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6장.
.....가나안 남북전쟁/롯 구출 _횃불언약은 84세때 체결 .. 이제 2년 후인 86세때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신다> 출산..이스마엘은 현재 터키와 아랍 나라들을 이루는 12족속들로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이스마엘족속에 해당함
.....[하갈은 사라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며 머물러 사라가 <그로 인해>살아가는 바 은혜로 살기를 배워 은혜 믿음 통한 구원에 이르러야 함] ::::: 태초부터 전적인 주권적 은혜로 [내세울 의로운 행위가 전무한 ]사라를 택하셔서 그녀를 통해 이삭<구주 표상>을 낳게 하시는 주님, 그러나 아브람과 사라의 육적 선택에 의해 이스마엘을 낳을 바 <사라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하갈에게는 여주인 사라<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여 머무르며 철저히 은혜와 그 은혜 믿음으로 살기를 체득하고 은혜 안에 동행함름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웡 경륜과 영원 목적 이룰 수 있음< 즉, 육적 출생 통해 이 땅에 보냄 받았더라도 주님의 시간 안에 예비해 두신 연단 과정의 우선 순위와 정하신 때가 있는 바 오직 철저하게 육에 대한 증오 경험 통해 육적 행위로느 결코 은혜에 참여할 수 없고 오직 구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주님, 그리스도의 은혜 학교를 거쳐 완전히 은혜따라 살기를 배우고 그 안에 거해야 함>을 가르치고 계심...
<주님 보시기에>
주님 뜻하신 바 지고지선의 선한 뜻 이룸의 통로로 삼고 이를 온전히 이룸 위해 당신 존재 전부 곧 이름 영광 성품의 모든 것 기울여 끝까지 돌보고 보호하며 공급하심으로써 택하신 그대의 생계와 생존을 끝까지 완벽하게 책임지실 뿐 아니라 창대케 하시겠다 하신다. ((이것이 창12장에서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뿐 아니라 더불어 약속하신 바로 그대로 완전무결한 공수동맹<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받을 것>의 초월적 명성의 혜택을 부여하시며, 더 나아가 영원한 방패 영원한 상급으로 자신의 모든 영광을 기울여 온통 부어주시며 연합한 하나되심 이루고 계시며 믿는이의 자손 천대에 이르도록 인자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횃불언약 통해]주님과 그분의 선택한 자를 위한 영원목적<지성소 증거궤이신 JC 의 반쪽 짝 얻으심 통해 완전한 증거 이룸 됨> 통해 하나님 증거의 완전함 이루기 원하시기에, 씨(생명, 말씀, 그리스도)와 자손의 거하며 번성할 바 땅(교회,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로 사는, 그리스도의 신부 산출 이루려 하신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이자 그리스도 영광의 반사 반영인 왕같은 제사장들의 유기적 공동체인 새 예루살렘 얻음 이루시기를 원하심으로 표현된다
.... 이 모든 이룸울 위해 최우선적 선결 요건은 하나님 자신을 온통 기울여 믿는이 안에 은혜로 넣어 주입해 주사 <육을 따라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그의 옛자아는 죽고, 오직 주님으로 사는, 거듭난 부활생명의 새자아로 살게 하심 이루는 것.... 바로 이 하나님 임재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고 앙망하며 끝까지 기대하며 기다릴 바 그 내적 움직이심만 따라 영의 민감함 안에서 살아감이 주로 주 되시게 함이자 점흠티주름없는, 사랑으로 합당하게 높여드림의 삶인 것이다
.... 언약 맺은 자라 할지라도 범죄함보다 더 주님 마음 상하게 랗 수 있음을 주의하라!! ...외적 실패나 범죄보다 더 하나님께 더욱 더럽고 모독감 느끼시게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믿는이가 (거듭난자로서의 자각 안에서 주님 마음과 심정 알아드림으로 그분의 통로된 삶 사는, 짝된 자의 친밀함 안에 머물며 하나님 은혜의 주도하심을 기다려 일절 앙망하며 바라며 오래참음으로 기다려 동행함이 아니라(주의 약속은 결코 더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곧 성급하게!! 바로 천연적 자아따라 육적 제소견에 옳은대로 섣부르게 자행자지하는 것임을 주의하라. 바로 이러하였기에 아브람은 무려 13년간 주님임재를 잃어버린다.((이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주님 보여주신 해결책은 바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임재의 생생만 말씀으로 살기, 곧 하가,Hagah이다...!!)).
.....((죄 범함은 자각이 있어서 대개 금방 회개하게 되지만, 천연적 자아로 행함은 자기가 더럽다는 의식이 종종 전혀 없기때문이요 양심의 일깨우는 소리에도 회개하고 자복하기는 커녕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노라고 그럴듯하게 변명하는 법이다.. 사탄이 얼마나 비아냥거리며 주 앞에 참소하며 고소해 할까..끔찍하게 여겨지지않는가.)).
....((그러므로 믿는이마다 반드시 내적 생명이신 성령께 여쭈며 순복함으로 동행함으로써 옛자아, 천연적 자아를 죽이기를 배우라!!)) .횃불언약 통해 주님의 영원목적 이루시려는 주님 마음을 살펴 볼 때, 진정 주님 바라시는 바는, 화목제-속죄제이신 그리스도 경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번제>의 사람...곧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를 실행함으로 성령따라,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삶... 주의하라!! 횃불언약 맺은 후 겨우 2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사람의 소견에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을 바 사래의 권유함 받은 아브람은 못이기는 척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얻게 되지만 무려 13년간은 의미 상실한 기간, 곧 하나님 임재를 잃어버렸기에 하늘의 신성한 기록에는 빠져있음을 본다.
..그대는 <아브라함 안에서 이미 받은 바> 횃불 언약의 영적 의미와 실제에 대한 깨달음과 자각 통해 그리스도를 살고 있는가....횃불 언약은 [아브람에게 씨와 더불어 주심으로써 자손이 그 안에서 살고 누리며 창대케 됨 통해 단체적 그리스도이자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 산출할 땅, 곧 교회와 교회 생활이신 그리스도를 말함이다. 동시에 그 언약은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실 바 땅에 대한 <거룩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보증이자 자기가 누구인지, 어떻게 행하시는지에 대해 증거하심이다....정말, 잘 알아두어야 한다..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없다면 주께(신뢰함, 그분의 친절한, 친밀하신 사랑에 의지하여 여쭈며 교통함 통해 더 깊은 믿음 안으로 들어가자....사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그의 생존과 생계를 완전히 책임지시며, 그의 완전한 방패되심, 더 나아가 큰 상급으로 온통 자신을 내어주시는 은혜의 주님(은혜=GRACE=God's Rewarf At Christ's Excess)이자,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만들어서라도 주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분명히 믿었다...그러나 (씨가 누구인지는 막연한 감은 있었으나) 더 파고들어서 허락하신 끝까지 여쭈었어야 한다.(다니엘은 진정 그러했고, 주님이 더 이상은..하며 제지한 셈이다). 사래의 몸으로 아들을 낳게 될런지.. 아브람이 더 묻기를 넌지시 기대하며 기다리셨던 것은 아닐까?.(이것은 아브람에게 <당시에는 개인적으로>허락하신 특권이기 때문이다..<타인이 어찌 될 것을 묻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두손들고찬양합니다..나를지으신이가하나님.주의친절한팔에.은혜아니면.온맘다해.주님만이내힘이시며..겸손하게무릎꿇고...
