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장 [429세상모든풍파너를흔들어] 503세상모두사랑없어 542구주예수의지함이
===고난과 위로와 구원과 감사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교회 방문을 연기하다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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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rinthians 1 Amplified Bible
==Introduction
1 Paul, an apostle (special messenger, personally chosen representative) of Christ Jesus (the Messiah) by the will of God, and Timothy our brother, To the church of God which is at Corinth, and to all the [a]saints (God’s people) throughout Achaia (southern Greece):
2 Grace to you and peace [inner calm and spiritual well-being]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3 Blessed [gratefully praised and adored] be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Father of mercies and the God of all comfort,
4 who comforts and encourages us in every trouble so that we will be able to comfort and encourage those who are in any kind of trouble, with the comfort with which we ourselves are comforted by God.
5 For just as Christ’s sufferings are ours in abundance [as they overflow to His followers], so also our comfort [our reassurance, our encouragement, our consolation] is abundant through Christ [it is truly more than enough to endure what we must].
6 But if we are troubled and distressed, it is for your comfort and salvation; or if we are comforted and encouraged, it is for your comfort, which works [in you] when you patiently endure the same sufferings which we [b]experience.
7 And our [c]hope for you [our confident expectation of good for you] is firmly grounded [assured and unshaken], since we know that just as you share as partners in our sufferings, so also you share as partners in our comfort.
8 For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brothers and sisters, about [d]our trouble in [the west coast province of] Asia [Minor], how we were utterly weighed down, beyond our strength, so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itself].
9 Indeed, we felt within ourselves that we had received the sentence of death [and were convinced that we would die, but this happened] so that we would not trust in ourselves, but in God who raises the dead.
10 He rescued us from so great a threat of death, and will continue to rescue us. On Him we have set our hope. And He will again rescue us [from danger and draw us near],
11 while you join in helping us by your prayers. Then thanks will be given by many persons on our behalf for the gracious gift [of deliverance] granted to us through the prayers of many [believers].
==Paul’s Integrity
12 This is our [reason for] proud confidence: our conscience testifies that we have conducted ourselves in the world [in general], and especially toward you, with pure motives and godly sincerity, not in human wisdom, but in the grace of God [that is, His gracious lovingkindness that leads people to Christ and spiritual maturity].
13 For we write you nothing other than what you read and understand [there is no double meaning in what we say]. And I hope you will [accurately] understand [divine things] until the end;
14 just as you have [already] partially understood us, [and one day will recognize] that you can be proud of us just as we are of you, in the day of our Lord Jesus.
15 It was with this confidence that I planned at first to visit you, so that you might receive twice a token of grace;
16 that is, [I wanted] to visit you on my way to Macedonia, and [then] to come back to you [on my return] from Macedonia, and have you send me on my way to Judea.
17 So then, was I indecisive or capricious when I was [originally] planning this? Or the things I plan, do I plan [e]in a self-serving way like a worldly man, ready to say, “Yes, yes” and “No, no” [at the same time]?
18 But [as surely as] God is faithful and means what He says, our message to you is not “Yes” and “No” [at the same time].
19 For the Son of God, Jesus Christ, who was preached among you by us, by me, Silvanus, and Timothy, was not “Yes” and “No,” but has proved to be “Yes” in Him [true and faithful, the divine “Yes” affirming God’s promises].
20 For as many as are the promises of God, in Christ they are [all answered] “Yes.” So through Him we say our “Amen” to the glory of God.
21 Now it is God who establishes and confirms us [in joint fellowship] with you in Christ, and who has anointed us [empowering us with the gifts of the Spirit];
22 it is He who has also put His seal on us [that is, He has appropriated us and certified us as His] and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in our hearts as a pledge [like a security deposit to guarantee the fulfillment of His promise of eternal life].
23 But I call on God as my soul’s witness, that it was to spare you [pain and discouragement] that I did not come again to Corinth—
24 not that we rule [like dictators] over your faith, but rather we work with you for [the increase of] your joy; for in your faith you stand firm [in your strong conviction that Jesus of Nazareth—the Messiah—is the Son of God, through whom we obtain eternal salvation].
==Footnotes
2 Corinthians 1:1 All born-again believers are saints, that is, they are set apart for God’s special use.
2 Corinthians 1:6 Lit suffer.
2 Corinthians 1:7 In the NT the word “hope” expresses a cherished desire along with the confident assurance of obtaining that which is longed for.
2 Corinthians 1:8 In general, the editorial plurals used in this letter refer only to Paul.
2 Corinthians 1:17 Lit according to the fle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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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서론)
바울은 전서에서 마게도냐를 지날 때에 고린도를 방문할 의향을 밝혔다(16:5).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얼마 동안 길이 막혔으므로 전서 집필이후 약 일 년 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서신을 쓴다.
두 가지 정도의 긴박한 사정이 있는 것 같다.
1. 책망을 받고 있던 근친상간의 사건은 속히 다시 교제할 것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이 지도하고(2장) 그 후에(7장)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행한 행동을 만족하게 생각한다.
2.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를 위하여 헌금을 하였다. 바울은 이 헌금을 권장하였다(8, 9장).
이 서신에는 여러가지 다른 관찰할 것이 있다. 예를 든다면
(1) 여러 곳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한 노력과 성공(2장)
(2) 구약과 신약의 섭리의 비교(3장).
(3)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당한 여러 가지의 고난과 그들의 근면과 인내에 대한 동기와 격려(4, 5장).
(4) 불신자와 혼합되는 것에 대한 바울의 경고(6장)
(5) 고린도에서 세운 바울의 명예를 파괴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모욕적인 빈정거림과 비난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사도직을 정당화하는 방법(10-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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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제
성경 사본들은 이 편지서에 단순히 “고린도인들에게 Ⅱ”(헬, Pros Korinthious B)라는 표제를 붙이고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최고의 사본, 즉 3세기 경의 사본에서도 나타나는 표제이다.
영어 성경의 좀 더 긴 표제인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두번째 서한”이 나타난 것은 휠씬 뒤의 일이다.
이 편지서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라는 것과 또는 “후서”라는 말이 사용된 유래에 관해서는 아래의 역사적 배경을 참조하라.
이 편지서의 원본에는 이러한 표제가 붙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2. 저자
외적 및 내적 증거는 바울이 이 편지의 저자임을 결정적으로 말해 준다.
외적 증거는 사도 시대 직후의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 가고 있다.
다수의 초기 교부들과 저술가들이 이 편지로부터 인용하고, 그것에 대해 언급한 기록들은 이 편지서의 진실성과 완전성에 관한 풍부한 증거를 제공한다.
이 편지서보다 약 35년 뒤에 기록된,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A.D. 95년 경)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형편과 꼭같은 고린도의 형편을 다루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전에 있던 문제들의 다수가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빌립보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Polycarp.A.D. 155년 경 사망)는 고린도후서 8장 21절을 인용하고 있다(Epsistle 6).
