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2장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
.....@@@하나님과 동역하는 기도 (마태복음 6장 10절) : 기도는 주뜻 이룸 위한 참생명호흡이자 동역
.....[시공 초월하여 계시는 분, 하나님께서 그리하신바,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자마다, 주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낸바 되었고 주와 함께 부활하였음을!!(죽은자는 말이 없다!!...그러므로 그대의 안팎의 대적이 나타나거든 하나하나마다에게 구주와 함께 옛사람이 처리된 바 그 십자가죽음-장사됨-부활을 적용하라!!), 이미 하나님이[초월적으로] 참되게 이루셨음을,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인 바, 십자가 죽음-장사지냄-부활승천하사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분의 부활 생명을 분배 받고 소유한, 곧 TUQ의 최종완성형이신 그 영=주 영 = JC의 영께서 거듭난 그의 영 안에 내주하사 결코 떠나지도-버리지도-포기하지도 않으심을 이루셨다!!]
.....거듭난 자 되었음을 믿는이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로 거듭난 자(그 안에 부활생명의 성령이신 JC가 그의 거듭난 영에 내주하시는 바)요, 이제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거처로 내어드리고 주도하시도록 참 주인 되시게 해 드림따라 인도하시는 그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참 인성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신격이나 위격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에까지 이르도록[이것은 Q경외함의 사랑 + 형제사랑 안에서 믿음+순종으로 이루실바]신성에 참여함의 성화(sanctification)+영화(glorification) = 속사람의 변화(transformation) 가 거듭남과 함께 짝으로!! 구주 영접한 이마다에게 =구주 JC이름 믿는자에게=하나님의 자녀가 됨의 권세 받은 자에게 주어졌음을((이는 JC십자가로 동시에 이루신 바 새 존재의 당연한 귀결인데, 성령충만 받아 땅끝까지 [그리스도, 곧 복음의 실제이신 그분을 살며-살아내며-전파하는]증인됨으로 충만하신 그분의 넘쳐남을 막을자 없다)) 알고 있는가.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주로 주 되시게 함!!, 그대의 주님이자 주인 되시게, 유일한 남편-반쪽-머리 되시게 해 드림 문제일 뿐이다].....
.....사탄마귀-세상-옛사람-죄성은!! 그것을 용인할 수 없기에!!...모든 간교한 기만/속임-협박/박해/우겨쌈-조롱/비아냥/정죄감-미혹/유혹/현혹으로 방해할 것이다.
.....어찌하든지 그것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하려는 육신/죄성-세상(사탄체계)-사탄마귀의 가스라이팅에 대해, 오히려 그것을 당연시 여기며 걷는이의 남라마 매순간마다 이미 이긴이김/승리 구가함이 주어져 있으니!! 살아생동하는 발휘되는 산 믿음으로, 주님 이름의 권세로 하나됨의 기도로 그리스도를 살며-살아내며-공급하며-복음 전파하는 증인으로서 이 땅을 걷는 바, 주님의 이기신 그 이김/승리를 선포하고 끝까지 싸워 이김 아래서, 사랑의 주님께서 날마다 새로이 더 충만히 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진리 말씀따라 길-진리-생명이신 주님과 상호거함의 붙좇음-하나됨의 임재아래서 주님 의지하고 순종하며 한걸음 걸음 함께 걸어감이다.
-----
주기도에서 하나님을 위한 간구는 세 가지입니다. 당신의 이름(오노마 수), 당신의 나라(바실레이아 수), 당신의 뜻(셀레마 수)입니다.
여기서 당신의 뜻은 물론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거의 습관적으로 ‘내 뜻’을 관철시키려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기도생활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모든 것이 ‘내 뜻’에 모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의 뜻’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주기도의 내용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보십시오. 그대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사실 이것은 우문입니다.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뜻은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지만 하나님이 뜻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그러므로 주기도를 드리는 우리가 먼저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는 자격(?)이 필요합니다. 12장 1절에서 이렇게 먼저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린 사람은 하나님이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기로 결단하고 주님께 자기 인생을 위탁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세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을 통해서, 둘째 기도를 통해서, 셋째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방법을 잘못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애쓰되, 하나님의 뜻을 정말 분별하고자 한다면 [성경에 제시된] 이미 나타난 뜻에 순종하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세밀한 뜻들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담대하게 기도하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알았다면 그 다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 담대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어떤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요청해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해주세요” 하는 수준의 기도가 아니라 당당하고 담대하게 요청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 뜻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드러난 뜻입니다. 그러니 이루어 주십시오. 속히 응답해 주십시오.”라고 큰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빌어 얻어내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이 일을 하셔야 합니다. 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여기 이곳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릴 때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막 11:24)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동역자의 기도활동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미 정해졌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크고 작은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에스겔서 36장 36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라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확증하신 후에, 다시 이런 말씀을 추가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이스라엘이 회복되게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정해져 있었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9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드리는 일꾼으로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일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은 땅에서 일하는 협력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동역자 의식’을 가지십시오.
예수님은 놀랍게도 우리가 땅에서 기도로 일하면 하늘에서 또한 기대로 일해주실 것을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약속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역하는 하나님이신 것을 줄기차게 보여 줍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동역자들 이야기입니다.
(1) 아말렉과의 전투 이야기(출애굽기 17장 8-13절)
(2) 엘리야의 큰 비 이야기(왕상 18장 1절~ )
(3) 에스겔의 ‘그래도’이야기
(4) 시므온과 안나 이야기(누가복음 2장 21절~39절)
(5) 겟세마네의 예수님의 기도(마태복음 26장 36절~46절)
(6) 제자들의 성령을 기다리는 기도(사도행전 1장8절~2장)
(7) 복음이 땅 끝까지 이르게 된 경위(사도행전 13장 1절~2절)
.....영에 속한자, 하늘에 속한자, 거듭난 믿는이 참제자요 증인, 화목의 복음 증거 위한 그리스도의 대사여....
바로 그대는 그대 안에 내주하여 계신 그리스도의 소금과 빛 되심 인해, 그분을 살아내는 사람이라....그대의 환경-상황-형편-처지(생노병사화복-빈부귀천-전기진역)에 상관없이 오늘 그대의 삶의 흐름과 주도권을 주님의 절대적 주권적 결정과 섭리하심에 다 맡겨드리고, 오늘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바로 그곳에서, 그것을, 주님과 함께 하도록 하는 삶, 지고지선의 진복-지복직관의 환희, 그분의 사랑에 잠겨 그분이 주님으로서 그대 안에서 사시도록 하라....하루 하루, 그대가 하는 모든 일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 되심이 중요하다.. 그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하나되어 계셔서 이 땅에서 그대가 하도록 맡기신 일 다 마치면 그대를 하늘로 부르시리니..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말라... 그대는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니..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아버지와의 교제 가운데 나아가신 주님 JC는 오직 아버지께서 보이시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일을 이루고 계셨다....
그대가 언제-어디서 있든지 상관없이 오직 주님을 살라...주님의 우선순위를 따르라...20.310.363..사람 막대기-인생 채찍, 삼하7...
오늘뿐이요 내일은 내일이다-지금, 그대에게 맡기신, 그대만이 할 수 있는 바로 그일을 주 안에서 행하돠, 주께서 하시도록 하라-만나게 하시는 바로 그사람에게 집중하여 사랑으로 섬기라(주께 하듯, 주님 하시듯)
---[관계형 기도의 전형..."파파기도"...래리크랩]...."내마음, 그리스도의 집"..로버트 멍어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관계의 극치이다.”
“기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한다.”
“기도는 신자에게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 산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기도의 신학자 P. T. Forsyth의 주옥같은 기도의 교훈들이다.
기도할수록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게 된다. 기도가 신자의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계속되는 기도생활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가? 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가?
한마디로 기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에 기인한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실제로 직면하는 현실적 상황이다.
기도의 최우선 목적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와 맺고 싶어 하는 관계의 깊이에 들어가는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충만함을 내가 알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기도의 핵심은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이다.
아버지의 품 안에서 편히 쉬고 아버지와 더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것, 하나님과 함께 있어 아버지의 마음(사랑/생명)으로 가득 채우는 것,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을 유의해 보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1순위이고 우리가 구하는 것은 2순위이다. 관계가 청원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에 귀기울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그 어떤 것을 얻는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우리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싶어하는 강한 성향이 있다. 내 뜻, 내 소원을 앞세워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채워지기를 더 갈망한다. 그것에 더 만족한다. 기도의 패러다임이 관계중심이 아니라, 청원중심이라는 말이다.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을 체험하면서도 우리의 관심사는 여전히 자아의 수준에 머물러 있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여기에 변화가 따르지 못함은 물론이고 기도란 언제나 우리가 ‘해야 하는’ 부담스럽고 짐스런 것이 될 뿐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기도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소원이 중심인 청원형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1차적 관심사가 되고 우리의 간청이 2차적 관심사가 되는 관계형 기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상담학자요, 성경교사인 래리 크랩이 파파기도(원제: The Papa Prayer)라는 새로운 기도법을 저술해서 한국에 소개되었다.
부제가 흥미롭다. “당신이 결코 해보지 못한 기도(The prayer you've never prayed.)"
그가 인생 말년에 경험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도가 바로 관계형 기도이다.
‘아빠’를 의미하는 영어의 PAPA로 요약되는 새로운 방식의 기도로서 이 기도는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초점을 두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기도로서 ‘해야 하는’ 기도가 아닌 ‘하고 싶은’ 기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 결과 성부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신 예수님과 일치되는 변화의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이 삶이 희생과 모험이 따르는 삶이지만 하나님 사랑의 거룩한 에너지에 이끌려 자유함 속에서 그 삶을 기꺼이 수용하게 된다.
그렇다면 PAPA기도에서 제시하는 관계형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여기서 제시하는 네 가지 단계는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는데 필수적인 원리로서, 1)우리가 신뢰하는 상대방 앞에서 자신에게 솔직/정직, 2)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진심으로 관심갖기, 3)관계를 해치는 것은 무엇이든 잘못을 인정하기, 4)상대와의 관계를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존중하기이다. 이 원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1단계: 자신을 꾸밈없이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라(Present).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싶다면 하나님께 뭔가를 요청하기에 앞서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긴장을 풀고 당신의 내면에 떠오르는 느낌, 생각, 현재의 내 모습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리라. 아무 것도 감추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 지금 서 있는 현재 위치를 정직하게 파악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라.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지 말라. 실패하고 넘어진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내어 놓으라. 하나님 앞에 진실하라. 이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져야 한다.
2단계: 당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예의주시하라(Attend).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결정적인 장애물은 우리 자신 안에 형성된 잘못된 신관(神觀)이다. 그 그릇된 하나님 이미지가 바뀌지 않는 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기억하라. “나는 지금 누구한테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의주시하라. 당신이 기도할 때 알게 모르게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자동판매기, 비인격적인 힘, 엄한 아버지 아니면 웃음짓는 친구인가? 이런 이미지들은 실제의 하나님과 관계맺지 못하도록 우리의 기도를 왜곡시킨다. 우리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 계시록 1장의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하라. 그리고 복음서의 예수님과 시편을 자주 묵상하라.
3단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쏟아 놓으라(Purge).
하나님은 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그분의 영광이 내 영혼의 지성소에 머물고 있다는 말이다. 왜 우리는 그 영광을 대면하지 못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가? 뭔가가 그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 안에 있는 관계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서, 배우자나 친구들과 맺는 관계에서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는 방식으로 대하지 않는 모든 행동들이 관계의 죄다. 그 분의 사랑의 음성을 외면하고 사랑받지 못함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뭔가를 얻어내려는 모든 행동들이 관계적인 죄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아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듣기를 갈망한다면, 그분과 가까이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당신 자신을 ‘거룩함에 내던져야’ 한다. 이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넘겨드리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맺으시는 방법을 따라 타인중심으로, 희생을 감수하면서, 겸손과 사랑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그분의 거룩한 성품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거룩함에 내던질 때,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하기 시작한다.
4단계: 하나님을 당신의 ‘1순위’로 여기고 나아가라(Approach).
