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7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골3.<옛 나는 죽고>JC안의 한 새사람 이룸.머리이신, 부활생명JC로 살아가는 한 몸됨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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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3장   [411.예수사랑하심은]


.....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1:1-8까지 소개의 말을 한 후, 1:9-3:11까지에서 그리스도를 뛰어나고 만유를 포함한 분, Q의 중심과 전체로 계시한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를 Q의 어린 양-만나-생수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다른 데서 여러 번 이미 반복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를 성도의 분깃, 보이지 않는 Q의 형상. 모든 창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자, Q의 경륜의 비밀, 내주하시는 영광의 소망,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 안에 감취어 있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골로새서 안에 전달된 새롭고 독특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는 비범한 것이며 성경의 다른 데서 계시된 것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2:12-4:6까지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생활 문제로 전환한다. 

.....**거룩함 :: <죄없음이나 완전함이 아니라>오직 유일하게 거룩하신 Q과 그분 안에 하나됨을 의미..... Q아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별됨은 그분의 거룩한 성품으로 충만되고 적셔지도록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넣어주심으로써 그분의 신성에 참예하고(벧후1:4), Q 자신처럼 Q의 본성과 그분의 성품 안에서 Q으로 충만케 됨인 것.

이미 참되게 믿는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곧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롬1:6,7>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그 완전한 성취와 보장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고전1:30에서 분명히 <너희는 히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 하셨으니,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 생명과 빛의 나라로 옮겨 놓으심(=구속..영원한 참 자유),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연합한 자로 있게 하심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지혜였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성도의 의 되심, 즉 성도마다 하나님께 대해 거리낌 전혀 없는 자로서 영원한 하나됨 이루셨고<주 뜻 이룸에 장애물 전혀 없음의 의로움(righteousness..의로우신Q안에 거함, 믿음으로 (성령따라)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발휘 가능)와 정당화 함(=죄 사함의 은혜 베푸심, 의인, 정당화(참 회개함 인해)justification...이로 인해 전사 창출됨)>, 성도의 거룩함 되심, 즉 그분 안에 상호 거함 통해 또한, 그분 자신이신 그리스도의 성령의 주입 공급 충만+흠뻑 적셔짐  통해 그분의 거룩함, 곧 성화와 영화에 이르도록 하고 계시며<=Q거처/신부 단장 수행하고 계심>, 성도의 영원한 구속(redemption, buying back), 곧 죄와 죄들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고 아들의 나라 안으로 옮기신 바, 세상적 방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분의 뜻에 부합하는, 지고지선의 진복 누림의 완전한 참 자유를 영원히 누릴 수 있게 해주셨다.

....  3:12-15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에 의해 지배 받을 필요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16-17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분의 평강, 그것은 말씀 안에 있는 그분의 풍성<이것은 곧 그 영의 충만이다>의 바탕 위에서 샘솟아 흘러 넘쳐 작동됨을 의미) 그리스도와 연합해 산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생활에서조차도 (비록 그것을 인식 또는,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그분과 늘 하나 되어 있으며 결코 분리되어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요15장에서는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 안에 거하라, 그분을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곧 Q 보시기에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는 것마다 무엇이든지 전혀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은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어야 하는 바, 그것은 믿음으로 말씀 안에 거함이자 그대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함을 의미한다, 곧 우리가 생활에서 <내주하시는 말씀이자 그 영이신> 그분과 하나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3:10-11에서는 새 사람< 이 새사람의 개념은 부활 안에 있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를 말한다> 안에서 그리스도가 만유시며(그분은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유의 중심이자 둘레 곧 전체를 구성하시며, 서로 결합하여 붙드시며 유지시키며 주관하신다) 만유 안에 계심을 본다. 그분은 또한 만유 안에 계시기에, 새 사람인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며 모든 지체들 안에 계시며, 새 사람 안에는 천연적 사람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이시고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 새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가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하나이며 그분이 우리와 하나라는 것을 가리킨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우리이며 우리가 그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와 그분의 연합, 곧 동일시 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이란 바로 그러한 정도까지 그분과 하나되고 그분 자신으로 충만하고 나는 죽고 그분이 실지로 행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는 생활, 그분과 동일시 이룬 생활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우리와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이며,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생활 안에서 사는 것이다.  

..... 우리는 주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인 것 같이 그분과 하나일 필요가 있다. <요14:10...*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의 말씀하심 안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은 두 인격이지만 그들은 오직 한 생명과 한 생활을 가진다.  아들의 생명이 아버지의 생명이고 아들의 생활이 아버지의 생활이요, 한 면으로는 아버지의 생명이 아들의 생명이요 아버지의 생활이 아들의 생활이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은 한 생명, 한 생활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와 우리에 대해서도 원칙은 똑 같다. 오늘날 우리와 그리스도는 한 생명, 한 생활을 가지고 있다. 아들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고 우리의 생활이 그분의 생활이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의 의미이다.

..... 그러한 연합 안에서 우리와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이다. 참된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우리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로서 살기 때문이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생활이 그분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활 안에 사신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곧 Q의 표준에 이르고 그분의 경륜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는 생활이다. 

.....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생활에 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 안에서 중재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서신들 중 다른 서신들에서는 이러한 언급이 없다) ... <~하게 하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표현들은,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 양자가 이미 존재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중재하게 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나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으,며, 특히 이러한 것들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새 사람을 입었다 = 참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안에서 참 본체이자 그분의 몸인 한 새 사람으로 재 창조함 받은 영적 교회(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 존귀함에 있어서 그분과 동일시 되는 비가시적 교회) <부활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다> = 새 사람 그리스도에 합당한 의의 옷을<=그리스도의 미덕의 옷> 입어야 함.. 비가시적 교회는,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 하나임... (옛 사람은 이미 장사지낸 바 되었음) 그분과 하나된 생명의 연합으로 인해 부활했고 승천 안에서 보좌에 앉아 있음......위엣 것을 찾는다 함은 머리이신 그분과 하나되어 이룬 바 한 새 사람 그리스도께 합당한 그분의 몸 됨을 추구함..

......이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분의 몸인 가시적 교회 또한 Q께 선택-분별된 거룩하고 사랑받은 자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하도록 성화-영화되어 감이 마땅함

----- *1)옛 것들을 십자가로 넘겨 처리함...곧, 땅의 지체들<음란-부정-사욕-악한 정욕-탐심>과 옛 사람과 그 행위들, 곧 <세상 가치 따랐던> 옛사람의 모든 언행심사들<분-노-악의-비방-더러운 말-거짓말>마저 남김 없이 십자가로 넘겨 처리하고, 

----- *2)그리스도의 패러다임, 곧 그분의 영적 미덕<긍휼-자비-겸손-온유-오래참음-용납/용서 등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옷 입고 그 위에 사랑의 온전(완전)케 <하나되도록 붙들어>매는 띠를 띠고,  

----- *3)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하나됨 이룸 위한, 내적 중재자를 삼아> 우리 마음을(마음의 갈등 상황을) 중재-주관하게 하며 또한 감사하되,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말씀과 그 영은 동일하다...요6:63..엡5:18-20..))의 풍성한 거함 그 안에서 Q의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서로 권면하며(=교통) 시-찬송-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며(조화로움) Q을 찬양하고, 모든 일함과 말함에 있어서 JC이름으로 하고 그를 인해 아버지께 감사함으로 살아감이 중요...Q의 신약 경륜에서 Q은 아들 안에서 말씀하시고, 아들은 복음서에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실 뿐 아니라 사도행전과 서신서들과 계시록에서 그분의 지체들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이 모든 것을 그분의 말씀으로 간주할 수 있음...골로새서에서는 말씀을 통해 주권을 행사하시며 우리에게 풍성을 공급하시는, 우리의 머리이자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강조되며<따라서 골로새서에서는 성령이 단 한 번 언급되어 있고(1;8), 사람의 영도 한번만 언급되어 있다(2:5>,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우리가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Q의 모든 충만에 이르는 길은 영 안에서 충만해지는 것이기에 그 영과 우리의 영이 거듭 거듭 강조되고 있다.(말씀까지도 그 영으로 간주된다.(엡6:17)...한편, 에베소서에서 말씀은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을 씻어내고(5:26), 대적에 대한 싸움(6ㅣ17)을 위한 것인 반면, 골로새서에서 말씀은 그분의 뛰어남과 중심성과 전체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한 것이다(1:25-27)....에베소서는 우리의 생활을 다루고 있지만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다루고 있다.


....<요일2: 6, 20, 27...*6.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the one who says he abides in Him ought himself to walk in the same manner as He walked...*20.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But you have an anointing from the Holy One, and you all know...*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As for you, the anointing which you received from Him abides in you, and you have no need for anyone to teach you; but as His anointing teaches you about all things, and is true and is not a lie, and just as it has taught you, you abide in Him..>

<요일3:1,2,3,...*1.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See how great a love the Father has bestowed on us, that we w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and such we are For this reason the world does not know us, because it did not know Him.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Beloved, now we are children of God, and it has not appeared as yet what we will be We know that when He appears, we will be like Him, because we will see Him just as He is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And everyone who has this hope fixed on Him purifies himself, just as He is pure.>

<요일5:21..*19.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We know that we are of God, and that the whole world lies in the power of the evil one.  *20.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And we know that the Son of God has come, and has given us understanding so that we may know Him who is true; and we are in Him who is true, in His Son Jesus Christ This is the true God and eternal life.  *21.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Little children, guard yourselves from idols>


1.  그러므로 너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친히 부활하신]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연합한 하나로 함께 동참함으로써]받았으면 위의[=하늘나라와 거기에 속한 명원불멸의 가치 있는] 것을 찾으라[=추구하라..찾아 구하여 얻고, 한 몸 됨 자각 하에 한 새 사람으로서 머리를 따르라...하나되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사 알게 하신 바, <하늘에서, 동시에 내 안에서> 일하심과 일치하여 <상응-반향하여> 바로 그것을 행하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요5:17..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10:30..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14:10하....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5:19하, 20..*19.하..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20.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  [습관적으로, 늘, 영구적인]위의 것을 생각하고[=염두에 두며, 집중-몰입-추구하라..영적 수신기 주파수를 그리스도께 맞추어 놓으라, 그분의 일하고 계신 바로 그대로를 <이 땅에서> 반향하도록 하라] 땅의 것을[=일장춘몽인, 허망하고 변화무쌍한, 일시적 가치 밖에 없다]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이 땅과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해]죽었고 너희 [참, 새]생명이 [연합한 하나된 바]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마치 지성소 증거궤  안에 둔 금 항아리 안의 감취어진  만나처럼 비밀스럽게]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리스도-우리의 생명]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으로서 하나됨의 의미>...곧 생명-생활-운명-영광에 있어서 하나 = 공동운명체임

<골34...*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믿는 이의 생명은 지성소 증거궤 안의, 금 항아리 속에 감취어진 만나로 표상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감취어져 있음...그대의 전 존재는 속사람(시공차원 초월하는, 영적 생명<영..HS의 좌소> + 인격<혼>...참 실체)겉사람(제한 받는 육체 = 그림자..본래 사탄은 자기자신이자 자신의 정화인 죄성을 죄의 몸에 주입하였고 <타고난 천연적 생명>의 옛 습관/욕동의 의지 발현 형태로 성령을 대적함..부활의 몸은 영체로서 제한 받지 않음)으로 구성됨.

....한편, 거듭난 이들의 유기적 생명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이 땅의 가시적 교회와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힘 받은 비가시적 교회로 구분해 볼 수 있음< 비 가시적 교회는 부활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현재 부활의 <시공 차원의 제한 받음 없는> 몸으로서 하늘 영역에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동시에 그분의 영이신 성령, 곧 그 영(주 영)으로 강림하셔서 이 땅에 있는 그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의 영 안에 그 자신을 분배하여 내주하시는 <성도의> 참 생명이 되사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으로 살아감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의 몸의 확대 재생산/산출을 이루고 계심

....그러므로, 교회의 지체인 각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분의 생명의 성장 성숙에 이르도록 오직 하늘 나라 가치 따라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로> 살아감이 합당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정 중심은 오직 십자가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길인 바, Q의 영광<카보드와 셰키나> 안에 걷기를 구하라..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 아닌 모든 소극적인 것들마다에 대해)십자가를 적용하고, 오직 주 이름 부름으로써 자신을 열어, 성령께서 자유로이 샘솟아 넘쳐 흐름 통해 운행하며 움직이시며 역사하시도록 길을 내어드림이 합당하다 (HS의 역사하는 길은 HS의 열매 맺음과 그분의 몸 산출-확장에 이르게 하는 길, 곧 Q의 이름과 성품 따라 행하며, 하나님 말씀의 참됨을 증거하시는 길이다)

<롬8: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3:21..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 = 만유를 포함한 그 영] ...인간 존재의 핵심과 본질은 영적 생명과 인격이라는 관념을 붙드는 가운데서 메세지를 이해하도록 하라.

....오늘날, 주 Q-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그 영=주 영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그분은 과정을 거치신 그 영이시다.....영원 과거에 홀로 계셨던 Q, 그분은 시간 안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이 창조주 Q은 사람이 되셨는데, 이 중요한 단계가 성육신....<(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뿐 아니라 창조물의 모든 것을 포함한 인성) 그 인성을 입는, 그 성육신에 의해 [만유 위에-만유 안에 계시며, 동시에 만유를 포함하시는] Q은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의 모든 것과 함께(...즉, <본질과 그림자란 구도로 본다면, 지금 눈에 드러난 피조물은 그림자요 그분 자신이 실체이심) 사람을 입으셨음(사람은 피조물의 머리임)...성육신된 Q이신, 주 예수님은 33년 반 동안 이땅에 사셨으며,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모든 전체 창조물도 사람이신 그분과 함께(만유를 포함하신 그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그 후 무덤 속에 장사되었고, 3일 만에 주JC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는데, 부활을 통하여,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더욱이 그분은 삼층천으로의 승천 안에서 관을 쓰셨고, 만물 위에 머리와 주가 되셨다. 그 다음,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은 만유를 포함한 영으로서 변형되어 그분의 몸인(그분을 믿는 성도들의 유기적 공동체인)  교회에 강림하여 내려오셔서 그분을 믿는 성도들 각자의 영 안에 살고 계신다.

....Q은 창조의 역사를 완성하신 후에 성육신과 인생, 십자가에 못박힘, 부활, 승천, 강림을 통과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과정을 거치신 Q>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성육신- 인생- 십자가에 못박힘-장사됨-부활-승천-강림의 모든 과정에 우리와 모든 창조물은 함께 하여 통과했음을 기억하자..(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해 Q을 우리에게 이끌어 오셨고, 그분과 하나된 우리를 부활 승천 통해 Q께로  이끌어 가셨으니, 지금 이 땅에서 교회 생활 안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이미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다.)

.... 한편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교회 안에 있고, 또 한편으로는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품에 안겨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  하늘과 보좌 사이에는 빛(4차원의 산물이라고 알려짐)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왕래가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늘과 교회는 하나이다!!..교회 안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음이다.

......[그 영 = 복합적 관유의 실제]

....출30장의 복합적 관유의 실제가 바로 그 영임을 지적해야 한다. 복합적인 관유인 그 영은 감람유로 예표된 Q의 영 뿐만 아니라, 4가지 향료들로 예표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면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감람유가 향료들과 혼합될 때 그 기름은 복합체인 관유가 되었던 바, 그 관유는 만유를 포함한 그 영을 의미한다.

....영원 과거에 Q의 영은 단지 한 요소, 즉 신성의 요소만을 가지고 존재하셨으나, 그리스도의 성육신 때에 인성을 입으셨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생 33년 반 동안, 그 신성의 요소에 많은 것이 더헤졌다. 게다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만유를 포함한 죽음의 본질이 그분께 더하여졌고 그분의 부활도 그러 했다. 그리스도가 이러한 중요한 단계들을 거치심에 따라 Q은 과정을 거치셨고 인성과 복합되셨다. 감람유가 네 가지 향료들과 섞여져 한 형태가 되었듯이, Q의 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죽음의 향기와 부활의 효능과 부활의 능력과 섞여졌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이제 만유를 포함한 영으로서 그분의 택한 백성들에게 내려오셔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그들 속에 들어가 계시는,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의 두 출생]

....신약에 따르면 그리스도에게는 두 번의 출생이 있다. 첫 번째는 성육신의 출생이었고 두 번째는 부활 안의 출생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나왔는데, Q의 맏아들인 그분의 두 번째 출생에서 그분의 모든 형제들, 곧 그분의 몸의 지체들인 교회와 함께 태어나셨고, 교회는 이제 만유를 포함한 영 안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 안에 있는 참되게 알고 믿는 이마다에게는 금욕주의-영지주의-천사 숭배-모든 종교/유사 종교들의 여지는 전혀 없음을 염두에 두고, 더 이상 대적의 으르렁거림과 미혹에 자기를 내어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Q의 경륜 안에는, 다른 인격, 다른 길은 없고 오직 한 인격- 한 길, 곧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길 뿐이다) 오직 만유를 포함한 <과정 거친,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과 부활의 능력, 그리고 높여진 인성을 다 가지고 있는> 그 영꼐 우리 자신을 열어 그 영에 접촉하고 그 영으로 하여금 우리 내부에서 자유로운 길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그 영은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을 적용할 것이요, 더 나아가 이 체험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가져 올 것이기에, 그대는 단지 그 영으로 적셔짐 안에서 머물며 자유롭게 움직이시도록 허용해 드림으로써 그 분은 우리 안에서 흐르며 적용하실 길을 찾으실 것이요 그 때, 그 중한 정도가 어떻든지 간에 모든 왜곡된 상황은 근본적으로 치유 가능해지고, 위엣 것을 추구해야 하며,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로 인해 살아야 한다. (이것은 바로 교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하나님 안에,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 믿는이는 누구나 추구할지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 영역이 됨을,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살아야 한다. 믿는 우리는 결코 그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  우리에게 사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이다!! 

....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것은 하늘 안에 있는 것이요, 하늘에 있는 것은 교회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와 하늘은 하나이다.  우리의 참 생명은 자아나 혼 생명이 아니라 Q안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 생명임을 붙들어야 한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지만 장차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구태여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기 증진을, 자기 생활을 선전하려 하지 말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죄된 몸의 육적 행실들...이것들은 소극적-부정적 에너지이니, 오직 주이름 부름으로써 사랑과 감사 찬양으로 그분께 몰입하여 그 영으로 적셔지고 그 영을 자유로이 넘치도록 흘려 보낼 때 저절로 소멸 가능함>를 죽이라<그것들은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 안에서 이미 처리된 것들이니 비록 상념가운데 슬며시 떠 오르더라도 괘념치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 저절로 소멸되리라> 곧 음란(매춘fornication, 성적 부도덕sexual immorality<혼전 성교 및 간통/강간..매춘 포함할 때는 간음=빗나간 성욕이라 함>)과 부정(=불결, 더러움 uncleanness. impurity)과 사욕(inordinate affection=passion, 저질의 빗나간 파토스, 악한 격정 )과 악한 정욕(evil concupiscence, 악한 색정/음욕.. 빗나간, 악한 결합 욕구)과 탐심(greed)이니 탐심(빗나간 재물욕)은 우상 숭배니라 

 ::: 육적 지체란 옛자아, 곧 땅에 속한 부분의 악한 갈망들( 육체의 정욕들 즉, 성적 부도덕(간음, 음행과 음란), 불결(부정/더러움), 악한 <저질적> 열정과 악한<빗나간> 색욕 들...이는 <죽여 멸하는>보혈의 능력으로 이기며), 그리고 탐심(탐욕...이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임...영Q이요 생명JC 그 자신인 바 Q말씀<요6:63>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음<내적 움직이심>을 따름으로써 이긴다)에 대해, (<쾌감 중독의>관능적, 자기중심적 본능들과 함께)악한 갈망(<쾌감 중독의>관능적, 자기중심적 본능들과 함께) 사망 선고하고 끊어 버리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악한 혼적 영역에 속하는 바, 이것 또한 그대가 적셔진 바 그 영의 능력에 의해, 동일한 내버려둠으로 저절로 벗겨짐이 가능함))분함(anger)과 노여움(wrath)과 악의(malice)와 비방(slander. blasphemy)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filthy, abusive speech)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미 침례를 통해 처리된 바>옛 사람과 그 행위를((=옛사람 전체))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그리스도께 속한 단체적 총체로서의 새 사람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한편, 성도 각자의 경우로 보면 그리스도와 하나됨 인해 새로와진 존재, 영적 참 자아<거듭난 속 사람>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한편으로는, 새 사람인 교회와 새 사람이신 구주는 하나이다...즉, 동일시 된다...그러므로 활성화 시켜 누림이 중요하다.))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새 사람이듯이, 성도 각자의 경우에서도 거듭난 새 존재로서 그의 영 안에 Q의 생명을 가진 그 영이 더해졌기에 영 안에서 새로 창조함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혼과 몸도 새롭게 될 필요가 있다.. 혼을 대표하는 생각이 새로와 질 필요가 있다. 영은 이미 Q생명의 그 영으로 거듭났고 혼은 새로와지는 중에 있다(즉 혼 안에서 새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골로새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새 창조에 관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있어서 잘못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보이지 않는 Q의 충만이자 그의 표현인 그리스도]을 좇아(골3:10)> 충만한 지식에까지 새로와질 필요가 있었다.(부지런 하여 게으르지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추구하라..그렇지 않고 방비가 허술해질 그 때, 대적에게 탈취 당할 가능성이 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로서, 감정은 우리가 생각 안에서 갖고 있는 체험적 이해와 가치 인식, 감동-감화의 범위와 그 참된 정도에 관계된다.. 이처럼, Q의 형상(표현과 충만)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새로와진 인식과 생각의 너비-깊이-높이(장광고심)에 비례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감동-감화 받고 사랑 깃든 감정도 자동적으로 새로와진다. 이제 합당한 참 지식과 함께 동반된 사랑의 감정은 의지적 결단에 이르도록 자연스럽게 자극하는 바, 그분을 위하고 따르며, 그분을 살며 자라게 하고, 그분을 산출하기로 결심하도록 이끌며, 마침내 그분을 위하고 그분을 위해 살기로 결정한다. 

