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4.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행14.이고니온_루스드라[선천성하지마비치유/경배만류/돌에맞는바울]_더베:복귀(루스드라/이고니온/안디옥/버가/앗달리아/안디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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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4장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전도하다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다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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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s 14 Amplified Bible

===Acceptance and Opposition

1 Now in Iconium Paul and Barnabas went into the Jewish synagogue together and spoke in such a way [with such power and boldness] that a large number of Jews as well as Greeks believed [and confidently accepted Jesus as Savior]; 

2 but the unbelieving Jews [who rejected Jesus as Messiah] stirred up and embittered the minds of the Gentiles against the [a]believers. 

3 So Paul and Barnabas stayed for a long time, speaking boldly and confidently for the Lord, who continued to testify to the word of His grace, granting that signs and wonders (attesting miracles) be done by them. 

4 But the people of the city were divided; some were siding with the Jews, and some with the apostles. 

5 When there was an attempt by both the Gentiles and the Jews, together with their rulers, to shamefully mistreat and to stone them, 

6 they, aware of the situation, escaped to Lystra and Derbe, [taking refuge in the] cities of Lycaonia, and the neighboring region; 

7 and there they continued to preach the good news.

8 Now at Lystra a man sat who was unable to use his feet, for he was crippled from birth and had never walked. 

9 This man was listening to Paul as he spoke, and Paul looked intently at him and saw that he had faith to be healed, 

10 and said with a loud voice, “Stand up on your feet.” And he jumped up and began to walk. 

11 And the crowds, when they saw what Paul had done, raised their voices, shouting in the [b]Lycaonian language, “The gods have come down to us [c]in human form!” 

12 They began calling Barnabas, Zeus [chief of the Greek gods], and Paul, Hermes [messenger of the Greek gods], since he took the lead in speaking. 

13 The priest of Zeus, whose temple was at the entrance of the city, brought bulls and garlands to the city gates, and wanted to offer sacrifices with the crowds. 

14 But when the apostles Barnabas and Paul heard about it, they [d]tore their robes and rushed out into the crowd, shouting, 

15 “Men, why are you doing these things? We too are only men of the same nature as you, bringing the good news to you, so that you turn from these useless and meaningless things to the living God, who made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everything that is in them. 

16 In generations past He permitted all the nations to go their own ways; 

17 yet He did not leave Himself without some witness [as evidence of Himself], in that He kept constantly doing good things and showing you kindness, and giving you rains from heaven and productive seasons, filling your hearts with food and happiness.” 

18 Even saying these words, with difficulty they prevented the people from offering sacrifices to them.

19 But Jews arrived from Antioch and Iconium, and having won over the crowds, they stoned Paul and dragged him out of the city, thinking he was dead. 

20 But the disciples formed a circle around him, and he got up and went back into the city; and the next day he went on with Barnabas to Derbe. 

21 They preached the good news to that city and made many disciples, then they returned to Lystra and to Iconium and to Antioch, 

22 strengthening and establishing the hearts of the disciples; encouraging them to remain firm in the faith, saying, “It is through many tribulations and hardships that we must enter the kingdom of God.” 

23 When they had appointed elders for them in every church, having prayed with fasting, they entrusted them to the Lord in whom they believed [and joyfully accepted as the Messiah].

24 Then they passed through Pisidia and came to Pamphylia. 

25 When they had spoken the word [of salv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in Perga, they went down to Attalia. 

26 From there they sailed back to [e]Antioch, where they had been entrusted to the grace of God for the [f]work which they had now completed. 

27 Arriving there, they gathered the church together and began to report [in great detail] everything that God had done with them and how He had opened to the Gentiles a door of faith [in Jesus as the Messiah and Savior]. 

28 And they stayed there a long time with the disciples.

===Footnotes

Acts 14:2 Lit brethren.

Acts 14:11 An ancient dialect no longer known.

Acts 14:11 Lit having become like humans.

Acts 14:14 This was the customary Jewish response to blasphemy, which in this case was appropriate because the apostles were wrongly being identified as gods.

Acts 14:26 This was the third largest city in the Roman Empire and was part of the province of Galatia.

 

Acts 14:26 The first missionary journey lasted about eighteen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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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장 (개요)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전도로 말미암아 복음이 더욱 확장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복음은 비록 불신앙의 유대인들의 반대에 직면하였지만 계속 정복하고 또 정복하였다.

Ⅰ. 사도들은 일시적으로 이고니온에서의 복음 전도에 성공하였으나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포함한 박해자들의 박해로 추방당하여 어쩔 수 없이 이웃 지방으로 떠난다(1-7).

Ⅱ. 사도들이 앉은뱅이를 고친다. 이를 보고 백성들이 그들을 높이 추앙하나 사도들은 저들의 극단적인 숭배 행위를 막느라고 무던히 애를 쓴다(8-13).

Ⅲ.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백성들이 격분하여 사도들을 박해하여 돌로 쳤다. 그들은 사도가 죽은 줄로 여겼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소생하였다(19,20).

Ⅳ.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이 세운 교회들을 방문하여 굳게 하고 그들을 조직한다(21-23).

Ⅴ. 그들은 그들이 출발한 안디옥에 돌아왔다. 그들은 도중에서 좋은 일을 행하였고 도착하여서는 전도 여행에 대하여 안디옥 교회에 보고하였다(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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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전도하다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이고니온에 온 바울(행 14:1-7)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이고니온에서의 복음 전파. 이고니온은 안디옥을 떠나서 도착한 곳이었다.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를 일으키는 씨앗이 되듯이 신앙인들을 추방하는 것은 씨앗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는 효과를 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최초로 전할 때에 이용한 방법. 

그들이 그곳에 간 것은 집회처이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도들은 어디가든지 먼저 유대인을 찾아갔다.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야만스럽게 다루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전하기를 기피하지는 않았다. 

이곳의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호의를 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 때문에 전체를 정죄하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또한 타인의 잘못으로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입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로 선을 행한 수 있어야 한다. 

"피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지만 정직한 자는 그들의 생명을 찾아야 한다"(잠 29:10). 즉 그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한글 개역과 다소 내용이 틀림:역자 주).

2. 사도들은 서로 협력하였다.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행동은 그들의 단합심과 상호간의 애정을 나타내 주었고 청중들은 그들의 행위를 보고 "보라 저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라고 말하며 경탄하였고 기독교를 더욱 좋게 여겼다. 

사도들은 서로 서로 격려하며 상대방의 증언을 지지하였다. 즉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엇이든 세움을 입느니라"는 말씀과 같다. 

그들은 하루는 이 사람이 가고 다른 날에는 다른 사람이 가지 않았다. 또는 한 사람은 시작할 때 가고 다른 사람은 그 후에 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둘이 함께 갔다.

Ⅱ. 거기서 그들의 복음 전도의 성공. 

"그들이 말하니 허다한 무리" 수천 명은 아니더라도 수백 명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닌 헬라인들이 "믿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이제 복음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함께 전파되었다. 

그리고 양측의 믿는 사람들이 함께 교회를 이루었다. 

앞의 장(章)에서는 복음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어 그들 몇 사람이 믿었고 다음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 그들 얼마가 믿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들은 같이 모였고 또 함께 복음을 들었다. 

유대인들은 뒤로 쳐져서 그들에게 복음이 먼저 전해지는 특혜를 포기하려하지 않았고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서로 양해가 이루어져 있었다. 

"둘이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다"(엡 2:16). 그리고 둘이 함께 차별없이 교회에 용납되었다.

2. 이곳에서의 사도들의 복음 전파는 두드러진 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성공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그들이 말하니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들은 아주 분명하게 또 확신있게 또 명백한 증거 자료를 제시하며 성령의 감동으로 능력있게 전하였다. 또한 그들은 온화하고도 열정적으로 전하였다. 

그들이 인간의 영혼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의식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확신하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였다. 

그들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따라서 듣는 이들의 마음에까지 파고 들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열성으로 진지하게 또 용기를 가지고 대담하게 전했으므로 듣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진리로써 그들과 함께 하심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복음 전도의 성공은 그들의 전파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그 방법을 사용하게 하신 하나님의 성령이었다.

Ⅲ. 그들의 전도가 반대에 부딪치다. 

그리고 이 고통은 사도들이 개종한 무리들과 함께 자만하게 되지 않도록 주어진 것이었다. 즉 그들에게 이 육체의 가시가 주어진 것이다.

1.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화근이 되었다(2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였다." 

복음은 많은 이방인들에게 감화를 주어 그들이 믿게 하였다. 또한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어떤 유대인들에게는 자극아 되어 역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롬 11:14). 

이와 반대로 복음은 어떤 이들에게는 악한 시기심을 일으켜 복음 대적하는 일을 전개하게 하였다. 

이 사실은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향기가 되며 다른 이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로는 독소가 된다는 좋은 교훈이요, 좋은 표본이다. 고린도 후서 2장 15, 16절을 참고하라.

