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장....분명히 !! 주님은 마7장을 통해서 암시해 주고 계시는 바!! 선악 지식 나무조차도 허락하실바 ((아담과 하와의 믿음의 분량과 그 성숙함의 정도를 참되게!! 아신다!!)) 그 때가 아직은 아님을!!, 오직 주께서 친히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심으로써 십자가 거쳐서 부활생명의 ((오직 생명과 사랑을 체득함으로써!! 성화-영화의 가치를 알게 되기에!!, 바로 그렇게 결합한 하나 이루실 바, 한량없는 <진정한 영적 성숙이 어떠함, 그 진귀함 참되게 깨달아 알게 하는>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진리생명말씀!!)) 그영의 부어지심-내주하심 통해서 날마다새로이 생명말씀 양식 먹고 수용/적영/조성/영적 감동과 깨달음의 찬양 통해 마음판에 그 말씀 새겨짐의 그릇인바 주예수님 판박이-참제자 이루는바 <<오직 그 때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참되심을 신뢰함으로써 기다리기를 배운 자, 곧 거듭난 그 자신이 그토록 Q이 얻기를 고대하시는 바로 그 사람, CJ 엘로힘 판박이-참제자-그리스도의 신부/어린양의 아내-Q아들됨 아는자라야...구하고-찾고-두드림 통해서라야>> 허락하실 수 없음을 암시하고 계신다....쌀라흐(용서+중보/중재)-->쉴라흐(발씀 통로 삼아 보내심)-->찰라흐(영혼 구원) 이룸
......
..([구주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분명히 일러주셨다...이것은 회개하고!! 그분을 영접함으로써 곧 "나의 주-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예수님, 나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고백함으로써 바로 그 주예수 이름 부르는이마다 주와 하나인바 회개 통해 그분의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아 알아가게 되며 그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까지 그분의 어떠함=성의진선=과 하나되신 영혼몸 전존재의 유일무이하신 영생의 참목자요 신랑이신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하신 바 모든것을 이루는 그분의, 코람데오-솔라피데-솔라스크립투라-솔라크리스토스-솔리데오글로리아 성취해가시며, 성취케 하는 그분 이름의 전능한 그 능력의 이름으로!! 마귀사탄-악한영들-귀신들을 분별하며 대적함으로써 능히 이긴 그분의 이김을 분배-공급하셨다)
(진정한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즉 자기를 지으시고 사명 주사 이땅을 맡겨주신 창조주 Q의 뜻과 그 성취 위해 당신의 모든것 위임해 주사 대리왕 삼으신 그 모든것에 대해서는 깜깜한 문외한, 즉 주께 여쭙지 않음 인해, 무지몽매 상태에서 사탄체계인 세상에 매몰됨 상태에 머무름, 그 안에 이목구비가 닫혀진 채,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지하감옥에 가두어진, 속임/기만 당하며 가스라이팅 상태로 있는, 장애자가 아니로되 마치 태생적 장애자처럼 스스로 여기도록 만들어서, JC이름으로 인한 사탄마귀 자신의 포로로 삼음으로써...따분함-지겨움-서운함-섭섭함으로 틈을 보이고 있었다...원수대적 사탄마귀와는 대화하려말고 예수이름으로 대적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대적하기를 앚고 있었다)
피조된 세상은 참생명 및 비췸의 다바르, 로고스 이신 그리스도 없이는 그 참 의미를 곀코 알 수 없다!! ...그리스도 아니면 사탄마귀의 길일뿐이요,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음을 알라!!...사탄마귀는 하와(=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영적 하와임을 알아야 한다)를 참자와서 말을 섞는다.....무척 친한-친밀한 자의 겉모습으로 다가와서 미혹했었다...단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뱀, 곧 사탄마귀가 지고지선, 최상의 지혜자인것처럼 찾아와서 "속상-섭섭-불평불만 그 자체인 소유-기복 마귀"는 일종의 자기연민의 악한 영인바,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자아성취"라는 사탄마귀의 가치인 동시에 사탄마귀체게인 세상의 가치- 패러다임, 그 속임-기만-사기 가치체계 따라서만 알며 실행하게 하는데, 하와에게 일러주었던 그대로 오늘날도 여전히, 귀가 가려운이들에게 ."하나님도 틀릴수있다--하나님이 틀렸다--하나님은 없다/세상은 저절로 있는것일뿐이다--네인생은 던져진것일뿐이니, 네인생은 네가주인이요, 네가 책임져야하는바, 네가 하나님이다--전혀 다른이들을 고려/배려하려 말고 죽고 죽이는 이 세상 생존경쟁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할진대, 그러려면 그리스도신앙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조금?은 알아야 하고, 온갖수단방법 다 동원해서 독야청청군림해야 하며, 네 혼자 잘먹고 잘살다가 원할때 그냥 자살로 끝내버리면 상황 끝이니"라고 속삭인다.....잊지말라!!, 교만과 자기연민은 동전의 양면 이룸을 알고 틈을 주어서는 안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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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알라/합당하게 행하라...피조물됨의 자각아래에서 살기를 힘쓰라....참된 지피지기를 통해 자기 위치 지킴이 중요하다...자기연민/과대포장(허풍)은 자기속임이자 교만의 또 다른 모습이다)교만==>거역/반역--->질시/미움/분한/탓함/원망/저주==>미혹/탈취/살인..이것이 마귀가 거친 과정일 것!!
===사람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심판 선언
1. [258샘물과같은보혈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성결되지 않은 영리함에 있어서 원조격이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268.죄에서자유를얻게함은]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455.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시다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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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ll of Man
1 Now the serpent was more crafty (subtle, skilled in deceit) than any living creature of the field which the Lord God had made. And [a]the serpent (Satan) said to the woman, “Can it really be that God has said, ‘You shall not eat from [b]any tree of the garden’?”
2 And the woman said to the serpent, “We may eat fruit from the trees of the garden,
3 except the fruit from the tree which is in the middle of the garden. God said, ‘You shall not eat from it nor touch it, otherwise you will die.’”
4 But the serpent said to the woman, “You certainly will not die!
5 For God knows that on the day you eat from it your eyes will be opened [that is, you will have greater awareness],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the difference between] good and evil.”
6 And when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delightful to look at, and a tree to be desired in order to make one wise and insightful, she took some of its fruit and ate it; and she also gave some to her husband [c]with her, and he ate.
7 Then the eyes of the two of them were opened [that is, their awareness increas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fasten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coverings.
8 And they heard the sound of the Lord God walking in the garden in the cool [afternoon breeze] of the day, so the man and his wife hid and kept themselves hidden from the [d]presence of the Lord God among the trees of the garden.
9 But the Lord God called to Adam, and said to him, “Where are you?”
10 He said, “I heard the sound of You [walking]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so I hid myself.”
11 God said, “Who told you that you were naked? Have you eaten [fruit] from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you not to eat?”
12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You gave to be with me—she gave me [fruit] from the tree, and I ate it.”
13 Then the Lord God said to the woman, “What is this that you have done?”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and deceived me, and I ate [from the forbidden tree].” 14 The Lord God said to the serpent, “Because you have done this, You are cursed more than all the cattle, And more than any animal of the field; On your belly you shall go, And dust you shall eat All the days of your life.
15 “And I will put enmity (open hostility) Between you and the woman, And between your seed (offspring) and her [e]Seed; He shall [fatally] bruise your head, And you shall [only] bruise His heel.”
16 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Your pain in childbirth; In pain you will give birth to children; Yet your desire and longing wi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will rule [with authority] over you and be responsible for you.”
17 Then to Adam the Lord God said, “Because you have listened [attentively] to the voice of your wife, and have eaten [fruit] from the tree about which I commanded you, saying, ‘You shall not eat of it’; The ground is [now] under a curse because of you; In sorrow and toil you shall eat [the fruit] of it All the days of your life.
18 “Both thorns and thistles it shall grow for you; And you shall eat the plants of the field.
19 “By the sweat of your face You will eat brea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For from it you were taken; For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20 The man named his wife Eve (life spring, life giver),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the living.
21 The Lord God made tunics of [animal] skins for Adam and his wife and clothed them.
22 And the Lord God said, “Behold, the man has become like one of Us (Father, Son, Holy Spirit), knowing [how to distinguish between] good and evil; and now, he might stretch out his hand, and take from the tree of life as well, and eat [its fruit], and live [in this fallen, sinful condition] forever”—
23 therefore the Lord God sent Adam away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and cultivate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24 So God drove the man out; an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He [permanently] stationed the [f]cherubim and the sword with the flashing blade which turned round and round [in every direction] to protect and guard the way (entrance, access) to the tree of life.
===Footnotes
Genesis 3:1 The relationship between Satan and the serpent is not made clear, but Satan is identified with the serpent later in Rev 12:9, 14, 15, and 20:2. It seems difficult to believe that Eve would not have been suspicious of a talking creature, but at this point in time Eve probably knew next to nothing about animals; and in any case, the serpent, as it existed before the curse (v 14), was a very different creature from the reptile that is familiar to us today.
Genesis 3:1 Or every.
Genesis 3:6 This may have been sometime later. Jewish tradition said that Adam was absent at the time of Eve’s conversation with the serpent (according to the Talmud).
Genesis 3:8 Lit face.
Genesis 3:15 Many consider this verse the protevangelium, the first announcement of the gospel. This is the first prophecy about the Messiah (Christ), who through His death on the cross and resurrection would ultimately defeat Satan, the power behind the serpent, with a death blow. See Is 9:6; Matt 1:23; Luke 1:31; Rom 16:20; Gal 4:4; Rev 12:17.
Genesis 3:24 Cherubim are ministering angelic beings who avenge assaults on God’s hol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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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개요)
본 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든 면에서 생각해 볼 때) 성경에 있는 모든 이야기 중 가장 슬픈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장에는 처음 조상들의 거룩함과 행복에 관한 즐거운 견해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모든 피조물의 평화와 아름다움, 모든 선한 것들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광경이 일변하여 우리의 처음 조상들의 죄와 비참,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피조물의 평화의 붕괴, 피조물의 아름다움의 추락 등 모든 악한 것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는고!”(애 4:1)
본 장의 대충적인 내용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한 로마서 5장 12절의 말씀과 같다.
그 내용을 보다 더 상세하게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무죄 가운데 받은 시험(1-5).
2. 시험과 범죄(6-8).
3. 범죄와 고소(9, 10).
4. 고소와 유죄 판결(11-13).
5. 유죄 판결과 선고(14-19).
6. 선고와 집행유예(20, 21).
7. 집행 유예와 부분 집행(22-24).
그리고 만일 약속의 씨를 통해 인간을 구속하시리라는 것을 여기에 은혜로써 알려 주시지 않았다면, 그들과 그들의 타락한 후손들은 영원한 절망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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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가운데서 받은 시험(창 3:1-5)
여기에는 사탄이 우리 시조들을 죄 가운데 떨어뜨리기 위해 그들을 유혹한 시험의 이야기가 있다. 이 시험은 그들에게 회복되기 힘든 치명상을 안겨주었다.
Ⅰ. 유혹자, 즉 사탄은 뱀의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
1. 하와를 속인 자는 확실히 마귀였다.
마귀와 사탄은 옛 뱀이다(계 12:9). 그리고 이는 악의에 찬 영이다. <아마도 천지창조의 첫날, 빛을 지으실 때 지음받았으리라>
창조 때에 빛의 천사로 하나님의 보좌 바로 옆에서 수종들었으나 죄로 인해 당초의 지위로부터 쫓겨나서 하나님의 명예와 권위에 반항하게 된 자다.
이 때 <그의 꾀임에>수많은 천사들이 타락했다.
그러나 우리의 시조들을 공격한 자는 확실히 마귀들의 왕자요 반역자들의 향도, 바로 그 였다.
그는 <교만-불평불만의 악순환에 빠져서, 점점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기에..(회개는 육체를가진 영혼에게 특별히 부여하신 선물임!!)> 죄를 짓자 곧 사탄이 되었고, 반역자가 되자 곧 유혹자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대해 분노하고 <하나님의 전적으로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인간과 그들의 행복을 시기했다. <스스로의 의지를 따라 불만 품고 잘못 선택한 결과로, 하나님을 거역했던 바 정죄당한 슬픔과 회한에서부터 시작했을 수는 있겠으나 고집 부려 하나님 영광 누림에 참여를 스스로 거절하였고 , 뒤이어 끝임없이 솟구치는 원망-분노를 전가할 대상<아담>을 찾아, 자기 처지와 비교하며 <차별 받았노라> 여겨 하나님과 사람을 미워하며 분냄과 질시의 악순환에 빠져든 결과, 비교 대상인 상대방(아담)의 타락과 파멸을 야기하려 함정을 파서 유혹-타락케 하여 그로부터 세상 다스림에 대한 권리를 탈취하였고, 범죄한 아담-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을 비꼬며 고소해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담과 그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비꼬며, 하나님 앞에서 상대방(아담)을 헐뜯으며 참소하는 것, 바로 그것은 사탄의 특성이다!!>
사탄은 인간을 멸망시킬 수는 없어도 타락시킬 수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는 없었으나 시험할 수는 있었다(계 2:14).
그러므로 사탄이 꾸민 간계는 우리의 시조들을 죄짓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탄은 원래부터 살인자요 이간자였다. 사탄은 온 인류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이를 한 손에 내려쳤다. 인류의 원수는 이처럼 극악한 자다.
2. 마귀가 뱀 모양으로 나타났다.
마귀가 단지 뱀의 모양으로 나타났었는지(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출 7:12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인지), 혹은 사탄의 손아귀에 붙잡혀서 조종당한 진짜 살아 있는 뱀이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면 그 어느 쪽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여간 마귀는 자기의 일을 하기 위해 뱀을 선택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면 마귀가 왜 뱀을 택했을까?
(1) 뱀은 그 피부에 반점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를 쳐들고 다니는 그럴 듯한 모양을 한 짐승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것은 일종의 날아다니는 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스랍들 중의 하나와 같이 저 윗세상으로부터 오는 사자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불뱀”이란 말이 있기 때문이다(사 14:29).
많은 위험한 유혹들은 단지 가죽 한 꺼풀이긴 하지만 화려한 색깔로 꾸민 채 우리를 찾아오며, 위로부터 오는 것처럼 나타내 보인다.
왜냐하면 사탄은 광명의 천사처럼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2) 뱀은 간교한 짐승이기 때문이었다.
뱀이 남을 해하거나 또는 자기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행한 많은 간계를 찾아볼 수 있다. <긍정적 의미로서>우리는 뱀과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
그런데 마귀의 조종을 받은 이 뱀은 틀림없이 다른 어떤 뱀보다도 더욱 간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비록 신성함을 상실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천사들의 영리함을 가지고 능히 악한 일을 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뱀을 이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성결되지 않은 영리함은 마귀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가장 이용하기 좋은 수단임을 알아야 한다.