::: JC와 연합한 하나된, JC를 영접하여 소유한 거듭난 새 존재인 그대, 모든 언행심사의 근본동기-가치/의미/목적/보람-패러다임에 있어서 JC가 그대에게 오셔서 그대의 영원무궁한 참생명이 되셨고 그 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주셨기에, 또한 그것으로 그분의 이름으로, 사랑이신 Q능력 발휘하며 누리며 공급하며 살도록 해 주신, JC와 하나된, 한 새사람의 신분임을 항상 깨어 명심하며 자각하라...바로 그렇게 JC이름에 합당하게 선택하며 진리 따라 행하도록 JC이름 부르며 누리며 행함 통해 살아낸 Q말씀,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라....Q 주 영께서 그대를 당신의 참 지혜-총명-모략-재능/권능-지식-Q 경외함 안으로 인도하심으로써 진리를 아는 참 지식인-참 지혜자요 주 안에서 능치 못함 전혀 없는 자 됨 이루시리니...이는 TUQ 아버지 JC 그 영의 이름과 내주하심, 그분의 사랑이 그대에게 항상 머물러 있기 때문이요, 이로써 그리스도로 조성되게 하시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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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all = 모든 존재 전부)시요 만유 안에(in all..모든 존재 안에...즉, 몸의 모든 지체마다 그 안에) 계시니라

....(모든 그림자로서 제시된 예표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는 우주 만물(모든 차원과 모든 영역(가시적, 비가시적)의 존재들)을 친히 지으신 바, 바퀴의 중심축이면서 테와 살을 서로 짜 맞추신 분이시요, 동시에 우주 만물 그 안에 충만-관통하시며 만물 위에 머리로서 만물을 발 아래 두시며 그 모든 것에 동력을 주시고 그분 뜻에 따라 운행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리스도는 만유(=만물, 모든 것)이요, 만유 안에 계심 ===> 따라서 그리스도를 옷 입은 새 창조인 그리스도의 몸, 곧 한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로서, 그 구성원 사이에 차이나 차별이 없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으로 들어온, 참되게 그리스도를 전 존재  걸고 목숨 다해 믿고 추구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부분이라도 겉으로 드러난 천연적-육적 관점에서 보는 습관을 내려놓아야 함을 기억하라, 섣부르게  세상 관점 따라 판단하여 괴롭게 말라. 오직 그리스도 앞에 선 단독자로서  영광의 주님께 나아가 생생하게  적셔지고 말씀의 교통 안에서 넘쳐 흐르시며 씻어 새롭게 하사 치료하시는 성령 따라 그 안에 거하며  주 말씀 적용하며 따르기를 배워  그리스도의 생명 성숙함에 이르도록 세심한 보호-양육-돌봄과 사랑의 말씀 가르침으로 양육 받는 기간이 반드시 있어야 되리라

.....주님과 진정 하나됨 따라 참 실제이신 주님과 교통 안에서 살아가는 거듭난 성도들의 유기적 생명 공동체이자, 새로와진 한 새 사람인 교회 안에는 궁극적 관점으로 볼 때, 세상적 가치 따라 차별함의 (영적 우상) 따르는 천연적 사람은 가능성과 여지조차 남아있을 수 없기에, <세상의 보는 기준 따라> 천연적 사람을 구분하여 차별함(인종-국적-지위고하-남녀노소-빈부귀천-신체/정신 건강 조건(할례 여부, LGBT여부, 심지어 과학적 진화론 지지자라 해도 --이 모든 것은 주님을 참되게 만나뵙고 더 깊이 그분을 알아가게 되면 쓰레기처럼 다 내어버리고 주님께 귀의하게 되리니)이나, 개인적 기호-취미-선호 따라 편당하여 뭉치며 나뉘어짐의 이합집산이란 더 이상 있을 수 없음...결론적으로 Q이 보시는 교회 안에는, <만유를 한 새 사람인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지체, 즉 교회의 각 성도들이라고 볼 때>, 오직 만유의 실체(참된 본체, 본질적 참 몸)이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한 새사람 교회-지체는 동일시 되며, 그리고 이 땅의 가시적 그림자로서 만유-가시적 교회-가시적 성도가 존재한다....따라서 무엇보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침된 실체), 곧 그 영에 적셔지고 그 영으로 하여금 존재 안에서 자유로이 흐르시도록 열어드릴 때, 각 성도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을 깨닫는 그 때라야, 형제 자매 서로 서로 <각자 안에 계신, 상대방 안에 계신> 그분과 동일시 함으로써 ((진정 그리스도를 대하듯)) 귀히 여기고 너그러이 받아 주고 사랑-기쁨-평강 안에서 하나됨 이룰 수 있게 됨.

....그리스도와 한 새 사람인 교회는 둘이로되 하나이다<아버지와 아들이 그리하심 같이>, 각 성도마다 한 새 사람의 지체이며, 새 사람의 각 지체와 각 부분도 또한 그리스도인 것이다.(이것이 <그리스도와의 동일시> 실행함의 근거이다)

....이 땅에 있는 교회와 그 지체들인 각 성도들을 보라....어쩌면, 겉보기에는 유약하고 중구난방이며 분산되고 산만하며 무지-무각-무능-무력-연약함 안에 있는 지체들로 보여질 수 있으나, 주 이름 부름으로써 열어주시는 바, 바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주 Q이 보시는 그 명료한 영안과 영적 시야 통해 <만유이신, 곧 각 성도들 안에 하나되어 살아계신 그리스도>라는 이 진리의 실제를 붙들고 <그 영 따라 행함>을 행할 수 있다 하셨기에, 늘 깨어 기도함으로써 그 영의 자유로운 넘쳐 흐름 안에 머무르기를 힘써야 한다.

....주 보시기에 <상호간에> 완전한 용서를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참되게 빚을 갚는 것임과 동시에 어찌 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함의 대가지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예컨대, 과거에 그 누군가 다른 이에게 심각한 손상을 입혔던, 그런 문제가 있었던> 그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도, 먼저 오직 참되게 주님 만날 수 있도록 사랑 안에서 돕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주 보시기에 진정한 회개로 죄사함 받은 그 자신은 평생 <다 갚지 못할> 죄사함의 은혜 안에서 감사와 겸비함으로써, HS따라 살면서 주 임재 앞에서 행함이 옳을 것이다!!!)..또한 <물질적 손해 뿐만 아니라 전 존재적 손상을 입혔다고 느껴지는 이를 찾아가서 ((마치 자기 목숨을 구걸하듯이 건졸하게)) 무릎 꿇고 자기 잘못을 시인-고백하고 용서를 구함이 마땅하며, 그가 요구하는 물질 수준보다 기꺼이 더 변제하려 함이 옳다..(과연 상대방이 요구대로 다 갚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결코 미리 염려하지 말라, 다만 진정하게 뉘우치고 간절히 용서를 빌라...전지전능하신 주님이 다 갚게 해 주실 것을 믿으라).

....빅뱅 이론을 나름대로 일리 있다고 (진리는 항상 참되며 일리 있음 그 자체가 진리의 구성 요건은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진화론자라 해도  주님을 참되게 믿게 되면 빅뱅 과정의 원초 물질조차 주님의 창조물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될 것이니,  섣부르게 대적함으로써 더 큰 논란을 야기하려 말고. 오히려  참 진리의 주님 신뢰함으로써 너그러이 기다려 주라...그리고 그 후에 마음에 여전히 거리낌 느끼게 하는 관계적 채무가 남아있다 느껴지는 때는 바로 그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제3:12-4:6까지에서, 생활 속에서 성도의 그리스도로<그분의 영적 미덕 넘쳐남> 살기, 그분과 연합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

12.  ○그러므로 너희는(그분 안에 거함 통해 그리스도를 사는(요15 :4), <그분과 연합한 하나>의 자각 아래 그분과 동일시 함으로 사는 성도들 각자는..오직 성령의 열매 낳도록 그 영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Q이 보시는 바, 바로 이런 분으로서, 새 사람인 교회와 거듭난 새 존재들인 성도들을 돌보고 계신다긍휼(=체휼)과 자비(=친절)와 겸손(lowliness of mind>humility.겸비<비하=비움/타인의 가치 인정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여, 함께 일하며 선대하며 배려함의 개방성..낮은데 처함 = 무지-무각-무능-누력-무가치한, 사랑으로 섬기는 종의 자각아래서, 둘로스로서 납작 엎드리며 순복함)과 온유(gentleness,온화-유순-관용)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긍휼(체휼) :::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기 원하며) 환난 당한 자, 불쌍히/가엾게 여김 + 그 심정 이해-공감-동참 <극복 위해 끝까지 함께>하며 세심하게 <필요를> 보살피고 돌보며 도와 일으킴

....주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 :16)>라고 하셨다....(아버지와 아들은 두 인격이로되, 그들은 오직 한 생명과 한 생활을 가지셨다. 아버지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심으로써 그분의 입에 넣어주신 그대로 이르고 계셨다...이것이 연합하여 사는 삶의 참 의미이다.

....<참 생명 그리스도, 그 생명 성숙함의 완전성의 지표인그리스도의 미덕은 긍휼/자비-(섬기는 종의) 비하/온유-오래참음/용납/용서-사랑-평강-감사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상대방을 받아들여서, 일심동체로서 업고 감 =십자가>하여 피차 용서<상대방의 구원 위해 놓여진 장애물을 제거함 =중재>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중재=주재=판정=조절/결정>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새 사람인  그리스도의 교회는 <중재자이신> 평강의 그 영에 적셔짐 통해 그분 따라 화평/화목의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당연함)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모든 <세상적>염려는 주께 맡겨드리고 오직 <살아 생동하는 믿음을 발휘하여 신뢰함으로써>주께서 인도하심 그대로만 한걸음 한걸음 (평강 안에서) 함께 동행하라.. 이는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목자-무한풍성부요능력충만의 아버지 그가 친히 공급하시며 돌보시고 계심이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 그리스도를 앙망함 안에서 논쟁에 임한 사람들 모두 함께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 머무르며 적셔짐으로 오는 그분의 평강, 그것에만 주의함으로써 <주께서 이미 무효화 한 규례-철학적 관념 : 철학이나 관례-전통> 따르는 의견 차이를 불식하고 폐함으로써 정복함의 생명 충만을 밋보도록 함이 옳다!!

.....<사랑하는 주여, 이 자리에 충만한 성령으로 임하소서. 우리는 (주님과 동떨어진 상태에서 나오는) 우리 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을 주의하거나 취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직 당신의 평강 안에서 저와 우리들을 중재하시고-지배하시고-모든 결정을 합당하게 내려 주소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요, 그분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려면 철학이나 종교 등 모든 것을 다 비워내야 한다. 그분의 평강으로 중재하시도록 하고 그분의 말씀으로 충만 될 때 우리는 실질적으로 새 사람을 갖게 되며 모든 성도들은 한 새 사람 그리스도를 살게 되리라..

16.  <그 영께서 친히 이르신 바>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주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의 영이 살아 있음이 무엇보다도 선결 요건으로서 중요하지만,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땅에 속한 지체들과 옛 것에 속한 모든 언행과 행위들을 벗어 십자가로 처리하고> 그리스도의 영적 미덕으로 새로 옷 입고, 그 위에 사랑의 온전/완전하게 매는 띠를 띠어 합당하게 구비됨이 따라 온다(벗은 몸으로 발견되서는 안된다)..그 다음에 와야 할 것은,  <각자의 선호 따라 의견-관념-사고-판단을 내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실은 살아 생동하시는 평강의 왕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주장-중재하시도록 고요히 경청하되, (그리스도의 운행하심은 오로지 왕중 왕이신 그분의 말씀, 곧 생명의 성령께서 풍성-충만으로 그대 안에 거함 통해 자유로이 운행하고 움직일 길 얻도록 해 드림과 순복함 통해서 가능하다) 깨닫게 하시는 바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행함이기 때문이요,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로 그 성령의 이끄심 따라 피차간에 지혜-가르침-권면 베풀며, 함께 시-찬미-신령한 노래 부르며 Q께 감사 찬양하며, 범사에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인격...성경에서, 누군가의 이름은 그의 인격 그자체이다!!>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Q아버지께 감사하는 일상 생활을 이룸이어야 한다. 이 때, 3:18~4:1에 말하는 바, 합당한 남편-아내-부모-자녀-종-상전이 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를 살며 표현해내는] 합당한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해 보자>

.....그리스도로 옷 입은 한 새 사람인 교회는 그 위에 사랑의 띠를 띠는데, 그 띠 안에는 5가지 미덕들<긍휼-자비-겸손(비하)-온유-오래참음>이 함께 짜여져 있어야 한다 :::  [5가지 미덕으로 구성된 사랑의 띠를 띰]---> 그결과 삶 가운데 용납<겸손(비하)-온유-오래참음의 적용의 열매> + 용서<긍휼과 자비의 적용의 열매>의 넘쳐 흐름이 나오게 되고 [이 두가지, 용납과 용서는 CJ의 개방성의 체험이라 할 수 있다] ==> 이 때 CJ의 평강<그분의 영원히 변치 않는 반석 되심 인해 견고한 보호-돌봄-인도-승리>의 주장-중재하심 인해 한 몸 됨의 교통-균형-조화-하나됨 불러 옴 ==>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풍성한 주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 말씀 자체이신 주 성령께서 충만함 가운데 자유로이 운행하고 움직이실 길을 내어드리며 순복함으로써  감사 충만한 한 몸 이룸으로 영광 돌림이 된다.


===주께 하듯 하라....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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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t On the New Self

1 Therefore if you have been raised with Christ [to a new life, sharing in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keep seeking the things that are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새 생명안으로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면, 중단없이 위엣것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하나님 우편에 그리스도께서 앉아계시니.

2 Set your mind and keep focused habitually on the things above [the heavenly things], not on things that are on the earth [which have only temporal value]. :: 마음을 단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땅엣것이 아니라, 위엣것에 두고 그것에 집중, 몰두,추구하는 것을 습관화 하라. 

3 For you died [to this world], and your [new, real] life is hidden with Christ in God. 그대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십자가에서 세례로 연합하여>이미 죽었고, 그대의 새롭고 참된 <부활>생명이 하나님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었기 때문이니...죽은 성도의 영혼은 음부의 낙원<안락한 곳>의 안식 가운데 지금 있고, 몸은 해체 상태이나, 악인은 음부의 고통 가득한 감옥 가운데 두셨음..^눅23:43, ^눅16:19-31.

4 When Christ, who is our life, [a]appears, then you also will appear with Him in glory.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생명이시며, 그분이 영광 안에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 또한  그분과 함께 나타나게 되리라.

5 So put to death and deprive of power the evil longings of your earthly body [with its sensual, self-centered instincts] immorality, impurity, sinful passion, evil desire, and greed, which is [a kind of] idolatry [because it replaces your devotion to God]. 땅에 있는 몸에 속한 (육적 본능들인 바) 악한 갈망들(음란), 부도덕/불결(부정), 죄된 열정(사욕), 악한 정욕(사욕), (일종의 우상숭배인) 탐심을 [쾌감 중독적, 자기중심적 본능과 함께] 죽이라, 그 능력을 제거하라.[염두에 두지말고 미워하고 배제하여 멸절하라]

6 Because of these [sinful] things the [divine] wrath of God is coming [b]on the sons of disobedience [those who fail to listen and who routinely and obstinately disregard God’s precepts], ::: 바로 이런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막고 완고함의 고집으로 늘 무시하는 바)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7 and in these [sinful things] you also once walked, when you were habitually living in them [without the knowledge of Christ]. 그대들도 예전에 한때는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생생한 체험 통한 참 지식 없음>함으로] 이런 죄된 것들안에 습관적으로 살고 있었으니.

8 But now rid yourselves [completely] of all these things: anger, rage, malice, slander, and obscene (abusive, filthy, vulgar) language from your mouth. :::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들을<육적 본능따라 나오는 통제되지 않은 그 모든 언행들> 그대에게서 완전히 제거해 버리라, 곧 분냄, 노함, 악의, 중상, 입에서 나오는 역겨운(온갖 더럽고 저속한 마구 지껄이며 남용하는)말들이라.

9 Do not lie to one another, for you have stripped off the old self with its evil practices, ::: 서로서로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 악한 실행과 더불어 옛자아를 벗어버리라.[그리스도안에서 중생함으로 입은 바 새로이 창조함 받은 새 자아, 영적 참자아의 패러다임<성의진선, 자비-은혜-노하기를 더디함-인자/진실이 무궁함..아가페적 사랑안의 용납/용서/관용-인내-온유-겸손-친절-온화-섬김 정신따라 발휘되는 생동하는 산 믿음...사희회인자양충온절>을 살라.

10 and have put on the new [spiritual] self who is being continually renewed in true knowledge in the image of Him who created the new self— :: 새로운 (영적 참) 자아를 지어 입혀 주신 분의 참된 형상안에서 참된 지식안으로 지속적으로 새롭게 됨(RENEWAL)을 받으라.

11 a renewal in which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Greek and Jew, circumcised and uncircumcised, [nor between nations whether] [c]barbarian or [d]Scythian, [nor in status whether] slave or free, but Christ is all, and in all [so believers are equal in Christ, without distinction]. 빈부귀천-인종-종족-국적-할례 여부 상관없이 새롭게 된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만유시며, 만유 안에 게심.((그분이 실체요, 모든 사람은 그림자이기에))

12 So, as God’s own chosen people, who are holy [set apart, sanctified for His purpose] and well-beloved [by God Himself], put on a heart of compassion, kindness, humility, gentleness, and patience [which has the power to endure whatever injustice or unpleasantness comes, with good temper ::: 영적 참자아, 새사람의 입은 바 그 품성들은 곧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불의/부당-불유쾌 하게 하는 모든 일들을 선한 기질/품성을 발휘-적용하여 끝까지 잘 견디며 참아냄의 능력이 바로 인내)]이니; 

13 bearing graciously with one another, and willingly forgiving each other if one has a cause for complaint against another; just as the Lord has forgiven you, so should you forgive. ::: 이는 상호 용납-용서-관용의 태도와 자세로 표현되는데, 용납이란 기독자 상호간에 은혜스럽게(그 어떤 전제조건없이 자신의 전존재 중심을 열어 품어주신, 은혜의 주님이 그러하심따라 끝까지 개선의 여지와 기대를 품고) 참고 견뎌 주며 포기하지 않는 것, 용서는 상호간에 마음이 편치 못하게 한, 그 원인 제공자를 기꺼이 전 존재적 의지로 한량없이 용서함이다. (주께서 먼저 그렇게 그대를 용서해 주셨다!) 

14 Beyond all these things put on and wrap yourselves in [unselfish] love, which is the perfect bond of unity [for everything is bound together in agreement when each one seeks the best for others]. ::: 이 모든 것 위에 이타적(아가페적) 사랑<상호간에 타인의 지고지선-최상의 유익 추구 실행함>따라 함께 하나됨안에 모든 것이 하나의 띠로 매인 바 된 사랑>안에 너희 자신들을 두고 감싸도록 하라

15 Let the peace of Christ [the inner calm of one who walks daily with Him..그리스도의 평강 : 날마다 그와 동행하는 이의 내적 고요함] be the controlling factor in your hearts [deciding and settling questions that arise]. To this peace indeed you were called as members in one body [of believers]. And be thankful [to God always].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대의 심령안에서 <삶속에서 제기되는  제 문제들을 결정하고 확장하는, 즉 모든 것을 통제/조정하는 주관적 요소가 되게 하라.

16 Let the [spoken] word of Christ have its home within you [dwelling in your heart and mind—permeating every aspect of your being] as you teach [spiritual things] and admonish and train one another with all wisdom, singing 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with thankfulness in your hearts to God. :::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말씀이 그대 존재의 모든 면을 관통함으로써 그대안에(그대의 마음과 생각, 심령과 지성안에) 거하시게 하라..하나님께 향하는 심령안에서 감사함과 함께 상호간에 영적 가르침과 교훈 베풂, 훈련에 있어서 모든 지혜, 노래하는 시편, 찬송, 영적 노래들을 부르라.

