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2장.
[출34:5,6,7...*4.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So Moses cut two tablets of stone like the first ones, and he got up early in the morning and went up on Mount Sinai, as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a]the two tablets of stone in his hand. *5.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Then the Lord descended in the cloud and stood there with Moses as he proclaimed the Name of the Lord.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6 Then the Lord passed by in front of him, and proclaimed, “The Lord, the Lord God, compassionate and gracious,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lovingkindness and truth (faithfulness);]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죄벌은 반드시 집행하시되 긍휼을 잊지 않으심..죄벌 집행=보응하심의 .그 목적은 회복!! >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keeping mercy and lovingkindness for thousands,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but He will by no means leave the guilty unpunished, visiting (avenging) the iniquity (sin, guilt) of the fathers upon the children and the grandchildren to the third and fourth generations [that is, calling the children to account for the sins of their fathers...회개케. = 새로운 복된 존재로 회복시키려 하심].”
....<이스라엘 = 사라 + 엘....늘 한결같이 감내하며 지속적으로 행하사 만족하심, 곧 늘 주도하시며 끝내 이기시고 다스리시는 한결 같은 하나님!!, 그분의 왕자(왕이신 Q 그분의 목적을 이루는 자)..> ==>redeemed, transformed<=sanctified>, bondservant of YHWH<구속받고 변화된 주님의 노예>
...."히브리" = 강을 건넌 자,..다함 없는 지고지선-사랑의 주님, 진정 주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바로 그 존재로 살게 하소서, 구속함 받고 거듭난 제게서, 주께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 제하시어 오직 주님의 기쁨과 사랑 만드소서.
..**다루심과 연단 거쳐 주께 절대적인 그릇으로 준비되고 있던 레위-유다 지파증에서 먼저 레위 지파를 들어 쓰심을 기뻐하라.. 주께 합당한 예배와 대언적 가르침이 무엇보다 먼저 있을 때 비로소 변화 통한<생명 성숙>과 함께 죄 정복이 오고 축복과 다스림이 바르게 시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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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히브리어로 분해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 + <엘>
즉... <이스라>는 '주도하다, 끈질기게 다투어서 이기다, 다스리다'를 뜻하는 <사라>의 3인칭 평서형 또는 기원형입니다.((끝까지 주도적으로 이끌며 다스리사 마침내 이기소서!!!,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 하나님이여!! ---너 주님의 왕자야, 이제 주로 주 되시게 하라 = 네 이름을 <주로 주 되시게 하는 주님의 왕자>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엘>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부르던 하나님의 이름이죠....그러니까 둘을 합치면 평서형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주도하다, 하나님이 이기다, 다스리다'가 되고 기원형으로 보면 '하나님이 주도하시기를, 하나님이 이기시기를,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이 되는 거죠.
히브리사전이 내린 정의. 사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이스라엘> n.pr.m. et gent. Israel - El persisteth, perseverth (or. juss. Let El persist. usu. Let El contend) ==.<이스라엘> 고유명사(n.pr.).남성(m). 그리고 민족 이름(et gent). 이스라엘 - 하나님이 <계속 끝까지>주도하신다 (또는 기원형 하나님이 주도하시기를), 대개는 하나님이 <한결같이 계속 해오신 그대로 이겨내심으로써 만족케 되시기를>(싸워 이겨내시기를) .. persist.. persevere, contend
창세기 32장 24절에 보면 야곱이 혼자 남았는데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여기서 주어는 어떤 사람', 곧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야곱과 싸웁니다. 그런데 싸움은 하나님이 먼저 거셨는데 시간이 갈수록 야곱이 그 싸움을 주도하게 됩니다.
2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못 이겼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야곱이 겨루어 이기는 것이 맞습니다.
뭐 이때까지 야곱은 누구와 겨루든 늘 이겨왔었죠. 줄곧 그랬었잖아요. 언제나 끈질기게 주도하고 늘어져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내고야 말았죠. 형 에서와도 그랬고, 아버지 이삭과도 그랬고, 삼촌 라반과도 그랬죠. 그리고 32장에서는 급기야 하나님까지 그렇게 물고 늘어져서 이기고야 말았습니다.
26절에 보면 야곱은 하나님에게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노라'고 달라 붙기까지 합니다.
이것을 보면 얼마나 야곱이 주도적인 사람입니까? 얼마나 끈질긴 사람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는 '야곱'이라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왜냐하면 네가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28절).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28절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너는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네가 지금까지는 '야곱', 곧 철저히 육을 따라 천연적 생명으로 살아서,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들과 겨루어 이겼고 게다가 오늘은 하나님인 나와 겨루어서까지 이기고야 말았잖니....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말도록 하자꾸나. 이제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왕자로 살거라.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주도하고 내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하나님의 간곡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막무가내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랄까요? 그 마음이 느껴지신다면 히브리 사전이 정의내린 것처럼 '하나님이 주도하시기를' [=주께 합당하도록, 주로 주 되시게 하는 자]이라는 뜻이 옳은 답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말씀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는 말씀도 이해가 되시겠죠?
이 말씀은 지금까지 야곱이 사람과도,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긴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계속>다스리시기를'이라는 본디 뜻과 상충되는 말이 전혀 아니라 오히려 그 이름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구절 때문에 모든 주석서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뜻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고 단순하게 정의내려 버린 거죠.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히브리 낱말을 문법 그대로 풀어낸 해석이 아니고 히브리어를 고려하지 않고 28절 후반부만 보고 도출해낸 해석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본디 의미와 정반대의 뜻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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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דְּבָרִים)에 관하여
^^히브리어 מדבר 미드바르(광야)의 뜻
:::: מדבר 미드바르 = 광야, 황무지, 거친땅, 거친들, 불모지, 사막, = 입 (아 4:3)
:::: 유래>> מ 멤 = 혼동, 나라, 언어, 40. 최악의 한계 + דבר 다바르 = 말, 말하다, 이르다, 명하다, 가로되, 명령, 명령하다, 언약
===> מ + דבר = 미드바르 = 광야는 말씀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3:16).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계시하여 주신 말씀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저술된 책이다.
죄인을 구원하는, 구원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성경이다.
요한복음의 맨 첫 구절에 ‘말씀’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그리스어로 <로고스 λόγος>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요1:1). 그리스어 <로고스>는 구약성경 칠십인역에서 십계명을 가리키는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열 마디의 말씀을 개역은 ‘십계(十誡)’라고 옮겼으나 나머지 한글역본들은 일제히 ‘십계명(十誡命)’이라고 번역했다(출34:28).
‘십계명’이란 용어는 히브리어로는 <아세레트 하더바림 עֲשֶׂרֶת הַדְּבָרִים >이다.
<아세레트 עֲשֶׂרֶת>는 ‘열/10’이란 기수이고 <더바림 דְּבָרִים>은 ‘말들’이라는 뜻의 복수명사이다.
한글성경은 복수명사 <더바림 דְּבָרִים>을 ‘계명(誡命)’이라고 옮겼다. 복수명사 <더바림>을 그리스어로 옮기면 <로기온 λόγιον>이 되는데 칠십인역(LXX)은 출34:28에서 복수 대격(accusative)으로 옮겨 ‘십계명’을 <투스 데카 로구스 τοὺς δέκα λόγους>라고 번역하였다.
‘십계명’<아세레트 하더바림 עֲשֶׂרֶת הַדְּבָרִים >을 풀어 쓰면 ‘열 마디 말씀들’이 된다.
이 용어는 출34:28; 신4:13; 10:4에 나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동작은 피엘 동사 <디베르דִּבֶּר >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디베르> 열 마디 말씀<더바림>이 십계명이다.
히브리어 동사 <다바르 דָּבַר>에서 명사 <다바르 דָּבָר>가 파생하였는데 이 명사의 복수형이 <더바림 דְּבָרִים>이다.
동사 <다바르 דָּבַר>는 ‘말하다’란 뜻 외에도 ‘선언하다’, ‘대화하다’, ‘명령하다’, ‘약속하다’, ‘경고하다’, ‘위협하다’, ‘노래하다.’ 등등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동사는 KJV에서 서른 가지 정도로 다른 역어로 번역되어 있다.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 <다바르 דָּבָר>도 ‘말’, ‘말하기’, ‘연설’, ‘일’, 등등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이것도 KJV에서 80가지 정도로 다른 역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 특이한 것은 이 명사가 ‘일/사건’이라고 번역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명사에서 발전한 아람어 명사 <디브라 דִּבְרָה>는 ‘문제/일/사안/matter’이란 뜻이 되었다. 창15:1에 이 동사와 복수명사 함께 나온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창15:1).
이 구절에서 <더바림>은 ‘일들’이라고 번역되었고 <디베르>는 ‘말씀하셨다’라고 번역되었다. ‘이런 일들<더바림>이 일어난 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디베르>.’ 이와 같이 히브리어 복수명사 <더바림 דְּבָרִים>은 ‘사건/일’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말하다’란 히브리어 동사 중에 <다바르 דָּבַר> 말고 <아마르 אָמַר>란 단어도 있다. 둘 중에 <아마르>가 훨씬 많이 사용된다.
<아마르....(풀어) 이르다....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는 화자가 말하는 말의 내용에 집중하지만, <다바르>는 화자의 말하여 나타난 바 된 행위에 그 초점을 집중한다.((곧 Q의 말함<계명> 그 자체는 그대로 발현, 입증해 내심, 일하심의 행위 = 사건이라는 뜻))
명사 <다바르>는 행하여진 일을 알려주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이 명사는 ‘사건/행동/일’이란 뜻을 지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하신 말씀은 곧 실행되어 하나의 사건이 된다. 그래서 말씀은 곧 사건이 된다.
출애굽기 19장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시는 강림사건을 보도한다. 시내산 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척 강조한다.
‘소리’는 히브리어로 <콜 קוֹל>인데 이 명사는 출애굽기 19장에 다섯 차례 반복된다(출19:5, 16, 16, 19, 19).
‘소리’<콜>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강조한다.
여호와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신현현은 모세가 질문하면 여호와는 대답하시는 소통의 장이다(출19:19).백성은 모두 무서워서 벌벌 떠는데 모세만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화하는 상황이 사람에게는 가장 거룩한 상태일 것이다.
교회의 설교와 말씀 공부는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거룩한 장이다.
교회의 회중은 예배 중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한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교회는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익히고 실천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교회의 모습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사건이 발생한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을 주석하여 원문의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서 전달하는 것이 설교다. 설교가 선포되는 현장은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응답하는 회중의 행위를 통해서 역사적 사건으로 나아간다. 말씀이 역사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에 곧바로 구원의 사건이 발생한다. 세상의 폭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모든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구원을 받는다. 이 구원의 사건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십계명은 사람을 의무로 묶어 억압하는 율법이 아니다. 십계명 말씀은 억압당한 사람을 해방하고 폭력에 억눌린 사람을 구원하는 십자가 구원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십계명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로 표상된다.
구약의 모든 율법을 구원사건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81:1, 10...*1.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Sing aloud to God our strength; Shout for joy to the God of Jacob (Israel)...*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I am the Lord your God, Who brought you up from the land of Egypt. Open your mouth wide and I will fill it.]
**창49장의 <야곱의 임종 직전 예언에서> 레위는 [시므온과 함께, 비록 공의를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판단대로<삿된 계교와 분노와 혈기를 따라...자행자지함으로써> 칼의 폭력을 행사한 자라는 아비 야곱의 정죄-저주를 받기는 했으나, 그 저주는 430여년이 지난 이제, 모세에 이르러서는, 모세를 통해서 저주는 생명의 축복으로 변하게 되는데, 즉 축복의 통로로 발견되는 전환점을 보게 됨...여기에서는 <자기에 대한 자각에 있어서 이미> 죽음을 통과한 자로 여김으로써, 전심으로 자기를 주께 열어드리며 그분을 의뢰하기를 배우고 주님을 추구할 때 또한,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자...즉, 죽음의 물을 통과하여 새 생명 삶 안으로 들어 간 자> 모세는 오히려 생명을 살리며 양육하고 번성-충만에 이르게 하는 자가 됨을 시사함...
**여기에서 모세가 예표하는 바는 장차 JC, 사내아이로 나타나고 있음...*1) [JC]JC탄생 후 당시 아기를 죽이려는 유대 헤롯왕의 유아 말살 책동 및 *2)[보좌로 부활-휴거 된 사내아이]계시록에서 펼쳐 보이는 바, 여자(교회)가 낳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사내)아이를 삼키려는 용의 의도를 좌절시키시고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보호-양육하사 부활-휴거 시키심으로써 하늘 군대와 함께 사내아이로 하늘에서 사탄마귀를 축출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 지혜와 그 실행능력을 찾아 볼 수 있음..
**모세의 부모를 보라!!..오직 주를, 주의 언약 말씀을 믿는 부모가 <그들의 아이에 대해> 깨달아야 할 바를 주께서 열어 보여 주고 계심을 기억하고 명심할 것!!, (비록 그들의 몸에서 낳은 바 되었더라도, 주께서 주신 바 그 아이가 <그 몸 상태가 어떻든지 무관하게> 바로 주로부터 왔고, [정해진 기간까지는!!] 그를 사랑으로 주님 말씀과 훈계, 주님의 공급하시는 초월적 사랑과 관심으로 양육하도록 친히 위탁 받은자 됨을 자각하는) 부모의 기도-가르침-축복과 양육-돌봄의 위대한 효능을 볼 수 있어야 함....또한 더 나아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아이를> 떠나 보내야 할 그때에 이르러서도 주께 마음을 열어드림 통해 여쭘으로써 그의 모든 행보와 일거수 일투족 책임 져 주실 것을 중보하고 맡겨드리되, 생명 살리는 최선의 선택을 실행하며 관심 가지고 지켜 봄 통해 하나님의 친히 일하고 계심을 발견하고 감사하며, 끝까지 [주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완수함으로써]주와 동역하는 부모 되기를 원하고 계심..
**이제, JC와 함께 그분의 <대속의> 죽음 안으로 세례 받은 이들마다, 죄와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과 그분의 의에 대해 다시 살아난, 새 생명을 사는 자 됨의 의식으로 그분의 부활 안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참되게 알며-사랑하며-섬기는 그분의,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 됨을 위해서는 말씀(JC의 다리에 새겨진 Faithful and True그대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신, 주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바 Q말씀은 영이요, 생명임!!]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모든 차원-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요, 영생자존하시는 그분의 모든 요소와 어떠함의 영광 그대로를 말해냄= 믿는 모든이에게 그분 자신을 공급함이기에) 그대로 믿고 붙들어 그렇게 여기며 그분의 임재 앞에서 행하는 이마다 진실로, 실지로 그분이 그대로 나타내시며 이루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고, 친밀히 알고-누리며-사랑하며-섬기며- 연합한 하나됨의 영생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빼어닮은>그분의 신부-아내인 새 예루살렘을 이루는 지체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지고지선의 영생복락 누리는 자 됨을 약속하고 계심...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 땅에서 <말씀 안에> 곧 광야<미드바르>-사막을 주와 함께 걷는 동행-동거-동주의 삶의 교통하는 실행을 통해 믿는 이 마다마다를 창세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하시고 불러 구원하시고 참되게 완전히 아시며 구주 보혈을 통해 보심으로써 <네가 없이는 나 하나님 안할란다!! 하시며, 너도 나 아니면 살 맛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하시며!!> 전적으로 형언 못할 기쁨으로 완전히 열납하시며 절대적으로 위하시며 자신을 온통 쏟아 부어주시는 그분, 바로 그 분이 누구신지를 참되게 알고-사랑하며-섬김 안으로 들어 오기를 그토록 열망하고 계심!!
