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12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계15.<보좌앞>후기의 이기는 자들_금대접 일곱 예비됨.Q의 거룩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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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5장...후기의 이기는 자들<불붙는 유리바닷가..일곱대접재앙 직전 등장>

[321. 날 대속하신 예수께]  [446. 주 음성 외에는]


[그분의 어떠하심을 계시해 주신 바, 바로 그대로이신 Q, 그분은 진실로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사랑의 Q, 그분은 진실로 거룩하심]...말씀하신 그대로 그분의 제시하신<의>를 따라 누림의 길을 열어 놓으셨음!!!.

[거룩함]..히브리어 코데쉬(kodesh)/카데쉬 = 잘라냄/분리함<더러움과 분리됨의 상태> = 높고 위대함

.....<사랑이시며, 사랑하시며, 사랑받기 원하시는>Q은 모든 사람마다 그분을 사랑하여 지고지선-최상의 진복-영생인 바 상호 교통-거함-누림 안에 그분이 공급하시는 사랑으로 하나되어 살기를 원하신다.

.....그것을 진실로 원하는 사람들마다 그 길을 보여주심 통해 각 사람에게 합당한 거룩함을 요구하시는데, 오직 먼저 주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모든 거리낌마다 자백하고, JC보혈을 의지함, 곧 JC의 십자가죽음의 대속과 영원한 보혈의 죄 씻김 효능을 믿고  의지함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따라 JC이름 부름으로써 하나됨의 사랑과 기쁨, 밀월의 교통 인한 평강 안에서 Q을 살아내며 닮아감 이룰 수 있게 하셨음.

..,,,이는 또한 Q과 사람 사이의 완전한 상호 만족 누림, 곧 상호 교통-거함-누림-기업-소유됨을 위함인 바, 그분의 참 만족 얻으심은 바로 모든 참되게 믿는이들의 유기적 공동체인 우주적 교회, 곧 한 새사람, 새 예루살렘,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를 산출하심 통해서 이루시려 함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의 개념] = 언약적/관계적 의 = 관계적 <의무 수행에 있어서>신실함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의로우시나, 사람은 범죄함으로써 의롭지 못하였음, 이러한 불의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음 -->이의 해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바 관계적 의를 회복케 하는, [언약적 공의와 언약적 자비의 길인바] JC십자가 대속의 죽음-부활을 믿고 새롭게 거듭난 자로서 주와 하나됨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으로 들어 섬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회복의 길을 열어 놓으셨음...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셋째 화, 7째나팔울림으로 시작됨]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물이 담겼었으나 이제 불못으로 변한 상태임을 지칭..4:6에서는 아무도 없었음]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 바닷가는<수장/육체의 죽음> 경험 통과를 의미하기에 그들은 실지로 죽음 거쳐<순교> 부활하여 보좌앞으로 휴거되었음을 의미..[후기의 이기는 자]

....[하나님의 거문고...Q이 만들어 주신 거문고...초기의 이기는 자들의 고백소리는 거문고 소리 같았다(14:2) 하였으나 후기의 이기는 자들에게는 실지로 거문고가 주어졌음]말씀하신 그대로 Q이 마침내 <영원한 구속과 구원을>이루심을 실지로 삶속에서 경험한 바, 그것을 감사하는 이들이 <성령으로 하나되어...(초기의 이기는 자들의 노래는 아마도)우리 찬양 향기 되게 하시고, 주의 보좌에 기둥 되게 하소서!!일 것> 각 사람마다 전 존재 기울여 Q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사랑-희락-화평 누림의 찬양-감사-고백을 균형-일치-오묘한 어울림과 조화로 더욱 자유로이 극도의 아름다움으로 연주하고 풀어내기 위한 교통과 찬양의 도구일 것.

....후기의 이기는 자들은 축복을 받는 이들이요, 거룩할 것이요, 둘째 사망이 그들을 지배할 권세를 갖지 못하는 바(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과 함께 천년간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장차 올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열국을 다스리는 공동왕으로서 왕노릇할 사람들 가운데 포함될 것(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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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20:4-6]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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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홍해, 곧 심판의 물로 대적을 심판하시고 친 백성들을 부활 안으로 건져내심 감사], 어린 양의 노래[=원수의 목전에서 구속하사 상을 차려주시며 기름을 머리에 부으심(시23), 곧 그리스도의 구속 체험 감사]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적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과 심판]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Q의 본성...[거룩한]의 단어 의미는 그 자체가 신성한 속성에 들어맞고 또 그것을 형성하는 성질들의 총체가 그러함을 의미..Q의 어떠하심<성-의-진-선> 안에서 성<거룩...점흠티주름 없고 순전온전완전하심>-선<선하심 =사랑, 아낌없이 내어주심>은 그분의 본성, 의<계시하신 성품 그대로>와 진리<말씀하심 그대로>는 통치/행사의 원칙임] 주의 의로우신[=Q의 원칙]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 [Q의 역사와 Q의 길]**Q의 역사<결과> = 행사/일하심..위대하고 기이함//**Q의 길<원칙> = 통치 원칙, 의롭고 진실/신실하심...Q의 길을 아는 자라면 Q의 역사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해도 그분의 역사를 보기 위해 [애타게 안절부절하며]구태여 끝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음에 주의하라..(Q은 의롭고 신실하시므로 주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에!!)..모세는 Q의 길<일하시는 원칙, 곧 의롭고 신실<진실>하심>을 알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직 그분의 행사<결과만 관심함>만 알았다(시103:7)....Q의 길을 아는 자마다 Q이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실행하사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Q의 지혜를 보라...이미 죽은, 이기는 자들은 사내 아이가 되며, 지금 살아 있는 <초기의 이기는 자>들은 처음 익은 열매가 되며, 대환난 동안 순교한 이들은 <후기의 이기는 자>들이 될 것이다....대환난을 통과하는 대부분의 믿는이들은 본격수확물 가운데 포함될 것이다. 수확물의 휴거 뒤에도 주님은 수확후에 익게되므로 익을 때까지 더 많은 햇볕 쬠이 필요한, 베고 남은 이삭들을 여전히 모으셔야 한다...한편, 대환난이 끝날 때 주님은 행악자들인 포도들을  포도주 틀에 모으시고 하나님의 격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임을 본다.