17 Whatever you do [no matter what it is] in word or deed, do everything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nd in dependence on Him], giving thanks to God the Father through Him. ::: 말과 행위에 있어서 범사에  주예수님 이름으로[그분을 완전히 의지-순종-신뢰함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통해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라.

==Family Relations

18 Wives, be [e]subject to your husbands [out of respect for their position as protector, and their accountability to God..남편은 아내의 보호자이며 하나님앞에서 아내ㅔ 대해 회계할 자이므로 그 위치에 합당한 존경을 나타내라다], as is proper and [f]fitting in the Lord.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19 Husbands, love your wives [with an affectionate, sympathetic, selfless love that always seeks the best for them..다정다감, 동정/동감, 아내들의 최선의 유익을 항상 염두에 두고 추구함의 이타적 사랑으로] and do not be embittered or resentful toward them [because of the responsibilities of marriage].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되 [결혼의 책임/의무를 다하라] 쓴 뿌리나 모든 원망이 없도록 사랑하라

20 Children, obey your parents [as God’s representatives..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 in all things, for this [attitude of respect and obedience] is well-pleasing [g]to the Lord [and will bring you God’s promised blessings..하나님의 약속하신 바 모든 축복을 받게 되리니]. :::자녀들아 모든 일에서 <주안에서>부모에게 순종하라, 바로 이러한 존경과 순종]태도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니.

21 Fathers, do not provoke or irritate or exasperate your children [with demands that are trivial or unreasonable or humiliating or abusive 별일 아니 것처럼, 비합리적인. 수치감 일으키는, 함부로 막 대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그 모든 요구들로 인해 ; nor by favoritism or indifference편파성이나 무관심으로 아니라; treat them tenderly with lovingkindness온유-친절한 사랑으로 대하라], so they will not lose heart and become discouraged or unmotivated [with their spirits broken..심령에 상처 받아서 상심하여 용기 잃고 삶의 동기 상실함 없도록 하라]. 아비들아 자녀들로 하여금 노엽게(분노 유발, 자극, 화를 내게) 하지 말라. 낙심할까 함이라

22 Servants, in everything obey those who are your masters on earth, not only with external service, as those who merely please people, but with sincerity of heart because of your fear of the Lord. :::종들이여, <그대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서>땅에서 사는 동안 주인에게 복종하되 <단순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외적 실행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신실함으로 하라.

23 Whatever you do [whatever your task may be], work from the soul [that is, put in your very best effort...최선을 다하고 집붕-몰입하라], as [something done] for the Lord and not for men, 무슨 일이든지, 무엇을 하든지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사람을 위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듯 하라

24 knowing [with all certainty] that it is from the Lord [not from men] that you will receive the inheritance which is your [greatest] reward. It is the Lord Christ whom you [actually] serve. ::: 그대의 가장 큰 상급(유업)을 주께 받을 줄 알라.. 지금 그대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25 For he who does wrong will be punished for his wrongdoing, and [with God] there is no partiality [no special treatment based on a person’s position in life]. :악한 이들은 그의 잘못에 대해 징계를 받게 되리니 하나님은 치우침이 없으시니라.

==Footnotes

Colossians 3:4 A reference to His second coming.

Colossians 3:6 Two early mss do not contain this phrase.

Colossians 3:11 A derogatory term used to describe uneducated, uncultured people who were not fluent in the Greek language.

Colossians 3:11 The Scythians were savage equestrian herdsmen who were skilled archers and often worked as mercenaries and/or slave traders. The Scythian women were known to dress as warriors and fight alongside the men.

Colossians 3:18 The wife is to submit voluntarily to her husband (not to men in general); not as inferior to him, nor in violation of her Christian ethics, but honoring her husband’s responsibilities and authority as head of the household.

Colossians 3:18 I.e. not in conflict with Scripture. 

Colossians 3:20 Lit in, as “in the Lord’s pres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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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장 (개요)

본문의 내용을 살펴 보자.

Ⅰ. 사도는 우리 마음을 하늘에 두고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날 것을 우리에게 권고한다(1-4).

Ⅱ. 그는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죄를 억제할 것을 권고한다. (5-11).

Ⅲ. 그는 진지하게 서로의 사랑과 동정을 강조한다(12-17). 그리고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의 상호 간의 의무에 대하여 권고함으로 본장을 끝맺는다(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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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생활(골 3:1-4)

전반부에서 그리스도가 주신 특권들과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우리의 해방을 서술한 후 여기서는 거기에서 귀결되는 우리의 의무에 대하여 역설한다. 

비록 우리가 의식적인 율법의 의무에서 자유하게 된다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복음적인 모든 순종의 실례들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더욱 하나님과 밀접하게 살아야만 한다. 

사도는 그들의 마음을 천국에 두고 그리고 이 세상에 두지 말 것을 그들에게 권하는 것으로 본장을 시작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1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특권이다. 성화되고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위에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보다 더 저 세상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하늘 나라를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거룩한 사랑에 의하여 위에 세계와 교제를 유지하고 그리고 천국의 지복을 위한 우리의 권리와 자격을 확보하는 것을 우리의 끊임없는 관심과 일거리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최선의 친구이며 우리의 머리이신 그는 하늘 나라의 최고의 위엄과 존귀를 얻으셨고 그리고 우리 앞서 우리를 위해 천국의 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가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너무나 막대한 희생으로 획득한 것을 반드시 구하고 확보해야 하며 그리고 그 일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지상에서 살으셨고 그리고 이제 천국에서 사시는 바 그런 생활을 여기서 영위해야 한다.

Ⅰ. 그는 이 의무를 설명한다. 그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않는"것이다(2절). 

하늘의 것들을 찾는 것은 그것들에 애정을 품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우리의 참된 내적 욕망을 그것들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우리의 마음에 애정의 날개를 달므로 그것은 위를 향하여 치솟아 올라가게 되며 영적이며 신성한 것들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영적인 것들과 친숙해야 하며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존귀히 여기며 또 그것들을 소유하기 위한 준비에 투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윗은 여호와의 일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준비함으로 자신의 하나님의 집을 향한 사랑을 증명했다(시 27:4). 

이것은 마음이 영적인 성품으로 변모되는 것이며(롬 8:6)보다 좋은 나라 즉 "천국을 찾고 바라는 것이다"(히 11:14, 16). 

본문에서 땅의 것들은 위의 것들과 반대 위치에 놓여진다. 땅의 것들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되며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오직 위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하늘과 땅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그리고 두 가지를 모두 최상의 것으로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우세함은 다른 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비례적으로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Ⅱ. 그는 이 의무를 행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들을 제시한다(3,4).

1. 우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세상에서의 분깃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신앙 고백과 그것에 근거한 삶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죽음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리고 세상은 그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혔다"(갈 6:14).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고 그것을 우리의 복으로 여기기를 거부했다고 하면서 이제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구한다고 하면 그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처럼 되어서 그것에 대해 무감동하며 애정을 느끼지도 말아야 한다.

2. 우리의 참된 생명은 저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 이니라"(3절). 

그러므로 새 사람을 거기서부터 삶의 의무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참된 생명은 위로부터 났고 또 거기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리고 그 나라를 위하여 이 생명을 완전하게 보전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것이다." 감추어졌다는 말은 그것이 우리에게 비밀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감추어졌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 이는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 것이라"(요 14:19)는 뜻과 같은 말씀이다. 현재로 그리스도는 숨겨진 그리스도이며 "우리가 보지 못한" 그러한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 그와 함께 감추어졌고" 그와 함께 안전하게 보전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위안이 된다. 우리가 까닭이 있어 보지 못한 그를 사랑하듯이(벧전 1:8) 또한 우리는 볼 수 없으나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보관된" 축복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전한 복을 받을 것을 우리가 소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까지 그리스도인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4절).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갈 2:20)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목적이며 원리이다. 그는 영으로 우리 안에 사시며 그리고 우리는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 그를 위하여 산다. 

그 이유를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빌 1:21)고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 숨어 계신다. 그가 지금은 하늘에 거하시는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그는 위에 세계의 모든 영광을 입으시고 그의 "거룩한 천사들과"함께 그리고 "그의 자신의 영광과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나타나실 것이다(막 8:8; 눅 9:26).

(3) 그때 우리는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구속하신 자들이 그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될 때 그가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살후 1:10). 

그리고 그와 함께 오는 것과 그와 함께 영원히 있는 것은 그들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모든 성도들의 전체적인 만남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명이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진 자들은 그때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누리는 그 영광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요 17:24). 

우리는 그런 복을 내다보고 있으면서 우리가 그 세계를 사모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을 넘어서서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 비하면 도대체 이 세상을 넘어서서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여기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보화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영원히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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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극복의 필요성(1)(골 3:5-7)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의해 있는 것들을 찾는 데 큰 장애가 되는 죄를 극복할 것을 권고한다. 

하늘의 것들을 사모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므로 "지상에 있는 것" 그리고 세상의 것들에게로 향하게 하는 "우리의 지체들을" 억제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의무다. 

"죄를 억제하라. 즉 너희의 이방인의 상태에서 만끽했던 마음의 약한 습관을 억제하라. 그것들을 금하라. 그것들을 없애라. 없애되 마치 너희가 만연하는 잡초나 해충들을 제거하고 그것들의 모든 것을 멸절시키는 것과 같이 하고 또는 너희를 상하고 너희에게 싸움을 거는 원수를 살해하는 것처럼 죄를 없이 하라"고 한다. 

본문에 보면 "땅에 있는 지체"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 가운데 흙으로 이루어진 부분 즉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시 139:15) 몸의 지체를 말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우리를 땅의 것들로 인도하는 마음의 부패한 성질 즉 죽은 몸의 지체들을 말하는 말씀이다(롬 7:24). 

그는 다음과 같이 세분한다.

Ⅰ. 육에 속한 것들. 이것들에게 그들이 전에는 사로잡혀 지냈었다. 

그것들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으로서 이 육체적 욕망들과 육체적 부정함으로 인하여 다양하게 나타난 것들이다. 

그들은 이전의 생애에 있어서 이 가운데 깊이 빠졌었고 또한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늘의 소망에 매우 상반되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다.

Ⅱ. 세상에 대한 사랑, 이것을 사도는 "탐심 곧 우상 숭배니라"(5절)고 하였다. 

즉 이것은 현세적인 물질과 외적인 즐거움에 대한 무절제한 탐닉과 사랑이다. 

물질과 세상즐거움에 대한 마음의 지나친 편애, 집착 지나친 추구는 그것들을 적절히 사용하고 향유하는 것을 방해하며, 그것들의 상실 가능성에 대한 조바심, 지나친 염려와 불안, 지나친 슬픔을 일으키게 한다. 탐심은 영적인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자. 

마땅히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사랑과 관심을 세상의 부요에 기울이는 것이며 세상적 부에 대한 사랑에는 대단한 정도의 악의가 숨겨 있으며 일반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심하게 하나님을 거스리고 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라...선한 사람들이 범한 죄에 대해 성경에 기록되어진 모든 실례를 살펴 보면(성서의 인물 가운데도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인물이 그들의 생애 과정에서 한두번 죄를 범하였다)그들이 범한 죄에서 탐심의 죄는 거의 없었다.[[이것은 주께 대한 불신이다!!]]

사도는 더 나아가 계속 죄를 억제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 준다(16,17절)

1.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우리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하느니라(6절)고 하였다. 

우리가 본질상 어떠하였는지를 잠시 살펴 보자. 먼저 우리는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다. 

불순종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 아래 있으면서 본래 불순종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편은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며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불순종의 자녀이므로 또한 진노의 자녀가 된다(엡 2:3).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한다. 

율법의 교훈에 순종치 않는 자들은 그것에 의한 벌을 초래한다. 그가 말하는 죄들은 그들의 이교의 그리고 우상 숭배의 상태에서 있었을 때의 죄이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히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이 죄들은 그들에게 심판을 가져 왔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드러내 놓았다.

2. 우리는 이 죄들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이전에 죄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제 그것을 버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리는 곁길로 행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 길로 가지 말도록 하자. 그러므로 욥은 "만일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욥 34:32)라고 고백하였다. 

우리에게는 이방인의 뜻을 좇아 음란 가운데 살던 지나간 때가 족한 것이다(벧전 4:3). 

본문에 이르기를 "너희가 그런 일들을 행한자들 가운데서 살았을 때는 너희가 그 악한 습관 속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어두움의 일들을 행하는 자들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들과 교제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진창 속을 걸으면서 흙을 묻히지 않으려는 것과도 같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길을 삼가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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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극복의 필요성(2)(골 3:8-11)

우리가 과도한 욕망들을 억제해야 하듯이 또한 과도한 열정도 억제해야 한다(8절). 

그러므로 본문에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불순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되기 때문이다. 

복음신앙은 영혼의 보다 낮은 기능을 보다 높은 기능까지 변화시키며 욕망과 정열에 대하여 올바른 이성과 양심이 지배권을 장악하도록 지지한다. 

성냄과 격노는 나쁘지만 악의는 더 나쁘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욱 뿌리 깊고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화되고 고착된 성냄이다. 

그리고 부패된 원리들이 마음 속에서 제거되어야 하듯 그 부패된 원리들의 부산물은 혀에서도 제거되야 한다. 

본문의 "훼방"은 인간들에게만 폭언을 써서 중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것까지 의미하는 말이다. 

또는 "훼방"은 사람들을 중상하거나 악한 궤교로 좋은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본문의 "부끄러운 말"이란 모든 추잡하고 부정한 강론으로 이것은 말하는 자의 더러워진 마음에서 나오며 그리고 듣는 자에게 같은 더러움을 오염시킨다. 

그리고 본문에서 또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9절)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의 율법과 사랑의 율법에 모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하며, 불친절하며, 그리고 본래 인간 가운데 있는 친교와 모든 믿음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거짓말은 우리를 악마와 같이 만든다(악마도 거짓말의 아버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영혼에 섬겨진 악마의 형상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이러한 죄를 경계해야 한다. 즉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9,10절)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 고백에 의하여 죄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주장과 이윤을 지지하기로 한 사실을 생각하여 우리는 모든 죄를 믿게 하고 그리스도와 계약을 맺고 이 거짓말의 죄에 대해 스스로를 강하게 무장해야 한다. 옛사람을 벗어버린 자들은 옛 사람의 행위들도 함께 벗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은 새 사람의 모든 행위들을 함께 입어야 한다. 그들은 선한 원리들을 함께 입어야 한다. 

그들은 선한 원리들을 지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선한 생활 가운데서 그것들은 실현시켜야 한다. 

새 사람은 "지식에 있어서 새롭게 된"자라고 말하여진다. 왜냐하면 무지한 영혼은 선한 영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이 그 마음이 선할 수 없다(잠 19:2).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하므로 의지와 생각에 영향을 가한다. 

빛은 태초에서 그러하였듯이 새 창조에 있어서도 첫째로 존재한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형상을 따라 무흠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에게 영예로움이 된다. 그러나 그 현상은 죄 때문에 망가지고 상실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거룩하게 하는 은혜에 의하여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된 영혼은 아담의 타락하기 전에 모습과 같을 것이다. 

성화의 특권과 의무에 있어서 "거기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당이나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분별이 있을 수 없다"(11절). 지역의 차이나 삶의 환경이나 조건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아무런 차별도 거기에는 있을 수 없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무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되는 은혜를 받는 것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막힌 담을 헐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같은 위치에 즉 의무와 특권에 있어서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이유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 즉, 그의 유일한 주이시며 구주 그리고 그의 모든 소망과 복이 되신다. 

그리고 전자는 물론, 후자 그리고 다른 관점들에서 그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화되어진 자들에게 그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며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그는 그들에게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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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권고(골 3:12-17)

사도는 여기에서 상호간의 사랑과 동정을 권고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그러므로 긍휼의 심정을 옷 입으라"(12절)고 하였다. 

우리는 성냄과 분노를 벗어나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8절과 같이) 동정과 친절을 옷 입어야 한다. 

악을 행하기를 멈출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대로 선한 일을 해야 한다.

Ⅰ. 본문에서의 권고는 강조적인 논법으로 전개된다. 

본문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옷 입으로"(12절)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거룩한 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그들은 사랑을 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야 함은 물론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들은 모든 일에서 그들답게 처신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거룩함의 신임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며 선택받고 사랑받은 자로서의 위로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거룩한 자들은 누구에게나 낮아지고 사랑스럽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특별히 옷입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1) 불쌍한 자들에게 대한 동정의 옷을 입어야 한다. 

"긍휼의 심정" 즉 가장 부드러운 긍휼을 입어야 한다. 너무나 많은 긍휼을 입은 자들은 긍휼의 받아야 할 모든 대상들에 대해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고 하였다.

(2) 우리의 친구들,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친절을 옷입어야 한다. 

정중한 성품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적절한 것이다. 

복음의 의도는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온화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는 물론 사람들 가운데 교제를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보다 낮은 자들에 대하여는 겸손과 그리고 우리보다 위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는 복종할 수 있는 "마음의 겸손함"을 옷입어야 한다. 

겸손한 마음뿐만 아니라 겸손한 행위도 있어야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

(4) 우리를 격노케 하거나 혹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에게 "온순한"을 옷입으라고 하신다. 

모욕과 무시에 대한 원한으로 인하여 우리가 불손함을 표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신중하게 자신의 분노를 자제하면서 그리고 참을성있게 다른 사라들의 분냄을 견뎌야 한다.

(5) 우리를 계속 격분시키는 자들에 대해 "길이 참음"을 입으라고 하신다. 

"사랑은 온유함은 물론 오래 참는다"(고전 13:4). 순간적인 도전은 잘 참아내는 사람들도 그 도전이 끈질기게 계속될 때는 흔히 참지를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들의 해함과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로 기인한 힐책을 오래 참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그에 대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해 오래 참으신다면 우리도 같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게 오래 참아야만 한다.

(6) 우리 모두가 연약함과 결함으로 가득찬 존재라는 점을 고려해서 서로 용납함을 옷입으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서로 용납하라"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남의 관용을 필요로 이 우리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해도 이를 용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나타낼 때 그들도 우리를 용납해 주게 되는 것이다.

(7) 우리를 향한 타인의 해함을 용서할 마음을 옷입으라고 하신다. 

고로 본문에 "만일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 마음 속에는 많은 부패함이 있으며 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거룩하고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자들 가운데서 조차도 일어난다. 

바울과 바나바는 "격렬한 논쟁"을 하여 "피차 갈라졌음"(행 15:39)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도 논쟁이 있었다(갈 2:14).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서로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렇다고 원한을 품으라는 것이 아니다. 모욕을 참으며 그리고 그것을 간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러하라"(13절).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많은 범죄를 사함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은 용서해야 할 좋은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죄를 용서할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해 주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 자신들이 용서받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의 본을 또한 따라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Ⅱ. 이 모든 것을 위하여 본문에서 우리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들을 권고 받는다.

1. 우리 자신을 사랑으로 옷 입히라고 한다(14절). 그러므로 본문에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하였다. 

‘에피 파신 데 투토이스’-즉 모든 것 위에란 우리의 생활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사랑으로 겉옷을 삼으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으로 우리의 분별됨과 위엄의 표시를 삼으라는 말이다. 

또는 사랑으로 우리의 생활 신조를 삼으라는 말이다. 이 사랑은 모든 계명의 축소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후서에도 "믿음에 덕을 더하고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고 하였다. 

믿음을 기초로 삼고 사랑은 머릿돌로 삼아야 한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때로써" 행복한 사회를 공고히 하는 접착제이며 그 구심점이다. 

그리스도인의 단합은 일치와 상호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2. 하나님의 평강의 통치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라고 한다(15절). 그러므로 본문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과 평강을 유지하고 그가 너희를 받으시고 사랑한다는 위로를 인식하라는 말씀이다. 

혹은 너희 자신가운데 평화로운 마음 곧 평화를 유지하며 평화를 만드는 평화의 정신을 지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일컬어 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백성인 모든 사람 안에서 그가 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요 평강이다"(롬 15:17). 

사도는 그러므로 "이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즉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너희 마음을 통치하게 하며 또한 너희 가운데 그를 심판자로 모셔들여 모든 갈등을 해결하게 하라"고 한다. 또한 사도는 이 일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평강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에게는 특권이며 형제와 평화함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가 한 몸으로 연합될 때 인간의 홈의 지체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서로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칭하여질 수 있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2:27). 우리 안에 이 평화로운 마음을 보전하기 위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은 매우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 대하여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 대하여 유쾌하고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이 지닌 어떤 특별한 은혜와 뛰어남을 인하여 서로 시기하는 대신에 너희 누구에게나 공통된 "그의 긍휼하심에 감사하라"고 한다.

3.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16절). 

