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3장 ...[주의시랑비칠때에293]..[그크신하나님의사랑304]..은혜아니면살아갈수가없네, 나약해있을때에도, 주님과함께하는이고요한시간,어찌하여야그크신은혜, 갈길이멀어도,은혜로만들어가네,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다 죄 아래에 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예외없이 마찬가지로 동일한 죄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데 ...꾐에 빠져서 낳아주신 Q과 그 말씀을 배역하고 멸시-무시-모욕하며 침 뱉고 집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그토록 기다리며 정하신 그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돌아 올 기회 베푸시며 겪으시는 아비로서의 단장의 고통을 지금까지도 감수-체휼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눅15장.탕자이야기>, 더 나아가 우매무지무각하여 또한 부지불식중에 함부로 (악독하게) 그분의 교회를 그토록 극심하게 잔멸하려 박해하였는 바, 진실로 나는 <날마다 죽어 마땅한 자요> 그냥 멸절되어도 한 마디 할 말 없는 자요, 한없는 자비와 긍휼, 일절 오래참으심-용서하심으로 회복되었으나 동시에 여전히 진실로 극악무도한 죄인중 괴수이다!! ..nothing, nobody!!)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
---구주의 십자가 죽으심은 속죄(= 화해...죄빚 갚음 인해 담벽을 허물어 제거함)와 구속(대가 지불하여 되사옴)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 ...여기에서 더 나아가, 회개하고 이 사실을 믿고 주 이름을 불러 구주를 그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자(곧 구주를 믿는자)에게마다 칭의(의롭다 하심) + 양자 됨(Q의 자녀됨)의 권세를 부여하심..
---((속죄 = 화해 = 힐라스모스, hilasmos))..죄의 빚으로 인해 Q과 죄인 사이에 격리하는 담벽이 생겨나서 상호 교통 왕래가 불가능해진 상황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속죄, 곧 화해를 위한 제물이 되심으로써...((구속)) ; 죄로 인한 더러움 때문에 [의-거룩-영광]의 Q께로부터 잃어버린 바 된 노예 상태에서 값을 치르고 되사옴으로써...((화목))은 <죄 문제, 이에 더하여 원수 됨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함...즉 죄로 원수 된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 됨을 의미..이는 구주의 속죄/화해(벽 허무심) + 구속(대가 지불의 되 사옴)에 더하여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고 그분을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함의 믿음으로 얻는 바] Q의 칭의를 거침 통해서만 화목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직분자로<직분 주시려> 미리 택정(선택과 예정)--->부르심/직분(사명) 주심 ::: 부르심 받은 자는 주님으로부터 자격을 부여받은 것임 = 은총 베푸심 + 주님 영광을 주심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유한한 피조물로서는 항상 늘 율법준수가 불가능하다!!)율법으로는 (다만!!)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때가 차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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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개요)
본장에서 사도는 그의 칭의론을 펴고 있다.
그는 이미 유대인과 이방인의 죄를 입증하고 있으며 이제 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유대인에 대해 얘기한 것을 두고 일어날 수 있는 반론에 대한 대답(1-8)
Ⅱ. 그는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인류 전반의 죄악과 타락을 언급하고 있다.(9-18)
Ⅲ. 그는 여기서부터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그에 대한 이유를 여러 가지 들고 있다(19-31).
그의 여러 가지 중복된 부대설명이 주제 설명을 조금 어렵게 하는 감도 없지 않지만 그러나 그의 윤곽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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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혜택과 반론 반박(롬 3:1-18)
Ⅰ. 여기서 사도는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반론에 대한 해답을 내리고 있다.
어떠한 진리도 이처럼 명확하고 단순할 수 없지만 사악한 재치와 타락한 육의 마음은 언제고 이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신의 진리가 이런 저런 트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제 1 반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 그처럼 동일한 죄인의 입장에 있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두고 그 얼마나 유일무이한 민족(신 33:29)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특유한 보배며 자기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강조하셨던가.
그가 할례를 저들의 교회 회원된 뱃지요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의 인(印)으로 제정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평탄작업에 급급한 교의가 나타나서 그들에게 이 모든 특권을 부정하고 할례 제정에 먹칠을 하며 하찮은 것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해답>>.
유대인들은 어쨌든 위대한 특권과 존귀를 누려 받은 백성으로 위대한 수단과 방편을 소유한 자들인 것은 맞다.
또한 물론 이것들이 절대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2절) 그것이 주는 유익은 "범사에 많다."
또한 주께로 향하는 문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다 열려 있었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교회의 여러 가지 특권으로 해서 이 문에 이르는 데 보다 더 올바른 길이 이미 주어져 있었다.
이 교회의 여러 특권이라는 것은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 발전시켜 나가지 않음으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로마서 9장 4,5절에서는 유대인의 특권을 여러 가지 들고 있지만 여기서는 단 한 가지[사실은 이것도 전체와 맞먹는(instar ominum) 것이지만]를 들고 있다.
이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 할 때의 구약 성경, 그 중에도 "산 말씀"(행 7:38)이라 불려지는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련되는 모든 모형과 약속, 예언이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계시된 말씀으로 신탁으로서의 영원한 가치와 무오한 진리성을 가진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우림과 둠밈을 가리켜 [로기아, 3051], 곧 "신탁의 말씀"(oracles)이라 부르고 있다.
성경은 성경이라는 갑옷의 가슴받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신탁의 유무를 가리는 데 있어 율법과 신구약의 증언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복음도 신탁의 말씀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히 5:12; 벧전 4:11).
이제 이 신탁의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위임된 것이니 구약은 자기들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모세와 선지자들도 자기 동족으로 자기들과 같이 살았으며 우선적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상대로 그리고 그들을 위해 전파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뒤에 오는 세대와 교회를 대신해서 이들이 수탁자 구실을 한 것이다.
구약은 이들의 손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후대에 전달되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도서관원으로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소용과 유익을 위해 그리고는 온 세상을 위해 이 성스러운 보화를 위임받았다.
그리고 이 문서를 보관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일점일획이라도 상실하지 않고 충실하게 보관하였으니 이점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감사치 않을 수 없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구원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구원의 독점권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사도는 "첫째로"(프로톤 멘 가르. 3:2) 라는 말을 유대인들에 대해 사용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들의 최고 특권이요 본질적인 특권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의 향유야말로 한 민족의 첫째가는 행복이 아닐 수 없는데 맨 먼저(imprimis) 그들이 이 혜택을 입었던 것이다(신 4:8; 33:3; 시 142:20).
제 2 반론>>.
유대인들이 "산 말씀"에서 누린 혜택에 비춰볼 때 그들중 대다수의 불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신탁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방인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복음의 원수로 남아 있는데, 무슨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들에게 맡겨졌는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다"(3절).
해답>>.
아직도 유대인들 중에 더러는, 아니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사도는 이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 하고 딱 잘라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불신과 고집이 그들에게 맡겨진 신탁의 말씀에 담겨진 메시야 예언을 무효화하거나 번복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더라도"(흠정역, 사 49:5) 그리스도는 여전히 존귀한 분이다.
한 세대가 있어 그들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은 거짓말장이라 떠들며 나팔 불어 봤자 하나님의 말씀은 끝내 성취될 것이요 그의 목적은 끝을 보며 모든 결말이 날 것이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발설하신 말씀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켜주시며 당신의 신탁의 말씀은 그 어느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아니 그러기에 오히려 우리는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을 명백히 해 두도록 하자. 하나님의 미쁘심을 의심하는 것 그 자체를 팽개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다윗이 인간 모두는 거짓말쟁이라고 한 말을(시 116:11) 여기서 바울은 일부러 사용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버릇은 저 옛 인간의 앞잡이인 마귀에서 온 것으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입고 나온 의복이다.
모든 인간은 정처가 없이 변화무쌍(천변만화)하며 "헛된 것과 거짓말"에 치우쳐 있으니(시 62:9) "한가지로 헛된 것"(시 39:5)뿐이다.
인간과 하나님을 비교하라면 진실로 "인간은 모두 거짓말쟁이"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각사람마다 거짓말쟁이 라는 걸(인간 불신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깨달아 알고 나서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믿는 이에게는]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할 때"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하다는 걸" 생각하면 적잖은 위로가 된다(시 12:2, 6).
이것을 좀더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시편 51편 4절의 "주께서 의롭다 함을 얻으시려고" 하는 말씀을 (시 51:4)인용하고 있다.
그 목적은 다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1. 첫째, 인간들의 이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보존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2. 둘째, 우리 모두에 대한 결론이 내려졌으면 하나님을 의롭다 하고 그의 공의, 진리, 선하심 등을 어떠한 모양으로든 주장하고 보전하는 게 우리의 임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보라, 다윗은 의로우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안에서 합당하게 "그는 진실로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다" 인정하며 결코 그에게서 불의를 [일부러] 찾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간에 대한 평판은 (진짜 항상 늘 그러한지는) 일단 접어 두고 보자. 그게 물 속으로 가라앉거나 헤엄쳐 달아나 버리거나 중요한 게 못된다.
따라서 제 아무리 일견해 보기에 피조된 세상, 그 전체 윤곽이 삐뚤어져 보인다 할찌라도 꼭 붙들어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하는 결론이며, 이것만은 늘 분명히 하며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도록 하자.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그가 심판하실 때(사 51:4), 아니 여기 표현대로 빌리면 그가 "판단받으실 때"조차도 당신의 말씀에 있어 의롭다함을 얻으시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과 그의 처사를 두고 싸우려 든다면 필경 그 심판은 하나님 편에 유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제 3 반론>>.
여기서 인간의 못된 마음은 스스로 죄를 두둔하고자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과 타락상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의를 들어내게 하였다는 점을 얘기한 바 있다. 그런 논지의 연속선상에서, 이제 이런 식의 질문이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 모든 죄악을 다 합쳐도 하나님의 영광을 넘어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돋보이게 드러낼 뿐이요, 어쨌든 그의 목적은 이미 성취되어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손해 보는건 하나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와 불신앙을 그렇게도 가혹하게 벌하신다는 건 불공평한 게 아닌가?
유대인의 불의가 이방인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냈다면 유대인들이 이처럼 지탄받을 이유는 뭔가?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5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뭔가?
이에 대해 사도는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되묻는다..이 질문자의 반론적 물음 형식을 제대로 취해 드러내 본다면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오히려) 불의하신 게 아니냐?(메 아디코스 호 데오스, 3:5)"가 된다.
보라, 불신앙의 마음이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공평한 처사를 두고 트집잡고 지극히 의로우신 그분을 정죄하려 들기 마련이다(욥 34:17).
"내가 사람의 말하는대로 말하노니," 곧 나는 이걸 못된 육의 마음에서 나온 말씨로 보고 반대한다는 뜻이다.
그런 제안은 어쩌면 헛되고 어리석으며 오만불손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답>>.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너무도 턱없는 생각이라는 얘기다.
하나님 편에 그리고 그의 공의와 거룩하심에 불명예를 돌리는 그따위 제안은 협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악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감히 그런 생각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6절)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하는 아브라함의 논리와 흡사한 얘기다.
