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레11.주님백성들에게 합당한 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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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11장  [452.내모든소원기도의제목] [259.예수십자가에흘린피로써] [251.놀랍다주님의큰은혜]


[[주의 백성에게 <세상 사는 동안 관계 맺음에>합당한 먹거리를 분별 제시함]]

 

.... <주께 합당치 못한 모든>부정한 것과 합당한 것들을 잘 분별 선택하여 부정한 것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거룩과 의, 사랑과 빛(은혜와 진리)이신> 주 임재 앞에서 언행심사의 근본동기를 잘 살펴서 <원수 마귀와 세상의 미혹/유혹에, 오도되고-오해/착각하여 자행자지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나 의도적으로> 부정해지는 것을 거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는 모든 더러움-허물과 죄들마다 즉각적으로 주 이름 불러 자복-회개하고 보혈로 처리받아, 오직 말씀과 성령따라 Q께 대해 절대적으로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를<번제의 삶> 살아냄 통해 그분의 몸 건축하는, 몸의 생활 살기를 바라신다!!

.... (우리 몸은 우리가 먹는 것으로, 즉 소화-분해-흡수-동화과 정을 거쳐서 조성되기 때문에..."네 친구를 삼가 잘 사귀면서" "어느민족 누구게나"), 세상의 악영향을 차단하고 날마다 이김 위해 적극적-소극적 취사선택의 기준을 제시하고 계심....거듭난 생각의 분별력을 발휘하여 <여기에 제시하신 기준들(이제 거듭난 각 사람의 일상에서 친구 관계 맺을 수 있는 영혼의 됨됨이와 자세, 세상을 이김의 능력 구비 여부에 대한 기준임), 곧 주님 보시는 판단 기준을 따라 선택함으로써> 믿는이들이 세상을 살아나감에 있어서 <주를 참되게 본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을 통해 교회 산출 원하고 계심..


@***부정함uncleanness = <[거룩-의-사랑-빛]신성한 생명이신> 거룩하신 Q 접촉이 차단됨/불가능해짐(<사랑과 빛이신>거룩한 불의 강도가 약화되고 심지어 꺼질 염려도 있음) = 생명 공급 끊김 = 생명 결핍-사망을 경험케 함...= 격리시킴이 필요한 경우는, 공동체에 끼칠 수 있는 악영향을 차단코자 함이며 동시에 돌아보아 자복-회개-<허물과 죄들 범함 결과>언약 파기로 인해 Q을 마음을 아프게/근심케 하였음을 인식/자각함 안에서 애통함>


@타고난 혼 생명으로 살던 자, 구주 믿고 영접함 인해 그 영은 <택정하심 원칙 발동> ...<구주께 접붙이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역사와 효능, 약속과 영광의 모든 것을 믿는이에게 공급하시며> 믿는이의 <부활한> 영에 성령 내주하심으로써 그리스도 분배를 시작하여 영원까지 이르게 하심...(구주를 오늘의 속죄제와 속건제로 취하고, 앙망하는 자마다, 말씀을 열어 소제이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함 인헤 번제이신 생명 그리스도로 살게 하시고, 주로부터 이 땅에 보냄 받은 의미를 깨닫고 Q과 사람을 화목케 하는 자됨 인해) 영을 적시고 회개한 양심과 마음의 눈에 빛을 주심으로써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발동시키심 ...그리스도의 소망--믿음의 능력--완전한 사랑으로 살도록 함께 하심.


.... @[오직 은혜와 진리]@객관적 진리 말씀(풍성) 먹기 

==> <주 앙망 경청 교통> 주관적 체험(깨달음) 통한 내재화/조성됨(충만) =: 그리스도로(은혜....길-진리-생명-빛 : 주님의 믿음-소망-사랑 부으심따라) 살기

....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조성됨...먹고-소화-흡수-동화-조성됨..(이제 영적 건강을 위해 특별히 고려해야 하는 것들은 부정-주검-사망을 피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도록 자라나기 위해, 여호와께 성결/정결-생명 고양의 적극적 만물을 택하는 지혜가 필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중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먹을만한 [긍정적-적극적]것들

3.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 <쪽발>분별력 있는 행동 + <새김질>Q말씀을 깊이 음미하며 받아들임

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unclean)

5.  사반(shaphan..바위 너구리 혹은 바위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 <비늘>세상의 영향에 대해 [밝혀진 마음 눈의 영적 생명의 분별력으로 잘 분별하여]무분별한 수용 거절하고, 오직 살아 생동하는 일편단심-일사각오의 참 지식-참 믿음으로 세상 풍조 거슬러 <지느러미>진리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며 활동함.

10.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detestable..구역질나는)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13.  ○<날개(주님 향해 날아오르는, 초월하는 생명)가 있고 생명가진 씨앗을 모이로 먹는 새는 식용 가능>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죽은 사체 먹는>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4.  말똥가리와 말똥가리 종류와

15.  까마귀 종류와

16.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7.  올빼미와 가마우지와 부엉이와

18.  흰 올빼미와 사다새와 너새와

19.  황새와 백로 종류와 오디새와 박쥐니라

20.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로되

21.  다만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 세상을 초월하는 생명 안에서 살고 움직임 + 세상에서 달아나 그들 자신을 지킬 수 있음

22.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팥중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23.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부정한 주검(접촉 주의)

24.  ○이런 것은 너희를 부정하게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5.  그 주검을 옮기는 모든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26.  굽이 갈라진 모든 짐승 중에 쪽발이 아닌 것이나 새김질 아니하는 것의 주검은 다 네게 부정하니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27.  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다 네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28.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29.  ○땅에 기는 길짐승 중에 네게 부정한 것은 이러하니 곧 두더지와 쥐와 큰 도마뱀 종류와

30.  도마뱀붙이와 육지 악어와 도마뱀과 사막 도마뱀과 카멜레온이라

31.  모든 기는 것 중 이것들은 네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모든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32.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주검이 나무 그릇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자루에든지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33.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 그릇을 깨뜨리라

34.  먹을 만한 축축한 식물이 거기 담겼으면 부정하여질 것이요 그같은 그릇에 담긴 마실 것도 부정할 것이며

35.  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화로이든지 깨뜨려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36.  샘물이나 물이 고인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그 주검에 닿는 것은 모두 부정하여질 것이요

37.  이것들의 주검이 심을 종자에 떨어지면 그것이 정하거니와

38.  만일 종자에 물이 묻었을 때에 그것이 그 위에 떨어지면 너희에게 부정하리라

39.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때에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40.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의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41.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42.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것들은 가증함이니라

43.  너희는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 때문에 자기를 가증하게 되게 하지 말며 또한 그것 때문에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하지 말라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46.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길짐승에 대한 규례니

47.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AMP.Lev.11

===Laws about Animals for Food

1 The Lord spoke again to Moses and Aaron, saying to them, 

2 “Speak to the children of Israel, saying, ‘Among all the animals which are on the earth, these are the animals which you may eat. 

3 You may eat any animal that has a divided hoof [that is, a hoof split into two parts especially at its distal extremity] and chews the cud. 

4 Nevertheless, you are not to eat these, among those which chew the cud or divide the hoof: the camel, because it chews the cud but does not divide the hoof; it is [ceremonially] unclean to you. 

5 And the [a]shaphan, because it chews the cud but does not divide the hoof; it is unclean to you. 

6 And the hare, because it chews the cud but does not divide the hoof; it is unclean to you. 

7 And the swine, because it divides the hoof and makes a split hoof, but does not chew the cud; it is unclean to you. 

8 You shall not eat their meat nor touch their carcasses; they are unclean to you.

9 ‘These you may eat, whatever is in the water: whatever has fins and scales in the waters, in the seas, and in the rivers, these you may eat; 

10 but whatever does not have fins and scales in the seas and in the rivers, of all the teeming life in the waters, and of all the living creatures that are in the waters, they are [to be considered] detestable to you. 

11 They shall be [b]hated things to you. You may not eat their meat; you shall detest their carcasses. 

12 Everything in the water that does not have fins and scales is detestable to you.

===Avoid the Unclean

13 ‘These you shall detest among the birds; they are not to be eaten, for they are [c]hated things: the eagle and the vulture and the buzzard, 

14 the kite, every kind of falcon, 

15 every kind of raven, 

16 the ostrich, the nighthawk, the sea gull, every species of hawk, 

17 the little owl and the cormorant and the great owl, 

18 the white owl, the pelican, the carrion vulture, 

19 the stork, all kinds of heron, the hoopoe, and the bat.

20 ‘All winged insects that walk on all fours are detestable to you; 

21 yet of all winged insects that walk on all fours you may eat those which have legs above their feet with which to leap on the ground. 

22 Of these you may eat: the whole species of migratory locust, of bald locust, of cricket, and of grasshopper. 

23 But all other winged insects which are four footed are detestable to you.

24 ‘By [contact with] these you will become unclean; whoever touches their carcasses becomes unclean until the evening (dusk), 

25 and whoever picks up any of their carcasses shall wash his clothes and be unclean until the evening. 

26 Concerning all the animals which divide the hoof, but do not have a split hoof, or which do not chew the cud, they are unclean to you; whoever touches them becomes unclean. 

27 Also all animals that walk on their paws, among all kinds of animals that walk on four legs, are unclean to you; whoever touches their carcasses becomes unclean until the evening, 

28 and the one who picks up their carcasses shall wash his clothes and be unclean until the evening; they are unclean to you.

29 ‘These also are unclean to you among the swarming things that crawl around on the ground [and multiply profusely]: the mole, the mouse, and any kind of great lizard, 

30 the gecko, the crocodile, the lizard, the sand reptile, and the chameleon. 

31 These [creatures] are unclean to you among all that swarm; whoever touches them when they are dead becomes unclean until evening. 

32 Also anything on which one of them falls after dying becomes unclean, whether it is an article of wood or clothing, or a skin, or a sack—any article that is used—it must be put in water, and will be unclean until the evening; then it becomes clean. 

33 As for any earthenware container into which any of these [crawling things] falls, whatever is in it becomes unclean, and you shall break the container. 

34 Any of the food which may be eaten, but on which [unclean] water falls, shall become unclean, and any liquid that may be drunk in every container shall become unclean. 

35 Everything that part of their carcass falls on becomes unclean; an oven, or a small stove shall be smashed; they are unclean, and shall be unclean to you. 

36 Nevertheless a spring or a cistern (reservoir) collecting water shall be clean; but whoever touches one of these carcasses shall be unclean. 

37 If a part of their carcass falls on any seed for sowing which is to be sown, it is clean; 

38 but if water is put on the seed and a part of their carcass falls on it, it is unclean to you.

39 ‘If one of the animals that you may eat dies [of natural causes], whoever touches its carcass becomes unclean until the evening. 

40 And whoever eats some of its meat shall wash his clothes, and be unclean until evening; also whoever picks up its carcass shall wash his clothes, and be unclean until the evening.

41 ‘Now everything that swarms on the ground is detestable; it is not to be eaten.

 42 Whatever crawls on its belly, and whatever walks on all fours, and whatever has many feet among all things that swarm on the ground, you shall not eat; for they are detestable. 

43 Do not make yourselves loathsome (impure, repulsive) by [eating] any swarming thing; you shall not make yourselves unclean by them so as to defile yourselves. 

44 For I am the Lord your God; so consecrate yourselves and be holy, for I am holy. You shall not make yourselves unclean with any of the swarming things that swarm or crawls on the ground. 

45 For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from the land of Egypt to be your God; therefore you shall be holy, for I am holy.’”

46 This is the law regarding the animal and the bird and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in the waters and everything that swarms on the earth, 

47 to make a distinction between the [ceremonially] unclean and the [ceremonially] clean, and between the animal that may be eaten and the animal that may not be eaten.

===Footnotes

Leviticus 11:5 A small, shy fury animal (Hyrax syriacus) found in the peninsula of the Sinai, northern Israel, and the region around the Dead Sea; kjv coney, original NASB rock badger.

Leviticus 11:11 Lit detestable things.

Leviticus 11:13 Lit detestable things.

-----------NASB

1.  The LORD spoke again to Moses and to Aaron, saying to them,

2.  "Speak to the sons of Israel, saying, 'These are the creatures which you may eat from all the animals that are on the earth.

3.  'Whatever divides a hoof, thus making split hoofs, [and] chews the cud, among the animals, that you may eat.

4.  'Nevertheless, you are not to eat of these, among those which chew the cud, or among those which divide the hoof: the camel, for though it chews cud, it does not divide the hoof, it is unclean to you.

5.  'Likewise, the rock badger, for though it chews cud, it does not divide the hoof, it is unclean to you;

6.  the rabbit also, for though it chews cud, it does not divide the hoof, it is unclean to you;

7.  and the pig, for though it divides the hoof, thus making a split hoof, it does not chew cud, it is unclean to you.

8.  'You shall not eat of their flesh nor touch their carcasses; they are unclean to you.

9.  'These you may eat, whatever is in the water: all that have fins and scales, those in the water, in the seas or in the rivers, you may eat.

10.  'But whatever is in the seas and in the rivers, that do not have fins and scales among all the teeming life of the water, and among all the living creatures that are in the water, they are detestable things to you,

11.  and they shall be abhorrent to you; you may not eat of their flesh, and their carcasses you shall detest.

12.  'Whatever in the water does not have fins and scales is abhorrent to you.

13.  'These, moreover, you shall detest among the birds; they are abhorrent, not to be eaten: the eagle and the vulture and the buzzard,

14.  and the kite and the falcon in its kind,

15.  every raven in its kind,

16.  and the ostrich and the owl and the sea gull and the hawk in its kind,

17.  and the little owl and the cormorant and the great owl,

18.  and the white owl and the pelican and the carrion vulture,

19.  and the stork, the heron in its kinds, and the hoopoe, and the bat.

20.  'All the winged insects that walk on [all] fours are detestable to you.

21.  'Yet these you may eat among all the winged insects which walk on [ all] fours: those which have above their feet jointed legs with which to jump on the earth.

22.  'These of them you may eat: the locust in its kinds, and the devastating locust in its kinds, and the cricket in its kinds, and the grasshopper in its kinds.

23.  'But all other winged insects which are four-footed are detestable to you.

24.  'By these, moreover, you will be made unclean: whoever touches their carcasses becomes unclean until evening,

25.  and whoever picks up any of their carcasses shall wash his clothes and be unclean until evening.