2. 안 믿는 유대인들의 자극으로 복음에 감화되지 않은 이방인들도 사도들의 고통의 도구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거짓된 말로써 이방인들의 귀를 계속 현혹시켰다. 그리고 그대로 버려두면 복음에 대하여 호감을 가질 수 있는 그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무리들을 선동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아는 시람들을 일삼아 찾아가서 갖은 악랄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기독교를 중상하였다. 

그들은 기독교가 저들의 이교의 교리와 예배를 파괴할 것이 틀림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저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보다 이방인으로 있는 것이 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같이 하여 그들은 저들이 개종시키려는 자들과 개종한 자들에 대하여 악감정을 품게 하려 하였다. 

"옛 독사는" 독있는 혀를 날름거리며 "여인의 후손들인" 이들 이방인들의 마음에 독을 뿜어댔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에 "독초와 쑥의 뿌리가 생기게 하였다." 

선한 사람들에게 악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그들을 향하여 험담을 퍼붓고 악인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에 악감정을 품게 하였다(또  어떤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그들이 계속 지나친 아첨을 떨어 이들의 비위를 맞추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박해자들은 개와 같이 비굴해지고 만다.

Ⅳ.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일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셨다(3절).

1. 사도들은 그들에게 맡기어진 위탁에 따라 성실하고 근면하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였다.

 "이방인들이 그들을 향하여 악감을 품으므로" 그들은 복음전하는 일을 쉬든가 서둘러서 다른 곳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또는 그들이 복음을 전한다 해도 이미 격분되어 있는 그들을 더욱 자극할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전파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로 "두 사도가 거기 오래 있으매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했다." 

사도들은 새로운 개신자들을 향한 아음의 원한과 증오가 극심할수록 더욱 힘을 내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였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할" 필요를 더욱 강열하게 느꼈다. 

"그들은 담대히 말하였다." 그리고 안 믿는 유대인들의 비위를 상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았다. 안 믿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사도들에게 이루어졌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너희 얼굴을 굳게 하였다"(겔 3:7-9). 그러면 그들에게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였다." 즉 그의 주시는 힘으로 또한 그들로 증거케 하시는 분을 의지함으로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할 수 있었다."

2. 그리스도는 "볼지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약속에 따라 사도들과 함께 역사하셨다. 

그들이 그의 이름과 힘을 의지하여 나갈 때 그는 그의 은혜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시지 않았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복음은 은혜의 말씀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확신이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선한 일의 수단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이다. 그의 안에서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옷 입을 수 있다.

(2) "아멘이시요 신실한 증인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이 은혜의 말씀의 증거가 되셨다. 

그는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우리의 영혼을 그 말씀의 의탁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의 첫 번째 전도자들에 관하여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고 일반적으로 말씀되었다. 

본문에서는 특히 사도들에 관하여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고 기록되었다. 

그들은 말씀에 의해 자연 세계에 기적을 이루어 놓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말씀으로 기사를 행하였는데 신의 은총의 능력에 의하여 인간들의 마음에 더 큰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이 주님 안에 거하므로 주님도 그들과 함께 하시어 많은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Ⅴ.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성내 무리가 둘로 나뉘었다(4절). 

"성내 무리가 두 집단으로 나뉘었는데" 양쪽 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관원들과 지체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안 믿는 유대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사도들을 지지하는 측도 있었다. 

바나바는 열두 사도의 하나도 아니며 또 바울처럼 특별한 부르심을 입은 것도 아니었지만 본문에서 사도라고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방인을 섬기는 일에" 그를 특별히 임명하시어 구별하셨기 때문이다. 

이 복음 전도 사업이 너무나 잘 알려졌으므로 "성내의 무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편이 되든가, 그것을 대적하든가 할 수밖에 없었다.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를 택할 것이냐, 아니면 원수들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바알일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바울세불인가"택해야 하는 것이다.

1.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가 "세상에 화평은 주려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신 예언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눅 12:51-53). 

만일 모든 사람이 일치하여 그를 따른다면 모두가 합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복음에 동의만 하면 다른 일에 있어서 불일치와 불화의 위험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분열이 생기니까 그들의 간격은 바다처럼 넓어졌다. 

사도들이 이 성에 오기 전에 성내가 단합되었고 지금 분열이 생겼다고 해서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이 비난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온 성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분이라도 하늘에 가는 것이 차라리 낫기 때문이다.

2. 우리가 본문에서 얻게 되는 교훈은 무엇인가? 

먼저 복음 전파가 분열이 생기게 하여도 이상히 여기거나 마음을 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파멸로 흐르는 냇물에 자신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것보다 흐름을 역류하여 헤엄치므로 분리자라고 비난을 받고 핍박을 당하는 것이 차라리 낫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도들의 뒤를 따르자. 그리고 유대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Ⅵ. 사도들에 대한 적들의 음모. 

사도들에 대한 그들의 악한 열심은 결국 폭력으로 폭발되었다(5절). 

다음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음모자. 

그들은"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은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그러나 헤롯과 빌라도가 한편이 되었고, 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한편이 되어 그리스도를 대적한 것처럼, 또한 구약에서 "게발과 암몬과 아말렉이 합세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한 것처럼 그들도 기독교인에 대하여 합세하여 대적하였다. 

만일 교회의 적들이 교회를 파멸시키려고 이와 같이 연합한다면 교우들도 모든 개인적인 감정은 제쳐놓고 교회의 보존을 위하여 연합해야 되지 않을까?

2. 음모의 내용. 

그들은 관원들을 자기들의 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지체없이 계획을 수행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두 사도를 능욕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고 그 다음 "돌로 쳐서" 그들을 죽이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지금 벌어진 문제가 진압되기를 바랐다. 

그들은 사도들의 명성과 생명을 취하려고 계획하였다. 실상 사도들에게는 토지도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Ⅶ. 악하고 이성을 잃은 무리들의 손에서 사도들이 도망하였다(6, 7절). 

그들은 이들의 음모를 사전에 눈치채고서 도망하였다. 

사도들은 이들이 막 그들의 음모를 착수하려 할 때 곧 이를 눈치채고서 "루스드라와 더베"로(불명예스러운 도피가 아니라) 명예로운 퇴각을 하였다.

1. 거기서 그들은 안전을 찾았다. 

이고니온에서의 박해자들은 사도들을 그들 지방 밖으로 좇아낸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폭풍 속에서도 쉴 곳을 마련해 주신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영원히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2. 여기서도 그들은 일거리를 발견하였고 또 바로 이를 위하여 그들은 이곳에 왔다. 

이고니온에서의 전도의 문이 닫혀지자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문이 열렸다. 

이 성들에 가서 그곳과 "그 근방에 복음을 전하였다." 

박해시에 사역자들은 한 장소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명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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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다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남(행 14:8-18)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루스드라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바울이 기적적으로 고쳤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치료된 사람과 입장이 같았다(3:2). 

이미 3장에서의 사건으로 유대인들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으로 이방인들 가운데 전파되었다. 

이 두 사건의 영적 의미란  모든 인간의 영적인 진리(또 그로 인한  얻는 참된 자유)에 대한 전적 무기력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강건하게 하기까지 날 때부터 이미 앉은뱅이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6).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가난한 앉은뱅이의 가련한 처지(8절). 

그는 발을 쓰지 못하였다. 즉 발을 땅에 딛고 힘 주어 걷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무기력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그렇게 되어 걷지도 못하였고 서본 적도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사지를 이용할 수 있는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걷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하나만이 그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2. 그에게 치료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우러났다(9절). 

그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대단한 감화를 받았으며 그 메시지가 하늘로부터 유래된 것임을 믿었다. 

그리고 이 사자들은 하늘에서 사명을 받은 자들로 그들에게 신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러므로 그의 불구도 고쳐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바울은 그가 가진 영적 분별력에 의하여 앉은뱅이의 마음을 알았다. 

앉은뱅이의 얼굴에 이미 그러한 바람이 나타나 있었다. 

"바울이 주목하여 치료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즉 그가 치료되기를 바라는 생각이 간절한 것을 알았다. 

베드로가 치료한 앉은뱅이는 다만 구제만을 바랬지 이러한 믿음은 없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뿐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렇게 큰 믿음은 발견할 수 없었다"(마 8:10).

3. 그가 완치되었다. 

"치료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본" 바울은 "말씀으로 그를 치료하였다"(시 107:20).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불붙은 믿음이나 이 믿음에서 생긴 소망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바울은 큰 소리로 그에게 말하였다. 아마 그가 떨어져 있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참된 기적을 "엿보고 중얼거리며 속삭이는"(사 8:19) 사기꾼들이 행하는 거짓 기적과는 다른 성질의 것임을 보이려 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다(사 45:19). 바울은 주위의 사람들이 알아채고 그들도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라도록 큰 소리로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앉은뱅이가 거지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앉았다." 하였으나 구걸하려고 앉은 아니었다(8절).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다른 사람들은 걷고 있는데 자기는 걸을 수 없으므로 얼마나 처량하게 앉아 있었을까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 때 바울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는 말씀이 그에게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일어나라, 하나님이 너를 도우실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지 시도하여 보라. 그러면 네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이제 네게 말하노니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바울이 이와 같이 말하였으리라는 것은 상당히 타당성 있는 얘기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말과 함께 즉시 능력이 나타났다." 

