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3장 [314.내구주예수를더욱사랑]
===새 언약의 일꾼들
1. 우리가[일꾼들, 직분자들]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한사람 한사람마다 목자 마음에 새겨있음!!]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세상조차 읽어 알고 있음..한사람 한사람마다의 영적 성정성숙성화의 단계별 성취를 기록하고 보내심받은 자로서 주뜻 이루며 JC의 모든 영광 빼어닮도록 전심전력 돕고 있음**불신세상은 성령따라 말씀을 살아내는 성도들의 삶에서 살아 있는 생생한 성경을 읽고 있음을 명심하라, 기억하라, 바로 성령따라 성육신-십자가고난죽음부활승천-중보-재림심판의 그리스도를 살아내도록 하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JC께서 제자들에 대해 가지셨던 확신과 동일함!!))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자랑, 자격/권리 주장)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자격)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HS)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HS)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the ministry of the Spirit)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the ministry that brings righteousness : 죄씻음+성별헌신 =거룩함 이룸...<하나님이 (의롭다)인정하시는 참된 의, 곧 그리스도의 의란, 곧 구주 JC이 대속으로 인한 거듭남 + 생명말씀 믿고 교통/동행함으로 살고 누림으로 주님 뜻 이룸)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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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rinthians 3 Amplified Bible
==Ministers of a New Covenant
1 Are we starting to commend ourselves again? Or do we need, like some [false teachers], letters of recommendation to you or from you? [No!]
2 You are our letter [of recommendation], written in our hearts, recognized and read by everyone.
3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delivered by us,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4 Such is the confidence and steadfast reliance and absolute trust that we have through Christ toward God.
5 Not that we are sufficiently qualified in ourselves to claim anything as coming from us, but our sufficiency and qualifications come from God.
6 He has qualified us [making us sufficient] as ministers of a new covenant [of salvation through Christ], not of the letter [of a written code] but of the Spirit; for the letter [of the Law] kills [by revealing sin and demanding obedience], but the Spirit gives life.
7 Now if the ministry of death, engraved in letters on stones [the covenant of the Law which led to death because of sin], came with such glory and splendor that the Israelites were not able to look steadily at the face of Moses because of its glory, [a brilliance] that was fading,
8 how will the ministry of the Spirit [the new covenant which allows us to be Spirit-filled] fail to be even more glorious and splendid?
9 For if the ministry that brings condemnation [the old covenant, the Law] has glory, how much more does glory overflow in the ministry that brings righteousness [the new covenant which declares believers free of guilt and sets them apart for God’s special purpose]!
10 Indeed, what had glory [the Law], in this case no longer has glory because of the glory that surpasses it [the gospel].
11 For if that [Law] which fades away came with glory, how much more must that [gospel] which remains and is permanent abide in glory and splendor!
12 Since we have such a [glorious] hope and confident expectation, we speak with great courage,
13 and we are not like Moses, who used to put a veil over his face so that the Israelites would not gaze at the end of the glory which was fading away.
14 But [in fact] their minds were hardened [for they had lost the ability to understand]; for until this very day at the reading of the old covenant the same veil remains unlifted, because it is removed [only] in Christ.
15 But to this day whenever Moses is read, a veil [of blindness] lies over their heart;
16 but whenever a person turns [in repentance and faith] to the Lord, the veil is taken away.
17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emancipation from bondage, true freedom].
18 And we all, with unveiled face, continually seeing as in a mirror the glory of the Lord, are progressively being transformed into His image from [one degree of] glory to [even more] glory, which comes from the Lord, [who is] th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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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장 (개요)
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바울은 자기를 자천하는 것 같은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자신이 높아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돌린다(1-5).
Ⅱ.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고 신약의 우월을 설명한다(6-11).
Ⅲ. 복음의 사역자들의 의무를 말하며 율법 아래 사는 사람보다 복음아래 사는 사람의 유익을 든다(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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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1-5)
Ⅰ. 바울은 자기를 자천하는 것 같음을 사과한다.
고린도에는 바울의 명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신실성을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편리하였다.
그러나 그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다음을 말한다.
1. 바울은 거짓 사도와 교사들이 한 것 같은 말의 추천이나 천거서가 필요 없었다(1).
바울이 겉보기에 정말 보잘것 없어 보여 그를 아무리 경멸하더라도 그들 가운데서 행한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2.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참다운 추천이요 증거였다.
즉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이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이것이 바울이 가장 기뻐하고, 소중한 추천서이었다. 그들은 '그의 마음에" 기록되었다. 이것을 때때로 호소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교역자들은 자기들이 전도한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쓰여진 추천보다 더 기쁘고 더 좋은 추천은 없다.
Ⅱ. 바울은 자기를 높이지 않으며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주의한다.
1.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한다(3절).
사도나 다른 동역자들은 도구에 불구하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좋은 것의 주이시다.
그리스도의 법이 그들의 마음에 기록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의 가문에 부어졌고 이 편지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 같이 돌비에 쓴 것이 아니고 마음에 기록된 것이다."
이 마음은 돌과 같은 마음이 아니고 부드러운 육비이다. 육적인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써 부드럽고 새로워진 마음이다. 은혜로운 약속의 마음이다.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계약의 법궤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의 손으로 쓰여진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울이 기뻐한 소망이었다.
2. 바울은 어떤 찬사도 자기들에게 돌리는 것을 부인하고 그의 능력 원천이신 하나님, 성령 충만으로 맡기신 사역을 감당케 하시는 분께 돌렸다.
"우리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요"(5절) 우리 스스로는 결코 너희들이나 우리의 마음에 좋은 것은 줄 수가 없다.
우리의 능력은 너무나 미약하여 너희들의 감사나 찬사를 받을 수가 없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모든 선한 것의 감사,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하여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사역자나 신자에게 있어서 사실이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손은 우리에게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다. 오직 그의 은혜가 만족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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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의 일군(고후 3:6-11)
여기에서 바울은 구약과 신약을 비교한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교한다.
바울은 신약의 일꾼된 동역자들을 귀하게 평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하게 하셨기" 때문이다(6절).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자랑하는 거짓 교사들의 비난에 대한 답변이다.
Ⅰ. 바울은 신약의 문자와 성령을 구별하기까지 하였다(6절).