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지키게 되어야 한다. 또한 그가 우리 안에 거하되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는 하인으로가 아니라 자기 지붕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명령하며 지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주인으로 그가 거하셔야 한다. 우리는 집 주인으로서의 말씀으로부터 훈육과 지시를 받아야 하며 그리고 때를 따라 은혜와 위안과 힘과 식량의 우리의 몫을 공급받아야 한다. 

말씀은 우리안에 거해야 한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항상 가까이 있어 적절한 때를 따라 그것의 감화를 받고 또 그것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친숙히 알아야 하며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알아야 한다"(욥 5:27). 

이 말씀은 또한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해햐 한다. 즉 그것이 우리 마음을 지켜 줄 뿐만 아니라 좋은 집으로 유지시키도록 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 안에 모시기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그들안에 다만 빈약하게 거할 뿐일 때가 많다. 

그것은 그들에게 강력한 함에 영향을 갖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우리가 그것의 풍성함을 우리 안에 가질 때 그리고 성경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하게 될 때, 그때 영혼이 부요하게 된다. 

그리고 말씀은 우리로 지혜롭게 한다. 지혜란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가 자신의 훈육을 위하여 자신에게 적용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를 모든 지식과 사변에 있어서 박사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혜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지혜의 자녀들답게 행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4.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로 모든 은혜에 진보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작성에 의하여 자극을 받고 그리고 그들의 교회에 대해 서로 지식 교환함으로 자신의 지식을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시와 찬미로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시를 노래하는 것은 복음이 정한 의식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프살모이스 휨노이스 오다이스’란 말은 다윗의 시편과 영적인 찬미와 송시(頌時)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들은 성경에서 모아져서 특별한 경우에 알맞게 선별된 것으로 그들의 우상 숭배의 음탕하고 속된 노래들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신앙적 시들도 이런 표현 형태를 통하여 불리워진 것 같으며 좋은 감화력을 미치었다. 

그러나 우리가 시를 노래할 때 만일 우리가 마음이 은혜로 충만하고 노래하는 내용에 적절하게 감동되지 않고 그 안에 참된 헌신과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흥겹게 노래할 수 없게 된다. 시편에 대한 노래는 찬양의 의식에는 물론 가르치는 의식에도 효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노래로써 자신들을 활기 있게 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가르치고 권고하며" 서로의 관심을 자극시키며 교훈적인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

5.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야 할 것이 권고된다(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그의 명령에 따라서, 그리고 그에게서 나오는 힘에 의해서, 그의 권위에 일치하여, 또한 그의 영광을 보고, 선한 것을 받아들이시며 잘못된 것은 용서하시는 그의 공로를 의지하여 모든 일을 행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르기를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신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모든 일들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여전히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엡 5:20).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

(2) 주 예수는 우리의 기도의 중재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찬양의 중재자도 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엡 5:20).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들을 하는 자들은 결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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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감당해야 할 상대적 의무(골 3:18-25)

앞의 에베소서와 같이 사도는 본장을 상대적인 의무들에 대한 권고로써 결론을 맺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그리고 주 예수를 찬미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서신들은 여러 가지 상관 관계 속에서 생기는 의무들을 역설하는 데 가장 특별하고 분명하다. 우리는 복음 신앙에서 특권들과 의무들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Ⅰ. 그는 아내들과 남편들의 의무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한다(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복종은 아내들의 의무다. ‘휘포탓세스데’은 관리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롬 13:1 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력에게 굴복하라"는 말씀에 이 용어가 씌여졌다). 그리고 이 말은 복종과 존경을 표현하는 말이다(엡 5:24, 33). 

아내가 복종해야 되는 이유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먼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기"(딤전 2:13, 14) 때문이다. 또 남자가 복종을 받아야 하는 것은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고 범죄는 나중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다"(고전 11:3, 8, 9)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약속임은 물론 사물들의 이치와 자연의 질서에로 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기 마음대로 마구하는 포악한 격한 주인이나 혹은 절대적인 폭군에게 이렇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또한 서로 적절한 의무에 대한 엄격한 약속을 맺은 자기 자신의 남편에 대하여 복종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의무를 행하되 그들은 그리스도의 법과 권위에 복종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해야 한다. 

반면에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19절).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리고 그들 자신의 몸과 같이 심지어 자기 자신들같이 부드럽게 그리고 신실한 애정으로 사랑해야 한다(엡 5:25, 28, 33). 그리고 가장 가까운 관계 아래 있으면서 서로 생명의 최대 위안과 축복을 나눈 자답게 특별한 사랑으로 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아내를 괴롭혀서는 안 되며 거친 말이나 혹은 가혹한 태도로 그들에게 불친절하게 해서도 안된다. 

모든 일에서 아내 들에게 친절해야 하며 그들은 잘 돌봐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되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그리고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난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1:9, 11, 12)

Ⅱ. 자녀들과 부모들의 의무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20절). 

그들은 기꺼이 부모의 모든 당연한 명령을 행해야 하며 그들의 지시와 처분에 따라야 한다. 

부모들은 그들을 지도할 권리를 섭리에 의해 부여받았고 또 자녀들이 스스로 처신하기 보다 그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사도는 (엡 6:2) 자녀들에게 부모의 명령에 순종할 뿐 아니라 그들을 존귀케 할 것을 요구한다. 

즉 그들은 부모를 존경해야 하며 그들은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 복종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혹은 그가 받으실 만한 태도이다. 

그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기"때문이며(엡 6:2) 또한 거기에는 즉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는 뚜렷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자녀들은 세상에서 가장 잘 번성하며 그리고 장수를 즐긴다. 또한 자녀들이 순종해야 하듯이 부모들은 온화해야 한다(21절). 

그러므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너희의 자녀들에 대한 권위를 그들이 너희에게 분을 품거나 의무를 행함에 있어 실망하지 않도록 가혹하고 매정하게 행사하지 말고 친절하고 부드럽게 행사되도록 하라. 그리고 고삐를 너무 단단히 쥠으로 그들이 참을 수 없어서 달아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사도는 권한다. 신중하지 못한 부모들의 나쁜 기질과 행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큰 거침이 되며 그들의 길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이 자주 입증된다(엡 6:4 을 참조).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의 온화함과 자녀들의 의무를 다함을 통하여 그의 교회에 그를 섬기고 세세무궁토록 신앙을 전파할 자손이 있게 하시는 것이다.

Ⅲ. 종들과 상전들의 상호 의무.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22절). 

종들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에서 주어진 의무를 행하고 모든 일들에서 그들 상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 수행은 그들의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에 일치되는 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복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라"고 한다. - 즉 그들 상전이 볼 때뿐만 아니라 그들의 상전이 보지 않을 때에도 그러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바르고 부지런해야 한다. 또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다. -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경외하는 입장에 선 자들처럼 이기적인 의도나 위선이나 혹은 거짓없이 하라는 말이다. 마음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으로 모든 관계에서 선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들은 그들 상전의 눈 앞에 있지 않을 때에도 바르고 신실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감찰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생각했다"(창 20:11)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 5장 15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본문에서도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23절) 즉 근면하고 게으르고 나태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또는 "너희를 그 관계에 두신 하나님의 뜻에 불평하지 말고 즐거웁게 하라"는 뜻이었다. 

또한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한다. 섬김을 하나님께 하듯 할 때 그 섬김은 종의 일을 거룩하게 한다. 

즉 하나님께 하듯 할 때 그 섬김은 종의 일을 거룩하게 한다. 즉 하나님께 하듯 한다는 말은 그의 영광을 보고 그리고 그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며 단순히 사람에게 하듯 혹은 그들만 전심으로 섬겨서도 안된다. 우리가 사람에게 대한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만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종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선하고 충성된 종은 하늘 나라에서 더 이상 종노릇 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하자. 

그러므로 본문에도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상전을 섬김으로 너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며 그리고 그가 너희의 수고에 대해 지불하실 것이다. 너희는 마침내 영화로운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너희가 종이지만 장차 너희가 아들의 유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라"(25절)고 하였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만일 종들이 그 상전들에게 부당한 일을 한다면 비록 그들이 그것을 그 상전이 모르게 감출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하여 그들에게 갚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실한 종을 상주시듯이 분명히 불의한 종은 벌하실 것이다. 

반면에 만일 상전들이 그 종들에게 잘못을 행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할 것이며 그리고 그는 상전들의 외적인 환경들과 생활 조건들에 의하여 동요됨이 없으실 것이다. 

종이나 주인이나 그의 법정에서는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이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유대교에의 개종자와 무할례 이방인 등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공동적인 태도로 신앙 생활을 할 것인가를 놓하는데 중점이 주어지고 있다. 

