 전의 부정이나 간음으로 보는 것은, 첫째, 간음(adultery)란 말의 '포르네이아'가 아니라 '부부간의 성실성이 없음'이란 의미의 '모이케이아'(* )란 말로 분명히 달리 쓰이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둘째, 간음하는 것이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한다면 예수의 의견은 샴마이학파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막 10:11-1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어떠한 연고에 의해서도 이혼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찬성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10절의 제자들의 불평이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라는 말은 (4) 번의 견해와 같이 결코 고칠 수 없는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아내의 경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혼한 여자가 '음행'을 저지른 경우에 받던 죽음의 형벌은 사실상 폐지된 것이고, 이제부터는 이혼함으로써 부부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혼의 절대 금지에서 예외적인 조항을 밝힌 이 부분은 바로 앞 (4-8절)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수께서는 분명 4-8절에서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구약이 가르치고 있는 참된 방향을 제시하셨을 뿐이다.
더욱이 성적인 죄악은 창 1:27;2:24의 결혼법에 관한 예수의 관점(4-6절)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데, 그 이유는 창조 기사에서 인용한 구절들(창 1:27;2:24)이 예수가 옹호하고 있는 결혼의 영구 불변성인 성적인 결합, 곧 한 몸됨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인 부정은 이혼 금지에서 제외되는 예외적 행동에 속한다. 실로 성적 부정이 반드시 이혼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까지 상태가 악화되는 경우 이혼과 재혼을 허용한 모세의 정신은 예수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되고 있다.
마하니(Mahaney)는 '포르네이아'가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 흔한 근친상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태가 이들이 점점더 교회에 들어오게 됨을 염려하여 그들이 예수의 절대 이혼 금지(음행한 연고 외에는)를 그들 이방인들의 부정한 결혼을 묵인하는 것으로 오해할까 하여 이 구절을 집어넣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이 예수의 절대적 윤리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점차 상대적 윤리로 전향(轉向)해 가는 과정을 반영해 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19:10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 직역하면 '만일 사람의 연고가 아내에 대해서 이같을 진대'로, 개역 성경에는 '연고'(* , 아이티아)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여기서 '사람의 연고'란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올 요구할 수 있는 이유, 조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조건의 까다로움 또는 더 나아가서 이혼불가라는 예수의 너무나도 엄한 결혼관에 대해 불평하는 제자들의 극단적인 견해에 해당한다. 아마도 그 당시의 사회가 이혼과 재혼 또는 축첩(蓄妾)의 제도가 성행(盛行)하고 있던 시대이므로 예수의 말씀은 실현뷸가능의 이상으로써만 이해되었을 것이다.
=====19:11
@사람마다 이 말을...타고 난 자라야 - 예수의 답변 중의 '이 말'은 제자들의 극단적인 견해인 '장가들지 않는 것(독신)이 좋삽나이다'(10절)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받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코레인'(* )은 그릇이 일정량의 빗물을 받듯이 '어떤 것을 위한 공간(空間)의 자리에 담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지적인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그와 상응하는 도덕적 의지가 뒤따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을 받는다고 하는 표현은 말 그대로를 전의지적으로 따른다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나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 내지 금욕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라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타고난 자'란 결혼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고집이나 선택에 의해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 부터 부름 받고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결혼을 자발적으로 포기한자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으로 번역하고있다. 예수께서는 12절에 새 유형의 고자(鼓子)를 예시함으로써 이 말의 의미를 더욱 확실히 소개해 주셨다.
=====19: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 - 선천적인 성불구자나 성욕이 완전히 핍절(乏絶)한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고자'(* , 유누코이)란 원래 '침실을 맡은 자'란 뜻으로 고대 동양에서 왕의 침실에 수종들던 내시(內侍)가 모두 거세(去勢)당한 자들인 데서 유래하였다. 한편 이스라엘에서 고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레 21:20)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신 23:1).
@사람이 만든 고자 - 고대 동양에서는 왕의 아내들에게 수종드는 남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식기를 거세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들에게 왕의 부인과의 성적 접촉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 여자가 사제인 이교(異敎)에서도 그들을 돕는 남자들도 역시 거세되었는데, 예를 들면 에베소에 있는 다이아나(Diana) 신전에서 봉직하는 자들도 그러했다.
선천적인 고자나 내시나 환관 등의 특수 계급의 고자는 모두 장가를 들 수 없도록 만든 사람들로서 성욕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자제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욕자체가 생겨나지 않는 수동적이고 불가피한 절제자들이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 대표적인 사람으로 동양의 오리겐(Origen)을 들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천국을 위하여'란 '천국을 얻기 위하여'가 아니라, 천국의 요청과 천국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독신 생활(獨身生活)을 하는것을 가리킨다(J.Blinzler). 이 구절에 대해 결혼한 사람이 천국을 위하여 결혼 안한 사람같이 된다고 하는 페이(F.R. Fay)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7:32, 33에서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아내를 기뻐할 일에 골몰하고 장가를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주께서 기뻐하실 일에 열심을 다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알롄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말하기를 '참된 고자는 육체적인 쾌락(快樂)에 빠질 수 없도록 된 사람이 아니라, 육적인 쾌락을 거부하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한편 본문의 말씀은 결혼을 천박하게 본 것이 아니라 결혼을 훨씬 능가하는 가치, 즉 하늘 나라 봉사를 위해 결혼을 희생하는 것이 고귀함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 이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절대적 규범이나 명령이 아니라 영적고자로 부름받은 소수의 사람들의 선택적 규범이다.