===모세가 태어나다
1. [400.험한시험믈속에서..405주의친절한팔에]레위[=주와 연합한 거듭난 자 의미]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아비 아므람, 어미 요게벳, 누이(미리암, 8<-12>세 위), 형(아론, 3세 위)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한 몸 이룬 부부사이의 친 자녀 산출 통해서, 서로 다른 두 핏줄은 진정한 결혼, 곧 하나의 혈연으로 맺어진 한 가족이 되게 하셨음을 명심하라]그가 잘 생긴[=주님 생명 인해 빼어남...준수한/귀티나는/빼어난/범상치 않은..fine, beautiful, goodly, fair]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아이 소리가 커져서]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테바....방주..상자..만유와 만물이 그 안에 담김, 곧 JC 암시..방주-상자-유월절의 이스라엘집-교회는 세상과 분별된JC의 몸 의미]를 가져다가 역청[= 헤마르 : 타르(콜타르), 아스팔트...동물 유래 성분..바벨탑 쌓을때 썼었음]과 나무 진[=제페트, 나무 진..식물 유래 성분..방주 지을 때 썼었음]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주 경외하는 사람마다 마땅한 바 주 앞에서 합당한 .진인사 후 대천명의 동역, 이는 그 표본!!
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제례 전 성결례로서]목욕하러 나일 강[그곳]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주님의 계획하심따라]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Q의 불어넣으신 긍휼의 정]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7.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wet-nurse)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가장 탁월한 교육은 [바로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기며!!] Q 경외하는 친모의 감성 충만한 돌봄과 Q 경외함의 교훈을 따라 가르침의 양육임.
10. 그 아기가 자라매[젖 떼는 때, 약3-4세가 되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하다 = (세상적 관심에서 주님의 관심에로!! 패러다임 전환과 그 실행 가르치심 위해) 그의 속사람 새로 조성하심 통해 주의 뜻 이룰 그릇 만드심...갈2:20..<세상에서 당하는> 고생과 고난, 고초가 심할수록 그는 비례적으로 주께 귀한 자임을 깨달아야 한다!!....<환난 = problems and trials> ::: 쑥-담즙-고초torment(괴롬+어려움) =problems
11. [379.내갈길멀고밤은깊은데...341.십자가를내가지고...나의기도하는것보다..하늘의문을여소서..마라나타] ○모세가 장성한 후에(40세경...그동안 양모 하트셉수트 돌봄 아래 .애굽 왕좌 위해 <다스림 위해 필요한, 모든 면에서 능한> 왕자로 길러졌음)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하트셉수트 사망으로 그녀의 섭정은 종식되고, 본격 등장한 투트모세3세 (30세 즈음) 치하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주께 여쭘 없는>자행자지하는 부정적<소극적> 남성적 생명으로 행함 = 다루심과 연단 통한 생명 성숙, 형상 표현과 축복, 다스림의 학습 필요 상태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투트모세3세]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의, 아카바만 북서 지역]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23. ○여러 해 후에 [모세 수배령 내렸던]애굽 왕은 죽었고[중간기((나그네-생계 위한 종, 자기 비움의 인생))40년 생략...모든 천연적 생명 따른 자존심과 심지어 자존감 마저 내려놓고 처리받는, 자기 부인/자기 십자가 적용의 자기 비움, 곧 <적극적 여성 생명의 주 바라기> 듣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날마다 살기를 배우고 있었음 = 적극적 여성적 생명 살기를 배우는 기간을 지나고 있음]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이 시점, 출애굽 시점의 애굽왕은 아멘호텝2세....<사방으로 막혀 있어도 하늘은 항상 열려 있음!!>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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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lified Bible
===The Birth of Moses
1 Now a [a]man of the house of Levi [the priestly tribe] went and took as his wife a daughter of Levi.
2 The woman conceived and gave birth to a son; and when she saw that he was [especially] beautiful and healthy, she hid him for three months [to protect him from the Egyptians].
3 When she could no longer hide him, she got him a basket (chest) made of papyrus reeds and covered it with tar and pitch [making it waterproof]. Then she put the child in it and set it among the reeds by the bank of the Nile.
4 And his sister [Miriam] stood some distance away to find out what would happen to him.
5 Now the [b]daughter of Pharaoh came down to bathe at the Nile, and [she, together with] her maidens walked along the river’s bank; she saw the basket among the reeds and sent her maid [to get it], and she brought it to her.
6 When she opened it, she saw the child, and behold, the baby was crying. And she took pity on him and said, “This is one of the Hebrews’ children.”
7 Then his sister said to Pharaoh’s daughter, “Shall I go and call a [c]wet-nurse from the Hebrew women to nurse the child for you?”
8 And Pharaoh’s daughter said to her, “Go ahead.” So the girl went and called the child’s mother.
9 Then Pharaoh’s daughter said to her, “Take this child away and nurse him for me, and I will give you your wages.” So the woman took the child and nursed him.
10 And the child grew, and she brought him to Pharaoh’s daughter and he became her son. And she named him [d]Moses, and said, “Because I drew him out of the water.”
11 One day, after Moses had grown [into adulthood], it happened that he went to his countrymen and looked [with compassion] at their hard labors; and he saw an Egyptian beating a Hebrew, one of his countrymen.
12 He turned to look around, and seeing no one, he killed the Egyptian and hid him in the sand.
13 He went out the next day and saw two Hebrew men fighting with each other; and he said to the aggressor, “Why are you striking your friend?”
14 But the man said, “Who made you a prince and a judge over us? Do you intend to kill me as you killed the Egyptian?” Then Moses was afraid and said, “Certainly this incident is known.”
==Moses Escapes to Midian
15 When [e]Pharaoh heard about this matter, he tried to kill Moses. Then Moses fled from Pharaoh’s presence and took refuge in the land of [f]Midian, where he sat down by a well.
16 Now the priest of Midian had seven daughters; and they came and drew water [from the well where Moses was resting] and filled the troughs to water their father’s flock.
17 Then shepherds came and drove them away, but Moses stood up and helped them and watered their flock.
18 When they came to [g]Reuel (Jethro) their father, he said, “How is it that you have come back so soon today?”
19 They said, “An Egyptian saved us from the shepherds. He even drew water [from the well] for us and watered the flock.”
20 Then he said to his daughters, “Where is he? Why have you left the man behind? Invite him to have something to eat.”
21 Moses was willing to remain with the man, and he gave Moses his daughter Zipporah [to be his wife].
22 She gave birth to a son, and he named him Gershom (stranger); for he said, “I have been a stranger in a foreign land.”
23 Now it happened after a long time [about forty years] that the king of Egypt died. And the children of Israel (Jacob) groaned and sighed because of the bondage, and they cried out. And their cry for help because of their bondage [h]ascended to God.
24 So God heard their groaning and God remembered His covenant with Abraham, Isaac, and Jacob (Israel).
25 God saw the sons of Israel, and God took notice [of them] and was concerned about them [knowing all, understanding all, remembering all].
===Footnotes
Exodus 2:1 I.e. Amram; Ex 6:20 identifies Amram and Jochebed as the parents of Aaron and Moses.
Exodus 2:5 If the pharaoh is Thutmose I, then this is likely his daughter, Hatshepsut.
Exodus 2:7 Lit a nursing woman.
Exodus 2:10 The name Moses is a wonderful choice. It means “drawing out” in Hebrew, but in Egyptian, a similar word means “man of royalty” (e.g. the syllable “mose” in names like Thutmose).
Exodus 2:15 This pharaoh is likely to be identified as Thutmose III (1483-1450 b.c.).
Exodus 2:15 After Sarah died Abraham took Keturah his concubine (see note Gen 22:24) as a secondary wife. Midian was the fourth of six sons born to Keturah. Abraham gave gifts to Isaac’s half brothers and sent them eastward so that they would have no claim on Isaac’s position as Abraham’s only heir and the son of promise.
Exodus 2:18 Reuel’s other name, Jethro (Excellency), may have been a title indicating his rank in the tribe.
Exodus 2:23 The description of God in this passage (vv 23-25) attributes human qualities to God, including human emotions and ways of thinking or decision-making. It is meant to relate to a human point of view, without concern for a strict theological accounting of God’s nature. In reality, God is present everywhere, and is always aware of everything that has happened and will hap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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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
1. And there went a man of the house of Levi, and took to wife a daughter of Levi.
2. And the woman conceived, and bare a son: and when she saw him that he was a goodly child, she hid him three months.
3. And when she could not longer hide him, she took for him an ark of bulrushes, and daubed it with slime and with pitch, and put the child therein; and she laid it in the flags by the river's brink.
4. And his sister stood afar off, to wit what would be done to him.
5. And the daughter of Pharaoh came down to wash herself at the river; and her maidens walked along by the river's side; and when she saw the ark among the flags, she sent her maid to fetch it.
6. And when she had opened it, she saw the child: and, behold, the babe wept. And she had compassion on him, and said, This is one of the Hebrews' children.
7. Then said his sister to Pharaoh's daughter, Shall I go and call to thee a nurse of the Hebrew women, that she may nurse the child for thee?
8. And Pharaoh's daughter said to her, Go. And the maid went and called the child's mother.
9. And Pharaoh's daughter said unto her, Take this child away, and nurse it for me, and I will give thee thy wages. And the women took the child, and nursed it.
10. And the child grew, and she brought him unto Pharaoh's daughter, and he became her son. And she called his name Moses: and she said, Because I drew him out of the water.
11. And it came to pass in those days, when Moses was grown, that he went out unto his brethren, and looked on their burdens: and he spied an Egyptian smiting an Hebrew, one of his brethren.
12. And he looked this way and that way, and when he saw that there was no man, he slew the Egyptian, and hid him in the sand.
13. And when he went out the second day, behold, two men of the Hebrews strove together: and he said to him that did the wrong, Wherefore smitest thou thy fellow?
14. And he said, Who made thee a prince and a judge over us? intendest thou to kill me, as thou killedst the Egyptian? And Moses feared, and said, Surely this thing is known.
15. Now when Pharaoh heard this thing, he sought to slay Moses. But Moses fled from the face of Pharaoh, and dwelt in the land of Midian: and he sat down by a well.
16. Now the priest of Midian had seven daughters: and they came and drew water, and filled the troughs to water their father's flock.
17. And the shepherds came and drove them away: but Moses stood up and helped them, and watered their flock.
18. And when they came to Reuel their father, he said, How is it that ye are come so soon to day?
19. And they said, An Egyptian delivered us out of the hand of the shepherds, and also drew water enough for us, and watered the flock.
20. And he said unto his daughters, And where is he? why is it that ye have left the man? call him, that he may eat bread.
21. And Moses was content to dwell with the man: and he gave Moses Zipporah his daughter.
22. And she bare him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Gershom: for he said, I have been a stranger in a strange land.
23. And it came to pass in process of time, that the king of Egypt died: and the children of Israel sighed by reason of the bondage, and they cried, and their cry came up unto God by reason of the bondage.
24. And God heard their groaning, and God remembered his covenant with Abraham, with Isaac, and with Jacob.
25. And God looked upon the children of Israel, and God had respect unto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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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장 (개요)
본 장은 모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지상에서의 훌륭한 행적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모세는 선지자로, 구원주로, 율법 수여자로 또한 중보자의 모습으로서 가장 확실한 주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의 생애에 대한 책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다소 허구라고 생각되는 모세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모세 자신이 자신에 관해 기록한 본서는 믿을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기록의 진실성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무한한 지혜자이신 하나님이 이것은 전달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신 바이기 때문이다.
본 장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모세는 출생과 동시에 위기를 맞는다(1-4).
2. 위험에서 보호받은 모세는 유년 시절, 청년 시절에 특혜를 누리며 성장한다(5-10).
3. 장성한 모세는 핍박받는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설 것을 각오한다.
(1) 모세는 백성들이 원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다(11-14).
(2) 후일을 기약하며 모세는 물러난다(15-22).
4. 이스라엘 해방의 날의 여명이 밝는다(23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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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출생(출 2:1-4)
모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둘 다 레위인이었다. 야곱은 레위가 치욕의 상황에 처할 것을 예언했다(창 49:5).
그런데 그 후 모세는 레위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은 허물 많은 육신의 모양을 입으시고, 우리로 인해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레위 지파는 모세의 출생으로 다른 지파와 구별되기 시작했으며, 그 후 여러 가지 면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
이 갓난아기에 대해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모세는 어떻게 숨겨졌는가?
히브리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잔인한 법이 제정된 것은 바로 모세가 태어날 당시였다. 그래서 많은 어린 사내아이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의 양친에게는 모세보다 나이가 많은 미리암과 아론이 있었는데, 그들은 살생의 법이 선포되기 전에 태어나 별 위험 없이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롭게 세상에 태어난 자들은 그들이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그들이 부딪힐 역경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출생을 앞두고 근심에 싸여 있었다. 살생의 법이 발효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태하지 못한 자가 복이 있도다” 하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눅 23:29). 자기가 낳은 자식을 살인자에게 내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을 것이다(호 9:13).
그러나 이 아기는 후일 그 아비의 집에 영광이 되었다.
이와 같이 때때로 가장 큰 근심거리가 결국에는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하심을 보라.
바로 왕의 포악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비로소 구원자가 태어난 것이다.
인간이 교회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교회의 구원을 예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명심하자.
후일에 이스라엘을 이 속박의 소굴에서 이끌어 내게 될 모세는 압제자의 광포한 희생 제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그 살인자들의 손에서 그의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해 거룩한 열심으로 더욱 힘을 얻도록 한 것일 뿐이다.
1. 모세의 부모는 그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뛰어난 아이임을 알았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아이였다(행 7:20).
그들은 이 아이가 보통 아이와는 달리 얼굴에 광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 과연 얼굴에 빛이 있었다(34:29).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위대한 역사를 대행하도록 계획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사의 보증과 자신을 미리 나타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강하게 하셨으며(삿 13:24, 25), 사무엘을 가까이 하셨고(삼상 2:18), 다윗을 구원하셨으며(삼상 17:37), 디모데에게는 어려서부터 같이하셨던 것이다(딤후 3:15).
2. 그러므로 부모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더 큰 정성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것이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과 위대한 일에 대한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고 활력 있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적은 은총으로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즉 섭리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암시는 그것을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발각된다면 부모의 생명까지도 위험했지만, 그들은 “석 달 동안” 모세를 자신들의 집 은밀한 방에 숨겨 두었다.
여기서의 모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다(마 2:13). 즉 그리스도께서도 수많은 아이들이 학살당했을 때에 기적적으로 보호받으셨던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는 모세의 부모가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혹자는 모세의 부모가 그들의 자녀 가운데 구원자가 출생할 것이라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추측한다.
어쨌든 그들은 이스라엘의 보존에 대한 일반적인 약속을 믿었으며, 그 약속을 믿음으로 행동에 옮겼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움 없이 거역하며 아기를 숨겼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은 결코 취소될 수 없다. 그것은 자비를 획득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더욱 촉진하게 하는 것이다.
의무는 우리의 몫이요,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사람을 사로잡는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해 줄 것이다.
Ⅱ. 모세는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석 달이 다 될 무렵 숨겨진 어린아이를 찾는 자들이 사방에 돌아다니자 그들은 더 이상 모세를 숨길 수 없었다(아마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 같다).
그들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가에 놓아두고”(3절) 그의 누이에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게 했다.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누구의 손에 넘겨지는지 살피도록 한 것이다(4절).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 일을 하게 하셨다.
