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이1....참된 사랑안에서 진리 실행 계명..
.....[484.내맘의주여][539.너예수께조용히나가] [438.내영혼이은총입어] [286.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254.내주의보혈은] [267.주의 확실한 약속의]
[289.주예수내맘에들어와] [455.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인격이신 그리스도의 미덕으로 나타남(<성의진선>자비-은혜-오래참음-인자-진실 무궁-경책 :::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이것은 또한 포도나무JC 본체줄기의 뻗어나온 가지로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실행 미덕(믿음-덕-지식-절제-인내-경건-형제우애-사랑)
^^^생명말씀계명..회복의 구주 JC의 인격<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 생명-빛>-성육신-대속의 십자가죽음/부활-보혜사성령으로 내주하심-재림주로 오심
**제한 받지 아니하시는 무한하신 창조주(가시적-비가시적 세계, 모든 차원-우주천지만물-만유의 창조자), 영원과거, 태초이전부터 계신 선재하신 분, 아버지- 아버지 품속에 계시는 아들-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성육신 하신 독생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다함없는 사랑-그 대속의 십자가 죽음-부활 거쳐 제한됨 벗으시고, 친히 변형되신 그리스도의 영, 주 영, 그 영으로 믿는 이의 영에 들어 와 내주하사 영원히 살아계시며 자신의 그 영광 공급하심 통해 그리스도 빼어닮음 이루심... 아버지-아들-성령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말씀 통해> 알게, 깨닫게 교통하며 누리게 하시며... 상호 거처-소유-기업-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어린양의 아내,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시며.... 모든 피조물의 피조된 목적 이룸과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 통한 지고지선에 이르도록 성도 상호간에 서로 사랑함 통해 믿는 이와 교회를 도우시며 이끄시는 <생명-빛-진리-사랑-구원 보증-능력원천이신>보혜사 CJ,
===인사
1.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 길-진리-생명, CJ 살아가기 = 진리안에서 상호간에 서로 사랑 이룸.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와 사랑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9.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끝 인사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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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ohn Amplified Bible
==Walk According to His Commandments
1 The elder [of the church addresses this letter] to the elect (chosen) [a]lady and her children, whom I love in truth—and not only I, but also all who know and understand the truth—
2 because of the truth which lives in our hearts and will be with us forever:
3 Grace, mercy, and peace (inner calm, a sense of spiritual well-being) will be with us, from God the Father and from Jesus Christ, the Father’s Son, in truth and love.
4 I was greatly delighted to find some of your children walking in truth, just as we have been commanded by the Father.
5 Now I ask you, lady, not as if I were writing to you a new commandment, but [simply reminding you of] the one which we have had from the beginning, that we [b]love and unselfishly seek the best for one another.
6 And this is love: that we walk in accordance with His commandments and are guided continually by His precepts. This is the commandment, just as you have heard from the beginning, that you should [always] walk in love.
7 For many deceivers [heretics, posing as Christians] have gone out into the worl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confess the coming of Jesus Christ in the flesh (bodily form). This [person, the kind who does this] is the deceiver and the [c]antichrist [that is, the antagonist of Christ].
8 Watch yourselves, so that you do not lose what we have accomplished together, but that you may receive a full and perfect reward [when He grants rewards to faithful believers].
9 Anyone who runs on ahead and does not remain in the doctrine of Christ [that is, one who is not content with what He taught], does not have God; but the one who continues to remain in the teaching [of Christ does have God], he has both the Father and the Son.
10 If anyone comes to you and does not bring this teaching [but diminishes or adds to the doctrine of Christ], do not receive or welcome him into your house, and do not give him a greeting or any encouragement;
11 for the one who gives him a greeting [who encourages him or wishes him success, unwittingly] participates in his evil deeds.
12 I have many things to write to you, but I prefer not to do so with paper (papyrus) and black (ink); but I hope to come to you and speak with you [d]face to face, so that [e]your joy may be complete.
13 The children of your elect (chosen) sister greet you.
===Footnotes
2 John 1:1 Many scholars believe the words “lady and her children” refer to a specific woman and her family; some others view the words “lady and her children” as the personification of a church and its members.
2 John 1:5 The key to understanding this and other statements about love is to know that this love (the Greek word agape) is not so much a matter of emotion as it is of doing things for the benefit of another person, that is, having an unselfish concern for another and a willingness to seek the best for another.
2 John 1:7 John is not referring to the Antichrist of Revelation, but is using the term generally of anyone who is opposed to the cause of Christ.
2 John 1:12 Lit mouth to mouth.
2 John 1:12 One early ms reads 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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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서(서론)
여기에서 우리는 원칙적으로 단순한 어떤 사람이 아니라 현숙한 부인에 속하는 한 여인에게 보내진 정경화된 서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여인에게 서신을 보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복음서에 나타난 구원과 특권 그리고 존엄성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일한 존재다. 우리 주님은 식사할 것도 잊으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에 대해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순간에도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기를 잊지 않으셨으며, 이로써 장래를 위해 여자 제자들을 귀히 여겨야 할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셨다.
주께서는 부활하시여 맨 처음으로 여성에게 나타나셨으며, 그의 부활의 소식을 요한에게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에게도 전하도록 보내신 것도 바로 그 여자였다.
그 이후에 기독교 세계에 특히 사도 바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적인 봉사를 아끼지 아니한 열심있는 여성도 브리스길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 여인은 남편보다 먼저 언급되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온 이방인 교회들이 감사의 답례를 그 여인과 그의 남편에게까지 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존귀함을 얻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별된 기독교의 훌륭한 여장부들이 사도가 기록한 서신에 의하여 또한 귀하게 취급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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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서 1장 (개요)
존경할 만한 부인과 그의 자녀에 대한 인사(1-3).
그들에게 보내는 믿음과 사랑의 권고(4-6).
미혹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7). 스스로 삼가야 할 일(8).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은 자에 대한 취급 방법(9-11).
개인적인 언급 및 결론(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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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요이 1:1-4)
대개 옛날 서신은 본서와 마찬가지로 문안과 기원으로 시작했다. 참 신앙은 옛 서식을 새롭게 성별하며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Ⅰ. 문안을 하는 자의 이름은 익명으로 하고 단순히 선택된 신분 즉 "장로"로만 나타나고 있다.
표현과 문체, 그리고 사랑에 대한언급은 요한일서의 저자의 것과 동일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 당시 생존자 중 가장 연로한 사도며, 수석 장로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당시의 장로이다.
옛날 이스라엘에서의 장로는 존경할 만하고 또 존경을 받아 마땅한 자였는데, 하나님의 복음적 이스라엘 안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연로한 제자는 존귀한 자이다 연로한 사도와 제자들을 위한 지도자들을 위한 지도자는 더욱 귀한 자들이다.
거룩한 봉사와 경험을 쌓는 가운데 늙게 된 그는 이미 천국을 보고 경험했으며, 그가 처음에 믿던 때 보다 더욱 더 가까이 천국에 이르게 되었다.
Ⅱ. 문안을 받는 자. 믿음을 소유한 현숙한 부인과 그의 자녀들이다.
즉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문안을 하고 있다.
혈통과 교육, 그리고 신분에 있어서 뛰어난 숙녀이다. 복음이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귀인들과 숙녀들이 주 그리스도와 그의 신앙에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비록 많은 귀인들이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그리스도에게 더욱 큰 은혜를 입었다.
여기에서 그 부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씀이 있다. "택하심을 입은 부녀"이다.
단순히 선택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를 말한다.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증거를 나타내는 부녀는 참으로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있다.
