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례론]]...요6장의 강화를 묵상하라..
제1부 역사적 상황
제1장 요한 칼빈의 성찬론
요한 칼빈의 성찬론은 풍요롭고, 복잡하며 더욱이 우리를 놀랍게 만든다.
이 주제에 관한 그의 글들은 개혁자로서 그의 생애 전부를 포괄하며 설교집, 문헌집, 주석집, 그리고 신학 작품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 뿐만 아니라 루터란들과 츠빙글리의 후계자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했다.
비록 칼빈이 그의 사역 초기에 이 교리의 핵심적 내용들을 개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렇게 지속되는 논쟁들은 몇 가지 점에 있어서 그의 견해를 더욱 예리하고 분명하게 다듬도록 이끌어 주었다.
칼빈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만찬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던 16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이 1530년대 후반에 이 논쟁에 뛰어들기 전에 이 논쟁은 수년간 지속되고 있었다.
1520년대에 마틴 루터는 그의 책 『교회의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례 이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두 가지(또는 세 가지) 성례만을 제정하셨다고 주장함으로서 7가지 성례가 존재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논지를 반박하였다.
그는 또한 로마 가톨릭의 견해가 성례에 있어서 사제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의 관심을 로마 교회의 세 가지 오류에 집중하였다
1. 평신도가 잔을 받지 못하게 하는 행위 2. 화체설 3. 사제가 성만찬에서 사람들을 대신하여 선행을 하거나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생각
루터는 이 세 가지 견해들을 노골적으로 비성경적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미사에 대한 그의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별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는 견해(화체설)에 도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터란들과 츠빙글리를 따르는 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츠빙글리에 의하면 성례는 기독교인이 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다짐하고 입증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성찬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의 견해를 성찬 제정과 관련된 “이것이 내 몸이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다른 해석에 근거를 두었다.
츠빙글리에게 이 문장에 언급된 “~이다”라는 단어는 실제로 “~를 상징하다” 또는 “~를 나타내다(전시하다)”를 뜻하였다.
루터는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강력하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였다.
이들의 서로 다른 견해는 독일 개혁자와 스위스 개혁자 사이에 지속적인 논쟁거리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견해 차이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1529년에 마르부르크회의(Marburg Colloquy)에서 성사되었다.
불행하게도 비록 참가자들은 14가지 항목에 있어서 일치를 도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5번째 항목, 즉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참된 살과 피가 육체적으로 임재하는가를 놓고 일치를 도출해낼 수 없었다. 루터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성찬에 육체적[물리적]으로 임재하시지만, 츠빙글리에게 그리스도는 단지 신자의 마음속에만 [인지적]임하신다.
마르부르크회의에서 일치를 도출하는데 실패한 것은 칼빈에게 성찬론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그는 루터와 츠빙글리가 성취할 수 없었던 것, 즉 종교개혁의 서로 다른 가지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고 싶었다.
칼빈은 루터란과 츠빙글리주의자들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성경적이며 중재적인 근거를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칼빈의 중재적 입장이 루터의 견해보다 츠빙글리의 견해에 더 가까왔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츠빙글리보다 루터의 입장에 동조적이었다. 그는 츠빙글리의 입장에 대하여 동일한 열심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데이빗 슈타인메츠(David Steinmetz)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6세기 비루터란주의(non-Lutheran) 신학자들 가운데 요한 칼빈만큼 마틴 루터에게 동의하지 않기를 꺼려하거나 오히려 그와 공통점을 찾기에 열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루터의 이론적 접근에 크게 공감, 동조하는 비루터란신학자였다는 뜻!!) 1541년에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개최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스트라스부르의 대표로서 최근에 파송된 칼빈은 필립 멜랑흐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저자인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의 스승?), 그리고 루터란들과 동조했으며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usburg Confession)에 서명하였는데 이는 비루터란들 사이에서 호의적이지 않은 언급을 야기시켰다."
위 설명의 요점은 성찬에 관한 칼빈의 입장이 츠빙글리보다는 루터의 입장에 훨씬 더 가까왔다는 점이다.
이 점은 기억해야할 중요한 사안인데 후대에 이르러서는 칼빈의 계승자들이 점차적으로 그의 입장을 저버리고 더욱 츠빙글리적인 교리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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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성찬에 관한 칼빈의 견해에 루터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루터는 이 젊은 종교개혁자의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루터 혼자는 아니었다.
칼빈은 또한 어거스틴, 부써와 다른 개혁자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칼빈의 성만찬적 사고에 어거스틴이 미친 영향력은 특히 모든 분야에 미쳤다.
칼빈은 그의 교리에 나타난 몇 가지 기본적 요소들에 대한 지지를 위해서 그에게 호소했다:
1. 표징의 성격과 표징되는 실재와의 관계
2. 성찬 제정의 말씀이 지닌 상징적 성격
3. 성찬을 합당하게 받지 않는 것의 무익함
4. 그리스도의 자연적 몸이 하늘에 존재한다는 주장
5. 성례에 대한 신구약 성경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어거스틴의 영향은 칼빈의 성찬론 전반에 걸쳐 발견된다.
부써의 영향 또한 칼빈의 성찬론 몇 가지 부분에서 발견된다.
