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5장 ...출32 하단을 참고하라
[전가, 전이]의 교의 말씀을 권능의 영광으로 증거하사 [참되다]하시는 분은 [시공차원을 초월하여 전지전능,영존영생충만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412.내영혼의 그윽히깊은데서]..너는 마음의노래가있느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삶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아담과 그리스도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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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제5장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은 사람의 삶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때를 맞추어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이미 죽으셨습니다.
*7.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13.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죽음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15.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쳤습니다.
*16.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한 범죄에서는 심판이 뒤따라와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마는, 많은 범죄에서는 은혜가 뒤따라와서 무죄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17.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지배할 것이 아닙니까?
*18.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아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20.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로 사람을 지배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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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s 5 Amplified Bible
==Results of Justification
*1.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at is, acquitted of sin, declared blameless before God] by faith, [let us grasp the fact that] we have peace with God [and the joy of reconciliation with Him]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e Messiah, the Anointed).
*2. Through Him we also have access by faith into this [remarkable state of] grace in which we [firmly and safely and securely] stand. Let us rejoice in our [a]hope and the confident assurance of [experiencing and enjoying] the glory of [our great] God [the manifestation of His excellence and power].
*3. And not only this, but [with joy] let us exult in our sufferings and rejoice in our hardships, knowing that hardship (distress, pressure, trouble) produces patient endurance;
*4. and endurance, proven character (spiritual maturity); and proven character, hope and confident assurance [of eternal salvation].
*5. Such hope [in God’s promises] never disappoints us, because God’s love has been abundantly poured out within our hearts through the Holy Spirit who was given to us.
*6. While we were still helpless [powerless to provide for our salvation], at the right time Christ died [as a substitute] for the ungodly.
*7. Now it is an extraordinary thing for one to willingly give his life even for an upright man, though perhaps for a good man [one who is noble and selfless and worthy] someone might even dare to die.
*. But God clearly shows and proves His own love for us, by the fact that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9. Therefore, since we have now been justified [declared free of the guilt of sin] by His blood, [how much more certain is it that] we will be saved from the [b]wrath of God through Him.
*10. For if while we were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God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it is much more certain, having been reconciled, that we will be saved [from the consequences of sin] by His life [that is, we will be saved because Christ lives today].
*11. Not only that, but we also rejoice in God [rejoicing in His love and perfection]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and enjoy our reconciliation [with God].
*12. Therefore, just as sin came into the world through one man, and death through sin, so death spread to all people [no one being able to stop it or escape its power], because they all sinned.
*13. Sin was [committed] in the world before the Law [was given], but sin is not charged [against anyone] when there is no law [against it].
*14. Yet death ruled [over mankind] from Adam to Moses [the Lawgiver], even over those who had not sinned [c]as Adam did. Adam is a type of Him (Christ) who was to come [but in reverse—Adam brought destruction, Christ brought salvation].
*15. But the free gift [of God] is not like the trespass [because the gift of grace overwhelms the fall of man]. For if many died by one man’s trespass [Adam’s sin], much more [abundantly] did God’s grace and the gift [that comes] by the grace of the one Man, Jesus Christ, overflow to [benefit] the many.
*16. Nor is the gift [of grace] like that which came through the one who sinned. For on the one hand the judgment [following the sin] resulted from one trespass and brought condemnation, but on the other hand the free gift resulted from many trespasses and brought justification [the release from sin’s penalty for those who believe].
*17. For if by the trespass of the one (Adam), death reigned through the one (Adam), much more surely will those who receive the abundance of grace and the free gift of righteousness reign in [eternal] life through the One, Jesus Christ.
*18. So then as through one trespass [Adam’s sin] there resulted condemnation for all men, even so through one act of righteousness there resulted justification of life to [d]all men.
*19. For just as through one man’s disobedience [his failure to hear, his carelessness] the many were made sinners, 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and acceptable to God and brought into right standing with Him.
*20. But the Law came to increase and expand [the awareness of] the trespass [by defining and unmasking sin]. But where sin increased, [God’s remarkable, gracious gift of] grace [His unmerited favor] has surpassed it and increased all the more,
*21. so that, as sin reigned in death, so also grace would reign through righteousness which brings eternal lif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Footnotes
Romans 5:2 In the NT the word “hope” expresses a cherished desire along with the confident assurance of obtaining that which is longed for.
Romans 5:9 The “wrath of God,” with the definite article in Greek, anticipates the outpouring of God’s wrath on rebellious sinners in the tribulation period (cf Rev 6:16, 17).
Romans 5:14 Lit in the likeness of Adam’s transgression.
Romans 5:18 Salvation is available to all people who respond and place their personal trust in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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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s 5 New King James Version
==Faith Triumphs in Trouble
*1. Therefore, having been justified by faith, [a]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2. through whom also we have access by faith into this grace in which we stand, and rejoice in hope of the glory of God.
*3. And not only that, but we also glory in tribulations, knowing that tribulation produces [b]perseverance;
*4. and perseverance, [c]character; and character, hope.
*5. Now hope does not disappoint, because the love of God has been poured out in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who was given to us.
==Christ in Our Place
*6. For when we were still without strength, [d]in due time Christ died for the ungodly.
*7. For scarcely for a righteous man will one die; yet perhaps for a good man someone would even dare to die.
*8.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toward us, in that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9. Much more then, having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we shall be saved from wrath through Him.
*10. For if when we were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God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much more, having been reconciled, we shall be saved by His life.
*11. And not only that, but we also rejoice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the reconciliation.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12. Therefore, just as through one man sin entered the world, and death through sin, and thus death spread to all men, because all sinned—
*13. (For until the law sin was in the world, but sin is not imputed[=산입/전가하다=여겨처리하다] when there is no law.
*14. Nevertheless death reigned from Adam to Moses, even over those who had not sinned according to the likeness of the transgression of Adam, who is a type of Him who was to come.
*15. But the free gift is not like the [e]offense. For if by the one man’s offense many died, much more the grace of God and the gift by the grace of the one Man, Jesus Christ, abounded to many.
*16. And the gift is not like that which came through the one who sinned. For the judgment which came from one offense resulted in condemnation, but the free gift which came from many [f]offenses resulted in justification.
*17. For if by the one man’s [g]offense death reigned through the one, much more those who receive abundance of grace and of the gift of righteousness will reign in life through the One, Jesus Christ.)
*18. Therefore, as through [h]one man’s offense judgment came to all men, resulting in condemnation, even so through one[i] Man’s righteous act the free gift came to all men, resulting in justification of life.
*19. For as by one man’s disobedience many were made sinners, so also by one Man’s obedienc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20. Moreover the law entered that the offense might abound. But where sin abounded, grace abounded much more,
*21. so that as sin reigned in death, even so grace might reign through righteousness to eternal lif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Footnotes
Romans 5:1 Some ancient mss. let us have
Romans 5:3 endurance
Romans 5:4 approved character
Romans 5:6 at the right time
Romans 5:15 trespass or false step
Romans 5:16 trespasses
Romans 5:17 trespass
Romans 5:18 Or one trespass
Romans 5:18 Or one righteous 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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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개요)
사도는 자기의 요점인 이신칭의를 충분히 입증한 만큼 본장에서는 이 진리의 보다 세밀한 전개와 설명 그리고 그 적용을 펼치고 있다.
Ⅰ. 칭의의 열매(1-5).
Ⅱ. 칭의의 근원과 원천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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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의 열매(2)(롬 5:1-5)
칭의의 귀한 혜택과 특권을 우리 모두 열심을 가지고 우리의 것으로 삼아 의롭게 되고 거기서 오는 위로를 우리 것으로 삼고 거기서 오는 의무 또한 우리 것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생명나무의 열매는 더할 수 없이 지극히 귀한 것이다.
Ⅰ.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이 있다"(1절).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싸움을 부채질하는 가운데 소외감뿐 아니라 적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죄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계속 죄책아래 머무는 한 결단코 그와 평화로울 수 없으시다.
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으로서 주신 바, 구주 대속의 은혜를 믿는 자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칭의, 곧 그리스도 자신의 의가 죄책을 근본적으로 없애주고 평화의 길을 터 놓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선하심이 어찌나 큰지 이 장애물이 제거되는 순간 거기에는 평화가 곧바로 성립된다.
구주대속의 은혜를 붙드는, 바로 그 발휘되는(믿어 들어가는) 믿음만이 Q의 팔과 힘을 붙잡는 유일하게 허용된 수단이요, 하여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사 27:4, 5).
이 평화 속에는 적대감의 단순한 정지 상태 이상의 것이 담겨 있는 바 거기에는 우정과 사랑이 한량없이 담겨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호관계 원칙상, 하나님은 믿는 이 그 자신에게서도 그러하지만, 하나님 그분 자신에게도 믿는 이 자신은 철저한 원수이든가 절친한 친구이든가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에 "하나님의 벗"(약 2:23)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것도 아브라함만의 것은 아님을 눈여겨 보도록 하자 .. 보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친구"라 부르셨었다(요 15:13-15).
따라서 오로지 Q으로만 [진정한 의미에서 참살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도 Q을 자신의 친구로 삼는 일이며, 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할 일은 결단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곧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위대한 중보자요 화해자요 양자 모두에게 손을 쓰는 위대한 축복의 날의 사람인 그분을 통해서 말이다.
범죄 이전의 아담은 순수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고 동행함의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죄된 인간마다마다에게는 길-진리-생명-빛 구주JC를 통하지 않고서는 Q을 생각한다는 건 그 어떤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는 우리의 화평,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하시며, 측량 못할 극진한 사랑이신, 유일무이한 한량없이 다함없이 넘쳐나는 화평 - 화평의 하나님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엡 2:14). 즉, 평화를 가져오는 자일 뿐 아니라 이 평화의 본질이자 보유자이신 것이다(골 1:20).
Ⅱ.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2절).
이것은 더더욱 귀한 특권이다. 곧 화평뿐 아니라 은혜까지 받는 것이다.
1. 성도들의 행복한 상태.
이것은 은혜의 상태이니 곧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그대로 우리를 적시고, 점유-충만-변화-넘침-감상/음미-감동감격-감사-경배/찬양함의, 우리가 하나님과 참되게 일치하는 기쁨과 즐거워함의 바로 그러한 상태다.
하나님의 사랑과 형상을 가진 자란 [진실로 참되게] 바로 이 은혜의 상태에 머무는 사람이다.
이제 이 은혜에 [죄를 회개하고 구주 JC를 영접하고 믿는, 구주의 대속하는 보혈능력을 믿는] 우리가 접근(프로사고겐 - "안내받아")하게 되었으니 이 말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에게 원수"라는 말처럼 우리가 이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리 이 상태로 [지성소안으로 ..구주JC보혈을 힘입고 의지하여 그 보혈에 의해 이끌려...보혈은 구주의 손이다!!] 인도되었다는 걸 뜻한다.
우리 자력으로는 여기에 이를 수 없었으며 이 길에 놓인 장애물도 제거할 수 없었으나 손의 이끌림을 받은 것이다.
마치 눈먼 사람, 지체불구, 허약한 사람이 이끌리듯이, 또는 이방인이 특별히 제가를 얻어 임금을 알현하도록 안내되듯이 말이다.
