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4장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다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유다가 배반하다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시다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목요일 낮시간)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목요일 저녁, 유월절 시작--마지막 만찬 거행, 그후 그날 밤에 겟세마네로 이동, 잡히심--금요일 오후3시 운명하심, 장사되고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나고 주일 아침 새벽에 부활하심)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마지막 만찬
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언하시다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잡히시다
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으로 도망하다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공회 앞에 서시다
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하다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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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개요)
본 장(章)은 이 복음서의 저자가 우리가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비적으로도 알고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 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하에서 본 장(章)의 내용을 구분해 보고자 한다.
Ⅰ.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음모(1, 2).
Ⅱ.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 이틀 전에 베다니에서 저녁을 잡수시는 자리에서 어느 여인으로부터 머리에 향유를 바르게 됨(3-9).
Ⅲ. 그리스도를 팔기 위해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약속함 (10, 11).
Ⅳ.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함. 주께서 성만찬 의식을 제정하심. 만찬 도중과 후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강론하심(12-31).
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32-42).
Ⅵ. 유다에게 배신을 당해 팔리시는 예수님, 그리고 대제사장들로부터 파송된 자들이 예수를 결박함(43-52).
Ⅶ. 예수께서 대제사장들 앞에서 심문을 당하심. 그리고 그 법정에서 예수께 부당한 모독을 함(53-65).
Ⅷ.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함(66-72). 본문의 대부분은 이미 마태복음 26장에서 살펴 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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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뜨린 여인(막 14:1-11)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겪으신 실례를 들어 교훈을 하시는 것이다.
Ⅰ. 그리스도의 친구들이 베푼 친절과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존귀케 하기 위한 준비. 예루살렘 성안에나 그 주위마을에는 예수를 사랑한 얼마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무리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친절을 베푼다 해도 결코 흡족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 중에는 비록 이스라엘이 회복되지 못한다 해도 예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앞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 여기에 한 친구가 있는데 그는 예수를 식탁에 초대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도 친절히 그 초대를 받아들인 것이다(3절).
비록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아시고 계셨지만 그는 모든 친구들로부터 우울하게 물러서도록 자신을 저버리시지 않으시고 이전과 다름없이 그의 친구들과 자유스럽게 대화를 나누시었다.
2. 여기에 예수님의 또 하나 친구,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대단히 친절하게도 매우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이것이야말로 그 선량한 여자에 의해 예수께 베풀어진 특별한 존경이었다. 자기로서는 그것 말고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분이 베푸신 선한 일에 보답할 수 있거나 합당한 존경을 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가서 1장 12절에 있는 말씀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가지고 예수에게 향유를 부어드리자.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가지고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자. 그리고 주님을 우리의 군주로서 기름을 부으며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입맞춤을 하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까지 하셨는데 우리가 주님께 한 옥합을 부어드리는데 아까운 것이 있겠는가?
그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그리스도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여인은 향유 옥합을 깨뜨렸다고 우리는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상자가 보통 상자가 아니고 옥합이므로 깨기가 정말 힘든 것인데 그 향유를 붓기 위하여 굳이 그 옥합을 깰 필요가 있었을까?
어떤 분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그 여인이 향유 옥합 속에 들어 있는 향유가 잘 나오게 하기 위해 옥합을 흔들거나 땅에다 두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옥합 속에 굳어 있는 향유를 잘 녹아 나오게 하기 위해 그 여자가 향유 옥합을 문질렀을 것으로 생각한다.
보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소유 중 어떤 값진 것이라도 아까운 생각으로 도로 취하려는 생각을 말아야 한다. 주 예수에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취하시도록 하자. 우리의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자.
(1) 합당치 못한 잘못된 편견을 내세우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무슨 의사로 향유를 허비하는가?"라고 비난하였다(4절).
실상,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들의 값진 귀한 것을 드리려는 사랑이 그 마음속에 없기 때문에 그 여인이 값진 향유를 허비한다고 불쑥 말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칭하지 아니하겠고 궤휼한 자를 다시 정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라"(사 32:5).
그러므로 존귀한 자나 정대한 자, 그 누구든지 상관없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랑의 동기로 감사하며 주께 드리는 것을 결코 낭비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려"는 것처럼 말하였다(5절).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숙고해 보자면, "고르반"의 "일반적 동정"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 [사랑하기에]드리는 바 "구체적 동정"을 결코 면제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7:11).
즉,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일반적 의미의 자선 행함을 주 예수께 드리는 이 특별한 사랑을 물리치는 빙거로 삼아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행하기에 합당한 선한 일을 찾았다면 직접 당신의 능력으로 그 일을 행하라 !, 또한 사랑에 감격하여 드리는 바 자선과 구제의 헌금을 결코 잊지말라!!
(2)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어떤 계획과 생각에 대해서 이상적인 견해를 피력하신다.
아마 그 여인은 여러 대중이 보는 앞에서 예수에게 자기의 존경과 사랑을 일부러 보여드리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의 찬사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행함에 대해서 큰 믿음과 큰사랑의 행위임을 인정하신 것이다(8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와 같은 특별한 사랑의 표현 행위를 지금 다가오고 있는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비 의식으로 삼아 높이 인정해 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에는 자기의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였던 것을 보라. 그리고 어떻게 모든 일이 그의 죽음과 연관되었나를 보라.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서 친절히 말씀하여 주고 계셨는가를 보라.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이 그들의 관을 준비하고 장례를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례는 가장 낮추신 그의 겸손의 발자취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리스도께서 쾌활한 마음으로 거기에 따랐으며 그리스도는 거기에 따르는 영광의 표적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씻고 그의 성도들의 죽음도 또한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이제 고난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갈 때는 오히려 그렇게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장례를 위해서 머리에 향유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3) 그리스도께서는 이 여인의 이러한 영웅적인 사랑의 행위가 모든 세대를 통해 교회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을 수 있도록 칭찬을 하셨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9절).
이 세상에서 어떤 착한 일을 행함으로 받은 영광의 찬사란 그 일로 인해 받은 모든 책망과 모욕을 이겨내는 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던" 것이다(히 11:36, 39).
이 착한 여인은 그 여인이 드린 향유 옥합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여인은 그녀의 기름도 헛되지 않고 그녀의 봉사도 헛되지 않다"는 말이 옳은 것이다.
그 여인은 이 향유 옥합으로 인해서 주님으로부터 귀한 찬사를 들었고 이 값비싼 향유보다도 더 좋은 이름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악함과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준비를 진행함.
1.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등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며" 의논하였다(1, 2절).
유월절이 돌아왔으니 이 절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는 것이다.
(1) 그의 죽음과 고난의 그 모든 과정과 그 수모를 만천하에 공개해서 각 지방에서 올라온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일을 목격하도록 하고 놀라도록 하려는 것이다.
(2) 원형은 모형에 상응하는 수가 있다.
복음교회의 유월절이란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우리를 속박으로부터 해방해 주신 것을 기념함이다.
유월절 양의 희생과 동시에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 본래적 유월절의 의미인 것이다.
①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얼마나 간악하였나를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추방할까 옥에다 감금할까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로 하여금 잠잠케 하고 미래를 향한 그의 진행을 중단케 하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신 모든 선한 일에 대하여 그를 보복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② 그들이 얼마나 민감하였나를 보여 준다.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2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에는 오히려 위험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일에 방해가 된다고 하거나 자기들의 일에 비협조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민요가 날까" 염려가 된다고 하였다.
혹시 무리들이 들고 일어나 그를 구해낼 우려가 있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을 진행하는 자들에게 어떤 보복을 할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찬사와 인기를 가장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의 분노와 불쾌한 행동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2. 예수를 배신한 가증스런 원수인 유다는 그들과 예수를 넘겨주기를 약속하였던 것이다(10, 11절).