리용(Lyons)의 감독 이레내우스(Irenaeus)는 고린도후서 12:2-4에 기록된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실을 인용하고 언급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200년 경)는 20번 이상이나 고린도후서를 인용한다.
소위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카르타고(Carthage)의 터툴리안(Tertullian, A.D. 220년 경)은 고린도후서를 빈번히 인용하고 있다
내적인 증거는 바울이 저자임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우선 문체가 바울의 것이다. 이 편지는 바울에 대하여 고린도에서의 그의 경험에 대하여, 그 곳 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다.
많은 성서 학자들은 이 편지서가 바울의 성질과 개성과 기질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도 가장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편지서에 기록된 경험들이 역사적으로 전혀 무리가 없이 자연스러운 점은 그것의 진실성을 방증(紡證)하는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적어도 세번 방문했고, 세번, 어쩌면 네번 편지를 써 보냈다.
그의 제2차 선교 여행 동안에 있은 A.D. 51년 경의 첫 (공식)방문 때에 그는 1년반 동안 거기 머물렀다(행 18:11). 이때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조직했다.
그후에 그는 이따끔씩 대표자들을 통하여 그 교회와 접촉을 계속하였다(고후 12:17).
그의 첫번째 서신 연락은 고린도전서 5:9에 언급되어 있다. 이 문서는 (아마도) 오늘날 상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제3차 선교 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2년 이상(거의 3년여)을 보내면서 그 끝 무렵에 기록된 것이 오늘날 “고린도전서”로 알려진 편지서이다(고전 16:8).
두 개의 고린도서, 즉 에베소에서 보낸 전서와 마게도냐(빌립보>)에서 보낸 후서 사이에는 아마도 여러 주일의 기간이 경과했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바울은 [원래 본인 계획으로는] 에베소에서 오순절까지 유하다가 그 후에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여행하기로 계획하였다(행 19:21).
그러나 그는 계획했던 것보다 빨리 에베소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의 생명까지 위협하던 그 당시의 강한 반대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행 19:24-41).
에베소에서 겪은 반대는 바울에게 큰 압박을 가했다. 그는 진리의 반대자들을 “맹수”(고전 15:32)라고 일컬었고, 또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고후 1:8, 9)다고 기록했다.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향할 때의 상황이 이러하였다.
그는 마게도냐로 향하기 위한 승선 항구인 드로아로 갔다. 거기서 그는 전번 편지에 대한 고린도인들의 응답에 관한 보고를 가지고 돌아올 디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디도는 기대한 시간 안에 도착하지 않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염려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하여(고후 2:13)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는 잇점조차도 활용할 수가 없었다.
하여 그는 계속 마게도냐로 행하여 그는 빌립보에서 디도를 만났다. 디도가 고린도로부터 가져온 좋은 소식을 바울은 기쁨과 안도의 마음으로 청취했다.
바울이 이번에 고린도로 돌아온 것은 두번째 방문이었던 것 같다(고후 2:1; 12:14; 13:1, 2). 그는 전번 방문[2차전도여행도중 1.5년 이나 머물렀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 퍽 실망이었음을 말하고(고전 1:11), 그후에 또한 견책과 권면의 편지(고린도전서)를 써 보냈고 또 다시 계획한 방문의 준비를 위해 디도를 파견했다(고후 8:6; 13:1, 2).
고린도후서 2:4에서 바울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고린도에서 보낸 먼저번 편지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 편지는 그들을 “근심하게”하였다(고후 7:8). 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이며 이번에 다시 쓰는 편지는 따라서 “둘째” 또는 “후서”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두 편지 사이에 또 하나의 다른 편지를 써 보냈을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고린도후서 2:13; 7:5; 8:1; 9:2, 4 등에 비춰볼 때,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곳은 마게도냐였던 것같다. 그 시기는 A.D. 57년 경이었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바울의 편지들과 방문은 그 목적을 성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서 16:23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은 한 사람(가이오)으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변화는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에 기록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가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가졌던 근심과 염려로부터 회복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한 사실로 말미암아 더욱 더 확증된다(고후 2:13; 7:6, 13, 14).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고린도에서 의연금품을 모집하는 일도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롬 15:26).
이 둘째 편지의 기록과 바울의 그 다음번 방문 이후로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불과 몇번의 산발적인 언급 밖에 찾아볼 수 없다.
A.D. 95년 경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기록하여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전에 고린도 교회가 가졌던 악들이 적어도 얼마가 다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클레멘트는 그 교회가 여러가지 면에서 모범적 행실을 했다고 칭찬을 하였으나 그 교회가 여전히 분쟁과 당파 정신을 가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또한 질책을 가하였다. 이것이 사도 시대 동안의 고린도 교회에 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마지막 정보이다.
4. 주제
편지를 즉시 쓴 까닭은 디도가 고린도로부터 가져온 고무적인 보고 때문이었다.
편지의 첫부분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첫 편지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을 언급하고 그 속에 취급했던 문제들 중의 몇 가지를 다시 살펴본다.
바울의 교훈을 따라서 교회는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부도덕한 범법자를 출교시켰다(고전 5:1-5; 고후 2:6).
바울은 이제 그 범법자를 다시 구원해 들이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마게도냐와 헬라의 교회들 가운데서 각출(醵出)된 의연금품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한다.
이러한 사업이 바울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킨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및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교제와 연합의 끈으로 한데 묶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방인 신자들로서는 그들에게 복음의 지식을 갖다 주면서 겪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을 고맙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그 선물들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교제의 정신을 고맙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의연금품을 각출하는 일을 소홀히 해 왔었고 마게도냐의 교회들보다는 휠씬 뒤떨어져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 교회에 있던 분쟁과 악덕문제 해결 노력이 그의 주의를 끌어간 결과였을 것이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그들이 즉시 그 일에 열심을 내도록 마지막 호소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준 권고를 충심으로 받아들였던 것같다.
그들은 디도를 쌍수(雙手)를 들어 환영했다.
거의 처음부터 그 교회 내에는 당파들이 있어서 어떤 이들은 이 지도자를, 다른 이들은 저 지도자를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충성의 분열로 인하여 야기된 문제들의 다수는 이미 진압되었으나 갈라디아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유대주의적 당파가 유발시킨 것으로 믿어지는 공공연하고도 악착같은 반대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의 목적은 바울의 사업과 권위와 사도권을 매장시키려는 것이었다.
반대자들은 바울이 원래 약속한 대로 고린도에 오지 않는다고 그를 변덕자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그가 사도의 권위를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멀리서 편지로만 교회를 조정하려 하는 비겁자로 낙인 찍었다.
그들은 그가 직접 나타나기를 두려워한다고 선전했다.
고린도후서의 첫 9장은 감사와 인정으로 특징을 이루고, 마지막 4장은 단호함과 자기 변호로 특징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첫 부분은 바울의 권면과 견책을 받아들인 대다수의 교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뒷 부분은 교회를 융화의 정신으로 회복시키려는 그의 노력을 끈질기게 반대하는 소수의 무리를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생각된다.