"우리가……들어감을 얻었으며"(프로사고겐 에스케카멘)
여기서 그는 이미 자연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이끌려내진 자들을 두고 말하고 있다. 바울도 회개함 통해 이미 이 안내를 받아 가깝게 된 터였다.
바나바가 그를 "사도들에게" 소개시켜 주었으며(행 9:27) 그는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었다"(8절).
그러나 실지로 이 은혜에로 손을 끌고 안내해 간 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였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원저자요, 원 동인이고, 믿음은 이 접근의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어떠한 공로를 감안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우리가 믿고 의자하며 자신을 내어 맡기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힘을 얻는 것이다.
2. 성도들이 이 상태에 행복하게 계속 서 있음.
"서 있는" 우리가 바로 거기에, 있을 뿐 아니라 서 있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죄책을 벗어버린 상태("우리가 심판 중에 서 있다, 시 1:5)를 의미한다.
처벌받는 사형수처럼 허리를 구부리거나 땅에 엎드릴 필요가 없이 우리의 권위와 명예가 심판주앞에서 인정 확보된상태로, 당당하게 서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또 우리의 전진을 의미하는 바, 서 있는 동안 우리는 더욱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획득한 것처럼 드러누워 있어서는 안되며 그리스도를 수종드는 종처럼 서서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이 말은 또 우리의 인내와 끈기(오래참음과 견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확고하고 안전하게 서 있는 우리는 마치 원수의 세력에 압도되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병사들처럼 끈기를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속에 있다는 걸 암시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확고부동하게 서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늘의 법정은 높은 자리일수록 미끄러운 지상의 법정과 달라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이루실 줄"(빌 1:6)을 확신하는 가운데 겸손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
Ⅲ.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미리 바라봄으로써 소망/대망하고 기다리는 바..마침내 누림 그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
현재의 행복 이외에도 소망 중에 기다려지는 행복이 있다.
곧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성도들에게 옷 입혀 줄 영광이요 하나님을 뵈옵고 [그토록 대망하던 완전한 자유로 인해 기뻐 소리치며 환호하며 잔치자리에서처럼] 즐거워하는 것으로 일관되는 영광이다.
1. 현재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하는 자들, 오직 이 사람들만이 이후에 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중에 기다릴 수 있다.
은혜에 바탕을 둔 영광이 아니고서는 좋은 소망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은혜는 영광의 시작이요 영광의 담보이자 보증이다.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리라"(시 84:11)
2. 이후의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자야말로 현재 즐거워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하늘을 소망하는 자들이 그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하는 건 당연한 의무이기도 한다.
Ⅳ.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보라!! 하나님은 자녀들이 <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지고지선의 진복, 주하나님 누림의 복락을 참되게 경험하며 영생안에서 지속적으로 영원히 누리기를 원하신다!!..
... 바로 그것을 위해 궁리끝에 개인과 공동체에 새롭게 하심의 일환으로 환난-고통(고난)의 때를 지나가면서 깨닫고 회개하는 기회를 주시려 함인 바, 인자하심의 섭리 베푸심인 것을 깨닫도록 하자..
...3가지 형태의 고난이 있을 것이다... ^신앙과 무관하게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재난/전염병-기근-전쟁((이는 오히려 믿는 이의 성장성숙성결을 톡진하며, 중단없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는 복음전도의 폭발-확산-영적 후사의 증다를 불러 일으키실 계기로 삼으실 것인데, 파수꾼으로서의 중보기도가 필요함을 일깨우는 바, 그 사명 다 감당하자..)) ^ 개인적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도 ((처음엔 슬픔과 애통가운데 있게 되나, 이윽고 주께 묻고 그 뜻 깨달아 알고 회개-결단-동행함으로써 승리하게 하신다!... 자녀로서 인정하심이다...그 수준에 도달했다 여기심을 오히려 감사하라!)) 고난을 주시지만, 또는 ^의를 위한 고난도((박해/핍박 --기쁨과 즐거움, 담대함의 소망 충망!)) 있는 바, 결국 [이 두가지 모두,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이루게 한다]고난도 있음을 기억하자... 모든 고난중에서 그러해야 하나, 특히 ((개인적 슬픔과 애통의 때를 지나는)) 고난을 허락하심은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주님 대적하는 사단, 마귀의 주구된 세상 악인들처럼... 내어 버려 두심] 아니라 새롭게 일으키심의 참사랑의 발로임을 절대긍정-절대신뢰-절대기쁨의 믿음으로 껴안도록 하자, 그 어느때나 JC를 앙망하고 그 이름 부르며 이 때를 지나도록 하자]
우리의 환난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걸 막을 수 없다) 우리의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는 환난이 누릴 바 영광의 도를 더하게 더 크게 더 의미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고후 4:17). 꼭 기억하자..이 얼마나 엄청난 성도들의 행복인가.
"다만 이뿐 아니라" ...혹자는 그러한 평화, 그러한 은혜, 그러한 영광, 그리고 그러한 소망 중의 기쁨은 우리같이 (약간) 모자란 사람들이 자기 것이라 주장하기엔 너무 큰 것이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만 이뿐 아니라," 즐거워할 이유, 그리고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도다." ...특별히 [세상이 보기에는] 성도들의 행복에 정반대가 된다고도 볼 수 있는 바, 의를 위한 환난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우리의 행복은 이 환난중에서도 그의 심령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켜 하나님과 함께 하나됨으로 일치할 뿐 아니라 구주 믿는, 소망/앙망하는 믿음안에서 더욱 기뻐함으로 인도하심에 이끌려 이 환난에서 일어나고 넘어섬을 경험할 때 극락의 상태로 들어간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행 5:41).
문제가 이쯤 되자 사도는 그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도대체 뭣 때문에 우리가 환난을 자랑으로 여기는가? 왜 그런가?
환난은 여러 가지 연쇄반응을 일으킨 다음에 소망을 낳게 하는데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1.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환난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 환난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형언치 못할 강력한 은혜를 마침내 깨달아 알고, 체득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지체와 재질이 단련을 통해 발전되듯이 환난은 끝내 인내의 어떠함의 한계를 드러내시되, 연약-무력함을 절감하는, 그러나 주를 의뢰하는 우리를 친절과 온화/온유하심으로 점차로 점점 개선시켜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개선시켜 가신다.
마치 강철이 불로 더 단단해지듯이 환난 그 자체가 유효원인은 아니지만 그러한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의지하며 주를 보라, 마침내 믿는 이마다 보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대식가의 입에서 고기를, 강자의 입에서 당분을 어떻게 덜어내시는가를 보면 그 일의 궁극이 어떠할 지를 알 수 있다.
인내를 이루는 그것은 기쁨 그 자체다. 왜냐하면 인내는 환난이 끼치는 해보다는 더 많은 유익을 가져 오기 때문이다.
환난 그 자체는 [세인들에게는 대개] 안달을 가져 오지만 그러나 일단 그것이 성도들에게서 성화의 옷을 덧입을 때 그것은 인내를 낳는 법이다.
2. "인내는 연단을(체험을, 흠정역...하나님과 자신의 어떠하심에 대한 깨달아 앎의 체험 + 영원히 잊지못할, 반복되는 감사찬송, 기림 통해 날마다 그분을 빼어닮아감 ) "(4절)
인내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며 밤중에 주시는 노래를 체험하게 한다.
참고 견디는 자들이야말로 아픔이 증대함에 따라서 더불어 증대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더없이 크게 체험하게 된다.
곧 우리들 자신을 체험하게 하는 계기를 준다. 우리가 자신의 성실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은 환난을 통해서일 뿐이다.
환난을 가리켜 시험이라고도 부른다. 인내는 시인(휘포모네 도키멘)을 낳는다.
마치 시험을 통과한 자가 인정을 받듯이 말이다. 이처럼 욥의 경우에도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그가 아직도 "순전하고 정직하다"(욥 2:3)는 인정을 낳은 것이다.
3. "연단은 소망을"
이처럼 연단을 받아 황금같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를!!] 소망할 수 있게 격려를 받는다.
이 시험 또는 시련은 진정, 연단을 통해 이루실 바 [하나님의 사랑의 영의 부어지심 통한] 영광의 소망의 기초가 된다...더 나아가 좀 더 부연하자면, 기초가 됨과 동시에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수준과 그 예비하신 때에 이르렀다는] 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우리 소망의 지주다. 우리 자신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우리 성실성을 증거하듯이 말이다.
4. 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이 소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망보다 더한 아픔이 또 있을 수 없다.
어쩌면 약한 자들의 기대가 사라지면서 그들에게는 영원한 수치와 혼란이 일어날 것이지만 그러나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게 될 것이다"(잠 10:28; 시 22:5; 71:1 참조). 다시 말해 소망이 우리의 받든 고통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비록 우리가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받고 거리에 내버려진 진흙처럼 밟힘을 받아도" ...그러나 영광의 소망이 있기에 이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의 대의명분 곧 선하신 주님을 위한 것이요 좋은 소망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소를 받고 있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부은바 됨이니."
이 소망이 우릴 실망시키지 않을 것은 그것이 사랑의 영, 하나님의 위로의 영이신 성령으로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펼쳐 붓는 일은 복되신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곧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의식하는 것이요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을 당신에게로 이끄시는 걸 의식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의 위대한 효과를 살펴 보자. 이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특별 은혜와 이에 대한 즐거운 향유다.
이 사랑은 마치 향기로운 기름처럼 영혼을 향기롭게 하는 것이요 단비로 영혼이 해갈하며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모든 위로와 성결 그리고 양자에 있어서의 인내의 근원은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 펼쳐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를 묶어 매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고후 5:14). 이처럼 우리는 사랑의 결속으로 이끌려 내어 거기에 붙잡혀 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그에 대한 소망이나 그를 위한 우리의 고난을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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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롬 5:6-21)
사도가 여기서 증언하는 바, 주 예수의 죽음에 깔려 있는 칭의의 기초와 원천을 추적하여 따라가 보자,
그 강물의 줄기를 따라 계속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기에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죽음이 있다.
이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흘러 넘치는 것은 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강물 덕분이다. 따라서 믿는 이 모두에게 부어진 Q 사랑을 확대하여 참되게 진술하고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1. 십자가에 달리신 그가 위해 죽은 사람들(6-8절).
2. 그의 죽음의 귀한 열매(9-11절).
3. 첫째 아담의 죄와 죽음, 그리고 둘째 아담의 의와 생명사이의 병행성(12-21절)
##I.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돌아가실 때 우리가 처해 있던 상황.
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곧 우리는 슬픈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여기서 헤어날 길이 전혀 없었던,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요 회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대로 이러한 때에 "기약대로(이미 약속하신 바로 그대로)" 우리의 구원이 온 것이다.
Q께서 도우시고 구원하는 시기는 구원 받을 자들이 소리지를 힘조차 없고, 스스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과 연약, 비참의 최저상태에 이르러 죽기만 기다리는 시점, [한편, 세상에는 마치 Q이 얼굴을 가리고 셰시거나, 아예 안계신 것처럼 죄악이 극도로 관영하여 극악무도해지고 참되게 믿는 자들을 조롱-비아냥-박해-약탈-멸시-천대함으로써 멸절당할 위협을 매일 느끼는 바로 그 때] 완전히 힘이 빠져 있을 때(we were without strength, 롬 5:6)이니 그래야 구주 Q의 능력과 은혜는 더욱 더 완전/온전/순전하게 확실히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신 32:36.....*36.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For the LORD will vindicate His people, And will have compassion on His servants; When He sees that [their] strength is gone, And there is none [remaining,] bond or free. ).