프랑수와 방델(Francois Wendel)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찬의 요소들을 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 영혼이 양식을 공급받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칼빈에 의해 주어진] 동반(parallel)은 이미 부써의 『복음서 주석(Evangelical Commentary)』에서 발견된다.”
칼빈에게 영향을 주고 또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피터 마터 베르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와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비록 칼빈이 성경적 공통점을 발견하려 하였지만 그는 이를 다른 사람들과 전적으로 관계없이 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칼빈에게 영향을 주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어려운 교리에 대한 혜안을 찾기 위해서 그는 성경을 연구하였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탐독하기도 하였다.
>>>칼빈의 성례론
칼빈의 성찬론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가 성례론이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이를 추구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먼저 그가 성례의 일반적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기독교 강요』 제4권에서 칼빈은 성례의 광범위한 정의를 제공한다.
칼빈은 성례에 관한 장을 기본적 정의와 성례가 어떻게 표징(signs)과 인증(seals...=인침!!)으로 작용하는가에 대한 논의로서 시작한다.
그는 먼저 성례가 무엇인가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제공한다:
.....내 생각에는, 성례를 간단하고도 적절히 정의하자면, 그것은 주께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지탱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그의 선하신 약속들을 인치시는 하나의 외형적인 표징이며, 또한 우리 편에서는 주와 그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를 향한 우리의 경건을 인증하는 표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간단히 정의하자면, 우리에게 향하신 신적 은혜에 대한 증거를 외형적인 증표로써 확증하는 것이요, 그에 따라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정의를 택하든, 성례를 “신성한 것에 대한 가시적인 표징”이요 혹은 “불가시적인 은혜의 가시적 모습”이라고 가르친 어거스틴의 진술과 의미상 별로 다르지 않으나, 성례 자체를 보다 더 분명하게 설명해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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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례론(1)
또한 칼빈은 성례를 “하나님의 가시적 말씀”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어거스틴을 따른다.
그러나 더 길게 작성된 정의에서 이미 성례 개념을 소개하면서 그가 이를 특정한 약속을 확증하는 표지로서 언급하는 것을 보았다.[그리스도의 몸과 피(곧, 주님 뜻 이루기 위해 절대필요불가결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성령를 의미하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가져다가 나누는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교회 공동체, 곧 하나님나라 참여함을 누림 +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일과 새 언약을 기념함 ...이것은 마땅히 경험 가능한 능력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마음에 믿는 자마다 성령으로 내주하시며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체득하는 mystery를 알게 됨]
칼빈은 성례(sacrament)라는 단어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기초적 개념에 대한 그의 정의를 발전시킨다.
그는 고대 라틴 교부들이 헬라 단어 mysterion(신비)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용어는 “숭고하고 영적인 것을 경외감을 가지고 표현하는 표징들에 적용되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계속 헬라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라틴 기독교인들에 의해 “sacramentum”이라 불리는 것을 헬라 기독교인들은 “mysterion”이라고 불렀다.
다음에 칼빈은 그의 관심을 이 단어와 성례 사이의 관계로 돌린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앞서 주어진 정의를 근거로, 우리는 성례에는 반드시 그 앞에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가 일종의 부록처럼 거기에 붙어 있어서 약속 그 자체를 학인하고 인치며, 그리하여 그 약속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칼빈에게 말씀(=하나님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이시다!!)과 성례는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말씀이 이룩하는 바를 일반적으로 성례도 이룩하는데 이는 양자가 동일한 목적을 위한 다른 수단임을 뜻한다. 말씀과 성례 둘 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공하고 세우며, 또한 그 분 안에서 하늘의 은혜의 보화들을 제시하고 세운다.”
칼빈의 사고에 있어서 말씀과 성례의 연결은 상당히 강력하다. 칼빈에 의하면, 성례가 성례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포함하여야 한다.
그는 “말씀이 그 요소에 더해지게 하면 성례가 될 것이다.” 라는 어거스틴을 인용한다.
로날드 월레스(Ronald Wallace)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른 곳에서 칼빈은 성례가 “비가시적이며 영적인 것에 대한 참되고 가시적인 표상으로서의 말씀이 우리를 거기로(구태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이라 할 수 있을 것!) 인도하신다.” 고 정의한다.
이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복음의 증거는 성례위에 새겨져 있다.”
칼빈은" 말씀 없이 성례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또한 "성례 없는 말씀은 그 자체로는 의도된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고 밝힌다.
칼빈이 성례가 어떻게 인증으로서의 역할을 하는가에 관한 것으로 토론을 전환할 때, 그는 그의 교리에 대해 제기하는 강력한 반대에 답변하도록 요구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성례가 일반적으로 말씀이 이룩하는 바와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과잉 해석을 하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부의 문서나 기타 공적인 법령들에 붙여진 인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문서에 아무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거기에 인을 쳐 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이 적혀 있는 문서에 인을 쳐 놓으면, 그것은 그 적혀진 내용을 인증하고 보증해 주는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성례는 가장 분명한 약속을 가져다주며 성례는 말씀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약속들을 마치 생명으로부터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해주기 때문이다.”라고 첨가한다.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인증일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언약에 대한 상징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님께서 그의 약속들을 가리켜 “언약”이라 부르시고(창6:18; 9:9; 17:2) 그의 성례를 그 언약의 표라 부르시므로, 사람들의 언약과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돼지를 잡는 행위에 말이 첨가되지 않는다면, 아니 그 행위에 앞서서 말이 없다면, 그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별다른 깊은 의미가 없어도 돼지를 잡는 일은 흔히 있으니 말이다. 전쟁에서 손을 잡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으니, 그저 오른손을 내민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말이 먼저 주어지면, 그런 표징(즉, 오른손으로 악수하는 일)을 통해서 언약을 법으로 비준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생각하고 결정하고, 말로써 공포하였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더욱 확증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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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례론(2)
동일한 곳에서 칼빈은 또한 성례를 ‘기둥’과 ‘기초',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푸시는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로 비교한다.