이를 가리켜 사도바울은 받은 바 은사의 다양성에 따라 되어진 자발적인 선택의 일로 보고 있다(고전7:7, 26).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나 그의 제자들은 독선 생활이 결혼 생활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보지 않았을(딤전 4:1-3;히 13:4) 뿐 아니라 복음 사역에 있어서 최고의 차원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8:14;고전 9:5).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더 유용하게 쓰임받기 위하여 특별한 소명(召命)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만약 스스로 이러한 생활이나 훈련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우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하는(고전 7:9) 바울의 권면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19:13
@때에 - 결혼과 이혼에 관계된 예수의 가르침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 말이다(2:7). 결혼의 신성함을 말씀하셨던 예수께서는 이제 그 결혼 생활의 고귀한 열매(아이들)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시고 계신다.
@사람들이...버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어린 아이들을 랍비들과 장로들에게 데리고 가서 안수(按手)라는 관례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축복받게끔 하였다(창 48:14;민 27:18;행 6:6).
그런데 원래 이 안수는 상징성이 강한 행위로서 한 집안의 가장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나, 길을 떠날 때 혹은 죽음이 임박하여 자손에게 특권과 축복을 시여(施與)할 때 주로 행해졌는데, 대부분 축복의 기원이 그 내용이었다.
이 안수의 축복은 유대교에서 전례되어 초대 교회에 정착되었고(행 6:5-6;딤전 4:14), 또한 오늘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병고침과 필요만을 위해서 모여든 것이 아니라, 메시야이신 예수의 축복이 자신의 집안 대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믿음에서 아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하면서 안수받는 대상에 대해 마태가 7세이하의 '작은 아이들'(* , 파이디아)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반해서 누가는 눅 18:15에서 신생아 또는 젖먹이 아이, 즉 유아(乳兒)를 가리키는 말인 '브레페'(* )를 사용하였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 중에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나온 아이도 있었고 품에 안거나 어머니 등에 업혀 온 아이들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18:1-10의 말씀에서 당시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귀히 여긴다고 하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전하여진데서 나온 행동들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제자들이 꾸짖거늘 - 여기서 '꾸짖다'는 뜻의 원어 '에피티마오'(*)는 '책망하다', '경고하다' 등의 의미로 엄히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제자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을 데리고 온 자들(NIV, those who brought them)이었다(막 10:13). 이 때 제자들이 화를 낸 것은 어린아이들이 많이 몰려옴에 따라 예수의 권위가 손상된다거나 예루살렘으로 가던 여행이 지체될 것을 생각하고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 보다는 많은 병자와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나왔으므로 여전히 아이들에 대해서 귀한 보배라고 하는 인식(認識)이 없었던 제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이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고 축븍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최우선(priority)은 어른(남자)이며, 그 다음(secondary)이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신체적으로 미숙하며 지적인 발달이 미진한 어린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한 사람의 인격체로 여기며 그들이 당신의 백성이 되는 것을 기뻐하셨다.
=====19:14
@용납하고...금하지 말라 - 예수께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기뻐 달려오는 일을 용납(容納)한 것은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이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납하고'(* ,아페테)란 능동태 명령형으로서 '상관치 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뜻의 강한 요구이다. 그리고 '금하지 말라'의 원어 '메콜뤼에테'(* )는 강한 부정의 의미를 지닌 '메' + 현재 명령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지금하고 있는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을 제재하는 일을 당장 포기하라', '당장 허락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오스카 쿨만(O. Cullmann)에 의하면 본문에서 이 말이 쓰인 것은 원시 기독교의 세례식(洗禮式) 용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이 동사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세례와 관련되어 사용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3:14;행 8:36;10:47;11:17). 그러나 쿨만은 그렇다고 해서 본문에서 예수가 유아세례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신약의 교회가 이 기사를 기록하여 전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린이 축복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부모의 믿음과 관련된 유아 세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당신의 나라를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그 마음과 믿음에 있어서 어린아이같이 순결하고 순수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다(18:3). 따라서 지금 신경질적으로 어린아이들의 접근을 제어 하는 제자들은, 무엇보다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인습을 떨쳐버리고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아이들을 친절하고 온화하게 맞아들여야만 한다.
=====19: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셨다(13절).
그런데 그 소원들 중 '기도하심을 바란' 소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셨다. 이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는데,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축복과 필요를 채우실 수 있으셨기 때문에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예수는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기도 하셨으나(요 11:42;12:30) 본 시점에서는 당신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시기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 기도없는 축복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어린아이 축복과 유아세례의 기원이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유아 세례의 전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초대 교회시대 때부터 큰 반발없이 자연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유아 세례에 관해 처음 증언한 사람은 이레니우스(Irenaeus)와 오리겐(Origen) 및 터툴리안(Tertullian)이었다. 그 중 아레니우스는 유아 세례와 관련하여 180년경에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과 어린이들과 소년들과 젊은이들과 노인들 등 자신을 통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Hoer. *, xxii, 4)고 자신의 글에 피력한 바 있다. 또한 자신도 유아 시절에 세례받은 경험이 있는 오리겐은 분명히 그 관습의 기원을 사도 시대로 보고 있다. 그는 특히 롬 5:9을 근거로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통을 물려받아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고 주장했으며 유아 세례는 일종의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라고 말했다(Hom, On Lev. viii, MPG,ii, 496).