즉 모세가 바로의 딸의 손에 들어가게 하시고, 나아가 이 절박한 위험에서 그를 구하심으로써 지금처럼 버려진 하나님의 교회를 구원하라는 실례를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버림받은 자들을 특별히 보살피셨다(시 147:2).
이들은 그의 버림받은 자들이었다(사 16:4). 모세는 친구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듯했다. 그의 어머니도 감히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 그를 붙드셨고 지켜 주신 것이다(시 27:10).
2. 지극히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는 모험을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들이 아이를 감춰야 했던 (객관적 견지에서 보기에는 <기왕이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감추어 두고 키워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이는 바로 그 때에....<오히려, 어찌 보면...무모하게도 보이지만 전심으로 주 여호와 이름 불러 그분께 맡겨드림으로써> 아이를 <강가 갈대 밭에> 버려두기로 결정했다는) 것은...어찌 보면 하나님의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의]축복 약속 말씀에 어긋나는 일로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주를 신뢰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심 아래에서 일어남인> 억압 받는 환경으로 보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면 (살아계신 주님 앞에서!! 행할 바 여쭘 통해!!...사람을 두려워 함이 아니다!! 신뢰함으로써 주께 맡겨드림이다 **분명히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이는 섭리에 따르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험이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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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구출(출 2:5-10)
Ⅰ. 멸망의 위험에서 모세는 구원을 받았다.
이 위대한 인물이 어렸을 적에 처해 있었던 곳을 보라. 그는 갈대 상자에 담겨 강가에 버려졌다.
만일 그가 그 곳에 계속 놓여 있었다면 틀림없이 곧 굶주려 죽었을 것이다. 물속에 가라앉거나 아니면 악어가 삼키고 말았을 것이다.
만일 모세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졌다면 곧 바로 물속에 처박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의 공주를 불쌍하게 버려진 아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고 그를 불쌍히 여기게 하셨다.
이것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공주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5, 6절).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해져 절망에 처한 어린아이에게조차 연민의 정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일이 보살피시니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큰가!(겔 16:5, 6)
2. 비천한 자의 고통을 알아주고 돌보고 도와주는 일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3. 모세처럼 버림받지는 않았다 해도 어릴 적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위험들로부터 지켜 보호해 주셨던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시 22:9, 10).
4. 하나님은 가끔 대적들 중에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일할 동역자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잔혹하게 멸망시키려 했지만 그의 딸 공주는 히브리인의 아이를 동정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양육하게 되었다.
오! 주여, 당신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울 뿐이니이다!
Ⅱ. 모세는 사랑하는 친어머니를 훌륭한 유모로 제공받았다(7-9절).
바로의 딸은 히브리인을 유모로 두는 것이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모세의 누이는 기지를 발휘해 모세의 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했다. 아기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친어머니야말로 아기에게는 최상의 유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모세의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게 되었고, 이제 아무런 공포 없이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기쁨에 도취되어 행복에 겨워했더라면 아기의 친어머니임이 탄로났을지도 모른다(왕상 3:27).
Ⅲ.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로 발탁되었다(10절).
모세의 부모는 공주를 위해 그를 양육한 것이었지만, 공주의 아들로서 받는 그 영광에 대해 대단히 만족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미소들은 성난 얼굴보다도 우리에게는 더 강한 유혹이어서 거스르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바로의 딸은 친자식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녀 또한 외동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세가 그녀의 아들로 책정되어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모세는 의젓하게 왕관을 쓰고 궁정의 고위층들 앞에 서 있게 되었으며,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최상의 교육과 지도를 받아 애굽의 모든 학문에 능통하게 되었다고 한다(행 7:22).
다음을 기억해 두자.
1. 하나님의 섭리는 때때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어 방백들 중에 세우신다(시 113:7, 8).
태어날 때는 미련하고 가난해 보이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인해 세상의 마지막에서는 상좌에 앉게 되니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줄을”(단 4:26) 알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위대하신 역사를 이루도록 미리 계획하신 이들을 찾아내신 다음, 자격을 구비케 하여 준비시킨다.
모세는 궁정에서 받은 교육으로 왕자와 여수룬의 왕이 되기에 적합했다. 궁정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음으로써(당시의 애굽은 그러했다) 역사가(성경 기록)가 되기에도 충분했다.
모세는 애굽 왕국의 교육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왕궁에 파견된 전권 대사로서의 자격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Ⅳ. 그의 이름은 모세라고 지어졌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모세가 할례를 받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요아김이라고 이름 지었으나, 바로의 딸이 애굽어로 “물에서 건져진 자”라는 뜻의 모세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대의 율법 수여자를, <다름 아닌> 애굽인이 <이름 짓고, 모세라!!>명명했다는 사실은 이방 세계에 대한 좋은 징후인 것이다.
“나의 애굽에 복이 있으라”고 말해질 그 날에 대한 희망을 주는 사건이다(사 19:25).
또한 모세가 궁정에서 교육받은 사실은 이사야 49장 23절 말씀인 “열왕이 너의 양부가 될 것이며 왕비들이 네 유모가 되리라”는 약속 이행의 보증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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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살인 사건(출 2:11-15)
모세는 이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바로의 궁전에서 생애의 첫 40년을 보냈다. 바야흐로 이제는 그가 행동으로 옮길 시기가 온 것이다.
Ⅰ. 모세는 대담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망을 지지, 옹호하고 나섰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아가 그 고역함을 보았다”(11절)고 했는데, 이 뜻은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모세는 애굽 왕궁의 영화와 쾌락을 감히 멸시하고,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왕궁을 떠났다.
그 유혹은 실로 강한 것이었다. 모세는 소위 출세의 좋은 기회를 쥘 수 있었으며, 또한 왕궁에 있다는 이점을 이용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봉사할 수도 있었다.
그는 바로의 딸에게 호의와 감사로 순종을 해야 했으나, 마침내 거센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영예로운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영예롭고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2. 모세는 속박당하고 있는 불쌍한 동포에게 자상한 관심을 보였다.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는 쉽게 고난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핍박받는 백성들의 멍에를 보고 동정을 금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같이할 것을 결연히 결심했던 것이다.
Ⅱ. 모세는 앞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위해 해야 할 위대한 일에 대한 모범을 두 가지 작은 실례로 보였다.
이것은 그의 열조들이 “항상 성령을 거스렸다”고 했던(행 7:51) 스데반의 말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행 7:23 이하).
또한 모세가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나타났을 때도,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사역자였던 모세에게 고의적으로 반감을 품었던 것이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의 지도와 충동을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으며, 게다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던 애굽인들을 괴롭혔다.
그 한 예로 모세는 히브리인을 때린 애굽인을 죽인 적이 있었다. 아마 그는 (혹자의 생각대로) 모세의 친척으로 레위 지파에 속하는 히브리인 노예를 학대하던 애굽의 감독 중 하나였을 것이다.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고 억압받던 그의 형제를 구했던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늘의 뜻이 있었던 일이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어떤 무기로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인 베드로처럼 그 입의 말씀으로 죽였다고 한다.
“모세가 그를 모래에 감추었다” 함은 후일 바로와 그의 추종자들이 모세의 권능으로 인해 홍해 바다의 모래 속에 장사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혼자서 이 정의를 실행하려 했던 것은 긴요한 신중함과 조심성을 동반한 하나의 시험적 행동이었을 뿐이다.
아마 아직은 신앙이 미약했으므로 그가 한 일에 대해 약간 주저했을 것이다.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도 지극히 작은 믿음에서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무서워 떨면서 말도 제대로 못했던 것이다.
2. 모세는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했다. 그 예로 두 히브리인 사이의 다툼을 말리려 했고, 그로 인해 고난을 당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모세와 두 히브리인 사이의 불미스러운 다툼이 기록되어 있다(13절).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어쨌든 애굽의 혹심한 억압과 지배를 받을 때에 서로 싸웠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애굽의 매가 부족하여 그들이 서로 때려야만 했다는 말인가? 다음을 명심하자.
①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것처럼, 똑같은 고통을 모두 함께 받아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서로 연합시키지는 못한다.
②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를 일으키실 때는, 압제자인 애굽인들을 견제하고 다투는 히브리인들을 화해시키는 일이 생기는 것을 볼 것이다.
(2) 모세가 그들을 처리한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는 잘못을 저지른 자를 따로 세워 놓고 “네가 어찌하여 너의 동료를 치느냐?”고 유순하게 따져 물었다. 남을 해친 애굽인은 죽임을 당했으나, 해친 히브리인은 단지 질책을 받았을 뿐이다.
애굽인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악한 데서 우러난 범죄였으며, 히브리인의 행동은 일시적인 격분에 의해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현명하신 하나님은 모든 현명한 통치자들처럼 하나님 자신의 판단에 따라, 또 동일한 범죄라도 범죄의 성질에 따라 범죄자를 서로 구별하실 수 있다.
모세는 그들을 친구로 삼으려 했다. 그것은 선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다툴 때에 그들을 나무라셨던 것을 알 수 있다(눅 9:46 이하; 22:24 이하).
이는 병든 자를 치유하는 예언자로, 화평케 하는 자로, 또한 모든 원수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포들을 찾아간 모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하나의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어찌하여 너의 동포를 해치느냐?”는 모세의 책망은 오늘날까지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동포를 해치는 것은 어떤 경우든 나쁜 일이며, 특히 어떤 박해를 통해서든 어떤 다툼이나 싸움에서든 거친 말이나 손으로 동포를 해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더욱 악한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가 해친 자들을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의 동포요 형제요 동료인 그리스도인이며, 우리의 종 곧 고난 받는 동포인 것이다.
“어찌하여 해쳤는가”를 생각해 보라! 아마 정당한 이유와 원인이 전혀 없을 것이며, 말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3) 모세의 계획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누가 너를 우리의 법관으로 삼았느냐?”(14절)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모세에게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피해를 입은 쪽은 분명히 화해하려 했으나 가해자 쪽은 오히려 화를 냈던 것이다.
책망을 참지 못하는 것은 죄책의 표징이다. 흔히 가해자에게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피해자에게 잘못을 참으라고 설득하는 편이 더 쉬운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고전 6:7, 8).
모세가 말썽을 부린 히브리인에게 준 책망은 매우 사려깊고 온화했지만, 그 말썽원인자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쓸데없는 저항을 하여 <스스로>상처를 입었고(행 9:5) 자신을 책망하는 자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① 그는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다. 즉 “누가 너로 우리의 법관을 삼았느냐?”고 했다.
우정어린 충고를 하는 데에는 어떤 큰 권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친절한 행위다. 그러나 그는 모세의 우정의 충고를 건방지고도 주제넘은 일로 여겼다.
좋은 충고나 적절한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충고나 훈계를 설교라고 부르려 한다.
그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지지하거나 죄악을 반대하는 어떤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양, 모세를 몹시 비난했다. 그러나 모세는 사실상 그들의 왕자와 심판자였다.
그는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히브리인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를 도와 협조할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고집대로 행동했으며, 그를 “밀뜨려” 버린 것이다(행 7:25-27).
② 그는 모세가 애굽인을 죽였던 일을 비난하며 또 “나도 죽이려느냐?”고 대들었다.
최선의 말과 행위가 얼마나 악하게 돌아오는지를 보라!
모세가 꾸짖었다 하여 자신까지 살해하려 한다는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의 죄악을 비난하는 공격을 그의 생명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다.
모세는 애굽인을 살해했기에 충분히 그런 혐의를 받을 수도 있었다. 마치 모세는 애굽인과 히브리인을 구별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만약 모세가 피해를 입은 히브리인을 구하기 위해 애굽인을 살해했다면, 모세는 마땅히 히브리인의 친구다. 또한 비범한 권력과 열성을 가진 친구인 모세에게 복종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행한 일이요 약속된 전조였던 모세의 행위에 욕설을 퍼부었다.
만약 히브리인들이 그 암시를 깨닫고 모세를 그들의 우두머리, 곧 지도자로 맞이했다면 아마 그들은 그 당시에 해방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자를 저들이 멸시했으므로 저들의 해방은 마땅히 지연되고 저들의 속박은 40년이 더 연장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후에 가나안 사람들을 (무서워하고 여호와와 그분의 백성된 그 자신들은) 멸시하여 결국 가나안 사람들이 40여 년이 지나서야 가나안에 입성하게 되어 그 땅에서 쫓아낼 수 있던 것과 마찬가지다. “나(여호와)는 원하나 너희는 (해방을) 원치 않는도다.”
신실한 책망과 충고자를 거역하고 멸시하려는 인간은 자기들이 행하는 바를 바로 알지 못하며, 무엇이 그들 자신의 유익에 적이 되는가를 바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다투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후 40년 동안 모세에 관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평화의 날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조차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축복의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아마 크게 낙심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택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감수하고 있었다(히 11:25, 26).
이제 그가 첫 출발에서 고통을 당하고, 동족에게 능욕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결심에 매우 괴로운 시련이 되었다.
아마도 모세는 “이것이 히브리인들의 생각이라면 나는 다시 궁정으로 돌아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첫째, 우리는 몇몇 특정 종교인들의 어리석음과 까다로움으로 하나님의 방법과 그의 백성들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교회의 가장 훌륭한 친구들도 그들의 목회와 구원 사업에서 많은 반대와 실망에 부딪히며, 심지어 형제들에게도 공격받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건축자들에게서 버림받은 돌이 되셨으며, 지금도 그가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에게서 여전히 배척받고 있다.
(4) 그 결과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갔다.
결국 지금까지 모세를 향한 모욕과 언사는 실로 친절을 베푼 말이 되고 말았다. 즉 모세는 자기가 애굽인을 죽였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진 것을 깨닫고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의 진노가 불현듯 그를 처치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다툼까지도 그의 백성에게 유익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세가 애굽인을 죽였다는 정보(이것은 모세의 책망을 받은 그 히브리인의 소행이 아니었음은 다행이다)가 바로에게 전해졌다.
모세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므로 모세는 안전을 위해 미디안으로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15절).
①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신중한 생각에서 미디안으로 갔다.
만약 그가 애굽을 버린 것이 사도들의 기록과 같이 믿음으로 된 일이라면(히 11:27),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려다가 어려움과 위험에 처하게 될 경우 신앙의 은혜는 우리 자신에게 합당한 보존책을 적절히 강구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7절에는 “그가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했고, 본문 14절에는 “그는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모세는 그를 약하게 하고 괴롭히는 망설임과 놀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길을 가야만 한다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두려움을 품게 했다.
② 하나님은 현명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것을 마련하셨다. 상황은 아직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성숙되지 않았다(때가 되지 않았다).
애굽의 죄악의 분량이 아직 차지 못했으며, 히브리인들도 아직 충분히 욕을 당하지 않았고 인구도 하나님이 정한 수에는 달하지 못했다.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을 해방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은총의 때가, 곧 정해진 때가 오기까지는 당분간은 물러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미디안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그들 중에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배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거기서 안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편안히 정착할 수 있었다.
또한 후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이 곳을 지나가게 되니, 모세는 지금 이 땅에 익숙해질 기회를 가진 것이다(아마 그래서 더 잘 인도했을 것이다).
모세는 애굽을 떠나 미디안에 이르러 우물 곁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그를 인도해 내실지 알아보려고 기다렸다. 그것은 그가 바로의 궁전에서 안락하게 지냈던 날들에 비하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의 신앙을 이토록 연단하시니,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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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결혼(출 2:16-22)
모세의 조상 야곱이 수리아에 정착했듯이(창 29:2 이하) 이제 모세는 미디안에서 살게 되었다. 이 두 사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고 거기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아주 우연한 일로 보이는 사건이라도 후일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지혜로써 마련하신 것이고 그의 백성에게 중대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우연하고 사소한 일이 때로는 우리의 생활에 가장 큰 행복의 전환점이 되는 수가 있다.