아마도 그 부녀는 과부인 듯 싶다. 이렇게 볼 때 그녀와 그의 자녀들은 그 가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 가정은 모범적인 가정으로, 살아 있는 하나의 서신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 자녀들은 훌륭하게 묘사되고 또한 격려되며 좀 더 그들의 가정적인 사랑과 질서, 그리고 의무 이행에 있어서 잘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 자녀들은 기독교 문서를 통해 잘 알려졌고, 그들 자신도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 자신을 격려하고 조심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고 칭찬하는 자들이 그들의 안부를 물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부녀와 그의 자녀들은 그들이 받은 존경으로 말미암아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아래와 같은 사실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1. 사도 자신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즉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내가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한 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사랑의 기교와 수련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각별히 주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였다.
2. 믿는 모든 형제들과 요한을 아는 모든 성도들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즉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덕망과 선함은 드높은 곳에서 아름답게 빛난다.
진리는 응답을 요구하며 순수한 신앙의 확증을 깨달아 안 사람은 그 사실을 고백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증거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일은 훌륭한 증거이며, 또한 크나큰 사명이기도 하다.
이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베푼 사랑과 존경의 근거는 진리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있었다. "즉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기독교 신앙은 살아 있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사성은 애정을 유발할 수 있다.
그들 자신 안에 있는 진리와 경건을 귀히 여기는 자는 역시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와 경건을 귀히 여기며, 이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도 귀히 여길 수 있다.
사도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존귀와 경건에 합당하리 만큼, 또는 그의 사랑과 그의 진실한 신앙에 합당하리 만큼 그 부녀를 사랑했다.
우리들의 사랑은 단순히 어떤 감정과 기분에 이끌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오직 우리들의 마음과 심령 속에 또한 우리의 신뢰와 사랑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진실로 믿음이 한번 뿌리를 박은 곳에서 그 믿음은 영원히 존속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 기독교의 성령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Ⅲ. 문안은 하나의 사도적인 축복이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3절).
거룩한 사랑은 존귀한 이 믿음의 가정 위에 놀라운 축복을 쏟아 붓는다. 곧 있는 자는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아래의 몇 가지 점을 유의해 보자.
1. 이러한 축복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가?
(1) 하나님 아버지, 곧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축복의 샘이요, 모든 축복은 그로부터 우리에게 온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또한 거룩한 축복의 동기가 되며 전달자가 되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특이한 신분으로 구별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아들이 될 수 없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영원한 생명이시다"(요일 1:2).
2. 사도 요한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간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1) 은혜.
거룩한 사랑과 선의(good-will) 다시 말해서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죄많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축복이 참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2) 자비.
값없이 베푸시는 사죄와 용서이다. 이미 풍성한 은혜를 받은 자는 계속적인 용서를 필요로 하게 된다.
(3) 평강.
안전하고 성결된 모든 외적인 행복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화해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평온과 양심의 평안이다.
이러한 것들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에서 문안하는 자의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이나, 문안을 받는 자의 지속적인 진실과 풍성한 사랑으로 구하여지게 된다.
이러한 축복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 속에 있는 참된 믿음과 사랑을 길이 보존하게 될 것이다. 진심으로 이러한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Ⅳ. 탁월한 이 부녀의 자녀들의 모범적인 품행에 대한 축복. 이러한 신앙적인 많은 자녀를 소유한 부모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4절).
아마도 이 부녀의 아들들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 혹은 사업이나 가정 일로 인하여 세계를 널리 여행한 것 같다. 그리고 여행 중에 당시 사도 요한이 거주하고 있었으리라 추측되는 에베소에 들려 그곳에서 반갑게 그를 상면했을 법하다.
일찍이 신앙을 훈련시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라! 비록 신앙이 교육에 기초를 둔 것은 아닐지라도 교육은 귀한 것이며, 젊은이로 하여금 불신앙적인 악영향에 대처할 힘을 키우도록 하는데 방편이 된다.
그러므로 젊은 여행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지니고 여행에 임하도록 해야 하며 가정에서는 신앙을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가는 곳마다 악한 풍습을 배우게 될 것이다. 때로 택하심은 가계를 따라 전달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택하심을 받은 자녀라"는 말을 볼 수 있다.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 덕분에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녀들이나 그의 부모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으로 귀한 존재가 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사도의 기쁨을 통해 훌륭한 부모의 보살핌으로 양육된 자녀를 보는 일은 기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본 사람들은 그 부모를 축하하게 되며, 이러한 놀라운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많은 자녀들을 하늘나라와 하나님 앞에 인도한 이 부녀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위대하신 최고 절대의 심판자(하나님)로부터 자녀들에 대한 칭찬을 듣는 일은 그 부녀에게 있어서 얼마나 기쁜 일인가!
노경에 있는 훌륭한 목회자들과 또한 다른 모든 연로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죽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을 지키게 될 소망에 찬 새로운 세대들을 보여주는 일은 기쁜 일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된 행실의 기준이 있음을 본다. 즉 "아버지의 계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우리의 행실은 진실되며 우리의 말은 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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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사랑(요이 1:5-6)
우리는 이제 본 서신의 의도와 핵심에 보다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Ⅰ. 사도의 간구.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그가 구하는 바가 무엇임을 생각하려면 그의 말의 방법을 주목해 볼 만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특별한 부탁이나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일반적인 의무와 준수를 이름이다.
보다 부드러운 것이 효과가 있을 경우에는 보다 거치른 방법은 불필요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사도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친절했다. 보다 부드럽고 부녀에 대한 존경심과 사도적인 온유함으로 사도는 겸손하게 구하였다.
"부녀여 내가 이제 구하노니" 요한은 다른 사도가 그의 서신을 받는 자에게 말하듯이 하고 있다.
즉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능력에 따라 편리한 방법으로 너희에게 담대히 명령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 나이 많은 장로로서 너희에게 간구하노라"고 말한다. 권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사랑이 효력을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권위를 주장하게 되면 더욱 더 그 권위는 경멸을 받게 됨을 종종 보게 된다.
사도적인 목회자는 존경함으로 그의 동료들을 사랑하고 구하게 될 것이다.
Ⅱ.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요구되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자"(5절).
그리스도인의 덕성이 뚜렷한 사람도 아직 그 안에 더욱 성장되어야 할 여지가 남아 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 10).
1. 사랑은 아래와 같이 권고되어진다.
(1) 사랑은 의무 즉 "계명"으로 권고되어진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마음과 심령을 지배할 수 있다.
(2) 그 사랑의 의무는 옛날부터 권고되어진 것이다. "이는 새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그리스도인의 상호적인 사랑에 관한 계명은 주 그리스도에 의한 사랑의 새로운 시행과 허용이란 관점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상호적인 거룩한 사랑에 대한 문제로 볼 때에 그것은 자연적이며 유대교적 혹은 기독교 신앙만큼이나 오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피차간 사랑해야만 한다는 이 계명은 어디서든지 기독교에 꼭 수반되는 것이다.
2. 이 사랑은 그 계명이 가지고 있는 열매 맺는 특징으로 설명되어진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니"(6절). 곧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과 복종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우리의 형제에 대한 사랑이다.
"계명을 지키면 큰 상급이 있게 된다." 이 계명은 서로 사랑하며 거룩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게 되는 기독교의 진실한 상호적인 사랑의 증거를 말한다.
비신앙적이며 비기독교적인 상호간의 사랑도 있다. 절대적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선하고 진실한 덕성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신앙적인 순종을 도모하는 자는 기필코 기독교적인 사랑에 이를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복음적인 입장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다.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 행하라 하심이라"(6절). 다시 말해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랑의 퇴락과 또한 배교에 대한 예견이 사도로 하여금 사랑에 대한 의무와 기본적인 계명을 보다 더 부지런하고 열심 있게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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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하는 자에 대한 경고(요이 1:7-9)
본 서신 중 매우 중요한 부분인 이곳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보자.
