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1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왕상19.갈멜_브엘세바광야로뎀나무_호렙굴_굴어귀밖_세미/온화/분명/순수순전온전완전친절한속식임음성/Q임재앞에섬_사명자엘리야_기름부어세움/7천남은자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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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9장 

---엘리야... 갈멜산에서부터 이스르엘 입구까지 뛰어보니..어떠니!!..승리감에 도취됨은 잠깐이지만 고통스런 삶의 진지함은 길게만 느껴진단다..(생색내기는 사탄 충만한 자아가 주장하는바, 자기자랑일뿐이요, 자기연민이니, 나의 신실-진실한 종, 나와 하나인 네게 합당치 않다) 너는 오직 겸손-온유-신실함의 참 믿음으로 나 여호와 안에 머물러, 사랑과 순종의 사람, Q경외하는 네가 맡은 역할/사명과 여호와 누림만 충실히 하도록 하자, 그것으로 충분하단다!!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해 계획한 바를 다 이루기까지는 결코 쉬지않을것이고 친히 임마누엘로서 함께 하며 다 이루리니, 내가 명하는 그대로만 해다오!!...상황이 어떻든지, 어찌 전개되어 가든지에 무관하게!! 궁극적으로 그것은 네게 유익하기에!! 근원적 지혜의 나 여호와가 (대적으로하여금 그리하도록) 허락한것임을 잊지말고 참고 견뎌 버티기를 배우되 모든 순간마다 내 안에-내 품에 안겨 내 심장의 고동소리 들으며, 그 임재 안에 친밀한 교통의 대화로!! 거하도록 하거라

......***진리형상의 생명 = 메시아 -->진리형상의 실제 = 예수...실제이신 예수의 내용 = 여호와 Q : 예수 바라보면 TUQ전부를 받는것임.... ***.사밧--샤파트 : 예수가 비춰진 만큼 실제가 되어 조성됨과 동시에 합당치않은것 처리받게 됨 의미

---이 땅의 믿는이들외에는, 불신세상 자체가 (육이 가득차 있는바) 우상-사탄마귀 체계따라 [눈이 어두워져 있어서]영이 죽은 자들로서 살고 있음을 참되게 깨닫고 있는가?

---제아무리 탁월한 영성가라도!! 말씀의 나침반!!, 이것을 놓치면 길을 잃는법!!

..[406.곤한내영혼] [300.내맘이낙심되며], [384.나의갈길다가도록]..[425.주님의뜻을이루소서][430.주와같이길가는것]

--전능하신주나의하나님은, 지금은엘리야때처럼, 주님의영광나타나셨네 창조의아버지(주영광여기임하네) 내눈주의영광을보네(주의영광이곳에가득해)...우리는주의움직이는교회


...[[호렙에로의 도피 여정]]((이스르엘에는, 상아로 만든  아합왕의 별궁이 있었고, 이세벨도  거기 머무르고 있었다....나봇의 포도원도 거기 있었다, 그 남서쪽에 므깃도가 있다)) 

아마, 엘리야는 이스르엘에 잠시 있는 동안에 이세벨의 저주 섞인 경고를 접했던 것 같고, 엘리야의 기대와는  완전히 상반되었던 듯 하다.. [극도의 낙망감, 우울, 공포, 공황감에 사로잡혀 압도되어 자기연민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나머지] Q께  여쭙지 않고, 브엘세바까지 160km 직행(다급하게 천리행군처럼 도피했다면 4-5일 경과?), 이어서 호렙산까지 350km의 도피 여정(천리행군으로는 보통10일 길이지만...40주40야 걸리고 있음)을 택하고 있다(아마도 이전에 미리 호렙산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 그 도중에 브엘세바에 사환을 두고서, 광야로 진입하여 하룻길 간 다음, 기진하여 로뎀나무 아래  앉아 누워 *(아무 짝에도 쓸모 없으니...)죽여 주옵소서*  부르짖고 기진하여 쓰러져 누워 자는  중에, (이것은 옛 사람의 죽음 경험이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 자는 복 되도다.... 이제는 주님 패러다임으로 사는 새 사람, Q 아들의  패러다임으로 살기를 선택하고 주님 이끄심 따라 발걸음 옮기도록 하라.... 옐리야가 경험한 바, 그분은 이미 곁에 계셔서 한번도 그를 떠난 적 없으신, 모든 필요 돌보시며, 위로하며 격려하는  여호와의 천사로 나타나고 있었다), JC의 어루만져 깨우심, 떡과 물 먹이시고 더불어 단잠 공급하심-눕워 쉼 경험 통해 기운 얻고 마침내 호렙에 이르러, (시내산 꼭대기에서 마지막40일 금식 중보기도중에 모세가 만난바  그분의 영광, 성분과 요소로 주입 받아, 거듭남 경험 안에서 참되게 그분 알고 사랑하며 동행하며 마음 알아드려 동행하기를 배웠던, 아가페이자 필레오, 다바르이자 다바크이신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새로이 (=거듭남+성장성숙) 경험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교통 통해 갈 길, 곧 사명에 대한 새로운  각성 받고서 새로이 출발하여 맡겨진 바 나머지 과업 완수하고 있다..과업 완수 후 회리 바람에 들리워 승천하는데, 이것은 그의 몸이 구속, 곧 부활체로의 변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포인트!!, 거듭남은 JC의 모든 것으로, 오직 영광의 Q 현존과 임재로 적셔짐-씻겨짐 받으며, 점유 충만 안에서 변호 받음(아가페사랑과 빛에 달궆 받아 저절로 핓나며 빛 빛추며 그분의 임재 영광 반사 반영하며, 동시에 내주하시는 성령 따라 걷기 통해 날마다 네오스 카이노스 아나네오오 쉼모르포스를 살되, 예비해 두신 생명과 경건, 사랑 안에 하나 됨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 이룬 Q의 아들들인 지체로 이루는, 한 새 사람,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비전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때 그 어떤 영적 전쟁조차도 이미 승리한 것을 알게 될 것,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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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나무(rothem..white broom tree).]]..성지와 아라비아의 거친 광야에서 자라는 관목인 래탐레타마(white broom)로 본다. 

래탐레타마는 성지 전체에 걸쳐 있는 산지, 바위가 많은 곳, 협곡, 모래가 있는 곳, 특히 사해 근처, 길르앗, 갈멜 산, 시리아 광야, 페니키아 해안에서 자란다. 

.......왕상 19:4에 나오는, 이세벨에게서 도망치는 엘리야의 이야기에 나오는 로뎀나무에 대한 언급은, ‘광야’ 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황폐한 모습을 자세히 보여 준다. 시 120:4의 로템(rothem)에 대한 언급으로 학자들은 그 나무가 확실히 로뎀나무(broom)라는 결론을 내렸다. 

로뎀나무의 줄기와 잎에 있는 기름이 불을 만들기 때문이다. . (건조시킨 잎과 줄기, 그 뿌리는 오래 타기때문에 [서민들이 빵 굽기 위해] 불쏘시개용으로 쓰임)

......관목보다 더 큰 덤불인 로뎀나무는 2미터 높이까지 자랄 수 있다. 로뎀나무에는 작은 가지가 많고 잎이 적으며 흰 꽃송이들이 산비탈에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준다. 

.....지친 사람에게 쉼을 제공하는 그늘, 쉼과 안식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뎀나무가 '보잘것 없음'과 '비참함'을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로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시궁창, 진흙탕'을 의미한다. 로뎀나무 아래서 햇빛을 피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신세를 상징하는 것었다. 

.....광야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햇빛을 저주를, 그늘은 은혜를 상징한다. 로뎀나무를 빗자루같이 뻗어 있어서 그늘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로뎀나무 그늘에서나마 쉬려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은 광야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이었다.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라를 대신해 아브라함과 동침해서 아이를 가졌다. 사라가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브라함을 닦달해서 얻은 결과였다. 하갈은 임신하자 스스로 안방마님 행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라에게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기 때문이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났다. 브엘세바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광야에서 물이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갈은 네게브 사막을 방황하다가 이스마엘을 떨기나무 아래에 두고 통곡했다.(창21:14-16). 여기서 떨기나무로  번역된 나무는 로뎀나무를 말한다. 광야에서 오갈 데 없이 방황하는 비참한 상화에서 반드시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무가 로뎀나무이기 때문이다.

(대싸리 뿌리로 연명한 욥)......하나님을 잘 섬기고 많은 축복을 누렸던 욥은 사탄의 질시로 가족과 모든 부귀영화를 빼앗겼다. 욥은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면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짠 나무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욥30:4).  여기서 짠 나물로 번역된 나무는 광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금나무를 말한다. 소금나무는 이름처럼 잎사귀가 무척 짜다. 광야에서 사는 동물들은 이 나무의 잎사귀를 먹고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소금 성분을 공급 받는다. 그러나 소금 나무는 식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대싸리 뿌리는 생긴 모양이 빗자루와 같은 로뎀나무의 별칭이다. 대싸리 뿌리 역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우리 부모 세대들은 보릿고개를 넘기려고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캐서 먹었다지만, 대싸리 뿌리와 짠 나물은 그런 상황에서도 먹을 수 없는 식물인 것이다. 욥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로뎀나무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황을 상징한다. 로뎀나무는 시궁창이란 뜻이다.

(로뎀나무 숯불).....광야의 날씨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극심한 일교차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렵고 밤에는 반대로 극심한 추위로 고생해야 하는 곳이 바로 광야다. 광야의 날씨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40년 동안 광야의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광야에 텐트를 치고 양과 염소를 치며 원시적으로 살아가는 베두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어떻게 광야의 밤을 견뎌 내는 것일까? 수천 년 동안 광야에서 지내 온 베두인들이 광야의 추운 밤을 보내는 노하우는 바로 로뎀나무 숯불에 있다. 로뎀나무 숯불 위에 5~10센티 정도의 흙을 얹으면 베두인식 맥반석 찜질 침대가 된다. 그 위에 잠을 자면 따뜻한 광야의 밤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로뎀나무 숯불의 특징은 오래 타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 다 탄 것 같아도 부지깽이로 속을 뒤집어 보면 여전히 그 밑에서 불씨가 타고 있다. 탈무드에는 로뎀나무 숯불에 관한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초막절에 로뎀나무 숯불이 타는 것을 보고 간 사람이 유월절에 돌아왔는데도 그 숯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로뎀나무 숯불이 오래 탄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로뎀나무 숯불은 3일 정도 탄다고 하니 숯불의 왕자라고 할 만하다. 로뎀나무는 한국에 없는 나무이므로 한글성경에는 로뎀나무, 노가주나무, 싸리, 대싸리, 말라깽이 등으로 매우 혼란스럽게 번역되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브엘세바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며, 나무아래 누워 자다가 천사가 준 음식과 물을 마시고 힘을 내었다. 욥이 시험에 빠졌을 때에도 그를 조롱하던 사람 중에는 로뎀나무(대싸리 욥 30:4) 뿌리를 캐먹던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 로뎀나무의 뿌리는 가늘고 단단하여 음식이 될 수 없고, 맛도 쓰지만 가난한 유목민들은 그런 것까지 먹었던 것 같다.

로뎀나무는 네게브, 가이사랴 등의 모래밭에서 볼 수 있는데, 기후풍토가 좋은 아얄론 골짜기에서는 키도 크고 가지도 풍성한 로뎀나무를 볼 수 있다. 

싸리나무처럼 땅에서부터 가느다란 가지들이 자라기 때문에 그늘이 빈약하지만 사막에서는 그나마 고마운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이다.

콩과의 관목으로 높이 2~3m이내이다. 잎은 바늘 모양으로 적으며, 꽃은 백색, 이른 봄에 핀다. 긴 타원형의 열매를 맺는다. 팔레스타인 등지의 사막의 구릉이나 암석지대, 특히 사해 부근에서 번성하고 그늘을 내며 크게 자란다.

구약성서에도 언급되는 식물로, 《열왕기상》19장 4~5절에 따르면 호렙산(山)으로 가는 도중 엘리야가 이 나무 아래서 쉬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뎀나무 뿌리는 보통 숯불용으로 사용되었으며, 기근 때가 닥치면  구황작물로서 먹기도 했었다. (숯불, 횃불용도로) 아라비아에서는 오늘날에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카이로에서는 다른 어느 것보다 비싸게 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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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기나무  hn...세네(명남)는 어원이 불분명하며, '떨기나무'를 의미한다. 이것은 아라비아어로 '산트 sant'라고 하는 이집트 아카시아로 알려져 있으며, 애굽 및 시내반도에 생육하는 가시 있는 낙엽 교목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회 나온다. 이 나무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사역을 위한 그의 선택한 종 모세를 부르기 위해 그 가운데 나타난 식물이다(출 3:2, 출 3:3, 출 3:4). 신 33:16에서 보면 모세는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는 자"의 계시를 결코 잊지 아니하였다.(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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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셀나무...일명 소금 삼나무]]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창 21:33)”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하였더라(삼상 31:13)”
이같이 성경에 나오는 에셀나무를 보면 이스라엘 건조한 지역에 흔히 보이는 나무이거나 식수하는 나무였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에셀나무는 타마리스크(Tamarix)라는 나무인데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건조한 지역이 원산지인 나무로 세계적으로 50~60종이 있다. 이 Tamarix라는 이름은 고대 Tamaris 강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 보통 18-20미터까지 자라며, 그 자란 높이에 비례적으로 좌우 옆으로 더 퍼지며 뿌리는 깊이-너비가 20-30미터까지 이르게 되며, 가장 큰 특징은  밤에 뿌리에서 흡수한 물이 아침 해가 떠오르면 영롱한 이슬이 되어서 반짝이며 햇볕 강한 한낮이 되면 물기가 증발하면서 주위보다 무려 10도까지도 내려가기 때문에 더위에 지친 나그네들에게는 훌륭한 쉼터가 되어준다. ... 에셀나무는 높이가 18-20m까지 자라는 상록관목 또는 교목으로서 나무 한그루에 잎이 많기에 빽빽한 덤불 모양을 이루어 그림자를 만든다. 
이 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소금기가 많은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점이다. 에셀나무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가지고 있는데, 어린 가지들은 부드럽고 검붉은 갈색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껍질은 푸르스름한 자주색으로 변하고 깊은 고랑이 파인다. 얇은 가지에는 엽록소가 있어서 광합성  작용을 하며, 기공은 가지의 흠내에 숨겨져 있어서 수분 손실 과다를 방지한다.
잎은 서로 어긋나며 회녹색으로 향나무 잎처럼 바늘 같은 모양이고, 길이가 1~2mm이다. 잎이 때로는 하얀 소금 결정물로 덮여있는데,. 식물 내 조직에서 과도한 해로운 소금을 제거하기 위해 잎의 특수 땀샘에서 소금을 배설하기 때문에 소금기가 있는 땅에서도 잘 자라는 특징이 있다. ... 꽃은 분홍색 또는 흰색으로 3월에서 9월까지 가지 끝에서 작은 꽃이 자잘하게 모여 긴 이삭처럼 핀다. 꽃에는 5개의 작은 꽃받침과 5개의 흰 꽃잎이 있다. 암술머리에는 5개의 수술이 있다. 일부 종은 겨울 동안에도 꽃을 피우는 경향이 있어, 사람들이 보면 일년내내 꽃을 피우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 열매는 5mm 길이의 붉은 뾰족한 원뿔 모양으로, 바람에 의해 운반되는데, 수많은 작은 씨앗이 그 안에 들어있다. 씨앗은 젖은 토양에 떨어지면 쉽게 발아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몇 주 안에 생존력을 잃는다.  이스라엘 남부 해안지역과 네겝 황야에서 잘 자라며, 세계적으로는 아라비아사막과 북아프리카에까지 자란다. 혹한 조건에서도 상관없이 잘 자라며 시원한 그늘까지 제공해 주기때문에 과거 유대평원과 북부네겝의 주거지에 보면 이 나무의 흔적들이 보인다.
에셀나무는 건조한 지역에 자라는 나무답게 깊은 땅속에 있는 지하수를 흡수할 수 있는 긴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깊은 지하수에서 소금을 흡수하여 잎에 축적하여 표면 토양에 침전시켜 다른 식물들이 자라지 못하게 해로운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생존 경쟁을 해나가는듯하며,. 비가 많이 올 때 소금을 씻겨나가게 된다.