26.  'Concerning all the animals which divide the hoof, but do not make a split [hoof], or which do not chew cud, they are unclean to you: whoever touches them becomes unclean.

27.  'Also whatever walks on its paws, among all the creatures that walk on [all] fours, are unclean to you; whoever touches their carcasses becomes unclean until evening,

28.  and the one who picks up their carcasses shall wash his clothes and be unclean until evening; they are unclean to you.

29.  'Now these are to you the unclean among the swarming things which swarm on the earth: the mole, and the mouse, and the great lizard in its kinds,

30.  and the gecko, and the crocodile, and the lizard, and the sand reptile, and the chameleon.

31.  'These are to you the unclean among all the swarming things; whoever touches them when they are dead becomes unclean until evening.

32.  'Also anything on which one of them may fall when they are dead, becomes unclean, including any wooden article, or clothing, or a skin, or a sack-- any article of which use is made-- it shall be put in the water and be unclean until evening, then it becomes clean.

33.  'As for any earthenware vessel into which one of them may fall, whatever is in it becomes unclean and you shall break the vessel.

34.  'Any of the food which may be eaten, on which water comes, shall become unclean; and any liquid which may be drunk in every vessel shall become unclean.

35.  'Everything, moreover, on which part of their carcass may fall becomes unclean; an oven or a stove shall be smashed; they are unclean and shall continue as unclean to you.

36.  'Nevertheless a spring or a cistern collecting water shall be clean, though the one who touches their carcass shall be unclean.

37.  'And if a part of their carcass falls on any seed for sowing which is to be sown, it is clean.

38.  'Though if water is put on the seed, and a part of their carcass falls on it, it is unclean to you.

39.  'Also if one of the animals dies which you have for food, the one who touches its carcass becomes unclean until evening.

40.  'He too, who eats some of its carcass shall wash his clothes and be unclean until evening; and the one who picks up its carcass shall wash his clothes and be unclean until evening.

41.  'Now every swarming thing that swarms on the earth is detestable, not to be eaten.

42.  'Whatever crawls on its belly, and whatever walks on [all] fours, whatever has many feet, in respect to every swarming thing that swarms on the earth, you shall not eat them, for they are detestable.

43.  'Do not render yourselves detestable through any of the swarming things that swarm; and you shall not make yourselves unclean with them so that you become unclean.

44.  'For I am the LORD your God. Consecrate yourselves therefore, and be holy; for I am holy. And you shall not make yourselves unclean with any of the swarming things that swarm on the earth.

45.  'For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from the land of Egypt, to be your God; thus you shall be holy for I am holy.' "

46.  This is the law regarding the animal, and the bird, and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in the waters, and everything that swarms on the earth,

47.  to make a distinction between the unclean and the clean, and between the edible creature and the creature which is not to be ea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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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1장 (개요)

사도 바울은 의식법이란 “예물과 제사”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히 9:9, 10). 그리고 이것이 지금까지 본 레위기가 다룬 율법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의식적 부정에서 깨끗이 “씻는 것”에 관한 법도 율법에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바로 그런 의식의 율법을 11장에서부터 다루는데, 이것은 고기나 그 밖의 음식을 구별해 주는 율법이다. 

즉 이것은 깨끗하니까 먹어도 되고, 저것은 부정하니까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 따위를 알려 주는 율법이다.

만일 “사람 고기(육체)라는 한 종류의 고기”만 존재한다면, 자연적인 인간은 고기를 먹으려고 한다는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금수나 다름없는 사람이 아니고는 사람 고기를 먹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고기를 먹지 말라는 율법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짐승의 고기라는 또 다른 종류의 고기”가 있으니 바로 그것에 대한 율법을 여기서 다룬다(1-8). 

또한 “물고기”(9-12), “새”(13-19), 그리고 “기어다니는 동물”에 관해 다루고 있다.

 기어다니는 동물은 두 종류로 나눈다. 기어다니되 날개 달린 것(20-28)과 배로 기어다니는 것(29-43)이다.

또한 본 장에서는 생물에 관한 일반적 법칙을 내포하고 있는 율법과 그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4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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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고기(레 11:1-8)

아론은 하나님의 집 대제사장으로 위임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고, 공동 서약자로서 함께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아론에게도 말씀하신 것은, 제사장들이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에,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셨다(창 9:13). 

그 전에는 땅의 소산물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허용하신 자유를 여기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는 제한하신다. 

물론 그들도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온갖 것을 다 먹을 수는 없다. 부정한 것으로 여겨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 있었으며, 정결하다고 여겨 먹도록 허락하신 것이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한 율법은 아주 자세하고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율법이 필요한 것인가? 왜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민족들처럼 하나님의 온갖 피조물을 자유롭게 이용하면 안 되는가?

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 분의 뜻 자체가 율법이 되기에 충분하듯이, 그 분의 뜻 자체가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하나님의 뜻은 곧 그 분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제단의 여러 예식뿐 아니라 개인의 식탁의 일상적 일에서도 당신 백성들의 복종을 시험하셨다. 

그래야 그들은 자신이 한 권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특정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인간의 복종을 시험하셨다.

Ⅱ. 부정하다고 금지된 음식 대부분은 실제로 건강에 별로 좋지 않은 것들이요, 먹기에 부적합한 것들이었다. 

또한 우리가 충분히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짐승들, 예를 들면 토끼나 돼지 따위도 그 나라 사람들의 몸에는 해로웠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현명하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 자식들을 병들게 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음식은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몸의 주인이기도 하심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육적 쾌락을 위해 건강을 해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죄악임을 깨달아야 한다.

Ⅲ. 하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이 신앙생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가르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물론 이런 율법이 있기 전에도,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전통적으로 지켜 내려온 히브리인의 음식법이 있었을 것이다. 

애굽인과 히브리인은 함께 식사하려 하지 않았으며(창 43:32), 홍수 이전에도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이 있었다(창 7:2). 

이방인들은 신앙의 여러 가지 문제와 함께 이런 구별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율법을 통해 유대인들에게는 분명히 정리된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식사법을 가짐으로써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웃 민족과 가까워지지 않을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인의 모형이 될 수 있었다. 

영적 이스라엘인은, 이런 사소한 일뿐 아니라 기질과 생활을 신령하게 해야 하고, 맑은 정신의 단일성을 지켜야 하며, 이 세상에 동화되면 안 된다.

더 관찰하면서 얻을 교훈이 있다. 

즉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가증하게 여기라고 하신 대부분은, 그 자체가 이방인들이 음식으로 여기기보다는 신으로 여기거나 제물로 삼아 매우 존귀하게 여기던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부정한 것이요, 가증한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그런 고기를 먹으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함은 물론, 이방인들이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건히 증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돼지(나중에 이방인들은 돼지를 비너스에게 바쳤다), 미네르바의 부엉이, 주피터의 독수리, 헤카테(천지와 하계를 다스리는 그리스 여신)의 개 등 이런 모든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짐승에 대해 일반적인 법칙이 있었다. 즉 발굽이 둘인 동시에 새김질하는 짐승만 정결한데, 이 율법을 반복해서 언급할 때에(신 14:6) 그런 짐승들을 자세히 언급한다. 

거기에 보면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이 다양하므로, 그들은 이런 제한에 아무 불평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법에 의하면 돼지나 토끼 등의 고기는 부정하다. 우리는 잘 먹는 고기지만, 이스라엘은 먹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 의해, 어떤 고기든 먹어도 좋다고 허락받은 그 자유에 감사해야 한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딤전 4:4),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행 10:28)고 가르쳐 준다.

혹자는, 이 율법은 이스라엘을 구별하려는 것이며, 적어도 그런 뜻이 암시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김질하는 것”이란 영적 양식을 소화시키는 것이므로, 명상과 마음의 속사람이 드리는 기도의 행동을 상징하며, “갈라진 굽”은 정의와 사랑의 행실, 그리고 좋은 교제의 행동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자다. 두 가지, 즉 마음속의 인자한 사랑과 생활 속의 선한 행실이 항상 병행해야 한다. 둘 중에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분명 정결하지 못한 것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부정한 것으로서 금지된 피조물 중에서도 돼지고기를 가장 끔찍하게 여기고 싫어했다. 많은 유대인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려다가 안티오커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돼지고기는 아마 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과 자녀들에게 돼지고기에 대해 특별히 반감을 갖게 했는데, 돼지고기를 본래의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고 “이방의 것”이라고 불렀다. 이방인들은 분명히 우상을 숭배하는 데 돼지고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으며”라는 말씀이 있다(사 65: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돼지고기를 완전히 금하심으로 그들이 이웃 민족에게 돼지고기의 악한 사용법을 배우지 못하게 하시려 한 것이다.

이 부정한 짐승들을 금지한 것에는 그 짐승들의 악한 성질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뜻이 있다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 

우리는 돼지처럼 흙탕물에 뒹굴고 더러워져서는 안 되며, 산토끼처럼 소심해서도 안 되고, 또한 집토끼처럼 땅바닥에만 붙어 살아서도 안 된다. 

이것은 바로 명예롭게 창조된 인간이 멸망할 짐승들처럼 스스로 변질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다. 또한 그런 고기는 먹지 말라고 했을 뿐 아니라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 

죄에서 떠나고자 하는 자들은 죄악의 모든 유혹도 살펴야 하며, 그것을 바라거나 그 곳에 이르는 길도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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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와 새(레 11:9-19)

Ⅰ. 물고기에 대한 일반적인 율법.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어도 되며, 그 나머지 물고기만 금하셨다(9, 10절). 

옛날 사람들은 물고기를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여겼기 때문에 금식하는 날에는 물고기를 먹지 못했으며, 물고기만 먹는 것을 금욕의 예로 삼은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물고기에 대해서는 당신 백성에게 많은 제한을 가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당신의 종들에게 필수품뿐 아니라 즐거움까지 주시는 주인이기 때문이다. 

금지된 물고기에 관해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다(10-12절). 그것은 “너희는 그것들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야 하며 먹지도 말고 근처에 가지도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부정한 것은 가증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에게만 가증한 것이었음을 주목하라. 이웃 민족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증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유대인들은 특권으로 인해 존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특권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특정한 제한(transeunt cum onere)이 있었다.

영적 이스라엘도 이와 마찬가지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양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복음의 언약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존귀하게 되었으니,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복음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근신해야 한다.

Ⅱ. 새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법칙이 없고, 부정하므로 삼가야 할 새들의 구체적 목록만 주어졌다. 

이는 나머지 새들은 모두 먹어도 된다는 의미다. 본문에서 언급한 새에 대한 히브리 단어의 진정한 뜻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애를 썼다. 

그러나 그 중에는 여전히 불확실한 단어들이 있다. 특정하게 일부 지방에만 있는 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율법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우리는 그 율법이 금하는 새들에 대해 깊이 연구해야 한다. 

아마 우리가 저 세상에 가면, 여기에 언급된 새들의 성질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며, 그 때는 새들의 특성에 알맞게 이름을 지어 준(창 2:20) 아담의 지식에 감탄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율법이 폐지되었고 그 교훈이 상당히 사라졌으므로, 여기에서 금하는 새들의 일반적인 성질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1) 맹금이 있다. 곧 매와 독수리 따위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잔인하고 야만한 것을 모두 증오하며, 피를 흘리거나 약탈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기를 바라신 것이다. 

맹금의 밥이 되는 비둘기는 사람의 식물로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합당했다. 그러나 그것을 잡아먹고 사는 매나 솔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가증한 것이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들의 상태가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상태보다 훨씬 낫다.

(2) 고독한 새가 있다. 곧 올빼미나 당아새(시 102:6), 까마귀(사 34:11)처럼 어둡고 한적한 곳에 사는 새들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우울하고 슬픈 정서나 깊은 고독을 지닌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불결한 것을 먹고사는 새가 있다. 

곧 뱀을 먹고사는 황새 및 벌레를 먹고사는 새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부정한 것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부정한 것에 빠져 있는 자들과 교제하는 것도 삼가야 한다.

(4) 애굽인이나 이방인들이 예언할 때에 쓰던 새가 있다. 

길조로, 혹은 흉조로 여긴 새가 있는데, 이방의 예언자들은 이 새들이 높이 나는 사실을 대단히 중히 여겼다. 

이렇게 쓰이는 새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증스러운 것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그들은 이방인들의 방법을 배우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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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다니는 동물(레 11:20-42)

본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관한 율법을 다루고 있다.

Ⅰ. 파리·말벌·꿀벌 등 날아다니는 곤충에 관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먹지 말라고 금지했는데(20절), 사실상 먹기에도 부적합한 것들이다. 

그러나 메뚜기를 먹는 것은 허용되어 있다(21, 22절). 당시 메뚜기는 그 지방에서는 별미로 먹던 것으로 세례 요한도 사막에서 메뚜기를 먹고 살았다.

Ⅱ. 땅에 기어다니는 동물에 관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금하셨다(29, 30, 41, 42절).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란 저주받은 뱀으로 뱀과 인간은 적대 관계에 있는데(창 3:15), 그 적대 관계가 이 율법으로 유지된 셈이다. 

또한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은 땅의 티끌을 먹고 살기 때문에 사람의 음식으로는 부적합하다.

Ⅲ. 이 모든 부정한 동물들의 사체에 관한 것이다.

1. 그런 사체와 닿은 것은 모두 그 날 저녁까지 부정한데(24-28절), 이 율법은 자주 반복되어서 나온다. 

그것은 이 금령이 율법 창시자의 뜻이라는 것 외에는 이를 특별히 금하는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 해도 율법이 금하는 것은 모두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율법을 경홀히 여겨서 일부러 접촉한 것이 아닌 경우에는, 양심을 더럽히는 것으로나 하나님께 대한 죄로 여기지 않았다. 

동물의 사체를 치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만지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에 닿으면, 의식상 부정하게 된다. 

저녁까지는 회막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떤 성물도 먹지 못하며, 심지어는 이웃 사람들과 다정히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부정은 저녁 때까지만 이어지는데, 이것은 의식상의 모든 오염은 이 세상 저녁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끝난다는 사실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밤마다 새롭게 그 날의 죄를 회개하여 죄와 접촉한 자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버림으로써 부정한 가운데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개나 말 따위의 부정한 동물이라도 살아 있을 때에 접촉하면, 그것 때문에 의식상 부정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죽으면 만지지 말아야 하는데, 그 고기는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만지지도 말아야 한다(창 3:3).