한편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새로 회개하고 구원받은자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함으로써 유아세례의 가능성을 확실히 예시하고 있다(행 2:38;16:15;고전 1:16).
더욱이 앞절(14절)에 언급된 바 있는 '메 콜뤼에테'란 말이 초대 교회 당시 빌립 집사의 선교 사역 중 구스 내시(內侍)의 세례 장면에 나와 있는 관계로 보아(행 8:36) 적어도 70년경에는 유아 세례가 보편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종교 개혁 당시 재세례파(Anabaptist) 사람들에 의해 유아세례가 거부되기도 했지만 루터와 칼빈을 위시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그 시행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특히 종교 개혁자들의 유아 세례관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아이들의 신앙은 성인들보다 훨씬 직관적이요 순수하다. 따라서 그들을 유아 시기부터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신앙고백할 때까지 거룩히 훈련시키고 죄를 씻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약속에 동참케 하기 위해 마땅한 바이다".
더욱이 개혁자(改革者)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재성과 유아 신앙의 특이성 등에 근거하여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여하튼 유아세례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 책임을 일깨워 주는 것과 더불어 육아의 인격적 독립성및 신앙적 의속성(依屬性)에 의지하여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시된 채 단순히 의식으로서의 유아 세례를 집행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실로 교회는 마치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안수, 축복해 주셨던 것처럼 큰 사랑과 부족없는 노력으로 그들의 영혼을 훈육(訓育)하고 성결히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거기서 떠나시니라 - 베레아 지역을 떠나 예루살렘으로의 행보(行步)를 재촉하셨
다.
=====19:16
본절의 문장 초두에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감탄사 '보라'(* ,이두)가 첨가되어 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사건의 돌발성 및 중요성을 일깨우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1:20). 아마도 본 사건은 유아 축복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날 발생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 22절에 의하면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청년이며, 막 10:17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을 구한 열정적인 구도자(求道者)였으며, 눅 18:18에 의하면 그의 직업은 '관원'으로 알려졌다. 물론 '관원'이란 유대인들의 회당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징부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새번역에 의하면 그는 의회원중 한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눅 18:18).
이 부자 청년은 젊음, 재물, 명예를 다 얻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음으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채 나날이 회색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신 세대(不信世代)의 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서는 모두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13-15절) 뒤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분명히 깨우치기 위한 목적에서 편집되었을 것이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 먼저 이 청년이 예수를 '선생'(* ,,디다스칼레)으로 부른 것은 그가 예수를 율법 교사인 랍비로 보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물론 이말은 '랍비'라는 칭호를 직접 사용한 것보다는 그 존칭의 의미가 약하지만(막 10:51;요 20:16), 어쨌든 그 청년은 예수를 자신의 문제를 능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마가복음(10:17)과 누가복음(18:18)에서는 질문자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질문을 시작하고 있고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善)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고 대답하고 있다. 마태에 나오는 예수의 대답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오직 한 분이시니라"(17절)고 하였다.
여하튼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뜻을 지닌 '아가도스'(* )가 문장 어디에 붙든지 상관없이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청년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분이 명하는 바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암 5:4, 6, 14).
그러나 이 청년은 믿음의 도(道)에 의해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지 못하고,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공적(公的)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할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을 바로 알며 그분에 의한 선한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으리이까 - 청년이 지닌 치명적(致命的)인 과오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사실 '영생'이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지적이고 선택적이며 개방적인 은총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떠한 선행을 쌓아야지만 메시야의 나라에서 그 영생을 쟁취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이 청년이 이러한 왜곡된 생각을 한 데는 그 당시 랍비들의 그릇된 구원관 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있다.
랍비들 가운데는 계명 중에도 영생에 이르는 계명이 있는가 하면 영생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계명(어겨도 별 상관없는)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율법과 시편의 암송, 또는 노인들에 대한 공경(恭敬) 등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그가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메시야의 왕국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고상한 행위법을 예수께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길은 바리새인들 처럼 규율을 준수하는 데에 있는것(doing)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절대 선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영혼과 순종의 마음을 지니는 겸손한 존재가 되는 데(being)에 있는 것이다.
=====19:17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 평행구를 이루는 막 10:1과 눅 18:19 및 에브라임 사본에는 본문을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 몇몇 학자들(Hoskyns, Allen)은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와 연관지어 예수와 하나님의 존재론적(存在論的) 차별로 인해 예수의 신성이 부정될까 하는 염려에서 의도적으로 변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등)과 라틴 벌게잇 역(Valgate) 등에는 예외없이 본서의 읽기를 따르고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차이를 분석하기 전에 먼저 본 기사의 핵심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본 기사에는 예수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청년에게 그의 질문을 되받아 묻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실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절대적 의미에서의 선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대상 16:34;대하 5:13;시106:1;118:1, 29). 따라서 본문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인 '선'을 하나님과 함께 공유(共有)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더욱이 예수는 지금 선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짓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에도 관심을 지니지 않으셨다.