[믿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주께로 돌이키게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진실로,  Q의 뜻을 따라 , 즉  <사람들을 얻는 것>이거나 사람들을 <천당 가게 하려 함>을 넘어서서, 세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의 건축을 위해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창출-산출해 냄에 있는가] 

....만약  우리가  <진실로> 이렇게 하고 있다면, Q의 영원한 경륜 이룸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오늘,  (이 땅을 걷되, 하늘에 속한 이기는 자로서) 우리 영은 날마다 하늘 시온에 이르고  시온을 갖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만약 그렇게 하지  않다면 Q은 그분의 경륜을 이루고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길을 얻지 못하실 것이다..

....신약의 마지막  책은 이기는 자를 부르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계2:7, 11, 17, 26, 3:5, 12, 21)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몸의 구속 입어 영광 가운데 산 채로 들림 받든지, 아니면 한 번 죽고 부활하여 부활체로 들림 받던지에 무관하게> 이 이기는 자들이야말로 하늘 시온이 되며(14:1), 이 시온은 새 예루살렘이 되기 위한 표준이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땅에) 새 예루살렘이 도래할 때에야  시온은 사라질 것인데, 이는 새 예루살렘 전체가 모든 이기는 믿는이들과 함께 새 땅의 (영원한) 시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 생활은 시온에 이를 그 때까지 계속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 

....<회복 안에서의 교회 생활을 진지하게 실행함>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그 중심과 실제로 하는 Q의 경륜과 모든 이상을 보기 위해 힘써 수고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


===호렙 산의 엘리야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 160km(수색대대의 천리행군 훈련시 하루 40km씩 행군하게 됨 :: 이 속도로는 4일 거리..아마도!!)...브엘세바광야에서 호렙산까지는 350km : 여기에 소요된 시간은 40주 사십야..(모세의 시내산 꼭대기의 40일간 금식-회개/중보의 기간과 매치시키고 있음을 곰곰이 묵상해보자!!)

.....전신전력으로, 장기간 쉼없이, 주 섬김 사역에 올인했으나, 홀로 남았다는 고립감/무력감/절망감 엄습하여, 죽고싶은 마음 드는 그대에게!!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말라크=사자, 사신,메신저)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당장 죽이면 될터인데, 경고하고 있다 = 목적은*두려움에 스스로 사로잡혀있기에 함부로 할수없음 느낌, 또는 *협박하여 도망가게하려고??!..혼란-좌절-자포자기에 빠져들어 심정적 마비의 지옥 상태 지속--오도가도못하게 하려함이요, 그후에 손쓰려함이다...그토록 찾던이가 이제!! 스스로 나타났고, 아합도 그의 살해를 용인한 상태) *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그런데, 이런 말까지 하고는, 전혀 한마디도 안한듯이 후속행동 기미조차 없었다!!

.......***바알우상 숭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극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개인의 개성-다양성-자율성만을 중시하고 내세우면서(타인의 입장-환경-존재 가치는 완전히 무시한채 끼리끼리 어울려 특권계층 그룹 만들어 고양하여 즐기며!! ).....찬조주 Q 없기에 절대이념이란 없다 하며, 기존의 모든 공동체의 지속적 유익 위한 공공선과 질서유지 개념에서조차 벗어나고자 하는바, 탈이념 중시하는 상대적 정치 이론, 그 궁극적 결론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가치, 곧 사탄마귀의 가치이니....이것이 [상호 인간 존중 넘어선, 특정 개인에 대해 초월적 지위 및 특권 허용/남용이라는] 해롭게 하며, 구역질나는, 사망의, 썩고 부패/타락한,  그 천부적 생명 가지 존중 바탕 위에 근본적 상호 공동선 이룸의 균형적 인간 가치 존중/보호 개념과는 전혀 무관한 천부적 생명 가치 무시--잔혹한 폭력적  경멸/잔멸로 집약됨 

===그 바탕에는 절대적 무신론이 버티고 있음...((맹점))..그 자신은 Q 계시지 않음은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교묘히, Q 계신다는 것을 증명해보라 요구하고 있는바(절대적 무신론자 도킨스) 이는 분명히 억지임(--불가지론자 맥그라스의 반론적 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Q 존재 증명 제시못한다면 Q은 없음, 곧 질서-균형-통제의 기준이 되는 Q은 존재하지도 않고 결국 절대 이념은 없고!! 다만 ["내 인생은 내것"이라며!!, 개인 각자가 좋은대로 하면 그뿐이라는!! --일찌기 도스토예프스키가 예언한바 그대로!! - "내가 바로 신이다" = (창조시대부터!!) "내가 Q과 비기리라!!" 말해왔던 사탄, 그에게 기만당한바 사탄/마귀적 논리 그대로 답습/대표하며 제멋대로 권력 오남용하고 휘둘러 생명 잔멸/공동체 공멸 결정 서슴지 않음] 괴상하고도 빗나간!! 유아독존적 인권존중을 전면에 내세우는 바!!....타인의 피해와 공공 유익은 도외시한채] 개인의 개성-다양성-자율성만을 중시하며!! 절대이념이란 없다 하며, 기존의 모든 공동체의 지속적 유익 위한 공공선과 질서유지에 근간을 두는 사회계약적 개념조차 벗어나고자 하는바, 탈이념 중시하는 상대적 정치 이론, 이것이 [유아독존적 개인 인권 존중이란] 인권 개념으로 집약됨 

......포스트모더니즘의 궁극적 결과는 결국 "나만-우리만 좋으면 돼!!....나혼자 잘 먹고 잘살고 자기 좋을대로 살다가, 자살로 끝내버릴거야"라는 극단적 이기주의적 발상인바, 결국 동성애-이혼/불신결혼-가정파괴-생명 존중 사라지고 생명 잔멸을 우습게 여김의, 살인 자행을 밥먹듯하는 짐승 사회 ...반대하면"차별"로 몰아버림, 이는 가정-사회-공동체 해체 단계를 거쳐 망국적 낭떠러지행으로 나아갈뿐 ::: 동성애 합법화+(동성애가 죄임을 밝히는)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자체로서 기독교 신앙 말살 목적 법안임

......보라!!, 아합과 이세벨의 금슬이 너무너무 좋은 상태여서(지금이 좋사오니!!)...자라면서 율법을 교육 받은 아합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바알숭배로 사는, Q의 율법 전혀 모르는 이세벨의 치마폭 뒤에 숨어버리고 대신 이세벨에게 낱낱이 고자질하여, 전적으로 갈멜산 사건 뒤처리를 맡기는 바,  이세벨은 막무가내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이야말로!! 나라 전체 말아먹는 지극히 이기적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바벨탑 사건의 가장 큰 핵심문제란... "교만??....이 아니라 참 핵심적 실상은 인권 제일주의의 오만!!, 곧 사람이-내가- 하나님 될 수 있어 하며!!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앉고자 함이니...Q 나라는 인권 최우선-제일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주 다스리네!!"에 있는 것임..

.......***동성애자는 [회개를 통해] 분명히 구원받을 수 있으되!!, 소도미!! 동성애 행위는 명백한 죄임을 [주 앞에서] 인정해야만 하며((여호사밧 왕은 남색하는자를 유다땅에서 완전히 근절/멸절/추방하였다!!--이것을 주님은 기뻐하셨다)), 만인 평등은 사상이로되 실생활에서 이루고자 함은 [주 앞에서 한 사람 한사람마다 모두 다 타락한 죄인이기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Q 믿음(참신앙)이 실지로 믿는이 한 사람 한사람마다 자신이 존재 근원이자 삶의 동력 바탕으로 삼는바 Q 믿는 신앙이야 말로 살아계신 Q, 그분의 존재증명이요 참된 믿음체계임을 증거하여야 할 바, 그 자신에게서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생생한 간증 통하여 신앙생활의 능력을 나타내고 드러내야 함..

......현시점에서!! 전도란, "교회로 오라" 초청함이 최우선순위가 아닐 수도 있음을 분명히 얼고 있어야 하리라...오히려 Q께서 자기에게 있게 하신바, 바로 참되게 믿는이 그가 있는 그 자리에서!!  참 신앙의 믿음체계의 생생한 능력으로 살아가며 빛으로 나타냄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신앙은 생생한 산 믿음체계임을 입증함과 동시에 그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현대적 상황에 맞게, 불신세상이 능히 받아들일 수 있는  합당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성경의 진리를] 재번역할 필요가 있음(예-메시지성경처럼)...여기에 더하여, 이미 고래로부터 그 땅에서 알려진바 성경진리에 합당한 이야기를 발굴해내어서 그 진리를 적용하여 생생한 생활진리로 전할 필요도 있음

.......이땅에서 잘살고 학력이 높을수록 인권이 왕노릇함(이세벨이 대표적)===>오직!! 이미지와 스토리로 성경 진리를 적용하며 살아냄 인해((말씀의 빛 아래서 자기 죄를 보며 회개하고 성령따라 삶의 간증) [딛3:1-5(5)...*1.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자기의 계획한 바 달성목표에서, 5%부족한 상태 그대로 두시는, 야속한 Q ::: "그토록 주께 대한 열심이 특심했는데, 이건 뭐지? 속상해, 섭섭해요!!  나 선지자 사역 그만둘래" ==>"광야에서는, 토라진 그대로.."나, 주님이 그냥 죽여 주세요 = (나 살고 싶어요) 의미"]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이하 9절까지 YHW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지 않음...주께 묻지 않음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명의 자리를 떠나버리고 있음]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1-2미터 크기로 자람...잔가지가 많아서,바람과 햇빛 차단은 잘됨]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자기만 홀로 세상에 있다 여기고!!, (남유다 여호사밧은 이미 이세벨-아합과 결혼동맹 맺은 상태) 절망감에!! 절대신앙 상실=소명 버림 결정 ::: 홀로서기의 절대신앙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말인가!!]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여호사밧왕가에 시빚가서 결국 남유다왕가의 씨를 말려버리는 역할 맡게 된다 :: 즉, 엘리야의 브엘세바 광야 도망하던 때는 구속사상 가장 위기에 처한 시대가 열린 시점 직후의 영적 환경이었음 : 왕하11장까지 전개됨.

.....***[남유다 여호사밧은 아합과의 결혼동맹으로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모친 이세벨처럼!! 바알-아세라의 극렬한 숭배자였음)) 아들 여호람과 맺어주었고, 여호람은 32세때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등극, 8년만에 사망, 22세 된 그의 아들 아하시야를 예루살렘 백성들이 왕위에 옹립, 1년만에 [길르앗 라못 님시의 손자] 군대 장관 예후에게 북이스라엘 요람과 남유다 어하시야가 살해됨을 보고서,  아달랴가 유다왕의 자손들을 멸절하고 스스로 여왕이 되어 6년간 통치함((오직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1살난 조카 요아스를 그의 유모와 함께 자기 침실에 숨겨서 빼돌림))***.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야센..잠자다, 잠들다) 천사[말라크..여호와의 천사.JC :: 추적하시는 하나님 "나, 내게 너는 유일-독특한 내 소유이기에, 너 결코 포기못한다"]가 그를 어루만지며[내모습이대로 받으시는 Q --Q의 사람 그대가 그 어떤 경우라도(대개 큰 성취 이룬 후에) 때때로 참담함/절망감 느낄 때마다 (정신차리게 하시며!!) 정말 미안해 하신다..]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샤카브..누웠다..그러나 잠든 것 아님..잠들 수 없었음)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네 사명이 아직 다 끝나자 않았으니, 영육간 균형 회복해야 한다) 하는지라

.......절망감 느끼는 영적(영-혼) 곤핍은 바로 육적 곤핍 느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 먼저 먹을 수 있게 공급하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350km정도 : 브엘세바-->호렙...도보로 군대보행속도는 10일내외..번민-갈등 겪으며/통해 걷고 있었다 --YHWH 앎 위해 생생한 체득 경험 위해 필요했던바!!, 모세의-3차례의(출32-34)- 40일 금식/중보에 비견하고 계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9.  ○엘리야가 그 곳 굴[출33:22..모세가 여호와의 영광 지나감 볼 때 숨겨주신 그 굴 :: 그러나 그곳은 모세의 자리였지, 지금 있어야 할바 엘리야의 자리는 아니!!라 하고 계심]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나는 너를 이리로 부르지 않았는데...??)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 정말 주님의 질투하시는 그 열정적 사랑으로 행한바!!  저는 (철저한) 집탕으로, 오로지 주께만 충성하며 !! 일편단심-전심전력으로 올인 하여 왔었는데.. (그동안의 노력 결과란.. 하나도 이루어진 것 없고...그래서 더 이상은 못할거 같네요..그냥 포기하고 싶어서 숨어 있습니다)]

.......바로 요단 건너기전 시점,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민25:1-18), 모압의 꾀한바, 바알브올 사건, 즉 모압 딸들이 그들의 신(그모스)에게 제사드리는 제의에 이스라엘백성을 초대하여 범한바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인해 [여호와의 명령따라] 2만4천명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음행 위해 함께 장막으로 들어가고 있던 시므리-고스비를 목격하고서는!! Q의 질투심으로 창을 들어 한꺼번에 찔러죽인  바느하스처럼 특출한 열심을 발휘했음을 의미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아니다, 네 사명이 다 끝난거 아니니!!, 쩨쩨하게 굴 속에 숨지말고!! 말씀하시는YHWH 앞에 서서 말씀 들음으로!! 제대로 양육받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여호와의 움직임/영광 지나가심은 산하천지/지각변동으로 그대의 몸에 느껴질 수 있지만아직 ㄴ아갈 때가 아니요, 오직 기다릴바 "대망하는바 그분의 세미한 음성!! 그 음성 들려주사 대화 시작하시는!! 음성 들려오는 바로 그 영생의 순간에 주 임재 안으로 주 이름 부르며 나아가야 한다!! --, 전존재의 중심으로 부르며 기대하며 신뢰하며 사귐-교제/교통할 분!! 그분 임재 음성, 곧 목자이신 그분의 친절/다정한 그 속삭임!! 그 자체가 아니라면 참 실제를 놓치는 것이다!!)

