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3장 [[90.주예수내가알기전][94.주예수보다더][95.나의기쁨나의소망되시며][452.내모든소원기도의제목] [455.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 [458.너희마음에슬픔이가득할때][463.신자되기원합니다] [391.오놀라운구세주예수] **하늘의문을여소서, 나의기도하는것보다,지존하신주님이름앞에,날이저물어갈때....[214.주예수님내맘에오사] [274.나행한것죄뿐이니] [315.내주되신주를] [497.주예수넓은사랑그크신은혜를]
....보라, 여기 출33장에서 기록된 중재자 모세의 모든 발언과 행위들은 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른 것이었음을 먼저 알아두어야만 이해하기가 그나마 수뤌해진다.
드디어 주님과 모세 사이의 대화가 합의에 이르렀음을 출33장에서 보게 된다.. ((1차 40일 금식 중<성막 양식과 제사장 체계>에 대한 지시 + 친히 만들어 새긴 두 둘판 주심 -->2차 40일 금식<우상 숭배 범죄 중재 위한 금식 기도...백성들 몸 단정 스스로 금함+장신구 제거, 모세의 장막 진 밖에 옮김 + Q구름기둥이 회막문에 임함...미리 예비하심+임마누엘 Q영광의 임재 동행, 영광 보이심의 약속>--2차 마친 후 2일 지나-->3차 40일 금식<두번째 돌판 주시겠다고 하심>
....하나님께서는 그 범죄자들을 용서하시는 데 동의했지만, 그 언젠가는 그 백성을 다루실 것임을 <여전히>주장하셨고, 그것이 유쾌한 대답이 아님을 아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리 말씀하시는 주님 마음에 합당하게] 슬퍼하게 되었고, 주님 말씀대로 장신구들을 떼어내고 모세는 (그때까지는 진 중에 있던) 그의 장막을 진 밖에 멀리 떨어진 위치에 쳐서 회막이라 이름하고, 주님 앙모하는 자마다 회막으로 나아오게 하며, 주님은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그분의 임재의 구름기둥을 회막 문에 두심으로써 모세와 친밀히 말씀하고 계심을 보게 된다..
<출33:4, 5, 6...*4.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출33:1,2,3절에서는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라 말씀하셨던 Q께서 출33:12, 13에 이르러서는 <친히> 모세와 대화하시면서 ((스스로 마음을 열어 그렇게 너그러이 대하시기로 결정하신 바, 모세의 사랑스러움에 감동 받으심!!))으로써 점점 더 달콤함과 너그러우심을 나타내시며, 모세와 더 깊이 마음 여심으로써 대화와 교섭할 수 있는 여지를 보이고 계셨고, 중재자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께서 이미 마음에 두신 그대로> 정말 최대의 호의와 배려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출33:12, 13...*12.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더욱 더]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이때, 주님은 14절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여기서, Q의 사자는 Q자신이신 그리스도이심을 KJV(흠정역)과 Darby역에서는 분명히 하여 사자의 영단어angel의 첫자를 A로, 대문자로 쓰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이미 Q이 그에게 알게 하신대로 ] Q의 영광은 다름아닌 그분의 임재이며, <그의 백성과 함께 동행하시는>주권자이신 그분의 임재가 곧 그분의 길이니, <영광의>Q의 임재는 우리가 취하여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지도] 자체요 임마누엘의 동행과 인도, 길 그 자체임을 분명히 알아두도록 하자....보라, 여기서, 모세는 참되게 교섭하기를 배운, 주님 이름과 그분의 성품, 마음 알아드림으로써 그분의 갈망을 따라 교섭하기를 배운, 주님의 사랑 받는 자임이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다....이제 그분의 사랑하심에 힘입어 담대히 모세는 ((마땅히 경외하고 사랑함이 마땅한 바로 그분으로서)) 그 누구라도 주님을 경홀히 함이 없도록, 결코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님의 영광 보게 하시기를> 구하고 있었다..
....<출33:18-23...*18.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보라, <그분의 영광으로 친히 동행하시겠다>하심, 이것을 확실히 해 달라고 구했던 모세는 <직접 임재의 영광으로 함께 동행하겠다>는 주님의 동의와 보장을 약속 받았고, 모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요구하는 바, 주님은<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하신다....그러나 33:11절은 그전에 이미<사람이 그의 동반자와 이야기 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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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몇가지 신학적 난제들을 영 안에서 이해해 보도록 하자,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모세는 Q의 임재를 충만히 가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매우 한정된 방식으로 Q의 임재를 가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Q의 마음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Q의 마음과 매우 가까운 사람, 그분의 마음에 따른, 그분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Q의 임재를 충만하게 가질 수 있었고, Q의 동반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함으로써, Q과 일상적 관심사를 함께 나눌 수 있었고 그분의 계획을 이 땅에서 성취하기 위해 Q께 사용될 수 있었다.
....사실상 Q의 사자, Q의 임재, Q의 영광, Q의 얼굴...이 모든 표현들은 서로간에 모순된 표현들이 아니라, 정도와 범위의 관한 문제임을 분명히 이해하며 바르게 깨닫고 있어야 하리라.... 예를 들어 본다면, 출14장에서는 구름 기둥이 하나님의 사자(천사.Angel)과 함께 동행하며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한 가지만 있을 수도 있었지만, 두 가지 다 있었기에 더욱 좋았다. ....한편, 모세가 진 밖에 장막을 친 후 Q의 영광은 진 안에가 아니라 진 밖에, 모세의 장막 문에 Q의 영광의 구름 기둥, Q의 임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그러나 진 안에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전혀 계시지 않았다고 단언적으로 말해서는 결코 안된다. 이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Q의 영광이 우상 숭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지 않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으나, 절대로 단언적으로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앞서 보내실 사자,Angel ...Q 자신이신 그리스도, 동시에 또한 동행하는 반석이시기에 그리스도가 백성과 함께 가는 한, Q 그분 자신이 그들과 함께 감이다....그렇지만, 왜 Q은 처음엔 그 분의 사자가 가고 그 분 자신은 가지 않으리라 말씀하시다가, 모세와 더 많은 협상을 거치신 후에는 그분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 갈 것이라 말씀하고 계시는가....사자는 그리스도요, 임재는 Q의 얼굴 그 자체인데도...///
--2>(주께서) 나와 함께 보낼 자 = 동행하는 구름 기둥 + 사자///
--3>주의 임재 = 주의 영광 = 이것은 곧 주의 (행하심의) 길이기도 하다. ///
--4>주께서 함께 행하심(임마누엘로 동행) ///
--5>주의 영광 = [모든 선한 형상<그 성품의 어떠하심> + 여호와의 이름 + 그분의 신성한 생명-풍성부요충만-능력 베푸심의 행위<호의(은총)/긍휼>] 여기에 더하여지는 바 그분의 진면목(얼굴.....이것은 깨진 반석이자 바위 틈(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분의 등(!!)을 볼 수 있음...그러나 구주 재림시에는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
=== 누가 주께 합당한 믿음의 마음으로 자기를 열어드리고 주보시기에 합당하게 그분을 구하는가, 이것이 결국 그 힌량없이 크고 친밀하게 동행하며 누림 주시는 그토록 바라는 바 주님을 극도로 얻고 그 가운데서 발견됨의 범위와 정도를 결정짓는 관건이 될 것, ....그토록 참되고 올바로 주님만 구하는 모세는 이제 진중에 있었던 그의 장막을 진 밖으로 옮겨서 유일무이하신 존귀한 주님과 동거함의 거처로 내어드리고 있는 바 <회막>이라 칭하며, 주님 앙망하고 바라는 모든 이들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함께 모이도록 개방하고 있으며 또한 주님은 회막 문에 구름기둥의 임재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셨다.
===시내 산을 떠나라고 명하시다
....백성은 <금송아지우상 가루를 물에 타 마시고, 3천명의 살육, 게다가 온역의 죽음을 경험하였음에도>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자가 <주님이 아니라>모세라고 (아직도 여전히) 착각-주장<목을 곧게 함 =주님을 인정하지 않음>-결과적으로 반역하고 있었고, 그 점을 주님은 지적하고 계심 ::: "모세야, 지금 네 백성들과 함께 떠나서 네가 끝까지 <그들을>인도하라, 나 여호와는 임마누엘로 너희와 동행하지는 않겠고<그랬다가는 도중에 백성을 진멸하실까 염려하심>, 먼저 사자를 앞서 보내어 가나안7족속을 쫓아내어 주겠다."말씀하심..==>백성들이 듣고 슬퍼하고 회개함, ==>너희의 단장을 제하라, 너희 반응을 보고 추후 어찌할지 결정하겠다==>장신구를 제거함 ==>모세는 진 밖에 멀리 따로 장막을 쳐서 회막으로서, 주님 앙망하는 이들마다 나아올 수 있게 하고, 매일 아침 (홀로)주님께 나아감<그 안에서 교통하는 동안 주님 임재의 구름 기둥이 회막문에 나타남>...(모세와 동행하는) 여호수아는 모세가 진으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거기 남아 있음
....(출32:1, 4)"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지금 눈 앞에 없음)//(만들어 낸)금송아지 우상,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우리를 인도할 신"
1. [94.주예수보다더]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아마르)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아직 마음 속상하심)과 함께 여기를(호렙산)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주겠다>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JC)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헷,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브리스,히위, 여부스
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너희 중에 함께 하여> 올라가지 아니하리니<어색한 = 친밀감 손상/결여된> 너희는 목이 곧은<반역-제멋대로/방자한,stubborn and rebellious>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 백성이 이 준엄한<stern>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wearing>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jewerly and fine clothes>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Q께서 먼저 말씀하심 그대로 <모세는 그대로 백성에게 전하였고> 순종하여 행하고 있다<깊은 슬픔과 회개의 마음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단장하지도 않고 장신구를 제거함>.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회막...교통의 재개
7. ○((호렙산에서 돌아온 후))모세가 항상 [그의 거처는 진안에 둔 바]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구별+헌정>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주의 영광 임재)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그 회막 안에서)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예배 회복)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face to face)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Q의 아끼며 사랑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크고 다정다감하시며, 너그러우심과 자비가 광대하신지....이제,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알아차린 모세는, 가납하시며 친밀히 대하심에 의지하여 믿음 발휘함으로써, 주님의 속마음 깨닫게 하심 그대로 주님 마음 안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더불어, 이제 여기서 모세의 Q사랑함의 헌신과 섬김-순종을 전심으로 배우고 있는 모세의 수종자 여호수아를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친히 가리라 하시다...회막에서의 교통((적어도 2일간!!)) 결과..그후 두번째 돌판 수령 위해 호렙산으로 올라오라 하심..
12. [90.주예수내가알기전]○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야다) 너도 내 앞에 은총(=헨)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모세는 아직 자기와 함께 인도-동행할 자에 대해 아무 말씀 없으신 바, "주님 외에는-주님 말고는 절대 안됩니다"고 간구하기를 바라는 주님 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오직 <나는 너를 이름으로도 알고, 너는 내게 은총 입은 자>라 하신,그분의 말씀을 의지하여!! <친히 영광의 임재, 임마누엘의 목자로서 [주님이 예정하신 바로 그대로 그분의 길을 보이사] 인도하시며 주를 알게 하시며, 주님께 더욱 은총 입은 자 되도록 함께 동행해 주시기를>, 또한 이 족속을 <염치 없지만>주의 백성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여겨주시길 간구하고 있다.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암마누엘 주님의 인도-동행은 그 자체가 쉼-안식이다!!