이런 측면에서 본 대화를 기술한 마태의 표현은 세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심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마태의 표현은 마가-누가 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중심 문제에 근접해 있으며, 앞의 기사들과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청년은 천국에 속한 자들과는 엄청날 정도로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로 볼 때 막 :10:18이 예수의 무죄성(sinlessness)을 묻고 있지 않듯이 본절도 역시 예수께서 선한 것을 판단할 합법성(合法性)을 지니셨는지의 여부를 묻고 있지 않다.
한편 마태, 마가-누가 그 어느 기자도 다른 전승을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마가의 기록이 마태보다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D.A. Carson). 그렇지만 마가 우선설 때문에 만일 예수가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가능성(可能性)을 마태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고 마태를 비난할수는 없다.
실로 마태는 마가복음을 의존하여 본문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이 본 사건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갖고서 목격자의 입장에서 재구성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의 보고 문학 형식에서 상호 모순되지 않고 허용할 수 있는 통상적 범위 안에서 독자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묻는 그 청년에게 하나님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일만이 유일하게 선한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수 없고 자신을 선하다고 말할 수도 없음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예수의 신성과 절대 무흠하심을 부인하는 뜻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예수께서는 '선하다'는 말을 자신과 연관시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 청년의 잘못된 신앙관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그 관원은 예수를 하나의 '선생', 곧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이해 수준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선할 수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왜곡된 사고(思考)와 신앙관을 깨우치기 위해 '선'의 주체이시며 궁극적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셨다. 따라서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이 관원의 바리새적인 구원관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벽에 부닥치게 되었다. 정녕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다만 믿음을 통해서 의인(義認)된 죄인만이 있을 뿐이다.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여기서 '생명에 들어가려면'이란 16절의 청년의 질문과 짝을 맞추기 위한 예수의 의도적 문구로서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본문의 말씀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갈 자, 곧 구원받을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신구약을 통틀어 '선한' 분이신 하나님의 계명은 이미 '그 속에 생명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인정해 오고 있다(레 18:5;롬 10:5;갈 3:12).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는 계명을 다 지킴으로써 인간은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바로 계명의 명령자이신 하나님과 그 계명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란 모세의 십계명을 맹목적(盲目的)이고 외형적으로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계명을 문자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의 원목적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정신대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계명의 참 순종(순종)은 생명에 들어가는 참믿음의 결과요 증거이다.
=====19:18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청년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게명이 이미 자신이 다 실천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계명인지를 예수께 묻고 있다.
관원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수 많은 조항들을 덧붙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보편적이지 않고 실행하기 매우 힘들어 그 계명을 준수(遵守)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수한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19
@'살인하지 말라'부터 '부모 공경'까지의 다섯 계명은 출 20:12 이하와 신 5:16이하에 나오는 십계명이다. 그런데 마태는 막 10:19의 '속여 취하지말라'는 말을 생략했는데, 이는 구약의 본문에는 그러한 명령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의 본문은 출20:1-16의 히브리 본문에 일치하도록 변형되었다. 또한 마태는 레 19:18의 '이웃 사랑'을 새계명으로 덧붙이고 있는데, 바울도 롬 13:8에서 십계명의 네 계명(6, 7, 8,10)과 더불어 '이웃 사랑'의 계명을 덧붙였으며 그 당시 랍비들도 이웃 사랑의 계명이 율법을 요약한 것이라 가르쳤다. 예수께서 이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청년이 가지고 있던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한편 페이(F.R. Fay)에 의하면 본절의 두 계명은 십계명의 두돌판의 계명들을 각각 요약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즉 부모 공경은 제 5계명까지, 이웃 사랑은 제 6-10계명까지의 요약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 조항들이다. 즉 인간관계와 이웃에 대한 태도들을 규정(規定)하는 계명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 1-5게명보다 5-10계명을 더 강조하신 이유는 (1)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5-10계명들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根菜)의 십일조는 강조하면서도 계명의 핵심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행치 않았다(23:23). 따라서 당시의 율법주의에 빠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자세를 비판하신 것이다. 이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이 청년도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 (2) 영생이란 영원한 삶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원'(*, 아이오니오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것 또는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W. Barclay). 따라서 영생이란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상태이며 이는 율법의 여러 조항들을 모두 낱낱이 준수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는 하나님의 본체(本體)이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19:20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 막 10:20에 의하면 '어려서부터'라는 말이 붙어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의 종교적 행습(行習)은 칭찬할 만하다.
그런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청년의 이 대답을 통해서 그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찾아볼 수있다.
(1) 긍정적인 측면 : 세상의 열락(悅樂)에 빠질 만한 여러 조건들을 다 갖추고서도 그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것들에 몰두하지 않은 건전하고도 경건한 삶을 살아왔다. 실로 그가 완벽한 율법 준수자라고 자처한 것도 과장이나 위선에서가 아니라 열정(熱情)에서 실토한 순수한 자기 주장이었다. 마가의 보고(막 10: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는 이를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에 이르는 길'을 물은 것은 바로 그가 지닌 내면적 공허함을 해결하고 외형적 율법 준수로는 얻을 수 없는 마음의 평화(平和)를 얻기 위해서였다.그는 지금 '영적으로 철저히 고갈한 상태'였던 것이다.