......---바알의 신격은 다른 초기 농경 사회의 신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폭풍우와 비, 번개, 풍요/다산의 신이자 태양신이었다.---

......한편!!, 모든 기적들을 포함한 자연력((바람/폭풍-눈비-지진-불)) 다스림의 초자연적 능력조차도!!  그 안에서 작동 원인이신분!! 모든 사건-환경-상황-형편-처지, 기록된 모든 말씀 안에 있는 정수!!, 곧 영생하시는 운행-일하시는 주님YHWH!!, 그분 자신의 세미한 음성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고도/뚜렷이 알아 듣도록, 그래서 임재안에서 하나인바 참 생명 삶 살도록 하기 위한, 인침의!! 예비과정일뿐이었다!!....즉, 외적으로 나타나는 표적-기적-이사 경험 그 자체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요 오직 자신의 전적인 죄인/전적인 타락한 죄인 됨 인정 + 영원유일무이/영생하시는 하나님, 십자가 대속 구주 JC 없이는 전적인 무의미/멸절/멸망뿐임을 깨닫고 자인하며 구주-하나님으로 주예수 이름 불러 믿고 영접함의, 복음 듣고 구주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안내자 역할일뿐!!

13.  엘리야가 [주님 지나가심의 소리 느끼고 이제 굴어귀 안에서 밖으로 완전히 나아가 주님 임재 앞에 서고 있다!! 그는 그분이신것을 알고 있다.. 세미한=친밀한 음성의 임재 소리를!!]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굴 밖 어귀에 믿음으로 서야만!! 친밀하신 그분의, 목자의 음성!! 그 소리가 임하신다!!] 소리가 그에게 [뚜렷이/분명히...주님 자신임을!! ...착각이 아니고 주님자신이심을..확연히 알아채고 놓칠수 없도록 영혼의 존재중심에 인쳐 새겨주심!!---은혜위에 은혜러라!!--성장성숙에로 이끄시는, runing after의 진수!!---주님 임재의 행보, 그 나날 살기!! 가능하다!!]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기서 뭐하니??..[주님 위해, 네자신과 다른이의 구원 위해] 너의 지고지선의 진복과 사랑받음 위해 마련한 계획에 따르면, 너는 지금 여기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여기 에 네가 있는바 이 길은 내가 예비한 마땅한 길이 아니고, 네 자신이 [자의적으로] 의도한 길일뿐이다...출33:12-추적하시는 Q 기억함)..

......(관계적 문제) 직장생활 트러블-->두렴/근심/염려--비교됨/불안정감......"말씀이 없어서".....돈이 더 필요하다면, 효율 높은 알바를 (한가지) 선택집중해서 일하고 , 나머지 시간을 말씀 듣기 위한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 나눔/묵상/기도 모임에 올인할 것!!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마음 중심과 입 그 자체조차, 시공초월하는 무한하신 주영광/주 임재 충만 통한 마음-입의, 깨달은 새로운 생명 말씀 채움 받은바를 그대로 아직 말해내지 못하고 있음!!)..**죄인됨 인해 당연히!! 죄인됨 자각 아래, 사함 받은 죄인의 자리에 앉아서  겸손과 온유의 리더십 발휘했어야 할바인데 스스로를 모르고, 오히려!! Q 자리에 앉아 있는바, 상아궁 지은 아합, 킹메이커 이세벨임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히!!, 그 어떤 기적이라도 각사람 하나하나를 참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고 오직 말씀=여호와의 세미한 음성=이 개인적으로 참되게 그 심령마다에 들려야만 진정한 구원 얻게됨을 깨닫는바!!,  오직갑자기 문득 전지전능하신 Q을 인지하고, 입에 손을 대며, 이 무슨 망발/생색냄인가,... 오 주여 용서하소서...저는 전적으로 Nothing-Nobody일뿐입니다..주님 자각!!..기적 그 자체는 사람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한다!!...이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Q의 손길이 바로 "이세벨의 협박"일 수 있다--구속사적 해석--]

.........[왕상19:9-12...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 [왕상19:13...So it was, when Elijah heard it, that he wrapped his face in his mantle and went out and stood in the entrance of the cave. Suddenly a voice came to him, and said,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힌네 엘 콜 아마르" = A voice,  Suddenly a voice came to him, and said,...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 외투 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 바로 그 때에, 그에게 소리가 들려 왔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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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3:12-23...*12.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34:4-7...*4.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5.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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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13:5...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5여러분은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살피고 시험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입니다.///5 Test and evaluate yourselves to see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and living your lives as [committed] believers. Examine yourselves [not me]! Or do you not recognize this about yourselves [by an ongoing experience] that Jesus Christ is in you—unless indeed you fail the test and are rejected as counterfeit?//5 Examine yourselves as to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know yourselves, that Jesus Christ is in you?—unless indeed you [b]are disqualified.//5 Examine yourselves as to whether you are in the faith. Test yourselves. Do you not know yourselves, that Jesus Christ is in you?—unless indeed you [b]are disqualified]]
-----호렙굴_굴어귀밖_세미/온화/분명/순수순전온전완전친절한속식임음성/Q임재앞에섬_사명자엘리야_기름부어세움/7천남은자양육(새시대준비)----+

-----###엘리야에게 적용된 카이로스, 3단계---[로뎀나무아래]의 때((죽지않고 살기 위해 주님 손 의지함))==>(모세를...부모를!!..조상을!! 부적처럼 생각하여 의지하며)[호렙산 굴속에 숨어 거함]의 때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사람마다!! 새롭게 하시는 Q 음성 듣기 위해 ==[굴 어귀, 그 밖에 나아가서 매일 묵상통해 주님 붙들어야 함]의 때==((그 자리에서 [영혼 구원의 소명/사명 수행 위해, 양육하시는 Q 추구))...[인생의 목적을 물으시는 주님!!, 과연 누구를 위함인지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 해야 할지.... 금식하면서 주께 기도해보라!!, 일게 하실것이요, 그대로 따르라!!###---


15.  ○여호와께서 [아마도!! 그 때!! 다 아시는!! 주님은 미소지으셨으리라]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데레크, 길(생각/태도/자세)]을 돌이켜(=슈브...회개하고, 주님 마음과 하나되어, 부활생명 능력의 성령 안에서 전혀 새로운 존재인바  마음 새롭게 결단하여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나날/역사 안으로 나아갈바!!)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주님의 대리통치자, 곧 나기드로 임명하는!!...::: 지금껏 현존하는 세상 왕/통치자마다 Q의 예정/작정하심 안에 통제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계심!!...그리스도인은 참되게 아버지께!! 묻는법 연습하라!!)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요단 동편 디셉에서, 또는 그릿시내에서 요단 건너 서편에 마주 보이는 성읍...므낫세에 속함..기드온300용사에게 패주하여 도망하는 미디안병사들이 경유한 평원지대] 사밧[-사파트..재판하다]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다짜고짜 권능의 겉옷 벗어 그에게 던짐!! 행동으로 묘사됨]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이른바, 7천배의 응답!!..Q의 경륜/역사를 면면히 이어나갈바 7*10*10*10의 충만 완전수]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19:15-18을 깊이 묵상하라...주님은 엘리야에게 영적 차원과 영역에 관한 시야를 넓혀주고 계셨다....(네가 이미 알 수도, 아니 모를 수도 있지만) 아벨므홀라에 가서 먼저 엘리사에게 기름부어(그에게 엘리야는 그가 줄곧 걸치고 있던 겉옷을 던지고 있다!!) 너 엘리야를 대신할 선지자가 되게 하고, 또..하사엘에게-, 예후에게- 기름부어 왕이 되게하고(새시대를 열라) 말씀하고 계셨다... "하사엘에게 기름부어"란 표현을 주목하라...엘리야에게 직접 주신 말씀은 마치"엘리야가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임명하게 될 것"이라고 그대로 읽을 수 있으나(그리 이해해서는 안된다..하심이다).. 실지로 하사엘에게 (직접) 통보하는이는 엘리사였다(왕하8:7-15)..."예후에게 기름부어"라는 귀절의 성취도 그러한데, 왕하9:1-13에는, 엘리사 선지자가 그의 제자들 중 하나를 불러서 기름병을 가지고 (길르앗 라못에) 가서 예후에게 기름붓게 하고 있다.. 주님은 엘리야와 엘리사, 그의 제자를 (영적으로 이어진!!) 한 생명 사람으로 보고계신다!!...놀라운 관점을 제시하는 보배로운 귀절이다!!...

.....###엘리사(히 אלישע, 그 Ελισαίος 영 Elisha)###

엘은 '하나님', + 야샤(도움을 청하다, 구하다, 구원하다)를 합성어로 '엘리슈아'를 짧게 부르는 이름.   엘리슈아는 '간구의 하나님' ....엘리 + 예슈아(ישוע), 엘리사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이제, <엘리야와 엘리사, 예수아(예수)>를 합하면 우리 신앙의 답이 나온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그들의 이름으로도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다

---거듭난, 참되게 믿는 그대에게 하나님(여호와, 예수)은 누구신가? 모든 문제의 해결이신분인가?..그분이 진정 그대의 하나님이신가? 

---히브리어 우리말 번역으로 눈의 아들 모세의 시종으로 후계자가 되었던 "여호수아"는 히브리어로 '여슈아,  또는 여호슈아'는 "여호 + 슈아" 합성어로 "여호는 도움/구원이시다"란 뜻. ---히브리어 “예호슈아(יהושוע)를 신약성경(헬라어)에는 “이에수스(Ἰησοῦς) 라고 번역하였고, 영어로 Jesus, 우리말로 <예수>로 번역했다.  히브리어 사촌인 아람어로도 "예호슈아 또는 예슈아(יֵשׁוּעַ)이고,  <Ιησούς, 예수스>이다(마1:21).   다른 곳에서는 예수아, 예수로 번역했다.  ===그분이 그대의 하나님이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인데...그분 자신을 그대에게 나타내실 것이다....TUQ의 전존재의 모든것 부어지심 인한 말씀 하나님의 체현(몸으로 나타나심)이 예호와-예슈아-예수시다!!

.....[역대하 23장]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행방

역대하 23장은 드디어 제칠 년에 이르자,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하여 레위 사람들이 앞장서서 사악한 아달랴를 처단하고, 요아스를 남 유다의 왕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참으로 속이 시원하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순차적으로 풀리기까지 ‘육년’ 이라는 긴 기다림과 철저한 준비가 있었음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은 아달랴가 남 유다에 이식한 바알 종교와 바알 지도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여호와 신앙을 믿는 지도자들은 드러나게 행동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모두 잠적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달랴가 치정하던 그 때에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얼굴도 내 밀수 없는 살벌한 때였고, 어떠한 세력도 펼칠 수 없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동 시대에 북 이스라엘에는 여호와 신앙을 가진 선지자들을 향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이미 있었다. 그로 인해 엘리야는 호렙 산 어느 굴에 은둔한 채,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하였다(왕상 19:14, 18절).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바알을 섬겼던 아합-이세벨의 박해와 핍박이 어찌나 컸던지, 엘리야 생각에는 생존한 하나님의 선지자라고는 자신 혼자였을 것이라 여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칠천 명이 더 남아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남기셨던 것이다. 시대가 어두울 때, 신앙의 박해가 심할 때, 삶이 곤고하고 척박할 때, 그래서 믿는 사람보기가 드물다고 여겨질 때,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생각지도 않는 칠천 명을 남겨주신다. 왜 남기실까? 육년의 박해와 핍박 시기 속에서 이들을 준비시켜서 제칠 년의 때에 중요하게 사용하기 위함이다. 엘리야 외에 남은 칠천 명의 행방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그들의 행방을 역대하 23장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함께 요아스를 왕으로 등극시키는데 주축을 이룬 이들이 바로 그 칠천 명이었다. 역대기에는 그들을 일컬어 ‘제사장들과 수종 드는 레위사람들과 유다 사람들 그리고 여호와 전의 직원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4,6,18절). 게다가 악한 아달랴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이들도 그 칠천 명이었다. 그 뿐 아니다. 바알 신당을 부수고, 바알 대제사장 맛단을 죽인 장본인들도 그 칠천 명이었고, 남 유다에 여호와 신앙이 재정립되는데 주력을 아끼지 않은 이들도 바로 그 칠천 명이었다.

하나님은 헛된 말이나 과장된 말을 결코 하시지 않으신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다만 제칠 년이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묻혀 있었을 뿐이다. 때가 되자,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너무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것이다. 시대가 암울하고 박해와 핍박이 여전한 육년 동안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칠천 명에 속하는 일이다. 

제아무리 바알 종교가 득세하여 기득권을 행사한다할지라도 거기에 편승되어서는 안 된다. 독야청청(獨也靑靑)이라 하지 않았던가! 

홀로 푸름을 자랑하듯, 시대가 어둡고 박해와 핍박이 심할수록 신앙의 절개를 더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제칠 년이 되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그 칠천 명의 역할은 무궁하리라. 그 칠천 명 속에 우리가 포함되기를 소망한다.

주님! 어려운 때일수록 신앙에 더욱 신경 쓰게 하소서. 절대 다수가 바알에게 무릎 꿇는 시대 속에서 유일한 칠천 명에 속하는 복이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요긴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하소서.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다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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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소명 따로 구원 따로?? (구원받았으면 됐지, 왜 사명/소명따라 고난받으라 강권/강요하는가??라는 ((세상적/사탄적/육적)) 빈정거림의 질문에 대해....주님 나라에는 그런 "따로~" 구원이란 결코 없다!! = 그것은 악한자의 궤계일뿐이다!!...구원 받는자마 곧바로 [거듭난 생명 그리스도를 사는] 사명자요 소명자로서 살도록, 그 열매를 기다리고 계심을 반드시 명심하라....[딤후1:7-9..*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7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or cowardice or fear, but [He has given us a spirit] of power and of love and of sound judgment and personal discipline [abilities that result in a calm, well-balanced mind and self-control]. 8 So do not be ashamed to testify about our Lord or about me His prisoner, but with me take your share of suffering for the gospel [continue to preach regardless of the circumstances], in accordance with the power of God [for His power is invincible],for He delivered us and saved us and called us with a holy calling [a calling that leads to a consecrated life—a life set apart—a life of purpose], not because of our works [or because of any personal merit—we could do nothing to earn this], but because of His own purpose and grace [His amazing, undeserved favor] which was granted to us in Christ Jesus before the world began [eternal ages ag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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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ings 19. Amplified Bible

===Elijah Flees from Jezebel

1 Now Ahab told Jezebel all that Elijah had done, and how he had killed all the prophets [of Baal] with the sword. 2 Then Jezebel sent a messenger to Elijah, saying, “So may the gods do to me, and even more, if by this time tomorrow I do not make your [a]life like the life of one of them.” 3 And Elijah was afraid and arose and ran for his life, and he came to [b]Beersheba which belongs to Judah, and he left his servant there. 4 But he himself traveled a day’s journey into the wilderness, and he came and sat down under a juniper tree and asked [God] that he might die. He said, “It is enough; now, O Lord, take my life, for I am no better than my fathers.” 5 He lay down and slept under the juniper tree, and behold, an angel touched him and said to him, “Get up and eat.” 6 He looked, and by his head there was a bread cake baked on hot coal, and a pitcher of water. So he ate and drank and lay down again. 7 Then the angel of the Lord came again a second time and touched him and said, “Get up, and eat, for the journey is too long for you [without adequate sustenance].” 8 So he got up and ate and drank, and with the strength of that food he traveled forty days and nights to Horeb (Sinai), the mountain of God.