틀림 없이 그는 공의를 행하실 것이다. 만일 그가 무한히 공의롭고 의롭지 않다면 그는 만민의 심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공의를 미워하시는 자면 어찌 처리하시겠느냐?"(욥 34:7) 18,19절도 비교 검토해 보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그걸로 영광을 거두신다 해서 인간의 죄악이 그만큼 덜 추악하고 비열해지는 게 아니다.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경우는 늘상 있는 일이 아니라 어쩌다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저 죄인에게 감사할 일도 못된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생각만으로도 그의 공의와 공평에 대한 의심스러운 생각을 영원히 묵살하기에 충분하다.
절대적인 주권자의 처사를 운영하는 것은 우리의 하는 일이 아니다. 더 이상 상소할 데 없는 대법원의 판결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 4 반론>>
앞의 반론이 반복되고 있는데(7, 8절) 교만한 마음이 거하는 거짓의 피난처는 좀처럼 부숴지지 않으면서 끝까지 속임수를 붙잡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반론을 더 이상 절대 제기할 수 없게 그들의 말대로 표현한 바울의 수법에는 이미 그 해답이 담겨져 있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궤변가들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는 식이다.
"만약 내 거짓말이, 곧 나의 죄악이(모든 죄악에는 특별히 가르치는 자의 죄악에는 거짓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와 성실성을 영화롭게 들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면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 정죄받을 이유가 뭔가?" 아니 오히려 여기에 힘을 입어 "은혜가 더 풍성해지도록 계속해서 죄를 짓는게 좋지 않겠는가?"
얼핏 보아도 너무나 뻔뻔스런 논리요 소름을 끼치게 하는 얘기다.
강포한 죄인이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끈질기게 계속되기(오래 참고 기다리심)" 때문이다(시 52:1).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는 얘기는 죄인들의 입보다 마음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얘기인데, 스스로 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되고 있다.
이 악한 생각을 들춰 내어 폭로하면서 사도는, 괄호 속에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생각을 바울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의 생각해 낸 발상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들추어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들과 종들이 그들의 삶의 태도와 추구하는 길과는 정반대인, 말도 안되는 터무니없는 내용을 그들 스스로 지어내어 유포했다고 하는 거짓된 모함으로 인해 대중에게 원치않게 욕먹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바알세불과 한짝이라는 욕을 먹지 않으셨던가? 자신들이 주장에 반대되는 것을 유포하는 모함으로 인해 욕먹는 사람들은 허다하다.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이처럼 먹칠하는 것은 사람의 상투적인 수법으로 "중상을 두껍게 발라 두라. 그러면 거기에 묻혀들 자도 더러 있으니까(Fortiter calumniari, aliquid adhaerebit)" 하는 식이다. 제 아무리 선한 인간도 제 아무리 튼튼한 진리도 중상의 피해는 입기 마련이다.
"비방하여"(블라스페무메타, 987)라는 말을 쌘더슨 감독은 이렇게 풀어 얘기하고 있다.
통상 성경에서 말하는 비방(모독)은 최고급 중상으로 곧 하나님을 두고 악평하는 것이다.
주의 종과 그의 교의를 중상하는 것은 보통 중상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으로 또한 일종의 신성 모독이다.
왜냐하면 이건 그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그의 소명과 일 전부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살전 5:13).
해답>>.
그는 이제 더 이상 반박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저들의 저주는 공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중상 모략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당신의 진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공정하게 저주해 주신다는 얘기다.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는 명목으로 용감하게 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죄에서 선이 나올 것이라는 구실로 고의적으로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그 구실의 비호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거기서 저들의 저주가 정당화되며 더 이상 핑계할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추측과 확신을 가지고 죄를 짓는다는 것 자체부터가 죄 가운데 머물고자하는 속셈과 뜻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곧 고의적으로 죄를 선택하려는 악한 뜻과 죄에서 선이 발생한다는 구실로 그 죄를 얼버무려 버리려는 속셈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저주는 정당하며 어떠한 종류의 핑계를 가지고 저들이 놀아나든 그 어느 누구도 그 큰 날에 서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그의 모든 처사에 있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다. 모든 육체가, 곧 지금도 그분에게 반항하여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있는 저 교만한 육체도 그분 앞에서는 잠잠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들이 불신가운데 고집과 독선으로 재촉한 유대인들의 교회와 유대 민족의 다가올 멸망을 두고 말한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Ⅱ. 바울은 이제 이상의 반론을 물리치고 나서 유대인 이방인 할 것없이 인류 전반에 걸쳐 전반적인 죄악과 타락에 대한 주장을 다시 펴고 있다(9-18절).
"하나님의 말씀을 부탁받은 우리는 어떠하뇨?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호감을 사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아니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서 믿지 않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보다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가? 무슨 말씀을!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다, 거저 주신 은혜가 있기 전의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의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한 가지로 타락해 있었다." "다 죄 아래 있는 것이다"
모두들 죄책 아래 있다는 얘기다. 곧 형 집행 하에, 영원한 멸망과 저주라는 속박의 굴레를 차고 있다는 얘기다.
지옥 맨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말 짐(시 38:4)과 같은 죄에 눌려 있다. 우리 모두는 [믿는 자라도!! 여전히] 이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지고 있다(19절).
다시 말해서 죄의 통치와 지배아래, 마치 잔인한 독재자와 주인 아래 있듯이 거기에 매여 있어서 곧 악행을 할 수밖에 없도록 질질 끄는 멍에를 메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프로에티아사메다, 3:9).
이것은 법적 용어로서 우리가 이 사실의 형편없는 증거를 가지고 그들의 죄를 확정판결하였다는 얘기다.
이 선언과 판결에 대해서 그는 은혜로 억제하거나 은혜로 변화하지 않는 한 타락한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하는 구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우리의 타고난 모습을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
본 10, 11, 12절은 시편 14편 1-3절에서 인용한 것이요 이것은 시편 53편 1-3절에서도 반복되어 있는 것이다.
본문 이하의 말씀이 70인 역의 시편 14편에도 들어 있는데 어떤이들은 사도가 바로 이걸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여기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후기 70인역에 바울의 강론이 종합되어 있다고 보고 싶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타락상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유대인이나(사 59:7, 8) 도엑(시 149:3) 같은 특별한 경우의 인물의 타락상을 인용하면서 한 사람이 지은 그 동일한 죄는 인간 모두의 본성에 일치한다는 점을 얘기하고 있다.
다윗이나 이사야의 시대로 말하면 좀 나은 시대였지만 바울은 이걸 예로 들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14편에서 얘기된 것은 분명히 "인생" 전부를 두고한 말이요 그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의 관찰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6장 5절에서처럼 세상을 "굽어 살펴 보신 것이다." 따라서 이 심판은 진리에 일치하는 것이다. 친히 만물을 지으시고 그 솜씨를 각각 보살피셨을 때 모두가 아름답구나 하고 기뻐하시던 그분께서 이제 인간이 모든 걸 망친 이후에 다시 굽어 보시니 모두가 더럽구나 하고 한탄하시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습관적인 면의 두 모습
(1) 선한 모든 것의 습관적인 결함
① "의인은 없나니"
곧 올바른 도덕관을 가지고 그 원리에 따르는 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을 때 차려 입었던 바로 그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이 말은 곧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없다는 얘기다.
온 인류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눈 길은 한 사람 의로운 노아에게 멈췄던 일을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가는 얘기다.
은혜 받아 의화되고 성화된 자들 마저도 본성상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 인간 중에 의를 타고난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인간도 필경 죄 가운데 잉태되지 않을 수 없었다.
② "깨닫는 자도 없고"(11절)
문제는 이해력의 타락에 있다. 곧 눈이 멀게 되고 타락하여 삐뚤어져 버렸다는 얘기다.
인간들에게 미미한 지각이라도 들어 있다면 종교와 의가 주장하기에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지각이 없는 데서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죄인들은 바보들이다.
③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곧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들, 이들에게 지각이 없는 걸로 간주하는 건 당연한 얘기일지 모른다.
육적인 마음은 하나님을 찾는 데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그분과 원수다.
④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12절)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이 이 지구상의 무용지물, 곧 귀찮은 짐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죄의 상태에 안주하고 있는 자들은 해 아래서 가장 쓸모 없는 피조물이다.
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지구상에 죄를 범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자가 눈씻고 봐도 볼 수 없다.(전 7:23).
죄인들이 선을 행하겠다는 뜻으로 행하는 그 행위에도 본질적인 잘못은 들어 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가 전무하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온갖 결함은 악의 근원이다"(Malum oriturex quolibet defectu).
(2) 악한 모든 것의 습관적인 결함. "다 치우쳐"(모두 탈선하고 말았다), 인생의 최고 목표인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다는 건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제길을, 올바른 길을 가도록 지으셨지만 인간은 그걸 제발로 팽개치고 말았다. 인류의 타락이야말로 배도가 아닐 수 없다.
2. 실제적인 면. 이처럼 타락한 인류에게서 뭘 바랄게 있겠는가
(1) 그들의 말 (13, 14절).
① 잔인성.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곧 가난하고 순진한 자를 삼키려 들며 할 수만 있으면 해를 끼칠 틈만 기다리고 있으니 마치 옛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바로 이 자의 이름이 아바돈이요 아볼루온이니 곧 파괴자이다.
설혹 이들이 공개적으로 이 잔인성을 내보이지 않는 경우라도 은밀하게 해악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곧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담겨 있는 것이다(약 3:8).
곧 자기 이웃의 명성을 질책으로 나팔불며 그들의 생명을 거짓 증거로 앗아가는 불치의 독이다. 이 구절은 시편 5편 9절에서와 140편 3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② 속임수.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여기에 그들이 악마의 자손이라는 증거가 들어난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말쟁이 요 모든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거짓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게 이들의 부단한 과제인 것이다.
③ 저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거룩한 이름에 모독을 돌리려 하며 형제들에게 악심을 품은 나머지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한 것이다."
야고보는 이것을 혀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중에 하나로 꼽고 있다(약 3:9). 그러나 저주하기를 즐겨하는 자들은 이에 상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다(시 109:17-19).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이러한 죄를 범하는 가운데 스스로 아직도 죄의 통치와 지배 아래 있다는 걸 곧 태어날 때 그 상태에 아직 그대로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자들이 그 얼마인가!
(2) 그들의 행동(15-17절).
"그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르다."
곧 그들은 악한 일을 꾀하는 데는 약삭빠르며 그러한 기회를 포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 그곳에는 "파멸과 고생"이 따르고 있으니 이것이 저들의 동무다.
곧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들이 사는 사회와 이웃, 그리고 그들의 조국과 민족 마침내는 본인들 스스로에게 파멸과 비참이 따르고 만다.
그들의 종착역에 기다리고 있는 파멸과 비참(죽음이야말로 이 모든 것의 끝장이지만) 이외에도 그들의 죄가 바로 자신들의 처벌이다.
자신의 죄에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인간에게 또 있을 수 있겠는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곧 그들은 어떻게 하면 타인과 평화롭게 사는 건지 또 스스로를 위해서는 어떻게 평화를 획득하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이 평화를 떠벌일 수는 있으나 그러나 그 따위 평화는 악마의 궁전에나 있는 것이요 진정한 평화에 대해서는 이들은 철저한 이방인이다.
평화에 관한 일은 모르고 있는 자들이다. 이것은 잠언 1장 16절 이사야 59장 7,8절에서 인용된 말이다.
