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삿1.((여호수아, 사사의 표본))..매일 점검하고 씻고 새로이 JC 살도록 함의 거울-생명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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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장 [487.어두움후에빛이오며]...[389.내게로오라하신주님의<내마음주께바치옵니다>] [430.주와같이길가는것] [433.귀하신 주여] [425.주님의 뜻을 이루소서]....주님마음내게주소서..


....[[...왕이신 나의 하나님...다음세대로 하나님 경외함을 참되게 깨달아 알고 그로 인해 살도록 신앙의 전수가 그토록 중요하다!!...여호와가 영원 무궁히 유일무이한 참 왕이시나...<전심전력 다해 그분 알고 하나됨의 교통 안에 살아감으로 부종하며 따름으로써> 영존하시는 영원한 왕, 생생하게 살아계시며 친히 사랑으로 함께 하시며 이끌어 돌보며 먹이시며 교통하시는 임마누엘, 경외하올 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대주재 유일무이한 영원하신 참 왕으로 높여 인정하지 않음 인해]]....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의 갈망...오직 주님이 얻기를 원하시는 참 사람....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처인 유일무이한  그리스도 교회,  그분 영광의 반사-반영이자 영광을 살아내며 공급하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분의 단체적 아내-신부, 신격이나 위격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에서 거듭남으로써 진정한 하나님-사람 = 그리스도-사람 =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를 위하여 옛사람은 날마다 무시로 죽고 오직 그의 안에 내주하여 오셔서 사시는 부활 생명 능력 말씀의 영이신 날마다 매순간마다 새롭게 하시는 주 성령으로 사는, 그리스도로만 충만케 됨의 신진대사적 변화 이루며, 신격이나 위격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에서 머리요 남편이신 그리스도로 살며 그분을 살아내며 말씀하시는 그분으로 말하며 그분과 하나로서 오직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사는 바로 그 사람 얻음에 있음을 명심할지니!!.....(사탄은 항상 위조-모조품으로 미혹-현혹할 바).....유한한 세상과 타락한 사람이 보기에 상대적인 승패, 선악, 그분을 위함으로 기쁘고 즐겁게 해드림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삶을 통해, 그 분 안에 하나 됨(발휘되는 생생한 산믿음으로 거함-교통-사랑-순종-누림) 이루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으로써 그분의 부탁하신 사명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시도록 내주하시는 그분께 자신을 비워 내어드리는자로서 살아갈 때, 주님은 그분의 성령으로 기름 부으신바 바로 그분이 이 땅을 걸으시며 담당하신 선지자-제사장-왕적 직분에 합당한 섬김이로 살아감 친히 이루실 것...!!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모양을 따라 사람-우리를 창조하시고서, 우리가 생명나무가 표징하는 그분의 생명을 취하기 원하셨다. 그러기에 분명히 깨닫고 전심전력으로 추구할 바가 무엇인지를, 그 목표를 바라보아야 하리라...상대적 의미에서의 거룩함이나 영성, 즉  비교 우월-탁월-빼어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절대적 어떠하심 그분께 꼭 그대로 꼭 들어맞는 하나님-사람, 생명나무가 표상하는 그분의 절대적 참생명을 취한, JC이름의 부활생명 성령으로 거듭난 참 믿는이의 영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며 공급하시는 바 그분의 생명과 본성으로 영원완전히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으로 변화되어가며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이르도록 하고 계심임을 진정 깨닫고 자신을 열어드림이 합당하다..


士師/判官記...한글로는 같지만 한자로는 '~사(士, 師, 使, 事)'가 의미하는 뜻은 전부 다르다...학문을 닦아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선비..士’라고 하지만... 고대에는 (베는 도끼 형상)의 무장을 하고 업무를 보는 무관(武官)을 뜻했다. 士자에 아직도 ‘관리’나 ‘군사’, ‘사내’와 같은 뜻이 남아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士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선비’나 ‘관리’의 의미가 있다.

변호사·회계사·변리사 등에는 '선비 사(士)', 검사와 판사에는 '일 사(事)'자를, 교사(敎師), 목사(牧師)* 敎師(교사)*의사*약사에는 '스승 사(師)'가 붙고,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공사 등에는 강한 권위를 의미하는 '부릴 사(使)'자를 쓰고 있다....선비 사(士)는 공인기관에서 일정한 조건을 갖춘 이에게만 부여하는 자격증을 획득한 사람... 일 사(事)는 일정한 일을 맡은 사람이라는 뜻을 그 글자 안에 담고 있다.


일정 자격 인증자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보면 '사(士)'와 '사(師)'는 같으나, 사(師) 자는 모두 몸으로 힘들이고 애쓴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목사*의사·약사·간호사·교사·사육사 등에 '~사(師)' 자가 붙는다.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하는 것은 모두 같지만 '~사(士)' 자가 붙은 변호사 등은 주로 문서 위주로 일을 하며,  특히  '~사(師)' 자가 붙은 이는 직접 전문가로서 더 특별히 몸으로 섬기는 수고를 하는자란 의미요. 또 고단함에 대한 사회적 인정(認定)과 그 바탕에 이미 그 사람 안에 됨됨이 , 곧 섬김이로서의 인정(人情)이 이미 담겨 있다고 생각함을 전제로 한다....어찌보면...사실 의사에 쓰이는 '스승 사(師)'는 서양의 영향이 남아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영어 'Doctor'는 가르치다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doceo'에 행위자를 나타내는 접미사 '-tor'가 결합한 형태다. '가르치는 사람, 선생님'이라는 뜻이다....원래 초기 기독교에서 '교리의 권위자'라는 의미로 사용되다 중세 유럽에서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 '의학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doctor medicinae)'으로 의미가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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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의 친밀하심 안에 하나되어 머물러 그분을 참되게 사랑하고 존중하여 알아가며 신뢰함으로 절대 순종하며 그분의 영원 경륜의 깊은 갈망 이해하고 교통함으로써 그 심정 알아드리며 함께 동행-동참하며 이 땅에서 먼저 그분의 거처됨 이루는자야말로 주님 원하시는 참 사사임을 알라..

[요15:7-17...*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시25:14..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심따라 성육신하여 오신 참 Q, 구주 JC, 그분을 믿어 하나됨 안으로 들어가 바로 그렇게 내주하시는 기름부음이신 CJ의 성령 따라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사는 이마다 거듭난자요 참되게 믿는자이니...참되게 하나님 알고 사랑하여 섬기는 참제사장-참 선지자의 기름부음으로 주 앞에서 주와 함께 행하는자라야!! ....주께서 인정하고 기름부어주실 바,  사사 / 판관으로서(위임해주신 왕권, 곧 여호와의 성령따라, 영원한 말씀이신 여호와의 어떠하심과 그 이름으로 왕이신 여호와를 대리/대표하여)  참생명 이신 Q차원의 올바른 재판/판결/구별/분별/다스림/통치가 가능하게 됨

---------@@@[샤파트]--판관/사사, 판결하다=다스리다=통치하다---------

샤파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재판하다, 판결하다 judge, 다스리다, 통치하다 govern'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나오며, 칼, 니팔, 포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샤파트의 기본적인 의미는 통치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정부와 달리 고대의 정부는 입법, 행정, 사법적 기능(그리고 부서들)이 반드시 분립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재판하다'라는 일반적인 번역은 우리를 잘못 인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샤파트의 역어로 사용되는 '재판하다' judge라는 말은 정부의 사법적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부-시민적, 종교적, 혹은 그밖에 다른-와 관련하여 '통치하다' to govern 혹은 '다스리다' to rule로 일정하게 번역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현대 세계에서 그러한 넓은 의미를 지닌 어떤 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보다 더 특수화된 단어를 찾아야만 한다. NIV는 이 단어의 분사형을 '지도자' leader로 번역한다.

샤파트의 의미는, 비록 고대인들이 법률-시민 생활에 관한 법, 종교적인 법, 가정법 등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은 현대인들과 달리 법에 의하여 다스림 받는다기보다는 사람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층 더 복잡해진다. 인간에게는 법, 주권, 통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은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초기 모든 동방의 국가에서 재판의 집행권은 오늘날 사막의 아랍인들처럼 존경할만한 연장자들에게 있었다... 그러한 연장자들은 필요한 여가를 가졌을 것이며 그들이 내린 결정은 존중되었을 것이고, 상급 지위로 인한 폭넓은 교제를 통하여 보다 충분한 경험과 원숙한 숙고로 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통치의 수행을 나타내는 이 기본적인 단어의 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a)  지도자로 행동하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의 회중(민 18:22-28), 개개의 사사들(신 1:16, 삿 16:31, 삼상 7:16, 삼상 7:17), 왕(삿 8:20), 메시야(시 72:4), 심지어 하나님 자신(시 96:13)에 의해서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궁극적인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다. 그는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이시기 때문이다(창 18:25). 그러나 모세가 소송 사건들(형사 사건, 가정 사건, 종교적 사건 등등)을 판결할 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며(출 18:13, 출 18:15), 이는 구약의 신권 정치(theocracy)에서 다른 통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실이다(신 1:17).

(b)  두드러진 것으로 샤파트는 민사, 가정사, 종교적 송사를 재판하는 것과 같이 논쟁을 일으키는 소송 사건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우에 재판관의 임무는 특별히 미쉬파트(분별, 공의)와 체데크/체다카(의)로 재판하는 것이며(시 72:2-4), 고발한 사건에서 의인들을 의롭다 하고 악인을 정죄하는 것(신 25:1)이다.

(c)  단순히 법보다는 오히려 사람에 의하여 통치가 이루어지는 환경으로 인하여, 관원(쇼페트[재판하는 자])은 사법권은 물론 행정권도 가졌다. 관원은 또한 사법적인 판결을 집행하거나 집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다윗은 사울과 논쟁할 때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 서실 것을 호소하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판단하시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4:15). 따라서 여러 역본에서 건지다, 신원하다, 정죄하다, 벌하다와 같은 단어들과 사법적, 행정적 의미를 지닌 관련 단어들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d)  모든 참된 권위는 하나님의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대심판에서 세상의 재판장이 되실 것이므로 그는 탁월한 쇼페트이시며(시 96:13, 시 50:6, 시 75:8), 한편으로 섭리를 통하여 그는 언제나 우주의 최고 쇼페트가 되신다(시 94:2, 참조: 시 103:19).  이상의 모든 용례는 칼형이다.

니팔형은 때때로 이 어간의 상호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통치 과정이라는 의미가 확대되어 소송 사건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를 보여준다. 그러한 경우 에트(...와 함께)가 이 동사의 목적어 앞에 온다. 예컨대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내가 너와 함께 심판에 들어가리라, 렘 2:35, 참조: 겔 17:20, 겔 20:35, 겔 20:36, 겔 38:22, 매 경우에 하나님이 행위자이시며 화자이시다). 변론하다, 항변하다라는 법적인 의미에서 '변호하다' plead가 종종 나온다. 즉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삼상 12:7), "변론하다"(삼상 43:26, BDB, 'have a controversy'), '심판을 베푸시다'(사 66:16, RSV 'execut judgment').

포엘 분사는 "정죄하는 자"(시 109:31, 한글개역, "판단하려 하는 자"), "고소자"(욥 9:15, 한글개역, "심판하실 그"), "너에게 불리한 재판"(습 3:15, 한글개역, "너의 형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위협적인 재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샤파트는 그 파생 명사 미쉬파트와 더불어 어떠한 영역과 어떠한 형태이든지 통치(정부)의 기능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는 보다 희귀한 딘과 분명히 다르다. 즉 딘은 보다 시적인 용어인 반면에 샤파트는 주로 보다 형식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 쓰인다. (참조: R. D. Culver; BDB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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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슈파트] 정의=공픠= 공정한 판단, 심판, 재판, 공의, 법령 등

미쉬파트(명남)는 샤퍄트(fp;v; , 8199: 재판하다, 다스리다)에서 유래했으며, '심판, 재판 judgment, 공정, 공의 justice, 법령 ordinance, 관습 custom, 방식 manner'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00회 이상 나온다.

미쉬파트는 분명히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나 하나님이 전체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사상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준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용된 미쉬파트가 거의 400여회 '심판' judgment으로 번역되고 또한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손 치더라도 이 번역은 입법, 사법, 행정적 기능과 정부에서 기능들이 뚜렷이 분리된 오늘날의 새로운 통치 방식을 고려해 볼 때 현대의 우리에겐 종종 불완전한 번역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다스리다, 통치하다'를 의미하며 정부의 모든 기능들을 가리키는 일반동사 샤파트(이 단어에서 미쉬파트가 파생됨)가 사법적 기능만을 잘못 국한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에 동사와 명사 모두는 이 모든 기능들을 포함한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모든 용례를 분석하면 적어도 13가지 관련 용법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의미의 영역을 지닌 단 하나의 영어 단어로 번역한다면 명확한 핵심 사상은 반드시 justice라는 단어로 표현될 것이다. 심지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매우 강력하게 규칙적으로 번역하는 RSV도 미쉬파트를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새롭게 번역했다("주의 판단"[시 72:1]과 "공의로"[시 72:2]를 대조하라). 명사 미쉬파트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 혹은 종교적 통치의 거의 모든 측면을 지칭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a)  일반적인 재판장 앞에 가져온 소송 사건을 판결하는 행위. BDB는 출 21:31에서부터 출발하여 204개의 실례를 제공한다 - RSV와 NASB는 출 21:31을 이에 대한 실례로 간주하지 않고, 달리 번역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용례들은 매우 분명한 것들이다(신 25:1, 수 20:6 등).

(b)  소송 사건을 판결하는 장소. 보다 희귀한 이 용법의 분명한 예는 왕상 7:7이다(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c)  소송의 과정은 미쉬파트라고 불리운다. 의미1과 의미2 사이에 구분하기가 어려운 의심스러운 실례가 많이 있다. 한가지 예는 사 3:14이다. '소송' litigation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용례를 번역하기에 적합한 단어일 것이다. 가장 명백한 용례는 뒤따르는 명사와 함께 임(im)을 사용한다. "그러그러한 심판"(욥 22:4, 시 143:2).

(d)  소송 사건(즉 관원에게 가져온 특수한 소송 사건). 예를 들면 솔로몬은 그가 "미쉬파트를 들을"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했다 - 여기서 미쉬파트는 그 앞에 가져온 송사를 뜻한다(왕상 3:11, ASV marg). 이 실례는 인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RSV) 욥기에 나오는 아라크티 미쉬파트("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욥 13:18)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왕상 8:59도 보라. 이러한 용법은 명사 리브의 용법과 비슷하다.

(e)  법정 재판관의 선고 혹은 판결. 이 의미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판결' judgment이라는 단어가 미쉬파트의 역어로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매우 옳다(왕상 20:40). 렘 26:11, 렘 26:16에서 "죽음이 합당하니"라는 표현은 미쉬파트 마우웨트를 번역한 것이며, 분명히 사형 선고를 의미한다.

(f)  심판의 때. 분명한 예는 시 1:5, 전 12:14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미쉬파트로 가져 올 것이다"(한글개역,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심판하시리라")에서 미쉬파트는 위에 제시한 것과 매우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BDB는 일반적인 '심판의 집행'이 앞의 실례를 포함하여 일단의 구절들에서 미쉬파트가 지니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예는 공의의 개념 혹은 성질과 관련하여 분류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아 보인다.

이상의 모든 실례는 미쉬파트가 통치의 사법적인 면을 나타내는 주된 예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권위라고 생각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되는 용법은 다음과 같다.

(g)  주권(sovereignty), 궁극적인 권위 혹은 권리라는 의미에서의 통치의 법적 근거.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을 조직과 인간의 본질("자연권")에서 찾곤 한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①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미쉬파트라고 지칭되는 것이 바로 이 권위이다. '미쉬파트(재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신 1:17).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전체 미쉬파트는(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하나님의 창조물인 각 개인은 양도할 수 없는 미쉬파팀(권리 rights)을 가지고 있다(참조: R. D. Culver, Toward a Biblical View of Civil Government, 1974).

② 재판장의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은 왕되신 메시야의 엄연한 권위에 대하여 언급하는 시 72:1-2에서 가장 잘 예증된다. 물론 섭리의 교리가 이 개념의 기초가 된다(시 103:19, 참조: 롬 13:1 이하). 하나님의 이러한 우주적 통치와 지배는 렘 8:7의 미쉬파트가 전달하는 개념인 것 같다: "내 백성은 여호와의 율법(한글개역 "규례")을 알지 못하도다".

또한 통치의 입법적인 면과 관련되는 용법이 있다.

(h)  정의의 성격은 모든 옳은 인격적인 행정에 강조되어 있다.

① 이 공의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이다. 모든 참된 미쉬파트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며, 따라서 미쉬파트는 하나님의 요구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미쉬파트에 대하여 말할 때, 자주 그러하듯이, 이 단어는 특별한 뉘앙스를 지닌다. 즉 이 때 미쉬파트는 하나님의 당연한 법령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당연한 요구(just claims)를 뜻한다. 주되신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실 수 있으며, 그는 요구하신다"(Koehler, OT Theology, pp. 205-206).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권리(정의, 권위, 등)가 그에게 있다(사 30:18, 참조: 창 18:25). 하나님은 이러한 의미에서 미쉬파트를 사랑하신다(시 37:28). 시 36:6)은 '주의 미쉬파트(단수형)는 큰 심연이다'라고 기록한다(한글개역,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② 공의로서의 미쉬파트, 즉 하나님의 속성에 뿌리 박혀 있는 의는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이 되어야 하며 인간 중에서 사법적 과정의 특성이 되어야 한다(시 106:37). 지혜로운 자는 공의를 말하며(시 37:30) 공의를 생각한다(잠 12:5).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신다(미 6:8). 의인은 공의를 즐거워하며(잠 21:15) 의로운 재판장은 재판할 때 공의를 사용한다(미 3:1, 참조: 잠 29:4).

(i)  미쉬파트는 또한 율법의 규정을 나타낸다 - 이 단어는 종종 호크(법령, 출 15:25)와 토라(율법, 사 42:4)와 대등하게 사용된다. 오경의 법령들은 미쉬파트이며(레 5:10, 레 9:16 등), 사실상 모세 율법의 각 규정들이 미쉬파트이다(신 33:10, 신 33:21, 시 119편에서 16회 사용됨).

(j)  방법, 설계도(출 26:30, 한글개역 "식양").

(k)  풍습(왕하 17:33, 한글개역 "풍속").

(l)   취해진 알맞은 크기(왕상 5:8). 이 세 가지 의미들(왕상 5:10, 왕상 5:11, 왕상 5:12)은 거의 표준적인 것들이 아니고 확대된 의미들이긴 하지만 역시 이 단어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m)  율법, 인간, 하나님 아래 어떤 사람의 권리는 미쉬파트라고 불리운다(신 18:3, 렘 32:7).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관한 구약성경의 묘사에서 체테크 및 체다카와 자주 연관되는 이 개념은 성경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핵심을 이룬다.

주(註):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인 흉패는 "판결 흉패"(출 28:15, 출 28:29-30)라고 불리우는데, 이렇게 불리운 이유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보석을 통하여 주어지는 소위 어떠한 계시 때문이 아니라 그 흉패가 아론의 가슴을 덮었으며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흉패가 그 가슴 위에 있게 되고, 따라서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미쉬파트)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론이 하나님 앞에서 관여된 바는 이스라엘의 칭의, 즉 범죄에 대한 사법적인 선고(위를 보라)였다. 예컨대 '실제 동양의 생활에서처럼 예언적인 환상에서 칭의의 선언은 종종 입고 있는 옷의 성질에 의해 표현되었다. 사 61:10은 이에 대한 좋은 실례다'. 또한 사 62:3, 계 3:5, 계 7:9, 계 19:14, 에 6:8-9, 에 6:12을 보라(A. C. Hervey, Smith's Dictionary of the Bible, Hackett ed., Ⅱ, pp. 1066-67).  (참조: R. D. CUL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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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어 마슈파트 <미슈파트פטָּשְׁמִ<

[시9:8.....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  [렘11:20...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 [시140:12...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   [사49:4...정녕히 나의 신원(=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함께 하나님께서> ִמְׁשָּפט미슈파트<신원>은 공정하게 하다 심판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로 <미슈파트פטָּשְׁמִ< ...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정의롭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 ... 공의 공정을 뜻한다 ... 공정하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한다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로우심으로 다스리신다 ...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완성이 되었다 ...  이 땅에 하나님의 온전한 공의가 선포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 ...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모든 판단을 의지 할 수 있다 ...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끌고 가실 것이요 ... 그 안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담겨 있기에 믿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미슈파트פטָּשְׁמִ<이다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더라도 기억해야 한다 ...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신다 ... 가만히 계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때를 찾고 계신다 ... 언제 어떻게 일하셔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판단하고 계시며, .. 지금은 거듭난 믿는이 참  <나>를 연단하고 훈련하는 시간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억울함을 보시고 풀어 주시는 시간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 사랑하는 영혼의 억눌림과 원통함을 그대로 보고만 계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분이 바로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시간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 억울함의 신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 하나님의 방법이 함께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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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처럼 말하지 말라, 믿는이여!! 뉴노멀, 자율??...이 단어를 주 앞에서 곰곰이 되씹어보라....내 인생은 나의 것??...살아계신 주 임마누엘 앞에서 감히 누가 그리 말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공급하고 무엇을 가르치며 어찌 섬길 것인가의 핵심은 "그 자신이 믿고-살고-누리고-찾아내고 살아낸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 창조주, 초월적 근원이신 그리스도, 곧 참생명과 그분의 운행하심따라 적용하여 살아낸 바에 달려있다....그것 아니면 거짓말장이=사기꾼일 뿐이다...구구로 살라..구주께서 일하시도록 하라..


...그대 안에 내주하여 계시는 JC, 그분은 진정한 빛과 소금이심을 아는가.. 거듭난 그대 영 안에 부어지시고 내주하심으로써 하나되어 계시며 JC의 마음 주시고 구주의 패러다임으로 변화시켜가시며 이미 몸의 구속조차 이루신, 완전히 이루어 가고 계시는 분이시요,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위해 이 땅에 성령과 함께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화목의 대사, 평화의 도구로서 오늘도 그대를 보내고 계시는 분...


...."벧엘"로 "벧엘"되게 하라시는 주님, 먼저 주로 주 되시도록 주님께 순종하라...말의 진실성 그대로를 살아냄이 주님께는 그토록 중요하다....대적은 그대 육신에 주입되어 있는, 사탄의 주구-정화인, 양의 탈 쓴 이리, 곧 "죄성이요, 세상가치에 흠뻑 젖어 분간 안되도록 하는 마귀라"..."거듭난 사람" 벧엘을 기만하고 미혹하여 실지로는 "루스...[참 생명주님]으로부터 떨어뜨려 생명-교통-사랑의  단절-결핍-격리-고립-허망/황량" 상태로 만들어 삼키려 한다.."할 수 없다"는 그대 안의 세상-가나안을, 죄성을, 옛사람을 오늘!! "헤렘"하라!!...주님은 그토록 오래참아주고 계시며, 그대의 부족함을 여기저기에서 부지런히 메꾸어 주시고 계시는바, ..어느덧 종이요 나그네가 되어버렸음을 자각해야 한다...이제, 세상 염려 내려 놓고, 말씀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시는 주님께 귀기울여 듣고 그 방법 따라 순종해보라... 순종하기를 다시 배우라... 그분으로 주 되시게 함 통해 이뤄지는 놀라움과 감사, 그 큰 기쁨..결코 그 어느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비밀로 만들라!!


