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12.3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말씀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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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그분께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말씀을 기도로 읽는 성경적 실행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기도로 말씀 읽기*”는 성경을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찬미, 간구의 내용으로 삼는 것이다.

기도로 말씀 읽기는 고정된 방법이나 의식(儀式), 형식이 아니라 주님께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드리는 진정한 기도이다(항소문건 8).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기도가 병행해야만 한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엡 6:17-18; 요 15:7) 구약과 신약 속에서 많은 예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말씀으로 기도할 때에 기도는 훨씬 풍부해지고 높여진다.

뿐만 아니라 기도로 성경의 본질을 만질 때 풍성한 계시와 신성한 생명의 공급을 얻는다. 이러한 생명의 공급을 통해 믿는이들은 생명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 (벧전 2:2).

수세기에 거쳐 주님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적 실행에 대해 확증해 주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양육되고 빛을 보고 강건케 되었음을 간증한다.

****

[마4:4]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요1:1-5(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6]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딤후3:14-17(16,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벧전2:1-5(1,2)]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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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는 법을 결정하고 안내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물질적인 차원만 아니라 내적 본질이 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본질은 가르침이나 예언이나 도덕이 아닙니다.

성경의 본질은 신성한 호흡(딤후3:16), 신령한 젖(벧전2:2), 생명의 떡(마4:4), 영과 생명(요6:63), 그리스도-하나님 자신(요1:1)입니다. (지식 16-17).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본질을 만지며 말씀을 우리의 양식과 음료와 호흡으로 받습니다.

[[열린-믿는-신뢰하는 마음으로, 주예수님 이름 부름으로써 영을 사용하여, 영으로 접촉/만짐]]

위트니스 리는 성경의 본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외적으로 물질적인 몸을 갖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영과 혼이 있다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을 참조 ].

우리의 인격은 단지 겉 부분인 몸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영과 혼인 내적 부분도 있다. 성경도 이러한 원칙이다.

성경은 흑백의 글자의 “본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호흡하셨기 때문에 영도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생각만 사용해 연구한다면 우리는 생명 공급을 받지 못 할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눈과 생각과 영을 사용해야 함을 보여주신 주님께 감사한다.(딤후, 영문판 53-54)
성경은 흑백의 글자의 “본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호흡하셨기 때문에 영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올 때, 우리는 우리의 온 존재를 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인 온 존재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눈을 사용해 말씀을 읽고 입을 사용해 말씀을 말해낸다.

우리는 또한 혼의 주된 부분인 생각을 사용해 우리가 읽은 것을 이해한다.

우리는 사전이나 용어 색인 사전이나 다른 번역본들과 사본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을 창조해주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생각을 사용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할 때는 또한 우리의 감정을 사용해 말씀을 사랑하고 의지를 사용해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길을 취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사용하는 것은 혼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영을 사용해야 한다. 주로 이것은 기도하여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온 존재를 사용해 말씀을 접촉한다면 우리는 빛과 생명 공급을 받을 것이다.(출애굽기 영문판 2:699-700)
------신성한 호흡 신령한 젖 생명의 떡 영과 생명 그리스도-하나님 자신--------
==신성한 호흡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명백히 계시합니다.

최신 미국 표준역(NASV)성경 번역 성경은 이 구절의 전반부를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것이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것”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Theopneustos (QeopneustoV)로 Theos(하나님)와 pnein(“호흡하다"의 동사형)라는 단어로 구성된 복합어입니다 (Wuest 2:150).

웨스트(Wuest)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이다.”라고 해석한 것처럼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하나님의 호흡하심’입니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 그분 자신의 호흡으로 내쉬어 진 것입니다.
==영적인 음료-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호흡일 뿐만 아니라 신령한 젖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서의 말씀은 믿는이들이 호흡하기 위한 것이고 젖으로서의 말씀은 우리가 마시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말하기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2:2)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하였습니다: “때가 오래됨으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인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자가 되었도다”(히5:12).

바울은 또한 자신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마실 젖”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3:2).

하나님의 호흡으로서의 말씀은 믿는이들이 호흡하기 위한 것이고 젖으로서의 말씀은 우리가 마시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을 젖으로 받아들임으로 믿는이들은 공급을 얻고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생명의 떡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생명의 떡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주 예수님은“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말씀이 우리를 먹이고 양육하는 영적인 떡임을 계시하십니다.

히브리서 5장 13-14절은 또한 말씀이 성숙한 믿는이들의 단단한 음식임을 가리킵니다.
==영과 생명
요한복음 6장에서는 말씀의 본질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을 계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제자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계시하시고 그를 먹으면 그로 인해 살리라(48, 5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듣고 제자들은 그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반응했습니다(60절). 그들은 어떻게 주님을 먹는 것이 가능한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63절에서 주님은“살리는 것이 영이니”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주예수님은 오직 생명 주는 영이 되심으로 인해 믿는이들에게 생명과 생명공급이 되는 생명의 떡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명 주는 영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놀라운 생명공급이 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에게는 다소 추상적이고 비밀스럽습니다.
우리가 씌어진 말씀, 즉 성경에 나아갈 때 그 영이 말씀 안에 체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한 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63절 하반절에서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먼저 주님은 제자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 그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영과 말씀이 같다는 것은 영이 말씀 안에 체현(경험가능한 실제로)되었음을 말합니다. 그 영은 추상적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구체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씌어진 말씀, 즉 성경에 나아갈 때 그 영이 말씀 안에 체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한 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영과 생명입니다 (회복역, 요 6:63, 각주 3 ).
==그리스도 - 하나님 자신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씀 안에서 발견하기 원한다..매킨토쉬(C.H. Mackintosh)
요한복음은 비밀스러운 선포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1:1)

말씀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글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체현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과 그분의 말씀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40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시며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글자에는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모든 계명, 의문, 예언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자신에게 나아가기를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주님의 인격으로부터 분리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그분의 생명을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그들에 대한 꾸짖음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분의 신실한 부르심으로 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이 말씀으로 체현되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그분 자신에게 나아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길 바라십니다.
매킨토쉬(H. Mackintosh)는 그의 ‘창세기에 관한 비망록 (Notes on Genesis)’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씀 안에서 발견하기 원한다. 그리고 그분을 발견했다면 믿음으로 그분을 먹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Graver 70).