(2) 부정적인 측면 : 율법과 계명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의 사고 방식은 당시의 유대 바리새인들의 율법관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율법과 계명과 규례들을 일일이 다 지키었으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의 진정한 정신은 잘 알지 못하였다. 즉 그는 율법의 의(義)로는 전혀 부족함 없는 존재였다(빌 3:6). 따라서 그는 율법의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얽매임으로써 아무런 의심없이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 의'(自己義)를 주장했던 것이다. 실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나 실행, 자기 성취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영적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 막 10:21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다고 장담(壯談)하는 그에게 예수께서 한 가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계셨다.
바울도 그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빌 3:6). 그러나 본문에서의 그는 자신이 계명을 다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유대 랍비들을 떠나 예수에게로 나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일을 했다고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그는 확실히 선한일이란 율법에 명시된 계명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받은 율법 교육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이다.
율법교육은 끝없이 외형적인 선과 의를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공적(功績)이 되고, 영생한 삶으로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많은 계명을 지키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원의 확신은 없었고 여전히 영혼의 불안과 궁핍을 느끼고 있었다(롬 7:24).
=====19:21
@온전하고자 할진대 - 여기서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거나 무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신적인 완전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의 자의지(自意志)에 따른 결과로서의 완전이 아니라 처절하게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依托)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완전이다(5:48;빌 3:12).
한편 본문에서의 이 말은 좀더 특수하게, 그 청년이 목표로 삼고 있는 영생에 이르는데 조금도 핍절함 없는 완벽한 상태, 즉 절대적인 자기 부인(self-denial)과 철저한 순종 및 완전한 자기 의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예수의 온전케 하는 계명은 겉으로는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Banks). 왜냐하면 구약의 어떠한 구절에서도 본문의 이 명령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다(6:19-24). 더구나 사람은 본성적(本性的)으로 탐욕(貪慾)스런 존재이기 때문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써 차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땅에의 욕심이 많으면 하늘에로의 관심이 적어지게됨을 아시고 그 부유한 청년이 그의 재물을 다 나누어 줌으로써 진정한 영생의 삶을 누릴 수있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청년은 율법에 나타난 모든 외적인 계명들을 다 준수하려고 했지만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즉 그는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적극적이고 전적인 자기 포기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소극적이고도 수동적으로 행한 수 백 가지의 율법 준수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소유를 다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다가오고 있는 천국에 관한 임박한 종말의식(終末意識)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한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계 21:1)이 다가옴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에서의 참 보화를 소망하지 못하는 한 소유물들을 더욱더 굳게 움켜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나를 좇으라'하는 데에 있다. '가서, 팔아, 나누어 주라'(*, 휘파게 폴레손 카이도스)는 천국과 영생의 실체이신 예수를 좆는 제 1 전제 조건이었고, 온전함을 얻기 위한 단 한가지의 필요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절대적 명령에 따라 '가서', '팔아', '나누어줄' 때 동시적으로 그에게 내적 변화가 수반될 것인데, 그 내적 변화는 바로 그가 지금까지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온몸과 뜻과 정성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 13:44-46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하셨다.
이는 결국 본문의 '하늘에서 보화'란 이 부자 청년이 찾아헤매는 바의 영생의 삶을 의미한다. 그의 마음이 지상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의미로, 예수께서 그 즉석에서 영생의 삶을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실로 자기 보물이 있는 그곳에 자기 마음과 소망(所望)과 미래가 있는 것이다(6:19-21).
@와서 나를 좇으라 -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과 연결되고 있다(Lane). 즉 하나님의 뜻,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17-19절) 바로 참 생명의 주인이시요 인간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상호 협력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있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율법의 형식적인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 즉 자아(自我)의 전적인 포기를 수반한 복음에의 참여를 통해 서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은총을 통한 승리'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본문에서 볼 수있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수시로 사람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셨으며 다음과 같은 제자의 길을 제시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16:24)따르라고 말이다.
이 말씀처럼 구원의 기쁨을 얻고 예수의 사람이 되려는 자는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즉 세속적(世俗的)인 기대와 세상적인 인연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께 자신의 전부(부, 희망, 삶 등)를 맡기고, 그분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일체적(一體的)삶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갈 2:20). 이는 제자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크고도 힘든 장벽이자 조건이 되는 조항이다.
=====19:22
@재물이 많으므로 - 헬라어 원문의 뉘앙스로는 그는 현재에도 재물이 풍부할 뿐아니라 그 풍요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그 청년은 자신의 재물로 인한 풍요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청년에게 있어서 재물은 단순한 소유 이상의 가치로서, 그의 미래와 희망과 운명이 걸려 있는 절대적 가치였다. 이처럼 영원한 세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대적 가치에 불과한 것들을 절대화(絶對化)하는 것은 영생과 천국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근심하며 가니라 - '조심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스 '뤼페오'(* )는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고통스러워 하다' 등의 뜻으로, 막 10:22에 의하면 심각한 내적 갈등으로 인해 '슬픈 기색을 띤 것'을 의미한다.
한편 16:3에서 이 동사는 궂은 날씨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와 연관하여 '못 마땅해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lowering)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은 바로 재물과 예수 사이이다(6:24).
사실 구약의 전통적 개념으로 보자면 부자는 어찌 보면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에 속한다(욥 42:10-12;잠 18:11).
그 청년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이해해 왔던 대로 물질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함에 따라 영생을 보장하는 방법으로써의 물질포기에 대한 예수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보장된 현재 때문에 보장될 미래와 영생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선택을하고 말았다.