하와가 자기에게 말하는 이 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우리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와 자신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으리라.
아마 우선은 그것이 광명의 천사일 것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지난 후에는 어딘가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교의 우상 숭배자들은 대체로 뱀 모양의 마귀를 예배하고 있으며, 이런 것을 통해 그들은 배교자의 영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그리고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Ⅱ. 시험받은 사람은 남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혼자 있었으며, 금단의 나무 가까이에 있던 여자였다.
:: 신랑 구주와 하나되어, 교통하며 동행함이 가장 중요하다!! <마땅히 있어야 하는 장소란 주님 임재 교통의 바로그 장소, 그 시간에!!>
1. 연약한 그릇과 같은 여자를 유혹하는 것이 마귀의 간계였다.
하와가 비록 여자들 중에서는 온전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지식이나 힘, 그리고 침착성에 있어서 아담보다 훨씬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명을 받지 않고 그녀의 남편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처럼 쉽사리 그 계명에 불순종하도록 설복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마귀는 그녀가 혼자 있을 때 이야기를 걸기 시작하는 술책을 세웠다.
그녀가 만일 남편 곁에 있었다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유혹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힘을 주고 안전하게 유혹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3. 마귀는 그녀가 금단의 나무 가까이 있는 틈을 탔다.
아마 그녀는 호기심에 이끌려서 그 나무 위에 있는 열매를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사탄이 그 열매를 먹고도 죽지 않음을 보고 의아해 했을지도 모른다!!)
금단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되는 자는 금단의 나무 가까이 오는 것도 안 되었던 것이다.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라”(잠 4:15).
4. 사탄은 하와를 통해 아담을 유혹하기 위해 먼저 하와를 유혹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그의 아내를 통해 욥을 유혹했으며,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를 유혹했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의 관심을 크게 끌며,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영을 끼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유혹하고자 하는 것이 사탄의 술책이다.
Ⅲ. 유혹 그 자체와 그 유혹의 수단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우리를 엄습해 오는 사탄의 유혹, 즉 그 “궤계”(고후 2:11), 그의 “깊은 것”(계 2:24), 그리고 그의 간계(엡 6:11)에 대해서 말해 준다.
이런 예를 우리는 이 곳과 또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두 사람의 아담을 유혹하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마귀가 성공했지만 나중의 경우에는 마귀가 실패했다.
외부에서부터 말하는 것을 가지고는 사람들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탄은, 우리 자신들의 속이는 마음과 그들의 육체적인 이론들을 가지고 우리 속에서부터 말한다. 이것은 매우 분간하기 곤란한 공격이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공격이다.
마귀는 하와로 하여금 금단의 열매를 따먹도록 설복하고자 시도했다. 이 방법을 마귀는 계속 오늘날까지도 사용한다.
<하와의 마음의 틈을 발견한>마귀는 <하나님의 금령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금령의 상대화의, 그 여지는 어떠한지 그 자신은 이미 범죄함 통해 뼈저리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 물었다(1절).
<하와의 마음에서 일말의 흔들림을 확인한 후 한걸음 더 나아가> 마귀는 <금령 어김>거기에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했다(4절).
그는 오히려 많은 이득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주었다(5절). 이런 것들이 흔히 마귀가 사용하는 화술이다.
1. 마귀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 물었으며, 정말 그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야 되느냐고 물었다.
(1)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말한> 그 첫마디의 말은 그 전에 이 말과 관련된 어떤 <전제나 빌미가 되는> 사정이나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아마 하와가 <가치-의미 판단이 오도된 생각 안에서>혼잣말을 했을 것이고, 사탄이 그 말을 받아서 거기에 자기의 질문을 덧붙였을 것이다. 생각의 꼬리는 이상스럽게도 꼬리를 이어 다른 생각을 가져다 주는데, 아마 마지막에는 나쁜 생각을 가져다 줄 것이다.
① 처음에 그는 자기의 계획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어떤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하나님이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했는가?”
마귀는 이처럼 처음에는 슬쩍 이야기를 붙이고 나서 곧장 그녀를 담판으로 끌어들였다.
유혹으로부터 안전하고자 하는 자는 이런 사실을 알고 유혹자와 말하기조차 삼가야 한다.
②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이 그 나무 하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들에 관한 금령인 것처럼 명령을 거짓되게 인용했다.
하나님은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너희가 먹되 단 하나의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의 예외를 확대시킴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특권을 무효화하기 위해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처음부터 잘못 전달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법은 비난받을 수 없다.
③ 사탄은 그 여자가 그 나무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을 조롱하는 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서 네가 그 말씀대로 참 조심스럽게 잘하는구나.”
마귀는 거짓말쟁이처럼 처음부터 비꼬는<비아냥거리는> 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말세의 비꼬는 자들은 곧 마귀의 자녀들이다.
④ 사탄이 처음부터 노린 것은 그녀에게서 명령에 대해 절대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었다.
“너는 정말 오해하고 있구나. 하나님이 너를 그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불합리한 일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 사탄의 계교란 하나님의 법을 불합리하고 불확실한 것처럼 손상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을 확고히 믿고 그것을 굳게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다.
“너희는 거짓말하지 말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며, 술 취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렇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합당한 말씀이다. 유혹자가 아무리 이와 반대되는 것들을 제안해 온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명령을 지켜 나갈 것이다.”
(2) 이런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 여자는 그들이 받은 율법의 내용을 분명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2, 3절).
① 뱀과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이 그녀의 약점이었다.
그녀는 뱀의 질문을 듣고 그에게는 전혀 선한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즉시 깨닫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그러나 호기심과 경이감에 가득 찼던 그녀는, 뱀이 말하는 것을 듣자 그의 이야기에 끌려들어가게 되었다.
당장 멸시와 증오심을 가지고 거절해 버려야 하는 유혹을 상대하는 것부터가 위험스러운 일이다.
적과 협상을 제기하는 수비대는 머지않아 항복할 것이다. 해를 입지 않고자 하는 자는 해로운 길에서 멀리 떠나야 한다(잠 14:7; 19:27 참조).
②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동산에 보낸 것은 단지 보기에 먹음직스럽지만 먹지는 못하게 금하고 있는 과실을 눈여겨보게 함으로써 그들의 애를 태우고자 한 것이라고 교묘하게 암시했다. 이에 대해 하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임을 깨닫는 지혜가 분명히 있었다. “우리는 많은 나무들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분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만도 대단히 많고 또 그 종류도 여러 가지다”.
생명진리말씀의 [극히 적은 계명들의 제한과] 속박하에서도 거북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믿는이에게 베푸신 바!!..긍휼!!!....절대적으로 위하시는 분의 사랑 받는, 다함 없는 영원무궁한 분이 부어주신 성령의 교통 안에서 누리고 있는, 믿는이가 ]가진 자유와 위로에 대해 [절대 긍정-절대 기쁨-절대 신뢰로!] 시시때때로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③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의심할 여지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충실하게 반복했다는 것은 그녀의 결심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너희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그녀는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덧붙였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명령을 은연중에 “만지지 말라, 맛보지 말라, 손대지 말라”는 식으로 지나치게 엄격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명령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우리는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만지지도 않겠다. 그것은 신성불가침의 것이다.”
④ 하와는 그 위협에 대해서는 약간 흔들렸던 것 같다. 그녀는 그 명령을 되뇌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하신 것처럼>말을 전했다.
흔들리는 신앙과 결심은 유혹자에게 좋은 기회를 준다.
2. 마귀는 <기회를 얻고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기에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명령을 어기는 것이기는 해도 형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4절). 글자 그대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가 되도록 “너희가 정녕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라고 했다.
(1) 어떤 사람은 이 말이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너를 그렇게 믿도록 했지만 그것이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사탄은 자기가 넘어뜨릴 수 없는 자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의심하게 함으로써 그 힘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언제든지(!!!)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도 거짓이나 잘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되면(!!) 그 때 하나님께 불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사탄은 처음에 의심하게(상대화..틈을 만듦...병 발생!) 하고, 다음에는 거부하게(몸통 집어넣음..자리잡고 지배함...죽게!!) 만든다.
사탄은 우선 회의론자로 만들고, 다음 단계에서는 무신론자로 만든다.
(2) 또 어떤 이들은 그 말이 “네가 정녕 죽지 않으리라”라는 말이라고 한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위협적으로 사용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을 반대로 사용함으로써 자기의 말이 확실한 듯이 주장했다.
처음에 사탄은 그 명령에 대해 묻는 것으로 말을 시작했다(1절). 그러나 그녀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런 공격을 중지하고, 두 번째의 공격으로써 위협의 내용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이 말에 그녀가 흔들리는 것을 노려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녕 죽지 않으리라.” 이것은 거짓말이다. 순전한 거짓말이다.
①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진리라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 1서 2장 21-22절을 보라.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게까지도 거짓말을 하리만큼 심한 거짓말이다.
② 그것은 사탄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도 위배되는 거짓말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거역해도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하와에게, 뻔뻔하게!!> 말했을 때, 그 자신의 비참한 경험을 통해 <그 자신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말 자체가> 그 말이 거짓된 말임을 <이미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을 일단 어겼을 때 그 대가로 그 후 사탄은 하나님 임재 안에서 평강-충만의 삶을 결코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의 처음 조상들에게 그들이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자기와 같은 처지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 자신이 당한 비참한 모습을 숨겼다.
이처럼 그는 오늘날까지도 죄인들을 속여서 자멸하게 하고 있다. <오늘도 여전히> 사탄은 죄를 지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도 자기의 말을 더 믿게 한다.
죄를 지어도 벌받지 않는다는 생각은 모든 부정과 완고함을 크게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나는 평안하리라라고 말하리라”(신 29:19).
3. 마귀는 명령을 어김으로써 얻게 되는 이점이 있다고 약속했다(5절).
여기서 사탄은 하나의 강타를 먹이는데, 그것은 가지 된 우리가 붙어 있는 나무의 뿌리까지 흔드는 강타였다.
그는 그들을 불이익의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비밀한 지식을 내준다고 말한 셈이며, 이로 말미암아 조금도 잃어버리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이 많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좀더 신중히 생각해 보자...스스로 파선된 자가 말하는 안전을 믿을 만큼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아무도 그 약속을 믿지 않았을 것이지만..아쉽게도).
사탄은 그들을 위한 커다란 출세와 유익의 길이 약속되었다고 말해 주지 않고는 그들을 자멸의 길에 끌어들이도록 설복할 수가 없었다.
(1) 마귀는 그들에게 이 열매를 먹기만 하면 커다란 이득이 있다고 은근히 권했다.
그리고 그들을 유혹하는 데 있어서 육체적인 환락이나 만족이 아니라 지적인 기쁨이나 만족과 같은 순수한 상태에 어울리게 그 유혹을 이끌고 갔다.
사탄은 그의 낚싯바늘을 감추기 위해 다음과 같은 미끼들을 사용했다.
① “너희 눈이 밝아지리라. 너희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직관력과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너의 지적인 관점이 훨씬 넓어질 것이며, 지금보다도 훨씬 장래의 일을 잘 예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탄은 그 열매를 먹을 때 그들이 얻게 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지금의 상태는 참으로 보잘것없으며, 그들이 너무 앞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② “너희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너희는 엘로힘, 즉 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아지며, 전지자(全知者)가 될 뿐 아니라 전능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또는 이렇게 말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자신과 같아질 것이며, 그의 상대가 될 것이다. 너희는 또 다스리는 자가 되고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며 누구에게 예속된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제안이다. 이는 마치 어제 지음 받은 피조물이 영원 전부터 계신 그들의 창조주와 같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③ “너희는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유혹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탄은 그 나무에 주어진 이름까지도 악용했다.
그 나무는 사실 선과 악에 관한 지식, 즉 책임과 불충의 결과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 주기 위해 세워진 나무였다.
그리하여 그 나무는 선과 악, 다시 말하면 행복과 불행에 대한 경험적인 <결과적>지식만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악 지식 나무라 칭한> 그 나무의 이름은 그들에게 그 열매<주께 불충함, 곧 하나님 말씀 불순종!!>를 따먹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그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 사용했으며,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그 의미를 고의적으로 왜곡하여 전도시켜버렸다.
그리하여 그 나무가 그들에게 선과 악의 본질, 종류, 그리고 그 근원에 관한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지식을 주는 것인 양 말했다.
④ 이 모든 것은 이런 말로 집약될 수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갑자기 좋은 상태로 돌변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사탄은 이런 모든 속삭임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첫째, 그들이 앞으로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상태보다 현재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현재의 상태에 대해 불만을 품도록 하고자 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곧 모든 차원-우주-만물-만유를 창조하신 분, 주권적 섭리자, 지고지선의 유일무이한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영광-성품을 참되게 알고, 그 친밀함(비밀)을 누리며 체득하며 하나님과 상호거함-누림-기업/소유됨-동행-결혼한 부부로 하나됨의 진복을 맛보며 감사함 통해 살아감으로써,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 그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을 누림을 경험적으로 참되게 알지 못한다면, 그 외의 그 어떤 상태라도 그 상태 자체가 참된 복락-참된 만족감을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일단 하나님 명령을 어긴 상태에서는, 그의 죄를 회개-자백하지 않은 상태로>불안한 마음을 가진 아담은 낙원 안에 있으면서도 낙원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천사들 중에도 그들의 자리를 떠난 자들도 있다(유 1:6).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들도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하는 야망을 품게 하고자 했다.
사탄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필적하리라고 하다가 스스로 멸망했다(사 14:14).
따라서 사탄은 우리의 처음 조상들에게도 같은 욕심을 품게 함으로써 그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2) 하나님에게 나쁜 생각이 있어 그들로 하여금 이 열매를 먹지 못하게 금한 것이라고 은근히 속삭이면서 사탄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이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가 얼마나 잘될 것인가를 하나님이 알기 때문에, 너희에게 대해 시기하는 마음과 악의를 가지고 그것을 먹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그들 자신의 역량을 알고 그런 저급한 상태에 계속 머물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과 필적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먹지 못하게 한 것인 양 말했으며, 또 그들이 먹는 날에 그들이 갖게 될 명예와 행복이 싫어서 그렇게 한 것인 양 말했다.
①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커다란 모욕이며, 최고의 경멸이며, 그의 능력에 대한 비난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이 지은 피조물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행한 선한 업적을 비난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마치 그 자신의 손으로 행한 모든 것을 증오하며, 그가 지은 인간들의 행복을 가로막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잘못 말하고 악하게 말하는 것을 인간은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인간들 앞에서 하나님을 역시 비난한다. 이처럼 사탄은 불화의 씨를 뿌리며, 모든 불화한 자의 괴수다.