(3) 이 모든 결과의 원인.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절).
하나님 경외가 여기서는 실제 종교의 전부로 묘사되고 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무서워 할 줄 알고 신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우리의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악한 자들의 눈에는 이런 게 보이지 않는다.
곧 이들은 이러한 인생의 노를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다른 목표를 향해 다른 규범을 따른다는 얘기다. 이것은 시편 36편 1절에서 인용된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는 곳에 선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 경외야말로 우리의 영혼에 재갈을 물리며 제길을 달리게 하는 것이다(느 5:15).
반면 일단 이 경외가 사라지고 기도가 뜸해지는 날이면(욥 15:4) 만사는 잽싸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류의 전반적인 부패상과 타락상을 짧막하게나마 살펴 본 셈이며 결론은 오, 아담이여! 그대는 뭘 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이처럼 인간은 가지 가지 못된 일을 꾸며내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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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롬 3:19-31)
율법의 행위에서 칭의를 구하는 것은 허사요 오직 믿음으로만 칭의 받을 수 있다는 게 바울의 결론이다.
이것이 17절에서부터 계속 입증하려는 요점이요 28절에 가서 그의 강론의 요약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으니 "명백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quod erat demonstrandum)이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회개의 여지가 없던 순전한 양심의 첫째 율법의 행위도, 제 아무리 고도로 개선된 자연 율법 행위도, 의식 율법의 행위도(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이해 주는게 아니다), 죄를 가르쳐 주고 또 자긍하게 하는 도덕 율법의 행위도, 그 어느것도 하나님의 칭의를 가능케 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타락한 상태 곧 그 바닥의 힘에 짓눌려 있는 인간이기에, 그 어떠한 종류의 행위로든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의>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얘기이며 구주 십자가대속 사건, 그것을 값없이 주시는 은사로 알고 받아들이는 참된 신자마다에게 JC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아낌없는 은혜를 믿음으로서만이 해결될 문제다.
우리가 죄지은 일이나 타락이 없었다면 어쩌면 율법에의 순종이 <우리를 살리는>우리의 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나 일단 죄를 짓고 또 타락하게 되었은즉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로는 그 어떤 것으로라도 이전 범죄의 죄책을 결코 속량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오해했던 바) 도덕율법에의 순종이 칭의를 가져오는 것으로 여겼다(눅 18:11).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를 들고 나온다.
그 하나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말하는 인간의 죄책이요 다른 하나는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을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Ⅰ. 그는 율법의 행위로 칭의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책상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논리는 간단하다. 곧 우리가 일단 어겨서 깨뜨려 버린 율법으로는 칭의도 구원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예를 들자면, 형이 확정되어 버린 역적에게 대해서는 "에드워드 3세"의 25조항을 들고 사면을 청원해 봤자 풀려날 길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일단 율법이 그의 죄악을 발견하고 그를 정죄한 뒤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이 법을 어기지 않았다면 구제받을 길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 법을 어겼다는 게 이미 분명히 드러났고 기정 사실로 정죄된 이후에는 제아무리 뉘우치는 자세로 사면 조항을 들추면서 사면을 요구해도 풀려날 길이 없다. 이제 인간의 죄책상을 살펴 보자.
1. 그는 특별히 유대인을 두고 꼬집어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율법을 자랑하며 그걸로 칭의받을 수 있다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타락상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 유죄판결은 유대인에게나 그외 민족 모두에게 적용된는 것이니 그 이유는 그들의 율법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 아래 있다고 자랑하며 그것에 대한 배짱이 대단했지만 그러나 "율법은 너를 유죄판결하여 정죄하지 않느냐"고 바울은 얘기한다.
그 이유는 "모든 입을 막으려는"뜻에서이다.
의롭게 하거나 정죄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택하시는 방법을 주의깊게 살펴 보라. 그는 온갖 입을 다 틀어막고 만다.
의롭게 되었다는 자들은 간단히 유죄판결을 받아(유15) 아무 소리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스스로 자기들의 입을 막게 될 것이다(마 22:12).
"모든 악은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시 107:42).
2. 그는 일반적인 인간의 죄책상을 온 세상에 적용하고 있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흠정역).
이 세상이 죄악 속에 뒹군다면(요일 5:19) 그건 틀림 없이 "죄책이"있는 것이다.
곧 죄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마땅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니 본질상 모두가 "진노의 자녀들"이다(엡 2:3).
모두가 죄책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들의 칭의에 도취되어 있는 자들은 모조리 내어던져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다는 얘기는 무서운 말이다. 곧 만사를 통찰하시는 하나님, 그의 심판에 있어서 속지도 않거니와 속을 수도 없는 그분,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죄책을 면해 주지 않을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관 앞이라는 얘기다. 모두가 죄책 아래 있다. 따라서 모두는 하나님 앞에 입고 나설 의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23절) 곧 본질상 뿐 아니라 실제로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곧 인간의 최고 목표인 바로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르지 못하더니" 하는 이 말은 사격수가 그 표적에 못미치는 것이나. 달리기 선수가 상을 타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상을 타지 못하는 우승자가 아닐 뿐 아니라 철저한 패배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는 말을 더 살펴보자.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있어서 부족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1:21)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치, 곧 하등동물들이 오직 객관적으로 영화롭게 할 수밖에 없는 위대하신 창조주를 적극적으로 영화롭게 할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그러나 인간은 죄 가운데서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으니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그분을 욕되게 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거기에 미친 사람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다.
(2)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거리가 없다.
모르고 그랬다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려고 허둥대는 가운데 우리의 처지, 가진 것, 행위 등 그 어느 것을 가지고 떠들어 봤자 그건 오히려 영원히 우리에게 불리한 금반어(禁反語, estoppel)가 되고 말 것이다.
곧 우리 모두는 죄를 범했다는 꼬리표 구실을 할것이요, 그걸로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수는 있다. 곧 근시안적이요 마음 속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인간들, 똑같이 타락해 있으며 기꺼이 죄악에 뒤범벅이 되는 인간들 앞에서는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죄악을 대해서는 오래 참으실 수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3)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일에 부족하다.
영광의 시작인 칭의, 곧 하나님의 인정에 이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덧입혀 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인 성화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되고저 하는 온갖 바램과 소망을 내 던져 버린 것이다.
순수한 정직을 가지고 하늘에 이르기는 다 틀렸다. 그리로 가는 통로는 이미 다 막혔다.
생명의 나무에로 통하는 그 길에는 천사가 번뜩이는 칼날을 들고 지켜 서 있는 것이다.
3. 율법에 의한 칭의 기대를 철저히 배제하는 의미에서 그는 다시 한번 율법으로 확신시키고 있다(20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우리를 유죄판결하여 정죄하는 이 율법이 우리를 의롭다 할 리 만무하다.
이 율법은 "옳고 그른 것"(index sui eto bliqui)을 재 보여 주는 곧은 자(rectum)와 같은 것이다.
율법의 바른 용법과 의도는 상처를 들춰내는데 있는 것인 만큼 치료제가 될 수 없다. 파고드는게 어찌 치료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죄가 뭔지 알려면 율법의 엄격성, 그 범위, 그리고 그 상징적인 면을 면밀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이 자를 놓고 재보면 어디서부터 우리가 빗나가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해서 말하고 있다(7:9).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1) "의롭다 하심을 입을 육체가 없다."
그렇다 타락한 인간 그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 "그도 또한 육체이기 떄문이라"(창 6:3)는 말씀처럼 모두가 죄악투성이요 타락했기 때문에 곧 우리 모두가 육체이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우리 본성에 남아 있는 타락은 우리 자력에 의한 칭의, 곧 육체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관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은 앞으로, 영원히 배제하고 말 것이다(욥 14:4).
(2) 그의 앞에, 곧 하나님 보시기에서 칭의가 불가능하나 교회가 보는 관점에서의 율법에 의한 행위의 칭의를 여기서 그는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모두가 교회부지 안에 살고 있었으며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의 민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선 양심에 비춰볼 때 곧 "그의 앞에서"는 율법의 행위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사도는 시편 148편 2절을 언급하고 있다.
Ⅱ. 칭의가 기필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기대한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율법의 행위로는 칭의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죄책을 입은 인간은 영원히 진노 아래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 절망뿐이란 말인가? 죄악 때문에 입은 상처는 불치의 병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21,22절).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열려져 있으니 곧 복음 안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칭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다. 곧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의," 예정하시고 공급하시면 영접해 주시는 그분의 의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인의 갑옷을 가리켜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0)라고 하듯이 말이다.
1. 이제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1) 이 의가 들어났다는 점부터 보자.
복음이 제시하는 칭의의 가도는 고속도로다. 탁 트여 있다. 누구든 다 들여다 볼 수 있다. 구리뱀은 이미 높은 장대에 달려 있다.
어둠속을 헤매도록 내버려 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드러나 보여지고 있다는 얘기다.
(2) 그것은 "율법을 떠나서"다.
그는 여기서 유대 기독교인들의 방법론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곧 이들은 기필코 그리스도와 모세를 하나로 묶어 율법을 견지하며 그 의식을 지키자는 가운데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걸 강요하려 든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칭의는 "율법을 떠나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도입한 의야말로 완전한 의인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구약 성경에 이미 이것을 가리켜 보여 준 모형과 예언과 약속이 들어 있었다는 얘기다.
율법은 [실상은]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제 길을 가리켜 보여 주고 있으니 곧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의 의시니 그를 앙망하라"고 JC를 앙망하는 믿음을 지적,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행 10:43).
율법과 선지자를 그렇게도 들먹이기 좋아하는 유대인에게 이건 하나의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4)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한 복판에 "기름부음 받은 구주"로 모시는 그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칭의를 가져오는 신앙은 그리스도를 그의 3직 곧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이 모든 면에서 그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 섬기는 것이니 그를 의지하고 그를 영접하여 그에게 매달리는 면에 있어서 모두 그러해야만 한다.
이러한 신앙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도입한 이 의와 관련을 맺게 된다.
(5) 그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그는 지금까지 주창해 오던 것을 다시 밝히고 있다.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기만 하면 똑같이 되며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 하나님앞에 환영이라는 얘기다. 곧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곧 이 칭의는 "모두에게"(에이스 판타스), 곧 전체 일반에게 제공되어 있다. 스스로 제외하고 빠지지 않는 자들을 복음은 결코 제외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 칭의는 "믿는 모두에게"(에이스 판타스 투스 피스튜온타스)제공되어 있다. 이들에게 주어질 뿐 아니라 왕관으로서, 예복으로서 입혀진 것이다.
이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이것과 관계가 지어지며 여기에 따르는 모든 혜택과 특권에 대한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2.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한다는 얘긴가?
(1) 이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위해서다(24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도레안 테 아우투 카리티).
이것은 오로지 이 "은혜로" 된 것이다. 곧 (칭의와 성화를 부정하는 천주교에서 얘기하듯이 우리 안에 이미 이뤄진 은혜가 아니라)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나 가망조차도 보이지 않는데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이걸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은혜를 아주 순순한 면에서 정당하게 이해하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었다"(창 39:4)는 얘기가 나오지만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곧 그 주인은 요셉이 하는 일이 성공하는 것을 본 것이다.