즉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안에서 주님을 추구해야 하며 우리가 기도할 때 성경을 주님께로 가져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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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말씀 읽기는 견고한 성경적 기초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와 말씀이 내재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줄뿐만 아니라 신구약에서 기도와 말씀을 연합시켜 실행했던 많은 사람들의 예를 보여줍니다.
[에베소서 6:17-18에서의 바울의 가르침]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7-18
성경은 명확히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7-18절에서 바울은 말씀 읽기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간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헬라어의 문자적 해석이나 또는 다른 번역을 보기를 원하시면 아래 세 첨부글을 클릭하시오)

이 구절은 세 가지 서로 구별되는 항목을 포함하고있습니다: 1) 성령의 검을 (영은 하나님의 말씀임) 갖기 2) 말씀을 모든 기도와 간구로 받기 3) 영 안에서 기도하기. 이 세 가지 항목은 기도로 말씀 읽기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항소문건 12).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먼저, 믿는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바인의 성경 단어 해설 사전(Vine's Expoisitory Dictionary of Biblical Words)에 보면 에베소서 6장 17절에 있는 가지라(receive)의 헬라어 단어는 “환영하거나 감상하는 받음”을 의미합니다(510). 말씀을 갖는것은 그러므로 단지 성경을 읽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 그분의 말씀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이 사상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거하다(dwell)는 헬라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집안에 있다, 내주하다, ~에 살다”를 의미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안에 거하는 것은 확실히 주님의 말씀에 열고 주님의 말씀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협력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이들의 마음안에 운행하시도록 합당한 기회를 드립니다. (회복역, 골로새서 3장 16절, 2번 각주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라
둘째로, 모든 기도와 간구로 말씀을 취해야 합니다. “모든 기도”는 모든 종류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긴 기도, 짧은 기도, 큰 기도, 조용한 기도, 느린 기도, 빠른 기도, 사적인 기도, 공적인 기도. 우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해야 합니다(영안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삶, 영문판 p.76 ).
기도는 일반적이지만 간구는 특정합니다 (회복역, 에베소서 6장 18절, 각주 2번 ). 그러므로, 기도는 일반적인 감사나 주님 찬양일수도 있고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위한 특별한 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종종 우리의 일반적인 기도는 특별히 “모든 성도들에 대한 간구”를 유래합니다. ”
==영 안에서 기도하라
마지막으로, 기도는 반드시 영안에서 해야 합니다.

이 영은 주님과 한 영으로 연결된 믿는이들의 거듭난 사람의 영을 의미하는데(고전6:17) 지금은 그 영이신 주님이 (사람의 영에)거하고 계십니다(고후 3:17, 딤후4:22).
“영 안에”라는 구는 기도에 사용되는 주요 기관이 사람의 영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참조. 요4:24) (회복역, 에베소서 6장 18절, 각주 3번 ).
기도할때 영을 사용하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오직 사람의 영만이 영이신(요6:63) 주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원문은 혼에 속한 사람, a soulish man)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고전2:14). 이것은 사람의 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18절에 있는 기도와 말씀의 관계에 대해 아노 개블레인(Arno C. Gaebelein, AD 1861-1945)는 그의 주석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영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는 기도는 성령의 검 다음으로 항상 마귀와 그의 사악한 무리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우리는 반드시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은 나뉠 수 없다. 기도로 말씀을 찾아야 하고 기도는 말씀을 앎으로 효과적이다. (그레이버 31 )
==성경에서 말씀을 기도로 읽은 사람들의 예
에베소서에 나타난 바울의 가르침 이외에도 성경에는 말씀을 사용해 기도한 믿는이들의 예가 아주 많습니다
(Graver 13-32). 이러한 믿는이들은 성경을 그들의 기도의 내용으로 사용함으로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가지고 다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항소문건 8).