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이제 <뛰어 오르며 춤출듯한, 벅찬 기쁨과 감격 가운데!!> 다시 <임마누엘의 동행이야말로 주님의 은총, (또한 그와 이스라엘을 성별하심) 바로 그 자체임을 확고히 다짐하고 있음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이제 담대히 더 깊은 차원에서 주님(주의 영광-얼굴) 알기를 구하고 있음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죄사함의]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어미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의]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피조물인]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러나 이제 주님 재림시, 우리는 <그 영으로 인하여 변형되어> 부활체를 입게 되는 바,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교통하게 되리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여기에서는 여호와 주 하나님의 너그러이 가납하심과 그 사랑의 크기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AMP.33
===The Journey Resumed
1 The Lord spoke to Moses, saying, “Depart, go up from here, you and the people whom you have brought from the land of Egypt, to the land which I swore to Abraham, Isaac, and Jacob (Israel), saying, ‘To your descendants I will give it.’
2 I will send an Angel before you and I will drive out the Canaanite, the Amorite, the Hittite, the Perizzite, the Hivite, and the Jebusite.
3 Go up to a land [of abundance] [a]flowing with milk and honey; for I will not go up in your midst, because you are a stiff-necked (stubborn, rebellious) people, and I might destroy you on the way.”
4 When the people heard this sad word, they mourned, and none of them put on his ornaments.
5 For the Lord had said to Moses, “Say to the sons of Israel, ‘You are a stiff-necked (stubborn, rebellious) people! If I should come among you for one moment, I would destroy you. Now therefore, [penitently] take off your ornaments, so that I may know what to do with you.’”
6 So the Israelites left off all their ornaments [in repentance], from Mount Horeb (Sinai) onward.
7 Now Moses used to take his own tent and pitch it outside the camp, far away from the camp, and he called it the tent of meeting [of God with His own people]. And everyone who sought the Lord would go out to the [temporary] tent of meeting which was outside the camp.
8 Whenever Moses went out to the tent, all the people would rise and stand, each at his tent door, and look at Moses until he entered the tent.
9 Whenever Moses entered the tent, the pillar of cloud would descend and stand at the doorway of the tent; and the Lord would speak with Moses.
10 When all the people saw the pillar of cloud standing at the tent door, all the people would rise and worship, each at his tent door.
11 And so the Lord used to speak to Moses face to face, just as a man speaks to his friend. When Moses returned to the camp, his attendant Joshua, the son of Nun, a young man, would not depart from the tent.
===Moses Intercedes
12 Moses said to the Lord, “See, You say to me, ‘Bring up this people,’ but You have not let me know whom You will send with me. Yet You have said, ‘I know you by name, and you have also found favor in My sight.’
13 Now therefore, I pray you, if I have found favor in Your sight, let me know Your ways so that I may know You [becoming more deeply and intimately acquainted with You, recognizing and understanding Your ways more clearly] and that I may find grace and favor in Your sight. And consider also, that this nation is Your people.”
14 And the Lord said, “My presence shall go with you, and I will give you rest [by bringing you and the people into the promised land].”
15 And Moses said to Him, “If Your presence does not go [with me], do not lead us up from here.
16 For how then can it be known that Your people and I have found favor in Your sight? Is it not by Your going with us, so that we are distinguished, Your people and I, from all the [other] people on the face of the earth?”
17 The Lord said to Moses, “I will also do this thing that you have asked; for you have found favor (lovingkindness, mercy) in My sight and I have known you [personally] by name.”
18 Then Moses said, “Please, show me Your glory!”
19 And God said, “I will make all My goodness pass before you, and I will proclaim the Name of the Lord before you; for I will be gracious to whom I will be gracious, and will show compassion (lovingkindness) on whom I will show compassion.”
20 But He said, “You cannot see My face, for no man shall see Me and live!”
21 Then the Lord said, “Behold, there is a place beside Me, and you shall stand there on the rock;
22 and while My glory is passing by, I will put you in a cleft of the rock and protectively cover you with My hand until I have passed by.
23 Then I will take away My hand and you shall see My back; but My face shall not be seen.”
===Footnotes
Exodus 33:3 This phrase referred to the abundant fertility of the land of Canaan. Milk (typically that of goats and sheep) was associated with abundance; “honey” referred mainly to syrups made from dates or grapes and was the epitome of sweetness. Bees’ honey was very rare and was considered the choicest of foods.
-----------KJV
1.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Depart, and go up hence, thou and the people which thou hast brought up out of the land of Egypt, unto the land which I sware unto Abraham, to Isaac, and to Jacob, saying, Unto thy seed will I give it:
2. And I will send an angel before thee; and I will drive out the Canaanite, the Amorite, and the Hittite, and the Perizzite, the Hivite, and the Jebusite:
3. Unto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for I will not go up in the midst of thee; for thou art a stiffnecked people: lest I consume thee in the way.
4. And when the people heard these evil tidings, they mourned: and no man did put on him his ornaments.
5. For the LORD had said unto Moses,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Ye are a stiffnecked people: I will come up into the midst of thee in a moment, and consume thee: therefore now put off thy ornaments from thee, that I may know what to do unto thee.
6. And the children of Israel stripped themselves of their ornaments by the mount Horeb.
7. And Moses took the tabernacle, and pitched it without the camp, afar off from the camp, and called it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And it came to pass, that every one which sought the LORD went out unto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hich was without the camp.
8. And it came to pass, when Moses went out unto the tabernacle, that all the people rose up, and stood every man at his tent door, and looked after Moses, until he was gone into the tabernacle.
9. And it came to pass, as Moses entered into the tabernacle, the cloudy pillar descended, and stood at the door of the tabernacle, and the Lord talked with Moses.
10. And all the people saw the cloudy pillar stand at the tabernacle door: and all the people rose up and worshipped, every man in his tent door.
1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face to face, as a man speaketh unto his friend. And he turned again into the camp: but his servant Joshua, the son of Nun, a young man, departed not out of the tabernacle.
12. And Moses said unto the LORD, See, thou sayest unto me, Bring up this people: and thou hast not let me know whom thou wilt send with me. Yet thou hast said, I know thee by name, and thou hast also found grace in my sight.
13. Now therefore, I pray thee, if I have found grace in thy sight, show me now thy way, that I may know thee, that I may find grace in thy sight: and consider that this nation is thy people.
14. And he said, My presence shall go with thee, and I will give thee rest.
15. And he said unto him, If thy presence go not with me, carry us not up hence.
16. For wherein shall it be known here that I and thy people have found grace in thy sight? is it not in that thou goest with us? so shall we be separated, I and thy people, from all the people that are upon the face of the earth.
17.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I will do this thing also that thou hast spoken: for thou hast found grace in my sight, and I know thee by name.
18. And he said, I beseech thee, show me thy glory.
19. And he said, I will make all my goodness pass before thee, and I will proclaim the name of the LORD before thee; and will be gracious to whom I will be gracious, and will show mercy on whom I will show mercy.
20. And he said, Thou canst not see my face: for there shall no man see me, and live.
21. And the LORD said, Behold, there is a place by me, and thou shalt stand upon a rock:
22. And it shall come to pass, while my glory passeth by, that I will put thee in a cleft of the rock, and will cover thee with my hand while I pass by:
23. And I will take away mine hand, and thou shalt see my back parts: but my face shall not be s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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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3장 (개요)
본 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중재한 모세에 관한 기록의 연속이다. 그 중재는 죄로 인해 생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단절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1.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매우 겸손케 하는 메시지를 받는다(1-3, 5).
이 메시지는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고, 저들에게 다시 자비를 베풀도록 도와준다(4, 6).
2. 모세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통신을 가설한다. 하나님과 그들은 각기 그 통신을 동의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즉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내려오심으로써, 백성들은 장막 문에서 경배함으로써 표시한다(7-11).
3. 모세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여 승리한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12-17).
(2) 하나님께서 친히 그 영광을 보이신다(18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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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받은 이스라엘(출 33:1-6)
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준 메시지에 하나님께서 아직도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과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좋지 않은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모세는 그들이 앞으로 계속 굴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것을 그들에게 알려야만 했다.
1. 하나님은 그들의 본성을 말씀하실 때에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을 붙여 주셨다(3, 5절).
하나님은 “가라, 가서 그들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들 자신보다 그들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율법의 멍에 아래에 두고, 당신의 계약의 굴레 안에 있게 하려 했으나, 그들은 목이 곧아 그런 일에 굽힐(복종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하고 비뚤어진 그들의 성격을 고치시고 올바르게 만들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고집불통이고 완고했으며 혁신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려 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그들의 마음의 성격에 따라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사람의 행동을 보고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보고 판단하신다.
자녀들이 부모나 선생에게 고집부리는 것만큼 모욕적인 것이 없듯이, 목이 곧은 것만큼 하나님을 분노케 만드는 것은 없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5절).
이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을 벌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죄에 따라 처리하셨다면, 순식간의 파멸로 없애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입은 자들은 자기들의 죄가 마땅히 받을 벌이 무엇이며, 만일 용서받지 못했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을까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더욱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3. 하나님은 그 곳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1절).
그들이 지금 거하는 이 시내산은 하나님의 성막을 세우고 엄숙한 예배를 드릴 곳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게다가 이것(성막)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지금 거기를 떠나라고 명령하심은 그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것이다.
즉, “그들 마음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었다.
4. 하나님께서는 마치 모세가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사람인 양 그들을 그에게 넘겨 주셨다.
그리하여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일을 그에게 맡기셨다.
5. 하나님은 가나안을 주겠다고 한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실행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 아직은 지금까지 그들의 축복이 되어 왔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겠다는 특별한 표시를 보이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을 지휘하는 일은 저들의 왕인 모세의 전반적인 안내와 수호천사들의 일반적인 호송 아래 맡기셨다.
“너의 수호자로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악한 천사들이 너를 곧 멸망시킬 것이니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내가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2, 3절).
천사가 하나님보다 더 참을성 있고 자비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천사에게 무례히 행하는 것은, 쉐키나 곧 하나님의 엄위하심 그 자체에 대한 무례이니, 이번만큼은 하나님을 분노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누리는 특권을 활용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닌 특권이 크면 클수록 위험도 더 크게 따라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6.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을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분처럼 말씀하셨다.
정의는 “그들을 처단하여 진멸시키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비는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고 말한다(호 11:8).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즉 “너희는 참회의 자세를 가지라. 그리하여 이 쟁론이 너희에게 유리하게 매듭짓도록 하라. 그러면 자비가 심판을 이길지도 모르리라”(5절).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자비를 베풀겠다는 뚜렷한 암시임을 명심하자.