그는 "열 둘 중에 하나"라고 불렀고, 그리스도의 가족의 하나로 그리스도와 친숙하였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섬길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그런데 그가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가서 이 일에 자기가 협조하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1) 유다가 그들과 약속한 것은 그가 그들에게 예수를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로 민요가 나지 않도록, 민일 예수께서 그의 숭배자들 가운데 대중 앞에서 그를 붙들려고 한다면 어느 때 어디에서 그를 찾고 그를 붙들까에 대해서 신호를 해 주겠다고 대가를 받고 약속을 한 것이다.
가룟 유다가 그들이 원하는 도움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모의를 하는지 사전에 과연 알고 있었을까? 그는 아마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토론은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룟 유다가 자기들의 음모에 협조하려고 하는 것을 사전에 알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 누가 그러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간 사탄이 그들이 유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아채게 하였으며 그를 그들의 안내자가 되게 한 것이다.
불순종의 자녀들 속에 역사 하는 영은 악을 도모하기 위한 계획 가운데 어떻게 서로 돕게 할 지를 알고 있기에, 그 일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는 것이다.
(2) 유다가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약속한 것은 이 일로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기 전에 그는 이미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탐욕은 유다를 지배하는 욕심이었고, 그 자신의 부정이었다.
그리고 그 탐욕은 가룟 유다로 하여금 자기의 선생을 파는 무서운 죄로 자기를 배신하게 하였다.
악마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를 시험하였고 그를 정복하였다. 그들이 유다에게 어떤 권세를 약속하지는 않았다.
유다에게는 그런 야망이 없었다. 그들은 그에게 돈을 약속하였다. 우리는 가장 쉽게 우리를 침입하는 죄에 대해서 더욱 경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마 가룟 유다가 처음에 예수께 나와서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것도 금전을 취급하는 회계 일을 보도록 하는 약속이 있어서 욕심 때문에 그러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를 따르는 당초부터 그를 팔려는 생각과 계획을 가졌는지 모른다.
종교를 추구하던 정신이 어떤 시점에 이르러 그 추구하는 바가 육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지향하게 되는 때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바로 그 근저에는 가증스럽고 허물진 배교의 쓴 뿌리가 있음을 알게 되리라.
(3) 돈을 안전하게 모으기 위해 그는 이익에 자기를 맡겼다.
그는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았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기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어떤 것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사악한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만일에 어느 때에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인해서 올무에 걸리게 될 때에 우리는 재빨리 그 곳에서 나옴으로 우리 자신을 구원하도록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잠 6:1-5).
악한 일에 대해서 의무를 다함은 무익한 일이라는 것은 종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율법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를 못하도록 얽매이게 하며 우리의 원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길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악적인 추구에 있어서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을 쉽게 확장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불행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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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 제정(막 14:12-31)
이 성경 구절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제자들과 더불어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다가오는 슬픔을 당신 스스로 준비하시려 기쁨과 위로에 찬 성찬식을 행하시고 그 장엄한 일을 기쁨으로 잘 감당하시며 다가올 일에 대한 확실한 전망을 가지고 이를 행하시었다.
다가온 그리고 다가오는 고난에 대해서 아무런 깨달음이 없이 성찬식에 참예하는 것은 적합한 일이 아니다.
1. 휘트비 박사(Dr. Whitby)가 자세히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지켰던 보통 절기일에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하몬드 박사(Dr. Hammond)가 밝힌 전날 밤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것은 절기 첫날이었던 것이다. 이런 절기는 한 주간을 두고 지켰던 것이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12절) 예비하였다.
2.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유월절을 드실 장소를 어떻게 찾을까에 대해서 지시를 하시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 미래의 일에 대해서 전혀 오류가 없으신 지식에 대한 증거를 또 한번 보여 주고 졔신다.
그것은 이보다 앞서 예수께서 입성하실 때 나실 나귀를 가지러 보내신 일과 비슷한 사실이다.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킬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13, 14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시민들 중에는 지방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위해 이 경우와 같이 방을 빌려 줄 데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방들 중에 하나를 빌리게 된 것이다. 그 방은 어떤 친구의 집도 아니고 전에 안면이 있는 사람의 방도 아닌 것 같다.
만일 그런 친지의 집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 그 어떤 친구의 집에 가라"하셨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잘 모르는 집에 가시어서 제자들과 더불어 성만찬을 들으시면서 대화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시었을 것이다.
아마 그리스도께서 이 일에 대하여 암호로써 통지함으로 유다에게 숨기셨을 것이다. 그도 그 장소에 도착한 후에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암호를 사용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정결한 물로 끼끗히 씻은 듯한 깨끗한 심령에 거하시게 될 것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서 유하시려고 생각하신 곳에는 그분보다 앞서 물주전자가 먼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사 1:16-18).
3. 그리스도께서는 잘 예비된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잡수시었다.
하몬드 박사는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이라는 말의 “자리를 베풀고”의 원어 ‘에스트로메논’을 카페트를 깔아 잘 갖춘 것이라고 하였다.
그 다락방은 아마도 대단히 잘 정돈된 식당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보통 식사를 하실 적에는 그와 같이 훌륭하게 갖추어진 식당에서 하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대단히 평범한 곳을 택하시어 잔디 위에 앉아서 식사도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드실 적에는 당신이 구할 수 있는 한 가장 훌륭하고 잘 정돈된 방을 택하시었다.
하나님께서는 외관적인 화려함을 보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중심적인 존경심으로 신성한 의식을 표시함을 보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가족인 열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했다. 그리하여 가족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시었다.
자녀들의 가족들뿐 아니라 종들의 가족들, 또는 학자들의 가족들 학생들의 가족들에 대하여 그들의 종교심을 붙들어 주고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열둘을 데리시고" 오셨다면 그 중에 가룟 유다도 비록 그가 이 때에 자기의 선생을 넘겨 줄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성경 구절에서 가룟유다가 그곳에 동석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20절). 그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그런 자리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에 이 만찬회에 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면 다윗에 대해서 사울이 한 것처럼 "그는 부정한가 보다, 그는 정녕 부정한가 보다"(삼상 20:26)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위선자들은 비록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는 줄을 알지만 그들의 명예를 유지하고 그들의 숨은 악을 완화시키려고 그 특별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의 악함을 아시지만 아직 그것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유월절 만찬석에서 추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외관상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인간들의 손에 "천국 열쇠"를 주시어 당신의 식탁에 그들을 인도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고백으로 만족하게 하시려 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싹이 나기 전에는 "쓴 뿌리"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Ⅱ. 그들이 유월절 식사를 들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더불어 담화를 가지심.
아마 그들이 담화를 나누게 된 것은 유월절 절기의 관습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하나님이 구원해 내신 일과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보호해 주신 일 등에 대하여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기까지는 이 경우를 당해서 늘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만찬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1.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을 중심으로 한 작은 사회에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곧 당신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하시었다. "인자가 팔리리라"고 하시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전에도 들었기 때문에 다음에 무슨 말이 따르게 될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를 당신이 팔리게 되면 제자들이 곧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해서 결심하였고 예수께서도 죽기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할 것이라 하시었다.
"인자가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21절)고 하시었다.
그 사실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예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 말씀을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서로 위로하는 공동체로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시자 즐거운 분위기는 깨지게 된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심은 가능한한 가룟 유다의 양심을 일깨우고 그를 악으로부터 돌이키게 하여 아직도 늦지 않으니 함정의 가장자리에서 그를 붙들어 주시려 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고 멀었는데, 충고에 있어서 가장 핵심 대상이었던 그가 무관심을 보인 것이다. 모든 나머지 제자들이 그 일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되었다.
