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고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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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6장  [298속죄하신구세주를]


===성도를 위하는 연보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권면과 끝 인사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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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장 (개요)

본장의 내용은 이렇다.

Ⅰ. 유대에 있는 교회들의 고난 당하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수집한 연보에 대하여 지도한다(1-4).

Ⅱ. 그들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말한다(5-9).

Ⅲ. 그들에게 디모데를 추천하고 아볼로의 방문에 대하여 말한다(10-12).

Ⅳ. 바울을 도운 동역자들에게 대한 주의와 사랑과 관심을 권한다(13-19).

Ⅴ. 인사 후 장엄한 충고를 하며 축원으로 서신을 끝낸다(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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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를 위한 헌금에 대하여(고전 16:1-4)

이 장에서 바울은 덜 중요한 특별한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끝을 맺는다. 모든 것이 신령한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이것도 교훈에 유익하다.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들의 고난과 가난을 위한 연보에 대하여 지도한다. 

이 때에 유대는 국가의 재난으로 허덕이고 기독교인은 특별한 고난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관찰하자.

Ⅰ. 지도에 대한 소개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특별한 봉사가 아니었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들에게도" 같은 명령을 하였다(1절). 

같은 경우에 있어서 다른 교회들에게 명한 규칙에 따라가도록 전도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고후 8:13). 

바울은 신중히 갈라디아 교회들을 언급하여 경쟁심을 일으키고 그들이 환경에 따라서 후하게 되도록 격려한다. 

영적 은사와 물질에 있어서 다른 교회보다 우월한 사람을 나타나는 일에 뒤지면 되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다른  교회와 교인들의 좋은 본보기가 신령한 경쟁심을 일으켜야 한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않고 더욱 노력한다면 덕에 있어서, 칭찬받을 말한 일에 있어서,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뒤떨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영적 은사나 외부의 능력에 있어서 뒤떨어지면 안 될 일이다.

Ⅱ. 지도 내용에 대하여 관찰하자.

1. 연보하는 방법이다.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2절) 이 목적을 위하여 기금을 만드는 것이다. 

때때로 형편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저축해서 자선을 위하여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선한사업을 위하여 저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부한 사람은 선한 일에 부해야 한다(딤전 6:17, 18).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 수입의 얼마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기회가 올 때에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살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일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도록 힘써야 한다. 

선한 일을 위한 기금이 클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때때로 형편대로 저축하는 일이다. 

희랍 교부들의 얼마는 이 충고가 그들 중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함이라고 말한다. 

매주일 헌금하여 헌금이 쉽게 행해지고 기금이 되도록 해야 한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는 속담과 같다. 

우리의 자선과 은혜로운 일은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저축하는 방법보다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저축하고 있음을 알때에 기쁘게 줄 수 있다.

2. 저축해야 할 양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대로"(에안 유오도타이, 16:2) 즉 하나님의 섭리로써 축복받은 분량대로 하나님께서 성공하게 하신 대로 저축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의 사업과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없이 부지런한 손이 부를 만든 것이 아니다(잠 10:4, 22). 

우리의 성공과 번영은 하나님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의 은혜와 축복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생각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보하도록 더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고 우리를 번영시키실 때에 하나님의 가난한 종들을 도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남에게도 전달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것에 비례해서 저축해야 한다. 노동과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이 더 많이 축복 주시면 더 많이 연보를 위해서 저축해야 한다. 

우리의 자선이 하나님의 은혜에 비례하도록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가진 모든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적게 받았으면 적게, 많이 받았으면 많이 바쳐야 한다. 

하나님은 짚이 없이 벽돌을 만드며 능력 이상으로 바칠 것을 기대하시는 무자비한 주인이 아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 8:12). 

하나님께서 번창케 하시며 선한 일을 하도록 능력 주시는 대로 우리가 하도록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 더 큰 능력을 주시면 우리의 마음이 더 넓어지고 우리의 손이 더 넓어야 한다. 

능력이 없으면 손을 넓게 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은 그렇게 기대하시지 않는다.