이제 빈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누리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의 빈 마음의 공간이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면서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 싶은 열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기 시작한다. 비록 그 삶이 모험과 희생의 대가를 요구할지라도 하나님 사랑의 거룩한 에너지가 그것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게 한다.
---[사6: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샤를르 드 푸코... "나를 드리는 기도"))---
아버지, 나를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든지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 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나님께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 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아멘.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8.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헤롯이 죽다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
Acts 12...Amplified Bible, Classic Edition
1 About that time Herod the king stretched forth his hands to afflict and oppress and torment some who belonged to the church (assembly).
2 And he killed James the brother of John with a sword;
3 And when he saw that it was pleasing to the Jews, he proceeded further and arrested Peter also. This was during the days of Unleavened Bread [the Passover week].
4 And when he had seized [Peter], he put him in prison and delivered him to four squads of soldiers of four each to guard him, purposing after the Passover to bring him forth to the people.
5 So Peter was kept in prison, but fervent prayer for him was persistently made to God by the church (assembly).
6 The very night before Herod was about to bring him forth, Peter was sleeping between two soldiers, fastened with two chains, and sentries before the door were guarding the prison.
7 And suddenly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standing beside him], and a light shone in the place where he was. And the angel gently smote Peter on the side and awakened him, saying, Get up quickly! And the chains fell off his hands.
8 And the angel said to him, Tighten your belt and bind on your sandals. And he did so. And he said to him, Wrap your outer garment around you and follow me.
9 And [Peter] went out [along] following him, and he was not conscious that what was apparently being done by the angel was real, but thought he was seeing a vision.
10 When they had passed through the first guard and the second, they came to the iron gate which leads into the city. Of its own accord [the gate] swung open, and they went out and passed on through one street; and at once the angel left him.
11 Then Peter came to himself and said, Now I really know and am sure that the Lord has sent His angel and delivered me from the hand of Herod and from all that the Jewish people were expecting [to do to me].
12 When he, at a glance, became aware of this [[a]comprehending all the elements of the case], he went to the house of Mary the mother of John, whose surname was Mark, where a large number were assembled together and were praying.
13 And when he knocked at the gate of the porch, a maid named Rhoda came to answer.
14 And recognizing Peter’s voice, in her joy she failed to open the gate, but ran in and told the people that Peter was standing before the porch gate.
15 They said to her, You are crazy! But she persistently and strongly and confidently affirmed that it was the truth. They said, It is his angel!
16 But meanwhile Peter continued knocking, and when they opened the gate and saw him, they were amazed.
17 But motioning to them with his hand to keep quiet and listen, he related to them how the Lord had delivered him out of the prison. And he said, Report all this to James [the Less] and to the brethren. Then he left and went to some other place.
18 Now as soon as it was day, there was no small disturbance among the soldiers over what had become of Peter.
19 And when Herod had looked for him and could not find him, he placed the guards on trial and commanded that they should be led away [to execution]. Then [Herod] went down from Judea to Caesarea and stayed on there.
20 Now [Herod] cherished bitter animosity and hostility for the people of Tyre and Sidon; and [their deputies] came to him in a united body, and having made Blastus the king’s chamberlain their friend, they asked for peace, because their country was nourished by and depended on the king’s [country] for food.
21 On an appointed day Herod arrayed himself in his royal robes, took his seat upon [his] throne, and addressed an oration to them.
22 And the assembled people shouted, It is the voice of a god, and not of a man!
23 And at once an angel of the Lord smote him and cut him down, because he did not give God the glory (the preeminence and kingly majesty that belong to Him as the supreme Ruler); and he was eaten by worms and died.
24 But the Word of the Lord [concerning the attainment through Christ of salvation in the kingdom of God] continued to grow and spread.
25 And Barnabas and Saul came back from Jerusalem when they had completed their mission, bringing with them John whose surname was Mark.
===Footnotes
Acts 12:12 Marvin Vincent, Word Studies.
=======
사도행전 12장 (개요)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유대왕으로 통치하고 있던 헤롯 아그립바가 사도 야고보를 살해하고 베드로를 투옥시킨다(1-4).
Ⅱ. 천사의 인도로 베드로가 옥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함.
이는 그를 위한 교회의 기도 덕분이었다(6-19).
Ⅲ. 헤롯의 교만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의 공의의 치리자인 천사가 그를 치신다(20-23).
---이 사건은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 교회의 구제품을 전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거하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므로 끝 부분에서 우리는 그들이 안디옥으로 돌아옴에 대하여 설명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야고보의 순교(행 12:1-4)
바울이 회심한 후 제사장들의 수하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박해하였다는 내용을 그동안 대할 수 없었다.
아마 사울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와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들의 음모와 좌절이 다소 그들을 멈칫하게 한 것 같다.
또한 가말리엘이 "이 사람들을 버려두라. 그리고 그 결과가 어찌되는가 살피도록 하자"는 충고가 그들을 억제시킨 것 같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전혀 다른 방면에서 폭풍이 일어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교직자들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백성들의 힘을 이용하여 박해를 자행하였다(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대개가 그랬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헤롯 아그리빠에 의한 것인데, 입장이 달랐다. 헤롯 아그리빠는 본래 에돔족 출신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것같이 보여진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모세가 전해 준 의식에 열성적이었고 그 의식에 대한 철저한 신봉가였다.
그는(헤롯 안티파스가 그랬던 것과 같이) 갈릴리의 분봉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라디우스 황제의 위임을 받아 유대 총독의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그는 예루살렘에 거하였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때에도 그는 예루살렘에 있었다. 본문에서 그가 행한 세 가지행위에 대한 사실을 접하게 된다.
Ⅰ. 그가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였다"(1절).
그가 손을 들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그의 손이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데 대하여서는 양심의 제재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런 구속을 떨쳐버리고 결사적으로 살의를 품고 그의 마수를 뻗치었다.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였다"는 말씀을 어떤 이는 이런 뜻으로 풀이한다. 즉 그가 관리들을 기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실형을 가하기 위하여 이들을 체포하고 구금시켰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제 그가 점진적으로 그의 계획을 추진하는 것을 살펴 보자.
1. 먼저 그는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아닌 자들로서 교회 중 몇 사람에게 손을 댔다.
그는 이렇게 처음에는 적게 시작하였으나 후에는 바로 사도들에게까지 손을 댔다. 그는 교회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가 이들에게 고통을 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들이 교회에 속했고 따라서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이었다.
2. 그는 처음에는 그들을 괴롭히기만 하려 하였다.
즉 그들을 때리고 투옥하고 벌금을 물게 하고 가택과 재난을 약탈하고 기타 여러 방법으로 그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러나 그는 종래에는 더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수난받는 종들은 적은 고통을 통하여 단련을 닫고 후에 보다 큰 시련에 임하게 된다. 즉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 하겠다.
Ⅱ. 그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2절). 본문에서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1. 순교자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라는 사실이다.
그를 이렇게 부른 것은 다른 야고보인 알패오의 아들이요] 요세의 형제 야고보와 그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전자를 "큰 야고보"라고도 하며 후자를 "작은 야고보"라고도 한다.
본문에서 순교의 관을 쓴 이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끼신 세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예수의 변화산에서의 변화하심과 그의 겟세마네에서의 고통의 증인들"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그는 순교를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보아너게" - 번역하면 "우뢰의 아들"인데 - 이라고 불리운 자였다.
아마도 그는 능력있는 경고의 설교로써 헤롯과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공박하였다는 점에서 세례 요한이 또 다른 헤롯을 공박한 것과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공박으로 인하여 그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세베대의 아들 중 한 사람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그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것이며 그가 받으려는 세례를 받으리라"고 한 사람의 하나였다(마 20:23)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들이 그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그리스도의 우편에 앉히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온 민족들을 나의 제자로 삼으라"는 명을 받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사명을 다하기 전에 제거를 당하고 만 것은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형편이었다.
당시는 아벨을 통하여 세상에 사람들이 번식해야할 시기였으므로 아벨 한 사람의 죽음은 그 후 인간의 수효가 많았던 때의 많은 사람이 죽은 것과 비교될 수 있었다.
헤롯 아그리빠는 그가 사도 한 사람을 죽이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게 하였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면 어째서 하나님이 이를 허용하셨는가?
"성도들의 피" 더구나 사도들의 피를 "그가 귀하게 여기셨다면" 이에 상당한 가치없이 하나님이 피흘리게 하시지는 않았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마도 그의 순교를 통해 주시려는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이를 계기로 나머지 사도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더 이상 예루살렘에 거하지 말고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시려고 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정되었지만 그들이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에라 할지라도, 그들 없이도 그의 사업을 이루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한 것이거나, 또한 한 사도가 순교함으로써 다른 사도들도 이러한 순교를 각오하고 이를 준비시키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카톨릭 교회 전승에 의하면 이 야고보가 이전에 스페인에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없는 얘기다. 이를 증명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2. 그가 어떻게 죽음을 당하였는가.
그는 "칼로" 살해당하였다. 즉 그의 머리를 "칼로 쳐서" 처형한 것 같다.
칼로 교수형을 가하는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도끼로 교수형을 가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유대인들 가운데는 교수형은 별로 이용되지 않았다. 다만 왕들이 사적인 급작스러운 처형을 구두로 명할 때 가장 신속한 방법이기 때문에 이러한 처형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 다른 헤롯이 사적으로 은밀하게 세례 요한을 처형하였듯이 이 헤롯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야고보를 처형한 것 같다.
스데반이 순교하였을 때와 같은 상세한 기록이 이 같은 대사도의 순교에 대하여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통해서 첫 번째 복음 전도자들이 복음 진리에 대한 자세가 확고부동하였으므로 그들을 죽여 이를 봉쇄하려고 했음을 충분히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도 요청될 때는 언제나 "죽음을 무릎쓰고 항거하리라"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한다.
구약의 순교자들도 "칼로 처형당하였고"(히 11:37) 그리스도께서도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으로" 자기를 무장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사람의 칼이 우리에게 가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Ⅲ. 그는 가장 소문이 많이 난 베드로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그는 베드로를 사도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겼고 따라서 그를 죽이므로 영예를 얻고자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는 야고보를 교수형에 처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였다."
피에 굶주린 자는 피를 보면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되며 따라서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박해의 수단도 더욱 악랄하게 된다.
일단 사람이 죄를 지으면 쉽게 그 일에서 손을 떼게 되지 않는다. 누구나 일단 그 속에 빠져들면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된다. - 즉 한 번 악을 행하면 곧 다른 악을 범하므로 빠져나올 길이 없게 된다.
죄악을 향하여 용감히 한 발자국 내디디는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사단의 지배력이 강화되므로 사단의 다른 유혹에 빠진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진노하사 그들을 버려두시므로 그들은 더욱 악에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죄는 시초에 근절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이다.
2. 그는 "유대인들이 이일을 기뻐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행하였다.
유대인들은 비록 헤롯을 선동하여 야고보를 직접 죽게 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그의 죽음을 만족히 여겼기에 야고보의 피에 대한 죄가를 공동으로 지게 되었다. 사건 배후에는 종범(從犯)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이 박해당하는 것을 기뻐한 자들도 박해자로 취급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 학대받는 것을 기뻐하여 "우리도 같이 그 일에 참여할 것을!"이라고 외친다. 그러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들은 은밀히 속셈을 드러내었다. 잔인한 박해자들은 그들의 행한 일에 대하여 갈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용기를 얻어 더욱 계속 수행한다.
그들은 그들의 손길을 강하게 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며 양심의 소리를 말살시켜 버린다.
헤롯이 행한 일에 유대인들도 동조하게 되자 헤롯에게 이 사실은 큰 힘이 되었다. 이유는 "그가 유대인들이 이를 기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빌라도가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리스도를 정죄하였던 것처럼 헤롯자신은 그가 박해를 하지 않아서 유대인들이 불쾌하게 생각한다 하여도 그것이 그에게 두려움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함으로 유대인들을 기쁘게 해 주려 하였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이익을 주므로 다른 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불쾌히 여기는 것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 그를 생각하였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마음을 쏟는 사람들은 쉽게 사탄의 먹이가 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하자.
