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고전15..부활. 생명 주는 영.life-giving(quickening) spirit. 그리스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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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장  [310.아하나님의은혜로] 455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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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증인들]

....아마도 (사랑 충만한) 막달라마리아가 (가장 먼저 무덤을 홀로 찾아와...무덤 안치되었음을 확인한 후 이제 무덤을 찾아와서 향품 바르기로 셋 또는 네사람이 의견 일치를 보았고, 그런데  누가 돌문 열어줄꼬 걱정하며 향품 준비하였으리라) 돌문 열린 것 확인 -->일단 제자들에게 알림(베드로와 요한이 이를 확인하고 돌아감)-->한편, 막달라 마리아는<요안나, 살로메,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막16:1, 눅24:10..로 보이는> 여인들과 함께 <향품 바르려>무덤을 다시 방문 --->[무덤 속에서 천사를 만남] 세(두) 여인 먼저 돌아가고, <슬픔에 싸여>뒤에 처진 막달라 마리아는 비밀히 <홀로> 무덤안에서 두 천사와 부활예수를 함께 만남/갈릴리에서 보자는 구주의 전언을 받아 제자들에게로 돌아가면서 세(두) 여인을 만나서 힙류.-->이 사실을 돌아가고 있는 (반신반의하면서?) 세여인들에게 전언(그랬을 것으로 추측!!), 함께 제자들에게 구주 말씀<갈릴리에서 만나자>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구주를 (그들과 함께 막달라마리아는 다시 만났으며, 또 구주 말씀을 재차 들은 것임!!) 만나 경배하고 구주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함께 전함 ::: <눅24: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막16:1에서는 살로메로 지칭됨-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교제하심<눅24:13-35> 구주이심 깨닫고 돌아와 다락방에 합류하여 증언--->안식후 첫날<부활의날>저녁, <문이 닫힌> 마가 다락방에 나타나심<먼저 10제자>, 7일이 지난 두번째주일, <문이 닫힌 마가다락방에> 도마 포함 11제자에게 다시 나타나심.....::따로 추가<고전15:5-8>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의 날, 태어난 지 제8일 할례의 말, 안식일 다음날, 추수한 첫 곡식 한단을 요제로 드리는 날

<<요제의 날>>레23:10, 11, 15-[안식일 다음날...안식일은 제 7일째였기에 안식일 다음날은 이제 그 주간의 첫날이며, 동시에 새로운 부활 주님 안에서의 첫날이기도 함...이것이 요20에서 성취된 예언임]에,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요제(앞뒤로 흔듦..부활을 의미)로 드렸는데, 첫열매의 그 단은 부활 안에 첫 열매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음(고잔15:20, 23)  [--이에 반해, 거제란 위아레로 흔드는 동작으로서 승천하시는그리스도를 예표함]
<<할례의 날...창17:12>>...남아마다 태어난지 8일째에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음 :: 의미--천연적 출생의 옛창조를 끝내고 부활한 생명과 그 합당한 본성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골2:11, 12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우리는 모두 그분의 십자가로 할례받았음을 선언하고 있음.. 부활은 전적으로 새 창조 안에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공포하시려 의도하신 바임..


===그리스도의 부활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죽은 사람의 부활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몸의 부활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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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rinthians 15  Amplified Bible

==The Fact of Christ’s Resurrection

1 Now brothers and sisters, let me remind you [once again] of the good news [of salvation] which I preached to you, which you welcomed and accepted and on which you stand [by faith]. 

2 By this faith you are saved [reborn from above—spiritually transformed, renewed, and set apart for His purpose], if you hold firmly to the word which I preached to you, unless you believed in vain [just superficially and without complete commitment].

3 For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what I also received,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at which] the Scriptures [foretold], 

4 and that He was buried, and that He was [bodily]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at which] the Scriptures [foretold], 

5 and that He appeared to Cephas (Peter), then to the [a]Twelve.

6 After that He appeared to more than five hundred brothers and sisters at one time, the majority of whom are still alive, but some have fallen asleep [in death]. 

7 Then He was seen by James, then by all the apostles, 

8 and last of all, as to one [b]untimely (prematurely, traumatically) born, He appeared to me also. 

9 For I am the least [worthy] of the apostles, and not fit to be called an apostle, because I [at one time] fiercely oppressed and violently persecuted the church of God. 

10 But by the [remarkabl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ward me was not without effect. In fact, I worked harder than all of the apostles, though it was not I, but the grace of God [His unmerited favor and blessing which was] with me. 

11 So whether it was I or they, this is what we preach, and this is what you believed and trusted in and relied on with confidence.

12 Now if Christ is preached as raised from the dead, how is it that [c]some among you say that there is no resurrection of the dead? 

13 But if there is no resurrection of the dead, then not even Christ has been raised; 

14 and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then our preaching is vain [useless, amounting to nothing], and your faith is also vain [imaginary, unfounded, devoid of value and benefit—not based on truth]. 

15 We are even discovered to be false witnesses [misrepresenting] God, because we testified concerning Him that He raised Christ, whom He did not raise, if in fact the dead are not raised. 

16 For if the dead are not raised, then Christ has not been raised, either; 

17 and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your faith is worthless and powerless [mere delusion]; you are still in your sins [and under the control and penalty of sin]. 

18 Then those also who have fallen asleep in Christ are lost. 

19 If we who are [abiding] in Christ have hoped only in this life [and this is all there is], then we are of all people most miserable and to be pitied.

==The Order of Resurrection

20 But now [as things really are] Christ has in fact been raised from the dead, [and He became] the first fruits [that is, the first to be resurrected with an incorruptible, immortal body, foreshadowing the resurrection] of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in death]. 

21 For since [it was] by a man that death came [into the world], it is also by a Man tha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has come. 

22 For just as [d]in Adam all die, so also [e]in Christ all will be made alive. 

23 But each in his own order: Christ the first fruits, then those who are Christ’s [own will be resurrected with incorruptible, immortal bodies] at His coming. 

24 After that comes the end (completion), when He hands over the kingdom to God the Father, after He has made inoperative and abolished every ruler and every authority and power. 

25 For Christ must reign [as King] until He has put all His enemies under His feet. 

26 The last enemy to be abolished and put to an end is death. 

27 For He (the Father) has put all things in subjection under His (Christ’s) feet. But when He says, “All things have been put in subjection [under Christ],” it is clear that He (the Father) who put all things in subjection to Him (Christ) is excepted [since the Father is not in subjection to His own Son]. 

28 However, when all things are subjected to Him (Christ), then the Son Himself will also be subjected to the One (the Father) who put all things under Him, so that God may be all in all [manifesting His glory without any opposition, the supreme indwelling and controlling factor of life].

29 Otherwise, what will those do who are being [f]baptized for the dead? If the dead are not raised at all, why are people even baptized for them? 

30 [For that matter] why are we [running such risks and putting ourselves] [g]in danger [nearly] every hour [if there is no resurrection]? 

31 I assure you, believers, by the pride which I have in you in [your union with] Christ Jesus our Lord, I die daily [I face death and die to self]. 

32 What good has it done me if,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I [h]fought with wild animals at Ephesus? If the dead are not raised [at all], let us eat and drink [enjoying ourselves now], for tomorrow we die. 

33 Do not be deceived: [i]“Bad company corrupts good morals.” 

34 Be sober-minded [be sensible, wake up from your spiritual stupor] as you ought, and stop sinning; for some [of you] have no knowledge of God [you are disgracefully ignorant of Him, and ignore His truths]. I say this to your shame.

35 But someone will say, “How are the dead raised? And with what kind of body will they come?” 

36 You fool! Every time you plant seed you sow something that does not come to life [germinating, springing up and growing] unless it first dies. 

37 The seed you sow is not the body (the plant) which it is going to become, but it is a bare seed, perhaps of wheat or some other grain. 

38 But God gives it a body just as He planned, and to each kind of seed a body of its own [is given]. 

39 All flesh is not the same. There is one kind for humans, another for animals, another for birds, and another for fish. 

40 There are also heavenly bodies [sun, moon and stars] and earthly bodies [humans, animals, and plants], but the glory and beauty of the heavenly is one kind, and the glory of the earthly is another. 

41 There is a glory and beauty of the sun, another glory of the moon, and yet another [distinctive] glory of the stars; and one star differs from another in glory and brilliance.

42 So it is with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he [human] body that is sown is perishable and mortal, it is raised imperishable and immortal. 

43 It is sown in dishonor, it is raised in glory; it is sown in weakness, it is raised in strength; 

44 it is sown a natural body [mortal, suited to earth],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immortal, suited to heaven]. As surely as there is a physical body, there is also a spiritual body. 

45 So it is written [in Scripture],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an individual);” the last Adam (Christ) became a life-giving spirit [restoring the dead to life]. 

46 However, the spiritual [the immortal life] is not first, but the physical [the mortal life]; then the spiritual. 

47 The first man [Adam] is from the earth, earthy [made of dust]; the second Man [Christ, the Lord] is from heaven. 

48 As is the earthly man [the man of dust], so are those who are of earth; and as is the heavenly [Man], so are those who are of heaven. 

49 Just as we have borne the image of the earthly [the man of dust], [j]we will also bear the image of the heavenly [the Man of heaven].

==The Mystery of Resurrection

50 Now I say this, believers, that flesh and blood cannot inherit nor be part of the kingdom of God; nor does the perishable (mortal) inherit the imperishable (immortal). 

51 Listen very carefully, I tell you a mystery [a secret truth decreed by God and previously hidden, but now revealed]; we will not all sleep [in death], but we will all be [completely] changed [wondrously transformed], 

52 in a moment, in the twinkling of an eye, at [the sound of] the last trumpet call. For a trumpet will sound, and the dead [who believed in Christ] will be raised imperishable, and we will be [completely] changed [wondrously transformed]. 

53 For this perishable [part of us] must put on the imperishable [nature], and this mortal [part of us that is capable of dying] must put on immortality [which is freedom from death]. 

