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후6장 [328.천성길을버리고]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2 Corinthians 6 Amplified Bible ==Their Ministry Commended 1 Working together with Him, we strongly urge you not to receive God’s grace in vain [by turning away from sound doctrine and His merciful kindness]. 2 For He says, “At the acceptable time (the time of grace) I listened to you, And I helped you on the day of salvation.” Behold, now is “the acceptable time,” behold, now is “the day of salvation”— 3 we put no obstruction in anyone’s path, so that the ministry will not be discredited, 4 but we commend ourselves in every way as servants of God: in great endurance, in sufferings, in hardships, in distresses, 5 in beatings, in imprisonments, in riots, in labors, in sleepless nights, in hunger, 6 in purity and sincerity, in knowledge and spiritual insight, in patience, in kindness, in the Holy Spirit, in genuine love, 7 in [speaking] the word of truth, in the power of God; by the weapons of righteousness for the right hand [like holding the sword to attack] and for the left [like holding the shield to defend], 8 amid glory and dishonor; by evil report and good report; branded as deceivers and yet [vindicated as] truthful; 9 as unknown [to the world], yet well-known [by God and His people]; as dying, yet we live; as punished, yet not killed; 10 as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as poor, yet bestowing riches on many; as having nothing, yet possessing all things. 11 We are speaking freely to you, Corinthians [we are keeping nothing back], and our heart is opened wide. 12 There is no limit to our affection for you, but you are limited in your own affection [for us]. 13 Now in the same way as a fair exchange [for our love toward you]—I am speaking as [I would] to children—open wide [your hearts] to us also. 14 Do not be unequally bound together with unbelievers [do not make mismatched alliances with them, inconsistent with your faith]. For what partnership can righteousness have with lawlessness? Or what fellowship can light have with darkness? 15 What harmony can there be between Christ and Belial (Satan)? Or what does a believer have in common with an unbeliever? 16 What agreement is there between the temple of God and idols? For we are the temple of the living God; just as God said: “I will dwell among them and walk among them; And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shall be My people. 17 “So come out from among unbelievers and be separate,” says the Lord, “And do not touch what is unclean; And I will graciously receive you and welcome you [with favor], 18 And I will be a Father to you, And you will be My sons and daughters,” Says the Lord Almighty. ========== 고린도후서 6장 (개요) 이 장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자기의 임무를 밝힌다. Ⅰ. 바울이 사용한 방법들(1-10). Ⅱ. 특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며 강한 사랑과 강력한 호소로써 그들에게 주의를 한다(11-18). ========= 역설적인 사역자들의 은혜(고후 6:1-10) 이 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임무와 그의 복음을 듣는 자들에 대한 권면을 듣는다. 그는 얼마의 주장과 방법을 취하고 있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임무와 격려는 복음의 화해에 적응하는 것이다. 즉 복음으로 은혜를 입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1절) 복음은 우리의 귀에 울리는 은혜의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믿고 그 목적을 따르지 않으면 헛된 것이다. [바로 자기자신이 그렇게 먼저 복음에 순종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형제자매들에게]은혜와 자비를 받도록 권면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임무이나 그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1.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영혼과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내려 놓고, 비워 드린 바, 사랑에 겨워 자원-헌신함으로 자신을 도구로 내어드린 바, 극도로 충성스럽고 효율적인]하나님의 기계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충성한다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역사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의 노력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 2. 복음의 정신과 길을 관찰하자. 그것은 거칠거나 엄하지 않다. 온유함으로 간청하며 죄인을 설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영원히 행복하도록 설득시킨다. Ⅱ. 바울이 사용했던 논술과 방법은 이러하다. 1. 현재가 주어진 은혜를 받을 가장 적당한 때이다. 그리고 주어진 복음말씀의 은혜를 [지복직관, 지고지선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돌이켜 중심을 가다듬고 회개하며, 영적 지성(NOUS)를 극도로 발휘하여 <보이지 않은 분을 마치 보는 것처럼 민감성을 발휘하여> 일편단심 마음 열고 사랑-기쁨-절대 신뢰함으로 감사로 받아, 적극-능동적으로 묵상하며 성령님 신뢰하며 그 안에서 호흡하고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살아 내야 할 때, 하나님의 카리로스기간 안에 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 복음의 날이 구원의 날이며 은혜의 수단이 구원의 수단이다. 복음의 제공은 구원의 제공이며, 현재가 이들의 제공을 받을 가장 적당한 시기이다. "오늘, 오늘이라고 불리워지는 때이다."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내일은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내일은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은혜가 내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초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소유하고 있을 때에 바로 그것을 참되고 진지하게 이용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 2.사역자들은 그들의 전도가 방해되지 않도록 범사에 신중하게, 주의를 하였다. "무엇이든지 거리끼지 않게 하고"(3절)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거리끼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울의 실수를 찾았고 그의 목회와 행위를 비난할 사례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쓸데없이 율법에 반대하여 유대인을 거리끼게 하거나 무조건 율법에 맹종하여 이방인을 거리끼게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일 외에 스스로 판단하여 함부로 어떤 혁명을 꾀하거나 사회를 뒤집어 엎으려 하거나 권력을 얻고자 하거나 세력을 탐하거나 하지 않았다...목회사역은 맡기신 바ㅡ 또한 더하사 맡겨주시는 바 맡겨진 양무리를 먹이며 돌보며 보호 인도 양육하여, 생명 산출함이다!!] 바울은 죄나 슬픈 일을 그들에게 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다른 사람이 거리끼기 쉬우면 훼방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 사목 사역자들은 그들의 사역이 비난 받고 실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3. 