Ⅰ. 부녀에게 전달된 불길한 소식. 그것은 미혹하는 자가 번창한다는 소식이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왔나니," 이 보고는 보고의 이유를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 소개되고 있다.
너희의 사랑을 지키도록 하라. 이는 세상에 사랑의 파괴자들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믿음을 파괴하는 자들은 사랑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공동인 믿음은 공동적인 사랑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리하면 이것이 당신을 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안전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는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남을 슬프게 하는 소식을 믿음의 친구들에게 전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그들을 슬프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시련을 대비케 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1. 미혹하는 자와 그의 거짓됨.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이다"(7절).
그는 주 예수에 대한 그릇된 생각과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심이나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해 이미 약속하신 바 메시야이심과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러한 자는 그리스도가 아직 앞으로 오셔야 할 것으로 기대한다.
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세주가 되심에 대한 확증을 부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2. 악화 일로의 경우. "이러한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다."
그는 사람들을 속이고 주 그리스도 영광과 그의 왕국을 더럽힌다.
그는 세상에 비추인 빛과 그리스도 자신이 나타낸 확증과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대해 보여주신 증거를 거부하는 사기군이요 의도적인 협잡군이다.
그는 주 그리스도의 인격과 존귀와 유익에 대해 의도적인 반대를 하는 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의 정체는 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주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에 대해 미혹케 하며 반대를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지 말자.
사도 시대에도 이러한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Ⅱ. 택하심을 입은 부녀에게 주어진 권고. 주의와 경고는 언제나 필요하다. "너희를 삼가라"(8절).
미혹하는 자들과 그들의 속임수가 많아질수록 제자들은 이에 대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혹이 많아짐으로 택하심을 입은 자까지도 이로써 위험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한다.
1. "사도들이 일한 것과 행한 것 혹은 그들이 얻은 것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8절).
신앙적인 노력이 헛되어 돌아가는 일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어떤 자들은 시작은 훌륭하나 드디어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젊어서부터 계명을 지킨 소망 있는 사람이 세상에 대한 사랑의 억제와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큰사랑의 결핍으로 모두를 상실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이미 얻은 바를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좋은 평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은혜와 죄악에 대한 확신, 세상의 허무성과 신앙의 우월성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들은 "내세의 소망과 성령의 은사를 맛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모든 것을 잃고 있다.
"너희로 하여금 진리를 좇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를 너희가 멀리하였도다."
그리스도의 훈련장에서 얻어진 훌륭하고 귀한 지식을 잃어버리는 것은 유감된 일이다.
2. 그들을 위해 확정된 상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온전한 상을 얻으라."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누구에게든지 주어지는 온전한 상을 얻도록 하라. 만일 귀한 것이 있다면 영광 중에 높은 곳에서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은혜의 빛과 사랑과 평화를 잃지 말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온전한 상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에 대해 진실하며 끝까지 믿음 안에서 사는데 있다.
Ⅲ. 사도의 권고와 주의와 경고에 대한 이유. 그것들은 두 가지이다.
1. 복음의 빛과 계시로부터 이탈함에 따른 위험과 죄. 그것은 결과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떠나는 것이 된다.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이로써 하나님은 인간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며 그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가 된다.
2. 기독교의 진리를 고수함으로써 얻어지는 유익과 행복.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진리의 대상과 주체가 되는) 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 매어 놓는다.
이는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자(뿌리를 박고 근거를 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소유한 자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지식에 눈을 뜨게 된다.
그 교훈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성화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 이러한 정결함이 하늘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든다.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해 증거하신 것처럼 위대하신 하나님은 그 교훈에 귀중한 가치를 부여하신다.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과 복된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고 바라는 만큼 거룩한 교훈을 믿고 사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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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자에 대한 경고(요이 1:10-11)
Ⅰ. 여기에서 사도는 미혹하는 자들에 대한 필요한 경고와 아울러 대우 관계를 지시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역자처럼 대우해서는 안 된다. 주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로부터 미혹하는 자들을 구분하며 그의 제자들을 보존하실 것이다.
사도의 지시는 소극적이다.
1. "미혹하는 자들을 도와주지 말라." 즉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 말고 인사도 말라."
아마도 이 부녀는 우리가 다음 서신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관대한 집주인이며 여행하는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잘 돌보아 준 가이오와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미혹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 혹은 그곳에 방문한 바 있는 보다 훌륭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동일한 환영을 받을 것을 기대한 것 같다.
그러나 사도는 이를 허락지 아니했다. "그들을 너의 집에 들이지 말라."
긴박한 궁핍 가운데 있을 그들이 푸대접을 받게 될 때 그들은 적지 아니 실망하게 될 것이다. 믿음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자들이다.
택함을 입은 부녀들도 신앙적인 의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만 한다.
2. "미혹하는 자들의 하는 일을 축복하지 말라. 즉 인사도 말라." 기도와 간절한 기원으로 그들의 사업에 시중들지 말라.
악한 일은 거룩한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거짓과 유혹죄의 후원자가 아니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도 사업에만 축복을 빌어야 한다. 그러나 치명적인 악의 번식을 막을 수 없거든 상종을 금하도록 하라.
Ⅱ. 미혹하는 자를 위한 후원과 도움을 금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11절).
이런 경우의 호의와 사랑은 죄에 참예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악에 분담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지혜롭고 조심성이 있어야만 하는가!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의 범죄에 참예하게 되는 길이 너무나 많다.
즉 그것은 불의한 침묵, 게으름, 무관심, 사적인 기여, 공적인 지지와 협조, 내적인 시인, 또는 공적인 변호와 방어로써 이루어진다.
주여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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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인사(요이 1:12-13)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이 서신을 끝맺고 있다.
1. 그는 추후에 직접 얼굴을 대하고 더 많은 것을 말하기를 원한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어떤 때는 글자로 쓰는 것보다 말로 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 펜과 잉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고맙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면담은 더욱 고맙고 즐거운 마음을 상대방에게 준다. 사도는 아직 여행하거나 또는 전도 여행하기에 어려움을 당하리 만큼 늙지는 않았다.
성도의 교제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지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교제는 서로의 기쁨을 가져오게 한다.
훌륭한 목회자들은 그들의 동역자들로부터 오는 기쁨을 얻게 된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2).
2. 가까운 친척들이 그 부인에게 보내는 문안으로 본 서신을 마치고 있다.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13절).
이 가정에 은혜가 충만하게 넘쳤다. 여기에 두 자매와 택하심을 입은 그들의 자녀가 있다. 얼마나 그들은 하늘의 놀라운 축복을 귀중히 여기었을까!
사도는 질녀들이 그들의 숙모에게 행해야 할 의무와 예의를 삽입하고 있다. 손아래 사람들의 의무를 명백히 하고 있다.
분명히 사도는 접근하기 쉬운 사람이었고 친절하고 경건한 교제를 나누었으며, 또한 그의 질녀들 안에서 그녀의 기쁨을 더하게 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은혜 받은 자녀들과 다른 모든 친척들로부터 기쁨을 누리는 이러한 부녀와 같은 자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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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서 제 1장
@장로는. - '장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프레스뷔테로스'(*)에 관사 '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본서의 저자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신약 성경의 다른 서신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아니하고 '장로'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이 나이가 많은 연장자로서 존경을 받을 만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감독과 같이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이단의 거짓 교리에 대항하여 사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임을 시사한다(Stott, Barker, Smalley, Westcott).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 본서의 수신자를 나타내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의 헬라어 '에클려테 퀴리아 카이 토이스 테크노이스 아우테스'(*)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1)혹자는 '에클려테'나 '퀴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라고 주장한다(Clement, Harris). (2)혹자는 지방 교회와 같은 기독교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Westcott, Brooke, Bruce, Dodd).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한 개인에게 해당하지만 사실상 공동체에 대한 교훈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따라서 수신자들은 요한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방 교회와 교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 '참으로'의 헬라어 '엔 알레데이아'(* )에 대해서 혹자는 관사가 없음을 근거로 '진실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그러나 문맥상 본서에서 이단자들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진리 안에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tott).