===Elijah at Horeb

9 There he came to a cave and spent the night in it; and behold,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him, and He said to him,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10 He said, “I have been very [c]zealous (impassioned) for the Lord God of hosts (armies) [proclaiming what is rightfully and uniquely His]; for the sons of Israel have abandoned (broken) Your covenant, torn down Your altars, and killed Your prophets with the sword. And I, only I, am left; and they seek to take away my life.”

11 So He said, “Go out and stand on the mountain before the Lord.” And behold, the Lord was passing by, and a great and powerful wind was tearing out the mountains and breaking the rocks in pieces before the Lord; but the Lord was not in the wind. And after the wind, [there was] an earthquak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earthquake. 12 After the earthquake, [there was] a fire, but the Lord was not in the fire; and after the fire, [there was] the sound of a gentle blowing. 13 When Elijah heard the sound, he wrapped his face in his mantle (cloak) and went out and stood in the entrance of the cave. And behold, a voice came to him and said,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14 He said, “I have been very zealous for the Lord God of hosts (armies), because the sons of Israel have abandoned (broken) Your covenant, torn down Your altars and killed Your prophets with the sword. And I, only I, am left; and they seek to take away my life.”

15 The Lord [d]said to him, “Go, return on your way to the Wilderness of Damascus; and when you arrive, you shall anoint Hazael as king over Aram (Syria); 16 and you shall anoint Jehu the son of Nimshi as king over Israel; and anoint Elisha the son of Shaphat of [e]Abel-meholah as prophet in your place. 17 It shall come about that Jehu shall put to death whoever escapes from the sword of Hazael, and Elisha shall put to death whoever escapes the sword of Jehu. 18 Yet I will leave 7,000 [survivors] in Israel, all the knees that have not bowed down to Baal and every mouth that has not kissed him.”

19 So Elijah departed from there and found Elisha the son of Shaphat, while he was plowing with twelve pairs of oxen before him, and he with the twelfth. Elijah went over to him and threw his mantle (coat) on him. 20 He left the oxen and ran after Elijah and said, “Please let me kiss my father and mother [goodbye], then I will follow you.” And he said to him, “Go on back; for what have I done to [stop] you?” 21 So Elisha left him and went back. Then he took a pair of oxen and sacrificed them and boiled their meat with the implements of the oxen [as fuel], and gave the meat to the people, and they ate. Then he stood and followed Elijah, and served him.

===Footnotes

1 Kings 19:2 Lit soul.

1 Kings 19:3 Beersheba was about ninety miles south of Jezreel and was not part of Ahab’s kingdom.

1 Kings 19:10 Or jealous, i.e. intolerant of unfaithfulness.

1 Kings 19:15 God tells Elijah how to complete the destruction of the worship of Baal. First, Hazael was to be placed on the Aramean (Syrian) throne in order to attack Ahab. Second, when Ahab was weakened, Jehu was to seize his throne because he opposed the worship of Baal and was a powerful military man. Third, Elijah was to appoint Elisha as his successor, as the one who would, along with Jehu, strike down Baal’s remaining followers. 

1 Kings 19:16 This city was located in the tribal territory of Manasseh in the Jordan River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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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9장 (개요)

앞 장에서는 우리가 엘리야를 이스르엘의 입구에 남겨 두었다. 그래서 그는 공중 앞에 드러났고, 모든 백성의 눈이 그에게 쏠리게 했다. 

본 장에서는 그가 살아나기가 어렵게 되자, 다시금 도망쳐서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간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개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변덕에 대한 형벌로 보아야 한다. 

백성들이 듣고자 아니할 때에, 하나님이 그들의 선생들을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 놓는다는 것은 공의로운 일이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필 수가 있다.

1. 불구대천의 원수인 이세벨의 원한으로 인해, 엘리야가 배척당한다(1-3).

2. 추방 중에도, 언약의 벗인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1)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를 먹이셨는가?(4-8)

   (2)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했으며 자신을 하나님께 나타내었는가?(9, 11-13)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불평을 들어주시고(10-14), 행할 바를 그에게 명하시고(15-17), 격려하셨는가?(18)

3. 엘리사가 합류함으로써, 엘리야가 추방에서 돌아왔을 때 어떻게 그 손이 강해졌는가?(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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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엘리야(왕상 19:1-8)

대부분 이런 상상을 할 것이다. 

즉 그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그처럼 공개적이면서도 현명하게 나타난 것을 보았고, 엘리야와 바알 사이의 투쟁의 그처럼 분명한 결말을 보았고, 그것이 엘리야에게는 영예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당황이,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보편적인 만족이 돌아가게 되었고, 또 그들은 엘리야의 기도가 하늘에서 불과 물을 모두 내려오게 하는 것을 체험했고, 더구나 그 두 가지는 모두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니, 불은 그들의 제물을 받아들이신 것을 뜻하고, 물은 “그들의 유업이 곤핍할 때에 새 기운을 주시는” 것임을 목격했기 때문에, 흔히 어느 누구라도 이제는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회심하고, 엘리야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사자로 삼아, 그 후로는 그가 총리대신이 되어 그의 명령이 임금이나 나라 법과도 같이 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와는 정반대여서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신 그를 멸시하여, 그를 존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돌보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아무 소용도 닿지 않게 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스라엘 땅에는 큰 축복임이 틀림없는 그가, 이제는 구박을 받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Ⅰ. 아합은 이세벨을 부추겨 엘리야에게 몹시 성을 내게 했다. 

생각건대, 이세벨은 국왕의 아내이지만 사실은 섭정을 하는 여왕이었을 것이다. 

마치 후일 황태후가 되었을 때 오만한 여인이 되어 국왕과 그 왕국을 조정하여 마음대로 했던 때와 같았을 것이다. 

아합의 양심으로는 엘리야를 핍박하려고 하지 않았으리라(누군가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의 혈통과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자임을 상기시켜 주어서, 그것이 그의 행동의 자유를 억제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모든 것을 알려 주었다(1절). 그것은 그녀를 납득시킨 것이 아니라, 단지 격노케 했을 뿐이다. 

아합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바를 이야기하지 않고, 마치 어떠한 주문이나 마력으로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을 가져왔으므로 하나님의 역사는 그 가운데 작용하지 아니한 것처럼, “엘리야”가 행한 바를 알려 주었다. 

더욱이 그는 마치 그녀가 엘리야에게 노하기를 바라기라도 한 듯,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살해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아합은 어느 누구도 그 이름에 합당한 자가 없다는 듯이, 바알의 선지자들을 “그 선지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마음은 그들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살해한 것을 엘리야의 범죄라고 악화시켰던 바, 그것은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살해한 보복이라는 것(18:4)을 주지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본인들은 수치심이나 공포감 때문에 악행을 하지 못하면서도, 남을 선동하여 그런 일을 행하게 하는 자는, 마치 자진해서 그러한 짓을 행한 것처럼 그 책임을 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Ⅱ.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저주의 경고장을 보냈다(2절). 

맹세코 24시간 내에 그를 [850명의 바알숭배 선지자 무리를 삽시간에 죽인 것처럼] 죽여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가 당장에 시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오래지 않아 꼭 하리라는 결심이다.

육적인 마음은 그 마음을 오히려 회개시켜 하나님께 복종케 해야 할 것을 통해서도 다시금 하나님께 대해서 더 완악해지고 원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녀는 자기의 신들을 두고 맹세하고, 미친 자처럼 사납게 날뛰며, 하나님의 허락이라는 아무런 단서도 없이, 엘리야를 살해하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이 저주받으리라고 장담했다. 

잔인함과 담대함이 흔히 핍박자들에게서 서로 만난다(공존한다). “내가 쫓아가서, 탈취하리라”고 했다(출 15:9).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그에게 알려, 그로 하여금 도망갈 기회를 주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인지? 

엘리야가 담대한 사람이어서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막강한 존재로 생각하여, 자기가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는 그녀가 자신의 광포에 그처럼 이성을 잃게 된 데는 특별한 섭리라도 있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비록 그녀가 그의 목숨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았다 해도, 이 때에는 “모든 사람이 그를 선지자”, 그것도 위대한 선지자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서워” 감히 그의 일을 간섭하지 아니하려 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전갈을 보낸 것은, 단순히 그에게 겁을 주어 당분간이라도 물러가게 함으로써, 엘리야가 자기의 일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것일수도 있다. 

맹세와 저주를 포함한 그녀의 협박의 속셈은, 진정 자기가 그를 살해하리라는 의도를 밝힌 것이 아니라, 단지 그로 하여금 그런 사실을 믿게 하려고 함이었던 것뿐이다. 

그녀가 그 이름을 두고 맹세한 그녀 자신의 신들은 그녀에게도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못했다.

Ⅲ. [그런데, 왠일인지, 그토록 대담한 엘리야는] 이에 엘리야는 매우 놀라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아마 밤중에) 도망하여 브엘세바에까지 이르렀다(3절). 

우리는 이 일로 그를 칭찬해야 하겠는가? 결코 칭찬하지 않는다. 

최근에 아합과 바알의 모든 선지자들과 대적했던 그 용기는 어디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여호와의 불이 강림할 때, 그의 제물을 드려 자기를 지키던 그 용기는 어디에 갔는가? 

하늘과 땅,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주는 공포 사이에서도 용감하게 버티어 섰던 그가, 이제 교만하고도 정욕에 빠진 한 여인의 허약한 협박에 떨고 있는 것이다. 

“주여, 도대체 인간이 무엇입니까!” ...위대한 신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결같이 강인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이 중대한 시기에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크게 도움이 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했다. 이전에 그에게 위협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몸을 숨기라고 명했다(17:3). 따라서 그는 지금도 몸을 숨기는 것이 무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Ⅳ. 그는 브엘세바를 떠나 이스르엘 사람들이 유리 방황했던, 저 황량하고도 광막한 광야를 향해 들어갔다. 

브엘세바는 이스르엘에게는 매우 원거리에 있었다. 여호사밧과 같이 매우 선량한 왕이 다스리는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 곳에서는 안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이 위험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는데도, 두려움이 그림자같이 쫓아가서 거기서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하룻길의 여행을 하여 사막(광야)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엘리야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보다 더 자유롭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해 그 곳으로 들아갔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기 위해 산으로 올라갈 때, 그 종들을 산기슭에 남겨 두었고,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을 떠났던” 것처럼, 광야에서 은밀히 지내기 위해 엘리야도 자기의 사환을 브엘세바에 머물게 했다. 아마 그렇게 한 것은 자기 사환을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 사환은 아직 광야의 고생을 하기에는 젊고 약했다. 그런 고생을 시키는 것은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격이리라. 

이같이 우리는 우리의 휘하에 있는 자들의 처지를 잘 생각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처지를 그렇게 생각해 주시기 때문이다.

Ⅴ. 긴 여행에 몹시 피곤하게 된 그는 (졸릴 때의 어린애들이 그렇듯이) 보채면서 “죽기를 원하였다”(4절). 

“그는 죽기를 구하였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죽기를 구하였다.” --정말, 아이러니칼한 표현이다.

선한 사람에게는 죽음이 곧 생명이 되기 때문이며, 육체의 사망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죽기를 소원했던 이유는 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듯, 은총에 대한 간절한 열망도 아니다. 

욥의 소망처럼 자기의 타락을 바라는 욕정에 찬 소원이었다. 이러한 식으로 자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죽기에 적합한 처지가 못된 자다. 

이세벨이 엘리야의 처형-죽음을 맹세한 바 있기 때문에, 그는 짜증이 나서 죽음을 찾아 헤매며 죽음을 간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특수한 뜻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그의 부드러운 자비는 위대하다―의 손에 의해서 죽기를 바란 것이지, 사람―그의 부드러운 자비는 잔인성이다―의 손에 의하여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그는 이세벨의 경고에 따라, 바알의 선지자처럼 죽기보다는 차라리 광야에서 죽기를 바랐다. 

그것은 바알 숭배자들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만은 없도록 하고자 해서였다. 

그들은 하나님 옹호자를 거꾸러뜨리고 나면, 자기들이 이스라엘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자처할 자들이었다.

이제 그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나는 할 만큼 행하였고, 견딜 만큼 견디어 냈습니다. 사는 것이 싫어졌습니다”라고 탄원한다. 

저 세상에서 행복을 확보한 자는 머지않아 이 세상의 행복에 진력을 느낀다. 

이제 그는,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와 같은 곤고한 노역을 그들보다 더 잘 버텨 낼 만큼 낫지도 못하온데, 어찌하여 내 열조들보다 더 오래 이러한 고역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탄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바로 “내 주 엘리야”란 말인가! 저 위대하고도 용감했던 정신이 이다지도 위축되었는가?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자신에게 버려두신 것이다. 그리하심은 엘리야가 담대하고 강인했던 것은, “여호와와 그 크신 권능이 그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요, 엘리야 자신은 “그의 열조나” 형제“보다 낫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Ⅵ.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광야에서 그를 먹이셨다. 

엘리야는 스스로 광야의 위험과 곤궁 가운데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만일 광야에서 하나님이 자비롭게 그를 구원해 주시지 아니했던들, 그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고집이 센 자녀들이 받아 마땅한 것 이상으로 얼마나 인자스럽게 그 자녀들을 대하여 주시는지! 

엘리야는 뿌루퉁해져서 죽고자 했고, 하나님께서는 [어쩌면]엘리야가 필요치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를 쓰시고 영예롭게 하고자 하여 한 천사를 보내 주셔서 “그를 살게 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시고, 우리의 우매하고도 정욕적인 요구를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의 경우는 필경 악화될 것이다. 

엘리야는 죽기를 바라서, “누워 잤다”(5절). 잠자다가 다시 깨지 않고 죽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자다가 깨어 보니, 떡과 물이 잘 마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웠던 바는 한 천사의 돌봄을 받고 있음을 안 것이다. 

천사는 그가 잘 때에 보호해 주었고, 음식을 마련해 놓고는 음식을 먹으라고 두 번씩이나 그를 불렀던 것이다(5, 7절). 

이렇게 천사들의 봉사로 보충받는다면, 그로서는 인간의 몰인정함을 탓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식량 조달을 받은 그는,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던, 바알의 선지자들”보다 자기가 훨씬 잘 먹었다고 생각해야 마땅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느 곳에 처하든지 간에 여전히 아버지의 땅 안에 존재하듯이, 여전히 아버지의 감찰하시는 바와 돌보심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광야에서 길을 잃는다 하더라도,결코 그들을 놓치지 아니하시며, 그 곳에서 그들은 “하갈처럼 살아 계셔서 그들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창 16:13).