요셉을 잘봐 줘서 은혜를 베풀 만한 뭐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전제조건없이 오직 JC 믿는 자에게 참되게 "값없이, 거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진짜 거저 주어진 것이요 우리 속에 그걸 받을 만한 뭐가 있거나 낌새가 보였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한 것이다 그것이 거저 온다는 말은 진실로 맞다.
그러나 그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내어주심]의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산 것이기에 아직도 값없는 은혜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은 영원불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거저가 아닐 수 없는 것은 이 대속적인 만족을 제공하고 받아들인 것이 바로 이 은혜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의 영광을 위해서다(25, 26절).
"이에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이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삼으셨으니……"
①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시대에도 이미 "속죄소"(일라스테리온, 2435)라는 모형으로 나타났듯이 위대한 속죄 제물(의 원형)이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가 이뤄지고 우리의 행위와 우리 인격이 하나님 앞에 받아 들여질 수 있는 은혜의 보좌(의 원형)이다(요일 2:2).
그는 우리 화해의 처음과 끝이시다. 화해자일 뿐 아니라 화해의 본질이니 우리의 제사장, 우리의 속죄물, 우리의 제단, 이 모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속죄소 안에 계셔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② "하나님이……세우셨으니"
하나님, 피해자 측에서 먼저 손을 써서 화해하기 위해 중재인을 세우셨으니 곧 이 일에 그를 "예정하셔서"(프로에데토, 4388) 영원 전부터 그의 사랑의 조정자를 정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시며 마침내 자격을 부여하셔서 이 죄악 세상이 속죄 제물로 드러어내 보이셨다(마 3:17; 17:5 참조).
③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그의 피에 대한 믿음으로, 흠정역)
우리가 이 속죄 제물과 관련이 맺어지게 된다. 그리스도는 속죄 제물이다. 또한, 상처를 낫게 하는 붕대이시며, 그 붕대가 주어진 셈이다.
신앙은 이 붕대를 상처난 영혼에 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칭의 문제에 있어서 이 신앙은 속죄를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피"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
피가 없이는 속죄가 불가능하며 그것도 죈인 그 자신의 피가 아니면 어느 것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게 신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 시대의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린 이유다(출 24:8). 신앙은 우슬초 다발이요 그리스도의 보혈은 흩어 뿌리는 피다.
④ 신앙에 의해서 속죄 제물과 관련을 맺은 자들은 모두 "전에 지은 죄의 간과"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속죄 제물이 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으니 곧 속죄다. 이걸 위해 그는 오래오래 참으시는 집행유예를 보여 주신 것이다.
"길이 참으시는 중에" 우리에게 회개할 틈과 기회를 주셔서 하늘에 가게 하려는 신의 인내-일절 오래참으심-가 우릴 지옥에서 건져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에 지은 죄"를 구약 성도들의 죄로 보고 이 죄도 그리스도께서 시간이 차서 속죄하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앞뒤를 다 내다 본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 지나간"으로 보자.
우리가 죄악의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 인내 덕분이다.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서"(엔 테 아노케 투 데우)라는 말을 26절에 집어 넣어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귀한 두 열매를 강조하는 희랍사본도 여럿 있다.
곧 "속죄를 위해서"(디아 텐 파레신, 3:25)라는 말에서의 속죄와 "하나님의 참으심"이라는 말에서의 집행유예가 바로 그것이다.
열매 못맺는 포도나무가 포도원에 남겨진 이유는 그 주인의 인자함과 정원사의 조정 때문이다.
중개자와 속죄물이 없이는 용서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한시도 참으실 수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양자에 있어서 밝히 들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이쪽 편 세상 지옥에 항상 죄인이 항상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다.
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으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하는 식의 표현을 봐서도 그걸 알 수 있다.
"우선" 하나님은 속죄물 그 자체에서 자신의 의를 들어내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처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이 밝히 들어난 때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보다 못한 것이 죄를 속하려 들떄는 어느때고 그 죄를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의 아들에게서 죄를, 물론 전가된 죄를 발견하시고 그는 그 아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 아들, 우리를 위해 스스로 죄가 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21).
따라서 비록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외아들이지만 그에게 우리 모두의 죄짐이 얹혀 있는 것을 보시고서 그는 기꺼이 그에게 매질을 아끼지 않으셨다(사 53:10).
"다음으로" 그는 이 속죄물에 의한 사면에서 자신의 의를 들어내 보여 주고 계신다. 곧 "자기도 외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라."
자비와 신뢰가 더없이 하나로 뭉쳐지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었으니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들의 공의를 위해 만들어 준 속죄, 이것을 받아들이며 회개하는 신자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해위일 뿐 아니라 의의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담보물을 쾌히 받아들여 놓고 그에 대한 원금을 다시 받겠다고 나서는 건 하나님의 공의에 안맞는 일이다(요일 1:9 참조).
그는 의로우시다. 곧 당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얘기다.
(3)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이렇게 하므로 인간의 자랑이 설 자리를 잃고 만다(27절). 어떠한 육체도 당신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종일관 창의와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 허풍을 배제하는 방향에서 이끌어 오셨다(고전 1:29-31).
만일에 칭의가 율법의 행위로 가능했더라면 이 자랑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 받는다면 우리 스스로의 머리에 왕관을 쓰는 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법" 곧 이신칭의의 길은 이 자랑을 영원히 배제하고 만다.
왜냐하면 신앙은 의존케 하며, 스스로를 비우게 하며, 스스로를 부정하게 하는 은혜요 저 보좌 앞에 갈 자의 왕관을 내어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의화되는 것만이 가장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믿음의 법"이란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신자들이라고 법없이 내버려진 게 아니다. 신앙도 일종의 율법이다. 그것이 진리 안에서라면 어디서고 작용하는 은혜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에 자랑할 데가 없고 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그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28절).
Ⅲ. 본장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는 이신칭의의 범위를 제시하며 그것이 유대인에게만 국한한 특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통용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미 그는 22절에서 차별이 없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1. 그의 주장과 입증을 들어보자(29, 30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그는 이런 가정은 얼토당토않다는 점에서부터 이론을 펴 나가고 있다.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저 사특한 소수의 유대인에게만 자신의 은총을 국한하시고 기타 모든 인류는 영원한 절망 속에 내버려 두신다는 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이점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의 선하심에 대한 생각과 일치한다. "여호와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모두에게 한 가지 동일한 길만이 있을 뿐이다. 유대인들이 제 아무리 차별을 두려 해도 그 차별이 있을 수 없다.
2. 그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알고 있는 율법이 이 교의에 의해서 무효화되는 게 아니냐 하는 반론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31절).
"그럴 수 없느니라."
비록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헛되이 주어졌다거나 우리에게 무용하다는 얘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그러면서 그 지위와 기초를 확고하게 하느니라.
율법은 아직도 우리의 (죄된)과거를 확신시켜 주고 (영광스런)미래를 향하게 하는 데 효용가치가 있다.
물론 그게 직접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걸 중보자의 손에 들린 것으로 알고 그걸 소유하고 거기에 복종하며 은혜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폐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오히려 이 율법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도덕률의 이행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자들은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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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4:6-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찬양=너희는 아무것도 염려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랄 모든 것을 감사로 하나님께 아뢰어라...너희는 모든일에 모직 주만 의지하라 그리하면 주님이 네길 인도 하시리라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 평강 주안에서 네맘을 지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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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진실한, 진짜의, 신실한. ajlhqhv"(227, 알레데스)
1. 고전 및 70인역본.
히브리어 에메트(출34:6-7를 보라)를 번역할 때 주로 사용됨, 형용사 알레데스(Homer 이래)는 부정 접두어 아(a)와 레도(lhvqw: 남의 눈을 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문자적으로 '숨기지 않는'을 의미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변치않는, 일정한, 충실한' constant, '확실한, 타당한, 정당한, 유효한' walid(Jos. Ant., 8, 337과 343 등; Sib., v. 449; Fr 1, 10; 사 43:9).
(b) ① '신뢰할 수 있는' trustworthy 또는 '믿을 수 있는' reliable(1 Cl., 45, 2), 느 7:2; 잠 22:21.
② '성실한' sincere 또는 '정직한' honest(Aeschyl., Thu.; Did., 15, 1; Pol. 1. 1; Jos. Ant., 13, 191).
(c) '실제의, 실재하는' real(Jos. Bell., 1, 254), '실제로 있는 것'을 나타낸다.
(d) '참된', true(Jos. Ant., 4, 219; Herm. m; papyrus; 단 10:1). '참된 교리'(알레데스 도그마)에 대해 사용되었다(Leg. All. 3, 229).
(e) '진짜의' genuine 또는 '진정한' proper, 신의 실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Thu; Philo Leg 등).
2. 신약성경.
형용사 알레데스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벧전 5:12에서 알레데스는 '정당한, 타당한, 효과적인'을 의미한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b) 빌 4:8에서 알레데스는 '올바른' upright을 의미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c) 롬 3:4에서 알레데스는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d) 알레데스는 '성실한, 정직한'을 의미한다.
① 막 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병행구, 마 22:16). 여기서 알레데스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정직, 성실'을 나타낸다. 그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한 질문의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② 요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③ 고후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e) 알레데스는 '실제의, 실재하는, 진짜의'를 의미한다.
① 행 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② 요 10: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③ 요 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④ 요 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⑥ 요일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f) 알레데스는 '참된'을 의미한다.
① 요 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② 딛 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③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참 속담은 경험에 비추어 본 바대로 진리를 의미한다.
(g) 알레데스는 '진짜의, 진정한'을 의미한다.
①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② 요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여기서 알레데스는 보다 분명한 의미로 나타나는데, 즉 믿는 자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음을 확인함으로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다는 것을 확증한다.
③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이 구절에서 요점은 단순히 성실하신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분은 실재하시며, 그 분 자신이 진짜이시고, 알레데이아에 의해 결정되고, 그러므로 그 분은 계시자이시다는 것이다.
④ 요 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A. C. Thise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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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 성실, 확실함, 진리 tm,a,(571, 에메트)
에메트(명여)는 아만(@m'a; , 539)에서 유래했으며, '신실(성), 성실(성), 충실함, 확고함, 확실함, 진리, 진실'을 의미한다. 에메트는 헬라어 알레디아에 해당한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126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를 나타낸다.
(a) 에메트와 의미
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한, 확실한, 신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인격에 대해 사용될 때 그것은 때때로 주로 그의 말, 행동, 사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을 표현한다.
이쉬 에메트는 그의 행위가 진리의 규범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께 적용될 때, 특별히 그의 신실성에 대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확고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약성경 학자들은 히브리 저술가들이 말하는 '진리'란 의미상 '불변성'(stability), '확고함'(firmness) 혹은 '확실성'(reliability)이란 개념을 시사해주는 '신실성'(faithfulness)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예프센(Jepsen) 기록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에메트는 신뢰할만한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확실성)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에메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예프센은 이것을 인간의 진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적용시키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진리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는 ... 그의 말씀과 사역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TDOT Ⅰ313).
이런 견해를 근거로 하여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주장이 종종 있어 왔다.
만일 이 견해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 사이의 근본적으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볼트만(R. Bultmann)은 쉽사리 알레데이아의 헬라어 용법이 셈어적 용법과 대조된다고 말한다(TDNT Ⅰ238).