다음은 몇몇 예들입니다.
---야 곱
((가장 효과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약속에 기초를 둔 것))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의 기도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첫 기도였습니다. 야곱은 그의 기도의 처음 시작부분에서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9)”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주님이 창세기 31장 3절에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신 그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했고 주님께 그가 모든 축복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자백하고 형 에서의 손에서 자신을 건져내 달라고 간청한 후 “주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2) 라고 말하며 기도를 끝맺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기도의 끝에 창세기 28장 14절에서 주님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그 말씀들을 다시 한번 언급했습니다.
이 기도의 문맥은 의미심장합니다. 당시 야곱은 자신의 대가족과 수많은 종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두 무리로 나눌 만큼 형 에서에 대한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괴로운 상황 속에서 야곱은 주님께서 전에 주신 약속을 따라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듣고 그를 위험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야곱의 경험은 가장 효과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약속에 기초를 둔 것이라는 원칙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그분의 말씀에 기초를 둔 기도들을 귀하게 여기심이 분명합니다.
---모 세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통해 하나님과 긴밀한 교통을 가졌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모세 혼자만이 시내산 정상으로 부르심을 받아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받아 기록했습니다(출 19:3,20; 24:2,4).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주님의 말씀을 자세히 알게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께 거역한 후 모세는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그분의 노를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돌리시기를 구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신 약속을 따라 다음과 같이 간구했습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출 32:13)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창 12:7, 13:15, 15:7,18) 이삭과 (창 26:4), 야곱에게 (창 28:13,35:12) 하셨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Graver 16).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귀히 여기시고 그분이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려고 하신 화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다 윗
사무엘하 7장 18-29절의 다윗의 기도는 선지자 나단을 통한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말들로 풍성합니다” (Graver 17).
19절에서 다윗은 “당신이 말씀하셨고”라고 말하며 21절에서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주님이 그의 말씀에 신실하시기 위해 그를 축복하였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25절에서 다윗은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주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라고 말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라는 구절은 그의 기도의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다윗의 기도의 본질로 간주됩니다 (Grave18).
마지막으로 다윗은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29절)로 끝을 맺습니다.
다윗 또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 기도한 하나님의 사람들 중 하나였음이 분명합니다
---에 스 라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에스라 7:6).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매우 익숙했기 때문에 에스라 9장 6-15절에 기록된 주님을 향한 기도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Graver 21-22).
9장 6절에서 그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라고 고백함으로 시작합니다.
이 기도는 시편 38편 4절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치나이다”라는 부분에서 따온 것입니다.

에스라는 시편에 있는 이 구절에서 대명사 ‘나’를 ‘우리’라고 바꾸어 당시 상황에 맞는 기도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오랜 죄악을 회개하고 주님의 지속적인 긍휼하심에 대하여 감사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저희 딸을 너희 아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유전하여 영원한 기업을 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10-12절)
11절의 “너희가 가서 얻으려는 땅”이라는 구절은 신명기 6장 1절, 7장 1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12절은 4개의 다른 성경의 부분들에서 가져와 조합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깊습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신명기 7:3)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이사야 1:19)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찌니라”(신명기 23:6)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의 보는 데와 우리 하나님의 들으시는 데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너희 후손에게 끼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역대상 28:8)
에스라는 자신의 기도에 주님의 말씀을 섞어서 기도한 믿는 이였음이 분명합니다.
---주 예수님
신약은 주 예수님 또한 기도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신 분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주님은 아버지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들은 시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22:1, 31:5).
혼(Horne) 주교는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그의 글 “시편 주석 (Commentary on the Psalm)”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 영과 모든 지혜와 지식을 지녔고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신 주님은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로 선택하셨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안식하시면서 마침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시편 기자의 말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혼을 내보내셨다 (Graver 28).
---예루살렘 교회
믿는이들이 말씀으로 기도한 또 다른 예는 사도행전 4장 24-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 집회에서의 기도로는 유일하게 기록된 것이라 특별히 의미가 깊은 기도입니다 (항소 문건 11).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서 석방된 후 교회가 일심으로 하나님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여”(24절)라고 소리 높여 기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시작부분은 출애굽기 20장 11절과 시편 146편 6절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25-26) 교회의 기도 중 이 부분은 70인역 성경의 시편 2편 1-2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Graver 29).
뒤따르는 27절에서 그들은 이 말씀을 그들의 체험에 적용시켜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항소 문건 12).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며 기도를 끝맺었습니다(29-30절).
31절은 주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대해 놀랍고도 분명하게 응답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요 한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기도는 계시록 22장 20절에 나오는 요한의 기도입니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이 기도는 계시록 20장 22절 상반절의 “이 모든 것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주님의 경고에 대한 사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 요한은 즉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충실히 기도를 통해 반응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 전체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회복역, 요한계시록 20:22, 주석 2 ).
==생명 안에서 성장하는 것의 필요성
영적인 성장을 위해 믿는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단순히 성경적 지식이나 교리의 축적이라기보다는 성경의 본질이며 이것은 영과 생명으로써의 하나님의 요소입니다.
모든 믿는이들은 하나님께로서 났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또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나중에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3:1)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믿는이들은 문자그대로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큰 선물을 거듭남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는지요! (신성한 출생에 대해서는 ‘거듭남’을 참조 바람)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자라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믿는이들을 갓난아이에 비유했습니다 (벧전 2:2).

갓난아이가 하는 주된 일은 자라는 것입니다. 같은 구절에서 베드로는 새 신자들에게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믿는이들을 밭, 즉 경작된 땅에 비유합니다(3:9).

바울은 그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3:6). 이 단락 역시 우리의 성장의 필요성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장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구절은 골로새서 2장 19절로써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grows with the growth of God)”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성장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성장의 정의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믿는이들 안의 하나님의 성장입니다. 이것은 거듭났을 때 갖게된 하나님의 성분이 그들 안에서 증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Darby 번역본과 King James 번역본 모두 이 구절을 “Increase with the increase of God."으로 번역하고 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단순히 지식이나 교리의 증가가 아닙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믿는이들에게 점진적으로 분배됨으로 인해 믿는이들 안에 하나님 자신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보시오)
기도로 말씀 읽기는 이러한 성장의 과정 즉 믿는이들안의 하나님의 증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기도와 간구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 자신을 얻게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 믿는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단순히 성경적 지식이나 교리의 축적이라기보다는 성경의 본질이며 이것은 영과 생명으로써의 하나님의 요소입니다.
==성경 안에 있는 말씀 먹기
갓난아기가 합당한 음식을 먹음으로 자라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성장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말씀이 믿는이들의 영적인 음식임을 계시하며 (성경의 본질 참조) 신구약에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먹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말씀 먹기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욥기 23:12)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119:103)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예레미야 15:16)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 2:8-3:3)
--------신약에 있는 말씀 먹기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태복음 4:4)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고린도전서 3:2)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디모데전서 4:6)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5:12-14)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브리서 6:5)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전서 2:2-3)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요한계시록 10:8-10)
------말씀을 읽음으로 먹음
<말씀을 갖는 것은 말씀을 먹는 것이고 말씀을 먹는 방법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는 것>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또한 먹는 방법을 계시합니다.