@@사사기 타이틀 곡...[way maker..주여기 운행하시네..천관웅]@@

주 여기 운행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여기 역사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여기 운행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여기 역사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는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주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 어둠 속을 밝히시는 빛 그는 우리 하나님

주 우리 마음 만지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우리 치유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우리 새롭게하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우리 회복시키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는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주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 어둠 속을 밝히시는 빛 그는 우리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주의 일하심 볼 수 없어도 주의 일하심 알 수 없어도  

주는 결코 멈추지 않네  주는 결코 멈추지 않네


@@[주 발 앞에 무릎꿇고]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에 나 안기네 어떤 말도 그 어떤 소리도 그 발 앞에서 잠잠해지네

주 나의 사랑 그 발 앞에 앉아 내 모든 기도는 사랑의 노래가 되네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아도니 베섹을 잡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친히 말씀하실 주님을 제쳐놓고!! 자의적으로 행하였음..먼저 주님께 물어봐야 마땅했다..모세는 그리했었고 아론을 지명받았다!....오늘날에도 여전히 주께 합당한 사사의 기준은, 주와 하나됨 안에서 주바라기로 사는,  참 나실인 JC의 기준에 부합하는 자라야 하리라..)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북쪽은 길보아산 남쪽은 세겜, 그 사이 지역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유다 지파가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치다

.....갈렙은 유다지파 일원으로서 (베섹과 예루살렘에서) 마땅한 역할을 수행하고 난 후, (그의 기업으로 지정해주신) 헤브론을, 그리고 이어 드빌을 얻고 있다.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교통)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

......'연합, 동맹' ....헤브론은 아마도 팔레스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였던 것 같다(해발 3,040피트). 아브라함은 그의 세번째 제단을 그 지역 근처에 세웠으며(창 13:18) 그곳에 살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사랑하는 자를 그곳에 묻었다(창 23장). ....이곳은 그의 유업의 몫으로 갈렙에게 주어졌다(수 14:13-14). 이곳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계속하여 여호와 신앙의 예배처로서 의미를 굳건히 지녀왔다. 왜냐하면 이곳은 도피성이었으며(수 21:13) 다윗의-신정 왕국을 건설한 장소였기 때문이다(삼하 2:4, 삼하 5:3). 이곳은 다윗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에도 예배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삼하 15:7, 삼하 15:8). 그 당시 실로의 성막은 파괴되었으며 솔로몬의 성전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여 예배드리던 다른 공식적인 장소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헤브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브온이었으며, 그리고 또 다른 곳도 있었다.(G. V. Groningen)

===옷니엘이 드빌을 치다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뜻..성소 :: 가나안 최대 도서관이 있었던 성읍)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하나님 말씀, 말씀이신 하나님, 영생자존 무한하신 창조주 근원자, 조물주, 운영자, 근원적 참 생명 공급자, 신실과 참이신 분...그분의 압에서 내시는 말씀, "다바르"를 붙들어 하나되어 그 안에 사는(=다바크)자마다 인생광야(미드바르)의 새로운 날마다 걸음 걸음의 의미란 주와 하나되어 걷는 신탁의 말씀이 있는 성소(드비르,= 데비르) 안의, 주와 교통하며 거닐며 목자이신 주님의 초장(도베르)에서 주님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3.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4.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15.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유다와 시므온 지파의 승리

16.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여리고)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

17.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 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18.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자기 처지나 형편과 무관하게 !! 여호수아의 말 그대로 믿음으로 나아갔더라면!!..주님이 넘겨주셨을 것!!)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0.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베냐민과 유다의 공동 관할 기업으로, 산지였다!!)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연합??.서로 미루었던 것 같다)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벧엘을 치다.....자행자지 하다.

22.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그럼에도 불구하고!~!)

23.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벧엘은 에브라임과 베냐민의 경계에 있었기에 공동관할이었다..그럼에도, (주께 묻지 않고) 베냐민과 함께가 아니라 므낫세와 함께 움직인다.

24.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조건을 제시하며 강요당한 바, 어쩔 수 없이 협력한, 그와 그의 가족 처분에 대해서 먼저 주께 여쭈지 않고 있다..그 당시 히위 족속의 거주지였다)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이것은 주님 뜻 아니다!!..먼저 조건 제시하며.타협하는 정신은 세상의 영이다....순서가 , 최우선순위가 올바르게 정립되는 것이 중요하다 )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믿는 자에게는..))..이 말씀을 잊고 있다..점점 담대한 믿음과 용기-담력 상실의 유약성..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사해 남부 에돔 경계)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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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제1장

1.  Now after the death of Joshua it came to pass, that the children of Israel asked the LORD, saying, Who shall go up for us against the Canaanites first, to fight against them?

2.  And the LORD said, Judah shall go up: behold, I have delivered the land into his hand.

3.  And Judah said unto Simeon his brother, Come up with me into my lot, that we may fight against the Canaanites; and I likewise will go with thee into thy lot. So Simeon went with him.

4.  And Judah went up; and the LORD delivered the Canaanites and the Perizzites into their hand: and they slew of them in Bezek ten thousand men.

5.  And they found Adonibezek in Bezek: and they fought against him, and they slew the Canaanites and the Perizzites.

6.  But Adonibezek fled; and they pursued after him, and caught him, and cut off his thumbs and his great toes.

7.  And Adonibezek said, Threescore and ten kings, having their thumbs and their great toes cut off, gathered their meat under my table: as I have done, so God hath requited me. And they brought him to Jerusalem, and there he died.

8.  Now the children of Judah had fought against Jerusalem, and had taken it, and smitten it with the edge of the sword, and set the city on fire.

9.  And afterward the children of Judah went down to fight against the Canaanites, that dwelt in the mountain, and in the south, and in the valley.

10.  And Judah went against the Canaanites that dwelt in Hebron: (now the name of Hebron before was Kirjatharba:) and they slew Sheshai, and Ahiman, and Talmai.

11.  And from thence he went against the inhabitants of Debir: and the name of Debir before was Kirjathsepher:

12.  And Caleb said, He that smiteth Kirjathsepher, and taketh it, to him will I give Achsah my daughter to wife.

13.  And Othniel the son of Kenaz, Caleb's younger brother, took it: and he gave him Achsah his daughter to wife.

14.  And it came to pass, when she came to him, that she moved him to ask of her father a field: and she lighted from off her ass; and Caleb said unto her, What wilt thou?

15.  And she said unto him, Give me a blessing: for thou hast given me a south land; give me also springs of water. And Caleb gave her the upper springs and the nether springs.

16.  And the children of the Kenite, Moses' father in law, went up out of the city of palm trees with the children of Judah into the wilderness of Judah, which lieth in the south of Arad; and they went and dwelt among the people.

17.  And Judah went with Simeon his brother, and they slew the Canaanites that inhabited Zephath, and utterly destroyed it. And 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Hormah.

18.  Also Judah took Gaza with the coast thereof, and Askelon with the coast thereof, and Ekron with the coast thereof.

19.  And the LORD was with Judah; and he drave out the inhabitants of the mountain; but could not drive out the inhabitants of the valley, because they had chariots of iron.

20.  And they gave Hebron unto Caleb, as Moses said: and he expelled thence the three sons of Anak.

21.  And the children of Benjamin did not drive out the Jebusites that inhabited Jerusalem; but the Jebusites dwell with the children of Benjamin in Jerusalem unto this day.

22.  And the house of Joseph, they also went up against Bethel: and the LORD was with them.

23.  And the house of Joseph sent to descry Bethel. (Now the name of the city before was Luz.)

24.  And the spies saw a man come forth out of the city, and they said unto him, Show us, we pray thee, the entrance into the city, and we will show thee mercy.

25.  And when he showed them the entrance into the city, they smote the city with the edge of the sword; but they let go the man and all his family.

26.  And the man went into the land of the Hittites, and built a city, and called the name thereof Luz: which is the name thereof unto this day.

27.  Neither did Manasseh drive out the inhabitants of Bethshean and her towns, nor Taanach and her towns, nor the inhabitants of Dor and her towns, nor the inhabitants of Ibleam and her towns, nor the inhabitants of Megiddo and her towns: but the Canaanites would dwell in that land.

28.  And it came to pass, when Israel was strong, that they put the Canaanites to tribute, and did not utterly drive them out.

29.  Neither did Ephraim drive out the Canaanites that dwelt in Gezer; but the Canaanites dwelt in Gezer among them.

30.  Neither did Zebulun drive out the inhabitants of Kitron, nor the inhabitants of Nahalol; but the Canaanites dwelt among them, and became tributaries.

31.  Neither did Asher drive out the inhabitants of Accho, nor the inhabitants of Zidon, nor of Ahlab, nor of Achzib, nor of Helbah, nor of Aphik, nor of Rehob:

32.  But the Asherites dwelt among the Canaanites, the inhabitants of the land: for they did not drive them out.

33.  Neither did Naphtali drive out the inhabitants of Bethshemesh, nor the inhabitants of Bethanath; but he dwelt among the Canaanites, the inhabitants of the land: nevertheless the inhabitants of Bethshemesh and of Bethanath became tributaries unto them.

34.  And the Amorites forced the children of Dan into the mountain: for they would not suffer them to come down to the valley:

35.  But the Amorites would dwell in mount Heres in Aijalon, and in Shaalbim: yet the hand of the house of Joseph prevailed, so that they became tributaries.

36.  And the coast of the Amorites was from the going up to Akrabbim, from the rock, and upward.

-------Judges 1 Amplified Bible

==Jerusalem Is Captured

1 Now it came about after the death of Joshua, that the [a]sons (descendants) of Israel (Jacob) asked the Lord, “Who shall go up first for us against the Canaanites, to fight against them?” 2 And the Lord said, “Judah shall go up [first]; behold, I have given the land into his hand.” 3 And [the tribe of the sons of] Judah said to [the tribe of the sons of] Simeon his brother, “Come up with me into my allotted territory, so that we may fight against the Canaanites; and I likewise will go with you into your allotted territory.” So Simeon went with him. 4 Then Judah went up, and the Lord gave the Canaanites and the Perizzites into their hand, and they struck down in defeat ten thousand men at Bezek. 5 Then they found Adoni-bezek in Bezek and fought against him, and they struck down in defeat the Canaanites and the Perizzites. 6 But Adoni-bezek fled; and they pursued him and caught him and cut off his thumbs and his big toes. 7 Adoni-bezek said, “Seventy kings with their thumbs and big toes cut off used to gather up scraps of food under my table; as I have done [to others], so God has repaid me.” So they brought him to Jerusalem, and he died there.

8 Then the sons of Judah fought against [Jebusite] Jerusalem and [b]captured it and struck it with the edge of the sword and set the city on fire. 9 Afterward the sons of Judah went down to fight against the Canaanites who lived in the hill country, in the Negev (South country) and in the lowland. 10 So Judah went against the Canaanites who lived in Hebron (the name of Hebron formerly was Kiriath-arba); and they defeated Sheshai and Ahiman and Talmai.

===Capture of Other Cities

11 From there [the tribe of] Judah went against the inhabitants of Debir (the name of Debir formerly was Kiriath-sepher [city of books and scribes]). 12 And Caleb said, “Whoever attacks Kiriath-sepher and captures it, I will even give him my daughter Achsah as a wife.” 13 Othniel the son of Kenaz, Caleb’s younger brother, captured it; so he gave him his daughter Achsah as a wife. 14 When she came to Othniel, she persuaded him to [allow her to] ask her father [Caleb] for a field. Then she [rode up to Caleb and] dismounted from her donkey, and Caleb said to her, “What do you want?” 15 She said to him, “Give me a blessing; since you have given me the land of the Negev (South country), give me springs of water, too.” So Caleb gave her the upper springs and the lower springs.

16 The sons of [[c]Jethro] the Kenite, Moses’ father-in-law, went up from the City of Palms (Jericho) with the sons of Judah, to the wilderness of Judah which is in the Negev (South country) near Arad; and they went and lived with the people. 17 Then [the warriors of the tribe of] Judah went with [the warriors of the tribe of] Simeon his brother, and they struck the Canaanites living in Zephath and utterly destroyed it. So the city was called Hormah (destruction). 18 Also [the warriors of] Judah captured Gaza with its territory and Ashkelon with its territory and Ekron with its territory. 19 The Lord was with Judah, and [the tribe of] Judah took possession of the hill country, but they could not dispossess and drive out those inhabiting the valley because they had iron chariots. 20 Then they gave Hebron to Caleb, as Moses had said, and he drove out from there the three sons of Anak. 21 But the sons of Benjamin did not drive out the Jebusites who inhabited Jerusalem; so the Jebusites have lived with the sons of Benjamin in Jerusalem to this day.

22 The [d]house of Joseph also went up against Bethel, and the Lord was with them. 23 The house of Joseph spied out Bethel (now the name of the city was formerly Luz). 24 The spies saw a man coming out of the city and they said to him, “Please show us the entrance to the city and we will treat you kindly.” 25 So he showed them the entrance to the city, and they struck the city with the edge of the sword, but they let the man and all his family go free. 26 The man went into the [e]land of the Hittites and built a city and named it Luz, which is its name to this day.

===Places Not Conquered

27 But [the tribe of] Manasseh did not take possession of Beth-shean and its villages, or Taanach and its villages, or the inhabitants of Dor and its villages, or the inhabitants of Ibleam and its villages, or the inhabitants of Megiddo and its villages; so the Canaanites remained in that land. 28 It happened when Israel became strong, that they put the Canaanites to forced labor, but they did not drive them out completely.

29 Neither did [the warriors of] Ephraim drive out the Canaanites who were living in Gezer; so the Canaanites lived in Gezer among them.

30 [The warriors of the tribe of] Zebulun did not drive out the inhabitants of Kitron or of Nahalol; so the Canaanites lived among them and were put to forced labor.

31 [The warriors of the tribe of] Asher did not drive out the inhabitants of Acco, or the inhabitants of Sidon, or of Ahlab, or of Achzib, or of Helbah, or of Aphik, or of Rehob. 32 So the Asherites lived among the Canaanites, the inhabitants of the land, because they did not drive them out.

33 Neither did [the warriors of] Naphtali drive out the inhabitants of Beth-shemesh, or the inhabitants of Beth-anath, but they lived among the Canaanites, the inhabitants of the land; and the inhabitants of Beth-shemesh and of Beth-anath became forced labor for them.

34 Then the [f]Amorites forced the sons of Dan [back] into the hill country, for they would not allow them to come down into the valley; 35 yet the Amorites persisted in living on Mount Heres (the mountain of the sun), in Aijalon, and in Shaalbim; but when the power of the house (descendants) of Joseph became strong and prevailed, they became forced labor. 36 The border of the Amorites ran from the ascent of Akrabbim, from [g]Sela (rock) and upward.

===Footnotes

Judges 1:1 In general, sons of Israel or Israel or Israelites refers to all the people (males and females) of the various tribes descended from the twelve sons (Gen 35:23-26) of Jacob (later renamed Israel by God). In verses concerning things such as warfare or circumcision sons of Israel or Israel or Israelites usually refers only to the males. Tribes of ancient people were identified by the name of their founding ancestor. Therefore, this same general rule applies when referring to individual tribal groups, e.g. sons of Reuben, Reuben, Reubenites and so throughout.

Judges 1:8 Judah briefly captured Jerusalem, but could not hold and occupy it.

Judges 1:16 Also called Reuel (Ex 2:18).

Judges 1:22 I.e. the tribes of the descendants of Manasseh and Ephraim.

Judges 1:26 I.e. Aram (northern Syria).

Judges 1:34 Like the other Canaanites, the Amorites probably had iron chariots with which they controlled the valley. 

Judges 1:36 Some scholars identify Sela with Petra in modern day Jordan.

==사사기 서론=====

이 책은 히브리어로 쇼페팀(shophtim), 곧 사사기(Book of Judges)라고 불린다. 

시리아역과 아랍역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사사기”라며 부연하여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의 재판은 독특하여 그 직무가 다른 민족들의 재판자(사사란 재판자라는 뜻)들의 재판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70인역은 이것을 다만 크리타이(!!!krivtai), 즉 사사들(Judges)이라고만 명칭을 붙이고 있다. 

본서는 옷니엘로부터 엘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사들의 통치 기간 중의 이스라엘 공영체에 관한 역사다. 

그러므로 그 중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까지 그 역사를 전달해 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셨던 것이다. 

이 책은 라이트푸트 박사의 계산에 의하면 299년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즉 유다 지파의 옷니엘의 40년간, 베냐민의 예후의 80년간, 납달리의 바락의 40년간, 므낫세의 기드온의 40년간, 그의 아들 아비멜렉의 3년간, 잇사갈의 돌라의 23년간, 므낫세의 야일이 22년간, 므낫세의 입다의 6년간, 유다의 입산의 7년간, 스불론의 엘론의 10년간, 에브라임의 압돈의 8년간, 단의 삼손의 20년간, 그래서 모두 합하면 299년이 된다. 

에글론은 그들을 18년 동안 압박했고, 야빈은 20년 동안 억압했으며,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억압했다. 

그래서 그들이 종살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동안은 사사들의 통치 기간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보면 사사들은 여덟 지파에서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분산되었던 그 영예는 마침내 유다 지파에게 집중되게 되었다. 

이 책 안에 들지 않은 엘리와 사무엘 두 사사는 레위 지파 출신이다. 그러므로 르우벤이나 시므온 지파 또 갓이나 아셀 지파에게서는 사사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사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차례대로 본서 16장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나머지 마지막 다섯 장에서 룻의 이야기와 같이(룻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일어난 몇 가지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사사 시대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전체 이야기의 줄거리가 중단되지 않도록 그 책 마지막에 그 사건들이 함께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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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의 배경이 되는 연대는 사사 옷니엘의 등장(BC1367)로 부터 사울왕 등장(BC1025)의 342년간 지칭하며, .....룻기의 시대 배경 ::: 룻기가 망라하고 있는 기간은 11년 정도, BC 1322년부터 1312년까지이다.(2대사사인 에훗 등장 6년전-후5년 사이로, 살몬(라합과 결혼...여리고 점령BC.1400)의 세 아들[엘리멜렉-무명씨-보아스], 나오미와 룻의 귀환 시점은 특히 중년기의 보아스 활동시점으로 본다)..

 

(특별한 설명은 없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사사 에훗 때에도, 사사 드보라 때에도 유다지파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유다의 참여는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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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기간의 이스라엘 공영체의 국가 형편에 관해 살펴보면,

1. 거기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그러한 율법에 의해 지배되고 그런 약속에 의해 풍족케 된 그런 특별한 백성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특성, 즉 위대하거나 선한 모습은 없다. 

우리는 형편 없이 부패한 그들을 보게 되며, 그들 주위에 있는 이웃 민족들에 의해 가혹하게 억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이 책 전체를 통해 그 어디에도 전쟁에서나 협의에 있어서 그들의 영광스러운 가나안 입성과 비교될 만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나님이 여기에서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바가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가 아니고 다른 세상에서 완전한 성결과 행복을 찾기 위해 태양 아래에서는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불완전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2. 그러나 이 책의 기록자가 그들의 죄악과 불평에 관해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지라도, 그 땅에는 신앙적인 모습이 존재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그들 가운데는 비록 우상 숭배에 빠져 버린 자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모세의 율법에 따른 성막 예배가 지켜지고 있었고, 그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역사가들은 전쟁과 혼란의 사건들만 기록하고 한 국가 안에 일어난 사법과 상거래에 대한 통례적인 일들은 당연지사로 여기고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는 그와 같은 사건들의 암흑과 견줄 수 있는 그 이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당시에는 각 지파가 보통 각각 많은 통치 기관을 가지고 서로 제각기 행동하면서 어떤 공통된 우두머리나 협의체 없이 행동하여 그들 사이에도 많은 차이를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떤 기관들은 아주 두드러지게 드러나거나 또 그렇게 행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4. 사사들의 통치는 상설적인 것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 있는 것이었다. 

에훗의 승전 후 “그 땅은 80년간을 쉬게 되었다”는 것과 바락의 승전 후 “40년간”을 쉬었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것―물론 그들이 통치한 기간은 그보다 훨씬 짧았을 것이다―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사사들이나 다른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원수에 대하여 보복을 해야 할” 때가 오거나 이스라엘을 그들의 우상 숭배에서 순화시켜야 할 때가 오면―원칙적으로 이 두 가지 사실이 사사들의 이스라엘 치리의 특별한 원인이 된다―공적인 특별한 봉사를 행하도록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일으킴을 받고 격려받았다. 

그러나 여선지자 드보라는 전쟁 수행의 기회가 있기 전에도 모든 이스라엘을 치리하기 위해 사사의 일을 수행했다(4:4).

5. 사사들의 통치 기간에도 하나님은 더욱 특별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군림하셨다. 

그들이 그런 형태의 정치 제도를 버리기로 작정했을 때, 사무엘은 그들에게 바로 이 사실을 말해 주었다(삼상 12:12). 

하나님은 당신의 율법과 제 법규가 순조롭게 작용하는지를 시험해 보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시대의 후반기에 가서는 사사들의 통치를 더욱 상설화하고 처음보다 더 확대했으며, 드디어 그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고 따르는 다윗 왕을 세워 주셨다. 

그 다음부터 비로소 이스라엘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높고 낮은 관리들에 대해 대단히 감사한 마음을 가지도록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우리에게 선을 이루는”(롬 13:45)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4대 사사는 기드온과 바락, 삼손, 입다라고 칭송받고 있다(히 11:32). 학자 패트릭 주교는 선지자 사무엘이 이 책의 필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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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장 (개요)

본 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의 몇몇 족속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어떤 진행 과정을 밟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유다 지파는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그 위대한 사업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을 쉽게 완성할 수 있었던 성실한 자세로 그 과업을 출발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질서 있게 행한 점과 부족했던 점을 여기서 살펴보게 된다.

1.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연합해서 용감히 행했다.

   (1)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시작하라고 명하셨다(1, 2).

   (2) 유다는 시므온을 택해 자기와 함께 행동하게 한다(3).

   (3) 유다와 시므온은 베섹을 치는 데 성공하고(4-7), 예루살렘(8), 헤브론과 드빌(9-15), 호르마, 가사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도 싸워 이겼다(17-19).

   (4) 그러나 철병거가 있는 곳에서는 실패했다(19). 겐 사람들이 유다 자손과 함께 거한다는 언급이 있다(16).

2. 유다나 시므온 지파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지파들은 겁쟁이같이 행동했다.

   (1) 베냐민은 실패했다(21).

   (2) 요셉의 집은 벧엘을 대항해 잘 싸워 이겼다(22-26).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승리하지 못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도 성공하지 못했다(27-29).

   (3) 스불론은 가나안 사람들을 남겨 두었다(30).

   (4) 아셀은 어떤 지파보다도 가나안 족속들에 대해 굴종적이었다(31, 32).

   (5) 납달리는 그의 도성들 중 몇몇은 완전 소유하지 못했다(33).

   (6) 단은 아모리 사람들에 의해 궁지에 몰려 있었다(34).

잇사갈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다른 두 족속과 요단 강 건너편 반 지파에 대한 설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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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지파의 공격(삿 1:1-8)

Ⅰ.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느 지파가 먼저 가나안 족속들을 쳐서 다른 지파들에게 힘을 돋워 주어야 할지를 하나님의 신탁에 물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였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가 그들을 지휘했고 모든 지파는 그에게 순종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자 그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고 그가 가졌던 권위를 차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판결 흉패에 문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서 나오는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시요, 친히 저들의 대군의 주(主)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물은 것은 “누가 먼저 올라가리이까?”(1절)였다.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많은 수로 늘어났고, 그들이 차지한 땅은 포화 상태가 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적을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지파가 먼저 무기를 잡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각 지파들이 앞장서기를 바라고 그 영예를 차지하기를 서로 다투었는지, 아니면 앞서기를 두려워해 뒤로 빠지려고 했는지 그것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공통 의사에 의해, 누가 그 영예를 차지하고 그 과업을 완수하기에 가장 적합한지는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기로 한 것이다.

Ⅱ. 하나님은 유다 지파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명하셨고, 그들에게 성공을 약속하셨다.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2절). 

즉 그 땅은 유다의 소유가 되겠고 원수를 그의 손에 붙여 멸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왜 유다 지파가 이 싸움에 먼저 올라가야만 했을까?

1. 유다 지파는 가장 수가 많고 강한 지파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 지파로 하여금 이 모험을 먼저 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여하신 능력에 따라 사명도 맡기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가장 능력 있는 자들에게서 가장 많은 일을 기대하신다.

2. 유다는 가장 존귀함을 받는 지파였다. 

그러므로 의무를 다하는 데도 가장 먼저 앞서지 않으면 안 된다. “형제의 찬송이 될”(창 49:8) 지파가 유다 지파였다. 