하나님의 조력의 방법은 [데드 리프트 시점, 곧 마지막 관문에야] 드러난다.
2.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died for ungodly)"
곧 속수무책인 피조물이요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 천박하고 무용할 뿐 아니라 악하기 짝이 없는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귀한 은총을 받기에는 더더구나 무가치한 자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경건치 않은 만큼, 이들은 자기들을 위해 죽어 줄 사람이, 죄를 대속하고 의를 끌어들여 줄 사람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것을 그는 전무후무한 사랑의 예라고 설명하고 있다(7, 8절).
여기에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우리들의 생각이나 길과는 다르다는 점이 드러난다(요 15:13, 14 절 참조...*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Greater love has no man)"
(1) "의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쉽지 않고"
무고한 자, 부당하게 처벌 받는 자를 위해 죽어 주려는 자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사람을 보고 다들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겠지만 그러나 목숨을 걸고 위험을 안으려는 자는 없다.
(2) 설혹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있을 수 있다.
단지 의로운 사람보다 나은 유용한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스스로 선하다는 자들이 남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는 일도 없지만 쓸모가 있는 자들은 대개 사랑을 받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생명으로 바꾸려 드는"자들이 곧 이들의 보석이 되어 몸을 몸으로 때우려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보면 꽤 선한 사람 곧 유용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에게도 자기 목숨을 위해 목을 내 놓은 자들까지 있었던 것이다(16:4).
그러나 이렇게 하려는 자도 쉽진 않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모험에 불과할 것이라는 얘기다.
(3)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8절).
의롭지도 선하지도 않은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뿐 아니라 죄투성이요 험상 굳기 짝이 없는가 하면 없어져 봤자 아까울 것 없는 인물들이요 마땅히 죽어야 할 사형범들이기에 오히려 죽는 게 하나님의 공의를 풍성하게 드러낼 그러한 인물들을 위해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여기서 통상 유대인들의 "의인,""자비한 자" 그리고 "악인"(사 57:1)하는 식의 구분법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본다.
이제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자기 사랑을 입증하고 증거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확대하여 설명하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그의 사랑을 크게 드러내고 증대시켰으니 이론의 여지가 없게 할 뿐 아니라 경탄과 칭송의 대상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제 내 피조물들은 내가 저들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될 터이니 전례 없는 사랑의 예를 보여 주겠노라" 하는 식이다.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추천하다, 흠정역). ...마치 상인들이 자기들의 상품을 전시함 통해 그걸 추천하듯이 말이다.
당신의 사랑을 이처럼 추천하신 이유는 성령을 통해 우리 모두의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골고루 펼쳐 부으시려는 뜻에서이다.
더없이 열렬하고 호감이 가는 방향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하는 말은 우리가 언제까지고 죄인으로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는 얘기다. 어디에선가 변화가 일어나야 마땅했다.
그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우리 죄 가운데서가 아니라 우리 죄로부터 [완전히]구원하려는 뜻에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위해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아직 죄인이었다.
(4) 아니 "우리는 원수였다"(10절).
범법자일 뿐 아니라 반역자요 배신자로서 정부에 무장 도발을 단행한 자들이었다.
더없이 극악하고 추악한 범법자가 아닐 수 없다.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원수일 뿐 아니라 적개심 그 자체다(8:7; 골 1:21).
이 적개심은 상호적인 것으로 하나님 편에서는 죄인을 증오하고 죄인 편에서는 하나님을 증오하는 식이다(슥 11:8).
그런데도 이런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셔야만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비가 아닐 수 없으며 역리가 아닐 수 없다. 전에 없는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사랑을 흠모해하고 칭송하는 일을 우리는 영원까지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확증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당신의 천국 법률조항에 우리더러 원수를 사랑하라는 항목을 넣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닐 수 없다.
Ⅱ. 그의 죽음의 귀한 열매.
1. 칭의와 화해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첫 열매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고(9절)…… 그 아들의 죽음심으로 말미암아……화목하게 되었다(10절)." ::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죄가 면제되고 죄인이 의인으로 받아들여지며 분쟁은 끝나고 적개심도 말살되었으며 죄악도 도말되고 이제 남은 것은 영원한 의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성취되었다. 곧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모든 걸 성취하셨기에 우리는 [염려말라, 오직HS께서 끝까지 견고히 믿은 바를 성취하시나니...<그리스도께서 필요한 모든 갓을 성취하셨다, 어직 믿기만 하라!> 바로 그것을 깨달아 알고 영혼의 마음에 받아들여 내것 삼아 확고히 붙드는 바로 그 ]믿는 순간 실제로 칭의와 화목의 상태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 우리의 칭의가 그리스도의 보혈에 기인한다는 이유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 9:22).
"피는 생명이다." 따라서 속죄에는 피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속죄 제물에 있어서 피뿌리는 일이야말로 그 제사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었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레 17:11).
2. 따라서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따른다.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젊),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생명으로, 흠정역)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는 것이 제거됨에 따라서 이 구원이 따르는 건 필연이다.
아니, 우리가 원수였을 적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화목케 하셨다면 우리가 의롭게 되고 화목케 된 지금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건 "더욱 더" 확실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원수를 친구로 삼는 더 큰 일을 해 내신 분께서 보다 더 작은 일 곧 친구된 우리를 친구로서 대하시고 친절하게 대하는 건 더 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는 10절에서도 다시 한 번 "더욱 더"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기초를 만들기 위해 그렇게까지 깊숙히 판 그분은 분명히 이 기초 위에 건물을 짓고 마실 것이다.
"우리가 진노하심에서" 곧 지옥과 저주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지옥불이란 하나님의 진노요 "다가 올 진노"(살전 1:10)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 큰 날에 신자들의 최종적인 칭의와 사면은 여기서 말하는 진노에서의 구원이니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역사의 완성이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화목되었으며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생명[살으심]은 육신에 있을 때의 생명이 아니라 죽으신 후에 다시 얻은 부활 생명 곧 하늘의 생명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14:9 참조).
"그가 전에는 죽어 있었으나 이제는 살아 계시도다"(계 1:18).
우리의 화목은 낮추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은 높혀진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뤄졌다.
죽어 가신 예수께서 죄를 만족시키고 적개심을 없애며 우리를 구원 가능케 함으로써 그 기초를 놓으셨으니 이렇게 해서 경계의 벽이 무너지고 속량이 성취되며 권리 박탈이 거꾸로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완성한 것은 [그 자신이 영원생명이로되 죄인대신 죽었던 바, 부활하사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심이라"(히 7:25).
당신의 말씀과 영으로 마침내 우리를 유효하게 부르시며 변화시키고 하나님에게 화목케 하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를 상대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고 성취하여 존귀케 된 상태에서의 그리스도다(4:25; 8:34 참조).
죽으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유산을 남겨 주신 유언자요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이것을 지불하는 유언집행자이시다.
이제 문제는 간단하다. 우리의 구원을 사시려고 자기 전부를 내 주신 분이 그것을 적용하는 수고를 마다하실 리가 없다.
3. 이 모든 것은 또 더 나은 특권(further privilege)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Our joy in God"을 산출한다(11절).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And not only this, but we also exult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the reconciliation.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재앙의 날에 즐거움과 소망이다"(렘 17:17).
"우리는 화목케 되어 진노에서 구원 받은 자들이다."
"죄악이 우리의 파멸일 수 없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거기에는 계속적인 은총의 물결이 있다. 우리가 그저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그것도 승승장구하게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들어가는 것이다.
그저 [소망의, 안전한]항구에 들어서는 게 아니라 모든 돛을 다 올리고 당당하게(!!!..환호하는 천군천사들, 한없는 기쁨으로 맞아주시는 하나님...승리자의 영광을 만끽함으로 누리면서, 그토록 갈망하던 주님 품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위로와 소망의 머릿돌이자 대들보요, 알파와 오메가며, 우리의 "구원일 뿐 아니라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노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고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달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이루신 바 속량(=화목)의 덕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복음 시대에 곧 이 세상에서조차도 "화목을 얻고 누리게"(속량, 흠정역) 되었기 떄문이다.
이 속량은 율법 시대에 여러 가지 모양의 제사로 상징되어 오던 바요 하늘 나라에서 가질 행복의 담보물이기도 하다.
참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량을 받는다.(받아들여 음미/감상하며실지로 누린다) 이 속량을 얻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만족에 입각해서 칭의 가운데 하나님에게 실제로 화목케 되는 것이다.
"속량을 얻는다"는 말은 다음 두 가지 뜻이 있다.
(1) 이것은 이 속량을 기쁘게 받아들임, 곧 전존재로 환영하고 영원한 지혜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보혈을 통해 죄많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데 사용한 그 방법을 찬성하며 동의하는 것이요 또 복음의 방법에 의해 복음적인 면에서 기꺼이 구원을 받아들여 그안에 거하며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2)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갖는 기쁨의 근원과 기초인 이 속량의 위로를 실지로 받아들임(누림!! ...이것이 극락의 찬송과 기림이다!!...너는 마음에 노래가 있느냐...내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가락이..주 내소망은주더알기..사랑의주예수님이 내오른손붙잡고...사랑해요목소리높여..)이다. 따라서 이렇게 될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요. 이 "속량을 받아들이는"것이 된다. 그 속량을 정말, 실지로 개인적 최고의 영광과 "자랑으로 여기는 것"(카우코메노이, 5:11)이다.
하나님은 이미 이 속량을 받아들이셨다(마 3:17; 17:5; 28:2). 문제는 우리만 받아들이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Ⅲ. 첫째 아담에 의한 죄와 죽음이 둘째 아담에 의한 의와 생명으로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여기서 사도가 펴고 있는 진리를 분명하게 설명하는데 유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천거하고 참된 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더욱 유효하다.
왜냐하면 이 대조에서 우리는 우리의 타락과 회복에 들어있는 연관성 곧 유사성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첫째 아담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었을 때의 힘보다 둘째 아담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을 때의 힘이 훨씬 더 강력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1. 그의 강론의 기초로 깔려 있는 일반적인 진리 -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14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하여 그리스도를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란 말을 쓰고 있다(고전 15:45, 22 절 참조).
아담은 이런 점에서 곧 그가 하나님과 본인 사이의 언약이라는 계약에 있어서와 이 계약의 최종 단계까지 대표자이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상대로 일처리를 하셨으며 아담은 공공의 아버지로서 곧 모든 자기 후손의 원인, 근원 및 대표로서 행동하였다.
따라서 그가 그 상태에서 곧 우리를 위한 대리인으로서 행한 것은 우리는 그와 함께 행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에게 오는 영향은 그와 함께 우리에게도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대표자로서 곧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머리로서 행하셨으며 하나님을 상대로 이들을 위해 곧 그들의 아버지, 원인, 근원 및 대표로서 일처리를 하신 것이다. 곧 죽으시고 살으시고 장막 속으로 들어가신 모든 일이 이들을 대표로 하신 일이다.