끝까지 그리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바울은 그의 권위를 증명하고, 그들 가운데 행한 그의 행위를 변호한다.
그의 사도권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이상과 계시들, 주 예수를 위해 받은 엄청난 고난들, 그리고 그의 노고의 결과로 거둬진 풍성한 결실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정 등등에 호소하고 있다.
거짓 사도들 및 아직도 그들의 감화 아래 있을지도 모르는 소수의 사람들에 관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말씀의 엄격성과 단호함은 다른 교회들에게 보낸 그의 다른 편지서들에서는 그 유례(類例)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 편지서는 고린도전서와는 그 형식부터 판이하다. 첫 편지는 객관적이요 실제적이며, 둘째 편지는 주로 주관적이요 개인적이다.
첫 편지는 그 음조에 있어서 비교적 온화하고 차분하나, 둘째 편지는 고린도에서 전해진 소식에 대한 바울의 근심, 마침내 디도가 도착했을 때의 안도와 기쁨 그리고 여전히 그 교회를 괴롭히고 있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취급하려는 그의 확고한 목적 등을 반영하고 있다.
첫 편지는 고린도 교회 내의 형편을 드러내는 반면에 둘째 편지는 그 교회를 위한 사도 자신의 열정을 드러낸다.
둘째 편지의 주된 관심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만큼 교의적(敎義的)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편지는 중요한 교의적인 진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5. 개요
Ⅰ. 서론 1:1-11
1. 인사 1:1, 2
2. 시련 중에서의 감사 1:3-11
Ⅱ. 고린도 교회와의 최근의 관계 1:12-7:16
1. 여행 계획의 변경에 대한 설명 1:12-2:4
2. 그리스도를 향한 비도덕적 범죄자를 회복시키라는 권면 2:5-11
3. 고린도로부터 소식을 들으려는 갈망과 들은 기쁨 2:12-17
4. 사도권 신임장 3:1-18
(1) 진정한 사도로서의 바울의 신임장 3:1-6
(2) 사도 직분의 영광 3:7-18
5. 사도는 그의 봉사에 있어서 거룩한 능력의 지지를 받음 4:1-5:10
(1) 견디는 힘: 거룩한 은혜의 증거 4:1-18
(2) 영원의 관점에서 본 생명과 사망 5:1-10
6. 화해의 봉사 5:11-6:10
(1) 그리스도를 위한 사신으로서의 사도 5:11-21
(2) 사도직을 위한 필수적인 훈련 6:1-10
7. 악행하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라고 고린도인들에게 호소함 6:11-7:1
8. 고린도인들의 따뜻한 응답에 대한 바울의 기쁨 7:2-16
Ⅲ. 유대의 도움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연보 8:1-9:15
1.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적인 관대함 8:1-6
2.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 8:7-15
3. 고린도에서 헌금을 받아올 디도에 대한 칭찬과 그의 사명 8:16-24
4. 각각 자기의 몫을 담당하라고 고린도인들에게 호소함 9:1-15
(1) 연보를 위해 준비하라는 호소 9:1-5
(2) 너그럽게 내라는 호소 9:6-15
Ⅳ. 자기 사도권에 대한 바울의 옹호,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호소 10:1-13:10
1. 사도로서의 바울을 경시하는 자들에 대한 대답 10:1-12
2. 그의 지정된 봉사 영역 안에 있는 고린도 10:13-18
3. 참된 사도와 거짓 사도 사이의 특징적 차이점 11:1-12:18
(1) 거짓 사도의 음흉함 11:1-6
(2) 바울이 생계를 고린도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음 11:7-15
(3) 바울이 위기와 궁핍을 만남 11:16-33
(4) 거룩한 계시를 받은 자 바울 12:1-5
(5) 바울이 “육체의 가시”로 겸비해짐 12:6-10
(6) 바울이 그들의 재물로 치부하지 않음 12:11-18
4.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마지막 호소 12:19-13:10
Ⅴ. 결론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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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 (개요)
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Ⅰ. 편지의 소개(1,2).
Ⅱ.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나타낸다(3,6).
Ⅲ. 고린도 교인들을 교화시킴(7-11).
Ⅳ. 바울과 동료들의 충성스런 사역(12-14).
Ⅴ. 바울이 경솔하다는 비난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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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에 대한 소개(고후 1:1-2)
이것은 서신에 대한 소개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점이 있다.
Ⅰ. 송신자와 수신자.
1. 편지를 보낸 사람은 바울이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 불렀다.
사도직도 예수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쓰는 데 있어서 디모데를 포함시킨다. 그의 도움이 요청되기 때문이 아니고 두 사람의 증거에 의하여 전하는 말이 보증되기 때문이다. "형제"란 명칭을 디모데에게 주는 것은 신앙이나 사역에 있어서 이 위대한 사도의 겸손을 나타내고 있으며 비록 디모데가 젊었지만 그에게 명예를 부여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존경을 받도록 추천하는 것이었다.
2.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들뿐만 아니라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졌다.
즉 주위에 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졌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라와 도시의 주민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아가야 성도들이 같은 대우를 받는다.
Ⅱ. 전서에서와 같은 인사와 사도적인 축복이다.
바울은 두 가지 큰 축복 즉 평화와 은혜를 기원한다. 이 두 은혜는 함께 붙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참다운 은혜가 없으면 영원한 평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축복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나온다. 이 축복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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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위로의 하나님(고후 1:3-6)
서문을 쓴 후에 바울은 많은 환란 가운데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한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신령한 영광을 높이기 위하여 말한다(3-6절).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바울이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대상은 다만 홀로 찬양을 받으실 분인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여러 가지 영광스러운 말로써 하나님을 표현한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하나님은 영원한 출생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신령한 성질의 아버지이시며 동정녀의 탄생으로써 인간의 성질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신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계약의 관계로서의 구속자의 아버지이시며 그를 통해서 우리의 아버지와 하나님이 되시는 중보자의 하나님이시다(요 20:17).
구약에서는 우리가 흔히 이런 명칭을 자주 만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이들과 이들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 계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진다.
이것은 중보자와 그의 영적 자손에게 나타내는 하나님의 계약 관계를 나타낸다.
2. "자비의 아버지시다."
원래적으로 하나님에게는 많은 자비심이 있다. 그리고 모든 자비하심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자비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 "주께서는 인애를 기뻐하신다"(막 7:18)
3.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보혜사 즉 위로자가 나온다(요 15:2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주신다(26절).
우리의 모든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우리의 가장 즐거운 위로는 하나님에게 있다.
Ⅱ. 바울의 감사의 이유는 이러하다.
1 바울과 바울의 동료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환난 중에서 그들을 위로하셨다"(4절).
이세상에서는 그들이 환란을 당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평화를 가졌다. 사도들은 많은 환란을 당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평화를 가졌다.
사도들은 많은 환난을 당했으나 그러나 그들은 그 환란 가운데서 위로를 발견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동정하셨기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들의 위로도 넘쳤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에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부여된다.