그러므로 모험적인 일에서도 지도자가 되어야 할 지파 또한 유다였다. 영광에는 사명의 짐이 따르는 법이다.

3. 유다가 가장 먼저 나섰다. 제비 뽑은 결과 유다가 먼저 시작해야 했다.

4. 유다는 주님이 태어나신 혈통의 지파였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의 사자(lion)이신 그리스도가 그들 앞서 나가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장 먼저 어두움의 권세에 도전하셨고 그것을 물리치셨다. 

이것은 우리의 싸움에 힘을 주고 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롬 8:37)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다. 봉사와 성공은 병행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게 하라. 그러면 그는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인 것을 보게 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성공케 하시지 않으면, 유다의 봉사는 무위로 돌아갈 것이다. 유다가 열심히 자기 사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를 성공케 하시지 않을 것이다.

Ⅲ. 유다는 올라갈 준비를 하고, 그의 형제요 이웃인 시므온 지파(이 지파의 땅은 유다 지파의 땅에서 분할되었다)에게 자기와 함께하기를 간청했다(3절). 

다음의 사실을 살펴보자.

1. 가장 강한 자라 할지라도 약한 자의 도움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청해야 한다. 

유다는 모든 지파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지파였고, 시므온 지파는 가장 보잘것없는 지파였다. 그러나 유다는 시므온의 우의를 구해 그의 도움을 청했다. 

머리는 발에게 “내가 너를 쓸데없다”(고전 12:21)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엡 4:25)이기 때문이다.

2. 남에게 도움을 청한 자들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세도 가져야 한다.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자.” 그러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을 대항해 이스라엘인들은 서로 돕게 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비록 서로 다른 종족들이라 할지라도 사탄의 나라와 싸울 때는 함께 손을 잡고 힘을 합해야 한다. 

이와 같이 사랑으로 서로 돕는 자들은 하나님이 은혜롭게 도와주신다.

Ⅳ. 유다와 시므온의 연합 군대가 전투에 참가했다. 

“유다가 올라가매”(4절) 시므온이 그와 함께했다(3절). 아마도 이 원정의 최고 지휘관은 갈렙이었을 것이다. 

늙은이의 머리와 젊은이의 손을 가졌고 늙은이의 경험과 원기를 가진 사람으로서 갈렙만큼 적합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수 14:10, 11). 

갈렙에게는 아직 자기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땅이 없었다(10, 11절). 이름만 들어도 온 마음을 다해 충성할 수 있는 대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복된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모여 누가 올라가서 “그들(가나안)과 싸우겠느냐”고 상의하고 있을 때, 이미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로 결속되어 강력한 집단을 형성했으며, 자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여호수아의 죽음을 듣고 분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나안은 오히려 자기들의 상처를 악화시킨 결과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Ⅴ. 하나님은 유다와 시므온에게 큰 성공을 허락하셨다. 

그들이 적군에 침입해 들어갔든지 혹은 적이 먼저 그들에게 도전해 왔든지 간에, 여호와께서 저들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4절). 

비록 유다의 군대가 강하고 담대하다 할지라도 승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의 손에 맡기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나안을 파멸시킬 능력을 주셨다. 그들의 힘에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 분의 명령에 순종케 하셨다. 

패트릭 주교는 여기서나 그 밖의 성경에 나타난 신성한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승전에 관한 종교적 표현 기사는 이교의 저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와 같은 경건한 고백이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어지길 바란다.

1. 이제 우리는 가나안 군대들이 베섹 또는 그 근방의 전투에서 어떻게 무참히 참패했는지를 보게 된다. 

베섹은 나중에 사울이 총회 장소로 삼았던 바로 그곳이다(삼상 11:8). 그들은 1만 명이나 죽었다. 그렇다면, 이미 기세가 꺾인 그들은 크게 약화되었을 것이다.

2. 우리는 그들의 왕이 붙잡혀 어떻게 곤욕을 당했는지 본다. 

그의 이름은 아도니 베섹인데, 이는 “베섹의 군주”라는 의미다. 그 당시 자기들이 거하는 땅을 “자기 이름으로” 칭하는 자들이 있었다(시 49:11). 

그러나 아도니 베섹은 그 땅의 이름을 따라 자기 이름을 붙였다. 그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싸움을 하지 못하도록 엄지손가락을 잘렸고 도망할 수 없게 엄지발가락도 잘렸다(6절). 

불행한 한 인간에 대한 승리는 이토록 가혹했다. 그는 이스라엘인들의 처분에 맡겨졌다. 

그는 열성적인 가나안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와 똑같은 악행을 자행한 자이며,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이미 들어 아는 듯하다. 

요세푸스는 “그들이 그의 손과 발을 잘랐다”고 말한다. 그 상처로 인해 그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 정도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욕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의를 자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7절).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1) 아도니 베섹은 전쟁에 매우 유능해 적군들이 그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다. 

또 자기 집에서도 대단한 자였으니, 왕들이 그의 개들과 함께 앉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극도로 비참하고 치욕적인 단계로 떨어졌다. 이 세상은 얼마나 가변적이며 높은 자리는 얼마나 잃어버리기 쉬운가! 

가장 높은 자라도 교만하지 말며 가장 강한 자라도 안심하지 말라. 죽기 전에 얼마나 비극적인 처지가 다가올지 아무도 모른다.

(2) 아도니 베섹은 그의 이웃들에게 매우 가혹했다. 

70명의 왕들을 자기 포로처럼 마음대로 다뤘다. 한 도성의 우두머리였던 그가 왕이라 불렸고, 그의 밑에 있는 왕들을 모욕함으로써 그의 교만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우리는 아도니 베섹이 이 작은 70명의 군왕들을 단번에 그의 노예로 삼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점차로 통치해 가는 동안에 많은 사람을 찬탈하고 능욕했을 것이며, 아마도 그들 중 많은 왕이 연이어 그를 반역한 동일한 도성의 왕들이었을 것이다. 

야만적이고 전제적인 환상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행사하는 그의 폭력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를 자아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피 흘린 자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폐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땅의 정복을 대단히 용이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아도니 베섹을 정복함으로써 유다는 결과적으로 70명의 왕들을 정복한 셈이 된다”라고 말했다.

(3)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던 방식 그대로 그는 대접을 받았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섭리 중에서 죄에 대한 응답으로 벌을 주시고, 그 심판에서 형평성을 이행하신다. 

즉 약탈하는 자는 약탈을 당할 것이요 “학대하는 자는 학대를 당할 것이다”(사 33:1).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 계 13:10; 18:6).

(4) 아도니 베섹은 하나님이 행하신 의를 매우 정직하게 인정했다.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7절). 

하나님이 채찍으로 양심을 깨우치실 때 그것이 어떻게 죄를 기억나게 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인정하게 하는지 보라. 

교만으로 하나님을 무시한 그가 이제 하나님께 항복하고, 왕들을 상 아래 두고 지켜보던 그대로 그는 상 아래서 후회의 빛을 보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포로들에게 행한 대우보다는 지금 선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 같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의 손발을 잘랐을지라도(“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라는 보복의 법칙을 따라) 이스라엘은 부스러기를 줍도록 그를 상 아래 두지는 않았다.

Ⅵ. 예루살렘 정복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가 기울여져 있다(8절). 

KJV 번역자들은 여기서 말한 것은 이전 여호수아 시대에 행한 것이고, 다만 아도니 베섹이 죽는 기회를 따라 다시 한 번 반복했을 뿐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그들이 예루살렘을 쳤다”고 해석하고, 이 구절을 삽입구로 묶어 두고 있다. 

그러나 원문은 이것을 현재 일어난 사건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가장 합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일은 이스라엘 전체에 의해 행해진 것이 아니고 여호수아가 명령한 유다 자손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실제로 예루살렘의 왕 아도니세덱을 정복해 살해했다(수 10장). 

그러나 거기서 정복하는 동안 이스라엘이 전쟁 중에 정복했던 이웃의 왕인 아도니 베섹이 그것을 소유했을 것이다. 

이제 그 성은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왔고 그들은 주민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성곽 내로 도망한 자들은 제외했으며 다윗의 시대까지 그냥 두었다. 

또 그 성에 깊이 감염되어 있던 우상 숭배를 혐오하는 표시로써 “성을 불살랐다.” 

그러나 아마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고 그들이 최소한 생활해야 될 주택들은 남겨 두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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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승리(삿 1:9-20)

 우리는 여기서 유다와 시므온이 획득한 영광스럽고 성공적인 전승에 관해 더 자세히 보게 된다.

Ⅰ. 유다가 맡은 땅에서는 가나안 족속들이 많이 제거된 셈이었다. 그러나 철저히 제거되지는 못했다. 

“산지에 거한” 자들은(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산지들) 추방되었다(9, 19절). 

그러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이들에 대항해 그 땅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여호수아 17장 16절에 있다. 

여기서 유다의 군사들은 실패했다. 여러 가지로 용기도 있었지만 이 한 가지 사건 때문에 유다는 그들 뒤에 따라오는 나머지 다른 지파들에게 줄 수 있었던 좋은 영향력을 망쳐 버렸다.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안전치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의 “병거가 만만이라”는 것을(시 68:17) 생각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철병거도 불 앞에 마른 그루터기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분명히 가나안 족속을 대항해 바로 이 원정을 시작할 때 철병거를 가진 자들까지도 예외 없이 이스라엘의 손에 붙여 성공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2절). 

그런데 그들은 신앙보다도 공포에 빠져서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철병거에 감히 대항하지 못한 것이다. 한 번만 더 대담하게 나갔더라면 승리할 수 있었던 때에 비참하게 군대를 후퇴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들이 달음질을 잘했는데 무엇이 그들을 막아 버렸는가(갈 5:7).

Ⅱ. 갈렙은 헤브론을 빼앗았다. 

그것이 비록 여호수아에 의해 10년 혹은 12년 전(라이트푸트 박사의 계산에 따라)에 그에게 주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는 자기 개인의 사적인 이익보다 먼저 그 지파들의 안주를 위해 공무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야 그 땅의 주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은 마지막으로 돌리고 타인을 위해 먼저 봉사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소수인데,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기” 때문이다(빌 2:20, 21). 

이제 유다 지파는 모두 헤브론을 빼앗는 일을 위해 그의 조력자로 함께 올라가서(10절) 아낙의 아들들을 치고 그 땅을 차지했다(20절). 그들은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다. 

갈렙은 그의 지파들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드빌을 치고 그것을 유다의 자손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급해 그 중요한 땅을 빼앗는 자에게는 자기의 딸을 주기로 하고 원정을 서둘렀다(11, 12절). 

옷니엘이 용감히 그 일을 맡아 그 성읍을 빼앗고 갈렙의 딸을 얻게 되었다(13절). 그리고 옷니엘의 아내가 된 악사가 자신의 아버지 갈렙에게 청해서 대단히 좋은 유산을 얻게 되었다(14, 15절). 

우리는 이 사실을 여호수아 15장 16-19절에서 이미 보았다.

Ⅲ. 시므온은 자기 땅의 경계 내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의 땅을 획득했다(17, 18절). 

시므온에게 할당된 땅의 동쪽 부분, 스밧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들을 쳐서 진멸하고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저주받은 성읍들과 합쳐서 호르마, 즉 파멸이라 불렀는데,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민 21:2, 3). 시므온은 남쪽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의 이 성읍들을 완전히 멸망시켰는데, 이것은 그들이 서약한 맹약의 완전한 이행인 셈이었다. 

그들은 서쪽 지경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성읍인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취함으로 당시의 성읍들을 모두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을 진멸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블레셋 사람들은 점차 성읍들을 회복했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고질적인 적수가 되었다.

Ⅳ. 겐 사람들은 다른 족속보다도 유다 족속을 택해 그들과 함께 안주하게 되었는데, 유다 족속이 가장 강했으므로 그들이 거기서는 안전하고 조용히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6절). 

이들은 이드로의 후손이었다. 

이들은 모세가 청했을 때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했거나(민 10:29) 혹은 이스라엘이 38년 후에 광야의 유랑에서 떠나 본토로 올라왔을 때 그 부근에서 만나 모세가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몫을 얻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민 10:32) 함께 가나안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들은 먼저 “종려나무 성읍” 곧 여리고에 자리잡았다. 여리고는 결코 개축될 수 없는 도성이었다. 

그러므로 건물에 구애받지 않고 “천막”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적합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은 유대 광야로 옮겼는데, 그 장소에 대해 애착을 가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적적하고 한적하기 때문이라고 보며, 혹은 그 종족에 대해 애착을 가지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스라가 도피했을 때 납달리의 땅에서 훨씬 북쪽에 있는 씨족으로 야엘의 장막이 있음을 볼 수 있다(4:17). 

이것은 겐 사람들이 조용한 백성이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어디서나 안주할 수 있도록 했음을 말해 준다. 

아무도 괴롭히지 않은 사람은 누구에 의해서도 괴로움을 당치 않을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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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주민과의 혼합(삿 1:21-36)

여기서는 나머지 지파들이 가나안 족속들과 함께 거하게 됨을 보게 된다.

Ⅰ. 베냐민 지파는 그들에게 배당된 예루살렘에서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21절). 

물론, 예루살렘은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 양쪽에 동시에 귀속되었었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에게 좋은 예를 보여 주었고 큰 수확을 거두었다(9절). 

그러나 베냐민은 결단이 부족해 그 모본을 따르지 못했다.

Ⅱ. 요셉 집안은,

1. 다소 옮겨가서 벧엘을 차지했다(22절). 

이 도성은 베냐민 지파 가운데서 언급되었다(수 18:22). 그러나 거기서 보면(수 18:13) 이 도성은 베냐민 지파의 경계구역 안에 있는 도성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그 경계가 그 도성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으며, 그 도성의 절반은 베냐민에게 속하고 나머지 반은 에브라임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당시의 에브라임 지파들의 활동은 그 도성을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완전히 회복해 자기들의 소유로 삼는 것이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 도성의 가장 주요한 지역을 회복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후로는 그 도성이 열 지파의 세력권(베냐민은 그들 가운데 있지 않음) 안에 놓이게 되어 마침내 여로보암이 그 도성에 자기의 송아지를 세울 만큼 되었다. 

요셉 지파의 벧엘 원정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음으로써 오는 이익.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다.” 

다른 지파들도 자기들의 정성을 다했더라면 여호와께서는 그들과도 함께했을 것이다. 

시리아역은, 다른 여러 곳에도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을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을 돕는 자가 되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다. 그들이 한몸을 이룰 때는 물론이려니와 분리해서 활동할 때도 그리스도는 대장이다.

(2) 그 도성을 획득하기 위해 취한 현명한 태도. 

그들은 첩자들을 보내 그 도성 중 어느 부분이 가장 약한지 또는 어느 길로 공격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지 살피게 했다(23절). 

첩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자기들이 만나게 된 어떤 사람으로부터 대단히 좋은 정보를 획득하게 되었다.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위험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방비 상태로 버려둔 곳, 즉 그 도성에 침입할 수 있는 은밀한 통로를 찾게 된 것이다.

① 라합이 첩자들을 환대했을 때 비록 자기 나라의 원수이긴 해도 하나님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한 일이기 때문에 정당했다. 

마찬가지로 벧엘 사람도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했고, 여호와가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므로 그 땅은 이스라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면,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② 뿐만 아니라 “그를 선대하고” 그와 그의 가족에게 생명뿐 아니라 좋아하는 곳 어디에 가서든지 살 수 있는 자유를 준 요셉 지파도 책망받아서는 안 된다. 

선행에는 선행으로 보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벧엘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병합되기를 원치 않았고, 그들을 사랑하기보다는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벧엘 사람은 헷 족속의 땅으로 갔다. 그 땅은 여호수아가 침략했을 때 헷 족속이 아라비아로 들어가 안주한 곳인 듯하다. 

벧엘 사람은 그 헷 족속과 함께 살기로 작정했으며 그들 가운데 한 작은 성읍을 세웠다. 아마 새로운 이주자들은 흔히 성읍을 건설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곳의 옛 이름 곧 “벧엘”―하나님의 집―(이전의 이름 “루스”―편도나무)은 잘 보존되었다.

(3) 요셉 지파의 성공. 첩자들은 그들이 얻은 정보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전달했다. 

그것으로 그들은 유리한 입장을 얻게 되었고, 벧엘의 거민들을 모두 칼로 전멸시켰다(25절).

2. 그러나 요셉의 족속은 이 성취 이외에는 두드러질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 같다.

(1) 므낫세는 그들에게 배당된 대단히 훌륭한 몇몇 성읍들에서 가나안인들을 몰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몰아내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27절).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을 차지해 물러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땅에 거했다. 므낫세는 그들을 몰아낼 만한 결단을 하지 못했다. 

가나안인들이 순순히 물러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며 그냥 그 땅에 머무른다고 해도 굳이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이 처신했다. 

후에 이스라엘이 강성해지고서야 그 땅을 차지하고 자기들에게 공물을 바치게 하거나 개인의 종으로 삼았을 뿐이다(28, 35절).

(2) 에브라임은 강한 지파이면서도 그와 같이 훌륭한 성읍인 게셀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 중에 거하게” 했다(29절). 

혹자는 이것은 조용한 정착을 허락한 것이며 조공을 멸하지 않고 기본권을 허락해 준 것이라고 보고 있다.

Ⅲ. 스불론은 기드론과 나할롤 거민을 축출하지 않았다(30절). 

스불론은 배의 항구가 되리라는 예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해상무역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스불론은 다만 그 거민들에게 사역(使役)했을 뿐이다.

Ⅳ. 아셀 지파는 매우 나쁜 상태에 빠져 있었다(31, 32절). 

그들은 어느 족속보다도 가나안 사람들 수중에 더 많은 성읍을 남겨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에게 사역하는 대신에 굴종적인 태도를 취했다. 

본문의 표현 방법에서 유추해 볼 때, 아셀 지파보다 가나안 사람들이 수적으로 더 많고 더 강한 것처럼 들리며, 아직도 그 땅의 주인은 가나안 사람들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만 그들 가운데서 곤란을 당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Ⅴ. 납달리도 역시 그들 가운데 가나안 사람들을 거하도록 용납했고(33절), 그들은 이스라엘을 위해 일했다.

Ⅵ. 단은 그에게 할당된 땅을 정복하지도 못했고 아모리 사람들과 대항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에 몰려 산지로 쫓겨 들어가 거기에 거하면서 감히 골짜기에 내려오지도 못했다. 아마 그 지역에는 철병거가 있었을 것이다(34절). 

게다가 산지에 있는 어떤 성읍들은 계속 단 지파를 대항해 고수하고 있었다(35절). 

이와 같이 그들의 소유지가 협착해지자 거기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라이스 지방에 가서 더 넓은 땅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8:1 이하).

야곱의 집안에서 축복받은 유다는 사자에 비유되었고, 단은 뱀에 비유되었다. 이제 유다는 그의 사자 같은 용기로 어떻게 번성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은 그의 뱀과 같은 지략을 가지고도 땅을 얻지 못했다. 기술과 인간적인 방법이 항상 꾀하는 대로 성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단 지파가 이루지 못한 일을 그의 이웃인 에브라임이 그를 위해 얼마간 성취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모리 족속을 부리게 되었다(35절). 

전체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반적으로 그들의 의무와 이득에 대해 대단히 방심한 태도였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축출하고 자신들을 위해 땅을 확보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1. 그것은 나태와 비겁 때문이었다. 

그들은 완성해야 할 정복의 수고를 담당하지 않으려 했고, 대로에 사자가 나오지 않을까 겁먹고 있는, 바람과 구름 때문에 씨 뿌리고 수확하기를 두려워하는 게으름뱅이와 같았다.

2. 그것은 탐욕 때문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의 노력과 돈이 그들의 피보다는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손발이 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살려 두었던 것이다.

3. 그들은 마땅히 물리쳤어야 할 우상 숭배를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은 죄악의 그릇이 가득해도 칼로 가나안인을 치는 것은 가엾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저들을 자기들 가운데 살게 두어도 해롭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저들 때문에 자기들에게 어떤 위험이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4. 그들의 조상들을 40년 동안이나 가나안 밖에서 헤매게 했고 이제 와서는 그 땅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게 한 것은 결국 자신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한 불신이 그들의 유익을 상실케 했고 수천 가지의 불행을 초래했던 것이다.

======호크마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 이것은 본서의 서론적 표현으로서 사사기의 시대적 배경을나타낸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라는 말로 시작되는 여호수아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곧, 전에 모세가 죽었을때와 마찬가지로 이제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인해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여호수아는 110년을 향수하였는데(수 24:29), 그동안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 통치권과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나안 땅 분배에 중추적역할을 담당하였다(수 14-21장). 그로써 자신의 직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여호수아는백성들에 대한 권면을 마지막으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수 23:1 - 24:31).

그런데 문제는 막상 여호수아가 죽고나자 그를 이을 적당한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사기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정치적 배경으로 하여 기록되었다. 

즉 여호수아 사후 강력한 통치자가 없던 이스라엘은 주변 열강들과 미처 정복치 못한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한 때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등장한 이들이 곧 사사인 바, 사사기는 이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서가 여호수하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8,9에는 다시금 여호수아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이와 관련, 학자들 간에서는 1:1 - 2:9에 기록된 사건들이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의 사건들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사건들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나뉘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1-20 강해, '본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 사건의 발생 시기 문제'를 참조하라.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 이는 곧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이러한 표현은 사사기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타난다(별18:5;20:18,23,28:삼상 10:22;22:10;23:2).

구약시대에는 주로 대제사장들이 우림과 둠밈으로 여호와의 뜻을 구했는데(출 28:30;민27:21;삼상28:6), 아마 이때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여호와께 물었을 것이다(Keil,Delitzsch).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 사후 하나님의 뜻을 물은 이유는 여호수아가 남긴 유업을 마저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즉 비록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에 안식을 가졌다 주었지만(수11:23;21:44;23:1) 아직도 가나안 땅에는 미정복지와 잔존 원주민들, 그리고 그들의우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때문에 가나안 땅을 마저 정복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은 여호수아의 사후 이스라엘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다(수24:22-24).

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이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였고 하나님께 그 뜻을 물은 것이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싸우리까 - '올라가서'에 해당하는 원어 '알라'(* )는 단순히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대신 이는 수 8: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싸움터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Lange,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 p. 250) 

때문에 Living Bible은 이를 '전쟁에 나가다'(go to war)로 분명히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질문 속에서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던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아직도 여전히 미정복 상태로 남아 있는 많은 지역(수 13:1-7 등)을 정벌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민족적 대과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누가 먼저 가나안 족속의정벌에 나서서 백성들의 사기를 복돋워 주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가 선봉에 나서라고 일러주셨다(2절).

가나안 사람 - 정확히 얘기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당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아브라함 당시 가나안에 거주하던 '초기 원주민들'(창 2: 5, 6)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여호수아 서론, '가나안의 여러족속들'을 참조하라.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즉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질문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먼저 여호와께 물은 행위가 옳았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사 시대 전반에 걸쳐 되풀이 되던 극심한 타락상과는 달리 사사 시대 초기에는 그래도 여호와 신앙이 유지되었음을 보여 주는 일례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동안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2:7)는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 된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 여기서 '유다'란 '유다 지파'를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미정복지 정벌 전쟁에 이스라엘 여러 지파 둥 유다 지파가 먼저 출전토록명하신 까닭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우선 이스라엘 지파들 중 유다 지파의 수효가 가장 많았기 때문(민 1:27 ; 26:22)일 것이다(MathewHenry's Commentary, Vol. II, p.121). (2)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의 예언(창 49:8-12)을 통해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중 가장 탁월한 지위를차치하리라 축복하셨기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251). 그러므로 본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에서 우선 출전 명령과 함께 과거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것(수 13:1)과 같은 승리의 약속도 함께 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 땅 - 이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해 주었으나 그들이 미처 정복하지 못한 탓에 아직 남아 있는 가나안 미정복지를 가리킨다(수 13:1-7).

그런데 혹자는 이를 유다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던 땅만을 가리키는것으로 보기도 하나(Bertheau),그 것은 지나치게 의미를 축소시킨 견해이다.