만약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기 원하셨다면, 목이 곧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능히 알았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의 죽음도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들을 돌이켜 회개케 하라. 그러고 나서야 자비가 할 바를 알리라. 그렇지 않으면 자비도 할 바를 모른다.
Ⅱ. 메시지를 받은 백성들은 슬픔에 잠겼다.
하나님이 저들과 특별히 함께하는 은총을 누리지 못할 거라는 말은 분명 불행한 소식이었다.
1. 그러므로 “그들은 슬퍼했다”(4절).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물러가시도록 만들었던 저들의 죄를 슬퍼했다. 또한 그들의 죄로 인한 가장 괴로운 처벌에 슬퍼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3천 명이 레위 족속의 칼에 단번에 죽어 넘어졌을 때도, 그들이 그것 때문에 슬퍼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랬다면 저들의 죄는 용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함께하시겠다는 은총을 거절하자 그들은 슬퍼했고 괴로워했다.
죄가 가져오는 온갖 쓴 열매들과 결과들 중에서도, 진정한 참회자가 가장 슬퍼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신다는 말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임재하시지 않는 한 그것은 별로 기쁨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가나안 땅 그 자체는 조금도 기쁠 것이 없다. 저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므로 슬퍼했던 것이다.
2. 큰 수치와 굴욕의 표시로서, 아직 옷을 입지 않은 자들은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했고”(4절), 옷을 입었던 자들은 “그 산에서” 또는 혹자의 말대로 “산에 멀리 떨어져서 그 단장품을 제하였다”(6절). 아마 세리와 같이 (장막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장품을 제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5절).
그러므로 그들은 그렇게 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보면, 그들의 깊은 슬픔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고, 특별한 뜻으로 보면 금송아지 만드는 데에 귀고리를 내주었던 자기 자신들에 대한 거룩한 보복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신들의 죄악을 위한 경비에 쓰기 위해 단장품(장신구)을 내놓았던 자들은, 이제 그들의 죄에 대한 슬픔과 수치를 표하기 위해 단장품을 떼 버릴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주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실” 때에는(사 22:12) 맛있는 떡을 먹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단 10:3) 장신구들도 제거해야 한다.
심지어 보통 때는 매우 품위 있는 것들도, 굴욕의 날 또는 공동체 전체가 당하는 재난의 때는 부당한 것이요, 빛을 잃고 마는 것이다(사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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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된 통신(출 33:7-11)
Ⅰ. 저들의 굴욕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분노의 징표가 또 한 가지. “모세는 장막을 취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 자신과 자기 식구들을 위해 친 장막이 아니었다.
그 장막은 모세가 말씀을 전하고 소송 사건들을 접수하며, 하나님께 질문했던 곳, (말하자면) 그들 진의 회의소였던 것이다.
모세는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쳤다”(7절).
이것은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장막에는 합당치 않게 되어 버렸으며, 게다가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다시 그들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불화하셨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셨다.
여호와는 악한 자를 멀리하신다. 마찬가지로 성전이 죄로 더럽혀졌을 때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을 떠났던 것이다(겔 10:4; 11:23).
하나님께서 그의 장막을 옮기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한 표시라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규례는 그의 은총의 열매이며 그의 임재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규례가 우리에게 있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장막은 나중에 세워야 했던 그 장막의 한 설계도나 모형이었을 것이다. 즉 모세가 산에서 본 그 형상을 보고 급히 그린 설계 초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공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요, 얼마 동안 하나님과 모세가 공무로 만나는 회막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그것은, 저들이 받은 자비를 거짓된 망상 때문에 버리지 않았다면, 진 가운데 세워졌을 그 영광스런 집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저들은 이제 자신들이 빼앗긴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았으리라.
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득 품고 있었다.
1. 비록 장막은 옮겨졌지만 아직도 여호와를 찾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장막을 따르도록 허용되었다(7절).
모세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 문제에 대한 중재자로서 하나님께 청원할 수 있도록 초대되었고, 또 그럴 수 있도록 저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들이 “진 밖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이 돌아오기를 간청할 수 있는 장소가 지정된 셈이다.
이와 같이 에스라(제2의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를 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많은 사람이 그에게 몰려왔다(스 9:4).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고자 하실 때는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신다.
“우리는 그에게 구하여야 하리라”(겔 36:37). 그리고 그의 이름에 감사하면, 그는 찾을 것이며, 가장 불쌍한 사람의 중재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물론, 여호와를 찾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장막으로 환영되었다.
2.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중보하는 일을 담당했다. 모세는 “회막으로 나아갔다”(8절). 곧 협상의 장소로 나갔다.
회막은 아마 이스라엘과 산 중간에 세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회막에 들어갔다”(9절).
훌륭한 교섭 위원을 두었으므로, 그 일은 빠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밑에 있는) 저들의 재판관이 저들의 변호사가 되고, 율법 수여자로 지명된 자가 중재에 나섰으니,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3. 백성들은 화해를 찾는 아름다운 마음과 매우 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 모세가 회막으로 나갔을 때에 전에는 그를 경멸했던 백성들이 존경과 중재에 대한 전적인 의지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8절).
이로써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해 크게 걱정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결말을 관심 있게 주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성소로 들어가기 위해 승천하실 때, 지금의 모세처럼 “구름이 그를 둘러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제자들이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눈이 그를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존전에 알현하고 계신 것이다.
(2)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모세와의 회합을 의미하는 구름 기둥을 보았을 때, 그들은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경배했다”(10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 지엄하신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경모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영원히 그를 예배하며, 다시는 금으로 신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② 하나님께 기쁨에 넘치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의 표시를 기꺼이 보이셨고 화해의 희망을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려 하셨다면, 구름 기둥을 보여 주지 않았을 것이며, 모세와 같은 중재자를 일으키시거나 또 그 중재자에 대한 마음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③ 모세와 백성들의 마음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했던 모든 것을 주장하는 변호사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협상이 좋은 결말을 맺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경배의 눈으로 바라보며, 우리의 장막에서 하나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그들이 장막 문에서 경배한 것은, 공공연히 송아지를 경배했을 때와는 달리 하나님과 모세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뚜렷한 증거이기도 하다.
4.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화해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화해되기를 기꺼이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1) 하나님은 협상의 장소에서 모세를 만나셨다(9절).
이스라엘 진이 우상으로 더럽혀지자 그 곳을 떠났던 구름 기둥이 이제는 그 진과 약간 떨어져 있는 이 장막으로 되돌아왔다. 점차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만나려고 내려오신다.
(2) 하나님은 “모세와 말씀하셨다”(9절).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11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어느 예언자보다도 더 명백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빛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이요, 또한 그에게는 특별한 자비와 은총을 더 분명히 보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왕이 신하에게 명령하듯 하지 않고 “사람이” “그 친구와” 친밀하게 상의하듯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변호인이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을 보고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게다가 “모세는 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또 한 번 용기를 가졌을 것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이 문제의 결말이 좋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해 주기 위해, 또 그가 오랫동안 없으면 저들이 실망할까 봐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속히 회막으로 되돌아가겠다고 생각하여 여호수아를 회막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왜냐하면 영광의 구름이 회막의 “문에 서 있는” 동안(9절), 회막을 비워 놓는다는 것은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가 없는 동안, 만약 하나님께서 구름에서 뭔가를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을 들어야 하기에 여호수아가 거기 남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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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모세(출 33:12-23)
모세는 장막 문으로 되돌아와 두 가지 큰 은혜를 겸손하고 끈질기게 간청한다.
그는 왕으로서 하나님과 담판하여 두 가지 모두를 이루는 데에 성공한다. 여기서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그리스도)의 말을 언제나 들어주신다.
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
그러나 모세는 가나안까지 가는 이스라엘의 남은 노정에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을 열심히 간구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했지만, 모세의 기도가 승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돌이켜졌던 것이다(32:14).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로운 임재와 그것으로부터 오는 유익과 위로가 없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것이 회복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 우리는 저주를 면케 될 뿐 아니라 축복의 보증도 얻는다. 우리는 멸망에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자격도 얻게 된다.
모세가 이 사정을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간절히 아뢰었으며 “변박할 말을 입에 채웠는지”(욥 32:14) 살펴보자.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말을 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복지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가를 보자. 그는 어떻게 탄원했고, 어떻게 성공하는가?
1. 모세는 어떻게 탄원하는가?
(1)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고 위임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렇게 그는 시작했다. “여호와여, 나를 고용한 이는 바로 주 당신이니이다. 주는 나를 인정하시지 않으려는 겁니까? 나는 나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오, 여호와여, 주는 내게 큰 일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그것을 수행해야 할지 모르는데도 나를 버려두십니까?”
진실로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고 계획하는 사람들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시와 능력을 주시기를 믿음으로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모세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를 활용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절을 베풀겠다는 은혜로운 표현을 해 달라고 간구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특별한 친구와 심복처럼 여기사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고 하셨나이다. 또 너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고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13절).
모세는 은혜를 상실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호의를 나타내셨겠는가 하는 것은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에 탄원의 강조점을 두었다.
이것은, 비록 모세가 그런 은총에 불합당하게 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의 은총의 권외로 쫓겨난 것은 아니기를 희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하나님께 주장했다. 즉 “여호와여, 만약 주께서 나를 위해 뭔가를 하시겠다면 이 백성을 위해 해 주십시오.”
이와 같이 우리의 주 예수께서도 그의 중재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계신다. 그는 하나님이 항상 기뻐하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히 불쾌해하시는 우리를 위해 자비를 얻어낸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졌다”(엡 1:6 참조).
마찬가지로 공공심을 가진 사람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에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즐겨 비유한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내가 주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은 것을 알겠나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한 모세가 구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지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신다는 최상의 증거가 됨을 명심하자.
의무를 실행하도록 우리를 지도하고 고무해 주는 은총을 마음속에서 깨달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역사하고 계심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3) 모세는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께 극히 무가치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하나님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주께서 기사를 행하시어 친히 구원하시고 주와 언약을 맺은 백성,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여, 저들은 주의 것이옵니다. 그들을 버려두지 마옵소서.”
화가 난 아버지는 이렇게 하셨다. “나의 자식은 어리석고 고집이 세다. 그러나 그는 나의 자식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버릴 수 없다.”
(4)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매우 중대한 가치로 여겼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리라”는 말씀에 의지했다. 마치 그 말 없이는 살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자처럼 했다.
즉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했다(15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로가 안전하지도 못하며, 그들의 야영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없이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조차도 두려워하는 자처럼 말했다. “하나님 없이 가나안으로 나아가느니 차라리 여기 광야에 누워서 죽는 게 낫습니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을 준비를 가장 잘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모세가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를 관찰해 보라.
그는 부정의 응답은 받을 수 없다는 듯이 간청했다. “주의 은총을 받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 여기에 머무르겠나이다.”
마치 야곱이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말한 것과 같다(창 32:26).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양보를 받아냈는가를 관찰해 보라.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자비로운 암시들을 오히려 더욱 끈질기게 졸라대는 데 이용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운 약속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약속은 우리의 신상에 용기를 줄 뿐 아니라, 기도의 열의를 일으켜 줌이 틀림없다.
(5)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주장한다(16절).