아담이 실패하였을 때 우리는 그와 함께 실패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을 때 그는 우리를 위해 대표로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투포스 투 멜론토스) 곧 아담의 약속 불이행을 보수하러 오시는 자의 표상인 것이다.
2. 이 대조의 상세한 면
(1) 어떻게 대표자로서의 아담이 자기 모든 후손에게 죄와 죽음을 전달하게 되었는가(12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들어왔다." 온 세상이 지금 죄와 죽음의 홍수에 밀려 다니며 각종 죄악과 재앙 천지다.
이 근원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면 본성의 타락이라는 걸 알 수 있고 그게 어느 사이에 들어왔는가를 살펴보면 아담의 첫째 죄악 때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가 다름 아닌 우리의 뿌리와 근원으로서의 최초 인간이었다(설령 그 이전에 인간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은 무죄하였을 것이다).
① 그에 의해서 "죄가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아름답다 하고 선언하신 그 때(창 1:31) 세상에는 죄가 없었다.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그때부터 비로소 죄가 등장한다.
전에는 사탄을 위시한 많은 천사들이 그들의 충성을 내팽개치고 그들의 최초 영역을 떠났을 때 이 천사들의 세계에 죄가 들어갔었지만, 이 인간 세상에는 아담이 죄 짓기 전까지만 해도 죄의 자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아담의 범죄사건으로, 죄는 이제 죽이고 파괴하는 원수와 훔치고 약탈해 가는 도둑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정말 끔찍한 입장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난 후에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되었으며 전반적으로 본성이 타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때문에"가 아니라 "그 안에서"(in whom...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읽는게 좋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고전 1:22)라는 말이 있듯이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죄가 아담에 의해서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은 그와 함께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세상 법률 어디를 보나 대표자의 행위는 곧 그가 대표하는 집단에게 돌아가는 것이요 한 집단이 하는 행위는 그 구성원 각자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아담은 대표자로서 행동하였다. 곧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과 섭리 그리고 그것도 자연적인 필연성에 입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기타 피조물이 자신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자연 법칙을 세우셨기 떄문이다.
따라서 공동 저수지처럼 아담 안에 모든 인간 본성이 저장되어 있었으며 그에게서부터 모든 물이 물길을 따라 그의 후손에게 전달되게 되어 오고 있다.
왜냐하면 온 인류는 "한 혈통"(행 17:26)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서고 넘어짐에 따라 이 본성이 드러나 보여지기 마련인데 그가 죄를 지어 넘어지는 순간 이 본성은 죄악스럽고 타락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②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사망은 죄의 삯이기 때문이다. 죄가 일단 끝나는 곳에는 죽음이 따르기 마련이다.
물론 죄가 들어올 때는 죽음도 함께 들어왔다. 죽음이 여기에 제시된 이유는 죄가 수반하는 모든 불행을 대표하는 의미에서다.
곧 현세적이거나 영원한 죽음이 다 그것이다. 만약에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가 있었다(창 2:17).
③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마치 형사범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듯이 모든 인간에게 "내려졌다"(디엘덴, passed through).
이것은 마치 전염병이 온 시가지를 휩쓸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예외가 없는 보편적인 운명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내려지기 마련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재앙의 예를 낱낱이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14절).
사도 바울은 여기서 사망을 막강한 군주로서 묘사하고 있으니 그의 왕권은 그지없이 절대적이요 보편적이며 지속적인 것이다.
그 홀에서 벗어나는 자 그 누구인가. 그것은 이 지상의 그 어느 권력, 권위, 지배보다도 더 오래 오래 살아 남을 왕권이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그 어떤 지배도 받지 않던 벨리알의 자손들도 이것만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죄와 죽음을 가져다 준 아담의 덕이다.
그 사람 좋은 분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을 보면서 우리는 "오 아담이여! 그대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하고 물어볼 만도 하다.
이점을 더욱 명백히 하기 위해서 그는 죄가 모세 율법과 함께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 "이전에도 세상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 얘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만이 유일한 인생의 규범은 아닌 셈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도 규범이 있었는데 이게 어겨졌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율법에 불순종한다 해서 저주받는 게 아니듯이 거기에 순종한다 해서 의롭게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율법 이전에 이 세상에 죄가 있었다는 걸 증거하는 것으로는 가인의 살인, 옛 세상의 배도, 및 소돔의 죄악을 들 수 있겠다.
여기서 그의 의도하는 바는 곧 이전에도 [불문법으로서] 율법이 있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원죄란 하나님의 율법[불문법]에 대한 불일치요 실제적인 죄란 율법[성문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는 이런 저런 율법의 지배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증거로 그는 "사망이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왕노릇하였다"는(14절) 점을 얘기하고 있다.
죄가 사망의 보좌를 구축해 놓지 않았던들 사망이 그처럼 판칠 수 없었다는 건 확실한 얘기다.
이 말은 율법 이전에도 죄가 있었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요 그것은 다름 아닌 원죄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죄는 하나도 짓지 않은 그러한 사람들 곧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해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담처럼 살아보지도 못한 자들, 즉 실제적으로 죄도 지어 보지 못하고 죽어간 영아들에게도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기에 사망이 그들을 상대로 왕노릇하였다는 얘기다.
이 사망의 왕노릇이란 말은 어린 아이들까지 휩쓸어 앗아가 홍수나 소돔의 멸망같이 과격하고 엄청난 심판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적으로는 범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죄를 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위배되기 때문에 어린 것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참혹하게 병에 걸려 죽거나 재앙을 받아 죽거나 기타 이유로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원죄의 위대한 증거다.
(2) 이것과 비슷하게 어떻게 대표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영적 후손인 모든 참 신자들에게 의와 생명을 전달하게 되었는가.
이와 함께 사도는 여기에 들어 있는 유사성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그리스께서 가져오는 은혜와 사랑은 아담이 가져온 죄와 진노를 "넘어서" "더욱 더 강력하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① 유사성. 이점은 18, 19절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첫째, "한 사람의 범죄와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고 그 결가ㅗ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 정죄받게 되었다."
1. 아담의 죄는 불순종, 그것도 간단하고 분명한 명령에의 불순종이었다.
그것도 단련의 성격을 띈 명령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그가 행한 일이 악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일이[불순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체로서는 작은 죄 같아 보이지만 이것이 다른 여러 죄악에로의 문을 열었다는 데 있다.((이것을 조심하라, 또 조심하고 경각심 가지고 JC이름으로 물리치라!!))
2. 죄의 해독성은 너무도 강력하고 광범위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담의 죄의 죄책이 지금까지 그렇게도 도도히 그리고 면면히 흘러왔을 리 없다.
3.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
여기서 "많은"이란 범죄한 한 사람과 대조적으로 쓰인 말이다.
"죄인으로 만들어졌다"(카테스타데산, 5:19)는 말은 우리가 사법적인 행위에 의해서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다.
율법의 정론에 따라 우리가 죄인으로 제쳐지고 만 것이다.
4.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자들 모두를 정죄하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 죄의 확정 판결을 받았으니 정죄받는게 당연하다.
한 가정에 내려지는 권리박탈처럼 온 인류가 그러한 형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하늘 법정에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심판이 내려져 있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판정이 번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심판을 받아 몰락할 수밖에 없다.
둘째, "마찬가지로 '한 사람'(곧 이 한 사람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시다)의 의와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되고" 그 결과 "값없이 주시는 은사가 모두에게 임하게 되었다."
이 진리가 얼마나 중요하던지 사도가 반복하고 또 반복해가면서 강조하는 것을 엿볼수 있어야겠다.
1. 그리스도의 의의 특성과 그 도입 경위.
그것은 그의 순종에 의한 것이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가 멸망하게 하였듯이 둘쨰 아담의 순종은 우리를 구원한다. 곧 그분이 모든 의를 충족시키고 자신의 영혼을 우리의 죄에 대한 제물로 삼는 중보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다.
이 율법에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한 의를 이루셨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우리가 그의 은총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2. 그 열매.
(1) "값없이 주시는 은사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
곧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제공되었다는 얘기다.
성취된 구원은 "일반 구원"이다. 초청은 전반적이요 그 제공도 거저다. 누구든 오는 사람은 이 생명의 물을 거져 마시는 것이다.
이 거저 주신 은사는 모든 신자에게 곧 그들이 믿는 순간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는 것"이다.
칭의는 죽음을 면제케할 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자격을 구비케 한다.
(2)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다."
이 많은 사람이란 한 사람에 대조되는 말로서 온 세상에 흩어져 있지만 한 데로 모으면 무지막지하게 많은 은혜에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이" 마치 특허증에 따른 것마냥 의롭다고 "여겨질 것이다"(카타스타데손타이, 5:19). 아담에 의한 우리의 멸망과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회복이라는 반명제는 이 정도로 해 두자.
② 그리스도께서 가져 오는 은혜와 사랑이 아담이 가져 오는 죄와 진노를 훨씬 능가한다는 점. 이것을 그는 15-17절에서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부요함을 확대하여 보여주며 아담의 죄가 저지른 크나큰 상처를 보고서 엄청난 치유가 가능할까 하고 실망할지도 모를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의 표현은 좀 까다로워 보이지만 다음 몇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1. 만약 죄책과 진노가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다면 은혜와 사랑은 더욱 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전가된 죄책을 정죄하는 것보다는 전가된 의를 보고 구원하기를 즐겨하시는 분인 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넘쳤으리라."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모든 속성 가운데 특별히 그의 영광이요 그 근원(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해 가지는 그의 은총)은 바로 이 은혜다.
따라서 이 선물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2. 지상의 사람의 죄에 그만한 능력과 효과가 있어서 우리를 정죄할 정도라면 하늘로부터 오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는 더욱 더 큰 능력과 효과를 발휘하는 가운데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하고도 남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그 "한 사람"은 곧 예수 그리스도다.
물론 아담이 뿌리는 독은 예수 그리스도가 뿌리는 해독제만큼 강력할 수 없으니 곧 후자가 더욱 강력할 수밖에 없다.
3. 우리가 정죄를 받게 된 것은 아담의 단 한 가지 범죄뿐이다.
"심판은 한 사람(하나, 흠정역) 곧 한 범죄를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다"(엑스 헤노스 에이스 카타크리마)(16,17절 참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을"뿐이다.
은혜와 의의 물결은 죄책의 물결보다 더욱 더 깊고 넓다. 왜냐하면 이 의는 한 범죄의 죄책을 없앨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범죄 곧 모두의 죄책을 도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범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4.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이 사망의 왕노릇에 종지부가 찍혀질 뿐 아니라 신자들이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혜택을 받는 것이다(17절).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서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면 특허장을 가질 뿐 아니라 존귀의 특허권을 가지며 우리의 쇠고랑으로부터 풀려날 뿐 아니라 요셉처럼 버금 수레에 올라타 하나님에게 왕과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곧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특혜를 받는 것이다(계 1:5, 6; 5:9, 10 참조).
우리는 JC와 그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것보다 더 풍성하고 위대한 특권에의 자격을 부여 받고 거기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붕대가 상처보다 훨씬 넓으며 곪아 들어가는 상처보다 치유가 더욱 더 강력한 것이다.