그 손에 붙였노라 - '붙였노라'에 해당하는 원어 '나탄'(* )은 '넘겨 주다' 또는 '양도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미 하나님의 작정하에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도록 계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경에는 비단 민족간의 전쟁 뿐아니라(민21:2) 개인의 생명(16:23)도 하나님께서 상대방의 손에 붙이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개인의 생명과 더불어 모든 국가의장래도 곧 하나님의 주권하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1: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함께...싸우자 - 이처럼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가나안 미정복지 정벌 전쟁에 함께 출전할 것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기업 중에서 자신의 분깃을 나누어 받았기때문이다(수 19:1-9). 그러므로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와 행동을 같이 하여 자신들의 기업을 얻을 필요성이 있었다. 

한편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기업 가운데서 분깃을 나누어 받게 된 까닭은 야곱 당시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과거 시므온은 자기 누이 디나가 세겜 추장에게 강간당하자 그에 대한 복수로 과도하게 세겜 사람들을 멸한 일이 있었다(창 34:25-29). 그러자 야곱은 이에 대한 징벌로 시므온 자손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흩어질 것을 예언하였다(창 49:5-7).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는바,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정복 직전에 실시한 인구조사(민 26:14) 때 그 수가 가장적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축복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신 33장). 그리고 그 결과 시므온 지파는 독립된 기업을 얻지 못하고 유다 지파의 기업 중 일부만을 자신의 몫으로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수19:1-9). 

본절 이하에 의하면 이처럼 열세한 상황에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므온 지파는 불평 불만에만 빠져 있지 않고, 유다 지파와 협력하여 가나안 미정복지를 성공적으로 정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 지파는가장 수가 많고 강한 지파였으나(민 1:27;26:22)미약한 시므온 지파를 무시해 버리지아니하고 유기적인 협력 관계를 잘 유지했음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대 사사 시대 초기 당시는 아직 말기적 현상(20장)과는 달리 각 지파간의 관계가 돈독했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정벌에 대한 열망으로 서로의 마음도 똘똘 뭉쳐져 있었다고하겠다.

제비뽑아 얻은 땅 - 일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해 줄때 제비뽑기를 통하여 실시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곧 각 지파에게 분배될 땅의 상태가 좋고 나쁜 데 따르는 시비를 사전에 방지할 뿐 아니라 제비로 결정된 땅은 곧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기업이란 점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민 26:52-56 강해, '제비 뽑기'를 참조하라.

=====1:4

가나안 사람 - 1절에도 같은 말이 나오지만 그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즉 이 말은 성경에서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가지 경우로 사용되고 있다. 

그중 넓은 의미로는 1절에서와 같이 가나안에 거주하는 모든 족속을 가리킨다(창 10:19).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시돈과 두로의 베니게 지역 해변가와 요단 강계곡 및 평원에 살았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 중 한 종족을 가리킨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족속들>. 여기서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브리스사람 - 이 역시 가나안 후기 원주민 중 하나이다(수 3:10;11:3;17:15;24:1). 한편 '브리스'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지'(* )는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는 장소'라는 뜻의 '페라조트'(* )와 어원이 같다(겔 38:11). 이로 보아 브리스 사람이란 요새화된 성이나 성벽이 없는 성읍, 또는 작은 마을에 살았던 가나안의 한 종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이 성벽을 세우지 않은 것은 그들의 거주지가 주로 산지였으므로(수 17:15) 그지형 자체가 충분한 요새 역할을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Kalisch).

베섹 - 이 지명은 본절 외에 삼상 11:8에 딱 한번 언급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베섹은 기브아와 길르앗의 야베스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곳은 유다 지파의 땅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베섹'과 동일한 곳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올라간 베섹은 유다 지파의 기업 내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Rosenmuller). 

따라서 여기서 오늘날의 '베즈카'(Bezqa)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혹자(Lange,P. Cassel)는 '베섹'(* )이라는 지명의 뜻을 '빛'(겔 1:14에는 '번개'로 번역되어 있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베섹'이란 모래가 많아 태양 빛에 반사되는 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약적인 논리에 불과하다.

=====1:5

아도니 베섹 - '베섹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개인 이름이 아닌 베섹 성읍 통치자의 칭호이다. 이같은 칭호로는 애굽 왕을 가리키는 '바로'(출 1:11), 그랄 왕을 가리키는 '아비멜렉'(창20:2) 등이 있다. 창26:1 주석 참조. 한편 혹자(G.E.Wright)는 이아도니 베섹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수10:1)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나 분명치않다.

=====1:6

그 수족의 엄지 가락을 끊으매 -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 포로를 다룸에 있어서 이처럼 불구로 만들거나 눈을 뽑아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민16:14;삼상11:2;왕하25:7). 

이러한 형벌은 상대방에게 수치를 주기 위함이었음은 물론, 실제적인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즉 엄지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무기를 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엄지 발가락을 자르는 것은 도망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MatthewHenry's Commentary, Vol. II, p.122). 그리고 눈을 뽑는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실례로는 일찍이 페르시아 제국이 망하여(B.C. 331) 헬라의 포로가 되었을 때, 헬라인들이 포로들의 수족과귀 따위를 잘랐던 사건을 들 수 있다(Lange). 

아무튼 본절에서 아도니 베섹이 이같은 형벌을 당한 까닭은 일찍이 그가 동일한 방법으로 70명의 군왕들을 능욕했기 때문이다(7절).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나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7

칠십 왕 -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왕에' 해당하는 '멜레크'(* )는 종종 일개 성읍의 통치자를 가리키기도 한다(창 14:1,2 ; 수10:3;12:9-24). 

따라서 이들은 아도니 배섹 당시 각기 가나안의 군소 성읍을 관장하던군왕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 마치 개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행위(마15:27)를 가리킨다. 

이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비참하기도 굴욕적인 대접 중 하나에 다름 아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 p. 253).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 타인에게 가한 손상만큼 가해자에게도 동일한 형벌이 주어지게 하는 동해 보복법(Rex Talionis)은 모세 율법 이외에 함무라비 법전에도 언급되어 있다<출 21:18-36 강해, 동해 보복법>. 이러한 사실을 볼 때아도니 베섹의 이 한탄의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회개한 말이라기 보다는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인과 응보(因果應報)적 사상에 따라 자신이 처한 곤고한 상태를 한탄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이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간 사실은 아도니 베섹이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5절>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라이트(G.E.Wright)같은 학자는 예루살렘이 아도니 베섹의 왕도(王都)였기 때문에 유다 연합군이 그를 그곳으로 끌고 간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어디까지나 추측적 견해일 뿐 뒷받침될 만한객관적 증거가 없다.

=====1: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 예루살렘은 이미 여호수아 군대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수 10:23,26)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본절에서도 유다 자손이 그 성읍을 치고 불살랐으나 역시 완전히 정복되지는 않았다(21절). 이러한 미정복 상태는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다윗이 이를 정복함으로 비로소 끝이 났다(삼하 5:6-9). 

그런데 혹자는 이와는 약간 다른 견해를 표명하기도 한다. 즉 본 시점에서 예루살렘은 유다 연합군에게 완전히 점령되었으나 유다와 시므온 두 지파의 인구가 전지역을 장악할 만큼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곧 다시 여부스 족속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해 버린 것이라고 주장한다(A.E.Cundall).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19절의 기록에 의거하여 여부스 족속 중 평지 거민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유다 지파가 그 성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아무튼 예루살렘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히 정복되었으며, 그곳에 성전이 건립됨으로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수도로 부상하였다(삼하5:9).

=====1:9

내려가서 - 유다 지경(地境)의 북단 경계에 해당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남쪽 경계인 네게브(Negeb)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산지와 남방과 평지 - 유다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가나안 땅 지경(수5:1-12)의 지형상 특징 및 구조를 나타내 주고 있는 말이다. 

이 중 산지, 즉 유다 산지는 해발 약800m에 달하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지경 내의 산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남방'은 헤브론과 가데스바네아 사이의 반사막(semi-arid) 지대로서, 일명 '네게브'라고도 불리운다.

그리고 '평지'는 히브리어로 '쉐펠라'(* )라고 불리우는 저지대로서, 곧 지중해변의 해안 평야와 팔레스탄 중앙 산맥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지역을 가리킨다

=====1:10

헤브론 -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해발 910여m 정도의 고도(古都)이다. 오늘날 '엘 칼릴'(el-Khalil)로 불리우는 도시인데 상공업으로 유명하다. 

한편 일찍이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며(창 13:18) 아브라함과 사라가 매장된 곳이기도 하다(창 23:19 ; 25:9). 

그리고 후에는 다윗의 통치초기 7년 동안 유다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삼하 5:5). 

또한 '연맹'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이 고대 도시는 이스라엘에 정복된 후 이스라엘의 여섯 도피성 중 하나가 된다(수 20:7)). 

한편 헤브론은 갈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20절;수 14:6-15), 그 이유는 아마 헤브론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탐 때에 갈렙의 책임 지역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민 13:22 이하).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 - 헤브론에 거하던 거인족 아낙의 세 자손이다(20절;민 13가22;수 15:14). 이 중 '세새'는 '애굽 왕 시삭' (왕상 14:25)처럼 '태양'을 의미하고 '아히만'은 이방 신인 '므니'(Meni)의 친구(사 65:11)를 의미한다. 그리고'달매'는 밭고랑을 각각 의미한다. 

한편 일찍이 헤브론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파괴되고 헤브론왕 호함도 죽임당했었다(수 10:1-27,36,37), 그리고 드빌(11절), 아납 및 기타산지의 성읍들도 헤브론과 마찬가지로 파괴되었었다(수 11:21-23). 

그러나 본절에 따르면 그 후에 아낙 자손으로 된 이 세 씨족이 헤브론을 재탈환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를 다시금 정복해야 했었는데, 유다 지파 갈렙의 군대가 이를 재정복한 것으로 나와 있다(수 15:13,14). 

한편 이 세 씨족의 이름들은 당시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의 이름에서 본딴 것으로 가나안 땅에 우상 숭배가 얼마나 만연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기럇 아르바 - 헤브론의 본래 이름으로 '넷으로 된 성읍'(테트라폴리스,Tetrapolis)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은 당시 서로의 필요에 의하여 네 성읍이 하나로 연합한 데서 유래된 듯하다(Lange). 

그래서 아브라함 때에 이 기럇아르바는 '연합' 또는 '연맹'이란 뜻의 '헤브른'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던 것이다(창 23:20).

=====1:11

드빌...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 '드빌'은 헤브론의 남서쪽 약20km 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븍 당시 이곳에는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수 11:21). 이곳은 오늘날 '히르벳 라붇(Hirbet Rabud)으로 불려지는 지역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1968년부터 모쉐 코카비(Moshe Kokhavy) 탐사반이 이곳을 발굴한 결과 가나안 정복 당시의 상황을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유물들이 대량 발견되었다 한다. 

한편 '드빌'의 본명인 '기럇 세벧'은 '책의 도시' 또는 '기록의 도시'란 뜻. 드빌이 본래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웠던 까닭은 그곳에 큰 도서관이나 문서 보관 창고 따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수 15 : 15 주석 참조.

=====1:12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 갈렙이 이처럼 드빌을 정복하는 자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고대의 포상(褒賞) 관습(삼상 17:25;18:17,27)을 따른 것이긴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신앙의 용사를 사위로 맞이하려 한 갈렙의 신앙제일주의 사상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15:16 주석을 참조하라.

=====1:13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 - 본절을 그대로 번역할 경우, 옷니엘은 갈렙의 동생이 되며 갈렙은 그나스의 아들이 된다. 이러한 견해는 KJV,NIV,RSV과 같은 영어 성경도 따르는 바이다(Othniel the son of Kenaz,Caleb's younger brother). 그러나 공동 번역은 본절을 '갈렙의 동생 크나즈의 아들인 오드니엘'로 번역하고 있다.그에 따르면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가 되며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자 옷니엘의 아비가된다. 이는 Living Bible이 취하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Caleb's nephew, Othniel,son of his younger brother Kenaz). 이러한 서로 다른 해석은 성경의 원문이 그 어느쪽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때문에 학자들 간에는 옷니엘이 갈렙과 정확히 어떠한 관계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이 중 대표적인 견해를 들자면은 곧 다음과 같다. (1) 옷니엘은 갈렙의 이복(異腹)동생이라는 견해(Bertheau):이는 갈렙이 '여분네의 아들'(민 13:6;수 14:14)인 데 반해 본절에서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인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2) 옷니엘은 갈렙의 조카라는 견해(De Wette, Ewald, Pulpit Commentary) : 이는 갈렙과 옷니엘간의 현격한 연령 차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옷니엘이 드빌을 정복하고서 갈렙의 딸을 아내로 맞이할 때, 갈렙의 나이는 85세였다(수 14:10). 그러나 당시 옷니엘은 혈기 왕성한 젊은 용사였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은 형제간이 아니라 숙부와 조카 간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옷니엘과 갈렙은 다같이 그나스 집안의 사람들로서 친척이라는 견해(Lange) : 이는 민32:12에 갈렙이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아들'로 나와 있으며 본절에선 옷니엘이 '그나스의 아들'인 것으로 나와 있는 점에 근거한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세 견해 중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견해는 두번째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5 : 17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성경에는 그나스란 이름과 관련하여 동명 이인(同名異人)으로 에돔 사람 '그나스'(창36:11)가 나온다. 따라서 이 자를 옷니엘의 아비인 '그나스'와 혼동해서는 안 될것이다.

=====1:14

악사가 출가할 때에...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 이는 이스라엘의 '모하르'(* )풍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모하르'란 시집가는 딸에게 아비가 주는 결혼선물, 또는 남자가 처녀를 아내로 데려갈 때 장인에게 치루는 '대가'를 가리킨다. 

성경에선 대개 이 둘중 전자를 가리켜 '빙물'(聘物)이라 하고 후자를 가리켜 '빙폐'(聘弊)라 한다<1 : 1-20 강해,빙폐와 빙물>. 

물론 부모가 결흔하는 딸에게 '모하르'를주는 경우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하지만 악사는 옷니엘에게로 출가하면서 이 '모하르' 관습에 따라 아비에게 밭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악사가 요구한 밭이 어느 곳의 어떠한 밭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에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대개는 여타 밭과는 다른 특정한 밭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5:8 주석을 참조하라.

=====1:15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 KJV는 이를 '당신께서 내게 남쪽 땅을 주셨으니'(for thou hast given me a south land)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악사가 밭을 요구한 데 대하여(14절) 갈렙이 '남방', 즉 '네게브'(Negeb) 땅을 준 것으로 이해하고서 행한 번역이다. 

어쨌든 악사가 출가하여 옷니엘과 한 가정을 이루게 된 곳은 네게브 지역이었는데, 그곳이 '드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12절).

샘물도 내게 주소서 - 남방(Negeb)은 거의 사막과 같은 곳이었다(9절 주석 참조).때문에 급수(給水)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자들에게 있어 절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악사였기에 그녀는 현명하게 아비에게 샘물도 요구한 것이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주었더라 - 이 샘들의 위치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혹자는 헤브론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Robinson). 

그곳은 아마 옷니엘이 싸워 정복한 드빌 땅과 헤브론 지역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는 헤브론 남방 약 9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에서 두 샘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Wycliffe). 아무튼 재치있고 현명한 악사로 말미암아 본래 가난한 자였던 옷니엘은(Raschi)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의 사사로 그 위치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 같다(3 : 9)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 15 : 19 주석을 참조하라.

=====1:16

본절은 모세의 장인이 속했던 겐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음을 보여 준다. 민 10:29,30에 따르면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또는 르우엘)와 처남 호밥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자고 요청했으나 호밥은 처음에 이를 거절했었다. 그러나 본절을 통해서 볼 때 호밥은 후에 이같은 청을 수락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다.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 모세의 장인 이드로와 그의 처남 호밥은 원래 가나안 원주민이 아니라 미디안 족속 중 하나인 겐 족(Kenites)이다. 

이 겐 사람에 대한 최초의 성서 기록은 창 15:19에 나타나며 발람의 신탁 속에 등장하는 '가인 사람'도 역시 겐 족을 가리키는 말이다(민 24:21,22). 이들은 주로 홍해 부근, 즉 엘란(Elan) 만 동부 지역인 아카바(Aqaba) 만 일대에 거주했었는데 점차 모압 경계선 북부(민 21:4), 팔레스틴 남부 산악 지대에까지 북상하였다. 

아무튼 모세 이후부터 이들 겐 사람은 히브리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출 2:15-22)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삼상 15:6;30:29). 

그리고 본절에서는 이 겐 족이 유다 지파의 지경내(地境內)에 거하므로서 이스라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종려나무 성읍 - 일명 '향기의 도시', '달(月)의 도시'로도 불리웠던 여리고를 가리킨다(신 34:3;대하28:15). 예루살렘 동북방 약27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인데, 종려나무의 산지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종려나무 성읍'(the City of palms)으로 불리웠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최초로 정복한 성읍이기도 한 바, 이에 대하여서는 수6장을 참조하라. 

한편 혹자들은 겐 족이 유다 지파와 처음부터 함께 아랏 남방의 헤브론과 드빌로 갔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종려나무 성읍은 헤브론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여리고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Cundall). 그러나 본절에 보면 겐 족이 처음에 머문 곳은 분명히 종려나무 성읍인 여리고이며 그 후에 유다와 시므온이 남방을 정벌할 때 아랏 남방으로 내려가 유다 백성과 함께 거주한 것임을 알 수 있다(Hervey).

아랏 남방 - 아랏은 헤브론 정남쪽 2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성읍이다. 넓고 완만하게 경사진 황무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곳은 아브라함 당시 이미 문명이 발달했었음을 알 수 있다(N.Glueck). 한편 아랏과 여리고는 약 85km 가량 떨어진 먼 거리이므로 겐 족의 이주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 혹자는 '백성'에 해당하는 원어 '암'(* )이 '아말렉'과 첫 두 자음이 일치하며, 겐 족속이 아말렉(* )과 깊은 연판이 있는 족속이라는 사실을 들어(삼상 15:6), 

여기서 '그 백성'이란 아말렉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Cundall). 그러나 이미 앞에서 유다가 언급되었고 '암'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덧붙어 있으므로 '그 백성'이란 유다 지파를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역사적으로도 겐 족이 다윗시대까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처음의 주장은 분명히 옳지않다(삼상 30:29).

=====1:17

스밧...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 스밧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오늘날의 '텔 엘 밀'(Tell-ei-Milh)이거나 '텔 에쉬세리아'(Tellesh-Sheriah)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자는 브엘세바에서 약 10km 정도, 후자는 약2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은 스밧을 진멸한 뒤'호르마'라 칭하였는데, 이는 '완전히 파괴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읍의 파괴가 신들에게 언약의 맹세를 표하는 하나의 종교적 예식임을 암시하는 말로서 당시 고대 근동에서 널리 행해지던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진멸은 잔인한 면도 있으나 전쟁에 뒤따르기 쉬운 것들, 즉 예를 들면 강간, 약탈 등의 추한 행위들을 미리 예방해 주는 이점도 있었다. 

특히 유다 지파의 이러한 철저한 도륙은 그 땅에 뿌리박고 있던 우상과 이방 종교의 척결이란 점에서 오히려 의미가 깊다. 

한편 호르마라고 불리우는 이 스밧은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지경내에서 얻은 시므온 지파의 기업이었다(수 19:4).

=====1:18

가사...아스글론...에그론 - 아스돗, 가드와 더불어 블레셋의 5대 성읍으로 꼽히던 도시들이다(수 13:3). 이 중 가사(Gaza)는 예루살렘 남서쪽 80km, 지중해에서 내륙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아스글론(Ashkelon)은 가사 북쪽,아스돗 남쪽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마지막으로 에글론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가장 북쪽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은 남쪽에서부터 점차 북쪽으로 북상하면서 블레셋 성읍들을 정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그곳의 거민들을 완전히 진멸하지 못하였는 바, 이들 성읍들은 다시금 블레셋의 장중에 들어갔으며 이후 이스라엘을 고질적으로 괴롭히는 대적이 되었다(14:19;삼상 5:1,10;7:7,8).

=====1:19

본절에서는 두가지 대조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유다 지파가 신앙적으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산지(9절)거민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앙적으로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골짜기의 거민들을 쫓아 내지 못한 사건이다.

철병거가 있으므로 - 인류가 철을 생산하여 사용한 것은 헷 족속(Hittites)에 의해서 였다(성경 총론,'구약과 고대 근동 문화' 참조). 

그들 중 일부는 일찍부터 가나안땅에 이주해 온 듯하며(창 23:3 ; 26:34) 합금 기술의 개발을 통해 다른 어느 부족보다 더 막강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 철재 무기는 사울 왕 시대에 블레셋의 기술에 의존하여 사용한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당시 철재 무기는 매우 구하기 힘들었다(삼상 13:22).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철병거로 무장한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한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던 그들이 철병거를 두려워하여 골짜기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불신앙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에 여호수아는 가나안족들에게 철병거가 있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요셉 지파에게 주지시켰던 적이 있었다.(수 17:16-18). 

그리고 실제로 사사 시대에 드보라와 바락은 철병거 9백승을 가진 야빈 왕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적도 있다(4:13-16). 

따라서 유다 지파가 철병거를 가진 적에 대해 미리 겁을 집어먹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불신앙으로 인하여 정복 사업을 완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로 레호리쉬'(* )는능력이 없어서 쫓아내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쫓아내지 아니한 직무 유기 내지는 고의적 회피 행위를 의미한다. 족 유다 지파는 골짜기 거민들을 쫓아내 보려고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미리 겁을 집어 먹고 아예 이 일을 포기했던 것이다(Lange).

=====1:20

모세의 명한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 일찍이 모세의 가나안 정탐꾼 파송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과거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모세에게 회의적인 보고를 하였었다(민 13장).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만은 이스라엘이 능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민14:6-9). 그러자 모세는 갈렙에게 축복하기롤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수14:9)고 하였다. 그같은 약속에 근거해 갈렙은 여호수아 생존 당시 헤브론을 요구,기업으로 받았었던 것이다(수14:13-15). 본절은 바로 그 사건을 다시금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낙의 세 아들 - 이미 10절에서 언급된 아낙 자손의 세 씨족인 세새, 아히만,달매를 가리킨다. 한편 갈렙을 대장으로한 유다 자손이 이들을 무찌른 기사는 수 15:13,14에 상세히 나와 있다. 그러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1:21

본절에는 베냐민 자손이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수 15:63에는 유다 자손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기록은 서로 상치되는 것처럼 보일 수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베냐민과 유다의 경계는 벤 힌놈 골짜기와 예루살렘 남쪽 지역에서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수 15:8 ; 18:28). 그러므로 여부스 사람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지 못한 책임은 이 두 지파 모두에게 있었던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수15: 63주석을 참조하라.

여부스 사람 - 가나안 일곱 족속 중 한 족속으로서(창 10:16). 예루살렘 산악 지대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그래서 고대에는 예루살렘을 '여부스'라고도 불렀다(19:10 ; 수 15:18 ; 18:28 ; 대상 11:4 등). 한편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의 이같은 공격 실패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사사 시대 동안 이스라엘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19:10-12), 그러다가 다윗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완전히 정복된다(삼하 5 : 6-10). 그러나 다윗의 정복 이후에도 부분적이나마 여부스사람의 예루살렘 거주는 계속 허용된 듯하다 (삼하 24:16).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 예루살렘이 완전히 정복당하고 여부스 족이 축출당한 때는 다윗 시대이다. 따라서 여기서 가리키는 '오늘날'이란 B.C.1050-1000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본서의 기록 연대를 추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바, 본서의 기록 연대 역시 이 시기인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사사기 서론참조.

=====1:22

본절은 베냐민 지파와는 달리 요셉 지파가 믿음으로 정복 사업에 나아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셉 족속 - 여기서 '요셉 족속'이라 함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통틀어 칭하는 말이다(수 17:17). 

그들은 유다와 시므온처럼 기업을 함께 할당받았기 때문에(수16:1-4) 연합하여 벧엘 정복에 나섰음이 틀림없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 p. 258).