칼빈은 성례가 성령의 도구인 믿음을 확증[보증, 인침]하는 것에 그의 관심을 돌린다.
그는 먼저 악인에 의해서 성례가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 중요성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성례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단지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효력을 발휘한다.(믿는 이 각자는 자기 믿음의 참됨 여부를 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의 거룩한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그의 은혜에 보증을 주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말씀과 성례를 확실히 믿음으로 취하는 자들만 그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아버지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시고자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를 베푸시지만, 모두가 다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즉 성례를 통해서 제공된 것은 객관적이지만, 이는 단지 [발휘되는 생생한 산] 믿음을 통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주님을 제한하지 않도록 하라!)
칼빈에게 성례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믿음을 확증하고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믿음을 확증시키고 증진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 나는 성례에 이런 특별한 사역을 부여한다. 그러나 성례 자체에 무슨 은밀한 힘이 영구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성례 그 자체가 믿음을 더하게 해 주거나 믿음을 확증시켜 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나는 성례가 주님에 의해 믿음을 확립하고 증진시키는 목적을 위해서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칼빈은 성례에 대한 어떤 종류의 마술적 이해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기 위해서 엄청난 힘을 쏟아 붓는다.
그는 성례의 요소들 자체에 본래적으로 어떤 [초월적]힘도 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요소들이 지닌 힘은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시는]성령의 사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주하시는 스승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오직 그의 능력으로 마음을 꿰뚫고 움직여 사모하게 하고 우리 영혼의 문을 열어서 성례를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실 때에 비로소 성례들이 그 역할을 정당하게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성례는 우리 마음에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 마치 태양빛이 소경의 눈에 비치고, 귀머거리의 귀에 울려 퍼지는 것과 같은 효과밖에는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과 성례를 이렇게 구분하고자 한다. 즉 성례의 능력은 오로지 성령께 달려 있고, 다만 그 사역만 성례에 있으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으면 성례의 사역은 헛되고 하찮은 것이 되지만, 성령께서 속에서 역사하셔서 그의 능력을 드러내실 때에는 성례가 크나큰 효과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이 이해한 바에 의하면 성례의 사역에 있어서 성령은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신다.
“말씀이 당신의 귀에 헛되이 울려 퍼지지 않게, 그리고 성례가 당신의 눈에 헛되이 비치지 않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마음의 완악함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 마음을 진정시켜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성령의 사역을 떠나서는 성례는 아무런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성령이 사역하실 때, 그는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 귀에서 우리 영혼에 전달시켜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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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례론(3)
비록 이런 방식으로 성례가 하나님에 의해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례에 [언제나 효력을 발휘하는 만응의 어떤 것이나 마치 무슨 부적인 것처럼!!...즉, 우상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우리의 신뢰를 직접 두어서는 아니 된다.
성례는 [오로지, 그리고 철저히!!]수단이므로 (참여자의 마카리오스에 합당한 마음 준비가 필수이지만) 단지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수단으로 사용하실 때에만 가치를 지니게 된다.
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보실 때 편리한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시되 모든 것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도록 하시는데 이는 그가 모든 것의 주인이며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소용을 위해서 주어진 다른 어떤 피조물들에 우리의 신뢰를 둘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신뢰가 성례에 머물러서도 아니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성례에 돌려져서도 아니 된다.” 다른 모든 것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성례의 사용에 있어서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더우기, 성례는 그 자체로서 은혜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성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칼빈은 “만약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죄라는 장애물을 세우지 않는다면, 새로운 율법의 성례(지금 기독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가 은혜를 정당화하고 제공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한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을 제외한 채 의를 약속하는 것과 유사한 어떤 견해도 "영혼들을 낚아채어 멸망으로 이끄는 것이다."
어거스틴을 거듭 인용하면서 칼빈은 "가시적 표식 없이 불가시적 성화가 있을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참된 성화 없이 가시적 표식도 있을 수 있다.[나무의 어떠함은 그 열매로 알 수 있는 법이다]"라고 주장한다.
칼빈의 사고에 있어서 성례와 성례에 사용되는 요체(matter)에 대한 어거스틴적 구분은 아주 중요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구분은 상징과 진리(=요체, 실체, 실상)가 성례(=표징의 외적 의식)에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뜻할 뿐 아니라, 양자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서로 밀착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양자 그 자체는 결합되어 있지만 요체는 표징으로부터 항상 구분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 중 어느 하나에 속한 것을 다른 것으로 전이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성례가 그 나타내고자 하는 바 효력을 발생한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인용한다.