(2)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께 하나님의 행하심을 말할 때에 하나님을 가장 높이는 일이 된다.
2. 다른 사람들이 받을 이익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모든 환란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4절).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말해 주기도 하고 의로운 사람이 믿음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길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 다음을 주목하자.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우리를 기쁘게 하며 또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함이다.
(2) 우리가 선한 사람들이 고난 중에서 지킨 믿음과 인내를 본받으면 이 세상에서 받은 그들의 위안과 저 세상에서 받은 그들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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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고후 1:7-11)
이 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격려와 교회를 위하여 말한다(7절).
바울과 그의 동료가 당한 고난을 통하여 그들이 유익을 얻을 것을 바라고 그들의 신앙이 약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로가 증가되기를 기원한다.
1. 그들의 고난이 어떠했는가를 말한다(8절).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교회들은 그들의 사역자들의 고난이 어떠하였는가를 아는 것이 유익하다.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사도행전 19장의 데메드리오의 소란인지 전서에서 언급한 에베소에서 당한 짐승들과의 싸움인지(전서 15장) 혹은 다른 고통인지 모른다.
바울은 때때로 죽음을 직면하였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환란을 당한 것은 확실하다.
그들의 고난은 "힘에 지나도록" 심했고 보통 사람의 능력으로는 견딜 수가 없고 보통 기독신자가 참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8절).
그들은 죽어서 없어지거나 기절하여 버리게 되리라 생각했다.
2. 환란 중에 그들이 한 일은 이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이 궁지에 빠지므로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믿었다"(9절).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때때로 궁지와 고난에 몰아 넣으시어 그들이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의 충만을 의지하고 바라도록 만든다.
우리의 궁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기회이다. "산에서 주께서 보이시리라."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다(9절). 죽은 자를 살리심은 하나님의 전능의 증거이다.
이 일을 하시는 분을 어떠한 일도 하실 수가 있다. 그리고 항상 믿을 수가 있는 분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 신령한 능력에 붙어 있었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롬 4:17).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포기하더라도 사망의 문턱에서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다.
3. 그들이 얻은 구원은 어떠한 것이었느냐?
이것은 때에 알맞고 계속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소망과 의뢰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를 믿는 어떠한 사람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고 구원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다(10).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은 그날까지 계속하였다"(행 26:22).
4. 이 구원을 어떻게 이용하였느냐?
"또한 이 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10절).
하나님은 끝까지 도와 주시고 천국에 이를 때까지 보존하신다. 다음을 주목하자.
과거의 경험은 믿음과 소망에 큰 고무가 된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의무가 된다.
지난날 우리의 고통을 덜어 주신 하나님을 불신함은 우리의 경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다윗은 경험이 적은 청년이었지만 여기의 바울의 말을 주장했던 것이다(삼상 17:37).
5. 이 설명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기대. "너희도 우리를 위해여 간구함으로 도우라"(11절).
그들을 위하여 합심하여 한 곳에서 기도함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적당한 수단을 배제하지 않는다. 기도가 그 수단들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자신과 서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흠모했으나 성도들의 기도를 원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로 서로 도우면 기도의 응답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기회가 생기다.
우리는 기도로 서로 도와야 하며 찬양과 감사로써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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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사역의 신실성(고후 1:12-14)
바울은 주님의 사역자인 그들의 행위의 진실함으로 그들의 충성을 주장한다.
자랑이나 허영으로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뢰와 기도의 도움을 청하면서 한다(히 13:18).
그리고 바울의 인격과 사도직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중상을 막기 위하여 한다.
Ⅰ. 바울은 기쁨으로 양심의 증거에 호소한다(12절).
1. 수천개의 증거보다 양심의 증거에 호소한다.
양심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이다. 원수들이 그들을 비난하고 날뛸 때에 바울은 양심의 증거를 기뻐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건전한 양심의 증거는 모든 조건에서 항상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이다.
2. 양심이 증거하는 것은 이렇다.
(1) 그들의 행위와 인생의 길과 취지이다.
양심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해야 하며 이런 저런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2) 그들의 행동의 성질과 태도에 대하여. 즉 그것은 진실하고 순수했다.
이 복받은 사도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아니며 신실한 사람이었다.
(3) 세상과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그들의 행동의 원리는 이것이다.
육의 지혜가 아니고 육의 술책이 아니고 세상의 견해가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원리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때에 우리의 행동은 잘 처리된다.
Ⅱ. 바울은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의 지식에 호소한다(13, 14절).
그들이 어떻게 행하였으며 "얼마나 거룩하게 얼마나 정당하게 얼마나 흠 없이" 행하였는지 그들은 안다.
고린도 교인들은 정직한 사람에 어울리지 않는 어떠한 것도 그들에게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서로서로 즐거워할 수가 있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다음을 주목하자. 목사와 교인들이 서로 즐거워할 때에 행복하다. 이 기쁨은 양들의 대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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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는 바울의 긍정적 사랑(고후 1:15-24)
바울은 여기에서 자기가 고린도에 오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서 경솔한 사람이라는 [경솔한] 비난을 물리친다.
그의 원수들은 그의 인격을 더럽히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다 이용하였다. 그들은 이 기회를 잡아서 그의 인격과 사역을 불신하였던 것 같다.
Ⅰ. 바울은 자기의 의향이 신실함을 증언한다(15-17).
바울은 [신중함으로써 참되게 이해 분별할 것이라고] 고린도 교인들을 신뢰하면서 증언한다.
바울은 바울의 편리나 편익을 위함이 아니고 [어찌해야 진정!!, 고린도교인들에게 유익할 지를 주께 교통함으로써] 그들이 다시 참된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 결정하였음을, 그것이 그리 결정한 까닭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결코 경솔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17절). 바울은 어떤 세속적인 유익을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육체에 따라서" 행함이 아니고 즉 육의 목표와 견해로써 행함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결코 경솔하거나 무분별한 결정이 아니었다.
원래는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 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노라"(16절).
그러므로 바울이 그의 목표를 변경한 것은 중대한 이유 때문임을 그들이 알아야 한다. 바울에게는 예 예이고 아니요 아니요가 아니다(17절).
하기에, 바울은 [함부로 그 어느ㄴ사람에게서든지]경솔하다는 비난을 받아서도 안 되며 그의 말과 의향에는 모순이 없다.
다음을 주목하자. 선량한 사람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어야 한다. 충분한 생각없이 결정하면 안 되고 중대한 이유없이 결정을 변경하면 안 된다.
Ⅱ. 바울은 그의 복음이 거짓되거나 불확실하거나 진리에 모순된다고 추론하지 않도록 원했다(18, 19절).
바울이 고린도에 오는 것을 변경하더라도 그와 동료들이 전한 복음은 결코 거짓되거나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진실하시기 때문이다. 진실하신 하나님이며 영생의 하나님이시다.
사도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는 "예"이며 "아니오"가 아니다. 그의 안에는 "예"만 있다(19절). 다만 완전한 진리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는 예나 아니요가 아니요 예나 아멘이다(20절).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는 침해할 수 없는 불변과 의심할 수 없는 신실함과 확실성이 있다.