② 이것은 우리의 처음 조상들에게 가장 위험한 올가미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멀어지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귀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대해 잘못된 생각을 품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이끌고 있으며, 죄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 바가 많다는 헛된 소망을 통해 사람들을 자기에게 이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귀와 대적하여 하나님을 가장 선하신 분이라고 올바르게 생각하며, 죄악이란 곧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마귀에게 대항하면 그는 우리에게서 도망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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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 범죄(창 3:6-8)
우리는 여기서 하와와 유혹자의 회담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볼 수 있다. 사탄은 드디어 거점을 확보하고 간계를 써서 그의 근거지를 마련한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우리의 처음 조상들의 순종을 시험했다. 그리고 사탄도 이 문제에 동참하는데, 그들을 결국 범죄하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지혜롭고도 거룩한 결과를 얻기 위해 그로 하여금 어떻게 일시적으로 이기게 했는가 볼 수 있다.
Ⅰ. 그들을 범죄케 한 유혹. 유혹자의 능란한 술책에 속은 여자는 범죄의 향도 노릇을 했다(딤전 2:14).
그녀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는 그녀의 생각이 깊었다기보다는 생각이 모자랐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1. 하와는 이 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더 해롭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과실 나무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었다(2:9).
그런데 하와가 보기에는 이 나무도 다른 모든 나무와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먹기에 좋아 보였다.
(어쩌면 바로 그 때, <하와가 지켜보는 것을 모르는 듯이, 아니면 분명히>보란듯이 뱀이 선악지식나무 열매를 따 먹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열매의 색깔을 볼 때도 죽음이나 위험을 주는 듯한 위협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보기에 좋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해가 된단 말인가? 다른 모든 나무 열매들을 못 먹게 했으면 했지, 왜 이 나무의 열매를 못 먹게 금한단 말인가?”
다른 나무 열매들에 비해 이 금단의 열매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는 생각이 들게 될 때 죄악은 바로 문 앞에 도사리게 되었고, 사탄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보기에 다른 어느 나무 열매보다도 이 나무의 열매가 더 먹기에 좋아 보였을 것이며, 맛도 좋아 보였을 것이고, 몸에도 좋아 보였겠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아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육감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무의식 중에 올가미에 걸려드는 수가 있다. 또 비록 다른 것에 비해 우리의 마음을 더욱 끌어당기는 어떤 것이 그것 자체 안에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단지 금지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욱 그것을 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와가 사실 그랬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반대되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이상한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다). 금한 것일수록 더 하고 싶다(Nitimur in vetitum).
^^세인둘이 하는 말에 <무심코!!> 귀기울임 아니라<그대로 따라 행함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 안에서만 <그대로>판단하고 순종하기를 힘쓰라!!
2. 하와는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점을 가진 나무라고 상상했다.
말하자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한” 나무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나무보다 훨씬 좋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와가 그 나무를 “보았다.” 말하자면 하와는 마귀가 그녀에게 일러준 대로 그렇게 이해하게 되고,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곧 하와는 뱀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보았다는 의미이며, 또 그것을 먹었기 때문에 뱀은 이처럼 말할 수 있는 재능과 이성(理性)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로 말미암아 하와는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 능력이 그 나무에 있다고 추론하게 되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나무가 그처럼 지각 없는 짐승을 이처럼 이성적인 짐승으로 만들었다면, 왜 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을 신처럼 만들지 못하겠는가?”
지혜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쓸데없는 지식을 갈망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그들을 멸망시키는가를 보라.
많은 것을 알고 있던 우리의 처음 시조들은 그들이 알 만큼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참>지혜를 주시는 <생명> 나무다(골 2:3; 고전 1:30). 구원을 얻는 지혜를 얻기 위해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자.
하늘의 낙원에서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금단의 나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아야 할 것들은 모두 알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가도록 사모하자. 그리고 그 동안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너무 높거나 깊은 것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며, 성서에 씌어진 것 이상 더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욕심을 내지 말자.
Ⅱ. 범죄의 단계. 그 단계는 위로 이끄는 단계가 아니라 밑으로, 함정으로 이끄는 단계이며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는 단계다.
1. 하와가 “보았다.” 하와는 허망한 것을 보지 말고 눈길을 돌렸어야만 했다. 그러나 금단의 열매를 즐거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유혹에 끌려들어갔다.
많은 죄가 눈을 통해서 들어온다. 이 눈을 통해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병들게 한다. 눈은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도 하고 죄짓게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욥과 같이 위험한 음욕을 품거나 모든 것을 보지 않도록 우리의 눈을 두고 언약을 세워야 한다(잠 23:31; 마 5:28). 그리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언제나 우리의 눈을 가리게 하자(20:16).
2. 하와가 “땄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행한 것이었다. 마귀가 그것을 따서 그녀의 입에 넣어 준 것이 아니었다. 하와 자신이 하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하와 자신이 그것을 땄다. 사탄은 유혹할 수는 있어도 우리를 넘어뜨리지는 못한다(마 4:6). 하와가 딴 것은 훔친 것이다. 아간이 저주받은 물건을 취한 것같이 그녀는 취할 권리가 없는 것을 취한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선악과를 땄다.
3. 하와가 “먹었다.” 아마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는 따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땄을 때는 먹으려고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선악과를 먹었다. 죄의 길은 내리막길이다. 인간이 마음대로 멈추게 할 수 없다. 죄의 시작은 물길을 터 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만 나오고 이제 그만 나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죄는 처음 짓고 싶은 충동이 있을 때 이를 꽉 눌러 놓아야 한다. 그리고 참견을 시작하기 전에 쫓아 버려야 한다. 잘못은 봉오리 때 따 버려라(Obsta principiis).
4. 하와는 그것을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었다.”
아마 하와가 유혹당할 때 아담이 함께 있지 않았던 것 같다(만약 아담이 함께 있었다면 죄를 짓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와가 그것을 먹은 다음에 왔으며, 하와와 같이 그것을 먹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왜냐하면 선을 배우기보다는 악한 것을 배우기가 쉽기 때문이다.
하와는 그것을 남편에게 주면서, 뱀이 자기를 꾀던 말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그것을 먹어도 죽기는커녕 매우 기분이 좋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아담에게 권했을지도 모른다. 훔쳐서 마시는 물이 더 달다.
하와는 다정함을 나타내기 위해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었다. 그녀는 그렇게 맛있는 것을 혼자 먹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만일 혼자 먹었다면 그처럼 큰 불친절이 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편,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 해가 된다고 했더라도 하와는 그것을 남편에게 주었을는지 모른다.
남편이 그녀가 당한 비참한 운명에 동참해 주기를 바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불친절한 행동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금단의 열매를 먹은 자의 마음속에는 그런 생각이 쉽사리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짐작이 간다.
이처럼 나쁜 짓을 먼저 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같은 짓을 하도록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마귀도 그랬고 하와도 그랬다. 그들은 죄인이 되자마자 곧 유혹자가 되었다.
5. “그도 먹었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극성스러운 요구에 못 이겨 그것을 먹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이다. “다만 하와 혼자만이 죄를 지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 어려운 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해 주셨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엾게도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담도 그것을 먹었다. “그가 그것을 먹었다고 해서 어떤 커다란 해가 일어났단 말인가?” 터무니없는 심사를 가진 인간이 타락하고도 육욕에 찬 이론으로 반문한다. 어떤 해가 있었던가! 어찌하여 이런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되며, 자기의 현재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자기 자신의 공적을 뽐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영광을 탐내며,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시기하고, 육체를 탐닉하는 마귀를 신뢰하는 것이 되는가!
아담은 먹으라고 허락된 생명의 나무는 무시하고, 금지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 주신 은혜를 명백히 멸시했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금지하신 것에 더욱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조작하는 자가 되고자 했으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했으며,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고자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의 죄는 “불순종”이다(롬 5:19). 명백하고도 용이하며, 또 명시된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었다. 아담은 아마 그것이 그를 시험하고자 하는 명령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위대한 사랑, 많은 자비, 빛과 사랑에 거슬리는 죄를 범했는데, 그가 거슬려서 죄를 범한 빛과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이며 가장 큰 사랑이었다.
아담은 그의 속에 하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으리만큼 타락한 본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노예 의지가 아니라 자유 의지가 있었으며, 연약하거나 쇠잔하지 않은 충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쉽사리 옆으로 빗나갔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창조된 바로 그 날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날의 일을 마치고 나서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그럴 수는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에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날에 악을 행했다는 것이다. 하여간 그는 그의 완전함을 얼마 오래 지니지 못했고, 그 영예도 오래 간직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담이 그 범죄로 인해 그의 모든 후손들을 죄 가운데로 끌어들이고,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게 한 것은 더욱더 큰 죄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백성이 온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아담은 그 자신이 하나의 공인(公人)이라는 사실과 또 그가 불순종하면 그의 모든 후손도 불순종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의 범죄는 지금까지 있었던 범죄 가운데 가장 큰 불신 행위였으며 가장 비참한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은 우리의 첫 조상들에게 완전히 깃들여 있었다.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범죄에 있어서의 사권상실(私權喪失)이 성립되면서 불명예의 오점과 죄와 멸망의 전염병이 불가불 후손들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담의 죄가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Ⅲ. 그 범죄가 초래한 결과. 수치와 공포가 범죄의 당연한 결과로서(ipso facto) 범죄자에게 엄습해 왔다.
수치와 공포는 죄와 더불어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오늘날에는 죄와 동반되는 것이다.
1. 즉각적으로 수치심이 엄습했다(7절).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자.
(1) 저들의 가슴속에는 강한 뉘우침이 들어왔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이는 육신의 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나타나 있듯이 육신의 눈은 전부터 열려 있었고, 죄가 그 육신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요나단의 눈은 금지된 것을 먹음으로써 그 눈이 밝아졌던 것이 아니며(삼상 14:27), 그것은 그 때문에 그가 원기를 회복하고 소생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또한 이들의 눈은 어느 모로나 참된 지식에 이르는 진전을 보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양심의 눈이 밝아졌다는 뜻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들이 저지른 일이 옳지 못하다는 마음의 찔림을 받은 것이다. 일을 저질러 놓고서야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것이 미련한 소행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또한 행복에서 멀리 떨어져 비참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버린 것도 알게 되었다. 이는 사랑의 하나님을 노엽게 했으며, 그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다른 피조물을 지배할 권한도 송두리째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바 그들의 영의 부조화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지체 속에 다른 한 법이 있어, 마음의 법과 싸우고 마음을 죄와 진노로 몰고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람의 “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았던 것과 같이(민 22:31) 아마 그들은 자기들을 욕보이고 더럽힌 병을 보았을 것이다.
본문은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라고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① 그들이 낙원에서 지녔던 모든 영광과 기쁨을 박탈당하고 빼앗겼다.
전능한 하나님께서 응당 내려 주실 온갖 불행에 던져진 것이다. 그들은 무장해제를 당했다. 그들을 보호해 주던 모든 것이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② 그들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예를 장식해 주던 온갖 장신구들이 사라졌다. 그들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졌다. 최고의 치욕에 떨어졌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들 자신의 양심까지도 그들을 비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배우자.
첫째, 죄는 그 얼마나 부끄럽고 기회만 있으면 불안을 주는 것인가!
죄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인간을 해치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신들에 항거하게 하며, 그들의 행복을 깨치고 모든 안위를 파괴하고 만다. 머지않아 죄라는 것은 부끄러움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이는 참다운 회개로써 영광 가운데 끝맺는 부끄러움이냐, 그렇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 날에 재앙을 당하는 영속적인 치욕을 수반하는 것이냐 하는 것뿐이다. 죄라는 것은 만인에게 이같이 치욕적인 것이다.
둘째, 사탄이 그 얼마나 악한 사기꾼인가!
이와 같은 사탄은 우리의 시조를 꾈 때에 눈이 밝아진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되기는 했으나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로움과 이득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수치와 슬픔에 대한 눈이 밝아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아름다운 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가장 사악하고 해독을 끼치는 거짓말쟁이는 흔히 이처럼 모호한 말만 하여 속임수를 쓰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2) 이런 죄책감을 없애고 자신들을 방비해 보려고 그들은 가련한 수단을 썼다.
즉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기들 내외간이나마 수치를 최소한이라도 가려보려고 “치마를 하였다.” 여기서 죄인들의 일반적인 어리석음을 알게 된다.
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으려는 일이라기보다는 사람 앞에서 신용을 얻으려고 애쓰는 일이다.
그들의 죄를 자복하는 것과 반대로, 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일이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나를 높이소서”(삼상 15:30).
② 죄를 숨기고 가볍게 해 보려고 변명하는 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짓이다.
무화과 나뭇잎 앞치마와 같이 그들은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악화시켰다. 숨겨져 있는 수치심은 더욱 큰 부끄러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아담”처럼 자기 죄악을 숨겨 두기 쉬운 것이다(욥 31:33).
2. 그 금단의 열매를 먹자, 곧 두려움에 사로잡혔다(8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과 동기는 무엇인가?
그들은 “날이 서늘한 때에 동산에 다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들이 놀라게 된 것은 심판주가 다가오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에게만 두려움을 주는 방식으로 오신다. 생각건대 그는 인간의 형태를 입고 오셨으며, 그 때 세상을 심판하신 이가 최후의 날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바로 그 분이시며, “하나님이 정하신 자”(행 10:42)까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낙원에 있을 때 본 그런 모습대로 그들에게 나타나셨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신 것은 그들이 죄를 깨닫게 되고 겸손해지게 하기 위함이지, 그들을 놀라게 하고 공포심을 주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후에 시내산에서 (자욱한 연기로 거처를 삼거나 불타는 화염을 그 수레로 삼고) 인간의 눈에 보였듯이 하늘로부터 직접 강림하듯이 동산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들과 친숙하고자 하는 분처럼 찾아오신 것이다.
그저 걸어오신 것이지 뛰거나 바람 날개를 타고 오신 것이 아니며,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같이 오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노할 때 흥분하거나 조급히 굴지 말고 심사숙고하며 신중히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는 날이 서늘한 때에 오셨다. 공포를 가일층 더하는 한밤중에 오신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한낮 더위가 가장 심한 때 오신 것도 아니다. 즉 그의 노여움이 가장 극심한 때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노함이 없다”(사 27:4). 또한 돌연히 오신 것도 아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의 음성을 들었으니, 그가 오시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며, 아마도 그 음성은 엘리야를 불러 묻던 때와 같이 고요하고도 작은 음성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혼자서 아담의 죄를 생각하시고 그를 심판해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그들이 들은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에 관심을 가지고 말씀하신 때와 같이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호 11:8, 9)고 말씀했을 것이라고 한다. 아니면, 그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2) 그들의 공포의 결과와 증거는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
이 얼마나 슬픈 변화인가! 만일 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더라면, 뛰어나가서 그를 맞이했을 것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기꺼이 은혜로운 그의 심방을 영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정반대이고 보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서운 존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자기들끼리도 서로에게 공포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은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고발하여, 그들의 죄를 그들 앞에 여지없이 폭로했다. 무화과 나뭇잎도 그들에게는 헛되어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로서 나타나게 되었으며, 온갖 피조물이 그들과 싸우게 되었다. 게다가 아직 그들과 진노하신 하나님 사이를 중보할 어떤 이도 그들은 알지 못했으니, 결국 두려움 가운데서 심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공포 때문에 그들은 숲속에 숨어 버렸다. 결국 죄를 지은 그 곳으로 도망쳐 버리고 만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상을 알았기 때문에 감히 심판대 앞에 설 수가 없어 행방을 감추려고 도망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음 사실을 알아보자.