그가 즉시 "뛰어 걷는지라"고 말씀되었다. 

즉 그가 앉았던 자리에서 뛰어 일어나서 "똑바로 서 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즉시 완전히 치료된 것을 보이기 위하여 그들 앞에서 이리저리 걸어 보였다. 

그 때에 "이방 세계의 광야가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라."한 성서의 말씀이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사 35:1, 6 .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 역자 주).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들의 영적 앉은뱅이 상태에서 치유를 받은 사람들도 거룩한 환희와 함께 뛰며 거룩한 대화를 통하여 이 사실을 나타내야 한다.

Ⅱ. 이 치료가 백성들에게 끼친 효과. 

그들은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결코 이 같은 기적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적을 보고 열광에 사로잡혔다. 

바울과 바나바는 나그네였고 망명자였으며 이곳으로 피하여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기적이 일어났으므로 사도들은 백성들에게 참으로 위대하고 영예가 높은 자들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기적을 본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최대의 모욕을 당하실 때 그를 막아 주지 못하였음을 기억하자.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백성들이 사도들을 신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인 희랍 사투리인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의기양양하게 "소리질러 말하기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구름 속에서 그들에게 내려온 사람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굉장한 능력을 지닌 자들로 상상하였다. 

이교신학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은 그들이 지상 세계에 방문한 까닭에 일어난 것이라고 엉뚱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신들이 그들을 방문할 만큼 그들이 귀히 여겨졌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생각을 비약하여 심지어는 그들의 시인들이 신들에 대하여 묘사한 것을 되살려서 누가 어느 신이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12절).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Jupiter)라" 하였다. 

그들이 그를 신으로 여겼다면 그를 그들의 최고의 신으로 생각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었다. 아마 바나바의 나이가 바울보다 많았고 보다 당당하고 우아하게 생겼고 그의 얼굴에는 위엄이 풍기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은 신들의 심부름을 하는 사자인 허메(mercury)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바울은 바나바와 같은 외모가 없는 반면에 "주로 모든 말은 그가 하였고" 말의 재능이 있었으며 또 바울의 기질상 허메와 같은 재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쥬피터가 머큐리를 데리고 나타나셨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그들을 방문할 시기가 지금이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2. 이제 제관이 "그들에게 제사할 준비를 하였다"(13절). 

쥬피터 신전은 성의 수호와 안전을 지켜 달라는 뜻에서 정문 앞에 세운 것 같다. 

이교 우상의 신전의 재관은 백성들이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즉시 힌트를 얻어 이때야말로 실력을 과시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값비싼 많은 제물들을 쥬피터 신상 앞에 드렸었다. 그런데 만일 쥬피터가 몸소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면(in propriapersona) 그것은 그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그리고 백성들도 제사에 함께 참여하였다. 

허영을 지닌 지도자들이 얼마나 쉽게 군중들의 외침에 선동되는지를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군중들이 여기 쥬피터가 오셨다 라고 외치자 쥬피터의 제관은 바로 이때라고 생각하고 즉시 일에 착수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오시어 사람의 형상을 입으시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을 때 그들은 그에게 제물을 드리고 예배하려고 하기는커녕 그를 그들의 거만과 증오의 제물로 삼았다. "그가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가 그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이 그들을 영접지 아니함 같도다"라는 말씀대로였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기적을 하나 행하였는데도 즉시 신격화되었다. 

이 세상에서의 똑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진리를 싫어하는 육적인 마음에는 엉뚱한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제물로 바치려고 소를 가져왔고 또 제물을 장식하기 위하여 화환을 가져왔다. 이 화환들은 꽃과  리본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물로 바칠 소의 뿔에 도금을 하였다. 

Ⅲ.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 대한 이러한 부당한 경의에 대하여 질색하고 전적으로 그 일을 거부하였다. 

수 많은 이방 세계의 황제들이 자칭 신이라 하였고 또 신으로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들이야말로 인류를 위해 참된 혜택을 준 사람들이지만 이들 폭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 않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영예조차도 거절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하였기에 당연히 금지시켰다. 

그런데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며"(살후 2:4) 우리 여호와 하나님처럼 행사하는 자가 있는데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교황인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을 보고 거룩한 분노를 발하였다. 

"그들은 듣고 옷을 찢었다." 

사도들은 백성들이 그들을 헐뜯고 돌로 쳐죽이자고 할 때 옷을 찢은 일은 없었다. 지금 그들은 미련없이 옷을 찢었다.

백성들이 그들을 신격화시키고 그들에게 예배하려고 하자 그들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예보다는 하나님의 영예에 더욱 관심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옷을 찢었다.

2. 그들은 이 일을 저지하려 하였으므로 오히려 고통을 당하였다. 

그들은 이 일을 묵과하지 않았고 또 "백성들이 속는다면 속으라고 내버려 두지"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백성들이 계속 현혹되도록 하면 그들의 신변도 안전할 것이고 그들의 사역도 성공할 것이라는 내부의 속삭임이 그들을 유혹하였다. 그들은 악을 선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거짓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도로 삼으심으로 그들을 영예롭게 하셨고 따라서 그들은 신들이 받는 영예나 군왕들이 받는 영예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사요 하나님의 비밀 맡은 자로 여김받는 것을" 쥬피터나 머큐리라고 칭함받는 것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면 사도들이 이 일을 어떻게 만류하였는가 살펴 보자.

(1) "그들은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이 소식을 듣자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 보려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종들처럼 무리들 가운데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그들이 신처럼 보이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이를 위하여 모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영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리들 가운데로 뛰어듦으로 명백히 그들의 잃은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들은 아론이 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산 사람들과 죽은 자들 사이로 뛰어들어갔듯이" 그러한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뛰어들었다.

(2) 그들은 백성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물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어찌하여 여러분이 우리를 신으로 섬기려 하는가? 여러분의 하는 짓이 참으로 어리석도다"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신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말한다.

① "인간의 본질을 가진 우리가 이 사실을 용납할 수 없도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는 야고보서 5장 17절에서 엘리야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된 것이다. 거기서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들은 이러한 뜻으로 말하였다. 

"우리도 사람에 불과하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요, 만약 여러분이 우리에게 또는 다른 어떤 인간에게 그 영예를 돌린다면 하나님에게 잘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요.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려야 되는 것이요, 우리는 여러분들이 보는 대로 똑같은 몸을 입었을 뿐 아니라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지녔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이 지음을 받았고(시 33:15)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과 우리도 일반이라(잠 27:19). 그러므로 우리도 같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의 지배를 받으며 똑같은 인생의 재난에 직면하여 있는 것이요, 인간일 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죄인이요, 고통을 겪는 인간이기에 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요"라고 말한다.

② "또한 우리의 가르침도 그와는 정반대인 것이요, 여러분이 모시는 신들을 멸해야 할 우리들이 여러분들의 신의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요?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허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돌아올 것을 전하였소. 우리의 할 일은 여러분들을 이 우상 숭배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임을 꼭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소"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사도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이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또 필요한 사실임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살전 1:9). 

혹자는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를 싫어하였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만 전하면 되었지 예언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였듯이 수상 숭배를 배척하는 설교를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자연 종교에 대한 그들의 잘못을 시정해 줄 필요가 있었고 그 탐욕스런 부패에서 벗어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내용을 살펴 보자.

첫째,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섬겼던 신들과 그들의 예배의 모든 의식들은 "헛된 것"이며 비합리적이요, 아무 유익도 없는 가치없는 일들로써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도 불가능하며 참된 유익을 얻는 것도 불가능함을 말하였다. 

구약에서 우상은 흔히 "허무한 것, 헛된 것"으로 불리운다(신 32:21; 왕상 10:13; 렘 14:22). 또 고린도 전서 8장 4절에는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다. 그

것들이 신처럼 가장하는 모든 것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속임수에 불과하며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다. 

우상은 스스로의 연약함의 발로로 만든 우상을 의지하고 그것으로부터 위로를 바라는 사람들을 속이는 법이기에,  에브라임이 그랬듯이 "이 헛된 것들에서 돌이키며" 그것들을 지긋지긋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호 14:8), 다시는 이런 일에 속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자요 모든 존재와 능력의 근원이시다. 

"그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셨으니 심지어 여러분이 신이라고 받드는 그것들까지 지으셨도다. 그는 여러분들의 신들의 하나님이라.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지은 살아계시며 영생하시는 유일무이하신 참 신이십니다, 여러분의 상상력으로 빚어진 피조물, 여러분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예배하고 있는 것 뿐인 바, 우리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과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에게 참되게 예배하기를 바랍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십시다. 그리고 스스로 속지 마시오.  만물의 통치자이신 여호와를 섬기고 그의 피조물이며 그의 소유물에 절함으로 스스로를 경멸치 마시오"라고 말한다.