한편 본절에 나타난 '사랑'과 '진리'는 본서 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이단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하는 방패이다. 요한은 '사랑'과 '진리'의 상관 관계를 통해서 자신과 진리 안에 거한 자들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교회와 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4-6절).
=====1: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 본절은 요한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수신자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메드 헤몬 에스타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는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는 진리는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주어지며 이 진리를 통해서 상호에 대한 사랑이 지속되게 된다(Stott, Smalley).
한편 '우리 안에 거하여...진리를 인함이라'는 진리가 앞서 언급된 사랑의 원인임을 시사한다.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본이며 동기이다. 진리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내포하며(요일2:7,8; 3:11)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내적인 동기 부여와 충동을 통해서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
=====1:3
본절은 당시 서신의 관행을 따른 수신자들에 대한 축원(祝願)이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를 호의와 선물이며(약1:17) '긍휼'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딛3:5). 이러한 은혜와 긍휼을 근본으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결과가 바로 '평강'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파라 데우 파트로스, 카이 파라 예수 크리스투 투 휘우 투 파트로스). - '아버지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칭호 가운데 독특한 것으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요한의 신학을 반영한 것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계시하고 계셔서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과 같음을 시사한다(뇨20:31; 요일2:23, Smalley, Brooke,Bengel).
한편 본문에서 '...로부터'의 헬라어 '파라'(* )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각각 적용되어 두 번 사용되고 있다. 이는 아버지와 동등하게 아들도 축복의 근원이 되심을 시사한다(Stott).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 요한은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인사한 것과는 달리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를 삽입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이신 예수의 생을 통해서 계시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드러난 그의 사랑 안에서 현시되었음을 시사한다(요일4:9,10, Smalley,Barker).
또한 이러한 '진리와 사랑'을 통해서 수신자들이 이단자의 거짓 교리에 대처해 나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진리와 사랑은 불가 분리의 관계를 형성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사랑할 수 있게 하며 사랑을 통해서 진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Stott).
=====1:4
@너의 자녀 중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톤 테크논 수'(*)는 부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몇몇'의 헬라어 '티나스'(*)를 필요로 한다. 이 '몇몇'이 가리키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교회 구성원들 중 순회하다가 요한에게 와서 만나게 된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rshall, Stott, Bruce). (2)혹자는 교회가 이단의 거짓 교리에 의해서 어려워지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교리는 따르게 되었을 때 진리와 사랑 가운데 있었던 몇몇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malley, Houlden, Schnackenburg).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계명은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예수 안에서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요일3:23, Smalley).
이는 요한이 본서에서 강조하는 '진리와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삶의 특징이다. 한편 요한은 예수께로부터 받은 계명이라고 표현하지 않고(요13:34; 15:12,17) '아버지께' 받은 계명이라고 진술한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모든 진리와 메시지의 궁극적인 근원임을 시사한다(Marshall, Westcott).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 '진리에'로 번역된 헬라어 '엔 알레데이아'(* )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관사가 없는 것을 이유로 '진실하게'와 같이 부사적으로 해석한다(Barker). (2)혹자는 앞절에서 관사를 사용하지 않고 '진리와 사랑'을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로 관사와 관계없이 '진리 안에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행하는'의 헬라어 '페리파툰타스'(* )는 현재 분사로서 복음과 그 도덕적 기준을 따라 일정하게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시사한다(요일1:7).
=====1:5
본절은 요일4:21을 반영한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 '내가...구하노니'의 헬라어'에로토'(* )는 서간체이다. 요한은 자신이 명령할 수 있는 위치와 권한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청하는 표현을 씀으로 자신이 수신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어했던 중심적인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한편 '서로 사랑하자'의 헬라어 '아가포멘 알렐루스'(* )는 요 13:34; 15:12,17)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현재 시상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인 상호간의 사랑이 지속적인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요일4:7) 아들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셨던 것이며(요일3:16)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취되어 가는 것으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비이기적인 행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자발적(自發的)인 순종이다(요일4:13-15, Barker,Smalley).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 본문은 요일2:7에 대한 설명이다(요일2:3-5,10; 3:11-18,23; 4:7,11,21).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주어진 의무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해야 할 계명이다(Stott).
=====1: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 본절은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 두 종류의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Westcott, Smalley). 두 종류의 사랑은 상관 관계를 맺고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사랑으로 나타난다(요일4:7-1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요14:15,21; 15:10; 요일5:2,3). 즉 사랑의 시금석은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다.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 '그 가운데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테'(* )에서 '아우테'는 여성명사를 받는 지시 대명사로서 여성 명사인 '계명'(* , 헤 엔톨레)과 '사랑'(* , 헤 아가페) 중 하나를 가리킨다. 이 두 가지 중 '엔 아우테'는 '사랑'을 가리킨다(Smalley). 하나님에 대해 순종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한 순간부터 기독교 복음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들어 온 것이다(요일1:1-5).
한편 '행하라'의 헬라어 '페리파테테'(* )는 문자적으로 '걷는다'라는 의미로 생활을 통해서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계명을 행하는 삶은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고 빛 가운데 거하는 삶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1:7
개역성경에는 '호티'(*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는 사랑과 진리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4-6절까지의 내용과 7-11절에서 언급될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고'가 상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 '진리와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요소로서 이를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은 곧 미혹하는 자이며 적그리스도들이다. 본절은 요일2:23,27과 4:1-3을 반영한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 '많이'로 번역된 헬라어 '폴로이'(*)는 4절에 나타난 '너의 자녀 중에'에서 암시된 '몇몇'(* , 티나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는 수신자들이 속한 교회에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나 미혹하는 자를 따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은 매우 많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나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셀돈'(*)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미혹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무리를 형성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나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요일2:19). (2)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서 나와 세상에 들어오셨고(요17:18; 20:21; 요삼1:7) 같은 단어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미혹하는 자들이 잘못된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하여 나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 본절은 요일4:2을 반영한 것으로 미혹하는 자의 정체를 나타낸다. 본절과 병행을 이루는 요일4:2에서는 완료분사인 '엘렐위도타'(* , '오신 것을')가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육체로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내나 본절에서는 현재 분사인 '에르코메논'(*, '임하심을')이 사용되어 미래 시제의 의미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절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이유가 없다. 요한이 요일4:2에서와 같이 완료 시상을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상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초시간적인 사건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Barker, Marshall, Stott, Brooke, Alford). 미혹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후토스 에스틴 호 플라노스 카이 호 안티크리스토스).- 본문에는 관사 '호'가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에 대해 수신자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Smalley). 이러한 이단자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로서(요일2:18,22,26)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을 파괴(破壞)시킨다(9절).
=====1: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 '우리의 일한 것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너희가 일한 것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hat you have worked for, NIV,RSV,Stott, Bultmann, Schnackenburg). (2)혹자는 '우리가 일한 것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hich we have wrought, KJV,NEB, RV, JB, Brooke, Marshall, Westco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만약 수신자들이 미혹하는 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면 요한을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수고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갈4:11,19, Barker). 한편 '온전한 상'의 헬라어 '미스돈 플레레'(*)는 유대적인 표현으로(LXX 룻2:12)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봉사에 대한 보상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온전한 상'은 그리스도인이 신실하게 행한 진리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영생의 보상을 의미한다(벧전1:9; 요일4:14-16, Smalley).
