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5장 [508.우리가지금은나그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까지 자라나고 성숙함에는] 영의 거듭남 + 혼의 변화(성화) + 몸의 구속 모두 필요함..
*1>1-8..(몸의 구속과 관련된, 부활 안에 있는 몸)변형된 몸으로 덧입기를 갈망함 *2>9-13.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열망함(강한 의도로 열렬히 노력함으로써) *3>14-15. "주님을 위하여"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만을 향해 살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고 계심 *4>16-17.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마다 새 창조임 *5>18-20. Q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화목의 사역을 주셨기에,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성도들에게 Q과 화목하라 간청함. *6>21.Q의 의로우심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 이미 Q께서는 성도의 거듭남과 동시에 몸의 구속 위해 합당한 (죽지않는) 부활체를 예비해 두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음. 그러므로, Q 약속을 확실히 믿고 붙듦과 일치하는 방식과 태도로 일상의 삶을 영위함이 중요하다.
.... Q의 덧 입게 하실 그 부할의 몸은 이 땅의 육체에 맞춰 입는 맞춤복과 전혀 반대 방식이다... ((이루게 하시고...헬라어 원뜻으로는[형성하다, 모양이 잡혀지다, 예비하다, 적합하게 만들다,)) 즉, Q은 믿고 거듭난 우리의 죽을 몸이 그의 부활 생명에 의해 삼켜지도록 우리를 형성하셨으며 모양 잡혀지게 하셨고 예비하셨으며 꼭 맞게 이미 만드셨다. (어떻게 합당한 모양으로 만들어 가시는가?? 죄인을 용서하시고 신성한 생명을 그에게 넣어 그의 영을 거듭나게 하고 그의 혼을 변화되게 하심으로써 모양을 이루신다) 게다가 우리 전 존재가 그리스도로 적셔지게 될 것인데, Q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그분의 완전한 구원의 이 놀랍고 기이한 보증과 계약금, 미리 맛봄과 보증서로 그 영(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Q이 완전히 합당한 모양으로 그분이 이미 아시는 대로 벌써 맞추어 놓으셨고 우리를 거기에 맞춰 모양 잡혀가게, 자라게 하고 계신다....그대는 이미 모양 잡혔는가? 아직은 더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리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 Q의 약속이 반드시 그대로 확실히 이루실 것 붙들고 거기에 일치하는 방식과 태도로 일상의 삶을 영위함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오직 그분을 덧입음 이루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 [그분의 가이 없는 사랑 받는 자는 또한 마땅히 그분께 합당하도록 사랑할지니]부활의 몸이자 또한 그분 자신을 덧입음의 자격 가진 자란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연합된 하나됨의 (사랑겨운, 열정적)순종으로 행하는 자이기에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죽음을 통과해서든지, 또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벗은 자(천년왕국 참여 제외된) 로 발견되는 것 아니라]부활의 몸을 덧입는 자(=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소망함
===화목하게 하는 직분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강권하다 :: compell, constrain, 강요-압박-강제-제약-감금....[오직 자기를 죽음에 내어주신 그분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됨이 아니라면 도망쳤으리라!!]다른 모든 면으로는 차단-압박함과 동시에 좌우벽에 싸인 복도로만 행하도록 둔 것 같이, 선택의 여지를 없애고 강제로 제한하여 오직 하나의 목표 달성 위해 매진하도록 몰아 대다(부담을 느끼게 하다)...(cf> beseech ::::간청하다)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고후5:15....*(KJV)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And that he died for all, that they which live should not henceforth live unto themselves, but unto him which died for them, and rose again. = (RV)And He died for all that those who live may no longer live to themselves but to Him who died for them and has been raised...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을 향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을 향하여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활동적이요 적극적이로되 천연적 방법으로 행함 인해 주님 마음을 상하게 하며 그분의 누림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 오직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주님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단순히 그분을 향해 사는 것...."주를 향해 산다 함"은 예수께서 살았던 종류의 생명을 사는 것임(사도들은 예수 죽인 것을 체험했다고 하였던 바, 바로 그렇게 체험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 겉사람을 항상 십자가 죽음에 넣는...곧 범사에 그 영께서 친히 주장하시도록!!] 예수 생명을 살아냄이 주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육체를 따라 알지 않는다 함은 겉 사람을 따라 알지 않는다, 즉 [그의 직업-지위-재능-능력으로 사람을 알지 않는다 함이요 오직 속 사람, 곧 그의 영을 따라 알아야 한다]함이니, 합당한 교회 생활에서 인도자나 봉사자들은 오직 주님 감동 안에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은 부활의 몸 갖기를 열망하는 것과 연관되며, 주님 향해 사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열망하는 것과 연관된다. 우리가 주님 향해 살지 않는다면 그분을 기쁘시게(행복하게) 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임을 깨닫고 전 존재가 새로와진 성도로서 우리의 천연적 존재를 죽음에 넣어야(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이러함으로 살 때 우리는 참으로 새 창조, 즉 영 안에서 속 사람 안에서 (충만하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함이 되며, 이로써 부활의 몸 갖기를 열망함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기시리라..