신약의 새 일군으로서 그들은 의문 즉 문자의 사역자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문자를 전하는 이외에 그들은 또한 성령의 사역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의 직분에 수반했다. "의문은 죽인다."
율법의 문자는 죽음의 직분이듯이, 만약 우리가 복음의 문자에만 의존한다면 율법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망에서 사망으로 나가는 냄새뿐일 것이다. 명심하고 기억하라, 복음의 사역에 동반하는 복음의 성령께서는 활동적, 영적인 생명과 영생을 가져다 주신다.
Ⅱ. 바울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말하고 율법에 대한 복음의 우월을 지적한다.
1. 구약의 직분은 "죽게 하는 직분이며"(7절) 그러나 신약의 직분은 "살리는 직분이다."
율법은 죄와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를 나타낸다. 이것은 우리 위에 계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적대하시는 하나님을 보인다.
복음은 은혜를 보인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을 나타낸다. 이러므로 복음은 율법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율법도 그 안에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 모세가 산에서 두돌판을 가지고 내려올 때에 얼굴이 빛났다.
2. 율법은 정죄의 직분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 안에 기록된 것을 행하지 않으면 저주하고 심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내주하사 예비-공급-인도-보호-지도-양육-산출하시는 HS따라 믿는이가 절대신뢰-절대기쁨-절대긍정-절대앙망함으로써 동행함 통해 친히 거룩함을 이루어 가시는 바]의의 직분을 하였다. 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이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을 보인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보여 준다. 죄의 용서와 영생의 획득이다.
복음이 율법을 너무나 능가하기에 율법의 영광을 없어지게 한다(10절). 태양이 돋을 때에 등불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신약에 비교하여 구약은 빛을 잃는다.
3. 율법은 없어지나 복음은 남게 된다(11절).
모세의 얼굴의 영광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도 없어진다. 그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진다. 그러나 복음은 항상 새롭고 영광스럽게 세상 끝날까지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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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겨질 수건(고후 3:12-18)
여기에서 바울은 앞에서 말한 것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밝힌다.
Ⅰ. 복음의 사역자들은 솔직하고 명료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모세와 같이 얼굴에 수건을 쓰고 복음을 흐리게 하면 안 된다. 복음은 율법보다 더 명료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 복음에서는 모형이나 그늘로 나타나지 않는다. 가능한 한 목사들은 진리와 은혜를 밝게 드러내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였으나" 우리는 볼 수가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는 모세와 다른 선지자들이 지적한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수건이 없어지고 모든 모형과 그림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Ⅱ.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보다 복음 아래 있는 자들의 특권과 유익은 아래와 같다.
1. 율법의 직분 아래 사는 사람은 마음이 장님이 되었다(14절).
그들의 마음 위에 수건이 덮여 있었다(15절). 특히 메시야가 오시고 복음이 선포된 후에 유대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그렇다.
"그러나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지리라"(16절)고 사도는 말한다.
혹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무지의 수건이 벗어지고 마음의 어두움과 굳음이 제거되고 치료된다.
2. 복음을 즐거워하며 믿는 자들은 더 행복하다. 왜냐하면
(1) 그들은 자유를 가지고 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복음 아래에서 그가 역사하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17절).
의식적인 율법으로부터 자유며 부패의 노예로부터 자유며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자유며 기도의 자유이다.
마음이 자유롭고 하나님의 명령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
(2) 그들은 "빛"을 가지고 있다.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본다"(18절).
이스라엘 백성은 어둡고 무서운 구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거울 안에서와 같이 밝게 그리고 편안하게 주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얼굴과 얼굴로 모세와 이야기하신 것이 모세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벗은 얼굴로 그를 볼 수 있다.
(3) 이 빛과 자유는 변혁의 힘이 있다.
우리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은혜가 절정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얼마나 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가?
우리는 복음으로 우리의 형상이 변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성질로 변할 때까지 결코 안주하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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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제 3장
=====3:1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 본절의 `아니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의 이면에는 바울에 대한 두 가지 비난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업적을 지나치게 되풀이하여 선전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천거서를 받지 못한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바울에 대한 이런 도전은 적대자들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가리켜 자기를 칭찬하는 일에 열을 올리며 천거서도 받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거짓됨을 은폐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바울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떤 사람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이 선교사들로서 누가 보아도 현혹당하기 쉬운, 찬사로 가득찬 추천서를 소지(所持)하고 있었고, 바울과 아무런 상관없이 고린도에 와서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하였던 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 이들은 2:17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자들의 범주에 들 것이다.
혹자는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적인 교인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일 것이라고 본다(Harris).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근본이라고 믿었던 자들로, 율법보다 믿음을 중요시했던 바울을 못마땅히 여겼을 것이다.
@천거서 - 이것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일종의 소개장으로 어떤 사람의 직분과 권한에 대한 위임장 또는 신임장 역할을 하였다(행 9:2;18:27;고전 16:3, 10).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으나 바울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울이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위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이다(행 26:12-18). 여하튼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추천서를 가지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악선전을 하고 다녔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이 추천서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도 필요에 따라서는 추천서를 이용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8:16-24;롬 16:1, 2;고전 16:3, 10,11).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칭찬과 승인과 위임보다 하나님의 승인이 훨씬 더 우위에 있고 또한 한통의 추천서보다는 사도 자신의 깨끗한 양심과 성도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에 사도로서의 그의 진정성(眞正性)이 확인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바울은 어디서 추천서를 얻어다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거나, 그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3: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 고전 9:2에서 이와 유사한 의미의 구절이 발견된다.
거기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무시한 자들에게 그들이 바로 자신의 전도사역의 열매임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사도권을 논증한 바 있으며, 이러한 상황이 본절에서도 동일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앞절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는 추천서와 자신의 마음속에 고린도 교인들로 인해 새겨진 추천서를 대조시키고 있다. 이것은 몇가지 점에서 비교된다.
(1) 적대자들이 지니고 있는 추천서는 파피루스 종이에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마음에 쓰여진 것이다. (2) 적대자들의 추천서는 잉크로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하나님의 영(靈)으로쓰여진 것이다(3절). (3) 적대자들이 가진 추천서는 종이에 쓰여진 것이므로 몇몇 제한된 사람에게만 보여질 수 있으나 바울의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 썼고 - 혹자는 이 구절에서 렘 31:33의 새 계약 즉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가 암시되어 있다고 본다(Barrett).