(1) 그들은 슬퍼하기 시작하였다.
전에 죄에 빠졌던 일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또 다시 죄에 빠질까 두려워하게 된다.
그것은 신령한 잔치의 위안을 빼앗아가고 즐거움이 사라지게 한다. 여기에 유월절 만찬을 삼켜버린 쓴 풀이 있었다.
(2) 그들은 자신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자오되 내니이까?" 하고 물었다(19절).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더욱 경계하고 남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바라는" 것이 사랑의 법이다(고전 13:5-7).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에 의해서 보다 우리 자신이 더욱 악한 것을 하지 않았나 의심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복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욱 신뢰해야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은 것이다.
우리 안에 악한 길이 있나를 살펴보고, 그러한 쓴 뿌리가 있나 살펴보아 그것이 우리에게서 발견되면 그 뿌리를 뽑아내고 그 길을 멈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였나 살펴보자.
①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그리스도를 원수들에게 넘겨 줄 자는 이 악한 유다임을 암시한 것이다.
② 예수의 대답은 유다를 대단히 불안케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가 일을 수행하려고 하였다면 그것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것이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1절).
유다와 같이 주님을 팔고 원수들에게 넘겨주는 그런 불행한 생애를 갖느니 차라리 이 세상에서 생을 갖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선생님이 자주 자기가 팔리리라 말씀하였다고 스스로 자신을 달래고 요기를 내게 하였는지 모른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겠느뇨 하리라"(롬 9:1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하시었다.
인간의 죄를 용납하신다는 하나님의 선포,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홀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범죄가 필연적이라 인정함도, 범죄하려는 그들의 결심을 용인함도, 죄에 대한 변명을 허용함도 아니며 형벌을 완화시키시려 함도 아님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에 의해서 그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행 2:23).
Ⅲ. 주의 만찬의 제정.
1. 성만찬은 유월절 만찬이 끝날 무렵에 제정된 것이다.
그들이 유월절의 희생된 어린 양으로 흡족하게 먹었을 때에 주의 만찬은 육신의 음식을 드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한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부활시키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이 유월절 양의 고기에 대한 교훈의 양식은 오직 영혼을 위해 주시는 것이며 몸을 위해서는 적은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유월절 만찬이 끝날 무렵 그 유월절은 복음화하였고 영적인 의미로 대신하게 된 것이다.
많은 교훈과 성만찬의 의무는 유월절 율법에 의해서 우리에게 이해된다(출 12장).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은 비록, 그것이 우리를 얽매이게 하지 않는다 해도 복음의 열쇠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많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의식을 서로 비교해 보아도 좋다. 그리고 성만찬이 유월절보다 얼마나 간략하고 분명한가를 살펴 보라.
그리스도의 멍에는 구약의 의식에 대한 율법보다 훨씬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 의식은 더욱 신령한 것이다.
2. 그 성찬식은 그리스도 자신의 모범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명령하신 세례식과 같이 예식과 위엄의 법이 아니다(마 28:19).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에게 주어졌다(마 28:18).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실행하시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이미 당신의 제자가 된 사람들을 위해서 의도하였고 그들과 언약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성찬식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적인 의무이며 충만한 힘과 능력과 미덕 중에 행해지도록 의도된 것이다.
3. 성찬식은 축복과 감사를 드림으로 제정된 것이다.
일반섭리의 은사도 그러해야 하거든 하물며 특별한 은혜에 대해 서랴 ! (딤전 4:4, 5).
그리스도께서 축복하시고 감사를 드리었다(22, 23절). 다른 때에 음식을 드실 때에도 축복하시고 감사를 드리었다(6:41; 8:7).
그것이 너무나 잘 알려져서 그것으로 예수를 알게 된 적도 있다.(눅 24:30, 31). 예수께서는 이 만찬석에서도 그 때와 같이 축사하신 것이다.
4. 성찬식은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도록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며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기쁨으로 주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포도의 피라고 볼 수 있는 포도주를 가리켜 새 언약의 피라고 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피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빈번히 피를 언급함은 그 귀한 피가 우리의 속죄의 값이 되기 때문이다.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대속하시는 것이다(레 17:11-14).
피를 쏟으시는 사실은 그의 영혼을 우리를 위해 버리심에 대하여 가장 의미 있게 나타내신 것이다(사 53:12).
피는 호소하는 소리를 가지고 있다(창 4:10). 그러므로 피에 대한 언급이 많다. 왜냐하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히 12:24).
주께서 포도주에 대하여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시었다. 왜냐하면 은혜에 대한 약속이 언약이 되며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힘의 언약이 되기 때문이다(히 9:16).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다고 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신다고 하였다(사 53:11).
그리고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한다고 하였다(히 2:10).
그 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흡족하며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 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활용할 수 있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수많은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있다 하였다(히 7:9-14).
지금도 이 보혈은 모든 사람을 씻을 수 있는 샘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보혈을 흘려주시었다는 이 말씀은 회개하는 수많은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
많은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려주셨는데 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았겠는가 ?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이방의 죄인들을 위해서, 죄인들의 괴수를 위해서 피 흘리셨다면 왜 나를 위해 피 흘려 정결케 하지 않으시겠는가?
5.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은 언약에 대한 비준이 되게 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사신 그런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재가의 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것을 받으라고 하시었고 그들에게 포도주 잔을 주시며 그것을 마시게 하였다(22, 23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당신들의 것이 되게 하고 당신들의 영혼의 음료가 되게 하여 당신을 강하게 하고 양육하고 새롭게 하여 당신의 신령한 생활에 대하여 활력소와 위안이 되게 하라.
6. 성찬식은 하늘의 행복을 바라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행복을 간절히 사모하게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세의 모든 쾌락과 즐거움에 대하여 감각미를 잃게 하는 것이다(25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아무도 신령한 기쁨을 맛보고 나서 곧 현세의 본능적인 쾌락을 바라게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신령한 기쁨이 더 좋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눅 5:39).
그러나 누구든지 신령한 기쁨을 맛보게 되면 곧 영원한 기쁨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와 같은 신령한 기쁨을 더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쾌락의 강에서 신령한 음료를 마시기 전에는 이 세상의 상하고 부패한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날을 재촉하심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 영원히 새롭고 완전한 생명수를 마시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7. 그 성만찬은 찬미로 끝을 맺었다(26절).
비록 그리스도께서 원수들 가운데 있었지만 그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찬미하는 이 신성한 의무를 약하지 않았다.
바울과 실라가 노래하며 죄수들이 듣더라고 하였다. 이것은 복음적인 노래였다.
복음의 시대가 구약에 보면 즐거움에 찬 시대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때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노래로 표현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백조 같은" 노래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노래를 고민에 들어가기 직전에 부른 것이다.
아마도 그 찬미는 그가 자주 부르신 것으로 보이는 시편 113-118편이었을 것이다.
Ⅳ. 그들이 달밤에 베다니로 돌아올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심. "그들은 찬미를 하고" 곧 밖으로 나갔다.
그 시간은 취침할 시간이 되었지만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이 그에게 다가온 고난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실로 그이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그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그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졸게 아니하기를"
그 구속의 사업이 이루어지기까지 하였다(시 132:3, 4).
유월절을 지키던 날 밤에는 장자의 죽음의 사자의 칼이 두려워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외출이 금지되었던 것이다(출 12:22, 23).
그러나 목자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었던 것이다.
그들은 죽음의 사자들을 피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시어 영원한 죽음을 멸하시었던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자기 자신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고난 중에서 버림을 당할 것에 대하여 예언하시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27절).