54 And when this perishable puts on the imperishable, and this mortal puts on immortality, then the Scripture will be fulfilled that says, “Death is swallowed up in victory (vanquished forever). 

55 O death, where is your victory? O death, where is your sting?” 

56 The sting of death is sin, and the power of sin [by which it brings death] is the law; 

57 but thanks be to God, who gives us the victory [as conquerors]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58 Therefore, my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be steadfast, immovable, always excelling in the work of the Lord [always doing your best and doing more than is needed], being continually aware that your labor [even to the point of exhaustion] in the Lord is not futile nor wasted [it is never without purpose].

==Footnotes

1 Corinthians 15:5 A title referring to the original disciples chosen by Jesus (including Judas). A few hours after betraying Jesus, Judas committed suicide (Matt 27:5) leaving only the eleven (Matt 28:16; Mark 16:14; Luke 24:9, 33).

1 Corinthians 15:8 Paul’s life-changing encounter with the resurrected Christ occurred on the road to Damascus (Acts 9).

1 Corinthians 15:12 Perhaps these were converted Sadducees, who as a sect denied the possibility of a resurrection (Acts 23:8).

1 Corinthians 15:22 Because of our physical nature as descendants of Adam.

1 Corinthians 15:22 Because of our spiritual nature as born-again believers in Christ.

1 Corinthians 15:29 This has nothing to do with Christian baptism or salvation. Paul may be referring to the practices of a pagan religion that required a ritual washing to enter an afterlife.

1 Corinthians 15:30 Paul’s life was continuously threatened because of his public commitment to Christ.

1 Corinthians 15:32 This may refer figuratively to the furious crowd that rose up against Paul in Ephesus, rather than to literal animals (Acts 19:23-41).

1 Corinthians 15:33 Paul quotes this one verse maxim from the writings of the Greek dramatist Menander (342-291 b.c.). “Bad company” in this case undoubtedly refers to the teachers who were denying the truth of the resurrection. 

1 Corinthians 15:49 Two early mss read “let us al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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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장 (개요)

본장에서 바울은 기독교의 중대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즉 죽은 자의 부활이다.

Ⅰ. 우리 구주의 부활의 확실성(1-11).

Ⅱ.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주장을 논박함(12-19).

Ⅲ. 우리 구주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확립하고 다른 사고 전개로써 고린도 교인들에게 확신시킴(20-34).

Ⅳ. 부활의 반대론자에 대한 답변, 부활 때에 성도의 변화에 대하여(35-50).

Ⅴ. 마지막 나팔 소리에 일어날 변화와 의인이 사망과 무덤을 극복하고 획득할 완전한 승리(51-57).

Ⅵ. 기독교인들의 충성을 권면한다. 영광스러운 상을 받기 때문이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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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고전 15:1-11)

바울은 이 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얼마가 완전히 부인한 죽은 자의 부활의 교리를 주장하고 확립시킨다(12절). 

그들이 후메네오와 빌레도와 같이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여 부활의 교리를 은유로써 해석했거나 혹은 부활은 생명의 다른 과정에 불과하다고 말하거나 혹은 이성과 과학에 모순되어 불합리하다고 버렸거나 아뭏든 부활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미래의 보상을 부인하였다. 

이방인이나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 부활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나 계시에 의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나 분명하게 발견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우기 이 교리는 너무나 중요한 교리인 것이다. 

바울이 이 진리에 대하여 확신시킬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부활의 진리가 흔들리면 기독교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시작한다. 이 터전 위에 죽은 자의 부활이 되어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신령한 진리는 상호의 연관에서 관찰될 때에 증거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기초가 튼튼하면 위의 건물이 안정된다. 복음에 대하여 관찰하여 보자.

Ⅰ. 바울은 복음을 강조한다(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하며 강조한다.

1. 그것은 그가 계속적으로 일관되게 전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yes)이고 아니요(no)가 아니다. 바울은 같은 복음을 전하였고 같은 진리를 가르쳤다. 이 점에 대하여 그는 그들에게 호소할 수가 있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무흠한 교사들은 자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모순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이 지금까지 가르친 교리를 계속 가르치는 것이다.

2. 그것은 그들이 받고, 믿고, 전한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신앙을 확신하고 마음으로 믿었고 입으로 증거했던 것이다. 그것은 낯선 교리가 아니다. 복음은 그들이 지금까지 굳게 서고 계속 서야 할 터전이다. 이 진리를 버리면 서야 할 땅이 없고 신앙의 근거가 없어진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기초이다. 이 기초를 제거하면 전체의 구조가 무너지고 영원에 대한 소망이 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환란 날에 굳게 서고 하나님에게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이 진리를 고수함에 있다.

3. 그들이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복음때문이다(2절). 

왜냐하면 "다른 이름으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으니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을 받을 다른 이름이 천하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에 입각하지 않고는(!!) 그의 이름에 구원이 없다. 이것들이 우리의 거룩한 신앙을 구원하는 진리이다. 

우리 구속자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사망에 대한 그의 정복이 우리의 영적 생활과 소망의 근원이다. 이제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관찰하여 보자.

(1) 이 진리들은 마음에 간직하고 고수해야 한다(히 10:23).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 다음을 주목하자. 

만약 우리가 구원되려면 복음의 진리를 우리 마음에 고정시키고 생각에 결단하고 끝까지 지탱하며 굳게 잡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에 주의하지 않고 그 능력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최후까지 견디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2)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이루시고 베푸사 깨닫게 하신, 복음에 계시된 교회, 믿는 이 각자의 인생 가치, 목적과 목표로서]목적을 믿음에 있어서 끝까지 계속적으로 (살아 생동하는, 발휘되는 능력 충만함의 믿음, 부어주신 아가페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안에서 그리스도를 누리고 전파하며 굳게 섬으로써) 인내하지 않으면 헛되게 믿는 것이다. 일시적인 믿음은 유익하지 못하다. 불신으로 떨어져 더 큰 악을 범하게 된다.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면 기독교를 헛되게 고백하는 것이다. 부활을 부인하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고 믿음과 소망의 여지가 없게 된다.

Ⅱ. 이 복음이 무엇인지 관찰하자. 바울은 이것을 그렇게나 강조한다. 

그가 받고 무엇보다 먼저(엔 프로토이스, 15:3) 즉 "첫째로 그리고 주로" 전한 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이 첫째이며 가장 필요한 진리의 교리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즉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그를 믿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희생제물로 내어 줌이 되고 그들을 위하여 용서를 얻어 하나님에 의하여 용납되었음을 보이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진리의 총합이며 실체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영적 생활이 일어나고 여기에 우리의 영생의 기초를 두어야 한다.

Ⅲ. 이 진리가 어떻게 확립되는가 관찰하자.

1. 구약의 예언에 의하여서이다. 그는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성경에 의하여 성경의 예언대로 그리고 성경의 예표(type)대로 장사되고 죽은 자에서 살아나셨다. 

그러한 예언은 다음과 같다. 시편 16장 10절, 이사야 53장 4-6절, 다니엘 9장 26,27절, 호세아 6장 2절이다. 

그러한 예표는 요나(마 12:4)와 이삭이며 이삭은 바울에 의하여 대표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느니라(히 11:19). 

다음을 주목하자. 구약의 예언과 예표가 어떻게 응하였는지를 아는 것은 복음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립하는 좋은 증거이다.

2. 많은 실제로 본 자들의 증거에 의함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에 그를 보았다. 바울은 자신의 것을 제외하고 다섯 경우를 듣다. 

"그리스도는 게바 또는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 비록 유다는 그들 중에 없었지만 열 둘이라고 불리어진 것은 이것이 그들이 늘 사용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때에는 얼마는 이미 잠을 자고 있었으나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살아 있었다. 이것은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이다(마 28:10). 

그 후에 야고보 혼자에게 보이시고 그리고 승천하실 때에 열두 사도에게 보이셨다. 이것은 감람산에서 있었다(눅 24:50). 사도행전 2장 2절과 5-7절을 비교하라. 다음을 주목하자. 그렇게나 많은 눈이 그렇게나 많은 다른 시간에 보았으며 한 제자의 연약함을 기쁘게 받아 주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져보도록 허락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분명한 일인가! 

이 진리를 확신시키고 전하기 위하여 귀한 모든 것을 희생하고 굳게 선 성도들을 믿기 위해서 다른 이유를 구해야 하겠는가!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를 본 은혜를 입었다. 구주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사도의 한 직책이었다(눅 24:48). 

바울이 사도직을 받았을 때에도 이 증거를 맡게 되었다고 주 예수께서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나타나셨다. 사도행전 9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은혜를 언급하면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겸손한 언급을 한다. 바울은 하나님에 의하여 크게 은혜를 입었으나 항상 자기를 낮추고 그렇게 표현하기에 노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였다(8절). 유산된 자이며 때에 맞지 않게 죽어서 태어난 자(에크트로마, 1626)였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이 개인적인 교제를 가진 것과 같은 성숙한 사도직을 가지지 못하고 마치 갑자기 새로 탄생한 새로운 탄생을 닮은 것 같다.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교제를 가질 수 없을 때에 사도직를 받았다. 그는 주님을 알지도 따르지도 못했다. 이것이 바울이 겸손한 자리에 서야 할 이유였다.

(2) 자기 자신이 다른 사도보다 열등하다고 자백한다.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가장 적은 자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서 맨 나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직이나 사도의 칭함을 받을 자격이 없다"(9절). 

다른 곳에서 바울은 진정으로 "가장 큰 사도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고후 11:5) 우리에게 말한다. 

은사나 은혜나 봉사나 고통 그 무엇에 있어서 어떠한 사정이 그를 비천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다음을 주목하자. 높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정신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 그의 장점을 더욱 나타나게 만든다. 

바울을 겸손하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핍박한 그의 악함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최대의 악에서부터 최대의 선을 얼마나 쉽게 만들어 내는가! 죄인들이 성자들로 될 때에 그들의 과거의 죄가 유용하도록 만들어진다. 