Ⅶ. 그는 이 음식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까지 갔다(8절). 

아마도 엘리야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여호와의 성령께서 그를 이끄셨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교제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모세를 통해 준 그 율법이 그에 의해서 부활되게 하려 했을 것이다. 

그 천사는 두 번씩이나 그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그 앞에” 있는 “여행길”의 극심함 때문이다(7절). 

비록 우리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는지, 즉 어떤 일이나 시련을 주실는지를 알고 있어서, 예지의 부족으로 우리 자신은 알지 못할 때에라도 우리에게 “흡족한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겠다. 

어떤 항해를 해야 될지를 정하신 이가 거기에 따라서 맞는 배를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 얼마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살아가도록 지켜 주셨는지를 살펴보자. 

그는 어떤 때는 까마귀를 통해 여러 가지 음식을 먹었고, 또 어떤 때는 천사를 통해서 먹었다. 

이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사십 일간이나 휴식과 수면도 취하지 아니하고 먹지 않고도 살아 있게 지켜 주셨다. 

그것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일 년을 하루같이 방황했듯이, 생명을 유지할 음식을 조금도 간구하지 아니한 채 계속해서 사막의 미로를 가로지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식물을 필요로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원하지도 아니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바로 이 장소는 엘리야에게 만나를 회상시켜 주었을 것이며, 용기를 주어서, 옛날 이스라엘이 지금의 그처럼 초조하여 하나님을 불신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듯이, 엘리야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기에서도 자기를 돌보아 주시리라는 소망과 때가 이르게 되면 이 자리에서 그를 인도해 가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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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와 하나님과의 교제(왕상 19:9-18)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필 수가 있다.

Ⅰ.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는 호렙 산에 있는 한 굴에 거하게 되었다. 

그 산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현시하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여호와가 모세 앞을 지나시며 자기 이름을 밝히 드러내실 때에”(출 33:22), 모세가 숨었던 바로 그 동굴이거나 바위틈이었을 것이다. 

엘리야가 이 곳까지 와서 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으나, 다음의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첫째, 자신의 울적함을 충족하기 위함이었든지, 아니면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율법이 부여되었던 곳이요 그처럼 놀라운 여러 가지 역사가 일어났던 그 유명한 장소를 눈앞에 봄으로써 자신의 믿음과 헌신에 도움이 되게 하고, 모세가 영광의 하나님을 접하게 된 바로 그 곳에서 자신도 하나님을 만나 뵙고자 했을 것이다. 

*둘째, 그렇지 않으면, 개심하기를 싫어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포기한다는 표시였을 것이다(후자의 경우, 이는 예레미야의 소원과 일치하는 것이다. 렘 9:2에 이르기를,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말 그러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저버리셨다는 흉조일 수 있었다. 아니면, 이는 그가 여하한 곳에서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사도가 언급한 것도 바로 이 선한 사람이 겪어야 했던 이 곤경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즉 히브리서 11장 38절에 이르기를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했다.

Ⅱ.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은 [극한 우울과 자기연민으로 인해 자포자기의 탈진 상태에 빠진 엘리야를 친히 찾아와 부드럽고 세미한 음성으로 일깨우시며 요구하고 계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였다”고 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눈과 그의 팔과 말씀의 범위에서 떠날 수 없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참조)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마치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는 자들을 [결코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며 끝까지 붙들어] 돌보아 주실 것이며,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을 찾으시고 위로하시며 인정하여 주셔서, 영원무궁한 인자함으로 그들을 모아 주실 것이다. 보라, 요한이 밧모 섬으로 추방당해 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계 1:9).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하신 질문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는 것인데(9절), 13절에서도 거듭 묻고 있다. 

이것은 곧 일종의 질책임에는 틀림없다. 그 이유는,

1. 이 곳까지의 그의 도피 때문이다. 

“어찌하여 너는 집에서 이다지 멀리 떨어져 있게 되느냐? 네가 이세벨을 피하느냐? 네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할 수 없단 말이냐?” 

본문에는 “너”라는 대명사가 강조되고 있다. “어찌하여 네가! 그처럼 위대한 인간이요, 위대한 선지자이며 결단력으로 그다지도 명성을 떨쳤던 네가, 자기 나라를 피하고 자신의 개성을 이처럼 내버린단 말인가?” 

이 같은 비겁성은 또 다른 경우라면 변명할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그다지 좋지 못한 본보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리이까?”(느 6:11) “삼목이 그처럼 요동한다면 잣나무는 윙윙거린다.”

2. 이 곳에 고착해 동굴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네가 여기 이 굴 속에 있느냐? 이 곳이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은신할 곳이냐? 지금이 너 같은 사람이 은신할 때냐! 지금은 세상이 너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나님이 전에 엘리야를 은거하게 했을 때에는(17장), 그것이 가난한 사렙다의 과부에게는 축복이었으나, 여기에서는 그런 선행의 기회마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의당 있어야 할 장소에 있으며, 우리가 행할 바 책무를 다하는 처지에 있는지 아닌지를 이따금 자문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내가 의당 있어야 할 곳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불러내셔서 있으라 하신곳 ;; 소명하시는 곳, 내 직무가 있는 곳, 과연 [주 보시기에] 내가 주님의 쓰임새가 있는 곳에 있는가?”

Ⅲ. 엘리야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자신을 해명하는 기사가 두 번 나온다(10절). 그것은 동일한 질문에 대한 반복 대답이다(14절).

1. 그는 자신의 은신을 변명하고 있다. 

이것이 개심을 위한 자신의 열의의 부족의 탓이라고 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단지 그 노력이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은, 선행의 소망이 있는 한은, 그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별히 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헛되이 수고했다.” 그의 온갖 노력은 [갈멜산에서의 영광스런 승리로 인해 마땅히 아합과 이세벨, 온 이스라엘백성들이 주 이름부르며 회개하고 돌이키게 되리라 기대했던 바와는 정반대로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위협에 질려서 아연실색하며 갈멜산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효력도 내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고 조급증과 안달하는 중에 극한 우울과 공황, 자기연민, 자포자기상태에 이르게되고 몹시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그 일을 포기할 때요, 고쳐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애통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너의 독방으로 돌아가서, 절규하라.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2. 그는 죄 가운데 완악하고 불신앙의 극치에까지 이르게 된 백성들을 불평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렸나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저들을 저버리게 된 이유입니다. 그 누가 이들 가운데 버티어 서서 온갖 신성한 것이 파괴되고 헐리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단 말입니까?”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한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롬 11:2, 3). 

그는 빈번히 자진해서 그들의 대변자가 되었으나, 지금은 불가피하게 하나님 앞에 저들을 힐난하는 고발자가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요한복음 5장 45절에는 “너희를 고소하는 자가 있으니 곧 너희가 희망을 걸고 있는 자 모세니라”고 했다. 

자기들을 고발하는 증인과 거역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기도를 얻는 자들은 진정 비참한 것이다.

(1)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다는 혐의로 저들을 고발하고 있다. 

이들은 비록 언약의 징표와 서약으로 할례를 시행하고 있었으나, 그 언약의 목적이 되는 예배와 봉사는 중지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규례를 소홀히 하고, 그와의 교제를 와해시키는 자는 진정 그의 언약을 저버리는 자요, 동시에 그와의 맹약을 파기하는 자다.

(2) “주의 단을 헐었기” 때문에, 저들을 돌보지 아니하고 부패하게 내버려 두었을 뿐만 아니라, 바알을 숭상하는 저들의 열의로 인하여 고의적으로 자신들을 멸망시켰다고 비난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선지자들이 소유하고 있던 개인 제단이요, 거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도 없거니와 송아지나 바알을 섬기려 하지 않았던 선량한 백성들이 참례하던 제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독립적인 제단은 비록 교회의 통일성을 저해하는 것이었으나 건립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성실하게 목표 삼고 그를 충성스럽게 섬기고자 하던 사람들이 참례했다. 

따라서 외관상의 분열은 용서되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과 매한가지로 그 제단들을 인해 저들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러한 제단을 헌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죄라고 엘리야가 부르짖은 것이다.

(3) “그들이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라고 했다. 

아마도 이들은 제단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을 말할 것이다. 

이세벨이 이들 선지자들을 살해했으나(18:4), 이에 대한 범죄 혐의는 이들 백성들 공동체에 씌워지는데, 이는 그들 대다수가 “그들의 죽음에 찬성하고” 흡족해했기 때문이다.

3. 엘리야는 이 사막에까지 물러나서 굴속에 은거하게 된 이유를 밝힌다.

(1) 그것은 여하한 목적을 위해서 그가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나만 남았사오며, 아무런 선량한 목적이라도 나를 찬성하고 지지해 줄 이가 아무도 없나이다. 백성들 모두가 한결같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나를 지지하려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호하려 하지도 아니하나이다. 한때 쟁취했던 목표물도 지금은 상실하고 말았으며, 내가 저들을 개심케 하는 것 이상으로 이세벨이 저들을 더욱더 용이하게 타락케 할 수 있나이다. 어찌 한 사람이 수천 명을 대항할 수 있겠나이까?” 

성과를 이루지 못한 데서 오는 절망이 수많은 훌륭한 기업을 저해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감히 홀로 있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2) 안전하게 공개석상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러므로 개심하기 싫어하는 자들을 개심케 하는 열매 없는 노력에 내 생명을 잃느니보다는 쓸모 없는 황야에서 생활하는 편이 낫습니다.”

Ⅳ. 하나님이 친히 그에게 현시하셨다. 

그가 하나님을 뵙기 위해 이 곳으로 왔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상면해 주시리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앞을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동굴 안에 있게 하셨으나, 엘리야는 그 밖으로 나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본문에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11절)고 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호렙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던” 때처럼, 하나님의 “어떤 모양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1. 그는 강한 바람 소리를 듣고, 그 가공할 만한 효과를 목도했다. 

그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갈랐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늘과 땅의 재판장 앞에서 나팔이 그의 천사들을 통해서 울렸다. 

그 재판장은 “영들” 곧 바람을 자기의 천사로 삼으신 자다(시 104:4). 그 나팔 소리가 너무나 크게 울려, 땅이 진동했을 뿐만 아니라 갈라지기도 했다.

2. 엘리야는 지진의 진동을 느꼈다.

3. 그는 불의 분출을 목도했다(12절). 

이러한 것들은 예정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 도착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사건들이다. 

천사들이 그 일에 고용되었는데, 하나님은 “화염으로 자기의 천사를 삼으셨다.” 

이는 그들로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그 분 앞에 행군하여, “이 사막 가운데에 우리 하나님의 대로(大路)를 예비하기” 위함이었다.

4. 그러나 최후에 그는 한 “세미한 소리”를 감지했는데,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셨다”고 했다. 

하나님은 곧 그 세미한 소리를 통해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요,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다. 

경외심에 눌리게 되는 자는 주의를 환기하게 되어 겸손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같이 무시무시한 소리가 아니라 부드럽고도 온화한 속삭임으로 그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방도를 택했다. 

그가 이것을 감지했을 때,

(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리고 자신의 눈을 현혹케 하고 자신을 압도하는 것을 자각하여, “그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웠다.” 

천사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경외하는 표시로 “그 얼굴을 가린다”(사 6:2). 

그러나 엘리야는,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는 놀라운 그 의무에서 도피하고 비겁자가 된 데 대한 수치심의 표시로 그 얼굴을 가렸다. 

바람이나 지진, 불 따위가 그의 얼굴을 가리게 한 것이 아니라, 조용한 목소리가 얼굴을 가리게 했던 것이다. 

은혜에 찬 사람은 여호와의 공포보다는 그의 애정에 찬 자비로움으로 더욱 큰 감동을 받게 된다.

(2)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들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동굴 입구에 섰다. 

이 곳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서 몸소 자신을 현시하시는 이러한 방법은, 이전에 바로 이 장소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① 모세의 때에는 폭풍과 지진, 그리고 불이 있었다(히 12:18).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실 때에는 그가 친히 “자기의 자비를 선포하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세한 소리”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셨다.” 곧 “말씀이” 계셨다.

② 모세 당시에는 처음에는 공포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말씀의 소리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지금 엘리야는 그 율법을 소생케 해야 하는 부름을 받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는 첫 번째 두 가지 계명을 소생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 율법은 운영하는 방법을 지시받고 있는 것이다. 

말씀의 사역자란 모름지기 주 하나님의 베푸심따라 폭풍-태풍, 지진과 불꽃과 충천하는 화염같은 놀라운 표적으로 때때로 백성들을 깨우치고 겸손하게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생명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것임에 주의하자.

다만 말해야 할 때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따라 조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저들을 설복하고 확신시키도록 진력해야 하되, 결코 저들을 저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맡아 백성에게 전하는 자의 마땅한 바이다.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어떤 경천동지할 기적일 해도 참생명 하나님안으로 믿어 들어가 하나되어 그분을 누림, 오직 그것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일 뿐임을 명심하자...

③ 그 당시는 하나님께서 공포로써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도입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서에서는 조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그 말씀에 대한 공포가 우리로 두렵게 해서는 안 된다(히 12:18 이하 참조).

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실행하라고 주시는 명령.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전에 내리신 질문을 반복하신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기는 네가 지금 있을 곳이 아니니라.” 

엘리야는 전과 동일한 대답을 하며(14절),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절과 그들의 신앙의 파괴 등을 들어 불평한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신다. 그가 “죽기를” 원했을 때(4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우둔함을 따라서 그에게 그대로 들어주지 않으시고, 그를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남게 지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죽지 않게끔 마련해 주셨다. 그래서 그는 죽지 않고 승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가 자신의 낙담을 호소했을 때는(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불평이 있다면, 자기 주인 이외에 다른 어느 곳으로 가야겠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대로 [그의 연약한, 실망에 가득찬 쓰라린 마음 상태를 불쌍히 여겨 그냥 받아들여 다정다감함으로써 위로하시며 인정해 주시고 부드럽고 친절함, 온유함으로 엘리야의 사역이 다 마치기전까지 홀로 두지 않으시며, 당신이 결코 그를 떠나지도 외롭게 버려두지도 않고 보호하실 것을 주님이름으로 보증하시며 새로운 소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 강건함을 주심으로써 새로이] 응답해 주셨다. ::: 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듣기는 주님의 극진한 사랑에 겨워 자원하여 주를 따르기로 결심하는 자 각자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전환을 이루는 것임을 명심하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마음을 다시 [ 전적으로 주 의지하며 교통함 안으로 돌이키도록 이끄시ㄹ고] [남은 사역의 길 다 완수하도록]그를 사역-섬김에로 되돌려 보내어,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15절),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그리고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로 삼아 선지자의 직능에 임명하라고 지시하신다. 

이러한 사건은 하나의 예언적 사건이다. 

즉 하나님께서 장차 “타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응징하고, 그들에게서 당신 자신의 뜻을 펴시며, 배약(背約)의 복수를 갚으실 것”(레 26:25)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사악함이 처벌되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기근의 심판은 너무나도 관대한 것이어서 이들을 개심에 이르도록 하지는 못했다. 