그러나 성례의 요체 또는 실체란 무엇인가? 칼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례의 그 요체 또는 (당신이 선호한다면) 그 실체(substance)에 해당되신다. 그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함을 지니게 되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어떤 약속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성례가 어떻게 효력을 발생하게 되는가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성례들을 통하여 때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이 우리 속에 더 증진되고 확증되고 증가되는 도움을 얻는 만큼, 때로는 그리스도를 더욱 충만히 소유하며 그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만큼, 성례가 효과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성례에 베풀어져 있는 것을 참된 믿음으로 받을 때에 그런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성례를 받은 악한 자들이 이를 헛되게 만들고 무효화시킨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응답으로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가 주장한 바를 마치 성례의 효능과 진리가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나 또는 그 사람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변화가 심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바는 견고하게 서 있고 그 본질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베풀어 주신 것과 그것을 받는 것은 별개의 것이므로, 주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제정된 상징의 실제적인 본질은 변함이 없고 그 자체의 능력을 상실하지도 않는다. 다만 악인 또는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이것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다음의 짧은 문장으로 잘 해결해준다: "혹시 여러분이 육신적으로 받는다 해도, 그것은 신령한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그렇게 신령한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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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례론(4)
우리는 표징과 표징된 사물을 이렇게 신중하게 구분하는 것이 성례에 관한 칼빈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이것이 그의 성찬론의 핵심적 요소에 해당된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사역을 제외한다면 성례가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칼빈의 주장에 주목하였다.
그의 논의의 이 시점에 있어서 칼빈은 계속해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설명한다. 그는 성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례는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도 시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들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전해주며, 또한 보증물과 증거물로서 이를 우리에게 확증시킨다. 성령은 … 하나님의 은혜들을 가져다주시며, 우리 가운데 성례를 받을 장소를 제공하시고, 성례들이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사실은 중요하다. 칼빈은 첫째 이유를 제법 길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제정하신 성례라는 제도 자체 속에 그의 성령의 임재의 능력을 통해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제정하신 성례의 시행이 열매 없거나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성령의 내적 은혜를 외형적인 성례의 사역과 구별하여서 별도로 다루어야 한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표징을 통해서 약속하시고 나타내신 것은 무엇이든지 진실하게 시행하시며, 또한 표징들도 그 제정자가 참되시고 신실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효능이 부족하지 않다."
이 개념은 다음과 같은 잘못된 개념을 파괴한다: "칭의와 성령의 능력은 그 요소에 포함되어 있다."
칼빈 교리의 또 다른 측면은 하나님께서 참되게 그가 표징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는 바를 시행하신다는 사실이다.
성례를 집행하는 사역자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 사이에 연결점이 존재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사역자가 외적 행위를 통해 나타내고 증명하는 한도 내에서 성취하신다."고 주장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더군다나 참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의 숨겨진 효능으로 외형적 표징을 통해서 상징하는 바를 행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 편에서 볼 때 헛된 표징을 우리에게 설정하지 않으시지만 동시에 이 표징에 실제와 효능을 덧붙이신다." [성례를 섬기는 사역자나 참여자 모두 참되게 주 이름 불어야 한다!!]
칼빈의 견해에는 [성례를 통해 약속된 것은 실제로 그리고 참되게 주어진다. 그러나 비록 사역자에 의해 표징이 주어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실재를 정상적으로 허락하신다]는 사실이 칼빈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다음과 같은 예외가 있었다:
....."세례 또는 성찬의 성격은 시간의 순간에 얽매여서는 아니 된다. [영원하신, 불변하시는]하나님께서는 성례를 통해 그가 상징하시는 바가 즉각적 효과를 통해 충족되고 표현되는 것을 언제나 보신다. 표징의 사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때로는 이 표징보다 선행하고, 때로는 이 표징보다 후행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칼빈은 성례의 은혜를 예외 없이 표징이 시행되는 시각에 국한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주권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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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찬론, 정의와 설명
==칼빈의 성찬론
칼빈의 성례론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추구하였으므로 이제 우리는 신학에 있어서 그가 가장 크게 공헌한 성찬론으로 관심을 집중하고자 한다.
성경과 교부들의 작품을 다년간 연구한 후에 칼빈은 당혹스럽고 논쟁의 대상이 되는 몇 가지 사안들을 해결하였던 성경적 가르침을 제공하였다.
==정의와 설명
1540년에 칼빈은 "우리 주님이시며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에 관한 개요"를 작성하였다.
칼빈의 모국어인 불어로 기록된 이 소책자는 루터주의자들과 츠빙글리주의자들 사이의 중간 지대를 분명하고 간결하게 보여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 글에서 그는 왜 성찬이 제정되었는가에 대한 그의 가장 분명한 설명을 제공한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의 만찬을 제공하셨다.
첫째, 이는 우리가 그의 살과 피에 참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관한 복음에 담겨 있는 약속들을 우리의 양심에 표징하고 인치기 위해서, 이 성찬 안에 우리의 참된 영적 양식이 주어진다는 확신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러한 진지함을 지닌 결과로 우리가 구원에 관한 올바른 확신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우리를 향한 그의 엄청난 선하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를 자극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데 그 결과, 우리가 이를 더욱 완전하게 찬양하고 높이게 된다.