사래는 횃불언약을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니었다.(비록, 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나무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금지명령을 주로부터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아담으로부터 분명히 전해 들었었다. <그러므로 사탄이 자기 생각을 가지고 하와를 유혹했을 그 때!!> 하와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담에게 나아가서 다시 제대로 물었었더라면, 아담은 주께 또 다시 확인 했었더라면... 그리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마지막 기회가 있었을 그때, 즉 하와가 먼저 자기가 먹고나서 아담에게 건네주었을 그 때에라도 보기에 좋고 먹음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그것을 두고서 주께 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들은 무산되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횃불 언약에 대해 틀림없이 들었을 하와는, ("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지레짐작하여 단정짓고(이것은 정면적인 횃불 언약 말씀 무시였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자기 생각(실은 사탄이 넣어 준 생각)에 빠져서하갈에게로 들어가서 자식을 보겠노라>는 자기 생각을 아브람에게 말하였고 아브람도 깨어 있는 마음으로 말씀 언약 베푸신 주께 여쭈어 분별함을 생략한 채 그냥 무심코 따르고 있었음을 보라(일견 보기에 당시 상황에서는 정말 그럴듯한, <세상에서는 통용되던 방법이기는 했기에!!> 그럴듯한 훌륭한 차선책으로 보였으나...실은 사탄의 집어넣어준 생각이었다!!!...(주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덧붙여서 ~할까 하노라 말하는 하와에게 사탄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결코 죽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같이 지혜로와질 것이라고 거짓말로 사기치고 있었음을 잊지말라)...적극적 여성 생명은 교통함 안에 머물러 적극적 순종과 절대 신뢰 절대 기쁨 절대 긍정으로 주 말씀과 하나되어 따름이요 적극적 남성 생명은 주님 말씀따라 분별함 통해 소중한 이를 인도하는 목자 직능인 것을 기억하고 깨어 주님과의 교통 안에 깨어 구함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
## 참되게 믿는 이마다 마땅히 !!!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따라 사는 것을 넘어서야 하며 끝까지 주 말씀따라 기대하고 바라고 앙망하며 산 믿음 발휘하며 굳게 서서 주님 보시는 대로(말씀하시고 일깨우시며 열어주시는 깨달음따라 믿음으로) 말하고 행하기를 연습 실행해야 함으로써 마침내 주님 친히 행하며 이루심의 증거가 되기를 명심하라!!!
===하갈과 이스마엘[나 행한것죄뿐이니274]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 횃불언약 2년 경과 시점 아직 그때까지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도망하다]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다시 한번 에덴동산에서의 시험이 반복되고 있다...<주를 신뢰하며 앙망함으로 나아가 궁금한 바를 더 세밀히 여쭈어 보는 것은 어땠을까..주만 바라며 주님의 허락하시는 때 기다리기의 시험에> 아브람은 실패한다.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그대는 (지금 그대의 영적 위치/태도/상태/각도는)룻인가 하갈인가....세상과 그대 자신이 보기에 (비록) 또 하나의 하갈로 느껴진다 해도, 결코 (주님 추구하기를) 포기말라..오직!! [시어미 나오미와 하나되어 전적으로 주님 바라기로 동행함으로써 주님 얻고 그리스도 산출하는 믿음의 계보에 들어간 룻의 믿음을 본보기 삼아서, 주님의 패러다임으로 살기를 배우라..>---
7. [461십자가를질수있나]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브엘라 해로이= 가데스 바네아. 애굽 시내 근처의 가나안 땅과 애굽 경계] 그를 만나....어찌 보면 하갈이 <경계선 넘어> 애굽으로 들어감으로써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 원치 않으셨음!!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이 질문은 주 앞에서 사는 자라면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 어디서나 매일 매순간 주 앞에서 점검해야 한다.. 합당한 위치 각도 자세 태도 견자하라. 주 이름 부르라]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반성하는,자괴의 마음이 열려 있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신다]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그러나, 오직 복음 통해 이스마엘<터키와 무슬림>이 돌아오게 될 것!!...듣고 깨달아 전심으로 회개함으로 주 이름 부르는 자마다 그 태생이 어떠하든지 주님 소유 삼으시리니 ..주님 소유 그대는 [오직 주님 마음과 심정 생각따라 보내심 받은대로] 오늘 복음을 전파하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엘 로이..온 우주보다 크신 분 하나님의 전존재에 가득한 눈으로 쉼없이 빠짐없이 꿰뚫어 보시며 거듭난 믿는이 각 개인마다에게 친히 다시 오시어 자기를 나타내시며(호라오..라아), 전존재를 통찰-주목하여 보며 세밀히 살펴 감찰하시며-보호하시며 참 필요마다를 공급해 주시는(에피디도미) 하나님..라아..여호와 라아.. 목자되신 하나님 여호와>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샘>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가데스바네아]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브엘세바 : 지중해로 들어가는 베솔시내(가사 하방에 위치)--소알(사해남단)--세렛시내를 잇는 선의 좌중앙부에 위치.. 브엘라해로이는 애굽시내(이집트와디)에서 에시온게벨(또는 엘랏) 연장선상의 좌상 2/3지점에 있는 가데스바네아 부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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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i and Hagar.16.
1 Now Sarai, Abram’s wife, had not borne him any children, and she had an Egyptian maid whose name was Hagar.
2 So Sarai said to Abram, “See here, the Lord has prevented me from bearing children. I am asking you to go in to [the bed of] my maid [so that she may bear you a child]; perhaps I will [a]obtain children by her.” And Abram listened to Sarai and did as she said.
3 After Abram had lived in the land of Canaan ten years, Abram’s wife Sarai took Hagar the Egyptian [maid], and gave her to her husband Abram to be his [secondary] wife.