하나님의 동역자들에게 어울리는 자로써 모든 일에 자신들을 증거할 목적과 노력(4절). 바울은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충성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복음전파와 목회에 있어서 성공은 오로지 충성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역에 있어서 사목하는 목회자의 눈은 단순하고 그의 마음은 바르고 그의 큰 희망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며 증거하는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복음의 사역자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하고 여기에 맞는 행위를 수행하여야 한다. 바울은 그렇게 행하였다. (1) 고난 중에 많이 인내하였다. 그는 크게 고난을 받은 사람이었다.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 자주 곤경에 처하고 생활 필수품은 아니더라도 특별한 편의는 없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한 때도 있었다. 자주 채찍으로 맞았고(11:24) 투옥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일으킨 폭동을 겪기도 하였다. 수고와 전도와 여행에 있어서 고난을 당하였고 자기의 손으로 필수품을 구했다. 근신과 금식과 자의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이 모든 일에 인내를 하여야 함이 충성된 사역자들의 운명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증거하기를 원하는 사역자는 평화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인내로써 실천해 나가야 한다. (2) 선한 원리로써 행동했다. 바울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선한 원리로써 행동했다(6,7절). 즉 순결함이다. 순결함이 없이는 경건이 없다. 하나님의 용납을 받으려면 세상으로부터 깨끗해야 한다. 지식은 별개의 문제이다. 순결이 없는 열정은 미친 일이다. "오래 참음과 자비함"으로 행동했으며 쉽게 분노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기로 노력하되,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을 [일절 오래참음으로써] 인내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 행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움을 받고 의의 갑옷을 입고(보편적인 의로움과 거룩함을 의식하면서) 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부귀와 고난에서 오는 유혹을 이길 가장 좋은 방어이다. (3) 이 세상의 여러 가지의 환경 아래에서 온당한 성질과 행동을 행해야 한다(8-10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환경과 조건이 많이 변할 것을 기대하여야 한다. 우리가 이 모든 일에서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바르게 행동한다면 우리의 충성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사도들은 명예와 불명예, 그리고 좋은 소문과 나쁜 소문을 [세상사람들과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주며 진솔한 사랑으로 섬기는 교인들로부터도] 듣게 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은 모름지기 그들의 명예와 존경을 균형 잡아 줄 불명예와 비난을 받을 것을 [당연히]기대하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우리 모두는 남의 칭찬을 교만하지 않게 <우쭐함 없이 겸손과 감사함으로>받으며 한편으로는, (옳든 그르든) 그 어떤 비난이라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식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되, 오해와 착각으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것도 갚아주실 분은 주님이시기에!> 당장 변명해야 하는지를 주께 묻되)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이는 사단의 간계에 빠져듬이 된다!!), 비난을 성내지 않고 <온유/온화함-겸손-친절-관용의 굳센 심지로 끝까지 참고 견디며 >들어 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아마 사람들마다 제각각<사람마다 분명히 독특 유일무이한 단독자로서 지음받았기에 서로 각자 다른 관점과 견해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기에!>사도들을 다르게 말할 수 있음에 유의하고 참고 듣도록 하자. [다만 모든 사람의 깊은 마음속을 완전히 꿰뚫어 아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며 평가하시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바울에 대해서도 어떤 이는 가장 선한 사람으로 어떤 이는 가장 나쁜 사람으로 어떤 이는 진실한 사람으로 어떤 이는 사기꾼으로 여기며 대하였다.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에게 의탁하였지만, 동시에 또한 사도들은 무지하고 고려할 여지가 없는 미미한 사람들이라고 무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모든 교회에서는 그들이 높이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때때로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한다고 [거의 벼랑끔에 몰린 절망적인 느낌!]생각되었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았도다. 그 모든 곤경과 곤란가운데서도 <주께서 때에 맞게 항상 공급하시는 은혜, 곧 일심으로 주를 앙망하고 붙드는 믿음의 굳센 심지따라 성령안에 머무름으로써!!> 우리가 평안하게 살면서 모든 어려움을 참으며 극복하도다." 그들은 단련을 받았다. 법률의 채찍을 받았으나 그러나 죽지 않았다. 비록 그들은 한숨을 쉬며 슬퍼하는 우울한 무리라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였다.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가난한 사람이라 멸시를 당하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전하여 많은 사람을 부하게 하였다. 그들은 금이나 은이나 집이나 토지를 가지지 않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으나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지만 저 세상에 보물을 가졌다. 그들의 재산은 다른 세상, 다른 나라에 있었다. <JC이름을 부르며 부활생명능력의 성령을 호흡하는 바, 바로 JC로부터 초월적 은혜가 공급되는 바, 그로부터 돌파한다.. ::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그들은 그들 안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 이러한 역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이런 상황과 말을 들으면서도 <추호도 억율해 함 없이!!> 그리스도인은 천국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 구별된 성도의 생활(고후 6:11-18) 바울은 특별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며 불신자들과 혼합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어떻게 이 주의가 주어지는가? 특히 다정하게 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주의한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한다"(11-13절). 바울이 표현에 있어서 풍부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진 애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말이 요청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 같다. "오! 고린도 교인들이여, 나의 편지를 받는 그대들이여,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리고 싶도다.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모든 사람의 영적이며 영원한 행복을 증진케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넓게 열렸도다." 그의 마음이 사랑으로 넓게 열렸으므로 친절한 충고와 권면으로 그들에게 자유로히 충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마음과 기쁨을 돕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봉사를 다하였다. 만약 다르다면 잘못은 여러분에게 있도다. 우리에게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여러분 안에서 좁아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같이 우리에게 애정을 가지는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는 그 무엇보다도 상호간의 애정<주께서 위임하신 영적 아비요 목자라는 인식하에 상호간에 존경하고 존귀히 여김의 애정어린 신뢰!!>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상호간의 유익이 되며 위로가 된다. Ⅱ. 불신자들과 혼합되지 않으며 그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않도록 주의한다(14절). 1. 신앙의 삶 아닌 다른 길로 미혹함 받지 않도록 일상적 사업에 있어서 주의한다. 