Ⅳ. 마지막 두 절에서 그는 "그러면 율법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반론(갈 3:19)을 예상한 듯하다.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다."
죄 그 자체를 더욱 더 풍성하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계명을 잡고 늘어질 소질이 다분하다.
그 죄의 넘치는 죄악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돋보기는 희미한 점들을 발견할 뿐이지 그것들이 원인이 될 수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마치 어두운 방에 더 밝은 빛이 들어오면 전에 보이지 않던 먼지와 찌꺼기가 밝히 드러나듯이 계명이 세상에 들어오자, 죄가 소생한 것이다.
마치 이 햇빛의 들어옴은 치료에 필요한 상처를 탐색하는 것과 같다.
이 "범죄," 아니 "그 범죄"(토 파라프토마), 아담의 그 죄, 우리에게 미치는 그 영향의 확대, 우리 속에 있는 타락의 영향, 이 모든 것은 율법이 들어오자마자 이미 드러나 보이던 그 범죄를 더욱 더 풍성하게 보여 주는 것들이다.
2. "은혜가 더욱 더 넘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곧 율법의 각종 공포로 말미암아 복음의 위로를 그만큼 더 감미롭게 하려는 뜻에서다.
죄악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풍성하게 판을 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개종한 자들에게는 은혜가 더욱 더 넘쳐 그 많은 죄를 면제하고 그 많은 타락의 고개를 숙이게 하지 않았던가? 원수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복자의 영광은 그만큼 더 위대한 것이다.
이 은혜의 풍성함을 21절에서 그는 묘사하고 있다. 독재자와 압제자의 지배는 공정하고 후덕한 왕의 계승을 촉발하는 것에 불과하듯이 죄의 통치는 은혜의 통치를 가져올 뿐이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죽음의 통치는 사망에 이르고, 흠정역) 이것은 정말 무자비한 피의 지배였다.
그러나 "은혜의 지배는" 생명 곧 "영생"에 이르며 이것은, 우리의 칭의를 위해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성화를 위해 심어진 "의로 말미암은"것이다.
그리고 이 칭의와 성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당신의 교회의 선지자요 제사장이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효험을 통해서 가능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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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하신 하나님, JC의 대표적 십자가구속사건을 통해 일어난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
[[로마서 5:12-21]]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5:12-21)
그리스도의 대표적 구속과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교의를 알아봅니다.
전가(轉嫁...impute)란 말은 “누구의 탓으로 돌리다, 혹은 무엇의 탓으로 돌리다, 어떤 사람의 죄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운다.”는 뜻을 가진 법률용어입니다.
“죄의 전가”란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을 말하며 “의의 전가”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나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 내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칭의(稱義)입니다. 칭의가 무엇이냐?
인간이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칭의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지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담의 원죄를 지고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전가 결과로 야기된 확대파급결과입니다. 그러나 제2의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내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 의인이 됩니다.
1.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로마서 5:12,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한 한 사람은 인류의 시조 아담입니다. 아담의 죄가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담의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 ‘에덴’에 아름다운 동산을 창설하시고 “.......동산의 모든 과일은 네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16-17).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을 신학용어로 행위계약(行爲契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행위는 딱 한 가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만 안 먹으면 하나님과 맺은 행위계약을 완전히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범죄자가 되었고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유전되고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은 너무도 쉽고 간단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만 안 먹으면 됩니다. 에덴동산에는 맛있는 실과들이 수없이 많은데 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먹습니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라,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죄는 사소한 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쉬운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더 큰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신학용어로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원죄란 근본이 되는 죄로 모든 죄의 시작과 뿌리가 되는 죄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원죄에 유전돼 죄에 오염된 상태로 태어난 인간이 살아가면서 짓는 죄를 자생죄(自生罪)라고 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세상에 죄가 없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인간의 고통과 질병과 사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유전되어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죄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죄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죄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죄악의 유혹을 극복하고 신앙과 인생에 승리합니다. 아담의 불순종과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轉嫁)되어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범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우리들은 아담을 보지도 못했고 아담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아담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죗값으로 죽어야 할까요?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죄의 전가의 교리(敎理)”를 이해하려면 대표성(代表性)의 원리를 생각하면 됩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자동으로 하나님과 아담의 계약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대한민국 대통령이나 외무장관이 공적인 직무로 외국과 어떤 조약을 체결하면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은 자동으로 그 조약에 참여한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조약이 체결된 후에 태어났다고 조약의 의무에서 예외가 되지는 않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조약이 체결되고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체결된 조약이지만 조약의 의무가 상속되는 것입니다. 죄의 전가의 원리도 그와 같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자동으로 아담의 행위와 죄과를 승계 받는 것입니다.
전가(轉嫁)의 교리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전가의 첫 번째 단계는 죄가 전가되는 단계입니다.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어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죄와 심판이 함께 전가됩니다.
전가의 두 번째 단계는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단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의 죗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는 것입니다.
전가의 세 번째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단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속죄의 역사적 사실을 믿으면 우리의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예수님의 의와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돼 인간은 아담 안에서 다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깨끗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의인이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로마서 5:14, 하반절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자의 머리인 아담은 장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죄가 나에게 전가되어 내가 죄인이 되었다는 전가의 교리를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결정과 중요한 일들은 다 내 뜻과 상관없이 결정됩니다. 내가 김씨 성을 갖고 싶어서 김씨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나의 의사에 따라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조상과 우리 부모를 따라 나는 김씨로 태어났고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또한 부모와 민족과 국가도 내 뜻에 의해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정됐지만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며 거부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죄가 나에게 전가돼 내가 죄인이 된 것도 움직이거나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며 운명인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어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의의 전가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가 우리에게 옮겨지는 것을 의의 전가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가 어떻게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가되느냐? 구약시대 제사의 원리가 전가의 교리를 상징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 인간은 죗값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의식입니다. 제사에는 제물이 드려집니다. 제사에서 가장 많이 드려지는 제물이 양(羊)입니다. 제사에서 죄인이 제물로 드린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참회의 기도를 하면 죄가 양에게 옮겨가고 죄인의 죄는 깨끗하게 없어집니다. 그리고 양은 죄인의 죄를 대신 지고 죗값으로 피를 흘리고 죽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지만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제물로 드린 양입니다. 내 죄가 양에게 전가되어 양이 대신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전가의 교리는 구약시대의 제사에서 나왔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29).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속죄의 제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인간은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 여러분 중에 “예수님 한 분의 죽음으로 어떻게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단번에 사해질 수 있느냐?”고 궁금해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바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도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속죄로 그를 믿는 모든 인간의 죄가 사해지고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방법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제정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구원은 진리이며 역사적 사실입니다.
아담의 죄의 전가가 내 뜻과 상관없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는 것도 내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속죄의 은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로마서 5:15-21,에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속죄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로운 행위로 모든 인간이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고 의인이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지만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의인으로 설 수 있다는 승리의 외침입니다.
그리고 본문 로마서 5:20,의 말씀은 더욱 은혜롭고 복된 말씀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은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죄를 더 지으라는 말씀도 아니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은 아무리 큰 죄도 용서하고 남는다는 뜻입니다.
교부(敎父, 사도들의 뒤를 이은 초대교회 지도자)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는 우리가 빚진 이상을 갚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능력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는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고 무한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다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소멸되었고 우리들은 천국을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로 인간에게 사망과 고통이 임했습니다. 죄는 인간의 사망과 불행과 고통의 원흉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두려워하고 죄를 멀리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어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의 원리는 대표성의 원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죄에서 구원받고 의인이 된 것입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과 진리 가운데 행하셔서 하나님의 축복받고 신앙과 인생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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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에서 전가(Imputation)와 전이(Impartation)는 복음과 성령의 능력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개념들이다.
==마틴 루터와 칼뱅의 신학을 요약하면 죄없으신 Q구주의 의로우심의 전가이다.
즉, 신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되는데, 예수님과 연합할 때 (즉, 언약이 맺어질 때), 예수님의 의는 믿는 신자에게, 신자의 죄는 예수님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인데 이는 그가 완전한 예수 안에서 완전한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께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신 전가받으심과 동시에 자신의 의로우심을 모든 믿는이에게 넘겨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 통해]이루신 의가 [구주를 믿은] 그 사람에게 전가되었다고 보아주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율법을 범한 죄값을 치러야 하는데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그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여 치른 것이 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대속이다.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죄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개신교 신학에서 (어쩌면, 부정적 측면이 나타날까) 너무 조심하며 신중히 다루면서 때로는 거의 언급하지 않으려 하는 개념은 전이(Impartation)의 개념이다...이는 특히 웨슬리의 감리교 교의(doctrine)로서 드러나는 특징인데, 이 단어 사용하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있는 바,,이것은 개신교의 전이(impartation...성령께서 무한하신 그분과 그분의 것(은사)을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심)와 가톨릭의 주입(infusedness..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점차 그리스도화 되어감) 개념의 적용과 정의면에서의 혼동을 우려하는데서 유래된다.
이는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고 견지하는 바, 곧 사람이 태어나 영세를 받으면 거듭나게 되고 그 후 조건적 행위를 통해 구주의 의가 점진적으로 믿는 이 심령에 전이/주입된다는[영세, 구주 명령 순종 + 고백성사와 성례를 통해 점진적으로 전이/주입된다고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주도된 가르침으로서 그 바탕은 성경이 아니라 사람에서 나온 오도되고 첨삭된, 사람의 가르침이다!!]가르침으로 인해서, 개신교 교회에서는 그 [주입[이란 개념과 비슷한 [전이]란 용어의 허용 자체가 상당한 오류에 빠질 위험을 초래한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톨릭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함 통해 성령이 믿는 이의 영혼에 오셔서 내주하시는 참생명이요 진정한 주인으로서 완성해 가시는 일을 [JC의 명령 순종+고백성사와 성례 통해 Q의 은혜와 의로움이 점진적으로 육체에까지 도달.(토마스 아퀴나스)함의]영세라는 예식으로 대치시킴으로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거슬러 왔으며,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의 자선,(겉보기에 의로운) 행위로 인한 구원 가능성까지도 일면 인정해 왔던 바, 이러한 죄는 분명히 성령 모독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개신교는 성령이 복음과 함께 일으키는 [거룩케 하시는 성령이 주도하시는 바, 내적 형상(혹은 외적 모양에서조차 흘러나오는)의 거룩한 변화 그리스도와 하나된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랑하기에 감동, 감화, 자원하는 기쁨안에서 더욱더 견고해 지는 믿음의 순종, 온유와 겸손 가운데 품어주고 기다려 줌의 용서와 내어주는 사랑 등.. 그리스도와의 일치 통한 내적-외적 성화와 평강 , 복음과 함께 나타나는 구원 능력의 분배로서]전이의 영적 진실이요 사실적 교의를 상대적으로 등한시 함으로 인하여 개신교 성도들은 상당한 정도로 손해를 보고 있는 듯 하다. ...법적인 확신을 누리는 반면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즉, 전가로 인한 즐거움을 누리지만 생명의 성령의 [약동과 역동을 살아내면서 공급하는]법을 놓치고 있는 등,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실상, 엄밀하게 말하자면 전이는 각인의 영원한 참생명으로서 내주하사 믿는이의 주인으로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곧 예수님의 영원 생명이 믿는 우리 영혼에게 임하여 내주하여 실제로 살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신학 용어이다. 따라서 거듭난 자는 예수님의 생명, 즉 영생을 소유한 자임을 말한다.