이것은 다음 절(3절)의 '돌비'와 '육의 심비'의 대조와 연관시켜 볼 때 적절한 제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천거서에 대한 논쟁을 `율법과 복음', '육과 영'이라는 신학적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3:3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 본절은 적대자들의 천거서가 사람에게서 유래한 반면 바울의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바울의 사도직이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가시적(可視的)인 증거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사역(事役)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으로 세움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그리스도의 편지'(*, 에피스톨레 크리스투)에서 '그리스도의'는 표면상 소유격이지만 실제로는 주격의 의미를 갖는다. 즉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라는 점을 말해준다(R.Martin).
@돌비...심비 -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먹으로 쓰인 천거서를 가지고 율법을 강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에 분열을 일으키지만, 바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추천서를 가지고 있고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하나님께서 돌판에 써서 모세에게 수여한 옛 계명에(출 24:12) 매여있는 반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심령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 즉 새 계명을 새겨 넣은 것이다(렘 31:33;겔11:19;36:26). 이로써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제기된 추천장 문제는 바울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적대자들은 율법을 강요했으나 바울은 복음을 선포했다는 점과, 적대자들은 분열이라는 악한 열매를 맺었으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하는 생명의 열매를 맺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해진다.
=====3: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 본문은 바울이 결코 자화자찬하거나, 현상적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였으나 자신의 확신의 근거가 자신의 재능이나 성결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심령 속에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그것은 인간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마주 대하여 말한 심정에서의 확신이요, 비판의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확신이다"고 하였다(F. G. Carver).
=====3:5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 바울은 자신의 확신이 자기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자기를 통해 일어난 모든 능력의 원천(源泉)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자기 자랑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의식하여 자기의 겸손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빌 4:13).
한편 혹자는 본절이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랴'(욜 2:11)는 구약의 구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Martin).
실로 하나님 존전에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인식하게 되며 그때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을 운명을 가진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나,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시는 전능자(룻 1:20;욥 21:15;겔 1:24)이시기 때문이다.
=====3:6
@새 언약의 일군 - '돌비와 심비'의 대조(3절)가 '율법과 복음'의 대비를 나타낸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옛 언약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적대자들과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키고 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의문'(* , 그람마)은 본래 알파벳의 '문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즉 '문서'나 '책'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이 말이 본문에서 뜻하는 바는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영'(* ,프뉴마)은 썩어질 육과 대비되는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바울은 본문에서 '의문'과 '영'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 시킬 수 있다.
(1) 적응 대상에 있어서.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출 19:5, 6)에 적용됨로써 민족적 한계를 갖는 반면,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으로써 민족적 한계를 넘어선다. (2) 언약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하나님께 대해 순종을 맹세하고 피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성립된 반면,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성립되었다. (3) 언약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행함으로 하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한다(롬 10:9, 10;히 10:39). (4)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언약의 결과에 있어서. 옛 언약은 죽음을 낳지만 새 언약은 생명을 낳는다. 따라서 옛 언약에 대해 새 언약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시간적인 차이를 넘어 완전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의문'과 '영'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의 대비로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전자는 삶의 중심을 인간에 둠으로 인해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둠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이다.
또한 칼빈(Calvin)은 '의문'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외적인 설교'를 뜻하고, '영'이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속에 실제로 작용하는 '생명력있는 가르침'을 뜻한다고 본다.
=====3:7
@의문의 직분, 없어질 영광 - 바울의 논의의 주제가 언약에 관한 것에서 직분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본절에 묘사되고 있는 장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석판을 수여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오는 출34:29-35의 장면이다. 그 논점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율법을 선포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모세도 그 직분으로 인한 영광 때문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파할 직분을 가진 바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크지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돌에 새긴 것' 즉 '율법'이 본래는 선한 것이었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설명(롬 7:10-12)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의문'은 곧 죽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런 정도의 전이해(前理解)는 되어 있었던 듯하다.
한편 본절의 '없어질 영광'은 바울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에 관한 유대교의 전승(Targum Ongelos)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유대교의 전승에서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반박하면서 그 광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Martin).
=====3:8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 의문의 직분에 주어지는 영광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직분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거기에 비취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는 빛'(4:6)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빛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 빛이다. 한편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는 구절은 미래형이나 이를 시간적인 미래로 보아 주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서는 안되며 다만 논리적인 미래로 보아야 한다.
영의 직분이 바로 지금 오늘, 현재적인 것이듯이(1:22) 그 영의 영광도 현재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3:9
이제 더 나아가, '영의 직분'(8절)이 '의의 직분'으로 대체되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 앞에 인간을 세워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를 정죄한다(롬 3:19, 20).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죄를 사면해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게 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정죄의 직분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직분에 얼마만큼의 영광이 있느냐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의'(* , 디카이오쉬네스)의 개념은 바울이 그 말을 사용할 때의 용법에 비추어 이해해야 하는 바, 윤리적인 무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의 성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기인한다(Barrett).
의의 직분 속에는 그것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현존하는 것이다(Kasemann).
=====3:10
@더 큰 영광을 인하여 - 본절에서는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이 극도로 부각되고 있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달의 밝기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모세의 영광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인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바울으로 인해 율법의 직능이 무효화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율법 이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도들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이다(히 8:7-13).
=====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 율법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지나간 시대에만 시한부적으로 존재 의의를 가질 뿐(롬 10:4) 천국에는 없어질 것이었다. 그에 반해 복음은 영원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代替)되지 않는 것이다(막 13:31). 이미 지나가버린 것과 이제 시작되는 영원한 것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3:12
@이같은 소망 - 바울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새 언약의 불변성과 절대 탁월성에 근거한다.
@담대히 말하노니 - 바울의 소망의 근거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므로 바울은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 솔직하고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었다.
본문의 '담대히'로 번역된 헬라어 '파르레시아'(* )는 원래 '말을 함에 있어서의 솔직함' 또는 '두려움없는 정직함'을 뜻하였으나,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의 '솔직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3:13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 본절은 7절부터 시작된 바, 출 34:29-35에 관한 바울의 미드라쉬(Midrash)적인 해석의 연속이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모세가 왜 얼굴에 수건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모세의 얼굴에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져 그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Harris).
(2)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Hughes).
(3)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은 모세는 자기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일시적인 것임을 알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현혹되어 거기에 영원한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랬을 것이다. 이 가운데 첫번째와 세번째 견해일 가능성이 많다.