이 이론에 따르면, 고전 헬라어에서 알레데이아는 단순한 현상과 대조되는 '진리'(truth)를 의미하는데 반해, 히브리어에서 이에 병행되는 단어는 '불변성'(stability) 혹은 '신실성'(faithfulness)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대조가 어느 점에서는 타당성을 지니는 반면, 이 주장들이 조심스럽게 한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될 수도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에메트는 그 사용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에메트가 에메트로 간주되고, 에메트에 의해 지적되는 독특한 사실들을 항상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이 단어는 법률적 영역을 넘어가는 불확정한 일반적인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실이나 사실(reality)로 인정하기를 항상 요구하는 사실(facts), 신과 인간의 질서에 일치하여, 존중을 받는 정상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유사하게 미쉬파트(fP;v]mi , 4941: 공의, 심판)의 체다카(hq;d;x] , 6666: 의), 샬롬(!/lv; , 7965: 완전, 평화)과 같은 관련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그 의미와 일치하여 그것은 전혀 일반적으로 진리나 진실(truth)로, 심지어 정상적 개념으로서 '진실성'(veracity)으로 번역할 수 있다.
(b) 에메트의 법률적 용법.
에메트는 기본적으로 가장 확실히 법률 용어에서 '사실상의 과정이나 인과의 진실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22:20에 "그 일이 참되어(에메트)..."라는 표현에서 앞의 경우와 같이 "그 일이 비방거리에 근거하지 않고 확실한 사실들, 곧 진실에 근거한다면"이란 의미를 읽는다.
삿 9:16(삿 9:19)의 "너희의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의와 관련되며,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삿 9:15에서는 "참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메트가 사물에 적용되는 경우에 법률 용어의 비유적 용법을 보게 된다.
창 24:48에 "바른 길"이 데레크 에메트, 즉 제시되는 많은 길들 중에 확실히 성공하는 길이다.
렘 23:28의 "내 말을 받는 자(선지자)는 성실함으로(에메트) 내 말을 말할 것이라"는 말에서, 에메트는 그 자체 꿈으로가 아니라 실제적 역사(operation, 렘 23:29)를 나타내는 사실(a fact)을 가리킨다. 단 8:26에서(이상이 확실하니) 에메트는 그 계시가 실제로 일어날 명백한 것임을 확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 59:14, 사 59:15에서 진실이 부족하다는 불평은 사 59:13 상반절에 "배반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불신실성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불평의 참된 원인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혀로 거짓말 하기를 가르친다"고 불평하였다(렘 9:5). 틀림없이 이런 일 때문에 결국 어느 누구도 자기 형제를 신뢰할 수 없는 것 같다(렘 9:4). 그러나 여기에서 주요 문제는 거짓말 그 자체이다.
스가랴도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을 베풀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특별히 에메트의 개념에 있는 평결(judical finding)과 재판의 기준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시편의 세 구절들에서 진리는, 많은 학자들이 오로지 헬라 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거의 그런 의미에서, 은폐(concealment)와 대조하여 나온다.
시 43:3에서 기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계실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간사한 자"(시 43:1)의 유혹적인 말에 직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와 빛을 필요로 한다. 진리란 그를 어둠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여 사건들이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 45:4에서 왕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왕의 확실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부정하고, 공정치 못하거나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다 드러낼 그의 마음 자세이다. 왕은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의 원인을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옹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시 51:6의 "중심에 진실함을"이라는 유명한 언급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앤더슨(A. A. Anderson)은 여기에서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Psalms, Ⅰ, 396). 그러나 이 개념은 시편 기자가 충실함을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시편의 주제는 고백이며,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사건들의 상태의 진실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만일 우리가 "중심"(inward parts)을 계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덮여 있는 것"을 의미하고(E. A. Leslie, The Psalms, 1949, 400), 이 시편의 주제를 여호와께서 공정하시다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S. Mowinckel, The Psalms in Isreal's Worship, 1967,Ⅰ, 214),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잠언에서 진리와 거짓말(혹은 속임수) 사이의 대조를 배경으로하여 에메트가 사용된다. 지혜가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잠 8:7)라고 말할 때, 그 요지는 지혜가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교육과 지식을 통해서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잠 22:21에서는 진리가 참된 대답이 행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즉 그곳에 거짓이나 허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드러내어 진다.
(c)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
① 법률적 영역에서 중요한 다른 표현과 같이, 진리의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의 종교적 용어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에메트의 종교적 용법은 항상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지만, 종교적 이해(통찰)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경우에 그것은 법률적 용법에 의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교적 사실을 오로지 의미한다.
때때로 사법적으로 의인으로 묘사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명백한 진리의 사실에 근거하며, 진리가 하나님 자신의 행위와 말씀 안에 있는 토대인 것 같이 진리를 행한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인간의 진실함을 요구한다(시 51:6). 여호와의 성산에 거하기에 합당한 자는 그 마음에 에메트("진실")를 말하는 자이며(시 15:2),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의 질서라는 의미에서 진리에 전념하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이 마음은 사회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된다(참조: 겔 18:8). 그러므로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다(참조: 18:9). 하나님은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신다(왕상 2:4).
호세아가 호 4:1에서 이 땅에 진실(에메트)이 없다고 불평할 때, 진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즉 생의 모든 영역에서 진실함은 하나님의 뜻을 틀림없이 아는데서 성장하고, 이러한 앎은 그것에 관한한 진실함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지혜 문학에서 문맥은 셰켈(허위, 거짓)이나 아울라(불의)와 대조시키므로, 진실의 개념을 강조하는 한편(말 2:6, 잠 11:18, 렘 9:4, 참조: 잠 12:19), 악과 대조는 더욱 명확히 종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느 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에메트: 신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② 에메트는 자주 신실성이란 의미로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시 31:5에서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의인과 사람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실만 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신실하게(에메트) 대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의 규범을 지키신다(시 146:6).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진리를 확립하고 그 자체 진리인 법, 곧 진정한 율법(토로트 에메트)을 수여하셨다(느 9:13).(참조: Quell).
에메트는 보통 "내가 주의 에메트를 찬양하리이다"(시 71:22)와 같은 특징적인 구절들에서 '신실성'이란 의미로 나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지속된다(시 117:2).
앤더슨(A. A. Anderson)은 시 119:43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란 어구조차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기록이란 의미로 해석했다(The Book of Psalms).
시 30:9에서 하나님의 에메트에 대한 증거의 개념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오는데, 스올(Sheol)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선언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신자에게 하나님의 신실성을 새롭게 증거해 줄 계속적인 경험이 중단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에게는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시 30:9, 참조: 사 38:18).
③ 에메트가 '신실성'(faithfulness)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자주 헤세드(변함없는 사랑)와 병행되어 나오다. 이런 경우에 에메트가 '신실성'을 의미하는 문맥과 '진리와 진실'을 의미하는 문맥을 구별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헤세드와 에메트를 보여주기를 브두엘과 라반에게 요청하는 대목에서(창 24:49),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충성'(loyalty)과 '성실'(fidelity)로 볼 수 있겠지만 개역 표준 성서(RSV)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의 "deal loyally and truly"(충성스럽고 진실하게 대하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장(창 24장)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맨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엘리에셀을 "헤세드와 에메트를 끊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에 충실하고 신실했다는 것이다(창 24:27).
창 32:10에서 야곱은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심(에메트)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창 32:10).
그 특징은 시편에서 찬양과 기도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메트의 용법 중 반수 이상이 이런 의미를 지닌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라고 외칠 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특징 지워지기 때문에 아주 신뢰할 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다(M. Dahood).
에메트가 시 57:3, 시 57:10, 시 61:7, 시 69:13, 시 108:4, 시 115:1에서 헤세드와 결합되어 나올 때, "신실성"(faithfulness)이 에메트의 의미로 나온다. 흠정역 성서에 나타나 있듯이, 이런 의미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라고 번역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명시된다. 그리고 알레데이아는 '충실, 성실'을 뜻하는 에무나(시 88:11-49), '신실한, 신뢰하는'을 뜻하는 에문(시 12:1, 시 31:24), '확실한, 진실한'을 뜻하는 야칩(byXiy' , 3330; 단 2:8), '정직한'을 뜻하는 야샬(rv'y: , 3474; 욥 23:7), '완전, 성실'을 뜻하는 톰(!To , 8537, 잠 28:6), '진실'을 뜻하는 케쇼트(f/vq] , 7187; 단 2:47), '진실로'를 뜻하는 옴나(욥 9:2, 욥 19:4), 우림(신 33: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④ 우리가 에메트가 사용된 여러가지 측면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매우 많은 문맥들에서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아니라 행위로 자기의 진리를 드러내시며, 이 진리는 사실상 그의 백성의 체험 속에서 입증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진리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이론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이웃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구두상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일상적인 증언으로 나타낸다.
시 119:142에서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실존적인 진리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보여줄 등이요 빛이다(시 119:105). 여기에서 그는 사실상 그와 관련될 때의 사건의 진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내발 ... 내길").
⑤ 이러한 진리는 신뢰할 만하며 또한 확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이 오로지 신학적 기초 위에서만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메트, 헤세드, 에무나)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에메트의 이런 특별한 용법이 이 단어의 모든 용례들의 배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던 논리적 진리, 곧 참된 말은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는 점,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언행이 일치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참조: 수 24:14, 시 145:18).
진리를 말과 행동의 일치로 보는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참조: R. Butman; A. C. Thise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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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faith.pivsti"(4102, 피스티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Hes., Hdt.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b) 피스티스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향유하는 확신, 즉 '신뢰할 수 있음,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확실성이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다.
(c) 피스티스는 신뢰의 가능성,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에무나(경고, 충실, 성실, 확고부동의 믿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피스티스는 '신실성, 신뢰성'을 의미한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롬 3:3; 딛 2:10; 갈 5:22; 살후 1:48.
(b) 피스티스는 '엄숙한 약속, 서약'을 나타낸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딤전 5:12).
(c) 피스티스는 '증거, 보증'을 의미한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딤후 4:7.
(d)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믿음'을 나타낸다.
① 하나님에 대하여, 막 11:22; 벧전 1:21; 히 6:1; 살전 1:8; 롬 4:5; 롬 4:9; 롬 4:11-롬 4:13; 롬 4:16; 롬 4:19이하 등.
②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 8:10; 마 9:2; 마 9:22; 마 9:29; 마 15:28; 막 2:5; 마 4:40; 마 5:34; 마 10:52; 눅 5:20; 눅 7:9; 눅 7:50; 눅 8:25; 눅 8:48; 눅 17:19; 눅 18:42. 롬 3:23; 롬 3:26; 갈 2:16; 갈 2:20; 갈 3:22; 엡 3:12; 빌 3:9; 약 2:1; 계 14:12.
(e) 피스티스는 '신앙의 내용, 교리'를 나타낸다: 유 1:3, 유 1:20; 롬 1:5; 갈 1:23; 갈 3:23이하; 딤전 1:19; 딤전 4:1, 딤전 4:6; 딤전 6:10; 딤후 2:18; 롬 12:6; 딤후 4:7.