실로 이같은 선택을 한자에게 참된평화가 있을 수 없었기에 그는 고통 중에 '근심하며' 또다시 영원한 허무(虛無)와 갈증만 있는 형식적 율법 준수의 길로 되돌아서 가고 말았다. 정녕 참된 평화는 자기의 소욕을 극복하고 예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뢰할 때에만 주어진다(요 14:1).
=====19:23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재물과 탐욕이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되는가 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막 10:23에 의하면 부자는 바로 '재물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부자나 빈자(貧者)나 상관없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는 자는 영생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영생에 들어가고 부자라고 해서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자들일 경우에 재물이 많기 때문에 그것에 의존하는 정도가 지나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영생의 길이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나온 '어렵다'의 뜻인 부사 '뒤스콜로스'(*)는 소화되기 어려운 나쁜 음식을 먹은 것처럼 힘들게 나마(with difficulty)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방법은 꼭 한가지, 즉 모아두었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것 뿐이다.
=====19:24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 부자가 영생을 얻기 어렵다고 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 비유는 극단의 상징성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상징된 단어의 완곡한 이해가 종종 시도되었다.
그중 바클레이(W. Barclay)에 의하면 우선 바늘귀란 '작은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흔히 성곽을 두르고 있는 도시에는 문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중의 큰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수레 등이 다니는 것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흔히 '바늘귀 문'(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큰 짐승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 약대(camel)가 이 작은 문으로 통과하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다.
한편 칼빈(Calvin)은 약대를 가리키는 말의 헬라어가 '카멜로스'(* )이며 배에서 사용되는 '밧줄'(rope)의 헬라어는 '카밀로스'(* )인 점으로 미루어서 약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에 통과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바늘귀가 '바늘귀 문'이며 약대가 '밧줄'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약대는 바늘 문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밧줄은 바늘귀에 매어쓸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 비유를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의 정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랑게(Lange)에 의하면 육중한 몸무게의 약대가 부자를 상징하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인 바늘 구멍이 하늘나라로 가는 영적통로를 상징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적어도 본문은 이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를 더욱 확실히 해 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격언으로 바벧론 탈무드에는(B. Berakoth 55b) '약대' 대신 '코끼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벧론에서는 코끼리가 흔하고, 가장 큰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도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는 '약대가 바늘 귀로 지나갈 때까지 천국 문은 악인에게 닫혀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는 이 복음서에서 빌어 쓴 듯하다.
여하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더구나 교만(驕慢)과 자기 만족으로 살찌운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더욱 더 좁은 것이다. 이 비유가 영생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만큼 영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만큼 더 놀라운 것이며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 유대의 지혜사상(智慧思想)에 의하면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빈곤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한다. 그 실례로 부자였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벌과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욥 5:17).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불편함' 이전에 '부끄러움과 멸시'의 대상이었다(잠 19:7, 23). 그러므로 예수의 부자에 대한 경고(警告)와 재물 포기와 가난으로의 권유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전혀 새로운 사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 관원들 보다 못한 자신들 역시 '구운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염려로 아연실색(啞然失色)하였다.
여기서 본문의 '심히 놀라'(* , 여세플레쏜토)란 말은 마치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이 어안이 벙벙했다'는 뜻으로 제자들의 지금까지의 통념(通念)을 완전히 와해시킬 정도의 충격이 가해졌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천국과 천국의 진리는 기습적이고도 충격적으로 각 개인의 심령에 돌입한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 이는 제자들의 심각한 회의에 휩싸인 질문이다.
즉 만일 천국 입성이 부자에게 그렇게 불가능할 것 같으면 그 이외의 사람들은 더더욱 어렵지 않겠느냐는 투의 놀람과 불만 섞인 물음이다. 사실 (1) 유대인의 통념상 모든 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을 뿐 아니라(Carr, Plummer), (2)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부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과 욕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De Wette, Homer A. Kent, Jr.)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강제법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다.
=====19:26
@저희를 보시며 - '보다'의 뜻인 헬라어 '엠브레포'(* )는 사려깊은 눈빛으로 상대를 주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깊은 동정심과 사랑이 충만한 눈빛으로 제자들의 불안(不安)을 완전히 씻어버릴 정도로 그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가리킨다.
구원에 대한 염려로 떨고 있는 제자들의 내면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시는 구원자요, 참 스승이신 예수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 여기서 먼저 '사람으로'라는 말은 (1) 사람의 판단으로 (Frizsche, Edward) (2)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De Wette, Meyer)등의 뜻으로 사람의 모든 노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사람의 행함, 즉 도덕적 선행과 자유 의지(自由 意志)의 결행 등으로는 구원이 절대 불가능함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는 약대비유의 참 의의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구원'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임을 공언(公言)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구원은 사람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졌다(엡 2:8-10).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재물에 대한 의존력을 과시하시고 하나님 그 자신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격려하셔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셨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제자들의 부정적인 질문은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대답에 의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로 이끌어질 수 있다.
사람이 보기에는 구제받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약대를 바늘귀에 꿰실 수 있는 하나님의 강권과 그분의 능력에 의해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적(意志的) 선택으로 인해 심지어 구원의 문에 들어가기 거의 불가능한 부자들조차도 천국 시민이 될 수 있었다(9:9;27:57;눅 19:9;행 4:32-37).
실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초월적인 경륜(經綸)에 따른 부르심을 믿음으로 수용함으로써 재물로 인한 장애요인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순결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또 자신이 가진 소유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다.