.... [갈3:27..*27.(개)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공)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회)이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 (RV) For as many of you as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 (AMP)For all of you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into a spiritual union with the Christ, the Anointed] have clothed yourselves with Christ [that is, you have taken on His characteristics and values].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 안으로) 세례 받은 여러분 모두는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로 옷입었습니다(즉, 그분의 성품과 가치를 옷입었습니다)]
===##하_아담<헤이_알렙-달렛-멤>....*헤이 = 하나님이 호흡해내심(생기 불어넣으심) = 낳으심 -->*알렙=신성의 하나님, *달렛=결합한 하나. .*멤 = Q 담지자/그릇= [무죄]참 인성의 사람....바로 글자그대로!!, 온전/완전히 하_아담, 곧 엘로힘으로서 담겨지신 Q을 이땅에서 살아내신 분= 구주 예수님..===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켄 미 셰후 베마시아흐 베리아 하다쉬아 후 하리쉬노트 아바두 힌네 (하콜) 나아쇼 하다쇼트]
==17. ....@라켄<라멛-카프-눈>..라크 + 켄.. 참제자됨의 현존, 주님이 세우신 바라..@미<멤-요드>...진리로 사는자.. @셰후<쉰(우)_헤이-바브(중)-알렙>..*쉰(우)=Q-구주의 편지!!..#"함께"..쉰(우)=위에서 찾아오사 부어주심... 신(좌)=위로 찾아감.. 신(좌우) = 함께-공존 이룬후에 다시 함께 내려옴...동심합치로, 부으신 형상 그대로 호흡마다 Q을 살아내도다.. 곧, @베마시아흐<베이트_멤-쉰(우)-요드-헤이트>..'베레시트'그대로인 기름부음이 그 안에 거하심이라.. @베리아<베이트-레이시_요드-헤이>..*바라=창조하다<베이트-레이시-알렙>에서 알렙 대신 요드-헤이(즉, 여호와=말씀=얼굴)로 대치시켰음 = .피조물 = 새 하늘과 새 땅, 곧 매일-매순간 새로운 재창조요, 새창조라.. @하다쉬아<헤이트-달렛-쉰(우)-헤이 *하다쉬=새로운(헤이트-달렛-쉰(우))>..새로운 피조물이란 새창조=재창조인바, 하_아담이 거하는바, Q의 말씀(=여호와)으로 인해 이루고 계심.. @후<헤이-바브(중)-알렙>..호흡마다(결합한 하나, 그 성령께서 나타나시는바) Q이라.. @하리쉬노트<헤이_레이시-알렙-신(좌우)_눈_바브(상)-타브> *라아<알렙-레이시>=보다 *이쉬<알렙-쉰(우)> = 진리/말씀-빛/불..곧 성육신하신 참생명-인격(이신) 말씀 *로쉬=머리<레이시-알렙-쉰(우)> = ((세상의 삿됨에 치우치기 쉬운바, 우리의 머리는 잘려져야 하고!!))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로서 친히 살아가시도록 함(주님 뜻-의지-의향-원함-생각 그대로) ...우리의 영 안에 Q의 형상이 들어와 결합한 상태 이룸 = 그분의 형상 그 자체가 되어 사는 삶이라야 온전한 삶 이룸 됨...베레시트<베이트-레이시-알렙-쉰(우)-요드-타브>에서 위임하신 부분, 곧 쉰(우)-요드-타브..거기에 [사역]요드 대신 [생명-인격의] 바브(상)으로 대치시킨것이 '오트".. @아바두<아인-베이트-달렛-바브(중)> *아보드<알렙-베이트-달렛> = 경영/경작하다=경작자/경영자...Q을 경작함/Q을 경영함>>종??.. @힌네<헤이-눈-헤이>...확장-증대되는 생명이로다!!..[보라..여기..창1 : 1-31까지 이루신 그대로이니.]. (@하콜<헤이_카프-라멛>..곧 조성-대치됨의 제자 산출) @나아쇼<눈-아인-신(좌)-바브(상)>...참생명-인격이신 Q의 육화....*아사<아인-신(좌)> [사람의 동의(동역)가 있어야 주님 형상 이루심] 처음에 무-->유에로의 창조 그후,..기존의 것의 확장-기능 개시..*예체르<요드-체데-레이시>..십자가로 이룬바 새사람 창조.. @하다쇼트<헤이트-달렛-신(좌)-바브(상)-타브>..*쉬이트=위임<쉰(우)-요드-타브>==><신(좌)-바브(상)-타브>로 대치됨이 바오 육화되어 사람안에 내재하시는 그영을 의미..육화된바, 중생 성도 안에 Q형상[생명-인격]의 육화 그대로 이루신바 새로이 온전케 하심.. = 새로와진 존재, 그 안에 진리-참빛-참생명-참지혜이신 Q이 그대로 넘치는 충만-임재하심..바로 그 넘쳐 흐름이 당연히 나타나야 함....모든 언행심사마다 Q, 바로 그분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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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 [롬11:36...*36.Because out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왜냐하면 만물이 주님에게서 나와서, 주님을 통하여 있고, 주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영광이 그분께 영원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For from Him [all things originate] and through Him [all things live and exist] and to Him are all things [directed]. To Him be glory and honor forever! Amen.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골1:20..*20.And through Him to reconcile all things to Himself, having made peace through the blood of His cross — through Him, whether the things on the earth or the things in the heavens.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들에 있는 것들을 그분을 통해 그분 자신과 화목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and through [the intervention of] the Son to reconcile all things to Himself, making peace [with believers] through the blood of His cross; through Him, [I say,] whether things on earth or things in heaven.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r고후5:14-21...5:14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s us because we have judged this, that One died for all, therefore all died; 5:15And He died for all that those who live may no longer live to themselves but to Him who died for them and has been raised. 5:16So then we, from now on, know no one according to the flesh; even though we have known Christ according to the flesh, yet now we know Him so no longer. 5:17So then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things have passed away; behold, they have become new. 5:18But all things are out from God, who has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has given to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5:19Namely, that God in Christ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not accounting their offenses to them, and has put in us the word of reconciliation. 5:20On behalf of Christ then we are ambassadors, as God entreats you through us; we beseech you on behalf of Christ, Be reconciled to God. 5:21Him who did not know sin He made sin on our behalf that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in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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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화해신학 --화해하다(카탈라쏘, καταλλάσσω)에 대하여
...헬라어 동사 καταλλάσσω(카탈라쏘)는 바울의 저작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편지에만 6번 나타난다(고전 7:11; 롬 5:10, 고후 5:18, 19, 20).
그 중에 한 번은 인간 사이의 화합(아내와 남편, 고전 7:11)을 말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혹은 하나님과 세상의 화목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동의어로서 형제 사이의 화해를 나타내는 διαλλάσσω(디알라쏘, 마 5:24)가 있다. καταλλάσσω(카탈라쏘)의 명사형 καταλλαγή(카탈라게)는 바울서신에 4번 사용되었다(롬 5:11; 11:15; 고후 5:18, 19). 바울서신에만 사용된 것은 이 단어가 가진 구원론적이고 기독론적인 바울의 특별한 신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탈라쏘의 어근이 되는 동사 ἀλλάσσω(알라쏘)는 '고치다’(alter, 행 6:14; 갈 4:20), ‘변화하다’(transform, 고전 15:5; 히 1:12)의 뜻과, ‘교환하다'(exchange, 롬 1:23)의 뜻.
이 단어에 전치사 접두어 κατά (카타, ∼로서, ∼에 대하여)를 붙여서, 변화와 교환의 의미를 강화하면서, ‘화해’라는 관념적 의미로 발전시켰다.
καταλλάσσω(카탈라쏘) 가 ‘화해’의 개념으로서는 헬라 문화나 종교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헬라 문화에서는 신과 인간의 유사성이나 관계의 근접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신구약 중간시대의 문서라 할 수 있는 외경 마카비 하의 저자는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박해와 성전모독 사건이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라고 생각을 하고, 이제 하나님이 백성들의 기도와 노력을 보시고 분노보다는 화해하신다(καταλλάσσω, 카탈라쏘)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마카비 하 1:5; 7:33; 8:29).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심판의 분노가 가라앉거나 진정되는 모습으로서 화해를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화목)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분명히 선포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κατηλλάγημεν 카텔라게멘, we were reconciled to God, 1인칭 복수 수동태), 화목하게 된 자(καταλλαγέντες 카탈라겐테스)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의 분노를 진정시킨 분으로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마치 구약의 제물을 통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힌 것(appease, placate)처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하고 있다. 죄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사람들(enemies)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친구들이 되었다는 것이 καταλλάσσω(카탈라쏘)의 원어적인 뜻이다. 이것이 바울의 화해신학의 핵심이다.