예수께서는 성서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그들이 모두 자기를 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었다(슥 13:7).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사실을 아시고 계셨지만 그들을 식탁에 초대하여 그들과 더불어 유월절 만찬을 드시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타락하고 실수할 것을 아시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훗날에 범죄 할까 두려워 성만찬에 참예하기를 주저하는 연약한 제사를 취하지 말자.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위험스런 것은 근면한 양심으로 성만찬에 참예하여 우리 자신을 더욱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에게 붙들려 있음을 그들이 보았을 때에 이 분이 과연 메시야냐는 의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예수께서 시험을 당하실 때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때때로 실수를 범하였지만 그를 버리시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등진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폭풍이 너무나 거세게 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이며, 배는 파선될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떤 시험은 더욱 험악한 것이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라"하였고(계 2:10) 그 다음에서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써 시험이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하였다(계 3:10).
목자를 친다는 것은 보통 양들이 흩어지는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감독이나 목사나 가장이나 선생은 그들의 책임하에 있는 자들에게 목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목자들에게 무엇이 잘못될 때에 그 모든 양들은 그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위험스런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얼마 후에 그들이 다시 자기에게 모여들게 되고 그들의 의무와 그들의 위로에 되돌아 올 것을 약속하심으로 그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시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28절). 그곳에 가서 다시 만나 서로 위로를 하고 기뻐하자는 뜻을 비추신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특히 베드로에 의해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시었다.
그들이 감람산으로 갔을 때에 가룟 유다는 함께 가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 전에 몰래 빠져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제자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겨주라고 그들의 선생님을 떨어지지 말자고 그들 스스로 좋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다의 배신 행위에 동조 않은 것은 다행이나 그들도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고 따른다고 자랑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의 자리에서 보호해 주셨으나, 우리는 실제로 더욱 나아진 신앙 생활을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1) 베드로는 자기만은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29절).
베드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는 다른 제자들보다 강할 뿐만 아니라 자기는 그 큰 시험을 달게 받고 그것을 감래 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아무도 그와 더불어 보조를 함께 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혼자라도 대항하리라 생각하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좋게 여기고 우리의 마음을 신뢰함은 우리의 타고난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2)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자기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시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자기를 부인할 것이나 베드로는 한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며 그것도 얼마 안 있어서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비록 예수를 알고 친숙하였다 하더라도, 예수를 시인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자처럼 부인하리라 하였다.
(3)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부정하여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였다.
그는 비록 자기의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따르겠다고 말하였는데 그는 틀림없이 자기의 말한 대로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그가 자기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었을 때 이와 같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다는 계획 가운데 예수를 배신하는 죄를 범했고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두려워서 주를 부인하였다.
유다는 악을 죄하였고(미 2:1), 베드로는 시험에 빠져 실수를 범한 것이다(갈 6:1). 베드로가 자기의 선생을 부인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써 "주님 제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저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하고 애원하였다면 그는 그 악한 시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신만만하였다. 전번에 그들은 주의 말씀을 듣고 "주여 내니이까?" 물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자기들이 주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서 그들은 그렇게 자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섰다고 자부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은 자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다(왕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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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막 14:32-42)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그의 수난 가운데 들어가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영혼이 당한 모든 그의 고난 가운데서 가장 극심한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그의 고민 가운데 처해 있는 것인데, 이 침울한 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다.
그의 영혼에게 이 고민은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이었으나, 그로 인한서 슬픔에 압도되지는 않으셨으니, 그것은 그가 자유로이 수락한 것이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해 조용한 곳에 물러가 계셨다.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32절).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더불어 밤늦게 기도하시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을 위해서 그가 아버지께 나가 기도하는 동안에 그들은 여기 앉았으라고 말씀을 하시었다.
우리가 가족과 더불어 기도를 드렸다고 은밀한 개인적 독대 예배를 빼먹어도 되는 것은 아님에 주의하라.
야곱이 번민에 잠겼을 때에 그는 먼저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앞서 보내고 홀로 남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천사와 씨름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창 32:23, 24).
그리스도께서 전에도 홀로 기도하신 것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마치 그의 가족과 더불어 기도 드리려는 것 같이 보였다(9절).
Ⅱ. 그리스도께서 조용히 기도하러 가시면서도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가시었다(33절).
그는 대표적인 세 제자를 데리고 가서 당신이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을 목격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들 중에 몇 사람들은 JC의 고민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무관심함에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이 세 제자들은 그래도 적극적인 마음으로 사랑하는 JC의 일을 도우며 참여하려 하였는 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당하기를 즐거워함에 대하여 자랑하였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마가복음 10장 39절에서 그러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을 데리고 가셔서 피 세례와 쓴잔으로 그가 얼마나 고뇌를 당하고 있는가를 친히 보여 줌으로써 자기들이 하는 말의 그 의미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매사에 가장 자신만만한 사람들도 "먼저" 자신을 시험해 보고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깨닫는게 좋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심각한 번민 가운데 계시었다.
"심히 놀라시며"(33절) 하신 말씀의 원어에는 ‘에크담베이스타이’인데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 의미가 매우 깊다.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함과 같다고 말하겠다(창 15:12). 아니면 그보다도 더욱 심하고 더욱 두려운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것이 불신자가 겪을 바 저주의 실체적 단면으로 보여지며, 그 무엇보다도 극심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바, 그렇게 친밀한 하나됨, 태어나면서부터 그안에서 누려왔던 절대적 보호-연합의 일치감이 사라져 버리고) 존재와 관계의 절대적 고독감, 단절감, 곧 멸절감, 모든 것이 끊어지는 듯한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감= 피조물인 인간의 절대적 고독의 공황마비감이리라...바로 그것이 그를 엄습하여 그를 쳤던]" 것이다.
[구태여 더 살펴보자면, 그것은 피조물인 바, JC믿는 믿음이 없는 불신영혼이 임종을 앞둔 바로 그 때, 자신의 지난 날을 떠 올려 회상할 때, 갑자기 엄습해 옴으로써 너무 늦게 깨달아 겪을 수 있는 절대적 고독, 곧 자기 존재의 멸절예감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 자신의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됨으로 인한 하나된 연합과 일치감에서부터 끊어지는 단절의 예감 그리고 절대적 절망감으로서 도저히 그대로 직면할 수는 없는 성질의 것이리라...그런데, 창조이래 모든 인간의 죄들의 가중된 저주의 무게는 그 어떠할 것인가]
그는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진지하게 응시했다. 이 때처럼 그를 슬프게 한 적은 없다.
[창조이래로 이세상의 그 어느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이때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총 중에 당한 이러한 [관계의 단절, 절대적 고독속에서 멸절됨의 극심한 고통의 극단]체험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런 경험을 갖지 않았을 것이며 가질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의 정신의 동요 가운데서도 그는 조금도 혼란에 빠지거나 정신을 잃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그의 사랑은 소란스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주의를 준 것처럼 [항상 하나되신]하나님의 지시하에 행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처럼 부패한 본성을 가지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물이 침전되어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맑게 보이지만 흔들어 놓으면 흙탕물이 된다. 우리의 감정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깨끗한 그릇 속에 있는 맑은 물은 아무리 흔들어도 항상 깨끗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이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생각하기를 마귀가 지금 우리의 구세주에게 형체를 즉 자기 자신의 형체와 알맞은 색채를 입고 나타나 그리스도를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의 소망을 버리게 하려고 하였다고 보았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욥을 시험할 때에 그러한 목적으로 하였고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도록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귀는 그리스도께서 그 임무를 수행하시는 일을 그만 두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무엇으로 그리스도를 방해한다해도 그는 사탄에게서 오는 것임을 [꿰뚫어]알 수 있었던 것이다(마 16:23).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할 때에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후에 마귀가 얼마동안 그를 떠났다고 하였다(눅 4:13).