2. 그 사체가 그릇이나 그 밖에 어느 것에든 떨어지면, 저녁까지 부정하다고 했다(31절). 그 그릇이 토기면 깨뜨려 버려야 한다(33절). 

이것은 비록 일상생활에서라도 무엇이든 더러운 것은 주의 깊게 삼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소에 있는 그릇들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항아리까지도 “여호와께 성결해야” 한다(슥 14:20, 21). 

이런 경우에 관한 율법들은 매우 철저하므로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죽은 이나 쥐가 어디에 떨어지든 그것이 떨어진 물건은 부정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일 화덕이나 질탕관이면 모두 깨뜨려 버려야 했다(35절). 그 예외 사항도 역시 매우 까다로웠다(36절 이하).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부단히 율법에 관심을 두게 하고, 정확히 순종하는 것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이 짐스러운 의식들에서 우리가 벗어났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더욱 중요한 문제까지 신중을 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의식상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그들이 자신의 몸과 집안 살림살이를 지키고 깨끗이 했듯이, 우리는 죄에 오염되지 않도록 우리의 귀중한 영혼을 열심히 보호해야 하며, 죄에 오염되었을 때에는 빨리 깨끗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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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법(레 11:43-47)

Ⅰ. 이 율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이 율법의 목적은 단순히 음식물의 목록을 보여 주려는 것이거나 식사법 따위를 지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율법에 의해 그들 자신이 거룩하고 성결해야 함을 가르치고자 하셨다(44절).

1. 그들은 이 율법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먹는 음식이 모두 한결같을 수 없듯이 행위도 모두가 같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일상적인 행위라도 그 율법에 따라서, 즉 “하나님께 합당하게”(요삼 1:6) 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율례에 따라 해야 한다.

또 그것을 통해 자신을 이웃 모든 민족과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성별된 백성임을 알아야 하며, 이방인처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워야 한다. 

즉 이 모든 법은 성결을 위한 것으로, 이런 “세상의 초등 학문”은 저들을 교육시키는 가정교사요, 지도자였다(갈 4:2, 3). 

이런 초등 학문은 아담에게 있었던 첫 성결(거룩함)의 회복이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최상의 상태가 될 우리의 성결을 위한 보증이다. 

이런 성결이 없으면 아무도 주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모든 규례의 위대한 뜻이며, 그 규례를 통해 우리는 거룩하고 성결하게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매우 하찮아 보이는, 음식에 관한 율법조차도 그렇게 숭고한 뜻을 지향했던 것이다.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는 것은 신약은 물론 구약에도 있는 하늘의 율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43절)라는 경고가 있는데 가증한 죄와 벗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가증하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눈에 가증하게 보이는 자는 진실로 불행한 자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가증하게 만드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가증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유대 작가들은 이 율법이 결혼이나 그 밖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방인과는 일체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한다(신 7:2, 3). 

마찬가지로 그런 도덕은 우리도 준행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엡 5:11)는 금령이 있다. 

또한 마음과 생활에서 참된 성결이 없으면,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다”(사 66:3). 

돼지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면 돼지의 피를 하나님 제단에 바치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크게 진노하시겠는가!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Ⅱ. 이 율법을 주신 이유. 이 율법은 오직 율법 창시자에게서 연유한 것이요, 우리는 모든 행동에서 복종을 보임으로써 그 분께 경의를 표해야 한다.

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44절). 

이것은 곧 “너희는 순결한 복종을 통해 내게 존경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기에 그 분이 무엇을 명령하든 우리는 실행할 수밖에 없으며, 그 명령이 아무리 우리의 마음과 다르더라도 지켜야 한다.

2. “내가 거룩하니”(44절).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되기를 바란다면, 그 분이 거룩하므로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그 분의 거룩은 곧 영광이기에(출 15:11) 시편 기자는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 93:5)라고 노래했다. 이처럼 강조되는 이 위대한 계명은 비록 폐기된 율법(의식법을 가리킴)의 한가운데 있지만, 복음의 계명에서도 인용하고 인정한다(벧전 1:16). 

곧 이 모든 율법의 규제는, 우리가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벧전 1:14).

3.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45절). 

이것이 바로, 그들이 지금까지도 특별한 호감으로 유별나게 존중하고 있는 이 특이한 율법에 즐거이 복종해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민족에게보다도 귀중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기에, 그들에게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Ⅲ. 이 율례의 결론.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46, 47절). 곧 이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율례로 주신 것으로,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그들의 율례가 된다. 

그러나 복음 아래 있는 우리는 하늘에서 베드로에게 전해진 한 음성이 이 율례를 분명히 폐지했음을 안다(행 10:15).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골 2:21, 22) 다른 규례들과 더불어, 이 율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사실상 이미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식물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고전 8:8)는 것과, 무엇이든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은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마 15:11)을 확신한다.

1.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런 멍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아무것도 거부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 자유 안에 굳게 서자(갈 5:1). 그래서 “식물을 폐하라”(딤전 4:3, 4)고 주장하며 모세가 선포한 율법을 다시 살리려고 하는 자들의 교훈을 조심하자.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선한 피조물을 삼가 조심해 적절히 사용하자. 

하나님의 율법에서 자유로워졌어도 스스로 삼가도록 하자. 우리의 식탁이 덫이 되는 일이 없도록 음식을 함부로 먹지 말자.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또한 진찬을 탐하지 말라”(잠 23:2, 3). 

본성은 작은 것에 만족하며 은총은 더욱 작은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정욕은 아무것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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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

[1-8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솨판 )[바위 오소리(badger)(BDB, KB, NASB), 토끼 종류(coney)(KJV, NIV)]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먹을 만한 정결한 생물과 먹어서는 안 될 부정(不淨)한 생물을 구별하게 하셨다. 정결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의 구별은 노아 시대에 벌써 있었다(창 7:2; 8:20).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라”고 말씀하셨었다(창 7:2). 

땅의 모든 짐승들 중에 먹을 만한 생물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모든 것이었다. 낙타와 사반(아마, 바위 오소리)과 토끼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부정하고,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지만 새김질을 못하므로 부정하다고 간주되었다. 이런 것들의 고기는 먹지 말고 그 사체(死體)도 만지지 말아야 했다. 이것들은 부정한 것이었다.

[9-12절] 물에 있는 모든 것 중 너희의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무릇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것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강이나 바다나 물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민물고기든지 바다고기든지 물고기와 조개 종류들 중에 먹을 만한 것은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조기나 민어 같은 것들이 표준적인 생선이다. 수중 생물들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가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사체를 가증히 여겨야 했다. 그러면 게, 새우, 조개 종류들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 것 같다.

[13-19절]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네쉐르 )[수리](eagle)(KJV, NASB, NIV)와 솔개(페레스 )[독수리](vulture)(NASB, NIV)와 어응(오즈니이야 )[검은독수리(NIV, KB, ≑BDB), 말똥가리(buzzard)(NASB)]과 매(다아 )[솔개(kite)(NASB), 붉은 솔개(NIV, KB)]와 매 종류(아이야 )[송골매(falcon)(NASB,BDB), 검은 솔개(NIV, KB)]와 까마귀(raven)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타크마스)[수컷 타조(BDB), 올빼미 종류(NASB, KB)]와 갈매기(gull)와 새매(hawk)종류와 올빼미(코스 )[작은 올빼미](KJV, NASB, NIV)와 노자(솰라크 )[가마우지(cormorant), 바다까마귀](BDB, KB, KJV, NASB, NIV)와 부엉이(얀슈프)[큰 올빼미](KJV, NASB, NIV)와 따오기(틴쉐멧 )[흰 올빼미](KB,NASB, NIV)와 당아(카아스 )[펠리칸(pelican)(BDB, KJV, NASB), 사막 올빼미(NIV)]와 올응(라캄 )[썩은 고기를 먹는 독수리](carrion-vulture)(BDB,KB, NASB)과 학(stork)과 황새 종류(아나파 )[왜가리](heron)(KJV, NASB,NIV, KB)와 대승(두키팟 )[후투티](hoopoe)(NASB, NIV, KB, BDB)과 박쥐(bat)니라.

새들 중에 가증하여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은 주로 다른 생물들을 잡아먹거나 죽은 사체들을 먹는 맹금류들이다.

[20-23절]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곧 그 중에 메뚜기(아르베 ) 종류와 베짱이(살암 ) 종류와 귀뚜라미(카르골 ) 종류와 팟종이(카가브 )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가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단지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먹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메뚜기, 베짱이, 귀뚜라미, 팟종이 등 메뚜기 종류(BDB)이었다.

[24-26절] 이런 유는 너희를 부정케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무릇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무릇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 쪽발이 아닌 것이나 새김질 아니하는 것의 주검은 다 네게 부정하니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이런 유는 사람을 부정케 하는 것이며 누구든지 이것들의 사체(死體)를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다.

[27-28절] 네 발로 다니는 모든 짐승 중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다 네게 부정하니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는 그 옷을 빨지니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그것들이 네게 부정하니라.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은 사자나 곰이나 늑대 같은 것들일 것이다.

[29-30절] 땅에 기는 바 기는 것 중에 네게 부정한 것은 이러하니 곧 쪽제비(콜레드 )[족제비(weasel)(BDB, KJV, NIV), 두더지 (mole)(NASB, ≑KB)]와 쥐(mouse)와 도마뱀 종류(차브 )[큰 도마뱀 종류](NASB, NIV, ≑BDB)와 합개(아나카 )[흰 족제비’ferret)(KJV, BDB), 도마뱀 종류(gecko) (KB,NASB, NIV)]와 육지 악어(코아크 )[카멜리온(chameleon)(KJV), 악어(NASB),큰 도마뱀(monitor lizard)(NIV)]와 수궁(레타아 )[도마뱀(NASB, KJV), 벽도마뱀(wall lizard)(NIV)]과 사막 도마뱀과 칠면석척(틴솨멧 ) [카멜리온](chameleon)(BDB, KB, NASB, NIV)이라.

[31-40절] 모든 기는 것 중 이것들은 네게 부정하니 무릇 그 주검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주검이 목기(木器)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부대에든지 무론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물에 담그라.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할 것이며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 그릇을 깨뜨리라. 먹을 만한 축축한 식물이 거기 담겼으면 부정하여질 것이요 그 같은 그릇의 마실 만한 마실 것도 부정할 것이며 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질탕관이든지 깨뜨려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샘물이나 방축물 웅덩이는 부정하여지지 아니하되 그 주검에 다닥치는 것만 부정하여질 것이요 이것들의 주검이 심을 종자에 떨어질지라도 그것이 정하거니와 종자에 물을 더할 때에 그것이 그 위에 떨어지면 너희에게 부정하리라.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이 죽은 때에 그 사체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41-43절]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너희는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들, 즉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은 다 가증하므로 먹지 못하였다. 즉 뱀, 도마뱀, 지네 종류가 여기에 포함된다.

[44-47절]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레위기에는 ‘거룩’이라는 말이 약 87회나 나온다.

본장의 법은 몇 가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첫째로, 위생적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의학이 충분히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위생적 이유에서 어떤 생물을 먹지 못하게 하셨던 것 같다. 오늘날 지식에 의하면, 사반이나 토끼의 피 속에 있는 바이러스는 사람에게 야토병을 줄 수 있다고 하며, 돼지는 몇 가지 기생충들의 매개체로서 촌충들을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돼지고기로부터 감염될 수 있는 병으로 선모충병과 주혈원충병 등이 있다고 한다. 또 게나 새우 같은 것들은 썩는 고기를 먹으며 전염병을 쉽게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로, 이방인들과 구별하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 법은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인들이 그들의 우상숭배적 종교의식에서 먹었던 것들을 금함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을 구별하는 뜻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이런 의식법들이 다 폐지되었다(골 2:14-17).

셋째로, 상징적 의미가 있어 보인다. 땅의 짐승 중에서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것은 안정적인 초식동물로서 남을 해치지 않고 사납지 않은 것을 상징하는 것 같다. 발바닥으로 다니는 것들, 사자나 곰이나 늑대 등은 남을 해치며 할퀴는 것들이다. 물고기들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은 물의 흐름을 거슬러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나쁜 영향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다. 새들 중에도 다른 것을 잡아먹는 새들을 부정하다고 한 것은 남을 해치지 않아야 함을 상징할 것이다.

까마귀나 쥐나 도마뱀이나 뱀 종류는 다 불결한 것이거나 인류 초기로부터 혐오하는 것들이다. 뱀은 사탄을 상징하는 혐오물이었다. 