바울의 화해신학은 고린도 후서 5:11-21에 잘 설명되어 있다.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모든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5:17).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목되었음 (καταλλάξαντος 카탈락산토스, 부정과거분사)은, ‘화해의 사역’(διακονία τῆς καταλλαγῆς 디아코니아 테스 카탈라게스)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으로 주어지게 되었다고 선포한다(고후 5:18). 이 화해의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이 세상과의 화해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화해의 말씀’(λόγος τῆς καταλλαγῆς, 고후 5:19)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긴 것을 말한다.
화해신학의 핵심은 ‘화해’의 주체적인 행동자는 하나님이시고,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카비 하에 나타난 ‘화해’와는 다른 점이다. 마카비의 저자는 박해와 고난에서 유대인들이 먼저 회개하고 기도하며 외세에 대한 신앙적 정치적 대항과 성전정화로 이어지는 노력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과의 화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결과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 화해는 바울신학에서 ‘의롭다고 여기심'( λογίζομαι, 로기조마이)이라는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롬 4:3, 9). 인간의 죄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고(μὴ λογιζόμενος 메 로기조메노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인간과 화해한 것이다(고후 5:19).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는 사람이다. 바울은 이 진리가 그리스도인 존재의 근거이기에 이 화해를 명령으로 강조한다(고후 5:20). 그리스도인은 화해의 사역을 모든 사람, 더 나아가서 모든 피조물과의 화해를 위해 감당해야 한다. 죄 가운데 사는 불행한 사람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함께 고통 당하는 자연과의 화해를 위해, 영광의 자유를 가진 존재,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해야 한다(롬 8: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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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rinthians 5 Amplified Bible
==The Temporal and Eternal
1 For we know that if the earthly tent [our physical body] which is our house is torn down [through death], we have a building from God, a house not made with hands, eternal in the heavens.
2 For indeed in this house we groan, longing to be clothed with our [immortal, eternal] celestial dwelling,
3 so that by putting it on we will not be found naked.
4 For while we are in this tent, we groan, being burdened [often weighed down, oppressed], not that we want to be unclothed [separated by death from the body], but to be clothed, so that what is mortal [the body] will be swallowed up by life [after the resurrection].
5 Now He who has made us and prepared us for this very purpose is God, who gave us the [Holy] Spirit as a pledge [a guarantee, a down payment on the fulfillment of His promise].
6 So then, being always filled with good courage and confident hope, and knowing that while we are at home in the body we are absent from the Lord—
7 for we walk by faith, not by sight [living our lives in a manner consistent with our confident belief in God’s promises]—
8 we are [as I was saying] of good courage and confident hope, and prefer rather to be absent from the body and to be at home with the Lord.
9 Therefore, whether we are at home [on earth] or away from home [and with Him], it is our [constant] ambition to be pleasing to Him.
10 For we [believers will be called to account and] must all appear before the [a]judgment seat of Christ, so that each one may be repaid for what has been don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b]bad [that is, each will be held responsible for his actions, purposes, goals, motives—the use or misuse of his time, opportunities and abilities].
11 Therefore, since we know the fear of the Lord [and understand the importance of obedience and worship], we persuade people [to be reconciled to Him]. But we are plainly known to God [He knows everything about us]; and I hope that we are plainly known also in your consciences [your God-given discernment].
12 We are not commending ourselves to you again, but are giving you an occasion to be [rightfully] proud of us, so that you will have an answer for those who take pride in [outward] appearances [the virtues they pretend to have] rather than what is [actually] in heart.
13 If we are out of our mind [just unstable fanatics as some critics say], it is for God; if we are in our right mind, it is for your benefit.
14 For the love of Christ controls and compels us, because we have concluded this, that One died for all, therefore all died;
15 and He died for all, so that all those who live would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but for Him who died and was raised for their sake.
16 So from now on we regard no one from a human point of view [according to worldly standards and values]. Though we have known Christ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w we no longer know Him in this way.
17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that is, grafted in, joined to Him by faith in Him as Savior], he is a new creature [reborn and renewed by the Holy Spirit]; the old things [the previous moral and spiritual condition] have passed away. Behold, new things have come [because spiritual awakening brings a new life].
18 But all these things are from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making us acceptable to Him] and gave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so that by our example we might bring others to Him],
19 that is, that God was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not counting people’s sins against them [but canceling them]. And He has committed to us the message of reconciliation [that is, restoration to favor with God].
20 So we are ambassadors for Christ, as though God were making His appeal through us; we [as Christ’s representatives] plead with you on behalf of Christ to be reconciled to God.
21 He made Christ who knew no sin to [judicially] be sin on our behalf, so that in Him we would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that is, we would be made acceptable to Him and placed in a right relationship with Him by His gracious lovingkindness].
==Footnotes
2 Corinthians 5:10 Gr bema (a step). A raised area reached by steps, used as the official seat of a judge.
2 Corinthians 5:10 Or infer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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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개요)
바울은 그들의 고난 아래에서 어떻게 견디어 나가는가를 계속 설명한다. 즉,
Ⅰ. 그들의 기대와 소망과 확신이 사후의 행복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1-5).
Ⅱ. 그들의 현재의 생활의 위로(6-8).
Ⅲ. 그들의 의무를 촉진시킨다(9-11).
Ⅳ. 자천에 대한 변명과 그의 열심과 근면에 대하여 말한다(12-15).
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며 중생과 화해에 대하여(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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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집과 영원한 집(고후 5:1-11)
바울은 이 절에서 전 장의 논지를 계속한다. 즉 고난 아래에서 그들이 가지는 용기와 인내의 터전에 관하여 말한다.
Ⅰ. 바울은 사후의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대와 소망과 확신에 대하여 말한다(1-5절). 특히 다음을 관찰하자.
1. 사후의 신자의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대(1절).
신자는 믿음과 진리에 의하여 이 생이 끝나면 또 다른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행복에 의하여 소망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하늘의 집과 장래의 행복에 대한 확고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신자의 눈과 소망에 비취는 천국은 어떠한 곳인가?
거할 곳이 많고 영원한 집이 있는 집이요, 거주지요, 휴식처요, 피난처요, 하나님의 집으로 생각한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같이 이 지상의 모든 집보다 우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다. 건축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가치가 있다.
장래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것이다. 그것은 기초가 흙으로 된 우리의 영혼이 지금 사는 지상의 장막과는 다르다. 영원한 집이다.
(2)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이 기대로써 이 행복을 누린다. 다음을 주목하자.