즉 그를 겸손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만든다.

(3) 바울은 그에게 가치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10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다"라고 말하심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요 그의 은혜로 만들어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이 원천에서 나왔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항상 겸손하고 감사하였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하여야 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울은 그의 근면과 열심과 봉사를 알았으나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 생각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 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헛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신령한 본질을 사랑하고 연단하고 사용해야 한다. 

바울은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렇게 노력하고 그렇게나 성공했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한없고 과분한 은총을 찬양했다. 겸손한 심령은 은혜로운 심령이다. 교만이 정복된 곳에 은혜가 넘침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말한 후에 바울은 그의 본론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11절). 

바울이 같은 복음을 모든 때에 모든 장소에서 전한 것은 물론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가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베드로나 바울이나 어떤 다른 사도가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더라도 모두가 같은 진리를 주장하고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같은 교리를 전파하고 같은 증거로 확신시켰다. 모두가 이 점에 있어서 같다. 즉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총합이며 본질이다. 

모든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믿는 데 한 마음이다. 이 믿음으로 살고 이 믿음에 의하여 그들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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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부활(고전 15:12-19)

우리 구주의 부활 진리를 확립한 후에 바울은 부활이 없다고  교인들에게 논박을 가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 

이 절과 논술의 과정으로 보아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공통적인 감정이었다. 

이에 반대하여 바울은 반대할 수 없는 사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시한다. 바울은 그들의 주장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들어 논박하기 시작한다.

Ⅰ.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13절). 

그리고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다시 생명으로 회복될 수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을 것이요(16절).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할 것이 구약 예언에서 예언되고 그가 부활한 것을 많은 눈이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예언하고 지금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을 있을 수 없다고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이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Ⅱ. 그렇게 되면 복음의 전파와 믿음이 헛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14) 

이 가정이 인정된다면 기독교의 주요한 증거를 파괴할 것이다. 그래서

1. 전도를 헛되게 한다. 

"우리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증인으로 자처하고 이 진리의 확립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나 그러나 속이는 자요 거짓말하는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사실에 있어서 거짓된 것을 주장하며 공포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 건전한 터전 위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무슨 목적을 위하여 이 어렵고도 모험적인 봉사를 수행하겠는가?  무엇을 위하여 전도하며, 우리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생의 기대도 저 생의 소망도 가지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일어나시지 않았다면 복음은 껍질이며 공허이다."

2. 이 가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목사들의 노력을 헛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7절), 

죄와 죄의 정죄 아래에 있다. 왜냐하면 용서가 주어짐은 그의 죽음과 죄에 대한 희생의 댓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없이는 결코 죄 사함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다시 살아나심이 없이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고 생명을 잃어버린 채로 그냥 있다면 그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었다는 진리말씀에 대해 무슨 증거가 있겠는가? 그가 여전히 사망 권세 아래 있다면 그 무엇이 어떻게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겠는가? 

이와 같이 가정한다면 그를 믿는 신앙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겠는가! 그러기에 우리의 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가 반드시 살아나셔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의도 구원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아직 죽은 자 가운데 있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헛 것이 된다.

Ⅲ. 이 가정에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모순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다"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믿고 잠든 그들은 결코 일어날 수 없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위하여 죽었던 자라도 잃어버린 바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부활을 부정하는 고린도 교인들은 육체의 부활/재생은 물론 미래의 심판도 부인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사망으로 인해 육체의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이 영원히 파멸되고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그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며 죽은 후에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가정에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맏든 자들의 완전한 상실을 추론하지 않았을 것이다. 육체가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초월적 소망은 이땅에만 국한시키게 된다. 

"너희의 생각대로 부활이 없다면, 내생이 없다면 죽은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상실한 자가 되고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얼마나 공허하게 될 것인가!"

Ⅳ.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목사나 종들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19절). 

이것이 또한 부활이 없는 또 다른 모순이 된다.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상태가 더욱 다른 사람보다 나쁠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믿는 사람은 그에 의한 구원과 구속을 희망한다. 

그러나 부활이 없고 고린도에서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는 장래의 보상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소망은 이생에 제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이생에 제한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욱 비참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서신은 쓰던 그 때의 환경에서는 세상의 지배자들의 보호도 지지도 받지 못했다. 다만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을 뿐이었다. 

전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이생에 있어서만 그리스도에게 소망이 있었다면 그들의 생은 고난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미움을 받고 추격을 받고 비난을 받으며 모든 세상의 안락을 박탈당하고 모든 형태의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 더 어려운 길로 다녀야 하고 그러면서 밝은 소망도 없다. 

이보다 더 모순된 일이 있겠는가? 원수들보다 더 나쁜 상태에 영원히 버려 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겠는가? 

부활이 없거나 내세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큰 모순일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 너머에는 소망이 없고 기독교인을 가장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참으로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죽고 다른 세상을 소망하며 살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육체의 쾌락은 무의미한 것이며 영적이며 하늘의 기쁨이 그가 열망하는 것들이다. 

이 세상의 쾌락도 없고 더 좋은 세상을 소망하지 못하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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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순서와 상태(고전 15:20-34)

이 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죽은 자들의 부활의 진리를 확립한다.

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1. 그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20절). 

그리스도는 자신을 일으키셨고 바로 이런 면에서 그 안에서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로 일어나셨다. 

유대의 추수가 첫열매를 바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처럼 그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확실성이 있다. 첫 열매가 거룩한 즉 떡 전체가 거룩하게 된다(롬 11:16).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그리스도의 전 몸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보장된다. 그리스도가 일어났던 것처럼 그들이 일어날 것이다. 

첫 열매가 거룩하여 전체의 떡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자기만을 위하여 부활하심이 아니요 몸인 교회의 머리로써 부활하셨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다음을 주목하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보증이요 약속이다. 왜냐하면 그가 일어나심으로 우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덩어리의 한부분이며 첫 열매의 용납과 은총에 참여한다. 이것이 부활의 진리에 대한 바울의 첫 논술이다.

2.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병행으로 설명한다. 

사람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므로 사람으로부터 구원이 오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즉 모든 사람이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21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첫째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게 되고 같은 죄의 성질을 가졌던 것같이 그리스도의 공로(공적merit)과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성령에 참여하고(partake of the Spirit) 영적 본성(the spiritual nature), 재생(revive)하여 불멸(immortal)에 있게 된다. 죽는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로 죽는다. 바로 그렇게 살아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공로(공적merit)과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외 없이 다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의 논지는 일반적 의미에 제한한다. 

그리스도는 첫 열매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그에게 붙은 자"가 일어나게 된다(23절).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사람은 모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사망이 첫째 아담 때문일 것같이 부활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통하여 사망이 왔고 사람을 통하여 구원이 왔다. 첫째 아담이 그의 후손을 파멸시킨 것같이 둘째 아담이 그의 씨를 영광의 영생으로 회복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 같다.

3. 바울은 논술을 그만 두기 전에 부활에는 질서가 있을 것임을 천명한다. 

정확하게 어떻게 될 것인가는 말하여지지 않으나 다만 질서가 있음을 말한다. 

아마 가장 높은 지위와 가장 훌륭한 봉사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무서운 악과 죽음을 당한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 때에도, 그분의 부활능력으로 인해 자던 성도들 중 몇몇이 일어나서 예루살렘 성중에 자신을 드러냈었다는 기록이 복음서에 기술되어 있지만, 그들은 다시 죽었거나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가시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 즉, 꼭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비가시적으로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했을 수도 있다!]... 

부활순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자는 자들인) 첫째 열매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의 붙은 사람들이 다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사람의 부활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그리스도는 영생 하나님의 참생명, 부활생명 그 자체이시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산 사람들은 전체의 떡덩이가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예루살렘에 (직접)올라가서 첫 열매들을 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순절과 봉헌제에 바칠 때까지 (따로)구별하여 드었다가 그 절기에 올라가서 바치도록 하였었다. 민수기 26장 2절에 대한 패트릭 주교(Bishop patrick)의 말을 참고하라. 첫 열매들의 헌납은 전체의 떡덩이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추수하기 전에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바치기 위하여 구별하였다가 그 후에 바치더라도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도가 그리스도 부활승천에 앞서서 부활있었더라도(혹시 그리하였었더라도 다시 죽었거나 승천하였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들의 부활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들이 부활하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참생명으로서, 그들의 부활의 기초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임을 주목하자.

Ⅱ. 바울은 그리스도의 모든 원수가 파멸되고 마지막 사망이 파멸될 때까지 중보적 왕국의 계속에서부터 논한다(24-26절).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부활 때에 왕국이 부여되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의 손에 주어졌다"(마 28:18).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빌 2:9-11). 이 왕국의 통치는 모든 적대하는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모든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라"(24,25절). "맨 나중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26절)

1.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점이 있다.

(1) 우리의 구주는 모든 권세를 손에 넣고 중보자로서 왕국을 소유하고 다스리시기 위하여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셨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

(2) 이 중보적 왕국은 끝이 있다. 

하나님이 백성을 완전하게 보호하고 모든 원수를 정복할 때까지이다. "그 때에 끝이 오리니"(24절) .

(3) 모든 적대하는 원수들이 완전히 정복하고 굴복시킬 때까지는 끝이 오지 않는다(24, 25절).

(4) 다른 원수 중에서 사망이 파멸되고 버려져야 한다(26절). 

모든 사람에 대한 사망의 능력이 취소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바울은 밝히 말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일어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망과 무덤이 그들을 지배하고 우리의 구주인 왕의 권능이 그 백성의 마지막 원수를 지배하여 그 힘을 파멸시키지 못할 것이다. 성도들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사망은 취소되지 않는다. 때가 차서 중보적 왕국이 바쳐질 때에 일어난다. 

성도들은 다시 일어나서 죽지 않는다. 이것이 논지의 범위이다.

2. 바울은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암시를 주고 있다.