이들이 개심하기 전에 심판은 거두어졌기에, 엘리야가 이르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내가 그토록 열심이었으나, 하나님 자신은 마음 쓰시는 것 같지 않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냐. [그렇게 느꼈구나 엘리아야, 그러나 내게 단계별 계획과 경략이 있단다, 그러므로 나를 나 주의 어떠함을 경험적으로 더 깊이 친밀히 알게 되며 신뢰하고 네안에 내주하며 떠나지 않을 나 주를 더 친밀히 알게 됨을] 만족히 여기거라. 그 어느날, 때가 오면 [나의 뜻한 바가 정녕] 이루어지리라. 저들이 아직은 형벌을 받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저 경멸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심판이 마련되어 있느니라. 사람들이 택하여졌으니, 이제 지명을 하리라. 그 일을 할 자들이 지금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니라” 하셨다.

1. “하사엘이 아람 왕이 되면,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유혈극을 벌이게 하여(왕하 8:12) 그들의 우상 숭배를 교정할 것이니라.”

2. “예후가 이스라엘 왕이 되기에 이르면 왕족과 혈투극을 벌여서 우상을 세워 섬기고 있는 아합 일가를 철저히 파멸하고 말 것이라.”

3. “엘리사는 네가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동안 네게 큰 힘이 될 것이며, 네가 떠나가고 없게 되면 너의 일을 계승하여 이스라엘의 변절에 대한 산 증인이 될 것이며, 우상 숭배를 하는 도성, 벧엘의 자녀들을 살해하기까지에 이를 것이니라.”

사악한 자들이 남아 있는 것은 심판을 받기 위함임을 깊이 명심해 두어야 하겠다.

“재앙이 악한 죄인들을 추적한다.” 

따라서 재앙을 면할 도리가 없으며, 그것을 면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한 사람의 칼끝에서 다른 사람의 칼끝으로 피해 다니는 것에 불과하다. 

“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라”(렘 48:44 참조). 

엘리사는 “성령의 검”으로 하사엘의 전쟁의 칼과 예후의 정의의 칼을 피하는 자들의 양심에게 겁을 주고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그가 악인을 죽일 것이라”(사 11:4; 살후 2:8; 호 6:5).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시간에 자기의 일을 해 줄 도구가 모자라는 일이 없다. 

즉 한 도구(사람)가 사라지면 다른 도구들을 세워 자기의 일을 수행케 하신다. 

이 점을 생각하는 것은 선량한 사람들과 성실한 사역자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는 법이다.

Ⅵ. 오직 나만 남았다고 생각했으나 정직을 지킨 이스라엘 사람의 수효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려 주시는 고무적인 통보를 살펴볼 수 있다(18절).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유다 외에, 오바댜의 100인 외에) 칠천 인을 남겼으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한 자라.” 

여기에 깊이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1. 가장 극심한 타락과 변심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당신에게 신실한 남은 자를 남겨 두셨으며, 앞으로도 남겨 두시리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직을 수호하며, 시류(時流)에 굴복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바울 사도도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이와 같은 대답을 언급하고 있으며(롬 11:4), 그것을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복음을 거역하던 자기의 시대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5).

2.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고 이들을 다른 자들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자신을 성별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본문에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해) 남겼노라”고 했다. 이는 “자비로우신 선택에 따라” 남게 됨을 일컫는 것이다.

3. 이는 타락한 전체 민족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남은 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수천 수만이나 되는 이스라엘에 비하면 칠천 명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모든 세대의 남은 자를 한데 모으면 훨씬 더 많아지리라. 즉 “각 지파에서 인 맞은” 자들의 수효는 1만 2천 명이다(계 7:4).

4.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은 흔히 그의 숨긴 자다(시 83:3). 

그리고 가시적(可視的)인 교회는 좀처럼 뚜렷하지 못하며, 알곡이 겨 속에 잊혀져 있고, 금이 불순물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키질을 하고, 정제하여, 서로를 분리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5. 우리로서는 알지 못하나, “여호와는 자기의 것에 속한 자를 아신다.” 

그는 은밀한 가운데 감찰하신다.

6. 이 세상에는 현명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선량한 백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 

저들 자신과 하나님께 대한 저들의 열성이 저들로 하여금 타락이 보편화되었다고 생각하게 하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생각하듯이 보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때 그 곳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허다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듯이, 만나게 되리라고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것이다. 흔히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자애보다 훨씬 크고 넓다는 것이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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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의 소명(왕상 19:19-21)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명령 중에서는 최종적으로 지명받지만, 실제로는 첫 번째로 부름을 받게 된다. 

이것은 엘리사를 통하여 나머지 두 사람을 부르시고자 함이었다. 그는 엘리야의 자리를 대신할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자진하여 그를 세우려 하고, 전혀 자기 후계자를 시기하려 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일을 그처럼 훌륭한 사람에게 남기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한다.

엘리사의 소명에 관해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것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놀라운 소명이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그를 발견했든지, 아니면 아마도 그전부터 그와 친밀하여 그를 찾을 곳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엘리야는 선지자들의 교실에서가 아니라 “들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독서를 하거나 기도하고 있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제사를 드리고 있던 것이 아니라 “밭을 갈고” 있었다(19절). 

그는 (그의 잔치를 통해서 보면. 21절) 유력자요, 토지와 소와 종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일을 직접 하는 것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그의 종들을 감독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손수 밭갈이까지도 했다. 

나태라고 하는 것이 결코 인간의 명예가 되지 못하듯이, 농경(農耕)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누구의 치욕거리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우리의 정직한 직업이, 엘리사의 직업처럼, 역시 우리의 하늘의 소명에 조금도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사도들은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듯이, 엘리사는 농업에 종사하는 것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먹이고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에 택함을 입었다. 

엘리사는 결코 엘리야에게 되묻지 아니하고, 이 소명에 참여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를 선택하는 것이니, 이는 먼저 그가 우리를 택하셔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Ⅱ. 그것은 능력 있는 소명이었다. 

엘리야는 다만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을” 뿐이었다(19절). 이것은 우정의 표시다. 

그것은 엘리야가 옷의 보호를 받듯이, 엘리사를 자기가 보호하고 가르치겠다는 것이요, 같은 옷을 입어 하나가 되려는 뜻이었든지, 아니면 엘리야의 영이 그에게 옷 입혀졌다는 표시였다(이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그러했듯이, 엘리야는 자기의 존귀의 일부를 엘리사에게 돌린다. 민 27:20). 

그러나 엘리야가 승천했을 때, 엘리사가 그 겉옷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었다(왕하 2:13). 

그는 즉시 제 마음대로 가도록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자기가 곧장 그를 따르겠노라고 분명히 말했다(20절). 

보이지 아니하는 손이 엘리사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은밀한 권능이 그의 마음을 강력히 움직여, 아무런 외형적 설득도 없이, 그는 자기의 농업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성직에 투신하게 되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바로 그러한 헌신을 즐거이 하게 된다(시 110:3). 그러한 충동을 받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엘리사는 즉시 결심을 내렸다. 그러고는 부모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잠시간의 시간을 요청했다. 

이는 집에 있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를 바랐던(눅 9:16) 사람처럼, 지연시키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입은 바 자식으로서의 존경과 의무를 바치고 싶어서였다. 

엘리야는 그로 하여금 가서 그렇게 하라고 명했다. 조금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아니, 혹시 훼방하고 저해했더라면, 가서 돌아오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강요하지도 않고 엘리사의 의사에 반해 그를 붙들지도 않았다. 앉아서 비용을 계산해 보고, 자신의 행동을 정하라(눅 14:28 참조). 

하나님 은총의 효능이 이와 같이 인간 의지의 타고난 자유를 보존해 주셔서, 선한 사람들이 잘 선택하게 하며, 억지로 억압하여 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의사로 행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Ⅲ. 그것은 엘리사에게 유쾌하며 만족할 만한 소명이었다. 

이는 그가 그의 가족을 위해 이별의 향연을 베푸는 데 나타났듯이(21절), 그의 아버지의 거하는 곳의 모든 안락함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이세벨과 그 일당의 적개심에 그 자신을 내맡기게 했던 것이다. 

선지자들이 나서게 되는 것은 낙심되는 시기에 가서이다. 

혈육과 의논한 사람이라면 엘리야의 겉옷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입어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엘리사는 즐겁게, 크게 만족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나섰다. 

이와 같이 마태도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세관을 떠날 때에, 큰 잔치를 배설했다.

Ⅳ. 그것은 영향력 있는 소명이다. 

엘리야는 그가 강제로 시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그에게 머물지 않았다. 엘리사의 자의에 맡겨 두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 후 곧 일어나서 엘리야를 따랐고, 그와 연합했을 뿐 아니라, 엘리야의 하인처럼 “그에게 수종들었다.” 즉 “그의 손에 물을 부었다”(왕하 3:11). 

젊은 사역자들이 얼마 동안이라도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사역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커다란 유익이 된다. 

연륜은 지혜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들을 수종드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 

가르치기에 알맞은 자들이 되려면 먼저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앞으로 일어나서 (높은 자가 되어) 남을 이끌고 나아가려는 자는 자기들이 먼저 자신을 굽히고 봉사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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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열왕기상 19장

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ㅇ고하니 - 이에 해당하는 '나가드'는 '(세밀히 보고하여) 알게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넌지시 알리다'는 뜻의 어감(語感)이들어 있다. 

때문에 보통 이 동사로 설명되는 관계란 마치 공범자(共犯者)들끼리 갖는 동료의식처럼 친밀한 관계이다. 따라서 아합이 어느 정도로 이세벧과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여기서 알 수 있다. 

한편 본절은 아합이 앞장에서 목도한 이적과 바알 선지자 모두를 칼로 죽인 엘리야의 위업(18:30-467)에 질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국(一國)의 통치자인 아합은 줏대없이 그 모든 사실을 왕후 이세벨(Jezebel)에게 고하고 만다. 이러한 아합의 유약한 면은 본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이세벨의 과단성(果斷性)과 극명하게 대조된다(21:7).

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ㅇ내일 이맘때에는 - 본절은 우리들에게 의문점을 갖게 해준다.즉 진노한 이세벨은 왜 오늘 당장 엘리야를 처단하려 들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위협하여 멀리 쫓아내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Bahr, Keil & Delitzschk, Matthew Henry, Wordsworth). 

왜냐하면 갈멜 산상의 승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환호에 싸인 엘리야(18:30-40)를 직접적으로 처단하기는 어렵다고 이세벨이 판단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세벨의 잔인하고 과감한 성격을 감안할때 그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적어 보인다. 도리어 이세벨은 엘리야를 공개 처형할 의사를 전했다고 봐야 한다. 

즉 이세벨은 다음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를 처형함으로써 전날 백성들이 받은 충격을 무효화하려 한 것이다. 

아무튼 본장은 적어도 이세벨의 위협이 실제적인 생명의 위협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3, 10, 14절).

ㅇ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 여기서 '저 사람들'이란 앞서 엘리야가 처단한 450인의 바알 선지자들을 가리킨다(18:22, 40). 따라서 이 말에는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이세밸의 극심한 증오와 비장한 각오가 들어 있다. 그녀가 아합으로부터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처럼 더욱 강퍅해진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ㅇ신들이...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 이세벨의 맹세 속에 담긴 이 말은 의미 심장하다. 특히 엘리야가 한 분 하나님를 두고 맹세한 것과 비교하면 그 부정적이고 잡다한 인상은 두드러진다(18:15). 

그런데 참신이신 한 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이처럼 주위의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것들을 신격화하게 마련이다. 어쨌든 인간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 따라서 한 분 하나님께 굳건히 헌신하든가 아니면 다른 모든 것에 굴복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할 것이다.

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ㅇ이 형편(形便)을 보고 - 본절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는 단순히 '바라보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문맥상 본절과 같이 번역했을 따름이다. 

한편 어떤 영역본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엘리야가 띠었을 정서적 반응에 주목하여 이를 '두려워했다'(he was afraid)로 번역하였다(Modern Language, RSV). 한글 공동 번역도 같은 경우로써 이와 비슷하게 '두려워 떨며'로 번역하고 있다.

ㅇ그 생명을 위하여...브엘세바에 이르러 - 이세벨의 단호한 경고에 부딪친 엘리야는 할 수 없이도 도피길에 오른다. 

이적과 능력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온 백성들에게 떨쳐 보였던 엘리야(18:30-46)가 불과 하루 만에 이처럼 황망히 도피길에 오르는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칼(ironical)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성정(性情)을 지닌 엘리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엘리야가 행한 이적적 권능이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한편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 네겝(Negeb) 지방의 한 성읍이다. 이곳은 팔레스틴 최남단 지역으로서 곧 헤브론 서남쪽 55km 지점이다. 삼상 3:20 주석 참조.  

따라서 엘리야는 이세벧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남왕국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로 피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ㅇ사환을...어물게 하고 - 엘리야가 행한 이 조치에서 당시 그가 얼마나 큰 좌절감과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가장 큰 승리 뒤에 찾아온 위협은 극도의 무력감과 허탈감을 낳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야기되기 쉬운 극도의 고립감을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조차 동행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Lange).  

***한편 이와 관련하여 엘리야의 피신 경로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 까지의 거리는 160km . 브엘세바에서 호렙까지 350Km***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ㅇ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 이스라엘 역사상 '광야'는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이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이교도의 우상 숭배 영향을 받아야 했던 가나안 정착 시기와 달리,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시절(민 33가1-49)은 그들 역사에 있어 가장 순수한 신앙을 보존했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에게는 혼히 도시 문화에 대한 협오와 함께 광야에 대한 동경이 발견된다고 한다(Talmon). 

더구나 엘리야가 들어간 광야는 '하나님의 산 호롑'으로 나아가는 첫 문턱이다. 즉 처음부터 엘리야는 호렙 산을 목적으로 하고 여정을 출발하였던 것이다 (Hammond).

ㅇ하룻길 -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거리를 나타내던 관용적 표현이다. 정확한 수치로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하룻길'(Day's Joumey)은 약 32-40km이다. 성경총론,'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ㅇ로뎀나무 - 로뎀나무(broom tree,NIV, RSV)는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나 하상(河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이다. 콩과의 식물로서 흰 꽃이나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대개 1-2M의 높이이다. 

오늘날 아랍인들은 이나무를 '금작화'(genista Retem 또는 genista Monoserma)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 주기 때문에 대상(隊商)들에게 매우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사막에 거주하는 족속들은 이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Lange, Robinson,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p. 254).

ㅇ여호와여...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 불과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18:30-46)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하나님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상 선지자 요나도 이와 비슷한 탄원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지 않은가(욘 4:8)!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큰기적과 역사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항상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며 늘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ㅇ넉넉하오니 - 이에 해당하는 '라브'는 '충분하다'(enough)는 뜻이다. 그러나 본절은 문자대로의 뜻과는 달리 희망을 상실한 사람의 체념율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은 그러한 뜻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제 다 끝났습니다"로 표현하고 있다.

ㅇ내 열조(列祖)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 '낫다'에 해당하는 '토브'는 보통 '선하다', '좋다"는 뜻이다. 그리고 질이나 가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우수한 경우를 가리켜 쓰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자신이 선조들에 비해 나을 바가 없다고 한 말은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가? 