① 땅의 집인 우리의 육체는 곧 무너진다.
못이 빠지고 줄이 풀리어지고 그러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
② 이 일이 일어나면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집이 있다.
영은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고 이곳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과 살게 된다.
2. "우리가 탄식한다"(스테나조멘)라는 말의 의미와 같이 신자는 이 장래의 축복을 심히 갈구한다.
(1) 무거운 짐 아래에서 신음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생활의 짐 아래에서 신음한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2절) "우리가 이 장막 안에서 짐을 지고 신음한다."
인생의 재앙이 바로 무거운 짐이요 눌림이다. 육의 몸은 무거운 짐이다. 신자는 죄의 짐과 자기안에서 아직도 남아 날뛰는 많은 부패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불평하게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괴로운) 사람이로다"(롬 7:24).
(2) 다른 생활의 행복에 대하여 신음한다.
이래서 신자는 신음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2절) 곧, 영광의 영생을 사모하는 것이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킴 바 되게 하려 함"(4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발견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참 생명, 곧 부활의 몸 입은 자로 발견되기 원함) "(3절).
하나님의 뜻이면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재림시 살아 남은 자들은 확실히 하늘 나팔소리에 홀연히 부활의 몸으로]변화되리라. 그러므로 벗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써의 죽음은 원함이 아니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신자의 죽음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르는 통로이다.
신자는[어찌 보면!!] "사는 것보다 오히려 죽는 것을 바란다.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8절).
이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다. 즉 영광의 옷을 입기 위하여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① 죽음은 육체의 옷을 벗어버리고 인생의 모든 안락과 괴로움을 제거한다.
벌거벗고 이 세상에 왔으니 벌거벗고 이 세상을 갈 것이다.
② 은혜를 입은 영혼은 저 세상에서 벗고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부활생명 충만한 새로운 몸을 입은] 그들은 영광과 의와 칭찬의 옷을 입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고통을 벗어 버리고 그들의 옷을 씻어 어린양의 피로써 희게 된다(계 7:14).
3. 미래의 축복에 대한 확신의 두 가지 이유.
(1) 이 축복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우리에게 [이 땅에서부터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닮아감, 곧 의-평강-희락안에서 하늘나라를 살도록]성령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5절).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가 이곳에 있는 동안 하늘 나라에 필요한 모든 것이 예비된다. 하늘 나라의 신령한 집의 돌들이 이곳에서 다듬어진다.
이 일을 예비하셨고 이루어 가고 계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우리의 영혼이 신령한 것을 입게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손만이 이 일을 할 수가 있다.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대하여 알맞도록 많은 것이 준비되어야 한다.
(2) "[보증으로 주신 바] 성령의 간절함이" 그들에게 이 확신을 주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님 뜻대로 이루시기를 !! 그토록 믿는 이 안에서] 간절히 원하신다!! 간절함이 곧 지불이다. 신자가 이 땅에서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바 성령의 현재의 은혜와 위로가 영원한 은혜와 위로가 영원한 은혜와 위로의 간절함이다....[성령님의 기도에 합하라!!]
Ⅱ. 바울은 이 세상의 상태와 형편에 있어서 신자들의 위로를 추론한다(6-8절)
1. 그들의 현재의 상태와 위로. "그들은 주와 따로 거한다"(6절).
그들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요 나그네이다. 그들은 이 곳에서 잠간 머문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나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완전한] 상태는 아니다. 우리가 사는 한 그의 얼굴을 [맞대어] 뵈옵지 못한다. 하여, 성령안에서 성령님 이끄심따라 살아 생동하는, 발휘되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함이 아니다"(7절). 우리는 [지금 현실적 실존 속에서는]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기쁨을 소유하지 못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믿음은 이 세상에 대한 것이고, 보는 것은 저 세상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보면서 살 때까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의무요 관심이다.
2.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죽음을 당하여 우리는 얼마나 위로와 용기를 가져야 할까?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야 하며"(6절) 다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할 바 다른 세상에 대한 기대와 사후의 축복에 대한 온당한 소망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하면 [성령과 말씀안에서] 이 세상의 고난에서 위로받고 죽을 때에도 도움을 얻는다.
마지막 원수를 대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용기를 내어야 하고 이 장막을 벗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기를 원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위에서 난 사람은 위를 사모하는 것과 같이 몸에서 떠나 곧 주와 함께 있으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눈을 감고 영광 중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진실로!! 마침내!! 믿는 바 그] 믿음은 보는 것으로 변한다.
Ⅲ. 바울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의무를 수행하도록 격려한다(9-11).
천국에 대한 바른 소망을 나타나 죄를 행하도록 격려하지 않고 반대로 신앙에 있어서 주의와 열심을 내도록 한다.
"그러므로" 혹은 우리가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므로 우리는 노력하고 수고한다(9절).
‘필로티무메다’ - 즉 우리는 야망을 가진다. 마치 야망이 있는 사람이 자기의 목표를 성취하려는 것과 같이 노력한다.
1. 바울이 이처럼 야망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범사에, 이 땅에서부터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우리가 살든지 즉든지 몸 안에 있든지 몸밖에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9절).
우리의 위대한 주께서 "잘 하였도다" 칭찬하여 우리를 선택하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노력한다.
그들은 이것이 최고의 은총이요 최고의 명예로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의 대망이다.
2. 다가올 심판으로부터 신앙 생활을 격려한다(10,11절).
가장 선한 사람도 신앙의 열심과 관심을 가지게 하는 몇 가지 관계된 일이 있다.
심판의 확실성, 즉 우리는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심판의 보편성, 즉 우리는 모두 나타나야 한다.
그의 심판대 앞에 우리가 나타나야 하는 재판관 즉 그는 불타는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실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받아야할 보상은 육체 안에서 행한 모든 일에 대한 보상이다. 선악간에 모든 일이 공정하게 나타난다.
바울은 이 무서운 심판을 "주의 두려움"이라고 불렀다(11절). 이것을 생각하여 사람들이 회개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그에 앞에서 편안하게 나타나게 한다.
바울의 충성과 근면에 대하여서는 하나님과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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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고후 5:12-15)
여기서 다음을 관찰하자.
Ⅰ.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을 자천하는 것 같은 점에 대하여 사과한다(13절).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1. 앞의 절에서 그들의 충성과 근면을 언급한 것은 그들을 추천하거나 그들을 위함이 아니고 그들의 호의를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2. 외모로 영광을 구하며 비난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주기 위함이다.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주어서" 원수들의 비난에 대처하기 위함이다. 만약 말씀이 그들의 양심에 나타나고 그들의 행위와 교회에 효과가 있었다면 이것이 말씀의 사역에 대한 가장 좋은 방어가 된다.