설령 사역자들이 전에 이미 말한 바 그 약속의 불이행을 목도하게 되더라도 그들이 전한 복음의 계약은 확고하며 침해할 수가 없다.
나쁜 사람은 거짓되고 선량한 사람조자 변하더라도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변하지 않으신다.
바울은 복음의 약속을 굳게 옹호한 후에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예이며 아멘임을 설명한다.
1. 복음의 말씀, 그것들은 진리의 하나님의 약속이다(20절).
"거짓말할 수 없는" 분이며 그의 진리와 자비는 영원하시다.
2.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멘이요 진실하고 성실한 증거이다. 예수님은 약속의 계약을 증거하셨다. "계약의 확실함"이다(히 7:22).
3. 그들은 성령으로 확실하게 된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굳게 세우며 거룩한 은혜로 기름을 부으며 그들을 인치시고 완전하게 보증하신다.
성령은 그 마음에 역사하신다(21,22절). 성령의 진지함이 보증이요 대가의 일부분이 기도 하다.
성령의 빛은 영원한 조명이며 성령의 생기는 생명의 근원이다. 성령의 위로는 영원한 기쁨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성실과 그리스도의 중보와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작용하신다.
이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에게 영광이다(20절).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와 실족함이 없는 진리와 성실성을 위함이다.
Ⅲ. 바울은 기대된 고린도의 방문을 어떻게 행하지 못했는가를 말한다(23절).
그것은 그들을 아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울의 친절과 온유를 인정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 중에 책망받을 잘못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온유함을 보이기를 원했다.
이것이 참다운 이유이며 준엄한 방법으로 말한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게 하노라."
사소한 일에는 사용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온당한 말이다. 그의 원수들이 공격하는 그의 사역을 지키기 위함이다.
바울은 그들의 신앙을 지배하기를 생각지 않았다(24절). 그리스도만이 우리 믿음의 주이다. "그는 우리 믿음의 주요 완성자이시다"(히 12:2).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까를 나타낸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다른 사역자들은 그들이 믿는 JC의 일군이다(고전 3:15).
사역자들은 믿는 이 그들의 믿음의 기쁨을 돕는 자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굳게 서고 완전하게 위로를 받으며 산다. 우리의 능력과 힘은 믿음 때문이다.
우리의 위로와 기쁨은 진정 바로 이 믿음에서 흘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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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제 1장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 바울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 후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밝힘으로써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택함받은 열 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막 3:14-19), 그가 개심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계시에 근거하여(행 9:15) 열 두 졔자들과 동등한 사도라고 주장하였다(11:5;12:11;갈 2:6, 7).
그런데 바울이 본서신의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 서신에서 바울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그의 사도권에 대해 도전해 오는 것에 대응하여 자신의 사도됨의 정당성(正當性)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14-7:4).
#디모데 -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소스데네를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고전 1:1)과 달리 디모데를 본 서신의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은 디모데가 본서신의 공동 저자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모데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고린도에 파송되어 사역 감당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젊고 담대하지 못하였고(딤전 4:12;딤후 1:7;2:1),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매우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미미한 성과밖에 거두지 못였거나 거의 실패했었다(고전 4:17;16:10, 11).
이런 일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신앙의 아들이자 가장 절친한 동역자로서 자신과 함께 계속 사역해야 할 디모데의 권위를 다시금 세워주어야할 필요를 절감하였을 것이다(Harris).
또한 비록 과거에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바울 반대파로 인해 별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일이 있지만(고전 16:10, 11), 그럼에도 블구하고 바울이나 디모데는 그들에 대하여 여전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본 서신의 서두에서 보여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주변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젊은이였으며(행16:1, 2), 바울에게는 아들이라고 불릴만큼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딤전 1:2;딤후1:2),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빌레몬서의 서두에 언급될 만큼 절친한 동역자이기도 했다(행 16:1-3;빌 2:19-2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여기서 '하나님의'라는 소유격은 교회의 소유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와 바울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 추천장을 내세워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며 자기들만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고린도 교회에 문란을 일으켰던 적대자들과(3:1;4:2;10:7), 그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교회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했다.
한편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함은 본 서신의 수신자가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역과 그 주변에 있는 교인들이 모두 해당함을 암시한다.
즉 이 표현은 여러 수신처를 포괄(包括)하는 대표적인 언급이라 하겠다.
이러한 견해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서신의 초두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문구에 이어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지지될 수 있다(Tasker).
바울은 두 개의 고린도 서신이 고린도와 그 이외의 지역에서도 읽혀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가야 - 로마가 헬라를 지배할 당시 로마는 헬라 전체를 마게도냐(Macedonia)와 아가야(Achaia)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에피루스(Eqirus), 데살리(Thessaly), 갈시디스(Chalcidice)를 포함하는 중북부 지역이 마게도냐에 속하고 아덴(Athens)과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를 포함하는 남부 지역은 아가야에 포함되었고 아가야의 행정 수도는 고린도(Corinth)였다.
바울이 본 서신을 보내면서 고린도뿐만 아니라 고린도를 포괄하는 아가야 전지역의 성도들이 읽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덴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행 17:34의 기록과 겐그레아에 한 교회가 있었다는 롬 16:1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니, 아덴과 겐그레아는 모두 아가야 지역 내에 위치한 곳이었다.
#성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스'(* )는 원래 '분리하다', '구별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다쉬'(* )에서 유래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 민족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고(민 23:9;시147:20), 따라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제사장 직분의 삶이어야 했다(레11:44;신 7:6).
신약의 성도는 성별된 구약 이스라엘의 영적 계승(繼承)자로서(벧전2:9,10) 소극적으로 죄악으로부터 분리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헌신, 봉사해야 할 자들이다.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 본절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불리며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로 불리는데, 이는 '주'(* , 퀴리우)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것임을 고려할때(* , 아도나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심을 제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본절은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본절과 동일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구절이 고전 1:3에도 나오는데 이는 전통적인 헬라식 문안 인사말과 히브리식 문안인사말을 결합한 바울 특유의 전형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은혜'(* , 카리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근거인 하나님의 선재적(先在的)인 행위로, 받는 자의 행위나 자격에 의해 정당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호의' 또는 '선물'이다.
특히 여기서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목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예수께 지우신 것을 의미한다(5:19,20).
'평강'(* , 에이레네)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구원이 보증된영혼의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롬 1:7;빌 4:7).
=====1:3
#찬송하리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 )라는 '칭찬하다'는 뜻의 '율로게오'(* )에서 온 말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어 '바룩'(* ,'찬양하다')과 같은 의미이다.
'바룩'은 후기 유대교의 제의적 자료, 특히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는 열 여덟 개의 축복문에 눈에 띄게 나타난다(Barrett).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 이 말은 '찬송하리로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유대교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이 표현은, 유대교 찬양문에 나오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형식이 기독교적인 형태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Barrett).