우선 본절은 엘리야가 자신을 '못난 놈'으로 자조하는 비애 섞인 말임을 명확히 하자. 그 다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돌아오도륵 하는 일을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던 사람임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 사명이 성공한듯 보이는 순간에 닥친 위기(1, 2절)는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탄속에서 이제 엘리야는 지금까지 선조들이 겪은 이스라엘 역사의 성공과 실패에서 자신 역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는 실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ㅇ천사가...먹으라 하는지라 - 70인역(LXX)에는 '천사'가 '어떤 이'로 나와 있다. 그러나 7절에서 다시 언급된 바와 같이 여기 언급된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 곧 구약시대 당시 이 땅에 현현(顯現)하신 그리스도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 16:7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앞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4절)라고 기도하였었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아니, 아직 아니다"라 하시며!!) 엘리야로 하여금 땅 위에서 더 살도록 격려하며 기적적으로 음식물을 공급해 주셨다(6절).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긍휼과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ㅇ어루만지며 - 이에 해당하는 '나가'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단 8:18;10:16).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만지심은 상황을 변하게 하며 새힘을 주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하나님의 만지심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속한 존재라는 의미를주기도 한다(7절).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ㅇ숯불에 구운 떡 - 이에 해당하는 '우가트 레차핌'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는 달리 '뜨거운 돌 위에 놓인 떡'이란 뜻이다. 

당시 초장(草場)을 찾아 이리저리 유랑 생활을 하던 사막의 유목민들은 돌을 달구어 그 위에서 떡을 구워내었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떡이 엘리야에게 제공된 것이다.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ㅇ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 원문상으로는 '네가 가야할 길이 너무도 크다'는 말이다. 이는 곧 엘리야가 여행해야 할 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엘리야의 광야행은 처음부터 행선지가 정해진 것이었음이 다시금 암시된다. 4절 주석참조.  

아마도 엘리야는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의 전개에 실망한 나머지 하나님께 매달리는 심정으로 길을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호렙 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과 비탄에지친 엘리야는 여행을 지속할 여력도 의욕도 없었다. 천사의 도움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엘리야가 침체를 이겨내도록 음식과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5절 주석 참조.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ㅇ사십 주(晝) 사십 야(夜) -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는 대략 350km으서 정상적으로 꾸준히 걸을 경우 십여일 정도면 당도 가능한 거리이다. 

따라서 엘리야의 광야 40일은 행진만을 위한 기간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엘리야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따라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에 침익(沈溺)하기도 하면서 호렙 산을 향해 나아갔을것이다. 그런데 그 기간이 40일이었다는 것은 곧장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를 연상시켜준다(신 9:9;마4:2). 

특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40일 동안 바로 호렙 산에서 식음을 전페하고 여호와앞에 엎드려 있었다(신9:18).

그러므로 엘리야의 광야 40일도 모세의 경우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즉 40은 인내의 한계를 채우는 수로서 그 이후엔 상황의 변화를 초래케 하는 수이다. 

사실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 받야야 마땅할 백성들이 계속 보존케 된 것은 모세의 40일간 중보 기도 덕분이다(신 9:18, 19).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더이상 손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의 배교(왜냐하면 갈멜 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변화가 없었으므로)에 대해 엘리야가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죄의 부담(짐)을 지고 중보자로서 하나님을 찾은 기간이 바로 본절의 사십 주야인 것이다.

ㅇ하나님의 산 호렙 - 호렙산(Mount Horeb)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밑에서 장막을 쳤으며 모세가 여호와와 대화를 나누었던 신성한 산 시내(Mount Sinai)와 동일시 된다(출 19장).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으며 단지 오늘날의 예벨 무사(Jebel Musa)가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3:1주석을 참조하라. 

여하튼 이제 엘리야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던 바로 그 장소로 실의에 빠진 채 오르고 있는 것이다.

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ㅇ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 굴에 해당하는 원어 '메아라'앞에는 정관사 '하'가 붙어 있으므로 '그 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엘리야가 들어가 유(留)한 굴은 호렙산에서 흔히 발견되어지는 일반적인 굴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이 지날때에 모세가 피해 있었던 반석 틈(출 33:22)일 가능성도 있다(Matthew Henry'sCommentary, Vol. , p.682).

ㅇ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이 말(마 렉카 포)은 '무엇이 너를 여기 있게 하느냐'는 뜻이다. 

공동 번역은 이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도 그러하다(What are you doing here? NIV, RSV, Living Bible). 

그런데 이 질문은 새로운 사실을 묻는 물음이 아니고 도리어 질문받는 자를 [그의 현존의 실제를!!] 일깨우는 물음이다. 즉 하나님은 엘리야의 실망과 체념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 물으신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은 엘리야 자신을 냉정히 성찰케 하는 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종의 전환과 갱신의 계기를 마련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또한 자신에게도 할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ㅇ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18:15 주석참조.

ㅇ열심(熱心)이 특심(特甚)하오니 - 이 말(칸느 키느티)은 '질투하다'는 뜻의 '카나'가 두번 반복된 말이다. 즉 이는 '질투하고 질투하더니'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작태에 엘리야가 심히 분노한 것을 가리킨다. 

이때 그의 질투는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데서 나온 열정이다(출 20:5).

ㅇ오직 나만 남았거늘 - 원문은 '나, 나만 남았다'는 식의 표현이다. 이는 곧 엘리야의 탄식과 하소연이 그 호흡까지 느껴질 정도의 표현이다. 

더군다나 '나만'에 해당하는 원어인 '바드'(alone)는 '분리되어 고립되다'는 개념이 강조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에서 우리는 당시 엘리야가 얼마만한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수 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이다. 그 당시 이세벧의 박해 가운데서도 오바댜가 숨겨 놓은 100명의 선지자(18:4))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7천 명의 순결한 자가 남아 있었다(18절).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ㅇ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 본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공동 번역의 경우 이를 "야훼(여호와)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문장의 전후 관계상 "여호와의 앞에서"는 나가서 산 위에 서는 행동 전체를 받는다. 즉 엘리야가 산 위에 서는 행동이 곧 여호와 앞에 서는 행동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은 과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듯이(출 33:17-23) 이번에는 엘리야에게도 당신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엘리야의 주목(主目)을 촉구하는 말임에 분명하다.

ㅇ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 '여호와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출 33:19). 

즉 이는 여호와께서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한 방편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점은 '지나가다'는 뜻의 '아바르'는 움직임의 개념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사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바람은 그 움직임을 볼 수 있으되 형상을 볼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요 3:8).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방식에서도 인간의 수중[한계]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포하신다.

ㅇ강한바람...지진 - 비단 이것들 뿐 아니라 다음절에 나오는 '불' 등은 여호와께서 현현(顯現)하실때 일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출 19:16-20). 

그러나 정작 본절에선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셨다. 그러기에 바람, 지진,불 따위는 표적을 구하는 종교가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굉장한 중거임에 틀림없었지만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한 것은 그러한 현상들 다음에 들려온 '세미한 소리'(12절)였다. 즉 이것이야말로 엘리야에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분명한 증거였다.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을 통해 들려 주시는 그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시 119:105)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ㅇ세미(細微)한 소리 - '세미한'에 해당하는 '데마마 다카'는'고요하다'(다맘)와 '곱다'(다크)의 결합어이다. 즉 섬세한 것을 표현하는 단어 둘이 동원되어 이는 대단히 미세함을 강조하고 있다. 

더군다나 강한 바람과 지진, 불이 있은 후의 '세미함'이란 뚜렷한 대조를 보여 준다.  한편 '소리'(콜)는 신약에서의 '포네'와 마찬가지로 '음성'이라 함이 더욱 적절하다(계1:10;4:1 등).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로서 사용되는 경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뜻한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란 외적인 것이기보다 성령에 의해 듣는 자의 의식에 각인(刻印)되는 내적 감화(感化)이다(고전 2:10-14).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영적 깨달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Pope).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ㅇ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 이것은 엘리야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식별하고 취하는 행동이다. 

즉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경우 살 수 없기 때문에 엘리야는 겉옷으로나마 자신의 얼굴을 가리운 것이다. 출 33:20 주석 참조. 

한편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지나가심을 경험할 때는 여호와께서 친히 손으로 모세를 가리우셨다(출 33:22, 23).

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ㅇ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한 엘리야의 답변은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두려움과 절망의 심경을 역력히 반영하고 있다

즉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엄과 임재를 체험하고서도(11,12절) 여전히 부정적인 심경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야를 위로하며 앞으로의 구체적 사명에 대하여 일러주셨다(15-18절). 

그러자 비로소 엘리야는 용기를 회복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리는데(19-21절) 인간은 연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사례틀 보여 주는 한 표본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ㅇ네 길을 돌이켜 - 이 말은 단순히 왔던 경로를 되밟아 돌아가라는 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실제로 엘리야가 명령받은 행로는 다메섹으로 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돌이키라'는 말은 보다 내적인 태도와 의식의 전환을 지시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즉 이는 실망과 낙담을 안고 왔던 길을 새로운 사명과 과제를 받아 들고 돌아가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인생에 할 일이 남아있다는 의식이야말로 낙담과 무의미를 극복케 하는 첩경이다.

ㅇ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 하사엘(Hazael)자은 본래 아람 왕 벤하닷(Benhadad)의 군대장관이다. 

그러나 그는 벤하닷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후 줄곧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혔다(왕하 8:13-29;13:1-3).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하사엘을 이스라엘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하실 계획을 알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문제는 엘리야가 언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었는가이다. 실상 16절까지에서 언급되는 하사엘, 예후, 엘리사 중 그 누구도 엘리야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왕하8:12-15;9:1-10). 

그러나 이 난점은 '기름부음'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폭넓게 해석 할 때 해결된다. 즉 여기서 '기름 붓다'라는 말은 꼭 문자적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어떤 사명을 부여하는 것(시105:15;사 45:1)이나 따로 구별하는 것(출 30:26)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견해이다.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ㅇ님시의 아들 예후 - 사실 예후(jehu)는 님시의 손자이고 여호사밧의 아들이다(왕하9:2). 

본절과 같은 오역(誤譯)은 히브리어의 '아들'(벤)이 '자손'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서 온 실수이다. 따라서 정확히는 '님시의 자손 예후'가 옳다. 

한편 본래 이스라엘 군대장관 중 하나였던 예후는 훗날 라못 길르앗 출정시 반란을 일으켜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다(왕하 9:1-10"17), 

이때 예후는 무자비한 학살과 숙청으로 아합 가문을 진멸(盡滅)하였으니 이로써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성취되었다.

ㅇ아벨므홀라 - 이 지명의 뜻은 '춤추는 초장'이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벧산 남쪽 16km 지점의 한 유적지를 아벨므홀라(Abel-meholah)로 추정하고 있다. 삿7:22주석 참조.

ㅇ엘리사 - '엘리사'란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농부긴 해도 상당한 재산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열 두 겨리 소를 부릴 수 있었던 그는 엘리야의 부름에 즉각 호응하여 예언자가 되었다(19-21절). 

그리하여 엘리야가 승천한 이후(왕하 2장) 엘리사는 약50년간(B.C. 848-797년경) 북왕국에서 활약하게 된다. 

한편 학자들은 엘리야->엘리사의 계승이 모세->여호수아의 계승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고 본다(Stek). 특히 한 사역이 대를 이어 성취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ㅇ본절에 보이는 하사엘-예후-엘리사의 연결은 일견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르고 입장이 상충되는 세사람이 마치 같은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동료처럼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서로 대립하는 국가의 왕들인 하사엘과 예후가 의식적으로 같은 목적을 품고 활동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북왕국에 재난과 죽음을 가져다 준 인물들이다. 15, 16절 주석참조. 따라서 그러한 그들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과 연결될 때, 본절과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 

한편 본절에서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는 표현은 앞서 '기름부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취할 바가 못된다. 15절 주석 참조. 

즉 이는 엘리사가 직접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 많은 심판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ㅇ칠천 인을 남기리니 - '남기리니'에 해당하는 '솨알'은 대단히 의미 심장한 말이다. 

원래 신정 국가(神政國家)인 이스라엘의 정치적 운명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신앙에 좌우되기 마련이다(출 19:5,6). 

따라서 극도로 타락하고 혼미한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과 파멸을 불러 올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미래를 지속케 할 소수의 무리를 항상 남겨 놓으신다. 

이때 남은 자들(remnants)은 하나님의 주권적 택정(擇定)하심 안에서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은총적 의미가 있다. 

즉 이 경우 심판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자를 남기셔서 역사를 지속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Stark, Jenni). 

한편 본절에서 '칠천 인'은 실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Keil 등).즉 이는 완전수인 7의 배수로서 미래의 역사를 담당하기에 충분한 숫자가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그 한 쌍의 소가 하루 종일 갈만한 토지 단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전자의 뜻을 취할 경우 엘리사는 24마리의 소를 앞세워 밭을 간 셈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른 일꾼들이 그와 함께 일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편 토지 단위로서의 한 겨리는 8분의 5에이커, 즉 약 2,520m2에 해당한다고 한다(Sellers).

ㅇ열 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 이 말 역시 열 둘째 쌍의 소를 부린다는 뜻일 수도 있고 열 둘째 밭을 맡아 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절 초반을 참고할 때 열 두번째 쌍의 소를 맡아 부렸다는 뜻이 옳다.

ㅇ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 보통 겉옷은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특히 엘리야의 경우 그의 외모와 함께 톡이한 복장은 항간(巷間)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개 볼 때 엘리야가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준 것은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라는 매우 상징적이고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다(Hammond, Keil & Delitzsch). 

그러기에 엘리사 역시 이 동작에 담긴 의미를 즉각 알아 차렸다(20, 21절).

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ㅇ저가 소를 버리고...달려가서 -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소명자들의 비교적 공통된 특징(마4"18-22;눅 5:27-29). 

아마도 엘리사는 민족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깊이 탄식해 왔던 인물로서 평소부터 엘리야의 활약에 마음깊이 동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그는 엘리의 부름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ㅇ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 '입맞춤'은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적 인사법이다. 창 33:1-11 강해, '구약 시대의 인사법' 참조. 

한편 본절에서의 엘리사의 청원은 눅 9:59의 경우와는 다르다. 즉 눅 9:59에 나오는 사람은, 부친의 생존 기간 동안은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반면에 엘리사는 자신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응당 드려야 할 인사를 드리려 한 것이다.

ㅇ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 혹자는 이 말을 약간 힐난조의 말로 본다(Rawlinson, Wordsworth).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이 말은 긍정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는 '안 될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뜻이다. 사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행한 것은 선지자적 직무에의 초대이다. 

그런데 이 초대는 곧 부모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모에게 입맞추고 오겠다는 엘리사의 요청은 어떤 주저함도 아니다. 

도리어 이는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을 감지하고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단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엘리야 역시 기꺼운 수락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Lange).

21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 들었더라

ㅇ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 이 경우는 당연히 '한 쌍의 소'를 도축(屠畜)하였다는 뜻이다. 19절 주석 참조.