=====19:27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 감탄사 '보라'(* , 이두)는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문구로, 인칭 대명사 '우리'(* ,헤메이스)와 더불어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이는 가버린 부자 청년에 비해 예수를 따르고 있는 제자들 자신을 주목해 보십사고하는 말이다. 더불어 제자들이 말한 '모든 버린것'은 바로 부자 청년이 거절한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써, 사실 제자듸은 예수의 부름을 받으면서 세상적인 욕구나 생존(生存)의 터전및 자신들의 친족과 옛 생활까지 모두 갈릴리 해변에 버려두고 예수의 고난의 길을 좆아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던 것이다(4:20, 22;9:9;눅5:11).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 베드로의 이 말이 보상을 기대하는 잘못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Calvin, Carr),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예수의 엄격한 말씀에 불안을 느낀 제자들이 영생에 대한 확증(確證)을 얻고자하는 마음에서 제기된 물음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Homer A. Kent. Jr).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본다. 만약 이 견해에 의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이 소유했던 것들이 부자청년의 재물과 명예에 비해 보잘것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러나 비록 그러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버려두고 예수를 좇은 일이 과연 예수의 말씀에 적합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초조해 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어떤 선을 행해야 영생을 얻게 되는가'를 물은 부자 청년의 잘못된 구원관과는 달리 '행함'으로가 아니라, '버림'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생에 대한 관심에서 제기된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버림으로써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 지닌 신비한 역설(Paradox)이다.
=====19: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발언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이 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시는 그 언약(言約)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즉 미래의 보상에 대한 희미한 믿음과 적은 기대를 가진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심으로써, 선을 행함으로 자신의 의(義)를 쌓아가는 바리새파나 엣세네파 사람들과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제자 집단만이 올바른 것임을 인식하게 하신 것이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 심령이 거듭난 상태, 즉 중생(重生)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딛 3:5) '팔링게네시아'( )는 만물의 재탄생(renewal of all things), 재창조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여기서의 '새롭게 됨'이라고 하는 말은 RSV에 의하면 '새 세상이 와서'(in the new world)의 의미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즉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참예(參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이 완전히 '중생의 과정'(rebirth)을 겪음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실로 예수의 초림으로 만물의 변화(빛이 어둠을 몰아냄)는 시작되었고 예수의 재림으로 그 변화는 완성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피조물(被造物)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라고 설파하였다.
한편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1) 현존의 질서와 우주의 종말(24:35)과 (2) 자연의 대파국(大破局)(24:6; 7)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벅찬 사실은 모든 세대가 고대하고 바라던(사 65:17;66:22;벧후 3:13;계 21:1, 5) 세상종말에 도래할 만물의 변화(갱신)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이 현재적으로 향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 이는 최후 심판의 비유의 서두(25:31)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정확한 시점이 명시된 이때는 '메시야가 다시 오실 때'가 아니라 그가 '심판주로 보좌 위에 앉으실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의 '앉음'은 단순히 막연한 의미에서의 착석(sit)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judge)의 시작을 알리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영광의 보좌에 인자가 앉으실 때는 메시야가 그의 통치권을 확립하시고 공의(公義)와 불의를 가르실 때를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영광의 보좌'란 단순히 재림의 주이신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내실 보좌라는 뜻이 아니라 그 보좌 자체가 영광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그분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F.R. Fay). 실로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만물을 심판하실 심판주요, 만유의 주이신 예수께서 앉으실 보좌는 그분의 영광의 중심이요, 그분의 충만한 영광의 광휘를 나타내는 핵심적 요소이다.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 '앉다'라는 말인 '카디조'(* )는 '앉게 하다'의 의미로, '임명되다', '승진하다'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심판주로서의 취임과 더불어 그의 제자 열 둘도 심판과 영광의 자리에 앉아서 예수의 보조 심판자로서의 역활을 담당하게 된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예수를 따르던 성도들이 마지막 날에 인자와 함께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사상은 신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눅 22:30;고전 6:2).
한편 예수의 사도와 이스라엘 족속의 '열 둘'이 일치하는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예수의 사후, 가룟 유다의 자살로 공백이 된 사도의 자리는 반드시 메꾸어 져야 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열 두지파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지는 분명치않다. 즉 (1) 열 두 사도들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열 두 족속을 심판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2) 새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교회 전체(계 21:12-14)에 대해 심판을 행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혹시 (3) 열 두 사도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재판장의 역할을 담당할 메시야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점이다(계 20:4).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메시야 되신 예수를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Baumgarten, France).
한편 본문의 '심판하리라'는 말은 선악(善惡)을 구분하고 형벌을 선언하는 심판의 주체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심판의 주권(主權)은 오직 예수 한 분만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심판하다'는 말이 '판결하다'는 뜻 외에 '통치하다'(시 9:4, 8) 또는 '감독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본문의 이 말은 12제자들이 예수의 권위를 덧입어 그분의 심판의 모든 절차를 보좌하고 대행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19:29
@내 이름을 위하여 - 막 10:29에 의하면 '복음을 위하여'로 또 눅 18:29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로 표현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본문의 이름에 해당하는 원어 '오노마'(* )는 자기 자신을 알리는 것, 즉 계시 또는 복음, 하나님 나라 등으로 대치될 수 있는 용어이다.