셋째, 그가 세상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그들의 우상 숭배로 벌써 멸망시킬 것을 참으셨다고 한다(16절). 

"지나간 시대" 즉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를 "하나님이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다."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고 돌아오라고 청함을 받은 이들 우상 숭배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신들을 섬겨오지 않았는가. 또한 우리의 조상들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에서부터 그렇게 해오지 않았는가. 이 일이 잘못된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 신들을 잘 섬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버려두신 것은 하나님의 참으심 때문이며 그들이 끊기지 않은 것도 자비의 기적이라고 사도들은 말한다. 

비록 그들이 무지한 상태에 있어 더 이상 알 수 없을 동안은 우상 숭배로 인하여 멸망받지 않았으나(17:30) 이제 그가 세상에 그의 복음을 전하사 이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자신과 그의 뜻을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족속들에게 분명히 나타내셨으므로 그들이 우상 숭배를 계속하면 그가 앞으로는 지금처럼 참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신의 계시의 혜택을 받지 못한 모든 민족들 즉 유대인들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는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저지하고 인도해 줄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서도 없었고 예언자들도 없었고,  있었다 하면 그들 자신의 양심과 생각뿐이었다(롬 2:15). 그러므로 그 때에는 그들이 잘못된다 하여도 더 많이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알리어질 계시를 세상에 보내셨으므로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참으사 그들의 길대로 걷게 하시고 자기의 마음의 욕망을 따라 행하도록 버려두신 것을" 모든 민족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을 제하실" 때가 된 것이다(사 25:7).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이들 헛된 것에 머물면 용서받을 수 없으므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참으심은 "우리로 회개하게 하려 하심이요" 그를 거스려 행한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반역하도록 하려하심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우리가 무지할 때에 잘못을 행한 것이 우리가 더 나은 가르침을 받는 지금에도 잘못을 행할 수 있는 핑계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적인 지시와 교정 아래 있지 않다고 해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하여 더욱 바르게 행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17절). 

유대인들이 모든 거짓 신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입증할 수 있었던 "법령과 구체적인 심판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는 없었고 또는 증거판이나 증거의 장막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었다"(자연적인 양심이 지시하는).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많은 증거를 각자의 양심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성서가 없었으므로 그들이 부분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하여 그가 유대 민족들에게 하시었듯이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사실이 모든 변명의 이유가 될 수는 결코 없었다. 

이 사실 외에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수없이 많은 죄를 범하였다. 그들에게 오직 그 분만이 예배되어야 한다는 충분한 다른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또한 그에게서 온갖 은혜를 공급받았고 온갖 위로를 받았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한다는 것은 가장 부당한 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하나님은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도 아니였고" 아무러한 지시도 없이 버려두시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명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에게만이 합당한 영광을 다른 것들에게 돌린다면 하나님을 입증해 주던 것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고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1. 풍부한 하나님의 일반 섭리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섭리들은 모두 잘 계획적으로 배열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와 결실의 계절"은 우연히 온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떠한 이방의 헛된 것들도 비를 내릴 수는 없었다. 또한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렘 14:22). 

모든 자연의 힘들이 자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힘을 우리에게 증거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은 유래되었고 또 그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비를 주신다. 그는 비를 내리시는 아버지이시다(욥 28:28).

2.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증거들을 통해 얻는 유익으로 인하여 우리를 섬기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을 섬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같이 만드신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 자기가 하신 선한 일을 통하여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위대함을 증거하시는 것보다 그의 선하신 사례들을 베푸시는 것이 그의 칭호에 대한 우리의 찬양을 일으키게 하는 더 좋은 증거들이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선하심이 곧 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땅이 그의 선하심으로 충만하며 그의 자비가 모든 그의 지으신 것에 충만하도다." 

그러므로 "저들이 주를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시 145:9, 10). 

하나님이 우리를 선대하시되 그의 공기로 우리를 숨쉬게 하시며 그의 땅에서 걷게 하시며 그의 태양의 빛을 주사 우리로 보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우리에게 매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사도는 특히 이 사실을 택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신가를 보이셨다.

(1) 우리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시는데 이 음식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긴 과정에서 하나님은 첫째 동기가 되신다.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라엘에 응하리라"(호 2:21, 22). 

그는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주심으로 선을 행하신다. 비로 인하여 우리는 마실 물을 얻는다. 왜냐하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샘이 솟지 못할 것이요, 그러면 우리는 모두 갈증으로 곧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는 우리의 대지를 촉촉히 적신다. 우리가 비로부터 마실 것을 얻듯이 식물도 비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비를 주심으로 그는 "우리에게 결실기를 주신다." "만약 하늘이 철과 같이 된다면 땅은 놋과 같게 될 것이다"(레 26:19). "땅을 비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이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곡식을 주신다."(시 65:9-13). 

모든 하나님의 일반섭리 가운데 이방인들이 최상의 하나님을 알게 하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며 그에 대한 외경을 가지게 하는 뇌성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쥬피터를 우뢰의 신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쥬피터가 그의 손에 우리를 쥐고 다스리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시편 29편 3절에 보면 하나님도 우뢰를 다스리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논증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좋게 생각하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다. 즉 사람이 그에게 선을 베푸는 자에게 잘하듯이 우리 모두에게 선을 베푸는 그 분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그 분에게 감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어느 때든지 가뭄이 들거나 흉년이 닥치면 우리는 스스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임하던 "온갖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서 가져가시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랑을 멈추심은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족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가 크시며"(롬 10:12)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즐기게 하신다"(딤전 6:17). 

그는 우리의 은인일 뿐 아니라 모든 것에 넉넉하신 분이시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뿐 아니라 그것들을 즐기게도 하신다(전 2:24). "그가 음식으로 우리를 배불리시며" 즉 그는 우리 마음에 만족할 정도로 또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주신다. 겨우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풍부하고 맛있는 것으로 골고루 먹을 것을 주신다. 

그를 알지 못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민족들에게까지 "그는 좋은 음식으로 그들의 집을 채우시며 그들의 입을 채우시며 그들의 배를 채우신다(욥 22:18; 욥 17:14).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산다고 하는" 이방인들도 실상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도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셨다(마 5:44, 45). 

이들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까지 먹는 것으로 가득찼다. 먹을 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유일한 축복이요 위로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로는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겔 7:19). 또한 그들의 영혼의 고귀함을 바르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도 못한다. 

이제 사도들은 그들을 신의 은혜에 참여한 자로서 취급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음식과 기쁨으로 족하게 만들고자 하실 때 이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데 필요한 음식뿐만 아니라 기쁨으로도 채우므로 기쁘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의 날들 가운데 슬픔 속에서 음식을 먹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음식뿐만 아니라 그가 주신 기쁨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을 기억하자. 그가 우리에게 기쁨을 남겨 주셨고 그러한 이유를 허락하시사 진심으로 즐거울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하자.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음식과 기쁨으로 가득찼다면" 또한 이 마음을 사랑과 감사로도 채우자. 

그리고 우리의 본분을 다하고 복종하도록 더욱 노력하자(신 8:10; 28:47).

마지막으로 사도들이 백성들을 만류하려는 노력이 성공한다(18절).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였다" 

우상 숭배자들의 우상을 높이려는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신이 되는 것을 거절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은 도저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이 일의 악함을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겨우 그들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관이 그의 일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이교도의 우상 숭배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제작자에게 돌려야 할 것을 그 도구(수단)들에게 돌려버림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앉은뱅이를 치료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이러한 능력을 그들에게 주신 데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인간을 신격화하였다.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영예를 다른 사람에게나 또는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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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로 침을 당함(행 14:19-28)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더욱 봉사하고 또 고통을 당한 사실에 대한 설명을 대하게 된다.

Ⅰ. 바울이 돌에 맞아서 죽게 되었으나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함(19, 20절). 

그들은 바나바보다 바울을 향해 덤벼들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는 자로서 바나바 이상으로 그들을 성나게 하고 초조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백성들이 바울에 대하여 격노하였다.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어떤 해로운 짓을 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만일 그들이 이 일로 모욕을 당했다고 여겼다면 그들이 그에게 신이 받을 영예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잘못이라면 쉽게 용서랄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왔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초조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도들을 거스려 백성들에게 아첨하여 사도들을 평화를 해치는 가짜의 선동적이고 위험한 인물들이라고 중상하였다.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분노가 어떠하였는가를 기억해 보자.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이 어느 곳에고 발붙이게 된다는 것을 참지 못하였다.

2. 이들 무지한 유대인들에 의하여 백성들은 현혹되었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돌로 칠 정도로 흥분하였다. 법적인 재판에 의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군중의 소요 속에서 그렇게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그에게 돌을 던져 쓰러뜨렸고 그리고 그 성에 살아서는 안 될 사람처럼 끌 것인지 마차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성 밖으로 끌어 내쳤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장사지내려 하였다. 

타락하고 속세적인 마음은 악에 대한 편향심이 강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을 제어하기는 대단히 어렵겠지만 반면 악에게 설득되기를 대단히 쉽다. 