3. 연보가 행해지는 때에 대하여 말한다. 

"안식후 첫날 새벽에 (마타 미난 삽바톤)(눅 21:1)" 즉 주의 날에 그리스도인의 성일에 회중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에, 그리고 기독교의 제도와 신비가 수행될 때에 모든 사람이 저축하도록 해야한다. 

이 날은 거룩한 안식의 날이다. 마음이 세상의 근심과 일에서 해방이 되면 될수록 자비를 나타낼 마음이 더 생기게 된다. 

그 날의 모든 의무들은 이 일에 집중되어야 한다. 사랑의 행위는 경건의 예배에 따라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경건은 사람에 대한 친절로써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자비의 일이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사랑의 열매이다. 주일에 꼭 있어야 할 적당한 봉사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주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해 주신 대로 연보하기에 알맞는 때이다. 지난 주일의 축복에 대한 합당한 헌물이다. 

그리고 다음 주간의 우리 손의 노동을 복받게 하는 온당한 방법이다.

4. 헌금의 처분에 대해서 말한다. 

바울은 자기가 갈 때에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기를 원했다. "내가 이를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2절). 

그러나 바울이 갈 때에 헌금의 처분은 그들이 하도록 한다. 그들이 한 헌금은 그들이 처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하여야만 목표에 맞고 바로 사용될 수가 있다. 바울은 수신자들의 믿음이나 재정을 지배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동의 없이는 헌금을  간섭하기를 원치 않았다.

(1) 그들이 신용장을 휴대하여 헌금을 보내라고 말한다(3절). 

헌금을 손수 가지고 가는 것은 고난을 당하는 형제에게 대한 사랑을 잘 정할 수 있는 길이다. 더욱 더 먼 여행을 하여 전할 때에 더욱 그렇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는 어려운 형제를 도울 뿐만 아니라 동정과 염려를 잘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2) 그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대표자들과 함께 가기를 바울은 제안한다(4절). 

바울의 일은 봉사하는 일이 아니고 말씀과 기도에 전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 사랑의 일을 그만 두기를 원하지 않았다. 

바울은 빈 손으로 고난을 당하는 형제에게 가는 것보다 고린도 교인들의 자선을 가지고 가기를 원했다. 

그것은 전도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전도를 돕는 일이었다. 

다음을 주목하자. 목사들은 사랑의 일을 도울 때에 그들의 고유의 사역을 행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격려하여 유대의 교회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하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들의 대표들과 가기를 원했다. 

이것은 그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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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방문과 체류(고전 16:5-10)

이 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방문할 목적을 통고하고 설명한다.

1. 그의 목적에 대하여. 

바울은 그때에 있었던 아시아에서 나와(8,19절 참고)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로 가서 그들과 함께 머물고 월동할 것을 의향했다(5,6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오래 일했고(1년반동안 머물렀었다) 많은 유익을 줄 것을 희망했다. 하여, 그들과 함께 머물고 그들을 보기를 원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참다운 기독교의 목사는 자기가 오래 일하고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 있다. 

바울이 다른 의무가 허용해 주는 한 고린도에 가서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바울이 그들을 방문하여 머물고 싶은 것이 이상할 것인가?

그들 중에는 바울을 경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도와 영적 아버지에게 합당한 존경을 주는 사람도 많았다. 

나머지의 사람들 즉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개선시키고 교회의 무질서를 바로 잡으며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원했다. 

바울이 얼마나 좋은 효과를 기대했는지 명확하다.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6절). 

그들이 바울과 동행함이 아니고 바울의 여행을 촉진시키며 그를 격려하며 돕고 여비에 협조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행하기를 원했다(요삼 :6). 그래서 부족한 것이 없이 하는 것이다(딤전 3:13). 

그들 중에 더러는 바울의 체류가 그들의 당파심을 고치고 그들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기를 원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유익을 줄 전망을 가진 곳에 사도가 머무는 것은 당연하다.

2. 지금 그들을 만나지 않는 변명을 한다. 