Ⅱ. 바울은 그들의 열심과 근면에 대한 이유를 말한다. 바울의 원수들은 마치 바울이 미친 사람 같다고 비난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한다면 광적이었다고 말했다. 로마의 관원이 바울에게 말한 것과 같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행 26:24).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말한다.
1. 바울이 이와 같이 열중하며 열심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 너희가 이렇게 생각하든지 저렇게 생각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그리고 너희 유익을 위함이다(13절). 그들이 어떤 때에는 정열과 열중을 나타내고 어떤 때에는 이성으로 크게 침착하게 나타내어도 이것은 그 두 목적을 위함이다. 그 이유를 밝힌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4절).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하도록 강권을 받고 있다. 사랑은 목사와 교인들이 의무를 수행하도록 격려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덕을 가지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나타난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르게 생각되고 옳게 판단되면 우리에게 이런 효과를 가져온다. 사랑의 강권에 대한 바울의 말을 들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며 영원히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었도다"(14절). 율법 안에서 죽었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죄 가운데서 죽었으며 허물로써 죽고 영적으로 죽었다. 다음을 주목하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였다. 그들은 잃어졌고 망하였다. 죽고 파멸되었으며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시지 않았다면 영원히 이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즉 그들은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산 자들은" 다시 말하면 그의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산 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살으신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계획이다." 즉 그들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15절).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들 자신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과 행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 자기애를 치유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한 목적이다. 즉 그의 사랑의 명령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에게 바쳐야 하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바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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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6-21)
이 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에 필요한 두 가지를 언급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이다. 즉 중생과 화해이다.
Ⅰ. 중생은 두 일로 구성되어 있다.
1. 세상에서 젖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16절). 우리는 육체의 목적과 유익을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나 물건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며, 세상이나 세상의 일들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초월하여 산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있고 세상은 우리의 발 아래에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위로와 관계를 거룩한 냉담으로 즐겨야 한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육안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는지 논의된다. 아마도 이 편지를 받는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과대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육체의 임재를 제자들은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이 주는 위로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초상을 만들어서 예배시에 사용함은 하나님의 신앙을 위하셔 정하신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2. 마음의 철저한 변화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만일 어떤 사람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며 사람이어야 함을 증명해야 한다(17절).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여라"로 읽을 사람도 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이름을 가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마음과 성질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룩하는 역사가 그렇게나 크기 때문에 다음 말이 나온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즉 옛 사상과 옛 원리와 옛 행위가 지나갔다. "이 모든 일들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중생시키는 은혜는 영혼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시킨다.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고 새롭게 된 사람은 새 원리와 새 규칙과 새 목적과 새 동료들과 함께 행동한다.
Ⅱ. 화해는 두 개념으로 말하여진다.
1. 의심없는 특권이다(18, 19절). 화해는 싸움이나 우정의 파열의 조정을 의미한다. 죄는 분열을 만든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우정을 파괴하였다. 죄인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은 죄인에 의하여 배반을 당했다. 그러나 보라. 화해가 성립된다. 배반당한 하늘의 하나님께서 화해를 원하였다. 다음을 관찰하자.
(1) 하나님은 화해의 중보자를 정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를 그에게 화해시켰다(18절). 중보자의 모든 수행과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화해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다. 영향에 의하여 하나님은 자기에게 화해시키고 자기의 정의와 거룩에 손상을 주지 않고 배반자에게 화목을 주며 파기한 계약의 잘못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고 새로운 조약과 계약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며 이 계약의 취지에 따라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믿는 자를 의롭게 여기신다.
(2) 하나님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를 주셨다(18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성경이 기록되었다. 성경은 화목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평화는 십자가의 피로써 이루워짐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정하시고 목사들은 죄인에게 자비와 화목의 조건을 선포하며 그것을 따르도록 설득시켜야 한다.
2. 화해는 우리의 필요불가결한 의무로 말하여진다(20절). 하나님께서 화목을 원하시니 우리는 화목하여야 한다. 죄인이 하나님에 대한 원수의 감정을 버리도록 설득시키는 것이 복음 즉 화목의 말씀의 계획이다. 충성된 목자들은 죄인과 평화와 화해를 맺도록 보내진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며 그리스도 대신에 활동하며 그리스도께서 하셨고 원하시는 일을 한다. 얼마나 놀라운 겸허인가! 하나님은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으시며 평화로써 이득을 얻지 못하시지만 그러나 그의 목사를 통하여 죄인이 원수의 길을 버리고 그의 조건을 수락하여 화해하며 그의 법과 섭리에 따르고 속죄를 얻고 복음을 따르며 계획에 순응하도록 원하신다. 격려하기 위하여 바울은 첨가한다(21절).
(1) 중보자의 순결성. "그는 죄를 알지 못한다."
(2) 그가 당하신 희생. "그는 죄로 여겨졌다." 죄인이 아니고 죄이다. 즉 죄로써 드려지신 죄에 대한 희생이다.
(3) 이 모든 것의 목표. "저의 안에서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입는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① 자기의 죄를 모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로 간주되셨으므로 우리도 우리의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
② 하나님께 우리가 화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이다. 다만 그의 공로이다. 우리는 그에게만 의존하고 그의 의만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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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제 5장
=====5:1
@우리의 장막 집 - '장막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누스'(* )는 천막을 가리키는 말로서 본문에서는 천막(天幕)이 일시적인 것이듯이 인간의 육신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육체의 한계성을 천막에 비유한 것은 아마 그가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경험에서 얻은 지혜에서 기인했을 것이다(행 18:3).
@무너지면 - 이 표현은 (1) 육신의 죽음, 또는 (2)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전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혹자는 바울이 이렇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말을 한 것은 글을 쓰는 당시 심경(心境)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바울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경험할 성도들 가운데 자신도 포함되리라고 기대했었는데, 최근에 겪은 아시아에서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경험을 통해서(1:8-11), 재림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견해이다(Harris). 그러나 이 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하지만 그보다는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음으로써 재림을 경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성도들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고 볼수 있다.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 구절의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쉽게 썩고 낡아지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 역시 마찬가지 운명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질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 해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5:38-54).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 성도들을 위해 예비된 하늘의 처소(處所) 즉 하늘나라(요 14:2)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Hodge, Harris, Tasker), 또한 집단적인 몸 즉 고전 3:16;6:16에 언급된 '성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E.E. Ellis).
이 두 견해에 대해 혹자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가리키므로 본 구절의 '집'도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rtin). 그러나 본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일시적인 집과 영원한 집의 비교이지 몸과 몸의 비교가 아니다(Hodge). 성도들은 현재 유한한 장막에 거하나 나중에는 영원한 장막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 본절의 강조점이다.
=====5:2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 본문에서의 탄식은 인간의 실존적 유한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고난 때문에 튀어나오는 신음 소리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의 고뇌를 표출하는 것이다.