과연 만일 복음의 신앙이 어디에서나 힘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세상을 얼마나 복되게 만들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세상사와 인간의 모든 관계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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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제 3장
=====3:1
사도 바울은 2:8-23에서 그리스도의 충족성(充足性)에 대하여 말하는 동시에, 이단의 그릇됨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논술하였다. 
그는 여기서 그러므로(* )란 말로써 그 결론을 짓는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 헬라 원문에서 직역하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입었으면"이니, 이것은 2:12에서와 같이,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로 인해 성립된(벧전 1:3)신자들의 영적 중생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중생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말일(末日)에 부활의 복도 받게 되어 있다(요 6:44).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함께 부활하였다(롬 6:5). 우리는 영적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것 곧,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할 근거를 지니고 있으니, 그것을 구함이 무리가 아니다.(마 6:33;갈4:26;빌 3:20참조)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우리는 그의 계신 곳을 바라보며 거기 속한 것들을 탐구해야 된다. 이것이 곧,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의 의미이다. 
"위엣 것"이란 말(*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중심한 영적 사실들을 가리킨다(요 8:23; 빌3:20-21).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위엣 것을 사모하며 그것을 찾아 거기서 살면 참 자유(고후3:17; 갈4:26)와 참 지혜(약 3:17-18)를 얻게 된다. 
그것은 골로새의 이단자들이 선전하는 의식주의나 고행주의와 달라서 그리스도의 승리에 의한 성결과 평강과 영적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이단자들의 교훈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승리(2:12-15)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이다.
"찾으라"는 말(* )은 '계속 힘들여 찾음'을 의미하는데, 이 말을 보아서도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이 사람의 노력과 상당히 비례적으로 긴밀하게 관계되어 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는 데는 우리의 노력이 요구된다. 노력은 진실성의 증표이다. 마11:12;히12:4 참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과 하나님의 천국 통치에 동참함을 가리키는 말이다.(눅 20:43; 행2:35; 롬8:34;엡1:20; 히10:12; 계3:21참조). 그가 거기 계시니 만큼 우리는 우리의 찾는 "위엣 것"을 그의 중보사역에 의하여 얻게 된다. 그는 우리의 받을 복의 원천이시고 방법이시다. (롬8:34 참조.)
=====3:2
본절은 윗절의 "위엣 것을 찾으라"는 사상을 좀 더 밝히 해명하고 또한 고조한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생각하라"란 말(* )은 '애착심을 가지라'는 의미이다(Abbott).  
벵겔(Bengel)은 이것이 '즐기는 마음을 가지라'은 의미라고 하였다.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은 염세주의(厭世主義) 사상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의 것에 지나친 애착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땅 위의 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고, 그것들을 오용(誤用)함이 악한 것이다(고전 6:12,10:23). 
우리가 발로는 땅을 딛고 머리는 위를 향하였으니, 천상(天上)의 것을 사모하고 섭취하여 땅 위의 것들을 하늘 위의 것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들에게 복속하는 행동들은 죄악이다(빌 3:19).
=====3:3
본절은 "이는"으로 번역된 이유접속사(* )로 시작하여 윗말의 첫째 이유를 보여 준다. 
신자들로 하여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소망인 영생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죽었고 - 신자들은 그들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와 함께 죽었으며, 그 죽음은 (1) 죄에 대하여 죽음이고(롬 6:6,11). (2) 율법에 대하여 죽음이고(롬7:4), (3)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니, 그것은 곧, 땅엣 것을 애착하여 추구하고 의지하는 이 세상 생활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다(갈 6:14). 
기독신자는 원칙적으로 땅엣 것에 대하여 전혀 시체적(屍體的)관계를 가진다.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영원한 집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오로지 그곳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노력해야 된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 그리스도에게 대표되어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참 신자들은,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지체(肢體)된 참 신자들의 부활도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는 신자들의 생명이 포함된 셈이다.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하나님 안에"란 말은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요일 3:2).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 승천하셔서 (이제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천계(天界)에 승귀하사 감취어 계신 것과 같이, 그 안에 있는 신자들도 그러하다. 
그리스도는 대신 원리(代身原理)에서 우리의 생명이니(4절 초두의 해석 참조),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사 감취었음과 함께 우리의 생명도 다 그렇게 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이다. 
어떤 학설에,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는 말은 다만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영적 생명의 신비성을 가리킨다고 한다, 
벵켈도 역시 그와 같은 견해로 말하기를, "세상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모른다. 그리스도인 자신도 자기를 원만히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3:5
사도는 하나님 안에 감추인 생명이 장차 나타날 것을 여기서 말함으로 그 생명의 영광을 보여준다. 이것도 2절의 둘째 이유이다(첫째 이유는 3절). 이렇게 영광스러운 생명이 위에 있으니,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한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 우리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은 곧, 우리의 부활과 영생으로 그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부활의 원인자(原因者)이시요 또 원천이시다(요 11:25). 
여기 "나타나신다"는 말은 재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초림도 어느 정도 그의 "나타나심"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재림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다. 
초림하신 그리스도는 인류의 일부가 보았거니와, 재림하실 그는 온 인류가 다 보게 될 것이다(계1:7).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의 재림을 가리켜 "나타나심"이라고 하였다. 그가 "나타나실" 그 때에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한 일들도 선악간에 다 나타나다(고전 3:13).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우리 신자들이 그와 같은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미천(微賤)하던 우리가 영광스러운 존재로 나타날 것이다(롬 8:18-19; 요일3:2).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본절부터 9절까지는 믿음을 장성하게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죄를 [미워하고 철저히 ] 끊어 버림이다. 
기독교의 인간 개조는 피상적(皮相的)인 것이 아니고, (1)먼저 죄악의 뿌리부터 단절해 버림으로(5절), (2)악한 행습들을 제거함에 이르고(8절), (3) 선미(善美)한 덕행을 옷입듯하게 한다(12-17). 다시 말하면, 그것은 먼저 죽고 그 뒤에 사는 것이다. 곧, 악심과 악행을 죽이고 선미한 새 생명을 가꾸어 낸다.
여기 "그러므로"란 말은 위의 교리론(1-4)에서 실제적 결론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는 것이니만큼, 세상 끝날에 그것일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땅 위에서 믿음을 착실히 지켜야 한다. 
이 사상은 벧전1:3-5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하늘에 간직된 기업을 누릴 자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벧전 1:5).
우리가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끊어 버려야 된다. 이 의미에서 사도은 여기서부터 골로새 신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버리라고 말한다. 
"땅에 있는 지체"란 문구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이것은 불의(不義)의 병기로서의 지체들을(롬6:13)가리킨다는 해석, 곧, 하나님보다 땅의 것들을 더 사랑하는 육신의 지체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채택하는 경우에는, 아랫말 "죽이라"는 것은 제어(制御)하고 극복하라는 의미이겠다. 
(2) 이것은 우리의 부패한 성품의 각양 작용들을 의미한다고 하는 해석. 하반절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란 말이 "땅에 있는 지체"란 문구의 설명인 사실로 보아도 이 해석이 적합하다."죽이라"(*)는 것은, 악한 성품의 활동을 그것이 '아주 죽은 것처럼 영원히 정지시키라'는 의미이겠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땅엣 것들을 즐겨 하나님을 떠나 버리게 만드는 죄악들이다. 여기 열거(列擧)되는 다섯 가지 죄악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음행"과 "탐심"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1) 성적 죄악.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음란의 충동과 욕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음란과 부정"의 차이는 무엇이며 "사욕과 악한 정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음란"이란 "부정"이란 말보다 범위가 좁은 말로서 불법적으로 취하는 성적 행동을 의미하고, "부정" 성문제(性問題)에 대한 일체의 불합리한 언행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정 무서운 죄악은 음란이다. 그렇게 때문에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 열거한 죄목들에는 무엇보다 먼저 이것을 선두에 놓는다(갈 5:19; 엡 5:3). 그 이유는, 이 죄악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힘으로 하나님을 영구히 떠나기 쉬운 까닭이다(고전 6:15-20).
(2) 무제한의 소유욕. 이것은 "탐심"이라고 불리우는데 "우상숭배"와 같이 간주된다. 이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죄악이다. 
탐심의 소유자는 세상 것들에 애착하여 그것들을 추구하기에 전심 전력하고 하나님을 떠난다. "탐심은 우상 숭배"라는 내용의 교훈은 마 6:24과 엡 5:5에도 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이 최우선순위요 마땅한 과제이다. (곧 하나님을 섬김으로)하나님의 뜻이면 물질도 받을 수 있다(마6:33). 
그런데 이 말씀을 외면하고 물질을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중요시 하는 자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같다.
=====3: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노라 - 이 말은 위의 권면의 이유이다. 
"이것들" 곧, "땅에 있는 지체"들은 위험하니 그것들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에게 두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롬 1:18-32이 가르침과 같이, 그들을 그 범하는 죄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심이고(롬 1:18,24,26,28), 둘째는, 끝날 대심판때에 그들을 영벌에 처치시키는 것이다(계6:17). 
"임하느니라. "한역의 각주(脚註)가 보여줌과 같이, 어떤 사본들(A,C,D,E,K,L)에는 이 말 위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식들에게"란 어귀가 있다. 
그러나 Meyer는 이 어귀가 본래의 원본에서 순전히 보전되어 내려온 것이라 한다. 우리가 이 어귀를 취하든지 취하지 않든지 본절의 큰 뜻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임하느니라"란 말의 헬라 원어(* )는 현재 시상(現在時相)이다. 이에 대하여 라이트푸트는 말하기를, 이것이 죄인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아주 확실하다는 의미를 보여준다고 하였다.
=====3: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 여기 "그 가운데"란 말의 헬라 원어(* )를 직역하면, "그것들 가운데"란 복수로서 위에 말한 '죄악들 중에'란 말이다. 골로새 사람들이 중생하기 전에는 그런 죄악들이 그들의 방편이었다.
=====3:8,9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 "이제는"(* )이란 말은 개종하고 복음을 믿은 그 때를 가리킨다. 
"이 모든 것들"이란 말은 "땅에 있는 지체들"(5절 상반)  곧, 모든 죄를 의미한 것인데(5절하반), 역시 8절 하반부터 9절 초두에 있는 죄들까지 총칭한다. 
"벗어 버리라"는 말은 낡은 옷을 벗듯이 이 모든 죄들을 전적으로 내버리라는 말이다.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 헬라 원문에는 "분"이란 말(* )바로 위에 "노함과"란 말(* )이 있는데 ,한역에는 그것을 빠뜨렸다. 그러면, 헬라 원문대로 여기에 여섯가지 죄악이 열거되어 있으니, 처음 두 가지가 서로 관련이 밀접하고, 다음 네 가지 역시 서로 관련이 밀접하다. 
처음 두 가지 곧, "노함과 분"에 대해 말하자면, "노함"은 외부에 폭발된 것이고, "분"은 마음 속에 불타듯이 잠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네 가지에 대하여 말하자면, 
"악의"(* )라는 죄악은 기타 모든 것들에게 원인(原因)관계를 가진다. "악의"란 것은 남을 해하려는 독한 마음을 말함이니, 이것이 원인이 되어 (1)남을 훼방하며, (2) 남을 대면하여 욕하며(본문에 "부끄러운 말"은 대면해서 버릇 없이 말함을 의미한다), (3) 혹은 남을 속임이다. 
"훼방"이란 말(* )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경(不敬)하게 말함을 의미하는 때도 있으나, 여기서는 이웃이 듣지 않는 곳에서 그를 비방함을 의미한다.(롬 3:8,14:16;고전 4:31;딛 3:2). 
"부끄러운 말"(* )은 신약성경 중 여기에만 한 번 사용되었다. 이것은 부정한 말(음탕한 말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버릇없는 말)을 의미한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 여기서부터는 골로새 신자들이 위의 모든 죄를 끊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원칙적으로는 벌써 옛사람과 그 악행을 벗어 버렸으니만큼 그들로서는 그 죄악된 습성들로 범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옛사람"은 무엇인가? (1) 성령으로 중생되기 전의 사람이므로 옛사람이고, (2)타락하고 파상되었고, 또 부패해진(엡 4:22) 인성(人性)이므로 사악한 옛 행습을 의미하는데, 일시적이 아니고 상습적으로 기탄 없이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벗어 버리고." 8절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라
====3:11
@새 사람을 입었으니 - 이것은 위에 기록된 악행을 버릴 이유이다. 
기질상(氣質上) 죄악 곧, 노함과 분을 제거하고, 또 언어상(言語上) 죄악들 곧, 훼방, 욕설, 거짓말을 끊어 버려야 할 이유는 어디있는가?  
그것은 이 문구들이 보여줌과 같이, 믿는 사람들은 원리상으로 그 믿는 순간부터 옛사람 (부패한 본성)을 삽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새사람(중생된 사람)을 입은 사실을 인식하는 까닭이다.(롬 6:6). 
"새사람"이란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아(自我)를 가리키는 바, 고후 5:17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갈 6:15; 엡 4:23-24).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적에 채택하신 모형이니(창 1:26-27),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개조하심에 있어서 역시 그 모형을 취하셨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큰가를 알 수 있다. (1)그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그 이상 더 할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요, (2) 그리스도 안에서 제 2차로 인간을 개조하심에 있어서 또 그같은 모형을 취하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불변성(不變性)을 보여준다.
그런데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엡 4:24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이 잘 밝혀 준다. 여기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란 말(*)을 좀 더 풀어서 개역하면, "진리의 의(義)와 진리의 거룩함"이니, 곧 진리가 소유한(혹은 산출하는) 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진실로, 복음의 진리는 죽은 해골과 같은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고, 그것을 참으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의와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데, 진리에서 산출된 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름이고, 거룩함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말한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면, " [진리를 참되게 깨달아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새롭게 하심"이니 곧, 인간이 진리의 지식에 [참되게 제대로]이르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영적 개조(靈的改造)를 말한다. 
그러면 이것을 그 바로 윗말과 연락시켜 볼 때에, 그 뜻은 이러하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로 지으심에 있어서 (1) 그 모형은 자기의 형상인데, (2) 그 방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의 지식(복음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그 심령을 새롭게 하심이다. 
복음 진리를 참으로 아는 데 이른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곧, 의와 거룩)으로 변환한다. (핫지의 주석, 엡 4:24에 대한 해석 참조). 
"지식"이란 가(* )은 통속적 의미의 지식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만 받을 수 있는 영적 통찰이다. 
이 말에 대하여 화란 주석가 반류웬(Van Leeuwen)은 말하기를 , "여기 '지식'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론상 지식이거나 자역적 지식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생활에서 흘러 나오는 신앙적 지식 곧, 영적 통찰이다"라고 하였다.
여기 "새롭게 하심을 받는"이란 말(*)은 "새로워져가는"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진행형(進行形)으로서 (현재분사이니만큼)그 새로워짐이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자의 성화(聖火)가 단번의 성취가 아니고 점진적이고 계속적임을 말해 준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자가 악행을 끊은(8-9절 상반) 결과로 하나님을 아는 그의 지식이 더욱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신자가 악을 떠남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지만 그가 악을 떠날 때에 새 힘을 얻는 것도 은혜로 말이암음이 확실하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실행해야 그것이 축복의 원천으로 임한다. 진리를 순종함이 곧 믿음의 진실성인 것이다.
본절은 윗절의 계속으로서 "새사람"에 대한 설명을 첨부한다.
@거기는 - 이 말(* )은 새 사람의 세계에는..  아무라도 다  그 어떤 차별이 없나니, 누구나 그리스도께 속하여 구원을 얻는다(갈 3:27-29).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 "헬라인"은 희랍 민족을 가리킬 뿐 아니라. 희랍 문화를 받은 모든 다른 민족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Zaha, R merbrief, p. 66). 
다시 말하면 "헬라인"은 성경에서 문화인들을 총칭하는 말이다(고전 1:22). 그리고 "유대인"은 구약 종교의 특혜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롬 3:1, 9:1-5).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헬라인도 그 문화의 특수 지위를 자랑할 수 없고, 유대인도 그 소유했던 종교상 특권을 인하여 이방인들을 멸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구원은 문화상 발달이나 종교상 특권으로 말미암아 받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 이것은 종교의 외부적 특권과 관련된 자들과 또한 그것과 관련되지 않은 자들의 차이를 가리킨다. 
외형적으로 할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령으로 중생하여 새 사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롬 2:29).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 "야만인"이란 말(* )은 말이 어눌(語訥)하고 명료하지 못한 자란 의미이다. 
본국인은 외국인의 언어를 그런 불명료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헬라 문화를 받아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헬라 문화권 밖에서 외국어를 말하는 자들을 볼 때에 그들은 "야만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구디아"란 말(* )은 거칠고 무례한 사람을 의미하는바, 그 윗말 "야만인"보다 더 미개한 자들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스구디아"는 본래 흑해 북편 칼파디아 산(Mt, Carpathians)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알렉산더대왕의 정복에 의하여, 아시아에도 구라파의 스구디아인과 같은 민족이 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동쪽 구라파와 중앙 아시아와 북 아시아 전부가 스구디아인의 땅이었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그들은 문명에 낙오됨이 심하였으므로 그들의 부족 이름은 야만인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 영생을 얻는 특권은, 문화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야만인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나님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야만인들과 야만의 야만인들까지도 똑같은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미개한 민족에 속한 신자들은 이 특권을 누림에 있어서 위축하거나 자포자기할 바 아니다.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 이 말은 바울이 그 당시의 사회 형편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 
당시 사회는 노예를 학대했으므로 그들의 인권이 인정되지 못했다. 그런 사회제도 아래 있는 노예들에게 있어서, 사도의 이 말씀은 그야말로 복음이었으리라.. 갈 3:28을 보면, 새 사람의 세계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의 차별 대우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문화의 특권이나 종교상의 외형적 특수 관계도 아니며, 민족적 우수성이나 사회상 지위도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도 구원을 얻게 할 부속조건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만유"(전부...Al1)이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성립시키는 유일한 원인이시니만큼, 그가 이 원인의 전부란 말이다. 
그리고 그가 "만유 안에(and in All) 계시니라"고 한 말은, 피조물 중에 그리스도의 주관과 권고(眷顧)를 벗어날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그는 "만유"곧, 헬라인, 유대인, 야만인, 스구디아인, 노예, 자주자 할 것 없이 모든 인류에게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신 구원자로 계신다는 말이다. 
롬 10:12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하는 말씀이 이 뜻을 잘 설명한다. (고전 12:13; 갈 6:15 참조.)
=====3:12
@그러므로 - 이 말은 골로새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사람"을 입었으니, 마땅히 이행해야 할 바가 있다는 결론을 소개하는 말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 - 이 문구는 원문대로 직역하면, "택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하심을 입는 자들"이다. 
이들은 물론 그리스도 신자들이니 창세 전에 택하심을 입었다. 
그 택하심을 입은 결과로, (1) 그들은 거룩하게 되었고, (2)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영원히 입는 것이다. 
기독신자는 자기도 남과 다름 없이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감격함에 넘쳐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봉사하려는 동기를 품는다. 
그러므로 자기가 남달리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는 것을 바로 인식하는 신자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방심하지 않고 도리어 열심을 품어 선을 행한다. 
자기도 성도(聖徒)임을 알고서야 어떻게 불의를 행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계속적으로 받는 부요(富饒)한 자임을 알고서야 어떻게 이 세상 것들 때문에 남과 다툴 수 있으랴?
@~처럼 - 이 말의 헬라 원어(* )는 "로서"라고 개역되어 '사실 그대로'라는 의미를 나타내야 된다. 
즉,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로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 "긍휼"이란 말(*)은 직역하면, "긍휼의 감정"이니 인격의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불쌍히 여겨 도우려는 열을 말한다. 영적으로 부요한 하나님의 자녀는 다른 사람의 가련한 정형(情形)을 살피는 데 민감하다. 
"자비"란 말(* )은 성격의 관계면에서 인자함-부드럽고 다정다감하게 탄력적으로 대함을 의미하는 바, 엄위(嚴威)에 정반대되는 것이다(롬 11:22). 
이런 성격은 위에 서 말한 긍휼을 근원으로 하고 이 심정이 대외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겸손"(* )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빌2:3).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려면, (1) 자신의 부족과 결함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하며, (2) 높고 낮은 것을 판결하시는 때는 현재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남보다 우수한 줄로 자인(自認)하고 머리부터 상석(上席)을 택하는 것은 너무도 외람된 일이다. 눅 14:8-10의 비유에서 보여주는 대로, 현세 교회의 복음 전파는 사람들을 연회에 초청함과 같다. 이 교회 생활(연석을 차지하는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높인다면, 그것은 연회에 초청된 객으로서 연주(演奏)인 하나님의 하실 일을 월권하는 무례한 행동이다. 우리는 차라리 말석(末席)을 차지하는 것이 예법에 정당하다.
"온유"란 말(* )에 대하여 크레다너스는 말하기를, "그것은 베는 듯하고 쏘는 듯하고 찌르는 듯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며, 남에게서 손해와 방해를 받고도 격분되거나 원한을 품거나 반동하거나 복수하지 않는 것이고, 대인 접물(對人接物, 예를 들면 사람을 교훈하거나 사업을 경영함과 같은 것)에 있어서는 조급, 경솔, 조포(粗暴), 열광, 잔인, 속단, 흥분 등과 정반대되는 인내, 신중, 화순(和順), 조절, 포용, 유화(柔和), 침착으로 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오래 참음"(*)은 나를 괴롭게 하는 시험거리로 인하여 변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음을 의미할 수 있지만, 특히 남이 해하거나 혹은 은혜를 배반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노하지 않고 변함 없이 덕행(德行)을 계속함을 의미한다. 구약의 잠언에 오래 참는 덕을 칭찬하여 말한 귀절이 많다(잠 14:29,15:18,16:32,17:27).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은 롬2:4, 9:22; 벧후 3:9에서 볼 수 있고, 인간이 인간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권면은 딤전 1:16; 딤후 4:2에 있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5:22)에서 오래 참는 덕의 필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단은 그가 시험하는 사람을 폭력으로 정복할 수는 없으므로 같은 시험을 오랫동안 계속함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질그릇과 같아서 계속적 시험에는 넘어가는 줄 그놈이 알기 때문이다. 그놈은 이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렸다. 이와 같이 장기적 시혹(試惑)을 이기려면 우리는 오래 참는 덕을 소유해야 된다"(의역).
"옷 입고"우리의 행습(行習)은 옷과 같이 남의 눈 앞에 나타나 보이게 함으로 남의 평판을 받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 행습들은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이 나타나서 그의 판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의로운 행실의 소유자를 깨끗한 옷을 입은 자라고 한다.(계 19:8). 마 22:11-12 참조.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 본절은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미덕(美德)의 실제적 적용을 말한 것이니, (1)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적용으로서의 "용납"과, (2) 긍휼, 자비의 적용으로서의 "용서"이다.
"혐의"(* )는 "원망"을 의미한다. 
"서로 용납하여." 교회 안의 원망이나 다툼의 책임은 한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선 양편에 다 있는 것이다. 원망을 받는 자 편에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망 거리를 묵과하지 않고 불평을 일으키는 자도 사랑의 표준에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 측에서는 용납하는 정신을 가져야 된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회에서는 잘못된 자의 짐을 져주는 의미에서, 혹은 자기 역시 그 사람에게 허물됨이(같은 종류의 허물의 아니며, 혹은 같은 정도의 허물은 아닐지라도)없지 않음을 자인하는 의미에서 그 범과자에게 용납을 청하는 것과 근사(近似)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갈 6:1-2).
그러므로 서로 용납을 청할 필요가 있음도 사실이고, 서로 용납해야 될 것도 사실이다. [[용납이란 짐짓추정하거나 이리저리 이해득실을 따져 봄 없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나를 받아주심처럼 [설령 기만당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더라도 그것조차 감수하려는 마음으로]서로 받아주고 끝까지 선대함으로써, 주님이 나를 용납하심처럼 참고 기다려줌이다!!]]
"피차 용서하되"란 말(*)은 어떤 번역에 의하면, "너희 자신들을 용서하되"라고 한다. 이 번역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뜻은, 한 신자가 다른 신자를 용서하면 그것은 실질에 잇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함과 같으므로 "네가 남을 용서하라"고 함보다 "너희 자신들을 용서하라"고 하는 재담식(才談式) 문구를 사도가 쓴 셈이 된다는 데 있다. (물론) 이 번역이 옳다면, 사도의 이 권면은 모든 신자들이 다 한 몸과 같다는 성경적 의미를 포함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나 많은 학자들이 이 번역은 지지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골로새 신자들은 서로 용납해야 될 것이다.((그래서 선입견이나 짐짓추정 없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받아주심처럼 또한 그를 형제로서 받아주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범과가 발견되었을 때애는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심처럼 은혜를 베풀어서) 서로 용서하는 자리에 있어야 할지니, "용납"은 피동적이요 소극적이고, "용서"는 능동적이요 적극적이다, 용납은 12절에 열거된 다섯가지 미덕 중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산물이고, 용서는 긍휼과 자비의 열매로 볼 수 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우리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반역하고 그의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께서는 자기가 친히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대하여 불평을 하시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큰 희생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용서하셨다.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를 책 잡으려면 얼마든지 그리할 만한 최대 이유의 소유자는 그리스도였다"라고 하였다.
=====3:14
본절은 12절의 다섯 가지 덕(德)에 연속하여 모든 덕행의 근본인 사랑에 대하여 언급한다.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많이 있다(요 13:34-35; 롬13:8-10; 고전 13:1-13;갈 5:13-15;엡 4:2-3;요일 4:7-21).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12절에 열거된 다섯 가지 덕도 중요하지만, 그것들 이상으로 더 중요하여 그것들의 기초를 차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랑이다.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이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완전의 띠"란 말이니 곧, 도덕 생활의 완전을 성립시키는 근본적 용소하는 말이다. 
누구든지 사랑만 붙잡으면 모든 다른 덕행들은 거기에 따라온다(롬 13:8,13:1-13).
=====3:15
교회 생활에 있어서 피차간의 용납과 용서를 생산하는(13절) 다섯 가지 미덕(12절의 긍휼-자비-겸손-온유, 오래 참음)이 사랑의 띠로 결속(結束)되면(14절), 교회 안의 평화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도는 골로새교회에 대하여, 본절에서는 평화를,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內住)를 희망한다. 
그 논리적 단계를 도시(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5가지 미덕으로 구성된 사랑의 띠를 띰]---> 용납 + 용서 [CJ의 개방성 체험] ==>CJ의 평강 ==> 감사 충만한 한 몸 이룸 : CJ의 말씀 내주하심
--------------------------
    ::: 긍 휼                        
    ::: 자 비 (혹은 그리스도의 평화)
    ::: 겸 손
    ::: 온 유                      
    ::: 오 래 참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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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 여기 "그리스도의 평강"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평화이다(빌 4:7). 
이 평화를 마음에 소유한 자는 곧, 하늘의 것을 소유한 자니 분토(墳土)와 같은 땅 위의 것 때문에 이웃과 다툴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마음에 참 평화가 있는 자는, 다른 사람과도 늘 평화의 관계를 가진다. 