이중에서 첫번째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경우, 모세의 떳떳치 못함과 바울 자신의 떳떳함을 비교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는데 바울이 그것을 말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바울이 모세가 하였던 것처럼 얼굴에 수건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모세는 그의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까봐 얼굴에 수건을 썼지만,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영광이 영원한 것이므로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할 필요없이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4
@완고하여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 모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의 영광 즉 율법의 영광이 곧 사라질 한시적(限時的)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함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이 완고함으로 인해 그들의 눈에는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수건이 씌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수건'(*, 칼륌마)은 유대인의 영적 무지와 오해,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신앙, 사랑이 상실된 편견과 엄격한 율법주의적 편견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 유대인들의 눈을 감싸고 있어 그들로 하여금 영적 맹아 상태에 머물게 하는 그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실(마 5:17) 하나님의 은혜와 참된 영적 자유를 인간에게 가져오셨기 때문이다.
=====3:15
@모세의 글 - 바울이 앞에서는(14절) '구약'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모세의 글'이라고 바꾸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이 율법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 본구절은 유대인들이 계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마음' (* , 카르디아)은 지적 활동의 중심이며 인간의 인격과 애정이 자리잡는 곳이다.
유대인들은 이곳에 수건이 덮여있으므로 여전히 옛 것만 보고 새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3:16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 본절은 당시 초대 교회에 자리잡은 기독론적교리를 엿보게 한다.
왜냐하면 본절에 '주께로 돌아가면'이란 문구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먼저, '주'(* , 퀴리오스)는 과거 모세가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현재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초청하시는 동일하신 주님이시다.
즉 구약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신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주'(Lord)로 불렸던 바, 동일하신 분이시다(Hughes).
바울은 본절에서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자유와 영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다름 아니라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다음으로, '돌아가면'(* , 에피스트렙세)은 '돌이키다', '회개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어 회심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누구라도 언제든지 회심하고 주께 돌아오면 마음의 수건이 벗겨져 영적 무지와 오해, 불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없어지게되며(롬 10:4) 새로운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시대가 열려지게 된다.
=====3:17
@주는 영이시니 - 본절은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6절 내용과 연관하여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바울은 '의문'과 '영',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면서 후자(後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주석가들이 주장하듯이 본절의 내용이 삼위 일체론의 교리를 뒷받침한다고 도 볼 수 있지만(Bousset, Scott), 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본절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초점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 및 대조에 있다는 사실이다(Hughes).
이렇게 볼 때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그분께 돌아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바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함이 있느니라 - 주의 영이 있는 곳, 그리하여 마음의 수건이 벗겨지고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곳에는 복음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는 자유가 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옛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종의 자녀'로, 새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자유자의 자녀'로 비유한 적이 있다(갈 4:24-31).
여기서의 '자유'는 율법의 지배 하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던 '자비'에 대한 언급이(고전 9:1, 19;10:29) 후서에서는 이곳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 언약이 영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은 정죄와 구속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데 이 자유는 확신(4절)과 담대함(12절)을 주는 자유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 자유의 영을 받았으므로 인간적인 추천서에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명예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1절).
=====3:18
@우리가 다 - 바울은 본장을 시작할 때는 자신의 사도직에 관한 주제를 언급하였으나 이제 본장을 마감하는 시점에서는 출 34:29-35에 대한 그의 미드라쉬적인 해석을 배경으로 하여 새 언약의 우월성을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매 - 본문은 새 언약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은, 수건으로 덮인 마음(15절)을 가지고 아직도 율법을 읽고 있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벗은 얼굴로 복음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 이르니 -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는 주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성도들의 존재가 신격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마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이 성도들의 얼굴에서 빛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서도 안된다.
본문의 의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에 대한 지식을 받고 그 내면이 변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할 때 성도들은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영광으로 진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재림이 실현될 때는 성도들의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완전한 영광의 형체(形體)를 얻게 될 것이다(빌 3:21). 그런데 이렇게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의문의 율법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성도들의 영광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업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롬 8:2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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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장의 바른 이해]]
====제1부 고린도후서 3장을 쓰게 된 목적
왜 율법이 의문의 직분인가? 여기서 의문(grammasin)은 에베소서 2장의 제사제도를 말하는 의문(儀文)이 아니고 글자로 쓰여진 율법이란 뜻입니다.
제사제도의 의문(儀文)은 헬라어로 도그마(dogma)가 쓰이는데 여기서는 그와 다른 글자란 뜻의 그람마(gramma)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정확한 뜻을 알려면 3장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은 추천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과연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서를 받은 사람인지를 문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었기에 그의 자격에 대한 시비는 늘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비난하고 헐뜯는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이나 그 외 어떤 지도자로부터도 말이나 글로 쓰여진 공식적인 추천서를 받은 일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바울은 참 피곤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글(의문)로 쓰여진 추천서보다는 마음에 새겨진 영적 추천서가 우월한 것임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글로 쓰여진 율법의 직분과 우리 마음에 쓰여진 영의 직분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왜 그 신성한 율법이 우리를 죽게 하는 직분이 되는가?” 그 이유는 율법의 기능이 우리를 정죄하여 죄인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자로 쓰여진 율법은 그것이 아무리 신성하다 해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죄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영적 복음보다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율법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감히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영의 직분의 영광은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율법 논쟁이 아닙니다.