Ⅰ. 미디안의 제사장 또는 방백이었을 르우엘의 일곱 딸들에 관해 살펴보자.
1. 그들은 시골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소박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양들에게 줄 물을 긷고 있었다”(16절). 아버지가 방백이었다면, 일곱 딸들은 영예로운 가문의 자녀이고 특권과 대우를 받는 신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 어떤 유용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전력을 다해 일하고 있었다. 무위(無爲)는 결코 사람의 명예가 될 수 없다.
그녀들의 아버지가 제사장이었음을 감안할 때, 목회자의 자녀들은 겸손하고 근면하며 여러모로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2. 그들은 정숙한 여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아비가 부르기 전에는 낯선 애굽인(비록 잘생기고 준수한 모습의 남자지만)을 집으로 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숙은 여인이 갖추어야 할 장신구다.
Ⅱ. 모세에 관해 살펴보자. 그는 애굽인으로 간주되었다(19절). 낯선 자는 오해받는 것을 기꺼이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는 르우엘의 딸들이 양들에게 물 먹이는 일을 기꺼이 도와주었다. 학식이 많고 궁중에서 성장했다 해도 그는 그와 같은 경우에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애굽에서 많은 지식을 쌓았어도 목자들을 멸시하는 것은 배우지 않았다. 고등교육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노예가 하는 천한 일에 문외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필연성을 주어 그들이 자신을 위해 일을 하게 할지 모르며, 또한 어떤 기회에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역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젊은 여인들은 그들이나 그들의 종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처한 것같이 보인다. 혹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웃 방백의 목자들이거나 아니면 자칭 목자라고 하는 게으른 건달들이 “그들의 양떼를 쫓아버린 것이다.” 모세는 암울하고 피곤했지만 “일어나 그들을 도와주었으니”, 곧 그 목자들을 쫓아버렸을 뿐 아니라 양떼에게 물도 먹여 주었다. 이것은 르우엘의 딸들이 친절했기에 동정심을 베푼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 때의 상황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1) 모세는 공의를 행하는 것과 그가 목격한 그와 같은 피해자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워했다. 이런 것들은 자신들의 힘의 한도 내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다.
(2) 모세는 선을 행하기를 좋아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어떤 곳으로 내몰든지 거기에서 유익을 구하기를 희구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한도에서 기꺼이 선을 행해야 한다. 작은 일에 신실한 자가 큰 일을 위탁받게 되는 법이다.
2. 그의 봉사 행위는 얼마나 훌륭한 대가를 받았던가! 젊은 여자들이 낯선 이의 친절을 알리자, 부친은 모세를 집으로 초대해 정중히 대접했다(20절).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푼 친절에는 언제나 보상하실 것이다. 결코 저들이 상급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모세는 미디안 방백의 친절과 호의로 즉시 보상을 받았다. 르우엘은 모세를 자기 집에 유하게 하고, 얼마 안 가 딸 십보라와 결혼하게 했다(21절).
모세는 그녀에게서 아들을 낳게 되어 이름을 게르솜이라 했는데,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의 가정을 일으켜 주셨을지라도, 그는 나그네로 지냈던 땅을 기억했을 것이다. 이렇게 모세가 미디안에 정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1) 하나님께서 모세를 잠시 동안 피신시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의 날에 그들이 숨을 곳을 마련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친히 그들의 지성소가 되시어 그들을 보호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2) 하나님은 장차 하실 위대한 역사를 위해 모세를 준비시키려고 계획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장인의 양을 치던 미디안에서의 생활이 큰 도움이 되었다(그 때 그에게는 자기 양은 한 마리도 없었다).
① 모세는 역경과 가난을 체험함으로써 부유할 때와 마찬가지로 가난에도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존귀케 할 자를 먼저 낮추신다.
② 모세에게 명상과 신앙심을 길러 주었다. 애굽은 그를 학자로, 신사로, 정치가로, 또한 군인으로서 성장시켜 후일 그에게 유익을 주었지만, 아직 애굽 왕궁이 할 수 없었던 한 가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모든 일을 하는 자는 오랜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미디안 목자 생활의 고독과 은둔을 통해 그는 더욱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전자(명상의 수련)를 통해서는 여수룬에서 통치할 준비가 되었고, 후자(신앙심)를 통해서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준비가 된 셈이었다. 호렙 산 근처에서 그는 생애의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경건의 수련 속에서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은 모세가 바로의 궁정에서 맛보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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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받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출 2:23-25)
Ⅰ.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박이 계속된다(23절). 아마도 유아 살해는 계속되지 않은 것 같다. 유아 학살의 고통은 모세의 출생 직후에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시대는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 후 애굽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팽창에 대해 만족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부유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삼을 수 있게 되자 그들의 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빠짐없이 부리고 그들의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계획했다.
여러 해가 지나 애굽 왕이 죽고 다른 바로 왕(바로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칭호임)이 왕위에 올랐으나, 역시 선왕들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혹했다. 때로 조금 속박을 늦추기도 했지만, 즉시 전보다 더한 강포를 휘두르곤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번성했다. 그러나 그들이 번성하면 할수록 더욱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어깨 위에 악한 자들의 채찍을 매우 오랫동안, 그리고 매우 고통스럽게 허락해 두시는 때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세가 미디안에 있는 동안, 만약 애굽 궁정에 계속 있었더라면 형편이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하고 생각했다면, 또한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했더라면 지금의 형편은 얼마나 비참해졌을까도 생각했어야만 했다. 미디안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것은 큰 퇴보라 할 수 있으나 애굽에서 벽돌을 찍는 것보다는 형편이 나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동포들의 고통을 신중히 생각해 본다면 서로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Ⅱ. 마침내 이스라엘 해방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1.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여 부르짖으니”라고 했다(23절). 드디어 이스라엘은 그들의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우상에서 돌아서기 시작했다(겔 20:8). 지금까지 그들은 핍박과 압제에 시달린 나머지 하나님은 안중에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한다”(욥 36:13).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속박을 풀기 전에, 먼저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게 하시는 것이다(민 20:16).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에게 향하게 하고 해방을 간구하게 하신다는 것은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해방시켜 주심을 보여 주는 확실한 표적임을 명심하자.
2.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했다(24, 25절).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뜻을 표현하는 말의 접미사처럼 강조되어 있다.
(1) “하나님께서 그 고통 소리를 들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을 알고 계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압박받는 자의 신음 소리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귀에 분명하게 들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니, 특히 그의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 소리에 보응해 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신음하게 하는 그들의 멍에, 그리고 그들이 신음하듯 갈급히 찾는 축복, 더욱이 그들 속에서 그들을 위해 대신 중재의 신음을 하고 있는 성령의 탄식을 아신다.
(2)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였다.” 그의 언약을 잊고 있는 것같이 보이나,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언약을 마음에 두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이 언약을 유념하시니 그 언약 속에서 그들을 위해 친히 행동하신다(레 26:42 참조).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녀들을 살펴보셨다.” 모세는 그 동포를 돌아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겼다(11절).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굽어 살피시어 도와주시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당신의 백성인 그들에게 은혜스러운 관심을 가지셨다. 여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자주 반복되는 것은 이제 우리는 어떤 위대한 일, 곧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opus Deo dignum)를 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상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강하심과 그들의 하나님임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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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의 딸의 아들, 히브리 사람의 아이]]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부모들만큼 조기교육의 열정이 뜨거운 부모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조기교육이라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하여 이 작은 나라에서 세계적인 인물들이 나타나게 된 것도 사실인데, 대표적인 예가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본명 장영주 양입니다.
사라 장이 세 살 반 때에 처음으로 피아노를 쳐 보게 되었을 때에 그 아이에게 천부적인 절대음감이 있음을 발견한 그녀의 부모들은 그로부터 6개월 후 즉 만 네 살 때 16분의 1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손에 쥐어 주고 연습을 시작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녀는 다섯 살 때에 미국의 음악명문 학교인 줄리아드에서 오디션을 받았고 8세 때부터 벌써 세계무대에서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라 장이 9세 때에 4분의 1 사이즈 바이올린으로 '데뷔'라는 제목의 첫 음반을 내게 되었을 때에,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녀가 마치 '인생의 웬만한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40대 여인'과 같이 깊은 음악성을 표현하면서 연주하는 모습에 그 녹음 현장에 모여 있던 관계자들은 다들 문자 그대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 뒤로 14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베를린 필하모니, 빈 필하모니, 뉴욕 필하모니 등 세계 3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고, 지금도 계속 일취월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명연주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조기교육의 성공 사례를 논하자면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고 광야를 통과하여 끝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까지 이끌어갔던,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낳은 어머니가 요게벳인데, 실로 놀라운 것은 그녀가 자기의 아들을 직접 교육시킬 수 있었던 시간은 지극히 짧았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의 나이가 오늘날의 그 어떤 조기교육 시기보다 훨씬 더 어릴 적, 문자 그대로 '젖먹이 시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게벳은 자기 아들 모세를 실로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신앙의 인물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오늘날까지도 가장 추앙 받는 위인으로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과연 모세를 그렇게 키운 교육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을 진정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영적 조기교육'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모는 자기 자녀를 우선 '신전인격적 생명'으로서 인식해야 합니다.
1절부터 4절에 기록하기를 "1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2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3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4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세상의 부모들이 자녀로 인하여 받게 되는 그 어떤 스트레스와도 비교가 안 될 엄청난 압력을 모세를 낳게 되는 첫 순간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출애굽기 1장 22에 기록된 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고센 땅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점점 더 강성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그런 끔찍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부모가 스스로 죽이는 것은 정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임에 분명했지만, 모든 이스라엘의 부모들이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바로의 명령이 절대적이고도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세의 부모만 그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절대적인 권력자 바로의 추상같은 명령을 어기고서 모세를 숨겨 키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 갓난 아들을 '하나님 앞에서' 볼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절에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 상반절에 보면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모세의 부모가 '그 준수함'을 보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어린 아들이 그들의 눈에 그냥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로 보였다는 정도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부모의 눈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자기 아들이 그 얼마나 '아름답게' 비치고 있을지를 볼 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 11장 23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히브리서의 구절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모세'를 수식하는 말이 아니라 '그 부모'를 수식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다시 번역하자면 '모세가 났을 때에 믿음으로 그 부모가...'라는 어순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모세의 부모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으며, 그 결과 자신의 아들 역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알았고, 그러니 아무리 바로의 명령이 준엄하고 두렵다고 해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준수한 아이'를 결코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어린 모세를 '바로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한 부모였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까닭에 모세의 부모는 그 아들의 생명까지도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온전히 맡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석 달을 몰래 키우다가, 아마도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그 어린 아들을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변의 갈대 사이로 띄워 보냈습니다.
그때 이미 7, 8세 쯤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딸려 보내어 멀리서 지켜보게 하기는 했지만,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7장 21절에 "(모세의 부모가 그를) 버리운 후에"라고 기록하고 것처럼, 그 부모로서는 그야말로 '최후의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모세를 그냥 버리지는 않고 "역청과 나무진"으로 완전히 방수처리가 된 갈대 상자를 마련하는 등 끝까지 최선을 다한 후에 나머지는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맡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바로의 명령에 따르면 '죽여야 할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 부모가 그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결코 그럴 수 없는 '아름다운 아이'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처럼 두려운 명령도 '무서워 아니하고' 그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부모치고 자기 자식이 사랑스럽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어느 아버지 어머니의 눈에도 자기 아들이야말로 '최고로 준수한 완소남'이요 자기 딸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제 새끼를 귀여워하는 것은 사실 동물도 똑같이 할 줄 알지 않습니까?
명실 공히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식을 보는 눈이 그 정도 수준에 머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라면 당연히 자기 자식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자녀가 그냥 나를 닮아서 귀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실로 '아름답고도 준수한 생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은 내 성을 따르고 내 핏줄을 이어갈 아들이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선택하신 '생명책에 기록된 택자'이며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구속함을 얻게 된 아들인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내 딸 역시 내가 그런 '딸 바보'가 되기 훨씬 전부터 하늘 아버지께서 이미 당신의 사랑하시는 '언약의 자녀'로 지명해 두셨고 그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로 조성해 주신 것을 꼭 먼저 인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저와 여러분은 자녀를 키울 때에 모든 '세속적 압력'을 이겨내고 오직 '하나님의 기준'만을 따르게 됩니다.
'이 아이가 다른 사람 눈에 어떤 아이가 될까?'라는 걱정에 빠져 전전긍긍하는 못난 부모가 아니라,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사랑스럽고 흠모를 받는 아이가 될까?'라는 설렘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인도를 따라 그를 양육하는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아들이 학교 선생에게 얼마나 똑똑한 학생으로 보일까? 내 딸이 제 또래 친구들에게 얼마나 더 예쁘게 보일까?' - 이렇게 보기 이전에 '이 아이가 하나님의 눈에 지금 몇 점짜리 아이로 보일까?'라고 판단할 줄 아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저 부모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육신적 부성애나 모성애가 아니라 '믿음으로' 자녀를 대하고 판단할 줄 아는 영적 부성애와 모성애가 아니겠습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인 우리 자녀들을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신전인격적인 생명으로 볼 줄 아는 부모가 됨으로써, 오늘날 역시 '바로의 명령'이 주고 있는 온갖 압력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소중한 생명을 끝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자녀'로 지켜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는 자기 자녀를 가능한 한 어릴 때부터 '교회중심의 신앙교육'으로써 양육해야 합니다.
5절 이하 10절에 "5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7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8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9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그를 '갈대 상자'에 넣어 하수에 띄워 보낸 후에 오직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실로 오묘한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이 아주 당당하게 자기 아들에게 젖을 먹이며 키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애굽의 공주로부터 "삯" 즉 양육비까지 받아 가면서 자기 집에서 합법적으로 모세를 양육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랐을" 때에, 즉 모세가 젖을 떼고 걸음마를 할 무렵이 되었을 때 요게벳은 그를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야" 했고, 그때부터 모세는 그의 친부모와는 완전히 생이별을 하고 요게벳의 아들이 아니라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그 모세가 장성한 후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으며 자기 민족이 이스라엘인 것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의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라는 사도행전 7장 23절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모세는 40세가 될 때까지 여전히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 자기 민족에 대한 사명감까지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그 아들에게 '영적 조기교육'을 시켜 준 덕분이었습니다.
다른 일반 교육은 나중에 모세가 바로의 궁전으로 들어가게 되면 다 자동적으로 받게 될 것이니까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애굽 왕궁에서 왕자들이 받았던 교육은 애굽의 우상신들에 대한 신학을 비롯하여 천문학, 약학, 수학 등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일류 중의 일류인 엘리트 코스였습니다. 그 결과 사도행전 7장 22절의 스데반의 설교 중에도 "모세가 애굽 사람들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했듯이, 그처럼 큰 나라에서 자라면서 보고 배운 교육이 다 나중에 가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리드하는 사명에 너무나 요긴하게 쓰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굽의 교육을 잘 받아도 그 모세가 신앙인이 되지 못하면 다 헛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모세가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긍심과 사명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지도자는 고사하고 그냥 애굽 공주의 왕자로서 어쩌면 자기 민족을 학대하는 애굽의 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실상 모세 성장 환경을 생각하자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자랐으면서도 40년 동안이나 '여호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그 대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그 어린 모세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면서 키웠던 기간에 그에게 집중적인 신앙 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외에는 다른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게벳은 그 제한된 기간 동안 매일 같이 자기 아들을 그 얼마나 열심히, 그 얼마나 철저히 가르쳤겠습니까?