“우리를 지켜보는 그 민족들이 나와 주의 백성(나의 모든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어떻게 알리이까? 구별하는 은총을 베푸사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소서! 우리가 정말 영광된 것을 어떻게 나타내겠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이 아니니이까? 주의 임재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른 이웃 민족들과 같은 수준에 머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한 민족이라거나 큰 은총을 받은 민족이라는 말을 하지 마소서.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모세는 장소에 강조점을 둔다. “여기, 주께서 우리를 인도해 온 이 광야에서 우리를 떠나신다면, 우리는 분명코 길을 잃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성령과 은총을 보내어 지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위로하심으로써 특별히 함께하신다.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우리에게 특별한 사랑을 보이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요, 그것이 큰 은혜가 됨은 물론이요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더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점을 유의하자.
2. 모세가 어떻게 성공하는가를 관찰하자.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증을 얻었다.
(1) 그 은총은 모세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14절).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이 문제에는 네가 안심하도록 만들리라. 그것이 어떻게 되든, 너는 만족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안식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단 12:13).
(2) 모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은총을 받았다. 모세는 단지 자신의 은총만 약속하는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고 백성들을 위해서 뚜렷한 약속을 얻어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편할 수 없었다. 자애롭고 너그러운 사람은 자신만 하늘나라에 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며 친구들 또한 그 곳에 가기를 바란다.
모세는 이 문제에서도 승리했다. 하나님은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라”고 하셨다(17절).
모세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는 터무니없는 간청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모세는 간청할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구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셨다”(약 1:5). 기도의 힘을 보라. 기도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살전 5:17)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촉구되는 것이다(눅 18:1).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풍요함을 보라. 하나님은 이미 많은 것을 행하셨으나 기꺼이 더 많은 것을 행하실 것이다.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엡 3:20) 이상으로, “나는 이것도 하리라”고 말씀하셨다(17절). 이런 모세의 모형 속에서 그리스도의 중재의 승리를 깨닫자.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로 오는 모든 자를 위해 중재하고 계시며, 중재가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이 되신다.
중재가 성공하면 전적으로 모세의 공로다. 그에 의해 중재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공로도 없다. 곧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은 완전히 그들과 화해하셨고 구름 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시작되었으며 계속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잘 되었다.
이후로 더는 금송아지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여호와여,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나이다”(미 7:18).
Ⅱ. 이런 성공을 거두고 나서 모세는 “주의 영광”을 보기를 간청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도 역시 뜻을 이룬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모세는 겸손히 요청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절).
모세는 근래에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낸 적이 있고, 거기서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세상의 누구보다도 친근하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좀 더 알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과의 친교에 실제로 초대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으로 보듯 분명히 알게 되기까지 한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한 가지씩 은총을 얻어내는 데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기도의 성공은 계속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는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구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자비를 받는 위치에 있을 때, 그 은혜를 지키고 개발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쇠는 달았을 때 때려라.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나로 (그것을) 보게 하소서”(글자대로 읽으면 그렇다).
즉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보게 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도 견딜 수 있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모세가 어리석어 하나님의 본체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구름 기둥이나 불 기둥에서 들려오는 음성만 들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합당한 신적인 영광의 현상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부패하지” 않도록(신 4:16)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습을 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소 보더라도 그런 위험이 없기를 바랐던 것이다. 모세가 원했던 것은 이제껏 보아 왔던 것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순수하게 그의 신앙과 헌신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욕망은 비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마 그 욕망 안에는 인간의 결함이 혼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하지 않고 신앙으로 이 세상을 걸어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혹자는, 모세가 하나님의 화해를 나타내는 표시와 그들에게 약속했던 하나님의 임재의 보증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 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는 그가 요청한 바의 내용을 몰랐다.
2. 이 요청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1) 하나님은 용납할 만한 것이 못 되고 모세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거절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20절).
하나님의 영광을 완벽하게 본다는 것은 현 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며, 모세 또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인간은 비천하다. 합당치 못하며, 연약하며, 감당할 수 없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보좌 앞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으로 그 위에 펴시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욥 26: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에서는(즉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다(23절).
그것은 성도들의 영원한 축복이 되도록 장래를 위해 유보된 영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며, 그것 없이 사는 삶은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한 세계에 있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에 대한 기쁨은 기다려야 한다. 그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다(요일 3:2).
그동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높음과 아직 모르고 있는 깊음을 경배하자.
이보다 오래 전에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경탄했다(창 32:30). 죄인은 재판장인 하나님 보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2) 하나님은 모세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을 허락하셨다.
① 모세는 기쁜 소리를 듣게 되었다(19절).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화해하심으로써 자비를 베푸셨다는 놀라운 증거를 모세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흘러가고 있는 선한 형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샘 솟고 있는 선한 형상, 곧 “모든 선한 형상을” 모세에게 보이려 하셨다. 이것은 그의 요청에 대한 만족스러운 응답이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모세가 말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내가 네게 나의 선함을 보이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선함이 그의 영광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는 위엄의 영광보다는 자비의 영광으로 자신을 알리고자 하신다. 우리는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까지도 경외해야 하기 때문이다(호 3:5). 특별히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주권을 말한다. 곧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노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권을 쥐고 있는 주인이시므로, 당신의 뜻에 따라 선물을 다르게 내려 주신다. 아무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며, 또한 아무에게도 계산의 책임을 지고 있지 않으시다(“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마 20:15).
또한 하나님의 자비의 모든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결코 피조물의 어떤 공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뜻에 따라 자비를 베푸신다. 그가 원하셨기 때문에 베푸실 뿐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마 11:26)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진노하고 싶은 자에게 진노할 거라고는 결코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의 진노는 언제나 공정하고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느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특권으로 마음대로 저주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는 특권을 쓰신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거부하는 은혜를 어떤 이들에게는 자유롭게 주신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바울 사도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응수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② 모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으면서도 만족할 만한 것을 보아야 했다. 그 문제는 모세의 생명이 안전하면서도 만족할 수 있도록 조절되었다.
첫째, “반석 틈”에서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21, 22절).
그 반석 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눈부신 빛과 삼키는 불로부터 보호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 반석은 물이 나왔던 호렙 산의 그 반석이었다.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니라”고 한다(고전 10:4).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안전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반석 틈 안에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진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숨겨진 자들을 친히 보호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갖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일 뿐이다(합 2:14 참조).
이 반석 위에 서서 숨겨진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위로를 삼을 수 없다.
둘째,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23절).
이 세상의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보았지만 하늘에 있는 자들만큼 잘 본 것은 아니다.
사람의 위엄도 얼굴에 나타나 있다. 또 얼굴을 보아서 서로 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앞을 지나갈 때, 우리는 그의 등만 보며, 또 그 때 우리는 (소위) 그를 일견(一見)했다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로 그 정도밖에는 볼 수 없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눈여겨보았다는 말이 없다. 다만 하나님을 바라보았다(한글 개역에는 “뵈었는고”로 되어 있음)고만 할 뿐이다(창 16:13).
우리는 다만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13:12).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를 볼 때, 또한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대왕의 행위를 관찰해 볼 때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등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껏해야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다. 우리의 희미한 이성에 의해서는, 또 우리의 말솜씨로는 하나님을 언급할 수 없다.
마치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때의 모세에게는 등만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러나 오랜 후에 그가 그리스도의 변화산에서의 모습을 증거할 때에는, “해같이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마 17:2).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만 충실히 활용하면 머지않아 더 밝고 영광스런 광경이 우리에게 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있는 자가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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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장: 내가 친히 가리라
[1-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그의 계획하신 바이었고 오래 전, 약 646년 전에 ( <12)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 75세이었고 그 연도는 대략 주전 2092년경이다. 모세의 출애굽 시대가 주전 1446년경이므로 약 646년 이전이다.>) 그 조상 아브라함과 그후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며 약속하신 바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세에게 그들을 그 땅으로 인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한 천사를 그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그들로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살기 좋은 복된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거역하고 그 길을 속히 떠나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겸손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았다. 만일 그들이 또 한번 그렇게 범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길에서 다 멸망시키실지도 모른다. 여하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참으로 큰 행복이지만, 그가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참으로 큰 불행이다.
[4-6절]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핫다바르 하라 핫제 )[이 나쁜 소식(KJV), 이 슬픈 말씀(NASB)]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이 나쁜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 그러한 말씀을 듣고도 자기들의 몸이나 단장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정말 무지하고 무감각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몸의 단장은 기쁠 때 하는 것이지, 슬플 때는 하지 않는다.
[7-11절]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회막(會幕)은 ‘만남의 장막’이라는 뜻이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회막으로 나아갔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12-16절]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파나이 )[내 자신](my presence)(KJV, NASB, NIV)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는 생각을 바꾸셔서 “내가 친히[내 자신이]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모세의 간구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해주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천하 만민들 중에서 구별된 민족임을 증거해 주시기를 간구하였고 하나님의 결심을 확인하였다.
[17-2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요 4:24)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딤전 6:16)이시기 때문에, 그의 얼굴, 그의 등, 그의 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묘사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것을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한 형상’을 나타내시고 ‘그의 등’을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을 볼 수는 없으나, 때때로 하나님의 등, 즉 하나님의 영광의 뒷모습 즉 지극히 작은 부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의 사도들도 우리에게 외적 단장 대신 내면적 단장을 힘쓰라고 교훈하였다. 그것은 선한 인격과 행실을 말한다. 디모데전서 2:9-10,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우리가 세상 것들의 헛됨을 참으로 알고 장차 올 영광스런 천국을 참으로 사모할진대, 우리는 외적 단장을 절제하고 온유와 선행의 내면적 단장을 힘써야 한다.
둘째로, 모세는 회막이라고 부르는 한 장막을 진 밖에 쳤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은 다 회막으로 나아갔다. 회막(會幕)은 성도들의 만남의 장소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만남의 집이다. 주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8:20).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섬길 때 영적으로 그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교회에 예배하러 모일 때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그 다음에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된 약속이며 특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 성도들도 동일한 말씀을 받았다. 마태복음 28:20,“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요한복음14:16,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엡 4:30).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체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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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 ::: !Wjr"(7349, 라훔)
라훔(형용사)은 라함(!j'r; , 7355)에서 유래했으며, '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온다.
형용사 라훔은 하나님께만 사용되며(시 112:4은 아마도 예외인듯함) 하나님의 속성들 중의 하나를 표현한다(출 34:6, 신 4:31, 대하 30:9, 느 9:17, 시 78:38, 시 86:15, 시 103:8, 시 111:4, 시 145:8, 욜 2:2, 욘 4:2). 즉 하나님이 라함(!j'r; , 7355)에서 나타내는 것을 라훔(!Wjr" , 7349)에서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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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은혜로운, 자비로운 :::: @WNj'(2587, 한눈)
한눈(형용사)은 하난(@n"j; , 2603)에서 유래했으며, '은혜로운, 자비로운, 친절한 gracious'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오며, 하나님의 속성과 은혜스러운 행동을 묘사한다(출 22:26, 출 24:6, 대하 30:9, 느 9:17, 느 9:31, 시 86:15, 시 103:8, 시 111:4, 시 112:4, 시 116:5, 시 145:8, 욜 2:13, 욘 4:2). (참조: BDB; TWOT).