(1)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로서 우리 구주는 위임된 왕국을 가진다.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27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권세는 위임된다. 

비록 그의 중보가 하나님의 성격을 가정하지만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성격을 밝히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사람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성질을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위탁과 권능을 받는다. 

아버지는 전체의 섭리 중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낸다. 인간이 된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대리자로 나타난다. 

하나님으로서 그에게 속한 피조물에 대한 영원한 지배가 아니고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중보자로서 그에게 위탁된 왕국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 후에 아버지와 함께 왕위에 앉으셨다(계 3:21). 그래서 예언이 이루어졌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6). 이 의미는 신약에서 여러 번 나타났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막 16:19; 롬 8:34; 골 3:1), 권능자의 우편에 앉으시다(막 14:62; 눅 22:69).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다(히 12:2).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8:1). 

이 자리에 앉으심은 중보적 권능과 왕국을 가지는 것으로 그의 승천 때에 이뤄졌다(막 16:19). 이것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낮아짐과 인간이 되심과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한 댓가라고 말하여진다(빌 2:6-12). 

승천하실 때에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를 다스리고 보호할 능력을 가지시고 모든 원수를 파멸하고 구원을 완성하실 때까지 수행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근원적이고 무한한 권력이 아니다. 특별한 목표를 위하여 제한된 권력이다. 

권력을 가지신 그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으로 행동하시지 않고 중보자로서 행하며 거역을 받은 하나님으로서가 아니고 거역한 피조물을 위한 중재로서 행동하신다. 하나님으로서 지배하실 수 있으나 중보자로서 위임된 권력을 사용하신다.

(2) 위임된 왕국은 마침내 아버지께 바쳐진다(24절).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한 표를 위하여 받은 권력이며 교회의 모든 원수가 영원히 멸망될 때까지 교회의 성도를 다스리고 보호할 권력이기 때문이다(25,26절). 

이 목표가 달성되면 그 권력과 권위가 필요없게 된다. 구속자는 교회의 원수가 멸망하고 교회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지배하신다. 

이 목적이 달성되면 이 목적으로 받은 권력을 돌리신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서 영광된 교회를 영원히 다스리신다.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라"(계 11:15).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로다"(눅 1:33).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라"(단 7:14)(막 4:7 참조).

(3) 구속자는 그의 성도의 마지막 원수가 멸망하고 사망이 없어지고 성도가 재생하여 완전한 생명을 얻어 다시 죽을 위험이 없을 때까지 다스리신다. 

그때까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 그가"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고 우리를 생각하시는 그가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 즉었던 그가 영원히 사시고 통치하신다.

(4)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28절). 

이 의미는 그의 왕국에서 그러한 권위로써 통치하시던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바칠 때에 아버지께 복종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인간성은 영광스러운 피조물이 끝나는 것이다. 이것은 왕국이 바쳐질 때에 나타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며 우리 구원의 완성은 전연 하나님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만 명예롭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인간이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행위이며 우리의 눈에 기적임을" 주목하자.

Ⅲ.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의 경우에서 부활을 증거한다(29절). 

[[그리스도를 믿었으되 세례없이 (갑자기)죽은 자들로 이해함이 가장 타당하다...이들의 부활을 고대하면서 산 자들이 (죽은자들을 위해 대신) 세례받았던 일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만일 죽은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한다면 그들이 (대신 세례받는 그 일은 도대체) 무엇을 위함인가? 그들의 (대신 받은 바) 그 세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 

세례를 지지해야 하느냐 버려야 하느냐? 만일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면 어찌 그들이 세례를 받겠는가?(휘페르 톤 네크론) 

죽은 자들을 위한 이 세례가 무엇일까? 바울의 논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보편적인 결론인가, 혹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특수한 사람에 대한 것인가? 

관사를 제외하면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석가들에 의하여 세 가지의 세 곱보다 더 많은 의미가 부여되는 이 모호한 귀절을 누가 해석할 수 있겠는가? 

세례의 뜻이 무엇인지 혹은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 쓰였는지 비유적으로 사용하였는지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 쓰여졌다면 그리스도인의 고유의 세례인지 혹은 다른 세례식인지도 모른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무슨 의미로 ‘휘페르’ 이라는 전치사가 사용되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죽은 자가 우리의 주님 자신이라고 이해한다. 앞에서 언급한 휘트비(Whitby)를 참고하라. 

만일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으면 죽은 자 가운데에 남아있는 죽은 구주의 이름으로 누가 세례를 받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톤 네크론’ 가 한 사람의 죽은 자를 의미한다는 유일한 예이다. 그것은 그 말들이 다른 곳에서는 가지지 않는 한 의미이다. 

세례받은 자들(호이 밥티조메노이)은 그대로 두고, [만일 '죽은자들(호이 네크로이)'이란 단어가 우리 구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그들이 위하여 댜신 세례받는다 함은 일반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점은 순교자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왜 순교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는가? 이것은 때때로 옛 사람들에 의하여 피의 세례라 불리어졌고 우리 주님에 의하여는 막연한 세례라 말하여졌다(마 20:22; 눅 12:50). 그러나 무슨 뜻으로 순교당하여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초대 교회 시대에 세례없이 죽는 자들의 이름으로 어떠한 사람을 세례 주는 한 관습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관습이 그 당시에 다소간에 행해지고 있었으며, 바울도 이를 혐오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언급했으리라고도 본다. 

어떤 이들은 그 당시에 지켜오던 습속중 하나로서 죽은 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들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바울의 말하는 의미에 가깝다고 보기는 하나 그러한 행위가 사도 시대에 흔히 용인된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위하여 죽은 자들의 이름이나 정절을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확실히 어떤 이들이 이것을 지킴으로써 기독교인으로 개종되었다. 

만약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 그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살아나지 못하면 이런 동기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헛 것이 된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 당시에 많은 핍박을 받지 않았고 순교의 일들이나 순교자들의 확고한 신앙에 의하여 개종하는 자들도 보지 못했다. 

‘호이 네크노이’는 너무나 일반적인 표현이므로 순교자들만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더 확대시켜 보자면  ‘호이 네크노이’ 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갑자기, 돌연하게] 옮기어진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예를 들자면, "너희중에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11:30) 주의 식탁에서 무질서하게 행했기 때문이다. [주의 식탁에서 무절제하게 행함으로써 죽은 자들 발생한] 이 일은 그들 중 얼마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 효과는 흡사 기적적인 지진이 간수를 개종시킨 일과 같다. 행 16장 29, 30절을 참고하라. 

그 어떤 경우라도, 죽은자를 위해 [대신] 세례를 받는 사람은 죽은 자를 위하여(동시에 자기를 위하여) 세례를 받았다고(또한 참 기독교인으로서) 말하여질 수 있다. 죽은 자들과 세례를 받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은 서로 부합한다. 

우리는 이런 다양한 가정 위에서 추측할 따름이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이 무엇을 하며 어찌하여 세례를 받았겠는가?" 

이들이 현명하고 옳게 행하였다고 너희들은 생각한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빨리 죽은 그들이 저편의 소망을 가지지 않겠는가? 

이 의미가 옳은지 혹은 다른 의미인지 모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전혀 지장없이 이해되었던 것 같다.

Ⅳ. 바울은 이 가정에 대하여 자신의 행위와 다른 그리스도인의 행위에서 오는 모순으로 주장한다.

1.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은 위험을 당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30절).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릎쓰리요. 왜 우리가 계속적인 위험을 당하겠는가 더욱 더 사도들인 우리가 그러할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위험하며 더욱 더 전도자와 사도가 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위험한 일이었다. 사도는 말한다. 

"이제 우리가 죽은 뒤에 소망이 없고 우리가 온전히 죽고 재생하지 못하면 이 위험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를 처음 증거할 때에 따를 위험 때문에 이생의 저 너머에 소망이 없음은 어리석은 고백일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이생의 모든 복과 안락을 다 바치고 모든 악을 당하며 장래의 보장도 가지지 못하는 일이 된다. 

이것이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는 기독교인에게 적당한 신앙의 성격이겠는가? 바울은 주장을 밝힌다. 

"내가 날마다 죽는 것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너희의 기쁨과 기독교의 모든 위로와 거룩한 믿음의 도움으로 증거하노라"(31절). 

바울은 죽음의 계속적인 위험 가운데 있었고 그의 손에 목숨을 들고 다녔다. 이 생명 뒤에 소망이 없다면 어찌하여 이렇게 자신을 내어 놓을까? 

죽음을 바라보면서 소망 없이 사는 것은 낙담스럽고 위로가 없으며 우울한 삶임에 틀림 없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극단적인 약함을 당하게 된다. 바울을 큰 어려움과 사나운 원수들을 당하였다.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32절). 사나운 무리들에 의하여 찢기고 데메드리오와 다른 직공들의 소동을 당할 위험에 있었다(행 19:24). 어떤 이들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짐승들과 싸웠다고 해석한다.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당한 일로 이해한다. 니케포러스(Nicephorus)는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말하고 짐승들이 바울에게 접근했을 때에 유순한 기적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나 특별한  시험과 환경을 누군가 빼놓고 바울 자신이 그의 고난을 상세히 말할 때에 간과할 이가 없다(고후 11:24 참고). 그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다섯 번 매맞고 세 번 막대기로 맞고 한 번 돌로 침을 당하고 세 번 풍랑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 짐승과 싸웠다고 언급하지 않았음은 이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짐승들과 싸움은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의 짐승은 사나운 야생과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바울은 말한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지 않으면 이러한 싸움에서 내가 무슨 유익을 가지겠는가? 죽은 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찌하여 내가 매일 죽으며 난폭한 손에 의하여 죽을 위험을 당하는가? 그리고 죽은 후에 멸망한다면(post mortem nihi), 그 후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불쌍한 일이 있겠는가?" 