즉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되었는데(갈 4:4) 이것은 초대 교회에 널리 사용된 독특하고 특징적인 기독교적 어법인 것이다(벧전 1:3).
그러나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連續)되는 것이며,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또한 본문에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는가 하는 것이 규정되어 있는데(Backmann), 하나님은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 이 문구는 유대교의 회당에서 널리 사용되던 기도문 형식의 표현이다.
즉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오, 우리의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여'(* , 압 하라하밈)라는 말로 시작한다(A. Marmorstein).
이처럼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뜻 외에 '자비(* , 오이크 티르모스)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며 하나님이 자비의 창조자요 근원이심을 의미한다(시 86:15;미 7:18).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여기서 '모든'(* , 파세스)은 '완전하다'는 뜻도 있으나 그보다는 '풍부하고 충분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로'(*, 파라클레세오스)는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위로는 단지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난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구해냄을 받은 것을 포함한다(8-10절).
바울은 그 자신이 환난 가운데서 붙드시고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하였다(롬 8:35).
=====1:4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본절의 '우리'는 일차적으로 본 서신의 발신인인 바울 자신을 가리키며 넓게는 본 서신을 읽게 되는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Barrett, Lowery).
본서에서 바울이 아홉 차례나 사용하고 있는 '환난'(* , 들립세이)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實存)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8절;2:4;4:17;6:4;7:4;8:2, 13).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다(요 15:19 ,20).
그러나 이러한 환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주어진다. 본절의 '위로하사'(* , 파라칼론)는 '안위하다',`위로하다'는 뜻의 '파라칼레오'(* )의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중단없이 계속됨을 뜻한다.
연속되는 환난과 그에 상응하여 계속되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역설적으로 결합됨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규정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여러 차례 극심한 환난을 겪었으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안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였다(행 14:19;16:19-26).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2:10)고 고백하였다.
한편 본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고 위로하기는 중요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위로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培養)시켜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 것과 같다(벧전4:10).
=====1:5
#그리스도의 고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투 크리스투'(*)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한결같이 받는 고난'을 의미한다(Martin, Ewald).
모든 고난이 다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서 결과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고난이며(눅 22:52,53;23:22-24), 그 고난의 결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메시야적 고난'(* , 헤블레 함마쉬아흐)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JC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했고(골 1:8),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롬 8:17).
사실상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당했다. 복음을 증거하다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고(행 14:19),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고, 유대인 자객단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었다(행 23:12-15).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수 없는 위로를 받았으므로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1: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견디게 하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한 숱한 고난과 고린도 교회가 받은 위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인 것이었듯이 사도 바울의 고난도, 비록 동질(同質)의 것은 아니더라도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위로 또한 그의 서신을 읽게 될 고린도교인들과 아가야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바울은 그가 환난을 당하든지 위로를 받든지 여전히 고린도 교인들에개 유익이 됨을 확신한다(4:8-12, 15). 왜냐하면 그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에 먼저 고난을 경험한 바울의 예로부터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목격하고 위로를 받으며 지혜롭게 처신해 나감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 -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고린도 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때문이었다. `소망'(* , 엘피스)은 문자적으로 '강한 확신'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그것이 견고하다고 말한다. 아마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이단의 문제,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문제(3:1;4:2;5:11,12;7:2;10:7, 11;11:6), 교회의 분열에 관한 문제에 대해(1:10이하) 다소의 혼란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바울과 그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소망이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확신은 고린도를 다녀온 디도를 통하여 기쁜소식을 들음으로써 더욱 얻게 되었을 것이다(7:6, 7). 바울이 이러한 소망을 굳게 갖게 된 것은 적어도 본서의 독자들인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였다고 보았고 그것은 자신의 경험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가 주어지는 전제였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參預)하는 자들에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위로가 넘칠 것이고 결국 거기에는 확고한 소망이 있게 될 것이다(벧전 5:9, 10).
=====1:8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 본문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아시아'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하는 것과 '환난'이 어떤 종류의 것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시아란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함인가" 하는 전자의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1) '아시아'가 에베소를 가리킨다고 본다(Haenchen, Robertson, Farrar 등).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고전 15:32의 맹수와의 싸움에 대한 비유적 표현과 행 19:23-40에 언급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란에 두고 있다. (2) '아시아'가 리쿠스 계곡을 가리킨다고 본다(Harris, Duncan). 이렇게 보는 이유는, 바울이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된 일에 대해 기록한 고후 11:24을 이곳에서 있었던 일로 보기 때문이며(Lowery), 또 다른 이유는, 만약 '아시아'가 에베소를 가리킨다면 고전 15:32나 16:8에서 처럼 '에베소'라는 지명을 밝혔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제시하나 모두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본절에서 '아시아'가 가리키는 곳은 에베소와 리쿠스 계곡을 제외한 다른 어떤 장소 일지도 모른다(Charles, Hodge, Tasker). 바울은 그의 생명을 노리는 수많은 대적들로부터 여러차례 시련을 겪었고, 이러한 사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울이 고난을 당한 장소가 아니라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인 만큼 이에 대해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편 바울이 당한 극심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구체적인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미 고린도교인들이 알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전 15:32과 16:9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Harris). (2) 심한 질병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Knox, Ruckert). 이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바로 다음 절의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9절)라는 내용이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그러나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립시스'(* )는 심한 질병에 적용하기에는 적합치 않으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3)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 이후에 있었던 새로운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행 19:23-40[에베소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주동한 난동]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Theodoret, Calvin). 위의 견해 중 세번째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바울의 첫번째 편지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바울이 정신적으로 고통받은 것을 지칭한다는 파라(Farrar)의 견해가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마치 너무 많은 짐을 실은 배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가라앉듯이 바울에게 가해지는 고난의 무게는 그 자신의 힘으로는 견디어내기 어려운 혹심(酷甚)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끊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포레데나이'(*)는 급작스러운 고뇌로 모든 소망을 상실케 되며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와 같은 강렬한 경험을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1:9
#사형 선고 - 이 문구(* , 토 아포크리마 투 다나투)에 대한 해석은 분분(紛紛)하다. (1) 행 19:23-41에 기술된 에베소의 데메드리오 폭동 사건(Silanus, Duncan). (2) 법과 질서를 어긴 사람을 원형경기장의 맹수들에게 주어 생명을 빼앗게 하는 심각한 위험(Malherbe, Warfield). (3)법정에서 내려진 사형의 판결(Deissmann, Stanley). (4) 복음을 증거하다가 겪는 육체적 고난(Strachan, Martin). (5) 12:7의 '육체에 가시'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Clavier, Barrett). 이중에서 (3)과 (4)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용어상 재판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며 전후 문맥상 5절의 `그리스도의 고난' 및 8절의 '환난'과 긴밀하게 연계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은 본문을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절망감의 최종적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받은 줄 알았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케카멘'(* )은 `가지다',`소유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에코'(* )의 완료형이다(had received).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1) 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한 생생한 회상으로 보는 견해와(Robertson), (2) 단지 과거에 대한 회상을 넘어 현재에도 효력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바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가 아직 집행만 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유일한 희망이 부활에 있음을 뜻한다고 본다(Haenchen). 위의 두 견해 중 첫번째가 더 타당한 듯하다.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 - 바울이 절망하여 사형 신고를 받은 것으로 생각한 것은 더이상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구원에의 능력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신뢰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도(빌 3:4), 고린도 교회에서 맛본 좌절, 신체적인 질병, 거듭되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11:23-27)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그는 참된 위로와 구원과 신뢰가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 너머로부터 역사해 오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통감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포기(抛棄)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배울 수 있게 된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것을 알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교훈은 철저한 환난 가운데 배우게 되는 것이며 이것 역시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었음에 틀림없다.
