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5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엡4.[진리의장]그 영의 oneness.은혜/은사..믿음과 온전한 지식에서의 on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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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4장   [442. 저 장미꽃 위에 이슬]   455.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4:1-16(몸의 생활과 기능) ==>17-32(오직 진리와 은혜 따르는 일상생활 : <17-24,일상생활 원칙>, <25-32, 생활의 상세>)

....이 JC께서 가져오신 은혜와 진리는, 믿는 우리는 주관적 체험의 <사랑과 빛....달콤한 사랑-희락-화평-인내-겸손-온유로 달구어져 주위를 녹이는, 밝은 참된 광채>로 누림

....**은혜는 주 예수님의 달콤한 인격이요, 주 예수님은 Q의 충만의 체현이자 거룩한 영광의 광채(즉, Q의 표현)이심...**진리는 우리에게 계시된 Q...그분의 진리의 방면은 그분의 (행보를 뜻함의) 다리에 쓰인 충신과 진실, 곧 참됨으로 표현됨

....**(요한복음에서는 우리에게 오시는 Q을 보여줌) 은혜 누림이 진리 앞에 선행함을 보이고 있음, (요한 일서에서는 우리가 Q께로 감을 보게 함) 정결케 하는 보혈로 깨끗함 받고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접촉하러 내적인 방 안에 들어가, 은혜나 진리가 아니라 그 보다 더 깊은, 사랑과 빛을 체험함 ---이것이 two-way traffic<쌍방향 왕래>인 교회 생활-일상 생활임 **엡4장에서는 진리가 은혜보다 선행됨을 보이는데, 여기서 진리는 빛의 비침이자 원칙-틀-본-표준으로서,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임..여기서 은혜는 (교회 생활과 일상 생활에서) 그 표준을 살아나가기 위한, 그분의 형상을 본 받기 위한 능력<곧 달콤하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공급과 누림, 곧 Q의 생명 샘과 Q의 영>임


.... <하나, ONENESS(영원 불변의 본래적, 근원적, 동질적 유일성)...확장역, 다비역 ; 한편 KJV, NASB : unity(단일성)를 사용.>를 붙듬..

***엡3:1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 ::: the prisoner of Jesus Christ ---엡4:1에서는 주 안에서 갇힌 자<다비역>the prisoner in [the] Lord, :: (주 안에서<범위> in the Lord = 주 안으로 <깊이> into the Lord)로도 읽히기에 주의 갇힌 자 보다 더 차원이 깊다   음미해 보라

***oneness(하나됨)of the Spirit =그 영, 오직 <유일무이한 근원적-근본적-동질적 실제>하나인 성령 :: 그 영에 속한 하나(유일무이한)인 교회....<새 창조 안에서의, 근원적-근본적-동질적> 하나<공동운명체>를 뜻하는, 하나/한분이심(oneness)란 엄밀히 말하자면, 연합(unity....인위적/이질적 하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연합"은 (어떤 이슈하에, 인위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함께 결합시킴(unite) 통해 형성되지만, 반면에 "하나"란  믿는이들 안에서 그들을 모두 <새로운 창조 통해> 하나로 만든 생명, 그 영의 실체의 나타남이다. 즉, 교회는 연합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한다.  참 교회의 "하나"는 한 분의 인격이며, 심지어 생명 주는 영으로 실제화 되신 주 예수님, 곧 과정을 거치신 그 영<주 영> 자신인데, 오늘날 주님은 우리 안에서 생명 주는 영이시며, 이 영이 우리의 "하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는 멀리 하늘에 계신 객관적 인격이 아니라 생명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관적인 인격, 바로 그리스도의 영<그 영>이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역시 한 새 사람으로서 oneness라 말함이 더 정확하다.(연합한 하나 union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oneness에 비해 좀 약한 감이 분명히 있다!!)

.... 비유컨데, 이 "하나"는 발광에 있어서 많은 전구들을 하나되게 하는 전구들 속의 전기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전구들은 (하나의 실체를 조성하기 위해 연합 되는 것도 아니요) 각각이라도 모두 그 속에 흐르는 전기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원칙면에서 그리스도 안의 믿는이들도 같다.   이처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 영이 우리의 "하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생명 주는 영"을 붙들고 머무름 통해 지킴이다.  조심하라. 우리가 "하나"에 대해 많은 말을 할수록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에 놓일 것이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꼭 붙잡음으로써...<"사랑하는 주님!!"..주 이름 불러 주시는 느낌에 대해 여쭈고 경청하며 (중보가 필요한 이의 사정 아뢰어드리고) 그분의 심정을 살피며 교통하며] "생명 주는 영" 안에 머무른다면 그것을 지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 ....오직 (그 영과 하나된) 거듭난 영을 따라 살며<변화받고> 십자가 위에 머무름으로써 그 영의 "하나"(그 영으로 하나됨)을 지킬 수 있음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 한 새 사람인 교회로>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겸손과 온유 = 자기자신을 처리함(누구나 먹을 수 있는, 다양하게 요리 가능한, 잘 섞여지는 고운 가루이신 그리스도의 인성..절대 신뢰-절대 기쁨-정대 긍정-절대 감사/감수함의, 둘로스의 적극적/긍정적 수동성..] --겸손(겸비/비하=자기를 낮춤=마음가짐을 둘로스의 위치에 둠)..온유(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싸우지 않음).. ***오래 참음(부당한 대우를 견뎌냄) ==>타인들을 대하는 이 3가지 미덕을 통해서 우리는 <골치거리인 사람들을 포기하여 버리지 않고, 사랑 안에서>서로를 짊어짐(=용납함)을 이룰 수 있게 됨.....그러나 우리의 천연적 인성 안에는 그러한 <겸비-온유-오래참음>이 없고 오직 이런 미덕들은 우리의 변화된 인성, 즉 예수의 인성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그러므로 우리 영에 내주하시는 주님 이름 부르고 바라고 앙망하며 머물기를 연습하고 그분의 움직임을 따라 반응하기를 배우자..

.... 보라, 성막을 이루는 48개의 금을 덧씌운 널판들은 금 안에서 하나였고, 함께 붙들어 매는 띠도<결합시키는 성령> 역시 금을 입힌 아카시아 나무로 되어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는 <그리스도의 견고하게 붙들고 지탱하는> 인성을, 금은 신성한 본성을 상징하기에 결합시키는 영 안에는 인성의 요소가 있게 되는데, 이는 결합시키는 영이 단지 하나님의 성령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진 , (과정을 거친 지금은 거듭난) 우리 영과 혼합된 성령임을 가리킨다.....롬8:4에서는<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 지게 하려 하심이라>, 롬8:16에서는<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8:4의 그 영은 혼합된(mingled) 영으로서 <하나님의 성령과 혼합된 (거듭난) 우리의 영>을 말하며 8:16의 성령은 혼합된(mingled) 영으로서 (거듭난) 우리 영과 함께 있는 <그 영>을 말한다... 바로 이 <그 영>, 즉 결합시키는 띠들을 조성하는 [신성과 그리스도의 인성이] 혼합된 영 안에는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도달하심 인해> 겸손(겸비/비하)-온유-오래참음을 구비한 변화된 인성이 있게 된다.....그러므로, <그 영>의 하나(oneness)를 지키는 데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하나됨 인해 그 영으로 적셔짐 통한 "그리스도화"의>변화가 요구됨을 기억하라.....(어찌보면) 초신자들에게 "하나"를 지키라고 권면하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일 수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가 변화될 수록 우리는 저절로 겸손(겸비)-온유-오래참음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며 사랑 안에서 용납하기를 익히게 된다.

3.  평안의 매는 줄로(in the uniting bond of peace)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being diligent to keep the oneness of the Spirit)

.... 차별이 없어지고 <평강의 매는 줄로> 하나 됨 이룸은 오직 십자가로 나아가 <원수 됨 처리하고 새 창조함 받은 동질적 하나됨의> 십자가 위에 머무름 적용할 그 때에만!!  평강이 오고, <그 영의 "하나"를 지킴>이룰 수 있음을 안다. 가정과 교회 생활 모두에 있어서 변화 받음과 십자가 둘 다 필요하다.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그리스도,TUQ,주재,한 아버지) 만유 위에 계시고(성부- 초월적 다스림,sovereign over all) 만유를 통일하시고(성자-통과/관통/작동/운행/움직임,working through all)  만유 가운데(성령-충만내재하심,living in all) 계시도다...Q=만유의 창시자(아버지=몸을 위한 생명 근원)...(곧 4절에서는 생명이, 5절에서는 머리되심이, 6절에서는 시초/근원되심이 나오고 있음)....생명--머리되심--시초/근원 등에 대해 냉철한 분별이 필요하다....(우리의 하나는 <몸 안으로 역사되신>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안에서 우리에 의해 실제화 되고 체험된 TUQ이심)... 창시자 아버지 + 성취자 주님 + 수행자 그 영이심 : 체험적으로는 그 영이 먼저이며(하나와 직접 관계되며 함 몸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성취자 주님과 근원이신 아버지를 갖게 됨....

....."하나"를 지킬 것을 권면하면서."하나"의 근거와 기초가 되는 일곱가지 것들을(한 몸, 한 영, 한 소망, 한 주, 한 믿음, 한 침례, 한 하나님과 아버지).지적하고 있음 

--한 몸-한 영-한 소망

##"하나"의 이해

.... *1)[그 영과 관련된 첫 번째 군  :: 한 몸 --한 영--한 소망] 먼저 우리는 한 몸<몸이 하나>이기에 "하나"를 지켜야 함 --->한 영<성령이 하나>은 한 몸의 본질과 생명이니, (고전12 :13에서는<우리가 다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받았으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영을 마시게 되었느니라>하였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무이한 본질은 그 영임 -->한 소망(<주 예수님 오심 인해 몸의 변형 입음인..빌3:21>영광의 소망이요, 또한 Q의 아들들로 나타남에 대한 영광의 소망)  : 몸의 변형이든 Q의 아들들로 나타남이든, <물론 어느 의미에서 변형과 나타남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진리와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우리의 변형과 나타남은 오늘 점차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 과정은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생명-생명 공급이신 그 한 영에 의해 수행되고 있는 바, 그 영은 우리를 변형시키고 우리의 아들의 명분의 나타남을 위해 현재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다

.....*2)[주와 관련된 두 번째 군 ::: 한 주--한 믿음--한 침례]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믿는 분은 <생명을 위한>아들이지만(요3:16, 요일5:12),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믿는 분은 <머리됨의 권위를 위한> 한분 주님이시다(행16:31, 행2:36)... 사도행전에서 승천하신 후의 주님은 머리 되심 인해 권위를 가지신 주님이시다. ...그 몸의 "하나"는 생명에 관계됨과 동시에 머리되심에도 관계된다. 오늘날 생명에 대 주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극히 적으며, 게다가 머리되심의 권위에 주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적다.  "머리되심"에 주의하지 않을 때 분열과 나뉨이 있게 된다.  ---->한 믿음 : 신약에서 믿음이란 믿는 행위와 믿는 내용을 둘 다 가리킨다. 믿는 것의 내용으로서의 믿음은 믿음의 대상, 곧 객관적인 유일한 믿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부터 하늘로 승천하심에 관한, 주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구속의 역사를 믿음이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연결된다. --->한 침례 : 믿음 안에서 우리는 주님 안으로 믿고(요3:36), 침례로 그분 안으로 침례되며(갈3:27, 롬6:3), 아담 안에서 종결되었다. 믿음과 침례를 통해서 아담에게서 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으며 이처럼 우리는 주님과 연합되었다(고전6:17). 침례의 실제는 우리의 천영적 존재가 십자가에 못박혔고 장사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침례는 죽음과 장사와 부활의 실제화이다. 침례는 언제나 믿음에 뒤따른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누림 되신 참 생명 그리스도>를 주셨나니

....[(직접!!)은혜를 받음] <요1: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실제적 측면에서 은혜 받음이란, 먼저 <그 무엇보다도 말씀, 그 안에 담아두신 Q을 구하며, 그분이 자신을 열어 보여주시기를 전심으로 기대하며> 말씀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함을 실행하자...그리해야 말씀의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만짐이  되며, 그에 따라 영 안에서 행할 때 은혜의 공급과 빛 비췸 받음이 오게 되며 은혜이신 Q의 실제를 체험하게 된다...이 은혜는  자동적으로 우리를  그분의 몸인 교회에 연결시켜서<그분의 부엌>과의 활력 충만한 연결을 갖게 하고, 이때 우리는 합당한 청지기가 된다......기도할 때 주의점이란....(건강-기질 등) 사소한 문제나 일상 생활의 문제에 관심하지 말라...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이 먼저이다..즉, <말씀이 우리 속으로 들어 오고 우리를 충만케 할 때까지 말씀으로 기도하라>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그 영이 우리 영을 채우실 때, 자동적으로 우리 일상 생활은 Q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될 것이요,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서 영 안에서 행하게 될 것이며, 은혜를 받고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바울에 의해 세워진 표준에 이르게 된다.

.... [(직접!!)계시(진리 말씀 열어주사 깨닫게 하심)를 받음.... 엡 3:3, 5] <요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And the Word became flesh and tabernacled among us (and we beheld His glory, glory as of the only Begotten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reality.>

표준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또한 그 자신이 계시를 받는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선지자는 빛이 충만한 사람이요, 다른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기에 할 말이 매우 많다. 오늘날의 보내심을 받은 자와 선지자들이 되려면 모두 은혜와 계시를 받아야 한다. 

....계시를 받는 방법은 <우리 눈에서 베일 벗겨주시기를, 참된 영적 시력을 가리우는 어떤 것도 다 제거해 주시기를, 오직 주님의 말씀이 내게 열려지기를> 간구하며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령, 세족이나 침례의 방법, 만찬 때 쓰는 컵의 크기 등 비본질적인 사소한 일에 관심 기울이지 말고 Q의 영원한 목적이나 Q의 경륜에 관한 의미있는 질문들, 가령 은혜의 청지기 직분이란 무엇인지,  함께 후사가 됨,,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란, 그 비밀의 경륜이란, 시대들(ages)과 세대들(generations)의 차이는, 속 사람 안에서 강건케 됨, 그리스도께서 함그리스도의 비밀과 Q의 비밀의 차이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질문하도록 하라....이 때, 은혜의 계시를 받은 이들은 부담 주시는 대로 자기가 깨달은 바를 말하게 하시는 부담과 갈망따라 공급하도록 기회를 갖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사도와 선지자 됨이다.

.... 은혜란 은사를 배분 공급하는 그리스도의 피 안의 신성한 생명, 곧 우리에게 도달하신 그리스도시다...롬12장에서는 은혜에 따라 다른 은사를 말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은사에 따른 은혜를 말하고 있기에, 합당한 이해를 위해 은사는 각 지체의 크기와 직능이요 은혜는  피 순환량으로 보면 좋을 것(먼 나라로 떠나는 귀인이 맡긴 달란트로도 이해 가능하다)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승천)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기 전에는 사탄의 포로였던 죄인들) 사로잡으시고 <그리스도 믿음으로 구원 받은>사람들에게 선물[= 몸의 건축을 위하여, 합당한 봉사를 위한 능력인 은사들<은사자라 해도 통한다>]을 주셨다 하였도다

.... 확대역에서는, 정복자이신 그분이 승천 때에 <승리 축하의>개선 장면, 곧 (포로로 잡은) 패배한 원수들<사탄과 그의 천사들과 죄인들인 우리>의 포로 행렬을 이끌고 <원수들의 정체를 노출시켜 부끄럽게 만드시고> 아버지께로 나아 가셔서 <죄인인 우리들을> 올려드리고, 아버지께서는 포로되었던 죄인인 우리들을 자유케 하사 은사로 그리스도께 되돌려 주시는 장면을 언급하고 있다. ...Q은 창조주시요 그분께는 시간과 공간적 제한이 없다. 곧 영적 차원에서는 시공간은 동시성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믿는 우리의 구원 받고 거듭남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부활-승천 시점에 이미 이루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시68:18..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 시68:18의 높은 곳은 시온산을 의미하며, 신약에서는 Q의 거하시는 삼층천의 하늘 시온산을 상징한다(왕상8:30)....시68편의 배경은 민10:35의 인용으로서, 성막의 중심인 언약궤[=이는 그리스도의 분명한 예표임]가 가는 곳마다 승리가 뒤따랐음을, 마침내 시온산 꼭대기의 예루살렘 성전에 좌정케 되었음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바 이것은 어떻게 십자가 죽음- 장사 지냄에서 일어나 부활 승천 하신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고 그 승리로 인하여 당당하게 하늘들로 승천하셨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 (성육신하심으로써)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그분은 죽음 안에서 음부로  더 내려가셨고(행2:27) 결국 부활 안에서 음부로부터 땅으로, 승천 안에서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음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그리스도의 내려오심-올라가심으로써, 왕래 수단 확보와 함께 <은사를 통해> 부활 생명을 분배하심으로써 하늘-땅 그 어디에나 제한 받지 않고 계심 인해>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 엡4장은 우리에게 은혜, 즉 <우리에게 도달한 그리스도>가 은사의 분량이나 크기에 따라서 주어진다고 말한다. 은혜는 (동질적이요 차별이 없으되 그 크기는 주께서 정해 주시는 은사에 따라 달라진다..은사는 하나 하나가 다 귀하다...기억하라, 어느 한 지체가 없는 몸은 지체장애라 한다!!) 은사 있는 사람들을 산출하며, 그런 다음 은사의 분량을 따라 몸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한다. 모든 은사자들은 우리 모두가 13절에 언급된 세 가지 항목에 이를 때까지,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그리스도 분배함의> 사역의 일을 하도록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도록 하기 위해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죄인들이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전리품들이자 Q의 아들들이요 또한 몸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몸에게 <사도-선지자-복음 전도자-목자-교사의> 은사들이 된 단계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그분의 지상 인생(33년반)-->십자가 위에서 죽으심-->무덤에 장사되심/음부로 내려가심(3일간)--=>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심)-->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위해 하늘들로 승천하심 등을 포함한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은사들 : 계시를 따라 은혜로 살며 오직 절대적 생명 그리스도의 운행하심과 움직이심 따라 기동하는 지체들>이다. 장래에 우리를 어느 곳에 보내시든, 우리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은사들로써 보내심을 받게 될 것이다....물론, 인도하는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은사일 뿐 아니라, 몸의 모든 지체들 하나 하나조차 은사임을(실은 은사로 되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지체들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내 몸을 위해 할 수 있는 바 새끼 손가락조차 은사임을 알아야 한다. ((각 은사나 지체의 가치는 다 동일하다!! 잊지말라 귀보다 <일을 더 많이 하는> 어깨에 더 피<은혜>가 많이 필요하지만 그 피는 동일성을 가지며 각 은사나 지체의 가치도 <몸의 관점에서 볼 때!!> 동일하다!!))동시에 구원받은 우리는 온 세상에게도 주어졌다. 이처럼 우리는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요 <일상 생활 중에도> 어디에 가든지 접촉하는 다른 이들에게 큰 축복이 될 것이요, 동시에 다른 이들을 돌보고, 주님의 길 안에서와 Q의 경륜에 관한 것들 안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인 목자들과 교사이기도 하다.