요약하면, 이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악하고 사납고 불결한 것들로부터 구별되기를 원하심을 나타낸다. 45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된 것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하고(약 1:27) 악한 친구들과의 교제가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줄 알고 악한 친구들과의 교제를 삼가야 한다(고전 15:33).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풍조를 거슬러야 하고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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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1 - 소제-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족을 위한 그리스도 (1)(( 레위기 2:1))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소제와 괸련되어 있는 레위기 2장을 살펴보기 시작하겠다.
Ⅰ. 소제와 번제의 관계
우리가 소제와 번제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A.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해 사신 것을 강조하며 소제는 그리스도의 인생과 매일의 행함을 강조함
번제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분의 삶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을 위해 사신 것에 있다. 
소제의 강조점은 그분의 삶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으며, 그분의 죽음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인생과 매일의 행함에 있다.
B. 번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이심을 강조하고 소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심을 강조함
번제는 그리스도가 의(義)-하나님의 의-이신 것을 강조한다. 소제는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하나님 앞에서 의로운-것을 강조한다. 
번제 안에서 우리는 의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번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義)이심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소제는 그리스도가 의로우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의(명사-righteousness)와 의로운(형용사-righteous)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의 자체이며 또한 그분이 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 죄(명사-sin)와 죄 있는(형용사-sinful)이라는 단어에 있어서도 원칙은 동일하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가 죄, 즉 우리 전체가 죄 자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분은 죄가 되셨다(고후 5:21).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은 단지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닌, 전체적으로 죄가 된 인격이었다. 
그리스도는 죄가 되셨기 때문에, 그분은 인류의 죄를 지고 가셨으며(요 1:29), 인격화 된 죄는 정죄되었다(롬 8:3). 이것은 속죄제이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리스도는 또한 속건제이시다. 속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을 담당하신 문제이다(벧전 2:24, 히 9:28). 
한편으로, 속죄제로서 그리스도는 죄가 되셨고 다른 한편으로, 속건제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다.
타락한 사람들로서 우리는 단지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죄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종종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나는, 『주여 나는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죄 자체입니다. 나에게는 죄 밖에 없습니다.』라고 그분께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소제 안에서 우리는 의로운 그리스도, 모든 방면에서 올바르신 분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만족이 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만족케 하는 향기를 드릴 수 있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극도로 만족케 할 수 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향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유형의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의가 아니다. 우리는 죄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번제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죄인 우리가 의가 될 수 있는가? 
우리 자신 안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분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그것은 가능해진다.
사역의 초기에, 성질에 대해 문제를 가진 결혼한 젊은 형제 자매들이 종종 어떻게 그들이 좋은 남편 또는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는지를 내게 물었다. 
그들은 성질을 내기를 원치 않았으나 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패배되었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성질을 이기는지를 알려주기를 원했다. 
내가 젊어서 사역하고 있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를 사는 것에 대한 이상을 보지 못했다. 
이상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내가 읽은 책들의 영향력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주님을 사랑하고, 많이 기도하며, 성경 구절들을 암송할 필요가 있다고 알려주곤 했다. 그들은 내 충고를 받아들여 그것을 따르려 했지만 그것은 통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는 항상 실패였다. 
그들은 성질을 내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결국 그들은 성질을 내고야 말았다. 그들의 체험이나 나의 체험 또한 로마서 7장에 있는 바울의 체험과 같았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8下-19). 
오늘날 어떤 성도들이 그들의 성질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나는, 『당신은 당신이 성질 자체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성질을 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의 성질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또 다른 인격, 곧 성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신 분을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의가 없다. 그분은 이 우주 안에 있는 그(the) 의이시다. 우리에게 그분이 없다면 우리는 의를 가질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다(롬 10:3). 
그리스도를 떠나서 의를 찾는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번제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바로 그 의이시며, 소제로서 그분은 가장 의로운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곱고, 온전하시고, 완전하시며, 의로우시다.
Ⅱ. 고운 가루
A. 소제의 주요 요소
소제는 고운 가루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고운 가루가 소제의 주요 요소이다. 이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곱지만 우리의 인성은 거칠고 조잡하다. 우리가 외적으로는 온유하며 좋아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 우리는 거칠다. 
인류 가운데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온유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고운 가루이시다. 그분에게는 거칠음이 없다. 
그분의 인성은 모든 방면에서 곱고, 온전하며, 균형잡혀 있고, 올바르시다. 어떤 각도에서 보든지-앞뒤, 위 아래, 좌우 어디에서나 그분은 옳으시다.
B. 많은 과정을 통과한 밀로부터 산출됨
소제의 고운 가루는 많은 과정들 즉 심겨지고, 땅에 묻혀 죽고, 자라고, 비바람과 서리를 맞고, 태양에 쪼인 다음 익고, 탈곡되고, 체질되고, 갈아지는 과정들을 통과한 밀로부터 산출된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사 53:3)으로 만들었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다양한 고난들을 상징한다. 그분의 인생 속에서 그리스도는 슬픔 위에 슬픔을 맛보셨다.
C. 고움, 공평함, 부드러움, 온유에 있어서 완전하며 조금도 과함이나 부족함 없이 전적으로 균형잡혀 있음
고운 가루는 고움, 공평함, 부드러움, 온유에 있어서 완전하며 조금도 과하지 않고 부족함도 없이 전적으로 균형잡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생과 매일의 행함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시다. 그분의 인성과 우리의 천연적이고 타락한 인성과는 비교할 수 없다.
Ⅲ. 기름
A. 하나님의 영을 상징함
소제의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눅 4:18, 히 1:9). 그리스도는 사람이시며, 사람으로서 그분은 뛰어난 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에게는 또한 하나님의 영인 신성한 요소도 있다. 신성한 요소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다.
소제로서 그리스도는 기름으로 충만하시다. 우리는 그분에게 「기름이 발라졌다(oiled)」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기름과 연합(mingling)되셨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셨다는 뜻이다.
B. 고운 가루 위에 부어짐
소제에 있어서 기름은 고운 가루 위에 부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 위에 부어지신(anointing) 것을 상징한다(마 3:16, 요 1:32).
Ⅳ. 유향
A.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함
유향은 달콤한 냄새가 나며 사람들에게 아주 즐거운 느낌을 갖게 해준다. 예표에 있어서, 소제 안에 든 유향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의 그분의 향기를 상징한다.
B. 고운 가루 위에 부어짐
유향은 고운 가루 위에 부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고난으로부터 표현되어 나온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마 11:20-30, 눅 10:21 참조). 
그분의 인생의 과정 동안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분의 부활의 향기가 그분이 당한 고난들로부터 표현되어 나왔다. 
비록 그분이 매우 많은 고난을 당하셨을지라도, 그분은 달콤한 향기, 그분의 부활의 향기가 스며 나오게 하셨다.
소제에는 세 가지 요소들-고운 가루, 기름, 유향-이 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연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이 주로 이 세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었음을 볼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계속적으로 이 세 가지 요소들 안에서-그분의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부활을 표현함 안에서-사시며 행하셨다.
그리스도는 사실상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그분의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것에 관하여 우리는 주 예수께서는 그분의 생애의 바로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뿐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십자가 아래 있는 생애였다. 그분은 항상 죽임 당하셨으며, 가죽이 벗겨지셨으며, 각이 뜨이셨다. 여섯 시간 동안 지속된 그분의 십자가는 그분이 죽임당하시고, 가죽이 벗겨지시고, 각 뜨이신 것의 총체였다. 주 예수님은 날마다 십자가 아래 사셨기 때문에, 그분은 항상 그분의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으로부터 부활을 표현하셨다.
만일 우리가 복음서들을 읽을 때 이것을 유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그분이 어떤 유형의 사람이셨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최고의 최상의 인성을 지니신 사람이셨다.
이 인성에 기름이 더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인생에서 그분은 고난들이 아닌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부활은 우주 안에 있는 유향, 향기로운 향기, 달콤한 맛이다. 어떤 것도 이러한 부활의 향기처럼 달콤하지 않으며 향기롭지 않다. 이것이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생이다.
주 예수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조차도, 그분은 신성과 연합된 인성의 생활, 부활을 표현하는 생활을 사셨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온 한 무리의 병정들과 대리인들이 예수를 찾아 동산에 왔다. 그분은 그들에게 두번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으며(요 18:4, 7) 그 때마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대답했다(5, 7절). 주 예수님은 그 때 그들에게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다(8절). 「이 사람들」은 그분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분의 거짓 제자의 배신과 병정들의 체포를 당하시면서도, 그분은 여전히 그분의 제자들을 돌보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의 어머니를 돌보셨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요 19:26-27上). 여기서 우리는 다시 주님의 고난받음으로부터 표현되어 나오는 부활을 본다.
환경이 어떻다 할지라도 주 예수께서는 고난의 삶이지만,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표현하는 삶을 사셨다. 
모든 장소, 매 시간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 안에서의 삶과 그분의 부활을 표현하는 삶을 사셨다. 이것이 소제이다.
번제는 하나님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번제는 하나님의 음식이며, 그분만이 그것을 먹도록 되어 있다.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 태워진다는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진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번제를 소멸하는 불을 하나님의 「입(mouth)」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번제는 하나님의 음식인 반면, 소제는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음식으로서 작은 부분을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와 소제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것과 우리의 만족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 만족을 나누기 위해 소제를 드리는 것, 이것이 실제의 경배이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며, 소제이신 그리스도로 우리가 만족되며 이러한 만족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실제의 경배 안에서 번제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올라가며 소제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러한 경배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며, 우리는 우리가 누린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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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2 - 소제-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족을 위한 그리스도 (2)(( 레위기 2:2-13))
소제의 또 다른 방면들을 살펴보기 전에 나는 번제와 소제를 비교하고자 한다.
번제의 주된 항목은 피이다(1:3, 11). 소제의 주된 항목은 기름과 유향이다(2:1). 기름은 섞고 기름 붓기 위한 것이며, 유향은 소제 위에 놓이기 위한 것이다.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인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하다. 
아무런 실수도 범하지 않고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하고 온전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전적으로, 끝까지 절대적인 사람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절대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 
이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은 면에 있어서 죄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절대성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우리들 중의 몇몇은 상당한 정도로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완전히 철저히 절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가 이 땅 위에 사셨을 때만큼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다. 
사복음서에서 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도 그분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는 구속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속죄는 또한 우리와 하나님간의 상황, 곧 화목이 없는 상황을 화평케 하기 위한 것이다. 
속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상황을 누그러뜨리며 어떤 문제들을 해결한다. 
속죄를 위해서 우리는 번제이신 그리스도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분을 체험한 것만큼만 번제로서 그리스도를 드릴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번제이신 그리스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그분의 체험들 안에서 체험해야 한다.
속죄에는 피가 필요하다. 오직 동물들만이 번제가 되기에 적합한데, 이는 동물들만이 속죄를 위해 뿌려질 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물은 생축 중의 소나 염소나 양 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여야 했다.
소제에서는 동물의 생명에 속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식물의 생명, 곧 밀과 밀알과 밀 이삭들이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식물의 생명은,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산출, 번식, 증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소제에서 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기름과 유향을 본다. 기름은 소제에 부어져서 그것과 연합되며, 유향은 소제 위에 뿌려진다. 
피와 기름과 유향에 관해서 우리는 번제와 소제와의 매우 의미심장한 차이점을 본다.
제물들은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 누림을 갖기 위한 하나님과 우리 모두를 위한 음식이다. 
번제는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며, 그분만이 그것을 드신다. 하나님의 「입」은 번제를 태우는 불이며, 그 불은 계속 밤낮으로 탄다. 번제를 드시는 신성한 드심은 아주 질서정연하다. 이것은 태우기 위해 뜨여진 각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지는 것으로 시사되고 있다(레 1:7-8). 하나님은 질서정연하게 번제를 드시는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신다.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드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속죄를 위한 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제를 먹을 수 없다.
우리는 번제는 먹을 수 없지만 소제의 일부분은 먹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소제를 드릴 때,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은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살라져야」 했으며, 이것은 「화제라 여호와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다(2:2). 여기서 우리는 가루와 기름의 일부분과 모든 유향이 하나님의 음식임을 본다. 
하나님은 반드시 소제를 먼저 맛보고 누리셔야 했다. 고운 가루와 기름은 있으나 유향이 없는 소제의 나머지 부분은 제사장들을 위한 음식이 되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의 봉사는 거룩하며 그들의 음식 또한 거룩하다. 
만일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사장의 음식, 곧 우리의 거룩한 봉사에 걸맞는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 음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소제는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족이신 그리스도이다. 먼저 하나님이 그분의 분깃인 소제의 부분을 누리며, 그런 다음에 우리의 누림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누림은 공동의 누림(co-enjoyment), 곧 하나님의 누림과 함께한 누림이다.
Ⅴ. 모든 유향과 고운 가루의 부분과 기름의 부분이 단 위에서 불살라짐
모든 유향과 고운 가루의 부분과 기름의 부분은 단 위에서 불살라진다(2:2). 
이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하고, 완전하고, 그 영으로 충만되고, 부활로 적셔진 생활의 상당한 부분이 하나님의 누림을 위하여 음식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상징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사람의 생활은 탁월하였으나, 이 탁월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것이 그분의 속성과 미덕들의 높은 수준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수준은 얼마나 높은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이전에 인류 가운데 그러한 수준은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고, 연합되고, 충만된 하나님-사람이시다. 
더우기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부활을 표현하셨는데, 심지어 바리새인들에게 화내시고(마 23:1-36),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요 2:12-17)조차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땅 위에 사셨던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의 탁월함은 그분의 인간성과 그분의 신성함에 있었다. 즉 그것은 그 영 안에 있고 부활과 함께한 그분의 인성과 신성 안에 있었다. 이것이 사복음서가 그분의 탁월함 안에서 그분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다. 그분은 고우시고, 고르시며, 완전히 균형잡히신 분이며 어떤 것도 부족하거나 지나치지 않으셨다. 
더우기 그분은 그 영으로 충만되신 분이며 부활로 적셔진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행하셨을 때 항상 그 영으로 충만되셨으며 부활로 적셔지셨다.
A. 기념물로
고운 가루와 기름의 일부분과 함께 유향은 그것의 만족케 하는 효능으로 인하여 기념물로 태워졌다. 
기념물은 만족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로 만족될 수 있으나 그것들을 기념물로는 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높은 만족감을 누릴 때, 우리는 그 만족을 기념물로 삼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누림이 기념물이 될 정도로 그리스도를 누리신다.
B. 만족케 하는 향기로
만족케 하는 향기는 향기로운 냄새, 즉 안식과 평강과 기쁨과 누림과 완전한 만족을 주는 향기이다. 
소제의 풍성-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그분의 탁월하고, 완전하고, 그 영으로 충만하고, 부활로 적셔진 생활-은 하나님께 안식과 평강과 기쁨과 누림과 완전한 만족을 주는 향기이다.
Ⅵ. 소제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을 위한 것임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레 2:3). 