에베소서 6장 17-18절은 그 방법을 명확히 계시합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갖는 것은 말씀을 먹는 것이고 말씀을 먹는 방법은 이 웹사이트의 그리스도인들의 간증 부분에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로 말씀 읽기에 대한 간증
하나님의 말씀과 연합된 기도인 기도로 말씀 읽기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의 교통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실행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오로지 그들의 감정이나 성향에 따라 주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들의 기도의 책으로 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은 기도했으며 하나님이 사용하신 말씀을 사용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기도와 간구로 바꾸었습니다.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 영적인 양육과 더불어 그들의 혼에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로 말씀 읽기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빛 비춤을 얻었으며 성경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의 발췌문들은 대부분 래아 그레이버(Ray Graver)가 엮은 책 ‘주 당신이 말씀하시길(Lord thou saidst, 한국어 제목:말씀을 기도로 읽기)'에서 주로 뽑은 것입니다.

이 발췌문들은 수세기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기도와 연합시킨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을 기록합니다. 
오리겐(Origen) (AD 185-254) 조지 뮬러(Gorge Muller)(AD 1805-1898)
제롬 (Jerome)(AD 340-420) 매킨토쉬(C. H. Mackintosh) (AD 1820-1896)
어거스틴(Augustine)(AD 354-430)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AD 1828-1917)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AD 1483-1546)
한나 스미스(Hannah Whitall Smith) (AD 1832-1911)
존 번연(John Bunyan)(AD 1628-1688)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AD 1835-1892)
마담 귀용(Madame Guyon) (AD 1633-1727) 토레이(R.A. Torrey)(AD 1856-1928)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AD 1663-1727)
존 하이드(John Hyde) (AD 1865-1912) 조지 윗필드 (George Whitefield) (AD 1714-1770)
그리피스 토마스(W.H. Griffith Thomas)(AD 1861-1924)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AD 1800-1882)
위트니스 리(Witness Lee) (AD 1905-1997)

======성경의 본질
==성경의 본질에 관한 인용문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반드시 성경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들과 다르다는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교과서는 단지 흰 종이에 까만 글자이고 단순한 지식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감이며 하나님의 영적 호흡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령한 젖이며 생명의 떡이다. 영과 생명이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한다. 우리가 그 영을 접촉할 때 성경은 우리의 실제적인 후원자이다.
우리는 단지 영적 호흡만을 호흡하고 신령한 젖을 먹고 영적인 음식을 먹고 그 영과 생명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를 지원해주고 우리의 생각과 사고들을 만족시켜주는 분명한 말씀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성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도 있다. 우리는 이 둘을 나눌 수 없다. 만약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의 말씀을 읽는다면 주님의 말씀은 우리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알고 이해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흑백의 글자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바로 그 호흡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이 호흡하심이다.
오직 우리가 하루종일 주님과 지속적이고 개인적이고 살아있고 친밀한 접촉을 갖고 있을 때만 그분을 호흡함으로 참되게 사는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인 생명은 우리의 호흡에 달려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그는 죽는다. 마찬가지로, 그분을 호흡함으로 그리스도를 산다.
그러나 우리가 호흡하는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신가? 그분은 그 영안에 계시고 그 영은 말씀안에 체현되셨다.
우리가 단지 성경을 문자로 연구하는 방식이 아닌 살아 있는 방식과 주님을 호흡하는 방식으로 말씀앞에 나아올 때 마다 우리는 그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면 그분의 모든 어떠하심과 생명과 풍성들이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 온다. 그 결과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그분으로 적셔지고 그분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분과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하던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다루며 시편 기자들은 그들 자신을 주님께 열고 율법을 하나님의 산 말씀으로 여기며 하나님 자신을 접촉했다.
시편은 기도의 영과 영감과 하나님께 울부짖음으로 가득하다. 기도와 찬송안에서 시편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요소는 그들 안으로 옮겨부어졌고 그들은 그 요소로 적셔지고 침투되었다.
그들에게 율법은 단지 요구나 정죄나 규례들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시편기자들이 주님을 사랑하며 추구하는 자들이었기에 그들은 신성한 인격으로 적셔졌다.

그럴 때 그들이 했던 모든것은 하나님의 이름안에서 한 것 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루심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을 체험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단지 흑백 문자로만 취하고 성경을 읽으며 직접적으로 주님을 접촉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이 없는 책이 될 것이다.
바울은 “의문(원문은 letter: 글자)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고 말했다.

이 구절에 글자(의문)라는 헬라어 단어는 바울이 디모데 후서 3장 15절에서 성령을 말할 때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단어이다.
만약 성경을 글자로만 취한다면 죽이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영은 생명을 준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영안에서 주님을 접촉하면 말씀은 우리에게 영과 생명이 될 것이다.

우리의 영적 체험에서 이는 하나님의 호흡이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우리는 말씀의 근원을 접촉해야만 하고 이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이 호흡하심”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하나님의 호흡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영(요6:63), 뉴마(pneuma), 호흡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이신 하나님의 체현이다.
그 영은 그러므로 성경의 바로 그 본질과 실체인데 이는 인(phosphorus)이 성냥의 본질적 실체인것과 같다.