글로 쓰여진 추천서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글(의문)로 쓰여진 것보다 더 확실하고 우월한 추천서는 영적 추천서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글로 쓰여진 계명을 받고도 모세의 얼굴이 그렇게 빛났거든 하물며 영의 영광은 얼마나 더 크겠느냐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두 돌판을 가지고 시내 산에서 내려와 하나님에게 임명받은 대변인으로 등장했습니다. 바울의 신임서가 만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룩한 율법을 성령이 자신의 마음과 회심자들의 마음에 동일하게 각인했기 때문에 분명히 실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결코 다른 신임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와 그가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들의 생애가 그의 사명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2부 글자로만 아닌 영으로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바울은 새 언약을 옛 언약과 대조하면서 새 언약은 영으로, 옛 언약은 의문으로 언급합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집착은 우상숭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영을 무시하고, 의문(글자)의 지배 아래 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이고 외양을 중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순종은 기계적인 방법이나 복잡한 규칙 및 요구사항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그 특징을 이루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조와 이론적인 신학에는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기록된 율법인 “의문”(글자)은 모세가 만든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기록인 “의문”이 유대인의 마음에 율법의 “영”을 세워주는 좀 더 높은 목표에 이르는 유일한 도구가 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은 율법의 “의문”을 율법의 “영”으로, 즉 메시아가 제공할 구속을 믿음으로 개인적으로 죄에서 구원받는 살아있는 종교 경험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의 “영”만이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수행은 “경건의 능력”없이 “경건의 모양”(딤후 3:5)으로 변질되기 쉽기에 기독교 신앙의 “의문”은 구원을 위해 그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결국 죽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바울이 여기서 구약과 십계명을 경시하고 폐지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쓰는 편지에서 바울은 구약과 십계명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있다고 거듭 확증합니다(롬 8:1-4; 딤후 3:15-17; 마 5:17-19).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는 구약 외에는 다른 “성경” 자체가 없었습니다. 히 11장에 기록된 기라성 같은 신실한 사람들과 구약 시대의 수많은 신자들은 신약시대의 신자들처럼 그들의 삶 속에서 성령의 소생시키는 사역을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문”도 함께 있습니다. 성령의 소생시키는 능력 없이는 어느 교회에서든 복음은 반드시 죽은 글자가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에 만족하면서 영적 생명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옳은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도덕적 및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를 보존한 결과와 증거로 나타나는 옳은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예배를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문제로 삼기보다 규칙 제도에 대한 순응으로 축소하는 것은 “의문”의 봉사와 직분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건 그리스도인이건 종교상의 형식과 의식은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즉각 참된 종교경험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형식적으로 그 교훈에 복종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자연스런 결과로 순종하게 될 때에만 그 순종은 하나님의 눈에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마 19:16-30).
율법의 “영”은 율법의 “의문”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세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순종의 “영” 없이 율법의 “의문”에 순종하면 그분의 의의 표준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원리를 강조하셨습니다.
율법의 “영”은 율법의 “의문”을 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섯째 계명에 기초하여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마 5:22), 그렇다고 형제의 생명을 취하여 계명의 문자를 어겨도 된다고 허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섯째 계명의 “영”은 분명히 그 “의문”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을 보완하고 “크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계명을 포함한 십계명의 각 교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문”이 선한 것이지만 죄인을 죽음의 선고에서 구원해 낼 능력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의문은 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이 주실 때 생명을 증진하기 위해 고안됐으므로(롬 7:10,11)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롬 7:12)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순종과 어울리며 사망은 불순종과 어울립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인을 죽음에 처하게 하는데, 이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겔 18:4, 20).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나 복음은 죄인을 용서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 고안됐습니다(8:1~3).
율법은 계명을 범한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지만 복음은 그를 구속하여 다시 살립니다(시 51편).
“영”의 직분은 초자연적인 [생명]능력을 나눠 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부과한 사형 선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선물(요일 5:11, 12)로 인해 파기됩니다. 하나님의 의의 표준이 회심한 사람의 양심에 이르면 순종과 생명의 기회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양심에 이르면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제3부 없어질 영광은?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고후 3:7) .
어떤 사람들은 이 언급을 보고 하나님의 율법이 “없어”졌다고 결론을 내리는 이들도 있는데, 이 구절에는 “없어”진 것이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지나가는 “영광”이었다고 분명하게 진술돼 있습니다. 그 “영광”은 몇 시간 혹은 기껏해야 며칠 안에 사라졌지만, “돌판에 써서 새긴” 하나님의 율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라져 버릴 것은 모세의 직분과 유대인의 제도였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닙니다(마 5:17,18). 그 영광은 돌비 위에 있던 것이 아니기에 돌비에서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일시적인 영광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나눈 교제의 결과로 임한 것이었습니다. 그 영광은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모세가 거룩한 임재 가운데 있었던 사실을 증명하고,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모세의 사명과 그 교훈을 지켜야 할 백성의 책무를 암묵적으로 증언했습니다. 그 영광은 거룩한 근원에서 온 것임을 증명하여 율법의 구속력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했던 것처럼 의문의 율법과 지상의 성소 봉사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반영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모형 제도에 반영된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임재를 이해하고 경험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드디어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사람들은 원형의 영광을 [직접 경험하며!!] 바라보는 특권을 누렸으며, 모형에 나타난 더 약하고 반사된 영광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됐습니다.
바울이 의례와 의식의 직분을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희생 제도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죄의 값인 사망을 거두는 운명에서 아무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찾아야만 하는데, 이는 그분 안에만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행 4:12).
눈먼 이스라엘은 결국 메시아인 예수님을 거절하고 그들의 구속주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더 큰 영광이 도래하면서 결과적으로 모형 제도에 반영된 영광이 사라졌으므로 그러한 제도 아래 그대로 머물 구실이 더 이상 없다고 단언합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후 3:11) .
바울은 모세의 얼굴에서 영광(빛)이 사라진 것을 모세 제도의 소멸 즉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의 소멸의 예증으로 설명합니다.
모세의 직분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사도의 직분이 등장하면서 모세의 직분은 마무리됐습니다. 견본을 통해 만들던 옷이 완성되면 그 견본의 유용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늘에 있는 그것들”(히 9:23)을 돌보기 위해 하늘로 돌아가신 후에도 유대주의자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에 초점을 계속 맞췄습니다.
바울은 생명을 나눠 주지 못하는 “의문”의 직분에서, 생명을 나눠 줄 수 있는 “영”의 직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고후 3:13).
바울은 영적으로 눈먼 이스라엘의 상태를 예증하기 위해 수건으로 가린 사건을 사용합니다(고후 3:14~16).
바울의 표현에서 사라질 영광은 위대한 원형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끝날 모형과 의식을 표상했습니다. 그 “수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일시적인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거나 혹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은 모형과 의식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맹신했습니다. 그들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형 제도가 본질상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며 앞으로 올 그리스도의 영광의 전조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진리를 고의로 가려서 이스라엘을 속이려고 했던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시아에 관해 예언했으며 그분이 임하실 영광스러운 시대를 고대했습니다(신 18:15).