선한 사람이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과 혼합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을 나쁜 길로 유인하며 슬픈 일에 빠지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와 같이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선한 사람이 나쁜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보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해칠 위험이 <세상에서는 오히려>더 많은 법이다. [모든 성도들은 그 누구나 <주와 함께 동행하는, 삶속의 선교사요 전도자이기에!!> 그만큼 고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불신자와 결혼했다면 <취소할 수 없다!!...그렇다면!!> 그 무엇보다도 주와 결혼한, 주와 하나로 연합한 신부로 <주로부터 날마다 공급하는 부활생명능력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와 은총을 호흡하면서 일편단심, 일심으로 굳게 성령따라 살면서 빛과 소금됨을 유지하되 닥쳐오는 모든 환경적 고난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더불어 부부됨에 마땅한 질서-균형-조화-존귀케 함에 힘써서 내안의 그리스도를 살아내도록 하라...주님은 그대의 전도자 됨을 또한 바로 그렇게 이루어 가신다..땅끝까지 나아간 전도자요 선교사로 보시고 당신 자신을 공급해 주신다!!>] 2. 일반 교제에 있어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사람이나 불신자들과 함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가 만나는 것울 피할 수가 없으나 즉 물건을 함께 들고 있는 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신뢰하여 모든 것을 맡길만한] 친한 친구로 여겨서 자기를 맡길만한 자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3. 더우기 그들과 신앙적인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우상과 숭배나 거짓 예배나 어떤 혐오스러운 일에도 같이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과 악마의 식탁을 혼돈하거나 하나님의 집과 이방신의 집을 혼돈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이 타락한 교제에 반대하는 몇 개의 이유를 말한다. (1) 그것은 큰 모순이다(14,15절). 일치하지 않는 멍에이다. 유대인에 대하여 소와 나귀를 같이 세우며 여러 곡식을 함께 파종하는 것만큼 나쁘다. 의와 불의가 연합하며 빛과 어두움 그리고 불과 물이 합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신자는 의롭다. 불신자는 불의하다. 신자는 세상의 빛이나 불신자는 어두움이다. 이들이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서로 모순된다. 관심과 목적이 다르다. 이들 사이에 일치가 있을 수가 없다. 성도가 불신자와 함께 한다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을 연합하는 것과 같다. (2)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모순되니(16절). 그리스도인들은 고백을 통해서 그리고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되고 고용된 사람인다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거하시며 행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특별히 그들을 돌봐 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의 성전과 바알의 성전이 하나가 될 수 없다. 바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며 자기의 명예를 다른 존재에 양보하시지 않는다. (3) 불신자와 우상 숭배자들과 교제하면 불결하게 되며 버림을 받을 위험성이 많다. 그러므로 격려는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 적당한 거리를 가질 것이며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둥병자나 전염병자를 피하듯이 "불결한 것을 피하여 오염을 피해야 한다." 숯을 만지고 더럽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죄로 물들인 자들과 교제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납을 받으며 거절되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4) 그것은 성도들에게 모든 은혜를 부어 주신 하나님께 배은망덕하는 것이다(18절).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을 약속하셨다. 이보다 더 큰 영광과 명예가 있을까? 이 축복과 권위를 불신자와 교제하여 더럽히는 것은 얼마나 배은망덕하는 일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보답할 수 있겠는가? 오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여!" === === 고린도후서 제 6장 =====6:1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르군테스 데 카이'(*)는 문자적으로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쉬네르군테스'는 현재 분사로서 '누구와 함께 일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그 대상을 필요로 하나 헬라어 본문에는 이 대상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다른 교사들이다(Plummer).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1인칭 복수 주어 '우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그 자신을 다른 교사들과 구분하려 했다면 여기서 1인칭 단수 주어인 '내가'를 사용했을 것이다. (2) 고린도 교인들이다(Chrysostom,Allo). 이 견해는 문맥상 타당하지 않다. 바울은 바로 앞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을 진정한 복음 사역자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였고(5:11-13), 이제 다시 이러한 권면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3-12절;7:2-7). (3) 하나님이다(Calvin, Hodge, Tasker). 전후 문맥상 이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고전 3:9), 5:20에서 그 자신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고 고백하였으며 본절 하반절에서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Martin).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본문의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케논'(* )은 '빈', '공허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는(5:15-17), 개인의 결단과 선택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본문의 말씀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항이 추론(推論)된다. 하나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영과 육을 더럽게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에(7:1;12:20, 21)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 중 일부가 그 가르침에 현혹되어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으리라는 것이다(11:4, Bruce). =====6: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 이 구절은 사 49:8의 인용이다. 사 49:8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혹자는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 , 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Hughes). =====6:3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거리끼지 않게 하고 - 바울은 5:12에서 언급한 바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한 주제를 다시 거론한다. 본 절에서 바울은 훼방(毁謗)받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았던 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에 거리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여기서 '거리끼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코펜'(*)은 '실족할 계기', '범죄할 기회', '걸려 넘어짐'의 뜻을 갖는다(stumbling block, NIV) 바울은 자신의 인격적인 문제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방해받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바울은 많은 문제에 부딪혔다. 가령 그는 자신을 자랑하는 자라거나(3:1), 어리석은 자라거나(11:16), 미쳤다는 오해를 받았다(행 26:24).