① 유혹자의 허위성과 그 유혹 자체의 기만성 및 오류.
그의 허위성은 그들이 안전하리라고 허울 좋게 약속했지만, 그들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먹어도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지만, 이제 그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도망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또한 그들이 진보하리라고 약속했으나 조금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들은 지금처럼 자기들이 비천함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또한 지혜롭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어디에 숨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같이 위대하고도 담대하고 용맹스럽게 된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은 죄인으로 발각되어 떠는 초라하고 비참한 꼴이 되고 말았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도망갈 궁리만 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예속된 자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제 그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되었다.
②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죄인들의 어리석음이다.
빛 되신 성부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는가?(시 139:7 이하; 렘 23:24) 생명의 근원이시며, 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분을 우리가 떠날 수가 있단 말인가?(욘 2:8)
③ 죄에 따라다니는 두려움.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깜짝 놀라는 온갖 공포, 양심의 정죄, 어려움의 접근, 하등 동물들의 침해, 그리고 죽음의 엄습 등 이런 모든 것은 인간에게는 공통적인 것인데, 그것은 사실상 죄의 결과다. 죄에 짝이 되었던 아담과 하와는 죄에 수반되는 수치와 두려움에도 함께했다. 손에 손을 맞잡긴 했으나(그 손은 아주 최근에 결혼으로 결합됐다), 서로를 격려하거나 강하게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불행한 위로자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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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버린 아담(창 3:9-10)
하늘과 땅의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도망자들의 범죄에 대한 사실이 심리되는 사건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형식에 얽매이지는 않지만, 가능한 한 공정하게 판결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로움이 나타나게 된다.
Ⅰ. 하나님이 아담을 뒤따라가 그를 체포하시고는 그를 놀라게 하는 질문을 하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이 어리석은 자야! 이리 나오라!”고 하여 소송을 시작하려던 것이었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을, “오, 가련한 아담아!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냐?”라고 슬퍼하는 질문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는 또 이것을 해석하여) “오, 너 참으로 가엾은 자여!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啓明星)이여, 어찌 그리 떨어졌는고! 나의 벗이었고, 내가 총애했던 너였으며, 내가 이전보다 더욱 총애하고자 했던 너이건만, 이제 네가 나를 저버리고 자멸했단 말인가? 이것이 웬일인가?”라고 한다. 그가 죄를 깨닫고 겸손해지게 하기 위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책망의 질문은 오히려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다. “이것이 네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얻은 전부이냐? 나와 우열을 경쟁하던 네가 이제 나로부터 도망하려 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명심할 것이 있다.
1.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에 빠진 자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형편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모든 선에서 떠나 그들의 원수들의 수중에 있으며, 사탄의 노예가 되고, 멸망의 고속도로에 들어선 것이다.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질문은 그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그를 다시금 회복시키기 위한 은혜로운 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되찾으려고 부르시지 않았더라면, 타락한 천사와 같이 그의 처지도 도저히 가망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돌아오도록 찾지 않으셨다면, 잃어버린 양과 같이 방향도 없이 끊임없이 유리하는 방랑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을 다시 찾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가 있어야 할 곳과 있어서는 안 될 곳, 그리고 불행하고 불안하게 될 수밖에 없는 곳을 그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2. 또한 죄인들은 자기의 위치를 한 번쯤 숙고해 보게 되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까지는 평안히 쉴 수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Ⅱ.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아담의 떨리는 대답.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절). 그는 자기 허물을 솔직하게 자복하지는 않았으나, 자기의 수치와 두려움을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죄를 고백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잘못에 대해 질문을 받고 그 사실이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해졌음을 알게 될 때 흔히 범하는 공통된 과오와 어리석음인 것이다. 아담은 벌거벗었기 때문에 두려워했다. 맨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논쟁하기가 두려웠을 뿐 아니라, 옷을 벗었으므로 그 앞에 나타날 수 없을 만큼 매우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의로 가리지 아니하고는, 두려워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직 이것만이 증거의 갑옷이 되며, 우리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덮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4) 겸손하고도 담대하게 그 앞에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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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문(창 3:11-13)
범인들이 자신들의 고백으로 자기들의 죄책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죄과를 가볍게 하려고 애써 변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일을 고백하고 정당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을 자백하고 변명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어떻게 그들의 자백을 받아냈는가? 하나님은 남자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11절)고 물으셨다. “어떻게 하여 네 벌거벗음이 부끄러움이 된다고 느끼게 되었느냐?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알고 계시지만, 우리에게서 직접 알아내시며 그 죄들을 솔직하게 고백케 하시기도 함을 알자. 이는 그가 몰라서가 아니라, 간사하고도 교묘한 우리를 겸손케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심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너를 창조한 너의 주인이며 너의 은인이 되는 내가 너에게 그것을 먹지 말라고 명했었다. 네가 저지른 바와는 정반대로 명했던 것이다”라고 하시므로 전에 그에게 주셨던 명령을 상기케 하시는 것이다. 죄는 계명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보면, 가장 분명하고도 가장 죄악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거울을 아담 앞에 제시하신 것이다. 우리도 그 거울을 통해 우리의 얼굴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자에게 하신 질문은,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13절)라는 것이었다. “너도 네 허물을 인정하고 고백하겠는가? 악한 일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금지된 실과를 먹은 자들, 특히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처럼 먹도록 유인한 자들에게 하는 질문이며, 그들이 저지른 바를 신중히 숙고해 보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하자. 금지된 실과를 먹는다고 하는 것은 곧 위대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그 공의로운 법을 어기는 일이다. 또한 신성하고도 가장 엄숙한 계약을 위반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기고, 그의 진노하심과 저주를 받게 되어 우리의 고귀한 영혼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먹도록 유혹한다는 것은 우리가 마귀의 일을 해 주는 것이요, 다른 사람의 죄에 공모한 죄인이 되며, 그들의 멸망에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는가?”고 자문자답해 보자.
Ⅱ. 그들은 죄를 고백하는 중에 어떻게 그 죄를 변명했는가? 무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그들의 죄를 증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기들 스스로가 고소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모든 것을 압도하시기 때문에 아담은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는 “내가 그리하였나이다”라고 실토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대답에서 참회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죄를 괴로워하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대신 죄를 변명하고, 그 수치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아담은 그 모든 책임을 자기 아내에게 돌렸다. “그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면서 먹으라고 조르기에, 단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내가 먹었을 뿐이니이다.” 이 얼마나 경박하고 어리석은 변명인가! 아담은 아내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교육했어야 했다. 아내와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정도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죄에 결코 빠지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배우자. 또 시험에 들게 하는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이 세상의 가장 좋은 친구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양심에 어긋나거나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행동을 하자는 집요한 요구에 결코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을 알아두자. 그러나 이것이 아담이 행한 가장 나쁜 행동은 아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만 아니라, 무언으로 하나님 자신까지도 비난하기 위한 어조를 썼다. 즉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나의 반려자, 나의 안내자, 그리고 나의 벗으로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녀가 나에게 그 나무 실과를 주었으니 먹지 않을 도리가 없었나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하나님이 자기 죄에 대한 공범자였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에게 여자를 주었고, 그녀는 그에게 실과를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악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 있는 구실이나 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셨으니 우리는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상한 기질이 있음을 주목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귀, 영화, 그리고 연고자들을 주셔서 우리가 그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기화로 그에게 죄를 짓고 있다. 우리가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데 대해 하나님의 섭리를 원망하는 대신에 우리에게 주신 이들 크신 은사를 악용한 우리 자신을 원망해야 마땅한 일이다.
2. 하와는 모든 책임을 뱀에게 전가했다. “뱀이 나를 꾀었나이다.” 죄는 누구도 원치 않는 더러운 것이요, 치욕의 표시다. 죄의 쾌락을 즐겨 맛보려는 자는 죄의 책임과 수치도 즐겨 당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와는, “당신이 지으셔서 우리가 있는 낙원에 들어오게 하신 그 간사한 피조물이 나를 꾀었나이다”라고 했다. 또는 “나로 하여금 실수하게 했나이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는 우리의 과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음 사실을 배우자.
(1) 사탄의 유혹은 모두가 사기술이요, 그의 이론은 모두가 허위이며, 그의 꾐은 모두가 협잡이다. 사탄이 아름다운 말을 한다고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죄는 우리를 속이고 또 속여서 우리의 권리를 빼앗아간다.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죄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롬 7:11; 히 3:13 참조).
(2) 사탄의 간계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하여 우리 자신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는 유혹자이지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곁길로 유인하고 꾀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욕인 것이다(약 1:14). 그러므로 우리가 속아서 죄를 지었다고 하여 우리의 슬픔과 굴욕을 경감시키려 하지 말자. 오히려 철천지 원수인 자에게 속아야만 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울분을 더하게 하자. 그런데 왜 법에 따라 언도를 내리고 집행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피고석에 있는 모든 죄수들이 해야 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무의미한 말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말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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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내려진 선고(창 3:14-15)
그들의 고백을 통해 죄수들의 죄상이 드러났고, 게다가 그 재판장은 그들을 알고 있으며 그의 지식은 무오하여 판결을 저지할 실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즉석에서 언도를 내리셨다. 위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죄의 시작이 되었던) 뱀에게 언도를 내리신다. 하나님은 뱀을 심문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했는지, 왜 했는지를 묻지도 않고 즉결 언도를 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짞 뱀은 이미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고, 그의 악의적이고도 악질적인 죄상이 악명 높았으며 소돔의 사람들처럼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놓고 공표했기 때문이다.
짟 또한 용서받을 희망조차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개의 여지조차 없었기 때문에 뱀에게 뉘우치고 겸손해지도록 하는 따위의 말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상처는 찾아낼 필요가 없었던 것인데, 그것은 치유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타락한 천사들은 그들이 사람을 꾀어 거역하도록 유혹하기까지는 그 처지가 그렇게 절망적이라는 선고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Ⅰ. 사탄이 이용하는 유혹자에게 내려진 선고는 뱀에게 내려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뱀은 야수적 동물이다. 뱀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는데, 이제는 도리어 사람에게 해를 끼치도록 악용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분노와 아담과 하와의 상처받은 명예에 대한 질투심을 입증하기 위해 저주와 치욕을 뱀에게 내려 신음하고 번민케 하시는 것이다(롬 8:20 참조). 마귀의 도구는 마귀의 형벌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하여 악한 자의 육체는 단지 불의의 도구에 불과했더라도, 그 수석 지배인인 영혼과 영원한 고통을 함께 나누게 된다. 사람을 죽인 소까지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했다(출 21:28, 2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얼마나 죄를 미워하며, 더욱이 남을 꾀어서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자를 그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저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음이라”(왕상 14:16)는 것은 여로보암의 이름에 찍힌 영원한 낙인이었다.
1. 이제 여기서 뱀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네가 모든 육축들보다 더욱 저주를 받으리라”. 땅에 기는 생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는 그들에게 복을 내렸던 것이다(창 1:22). 그러나 죄가 복을 저주로 바뀌게 하고 말았다.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으리라”(14절). 부정(不淨)한 간교는 흔히 사람들에게 큰 저주가 된다. 또 사람이 악한 짓을 행하려고 계략을 쓰면 쓸수록 더 큰 피해를 끼치고, 결과적으로는 그들도 더 큰 화를 입게 되는 것이다. 간교한 유혹자들은 태양 아래 있는 피조물 중 가장 저주받은 피조물이다.
2. 또 뱀은 사람의 비난과 적개심을 사게 되었다.
(1) 그는 간악하고 비열한 짐승으로서 영원히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즉 “너는 배로 다니리라. 더 이상 발로 다니는 것도 아니며 반쯤 일어서서 다니는 것도 아니라, 배가 땅에 붙어 있게 되리라. 흙을 너의 먹이와 함께 먹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하셨다. 이는 매우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뱀의 범죄는 먹지 말아야 했던 하와를 꾀어서 먹게 한 죄다. 그의 형벌은 그가 먹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흙을 먹을지니라.” 이것은 천하고도 비열한 처지를 의미할 뿐 아니라, 초라해지고 불쌍해진 영까지도 의미한다. 용맹스러움이 사라진 자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는다”는 말이 있다(미 7:17). 뱀의 저주는 세상의 속물들이 택하는 것이며, “티끌을 탐내는” 것이 그들의 성품이라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암 2:7) 그들의 망상이 이것을 택했으니, 저들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되리라.
(2) 그는 독이 가득한 짐승이요, 영원히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15절). 사람을 위해 지음 받은 하등한 피조물이 사람에게 대적하게 되고 사람이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저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뱀이 받은 저주의 한 부분이다. 뱀은 사람을 해치며, 흔히 그 발꿈치를 물어뜯는다. 이것은 뱀이 그 이상 더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말발굽을 물어뜯는다는 말에서 더 잘 알 수가 있다(49:17). 그러나 사람은 뱀을 이기며, 그 머리를 상하게 하여 죽여버리고 독사의 온 족속을 송두리째 멸족시키려는 목표를 세운다. 비록 뱀이 교활하고도 위험천만한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류를 멸망시킬 만큼 우려가 되게 하시지는 않았다(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더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뱀에게 내려진 바로 그 저주의 결과라고 하겠다. 뱀에게 내려진 이 선고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즉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리라”(시 91:13)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즉 “뱀을 집으리라”(막 16:18)는 것과 바울이 그 손을 뱀에게 물렸어도 상하지 않은 것으로 더욱 뒷받침이 되는 것이다.
뱀과 여자는 서로 금지된 실과에 대해 말을 나누고 그들 사이에 놀라운 합의가 있게 된 바로 조금 전까지는 서로 매우 친밀하고 다정했었는데, 이제 순식간에 다시는 화해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 죄악된 우정은 이같이 반드시 철천지원수로 끝맺게 마련임을 명심하자. 악으로 맺어진 자들의 연합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Ⅱ. 이 선고는 마귀를 겨눈 것으로 볼 수 있다. 마귀는 이 장면에서 뱀을 자기의 도구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수석 지배인 노릇까지 했다. 뱀의 입을 빌려서 말한 마귀는 이 뱀의 편에 서서 얻어맞게 된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과 마찬가지로 이 선고의 중심적인 의도는 마귀에게는 캄캄한 면을, 그리고 우리 시조와 그 후손에게는 광명의 면을 두시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대단히 놀라운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1. 하나님과 사람의 대원수인 마귀에게 영구적인 화가 내려진다. 뱀의 배후에서 마귀는 다음과 같은 선고를 받는다.