(참조: Walter Bauer; A.Weiser; O.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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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다 believe.pisteuvw(4100, 피스튜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피스튜오(Aeschyl., Soph.,이래)는 피스토스(pistov", 4103)에서 유래했으며, '신뢰하다, 의지하다, 순종하다, 믿다, 위탁하다, 신임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피스튜오는 70인역본에서 약 9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아만(진실하다, 의지할만하다, 신실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피스튜오는 신약성경에서 약 250회 나오며, 신약성경에서 피스튜오는 일반 헬라어 용법에서와 거의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a) 피스튜오는 '의지하다, 신뢰하다'를 의미한다. 말씀(요 4:50), 하나님(행 27:25)에 대해 사용되었다.
(b) 피스튜오는 '믿다'를 의미한다. 말이나 말하는 자에 대해 사용되었다(막 13:21; 요 4:21).
(c) 피스튜오는 인격이나 사물의 여격(요 4:21; 행 27:25; 계 4:17), 사물의 여격(요 4:50; 행 24:14), 사물의 대격(요 11:26; 고전 13:7)으로 구성되어 있다.
(d) 피스튜오는 수동태로(믿게되다) 나타난다(살후 1:10; 딤전 3:16).
(e) 피스튜오는 대격이나 여격과 더불어 에피(ejpiv, 1909)와 함께(롬 4:5; 롬 4:24; 마 27:42; 행 9:42; 행 11:17; 행 16:31; 행 22:19), 엔(ejn, 1722)과 함께(막 1:15) 사용되었으며, '~을 믿다'를 의미한다.
(f) 피스튜오 에이스는 '~을 믿다' believe in는 의미로서(예: 갈 2:16; 요 1:12; 요 3:18) 일반 헬라어와 70인역본에서는 없는 독특한 것이며, 교회 선교의 문맥에 나타난다.
(g) 예수님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사건들(살전 4:14; 롬 10:9), 기독론적인 문장(요 20:31)과 믿음을 연관시키는 호티 문장들(피스튜오 호티: …을 믿다 believe that…)은 헬라 교회의 언어 용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이 문장들은 특별한 역사적 내용을 기독론적 고백에 결합시킨다.
(h) 피스튜오는 '자신을 위탁하다'를 의미하며(눅 16:11; 요 2:24), 수동태도 이와 같이 사용되었다(롬 3:2; 고전 9:17; 갈 2:7; 살전 2:4; 딤전 1:11; 딛 1:3). (참조: J.H.Thayer; R.Bultmann; O.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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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 의 dikaiosuvnh(1343, 디카이오쉬네)
명사 디카이오쉬네(Theognis. Hdt. 이래)는 디카이오스(divkaio", 1342: 의로운)에서 유래했으며, 의로운 사람의 덕, 자질, 상태를 나타낸다.
70인역본에서 히브리 체테크(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의 역어로 자주, 헤세드(의롭다 함 받은 자가 누리는 바 선함, 친절, 긍휼)의 역어로 드물게 사용되었다.
명사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성경에서 9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넓은 의미에서,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상태, 의로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
① 일반적으로:
"의의 말씀", 인간이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 받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길(way)에 관한 교훈, 히 5:13;
"의의 왕", 하나님께서 시인하신 왕, 그의 백성을 하나님께 용납되게 하는 왕, 히 7:2;
② '삶의 성실, 미덕, 순결, 정직, 생각, 느낌, 행동이 올바름':
마 3:15; 마 5:6, 마 5:10; 마 6:20; 마 6:1; 행 13:10; 행 24:25; 롬 6:13, 롬 6:16, 롬 6:18-20; 롬 8:10; 고후 6:7, 고후 6:14; 고후 11:15; 엡 5:9; 엡 6:14; 빌 1:11;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6; 딤후 4:8; 딛 3:5; 히 1:9; 히 12:11; 약 3:18; 벧전 3:14; 벧후 2:5, 벧후 2:21; 벧후 3:13,
"의의 도로", 의의 길로 행하는, 즉 정직한, 의로운 사람, 마 21:32;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마 6:33; 약 1:20;
'자선'에서 나타나는 의에 대해: 고후 9:9.
"의와 성결"로 연결되어 나오는 경우, - 눅 1:75; 엡 4:24, - 전자는 인간에게 향한 옳은 행동을, 후자는 하나님께 향한 경건을 나타낸다.
의를 행하는 것, 의롭게 사는 것: 요일 2:29; 요일 3:7; 요일 3:10.
의를 행하는 것, 행 10:35; 히 11:33; 의를 위해 사는 것, 의를 위해 생명을 바치다, 벧전 2:24;
옳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완전하게 수행하다, 마 3:15.
디카이오쉬네가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때는, 그의 완전 무결한 도덕성, 고결성, 죄 없으심을 나타낸다: 요 16:8, 요 16:10;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는 그의 '거룩성'을 나타낸다: 롬 3:5, 롬 3:25이하.
③ 바울 문헌에서 헤 디카이오쉬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유대인과 유대 기독교인의 견해에 대립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특히 다음의 사실들이 주목되어야 한다: 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과 그들 가운데서 기도교도로 개종하게 된 매우 많은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행위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받았다 - 마치 율법준수 공로 인정의 방식으로 - 고 생각하며, 또한 그리하여 영원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율법은 [그들의 이해와는 정반대가 진실인 바!] 그 가르침 모두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그러한 복종을 [늘,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하게] 이행하지 않는 자들을 오히려 정죄한다(갈 3:10, 갈 3:12). 이런 식의 복종은 유대인도 이방인도(롬 1:24-롬11:1) 그 누구라도 이행할 수가 없다(롬 3:10) - 이방인에게는 모세 율법 대신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타고난 올바른 법이 있다(롬 2:14이하).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즉 그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속하는 희생제물로 죽게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그의 은총과 선한 뜻을 입증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이 마치 죄를 짓지 않은 양 구원을 소망할 수 있게 한 그 사랑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 소망을 얻는 길은 오로지 믿음을 통하는 것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믿음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보증된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전유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인간에게 디카이오쉬네로 간주하여 주는 것이다; 디카이오쉬네는 '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통하여 그 죄인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용납(열납)될 수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디카이오쉬네는 롬 4:5이하, 롬 4:11; 롬 5:17, 롬 5:21; 롬 9:30이하; 롬 14:17; 고전 1:30; 갈 5:5에서 수식어구 없이 사용된다.
하나님으로 인한 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 롬 1:17; 롬 3:21; 롬 10:3.
이 단어가 함축적으로 사용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다, 롬 10:4;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용법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뜻한다.
고후 5:2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롬 3:22; "믿음으로 된 의", 믿음으로 얻어지는, 믿음에서 나타나는 의, 롬 4:11, 롬 4:13; "하나님께로서 난 의",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 하나님으로 인하는 의, 빌 3:9(내가 가진 의는 믿음에 기초한 의라는 것이다).
"믿음에서 난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좇는 의", 롬 9:30; 롬 10:6;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빌 3:9; "믿음을 쫓는 의", 믿음에 따르는, 믿음에 합당한, 히 11:7(그러나 히브리서에서의 '믿음'의 개념은 바울 문헌에서보다 더 폭 넓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없이는 의가 존재할 수 없는 분으로서, 의의 창시자로서로 불리운다, 고전 1:30.
"의를 이루기 위하여", 결과로서 의에 이르기 위하여, 의를 얻기 위하여, 롬 10:4, 롬 10:10.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구주JC 믿고 영접함의 믿음은 그 사람의 의로 간주된다, 즉 사람의 의는 구주JC 믿음에서 기인하고, 믿음에서 인정된다: 롬 4:3, 롬 4:6, 롬 4:9, 롬 4:22; 갈 3:6; 약 2:23. "의의 직분", 고후 3:9. 믿음에서 생겨난 "의", .....즉 율법 순종의 결과로 생각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와 반대된다, 롬 5:5이하; 율법에 의존하는, 즉 율법에 대한 가상적 복종에 의존하는 의, 빌 3:6;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 롬 10:3; 빌 3:9;
(b) 더 접근된 의미에서 '공의, 정의', 혹은 '각 개인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시는 미덕',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공평하게 부여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벧후 1:1.
법률상의 정의, 롬 9:28; "공의로 심판", 행 17:31; 계 19:11.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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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righteous. divkaio"(1342, 디카이오스)
형용사 디카이오스(Homer. 이래)는 디케(divkh, 1349: 옳음, 공의, 정의)에서 유래했으며, '디케를 준수하는, 의로운, 하나님과 인간의 법을 지키는,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를 뜻하고, 그리하여 초기 언어에서 루터는 넓은 의미로 '올바른'이란 이 단어를 사용한다; 헬라 문헌에서 심지어 물질적인 것에도 사용되어(Xen. mem.) '가장 비옥한'(Xen. Cyr.)을 뜻하기도 한다.
70인역본에서 히브리어 차딧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a) 넓은 의미에서 '정직한, 옳은, 고결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① 일반적으로: 마 1:19(의미하는 바는, 그의 약혼녀가 공적 비난을 당하게 하는 것은 그의 의로움과 양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 10:41; 마 13:49; 마 23:28; 마 25:37, 마 25:46; 눅 1:6, 눅 1:17; 눅 14:14; 눅 18:9; 눅 20:20; 롬 5:7; 딤전 1:9; 약 5:6, 약 5:16; 벧전 3:12; 요일 3:7; 계 22:11; "죄인과 경건치 아니한 자", 벧전 4:18; "의인과 악인", 마 5:45; 행 24:15; 그의 경건과 정직으로 주목 받는 구약성경의 인물에 대해: 마 13:17; 히 12:23; 따라서 아벨, 마 23:35; 히 11:4; 롯, 벧후 2:7; 실제이든 가상이든 간에,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 스스로 덕을 자랑하는 자들에게도 사용된다: 마 9:13; 막 2:17; 눅 5:32; 눅 15:7, "경건하여"와 함께, 눅 2:25; "거룩한"과 함께, 막 6:20; "선하고"와 함께, 눅 23:50; "하나님을 경외하는"과 함께, 행 10:22; "그의 의로움", 요일 3:12. 중성 토 디카이온 '요구하는 의무로 간주되는 것, 옳은 것': 벧후 1:13; 복수형, 빌 4:8; "옳으니라", 엡 6:1; 빌 1:7; 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서"와 함께, 행 4:19.
② 두드러진 부정적 개념: '순진한, 흠 없는, 죄 없는'; 따라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할 때 사용되었다: 마 27:19, 마 27:24 RGL br. Trbr. WHmrg.; 눅 23:47; 마 23:35; 죄와 교제하지 않는,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2.
③ 특히, 이 단어는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있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하는 자, 그리하여 마음이나 삶을 바로 잡을 필요가 없는 자에게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이 디카이오스로 불리울 수 있다: 행 7:52; 행 22:14; 벧전 3:18; 요일 2:1; "거룩하고 의로운", 행 3:14; 나머지 안간 중에서 단 한명의 디카이오스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부정된다, 롬 3:10(전 7:21).
하나님에 대해: '거룩한', 롬 3:26. '그리고 옳다고 하는 사람' 혹은 '의롭다고 선언하는 자'에 근거하여 '옳은'이나 '의로운'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적 의미는 '거룩한'이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품성으로 인해 죄를 미워하고 벌하신다, 요일 2:29.
④ 문맥상으로, '하나님이 좋다고 인정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롬 5:19; "믿음으로"와 함께, 믿음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갈 3:11; 히 10:38;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 롬 2:13.