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직책을 수행할 때 발생한 모든 문제들은 복음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일 뿐(고전 1:23) 바울의 인격적인 문제나 그의 잘못된 신앙 생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절의 '훼방을 받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메데'(* )는 '조롱을 받다'는 뜻을 지닌 헬라어 동사 '모마오마이'(* )의 가정법으로서 '의심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헬라어동사가 본래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은 '비난', '책망'이었다. 이 동사의 어근인 '모모스'(* )는 헬라의 조롱과 냉소의 신(Momus)을 가리켰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迷惑)되어 자신의 진실성을 의심했던 행위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Martin). =====6:4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감히 '자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자기를 천거(薦擧)할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3:1)과 모순되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이 자신을 천거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어떤 외부적 권위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증 받고자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지금 바울이 자신의 이기적 야심이나 인간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사역하며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가 견디어 낸 무수한 고난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은 앞의 언급과(3:1) 모순되지 않는다. 특히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당한 곤경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자신에 대한 천거는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적 행동으로 보여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많이 견디는 것 - '견디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네'(* )는 일반적으로 '인내'를 뜻하나,이 말 속에는 시련을 체념적으로 수용하거나 수동적으로 참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의미에서 끝까지 견디어 낸다는 뜻이 있다. '많이 견디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홉 가지로 열거되는데(4, 5절), 이것들은 세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Bruce, Harris). 첫번째로 본절에는 일반적인 시련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환난과 궁핍과 곤난이 그것이다. >환난(* , 들립세신)은 본서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1:4,8;2:4;4:17;7:4;8:2, 13),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압박받는 체험을 말한다(1:4-11). >궁핍(* , 아낭카이스)은 역경이 끊임없이 닥쳐오는 상황에서 겪는 고통을 말한다(행 20:34). >곤란(* , 스테노코리아이스)은 좌절을 강요하는 극한상황을 가리킨다(1:7, 8;4:8). =====6: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 - 이것은 두번째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핍박들이다. '매맞음', '갇힘', '요란한 것'은 사도행전에 상세히 나타나는데 사실상 그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행 13:50;16:19,22;20:34).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 이것들은 세번째로 분류되는 것으로,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짊어진 것들이다. '수고로움'은 열성적으로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한 일과, 바울이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노동을 했던 것(행 18:3;살전 2:9)을 가리키고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은 영적인 내핍 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고 살고 먹고 싶은 상태에서 그러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11:27). 바울이 이런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마주쳐 견디어 나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미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렇게 했다(5:13). =====6:6 5절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시련들을 견디어 나간 것이 사도의 외적 자질이라면 본 절과 7절에 열거되는 항목들은 사도의 직분을 이행하는 동안 줄곧 지향했던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깨끗함(* , 하그노테티) - 영적인 순결 즉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실을 가리킨다(살전 2:10). @지식 - 여기서 '지식'(* , 그노세이)의 의미를 분명히 가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구원에 대한 지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5:20, Hughes).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시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구속적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다(5:16, 18-20).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가진 성도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민감하게 분별하여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삶과 그 앎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 모두를 포괄한다(Barrett, Kelly). @오래 참음(* , 마크로뒤미아) - 혹자는 이를 모욕이나 상해(傷害)를 당했을 때 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이해한다(Plummer). 또한 혹자는 본절의 '마크로뒤미아'를 4절의 '휘포모네'(* , '견디는 것')와 구별하여 '견디는 것'은 교회 밖의 대적들로부터 오는 시련에 대한 인내를 가리키며, '오래 참음'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Hughes). 실제로 바울은 사심 없는 순수한 동기와 목숨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오해와 불신, 분란과 열매 맺지 못함 등에 대해 끊임없이 참고 언제나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엡 4:2;골 1:11;딤후 4:2). @자비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티'(* )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결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갈 5:22;엡 2:7). 바울은 고전 13:4에서 사랑을 '오래참고 온유하며'라고 묘사했던 바 실제로 그 자신이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다른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본절의 '자비함'을 '행동에 있어서의 선함'으로 보았던 바(Tasker), 이는 성령께서 주신 결과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유래되는 삶을 변화시키는 증거이다(Martin). @성령의 감화 - 혹자는 본절의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를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영'으로 이해하나(Barrett) 이는 '감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 )를 동반하므로 타당치 않다. '프뉴마티 하기오'는 그 용법상 '성령'(Holy spirit, NIV)을 의미하며, 여기에 특히 정관사가 없는 것은 '성령의 능력' 또는 '성령의 은사'(NEB)를 암시한다(Hughes, Tasker). 바울이 본절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변증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문제삼고 있는 그의 인간적 유약함은 바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로 바울의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점철된 삶이었다(롬 15:18,19). @거짓이 없는 사랑 - 이는 성령의 사역의 최대 열매이다(Bengel). 