셋째, 모든 거룩함과 순전함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원임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권고한 바와 같이 특히 한마음과 형제애를 지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칼빈에게 성찬은 이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참되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한다는 약속에 대한 인(seal)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그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삶의 거룩함으로 격려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이유들 가운데 첫째 이유를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성례의 주요 기능은 더 깊은 고려 없이 그저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제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살이 참된 양식이요 자신의 피가 참된 음료로서 우리를 먹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약속을 통해 증거하셨고, 또한 그의 약속을 통해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요 6:56)과 그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요 6:55)을 선언하시는데, 바로 그 약속을 인치고 확증하는 것이 성례의 주요 기능이다."
이것이 칼빈의 성찬론적 사고에 있어서 핵심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떠나서 올바로 이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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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연합(1)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념은 칼빈의 성찬 교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 연결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가 성찬에 관해서 말하는 것의 아주 적은 것도 이치에 맞지 않게 된다.
우리는 먼저 성육신의 목적에 관해서 칼빈이 주장하는 바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아버지와 동등한 본질과 영광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을 취하셨는데 이는 양자삼음의 권한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그가 본성적으로 지니셨던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기 위한, 즉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을 때 이루어진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고 우리 안에 이러한 효과들(대속, 전가, 그리고 중재)을 유발하시는 것은, 그가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그의 몸에 접붙임바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면 그는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불어 넣지 아니하신다. 그로부터 모든 관절을 통해서 적합하게 결합된 몸 전체가, 그의 사역에 근거해서, 각 지체에 비례하는 몸의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우리가 그의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성육신을 통해서 그가 인간의 몸을 취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와 연합될 수 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웬델은 "하나님과 우리의 접촉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칼빈의 성찬론은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칼빈은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떡임을 확증하시며 이 떡을 먹어 우리 영혼은 참되고 축복된 영생에 이르게 된다(요 6:51)."고 밝힌다.
"떡과 포도주의 성례전적 표징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우리가 받는 비가시적 양식을 나타낸다."
칼빈은 실재[곧 생명과 권능의 성령, 그리스도의 영] 자체의 본래적 성격이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의 이 신비가 가시적 표징을 통해 가시화된다고 설명한다.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더욱 연구할 가치를 지닌다.
에베소서 5:30을 주해하면서 칼빈은 사도 바울이 사용하였던 "우리는 그의 몸, 그의 살, 그의 뼈의 지체임이니라"는 표현의 의미를 설명한다.
칼빈은 바울이 "단순히 그리스도가 우리 본성의 참여자라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고상한 의미를 …. 더욱 강조하여 표현한다."고 밝힌다.
31절을 주해하면서 그는 이 연합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자세히 설명한다:
....."하와가 그녀의 남편의 실체를 사용하여 지음 받았듯이, 그래서 그녀가 그의 일부분이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일원이라면, 우리는 그의 실체를 함께 나누며, 이러한 나눔에 의해서 하나의 몸으로 연합된다. … 바울은 우리가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찬에 있어서 우리가 그의 몸을 누리고 영생에 이르도록 이를 먹을 수 있도록 나누어 주신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워해야 하지 않는가?"
루터주의자 헤슈시우스(Heshusius)에 대한 답변에 있어서 칼빈은 신비로운 연합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강조하였다:
....."나는 이 연합을 신적 본질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 연합이 그의 살과 피에 속한 것이라고 확언한다. 단순히 ‘나의 영혼’이라 하지 않고 ‘나의 살이 진실로 양식’이라고 말씀하시며, 단순히 ‘신성’이 아닌 ‘나의 피는 진실로 음료’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살과 피의 이 교제를 공통된 본성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인간이 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를 형제애적 친교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셨다. 그러나 나는 [그의 성육신을 통해]그가 취하신 우리의 육체가 우리 영적 삶의 소재(material)가 됨으로써 우리를 살리는 것이라고 확증한다. 그리고 나는 어거스틴의 다음 견해를 기꺼이 수용한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지음 받았듯이, 우리 삶의 기원과 시작이 그리스도 편에서 우리에게로 흘러나온다. 비록 내가 징표와 상징되는 것을 구분하지만, 단지 공허하고 그림자만 지닌 상징만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으며 분명히 떡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부활생명의 영과 함께 바로 그렇게 부활하신 자신의 영광의 몸을 주시는 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교제와 이것이 상징하는 바에 대한 확실한 서약이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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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연합(2)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의 신비로운 연합의 끈은 성령이시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따라서 이 연결의 끈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통일성을 지니게 되며 그는 마치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것과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주어지는 통로와 같다."
칼빈의 사고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약속은 성례가 주로 나타내고 상징하도록 요구되는 복음의 한 측면에 해당된다.
월레스(Wallace)는 칼빈이 주장하는 이 연합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과 특히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의 인성을 사용하여, 즉 그의 인간적 몸을 사용하여 인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것을 신실하게 가르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간적 몸과 인성을 사용하고 이를 통하여 우리 구원을 완성하셨으므로, 우리 스스로가 그의 인성과, 특히 우리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이 행해진 그의 육체와의 어떤 교제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의 사역의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다시 사신데서 비롯되는 축복에 참여하는 것은 그의 인격과의 교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이 연합이 단지 그리스도의 '육체'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이 연합을 통해서 칼빈이 '놀라운 교환'이라고 부르는 일이 발생한다. 이 교환은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에 의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속한 것을 취하시고 자신의 소유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두 성례가 각각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된 것이라고 칼빈은 이해한다.