이것은 하나님이 누리신 후에 우리도 우리의 음식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먼저 하나님은 만족케 되시기 위해 그분의 분깃을 받으셔야만 했다. 남은 것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분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우리의 음식으로 누릴 수 있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레위기 2장의 예표를 고찰해 본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의 예표는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상징하는 한 그림이다.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기름 섞인 고운 가루, 곧 기름과 연합된 고운 가루를 산출하기 위해 기름과 가루가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운 가루를 먹는 것은 기름을 먹는 것이며 또한 연합된 것을 먹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름과 가루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레위기 2장의 그림은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우리가 누리는 길은 그 영에 의해서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요한복음 6장은 이것을 증거한다. 이 장에서 주 예수님은 자신을 먹을 수 있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51절).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라고 했다. 63절에서 주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을 먹는 길은 그 영에 의해서임을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그 영에 의해 예수님을 먹고자 한다면, 오늘날 그 영은 말씀 안에 합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접촉할 때, 말씀 안에 합해져 있고 혹은 체현된 것을 접촉한다. 
예수님을 먹고, 예수님을 취하고, 예수님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접촉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접촉할 때 그 영이 그곳에 계신다.
신약에 따르면, 거룩한 영은 우리 사람의 영과 연관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주님의 말씀을 접촉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으로 접촉하는 방법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우리의 눈과 생각을 훈련하여 신문을 읽을 때처럼 말씀을 읽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눈과 생각을 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외적으로는 말씀을 접촉하나 실제적으로는 그 영을 접촉하는 것이다. 그 영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 합해져 있는 그 영을 접촉하기 위해 우리의 영을 훈련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과 삶을 먹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가?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 우리의 영을 훈련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그분의 영을 접촉하며 이 영은 그분의 인성과 연합되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높은 인성, 곧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영양 공급받는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주 예수님의 사람의 생활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그런 생활을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대하여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 우리의 영을 훈련함으로써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취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며 그 영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양공급이신 예수님을 공급한다. 
우리는 우리가 먹은 것의 어떠함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더 예수님으로 조성된다. 
우리가 주님의 사람의 생활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생활은 우리의 것이 된다. 자연히 우리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음식이신 예수님을 누리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생활을 하게 한다.
천 오백 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한 책, 곧 성경을 준비하셨으며 그 책을 우리 손에 쥐어주셨다. 
그분은 또한 그분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영은 안에 있으며 책은 밖에 있다. 함께 더하여진 이 두 가지는 바로 인생 안에서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린다. 이것이 소제이다.
Ⅶ. 불을 통하여
A. 모든 소제는 단 위에서 불살라짐
모든 소제, 곧 화덕에 구운 것이나, 번철에 부친 것이나, 솥에 삶은 것 모두는 단 위에서 불살라진다(레 2:4-9). 
이것은 음식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인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불을 통과해 가셨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소제를 접촉할 때, 시험하는 불을 접촉한다.
B. 불사르는 불은 태우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며, 그것은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열납하기 위한 것임
레위기 2장의 불사르는 불은 태우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며, 그것은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열납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그분의 음식으로 드려지는 소제의 분깃은 불살라졌다. 즉 그것은 불로 태워졌다. 이것은 그분의 심판이 아니라, 그분의 열납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을 만족케 하는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열납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불로 소제를 태우심으로써 그것을 열납하신다.
Ⅷ. 기름으로 연합됨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레 2:4-5). 
이 기름 섞음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령과 연합됨을 상징한다(마1:18下). 이 연합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과 연합됨을 상징한다.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 사람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하신 사람이시다. 그분의 인성은 하나님과, 그 영과 연합되었다. 그 영은 바로 그분의 존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접촉할 때, 그 영을 접촉한다.
레위기 2장의 연합과 관련하여, 시편 92편 10절 하반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다비의 새 번역은 기름을 붓다라는 말에 대해 『엄밀히 말하면, 「연합되다」이다』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더우기 레위기 2장 4절의 「섞다(mingled)」에 대해 다비의 주석은, 『「혼합되다」, 「연합되다」라는 의미이다.』라고 말한다
시편 92편 10절에는 단지 헌신으로서 기름 부음 받는 것뿐 아니라, 그의 전존재가 그것으로 활력을 찾게 하고 강화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로 하여금 힘을 쏟을 수 있게 한다. 때문에 그것은 「신선한 기름」이다. 그러므로 이 연합은 사람의 내적인 부분과 성분들을 활력화시키고 강하게 한다.
기독교 초기 시대에는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는 문제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연합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즉 사람이 신격화되는 정도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함축한다고 생각했다. 
연합에 관한 가르침을 이와 같이 이해했던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정죄했다. 결국, 신학자들은 감히 연합이라는 단어를 쓰거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관하여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오늘날 우리는 이 용어를 사용할 만큼 담대함을 갖는가? 우리가 연합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성경에 그와 같은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는 것에 관한 우리의 가르침은 신약의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구약의 예표로 확증(確證)된다.
레위기 2장의 예표, 그림에 따르면 소제는 고운 가루와 기름을 기초로 한다. 4절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라고 말한다. 
기름은 신성을 나타내고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낸다. 
고운 가루와 기름이 섞인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높여졌음을 가리킨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하며,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을 뿐 아니라 <만유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 이해...믿는 이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란 그 믿는 이 자체가 그리스도를 산다 함이요, (심지어 그 전존재 안에 오직 그리스도만 남기까지 (바룽 안에) 충만하여진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바울은 죽고 그 대신) 사신다 함이다!!, 또한 그분은 머리시요 성도마다는 몸의 지체이다....이렇게 이해한다면 오해의 여지는 없게 되리라> 바울이 그리스도였다
어떤이들은 이 말을 듣고 내가 바울의 말을 왜곡한다고 반박하며 나를 비난할 것이다. 그들은,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말했으며 때문에 그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과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대해,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서 어떻게 그 사람을 살 수 있는가? 바울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살 수 있었겠는가?』라고 대답할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 있었을 때 주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시고 이어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행 9:4-5). 
바울은 자신이 스데반과 다른 제자들만을 핍박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자신이 사실상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그분의 일부분으로 여기셨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9장 4절의 「나」는 주 예수님과 모든 믿는이들을 포함하는 단체의 사람이다. 
모든 믿는이들은 그리스도와 하나이며 그것은 단지 결합이나 통합 안에서의 하나가 아니라 연합 안에서의 하나이다.
주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기 위해 성육신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시다. 당신은 그분의 신성이 그분의 인성과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떤 연합됨도 없이 단지 그분을 하나님-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통합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연합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분이 하나님-사람으로서 사실 수 있었는가?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분의 인성과 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제 삼의 어떤 것을 산출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나님의 성분과 사람의 성분이 연합되신 주 예수님이 제삼의 본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이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이해하는 연합이 아니다. 우리는 웹스터의 세 번째 국제 사전이 「연합」을 「함께 묶거나 합쳐진 것으로 결합된 그 구성 성분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데 동의한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성분이 연합되는 데 있어서 그 성분들은 식별할 수 있으며 제삼의 성분은 산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며, 하나님의 성분과 사람의 성분을 갖고 계시며 분명히 제삼의 성분을 갖고 계시지 않는다. 이것은 신약에 계시되어 있으며 레위기 2장의 예표에 묘사되어 있다. 이 예표는 연합을 분명하게 묘사한다. 기름은 고운 가루와 연합하고 고운가루는 기름과 연합한다. 이 두 가지 성분들이 연합되었지만(섞였지만), 각 성분들의 본질은 식별할 수 있게 남아 있으며 제삼의 성분은 산출되지 않는다. 이것이 연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제이신 그리스도의 탁월함은, 그분의 신성과 그분의 인성 모두에 있다. 그분의 신성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갖고 계시며 이 하나님의 속성들은 그분의 사람의 미덕 안에서, 그분의 사람의 미덕을 통하여, 그분의 사람의 미덕으로 표현된다. 이 때문에 그분은 모든 사람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와 도덕을 갖고 계신다. 신성한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그분의 어떠함에 사람의 미덕을 갖고 계시는 사람이신 그분의 어떠함이 더해졌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이며, 이것은 신성과 인성의 연합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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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3 - 소제-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족을 위한 그리스도 (3) (( 레위기 2:4-7, 13-16))
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소제에 관한 더 전진된 방면들을 살펴볼 것이다.
Ⅸ. 누룩이 없음
소제에는 누룩이 없다(4-5절上).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찌니』(11上). 
((부풀게 하는, 일종의 야망처럼))누룩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죄나 소극적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고전 5:6-8).
Ⅹ. 발효하는 꿀이 없음
소제에는 발효하는 꿀이 없다(레 2:11).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천연적인 애정이나 천연적인 선함이 없음을 상징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두 가지 문제가 나를 괴롭힌다. 하나는 야심으로, 나는 이것을 누룩으로 간주한다. 다른 하나는 천연적인 애정인데, 이것을 꿀로 여긴다. 
어떤 성도들은 서로를 위하는 그들의 사랑이 주님의 계명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요 13:34). 사실상 그들의 사랑은 천연적인 애정이며 주님의 계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 수 있다.
야심과 천연적인 애정보다도 교회 생활과 주님의 사역과 주님의 일을 손상시키는 것은 없다. 
인도자들의 야심은 누룩이며 누룩은 타락을 가져온다. 천연적인 애정은 꿀이며 꿀은 부패를 가져온다.
야심과 애정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한 형제가 특별한 야심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라. 그의 야심이 성취된다면 그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나 야심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그는 불행을 느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모두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야심을 성취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을 그는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야심과 천연적인 애정으로부터 우리가 정결케 될 수 있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어떤 성도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잘 대해주든지, 우리와 얼마나 가깝든지, 우리와 얼마나 오래 함께 있었든지,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친구<편당>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성도들을 동일하게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야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 천연적인 애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 애정은 부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소제에는 누룩이나 꿀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누룩이나 꿀이 섞이지 않은 고운 가루이신 그리스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해주시어 우리 생활에 누룩이나 꿀이 없도록 구할 필요가 있다.
ⅩⅠ. 소금과 함께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13절). 
여기서의 소금은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 곧 부패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언약의 소금이다. 이 소금은 맛을 내며, 병균을 죽이고, 부패하지 않게 보존한다.
소제에 있는 소금에 대한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소제에서 그 영(기름)과 그리스도의 부활(유향)과 그리스도의 인성(고운 가루)을 보았으나 아직 그리스도의 죽음은 보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죽음, 곧 십자가는 소금으로 상징된다. 그러므로 소제의 소금은 그리스도의 죽음, 곧 십자가를 말한다.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야심과 천연적인 애정이 있는 까닭은 소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족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적용하는 것이 부족하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충분한 소금을 가지고 있다면, 야심과 천연적인 애정은 없어져 버릴 것이다. 십자가가 여기에 있는 한, 소금이 여기 있으며, 소금이 여기 있는 한, 병균은 죽을 것이다. 십자가가 여기에 있는 한, 야심과 천연적인 애정은 없어질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모두의 체험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야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 천연적인 애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주님의 죽음의 처리함만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참된 겸손과 참된 사랑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결케 될 것이며, 주 예수님이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에 사셨던 그와 같은 삶, 곧 누룩과 꿀이 섞인 것이 아닌 소금으로 가득찬 삶을 살 것이다.
ⅩⅡ. 고운 가루로 만든 병(餠)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으로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4절). 
고운 가루로 만든 병(餠)은 하나님과 그분의 섬기는 자들을 위한 음식이 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고운 가루는 형태가 없지만 고운 가루로 만든 병은 단단하며 확실한 형태가 있다. 이 병은 그리스도의 더 강한 체험을 가리킨다. 
우리는 고운 가루, 곧 형태가 없는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으며 또한 병, 곧 단단하며 확실한 형태를 가진 어떤 것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
A. 소제에 있어서 가장 큰 항목
고운 가루로 만든 병(餠)은 소제에 있어 가장 큰 항목이다. 그러므로 병(떡)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데 있어서의 가장 큰 분깃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것으로 소제를 체험하는 데 있어서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본다. 당신은 어떤 크기의 분깃을 가질 수 있으며, 또 다른 성도는 그와 다른 크기의 분깃을 가질 수 있다.
B. 구멍이 나거나 뚫어짐
고운 가루로 만든 병은 구멍이 나거나 뚫어진다. 구멍을 내거나 뚫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고난받으신 고난의 어떤 면을 상징한다. 
주님의 인생에는 각종 많은 고난들이 있었으며, 병이 구멍이 나거나 뚫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 중의 한 면을 상징한다.
C. 누룩이 없음
고운 가루로 만든 병은 무교병이었다. 누룩이 없다는 것은 죄나 어떤 소극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D. 기름과 섞음
고운 가루로 만든 병에 기름을 섞는다. 기름을 섞는다(연합한다)는 것은 성령과 연합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항상 그분의 신성과 연합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체험과 누림 안에서 소제는 하나님의 영과 분리될 수 없다.
ⅩⅢ. 전병
소제는 또한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이 될 수 있다(4下).
A. 속이 비어 있어 먹기에 좋음
전병은 속이 비어 있어서 먹기에 좋다. 이것은 어린 믿는이들에 의해 누려진 바 되고 체험된 인성 안 에 계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병(餠)이신 그리스도는 강한 자들에게 유익하고 전병이신 그리스도는 어린 자에게 유익하다. 그분은 모든 세대들에게 유용하신 분이다. 그분이 그렇게 먹을 수 있는 분임을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B. 누룩이 없음
또, 누룩이 없다는 것은 소제이신 그리스도는 죄나 어떤 소극적인 것도 없으심을 상징한다.
C. 기름으로 바름
전병은 기름으로 발라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으신 분이며, 그분 위에 쏟아부어진 성령을 갖고 계심을 상징한다.
ⅩⅣ. 번철에 부친 소제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찌니 이는 소제니라』(5-6절). 
이런 종류의 소제에 있어서 고운 가루는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밀가루 반죽이 아니라 단지 번철 위에 부친 가루이다.
A. 누룩이 없음
또 다시, 누룩이 없다는 것은 죄나 소극적인 것이 없음을 상징한다.
B. 기름과 섞음
고운 가루에 물을 섞은 것이 아니라 기름을 섞었다. 이 섞음을 인해 밀가루 반죽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소제를 한 조각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다시, 기름으로 섞는 것은 성령과 연합됨을 상징한다.
C. 조각으로 나눔
이 소제는 조각으로 나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완전하나 결코 전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항상 나뉘어진다. 
이 나뉘어짐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통과하셨던 또 다른 고난을 말한다.
D. 조각들 위에 기름이 부어짐
조각들 위에 기름이 부어졌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으신 것을 상징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신 것에 대한 그림을 본다. 먼저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나셨다(마 1:18, 20). 
이것은 그분이 그 영으로 연합되신 문제이다. 그런 다음, 삼십 세에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으셨다. 그분이 물로 침례받으신 후 성령이 그분 위에 부어졌다
(마 3:16). 그러므로 이 작은 소제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체험하신 두 방면을 볼 수 있다.
ⅩⅤ. 솥에 삶은 소제
『네가 솥에 삶은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찌니라』(레 2:7). 
솥에 삶은 고운 가루는 또 다른 고난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이 소제의 다른 모든 항목들은 번철에 부친 고운 가루의 소제의 의미와 동일하다.
ⅩⅥ. 푸른 이삭
14 절부터 16절까지에서 우리는 소제의 또 다른 범주-푸른 이삭-를 본다.