3. 헤롯이 베드로를 잡으려 하던 시기가 언급되고 있다. "때는 무교절이라."
때는 유월절로서 이 때에 그들의 전형적인 구속을 기념하므로 그들은 영적인 해방을 얻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장하여 가장 심하게 율법을 거스렸으며 "무교절일에" 그들은 "추악과 악행의 옛 누룩"으로 이 날을 더럽혔다.
유월절에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왔고" 또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에 대하여 서로 불평을 털어 놓았으므로 이 때에는 어느 때보다 더 분위기가 험악하였다.
4. 베드로의 투옥이 설명되고 있다(4절).
헤롯은 베드로를 잡아 아마도 그를 문초하고 싶은 "옥에다 그를 가두었다."
어떤 이는 이 옥이 몇 년 전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갇혔다가 천사의 인도로 탈출한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5:18).
베드로는 "넷 씩인 네 패의 군사" 즉 열 여섯 명의 군사에게 넘겨졌다. 그들은 한 번에 네 명씩 그를 지켰고 그러므로 그는 도망갈 수도 없었고 그의 친구들도 그를 구출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였으므로 그들은 베드로를 단단히 붙잡아 놓았다고 생각하였다.
5. 헤롯의 계획은 그를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라는 것이었다.
(1) 그는 베드로를 구경거리로 삼고자 하였다.
아마도 그는 야고보를 은밀히 처형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 사실을 불평하였던 바, 그들이 불평한 것은 공중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서 야고보를 죽게 한 것이 부당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그가 처형 당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을 누릴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이제 백성들의 이런 의중을 안 헤롯은 베드로가 결박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줌으로 그들에게 만족을 주려하였고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주려했다.
그는 백성들을 기쁘게 할 수 있게 된 것을 만족히 여겼다. 백성들 또한 그가 그들을 기쁘게 해 주려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만족히 여길 것인가!
(2) 그는 이 일을 "부활절 후에" - ‘메타 파스카’(12:4) - 즉 유월절 후에 행하려고 하였다(AV에는 부활절 후에로 번역되어 있음, 역자 주).
본문은 [분명히!] 유월절 후에라고 읽는 것이 바르다. 왜냐하면 pavsca 란 단어는 항상 유월절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유월절 대신에 부활절을 빗대어 소개하려 하는 이들은 우리 기독교를 유대교와 혼합시키려는 의도에 말려들 수 있음을 주의하자.
우리는 신약 성서에서 이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없다.
헤롯은 유월절이 끝날 때까지는 베드로를 치죄하지 않으려 하였다. 혹시 베드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백성들 가운데 있으므로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절기의 관례에 따라 그에 대한 석방을 요구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명절의 열기가 가시고 성이 한산해질 때 베드로를 공개 재판하여 처형함으로써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계획이 완료되어 백성이나 헤롯왕이나 다 같이 명절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이 야만스러운 오락을 그들은 즐기고자 하였다.
---------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8.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베드로의 투옥과 그의 석방(행 12:5-19)
베드로가 옥에서 노여나는 모습이 본문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로써 베드로에 대한 헤롯의 음모는 좌절되었고 베드로의 생명은 더욱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보존되었으며 이 유혈의 격류에 제동이 가해졌다.
Ⅰ. 그의 석방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데서 찬양할 만한 것이었다(5절).
"베드로는" 대단한 감시 아래 "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므로 무력으로든 은밀한 방법으로든지 그를 탈출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
진실로 기도와 눈물로 주께 부르짖음은 교회의 강력한 호소 무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교회의 적들에 대항하여 싸울 뿐만 아니라 교회의 형제자매들과 교역자을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 교회는 기도와 눈물로 싸워야 한다.
1. 베드로의 재판이 지연됨으로써 그들에게는 기도할 시간이 주어졌다.
아마도 야고보는 급하게 사적으로 서둘러서 처형되었으므로 그를 위하여 기도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셨으므로 그들에게 기도할 여유가 없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면 그들이 간구하여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야고보는 그들의 신앙을 돕기 위하여 희생 제물로 드려져야만 했기에 그를 위한 기도가 제재를 받고 방해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을 위하여 더 살아야 했기 때문에 헤롯이 형집행을 연기함으로써 그를 위한 기도가 고무되었고 또 기도할 수 있는 시간도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헤롯은 그가 놓여나도록 주께서 정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생각지 못하였다.
2.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들은 기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으로써 어떻게든지 헤롯의 목적한 바가 좌절되고 사자의 아가리에서 어린 양이 구출되기를 바랐다.
야고보의 죽음이 그들에게 경고가 되었기에, 그들은 바짝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서 베드로를 위하여 대단히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계속 공격을 당하여 부서진다면 결국 원수가 완전히 끝장내려고 달려들지나 않을까 그들은 두려워하였다.
스데반이 사라지고 야고보가 사라졌다. 이제 그들이 베드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일들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움직여나갔고 슬픔에 슬픔을 더하게 하였다(빌 2:27).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죽음과 고통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여도 이들의 생명과 자유와 평온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임을 기억하자. 그들이 급박한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 그들을 위하여 힘써 기도할 것을 하나님은 때때로 요구하신다.
3. "그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그것은 ‘프로슈케 에크테노스’(12:5) - 즉 간절한 기도였다. 그리스도께서 고통 중에 기도하실 때도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하였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됨이 많다. =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음이니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간절히 기도하였다는 말을 그들이 기도를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는 말로 생각한다.
이 견해는 옳다고 보여진다. "그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전력을 다한 기도였다.
그들은 공중 집회에서 그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하였다("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아마 개인집에서 모인 것 같다). 또한 집에 돌아가서는 가정에서 이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또한 다락방에 물러가서 거기서도 이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그들은 조를 짜서 돌아가며 그를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였다(12절). 공적인 어려움과 위험의 시기는 교회가 기도해야할 때 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지만 이럴 때는 특별히 기도해야 한다.
Ⅱ. 이 석방을 특별히 찬양할 또 다른 이유는 에스더 9장 1, 2절의 말씀과 같이 "왕의 명령이 집행될 시기가 가까워졌을 때에" 그의 석방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가 석방되던 때를 생각하여 보자.
1. 이때는 바로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 내려고 계획을 세운 전날 밤이었다.
이 사실은 그의 친구들에게는 더욱 큰 위로가 되었고 그의 적들에게는 더 큰 패배를 주었다.
아마 교인들 중 헤롯과 이해 관계가 있던 사람이거나 또는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 중에 몇 명이 베드로의 석방을 위하여 애를 쓴 것 같다.
그렇지만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전혀 승산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잡아내려고 하는" 날이 내일로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님이 잡히실 때에 그랬던 것처럼 매우 조급하였다. 이때에 하나님은 베드로가 피하도록 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건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 다른 아무런 방법도 남아있지 않을 때 도우신다(신 32:36).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태가 악화될수록 전망도 또한 밝아진다"는 격언이 유래된 것이다.
이삭이 제단에 결박되고 칼이 손에 들려지고 이삭을 죽이려고 손이 높이 들렸을 때 "여호와이래 - 주께서 준비하셨다."
2. 이 때는 그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그가 부스럭거리기만 하여도 그들이 알 정도였다. 게다가 옥문이 잠기고 빗장이 걸린 것도 사실이었고, 보다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켰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를 구출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죄수를 지키기 위하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되었다.
틀림 없이 헤롯도 빌라도처럼 "힘자라는 대로 곧게 지키라"(마 27:65)고 부하였을 것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하심을 보여 주신다.
3. 이 때는 베드로가 "군사 틈에서 곤하게 잠이 들어 있을 때였다."
(1) 그는 위엄을 앞에 놓고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비록 사태가 긴박하였고 도주할 구체적인 방안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태연하였다. 그는 죽기 일보 직전에 당도하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안히 파숫군들이 깨어서 지키고 있는 때에 적들 틈에 누워자고 있었다.
선한 동기 때문에 고난을 겪으며 또 고난당할 양심의 거리낌도 없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련을 주신 것은 이로써 그에게 큰 영광을 돌리는 길이기 때문임을 확신히였으므로 그는 태평하였다. "의로 판단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고 그의 영혼은 안연히 거하였다."
하나님은 비록 옥 속에서 두 군사들 틈에 그가 있었지만 그에게 잠을 주신다. 이와 같이 그는 그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행하신다.
(2) 그는 자기가 석방될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구원을 바라서 이쪽 저쪽 돌아보며 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워 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석방되게 되자 그는 깜짝 놀랐다.
이와 같이 교회도 구원받을 것이다. 그리고 시편 126편 1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Ⅲ. 그의 석방이 찬양받을 만한 또 다른 이유는 그를 구할 목적으로 "하늘에서 주의 사자가 파견되었다"는 사실 때문에다.
이 때문에 그의 탈출은 가능하였고 또 보장되었다. 이 천사가 그를 풀어준 것은 합법적이었다. 그리고 천사는 베드로에게 그 권리를 사용하도록 도와 주었다.
1. "주의 사자가 그에게 임하였다"하였다.
즉 본문에 ‘에페스테(2186)’란 말은 천사가 "그의 곁에 섰다"는 뜻이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포기된 것과 같이 보였지마는 그의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다. 즉 "주님은 그를 생각하셨다."
옥문과 파숫군이 그와 그의 벗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하나님의 사자들과 그의 사이까지 가로막지는 못하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신다"(시 34:7). "그러므로 적의 군대가 그들을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시 27:3).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있든지 또 아무리 에워싸인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하늘로 향한 길이 열려 있다.
아무 것도 그들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지는 못한다.
2. "광채가 옥 속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곳은 어두운 곳이었고 또 밤이었지만 베드로는 갈 길을 명백히 알아 볼 수 있었다.
구약에서는 천사들이 나타났어도 "빛이 그들 주변을 비추었다"는 사실은 발견할 수 없다고 어떤 사람은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어둠의 시대였고 천사들의 영광도 가리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천사들이 나타남을 말할 때는 그들이 빛 속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에 의하여 천상계가 밝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베드로에게 착고를 채운 군사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다윗이 와서 사울의 창과 물통을 가져가도 모르고 잔 것과 같은 경우였다). 설령 그들이 깨어 있었다 하여도 천사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말았으리라.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이 그와 같았었다.
3.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그를 깨웠다.
그는 너무 곤하게 잠이 들었으므로 그에게 빛이 비쳤는데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잠을 깨도록 부드럽게 그를 건드린 것이었다고 보겠다. 제 아무리 훌륭한 백성이라도 위험한 시기에 잠이 들 수 있는 바, 말씀의 빛에 의하여도 깨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어야 할 때, 강하게 옆구리를 걷어차이게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냥 잠들어 있는 것보다 그렇게라도 일어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치면서 하신말씀은 "급히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한 것은 그의 지연으로 천사가 손실을 당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잠에 빠져들어 가지 말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릴 때"(삼하 5:24) " 다윗은 급히 일어나서 분발해야만 하였던 것이다.
4. "쇠사슬이 그의 손에서 벗어졌다."
아마도 그들은 그가 도망을 못가도록 확고하게 하려고 그에게 수갑을 채웠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결박을 풀어 주셨다."
수갑이 그의 손에서 벗겨질 때 삼손이 삼 밧줄을 끊어버리듯 쉽게 벗겨졌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이 쇠사슬은 군사들 중의 한 사람이 성보(聖寶)로써 보존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 쇠사슬에 의하여 어떤 기적들이 일어났고 전해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이 베드로의 쇠사슬을 기념하여 매년 8월 1일을 절기로 지킨다. 그들은 이 날을 베드로의 투옥 기념일이라고 부른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유월절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이 쇠사슬로 세계를 그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베드로의 쇠사슬을 사랑하는 것 같다.)
5. 천사는 베드로에게 즉시 옷을 입고 그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순종하였다(8, 9절).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나 어찌할 줄을 몰랐고 다만 천사의 지시대로 따랐을 뿐이다.
(1) 그는 허리띠를 띠어야 했다.
옷을 입고 잘 때에는 허리띠를 끄르고 잔다. 그러므로 잠을 깼을 때는 먼저 허리띠를 매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2) 그는 걷기 좋도록 "신을 신어야 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속박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한다."