벧엘 -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베이틴(Beitin)이다. 이곳에는 좋은 샘들이 많아 고대로부터 유목민들의 각광을 받았었다. 

본래의 이름은 '루스'(23절)인데, 야곱에 의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로 바뀌었다(창 28:16-19). 한편 이러한 벧엘은 본래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땅(수 18:22)이었으나 요셉 족속의 남쪽 경계선과도 서로 맞물려 있었다(수 16:1,2). 따라서 요셉 족속도 벧엘에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인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요셉 족속이 벧엘 정복에 나선 것이다.한편 벧엘 정복에 관한 기사는 성경상에 상세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추측컨대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정복한 후(수 8장) 곧 이어 벧엘도 일시 정복했던 것같다(수12:16). 그러나 벧엘은 다시금 가나안 원주민들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이에 본절에서 요셉 족속이 재차 정복에 나선 것 같다(Goslinga). 아무튼 이러한 벧엘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벧엘은 왕정 시대 당시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12:26-33; 왕하 17:27-33 ; 렘 48:13).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 요셉 족속이 벧엘을 성공적으로 정복하게 된 동인(動因)이 근본적으로 여호와께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구절이다(삼상 17:47).

=====1:23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 여기서 '정탐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투르'(* )는'경비가 엄한 지역을 몰래 살피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모세가 가나안에 염탐꾼들을 보냈던 것(민 13:1-20)과 비슷한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즉 요셉 족속의 이런 신중한 태도는 그들이 참으로 믿음 가운데 서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루스 - '벧엘'의 본명이다.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이란 이름은 야곱이 처음 붙인 것이며(창 28:19) 가나안 족들은 그곳을 '루스'라 했다. '루스'(* )란 '왜곡되다', '떠나다'라는 뜻인데 벧엘의 우상 숭배 역사와 잘 부합되는 이름이다.한편 수 16:2에는 "벧엘에서부터 루스가 나아가"라는 언급이 있다. 이는 마치 벧엘과 루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다른 지역인 것처럼 생각케 해준다. 때문에 혹자는 루스의 남쪽을 '벧엘'로 보고 있기도 하다(Cassel).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껏 살펴보아왔듯 이 '루스'와 '벧엘'은 동일한 지역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수16:2 주석을 참조하라.

=====1:24

본절에 기록된 사건은 여리고 정탐시에 기생 라합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하다(수 2장). ..겉보기엔 그러하다.

.그러나, 진지하게 주 앞에서 점검하며 주님 말씀따라 그대로 그대 마음을 점겆하고 들여다 보노라면..실상은 그 일은 주님의 일을 주가 하심따라 행함이 아니라 "제 소견에 옳은 대로..easy-going"...자행자지함이었다.......그런데, 주님 인도 따르지 않고 섣부르게 스스로의 생각따라 어리석게 "불신자와 타협하는 어리석은 약속을 하고 말았다.

아무튼 이는 요셉 족속이 어떻게 견고한 요새 벧엘을 정복하게 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또 벧엘 정복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셉 족속과 함께 하셨음(22절)도 잘 보여 준다

...하나님은  가나안 내의 모든 족속에게 속한 것에 대해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고 임마누엘로 동행하리니...주님 원하시는 그것, 곧 그분이 결정하심, 지도하심따라서만...오직 주와 소통/교통함따라서만!! ...헤렘이 원칙이지만..헤렘 대상 여부 판단을 결정"하라..오직 주님의 새롭게 하심을 따르라..하셨는데, 스스로의 생각따라(영원히 함께 계시며 순간순간 지금도 말씀하시는 부인이신데, 그분을 무시하고!!.. 주님의 주인되심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생각 내세워 조건제시함으로써, 결국 그 주민은 헤렘을 피하게 되었고, 오히려 다른 지방에 가서 성읍을 그대로 건설하고 있었다....그러므로, 오늘 할 일, 하자 하심따라서만 하도록 해야 한다...그대가 아니라 주님이 머리-주-왕-남편-영원 유일무이하신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읍의 입구 - 이것은 성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벧엘사람들이 요셉 족속의 성문 출입을 허용 할리 만무하다. 따라서 이는 요새화된 벧엘에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비밀 루트(root)나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259).

 선대하리라 - 원문을 직역하면 '자비를 보이겠다'. '은혜를 베풀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비', '은혜'에 해당하는 원어 '헤세드'(* )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 또는 인간과 인간 간의 '변함없는 신뢰'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창19:19; 삼하16:17 ; 시59:17). 여기서는 정탐꾼이 벧엘 거민에게 제시한 '약속을 어기지 않고 반드시 이행하겠다'는 강조적 의미로 쓰였다.

=====1: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 이 벧엘 사람은 요셉 족속의 정탐꾼으로 말미암아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므로 이처럼 성읍의 입구를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다.그러나 정탐꾼이 그에게 정중히 도움을 요청한 점으로 보아(9절) 자발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즉 그는 여리고 성의 라합처럼(수2:8-11). 이미 하나님께서 요셉족속과 함께 하심(22절)을 감지했기 때문에 정탐꾼의 요청에 협조했을 것이다.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 라합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켰다(수6:17). 이와 같이 한 사람의 행동 여하에 따라 전가족의구원과 멸망이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대표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과거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오늘날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된 것이다(롬5:18). 물론 구원은 최종적으로 개개인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타인의 구원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쳐 구원에로 인도할 수는 있으므로, 성도의 힘쓸 의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고후 2:15, 16 ; 딤후 4:2).

=====1:26

 헷 사람의 땅 - 헷 족속은 인도 유로피안(Indo-European) 족이다. 이들은B.C.1800-1200년 사이에 소아시아와 시리아 지역에 거대한 왕국을 건설했었다(수 서론,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 참조).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나 모세 율법시대에 일어난 사건들과 헷 족속의 법률이나 관습들, 특히 이들의 종주권계약(suzerainty treaties)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한편 시리아 지역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헷 족속의 온 땅'으로 불리워졌다(수1:4). 따라서 본절에서 벧엘 거민이 이주하였다는 '헷 사람의 땅'은 시리아의 어느 한 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 이 사람은 자신의 새로운 정착지에 다가 벧엘의 옛이름인 '루스'라는 칭호를 붙였다.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떠나다'라는 뜻 외에도<23절> '편도나무'(almond)라는 뜻을 지닌 '루스'라는 이름에 근거해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즉 편도나무로 유명했던 고대 헷 족속의 땅으로는 북부시리아의 '쿠프로스'가 있으므로 이곳이 곧 루스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Cassel).

=====1:27

 본절은 벧엘의 운명과는 대조적으로 므낫세의 영토내에 있는 많은 가나안 인들의 성읍들이 그대로 존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들 성읍들은 '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스르엘과 에스드렐론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편 이  도시들 중 몇몇은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되었으나(수12:21,23), 나머지 성읍들에 대한 정복기사는 아무 데도 없다. 아마 그들은 철병거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쉽게 이스라엘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Goslinga). 그리고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된 성읍들까지도 곧 독립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본절의 끝 부분에 나오는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라는 말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저항이 막강하였음을 의미한다.

 벧스안 - 요단 계곡과 이스라엘 골짜기의 교차 지점, 곧 요단 강 서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주요 요새이다. 라암세스 3세 때(B.C.1175-1144)까지 이곳에 애굽 수비대가 상주했었으며, 그 후 블레셋이 이곳을 점령했었다.

 그 향리 - 즉 큰 성읍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형성되었던 촌락이나 위성 도시를 가리킨다.

 다아낙 - 므깃도 남동쪽 8km 지점에 위치한 가나안의 주요 성읍이다. 역사상 이 성읍은 당시 에스드렐론 계곡에서 샤론 평야에 이르는 남서 통로를 지배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 가이사랴 북방 약 13km 지점의 갈멜 산 남쪽, 팔레스틴 해안에 위치한 요새화된 성읍이다. 이곳에는 그 해안을 따라 자주빛 물감의 원료가 되는 조개가 많이났기때문에 고대로부터 페니키아인들이 정착해 살았었다. 한편 솔로몬 당시 돌과 그 인근지역은 솔로몬 왕국의 제4행정 구역에 편입되었던것으로 전해진다.

 이블르암 - 샤론 평야 동쪽, 이스르엘 골짜기 남쪽에 위치한 가나안의 주요 성읍이다. 오늘날에 '길벳 빌 암메'(Khirbet Billameh)와 동일시 되는데, 이는 므깃도 남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므깃도 - 하이퍼 남동쪽 약 30km 지점의 이스르엘 평원에 위치한 고대 도시이다.이곳은 B.C. 12세기 중반까지 애굽의 지배 하에 었었다. 고고학자 스트라툼(Stratum)7세는 므깃도가 갑자기 멸망당했음을 밝혀냈는데, 그것은 5 : 19에서 암시하고 있는드보라의 숭리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Albright)

=====1:28

 본절에서 사사기 기자는 므낫세 뿐만아니라 다른 지파까지 포함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가나안 인들을 그 땅에서 다 쫓아내지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그리고 이스라엘이 강성해져 충분히 가나안 인들을 쫓아낼 수 있을 즈음에는, 가나안인들을 쫓아내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부려먹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즉 강성한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라 보다 가나안 인들의 사역을 통하여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성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 - 정확히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물른 이스라엘의 국력이 최고로 신장(伸長)된 때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시기(B.C.1005-931)이다. 그러나 사사 시대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꾸준히 국력을 길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때는 이스라엘이 충분히 가나안 인들을 다 쫓아낼 수 있을 만큼 국력이신장된 때임에 만은 분명하다.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 이처럼 이스라엘이 가나안 인들을 사역시킨 경우는 이미 여호수아 당시에도 있었던 일이다. 즉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속여 화친 조약을 맺었던 기브온 거민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았었던 것이다(수9:22-27). 또한 솔로몬은 자신의 건축 사업에 가나안 인들을 동원, 인부로 사용하기도 했었다(왕상9:19-2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가나안땅에서 모든 원주민들을 멸하고 쫓아내는 것이었지(신20:16-18) 결코 그들을 남겨, 이용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잘못이 있었는 바, 이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이방 우상 숭배 종료와 사악한 풍습에 점차 물들어 가고 말았던 것이다.

=====1:29

 게셀 - '쉐펠라', 즉 가나안 평지<9절>의 돌출부에 위치한 전략 도시로서 예루살렘 서쪽 3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특히 에브라임의 영토 중 최남서쪽 경계와 맞물려 있는 이곳은 지중해변에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주요 길목이기도 하다. 한편이 게셀은 애굽의 문서들에서도 여러번 언급되고 있는데, 애굽의 바로가 솔로몬에게 결혼 선물로 이 성읍을 줄때까지(왕상9:15-17) 이 성읍은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들어오지 않았었다.

=====1:30

 스불론의 영토에 있는 두 성읍 기드론과 나할롤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기드론 - 예루살렘과 감람 산 사이를 흐르는 시내인 '기드론'(삼하1:23)과는 엄연히 틀린 곳이다. 하이퍼(Haifa)의 남동쪽에서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엘 파르(Tell el-Far)인 듯하다.

 나할롤 - 또는 '나할랄'으로도 불리우던 성읍이다(수19:15 ; 21:35). 아크레 평원 남단, 하이파 동쪽 8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엔 나흘(Tell en-Nahl)로 추측된다(Albright).

=====1:31

 본절에 언급된 성읍 중에서 악고, 시돈, 알랍, 악십은 모두 갈멜 산 북쪽 해안에위치해 있었다. 이곳 거민들은 다른 지역의 가나안 인들과는 달리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후에 이곳은 중요한 해양 국가인 베니게(Phoenicia)로 발전하였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삼하5:11 ; 왕상5:1-12). 그런데 레니게의 공주 이세벨이 아합과 결혼하여 이스라엘에 바알 우상을 들여옴으로써(왕상16:31-34) 이스라엘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아셀 지파의 성읍들을 간략히 도표화하여 살펴보면 곧 다음과 같다.

┌──┬───────────────────────────────────┐

│이름│   비   고                                                   │

├──┼───────────────────────────────────┤

│악고│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갈멜 북쪽 6km 지점의 지중해 연변에 위치. 사도 │

│        │바울 당시에는 '돌레마이'(행 21:7)로 불리웠음.                                                  │

├──┼───────────────────────────────────┤

│시돈│두로 북쪽 약 35km, 베이루트 남쪽 약 35km 지점에 위치한 베니게의 중요 │

│        │항구 도시. 솔로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돈의 우상 신 '아스다롯'을 │

│        │숭배하였음(왕상 11:5,33).                      │

├──┼───────────────────────────────────┤

│알랍│두로 북동쪽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성읍. 이름의 뜻은 '비옥함', '풍성 │

│        │함'으로서 당시 경제적으로 상당히 윤택한 도시였음을 짐작케 해줌.               │

├──┼───────────────────────────────────┤

│악십│악고에서 두로에 이르는 도로상에 위치한 지중해 연변 도시 악고 동남쪽 약│

│        │11 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키산'(Tell Kisan)과 동일시됨.                │

├──┼───────────────────────────────────┤

│헬바│정확한 위치 불명. 일명 '알람'(Ahlab)으로도 불리운 듯함.                                │

├──┼───────────────────────────────────┤

│아빅│일명 '아벡(Aphek)으로도 불리웠음(수 19:30). 하이퍼(Heifar) 만에서 4.8 │

│        │km 정도 떨어진 악고 평원에 위치. 베니게와 애굽을 잇는 도로상의 전략적 │

│       │요충지이기도 함.                             │

├──┼───────────────────────────────────┤

│르홉│악고 평원 동남방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 엘-갈비'(Tell el │

│        │Gharbi).                        │

└──┴───────────────────────────────────┘

=====1: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증에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에브라임과 스불론 지파의 경우(29,30절)와는 대조되는 기록이다. 즉 위의 두 지파는 가나안 거민들을 완전히 쫓아내지는 못하였으나 그들이 점령한 땅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아셀 및 납달리 지파(33절)는 오히려 그들이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아셀과 납달리 지파의 지경 내에서는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마 그 까닭은 가나안 사람들이 숫적으로 우세하며 아셀 지파나 납달리 지파가그들에게 대하여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수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1:33

 벧세메스 - '태양의 집'이란 뜻, 이것은 이곳에 태양 신을 섬기던 신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갈릴리 고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한편 성경에는 '벧세메스'란 이름은 같으나 서로 다른 지역인 곳이몇 군데 더 나온다. 그중 하나는 법궤 사건으로 유명한 유다 지파의 북쪽 경계(수15:10)인 벧세메스이고(삼상6:10-16) 다른 하나는 잇사갈 지파의 경계지인 벧세메스이다(수19:22).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애굽의 성읍인 벧세메스이다(렘43:13)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납달리 지파의 벧세메스를 이들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벧아낫 - '아낫의 집'이란 뜻이다. 이로 보아 이곳에는 피요의 여신이며 바알의 아내인 '아낫'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이 '아낫'(Anath)은 우가릿(Ugarit)의 전쟁의 여신이었다. 한편 이곳 역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다만 밸세메스 부근에 위치하였던 것으로만 추정할 수 있다.

=====1:34

 본절에서는 단 지파가 아셀 지파나 납달리 지파와는 달리(31-33절) 가나안인 가운데 거하지도 못하고 아모리 족속에 의해 산지로 쫓겨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단지파의 일부는 아모리 족속을 피해 유다의 영역이나 팔레스틴 최북단 지역의 라이스(Laish)로 이주해야만 했다(18:1-31).

 아모리 사람 -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까지 그곳에 거주하던 모든 가나안 족속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창15:16). 그러나 엄격히 구분하면 주로 팔레스틴 계곡이나 해안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가나안인'이라 일컬은 데 반해 팔레스틴 산지에 주로 거주하던 자들을 '아모리인'이라했다. 이들은 본래 팔레스틴, 시리아, 바벨론등지에 널리 흩어져 살았었다. 그러나 팔레스틴 내에서는 당시 에게 해 연안출신으로서, 가나안 남서부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오던 블레셋에게 쫓겨 골짜기나 산지로 밀려나고 말았다. 따라서 단지파가 산지로 쫓겨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때문이다.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 단 지파가 본래 기업으로 받은 땅은 가나안의 서부지역 산간과 해변에 이르는 비옥한 땅이었다(수19:40-46). 그러나 이들은 아모리사람들에게 밀려 산지로 쫓겨났고 급기야는 그곳에서조차 정착치 못하고 결국 '라이스'에로까지 이주해야만 했다(수 18장).

=====1:35

 헤레스 산 - '태양의 산'이란 뜻으로서, 이곳 역시 우상 신전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이곳은 수19:41에 나오는 '이르세메스'(태양의 성읍)와 동일한 곳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아인 세메스'(Ain Shemes)라 불리우고 있다(Keil, Goslinga등). 한편 이스라엘이 정복하는 데 실패한 도시들의 이름이 대부분 우상과 관련된 것으로 볼 때<33절>. 이스라엘의 실패는 단지 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앙적인 차원에서 설명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아얄론 - 여리고와 지중해 사이의 고지에 위치한 성읍. 오늘날의 '얄로'(Yalo)인것으로 추정된다. 여호수아가 아모리족을 격퇴할 당시 야얄론 골짜기에 달이 머문 사건으로 유명하다(수10:12).

 사알빔 - 예루살렘 서쪽 약 24km 지점, 아얄론 부근에 위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의'셀비트'(Selbit)로 추정된다. 솔로몬 당시 이곳은 식량 공급을 위한 행정중심지였다(왕상4:9).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사역을 하였으며 - 단 자손들은 대부분 평야로 이루어져 있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쫓겨나고 산지에서 조차 아모리인들의 공격으로 고난을 받았었다. 그러나 훗날 요셉 족속, 엄밀히 말하면 에브라임 지파는 단 지파의 영토에까지 새력을 확장, 아모리인들로 하여금 사역케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모리인들이 비록 단 지파의 지경에서 단 지파를 쫓아 내긴 했으나 그 지역이 결국에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영토로 회복되었음을 보여 준다.

=====1:36

 아모리 족속이 단 지파의 영토를 차지한 것(34,35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도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잔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즉 이를 위해 본절은 당시 아모리 족속이 거주하던 땅의 남쪽 경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곧 유다 족속이 기업으로 분배받은 가나안 땅의 최남단 경계와 일치한다(수15:1-4).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였더라 - '아그랍빔'이란 '전갈'이란 뜻이다.아마도 이 지역에 전갈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Pulpit Commentary).이 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민34:4과 수15:3에 의거하면 사해 남쪽지역에서부터 브엘세바, 즉 유다 남부 구릉 지역의 평지까지 이르는 가파른 절벽 지대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바위'에 해당하는 원어 '하쎌라'(* )는 헬라어로'페트라'(Petra)에 해당된다. 민34:3과 수15:1에 의거할 때 이는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에돔 지경(地境)의 산악 지대를 가리키는 듯하다(Lange, Wycliffe). 그러나 혹자는 '하쎌라'를 에돔 지경의 산악지대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아닌 그냥 바위가 많은지역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이해하기도한다(Keil). 마지막으로 여기서 '그 위'란 서쪽 지중해변을 가리키는 바, 이는 민 34:5 ; 수 15:4에 의거할 때 지중해로 흘러드는 '애굽 시내'부근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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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1절) 이스라엘 각 지파가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는 점진적 과정을 보여 준다.   

물론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미 완수되었고  각 지파별로 토지도 분배된 상태이긴 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완전히 장악하고 정착하는 데는 물리적인 군사력에 있어서나 아직까지 미성숙한 상태에  있었다.  즉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이 정복치 못한 강력한 원주민들과 미정복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수 13:2-7).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기업(수14-19장)을 온전히 취하기 위해서는 한시 바삐 가나안인들을 축출해 내고 그곳에 이스라엘의 통치 체제를 구축해야 했었다.  

본장은 이에 제일 먼저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와 더불어 행한 정복사업을 소개한다(1-21절).  그리고는 이어서 요셉 족속의  성공적인 정복 사업(22-26절) 및 다른 지파의 실패담을 차례로 소개한다(27-36절).   결국 본장에 기록된 이러한 각 지파의 정복 사업은 다음 두 가지 성격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긍정적인 면 : 이 정복 사업에 성공한 지파는 유다 지파의 요셉 족속이다.  이 중 유다 지파는 믿음의 사람 갈렙과 옷니엘의 활약(11-15절), 시므온 지파와  겐  족속의 도움(16, 17절)에 힘입어 가나안 남부 지역을 성공적으로 징벌하였다.   그리고  요셉족속은 여호와에 대한 투철한 믿음으로 굳건한 요새인 벧엘을  성공적으로  탈취했다. 즉 이들의 성공의 원인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12, 22절) 때문인데 특히 갈렙과 옷니엘 그리고 벧엘을 정탐한 자들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인들을 여전히 잔존 세력으로 남겨  두게  되는데(19절),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훗날에 큰 화근을 당하게 된다.

 (2) 부정적인 면 : 위에 언급한 지파들 이외에 다른 지파들은 모두 가나안 정복 사업에 실패하고 만다.  

본서 기자는 이들 각 지파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신학적 주석을 가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이들 지파의 실패 원인이 군사력이나  어떠한 외부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여호와께 대한 신앙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임을 보여 준다.  특히 이들이 장악하지 못한 성읍의 대부분은 우상과 깊은 연관이  있어서 이스라엘 후기 역사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우상 숭배 죄의 근원이 된다. 아무튼 저들의 행위는 결국 '가나안 주민들을 철저히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신7:2)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불순종으로 시작된 가나안 정착의 역사는 온갖  죄악으로 얼룩지게 되므로써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도래케 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 장은 여호수아서와 본서를 이어주는 다리 역학을 할 뿐만 아니라 본서 전체의  배경이 될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1. 유다 지파의 승리(1:1-20)

하나님의 신탁에 의거(1, 2절), 제일 먼저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와 더불어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 가나안인들을 쳐부수고(3-7절) 유다와 시므온에게 주어진 분깃을 차지하는 장면이다(8-20절).  

여기서 본서 기자는 유다 지파를 승리로 이끈  두  인물을 강조하고 있는데 곧 믿음의 용사 갈렙과 옷니엘이다(11-15절).  

그들의  활약은  특히 헤브론과 드빌 정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유다  지파가 정복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이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다 지파의 정복 사업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신탁에 의하여 이들이 맨 먼저 가나안 징벌에 나서게 된 점부터 시작하여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의 손에 붙이시며(4절) 모든 전투에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꼐  하셨다(19절)는 점 등은 모두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유다 지파는 단지 자신의 분깃을 차지하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그들의 정복 사역을 곧 성전(聖戰)으로 간주하고 철저한 믿음과 사명감으로 정복 사업을 수행했다는 뜻이  된다.

 (2) 유다 지파는 철저한 순종으로 성전(聖戰)을 치루었다는 점이다.  

성전에  있어서 승리의 관건(關鍵)은 여호와께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으며(출 14:14 ; 삼상 18:17) 병력의 수효나 무기의 우열에 구애되지 않는다(삿 7장 ; 삼상 14:6).  

아마 유다 지파는 분명히 이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을 것이다(2절).

 (3) 유다 지파는 지혜로왔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였다는 점이다.  

첫째는 자기 지파보다 훨씬 열세(劣勢)한 시므온 지파와 협력을 구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고(3,  17절), 둘째는 겐 족속의 유입을 그대로 잘 수용했다는 점(16절)에서 그러하다.

 (4) 유다 지파에는 갈렙과 같은 우수항 지도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 각 지파 간에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여호수아를 대신할  강력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다 지파에는 다행이 갈렙이 있어서 그 빈자리를 메꿀  수 있었다(12절).  

특히 탁월한 신앙심을 발휘했던 갈렙은 이미 85세 이상의  노장이었으나(수 14:10-12) 지도자 역할을 훌륭히 했던 것이다.  

온 무리가 모세의 명대로  갈렙에게 헤브론을 주는 것에 마음이 일치할 수 있엇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임이 분명하다

(20절). 이처럼 신앙을 유지 성장시키고 민족 공동체나 신안 공동체를 하나로 집결시키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위임을 받은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한편 본문 후반부에는 단 한번 유다 지파의 실패가 언급되고 있다(19절).  