(b) 좁은 의미에서, '각각의 의무를 이행하는'; 사법적 의미에서 말로 표현되든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여지든 간에 '다른 사람에게 정당한 판단을 내리는': 딛 1:8; 따라서 그들의 행위에 따라 공평하게 인간에게 보상하는 하나님께 사용, 계 16:1; 동일한 의미로 요 17:25(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충실한 제자들과 '세상'에게 똑같은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요 1:9(그는 그의 통치의 법을 실시하시며, 또한 죄 사함에 관한 법도 실행하신다)에서도 사용된다; 그리스도에 대해, "의로우신 재판장", 딤후 4:8; "공의로운 심판", 요 5:30; 요 7:24; 살후 1:5; 복수형, 계 16:7; 계 19:2;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계 15:3.
중성 토 디카이온 "의", 다른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 골 4:1; 공의와 법률에 합치하는 것, 눅 12:57; 그것은 공의에 합치하는 것이다, 살후 1:6; 공과에 따라, 마 20:4; 마 20:7.(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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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다 하다 justify.dikaiovw(1344, 디카이오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디카이오오(Soph., Hdt. 이래)는 디카이오스(divkaio", 1342)에서 유래했으며,
(a) '바로 잡다'(법으로 폭력을), '옳은 것으로 세우다', '정당화 하다'
(b) '권리로서 요구하다, 옳다고 간주하다, 판단하다, 승인하다'
(c) '누군가에게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다'. 이 경우는 '형을 언도하다, 벌을 내리다,징벌하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의롭다고 선언하다, 정당하다고 인정하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디카이오오는 70인역본에서 약 4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차다크(올바르다, 공정하다, 의롭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디카이오오는 신약성경에서 3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거의 항상 법적인 관련이 나타난다.
(a) 계 22:11에 나오는 이례적인 의미는 '의를 행하다' exercise righteousness이다.
(b) 흔히 하나님의 변호를 언급한다(눅 7:29; 마 11:19; 롬 3:4; 딤전 3:16).
(c)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다'는 눅 10:29(보다 약한 의미로 사용됨)과 눅 16:15에 나온다.
(d) 눅 18:4과 마 12:37에서는 '무죄로 된' acquitted이나 '의롭다고 선언된' declared righteous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마 12:37에서는 마지막 심판과 분명하게 관련된다.
(e) 바울 기록에서 우리는 맨 처음
① 법적인 용법을 발견한다. 악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러한 칭의는 현재에 일어나는 구원적인 방면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제정되고 믿음으로 이해되는 관계의 객관성을 지닌다. 갈 2:16-17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는 의미이다. 심판의 개념은 항상 나타나지만, 디카이운은 그리스도를 통한 현재적인 은혜의 행동이다.
② 그렇지만 바울의 이 용어 사용은 체험의 문제에 기여하였다(참조: 갈 3:8, 갈 3:11; 롬 3:24). 십자가에서의 모든 사람에 대한 칭의와 믿음 안에서의 개인적인 칭의는 조화된다. 칭의는 은혜의 완성품이다. 그러나 "믿음으로"라는 말은(참조: 갈 2:16; 갈 3:8, 갈 3:11) 칭의가 또한 현재에 계속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객관적인 행동과 주관적인 이해를 끊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 심판에 관한 한, 바울은 디카이오오를
③ 우리 삶의 전체적인 활동에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내려지는 선고와 관련시킨다(참조: 고전 4:4). 미래가 사용될 때 항상 이것이 의도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롬 2:13에서 언급하는 바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지막 심판에 관한 것이지만 문맥상 요지는 어느 누구도 의로운 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롬 5:19은 종말론적인 언급인 것 같지만, 의미하는 바는 십자가에서 제정되고 계속적인 선물로 알려진 신적 칭의는 결정적인 무죄방면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이다(참조: 롬 8:24, 롬 8:33).
④ 이 동사는 행 13:38-39(여기에서는 법정적 의인이 또다시 문제가 됨)에서 처럼, '~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은 롬 6:7에서 이 용법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와 함게 십자가에 못 박힘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근거는 죽음을 통한 속죄라는 랍비적 개념이다. 이것은 바울이 얼마나 밀접하게 칭의와 속죄를 결부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새로운 특징은 이런 해방하는 죽음은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f) 야고보서.
야고보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대해 3회 언급하고 있다. 이 언급은 현재의 칭의에 관한 것이다. 이 언급은 현재의 칭의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가 인정을 받은 의로운 사람이다. 이것은 바울주의에 대한 논박으로 언급된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은 게으름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된 것이다(약 2:21이하).(참조: G. Schrenk; C. Brown;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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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채, 영광, 영화, 명성. dovxa(1391, 독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독사(Homer이래)는 도케오(dokevw, 1380)에서 유래했으며, 기본 의미는 '생각하는 것, 의견'이다. 이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나는 생각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내가 가지는 의견'을, '나는 ~라고 간주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가지는 의견'을 의미한다.
(a) 이 단어는
① '기대, 의견, 견해, 단순한 추측', 철학적 주의. ② 좋은 평판, '명성, 칭찬'. ③ '빛, 광채'를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작품에서,
① '견해'나 '주의', ② '명예'나 '영광', ③ '장려' 그리고 ④ '하나님의 광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독사는 70인역본에서 400회 이상 나오며, 25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며, 주로 카보드(영광)를 번역한다.
독사는 70인역본에서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카보드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독사는 '견해, 의견'(전 10:1; 집회서 8:14; 마카베오사서 5:17), '장려, 권능, 세상적 장엄'(사 17:4; 사 35:2; 학 2:3),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사 24:7이하; 사 29:3; 사 42:8),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사 2:10, 사 2:19, 사 2:21; 출 33:22; 시 102:15) 등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독사는 신약성경에서 167회 나오며, 한글개역 성경은 한번 '광채'로 번역하고, 모두 '영광'으로 번역했다.
(a) 독사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독사의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보다 70인역본을 따른다.
이 단어는 '평판'과 '능력'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헬라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서적 용어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70인역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 영예', '하나님의 장엄',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가견적 광채는 고전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문맥에서 차이를 식별해야 한다.
그렇지만 항상 표현되는 것은, 비록 신현현의 가시적 요소를 여러 가지로 강조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예를 들면,
행 7:2에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
눅 2:9의 크리스마스 기사에서 "주의 영광",
눅 9:31이하; 벧후 1:17의 변형에 대한 기사에서 "지극히 큰 영광",
행 22:11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 "그 빛의 광채",
계 15:8; 계 21:23의 하늘의 성전과 하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영광" 등이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을 실제적 인정과 감사로 고백하거나(행 12:23; 롬 4:20; 계 16:9) 찬양하는 것(눅 2:14; 눅 19:38; 롬 11:36; 롬 16:27; 엡 3:21; 빌 4:20; 딤전 1:17; 계 4:9; 계 7:22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송영은 에스틴(ejstivn)을 전제한다(갈 1:5; 벧전 4:11).
요한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용법과 인간이나 하나님이 부여해 주는 명예나 찬양에 대한 용법을 거의 순수하게 병행시킨다는 사실이다(요 12:41; 요 12:43).
(b) 독사는 예수님의 영광을 표현한다. 신약성경에서 독사를 하나님과 관련시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시킴으로써, 결정적인 단계를 취한다.
이 관계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의 전동력론(whole dynamism)은 독사의 용법에 반영되어 있다.
롬 6:4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3:16에서는 영광 속으로 올리워진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행 7:55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의 오른 편에 계신 그를 보았다.
베드로전서에서 그의 "고난 후에 받으실 영광"(벧전 1:11)과 그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벧전 1:21)에 대해 말한다.
히 13:21에 의하면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처럼 그에게 돌려진다.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 약 2:1)
종말론적인 소망(참조: 사 40:5)은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이다(딛 2:13; 벧전 4:13; 벧전 5:1; 막 13:26등). 이 언급들의 대부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독사가 성육신한 예수님에 적용된 것은 매우 드물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재림(parousia)과 관계되어 있다(막 8:38; 막 10:37; 막 13:26과 병행구, 마 19:28; 마 25:31).
누가복음에서 독사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변모 기사에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독사의 계시(눅 2:9)는 천사들의 출현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그의 오심을 지적한다. 요 17:5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독사"를 언급한다.
요한복음에서, 오직 믿음으로 또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요 1:14; 요 2:11; 요 11:40). 그리스도의 이 독사는 본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요 7:39; 참조: 요 12:23; 요 13:13; 요 16:14; 요 17:1, 5의 기도). 영광으로 들어간 것은 십자가에서이다(요 13:31). 여기에서 하나님의 독사가 고백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이 수난의 빛에서이다.
(c) 독사는 신자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독사를 보는 것에 있다(참조: 레 9:6; 사 6:1; 사 35:2). 랍비들에게 있어서도 영원한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강조점은 참여에로 옮겨진다.
빌 3:21에서 부활 때에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의 몸으로 변모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 영광에 참예할 것이다(골 3:4).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참조: 롬 8:17).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다(골 1:27).
독사에의 참여는 그리스도에의 참여로 말미암는다. 영원한 영광이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다(벧전 5:4; 고전 5:10; 살전 2:12; 살후 2:14; 고후 4:17; 딤후 2:10). 여기에서부터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이 신자의 목적의 하나이다(롬 5:2). 이 죄많은 시대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롬 8:18; 롬 8:21). 욕된 것으로 심겨진 것이 영광스런 것으로 다시 산다(고전 15:43). 그렇지만 미래의 영광은 그 근거를 하나님의 목적과 행동에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다(참조: 롬 8:29 - 롬 8:30; 고전 2:7). 성령은 영광을 가져오는 새로운 것의 보증이다(참조: 엡 3:16; 벧전 4:14).
이것은 특히 고후 3:7이하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모세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새롭고 더 큰 영광과 대조시키며,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신자들이 어떻게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는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움직임은 현재의 영광에서부터 종말론적인 완전한 영광에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사역에 의해 실행된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고전 4:6).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7장에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며(요 17:24), 그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되며(요 17:10),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을 그들에게 주신다(요 17:22)고 언급되어 있다.
(d) 독사는 천사들의 영광을 표현한다.
겔 9:3 등에서 그룹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유대교에서처럼 천사가 영광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히 9:5은 영광의 그룹에 대해 언급한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계 18:1은 천사의 영광에 대해 언급한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서 천사들을 '독사이'라고 부른다. 유 1:8에서는 "영광", 벧후 2:10에서는 '영광있는 자들'로 번역했다.