.....[날구원하신 주 감사/기뻐하며 승리의 노래 부르리/그 큰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615 >/영광의 주님 찬양하세...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성부의 어린양이<82 >/예배드릴 왕의 왕은/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그분의 건축을 통한 Q자신의 표현] 장막[나오스,NAOS= 장막 안의 지성소 그 자체 = 새 예루살렘 그 자체로 확장됨(장-광-고 각각 12000스타디온.**1경기장 직선 길이...1스타디온 =190미터(12000스타디온=2280킬로미터...대략 LA~달라스 또는 시애틀~샌디에고 간 거리.).Q의 증거인 율법의 언약궤가 장막 안에 두어졌기에 증거 장막이라 했음]의 성전이 열리며[=이제는 온 우주가 볼 수 있도록 우주적으로 공개되고 있음!!...4장2-3절의 무지개를 두른 보좌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6-11장까지에 있는 모든 심판의 중심인 반면에, 언약궤를 가진 성전은 적극적인 측면으로서 12-22장까지에서 Q이 우주 안에서 수행하신 모든 성취들의 중심이기에, 계시록의 첫부분인 1-11까지의 중심은 <무지개를 두른 보좌>이며, 둘째 부분인 12-22장에서 계시의 중심은 언약궤가 있는 성전인데, 이는 Q의 건축과 건축을 통해 Q을 표현함인 증거를 위한 것!!.]....일곱대접 재앙 심판은 무의미하게 단순히 보좌로부터 그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한층 Q의 증거를 위해 그분의 성전에서 나온 것임을 가리킴 :: 즉 심판은 증거를 위하며 증거는 심판을 가져오고, 그 결과는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오는 바, Q의 간증(증거) 통한 건축에 있음...심판을 감수할 때마다 그 영에 의해 Q안으로 건축됨을 뜻함

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제사장의 복장..군인의 복장이 아님..이 일곱대접 쏟음은곧 기도나 탄원에 의한 응답이 아니라 <후기의 이기는 자들의 찬양-하나님의 본성과 , 통치원칙, 그분의 표현을 가지기 원하신 경륜 성취를 찬양함->에 대한 응답임을 주의하라..]

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 여기 이 시점은 더 이상 <회개하고 주께 돌이킴의>참된 유익을 위해 허락하시는 심판과 징계로서가 아니라,  Q과 그의 백성된 친 자녀들의 보수를 위한, Q의 경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거역하는 무리들의 멸절 위한 결단, 그 실행에로 나아가고 계심을 의미. **이처럼 일상 생활, 공적 생활, 교회생활 모든 방면에 있어서 모든 소극적 부정적 요소마다 Q의 심판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Q의 성전, 곧 Q의 표현이 될 수 있음!!

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반역적인 사람들에 대한 Q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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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의 보좌<행정..심판..심판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심으로써 진멸되지 않게 하심>는 그분의 성전<표현..건축>을 위한 것, 영원과거부터 <행정을 위해> 보좌에 계셨던 분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 곧 <그분의 표현을 위해> 성전 갖기를 갈망하시기에 그분의 거하실 처소인 성전, 곧 우주적 교회(최종 완성은 새 예루살렘) 건축 위해 일하고 계시며, 보좌로부터 친히 그분 자신을 공급해 주시는 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와 온 성을 적심 통해서, 참되게 그분 안으로 건축해 가시는 바,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은 보좌로부터 흘러나오시는 하나님의 최종 완성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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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lation 15   Amplified Bible

===A Scene of Heaven

1 Then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wonderful [a warning of terrifying and horrible events]: seven angels who had seven plagues (afflictions, calamities), which are the last, because with them the wrath of God is finished [that is, it is completely expressed and reaches its zenith].

2 Then I saw something like a sea or large expanse of glass mixed with fire, and those who were victorious over the beast and over his image and over the number corresponding to his name were standing on the sea or large expanse of glass, holding harps of God [worshiping Him]. 

3 And they [a]sang the song of Moses, the bond-servant of God, and the song of the Lamb, saying,   “Great and wonderful and awe-inspiring are Your works [in judgment],  O Lord God, the Almighty [the Omnipotent, the Ruler of all];  Righteous and true are Your ways, O King of the [b]nations!