여기서 '거짓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뉘포크리토'(* )는 부정 접두어 '아'(* )와 '가장하다', '속이다'는 뜻을 가진 '휘포크리토스'(* )가 합성된 단어로 '위선됨이 없이'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전적으로 위선이 아닌 순수한 것이었다(12:15;고전 8:1). =====6:7 @진리의 말씀 - 복음 곧 화해의 말씀(5:19)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바울은 적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선포하였다(4:2). 바울이 선포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즉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설교와 행위 속에 현시(現視)됨으로써 증명된다(롬 15:19;고전 1:18;2:4,5).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적 정비가 완벽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잘 사용하는 로마 군대의 무장법(롬 13:12;엡6:13-17)을 비유로 들고 있다. 여기서 '의의 병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의'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고결한 인격,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포괄한다고 본다(Harris, Tasker). '좌우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덱시온 카이 아리스테론'(*)은 문자적으로 '오른손과 왼손에'라는 의미이다(in the right hand and in the left, NIV). 이는 양손이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어 언제라도 적의 공격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태세가 완비되어 있음을 말한다(Barrett). 이 묘사는 마치 적군의 화전(火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 겹의 나무에 짐승의 가죽을 덮어서 만든 방패를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든 로마 병사를 연상케 한다.바울은 엡 6:16,17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으로서, 공격용으로 '성령의 검'과 방어용으로 '믿음의 방패'를 갖출 것을 언급하였다.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 바울은 그의 사도 직무를 수행하면서 존경을 받을 때도 있었으나(갈 4:14) 오해와 비방을 받을 때도 많았다(10:10;11:23-33;고전 4:10;빌 1:15-18;살후 2:2).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직책(5:18)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었다.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 본문은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공동번역)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뒤에서 비방(誹謗)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일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결국 교만과 자기 만족으로 이끌 뿐이므로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악한 평판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를 해칠 수 없고, 좋은 평판이 참되다 할지라도 결코 그를 비뚤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예수께서도 생전에 미혹하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었다(마 27:63;요 7:12).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했을 때, 그의 대적들은 그를 가리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고(고전 15:15),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속임수라는 비난을 하였다(12:16-18).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아님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증거한다(4:2;5:11;11:31).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 '무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우메노이'(* )는 '무시당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바울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바울이 무시당했다는 것은 아마 그의 사도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고전 9:1;15:8, 9).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반(反)하는 자기들의 견해를 주입시키려 하였던 상황이 전개되었었다(10-13장). 그리고 사실상 바울은, 열 한 사도들처럼 생전의 예수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외부적 조건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모든 사도직의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도직은 부여받았다(갈 1:1, 12, 16).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중심 사도로부터도 인정받았고 (갈 2:7, 9),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인정받았음이 틀림없다(5:11). @죽는 자 같으나...살고 - 본절은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 실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여러 번 겪었고(행 14:19;고전 15:30) 거의 죽게 된 상황에까지 이르렀었다(1:8, 9). 또한 그는 예수의 죽음을 그의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4:10-12). 여기에는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5:14, 15;롬 6:1-14;갈 2:20). 본 절에서 바울은 그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獻身)된 도구가 되었음을 고린도교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Martin).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징계는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행동에 비유되는 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증거로 이해되었다(욥 5:17;시 94:12;119:67;잠 3:11, 12;렘 31:18, 19등). 본 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와 같이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심히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랑의 표시임을 인식하였고 실제의 삶에서 이를 체험하였다(1:9;4:11;고전 11:32).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 적대자들의 사도 시비, 그것에 의해 흔들렸던 일부의 고린도 교인들, 그리고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불신앙 등은 바울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늘 기뻐하였고(2:3;7:4;롬 12:12;고전 16:17)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리하도록 가르쳤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특징이다(Barrett).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 바울은 세상의 부(富)를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경제적인 가난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고린도 교인들의 영육이 부해지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교회의 보수받기를 피했지만(5절;11:7-10;고전 9:12, 15, 18),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의 가난이다(Collange).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였는가 ? (1)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귀한 지식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부요한 자라고 생각하였다(빌3:8). 바울이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인간의 부요함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자가 되셨다(8:9).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바울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한 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이 세대'가 진행되는 동안만 쓸모 있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에는 전혀 가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세대'를 얻었으므로 사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였다(고전 3:21, 22).