(1) 마귀의 지위가 하락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천사를 마귀로 바꾼 죄는 교만이다. 여기서 뱀은 그 배로 기어다니며 티끌을 핥아야만 하는 비천한 처지로 표현된 여러 가지의 고행으로 그 교만이 정당하게 벌을 받게 된다. “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떨어졌는고!”(사 14:12) 하나님보다 높게 되고자 하여 그를 반역하는 데 괴수 노릇을 하는 자는,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멸을 당하고 짓밟히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의 교만은 그 인간을 비천하게 만들며, 스스로 겸손하려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법이다.
(2) 모든 인류의 증오와 혐오를 받게 된다. 사탄의 세력에 유혹당한 자들까지도 그를 미워하고 혐오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자기 스스로를 지켜 이 사악한 자가 자기를 만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요일 5:18). 그러므로 마귀는 전쟁 상태와 또 화해될 수 없는 적대 상태에 있도록 저주받는 것이다.
(3) 결국에는 위대하신 구속자에게 멸망을 받는다. 이것은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것으로 상징되어 있다. “그의 간교한 술책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요, 그가 찬탈한 힘은 완전히 말살될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세력을 침해한 자라는 낙인을 영원히 면치 못하리라.” 이러한 선고를 받음으로써 그는 멸망의 때가 오기 전에 이미 고통을 받은 것이다.
2.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 사이의 영원한 싸움이 인간 세계에 시작되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싸움이 선포된 것이다. 하늘에서는 이미 미가엘 천사와 용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다(계 12:7). 이 적대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백성은 은혜와 타락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게 되었다. 마귀는 그들의 타락을 이용해 성도들을 공격하고, 싸우고, 키질하며 삼키려 한다. 그 반면에 성도들은 그들의 은혜의 작용으로 그들과 대적하고, 격투하며, 그 불길 같은 공격을 소멸시키고 쫓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두움은 결코 화해할 수 없다. 사탄과 성별된 영혼도 결코 화해할 수 없다. 이것들은 서로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2) 이 세상의 악한 자와 경건한 자 사이에는 분쟁이 그칠 날이 없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한다(시 139:21, 22).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자들의 분노와 악의는 바로 이 적대심의 열매인 것인데, 이런 싸움은 성도가 하늘나라의 편에 있고 악한 자가 지옥의 편에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더라도 놀랄 것은 없다(요일 3:13).
3. 여기에는 타락한 인간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내실 그리스도에 관한 은혜로운 약속이 나타나 있다. 위에서 내린 선고는 뱀에게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시조들도 틀림없이 듣고 있었고, 그들에게 은혜를 암시한 것이며, 그들은 자기들 앞에 있는 소망의 문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내려진 그 다음의 선고는 저들을 위축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새 아침이 밝아온 것이다. 즉 상처를 입자마자 곧 치료책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이는 기록된 바와 같이(히 10:7) “경(經)의 서두에”(한글 성경에는 “두루마리 책에”), 곧 성경의 처음에 이미 “하나님의 뜻을 행할”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시조와 홍수 이전의 조상들은 이 약속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았고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 약속의 특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그들에게 주신 세 가지 사실이 나타나 있다.
(1) 그의 성육신.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 곧 그 여자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의 족보(눅 3장)는 아담의 자손임을 보이기 위해 그에게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가 그리스도를 자기의 후손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이는 마귀가 꾄 것도 바로 그 여자요, 아담이 그 책임을 전가한 것도 바로 그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셨다. 비록 그 여자가 최초의 범법자이기는 해도 그녀는 해산(解産)을 함으로써, 곧 그녀에게서 계승될 약속된 후손을 낳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딤전 2:15).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여자만의, 곧 동정녀의 씨가 되어야 했는데, 그것은 타락한 우리의 본성에 물들지 않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가 보내심을 받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었으니” 이는 약속을 이루려 하심이었다(갈 4:4). 그러므로 우리 구주께서 “그 여자의 씨가 되시고 우리의 뼈 중의 뼈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은 죄인들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히 2:11, 14).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있는 부정한 존재이니, “부녀에게서 난 자”이기 때문이다(욥 25:4). 그러므로 “그의 날은 괴로움이 가득한”(욥 14:1)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씨가 우리를 위해 죄와 저주를 담당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두 가지에서 구원받는다.
(2) 그의 고난과 죽음. 그것은 사탄이 “그의 발꿈치를 상한다”는 것, 곧 그의 인성(人性)을 상하게 하리라는 것 속에 나타나 있다. 사탄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하여 죄 가운데로 끌어들이려고 유인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께서 고민 중에 계실 때에 위협을 가해 낙심케 하려 한 것은 사탄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룟 유다의 심중에서 그리스도를 배반케 하고, 베드로가 그를 부인하게 하고, 대제사장들이 그를 고소하게 하고, 거짓 증인들이 그에게 죄를 씌우게 하고, 빌라도가 그를 정죄케 하는 등 이런 모든 것을 통해 구세주를 멸하여 훼방하려는 것은 바로 마귀였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그리스도는 오히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망시켰다(히 2:14). 그리스도의 발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 그의 발꿈치는 상했고,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성도들의 고난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마귀는 그들을 시험하고, 옥에 던져 핍박하고, 죽이며, 더 나아가서 그들의 고난에서 함께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땅 위에서 발꿈치를 상한 때에도 그의 머리는 하늘에 있어 안전하니 감사한 일이다.
(3) 이로써 그리스도가 사탄을 이기심. 사탄이 일시적으로 그 여자를 짓밟고 모욕했지만, 그 여자의 후손이 때가 차서 일어나 그녀의 원수를 갚고 그를 짓밟아 그를 쳐부수고 그를 사로잡아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이다(골 2:15). “그가 그의 머리를 상하리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마귀의 모든 술책과 권세를 파괴하고 그 나라와 세력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시험을 좌절시켰고, 그 손아귀로부터 영혼을 구원해 내셨으며, 사람의 몸에서 그를 몰아내었고 또한 무장한 강자를 몰아내었으며 그의 전리품을 분리시켰다. 그가 죽음으로써 그는 마귀의 왕국에 결정타를 때리셨다. 곧 이 짐승의 머리에 다시는 치료될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이다. 그의 복음이 기반을 잡음에 따라 “사탄이 떨어지고”(눅 10:18) “결박”을 당하는 것이다(계 20:2). 그의 은혜로써 그는 사탄을 주의 백성들의 발 아래 짓밟히게 하고(롬 16:20), 머지않아 불속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계 20:10). 그리하여 마귀의 영원한 멸망은 택함 받은 남은 자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기쁨과 영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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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가 받은 선고(창 3:16)
여기서는 죄로 말미암아 하와에게 내려진 선고를 보게 된다. 그 여자는 두 가지 선고를 받는다. 즉 고통과 종속의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쾌락과 교만을 충족시키려 했던 자기 죄에 대한 응분의 처벌이다.
Ⅰ. 그녀는 이제 고통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다. 이 고통은 특별한 것으로서 아이를 낳는 고통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성이 가장 당하기 쉬운 슬픔과 공포의 온갖 행적과 그들이 당해야 하는 공통된 재난이 포함되어 있다. 죄가 이 세상에 고통을 몰고 왔고, 세상을 눈물의 골짜기로 만들었으며 인간의 머리에 근심의 소나기를 부으며, 심령에는 슬픔의 샘을 열게 하여 이 세상을 대홍수로 범람케 한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 우리가 죄를 몰랐더라면 슬픔이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격언, 곧 성경의 격언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해산의 고통은 죄의 결과다. 해산의 수고를 하는 여자의 모든 신음과 진통은 죄의 숙명적 결과를 큰 소리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 모두가 금단의 실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 고통이 “크게 더하겠다”고 선고되어 있다. 현세의 모든 고통이 다 그와 같다. 그중 많은 것들이 우리 인생이 마땅히 져야 할 온갖 재난이며, 때로는 비가 온 후 구름이 다시 몰려오듯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죄가 있을 때 고통도 더하게 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죄와 고통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악이다. 해산의 고통은 증가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해산 전 임신기간 중의 불편(임신 당시의 고통), 해산 후 키우는 수고와 고통이 포함되기 때문이며, 또한 아이를 낳은 후 그들이 혹시 악하고 미련해지면 그들을 낳은 어머니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한다. 한 가지 슬픔이 지나가면 또 다른 슬픔이 뒤따르는 법이다.
2. 우리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더하리라.”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께서 그같이 하신다. 모든 고통 속에서 우리를 침묵케 하기 위함이다.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마땅히 받아야 한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화시키기 위해 행하시는 것이며, 죄로 인해 겸손해지게 하고, 모든 고통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과 인연을 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고통 속에서도 위로를 받으며, 고통으로 인해 받는 우리의 유익은 매우 풍성하기 때문에 능히 그 고통과 평형이 된다.
Ⅱ. 그녀는 종속 상태에 놓인다. 창조 때에는 남자와 동등했던 여자가 죄, 즉 금한 것을 먹음으로 인하여 낮아진 것이며 “주관하는 것”을 금지당했다(딤전 2:11, 12). 특히 아내 된 자는 그 남편의 주관하에 놓이게 되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 같은 법에 관한 실례를 민수기 30장 6-8절에서 볼 수가 있다. 거기에는 아내가 한 서원을 남편이 자기 마음대로 취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선고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2)는 명령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써 그 같은 의무는 형벌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언제나 지혜와 사랑으로 다스릴 수가 있었을 것이고, 여자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그녀 역시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순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배라고 하는 것이 불평의 원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한다. 만일 하와가 금한 실과를 먹지 않고, 또한 그 남편으로 하여금 그것을 먹도록 꾀지 않았더라면,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것을 불평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혹하다 하더라도 결코 불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불평을 하려면 그렇게 만든 죄를 원망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자기 남편을 경멸하고 불순종할 뿐 아니라 그를 다스리려는 아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고에까지 불복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Ⅲ. 여기서는 이 선고의 진노 속에 긍휼이 어떻게 섞여 있는가를 보게 된다. 여자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여자가 예속되었으나, 이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지 낯선 자나 적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 선고도 그녀를 멸망케 하는 저주가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뱀과 여인 사이처럼 적의가 있는 것은 아님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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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받은 선고(창 3:17-19)
여기에는 아담에게 내려진 선고가 있다. 이것은 범죄 사실의 설명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한즉”(17절). “그 여자가 그것을 내게 주었나이다”라고 말하여 아담은 아내에게 그 책임을 돌림으로써 자기의 잘못을 변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 하와가 그를 유혹할 수는 있었어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아담으로 하여금 그것을 먹도록 졸라댄 것은 하와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은 그의 잘못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어리석은 변명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는 기각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내릴 선고의 근거가 되고 말 것이다.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라”(눅 19:22).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이 선고로써 그의 주거지가 저주를 받는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 그 저주의 결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주거지가 변경될 것이 암시되었다. 그는 더 이상 훌륭하고 복된 낙원에서 거하지 못하게 되고 쫓겨나서 보통 땅, 게다가 저주받은 곳으로 옮겨가게 된다. 창조 시에는 온 땅이 복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되어,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땅의 어떤 부분은 폐허가 되어 인간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가 죄를 짓지만 않았더라면, 위로와 축복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자녀들에게 땅을 주시어 그들이 거처하기에 편안하도록 만드셨다. 그러나 죄가 땅의 속성을 변모시켰다. 사람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받았다. 즉 땅은 인간의 불명예스런 거처가 되었다. 인간의 비천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의 기초는 티끌 속에 있다. 땅은 불모의 메마른 거처다. 땅의 자연적 소산은 잡초뿐이요 가시덤불이며, 구역질나거나 독기 있는 것들이다. 땅에서 난 모든 좋은 열매는 사람이 그 기술과 노력으로 탈취한 것들뿐이다. 풍성하게 열매 맺는 것이 땅의 축복이며 사람에게는 유익한 것이었는데(1:11, 29), 이제 결실을 맺지 못함은 땅의 저주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형벌로 말미암은 것이다. 애당초 땅이 창조되었던 날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죄가 비옥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어 버렸으며, 사람은 “들나귀처럼 되어서 들나귀의 땅을 차지하니, 들로 그 집을 삼고 메마른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다”(욥 39:6; 시 68:6). 아마 하나님께서는 이 저주의 얼마간은 탕감해 주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땅은 영영토록 황무지가 되어 가시덤불과 엉겅퀴 외에는 아무것도 산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땅은 저주를 받았다. 즉 마지막 때, 곧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타게 되고, 그네들의 죄악의 분량이 다 차게 될 때에는(벧후 3:7, 10) 파멸될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선고 속에는 긍휼도 포함되어 있음을 살펴보자.
(1) 아담 자신은 뱀과 같이 저주를 받지 않았다(14절). 땅만이 그로 인해 저주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축복과 거룩한 씨까지도 주었다.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사 65: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 복을 마련해 주셨으므로 직접적으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저주를 받는다. 말하자면 2차적인 저주를 받은 셈이다.
(2) 그는 여전히 땅 위에 있다. 땅이 입을 열어 그를 삼키지 않았다. 단지 땅은 과거의 상태와 다르게 되었다. 그가 당초의 순수성과 정직함에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하듯이, 땅도 창조 당시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잃었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의 거처가 되는 것이다.
(3) 이 땅에 내려진 저주는 이 세상의 사물에서 얻고자 하는 모든 행복을 끊어버리고, 윗세상에 있는 것에만 축복과 만족을 바라도록 그를 지도하고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2. 그의 직업과 향락은 오히려 그에게 고통을 가중시킨다.
(1) 그가 하는 일은 이제부터 수고거리가 될 것이며, “얼굴에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19절). 죄를 짓기 전에는 그의 일이 언제나 그에게는 즐거움이었으며, 아무런 힘든 노동을 하지 않고도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노동이 아주 힘들고 고된 것이 되고, 몸은 쇠약해진다. 그가 돌보는 일은 괴로움이 되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땅을 황무지로 화하게 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한, 땅에 내려진 저주는 그의 직업을 훨씬 더 어렵고 고생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노동은 우리의 의무이니 신실하게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 일은 우리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의 일부분이니, 감히 소홀히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② 노동에서 오는 불편함과 고됨은 우리가 받아야 할 당연한 형벌이며, 참고 순종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죄질보다 가벼운 형벌이므로 조금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염려와 수고로 우리의 형벌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보다 더 무거운 것으로 삼지도 말자. 오히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머지않아 휴식이 있을 것을 기대함으로써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며, 땀을 씻어 버리는 것을 배워야겠다.
(2) 그 음식이 이제부터는 (전과 비교해 볼 때) 그에게 불쾌한 것이 된다.
① 음식 재료가 바뀐다. 그는 들에서 나는 채소를 먹어야 하며, 더 이상 에덴 동산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짐승과 같이 짐승의 동료로 변모하여 “하나님이 다스리는 줄을 알기까지” “소처럼 풀을 먹을”(단 5:21) 것이다.