4 “Who will not fear [reverently] and glorify Your name, O Lord [giving You honor and praise in worship]?  For You alone are holy;  For all the nations shall come and worship before You, For Your righteous acts [Your just decrees and judgments] have been revealed and displayed.”

5 After these things I looked, and the temple (sanctuary) of the tabernacle of the testimony in heaven was opened, 

6 and the seven angels who had the seven plagues (afflictions, calamities) came out of the temple, arrayed in linen, pure and gleaming, and wrapped around their chests were golden sashes. 

7 Then one of the four living creatures gave to the seven angels seven golden bowls full of the wrath and indignation of God, who lives forever and ever. 

8 And the temple was filled with [c]smoke from the glory and radiance and splendor of God and from His power; and no one was able to enter the temple until the seven plagues of the seven angels were finished.

===Footnotes

Revelation 15:3 At the end, the old covenant that came through Moses is seen to be in complete unity with the new covenant in Jesus Christ.

Revelation 15:3 Two early mss read ages. 

Revelation 15:8 The awe-inspiring manifestation of God’s shekinah glory was seen in the tabernacle, then when Solomon’s temple was dedicated, and the prophets said it would be seen again at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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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5장 (개요)

근래의 유력한 주석가들에 의하면1장에서 14장까지의 내용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 사도 요한에게 아래의 몇 가지 점을 나타내 보여주셨다고 말한다.

Ⅰ. 이교도의 지배하에 있던 교회의 상태가 밝혀짐. 

이 일은 여섯 개의 인들을 떼시므로 밝혀진 것이었다.

Ⅱ. 교황 지배하에 교회의 상태. 

이 일은 일곱째 인을 떼자 울리기 시작한 여섯째 나팔의 환상 속에서 밝혀졌다.

Ⅲ. 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의 상태에 대한 보다 개괄적이며 간략한 설명. 

이 일은 작은 책의 환상 가운데서 드러난 것이었다.

Ⅳ. 어떻게 적 그리스도가 멸망되며 어떤 단계로써 멸망하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이 일은 일곱 대접의 환상에서 밝혀졌다. 그런데 본 장에서는 일곱 대접을 쏟기 이전에 그 준비 단계로 무서운 서막이 전개되고 있다.

1. 이 크나큰 역사를 수행할 하늘의 천사들의 모습과 천군들이 이 놀라운 섭리를 찬양하는 즐거운 환호의 장면이 나타나 있다(1-4).

2. 천사들이 쏟아 세상의 큰 소동을 일으킬 대접들을 받기 위해 하늘로부터 나오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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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대접(1)(계 15:1-4)

여기에서는 일곱 대접을 쏟는 일을 위한 서막이 열리고 있다. 

이 일은 일곱 천사에게 위탁된 것이다. 

먼저 사도 요한에게 천사들이 나타난 광경을 유의해 보자. 천사들은 "하늘"에서 나타났다. 그것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같이 놀라운 모습을 띠고 천사들이 나타난 이유.

1. 천사들의 임무의 막중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임무란 최후로 적 그리스도를 멸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이번 일로써 적 그리스도의 세력에 마지막 일곱 재앙을 쏟으려고 하셨다. 

이제 바벨론의 죄악이 가득 찼으므로 그들은 이제 복수심에 가득 찬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게 될 것이다.

2. 이에 대한 목격자와 증거자들. 

그들은 "짐승에 대해 승리를 거둔 모든 자들"이다. 이들은 유리 바닷가에 서 있는다. 

유리 바다란 이 세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세상이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게 될 연약한 것임을 보여준다고 흑자는 말한다. 

또는 이 유리 바다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복음 계약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복음의 계약은 제사장들이 손을 씻는 성전 안에 있는 놋바다의 상징적인 뜻인데 위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유리 바다를 놋바다의 상징적 의미와 연결시킨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그리스도의 의(義)의 샘가에 서 있었다고 본다]. 

또는 이 유리 바다란 어떤 다른 이들의 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는 동안 멈추어 있었던 "홍해 바다"로 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동안 불기둥의 불빛이 홍해에 반사되어 바다에 불이 섞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해에 불빛이 반사되어 바다에 불이 섞인 것처럼 보인 것은 바로와 그의 기병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멈추어 있는 바다를 합치시켜 그들을 멸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후자의 뜻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더 확실한 증거는 유리 바다가에 선 성도들이 예전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부른 "모세의 노래"를 부른 사실이다. 

이 노래에서 그들이 찬양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그들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의 백성의 대적을 소멸하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의 위대함과 그의 뜻의 의로움과 신실함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비록 그것이 아직 성취되지 아니했을지라도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에서 기뻐했다.

(2) 그들은 열국을 향해 열국이 하나님의 진실과 공의로움을 발견하였으니 이제 이에 합당한 경의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라고 만국을 초빙한다. 

"주여 누가 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리까?(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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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재앙(계 15:5-8)

아래의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Ⅰ. 천사들이 그들이 사명 수행을 위해 하늘로부터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들은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5절) 나타났다. 