===[[<구약>은혜와 긍휼]]...
@@<죄인에게...은혜>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 하난(חנן)(2603, 하난)
1. 하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은혜)롭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80회 나온다.
(a) 칼형에서 '호의(은혜)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하난은 칼형으로 사용된 용례들 중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용례들, 즉 대략 41회 용례들이 여호와를 주어로 취한다. 청원의 말, '혼네니'(나에게 자비로우소서)는 시편에 19회 나온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외로움(시 25:16, H17), 고통(시 31:9, H10), 죄과(시 51:1, H3)에 대하여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간청한다. 죄과에 대해서 그가 구하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고발을 말소시켜 달라는 것이다. 사 33:2을 참조하라.
여호와는 자비롭게 야곱에게 자녀를 주시고(창 33:5) 그를 번영하게 하셨다(창 33:11). 베냐민에게 내린 요셉의 축복(창 43:29)과 아론의 축복(민 6:25)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태도를 필요로 한다.
아모스(암 5:15)는 청중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도록 의를 세우라고 촉구한다. 요컨대 여호와는 그가 선택한 사람들에게 자비롭게 행하신다는 점에 있어서 주권자이시다(출 33:19).
(b) 니팔형에서 '불쌍히 여기심을 받다, 동정의 대상이 되다'를 의미한다.
렘 22:23, "레바논에 거하여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
(c) 피엘형에서 '은혜(자비)롭게 하다'를 의미한다.
잠 26:25에서 말이 외적으로 친절하거나 동정적인 말에 대해 사용되었다.
(d) 포엘형에서 '자비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를 의미한다(잠 14:21, 시 102:14).
(e) 호팔형에서 '은혜 받다(입다)'를 의미한다(사 26:10, 잠 21:10).
(f) 히트파엘형에서 '은혜(자비, 은총)를 구하다'를 의미한다.
히트파엘 어간은 약속의 땅을 보게 해 달라고 한 모세(신 3:23)와 성전 봉헌 때의 솔로몬(왕상 8:33, 왕상 8:47, 왕상 8:59, 왕상 9:3, 대하 6:24, 대하 6:37)과 시편기자(시 30:8 H9, 시 142:1 H2) 그리고, 야곱이 더불어 씨름한 천사에게 간구하는 것을 인용한 호세아(호 12:4 H5)가 하나님께 탄원할 때, 사용하였다. 빌닷에게서 하나님께 탄원하라는 충고를 받은 욥(욥 8:5)은 비록 자기가 의롭긴 하지만, 이 방법만이 그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길일 것이라는 점을 시인한다(욥 9:15).
2. 하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싫다, 몹시 싫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욥 19:17에서 1회 나온다: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참조: E. YAMAUCHI;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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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한 자에게....긍휼>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롭다.... 라함(רחם) (7355, 라함) ....하나님의 여성성 드러냄==자궁
라함(동사)는 라함(!j'r' , 7356)에서 유래했으며,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심을 갖다, 자비롭다'를 의미한다.
이 어근은 '자연적인' 유대에 뿌리를 둔 깊은 사랑(대개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 대해 갖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 어근의 피엘형은 동정, 연민, 자비 등 여러가지로 알고 있는 깊은 내적 감정에 대해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7회 나온다. 라함은 사람에게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12회).
이 단어의 칼형은 단 한번만 사용되는데, 시편 기자가 여호와에 대한 그의 사랑을 고백할 때이다(시 18:1).
이 사랑의 깊이는 이 단어와 레헴/ 라함과의 결합에서 보여진다.
이사야(사 49:15)가 젖먹이 아이에 대한 어미의 사랑을 언급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라. 이 단어는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가리킬 수도 있다(시 103:13).
이 동사는 인간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서로를 향해 갖는 자비의 감정을 나타내며(렘 50:42), 이러한 자비의 감정은 어린 아이(사 13:18)나 다른 무력한 사람들로 인하여 가장 쉽게 일어난다.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적들이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볼 때 결여한 것은 무력한 자들에 대한 바로 이러한 자연스런 자비이다(사 13:18, 렘 6:2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이러한 감정(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다(왕상 8:50, 렘 42:12). 실로 선지자들은(사 13:18) 바벨론(렘 21:7)과 하나님(렘 13:14)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가지 아니할 것(결여)을 기술할 때 후츠(어떤 사람으로부터 타인에게 흐르는 감정), 하말(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을 위하여 즉 그들의 어떤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하여 행동하게끔 하는 감정의 힘), 및 라함(어떤 '자연적인' 유대에 기초하는 깊은 내적 감정)을 결합한다.
--이 어근은 하나님께 빈번히 사용된다. 이 어근은 두 개념을 통합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라고 부른 자들과 맺고 있는 강한 결속의 개념이다(시 103:13). 하나님께서는 아비가 자식들을 돌아보듯이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참조: 미 7:17).
두 번째 개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하넨:은총)의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가 택하신 자이면 누구에게든지 은혜롭고 자비하시다고 하셨다(출 33:19).
--하나님의 깊고 온화한 사랑에 부속하는 몇 가지 개념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개념(출 33:19)이고,
둘째는 그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때 그들을 향하여 베푸시는 자비와 용서이며(신 13:17), 또한 그의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심판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자비와 은혜(왕하 13:23)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 속성은 부분적으로 종말론적 희망의 토대가 된다(참조: 사 14:1, 사 49:13, 사 54:7, 렘 12:15, 렘 33:26, 겔 34:25, 미 7:19, 슥 1:16). 신
명기(신 30:3)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포로(exile)를 예언하면서 회개만이 하나님의 애정에 찬 긍휼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주목할만 하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거두어 지고 바벨론의 손에 의한 가혹한 심판이 초래되는 것을 읽는다(사 9:17, 사 27:11, 호 2:4). 바벨론 포로 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사랑과 온화한 자비로 백성들을 격려했으며(애 3:32) 그들로 겸손히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께 아버지 같은 긍휼을 다시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게 하였다(슥 1:12).
부자 관계의 회복과 포로에서의 귀환은 이러한 동반하는 사랑의 돌보심을 증거한다(호 2:23).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포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따라(사 30:18)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겔 39:25, 참조: E. J. Young, The Book of Isaiah, Ⅱ, p.353f.).
포로에서의 귀환에 대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부자 관계가 결코 깨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상태를 지향한다(호 2:23, 사 54:8, 사 54:10).
라함의 푸알 완료 여성형 루하마는 명사로 사용되어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의 딸에게 준 이름이며,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이름이다.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 호 1:6)라는 이름에 대신하여 준 두번째 이름이다(호 2:1). 이 네번째 아이(둘째 딸)의 이름 루하마는 이스라엘의 여호와께 대한 변화된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상징적인 이름이다(호 1:10, 참조: 롬 9:25, 벧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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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어 내주하신 Q께서 공급해 주심 인해, ((신약의))믿는이가 발휘할 수 있는> Q의 전능한 믿음 = faith...(막11;:22...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또한 하나님을 신뢰하라 ...((구약의 <아브라함의> 믿음 = 신뢰함..belief))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Then he believed in the LORD; and He reckoned it to him as righteousness.)
==믿음<에무나 = 믿음, 충성, 신실함> 아만, 아멘, 피스티스, 피스튜오 ==
@@@m'a;(539, 아만) ...확실하게 하다, 지지하다, 충실하다, 믿다<<아멘의 출처>>
아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확실하게 하다, comfirm, 지지하다, 기르다 support, 충실하다, 신실하다, 성실하다 be faithful, 믿다, 신뢰하다 believe, trus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0회 나오며, 칼, 니팔,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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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이 단어의 개념은, 이 단어에 대한 많은 대중적 개념과 대조 구별되는 '믿음'(faith)의 성경적 의미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이 어근의 의미는 핵심에는 '확실성'(certainty)의 개념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히 11:1 나타나 있는 신약성경의 믿음에 대한 정의에 의해서 확증된다. 이 어근의 기본적인 개념은 '확고함'(firmness)이나 '확실성'(certain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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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형에서 이 단어는 '지지하다, 양육하다, 기르다'를 의미한다.
왕하 18:16에서 이 단어는 '버팀 기둥'을 묘사한다. 에 2:7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자기 딸같이 양육했다. 민 11:12에서 "양육하는 아비", 룻4:16에서 아기의 "양육자"를 묘사한다.
2. 히필형에서 이 단어는 '확실하게 하다' 혹은 '~에 대해 확신하다', '보증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히필 동사 변화에서의 이 단어는 '믿다'를 의미하며, 성경에서의 믿음은 '보증' assurance, '확실성' certainty이다 (이는 믿음을 있음직하고, 아마도 참되긴 하지만 확실치 않은 어떤 것으로 보는 현대의 개념과 대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이로부터 이 단어는 '확립된 사람' 혹은 '굳혀진 사람' 즉 '충성된 자'(삼하 20:19, 시 12:1, 시 31:23)라는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된 칼의 수동 분사형으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3. 니팔형에서 '확립(확정)되다'를 의미한다(삼하 7:16, 대상 17:2, 대상 17:3, 대하 6:17, 사 7:9).
'신실하다, 충실하다, 확실하다, 신뢰할만 하다'를 의미하며, 분사형에서 신자들을 나타낸다(민 12:7, 삼상 2:35, 느 9:8). 이 어형은 또한 모든 확실성의 근거가 되는 것, 즉 하나님 자신(신 7:9), 그리고 그의 언약(시 89:28)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된다.
'믿음'과 '견고한 것' 사이의 관게에 관한 흥미있는 한 가지 실례는 사 7:9에서 발견된다: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아하스는 만일 그가 믿지(히필형) 않는다면, 그가 견고히 서지(니팔형) 못한다. 즉 믿음이 없이는 그가 안정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파생어들도 확실성과 신빙성에 대한 똑같은 개념을 반영해 준다. 파생어 아멘(진실로 verily)은 신약성경에서 아멘이란 말로 받아들여져서 오늘날의 영어 단어 'amen'이 되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셨다(마 5:18, 마 5:26 등). 이 히브리어 어형과 헬라어 어형은 기도와 찬양송의 끝에 온다(시 41:13, 시 106:48, 딤후 4:18, 계 20:20 등).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 이렇게 사용된 이 용어가 우리가 기도드리는 주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참조: J. B. Scot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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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emunah이다. 이 단어는 예를 들어 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 나타나는데, 기본적인 뜻은 신실, 충성, 한결같음이다.((실지적 실행의 측면에서는, <그분의 이름-성품-어떠하심을 배워 참되게 깨닫고 (그분을 주관적으로 살아냄의 체험적 간증 얻음을)추구하며 신뢰함으로써, 결코 요동함 없이 주님을 붙들고 붙들어 믿어 들어가서 (신실하신) 그분을 생명 삼고 <주님 뜻대로, 주님의 때에 온전히 이루시기를> 바라고 앙망하며 기도-기대-기다림으로써, 발휘하는 생생한 믿음을 의미할 것)) 이런 가치는 기본적으로 그 주체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내는 여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는 pistis이다. 이 단어의 뜻 역시 신실함, 충성, 헌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살아냄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신 분이다(롬3:21-26).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믿는자들이라면, 이들 역시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야 한다. 믿음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fides인데 기본적인 뜻은 신뢰, 보호, 의존이다. 믿음(faith)에 해당하는 이런 단어들은 어떤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믿는 인식론적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faith)은 그러한 인식론적인 믿음(belief)에 행동이 더하여진 개념으로서, 한번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치는 믿음(belief)이 아니라 평생 일관되게 사는 삶을 뜻한다.