몇 년만 지나면 떠나보내야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생부모와 헤어지고 자기 민족과 단절되고 무엇보다도 신앙교육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곳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야 할 것을 생각하면서, 요게벳은 그야말로 분초를 아껴서 자나깨나 모세에게 반복적으로 주입식 신앙교육을 시켜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모세에게 젖을 먹일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는 기도를 그 영아 모세의 귀에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그 어린 모세를 안고 흔들어 주면서 혹은 업고 다니면서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과 그 동족이 간구하는 '해방, 구원' 이런 단어들을 잠재의식 속에 새겨지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아기 모세를 잠재울 때에도 자장가 대신에 찬송을 불러주다가 엄마의 뜨거운 눈물이 그 아기 모세의 얼굴에 떨어지게 된 적도 자주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잃느냐 지키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몇 년 안에 결판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준수한 아이'를 애굽 왕실에 빼앗기느냐 아니면 '히브리 사람'으로 키우느냐 하는 사생결단의 문제를 두고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는 겨우 수 년밖에 안 되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될 소중한 기회요 딱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사적인 영적 조기교육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정말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두고 히브리서 11장 24절로 26절은, 바로 그 앞절에서 그 부모의 신앙을 칭찬한 후에 곧 이어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 어머니 요게벳의 조기 신앙교육의 결과 모세는 끝내 '믿음으로 장성하게' 되었고 온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모세가 0세부터 3, 4세까지 자라는 동안, 아직 말도 제대로 못 배웠을 나이였지만, 그 영아 모세의 영혼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가 깊숙이 박혀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그가 나중에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서 초중고대학교 전 과정을 거치면서 애굽의 온갖 태양신, 짐승신, 잡신들에 대한 신학만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여호와의 성호를 기억하고 그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을 지켜낼 정도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매일 왕궁에서 애굽의 왕족들과만 교제하면서도 오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자신의 진짜 민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자기 민족을 구원해 내어야겠다는 사명 수행을 위하여 고난까지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까지 자라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조기 신앙교육의 성과입니까? 오늘날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염려하면서 자녀를 키우고 있습니까?
주일에 예배를 빠뜨리고서라도 학원에 보내어 과외공부시키지 않으면 대학교에 못 들어갈까 벌벌 떨고 계십니까?
성경 말씀대로 행하도록 가르치면 학교의 불신 친구들에게 전혀 인기 없는 아이가 될까봐 걱정하고 계십니까?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자칫 세상 사회에서는 꽁지가 될 것 같아서 겁을 내고 계십니까?
그처럼 자기 자식을 '바로의 궁'에서 세속적인 '일류 교육'만 시키려 하는 부모는 절로 그 자녀로 하여금 '애굽의 우상숭배'라는 과목부터 제일 먼저 배우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조기교육은 아주 중요하며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0세부터 3세까지의 기간이 어린아이들의 두뇌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라는 기간인데, 생후 1년 사이에 뇌의 무게는 무려 두 배로 증가하며 2세가 되면 성인의 뇌의 50퍼센트, 그리고 4세에는 이미 75퍼센트까지 발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뇌의 용적과 무게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바로 이 기간 동안에 엄마의 뱃속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고스란히 흡수하면서 익히게 되는 까닭에, 이 기간의 조기교육의 중요성이 그처럼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조기교육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무리한 언어교육이나 지식교육이 아니라 바로 '생활교육'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저 엄마의 사랑을 듬뿍 주면서 스스로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간단한 옷을 저 혼자 입을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 실상은 훨씬 더 중요한 교육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육들이 아이의 근육 발달은 물론이요 정상적인 두뇌발달 및 감성 형성에 제일 좋은 자극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모국어도 제대로 자리 잡히지 못한 나이에 일찍부터 무리하게 외국어까지 억지로 배우게 하면 그 아이에게 절로 스트레스를 주게 되며 정상적인 교육에 장애를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전문 심리학자들의 지적이 아니라도 상식적으로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어린 시절부터 바른 '신앙교육'을 시키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22장 6절에서도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우리 부모들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도 가능한 한 어릴 때에 받게 하는 것도 아직 말 한 마디도 못하는 영아 때부터 그 아이를 '언약의 자손'으로 신앙교육을 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게벳의 경우처럼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 역시 제한되어 있으며 절대로 실패해서는 아니 될 단 한 번의 기회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녀들이 내 집에서 먹고 자랄 동안 우리는 이들이 평생토록 잊지 못할 신앙교육을 완전히 다 마쳐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아부와 유치부 주일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에 벌써 그들의 인격 속에 평생을 두고 절대로 지워지지 아니하도록 우리 부모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아이들의 귀에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의 이름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주일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주일학교 선생님께로부터 배웠던 성경구절들이 그 아이의 머릿속에 아예 '돌비에 새겨진 듯'이 박혀 있어야 하고, 주일학교 친구들과 함께 불렀던 찬송들이 그들의 귀에 늘 앵앵거리고 혼자서라도 절로 입술로 흥얼거릴 정도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중고등학교에 가서 이제 세상 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자라게 되는 때에도 그들의 영적 잠재의식 속에 예수 구원 신앙,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 천당과 지옥의 실존 등 제일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교리가 그 아이들의 사춘기 성장과정 중에 가장 강력하고도 뚜렷하게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뒤꽁무니만 따라가거나 불신사회의 과잉교육 풍조에 휩쓸리지 말고, 우리의 소중한 아들딸들을 오직 이처럼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기관'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교육에 최우선을 두고서 양육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란 부모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기력의 시작'인 동시에 '축복의 기업'입니다.
그러니 그 자녀를 잘 키우고 바로 교육시키는 것은 부모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중차대한 의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속된 말이지만 정말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듯이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기업가가 자기 평생에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뜻대로 될 수 없었던 일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자식'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자녀들을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 밑에서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야말로 내 자녀의 진짜 부모인 '생명의 창주주'이시며 육신의 부모인 나보다도 훨씬 더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는 '아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녀를 '부모'의 눈으로 판단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의 인격체'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을 '불신사회'의 기준을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교회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신앙인의 교육을 시켜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의 자녀들은 '바로의 딸의 아들'이 아니라 진정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서 성장하게 될 것이며, 선민 이스라엘 중에서도 크게 쓰임 받는 '신앙의 위인'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에서 모든 기본 생존권을 뒷받침해 주는 사회보장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아들딸들에게는 영적으로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르는 신앙교육이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일학교와 경향인의 각 가정을 통하여 '영아' 때부터 '소천'하게 되는 그날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충성하는 사명인으로 살게 만드는 이 위대한 신앙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모와 교사로서의 이 소중한 책임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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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비가 와도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곳이로되, 한편 광야는 비가 내리면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지역을 뜻함..
......광야(廣野); 미드바르 מִדְבָּר .......다바르 דָבַר = 로고스( λόγος, logos)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사실은 가나안이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지였습니다!
광야의 세월은 의미있는 세월이었습니다. 그 광야에 축복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씀'의 축복이었습니다.
☛ 광야(廣野); 히브리어 (미드바르 מִדְבָּר) - ☛ 하나님의 말씀 ; 히브리어 ( 다바르 דָבַר)-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을 가지는데 신명기서 1:1절에는 이 미드바르(광야)라는 단어와 다바르(말씀)이라는 단어가 함께 나타납니다.
[신1:1]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미드바르)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 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다바르)이니라
☛ 다바르 דָבַר (말씀 dabar)-> speak 말하다, talk 대화하다, promise 약속하다, commune 교감하며 대화하다, declare 선포하다)
다바르에는 광야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소망과 사랑의 약속, 구원, 치유, 위로, 용서, 용기, 비전, 희망- 즉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 다바르 דָבַר 에는 다양한 파생어들이 있습니다.
☛ 미드바르 מִדְבָּר(광야(廣野 신명기 1:1)
☛ 드비르 דְּבִ֥יר (지성소 至聖所 시편 28:2)- 광야에서도 말씀의 성소가 있다면!
☛ 도베르 דֹּבֶר(목장(牧場 이사야 5:17) 다바르를 붙잡을 때- 인생은 푸른 초장!
☛ 데베르 דֶּבֶר(역병(疫病 전염병 傳染病 신명기 28:21) 다바르를 떠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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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바르는 헬라어로 곧 로고스( λόγος, logos)입니다. 광야같은 세상 미드바르를 살 때! 다바르=로고스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1:1] 태초에 말씀(다바르=로고스=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말씀(다바르=로고스=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다바르=로고스=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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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43:19, 20]]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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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황무지 rB;d]mi(4057, 미드바르)
미드바르(명남)는 다바르(rb'D; , 1696)에서 유래했으며, '광야, 황무지'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70회 나온다.
(a) 미드바르는 일반적으로 세 유형의 지역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목초지(수 2:22, 시 65:12, 렘 23:10);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땅(신 32:10, 욥 38:26, 잠 21:19, 렘 9:1); 오아시스 혹은 도시와 읍이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넓은 지역, 유다의 광야에는 그 안에 적어도 6개의 도시가 있었다. 요르단의 광야(충적의 평야)에는 도시들이 존재하며 시내 광야에는 그 지역 안에 많은 오아시스들이 있다. 미드바르는 또한 비유적으로 사용된다(호 2:5, 렘 2:31).
(b) 미드바르로 불리우는 가장 넓은 지역은 시내, 네겝, 요단 골짜기와 아라비아 광야이다.
특별한 광야 지방은 다음과 같다: 브엘세바(창 21:14); 바란(창 21:21, 민 10:12, 민 12:16, 민 13:3, 민 13:26, 삼상 25:1); 신(출 16:1, 출 17:1, 민 33:11, 민 33:12); 시내(민 1:19 등, 출 19:1, 출 19:2, 레 7:38); 신 Zin(민 13:21 등, 신 32:51, 수 15:1); 벧아웬(수 18:12); 유다(삿 1:16, 시 63의 제목); 십(삼상 23:14, 삼상 23:24, 삼상 26:2); 마온(삼상 23:24, 삼상 23:25); 기브온(삼하 2:24); 다메섹(왕상 19:15); 에돔(왕하 3:8); 여루엘(대하 20:16); 수르(출 15:22, 출 16:1, 민 1:19 등); 에담(민 33:8); 그데못(신 2:26); 드고아(대하 20:20); 가데스(시 29:8); 애굽(겔 20:35).
(c) 이 광야는 가끔 포도, 샘, 물 웅덩이, 강, 즐거이 쉴만한 장소 등이 없다는 뜻의 부정적 의미로 묘사되며, 혹은 주목할만한 진술, 즉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시 78:19)라고 묘사된다.
「참고 - 미드바르는 70인역본의 용법에서 에레모스(2048)로 번역되었다. 에레모스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헤로도투스에서부터 나타나며, 본래 '버림받음, 포기'를 뜻하며, 따라서 '적막하거나 사람이 별로 살지 않은 지역'을 의미하게 되었고, 그 다음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황무지, 광야'를 의미하게 되었다. 고대 세계에서 광야는 물과 식물이 없으므로, 주민이 살 수 없는 땅일 뿐만 아니라 또한 황폐하게 되어 주민이 이동한 지역, 버려진 혹은 목초지, 즉 유기된 지역이다. 고대 그레코 로마 세계에서 외딴 곳에서 신의 계시를 기다렸으며(e. g. Eur., Bacch. 874ff), 또한 귀신들의 거주지로서 광야를 무서워 했다(예를 들면, Lucian, Vitorum Auction 9).
(a) 70인역본에서 에레모스는 총 345회 나타나는 히브리어 미드바라(황야, 광야, 수목 없는 대 초원, 풀 없는 땅을 의미하기도 함, 창 37:22)의 역어로 241회 사용되었다. 또한 에레모스는 히브리어 어근 하레브(황량하게 되다, 황폐하게 되다)의 파생어들의 역어로 32회, 히브리어 샤멘(설득하게 되다, 유린당하다, 황폐하게 되다)과 이 단어의 파생어의 역어로 25회, 네게브(메마른 땅)의 역어로 10회 사용되고 있다. 에레모스의 사용 중 120회는 모세오경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109회 증거됨)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방랑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역시 시편(21회), 이사야(45회), 예레미아(28회)와 에스겔(38회)에서 에레모스는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b) 산과 물과 같이 구약성경에서 광야는 거룩한 곳의 이중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광야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곳이며, 그러나 또한 귀신들의 거주지이며 이들은 불결한 것과 병과 죽음으로 인간들을 위협하고 있다.
① "거룩한 곳" 즉 광야에 주어지는 긍정적인 가치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현현과 관계되는 수많은 기사에 의하여 나타나게 된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할 때 광야에서 천사가 음식으로 엘리야를 강건하게 하였다(왕상 19:4-6), 호렙(출 3:1이하; 황상 19:11-18)과 시내 (출 19)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심은 산에서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도 현현하셨다.
이스라엘의 40년간 광야의 유랑(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참조: 신 8:2)은 특별히 하나님과 밀착되는 시간으로 간주되고 있다(호 9:10; 참조: 호 11:1; 호 12:10[호 12:9]; 호 13:4 이하); 특히 이러한 것은 시편,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에서 나타난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 민족의 불충실: 시 78[77]:17, 시 78[77]:40; 시 95[94]:7-11; 시 106[105]:13-33; 겔 20; 참조: 민 13 이하)을 배경으로 하는 권고적 언급들은 비교적 많은 지면을 차지 하고 있다(예를 들면, 시 78[77]:15, 시 78[77]:19, 시 78[77]:40, 시 78[77]:52; 시 95[94]:8; 시 106[105]:7-12; 사 48:21; 사 63:13; 렘 2:6; 겔 20:10-26; 겔 20:36).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소망은 또한 광야와 연관된 생각과 관계되고 있다(사 40:3; 렘 31[38]:2; 겔 34:25; 호 2:16-25). 여호와의 밀접한 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자마다 어는 시대나 레갑 족속처럼 황량한 환경을 만들어 생활하는 것을 선택하는데 그 기원은 엘리야 시대의 예언적 부흥 운동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집 대신에 천막에서 살았다(렘 35:7; 렘 35:9이하). 적어도 일년에 한번 모든 유대인들은 "천막"의 장막절을 기념할 때 광야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한 것처럼 "천막"에서 생활한다(레 23:34-36, 레 23:42 이하: 신 16:13-17).
② 동시에 광야는 매우 위험한 곳이며 하나님과 분리된 곳이며 귀신 세력들이 있는 곳이다(신 8:15; 참조: 민 21:4-9; 사 30:6). 경작지와 광야의 차이는 가나안 땅과 애굽의 땅의 대조와 같다. 즉, "애굽"은 특히(귀신이 사는) 광야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토빗 8:3; 참조, 겔 20:36과 마 2:15; 또한 참조: 호 11:1). 여호와의 무서운 동풍은 인간의 말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바람 처럼 광야에서 일어난다(호 13:15). 속죄 염소는 귀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졌다(레 16:10, 레 16:21 이하). 광야의 귀신들은 바벨론(사 3:21 이하)과 에돔(Edom),(사 34:13-15)의 파멸을 손에 쥐고 있다. 당시의 황폐함과 참혹함은 유린(황폐)으로 보여졌으며(예를 들면, 사 1:7; 사 54:3; 렘 2:15; 겔 19:13), 미래의 성읍들과 땅의 멸망은 적막한 유린 형태로 위협을 받고 있다(예를 들면, 사 5:9; 렘 4:26이하; 겔 5:14). 특히 물이 말라 사막으로 변하는 특징이 있다(사 37:25; 사 44:27; 사 51:10; 렘 51[28]:36; 겔 29:10; 겔 30:12).