그것은 마귀가 다른 방법으로 예수와 접전을 하기 위하여 얼마간 떠나갔다는 것이다.
마귀는 자기의 아첨하는 말로서 예수를 시험하여 넘어지게 할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이제는 자기가 예수를 두렵게 하여 넘어지게 하고 그의 구원의 계획을 무효케 하였던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이 선동에 대하여 슬픈 마음을 나타내시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34절).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죄인이 되시었다.
그러므로 그렇게 [바로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고민하며]슬퍼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전가받아 고난을 당하여야 할 악의적인 죄의 어떠함과 그 결과를 충분히 알고 계시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 의해 배척을 받아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 대하여 최상의 사랑을 유지해야 하고 그들에 의해서 해와 위험을 당해야 하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에 대하여 최대의 사랑을 유지해야 하였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우셨으리라].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의 앞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허물을 짊어지신 것이다.
2.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보증과 대표로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그는 본래 우리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보속의 행위로써 한 것이다.
예수께서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을 때에 말하자면,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보상하고, 저주를 영원히 도말할 때까지 그들에게 굴복하고 모든 짐 아래 놓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위해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히 2:9).
그것은 마치 죽음을 시험만 했다는 식의 완곡 표현이 아니다. 그는 쓴잔을 마시었다. 그것은 집합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도매금으로 처리된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모든 쓰라림을 [실제로]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가 말한(히 5:7) 그 두려움이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본래적 두려움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에 고민한 것과 우리를 위해 그가 슬퍼하신 일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1) 우리의 죄를 슬퍼하심.
우리의 죄가 주 예수께 어떤 인상을 주게 되는가를 알 때에 우리가 어떤 죄의 생각인들 감히 호의적이거나 가볍다 여겨 즐길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심히 고민하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고민하지 않지 않는가?
어떻게 우리가 감히 우리가 괴롭게 하고 우리가 찌르고 우리가 울게 하고 슬프게 한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 !
죄 때문에 "심히 고민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비웃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셨으니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자.
(2)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자.
우리가 현재의 고통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을 때에 우리 주께서 우리 보다 앞서 이러하였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제자가 선생보다 더 크지 못함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슬픔을 당하시고 순종하시고 그럼으로써 그 찌르는 것을 제하여 주시고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덕이 되게 하고 감당할 수 있게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 슬픔을 추방하려고 노력해야 하겠는가? 그럴 것이 아니다. 그 슬픔을 위로하고 위안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축복 받은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였다.
만일 우리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면 그것은 모든 우리의 슬픔의 종지부가 될 것이다.
눈이 감겨질 때에 모든 눈물은 눈에서 씻겨지게 되는 법이다.
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과 함께 있도록 명령할 것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여서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바라보고 교훈을 받도록 하게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었다(34절).
그리스도께서 다른 제자들에게는 동산 입구에서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32절) 하시었다.
그러나 이 제자들에게는 데리고 동산안에 좀더 나아가서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였던 것이다.
나머지 제자들에게 보다 이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더욱 기대하시는 태도를 보이신 것이다.
Ⅵ.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기도로 당신의 사정을 아뢰었다(35절)
"땅에 엎드리어 구하였다".
이 보다 조금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요 17:1) 기도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고민 중에 [그 무게로 인해]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였다.
그것은 현재 그의 겸손을 잘 나타내 보여 준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낮출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앞에 나오게 될 때에 우리는 낮아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인간으로 오셨으므로 그도 고난을 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였던" 것이다(35절).
그리스도는 이 시간부터 자기가 당하기 시작하는 이 잠간이지만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하지 않고도 인간의 구원의 사업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러기를 바란 것이다.
"아바 아버지여"
이 그리스도의 간단한 말씀은 아랍어를 여기에 인용한 것인데 그 뜻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슬픔 중에 강조하는 의미에서 아버지에 대하여 더욱 친근감을 주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며 우리도 그렇게 부르라고 암시하고 있다.
같은 목적으로 사도 바울도 이 용어를 인용하여 말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은 모든 입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는 것이다(롬 8:15; 갈 4:6).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자신이 그의 지혜와 자비를 힘입고자 하면 "그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말씀대로 그의 능력에 대하여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말없이 따르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절).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그 뜻은 예정된 것이고 변개될 수 없음을 다 아시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대로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고난을 환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Ⅶ.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기도하는 동안에 졸고 있던 제자들을 깨우셨다(37,38절).
그들이 예수를 수종들지 않았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돌아보시기 위해 그들에게 오시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당하시는 고민이나 슬픔이나 기도에 별 관심이 없는 듯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하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이와 같은 무관심한 태도는 그를 버리게 될 전조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허물이 없는 바 아니었지만 그들이 당신의 시험 중에 함께 하기를 늦게서야 그들에게 명령하신 일은 사태를 더욱 악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로 하여금 가장 잘되기를 바라셨는데, 어찌하여 그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 자신들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깨어 있으라는 명령에 그렇게 냉담하였을까?
그들은 늦게서야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겠다고 [마지못해]약속하였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내키지 않게 하는 것이 되었을까?
그는 특히 베드로에게 그가 졸고 있음에 대하여 안타까와하시었다. "시몬아 자느냐?" ‘시몬 카듀데이스’ - 즉 내 아들아 어찌 하려느냐?
"네가 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약속을 하고서 나를 이렇게 소홀히 다루느냐? 나는 네게서 더 나은 일을 기대하였는데 "한 시간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는 의미로 하신 말씀인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온 밤을 같이 새우자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한 시간을 같이 깨어 지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우리 약함과 지속성을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그는 우리를 수고롭게 아니하고 괴롭게 아니하시는 것이다(사 43:2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올 때까지 우리가 가진 것을 굳게 지키는 것 외에 다른 짐을 지어 주시지 않으려 하신다(계 2:24, 25).
그리고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시었다(계 3:11).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은 그들이 잘못될 때에 그들을 책망하신다. 그리고 그가 책망한 그들을 그는 또한 달래고 위로하시는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그이 제자들에게 주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단히 현명하고 성실한 충고의 말씀이다(38절).
그리스도께서 고민 가운데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스스로 분발하고 깨어서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힘을 얻지 않으면 그들은 더 큰 시험에 빠지도록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깨어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게 되었고 그런고로 주를 버리고 달아나게 되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대단히 친절하고 부드러운 변명을 해 주시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8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마음에는 원하고 그것을 실천해보려고 노력하고 깨어 있으려고 원하였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음을 아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노력에 대한 한 가지 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깨어 기도하려는 마음이 있음은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함도 잘 아시나 그들은 육신이 연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그리고 인내의 덕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들은 패배 당하게 될 것을 그는 아신 것이다.
우리가 시험에 들 때에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발하여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안에서 주와함께 깨어있어 기도함안에서 속사람을 강건케 하기를 스스로 분발하여 연습하고 습관화, 체질화 하도록 해 보자!!))
Ⅷ.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나가 아버지께 동일한 기도를 반복하였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39절) - 같은 말씀, 문제, 업무 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세 번이나 구하였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눅 18:1).
1.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속히 내리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반복해서 새롭게 구하고 항상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 2:3).
바울은 여기 주님과 같이 세 번이나 사탄의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평안한 응답을 받았던 것이다(고후 12:7, 8).
이보다 조금 전에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고민 중에서 기도하여 이르기를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소서" 하였었다.
이제 여기에 대해 하늘로써부터 응답이 있어 이르기를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화롭게 하리라" 하시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 세 번 찾아오신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가 계속 그를 의지하도록 하게 하려고 우리의 기도의 응답으로 빠르든 늦든 하나님의 허락하신 은혜로 우리를 찾아 주시는 것이다.