=====1: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 미혹하는 자와 적그리스도를 따라 행할 때 온전한 상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함을 강조한 앞절에 이어 본절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조차도 상실하게 됨을 나타낸다. '지내쳐'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아곤'(* )은 진리를 넘어서 지나치게 나아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스스로 믿음의 초보 상태를 벗어나 진보되고 성숙된 믿음을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는 잘못된 모습을 나타낸다(Stott, Smalley). 한편 '그리스도의 교훈'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디다케 투 크리스투'(*)에서 나타난 소유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Stott, Brooke, Schnackenburg). (2)혹자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ith, Bultmann, Marshall, 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두 가지 견해가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과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전자는 믿음의 근본을 이루는 진리를 나타내며 후자는 진리에서 비롯된 믿음의 표현을 나타낸다(Barker).
=====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 '이 교훈'은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요한이 본서에서 특히 강조하는 '진리와 사랑'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의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는 명령은 요한의 교훈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요한은 다른 사도와는 달리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특히 강조하며 나그네 된 자들을 환대해야 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요삼1:5-8). 그러나 본문의 '들이지도 말고'는 사적(私的)인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집'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만났던 장소로서(롬16:5; 고전16:19; 골4:15; 몬1:2) 미혹하는 자들을 '집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미혹하는 자들을 공식적으로 환대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Stott, Smalley). 그러기에 요한은 교묘하게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고 거짓된 진리를 자랑하며 선전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거절할 것을 권면한다.
=====1: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 본절은 미혹하는 자를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하지도 말라는 명령에 대한 이유이다.
미혹하는 자들과의 인사는 그들과의 만남의 시작이나 혹은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혹하는 자들과의 교제를 의미한다(Smalley). 그들과의 교제는 그들이 저지르는 악한 일 즉, 교리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죄와 윤리적으로 타인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랑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죄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에 참여하다가는 온전한 상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도 잃어버리고 영원한 파멸을 향하게 된다(마6:24; 고전10:20).
=====1: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 '원치 아니하고'의 헬라어 '우크 에불레덴'(*)은 서간체 단순 과거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서신을 받아보았을 때를 기준으로 하여 요한이 본 서신을 기록하였음을 나타낸다. 한편 '면대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스토마 프로스 스토마'(* )는 문자적으로 '입과 입으로'라는 의미로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다.
요한은 본절에서 수신자들에게 전해야 할 말이 많으나 더 이상 서신으로 교제를 나누지 아니하고 직접 만나기를 원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 본문은 요한이 서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수신자들을 만나기를 원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이 기쁨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간의 교제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요일1:3,4).
=====1:13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 본절의 마지막 인사는 본서처음에 나타난 인사인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와 병행(竝行)을 이룬다(1절). '수'(* , '네')와 '세'(* , '네게')는 집합적인 의미를 지닌 단수로서 수신자들이 속한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를 가리킨다(Marshall, Smalley, B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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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기독교 이단들]]===
@초창기, 유대주의적 기독교 이단 --에비온파 = JC의 선재-성육신 부인-양자기독론 강조, 청빈 강조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에 의하면 '에비온파'는 창시자의 이름인 '에비온'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리어졌다고 말한다.
반면에 '오리게네스'는 그들의 이름은 '빈곤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인 evyon으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들의 이름은 초창기 시절에 이들이 속해 있던 공동체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사도행전 2장 44~45절과 사도행전 4장 32~27절의 말씀을 토대로 그들이 가진 것을 타인들과 나누고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러한 삶을 자발적으로 살았던, 곧 가난한 삶을 선택했던 이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들에 의해 저술된 자료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가 않은 상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들에 대한 정보를 이들을 반대했던 이들로부터 밖에는 얻을 수가 없는 실상이다.
원 정통 기독교의 저술가들에 의하면 '에비온파'는 당시 원 정통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위협의 대상이었다고 전한다.
이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경전인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법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월절을 지키고 정결한 음식을 먹고,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 "매일 예배 의식을 행할 시에는 반드시 머리를 예루살렘 방향으로 향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이 외에도 이들은 자신들만의 신학을 정립했다.
특히 에비온파에 속한 이들은 '예수의 선재설'과 '처녀 잉태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 역시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때 이들이 인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그(예수)가 신성을 가져서도, 나아가 처녀에게서 잉태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그의 아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들이 주장하는 이와 같은 기독론은 종종 원 정통 기독교인들에게 '양자기독론'이라고 불리어지곤 했다.
에비온파에 속한 이들은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장자이며, 나아가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성관계로 인해 태어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예수를 그의 아들로 선택했고, 예수 자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그에게 사명을 부여했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를 제사의 제물로 받았다는 증거로서 그를 다시 부활시켰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에비온파의 이와 같은 주장은 원 정통 기독교파에 속한 저술가들을 충분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에비온파의 입장에서 본다면 원 정통 기독교파의 견해는 자신들의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약성경 특히 바울의 가르침은 자신들의 신학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에비온파에 속한 이들은 구약의 율법(유대인 법)을 매우 중시 여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경전은 히브리경전(구약성경)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들이 선택한 신약의 텍스트가 있었다. 바로 마태복음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보유했던 마태복음은 아람어 번역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중요한 사실은 에비온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마태복음 텍스트는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마태복음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을 것이라고 대다수의 학자들이 주장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그들이 사용한 마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합쳐 놓은 형태와도 같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어떠한 면에서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텍스트로 사용했던 그들만의 마태복음 텍스트가 원 정통 기독교파의 학자들로부터 탄압과 이단화로 내몰리면서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원 정통 기독교파가 힘을 얻게 되면서 이단시 되었던 모든 이들의 자료들을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원 정통 기독교파는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고 힘을 얻어 자신들의 신학을 더더욱 발전시킬 수가 있었다.
반면에 권력에서 밀려난 변두리의 초창기 기독교파들은 점점 더 자신들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잃고 말았다.
====[영지주의, Gnosticism]=====기본 논리는 이원론적..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관점
@세린티안 ::: 영지주의(Gnosticism) 교부로서, 세린투스(케린투스)는 복음서 저자 요한(John the Evangelist)과 동시대인이자 복음서 저자 요한의 반대자였으며, 그리고 복음서 저자 요한은 세린투스(케린투스)에 반대하여 요한복음을 저술
---초기 기독교 정통파들과는 달리 세린투스(케린투스)파는 유대교 율법을 따랐으며, 《히브리 복음서》를 사용하였고, 지고한 신이 물질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 예수의 선재성, 신격<참하나님-참사람이심, 곧 성육신>을 부정하였다.
---세린투스(케린투스)의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무형의 스피릿(bodiless spirit, 형체가 없는 순수 영)인데 예수라는 실제 인간 속에 일시적으로 거주하였다고 설명 ::: 그리스도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에 비로소 예수에게로 왔으며 그리고 이후의 예수의 사역 동안 예수를 인도하였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였을 때 예수를 떠났다고 주장.
@마르시온 :: 도세티즘적(가현설/가현론적 = 실제적 성육신 부인) 마르시온파
이번에는 초창기 '도세티즘'적인 기독교파였던 '마르시온파'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에비온파와는 대조적으로 마르시온파는 유대적인 요소들을 자신들의 신학으로부터 모두 배제해 버린 자들이었다.