그것은 곧 저들이 철병거를 보유하고 있던 골짜기 거민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산지 거민들을 다 쫓아내었던 유다 지파가  이처럼 유독 철병거만을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결국 불신앙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즉 저들은 가나안족의 막강한 무기를 보는 순간, 일시적이나마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 인간적인 두려움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뜻아니한 어려움에 직면하면 곧잘 절망하고 낙심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성도는 더욱더 권능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결단코 내치지 않으신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고 노래한 시편 기자의 신앙 !  바로 이것이야 말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지해야 할 우리의 마땅한 자세이다.

   본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 사건의 발생 시기 문제 - 본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서문구로 시작된다(1절).  

이것은 여호수아서가 '모세가 죽은 후에'(수  1:1)로 시작하여 모세 사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사기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의 역사를 다룬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2:6-9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의 역사를 다룬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2:6-9은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어서 그 이전의 가나안 정복 사건이 여호수아 때에 일어난 일을 회고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래서 학자들 간에는 본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  사건이 여호수아 죽음 이후에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에 일어난 것인가에  대하여 서로 엇갈린 견해들을 보이고 있다.  이제 그 견해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여호수아의 죽음 이전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A.C. Hervey) : 이는 본서  1:1-2:5에 기록된 정복 기사의 내용이 여호수아 15장 등에 기록된 정복 기사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참고로 본장의 기사와 여호수아서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정복  기사  내용

헤드본과 드빌의 정복 기사         1:10 - 15, 20          15:13 - 19

베냐민의 예루살렘 정복 실패         1:21              15:63

므낫세의 블레셋 지역 정복 실패         1:27              17:11 - 13

에브라임의 게셀 정복 실패         1:29              16:10

 위의 도표를 통해서 볼 때 1절에서 '여호수아는 죽은 후에'라는 서론구는 그 다음 내용(1:1-2:5)과는 일견 아무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인다.  

때문에 본 견해를 표방하는 자들은 주장하기를 이는 다만 사사기 전체의 상황과 배경에 대한 총괄적인 서론으로  후대에 편집자가 첨가한 표현이라 한다.

 (2)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Keil,  Goslinga,  Matthew  Henry, J.P. Millar : 카일(Keil)은 많은 학자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점을 들어 본장의 정복 기사가 여호수아 죽음 이후의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까)여호수아 10:3, 18-26에서는 여호수아가 예루살렘을 불사르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는 점.   (다)헤브론과 드빌을 여호수아가 정복하긴 했으나 조직적인 통치 기구가 없는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 성읍들을 곧 재탈환 당했다는 점.  (따)당시에 가나안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어서(19절) 쉽게 그 지역을 장악할 수 없다는 점.  (마)여호수아  13:1-7 에서 미정복 상태로 남아 있던 성읍들이 본장에서는 정복했다는 점 등이다.

 이상의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후자이다.  왜냐하면 본장의 1절은 '그리고'라는 뜻의 히브리어 접속사 '와 우'(*  )로 계속하여 연결되어 있어서 1절의 기록과 이후의 사건들이 서로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위의 도표에 나타난 것처럼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기록은 내용에 있어서는 유사하지만 여호수아서는 한 지도자 아래 각  지파가 연합하여 정복 사업을 실시하였으나 사사기는 각 지파별로 따로 시행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점에서 엄연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참작,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가나안 정복 사업을 정리해 보면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크게 대조된다.  

첫째로 여호수아서의 정복은  원칙상의 정복, 또는 표면상의 정복이나 사사기의 것은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다.  

둘째,  여호수아서의 정복은 강력한 지도자 아래서 수행되고 있지만 사사기의 것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셋째, 여호수아서의 정복은 이스라엘 전체에 의해 수행되고 있으나 사사기의 그것은 뚜렷한 구심점이나 응집력이 없이 각 지파별로  따로 시행되었다.  

넷째, 여호수아서의 정복은 승리로 장식되고 있으나 사사기에서는  패배로  끝난다.  

이로 볼 때 사사기 1:1-2:5의 기사는 분명히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의 사건임이 분명하다.

   빙폐 (聘幣)와 빙물(聘物) -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 중에는 '모하르'(*     )라는 풍습이 있다.  

'모하르'란 말은 '결혼 지참금'을 뜻하는 말로서 '아내를 얻기 위해 흥정하다'또는 '결혼하다'라는 동사 '마하르'(*     )에서 파생되었다.개역 성경에 서는 이 모하르가 '입물'(창 34:12), '빙폐'(출 22:16), 또는 '폐백'(삼상 18:25)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모하르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가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결혼 예물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처녀를 아내로 데려올 때 그 장인에게 남자가 치루는 지불 대금(代金)이다.   개역 성경에서는 전자를 빙물이라고 하고 후자를 빙폐라고 번역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신부인 딸에게 빙물로서 여종을  주었으며(창  16:1  ;    24:61  ; 29:24, 29) 이 여종에 대하여 남편들은 아무런 지배권도 없었다.  

라반의 딸들이 아버지가 자신들에게 줄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해서 불평했는데 이것은 '빙물'에 관한  것이다(창 31:15).  

이외에 샘물이나 성읍을 빙물로 주기로 했다(수  15:18,  19  ;  왕상9:16).

 한편 결혼을 앞둔 남자는 돈 대신에 노동의 봉사로서 '빙폐'를 대신하는 예도 있었다(창 29:15-30).    

그러나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데려올 때에는 빙폐의 일례로 예물을 그 가족들에게 주었다(창 24:59).  

한편 옷니엘의 경우에는 드빌 전투의 업적으로 '빙폐'를 삼았고(11-13절), 악사는 '샘'으로 '빙물'을 삼았다(14, 15절).  이것은 다윗과 미갈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삼상 18:25-27).

2. 다른 지파들의 실패(1:21-36)

  앞서 유다, 시므온 지파가 가나안 정벌에 성공한 것과는 달리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스블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 등이 가나안 정복에 실패한 것과 그로 말미암은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혼합 경위를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본문  중에는 요셉 족속이 믿음으로 벧엘 정복에 성공한 기사도 포함되어 있다(22-26절).    이  벧엘 정복 기사는 유다 지파와 같이 믿음으로 가나안 정복 사업에 나섰더라면 다른  지파들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정벌에 성공하였을 것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단 한번의 벧엘 정복 이외의 본문에 나타나는 지파들은 모두 자신의 분깃을 차지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한편 이러한 실패의 결과 저들은 중요한 양상을 초래하고 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1) 전반적인 가나안 정벌에는 실패했으나 부분별로 각 지역의 주도권을 잡은 지파들이 있는데 요셉 족속,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 그리고 스불론 지파이다(22-30절). 게다가 요셉 족속은 점차 강성하여짐에 따라서 자신들의 영토 내에 있는 가나안인들을 종으로 사역시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 지역에 있는 가나안인들까지도 사역을 시키게 된다(35절).    

그러나 요셉 족속의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하고 좀더 현명하였다면 그들을 사역 시켜서 얻는 이익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가나안인들을 철저히 진멸하여야' (신 7:2)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남긴 가나안인들은 그들 가운데 떨어진  죄악의 씨앗이 되고 이러한 죄악의 번식력은 막강하여 장차 그들을 잠식(蠶食)시켜 버릴 것이

기 때문이다.

 (2) 가나안 정벌에 실패하므로서 가나안인들과 타협하여 그들 가운데 거해야 했던 지파들에는 아셀과 납달리 지파가 있다.  

이들 지파는 가나인들을 종으로  부리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숫적인 열세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단 지파의 경우는 오히려 가나안인들에게 쫓겨 북쪽으로 이주하거나 산지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34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족속의  강성함으로  그 지역의 주도권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갖고 있었다(35, 36절).

 이와 같이 각 지파들이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지 않을 때 오히려 사단의 세력이 득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세우지  못하도록 방치하게 됨을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성도들을 각종 죄악으로  잠식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파수꾼이 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뜬눈으로 밤을 밝히듯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항상 영적으로 각성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약속의 땅에 참여 한 이방인 - 본장에는 이방 종족의 출신이거나 이방인들로서  이스라엘 지파에 소속하여 약속의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자들이  모세 장자의 자손인 겐 족속으로서 그들은 유다 백성들과 함께 아랏 남방에서 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16절) 이후 이스라엘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4:11).

그 다음에는 특정한 인물로 밝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벧엘 정탐꾼을 도와 준  연유로 그 가족과 함께 구원을 받은 벧엘 거민을 들 수 있다(22-26절).  

이 이방인은  가나안 정탐시의 기생 라합과 동일하게 진멸속에서 구원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겠다(수2:8-11).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방인들이 약속의 땅에 참여한 거나 구원받은  점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구별은 인종적인 구별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신앙의 여부에 따른 구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설교했던 것이다.

 (2)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여부를 시험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할례'라는 외형적인 의식을 이방인들에게 요구했었다(창 17:12).

그 대표적인 예로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의 누이 디나를 범한 세겜족들에게 할례를  요구한 사건을 들 수 있다(창 34:14-7).  

그러나 여자의 경우에는 기생 라합과 같이  믿음의 여부를 보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그분의 복을 누릴 수 있었다(갈 3:14). 

즉, 그 믿음만으로 '새 이스라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갈 3:7).

 (3) 따라서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체제는 폐쇄 체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개방 체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었으나 이방인들도 일정 조건을 갖추게 되면 히브리인과 동일한 특권과 의무, 그리고  봉사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가나안 정복의 실패와 그 교훈 -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정복에 실패한 가나안 도성들은 모두 전략, 교통, 경제, 문화 등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성읍들의 지병에서 알 수 있다.  

를 들면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 벧아낫은 '아낫 여신의 집', 헤레스  산은  '태양의 산' 등의 뜻이다(33, 35절).  