(3) 그는 또한 겉옷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천사를 따랐다. 그는 하늘에서 온 사자가 그를 지켜 주고 안내해 주었으므로 큰 용기를 얻어 기쁨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나가서 따라갔다."
영적인 감금 상태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살던 나라에서 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 분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서 따라갔다."
다만 그들이 천사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었다.
베드로가 천사를 따라나갈 때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으나 그는 "그가 환상을 보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환상이었다면 그가 환상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환상이었다 해도 이것은 천상의 환상인 것이 명백하였고 또 이를 증거해 주는 일들이 많이 따라서 일어났으므로 이 일이 사실로 일어난 것인지 환상 중에 이루어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126편 1절에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기록되었다.
베드로가 그런 심정이었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이것이 참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였다.
6. 그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안전히 위험에서 벗어났다(10절).
파숫군들이 통로마다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옥에서 나왔을 때 이들을 통과하여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의 눈이 닫혀져서 그랬는지 또는 그들의 손이 묶였는지 그들의 정신이 나갔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천사와 베드로는 "첫째와 둘째 파수를 무사히 지났다."
이들 파숫군들은 유대 교회의 파숫군들을 상징하고 있다. 기록되기를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하였다(롬 11:8). 또한 "그의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라 하였다(사 56:10).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철문을 통과해야 하였다. 만일 그 앞에 서 있다가 파숫군들이 제 정신을 찾으면 바로 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다시 사로잡기를 바랐듯이 그들이 죄수들을 다시 잡아 가둘 것이 분명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문까지 전진하였고 그러자 이스라엘 앞에서 홍해가 갈라지듯이 "문이 그들을 위하여 열렸다." 그들은 문을 열려고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나 문은 "저절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열렸다.
그러므로 고레스왕에게 상징적으로 약속되었던 말씀이 성취되었다(사 45:1, 2). "내가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또한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으리라"한 말씀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철문은 저절로 다시 닫힌 것 같고 그러므로 어떤 파숫군도 베드로를 추적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실 때 그 앞길에 이겨내기 어려운 장애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철문까지라도 저절로 열렸다. 이 철문을 벗어남으로 그는 감옥을 완전히 떠나 시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문이 성 안에 있던 문이었는지 또는 성 밖으로 통하는 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을 통과하자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본문의 베드로의 석방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흔히 죄수를 자유롭게 석방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복음은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감옥 밖으로 인도까지 해 준다."
영혼이 회개함으로써 구원은 임하는데 이에 대하여 스가랴 9장 11절에는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에 주의 사자가 그렇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처음에는 옥 속을 밝게 비추사 이해의 눈을 뜨게 하신다.
그리고는 잠자는 죄인의 옆구리를 치시므로 양심을 일깨우신다. 또한 손에서 쇠사슬을 풀어 주시므로 인간의 뜻을 새롭게 하시며 그런 다음 "허리띠를 띠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여러 난관을 통과해야 한다.
사탄과 또한 첫째 둘째 파숫군인 그의 종자들의 방해 또한 패역한 세대 등의 난관이 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구출해야 한다.
그러면 종국에는 철문이 우리를 향하여 열릴 것이요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포로의 멍에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로 인도될 것이다.
7. 이 모든 일이 끝나자 "천사는 곧 떠났고" 그는 혼자 남았다.
그는 적들로부터의 위험에서 벗어났고 그러므로 지켜 줄 사람이 필요 없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또 어떻게 친구를 찾아갈지 그는 잘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 안내자도 필요 없었고 따라서 하늘의 수호자요 안내자인 천사는 그를 떠나갔다.
평범한 수단으로도 해결될 문제에 기적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베드로에게 그를 지키는 파숫군을 통과할 필요도 또 철문을 통과할 필요도 없게 되었으므로 이제 평상시에도 따르는 보이지 않는 천사의 가호만 있어도 충분하였다. 천사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주변에 거하여 그들을 구해 준다.
Ⅳ. 그의 석방이 찬양할 만한 것이었음을 살펴 보았으니 아제 이 사실이 그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표명되었는지를 알아 보자.
또한 이 사실이 어떻게 놀라운 일로써 알려지게 되었는지를 알아 보자.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베드로는 제 정신을 찾게 되자 스스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11절).
잠에서 금방 깨어난 사람에게 이상하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면 그는 당장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는 그가 어디 있는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것이 꿈인지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베드로가 "정신이 나자" 즉 완전히 잠에서 깨자 그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말한다. "내가 이제야 참으로 알았도다. 내가 이 일이 참이며 환상으로 인한 망상이 아님을 알았도다. 내가 이제야 주 예수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심을 알고 기뻐하노라. 천사들은 주님에게 속하였으니 그들이 그의 명을 수행한 것이로다. 그가 나를 꼼짝 못하게 가둔 줄 알고 있는 헤롯의 손에서 나를 건지셨고 그러므로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셨도다. 유대인들은 이 베드로가 다음 날이면 교수형을 당하리라고 분명히 믿고 있으리라. 또한 나의 목을 치는 것은 일격에 전 기독교의 목을 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바랄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중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유대 백성이 대단히 이를 기대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자신을 돌이켜 봄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어떠한 큰 일을 행하셨는가 하는 "진리를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는 너무도 기뻐서 이 사실을 믿으려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이 영적인 속박에서 구속받은 영혼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진리는 체험하였어도 그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이러한 변화가 정말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내내 꿈 속에 잠겨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묻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곧 보내시는 보혜사가 임하시면" 그는 그들에게 얼마나 축복된 변화가 안겨졌는지 또 그들이 지금 얼마나 행복한 상태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해 주신다.
2. 베드로가 교우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전후 사실을 전하였다. 본문에서는 이 사실이 특별히 설명되고 있으며 또한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1) 그는 전후 사정을 "깨달았다."
즉 그가 얼마나 급박한 위험에 직면했었으며 그가 놓여난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음을 알았다.
그러면 이제 그는 무엇을 해야할까? 석방된 것을 어떻게 선용할 수 있는가. 다음에 그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지혜를 사용할 여지를 남겨 놓으신다. 그리고 그가 비록 자기가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여 완성시키시겠지만 그래도 그는 우리가 그 일을 고려해 보기를 바라신다.
(2) 그는 한 교우의 집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곳은 그가 있던 곳에서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집은 바나바의 자매요, 요한 마가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집이었다.
그녀의 집은 제자들의 사적인 집회를 위해서 자주 이용되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그녀의 집이 커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던 때문이든지 그의 집이 좋은 은닉처이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그녀가 자기 집을 제공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 섰기 때문이든지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오벳에돔의 집이 법궤로 인하여 축복을 받았듯이 그녀의 집도 틀림 없이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려 그 집을 작은 성소로 삼아야 한다.
(3) 거기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한밤중이었는데 내일이면 재판을 받게 될 베드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① 그들은 그들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뜻에서 계속하여 기도하였다.
그들은 한 번 하나님께 베드로의 사정을 아뢰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복하여 간구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쉬지 말고 항상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긍휼을 기다리는 한 그 긍휼을 얻기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해야만 한다.
② 이제 사태가 더욱 급박해져서 다음 날이면 문제가 결판나게 되었으므로 그들은 전보다 더욱 기도에 힘썼던 것 같다.
그의 석방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사무칠 때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구하시려고 작정하셨다는 것은 좋은 예표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야곱의 자손들에게 너희가 내 앞에서 헛되이 구하리라"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다.
③ 그들은 이 경우를 당하여 기도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만약 그들이 정부에 발각되면 그들은 처벌받을 것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함께 기도하심을 강조하셨으므로 그렇게 하였다(마 18:19, 20).
또한 역대하 20장 4, 에스더 4장 16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언제나 기도로써 그들의 힘을 단합해야 한다.
④ 기도하려고 모인 사람의 수효가 많았다.
방에 빈틈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인 것 같다. 그들은 연도(蓮禱)를 하기도 하고 또 한 사람이 기도하면 대중이 따라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에 교역자들이 없었더라도 기도의 방법을 아는 기독교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
이들은 적절하게 기도할 줄 알았고 또 그들과 기도에 합세한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서 그들과 보조를 맞추어 기도할 만큼 열이 붙을 때까지 오랫 동안 계속 기도할 줄도 알았다.
이 때는 다른 사람들이 잠자고 있는 밤중이었다. 이 사실을 예로 들더라도 그들의 진지한 자세와 열성을 발견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이 사적으로 모여서 기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특별히 위태한 시기에 그렇다. 이런 기도 집회를 소홀히 여기거나 중단해서는 안 된다.
⑤ 베드로는 그들이 기도하고 있을 때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의 기도가 즉시 응답된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베드로가 놓여나 너희에게 돌아오기를 바라서 기도하는가! 여기 그가 있노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이사야 65장 24절에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은 것이라" 하셨으며 다니엘 9장 20, 21절에는 "다니엘이 기도하고 있는 동안" 그의 기도에 대한 화평의 응답으로 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보냄을 받았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라"하신 말씀을 잊지 말자.
(4) 그는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맞아들이기까지 는 많은 수고가 따랐다(13-16절). 베드로는 그들을 잠에서 깨우려는 목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는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봉헌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만약 교우들이 감옥으로 면회를 와서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용인되었다면 그는 이 모임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이 집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이 사실을 기억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도 많은 교우들이 함께 모여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① "한 계집아이가 듣고 나왔다."
이 계집아이는 밀고자들이나 아닐까 두려웠으므로 거기 있는 사람이 친구인지 적인지 또 그들이 온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하기까지는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 계집아이가 가족 중 한 사람이었는지 교인 중 하나였는지 또는 종인지 딸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녀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녀는 교인들 가운데 알려져 있던 것 같으며 같은 나이 또래에 비하여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한 것같이 보인다.
② 그녀는 베드로의 음성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주 그가 기도하고 전도하며 설교하는 것을 즐겁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밖의 추운 데서 곧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대신에 "기뻐하여 문을 미쳐 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때로는 너무도 친구를 사랑하므로 오히려 그에게 불친절한 일을 행할 때가 있다.
③ 그녀는 달려 들어갔다.
아마 그들이 함께 모인 다락방으로 간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그 사람이 적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속을까 두려워서 문을 열 엄두는 못냈지만 문 밖에 있는 것이 베드로가 확실하다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베드로가 거기 있다고 말하였을 때 그들은 "네가 미쳤다. 그는 감옥에 있는데 그럴 리가 없어"라고 말하였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 모든 것에 대하여 오히려 믿지 않으려 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속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도 "너무 기뻐서 믿으려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틀림 없는 그라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말하였다(15절).
그의 천사라고 한 말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밖에 있는 사람은 베드로가 보낸 사자라고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베드로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a[ggelo"란 단어를 단순히 "사자"란 뜻을 지닌다고 본다. a[ggelo"란 단어는 요한의 보낸 자에 대하여서도 사용되었고(눅 7:24, 27) 그리스도의 보낸 자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다(눅 9:52).
계집아이가 그를 베드로라고 믿은 것은 그의 음성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문밖에 있는 사람이 자기를 베드로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이 어려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려고 한다. 즉 "그는 베드로가 보낸 심부름 온 사람인데 네가 마치 베드로처럼 착각하는구나"라고 그녀에게 말한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이것이 이 문제 이해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밖에 있는 "베드로의 형체와 음성을 지니고 그의 모양을 갖고" 서 있는 그의 "수호 천사"거나 또는 다른 천사일거라는 견해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베드로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전조로서 천사가 나타난 것이라고 상상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민속 신앙에서도 그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때때로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그들의 수호천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영은 용모나 옷 입은 것까지 겉 사람과 똑 같다고 한다. 이 영들은 본인이 있지 않는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이것을 그들을 지키는 수호하는 영 즉 그들의 천사라고 부른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은 이것이 그들의 기도가 거부되었다는 불길한 징조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베드로의 유령이 "이것으로 족한 줄 알라. 베드로는 죽어야만 되니 그 문제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구하지 말라"고 말하러 온 것처럼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본문을 이렇게 이해하면 그것은 다만 이들 교인들이 사람이 죽기 조금 전에 그 사람의 수호영이 나타난다는 견해를 가졌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어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이 사람을 하늘에서 온 천사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리려 온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또 어째서 그들이 천사가 베드로의 음성과 모습을 지니고 나타난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천사가 나타날 때 이렇게 나타난다는 기사를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유대인의 신앙을 답습하고 있다고 보고 싶다.)