이들은 유대인의 관습, 유대인들의 경전, 나아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까지도 부인했던 자들이었다.
당시 원 정통 기독교파의 입장에서는 마르시온파를 이단적으로 보았다. 특히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의 경우에는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5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원 정통 기독교파에서 본 이들의 특징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적으로 '마르시온'이란 사람은 서기 100년경에 흑해의 남쪽 해안에 자리 잡은 본도 지방의 '시노페'에서 태어났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 그는 상당한 재력가였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화물 수송업과 선박 제조업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러한 그가 서기 139년에 고향을 떠나 로마로 가게 된다.
로마에 머물게 되면서 그는 기독교에 관련되어진 텍스트들을 엄청나게 읽었다. 특히 그는 사도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글들에 매료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갈라디아서는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울은 율법에 따른 행위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설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사도바울의 사상은 마르시온에게 배타적-절대적-이단적인 교리 정립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 마르시온은 히브리성경(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유대법은 유대인들을 위한 법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더는 효력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나아가 그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바울의 저술들에서 발견되어지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존재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더 발전되어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예수는 실제에 있어서 피와 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실제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실제의 인간이 아니었고, 단지 인간의 모습으로 보였을 뿐이다." 한마디로 그는 '도세티즘(Docetism : 가현설/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원 정통 기독교파의 저술가들에 의해 엄청난 공격을 받게 된다. 특히 그가 가장 좋아한 구절은 로마서 8장 3절이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 구절에서 마르시온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곧 '도세티즘'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것은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학 곧 그리스도의 대속론을 발전시켰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의 저술(기록)들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안티테제(반정립)'라고 불린 그의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상반되는 두 하나님을 정립과 반정립의 명제로 대립시키면서 히브리 성경의 하나님은 예수의 하나님일 수가 없다는 그의 논지를 전개해 나아고 있다. 또 다른 한권의 책은 엄밀히 말해 그의 저술이 아니라 당시 여러 기독교의 텍스트들을 자신의 신학대로 편집한 책이었다.
그는 바울의 편지들 10편과 누가복음을 자신의 핵심 경전으로 삼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구약성경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이유는 구약성경은 예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구약성경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고민은 이랬다.
그가 경전으로 삼은 신약의 11편의 텍스트들 가운데서도 종종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구절들이 그의 골칫거리로 남은 것이다. 결국 그는 이러한 주장을 내세웠다.
"11편의 경전 속에 등장하는 구약의 인용구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첨가된 내용들이다."
그는 그와 같은 구절들을 모두 삭제한 후에 그 외의 것들로 자신만의 경전을 창출해 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로마로 소집하여 자신의 신학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로마로부터의 추방 명령이었다. 결국 그는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로 갔고, 그곳에서 그는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키워 나갔다.
@몬타누스 주의...시한부 종말론 + (로고스에 바탕한 레마가 아니라!!) 직통 특별 계시 강조.
몬타누스주의는 2세기 중엽 몬타누스가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방에서 종말에 관한 희망과 임박한 구주재림 기대를 바탕으로 교회의 생활규범을 극단적으로 쇄신하려고 한 예언 운동.
이미 2~3세기부터 여러 교회 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받은 이 운동은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몬타누스주의」, 발생지에 따라 「프리기아 사람들의 이단」, 운동의 성격에 따라 「새 예언」으로도 불린다. 이 운동의 창시자 몬타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프리기아의 여신 키빌레 신전의 사제였다.
그는 자신을 주님께서 교회에 보내기로 약속한 진리의 영, 협조자의 도구라고 여기며, 그 당시 교회의 매우 절박한 문제에 대응하려 하였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을 멀리할 것과 종말을 준비할 것을 권고하면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열정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다.
몬타누스파의 특징은 [배타적, 직통 계시로서]계시이다. 몬타누스와 그와 함께 활동한 여예언자 프리쉴라와 막시밀라는 무아경에 빠져 받은 신탁으로 계시를 선포하였다.
특히 이 세 사람은 <유일무이한>예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이 은사는 더 이상 계승되지 않고 그들과 함께 끝난다고 주장하였다.
막시밀라는 『내 뒤에는 더 이상 어떤 예언자도 오지 않을 것이며, 종말의 완성이 올 것이다』하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전파한 내용은 전적으로 종말론적이다.
그들은 예언적 영의 선물을 임박한 종말에 관한 기대로 여기는, (요엘서의 기록 부분)사도행전2장17-20절을 바탕으로 임박한 종말 기대를 화두의 실마리로 삼았다.
몬타누스파는 임박기대가 실현되는 장소를 제한하면서, 묵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과 천년왕국이 프리기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마을에 실현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들은 천년왕국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신자들에게 단식, 독신생활, 성생활의 자제, 생식, 자선, 순교를 권하였다.
더구나 몬타누스파는 스스로 선택된 이들이라는 자의식에 가득 찬 나머지, 중죄를 지은 이들에게 회개할 기회나 여지조차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의 교회가 예언자들과 영의 소유자들에게 나타났던 바, 원시 그리스도교의 열정은 시들어 버린 채 세속화되어 가자, 이런 경향에 맞서 엄격한 극기를 행하였고,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을 강조하여 여성의 성직도 허용하였다.
예언자들과 여예언자들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언과 연계되었으며, 예언적 교회가 제도적 교회에 맞섰다.
막시밀라가 197년 사망한 뒤에도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지 않자, 새 예루살렘에 대한 임박기대를 주장한 몬타누스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몬타누스주의는 예언이 중심이 된 프리기아 지방의 종교, 지리적 특성을 넘어 널리 전파되었다. 몬타누스는 조직을 관리하고 구성하는 데 뛰어났기 때문이다.
서방의 일부 공동체는 새 예언이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거부하였지만, 이와 달리 그리스어권 그리스도인은 새 예언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몬타누스주의는 갈라디아, 시리아, 흑해 연안까지 전파되었다.
200년경 프로클루스는 로마에서 몬타누스파를 대변하였으며, 로마의 주교 빅토르는 몬타누스 사상에 호의적이었던 듯하다.
교회의 많은 주교들은 몬타누스파의 예언이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 감지하였기 때문에 몬타누스파의 확산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주교들은 몬타누스파의 극단적인 순교 열망에 영향받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하였으며,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보다 더 높아지고, 그때 형성되던 신약성서 경전이 몬타누스파 에언자들의 신탁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현실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몬타누스파의 핵심적인 유설을 논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허나 몬타누스파가 주장했던 세상의 종말은 없었고, 당시의 뛰어난 저술가들인 밀티아데스, 아폴로니우스가 정통 신앙을 변증함으로써 교회의 정통신앙은 점차 그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더구나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2~3세기경 몬타누스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몬타누스파의 여예언자와 추종자들을 단죄하고 공동체에서 쫓아냈다.
마침내 티아테이라를 제외한 프리기아 지방의 중부와 남부 도시들은 정통신앙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 뒤로 이 운동은 급속도로 쇠퇴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몬타누스주의는 프리기아의 일부 지역과 특히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에게서 지속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아프리카 지방의 대표적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임박한 종말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고취시킨 몬타누스주의가 영의 활동을 북돋운다는 사실에 매료된다.
207년부터 그는 새 예언의 가르침을 옹호하면서 모교회를 「타락한 영혼의 교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적대자로 변신하였다(이는 칼 라너 같은 신학자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하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는 211~217년경에 저술한 마지막 작품들에서 이 운동의 사상과 일치하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과부의 재혼은 간통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성령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박해를 받을 때도 결코 피하지 말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순교할 것을 권하였다.