Ⅸ. 그리스도께서 거듭해서 제자들을 찾아오심.
이 사실은 교회가 졸고 있으며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라도, 그리스도로써 지상에 있는 자기의 교회들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가지며 하늘에서 아버지에게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음에 대한 실례를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로써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졸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40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비록 그들이 결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또 다시 무능력하였던가를 보라.
그리고 그들이 비록 저항하려 하였어도 그들이 졸음을 이기지 못한 것을 보라. 우리의 몸이 우리의 영혼에 대하여 얼마나 장해가 되는가 보라.
영혼은 우리의 몸이 지장이 되지 않는[영혼의 깨어 있음에 조화를 이루며 도울 수 있는 바 육신이 약하지 않음] 그 복된 상태에 이르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두 번째 그들에게 오시어 전과 같은 말씀을 하시었으나 그들은 무어라 대답할 바를 모른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졸음에 대하여 무어라고 변명할 구실을 찾지 못한 것이다.
또는 그들은 졸음에 빠져있었으므로 아직도 반은 잠자고 반은 깨어 있는 혼미한 상태에서 그들이 어떤 처지에 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는 그들이 자도 좋다는 뜻을 예수께서 비추신 것이다.
"이제는 자고 쉬라"(41절). 어찌 보면 "너희의 원하는 대로 잠도 자고 마음대로 하라. 너희를 깨어 있도록 돌아볼 기회가 내게는 더 없다"는 뜻이다.
"그만이다." 이 말은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다. 아마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일 것이다.
"너희는 깨어 있으라는 충분한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를 못하였다. 너희가 안심할 만한 이유를 거의 지니지 못하였음을 알라."
‘아페케’(568) - "이제 더 이상 주의를 너희에게 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깨닫도록 하라."
"때가 왔도다.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 "네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 그들의 길을 택하라고 하신 것이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손에 팔리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증스럽게 거룩한 신앙 고백을 하는 큰 죄인들인 것이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곳에서 계속 졸지만 말고 일어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원수들을 맞이하자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우리도 고난이 문 앞에 다가왔을 대에 그것을 대비하기 위하여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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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예수님(막 14:43-52)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대제사장들에 의해 파송된 자들에게 결박된 사실을 보게 된다.
이 일은 그들이 오랫동안 모의해 온 사실이다. 그들은 수차에 걸쳐 예수를 붙들려고 사람들을 보냈었다.
그러나 아제까지는 때가 아직 안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손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허락하신 때가 되어 그가 스스로 당신을 내어 주었으므로 그를 붙들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마음에 고민을 하신 것이며 그 다음에 육체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마음에 사죄의 역사를 시작하시어 불의의 병기인 우리의 육체에서 죄를 깨끗케 하시려 함이었다.
Ⅰ. 우리 주 예수를 결박하여 투옥시키려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악당들을 고용한 것이다.
"대제사장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뭉치를 가지고"(43절) 왔다.
세상에는 이렇게 심한 사악도 없고 이렇게 무서운 일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자녀들 중에 서슴치 않고 그런 일을 할 자들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대단히 비참하게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 인류이다. 이 반역의 무리들의 머리가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인 것이다.
여러해 동안에 주님과 가까이 지냈고, 가까운 대화를 나누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판 것이다.
아름답고 훌륭한 고백을 한 자가 결국에는 부끄럽고 치명적인 애교자로 끝나는 일은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너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떨어졌느냐 !"(사 14:12)
Ⅱ.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악한 일을 하게 하였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처럼 꾸미었고 그를 환영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꾸미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시었을 때에 그가 오실 메시야라는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아첨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화려와 장엄에 대하여 지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시적인 군주로 임하지 않았고 신령한 왕국을 수립하고 회개와 개혁과 거룩한 생활을 가르치고 사람들의 사상과 사랑을 지도하였고 다른 세계를 목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신임하려 하지 않고 그를 시험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Ⅲ.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춤으로 그를 넘겨주려고 한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어느 때라도 어디를 다녀왔을 때에 자기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것을 허용하였는데 그는 이 자유를 악용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랍비여" 하고 부르면서 입을 맞춘 것이다. 그는 마치 예수를 전보다 더 존경하는 것처럼 "랍비여"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춘 것이다.
사람들은 랍비라고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였다(마 23:7).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넘겨주면서 유다는 예수께 그런 경어를 부르면서 입을 맞춘 것이다.
유다는 그 악당들에게 다가가 입맞추는 자가 예수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약속하였던 것이다.
어떤 자들은 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즐겨 행하시지 않는 이상 그들이 그를 안전하게 붙들어 갈 수 없고 이 삼손과 같은 분을 줄로 결박한들 불탄 삼줄같이 끊어버리고 달아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자기는 돈을 벌게 되고 그리스도에게는 영광이 되고 아무 해를 받을 수 없을 것임을 알고 빈정대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행위에 대하여 가장 나쁘고 가장 악한 의도는 추측하기에 너무 검은 것이다.
아니 그는 자주 주께서 자기가 배신을 당하게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하였으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Ⅳ. 그들은 그리스도를 결박하였고 죄인 다루듯 하였다.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그들은 자기들의 잔인하고 포악한 손을 들어 그리스도를 잡아 결박하였다.
그들은 전에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실패하였지만 이제는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였음을 의기양양하게 생각한 것이다.
Ⅴ. 베드로는 자기의 선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한 자기의 맹세가 기억이 나서 주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서서 그 잔인한 폭력배 하나를 칼로 상하게 하였던 것이다.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었다" 한 말은 그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그 법정에 있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검을 빼어 누구의 머리를 치려고 목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잘못 휘둘러 그 사람, 대 제사장의 종의 귀를 쳤던 것이다(47절).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것은 그를 위해 죽는 것보다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좋은 병정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음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그리스도 위해 바침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계 12:11).
Ⅵ.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붙든 자들과 논쟁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무모하게 대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여 준 것이다.
1. 그리스도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인데 그들이 마치 강도를 잡으려는 듯 폭력으로 대하였음을 지적하여 비난하였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하시었다.
그에게 부정한 계획이나 행동이 있었다면 그런 것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보낸 자들이나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이 그의 설교를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서"라 하였다.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훌륭한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그들 스스로가 그 말씀에 대한 재판관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 입의 말은 다 의로운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는" 것이다(잠 8:8).
그의 열매를 보아서 그의 나무가 좋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마치 강도를 잡으려는 것같이 그에게 폭력적으로 대하였을까?
2.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공공연하게 나타나시기도 부끄러워하시거나 무서워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렇게 비밀히 예수를 붙들려고 나왔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빛을 미워하고 빛 가운데 나오기를 싫어하는 행악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시었다(요 3:20).
만일 그들 유대교 선생들이 예수에게 할 말이 있었다면 그들은 어느 날이라도 그를 성전에서 만나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모든 도전적인 질문에 대답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를 기뻐하는 것 같이 대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성전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밤에 그를 몰래 잡으러 온 것은 야비하고 비겁한 일이었다.
그들은 마치 다윗의 원수들 같이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본" 것이다(시 10:8). 그러나 이것만이 다는 아니다.
3.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정부를 대적하기 위해 무장한 것처럼, 그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반란을 계획한 것처럼 "칼과 몽치"를 들고 예수를 잡으러 온 것이다.
그런 무기를 갖추고 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무장을 하고 왔던 것이다.
(1) 그들은 노한 군중을 의식하고 그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무장을 하고 왔던 것이다.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시 53:5).