② 음식을 먹는 방식이 바뀐다. “수고하고(17절), 얼굴에 땀이 흘러야(19절)” 먹게 되었다. 아담은 자기가 먹은 금단의 열매와 그 때문에 당한 죄와 욕됨을 기억하면서, 평생토록 고통을 맛보면서 먹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첫째로, 인생은 많은 불행과 재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 비극들은 얼마 안 되는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에 비하면 훨씬 더 괴로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질병이나 서글픔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먹지 못하며(욥 21:25), 모든 인간, 곧 가장 선한 자들이라고 해도 죄로 말미암아 수고하여 먹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자들, 곧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자들까지도 그들의 기쁨 가운데는 슬픔이 있다. 많은 질병과 재앙과 죽음이 여러 가지 형태로 죄와 더불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오늘날까지도 휩쓸고 있다.
둘째는, 죄로 인한 온갖 비참한 결과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인정되어야만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원망하랴”(애 3:39). 그러나 역시 이 선고에도 긍휼이 내포되어 있다. 즉 땀을 흘리기는 하겠지만, 잠자리에 들듯이 인간이 땅에 돌아갈 때 그 수고는 그의 안식을 더욱 즐겁게 해 줄 것이다. 고통을 겪으나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고통이 있겠으나 그 고통으로 빵을 먹게 되며, 그 고통 속에서 그 마음이 강건케 될 것이다. 그는 뱀과 같이 흙을 먹으라고 선고받은 것이 아니다. 들에 있는 채소를 먹으라고 한 것뿐이다.
3. 그의 수명 역시 짧아진다. 그가 사는 날이 많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날수가 적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다(비록 삶이 불유쾌한 것일지라도). 그 죽음은 선고의 결말이기 때문이다. “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흙에서 취해 만든 부분, 네 육체는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는 네가 흙이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애초의 육체의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흙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따라서 불멸하는 것을 허락해 주심을 취소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주어졌던 능력을 거두어가기만 하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흙이라”고 했으니, 그것은 현재 인간의 마음의 부패와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너의 귀중한 영혼은 이제 잃어버리고, 몸은 흙 속에 파묻히어 육욕에 빠지고 말았다. 영혼은 영적으로 또 거룩하게 지음을 받은 것인데, 이제 육욕적이면서도 세속적인 것이 되고 말았도다.” 따라서 그에게 내린 심판은 “네가 흙으로 돌아가리라. 너의 육신은 너의 영혼의 버림을 받고 흙덩이가 되리라. 그리하면 몸은 자기 본향인 무덤에서 살게 될 것이며, 땅의 흙과 섞이고 말 것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흙이다”(시 104:29). 땅은 땅으로 흙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인간은 비천하고 허약한 피조물이다. 티끌처럼 미미하다. 또 저울 위의 티끌 몇 개처럼 가볍다. 무상하다기보다는 하찮은 존재다. 티끌처럼 나약하니 견실성이 도무지 없다. 우리의 힘은 돌의 힘과 같지 아니하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이것을 아시니,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인간은 참으로 세상 진토 중의 으뜸이지만(잠 8:26), 역시 티끌에 불과하다.
(2) 사람은 무덤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는 피조물이다. 먼지는 들려서 잠시 동안 작은 구름 속에 머물러 있어, 먼지를 들어올린 바람으로 받쳐져 있는 동안은 높은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끝내 그 힘이 다하면 다시 떨어져 떠났던 땅으로 되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제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크나큰 먼지덩이에 지나지 않으며, 끝내는 자기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3) 죄가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롬 5:12).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영원불멸의 불꽃을 맡기셨으니, 끊임없이 인내하여 선행을 계속했더라면 영원한 불꽃으로 날아올라갔을 텐데, 어리석게도 고의적인 죄로 불꽃을 꺼 버리고 말았으니, 이제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는 사망의 쏘는 것이다”(롬 6:23; 고전 15:56).
Ⅱ. 우리는 두 가지를 더 생각해 보지 않고는 우리의 시조에게 내려진 이 선고를 넘어갈 수 없다. 이 선고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깊이 관계되어 있고, 오늘날까지도 절실히 느끼는 바가 많다.
1. 아담의 영혼과 그의 죄악된 자손이 당하는 죄의 슬픈 결과가 이 선고에 의해 얼마나 알맞게 묘사되고 상징되어 있는가 함이다. 거기에는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뜻이 있으리라. 물론 육체에 미친 재난만 언급되어 있지만, 그것은 영적 비극의 한 전형, 곧 영혼 속에 깃들인 저주였다.
(1) 여자가 해산할 때 겪는 진통은 죄지은 양심이 당하는 공포와 고통을 뜻하며 죄의식을 깨우치는 것이다. 욕정을 잉태함으로써 이런 고통은 심히 더해지며, 해산 때의 여자의 진통같이 머지않아 죄인에게 임하는 것이다.
(2)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하도록 격하된 것은 죄의 결과로 영적인 자유와 의지의 자유가 상실됨을 뜻하는 것이다. 죄가 영혼을 주관함은 남편이 그 아내를 주관하는 것과 비할 수 있다(롬 7:1-5). 죄인의 소망은 죄에 있으니, 그는 자기가 종 되는 것을 좋아함이다. 그리하여 죄가 그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3) 땅이 저주를 받아 불모가 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된 것은, 타락하고 죄악된 영혼이 선에는 불모지가 되고 악에는 결실을 많이 맺음을 나타내는 적합한 상징이다. 엉겅퀴가 너무 무성하게 자라나서 쐐기풀이 그 얼굴을 덮으니, 이는 “저주함에 가까운” 것이다(히 6:8).
(4) 수고와 땀은 육신이 허약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적인 일에 힘씀에 있어서 당하게 되는 어려움을 말해 준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지금은 매우 어려워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미할지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5) 그의 음식이 그에게 쓰게 되었다는 것은, 생명이며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은총의 위안이 그것을 갈구하는 영혼에 결핍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6) 그런 영혼은 육신처럼 이 세상의 흙으로 돌아간다. 이는 그런 영혼의 취향이 그 같은 방향이며, 영혼은 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요 3:31).
2.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죽으심과 고난을 통해 우리 시조에게 내려진 선고에 감탄할 만큼 만족한 보응을 하셨다.
(1) 해산하는 고통은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혼의 고통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사 53:11). 또 그가 사망의 고통(행 2:24) 곧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wjdivn)이라는 고통을 받았음도 볼 수 있다.
(2) 종속이라는 것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 나셨다(갈 4:4).
(3) 저주가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시고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다(갈 3:13).
(4) 가시덤불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5) 땀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핏방울 같은 땀을 흘려 주셨다.
(6) 고통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는 고통의 사람이었고, 그의 영혼도 심히 번민했고 고통당하셨다.
(7) 죽음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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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라는 이름(창 3:20)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이름하여 아담이라 불렀으니, 이는 붉은 흙이라는 뜻이다. 아담은 그의 지배권의 징표로서 여자에게 이름을 주어 하와라고 불렀다. 이는 생명이란 뜻이다. 아담은 “죽을 몸”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하와는 “살아 있는 영혼”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이름이 주어진 이유가 있는데(어떤 이는 기록자 모세에 의해서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담 자신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이기(즉 되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에는 아담이 그녀를 아내로서 여자라고 불렀는데, 이제 여기에서는 어머니로서 하와(생명)라고 부른다.
Ⅰ. 이것이 만일 하나님의 지시로 된 것이라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새로운 이름처럼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이요, 계약의 표다. 또한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 하나님의 노하심에도 불구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번복하시지 않았다는 확증이다. 마찬가지로 이는 바로 전에 한 약속의 여인, 곧 이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확증인 것이기도 하다.
Ⅱ. 이것이 아담이 홀로 한 일이라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의 신앙의 확증이었다. 물론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저주를 멸시한다든가 무시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에 대한 겸손한 확신과 의지하는 마음에서 행했던 것이다.
1. 하나님께서 그런 죄인들을 모든 산 자의 부모가 되도록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샘은 오염되어 독이 가득 찬 물밖에는 내보낼 수 없는데도, 그 모든 인생과 그 인간성의 근원을 즉각적으로 폐쇄해 버리지 않는 집행 유예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찬미하자.
2. 구속주, 즉 약속된 씨의 축복이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 즉 생명이라고 부름은 이 축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 약속된 씨가 모든 선한 자의 생명이 되며, 그를 통해 이 땅 위의 모든 가족들이 축복받게 될 것이고 그런 희망 가운데 그가 성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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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창 3:21)
인간의 시조들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신다는 기사를 계속 보게 된다. 비록 하나님은 불순종의 자녀들을 바로잡으시고 그의 진노의 표적 아래 두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과 의절하시지 않고, 인자하신 아버지처럼 들의 채소를 그들의 식물로 주시고 “가죽 옷”을 그들의 옷으로 마련해 주신다. 탕자의 아버지도 아들이 돌아오자(눅 15:22, 23) 그와 같이 해 주었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를 기뻐하셨더라면 이런 일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Ⅰ. 옷은 죄와 더불어 들어온 것이다. 만일 죄가 벌거벗게 하고 벗은 것이 우리의 부끄러움이 되게 하지 않았다면 옷을 입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빈곤과 악행을 상징하는 옷을 자랑으로 여길 이유가 조금도 없다.
Ⅱ. 하나님께서 우리 시조들에게 옷을 마련해 입히셨을 때에는 따뜻하고 튼튼한 것이었지만 매우 소박한 것이었다. 자색 예복이 아니라 다듬지 않은 가죽으로 지은 것이었다. 후에 시온의 딸들이 창안해 내어 지어 입고 자랑하던, 곱게 다듬고 수놓은 사치스러운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천하게 옷을 입은 가난한 자들도 불평하지 말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게 여길 것을 배우자.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옷을 잘 입은 부자들은 옷을 화려하게 꾸며서 자랑하지 말 것을 배워야 하겠다(벧전 3:3).
Ⅲ. 우리에게 음식뿐만 아니라 입을 옷까지도 마련해 주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를 드려야 한다(28:20). 양털과 섬유는 “곡식과 포도주”처럼 모두가 그의 것이다(호 2:9).
Ⅳ. 이 가죽옷에는 의미심장한 것이 있었다. 짐승의 가죽이라 했으니, 그 짐승들이 그들의 목전에서 죽어야 했다. 그리하여 죽음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고(전 3:18 참조), 그들 자신도 죽어야 할 짐승들임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 짐승들은 먹기 위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제사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후세에 주님이 오셔서 단 한 번의 위대한 희생의 제물을 드린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로 죽은 것은 희생의 제물, 곧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이 제물들은 하나님과 사람이 나누어 가졌으니 화해의 표였다. 즉 고기는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물로 드리고 그 가죽은 사람에게 옷으로 주셨으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향내 나는 제물로 드린 바 되고, 그 때 우리는 옷과 같이 그의 의(義)를 옷입어 우리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린다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된 앞치마를 해 입었으나, 너무나 좁아서 “능히 싸지 못할” 것이었다(사 28:20). 그런 것이 더러운 누더기 같은 우리 자신의 전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풍족하고도 질기며 오래갈 수 있는 알맞은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 그와 같은 것이 그리스도의 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롬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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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에서의 추방(창 3:22-24)
하나님은 범죄자들에게 선고를 내리신 후 그 일부분은 즉시 집행하심을 여기서 볼 수 있다.
Ⅰ. 그들이 한 일에 대해서 그들은 치욕적인 나무람을 들음으로써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 앞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니 그것이 얼마나 당연한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도다! 그가 그럴 듯한 신이 되었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 금단의 과실을 먹어서 그가 어떤 이득을 얻었는지 두고 보라.” 이 말은 그들을 일깨워 겸손해지도록 하고,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깨달아 회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자기들은 마귀의 말에 처참하게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앎으로써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추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수치로 저희 얼굴에 가득케 하사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게 하신다”(시 83:16).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심케 하기 위해 이와 같은 당혹 속에 그들을 놓아 두신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자기 스스로를 책망하는 일이니 “죄로 말미암아 네가 어떤 열매를 얻었느냐?”(롬 6:21) 죄의 길에서 나 스스로에게 어리석게 약속했던 것을 내가 과연 얻었는가? 결코 아니다. 내가 바라던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다.
Ⅱ. 그들이 버림받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처사인가! 이것은 “네가 들에서 나는 채소를 먹으리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 암시되어 있는 선고의 한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낙원에서 쫓아낸 이유. 그것은 그가 손을 내밀어 지식의 나무의 열매까지 따먹고(이전에 율법으로 지식의 나무를 금하신 것같이 그 열매는 이제 선고로써 금지되었다), 신성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선고를 무시하고 영원히 살리라고 스스로 속아 자만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을 주목하자.
(1) 그리스도인의 특권의 표적과 그림자를 붙잡기 위해 그 실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고 마는 자들의 어리석은 버릇이 있다. 계약의 조건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자신의 명성을 위해 계약의 표시만을 좋아하는 것이다.
(2) 그런 자들에게 그것이 거부된 것은 정의일 뿐 아니라 자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유할 자격이 없는 것을 찬탈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들의 죄를 보다 더 흉악하게 만들고, 그릇된 기초 위에 그들의 희망을 세움으로써 개심을 더 어렵게 하고, 그들의 대망을 보다 비참하게 하기 때문인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에게 절연장을 주어 희락의 동산에서 쫓아내는 방법. 하나님은 그를 쫓아 버리시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1) 동산에서 보통 땅으로 쫓아내셨다. 이 말씀은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내어보내셨다”(23절). “하나님은 그 사람을 쫓아내셨다”(24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셨으며, 동산은 그에게 합당한 곳이 아니니 더 이상 동산에서 머물러 즐길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곳을 매우 좋아하여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쫓아내셨으며” 내보내신 것이다. 이것은 그와 그의 죄지은 족속들이 낙원의 복이며 영광이었던 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아담이 무죄 상태에 있을 때 누렸던, 사람의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기쁨의 징표가 이제 단절된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친교가 허락되지 않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즉 하나님의 성령이 떠났을 때의 삼손처럼 아담은 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아담의 교분은 줄어들어 잃어버려진 자가 되었고, 사람과 조물주 사이에 있었던 교통은 막히고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런 영광을 받을 가치가 없고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합당치 못했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과 모든 인류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친교를 박탈당하고 상실했다.