즉 지나가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7절)(엔 파로도 - in transitu-en passant). 그것은 다만 순간적인 방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식욕만 돋구고 먹지 못하여 함께 있고 싶은 소망만 일으키고 만족하지 못한다. 

바울은 그들을 너무 사랑하였기에 얼마 동안 머물 기회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것이 지나가는 길에 방문하는 것보다 그에게 더 기쁘고 그들에게 더 유익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지금 만나기를 원하지 않고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3. 이 목적에 대하여 제한이 있다.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7절). 

사도들이 비록 성령의 감동으로 썼더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실까를 그들은 알 수가 없다.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그들과 함께 머물고 유익을 주기를 바랬다. 이것은 성령의 어떤 특별한 감동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동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형성된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가겠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바울 자신의 의향이었다. 

우리의 목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행하겠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의 모든 목표는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약 4:15) 

하나님의 허락없이 우리의 계획을 수행할 수가 없다. 우리가 모든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허락과 지도에 의함이다. 

이방인도 신의 섭리를 인정하는데 우리는 더욱 이것을 인정하고 여기에 유의하여야 한다.

4. 당분간 에베소에 머물 바울의 의향이 나타나 있다. 

오순절까지 그곳에 머물 것이라 말한다(8절). 19절과 비교하여 이 절에서 서신을 쓸 때에 바울은 에베소에 있었던 것 같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라고 말한다. 에베소에서 보낸 적당한 인사이며 빌립보에 있었다면 적합치 않다. 

많은 사본이 이런 추신을 가지고 있다. 만일 빌립보에서 보냈다면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라고 삽입했을 것이다.

5. 에베소에 머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9절). 에베소에서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많고 그에게 큰 성공을 주었다. 

바울도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고 더 많은 사람을 인도할 큰 희망이 있었다. 이 이유 때문에 에베소에 잠간 머물기를 결정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목회의 성공과 전망이 바울로 하여금 어떠한 장소에 머물고 노력하도록 했다. 넓고 효과적인 문이 열려있었으므로 대적자들도 많았다. 

복음의 사역에 있어서 성공은 보통 많은 적을 만들어낸다. 사탄은 자기의 왕국을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자들을 맹렬히 반대하고 고통을 준다. 

이 절은 바울이 로마의 원형극장을 은유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한 문에서 투사가 나오면 다른 문에서 도전자가 나온다. 

참다운 용기는 반대에 의해서 고무된다. 바울의 열심히 반대자들의 정열로 불이 붙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들은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기에 열중하였다. 이 때에 바울이 그의 위치를 버리고 그의 인격과 교리에 치옥을 가져오겠는가? 

바울은 대적자들에 의하여 위축됨이 없었고 그들이 날뛰고 반대하면 할수록 더욱 사역에 힘썼다. 

바울이 도망을 하겠는가? 대적과 반대는 충성스럽고 성공적인 목사를 꺾을 수가 없고 그들의 정열에 불을 붙이고 새로운 용기로 감동시킨다. 

참으로 헛된 노력이 실망을 시킨다. 이 일이 의기를 꺾고 마음을 상하게 한다. 적이 날뛰고 중상하고 박해하여도 사역만 성공하면 활력을 목사에게 준다. 

목사를 누르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대적의 반대가 아니고 그의 청중의 고집과 후퇴와 거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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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의 영접과 송별(고전 16:11-12)

Ⅰ. 바울은 몇 가지 점에 있어서 디모데를 그들에게 추천한다.

1. 디모데가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고 명령한다. 

디모데는 그들 안에 몰래 들어온 악습을 고치기 위해서 보내졌다. 고칠 뿐만 아니라 책망하고 나쁜 자들을 견책하기 위해서 보내졌다. 

그들은 당을 짓고 상호의 투쟁과 미움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아주 부한 자들도 있었고 외부와 영적 은사 때문에 교만한 자도 많았다. 