=====1:10
#큰 사망에서...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큰 사망'(*, 텔리쿠투 다나투)은 '어려운 죽을 고비'(공동번역)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과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바울은 그것을 현재와 미래에 있을 환난에서의 구원을 확증해 주는 예표로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적 신앙으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위로할 수 있었고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교훈을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되 시간과 회수에 제한없이 영원히 보살피신다(전 3:14;딤후 4:18).
=====1:11
#간구함으로 도우라 -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빌 1:19).
여기서 바울은 커다란 힘을 갖는 중보 기도를 부탁함에 있어 자신이 사도로서 일방적으로 사역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도움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그들이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서로 협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일치를 이루자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도우라'로 번역된 헬라어 '쉬뉘푸르군톤'(* )은 '함께 도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강력하게 부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살후 3:1-3).
#많은 사람의 기도로...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바울에게 은혜가 내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론프로소폰'(* )에서 대명사 '폴론'에 첨가된 '프로소폰'은 '얼굴'을 뜻한다. 이 말이 헬레니즘 시대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는 '얼굴'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다. 그 예로 본서에 이 단어가11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최소한 여덟번은 '얼굴'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3:7, 13, 18;10:1, 7;11:20). 반면 본서 2:10과 4:6에서는 '사람' 또는 '얼굴'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Robertson).
그런데 본문의 '프로소폰'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것에 대해서 헨헨(Hacenchen)은 '프로소폰'이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는 대명사 '플론'(*)만으로 충분한데, 여기에 또다시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프로소폰'을 첨가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이 본래적 의미인 '얼굴'로 쓰였다고 보아 많은 얼굴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아니면 연극에서의 의미 즉 연극에는 다양하고 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그 모든 인물들이 하나의 결말(結末)을 위해 협력하며 그때 생겨나는 좋은 결과에 대해 다같이 감사하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1:12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진실성을 굳게 단언함으로써 자신이 성실하지 못하다고 하는 비난에 대해 윤리적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함'은 헬라어 '하기오테티'(* )를 번역한 것인데 어떤 사본에는 '하플로테티'(* ) 즉 '솔직함'으로 되어 있어 학자들 간에는 전자가 본래적(本來的)이라고 보는 입장(Farrar)과, 후자가 문맥상 본래적이라고 보는 입장(Cowery, Barrett, Harris)으로 갈린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이 바울의 윤리적 성실성을 주장하는 대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후자의 의미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바울이 '하기오테티'라는 용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솔직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Barrett).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철저한 솔직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 앞에서는 윤리적 측면에서진술했다면 여기서는 신학적 측면에서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육체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대비되어 제시된다. '지혜'(* , 소피아)라는 말은 본서보다는 고린도전서에 많이 나오며 본문의 '육체의 지혜'에 해당하는 병행구로 '세상의 지혜'(고전 1:20;2:6;3:19), '인간의 지혜'(고전 2:5) 등이 나온다. '육체의 지혜'는 자신을 신뢰케 함으로 사리사욕에 빠지게 하기 쉽고 결국은 자기 파멸로 이끌고 간다(롬 8:5, 6). 이에 반해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 삶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끊임없는 보살핌이다(6:1).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역은 육체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 바울의 행위가 윤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온전한 것이었음을 그의 양심이 증거한다. '양심'(* , 쉬네이데시스)이라는 말은 당시 고린도 지방에 널리 사용되던 용어였을 것이다. 즉 고린도인들은 그들의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을 증언할 때 '양심'에 호소하였던 것이다(고전 8:7, 10, 12;10:25,27-29, Jewett).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양심'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그의 행위가 참되다는 것을 증언해준다고 말하였을 것이다(Pierce). 한편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자랑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공명심(功名心)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잘못된 방식으로 자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올바로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의도에서 언급되었다고 한다(고전 1:31;고후 10:17, Barrett).
=====1: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 본문은 고린도교인들 중에 바울의 서신이 진실하지 못하고 모종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적대자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것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서신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외에는 다른 의도가 전혀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1:14
#본절은 다소 완곡어법적(婉曲語法的)인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목회가 다소 어려움이 있음을 엿보게 한다. 즉 지금은 완전한 상호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래에의 기대를 바울이 본절을 통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 여기서 '대강'(* , 메루스)이라는 표현이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수를 나타내는지(Farrar), 아니면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지(Barrett) 분명치 않으나 후자의 의미가 정확하다고 본다. 그들은 바울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온전히 알지 못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 이 날은 모든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될 날이다(5:10;고전 1:8;5:5;빌 1:6;2:16;살전 5:2;살후 2:2).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은 바울을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심판의 날에는 바울의 진실됨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랑 너희의 자랑 - 이는 심판의 날에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간에 상호신뢰의 관계가 형성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본구절은 장래에 고린도 교인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임을 바울이 이미 믿고 있고 또한 그렇게 될 때에 고린도교인들의 신앙은 바울의 피땀어린 사도적 사역에 힘입은 것임(고전 4:4-10;11:1)을 암시한다.
=====1:15
#이 확신을 가지고 - 바울은 자신의 여행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하여 그의 신실성을 비난하였던 고린도인들에게 먼저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존경과 애정의 관계성을 확인시키고 있다. 바울과 고린도 교인 사이에 생겨난 모든 오해들은 이 전제를 토대로 하여 풀어져야 했다.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 `두 번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듀테란 카린'(* )에 대해서는 '두번째의 은혜'(a second benefit)로 해석하는 견해와(KJV, Barrett) '두번의 기쁨'(a double pleasure)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RSV, Moffatt, Harris). 전자를 주장하는 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고후 12:14을 보면 바울이 본절을 쓰는 시점 이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를 두 번방문하였으므로 전자의 견해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본절의 '먼저'라는 단어는 바울이마게도냐를 가기에 앞서 고린도를 방문할 것임을 시사하고 16절 내용 또한 마게도냐방문 전후에 각각 고린도 방문이 있을 것을 보여주므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바울은 마게도냐를 다녀가는 길과 오는 길에 두 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과 은혜와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1:16
#너희가 보내줌으로 - 여기에는 배에 승선하는 곳까지 동행해 준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가는 길에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이 자기와 함께 동행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Martin).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 '경영하였으니'(* , 불로메노스)는 '계획을 했다'는 뜻이다. 최종 목적지가 유대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한 헌금(롬 15:26;고전 16:3, 4)을 가지고 가려고 계획했음을 보여준다.