몬타누스주의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사망한 뒤로는 아프리카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4세기 아프리카 교회의 도나투스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4세기 이후의 몬타누스주의에는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째, 새 예루살렘이 페푸자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몬타누스파는 여러 직급, 곧 주교, 장로, 봉사자 외에 코이노노이와 총대주교로 이루어진 교계제도를 만들었다.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그들의 미사는 활기에 넘쳤으며 종종 열광적으로 거행되었다고 한다.
둘째, 이들은 부활절 축일을 그들의 고유한 방식으로 정하였는데, 부활축일 산정은 태양력에 바탕을 두었다.
교황 인노첸시우스 1세(401~497년)는 몬타누스주의를 매우 적대시하였고, 호노리우스 황제가 선포한 이단 법령은 서방에서 몬타누스주의가 쇠퇴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
이로부터 150년 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년)가 이 종파를 추종하지 못하게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몬타누스주의는 동방에서도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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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누스파(Montanist, 몬타니스트)는 2세기 소아시아에 있었던 기독교의 일파이다.
창시자인 몬타누스(Montanus)의 이름을 따서 몬타누스주의(Montanism)라고도 하며, 주류파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세례 시 그들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했다. 예수가 약속한 보혜사인 성령이 그들을 통해 그러한 은사들을 준다고 주장했다.
몬타누스와 그의 두 여제자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대변인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예언 중에는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경고도 있었다.
교회에서의 의식들이 엄격히 실행되지 않을 때 그들 중에는 신자의 보다 더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이들이 생겼다.
터툴리안이 몬타누스파가 되었을 때 그들은 가장 이름있는 개종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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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시대가 저물고 교회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자신들의 시대에 그리스도가 재림하리라 믿었던 많은 성도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남아 있는 자들은 점차 긴장의 끈을 늦추기 시작했다.
일부 성도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기해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고 믿었지만, 이런 사상도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약화되었다.
성도들의 가치관이 변했다. 이들은 더 이상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살지 않았다.
엄격한 윤리 의식이 사라지면서 성도들의 생활은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제도와 외형적 질서를 정비해 나갔다. 새롭게 정해지는 규정에 따라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의무와 권리가 발생했다.
이런 현상을 교회의 세속화로 규정하고 초대교회로의 회귀를 외쳤던 한 무리가 등장했는데, 그 중심에는 소아시아 프리기아 출신의 몬타누스가 있었다.
----몬타누스와 여성 추종자들
몬타누스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본래 이교도였으나 세례를 받고 회심했다고 알려진다.
156년 경 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고 전해지는데, 이 운동을 몬타누스의 이름에 기인해 몬타누스주의라고 부른다.
몬타누스주의는 예언하는 두 여자, 프리스길라와 막시밀라의 합류로 힘을 얻게 된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새로운 계시와 종말론, 금욕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직통 계시와 종말론
당시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사도 시대가 종료되면서 더 이상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때문에 몬타누스와 그 추종자들의 계시와 예언 선포 활동은 열정적인 신앙을 갈망하는 성도들로부터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1)
몬타누스는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예고된 보혜사가 자신에게 임했다며, 자신이 성령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역사를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하는 소위 삼시대론을 주장했는데, 자신과 함께 성령시대가 시작했다고 말했다.
몬타누스와 함께한 두 여자 중 프리스길라는 그리스도께서는 일반교회를 떠나셨고, 자신이 직접 계시를 받는다고 했다.
막시밀라는 자신 이후에 선지자는 없을 것이고 예언은 자기에게서 마쳐진다고 선언했다.2)
서요한 교수는 “이들의 새로운 예언은 황홀한 환상과 이상한 방언에 근거했다”고 밝힌다. 이것을 하나님의 끝없는 영감과 계시라고 믿고 자신들은 성령에 의해 연주되는 악기라고 믿었다.3)
몬타누스와 그 추종자들의 예언의 정점은 종말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새예루살렘이 프리지아의 페푸자에 건설된다고 말했다. 최후 심판이 2년 안에 올 것이라 믿고 집과 물건을 처분한 이들도 있다.4)
----금욕주의
몬타누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설파하며 신도들에게 매우 엄격한 생활을 요구했다.
회개를 강조하는 당시 교회의 분위기에 반대해 세례 이후에 짓는 죄의 문제를 엄격하게 다뤘다.
박해를 피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성도들은 순교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많은 금식 규정을 만들고, 일체의 오락을 금했다.
종말이 임박했으니 결혼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엄격히 제한했다.5)
----영향과 교회의 반응
몬타누스주의는 소아시아 로마,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6)
특히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유능한 라틴 신학자 터툴리안은 이들의 금욕주의에 매료되어 이 운동에 심취했다.
몬타누스주의의 새로운 계시 주장과 극단적인 종말론은 교회를 분열시켰다.
일차적으로 몬타누스주의자들 스스로가 정통교회를 배척했고, 교회 안에서는 몬타누스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대립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이레니우스 등이 이들의 사상을 논박했고, 교회는 177년 경 이 운동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비록 몬타누스주의가 이단적 운동이었지만, 학자들은 이 운동을 계기로 교회가 몇 가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대표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성경으로 종결되었음을 확증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몬타누스의 주의의 약화와 재현
사람들은 재산을 팔면서까지 임박한 재림을 고대했으나 종말은 오지 않았다.
몬타누스와 추종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을 연기하는 이유가 있다고 변명했지만 이는 한계가 있었다.
몬타누스와 여성 예언자들이 죽자 자연스레 세력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5세기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몬타누스 이후에도 많은 직통계시파 이단이 등장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자, 종말의 일시를 정한 시한부 종말론자,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종말이 온다는 조건부 종말론자 등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이단이 그 자취를 감추거나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몰몬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등 큰 교세를 이루며 우리 사회에 완전히 자리 잡은 이단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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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20)-초대교회의 이단과 분파 운동
===초기 교회의 이단들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 밀라노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초대교회는 약 280년 동안 여러가지 전쟁을 치러나가야 했다.
유대교의 시기와 방해, 교회를 없애려는 로마제국의 탄압, 그리고 이단의 침투와 분파 등에 대한 전쟁이었다.
박해가 교회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라면 이단의 발흥은 교회 내부에서 오는 공격이었다. 당시 일어난 이단들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였다.
유대 전통에서 나온 율법주의적 이단,
그리스도철학과 동방의 이원론(二元論) 사상과 혼합된 데에서 나온 이단,
현실 생활을 무시한 신비주의적 가르침에 치중한 이단 등.
유대교적 이단으로는 예수는 신격화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에비온주의가 대표적이요,
헬레니즘과 영지주의에서 나온 이단으로는 영지주의, 곧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부정하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 마르시온주의 등을 예로 들 수 있겠고
종말론적이고 신비적인 이단으로는 2세기 중엽에 등장한 몬타니즘이 있었다. 이들은 초기 교회에 홍수처럼 밀려온 매우 위험하고도 강력한 도전이었다.
교회의 신상을 위협하는 운동이나 가르침이 나타났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반격하고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정통교리를 정립하려고 했고, 때로는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들을 정죄하기도 했다. 각종 이단적 교리들이 교회 내에 침투했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힘을 합하여 대처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철학자들과 이단자들로부터 교회를 지키려는 노력을 경주했지만 교회들이 연합하여 대처해 나가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기도 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이단 종파 몇 가지를 소개한다.
@에비온파
에비온주의는 사도 시대의 이단으로, 유대교적 율법주의적인 이단이었다.
초대 교회 구성원들 중에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전에 믿던 유대교적 요소를 버리지 못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유대교의 틀 안에서 견지하려고 했기에 에비온주의는 초기 기독교에 많은 혼란과 지장을 주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 중에 몇몇은 자신들을 에비온(Ebionites)이라고 불렀다.