유대인들은 착한 사람이면 누구나 특별한 수호 천사가 있어서 그를 보호하고 때로는 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믿는다.
이방인들은 이것을 사람에게 있는 좋은 수호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 다른 곳에서 이러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오 본문의 내용만으로 그런 교리의 타당성을 입증하기에는 너무나 약하다.
우리가 확신하기는 천사들은 "구원의 후사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역사하는 영"으로 그들은 구원의 후사들을 보호해 주며 울타리를 둘러 그들을 보호해 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든 성도마다 수호천사를 갖고 있다고 애써 고집을 세울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성도는 천사들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만 확신할 수 있을 뿐이다.
(5) 결국 그들은 그를 영접하였다(16절).
그들이 문을 열기를 머뭇거렸지만 "베드로는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였고" 마침내 그들은 그인 줄 알게 되었다.
그를 가로막았던 철문은 한 번도 두드리지 않았는데 저절로 열렸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교우들의 집 문은 저절로 열린 것이 아니라 두드려야만 했고 그것도 오래 두드려야 했다.
이것은 베드로가 천사가 그에게 베푼 영예를 자기 것처럼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교우들이 그를 경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므로 그는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저희는 베드로를 보고 놀랐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슬픔과 염려로 그들이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이에 비례하여 이제 그들의 기쁨과 놀라움도 컸다. 그들은 대단히 놀라고 기뻐하였다.
(6) 베드로가 그들에게 그가 나온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그가 함께 모여 대단히 열심히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교우들에게 왔을 때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기도하던 열심 못지않게 그의 석방을 축하하였다.
그들이 너무나 소란을 떨었으므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가 지금까지 당한 곤경을 말하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귀 곁으로 듣고 있으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손짓을 하여 조용하게 시켰다."
그들이 너무 떠들고 있기 때문에 조용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께서 천사를 통하여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였다."
그들이 그의 석방을 위하여 간구한 것을 발견한 그는 그와 그들이 같이 하나님께서 그를 자유롭게 해 주신 하나님께 엄숙히 감사를 드리기까지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남아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었다면 그들끼리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로 이루어진 것은 찬양으로 영광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로받은 사실에 대하여 영광받기를 원하신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위하여서 행하신 것을" 선포하면서 그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시 66:16, 20).
(7) 베드로는 그의 다른 교우들에게도 이 사정을 알리도록 사람을 보냈다.
"가서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한다.
아마도 다른 곳에서 같은 시간에 모여서 똑 같은 문제를 앞에 놓고 은혜의 보좌 앞에 사정을 아뢰던 교우들이 있었던 것 같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같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행동을 같이하여 성도들의 교제를 유지하며 기도로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그는 야고보와 그의 형제들에게 그의 석방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베드로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의 수고를 덜어 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님께 그들이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헤롯이 동명의 큰 야고보는 칼로 살해하였으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은 다른 야고보이다.
그도 역시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집회처에서 거기 있는 형제들을 통솔하였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실 때 그는 그 일을 할 인물이 없어서 결코 곤란을 겪으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8) 베드로는 현재의 입장으로는 그의 안전을 위하여 피신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하였다. "그는 떠나 다른 곳" 보다 안전한 장소로 갔다.
그는 이 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어느 장소가 그에게 더 안전한지를 잘 알았다.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리스도를 위한 자기 부정과 고통의 법이 갖기를 보존하려는 본능적인 법칙을 폐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당한 수단에 의하여 안전을 위한 기회를 주실 때는 우리의 안전을 돌보아야 한다.
Ⅴ. 베드로가 석방되므로 교우들의 사기가 충천하였음을 고찰하였다.
이제는 반대로 그의 적들의 당황한 모습을 살펴 보도록 하자. 그를 죽인다는 데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대단히 컸으므로 그들의 낭패도 더욱 컸다.
1. 이 일로 인하여 파숫군들이 가장 곤혹을 겪었다.
그들은 죄수가 탈출하였을 때 자기들이 당할 형벌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18절).
"날이 새매" 그들은 죄수가 없어진 것을 알았고 따라서 그들은 본문 말씀 그대로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않게 소동하였다."
그가 없어졌으나 아무도 그가 어떻게 어느 길로 탈출하였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가 지난 밤까지 있었다는 사실밖에는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새가 훌쩍 날아가듯이 그가 없어졌고 그들은 그에 대하여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싸우기만 하였다.
한 사람이 "이건 네 잘못이야"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은 "천만에 네가 잘못했지"라고 서로 다투었다. 문제를 해명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들은 서로 비난하였다.
우리의 경우에는 만약 채무 때문에 갇힌 죄수가 도망해 버리면 주(州)의 장관이 그 채무를 변상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패하게 되면 그들이 복음을 반해한 사실은 염두에 두려하지 않고 분이 나서 다른 곳에서 실패한 원인을 찾으려 한다.
2. 도망간 죄수를 찾으려고 가택을 수색하였으나 헛수고에 불과하였다(19절).
"헤롯이 그를 찾았으나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숨기신 자를 누가 찾을 수 있겠는가? 바룩과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기 때문에" 수사를 했으나 잡히지 않고 안전하였다(렘 36:26).
공적인 위험의 시기에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아야한다."
그곳은 아주 은밀하므로 무지한 세상이 그들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곳은 아주 튼튼한 요새이므로 무력한 세상이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3. 간수들이 탈출을 묵인한 것으로 여겨졌다.
"헤롯이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베드로가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만족할 만한 설명을 그들에게서 들을 수 없게 되자 로마법과 열왕기 상 20장 39절의 말씀에 의거하여 "그들을 죽이라 명하였다." 열왕기 상 20장 39절에는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리라"고 말씀되어 있다.
아마 이들 파숫군들은 필요 이상으로 베드로에게 가혹하였던 것 같다(16:24 의 간수의 같이).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에게와 또 같은 이유 때문에 옥에 갇힌 다른 사람들에게 학대하였던 것 같다. 이런 죄로 인하여 그들은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그들에게 "교회를 박해하라고" 시킨 바로 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악한 자는 자기 손으로 저지른 잘못을 가볍게 여길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잘못을 갚으신다.
또한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 처벌을 받지 않으며 무죄한 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의하여 고통을 겪는다해도 이런 일들이 오래 계속되지는 못한다. 무죄한 사람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지만 - 이것은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이 시도는 베드로가 탈출하므로 좌절되고 만다 - 형 집행은 지연되었고 그러다가 곧 헤롯이 죽으므로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4. 헤롯 자신도 이 일에서 물러났다.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고 기록되었다. 그는 마치 먹이를 놓치고 분해하는 사자처럼 마음이 상하였다.
베드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서 곧 그들에게 보여 기쁘게 해 주겠다고 "유대 백성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는데 계획이 좌절되었으므로 더욱 분노했다.
그들도 헤로디아가 세례 요한의 머리에게 했듯이 베드로의 머리를 소반에 담으려했던 것이었다. 이 자랑거리를 놓쳤으므로 그는 수치를 당하였다.
위신을 회복시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사건이 그의 거만한 영혼에 수치를 안겨 주었으므로 그는 참고 유대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가이사랴로 간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가이사랴에 온 것은 그가 유다 전역을 통치하기 시작한지 삼 년이 끝날 무렵이었다고 말한다(Antiquit, 19:7). 그리고 그가 거기에 간 것은 황제의 건강을 기원하며 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하여 나라 안의 귀족과 상류 인사들을 방대하게 초청하여 거대한 식을 올리기 위해서라고 전해 준다.
-----------
===헤롯이 죽다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헤롯의 죽음(행 12:20-25)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헤롯의 죽음.
하나님께서는 헤롯의 수한(壽限)을 정하셨다. 그는 야곱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도모했었다.
죄인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 때문에 또한 그들의 악한 음모와(시 28:4) 그들이 저지른 또 그들이 앞으로 저지를 위해(危害)로 인하여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이후에 헤롯은 얼마 동안 살지 못했다. 어떤 죄인들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신속히 처리해 버리신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1. 그의 불법의 정도가 극에 달하였다.
그는 "자만" 때문에 불법을 행하였다. 자만이야말로 파멸 직전에 선 인간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잠언 16장 18절에도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기록되었다.
느부갓네살왕은 매우 잔인한 인물이었고 또한 대박해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 동기는 왕이 입으로 거만한 말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한 것이 아니냐"(단 11:30, 31).
욥기 40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므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본문을 보면 이러한 사례가 잘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만한 자"를 벌하시는지 잘 나타나고 있다.
(1)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에게 득죄한 것같이 보인다.
이 도시들은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은 헤롯을 격노케한 비행을 저질렀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보복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매우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헤롯과 같이 거만하고 독선적인 인물에게는 분노의 이유가 되었고 문제를 끄집어내 시비를 삼았다.
그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싫어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을 향한 그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았고 죽음의 사자(使者)와 같았다."
(2)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못하지 않은 것으로 그를 납득시키려고 그에게 굽실거렸다.
그러나 이와 같이 거만한 적수와 타협한다는 것은 헛수고였다. 그는 그들이 잘했건 잘못했건 그들에게 강경하게 대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복종하였고 어떤 조건이라고 "그와 화평하려고" 노력하였다.
① 그러면 그들이 분쟁을 조절하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 보자.
그 이유는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기 때문이었다." 두로와 시돈은 상업국가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속한 영토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가나안 땅에서 양식응 수입하였다.
에스겔 27장 17절에도 이르기를 "유다와 이스라엘 땅 사람들이 네 장사가 되었음이여 민닛밀과 과자와 꿀과 기름과 유향을 가지고 네 물품을 무역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이제 만약 헤롯이 두로와 시돈에 양곡 수출 금지법이라도 제정한다면(그들은 그가 그 법을 제정하므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굶어 죽더라도 곧 일을 지지를 만한 보복적 인물임을 잘 알았다) 그들의 지방은 이제 끝장이었다. 그러므로 그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화평하며 그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우리는 살고 활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② 그들이 불화를 막으려고 취한 방법.
"그들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구로 삼았다."
아마 뇌물과 선물로 매수한 것 같다. 매수하는 것은 사람들이 관리를 사귀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두로와 시돈의 제후들의 입장은 참으로 가련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국의 제후면서도 남의 나라의 관리를 돈으로 매수하여 아첨해야했고 그들에게 자국의 문제 처리를 의뢰하여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헤롯과 같은 이러한 사람들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만과 격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블라스도는 헤롯이 총애하는 신하로서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완을 지닌 자였다.
이제 두로와 시돈의 대사들이 와서 헤롯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권능에 의해 용서를 빌고 그의 관대한 조치를 구하며 다시는 이와 같은 범죄를 범하지 않기로 그에게 약속할 시기가 정하여졌다. 이렇게 그의 자만심을 충족시키므로 그의 격노를 완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3) 헤롯이 온갖 위엄을 갖추고 거만하게 나타났다.
"그는 왕복을 입고"(21절) 위에 앉았다. 요세푸스는 이때에 헤롯이 갖춘 장엄한 외양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Antiquit, lib. xix, Cap, 7). 그는 당시에 헤롯이 정교하게 짜여지고 운치있게 수놓은 은으로 만든 예복을 입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태양이 비추면 그 빛이 반사되는 광채가 너무나 찬란하여서 보는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혔고 따라서 보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람의 가치를 그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 이러한 외모에 가치를 두며 그것을 구하고 그것으로 자신이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헤롯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헤롯은 "왕복을 입으므로" 왕다운 포용성있는 마음이 결여된 것을 메꾸려 하였고 "보좌에 앉으므로"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발 아래 놓고 짓밟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 것으로 알았다.
(4) 그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아마 그들의 잘못을 꾸짖은 후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한 다음 그들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과 앞으로는 그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라고 명한 것 같다.