그러나 에덴에서 쫓아내어서 어디로 보냈는가? 하나님은 능히 그를 세계 밖으로 쫓아내실 수도 있었고(욥 18:18), 죄지은 천사들을 하늘의 낙원에서 쫓아냈을 때에 지옥으로 보냈듯이(벧후 2:4) 그를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산에서 쫓아냈을 뿐이다. 사람은 그가 지음 받은 그 땅으로 보내졌을 뿐이다. 그는 고통을 당할 곳이 아니라 수고할 곳으로 보내졌다. 그는 무덤이 아니라 경작할 땅으로, 토굴이나 감옥이 아니라 노역소(勞役所)로 보내졌다. 그는 쇠사슬을 끌어야 할 곳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다. 그가 땅을 경작하면 그 대가로 거기서 나는 열매를 먹게 된다. 그가 취함을 받은 흙과의 교제는 선한 목적에 이용할 수 있으며, 그를 겸손케 하고, 그에게 다가올 종말을 생각나게 하는 데 유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 시조가 그 무죄 상태라는 특권은 빼앗겼으나 절망할 만큼 버림받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셔서 그들에게 새로운 조건으로 둘째 시험 단계를 두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2) 그를 밖으로 내쫓아 못 들어오게 하여, 다시 들어올 희망을 가지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 동편에” 무섭고도 당해 낼 수 없는 힘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군사 “그룹들”과 어느 방향으로나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 곳은 아담이 보냄을 받은 곳과 인접해 있는 곳이며, 그리하여 그가 생명나무로 갈 수 있는 길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몰래 잠입하거나 강제로 들어갈 수 없게 한 것이다. 누가 감히 보초 중에 있는 천사를 대적하고 그 곳을 통과할 수가 있으며, 그 큰 힘으로 지키고 있는 곳을 지나갈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① 하나님은 아담에게 분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에게 긍휼을 마련하셨지만 지금은 노하셨으며, 그의 원수가 되셔서 그와 싸우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들고 있기 때문이다(민 22:23). 그리고 화염검을 두어 그를 지키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소멸하는 불이 되신 것이다.
② 천사들도 아담과 교전하고 있었다. 천사들의 주요, 우리의 주이신 하나님께 아담이 반역하고 있는 한, 하늘의 군사들에게도 평화가 없다.
③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었다. 즉 처음에 그가 놓여졌던 흠없는 무죄의 길이 차단된 것이다. 이것은 아담과 그의 자손들을 생명나무로부터 영원히 차단시키기 위해 그룹을 세워 두셨다는 말이 아니다(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우리 앞에 낙원을 마련해 주시고 그 가운데 생명나무를 두셨으니, 우리가 그 소망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룹들은 전에는 그들이 다녔던 생명나무의 길을 지금까지 지키기 위해 서 있다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그와 그 후손들이 첫 계약을 힘입어 의와 생명과 행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허사가 되었다. 그 첫 계약은 결코 회복될 수 없도록 파괴되었고, 조금도 변화될 수 없으며, 아무런 혜택도 거기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계약의 계명이 파괴되었으니, 그에 따른 저주도 전면적이다. 거기에는 회개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 그 계약의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면 우리는 모두 파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담에게 나타내 보이셨으니, 그를 절망 속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두루 도는 화염검을 제거할 약속된 씨를 통해 생명과 행복을 찾도록 은혜를 주시고 고무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우리와 화해하게 되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우리 앞에 거룩하게 열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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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사람의 범죄와 그 형벌
하나님과 천지 창조와 사람의 범죄에 대한 지식은 사람이 알아야 할 기본적 지식들이다.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는 그런 내용을 증거한다.
창세기 3장은 첫 사람의 범죄와 그 형벌에 대해 증거한다.
첫 사람의 범죄 사건은 그가 자녀들을 가지기 전이었으므로(창 4:1) 그가 창조된 후 오래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고 보인다.
===1-6절, 첫 사람의 범죄
[1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첫 사람의 범죄는 뱀의 시험을 통해 일어났다(고후 11:3). 이 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 하나인 실제 뱀이었지만, 사탄이 사용한 도구이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9에는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고 기록하였다.
그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했다.
간교함은 사탄의 특징이다. 간교함은 이중적이고 거짓됨을 말한다. 그것은 성도의 품성에 반대된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그의 백성된 우리에게 진실함, 마음에 간사함이 없음, 순진함을 요구하신다(시 15:2; 32:2; 요 1:47).
그러나 사탄은 간교하고 거짓되다. 사탄과 악령들은 범죄함으로 타락한 천사들이다(벧후 2:4; 유 6).
요한일서 3:8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말한다.
사탄의 범죄는 인류 역사 초기에 일어난 것 같다. 그는 교만함으로 범죄하였다(딤전 3:6). 사탄은 악한 꾀를 내어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뱀은 먼저 여자에게 접근했다. 그것은 그가 여자에게서 어떤 약점들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때(창 2:16-17) 여자는 아직 창조되기 전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아담에게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해 들었을 것이며 그의 지식과 믿음은 아담보다 약했던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약할 때 마귀의 공격을 받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책을 직접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묵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베뢰아에서 전도했을 때 그곳 사람들은 마음이 고상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행 17:11-12).
뱀이 여자에게 접근한 다른 한 이유는 아마 여자가 남자보다 감성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대체로 남자보다 더 감성적이며 덜 이성적이고 다른 이의 말에 잘 반응한다.
또 뱀은 남자가 여자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약하다는 점도 노렸던 것 같다. 아내가 남편에게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성경도 그런 사실을 증거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왕후가 우상숭배자일 때 왕이 쉽게 우상숭배에 빠졌다(대하 21:6).
그러므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경건하고 훌륭한 사람의 배후에는 경건하고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뱀은 여자에게 물었다. 뱀이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지만, 사탄의 역사로 그렇게 한 것 같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나귀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신 경우가 있고(민 22:28), 또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장차 사탄의 활동으로 우상이 말하는 일도 예언되어 있다.
뱀은 여자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것은 부정확한, 지나친 질문이었다. 뱀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질문을 통해 여자의 생각을 혼란시켰다.
사탄은 진리를 혼란시키기를 잘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른 생각과 지식으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바른 지식과 논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3절]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의 지나친 질문에 대해 여자는 지나치게 대답했다.
동산 중앙에는 두 개의 나무, 즉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고(창2:9) 그 중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아야 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만 하셨지 ‘만지지도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임의대로 가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록한 말씀을 넘어가지 말고 그 말씀에 충실하도록 힘써야 한다.
고린도전서 4:6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
[4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은 확신에 찬 거짓말을 하였다. 그의 말은 확신이 있게 보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거짓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으나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주께서는 마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사탄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임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임하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이 모든 죄의 원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신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요한 일을 위해 성경을 주셨다. 거짓과 속임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우고 확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딤후 3:13-17).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의 이 말은 부분적인 진리라고 보인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사람이 눈이 밝아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첫 사람은 범죄한 이후 자신이 악을 행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뱀의 이 말은 여자의 교만을 부추기는 뜻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막으신다는 뜻을 가진 것 같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길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여자의 교만을 부추겼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된다. 교만은 불순종의 원인이다.
그러나 교만은 사람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같다(삼상 15:23).
사람이 하나님의 정해주신 한계선을 넘어서서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은 매우 큰 악이다. 사람이 교만하면 결국 멸망하게 된다(잠 16:18).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자는 뱀의 거짓말에 영향을 받았다. 여자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그 나무를 본즉 그것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 그 여자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
여자는 자기만 그것을 먹은 것이 아니고 그 남편에게도 주었고 그 남편은 그것을 받아먹었다.
본문은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고 단순히 기록하였다. 사탄의 계산과 계획은 적중하였다.
여자가 먼저 범죄했고(딤전 2:14) 남편은 그 뒤를 따라 너무 쉽게 범죄하였다. 첫 사람 아담과 그 아내는 이렇게 범죄하였고 무죄 상태로부터 타락하였다.
에덴 동산에서의 첫 사람 아담과 그 아내의 행복한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시험 기간을 잘 통과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상태와 행복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그들만의 불행이 아니고 온 인류의 불행이었다.
오늘날도 세상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시험이 많다. 사탄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를 시험하였다(마 4:1).
예수께서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나 원수 마귀도 세상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다닌다고 말씀하셨다(마 13:25, 38-39).
또 사도 바울은 ‘이 세상 신’이라고 불리는 사탄이 지금도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그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고 있고(고후 4:3-4) 공중에 권세 잡은 그가 지금도 세상 사람들 속에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였다(엡 2:2).
또 성경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고 말하였고(딤전 4:1), 또 이단들이 많이 나타날 것을 예언했다(요일 4:1). 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징조로서 사탄이 교회를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배교와 거짓된 은사주의, 기적 운동을 예언하였다(살후 2:9-10).
또 요한계시록은 큰 성 바벨론으로 묘사된 마지막 때의 배교한 교회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계 18:2).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전쟁과 같다. 우리는 이 세상에 권세 잡은 사탄과 그를 따르는 악령들과 싸우는 자들이다(엡 6:12).
사탄과 악령들은 이 세상을 불경건과 부도덕으로 악화시키고 교인들을 교만과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교회를 배교와 세속화로 이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오늘날에도 사탄의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야고보서 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베드로전서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마귀]를 대적하라.”
둘째로, 여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첫 사람의 범죄와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범죄로 시작되었다.
성경이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금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디모데전서 2:14, “[여자의 목사직과 장로직을 금하는 이유는]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는 여자들이 조심해야 하고 남자들도 여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거짓말을 분별하고 대적해야 한다. 마귀는 부정확한 말로 사람을 혼란시킨다.
오늘날에도 온갖 거짓말들, 즉 온갖 이단사설들이 난무하다. 이것은 말세의 징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성경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연구함으로 부정확한 말, 즉 좌우로 치우쳤거나 지나친 말을 분별하고 배격하고 배척해야 한다.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의 시험을 이겨야 한다(엡 6:17). 우리는 바르고 정확한 말, 즉 성경적 교훈을 믿고 확신하고 지켜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거역하지 말고 다 믿고 순종하자.
첫 사람은 마귀의 미혹을 받아 범죄함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고 의에게 종이 된 자들이므로(롬 6:17-18, 22) 성경에 밝히 증거되고 교훈된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순종하며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7-24절, 첫 범죄의 결과
[7-8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본래의 순진함을 잃어버렸고 죄의식과 더불어 수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거니시며 사람과 교제하곤 하셨다. 그는 사람과 교제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범죄한 그 날 교제에 이상이 생겼다.
아담과 그 아내는 서늘한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의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
그들은 분명히 죄책감과 수치감 때문에 숨었다. 죄는 하나님과의 정상적 교제를 가로막는다(사 59:2). 죄인은 하나님께 나오기를 꺼려한다.
주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3:20).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의 얼굴을 피해 다시 스로 도망치려고 배를 탔고 배 밑창에 내려가 자신을 숨기려 했던 선지자 요나처럼,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 한다.
[9-10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선한 목자처럼, 아담을 부르시며 찾으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는 지금도 자기 백성을 찾으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대답하였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범죄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지만, 악인에게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잠 28:1).
[11-13절]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속이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생긴 수치심이 그가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결과임을 깨닫게 하셨다.
아담은 여자가 그 실과를 주므로 먹었다고 대답했고, 여자는 뱀이 속이므로 그 실과를 먹었다고 대답했다. 그들이 범죄한 과정은 그들의 말 그대로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 속에는 잘못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핑계의 생각이 있었다.
[14-15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먼저 뱀에게 두 가지 저주를 선언하셨다.
첫째는 배로 다니며 흙을 먹으리라는 것이다. 뱀의 발들은 아마 그 후 퇴화하였고 발이 없는 뱀이 먹이를 먹을 때 흙도 먹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둘째는 사람과 원수가 되리라는 것이다. 여자는 하나님보다 뱀을 더 친근히 했고 하나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했지만, 이제 뱀과 여자는 원수가 될 것이다.
사실, 뱀은 여자의 친구가 아니고 원수이었다. 여자가 범죄한 것은 그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는 여자를 속이고 그에게서 영생의 복을 빼앗고 영원한 죽음을 준 살인자이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사실이다.
사람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 하고 뱀은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파하실 것을 암시한다. 주 예수께서는 “여자에게서 나셨고”(갈 4:4)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셨다”(히 2:14).
이와 같이, 본문 15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처음으로 주신 메시아 약속이었다.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너의 고통과 너의 잉태를]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세 가지의 징벌을 내리셨다.
첫째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다. 여자는 임신하며 출산하는 큰 수고와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둘째는 남편을 사모함이다. 사모한다는 말은 바라며 열망하며 원한다는 뜻이다.
범죄한 후 여자는 무슨 부족이 있는 자처럼 남편을 애타게 사모하는 연약한 마음이 생겼다.
셋째는 남편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들의 사랑 없음과 욕심과 횡포 때문에 생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범죄로 인한 불행한 결과이었다.
[17-19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도 세 가지의 징벌을 내리셨다.
첫째는 땅의 저주이다.
아담은 땅의 책임자이며 그의 범죄 때문에 땅은 저주를 받았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땅에는 천재지변과 질병과 병충해가 있을 것이다.
인류는 저주받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둘째는 평생 수고하며 땀을 흘리는 것이다.
아담은 평생 수고하며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될 것이다. 땀 흘리며 수고하는 삶은 세상에 사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정상적인 삶이 되었다.
셋째는 죽음이다.
사람의 몸은 본래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창2:7) 범죄한 사람은 그 본래의 흙으로 돌아가야 했다. 사람이 범죄치 않았더라면 몸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몸은 비록 흙으로 만들어졌으나 사람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영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범죄한 몸은 본래의 원소로 돌아가야 했다(전 3:20; 12:7).
본문에 영혼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이다.
주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신약성경뿐 아니라(눅 16:10-31도) 구약성경도 이 사실을 증거한다.
시편 73:24는,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라고 말했고, 전도서 3:20-21은,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말했다.
[20절]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와’(카와 )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이며 그를 통해 사람은 번식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죽을 것이지만, 하와를 통해 아담의 자손들이 많이 출산될 것이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메시아께서도 오실 것이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범죄하여 죽게 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
가죽옷은 그들의 수치감을 가려주고 몸의 약함을 보호할 영구적인 의복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이셨고 그 피를 흘리셨다.
사실, 죽임을 당해야 할 자는 아담과 하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신하여 한 짐승을 죽이셨다.
여기에 짐승 제사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암시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하시기 위해 죽이신 짐승은 장차 인류를 위해 죽으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은 죄인들의 수치를 가릴 완전한 의의 옷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나(사 64: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의의 옷을 입혀주셨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2-24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사방을 향해 번쩍이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범죄하기 전에는 악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선악을 아는 자가 되었다.
‘우리 중 하나같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진리를 암시한다(창 1:26; 11:7; 사 6:8).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할까 염려하심은 타락한 상태로 영생할까 염려하심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람이 영원히 죄인이 되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셨고 농사의 일을 하게 하셨다. 그는 그를 쫓아내셨다(24절).
죄인은 에덴 동산에 적합하지 않았다. 더욱이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서는 안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룹 천사들과 사방으로 번쩍이는 칼로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그 후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었고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첫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이 저주받은 땅 위에서 수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자들은 결혼과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심리적으로 남편을 사모하는 연약함이 있으며 또 남편의 지배를 받아 때때로 심신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남자들은 일평생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며 살아간다. 세상에는 수고와 슬픔이 많고 질병과 눈물과 고난이 많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할, 아무도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세상에서 날마다 수고하며 사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이다.