여기에 장막과 성전 안에서 가장 거룩한 곳인 하늘의 지성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지성소에는 "증거 궤를 덮는 속죄판"이 있고 또 이곳은 대제사장이 중재하는 곳이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교통하며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곳이다. 

우리들이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하나님이 적 그리스도의 진영에 심판을 내리실 때에 그는 모든 예언과 계약의 약속들을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 예언과 약속들은 언제나 그의 앞에 놓여 있어서 그는 항상 그 내용을 기억해 두신다.

2. 이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기도를 응답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기도는 대제사장을 통해 그에게 드려진 것이었다.

3. 이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헐뜯은 자들에게 복수하신다는 사실이다. 

적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직분과 권위는 유린당했고 그의 이름은 더럽혀졌으며 그의 죽음의 대 목적이 난관에 부딪쳤던 것이다.

4. 이 심판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이후로는 수없이 많이 열릴 엄숙한 예배에 참석하여 자기에게 예배할 수 있는 자유의 문을 넓게 열어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Ⅱ. 사명 수행을 위해 천사들이 갖추고 준비한 것은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1. 그들의 복장. 

그들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다(6절). 

이 복장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뵈오려 들어가 그의 응답을 받아 나올 때에 갖추는 복장이었다. 

이러한 대제사장의 복장을 천사들이 갖추었다는 것은 이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즉 "크신 하나님의 잔치"를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19:17). 

천사들은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종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일을 순수하고 거룩한 태도로 행한다.

2. 그들의 무기. 

곧 그 무기의 종류와 그들에게 그 무기를 준다. 이 큰 사명 수행을 위해 받은 그들의 무기는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채워진 일곱 대접"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대적들에 대한 무장을 했다. 하나님의 분노로 무장되어질 때 가장 비천한 존재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될 수 있다. 

더구나 하나님의 천사야말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한꺼번에 부어지지 않고 일곱 번으로 나뉘어 아주 성공적으로 적 그리스도의 무리에게 부어졌다. 

그러면 누구로부터 천사들은 이 대접들을 받았는가? 

네 생물들 중의 하나, 곧 참된 교회의 사역자들 중 하나로부터 받았다고 즉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그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또 그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꺼이 이 일에 자원하여 나섰다.

Ⅲ. 이 사건이 성전 가까이에 있던 모든 자들에게 준 영향.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 안에 가득 채워진 연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연기 때문에 이 역사가 끝나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 

적 그리스도의 이권은 열국의 이권과 복잡하게 얽혀 있으므로 모든 세상에 큰 충격을 주지 아니하고는 적 그리스도는 멸망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은 하나님 앞에 모이는 일에 조금도 방심하거나 나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방심하는 즉시 그들의 안식은 중지되고 그들의 공적인 예배 의식은 중절되며 모든 것이 혼돈 속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심판으로 그의 의를 실현시키는 방법을 통해 교회와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친히 말씀을 증거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 일들이 이루어진 후에는 교회는 쉼을 얻으며 성전은 열리고 무리들은 모이고 교화되어 그 수가 급증일로에 이를 것이다. 

교회의 가장 큰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두렵고 놀라운 조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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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제 15장

=====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 '이적'의 헬라어 '세메이온'(* )은 본서에서 세번 나타난다(12:1, 3). 이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곱 천사가 행할 일곱 대접 재앙을 가리킨다(6-8절;16장, Ladd, Johnson). 

일곱 대접 재앙은 여섯째 나팔 재앙에 이어 나타나는 셋째 화로서(11:14) 마지막 때에 심판을 종결짓는 절정의 사건이다(Hughes, Johnson). 

한편 '마치리로다'의 헬라어 '에텔레스테'(* )는 '완성하다' 혹은 '성취하다'를 의미하는 '텔레오'(* )의 예언적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는 이번 진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마지막 재앙이며 이후에는 오직 마지막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15:2

@또 내가 보니...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유리 바다 가에 서서. - 본절에서는 '유리 바다'와 '유리 바다 같은 것'이 혼용되고 있다. 이 '유리 바다'는 4:6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유리 바다는 4:6과는 달리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불이 섞인. -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유리 바다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으로 눈부신 순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unce,Hughes, ohnson). 2 혹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진노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Swete, Morris, Hendrikse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2) @짐승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 유리 바다 곁에 서 있는 자들은 짐승에게 절하여 경배하거나 짐승의 수인 666을 받는 것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살아온 자들로서 짐승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13:13-18;14:12, Ladd, Johnson). 그들은 하늘의 홍해라 할 수 있는 유리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다(Swete, Beasley-Murray).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 이것은 짐승을 이긴 자들의 기쁨의 찬양을 시사한다. 그들은 거문고를 가지고 승리의 기쁨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역사하신 구속의 승리를 경배하며 찬양한다(5:8;14:2).