A. 들에서의 수고로 인한 추수의 산출
푸른 이삭은 들에서의 수고로 인한 추수의 산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수고는 푸른 이삭을 가진 추수를 산출함을 상징한다. 푸른 이삭은 매우 부드럽고, 매우 신선하며 매우 맛있다.
B. 푸른 이삭의 첫열매로서
푸른 이삭의 첫열매는 부활 안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선한 누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땅으로 심겨진 밀알이셨으며 부활 안에서 자라 푸른 이삭을 산출하셨다(요 12:24). 이 푸른 이삭은 그분의 부활의 첫 열매이다.
C. 찧어짐
레위기 2장 14절은,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라고 말한다. 「찧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
가로 처리받음을 의미한다. 푸른 이삭은 찧어져야 한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없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소제이신 그리스도에 의한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십자가를 피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찧어지는 체험을 할 필요가 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없어져버리는 체험이다.
D. 소제 위에 기름을 부음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찌니』(15절). 소제 위에 부어진 기름은 그리스도의 인성 위에 부어진 성령을 상징한다.
E. 소제 위에 더해진 유향
유향이 소제 위에 놓아졌다.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 위에 더해진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의미한다.
F. 얼마의 이삭과 얼마의 기름과 모든 유향을 단 위에서 불사름
『제사장은 찧은 곡식 얼마와 기름의 얼마와 모든 유향을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16절). 
얼마의 이삭과 얼마의 기름과 모든 유향을 단 위에 불사르는 것은 신선한 그리스도의 인성, 성령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가진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음식으로서 그분께 드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한번 우리는 소제의 분깃, 즉 가장 좋은 분깃이 하나님의 음식이 되기 위한 것임을 본다.
G. 기념물로
하나님의 분깃인 소제는 기념물로서 드려진다. 이것은 그것의 만족케 하는 효능으로 인해 기념물이 된다. 이 분깃은 그리스도의 입맛을 만족케함으로 기념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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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4 - 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과 누림
이번 메시지에서의 나의 부담은 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과 누림에 관하여 여러분과 교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유일한 제물
그리스도는 오늘날 제물들의 실제이시다. 히브리서 10장 7절부터 9절까지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육신으로 오셨으며, 이 하나님의 뜻은 구약의 제물들을 그분 자신과 대치하는 것이었다. 9절 하반절은,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 것」은 구약에 있는 동물의 제물들을 말하며, 「둘째 것」은 유일한 희생물, 유일한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구약에는 많은 제물들이 있으나 신약에는 하나, 유일한 제물, 곧 놀라운 사람이신 그리스도가 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이신가를 계시한다. 매 장마다 바울은 우리에게 놀랍고, 비밀하고, 만유를 포함한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 휘장을 연다. 특별히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시기도 하다. 10장에서 우리는 이분이 구약의 모든 제물들의 대치물이 되심을 본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오셨다(히 10:7, 9). 신약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구약의 제물들을 그리스도로 대치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히브리서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놀라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삼일 하나님-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또한 한 사람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성과 연합되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과하셨으며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더우기 한 사람이신 그분은 삼층천, 곧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사람이신 그분이 보좌에 앉아 계시는 곳으로 승천하셨다. 그분의 성육신 안에서 그분은 하나님을 땅으로 이끄셨고, 그분의 승천 안에서는 사람을 하늘로 이끄셨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승천하신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구약에서, 대제사장의 의무는 하나님께 제물이나 예물을 드려서 속죄케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죄의 본성과 죄의 행위가 있는 죄인들인 우리는 하나님과 문제가 있었으며, 하나님은 우리와 문제가 있으셨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화평이 없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행해져야만 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속죄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상황을 진정시키셨다. 더우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는 어떤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행복해지기를 원하셨으나, 우리의 죄들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불행케 만들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으나 우리와 함께 행복하시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리스도는 죄를 위한 제물로서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선물로서 그분 자신을 드렸으며, 그럼으로써 그분을 행복하게 만드셨다.
유일한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속죄하셨으며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셨다.
===하나님과 그분을 섬기는 자들의 만족을 위한 음식이신 그리스도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레위기이다. 이 책을 열고, 해석한 최초의 사람은 바울이었다. 수세기에 걸쳐서, 성경 학자들 특별히 형제회의 성경 학자들이 레위기를 해석해 왔다.
형제회는 예표를 열어 놓았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에 앞선 성경 학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
레위기를 합당하게 이해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 책과 히브리서가 연관이 있음을 본다. 육십여 년 동안 우리는 히브리서를 연구해 왔으며, 이 책이 어떻게 레위기와 연결되어 있는가를 연구해 왔다.
스코필드(C. I. Scofield)는 레위기의 모든 장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레위기에서 제물들을 볼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볼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형제회의 도움으로 레위기에 그리스도가 예표들로 묘사되어 있음을 보았다. 모든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예표들이며 그림들이다.
비록 형제회의 도움으로 레위기에서 예표 안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지만, 나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날 때까지도 제물들이 하나님의 음식이라는 것(레 3:11, 16, 21:6, 8, 민 28:2)을 깨닫지 못했다. 당신은 하나님이 배고프시다는 것과, 그분이 음식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과, 그분이 먹어야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배고프시고 음식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 사람의 관념에 따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희생물인 제물들을 말할 때,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하나님과 문제를 갖고 있으며 우리의 상황과 하나님을 진정시킬 수 있는 속죄를 위한 제물들이 필요하다는 생각만 가질 것이다. 우리는 제물들의 주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실제로는, 하나님과 그분의 섬기는 자들을 위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결코 깨달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우리는 장막 안과 주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제사장의 음식을 먹는 것을 본다. 이 제사장의 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제물들이며,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 둘다이다. 제물들은 우리의 상황을 속죄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제물들은 또한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섬기는 자들을 만족케 하고 강화시켜 주고, 활력화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해 많은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분을 어떻게 섬기는가? 우리는 음식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있다. 이 음식은 단지 한 형태, 혹은 한 코스에 속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만찬처럼 많은 코스에 속한 것이 되어야 한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건제와 속죄제와 요제와 거제와 낙헌제와 전제, 이 모든 제물은 여러가지 코스이신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이분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식이며 또한 우리의 음식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음식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먹는다는 우리의 말을 들을 때 당황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요한복음 6장 57절의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강화시켜 주고 활력화시켜 준다.
우리는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섬긴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만족케 할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빈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 드릴 그리스도를 가득 채운 손으로 나아가야 한다.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가장 최상의 분깃은 하나님의 누림을 위한 그분의 음식이 되며 나머지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음식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을 섬기는 자 모두가 음식이신 그리스도로 만족케 되며 그분에 의해 만족케 됨을 본다.
===레위기에 계시된 것과 같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림
사복음서는 각각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것을 계시한다. 어떤 점에서 레위기는 또한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한 복음이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레위기에 계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분은 복음서들에서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계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레위기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언어의 한예는 1장에 있는 「번제」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이다. 문자적으로 이 단어는 올라가는 어떤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레위기의 언어를 안다면, 이 올라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말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레위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과 관련된 여러가지 상세한 것들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생명의 떡이시며,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시며, 우리가 먹기에 좋은 것임을 계시하신다(6:48, 50-51). 그러나 비록 주님이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시기는 하지만, 이것에 관한 자세한 것들은 요한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를 먹는 것에 관한 자세한 것을 보려면 우리는 레위기로 가야 한다.
우리가 레위기에 계시되어 있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길을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매일,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분을 체험하고 누려야 한다. 이렇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제물의 실제를 알아야 한다.
===실제의 영-우리에게 제물의 실제가 되시는 그리스도
어떤이들은 제물들의 실제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옳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이 곧 실제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실제)요 생명이니』. 같은 장에서 그분은 실제의 영에 대해 말씀하신다(17절). 그리스도께서 단지 실제 자체라면 그분은 우리에게 실제가 될 수 없으시다. 그분 자신 안에서 그분은 실제이나 그분은 아직 우리에게 실제가 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실제의 영이 필요하다.
요한복음 1장 17절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것은 주 예수님이 오셨을 때 또한 실제가 오셨음을 가리킨다. 한 면으로,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이 실제라고 말씀하시며 다른 한면으로 그분은 실제의 영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실제)의 영이라』(14:16-17上).
신약의 계시에 따르면, 실제의 영은 그리스도의 변형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다니셨을 때, 그분은 아직 실제의 영이 아니셨다. 그러나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심으로 만유를 포함한 구속을 성취하시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신 후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下).
한때 육신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이 영은 그 영 곧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다. 오늘날 생명 주는 영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다. 아버지의 어떠함과 아들의 어떠함과 그 영의 어떠함이 모두 이 만유를 포함한 그 영 안에서 완성되었다. 이것이 계시록 22장 17절이 「그 영」에 대해서 말하는 까닭이다. 『그 영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그 영은 단지 능력, 힘, 에너지일 뿐 아니라 한 인격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사시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그러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또 다른 인격, 곧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는 실제의 영이신 그리스도를 갖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취하고 그분을 누릴 때 한 인격을 취하고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갖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주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분이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주 예수님이 한 인격으로서 당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가? 이 인격은 여전히 신성한 본성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더이상 육신 안에 거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영으로 변형되셨기 때문이다. 그 영은 최종 완성적인 영, 곧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인 그 영이다.
당신은 우리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을 갖고 있으며 이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 최종 완성된 그 영이 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나는 그런 한 인격이 내 안에 있으며, 나와 함께 있으며, 나를 돕고, 나에게 힘을 주고, 활력을 주고 나를 지켜주신다는 깊은 느낌을 갖고 있음을 간증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할 수 있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놀라운 사람이시며 이 놀라운 사람이 오늘 생명 주는 영이심을 계시한다. 그분은 우리의 누림을 위해 내내 우리와 함께 하는 복합된 그 영이신 최종 완성된 삼일 하나님이시다.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누릴 수 있는가? 우리는 그분을 모든 제물들로서 누릴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물들로서 누릴 수 있다는 사상이 레위기 이면에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리스도를 번제물로 누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으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을 위하여 절대적이시다. 때문에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하여 그분을 번제물로 누려야 한다.
이것을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주 예수여, 당신은 놀라운 사람이십니다. 당신은 내내 나와 함께하는 최종 완성된 그 영이시며, 당신은 나의 번제물이 되시기 위해 나와 함께하는 분입니다. 주여, 나는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으나 당신은 그분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위하여 절대적일 수 없으나 당신은 항상 그분을 위하여 절대적이셨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십니다. 주 예수여, 이제 나는 당신을 나의 번제물로 취합니다.』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우리의 소제물로 누릴 수 있다.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한 음식이시며 또한 우리를 위한 음식이시다. 이 음식에는 유향과 소금은 있으나 누룩이나 꿀은 없다. 소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고 유향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충만하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는 인식을 가지고 제물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 많이 제물들로서 누릴 것이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길은 실제의 영이신 그분을 접촉하고 취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을 해방함
만일 우리가 레위기에 계시되어 있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생각으로 기도해서는 안 되며 성경에 있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을 해방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의 항상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즉각적인 말씀이 되게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한 방법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우리를 포함하여,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을 해방함으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결핍되어 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여러가지 실행들을 취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실지적으로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 우리의 체험 가운데의 즉각적인 말씀이 되는 성경의 항상 있는 말씀으로 기도함으로 우리의 영을 합당하게 훈련하지 않는다. 만일 일정 기간 동안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을 해방함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이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하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깊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다른이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함
우리가 매일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을 해방하고 그 영을 접촉함으로 그리스도를 누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를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언급하지 않을지라도 다른이들과 교제하는 중에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할 것이다.
제물들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리스도를 먹는 문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많이 먹을수록 우리는 그분으로 더 충만될 것이며 그분으로 만족케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경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이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할 때조차도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다른이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그와 같은 것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물들이신 그리스도로 만족케 되어야 하며, 그럴 때 다른이들을 사랑케 하는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한면으로 우리는 우리가 누렸던 그리스도를 다른이들에게, 특히 여전히 죄 안에 살고 있는 약한 자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공급받고 빛비춤 받아 그들의 죄들을 자복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죄들에 대하여 승리하고 이길 것이다.
이 메시지에서의 나의 부담은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성도들이 실제적이고 실행적으로 그리스도를 누리는 법을 알고, 놀랍고 살아계신 그분이 우리의 제물들임을 깨닫는 것이다.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시며, 과정을 거치신 분이며,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시다. 그분은 또한 우리의 거룩한 음식이시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의 음식이 되는 제물이심을 의미한다. 그분은 심지어 하나님과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우리 안에 계신 분에게 드려지는 우리의 경배이다.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다른이들에게 그분을 공급하기 위해 그런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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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5 -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 생활을 위한 소제의 성분들 ((레위기 2:1-2, 4, 11, 13, 누가복음 1:35, 마태복음 1:18, 20, 누가복음 3:21-22, 4:1, 23:14, 마태복음 12:46-50, 마가복음 10:38, 요한복음 12:24, 7:6, 16-18, 로마서 8:2, 3, 6, 9-11, 13, 고린도전서 10:17))