세례는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의 시작과 관련된다.
성찬은 이 연합에 있어서 지속과 관련된다.
게리쉬(B. A. Gerrish)는 칼빈의 사고에 있어서 성찬과 신비로운 연합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적절한 설명을 제공한다:
....."칼빈에 의해서 교회의 삶에 있어서 성찬의 역할은 다음의 사실로 설명된다. 즉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처음부터 온전하고 완전한 것이 아니라 성장, 우여곡절, 방해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 상징주의의 성격 자체는 칼빈에게는 성찬이 양식 공급, 지속, 그리고 말씀과 세례를 통해 시작된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증대의 문제라고 제시한다. 우리가 처음에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이 연합 안에서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자라게 된다."
칼빈에게 그리스도는 신자의 삶의 근원이자 영적 양식이다. 요한복음 6:51 주석에서 칼빈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신자에게 신적 생명의 중재자로 행동하시는가를 설명한다:
....."비록 영혼을 소생시키는 이 능력이 육체와는 다른 근원에서 비롯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이 왜 이 지칭이 그리스도의 육체에 정확하게 적용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생명의 근원(요 1:4)이기 때문이다. 통로로서 그의 육체는 그 안에 원래 내재하는, 즉 그의 신성 안에 내재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생명을 주는 육체인데 이는 다른 곳에서 우리를 위해 빌려 온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 개념을 『기독교 강요』에서 더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께서 우리 육체 속에 거하시기 시작하면,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서 멀리 숨어 계시지 않고, 우리가 그에게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그러나 그 분은 또한 그가 거하시는 우리 육체 자체를 살리기도 하신다. 즉,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그를 먹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 6:48, 51). 이 말씀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온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므로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시며, 동시에 그가 내려오실 때에 취하신 그 육체에 그가 생명의 능력을 부으셔서 그로 말미암아 생명에 참여하는 역사가 우리에게 흘러넘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이 사실에 또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뒤따른다. 즉 "그의 살이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가 참된 음료이며(요 6:55), 또한 이 양식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영양분을 공급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육체 그 자체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육체도 애초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고, 비록 지금은 영생을 부여받은 상태에 있으나 그 자체로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인성에도 충만한 생명이 거하며,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자는[오직 그리스도를 영접한 바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로서 산 믿음을 발휘하며] 동시에 생명[하나님의 참생명, 영원생명 ZOE] 속에 참여함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육체는 마치 우리에게 생명을 부어주는 풍성하고 다함이 없는 샘과도 같아서 하나님으로부터 그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교제가 하늘의 생명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신적 생명을 중재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인간의 육체를 취하셔야 했기 때문에 칼빈에게 성육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칼빈에게 그리스도의 육체는 "통로" 또는 "전선관(conduit)" 같은 역할을 지니는데 이를 통해서 신적 생명이 그 분과 연합한 자들에게 부어지게 된다. 그는 참된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그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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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1)
이제 우리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로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이 주제는 아마도 성찬과 관련된 어떤 주제보다도 더 많은 토론과 논란의 근원이었으며, 때문에 우리는 특히 조심해서 칼빈이 말했던 것과 말하지 않았던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칼빈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표징론(the doctrine of signs)에서 출발해야 한다.
게리쉬가 고찰한 바와 같이, "칼빈의 모든 성례 신학이 그의 표징론(물론, 그는 이를 어거스틴으로부터 차용하였음)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성례전적 표징에 대한 칼빈의 토론은 그의 전 작품에 걸쳐 발견되며 그는 모든 곳에서 동일한 것, 즉 표징과 상징된 것은 분리되지 아니하고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따라서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표징과 상징된 것을 구별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를 징표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며 믿음을 지닌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를 그의 영적 은사와 더불어 영적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수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한편 오랫동안 그리스도에 참여해 온 자들은 이 교제를 지속하고 갱신한다."
"성례에 관한 상호 협약"이라는 글의 서문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성례가 그 실재와 효력에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우리 중에 누구인가?"
요한복음 6장[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니..}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거의 동일한 사실을 언급한다:
"성례는 가시적 징표, 그리고 이것과 연결되는 상징되는 것(비가시적 실상)으로 구성되는데 후자는 곧 그 실재에 해당된다."
로날드 월레스는 표징과 이에 의해 상징되는 것 사이에 발생하는 성례전적 연합에 대한 칼빈의 교리의 주요 사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성례의 신적 행위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는 신적 행위와 인간 행위 사이에 형성된 연합은 매우 밀접하므로 실제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실체가 된다."
칼빈이 표현하듯이, "따라서 사물의 명칭은 여기에서 표징으로 전달되는데 이 전달은 마치 그것이 엄격하게 적용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며 앞서 언급된 연결의 토대 위에 상징적으로 간주된다."
둘째, 이 성례전적 연합은 "아주 초월적이며, 자유로운 인격성을 띄는 것이기 때문에 상징된 것은 반드시 표징으로부터 구별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만약 표징이 실제로 그 상징하는 것 자체가 된다면, 이는 성례로서 작용하기를 멈추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 연합을 설명하는 자연적 유추(analogy)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계에 어떤 평행도 없는 독특한 신비이다. 성례전적 연합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유추는 성육신의 신비이다.