4 He went in to [the bed of] Hagar, and she conceived; and when she realized that she had conceived, she looked with contempt on her mistress [regarding Sarai as insignificant because of her infertility].
5 Then Sarai said to Abram, “May [the responsibility for] the wrong done to me [by the arrogant behavior of Hagar] be upon you. I gave my maid into your arms, and when she realized that she had conceived, I was despised and looked on with disrespect. May the Lord judge [who has done right] between you and me.”
6 But Abram said to Sarai, “Look, your maid is entirely in your hands and subject to your authority; do as you please with her.” So Sarai treated her harshly and humiliated her, and Hagar fled from her.
7 But [b]the Angel of the Lord found her by a spring of water in the wilderness, on the road to [Egypt by way of] Shur.
8 And He said, “Hagar, Sarai’s maid, where did you come from and where are you going?” And she said, “I am running away from my mistress Sarai.”
9 The Angel of the Lord said to her, “Go back to your mistress, and submit [c]humbly to her authority.”
10 Then the Angel of the Lord said to her, “I will greatly multiply your descendants so that they will be too many to count.”
11 The Angel of the Lord continued, “Behold, you are with child, And you will bear a son; And you shall name him Ishmael (God hears), Because the Lord has heard and paid attention to your persecution (suffering).
12 “He (Ishmael) will be a wild donkey of a man; His hand will be against every man [continually fighting] And every man’s hand against him; And he will dwell in defiance of all his brothers.”
13 Then she called the name of the Lord who spoke to her, “You are [d]God Who Sees”; for she said, “Have I not even here [in the wilderness] remained alive after [e]seeing Him [who sees me with understanding and compassion]?”
14 Therefore the well was called Beer-lahai-roi (Well of the Living One Who Sees Me); it is [f]between Kadesh and Bered.
15 So Hagar gave birth to Abram’s son; and Abram named his son, to whom Hagar gave birth, [g]Ishmael (God hears).
16 Abram was eighty-six years old when Hagar gave birth to Ishmael.
===Footnotes
Genesis 16:2 This must have been an acceptable practice in that time and culture, based on the idea that the children of such a union would belong to the owner of the slave-girl. Abram undoubtedly had informed Sarai of God’s promise to him, and Sarai perhaps thought that this was necessary in order to bring about God’s plan for them.
Genesis 16:7 This is the first occurrence of “Angel of the Lord (YHWH)” in Scripture. The Hebrew word for “angel” means “messenger” (an angel of God is a special messenger from God who speaks for and is closely identified with Him) and context determines whether the messenger is an angel or a human. The same is true for Greek, and the word “angel” is an English form (transliteration) of the Gr aggelos. The Angel of the Lord can be a special case, however. Many Bible scholars believe that this Angel may be a theophany, that is, a physical manifestation of God, in which case the word Angel is capitalized. The Angel of the Lord may, based on context, be the pre-incarnate Christ, the Son of God.
Genesis 16:9 Lit under her hands.
Genesis 16:13 Heb El roi; God never sleeps, He sees, He is aware, He is the great Omnipresent God.
Genesis 16:13 Or seen the back of Him who sees me, which would suggest that at some point in their conversation Hagar requested to see the divine Angel (see note v 7) and, as in Moses’ encounter with God (Ex 33:18-23), was granted the privilege of seeing His back. The wording of the Hebrew is not clear enough to further narrow the possibilities.
Genesis 16:14 This, “it is between Kadesh and Bered,” is further proof of the antiquity of the original names, since the place had to be identified to the reader in the time of Moses.
Genesis 16:15 Ishmael was the first person whom God named before his birth (Gen 16:11). Others were: Isaac (Gen 17:19); Josiah (1 Kin 13:2); Solomon (1 Chr 22:9); Jesus (Matt 1:21); and John the Baptist (Luke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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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장 (개요)
본 장의 이야기 중에서 인적 사항이 불분명한 한 애굽 여인 하갈이 가장 관심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녀를 아브람의 가정으로 이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그녀의 이름과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녀는 애굽 왕이 아브람에게 주었던 여종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14:16). 그녀에 관한 네 가지 사실을 여기서 살펴볼 수 있다.
1. 그녀의 주인 아브람과의 결혼(1-3).
2. 그녀의 여주인 사래에 대한 비행(4-6).
3. 그녀가 도피 중에 만난 천사와의 대화(7-14).
4. 그녀가 아들을 낳음(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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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 사래, 그리고 하갈 (1)(창 16:1-3)
아브람이 하갈과 혼인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녀는 그의 둘째 아내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브람의 어떤 변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코 그 사실은 정당화될 수 없었다. 이는 주님의 법이 본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마 19:8).
아브람은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과 교회에 사람들이 보다 신속히 많아질 수 있도록 가정을 일으켜야겠다는 불법적 욕망이 있어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일은 분명히 일어나지 말았어야 될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혼을 첫 질서로 삼으셨고,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맺어지도록 하셨다.
Ⅰ. 이런 결혼을 성립시킨 자는 사래 자신이었다.
그녀는 아브람에게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고 했다(2절).
1. 우리와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연고자를 통하거나, 우리가 신임하고 사랑하는 친구를 통해 시험하는 것이 사탄의 술책이다.
유혹은 별로 의심할 바 없는 자를 통해서 올 때 가장 위험하다. 그러므로 영의 민감함따라 분별 선택하되 이야기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는 영적 측면에서 주 임재의식 안에서 경청 분별 선택하기를 연습하되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를 (사탄의 기만인가 천연적 자아인 육에서 나온 것인가--이 두가지의 경우는 선듯취하기에는 뭔가 개운치 않은 거리낌이 있다-- 아니 진실로 그리스도 곧 성령의 일깨워 말씀하심인가--이 경우에는 이미 말씀 통해 주신 바 주님의 내적 평강 규례에 일치하기에 거리낌없는 평강과 기쁨 확신이 수반된다..그래도 주께 남의 귀 통함 아니라 내 귀로직접 듣고 확인해 보고 결정하여야 한다!! 주님 약속하심은 결코 잊으시는 법 없으시며 주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주님의 때에 가장 적절하고 복된 방법으로 이루시리니!!!) 분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2. 우리 자신이 궁리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위안과 영예에 훨씬 더 좋은 조언이 된다.
브람이 그녀의 어리석은 계획에 따르는 대신 하나님의 율법의 규례를 좇았더라면, 사래의 유익을 위해서도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스스로 악을 행한다.
Ⅱ. 그것의 원인은 사래의 불임이었다.