신성한 불을 피우기 위해 성경의 영과 우리의 영이 “부딪혀야” 한다.
그 영 하나님의 체현으로서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의 체현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시며(계19:13) 성경은 하나님의 씌여진 말씀이시다(마4:4).
요한복음 5장 39-40절에서 주 예수님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성경은 주 예수님의 증거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때 유대인 교사들과 인도자들은 성경을 상고하는데 열심이었다. 그들은 단지 읽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성경을 상고하고 연구했다.
하지만 주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너희는 영생이 성경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그리스도인 나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성경에 영생이 있는 이유는 성경의 내용이 나, 주 예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나, 주 예수만이 영생이다.”라는 의미이다.
영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단지 영원한 축복이 아니다. 영생은 창조되지 않고 파괴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 유대인 선생들은 성경 안에서 영생을 가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성경을 상고하지만 나에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명의 주님을 접촉하지 않고 성경을 읽을 수 있음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필요는 동시에 주님 자신과 그분의 말씀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나눌 수 없다. 만약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주님을 나눈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 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이 그분의 말씀의 내용이심을 보아야 한다. 그분의 말씀은 그분의 표현이시며 담는 그릇이다. 성경은 병과도 같고 주님 자신은 병 안에 든 물과도 같다.
오늘날 여러분이 병을 갖고 있지 않다면 물을 마실 수도 없고 물을 갖고 다닐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물을 마시지 않고 병만 들고 있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물을 누리기 원한다면 반드시 병을 들고 물을 마셔야 한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내게 오기”와 나뉠 수 있다. 유대 종교는 성경을 숙고 했지만 주님께 오기를 원치 않았다. 이 둘은 함께 해야 한다. 성경이 주님에 대해 증거하기에 주님으로부터 나뉠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을 접하지만 주님을 접하지 않을 수 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주님 자신으로부터 성경을 나눌 수 없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할 때 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 자신께 나와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을 상고하고 주님을 접촉하는 것이 한 가지가 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할 때 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을 주님께 열어드려야 한다.
우리의 눈이 말씀을 읽고 있는 동안 우리의 생각은 그것을 이해하고 우리의 영은 성경을 통해 주님을 접촉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그럴때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흑백의 글자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안에 생명을 갖는다.
에베소서 6장 17-18절에 관한 인용
17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여섯 개의 항목 중에 이것만이 대적을 공격하는 유일한 무기이다. 검으로 우리는 대적을 궤멸시킨다.
그러나 먼저 검을 드는 것이 아니라 첫번째로 허리띠를 띠고 흉배를 붙이고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쓴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완전히 보호되고 구원을 우리 분깃으로 받을 때 성령의 검을 받을 수 있다.
17절에서 관계대명사가 수식하는 말은 영(Spirit)이지 검이 아니다. 이것은 영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둘 다 그리스도이다(고후 3:17, 계19:13).
만약 내가 이 구절을 쓴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했다.
여기서 언급한 검은 성령의 검인가 아니면 말씀의 검인가? 대부분의 독자들은 바울이 검이 말씀이고 성령이 검을 휘두른다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 구절을 수 년 동안 이해해 왔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성령이 검을 사용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이해에 따르면 검이 말씀이고 검을 사용해 대적을 치는 이가 성령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성령이 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도록 돕는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것은 여기의 뜻이 아니다.
정확한 의미는 성령이 검이지 성령을 사용하는 이가 검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검이다. 검은 성령이고 성령은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셋이 하나임을 본다:검, 성령, 말씀.
이 메세지에서의 나의 중심 부담은 이 것이다. 말씀은 성경이다. 하지만 이 말씀이 단지 인쇄된 글자라면 이는 성령도 아니고 검도 아니다.
17절에서 사용된 말씀의 헬라어 단어는 레마(rhema)인데 이는 어떤 상황에서 그 순간 성령이 하신 즉각적인 말씀이다.
불변한 성경의 로고스의 말씀은 즉각적인 레마가 되고 이 레마는 그 영이 될 것이다. 그 영이 되는 레마는 대적을 조각내는 검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특정한 구절을 읽고 또 읽어도 단지 글자로된 단어인 로고스로만 남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날 이 구절은 우리에게 현재의 즉각적이고 살아있는 말씀인 레마가 된다. 그 때 이 레마는 그 영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또한 헬라어 단어 레마를 사용한다. 즉각적인 현재의 말씀은 그 영이다. 이러한 말씀이 검이다. 그러므로, 검, 그 영, 말씀인 이 셋은 하나다. 더욱이, 그 영이 아닌 우리는 이 검을 사용하여 대적을 죽인다.
그리스도인 체험안에서 말씀과 그 영은 항상 하나여야 한다. 말씀없이 그 영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다. 내 체험에서 나는 대부분 말씀을 통해 그 영을 받았다. 내가 살아있는 방식으로 말씀을 접촉할 때 그것은 내게 그 영이 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영 없이 말씀을 취한다. 이것 또한 잘못되었다. 꽃을 가꾸기 원하는 사람들은 씨앗과 씨앗에 담긴 생명 둘 다가 필요하다. 씨앗과 씨앗안에 있는 생명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명을 갖기 위해 반드시 씨앗이 있어야 한다. 말씀과 그 영의 관계는 씨앗과 생명의 관계와 같다. 우리는 반드시 둘 다를 갖고 있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그 영과 말씀 둘 다 이시다. 그분이 말씀되시지 않고는 그 영이 아니시며 그 영이 되시지 않고는 말씀이 아니시다.
그분이 말씀과 그 영 둘 다 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이해할수 있는 생각과 받아들이는 영으로 창조하셨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생각과 영을 둘 다 사용해야 한다. 성경읽기로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고 기도함으로 영을 사용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어야 한다.
나는 기도로 말씀 읽기를 통해 내 영이 강해지고 대적을 삼킬 준비기 되어있음을 간증할 수 있다. 나는 단지 내 영을 사용할 뿐 아니라 내 생각을 사용해 말씀을 숙고한다. 예를 들어, 나는 왜 은혜와 진리가 4장에서 언급되고 사랑과 빛이 5장에서 언급되는지에 대해 물을 수 있다. 또한 이것에 관해 기도할 수 있다.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마다 내 영이 더 강건해 지고 성령의 검을 사용해 대적을 더욱 치고 싶어 한다. 내 말 속에 대적을 산산조각낼 검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와 평안의 복음의 굳건한 기초와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의 여섯 항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전신 갑주로 장비될 때 우리는 대적의 공격에 맞설 수 있고 공격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항목 후에 바울은 기도를 말한다.
18절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라고 말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는 17절에 있는 말씀을 수식한다. 기도로 우리는 구원의 투구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여섯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다. 기도는 일곱번째로 생각될 수 있다. 기도는 우리가 다른 항목들을 적용하는 수단이다.
18절에 있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라는 수식어는 14절부터 17절에 나온 전신 갑주의 여섯 항목과 관계가 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를 메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굳건한 기초로 신을 신는다.
더욱이, 기도로 우리는 믿음의 방패를 취하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취한다.
우리가 갑주를 입거나 갑주의 어느 것을 취할 때 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 없이 하나님의 갑주의 어느 부분도 사용할 수 없고 사용하려 해서도 않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갑주를 적용하는 유일한 길이다. 기도로서 갑주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유효하다. 예를 들어, 구원의 투구를 갖고 있지만 기도가 이 투구가 유효하고 우세하게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중요하고 절대 필요하다.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것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올 때 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눈을 사용하여 읽거나 생각을 사용하여 이해해서는 않된다. 내가 나의 체험으로부터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눈과 생각으로만 성경을 접하면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죽은 글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성경 읽기는 기도와 함께 연합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도로 말씀읽기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절을 기도로 읽으면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태초에,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태초에. 오, 하나님이 태초에 계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이 시작이시며 창시자이십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산 호흡이신 그 영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적셔지고 영양분을 공급받고 신선해지고 빛비춤을 받는다. 죽은 글자의 책에서 멀리 떨어져 성경은 우리의 체험안에서 영양분을 공급하는 그 영이 된다.