..... 엡4:11은 <은사들> 곧 몇몇 사도들--선지자들-- 복음 전파자들-- 목자들과 교사들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바로 그들이 됨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선주자인> 그들을 뒤따르는 자들로서 같은 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즉, 모든 믿는이마다 자신을 오늘날의, 사도들을 비롯한 4중 직임((이들은 계급상의 서열이 결코 아니다, 단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에 대한 기능적 순서일뿐임을 명심하라!!)), 오늘날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 중 한 사람으로 여김으로 여김이 마땅하며 그렇게 몸을 위함이 마땅하다..남편과 아내에 대해서도 가정을 세움에 있어서도 남성과 여성의 특별한 기능적 차이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성직자-평신도>제도라는 큰 이단에 빠져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12.  이는<=은사를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결과적으로)봉사<그리스도를 분배하는 사역ministry>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12.  For the perfecting of the saints, for the work of the ministry, for the edifying of the body of Christ: 12 [and He did this] to fully equip and perfect the saints (God’s people) for works of service, to build up the body of Christ [the church]; = For the perfecting of the saints unto the work of the ministry, unto the building up of the Body of Christ...<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를 분배-공급함 통해 >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함으로, 그 온전케 함의 목적은 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분배케 함으로써 양과 질에 있어서 몸의  증가와 확장이라는 선순환을 통해, 유일한 목표에 이르게 하는> 사역인데,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한다(세운다)!! ....여기서, (은사들을 통해 온전케 된 성도), 그 성도의 사역<그리스도 분배>과 건축<몸을 세움>은 동격이다!!...성도의 그리스도 분배 사역이 바로 몸을 세움이라는 뜻!! 즉, [단체적 유기체로서의 몸을 세움은] 온전케하는 자들(은사)와 온전케 된자들(성도) 모두의 일이다...**잊지말라!! 베드로, 바울, 요한의 제자였던 이그나티우스AD35-107)는 위대한 교부들 중 하나였지만 감독들이 (지역교회)장로들보다 더 높다는 견해를 고집하여, 계급제도의 씨를 뿌렸다...이것은 결국 추후 가톨릭 교권제도<주교(감동) -대주교-추기경-교황>의 씨가 되었다.

...<마23:8-10..*8.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롬8: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구주께서 곧바로 [부활의]생명으로 우리에게 오실 수 있었으나, 성육신-인생 33.년반의 사역 과정을 거치신 다음에야 부활 안에서 생명의 그 영으로 오셔서 내주하시는 이유....Q이 원하시는 그분 자녀들의 삶의 본, 즉 Q을 만족시키며 그분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는 본과 모범을 세우려 하심이었음...(롬8:29에 따르면 Q은 맏아들 그리스도의 모형<본, 틀>을 이미 가지고 계시며 그분의 많은 형제들인 우리를 거기에 꼭  들어맞는 형태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데, 그 새 창조는 <이미 침례를 통해 시작되었고..롬6:3, 갈3:27>

13.  우리가<"너희가"라 하지 않고 있음.. 곧 바울은 (자기도 동일선상에 있는)  같은 위치에서 몸을 보고 있었다>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한 새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Until we all arrive at the oneness of the faith and of the full knowledge of the Son of God, at a full-grown man, at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 신약에서 주님은 생명과 관련해서는 Q의 아들이라 불리우고, 그분의 위임<은사와 직분 주심>과 관련해서는 그리스도라 불리우신다(마16:16, 요20:31) 결국 체험적 생명으로서 <주-그리스도, 곧 살아계신  Q의 아들>그 분을 앎의 문제이다. 주 예수님이그리스도시며 Q의 아들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 함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체험할 때 ,Q의 아들이신 그분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12절과13절은  모두 분명히  비밀한 참생명 그리스도로 살기의 실행 통한 주관적 체험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분명히 주께서 친히 깨달아 알게 해 주신다!!! <온전케 된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로서] 오직 그들의 삶의 초점이 생명 그리스도의 운행하심과 움직이심을 따르기에, 결국 세 가지 것들에 이르게 됨...곧  객관적 생명 진리 말씀의 주관적 체험 통한 깨달음(붙들어 그로 인해 그 자신의 조성이 되게함으로써) 그 안에서 *1)Q의 아들에 대한 믿음+충만/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oneness 견지/성장 성숙 *2)온전히 성장한 사람이 됨 *3)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도달> ---그리스도는 충만을 가지고 계시며, 그 충만은 신장을 가지며, 그 신장은 분량을 가지고 있음

[믿음의 하나, oneness of the faith] = 교회 생활에 있어서 <믿는 바 그 내용의 하나됨>

----실제로서의 하나--the oneness of the Spirit <이것은 시작이다>

[그 영의 하나.oneness of the Spirit]은 실제의 하나됨, 곧 반드시 실천 통해 발휘되어 나타나는 것이 오직 그 영, 하나여야 함을 의미함.

---- = <목적지임>실행에 있어서의 하나..the oneness of the faith and of the full knowledge of the Son of God, at a full-grown man, at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Q의 아들에 대한 믿음의 하나] -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곧 실행적 측면에서의 하나), 그 중에서 Q의 아들에 대한 믿음에서의 하나 =  우리가 믿는 믿는 것(그 대상과 내용들....곧 그분의 구속 역사 +살아계신 그리스도)에서의 하나<유다서3절, 딤후4:7, 딤전6:21> ::: 오직 그리스도 얻기를, 그리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라는 이마다에게, 믿는 바 Q의 아들에 대한 믿음, 곧 객콴적 진리 하나하나마다 반드시 주관적 체험 통해 깨닫게(붙들고 조성되게) 하시리라

[Q의 아들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  = 우리가 경험하여 참되게 아는 바, 우리에게 생명되시고 만유되시는 그리스도] = 체험을 위해 Q의 아들에 대한 계시를 깨닫는 것 + Q의 아들 즉 참 생명과 관계된 필수 불가결한, 경험적 산 지식과.그렇지 못한  <가르침-교리-관념-의견들>군더더기들에 대한 생명 차원에서 옥석 분별하여 취사선택 하기.....환언하면, Q의 아들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주님의 인격을 언급하며, 한편 그리스도(주)는 그분의 몸의 지체인 우리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은사를 갖도록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의 위임을 언급한다. --> 우리가 생명 안에서 자랄수록, 더욱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인식이 확고해져 감 인해 분열을 야기하는 바 중요하지 않은 교리들에 대한 모든 관념들을 떨쳐버리게 되어가며,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사업에 관한 그 유일한 믿음 + Q의 마들에 대한 온전한 산 지식에 체험적으로 이르게 됨>의 실행적 하나에 이르게 되고 또한 얻게 될 것..(이것이 온전히 자라난,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이름인 것이다.)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오류의 체계에 빠지도록 하는, 사람들의 궤술과 교활함 안에 있는 모든 가르침의, 바람에 요동하거나 파도에 휩쓸려 다니지 않기 위함이라..That(=in order that) we may be no longer little children tossed by waves and carried about by every wind of teaching in the sleight<책략, 술수, 속임수> of men, in craftiness<교활, 간계> with a view to a system of error,

.... Q을 거역하는 세상(정경사문과가교) 혼돈-공허-어둠의 미혹-미망 체계, 곧 시대-세대별(ages-generations) 온갖 유행/풍조(바람과 물결, 세태나 흐름)-문예사조<문화(철학-종교-전통-관습)-예술-사상학문체계>...이에 대한 [Canon<길-진리-생명-빛>인, Q말씀따라, 주 안에서] 사리판단과 분별, 곧 주께 합당한 자세, 태도와 지향의 정립과 정하신 뜻대로 그리스도로 살기 필요

.... (17-19..옛사람, 이방인의 특징)공허한 생각 안에서 행함--이해가 어두워짐--Q생명에서 떠나 있음--[지식의 결핍 + 알기를 원하지도 않음 = 무지함]...Canon이신 창조주 영생하시는 Q을 모르면<결국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수 없고..악순환 가운데 있게됨>, 굳어지고--무감각해지고--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게 되고--더러운 것을 행하게 됨--죄의 삯은 사망임.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But(=only)holding to truth in love--> grow up into Him in all things,..사랑 안에서 진리(참된 것)를 붙들어....=곧 오직 사랑안에서, 두 가지 참된 것인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을 붙들어>그에게까지 자랄지라<= 몸 안의 지체들의 성장 성숙 = 그리스도의 증가>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하시는 Q의 사랑 = 그리스도의 사랑 = 우리에게 부어주사 주님과 서로서로 사랑함의 바로 그 사랑

.... 여기서 바울은 <오류 체계인 세상의 궤술-유혹-세상 교훈의 풍조 따름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와 교회만이 궁극적으로 참된 것, 곧 진리-실재- 실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는 상호 필충조건이니, 두가지의 동시 충족이 없다면 허망함 느낀다!!...사랑<=은혜> 안에 머무르고, 그 안에서의 진리 실행!!) 머물며 행하기를 권하고 있다....그리스도와 교회를 떠난 그 어떤 것도(세상이 추구하도록 제시하는 쾌락-건강 장수-부귀 공명, 나도는 뉴스나 기사, 지식과 아이디어 기술 등등) 결국 모두 헛된 것이요 거짓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영속되지 않는 것이니, 아무것도 참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뿐이다(전1:2)....(그리스도의 몸인)교회와 함께 하는 (몸의 머리이신)그리스도가 유일무이한 실제(진리), 곧 참 가치-기준-길-생명-빛이자, 충족요건의 최우선순위인 바, 교회와 그리스도를 떠난 그 어떤 것도 <때때로 일리 있어 보이지만 일부분이거나 반쪽짜리이기에 진리가 아니요> 그 실체와 결국은 헛된 것-허망한 거짓 그 자체이다.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Out from whom all the Body, being joined together and being knit together through every joint of the rich supply and through the operation in the measure of each one part, causes the growth of the Body unto the building up of itself in love.

.... 이제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공급하시는 측면을 보자. 인도하는 4중직의 은사자마다 아직 다른이에게는 없는<주께서 베푸시는 그리스도>라는 특별한 공급이 있는 각  마디인 선주자 됨을 깨닫고 그 은사를 따라 참되게 잘 배우고 , 잘 분별하여<주께 여쭈며 이끌어 주시는 영의 생각을 따라 배워 한 걸음 더 전진함의 [청출어람] 되도록 해야 한다!!> 고유한 분량을 가진 각 지체들의 기능적 연결-결합-성장으로 인해 몸을 스스로 자라도록 해야 함을 잊지말라. <주 보시기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온 몸은 몸 자체에 의해 자라나야 하는 바, 각 지역교회는 그 자체로서 자라나야만 한다는 것이 대원칙이다. 교회들이 그들에게 말씀을 공급하게 하려고 어떤 이들을 초청하는 것은(일종의 별식이다!!) 결코 지역교회를 스스로 자라게 할 수 없다. 만일 (바로!!, <주 앙망하며 전진함으로써> 위의 과정을 거쳐) 그대들이 지역교회를 자라게  할 수 없다면 그 곳에  있지 말아야 한다.

.... [Q의 부르심의 목표 = 그리스도의 몸 건축(몸을 세움)].....에베소서에서 Q의 부르심에 대한 문제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엡1:17, 18에서, 바울은<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도록>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도록>기도했다. 엡4:1에서는 Q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은혜와 구원은 Q의 궁극적 최종 목표라 할 수 없다.. ...에베소서에 따르면 Q의 부르심의 유일한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세우는> 것이다.  마16장에서 주 예수님은 <베드로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Q의 아들이시니이다" 란는 고백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건축하겠다)고 말씀하셨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교회가 주님에 의해 직접 건축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많은 지체들을 통해서 건축됨을 계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몸에 의해서 몸을 건축하고  계신다!! Q께서는 이 목표를 성취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보라, 엡3:2절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받은 바> Q의 은혜의 청지기 직분을, 4:12에서는 <모든 성도들의 책임인 바>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세움)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엡3:2~4:12까지의 부분은 Q의 은혜의 청지기 직분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으로 끝맺고 있다. 이 몸의 건축을 위해 사역의 일을 하도록 성도들이 온전케 되고 있음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성도들을 온전케 함이 결국 사역의 일이 되며,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몸은  사도들이나 다른 인도하는 자들에 의해 직접 건축되지 않고 성도들에 의해서 직접 건축된다. 

<[기능적 중요성의 순서]고전12: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목자 및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집사))과 다스리는 것((장로))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엡4:15, 16..*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2절에서는 성도들을 언급하고, 16절에서는 각 지체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몸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도록 스스로를 자라게 한다. 실제적으로 이렇게 되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은 사도들과 그외의 인도하는 자들에 의해 온전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사도가 되는 것, 곧 자기의 어떠함과 같이 되기를 기대했다!!....바울은 실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사도만이 아니라 또한 (Q을 대신하여 그분의 말씀을 말하는 대변자인) 선지자요, (Q을 대신하여 회개하여 구주 이름 불러 영접하여 믿어 들어가 구원 받도록 전하는)복음 전도자요, (몸 안으로 들어 온 이들을 돌보며 보살피며 가르치는) 목자와 교사이기도 했다!!....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히 행하기 위하여서는 <주 앞에 단독자로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자, 생명 충만한 그리스도의 미덕(겸손-온유-친절-사랑 등) 가짐에 관심 함과 동시에> 몸을 위항 은사자로서, Q이 그토록 바라시는 몸을 건축하기 위해, 맡겨 주시는 은사따라 그리스도 분배함으로써 몸을 세워나가기를 전력투구함으로써 힘쓰되, 자신을 어떤 은사나 직분에 한정하려 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 기름부으심의 인도를 따라 행함이 옳다>

......몸의 건축은 <사도-선지자-복음 전파자-목자와 교사 등> 은사를 가진 인도자들에 의해서만 <직접적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은사 받은 인도자들에게 있어서 합당한 길은 본을 세우고 그들이 하는 것을 성도들도 할 수 있도록 성도를 훈련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은사자들의 주된 과제는 <바울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요.. 그럼으로써 온전케 된 성도로 그리스도 분배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하여 몸의 건축을 이어 받아 이루어 가도록 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하는 자들인 그들 자신처럼 <성도를> 훈련시킴으로써 성도를 다음 세대의 은사자들이자 인도자들로 세워나감이 또한 건축하는 것이다.  인도자들에게 있어서 합당한 길은 본을 세우고 그들이 하는 것을 성도들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기에, 성도들이 온전케 된 다음에는 <사도-선지자-복음 전파자-목자와 교사 등> 인도하는 자들은 비켜서서 성도들이 직접 건축의 일을 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증인들로서 다 보내심을 받을 수 있고 선지자들로서 주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 있으며, 복음 전하는 자들로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목자들과 교사들로서 매일 다른 이들을 양육하고 가르칠 수 있다.> 인도하는 자들은 누구나 비켜서야 할 때와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 온전케 하는 일이 완수되고 나면, 반드시 인도하는 자들은 직접적인 건축의 일은 몸의 모든 지체들 손 안에 넘겨주어야 한다.  몸의 건축은 소수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니라 모두 함께 동시에 목적지에 이르는 문제임을 기억하라

===옛 사람과 새 사람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 (이방인의 특징)타락한/공허한 생각 안에서 통제 받으며 행함, 이해가 어두워짐, Q생명에서 떠나 있음, [Q 지식의 결핍 + 알기를 싫어하며 원하지도 않음 = 무지함]Canon이신 창조주 영생하시는 Q을 모르면<결국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수 없고>, 굳어지고, <양심 기능 마비>무감각해지고,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게 되고<탐욕과 충족 불가능한 정욕에 사로잡힘>, 더러운 것을 행하게 됨...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항상 Q안에서, 그분과 함께-그분을 위하여-일하셨기에 Q은 항상 그분의 삶 안에 계셨고 Q과 그분은 하나였다. 이것이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의 참된 상태인 바 > 예수 안에 있는 진리이다!!