(e) 독사는 인간 또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사용되었으며, '화려, 장대, 탁월' 등을 나타낸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 즉 그것들의 자원, 부, 그들 도성들의 장대함과 위대함, 그것들의 비옥한 땅, 그것들의 많은 인구(마 4:8; 눅 4:6), "땅의 왕들의 영광"(계 21:24), "만국의 영광"(계 21:26), 왕의 영광, 찬란한 의복 등(마 6:29; 눅 12:27), "육체의 영광"(벧전 1:24), "직분의 영광"(고후 3:8 - 고후 3:11), "여자는 남자의 영광"(고전 11:7), "땅에 속한 자의 영광"(고전 15:40), "해, 달, 별의 영광"(고전 15:41)을 나타낸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S.Aalen; G.Kit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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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redemption, 구조 deliverance, 해방 release. ajpoluvtrwsi"(629, 아폴뤼트로시스)
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폴뤼트로시스는 아폴뤼트로오(ajpolutrovw: 속전을 받고 놓아주다)에서 유래했으며, '몸값, 속전'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아폴뤼트로시스는 70인역본에서 해당하는 히브리어 없이 한번 나타난다. 단 4:34에서 이 명사는 느부갓세살왕이 정신이상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폴뤼트로시스는 다른 곳에서는 드물게 나타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10회 사용되었다. 아폴뤼트로시스는 '속전을 받고 자유롭게 함'을 의미하지만 또한 '해방'이라는 보다 일반적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바울의 서신에서 이 단어는 주로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죄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오직 그리스도에 기초한 현실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참조: 롬 3:25).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러나 이 단어는 미래적인 국면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구속의 완전 실현은 재림과 함께 올 것이기 때문이다.
눅 21:28에서 아폴뤼트로시스는 제자들이 기대를 가지고 주목해야 할 새 시대의 결정적인 종말론적 구속을 의미한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엡 1:14과 롬 8:23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 롬 8:23에서 이 단어는 특히 몸 '으로부터'(from)의 구속이 아닌 몸 '의'(of)도 구속, 즉 부활하신 주님을 닮은 몸의 변형을 뜻한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엡 1:14; 엡 4:30에서 아폴뤼트로시스는 완전한 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완전한 기업 중 제일 첫 화분(first instalment)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그러나 구속은 또한 그 자체를 현재에 소유하는 것이기도 하다(엡 1:7; 골 1:14). 구속은 하나님의 행동이신 용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용서는 지금 약속을 통해 향유되고 있으나, 마지막 날에 용서는 완전한 갱생(renewal)을 가져다 줄 것이다. 구속의 역사적 현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의 현실이며,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의 형제로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history)의 중간점이 되신다. 현재 우리의 구속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지만, 이 구속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살전 4:17)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화롭게 될 때(고전 15:49) 완성될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아폴뤼트로시스가 되셨다(고전 1:30). 그러므로 아폴뤼트로시스는 오직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만, 즉 그의 역사(work)를 힘 입고(갈 2:20), 그의 주권 영역 내에서만(골 1:13) 얻을 수 있다. 아폴뤼트로시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구속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혜의 선물이다(롬 3:24).
히 11:35에서, 아폴뤼트로시스는 '해방, 면제'(release)라는 일반 헬라어 의미를 지니지만, 히 9:15에서는 '사면, 용서' (remission)라는 의미를 지닌다.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실제적인 '속전'의 개념을 분명히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개념에 가장 가깝게 사용된 곳은 롬 3:24이다. 그러나 롬 3:25에 의하면 그 개념은 상업적이라기보다는 제의적이다. 만일 칭의(justification)가 롬 3:24에서 법적 개념이라면, 율법은 형벌 면제를 위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아폴뤼트로시스는 사실상 신약성경에서 핵심용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사용되지 않는 곳이 많으며, 바울에게 있어서도 디카이오쉬네(dikaiosuvnh, 1343) 같은 용어보다도 덜 중요하다. 이 단어는 다른 사실들이나 개념들에 의해 그 특별한 내용을 부여받는 보다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이 단어의 가장 중요한 용법은 눅 21:28; 엡 1:14; 엡 4:30; 롬 8:23에서와 같은 종말론적 용법이다.(참조: C. Brown; F. Buch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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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grace, 호의, 친절 favour. cavri"(5485, 카리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리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며, 카라(carav, 5479)는 이 복리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나 표현을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a)의 기본 의미에서 여러가지 의미가 파생되었으며, '은혜, 호의, 아름다움(미), 미덕, 사은, 감사, 사의,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속격과 함께 사용될 때, '~을 위하여, ~에 대한 고려를 해서'를 의미한다.
(d) 아이스킬루스는 신들의 호의에 카리스를 사용했다. 플라톤의 문헌들에서 카리스는 '좋은 선물, 좋은 뜻, 호의, 기쁨, 기쁘게 하는 것, 감사' 등의 뜻을 가진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90회 나오며 여러 히브리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중 헨이 가장 자주 나오며(61회), 대개 '호의, 좋아함, 의향, 기호', 드물게 '매력, 아름다움, 애교'를 의미한다(시 45:2). 그리고 이 단어는 라촌(만족스러운 것, 사람들 사이에서, 잠 10:32;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은총, 잠 11:27; 사람이 '하나님께 얻는 은총'), 헤세드(은총, 에 2:9; 에 2:17), 라함(우애감, 단 1:9; 동정, 창 43:14), 토브(선한 것, 잠 18:22), 게둘라(영예의 표시, 에 6:3)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15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누가의 기록.
① 카리스는 비종교적인 행 24:27; 행 25:3; 행 25:9 등에 나타나며, 좀 더 분명하게는 행 2:47; 행 4:33에 나타난다.
② 구약성경의 영향이 눅 1:30; 행 7:46; 행 7:10; 눅 2:40; 눅 2:52; 눅 6:32 이하의 종교적인 용법에서 나타난다.
③ 카리스는 눅 4:22; 행 14:3에서 복음의 특성을 설명해 준다.
이 단어는 행 6:8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묘사한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11:23에서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카리스의 지도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4:26; 행 15:40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
행 15:11은 권고 형식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 사상의 표현이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b) 바울 서신.
① 카리스는 바울의 중심 개념으로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롬 1:7; 살전 5:28 등).
② 바울에게 있어서는 카리스는 독특하게 구원 사건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카리스가 하나님의 속성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구체화되고(갈 2:21) 복음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은혜는 죄인들에게 나타났고(롬 3:23-24) 구원의 전부이며(고후 6:1) 모든 신자들이 받은 것이다(고전 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더불어 신자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롬 3:24 이하).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는 것이다(롬 4:16). 은혜는 칭의의 기반이며, 그것에서 나타나게 된다(롬 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이다(갈 5:2).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이다. 은혜는 충분하다(고전 1:29). 우리는 더 요구하거나 더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에는 확신적 요소가 들어있기는 하나 거짓 확신이 아니므로 자랑할만한 여지가 없다(고전 1:29; 참조: 갈 5:4).
③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은혜의 작용은 그 능력을 보여준다(롬 5:20-21). 은혜와 죄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신 자들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1:5-6). 은혜는 교회 안에서, 보기로 바울의 모금에서(고후 8장)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은혜의 목적은 모든 선행을 하는데 있으며(고후 9:8),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지만(고후 6:1), 자원하여 순종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할 뿐이다. 은혜는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이론이다. 바울은 롬 6:1에서 그런 단순한 생각을 책망하고 있다.
④ 바울의 사도직은 롬 1:23 등에서 특별한 은혜이다. 사도직이 바울에게 주어진 것과(롬 12:3),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은혜였다(고후 1:12). 교회를 방문하는 것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은혜였다(고후 1:15).
⑤ 골 1:6에서 카리스는 복음을 뜻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4:6에서 '매력'을 의미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엡 1:6-7에서 카리스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한다: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특히 엡 2:5 이하가 바울적 특색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3:2; 엡 3:7-8도 마찬가지다. 엡 4:7; 엡 4:29에서 "주다"라는 단어와 함께 쓰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이다.
⑥ 목회서신에서 카리스는 딤전 1:12에서 '감사'를 의미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후 2:1에서 직분의 '은혜'를 나타낸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딤후 1:9에서 은혜가 나타났다는 본문을 통해서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다(참조: 딛 2:11).
딛 3:4 이하에서 선하심이나 자비 등의 용어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행위와의 대조를 보는데 이번에는 세례(침례)를 받는데서 나타난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딛 3:5 이하).
딤전 1:14에서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대신 은혜(카리스)를 둔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c) 히 4:16에서 카리스와 엘레오스(e[leo", 1656: 자비, 동정, 불쌍히 여김)를 사용한다(참조: 딤전 1:2). 그리스도는 은혜를 구현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은혜를 받는다(히 7:25).
히 2:9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받으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10:29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또는 피)은 계약과 은혜를 결합하였다. 은혜와 제사에 쓰인 고기를 대조시키는 것은 히 13:9에서 계약에 대한 반대 명제를 언급한 것의 일부분이다.
히 12:15에서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d)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은 은혜로 이해되고 있다(벧전 2:19-20). 벧후 3:18은 카리스를 그노시스(지식)에 관련시킨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e) 요한의 기록.
카리스는 요이 1:2과 계 1:4; 계 22:21의 인사말에 나온다.
요 1:14; 요 1:16-17에서 은혜는 율법과 반대되고, 진리와 완전함에 결합되어 나타나는 로고스의 계시의 결과를 언급한다. 그럼으로써 이 단어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참조: H. -H. Esser; H. Conze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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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31..므두셀라에 담겨진 뜻
천지창조의 여섯 째 날에 땅의 티끌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어 (창2:7, 1:26-27) 아담이 우리의 형상대로 생령이 된 이후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누구일까요? 므두셀라, 969년..
므두셀라는 성경인물 중 969세로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왜 그리 오래 살았을까요? 최초의 인간인 아담도 아니고,(930세 창5:5).. 므두셀라를 낳은 후 무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365세에 하나님께서 데려간 에녹도 (창5:21-24) 아니었어요.
므두셀라는 대홍수의 심판 직전까지 살았는데 아마도 홍수 직전에 죽은 것 같습니다. (창5:27)
(역시 홍수가 닥친 후 그로 인해 죽었다면,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성품상 부자연스럽지요.) 여기에 하나님의 아주 깊은 뜻과 사랑이(섭리) 있습니다.
아담의 7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유1:14) ....이 구절로 보아 조그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마도 당시 에녹은 모든 사람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에녹의 예언은 성취 되었을까요?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창5:25)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창5:29)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600세라.(창7:6) ...여기서 187+182 +600 =969 로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홍수의 대심판이 정확하게 실현됩니다.
여기 <므두셀라>란 이름의 본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창을 든 사람,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뜻으로 당시 혈연 내지는 부족을 위해 불침번을 서야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 자가 죽게 되면, 종말이 오고 심판이 온다는 것을 경고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 간 에녹은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고 합니다.(히11:5) ...성경에 들려 올라 간 사람은 에녹, 엘리야(왕하2:11),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눅24:51,막16:19, 행1:9-11) 뿐입니다.
하나님은 왜 에녹과 300년간 동행하시고, 또 그의 아들 므두셀라를 왜 그리 오래 살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바로 제2의 천지창조라는 노아의 대홍수가 있기까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가득할지라도(창6:11) 타락한 세상사람들이 회개하여 돌아 오기를 그토록 바라시며 참고 또 참고 기다리셨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8-9, 딤전2:4, 시90:4)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란불로 경고하시고, 사랑으로 기다려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 (~12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90:10)
대홍수 전 여호와는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8,12)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면, 그 후에는 회개하여 주께로 돌이킬 길이 없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은 죄와 상관없이 어린 양 심판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히9:28, 마25:31-33, 계20장)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멸망시겼나니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니라."(눅17:27,30)...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시37:3)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사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하나님을 좀더 알고, 믿고 신뢰하여 따르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나의 이웃을 사랑하여 매일 거듭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 . (신6:4,레19:18, 요3:3,13:34 등)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십니다.(전12:14)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시37:3-5)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