모세의 얼굴을 덮었던 그 수건이 이제는 모세가 쓴 책을 덮고 있습니다. 모세가 말한 말이나 기록한 글과는 상관없이 백성의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눈먼 상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규칙적으로 읽었으며 추측건대 모세에게 영예를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모세를 믿지 않았는데, 이는 그랬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도 믿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5:46,47). 그들에게 모세의 영광은 율법의 “의문(글자)”과 그 안에 규정된 외형적인 형식과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구약의 예언과 거기에 규정된 형식과 의식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에만 성경의 그 부분을 읽을 때 “수건”이 걷힐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절했기에 그 수건은 걷히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제4부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짐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5).
그들의 역사 내내 유대인들은 고의적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기록한 것 중에서 그들이 믿고 싶은 것만 가려보았고, 모세 율법의 “의문”이 갖는 비할 데 없는 탁월함에는 온전히 확신했으나, 그 “영”에는 눈을 감았습니다. 성소 봉사와 제사제도는 하나님의 어린양과 그분의 중보 사역을 가리켰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들은 메시아가 왕으로서 다스리기 전에 반드시 고난을 당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메시아를 찾았지만 그 메시아는 죄가 아니라 로마에게서 건져줄 구주였습니다. 고의적 불신이라는 동일한 수건이 오늘날에도 진리를 가리곤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6).
모세가 여호와 앞으로 다시 나아갔을 때 그 수건을 벗었던 것처럼(출 34:34), 영적인 시각 상실과 불신은 진심으로 회심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됐을 때, 그의 시야를 가려 영원한 언약을 보지 못해 자신의 존재를 왜곡했던 수건은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은 제사 제도의 참 의미를 볼 수 있게 됐으며, 그리스도가 희생 제도와 모세의 전 율법의 핵심을 그분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이루셨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됐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에만 사람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읽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한 순종으로 헌신할 때에만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고 올바로 해석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성령의 자유란 언제나 무상으로 제공되는 새 생명의 자유이며,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뜻을 자기 안에 실현시키는 것이 가장 큰 열망이 된다는 단순한 이치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으로 인간은 모든 형태의 외부 압력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가 옳은 일을 하고자 선택하는 것은, 율법의 “의문”이 그릇된 일을 하지 말라고 금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영”이 옳은 일을 선택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내재하시는 성령이 의지와 감정을 다스리시므로 그는 옳은 일 하기를 갈망하며 예수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자유롭게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율법이 선함을 인정하며,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란,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면 자기 좋을 대로 해도 된다는 허가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유에는 규제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에게는 완전한 자유를 안심하고 위탁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그 자유를 남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마음과 정신이 여전히 수건으로 가려져 있어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은 그 영광의 충만함을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을 받습니다. 시내 산에서는 모세만 수건을 쓰지 않은 얼굴로 하나님에게 계시를 받았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분과 친밀한 친교를 나눌 수 있습니다.
구속의 계획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롬 8:29; 요일 3:2), 즉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오는 변화를 목표로 합니다(롬 12:2; 갈 4:19).
그리스도의 형상을 묵상하는 일은 하나님의 임재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것처럼 도덕적 및 영적 본성 위에 작용합니다.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끊임없이 바라보는 가장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일부 반영할 것입니다.
그가 충실하게 그렇게 계속한다면 자신의 개인적인 그리스도인 경험에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벧후 1:5-7).
그리스도에게서 기인하는 영적 변화는, 마음에 접근하여 본성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와 닮도록 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제5부 생명을 약속하는 율법
다음 주석은 고후 3장의 영적 이해를 풍부하게 해줄 것입니다.
>>고후 3:6-9 생명을 약속하는 율법
시내 산에서 두려운 위엄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에 대한 정죄의 말씀이었다. 정죄하는 것은 율법의 영역이지만 그 속에는 용서하거나 구속할 힘은 없다.
그것은 생명을 약속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은 순종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정죄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속박과 죽음을 가져다줄 것이다.
>>고후 3:7-11 두 가지 율법(갈 3:19; 엡 2:15; 골 2:14; 히 9:9-12; 10:1-7)
하나님의 백성들, 곧 하나님께서 자기의 특별한 보배라고 부르신 사람들은 두 가지 율법, 곧 도덕률과 의문의 율법(the law of commandments contained in ordinances, 엡2:15)을 특권으로 받았다.
도덕률은 세상을 창조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계속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의 창조를 가리켜 보이고 있다. 그 율법의 요구는 각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고 항상 있을 것이며,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의문의 율법은 사람이 도덕률을 범했기 때문에 주어진 율법으로써 미래의 구속을 가리켜 보이는 희생과 헌물 가운데 있는 것들을 순종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분명하고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도덕률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의 본질적인 부분으로써 하나님 자신과 같이 변경이 불가능한 것이다. 본질적 의미에서 십계명( , commandment)의 도덕률은 구약성경에서 한 번도 율법이라 불리지 않았다. 의문(규례법)의 율법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계획에 한 특별한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표상적 율법 곧 희생과 헌물 제도는 죄인이 이 제도를 통하여 크신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도록 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교만과 죄로 말미암아 눈이 매우 어두워져서 죄사함을 받기 위한 속죄 제물인 짐승의 죽음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 제물이 표상하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의문의 율법은 훌륭한 제도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의논하여 마련하신 것이었다. 표상적 제도의 전 체계는 다 그리스도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아담은 여호와의 율법을 범한 그의 죄의 형벌을 받는 죄 없는 짐승이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는 것을 알았다.
>>두 가지 율법 모두에 하나님의 인이 있다.
바울은 그의 형제들이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의 크신 영광이 유대인들의 모든 성소 제도에 깊은 뜻을 부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랬다. 그는 또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희생제물로 죽으셨을 때 표상은 그 원형을 만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랬다.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의문의 율법은 아무런 효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률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영광이 있었다. 이 두 율법은 다 신성의 인(sign)을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공의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폐지될 의문의 직분의 영광이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사 그분의 생명을 주시고 성결케 하는 영을 주실 때, 그 실체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the ministration)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간략하고 포괄적이다. 이는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포괄적 의미는 다음의 말에 요약되어 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만약에 죄인이 이 언약의 말씀에 나와 있는 문자 그대로 처리되어야 한다면 타락한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아담의 족속들은 이 언약의 문자에서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모든 사람의 보상이 될 것이다. 모든 범죄자들에게 하나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형을 집행할 것이라는 자기 자신의 말로 자기를 묶어 두셨다. 거듭거듭 사람들은 범죄하였지만 그들은 율법을 범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믿는 것 같지 않다.