((참되게 주님 믿는 믿음 안에 있는지 점검해보라 주님 친히 약속해 주신 바를 일반적 은층의 약속들과 특별 은총의 약속으로나누어 정검해 보라. 아직 이루어짐 보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합당한 때에 이루시기를 구하되 그 이룸의 때까지 기다리며 앙망하고 기대하는 발휘되며 날아오르는 살아 생동하는 바로 주님의 임재의 친밀한 달콤함과 주님 자신의 전능한 그 믿음을!! 공급해 주시기를 바라라)) --- 때 동기 수단 모두가 하나도 어김없이 주님이 손수 철저히 주도하심이며 시종일관 그러하시도로 그대 마음을 지키라 주님의 생생한 증거되게 하라!!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자녀를 생산치 못했다.”
그녀는 매우 아리따웠고(12:14), 매우 충실한 아내였으며, 그의 많은 재산의 공동 소유자였으나, 자식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데,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채워 주시지만 지나치게 주시지는 않는다. 때로는 여러 가지 십자가가 지극히 큰 즐거움에 동반되게도 하신다.
(2) 부자는 자녀에게 재물을 물려주며, 선한 사람은 그 자녀를 정성껏 교육시키지만, 자녀의 축복은 가난한 자에게는 허락되나 부자들에게는 없으며 악한 자에게는 주어지나 선한 자들에게는 거부되는 수가 있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
2. 이 괴로움 속에서 사래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1) 자녀를 주시는 자가 하나님이심과 같이(33:5), 자녀가 없는 곳에는 그 자녀를 주지 않는 이도 하나님이시라(30:2)는 것을 알자. 이런 화는 여호와께 속한 일이다.
(2) 그런 화는 우리가 참고 견디어야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명령하시는 고통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3. 사래는 자기의 불임을 아브람과 그의 여종을 혼인시키기 위한 구실로 이용했고, 아브람은 그녀의 말에 넘어갔다.
(1) 우리의 마음이 지나치게 육체적인 쾌락에 집착하게 될 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간접적인 방법을 쉽사리 이용하게 된다.
지나친 욕구는 흔히 변칙적인 수단을 꾀하게 한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거의가 하나님의 계율에 맞지 않게 될 것이다.
(2) 기대했던 자비를 붙잡기 위해 우리의 의무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굳은 신뢰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4.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곧 사래의 제안에 대한 아브람의 응낙은, 약속된 자손에 대한 간절한 소원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 자손은 그 계약을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상속자가 아브람에게서 난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래로 인해 출생되리라고는 아직 말씀한 바 없었다.
따라서 아브람의 생각에는, “사래 자신이 이것을 제안하였으니 하갈이면 어떠랴?”고 했을 것이다.
다음을 염두에 두자.
(1) 위험한 유혹은 매우 그럴듯한 구실을 가지고 있고 그럴듯하게 꾸며지는 것이다.
(2) 육체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긍휼의 때를 제멋대로 예견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만든다.
(3) 중요하지만 의심스러운 일은, 그 일을 행하기 전에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그 뜻을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과오는 다행히도 방지할 수 있었으리라. 여기에 아브람의 부족함이 있었다. 곧 그는 하나님의 동의 없이 결혼한 것이다. “그 권면은 그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었다”(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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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 사래, 그리고 하갈 (2)(창 16:4-6)
아브람과 하갈의 불행한 관계에서 오는 즉각적인 나쁜 결과가 나타나 있다. 그것은 순식간에 매우 큰 해를 끼쳤다. 우리가 의를 행하지 않을 때, 죄와 고통이 문 앞에 이른다. 그러므로 본분을 떠날 때 죄책과 슬픔이 뒤따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탓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자.
Ⅰ. 사래가 하갈에게 멸시를 당하므로 그것에 자극을 받아 격분했다(4절). 하갈은 자기 주인의 아기를 잉태한 것을 알게 되자마자, 자기 여주인에게 불손하게 굴고 그녀를 비난하고 모욕했다(삼상 1:6과 같이). 그리고 그 복된 땅과 약속을 물려받을 후사를 아브람에게 낳아 주리라는 것을 자랑했으리라. 이제 하갈은 자기가 사래보다 더 나은 여자요, 하나님께 보다 큰 은총을 받은 여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전과 같이 사래에게 복종하지 않으려 했다.
1. 천박한 노예근성을 가진 인물들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귀여움과 위함을 받게 되면 오만하고 무례해지기 쉬우며, 자기의 위치와 본분을 잊기 쉽다(잠 29:21; 30:21-23).
명예를 올바로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2. 우리는 물론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한 그 사람들로 인해 고통도 받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죄악의 도구로 삼았던 자들을 우리의 고통의 도구로 삼아 우리 자신의 악한 계획에 빠지게 하심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임을 기억하자.
돌은 그것을 굴린 자에게로 되돌아가는 법이다.
Ⅱ. 사래가 기분이 나빠 있는 동안, 아브람은 시끄러운 불평을 듣게 되어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사래는 그를 몹시 비난했으며, 부당하게도 그런 모욕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 있었다. “나의 받은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이는 그녀가 아브람이 하갈의 오만을 편들었다는 지극히 부당하고 질투 섞인 의심을 터뜨린 것이다.
아브람이 자기의 과실을 고치고 그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해야 할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사래는 경솔하게도 이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아브람이 그녀에게 당연한 권리를 거절한 듯이,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다.
사래는 이렇게 성이 나서,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은 말을 했다(욥 2:10).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1. 성미 급한 자들이 흔히 자기가 죄책을 지고 비난받아야 할 것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다툰다는 것은 일종의 자가당착이다.
사래 자신이 그 여종을 아브람에게 주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한 내가 그 얼마나 어리석었던고!”라고 해야 했을 때, “나의 받은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교만과 노여움으로 말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격정이 극에 이르면 이성을 잃게 되어, 남의 말을 듣거나 자기 말을 할 수도 없게 된다.
2. 하나님께 소란스럽고 성급하게 호소하는 자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경솔하고도 대담한 악담이 흔히 죄와 악한 마음을 품은 증거가 된다.
Ⅲ. 하갈은 심한 학대를 받고 그 집에서 도망갔다(6절).
1. 아브람의 온유함은 그 여종에 관한 문제를 사래에게 일임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다”.
그것이 가정에서의 그녀의 직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하갈이 그의 아내였지만, 사래에 대한 어떤 무례한 짓에 대해서도 하갈을 편들거나 감싸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래에 대한 아브람의 사랑이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평화와 사랑을 간직하고자 하는 자는 심한 비난에 대해서도 온순한 대답으로 응해야 함을 기억해 두자.
부부는 서로 노하지 않도록 합의하고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양보한다는 것은 큰 노여움을 진정시킨다”(잠 15:1 참조).