바울이 그렇게나 무식했을까? 바울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도록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여지를 주었던가? 죽는 것이 그에게 큰 유익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바울이 그의 생명을 던졌을까? 죽은 후에 보다 더좋은 생이 있다는 생각 외에 그 무엇이 이생의 사랑을 버리게 하겠는가? 

"죽은 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울이 그러하였고 우리의 주님이 그러했다(히 12:2). 우리들도 그들의 본을 받도록 명령을 받고 우리의 열매를 거룩하게 바쳐 우리의 목표가 영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요 우리 영혼의 구원이다(벧전 1:9).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2. 둘째의 모순은 이생의 안락을 취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 되는 것이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32절). 식도락자가 되자. 선지자 이사야의 22장 13절에 그렇게 나타난다. 짐승같이 죽으면 짐승같이 살도록 하자. 이것이 죽은 후에 부활이 없다면 생의 쾌락을 포기하고 생의 모든 비참함을 당하여 잔인하게 죽는 것보다 현명한 일일 것이다. 

이 귀절은 분명히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린도 교인 중에서 부활을 부인한 사람은 사두개인이며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행 23:8). 이다. 즉 인간은 육체이며 육의 것을 살릴 아무것도 없으며 죽으면 다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사두개인들에 대하여 반대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주장이 아무런 힘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다시 살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살리면 유익하기 때문이다. 아니 마음이 천국의 영광과 행복의 주된자리이며 주체이다. 만일 사후의 소망이 없다면 현명한 사람은 바울이 산 비참한 생애보다 안락한 생애를 더 좋아하지 않겠는가? 아니요 가능한 한 이 생애를 즐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생애는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생후의 소망보다 아무 것도 이 생애의 안위와 쾌락을 무시할 수 없게 하고 가난과 경멸과 비참과 죽음을 사랑할 수 없게 한다. 

사도들과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았다. 만일 그들이 자기를 속이고 허망하고 헛된 소망으로 세상을 버렸다면 그들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Ⅴ. 바울은 주의와 격려와 책망으로 그의 주장을 끝맺는다.

1. 나쁜 사람과 타락한 생활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위험한 교제를 피하도록 주의한다. 

바울은 말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33절), 

아마도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문란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고 타락한 원리로써 그들의 악한 행위를 지지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의 입에는 이런 말이 늘 있었다. "먹고 마시자. 왜냐하면 내일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만일 장래의 세계가 없다면 그들의 말이 적절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신념을 논박한 후에 그들과의 교제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고한다. 만일 그들이 저들의 신념에 동조하면 그들에 의하여 타락하고 그들의 생활을 따를 것이라 하였다. 다음을 주목하자. 

나쁜 친구와의 교제는 나쁜 사람을 만들기 쉽다. 잘못과 악은 전염된다. 감염을 피하려면 그들과 멀리해야 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2. 여기에서 저들의 죄에서 떠나 일어나서 보다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권면한다(34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혹은 의롭게 깨어서(에크넵사테 디카이오스) 더 죄를 짓지 말라. 

"스스로 일어나서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악한 길을 버리고 잘못을 고쳐 나태와 어리석음으로 기독교인의 소망을 삼키고 그 행위를 타락시킬 그러한 교제와 원리를 버리라." 

내세에 대한 불신은 모든 덕과 경건을 말살시킨다. 그 진리에 대한 가장 어떤 개선은 죄를 그만두고 열심으로 신앙에 정진하는 일이다. 

만일 부활과 장래의 생활이 있다면 그것을 믿는 사람답게 살고 행해야 한다. 

우리의 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우리를 타락시키며 음란하게 만드는 주정뱅이와 같이 행하면 안 된다.

3. 그들 중에 얼마에게 주는 엄한 책망이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성질과 은혜와 통치에 대하여 모든 지식을 다 제공한다. 이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있음은 자신을 책망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나태와 하나님을 경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경시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그렇게나 무지하고 하나님에 관한 일에 그렇게나 무관심한 일이 무서운 수치가 아니겠는가? 

부활과 장래의 생애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종들을 버리지 않으며 그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렇게나 어려운 고통에 처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력과 인내를 잊을 만큼 불성실하며 불친절하시지 않음을 안다. 나는 이 표현이 보다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중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의 일만 인정하는 무신론자가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 교회의 중상이며 수치이다. 마치 무신은 내세를 불신하는 근저에 있다. 

하나님과 섭리와 이 세상의 생활이 얼마나 불공평하며 선한 사람이 얼마나 고난을 당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모든 일이 바로 판단을 받을 내세를 의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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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는 것과 다시 사는 것(고전 15:35-50)

[NKJV]고전 15:45 --And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AMP] 45 So it is written [in Scripture],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an individual);” the last Adam (Christ) became a life-giving spirit [restoring the dead to life]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에 반대하는 그럴싸한 주된 반대논거들에 대하여 답변한다. 반대의 제안을 관찰하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35절). 

그들이 어떻게 일어날까? 무슨 능력으로 일어날까? 

[결론적으로 부활은 없다]는 그것이 이방인들 중에서 유행하던 사상이며 사두개인들의 사상이었다.

죽은 인간을 영생시키며 죽은 자를 재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범위 내에 있지 않다고 믿는 것 같다. 

죽은 자의 부활을 반대하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그들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전연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반대하는 논거중의 또다른 하나는 부활할 몸의 성질이다.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같은 몸으로, 같은 모양으로, 같은 크기와 지체로, 같은 성질로 오느냐 여러 성질로 오느냐?" 먼저 반대는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의 것이고, 후자는 호기심의 의심하는 자들의 것이다.

Ⅰ. 전자의 반대에 대하여 바울은 매년 씨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신령한 능력과 같이 죽은 자도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이 그와 같은 능력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너무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라는 투이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고"(36절) 

다시 살아나기 전에 썩어야 한다. 죽은 후에 싹이 돋아날 뿐 아니라 살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 

((실상을 좀더 깊이 들어가 보자..씨를 뿌렸어도 그 중에 싹이 자라지 못하는 씨도 분명히 있다..그것은 겉보기에는 좋아보이는 씨들 중에서도 씨 자체(실은 씨 속에 들어 있는 싹 모양의 배아떡잎의 생장점이 자라나면서 둘러싸고 있는 씨의 양분을 쓰며 자라다가 새싹이 움터 나오게 된다.)가 죽어 생명력을 잃었기 때문인데, 씨가 죽으면 곧 썩어 흩어져 버린다..한편, 씨가 살아있다면 처음 한동안은 죽은 씨나 마찬가지로 쪼그라들거나 썩는 과정처럼 경과하다가, 죽은듯 보이던 씨로부터 싹이 움터 나온다!!))

매년 씨앗이 살아나는 그러한 힘으로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을 상상치 못함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것이 첫째 질문에 대한 사도의 답변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가 죽은 것이 살아나서 재생하는 것은 매일 보면서 죽은 자를 일으킬 신령한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Ⅱ. 바울은 둘째 질문에 더 상세히 대답한다.

1. 심지어는 씨가 변화하는 것을 지적한다. 

뿌리는 것을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밀이나 알갱이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형체를 부여하신다. 

서로 다른 종류를 구별하시기 위함이다. 뿌려진 모든 씨는 고유의 형체를 가지고, 그 종류에 알맞는 성질과 모양을 가진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모르는 것과 같이 씨앗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분명하다. 

죽은 자가 죽은 후에 그들의 몸으로 일어나는 모양도 이와 같다는 것이 이 절에 암시되어 있다.

2. 계속해서 식물에 있어서 여러 종류가 있는 것과 같이 육체에 있어서도 여러 종류가 있다.

(1) 육체의 종류.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요" 

사람의 육체도 있고 짐승의 육체도 있고 물고기의 육체도 있고 새의 육체도 있다(39절). 모든  종류에는 고유한 형체가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이다.

(2) 땅의 육체도 있고 하늘의 육체도 있다.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과 다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의 참 영광은 지위와 상태에 적당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땅의 육체는 하늘에 어울리지 않고 하늘의 육체는 땅에 어울리지 않는다.

(3) 하늘의 육체 중에도 여러 영광이 있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41절). 

이 모든 것이 다음을 암시해 준다. 죽은자의 부활도 완전히 변하여 하늘에 적당하게 되며 해와 달과 별들의 영광이 있듯이 죽은 자의 부활도 여러 영광이 있을 것이다. 같은 재료에서 여러 종류의 식물과 육체를 형성하는 것과 같이 죽은 자와 썩어질 육체를 일으키는 능력도 하나님에게는 있음을 암시한다. 

태양과 별들도 지구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으나 하나님의 교묘한 기술로써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같은 재료에서 그렇게나 많은 것은 만드시는 분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없겠는가?

3. 문제에 대하여 직접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다"고 말한다. 

썩어질 씨앗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것과 같이 하늘의 육체를 입게 된다. 별들의 영광이 다른 것과 같이 다시 사는 육체도 영광이 다르다.

(1)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 

그것은 심어진다. 죽은 자를 묻는 것은 심는 것과 같다. 심어지는 우리의 육체는 썩어지며 부서지기 쉬우나 우리가 다시 살 때에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 되어 다시는 썩지 아니한다.

(2)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 

현재의 우리의 육체는 나쁜 육체이다(빌 3:21). 죽은 시체보다 더 싫은 것은 없다. 아무런 줄거움이 없는 경멸받고 깨어진 그릇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시에 영광이 더하여진다.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된다. 

땅의 모든 찌꺼기에서 정결하게 되어 맑은 물질이 되고 주님의 몸과 같이 빛이 나게 된다.

(3)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그것은 가련한 물건으로 사망의 지배 하에 모든 활력과 생명과 힘을 박탈당하여 땅에 묻힌다. 그것은 움직일 수도 없다. 

우리가 다시 살아날 때에 우리의 육체는 신령한 생명을 얻어 새 힘을 가진다. 그들은 건장하고 굳세며 영원하여 연약함과 부패를 당하지 않는다.

(4) "육의 몸으로 심는다." 