넷째, 월레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연합의 신비(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과 내주하시는 생명/권능의 성령께서 이루심!!)를 통해서, 칼빈이 이 성례전적 연합의 신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통제하는데 적어도 보탬이 되는 유추를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칼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연합과 성례에 있어서 표징과 실재 사이의 연합 사이에 칼빈이 이해한 유추는 그의 주요 논지들의 일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제공한다.
분리 없는 구별을 주장함에 있어서 칼빈은 정통 기독교에서 공인된 공식에 호소하고 있었다.
폴 로렘(Paul Rorem)은 칼빈의 성례 신학은 "칼케돈 공의회처럼 균형을 잡는 행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고 구별되어야 하는 것같이, 표징과 상징된 실재 또한 분리되지 않고 구별되어야 한다.
칼빈에게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현존하는 것을(곧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 예수와 뒤나미스이신 주 성령) 나타내는 표징이지 결여된(영적으로 공허한, 무의미한)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 아니기 때문에 표징과 상징된 것에 대한 그의 견해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셉 틸렌다(Joseph Tylenda)는 칼빈이 "adesse(현존하다, 임재하다)..to be present : [명]presence..임재, 존재, 실존"라는 단어를 "이 단어가 실재적이며 물리적인(가시적) 임재를 지칭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대신에, 칼빈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는 "exhibere = exhibit [명]exhibition..전시"인데 이 단어는 "임재(비가시적 영적 실재)를 전제로 삼고 그 결과로 (외부로 표출되어) 나타나는" 것에(상징적 단어) 사용된다.
실제로 칼빈의 성례전적 표징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측면은 이 표징들이 공허한 상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존 헤셀링크(I. John Hesselink)가 지적하듯이, "개혁주의 교회와 장로교회를 포함한 대중적 견해와는 전혀 달리, 칼빈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대한 단순한 상징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참 의미는 <떡=반드시 성도가 받아 먹고 소화하여 흡수함, 곧 읽고 깨닫고 그 가운데 거함으로써 성령에 의해 작동될 필요가 있는 Q의 말씀> Q생명 구주와 영광받으신 그분의 부활생명능력의 모든 충만한 은혜의 삶을 살게 하고 주님 뜻 이루게 하는 근본적 다이내믹 에너지/뒤나미스<포도주 =발휘되는 산 믿음통해 발출되는 기쁨의 권능>, 곧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신 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각 성도의 삶에 가징 중요한 모든 필충조건]
게리쉬는 성찬 교리의 이 요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원전에 대한 가장 왜곡된 독해만이 칼빈에게 성례가 순수하게 상징적이며 교훈적 기능을 지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 성례는 형상화된 상징을 수단으로 삼아 가르치지만, 이는 또한 상징된 것의 전달에 의한 은혜의 참된 도구이기도 하다."
만약 이러한 생각이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사고의 전체적 흐름에서 이미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표징의 성격에 대한 칼빈의 조심스럽고 분명한 주장들에 의해서 제거되었어야 마땅하다.
표징과 상징되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그는 기독론적 공식의 언어, 즉 "분리 없는 구별"을 적용한다. [예>그리스도는 그의 보혈을 의지하여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우리는 표징을 상징되는 것으로부터 구별해야 하지만 이들을 분리할 수는 없다. 표징이 있는 곳에, 실재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이 실재, 즉 성례의 질료와 본질이므로, 표징은 실재적 임재에 대한 서약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표징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임재를 유효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표징은 실재일 수 없으며 또한 실재가 될 수 없으며 결여된 실재에 대한 상징도 될 수 없다.
칼빈보다 훨씬 전에 어거스틴이 고찰한 바와 같이 성례신학에 있어서 표징과 표징의 대상을 분리 없이 구별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영적의미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살펴보기 전에 간단히 논의되어야 할 둘째 이슈는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의 말씀에 대한 칼빈의 해석이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칼빈은 이 질문에 대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1:24에 관한 주석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이 표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내 몸이다. … 그리스도는 떡을 그의 몸이라고 부르신다. … 그렇다면 모든 논쟁을 뒤로 하고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떡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고 간주하도록 하자. 이제 질문은 바로 "어떤 의미에서의 떡인가?"로 귀결된다. 우리가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이 표현을 비유적인(figurative) 것으로 보아야 한다. 확실히 이를 부인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정직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몸'이라는 용어가 떡에 적용되었는가? 요한이 성령을 비둘기라고 부른 것(요 1:32)과 동일한 이유에서 이런 적용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용인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에 우리는 동의한다. 이제 성령이 그렇게 불리워지는 이유는 이것이다. 즉 그가 비둘기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이름이 가시적 표징에 전이된 것이다. 이 본문의 경우에도 환유(metonymy)의 유사한 형태가 적용되어 '몸'이라는 단어가 떡에 적용되어 그에 대한 표징과 상징이 되었다고 파악할 수 없을까 … ? 그렇다면 나는 문제의 해결점을 여기에 제시한다. 즉 여기에 표현에 있어서 성례전적 형태가 주어졌다는 것이며 주님께서 상징된 것의 이름을 표징에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환유에 대한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상징된 것의 이름이 단순히 그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표징에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답한다. 오히려 그것의 상징으로서 실재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왜냐하면 떡이 나타내는 몸이 우리에게 제공되거나 또는 이 상징을 우리에게 제공하시면서 이와 동시에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주신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보장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공허한 표현으로 우리를 속이는 기만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의 사실이 나에게는 모든 논쟁을 멀리할 정도로 분명한 것이다. 여기에 실재는 표징에 연합된다. 또는 이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떡을 함께 떼고 먹는 것은 영적 효능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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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앎, 말 소개]]