21.  진리(=모든 어둠/사망의 냉기 물리치는 달구어진/태우는 빛의 근원적/초월적 광채)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이미 침례로 그분의 죽음에서부터 그분 안으로 함께 넣어짐 인해 부활의 새 창조로 그분의 형상 본받음을..요13:15, 벧전2:21, 마11:29, 고전1:30>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자마다 참되게 그분을 접촉하기 위해 기도할 때, 자동적으로 사복음서로 돌아가서 그 안에 기술된 그분의 모형대로 그분 살기를 배우게 되리라...그 결과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라 말할 수 있었다>..If indeed you have heard Him and have been taught in Him as the reality is in Jesus,  ........예수 안에서 듣고 가르침 받은 자의 목표와 자세 = : 이제는 실생활에서 바로 그렇게 Q의 부르심에 합당히 행함.... *1)<유일무이한 그 영의, 새 창조의> 한 새 사람, 교회를 만드신 그대로 지킴 *2)<머리를 향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남 *3)예수 안에 있는 진리 그대로(이것은 Q를 위한, 그분의 경건한 삶, 곧 Q 안에서-Q과 함께 하나로-Q을 위하여 일하심의, 참된 예수님의 삶)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를 배움<=맏형이신 그리스도의 본(本) 그대로(롬8:29)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음....침례 통해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주심 따라 가능케 하셨다.> 그리스도로 적셔지고 점유되고 충만케 되고 그분으로 달구어짐으로써 그분의 영광 그 자체를 공급하는 사람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구주와 함께 장사됨의 침례 통해 벗어버렸음을 참되게 깨닫고 붙듬 발휘함 통해>.....That you put off, as regards your former manner of life, the old man, which is being corrupted according to the lusts of the deceit,

.... 주의하라, <피상적 껍데기를 강조하는> 이단적 현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Q이 아니고 단지 우리가 따라야 할 인간 삶의  최고의 표준을 세운 사람에 불과할 뿐이요, 그분을 닮기 위해서는 누구나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타고난(타락한) 생명의 훈련 필요성을 강조한다.

.... 그러나, 신약을 따라 믿는 우리는 <믿는 바> 죄인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을 때<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음, 곧 새 사람 안으로 들어감 이루시며>, Q은 참된 모형, 곧 본뜨는 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이 사람을 넣으시며, 동시에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그 사람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 그의 영 안으로 들어가심으로써, 믿는 이는 그 모형에 따라 그의 생명 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로 살게 된다.. 또한, 그가 지극한 사랑이신 그리스도께 매료되어 그리스도로 살아감을 더욱 더 추구할수록 자연히 그 모양의 형상대로 더욱 형태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요,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삶인데, 그분의 삶 안에서 우리는 실제, 즉 진리와 빛의 비침과 Q의 표현을 본다. 바로 이렇게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리스도를 배운다..

.... (성령의 이끄심 따라) 죄인들에게 복음 전할 때 우리는 보통 그들에게 주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해준 후, 그리스도를 믿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생명으로 그들 속에 <망설임 없이 지금 당장>영접할 것을 권한다.. 그 다음 단계는 영접한 자에게 곧바로 침례를 주는 것이 필수인데, 이는 우리가 그들을 모형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넣는 것을 가리킨다. 그후 그들은 <물에 잠겨 옛 사람은 처리되었고, 물에서 나옴으로써 부활의 새 사람으로 옷 입혀졌기에> 모형에 따라<모형에 일치되도록> 그리스도에 의해 살게 되는 것이다.

23.  오직 너희의 <거듭난, 새 사람으로서, 그대의 마음을 점유-충만한 그 영을 따라>심령이 새롭게 되어 .... And that you be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됨  ::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다"는 성취된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음..... 새롭게 된다(renew)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롬12:2, 고후3:18)... <생각의 영>에서의 영은 Q의 내주하시는 그 영과 연합한 하나된 믿는이들의 거듭난 영으로서, 그러한 연합된 영이 우리 생각 안으로 퍼져서 점유 충만케 됨으로써,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되는 것이니,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그 목표하는 바란, <새 사람 입음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거듭났음>의 성취된 사실이 체험을 통해 실제화되도록 하려 함인데, 이때 우리는 예수의 삶에 일치되는 삶을, 즉 진리를 따르는 진리의 삶이자 빛의 비침 안에 Q의 표현 안에 있는 삶을 살게 된다..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의 + 진리의 거룩함 또는 (Q의 인격화이신 진리 그 자체인)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입은 바 그렇게 살라.... And put on the new man, which was created according to God in righteousness and holiness of the reality.

.... 새 사람 입히심의 필충조건은 다만 죄인됨 자백하고 죄를 회개-구주 영접-구주 이름 불러 침례받음인데, 성령 내주하심 따라 그리스도로 삶이 가능해짐. 

.... 구주 안으로 넣으심 받은 새 사람에게 입히신 바, 새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서든지 찾아볼 수 있는 바, <진리이신> Q의 <의>와 <거룩함> ::: <의>는 Q과 사람에 대해서 옳은, 외적인 행위를, <거룩함>은 Q께로 분별되어 Q의 거룩한 본성으로 적셔짐의 내적 본성을 말한다. 여기서 <진리>는 새 사람과 관련되는 바, Q의 인격화로서, 예수님의 삶 안에서 전람되었다.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

....모든 은혜(=그리스도의 사랑) 누림 인해, 악독-분노-화냄/떠듬-분쟁-악의 사라지고 긍휼-자비-겸손/온유/인내-용납/용서-사랑/평강/감사 충만 + 진리 안에 거함 인해(=그리스도의 생명),  모든 거짓/허망함 사라지고 공의/정직-충성/신실 가득함의 삶!!

[개괄적으로 보게 되면, 주 안에서 그분의 달구어진 사랑 가득한 광채, 곧  은혜<우리의 누림 되시는 우리에게 도달하신 Q-감추임..세밀한 내용의 표준들...이로 인해 악독-한담-비방은 사라짐>와 진리<그 어떤 어둠도 없는, 소멸하여 태우는 빛의 광채이신 Q -아버지의 생명이 표현됨..본과 틀인 원칙들>가 일상 생활<새 사람의 언행심사-반응>에서 JC 배움/본받음의 기반임을 알 수 있음...주께 여쭈며 동행하라 주께 대해 <주 앞에서, 오직 성령 따라> 절대적이 되라!!, 바로 그렇게 지체들을 대하라..오직 <부어주신 바> 그리스도의 마음/심정-관점(패러다임)/시야로 그분의 움직임과 운행하심 따라 행하기(골3장을 보라!!)

25.  ○<진리, 곧 궁극적으로 참된 것, 그리스도와 교회 말하기>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주 안의 형제 자매 권속들이자,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한 몸의 지체들인]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오직 사랑과 빛 되신 구주의 은혜와 진리 안에 머무름으로써, 바른 교훈 위해 꾸지람의>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길어지면 마귀에게 틈을 주는 셈이니>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오직Q신뢰하고 맡겨드리며 동행함으로 그분의 공급하심 누림으로써>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은혜의 성령 따라 (모든 언행심사에 있어) 일치시키기>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 성령을 근심케 함(=슬프게/언짢게 함...은혜와 진리의 원칙에서 떠날  때) = 우리 마음에 거리낌/불편한 느낌으로 오기에, 여쭙고 회개하여 그분과 하나됨의 평강으로 돌이키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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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hesians 4  Amplified Bible

==Unity of the Spirit

1 So I, the prisoner for the Lord<다비역..the prisoner in [the] Lord>, appeal to you to live a life worthy of the calling to which you have been called [that is, to live a life that exhibits godly character, moral courage, personal integrity, and mature behavior—a life that expresses gratitude to God for your salvation], 

2 with all humility [forsaking self-righteousness], and gentleness [maintaining self-control], with patience, bearing with one another [a]in [unselfish] love. 

3 Make every effort to keep the oneness of the Spirit in the bond of peace [each individual working together to make the whole successful]. 

4 There is one body [of believers]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called [to salvation]— 

5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6 one God and Father of us all who is [sovereign] over all and [working] through all and [living] in all.

7 Yet grace [God’s undeserved favor] was given to each one of us [not indiscriminately, but in different ways] in proportion to the measure of Christ’s [rich and abundant] gift. 

8 Therefore it says,  “When He ascended on high,   He led captivity captive,  And He bestowed gifts on men.”

9 (Now this expression, “He ascended,” what does it mean except that He also had previously descended [from the heights of heaven] into the lower parts of the earth? 

10 He who descended is the very same as He who also has ascended high above all the heavens, that He [His presence] might fill all things [that is, the whole universe]). 

11 And [His gifts to the church were varied and] He Himself appointed some as apostles [special messengers, representatives], some as prophets [who speak a new message from God to the people], some as evangelists [who spread the good news of salvation], and some as pastors and teachers [to shepherd and guide and instruct], 

12 [and He did this] to fully equip and perfect the saints (God’s people) for works of service, to build up the body of Christ [the church]; 

13 until we all reach oneness in the faith and in the knowledge of the Son of God, [growing spiritually] to become a mature believer, reaching to the meas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manifesting His spiritual completeness and exercising our spiritual gifts in unity]. 

14 So that we are no longer children [spiritually immature], tossed back and forth [like ships on a stormy sea] and carried about by every wind of [shifting] doctrine, by the cunning and trickery of [unscrupulous] men, by the deceitful scheming of people ready to do anything [for personal profit]. 

15 But speaking the truth in love [in all things—both our speech and our lives expressing His truth], let us grow up in all things into Him [following His example] who is the Head—Christ. 

16 From Him the whole body [the church, in all its various parts], joined and knitted firmly together by what every joint supplies, when each part is working properly, causes the body to grow and mature, building itself up [b]in [unselfish] love.

==The Christian’s Walk

17 So this I say, and solemnly affirm together with the Lord [as in His presence], that you must no longer live as the [unbelieving] Gentiles live, in the futility of their minds [and in the foolishness and emptiness of their souls], 

18 for their [moral] understanding is darkened and their reasoning is clouded; [they are] alienated and self-banished from the life of God [with no share in it; this is] because of the [willful] ignorance and spiritual blindness that is [deep-seated] within them, because of the hardness and insensitivity of their heart. 

19 And they, [the ungodly in their spiritual apathy], having become callous and unfeeling, have given themselves over [as prey] to unbridled sensuality, eagerly craving the practice of every kind of impurity [that their desires may demand]. 

20 But you did not learn Christ in this way! 

21 If in fact you have [really] heard Him and have been taught by Him, just as truth is in Jesus [revealed in His life and personified in Him], 

22 that, regarding your previous way of life, you put off your old self [completely discard your former nature], which is being corrupted through deceitful desires, 

23 and be continually renewed in the spirit of your mind [having a fresh, untarnished mental and spiritual attitude], 

24 and put on the new self [the regenerated and renewed nature], created in God’s image, [godlike] in the righteousness and holiness of the truth [living in a way that expresses to God your gratitude for your salvation].

25 Therefore, rejecting all falsehood [whether lying, defrauding, telling half-truths, spreading rumors, any such as these], speak truth each one with his neighbor, for we are all parts of one another [and we are all parts of the body of Christ]. 

26 Be angry [at sin—at immorality, at injustice, at ungodly behavior], yet do not sin; do not let your anger [cause you shame, nor allow it to] last until the sun goes down. 

27 And do not give the devil an opportunity [to lead you into sin by holding a grudge, or nurturing anger, or harboring resentment, or cultivating bitterness]. 

28 The thief [who has become a believer] must no longer steal, but instead he must work hard [making an honest living], producing that which is good with his own hands, so that he will have something to share with those in need. 

29 Do not let unwholesome [foul, profane, worthless, vulgar] words ever come out of your mouth, but only such speech as is good for building up others, according to the need and the occasion, so that it will be a blessing to those who hear [you speak]. 

30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but seek to please Him], by whom you were sealed and marked [branded as God’s own] for the day of redemption [the final deliverance from the consequences of sin]. 

31 Let all bitterness and wrath and anger and clamor [perpetual animosity, resentment, strife, fault-finding] and slander be put away from you, along with every kind of malice [all spitefulness, verbal abuse, malevolence]. 

32 Be kind and helpful to one another, tender-hearted [compassionate, understanding], forgiving one another [readily and freely], just as God in Christ also forgave [c]you.

==Footnotes

Ephesians 4:2 The key to understanding this and other statements about love is to know that this love (the Greek word agape) is not so much a matter of emotion as it is of doing things for the benefit of another person, that is, having an unselfish concern for another and a willingness to seek the best for another.

Ephesians 4:16 See note v 2. 

Ephesians 4:32 Two early mss read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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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 (개요)

우리는 앞의 세 장에서 몇가지 중요한 교리적 진리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는 에베소서의 전반부를 읽었다. 

이제 우리는 이 서신의 후반부에 이르렀는데 여기서는 가장 무게 있고 심각한 교훈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바울의 다른 여러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에베소서도 역시 앞 부분은 교리에 관한 말씀으로 인간들의 마음 가운데 복음의 위대한 진리와 교리를 전해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뒷부분은 실제적인 면에 관한 말씀으로 성도들의 생활 습관에 대하여 지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음을 보게 된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도 [지고지선의 아가페적 사랑, 하나님 참생명 충만을 누리며 빼어닮아가며 공급하는, 부어주신 바 사랑-하나님의 모든 기쁨/열납하심-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안의 화목/화평/평안/평강의 충만에 참여케 하심따라 발휘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건전한 믿음을 추구하게 하며 실생활이 온전-순전-완전함을 지향하며 절도 있고 규칙적이도록 권하고 있다. 

앞부분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로가 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에 대하여 또 그러한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대신에 우리 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듣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읽은 특권의 비밀을 이해하고 거기에 동참하는 가장 최선의 길이란 뒤부분에서 나오는 우리의 의무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앞 장에서 우리가 이미 가르침을 받은 교리들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믿음을 뒷부분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무의 실천을 수행하는 좋은 기초가 될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서로 조화-균형 이루는 가운데 상호 보완-상호 시너지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중요한 의무에 대한 여러 권유를 읽을 수 있다.

Ⅰ. 보다 일반적인 교훈(1).

Ⅱ. 성도들 상호의 사랑, 일치에 대한 교훈,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을 발전시키는 적절한 수단과 동지들에 대한 교훈(2-16).

Ⅲ.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순결과 거룩성에 대한 권고, 그리고 좀더 일반적인 권고와(17-24) 구체적인 실례들이 25절에서 끝절에까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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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있는 신앙(엡 4:1)

위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합당하게 되기 위하여 행해야 하는 일반성을 띤 교훈이다. 

바울은 그때 로마에서 죄수로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주를 위하여" 또는 주 안에서 갇힌 자가 되었다. 

이 말씀은 할 수 있는 한 주를 위한 자라는 뜻을 의미 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3장 1절을 참조하라. 

바울은 자기가 갇힌 바 된 것을 반복하여 언급한다. 이는 그가 자기의 갇힌 바 된 것을 부끄러워 아니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행악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갇힌 것을 반복하여 말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그들에게 쓴 내용을 부드럽게 또 설득력 있는 입장에서 추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복음의 교훈을 위하여((그는 이방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사명 받은 선두주자로서!!)) 고난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교회성도들도 복음을 가치있게 여기고 진지한 경의를 표하고 충성스럽게 지킬 것을 확신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된 한 가련한 죄수의 간구를 읽을 수 있다. 

그는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1절)라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것과 또 어떤 자리로 너희를 부르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열심히 구하노니(내게 가련한 죄수들이 흔히 그들의 친구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은 무슨 위문품으로 보낸다거나 또 나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지 말고) 선한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고 너희 신앙과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살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에게 가져다 준 복된 삶에 부끄럽지 않게 거기에 일치하고 적절하게 행하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교도의 자리에서 기독교도로 부르신 그 부름에 합당하게 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의하여 자기들이 불리움을 받은 복음과 그것을 위하여 자기들이 불리움을 받은 영광에 합당하도록 살아야 함을 명심하자. 

이 둘이 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와 영광을 마음에 두고 그 나라와 영광의 상속자답게 행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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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에 대한 교훈(엡 4:2-16)

위의 말씀에서 바울은 좀더 각별한 권고를 하였다. 바울은 4장 안에서 두가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 하나는 일치와 사랑이요 또 다른 하나는 순결과 거룩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과제이다. 

만약 모든 성도들에게 신실한 동료가 되지 못하거나 또는 모든 죄를 물리치는 원수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지 못하고 있는"것이 된다. 

위의 단원은 상호간의 사랑과 단합과 일치에 대한 권유가 포함되어 있고 또 이러한 요소들을 증진시키는 적절한 수단과 동기들이 취급되고 있다. 

성경 안에서 위의 사실만큼 우리에게 열심히 강조된 말씀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육신-십자가의 대속적 죽음-부활승천으로 본을 보이셨고, 친히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부어주사, 성령따라 행함으로써 나타내시는 바, 새시대를 살아내며 주도하며 새롭게 하는, 모든 죄를 이기는 보혈의 능력이며]그리스도 왕국의 율법이며 그리스도 학교의 과목이며 그리스도 가족들의 제복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Ⅰ. 일치의 방법. 

그것은 "모든 겸손과 온유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2절). 