교만한 정신은 책망을 쉽게 견디지 못한다. 젊은 디모데가 이용당할 것을 생각함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를 나쁘게 대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나쁜 일을 견디지 못함이 아니고 그의 확고와 신중이 어떠하든지 그를 잘 대접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였다.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낙담시키면 안 된다. 그의 견책에 분을 내어서는 안 된다.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인들은 목사들의 충성스러운 책망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을 실망시켜 그들의 의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2. 그들이 디모데를 경멸하지 못하도록 경고한다. 

외큐메리우스(Oecumenius)가 지적한 것과 같이 그는 젊고 혼자였다. 그를 지지해 줄 아무도 없으며 그의 젊은 얼굴과 나이는 큰 존경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체하는 자들이 그를 경멸하기 쉽다. 바울은 말한다. "이것을 삼가라." 

디모데를 불신하기 때문이 아니다. 디모데가 자기 인격에 모욕을 가질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나 교만이 고린도 교회에 넘지는 죄이기 때문에 이런 충고는 너무나 필요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경멸하지 않도록 해야하며 특히 그리스도의 충실한 목사들에게 경멸을 주어서는 안 된다. 

젊거나 늙거나 그들의 사역 때문에 극히 존경하여야 한다.

3. 바울은 그들이 디모데에게 온당한 격려를 주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를 잘 대접하도록 당부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써 우정으로 보내며 평안히 바울에게 보내라고 말한다(11절). 다음을 주목하자. 

목사들은 사역을 할 사람들에 의하여 잘 영접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적당한 존경으로써 보내져야 함을 명심하자.

Ⅱ. 바울은 그들이 왜 디모데에 대하여 이렇게 행해야 하는가의 이유를 말한다.

1. 왜냐하면 바울과 같은 사역에 고용되고 같은 권위로 일하기 때문이다(10절). 

디모데는 바울의 심부름을 한 것이 아니고 주의 일로 갔다. 비록 그가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를 돕고 하나님의 사명으로 보내졌다. 

그의 정신을 괴롭히는 것은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그를 멸시함은 바울을 멸시하는 일이 아니요 바울과 그들의 주님을 멸시하는 일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위협을 당하거나 멸시되어서는 안 되며 유순과 존경으로 대접해야 한다. 

같은 지위와 계급은 아니지만 말씀의 모든 사역자들이 다 그러하다. 목사와 교사, 사도와 전도자가 다 그러하다. 

이들이 그들의 의무를 수행할 때에 명예와 존경으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

2. 다를 이유는 바울의 사역 때문에 바울을 존경하면 바울이 보낸 사역자를 존경해야 한다. 그는 바울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서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11절). 혹은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에크데코마이 가르 아우톤). "나는 그의 옴과 너희들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노라. 나에 대한 관심과 존경을 그에 대한 대유로써 판단하리라. 나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도록 주의하라." 

바울은 자기가 보낸 자들이 배려와 대접을 받기를 기대했다. 그의 봉사와 성공과 사도의 권위가 이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사도를 슬프게 하며 노하게 할 소식을 가지고 디모데를 보내면 안 된다. "나와 형제들이 그가 돌아옴과 그의 소식을 고대한다. 평안히 돌아오게 하여라."

Ⅲ. 바울은 아볼로가 그들을 만날 목적을 알린다.

1. 바울은 아볼로가 그들에게 가기를 심히 원했다(12절). 

그들중에 한 당파가 바울을 대적하고 아볼로를 지지했지만(4:6 참고) 바울은 아볼로가 고린도에 가는 것을 막지 않고 오히려 원했다. 

아볼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바울의 관심과 존경을 저하시킬 것 같아도 아볼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다음을 주목하자. 

충성스러운 종은 동역자를 의심하지도 시기하지도 않는다. 참다운 사랑과 형제애는 악을 생각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목사들 마음이 아니고 이런 마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2. 아볼로는 지금 갈 수 없고 더 적당한 시기에 가려고 한다.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과 당파가 현재의 시기를 부적당하게 만든다. 아볼로는 지금 어느 한 당파의 두목이 되고 분열하며 경쟁하는 마음을 지지하고 싶지 않았다. 이 당파심이 식어져야 바울의 서신이나 디모데의 소식에 의하여 방문의 적절한 시기를 결정할 것이다. 