2. 사래의 격분은 하갈에게 보복하도록 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다”.
사래는 하갈을 보통 종으로서의 장소와 일에서 벗어나 유폐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가혹한 행위를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정하고 가혹한 주인이 부당하게 그 종들을 고생시키는 것을 주목하고 계시며 불쾌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아 두자.
욥의 생각과 같이 그들을 위협하는 일은 삼가야 하나니,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욥 31:15)라고 했다.
하갈의 교만은 이 학대를 견딜 수가 없었고, 그녀의 도도한((실은 자기 위치와 본분 잊고 교만한)) 정신이 비난을 참고 견딜 수 없어서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다.”
그녀는 사울의 노여움을 피해 다윗이 도망했듯이, 사래의 노여움을 당분간 피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모든 일을 버리고 그 앞에서 도망쳤다.
그녀는 다음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1) 자기 여주인과 또 남편 되는 주인 아브람에 대한 자기 자신의 잘못.
교만은 어떤 의무의 속박으로도 아니, 많은 의무의 속박으로도 좀처럼 억제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그녀 자신이 먼저 여주인을 멸시함으로써 노여움을 샀다는 사실.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자는 자기의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자(벧전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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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 사래, 그리고 하갈 (3)(창 16:7-9)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천사 출현 기사다. 하갈은 율법의 모형이었고, 그 율법은 천사들의 의향에 따라 주어졌다.
그러나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다”(히 2:5). 다음을 살펴보자.
Ⅰ. 천사는 어떻게 도망하는 하갈을 붙잡았는가?(7절)
그녀는 자기 고향으로 도망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애굽 쪽에 위치한 술이라는 마을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우리의 괴로움이 보다 좋은 곳인 우리 집을 생각나게 한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하갈은 자기의 위치를 벗어났고, 본분을 벗어나 계속 방황하고 있다. 그래서 천사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1. 양심이나 섭리로 인해 죄악의 길에 들어서지 않게 되는 것은 큰 은혜로 알아야 한다.
2. 하나님께서는 곁길로 벗어난 자들을 잠시 동안 방황하게 버려두시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스스로 자초한 손해를 깨달아서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하신다. 하갈은 광야에서 피곤하여 주저앉았다. 그리고 맑은 물로 기운을 차리려 할 때 비로소 그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끄시고 거기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호 2:14).
Ⅱ. 천사는 그녀를 어떻게 심문했는가?(8절)
1. 그 천사는 그녀를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었다.
(1) 그녀의 교만에 대한 견제였다.
그녀는 사실상 아브람의 아내였으며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그녀를 “사래의 여종”이라고 부른 것은 그녀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남을 부를 때는 가장 높은 칭호로 부르는 것이 정중한 예의지만, 겸손과 지혜는 스스로를 가장 낮은 칭호로 불러야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음을 알아야겠다.
(2) 그녀의 처사에 대한 견책이었다.
사래의 여종은 사래의 장막에 있어야 마땅하며, 광야의 샘물 곁에서 방황하고 빈둥거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과 우리의 친족 관계를 염두에 두는 것은 좋은 일이 된다(전 10:4 참조).
2. 천사가 그녀에게 던진 질문은 지극히 적절하고 합당했다.
(1) “네가 어디서 왔느냐? 너의 본분과 아브람의 장막에서 축복받은 특전에서 도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신앙 깊은 가정에서 산다는 것은 큰 이득요, 그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 자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함에도, 우리는 사소한 유혹이 있어도 그 곳을 떠나기 쉽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너는 스스로 죄악의 나라 애굽으로 들어가고 있느니라”(그녀가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우상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위험한 광야 가운데로 들어서는 것이니라.” 그녀는 그런 곳을 통과해야만 했다(신 8:15). 하나님과 자기 본분을 저버린 자들은 “어디서 떨어졌는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디로 빠져들고 있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갈과 마찬가지로) “네가 애굽 길에 있음은 어찜이냐?”(렘 2:1; 요 6:68 참조)
3. 그녀의 답변은 정직하고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1) 자기 여주인을 피해 도망하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자기 여주인의 “낯을 피하여”, 또는 성내는 것을 피하여 도망한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자녀들과 종들에게 온유와 친절로 대하여 그들이 나쁜 길을 택하고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 행동이 저들을 정당화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4. 천사는 어떻게 적절하고 동정에 넘치는 충고를 하여 그녀를 돌려보낼 수 있었던가?(9절)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9절). 집으로 돌아가서 네 잘못에 대해서 겸손히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앞으로는 네 스스로 보다 잘하겠다고 결심하라.” 아브람이 그녀를 뒤쫓아 사람을 보냈다고 하는 기사는 없지만, 천사는 그녀가 영접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자기의 위치와 본분을 벗어났던 자는, 과오를 깨닫게 되면 어떤 고생이 따르더라도 서둘러 돌아가고 개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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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에게 준 약속(창 16:10-14)
천사가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라”는 친절한 충고를 하갈에게 주자, 즉시 그녀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고 집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후 천사는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그녀와 그 자손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확증을 주어 그녀를 위로했다.
하나님은 자기 본분으로 돌아가는 자들을 긍휼로써 맞이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자복하리라 하였더니 주께서 사하셨나이다”(시 32:5).
Ⅰ. 그녀의 후손들에 관한 예언. “보라, 네가 잉태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형편을 주시한 것이다. 그 곳은 그녀가 거처하기에 적합치 않은 곳이었다.
잉태한 여인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하신 인정과 돌보심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알아두자.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형편을 보시고 거기에 알맞은 도움을 주신다.
1. 천사는 그녀가 안전하게 해산할 것과, 게다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을 보증한다.
이는 아브람이 바라던 바였다. 그녀가 겪은 공포와 방황은 자녀에 대한 그녀의 소망을 빼앗아 버렸을지도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녀를 그 어리석음에 따라 대하지 않으셨다.
2. 천사는 그 아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이것은 그녀와 그 이름에 대한 영광이기도 하다.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들으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그녀의 호소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들으셨고, 앞으로도 들어주실 것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때에 따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일단 경험했다면, 그와 유사한 위급에 처해서도 그와 같은 도움을 하나님께 희망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시 10:17).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11절).
신앙으로 애원하는 기도가 없는 곳에서도 때때로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인간의 고통스런 부르짖음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눈물도 말을 하는 법이다. 하나님께서 번민하는 자들의 고통을 돌아보실 뿐 아니라, 그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은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을 때의 알맞은 구원은, 하나님께 감사드림으로써 언제나 기억해야 함을 유의하자.