즉 이 탄식은 인간 존재의 한계성과 무기력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과 자유를 갈구(渴求)하는 것이며, 썩어질 육체를 벗어버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덧입게 될 것을 소망하는 염원의 소리이다(롬 8:18-25).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대한 표현인가 하는 점이다. 가령 1절에 의하면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 즉 육신이 죽는 것으로 하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울은 육체의 질곡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을 빨리 맞고 싶어하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4절의 "벗고자 함이 아니요"라는 표현에서 얻을수 있다. 그렇다면 그 탄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대를 끝장내고 새로운 세대를 여는 때, 즉 주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을 때까지 땅 속에서 기다리지 않고 살아서 그 몸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이다(Barrett).
따라서 본 구절은 바울이 살아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5:3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 본문의 '벗은 자'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 본 절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육체에서 분리된 영으로 형체와 활동의 능력이 없는 지옥의 영이라고 본다(Plummer). (2) 중간 상태 즉 죽은 후 부활하기까지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데 이 상태에 대해서 다시 두 가지 해석으로 구분된다. 첫째, 죽은 신자들은 육체가 없이 의식만 남아있는 상태가 되어 육체의 부활을 기다린다. 둘째, 죽은 신자들은 의식과 함께 '중간적인 육체'를 갖는다. 그런데 이것은 부활의 육체와는 다르다. (3) 죽어야 할 운명을 가리킨다(Lowery). (4)주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되는 심판 때에 죄악이 폭로됨으로써 당하는 수치감이라고 본다(Ellis). (5) 죽은 후 재림을 기다리는 몸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데(Barrett, Tasker) 여기에는 (2)의 '중간 상태'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 데에는, 바울이 죽어서 몸이 없는 상태로 부활을 기다리기 보다는 살아서 주의 재림(再臨)을 맞기를 원했다는 전이해가 고려되어 있다(고전 15장). 여기서는 마지막 해석이 비교적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5:4
@이 장막에...탄식하는 것은 - 본절의 내용은 2절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육체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 육체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장막을 벗어버리면 가능해진다.
그러나 바울은 이 장막을 벗어버리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늘의 집을 덧입는 방식으로 벗어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것은 앞절(3절)에서도 다루었던 바 죽지않은 상태에서 바로 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지기를 바울이 소망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고전 15:44, 51).
그렇다고 이것이 죽은 성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죽은 자도 산 자와 동일하게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바울 자신이 말했기 때문이다(살전 4:15).
다만 바울은 살아서 영화로운 몸을 입기를 더 원했던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육체를 가지고 부활에 참여하고자하는 소망을 피력하는 것은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고 어떠한 육체적 부활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5:5
@이것을..이루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육체나 죽은 자의 영혼이 부활의 몸으로 바뀌어지도록 준비해 주셨다.
이것을 보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셨다. 여기서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라보나'(* )는 최종적인 지불을 보증하는 담보, 또는 환납(還納)하지는 않았지만 상품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는 첫 할부금이나 보증금을 뜻한다.
성도들의 심령에 내재해 있는 성령은 비록 성령을 주신 하나님의 행위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한 거래로써 설명될 수는 없지만 영적인 몸으로 썩을 육체를 대체시켜 주신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성도들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고후 3:18;4:16 엡 3:16),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로 성도를 도움으로써(롬 8:26, 27) 참다운 보증이 된다.
=====5:6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 바울은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여전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본 구절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즉 비록 그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지만 그리스도와 실제로 함께 살고 있지는 않다.
바울의 현재적인 거처와 예수님의 거처는 분명하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단절(斷絶)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5:7
@믿음으로 행하고...아니함이로라 - 본절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친밀성이 재림 이후의 완전함에 못미친다는 현실적인 경험이기에 세상에서 육을 입고 사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세계의 삶인 것이다(고전 13:12).
=====5:8
@차리리 몸을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 여기서 우리는 처음에는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부활을 경험하고자 희망했던 바울이 점차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깨달아가는 변화를 볼 수 있다.
=====5:9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영광스러움이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확신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초연(超然)하게 하며 오직 모든 관심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데 집중하게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매우 중요한 핵심을 진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성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거나 그들을 위한 봉사자가 될지라도 궁극적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일이다(4:5, 15).
또한 바울은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육의 몸을 입고 있을 때 당하는 모든 환난을 견디어 낼 수 있었고(4:8, 9), 장막을 벗어 버리고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희망을 버릴 수 있었다(빌 1:21-24).
=====5:10
@그리스도의 심판대 -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
이 심판은 본래 하나님의 심판으로 표현되지만(마 25:31, 32; 롬 14:10) 본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표현된 것은 심판에 있어서 일차적 기준이 그리스도이며, 또한 이 심판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문의 이 심판이 비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모두 포함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세번째 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하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최후의 심판대는 일차적으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을 구분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마 13:36-43;25:31-46;살후 1:6-10). 그러나 그 심판은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그들이 받을 상의 크고 작음을 가리는 자리가 될 것이다(롬 14:12; 살전 1:3).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기쁨인 동시에 도전이기도 하다.
바울이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이 심판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간에 그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 이 표현에 대해 혹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기본 교리와 모순된다고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율법의 행함을 부인했을 때, 그것이 뜻하는 바는 율법의 요구 자체를 폐기(廢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의로 내세우려는 태도를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율법이 명하는 바 선에의 투신은 오직 그리스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기초 위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고전 3:10-15).
=====5:11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 여기서 '주의 두려우심'은 절대자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이나 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키는 공포(창 35:5)가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 즉 미래의 심판자로서의 주님(10절)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 곧 경외심을 가리킨다. 한편 '알므로'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이도테스'(* )는 단순히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영적 비밀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체험적으로 인식된 것임을 말해준다. 아마 여기에는 다메섹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권하노니...바라노라 - 혹자는 본 구절과 관련하여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혹은 진실되지 못한 동기로 그들을 자기 편에 끌어들인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Barrett).
이런 추측은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즉 본 구절에서 강조되는 바울의 진술은 위의 비난에 대한 답변으로서 바울 자신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에 결코 진실하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자신을 전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고전 2:4)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했음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확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4:1-5).
=====5:12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 바울이 자신의 진실된과 순수함을 하나님 앞과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할 때, 그를 대적하는 자들은 또다시 그것을 가리켜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사전에 그런 문제의 소지(素地)를 없애고자 이 말을 하게 되었다.
이미 앞에서 천명한 바 있지만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천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못밖고 있다(3:1).