사도들은 서로 다투지 않으며 서로 돕고 위로했다. 하나님 교인들은 바울을 나쁘게 이용했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볼로는 바울에게 존경을 나타내고 그의 인격과 권위를 유지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더 좋아질 때까지 여행을 연기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복음의 사역자들이 서로 돕고 서로의 명예를 존중함은 어울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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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일꾼을 인정하라(고전 16:13-18)

Ⅰ. 이 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충고를 한다.

1. 먼저 깨어야 한다(13절). 

깨어서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위험 중에 있다. 그러므로 항상 주의를 해야 한다. 어떤 때와 어떤 형편에서는 위험이 더 크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위험 중에 있었다. 큰 당파 싸움과 큰 무질서와 그들의 중요한 교리를 부패시키려고 속이는 자들이 있었다. 

깨어 있지 않고는 덕과 경건을 지킬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러한 위험의 환경에서는 깨어있는 것이 마땅하다.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인이 안전하려고 하면 깨어있어야 한다. 위험이 크면 클수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2. 바울은 그들이 "믿음에 굳게 서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계시위에 서서 고수해야 하며 세상 지식으로 대치하거나 부패하지 말도록 충고한다. 복음에 굳게 서서 죽도록 고수해야 한다. 

복음을 고백하며 그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인은 복음의 믿음에 고정되어 그것을 포기하면 안 된다. 유혹을 이길 힘은 이 믿음이다. 

우리가 서는 것도 믿음이다(고후 1:24). 세상을 이기는 것도 믿음이다(요일 5:4). 세상이 유혹하고 위협할 때에 복음을 믿음에 굳게 서서 충성할 수가 있다.

3. 바울은 그들이 남자답게 강건하도록 충고한다. 

"남자답게 굳세게 행하라. 끈기있게 노력하며 너희들을 분열하고 타락시키는 자들을 대적하라. 그들에 의하여 유혹이나 위협을 당하지 말라.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답게 되어라. 건전한 판단과 확고한 결단으로 굳게 서라."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방어하고 충성을 유지하면서 원수와 싸울 때에 남자답게 굳게 서야 한다. 

고린도 교인들이 공격을 받는, 건전하고 실제적인 믿음을 수호하는 일에 그래야 한다. 이 일은 확고한 판단과 강한 결심으로 행해야 한다.

4. 바울은 그들이 모든 일을 사랑함에서 하도록 충고한다(14절). 

우리의 열심과 끈기는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에 있어서 남자답게 행할 때에 사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믿음을 지키는 동시에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생활뿐만 아니라 복음을 지키는 믿음에서도 빛이 나야 한다. 지조와 잔인은, 그리고 기독교인의 확신과 열광적인 분노나 격정은 다르다. 

기독교가 사랑이 두둘어지게 나타나는 것은 잘못한 형제를 참으며 거룩한 믿음의 적을 사랑으로 물리치고 모든 일이 사랑으로 행해지며 온유와 선의로써 서로 대할 때이다.

Ⅱ. 그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한 자들에게 어떻게 행해야할 것을 특별히 지적한다.

1. 그들의 성격에 대하여 말한다.

(1) 스데바나의 집과 성격이 언급된다. 

고린도 교회가 있는 그리스 지방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에 개종한 아가야의 첫 열매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의 신자가 되는 것은 명예롭다. 그리고 그들은 더우기 성도에게 봉사했다. 

" 또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한 것이다". 즉 성도들을 봉사하는 것이다. 말씀의 봉사가 아니고 영적 물적 여러 일에 돕는 일이다. 

스데바나의 가정은 그 지역에서 지위가 높고 중요한 가정이나 성도들을 돕는데 전념하였다. 다음을 주목하자. 

높은 지위의 사람이 성도에게 봉사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실제로 종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돕는 것이다.

(2) 바울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고린도 교회에서 그에게 온 것이라 말한다. 

바울의 설명은 그들이 바울을 위하여 교회의 부족을 채워 주었다. 그렇게 하여서 "그의 마음과 저희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17,18절). 