귀신 신앙자의 조건을 근거로 하면 광야는 정확하게 에스겔 26:19이하의 "큰 물"과 마찬가지로 지하 세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영원히 …황적한 곳" 겔 26:20JB). 우리는 여호와께서 광야에 거하는 귀신들을 처벌하시는 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데(민 21:4-9) 그 때 여호와께서는 최종적으로 단 한번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을 국문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계신다(겔 20:35). 물론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광야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 사실이다(참조, 겔 34:25; 호 2:16; 상기 2(a)참조).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다만 광야가 영구히 제거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광야는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될 것이며, 물은 광야에 넘칠 것이며 길은 개통될 것이며, 황폐되었던 성읍들은 재건될 것이다(사 32:15; 사 35:15; 특별히 후에 쓰인 이사야서에서 예를 들면, 사 41:18; 사 43:19f; 사 58:12; 사 61:4; 사 62:4; 렘 33[40]:10-12; 겔 36:10, 겔 36:33 이하; 겔 38:8, 겔 38:12; 단 9:27; 참조: 호 14:5-10). 이 문맥에는 사 40:3과 같은 한 구절이 속한다. 그곳에서 광야를 통해 길들이 트일 것이며(사 43:19), 여호와께서 주되심이 밝혀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시 광야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실지라도, 광야는 여전히 최후의 수단으로 하나님을 적대시 하는 장소 즉, 악한 귀신의 장소이다. 자신의 적과 자기 백성들의 적을 물리치신 하나님의 승리는 또한 광야를 제압하신 승리이다.
3. 성서 이후의 유대교
성서 이후의 유대교는 호세아의 황폐 예표설의 범위 내에서 연구하였을 때 광야로부터 유대인의 구속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SB I 85-88에서 랍비들의 증거). 이러한 뜻은 메시야께서 광야에서 오신다는 혼란의 이유가 되었다(Josephus, War 2, 258-63). 에세네파(Essenes)는 종말에 자기들이 쿰란의 광야로 옮겨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러한 이유는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했으며(참조, 1QS 8, 12이하; 9:19f.), 이와 같은 것은 세례(침례)요한에게도 적용된다(Josephus, Ant. 18, 116-119). 이와 비슷하게 이사야(사 2:8-11)의 순교에 의하면 선지자들 곧 이사야, 미가와 다른 선지자들은 "황폐한 산"으로 가서 살았다고 한다. 유대교가 메시야를 광야와 관련하여 생각하는 것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호 2:16; 12:10; 욥 30:4과 사 40:3과 같은 성구에 집착하는 것이며, 사 40:3은 세례(침례)요한과 마찬가지로 쿰란과도 관계 있다. 성전 파괴 후에 유대인들은 어려움 없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광야로" 떠날 수 있도록 기도하였는데(Josephus, War)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특별히 광야에서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귀신들은 역시 광야에서 살고 있다. 베헤모트(Behemoth, 참조: 욥 40:15-24)는 에녹일서 60:8에 의하면 광야 귀신이다. 형벌을 받고 있는 악한 귀신들은 광야로 보내지는데 그곳을 거처로 삼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토빗 8:3; 에녹일서 10:4; 참조: 마 12:43. 병행구 눅 11:24). 광야 귀신들에 대한 두려움과 고도의 신학적 - 종말론적 관심이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쿰란 종파의 계속적으로 시행한 반 마귀적인 세정식에서, 기도와 금식으로(반 마귀적인) 정결을 위하여 싸운 이사야 순교 2:8이하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세상과 분리에서 보여진다. 광야에서 수도자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기 위하여 악한 영들과 투쟁한다.
4. 신약성경의 용법.
에레모스는 신약성경에서 37회 나타나며, '광야'를 뜻한다.
(a) 광야에 대한 신약성경의 평가는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평가와 같다.
변함 없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40년 간의 방랑 생활은 하나님의 역사적 활동의 중요한 사실로서 생각되며(요 3:14; 요 6:31, 요 6:49; 행 7:30이하; 행 13:18; 고후 10:5; 히 3:8, 히 3:17), 광야에서 종말적인 운동이 시작된다는 사상은 여전히 살아 있다(마 24:26; 행 21:38).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는 묵시(계 12:6, 계 12:14)는 이스라엘 백성의 시대가 광야에서 열려진다는 지대한 관심에서 설명되어 지지 않으면 안되며 동시에 메시야가 광야에서 올 것이라는 기대를 입증하여 준다(참조: 마 2:15; 호 11:1).
(b) 세례(침례)요한은 광야에 숨어 살았으며, 유대광야에서 효과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유대 광야"는 삿 1:16에서 "아랏 남방"으로 표기되었다. 여리고에서 남쪽으로, 곧 사해의 서북 쪽에 있는 울퉁불퉁한 여러 지역들 - 십 황무지(삼상 23:14, 삼상 23: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황무지(삼상 24:1), 여루엘 들(대하 20:16), 드고아 들(대하 20:20)을 통틀어 지칭한다. 이 모든 지역은 유다 영토에 속한다.
(c) 유대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지자들은 광야와 산에서 은거하였는데 그 이유는 수도자들에게 그곳이 적당한 장소이기 때문이며(Mare. 사 2:8-11), 그러므로 히 11:38은 구약 선지자들과 수도자들이 광야, 산, 토굴에서 은거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광야의 방랑자들과 구약성경의 광야 거주민을 새 이스라엘과 관련시켜 보면 새 이스라엘을 방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원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히 3이하; 히 11:8-10; 히 12:18-24; 참조: 고전 10:1-13; 참조: E. Kasemann).
(d) 예수님의 의미가 선지자와 메시야로 묘사되는, 한 광야는 그 지역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시대의 지도자 모습에 대한 선지자적 해석에서 모세와 닮은 것으로 나타나셨으나(행 3:22 이하; 행 7:37; 참조: 신 18:15), 그러나 물론 원형으로 모세를 능가한다(참조: 히 3:1-6).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공관복음의 이야기는 초원과 외딴곳에 사는 사람들, 즉 들에 있는 목자들에게 선포한 메시야적 영광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으며(눅 2:8-14), 애굽으로 피신가는 것으로(마 2:13-15, 마 2:19-21) 애굽의 광야로부터 메시야가 오셨다고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호 11:1에 대한 마 2:15의 메시야 해석; 토빗에서 애굽은 광야를 의미).
예수님께서 사람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은 광야에서 일어났으며(마 4:1-1 병행구 막 1:12 이하, 눅 4:1-13; → 유혹하다 tempt), 예수님께서 이적으로(참조: 왕하 4:42-44 엘리야와 더불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먹이신 것도 광야에서 일어났다(마 14:13 병행구 막 6:32; 또한 눅 9:12; 마 15:33 병행구 막 8:4).
여러 번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시어 기도하셨고 금식하셨으며(마 4:1이하 병행구 눅 4:1 이하; 참조: 막 1:35, 막 1:45 병행구 눅 4:42; 눅 5:16), 특별히 하나님과 가깝게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마귀들의 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다(막 1:12이하 병행구).
광야는 여전히 환상을 보기에 적합한 장소이다(계 17:3; 참조: 행 8:26).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을 찾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갈 1:17).
그렇지만 단순히 적대자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참조: 왕상 19:3 이하; 그리고 계 12:6).
(e) 광야 세대의 죄와 허물(위의 구약성경 그를 참조)이 언급되어 있는 곳에서는 사막이 부정적으로만 기록된다(행 7:41-43; 고전 10:5; 히 3:8, 행 3:17).
사막에는 악마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후 11:26; 참조: 눅 15:4).
왜냐하면 그 곳에는 귀신(마 12:43 병행구. 눅 11:24, 막 1:12이하)과 귀신들린 자들(눅 8:29)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론적인(aetiological) 악마 전설은 사막 지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행 1:18-20; 참조: 시 69:26[그 밖에, 마 27:3-10]; 참조: Papias, Frag. 3).(참조: W. L. Liefeld; G. Kit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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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사막, 광야 @/myviy](3452, 예쉬몬)
예쉬몬(명남)은 야샴(!v'y: , 3456)에서 유래했으며, '황무지, 사막, 광야, 황야'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온다(민 21:20, 민 23:28, 신 32:10, 삼상 23:19, 삼상 23:24, 삼상 26:1, 삼상 26:3, 시 68:7, 시 78:40, 시 106:14, 시 107:4, 사 43:19, 사 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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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상자 ark hb;Te(8392, 테바)
테바(명여)는 외국어에서 유래한 듯하며, '방주, 상자 ark'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8회 나오며, 오직 두가지 경우, 곧 노아의 '방주'와 모세를 담아 두었던 자그마한 상자에 대해서만 사용되었다.
(a) 창 6장-창 9장에서 테바(26회)는 노아와 그의 가족과 동물들이 대홍수 심판을 피하려고 들어간 직사각형의 상자 모양의 거대한 배를 가리킨다.
역청으로 방주의 내부와 외부를 칠한 것이다. 역청은 즉 아스팔트는 흑색의 점질로서 자연적으로 발생된 것이거나 혹은 원유로부터 아스팔트라 할 수 있는 광물성 타르 성분을 빼낸 것이다(창 6:14).
방주(장광고 : 137*14*23미터)는 길이가 300규빗(450피이트, 약 137미터) 넓이가 50규빗(75피이트, 약 23미터), 높이 30규빗(45피이트, 약 14미터)이었다. 그 방주는 길이가 100미터 트랙의 1.5배, 너비는 왕복8차선도로폭보다 조금 넓고, 높이가 4, 5층 건물만큼 된다!
그 방주는 아마 거룻배를 닮았을 것이며 분명히 선단이 네모졌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홍수의 세력에 버티기만 하면 되었으며 물위에서 진항할 필요는 없었다. 방주는 그 목적에 - 노아와 그 식구들 및 그와 함께한 동물들의 목숨을 보전하기에 - 완전히 적합하였다(창 6:15 이하).
방주에 짐을 실을 때가 왔을 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노아와 그의 가족이 맨 먼저 승선했다(창 6:18, 창 6:19).
그 다음 하나님은 짐승들을 방주 안으로 들여보내셨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동물들을 몰아 방주 속에 들여 넣을 필요가 있었다(창 7:7, 창 7:9-15). 하나님에 의해 모인 동물들이 그 명령대로 방주 속으로 행진해 들어갈 때 그 광경이 어떠하였으랴!
홍수가 지나간 후 땅이 말랐을 때 하선했다(창 7:17-23, 창 8:1-창 9:18).
(b) 출 2:3, 출 2:5에서 테바는 바로 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모세를 담아서 나일강 갈대 숲 속에 숨겨두었던 자그마한 상자를 가리킨다.
창세기 홍수 기사와 출애굽기의 모세 상자 기사 사이에는 신학적인 유사점이 많은데 이는 분명히 이 두 기사의 기록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캇수토(V. Cassuto)는 "이 두 기사에서 보면 구원 받을 가치가 있는 자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예정된 자가 물로 인하여 죽게 될 상황에서 구원 받는다. 창세기 기사에서 구원의 대상은 인류이고, 출애굽기 기사에서 구원의 대상은 선택된 백성이다"고 주석했다.
나아가 노아 방주는 구원의 상징으로서 벧전 3:20이하에서 침례(세례) 의식과 비교되고 있으며,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방주를 외적인 재앙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의 상징으로서 고대 로마거리 아래 있는 카타콤의 벽화에 그렸다.(참조: R. F. Youngblood;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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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모세를 준비시키심
[1-4절]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토브 )[아름다움]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모세의 출생과 어릴 때의 이야기이다. 모세의 부친은 레위인이며 그의 모친도 레위인이었다. 그가 출생할 즈음에는 히브리인의 남자 아이가 나면 나일강에 버리라는 왕의 명령이 내려져 있던 때이었다(1:22). 그의 부모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었다(히 11:23).
그의 모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과 지혜로 행하며 그 아이를 역청과 나무 진으로 안을 칠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버렸다. 그는 그 아이를 하나님의 섭리의 손에 의탁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했을 것이다.
[5-6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河水)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기하게 이루어졌다. 그 공주는 그 상자를 보았고 열어 그 아기를 보았다. 삼 개월된 그 아기는 공주를 보고 울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겼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 공주에게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다.
[7-10절]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그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그의 종 모세를 건지셨고 살리셨고 경건함으로 양육받게 하셨다.
모세의 어머니는 안전하게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말씀과 기도로 키웠을 것이다. 그 아기는 자라서 바로의 딸에게로 인도되고 그의 아들이 되었다. 그는 바로의 궁중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스데반은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말했다(행 7:22). 그 공주는 그 아기의 이름을 모세라고 불렀다.
‘모세’라는 원어(모쉐 )는 ‘건져내다’는 뜻을 가진 단어(마솨 )에서 나온 것 같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신비하고 신기하다.
[11-12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모세는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모세의 그 행동은, 그가 자신을 고통받는 히브리인 형제들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스데반은 설교 중에 모세에 대해,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해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고 말했고(행 7:23-24),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증거하였다(히 11:24-26).
[13-15절]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방백]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정녕](아켄 )(원문)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하였다(행 7:25).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은 퍼졌고, 바로는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았다. 공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한 순간에 지명수배자와 도망자가 되었고 바로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 머물렀다.
[16-17절]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모세는 양치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은 도왔다. 그에게는 정의감과 선한 동정심, 즉 건전한 인격의 기본적 요소인 도덕성이 있었다.
[18-20절]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그 딸들의 아버지인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은 은혜에 보답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는 바르고 선한 마음이 있는 자이었다.
[21-22절]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칩포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는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였고, 르우엘은 그의 딸 칩포라를 모세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가 아들을 낳았고 모세는 그 이름을 게르솜( )이라 부르며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고 말했다. 후에, 모세가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 나이가 80세이었으므로(출 7:7), 그가 미디안 광야에 거한 세월은 약 40년간이었다(행 7:29-30).
미디안 광야는 모세의 믿음과 겸손과 인내를 훈련시킨 학교이었다. 출애굽 후 40년의 광야 생활이 실전(實戰)과 같은 삶이었다면, 미디안 광야 생활은 그것을 준비하는 학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여지없이 실패했던 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패자, 살인자, 도피자인 그를 들어 쓰시려고 거기서 그를 훈련시키셨던 것이다.
[23-25절]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하나님께서]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보셨고 하나님께서] 권념하셨더라[아셨더라].
원문에는 24-25절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4번 나온다.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셨고 하나님께서 보셨고 또 하나님께서 아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심령으로 그들을 돌아보셨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모세의 출생과 생명 보존과 양육은 하나님의 신기한 섭리 안에 진행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기이하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이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로 말미암음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바라야 한다(롬 11:36).
둘째로, 모세는 내가 해보겠다고 할 때 실패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살인자, 도피자인 그를 들어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셨고 준비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위해 일꾼들을 훈련시키시고 준비시키신다.
셋째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의 응답으로, 그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그의 성실한 이행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하신 때 그의 일을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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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5편 - 진실함(에메트) (시 85:1-13)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니“(시 85:10)
‘인애(헤세드)‘와 ‘진리(에메트)‘는 본래부터 같이 다니기에(창32:11; 출34:6;사40:10; 57:10; 시89:14) 새삼스레 다시 만나야 할 것이 아니고, ‘의(체데크)‘와 ‘화평(샬롬)‘도 서로가 낯설지 않아(사32:17) 살렘왕 멜기세덱은 ‘평화의 왕‘인 동시에 ‘의의 왕‘이기도 한데, 이미 만나 입맞추었다는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은 그러나 시인이 사는 땅에서는 쉽게 마주칠 수 없어 보인다(4~7).