그는 "생사여탈권"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서 그들의 운명이 어찌될지 마음 졸이게 한 다음 이 연설을 행하므로 그들이 은총을 입은 사실을 더욱 강조하려고 한 것 같다.
(5) 그를 의지해야했던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입고 그를 찬양하였다.
그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외쳤다(22절).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지선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헤롯의 의복과 보좌의 위엄과 그들을 용서하는 그의 선함을 대하면서 그들은 그가 신이라 불리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마 그는 위엄있는 목소리로 또 거기다가 관대함을 곁드려서 연설한 것 같고 이것이 청중들을 움직인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연설이 그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도 주지 않았고 또 그들은 그가 위엄이 있다거나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그를 천하게 여겼으나 그를 찬양하므로 그의 환심을 얻고 그들 사이에 체결된 평화 관계를 강화시키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같이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아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 이들은 두둔하면 결국 그들의 밥이 되고 만다.
이에 대하여 그로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통치자들이 "신이라 칭송된다"고 하지만(시 82:1) 그러나 왕과 군주들은 단순한 사람에 불과하지 신들은 아니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현존하는 또는 이미 죽은 왕들에게 신의 영예를 부여한다. 그들은 원로회 회원들이나 배심원들도 그렇게 부른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는 호의를 보일 필요가 없다.
감각적으로 생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치 자신들과 같은 존재이기나 한 서처럼 비방한다. 그리고 인간들이 신이기나 한 것처럼 인간들을 신격화한다. 그들은 눈 앞의 이익 때문에 그들을 찬양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실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그에 대단한 모욕일 뿐 아니라 아첨을 받는 본인에게도 대단한 해가 된다.
헛된 찬양은 그들로 자신을 잊게 만들며 거만스럽게 자신을 자랑하므로 악마의 저주를 받게 될 가장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6) 이 부적절한 찬양을 헤롯은 수납하고 또 기쁘게 여겼으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죄였다. 우리는 그가 측근들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여 백성을 선동하라고 사적으로 명령을 내렸거나 백성들을 매수하여 그렇게 외치도록 한 사실도 발견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찬사에 대하여 사의를 표하지도 않았고 그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결점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 꼭 그들의 아첨을 꾸짖지도 않았고 그들이 그에게 돌린 칭호를 물리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23절). 오히려 그는 그것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 칭호가 자신에게 돌려진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신으로 생각된다는 것과 그에게 신적인 영예가 주어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격언 즉 백성들이 기만당하면 당하도록 버려두라는 말을 철저히 신봉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믿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많은 주를 가진 이방의 황제들보다 더 악하였다고 하겠다.
2. 그의 불법은 어떻게 처벌받았는가?
"즉시(23절) 주의 사자가 그를 쳤다"(이는 모든 심판권이 그에게 위임된 그리스도 자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받으실 영예가 자신에게 돌려지지 아니하고 영광받지 말아야할 사람이 영광을 받는 것을 질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땅에 기어 다니는 "충에 먹혀 죽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며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하였고 그 밖에도 저지른 다른 잘못에 대하여 보상을 받은 것이다.
헤롯의 멸망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그를 친 것은 천사였다.
즉 그를 죽이라는 명을 위탁받은 "주의 사자"였다. 또한 이 천사가 이러한 성질의 일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그는 파괴하는 천사였는지 모른다. 또는 이 천사가 전장(前章)에서 베드로를 놓아 준 바로 그 천사일지도 모른다. 이 천사가 헤롯을 쳤다. 이들 주의 사역자들은 신의 심판이나 긍휼을 베푸는 사역자들로 하나님은 그들을 고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천사는 헤롯이 백성들의 갈채 소리에 뽐내며 자기 그림자에 도취되어 있을 바로 그 순간에 그를 악질(惡疾)로 치셨다.
에스겔 28장 2-9절을 보면 두로의 왕도 자만하여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도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삼았도다"라고 말한다.
그럴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라 너는 너를 치는 자의 손아귀에 든 연약한 가사적인 인간이라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헤롯이 그와 같았다. 거만스러운 제왕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뿐 아니라 천사들 역시 그들보다는 위엄과 권세가 높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천사가 그를 친 것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예를 귀히 여기고 지킨다. 그들은 명령을 받은 즉시 하나님의 특권을 탈취한 자들을 치시며 하나님께 그의 영예를 돌린다.
(2) 헤롯을 멸망시킨 도구는 충에 불과하였다.
"그는 충에게 먹히었다(‘게노메노스 스콜레콥로토스’ - 즉 충에게 먹힘을 당하였다, 12:23). 그는 충에게 먹히어 살이 썩었고 마침내 썩은 나무토막과 같이 되었다. 사람의 시체가 땅에 묻히면 버러지가 먹어 썩는다. 그러나 헤롯의 몸은 아직 살아서 썩기 시작하였고, 이내 충이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박해자였던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육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파멸의 씨를 지니고 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언제나 그 말씀에 의하여 인간은 파멸하고 만다.
최근에 현미경을 통하여 인체내에 무수히 많은 충들이 있으며 이 충들이 신체의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놀랄 만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육체나 또는 인간이 쌓은 업적에 대하여 자랑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된다. 또한 우리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급급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몸은 충의 먹이에 불과하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충을 위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아무리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미물도 그의 심판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
바로는 이와 파리에게 괴로움을 당하였고 에브라임은 좀벌레로 인하여 쇠잔하였고 헤롯은 충에게 먹히었다.
③ 하나님께서는 거만한 자들을 꺾으시기를 기뻐하실 뿐 아니라 가장 굴욕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꺾으심으로 그들에게 경멸을 가하신다.
헤롯은 죽되 충에게 죽임을 당하므로 그의 자랑스러운 영광에 먹칠을 한다.
헤롯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도 유대인이었던 요세푸스에 의하여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Antiquit, lib, xix, cap, 7). "헤롯은 로마 황제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축제를 베풀러 가이사랴로 내려갔다. 축제 이튿날 헤롯은 앞서 언급한 찬란한 예복을 입고 아침나절에 극장으로 갔다. 간신배들은 그를 신처럼 경배하였고 그가 그들에게 축복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지금까지 그들은 그를 인간으로 존경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를 가시적인 성격을 띤 것보다 더 우수한 존재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에게 불경스러운 아부를 거절하거나 정정하려하지 않았다(역사가가 표현한 말 그대로 하면). 얼마 안 있어 그가 위를 올려다보니 올빼미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 가지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는 그의 창자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고 그러므로 그는 배를 움켜 쥐었다. 그 고통은 처음부터 아주 격렬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친구들을 향하여 이러한 뜻의 말을 하였다. "너희가 신이라 그러기에 죽지 않으리라한 바로 내가 인간임이 입증되었고 그러므로 이제 죽는구나." 그의 고통은 쉬임없이 계속되었고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왕으로 있은지 칠년만인 그의 나이 54세에 죽었다.
Ⅱ. 이후의 복음의 전파.
1.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이 "흥왕하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서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하여 교회의 수가 증가하였다(24절). 야고보가 죽은 후 하나님의 말씀은 성장하였다. 교회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성장한다.
순교자들의 용기와 그들이 받은 위로 또한 하나님이 그들이 당한 고통은 복음을 더욱 성장하도록 촉진시켰다.
헤롯이 죽은 후 하나님의 말씀은 정착되었다.
헤롯과 같은 박해자가 무서운 심판을 받아 사라지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된 것임을 믿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2. 바나바와 사울은 그들이 그 때문에 파견된 목적을 마치자 곧 안디옥에 돌아왔다.
"그들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즉 적절한 사람들에게 구제금을 분배하고 그들을 주려고 모았던 것을 적당하게 분배한 후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현재로는 그들의 사명이 안디옥에 있었다. 현재로는 그들의 사명이 안디옥에 있었다.
우리의 일거리가 있는 곳에 우리는 거해야하며 또 필요 이상으로 거해서도 안 된다.
주의 종이 외국에 어떤 사명을 띠고 나갔다가 그 사명을 완수하면 그는 고향에서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그를 원하는 곳에 있어야 하고 그를 부르는 곳으로 가야한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으로 갈 때 "마가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갔다."
우리가 1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마가의 어머니의 집에서 그들은 기도를 위한 집회를 가졌었다. 그녀는 바나바의 자매였다.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바나바는 그 집에 유숙하였고 바울도 그와 함께 거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시기에 집회가 있었던 것 같다(왜냐하면 바울이 가는 곳에는 항상 그에게 좋은 일거리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그 가족과 친하여졌으므로 돌아올 때 그녀의 아들을 그들 밑에서 훈련시켜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채용하기 위하여 함께 데리고 온 것 같다.
주의 일을 위하여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고 주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은 중진 교역자들이 고려해 볼 매우 좋은 사업이며 오는 세대에 대한 큰 기여가 되는 것이다.
===
===호크마==
사도행전 12장
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ㅇ그 때에 - 이야기의 무대가 다시 유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그 시점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때는 헤롯왕이 통치하던 시기이며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를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이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은 헤롯왕이 죽은 후에 방문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12:23-25). 연대기적으로는 A.D.44년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헤롯이 44년에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Thomas Whitelaw). 따라서 여기서 언급되는 이야기의 시점은 헤롯이 죽던 해 즉 A.D.44년 유월절 전후로 볼 수 있다(3절).
ㅇ헤롯 왕이 - 여기서 언급된 헤롯 왕은 헤롯 대왕(B.C.37-B.C.4)의 손자인 아그립바1세(Agrippa I, A.D.37-44)를 가리킨다. 그는 로마 황실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성장했으면서도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가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권을 받게 된 것은 A.D.41년 칼리굴라(Caligula)가 암살당한 후 글라우디오(Claudio)가 황제로 즉위할 수 있도록 공헌한 데 대한 대가였다. 그는 친유대교적인 정책을 펴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본장에서 역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인을 탄압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Lenski).
ㅇ손을 들어 - 이 말은 헤롯에 의하여 기독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으로서 박해에 대한 헤롯의 직접적인 개입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박해의 손을 뻗쳐'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4:3과 5:18에도 이와 유사한 문장이 언급되는데(에페발론 타스 케이라스) 체포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하반절과 2절에서 박해에 대한 구체적 진술이 나오므로 `체포하다'란 의미보다 `박해의 손을 뻗치다'로 이해되어야 한다.