그들은 바울에게 서신보다 더 상세한 소식을 전하여서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며 돌아가면 고린도 교회는 교인들을 시원케 할 것이다. 

소문은 사실보다 더 나쁘다. 서신은 충분한 소식을 전하여 바울을 시원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과 이야기하여 평안하게 되었다. 

그들은 바울이 소문으로 들은 모든 잘못된 의견을 제거하였다. 다음을 주목하자. 

신실한 교인들로부터 소문보다 좋은 소식을 직접 듣는 것은  충실한 목사의 기쁨이다. 

사역자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쁜 말을 듣는 것은 슬픈 일이다. 소식을 전한 사람이 신실하면 할수록 더 기쁘다.

2. 이들의 설명에 의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이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를 말한다.

(1) 이들이 멸시를 받지 않고(11절) 존경되어야 한다. 

그들의 직책으로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 성도들은 도우며 교회의 명예와 명성을 염려하며 오해를 제거하는 이들은 가치있고 존경할 만하며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나 좋은 정신을 발견한 자들은 아무리 귀하게 여겨도 부족하다.

(2)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16절) . 

높은 자들에게 복종보다도 그들의 가치를 자발적으로 인정해 주는 일이다. 이들은 그들이 존경하고 경애해야 할 사람들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성도에게 봉사하고 복음의 성공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며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사역자들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그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사람들은 명예로운 인격자며 존경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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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지막 인사와 축도(고전 16:19-24)

Ⅰ. 아시아의 교회들과 아굴라와 브리스가와(아마 에베소에 거주했다. 행 18:26) 그 집에 있는 교회와 모든 형제들로부터 오는 인사로써 이 편지를 끝맺는다. 

바울은 아마 에베소에 있었던 것 같다. 바울에 의하여 고린도 교회에게 문안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는 결코 예의를 파괴하지 않는다. 바울은 중요한 문제를 취급하는 서신에도 친구들의 안부를 전하는 여지를 발견한다. 

신앙은 예의와 의무를 정진시킨다. 모든 격려를 쓰게 받아 들이면 안 된다. 이들은 "주 안에서 문안한다." 

그리스도인의 인사는 빈 말이 아니다. 선의의 참다운 표현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충심으로 전한다. 

주 안에서 문안하는 사람은 주님의 은총을 기원한다. 개인 가정의 교회가 언급되어 있다(19절). 가정이 교회라고 불리어진 것 같다. 

모든 기독교 가정은 어떤 점에서 교회이다. 외국에 전파될 때에 다른 교인들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교회가 되어야 하고 크면 모든 규례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규칙 아래에서 기독교의 예배를 매일 드려야 한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고 그곳이 교회이다.

1.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20절) 

진실한 선의와 분쟁과 당파에 대한 엄한 견책의 말이다.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과 그렇게 먼 기독교 형제들이 문안하는데,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음은 수치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형제의 사랑이 형제애를 일으킨다. 기독교의 다른 교회가 문안하는데,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죄이다.

2. 바울은 자신의 인사를 첨부한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21절) 그의 서기가 모든 편지를 바울의 입에 따라서 기록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끝에는 바울이 손수 서명하여 참됨을 알린다. "이는 편지마다 표적이다"(살후 3:17). 바울이 전체적으로 쓰지 않은 편지에 그렇게 하였다(갈 6:11). 

다음을 주목하자. 사도의 편지가 권위있고 신령함을 서명으로 나타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관심이 누구에게나 뒤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기의 서명을 첨부했다.

Ⅱ. 그들에게 엄한 경고를 준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22절). 

우리는 경외하기 위하여 위협의 말이 필요하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지혜자는 말한다. 

경외는 거룩한 믿음과 생활에 좋은 반려자다. 이 심판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1. 이 심판을 받을 사람이 설명된다.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다." 즉 JC를 모독하고 그의 진리를 부인하며 그의 제도를 경멸하고 인간의 지식과 식으로 그의 계시를 멸시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경고로 주어져 있으며 그들의 죄악에 대한 견책이다. 