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고전 3:23)라는 의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오직 주 예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을 믿고 살아간다(Barrett). 한편 본절의 내용은 영적인 것에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초점을 맞춘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 사도의 자화상(自畵像)을 보여준다. 바울은 실로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였다. =====6:11 @고린도인들이여 - 혹자는 이 칭호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을 나타낸다고 하나(Chrysostom), 그 용법상 이는 타당치 않다. 오히려 바울이 편지를 쓸 때 독자들의 칭호를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로 매우 격한 감정의 상태에서 그런 표현을 쓴다(Collange). 가령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유대주의 교사들에 미혹되어 율법으로 회귀하는 가슴 아픈 상황에 직면하여(갈 3:1),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의 친절을 칭찬할 때(빌 4:15) 독자들의 칭호를 직접 불렀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인들이여'라고 불렀을 때, 그의 심정은 아마 진리의 영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충만하여 어떤 문제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입이 열리고 - 그리하여 바울은 '숨김없이 다 말하였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공동번역은 본문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로 번역하고 있다. 실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공개적이었고 신실했다(1:12-14;4:2).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정직하게 숨김없이 말하였고 그들을 향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었다. 또한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어떠한 잘못도 자비로 덮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7:3). =====6:12 @너희가...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 본절은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는 뜻이다(공동번역). 분명히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가 소원(疏遠)해졌다. 이는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11:11). 아무튼 문제는 바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좁아진데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거나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는 자신이 여전히 예전처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부드럽게 호소하고 있다(Barker). =====6: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그의 영적 자녀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Hughes, Tasker).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Plummer).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자존심이나 권위를 내세워 옹졸해지는 법이 없듯이 바울 자신도 단순히 가르치는 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 바울은 오해를 하고 불평을 한 고린도 교인들을 나무라지 않고 그에게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는 사도의 권위로써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들에게 주는 호소였다. 혹자는 바울이 본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오직 '공정하게 행동할 것'(fair play)을 요청하고 있다고 본다(Bruce).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13절)이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 갑자기 서신의 주제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과의 관계에서, 고린도 교인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본절의 '믿지 않는 자'(*, 아피스토이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의 적대자들을 가리킨다(Rensberger, Collange).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근거로서 본서의 주제는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2) 문자 그대로 불신자들을 가리킨다(Filson, Barrett). (3) 믿음의 순수성을 해치는 세상과의 타협을 가리킨다(Hughes). (1), (2), (3)의 견해가 모두 일면 타당성을 지니나, '아피스토이스'의 어의상, 그리고 전후 문맥상 (2)와 (3)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한편 성도들의 순결을 요구하는 본문은 신 22:10의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와 레 19:19의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하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라는 구약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의 '멍에'는 믿음의 순수성을 저해하는 불신자와의 결혼(고전 7:39), 우상숭배(고전 10:14), 도덕적 타락(고전6:8),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11:4)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신앙과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 성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 '불법'(* , 아노미아)은 불신자와 적그리스도의 특징이다(롬 6:19;살후 2:3, 7). 반면에 '의'(* ,디카이오쉬네)는 신자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의 '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칭의의 차원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Martin, Collange).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의'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이 쿰란 문헌에 나타난다는 점에 착안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직면한 문제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불의'였다고 추론하기도 한다(Schlatter). 그러나 바레트(Barrett)는 이 견해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의'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은 바울에게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며(7절;11:15;롬 6:13-19;빌 1:11), 바울이 '의'를 윤리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쿰란 문헌의 영향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영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 바울은 신자들의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매우 극단적인 대조법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귀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의 교제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던 말이다(9:13;고전 1:9;10:16). 빛과 어두움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은 구원 얻는 자들과 멸망하는 자들(2:15)이 동반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꼐서 '세상의 빛'이시며(요 8:12;9:5) 세상은 멸망으로 귀착할 어둠에 속하기 때문이다(마 8:12;25:30). =====6:15 @야알'(* )의 음역으로 본래는 '무가치함', '악함'을 뜻하는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매우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불량하거나, 방탕하고, 거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고(삿 19:22;삼상 10:27),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는 , '악심을 품은 허위 선전'을 뜻하는 '벨리알의 말'(신 15:9;시41:8;101:3), '거짓 증언자'를 뜻하는 '벨리알의 증인'(잠 19:28), '음모를 꾸미는 자'를 의미하는 '벨리알의 충고자'(나 1:11) 등으로 적용되었다. 