@우리를 인하여...대하게 하려하는 것 - 이는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외부적인 자랑거리를 내세우며 자기들을 과시하였으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에 대한 그들의 비난을 반박할 어떤 내용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거짓 사도들을 반박할 수 있는 논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과 거짓 선지자들을 비교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직접적으로 접했다는 것(16절),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추천을 받았다는 것(3:1), 환상을 보았다는 것(12:1-7) 등을 자랑하지만 그 자랑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들은 무익한 자랑(12:1)을 하면서 대접을 받으려 하지만, 바울은 어떠한 외적인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으며(3:1-6), 대접을 받거나 군림(君臨)하기 위하여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지도 않고 오히려 스스로 종임을 선언했다(1:24;3:5;4:2, 5).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의 진정한 사도인 바울을 자랑거리로 삼아도 되며 그것으로 대적자들을 반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5:13
@미쳤어도...정신이 온전하여도 - 본 구절은 바울 자신이 결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쳤어도'와 '정신이 온전하여도'란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란 사실에 있다.
먼저 '미쳤어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스테멘'(* )은 '황홀경'(ecstasy)의 뜻을 가지고 있는 '엑스타시스'(* )에서 파생된 말로 종교적 무아경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막 3:21).
이에 반해 '정신이 온전하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누멘'(* )은 '분별력 있는', '자제하는'의 뜻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언어적 분석을 배경으로 학자들은 위의 두 문구가 지니는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
먼저, 전자는 개인적인 황홀경의 체험 중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고전 14:18), 또는 환상을 보는 것(12:1-7)등을 가리키며, 후자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성으로 깨달은 바를 말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Kasemann, Denny, Harris).
이 해석을 취할 경우 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후자는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유익한 것으로, 이 둘은 결국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달리 혹자는 '미쳤어도'란 표현이 바울의 영적인 긴장(stress of great spiritual emotion) 상태를 가리키는 바 항상 지니고 활동했던 긴장이라고 본다(Tasker).
그러나 본 구절에서 이 표현은 그 상태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한 특수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래서 알로(Allo)는 '엑세스테멘'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밝히지 않으나 적어도 그것이 과거의 한 특정한 사건을 가리킴에는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바크만(Bachmann)은 이것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이거나 12:7에 나타난 '계시'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바울이 고린도에 가슴 아픈 방문을 했을 때 일어났던 '분노'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로 변화된 것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여기서는 바울이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살수 밖에 없는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온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헌신적인 사랑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해 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롬8:39). 한편 '강권하시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케이'(* )는 '둘러싸고 밀어낸다', '붙든다'는 뜻으로 이는 바울의 현신적인 행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이 표현은 롬 5:15, 16과 매우 유사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 원리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자신이 그 원리에 따라 살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5:15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본 구절에서는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사상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이 사상이 그의 사역의 원동력이며 또한 최종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산 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역시 동참한 자이다. 그의 부활에 동참한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자이기에 '산 자'이다(요 5:24).
따라서 이 체험이 있는 성도는 마땅히 아담 이후 창조자를 거역하고 자기가 스스로의 주인 행세하던 삶에 대해선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로써 바울은 자기 중심적 삶을 사는 거짓 사도들과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며 동시에 자신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5:16
@이제부터는...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 본 구절에서 바울이 '이제부터'라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의 의미는 바울이 편지를 쓸 때부터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깨닫고 난 후부터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성도는 육체적인 판단 기준을 버리게 된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사람과 그리스도를 육체적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났고(5:17;롬 6:3,4;갈 2:20),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인식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언급되지않았지만 다만 그것이 육적인 인식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육체적인 것은 왜곡된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자기 중심적인 아집(我執)과 이기적인 태도가 그것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자신이 유대인임을 자랑했던 것, 예수를 가리켜 사람들을 현혹케 하는 거짓 메시야라고 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을탄압했던 것 등은(행 26:4-11) 바로 이 육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그 때부터 더이상 과거와 같이 육체적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새로운 피조물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 )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고전 5:12, 13;갈 3:28;엡2:11-22;골 3:11).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 믿는자들의 실존에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다(16, 17절). 구원 섭리에 있어 철저한 하나님의 주도성(主導性)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 신앙의 출발점이다.
@화목하게 - 본 구절에서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 가운데 하나인 '화해'에 대한 내용이 진술되고 있다.
여기서 '화목하다'란 표현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범죄함으로 양자 사이가 분리되었고(사 59:2), 원수와 같은 적대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롬 5:10).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던 담이 무너지고, 적대 감정이 해소 되었다(롬 5:10;골 1:15-22). 이 엄청난 화해의 작업은 일방적 관계의 파기자(破棄者)인 인간이 할 수 없었기에 오직 하나님에 의한 주도권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총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 뿐 아니라 전체 기독교인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누구라도 하나님과 화해 했다면 그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은 자로서 수평적으로는 이웃과 화목해야 하고 수직적으로는 아직 화해의 은총을 모르는 자에게 그리스도 사건을 전해야 한다(20절).
=====5:1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특별한 한 인간의 죽음을 넘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예정된 사건임을 강조했다.
@저희의 죄를 아니하시고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적대적 관계 또는 화목한 관계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내용이 '죄'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문제에 직접 간여(干與)하셔서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 - 18절에서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성도에게 부여하셨듯이 본구절에서는 그 직책 수행의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다.
=====5:20
본절에서는 바울의 사역과 복음의 내용이 함축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사신이 되어 - 바울의 사도직은 오직 그리스도의 화평의 메시지(엡 2:16, 17)를 전파하는 데에 의미가 있을뿐 바울 자신은 말씀과 비견(比肩)되는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할 뿐이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당파와 시기, 질투로 인해 분열되어 있으며 또한 거짓 사도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된 고린도 교인들이 화목한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의 화목에 의해서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질병을 치유시키고자 했다.
한편 바울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의 공로가 죄인들에게 덕을 끼칠 수 있다고 보는 사상이 유대교에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사상 이상을 진술하고 있다.
즉 예수는 상대적으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이다(롬 8:33, 34).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무죄함이 대속의 원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증언된다(히 4:15;7:26;벧전 2:22;요일 3:5).
@죄를 삼으신 것 -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의 뜻을 함축한다.
(1) 그리스도의 성육(成肉) 즉 죄있는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롬 8:3). (2) 그리스도께서 실질적인 죄인으로 취급되어 죄의 삯인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마 27:46).
@하나님의 의 - 본문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이 의는 하나님의 능력의 현시를 나타낸다고 본다. 이 경우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정의 아래 있는 자들이다(Kasemann). (2) 이 의를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성실성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성실성이 실현된 것을 말한다고 본다(Stuhlmacher). (3) '칭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가 짊어진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게됨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갈 3:13, 14:빌 3:9; Hodge, Barrett, Harris, Lowery).