낮아짐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 즉 자기를 즐겨 낮추어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교만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온유함을 통하여 우리는 그것이 인간들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타인들의 결점을 쉽게 공격하지 않도록 하는 인간 영혼의 가장 뛰어난 성품임을 배우게 된다. 또한 온유함은 진노한 원한과 격분에 반대되는 성향이다. 

"오래 참음"은 복수를 하려함이 없이 해 받음을 인내로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사랑의 정신에 입각하여 타인의 약점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용납하며 서로 상대방을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의 풍성한 은혜는 고무하나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자야말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죄를 발견하였더라도 지나치게 나쁘게 여기지 말고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는 것처럼 그를 용서해야 한다. 이러한 행위가 없이는 일치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용서는 매임에서 풀어주고 받아들여주는 것임을 잊지말라!!]

일치를 위한 첫 걸음은 겸손이다. 겸손함이 없이는 온유함이나 오래 참음이나 용서가 있을 수 없으며 이 모든 것이 없이는 일치란 있을 수 없다. 

교만과 격정은 화평을 깨뜨리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실수를 저지르게 하지만, 겸손과 온유함을 화평을 회복시키며 그것을 유지하여 준다. 

"교만은 논쟁을 일으키고" 겸손은 사랑을 가져 온다.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더욱 더 일치감이 잘 형성된다. 

만약 우리가 온유함과 겸손한 마음을 지니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그를 위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그분은 뛰어나게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또 그가 우리에게 자기를 배우도록 친히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Ⅱ. 바울이 표현한 일치(하나됨, unity)의 특성.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일치, the unity of the Spirit"이다(3절).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는 자리는 마음과 영혼 가운데 있다. 

성도들의 하나됨이란 생각의 일치나, 예배 형식과 모양의 하나됨이 아니라, [각자가 진실로 그리스도와 성령안에 머물러 있음으로 그 인도하심따라 상호간에 마음을 열어]한 마음과 한 영혼으로 합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과 사랑의 일치야말로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그리스도의 평강이 각 성도의 마음을 주장하심으로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일치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의 총화로서의 특성이다. 

이 일치됨을 보존하도록 우리가 [성령따라 겸손-온유-일절 오래참음-사랑안에서 상호 용납하기를 실행함으로써 하나됨을 힘써 지키며]노력해야 한다

본문 "힘써 지킴"이란 단어는 복음적 용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하나님의 입의 모든 말씀>안에서 그리고 성령안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우리와 다투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우리를 멸시하고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멸시하거나 미워하지 아니하도록 힘써야 한다. 

또한 본문의 "평안의 매는 줄"이 있다. 이 말은 평화가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고 서로서로 친교를 갖고 살도록 매는 줄이란 뜻의 말이다. 

평화로운 성격과 행동은 그리스도인을 하나가 되게 한다. 반면에 불일치와 논쟁은 그들의 마음과 사랑의 결속을 해치고 분열을 초래한다. 

약한 줄이 많이 모여 꼬여지면 강하게 된다. 평화의 결속은 사회의 힘이 된다. 

모든 선한 사람들과 그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꼭 같은 길이와 꼭 같은 정서와 꼭 같은 판단을 하게 되는 사회 도래를 뜻함이 아니라, 평화의 결속이란 그들 모두의 상이성[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하나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여러 나뭇가지를 한 데 묶은 것처럼 거기에는 길이가 다르고 강도가 다른 것들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로 묶이고자 노력 할 때 그들은 그 중 가장 굵고 강한 것보다 더욱 더 강한 힘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Ⅲ.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증진시켜 주는 여러 가지 동기들. 

바울은 우리를 설득하기 위하여 몇 가지를 역설하였다.

1.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는 기쁨과 영광이 되고 있는 많은 일치된 것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니"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4절).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마음이 있다면 이는 괴물일 것이다. 몸이 하나이라면 그 몸에 속한 모든 것이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보편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한 몸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라면 누구나 한 헌장 아래 규합되어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 헌장은 복음의 헌장으로 그의 선물과 은혜에 의하여 이 몸을 소생시키고 생기있게 하고 하나의 계약은 복음의 다스리는 성령에 의하여 활력있게 역사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다면, 우리는 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활력을 공급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리라"(4절)고 하였다. 

소망은 본문에서 소망해야 할 대상, 소망해야 할 것, 곧 하늘 나라의 유업[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기업, 상속자됨의 영광]을 지시해 주고 있다. 

영적, 참 이스라엘을 위하여 우리는 불리움 받은 것이다. [진실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그리스도안의 구원영생복락]이라는 동일한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이 모두가 소망을 두는 한 분, 그리스도가 있고 그들 모두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하나의 하늘 나라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 말씀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모든 성도들은 직접적으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또한 "믿음도 하나이요"라고 하였는데 이는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이 들어있는 복음[그 복음을 믿는 믿음]의 의미하는 말이다. 

또는 이 말은 이로 인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은 믿음(그리스도를 믿음)이란 동일한 은혜를 말하는 말씀이다. 

또한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 바로 그 세례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세례란 이로 인하여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와 관계 짓는 같은 성례적인 계약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다"(6절)고 하였다. 

이 한 분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진실된 회원들을 그의 자녀도 삼으시는 바로 그분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에 의하여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되신 것처럼 이제는 특별한 관계에 의하여 보든 교인마다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만유 위에 계시다"고 했는데 그는 그의 본질상 만유 위에 계시며 그의 품격이 영광스럽게 흠없이 완전하다는 점에 있어서 만유 위에 계신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특히 주님의 교회를 섭리로 다스림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만물을 통일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 자신의 섭리에 의하여 만유를 주장하시고 다스리심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의 성령과 특별한 은총에 의하여 성전에 거하시는 것처럼 모든 믿는 자들 가운데 계심을 뜻하는 말이다. 이 같이 많은 "하나됨"들이 있는데 한 가지 곧 "마음의 하나됨" 또는 "영혼의 하나됨"만이 없다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2.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수여하신 은사의 다양성을 상기시킨다. 

본문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을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절)라고 하였다. 

비록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회원들이 그렇게 많은 점에 일치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몇 가지의 다양성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그들 가운데서 [인본주의적, 상대적]차별 의식을 가져 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모든 다양한 은혜는 같은 위대한 목적을 위하여 계획되고 동일한 풍성한 주재자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 즉 은혜의 선물이 [하나님으로부터 그 개인에게 가장 이롭고도 적합하게 주권적으로]주어졌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어찌 보면]어떤 사람에게는 좀 더 큰 은사가 다른 사람에게는 좀 덜한 은사가 주어졌다고 판단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받은 다양한 은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논쟁의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그 은사에 따라 어떤 사람은 바울을 위하였고 다른 한편은 아볼로를 위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문제에 관하여 다툴 필요가 없음을 보여 준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보편적인 덕성을 위하여 함께 각각의 임무에 쓰여지고 있는 바, 모든 사람마다에게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각기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듯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는 은사를 주셨다. 

모든 사역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의 일원들을 그들이 소유한 은사와 은혜에 대하여 그의 덕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시고 그의 은사들을 내려 주신 모든 사람들은(비록 이 은사들이 규격이 다르고 명칭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더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는 이 경우를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신 몇 가지 은사에 특별히 적용시킨다. 

먼저 사도는 이 은사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졌음을 다윗의 말을 통하여 밝힌다.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그가 은사를 주실 것을 예언했었다(시 68:18).  "그러므로 그가 이르기를" 즉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인용한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예언하였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 말씀에 대하여 이후에 나오는 세 절의 말씀 속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먼저 "그가 올라가셨다"는 말씀에 대하여 사도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 그대로 승천하신 곳, 가장 높은 하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였다. 

또한 이 말을 통하여 사도는 그가 올리움을 받은 상태, 즉 그의 아버지에 의하여 높임을 받으시고 특별히 영광을 입으신 상태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마음을 쏟아 보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복된 구세주께서는 하늘 나라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완전한 증거가 된다. 

위대한 정복자가 개선 행진을 할 때에는 자기 포로 중에 뛰어난 자들을 사슬에 매달고 군사들과 관중들에게 상금과 전리품을 뿌려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정복자로 하늘에 오르셨을 때 "사로잡힌 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셨다." 

구약에서 이 말씀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던 바로 그 강한 적들이 정복되었음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졌다(삿 5:12 참조). 

그런데 본문에서 사로잡음은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모든 영적인 적들을 사로잡음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우리를 정복하였던 자들을 정복하셨다. 즉 죄와 사탄과 죽음 같은 것들을 정복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십자가 위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셨는데, 그 승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완성되었다. 즉 그가 만유의 주가 되시고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그의 손 안에 쥐셨을 때 그의 승리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가 선물을 인간을 위해서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역주: 한글 개역과 틀림, 한글 개역은 선물을 인간에게서 받으셨다로 되어 있음).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받으신 것은 인간들에게 은혜와 은사의 막대한 분량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특히 그는 성령의 은사로써 그의 제자들을 풍성하게 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베풀고 계신다. 

바울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하여 먼저 언급한 후  "그가 내리셨음"을 말한다(9절). 

바울의 이 말을 한 의도는 다음과 같다. 즉 다윗의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하여 말했 때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겸손하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바울은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승천하셨다는 것은 그가 먼저 아래로 내려 왔음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즉 그의 승천은 지상에서의 그의 겸비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보고 있다. 그 다음에 바울은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음을 말한다. 

이 말씀은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제가 주의 앞에서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시 139:15)라고 한 다윗의 시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성육신을 뜻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는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시 63:9)라는 말씀에 따라 그의 장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그의 선조들이 말하였듯이) "땅의 깊은 곳에 들어가심"이라고 불렀다. 그는 육신을 입으심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다. 또한 그는 장례되어 땅 아래로 내려 가셨다. "요나가 고기의 뱃 속에 사흘 낮, 사흘 밤을 지낸 것처럼 인자도 땅 속에서 사흘을 거하리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다음에 사도는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10절)고 말씀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보이는 하늘인) 별과 공기가 있는 하늘 훨씬 위 즉 제일 높은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즉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조건과 상태에 따라 적합한 은사와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 주께서는 먼저 자기를 겸손히 낮추심으로 높임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먼저 내려오셨고 그 다음에 올라 가셨다. 

바울은 다음에 승천할 때에 그리스도가 주신 은사가 무엇이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한다.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로써 "그 중의 얼마를 사도로" 세우셨음을 말한다(11절).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미 그들 중 몇 명을 사도로 보내셨었다(마 10:1-5). 그러나 그후 다시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행 1:26). 

모두에게  주님께서 특별한 방법과 분량의 성령을 볼 수 있게 부어 주심으로 그들은 더욱 확고히 무장되게 되었고 부끄러움 없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 때에 교회에 부으신 은사는 그 무엇보다도 화평과 화해의 사역의 은사였음을 주목하고 기억하자

사역의 은사는 그리스도 승천의 결실이다. 사역자들은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았는데 이 은사는 주 예수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주신 두 종류의 직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Officers) 

그 하나는 "특별한" 것으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들"과 같이 교회에서 상위를 점하는 [말씀의]직분자들을( higher officers) 가리킨다. 

그 중에 사도가 으뜸이다. 이들 사도들을 그리스도가 직접 부르셨고  비범-특별한 은사와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빠짐없이 전하는 사명으로 무장시키셨다. 그들은  보고 들은 바 그리스도의 이적과 교리의 목격자로서 복음전파의 소명을  받았고,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고 다스리도록 그는 그들을 보내셨다. 

또 선지자라 함은 여기서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던 사람으로 보여진다. 

복음 전하는 자는 안수받은 자들로(딤후 1:6) 바울이 전도 여행에 데리고 다닌 사람들이며(갈 2:1), 사도들이 이미 세운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보내졌으며(행 19:22) 한 군데에서 정착하여 있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다시 부름을 받으면 옮겨갔다(딤후 4:9). 

또 다른 하나는 보통의 사역자들을 (ordinary  ministers)가리킨다. 그들은 목사와 교사들과 같이 좀 낮은 위치에 속하고 또 [한정된 지역의] 좁은 범위에서 활동하도록 선택된 자들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명칭이 한 직분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이 두 명칭은 각각 구별된 직분을 말하는데 둘 다 교회 안에 있으며 일반적인 직분이라고 설명한다. 

목사들이 개개의 교회 안에서 제일 우두머리로 정한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방법에 따라 성도들을 인도하고, 교훈하고, 말씀으로 먹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자주 사제나 장로라고도 불리웠다. 교사들도 교훈을 통하여 성도들을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안에서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직분을 정하고 또 그 직책에 합당한자들을 세우시는 것이 그의 대권임을 알게 된다. 

교회 안에 처음에도 이렇게 여러가지 직책이 있었고 지금까지 여러 은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교회의 부요함을 보여 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친절하신가!  

또한 그는 그의 교회와 교회의 개발을 위해 얼마나 주위를 기울이시는가!  

그가 승천하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은사를 부어 주셨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다. 어떤 것은 좀더 크고 어떤 것은 분량이 적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다음의 내용에 기록되고 있다.

3.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 그리스도의 대 목적과 계획. 

그리스도의 은사는 그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이며 그의 나라와 유업이 인간들에게 있어지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 모든 은사가 이러한 보편적인 목적을 위하여 계획되었다는 사실은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지 아니하고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은사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려 하심이다"(12절). 

즉 이전에는 죄로 인하여 분리되어 있고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질서있게 영적인 자리로 나아오게 하며 또한 그 안에서 좀 더 강해지고 확고해지도록 하며 앞으로 나아오게 하며 그러므로 각자가 각자의 고유한 위치와 기능 가운데서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헌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또한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즉 그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일을 하게 하며 그들의 목회적 기능의 분야를 성공적으로 감당하게 하시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13절)고 하였다.

이는 교인들의 받은 은사를 증가시키고 새로운 성도를 더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하여 은사와 직분들을 세우셨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 나라를 예비하게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러므로 13절에 "우리 모두가 ~에 이르기까지"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된 은사와 직분들은 성도들이 완전해질 때까지 교회 안에서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 은사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과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될 때까지(즉 모든 참된 신자들이 같은 귀중한 믿음에 의하여 함께 모일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또한 이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위대한 중보자가 되심을 단지 사변적으로만 알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랑으로 그를 인식하게 되며 모든 마땅한 영예와 신뢰와 복종을 그에게 바치게까지 되는 것이다. 

또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에게 은사와 은혜가 충만하여 우리로 이 세상에서 예속된 것과 같은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함을 벗어버리도록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절)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사 안에서 무르익고 완전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한다. 또는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하신 그리고 그의 신비한 몸을 완성시키신 그 장성함의 분량에까지 성도들이 이르게 하려 하심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 [그 사실을 참되게 인식한다면] 우리는 [계시로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바] 완전한 세상에 갈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온전함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러함에도 이땅에서부터 여전히 그리스도안에서 그분의 충만하심의 공급통로로서 그분을 공급하기 위해 계속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충만함은 바로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분의 충만하심안으로의 성장성숙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 성장한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사도가 여기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믿음과 지식에 일치가 되어 결합함으로 그들이 완전한 인간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한 것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그의 거룩한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제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즉 그가 교회에 여러 가지 직분을 세우신 뜻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씀한다.

(1)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않게 위해서 이다"(14절). 

이 말씀은 우리가 지식에 있어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되거나 믿음이 약하여지거나 우리의 판단력이 일관되지 못하거나 쉽게 모든 유혹에 굴복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비위나 맞추려 하거나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좌우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어린 아이들은 쉽사리 강요당한다. 

우리도 이런 것을 주의하여 중심이 안잡힌 배와 같이 또는 공중의 구름과 같이 진실함도 없고 견고성도 없으면서 바람처럼 넓게 펴져있는 교훈에 의해 이리저리로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여야겠다. 

또한 "사람의 궤술"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도박으로부터 취해진 비유이며, 악한 자들의 간교한 행악함을 의미한다. 

또한  "간사한 유혹에 빠져"라 하였는데 이는 유혹을 하고 또 속이는 길을 찾음에 있어서 재주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그 다음에 "속이려고 기다린다"는 말을 통하여 그 간교함의 실태가 드러난다. 즉 약한 자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진리로부터 끌어내기 위하여 숲 속에 기다리는 것처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거짓된 교훈과 죄에 이르도록 유혹하여 속이는 자들은 대단히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하자.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사람들이 이를 위하여 궤술과 간사함을 사용하는 비열한 인간들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들이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최선의 길은 거룩한 진리를 배우고 그리스도의 성령의 빛과 은사를 얻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진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하며 그 진리 안에서 확고히 설 수 있게 되어야 한다.

(2) 이는 우리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15절). 

또는 사랑 안에 있는 진리를 따르며 또는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일에 신실하게 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우리가 진리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종한다고 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와 더불어 진리를 보존하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또한 진리도 놀라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 가운데서 전하며 다툼으로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 된다. 

진리와 화평 이 두가지는 함께 공존해야 한다.

(3) 우리가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리스도 안으로 더욱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범사에 즉 새로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와 사랑과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그에게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숙함을 향하여 성장해야 한다. 성숙함은 어린 아이와 상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의지할수록 더욱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풍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의 머리이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하여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곧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이다.

(4) 우리가 한 몸의 지체처럼 서로 돕게 하기 위해서이다(16절). 