육욕적이고 속세적인 사람들의 심령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그들은 사물에 대하여 깨닫지도 못하고 생각할 줄도 모른다. 

한 때는 사도들을 인간 이상으로 대우하던 그들이 이제는 사도들을 짐승보다 도 못한 존재로 가장 악한 자요 해로운 자로 다루었다. 

오늘은 호산나라고 찬양하고 내일은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외친다. 오늘은 그들에게 제물을 갖다 바치고 내일은 그들을 제물로 삼으려 한다. 

28장에 보면 또 다른 인간의 변덕스러운 실례를 보게 된다. 4절에서는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하고 6절에서는 "신이라고 하였다." 대중의 인기란 바람과 같이 변화무쌍하다. 만일 바울이 머큐리인 척하였다면 그는 옹립되어 사당에 자리잡고 앉았으리라. 그러나 그는 성실한 그리스도의 사역자였기에 돌에 맞아 성 밖에 버림을 당하였다. 

루스드라 사람들같이 강한 유혹에 쉽게 복종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싫어한다.

3.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구출되었다. 

그를 "성 밖에 끌어 내치니 제자들이 그를 둘러 서 있었다"(20절) 

본문을 보면 사도들을 신격화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거절하는 틈바구니에서 중용을 위하여 제자들이 된 사람들 몇이 루스드라에 있었던 것 같다. 

이들 새로운 개종자들은 바울을 친 바로 그 돌들이 자기들이 그를 두둔하였기에 그들도 칠 수 있으리란 것을 충분히 두려워할 만하였지만, 그가 쓰러졌을 때 그를 지킬 용기를 자기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더 이상의 백성들의 광분에서 그를 지키려는 듯 그를 둘러 섰다. 또한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기 위하여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일어났다. 

그가 죽지는 않았지만 그는 심하게 돌로 맞아 상처를 입고 기절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가사 상태에 있었고 그러므로 기적이 아니고서는 그가 곧 제 정신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곧 성내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비록 그들이 죽음 직전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또한 친구들이나 원수들에게 죽은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붙드시는 한 결코 죽지 않는다. 그들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 4:9).

Ⅱ. 사도들은 이러한 반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명을 계속하였다. 

백성들이 아무리 바울에게 돌을 던진다 하여도 그를 그의 사명에서 물러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쳤다"(19절). 

그러나 그는 마치 그들을 무시하기나 하는 것처럼 다시 "성으로 들어와" 그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아무 것도 그를 움직일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곳이 그들을 핍박하므로 다른 유익한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즉시 루스드라를 떠났다.

1. 그들은 이곳을 떠나 더베로 가서 새로운 땅을 갈아 엎었다. 

다음 날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출발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복음을 전하였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21절) 

디모데는 더베 출신인 것 같아 보인다. 그는 지금 바울에게 수종을 들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안디옥에서 바울을 만나 모든 전도 여행에 바울을 수행한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사건에 대하여 디모데에게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보고 알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딤후 3:10, 11). 

더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2. 그들은 이제 되돌아가면거 그들이 심은 것을 물을 주며 그들이 복음 전하던 곳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들은 더베에서 충분하다고 여겨지리만큼 거한 다음 그들이 전도하였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다시 순회하였다(21절). 

우리는 그들이 기초를 다지고 좋은 일을 착수할 때의 사용한 방법에 대하여 교훈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그 기반 위에 건물을 세우며 좋은 일을 착수하는 방법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교훈을 얻게 된다. 

그들이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고찰하자.

(1) "그들은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였다." 

즉 그들을 굳건하게 세우기 위하여 교훈들을 되풀이하여 전해 주었다(22절). 

초신자들은 흔들리기 쉽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충격을 받는다. 또 그들의 옛날 친구들은 그들을 향하여 자기들을 떠나가지 말라고 간청한다. 즉 자기들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그들이 돌아선 일의 모순됨과 온당치 못함과 위험성을 그들 앞에 제시한다. 그들은 윗 사람들의 권유에 의하여 그들의 조상들의 전통을 고수하도록 권유를 받는다. 또한 그들은 흐름을 역류하여 헤엄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생각하고는 깜짝 놀란다. 이러한 모든 유혹들은 그들도 적절한 시기에 물러서야 되겠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 때에 사도들이 와서 그들에게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은총이니 그 안에 굳게 거하라"고 권하였다. 

또한 그들이 그 안에 굳게 섬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는 것이 흔들리지 않도록 할 것과 아무도 그들이 붙잡고 살려고 하는 삶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하였다. 

어떠한 시련이 닥치든지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그리스도께서 주실 것이라고 권하였다. 그들이 손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더욱 풍성하게 보상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말씀들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이 말씀은 그들의 경건한 결심을 든든하게 하였고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처음 믿은 사람들의  믿는 마음을 다시 확고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심기워진 자는 뿌리를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사역자들이 할 사명은 죄인을 일깨우는 일뿐 아니라 성도들을 굳게 세우는 일이다. 

유지 보존한다는 것이 때로는 무엇을 얻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다. 진리에 대하여 교훈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교훈을 받는 사실들의 확고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결심한사람들은 그들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야 한다.

② 참된 확고함은 영혼이 확고하게 되는 것이다. 

변절자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형벌은 인간의 몸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속박해야 한다.

 훌륭한 사역자들은 적절히 압력을 가함으로 영혼을 그리스도 안에 속박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못지 않게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변절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2) "그들은 이 믿음에 거하라고 권하였다." 또는 "그들을 격려하였다"라고 읽을 수도 있다. 

성도들에게 끝까지 견디는 것이 그들의 임무요 또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함을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이 필요함을 말하였다.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이 세상의 애환으로 인해 신앙을 포기하라는 온갖 유혹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거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자주 교훈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끊임없이 변절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은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교훈으로 계곡 권면함으로써 경성시킬 필요가 있다.

(3) 그들이 가장 많이 주장한 것은 "성도들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 하늘 나라에 가도록 예정된 모든 사람들을 그곳으로 가다가 시련과 핍박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며" "믿음에 거하도록 하는 것이 될까" 염려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로 불안하게 하지나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바르게 알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굳게 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환란에 직면하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많은 고난을 받아야 될 것이다. 때로 최악의 환란에 직면하게도 된다. 그러나

① 이 일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들은 고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을 피할 길은 없다. 만사는 결정되었으므로 변경시킬 도리가 없다. 

우리를 그의 주권에 의하여 다스리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모든 사람들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운명으로 정해 놓으셨다. 

우리에 대하여 주권적인 명령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정하시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이름을 포기할 때 고통을 감수할 것도 동의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앉아서 값을 치루실 때 우리가 바로 계산하였다면 고통은 우리가 치루어야할 대가다. 

그러므로 "말씀 때문에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면" 사전에 미리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신 것을 수행하신다." 이 사실은 변경할 수 없는 사실로 정하여졌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바윗덩이를 그 자리에서 옮길 수가 있는가?"

② 환란은 군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군대의 지휘관들이 겪어야 할 운명이다. 

환란은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들의 고통이 너희에게 거침돌이 되지 말아야 하듯이 우리의 환란이 우리의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데살로니가 전서 3장 3절을 보라.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가 섬기신 이상의 섬김을 요구하지 않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자기들이 섬긴 섬김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③ 우리가 환란을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고무하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능히 환란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란을 당한다 하여 실패하고 멸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환란은 홍해와 같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이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다. 우리는 고난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올라올 수 있는 것이다.

④ 우리는 환란을 겪지만 환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끝날에 우리가 맛볼 기쁨과 영광은 우리가 그 길을 가면서 당한 모든 어려움과 곤경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 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곧바로 길을 가고 곁길로 빠지거나 뒤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면류관을 얻게 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고 믿는 마음이 환란도 쉽고 기쁘게 감당하게 하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4) 그들은 각 교회에 장로들을 안수하여 세웠다. 

사도들은 두 번째 방문하여서 교회를 조직하고 신앙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또 신도들을 지도할 사역자들을 임명하였다. 즉 말씀을 가르칠 자와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들을 구분하였다.

① 각 교회마다 지도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교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요, 그들의 신앙적인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며 그들에게 복음서의 모든 명령을 준행하도록 지도하며 그들을 감독하고 "무지한 자를 교훈하며 절제 못하는 자를 경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는 위로하며 부정적인 사람들을 말씀으로 확신시키는" 일이었다. 

모든 교회는 그 교회 안에 이러한 사람을 한 두 명 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② 교회의 지도자들은 당시에는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자격에 있어서는 장로로서의 지혜와 품격을 갖추었고 임무에 있어서는 장로로서의 권한과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에 새로운 법을 제정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법이 준수되고 그대로 실행되는가를 감독할 뿐이었다(율법을 정하는 일은 큰 율법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이다. 교회라는 정부는 절대 군주 체제이다. 그러므로 법의 제정 권한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다).

③ 이들 장로들은 안수를 받았다. 