=====15:3,4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하더라. - 본문은 짐승을 이기고 유리 바다 곁에 서 있는 자들이 찬양한 노래이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두 가지의 노래 즉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다른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한다(Ladd). 래드는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을 배경으로 하여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한 것이며 어린양의 노래는 짐승의 핍박과 위협으로부터 구원된 자들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2) 혹자는 한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한다(Mounce, Beasley-Murray, Hughes, Morris). 이들은 두 가지의 노래가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으로 부터 시작해서 어린양의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나 또는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이 어린양의 구원을 예표하는 모형이라고 해석하여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하나의 찬양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 어린양의 노래를 짐승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속으로만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모세의 노래에 대해서 혹자는 신 32장을 반영한것이라고 주장하며(Beckwith) 혹자는 홍해에서 수장을 통해 애굽 사람들의 추격을 퇴치하고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을 찬양한 출 15:1-18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Johnson).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Beasley-Murray). 그러나 본문의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가 출 15장과 신 32장을 반영한다 할지라도 그 내용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을 찬양한 것으로 유대인 회당과 초대 교회에서 불리어진것이었다(Johnson).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께서 영원하며 완전한 주권을 소유하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모든 자들을 진노로 심판하셔서 멸망시키시며,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셔서 자신의 의로움과 신실하심을 나타내신 것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15: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때에 법궤가 있었던 성막을 상기시킨다(출25:16, 21;민 17:7;18:2). 그러나 옛 언약 하에 있었던 광야의 성막은 참 형상이며 실체인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을 예표하는 그림자이다(히 8:5). 참 실체인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사실은 이미 11:19에서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며 확실한 것임을 시사한다(Ladd).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성은 백성에 대한 구속의 완전함과 확실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한 악에 대한 진노의 심판 또한 확실한 것임을 시사한다.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 '성전으로 부터 나와'는 일곱 대접 재앙을 실현할 일곱 천사의 출현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한편 본절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 중에서 '맑고 빛난'은 천사의 고결함과 거룩함을 의미하며(단 10:5, Mounce)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는 구약 시대의 왕적인 직분과 제사장적 직분을 상징하는 것으로(출 28:4ff.) 일곱 천사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대리함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15:7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 '세세에 계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주권이 영원하며 자신을 대적하는 악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실 권한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시사한다(Ladd, Morris, Mounce). 

한편 '대접'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알라스'(* )는 문자적으로 연희에서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나(암6:6) 혹은 희생 재물의 피를 담기 위해 제사의식에 사용하는 그릇을 의미한다(출27:3). 이러한 '피알라스'는 5:8에서 순교자들의 신원하는 기도를 담은 대접에 사용되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이 진노를 담은 대접에 사용되어 성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진노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성도들의 탄원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을 행하시게 하는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Ladd).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 '연기'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었다(출 19:18;40:34;대하 7:1-3;사 6:4). 본절에서 연기는 일곱 재앙을 통해서 악을 완전히 심판하시기 위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시사한다.  