여기서 바울은 자연적인 몸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물론 이 신비한 몸의 머리되시는 이는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의 각 지체가 각각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상호간에 교통하며 연합하여야 하듯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은혜 안에서의 영적인 발전과 심장을 위하여, 서로 사랑하고 일치해야 하며 각각의 은사의 열매들을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에게서(즉 각 지체에게 지시를 하며 자양분을 전달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부터)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각 부분이 일치하여 신체를 도움으로 또는 몸의 동맥과 정맥과 같은 성령, 믿음, 사랑, 성례전 등이 그리스도인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또한 동료 지체인 각 사람들과 서로 일치하게 도움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그들이 질서있게 또한 확고하게 일치하며 각자가 자기의 자리를 지킴으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한다. (즉 다시 말하면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그리고 각 지체가 몸 안에서의 제각기의 위치를 지키고 임무를 수행함에 따라 역사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각 지체에게 충분하시다고 판단할 때까지 하나님이 그의 큰목적, 즉 그 몸을 자라게 하기 위하여 정하신 방법들로 효과있게 하려고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머리로서 각 지체를 명령하고 소생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따라" 서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각 지체의 "효율적인 역사에 따라"서란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즉 각 지체가 자기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각 지체에게 맡겨진 대로 모두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므로 한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람은 몸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전체 몸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로써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지는 것이다"(16절).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 두 가지 내용 중 한 말씀이든지 또는 말로써만의 그리스도와 타인들에 대한 사랑에게 행동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든지 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상호간 사랑은 영적인 성장을 가져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육신의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반면에 "서로 분열하여 싸우는 나라는 서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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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과 거룩에 대한 교훈(엡 4:17-32)

바울은 앞의 구절에서 상호간의 사랑과 연합과 일치를 권고하였다. 

계속하여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활에 있어서의 성결과 거룩성을 갖도록 권고하였다. 

본문 전반부에서는 일반적인 원칙을 얘기했고 (17-24) 후반부에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었다(25-32절). 

본문의 말씀은 엄숙한 어조로 도입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17절)  

다시 말한다면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통하여 너희가 그러한 은혜의 동참자이며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구성원이 된다는 사실이 알았으니 이제 나는 너희의 양심에 호소하여 주의 이름 안에서 너의 의무에 대하여 증거하노라. 또한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권위의 덕을 힘입어 증거하노라."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Ⅰ. 마음과 생활의 성결과 거룩성에 대한 좀더 일반적인 권고.

1.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즉 다시 말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무지하고 회개하지 않은 이방인들같이 생활하며 행하지 말라. 이방인들이 헛된 일과 우상 섬김과 그들이 영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들의 기대를 기만하는 세상적인 것들에 관한 생각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비록 회심한 사람들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산다고 하여도 그들과 같은 형식으로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1) 바울은 때때로 이방 세계의 악함에 대하여 설명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볼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 등걸과 같이 악한 이방 세계에서 끄집어 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면 이방인의 상태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① "저희의 총명은 어두워졌다"(18절). 

그들은 모든 구원의 지식을 피하였다. 본성의  빛이 그들에게 가르쳐 준 하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에 대하여 그들은 무지하였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었고, 그것을 그들은 빛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의 무지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다." 

그들은 거룩한 삶으로부터 멀리 떠난 삶을 살았으며 거룩한 생명을 싫어하고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거룩한 삶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며 만족하게 여기시는 생명의 길이며 이 삶에 의하여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진리와 선하심을 닮는 것이다. 

그들이 사악한 무지는 빛과 지식 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그들이 멀리 떨어진 까닭이다 .

천박하고 부자연한 무지는 신앙과 경건에 파괴적인 영향을 준다. 

그들이 이와 같이 무지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저희 가운데 있는 마음의 어두워짐과 굳어짐으로 말미암은"(18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통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알도록 하시지 않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거룩한 빛으로부터 나오는 교훈적인 광선을 받아들이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무지했다. 그들이 무지함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완고한 데서 기인한 것이며 빛과 지식을 아는 여러 가지 방법을 거부하고 빛에 대하여 반항하였으므로 생겨진 것이다.

② 그들의 양심은 타락하고 무감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가 감각없는 자가 되어"라고 하였다(19절). 

그들은 자기의 죄에 대한 인식을 할 수도 없으며 죄로 인하여 생긴 그들의 처지를 위험과 불행에 대하여도 인식할 수도 없었다. 이 까닭에 "그들은 자신을 방탕하게 방임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더러운 욕망에 탐닉하였고 이들 욕망의 지배에 자신을 맡겼다. 

그들은 더러운 것은 욕심으로 행하므로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욕망으로 모든 종류의 더러운 죄와 심지어는 가장 괴상하고 기괴한 죄를 자행하는 것을 다반사로 삼았다. 

인간의 양심이 한 번 무감각하게 되면 그들의 죄를 끝이 없게 됨을 명심하자. 인간이 자기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곳에 집중할 때 가장 혐오할 만한 권능과 방창 이외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그들의 무서운 범죄 행위가 더욱 늘어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방인들의 특징이었다.

(2) 그러나 회개한 이방인들도 반드시 자신을 이러한 이방인들과는 마땅히 구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절)고 하였다. 

이 말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너희는 저희와 같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처하고 있는 어둠과 악함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기에,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태도로 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은 죄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그리스도를 배우라! 배우라니? 그러면 그리스도가 책이며, 학과목이며, 길이며, 무슨 사업이란 말인가? 

그 뜻은 이러하다. 너희는  이같은 기독교를 배우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여 주신 생활의 규범은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바와 같이 행하지 않도록 하라.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21절) 즉 우리가 전하는 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을 듣고 또한 그 안에서 즉 그의 성령에 의하여 내적으로 효과적으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21절) 그렇게 하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배움의 대상이 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워야만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교사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또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과 같이"(21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 자신이 지니신 것과 같은 참된 진리를 그의 가르침과 그의 생애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씀이든가 혹은 "그 진리는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처럼 나타날 때, 그 아름다움과 권능을 드러낸다.

2. 또 다른 부류의 원칙적인 교훈. 

이 원칙적 교훈은 "너희는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22-24절)로 시작되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이것은 너희가 가르침을 받고 이미 배웠던 교훈의 중요한 일부이다." 

바울은 여기서 옷을 벗어 버린다는 비유를 써서 자신을 표현한다. 인간의 생명에 구원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영혼의 원칙 기질이나 습관이 변화를 받아야만 한다. 

다음의 두 가지로 구성되는 성화가 있어야만 한다.

(1)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만 한다. 

여기서 타락한 본성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타락한 본성도 인간의 신체와 같이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로 도우며 힘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타락한 본성[=죄성]은 옛 사람이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이 타락한 본성을 물러 받았다. 이 타락한 본성은 몸 안에서 성장된다. 

그리고 우리는 타락한 본성과 함께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처럼 간교하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 안에서 옛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쇠하고 시들어 없어져 간다. 

또한 이 옛 사람은 썩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씀되고 있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 있는 죄는 영혼의 기능을 침식하기 때문이다. 

죄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죄가 날마다 더욱 악화되어 결국은 그를 파멸시킨다. 또한 "유혹의 욕심을 따라"라고 말씀하였다. 

죄를 향한 성향과 욕망은 곧 유혹의 욕심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더욱 불행 가운데로 인도하며 만약 우리가 죄를 극복하고 억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를 배신하고 파멸로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욕심을 입으면 우리가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추한 낡은 옷과 같이 벗어 버려야한 한다. 

그 모든 욕망은 억제되고 극복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욕심은 그들로 하여금 "구습"으로 즉 회개하지 않고 이방신을 섬겼던 상황으로 돌아가게 한다.

(2)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한다. 

타락한 습관을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은혜로운 습관을 따라 행해야만 한다. 

은혜로운 습관을 포용하고 지지하며 충분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악행하기를 그친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본문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하였다. 즉 "날마다 더욱 더 새로워진 심령을 갖기 위하여 전술한 합당한 수단들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또한 "새 사람을 입으라"(24절)고 하였다. 새 사람은 새로운 본성,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한다. 

새로운 본성은 새로운 생활 원리와 소생시키는 은혜에 의하여 활력화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을 살게하여 주며 기독교가 요구하는 거룩과 의로운 생활에 이르게 하여 준다. 이 새 사람은 그의 솜씨가 참으로 탁월하시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 또는 만들어진 것이다. 

또 "하나님을 따라"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고 그의 위대한 본과 원형을 따라감을 말한다. 

인간 영혼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을 타락한 인간의 비참함과 죄됨을 나타내 준다.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이 모습을 닮았다함은 새로운 피조물의 아름답고 거룩하고 복됨을 말한다. 

이 새 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의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5계명에서 10계명까지의 모든 의무를 포함한 인간을 향한 태도를 말함이요. "거룩함으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제 1계명에서 4계명까지의 계명에 신실하게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말함이요,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는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의식적이고 외면적인 거룩함과 반대되는 태도롤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하여 신의 속성을 애써 추구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새 사람을 입었다고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마음과 생활의 정결함과 거룩성에 대한 더욱 원칙적인 교훈이라고 하겠다.

Ⅱ. 바울은 좀더 상세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왜냐하면 원칙적인 권유는 감동을 주기가 어려운 관계로 여기서는 극복하여야 할 옛 사람의 지체가 무엇인지 또 벗어버려야 할 옛 풍습의 더러운 누더기가 무엇인지 우리가 기독교 신앙으로 장식하여야 할 새 사람의 특별한 장식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되고 있다.

1. 거짓을 경계하고 항상 진리를 말하고자 힘쓰라고 한다(25절) 

"그런즉 너희가 이미 너희의 의무에 대하여 잘 교훈을 받았으며, 그것을 수행해야 할 책임 아래 있으므로 앞으로의 너희의 행동에서 너희 가운데 진정하고 위대한 변화된 점을 보이라. 특별히 거짓을 버림으로 그리하라." 

이방인들은 특히 이 죄를 많이 범하였다. 그들은 유익이 되는 거짓말은 상처를 주는 진리보다 더욱 좋은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거짓 즉 진리에 위배되는 모든 일을 그치도록 경고하였다. 이것은 벗어 버려야만 하는 옛 사람의 일부이다. 

또한 거짓에 반하여 우리가 입어야만 하는 새 사람의 습성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 가운데서 "진리를 말하는"것이다.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감히 거짓을 말하려는 생각조차 않으며 거짓말을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성이다.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실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는"까닭이다. 

진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지고 있는 빛이다.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서로 거짓을 말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 같이 사회 또는 단체에 속하여 있다. 그런데 거짓은 그 사회를 와해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을 피하고 진리를 말해야 할 것이다. 

거짓말을 대단히 중한 죄요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책임에 대한 특별한 침해이며 기독교 사회에 대하여 대단히 해로운 것임을 명심하자.

2. 분노와 무절제한 격정을 경계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26절). 이 구절은 칠십인역의 시편 4장 4절에서 인용된 것인데 그 원문은 "두려움을 품고 범죄치 말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을 명령으로써 보다는 권유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을 내어도"(26절)라고 말씀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눈을 내기가 쉽다는 사실을 충분히 아신다. 

그러나 우리가 분을 억제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죄를 범하지는 말라"는 말씀이다. 

"만일 너희가 화를 내야 할 입장에 직면하게 되면 죄가 되지 않도록 지나친 분노는 삼가도록 하라"고  하신다. 

만약 우리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아니하려 한다면 죄 이외의 것에 대하여는 그 어떤 것에게도 분을 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욱 열심을 내야 한다. 

분을 내는 가운데 짓기 쉬운 크나큰 죄는 분노가 불타오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분노에 대한 경계를 주고 있다. 

"만약 너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받았다면 저녁이 되기 전에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도록 하라"는 말이다. 

비록 분노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의깊게 경계하지 않고 또 빨리 분을 가라 앉히지 아니하면 그것이 죄가 될 가장 큰 위험이 있음을 명심하자. 

지혜로운 자의 마음 속에도 분이 치밀 수가 있지만 그것은 곧 사라져 버리고 다만 분노는 "어리석은 자의 마음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27절)고 하셨다. 죄된 분노와 진노를 품고 있는 자는 자기의 마음 속에 마귀를 불러 들이는 것과 같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자신들을 주장하게 함으로 사탄을 그들 속에 악덕과 악한 음모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비방하는 자 또는 거짓 참소자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이 말씀은 은근히 속삭이는 자와 이야기를 꾸며내는 자와 중상 모략하는 자에 대하여 "귀머거리 노릇을 하라"는 말씀이다.

3. 다음으로 우리는 제 여덟번째 계명이 되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대하게 된다. 

그리고 정직 근면하며 자비를 베풀라는 충고를 대하게 된다. 본문에 "도적질하는 자도 도적질하지 말고"라고 하였다(28절). 

이 말씀은 무정한 수단이나 강제에 의하여 악을 행하는 모든 태도에 대한 경고이다.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이러한 흉악한 행동을 하였으나 이제는 더이상 죄를 짓지 말라."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죄와 반대되는 의무를 풍성히 행하여야 할 것이다. 

도적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게으름이 도적질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도적질은 게으름의 결과이다라고 말하였다.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과 구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도적질에의 유혹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어떤 불법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부르심 안에서 부지런하고 근면해야 한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 

올바른 일을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는 근면은 인간들로 잘못을 저지르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지런해야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을 유혹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할 수도 있게 때문인 바,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28절)서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빈궁함을 도와 주기 위하여서도 노력해야 한다. 비록 노동으로 겨우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수고한 중에서 얼마간으로 자비를 베풀어야함을 명심하자. 

노동자이거나 하인이거나 적은 것밖에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며 소량이라도 하늘 창고에 보관해 드리는 것은 필요하고 의무가 되는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구제는 불의와 도적질도 얻은 재물이 아니라, 정직과 근면으로 얻은 소산물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도적질한 것을 속죄제로 바친 것을 싫어하신다" 

4. 우리는 본문에서 더러운 대화를 경고하는 말씀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유용하고 덕스러운 대화를 가지라는 지시를 받는다(29절). 추하고 더러운 말과 논설은 썩어 냄새나는 고기와 같이 독이 있고 다른 사람까지 오염시킨다. 

더러운 말은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며 또한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더러운 것이 있음을 증명해 주며 그 말을 듣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에도 악한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언동을 삼가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격정과 욕망을 자극하기 위하여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러운 대화를 버릴 뿐만 아니라 "덕을 세우는 데 소용이 되는 선한 말을"하여야 한다. 

대화가 지닌 가장 유용한 점은 그것으로 우리가 상대방을 교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유익한 대화를 증진시키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려 함이다"(29절). 

지식의 제공, 의견의 제안, 적절한 권고 등은 듣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며 또 말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그에게 일으킨다. 

그리스도인들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타인들이 유익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언행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크나큰 의무임을 명심하자.

5. 본문에 노와 분냄에 대한 또 다른 경고가 있다. 

이 말씀과 함께 상호간의 사랑과 친절을 나눌 것이 충고되고 있다(31,32절). 

"악독과 노함의 분냄은" 다른 사람에 대한 내면적인 원한과 불쾌함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떠드는 것" 즉 말이 많음, 큰 소리의 협박 절제없는 말에 의하여 악독과 노함과 분냄이 드러나게 된다. 

"훼방하는 말"은 우리가 화를 내는 것에 대한 온갖 비난, 중상, 욕설을 퍼붓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모든 악의"라는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타인들에게 해를 가하도록 음모를 꾸미게 하며 또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뿌리 깊은 분노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과 반대되는 사실들이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이 말씀은 마음 가운데 사랑의 원칙을 세우고 친절하고 겸손하며 공손한 행동으로 이 사랑을 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책임의 법도를 배웠고 또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서로 인자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불쌍히 여기며"라 하였다. 이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연민과 가여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서로 용서하라"고 하였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의견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므로 "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 곳에 용서가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용서하고 또 그리스도가 신의 공의를 이루신 구속 때문에 용서하셨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심령을 지니게 되며 하나님이 신실하고 진심으로 기꺼이 그리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영원히 신실히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이렇게 사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그들의 기도를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지금까지 권고한 구체적인 실례들이 인간들에 대한 십계명을 후반부에 속한 내용들과 같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십계명을 후반부에 말씀을 실행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음을 여기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이 말씀들을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가장한다고 해도 결코 참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또 두려워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위의 권고와 경고 가운데 바울은 원칙적인 말씀을 삽입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지 말라"(30절)는 말씀이다. 

전후 문맥을 살펴 봄으로써 무엇이 하나님이 성령으로 근심하게 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30절 앞의 구절들에서는 모든 추악한 생각과 더러운 욕망을 일으키는 더러운 대화들과 호색, 추악함, 거짓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30절 뒤에 따라 나오는 구절에서 보면 모든 타락된 격정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복되신 성령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슬퍼하시며 성내심을 알 수 있다.

본문의 권고의 목적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슬퍼하게 하며 불안하게 만들지 아니함으로 성령을 거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성령의 거룩한 본성과 뜻을 거스리는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성령의 뜻하심을 듣기를 거절하거나 성령의 다스림을 반대하여 기억하여서도 안 된다. 

이러한 일을 하면 성령을 노하시게 하므로 마치 사람들이 자기들을 불쾌하게 하고 노엽게 하는 자들에게서 떠나고 그들에게 요구되는 친절을 거두어 버리며 적들에게 그들을 내버려두듯이 성령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되신 성령을 격동하여 그의 현존하심과 은혜스러운 영향력을 너희에게서 거두어 가시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성령을 거스리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령은 우리에게 구원의 날에 인치심을 주시기 때문이다." 

앞으로 구원의 날이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부활의 날에 무덤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죄와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듯이 또한 죄의 결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될 것이다. 