믿음(faith)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어려운 점은 이 단어를 동사로 표현할 때 거기 알맞는 영어 단어가 없다는 점이다.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 동사는 pisteuo인데 여기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없다는 말이다.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믿음을 실천하다" "믿는대로 살다"라는 뜻을 지닌 faithize가 아닐까 싶다.
영어 성경은 그리스어 동사 pisteuo를 "to believe"로 번역한다. 그런데 이 동사는 belief의 동사이지 faith의 동사는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스어pisteuo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영어동사가 없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중 하나는 "믿음"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지속적인 신뢰 관계를 표현하는 원래 의미를 잃어버리고, 특정 교리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그친 것이다. 적어도 그리스어pisteuo를 "believe"가 아니라 "faithize"로만 이해한다 하여도, 이러한 번역상의 위험성을 많이 줄일 수 있다. 물론, "faithize"조차도pisteuo의 의미를 충분히 살린 단어라고는 볼 수 없지만, pisteuo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단어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나마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2바울서신이나 목회서신에서 사용된 pistis나 pisteuo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faith이 아니라 belief의 의미로 사용되어, 어떤 교리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용법은 분명 복음서나 바울의 진정성 있는 서신에서 사용된 용법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제2바울서신이나 목회서신에 나타난pistis는 belief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개인적 소견을 더함))...한편, 이 문제는 pisteuo를 to believe into = be life into로, 곧 그분 안으로 믿어들어가 그분의 모든 영광(이름-성품-풍성부요충만능력의 어떠하심) 그대로 나타내시도록 나의 참 생명 삼음으로 정의하면 될 것...(Q을 <성경 말씀 그대로> 참되게 일며 사랑하며 섬기며 절대적으로 신뢰하기에, 나의 짐을 그분께 가지고 나아가 <그분이 처리-해결해 주시도록> 맡겨드림[바로 이 상호 거함-맛봄-누림-기업-소유-붙듬 됨 통해, <참되게 아는 바 그 Q께 신뢰함으로써 맡겨드림이 아만이자 피스튜오가 될 것> + (그분의 때에 그분 뜻대로 참되게 이루시기를 구함으로써) 그분 안에 머무름 + 기도/기대/앙망/신뢰 ==>그분이 이루어 주신 바를 증거함의 선순환으로 나아감이라 할 수 있을 것..
====2. 성경이 말하는 ‘믿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의미
......내 짐을, 내 모든 사정을 완전히 통찰하여 알고 계시는 여호와 Q께, 그분을 신뢰하여(의뢰하여) <온전히> 맡겨 (넘겨) 드림 통해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 하나되어 머무르며, 맡아주신 그분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이미 말씀하신) 그대로 <항상 신실하사, 지고지선의 진복 이루시는 그분의 뜻따라 최선이 되도록> <그분의 때에>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실히 하고 일깨워드리며, 바라고 앙망하며 기도-기대하며 기다림
===구약의 경우
구약에서 '믿음'으로 사용된 된 단어가 히브리어로 '아만'(aman)이란 동사이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아멘’이란 말이 나온 것 기억하는가? 아멘이 바로 이 단어에서 나왔다.
----‘아만’은 본래 뜻이 ‘굳게 하다, 흔들리지 않게 견고하게 하다’는 뜻이다.
영어로 confirm이란 말로 주로 번역된다. 그래서 이 ‘confirm' ’굳게 한다’는 동사, 우리말로는 그것을 사역형동사라고 한다. 사역형, 뭘 ‘누구한테 맡겨서 그렇게 하게 한다’는 이 단어를 ‘아만’이라는 사역형동사로 바꾸어 놓으면 그것을 거의 대부분이 우리말에 ‘믿는다’ 라는 말로 번역을 했다.
최초로 구약에 '아만'의 사역형 동사가 처음 나오는 곳이 창세기 15장 6절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하신 저 유명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성경 절인데 거기 그런 표현이 실제로 사용되었다.
이 ‘아만’이란 동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믿는다’라고 번역했을 때, 그 뜻은 자기스스로가 설수 없기 때문에, 굳게 설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서 있어야 하는데 자꾸 넘어지기 때문에, 누구의 손에 (자신을) 맡겨서(의뢰/의탁해서) 결과적으로 그 손이 와서 ‘굳게 세워준다. 견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자기 스스로 굳게 서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맡겨서 굳게 서게 한다’ 는 그 뜻이 ‘믿는다’라는 것이다. 이 ‘아만’이란 동사에서 능동형 소위 기본형으로 쓰는 단어로는 ‘믿는다’라고 번역된 말이 없다.
<조심하라, 본래의 뜻과 용도를 견지해야 한다, 오용해서는 결코 안된다...우리가 종종 ‘내가(내 스스로가) 믿는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히브리말에는 그런 (재귀족)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다. 즉, ‘내가 스스로 혹은 내 힘으로 무엇을 믿는다’ 그런 개념이 없다.>
<‘아만’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맡겨서 굳게 한다, 견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견고하게 한다, 굳게 선다’ 그런 말이 아만이란 동사에 쓰인 일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다’라는 말을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한 말이다. 정말로 중요한 얘기이다. 이것을 모르면 진리에서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은 여기서부터 샘의 근원이 달라지면서 딴 샘이 나온다. 딴 샘이 생기는 것이며 전혀 다른 물이 나오는 다른 샘이 생길 수밖에 없다. >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
역대하 20장 20절에 이 단어가 사용된 예를 함께 찾아보겠다.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신뢰하라’는 말씀을 주목하라. 이 말은 ‘아만’이라는 동사에 사역형동사이다. 그 다음을 보자.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여기 ‘견고히 서리라’는 말이 '아만'의 수동형 동사이다. 시키는 것은 사역형이다. ‘빨간 물속에 옷을 집어 넣었더니 그 빨간 물이 옷을 빨갛게 만들어서 옷이 빨갛게 되어 진다’는 이 예문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수동형 동사이다.
다시 이 말씀을 잘 보자. 똑같은 ‘아만’이란 동사인데 앞에 것은 사역형 동사이고 뒤에 것은 수동형 동사이다. ‘견고히 서리라’ 이 말은 자기가 견고하게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맡겨서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해주셔서, 내가 견고하게 서게 되어 진다는 수동형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 혼자는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다. 자꾸 넘어진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그러면 결과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내가 견고하게 서 지는 것이다. 그것이 이 ‘아만’이란 동사의 두 가지 모습이다.
그런 예들이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 하나만 더 보자. 이사야 7장 9절 끝에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그리고 끝에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여기서 ‘믿지 아니하면’은 ‘아만’의 사역형 동사이다.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에서 ‘서다’ ‘정확하게 굳게 세워진다’ 그것은 아만의 수동형 동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면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세워주심으로 세워진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니까 자기 혼자는 넘어진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견고하게 세워진다.
----사단의 거짓진리를 조심하라
‘믿음’에 대해서 개념정리를 잘 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가 6천년동안 우리인간에게 뭐라고 말했는가하면 ‘네가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이룩하라. 신앙이든지 무엇이든지’다 그렇게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아주 익숙해 있다. 우리가 늘 하는 이야기 있지않은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 말이 어떤 면에선 진리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혀 진리가 아니고 진리의 반대이다. 이 개념이 서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상을 마귀가 계속 주입시켜 왔다. 실제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얻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이 땅에서 사다리를 놓아가지고 하늘 끝까지 사람이 올라가서 우주의 중심까지에 닿는 것이 가능한가? 영원히 해도 불가능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다리를 내려가지고 땅에 닿게 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야곱의 사닥다리를 기억하는가?
사닥다리를 누가 내리는가? 하나님께서 사닥다리를 내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다리를 놓아 가지고 달나라까지 가겠는가? 태양 끝까지 가겠는가? 우주의 끝을 어떻게 가겠는가? 그것은 불가능 하다.
그래서 사단은 끊임없이 안 되는 일을 시킨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게 하는 것이 사단이 하는 방법이다.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게 하고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사단의 술책이다.
====신약의 경우
신약성경에는 ‘믿음’을 '피스튜오'(pisteuo)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가 번역된 것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데 번역된 것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먼저 요한복음 2장 23절 24절에 “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23절의 '믿었으나’ 는 헬라어로 '피스튜오’라는 동사이다.
24절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거기 ‘의탁지’라는 단어도 역시 피스튜오라는 동사이다. 23절에는 ‘믿었다’라고 번역했고, 24절로 와서 ‘의탁’즉 ‘맡기다’란 말로 번역했다. 본래 ‘믿는다’는 말이 가진 의미가 바로 ‘맡긴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굳은 믿음
좀 더 확실하게 번역한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16장 11절에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 기록 되어 있는데 여기 ‘맡기겠느냐’ 이 단어가 ‘피스튜오’이다. 여기는 아주 정확하게 우리말로 ‘맡긴다’라고 번역 되었다. 그러니까 이 ‘믿는다’는 동사의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는 ‘맡긴다’이다. 자기 스스로 설수 없기 때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서 3장 1절-2절에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 ‘맡았다’는 말이 '피스티오’의 수동태로 되어있다. 우리말로는 ‘맡았음’이라고 되어있다. 마치 유대인들이 성경을 자기들이 떠 맡았다, 끌어 앉았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맡겨졌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맡겨졌다’가 본래 뜻이다.
그래서 ‘피스튜오’라는 동사나 ‘아만’이란 동사가 구약이나 신약에 공히 ‘맡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게 성경의 원래 뜻이다. 여기서 약간의 말의 형태가 변형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바뀐 일이 없다. 정리하면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셨다 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믿는다’ 라고 표현 할 때는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그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적으로 머리로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생각과 존재를 거기다가 ‘맡긴다’가 본래 뜻이다.
‘믿음’의 주체는 근원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믿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견고하게 해주시도록 나를 ‘맡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스스로 ‘믿는다(굳게선다)’ 이런 말은 아예 없다. 이게 중요한 진리이다.
----'믿음' 곧 맡기는 것에 대한 실생활에서의 예
어떤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에게 결혼을 앞둔 딸이 있었다. 그 딸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어떤 청년과 결혼을 목표로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남자 청년이 사위 감으로 영 못 마땅했다. 그래서 딸에게 교제를 중단할 것을 종용했는데 그 딸의 입장은 어머니와 전연 달랐다. 너무나 그 남자 청년이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에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며 계속 교제를 했다. 시간이 흘러도 중단하기는커녕 계속하니까 어머니는 딸의 장래가 불안했고 그만큼 딸을 압박했다. 딸도 양보할 수가 없다보니 모녀 사이가 갈등관계로 변해 갔다. 드디어는 어머니도 딸도 양보할 수 없는 상태까지 되자 감정싸움이 심각하게 되어 이 어머니가 이럴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연락을 했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 '그 남자 청년과 딸이 결혼하면 행복할 것인지, 불행할 것인지 하나님보다 어머니가 더 잘 알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니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보다 미래를 더 잘 알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딸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습니까?' '딸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불가능 하다'고 했다. 그러면 더 이상 그 교제를 참견하지 마시고 그 결혼문제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보라고 조언했다.