이 말이 사해 사본에서는 '악마의 왕'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단'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Barrett).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가 어찌 상관하며 - '믿지 않는자'(* , 아피스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때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이다(14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서로 상충하지 않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으로 병립할 수 없으며, 운명을 같이 할 수가 없다(2:16).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오 -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말라'(14절)는 주제에 대한 논증이 본절에서 절정을 이루며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본문에서 '일치'로 번역된 헬라어 '슁카타데시스'(*)는 '함께 찬성의 투표를 하여 승인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동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언급한 바 있다(고전 3:16;6:19).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오스'(* )는 구약 시대의 성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지성소'를 가리킨다.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성전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우상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야 한다(고전 10:14).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 바울은 자기가 진술한 것들에 대한 정당성을 더 강화시키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본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레 26:11, 12이며 같은 내용을 가지는 구약의 구절들은 출 25:8;29:43-46;삼하 7:14, 27;사 52:4,11;겔20:34 등이다. 이와 같은 구절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결을 강조하는 것들이며 새로운 관계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사실상 바울은 이 약속이 그리스도가 거하도록 허락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6:17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 본문은 이사야가 그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은 떠나 그곳의 이교주의와 단절하라고 권고한 사 52:11의 인용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기 위해서는 백성으로서의 순결성이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려면 음행, 토색, 우상숭배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고전 5:1-13).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본 구절 앞에 '그러면'(* , 카이)이 있다. 이는 앞의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된다. =====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 본절은 바울이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삼하 7:14;사 43:6;렘 31:9).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울이 삼하 7:14과 사 43:6을 나름대로 수정 인용함으로써 '남자'(*, 휘우스, '아들')와 '여자'(* , 뒤가테라스, '딸')를 명시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때 남자들과 여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를 갖게 된다(갈3:28;4:5, 6;엡 2:18). @전능하신 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판토크라토르'(*)는 삼하 7:8;렘 51:7등에 나오는 '야웨 쉐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에 대한 70인역(LXX)의 인용으로 바울 서신에서는 본절에서만 발견된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Martin). ====== ====== [[롬8: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 억압 oppression, 고난 affliction, 환난 tribulation.qlivyi"(2347, 들립시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들립시스(Thu. 이래)는 들리보(qlivbw, 2346)에서 유래했으며, '억압, 압박', '고통, 괴로움, 고난'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들립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30회 나오며, 12개의 히브리 단어 및 어군을 번역하는데 주로 차랄 어군을 번역한다. 이런 히브리어 단어들은 '억압, 근심, 괴로움, 고난, 환란' 등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들립시스는 신약성경에서 4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1. 고난의 성질. (a) 신자와 사도들 모두 고난을 겪는다. 이 고난은 실제적인 것이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행 11:19). 또한 피할 수 없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이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은 하나의 본보기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특별한 고난을 당한다(살전 3:3-살전 3:4; 행 20:23; 고후 1:4). (b) 이 고난은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며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도에게 계속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한다(참조: 고후 4:10-고후 4:11). 계 7:14의 순교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들을 증거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이 높임 받으신 주님이 이미 당하신 고난을 주님의 지체들에서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 일컬어진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에 기초하여 그의 백성들 안에서 고난 당하신다. (c)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떨어질 수 없으며,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며, 그리스도께서 끝내신 이 세대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인 것이다(고전 7:26이하; 마 24:9이하; 계 1:9; 여기에서 현재의 환란은 말세의 대환난의 견지에서 고려된다). 유대교도 역시 종말론적인 환란은 기대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새로운 특징은, ① 이 마지막 환란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② 메시야 자신의 수난이 이 환란을 개시하신다는 것과, ③ 이 환란은 그의 흩어져 있는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이다. (d) 또한 마지막 심판과 관련된 고난도 있는데, 불의한 자들과 교회를 핍박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일 것이다(롬 2:9; 살후 1:6). 교회는 이 심판을 고대하는데, 이는 그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참된 표이다(참조: 살후 1:5). 2. 고난의 체험. (a)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롬 2:9; 살전 3:7; 요 16:21; 막 4:17). ① 구체적으로 이 고난들은 살전 1:6에서는 박해를 가리킨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② 행 20:23에서는 옥에 갇힘을 가리킨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③ 히 10:33에서는 조롱을 가리킨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④ 고후 8:13에서는 가난을 가리킨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⑤ 계 2:22에서는 아마도 질병을 가리킨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참조: 또한 계 8:35과 고후 11:23이하의 목록을 참조하라). ⑥ 또한 내적 고민과 슬픔(빌 1:16이하)이나 불안, 걱정과 두려움(고후 7:4이하)의 고난도 있다. (b) 고난의 공통되는 힘은 그 안에서 역사하는 사망의 권세이다(참조: 고후 1:8-고후 1:9; 고후 4:10-고후 4:11; 고후 11:23).