무덤에서 나올 때까지는 우리는 죄와 고통에서 자유할 수 없다. 그 후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하고 충분한 행복은 시작된다. 모든 참신자들은 그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시고자 그들에게 표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환희와 영광의 부활에 대한 조건와 보증을 주신다. 하나님의 성령이 바로 그 보증이시다. 

복된 성령이 거룩하게 하는 자로 역사하시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그는 구원의 날의 모든 환희와 영광의 표정이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성령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파멸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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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제 4장
=====4:1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 )은 바울이 앞에서 언급한 교리적인 내용중 영적인 특권과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관한 추론으로서(Wood, Mitton) 교리적인 교훈에서 실천적인 교훈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실천적인 교훈이 기독교 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Foulkes).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 3:1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의 '주 안에서 갇힌 나'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 충성하다가 감옥에 갇혔음을 의미한다(Mitton, Foulkes). 이것은 이후에 바울이 권면하고자 하는 내용의 진실성과 권위를 암시한다(Foulkes, Lincoln).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악시오스'(* )는 문자적으로 '다른 들보를 하나 더 세워'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함을 의미한다(Wood, Lincoln). 
그 기준은 '부르심'으로서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을 통한 새 생명에의 초대이다(1:4, 5, 12, 13).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신앙인의 고백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평형(平衡)이 유지되어야 함을 시사한다(마 3:8;10:38; 행26:20; 빌 1:27; 골 1:10, Mitton, Lincoln).
=====4:2
본절은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덕목들을 제시한다(Bruce).
(1) 겸손 - 이것은 [어떤 의미있는 일을 스스로 구하거나, 찾거나 이루려 함에 있어서]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철저히 자각하며!!]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 자세이다(빌 2:3). 
당시 '겸손'은 [자기의 신분, 위치, 지혜와 힘-능력-소유의 하잘 것 없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낮추고 비우며, 주인의 지시따라 전적으로 의지하며 섬김이란 뜻에서]비열한 마음과 노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세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미덕이 아니었다(Foulkes, Wood).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빌 2:6-11; 벧전 5:5)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미덕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 온유 - 이것은 '이해심 깊음'이라는 말로서 '정중함'(gentleness)이라고도 번역된다. 
이 미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며(고후 10:1) 성령의 열매로서(갈 5:22, 23)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조화를 유지함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둘째,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덕성을 의미한다(약 3:3-8).
(3) 오래 참음 - 이것은 죄인을 [일절 오래참음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며(롬 2:4;9:22; 벧전3:20; 벧후 3:15) 그리스도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로서(고전 13:4; 고후 6:6; 갈 5:22; 골 3:12),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이다(Lightfoot, Lincoln).
(4)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본문은 앞서 언급한 '오래 참음'의 확대된 미덕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단순히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나(골 3:13) 본절에서는 '사랑 가운데서'를 삽입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공급되어지는(롬 5:5)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사랑인데] JC를 통해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새 시대의 [유일무이한, 진정한] 능력으로(고전 13장; 갈 5:14, 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 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이다.<가장 가까운 의미로는 아가페적 사랑이라 할 수 있으나, 아가페란 단어의 의미 그 이상이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Lincoln).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것을 힘써 지키라 - 바울은 하나됨의 생활 곧 일치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일치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수단은 '평안의 매는 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된 관계를 화해시키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으며(2:14-18)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됨'을 유지(維持)하도록 하기 위해서 평안과 화해의 대리자라는 직분을 주셨다(고후 5:18).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치가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매는 줄'(* , 쉰데스모)은 성도들을 서로 묶어 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골 3:14) 것으로 족쇄보다 강한 결속을 시사한다. 
이러한 성도의 일치됨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얻을 수 있다(Calvin, Bruce).
한편 '힘써 지키라'의 헬라어 '스푸다존테스'(* )는 '노력하다'보다 강한 표현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한 진지하고 열심있는 태도를 가리킨다(Blaikie). 
이것은 평안을 통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매우 급박한 것이며 [자기희생의!!]단호한 결심이 뒤따라야 하는 어려운 일임을 나타낸다(Wood, Lincoln).
=====4:4
@몸이 하나이요(* , 헨 소마) - 이것은 문자적으로 '한 몸'을 의미한다. '한 몸'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뜻한다(1:23;2:14-22). 이러한 '한 몸'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히 하나로 묶여진 유기체로서 통일성을 이룬다(고전 6:15;10:17; 골 1:18).
@성령이 하나이니(* , 헨 프뉴마) -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성령을 영접하였다고 선언한다(1:13, 14).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사이의 공통적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이룸을 시사한다(Wood, Lincoln, Mitton).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교회가 통일성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한 소망을 위해서 부르셨는데 여기서 '한 소망'은 '우주적 통일성'에 관한 소망을 가리킨다(1:9, 10). 
이 '우주적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구원의 목적으로서 이에 대한 소망은 교회를 통일시키고 화해를 이루게 한다(Lincoln).
=====4:5
@주도 하나이요(* , 헤이스 퀴리오스) - 이것은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롬 10:9;14:8, 9; 고전 8:6;12:3; 빌 2:9-11)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를 따르며 복종한다는 의미를 지닌다(HedriKsen). 교회는 한 통치자의 인도하에 있으므로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
@믿음도 하나이요(* , 미아 피스티스) - 믿음은 개인적인 면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따라 충성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의탁(依托)하는 것이다(Wood, Lock, Lincoln).
@세례도 하나이요(* , 헨 밥티스마) -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어 있다고 하는 외적인 표적으로 물세례를 가리킨다(Bruce, Lincoln, Wood). 
이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었음을 시사하는 표시이다(1:13;2:5, 6). 
한 주를 믿는 한 신앙인임을 고백하는 공적인 의식인 세례를 통해서 교회는 하나가 되었다(고전 12:13; 갈 3:27, 28).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 바울은 하나됨의 마지막 원리로 만유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한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다. 
'한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다. '만유의 아버지'는 인간을 구속하는 아버지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이나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로 보아 '우주적인 아버지'의 의미도 담고 있다(Wood).
@만유 위에 계시고 - 이것은 하나님의 지고성과 초월성을 나타낸다.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이것은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 온 우주의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은 교회의 통일성을 위한 근거이시다.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바울은 지금까지의 교회 전체의 하나됨이라는 주제에서 방향을 바꿔 이제는 교회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각 지체 곧 개인에 대해 다루고 있다(Wood). 
본절의 '은혜'는 '은사'와 동일시할 수 있다(롬 12:1; 고전 12:4, Bruce, Lincoln). 이런 은사의 다양성은 하나된 몸을 이루는 각 지체인 성도들의 조화를 강화시키며 촉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을 충만한 상태로 계속 유지하게 한다(Calvin). 
한편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는 '은사'와 동일시되는 '은혜'가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 
반면에 다른 신약성서에서 '선물'이나 '은사'는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난다(고전 12장).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은혜의 수여자이며 성령을 통해서 은사를 수여하시기 때문이다(Bruce, Lincoln).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 바울은 앞에서 논의한 것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확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레게이'(* )는 직접 인용한 출처(出處)를 밝힐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서(Wood) '성경이 말하기를' 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Bruce).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 본절은 승리의 찬송인 시 68:18의 인용이다(Calvin). 
본절은 시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대적한 자를 정복하신 후 하나님 보좌에 오르셔서 자기 백성에게 은사를 주심을 의미한다.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 '땅 아랫곳'의 헬라어 '에이스 타 카토테라 메레 테스 게스'(*는 문자적으로 '땅의 낮은 곳'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리셨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언급하는지에 대해서는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음부에 내리셨다'는 의미(Meyer, Robinson, Buchsel). (2)'성령 안에서 내려오셨음'을 의미(Caird, Abbott, Houlden). (3) '성육신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음'을 의미(Wood, Bruce, Gnilka, Mitton).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타 카토테라 테스게스'는 '이 땅'을 가리키며(Bruce, Calvin) '이땅'과 관련하여 '내리셨던 것'은 '성육신'을 의미한다(Wood, Bruce).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 '모든 하늘'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하늘을 일곱층으로 생각했던 것을 암시하는데(Wood, Lincoln) 그리스도는 그 모든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신다.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 본절은 '히나'(* , '하기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 본절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목적임을 시사한다. 그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이다. 
'만물을 충만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세타 판타'(* )는 온 우주에 임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그의 주권 아래 두심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되셔서 모든 존재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며 영향력을 행사하신다(Bruce).
=====4:11
@그가...주셨으니 - 본절에 언급된 직분중 세 직분 즉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는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사역했던 것인 반면 나머지 두 직분 곧 '목사'와 '교사'는 지역 교회에 국한된 직분들이다(Wood, Foulkes). 이러한 직분들에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직분의 다양성이다(고전 12:5). 교회는 한가지 직무나 은사만으로 운영될 수 없으며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개성이나 은사로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진정한 하나됨을 발견할 수 있다. (2) 직분의 통일성이다. 이러한 다양한 직분들은 서로 협력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는 영적인 유기체이다.
@사도 -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로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섬긴 자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 바울 자신과 바나바(행 14:14), 실라(살전 2:6) 등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였다(행 14:4, 14; 고전15:5; 갈 1:19).
@선지자 - 하나님의 계시를 중재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고전 14:24) 교회를 훈계하기도 하였다(행 15:32). 이들은 극심한 박해(迫害)와 직권 오용 그리고 정경의 등장으로 인해 후에 교회에서 사라졌다(행 13:1; 고전 12:28, Foulkes, Lincoln).
@복음 전하는 자 - 선교의 차원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빌립(행 8:4-7), 디모데(딤후 4:5), 에바브라 등이 이에 해당된다.
@목사와 교사 - 혹자는 두 직분 사이에 관사가 하나밖에 없다는 이유로 같은 직분이라고 주장한다(Barth). 그러나 직분상 그 기능이 어느 정도는 중복된다 할지라도 동일한 사람으로 볼 수 없으며, 관사가 하나밖에 없는 것은 두 직분이 지역 교회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Lincoln). 따라서 '목사'는 교회를 양육하고 돌보며 인도하는 자이며 '교사'는 사도적 교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4:12
바울은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을 세우신 목적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톤 카타르티스몬'(*)은 외과 의학에서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찢어진 그물을 수리할 때(마 4:21), 또는 범죄한 자를 바로잡는다고 할 때(갈 6:1) 사용되었다. 즉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적을 실현하며 성도들이 온전케 되도록 회복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10; 살전 3:10, Lincoln, Foulkes).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직분이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도록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 회복(回復)과 훈련을 통해 온전케 된 성도들이 하나됨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벧전 2:4, 5).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성도 각자의 특별한 직분을 사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 온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킴을 시사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모든 지체의 과제이지만(16절) 특히 사역자들은 사도적 복음과 전승을 전달하고 해석하는 독특하고 중요한 과제로 나머지 지체들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Lincoln).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의 헬라어 '에이스 안드라 텔레이온'(*)은 문자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성장한 인간이 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안드라'는 남성 단수형으로 전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한 새사람'을 이룸을 시사하며 '텔레이온'은 '완전'보다는 '성숙'의 의미를 내포한다(고전2:6;14:20; 히 5:14). 이것은 다음 절에서 언급되는 어린 아이와 대조적인 것으로 '성숙한 성인'에 강조점이 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교회가 원리상 교회 내에 이미 성숙함과 온전함을 획득하였음을 암시한다(2:15, Lincoln). 
한편 '믿는 것'은 믿음의 행위라기보다 믿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며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는 일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구원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과 '지식'의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울의 전통적인 기독론적 칭호이다(롬 1:3, 4, 9;5:10;8:3; 고전 1:9; 고후 1:19; 갈1:16;2:20;4:4; 골 1:13; 살전 1:10).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되게 하는 것은 목사와 교사들에게 부여된 과제로서, 목사와 교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한 믿음과 한 지식을 향한 점진적 진보가 있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Lincoln).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 교회가 지향해야 할 완전한 영적 성숙을 나타낸다(Bruce). 여기서 '장성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스'(*)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Wood). (1) '나이'를 의미한다(요 9:21). 이것은 성인이 된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유년기를 벗어나 '영적으로 성숙한 분량의 연령에 이름'을 시사한다. (2) '키'를 의미한다(눅 19:3). 헬라의 고전 작품에서는 '분량'을 나타내는 헬라어 '메트론'(* )과 함께 사용하여 '영적으로 자라난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눅 2:52). 본절은 전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1:23)를 위하여 더욱더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을 채워가야 함을 시사한다(Best).
=====4:14
본절은 '히나'(* , '...하기 위하여')로 시작되는 목적절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 본절은 성인이면서도 영적인 면에서는 아직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자의 특징을 나타낸다(Wood). 신약성경에서 '어린아이'는 영적 미숙을 시사한다(고전 3:1, 2;13:11; 히 5:13).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 '궤술'의 헬라어 '퀴베이아'(* )는 문자적으로 '주사위를 던지다'는 의미로 당시의 속임수나 사기를 가리킨다. 또한 '유혹'의 헬라어 '파누르기아'(* )는 거짓 교사들이 미성숙의 길로 들어서도록 교활하게 유도함을 의미한다.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 영적 미숙아의 특징은 '요동하는 것'이다. '요동치'로 번역된 헬라어 '클뤼도니조메노이'(*)는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조그만 어려움이나 거짓 교리에 대해 쉽게 넘어간다.그러나 성숙한 자는 진리를 분별(分別)하는 능력을 가지며(히 5:14) 어떤 거짓된 풍조에도 흔들리지 않는다(Bruce). 한편 '모든 교훈의 풍조'는 바울이 앞절에서 말한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는것'에 반대되는 모든 교훈을 의미한다(Lincoln,Bruce). 즉 바울은 영적 미숙아가 앞서 말한 거짓교사들의 사기와 교활함에 쉽게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해가야 함을 권면한다.
=====4:15
개역 성경에는 '데'(*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과 본절을 대비시키고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 본절은 교회 성장의 수단을 나타낸다. '참된 것을 하여'의 헬라어 '알레듀온테스'(* )는 문자적으로 '진리를 말하여'를 의미하는데(speaking the truth, NIV) 이것은 교회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시사한다(2:5). 교회의 복음 선포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은 진리에 대해 충성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 '범사에'에 대해서 혹자는 '우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우주에 전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Meyer,Schlier). 그러나 '범사에'는 부사적 목적격으로 '모든 방법으로'로 이해되어야 한다(Lincoln). 왜냐하면 앞절과 본절에서 성장에 관계된 것은 우주가 아니라 교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목표와 척도(尺度)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 과정 속에서 일관된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질적인면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자라야한다.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 '연락하고'의 헬라어 '쉬나르몰로구메논'(* )은 '함께 연결하고'를 의미하며, '상합하여'의 헬라어 '쉼비바조메논'(*)은 '함께 연합하여'라는 의미로 동의어로 사용된다(Bruce). 이것은 지체들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마디'에 해당하는 '하페스'(* )는 세가지로 해석된다. (1) 감정이다(Meyer). (2) 접촉이다(Abbott, Barth). (3) 결속이다(Foulke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즉 '마디'는 각 지체와 머리 사이의 연결을 제공하는 결속을 나타낸다(Lincoln).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각 지체'는 교회의 다양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본절은 '각 지체'가 몸 전체를 위해서 자신만이 갖고있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시사한다. 특히 '스스로'는 비록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성장의 근원이 된다 할지라도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교회의 자발적인 참여를 필요로 함을 말한다(Lincoln). 각 지체가 유기적으로 잘 연합함으로 몸은 성장할 수 있다(Wood). 
한편 각 지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비밀의 열쇠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고후 5:14) 사랑은 교회성장의 척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랄 수 있다(Bruce).
=====4:17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 '허망'의 헬라어 '마타이오테티'(* )는 신약성경에서 때때로 우상 숭배와 관련된 단어로 사용된다(Bruce).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삶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책임한 처신에 이르게 하는 '쓸모 없는 생각'을 가리킨다(롬 1:21; 벧전 1:18, Wood).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과거의 삶처럼 목적없이 헛된 것에 욕망을 기울여 무익하고 공허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말 것을 권면한다.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 '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노이아'(*)는 70인역에서 '사랑을 인식할 수 있는 중심부'를 의미하는 '카르디아스'(*, '마음')와 서로 혼용된다(창 8:21;27:41; 출 28:3). 본절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저희 가운데 있는...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 '하나님의 생명'은 모든 생명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근원이다(Bruce, Lincoln). '하나님의 생명에서의 떠남'은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으로 '죽은'(2:1, 5), '하나님이 없는'(2:12)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무지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이안'(* )은 선천적인 죄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Lenski).
@마음이 굳어짐 - '굳어짐'의 헬라어 '포로신'(* )은 돌같이 딱딱한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마음이 굳어짐'이란 말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양심(良心)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완고해지는 것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골 1:21, Lincoln).
=====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 '감각 없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펠게코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앞절에서 언급한 '마음이 굳어짐'과 연관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이란 의미로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함을 시사한다. 바울은 이러한 이방인의 삶을 다음 세가지로 나타낸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 어떠한 것에도 제한받지 않으며 수치나 두려움을 모르고 육욕(肉慾)에만 얽매이는 행동을 말한다(고후 12:21; 갈 5:19). 한편 롬 1:24-32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내버려 두셨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이방인 스스로가 자신을 '방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이방인의 도덕적 책임성을 강조한 것이다(Lincoln).
@모든 더러운 것 - '더러운 것'의 헬라어 '아카다르시아스'(* )는 기본적으로 성적 부도덕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모든'이란 말로 수식되어 '모든 부도덕'을 의미한다.
@욕심 -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 만족을 모르는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탐욕'이나(5:3, 5) '우상 숭배'(5:5; 골 3:5)와 연관된다.
=====4:20
개역성경에는 '데'(*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에서 언급한 이방인의 생활과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 '너희'는 앞절의 '감각없는 자'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그리스도인, 특히 에베소 교인을 지칭한다. 한편 '배우지'의 헬라어 '에마데테'(* )는 단순한 학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나 제자가 되어 철저한 훈련으로 배우는 것을 말한다(Wood). 본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배운다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에 관해 배우는 것을 지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Lincoln).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 본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호칭에서 '예수'(구원자)라는 칭호로 바꾸고 있다. 이 칭호는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원자임을 보여준 역사적 사실을 암시한다(Bruce, Wood).
@너희가 과연...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 '진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 게'(*)는 확실한 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3:2) 에베소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가르침을 받았음을 바울이 전제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4:22
@너희는...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옛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다(Calvin). 또한 '옛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의 행실, 성격, 태도를 총칭하는 말로서 옛생활을 되풀이하려는 육적인 본성을 시사한다(Moffatt, Bruce). 그리고 이것은 악이나 그 세력의 지배 하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한편 '벗어 버리고'는 24절의 '입으라'와 대조적 개념으로 죄로 물든 옛 생활방식에서 떠나는 것을 시사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이미 세례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본절의 이 금지 명령은 세례를 반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옛 사람을 포기하는 생활을 지속하라는 권면이다(Lincoln).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은 현재 시상(時相)으로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부패의 과정을 의미한다(Wood). 이 '썩어져 가는 구습'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이방인 생활을 가리킨다(2:3). 이것은 과거의 이방인 생활 방식을 포기하는 '그리스도를 닮는 삶'과 대조된다. 이방인의 옛 생활 방식은 '유혹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유혹'의 헬라어 '아파테스'(* )는 진리의 말씀인 복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마 13:22; 막 4:19; 히 3:13) 거짓 교사의 교리를 나타낸다(골 2:18). 바울은 이렇듯 복음과 반대되는 허망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할때 그 결과는 죽음이기에(2:1, 5; 벧후 1:4) 에베소 교인들에게 벗어버리라고 권면한다.