추천을 받아서 또는 자천하여서 장로의 직을 받게 될 사람들은(그들이 사도들에 의해서 또는 백성들에 의해서 추천되었든지 간에) 그들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도들에 의하여 자격 심사를 받아야 했다. 스스로를 헌신하는 사람들이라도 주의 사역을 위하여 따로 세우는 식이 필요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 직에 책임을 더욱 무겁게 느끼게 된다.

④ 이 장로들은 제자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선한 사업에 봉사하도록 하였다. 

신앙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또한 신앙 속에서 세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장로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목사와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덕을 나타내는 자라야 하는 것이다."

(5) 금식 기도로써 사도들은 저희를 그들이 믿는 주 예수께 의탁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 또 열심을 낸다고 하여서 교역자들의 그들에 대한 관심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 계속 그들을 지켜보며 교훈하며 각성시킬 필요가 있다. 아직도 그들의 신앙에서 결핍된 것은 완전케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② 믿는 자들을 돌보아야 할 사역자들은 자기를 주님께 의탁하고 그의 은총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만 한다. "주여 저들을 당신의 이름으로 지켜 주소서"라고 사도들은 기도하였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보호에 자신들을 의탁해야 하며 사도들의 수하에 있는 사역자들도 그에게 자기들을 의탁해야 하는 것이다.

③ 기도를 통하여 그들은 주님께 의탁되었다. 그리스도께서도 기도를 통하여(요 17:) 제자들을 그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소서"라고 기도하셨다(한글 개역과 다소 다름:역자 주).

④ 우리가 주님께 제자들을 부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그들이 믿는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자기들을 위탁한 사람들을 또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그리고 저들이 당신에게 부탁한 것을 그날까지 지키심을 저들이 믿는 줄을 우리가 압니다"(딤후 1:12)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⑤ 우리의 죄에 대한 겸손을 표시하는 뜻에서 또 우리의 기도에 능력을 얻기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⑥ 우리가 친구들을 작별할 때 가장 훌륭한 인사는 저희들을 주님께 부탁하고 그들을 주님과 함께 거하게 하는 것이다.

3. 그들은 그들이 있었던 다른 곳에 가서도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에 교회를 이룰 때처럼 이번에도 많은 신자들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하여 새 신자 전도에 주력하였다. 

안디옥을 출발하여 그들은 비시디아를 경유하여 밤빌리아에 이르렀다. 그 지방의 중심지는 버가였다. 전에 그들은 버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13:13). 이제 그들은 다시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그곳에 도착하였다(25절). 

그들은 두 번째로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복음을 받기 전보다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살펴 보았다. 그들이 그곳에서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는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다음으로 그들은 앗달리아로 내려갔다. 그곳도 밤빌리아 지방에 속한 성으로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가는 곳마다 후에 교회를 세울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몇 개의 복음의 씨앗을 뿌림으로 때가 이르면 많은 수확을 얻게 되기를 바랐다. 이제 그리스도의 비유가 실제로 적용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작은 누룩에 비유하였다. 그것은 때가 되면 온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이다. 또한 계자씨를 비유하셨다. 그것은 처음에는 보잘 것 없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땅에 씨를 심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만이 아신다.

Ⅲ. 이제 그들은 그들이 전도여행을 출발하였던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앗달리아를 출발하여 배를 타고 그들은 안디옥에 당도하였다(26절). 다음 사실들을 알아보자.

1. 그들이 안디옥에 온 이유. 

왜냐하면 그곳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늘 나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에 추천된 데 대하여 귀한 일로 보답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을 추천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형제들이 "그들이 이룬" 그 일을 위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의탁하였었다. 이제 사도들은 그들이 완성한 사업에 대하여 형제들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이 형제들의 기도에 의해 힘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형제들의 격려의 말을 들음으로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2. 사도들이 형제들에게 그들의 여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27절). 

"그들은 교회를 함께 모았다." 

안디옥에는 한 장소에 모이기에는 벅찰 정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을 위하여 지도적 인물들만 불렀다. 

지파의 두령들을 이스라엘에서 "회중"이라고 불렀듯이 안디옥의 사역자들과 직원들도 교회라 불리워졌다. 

물론, 이와는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집회 장소가 허용하는 한에서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하여 모였으리라는 것이다. 또는 장소를 옮기면서 여러 곳에서 사람들을 만났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하간 그들을 함께 모으고 사도들은 두 가지 사실을 설명하였다.

(1) 사도들은 자기들의 노고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을 자세히 말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행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이렇게 하였다면 허영의 냄새만 풍겼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또 그들에 의하여 하신 일을 전하였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우리가 한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그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계획하시고 행하실 뿐 아니라 우리로 성공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교역자들의 설교 없이도 하나님의 은총은 무엇이고 이루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교역자들의 설교는 비록 바울의 설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말씀의 능력 속에서 역사하시는 은총의 역사는 인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2)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그들의 수고가 결실되었음을 고하였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였다." 이방인들은 복음 잔치에 초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이 초대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믿음의 문 이외에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굳건하게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

② 믿음의 문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에게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를 나타내 주신다. 또한 그가 우리의 마음을 여시사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신다. 또한 이 문을 활짝 여시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가게 하신다.

③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과" 그들에게도 그의 복음을 주셨으며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것과"(롬 16:26)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이같이 하여 복음은 전파되었고 더욱 광채를 더하여 갔다. 하나님이 여신이 문을 닫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옥과 세상의 모든 권력을 합쳐도 이는 불가능하리라.

3. 그 후의 사도들의 동정(動靜).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었다."(28절). 