아는 체하며 세상의 지식으로 신앙을 바보로 취급하고 가장 중요한 교리를 모순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복음의 순수성과 성결한 생활을 하게 되는 원리들을 버리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원한을 가지며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말을 들으면 그리스도교를 배교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엄중한 충고를 한다. "무서운 심판을 면하려면 그러한 행동을 버려라."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버림으로 무서운 파괴를 초래한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이 그리스도에 대한 거룩하고 진실한 사랑이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입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눅 19:27). 

구원의 소망이 이들에게는 없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는가?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의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몸을 버리시고 피를 흘려 사랑을 증거한 그를 이처럼 나쁘게 거역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사랑에 감동을 받지 못하고 이러한 구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슨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2. 여기에 이런 사람의 심판이 설명되어 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무섭고 심한 저주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떨어지고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되고 마지막 복수를 받게 된다. maranatha는 시리아 말로써 "주께서 오신다"의 의미이다. 

그들이 사랑하지 않고 외부로 어떠한 고백을 할지라도 마음으로 싫어하면 바로 그 주님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오시리라. 

그의 분노하심을 당하고 왼편에 서서 그에 의하여 저주를 받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주께서 파멸시키시면 누가 구할 수 있겠는가? 

그의 저주의 심판을 받는 자는 영원한 멸망을 받으리라. 

다음을 주목하자. 주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되고 구제되지 못한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참다운 신앙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를 믿을 수가 없다.

Ⅲ.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소원과 선의를 나타낸다.

1. 바울의 소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23절).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기쁘지 못한 마음으로 너에게 경고하지만 진정한 사랑으로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영원히 좋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 축복을 주는 것이 최고의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모든 형제와 친구에게 해야할 축복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하심을 사모하며 얻으며 향유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최대의 엄한 충고는 최대의 사랑과 선의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축복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경고한다. 

이 은혜를 받도록 이 경고를 한다. 기독교인의 마음은 얼마나 넓어지는가? 우리가 축복하는 사람은 두 세계의 축복을 받도록 기도한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써 끝을 맺는다.

2.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에게 사랑을 가진다.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24절). 