(2) 다른 노한 군중들에게 그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잡으러 검과 몽치를 들고 옴으로써 그를 사람들에게 이렇게 무장을 하고 잡아야 할만큼 흉악범인 것 같은 인상을 백성들에게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결과로 백성들의 분노를 효과적으로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Ⅶ.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모든 부당하고 치욕적인 대우를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스스로 참고 견디신 것이다.
"이는 성경을 이루려함이니라"(49절).
1.그리스도께서 성서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셨나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서 말씀의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견디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서 이러한 목적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의 영광 중에도 이러한 목적을 위하시는 것이다.
세상 심판 때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심도 성경을 이루게 하기 위함인 것이 아니겠는가?
2. 우리는 구약의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활용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구약의 성서에서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찾는 심정으로 탐구하여야 한다.
신약의 역사가 구약의 그리스도를 찾는 심정으로 탐구하여야 한다.
신약의 역사가 구약의 예언에 대하여 설명을 하여 주는 것처럼 구약의 예언이 신약의 역사를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Ⅷ.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리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50절).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자기들이 시도해 보기 전에는 자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당할 때에 그들이 함께 하였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라고 위안을 받으시던 주께서(눅 22:28) 지금 당하시는 큰 시험 중에 그들이 마땅히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으실 때에 그를 보호하고 그가 송사를 당할 때에 증인되어 그리스도를 섬겨야 할 그 제자들이 다 그를 버리고 갔을 때에 그 슬픔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우리는 추측하고 남는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모든 자들도 그들 스스로가 버림을 당한 때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선생보다 크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원수들에게나 그들의 친구들에게나 더 나은 대우를 받으리라 기대하지 말도록 하라.
사도 바울이 위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그 곁에 함께 있지 않고 모두 그를 버리고 갔던 것이다(딤후 4:16).
Ⅸ. 이 소동은 이웃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웃은 폭력에 의한 위험을 당하기도 하였다(51,52절).
이 성경 구절의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한 청년"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닌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어떤 분들이 생각하는 것같이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잡수시던 집의 하인이 그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나를 보려고 [마치 선지자의 생도 오십 인이 가서 멀리 서서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되나 바라본 것같이(왕하 2:7)], 멀리 따라갔다고도 볼 수 없다. 그는 그 법정에서 가까이 살고 있거나 그 법정이 붙어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어느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에 관해서 잠깐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어떻게 하여 그 청년이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구경하려고 따라왔을까?
그 무리들이 무장을 하고 고요한 마음의 야밤의 적막을 깨고 야단을 피우며 지나가자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잠을 자다 놀란 이 청년은 아마 그 성에 소동이나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호기심에 견딜 수 없어서 알아보려고 옷 입을 새도 없이 급히 홑이불을 둘러쓰고, 마치 수의를 입은 귀신이 걷는 것같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났지?" 물으면서 군중들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그는 예수에 대해서 많이 듣고 그의 명성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 일의 귀추를 알고 싶어서 제자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를 따르면서 그가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행하시나 보고 듣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이 사람이 이런 홑이불을 걸치고 간 것은 자칭 이웃보다 더 경건하게 산다고 고백하는 유대인이라 생각한다. 그런 자들은 자기들의 몸에 대하여 엄격하고 검약하는 표로 얇은 홑이불(삼베) 같은 것을 둘렀다. 그것은 그들의 검약과 겸손과 고행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입은 홑이불(삼베)이 그가 늘 입은 의복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2. 그 청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어떻게 그가 놀라서 다시 자기의 침실로 들어갔나를 살펴보자.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를 버리고 갔다. 그러나 이 젊은 청년은 자기는 그리스도와 그러한 관계가 없으므로 무사하게 그를 따라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특히 그는 홑이불을 두른 정도이니까 무장과는 거리가 더욱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젊은 로마병정들은 그 청년을 붙들게 된 것이다.
실로 그들이 친 그물에는 모두 걸리게 마련인 고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로마 병정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모두 피신해 버렸으므로 그들을 붙잡을 수 없으니 그들은 아무나 닥치는 대로 붙잡으려 하였는지 모른다.
비록 이 청년이 유대교의 열심당의 하나였다 하더라도 로마군인들에게 이 경우에 있어서 양심에 거리낄 것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청년은 그들의 손에 옷자락이 붙잡히자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다가온 것을 직감하고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던" 것이다.
이 성경 구절은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야만적이었나를 보여 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결박하라고 파송된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들의 수중에 빠졌다가 얼마나 간신히 피했던가를 말해준다. 그들의 수중에서 아무도 무사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을 변함없이 염려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뿐이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요 18:8).
이 일은 또 다만 호기심에 의하여 인도를 받고 신앙과 양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보호하실 수 없음을 암시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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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의 재판(막 14:53-65)
여기에는 "교회권의" 법정에서 대제사장이나 법원의 판사가 의장인 산해드린 의회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고소를 당하고 심문을 당하고 선고를 받고 정죄를 받은 사실이 나와 있다.
바로 이 가야바가 얼마 전에 그리스도는 죄가 있든 없든 죽음을 당하는 것이 유대 나라에 유익하다고 판결을 내린 일이 있었다(요 11:50).
그러므로 그 법정은 편파적이라 말해야 당연하다.
Ⅰ. 그들은 예수를 데리고 바삐 대제사장 집으로 갔다.
가야바 법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록 고요한 심야이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비밀히 모여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야 그가 그물에 걸려든 먹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Ⅱ.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갔는데, 이것은 베드로의 최근의 용기가 비겁한 자리에까지 전락한 것을 말한다(54절).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불의 쬐었으니"
이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대제사장의 집 뜰 안에 있는 불 주변은 그에게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 하속들도 베드로에게 좋은 친구들이 못되었다. 바로 이것이 그를 시험에 들게 한 관문이었다.
Ⅲ. 사랑이나 돈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거짓 증인들을 모집하는데 열성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행악자와 같이 결박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리스도를 기소할 만한 아무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에게 책임을 물을 만한 아무런 범죄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할 어떤 증거를 찾고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를 넘어뜨릴 질문을 하게 하였고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뇌물을 주어 매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좋아하던 싫어하던 그 일을 수행해야 하였던 것이다(55, 56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율법에 따라 거짓 증인들에게 법적 판결을 내릴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신 19:16, 17).
그러나 그들은 지금 모든 정의를 버리도록 보살펴 주는 범법의 장본인들인 것이다.
이 땅의 의원들이 오히려 그 땅의 골치 거리이며 평화와 평등을 수행해야 할 자들이 모두 부패한 지금이야말로 "주여 도우소서 !" 하고 외칠 때인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몇 년 전에 유대교인들이 성전을 우상보다도 더 낫지 않게 여기는 점에서 성전에 대하여 경고로 말씀하신 그 일을 가지고 그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다(57, 58절).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증언이 일치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58, 59절).
그들의 증거는 충분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그 범죄의 핵심에 있어서 일치하지를 못한 것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그들이 그 일로는 예수를 고소해서 사형 선고에까지 이르게 할 수 없다. 그들의 법을 제아무리 크게 확대시킨다 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Ⅴ.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그들의 거짓 증거와 고소에 이의가 없는가 물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이 없느냐?"(60절)
그는 예수를 올바르게 잘대하는 것 같이 가장해서 물었지만 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고 예수를 고소하기 위함인 것이다(눅 11:53, 54; 20:20).
이 교만한 대제사장이 이 질문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에게 물었을 때에 그곳 법정의 공기가 얼마나 교만하고 경멸에 차 있었을까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아마 거만하게 "이봐 피고는 그대에게 대하여 선서하며 증언하는 말을 들었겠지, 자신에 대하여 변호할 말을 들었는가?"