@집이나...전토를 버린 자마다 - 여기서 예수의 권고는 열 두 제자들에게만 안정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헌신(獻身)하는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그 대상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특별히 예수께서는 당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을 세 가지 차원 (1) 광의적 의미의 가정(집) (2) 친족(자매, 부모, 자식) (3) 소유(전토) 등으로 구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구하셨던 3중적 포기(창 12:1)와 비교할 만하다.
실로 예수 자신도 복음 전파를 위하여 집을 떠나고 그의 모친과 동생을 떠나시었다(12:46-48). 정녕 이러한 떠나는 믿음은 얻는 축복으로 넉넉히 보상될 것이다.
@여러 배(倍)를 받고(* , 헤카톤타플라시오나) - 문자적으로 '일백 배'를 의미한다(막 10:30). 이에 비해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을 '폴라플라시오나'(* ), 즉 '여러 배'로 표현하였다(눅18:30). 이러한 차이는 본문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이라고 할수 없다.
여하튼 예수의 이 언약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일백 배 또는 여러 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수를 먈한다. 실로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집, 부모, 형제를 버린자는 신앙 공동체(信仰共同體)의 일원으로서 영적 가족이 되어 수많은 신앙의 형제 자매를 얻게 될 것이다(12:49, 50). 또한 그는 비록 물질은 상실했지만 물질보다 더 영원하고 가치있는 참 평안과 사랑과 행복의 실제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얻게 될 것이다.
@영생을 상속하리라 - 마가에 의하면 백 배의 축복은 이생에서 핍박과 더불어 받는 것이며 영생의 축복은 내세에서 받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다(막 10:30).
성도가 이세상에서 자기 희생의 대가로 받는 축복은 물질적인 차원의 풍족함이며, 내세에서 받는 축복은 영적인 차원의 풍성함, 즉 영원한 생명이 될 것이다.
한편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그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5:5;21:38;25:34). 그러나 분명히 인식할 사실은 영생은 가정과 재산을 버린 것 그 자체에 대한 보상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핍박받은 것에 대한 공로의 보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정 그것은 지금까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구원된 삶을 누리고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19:30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대한 교훈의 결론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유대의 격언으로, 다음 장에(20:1-16)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서론으로 사용됨으로써 부자에 대한 이 교훈과 비유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이격언은 메시야 왕의 통치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역전(大逆轉)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된 자, 나중된 자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1)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날에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자는 가난하게 되고 가난한자는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주장이 그러한 윤회(輪廻)로서의 역전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2) 많은 교부(敎父)들은 먼저 된 자는 유대인이며, 나중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하였다(Clarke).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본 장에서 그렇게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3) 어떤 학자는 서로가 먼저 된 자라고 주장하며 논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 주장은 오히려 18장에서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하 두 견해가 가장 적절한 해석인듯하다. (4) 카슨(D.A. Carson)에 의하면 이 격언은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권세가 있던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역시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낡은 유대식 관념(觀念)을 모두 부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5) 한편 또 다른 학자는 이 격언이 사용된 막 10:31과 눅 13:24-30에 의하면 나중이라는 의미가 천국 안에서의 '나중된 자'가 아니라 '그 나라밖에 있는 자'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먼저된 자'는 그 나라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은 이미 그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했다고 믿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의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마지막 날 그 나라에서 쫓기움을 당할 것이요, 세리와 창녀등 스스로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주를 따른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영적 우월 의식과 특권의식을 철저히 경계하시고, 대신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과 온유와 순결한 영혼을 인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천국 시민관이라 할 수 있다.
===
https://m.blog.naver.com/ahav_yeshua/50087893885 히브리문화로 보는 유대인의 약혼(정혼)과 결혼
==========
===하나님의 지고지선, 완전한 아가페사랑의 3가지 측면===
@@은혜(십자가로 이루신 구속/회복의 사랑, 곧 은총)를 통하여 주님과 화목함(하나됨..하나님의 소유된 영광의 반사, 영광 공급의 통로 삼으심)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자신의 모든 것을 (믿음을 통해) 누리도록 하심으로 평강안으로 이끄심.....
@@긍휼을 통하여 체휼하시는 사랑(환난과 고난, 역경 중, 특히 죄인괴수의 자각가운데 전적으로 무력한 피조물로서 주의 도움없이 살 수 없음 호소할 때, 불쌍히 여겨 친히 아파하며 동감/동정/공감하사 동행/인도하며 일으켜 세우심으로 은총 누림안에 머물도록 하심)으로 평강안으로 이끄심.....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은 자비mercy와 긍휼compassion로 나타남]자비는 십자가대속사건으로 꽃을 피우고 주님말씀 믿고 영접함 통해 자기를 열어드린 이마다 새로운 창조안의 자녀로 삼으심의 은혜를 베푸심!!....은혜를 온전히 이루는 사랑은 하나님의 체휼하시는=오래참으시며 용서하시고 도와 일으키시는 사랑, 인자/긍휼임)
@@평강(임마누엘하나님이 반석-방패-산성/요새-목자 되심 믿고 붙듦으로 인해 조성된 생명의 번성번영창대케 됨, 그것을 통해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의 근원이신 주님 발견하고 그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여 동행하며, 주뜻 안에 하나되어 살아감)....이 평강으로 인해 참된 형통, 곧 하나님의 지고지선의 진복의 실제의 어떠함이 나타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