그런 난국에, 그런 어려운 시기에 “여호와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시고 나를 도와주셨다”(신 26:7; 시 31:22 참조).
3. 천사는 그녀에게 무수한 자손이 있으리라는 약속을 한다(10절).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케 하리라”.
히브리어로 보면, “번성하리니, 내가 그것을 번성케 하리라”고 되어 있다. 곧 모든 세대를 통해 자손을 번성케 하며 영속시킨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터키 인들과 무슬림(12족장)들이 이스마엘의 후예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들은 큰 민족이 되었다.
이것은 아브람에게 준 약속의 이행이었으니,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라”(13:16)고 하셨던 것이다.
믿음 깊은 부모를 둔 많은 자녀들은, 비록 그들이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고 해도 그 어버이들로 인해 이스마엘처럼 외형적이고 일반적인 축복의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 두자.
4. 천사는 그녀가 낳을 자식의 성질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그녀에게 달갑지 않았을 것 같다(12절).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말뜻은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난폭하고 대담하며 인간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사납고 다루기 힘들며, 별 목표도 없이 살아가고, 봉사와 자제를 좀처럼 모르는 성품의 소유자를 뜻한다. 하나님의 계약에서 제외되어 있는 여종의 자녀들은, 날 때부터 들나귀 새끼 같다.
인간을 개화시키고 교화하여 현명하게 만들고 어떤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은혜에 의해서라는 것을 기억하자. 여기에 몇 가지가 예고되어 있다.
(1) 그는 분쟁과 전쟁 상태 속에서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 손이 모든 사람들을 치겠고.” 곧 그의 죄를 뜻함이다. 또한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라”고 한 것은 그의 형벌을 뜻한다. 거칠고 불온한 정신의 소유자는 흔히 성가시고 어려움 많은 삶을 영위하며 남을 화나게 한다. 남을 비방하는 자는 자기에게 그 보복이 올 것을 각오해야 한다. 자기의 손과 혀가 모든 사람을 치는 자는 또한 모든 자의 손과 혀가 그를 칠 것이니, 그에 대해 하등 불평을 할 이유가 없음을 기억하자.
(2) 그러나 그는 안전하게 살 것이며, 모든 세상과 싸워 자기의 땅을 차지하리라 했다. “그가 모든 형제의 목전에서(KJV에는 “in the presence of”로 되어 있음─역주) 살리라”고 했다. 비록 이웃에서 위협을 받고 모욕을 당해도 그는 자신의 땅을 보존하며, 아브람으로 인해 자기 소유지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25:18), 그는 생존시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서” 죽었다. 경망하게 자신을 드러낸 많은 자들이 이상하게도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로 보전함을 받고 있으나, 그것은 저들이 죄로 인해 생명을 빼앗기거나 위태롭게 될 때에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마땅히 받을 응분 이상으로 매우 인자하게 대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Ⅱ. 은혜스럽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대한 하갈의 경건한 태도(13, 14절). 그녀의 말을 통해 다음을 살펴보자.
1. 하갈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섭리가 자기에게도 적용된다고 말함으로써, 그에 대한 경외심을 표명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로써 그녀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했으며, 그를 찬양하여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하갈과 더불어 있을 영원한 하나님의 이름이며, 그녀가 생존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알고 기억할 것이니 영원한 하나님의 기념이 될 것이다.
(1) 우리가 관계해야 할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며, 그 분은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고대인들이 표현했듯이) 하나님은 모든 눈이시다.
(2) 이 사실은 우리 자신 각자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윗과 같이(시 139:1),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이가 나도 감찰하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3)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 두자. 다음은 참회자에게 합당한 말이다.
① “당신은 나의 죄와 어리석음을 감찰하시나이다.” 내가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탕자는 말한다(눅 15:18). 다윗은 “나는 당신의 시야 속에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② “당신은 나의 슬픔과 괴로움을 감찰하시나이다.” 이것은 특히 하갈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을 자초했을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③ “당신은 나의 돌이킴과 회개의 성실성과 신중함을 감찰하시나이다. 당신은 죄에 대한 나의 은밀한 애통과 당신을 향한 은밀한 나의 거동을 감찰하시나이다.”
④ “당신은 내가 혹 당신을 떠나는가를 감찰하시나이다”(시 44:20, 21). 이런 생각이 언제나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막아 주고 의무를 일깨워준다. 곧 “당신이 나를 감찰하시나이다”라는 말씀이다.
2. 자기에게 베풀어 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그녀의 겸손한 찬미가 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등을 뵈었는고?” 이 말씀은 출애굽기 33장 23절에 있는 말씀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 것이 아니라,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본 것이다(고전 13:12). 아마도 그녀는 천사가 떠날 때까지는(삿 6:21, 22; 13:21과 같이) 자기와 이야기하는 이가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 후에야 그녀는 두 제자들의 경우와 같이(눅 24:31, 32) 반성해 봄으로써 그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거룩한 영혼이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은총의 눈을 가지심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눈을 가짐으로써 이루어진다. 교제는 눈으로 계속된다.
(2)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의 특권은 경탄과 찬미로 우러러보아야 한다.
①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은총이 허락되는가를 생각해 볼 때 그렇다. “내가 말입니까? 그처럼 천한 내가, 그렇게 타락한 내가 말입니까?”(삼하 7:18)
② 우리가 그런 은혜를 입은 장소를 생각해 볼 때 그렇다. “여기에서요? 아브람의 장막과 그의 제단에서뿐만 아니라, 여기 이 광야에서입니까? 내가 결코 생각지도 아니했고, 나의 의무를 벗어났던 이 곳에서입니까? 주여, 어찌됨이니이까?”(요 14:22) 어떤 자는 이 질문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회의 반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곧 나의 고민과 고생 중에 하나님을 구했던가? 아니다. 전에도 그랬듯이, 나는 하나님께 대해 부주의하고 무관심했도다. 그러나 그 분은 이처럼 나를 찾아 돌보아 주시는도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은총으로 우리를 앞서 가시어, 그를 찾지 않는 자에게도 나타나시기 때문이다(사 65:1).
Ⅲ. 이 일 때문에 그 장소에 붙게 된 명칭. “브엘라해로이”, 곧 “살아 계셔서 나를 감찰하시는 자의 우물”이다(14절). 이 이름은 하갈이 붙였을 것이다. 그것은 이 사건의 영원한 기념이 되어, 먼 후대에 이르기까지 간직되었다. 이 곳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고민에 빠져 있던 한 가련한 여인에게 보이신 특별한 인정과 보호를 드러낸 곳이었다. 여기에 명심해 둘 것이 있다.