ㅇ교회 중 몇 사람 - 교회, 즉 기독교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몇 사람이 박해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몇 사람이라는 말이 교회 전체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2,3절에서 언급된 대로 야고보나 베드로와 같은 몇몇 지도자를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두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보면 교회에 대한 헤롯의 박해가 전체 기독교인들에게 미쳤을 것이고 또한 그는 그중 몇 사람을 체포하여 죽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박해의 대상을 몇 사람으로 언급하여 헤롯이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시범적으로 몇 사람을 체포하여 죽이거나 투옥했던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같다. 따라서 헤롯에 의해 기독 교회 전체가 핍박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ㅇ해하려 하여 - `악을 행하다' 또는 `상처를 입히고 고통당하게 하다'이 뜻의 `카코오'는 70인역에서 60회 이상 사용된 단어이다(Haenchen). 본절에서 이 단어는 고통을 주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과 같이 핍박과 관련된 악행 행위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ㅇ요한의 형제 야고보 -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로 언급되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다(마 4:@1;10:2). 그의 아버지 세베대는 어부이면서 선주였던 것으로 보인다(막 1:20;눅 5:11). 야고보는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세 명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급하고(눅 9:53, 54) 이기적인 성격이었으므로(막 10:37) 예수는 그에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하였다(막 3:17). 그런데 이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1:13)나 예수의 동생 야고보(15:13;21:18;갈 1:19)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ㅇ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 사도 야고보를 처형한 헤롯의 행동에 대해 유대인들이 매우 흡족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묘사된다.`기뻐하다'로 번역된 `아레스토스'는 `기분이 좋은' 또는 `만족한'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적 형용사인데 헤롯의 행위가 유대인들을 크게 만족시켰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헤롯의 이같은 행위에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고 유대인들로부터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까지 옥에 가둔 헤롯의 행위는 백성들의 반응에 자심감을 얻어 광분한 독재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ㅇ잡으려 할새 - 야고보의 참수형을 보고 기뻐하는 유대인들의 반응에 고무되어 헤롯은 베드로까지 손을 뻗쳤다. 베드로가 제자들 중 우두머리 역할을 했으므로 헤롯은 그를 잡게 되면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를 더욱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본구절에서 두개의 동사형이 함께 나온다. 즉 개역 성경에는 정확하게 그 두 동사의 의미가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 따라 본 구절을 직역하면 `추가하여 체포하다'란 의미로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는데 그치지 않고 또 다시 베드로를 체포하려 했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두 단어는 70인역에 나오는 히브리적 구문인데(창 4:2;8:12;18:29) 누가는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유대인들과 헤롯이 기독교를 박해한 공범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누가는 복음서에서와 같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유대민족으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복음서에서 누가는 유대의 지도자 계급, 즉 사두개파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것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대 대중들도 기독교의 박해에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ㅇ때는 무교절이라 - 베드로가 체포되었던 시기가 무교절()기간임을 말하고 있는데(무교절에 관해서는 눅 22:1 주석 참조) 4절에서 언급된 유월절을 니산월 14일 저녁 유월절 식사로 제한 한다면 군사들이 베드로를 유월절이 지난 후에 백성들에게 내어 놓자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체포 시점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시점을 전후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점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니산월 14일 저녁 해지면서 15일이 시작되고 무교절의 첫날이 되며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월절을 무교절과 같은 기간으로 볼 때(눅 22:1 주석 참조)에는 정확한 시점을 규명하기 곤란하다. 다만 무교절 기간 중에 있었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4절 주석 참조).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ㅇ잡으매 옥에 가두어 - 이로써 베드로는 세번째로 투옥되는 셈이다(4:3;5:18). 이로한 사도들의 모습은 예수가 걸어가셨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용기있게 따라가는 모습으로 보여지기에 충분하다.
ㅇ군사 넷씩인 네 패 - 옥에 갇힌 베드로를 경비하는 군사들의 근무 편성을 소개하고 있는 본문은 (1) 베드로의 체포가 공권력에 의한 것임과 (2) 베드로가 중죄인으로 취급받았음을 암시한다. 혹자는 베드로를 경비하기 위해 편성된 군인이 한조에 네명씩으로 구성되어 모두 네 개의 조로 짜여져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하루24시간을 한 조가 6시간씩 지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Lenski). 이에 반해서 혹자는 밤에만 베드로를 지켰던 것으로 생각하여 세 시간씩 4교대로 보초를 섰을 것으로 단정한다(A.C.Hervey, 아사노중이찌). 이 외에 네일(Wiliam Neil)은 낮과 밤에 네 조가 각기 돌아가면서 3시간씩 4교대로 보초를 선 것으로 추측한다. 혹자는 이러한 주장중 당시 로마에서 투옥된 죄수를 지키던 관습이 두번째 주장과 같기 때문에 이 견해를 지지한다(I.H.Marshall).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 풀려난 사건이 밤중에 일어 났으므로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아무튼 두 명은 묶인 죄수 옆에서, 두 사람은 옥문 밖에서 지켰을 것으로 추측된다(6절). 한편 이같은 근무 편성은 평소의 옥문지기보다 많은 수라고 주장하면서 이미 베드로가 탈옥한 전과가 있었으므로(5:19) 병력을 증가시켰을 것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Jacquier). 그러나 로마군에서는 4명이 한 조가 되어서 세 시간씩 근무를 했다는 점에서 볼 때(Haenchen)헤롯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도 그에 준했을 것으로 보는 편이 가장 무난하다.
ㅇ유월절 후에 - 베드로를 백성 앞에서 공개 재판하기로 작정한 날로 언급된 유월절 축제는 눅 22:1에서 언급된 바처럼 무교절과 동일시 되어 무교병을 먹는 일주일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Alford, Haenchen, Hervey). 따라서 유월절 후라면 적어도 니산월 21일 후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유월절이 유월절 식사를 하는 니산월 14일 저녁을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Lenski, Zahn, EphraemSyrus). 본문을 통해서는 이 두가지 견해의 타당성 여부를 구분할 근거를 찾아낼 수 없으나 누가가 유월절이라는 단어를 3절의 무교절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여기의 `유월절 후'는 무교절이 끝나는 니산월 21일 후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ㅇ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 백성들 앞에 베드로를 끌어내고자 하는 헤롯의 의도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백성들이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도 없었기 때문에 재판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Haenchen). 아마도 예수의 수난 설화에 맞추기 위한 저자의 의도적 편집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Loisy).그렇지 않으면 사형 집행을 공개적으로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유대인들을 만족시켰고 또한 자신도 유대인들의 기쁨에 매우 고무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2, 3절) 헤롯은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베드로의 체포를 선전하고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ㅇ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 베드로의 체포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본 구절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 (1) 성도들이 베드로의 체포를 교회의 위기로 판단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이미 영향력있는 사도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베드로 역시 처형될 것이라는 결론은 자명했다. 따라서 핵심적 지도자의 상실은 곧 교회의 위기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2) 교회의 단결을 볼 수 있다.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되어 뭉쳤다는 뜻이다. 즉 교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 흩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단결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는 고난중에 있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고난 중에 해야될 교회의 본분 중에 기도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었다. 따라서 당시 기독교인들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초능력만을 기대하는 현실도피적 신앙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불법적 힘에 맞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그것을 따른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은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의 구성상 7-11절에서 나타난 기적적 사실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즉 교회의 기도는 기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구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단결과 기도하는 힘은 하ご纛?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동기가 됨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이와 같은 교훈적 의미를 초대교회에 시사해 주기 위해 본문의 이야기를 기록했을 것이다.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ㅇ그 전날 밤에 -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되면서 또다시 이야기의 시점이 언급되고 있다.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기로 작정했던 그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4절에서 유월절 후라고만 언급하였기 때문에 유월절이 끝나는 바로 그 다음날인지 아니면 막연하게 유월절이 지난 어느 날을 가리키는지 정확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헤롯이 잡아내려 했다는 말을 볼 때 특정한 날이 지정되었음에 틀림없고 유월절후라는 말은 유월절이 끝난 니산월 22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유대인의 대명절로서 그 기간 중에는 죄인에게 형을 집행하지 않는 관례가 있었기 (마 26:5)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시점은 니산월 21일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의 날짜 계산이 저녁 해질 무렵에 하루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미 유월절 기간이 끝나고 22일이 시작된 날 밤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자세한 것은 4절 주석을 참조하라.
ㅇ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 옥에 갇힌 베드로의 모습에서 두 가지 저자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1) 옥에 갇힌 베드로의 상황이 탈출이나 구출을 엄두도 못낼만큼 삼엄하고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베드로의 양 옆에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고 병사 두 명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는 장면 묘사는 도저히 베드로가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는 이 다음에 진술되는 베드로의 구출에 극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2) 베드로 자신도 탈출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그가 잠자고 있었다는 사실로 잘 알 수 있다(Bauernfeind). 이같은 장면에 대해서 베드로가 자신의 처형 날짜가 다가왔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고 전제하면서 베드로의 침착성과 경건성이 강조될 수도 있다.그러나 누가는 문맥상 강조점을 베드로가 탈출에 대한 의사도 없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함으로써 베드로를 탈출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두고 있다. 한편 베드로가 두 군사 사이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진술은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1) 베드로가 양 옆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고 그 옆에서 두 군사가 지키고 있다. (2) 베드로를 묶고 있는 두 쇠사슬은 각각 양편의 군사와 함께 묶여 있다. 베드로에 대해 철저히 감시하려 한 헤롯의 의도로 보아 두번째 해석이 더 타당하다.
ㅇ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 감방 안에서도 두 사람의 경비병이 있고 문 밖에서도 두 사람 이상의 파수꾼이 지키고 있다는 것은 역시 베드로의 상황이 탈출이나 구출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임을 강조한다. 이로써 누가는 베드로를 구출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극적으로 고조시켜 준다.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ㅇ주의 사자 -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하늘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누가는 `하나님의 사자'(10:3) 또는 단순히 `천사'(10:4,22;12:8)로도 묘사하고 있다.
주의 사자가 나타난 것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5절) 하나님의 응답을 암시하며 한편으로는 베드로의 구출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것을 의미한다.
ㅇ광채가 조요하며 - 환한 빛이 감방을 비추었는데(공동번역) 이같은 묘사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그 영광이 임함을 표현하는 전통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마 28:8;눅 2:9;24:4).
ㅇ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 천사는 베드로를 깨우기 위한 수단으로 베드로의 옆구리를 쳤는데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파타쏘'는`친다', `때린다' 외에 `때려 눕힌다'(strike down) 또는 `죽인다'(slay) 등으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천사가 베드로에게 세찬 충격을 준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깊은 잠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주는 듯하다 (A.T.Robertson).
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ㅇ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 이 명령은 계속 강조되고 있는 사실 즉 베드로 자신에게는 탈출하려 하는 계획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베드로가 허리띠를 풀고 신까지 벗어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 증명된다. 당시의 복장은 반드시 허리띠를 띠어야만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산달리아)는 나무나 가죽으로 밑바닥을 만들어 가죽끈을 이용해서 발목에 메는 것이었으므로 벗었다가 신는데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편안한 상태에서 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천사의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베드로의 모습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베드로의 구출이 계획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ㅇ참인줄...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 여기서 언급된 `환상'은 바로 앞의 `참'과 대조되는 단어로서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현실이 아닌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Haenchen).이같은 묘사 역시 베드로에게는 스스로 탈출하려는 계획이나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상도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의 구출 사건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ㅇ성으로 통한 쇠문...절로 열리는지라 - 성으로 통하는 쇠문은 `거리로 통하는 철문'을 의미하는데 보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도시 또는 시내로 향한 것을 뜻한다. 또한 쇠로 된 문이란 매우 육중하고 함부로 열 수 없는 견고한 문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절로 열리는지라'는 말과 대조되어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헤롯이 베드로를 성 중에서 가장 견고한 감옥에 구금했음을 의미한다.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 하여
ㅇ베드로가 정신이 나서...알겠노라 -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정신을 차렸다는 말은 곧이어 언급된 ` 알겠노라'와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구출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2) 9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이 구출되고 있는 사실을 환상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환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본문의 전체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두번째 해석이 더 타당하다. 베드로는 꿈인지 생시인지 의아해 하면서 천사를 따라 나온후 천사가 떠나버리자 자기가 감옥 바깥에 확실히 나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환상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사건의 전모에 대한 의미를 깨닫기 전에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심리 상태를 묘사해 준다. 베드로는 자신이 당한 일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먼저 놀라운 사건이 환상인지 실제인지 인식해야 했다. 그 다음에 그는 자기가 왜 하나님에 의해 구출되어야 했는지 알게 되는 인식의 과정을 거쳤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오이다'는 경험적인 지식에 주로 사용되는 `기노스코'와는 달리 직관적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베드로가 정신이 들면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ㅇ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 베드로가 감옥으로부터 구출되어 처음으로 찾아간 집을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마리아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가라는 요한에게 강조점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요한의 이름이 당시 독자들에게 지명도가 높은 이름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이며(골4:10) 바울과 바나바의 보조자이며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한편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유대식 이름이다. 이는 바울이 로마식 이름이고 사울이 유대식 이름인 것과 동일하다. 그는 바울의 제1차 여행때 바나바와 바울과 동행하였는데 (12:25;13:5) 2차 여행 때 그의 동행에 관한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기도 한다(15:37,38). 또한 1:13이하에 언급되는 다락방이 본문과 동일한 장소라고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제자들이 수시로 모였던 것 같다.