=====1:17
#경홀히 있었겠느냐 - 앞절에 언급된 바울의 여행 계획이 변경된 것에 대해 고린도교회의 바울 적대자들은 그것을 바울을 비난하는 빌미로 삼았다. 아마 그들은 바울이 진실되지 못하고 경솔하며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이다(12절).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이 자기에 대하여 그와 같이 비난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는 대적들의 비난과 중상(中傷) 가운데서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홀히'(* , 엘라프리아)란 말과 두 번 거듭 언급된 '예'(* , 나이),'아니'(* , 우)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적대자들의 비난에 대한 바울의 반박은 반어법적인 수사법으로 되어 있다. 바울의 어조를 살려 본문을 재해석하면,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경솔한 일이었습니까? 또는 인간적인 동기로 계획을 세워 편리할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려는 줄 압니까?"(공동번역)가 된다. 바울은 '육체'(*, 사륵스), 곧 자기 이익을 따라 임의로 계획을 변경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고 성도들의 유익을 구하였다(2:1-3;행 16:6;고전 16:7).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 '미쁘시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 )는 사업의 거래나 공적 의무의 수행에 있어서 `신실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란 뜻이다. 구약에서 '신실하신 하나님'(* , 하엘한네에만)은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명칭이기도 하다(신 7:9;사 49:7).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함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거하여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사2:2-4;눅 1:68-79;고전 1:9), 이것이 바울의 신실함의 근거가 된다면 그의 신실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울은 매우 효과적이고도 담대(膽大)하게 자신을 변증하고 있다.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은 그의 여행 계획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까지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13절).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그의 사역을 수햄함에 있어 매사에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신실함으로일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1:19
#실루이노 - 이는 '실라'(* )의 로마식 이름이다(살전 1:1).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자 중 한 사람이었고(행 15:22),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에 동참했던 동역자이자 친구였다(행 15:36-41).
#너희 가운데 전파된...예수 그리스도 -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가 고린도에 복음을 증거한 것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기간이었는데 먼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고(행 18:1-4),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나중에 합세하였다(행 18:5). 이들 세 사람은 고린도에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행 18:7-11).
#저에게는 예만되었느니라 - 바울과 실루아노, 디모데 세 사람의 삼중 증거에 의해 전해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결코 모순과 우유부단함과 이중성이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넨'(*)은 강조적 현재 완료형(Intensive Perfect)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현실로서 동일한 효력을 나타냄을 보여준다(Ha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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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서 선지자들이나 당신의 종들을 통해 주신 약속의 성취자이고(롬 1:3;갈 3:16). 이스라엘의 전역사가 지향해 온 목적을 완성하신 분으로 모두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이러한 사실은 구체적으로 예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실현되었고(눅 5:17-26;7:18-23), 성도들과 교회는 그것의 증거이다.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 '아멘'(* )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이루어 주소서'라는 의미를 갖는 말로 구약성경에서도 사용되었고(* ,'아멘', 신 27:15, 16;렘 11:5;시 41:13) 유대교를 거쳐 기독교에서도 예배시에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성도들의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가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처럼,성도들의 '아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된다. 바울의 헌신적인 사도적 수행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아멘'의 한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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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케 하시고 -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관계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세우신 분이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실진대,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욱 풀요롭게 하실 분이 하나님이실진대 양자 사이에 사소한 일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에 함축된 의미이다.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기름을 부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크리사스'(* )는 `기름을 붓다', '신성하게 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크리오'(* )에서 온 말로 구약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 크리스토스)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또한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을(선지자, 왕상 19:16;왕, 왕상 1:39;제사장, 출 29:7) 구별하여 소명을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 하나님께서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하는 것은 위의 두 경우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들의 기름부음 받음은 하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사명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음 즉 그리스도의 소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이나 개인적인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 확증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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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인치시고 - `인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사메노스'(*)는 '공문서의 효력을 보장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즉 이 인(印)은 봉인된 서류가 변조되거나 수송 중에 내용물이 변경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며 또한 소유권의 표시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성령으로 인치셨다는 것은 성도들을 당신의 소유로 확인하셨다는 것이며(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NIV)성도들에게 구원의 궁극적인 확실성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이다(엡 4:30).
#보증으로 성령을 -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라본'(* )은 히브리어 '에라본'(* )에서 유래한 상업적인 단어로(창 38:18) 어떤 물건을 매입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금의 총액 중 '첫번째 분납금'(down payment)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 보증금을 지불하셨다. 사람에게 있어서 계약을 체결하고 보증금을 지불하는 것이 반드시 소유를 확정지어 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형편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며 또 그 마음도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보증금을 지불하셨다는 것은 곧 그분의 완전한 소유(所有)가 되는 것을 뜻한다. 성도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것은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성령께서 증거하신다(롬5:5;8:9;갈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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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이 어떠했고 그 계획이 왜 바뀌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가(15-17절) 자신의 여행 계획이 근거하고 있는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자기의 진실성을 먼저 확인시킨 뒤(18-22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여행 계획을 재변경시킨 사유를 밝히고 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영혼을 걸고 거의 맹세에 가까운 표현으로 자신의 진실성을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가끔 그의 주장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는데(롬 1:9;빌 1:8;살전 2:5, 10), 이러한 문구는 당시 헬라 문학에서 사용되던 저주문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바울의 문구는 구약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맹세문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룻1:17;삼상 14:44;삼하 3:35). 여기서 바울이 감히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은, 맹세가 아니라 그의 전 생애가 하나님 앞에 밝히 드러나 있다는 그의 신앙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 바울이 계획을 바꾸어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결코 바울자신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다.
만약 바울이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이 본래의 계획대로 고린도를 찾아갔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마음 아픔뿐이었을 것이다(2:2, 3).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벌을 받아야 할 만큼 바울을 근심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2:5-7).바울은 그들을 징계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러기보다는 그들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2:7). 이것은 목회자로서의 바울이 매우 지혜롭고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린도의 문제 교인들은 바울의 인내와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왜곡(歪曲)하여 도리어 그를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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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주관하려는...기쁨을 돕는 자 - 여기에는 바울의 목회관이 나타난다. '주관한다'(* , 퀴리유오멘)는 것은 '지배한다'는 뜻이며(lord over, NIV), 이는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도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신앙적 기쁨을 위해 돕는 봉사자로 나아가기를 원했음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그의 신학적 이해가 깔려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신앙을 갖게 된 성도들에 대하여 일정한 사도적 권위를 가지기는 하지만(10:2-8;고전 5:4, 5;딤전 1:20), 궁극적으로 신앙인의 실존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만 규정된다고 보았다. 또한 신앙은 지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인 만큼 바울은 그들 스스로가 신앙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목회라고 보았다. 이처럼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육체적 이익을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의 주장이 어불성설(語不成說)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