앞의 두 해석도 의미론적으로 참고할수 있으나 세번째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원리에 대해 진술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대속의 원리와 관련되어 언급된 '의'는 칭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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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26-28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통찰을 줍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둔 믿음으로 새 정체성을 얻은 갈라디아의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죄된 옛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삶을 완전히 수용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우리가 성령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시키십니다. 고린도전서 12:13은 말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경의 여러 구절이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5:14; 빌립보서 1:1; 로마서 8:1). 골로새서 3:3은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하나님은 완전한 공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못 본 체 하시거나 그냥 넘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건 공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죗값은 치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품으신 모든 분노가 자신의 아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합당한 벌을 대신 받아 고통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말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요한복음 19:30).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지상에서의 삶은 아니었습니다. 사흘 후에 증명하셨듯, 지상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8:7; 마가복음 16:6; 고린도전서 15: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타락한 세상을 대속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하실 때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반역 행위의 죗값을 성공적으로 치르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우리 자신의 죄의 속전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전과 기록은 우리가 품었던 모든 죄된 생각과 태도와 행동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아무리 정결하게 해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그분과의 관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3:10-12). 성경은 우리의 원래 죄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5:10). 우리가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은 우리와 위치를 바꾸십니다. 우리의 죄 목록을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는 예수님의 완전한 행위와 뒤바꾸십니다 (고린도후서 5:21). 십자가 발치에서 거룩한 교환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죄된 옛 본성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이 교환됩니다 (고린도후서 5:17).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 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불완전함 대신에 자신의 아들의 의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2:13; 히브리서 8:12).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우리의 죄의 빚은 탕감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원되며, 우리의 영생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18; 20:31).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For as in Adam all die, so in Christ all will be made alive)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의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일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의 서신서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라는 말은 무려 164회나 사용됨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여러 성경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된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전. 15장>은 “부활장”으로 유명합니다. 사도는 먼저 <고전. 15장>의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12~19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선포합니다.
그리고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 하셨으리라” (v.13)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으로 성도의 부활을 가져올 수 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v.22)라고 ‘아담 안에’ 속한 그룹과 ‘그리스도 안에’ 속한 그룹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죄와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과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의미일까요?” (What does it mean to be ‘in Christ’?) 그것은
첫째, ‘존재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changed our status):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고 신앙고백합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가 뜻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different our attitudes from that point):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구원받았다는 신분 (=존재)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깨닫아 나가는 것입니다 (롬. 6장).
셋째, ‘부활의 능력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enjoy the power of resurrection):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요. 15:5)고.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안에 거함으로써’ (요.15:7~9)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약속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의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일까요?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시작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습니까? 바라기는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해서 그분의 피로 죄씻음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분의 생명으로 영생의 기쁨과 부활의 능력을 누려가는 성도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라는 말은 바울 신학의 중심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서신서 속에서 무려 164회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개념에서 볼 때, <웨스트민스터> 신학성구 사전에서는 “크리스챤 신자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 연합이 가져오는 구원의 혜택”이라고 짧게 정의하고 있고, 여러 성경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되었음”을 정의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고전. 15장>은 “부활장”으로 유명합니다. 사도는 먼저 <고전. 15장>의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언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역사적 사실 (fact)임을 그분을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 즉 사도들과 야고보와 일시에 목격한 500여 형제들 그리고 바울 자신까지를 그 근거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12~19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선포합니다. 사도는 성도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여러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었을 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데로 여러 목격자들에 의해 증명된 사실’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v.12). 그리고 그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바로 성도들이 부활하게 되는 완벽한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 하셨으리라” (v.13)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으로 성도의 부활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영적 필연성을 근거로 해서, 역설적으로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이렇게 잘 설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v. 19) 이것이 그가 <32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v.32)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이어지는 <20절>에서부터 <고전. 15장> 끝절까지 이제 ‘성도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부활의 순서와 부활한 몸의 상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성령으로 계시함을 받은 구체적인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선언하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v.22)는 말씀은 그가 두사람을 대조해서 비교함을 보게 됩니다. 한사람은 ‘아담’이요, 다른 한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왜 그는 두사람을 비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대표성’에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그는 첫 사람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에 의해 태어나게 될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후손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누릴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는 대표성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안따까운 사실은 우리 모든 아담의 후손은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한사람도 예외 없이 저주와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소망스러운 사실은 이런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를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 안에서 품어 주셔서,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구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은 자 되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 진리를 매우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6장>입니다. 그는 <롬. 6장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v.8)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는 우리 성도의 영적 실존을 확인시켜주는 분명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의미일까요?” (What does it mean to be ‘in Christ’?) 그것은
첫째, ‘존재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changed our status):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의미하는 개념을 살펴 보았을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되었음’을 뜻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이 도데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영적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와 함께 부활했다’는 뜻입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번 강조하여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하나의 영적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존재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고 예언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불 뱀을 바라보듯이, 십자가에 목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하게 되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근거는 2000여년 전에 주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목박혀 죽으심과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할 때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이와 같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능력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님을 믿게 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는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요 ‘영적 출생’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아담으로 대표되었던 우리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벗어버리고, 이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사람’이 된 우리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아담의 대표성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대표성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듯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고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가 뜻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 생명을 얻고 그분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be different our attitudes from that point):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보다 ‘구원받음’이요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임을 첫번째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우리 신앙의 출발이요, 기초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가 가져오는 실제 삶에서 능력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됨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0~11)고 사도는 로마교회 성도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음으로 영적인 출생을 했다는 존재의 변화가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고 사도는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전환점, 곧 내 신분의 각성을 통한 삶의 적용 단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길지어다’ (count/ reckon) 는 말은 스스로 ‘설득하라’는 말이 아니라, ‘~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하라’ 혹은 ‘~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체험이 아니라 깨닫음입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죄를 죽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곧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게 된 일을 깨닫으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서 있는 영역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 있음으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의로움과 생명이 통치하는 영역에 살아 있음을 깨닫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긴다’는 뜻이요,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다는 의미입니다. 깨닫음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능력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It means to enjoy the power of resurrection): ‘그리스도 안에’가 뜻하는 것이 먼저 ‘영적 신분의 변화’요, 그 다음은 ‘그 신분의 변화를 깨닫는 것’이라면, 마지막은 ‘그 신분의 <특권/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이렇게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고. 주님은 ‘나를 믿는 모든 자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 안에 거하는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했음을 삶으로 적용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계속해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요. 15:7)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이어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9)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그것이 곧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풍성한 열매는 그 무엇보다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금지할 법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갈. 5:22~23). 이것이 부활의 능력을 누리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특권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더 이상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께 순종하고 그 분을 좇음으로 맺게 되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첫 사람 아담 안에 속해 있었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분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새사람을 입었습니까? 더 나아가 거듭났다는 영적 존재의 변화 뿐 아니라, 이런 하나님께 대해 살아난 그분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된 우리 자신의 존재를 깨닫음으로 말미암아 참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속하고자 온 힘과 열심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될 때 주의 영, 성령님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 속에 약속하신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성도의 삶이요, 그로인하여 누리게 되는 풍성한 열매의 삶임을 저는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