=====4:23
개역성경에는 '투 노오스 휘몬'(* , '너희 마음의')이 생략되어 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 '심령'의 헬라어 '프뉴마티'(* )에 대해서 혹자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nilka, Houlden, Schlier). 그래서 본절을 '성령에 의해서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하라'로 해석한다(Houlden).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마음의'라는 속격에 의해서 수식당하는 것은 개연성(蓋然性)이 없다(Mitton). 따라서 본절의 '심령'은 인간의 영과 마음을 가리킨다(Lincoln). 따라서 본문은 '너희 마음의 영을 새롭게'라는 의미이다. 한편 '새롭게 되어'의 헬라어 '아나네우스다이'(* )는 현재 부정사 수동태로, 성령에 의해서(고후4:16; 딛 3:5, Wood) 날마다 계속적으로 새로와져야 함을 시사한다.
=====4:24
@하나님을 따라...지으심을 받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 )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창조된'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골 3:10, Bruce, Lincoln). 하나님은 죄로 잃어버렸던 그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시켰고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심으로(Bruce, Wood)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Lincoln).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는 문자적으로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를 의미한다.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함을 받는 새사람의 윤리적 덕목이며 자질(資質)이다(Lincoln). '의'는 모든 생활 가운데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며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한다. 이런 두 가지 덕목은 '진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진리'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실재다(21절;1:13).
@새 사람을 입으라 - 본절은 22절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와 대조된다. '새 사람'은 문자적으로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2: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자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4:25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접속사는 '디오'(* )로 '옛 사람을 벗어버림으로써 새 사람을 입었은즉'(Robertson)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접속사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원리적인 교훈과 실천적인 교훈을 연관시키고 있다(Wood).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옛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거짓'이다(골 3:9). '거짓'은 모든 종류의 부정과 속임수 혹은 궤계를 가리킨다. 반면에 '새 사람'의 특징은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가랴 8:16(LXX)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인은 상호간의 친교 가운데 솔직해야 함을 시사한다(Bruce).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서(4:15, 16;5:30; 롬 12:4, 5; 고전 12:12-15)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서로 진실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진실을 통한 상호간의 신뢰감 대신에 거짓으로 인해 생겨난 불신은 유기체를 분열시키고 파괴시키기 때문이다(Lincoln).
=====4:26
@말며'는 시 4:4(LXX)의 인용으로 역설적 명령이다. 왜냐하면 본절에서는 분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나 27절에 사단에게 빠지지 말라는 명령과 31절에 모든 분에 대한 금지 명령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노하기를 더디하라'는 권면(마 5:22; 갈5:20; 골 3:8; 딤전 2:8; 딛 1:7; 약 1:19, 20)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의분'(義憤)을 내신 적이 있었다(막 3:5; 요 2:13-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을 금지시킨 이유는 그릇된 방향으로 변질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해가 지도록'은 '분'을 처리하기 위한 시간 제한이다. 즉 시간 제한을 통해 한밤중까지 분을 품지 않도록 함으로 죄에 빠지는 잘못을 막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Bruce,Lincoln).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 본절은 앞절에서 언급된 금지 명령의 동기이다. 분노를 마음에 오래 품음으로 탐닉(眈溺)하게 되면 사단에게 자유롭게 영을 유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분을 품는 행위를 멈추든지 아니면 분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는 습관을 갖지 말라고 권면한다(Robertson).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분노로 가득 채워지기 전에 반드시 적당한 때에 풀어야만 한다(Calvin).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 이것은 십계명 중에서 제7계명에 대한 언급이다(출 20:15; 신 5: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이다(막 10:19; 롬 13:9). 여기서 '도적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클레프톤'(*)은 직업적인 '도적'(* , 호 클레프테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부당한 착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의 판단으로 정죄할 수 없는 사소한 도적질까지 포함한다(Calvin).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끊어 버려야 한다(Wood).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 바울은 '도적질'을 하지 말라는 권면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을 통해 빈궁한 타인을 도우라고 권면한다. 본절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본질적인 부분인 (눅 6:29-36; 고후 8:1-15;9:6-12) 기독교적 노동 윤리를 나타낸다. 그 노동의 목적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궁핍한 이웃을 돕는 선한 일에 있다(갈 6:1).
=====4:29
본절은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언어 생활에 대한 권면이다.
@더러운 말은 너희입밖에도 내지 말고 - '더러운 말'은 문자적으로 '부패한' 혹은 '썩은'이란 의미로 단순히 좋지 않은 언어가 아니라 악의 있는 험담과 중상 모략을 나타낸다. 이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 분쟁을 일으킨다.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 '선한 말'은 도덕적으로 건실하고 옳은 말로서 말을 잘 선별하여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런 선한 말을 하는 목적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상호 간에 덕(德)을 세우며 (Bruce)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언어 생활에서 타인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함이다.
=====4:30
개역성경에는 '카이'(* , '그리고')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더러운 말을 통해서 성령이 근심하게 됨을 암시한다(Wood).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 본절은 사 63:10의 사상을 반영한다. 부주의하고 옳지 못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한다(고전 3:16; 살전 5:19).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안내자이며 지도자이시기 때문에(롬 8:26; 갈 5:17)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더럽히면 그를 근심케 만드는것이 된다(Calvin).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 '인치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소유주이심을 나타내는 보증의 표이다(1:13, 14). 한편 '구속의 날'은 본서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으로 구원과 심판의 완성을 동반하는 '주의 날'(고전 1:8; 살전 5:2; 살후 2:2) 혹은 '그리스도의 날'(빌 1:6, 10;2:16)을 가리킨다. 성령은 성도의 일시적인 범죄로 떠나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 약속하신 기업을 주시는 날까지 성도의 확실한 보증이 되신다(요 14:16; 요일 3:2, 3). 그러나 이 보증은 단지 미래에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 구속 곧 죄사함의 확신을 경험하며(1:7) 미래의 구속의 날에 몸전체의 구속을 경험하게 된다(롬 8:23).
=====4:31
@너희는...버리고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버려야 할 악에 대해서 열거한다. '버리다'의 헬라어 '아르데토'(* )는 문자적으로 '깨끗이 쓸어버리다', '제거되게 내버려 두라'는 의미로 더 이상 모든 악독과 관계를 갖지 말아야 함을 시사한다(Wood).
@악독 - 이것은 과거에 당한 손해나 모욕에 대한 원한을 버리지 않고 마음 속에 품어두어서 이웃과 화해하기를 거부하는 마음 상태이다(행 8:23; 롬 3:14; 히 12:15; 약3:14).
@노함과 분냄 - 이 두 가지는 대개 동의어로 사용되나 엄밀히 구별하면, '노함'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분노로서 급격한 감정 폭발이며(고후 12:20; 갈 5:20), '분냄'은 통렬하고 악독한 적의가 마음에 자리잡아서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딤전 2:8; 약 1:19, 20).
@떠드는 것 - 이것은 신약에서 본절에서만 악한 덕목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소리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훼방하는 것 - 이것은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모욕적인 인사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막 7:22; 골 3:8; 딤전 6:4; 딤후 3:2).
=====4:32
바울은 앞절에서 금지 명령을 한 반면 본절에서는 행해야 할 덕목을 제시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 '인자'는 본서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난다(2:7). 이것은 타인의 필요를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고후 6:6; 갈 5:22; 골3:12). 또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자비', '인자'와 함께 신약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타인의 필요에 공감하고 동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서로'에게 표현해야 하는 덕목이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 '...과 같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도스 카이'(* )는 '일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하신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기준과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Lincoln).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구원 행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위인 원형(原型)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용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타인에 대해 용서해야 하며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용서 자세는 반드시 사랑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Wood). 
한편 '하라'의 헬라어 '기네스데'(* )는 실제로 '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를 본받아 그렇게 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를 본받아 그렇게 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서로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 가운데서 반드시 드러나야 할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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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Union), 연합(Mingling), 합병(Incorporation), 3 단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접붙이기 연결(Graft Union=접합) -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을 사람의 생명 안으로 흘려보내는 생명(Life)에 관한 것이 중점이고, #연합(Mingling) - 신성한 본성과 사람에 속한 본성의 연합인 본성(Nature)에 관련된 것이며, #합병(Incorporation) - 세 인격 이상이 상호 내재하고 하나로서 함께 일하는 인격(Person)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연결, 연합, 합병 그리고 생명, 본성, 인격 이렇게 셋을 세트로 묶어 놓으시면 오래 기억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unify는 동질 상태였으나 어떤 계기나 이유로  갈라진 것을 통일함, unite는 사로 이질적으로 있었던 것, 나뉘졌던 것을 하나로 연결 동질화 함
【연결】連結 unite....두 종류의 나무가 연결 될 수는 있어도 연합(mingling)될 수는 없다. 나무는 가루가 되어야 비로소 연합될 수가 있다. 
(참고) unite의 명사형 union은 만일 두 손을 깍지 끼듯 움켜진다면 내 두 손은 서로 union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은 이보다 훨씬 더 한 것이다. 한 가지가 다른 가지에 접붙여졌을 때 그 결과가 곧 연합이다 
【연합】 聯合 mingle...특별히 원래의 요소들이 그 배합 안에서 구별될 수 있도록(다른 한 가지에 한 가지나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을 함께) 결합하거나 배합하는 것(웹스터 대사전)
달리 말해서 두 가지 것들이 하나의 실체로 연합되지만, 그들 개개의 본성은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고 여전히 동일한 본성으로 남아 있다. 앤드류 머레이는 동일한 것을 보았지만 레위기 2장 4, 5절에 있는 소제의 예표에서 사용된 '연합되다'라는 단어 대신에 직물에서처럼 '교직되다'(interwoven)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이 함께 연합될 때 그들의 원래 본성은 없어지지 않고 구별할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 연합의 예로는 차(茶)를 들 수 있다. 차가 물에 연합되어 음료가 될 때 차의 본질도 잃지 않고 물의 본질도 잃지 않는다. 대신 두 본질은 남아 있다. 이 두 본질은 함께 연합되어 음료를 산출하지만 그것들은 차에 속하지도 물에 속하지도 않는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 주님은 신성한 본질로 잉태되셨고, 사람의 본질로 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제 삼의 어떤 존재를 산출하지 않고 함께 연합된 - 하나님과 사람 - 두 본질을 지닌 한 인격이시다. 주님께는 두 가지 본질이 있지만 그분은 여전히 하나의 온전한 인격,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다.(누가복음 L-S 16)
연합은 소제에 있어서 기름과 고운 가루의 섞임과 같다(레2). 고운 가루는 기름 안에 있고 기름은 고운 가루 안에 있다. 이것이 연합이다.(로마서  
【합병】合倂 incorporation...합병은 적어도 셋 이상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 합병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경륜 안에서 계획한 것이 완결된 삼일 하나님과 택함 받고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화롭게 된 그분의 모든 백성과의 합병이다. 성경 전체의 역사를 볼 때 그 역사의 최종 완성의 결과는 커다란 합병체이다. 연결(union)은 생명에 속한 유기적인 것이고, 연합(mingle)은 요소들의 섞임이며, 합병은 인격과 관계된다. 새 예루살렘은 계시록 21장에서 하나님의 장막으로 불리웠다. 그러므로 장막은 새 예루살렘의 표징이고 새 예루살렘은 장막이다. 계시록 2장에서 주님은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감추인 만나를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감취었던 만나가 바로 장막 안에 합병되는 것이다. 감추인 만나는 그리스도이다. 감추인 만나인 그리스도가 장막의 중심이시다. 감추인 만나는 금 항아리 속에 있다. 금 항아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의미한다. 금 항아리는 금으로 씌운 조각목으로된 언약궤 안에 있다. 이 언약궤는 신성과 인성을 포함한 그리스도이다. 이 언약궤는 지성소안에 있다. 지성소는 오늘날 우리의 영이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며 또한 아들은 지성소의 실제라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개의 '안에'가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20절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믿는 이들은 아들 안에, 아들은 믿는 이들 안에, 그리하여 모두 안에 실제의 영이 내주한다. 그러므로 장막 안으로 합병된 것이다. 감추인 만나를 먹음으로 장막 안으로 합병되는 것이다. 먹을수록 더 합병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우주적인 합병체이다. 하나님의 장막인 새 예루살렘은 우주적인 합병체이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는 '그날에는 - 알리라'고 했는데, 그 날은 주님의 부활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영화롭게 되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믿는 이들을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결 안으로 이끌어 완결되신 하나님과 연합되어 합병체가 되었다. 이 합병의 세 방면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집과 포도나무와 그 영의 아이이다. 삼일 하나님은 자신이 바로 합병체이다. 이 신성한 합병체가 아들의 영화롭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합병체가 되었다. 결국 새 예루살렘은 삼일 하나님과 모든 믿는 이들을 포함하는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우주적인 합병체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신 결과) 합병이라는 것은 연결과 친밀한 연합의 문제이다. 합병되는 것은 친밀하게 연결하는 것이고, 섞는 것이고, 결사시키는 것이고(coporate), 철저히 연합시킴으로 하나의 전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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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되심과 포함과 강화의 세 단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Ⅰ.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의 첫 번째 단계는 육체되심의 단계로서, 그분의 사람으로서의 출생부터 인생을 거쳐 죽으심까지의 육신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단계임
A. 그분의 육체되심에서, 그리스도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사람 안으로 이끄셨음. 그분은 또한 TUQ을 세 부분으로 된 사람과 연결하고 연합하셨음.
B. 그분의 인생에서 그리스도는 부요한 속성들 안에 계신 풍성한 하나님을 그분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통해 표현하셨음.
1.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생에서 풍성한 하나님을 표현하셨는데, 주로 하나님의 부요한 속성들을 표현하셨음.
2. 그리스도는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사로잡으셨음.
a. 육신 안의 그분의 인간 생명을 살지 않으시고, b. 부활 안의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사심으로. C. 그분의 죽음에서, 그리스도는 만유를 포함한 구속을 성취하셨음.
1. 그분은 옛 창조의 모든 것들을 끝내셨음.
2. 그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나 죄 가운데 타락한 모든 것들을 구속하셨음 – 히 2:9, 골 1:20.
(히 2:9) 다만 우리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분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골 1:20) 그분은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들에 있는 것들을 그분을 통해 그분 자신과 화목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3. 그분은 그분의 신성한 요소로 새 사람을 창조하셨음(잉태하셨음) – 엡 2:15.
(엡 2:15)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이 둘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화평을 이루시려는 것이며,
4. 그분은 그분의 인성의 껍질로부터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셨음 – 요 12:24.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5. 그분은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한 기초를 놓으셨고, 포함의 단계에서의 그분의 사역을 달성하기 위한 절차를 세우셨음.
 Ⅱ.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의 두번째 단계는 포함의 단계로서, 부활부터 교회의 하락까지의 생명 주는 영이신 그리스도의 단계임.
A. 그분의 부활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셨음 – 행 13:33.
(행 13:33)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그들의 자녀인 우리에게 이 약속을 온전히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시편 제이 편에 기록된 것과도 같습니다.‘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1. 시작이 없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는 인성은 없이 신성만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셨으며, 죽음을 거쳐 부활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셨음.
2. 육체되심에서 하나님의 독생자는 육신이 되시어 하나님-사람, 곧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소유한 사람이 되셨음.
3.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다윗의 씨이신 육신 안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로 인정되셨음
(롬 1:3-4)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아들은 육체에 따라 말하자면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한 영에 따라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 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이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a. 죽음에서 그분의 인성은 못 박히셨음. b. 부활에서 그분의 못 박히신 인성은 그분의 신성의 영에 의해 살리심을 받아(벧전 3:18) 하나님의 독생자의 아들의 명분 안으로 들어올려졌음.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 또한 죄들 때문에 한 번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곧 의인으로서 불의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하나님께 이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육체 안에서는 죽으셨으나, 영 안에서는 살아나셨습니다. c. 그리하여 그분은 부활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음.
B. 부활 안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 – 고전 15:45下.
(고전 15:45하)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1.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땅에서의 그분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 부활 안에서(변형되셔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
2.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심은 그분의 인성의 껍질 안에 갇혀 있던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믿는 이들 안으로 이 생명을 분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들을 그분의 몸을 조성하는 많은 지체들로 만들었음 – 요 12:24.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3. 공기 같은 영이신 이 생명 주는 영은 생명의 영(롬 8:2), 예수의 영(행 16:7), 그리스도의 영(롬 8:9), 예수 그리스도의 영(빌 1:19), 주 영(고후 3:18)이라고도 부름.
(롬 8:2)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행 16:7)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롬 8:9)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빌 1:29)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고후 3:18)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서 비롯됩니다.
C.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몸을 위해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하셨음 – 벧전 1:3.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크신 긍휼에 따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살아 있는 소망을 갖도록 하셨으며,
1.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고 또한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 생명 주는 영이 되셨는데, 이로써 믿는 이들을 한 번의 우주적인 커다란 출산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에게서 난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음.
a. 하나님의 집, 심지어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b. 그리스도의 몸을 조성하여 그분의 충만, 곧 그분의 표현과 확장이 되고, 과정을 거쳐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표현과 확장을 완결하기 위하여. 
2.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심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만유를 포함한 생명 주는 영으로 한량없이 주심 – 요 3:34.
(요 3:3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며, 또 그 영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은 기질상의 성화(롬 15:16), 새롭게 됨(딛 3:5), 변화(고후 3:18), 형상을 본받음(롬 8:29)을 통하여, 그 영이신 그분이 거주하시는 그들의 영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로 건축됨(엡 2:22).
(롬 15:16) 이 은혜로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자, 곧 하나님의 복음에 수고하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후 3:18)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서 비롯됩니다.
(롬 8:29)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엡 2:22) 여러분도 또한 그분 안에서 함께 건축되어,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있습니다.
Ⅲ.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의 세 번째 단계는 강화의 단계로서, 교회의 하락에서부터 새 예루살렘 의 완결까지의 칠 배로 강화된 영이신 그리스도의 단계임.
A. 그리스도가 그분의 사역의 세 번째 단계에서 하고 계신 첫 번째 일은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강화시키는 것임.
1. 교회를 산출하고 그분의 몸을 건축하여 새 예루살렘을 완결할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수행하는 포함의 단계에서 그리스도가 사역하시는 도중에 교회가 하락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성취를 좌절시켰음.
2.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분의 몸을 건축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기 위하여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칠 배로 강화시키시려고 칠 배로 강화된 영이 되셨음(계 1:4, 4:5, 5:6, 3:1).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합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께서, 또 그분의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께서
(계 4:5) 그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천둥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는 일곱 개의 등불이 타고 있었는데, 이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계 5:6) 또 내가 보니, 보좌와 네 생물 한가운데에, 그리고 장로들 한가운데에 갓 죽음을 당하신 것 같은 한 어린양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셨는데 이것은 온 땅에 보내어지신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계 3:1) 사데에 있는 교회의 전달자에게 이렇게 편지하여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행위를 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 죽어 있다.
B. 그리스도가 그분의 사역의 세 번째 단계에서 하고 계신 두 번째 일은 이기는 자들을 산출하시는 것임.
1. 교회의 하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의 거의 모든 믿는 이들이 그들의 옛사람 안에서 사탄과 죄와 세상과 육체에 의해 패배 당하였음.
2. 하락한 교회들에게 보낸 그분의 일곱 서신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칠 배로 강화됨 안에서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체험하기 위한 칠 배로 강화된 영이신 그분 자신에 의해 이기는 자들이 되게 하시려고 패배한 믿는 이들을 부르심.
C. 그리스도가 그분의 사역의 세 번째 단계에서 하고 계신 세 번째 일은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것임.
1. 신약의 전체 계시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일의 유일한 목표는 새 예루살렘이어야 하는데,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궁극적인 목표임.
2. 교회 하락은 주로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빗나가 새 예루살렘 아닌 다른 많은 것들을 그들의 목표로 삼는 데 기인함.
3. 그러므로 교회의 하락 아래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목표인 새 예루살렘을 대치하는 모든 것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표, 곧 새 예루살렘을 우리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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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납....그 사람의 현재 영혼몸의 상태 그대로 주께 올려드리며 인정하고 받아드림으로써, 공동체 안에 머물도록, 주의 너그러우심따라 기다려 주고-기대-기도하며 교통함]