1.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이는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시니, 그는 살아 계시고 감찰하신다.
2. 은혜로써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고 적절한 위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영혼을 위해 베푸신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어, 그들도 역시 용기를 얻고 하나님을 찾으며 믿도록 해야 한다.
3. 하나님께서 친히 은혜로써 나타나셨다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하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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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의 출생(창 16:15-16)
비록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천사가 하갈에게 명했던 바와 같이, 그녀는 그 여주인에게로 돌아가 복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후 때가 차서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의 계율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위로를 받는다. 그는 “육체를 따라 난”(갈 4:23) 여종의 아들이었다. 믿음 없는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다(25절). 여기에 명심해 둘 바가 있다.
Ⅰ. 아브람을 조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다(마 3:9).
Ⅱ. 교회 안에 있는 육의 자손들이 영적 자손보다 일찍 열매를 맺게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의 외모를 꾸미도록 만드는 일은 경건의 능력에 복종케 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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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하갈과 이스마엘
[1-2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아브람이 믿었고(창 15:4-6) 그의 아내 사래도 믿었겠지만, 사래는 결혼한 후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못했고(창 11:30) 그때까지도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좀더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 방법으로 이루려 하였다. 그것은 인간적인 연약한 생각이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애굽 사람 여종이 있었는데, 사래는 그를 자기 남편에게 주어 그를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는 그 일을 남편에게 권유했고 남편은 아내의 말을 따랐다.
마치 첫 사람 아담이 그 아내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인 것처럼, 아브람은 아내의 인간적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의 권유라 하더라도 그는 거절할 것은 거절했어야 했다. 아브람은 우리와 같이 연약함을 가진 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함이 있다.
[3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10년 후이었더라.
‘첩’이라는 원어(잇솨 )는 ‘아내’라는 말이다. 아브람은 아내가 둘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났다. 일부일처(一夫一妻)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의 갈빗대로 한 여자를 만드시고 부부가 되게 하셨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가 되게 하신 것이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동성간의 결혼이나 일부다처(一夫多妻)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4-5절]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으로 인하여 임신한 하갈은 자신의 임신함을 깨닫고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갈의 잘못이었다. 하갈은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의 첩이 된 것이 여주인 사래의 덕분인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여주인을 끝까지 존중하고 섬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었고 마음이 높아졌던 것이다. 사래도 그런 일을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아브람과 자신의 가정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했던 일이 도리어 자기에게 고통으로 돌아와 당황했을 것이다.
[6절]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람은 사래에게 그의 눈에 좋은 대로 그 여종 하갈에게 행하라고 말했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였다.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했으니 학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주인이 여종에게 멸시를 받고 그냥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을 좀더 참고 끝까지 잘 대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자기 남편의 아기를 임신한 여종을 학대하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었다. 하갈의 인격이 부족해서 여주인께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 위치를 벗어났으나 그가 그런다고 여주인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브람의 마음은 사랑하는 아내 사래에게 있었다.
학대를 받던 하갈은 사래의 얼굴을 피해 집을 나와 도망쳤다. 학대받는 자가 도망치고 싶은 것은 사람의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학대는 자신이 스스로 가져온 결과이었다. 그가 여주인을 멸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런 학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상 도망칠 일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겸손히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해야 했을 일이었지만, 그는 도망쳤다.
[7-8절]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Shur)[슈르]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하갈을 만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려이었다. 본문의 여호와의 사자는 단지 한 천사가 아니었다. 10절에 보면, 그는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13절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이라는 말씀을 보면, 그는 구약시대에 종종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창 22:12, 14; 출 3:4).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광야의 샘 곁 곧 슈르 길 샘물 곁에서 하갈을 만나셨다. ‘슈르 길’ 곧 슈르로 가는 길은 당시의 주요한 도로 중의 하나이었고 그 길에 한 샘이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께서 하갈을 만나신 것은 그 샘 곁, 즉 구체적인 한 장소에서이었다.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하갈에게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시며 하갈의 신분을 언급하셨다. 그의 신분에 대한 언급은 하갈로 하여금 즉시 자신의 신분을 다시 깨닫게 했을 것이다. 하갈은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멸시했고 그에게 학대받았던 사래를 ‘나의 여주인’이라 불렀다. 그렇다, 그는 사래의 여종이었다.
[9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은 여종의 마땅한 본분이다. 종은 주인을 멸시하지 말고 그에게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중히 여기신다. 또 임신한 몸으로 도망친 것은 자신과 태아 모두에게 해로웠다. 그 태아는 아브람의 아이이다. 그는 자신과 그 아이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정한 때까지 힘들어도 집에 머물러 있으며 여주인 사래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것이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질서를 존중하며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질서와 혼란을 원치 않으신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학생은 선생님께 순종하고 직원은 상급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적절한 다른 길을 보여주시기 전까지 현재 처한 환경에 적응하고 겸손히 자기를 부정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0-12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께서는 또 하갈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녀의 다산(多産)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복이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가 실수로 잉태케 한 하갈의 아들도 복주셔서 번식케 하실 것이었다.
또 그는 하갈이 낳을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고 그가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신 것이다. 그는 사람이 고통 중에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또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시다(시 68:5).
또 그는 하갈이 낳을 아들이 사람들 중에 들나귀같이 되겠고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 것이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어떻게 활달하고 호전적 인물이 될지를 보인다. 이 말씀대로, 이스마엘의 자손인 아랍인들은 호전적 유목민의 특징을 가졌다.
[13-16절]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 )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86세이었더라.
하갈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주인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외로웠겠지만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에 너무 감격하였을 것이다.
‘브엘라해로이’( )는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샘물’이라는 뜻이다. 그 샘물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다는 언급은 모세의 보충적 설명이라고 보인다. 성경의 사건들은 사람이 지어낸 허구적 내용이 아니고 진실한 역사적 내용이다.
때가 되어 하갈은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었다. 그때 아브람은 86세, 즉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1년쯤 되는 때이었다. 비록 아브람의 적자(嫡子)가 아니고 서자(庶子)이긴 하지만,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첫 아들이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사래와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지 못하고 인간적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려 하였다. 여종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은 잘못이다. 일부일처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때때로 서서히 이루어지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 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믿고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잘 지키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한 것은 자기 위치를 망각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을 학대한 것도, 인격적 결함을 가진 여종을 사랑으로 품지 못한 부족과 연약함이었다. 우리는 질서를 중히 여기고 서로 존중하고 피차 복종하며 또 모든 사람에게 항상 선을 베풀어야 한다. 종은 두려움과 성실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엡 6:5). 또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사람의 감정을 따라 보복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셨다(마 5:39-48).