전이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이 핵심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라 하겠다.
따라서 신자는 완전하게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이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나아가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 이 생명이 없다면 신자의 삶은 오직 위선 밖에 없으며 세상 사람들과 본질상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녔기 때문에 성령으로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전이는 성도들마다 실제적인 삶에서 증거된다.
원수를 사랑하는 면에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대속을 하셨음을 깊게 깨달으며 더욱 주를 사랑하며 순종하게 된다.
전가와 전이는 '십자가의 도'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전가를 알게 되며, 전가를 깨달은 자들은 자신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며 그 생명을 나타내게 된다. 즉,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명의 속성이 나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오직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음을 통해 내가 죽고 그리스도를 살게 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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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쓴뿌리(주님사랑안에 하나됨의 신뢰로 머무름...그것을 흔드는 모든 분노-불평-시기-염려-의심, 그 느낌과 역동조차)를 주앞에서 토설-처리하고 뒤로 던져버리라(오직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주님, 여호와가 누군지 다시 마음에 새기고 신뢰하는 주님의 사랑-평강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취하라!!)...
오직, 이 땅을 걷는 네길을 예비하신 주님의 모든 공급-인도-훈육에 마음 열고 주만 의지하고 네 길을 맡겨드리며 이끄시는 주님 따라 하나되어 동행하라
진실로 그분이 네 누림-거함-기업-소유요, 너 또한 그분에게 있어서 그러함을 알라((JC의 어떠하심-아버지와 하나되심-아버지를 누림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도록 하라)) .
완전하신 Q의 사랑의 충만함, 오래참으심따라 형제에 대하여 서로 관용하며 교통하며 세우며 덮어주라....선행과 덕의 실행 통해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서로 격려하라..... 모든 악은 모양조차 버리라.....피차 사랑의 빚외에는 아무빚도 지지말라
@@fret [살아계신 창조주 구주하나님의 어떠하심-기념이름-풍성부요충만권능-주권적 선하심/인자하심/진실하심을(성의진선의 초월적 사랑) 의지/발견/추구하고 그 가운데 그분을 누리며 살아감, 곧 지고지선의 진복으로 인도하는 과정/경륜적 섭리인 고난/역경/환난의 진정한/적극/긍정적 영적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믿어 붙들지 못함, 곧 부정하며 (롬5:3-5) [그분을 신뢰=확신/의지/의뢰/기도/기대/기다림의 붙들어 앙망함 없이] 자기나 자녀들을 세인과 비교하며 조바심내다(= 세상신 몰록/밀곰에게 자녀를 잡아 제사드림의 기복적 우상숭배임),.조마조마/초조/안달/의심-불평/질시/분노하다-부질없이 애쓰며 [쓸데없는]근심염려걱정으로 스스로 괴롭히다...
...[주의친절한팔에405]나는갈길모르니375.주와같이길가는것430.주날개밑419.내맘이낙심되며306.어려운일당할때543.내맘에한노래있어410.내모든시험337.내모든소원452.나의영원하신기업435.나의생명되신주380.....주님품에새생활하네.나의부르심.오하나님받으소서왕께.네마음에근심있느냐.보소서주님나의마음을.내가주인삼은.내맘속에있는참된이평화는.내게강같은평화.나는시냇가에..주여진실하게하소서.사랑의주님이.사랑의주예수님이.내눈여소서.내안에사는이.주내소망은.나의입술의모든말과.내손을주께높이...주님의성령.은혜로만.보혈을지나.오늘집을나서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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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정리 --전가된 의, 분배전이된 의 >> 주입된 의]]
Impartation이란 ....나누어 준다는 단어 의미는 "주다, 전달하다, 부여하다 "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전달은 무언가를 주거나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에서 보자면 영적 은사가( 롬 1:11 ), 지혜가( 잠언 29:15 ), 복음의 메시지가( 살전 2:8 ); 물질적 재물이 나누어집니다( 에베소서 4:28 ; 디모데전서 6:18 ). 일부 번역들은 share란 단어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Impartation of righteousness 의의 분배라는 말 자체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믿는 이들에게 주신 바 된 의를 "전가된 의"로 정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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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uted righteousness....[책임을/권리를]전가/귀속시키다,(~의 탓(덕분)으로 돌리다 = [의로] 여겨주시다...) 결국, 좀 더 들어가 곰곰이 생각해 보자면 여기서의 [의]는 근원적[의]로서 구주 예수그리스도, 곧 구주의 의 그자체이기에...아버지 품안에 하나되어 안겨 계신 그리스도 안에 [내게 오라] 하신 그리스도 안으로 믿음으로 기쁨과 당당함으로 안겨 들어가 (아버지까지 포함한) 그리스도, 그분의 모든 것을 향유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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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부여함/수여함impartation이 아니고 전가함imputedness입니다. 다른 사람의 계정에 대한 접근권한과 함께 사용권한(그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 경험하며 관련된 권리의 전권) 사용을 허락함의 신임/신용장까지 받은 그리스도의 대리대사로 위임함입니다..
의의 전가는 로마서 4:3 과 같은 구절에서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참조, 갈라디아서 3:6 ; 로마서 4:22 ).
아브라함이 받은 “신용” 또는 “계산”은 전가였습니다. 따라서 전가는 정당화[=당당함. 의롭게 됨]의 행위와 당연히 연결됩니다 .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 그리스도의 의가 그 죄인의 계정으로 전가됩니다. Double[mutual] imputedness,이중 전가 교리는 동시에 죄인의 죄는 그리스도의 책임으로 전가된다고 말합니다. (3중전가를 말하기도 합니다.. 아담-->믿는 이-->그리스도-->머리이신 그리스도, 그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믿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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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로마 카톨릭은 주로 Infused righteousness, 주입된 의에 대해 주장하며 전가된 의나 분배된 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주입된 의 개념을 의의 분배 impartation of righteousness 또는 의의 전가 imputedness of roghteousness와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가톨릭 신학에서 주입된 의 infused righteousness는 순종, 고백, 참회 및 기타 성사를 통해 신자에게 점진적으로 온다[곧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하 행위의 공로 통해서 온다] 함이기에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입된 의로움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으며, 이는 칭의가 행위의 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온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크게 모순됩니다( 로마서 3:28 ).
===사람이 태어나 영세를 받으면 거듭나게 되고 그 후 조건적 순종 행위를 통해 구주의 의가 점진적으로 믿는 이 심령에 주입된다는[영세, 구주 명령 순종 + 고백성사와 성례를 통해 점진적으로 주입된다고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주도된 성경이 아니라 사람에서 나온 오도되고 첨삭된, 사람의 가르침이다!!] ===
***[개인적 생각] (( 믿는 이의 실행적 삶 측면에서, 관상기도의 측면 만을 떼어 놓고 본다면)) 분별 포인트는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습득" 이란 말을 "전가됨...이것은 공로없이 거저 주셔서 얻은 것이기에.."으로 이해한다면, 사실 동일한 동전의 양면으로 볼 수도 있겠다 느껴집니다만...묵상/관상(Contemplation)기도의 방법론에서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능동적 : 말씀 붙들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전존재로 받아들여 영적 지성을 사용하며 말씀을 누림으로 그리스도를 누림)과 주입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오직 하나됨의 연습을 위해 그리스도께 몰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누림)을 말하고 있는데 저로서는 이는 오직 믿는 이에게 이미 전가된 바 바로 그분 그리스도를 누림안으로 들어가는 방법론의 두 측면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Imputed righteousness 부여된 의 는 sanctification성화를 설명하기 위해 웨슬리와 감리교 서클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누림에 있어서는] imputedness와 impartation두가지가 함께 작동하지만 Impartation분배는 imputedness전가와 별개의 단계로 간주됩니다. 웨슬리의 신학에 따르면, Christ' righteouness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imputed 전가된 다음, through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our hearts, empowering us to live in a holy manner,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 심령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역사하심 통해 (그로 인해 거룩한 방식으로 살도록 권능을 받고), God's righteousness하나님의 의가 imparted분배됨으로써 신적성품에 참여함(impartation, part-taking), 곧 거룩하게 되기 시작(be sanctified)하며, 더 나아가 웨슬리 전통의 일부에 따르면, 이렇게 imparted righteousness분배된 의로 인해 sinless perfection죄 없는 완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imparted rightepusness 분배/전이된 의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과 신적성품에 참여함에 대한 성경적 지지는 빌3:10, 고린도후서 3:18 에서 나옵니다., “18 And we all, with unveiled face, beholding the glory of the Lord, are being transformed into the same image from one degree of glory to another. For this comes from the Lord who is the Spirit. : (개역개정)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벧후1:4에서는 더 나아가 devine nature신적성품에 참여(참예)함에 대해 말합니다. ( 벧후 1:4 4 by which he has granted to us his precious and very great promises, so that through them you may becom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having escaped from the corruption that is in the world because of sinful desire. (개역개정)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즉, imputed righteousness 전가된 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standing)을 바꾸고, imparted righteousness 분배된 의는 육신으로 사는(육체가운데 사는..even as we live in the flesh.) 우리의 본성(nature)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육신과 싸우는 새 성품(로마서 7:14-25)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imparted righteousness 부여하신 의로움의 결과입니다.
(롬 7:14-25....*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최종적 분석 보고에서 성경은 imputed righteousness전가된 의는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만 imparted righteousness 분배된 의의 교리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love righteousness 의를 사랑하고 produces good works 선행을 하는 receive a new nature 새 성품을 받습니다. 그러나 receive righteousness 의를 받는다 말하는 것 자체는 [그리스도를 받는다 함이기에] 요점을 (요점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지나쳐서) 확장시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KJV) 15. But sanctify the Lord God in your hearts: //(NASB)15. but sanctify Christ as Lord in your he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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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하다impute, 여기다reckon, 생각/간주/평가/계산하다 account to be put to one's account -- (전권 행사가 가능하게 됨)
-- logivzomai(3049, 로기조마이)
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로기조마이(Aristoph., Thu. 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계산하다'(상업적으로), '판단하다'(법적 용어로), '간주하다, 평가하다, 지불을 청구하다',
(b) '숙고하다, 신중히 생각하다, 결론 짓다, 결정하다, ∼라고 생각하다'.
2. 70인역본의 용법
로기조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대부분 하샵(생각하다, 간주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로기조마이는 '계산하다'(레 27:23), '∼라고 생각하다, 간주하다'(창 31:15; 레 25:31; 신 2:11, 신 2:20; 신학적으로, 창 15:6; 레 7:18; 레 17:4; 민 18:27, 민 18:30). 악을 '궁리하다'(시 52:2; 시 140:2; 미 2:1; 슥 8:17; 겔 11:2; 겔 38:10), 죄를 '전가하는 것'(시 32:2), 제의적으로 '전가하는 것'(하나님의 뜻)(레 7:18; 레 17:4) 등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로기조마이는 신약성경에서 40회 중, 34회가 바울서신에 나온다. 바울은 이 단어를 자기의 목적에 맞춰 사용하지만, 그 가지고 있는 모든 어감을 따른다.