[[용서하다 ...원어적 의미와 실행]]
>1.용서하다 : ajpoluvw(아폴뤼오) 석방하다, 풀어 놓다, 해고하다, 용서하다, 가게하다, 내쫓다,   해산하다, 이혼하다.
>2.용서하다 ajfivhmi(아피에미)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  동사 아피에미는 아포(ajpov)와 히에미(i{hmi: 보내다)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사람에게서  법률로나 실제적으로 통제를 당하는 사람이나 물건의 임의적인 석방을 의미한다.
>3.용서하다 : carivzomai(카리조마이) 값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
[마6:14, 15...*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Mt 6:14 For if you forgive men their offenses, your heavenly Father will forgive you also; Mt 6:15 But if you do not forgive men their offenses, neither will your Father forgive your offenses.]
....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하거나 원수를 갚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결과는 죽음으로 연결될 것이다. 원수를 갚는다면 상대를 죽이는 것이고 용서를 한다면 내가 죽는 것이다.
.... 그대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픈 상처에 대한 기억이 떠오름--->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름---> 상처를 준 원수를 저주함--->사람을 미워했다는 죄책감에 빠지고 회개함---->분노를 억누르고 마음을 진정시킴----->다시 아픈 상처가 기억남......이와 같은 악순환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괴롭힘 당함의 일생을 보내게 된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일생이 그와 같다면 얼마나 비참한가..
.... 이제,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주께 그 처리 권한을 위임해 드린다면] 주님은 [일깨워주실 바] 당신에게 단 하나의 목적 -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체험함-을 이루기 위해  이 일이 필요했음과, 이제 후로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용서의 참된 의미는 옛 사람의 죽음에 연합하는 것이기에  주와 함께 옛사람이 달린 그 십자가 죽음을 체험하지 않고 용서한다는 말은 전부 거짓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당신을 그 분의 십자가 죽음의 체험 안에 두기 위해서라면 당신에게 어떤 상처라도 허락하실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는 그 때까지 계속 반복되게 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아픈 상처를 준 바로 그 사람이나 그대나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대의 옛사람의 전형이요, 우리 옛 사람이란 정말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에만 합당하다]는 사실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를 다루실 것이다. 
.... 어쩌면, 당신이 진실로 주님의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억울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때 그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주님께 항의하고 하소연할 수도 있다. “주여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에게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할 수는 없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가 당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주님은 전혀 관심두지 않으시는 것 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억울함의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은, 당신이 그 일이 그분의 십자가 상의 죽음을 생생하게 경험케 하심으로써 옛사람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서, 거듭난 새 사람의 합당한 인성, 곧 그리스도의 인격의 패러다임 안으로의 옮겨짐에로 이끌려 하심과 관련되어 있고, 그대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연합한 하나되었음을, 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용서하시는 말씀 곧,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고 그대가 고백하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당신에게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허락할 것이다.
.... 거듭난 <그리스도와 십자가 상에서부터 함께 죽고-장사되고-부활한 바, 부활 생명으로 새롭게 창조함 받은>우리는 구주 십자가의 죽음 경험 안에서만 우리에게 악을 행한 원수를 참되게 용서할 수 있고 심지어 사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깊이 연합할 때 우리 외부에서 가해지는 어떤 악도 그 평안과 안식을 깰 수 없다. 그것은 죽은 사람만이 느끼는 평안과 안식이라 할 수 있는데, 옛 사람이 살아 있는 자는 결코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거듭난 우리는, ((기계적으로, 아무 깨달음 없이, 섣부르게, 억지로))용서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무는 비결을 배우도록 함이 옳으리라.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저 영원한 [온유함의] 안식에 들어가게 되리라.
....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도록 하자...용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완전한 심판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분쟁을 어떻게 다룰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결국 그분은 죄인과 죄적인 행동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전문가이시다.....((그분께 [그 어떤 경우이든지 상관없이 [가령 극심한 경우 가족이나 본인의 몸의 손상, 재물 손실도 있을 수도 있고, 감정적 격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무례함이나 부당한 홀대의 느낌을 느끼게 한 다양한 상황 등으로 인하여 야기된 제반의 부정적 감정들... 불구대천의 원수 됨, 저주하고 싶을만큼 속상함-평강 없음, [거절감-부족/결핍감-고립/고독감/왕ㄸ받는 느낌-두려움/공포/공황감-분노/원한/쓰라림 등의 해소 불가능한 쓴 뿌리들에 대해], 주님 이름 불러서 그분께 스스로 이해하는 바, 유발 상황과 느낌까지 (생각 나는대로) 다 아뢴 후, [스스로는 그 상활을 제대로 다 알지 못함, 오해했을 수도 있음, 주 보시기에 지고지선의 가장 합당한 처리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최선의 선택을 할 수도 없음을 고백하고, 주를 신뢰함으로써 [주로 주 되시게 하기 위해] 그 처리 권한을 주께 넘겨드리고 그 매임에서 [스스로 잡았던 줄을 주께 넘겨드리고, 스스로는 놓아버림과 자유함을 선언함]에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때때로 저도 모르게 그 상처의 기억이 올라와서 괴롭히려 할 때마다, 이미 주께 그 권한 넘겨드렸음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탄에게 선포하며 되새기고 [주님의 문제임을] 선포함으로써 자유함에 이르기를 연습하도록 하자..))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 성경적 의미의 용서<그 진실한 적용> .... 죄 사함 받은 그대여, 정말 제대로 알고 실행하도록 하자]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자기에게 죽음의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을 향해 용서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읽게 된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뭘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또 잘못 범한 형제에 대해 몇 번을 용서해야 하냐고 묻는 베드로, 일곱 번이면 충분히 용서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용서의 목적이 무엇인가? 사랑 깊은 관계로의 회복이 그 목적이 아닌가? 

궁극적으로 용서를 통해 사람을 살리고, 더 나아가 공동체에게 유익을 주고 상처를 회복시키는 것이 용서의 목적이 아닌가? 

하여 잘못을 용서는 하지만, 상황 따라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려는 목적으로 처벌과 보상/배상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경우에는 처벌이 뒤따를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 중에 용서하라는 마음의 명령을 받지만 실제로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다. 

용서의 문제로 마음에 갈등을 겪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적절한 처벌과 보상 없이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충분히 벌을 받지 않았고 나에게 충분히 보상/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그걸 없던 일처럼 넘어가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용서와 처벌/보상(배상)의 문제를 일괄적으로 연계하는 것은 성경의 세심하고도 참된 사랑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편견에 치우치는 것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영적으로 볼 때) 용서는 외형적인 처벌/보상 여부와는 상관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잘못한 자에게 진정한 깨달음과 그것을 인정하고 사화하는 태도와 [적절한 본보기 삼을 필요]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보통의 이해로는 죄 값을 치르게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그 것,  또 손해 본 것을 눈감아 주면 그것이 용서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처벌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있음을...곧 처벌하면서도 얼마든지 용서가 가능하고 또 처벌을 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용서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좋은 예가 민수기 12장에 나오는 미리암과 아론의 예이다. 모세의 누나와 형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하나님이 모세 너를 통해서만 말씀했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냐? 그런데 너는 어째서 우리들 위에 군림하는 거냐?" 

이때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하나님은 실제로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로 세워주셨는데 이걸 알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도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그 결과 미리암이 문둥병이 들어서 피부가 하얗게 변했다. 

이때 아론과 미리암은 잘못을 깨닫고 즉시 회개하였고 모세도 이들을 불쌍히 여겨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물론 하나님은 이들을 용서해주셨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주셨는데 이상하게도 미리암의 문둥병이 그 즉시로 치료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 동안 진 밖에서 문둥병이 걸린 채로 고생하다가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낫게해 주실 때 미리암이 원래의 자리로 회복된 것이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암의 죄를 용서해주셨지만 그렇다고 처벌을 도중에 멈추지는 않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처벌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보라, 아론과 미리암은 주께서 세우신 인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소견의 옳음 내세움에 치우쳐서 주님이 친히 세우신 인도자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하심을 경홀히 여긴 결과, 그 선을 넘어 모세를 비난함에 대해 경종을 울리시려고 처벌을 감행하셨다...그러심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긍휼을 베푸셨다!!....원래 주님의 주권적 거룩하심을 범하는 것에 합당한 죄벌은 그 즉시 사망 영원 멸절에 해당되었음에도 불쌍히 여기셨다!!>  

또한, 자기가 피해 당사자라면(!!!) 자기 스스로 손수 처벌하지 않고 주님께 그 처벌 권한을 맡겨드림으로써 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는 중재(한번 더 주께로 돌아 올 기회를 열어주심 구함의..spare)이자 중보(유일무이하게 전적으로 무죄하신 하나님 어린 양 JC의 대속의 죽음 인해 주께로 열려진 구원 적용 요청)기도가 그것이었다...자기가 무엇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짓고 있던 이들을 용서해(죄를 사하여) 달라 기도하셨었다..> 

구태여 정리해 본다면, 만일 처벌을 받아야 할 개인이 진심으로 먼저 주 앞에서 돌아 보아 회개하고 [죄인됨의 깨우쳐 주심 가운데 겸비한 마음으로 깨달은 바, 상대방에게 범한 자기 잘못과 그로 인해 끼친 손해를 인정하고 솔직히 사과하며 합당하게 보상/배상하고자 함 통한 화목 이룸의,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그 합당한 댓가를 지불할 용의를 표현함의] 사화(=용서 구함으로써 화목 회복) 하고자 할지라도, 그가 피해를 입힌 이웃이나 공동체가 아직 상처를 치유 받기에 시기상조라면, 그래서 합당한 처벌[더불어 보상/배상]이 필요하다면, 용서는 하지만 [공공의 유익과 질서 유지를 위해] 공의에 합당하게 처벌 받음은 옳을 것이다. 

진실로, 이런 경우에는 용서한다고 하면서 처벌과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줄 착각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합당한 처벌로 인해 얻는 유익은 공동체에게 유익이 됨이니, 스스로 경계하며 조심함 없이는 다시 범죄할 수도 있음이다.

.((..보라,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때때로 인간사회에서 경험하거나 보게 되는 극악한 추악함이 있는데... 심지어 잘못한 자가 도리어 자기가 옳다고 뻔뻔스레 큰 소리치며[적반하장격으로] 배상하라 하며(이것이 무고이다) 강탈과 잔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조심하라, 상대방의 잘못을 무작정 눈감아 주는 것은 결코 참된 용서가 아니다. 게다가, 처벌과 보상/배상이 없어야만 용서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결코 성경적이지 못하다. 

용서는 겉으로 보이는 행위가 아니라 더 이상 [개인적 복수로 갚음 유발 가능성이 상존하는 바, 부정적 에너지인] 원한을 품지 않고 끊어내어 처리함으로 인해 주께서 부어주시는 마음의 평화 누림이요, 처벌/보상의 단순한 면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참되게 주님 구원 안으로 이끌어 들임으로써] 살리고자 하는 사랑의 선택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명령으로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할 때 우선 사랑의 원칙을 생각하자. 

[영적 관점을 잊지말라... 그대의 언행심사가 오직 주님 보시기에 참된 목적인 주님 구원에로 들어감의 참 유익을 줄 수 있는지를 보라] , 

곧 처벌과 보상/배상을 요구해야 상대방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참 용서이고, 처벌과 보상/배상을 면제해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참 용서일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설령 [심지어 법정 공판을 거쳐서] 배상이나 보상을 요구하기로 결정하는 경우에도, 곰곰히 주 앞에서 먼저 돌아보아 정결케 된 양심 안에서(!!) 주님의 의견 구함의 절차를 거쳐서 결정해야만 함을 결코 잊지말라!!  바울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몸 건축 위함]이라는 뚜렷한 사명 자각하에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의 역할 감당 위해 주께 나아갈 길을 여쭈었고, 주님의 지혜는 예루살렘에서의 체포, 가이사에게 상소함 위해 로마행을 감수함의 [투옥과 감금 생활을 통한 고난의 길]을 택하도록 인도하고 계셨다. ((그 언제라도 대응 방침에 대해 주님께 친히 여쭈라... 그리스도인은 쉽게 물러서버리고, 무력하니까...라고 불이익을 감수하도록 유도하며, 덤터기 씌우려는 국가-공권력-사회와 기업들의 몰지각함에 대해 경종 울리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의 유익을 위해!!] 그대에게 고난의 길 택하도록 하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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