즉 동물과 같은 몸(소마 프쉬키콘), 신령한 상태와 기쁨에 비교하면 거치른 천한 상태와 감각적인 쾌락에 적당한 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일어날 때에는 전연 다르다. 우리의 육체는 신령하게 된다. 육체가 육체 아닌 것이 되며 물질이 비물질이 된다는 말이 된다. 

표현이 비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부활때에는 우리의 몸이 최고로 순결하여지고 밝고 민활하게 된다. 

비록 그들이 영이되지 않더라도 영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무에서 창조하시고 같은 물질에서 여러 종류의 물질을 만드시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썩어질 생명이 없는 몸에서 불후의 영광스러운 생명의 몸을 만드실 능력이 없겠는가?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며" 불가능일 수가 없다.

4. 바울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비교로써 설명한다.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몇 가지의 예로써 설명한다.

(1)첫째 아담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육의 몸을 가진 것과 같이 둘째 아담에서 신령한 몸을 기대한다. 이것이 전체의 비교에 내포되어 있다.

(2) 이것은 이 두 사람이 가진 다른 성질에 위치한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living being : 생명을 가진 육의 몸을 산출하는 존재)이 되었다.

즉 우리들 자신과 같이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번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자기보다 더 낫지도 않고 다르지 않는 자기와 같은 육의 몸과 성질을 물려 주었다. 

"둘째 아담은 살려 주는 영(life-giving Spirit  :: [그분이 원하시는 자에마다] 하나님의 생명(조에)인 참생명!! 그 참생명 =부활생명 그 자체를 분배해 주시는 생명근원이신 성령. 그 영)이 되었나니"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4:25). 그에게는 생명이 있고 원하시는 자를 살리신다(요 5:21, 22).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그의 육체는 땅에 알맞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난 주이시니"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땅에게 생명을 준다(요 6:33). 

하늘에서 내려온 자는 하늘에 계셨던 자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주이시다. 

첫째 아담이 우리에게 육의 몸을 전하여 줄 수 있다면 둘째 아담이 우리의 몸을 신령한 몸으로 만들 수가 없겠는가? 

이 하계의 대리적인 주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늘과 땅의 주님께서 그 일을 하실 수 없을까?

(3) 우리가 둘째 아담으로부터 신령한 몸을 얻기 전에 첫째 아담으로부터 육의 몸을 가져야 한다(49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이것이 섭리의 질서이다. 우리가 살아있고 영적이며 불멸의 몸을 둘째 아담의 살리는 능력으로 받기 전에 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죽어야 하는 육체를 첫째 아담에서 받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죽지 않고 살기 위하여 먼저 죽어야 한다.

(4)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다운 신자는 육의 몸을 가진 것과 같이 영의 몸을 가질 것도 그만큼 확실하다. 

우리는 첫째 아담을 닮아 땅에 속했으며 둘째 아담을 닮아 하늘에 속했다. 육의 몸을 가진 확실성만 영의 몸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날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변화한다.

5. 이 변화의 이유를 지적하면서 바울은 논술을 종합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절). 

자연의 몸은 육이요 피요 뼈와 근육과 신경과 혈관과 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육체는 썩어질 구조요 부패하기 쉽다. 

이런 것이 하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는 없다. 썩을 것이 썩지 못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으면 모순이다. 

하늘 나라는 썩지 않으며 시들지 않는다(벧전 1:4). 이것이 어떻게 육과 혈로써 소유되겠는가? 

이것이 하늘 나라를 이어받기 전에 영원한 물질로 변화되어야 한다. 종합하면 성도들은 다시 살 때에 현재의 상태에서 크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썩어질 혈과 육이지만 그때에는 썩지 아니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이 되어서 하늘의 세계와 상태에 적합하게 된다. 

그곳에서 영원한 나라에서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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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의 부활(고전 15:51-57)

새 몸(하나님의 새 예루살렘으로서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할 바 영적인 몸, 부활체)으로의 변화에 대한 바울의 말을 확정시킨다.

Ⅰ. 바울은 그때까지 감추어져 있고 알려지지 않은 것 즉 모든 성도들이 다 죽는 것이 아니고 주 재림때까지 살아남는 자들은 (공중영접시점에) 변화되리라는 것을 여기서 말한다. 

주님이 오실 때에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을 보지않고 구름 위로 들리워진다(살전 4:11). 그러나 이 귀절은 변화가 없으리라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들과 같이 산 자들의 육체도 변화된다. 이것도 "순식간에 홀연히"(52절) 일어난다. 

전능자의 능력이 어떠한 일을 할 수 없을까? 죽은 자들을 소생시키는 능력이 이와 같이 순식간에  산 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혈과 육은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산 자들도 죽은 자과 같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인 바울의 비밀이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즉 전에 어둡고 알지 못하던 것을 밝힌다. 다음을 주목하자. 

복음 안에서는 많은 비밀들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진다. 주 오시기전까지는 물론 여전히 부분적이기는 하겠지만, 전에 알려지지 않은 진리가 알려지고 전에 어둡고 애매한 진리가 밝혀지고 충분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부분적으로 계시된다. 

바울은 여기에서 주민의 재림시에 살아있는 성도는 죽지 아니하고 변화되어 이 변화는  순식간에 마지막 나팔에 눈 깜짝할 순간에 일어나는 알려지지 않은 진리를 밝힌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오라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큰 부름의 소리이다. 

이 소리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도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일어나며 산 성도들도 썩지 아니할 상태로 된다(52절).

Ⅱ. 바울은 이 변화의 이유를 진술한다(53절).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은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떻게 인간이 썩지 아니할 나라의 알맞는 시민이 되며 영원한 유업을 받기에 적당하겠는가? 

썩을 것과 죽을 것이 어찌 썩지 아니하고 영원한 것을 누리겠는가? 

인간이 이 행복을 누리기 전에 썩을 육체가 썩지 아니하고 죽을 육체가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썩지 아니함을 입을 것은 이 썩을 몸이다. 다시 일어나는 것은 파괴될 조직체이다. 심은 것이 다시 소생해야 한다. 

성도들은 새롭게 함 받은 자기의 육체로 올 것이다(38절).

Ⅲ.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변화를 받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알린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혹은 "주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사 25:8).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그리고 사망이 완전히 정복되고 성도들은 그 권세에서 해방된다. 

우리의 주님이 일어난 성도를 인도할 곳은 사망이 정복된 곳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승리의 찬양(에피 니코스)을 부를 것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 사망은 영원히 삼킨 바 된다(에이스 니코스).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죽을 때에 사망이 삼키지 못하도록 하신다. 

성도들이 다시 살 때에 사망은(그들에게 있어서는) 영원히 삼킨 바 되어버린다. 이 사망의 멸망에 대하여 성도들은 승리의 "노래를 터뜨릴 것"이다.

1. 성도들은 정복된 사망에 대하여 개가를 부를 것이다. 하여, 이 크고도 무서운 파괴자를 경멸한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 너의 해치는 능력이 어디에 있느냐? 얼마나 많은 비참함을 우리에게 행하였는가? 우리는 죽었다. 보라. 우리는  다시 살았다. 그리고 다시 죽지 않는다. 너는 정복되었고 무기를 빼앗기고 공격할 힘이 없어졌다. 너의 운명적인 대포가 어디에 있느냐? 너의 병기고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너의 재난을 무서워하지 않고 너의 능력에 반항하며 너의 분노를 조롱한다.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어떻게 되었느냐? 너의 파괴와 우상 숭배가 어디에 있느냐? 한 때에 우리는 너의 포로가 되었었으나 옥문이 파괴되고 자물쇠와 빗이 제거되었다. 쇠사슬이 끊어지고 우리는 영원히 자유하게 되었다. 포로가 석방되었다. 상상되던 승리자는 정복되고 노예는 석방되었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종말이 되었구나. 사망의 끈이 풀리고 우리도 자유롭게 되었다. 죽음으로 상처받지 않고 무덤에 갇히지 않는다." 

순식간에 사망 능력이 정복되고 무덤의 파괴가 사라졌다. 성도에게는 그들의 자취가 없어졌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성도가 영생으로 일어날 때에 그들의 주님에게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송축하리라. 사망을 정복한 영광이여!

2. 승리에 대한 기초가 여기서 암시된다.

(1) 사망을 능력이 나오는 출처로써 설명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가 사망에게 독소를 준다. 죄가 사망에게 해치고 죽일 능력을 준다. 기억하라, 용서받지 못한 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사망의 능력을 주지 않는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죄에게 능력을 주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한 저주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죄는 사망의 모체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죄의 결과요 죄의 후손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이 획득한 승리로써 설명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 쏘는 것을 제거하셨다. 죄에 대한 속죄를 하셨다. 죄의 용서를 획득하시고 그러므로 사망의 소리가 있어도 해하지 못한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를 위한 구속자가 당한 저주 때문에 율법의 저주가 없어졌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음에 의하여 죄는 힘과 쏘는 것을 빼앗겼다. 

사망이 [지금 이 땅에서 육신 입고 살아가지만,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신자마다 이미 영원히 그리스도의 것이기에]신자를 잡아도 쏘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다. 

(보라, 마침내!! )무덤이 열리고 사망의 줄이 풀어지며 죽은 성도가 재생하며 썩지 아니하고 영생하여 사망에서 해방될 날이 (반드시!!) 온다. 

성도에 대해서는 사망의 힘이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사망을 극복하고 신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사망을 정복한다. 

이 승리를 소망하며 그들은 기뻐하고 무덤에서 일어날 때에 사망을 이긴다. 다음을 주목하자. 

죄가 용서받고 사망이 정복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덕택이다. 

율법은 사망에게 파괴할 능력을 주었으나 죄의 용서는 율법에서 이 능력을 박탈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3) 사망에 대한 성도의 승리는 찬양이 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57절). 

우리의 기쁨을 성화시키는 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거두시고 우리가 그것을 드릴 때에 우리는 거룩한 방법으로 축복과 명예를 누린다. 이것은 우리의 만족을 높인다. 