하나님께 어떻게 맡기는지 가르쳐달라고 해서 기도로 맡기라고 하며 기도할 내용 '아버지 저는 그들의 이후의 미래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대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사이좋던 딸과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제 생각을 버리고, 제가 그들을 헤어지게 하려고 했던 생각과 노력을 버리고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하신 약속의 말씀 속에 들어가서 그 약속의 말씀 속에 계신 아버지 발 앞에 저의 이 염려와 문제를 내려놓고 아버지께 맡기겠사오니 그 교제가 아버지의 뜻이면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아버지 뜻이 아니면 헤어지게 해 주옵소서! 저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이 문제를 맡아 주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시간표대로, 아버지의 방법대로 해결해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 보라고 했다.
1주일 뒤에 다시 연락이 왔는데, 그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불안하고 그 남자 청년을 보면 웬지 밉고, 보기 싫고, 딸에게는 계속 잔소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 되느냐고 질문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한 그러한 상태는 아직은 맡기지 않은 증거이고, 맡겨지면 하나님이 견고케 하시므로 마음에 평강을 주신다고 하면서 예레미야 29장 13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는 말씀대로 전심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할 뿐 아니라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믿고 맡길 수 있도록, 견고히 서도록, 믿음 달라고 다시 기도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
다시 1주일 정도 지났는데 연락이 와서는 '이제는 마음에 평강이 있고, 딸에게도 잔소리가 나오지 않고 그 남자 청년을 봐도 미운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그런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견고케 해 주신 상태인 믿음 곧 맡기는 것이라고 말해주며 이제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문제를 처리하시는지 그때까지 기다려 보시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마귀는 어떤 문제든 염려든 죄든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게 방해 할 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맡긴 일에 대해서 반드시 시험을 하되 그 문제의 해결이 지체될 때 또 다시 염려하게 하여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시험을 한다고 조언했고 그리하여 맡기는 것 곧 믿음을 견고케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이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이 어머니는 주의하고 계속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고 약 3개월 이후에 연락이 왔는데 딸이 그 남자 청년과 헤어졌다고 하며 너무 기뻐하고 감격해 했다.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너무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 '믿음'은 마음으로나 생각에서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제로 행동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맡겨서 하나님이 견고케 해 주셔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우리가 맡기게 되고 더욱 믿음을 받고 더욱 더 많이 맡기게 되어 "믿음에서 믿음으로"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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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호의, 은총, 은혜, 매력, 아름다움 ::: @je(2580, 헨)
== 상대방과의 관계적 친밀의 참된 앎을 통해 다함 없는 기쁨과 만족에 겨워<중심을 기울여 끝까지 특별히 열심 다하여 사랑하기로>결정하여 마음 열어줌 통해 베푸는 특별히 친밀한 은혜...
헨(명남)은 하난(@n"j; , 2603: 호의, 은혜를 베풀다, 자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호의, 은혜, 은총, 매력,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의 총애를 받다' find favor in the eyes of라는 어구로 나오는 43회의 용례와 '주다' give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7회의 용례, 그리고 '얻다' obtain라는 동사와 함께 나오는 3회의 용례(에 2:15, 에 2:17, 에 5:2)를 포함하여 69회 나온다. 따라서 이 단어가 독립적으로 사용된 예는 14회이다.
이 단어는 결코 정관사와 함께 나오거나 복수로 나오는 경우가 없으며, 이 단어가 인칭 접미사를 취하는 경우는 단 한번 창 39:21에서 뿐이다.
이 단어의 대다수의 용례들은 일반적이며 신학적인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동사 하난과는 달리 관심의 초점은 수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의 수령자에게 있다. 이 동사와 그 파생어들이 번번히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편에서 헨은 오직 2회, 즉 시 84:11,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시며"와 신랑의 입술에 머금은 "은혜"에 대해 언급하는 시 45:2에 나올 뿐이다.
헨은 잠언에 13회 나오며, 종종 매력이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미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노이바우어(Neubauer)가 역설하였듯이, 이 어구가 나오는 많은 구절들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예를 들면 왕과 그의 신하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야곱이 창 32:5, 창 33:8, 창 33:10, 창 33:15에서 사실상 자기 자신을 에서의 가신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이 어구를 전문적인 어구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이 어구는 이혼의 정당성에 관한 결정적인 구절, 신 24:1에서 발견되는데, 이 구절은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 사이의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랍비 아키바(Akiba)는 "'만약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만약 그가 그 아내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를 발견한다면", 자기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학적 용법에서, 노아와 모세는 여호와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언급된다(창 6:8, 출 33:12). 요셉으로 전옥에서 은혜를 받게 하시고(창 39:21) 또 이스라엘인들로 애굽인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신(출 3:21, 출 11:3, 출 12:36) 이는 여호와이셨다.
민 11:15에서 모세는 여호와께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라고 말하고 있다.
슥 12:10에서 여호와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 위에 "헨과 타하누님의 심령"을 부어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타르굼은 "자비와 동정의 영"이라고 표기하며, 웅거(Unger)는 이것을 성령으로 간주한다.
슥 4:7에 나오는, 스룹바벨의 성전 완공 때에 외친 환호의 외침은 웅가르에 의해, "이것은 얼마나 은혜로운가(아름다운가)!" what gracefulness(beauty) it has!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셀린(Sellin)은 "잘한다, 잘한다!" Bravo, bravo! 라는 의미라고 주장하였다.
수많은 구절들에서 헨은 '매력' charm이나 호의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적인 인격'을 의미한다. 아히카르(Ahiqar)의 아람어 잠언에는 "사람의 매력은 그의 진실성에 있다"라는 어구가 나온다(ANET, no. 132, p. 429). 이런 호의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혜의 배려이다. 즉 잠 3:4, 잠 13:15, 전 9:11, 전 10:12. 육체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이런 은혜와 매력을 지닌 여자(잠 11:16, 참조: 잠 11:22)는 존경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여자는, 단지 거짓된 매력과 헛된 아름다움만을 간직하고 있는 자와는 달리, 찬양을 받는다(잠 31:30). 나 3:4은 니느웨를 토밧 헨인 창부에 비유하는데, 이 히브리어 어구를 70인역본은 칼레 카이 에피카리스로 번역하며 불가타역본은 스페시오세 엣 그라테(speciosae et gratae)로 번역한다. 그 뜻은 '아름답고 즐거운'이다. NAB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fair and charming; NEB의 "아름답게 보이는" fair-seeming을 참조하라. (참조: E. YAMAUCHI;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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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 חֵן )과 헤세드(חסד ) 와 여호와 언약>>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를 두 가지 들수 있는데 헨( חֵן )과 헤세드(חסד )이다.
헨( חן favour, grace )은 <편파적인> 사랑 혹은 은혜 은총을 의미한다.[여호와 이름으로 맺으신 바 [짝 삼으심의]관계 언약에 근거한, 주님의 눈에서 발견되는 바, 영생 빛 비추심의 <결코 포기함 없는..상대방을 자신처럼 아끼며 귀히 여김의>편파적 사랑...개인적/주관적 내밀한 만남/교통 통한 <이름으로도 앎 = 야다!!...매력-매혹-매료됨>이 그 안에 담겨 있음]
헤세드(חסד kindness mercy, pity)는 [주님 언약에 바탕한, 항구불변의, 지고지선-지복직관의 분명하고 뚜렷한 목적을 가진, (("헨<은총>"에 더하여!!)) 여호와의 열심으로 <반드시> 이루시는 (요1:14에서 말하는, 신약의 <아낌없이 온전히 그분의 모든 것 내어주심의>) 은혜]친절 연민 인자, 긍휼(라함/라훔과 함께 하난/한눈을 더불어 적용하는, 마치 낳은 어미가 친히 낳은 자녀를 불쌍히 여기듯 아껴주며 귀히 여기고 자기를 내어줌의)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그의 언약을 맺은 택한 자들에게 헨과 헤세드를 베푸신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께서 언약을 맺은 자들에게는 편파적인 사랑(은혜)와 다정함과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에서 나타나신 여호와를 이해할 때 헨 과 헤세드를 이해하지 못하면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과의 깊은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헨과 헤세드가 언약이라고 하는 특수한 관계에서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언약이 없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법대로 처리하신다. 다시 말하면 죄를 철저히 징벌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언약이 있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법을 넘어서는 초월한 사랑을 베푸신다.
그러면 구약에는 헨(43회)과 헤세드(52회)가 얼마나 나왔을까?
헨( חן( ֵ과 헤세드( סדֵח( ֵ는
(창세기) 헨- 6:8, 18:3, 19:19, 34:11, 39:4, 47:29, 50:4 헤세드- 24:14,49, 40:14, 47:28,
(출애굽기) 헨-33:12,13,16,17, 34:9 헤세드-20:6, 34:7
(레위기) 헤세드-20:17
(민수기) 헨-11:5,15 32:5
(신명기) 헤세드-5:10
(여호수아) 헤세드-2:12.14
(사사기) 헤세드-12:24 8:35 헨- 6:17
(룻기) 헤세드-1:8 헨 - 2:10
(삼상) 헤세드-15:6 20:8,14 헨-1:18 16:22 20:3,29 25:8 27:5
(삼하) 헤세드-2:6 9:1,3,7 10:2 15:20 헨-14:22 15:25
(왕상) 헤세드-3:6 20:31 헨-11:19
(대상) 헤세드-4:20 19:2
(대하) 헤세드-1:8
(에스더)헤세드- 2:9 헨 - 3:15 5:2 6:8 8:3,5
(에스라)헤세드- 9:9
(욥기) 헤세드-6:14
(시편) 헤세드-18:50 25:10 31:7 32:10 33:5 52:1 61:7 62:12 89:14 103:4 109:16 헨-45:2 84:11
(잠언) 헤세드-3:3 11:17 20:28 헨-1:9 22:1,11 29:23
(전도서) 헨-9:11 10:12
(예레미야) 헤세드-2:2 10:24 32:18 헨-31:2
(호세아) 헤세드 6:6 12:6
(미가) 헤세드-6:8 7:18 7:20
(나훔) 헨- 3:4
(스가랴) 헨-4:7 12:10
헨과 헤세드는 창세기부터 스가랴까지 구약 전반적으로 나와있으며 특히 창세기와 시편에 많이 나와 있다.
창세기6:8에서 가장 먼저 헨( חן( ֵ이 나왔는데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 חן( ֵ를 입었더라"이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악함이 세상에 관영함을 보시고 홍수 심판을 작정하셨다. 그런데 노아는 사악한 세상에서도 의인이며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한다.
노아가 사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But Noah found grace( חן ( ֵin the eyes of the LORD.