(a) 로기조마이는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생각에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① 바울은 생각의 거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생각에서 생각의 갱신을 요구한다.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후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고후 10: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
고후 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② 그러나 이제 로기조마이는 하나님의 실재에 의해 확립된 사건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③ 따라서 로기조마이는 '믿음의 판단'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롬 3:28; 롬 6:11; 롬 8:18; 롬 14:14; 빌 3:13).
모든 의문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롬 3:28에서 어떻게 십자가의 못 박힘의 결과가 인간의 의가 되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8:18에서 우리가 어떻게 현재의 고난을 장래의 영광에 비추어 생각하는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에서 로기조마이의 기준은 그것 밖에 있고 그것 이상이다. 구원하는 사건으로서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사실이며, 생각하는 행위는 이 사실로 반드시 지향되어야 한다. 따라서 로기조마이는 순종적이다.
④ 신앙의 판단의 표시나 증거(mark)는 무조건 타당한 것이다. 바울이 사도로서의 자기의 위치에 관하여 판단할 때: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고후 11:5), 바울이 자기의 완전의 상태에 관하여 판단할 때: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 3:13), 여하한 반대도 공동체에서 일어날 수 없다.
롬 14:14에 의하면 연약한 자의 믿음은 그가 우상들에 드린 식물을 취하면 무너진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이 식물이 부정하다는 판단은 그에게 있어서 그의 위반이 그가 스스로 흔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속박하는 실체이다. 따라서 로기조마이 안에 있는 믿음의 실체에 대한 순종적 이해는 생명이 이 실체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제시한다(취하게 한다).
롬 6:11의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는 명령은 행위가 이 판단과 일치 또는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b) 로기조마이는 사도들의 사역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일반적 의미로 그의 사역에 대해 언급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평가하면서 로기조마이를 보다 넓은 의미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획하고, 결정하는, 사도들의 활동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고전 13:11과 고후 10:2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판단은 행동의 참여를 포함한다.
(c) 로기조마이는 공동체 생활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명상을 위한 덕목을 제시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단순한 생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낳은 실천적 사고를 요구한다. 공동체는 어떻게 선을 행할 것인가를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고전 13:5에서 '사랑은 …생각한다'(아카페 로기제타이)와 같은 표현은 헬라인들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본질적인 것이다. 이 유형의 사고는 어떤 원리를 따른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사건(참조: 빌 2:5이하)이나 그리스도의 병기인 사도의 모범을 따라 사는 것이다(참조: 빌 4:9). 그리스도께서 표준 요소이라면 로기제스타이는 살아가는 능력이다. 이것은 제멋대로 목적없이 억지로 행동하도록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고 공동체의 교화에서 성취된다(참조: 고전 12장과 14장).
(d) 로기조마이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① 믿음을 의로 여기는 것(약 2:23; 롬 4:3이하; 롬 4:9이하; 롬 4:22이하; 갈 3:6). 이 전가는 구원과 믿음간의 관계를 확립하고 공로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창 15:6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의로 여기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지 믿음이 본질적으로 그런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특히 랍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격적 의지에서 판단을 제거하고 그것을 일반적인 인정(recognition)으로 바꾸는 경향이 발전하였다. 헬라어 로기조마이는 이러한 경향에 들어맞았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전가의 개념을 포괄하면서도 한편으로 그와 아울러 믿음 또한 공로임을 암시하는 인정의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롬 4:3 이하에서 믿음을 의로 간주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여기서 전제가 되는 것은, 믿음이 왜 의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하는 바로 그 질문은 그 답변을 십자가의 은총에서 찾지 않는다면 거짓된 질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의 핵심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판단과 자비에 맡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이 사는 것이다. 의는 십자가에 근거하여 이제 참 실재가 되며 따라서 이러한 전가(칭의)는 허구가 아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평가(혹은 판단)의 실재도 인간을 위한 행동의 규범 역할을 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로기제스타이(여기신 것)에 의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갈라디아에서도 믿음을 의로 간주하는 동시에(갈 3:6), 이 칭의를 성령을 받은 것과 동등시한다(참조: 갈 3:2이하)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칭의를 지지하기 위해 창 15:6을 인용하고 또 본 절의 참된 의미를 회복시키고, 로기제스다이의 헬라적 의미에 의해 지지받던 랍비적 경향(70인역본)을 바로 잡으며, 디카이운(의롭다하는 것)과 로기제스다이를 서로 보충하는 용어들로 제시하여 심판관이신 하나님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디카이운은 하나님을 심판자로 로기제스다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제시하는 것이다).
약 2:23은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창세기의 인용문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아브라함의 적극적인 순종 자세를 나타내는데에 사용하였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② 믿음을 인정하시는 것의 이면은 죄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롬 4:7-롬 4:8; 고후 5:19; 시 32:2). 하나님의 공의에 은총이 밀고 들어가는 것은 헬라인들에게는 언어학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불쾌한 것이었다. 십자가가 결합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우리'에게'(to) 돌리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for)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기제스다이는 또 다시 은혜의 판단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창 15:6과 시 32:2 사이에 연결하는 점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믿음을 인정하시는 것은 분명히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 그 이상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J.Eichler; H.W.Heid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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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의 마음에 전가 된 의는 곧 그리스도 자체이시며, 바로 그분 그리스도를 참된 주님으로서 존숭, 순종하며 거룩하게 높여드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이신 HS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이들에게 자신을 부으사 믿는 이 상호간에 역사하는 성령안의 교통/교제/분배/나눔 통한 성화를 온전히 이루심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에 참여하게 됨]] .... [벧후3:15] (개정개역)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표준새번역)*15.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높이며..//(우리말성경) *15. 오직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KJV) *15. But sanctify the Lord God in your hearts: ..//(NASB) *15. but sanctify Christ as Lord in your hear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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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uted righteousness는 믿는 이 단독자 각사람마다에 대해 자신을 온통 부어주시는 구주, imparted righteousness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서 함께 이루는 바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주도하심따라 이루시는 성화로서, 신적성품[거룩함]에의 참여를 위함 =성결과 의로 섬기게 하사려는 뜻 이루심 == 이를 위해 Lectio divina -contemplation(이냐시오로욜라 방식,acquired/active or 예수기도/향심기도 방식 infused or passive)으로 그리스도 누림위해 [무시로] 주안으로 들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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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7-12]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impartation 분배/나눔/나누어 줌(share) = participation,참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그 지체로서) = fellowshipip 교제 : 이 안에 세례, 성례, 예배, 집회 등 모든 영역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누림 --성령의 주도하심따라 [신적 성품에 참여함]의 성화를 이룸 = koinwniva(2842, 코이노니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코이노니아(Plind. 이래)는 코이노노스(koinwnov", 2844: 동료, 참여자)에서 유래했으며,
(a) '참여' participation,
(b) '나누어줌' impartation.,
(c) '친교, 교제' fellowship.
(d) '자선품이나 기부금'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목적 속격(나누는 것), 주격 속격(나누는 사람 또는 물건), 여격(수령자)과 함께 사용되거나 전치사 및 목적 속격(참여하고 있는 자)과 함께 사용되었다.
·인간 생활-나눔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면 사업, 법률관계, 결혼 등, 또한 헬라인에게 있어서 친교의 최고의 표현이 우정이다. 시민권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의 보존과 실로 세계(cosmos)의 보존은 정치적, 세계적 나눔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의적 언어-원시 사상에 의하면 먹고 마심에서 신비한 신적 능력을 내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개념은 제의적인 축제나 심지어 성적인 결합을 통하여 신과 연합한다는 헬라 개념에도 잔존해 있다. 철학은 이 개념을 순화한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신과의 교제는 친교의 최고 형태이다. 반면에 완전한 우주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스토아 철학은 인간 사이의 친교와 신과의 모든 인류의 친교를 강조한다. 신비주의는 친교를 합일(union)로 대체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코이노니아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레 6:2에서 '담보'라는 의미로, 지혜서 8:18에서 물질적 참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코이노니아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3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울 서신에 사용되었다.
1. 코이노니아는 '함께 나누는 것'을 나타낸다.
(a) ① 고전 1:9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친교하도록 초청받았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이런 친교에는 신비적 합일이 없으니 이 친교는 그들의 생명과 그의 생명(그리스도의)과 동일시하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이 친교는 현재 얻게 된다 할지라도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참조: 살전 4:17).
② 빌 1:5에 보면 이 친교에는 복음에의 참여가 수반되며,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참조: 고전 9:23),
③ 믿음의 교제가 수반된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몬 1:6).
(b) 고전 10:16 이하에서 코이노니아는 주의 만찬에서 일어나는 교제에 대한 매우 중요한 표현에 사용되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바울은 주의 만찬에서 가지게 되는 친교에 대해 코이노니아를 매우 의미심장하게 사용하였다. 기본적으로 완전히 믿음 안에서 알게된 그리스도에게 참예하는 일은 어떠한 교리와도 연관되지 않은 채 성례전에서, 고양된 형태로 이루어지고 경험된다.
먼저 바울은 주의 만찬을 유대교와 이교의 제사 의식과 구별한다. 고대의 일반적인 신앙에 따를 때 제의적 식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 신과 함께 하는 자들이 됨은 자명한다. 따라서 유대의 희생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에 참예하는 자"(고전 10:18)가 된다. "제단"은 분명 하나님을 가리켜 사용된 것이다.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보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교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귀신과 교제하는 자"(고전 10:20)들임이 분명하다. 유추적으로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동류들인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생기는 진정한 교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의 의무 가운데 하나인 제의적 식사를 피해야만 한다는 매우 당연한 종교적 결론을 수반한다(고전 10:21).
따라서 바울은 주의 만찬의 성격을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교제의 견지에서 설명한다. 즉 그의 몸과 피에 참예하는 것(코이노니아)이라고 한다(고전 10:16). 유대의 제단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는 것이듯이 떡과 포도주(잔)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방편이다. 떡과 잔에 참예함은 하늘의 그리스도와 연합(함께함)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높임받으신 그리스도는 몸과 피를 가진 지상의 역사상의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이다. 코이노니아는 내적 합일(연합)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이 의식에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합일은 그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얻으신 용서의 축복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임이 자명하다.
제의적 식사에서 이러한 합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바울은 귀신과의 교제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 유사한 친교 방식의 성격이 아니라 친교의 사실 그 자체이다.
고전 10:17절에 삽입된 진술에서 바울은 희생 제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의 만찬에서도 참여자들 사이에 친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한 개의 떡으로 표현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공통적인 연합에서 생겨난다.
(c)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롬 6:8; 롬 8:17; 롬 6:6; 딤후 2:12; 고후 7:3; 골 2:12-골 2:13; 엡 2:5-엡 2:6). 여기에는 두가지 측면의 교제가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의 수치(굴욕)와의 친교이며, 둘째는 그의 높임 받으심과의 친교이다. 바울은 그의 생애와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고난에 동참한다(빌 3:10; 참조: 골 1:24). 그러나 그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영광에도 참여하기를 소망한다(빌 3:10; 참조: 롬 8:17).