우리의 의무를 다하여 기쁨을 깨닫는다. 

성도들이 다시 살때 사망에 대한 승리보다 더 기쁜 일이 있겠는가? 그들이 구원의 하나님과 주님을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시 88:10)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은 찬양할 마음이 없다. 

사망에 대한 정복과 승리가 성도의 입을 움직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위대한 승리에 대한 찬양이요, 그 수단에 대한 찬양이다. 

우리의 가치 때문이 아니요, 그리스도 때문이다. 어찌 하나님께 찬양하지 않을까?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 구주의 죽음과 부활과 고난과 정복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가! 하늘의 궁창이 찬양에 화답하도다.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노래가 퍼지며 아멘과 할렐루야로 화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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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일에 항상 힘쓰라(고전 15:58)

이 절에서 위에서 생기는 동기와 권면을 가진다.

Ⅰ. 권면은 세 가지이다.

1. 성도들은 견고해야 한다(에드라이오이). 

복음을 믿는 믿음에 견고해야 한다. 즉 바울이 전하고 그들이 받은 복음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3,4절) 죽은 자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믿어야 한다. 

"이들 진리에 대한 너의 믿음이 흔들리게 하지 말라. 그들은 확실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의 부활을 확고히 믿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하여 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이것이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다. 내세를 불신하면 모든 부정과 부도덕, 불법에 빠지게 된다. 

내세의 소망이 없다면 내일이란 없으며 우리가 죽으면 끝이니까 동물처럼 살 것이라는 것이 당연히 추론된다.

2. 성도들이 "흔들리지" 말도록 권면한다. 

왜냐하면 썩지 아니하고 영생할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복음의 소망에서 결코 흔들리면 안 된다(골 1:23). 

이 위로의 소망을 포기하면 안 된다. 이들 소망은 부활하신 구주의 죽음에 기초한 실질적인 소망이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 소망은 세상의 고난을 이기며 사망의 공포에 대한 해독제이며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수행하게 하는 생동하는 동기가 된다. 

성도들이 이 소망을 버릴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흔들리면 되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은 복된 부활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 소망은 영혼의 닻이 되어야 한다(히 6:19).

3.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한다.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항상" 참생명따라 성령안에서 (아가페적)사랑으러 영혼구원 위해 봉사해야 한다. 

성도들은 근면하고 인내해야 하며 참다운 경건으로 전진해야 하고 성한 일을 하는 데 민첩해야 한다.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진 자들이 기쁘게 의무를 수행하며 근면하고 인내한다. 

장래에 있어서 나타날 큰 보상/상급을 기대한다면 이찌 과도히 충성하겠는가? 이 소망이 어떠한 활기와 결심과 끈기를 일으킬까?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인은 거룩한 생활에 있어서 인색하면 안 된다. 건전한 신앙에 부요하며 주의 일에 힘써야 한다.

Ⅱ. 전술한 말에서 생기는 동기는 그들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터전을 가지고 있다. 기대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확실한 것처럼 그들이 다시 산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인 것같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 사도들이 죽은후에 주님을 보았고 만남을 무릎쓰고 이 진리를 세상에 증거하였다. 

이렇게 확실한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있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그들의 부지런한 봉사와 고통스러운 고난도 수포로 되지 않는다. 

성도의 수고는 헛된 수고가 아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나 하나님에 의하여 아무 것도 손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풍부히 보답을 받는다. 

하나님은 성도의 수고를 잊어버리실 정도로 부당하지 않으시다(히 6:10). 그들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하나님은 보상하신다. 

그들이 행한 봉사나 그들이 당한 고난이 내세의 기쁨과 비교될 수가 없다(롬 8:18).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좋은 삯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참되게 더 풍성히  보상해 주시는, 선한 일꾼을 위하시는 분을 위해서는 아무리 충성해도 부족하다. 

지금 봉사하면 차후에 그를 뵙는다. 땅에서 그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 하늘에서 그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 

그를 위하여 죽으면 죽은 자에서 다시 살아나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로 보답되어서 영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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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29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뜻은?....[[+ 연옥의 개념, 어찌 볼 것인가]]

[고전15:29]*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신자들은 장례식에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인사말을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바로 그곳에서 합당한 위로를 하면 족한데, 아마도 유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함이 가장 적합하리라.  

사람이 죽으면 그 즉시로 구원과 심판으로만 나뉘며, 그 중간의 회색지대는 없기 때문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히9:27) 

이처럼 사람이 한번 죽은 후에는 분명히 구원과 심판으로 나뉨을 강조하고 있는데, 고전 15:29에서는 곤란한 질문을, 그것도 사도 바울 자신이 제기 하는데, 그 이유와 배경, 취할 바 올바른 해석은 무엇일까??

==사람이 죽으면 그 즉시로 구원과 심판으로만 나뉘며, 그 중간의 회색지대는 없기 때문이다. 

.....계시록을 인용해서 해석을 해 보자면, 

*1>일차로, <<그리스도 재림 후, 이 땅에 베푸실 바 천년왕국 참여에 합당한 지에 대해, 재림 주께서 공중재림시에 <주께 합당한 자로서>죽은 성도들의 부활이 일어나고 <그들은 주와 함께 섬기며 다스릴 자로서 부활하는 것임>, 이땅에서도 그리스도 왕국 참여에 합당한, 곧 주께 합당한 자들의 몸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 입어서 공중으로 들어올려짐 통해 주님 영접에 참여하게 되고,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인 이들의 구원 영생은 확실함!!

*2>이차로, <결국>그 때까지 <아직 들림 받지 못한 자들로서> 죽지 않고 땅에 사는 이들마다(물론, 여기에는 믿는 이들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음!...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믿는가 주의하라!) <재림 주님의 아마겟돈 전쟁 승리 후 베풀어질> 예루살렘 보좌 심판에서 <살아 있는, 믿는 이들은> 양과 염소로 나뉘게 될 터인데, 양에 속한 이들은 천년왕국에 참여케 되고 염소에 해당하는 이들은<염소 그룹에는 (비록 미숙하지만)믿는 이들과 불신자들이 포함될 것> 그리스도의 왕국과 영생에의 참여에 합당한 성품 훈련 위한 다루심<연단>을 받기 위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쫒김>당할 것....이것을 가톨릭>에서는 <연옥> 개념으로 오용하고 있는 것일 수는 있음.

*3>불신자들은 [비록, 천년왕국 시대 안에서 죽는다 해도] 마지막 최종적인 백보좌 심판이 예정되어 있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주께 합당하도록 최종적 보혜사이신 성령과 함께 하나님 말씀을 살며 순종하는 이들마다에게 저절로 이루어 가실 바[성령은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를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를 빼어닮는 하나님의 아들들 됨 추구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러므로, 영생구원의 다른 기회 찾지 말고 속지않도록 깨어 있어서 성령과 함께 <나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최우선이 될 것.

.....,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할 <주와 함께 하는 영생의 삶>에 집중하라...중요하지도 않고 <연옥>문제로 왈가왈부 하지말라...오직 실존적으로 살라..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는 제2의 회개할 기회나 대기 장소도 없다>고 여기라.

..... 오직 그리스도, <그분의 보혈의 공로외에는!!!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바 없으니> 그 이름 말고는 그 어떤 누구의 공로를 의지하려 하지 말라.....이미 주님은 에스겔18:1-20에서, 아비와 아들은 각각의 죄 행위에 따라 각각 심판 받는다는 것을 확정하셨음에 주의하라.....그러므로, 영생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느냐 여부로 영생과 영벌 둘로만 나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신자들은 장례식에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인사말을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바로 그곳에서 합당한 위로를 하면 족한데, 아마도 유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함이 가장 적합하리라.

죽은 자를 위해 세례 받는 것도 당연히 하 필요가 없다는 것임!!. 아무 의미가 없음에도 그 본인이나 주위사람에게 마치 죽은 후에 제 2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죄의 본성이 살아있고 종종 죄를 범하는 인간 신자가 대신 세례 받았다고 이미 심판으로 떨어진 자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아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죄인의 구원과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의가 덧입혀질 때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후에, 인간의 세례 한번으로 이미 죽은 자가 구원받게 되면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실 필요도, 십자가에 죽을 이유도 없다.

[고전3:1-3, 10-15...그리스도왕국 및 새예루살렘성<곧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란 그 공적<열매>이 불시험을 통해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자임]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마12:28-3732)....성령<과정 거치신 그 영, 주 영, 십자가죽음-부활 거쳐서 차원을 초월하는 부활의 몸을 입고 나타내 보이신, 변형되셔서 참되게 믿는 이의 영에 내주하사 하나되셔서 인도하고 계시는 보혜사>를 모독하는 자는 현세와 내세에서도 구원받지 못함....천년왕국 및 하나님 나라 참여 불가 + 백보좌심판 거쳐 영멸에 처해짐] *28. 그러나 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계22:10-21(12)]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을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고전15:29)

이 구절의 <본래적>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려면, 전후문맥을 잘 살필 필요가 있음에 주의하라.....이 구절을 당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연시 하였지만 , 그 안에 감추인 진정한 의미는 놓쳤던 것 같다..

문제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본다면, 마치 죽은 자를 위해 산 신자가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러면 다시 산다는 의미로 여겨지며((실제로 가톨릭은 그렇게 해석하여 행하고 있음)), 이는 전적으로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와 확실히 어긋난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바르게] 해석해 보도록 하자.

.... 그 속뜻을 긍정적 의미로 풀어 보면!!...! 영혼이 죽은 자(=불신자)가 부활해서(이 가능성에 대해 성경은 "그런 것 없다, 전무하다" 말하고 있으므로 논의할 가치도 없지만), <이것조차도 그 누구의 공적을 인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 믿는이의 성화과정을 적용해보면, 예수를 믿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구원 얻고 <그의 전 존재가...비록 아직 이 땅의 몸은 후패하여 가지만, 영이 새롭게 하심 받았고, 혼조차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바 되며, 구주 재림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살아난다<부활에 참여케 된다>는 것이 합당한 해석이리라.. 