영어교사들을 위한 인지언어학 이야기: 환유(Metonymy)의 세계 (1)
metqnymy, 환유는 언어와 사고의 수사법 중 하나로 한 실체가 관련된 다른 실체를 가리키거나, 인지언어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관련된 다른 실체에 ‘접근지점[직관적 접근/연결지점]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곧 하나의 관념(觀念) 전체를 연상(聯想)시키는,깨달은 바 그 어떤 단어를 그 관념(觀念)의 표시(表示)를 위(爲)해 대표적으로 가져다 쓰는 것, 일명 대유법이라고도 함))
.....다시 말해 환유는 한 언어표현이 특정 대상을 정확히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로 연결되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metonymy의 어원을 따라 올라가면 라틴어metonymia, 나아가 그리스어 metōnymia에 닿게 되는데, 이것은 “이름을 바꾸기(change of name”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표현에서 ‘빵’은 단순히 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먹거리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를 어원에 빗대어 설명하면 ‘먹거리’가 ‘빵’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죠. 물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이렇게 이름을 바꾸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많은 서구권 국가에서 빵은 주식 중 하나이기에 이런 이름바꾸기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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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버스 파업중이야. 지하철 타고 가.“
b. “빨간 모자 너무 시끄럽다. 가서 한마디 할까?“
c. “손이 모자라서 시간이 배로 걸릴 듯. 사람 좀 더 뽑아주지.“
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펜은 칼보다 강하다.)
e. The White House sees it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백악관은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
f. Ireland passed a landmark bill last year. (아일랜드는 작년에 기념비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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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a-c는 모두 ‘환유’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현상의 예시입니다. 인지언어학자들은 환유(metonymy)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합니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준거가 필요한 만큼 Littlemore (2015)의 다음 정의를 차용하도록 하겠습니다.
Metonymy is a figure of language and thought in which one entity is used to refer to, or in cognitive linguistic terms ‘provide access to’, another entity to which it is somehow related. (환유는 언어와 사고의 수사법 중 하나로 한 실체가 관련된 다른 실체를 가리키거나, 인지언어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관련된 다른 실체에 ‘접근지점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먼저 a를 봅시다. ‘버스 파업중이야’라고 하지만 실제로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은 버스가 아닙니다. 멀고 먼 훗날 자율주행 버스들이 자신의 권익을 찾기 위해 파업을 벌이는 상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SF 속 이야기고, 실제로 파업을 하는 것은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죠. 하지만 우리는 ‘버스를 운전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중이야.’라고 길게 말하기보다는 ‘버스 파업중이야’를 택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실제 대상을 상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그 대상을 가리키는 데 꼭 필요한 정보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문장의 길이도 상당히 짧아지지요.
다음으로 b를 봅시다. ‘빨간 모자’는 그 자체로 시끄럽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모자라면 소리를 내진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시끄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빨간 모자 쓴 사람 너무 시끄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빨간 모자’만 써도 충분히 의미 전달이 됩니다.
다음으로는 c입니다. 여기에서 ‘손’은 단지 신체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손’을 말합니다. 따라서 손이 부족하다는 것은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뜻이 됩니다. a나 b와 비교할 때 조금 다른 점은 ‘버스’나 ‘빨간 모자’가 가리키는 대상의 부분이 아님에 비해 ‘손’은 가리키는 대상 즉 일할 사람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입니다. 흥미롭게도 영어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short-handed’죠. 일손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종종 쓰이는 표현입니다.
속담 d에서 ‘the pen’은 필기구가 아니라 문필 즉 글을 쓰는 행위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에 대구가 되는 ‘the sword’는 무력을 사용하는 일체의 활동을 가리키지요. “The pen”과 “the sword’가 다른 개념으로 가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e에서 “The White House”는 미국 대통령이 참모와 함께 거주하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를 가리킵니다. 빌딩이 아닌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f에서 “Ireland”는 아일랜드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 의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제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아일랜드 국가 전체가 아니라 의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예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특정 개념에 접근할 때 종종 해당 개념에 정확히 상응하는 언어표현을 쓰지 않고 깨닫는 바 그 어떤 단어로 표현해도 통한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행위 전반’에 접근하기 위해 ‘펜’을 사용하고, ‘미국 정부’라는 개념에 접근하기 위해 ‘백악관’이라는 언어를 활용하죠.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간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가 됩니다. 즉 환유는 단순히 언어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구조와 과정을 보여주는 개념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계속)
.....**상호연관된 어떤 속성을 가진 기능적 그룹 전반을 직관적 이해가 가능하기에 대표할 수 있는, 그 그룹에 속한 일부 단어로 전체를 아울러 표현/ 전시하는 언어인지학적 수사법....[예수께서 대딥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 마4:4]...육체를 보전하기 위한 모든 필요를 떡으로, 육체와 아울러 영의 필요 전부를 포함한 필요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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