따라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실패는 단순히 그  땅을 점령하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타파하는 성전(聖戰)에 실패한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가나안 땅에  제사장  나라를 건설하는 데 실패함으로서, 장차 이 땅을 본거지로 하여 온 인류에게 참 종교를  전파하려던 하나님의 계획(출 19:6)은 중대차한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가나안땅에 남아 있던 우상 숭배 죄악의 뿌리가 급기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버렸기 때문이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인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흔적을 호리(毫釐)라도 남김없이 제거하도록 명령하셨던 것(출 23:33 ; 신 7:2)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우려해서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점은 이와 같은  명령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모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철저한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골 3:5, 6 ; 살전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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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장> 사사기1:1~10 끝나지 않은 전쟁
맥락적으로 여호수아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여호수아서는 약간 불편한 대화로 끝난다. 
세겜 땅에서 한 여호수아의 고별설교의 요지는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수24:15)”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가슴에 쌓아두었던,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그들의 답변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답변에 감복하지 않고 “너희가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19절)”라고 말한다. 
여호수아서에는 뚜렷하게 보이는 지도자가 있었다. 눈에 띄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뚜렷하게 눈에 보였던 지도자가 사라진다(삿1:1). 
사사기로 넘어오면서 이스라엘의 대표성을 가질 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왕으로서 실지로 통치하시되!! 그분의 백성을 그들 중에서 택하여 사사(한자로는 선비 사 + 스승 사....히브리어로는 쇼페팀 = 판관....판단-다스리는 관리)라는 독특한 지위를 설정하셔서 이스라엘을 새로운 방식으로 경영하신다. 사사란 “쇼페팀(재판관)”이라는 말이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백성을 경영했는데 사사기는 백성들이 직접 하나님과 소통하는 툴로 바뀐다. 이것이 사사기 전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경영하시고자 하는 방법의 수단의 전환이다. [진실을 말하자면..]여호수아 시대보다는 사사시대가 영적으로 좋은 것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은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부활-승천-성령으로 자신을 부어주심의 과정 통해, 주님께서 친히 성령으로 믿는이의 영에 (왕-주인-남편-머리로서) 내주하심-그리스도의 마음 주심-(JC를 자신의 속죄제-속건제로 취하고) 아버지께 자신을 열어드림으로써 생각나는 모든 죄와 부지불식간의 모든 죄를 자백, 회개하며 주께 엎드려 지고지선의 진복-영생이신 주님, 하나되어 계신 그분의 친히 인도하심-이끄심, 곧 성령 충만-감동을 앙망-응시-주목-바라봄의, 구하고-찾고-두드리는 이마다에게 그분 자신을 믿고-살고-누림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분의 (거듭난) 구속받은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도록 빚어가고 계신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저주에 가까운 흑암의 역사가 사사시대다. 아이러니하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확실하게 이루어질 일에 사용하는 미래완료형시제를 썼다. 여호수아 때는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인데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싸울 땅이 남아 있는 게 문제다.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인데, 땅을 점령하는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불순종의 흔적을 문자의 속살에서 들추어낼 수 있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께 여쭙기까지 했다. 기도하고 종교적 형식은 갖추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대답은 “유다”였다. 그럼 유다만 올라가면 된다. 그런데 유다는 지근거리에 있던 시므온 족속과 연합을 꾀한다(3절). 
이번에 함께 올라가서 싸우면 시므온 지파가 전쟁할 때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이에 시므온 지파가 선뜻 응한다. 
두 지파는 밀접한 관계다. 유다와 시므온은 한 어머니 레아의 아들들이고,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영토 안에서 자신들의 기업을 물려받았다.
인간적 측면에서는 아름다운 형제애를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주관, 명령적 관점에서 볼 문제다. 
시므온을 왜 불렀을까? 하나가 더 합해지면 힘이 커져서 승리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을 힘의 논리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오늘날에도..) 이게 교회 일하는 사람들의 함정이 아닐까.... 
더 많이 모이고 세력을 키우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더 능률적이고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원리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 가나안 전쟁은 사람의 수나 크기에 승패가 달려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전쟁이다. 
그걸 드러내시기 위해 사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사기는 실패의 연속이다. 인간의 능력과 자발적인 의지로 하나님께 의존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시키는 것이다. 
유다지파가 선봉에 세워지는 이유는 유다지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사기의 주제도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엎어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면서 그 실패와 성공 자체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향시키고자 하는 초점은 딱 하나다.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이다. 
이게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넘어짐과 일어섬이 우리 관심이 되지 않아야 하고, 넘어짐과 일어섬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붙드는 눈이 열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는 존재들이다. 여호수아서도 불편하게 끝난다. “너희는 못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백성들의 본심의 실체를 드러낸다. 실제로 사사기 시대 하나님이 직접 경영하시고 통치하시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삐딱선을 탄다. 
사사기 1장에는 두 개의 선명한 사건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에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대적을 만 명을 죽인 것이다. 아도니 베섹은 베섹지역을 통치하는 통치자의 통칭이다. 아도니 베섹과 같이 가나안 땅에 있는 각각의 도시와 성읍마다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아도니 베섹은 “베제크의 주인”을 뜻한다. 그를 잡아 죽이지는 않고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랐다. 
왜 이런 상세한 표현을 했을까? 이는 가나안 문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지 수 년의 세월이 흘러 자기들도 모르게 가나안 문화에 물들어 있다. 가나안 문화 방식의 전쟁 패턴에 따라서 전쟁을 한다. 
하나님은 손가락 발가락 자르라고 명하시지 않고 진멸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안 죽였다. 
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70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이게 가나안 방식이라는 말이다.
7절 하반절에 보면 사망이라는 결론은 같았지만 아도니 베섹이 (실지로는) 자연사를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이지 않았다. 왜? 하나님이 명령한 전쟁의 원리를 안 따른 것이다. 베섹의 지도자를 끌고 승리의 전리품 삼아서 그들의 전쟁의 결과에 대한 영광을 자기들이 취했던 것이다. 잔인한 영광의 탈취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른 이유도 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무서운 섞임이 있다. 
[말씀 적용의] 질서와 원리를 따르자면 죽였어야 한다. 그런데 자연사할 때까지 그들의 승리를 맛보고 누리는 데 써먹는다. 은밀하고 교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한다. 
인간의 본성, 그 거역과 곁길로 나아감의 경향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입으로는 은혜로운 표현으로 “다 주님이 하셨다”고 말은 해도, 한 명이 더 있으면 안심이 되고, 눈에 보이는 통계가 있으면 그게 우리를 지지해주는 것 같다. 
다 속는 것이다.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전리품 삼아서 그 영광을 자기들이 짜릿하게 누리는 것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넘겨주어서 얻은 승리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모든 영광을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께 돌려야 맞는다. 
1장부터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지적한 대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혼잡해있는지를, 순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서부터 얼마나 멀어져 가는지를 말해준다.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 
일부러 해설을 달아놓았다. 중후장대한 거인족들이 사는 지역이다. 그 지역을 유다백성들이 승리한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과정 속에 인간의 허물과 약점이 노출되고, 반면교사 삼아야 할 내용이 있지만 하나님은 언약하신 대로 유다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신다. 이게 우리 구원이다. 
삿1:11-21 절반의 승리
위 사건과 대조적으로 갈렙의 딸 악사가 등장한다. 전쟁의 승리를 거머쥔 옷니엘과 결혼한다.
이 사건은 역사적 순서도 아니고 사건별 순서도 아니다. 이미 여호수아서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측면에서 삽입하여 기록한 일이다. 
사사시대의 일이 아니라 여호수아 시대의 일이다. 수15장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세벨이라 
갈렙은 여호수아와 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담대히 올라가 기럇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기럇세벨은 험한 곳이고 대적이 강력한 곳이다. 딸을 주는 풍습은 원래 이스라엘 문화가 아니고 이방 문화다. 가나안에서도 이런 풍습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이어 내려오고 있었다. ‘모하르’라고 한다. 옷니엘이 나서서 전쟁에 이겼다.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면 조카가 된다. 
이제, 바로 그 옷니엘이 향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가 되어 40년을 통치한다. 옷니엘이 가장 1등급 최상의 인물이다. 사사들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못한 사람이 나온다. 
옷니엘이 사사로 있던 시절은 굉장히 평안했다. 대체로 하나님 앞에 곧은 신앙을 가지고 선하게 살았던 인생의 기록들이 3장부터 본격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시집가는 딸이 차비를 차리고 출발하려다가 갑자기 나귀에서 내려 아버지 앞에 넙죽 큰절을 하였다. 
당시 풍습으로는 이런 경우가 없다.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갈렙이 “무슨 일이냐?” 묻자 악사는 품고 있던 본심을 여과 없이 이야기한다. 
이들이 가야할 곳은 남방 네게브 사막지역이다. 풀도 드물고 숲도 없다. 살기가 팍팍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살려면 제일 필요한 게 물이다. 
거기로 시집을 가는데 가장 필요하니까 “복을 주옵소서”하고 밭을 구하고 샘을 구한다. 아버지가 밭과 아랫샘, 윗샘을 냉큼 준다. 풍성하게 인생이 이어져간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처리하고 별로 안 중요한 것 같은 내용은 동작, 태도까지 자세히 소개했다. 
이 기록은 사시시대 기록도 아니고 여호수아 때 기록을 인용해서 기록했다. 드러내고자 한 메시지가 뭔가?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할 때 쫓아가서 잡아 엄지손가락 발가락 잘라 옛적에 70명의 왕들이 내 상 아래 주워 먹더니 
유다지파가 전쟁에 가서 승리했고 그 결과가 아도니 베섹 통치자를 체포하고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 평생 전리품으로 수치를 보이고 결국 거기서 죽게 된다. 
오늘 이야기와 어떤 관련이 있나? 의도적인 비교를 위해서 기자가 설치를 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공동체와 대적한 자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신체 훼손을 당하고, 평생 죽을 때까지 조롱당하다가 죽어가는 그림이 그의 종말이다.
또 하나는 옷니엘에게 시집가는 악사 이야기다. 아버지께로부터 복의 근원이 되면서 생명 같은 아래샘 윗샘을 물려받는 은총을 경험한다. 극명한 결과를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사사기 1장에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성경 기자가 일부러 두 사건을 걸쳐놓은 이유가 뭔가? 스토리가 복잡하게 엮어져 있으나 하고 싶은 말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께 붙어 있고 쓰러져도 은혜의 자리로 넘어지는 자는 복을 얻으나 하나님의 공동체와 떨어져 대적하는 자의 결말은 굉장히 비참하다는 것이다.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 이건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수단과 과정은 굉장히 잘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쪽으로 넘어질 줄 아는 복을 입은 존재다. 
갈렙의 딸 악사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다. 아도니베섹은 공동체의 대적자 첫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 결과는 비참하다. 
신앙생활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후 모세의 장인 겐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이방인이고 모세를 돕고 후대하여 모세의 가문의 사람으로 들어오기를 즐거워한다. 
16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거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 
이 이야기도 시간별 역사별 이야기가 아닌데 기자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이다.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는 “당신이 우리의 백성이 될 것이다” 모세가 예언한 것이 먼 훗날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얼마나 고상한가, 잘 사나, 못 나사가 아니다. 넘어져도 은혜의 자리로 넘어질 줄 아나, 하나님의 공동체와 항상 대적의 자리에 있는가 하는 싸움이다. 
그게 야곱이 결국 깨닫고 누렸던 자기고백이었다. 사사기 1장에서 두 사건을 극명하게 대조해 놓은 이유가 이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이 이 같은 복을 주실 것이고 명을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때는 이 같은 종말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을 이 첫 장에다가 아이콘처럼 설치를 해 놓았다. 
1장에 두 개의 이야기로 선명하게 설명하고 이후로부터 마지막장까지 전부 백성들의 전쟁 이야기를 설치하고 있는데 그게 전부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싸움이다. 
이기고 지고에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느냐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 계속 설명하신다.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본심을 숨긴 기록이다. 사실은 쫓아내지 않은 것이다.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산지주민은 중후장대한 거인족을 말한다. 난공불락의 대적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내쫓았다. 
“아니하였더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다. 이게 속내에 감추어진 본심이다. 
화려한 가나안 문화와 철기문명의 발달에 이스라엘이 충격을 받으면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노역을 시키면서 그들의 철기문명을 습득하기 원했다. 
하나님의 명령적 차원이 아닌 효율과 실리가 가장 중요한 관심이었다. 
수사적으로는 “환경이 그래서, 연약해서, 부족해서…” 이런 핑계를 대면서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습관과 중독에 묶인 오랜 죄악들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 죄악이 주는 단맛, 거기서 얻어지는 결과물들이 주는 이익의 단맛이 쏠쏠하다. 그래서 쉽게 끊어내지 못한다. 
12지파가 한 지파도 예외 없이 여기에 걸려 넘어진다. 이게 사사기의 거듭되는 실패의 역사이다. 
승리로 시작했던 유다지파가 굉장히 허약한 지파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사사기를 통해서 백성들이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고 바라도록 모든 이야기가 만들어져 간다. 
1장의 선명한 대조는 사사기 전체의 굵은 메시지가 된다. 아도니 베섹의 스토리와 악사가 결국에 누리게 되는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이 뭘 이야기하고 싶으신 걸까? 
사사기를 통해서 2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착하게 된다. 전쟁사가 소개되지만 어떤 페이지를 들추든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더라도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되겠다. 넘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쪽으로 넘어질 줄 아는 백성이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쪽으로 넘어지는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순종의 자리에 있느냐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이 첫 장에 보여줌으로써 향후 모든 사사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 연약함, 넘어짐에 대한 결말 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 안에 어떤 끊어내고 진멸시켜야 할 아말렉과 같은 죄의 문제가 내가 쫓아내지 않는 건가? 못하는 건가 정직하게 자기 심령을 살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삿1:22-36 승리보다 많은 패배 
요셉가문 이야기이다. 
22 요셉가문이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니라
23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복된 수식어로 전쟁이야기가 시작된다. ‘벧엘’의 원래 이름은 ‘루스’다. 루스는 ‘분리되다’는 뜻이다. 분리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동체가 될 수 없다. ‘루스’는 지명 자체는 ‘분리되어지는 곳’이다. ‘벧엘’은 ‘베이트’+‘엘’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된 합성어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 루스라는 곳에 요셉 지파(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점령하기 위해 올라가는데 조그만 일을 만나게 된다. 
24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어떤 사건과 모티브가 유사하지 않은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보내 라합의 집에 이르렀는데 라합이 두 정탐꾼을 숨겨줌으로써 라합과 그 가족이 구원을 얻었다는 내용이 여호수아서 서두에 소개된다. 사사기의 사건에서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정탐꾼들이 성읍의 한 사람에게 성읍 입구를 물으면서 가르쳐 주면 후에 이 땅을 점령하러 들어올 때 선대하겠다고 약속한다. 
구도는 유사하지만 반대의 경우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선대한다고 하면서 이 사람을 자기 족속의 공동체나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들어오게 하지 않고 그냥 놓아 보낸다. 
양자간에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는 헷 사람 땅에 가서 성을 건축하고 이름을 루스라고 했다. 가나안 원주민을 이야기한다. 
루스는 요셉 가문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빼앗긴 성인데 자기가 살던 그 성 이름을 따서 헷 족속 땅에 성읍을 건축하고 루스라고 이름을 짓는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안 들어오고 딴 살림을 차린 것이다. 
이는 가나안의 신과 문화를 보존하고 유지한다. 요셉 지파의 굉장한 실수다. 그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삼지 않으면 멸절 시켰어야 옳았다. 
전쟁의 결과가 선명하게 정복을 한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양새로 결론을 내고 만다. 그 성안에서 자기들의 신과 문명과 문화를 다시 형성한다. 
요셉 가문의 완성되지 않은 승리다. 지금부터 모든 지파가 똑같은 실수를 한다.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죄는 굉장한 집요성과 고집이 있다. 원문에 고집이라고 써 있는데 고집을 부린 끝에 결국 꺾어냈다는 말이다. 상대가 집요한 걸 말한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중독과 죄성이 걸려 있는 문제는 결국 숲을 이루어낸다. 별 거 아닌 줄 알고 방치하는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에 살금살금 자라난다. 나중에는 나도 감당 안 되고 제어 안 되는 거대한 숲이 되고 만다. 그때는 허용하고 용납해야 한다. 
교회 안에 이런 식의 세속의 물결이 굉장히 많이 들어와 있다. 20-30년 전만 해도 어림없었던 세속의 문화가 살금살금 들어와 이제는 둥지를 틀고 뽑아내면 전부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어 손도 못 대는 이런 것들이 많다.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처음에는 “못했다”, 나중에는 “않았다” 둘 다 성경에 써 있으니 둘 다 맞는다. 못했다는 말도 맞지만 그건 인간의 해석이다. 
쫓아내지 않은 게 결론적으로 맞다. 그건 하나님의 해석이다. 왜 못 좇아냈나? 그들의 연약한 불신앙 때문이다. 
원래 가나안 땅이라는 공간은 아브라함 때부터 신명기를 넘어서 모세를 통해 여호수아에게 “반드시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하고 약속해서 들어간 땅이다.
가나안 삶의 스타일은 총칼로 크기와 힘으로 이겨서 쟁취하는 땅이 아니다. 힘과 힘의 전선이 아니다. 순종으로 가는 공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연습하는 공간이다. 
약속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 넘어가게 되어 있다. 밟으면 철병거든 아낙자손이든 다 넘어오게 되어 있다. 연약함 때문에 크기 앞에 압도를 당했고 세력 앞에 압도당해서 못한 것이다. 
“않았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가나안 족속들을 노역을 시켰는데 그들이 창출하는 노동력의 단맛이 컸고, 그들이 갖고 있던 문화를 남겨두어야 이익이고 실익이고 효과적이라서 그냥 두었기 때문이다. 노예해방을 지주계급들이 오랜 세월 반대했던 이유는 노동력이 사라졌을 때의 경제적 손실과 불편함을 귀족들이 감당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실익 때문에 극렬하게 반대한 것이다. 교묘한 것들이 얽혀 쫓아내지 “못했고”, “않았고” 이렇게 된 것이다.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전부 “쫓아내지 못하고”로 되어 있다. 27~36절에 “쫓아내지 못했다”고 6번이나 나온다. 
34절에 단 지파의 치욕이 나온다. 
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로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요셉가문이 단지파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몰아낸 게 아니라 볼모로 노역을 시킨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에 가나안 문화가 혼잡하게 섞여갔다. 
개혁을 해야 한다. 개혁은 세상적인 정의를 부르짖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모든 비본질적인 것들을 잘라내는 것이 개혁이다. 
매일매일 영육간에 이 혼잡해서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자꾸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과수원에서 농부들이 정기적으로 가치치기를 안 해 주면 뿌리로부터 올라오던 양분이 가야될 과일로 가지 않고 쓸데없는 잔 가지로 가기 때문에 가지치기를 안 해준 나무열매는 양분을 충실히 못 먹어서 조막만하다. 가지치기를 열심히 해 준 과일은 양분이 한 군데로만 가기 때문에 달고 크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성이 있어 그대로 두면 잡초화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돈 있고 시간이 남으면 죄짓는 것밖에 없다. 돈이 있고 시간 남아서 선한 생각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잡초가 계속 자란다. 그것을 경건의 시간과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시간에 계속 뽑아주고 잘라줘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만 드러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만 의지하는 훈련이 매일 일어나야 한다. 
사사기는 계속되는 실패의 연속을 보여준다. 가나안의 삶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연습을 하는 공간이다. 
내 안에 일어나는 가나안 족속의 섞임과 유혹과 그들의 매력적인 문명을 계속 쫓아내는 싸움이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기도 없이 은혜 없이 이루어질 일은 하나도 없다. 기도했기 때문에 응답하신다는 말이 아니고 “이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리는 것이다  .. https://blog.naver.com/sinjisaem/220539339155
=== https://www.kcjlogos.org/news/articleView.html?idxno=10824
[[에하드-삼위일체의 비밀]]..명사형 = 야하드...헬라어 : 헨
스가랴 14장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אחד)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אחד)이실 것이라”
요한복음 17장 21-23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도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완전한 연합
‘유일한’, ‘하나’ 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하드’ (אחד)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숫자 1과는 다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에하드’는 전혀 다른 것들이 완전하게 연합하여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에하드는 완전한 연합 혹은 완전한 하나됨을 뜻합니다. 빛과 어둠, 낮과 밤이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 하루(에하드)가 됩니다.(창세기 1장 5절)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에하드) 몸이 됩니다.(창세기 2장 24절)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장 21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전혀 다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동일(에하드)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죽음과 다시 사심은 전혀 다르지만 온전히 하나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도 헛된 것이고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삼위일체
에하드의 뜻에 비추어 스가랴 14장 9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완전한 연합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은 완전한 하나됨이실 것이다’가 됩니다. 
종말의 때에 알려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에하드’(완전한 하나됨 혹은 완전한 연합)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과 성령이 모두 다른 인격을 가지셨지만 완전히 연합된 한 분(에하드)이십니다. 
이 비밀을 이해할 수 없어서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에하드’이심을 숫자 1로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과 존재양식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요 구원자요 통치자이심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에하드)이니라’(요한복음10장30절)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히 연합한 하나(에하드)임을 선언하고, 이 ‘에하드’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에하드’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생명을 바쳐 아버지를 사랑한 아들 예수님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생명을 바침으로 아버지와의 완전한 연합을 성취하신 그 아들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 완전한 연합, 완전한 사랑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고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는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성취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하나됨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연합(에하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세상에 증명하기 원하십니다.
===생명을 버리는 사랑
완전한 연합, 완전한 하나됨은 오직 생명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할 때 성취됩니다.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을 다해 형제를 사랑할 때,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완전한 하나됨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한 분(에하드)이라는 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에하드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가장 중요한 존재양식입니다. 
에하드는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양식입니다. 
에하드는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자신의 생명을 바쳐 아버지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신 그 아들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에하드(완전한 연합)은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생명을 다해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 참임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지키라...===
[[에베소서 4:3~6...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장은 1~3장에 걸쳐 나누었던 신학을 신앙으로 살아낼 것을 도전하며 시작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정체성과 부르심에 따라 합당히 행하기 위한 태도와 삶의 방식으로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요소는 3절의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높은 부르심을 받은 자로, 우리가 행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령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지켜내는 것 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 됨.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 됨.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하나 됨. 하나 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자 비밀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마치 가라지를 뿌리듯 교회를 분열시킬 거짓들을 뿌리고 다닙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 됨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사상과 잡신들을 뒤섞은 ‘가짜 하나 됨’을 만들어 교회들을 찢어놓고 분열시려 합니다. 
이 시대, 진정한 교회의 하나 됨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 신부, 곧 하나 된 교회와 연합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됨 - 4절
본문 4~6절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한 요소들을 보게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됨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4절은 우리가 왜 하나인지, 그리고 왜 하나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성령님’을 말합니다. 
우리는 한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의 외모, 가정환경, 직업, 기질은 모두 다르나 우리가 구원받도록 복음을 증거하신 분이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우리 안에서 구원을 유지하십니다. 그렇기에 다른 영을 받은 자들은 ‘가짜 하나 됨’에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주의하고 있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 됨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얼핏 교파를 초월한 아름다운 연합을 말하는 듯하나, 실상 성령님이 아닌 온갖 귀신들을 불러 모은 거짓 하나 됨을 말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18장에 등장하는 바벨론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성경을 말하는 듯하나, 성령이 없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과 교제할 때면, 우리 안의 성령께서 불편한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의 하나 됨은 한 성령 안에서 임을 기억합시다.
===성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됨 – 5절
두 번째, 우리가 마땅히 하나인 이유로 5절은 성자 예수님을 말합니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님 한 분 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한 분 왕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굴복함으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왕이 오직 예수님이시기에, 우리 역시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 가운데 예수님보다 높아져 있는 것이 없는지 점검하길 축원합니다. 내 안에 말씀이 기준 되지 못한 마음과 생각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과 맞서 외치고 주장하는 정의가 무엇으로 말미암았는지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위배된 세상의 일들로 인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북한 주민들을 위하여 소리를 발하고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인해, 주님의 뜻을 위해 교회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의 몸이 되었다면, 주님의 정렬 안에 놓이도록 기도합시다. 나의 사심이 버려지고 머리되신 주님의 뜻에 순복되어지길 축원합니다. 
하나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개인의 욕구들을 채우기 위한 사조직처럼 공동체가 운영되고 있다면, 이는 악한 합동 모임일 뿐입니다. 
때로 우리가 희생할지라도, 주님의 머리되심 안에서 질서를 따라 하나 됨을 이룹시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될 때 흘러오는 능력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할 것입니다.
===성부 아버지 안에서 하나 됨 - 6절
세 번째로 6절은 우리가 하나인 당위성에 대해 성부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지음 받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흙으로 빚으셨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한 분 이십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시고 간절한 기도로 주님의 소원,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에는 하나 된 우리가 있습니다. 
===하나 됨 안에서 지켜지는 평강
하나 됨을 나누는 오늘, 우리 교회가 맞이한 새로운 시즌 속에서 주님께 더욱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담임목사인 저와 2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동역하던 사역자들을 또 다른 교회의 담임 목회자와 사역자로 파송하며, 교회의 하나 됨의 신비를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하나 됨은 우리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비밀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평강이 흔들리고 있다면,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유일한 왕, 예수님의 온전한 다스림 안에서 그에게 의탁됨에 의해 흘러오는 평강이 곧 샬롬이라 했습니다. 이 평강이 하나 됨을 지키며 하나 됨이 평강을 지킵니다. 내 심령을 불안하게 하고 하나 됨에서 갈라지게 하는 요소가 있다면, 떠나가길 기도해야 합니다. 뱀 같은 지혜를 기억합시다. 뱀은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결코 적에게 머리를 내어주지 않으려 합니다. 내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머리되신 예수님보다 우선시 된다면, 실상 가장 큰 곤경과 실패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의 하나 됨을 사수하길 축원합니다. 하나 됨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며, 하나 됨으로 인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3~6....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라. ]]
===섭리적 인생의 은혜
형제들에 의해 먼 이방 땅의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아직 어렸던 소년의 가슴에 고통과 원망이 사무쳤을 법도 한데, 요셉은 훗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큰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실패한 듯 하지만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던 인생의 여정들이 있습니다. 우연히 흘러온 듯 하지만, 주님께서 개입하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림 안에 우리 삶이 놓이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의 섭리적 계획안에 그의 뜻을 이루는 인생이, 우리가 구할 진정한 축복의 삶일 것입니다.
===코이노니아의 하나됨을 지키라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 됨의 타당성과 그 이유는 또한 우리가 하나 됨으로 지켜내야 할 요소와 덕목들이기도 합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힘써 지킬 첫 번째 하나 됨은 코이노니아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미 하나 된 자들입니다. 한 영으로 몸을 이루었기에, 서로를 향한 성령의 감동들이 흘러갑니다. 때로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셀 가족들을 위한 긴급한 중보 기도가 나왔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한 몸 안에서 핏줄로 서로 연결된 것처럼, 주님은 우리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우리는 코이노니아의 하나 됨, 곧 교회의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이 찢어지는 것을 아파하십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사람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 성령의 감동과 인간적인 생각들이 대치되기 시작할 때, 분열이 틈타게 됩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사람의 실속을 챙기기 위함이 아닌, 성령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한 영안에서 교회가 하나되도록 사수합시다.
===오직 예수를 지키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두 번째로 우리는 ‘오직 예수’를 지켜야 합니다. 지난 시간, 예수님만이 우리의 기초 되심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 외에 또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듯한 이 말이, 이 시대에 조롱 받고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우리의 믿음을 폭압적인 독선이라 비난합니다. 문화와 예술과 사상이라 말하면서, 사실 예수의 마음과 진리를 교묘하게 꺾어 버리는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말씀보다 높아진 모든 생각에서 우리의 마음이 지켜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뱀의 지혜처럼, 머리 되신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유일신 사상을 지키라
세 번째는 유일신 사상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도록 하는 미혹의 소리들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변화 산에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를 생각해 봅시다. 이 두 사람은 구약 시대에 유일신 사상을 회복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400년의 세월동안 애굽의 종 노릇을 하며 여호와를 잊었던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참 신이 누구인지 드러냈습니다. 엘리야 시대도 동일합니다.
바알이 하나님인지 여호와가 하나님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엘리야는 하늘에서부터 제단으로 불을 내려 누가 참 하나님인지 온 이스라엘이 보게 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를 시작하신 분은 오직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됨을 지켜야 하는 당위성우리가 힘써 하나 됨을 외치고 지켜나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기억합시다. 삼위 하나님께서 한 분 하나님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는 순간에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시며, 완전한 코이노니아로 존재하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에서도 코이노니아로 존재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한 분 하나님처럼, 우리도 하나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존재 방식인 코이노니아 속에서 우리도 하나 됨을 경험하고 누리길 원하십니다.