둘째로, 모든 사람은 마침내 죽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죽음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긍정하며 그것의 원인을 알고 그것에 바르게 대처하며 살아야 한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내려진 징벌이기 때문에 죄사함 안에 부활과 영생의 길이 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구원을 암시하셨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예언과 그들을 위해 지어 입히신 가죽옷에서 증거되었다. 성경의 요점이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다 파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예수의 십자가로 이루신 완전한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를 위해 의를 이루셨고(롬 10:4)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다(고전 1:30).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하며 사랑하고 순종하며 선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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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한 시간 갖는 가장 좋은 방법은 <히브리적>묵상이다]]
1. 묵상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다
모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천 명의 인원을 이끌고 수련회를 가도 어려운데 장정만 육십만 명인 이스라엘 백성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했다. 심리적 압박이 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비책을 말씀하시거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 아니다.
강하고 담대하라고 세 번이나 말씀하시지만 강하고 담대할 만한 자원을 공급해 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달랐다.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한 하나님의 비법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이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여호수아 1장 8절은 가나안 땅을 앞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히브리서 3:17~18)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구약의 말씀을 재해석하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곧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4:11)”
히브리서 4장 11절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주장한다.
히브리서의 주장에 의하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 곧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다. ‘안식’과 ‘가만히 있는 것’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묵상이 바로 가나안 즉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핵심 전략이다. 묵상을 통해 안식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히브리서 4장 11절 다음 구절에 안식에 들어간 결과가 나온다....이김과 정복, 그 누림 인한 감사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4:12~13)”
묵상을 통해 가나안 즉 안식에 들어가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다. 그 말씀은 혼과 영을 찔러 쪼갠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할 만한 말씀의 빛이 임한다. 그 안식 가운데 비춰진 계시의 빛은 우리로 ‘하나님 됨을 알게’ 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 10)”
2. 묵상(MEDITATION)은 심령의 약(MEDICINE)이다
묵상을 의미하는 meditation(메디테이션)과 약을 뜻하는 medicine(메디씬)은 같은 어원이다.
피부에 상처가 생길 때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를 바르듯, 묵상을 통해 말씀을 내 심령에 바를 때 그 말씀이 스며들어 내 상처를 치료한다.
medicine이 몸의 약이라면, meditation은 영혼의 약이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마르페)이 됨이니라 (잠언 4:20~22) ..For they are life unto those that find them and medicine to all their flesh.(Jubilee Bible 2000)”
잠언 4장 22절은 말씀에 주의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떠나게 하지 말며 말씀을 마음 속에 지키고 말씀을 얻는 자에게 그것이 곧 건강이 된다고 설명한다.
JB 2000 버전은 ‘건강’을 ‘medicine’으로 번역했다. 이 구절에서 ‘건강’의 히브리어는 ‘마르페’다. 마르페를 또 다른 구절에서는 양약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마르페)과 같으니라 (잠언 12:18)”
3. 묵상은 믿음을 가져온다
의지적인 믿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은 들어오는 것이다.(주님이 넣어주심, 불러일으켜 불 붙여 주심, 주님 당신의 열정-열심으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NIV)”
믿음은 내가 의지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버전은 ‘믿음은 오는 것(Faith Comes From…)’이라고 번역했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말씀 앞에 자복하며 큰 감동을 받을 때 믿음은 ‘들어 오는 것’이다.
어디서 오나? 바울은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온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다.
히브리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을 헬라어 원어로 확대 해석하면,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자 믿음의 원천이다. 이 말씀이신 주님이 내 심령을 터치할 때 말씀과 함께 믿음이 들어 오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2 上)”
앞서 살펴봤던 잠언 4장 20절 말씀을 보면 ‘내 말에 주의하며’란 표현이 나온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카샤브)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잠언 4:20)...My son, pay attention to what I say; listen closely to my words. (NIV)”
주의한다는 것은 집중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pay attention to)이다. 관심을 기울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그 대상의 숨겨진 마음마저 알게 된다.
그래서 ‘주의하다’의 히브리어 ‘카샤브’에는 ‘주의하다’란 의미 외에 ‘귀를 기울여 듣다’란 의미도 있다. 시편 10편 17절 말씀은 ‘카샤브’를 ‘듣다’로 번역한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카샤브) (시편 10:17)”
묵상은 [놓치면 만사가 허사라는 심정으로!!]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카샤브, pay attention to)이다.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때 말씀 이면 심연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말씀을 통해 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때 믿음이 들어온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는 것이 바로 ‘계시’다.
4. 묵상은 ‘영의 생각’을 돕는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영적 존재’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영적’이란 말을 들으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경건한 사람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것의 결과일 뿐이다.
‘영적’이란 말은 삶의 주도권과 관련 있다.
[[곧, "영적"이란, "영에 속한, 더 깊이 말한다면 성령께 <주도권 내어드리고> 완전히 순복하여 하나된"의 뜻이다!!]]
영적인 것은 내 생각, 이성, 감성, 의지, 경험이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 ‘영적’이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내 감정이 즉각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는 영에 의해 감정이 통제되어 반응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영적’인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에 의해 통제되어지는(spiritcontrolled)’으로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대해 얘기한다. 내주하는 영을 따를 때(영적일 때) 영의 일을 생각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5-7)"
생각은 감정과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감정과 태도는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행동의 반복이 내 삶을 결정한다.
삶을 바꾸려면 결국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 생각에는 육신의 생각이 있고, 영의 생각이 있다. 육신의 생각으로 살아갈지, 영의 생각으로 살아갈지는 내가 선택해야 한다. 영의 생각은 영에서 온다. 영과 연결해야 한다는 의미다. 영은 지성소에 상응한다. 안식의 영역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안식이 곧 가나안 땅임을 알려준다. 영과 연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묵상이다. 가나안 땅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알려주신 비법이 바로 묵상이었다. 말씀을 주야로 입에서 떠나지 않게 중얼거릴 때 영의 생각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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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칼 사용법을 알려주신 것이 아니다. 대신 어떻게 주님을 주야로 묵상할지, 그 결과 어떤 위대한 성공을 거둘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셨다.....The Lord didn’t show Joshua how to use the sword, but He told him how he should meditate on the Lord day and night, and then he would have good success. – D.L. 무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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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의>묵상이 아니라 <히브리적 묵상> 하가이다]]
가나안 땅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거창한 전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전쟁 승리에 도움이 될 전략을 주신 것도 아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 백 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임져야 했다.
그런 그에게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신신당부하신 것이 ‘묵상’이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비중을 두고 말씀하신 ‘묵상’의 원형적(原型的) 의미는 무엇일까?
1. 성경적 묵상은 ‘소리’가 중요하다
다른 종교도 묵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계발 분야에서도 묵상을 강조한다. 묵상이란 단어를 들을 때 가장 먼저 마음의 평안을 위해 조용히 생각하는 것을 떠올린다. 국어 사전에서는 묵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묵상(默想) :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
하지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묵상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8)”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묵상의 히브리어는 ‘하가(HAGAH)’다. 하가란 단어에 ‘생각하다, 사색하다’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의미는 ‘중얼거리다(murmur, mutter)’ 혹은 ‘신음소리를 내다(moan)’이다. 즉 소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단어다.
조용히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묵상의 국어 사전 정의와 다르다. 하가를 사용한 다른 구절을 더 살펴보면 하가의 근원적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하가)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이사야 8:19)..…Seek unto them that have familiar spirits, and unto wizards that peep, and that mutter: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하가) 심히 근심하리니 (이사야 16:7)..…for the foundations of Kirhareseth shall ye mourn; surely they are stricken.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하가) 때에… (이사야 31:4)..…Like as the lion and the young lion roaring on his prey…"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하가)…(이사야 38:14)..Like a crane or a swallow, so did I chatter: I did mourn as a dove:…"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하가)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35:28)..And my tongue shall speak of thy righteousness and of thy praise all the day long.”
위 구절들에서 ‘중얼거리다(mutter), 슬퍼하다(mourn), 으르렁거리다(roar), 슬피 울다(mourn), 말하다(speak)’의 히브리어는 모두 ‘하가’다.
묵상과 어울리지 않는 사자와 비둘기 울음소리에도 ‘하가’를 사용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강조하신 묵상(默想)은 눈감고 조용히 말씀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먹이를 움켜잡고 으르렁대며 씹듯이 중얼거리는 사자와 같이 말씀을 씹고 읊조리며 중얼거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가’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리가, [하나님 자신의 모든 성분과 요소가] 말씀 안에 들어 있다.
[그러기에, 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진정] 말씀은 그 자체로 영이요 생명이다.
하가는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소리를 이 땅 가운데 풀어내는 것이다. 딱딱한 말씀을 씹듯이 읊조리며 계속 중얼거릴 때 어느새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소리가 영과 생명으로 새어나온다. 이렇게 영과 생명이 새어 나올 때 말씀 안에 있는 계시가 풀린다. 그 계시가 곧 영의 생각이다.
[영의 생각 따를 때 영의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이며 영의 생각은 육신과 원수가 된다..영은 육신을 이긴다!!]
(([롬8장]===생명의 성령의 법....*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고대하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은 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시며 다른 대안을 주시지 않고 ‘하가’를 강조하셨나?
일반적으로 자아는 생각의 주도권을 내려 놓지 못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생각의 주인은 ‘나’이기 쉽다.
내 생각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못한 가운데 조용히 사색하듯 생각하는 것은 ‘자아’만 더 강화시킬 뿐이니, 생각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아가 강한 이유다.
거듭난 참 기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理性) 강화시킴이 아니다.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영과 연결하여 그 ‘영’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말씀이 들어가야 한다.
말씀은 진리 그 자체이지만 딱딱하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소화시키기도 어렵다.
이 딱딱한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소리로 중얼거리며 녹여낼 때 말씀 자체의 소리가 내 ‘이성(理性)’과 부딪힌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계속 말씀의 소리로 이성에 충격을 가할 때 어느 한 순간 [드디어!!, 하늘로부터 내리치는 번개같이!!] 이성이 말씀 앞에 굴복한다.
...두려움에 놓인 사람이 있었다. [다른이듥돠 마찬가지로 거의 항상] 상황이 자신의 감정을 압도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배우게 하심따라] 믿음으로 말씀 한 구절을 택하여 계속 ‘하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의 감정이 말씀보다 컸다. 그러나 말씀으로 상황을 밀어내듯 ‘하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느 한 순간!!, 이럴 때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말씀의 한 부분이 툭 튀어나와 내 이성과 부딪힐 때 한 순간 이성과 감정이 그 말씀 앞에 굴복함을 경험한다.
이성과 감정이 말씀에 굴복하는 순간 감정을 붙들고 있던 두려움은 사라진다. 말씀을 ‘하가’하는 사람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주야로 말씀을 ‘하가’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하가’를 통해 말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것이다.
하가는 이렇듯 딱딱한 말씀을 중얼거리는 소리로 계속 녹여 내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내 이성과 감정 가운데 풀어내는 것이다.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생각이다. 이 생각의 주도권을 말씀에 넘기는 과정이 ‘하가’다.
‘하가’는 기록된 말씀에서 직접 퍼 올린 소리다. 말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을 내 이성에 들려주는 것과 동일하다.
그래서 욥기 37장 2절은 ‘하가’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욥37:2)"
모든 죄와 시험은 생각에서 비롯한다. 생각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을 씹는 것이다. 되새김질 하듯 중얼거리며 말씀을 씹을 때 그 소리가 육신의 생각을 막는다. ‘하가’를 통해 말씀의 소리를 풀 때 영의 생각이 활성화된다. 생각에서 승리해야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가’하라고 강조하신 이유다.
2. ‘하가’의 핵심은 ‘기록된 말씀’과 ‘소리’와 ‘마음 중심’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하가’는 조용히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속삭이고, 중얼거리고, 슬퍼하고, 으르렁거리고, 구구 거린다.
이 ‘하가’ 소리의 공통점은 굳이 문법이나 문장 규칙을 엄격히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령이 갈급할 때 문장 규칙을 따져 소리내지 않는다. 포효하듯 ‘주여~’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소리에 마음 중심이 실리기 때문이리라.
문법, 철자, 논리, 완벽한 문장은 이성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신경 쓰다 보면 영의 본능은 사그라질 수 있다.
때로는 논리에 맞지 않지만 부르짖는 마음 중심의 소리가 영을 일깨운다.
하나님이 ‘하가’를 말씀하신 이유는 이성을 강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철저하게 말씀의 소리를 통해 ‘영’을 활성화하기 위함이다.
깨닫고 나면 무릎을 칠만한 하나님의 전략이다.
사람들은 머리로 말씀을 이해하려 한다. 가슴으로 말씀을 느끼려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말씀이 영이요 생명임을 기억하자.
영과 생명에 접근하는 것은 머리와 가슴이 아니다. 믿음이 실린 마음 중심이 먼저다.
기록된 말씀을 입으로 씹으며 마음 중심이 실린 소리로 발산할 때 그 소리를 타고 말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때 그 영이 내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내 삶의 주도권을 갖는다.
말씀이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칠 기회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계시의 빛이 임할 확률도 함께 높아진다.
3. ‘하가’의 주 목적은 하나님 마음을 아는 것이다....이 때야말로, [하나님의 깊은 것을 참되게 그대로 아시는]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마음 알게 되며, 기도하시는 성령님과 한 영의 연합함 안에서 [주도권 맡겨드릴 그때] 열어주시는 <참된> 중재와 간구, 기도에 참여함을 이루신다.
나를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려면 계시가 필요하다.--- 계시가 있으려면 잠잠한 시간이 필요하다.--- 잠잠한 시간을 갖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묵상이다. ---묵상의 성경적 원형은 하가다. ---결국 하가를 하는 주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 아는 것을 통해 나를 아는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들이 믿고 있는 ‘나’가 아니라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아시는, 주님 믿고 있는 ‘나’를 [참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먼저다.
하가는 말씀을 계시의 빛으로 변환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말씀에 비친 나를 알게 하는 도구다.
탁월한 신학적 지식이, 뜨거운 열심이 ‘하나님을 알게’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언제나 말씀을 ‘도로(road)’ 삼아 움직이신다.
[처음에는] 딱딱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하루종일 씹고 중얼거리고 되새김질할 때 그 위에 성령님이 운행하신다.
말씀을 재료로 빛으로 바꾸시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 순간의 빛이 마음을 비출 때 심령이 새로워진다. 그것이 참 영의 양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나의 어떠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과 내 마음 중심과 소리가 성령님과 함께 만나는 유기적 활동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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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하가’하며 풀어낸 기도야 말로 하나님께 가장 잘 상달된다....Prayer that is born of meditation upon the Word of God is the prayer that soars upward most easily to God’s listening ears. – R.A. 토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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