시편 85편은 톰 라이트가 소위 ‘제2성전 유대교‘의 현실인식이라 서술했던 내용의 요약과도 같이 포로에서 돌아왔으나(1) 선지자들의 기대 속에 그려지던 영광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아(4,9) 여전히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9) 상황 가운데 놓인 자들이 부르는 노래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다(2). 그의 모든 분노를 모아 치워 버리셨다(3). 왜냐하면 그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이 많은 하나님‘이셔서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출 34:6).
그러나 포로에서 돌아온 현실은 영광과 화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듯이 보인다(5).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 열매 그치고 외양간 송아지가 없어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다‘던 하박국 선지자의 각오가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에게도 여전히 요구되는 매일을 살면서, 그러나 시인은 다시 한번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마음을 집중하며 말을 한다. -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말해 주실 것이다(8; 렘29:11).
진실로 그의 구원이 가깝고, 영광이 이 땅에 거하게 될 것이다(9; 사46:13).‘ 그렇게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자(하시딤)의 자리에 선다(8).
대개 ‘경건한 자‘로 번역되는 ‘하시딤‘은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인 ‘헤세드‘가 빚어낸 자들이다.
의가 평화를 빚듯,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이 하나님께 믿음을 두는 자들 가운데 ‘진실함(에메트)‘을 빚는다.
땅에서 ‘진실함(에메트)‘이 싹을 틔우는 것은, 하늘에서 의가 비처럼 내리기 때문이다(11). 땅이 그 소산을 내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12).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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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5편 (사역) -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1 여호와여, 당신께서 당신의 땅을 기뻐하셨고, 당신께서 야곱의 포로 된 자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2 당신께서 당신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셨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습니다. 셀라
3 당신께서 당신의 모든 분노를 모아다 치워버리셨고, 당신의 진노를 돌이키셨습니다.
4 회복시켜주소서, 우리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끝내소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진노를!
5 영원히 우리에게 분노하시렵니까? 당신의 노여움을 대대로 품고 계시렵니까?
6 당신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어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기뻐하게 하지 않으시렵니까?
7 우리로 보게 하소서, 여호와여,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헤세드‘)을! 주소서, 당신의 구원을, 우리에게!
8 내가 들으리라, 하나님, 여호와 그가 하시는 말씀을. 참으로 그가 말씀하시리라, 평화(‘샬롬‘)를, 자기 백성에게, 그의 한결 같은 사랑을 의지하는 자들(‘하시딤‘)에게
9 참으로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그의 구원이 가까이 있도다.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라.
10 한결같은 사랑('헤세드')과 진실함('에메트')이 만났고, 의('에메트')와 평화('샬롬')가 입맞추었다.
11 진실함이 땅에서 싹을 틔우고, 의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다.
12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며, 우리 땅이 자기의 소산을(열매를LXX) 낼 것이다.
13 의가 그분 앞서 걸어갈 것이며, 그는 의의 발걸음을 (자기) 길로 삼을 것이다.
*. 히브리어 '에메트'는 구약에 127회 사용되었는데, 칠십인역은 그 대부분을 '알레테이아(참됨,진실함)' 군으로 옮기는 중에도 7번을 '피스티스(신실함)'로 옮기고 있다.
에메트는 '진실'이라는 우리 말이 그러하듯 '참됨'과 '신실함'이라는 의미를 함께 아우른다.
맹세를 할 때조차 ‘진실(에메트)‘과 ‘의‘가 없는 사람에게(사48:1) 도대체 ‘참됨‘과 ‘신실함‘을 기대할 수 있을까?
참되고 진실한 분은 하나님이고, 참되고 진실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며, 그의 계명이다(시119:142,151). 그럼에도 에메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의 모습을 표현하거나(삼상12:24), 하나님에 대해 신실한 자들의 삶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왕하 20:3).
이때 에메트는 ‘하나님의 진실함(에메트)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의미하는 ‘에무나(신실함, 믿음)‘와 언어적, 의미적 연관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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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함]] = b/f(2896, 토브) ...좋은, 선한, 즐거운, 선, 이익, 번영, 복지
토브(형용사)는 토브(b/f , 2895)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즐거운, 유쾌한',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0여회 나온다.
'선한'은 실제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익을 언급하는 것으로 잘 나온다. 좋은 열매(창 2:9)와 바로의 꿈에 나타난 이삭(창 41:5, 창 41:36)은 먹기에 좋은 것이었다.
요셉의 노예상태가 "좋은" 것은 양식과 민족의 생존 같은 실재적인 이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선하지 못한" 모세의 재판에는 실제의 행정적인 불이익도 포함되었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출 18:17).
토브로 전달된 다른 실제적인 선은 아합에게 거부한 승리의 약속(대하 18:7); 환대와 우정(창 26:29); 유익한 충고(삼하 17:7, 삼하 17:14); 일반적인 경제번영(왕상 10:7); 농업 번영(호 10:1, ASV);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암 9:4) 등이다.
그러나 국가의 풍기를 문란케한(느 5:9) 강포한 삶(잠 16:29)과 행동은 "선하지 못하다"고 일컬어 진다.
노동의 "선"은 일에서 얻은 실제적인 이득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참조: RSV '기쁨' pleasure).
"선"은 여러 가지 광범위한 추상적인 관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선한 이름은 명성이나 평판의 관점에서 볼 때, 후손보다 더 낫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사 56:5). 다윗이 제후인 아기스에게 충성한 것은 "선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삼상 29:9, RSV '흠이 없는' blameless).
엘리후는 진리나 타당성과 관련 지어볼 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동료들에게 요구했다: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 보자"(욥 34:4).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 노를 더디 내는 것은 이상적인 용사의 폭력적인 힘보다 더 바람직하였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마찬가지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아이는 고집 센 왕보다 "더 나았다"(전 4:13).
이 단어는 심미적이거나 감각적인 선함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창 6:2), 리브가의 아리따움(창 24:16), 그리고 밧세바의 아름다움(삼하 11:2)을 묘사한다. 이 단어가 사람을 묘사할 때, 영어의 관용구는 '잘생긴' handsome이란 말을 사용한다(삼상 16:12).
감각적인 기쁨이나 좋은 것은 "단"이라고 묘사하는 데에서(렘 6:20), 그리고 다메섹의 물이 요단의 흙탕물보다 더 "낫다"는 나아만의 판단(왕하 5:12)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서의 한 포도를 묘사하는 데에는 감각적인 매력도 포함되어 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 8:2).
'선한'은 자주 '행복한' happy을 나타낸다. 이것은 왕이 결혼하는 때를 묘사한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시 45:1). 행복한 축제일은 "좋은 날"로 묘사되기도 한다: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 RSV '휴일' holiday; 참조: 삼상 25:8).
"좋은 마음"은 행복을 나타낸다(대하 7:10, 잠 15:15).
행복은 술에 의해 야기되기도 하는 것 같다(전 9:7).
토브를 포함하는 관용어로는 선호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사람의] 눈에 선한"이란 용법이 있다. 이런 용법의 예들로는 도망친 노예가 어떤 곳을 거처로 택함(신 23:16, RSV "그를 기쁘게 하는 곳), 그리고 슬로브핫의 딸들이 남편으로 택함(민 36:6)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삼상 3:18). 이것은 타락하고 죄에 가득찬 욕망을 묘사한다(창 19:8, 삿 19:24). 이런 경우에, 이 관용어는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토브는 우수한 질이나 상재적인 가치에 대한 개념도 포함한다. 이런 식으로 이 단어는 하윌라의 "정"금(창 2:12)과 고급 향유(아 1:3, RSV "바르는 기름" anointing oils)를 묘사한다.
우수한 장인은 모세가 "준수하다" (즉 고귀하다)고 묘사되는 경우(출 2:2)처럼, 인간의 성품의 특성이나 고귀성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지칭된다(사 41:7).
토브의 중요한 용법은 도덕적인 선을 가리킨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시 34:14, H15)라는 명령은 분명히 "선"을 도덕적인 악과 대조 시킨다. 하나님께서 다루기 어려운 자기 백성을 가르치실 "선한 길"은 도덕적인 삶을 가리킨다(왕상 8:36). '선한'과 '옳은'을 뜻하는 야샤르는 종종 도덕적인 선을 뜻하는 유사한 말로 나온다(대하 14:1, 대하 31:20).
토브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어떤 용법들에는 앞에서 논의된 둘 이상의 의미의 영역들이 뒤섞여 있다. 옛 언약의 "좋은 땅"은 실제적이며, 경제적이며 미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신 1:25, 수 23:13).
마찬가지로, "선한 분"으로서의 하나님 개념도 "선한"이란 단어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충분히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시 106:1, 대상 16:34), 좋으신 주님이시다(시 52:9).
구약성경에서 선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선의 개념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선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창 3: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지 '선'이 아니라 선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것, 율법을 주신 것(신 30:15, 잠 28:10), 그리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출 18:9, 신 10:29이하)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창 l:1-8)에서건, 그의 말씀에서건(사 39:8), 그의 영에서건(시 l43:10), 심지어 그가 반대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조차도(창 50:20) 그에게서 유래되는 모든 것은 선하다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하나님을 오로지 선하신 분으로 찬양하는 새로운 계기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한 그의 사역에서 선(참조: 출 l8:9)을 행하시는 바 그 목적은 구원이며,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선은 이미 행해져 왔으며, 또한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던 선은 메시야적, 종말론적 구원에서 실제로 성취될 것이다(레 32:39 - 42; 사 52:7). 한편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가능할 것인가는 논쟁이 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전 7:20).
랍비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선함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선한 것과 성취 가능한 것은 율법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또 선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선은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동료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의 논의에 비춰볼 때, 각 개별 용법은 앞의 의미들 중 어느 것이 가능한지를 고찰하기 위해 분명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수많은 문학적인 표현들은 특별한 취급을 필요로 한다. "선과 악"은 보편성에 대한 관용어로 이용된다(민 24:13, 삼하 13:22). 어떤 이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이런 보편성을 뜻하는 관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사하였다(창 2:9). 그러나 창세기 앞부분의 문맥은 전체적으로 이 어구의 도덕적 의미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선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동의나 수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도덕적 판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왕하 20:19, 참조: 삼상 20:7).
"선한 눈"은 관대함을 나타낸다(잠 22:9, RSV '관대한 눈' bountiful eye ).
전도서에서, "선을 보다" to see good는 좋은 것이나 삶의 기쁨을 경험하다로 번역된다(전 5:18, RSV '기쁨을 발견하다' find enjoyment; 전 6:6, RSV '선을 향유하지 못하다' enjoy no good).(참조: A. BOWLING; E. BEYREUTHER).
@@@언약, 계약, 협정 tyriB](1285, 베리트)
베리트(명여)는 '언약, 계약, 조약, 협정, 법령, 서약, 동맹'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80회 이상 나온다.
(a) 베리트는 다양한 종류의 협약을 뜻하는 일반적 구약성경 용어이다.
이러한 협약들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들이 포함된다. 법적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삼상 20:8) 두 친구 간의 계약(삼상 18:3) 자신들의 권익 범위(창 21:22 이하, 창 26:26 이하, 왕상 5:12, MT 5:26), 또는 화평 조건을(왕상 20:34) 정하는 두 주권자 간의 계약, 그 백성들까지도 포함하는 두 왕 사이의 계약, 두 부족이 언약을 맺기도 하였다(수 15:9). 이 단어는 이스라엘과 그 종들 사이의 계약에 대해서도 사용된다(렘 38:8 이하).(역자주. 이 히브리어의 본래 의미는 그것이 왕과 종의 소유자들 간의 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왕이 자신의 신하들과 계약을 맺을 때(왕하 11:4[역자주. 이 계약은 아마도 여호야다와 호위병 사이의 개인적 협약이었을 것이다]), 또는 계약에 의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을 때(삼상 11:1) 그 상황은 약간 달랐다. 아브넬이 다윗과 맺은 계약은(삼하 3:12 이하) 아브넬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도 다윗의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삼하 3:21).(J. Guhrt)
국가간의, 혹은 개인간의 조약이나 협정으로서의 언약은 쌍방이 평등한가 아니면 한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한가를 근거로 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창 14:13에서 아브라함과 아모리인들은 평등하게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여호수아 통치 하의) 이스라엘과 기브온인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수 9장). 여기에서는 언약의 맹세적인 면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시된다. 비록 기브온의 종자들이 거짓말한데 대한 벌을 받긴 했지만(수 9:22-23),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할 의무를 여전히 지고있었다. 훨씬 후에, 사울이 맹세한 언약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그의 가족들은 벌을 받았다(삼하 21장).
두 집안이나 국가들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표로써, 스텔라(돌)를 세우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였다(참조: 야곱과 라반, 창 31:44-47). 양측은 모두 이 언약이 변경될 수 없음을 나타내주는 증인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더구나 시나이 언약의 경우에서처럼, 야곱과 라반은 산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고 공동식사를 나누었다(창 31:54-55). 이런 조약을 보증해 주는 다른 표시들로, 예를들면 두 왕족 사이의 결혼 같은 것이 있다(왕상 9:16). 그렇지만 언약의 말, 즉 약속과 규정의 형태로 되어있는 이 말들을 철자화하고, 증언하고 서명하고 봉인한 기록 문서가 언약 체결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이었다. 이런 언약 문서들은 많이 있다(참조: D. R. Hillers, Covenant: The History of a Biblical Idea, Baltimore, 1969). 베흠(Behm)은 '법적으로 보증된 평화나 개인적인 충성에 대한 보증으로서 언약보다 더 확고하게 보증해주는 것은 없다'고 결론 짓는다(TDNT, Ⅱ, 115, 참조: 암 1:9).
혈연을 제외하고는, 언약이 고대 세계의 백성들이 서로간에 보다 넓은 관계를 이루는 길이었다(Treaty and Covenant, D. J. McCarthy, Rome, 1963, 175).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 관한 기록들은 구약성경에서의 두 개인들 사이의 맹약에 대한 아주 분명한 언급이다(삼상 18:3, 삼상 20:8, 삼상 23:18).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 계약을 증언해주시고 법적인 절차를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언약'으로 언급되었다.
이스라엘의 군주제는 백성들과 왕 사이에 맺은 언약적 관계로 인하여, 그처럼 이른 시기에는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었던 일종의 입헌 군주제가 되었다(삼하 3:21, 삼하 5:3, 대상 11:3).
이러한 모든 언약의 절차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해주는 문화적인 배경을 제공해 준다.(E. B. Smick)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하나님과 노아(창 6:18), 아브라함(왕하 13:23), 또는 다윗과의 언약(렘 33:21)도 유사하다. 이곳에서 언약은 분명히 그들의 후손에게로 연장되고(창 9:8 이하, 창 15:18, 삼하 7:12-16),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된다(출 6:4 이하). 그러나 렘 50:5에 나오는 언약도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겔 16:8은 예루살렘과의 언약에 대해 말한다. 언어학적으로라면 70인역본은 (a)의 예들에서 '쉰데케'를 사용했을 것이다(위의 고전 헬라어 문헌을 참조하라). 그러나 후자의 경우들에서 베리트는 많은 것들에 대한 처분권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창 9:12, 창 17:7 이하, 렘 31:31-34 등). 곧 70인역본의 번역 '디아데케'는 충분한 뜻을 갖고 있다. 반면에 여호와의 주야와의 약정(렘 33:25) 그리고 예루살렘과 사망과의 계약(사 28:14-18) 같은 예외적인 용법들이 있다.