그들은 처음에 작정했던 것보다 더 오래 있은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이 적들을 두려워서가 아니였다. 그들의 교우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그들을 작별하는 것이 애석해서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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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장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ㅇ이고니온 - 이고니온(Iconium)은 헬라인에 의하여 도시국가로 변형되었는데 비옥한 고원지대(高原地帶)에 형성된 도시이다. 이곳은 당시 루가오니아(Lycaonia)의 수도였으며 로마로부터 자유로운 도시였으나 하드리안(Hadrian) 황제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현재의 터키의 중요한 상업도시로 '코냐'(Konya)라 불리어진다. 이곳에도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회당을 중심으로하여 신앙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ㅇ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회당에 들어갔을 것이다. 여기서는 어떻게 설교를 하게 되었는지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아마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배려라고 볼 수 있다.
ㅇ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 이 문장 역시 안디옥에서와 같이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없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ㅇ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 - 이 말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즉 불신앙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유대인이 바울과 바나바의 반대자로 언급된 것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동일하다(13:45 주석 참조).
ㅇ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집단적인 공격 형태의 움직임까지 나타내고 있다.
ㅇ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 여기서 언급된 '형제들'(아델폰)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바울의 설교에서는 '형제들'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여기서의 '형제들'은 1절에서 언급한 '허다한 무리'에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를 가리키며 누가가 본서에서 즐겨 사용하는 '제자'(6:1,2,7;9:1,10,19,25,26,38;11:26,29;13:52;15:10;16:1)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ㅇ두 사도가 오래 있어 - 개역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이 문장은 접속사 '멘 운'('뜻')과 함께 시작되어 앞에 진술된 내용과 본절 이후의 진술이 서로 인과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그래서'로 번역하여 인과 관계를 분명히 해주는 편이 좋다. 그런데 이 인과 관계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학자나 번역본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1)'개종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반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두 사도는 오래 남아 있었다'(Knowling). (2)'주께서 그들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은총에 관하여 그들이 전하는 말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그래서 두 사도는 계속 남아 대담하게 말씀을 전했다'(공동번역). 그런데 접속사 '멘운'이 본절 초두에 나와서 2절과 본절을 인과절로 접속시키고 있다. 따라서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 오래 머문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인들의 선동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이와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NIV, MB).
ㅇ표적과 기사 - 복음서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언급된 곳은 마24:24와 요4:48 두 곳뿐이나 본서에서는 본절 외에도 2:22,43;4:30;5:12;6:8;8:13 등 수 차례 언급되었다.  이는 누가가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그 두 단어를 함께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ㅇ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 이고니온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두 부류 즉 바울과 바나바를 추종하는 무리와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바울 일행에 악감을 품은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것은 곧 논쟁의 출발이며 바울 일행이 겪는 박해의 시작이다.  당시 헬라계 성읍에서 이와같은 파벌적 대립과 분열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은 흔히 있었던 일이었으므로(Alford)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ㅇ두 사도 - 이는 바울과 바나바를 지칭하는 말로서 본서에 12명의 제자가 아닌 예수추종자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처음 붙여지게 된다. 물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속하여 자신의 사도됨을 강조한 적이 있다(롬1:1;고전1:1;9:1;15:9;고후1:1;갈1:1;딤전1:1;딤후1:1). 그런데 본서의 저자 누가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의 칭호를 적용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바울과 바나바의 지위가 사도로서 인정받았을 수 있었다는 점과 사도라는 말이 예수를 직접 수행한 12명의 제자 이외의 사람에게도 폭넓게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갈1:19).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ㅇ그 관원들이 -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는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로 그 지역을 통치하는 지도자들(공동번역)이다. 다시 말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가 단순히 회당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박해만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까지 가담하여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공격적 박해임을 말해주고 있다.
ㅇ능욕하며 - 무례하고 모욕적인 언사(言辭)를 나타내는 '휘브리사이'는 앙심을 갖고 조롱하고 학대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공동번역). 이것은 육체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폭력행위라기보다는 경멸하는 어투와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괴롭히는 것을 나타낸다.
ㅇ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 그들의 능욕 행위는 투석을 통한 폭력행위로 발전하였다. 본래 돌로 사람을 쳐죽이는 처형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형 집행 방법이었다. 이는 처형당하는 죄인에 대한 저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 이와 같은 투석 행위는 스데반에게도 있었던 일이다(7:58). 스데반을 향해 유대인들이 돌을 던질 때 그 일에 가담했던 바울이 스데반과 똑같은 폭력을 당하게 될 위기에 직면한 것은 9:16의 예언이 그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묘사는 당시의 전도자가 필연적으로 져야 할 공통적인 십자가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런데 돌을 던지려는 행위가 실제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이 상황 묘사는 박해자들이 돌을 던질 만큼 험악한 분위기에 다달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돌로 쳐 죽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라고 번역하여 생동감있게 표현하였다.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ㅇ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 여기서 '도망하여'는 헬라어로 '카타퓨고'   이며 뜻은 '도망하다' 외에 '피난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같은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단순히 폭력을 두려워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박해자들과 무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다른곳으로 옮겨갔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표현보다는 피하였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ㅇ루가오니아 - 루아오니아(Lycaonia)는 소아시아의 중남부 지방으로 북쪽으로는 갈라디아가 있고, 동쪽에는 가바도기아, 서쪽에는 브루기아 비시디아가 인접하여 있다.  이 지역은 마게도냐에 정복된 적이 있으므로 코이네 헬라어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ㅇ후스드라 - 루스드라(Lystra0는 루가오니아의 중남부 지방에 위치한 성으로서 이고니온 성에서 약 38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소수의 로마군이 지배하고 있는 전원 도시였다. 이곳은 해상을 통한 무역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곳 주민은 주로 농사와 목축에 의존했다.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회당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Robertson). 이곳에서 디모데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가 살았고(16:2,3;딤후1:5) 바울 일행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같다.
ㅇ더베 - 이곳은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길리기아와 인접한 곳으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 글라우디우스 티베라 불리기도 한다. 바울은 이곳에서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 짓고 안디옥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후 제2차 전도 여행 때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16:1). 특히 이곳은 아시아까지 바울과 동행한 가이오의 출신지로 알려져 있다(20:4).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ㅇ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이 말은 6절에서 도망했다는 진술이 반대자들을 두려워해서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과의 충돌을 피해 활동 무대를 옮겨간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 전력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로버트슨(Robertson)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 언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렌스키(Lenski)는 어디서나 헬라어가 통용되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지역은 팔레스틴 지역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었으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는 이 지역에서 코이네(Koine) 헬라어가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큼을 암시한다. 따라서 렌스키의 의견이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다(11절 주석 참조).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ㅇ나면서 앉은뱅이 - 이 환자는 발이 있으나 무기력하여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태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다고 보충 설명을 하여 그의 질병이 치유 불가능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성전 미문(美門) 앞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 이야기와 비슷하다(3:2). 아마도 누가는 앉은뱅이를 고친 두 사건에 중요한 의미를 둔 것 같다. (1)베드로처럼 바울도 앉은뱅이를 고침으로써 동등한 사도권이 바울에게도 인정됨을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2)베드로는 유대인을, 바울은 이방인을 치료한 사실을 대비시킴으로써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바울을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것을 보고
ㅇ구원받을 만한 믿음 - 이 표현은 앉은뱅이 환자가 바울의 설교에 귀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러한 그를 눈여겨 보았기에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병고침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으로 '믿음'이 언급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병고침의 전제는 주로 환자의 믿음과 관계된 것으로 묘사되었다(3:16;막9:21-29;눅5:20;7:50;8:48;18:42). 여기서 언급된 '구원받을'(소조)이라는 말은 '구원하다'란 의미 외에 '온전하게 하다' 또는 '건강하게 하다'의 뜻도 지닌다.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앉은뱅이의 무기력한 발이 완전하게 되어 건강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을 앉은뱅이의 영적 구원과 반드시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믿음'이란 말도 바울 신학의 핵심 주제로서의 '믿음'과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롬1:8-17 주제 강해 '이신 득의의 이해'). 한편 본 치유사건은 3:2-6에서 언급되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와 내용상 다르게 언급된다. 즉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는 단순히 무엇을 얻을까 하는 구걸인으로 묘사된 반면 본문에서는 앉은뱅이의 마음 속에 치료받을만한 믿음이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는 저자인 누가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즉 그는 이방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치병 기적을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에게도 구원받을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며 또한 바울의 이방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선포하고자 의도했을 것이다.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ㅇ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 여기서 바울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한 것은 아마 환자에게 믿음을 북돋우고 확신을 주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베드로가 성전 미문 앉은뱅이에게 한 말과 차이점이 있다. 즉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하였으나 바울은 예수처럼(막3:5) 자신이 직접 명령했다. 이에 대해 C와 D사본은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 말을 첨가시켰지만 대부분의 사본은 그 구절을 첨가하지 않았다.
ㅇ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 이 묘사는 3장에서 언급된 미문의 앉은뱅이가 구원받은 묘사와 비슷하다. 즉 걸을 뿐만 아니라 뛰기도 했다는 이 표현은 구원 곧 치유가 바울의 소리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앉은뱅이가 차츰차츰 걷게 되었다든가 다소 불편한 걸음이 아니라 완전히 회복된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는 강조적 표현이다.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ㅇ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 본구절은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현장을 목격한 루가오니아 사람들이 놀라와하며 흥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은 흥분하여 격앙된 목소리로 기적의 현장을 떠들석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였다는 표현은 이제까지 루가오니아 말로 하지 않고 다른말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네일(W.Neil)에 따르면 소아시아의 다른 성읍들과 마찬가지로 루스드라는 평상시 3개의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한다. (1)라틴어:루스드라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라틴어가 공식적인  언어였다. (2)헬라어:로마의 상용어(Linguefranca)로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3)모국어:이는 성읍 사람들끼리의 통상적인 의사 소통 수단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Haenchen, Bruce). 바울이 설교하는 동안 헬라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나 그들이 흥분한 나머지 자기들의 언어인 루가오니아말로 소리쳐 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ㅇ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는 헬라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며 사고방식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교리는 헬라 문화권에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ㅇ쓰스..바울은 앉은뱅이에게 말을 하였다는 점에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인 허메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한편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이 헬라 신화 속에 나오는 신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이해한 것은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암시해준다.
13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ㅇ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 - 일반적으로 헬라 지역 내의 도시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루스드라의 쓰스 신당과 같이 헬라 지역 이외의 신전들은 성 밖에 세워졌던 것 같다. 그리고  뷔켄하우저(Wikenhauser)에 따르면 신전이 성 밖에 있었던 것은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신당과 제사장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종교적인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 지역은 본래 헬라 문화권 밖에 있었으나 알렉산더에 의해 소아시아 지방이 헬라화될 때 헬라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이때 헬라의 다신교가 이곳에 전해져 정착된 것 같다.
ㅇ소와 화관 - 이는 제사장이 예배하기 위해 가져온 제물이다. '소'로 번역된 헬라어 '타우로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황소를 뜻한다. 그리고 화관은 꽃다발(harland, RSV)을 뜻한다. 당시 제우스와 머큐리 신에게는 황소를 제물로 바쳐 제사하며 화환을 함께 올려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obertson).