(d) 성령에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다.
①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오신다. 우리가 여기서 가지는 것은 성령에 참여이다.
②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여기서 '성령의 교제'(코이노니아 프뉴마토스)는 '긍휼이나 자비'와 같이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과 같이 성령 안에서 친교(교제)이며, 성령이 실행하는 친교(교제)가 아니다.
(f) 요일 1:3; 요일 1:6; 요일 1:7,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에서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 및 하나님과의 신비적 결합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의 교제를 언급한다.
이 사귐은 여기서 시작하여 이후에 완성될 동거함(참조: 요일 3:2; 요일 3:24; 요일 4:13)에 의하여 성부 및 성자와의 친교로 시작한다(요일 1:3; 요일 1:6). 이 사귐은 신자들의 가족적 교제를 가져온다(요일 1:3).
그 근거는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사도의 설교와 빛 안에서의 행함과 모든 죄를 씻기시는 예수님의 피에 있다. 따라서 이것은 성육신을 부정하고 죄의 특성을 잘못 전달하는 분파적인 자만심을 배격한다.
2. 코이노니아는 '어떤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나타낸다.
(a) 행 2:42에서 코이노니아는 독립적인 의미의 예배 생활의 필수 부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코이노니아는 '참여, 함께 나눔(나누어줌), 교제(친교)'라는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피"(빌 2:1)와 복음 사역에서의 협동(빌 1:5),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고후 8:4; 고후 9:13) 등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코이노니아의 정확한 의미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것은 행 2:44에 있는 재산의 분배를, 혹은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의 한 마음을, 혹은 친교적 의미에 있어서의 주의 만찬(고전 10:16)을, 혹은 공동 식사에 참여해서 나누는 교제, 혹은 아가페(애찬)를 말할 수도 있다.
코이노니아는 새롭고 독립적인 어떤 것을 나타낸다. 곧 성령에 의해 전달된 일치와 연합을 나타낸다. 개인은 이 공동체에 의해 완전한 후원을 받았다.
(b) 고후 9:13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져온 기부금, 곧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은 교회들의 교제를 나타내주는 확실한 표현이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기부는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결합하는 하나의 복음으로부터 발생되었고 바울이 롬 15:26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은 영적이며 물질적인 주고 받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는 실제적인 궁핍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도들 중에는 가난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인 은사들"의 시냇물은 "세상의 선물들"의 마주쳐 흐르는 시냇물로 응답되었다.
초대 교회의 이 모범은 단절된 채로 남게 되었다. 이 모범을 모방하는 것은 요구되지도 않았고 행해지지도 않았다. 사유 재산의 보전은 모든 교회들에서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가져온 것이지 새로운 사회 질서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1895년의 복음 사회 협의회(Evangelical Social Conference)에서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 Naumann)은 '종교의 관점에서 경제 체계에 이르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고 말했고, 반면에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는 기독교에 독립적인 혁명적 요소가 있으나 혁명을 선동할만한 뜻은 없다고 지적하였다(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1, 1931, 3969).
(c) 바울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과 관련하여 이 의미를 사용한다. 이 모금은 두 부류의 기독교인 간의 친교를 보여주는 분명한 형태이다(갈 2:9; 롬 15:26). 이 모금은 신실하고(고후 8:4) 마음에서 우러난 나눔(고후 9:13)으로 섬기는 교제의 의의를 지닌다. 히 13:16에서도 적극적인 나눔을 뜻한다. (참조: J. Schattenmann; F. Hauck;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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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형통(worldly prosperity)아닌, 현실과 주변상황을 초월한 참된 형통, 영적 형통[Spiritual, True, Real Prosperity = 화평(peace..샬롬) = 번영(투브, 지고지선, 하나되신 주와 동행]의 의미 ( 창 39:1-6 )...임마누엘 JC 하나님 말씀따라 상호거함-상호소유됨-상호누림-연합한 하나됨으로 살며 은혜를 주시며 가르치시며 인도-보호하시는 성령과 동행하며 이 땅을 걷기###
"[마28:20...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롬5:1-11....*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환난은 가난, 질병, 근심-고민-어려움 등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피하고 싶은 모든 종류의 영육간의 고난이라 할 수 있다.
사도바울은 구체적으로 그 범위들을 더 깊이 확장해서, 환난-곤고-핍박(박해)-기근-적신(벌거벗음)-위험-칼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바로 이 역설을 선포하고 있다.
....[보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하늘 유업을 이을 상속자들이 <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신 바로 그 지고지선의 진복, 주하나님 누림의 복락을 참되게 경험하며 영생안에서 지속적으로 영원히 누리기를 원하신다!!..
... 바로 그것을 위해 궁리끝에 그리스도를 믿고 붙드는 개인과 공동체에 새롭게 하심의 일환으로 환난-고통(고난)의 때를 [임마누엘 안에서] 지나가면서 깨닫고 회개하여 실지로 하나님의 참생명으로 사는 참살이의 기회를 주시려 함이요, 인자하심의 섭리 베푸심인 것이 아닐까...
...아마도 3가지 형태의 고난이 있게 될 것이다... @세상사람들조차 누구나 당하는, 신앙과 무관하게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재난/전염병-기근-전쟁((이는 오히려 믿는 이의 성장성숙성결을 촉진하며, 중단없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는 복음전도의 폭발-확산-영적 후사의 증다를 불러 일으키실 계기로 삼으실 것인데, 파수꾼으로서의 중보기도가 필요함을 일깨우는 바, 그 사명 다 감당하자..)) @개인적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고난이다 ((처음엔 슬픔과 애통가운데 있게 되나, 이윽고 주께 묻고 그 뜻 깨달아 알고 회개-결단-동행함으로써 승리하게 하신다!... 자녀로서 인정하심이다...그 수준에 도달했다 여기심을 오히려 감사하라!)) 또 하나는 @의를 위한 고난<이른 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박해/핍박 --기쁨과 즐거움, 담대함의 소망 충만함에 도달케 하시기 위함!))
결국 [이 세 종류의 고난은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함, 곧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이루게 할 것]임을 기억하고 명심하자... 모든 고난중에서 그러해야 하나, 특히 ((개인적 슬픔과 애통의 때를 지나는)) 고난을 허락하심은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주님 대적하는 사단, 마귀의 주구된 세상 악인들처럼... 내어 버려 두심] 아니라 새롭게 일으키심의 참사랑의 발로임을 절대긍정-절대신뢰-절대기쁨의 믿음으로 껴안도록 하자, 그 어느때나 JC를 앙망하고 그 이름 부르며 이 때를 지나도록 하자]
보라, 이제 노예로 전락한 요셉은 애굽에서 시위대장 바로의 집으로 노예로 들어간다. 그러나,...주인 보디발이 요셉을 그의 범사를 살핀후에 요셉을 자기집에 있는 모든것을 요셉에게 맡기는 가정총무로 삼는다....본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채색옷을 입힐만큼 여유있는 집안의 아들의 신분이었다. 남 부럽지 않은 경제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살아온 집안의 아들중에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주목을 받은 아들이었는데 지금 현실은 갑자기 노예의 신분, 종의 신분, 머슴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신분이 밑바닥으로 많이 추락한 상태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요셉을 " 형동한 자 " 라고 몇 번씩이나 반복하며 강조하고 있다. 이유가 "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 였다.
그래도 보디발 집으로 입주하게 된 요셉이 가정총무의 자리까지 올라가서 " 형통한 자 " 라는 표현은 그래도 동의가 안되지만 어렵게 받아들인다 해도....상황이 반전되어, 요셉이 [성범죄자로 몰려서!!] 감옥에 까지 가게된 상황에서까지 " 형통한 자 " 라는 표현은 정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요셉의 삶을 "형통한 자" 라고 말씀하시는 성경말씀을 주의하여 붙들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본 관점을 살펴본다.
2절과 3절에 형통이라는 단어를 실지로 쓰고 있다. " Prospered ", " Success " 라고 영어로 번역을 했다. 한마디로 이 땅에서 번영하고 잘 되는것이 "형통" 이라고들 한다.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다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형통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지금 종의 신분이고 노예의 신분이고 성범죄자로 몰려 감옥안에 갇힌 죄수인 신분인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 형통한 자 "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28:20...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게 내 삶에서 어떤것인가? 구체적으로 내 인생에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 "실지로 그러함"을 깨닫고 경험하고 싶은 말씀들이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로 비유하고 우리 인간들을 질그릇으로 비유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자로 표현하고 그런 자들의 삶을 설명을 한다.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라고 말한다. 또한 그런 자들의 삶을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 로다 " 라고 사도바울 본인이 겪은 인생에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설명을 한다. 어찌 보면 말 장난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씀들이 기독자인 내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나 온 나의 삶속에 일어나고 경험되어 지고 있으며 현재도 진행중임을 깨닫는다. 하나님 말씀이 이론이 아니라 강한 능력으로 다가와 나의 삶을 변화를 시키는 능력으로 임하셨던 것을 통해 요셉의 형통함이 무엇을 말하는지 삶으로 알도록 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어찌 보면 정말, 역설을 좋아하시는 분이신 것 같다.
찬찬히 살펴본다면, 하나님의 관심은 이땅의 가치관이 아니다. 하늘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사람들을 인정하시고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방법대로 일하신다. 지금 요셉은 인생 실패자이고 Winner 가 아니라 Looser 처럼 보이는 인생이다. 이 땅의 가치관으로 볼때 가장 별볼일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 형통한 자 " 라고 부르신다.
아버지 야곱을 떠나 애굽으로 팔린 인생 앞에는 자기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육신의 아버지 야곱이 안보이는 순간 요셉은 하나님만 바라보았으리라.. 그 하나님 의지하는 요셉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떄문에 요셉은 이 땅에서 소망없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버려진 휴지처럼 보인 인생에서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어떤 인생으로 쓰이는지 그런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를 하나님 나라의 통로로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늘의 메세지를 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기쁨으로 자원하며, 순복하여 섬기며 동행하고자 하는 자가 있는지를 눈여겨 찾아 보시며, 또한, 함께 하시길 원하시는 사람들을 오늘도 여전히 찿고 계신다.
그런데 내 안이 너무 부패하고 더럽고 추악한 모습 속에 하나님께서는 밖에서 참고 기다리시며 궁리궁리하시다가 어쩔 수 없이 [오직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 주께 합당하지 못한 것들은 다 깨뜨리시며 그리스도고난의 섭리를 통해서 영적 참자녀답게 진실로 회개하고 주 이름 불러 십자가 보혈로 정결케 함 받고 옛자아의 죽음-부활생명으로 거듭난 새자아로서 내안의 새생명 그리스도를 조성해 가시며, 그리스도와 하나된, 연합한 영적 참자아의 새사람으로서 성령따라, 말씀으로 사는 자로 만들어 가고 계신다.
그리스도로 사는 그 거룩한 부름 앞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나를 말씀으로 먼저 씻고 거룩한 신부로 준비되어 하나님의 초청앞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 나의 영안을 열어 볼수 있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시고 빚어 가시는 하나님을 오늘도 바라볼수 있게 하심을 감사를 드리며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를 나아가게 하신 은혜를 바라보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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