그런즉 남들과 평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참된 평화(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소유해야 된다(요 14:27; 엡2:14). 
"주장하게 하라"란 말(*)은 경기 지휘자(競技指揮者 = Umpire)의 역할을 하라는 말이다. 
경기장에서 혹시 분쟁이 일어나는 때는 두 말할 것 없이 그 지휘자의 결정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경기는 진행되는 법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 신자의 마음에도 어떤 대외적 원한(對外的怨恨)이 있어서 암투(暗鬪)가 일어날 경우에는, 지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평화적 지휘에 순종해 나아갈 뿐이다.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 고전 7:15참조, 기독신자들이 얻은 구원의 최후적 목표는 "영원한 평강"이니(계7:14-17,21:1-7, 9-26,22:1-5), 그것을 성취하시는 방도로서의 "부르심"도 그것에 해당(該當)하여 아무 분쟁 없는 한 몸 같은 교회(고전 12:12-27)를 이루게 하는 부름이다.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 곧, 너희는 너희를 한 몸이 되도록 부르사 평강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 감사의 표는, 그들이 이 부르신 목표(한 몸이 되게 하는 것)에 순응하여 서로 화합하는 것이겠다. 
칼빈은 여기 "감사하는"이란 헬라 원어(* )를 "유화(柔和)하는"(anabilessitis)으로 번역했으니, 그것은 친목적 화합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절의 문맥에 아주 적합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평강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너희를 한 몸처럼 합일(合一)하는 조직체인 교회가 되도록 부르셨으니, 너희도 거기에 순응하여 너희끼리 유화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이다. 
에디(Eadie)는 이 점에서 있어서, 이 말이 고전(古典) 헬라어에서는 "유화"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렇게 쓰인 실례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감사"의 의미를 채택하였다.
=====3:16
사랑의 띠를 띠는 것으로 모든 미덕(美德)을 생산 지속할 수 있게 된 교회는(14절), 논리적으로 평화의 덕을 소유할 수 있으니만큼, 사도의 평화를 희망했다(15절). 그리고 또한 그런 교회에는 논리적으로 진리의 부요한 내주(內住)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2:2), 본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내주하기를 희망한다.
@그리스도의 말씀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라이트푸트는 이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현시적(現時的) 영적 임재(靈的臨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본절의 문맥으로 보아서 이 둘째 해석이 합당하다.
@너희속에 풍성히 거하여 - 신자들 사이에 사랑이 풍성하여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의 말씀도 풍성히 내주한다. ((연이어, 말씀 충만은 사랑 충만으로 나타날 것!!))
그 이유는, 합심된 신자들의 단체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내주하시는 까닭이다(마 18:19-20). 
이처럼 사도는 사랑을 권면한 후(14절)에 그것(사랑)의 첫 열매로서 교회의 화평을 희망하고(15절), 또 의 둘째 열매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을 희망한다. 신자가 서로 사랑 안에 연합하여야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여 얻는 지혜의 부요에 이른다(2:2 해석 참조).((이는 시너지와 선순환을 가져온다!!))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르 부르며 - 여기 말한 "가르침", "권면"."찬미"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가 없으면 가르침이나 권면이나 찬양이 참되이 나타나지 못한다. 
"가르침"은 영적 지식을 전달함이고, "권면"은 도덕 실행의 동기와 용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둘은 "모든 지혜"를 방법으로 한다. 
지혜의 방법을 가지지 못한 가르침은 언제나 실패한다. 권면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브르며." 여기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시"(* )는 악기에 반주되는 가곡을 가리킨 것이지만, 역시 반주 없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가(聖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학설에, 이것은 구약의 시편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찬미"(* )는 단순히 목소리로 부르는 종교 음악이니, 신약시대에 이르러 성도들이 영감(靈感)으로 지은 성가들이다. 
그리고 "신령한 노래"는 위의 두 가지 중 어느 것이든지를 가리킬 수 있는 일반적 명칭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어떤 특종의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윗말 "시와 찬미"를 총괄하는 명칭이다(엡 5:19).
@마음에 강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 이 문구는 윗말과 밀접한 연락을 가졌으니 그 연락을 따라 약술(略述)하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러서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이다. 
모든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주요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함이 아니고, 교회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감사함으로"란 말(* )은 한역의 각주와 같이 "은혜로"라고 번역할 수 있으니, 그것은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은혜를 받은 마음으로 하라는 의미이겠다. 그러나 첫째 번역이 자연스럽다.
=====3:17
이 귀절에서 바울이 12-16절의 결론을 짓는 의미에서, 기독신자의 행동 원리의 요령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함과 또한 그 이름으로 감사함이다.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 이 문구에는 이중 의미가 포함되었다. 
(1) 그 언행(言行)이 그리스도 자신의 언행답게 하라는 것이니, 신자가 그 언행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모본하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를 위하는 언행을 의미한다.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여기 "그를 힘입어"란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그리스도 신자는 일반 언행에 있어서나, 하늘의 하나님을 송영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힘입어야만 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는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다.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 사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부부간의 도덕을 거론하였으니, 그 이유는, 부부가 가정의 기초인 까닭이다(창 2:18).
"남편에게 복종하라." 가정의 화평은 주로 아내된 자의 온유한 덕으로 말미암아 성립된다. 
온유와 복종은 서로 유사한 덕이다. (벧전 3:4-5 참조). 
구약 잠언에 복종의 덕을 소유하지 못한 아내의 불행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경계한다(잠 11:22,12:4 하반. 21:9,19,25:24, 27:15). 잠 11:16,12:4,31:10-31 참조.)
@이는 주 안에사 마땅하니라 - 이 문구는 주 안에 있는 자가 마땅히 실행할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책임이 있는 이유는 성경에 밤히 기록되었다. 
(1)남자가 먼저 창조된 까닭(딤전 2:13), (2)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까닭(고전 11:9), (3) 여자는 남자에게서 난 까닭(고전 11:8), (4) 여자가 솔선하여 범죄한 까닭(딤전 2:14), (5)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그릇임으로 남자의 지도와 보호를 요구하는 까닭(벧전 3:7), (6)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정하신 까닭(벧전3:7), (6)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정하신 까닭(창 3:16;고전 11:3)이다.
그러나이 복종은 예종(隸從)이 아니고 여자의 천직(天職)이다. 인권(人權)에 있어서는 남녀가 동등이다(고전 11:12;벧전 3:7).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 "아내를 사랑하며." 엡5:25에,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은 어떠한가? (1) 그 사랑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고, (2)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그가 솔선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고, (3) 자기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사랑이고 (4) 영원한 사랑이고, (5) 우리를 셩결하게 하시려고 사랑하신 것이다(엡5:26-27). 
남편된 자가 그 아내된 자에게 이렇게 큰 사랑의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괴롭게 하지 말아 - "괴롭게"한다는 말(* )은 '쓰게 군다'는 의미이다. 
남편된 자는 그 아내를 주관할 천직을 가졌으나, 그것은 독재적 압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오직 사랑으로써 보호하고 부양하며 지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남자는 이 권리의 성질을 오해하고 아내의 가정상 권리를 무시하고 전자(專恣)를 일삼는다. 
크리소스톰은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강해하였다. "남편된 너는 네게 속한 사람이라고 하여 아내에 대하여 전자하는 자가 되지 말고, 아내된 너는 남편이 사랑한다고 하여 교만해지지 말아라, 아내된 너는 남편에게 종속하기를 서슴지 말아라. 너는 사랑하는 그에게 종속함이 고역이 아니니라. 남편된 너는 네 아내 사랑하기를 서슴지 말아라. 그 이유는, 네 아내가 네게 종속되어 있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남편은 언제든지 그 아내에게 오직 사랑으로 지고지선의 유익에 이르도록, 희생적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며 아내는 기쁨으로 순종해야 할 본분을 가지고 있다.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 (출20:12; 레19:3; 신5:16; 잠23:22; 눅2:51-52; 엡6:1-2 참조.) "모든 일"이란 말은 절대적으로 그렇게 엄밀하게 볼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은 부모가 명하는 것들 중에 악한 것까지도 포괄하는 의미로서의 "모든 일"이 결코 아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에게 순종차 않는 것은 성경 말씀이 엄히 정죄한다. 
잠30:17에 말하기를,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였다. 
롬 1:30과 딤후 3:2을 보아도 부모를 순종하지 않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순종하라"는 말(*)은 18절의 "복종하라"는 말(* )과 다르다. 18절의 것은 통솔(統率)에 종속함을 의미하고, 본절의 것은 교훈에 청종(聽從)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 안에게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도덕 표준에 부합한다는 의미이다(Lightfoot).
신자들의 도덕 표준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본(寫本)은 이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여기 "주 안에서"의 헬라 원어(* )를 "주에게"란 말(* )로 고쳤다. 
기독신자는 세상의 안목(眼目)에 맞추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에게 부합하도록 행함이 필요하다.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 이 귀절의 의미는 엡 6:4이 더 상세하게 밝혔으니, 그것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부모된 자들이 그 자녀를 격노케 하는 원인 어디 있는가? 그것은, (1) 그들이 자녀들을 훈계하되 자기들의 권위와 자기들의 방법과 자기들의 표준을 고집하면서, (2) 만알 그 자녀들이 잘 순종치 않는 경우에는 혈기와 울분에 끌리어 강박(强迫), 악담(惡談), 폭력까지 사용하는 데 있다.
부모가 그 자녀에게 대한 자기들의 권한을 남용하여 지도하는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런 실패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부모로서 그들은 자녀를 교양함에 있어서 자기들의 권위나 방법을 자의적(恣意的)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 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만이 주인공이시니 그리스도만이 그 권위와 방법을 가지셨디.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하신 교양과 훈계를 그 자녀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엡 6:4참조). 
그들은 그 자녀의 잘되고 못되는 문제를 일체 주님께 의뢰해야 된다. 
그리고 혹시 그 자녀가 불순종하는 때에도 그들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온유하게 지도해야 된다.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부모가 그 자녀를 옳게 지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모에게 대하여 노여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그 부모에게는 잘못이 없다.
@낙심할까 함이라 - 이 문구에 대한 벵겔의 강해를 보면, "낙심은 청년의 패망이다"라고 말했다.
=====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 바울 당시에는 노예 제도가 사회의 일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스도 신자의 가정 도덕을 진술함에 있어서라면, 이 부분을 제외할 수는 있겠다. 
그 당시 흔히; 있는 일로서 노예는 주인을 속여 가면서 맡은 일을 게으르게 하고, 주인은 노예를 학대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문제의 도덕적 해결책을 여기에서 진술하였다.
"육신의 상전" 바울은 이 말로써 노예들의 인격적 가치의 고귀함을 설명하여 그들의 눌린 심령을 위로한다. 
곧, 이 말은 노예들이 육신상으로만 노예된 것이고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를 믿는 한(限), 남들과 같이 영생의 복을 누릴 자유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 문구에 대하여 크리소스톰은 강해하기를, "바울의 이 말은 노예들의 인격의 더 좋은 부분(영혼)은 자유한다는 것이며, 노예로서의 그들의 고역은 잠간임을 밝힌다"라고 하였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 가림만 하지말고." 그리스도 신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로 그 일을 성실히 감당해야 할 종교적 의미인 것이다.
그의 생활은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니, 그의 직업도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마음 속과 모든 은밀한 것을 밝히 보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행함이 마땅하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려면 거짓됨이 없이 중심으로 그 직무에 충성해야 된다. 
그의 수고가 그 주인된 인간을 기쁘게 할 목적이면, 그것은 하나의 무의미한 고역(苦役)과 비애(悲哀)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대로, 노예의 수고도 주 안에서 행한 것이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봉사를 목표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천국 노동이다. (고전7:17-23 참조).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성실한 마음으로"란 말(*)은 '단순한 마음'곧, 거짓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노예도 모든 다른 직무를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끝날에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갖게 되는 성실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된다.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 본절은 앞절의 내용을 이어서 노예 봉사의 또 한 가지 태도를 부가한다. 
앞절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부터 오는 성실한 마음(거짓이 없는 마음)으로서의 봉사 태도를 말하고, 본절에서는 그 봉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실행되어야 할 것을 말한다. 
"마음을 다하여"란 말(* )을 자역(字譯)하면 "영혼에서부터"라고 할지니 이것을 보면, 마음을 다하는 것 뿐 아니라 감심(甘心)의 의미까지 포함한다. 
아무리 노고가 심하고 비천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향기롭고 영예로운 것이다. 
그런 일은 누구든지 마음을 다하여 할 만하고 또 감심으로 할 만하다.
이런 감심적 봉사는 어언간 노예의 속박을 떠나 자유의 영역에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고상해 지고 또 영화롭게 된다.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노예가 그 봉사를 할 때에 주님을 위하는 의미로 할 것이고, 인간을 위하는 의미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3: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 이 귀절과 다음절은 노예가 주님을 위하는 의미로 그 책임을 성실히 해야 될 이유를 보여준다. 
곧, (1)노예된 자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서 영생의 기업을 은혜로 받으니 그 은혜가 감사한 까닭이며, (2) 그의 수고는 궁극적 의미에서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내용을 가진다. 그 일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하면 끝날에 보응을 받겠기 때문이다(25절).
@"유업의 상." 이 문구 역시 노예들을 상대한 말이다. 
노예들이 "육신의 상전"에게서는 종의 대우를 받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녀의 명분으로 장차 유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유업을 받는 자는 그 집 노예가 아니고 언제나 그 집 자녀일 것이다(마 21:35-38; 롬8:15-17; 갈 4:1,7). 
신자가 내세에 들어가서 받게 되는 영생과 그 영광을 가리켜 "기업"혹은 "유업"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 거저 받는 영생이기 때문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자녀의 처지에서 받는 영생의 복은 그의 어떤 공로와의 교환 조건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세에 그 성도들에게 주실 영생은 불변하는 것이다(벧전 1:4-5). 자식이 그 아버지에게서 받는 기업은 일시적 상급이 아니고 영구한 것이다(요 8:35).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한역의 각주(脚注)에, "종노릇하느니라"라는 번역은 "섬기느니라"(* )의 문자역으로서 글뜻을 더 밤히 보여준다.
이 문구는 노예들의 봉사의 의의(意義)를 결론적으로 밝힌다. 그들의 봉사가 직접으로 는 인간을 상대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상대한다. 
어떤 학자는 여기 "섬기느니라"를 "섬기라"란 명령사로 번역한다.
====3: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 (1)본절은 내세의 심판이 공정할 것을 예고하여, 노예된 자들로 하여금 책임에 충성케 하려 하려 함이라고 한다. (2)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노예들의 나타(奴隸)와 불성실을 경계하라고 이 말을 하였다기보다, "상전들"의 노예 취급의 불공정함을 염두에 두고 노예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3) 또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은 두 계급(주인과 노예)을 함께 경성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다고 한다.
"불의의 보응." 이것은 그 행한 불의에 해당한 벌을 가리킨다.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여기 "외모"는 모든 외형적 차별들이 인종, 지위, 빈부, 귀천등의 차별이다. 끝날의 심판 때에는 지위가 높았던 사람이라고 해서 받을 형벌을 면할 것이 아니며, 혹은 낮은 지위에 있었다는 이유로써 마땅히 받을 정죄에서 방면(放免)될 바도 못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각 사람의 소행을 따라서 실행될 것이다. (롬2:6;고후 5:10;엡 6: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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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납이란 어떤 이를 [하나님이 붙여 준 사람으로 인정하여 ]그 자체로서 일단 [선입견이나 짐짓 추정 않고 없이] 존중하며 받아줌이다. 
[비록 약점과 연약함이 보이더라도] 그냥 그대로 [그의 연약함을 꼬집어 비판하지 말고 그 사람의 연약함을 보더라도... 가룟유다를 <바로 그렇게> 받아주신 JC처럼] 인정하고 받아주라는 말씀이다. <이것 저것 따져 보면서> 불평하지 말고, 고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냥 그대로 두고 껴안음, 네가 [먼저 깨달은 자로서 그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줌으로써 일절 오래참음으로 견뎌내며]인내함인 바, 사랑의 첫걸음이다.
====용납과 용서=====
용납과 용서는 동어반복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무엇인가? 
용서는 과거 일에 대한 관용이고, 용납은 현재 일에 대한 관용이라고 정의 내려 볼 수 있지만, 골로새서의 말씀이 일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으므로, 조금 더 생각을 진전시켜 볼 필요가 있다.
"용납"의 의미로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아네코ἀνἔχω인데, 전치사 아나ἀνά와 동사 에코ἔχω의 합성어이다. 
아나ἀνά는 원래 "가운데" "사이에"라는 뜻이었지만 후대로 오면서 "위"up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는데, 신약에서는 이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에코ἔχω는 "가지다"have나 "취하다"take의 뜻이 있다. 이 두 단어가 합쳐져 어떻게 용납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위에 가지다? 무슨 뜻인가? 
어깨 위에 짐을 지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take up. 어깨 위에 지는 것은 십자가이다. 
마가복음 8:34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실 때 영어 take up이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take+up의 의미가 연상이 된다.
 아네코ἀνἔχω에서 유추하는 "용납하라"의 기본 뜻은, 마음에 안드는 것을 네가 짐으로 지고 [그 내적 외적 부담을]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견디라는 말이다. 
용납은 사랑의 첫단계이다. [일견 보기에]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용납하라는 말씀은 [짐짓 추측하여 거절하여 내버려 두지 말고!!]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불평하지 말고, 고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고 네가 인내하라는 말씀이다. 
어려운 요구이다. 그러나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아직, 적극적으로]]나를 공격하거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용서 보다는 쉽다.
"용서"는 사랑의 마지막 단계이다. 
용납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라면, "용서"는 나에게 잘못하고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훨씬 더 어렵다. 
용서의 헬라어는 카리조마이χαρίζομαι인데,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άρις의 동사형이다. 하여, "용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용서는 둘 사이에 [이미 책벌 통해] 정의가 실행되어 버리면[이루어지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의가 이루어진 곳에 은혜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당한만큼 되갚아준 다음에는 정의는 세워졌을지언정 용서는 일어날 수 없다. 갚아주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용서이다. 그러니 정말 어렵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우리도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오직 그것이 이 어려운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우리의 희망이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행위이다. <은혜 베풂이란 곧 구원 누림에 이르도록, 장애물 제거함 위해 주께 중재-중보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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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 중용 = (오직 성령 안에서) 마음 지킴..moderation.빌4:5-7]..결코 어떤 일-상황-처지에 처해서도 과격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고, 오직<아직 저들은  제대로 모르기에!!...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처한 곤란한 상황을 <성령의 인도하심만 따르라...주변의 소리나 옛자아-곧 마귀-의 속삭임에 결코 넘어가지 말라.....궁색하게 변명함 아니라!!...주께서 허락하시는 상황전개를 기대하라> 마음이 넓게 받아들이고 <오직, 주 바라기로!!>너그럽게 용서함 + 참아 줌 + 손해 감수함으로써 주께 맡겨드리고 잊어버림...이는 때때로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따름으로써!!....반드시 주께서 확인시켜 주신다는 것을 잊지말라!!)적극적으로 자기를 내어 줌의 자기 희생<순교...스데반처럼, 주님처럼>에 이르게도 한다.
[관용하는...중용을 지킴]ejpieikhv"(1933, 에피에이케스) ....[부정적 상황 중에서..(일반적인 환난-곤고-핍박-위험-적신-칼 등 모든 곤경 외에, 개인적으로 당할 수 있는 <감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자존감을 짓밟아 뭉개는 듯한> 그 어떤, 모든 종류의 오해-모욕-수치-모멸-천대-핍박-박해-폭력, 모든 위협 등에 대해...주만 앙망함으로써만 감수할 수 있음....주 바라기!!를 통해서만 이길 수 있음...주께서 친히 채우시며 갚아 주시며 영광스럽게 하신다..<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형제 자매 사이에서의 적용>...좀 더 적극적/긍정적 상황 중에서라면....범사에 오직, 성령을 따라 행하되!! 진리말씀을 밝혀 분명하게 <그러나 부드러이, 일절 온화함으로>과오를 지적하되, 죄벌 감당하기 어려운 죄인의 처지를 감안하여 죄벌을 나누어 담당해 줌 통해 구원함 = 짐을 함께 나누어 져 줌으로써 자유케 해 줌...불행을 당한 자에게 부조하기..어려운 이들에게 <오직 성령따라, 전혀 드러내지 않고 비밀히  구제하기>]
온순한, 온화한, 순한, 온유한, 친절한, 참을성 있는, 관용하는.
1. 고전 헬라어 문헌 
형용사 에피에이케스와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에이코스(알맞는, 어울리는, 적절한, 온당한)에서 유래하였거나 아니면 에이코(굴복하다, 양보하다)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며,호머 시대 이래로 '온당한 알맞는 생활방식'이라는 의미로, 투키디데스 이래로 '관용, 인내, 온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피에이케스 및 그 어군의 단어들은 본래 제멋대로 방자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균형 잡히고, 지성적이며 잘 어울리는 외모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말이었다. 
후에 그것은 법률의 적용에 있어서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의 공민권을 포함한 모든 공민권이 단호히 확립되어야 한다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정의의 엄격성을 그 법률적 표현 및 제권리와 함께 융통성 있게 할 용의가 있는, 인정 있고 사려 깊은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 에피에이케스 단어군과 프라위스(prau?", 4239)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l0회 등장하며, 에피에이케스 및 그 형용사형은 6회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세상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비심(삼상 12:22; 시 86:5; 지혜서 12:18)과 왕의 행동(마카베오이서 9:27), 선지자(왕하 6:3) 및 경건한 자(지혜서 2:19)의 행동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에피에이케스는 5회 나오며, 에피에이케이아는 2회 나온다. 약 3:17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목록에 나타난다: 에피에이케스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살 때 지켜야 할 규칙을 표현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딤전 3:3에서는 특히 감독들의 자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감독은…오직 관용하며". 벧전 2:18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종들의 주인에게 적용되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고후 1O: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에피에이케이아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태도를 표현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행 24:4에서 에피에이케이아는 총독 벨릭스 앞에서 유대인 변사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는 연설을 할 때 사용되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참조: F.Hauck/S.Schulz; W.Bauder). → prau?", 4239 프라위스.  → prau?th", 4240 프라위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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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팡세]..Pensées, "생각"이라는 뜻...오늘날, 팡세는 단상을 모아 편집한 것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든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전표면이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로써 알려진 <팡세>는 비꼬는 경구(警句)만이 나열된 단순한 인간관찰의 책이 아니다. 
본래 모든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쓰여진 기독교 변증론의 초고(草稿)였다. 그의 사후 유고(遺稿)로서 미정리된 채로 발견된 단편(斷編)에 대한 원고의 판독(判讀)과 정리에 대한 노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 책 속에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변증법에 의해서 신을 향한 사랑에 이르는 길(道)이 설명되고 있다
에픽테토스와 몽테뉴에게서 인간론을 배운 파스칼은 인간을 무한과 허무(虛無), 위대와 비참 사이에 부동(浮動)하는 중간자(中間者)로서 포착했다. 
인간은 광대무변한 우주에 비하면 겨우 하나의 점과 같은 갈대처럼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싸고, 하나의 점으로서 나를 삼킨다. 그러나 사고(思考)에 의해서 나는 우주를 싼다"는 점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 인간은 자기의 비참을 이해하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의 비참을 모른다." 에픽테토스는 자기의 비참을 모른 채 자기 힘으로 신을 완전히 알고, 사랑하려 했기 때문에 오만(傲慢)에 빠졌다. 
그러나 몽테뉴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내면적 교섭을 갖는 일 없이 자기애(自己愛)의 공허함을 말하고 인간의 비참에 직면한다면 구원할 수 없는 회의와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모순은 신의 위대함과 인간의 비참을 하나로서 체현(體現)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비로소 해결되는 것이다. 
이 중개자가 없다면 신과의 모든 교섭은 단절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을 알려고 하는 자는 고립적 정신의 차원을 떠나서, 그리스도와의 깊은 내면적인 공동 관계를 유지하는 '사랑'의 차원으로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을 직관(直觀)하는 것은 심정(心情)이며, 이성(理性)이 아니다. 이것이 즉 신앙이다." 파스칼은 정신의 질서를 초월해서 이 심정의 질서에 이끌렸을 때 비로소 신과 자기의 확실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파스칼의 본령(本領)이 있다
==[용납과 용서는 아가페 사랑 배우기의 시작과 마지막...아가페 사랑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는)역지사지의 선대하는 사랑!!]==
.....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여주신 바, 그분의 대속하심의 (아가페) 사랑 실행 안에서 배우는, **일절 오래참음(인내..참아주고 끝까지 견뎌내심 = 용납)과 **새롭게 살 수 있도록 은혜 베품(=용서 +관용) ---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부활-승천 안에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놓으시고) 먼저 정죄/심판하지 않으시고 일정한 때까지(끝까지) 참고 기다려 주심을 아는 자마다, 회개를 통한 <포로의 정죄감으로 묶어 놓았던, 원수의 모든 궤계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맛보는 자마다, 그 아가페 사랑 실행하기를 배우려 함이 당연함.....그 첫 행보가 바로 용납, 마지막 행보가 용서인 것임..
==[[용납<참고 감수함>과 용서<주님 십자가 앙망하고, 주께만 아뢰고 잊어버림>:이로써 참 자유함 안에서 하나됨 이룸]]==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골3:13)
용납과 용서는 동어반복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무엇인가? 
용서는 과거 일에 대한 관용이고, 용납은 현재 일에 대한 관용이라고 정의 내려 볼 수 있지만, 골로새서의 말씀이 일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으므로, 조금 더 생각을 진척시켜 볼 필요가 있다.
"용납"의 의미로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아네코ἀνἔχω인데, 전치사 아나ἀνά와 동사 에코ἔχω의 합성어이다. 
아나ἀνά는 원래 "가운데" "사이에"라는 뜻이었지만 후대로 오면서 "위"up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는데, 신약에서는 이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에코ἔχω는 "가지다"have나 "취하다"take의 뜻이 있다. 
이 두 단어가 합쳐져 어떻게 용납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위에 가지다? 무슨 뜻인가? 어깨 위에 짐을 지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take up. 어깨 위에 지는 것은 십자가이다. 
마가복음 8:34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실 때 영어 take up이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take+up의 의미가 연상이 된다. 
아네코ἀνἔχω에서 유추하는 "용납하라"의 기본 뜻은, 마음에 안드는 것을 네가 짐으로 지고 인내하면서 견디라는 말이다. 
용납은 사랑의 첫단계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용납하라는 말씀은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불평하지 말고, 고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고 네가 인내하라는 말씀이다. 어려운 요구이다. 
그러나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나를 공격하거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용서 보다는 쉽다.
"용서"는 사랑의 마지막 단계이다. 
용납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라면, "용서"는 나에게 잘못하고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훨씬 더 어렵다. 
용서의 헬라어는 카리조마이χαρίζομαι인데,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άρις의 동사형이다. 하여, "용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용서는 둘 사이에 정의가 [이미 실행 되어] 이루어지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의가 이루어진 곳에 은혜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당한만큼 되갚아준 다음에는 정의는 세워졌을지언정 용서는 일어날 수 없다. 