한편 일곱 재앙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성전에 들어갈 자가 없다는 사실은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경외스러운 나머지 감히 접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대하 7:1-3;;합 2:20, Mounce, Johnson). (2) 모든 피조물이 온전히 깨끗함을 입는 마지막 심판의 때가 지나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Hug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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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앞 유리바다** :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영하기에 수정과 같다...보좌 앞에 위치한다..성도의 눈, 네 생물들의 눈들(계4:6), (불심판진행을 지켜 보면 감사하는) 유리바다가에서 있는 성도들의 눈....바로 이렇게 강조되는 것은 진행상황의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하신 바로 그대로]정의를 따라 신실함 바로 그대로 이루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 말씀의 뜻은 참되게 하나님을 누리며, [날마다 보혈과 말씀, 성령따름으로 ]하나님의 누리시기에 합당한, 곧 그분의 누림이 되는 친 백성들 됨이 그 무엇조다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함 아닐까..
[구약 회막에서는 제단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수족을 씻는 물이 담긴다....말씀의 씻는 물, 거룩하게 하는 물이 담긴 대야이다..솔로몬 성전에는 몸까지 씻을 수 있게 크게 만들기도 했다!!]....유리바다의 그 위치는 보좌 앞이다, .. 유리바다의 특성은 본래 하늘,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대로 닮아  투명한 수정과 같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세상에 임한  불심판 진행을 유리바닷가에 서서 목격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하신 바, 기록해 두신 말씀로 그대로 전개됨, 그분의 신실하심을 감사하게 되며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전심, 전존재로 드리는 사랑의 경배] 감사찬송하며 영광돌린다....그분의 말씀하심 안에서 그분의 주권적 뜻 그대로 진행됨을 드러내 증거한다...곧 진실하신 하나님의 어떠하심따라 그분의 다스리심의 주권적 통치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바,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비밀한 뜻-계획-경륜-섭리의 말씀하신 대로 진행되는 신실하신 약속 말씀 진행의 증거창이라 할 수 있을 것..
[계4:6 :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계15:2].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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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거울 앞에서(약10:22~25)
요즘은 좀 뜸한데 얼마 전에 비상배낭(생존배낭)이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지진이 발생하고 북핵 문제로 전쟁 위기설까지 퍼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불안감이 확산된 탓이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보면 여러 종류의 비상배낭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그 안에 어떤 물건들이 들어 있나 봤더니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침낭, 담요, 비상식량, 휴지, 라이터, 세면도구, 방한복, 나침반, 호루라기, 휴대폰 보조배터리, 손전등, 미니 라디오, 비상약 등입니다. 정말로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 아니 생존필수품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 빠진 거 없나요? 네, 성경이 빠져 있습니다. 성경을 통째로 암송하는 분들은 제외해놓고 기독자인 우리에게 성경이야말로 생활필수품이요 생존필수품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인생 지침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대해 세세하게 안내해 주는 인생, 곧 진정한 의미에서 [참생명으로 사는 참인간의 삶 매뉴얼]입니다. 
육신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아무리 잘 챙겨도 성경을 챙기지 않으면 영혼이 피폐해지고 결국은 삶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성경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성경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성경을 늘 가까이 함으로 큰 유익을 얻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1] 성경 :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먼저 성경은 과연 어떤 책인지 살펴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죽은 책이 아닙니다. 살아 있어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는 ‘산 책’(Living Book)입니다. 그 기원을 알아보면 수긍할 수 있습니다. 
딤후3:16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NIV-God-breathed, KJV-by inspiration of God) … ” 
여기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성령으로 감동된 책이란 뜻입니다. 감동되었다는 말은 영감(靈感, Inspiration)이 되었다는 뜻인데, 영어 동사 ‘inspire’를 사용하는데, 본래 숨을 불어넣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님이 숨을 불어넣어주셨다는 겁니다.
1차적으로 성경의 기록자는 인간입니다.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합쳐서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죠. BC 15세기~AD 1세기에 걸쳐 40여 명이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5권의 기록자는 모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틀어 모세오경이라 부릅니다. 마태복음은 마태, 사도행전은 누가, 로마서는 바울 …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인간 기록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독자적으로 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기록할 때 성령 하나님이 함께해 주신 겁니다. 
그들 각자의 지식과 경험, 개성 등을 사용하시되 성령님이 유기적으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바른 뜻을 기록하게 하신 겁니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오롯이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충분한 설명은 못 되겠지만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 연설문을 누가 쓰죠? 비서관들이 씁니다. 한두 명이 아니고 여러 명입니다. 분야별로 경우에 따라 각각의 비서관이 기록합니다. 각자의 재주를 발휘해서 씁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게 아니죠. 대통령과 충분히 교감을 하면서 씁니다. 최종적으로 대통령 자신이 확인하고 다듬은 후에 완성합니다. 그러면 그 연설문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대통령의 것이 됩니다.
성경의 기록 과정에서 성령의 영감이 마치 그런 겁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님입니다. 
그러니까 긴 세월에 걸쳐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 기록됐지만 ‘통일성’과 ‘정확무오성’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신비로운 책입니다.
이 66권으로 성경은 완성됐습니다. 가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66권 전권을 가리켜 흔히 정경(正經, Canon)이라 부릅니다. 
영어 단어 ‘Canon’은 헬라어 ‘카논’(κανων)에서 유래했는데 본래 ‘갈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대에는 표준 자가 없어서 갈대를 꺾어 대충 길이를 측정했습니다. 
그래서 ‘카논’(κανων)이란 단어가 ‘갈대’라는 의미 외에 ‘척도’ ‘표준’ 등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 66권이 한 권이 되었고 진리의 표준이란 의미로 정경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늘도 이 정경을 통해 우리에게 생생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가 가능할까요? 옛날 성경 기록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던 동일하신 성령님이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조명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령의 ‘조명’(照明, Illumination)이라고 합니다(요14:26, 고전2:10~13).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을 통달하고 있으므로 그 뜻을 밝히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진리의 교사인 셈입니다.
정리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겁니다.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는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읽는 당시에는 성령의 조명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기록된 성경은 우리에게 일단 일반적인 메시지(general message)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깨우쳐주심으로 나를 향한 개인적인 메시지(personal message)로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성경이 이런 책이라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책 자체를 우상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기대하고 대하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성경은 정말 우리 각자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고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부디 성경을 하나님 대하듯 대하심으로 인생에서 꼭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성경 말씀을 여러 가지로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예들 들면 길로 비유합니다. 한자로 보면 말씀 도(道) 자와 길 도(道) 자가 같죠.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안내해 주시는 인생의 길이라는 겁니다. 
혹은 등불로 비유합니다. 인생을 빛으로 인도하는 등불이라는 겁니다. 
이런 비유들이 많은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중의 한 가지가 나옵니다. 거울 비유입니다.
[2] 성경 : 말씀의 거울
약1:23에 보면 성경 말씀을 거울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거울이란 겁니다. 한자로 말하면 성경(聖經, Holy Bible)은 성경(聖鏡, Holy Mirror)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의 모습이 생긴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할지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어떻게 아름답게 단장하면 좋을지 판단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보면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달라져야 될지 알 수 있고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인생을 점점 더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을 이렇게 정의해 봅니다.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서 사는 삶!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말씀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면 좋겠습니까? 네 가지로 소개해 드립니다.
[3] 말씀의 거울 앞에서 : 성찰, 회개, 실천, 기도