노아가 여호와의 눈안에 있는 헨을 발견했기 때문에 의롭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헨( חן( ֵ이 무엇일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편애 편파적 사랑이다.
헨을 히브리어의 알파벳의 의미로 살펴보면 ח)헤트)는 생명이고 ן)눈)은 영원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노아가 여호와의 눈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노아는 여호와안에 임재해 있는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불법과 불의 죄악을 이기고 의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 아래서 여호와를 기다릴 때 여호와의 천사들을 맞이하게 된다. 이 때 아브라함은 급히 맞이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if now I have found favour in thy sight (창18:3)... 이 말은 노아가 여호와의 눈안에서( in the eyes of the LORD ) 은혜(חן ֵfavour )를 발견한 것과 똑같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눈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찾았고 믿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영웅도 아니고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가 그 시대의 길가메쉬의 소망인 영원한 생명을 여호와 하나님의 눈속에서 발견하고 여호와와 언약을 맺게 된다. 역시 노아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물론 구약성경에 나온 헨( חן( ֵ이 모두 다 영원한 생명의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다. 편애 또는 치우친 사랑으로 쓰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그와 언약을 맺은 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은총으로서의 은혜( חן( ֵ는 단순한 편애가 아닌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슥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스룹바벨은 포로 귀환 후에 예루살렘에 제2성전 건축을 주도한 총독이다. 스룹바벨이 제2성전의 머릿돌을 놓을 때에 귀환한 백성들이 다시 세워질 성전에게 은총 은총이 있을 것이라고 외칠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새로 지어질 성전에 있을 은총( חן( ֵ은 무엇일까? 단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편애하시는 사랑일까? 그 은총은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의미한다.
은총( חן( ֵ과 함께 구약성경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단어는 헤세드( סדֵח ( ֵ이다.
헤세드는 은총에 대한 여호와의 열심을 대표하는 단어이다. 헤세드는 여호와의 언약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죽을수 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실 수 있는 열심은 오직 헤세드밖에 없다.
헤세드는 인정을 베품(kindness) 죄사함(mercy ) 불쌍히여김( pity )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언약을 맺은 그의 백성들에게 베풀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행하신다.
여호와의 언약을 맺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하나님이 그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사랑이 바로 헤세드이다.
여호와의 헤세드를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 מרֶג ֹּcompletion)을 아내로 맞이한다.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호세아는 세명의 자녀를 낳게 된다. 첫째는 아들인데 이스르엘인데 그의 운명은 망하는 것이다. 둘째는 딸인데 로루하마인데 긍휼을 받지 못할 것이다. 세째는 다시 아들인데 로암미 내백성이 아니다는 뜻이다.
실상은 알수 없지만 어쩌면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했으면서도 계속 바람을 피워서 다른 남자의 아이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래서 실상은 호세아와 아무런 상관없는 저주받은 아이들을 고멜이 낳게 된 것이다. 고멜은 남의 자식들을 낳아놓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전히 바람피기에 바쁘다.
그런데 더욱더 막장인 것은 고멜이 외간남자랑 바람피면서 입은 멋진 옷이나 악세사리 혹은 먹었던 술과 고기는 다 호세아한데 돈을 받아내서 구입한 것들이다.
이런 구제불능의 여자를 호세아는 버리지 않고 여전히 외간남자들과 놀아나는 술집이나 주막을 찾아다니며 붙잡고 집으로 데려다 놓는다.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설득하고 회유하면서 내가 더 잘해줄께 다른 남자한테 가지 말라고 사정을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네가 나를 진짜 남편으로 부르고 섬길날이 올 것이라고 말을 한다. 호세아는 고멜에게 다시 사랑의 고백을 하는데 네가 나를 버려도 나는 절대로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서약을 한다.
왜 호세아는 더러운 고멜에게 이렇게 목을 맬까? 그 이유는 호세아가 고멜과 맺은 언약때문이다. 결혼 서약때문에 호세아는 고멜을 회유하기 위해 개과천선하여 진정한 아내가 되도록 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런 짓을 하라고 하셨을까? 이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맺은 타락하고 음란한 이스라엘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헤세드를 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여호와의 언약은 아브라함이 원해서 혹인 이스라엘백성들이 원해서 맺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따라 언약을 이스라엘에게 맺어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호세아가 음란한 고멜에게 가서 일방적으로 결혼을 한 것과 같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죄인들과 일방적인 언약을 맺으셨을까? 원래 계약은 군주가 자신에게 유리한 계약을 약한 군주나 신하나 백성에게 조건을 걸어서 맺는 것이다. 그래서 그 군주에게 유리한 조항을 지키지 않을 때 약자는 무자비하게 보복을 당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강자를 위한 계약은 이교도의 세계에서 하나도 이상할 것도 문제될 것도 없다. 세상은 강자만이 살아남고 승자가 정의이고 패자는 불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얼마나 공평하시고 의로우신지 강자를 위한 계약이 아니라 약자가 유리한 계약을 만드시고 맺으셨는데 그것이 여호와의 언약인 것이다. 그러므로 약자를 위한 여호와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약자인 죄인들에게 한없이 비굴해져야 하고 한없이 참고 기다려야 하고 한없이 베풀어야 한다. 바로 약자를 위해 맺은 여호와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헤세드라고 하는 극단의 처방을 내리신 것이다.
호세아가 고멜을 끝까지 참고 기다렸던 것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죄인들을 위해 할수 있는 만큼 그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기다리시면서 헤세드를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지키고 싶으셨던 여호와의 언약은 무엇일까?
렘 34:18 -20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백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3/4
언약( ריתִב ( ְּ은 고기의 두 조각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어두워졌을 때 연기나는 풀무에서 나온 횃불이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감으로 언약이 성사되었다. 다시 말하면 희생짐승의 피를 보겠는냐 아니면 너의 피를 보겠는냐 둘중에 하나 택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희생짐승의 피를 흘려 그 중간을 쪼개어 놓고 여호와의 불이 임함으로 피의 언약을 맺었던 것이다.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거룩한 말씀을 실행치 않고 계속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면 그들의 쪼개어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언약을 맺은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희생의 피를 드리고 그 사이를 쪼개어 놓아야 한다. 이것은 여호와앞에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언약은 피로 죄사함받는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백성들이 죄를 지어도 설혹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어도 반드시 희생의 피로 죄사함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언약의 피를 여호와앞에 가져오기만 하면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무슨 죄를 지었어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받아주신다. 이것이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헤세드이다.
여호와의 언약이 이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과 쪼개어지심으로 나타났다. 이제 우리가 받을 여호와의 언약은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죄사함과 거룩함이다.
만일 우리가 여호와의 언약인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죄사함과 거룩함을 붙잡고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헤세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한없는 사랑 끊임없는 편애 놓치지 않는 긍휼과 은혜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호와의 언약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다. 혹시 우리가 다윗처럼 고범죄를 지어도 혹시 무의식간에 부지중에 허물이 있어도 우리에게 여호와의 언약인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죄를
자백하며 죄사함과 성령의 거룩하심을 다시 회복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고 "끝까지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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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다- 알다, 이해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44회 나오며, 모든 어간에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등을 감각 기관으로 얻은 약간씩 차이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나타낸
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야다는 인간(창 18:19, 신 34:10)과 그의 길(사 48:8, 시 1:6, 시 37:18)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 지식은 심지어 탄생 이전에 시작된다(렘 1:5). 하나님은 또한 들새도 아신다(시 50:11).
야다는 또한 인간의 지식과 짐승의 지식에도 사용되었다(시 1:3).
야다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야다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 (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 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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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다(알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한 것
구약성경이 쓰여진 히브리어에서 "알다"라는 뜻의 단어를 "yadah"라고 한다.
그런데 yadah라는 단어에는 "알다"라는 뜻 외에도 "경험하다" "성관계를 하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다"라는 뜻의 단어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안다"는 것은 "경험한 것"이었다. 돌려말하자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인식론적으로, 머리로, 지성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자신의 조상들이 직접 만났던 하나님이 중요했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이 중요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역사"란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더 나아가 히브리인들에게 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성관계를 같이하는 정도로 서로를 알 때와 같이 속속들이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는 동침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누가 누가를 알지 못하였고"라는 표현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부부가 동침하는 정도로 속속들이 아는 것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안다"는 것의 의미였다.
사실 인식론적으로, 이성적으로 안다는 것은 히브리적 개념이 아니라 헬라적 개념이다.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육체, 가슴(마음),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헬라인들은 이 중 마음(가슴)을 마음(heart)과 생각(mind) 두개로 나누어 생각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동양인들은 마음과 생각을 하나로 여기는 성향이 강하지만 서양인들은 감정, 느낌을 의미하는 마음(heart)과 머리의 지시적, 인지적 행동인 생각을 의미하는 생각(mind)로 명확히 구분하는 경향을 보인다. heart와 mind를 번역할 때 한국인들은 별 차이를 느끼지 않을지 모르나 서양인들의 구분은 명확하다.
로마가 지배할 당시, 헬라적 사고와 세계관이 세계를 지배할 때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헬라적 개념을 동원 하나님을 설명했다. 지성, 이성, 인식론, 즉 mind를 이용한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중세시대를 거쳐 "신학"으로 발전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신학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배우는 학문이 되었다.
나 자신이 신학을 시작하면서 "진정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인식론적으로, 지적으로 혹은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신학자들의 견해와 이론을 안다는 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일까? 이론으로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이나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도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지금까지의 삶을 경험을 통해 볼 때 "내가 아는 하나님"은 되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오직 내가 경험한 하나님 뿐이었다. 내가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나에게 위로해주셨던 하나님, 내가 주를 떠나고자 했을 때 나를 경책하셨던 하나님,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을 때 용서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그러한 순간마다 책에 씌여있는 활자로부터 내 영혼과 삶에 역사하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변모되었다.
우리 시대에 수많은 교회에서 수많은 성경공부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참석해 본 성경공부 중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모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성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나 삶 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을 그러한 성경공부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다. 사람은 가슴이 움직이면 몸도 움직인다. 때로 머리가 움직여서 움직일 때도 있으나 가슴이 타오르면 사람은 행동하게 되어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비판받는 이유는 우리의 성경공부가 가슴은 만지지 못하고 머리만 만지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경험한 하나님은 없고, 머리로 생각하여 알게 된 하나님만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설명한다고 하여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하나님과 믿음에 대한 이성적 비판은 언제나 비판을 위한 도구였지 진정 그 비판의 핵심이 되는 문제가 이성적으로 해소되었다고 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는 진정 "진리"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빼고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고자 우리는 이성적, 논리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납득하거나 동의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론적, 이성적, 논리적 설명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어떠해야 할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화된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그분을 이렇게 만나고 이렇게 그분과 동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나의 말 더 나아가 그런 삶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 본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함이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은 자여! 하나님을 안다 말하지 말라. 하나님을 경험했는지 아닌지는 시험과 환란을 통해 흔들어보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시험이 닥쳐올 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눈앞의 요단강도, 여리고성도 건너게 하실 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머리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던 자들은 시험이 오면 넘어진다. 이성으로 이해한 하나님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분이 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험하자! 골방으로 나아가 무릎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자! 생각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머리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과 영혼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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