에베소서 6장 17절과 18절에서 바울은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도록 확실히 명했다. 기도로 말씀 읽기를 반대하는 어떤 이들은 이 구절들을 이렇게 적용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혹은 기도를 통해 받아야 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고 하며 또한 말씀을 기도로 받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도로 말씀읽기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말씀을 읽어야 하고 기도로 받아야 한다. 수 세기 동안 많은 성도들이 이 원칙안에서 실행해 왔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우리가 기도와 같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을 기도와 같이 읽는 것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주님의 많은 백성들이 이러한 용어를 모르지만 기도로 말씀 읽기를 실행해 왔다. 말씀앞에 나아와 즉각적으로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놓고 기도했다.
여러분이 기도로 말씀 읽기에 대해 듣기 전에도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도로 읽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읽고는 “오 하나님, 세상을 사랑해 주셔 감사합니다. 아버지, 나를 사랑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그처럼 사랑하서 당신의 아들을 날 위해 주셨군요.”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이것이 기도로 말씀 읽기이다.
==말씀을 영양 공급으로 받는것에 관한 인용문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생각을 사용해 말씀과 성경 용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참고 문헌들과 색인 사전을 갖고 한 단어를 몇 시간 동안이나 연구할 수도 있다. 내 체험으로 부터 나는 그러한 연구가 혼을 지치게 한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가끔 이것은 영을 억누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말씀의 살아 있는 기능을 체험하고 누리는 것일때는 유용하다.
한면에서 성경을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 연구하는 겆을 잊고 우리의 영을 사용해 말씀을 기도로 읽고 말씀을 놓고 기도하며 말씀안에서 말씀을 통해 주님을 접촉하기를 구해야 한다. 말씀으로 기도해 주님을 접촉한다면 말씀에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럴때 말씀은 죽은 글자들이 아니며 우리의 영을 사용함으로 우리는 말씀안에 계신 살아계시는 분을 만질 것이다.
내가 성도들에게 말씀을 사역하기 전에 나는 이런 방식으로 주님을 접촉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어느 것도 나눌 것이 없다.
말씀을 연구함으로 메세지를 준비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주님안에서 호흡하고 기도하고 찬미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주님께 기도할께 언어나 문법이나 작문을 관심하지 않는다. 내 유일한 갈망은 주님께 말을 해서 살아 있는 방식으로 그분을 접촉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작문하는 것을 관심한다면 우리의 영은 약화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작문하는 것을 잊고 우리의 영을 사용해 기도한다면 살아계신 분을 접촉할 것이다.
영양 공급과 원기회복을 위해 계속해서 말씀앞에 나와야 한다. 이렇게 성경에 접하는 것은 말씀을 먹는 것에 관한 찬송에 잘 나타나 있다.
주여 내 영과 맘 목마르고 배고파 주앞에 나왔으니
당신 자신을 공급하소서 주만이 내 능력 생명 공급
날 먹이소서 먹이소서 내 배고픔을 채워주고
목마름을 해결해 주소서 기쁨얻도록 먹이소서 찬송가 586장
이 찬송에서 나타난 영으로 성경에 나아올때 우리는 영양 공급을 받고 원기가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때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말씀앞에 나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도 하지 않고 주님을 접촉하기를 열망하지도 않는다. 대신, 눈으로 성경을 읽고 생각으로 이해하려 한다.
우리에게는 주님을 접촉할 마음도 없고 영도 없다. 그런 경우에는 말씀을 더 읽을 수록 더 지치게 된다.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하며 주님을 접촉하기를 열망해야 한다. 시편 119편은 그러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로인해 시편기자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을 접촉하는 그의 방법은 그의 친밀한 정서와 깊은 열망의 표현으로 그의 온 존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씀을 읽을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절히 그분을 구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성장의 모든 요소이시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든 항목들을 받고 누릴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키는 책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침의 책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우리의 지적 지식을 위한 책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음식을 공급해 주는 책이다.
성경은 하늘에 속한 영적이고 비밀스러운 책이다. 상징으로 가득하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무교병이고(고전 5:8) 하나님의 어린양이고(요1:29) 생수(요4:10, 7:38-39)라고 말한다. 이 모든 상징들은 영적 실제를 말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앞에 나와 그분의 말씀을 음식으로 취하는 고요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단지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읽은 것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반드시 말씀으로 돌이켜 기도안으로 읽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로 말씀 읽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읽은 말씀을 성령 안으로 가져오고 말씀은 영이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받는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받은 말씀은 그 영이 된다. 말씀과 그 영은 하나이다.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그 영이 된다. 우리가 다른이들에게 말 해낼때 다시 한 번 말씀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이 말씀을 받을 때 또 다시 그들안에서 그 영이 된다. 이로 인해 주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생명의 공급이고 또한 생명의 분배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존재가 영과 생명이신 말씀이신것에 기초하여(요6:63) 생명의 떡이시다. 우리 믿는이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영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을 받고 누린다.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받음과 기도안에서 주님의 영을 접촉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고 누린다(엡6:17-18a).
매일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는 것 처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주님께 나와(참조, 시편55:17) 잔치하고 그분의 말씀과 영을 통해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한다. 삼 일 동안 먹고 다음 삼일 동안 굶는 것은 건강한 것이 아니다. 모든 건강한 사람들은 정해진 때에 먹고 정해진 양을 먹는다. 그들은 자주 먹지만 적당히 먹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매일의 만나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음식이시다(요6:31-35, 48-51). 그리스도를 음식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간은 아침 기상할 때이다(시119:147-148, 143:8, 애3:22-26). 우리는 매일 매일 이십분에서 삼십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 말씀을 세 구절에서 다섯 구절 정도 기도로 읽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먹고 마시고 누리는 것이다.
말씀은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누릴때 우리는 하나님을 먹고 마시고 누리고 하나님과 동화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과 넘치는 분배를 받는다.
위에 언급한 것 뿐 아니라 아침 휴식때나 점심 시간이나 오후 휴식때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주님의 말씀을 꺼내 이런 방식으로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누리고 받는 자들이 될 것이며 우리의 영적 생활은 확실히 건강하고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읽는 것과 기도가 연합해야 한다. 우리의 눈과 생각을 사용할 때 또한 영을 사용해 그 영을 접촉해야 한다. 그러면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체험안에서 그 영의 풍성한 공급이 될 것이다.
시편 133편을 성경을 분석하는 것과 기도로 말씀읽기를 통해 성경에 있는 영양분을 누리는것의 차이를 보겠다.
개인 기도 시간에 어떤 그리스도인은 시편 133편을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보배로운 기름과 수염과 옷깃과 이슬과 헬몬산에 대해 분석하고 질문할수 있다. 풍성한 공급을 누리는 대신에 수 많은 답없는 질문들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편 133편을 기도로 읽는 다면 우리는 생명의 길 안에서 이 분깃을 취할 것이다.
우리가 기도로 읽을 때 “보라, 아멘,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아멘”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취할 때, 우리는 만유를 포함한 영을 우리의 내적 존재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로 말씀 읽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해 말씀에 있는 영적 영양분을 받는다. 이러한 영양분으로 우리는 생명 안에서 자란다.