>>유대인들의 의문의 율법은 예언적인 것(히 8:5)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의 시대에 그 영광을 반사하고, 유대인들의 모든 성소 제도에 빛을 던지며, 의문의 율법에 깊은 의미를 갖게 한다. 지상에 있는 성막이나 대성전은 하늘에 있는 원 성소의 모형이었다. 유대인들의 율법의 의식들은 예언적이며, 구속의 경륜 가운데 있는 신비들의 표상이다.
율법의 의식과 예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신 것이다. 그분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에 자기 몸을 가리우시고 이스라엘 군중을 인도하신 인도자였다. 큰 존경심을 가지고 이 율법을 취급하여야 하였으니, 이는 그것이 거룩하기 때문이었다. 그 율법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게 된 후 일지라도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 그 율법의 참된 위치가 어디이며, 그 가치가 어떠함을 제시하였고, 구속의 경륜에 있어서 그 율법이 차지하는 자리와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과 그것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도는 이 율법이 거룩하신 창시자에게 돌리기에 합당한 영광이었다고 선포하였다. 그것은 폐하여질 것이요, 영광이 있기는 하였으나 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의 가족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제정하신 율법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늘이 계속 있는 한 주님의 율법도 계속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광에서 더 큰 영광으로(계 22:14)
구약과 신약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약에는 오실 구주에 대한 복음이 있고, 신약에는 예언된 대로 나타나신 구주에 대한 복음이 있다.
구약은 끊임없이 참 희생 제물 되신 분이 오실 것을 가리켜 보이고 있는 반면에 신약은 표상적 희생제물로 예표 된 구주가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들 시대에 희미한 영광은 그리스도인 시대의 더 밝고 더 뚜렷한 영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리스도는 자기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가 폐하여졌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반대로 밧모섬을 경유해서 그분의 교회에 보내신 그의 마지막 메시지에서 그분은 아버지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축도를 한다.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제6부 그리스도의 영광과 도덕법
>>고후 3:7-17 도덕률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광을 받음
예언들과 함께 희생을 드리는 예배 의식의 상징과 그림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시하신 은혜와 자비에 대하여 베일에 가리워진 불분명한 견해를 갖게 하였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과 그림자들이 뜻하는 바가 모세에게 공개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표상이 원형을 만날 때 결국 폐하여 지도록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도덕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보았다.
이 율법을 범함으로 인해서 인간은 세상에 죄를 들여왔고, 죄와 함께 죽음이 왔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위한 속죄가 되셨다. 그분은 인간의 죄된 것 대신에 그분의 완전하신 품성을 제시하시고 불순종의 저주를 자신이 친히 담당하셨다. 희생과 헌물은 그분이 치루실 희생을 가리켜 보였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표상하였다.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게 한 것은 폐하여질 것을 보고 또 율법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돌에 써서 새긴 율법의 직분은 죽음의 직분이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범죄자는 그 저주하에 있게 되고 용서받을 희망이 전혀 없다. 직분 그 자체는 아무런 영광이 없는 것이지만 의문의 율법의 표상과 그림자 속에 계시된 언약의 구주께서 도덕률을 영화롭게 하신다.
>>고후 3:7-18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의 율법 가운데 나타남(롬 3:31; 7:7; 갈 3:13)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고, 그 형벌을 받으셨으며,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곳에다 올려놓으시고, 구주의 공로로 가납함을 받게 하는 계획을 완수하셨다. 없어질 것의 끝을 본 사람은 모두 다 없어지지 않을 것, 곧 의의 표준이요,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의 영광을 분명히 보았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리스도는 죄인의 대변자이시다. 그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분을 바라본다. 그들은 그분의 사명과 율법과의 관계를 보고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 율법 속에 나타나 있다. 그 율법은 그의 품성의 사본이다. 사람들은 그분의 변화시키시는 효능을 영혼에 느끼게 되고 마침내 그분의 형상대로 변화된다. 그들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고, 점점 자라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되며,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되고, 마침내 완전에 이른다.
율법과 복음은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복음은 율법을 높이고, 율법은 복음을 높인다. 양자가 다 나름대로의 위엄을 갖고 있으며, 율법은 양심과 마주 대하여 서서 죄인이 그리스도 곧 죄를 사하시는 속죄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준다. 복음은 율법의 능력과 그 불변성을 승인한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죄에 대한 느낌이 사무칠 때 죄인은 구주께로 달려간다. 우리는 죄인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 갈보리 십자가가 제공하는 강력한 이유를 제시할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할 수가 있다. 이는 회개하는 모든 죄인에게 그 의를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고후 3:12-15 불신의 수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즉 희생과 헌물이 그 의미를 잃었다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완고한 불신 가운데서 스스로 쓴 수건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가리우고 있다. 만약 그들이 율법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 수건은 벗겨질 것이다.
그리스도 교계에도 그들의 눈에,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수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없어진 것의 끝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폐지된 것은 의문의 율법뿐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도덕률도 십자가에 못 박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이해력을 어둡게 하는 수건은 두껍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의 정부의 법률에 조화를 이룰 때에만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분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시라고 말을 하겠지만 끝에 가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도덕률은 표상이나 그림자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지음을 받기 전에도 있었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한 계속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분의 율법 가운데 한 계명도 바꾸거나 변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환도, 변경도 불가능한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의 명예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죄에 대한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바치실 필요가 있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은 인간을 향한 놀라운 사랑과 함께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후 3:14,16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수건을 벗김
인간의 구속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수건을 벗기고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유대의 전 종교에 많은 빛을 반사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었으면 이 모든 제도가 무의미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종교 제도는 그들에게 불분명하고, 불확실하며 설명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그들은 십계명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원형을 만난 표상, 곧 그림자의 의식에 대단한 중요성을 두고 거기에 집착한다. 십계명은 그림자가 아니요, 실체이며 여호와의 보좌만큼이나 오래 지속될 율법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의 표상과 의식들을 명예롭게 하였다. 이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약속이요, 그분의 백성들의 마음에 살아있는 믿음을 간직하게 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죽음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후 3:18 비할 데 없는 그리스도의 매력(히 12:2)
그리스도를 보라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의 품성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대는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끔찍한 사탄의 그림자를 꿰뚫어 보고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는 그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의를 깨닫게 될 때에 그리스도와 영혼 사이에 끼어 있는 안개가 걷힐 것이다.