우리는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롬 12:17, 21).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자를 감찰하시고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만 돌아보시지 않고 그의 여종 하갈도 돌아보셨다. 그는 하갈을 감찰하셨고 그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자손도 번창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돌아보시며 고통 중의 우리의 부르짖음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7:10-16,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어떤 사람의 고난이 비록 그의 부족때문에 왔을지라도, 그가 하나님께 회개하며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며 그를 그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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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동행..완전함...패역...선심/선심성...
[[성실한 가난(잠28:6) ]]
[잠19:1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잠28:6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28:18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그리스도인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까? 솔로몬은 성도는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실하게( מיםִת ָּwithout blemish, complete, perfect ) 는 흠이없이 완전하고 완벽하게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가 완벽하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노아가 그랬고 욥도 그랬다.
노아와 욥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악에서 떠나 완전한 자였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 מיםִת( ָּ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6:9 ) ]
[그 사람은(욥) 온전하고( תם (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מיםִת "( ָּ고 말씀하셨다.
이전까지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앞에서 완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완전함을 위해 할례라고 하는 쓰라리고 아픈 경험을 하게 하셨다. 할례는 죄를 잘라내는 영적 예식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한 후에 하나님앞에서 완전해졌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성도가 완전함에 거하는 상태는 하나님과 동행할 때이다. 하나님과 동행한다( walking with God התהלך 히트파엘 traverse )는 뜻은 횡단하다 가로지르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광야를 가로지르다는 뜻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어떤 중요한 계기가 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그 후로부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므두셀라를 낳을 때 하나님의 심판인 대홍수에 관한 계시를 받았을 것이라고 옛문헌은 전하고 있다.
노아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그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인이며 완전한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욥은 어떤 동기를 얻어 완전한 자의 삶을 살았을까? 욥은 번제를 통해 죄사함의 은혜를 얻었고 번제를 삶의 중요한 의로 실행하고 있었다.(욥1:5)
아브라함은 할례를 통해 완전함에 이르게 된다. 완전함이란 항상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결과이다.
완전함은 자신의 의지나 뜻 사상으로는 절대로 이룰수 없는 영성이다.
자신의 의지 뜻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모든 발걸음의 보조를 맞추어서 하나님과 같은 방향 하나님과 같은 목적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초지일관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왔지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을 하나님없이 살아가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의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할례 전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99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완전하라고 하시고 할례를 명하셨고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함으로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성실하게(완전하게)행하는 것과 반대는 굽은 길로 행하는 것이다.
굽은 길로 행한다( he that is perverse in his ways )는 말은 어떤 뜻인가? "그의 길들(두 길)에서 패역한 자" 이다. שׁקֵּע ) ִdistorted, crooked, froward, perverse )
세상에는 많은 삶의 방식 삶의 길들이 있지만 크게 의와 진리의 길 그리고 죄와 사악한 길이다.
위에서 말한 의인 즉 욥이나 노아 에녹은 의와 진리의 길을 걷는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
세상에서 악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완벽하게 죄와 사악한 길에 서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서 완벽한 의인도 없지만 완전히 죄와 사악한 길만 걷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 길이 있는데 의의 길과 죄의 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패역한 자 굽은 길을 걷는 자라는 말은 의와 죄의 길을 왔다 갔다 하는 자를 말한다.
아무리 악한 폭군에게도 선한 면이 있다. 살인자에게도 연민은 있다. 성경에서 패역하다 굽었다고 하는 말은 선과 악을 오락가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함께 행하고 유불리에 따라 선과 악을 섞어서 행하는 자들을 패역한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타락한 이스라엘은 패역한 백성이었는데 그들은 여호와의 단과 우상의단을 겸하여 섬겼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겸하여 섬기는 자를 가증스럽게 여기시고 패역한 자(굽은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악인은 어떨 때 선한 길을 걷는가? 대체로 민중들의 환심을 사려 회유할 때 그렇다.
복지란 불특정 다수가 혜택을 보는 것, 선심이란 원래가 좋은 마음 즉 악의 없이 베푸는 것. 반면에 하지만 ‘선심성’은 그 성격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선심과 유사한 성격의 그것이란 의미로, 무언가 목적이 전제 되면 ‘선심 아닌 선심성’이 되는 것이다.
사악한 네로 황제도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심성 정책과 회유를 시도했다. 잔인한 헤롯 왕도 유대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주었다.
악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선을 행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악을 행한다.
패역한 자들은 때로는 선한 척하고 때로는 표독스런 야수처럼 행한다.
일반적으로 착한 척하지만 반면에 거짓과 위선 잔인한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악인은 선과 악을 넘나드는가? 그것은 자신의 부와 권력 쾌락과 욕망을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해도 패역한 자들이 반드시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유익을 취하기 위해 선과 악을 이용하지만 끝까지 부도 권력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패역한 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유익을 좇아 선악을 넘나들며 죄악의 유희를 즐긴다.
하와는 왜 선악과를 먹었을까? 선과 악을 자유롭게 취할 수 있기를 소망했던 것일까?
결국 두 길(선과 악)을 욕망에 따라 걸어가고자 하는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난과 고통 미움과 슬픔과 질병과 죽음의 길을 걸어간다.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기 전에는 두 길을 걸었다. 순종의 길과 불순종의 길 ....그러나 할례를 받은 후에는 오직 믿음으로 진리와 의의 길을 걸었다.
이삭을 하나님앞에 바친 후에 아브라함은 욥 노아 에녹의 길에 접어들었다.
참되게 믿는 그리스도인이 진리와 의의 길을 걷는 것은 부 권력 명성 쾌락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의와 진리의 길을 걷다가 재물을 얻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려도 의의 길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거칠고 힘들고 환란과 궁핍이 지속되어도 다른 길(거짓과 죄악)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성실하게(의롭게) 걷는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리스도의 피와 죄사함 은혜와 진리 거룩을 좇는 삶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삶은 돈이나 성공 명예 인기에 휘둘리지 않는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자체가 부귀 영화가 되는 것이다.
성도의 부귀영화는 세상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다. 성도의 부귀영화는 거룩함과 진리 영광과 존귀한 영혼의 삶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가난하게 사는 자는 하나님 없이 부자로 사는 자보다 복되고 마지막에 진짜 부요함이 되는 구원을 얻게 된다.
하나님 편에 서는 자는 돈과 재물이 부족하고 궁핍해도 진정한 부요함을 누린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이다.
세속적인 부자와 성실한 빈자가 인생이란 링위에서 시합을 했는데 주심인 솔로몬은 후자의 손을 번쩍 들어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