.... 그러나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이 포함된 앞뒤 문맥(15:12-58)이 죽은 자의 육신의 부활을 논하고 있음에 주목해서 제대로, 곧 전체적인 주제와 흐름과 합치된 해석을 추구해 보자..

가장 중요한 포인트!!...지금 바울은 육신 부활의 확실성을 논증하고 있다. 본문은 단지 그 진리를 더 강조하는 한 가지 예로 인용한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세례를 받으라고 권면하는 뜻이 아니며 그런 의도 또한 전혀 없다. 

단지 부활이 확실하기에 [그것은 <고린도인들이 아직>성경을 잘 몰라서, 즉, 미숙하여....이들을 바르게 부드러이 인도하려 하고 있음!!]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 받는 사람들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해석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본문에 대한 해석에 몇몇 오해가 있었다. 

현대에 들어와 성경원어의 어원과 의미와 문법과 구조, 당시의 역사와 문화와 관습과 제도와 법률 등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면서 성경본문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이뤄졌고 더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성경전체를 전부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받아들였었다.

고대문서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신약 헬라어에도 어디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되는지 구분이 없고 인용부호 등은 아예 없음을 최근 연구로 알게 되었다. 

이제 신학자들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 성경저자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계시,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 다른 이의 말이나 다른 사건을 인용한 것, 비유와 예화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상기 본문도 하나님의 계시나 바울 본인의 의견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바울은 단지 당시에 죽은 자를 위해 대신 세례 받는 관습을 인용한 것뿐이었다. 알기 쉽게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부활이 있음을 알고 믿기에 지금 그런 관습을 시행하지 않느냐? 그럼 예수 십자가의 부활을 본 기독교 교회와 신자는 더더욱 부활을 확실히 믿어야 하지 않느냐?”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는 구절(30-32절)에서도 바울은 부활이 확실히 있으므로 복음을 전하면서 모든 위험과 핍박을 감수 할 수 있었다고 변론하는 것이다.

원어의 의미와 가장 가깝다고 평가되는 최근의 표준새번역본 성경이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보라.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 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정말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즉, 바울 자신은 <어찌 보면> 죽은 자를 위해 세례 받는 자들을 교회와 자신과 완전히 무관한 제 삼의 집단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

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안에 그런 관습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혹시 있었다 해도 아직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정확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실제로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의 이 구절을 오해하여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를 위해 죽은 자가 누워있는 침상 아래에 들어가 세례를 대신 받아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 온전히 믿은 자로 단지 세례 받지 못한 것만 대신하려는 뜻이었긴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기구절에, 살아있는 신자의 세례로 1) 죽은 불신자의 구원이 가능하거나, 2) 죽은 신자가 천국에서 더 많은 상을 받거나 불신자는 지옥 형벌이 좀 감해지거나, 3) 이 땅에서 세례 받지 못한 것을 보충하는 식의 의미는 전혀 없다. 오직 당시의 그런 관습만 봐도 부활은 확실하지 않느냐고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부활을 강조한 것뿐임에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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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26-28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통찰을 줍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둔 믿음으로 새 정체성을 얻은 갈라디아의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죄된 옛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삶을 완전히 수용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우리가 성령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시키십니다. 고린도전서 12:13은 말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경의 여러 구절이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5:14; 빌립보서 1:1; 로마서 8:1). 골로새서 3:3은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하나님은 완전한 공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못 본 체 하시거나 그냥 넘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건 공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죗값은 치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품으신 모든 분노가 자신의 아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합당한 벌을 대신 받아 고통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말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요한복음 19:30).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지상에서의 삶은 아니었습니다. 사흘 후에 증명하셨듯, 지상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8:7; 마가복음 16:6; 고린도전서 15: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타락한 세상을 대속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하실 때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반역 행위의 죗값을 성공적으로 치르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우리 자신의 죄의 속전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전과 기록은 우리가 품었던 모든 죄된 생각과 태도와 행동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아무리 정결하게 해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그분과의 관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3:10-12). 성경은 우리의 원래 죄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10). 우리가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은 우리와 위치를 바꾸십니다. 우리의 죄 목록을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는 예수님의 완전한 행위와 뒤바꾸십니다 (고린도후서 5:21). 십자가 발치에서 거룩한 교환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죄된 옛 본성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이 교환됩니다 (고린도후서 5:17).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 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불완전함 대신에 자신의 아들의 의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2:13; 히브리서 8:12).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우리의 죄의 빚은 탕감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원되며, 우리의 영생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18; 20:31).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For as in Adam all die, so in Christ all will be made alive)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의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일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의 서신서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라는 말은 무려 164회나 사용됨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여러 성경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된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전. 15장>은 “부활장”으로 유명합니다. 사도는 먼저 <고전. 15장>의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12~19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선포합니다.
그리고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 하셨으리라” (v.13)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으로 성도의 부활을 가져올 수 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v.22)라고 ‘아담 안에’ 속한 그룹과 ‘그리스도 안에’ 속한 그룹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죄와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과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의미일까요?” (What does it mean to be ‘in Christ’?) 그것은
첫째, ‘존재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changed our status):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고 신앙고백합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가 뜻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different our attitudes from that point):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구원받았다는 신분 (=존재)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깨닫아 나가는 것입니다 (롬. 6장).
셋째, ‘부활의 능력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enjoy the power of resurrection):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요. 15:5)고.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안에 거함으로써’ (요.15:7~9)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약속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의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일까요?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시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해서 그분의 피로 죄씻음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분의 생명으로 영생의 기쁨과 부활의 능력을 누려가는 성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라는 말은 바울 신학의 중심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서신서 속에서 무려 164회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개념에서 볼 때, <웨스트민스터> 신학성구 사전에서는 “크리스챤 신자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 연합이 가져오는 구원의 혜택”이라고 짧게 정의하고 있고, 여러 성경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되었음”을 정의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전. 15장>은 “부활장”으로 유명합니다. 사도는 먼저 <고전. 15장>의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언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 (fact)임을 그분을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 즉 사도들과 야고보와 일시에 목격한 500여 형제들 그리고 바울 자신까지를 그 근거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12~19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선포합니다. 사도는 성도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여러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었을 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데로 여러 목격자들에 의해 증명된 사실’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v.12). 그리고 그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바로 성도들이 부활하게 되는 완벽한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 하셨으리라” (v.13)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으로 성도의 부활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영적 필연성을 근거로 해서, 역설적으로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이렇게 잘 설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v. 19) 이것이 그가 <32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v.32)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이어지는 <20절>에서부터 <고전. 15장> 끝절까지 이제 ‘성도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부활의 순서와 부활한 몸의 상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성령으로 계시함을 받은 구체적인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선언하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v.22)는 말씀은 그가 두사람을 대조해서 비교함을 보게 됩니다. 한사람은 ‘아담’이요, 다른 한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왜 그는 두사람을 비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대표성’에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그는 첫 사람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에 의해 태어나게 될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후손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누릴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는 대표성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안따까운 사실은 우리 모든 아담의 후손은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한사람도 예외 없이 저주와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소망스러운 사실은 이런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를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 안에서 품어 주셔서,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구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은 자 되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 진리를 매우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6장>입니다. 그는 <롬. 6장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v.8)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는 우리 성도의 영적 실존을 확인시켜주는 분명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의미일까요?” (What does it mean to be ‘in Christ’?) 그것은
첫째, ‘존재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changed our status):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의미하는 개념을 살펴 보았을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되었음’을 뜻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이 도데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영적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와 함께 부활했다’는 뜻입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번 강조하여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하나의 영적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존재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고 예언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불 뱀을 바라보듯이, 십자가에 목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하게 되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근거는 2000여년 전에 주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목박혀 죽으심과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할 때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이와 같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능력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님을 믿게 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는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요 ‘영적 출생’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아담으로 대표되었던 우리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벗어버리고, 이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사람’이 된 우리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아담의 대표성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대표성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듯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고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가 뜻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 생명을 얻고 그분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different our attitudes from that point):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보다 ‘구원받음’이요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임을 첫번째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우리 신앙의 출발이요, 기초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가 가져오는 실제 삶에서 능력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됨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0~11)고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음으로 영적인 출생을 했다는 존재의 변화가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고 사도는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전환점, 곧 내 신분의 각성을 통한 삶의 적용 단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길지어다’ (count/ reckon) 는 말은 스스로 ‘설득하라’는 말이 아니라, ‘~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하라’ 혹은 ‘~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체험이 아니라 깨닫음입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죄를 죽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곧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게 된 일을 깨닫으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서 있는 영역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있음으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의로움과 생명이 통치하는 영역에 살아 있음을 깨닫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긴다’는 뜻이요,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다는 의미입니다. 깨닫음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능력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enjoy the power of resurrection): ‘그리스도 안에’가 뜻하는 것이 먼저 ‘영적 신분의 변화’요, 그 다음은 ‘그 신분의 변화를 깨닫는 것’이라면, 마지막은 ‘그 신분의 <특권/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이렇게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고. 주님은 ‘나를 믿는 모든 자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안에 거하는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했음을 삶으로 적용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계속해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요. 15:7)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이어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9)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그것이 곧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풍성한 열매는 그 무엇보다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금지할 법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갈. 5:22~23). 이것이 부활의 능력을 누리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특권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더 이상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께 순종하고 그 분을 좇음으로 맺게 되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사람 아담 안에 속해 있었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분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새사람을 입었습니까? 더 나아가 거듭났다는 영적 존재의 변화 뿐 아니라, 이런 하나님께 대해 살아난 그분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된 우리 자신의 존재를 깨닫음으로 말미암아 참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속하고자 온 힘과 열심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될 때 주의 영, 성령님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 속에 약속하신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성도의 삶이요, 그로인하여 누리게 되는 풍성한 열매의 삶임을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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