사탄은 우리들의 시야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우고, 그분의 빛을 이지러지게 하려고 한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영광의 빛을 잠깐만 보아도 그분에게 이끌릴 것이기 때문이다. 죄는 비할 데 없는 그리스도의 매력을 우리가 보지 못하도록 숨긴다. 다시 말하자면 편견, 이기심, 스스로 의롭다는 정신, 정욕 등은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구주를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가 만약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의 품성,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요,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찬양이 흘러나와 소리내어 찬송할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사탄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곧 하나님을 거슬려 죄를 범하고, 의심과 불신의 말을 하는 것을 영원히 그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불평하거나 탄식하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의 눈물로 하나님의 제단을 가리지도 않을 것이다.
>>땅의 너무 낮은 곳에만 시선을 주면 안된다(창 5:24; 엡 4:13,15)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품성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분은 보혜사, 곧 성령이시다. 그리고 이 일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거울처럼 반사할 것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의 품성은 그분의 품성과 같이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 사람을 보는 사람은 거울같이 그리스도 자신의 품성이 비쳐 나오는 것을 본다는 뜻이다. 눈에 뜨이지 않을 만큼 우리들도 우리의 길과 우리의 뜻이 날마다 그리스도의 길과 그리스도의 뜻으로, 그의 아름다운 품성으로 바뀌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자라나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형상을 반사한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땅의 너무 낮은 곳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눈은 일상의 사물들만 보도록 길들여져 있고, 그들의 마음은 그들이 보는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신앙적 경험은 천박하고 만족이 없는 경우가 많고 그들이 쓰는 말들은 경박하고 무가치하다. 그러한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떻게 땅의 어두운 곳에다 의의 태양의 밝은 광선을 보낼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에녹은 언제나 그 앞에 주님을 모셨다. 영감의 말씀은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항상 같이 다니는 단짝 친구로 삼았다. 세상에 처하여 있으면서 세상에 대한 그의 의무들을 다하였지만 그는 항상 예수님의 감화 하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사하여 그분과 같은 수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부드러운 동정심과 연민의 정, 인내, 온유, 겸손 그리고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는 날마다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써 그가 그토록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다. 그는 자기의 사상과 감정에 있어서 날마다 그 자신의 방식을 떠나서 그리스도의 방식, 거룩한 하늘의 방식으로 점차 옮겨 가고 있었다. 그가 항상 자문해 본 것은 이것이 주님의 방법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과의 우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것이 순수한 성화이다.
>>그리스도, 그분의 생애를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주어진 대로 그분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숨겨진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파내어야 하고,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착시켜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모실 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담력을 갖게 된다. 바라봄으로써 변화되고, 품성이 완전하신 그분께 윤리적으로 동화된다.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통하여 그의 입혀주시는 의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같이 된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고, 그것이 그의 전 존재를 사로잡는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는 노력
진리를 찾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 보려는 목적으로 그분을 바라볼 때에 그는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들의 완전함을 깨닫고, 완전한 것이 아니고는 어떤 것에도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다 그의 삶을 숨겨 두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성이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나 있음을 보고 점점 더욱 열렬히 그분과 같이 되어 보려고 애를 쓴다.
언젠가는 한바탕 전쟁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혹하는 자가(마귀) 그의 부하 중 한 사람을 잃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싸움은 사탄이 직접 사용하기 위하여 강화시켜 온 속성들과 싸워야 한다. 인간 대리자는 그가 더불어 싸워야 하는 것,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완전에 달한다는 생각과는 정반대가 되는 어떤 이상한 힘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그가 그 싸움에서 승리를 얻게 해 줄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다.
구주께서 그가 은혜와 능력을 간구하며 나아갈 때에 그를 강하게 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도덕적 분위기의 쇄신
자아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될 때 구주의 아름다운 형상이 그 신자에게서 반사된다.… 자아가 희생의 제단에 놓여져야 비로소 그 품성에서 그리스도가 반사될 것이다. 자아가 매장되고 그리스도가 마음의 보좌를 차지할 때 영혼을 두르고 있는 도덕적 분위기를 쇄신할 원칙의 계시가 있을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로 결심할 때
사람들이 자신의 품성을 형성하는 법을 가장 잘 깨닫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마음과 의지를 꼴짓고 모양을 잡으시기 위하여 들어오시는 데에 방해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이 생각해 낸 모형에 따라 그들의 품성을 완전하게 꼴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품성이 꼴지어져야 할 모형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품성이다.
구주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로 동의할 때 그들의 삐뚤어진 특성은 사라질 것이다.
그들이 품성 가운데 있는 자신들의 삐뚤어진 특성과 바람직하지 못한 성벽을 그대로 갖고 있기로 결심할 때 사탄은 그들을 취하여 그의 멍에를 메우고 그를 섬기는 종으로 이용한다. 사탄은 그들의 달란트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고, 그들로 하여금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모본을 보이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비난거리가 된다.
>>마치면서…
---완전한 모형에 접근해 가라(아 5:10,16; 히 12:2)
사람이 구속주의 역사와 친숙하게 될 때 자기 속에 심각한 결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너무나 닮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생애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크신 모본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전히 연구를 계속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주님의 정신과 그분의 모습을 포착한다.
바라봄으로써, 즉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는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모방하는 것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분을 바라봄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그분의 완전하심을 깊이 생각하고, 취미를 우아하게 하고, 품성을 고상하게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되는 것이며, 시도해 봄으로써, 즉, 믿음과 사랑으로 열렬하고 참을성 있는 노력으로 완전하신 모본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거듭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그분의 말씀, 그분의 습관, 그분의 가르치신 교훈들)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그처럼 면밀히 연구해 온 그 품성의 덕을 빌려 받게 되고 우리가 그토록 찬양해 온 정신이 스며들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만 사람에 뛰어나”고 “그 전체가 사랑스러운” 분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영혼에다 그분의 형상을 그려 주신다.
영혼이 빛과 진리의 위대한 창시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을 때에 그분이 하나님 앞에 영혼의 참된 위치를 나타내 보여 주시기 때문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러면 자아는 죽을 것이고, 교만은 낮추어질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 영혼 위에다 좀더 뚜렷한 선으로 그분 자신의 형상을 그려 넣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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