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겪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타파하신 사망의 효과를 체험하는 것이다(참조: 빌 3:10). 고난은 그 뜻하지 않은 사건과 부패성으로 우리 현재 삶에 외적 흔적을 남긴다(고후 4:16이하).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지킬 것인지, 생 그 자체의 가능성의 견지에서 삶을 볼 것인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가능성의 견지에서 삶을 볼 것인지를 시험받게 된다(고후 1:8-고후 1:9). 믿음은 고난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생명을 하나님께 도로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소망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꿋꿋한 인내를 낳으며(살후1:4), 위로를 주며(참조: 고후 1:5-고후 1:6) 장래의 영광이 현재의 고난에 비할 수 없으리만큼 중하다는 확신(고후 4:17-고후 4:18)을 준다. 이리하여 덕스러운 순환을 가지는데, 이 순환에 따라 약속은 소망을 주고, 소망은 고난을 받아들이며,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소망을 증대한다. 이리하여 기쁜 성령의 약속을 성취한다. (c)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고난을 받아들임으로 공동체를 세운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말씀은 다른 사람들에게 적절한 위로의 약속이 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이하). 그의 백성의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를 세우시며, 따라서 사실상 그리스도는 이미 고난의 권세를 깨뜨리셨음을 보여준다. (참조: J.H.Thayer; H.Schlier; R.Schippers). ------------ #곤고, 곤궁straits,고통 distress, 고난 affliction, 곤란 difficulty. stenocwriva(4730, 스테노코리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스테노코리아(Thuc. 이래)는 스테노스(stenov", 4728: 좁은)와 코리아(장소)의 합성어이며 '좁은 장소, 즉 내적, 외적의 곤경에 의해 압박'을 받는 것을 표현한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비참한 재난, 극한 고생'을 나타낸다. 2. 70인역본의 용법 스테노코리아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마촘(포위공격, 포위된, 신 28:53, 신 28:55, 신 28:57)과 추카(고통, 압박, 사 8:22; 사 30:6)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스테노코리아는 신약성경에서 4회 바울서신에만 나온다. 롬 2:9에서 스테노코리아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낸다. 이것은 세상과 다음 세상에 있어서 심한 환난을 묘사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롬 8:35에서 믿는 자들이 환난에서 제외되지 않으나 이러한 것이 신자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끊지 못할 것임을 보여준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고후 6:4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관련된 열정적인 경건심에서 자신이 압제를 당하고 있으나 낙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고후 12:10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쁘게 받는 '고난'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참조: Walter Bauer; R.Schippers; G.Bertram). ------------ #핍박, 박해 persecution. diwgmov"(1375, 디오그모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디오그모스(Aescyl. 이래)는 디오코(diwvkw, 1377)에서 유래했으며 '박해, 핍박'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디오그모스는 70인역본에서 3회 '박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잠 11:19; 애 3:19; 마카베오이서 12:23). 3. 신약성경의 용법 디오그모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공관복음에 3회, 사도행전에 2회, 바울서신에 5회 사용되었다. 마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병행구, 막 4:17).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행 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살후 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딤후 3: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 #기근, 배고픔 hunger, 기근 fimin. limov"(3042, 리모스) 1. 일반 헬라어의 용법 명사 리모스는 도리스(Doris) 및 후기 문서에 나타나며, '기근, 굶주림'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리모스는 70인역본에서 110여회 나오며, 한번을 제외하고는 라압 어군(기근, 굶주림, 굶주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리모스는 신약성경에서 12회 나오며, '기근, 굶주림'을 의미한다. 눅 4:25에서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큰 '기근'에 대해서 말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행 7:11에서 아브라함 때에 애굽과 가나안의 큰 기근에 대해 말한다: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기근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재난 중의 하나이며(마 24:7 병행구, 막 13:8; 눅 21:1; 계 6:8; 계 18:8), 기근의 때는 특정한 양의 부조를 행하여야 할 때이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 11:28). 음식에 관한 질문이 믿음에 관한 질문을 야기시킬 때, 굶주림은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눅 15:14; 눅 15:17).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 #적신, 벌거벗음, 빈곤. gumnovth"(1132, 귐노테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귐노테스는 귐노스(gumnov", 1131: 벌거벗은)에서 유래했으며, (a) '벌거벗음' nakedness(Cornutus 30.), (b) '헐벗음, 결핍, 빈곤'(ps. -Dionys.)을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귐노테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롬 8:35에서 귐노테스는 '벌거벗음', 즉 빈곤을 의미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b) 고후 11:27에서도 귐노테스는 '헐벗음, 곧 빈곤'을 의미한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c) 계 3:18에서 귐노테스는 '영적 빈곤'을 의미한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A. Oepke; H. Weigelt). -------- #위험 danger. kivnduno"(2794, 킨뒤노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킨뒤노스(Hdt. 이래)는 '위험' danger, '모험' irsk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킨뒤노스는 70인역본에서 시 114:3(시 116:3)에서 하데스와 함께 사용되어 이 기자가 거기서 구원을 받은 바로 그 곤경을 표현한다. 집회서 43:24에서 킨뒤노스는 선원들이 직면하는 위험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킨뒤노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 (a)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서 기독교인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불유쾌한 여러 현상들 중의 하나로 위험이 등장한다. (b) 고후 11: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기서 바울은 킨뒤노스를 여러 차례 사용하여, 자기의 사역에 수반되었던 다양한 어려움들을 기술하였다. 이 위험들에는 대 자연의 요소들(바다와 폭풍)과 인간들의 적대 행위(강도, 유대인, 이방인)가 포함되어 있다. 전체의 문맥상 이러한 진술들은 바울이 고린도인들을 향해 자기의 사도적 사역의 권위를 예증하기 위한 시도의 일부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P. J. Budd). ----------- #칼, 검 sword mavcaira(3162, 마카이라)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마카이라(Homer 이래)는 마코마이(mavcomai, 3164: 싸우다)에서 유래했으며, (a) 첫째로 제사, 도살, 요리, 면도, 삭발, 정원 손질에 사용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