초기의 학자들은 세속적인 계약과 종교적 언약을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모두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는 언약 개념의 다양성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더욱이 가장 세속적인 언약은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증거되었음을 전제로 하는 반면(창 31:44-50, 삼상 23:18), 가장 종교적인 언약들에서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언약을 맺는 제왕과 비교된다. 구약에 있어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별은 생각할 수 없다.
(b) 이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개념들이 그로부터 발전된 원초적이며 명백한 언약 사상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했다. 현대적 연구는 네 가지 해답을 내놓았다.
① 페더센(J. Pedersen)은 원래 언약의 두 가지 측면이 동등하게 존재하였다고 생각했다.
② 반면에 베그리히(J. Begrich)는 언약이 보다 강한 자들이 보다 약한 자들에게 주었던 어떤 것으로 출발하였다고 주장했다.
③ 멘덴할(G. E. Mendenhall)은 헷 족속의 종주권 조약에서 종교적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발견하였고 그와 같은 조약 요소가 언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추론하였다.
④ 노트(M. Noth)는 최근에 발견된 본문들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 본문들은 이 언약이 양자 사이에 있는 제 삼자에 의해 중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요소들 중의 어떤 것이 최초의 것이라든가 또는 어떤 요소가 후에 생겨났다든가하는 것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언약과 백성들의 언약은 출 34장에 언급되며 개인적인 언약과 왕의 언약은 삼하 3장에서 언급된다. 현재로서는 우리가 언약의 원형을 결정할 수 없다.
(c) 이 모든 개념들은 하나의 술어 베리트에 의해 표현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그 개념들 뒤에 존재하는 어떤 일치점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비록 언약 당사자들의 관계, 또는 언약 협정의 내용들이 이것을 규정하지 않았으나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통상적인 규범이 있었음이 나타나고 있다(Baltzer, 참고문헌을 보라). 이러한 의식에는 6가지의 극히 중대한 요소들이 있었다.
① 당사자들의 이름들을 언급하는 전문,
② 언약에 들어가는 자들의 관계에 대한 서문적 이력,
③ 당사자들의 미래 관계에 대한 기초적 공술,
④ 새관계에 대한 세부 설명들,
⑤ 증인의 직무를 말하기 위해 양측에 의해 예배되는 각각의 신들에 대한 기원,
⑥ 저주와 축복의 선언.
발처(Baltzer)는 쿰란 문서까지 그리고 신약성경 속으로 또한 신약성경의 범위를 넘어서기까지 철저하게 이 윤곽을 추적했다. 이것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언약 개념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실존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적 사상에서도 근본 요소임을 보여준다.
(d) 우리가 언약의 입장에서 이들에 접근할 때 우리는 구약성경 전통의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어떻게 함께 속하여 있는가를 보게 된다. 전문(前文)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을 암시한다(참조: 출 20:2, 언약의 관용문구에 나오는 바와 같이 과거 사건들의 개관이 따른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신의 역사에 대한 독특한 관심의 근원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와 관계된 여호와의 역사로 나타나며 이로써 언약의 역사와 구원사가 형성된다. 세번째 부분은 이사야서에서 구원의 선포, 하나님의 신실함과 화평의 약속으로서 그 아주 명확하게 표현된 그 사상을 반영한다(사 54:10, 사 55:3). 이 약속은 백성의 불순종에 의해서도 취소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필히 이를 수행하는 것으로 선언하셨고 모든 임의성을 부인하셨다. '그러므로 이 기초는 복음을 위해 놓여진 것이다'(G. Quell, TDNT Ⅱ 123). 이 언약들과 렘 31장의 언약들을(예를 들어) 시내산 언약의 관용적 문구와 비교할 때 우리는 위의 (c) ④에서 언급된 세부 사항들을, 공로에 대한 보상이 따르는 제일 처음으로 이행되어야 할 조건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인상은 레 26:15 이하와 신 31:20과 같은 구절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가능하게 된 새 생활의 법규들이다(참조: 창 9:9, 창 15:13-16, 렘 31:31). 신 26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대한 숙고와 율법은 이 새 생활을 위한 가르침으로서 함께 속한 것이다.
(e) 언약 당사자들의 관계는 헤세드(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로 표현한다(RSV steadfast love, 불변의 사랑, NEB love 사랑, loyalty 성실, 충성, constancy 불변성). 삼상 20:8은 이것을, 보호하는 행동으로서 이해한다. 사람이 언약을 기억함은 행동으로 그 자체를 표현한다(시 103:17 이하). 쌍방 즉 여호와 언약의 백성은 단지 일개인으로서 대표되는데 베리트 안에서 서로를 직면한다. 곧 이들은 능동적이며 실제적인 협력 관계 안에 있으며(Pedersen), 그리하여 쌍방은 언약의 식사를 함께 나눈다(창 31:54, 출 24:9 이하). 이것이 당사자들의 →친교(Fellowship를 강화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언약과 그 갱신이 순수하게 제식적 행동들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제식의 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부정될 수 없다(시 50편). 이것은 특히 세겜의 경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수 8:30-35, 수 23:24). 옛날에 그곳에서 예배되었던 바알 베리트(Baal-berith), 또는 엘 베리트(El-berith)에 대한 관계는 전혀 만족하게 설명된 적이 없다(삿 8:33, 삿 9:4, 삿 9: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은 첫째로 언약 백성의 여러 부족들의 일상 생활에 속한다. 이러한 언약은 꾸준히 제식과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신명기에서 그 언약 신학 및 생활의 세속화와 함께 나타나는 듯하다. 이 제식들은 본래적인 영원한 언약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 언약의 창설자이신 여호와께서만이 언약의 지속성과 또한 언약의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제식을 함께 보장할 수 있으셨다. 오직 여호와께서만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언약을 갱신할 수 있으셨다.
이 사실 때문에 많은 선지서들에서 언약의 사상이 순종에 대한 요구를 위해 사실상 사라진다. 이사야서의 초기 부분들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언약 개념을 거의 완전하게 회피하였다. 사 24:5, 사 33:8은 예외들이며 보다 일찍이 언급된 사망과의 언약 역시 예외이다(사 28:15, 사 28:18). 호세아는 아마도 언약의 법적 특성에 대한 일방적 강조의 위험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결혼에 대한 상징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과의 관계를 묘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베리트가 호 6:7, 호 8:1에서는 깨어진 것으로만 언급된다. 호 10:4, 호 12:1에서 베리트는 인간의 협약들을 언급한다. 예레미야는 깨어진 언약을 대신하는 완전히 새로운 언약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강조한다. 지속성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직 여호와에 의해서만 창조된다. 성령을 통하여 인간 심령에 하나님의 직접 역사하심이 순종에 대한 명령에 대신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단절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보여 주며 또한 신약을 위한 길을 예비한다.
([편집자주] 그러나 본질적인 연속성이 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율법의 폐지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이곳에는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언약의 신적 확정이 있다[위의 4를 보라]. 언약 관계는 다음과 같은 약속에서 요약된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참조: 출 6:7, 레 26:12, 렘 7:23, 렘 11:4, 렘 30:22, 렘 32:38, 고후 6:16, 히 8:10, 계 21:3].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이 관계는 율법을 무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율법의 보다 더 개인적인 적용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f) 구약성경의 전형적 표현인 카라트 베리트(언약을 자르다, 즉 언약을 맺다)는 아마 창 15:9 이하와 렘 34:18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역자주] 이것은 사용된 유일한 표현이 아니며 또한 언약을 맺음을 나타냄에 있어서 본질적이었던 것도 아닌듯하다). 이 구절은 70인역본에서는 디아데켄 디아티데마이(디아데케를 세우다)로 표현된다. 디아데케라는 술어에 대한 헬라식 이해는 더 이상 언약이 동등한 권리를 소유한 쌍방간의 협정이 아니었다. 디아데케에 대한 헬라식 이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형태로만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임의적인 신적 행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70인역본은, 포로 후에 자주 나오는, '언약을 정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히브리 표현 '헤킴 베리트'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묵시서들은 이 표현을 더욱 발전시킨다. 필로는 유언 사상에 대한 우화적 주석을 산출하였다. 랍비들은 언약을 하나의 절대적인 법 개념으로 제한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언약에 큰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새 언약의 약속(렘 31:31-34)이 자신들 가운데에서 성취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스스로를 '다메섹 땅의 새 언약'으로 칭했다(CD 6:19). 시내산 언약이 모든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면 쿰란 언약자들은 스스로 거룩한 남은 자들, 구원 시대의 순수하고 종말론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입자들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그들은 엄격한 규칙들을 적용하였고 이 공동체를 특징지었던 '언약 율법들(즉 이 공동체가 해석하였던 것으로서의 율법)'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했다. 이 종파의 언약에 대한 종말론적 사고는 그들을 특히 랍비들과 구별하였다. 랍비들은 언약을 할례와 동등시하였고 그 보존이 모세 율법의 엄격한 준수에 의해 보장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나아가서는 렘 31:31-34의 성취를 미래적인 것으로만 기대하였다([역자주] 새 언약이 탈무드적 유대주의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상 아마 쿰란과 유대 기독교에 대한 논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J. Guh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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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방주, 갈대상자, 언약궤
...● 노아의 방주 의미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창세기:7:23)."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물위에 떠있는 방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히브리어: נח תיבת ;고전히브리어:Teyvat, -方舟, 영어: Ark)’라고 하는데 이 뜻은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테바’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3번 언급됩니다.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이 노아의 “방주(테바)”이고, 두 번째는 아기 모세가 담겨졌던 “갈대상자(테바)”, 세 번째로는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테바)”입니다.
● 방주
방주(테바)라는 단어는 창세기에서 노아의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심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동물들이 방주 안에 들어갔고, 완성된 방주의 문을 하나님께서 직접 닫으셨으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홍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방주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와 그의 식구들 그리고 동물들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방주 안에 들어가게 되었고, 홍수 심판을 면하고 생명을 보존 할 수 있었습니다.
● 갈대상자
이 '테바'라는 단어가 출애굽기 모세의 이야기에서 언급됩니다. 그 때 당시 이집트의 왕 바로의 명령에 의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 아기들은 물에 빠져 죽었어야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모세는 '갈대상자' 안에서 생명을 보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 법궤
이 '테바'라는 단어가 레위기 성막 안에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에서 또 언급됩니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3가지 물건은 인간들의 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죄의 상징물들은 법궤 안에 들어가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2개의 그룹들이 법궤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죄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법궤 위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피가 뿌려져서 법궤를 덮고 그 안에 있는 죄의 결과물들이 가려지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노아의 방주, 아기 모세의 갈대상자, 하나님의 법궤 3가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 속에서 꽃피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누가복음2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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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테바흐: תֵּבָה)와 갈대상자(테바흐: תֵּבָה) //키보토스
‘방주(תֵּבָה)’라는 단어는 성경의 두 곳에서 사용되었다. 하나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תֵּבָה)를 만들라(창 6:14)고 명령한 후, 창세기 6~9장에 걸쳐 23회 정도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이 방주를 통해서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길 원하셨고 이것을 노아에게 언약하신다(창 6:18).
다른 한 곳은 출애굽기 2장 3절에서 요게벳(출 6:20; 민 26:59)이 갈대 상자(תֵּבָה)를 가져다가 모세를 구원할 때 사용하였다.
이 두 사건에 사용된 도구들이 각각 방주와 갈대 상자로 다른데 같은 단어를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용된 목재도 다르다. 방주를 위해선 고퍼 목재(Gopher)가 사용되었고, 갈대 상자를 위해선 당시 나일강 유역에 흔히 있는 파피루스(papyrus)를 엮어서 만들었다.
방수 처리에 사용된 물질도 각각 다르다. 방주를 위해선 나무진(고페르.. כֹּפֶר: pitch)을 안팎으로 칠했고, 갈대 상자를 위해선 역청(헤마르..חֵמָר: Bitumen or Asphalt)과 진(זֶפֶת: pitch)을 발랐다.
그 크기도 달랐다. 방주는 축구장보다 조금 더 긴 140m에 가까웠을 것이고(창 6:15), 갈대 상자는 겨우 1m 남짓했을 것이다.
물에 띄워야 한다는 공통점 외에는 방주와 갈대 상자에 같은 이름을 붙일 아무런 이유가 없다. 왜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까?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뀌는 경우도 없고, 그의 명령이나 신탁이 항상 일관되고 통일성을 유지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다.
이것은 세상 신화나 설화 그리고 세상 역사서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는 몇천 년이 흘러도 흐트러지지 않는 이런 통일성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만 한다.
==갈대상자에 담긴 모세
그렇다면 방주와 갈대 상자 사이에는 어떤 통일성이 있을까? 바로 언약과 구원이라는 모티브(motif)를 통일성 있게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첫째는 사건의 등장인물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노아(נֹחַ)와 모세(מֹשֶׁה)는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쉼도 생명도 스스로 건질 수 없는 시대에 살았다.
홍수로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할 때,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 방주에서 생명을 보존할 것이라는 언약을 한다(창 6:18). 노아는 하나님의 이 언약을 믿고 방주를 지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바로의 정책 때문에 모든 유대의 남아가 죽어 갈 때, 레위 지파의 아므람과 요게벳(출 2:1; 6:20; 민 26:59)은 아이의 용모가 준수함(בוֺט)을 보고 갈대 상자를 엮어 살리기로 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브람(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믿었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손이 사 대(4백 년) 만에 돌아와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그들의 소유로 삼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었다(창 15:12~21).
애굽에 내려온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야곱이 1세대이고, 레위가 2세대이고, 레위의 딸인 요게벳(남편 아므람)이 3세대였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다음 세대에 그 누군가를 통해 성취될 것을 확신하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 모세의 용모가 준수함(טוֺב)을 보고 그 언약이 이 아이를 통해 성취되길 바랐을 것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23절에서도 모세를 살리는 일에 이들이“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다”(히 11:23)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노아와 모세의 부모에겐 하나님 언약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는 것과 그들이 각각 만든 방주와 갈대 상자로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공통된 모티브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성경의 저자가 비슷한 모티브를 가진 사건을 같은 이름으로 묶어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방주와 갈대 상자는 구원이라는 같은 모티브를 가지고 있으며, 창세기(방주)와 출애굽기(갈대 상자)의 저자가 같은 인물인 모세다.
모세는 구전으로든 문서로든 노아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방주로 구원을 받은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은 부모가 만들어 준 갈대 상자로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과 흡사함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갈대 상자를 지칭할 때, 방주에 사용한 ‘테바흐(תֵּבָה)’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신약성경도 노아의 방주와 십계명을 담은 언약궤(상자)가 같은 모티브를 가졌다고 본다. 둘을 부를 때 공히 헬라어로‘키보토스(κιβωτός...방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둘은 사뭇 다른 용도로 사용된 것 같다. 하지만 노아를 실은 방주와 십계명을 넣은 궤는 구원과 언약에 긴밀한 모티브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십계명 돌판 때문에 궤를 언급할 때, 수식어처럼 사용된 단어가 언약(히브리어 베리트.בְּרִית-bĕriyth.헬라어 디아데케..διαθήκη) 이라는 단어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우리는‘언약궤’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이처럼 신약 저자들은 노아의 방주와 언약궤를 지칭할 때‘키보토스(κιβωτός)’라는 같은 이름을 붙여 읽는 것이다.
모세가 방주와 갈대 상자가 구원과 언약의 모티브로 엮여 있다는 것을 알고 둘 다 ‘테바흐(תֵּבָה)’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불렀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티브들로 시대를 넘어 통일성 있게 엮어 놓은 성경은 다른 신화나 설화나 역사서와는 달리 읽혀야 하고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세상 문학과 달리 시대마다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여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