예수께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이 보인다. 그는 누구 싸움을 걸어올 때 자주 침묵을 지키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 것도 대답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1. 비방과 거짓 고소 중에도 인내하라는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가 욕을 받되 대신 욕하지 말자(벧전 2:23).
2. 신중함에 대하여 본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들은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며 우리의 변명이 우리의 허물을 더하게 한다(사 29:21).
지금은 신중을 기하는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며(그들이 더욱 악한 말을 하게 됨으로) 모든 것을 의롭게 판단하는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맡겨야 할 악한 때이다.
Ⅵ.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부인하지 않고 자기가 그렇다고 고백하였다(61, 62절).
그들이 묻기를 "네가 찬송 받으실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말하기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 그들은 종종 "영원히 찬송 받으실"이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찬송 받으실" 이 말이 하나님의 명칭같이 부르게 되었다. 특별한 명칭으로서 이 말은 그리스도에게도 붙여 부르게 된 것이다(롬 9:5).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증거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두 번째 오신다고 하시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하시었다(62절).
지금 인자가 대단히 초라하고 경멸을 받을 만하게 오시어 지금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잇지만(사 53:2, 3), 그가 곧 다시 오실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그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우리 주 예수께서 현재의 그 모양과 어울리지 않는 위엄과 장엄을 가지고 이와 같이 말을 할 적에 그 법정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의 의견은 적어도 항변이나 판결 저지를 요구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더 수많이 생각할 수 있기까지 계속 진행하여야 했을 것이다.
바울이 감금되었을 때에 그는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였고 총독이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악과 분노로 인해 가련하게도 눈이 멀어서 전쟁터로 달려가는 말과 같이 그들은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땅을 삼키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소리를 들어도 머물러 서지 아니하는"것이다(욥 39:22, 24), 욥기 15장 25-26절을 참고하라.
Ⅶ. 대제사장은 예수의 말씀에 더욱 노하여 그를 참람하다고 정죄하였다(63절).
‘키토나스 아우투’ ─ 즉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어떤 이는 이것은 제사장이 제복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큰 의식이 있을 때 입는 것인데 이 경우는 밤인데도 그 제복을 입고 나왔다고 보는 것이다.
전에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면서 그가 무엇인가 알지 못하고 말을 하였다(요 11:51, 52). 그러나 지금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행한 것이다.
만일 사울이 붙들어 찢은 사무엘의 겉옷이 사울에게서 왕위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시려는 뜻을 의미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졌던 일이 만일 제사의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하였듯이 가야바의 겉옷을 찢은 것은 그에게서 제사장직을 빼앗은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삼상 15:27, 28; 마 27:51).
그리스도의 겉옷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도 잘 보존하고 찢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레위 족속이 제사장직을 빼앗겨 예수에게로 옮겼을 때에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라 하였다(히 7:24).
Ⅷ. 그들이 예수를 참람한 자라고 동의하였고 그것이 그에게 씌운 주요한 죄목이었다(64절).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이 질문은 얼핏 보기에 퍽 상냥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은 이미 정죄한 말이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말하기를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법정의 의장으로써 먼저 판결을 하고 다음에 의견을 물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던" 것이다(64절).
산헤드린 의회 안에 예수의 친지들이 있었지만 출석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통고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Ⅸ. 그들은 마치 삼손에게 있어서 불레셋 사람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희롱하였다(65절).
예수를 정죄한 그 제사장들도 스스로 자기들의 위치에 대한 의무뿐만 아니라. 위엄성을 잊고 그 하속들이 정죄받은 죄수로 더불어 희롱하는 일을 도왔던 것이다.
그들이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악행을 종결지으며 그러한 희롱으로 전환을 한 것이다. 유월절 지키는 그 밤을 그들은 그렇게 즐거운 밤을 만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욕보이는 일을 자기들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모든 것을 우리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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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불행(막 14:66-72)
우리는 여기에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대하에 된다.
1. 이 사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멀리한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갔다 하였다(54절). 그리고 그는 지금 "아래 뜰에 있었다."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멀찍이 따르다 그를 부인하게 된다.
즉 거룩한 의식에 참예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진실한 성도들과의 교제를 부끄러워하며 멸시를 당하는 경건한 무리들의 편에 서기를 싫어한다.
2. 이 사실은 그가 대제사장의 종들과 함께 하고 그들과 동석을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더불어 같이 있는 것이 위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도록 끌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원수들과 더불어 같이 있는 것은 더욱 위험스런 일임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죄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3. 시험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제자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7절). "이 사람은 그 당이라"(69절).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70절).
베드로가 이 일로 그들에게 도전을 받거나 그 일로 인해 죄인으로 기소를 당할 위험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가 그 일로 놀림을 당하거나 그것으로 어리석은 자라는 조롱을 당하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주님을 욕보이고 있는 동안 그 종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주장이 멸시를 당하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비류가 그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그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는" 것이다(시 35:15).
욥이 거름덩이 위에 앉아 있을 때에 그는 "비천한 자의 자식들"에게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욥 30:8, 9).
그러나 모든 일을 고려해 볼 때에 시험은 무서워할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비자가 베드로를 바라보게 되고 베드로에게 어떤 괴로움을 주려는 생각이 없이 무심코 말하기를 "너도 그 당이라" 하였고 거기에 베드로는 어떤 대답을 하여야 했으며 거기에 대하여 "내가 그라 하더라도 나는 배신자가 아니기를 바란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4. 그 죄는 대단히 컸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법정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증인으로 나서야 할 그 시간에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예고를 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고난이 임하자 그것은 베드로에게 전에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것처럼 큰 놀람과 두려움으로 임한 것이다.
전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자기를 위해 자주 고난을 겪어야 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를 좇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러하였음에도 베드로는 그 첫 번째 경보에서 그 고난을 몹시 두려워하여 그것을 피하려고 거짓말도 맹세도 어떠한 일도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존경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따를 때에는 그는 쉽게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께서 버림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자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고 그와 아무 관련을 갖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5. 베드로의 회개는 대단히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였는데 그 중에서 세 번째의 부인은 대단히 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에 그는 자기의 부인을 더욱 굳히기 위해서 저주하고 맹세하였기 때문이다.
그 세 번째 타력이 그리스도를 대경실색케 하였을 것이고 그를 낙담케 하였을 것이고 놀라게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에 닭이 두 번 울므로써 베드로는 "여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이 기억이 났던 것이다.
그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 죄에 대하여 마음이 민감하여졌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을 때에 슬피 울었다.
어떤 이들은 기자가 베드로의 지도하에 본 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이 복음서에는 베드로의 죄를 자상하게 기록하였고 그의 슬픔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기록하였다.
그것은 베드로가 겸손하게 자기의 슬픈 회개에 대해서 과장하지 않으려 함과 자기의 큰 과오에 대해서 그 회개가 넉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의 회개에 대한 표현이 ‘에피발론 에클라이엔’(생각하고 울었더라)인데 여기에 무언가 더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가 울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유대교식의 표현이다. 그는 울었다. 그리고 그는 과오를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울었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울었다.
그는 밖으로 뛰쳐나가서 울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의 샘이 터진 듯 울었다. 그는 자신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져 울었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우고 울었을 것이며, 그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울었을 것이다.
그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았다. 주께서도 얼굴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부딪친 것이다. 하몬드 박사의 설명이다. 그의 말은 추측이다.
또는 우리가 이해하여온 대로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울었다. 순간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겸손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서 살아야 한다. 만일에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그 자신에게 짐이 되고 그 자신의 얼굴에 혼란을 주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마치 세리가 자기 죄로 인해 가슴을 치며 슬퍼한 것처럼 슬퍼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심하게 울은 것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