에비온은 '가난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 말로, 특별히 유대교의 사두개파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이 대부분 가난했던 것을 비꼬아 부른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에비온파는 분파를 형성하여 율법의 준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 위에 기독교를 이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사도성을 부인했고, 이방인들도 기독교도로 인정했다고 유대교를 배신한 배반자라고 불렀으며, 따라서 바울의 서신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함으로써 교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에비온주의자들은 한 마디로 유대교적 율법주의자들로, 기독교의 유대주의화를 주장했던 이단이었다. ---<히브리서, 갈라디아서의 집필 배경?>
@영지주의(靈知主意)
영지주의는 아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간단히 정의하여 말하기 어렵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앎, 깨달음,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 등의 뜻을 가진 그노시스(gnosis..주관적 내적인식 지식이나 통찰)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영지(gnosis)는 일반적인 의미의 지식이 아닌,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實在)에 대한 통찰력, 혹은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이성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기에 철학적 계몽이나 기독교의 계시와는 구별된다.
1945년, 파코미우스(Pachomius, 292~364)가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했던 이집트 북부의 한 작은 촌락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영지주의자들이 400년경에 묻은 것으로 보이는, 파피루스 코덱스 13권이 들어 있는 밀봉된 단지가 발견되었다. 다량의 이 문헌이 발견되면서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영지주의는 대개 1세기 말에 기독교 교리,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철학, 그리스-로마의 신비종교, 동양 종교들의 이론과 사상을 절충, 혼합하여 만든 기독교 이단으로 물질과 육체를 죄악시하고 영(靈)을 높이 평가하는 종교적 철학적 경향 혹은 주의를 말한다.
****[사도 요한 생존시, 문제가 되었던 영지주의파는 세린티안<케린투스파>였고, 이의 극복 위해 요한복음-=요한서신서-계시록을 쓰게 되었음]****
영지주의는 2세기 초반 비교적 안정된 사상 체계를 가짐으로써 호소력 있는 종교가 되었고, 약 150년간 전성기를 누리다가 3세기 후반부터 쇠퇴하였으며, 4세기경에는 그 사상이 마니교에 흡수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영지주의는 사실상 사라졌다.
모든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적 창조세계를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구원은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된다고 여겼다.
그들에 의하면,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들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어떤 영적 개인들의 몸 안에 주입되었다.
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의 기원(起源)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불완전한 육체에서 해방되고 지구를 탈출하여 본래 그들이 있었던 천상의 시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패스워드(password)와 같은 영지가 필요했다. 모든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탈출하여 저 세계로 돌아가는 구원의 여정을 상정(想定)했다.
즉, 구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특별하고 신비한 지식, 깨달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그노시스(영적 지식)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지식은 특별한 영적 계급에 속한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고, 그들만이 최고 신의 빛의 경지에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육체라는 물질세계에 속박된 상태에서 해방되어서 영혼이 기원한 빛의 세계, 곧 초월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여겼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비밀한 지식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영지를 전하기 위해 오신 천상의 계시자 정도로 여겼다.
또한 물질과 육체는 악하다는 신념에 따라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육체는 기적적으로 육체처럼 보였을 뿐이며,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음이나 부활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는 가현설(假現說 =가짜 성육신)을 주장했다.
그들의 사상은 이원론적 헬라 철학을 근간으로 하여 이집트와 페르시아, 동방의 신비 종교 사상을 혼합한 것으로, 2세기 내내 기독교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부활 등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페할 것을 주장한 것(딤전 4:1~3)이나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한 것(딤후 2:16~18),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요일 4:1~3, 요이 1:7) 등은 영지주의적 사상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거짓말하는 자들,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다(요일 2:22, 4:2~3).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마르시온주의는 2세기 중반에 나타난 가장 위협적인 이단이었다.
마르시온이 쓴 작품들은 현존하지 않지만 터툴리안을 비롯하여 그를 비판한 교회 지도자들의 자료들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잘 엿볼 수 있다.
마르시온은 85년경 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본도(Pontus)에서 부유한 선박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스러운 처녀를 미혹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교회의 감독이었던 그의 부친은 그를 교회에서 추방시켰다.
140년경 그는 쉬프스리더(Schiffsreeder)의 초청을 받고 로마로 건너가 그곳 교회에 거액을 헌금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려 하였다.
로마에서 그는 크레도(Credo)라는 사람의 영지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유대교와 물질세계를 증오했던 그는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키며 크레도의 사상을 구체화시켰다.
그가 이단적 가르침을 시작하자 교회에서는 144년 그를 출교했다.
마르시온은 곧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워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며, 마르시온 교회는 거의 1세기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다.
마르시온은 극단적인 바울 추종자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유대주의자들로 여겨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바울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진정한 사도로 여겼다.
그리고 그는 구약과 신약을 분리시켜서 구약 성경은 유대인의 역사서요, 율법일 뿐이라고 여겼다.
또한, 구약의 신(神)은 지고한 하나님이 아니라 무지와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지닌 열등한 창조 신에 불과하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한 참 하나님으로 우주적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으로 보았다.
마르시온이 정경(正經)으로 인정한 것은 바울의 10개 서신과 누가복음의 편집본이었다. 이것을 가리켜서 '마르시온의 정경(Marcionite Canon')이라고 부른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육체를 지니지 않은 영적 존재라고 가르쳐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었음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주장했다.
그는 육체의 부활은 없고 최후의 심판도 없다고 했다. 또 물질과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육식이나 부부생활을 금하는 염격한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시온은 160년경에 죽었지만 마르시온의 추종자들은 이후에도 여러 세기 동안 활동했다.
마르시온의 성서 편집에 자극을 받은 초기 교회는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작업을 촉진했고, 393년 북아프리카의 히포 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경 정경 목록을 확정했다.
@몬타누스주의(Montanism)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속히 이뤄지리라 여겼던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뜨거원던 종말 신앙은 점점 퇴색했다.
몬타누스주의는 이처럼 신앙이 약화되고 경직되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이방 종교의 사제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몬타누스가 160년경 소아시아 프리기아에서 성령이 자신에게 임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몬타니즘 운동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 그리스도를 인정했고, 교리적인 면에서 영지주의나 마르시온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몬타누스의 잘못된 견해 때문이었다.
몬타누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 예언(new prophecy)'이라고 하면서 방언과 열광적인 엑스터시의 체험을 강조했다.
몬타누스는 그를 통하여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자신과 그를 돕는 두 여사제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를 통하여 성령은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프리가이 지방의 페푸자(Pepuza)라는 도시 근처에 세워지게 되어 있다고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일에서 떠나 페푸자로 가서 종말을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그들은 임박한 종말을 대배하면서 결혼을 금하고 금식과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였으며 순교를 장려했다.
3세기에 들어서 몬타누스주의 운동은 큰 힘을 얻었는데, 그것은 후대에 서방 교회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이 이 운동의 염격한 도덕 생활과 금욕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일시 합류했기 때문이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초기 교회의 종말론적 긴장을 되살렸고,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과 성령의 특별 계시를 강조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아시아 교회의 감독들은 160년 직후에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177년 몬타누스를 이단으로 정하였고, 교회의 결속을 위하여 감독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시켰다. 이것이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회(Symod)였다.
그 후 비슷한 유형의 성령 운동이나 예언 운동이 계속 나타났으며, 사도적 신앙을 계승하려는 교회가 계속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이러한 여러 이단들의 활동으로 부터 진리를 수호하고 성도를 보호하려는 여러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교회들의 연합, 정경(正經)과 교리의 확립, 이단자들에 대한 정죄와 축출 등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