ㅇ대문 앞 - 바울의 설교가 행해졌고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신당의 제사장이 달려온 이 장소는 대문 앞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으므로 정확한 위치와 장소를 알 수 없다. 성 밖에 있는 신당의 대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Ramsay, Bruce) 문맥상 바울의 설교가 성 안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성 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성 안의 자신들이 머물렸던 집 대문이라든가 아니면 어떤 큰 집 대문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Alford, Lumby). 그러나 대중 설교를 할 수 있는 대문이라면 가정 집이라기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성문 앞으로 생각할 수 있다(Hervey, Blass). 당시 이곳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구걸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과 새 번역도 '성문 앞'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대문 앞은 성문 앞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ㅇ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 옷을 찢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울분과 비통한 심정이나 절망과 증오를 위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습관이었다(창37:29,34;수7:6;삼하13:19;왕하18:37;19:1;마26:65). 그리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묘사는 옷을 찢는 행위를 통해 보여준 바울과 바나바의 단호한 의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즉 그들은 루스드라 주민들의 그같은 행위를 절대 용납할 수 없음을 단호하게 보여준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다가(11절 주석 참조) 제사를 준비하게 되자 그 내용을 알아차리고 당황하여 다급한 심정으로 이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ㅇ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 -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정(性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파데이스'로 동일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의 몸을 취했으나 인간과 본성이 다른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한다.
ㅇ이 헛된 일 - 헛된 일은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는 행위 또는 사람을 신으로 알고 경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곧 루스드라인들에게 신관(神觀)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ㅇ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종교적 진리, 세계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각 이방 나라의 관습과 종교생활 등에 대해 책망하시거나 벌하시지 않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ㅇ그러나 - 이말의 헬라어 '카이토이게'는 '그렇다해도', '그러면서도'(공동번역)를 의미하는 복합 접속사이다. 이 접속사는 앞 문장과 뒷 문장을 반대적 의미로 연결한다기보다는 앞의 진술과 관련이 있으면서 또 다른 내용의 진술로 전환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ㅇ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 각 민족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종교, 가치관, 세계관을 갖고 살아왔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고 자연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각 민족들에게 계시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15절에서 언급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께서 자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자연을 통해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자연 계시에 대한 진술이다. 바울은 17:24-29과 로마서 1:19,20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설교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열려 있었다는 말이 된다.
ㅇ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 이 말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게 주어졌으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주는 것이다. 즉 모든 민족을 하나님은 공평히 사랑해 왔음을 말하는 일반 은총에 대한 진술이다.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ㅇ겨우 무리를 말려 -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을 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음을 '겨우'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ㅇ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디옥 유대인들(13:14 주석참조)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로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이고니온에 사는 유대인들(2,5절)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박해를 가하였음을 진술한다.
ㅇ무리를 초인(招引)하여 - '초인하여'의 헬라어 '페이산테스'는 '설득하다'(공동번역)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서는 '선동하다'란 의미를 더 강하게 나타낸다. 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선동했는지 본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짐작건대 그 두 사람이 마술과 같은 속임수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교를 파괴하려 한다고 선동했을 것이다. 실제로 본서 19장에서 은장색(銀匠色) 데메드리오가 에베소 지방의 사람들을 선동할 때도 바울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를 무시하고 그 종교를 폐하려 한다고 소리쳤다(19:26,27).
ㅇ돌로 바울을 쳐서 - 본절에서 돌에 맞은 사람이 바울 한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 왜 바울만 폭력을 당하고 바나바는 언급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바울이 말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12절) 표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돌로 친 주체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맥상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이고니온에서 음모가(5절) 루스드라에서 성공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면서 누가는 그들의 핍박이 매우 집요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건을 바울은 고후 11:25에서 회상하며 언급하고 있다.
ㅇ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 이 표현으로 보아 바울을 돌로 친 현장이 성 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3절에서 언급된 장소, 즉 앉은뱅이를 고치고 설교하던 곳에서(13절 주석 참조) 폭행을 당한 듯하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일 때는 성 밖으로 스데반을 끌어낸 다음 돌로 쳤으나(7:58) 바울은 성 안에서 돌에 맞은 후 밖으로 끌어내졌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서로 대조된다. 이는 바울을 쳐죽이려 하는 무리들이 절차를 무시할 정도로 격분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그들의 박해가 스데반보다 더 잔인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부각시켜 스데반의 박해자가 스데반과 똑같은 방식으로, 더 나아가 훨씬 더 잔인하게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ㅇ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 19절에서 바울이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어 성 밖으로 내다버려졌던 사실이 언급되었듯이 바울은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었을 자리에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는 그 일의 증인들로서 제자들을 언급했다. 이 제자들이 쓰러진 바울을 중심으로 둘러섰던 것은 바울의 상태를  알아보고  죽었으면 장례 절차를 집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Robertson, Bengel).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쓰러진 바울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건강하게 일어선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둘러서서 어떤 행위를 취하기 전에 바울이 일어났음을 암시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ㅇ더베 - 루스드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지점인 더베(Derbe)로 오게 된다. 이곳에 대해서는 6절 주석을 참조하라.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ㅇ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 이곳 더베에서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처럼 박해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으며 설교의 내용이나 기적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고 간략하게 이 곳에서의 활동만이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 없었거나 순조롭게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돌로 쳤던 유대인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으므로(19절)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유대인이 거주하던 더베에서는 박해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면서 저자는 많은 제자를 얻었다는 성공적인 성과를 언급함으로써 바울의 선교 전체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간결한 어투와 함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는 짤막한 언급은 그곳에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결실을 맺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바울의 믿음을 암시한 듯하다. 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애정과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ㅇ마음을 굳게 하여 -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에피스테리조'는 '힘있게 해준다', '튼튼하게 만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바울이 방문한 곳에서 개종자들을 격려하며(공동번역)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하였다는 말이다.
ㅇ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 이같은 바울 일행의 권면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잘 반영해 준다. 즉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고통과 박해를 겪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것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실존(實存)에 해당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이 말은 당시 바울 및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당했던 박해와 수난들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받는 모든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ㅇ각 교회에서 -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에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음을 명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을 따르는 제자들을 계속 배출했으며(4,20,21절)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방지역에서 견고한 조직체를 만들어 갔다.
ㅇ장로들을 택하여 - 집단적인 공동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활동적으로 이끌기 위한 지도자로 장로를 택하게 되었는데 이미 11:30에서 장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장로를 택하여 세웠다는 언급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장로(elder, NIV)는 감독자라는 직분으로 언급되기도 하며(20:28) 다스리며(롬12:8;살전5:12) 수고하는 자(고전16:16)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만으로 당시 장로들의 정확한 직분을 규명하기 곤란하다. 단순한 교회의 봉사직으로서 설교할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는 주장(Zahn)도 있으나 오늘날의 목회자와 같은 기능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는 자로서 언급된 점으로 보아(딛1:5;약5:14) 사실상 목회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6:1-7의 주제 강해 '교회의 직분'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서 장로를 어떠한 방법으로 택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예루살렘이나 기존 교회들로부터 파송된 사람이 장로의 직분을 맡았는지 아니면 각 지역 자치 내에서 믿음이 충만한 자를 택하여 그 일을 맡겼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등과 같이 기존의 교회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장로를 세운 점으로 보아 각 지역자체 내에서 장로들을 선출하여 임명한 것 같다.
ㅇ금식 기도하며...주께 부탁하고 -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지도자들을 주께 부탁한 것은 선출된 자들에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직분의 거룩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바울이 사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누가는 하나님과 교회 지도자를 중재(仲載)하는 바울의 역할을 보여 줌으로써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암시적으로 내세웠다.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ㅇ비시디아...밤빌리아 -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13:13,14 주석을 참조하라.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ㅇ앗달리아 - 바울 일행은 버가(13:13)를 거쳐 앗달리아(Attalia)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게 된다. 왜 방향을 바꾸어 앗달리아로 갔는지 그 이유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버가에서도 복음을 전한 점으로 보아 귀환 길에도 쉬임없이 전도활동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전도의 목적을 갖고 앗달리아로 갔을 것이다. 앗달리아는 항구도시(port city)로서 버가의 서남쪽 약 26km에 위치해 있는데 이 항구도시는 B.C.159-138에 버가몬의 왕으로 지냈던 아탈루스(Attalus II) 왕이 건설한 것이다(Jacquier). 지금은 아달라(Adala)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도시를 찾은 것은 소아시아의 남단에서 이 도시가 가장 큰 항구도시로 인구가 많아 전도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ㅇ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 앗달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또한 전도 여행시 처음 찾은 곳인 구브로(Cyprus)섬(13:4-12)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안디옥으로 직행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앗달리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과 비교해 볼 때 뚜렷한 성과나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ㅇ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 - 여기서 누가는 바울 일행이 구브로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등에서 성공적 결과를 거둔 전도 활동이 안디옥 교회에서 출발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부탁하다'라는 말은 23절에서 언급된 '파라티데미'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파라디도미'   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임명하여 파송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이다(13:1-3 주석 참조).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ㅇ교회를 모아 - 그들이 돌아와 교회를 모았다는 것은 교회 신도들을(공동번역) 불러 모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모임이라는 주장은(Fern-ux)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의 귀환은 안디옥 교회의 큰 경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온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교 보고회를 열었던 것이다.
ㅇ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 - 본절에서 누가는 이방인의 개종 사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밝힘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시작된 이방인에 대한 선교(宣敎) 활동이 하나님에 의한 일임을 밝혀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물론 베드로나(9:32;11:18) 빌립보에 의해서도(8:4-13)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것처럼 본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방 선교를 위해 안디옥 교회가 직접 나서서 이방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ㅇ오래 있으니라 - 이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미 누가는 9:43과 10:48에서도 베드로가 한 곳에 오래 유(留)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베드로의 선교 활동이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 바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에 대해 안디옥 교회가 열렬히 찬사를 보내고 환영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오래 머물렀다는 말은 긴 휴식을 취했다는 의미로 선교 활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간접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제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상당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약 1년 안팎으로 본다(Levin, Alford, Lenski).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은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 교회로서 그 자리를 굳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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