바울은 그들에게 솔직히 말하고 엄하게 책망하였다. 그러나 감정으로 한 말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랑으로써 작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끝을 맺는다.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바울의 마음이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마음이 아첨이나 냉소가 아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것이 신앙의 결과임을 첨가한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의 목적과 관심을 지지하는 한 바울은 그들을 사랑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여 돕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을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사랑이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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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바나 Stephanas.Stefana'"(4734, 스테파나스) 
스테파나스는 '왕관을 쓴'을 의미하며, 한글개역성경에서 스데바나로 음역했다.
그는 고린도 사람이며, 그의 가정은 바울에게 세례(침례)를 받은 소수의 가정들 중의 하나이다(고전 1:16). 바울은 자기가 세례(침례) 준 것을 그대로 시인하였으나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에 바울에 속하는 파당이 생겨나서 자기들이 결정적으로 우월하다는 식의 분쟁이 없게 하고자 하는 맘으로 이들 스데바나 집 사람들 이외의 소수자들에게만 세례(침례)를 준 것을 감사한다고 편지를 써 보냈다(고전 1:10-15).
스데바나 집 사람들은 아가야 지방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기독교인들이었다(롬 16:15). 아가야의 '첫 열매'라는 문구는 아데네 출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 되어왔다(행 17:34). 그러나 이 문구는 그 지방의 최초의 그리스도인 가정, 그곳에 있는 교회의 열심 있는 사람들을 나타낼 수도 있다. 바울은 스데바나 집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고 봉사한 사실을 들어 칭찬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고린도 교회가 이같이 사도바울을 도와 여러 교회에서 동역자로 일하는 이들을 알아 주고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면 하였다. 고전 16:15의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다"라는 말은 스데바나 집 사람들이 그들의 집을 예배 처소로서와 및 성도간의 우애와 접대 장소로서 제공하였으리라는 사실도 포함하였을 것이다.
스데바나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를 방문하여 바울을 기쁘게 하였고, 바울은 몹시 기뻐 하였는데 그 마음이 시원하다고 했고, 고린도 교회에 편지 할 때는 이러한 자들을 알아 줄 것을 부탁했다(고전 16:17-18). 분명히 그들은 고린도인들의 편지를 가져왔고 고린도전서를 가지고 돌아갔다.
이 이름은 애칭형이다. 행 16:27에 관한 두 개의 후기 사본들은 스데바나를 빌립보의 간수와 동일시 한다. (참조: NIV; PEB;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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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드나도 Fortunatus (인) Fortounavto"(5415, 포르투나토스) 
포르투나토스는 라틴이름이며 '행복한'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고전 16:17에 한번 나온다. 포르투나토스/ 브드나도는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스데바나와 아가이고와 함께 아마 에베소에 있었던 바울에게 보내어진 사자이다. 세 사람은 태만해 보이는 그룹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고(고전 16:17) 또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답변한 질문들도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마음을 "시원케" 했다(고전 16:18). (참조: HBD;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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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이고 Achaicus. !Acai>kov"(883, 아카이코스) 
아카이코스는 '아가야에 속한다'를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아가이고'라고 번역했다. 그 이름은 아가야 출신의 노예나 전직 노예임을 암시하며, 아마도 뭄미(Mummii)를 섬기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로마의 아가야이며(고린도의 파괴자인) 뭄미우스(L. Mummius)의 칭호였다(NBD).
아고이고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16:17에 한번 나오며, 고린도의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아고이고는 고린도 교회에서 편지를 가지고 사도 바울에게 찾아온 대표자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들 세 사람이 바울을 찾아와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전해준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직접 방문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바울의 일을 덜어 주었다. 이들은 고린도로 되돌아갈 때에 분명히 '고린도전서'의 서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공인 본문(TR)의 주장에 그대로 서명되어 있다.(참조: ISBE; P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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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굴라Aquila(인) !Akuvla"(207, 아퀼라스) 
아퀼라스는 '수리'를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아굴라'라고 음역한다.
아굴라는 아시아 지방인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며, 결혼한 직후에 로마로 이주하여 살았으나 A.D. 49년에 클라우디스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로마에게 떠나라는 칙령을 선포하자 아굴라는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고린도에 와서 살았다. 그들의 직업은 장막을 만드는 일이었다.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왔을 때 아굴라 부부를 만나 그들의 집에 유숙하며, 그들과 같이 장막 만드는 일을 했다. 아마 아굴라 부부나 바울이 서로 관심을 가진 것은 직업이 동일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같은 직업의 교인을 만난 것은 자신의 개척 전도를 위해서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바울은 아굴라의 집에서 큰 부담없이 일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행 18:2 이하). 고전 16:19에 의하면 아굴라의 집이 교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굴라 부부는 바울이 그곳을 떠날 때 바울을 따라 에베소에 머물렀다(행 18:18-행 18:19).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아굴라 부부는 선교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에베소를 떠나지 않았다. 아굴라 부부는 이곳에서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 아볼로(Apollos)를 만나게 되었는데, 예수님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듣고 그를 그들의 집으로 초청하여(행 18:24-행 18:26), '그리스도 안에'라는 사상의 의미와 성령의 은혜에 관해 가르쳐서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그가 선포한 칙령이 효력을 잃자 아굴라 부부는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의 집이 그리스도인들의 집회 장소, 곧 가정 교회가 되었다(롬 16:3).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의 안부를 물을 때 아굴라 부부의 소식을 맨 처음 물었다.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을 위하여 어떠한 위협이라도 감당하려 하였기 때문에 바울과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감사를 보낸다(롬 16:4).
아굴라 부부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언급은 딤후 4:19에 나타난다. 이 때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 돌아와 디모데와 함께 사역하였다.(참조: PEB; ISBE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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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스가 Preisca(인) Privska(4251, 프리스가) 
프리스가는 여자 그리스도인이며, 아굴라의 아내이다.
프리스가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온다(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Akuvla", 207(아퀼라스)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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