ㅇ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 5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성도들은 베드로가 체포된 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베드로가 구출되어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본절에는 미완료 동사와 분사형이 함께 사용되어 끊임없이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강조되었다.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ㅇ대문 - 혹자는 베드로가 찾은 이 집이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본체로 들어가는 큰 집이라고 주장한다(hAENCHEN). 그 근거는 `대문'에 해당하는 `퓔론' 이 주로 `행랑의 대문' 또는 `궁전의 큰 대문'을 의미한다는데에 있다. 마가의 다락방이 1:13에 언급된 것과 동일하다면 그 집은 상당히 큰 규모였을 것이며 정원도 지닌 집이었을 것이다. 한편 대문이 잠겨 있는 것은 일상적일 수도 있으나 헤롯의 박해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ㅇ계집 아이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스케'는 `계집아이' 또는 `처녀' 외에 `하녀'도 의미한다. 이는 요 18:17에서 대제사장의 여종 곧 문 지키는 여종에게 동일하게 적용된 용어다. 따라서 본절에서 `파이디스케'는 단순히 계집아이가 아니라 큰집의 문간방에 거하면서 손님이 왔을 때 문을 열어 주는 `하녀'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ㅇ영접하러 - 이 말의 헬라어 `휘파쿠오'는 주로 `칭송하다' 또는 `따르다'의 의미로 사용되며(롬 6:16;엡 6:5;골 3:22;살후 1:8) 간혹 `열다'로도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ㅇ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 로데가 얼굴을 보지 않고서 음성만 듣고 베드로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에 자주 왔음과 그 가족들과 친밀한 관계였음을 시사해 준다.
ㅇ기뻐하며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 너무 기뻐서 문여는 것조차 잊고 안으로 달려가는 로데의 모습은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기적의 의외성을 보여준다. 즉 그녀의 행동은 베드로가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15절에서 로데의 증언을 듣고서 `미쳤다'고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당시 그 집에 모인 성도들은 사도 야고보가 순교당하고 베드로조차 투옥되어 핍박자의 손길이 자기들에게도 미치리라 생각하여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함께 기도했었다. 그러던 차에 베드로가 나타났으니 기쁘기도 하며 놀랍기도 했을 것이다.
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ㅇ네가 미쳤다 - 그들의 반응은 로데의 진술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즉 그들은 베드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무시했다. 베드로가 투옥된 후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했던 그들의 모습과 본절에서의 반응이 매우 상반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이 불신앙에 근거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너무도 뜻밖의 소식을 접했기에 그들은 로데가 잘못 본것으로 여겨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ㅇ힘써 말하되 - 이 표현은 성도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로데가 자신의 진술이 진실됨을 강하게 강조하는 만큼 성도들의 부정적인 반응도 그만큼 컸던 것이다.
ㅇ그의 천사 - 이 말은 베드로를 지켜주는 수호 천사를 말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당시 각 개인을 지켜주는 수호 천사가 있다고 믿었다(창 48:15,16;단 3:28;6:22;마18:10;히 1:14).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를 지켜주는 천사가 찾아와 베드로의 죽음을 전해주는 것으로 오해하였을 가능성도 있다(Lenski). 그들이 그렇게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베드로 체포 직전에 야고보가 참수형()을 당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인 있을 것이다.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ㅇ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 현재분사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장면묘사는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17절에 베드로가 급히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점(17절)과 병사들의 소동(18절)이 베드로에게 닥친 상황의 긴박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ㅇ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 베드로의 출현으로 사람들이 기쁨과 놀라움으로 흥분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손을 흔들어' 조용히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은 자신의 구출이 헤롯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구출될 당시는 한밤이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6절) 아직 아무도 베드로의 구출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출현이 알려져 또다시 체포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이같은 조치를 취했을 수 있다. 그는 오래 머물수 없는 위급한 상황임을 직시하고 곧 떠나야 할 마음 때문에 같이 기뻐할 겨를도 없이 먼저 자신의 구출 경위를 증언하기 위해 조용히 할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ㅇ야고보와 형제들에게 - 여기서 언급된 야고보가 정확히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12사도 중의 하나인 알패오 야고보라는 설도 있으나(Calvin,Bengel) 대체적으로 모든 주석가들은 예수의 동생 야고보로 보고 있다(Alford, Meyer, Lumby, Knowling,Lenski, Hervey). 여기서 언급된 인물은 당시 지명도가 높은 유명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을 맡게 될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적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15:13:21:18;고전 15:7;갈 1:19;2:9,12). 그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때로는 비난했던 적이 있으나(요 7:2-5) 그의 변화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1:14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초대 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15:12-21).이와는 달리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ㅇ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 베드로는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행선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다. 즉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과 클레멘트(Clement)의 설교에 근거하여 베드로의 행선지가 로마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세비우스의 기록 자체가 별로 신빙성이 없고 오히려 로마 교회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주장이 대두된 듯하다. 특히 이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했으며 (A.D.44)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도 그곳에 있었다(갈 2:9).따라서 베드로가 이후에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교회를 일으켰다는 카톨릭 신학자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고 본다.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지지되는 지명은 안디옥으로 꼽히고 있다(Haenchen). 그러나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베드로는 헤롯이 죽은 후(12:23) 예루살렘 회의 때 돌아오게 된다(15:7).
18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ㅇ날이 새매 -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마가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감으로써 일단락되고 여기서는 이야기의 뒷마무리가 묘사되고 있다. 날이 밝아오는 아침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베드로의 구출 사건은 간밤에 감쪽같이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점은 구출 사건이 한밤중이었다면 왜 아침까지 군사들이 몰랐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 군사들이 천사에 의해 깊은 잠에 빠졌거나 날이 샐 동안 베드로가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시점은 4-6절에서 언급된 바 있는 날 즉 헤롯이 베드로를 유대인들 앞에 끌어내려고 작정해 둔 날이었다.
ㅇ적지 않게 소동하니 -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적지 않게'라 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는 본서에서만 나타나는 누가의 독특한 용법이다(15:2;17:4,12;19:23,24). 이는 소동하는 정도가 매우 심했음을 강조해 준다. 한편 `소동하니'란 말은 어떤 문제가 야기되어 그 문제로 인해 야단법석이 난 상황에 적용된다. 아마 군사들은 근무 교대 시간에 이르러 베드로가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여 서로 놀라고 당황하였을 것이며 곧 그 사실을 헤롯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에 헤롯 궁전안에는 큰 혼란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ㅇ심문하고 - 여기서 언급된 법정 용어 `아나크리노'는 `심문하다', `질문하다' 또는 `조사하다'는 뜻 외에 `심판하다'와 `책임을 묻다'의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문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ㅇ죽이라 명하니라 - 베드로가 없어진 것에 대한 결과로 파수꾼들이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1) 베드로의 구출이 헤롯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11절에서 베드로를 구출하는 주님의 뜻이 헤롯을 실망케 하려는데 있음을 베드로가 깨닫는 장면을 통해 이미 암시되었다. (2) 베드로가 옥에 그대로 있었다면 야고보의 경우처럼 처형당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즉 헤롯이 파수꾼들을 처형시킬 정도였다면 그가 베드로를 체포한 것이 어떤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였음을 시사한다.
ㅇ가이사랴로 내려가서 -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4Km 지점에 있는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로서 고넬료가 있었던 곳이며(10:1)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곳으로 팔레스틴의 로마 행정 중심 도시이다. 헤롯이 갑자기 가이사랴로 내려간 이유는 정확히 알길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헤롯이 가이사랴로 내려갔다는 것은 헤롯의 박해가 사실상 실패했음을 시사한다. 가이사랴가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곳이기는 하나 헤롯 안티파터(Antipater)에 의해 건축되었으므로, 헤롯 왕가는 그곳에 거할 장소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본문에 언급된 헤롯 아그립바(1세)는 기습된 베드로의 탈출을 경험하고 박해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는 유월절 절기가 끝난 상황이므로 그는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쉬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가이사랴가 예루살렘보다 북서쪽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가다'로 표현된 것은 위치의 표현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기인한다. 즉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가면 `올라간다'고 표현하는 반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면 방향이 어디든지 상관없이 `내려간다'고 표현한다.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ㅇ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 헤롯은 보복 조처로 시돈과 두로지방에 대해 아마 식량 공급을 중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로와 시돈은 솔로몬 시대 이후(왕상 5:9;스 3:7) 식량을 유대지역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ㅇ헤롯이 날을 택하여 - 앞절과 연관하여 볼 때 아마도 이 `날'은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절단과 `평화 조약 체결'을 발표하는 날이었던 듯하다(Haenchen). 이와 달리 여러 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글을 인용하여 이 날이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영국에서 돌아온 승리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경기일 둘째날이었다고 말한다(Lenski,Whitelaw, H. Marshall, Bruce). 요세푸스가 묘사한 당시의 장면은 21-23절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므로 이보다 더 정확한 근거가 없는 한 부정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누가가 다음절과 아무 연관이 없는 한절을 삽입시켰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헤롯은 백성들이 기억할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정하였던 것이고, 이와같은 축제일을 기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사절단이 헤롯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ㅇ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헤롯은 은으로 만든 빛나는 옷을 입었으며 그 옷이 햇빛에 빛나자 아첨꾼들이 그를 신으로 추대하여 소리쳤다고 전해진다.
ㅇ백성을 효유한대 - `효유하다'란 말은 군중을 향해 연설을 한다는 의미다. 이는 어떤 공식적인 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백성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아우투스'는 직역하면 `그들에게'라고 해야 한다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KJV, NASB, RSV,JB, LB). 그런데 지시대명사의 성격상 앞에서 (20절) 언급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Haenchen). 하지만 22절에서 헤롯의 연설에 반응을 보인 것은 `군중'을 뜻하는 `데모스' 이다. 이는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축제 행사에 참석하고 있는 모든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헤롯은 경기일 둘째날 모여든 모든 군중들을 향해 승전을 기념하는 연설을 했을 것이다.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ㅇ이것은 신의 소리요 -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대개의 경우 모든 자연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신들의 질서는 인간 세계와 밀접하며, 범상하지 않은 사람은 신으로, 기이하거나 거대한 자연 현상은 신적인 것으로 이해했다(14:11;28:6). 이와같은 범신론적인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신의 소리'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헤롯을 향해 `신의 소리'라고 외친 사람들을 대해 요세푸스는 막연히 `아첨꾼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아첨꾼들을 유대인들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비록 헬라나 로마 세계에서 범신론이 퍼져 있기는 해도 유일신 신앙을 가진 유대교는 그것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함성은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죽으니라
ㅇ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 이 말은 헤롯이 군중들이 자신을 추켜 세우는 함성을 듣고 매우 만족해 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루스드라에서 그 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대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했던 것(14:8-18)과 매우 대조적이다.
ㅇ주의 사자가 곧 치니 - 헤롯의 불경건을 벌하기 위해 나타난 것은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해 나타난 것과 같은 `주의 사자'였다. 그가 행한 것은 헤롯을 `쳤다'는 것으로 7절에서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쳤을 때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리적인 힘을 가한 것이 아니라 그 사자가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어떤 조치를 취한 것으로 이해된다. 요세푸스는 헤롯의 죽음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기를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5일 후에 죽게 됐는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한다.
ㅇ충이 먹어 - 헤롯이 죽어간 과정은 벌레에 먹히어 가는 과정이었다.어떻게 먹히게 된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의 비참한 최후를 강조하는 것이다.누가는 이같은 묘사를 통해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맞게 되는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줌으로써 독재자들이 기타 교권주의자들이 박해를 못하도록 경고하려 했던 것같다. 헤롯을 죽게 한 것이 주의 사자였다는 것은 박해자를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ㅇ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 헤롯의 비참한 최후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본문은 기독교의 확장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이같은 형식의 문장은 6:7과 19:20에서도 나오는데 기독교의 거침없는 성장을 요약해 주고 있다.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ㅇ부조의 일을 마치고 - 본문은 문맥상 매우 이질적이다. 11:30과 직접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사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 베드로 구출 사건과 헤롯의 죽음이 있었는지 아니면 베드로 사건과 헤롯의 죽음 이후에 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헌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기근을 디베료 율리우스 알렉산더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발생한 것으로 기술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시점은 A.D.46년경으로 추정된다 (F.F.Bruce). 그렇지만 헤롯 아그립바가 A.D.44년 죽었으므로 그들의 예루살렘 방문은 베드로의 구출 사건과 2년 이상의 시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