첫째는 성찰, 둘째는 회개, 셋째는 실천, 그리고 넷째는 기도입니다. 이런 과정을 본문에서 암시해 줍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태어난 동생)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신앙의 실천에 관해 증거한 서신서입니다. 그 중에 본문을 보면 성경 말씀을 거울에 비유하면서 증거합니다. 
[약1:23~24]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발견합니다. 그러고 나서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게 당연합니다. 예를 들어 거울을 보니까 얼굴에 더러운 얼룩이 있으면 그것을 보고 나서 깨끗이 씻어내고 단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나서 곧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보나 마나입니다. 
그래서 야보고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약1:22] “*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그러니까 말씀을 보고 자신을 성찰하고 발견한 대로 고치고 단장하듯이 말씀대로 변화되고 행하고 살아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과정을 네 가지로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① 성찰 :
첫째, 성찰입니다. 성찰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잘 모릅니다. 외모도 거울을 보지 않으면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거울이 없을 때는 자신의 모습이 더럽고 추해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면 그냥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옛날 아프리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즘에야 아프리카도 도시화되어서 이런 일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이랬습니다. 거울을 처음 보고서 무척 신기해했습니다. 
여자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이게 나야? 내 입이 왜 이렇게 크지? 내 볼이 좀 더 올라가면 더 예쁠 텐데 …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남자들 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더러 더러운 사내라고 말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게 누구지? 너무 못 생겼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게 바로 당신이야!”라고 알려 주자 화를 내며 거울을 내동댕이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외모가 어떠한지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내면의 모습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과 인격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히4:12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마치 예리한 수술 칼로 인체를 샅샅이 해부를 하듯이 성경 말씀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감찰하며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래야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두 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된 후에도 법적으로는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됐지만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여기저기 죄인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런 가운데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바]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계속됩니다.
이런 말이 있죠. 국어를 잘 하라면 주제 파악을 잘 해야 되고 수학을 잘 하려면 분수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동일한 원리입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의 부족하고 추한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신앙의 기본입니다.
바리새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했을 뿐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마치 완전한 줄로 착각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자기 의에 갇혀서 남에게는 정죄의 칼을 들이대고 정작 자신은 부족한 모습으로 방치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② 회개 :
둘째, 회개입니다. 성찰 이후에는 회개해야 합니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더러운 게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방치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즉시 씻어내고 닦아내죠. 요즘 보면 외모에 관심이 많아서 더러운 게 아니라 작은 잡티만 생겨도 이를 제거하려고 애를 씁니다. 주름도 펴고 점도 빼려고 애를 씁니다. 거울을 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거울을 보고 자신의 부족하고 잘못한 모습을 발견하면 즉시 회개해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사도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심을 담대히 증거합니다. 그 말씀을 전해들은 군중들의 반응이 어떠했나요?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장본인들입니다. 
행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렇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바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된 겁니다.
여러분, 영화「벤허(Ben-Hur)」를 아시죠. 1959년에 제작된 영화인데 그 후에도 여러 번 개봉되고 개작되기도 한 명화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단체로 극장에 가서 본 기억이 납니다. 그 영화의 원작인 소실 벤허의 저자는 류 월리스(Lew Wallace, Lewis Wallace 1827~1905)입니다. 그는 본래 장군 출신으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독한 반기독교적 인사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기독교를 증오했는지 이런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성경의 모순을 파헤쳐 기독교를 말살할 수 있는 명저를 지술하자! 이런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결국 회개하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는 명저를 저술하게 됩니다. 그 책은 19세기 최고위 기독교 서적이 되었고, 그 후에 지금까지 소설과 영화로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고 회개했고 예수님을 믿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도가 된 후에도 여전히 부족한 나의 모습을 회개하면서 계속 변화되고 성화되고 있습니다. 부디 말씀의 거울 앞에서 이런 성화의 과정을 성실히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③ 실천 :
셋째는 실천입니다. 말씀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으면 실천하는 게 마땅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자기기만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약1:22을 다시 보시죠.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NIV-Do what it says)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럴 거면 왜 성경을 보느냐 이겁니다. 차라리 보지 말지. 보나 마나라는 겁니다.
이게 정말 중요합니다. 믿음은 마음속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진짜라면 사언행을 통해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마치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야고보는 2장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약2:20~22 “21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행함과 믿음의 관계는 하나로 연합된 겁니다. 마치 동전의 겉과 속의 관계와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 중 심각한 하나는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 노래하듯이 외치면서 구원받은 줄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런 건 마치 구원파 이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구원받았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정죄 받지 않는다는 식입니다. 종교개혁이 중세 가톨릭 공로 사상 즉 복음에 기초하지 않은 행위를 강조하는 데 반발해서 “오직 믿음!” 이라 외친 것이지 행위를 부정한 게 아닙니다.
야고보는 단호히 증거합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디도는 더 나아가 이렇게까지 증거합니다. 딛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이런 사람은 이름뿐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입니다. 결국은 실제적인 불신자(practical atheist)인 셈입니다.
예수님도 잘라서 말씀하셨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행함이 없으면 가짜 믿음이고, 그런 정도의 믿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나무라면서 사과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라는 겁니다. 이처럼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리며 신행일치(信行一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이런 사람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약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NIV-he will be blessed in what he does)”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말씀 순종(실천)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이번 시험 90점 이상 받으면 상금 줄게.” 이 말은 의무입니까? 특권입니까? 특권이죠. 옆집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내 아들이니까 말씀대로 살도록 권면하고 그 결과에 대해 상을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감상용이 아니고 실천용입니다. 19세기 복음전도자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는 하나하나 실천해 보고 하나님이 그대로 성취하시고 축복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시카고 무디신학교 캠퍼스 구내 기념관에 가 보면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헌성경책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여백에 T, P 등의 표시가 많이 나옵니다. 그 문자들은 T 는 Tried(실천해 보았다)이고, P는 Proved(검증되었다)입니다. 무디는 그저 말씀만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보고 그 축복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말씀의 거울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④ 기도 :