ㅇ소의 기구(器具를 불살라 - 이제까지 농부였던 엘리사가 농기를 불사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결단의 상징적 표시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의식(儀式)이라 할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엘리사가 구태여 농기구를 불사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ㅇ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먹게 하고 - 여기서 '백성'이란 당시 엘리사와 함께 밭을 갈았던 일꾼들 뿐 아니라 그의 친척과 친구, 이읏 모두를 의미한다. 

즉 엘리사는 이제 이들과 헤어지는 마당에서 마지막 석별(惜別)의 잔치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Pulpit Xommentary). 

ㅇ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 열왕기에서는 엘리야->여호수아의 계승과 대비하려는 의도가 있다 한다(Stek). 그렇다면 본절은 바로 그에 해당하는 요소라 하겠다.  

즉 여호수야가 모세의 수종을 든 것처럼 엘리사도 엘리야의 수종을 든 것이다.(출24:13;수 1:1). 한편 왕하 3:11에 의하면, 엘리사를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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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한다]...어찌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곧 Q을 대적하는 사탄마귀적 불신세상이 마침내 말세에 이르러 고안해낸, Q을 대적하는 "인권-인권"을 가장 중시하는 것처럼 내세움으로써 상대적으로 창조주-전능자-온 우주만물의 근원자로서 그분의 경륜 집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맞서고자 하여 조작해낸 바, 사탄마귀적 기만-거짓-속임의 극단적 이기주의 이론의 최종적 귀결중의 하나임을!!, 일반적으로 사회와 국가  형성과 유지에 있어서 선제요건인 공공선 바탕 확보 위한 공공질서와 예의로 대하는 상호존중, 곧 제한적 사회계약론의 제한적 통제마저 제멋대로!! 폐기하고 무제한적으로 "네 인생 네 것이니, 타인 고려/배려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네 맘 이끌리는 그대로!! 제멋대로((심지어 패륜적 살인-강간-강도짓이라 할지라도!!, 네가 하고싶은 그대로 하다가, --사회경제적인 국부조차 혼자 독식하던지 끼리끼리 강탈해먹다가, 죽고싶은때 그냥 자살로 끝내면 되지" 라는 식의, 무신론적 극단적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요, 이는 망국적인 동성애 + 포괄절 차별금지법 형태의 소수 동성애자 인권 옹호그룹에 의한  절대독재를 지지함이나 마찬가지인데, ((비유컨데, Q아닌 가짜신에 부종하는 기복신앙, 곧 당시!! 아합-이세벨의 450-400명 바알-아세라 선지자 그룹이 그 대표적 그룹이라 할 수 있겠다)).....존중해야할 바, 아주 먼 고래로부터 사람이라면 당연히 인간의 생명권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 개념이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인권보다도) 앞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가치인식이 중요시 되어 왔기에 선한 리더십이 그토록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스스로는 똑똑하다고 여기지만!! 속아서!!] 그저 생명 가진 타인을 상대화-차별화 함으로써 나라와 사회-가정 파탄조차 서슴지 않는,  망국적 귀결에 도달하게 되는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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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역사관(歷史觀)으로 보는 동성애==

율법서에서 동성애 관련 구절을 찾아본다면 창세기 19장 4~5절로, 소돔 사람들이 천사와 상관하려는 내용으로 처음 등장한다. 

레위기 18장 22절은 동성애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레위기 20장 13절에서는 남색 하는 자를 죽이라고까지 말씀한다. 

신명기 23장 17절은 남창이 있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렇게 율법서에는 4번 나온다. 

역사서에서 찾아보자,

사사시대에 기브아에서 동성 간에 성폭력을 시도했고(삿19:22), 왕국 시대에도 남색 하는 자가 있었고(왕상14:24), 남색 하는 자를 쫓아냈다는 말씀이 나오고(왕상15:12), 남색 하는 자를 쫓아냈다는 말씀이 또 나오고(왕상22:46), 심지어 성전에 남창이 살던 집도 있었다고 말씀한다(왕하23:7). 역사서에는 이렇게..5번 나온다. 

시가서에는 욥기 36장 14절에서 남창을 언급하고 있다. 시가서에 1번 나온다. 구약성경에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 구절은 10번이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남색?

성경에는 남자끼리 나누는 성관계를 남색이라고 표현했다. 남색(男色)을 히브리어로 카데쉬(‘קָדֵ֖שׁ)라고 하는데, ‘거룩한 남자’ 곧 ‘특별한 기능을 위해 구별된 남자’라는 뜻이다. 

남색은 이방 제사 의식의 하나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뜻에서 제물을 드리는 자가 신전 남자 사제와 가지는 성관계를 뜻한다. 신전 여자 사제와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친동성애자들은 남색이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였으므로, 제의를 목적으로 하는 동성애를 하지 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복음의 중대성과 복합성을 축소하는 평범화(Trivializing)의 오류다. 

.....다니엘 오버도르프(Daniel Overdorf) 교수는 성경을 적용하는 것은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이 위험해서 설교자가 성경의 본래 의미를 완화해서 적용할 때 그 지뢰가 폭발하여 성경의 진리를 퇴색시킨다고 말했다(성경을 적용하기, 제4장 참조). .....

남색은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목적인 남자 성창(聖娼)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고, 돈을 목적으로 직업적으로 가지는 남창(男娼)과의 관계까지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내리셨고(창1:27~28),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말씀하셨다(창2:24). 

그러나 동성애(同性愛, Homosexuality)는 동성끼리 곧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나누는 연애나 성적인 교접을 뜻한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정면으로 위반(違反)하는 행위이다. 

성경은 동성애가 신전에서 벌어지는 우상숭배(偶像崇拜)와 관련 있고, 개인이 일으키는 성적인 일탈인지라 명시적으로 금지하였다(성경문화 배경사전, 1,087~1,088, 1,091쪽). 

성경은 남색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남색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신명기 역사서는 올바른 선택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서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 구절이 10번 나오는데, ...사사기와 열왕기가 눈에 띈다.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부터 열왕기까지) 아니 신명기까지 포함하면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 구절이 6번 나온다. 10번 중에서 6번이다. 

동성애와 관련한 성경 구절이 신명기 역사서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무언가 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게 틀림없다.  

신명기는 모세가 출애굽 2세대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한 고별설교이다. 

모세는 부모 세대들이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자녀 세대들에게 실제로 적용해서 전해주었다. 

모세는 2세대들에게 율법을 따를 때는 생명과 복을 받지만, 떠날 때는 사망과 화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신명기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다니엘 블록(Daniel Block) 교수는 신명기가 구약 전체의 진리를 가장 조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구약의 로마서이자, 하나님의 은혜를 심오하게 전해주기 때문에 구약의 요한복음으로 비유했다(케빈 벤후저 편, 구약의 신학적 해석, 93쪽). 그만큼 신명기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신명기 신학에서 중요한 2가지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신명기에는 ‘중앙 성전’을 강조하고 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지역마다 신전과 수호신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의 성전만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배의 중앙 집중화를 가져왔고, 올바른 예배 행위를 요구하였다. 신명기에는 이상적인 이스라엘은 ‘한 하나님, 한 백성, 한 땅, 한 성소, 한 율법’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는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법궤가 있는 장소에는 하나님의 이름도 계셨기 때문이다. 다른 장소에서의 예배는 의미가 없었다.

또한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면 복이 임하고, 기대를 외면하면 저주가 임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것이 신명기 역사서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앤드류 힐 외, 구약개론, 145~146쪽). 이것을 신명기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신학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땅을 소유하고 보존하며 번영과 복지가 있지만, 불순종하면 재난과 병과 죽음과 땅의 상실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신명기에는 율법과 은혜, 즉 위협과 약속 중 어느 쪽이 득세할지 긴장감이 흐른다(트렘퍼 롱맨 외, 최신구약 개론, 151~159쪽). 

신명기 역사서에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결과까지도 알려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하라고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도 지라고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를 존중하신다.

===신명기 역사서는 동성애를 어떻게 말씀하는가?

>> 1. 하나님은 신명기 23장 17절에서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한다. 

신명기 23장 15~25절을 기타 율법 규정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창기’는 가나안 신전에 소속된 성창을 가리킨다. 신전에는 여자 창기도 있고 남창도 있었다. 가나안은 10월부터 3월까지는 우기(雨期)이고, 4월부터 9월까지는 건기(乾期)였다. 10월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 3월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했다(류모세, 열린다 성경 광야 이야기, 24쪽). 가나안은 우기라도 계속해서 비가 내리지 않고, 며칠간에 일 년 강수량만큼 쏟아지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절하게 내려야 했다. 많아도 적어도 문제였다. 

가나안 사람들은 성창과 성관계를 하면, 비가 알맞게 내려 곡물을 풍성하게 수확하고, 풀이 파릇파릇 돋아나 가축 떼가 번식한다고 믿었다. 동성애는 이른 비가 내리기 전과 늦은 비가 내리기 전이 가장 극성스러웠을 것이다. 이처럼 가나안 신전 안에서 벌어진 동성애는 민간에게까지 파고들었다. 신전 밖에서도 남자끼리 벌어지는 동성 매춘이 횡행했다. 하나님은 신전 안에서든 밖에서든 남색을 금지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때는 결과도 오롯이 감당해야만 한다.

>>2. 사사기 19장 22절에서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그 문을 두들기며 집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라고 말씀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문화가 있었다. 주인은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나그네를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 사람들은 여행 중인 레위인을 집으로 영접하지도 않았고, 레위인을 영접한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손님을 끌어내려 소란을 피웠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음행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레위인과 상관 즉 레위인을 성폭행하려 하였다. 중략. 기브아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로 말미암아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그 당시 문화로는 공동체 일부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행동은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공격으로 간주하였다. 베냐민 지파는 600명만 남겨놓고 대량 학살을 당하고 말았다(삿20:47). ..신명기 역사서에는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말씀이 820년간(주전 1,406~587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동성애 정확히는 동성 간의 성폭행을 자행하려던 기브아 사람들은 신명기의 경고대로 톡톡한 대가를 치렀다. 그 꺼져가려던 베냐민 그것도 기브아 땅에서 사울이 태어났으니(삼상10:26,11:4),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가늠하기가 어렵다.

>>3. 왕국 시대에는 왕들이 남색 하는 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나온다. 

① 유다 왕 르호보암은 악한 왕이었다(왕상14:22). 르호보암 왕은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다(왕상14:23). 하나의 성전 원칙을 어겼다. 또한 열왕기상 14장 24절에서 “그 땅에 또 남색 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라고 말씀한다. 르호보암 왕 당시에 신전에서 남색 하는 자가 있었다. 신전 안에서의 성관계는 신들의 성관계로도 이어져, 풍요와 다산을 가져온다고 믿었다(ESV 스터디 바이블, 737쪽). ② 아사 왕은 선한 왕이었다(왕상15:11). 

......아사 왕은 남색 하는 자를 쫓아냈다. 열왕기상 15장 12절에서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라고 말씀한다. 아사 왕은 우상 신전을 없애고 예배의 중앙 집중화를 가져왔다. 올바른 예배를 드렸고, 신전에 있는 남색 하는 자도 쫓아냈다. 

③ 여호사밧 왕도 선한 왕이었다(왕상22:43). 여호사밧 왕은 산당은 폐하지 않았으나 남색 하는 자는 쫓아냈다. 열왕기상 22장 46절에서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 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라고 말씀한다. 

.....여호사밧 왕은 민간에 널리 퍼진 산당은 처리하지 못하고, 신전에 있던 남색 하는 자를 쫓아냈다. 

④ 요시야 왕도 선한 왕이었다(왕하22:2). 요시야 왕은 므낫세 왕 당시에 성전 안에 만들었던, 바알과 아세라를 위해 만든 그릇들을 기드론 골짜기에서 불태웠다(왕하23:4~6). 

......요시야 왕은 성전 안에 있는 남창의 집도 헐었다. 열왕기하 23장 7절에서 “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더라.”라고 말씀한다. 남창의 집이 이방 신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파고든 것은, 종교혼합주의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남 유다의 선한 왕들은 산당을 없애면서 올바른 예배를 회복했고,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내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려 하였다. 

성경에서 선한 것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했느냐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겼느냐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했다. 

-----그러나 신전뿐만 아니라 민간에 뿌리내린 산당과 남색은 도무지 근절되지 않았다. 산당과 남색은 생명력이 강한 잡초와 같아서 선한 왕들이 줄기와 뿌리에 있는 생장점(生長點)을 잘라내도 옆으로 가지를 치거나 뿌리에서 악의 새싹이 돋아났다.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 바벨론을 몽둥이로 삼아 자기 백성들을 70년 동안 징계하기로 작정하셨다(대하36:21, 렘25:11, 29:10, 단9:2, 굿뉴스 스터디 바이블, 1,125쪽). 하나님이 일찍이 말씀하신 대로 율법에 순종할 때는 땅을 보존할 수 있었지만, 불순종할 때는 땅을 상실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 안에는 동성애와 관련한 조항도 있다. 율법 그중에 동성애로 좁혀보면 남색 하는 자를 쫓아내면 선한 왕이었지만, 방치하면 악한 왕이 되고 만다. 

-----우리는 신명기 역사서를 통해 번영과 쇠락이 순간의 선택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이 없는 분이시다. 따끔하게 때리다가도 이내 돌이키신다......징계는 허물을 뉘우치도록 주의를 주거나, 제재를 가하는 행위라고 했다. 징계의 기초는 사랑이고 목적은 온전한 상태로의 회복이라고 말했다(당신은 행복하십니까?,-유기성- 35쪽). 하나님은 남 유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징계하셨지 영원히 멸망시키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또 다시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찬송가 가사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회개해야 한다.

===동성애에 관한 신학적 원리는?

스코트 듀발과 다니엘 헤이즈(J. Scott Duvall & Daniel Hays) 교수는 구약성경과 우리 사이에는 문화, 언어, 상황, 시간, 언약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강을 건너려는 시도가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본문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의도했던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이라고 옳게 지적했다. 그 당시와 지금과의 차이점들을 알아보고 유사점을 찾아내서, 본문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신학적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 ‘원리화의 다리’라고 조언하였다. 그 신학적 원리는 본문 속에 반영되어 있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과도 조화를 이루고, 그 당시 독자들과 지금의 독자들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성경해석, 25~31쪽). 

.......친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관점과 충돌한다고 주장하지만, 동성애는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죄(罪)이며 근절해야 할 분명한 악(惡)이다. 

.......신명기 역사가가 말하는 동성애는 바울이 말하는 동성애와 같은 시각이다(롬1:27, 고전6:9, 딤전1:10). 

.......구약과 신약을 통해 동성애를 거부하는 신학적 원리는 탄탄하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고 동성애를 계속할 때 징계를 넘어 심판하신다. 지금은 그 어간(於間)에 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바른 복음을 믿어야 한다. 친동성애는 다른 복음이며, 반동성애가 바른 복음이다. 하나님의 시계는 이미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다. 반동성애는 혐오가 아닌 긍휼에서 나온다. 더 이상 동성애를 옹호하여 동성애 형제들과 자매들을 나락으로 몰지 말고, 그들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체이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새 인류가 되도록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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