갚아주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용서이다. 그러니 정말 어렵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우리도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오직 그것이 이 어려운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우리의 희망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행위인 것이다.
===골3장 1~17절===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AMP] Put On the New Self  *1 Therefore if you have been raised with Christ [to a new life, sharing in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keep seeking the things that are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2 Set your mind and keep focused habitually on the things above [the heavenly things], not on things that are on the earth [which have only temporal value]. *3 For you died [to this world], and your [new, real] life is hidden with Christ in God. *4 When Christ, who is our life, [a]appears, then you also will appear with Him in glory.  *5 So put to death and deprive of power the evil longings of your earthly body [with its sensual, self-centered instincts] immorality, impurity, sinful passion, evil desire, and greed, which is [a kind of] idolatry [because it replaces your devotion to God]. *6 Because of these [sinful] things the [divine] wrath of God is coming [b]on the sons of disobedience [those who fail to listen and who routinely and obstinately disregard God’s precepts], *7 and in these [sinful things] you also once walked, when you were habitually living in them [without the knowledge of Christ]. *8 But now rid yourselves [completely] of all these things: anger, rage, malice, slander, and obscene (abusive, filthy, vulgar) language from your mouth. *9 Do not lie to one another, for you have stripped off the old self with its evil practices, 
*10 and have put on the new [spiritual] self who is being continually renewed in true knowledge in the image of Him who created the new self— *11 a renewal in which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Greek and Jew, circumcised and uncircumcised, [nor between nations whether] [c]barbarian or [d]Scythian, [nor in status whether] slave or free, but Christ is all, and in all [so believers are equal in Christ, without distinction].  *12 So, as God’s own chosen people, who are holy [set apart, sanctified for His purpose] and well-beloved [by God Himself], put on a heart of compassion, kindness, humility, gentleness, and patience [which has the power to endure whatever injustice or unpleasantness comes, with good temper]; *13 bearing graciously with one another, and willingly forgiving each other if one has a cause for complaint against another; just as the Lord has forgiven you, so should you forgive. 
*14 Beyond all these things put on and wrap yourselves in [unselfish] love, which is the perfect bond of unity [for everything is bound together in agreement when each one seeks the best for others]. *15 Let the peace of Christ [the inner calm of one who walks daily with Him] be the controlling factor in your hearts [deciding and settling questions that arise]. To this peace indeed you were called as members in one body [of believers]. And be thankful [to God always]. *16 Let the [spoken] word of Christ have its home within you [dwelling in your heart and mind—permeating every aspect of your being] as you teach [spiritual things] and admonish and train one another with all wisdom, singing 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with thankfulness in your hearts to God. *17 Whatever you do [no matter what it is] in word or deed, do everything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nd in dependence on Him], giving thanks to God the Father through Him.
===용납하다..받다, 참다, 견디다..ajnevcw(430, 아네코) ==사랑의 시작=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네코(Homer 이래)는 아나(ajnav, 303)와 에코(e[cw, 2192: 가지다, 쥐다)에서 유래했으며,
(a)  '들어올리다, 지지하다',
(b)  '버티다, 견디다, 참다',
(c)  '너그럽게 보아주다, 관대히 다루다, 묵인(시)하다'.
(d)  '자제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네코는 70인역본에서 16회 나오며,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참거나 억제한다는 개념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창 45:1에서 사람에 관하여, 사 1:13; 사 42:14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멸망에 대하여(사 64:11), 혹은 자비(사 42:14)로 말미암아 자제하신다. 사 63:15에서 이 의미는 '관대히 다루다'라는 의미에 흡수되어 버린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네코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마 17:17에서 아네코는 인격적 대상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의 질문에서 '참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병행구절, 막 9:19; 눅 9:41).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삼년 동안 그들과 같이 행동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그 시대의 특징이었던 옛부터 있어온 불신앙이 다시금 예기치 않게 나타났으며, 이것 때문에 그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었다.
(b)  아네코는 비인격적 대상들의 <모든 수치-모욕-학대-편견-폭력-약탈-박해 등에 대하여> '참거나 견디다'((나를 참아주신 JC바라보며 그냥 참아 견딤으로 받아 주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② 살후 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c)  아네코는 교훈 및 권면에 관하여 특별히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히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②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③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d)  아네코는 인격적 대상들에 관하여 '받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서로'"라는 말 속에서 이 단어에 대한 신약적 용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즉 용납하는 마음 속엔 자기 중심적 요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 중 한 가지 필수적 요소는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인 것이다. 또 알렐론(서로)이란 말에서 용납의 상호 관련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엡 4:2에서도 이러한 표현("서로")이 사용되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② 고후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전혀 표방하지 않고 온유하고 낮은 자세로 그들에게 접근한다. 그는 사도이자 또한 그리스도의 진리의 전달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랑으로 고린도인들을 용납하신다. 그들도 바울을 용납해야 한다. 여기에서 상호 용납이라는 강력한 신학적 개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에게 보내진 자를 용납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낸 분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③ 고후 11:19; 고후 11:20,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Schlier; U. Falkenroth; C. Brown). 
===용서하다, 값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carivzomai(5483, 카리조마이) ===사랑의 완성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리조마이(Homer 이래)는 카리스(cavri", 5485)에서 유래했으며,
(a)  '자비롭게 주다, 값없이 주다, ~을 위해 즐거운 일을 행하다, 친절하다, 인자하다, 잘돌봐주다, 은혜를 베풀다, 호의를 베풀다, 총애하다, 용서하다',
(b)  '유쾌하다, 기분좋다',
(c)  '희생 제물로 신의 은총을 구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카리조마이는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탄(주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집회서와 마카베오서에서도 '주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카리조마이는 신약성경에서 2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호의에> 맡기다..맡겨주다) (<호의로> 석방되다)
행 3:14에서 바라바는 백성들의 호의로 석방되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행 25:11에서 바울은 백성들에 대한 호의로 자기를 그들에게 넘겨주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행 27:24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와 함께 여행하는 자들의 생명을 맡기셨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눅 7:21(참조: 눅 4:22)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고 있으며, 눅 7:42-43은 또한 전형적으로 누가다운 본문이다.
(b) (<은혜로, 선물로> 아낌없이 내어 주다, 베풀다 --> 또한 고난중에도 감사하며 순종함에 대해 영광으로 보상하신다) (상호간에 용서하다)........<대신 죄과를 (긍휼의 마음을 따라) 변제해 주고 잊어버리다..대가를 바라지 않다>.
카리조마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주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① 롬 8:32에서 구원론적인 뉘앙스가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② 고전 2:12에서 명사와 뜻이 가깝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③ 빌 1:29에서 고난을 선물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④ 예수님께서 퀴리오스(주)가 되신 것은 빌 2:9에서 순종에 대한 보상이라고 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⑤ 골 3:13(엡 4:32)에서 카리조마이는 '용서하다'를 의미한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신자들은 주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서로 서로 용서해야 한다.
골 2:13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참조: H. Congzelmann; H. -H. E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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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동정, 연민, 불쌍히 여김. oijktirmov"(3628, 오이크티르모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오이크티르모스(Pind. 이래)는 오이크테이로(oijkteivrw, 3627: 불쌍히 여기다, ~을 가엾게 여기다)에서 유래했으며,
(a)  처음에는 사람의 불행이나 죽음을 애도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b)  후에 비유적으로 '동정, 연민, 불쌍히 여김'을 의미하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오이크티르모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라함(불쌍히 여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삼하 24:14; 사 63:15; 시 25:6; 시 40:11; 시 51:1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오이크티르모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항상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a)  롬 12:1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후 1:3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로 표현되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b)  빌 2:1에서 인간적인 자비나 동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c)  히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여기서는 모세의 법을 어긴 사람보다 더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할 사람인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와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자들에 내리는 벌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긍휼(M ercy)
가엾게 여기는 마음...‘라함’(racham;자궁)에서 나온 말이다.
이 단어는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는기본적인 의미에서 ‘긍휼’, ‘자비’라는의미로발전했다.
젖을 빠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사49:15),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가지는 반응(렘31:20),형제가 형제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의 상태(암1:11) 등을 나타내는데 이 단어가 쓰였다....하지만 이는 단순한 감정 차원 보다는 사랑의 표현이나 행위(출33:19;왕하13:23;시102:13등)로 드러났다. 
그래서 이스라엘이죄에서 돌이켰을 때 주어지는 용서의 은혜를 표현할 때 쓰이기도 했다(사14:1;렘12:15;겔39:25).
신약에서는 긍휼에 해당되는 헬라어로 ‘엘레오스’(eleos), ‘스프랑크논’(splagchnon) 등이 쓰였다. 
긍휼은 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치유 속에 드러내신 예수님의 사역에서 잘 드러났다. 또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불쌍히 여긴 왕(마18:23-35),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아버지(눅15:11-32),강도 만났던 자를 불쌍히 여겨 살려낸 사마리아인(눅10:25-37) 등의 본문에서도 긍휼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닌 긍휼이라고 하셨다. 이렇듯 긍휼은 정신은 외면한 채 형식만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율법의 핵심으로 말씀하셨던 의(크리시스; krisis), 인(엘레오스; eleos), 신(피스티스;pistis) 중의 하나였다(마23:23).
바울은 병 치유의 근원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음을 고백했으며(빌2:27), 하나님의주권적인 선택과 관련해서(롬9:15;11:30-32) 구원은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엡2:4;딛3:5)과 은혜(엡2:7-8)로 인해 얻는 것임을 말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말한다(롬12:8;약3:17). 
또한 긍휼은 구제와 자선등으로 나타나며 긍휼 베푸는 일은 심판날긍휼을 받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딤후1:18;유21).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롬1:29-32;약2:13).→자비를참고하라.
긍휼을 베푼 사람들: 성경에는 긍휼을 베풀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들을 용서했을 뿐아니라 돕고자 했다(창50:20-21).
모세는 양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목자들에게 쫓겨난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 주었으며(출2:17)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룻이 이삭을 줍도록 배려했다(룻2:16).
또한 다윗은 왕이 된 후 요나단을 생각하여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다(삼하9:1-13).
이외에도 기적과 회심을 체험한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바울과 실라의 상처를 돌봐주었으며(행16:33), 멜리데섬의 토인들은 여행 도중 난파당한 바울 일행을 보살펴 주기도 했다(행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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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라함(רחם)”...헬라어로는 명사 σπλάγχνον(스프랑크논) 은 주로 복수형 σπλαγχνίζω(스프랑크나)로 사용되었다. 이것의 원뜻은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의 내장(entrails, inner parts)을 지칭....동사형으로는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프랑크니조마이)로 사용되어,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마 14:14; 18:27; 막 1:41; 6:34; 8:2; 눅 7:13; 15:20)....눅 1:78의 "하나님의 긍휼"(σπλάγχνα ἐλέους θεου)이라는 헬라어 문구의 정확한 번역은 "인애와 긍휼"이라는 구약의 통상적인 단어조합을 한 어구로 만들어, "하나님의 인애적인 긍휼"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서신들에서 바울은 특별히 σπλάγχνα 단어를 더욱 발전된 의미로 사용하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는 깊은 내면을 나타내는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기를 ‘우리의 마음(καρδία 카르디아= heart)을 넓게 열었지만, 너희는 심정(σπλάγχνα = affections)에서 좁아진 것이다’(고후 6:11-12) 고 말한다. 그리고 고후 7:15에서는 바울은 사역자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의 환대에 대하여 깊은 심정, 사랑하는 마음(σπλάγχνα)을 가지고 있다고 그를 칭찬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은 이 단어를 단순히 동정이나 긍휼의 뜻이 아니라, 좀 더 고차원적인 기독교인의 덕목으로서, 사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 혹은 심정을 표현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한다.
골 3:12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택하시고 사랑받는 사람인 것처럼, 긍휼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을을 옷 입으라’라고 명령한다. 이때 ‘긍휼’이라는 덕목을 σπλάγχνα οἰκτιρμοῦ 라고 표현하는데, 특별히 긍휼의 뜻을 가진 동의의 οἰκτιρμός의 소유격을 사용하여 σπλάγχνα를 수식하고 있다. 이것은 σπλάγχνα의 뜻을 긍휼이라는 분명한 의미로 전달하고자 하는 측면도 있지만, 사랑하는 심정을 담은 긍휼이라는 윤리적 덕목으로 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카르디아(καρδία = 심장, 이성, 고후 6:11))나, 프뉴마(πνεῦμα = 영, 고후 7:13)와 대조하며, σπλάγχνα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강조한다. 특별히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바울은 자신과 성도들의 마음(σπλάγχνα, 빌레몬 1:7, 20)을 평안하게 해 준 빌레몬을 칭찬한다. 그리고 바울은 마음이라고 번역된 σπλάγχνα를 놀랍게도 돌려보내는 노예 오네시모에게 사용하며, "그는 나의 σπλάγχνα이다"(12절) 라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선포한다. 바울은 여기서 한 가지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 자신과 성도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준 빌레몬이, 이제는 "바울의 마음"인 오네시모를 평안하게 해 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적용되는 교훈은 우리 모두가 형제간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서로의 깊은 곳이 되어 주고, 서로의 마음을 받아주며 평안하게 해 주는 형제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의 성도는 서로의 σπλάγχνα라는 사실을 말하는 바울은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감성의 본질적 내면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긍휼’이라는 단어를 더욱 존재론적 의미로 확장시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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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 대한 구주 사랑하심을 연습하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하심을, 범사에 아버지와-성령과 함께 아버지를 살아내셨음을 실지로 체득하기를 힘쓰라>
.....*1>용납(JC앙망함 안에서 <특히 형제자매에 대해> 일절 오래참음으로 받아줌/기다려줌/견뎌줌)---*2>관용(주를 앙망함 안에서 사정을 주께 올려드리고, 그 어떠한 것이라도 그 모든 불합리한 대우를 오히려 감사함<필요한 그 모든 것은 주가 항상 친히 넉넉히 채우신다>).---*3>용서(주께서 부어주신, 그 측량 못할 <사죄>, 곧 대속의 은혜를 감사함 안에서, 주를 앙망하며, 주님 마음과 심정 알게 해 주심 감사하며 주께 올려드리고, 용서를 선포하고 잊어버림)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야다<도드...연인의 사랑>-필레오<주께 합당한 사랑....에셰르-바라크-헬레크>-아가페<주께서 자기를 내어주심...JC께서 자기목숨 주심처럼, 형제자매를 위해 그대 또한 그리 할 마음조차 주실 수도 있음 = 이것이 바로 순교자의 마음일 것> 사랑에로까지 이끄실 것을 기대하라......다만, 오직 그분의 임재로 인한 평강 안에 머물러 그분을 누리며, 항기쉬기범감을 견지하라
===>이것을 이제  성령 인도하심에 따라 실행하되, <짐짓 추정하여 행함이 아니라!!, 오직 성령 이끄심/열어주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라> 형제자매와 함께 누림의 필레오의 완전함의, 거룩함 안에서 하나됨을 지향하라.....무슨 일을 하든지<범사에> 전심전력 다해 <주는 엘로이 Q, 곧 셀 수 없이 많은 눈으로 통찰하시는 분이시자, 동시에 당신의 무한풍성부요충만능력을 주입시켜주시는 극진한 사랑의 주님이시다!!>주께 하듯 하고 <단지겉보기에 그럴듯한, 표피적인 피상성 만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구주의 새로운 이름 중 하나가 바로 Faithful and True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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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내주하심 = 내적 충만, 요20:22, 롬8:9]
===내주하심과 부어짐의 차이 
사람 안에 있는 성령은 생명을 위한 것이고, 사람 밖에 있는 성령은 능력을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 역사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면 구약과 신약에 있는 성령의 역사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성령이 사람 안에 내주하리라는 약속은 신약에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기 전에 하신 약속이다. 성령의 이 방면의 역사는 주님의 죽으심과 관계가 있으며 이 약속은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이루어졌다.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며 역사한 결과는 믿는이의 생명을 위한 것이며, 또한 믿는이의 생활을 위한 것으로 성령의 열매인 성결, 공의, 인내, 희락 등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하리라는 약속은 아버지가 구약에서 한 약속으로 주님이 승천하기 전에 재삼 이 약속을 견고히 하셨다. 성령의 이 방면의 역사는 주님의 승천과 관계가 있으며 이 약속은 주님이 승천하여 높이 들리워졌을 때 이루어졌다. 성령이 사람의 몸에 임하여 역사한 결과는 믿는이의 능력을 위한 것이며 또한 믿는이의 간증을 위한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능력 삼아 성령의 은사를 산출하고 힘있게 주님을 위해 일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사람에 대한 성령의 두 방면의 역사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생명과 생활을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한다. 사람 밖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간증과 일을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은사를 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안에 성령이 충만하고 밖에도 성령의 임하심이 있다면 그는 큰 능력으로 주님을 위해 일할 것이다. 만일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단지 밖에 성령의 부어짐만을 얻었다면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는데 이는 교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이김의 관문을 통과한 적이 없다면 비록 외적인 성령의 부어짐을 얻었다 할지라도 몇 개월이나 몇 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이 우리 몸에서 행하시는 이 두 가지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 것임 
성령은 자신을 위해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 것이다(요 15:26). 어떤 사람은 당신이 십자가의 구속을 볼 때 성령이 당신을 도와 믿게 해달라고 구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당신을 이끌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말할 때 결코 성령 자신을 말하지 않고 성령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해 간증하는가를 말한다. 요 며칠 동안 우리는 이기는 생명을 말하고 성령을 말하지 않았으며 주님이 이미 부활하여 우리의 생명이 되셨음을 말했다.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와 직접 연합되게 하는 것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보면 성령의 역사를 얻고, 주님의 죽음을 보면 성령의 거듭남을 얻으며, 사람이 주님의 부활을 보면 성령이 생명 된 것을 얻는다. 오늘 승천한 그리스도 곧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본 사람은 성령의 부어짐을 얻는다. 
성령의 부어짐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한면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로 이기게 하시며, 또 한면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임을 증거하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갈 5:22-23), 이 열매는 다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것은 조그마한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예를 들면 조금의 사랑, 조금의 희락, 조금의 인내 등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전체를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열매는 오직 하나로 원문에서 ‘열매’는 단수이다. 이는 마치 감자 아홉알이 한 열매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만일 성령의 열매가 있다면 이 모두가 다 있는 것이다. 결코 사랑은 있는데 희락이 없고, 희락은 있는데 인내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도매를 하시며 소매를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당신께 주신다. 만일 당신에게 사랑이 있는데 희락이 없다면, 그것이 당신 자신의 열매이며 성령의 열매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령의 옮겨부음 - 내적 충만이 표현된 외적 충일((행 1:8, 4-5, 2:1-4)) ]
==성령의 옮겨부음의 목적
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기에 내가 죄 사함을 얻을 수 있었고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기에 내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으로 논이 올려지셨기에 내가 성령의 옮겨 부으심을 얻었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 인한 것이다. 죄 사함은 사람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근거한다. 거듭남은 사람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주님의 부활로 인한 것이다 성령을 주심은 사람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높이 올려지심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당신과 내게 부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하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만일 주님의 높여지심이 사실이라면 성령의 부어짐도 사실인 것이다. 반대로 주님이 만일 높여지시지 않았다면 성령도 부어질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보혈을 흘리시고 죄사함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은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 같은 원칙으로 그분이 이미 높여져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는데도 우리가 성령의 부어지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주님이 이미 보좌로 높이 들리워지셨으므로 주님이 우리를 충만케 하시길 원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충분한 믿음으로 주님과 그분이 이루신 역사를 믿는 것이 필요하다. 
 ==성령의 옮겨부음의 유익
*1)교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 
성령의 부어짐을 얻으면 먼저 당신에게 교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게 되고 당신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 안으로 전달해 줄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얻은 것이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능력이 없는데, 사람이 일단 성령의 부어짐을 얻으면 안에 있는 것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밖에 있는 힘이 그를 대신해서 안에 있는 것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마치 발전소와 같다. 발전소 안에는 많은 빛이 있지만 온 도시는 어두운데, 이것은 반드시 전선으로 발전소와 시내를 연결해야 비로소 빛을 도시에 전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발전소 안에 아무 것도 없다면 전혀 쓸모가 없지만, 발전소 안에 무엇이 있다 해도 전선이 없으면 쓸모없는 것이다. 전선을 통해서 흘려보내는 것이 곧 성령의 부어짐의 용도이다.
*2) 담대함이 있음
 이미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형제자매는 두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다른 부류는 두려워하지 않고 체면을 주의하지 않는다. 내가 성령의 부어짐을 얻기 전에 한번은 복음 전하는 친구에게서 일이 리를 떨어져서 따라 가며 감히 입을 열어 간증을 하지 못했다. 기차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할 힘은 있었으나 복음지를 나누어 주는 것은 반드시 많은 힘을 내는 것이 필요했다. 내가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후에는 옷을 잘 입었나 못 입었나에 상관하지 않고 아주 담대했는데, 이것은 얼굴이 두꺼울 뿐만 아니라 체면을 주의하지 않는 것이었다.
*3) <타인의 시선과 반응을 의식하여 사전에 반드시 준비해 둔 것만 쓰는>자의식이 없음 
자의식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나쁜 것이다. 자의식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입은 옷이 좋고 나쁨이나 다른 사람의 반응이 어떤가를 주의한다. 다른 사람이 그를 식사에 초대하면 그는 해방하여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며 새로운 사람과 말을 하지 못하고 반드시 많은 것을 준비해야 말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계속 자기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또한 혼자 방 안에서는 기도할 수 있지만 대중이 있는 곳에서는 방에서 했던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없으며, 어조와 말과 태도를 바꾸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이상히 여길까봐 두려워한다. 이러한 것은 다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영이 있으나 혼에 둘러싸여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 이반 로버츠(Evan Roberts)는 일생에 가장 많은 영혼을 구원시켰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그 한 사람만이 자의식이 없었다고 간증한다. 그는 웃고 싶으면 웃었고 다른 사람을 보려고 하면 즉시 보았다. 자의식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의식에서 벗어나고 오직 성령의 부어짐만 있어야 한다. 오직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사람만이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4>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된 사람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방에 들어가면 원래 조용했던 방이 시끄러워지고, 원래 시끄러웠던 방이 조용해지며, 원래 사람마다 말이 없었는데 다 말이 많아진다. 이러한 사람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실패는 어떤 분위기를 영적인 분위기로 바꿀 수 없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면 당신도 그를 따르고 당신은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성령의 부어짐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의 분위기에 따라 변한다. 우리 모든 믿는이가 만일 성령의 부어짐을 얻을 수 있다면 이렇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5> 일하는 능력이 있음 
성령의 부어짐을 얻으면 영적인 은사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인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일하는 능력이 없고 성령의 부어짐을 얻은 사람은 큰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 이것은 너무나 큰 차이이다. 우리가 힘 있게 일하려면 성령의 반드시 부어짐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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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구한 바, 그리스도의 중재-공급하심 인해, 옮겨부어 주입 받음