우리는 믿음의 말씀과 건강한 가르침으로 영양 공급을 받는다. 우리가 십분 정도만 투자해 말씀을 기도로 읽으면 우리는 영양분을 받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의 여러 요소들을 체험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는 그 영과 생명을 먹고 마시고 호흡하기위해 기도로 말씀을 읽는 문제는 성경 말씀에 나와있다.

그러므로, 기도로 말씀 읽기는 미신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로 읽을 때 글자 안에 있는 말씀은 주님 자신이신 영과 생명이 된다.

기도로 말씀 읽는 것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받는 것이다(엡6:17-18).

기도로 말씀 읽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마다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그 영과 생명을 먹고 마시고 호흡하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인 예레미야 조차도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라고 말했다(렘15:16).
하나님의 말씀은 먹을수 있으므로 우리의 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만 한다(벧전2:2).
히브리서 5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두 종류라고 한다. 어린 아이들이 먹는 젖과 성숙한 자들이 먹는 단단한 음식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하나님의 호흡하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호흡해 들일때 우리는 하나님이 호흡해 내신 것을 호흡하며 그분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기도로 말씀 읽기는 먹고 마시고 호흡하는 것이 분명하며 우리가 더욱 그것을 실행 할 수록 더 좋다.

우리가 조금 먹고 조금 마시고 조금 호흡한다면 시간이 지날 수록 우리는 깨끗게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글자와 역사적 사건과 사람들과 사물들을 넘어서서 생명의 계시를 얻게 될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6절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명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려면, 우리는 모든 기도로 말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성경에 따르면, 말씀을 받는 최고의 방법은 말씀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빌립보서 3장 17절로 예를 들어 보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이 구절을 읽고 여러분이 영감을 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러분이 기도할 때만 이 말씀이 여러분 안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구절을 기도로 취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말씀은 우리의 입안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적 존재 안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말씀을 기도로 받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할때 말씀은 우리의 존재의 매우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수년간 체험한 노인으로서 나는 말씀을 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모든 기도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말씀을 기도함으로 우리는 말씀 안에 있는 생수를 마신다.