이번 메시지에서 나는 소제에 관해 더 말하고 싶은 부담이 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소제 자체를 말하고 싶은 부담은 없다. 나의 부담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 생활과 관련된 소제의 성분들, 소제의 구성 요소들에 관해 여러분과 교통하는 것이다.
===실제의 영은 우리 체험 가운데서 우리에게 제물들의 실제가 됨
지난 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모든 제물들의 실제는 그 영으로 실제화되신 그리스도임을 보았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그 영이 제물들의 실제가 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 영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제물들의 실제를 갖지 못할 것이며 단지 제물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만을 가질 것이다. 그분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는 제물들의 실제이시나, 그분이 생명 주는 영이라는 사실을 떠나서는 그분은 우리에게 이 실제가 되실 수 없으시다.
===다섯 가지 기본 제물들
레위기에는 다섯 가지 기본 제물들-번제물, 소제물, 화목제물, 속죄제물, 속건 제물-이 있다. 이 다섯 가지 제물들 중의 어떤 것이 주요 제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이들은 화목제물이 레위기 1장부터 5장까지에서 볼 때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제물이 주요 제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른이들은 주요 제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번제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다른이들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죄와 죄들의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속죄 제물이나 속건 제물이 주요 제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는 기본 제물들이 모두 필요하지만, 그리스도를 여러 방면에서 그리고 세밀하게 체험할 수 있는 주요 제물은 소제물이다.
레위기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는 오늘날 많은 성경 교사들, 특별히 우리를 앞서간 형제회의 교사들의 어깨 위에 있다. 우리는 물론 그들을 신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들 중의 하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을 조성시켜 주는 제물들을 누리는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된다. 우리가 소제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조성될 것이다.
우리는 소제물을 구성하는 성분들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소제가 네 가지 성분들을 포함하나 특별히 두 가지 다른 성분은 제외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성분들을 아는 것이 실제적이고 자세하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고운 가루
소제의 첫 번째 성분은 고운 가루이다. 이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며, 그분의 인성은 균형잡혀 있고 곱다.
===기름
소제의 고운 가루는 인성을 의미하는 반면에, 기름은 신성을 의미한다. 기름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고운 가루가 기초이며, 기름은 그 기초에 더해진다.
레위기 2장을 주의깊게 읽는다면, 우리는 기름이 세 가지 방법으로 가루에 더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기름은 가루와 섞일 수 있으며, 혹은 가루에 부어질 수 있다. 가루는 또한 기름으로 발라질 수 있다. 기름을 가루에 더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가루에 기름을 섞는 것(연합하는 것)이다. 고운 가루는 마른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기름이 칠해진다」.
===유향
세 번째 성분은 유향이다. 예표론에서 유향은 부활을 상징한다. 유향의 달콤한 향기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상징한다.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얼마나 달콤한지!
===소금
소제의 네 번째 성분은 소금이다. 예표론에서 소금은 그리스도의 죽음, 또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소금은 맛을 내며 병균을 죽이고 보존하는 역활을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능이다.
---소제에 누룩이나 꿀을 섞지 못함
소제에는 누룩이나 꿀을 섞지 못한다. 누룩은 죄와 다른 소극적인 것을 의미한다. 복음서들에서 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사두개인들의 누룩, 헤롯의 누룩을 말씀하신다(마 16:6, 11-12, 눅 12:1,막 8:15).
꿀은 천연적인 사람의 생명을 상징한다. 그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의 나쁜 방면이 아닌 좋은 방면을 상징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항상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들이 때로는 매우 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천연적인 선함이 바로 꿀이다. 미움은 누룩인 반면에, 천연적인 사랑은 꿀이다. 
마찬가지로 교만은 누룩이나 천연적인 겸손은 꿀이다.
꿀은 누룩과는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경과한 후 꿀이 발효하면, 이 발효는 누룩을 가져 올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좋든 나쁘든, 결과는 결국 같음을 가리킨다. 이것이 창세기 2장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말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나 어느 쪽의 경우이든 결과는 누룩이 될 것이다.
우리는 꿀이 발효하는 예화로 이혼을 들 수 있다. 이혼으로 끝나는 어떤 결혼에서는, 어떤 꿀-천연적인 사랑-이 발효하여 누룩을 가져온다. 이 예화로부터 우리는 누룩인 미움과 꿀인 천연적인 사랑의 결과가 다 같음을 본다. 소극적인 것들은 누룩이며, 꿀로 상징되는 천연적인 생명의 선한 방면은 마침내 발효하여 누룩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서 사셨던 생명은 누룩과 꿀이 없는 생명이셨으며,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은 생명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네 가지 적극적인 성분들-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과 소금-은 가져야 하나 두 가지 소극적인 성분들-누룩과 꿀-은 가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합당한 소제물,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부활 안에서 신성으로 기름발라진 인성으로 구성되고 누룩과 꿀이 없는 제물이 될 것이다. 이런 생명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음식이며 또한 하나님의 섬기는 자들인 우리를 영양 공급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사복음서에 있는 이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의 묘사
사복음서에서 우리는 이 땅 위에 사셨던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의 묘사를 본다. 그분은 영원 안에서는 하나님이셨으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실제의 사람이 되셨으며 이 땅 위에서 한 사람으로서 사셨다.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 안에 있는 그 영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의 영과 많은 관계가 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눅 1:35, 마 1:18, 20). 잉태로부터, 즉 그분의 사람되심이 시작된 바로 그 때부터, 그분의 인성은 성령으로 싸여 있었다.
예수님은 성령을 떠나서는 잉태될 수 없었으며 태어날 수 없었다. 주님의 잉태와 출생은 전적으로 성령에 속한 것이다. 그분의 인성은 성령과 연합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은 이 연합을 근거로 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기 위해 나오셨을 때, 주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셨다.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1下-22上). 
성령이 온순함으로 잘 알려진 비둘기 형체로 강림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이 한 인격이며 단지 능력이나, 통로나, 도구가 아님을 가리킨다. 한 인격인 성령이 주 예수님 위에 임했다. 이것은 기름이 고운 가루에 부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이 주 예수님 위에 부어졌음을 의미한다. 한면으로 인성 안에서 그분은 성령으로 연합되셨으며, 또 한면으로는 성령이 그분 위에 부어졌으며 그분을 기름 발랐다.
누가복음 4장 1절 전반부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고 말한다. 그분은 그 영으로 충만함을 입으셨으며, 즉 그 영으로 완전히 기름발라지셨는데, 이는 그분이 그 영으로 연합되셨기 때문이며 그 영이 그분 위에 부어졌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분은 그 영 안에서 처신하셨고 일하셨다. 그분이 그분의 사역에서 하신 모든 것은 그 영 안에서-본질적인 영 안에서와 또한 경륜적인 영 안에서-행한 것이었다. 그분은 그 영과 그분 위에 부어진 그 영으로 연합되신 한 사람이셨다.
---흠 없는 인성-누룩 없는 사람의 생명
주 예수님의 인성과 사람의 생활은 흠이 없었다. 그분은 빌라도에게 이끌려가서 로마의 권력에 의해 심판받으셨지만, 빌라도는 그분에게서 어떤 흠도 찾을 수 없음을 선포했다(눅 23:14). 주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 그분 안에는 전혀 누룩이 없었다.
----천연적인 생명을 부인함-꿀 없는 사람의 생명
주 예수님에게는 꿀이 없으시다. 어느 날 그분이 군중들에게 이야기 하는 동안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마 12:46-47). 이 말을 들으시고 그분은 말하던 사람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48-50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분께는 꿀이 없으시며, 그분이 천연적인 생명을 부인하셨음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5장 36절부터 39절까지에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천연적인 생명의 꿀로 인해 기인된 것이다. 바나바는 그들의 여행에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고자 했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38절)고 하였다. 그 결과로, 『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 』 (39절).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이었으므로(골4:10),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문제는 바나바와 마가의 천연적인 관계에 의해 야기된 것 같다. 거룩한 기록에 의해 정당화되었던(행 15:39下-40) 바울은 이 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천연적인 생명을 피하기 위해 주 예수님을 배워야 한다. 믿는이들인 우리는 분명히 다른이들을 사랑해야 하나, 천연적으로 사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이들을 천연적으로, 인간적으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심지어 교회 생활 안에서도 우리는 천연적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형제의 기질이 우리의 기질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할지 모른다. 이런 사랑은 꿀인 천연적인 사랑이다.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바울은, 『같은 사랑을 가지고』라고 말한다. 같은 사랑을 가지는 것은 모든 성도들을 같은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는 이런 사랑을 가질 수 없는데, 이는 우리의 천연적인 경향은 차별하여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성도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다른 성도들을 대하는 사랑보다 정도가 더 깊을 수 있다. 이것은 꿀이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이와 같지 않다.
----항상 소금에 절여진 생활
마가복음 10장 38절과 요한복음 12장 24절은 주 예수님이 항상 소금에 절여지셨음을 가리킨다. 즉 그분은 항상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생활하셨다.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그분은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셨다.
마가복음 10장 38절에서 주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그분은 이어서,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39절)라고 말씀하셨다. 잔과 침례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한다(요 18:11, 눅 12:50). 주님의 잔을 마시고 그분이 받으신 침례를 받는 것은 그분의 죽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그분의 죽음을 우리 체험 가운데서 적용하는 것이다.
찬송가 46장은 소금에 절여지는 것에 대해 말한다. 2절과 후렴은 다음과 같다.
주의 형상 이루도록 나를 죽음에 넣네
십자가에 머물면서 혼 생명을 부인해
죽음 없이는 생명이 없네
오직 죽음 통해서만 생명 자라네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은 소금으로 절여진 삶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십자가를 체험하는 것이 소금에 절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 소금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소제인 고운 가루가 될 것이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군중들로부터 환영받으셨다. 인간적으로 볼때 그것은 그분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분을 찾는다는 말을 들으셨을 때 그분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 예수님이 자신이 높여지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에 소금에 절여지셨음을 가리킨다. 그분은, 『나는 한 알의 밀이다. 나는 사람들에 의해 환대받고 영광받고 높여져서는 안 된다. 나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우리는 소금에 절여지신 주 예수님을 배워야 한다. 다른이들이 우리를 환대하고 높이고 영화롭게 할 때, 우리는 소금 대신 꿀을 갖기가 매우 쉽다. 우리가 다른이들에게 환대받거나 높여질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소금을 적용하고 높여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는 것을 배워야 함을 의미한다.
----부활 안의 생명
주 예수님은 항상 소금에 절여지는 생활, 곧 십자가 아래의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항상 부활 안에 계셨다. 그분이 사셨던 생명은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이었다.
주 예수님이 부활 안에 사셨다는 것은 그분이 그분 자신과 그분의 천연적인 생명을 부인하셨으며 자신을 살지 않고 아버지를 사셨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요한복음 7장에서 이것을 분명히 본다. 6절에서 그분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다른이들은 어느 때든지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나, 그분은 제한되셨으며 천연적인 생명 안에서 살지 않으셨다.
16 절부터 18절까지에서 그분은 계속해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 그분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을 하셨음을 본다. 그분의 말씀하심의 근원은 그분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셨다. 이것은 그분이 천연적인 생명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생명으로 사셨음을 가리킨다. 이것이 부활이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주예수님은 부활 안에 사셨으며 천연적인 생명을 부인하고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다.
우리는 우리의 결혼 생활과 가정생활에서 부활 안에 살아야 한다. 당신의 결혼 생활에서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라. 그럴 때 당신이 당신 자신과 당신 자신의 생명을 산다면 분명히 당신은 성질을 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생명을 살지 않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계시된 생명을 살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먼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금을 체험하는 문제, 즉 죽음에 넘겨지고 십자가로 처리되는 문제이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어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부활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사
주 예수님은 이 땅 위에 계셨을 때 고운 가루이셨으며,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셨으며, 항상 소금에 절여지셨으며, 부활 안에 사셨으며 유향의 향기를 지니셨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누룩이나 꿀이 없었다. 때문에 그분은 소제가 되실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이와 같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사, 복사의 사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로마서 8장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함께 둔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로 함께 하나로 싸여진 그리스도의 인성(3절), 생명의 영(2절), 십자가(13절), 부활(11절)을 본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생활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과 똑같은 생명을 살아야 한다. 그분은 사람이셨으며 우리도 사람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졌으며 우리도 적어도 약간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졌다.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신 자의 영과 연합되었다. 그리스도는 소금에 절여지셨고, 즉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우리 또한 우리의 천연적인 존재를 죽음에 넣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사셨으므로 우리 또한 부활 안에 살 수 있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소제이신 그리스도의 복사가 되어야 함을 분명히 계시한다. 우리는 그분의 복사, 재생산이 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분의 어떠하심과 똑같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 안에서 사람이 되셨으며 오늘날 우리도 육신 안에서 사람이다. 육신 안에서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 기름 부음 받으셨다. 오늘날 우리도 내주하시는 그 영으로 기름 부음 받고 있다. 그 영은 우리에게 기름 붓는 역사를 행하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 내주하시는 그 영이 우리에게 기름 붓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육신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에 두어야 한다(6절). 그런 다음 우리는 그 영으로 우리의 몸의 행실들을 죽음에 두어야 한다(13절).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살게 될 것이며 이 생명은 부활 안의 생명이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소제가 되기에 적합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소제의 목적은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다. 소제의 최상의 부분, 곧 유향을 포함하는 부분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불로 태워졌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소제의 실제이시다. 그분만이 홀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올라가는 유향을 갖고 계시다. 온 우주에,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향기를 산출하고 그분을 행복하게 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 불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시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우리는, 그분의 복사가 되어 그분이 사셨던 것과 똑같은 생명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인성의 생명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으로 기름 부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또한 계속적으로 소금을 받아야 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 우리의 천연적인 행위들을 죽음에 넣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부활 안에 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유향을 갖게 될 것이다.
소제 안에 있는 모든 유향은 불로 태워졌다. 이것은 모든 유향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유향의 어떤 것도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것으로 소제이신 그리스도 안의 모든 유향은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향기가 되기 위해 태워져야 함을 본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체험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 그분의 복사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것 역시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소제의 두 형태
레위기 2장에서 우리는 소제가 여러 형태가 될 수 있음을 본다. 여기서의 우리의 관심은 소제의 두 가지 특별한 형태에 있다. 소제는 기름 섞은 가루의 형태가 될 수 있으며, 혹은 떡의 형태가 될 수 있다.
가루의 소제는 개인적인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또한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떡의 소제는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그분의 몸인 교회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이다. 신약은 개인적인 그리스도가 떡으로 상징된 단체적인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계시한다(고전 12:12). 바울은,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7)고 말한다. 이 떡(bread)이 소제의 「떡(cake)」이다.
소제에는 개인적인 방면이 있는 동시에 단체적인 방면이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적으로 사실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몸, 곧 교회와 함께 사신다. 그리스도는 단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신다.
그분은 머리이시며 지체들이 있는 그분의 몸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떡의 형태의 소제에서 우리는 교회 생활을 본다. 떡의 소제를 갖기 위해서, 우리는 기름을 섞은 가루가 필요하다. 가루와 기름을 섞음으로 반죽이 된다. 그런 다음 이 반죽은 오븐에 구워져 떡이 된다. 이 떡은 교회 생활의 상징이다. 이 상징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우리의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결국 한 총체가 되며 이 총체가 교회 생활임을 가리킨다.