===참된 사귐, 코이노니아의 세 가지 목적과 결과
하나님의 코이노니아, 그리스도인의 참된 사귐에는 세 가지 목적과 결과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코이노니아를 통해 참 생명의 공통분모를 찾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그 안에서 하나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고 끝나는 차원이 아닌, 죄의 자리에서 빛으로 전진하게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이 서로 그 생명을 나눌 때, 코이노니아 속에서 공유된 생명이 더욱 충만해집니다. 주님의 생수가 서로에게 흘러가며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인을 성숙하게 합니다. 우리의 공통분모들이 더욱 분명해지고, 그래서 숨어있던 비진리들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갈 때 우리는 또한 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코인노니아의 진정한 목적이며 결과입니다. 
===하나 됨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두 가지 방법 – 회개, 용서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 됨을 회복하며 또한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 첫 번째 방법으로 회개의 삶이 중요합니다. 나의 생명과 삶의 주인을 예수님으로 고백한 이후, 우리는 계속해서 내 뜻대로 걸어가려는 발걸음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의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란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한 회개의 삶을 의미합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를 더럽히는 죄들을 계속해서 씻어내는 작업들을 잊지 맙시다. 
두 번째는 형제와의 화목에 대함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하나님 앞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곁의 형제들과는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땅의 교회가 약해진 이유 중 하나도 그러합니다. 각자의 뜻을 주장하고 서로의 수치를 드러내느라, 머리되신 주님의 이름을 보호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시즌, 형제들을 용서하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용납과 담당함을 기억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듯이, 우리 역시 하나 된 자들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벽들이 무너지고 온전한 하나 됨의 은혜를 누리길 축원합니다.
===교회 안의 독립성(Unique)과 하나됨(Unity)==
[[에베소서 4:7~10...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됨”, 우리의 부르심
지난주는 하나됨을 선포했습니다. 마귀는 분리하는 자입니다. 분열, 갈등, 찢어짐은 하나님의 문화가 아닙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서 확장, 파송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에베소서 4장 전반절에서는 하나됨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됨의 중요성, 하나됨이 왜 당연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기초 위에 하나됨을 유지해야 합니다. 몸은 떨어져있어도 한 영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엡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7절부터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됨을 선포합니다. 원래 이 “각 사람” 앞에는 “그러나”가 붙어야 합니다. 헬라어원문, 새번역성경, 현대어성경, KJV 등 원문에 충실한 번역은 7절 시작에 “그러나”가 붙어있습니다. 앞에서는 우리가 온전한 하나로 유지되는 것의 중요성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에 비유하면서 “너희는 원래 하나다. 하나됨을 힘써 지켜라”라고 합니다. 이 하나됨의 선언 이후에 “그러나”라고 말하면서, 놀라운 얘기를 하십니다. 7절에서 갑자기 반전됩니다. 그러나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우리는 ‘하나’이지만, 그러나 ‘각 사람’으로서 하나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됨의 위대함을 경험해나갈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이 7-10절의 내용입니다.
===어떻게 하나됨의 위대함을 경험할 것인가?
각 사람의 개별성,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이 주신 다양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됨’의 위대함과 풍성함을 보기 위해 우리는 ‘각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덩어리로, 단체로 부어준 것이 아니라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선물을 부어주셨습니다. ‘유니크(unique, 독특함)’에서 ‘유니티(unity, 하나됨)’로. 그 사람만 갖고 있고 그에게만 부어준 기름부음(unique)이 극대화될 때 이 몸이 온전히 유니티(unity) 됩니다. 
===온전한 각 사람의 회복(Unique)을 통한 우리됨(Unity)의 극대화
이 몸이 진짜 풍성해지려면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유니크해서 좋습니다. 그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죽어버리면 이 몸이 균형을 잃습니다. 다 다르지만 한 영입니다. 각 사람에게 주신 어노인팅이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영적으로 회복되면 우리의 우리됨이 극대화 될 것입니다. 각 지체가 극대화될 때 더크로스처치라는 유니티가 건강한 유닛(unit, 단체)이 됩니다. 몸이 부요하게 되고 이웃이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서로를 비교하는 열등감과 상대적 비교의식이 끊어질지어다. 각 사람에게 주신 어노인팅이 있습니다. 그것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이 분량대로 부어집니다.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X세대란 신종 용어가 65-75년생들에게 처음 쓰였습니다. 그 이후로 각 세대의 문화를 표현하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어른 세대들은 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획일화된 방향성에서 스탠다드하면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유니크함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세대가 되니까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치체계가 교회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유니크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 안에서 나옵니다. 하나됨의 원리와 당위성은 하나님이 디자인한 ‘유니트’ 속에 나의 ‘유니크’가 나옵니다. 문화 성장 과정에서 묶이고 갇힌 것들이 끊어지고 독립될지어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유니크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 안에서 나옵니다.  https://www.tcc567.kr/speechandnote
-----유일무이한 왕, 여호와, 그분의 이름은 한 분 주님..그분 자신의 이름, 곧 영광을 그 분 안에 있는 모든 이마다 받아 하나 됨으로써 주 안에 거하며 하나됨 이룸------
[슥14:9...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And the LORD shall be king over all the earth: in that day shall there be one LORD, and his name one.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일치 속의 다양성에하드가 복수형 아하딤을 취한다는 사실에서도 고찰된다. 이 단어는 창 27:44, 창 29:20, 그리고 단 11:20에서 '몇 날' a few day로 번역된다.
창 11:1에서 이 복수는 "말"을 수식한다. 즉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 말은 같은 어휘, 즉 바벨탑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용했던 같은 군(群)의 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창 11:1의 처음 나오는 "같은 것" same(개역판 한글, '하나')은 유일한 것이며 토착민과 이방인에게 적용된 유월절에 관한 "같은 율법"(출 12:49, 참조: 민 15:16)이나 초대 받지 않고 페르시아 왕에게 가까이 가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는 "한 법"(에 4:11)과 유사한 것이다.
신 6:4의 유명한 쉐마 "이스라엘아 들으라...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에서 일치 속의 다양성에 관한 문제는 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비록 "하나" one가 단일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단어의 용법은 삼위일체 교리를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교리가 구약성경에 예시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 구절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이스라엘은 오로지 그 분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신 5:9, 신 6:5). 신약성경도 엄격히 말해 일신교적이지만, 동시에 일치 속의 다양성을 가르치고 있다(약 2:19, 고전 8:5-6)(H. W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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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시대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대제사장 가문의 변천 요약]
===대제사장 아론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출 6:23)이 그들이죠....이들은 아론과 함께 최초의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출 28:1). 이 중 나답과 아비후는 광야시절 (아마도 술에 취한 채) 분향하려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고 맙니다.(레 10장) 이후 제사장의 계보는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중심으로 이어집니다(민 3:4).
===아론이 죽은 후 대제사장의 직분은 나답과 아비후는 따로 자손을 남기지 못했기에(대상 24:2), 일단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이 이어받습니다.(민 20:22-28) ..아마도 장자상속의 원칙이 여기에도 이어진 듯 보입니다. 하지만 넷째 아들인 이다말 역시 주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다말, 그는 성막을 제작할 때 사용되는 자재들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고(출 38:1), 이후 성막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임무를 감독했습니다(민 4:24-33). 성소 주변에서 일하는 레위 사람들은 고핫, 게르손, 므라리 자손으로 나뉘는데 이다말은 이 중 두 자손(게르손, 므라리)을 감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형인 엘르아살과 함께, 혹은 교대로 대제사장의 임무를 감당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어쩌면 단지 엘르아살 곁에서 밀접하게 보좌하는 위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두 가문이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게 된 것이죠. 역대기에는 다윗 왕 때까지도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대상 24:3)
--먼저 엘르아살 가문, -엘르아살에게는 비느하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습니다(출 6:25). 그는 광야시절이 끝날 무렵 우상숭배를 하던 사람들을 직접 창을 들고 나서서 척결하는 일을 감행하는데(민 25:1-9), 이 일로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해 주십니다(민 25:13). 시편 106편에서는 그런 비느하스의 열심을 칭찬하는 구절이 있기도 합니다(시 106:28-31)**참고로 여기에서 '비느하스의 창'이라는 관용어가 나오는데요, 종교적 열심을 가리키는 말이죠. 이후 그는 성막(성전)을 수비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기도 합니다(대상 9:20). 그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 역할을 수행했는데 전쟁에도 꽤 재능이 있었는지 미디안족과의 전투에도 나섰고(민 31:6), 요단 동편 땅의 지파들과 서편의 지파들 사이의 분쟁 위기를 수습하기도 하죠(수 22장). 여호수아가 죽은 후 베냐민 지파의 만행을 처벌하는 전쟁에서도 비느하스는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삿 20:28).
***사사들이 부정기적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할 무렵, 엘르아살과 이다말 가문의 대제사장들도 성소를 중심으로 계속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다말 가문에서는 그 중 눈에 띄는 사람이 사무엘 선지자를 맡아 길렀던 엘리 제사장입니다(삼상 1장)...그는 이다말 가문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엘리는 40년 동안이나 재직할 정도로 나름 인정받는 제사장이었지만, 그의 두 아들(홉니와 비느하스)은 불경건 그 자체였습니다...엘리는 그런 아들의 잘못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고 방임했고, 이는 하나님의 책망을 초래했습니다(삼상 2:27-34)...하나님은 그의 가문이 제사장의 직무에서 배제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결국, 블레셋과의 전쟁 중 그의 두 아들이 모두 전사하면서(삼상 4:11) 하나님의 경고는 일차적으로 실현되는 듯 했지만, 완전한 성취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엘리의 아들이었던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가봇이라는 유복자를 낳았는데(삼상 4:21) 기록을 보면 그에 앞서 아히둡이라는 아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삼상 14:3).. 아히둡, 그는 다시 이다말 가문의 제사장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울 왕 당시에는 아히둡의 두 아들이 차례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다말 가문에서, 아히둡의 두 아들아히야, 아히멜렉) 중 먼저는 아히야라는 인물인데, 그는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울 당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삼당 14:3) 그러나 후에 성막을 놉 땅으로 옮긴 후. 놉땅에 있던 성소에서 섬기던 대제사장은 아히둡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삼상 22:9) 아히멜렉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을 넘겨주었던 인물이기도 하죠.(삼상 21장) ::: 사울 왕 당시에는 엘리 제사장의 후손인 아히멜렉이 대제사장이었는데, 그는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사울에게 처형되고 맙니다(삼상 21-22장). 이후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은 다윗을 따르게 됩니다.
....다윗 왕 때 와서는 두 명의 제사장 - 사독과 아비아달 -이 활동합니다(삼하 8:17).... 사독은 엘르아살, 아비아달은 이다말의 후손이었습니다.(대상 24:3).
한편, 엘르아살 가문인 사독은 그의 먼 조상 비느하스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는 삼천칠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의 반 사울 투쟁을 도왔습니다(대상 12:28). 결국, 다윗이 왕이 된 후 아비아달과 사독, 두 사람은 모두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죽고 난 이후 상황은 변하게 됩니다. 후계자 자리를 두고 두 사람의 선택이 달라졌던 거죠. 사독은 다윗의 마음이 가 있던 솔로몬을 지지했지만(왕상 1:38-39), 아비아달은 다윗의 또 다른 아들인 아도니야를 지지합니다(왕상 1:7)....결국 솔로몬 즉위 후 아비아달은 고향으로 추방됨으로써(왕상 2:26-27)..더 이상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지 못하게 됩니다....열왕기를 기록한 사람들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죠....하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는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에게 해 주셨던 약속의 성취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이후 유다 왕국이 망할 때까지 대제사장직은 사독의 후손들로 이어집니다....때문에 포로기 이후에 쓰인 역대기에는 아론의 후손들을 기록하면서 엘르아살의 후손들만 기록합니다(대상 6장)....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했던 에스겔 선지자도 제사장들을 부를 때는 '사독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죠(겔 43:19)....2차 포로 귀환을 추진했던 제사장 에스라는 엘르아살 가문의 십오대 손이었습니다(스 7:5).
**참고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두개인'은 이 사독의 후손, 혹은 사독을 따르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름이었습니다....하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면 더이상 제사장들은 사독의 후손과는 상관 없는 사람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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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에 기록된 12명의 사사들]...사사 별 활약 연대
-----여호수아 사후에서 옷니엘 활약 직전까지는  여전히 (엘르아살 계열 = 비느하스 계열)비느하스가 대제사장 재직((이 때, 이미 범사에 여호와 앎-그분의 통치로만 사는 [올곧은 여호와 신앙의 정절..."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 삶의 모범적 가치대로 살아감 통한 주님 영광 나타냄을 보여야 할, 주께 드려진 바 된 레위 족속 마저 그들의 일탈행위로 인해 자초하게 되었다고 보여지는 영적 열심의 하락 현상[기복적 제사장 행태] + 레위지파에 대한 존중과 절대적으로 여호와만 섬김의 고귀함 신앙 정절의 순전함-열성의 상대화가 나타났을 것으로 보여짐!!)) .....비느하스의 임종 후, 뒤를 이어 엘르아살 계열의 "오시"가 단독으로 맡고난 다음에는, "이다말" 계열과 함께 성소를 돌봄 ......그리고!!, [룻-보아스 시대가 그 안에 포함되는!!] 기드온의 활약 시점부터 "이다말 계열의" 엘리가 단독으로 대제사장-사사 역할 담당하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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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파 일부 헤르몬산 쪽으로 진출/이동==>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건 발생으로) 멸절 위기 ==>1대사사[유다]옷니엘(BC1374-1344) --->2대 사사[베냐민]에훗(BC1316-1235)-->3대사사 삼갈-->4대사사[에브라임]드보라(BC1216-1176)-->5대사사[므낫세]기드온(BC1169-1129)-->6대사사[잇사갈]돌라/7대사사[길르앗]야일 (23년간)--> 암몬족속의 발호 기간 18년...:: BC1103-1085-->8대사사[길르앗]입다(BC1085-1079) -->9대사사 입산/10대사사 엘론/11대사사 압돈/12대[단]삼손(BC1075-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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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느하스" - 요단 도하 전 모압 평지에서 영적 음행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한 제사장 ]]
1. 인적 사항
1) 제3대 대제사장(삿 20:28).....2) 비느하스는 '흑인'이라는 뜻.....3)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출 6:20)....4) 성막 문지기들의 감독(대상 9:20).
2. 시대적 배경
출애굽 40년의 오랜 광야 생활을 거쳐 마침내 가나안 입성을 바로 앞두고 모압 평지에 진을 쳤던 시기부터 이후의 가나안 정복 시기 및 사사시대 초기(B.C.1406-1390).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를 택하사 제사장 가문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모든 제사장의 머리로서 대제사장 제도를 두셨는데,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은 '아론' (Aron)이었고, 그 다음은 '엘르아살'(Eleazar) '비느하스' 
--->비느하스 이후에는 "비느하스" 계열로부터 '이다말' 계열로 옮겨져 '엘리(ELI)가 사사 시대말기에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대상 24:1-3). ....이와 같은 변화가 생기게 된 이유로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추론할 수 있다. (1) 엘르아살 계열의 후손이 끊어졌기 때문일 가능성 - 그러나 후일 엘르아살 계열의 인물이 다시 등장하는 사실(삼하 8:17 ; 20:25_로 보아 이 추측은 타당성이 없다. (2) 엘르아살 계열의 마지막 대제사장 - 요세푸스는 이를 '오시'(Ozi)로 본다 - 의 아들들이 당시 대제사장으로 오르기에는 너무 어렸거나, 아니면 사사 시대의 혼탁함을 제대로 다스릴만한 인물이 없었을 가능성 - 이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추측이라 할 수 있다. .***사사들이 부정기적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할 무렵, 엘르아살과 이다말 가문의 대제사장들도 성소를 중심으로 계속 일하고 있었다!!
==>아마도 바로 이러한 때 이다말 계열의 제사장이었던 '엘리(Eli)가 탁월한 지도력과 정치력을 발휘하여 대제사장직에 올랐고, 아울러 사사(士師)로서도 활약을 한 것 같다 ::: ====>((이다말 계열))엘리 대제사장의 생몰연대는 BC1177-1080
3. 주요 생애
* 출 생(출 6:25)....* 광야 생활을 함(민 14:34)....* 모압평지에서 간음하던 남녀를 현장에서 죽임(B.C.1406년-민 25:6-9)....* 하나님으로부터 평화의 언약을 받음(민 25:11-13)....* 미디안 정벌 지휘(민 31:6)....* 가나안 정착(B.C.1405년-수 11:23)...* 에브라임 산지를 배당받음(수 24:23)....* 요단 동편 2½지파의 제단 건축에 대한 경위 조사(수 22:12-29)....* 벧엘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심(삿 20:27,28)....* 고라 자손의 문지기직을 감독(대상 9:20) 
* 죽 음(잘 모름)
4. 성품
1) 이스라엘이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간음 현장의 두 남녀를 죽임으로써 여호와 신앙의 고결성을 회복한 돈독한 신앙인(민 25:7,8).....2) 정의로운 분노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행한 결단력 있는 믿음의 소유자(민 25:11,13).....3) 하나님께 대한 불의를 방관하지 않고, 노년까지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한 충직한 자(수22:16;삿20:17,28) ....4)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이 요단 언덕에 제단을 쌓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지파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이 를 수습한 지혜로운 자(수22:13-20).
5. 구속사적 지위
1) 엘르아살 뒤를 이은 제3대 대제사장(출6:25), 후손들까지 영원한 제사장직을 약속 받음(민 25:12,13).....2) 용기 있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한 결단력 있는 지도자의 실례가 됨(민 25:11).....3)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분열을 방지하고 하나님의 대한 신앙을 돈독케 한 중재자(수22:30-34).
6. 평가 및 교훈
1) 비느하스는 온 백성이 염병에 결려 죽어갈 때 공의로운 행동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하였다. 즉 그는 징계의 원인이 된 음행을 백성들 가운데서 멸절코자 과감한 결단을 행한 것이다. 이는 결단력 있는 지도자의 행동이 얼마나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지금 내 생활 가운에는 근절되어야 할 악은 없는가?(살전5:22).....2) 하나님은 불의를 대적한 비느하스의 충성을 보시고 그와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제사장 직분을 주시겠다고 축복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충성된 자에게 세세토록 무궁한 축복을 내리신다. 이러한 축복은 오늘날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하나님의 공의와 선을 행해야 하겠다(엡 6:8).....3) 비느하스는 미디안 족속을 치러 갈 때에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가지고 갔다(민31:6). 이는 성도들이 세상의 악을 대적할 때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함을 교훈 한다. 혹시 나는 말씀과 기도보다는 내 지식과 의지를 앞세우고 있지는 않았는가?....4) 가나안 정복 후 요단 서편 동족들과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 사이에 오해와 갈등이 생겼을 때 비느하스는 진상을 파악하고 그 오해를 풀어줌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을 방지했다(수22:30-33). 오늘날의 교회공동체에서도 종교적인 편견과 오해로 말미암아 크고 작은 분열들이 야기되고 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사랑과 지혜로써 분열을 방지하고 공동체인 연대를 지속시켜주는 현명한 중재자가 되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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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진지하게 주님 마음을 따라 하나됨 안에서!! 주님의 울음을 울 수 있어야만 하리라))
사사기에 보면 줄기차게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배도와 하나님에 대한 배신. 신앙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없애버려야 할 가나안 민족들과 혼합됨에 자신을 내어주어 범하는 육체적, 영적 음행들. 그리하여 사사 시대 400년(350년)을 한결같이 하락-징계-구원-평안-더 하락-징계-구원받음의 하락 순환 구조, 즉 영적 하락과 악순환.....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주님 마음과 의기투합한 정의의 영웅 ‘청년 제사장’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으로서 생존해 있던 기간이었는데...어째서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라는 것이다.
비느하스의 마지막 행적은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기브아 성에서 벌어진 베냐민 지파의 참혹한 범죄 - 레위인의 첩을 윤간, 살해하는 - 를 징벌하기 위한 이스라엘 군대가 ((자기 눈의 들보를 그대로 둔 바, 그 들보를 제거하기 위해 주께 나아가 제거함 받고 난 그후에라야 주님의 지도따라 나아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미처 돌보지못한채 ... 남의 눈에서 티를 빼어주려는 자가당착의 모순 그대로, ((이것은 바로 사탄의 술책-기만과 속임-에 여지없이 당하여 주님 영광의 빛과 임마누엘 임재 확증 없이 짐짓 추정과 서투름으로, 자의적 행함)) ...제멋대로 출전했다가 두번이나 참패하여 쫓겨 온 후, 그제서야 비로소 근본동기를 돌아보며!! <주 보시기에 !!합당한 싸움인지 여쭈고 회개-애통하며 주님의 움직이심 없이는 포기할 수도 있음을 각오하고!!))  벧엘에서 하나님께 통회함으로써 제사를 올릴 때 비느하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셨다고 나와 있다.
......여기서 여호수아 사후부터 벌어지고 있는 그간의 정황에 대해 주님의 마음이 어떠셨을지를!! 성경을 따라 살펴봄으로써!!  그 중에서 주님 보시기에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하개 여기고 계시는 한 가지 사실을 절대적으로 붙들며, 놓치지 말고 묵상함으로써 전존재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범죄가 벌어졌을 당시 주님 위하는 제사장 족속, 곧 레위지파의 삶이 어떠했었는가 부터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여호수아의 죽음과 함께, 더불어 하나님의 친히 앞서서 동행하시며 출애굽-홍해건넘-광야생활-요단 도하-가나안 점령의 생생한 역사를 경험한 이들의 죽음과 더불어 펼쳐지고 있는 영적 하락 시작 시점에 이르러...그 때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지도자가 비느하스였다는 것이다. (언약궤는 제사장 또는 사사만이 모실 수 있었고 언약궤를 모신 이가 곧 이스라엘의 최고지도자이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베냐민 지파들이 기브아에서 저지른 죄악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만큼 여호와 신앙의 전수를 잊어버림으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었으니....주님은 여호와 경외함 아는 이들을 얻으심으로써 그들을 통해 주님의 참 성전 얻기를 원하셔서 가나안을 마련하심이었고 그들에게 주셨던 것이었다!!..., 곧 살아계신 하나님과 합하여 사는 삶 + 하나님의 델레마[이 땅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안식 얻으실 수 있는 영원한 거처, 곧 주님의 교회 = 한 새 사람 그리스도의 몸인 참 성전(= 땅에 내려오게 되는, 하늘 시온성이자 새 예루살렘) 얻고자 하심이라는,하나님 경륜의 갈망 이룸에 동참하려는 "경건과 인애"의 사람 오게 하시려는 하나님 마음따라 사는 영적 사무엘-영적 다윗의 삶 사는 이들을 위한 가나안 주심이었는데...그만 참 길, 진리-생명의 길, 광명한 영광의 길을 [제멋대로, 제소견에 옳은대로 행함 고집하여!!]..스스로 벗어나고 잃어버렸으며 사탄의 독에 쏘여 잠들고 마취-중독되어 버렸다))
......흔히 간과하기 쉽지만 기브아에서 첩을 잃은 레위인도 마찬가지이다. ((레위인, 즉 제사장은 철저한 일부일처로 결코 ‘첩’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었다. 그런데도 그 레위인은 ‘첩’을 두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당당하고도 가당키나 한 것처럼...그런데, 이런 일은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에게서도 발견된다.....나는 그렇지 않은가, 주님의 빛 아래서 전검-회개하여야 할 일이다))
......첩을 두고 있는 것이 자랑인양 죽은 첩의 시체를 찢어 각 지파로 전달하고 베냐민 지파에게 복수해 달라고 떼를 쓰는 저 뻔뻔함은... ‘어디서 나온 그런 당당함인지’ 심히 염려되고 숨이 턱턱 막히고, 존재 가치가 그 근저부터 의심스럽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를 징벌한답시고 모인 이스라엘 지파 중((지파를 대표하는 장로들 중)) 어느 누구도 레위인의 축첩에 대해 뭐라 하는 사람 하나도 없다.
그 뿐이 아니었다...주님 경외하기를 잊어버리고!, 건성건성-짐짓 추정으로 겉모양만 중시함으로써 전쟁 결정에 있어서 "살아계신" 주님은 옆으로 제쳐놓고 마치 그들이 주인이요 주님인 것처럼!! 이미 ((그들 중 소수의 신중론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무시당하고) [사탄의 사망 독에 쏘여 잠듬-마취-중독 상태에 빠져 았어서, 사탄의 궤계에 그냥 넘어가버린] 장로들 대다수의 의견이 그러했기에 다 [멸절하기로] 결정해 놓고 통보하듯 처리하고서 (주님은 그냥 뭐...따라오시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라는 듯) 전쟁에 나서고 두번이나 연속 패배를 맛보고 있었다.((분명히!! 주님께서는 그 전쟁에 함께 하고 계시지 않으심을 감지하게 되었던))..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들 내부에 자성의 움직임이 우세하게 되었고, 결국 주님의 주 되심 앞에 나아가 회개-통회함으로써 이 전쟁을 어찌할지 근본적 질문을 통해 주님의 확답과 구체적 전술 지시를 그대로 따름으로써 세번 째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두고 있었다.....그러나, 유김스럽게도!!...승리감에 도취되어 (죄 범한 형제라도  사랑함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무시하고, 아니 도외시한 채, 눈 딱 감고 "남녀노소가릴 것 없이" 죽이고 약탈하여 멸하기만 집중한 나머지) 너무 정도가 지나쳐서..베냐민 지파가 젊은 남자 600명만 남아 도피케 되었음을 깨닫자..."주께서 어찌 그리하셨는고"..하며 오히려 주님 탓 하고....주께 여쭙지도 않을 뿐더러 속히 주님의 길을 버리고 제멋대로 판단하며 기껏 생각한다는 방책이 "길르랏 야베스의" 동포들을 죽이고 미혼처녀 강제로 빼앗아 나눠주고 (야베스 길르앗), 춤추러 나온 실로 여자들을 납치하여 아내로 삼도록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 베냐민의 패잔병들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려고 했고 그런 일이 버어졌다..(아쉽게도..물론 소수의 신중론자들의  반대 목소리가 있었겠지만...그런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더 나아가, 들여다 보노라면!!...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말도 안되지만...그냥 꾸며낸, 막장드라마가 아니다. 익히 알고 있는 ‘[그 공의로운 열심과 분노는 여호와의 심정을 알고 바로 그분을 대표한 것이기에 영원히 기억되리라 하셨던!]청년 제사장’  그 비느하스...바로 그가 다스리던 시기의 이스라엘에서 벌어져 성경에도 적나라하게 기록된 분명한 사실이다.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은... 첩을 들인 그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 에브라임 산지는 7년 전쟁 후 비느하스에게 영토로 주어진 땅이었다.((비느하스의 아버지 엘르아살도 그곳에 묻혔고 훗날 사무엘도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서 태어났으니 대대로 제사장의 성지인 곳이었다.))
비느하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벌이는 영적, 육적 타락과 죄악을 제어하고 통제하기는 고사하고 당장 자신이 직접 소유하고 관리하는 지역에서 벌어진, 그것도 자신의 동족이자 제사장 동료인 레위인의 축첩 행위조차도 제대로 징벌하지 못하였다....그러나, 신실하신 주님은 .... " 영원한 대제사장의 언약을 지키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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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의 난제.....민25장의 비느하스...(수백년 지나) 삿20:28에 다시 나타난다??]]
===성경은 연대 순으로 기록되었는가?
사사기 1장 1절을 보시면,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장 8절을 보면 또 다시 여호수아가 언제 죽었는지를 어디에 장사 지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순일까요? 그렇지 않을것 입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아도 시간을 되돌려 과거에 있었던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를 나타내는 단어가 사사기 2장 6절에 있는 “전에” 라는 ((이전의 사건들과 말씀을 회상해보는 접두어)) 단어입니다. .... 그리고 사사기 2장 6-10절은 여호수아와, 또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장로들, 즉 여호수아를 통해 여호와의 하신 일을 직접 경험한 증인들이 모두 죽어 장사고 난 후, 그 바로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며 바알과 아스다롯 등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으며...그로 인해 주위에 다른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항할 힘을 잃고 고통을 당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고통때문에 부르짖는!!....고통의 근본적 이유를 뿌리뽑고자 함은 없이..)) 이스라엘을 ((그냥 두고보실 수 없어서)) 사사를 일으켜서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고통에서 구해주시고 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예전의 "일심으로, 일편단심으로 여호와 경외함의 순전함에서는 더욱더 미치지 못하고 멀어져감"을 보이며 날이 갈수록 영적 하락의 악순환의 강도는 더  심해지고 있음을 나타내보이십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싸이클
사사기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죄와 구원의 싸이클을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은 분노하사 주위에 적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고통을 주게 하십니다.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은 결국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사사를 세우시고 그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구원을 받아 고통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악을 행하면, 이에 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적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사사기는 16장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악을 행하였는지에 대한 내용 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에 포커스를 두고 기록합니다.
16장에 등장하는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는 우리가 잘 아는 삼손 입니다. 단 지파였던 삼손은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들릴라에게 머리를 자르면 힘을 잃는다는 비밀을 알려주어서 힘을 잃고 눈이 뽑히지만, 결국 블레셋의 고관들이 잔치하는 건물을 무너뜨려 많은 원수들을 죽입니다.
===17장에 갑자기 등장하는 미가의 이야기
그런데 17장에는 갑자기 사사도 아닌 미가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우상을 만들고 레위인을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삼으며, 여러 신들을 섬기는 악한 이스라엘 사람 미가의 이야기 중에 사사기의 기자는 이스라엘의 타락의 이유와 원인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사사기 17:6>
사람이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 먹은 죄인이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시대는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미가가 있던 시대는 언제일까요? ...사사기 18장에 그 힌트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12 지파의 지도 - 사사기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또 그때에 단 족속의 지파는 자기들이 들어가 거할 수 있는 상속의 땅을 구하는 중이더라. 그 날까지 그들의 모든 상속 재산이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서 그들에게 떨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사사기 18:1>
단 지파가 자기들이 들어갈 땅을 아직 차지하지 못하고 구하던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자손이 자기들의 지역 곧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자기들의 가족 중에서 다섯 사람의 용사를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펴보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 머무니라. <사사기 18:2>
소라와 에스다올은 여호수아가 늙어 죽기 직전에도 점령하지 못해서 제비를 뽑아 분배한 땅입니다.
일곱 번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는데 그들의 상속 재산의 지경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여호수아 19:40~41>
사사기에 등장하는 마지막 사사인 삼손은 단 지파의 사람으로 이 때는 단 지파와 붙어 있는 블레셋에 지배를 당하고 있었을 지언정 단 지파가 여호수아때에 제비로 받은 모든 땅은 아니더라도 이미!! 그 땅에 정착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즉 17장 이후에 사건은 삼손이 사사였던 시간 이후가 아니라 단 지파를 포함한 이스라엘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땅을 완전히 점령한 상태가 아닌 사사기 초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느하스가 다시 등장하는 19~20장의 배경 시기는 언제인가?
그리고 비느하스가 등장하는 사사기 19장은 미가가 살았던 때와 동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에브라임 산 쪽에 머물던 어떤 레위 사람이 베들레헴유다에서 첩을 취하였는데 <사사기 19:1> ... 그리고 이 때가 사사기 초기라는 또 다른 증거는 언약 궤의 위치 입니다. ((사무엘상1-2장을 보면)) 사사기 후기에는 언약 궤가 실로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사사기의 기자는 다른 모든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을 했을때, 언약 궤가 벧엘에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사사기 20:26~28> ... 즉 사사기에는 오류가 있는것이 아니라 사사기를 연대순으로 이해하려는 우리의 이해에 오류가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한 기록과 인간의 죄악과 추악함에 대한 기록
사사기는 ((창세기 1장과 2장이 얘기해 주는 것처럼)) 같은 시대의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 사사기 1장에서 16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자세하게 다루는 반면, 17장부터는 그 이전에((사사들의 활약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 ((주께서 나타내보여주셨던 그 죄들에 대한 참된 자각과  참 회개 통한 돌이킴이 전혀 없었던)), 그 근원적 죄악에 대해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하나님의 심판이 정의롭고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 때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기 18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동성애가 퍼져 있었고, 사람들이 집단 강간을 시도하고 시행할 정도로 타락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인들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나타나 심화되고 이로 인해 그들의 기업을 떠나 방황할 뿐 아니라] 결국 생존을 위해 그들 자신이 호구지책으로 자의반 타의반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삯꾼 제사장 노릇 할 정도까지 하락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또 더욱더 경악할만한 것은....레위 족속조차 율법을 소홀히 여겨!!... 레위 사람은 율법을 무시하고 첩을 들였으며, 첩은 레위인을 대적하여 창녀 짓을 하는 등, 이스라엘 사회가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여호수아가 죽고 사사기 초기에 이렇게 까지 이스라엘이 타락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한 세대 만에도 인간은 쉽게 타락을 할 수 있으며, 지금의 세대들이 그런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타락과 그 원인 그리고 해결책
이는 인간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이며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인간은 도덕적이며 정의를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지난 200년간만 살펴봐도 인류는 수 많은 추악한 죄악들을 저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사사기를 읽으면서 비느하스가 기록된 사사기에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보겠다는 ((교만/오만한)) 입장에 서려해서는 안됩니다. ... 오히려 주 보시기에 합당한 자세는....지금 이 시대가 사사기때 만큼이나 타락해 있고, 내가 이 시대에 일원으로써 이를 회개하고 부끄러워 해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게 된 원인을 이해하고 지금 나에게도 적용되는, 이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그 원인에서 돌아서야 할 것 입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 -- 지금은??? .....이 세상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즉,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나의 왕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눈에 옳은 인본주의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옳은 것들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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