그런 후 이 생수는 우리의 내적 존재를 채우고 우리가 영양분을 받아 건강하게 되도록 한다.

디모데 전서 6장 3절과 디모데 후서 1장 13절에서 바울은 “건강한 말씀”(한국어 성경: 바른 말, 원문: healthy words")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말씀은 우리에게 건강한 말씀이 된다. 이러한 건강한 말씀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성경의 말씀을 먹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레미야 15장 16절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마태복음 4장 4절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단지 읽고 연구하기에 좋은 책이 아니라 특별히 먹는데 좋다. 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을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로 읽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 영의 풍성한 공급을 누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
==간증을 인용함
수 세기에 걸친 많은 믿는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실행을 했었다. 비록 그들이 기도로 말씀 읽기라는 용어를 몰랐지만 그들의 체험 속에는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했던 사람들 중 하나는 조지 윗필드로 그는 요한 웨슬레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조지 윗필드의 실행은 무릎 꿇고 헬라어 신약 성경을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능력과 영성의 비결이었다. 조지 윗필드는 생명의 말씀을 기도로 읽었다. 말씀을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영을 사용해 말씀에 불이 붙게 하는 것이다[성냥을 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오십 년 이상 성경을 읽고 추구해 왔다. 내가 젊었을 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성경을 철저히 알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나는 오직 눈과 생각으로 성경 읽는것만 알았다. 그럴 때 누군가가 나에게 성경을 읽지만 말고 묵상하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시간을 들여 말씀을 숙고하고 상고하고 그 안에 거하기를 시작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나는 또한 조지 뮬러의 자서전으로 도움을 받았다. 뮬러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성경을 읽고 묵상할 뿐만이 아니라 성경을 놓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자서전에서 뮬러는 우리가 말씀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어느 정도 읽고 기도해야 한다고는 말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사랑에 관한 구절을 읽는다면, 우리는 사랑에 관한 기도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에서 회개에 대하여 읽을때 회개에 대해 기도할 것이다. 한 구절 읽고 바로 기도하는 이러한 실행은 기도로 말씀 읽기와 비슷하다. 조지 뮬러의 자서전은 매우 도움이 되었고 나는 그의 실행대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종종 나는 성경의 순수한 말씀을 기도해 어떤 구절은 주님을 향한 내 기도가 되게 한다. 사실상 나는 기도로 말씀을 읽고 있었다.
(위트니스 리, 빌립보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397-98)
나는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 단순하게 읽는 것보다 더 좋고 높고 풍성하고 충만하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매일 매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 적셔지고 채워지고 만족하고 살아나고 강건케 되고 목양받고 소중히 품음을 받는다. 더욱이, 기도로 말씀 읽기로 나는 거룩케 되고 순수해 지고 변화받는다. 비록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로 말씀 읽기를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 달콤하고 너무 좋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 1장 1절로 간단하게 기도한다면 나는 목양받고 채워지고 주님안에서 만족할 것이다.
[먼저], 성경을 펴고 기도로 읽어 보라.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기도하면서 말씀을 보라. 성경 육십 육권중 어디에서도 기도할 때 눈을 감으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라고 말한 구절은 있다(요17:1). 기도하는 동안 하늘을 바라 보았다!
우리는 교리적인 방식으로 논쟁하지는 않겠지만 기도할 때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단지 “태초에...”라고 씌여진 종이를 보라. 그런 다음에 말씀을 보고 깊은 곳으로부터 “오 주여, ‘태초에’,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제가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말씀이 계셨습니다.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태초에!’할렐루야! ‘태초에!’ 오 주여,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단순히 이러한 방식으로 기도해 보라. 아마도 다른 구절로도 기도할 것이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나니! 오 주여,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오 주여, ‘지금 정죄함이 없습니다.’ 아멘. ‘지금’ 오 주여. ‘지금’. 아멘!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정죄함이 없나니’” 등등이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동안 문장을 작문하거나 기도를 창작해 낼 필요가 없다. 단지 말씀을 기도로 읽으라. 성경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기도하자. 결국, 여러분은 성경 전체가 기도의 책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단지 “주기도문”만이 기도가 아니라 성경 전체가 기도이다. 성경의 어느 쪽, 어느 줄, 어느 말씀을 펴 말씀의 그 분깃을 기도해 보라. 주님의 임재안에서 삼십 분 동안 이렇게 계속 기도로 읽을때 어떤 빛비춤과 적심과 영양분과 신선함과 강건함과 만족을 얻는지 보라. 이 삼십 분 동안 하루를 지탱해 줄 영적 아침 식사를 먹을 것이다!
비록 여러분이 어떤 단락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여러분은 영양 공급을 받을 수 있는데 이는 그분의 말씀안에 하나님의 어떤 것이 진정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바로 그 호흡이다.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은 헬라어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호흡하신것”이다.)
성경을 오직 배우려고만 하지 말라. 우리는 반드시 이것이 생명의 책이지 지식의 책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은 살아계신 그 영의 신성한 체현이며 그분은 생명이시다.
합당한 방법은 단지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사용해 기도로 읽음으로 말씀을 접촉하는 것이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이것이 옳은 길임을 증명해 왔다. 성경에 나아오는 방법은 그들의 삶을 혁명시켰다. 만일 여러분이 오일 동안 아침마다 실행한다면 여러분 또한 바뀔 것이다. 여러분의 성경에 대한 관념 전체가 급진적으로 바뀔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잘 않될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살아계신 그 영을 접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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