교회 생활은 천사와 같은 생활이 아니라 인성이 충만한 생활이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천사처럼 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더이상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다. 이러한 관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회 생활을 더 많이 갖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인성이 더 필요하다. 교회 생활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적이 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인성은 성령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성령과 연합되며 그 인성 위에 부어지는 성령을 갖고 있는 인성이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교회 생활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기름 부어진 사람, 곧 성령에 의해 기름 부어지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더우기 우리는 누룩이나 꿀이 되어서는 안 되며 소금과 유향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활에는 많은 소금, 곧 십자가의 죽음이 적용되어야 하며 우리는 부활로 충만해야 한다. 이것이 합당한 교회 생활이다.
이런 교회 생활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성이 충만해야 하며 천사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자매들 심지어 어떤 형제들까지도 마치 천사와 같이 살려고 한다. 이 성도들은 독특하며, 인성이 부족하다. 천사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 독특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되는 대신에 당신은 「유령」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인성으로 충만되어야 하며, 성령과 독립된 인성을 가져서는 안 됨을 다시 한번 말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성령에 의존해야 하며, 내적으로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고 외적으로 우리 위에 부어지는 성령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그 영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영에 집중될 것이며 그 영에 의해 점유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소금을 통과하고 유향 안에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거치고 그분의 부활 안에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소금은 누룩, 즉 죄의 병균들을 처리할 것이며 또한 꿀을 처리하여 천연적인 생명을 죽음에 넣을 것이다. 이것이 소제의 교회 생활을 갖는 것이다. 소제의 교회 생활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향기를 산출하기 위해 태워질 수 있으며 이 제물의 남은 것은 우리의 음식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교회 생활을 먹게 될 것임을 뜻하는데 이는 교회 생활이 우리의 매일의 공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매일의 공급인 소제는 단지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교회 생활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이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있으며 또한 교회 생활을 먹고 있다. 우리는 첫 번째 형태인 가루-개인적인 그리스도-만을 먹을 뿐 아니라 두 번째 형태인 떡-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교회-도 먹는다. 나는 우리가 장차 모든 교회들에서 소제의 교회 생활, 곧 하나님을 먼저 만족시켜 드린 다음 우리가 먹는 생활을 보게 될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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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6 - 소제의 교회 생활 (( 고린도전서 1:2, 9, 18, 22-24, 30, 2:2-4, 12, 3:16, 5:6-8, 6:5, 17, 19, 7:20, 24, 40, 9:22,26-27, 10:16-17, 23-24, 31, 11:27-29, 12:3, 4, 11, 18, 24, 27, 13:4-7, 14:26, 40, 15:9-10, 16:13))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교회 생활의 특별한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교회 생활은 아주 많은 방면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교회 생활을 한 구(句) 나 한 절 심지어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만일 우리가 이 땅 위에서의 주님의 생활을 기술하는 소제에 관하여 빛 비춤 받는다면, 우리는 고린도전서에 기술되어 있는 교회 생활과 주 예수님의 생활이 일치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생활은 소제를 형성하므로 고린도전서에 제시되어 있는 교회 생활을 소제의 교회 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소제가 네 가지 성분들-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과 소금-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았다.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고운 인성을 의미하며,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유향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소금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 있는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주관적으로 처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우리는 또한 소제에 누룩이나 꿀이 들어가서는 안 됨을 보았다. 누룩은 죄와 모든 소극적인 것을 의미하며, 꿀은 천연적인 생명 중 천연적인 애정을 포함하고 있는 선한 방면을 의미한다.
복음서들을 읽어 본다면, 우리는 소제의 네 가지 성분들이 이 땅 위에 사셨던 그리스도의 생활의 구성 성분이었으며 그분으로 하여금 참된 소제가 되게 하였던 것임을 볼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주 예수님이 사셨던 것과 똑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소제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장 높은 인성을 가진 생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소제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높은 인성을 가진 생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남자답게(사람답게)…』(고전 16:13)라고 말한 이유이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에 따르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우리가 높고, 향상된 인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생명을 갖는다면, 우리는 자아를 통제할 것이다. 이것은 9장 26절과 27절의 바울의 말이 가리키는 바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이 구절들은 바울이 높은 인성을 가졌으며, 그가 강하고 탁월한 특성을 가졌음을 나타낸다. 
그는 향방없이 혹은 허공을 치는 것같이 달리지 아니하고 자신을 통제했다. 그는 그의 삶에서 도덕의 높은 표준을 갖고 있었던 참된 사람이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7절까지는 사랑을 기술한다. 이 기술은 사실상 우리에게 고운 인성을 보여준다. 4절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한다. 우리의 약한 인성 안에서, 우리는 단지 제한된 참음만 가지나, 사랑은 오래 참는다. 또한 우리는 투기하며 탐욕스럽기가 쉬우나,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 더우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5-6절).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6下-7절). 
여기서는 고운 인성과 높은 사람의 특성을 기술한다. 이것은 고린도전서가 높여진 인성에 관한 책임을 가리킨다.
16 장 13절에서 바울은, 『영웅이 되라』고 말하지 않고,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모든 각도와 측면에서, 우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윤리적인 각도에서 우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아를 통제하는 각도에서 우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높여진 인성을 갖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참된 고운 가루를 볼 수 있다. 이 책은 분명히 소제의 교회 생활을 제시한다.
소제의 교회 생활에서 첫 번째 항목은 고운 인성, 즉 높여진 인성이다. 만일 우리가 합당한 교회 생활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는 강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 강한 성격은 균형잡혀야 하는데, 이는 균형잡히지 않은 인성은 치우친 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동시에 부드러워야 한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가 강하지만 부드럽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이들을 손상시킬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강한 것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워야 하지만, 우리는 너무 부드러워서는 안 된다. 
너무 부드러운 사람은 누들(noodle-밀가루와 달걀로 만든 말린 국수의 일종)과 같다. 『대나무는 들 수 있으나 누들(noodle)은 들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성도들이 너무 강하거나 혹은 너무 부드럽다면, 합당한 교회 생활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균형잡혀야 한다. 
교회 생활을 위해서 우리는 곱고, 균형잡히고 높여진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람
고린도전서 1장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임을 계시한다. 2절은 주 예수님이,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것이며 나의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세상 -타락한 인류-을 사랑하사 그분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의 교통 안으로 부르심 받았다(고전 1:9). 
우리는 이제 그분을 누릴 수 있으며, 그분에게 참예할 수 있으며, 그분을 서로 나눌 수 있다.
더우기 1장 30절은,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그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 은사이다. 이 선물은 한 인격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하나님-사람이다. 
하나님은 또한 이 선물의 누림 안으로 우리를 부르셨으며 이 선물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에 계시되어 있는 사람이신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영
소제의 두 번째 성분은 기름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에는 그 영에 관한 많은 말이 있다. 
바울은 2장 3절에서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2장 12절에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3장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당신 안에 거하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영이 그분의 거처로서 당신을 취한다는 것을 아는가? 
그 영은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지금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6 장 17절에서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영이신 주님과 우리의 영의 연합을 가리킨다. 우리는 주님과 한 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부분이다. 
이것은 우리가 경배할 대상인 하나님의 부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의 체험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의 부분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신성한 영과 하나이다. 우리는 그 영으로 기름 부음 받았으며 그 영과 연결되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하나되었다.
만일 우리가 그 영과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교회 생활을 가질 수 없다. 교회 생활은 성령에 의해,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인성의 생활이다. 
우리는 성령과 하나이며, 우리는 이 하나 됨 안에 머물러야 한다.
----부활 안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또한 유향, 즉 부활 안의 그리스도를 본다. 
사실상 15장 한 장 전체가 부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때문에 이 책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분명히 본다.
어떤 고린도인들은 마귀에게 속임당해 죽은 자 가운데의 부활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반박하면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15:13-16)라고 말한다.
15 장 9절과 10절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체험을 말한다. 먼저 9절에서 그는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한 다음에 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부활과 같다. 즉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부활 안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아니요 부활 안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58 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격려의 말을 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 안에서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수고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부활 안에서 행하는 주님을 위한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뭄
7 장에서 바울은 믿는이들에게 그들이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물라고 명한다.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절). 
그는 종을 예로 든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21-22上). 바울은 종이었던 믿는이들에게 해방 받으려 하지 말고 종의 상태로, 즉 그들이 부르심 받았을 때의 상태로 머물고 종의 상태를 참고 이기는 생활을 하라고 권한다. 
종은 종의 상태를 이기는 생활을 함으로 부활의 실제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갖고 있다. 그런 생활은 얼마나 간증이 되는지!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원칙은 동일하다. 바울은, 『여자는 남편과 갈리지 말고』(10절)라고 말하며, 이어서 12절과 13절에서,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높은 인성을 요구한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이혼이 있는 이유는 사람들의 인성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함께 살기가 힘들고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나 혹은 아내와 함께 머무는 것은, 우리가 「사람이 되는」 것과 높여진 인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나는 결혼한 어떤 부부가 그들이 구원받기 전에 이혼을 결정했던 것을 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므로 이혼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듣고 주 예수님을 받아들여 구원받았다. 그 때부터 그들은 그들 안에 사시는 또 다른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가졌으며 그분은 그들의 인성을 높이셨고 그들의 성격을 변화시키셨다. 
그들은 이혼할 생각을 그만 두고 달콤함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 안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들을 접촉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의 방법은 아주 특별하면서 또한 지혜롭다. 그는 형제에게 그의 아내와 머물라고 강요하지 않고 그들이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머물라고 성도들에게 명한다. 결혼한 사람들은 그들의 아내나 혹은 남편을 떠날 수 없다. 왜냐하면 배우자를 떠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믿는이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들의 배우자와 함께 머물러야 한다.
여기서의 요점은 성도들이 그들의 상태가 변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예로 바울을 들 수 있다. 
유대인인 그는 로마 제국주의 하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유대인들에게 로마인들에게서 벗어나라고 권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로마서 13장에서 그는 성도들에게 로마제국의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그들에게 그들의 상태를 바꾸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물라고 권했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리스도를 사는 기회가 더 많아진다. 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종인 동안에 부활 안의 그리스도를 살 수 있다. 이것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 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한 영이 되기 위해 그 영과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는 완전히 부활 안에 있어야 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린도전서에는 또한 소금-소제의 네 번째 성분-이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해 말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1:22-23上). 
바울은 그가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기적이나 지혜를 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계셨을 때,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막 15:31-32上). 
주 예수님은 많은 도전을 받으셨지만, 십자가 위에 머무셨으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그와 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다. 자신들의 문화와 지혜를 자랑삼던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오늘날도 상황은 이와 같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와 지혜를 자랑삼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능력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날마다 십자가에서 끝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 이것을 체험할 수 있는데, 이는 모든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십자가이며 모든 남편은 아내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금에 절여지기 위한 이 안배는 주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혼 생활뿐 아니라 교회 생활에서도 소금에 절여져야 한다. 소금에 절여지는 것과 같은 것이 교회 생활 안에 있다. 
한면으로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행복하나, 또 한면에서 우리는 소금에 절여지는 것으로부터 오는 씁쓸함도 가진다. 
깊은 속에서 형제들은 자신들이 자매들에 의해 소금에 절여지는 것, 없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자매들도 형제들에 대해 같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교회 생활에서는 소금에 절여지는 일이 많이 생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영화롭게 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가르친다. 
십자가가 없다면, 교회 생활이 없다. 소금이 없다면, 소제가 없다.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이 쳐져야 한다.
----누룩-죄 된 것과 소극적인 것-을 처리함
우리는 소제에 누룩이나 꿀이 섞여서는 안 됨을 지적했다. 고린도전서에서 누룩-죄 된 것과 소극적인 것-과 꿀-천연적인 생명-은 모두 처리된다. 
5장 6절 하반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누룩이 처리되는 것을 본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여기서 우리는 누룩이 교회 생활에서 용납되지 않음을 본다.
----꿀-천연적인 생명-을 처리함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은 바울의 체험에서 꿀, 곧 천연적인 생명이 처리되었음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그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음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한 것을 상기하라. 바울의 수고는 그(바울), 곧 천연적인 생명, 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틀림없이 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구원받기 전에 그는 성격이 아주 강해서 성도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 그는 사도가 되었으며,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 그러나 그의 수고는 천연적인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 생활 안에서 천연적인 생명과 천연적인 애정은 처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 생활 안에는 꿀이 없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 모두는 천연적이 되기 싶고 천연적인 생명을 살기 쉬우나 교회 생활은 천연적인 생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에 넘겨져야 한다. 
천연적인 생명의 꿀은 소금,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죽음에 넘기워야 한다.
우리는 소제에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 생활에서 우리가 소극적인 것이나 천연적인 생명을 가져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한 떡
교회 생활은 10장 17절의 한 떡으로 상징되는 단체적인 소제이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한 떡에 참예함이라』. 이 떡은 단체적인 생명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의 상에 참예할 때 이 단체적인 생명을 누린다. 당신은 당신 혼자서 떡과 잔을 취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당신은 성도들과 함께 떡과 잔에 참예한다. 
이것이 교통의 문제이다. 이것은 10장16절이,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말한 이유이다. 이것은 교통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체적으로 떡과 잔에 참예한다. 이 단체적인 참예함은 교회 생활의 표적이며 또한 교회 생활의 간증이다.
고린도전서가 다루는 모든 요점은 교회 생활, 곧 단체적인 생활과 관련된다. 
이 책에 따르면, 이러한 단체적인 생명을 살기 위해 우리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유향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십자가 아래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누룩이나 꿀을 갖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소제인 교회 생활이다. 전 교회 생활이 소제이다. 
이 소제의 최상의 부분은 하나님의 누림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 남은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의 우리의 매일의 음식으로 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과 다른이들의 영양분을 위한 음식인 소제이다.
하나님은 모든 지방에서 소제를 갖고자 하신다. 그분은 모든 지방 교회가 그분을 만족케 하고 성도들에게 매일 충분히 공급하는 소제가 되기를 갈망하신다.
우리의 배고픔은 그리스도에 의해서뿐 아니라 교회 생활에 의해 만족된다. 교회 생활은 우리를 만족시켜 주는데 이는 교회 생활이 하나님을 위한 최상의 부분과 우리를 위한 나머지 부분을 갖고 있는 단체적인 소제이기 때문이다. 교회 생활은 우리의 매일의 공급이 되는 소제이다. 소제인 교회 생활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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