....전기는 저 멀리 발전소에 있지만 이 전기가 사용되는 곳은 우리 집입니다. 이처럼 전기가 우리에게 오기 위해서는 옮겨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모든 차원-영역을 창조하신, 초월하는 분이시기에>우리가 우리 영 안에 계신 그분 앞에 나아갈 때마다 그분 자신을 우리 속에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보좌로 부터 옮겨 부어 주십니다.

일단 우리가 이 옮겨 부음의 충만 갖게 되면 하나님의 성분이 우리 속에 스며듦과 영적 주입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성분의 주입은 우리를 적시고 침투되게 합니다. 

옮겨 부음은 주입을 가져오고, 주입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분으로 침투되게 합니다. 옮겨 부음과 주입과 침투를 통해 이루어진 충만은 우리로 반응을 하게 합니다. 

그 첫째 반응이 <바로 그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깨달아 알게 되고> 더욱 더 경험적 산 믿음이 확고해 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가장 높은 정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능력이나 덕성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의 반응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속에 옮겨 붓고 자신의 신성과 생명을 우리 속에 주입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성분이 우리 속에 스며들 때 우리의 반응이 있게 되고, 그 반응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결코 인간의 덕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우리 속을 적시고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주입에서 비롯된 반응입니다. 

한번 우리가 그 믿음을 가지면 결코 그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속에 주입되어 우리 속의 성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는 표현이 없고, 정확히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갈2:20)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소망과 사랑도 Q의 아들의 소망이요 사랑의 주입임))

믿음이란 옮겨 부음과 주입과 적셔짐으로 인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여러 번 영광의 하나님(행7:2)의 나타나심으로 옮겨 부어졌습니다. 

나타나실 때마다 주입하고 침투하시어 아브라함으로 <바로 그 믿음으로!!>반응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믿음의 거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태어난지 몇개월이 채 되지않은 아기가 걷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부모의 기대-격려-듀옴-사랑의 돌봄이 필요한 것 처럼....Q은 자비-은혜-노하기를 더디하심으로, 한없이 기다려 주시며, Q 경외함의 걸음을 한걸음씩 한 걸음씩 배우고 익혀 나가도록, 그래서 마침내 홀로 서고 걷고 뛰기가 자연스러워지도록, 진정 그것을 통해 전 인생동안 Q으로 살 수 있도록, 그리하여 Q의 인자와 진실의 무궁함 따라 살도록 만들어 나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마다 <반드시 성숙한 믿음 발휘함이 아니었다 해도> 어떤 반응을 보였지만, 그것은 실패를 거치면서 조금씩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그분이 나타나실 때마다 그것은 바로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브라함을 세상으로부터 분별시키시고 하나님을 따를수 있게 하는 큰 격려와 힘이었습니다. 

같은 원칙으로 하나님은 신약의 믿는 이들을 그분의 보이지 않는 영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벧후1:3) 우리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로 충만함 받고 그분과 하나된 교통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무기력해져 있는 지체를 방문하게 된다면, 이제 손을 내밀어 주 이름 부르며 간구할 수 있습니다...주여, 이제 예수민 이름으로 구하오니, 지금 제 안에 옮겨 부어주심 인해 충만하게 채워주신바, 주님 자신을 이 지체로 하여금 경험할 수 있도록 이 지체의 영혼몸을 열어주사 만지심을 참되게 경험하여 알고 주님 자신 안으로 믿어들어가 주님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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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사랑하심을 입은 자마다 더욱 더 갈망하게 되는 바,  자원하는 사랑따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갈망 이루어 드리기를 원하게 될 것....-

......그러므로, 자연스레 <하나님의> 긍휼,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그 긍휼에 이끌려 행하도록 샘솟아 넘치는 기름 부으심 따라, 하늘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행하고 계시는, 바로 그일을 땅에서 수행하여 섬기기를 추구함이 바로 복음 전도-가르침-치유의 섬김 사역으로 나타나게 될 것(마9:34-37).

......이처럼 주께서 <하늘과 연결된 땅, 곧 믿는이의 영 안에 알게 해 주시는 바> 그리스도의 하늘 영역에서의 사역들((교회들을 위한 중재, 성도들에게 하늘에 속한 생명 공급, 하나님의 행정<그 영을 분배> 수행 + 그분의 몸인 교회 건축/신부 단장 + 중보/중재 사역-그분 마음 안의 애타며 안타까움/갈망 알게 하심 따라 그분의 섬김))에 함께 합류하여 하나 되어 기도하며 행하게 됨....이것이 아가서에 나타나는 성숙한 신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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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엘레오스>는 받아 마땅한 처벌을 보류하는(그리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부여하는) 행위인 반면, 은혜<카리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을 온통 내어주심으로써, 그 십다가 대속의 은혜를 믿는자마다에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섬기며 누림, 곧 in-him reality의 사랑-믿음-소망 안에서 주와 삶의 영생 누리도록)호의를 베푸는 행위이다....하나님은 자비로서 우리가 받아 마땅한 처벌을 면제해주셨고, 은혜로서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해롤드 L. 윌밍턴)).

===하나님의 사랑하심...은혜 자비, 긍휼, 오래참음(노하기를 더디하심)인내. 용납

[은혜란 우리에게 다가오사 믿는이에게 모든 것이 되신 TUQ, 그리스도 그분 자신임...성육신하여 오사 인생-십자가 대속의 죽음-장사지냄-부활-승천으로 TIQ의 최종 완성이신 그 영(성령)으로 믿는이의 거듭난 영에 내주하사 연합한 하나 됨으로 살아계심, 그 사실을 붙들고, 그분 안으로 믿어 들어가 (포도나무 본체와 접붙임 받아 사는 산 가지로서) 하나 된 믿음으로 사는 이마다에게 그분의 생명/본성을 아낌 없이 한량없이 부어 공급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삶의 재현을 이루심의 사랑.]

[Q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바로 구주 십자가 공로로 대속함 받음 믿고 부활하사 거듭난 닏는이의 영에 내주하여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과 연합한 하나 됨을 믿음 통해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살기"를 체득하며, 24-365 주 바라기의 동행 이루기의 최우선 선결요건임 

== Q의 자비로우심이란, (병자나 죄인의 근원을 주 안에서, 주 임재-교통 [in-him reality]안에서 빛 비추심 따라 살펴 봄[Q이 친히 낳으셨고, 믿는이 또한 동일한 같은 태에서 나왔음...그러나 그 병자/죄인은 전혀 주 안에 거함의 지고지선의 진복에 대해 가리워져 있어서 듣지도 알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하였음....또는 원수대적 사탄마귀 또는 죄성(육신)/세상의 유혹/미혹에 넘어가 미끄러져 함정에 빠져 있음]에 대해 불쌍히 여겨 안타까워 [다시 주님께도 돌아 올 기회 주시도록] 중재하는 마음이 바로 자비로우신 주님 마음이요..., 

== 병자/죄인의 절망적 느낌을 알아 동정하면서 그의  [주 안에로의, in-him reality]회복을 소망하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현실적 환경-상황-형편-처지를 고려하되 [복음을 통해 그 자신이 Q과 사람에게 대해 모두 손상 주었음을 진실로 깨닫고 정직하게 자복-인정하며 그 죄를 깊이 뉘우쳐 회개하는 자에게 허믈/범과에 대한 형벌을 면제(=용서)해 주시거나 , 합당한 형벌  시행 중에라도  그대로 다 갚게 함 아니라 (회개함의 진정성을 살펴) 도중에라도 경감하여주심]으로써 그의 회복에의 새로운 기회와 길을 열어주심이 바로 주님의 긍휼하심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친히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담당하고 계신다....이 때 중재자/중보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달림, 그분의 죽음-장사지냄-부활에의 참여하는,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 24-365 주만 바라기-주로 살녀 동행하기,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주관적 체험의 삶을 경험한다.....또한, 때때로, 주님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지체장애자를 그의 온 생애 동안 누군가에게 돌보도록[이것까지 할 수 있겠니 하시며] 전적으로 맡기실 수도 있는데, 그 때 하나 되어 계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long-suffering... 겸손/온유/긍휼/자비에 연결됨)의 사랑과 인내(patience =hopeful endurance), 용납하심(bearance = tolerance...너그러이 품어 덮어주심...진주조개가 모래 품어 진주 산출하듯)에 대해, 곧 하나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참되고 진실하게  주관적으로 체득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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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 섬기러 오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이 그리하셨듯,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함의, 마음의 눈 높이 같이함의 이해 + 용납 + 중재/중보함이 구원해 냄에 있어서  관건이 됨...그 결과, 불쌍히 여겨 <허믈/범과에 대한 형벌을 면제(=용서)하거나, 형벌 시행 중에도  그대로 다 갚게 함 아니라 경감하시는 Q>을 공급, 회복케 함

@@긍휼, 동정, 연민, 불쌍히 여김.[라함]....oijktirmov"(3628, 오이크티르모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오이크티르모스(Pind. 이래)는 오이크테이로(oijkteivrw, 3627: 불쌍히 여기다, ~을 가엾게 여기다)에서 유래했으며,

(a)  처음에는 사람의 불행이나 죽음을 애도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b)  후에 비유적으로 '동정, 연민, 불쌍히 여김'을 의미하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오이크티르모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라함(불쌍히 여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삼하 24:14; 사 63:15; 시 25:6; 시 40:11; 시 51:1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오이크티르모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항상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a)  롬 12:1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후 1:3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로 표현되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b)  빌 2:1에서 인간적인 자비나 동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c)  히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여기서는 모세의 법을 어긴 사람보다 더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할 사람인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와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자들에 내리는 벌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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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불쌍히 여김/동정심 있는,[하난] ....oijktivrmwn(3629, 오이크티르몬)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오이크티르몬(Theocr., )은 오이크테이로(oijkteivrw, 3627: 불쌍히 여기다, ~을 가엾게 여기다)에서 유래했으며, '동정심 있는, 자비로운'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오이크티르몬은 70인역본에서 17회 나오며, 히브리어 하난(자비하다, 호의적이다, 은혜롭다, 출 34:6; 신 4:31; 대하 30:9; 시 78:38; 욜 2:13; 욘 4:2; 애 4:10)의 역어로 나온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오이크티르몬은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누가복음과 야고보서에만 사용되었다.

(a)  눅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예수님은 평지 설교에서 인간의 행동의 척도로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제시하시면서 자비로운 행위를 요구하셨다(참조: 눅 6:20-눅 6:49).

(b)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여기서 시 103:8을 인용하여 결론을 맺는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H. E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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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 선대함, 선함 goodness, 친절함 kindness, 우정 friendliness....crhstovth"(5544, 크레스토테스) 

...이는 [대적 원수 마귀사탄의 주동한 바, 세인들과 대리권위들로 부터의 부당한 대우, 오해/착각-오도됨 인한 그 어떤 적대/박해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대사의 온유함으로)악을 선으로 갚음(주님의 일하심 따라) 오직 그리스도를 공급함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크레스토테스(Eur., Isaeus. 이래)는 크레스토스(crhstov", 5543)에서 유래되었으며,

(a)  '정직, 존경할만함, 훌륭함, 가치있음',

(b)  '친절, 우호적인(우정), 온화함(온유)'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여러 비문에서 통치자들과 중요한 공적 인물들을 위한 영예로운 칭호로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크레스토테스는 70인역본에서 약18회 나오며, 히브리어 토스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크레스토테스는 사랑의 '선이나 의'를 표현하며(시 14:1; 시 14:3; 시 53:3), 하나님의 자비 및 친절한 성품과 행위를 나타낸다(시 25:7이하; 시 31:19; 시 65:11등).

3. 신약성경의 용법 

크레스토테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바울서신에만 나타난다.

(a)  롬3:12에서 크레스토테스는 인간의 '선이나 의'를 의미한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구절은 시 14:1을 인용한 것이다.

(b)  크레스토테스는 롬 2:4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롬 11:2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와 통해서 나타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태도와 행위를 의미한다.

딛 3:4이하에서 크레스토테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친절(자비)을 표현한다.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신적 구원 활동의 특수한 궁극성을 체험한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의 영역으로 옮김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활동해 온 그분의 은혜와 친절하심(자비)에 대한 계시이다. 

'온유함, 친절함'을 뜻하는 크레스토테스는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님의 운동 원인들 가운데 하나의 새로운 동인이다. 

공동체가 비밀로서 소유하고 있는 것, 그리스도는 속량하시는 우주의 지배자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현실로된 것은 마땅히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동체 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공동체를 경유하고 통과하여 전해지며, 앞으로 올 세대까지 확대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통치를 전제로 삼는 신자들의 부활과 통치자적 지위는 앞으로 올 세대에서 밝혀져야 하고 드러나야 한다(Joachim Gnilka).

(c)  크레스토테스는 덕목 중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퍼져나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은 그 자체로서 이제는 다른 사람을 향한 크레스토테스로 작용한다.

갈 5:22에서 크레스토테스는 성령의 열매이며, 고후 6:6에서는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골 3:12에서는 이와 유사한 주님의 성품에 크레스토테스가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친절(자비)은 아가페의 직접적인 외관적인 활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의 삶 속에서 항상 살아있고, 능동적이며,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스스로 백성을 선별하셨으며, 죄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때가 찰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무한한 인자함을 나타내 보이셔서 죄와 사악에도 불구하고 계속 인자함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자비하심으로부터의 순환을 완성한다. 여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그 목적 Goal을 달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자비로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울을 보듯 분명히 볼 수 있다. 더욱이,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의 구성원들은 반드시 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자비의 길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동시에, 그들은 그러한 자비의 징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인자함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참조: J.H.Thayer; K.Weiss; E.Beyre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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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한, 온화한, 유쾌한, 친절한, 선한....crhstov"(5543, 크레스토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크레스토스(Hdt. 이래)는 크라오마이(cravomai, 5530: 이용하다, 사용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기본적인 의미는 '탁월한, 유용한, 목적에 적합한, 좋은 류의'이다. 이 단어는 '더 일하는 벌, 단정한 집, 맛있는' 또는 '건강에 좋은 음식, 좋은 제물, 심한 상처, 좋은 경험, 성공, 번영, 행운'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b)  이 단어가 사람에 대해 사용될 때는 '훌륭한, 공정한, 정직한'이란 도덕적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또한 '좋은 태도나 예의, 좋은 성질'을 나타내며, 특정한 임무에 '알맞은' 사람을 나타낸다. 또 다른 의미로는 '친절한, 온화한, 유순한, 마음이 좋은', 심지어 '단순한' 등을 의미한다.

(c)  크레스토스는 고유명사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크레스토스는 35회 나오며, '뛰어난, 진짜의 값비싼'을 뜻하는 히브리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히브리어 코브를 번역한다.

(a)  이 단어가 사물에 대해 사용될 때, 겔 27:22; 겔 28:13에서 야칼의 역어로 보석을 묘사하며, 단 2:32에서 타브의 역어로 '금'을 묘사하며, 렘 24:2, 렘 24:3, 렘 24:5에서 토브의 역어로 '무화과'를 묘사한다.

(b)  이 단어가 사람에 대해 사용될 때는 '친절한, 호의의, 은혜로운'(렘 52:32; 시 112:5), '정직한'(잠 2:22)을 나타낸다.

(c)  이 단어는 하나님의 위엄과 은혜와 관련하여, 하나님에 대해서(시 106:1; 렘 33:11), 하나님의 이름과(시 52:9) 자비(시 69:16)에 적용하고 있다. 우리는 좋으신 주님(시 34:8)께 소망과 신뢰를 가진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올바르시고(시 25:8) 그의 규례는 선하다(시 119:39).

3. 신약성경의 용법 

크레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① 크레스토스는 눅 5:39에서 물건에 대해 사용되어 물건의 '좋은'을 나타낸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② 고전 15:33에서 크레스토스는 선한 행실을 묘사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b)  크레스토스는 눅 6:35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태도와 행위에서 '온화하고 친절한'을 나타낸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심지어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들과 사악한 인간들(완고한 죄인들) 조차도 포용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친절함(자비)에는 한계가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원수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 11:30에서 크레스토스는 그리스도의 '친절'을 나타낸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서 그리스도는 이 용어를 사용하여 그의 메시지를 유대교의 메시지와 대조하고 크레스토스는 그의 인격과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친절과 호의적인 도움의' 충만을 나타낸다.

롬 2:4에서 바울은 회개할 여지를 남겨 두신 하나님의 인자를 묘사하기 위해 토 크레스톤(중성)을 사용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하여 회개치 않은 자들은 경멸하고, 그러므로 자기들에게 임할 진노를 쌓아 가고 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이전에 백성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참아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이러한 친절이 특별하게 표현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서 완성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벧전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에서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볼 수 있다.

(c)  엡 4:32에서 눅 6:35; 눅 6:36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이상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인용하여 신자들 상호간의 관계에 적용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참조: J.H.Thayer; K.Weiss; E.Beyreuther). 

----용납------

@@용납하다, bear [너그러이] 받다/품다-참다-끝까지 견디다.:: 진주조개가 이물질인 모래알을 품고 마침내 그 자신의 생명 진액으로 덮어 진주를 산출하듯.. ...ajnevcw(430, 아네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네코(Homer 이래)는 아나(ajnav, 303)와 에코(e[cw, 2192: 가지다, 쥐다)에서 유래했으며,

(a)  '들어올리다, 지지하다',

(b)  '버티다, 견디다, 참다',

(c)  '너그럽게 보아주다, 관대히 다루다, 묵인(시)하다'.

(d)  '자제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네코는 70인역본에서 16회 나오며,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참거나 억제한다는 개념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창 45:1에서 사람에 관하여, 사 1:13; 사 42:14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멸망에 대하여(사 64:11), 혹은 자비(사 42:14)로 말미암아 자제하신다. 사 63:15에서 이 의미는 '관대히 다루다'라는 의미에 흡수되어 버린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네코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마 17:17에서 아네코는 인격적 대상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의 질문에서 '참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병행구절, 막 9:19; 눅 9:41).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삼년 동안 그들과 같이 행동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그 시대의 특징이었던 옛부터 있어온 불신앙이 다시금 예기치 않게 나타났으며, 이것 때문에 그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었다.

(b)  아네코는 비인격적 대상들에 대하여 '참거나 견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② 살후 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c)  아네코는 교훈 및 권면에 관하여 특별히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히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②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③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d)  아네코는 인격적 대상들에 관하여 '받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서로'"라는 말 속에서 이 단어에 대한 신약적 용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즉 용납하는 마음 속엔 자기 중심적 요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 중 한 가지 필수적 요소는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인 것이다. 또 알렐론(서로)이란 말에서 용납의 상호 관련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엡 4:2에서도 이러한 표현("서로")이 사용되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② 고후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전혀 표방하지 않고 온유하고 낮은 자세로 그들에게 접근한다. 그는 사도이자 또한 그리스도의 진리의 전달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랑으로 고린도인들을 용납하신다. 그들도 바울을 용납해야 한다. 여기에서 상호 용납이라는 강력한 신학적 개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에게 보내진 자를 용납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낸 분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③ 고후 11:19; 고후 11:20,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Schlier; U. Falkenroth; C.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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