넷째, 기도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기에 성경 말씀을 잘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성경 말씀에 들어 있는 약속들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를 위해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함으로 승리를 체험하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프로 골퍼 최경주 선수는 부인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회심한 분입니다. 그는 늘 경기를 치러야 한기 때문에 항상 긴장합니다. 별명이 탱크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분필로 줄을 그어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코스가 보이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붙잡은 말씀이 바로 사41:10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또 한 번이 이런 경험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서 경기가 있었는데, 그 전날 밤 호텔에서 부인이 그에게 성경구절을 적은 쪽지를 건네주며 외우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요15:16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암송하고 경기에 임했는데 우승하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영국의 정치가로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섰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
~1833)가 있습니다. 그는 노예제도 폐지 법안을 발의했지만 번번이 반대 세력들로부터 방해가 있어서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그래도 그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들었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갈6:9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 병상에서 마침내 법안 통과 사실을 전해 듣고 소천했습니다.
여러분, 하루에 거울을 몇 번이나 보시나요? 거울을 보고 싫증을 내는 사람이 있을까요?
매일 보고 또 봅니다. 우리 영혼과 삶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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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토록 다스리실 전능하신 이<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계11:17)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15:3)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전능하신”을 헬라어로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라고 합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엘샤다이>의 의미이지만,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세상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분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 “전능하신 이”가 자주 사용됩니다.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둘러 싸고 계시며 충만하시며 모든 질서를 유지하시며 다스리는 분이신 것을 뜻합니다.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그 뜻대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심을 뜻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에서 <엘로힘>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보이셨던 하나님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로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다.
똑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는 죄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기에 강권적으로 개입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엘로힘>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면,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형상 대로 만드신 사람을 위해서 세상을 만드셨으면, 그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셔서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다시 오실 전능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소망이 오직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 언약적 공의]]
===[[사람의 믿음]]
...  로마서에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유명한 선포가 나오는데 그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뒤따라 나오는 말이 하박국서를 인용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이다. 주목할 것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의인의 믿음이 매우 밀접한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언급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의인의 믿음은 무슨 관계인지 생각하지 전에,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동의하듯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라는 개념은 개인의 도덕적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이다. 그러니까 의롭다는 것은 관계를 맺은 상대방에 대하여 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부모와 자식이란 관계에서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가 생기게 되는데 그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면 그것이 바로 의로운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의 개념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의의 개념은 한마디로 언약적 혹은 관계적 신실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났다 혹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복음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온천하에 미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그러니까 이 기쁜 소식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난 것이란 의미이다. 
이 말을 좀 더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서 나온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란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을 죄의 저주에서 해방시킨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이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계를 만드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언약적 책임을 반드시 감당하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가 차매 자기 아들을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신 것이고 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세상을 고치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란 곧 하나님의 언약적 혹은 관계적 신실함이기 때문에 그것은 관계 상대방을 향하여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언약 상대방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람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성경의 계시는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적 상대방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언약 상대방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사람을 향하여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는 언약적 자비(사랑, 은혜)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언약 상대방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 의무에 실패하였을 때, 즉 불순종하였을 때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또한 언약적 자비는 사람이 언약적 의무를 수행하였지만 그것이 부족하였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용하고 용납해주는 것이다. 
둘째는 언약적 공의( 진리, 정의)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언약 상대방인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을 때 그 죄악을 징벌하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징벌과 심판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 상대방인 사람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게 하려는 <참된, 더 나은 유익을 위한>징벌과 심판이다. 또한 언약적 공의는 사람이 언약적 의무를 잘 수행하였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보상해주는 <상급>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는 사람을 향한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지 그 의미를 선명하게 발견하게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곧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난 것이란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란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난 사건이란 말인가?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 이어지는 구절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증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와 진리가 바로 앞에서 말한 언약적 자비와 언약적 공의와 동일한 말이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충만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와 언약적 공의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온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죄를 미워하시고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진리였으며 동시에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마찬가지로 의로운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였으며 동시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였다. 이렇게 복음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곧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의인의 믿음은 무슨 관계인지 생각할 차례가 되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의 역사로 나타났으며,또 장차 그분의 다시 오심과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다. .
그러니까 복음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동이고 따라서 복음은 반드시 사람의 신실한 반응 혹은 대답을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믿음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신실하신 하나님의 다가오심 혹은 말 건네심에 대한 사람의 신실한 반응이고 대답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한 것은 사람은 복음을 믿음으로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신실하게 반응함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향한 언약적 신실하심이듯이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언약적 신실함이다.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 이것이 사람의 의이고 그래서 믿는 자를 의롭다 혹은 의로운 자 곧 의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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