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3장 [263. 이세상험하고] [549. 내주여뜻대로] [324. 예수나를오라하네][540.주의음성을내가들으니]. [446. 주음성외에는][415.십자가그늘아래] [442 저장미꽃위의이슬]...예수사랑나의사랑
..주의인자는끝이없고..주부르실때그때듣게하소서
[왕하10:15...*15...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하니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
::::: 임마누엘 나의 주여, 주님께서 절대적 진실-신실-거룩하심 같이..보혈-말씀-성령으로 오소서!!... 새롭게 하신 오늘 하루, 매순간마다.. 주께 대해, 그리고 모든 이 하나하나에 대해 그러하도록!! 오직 주님이면 족하오니...열린 하늘로부터 새로이 주님 영광 부어 적셔 점유-충만 감동하심으로 운행하사 저를 일깨우소서...주님의 기쁘신 뜻 온전히 이루소서...하나되신 주 임재 움직임 더 새로이 생생히 알리시며 주님 생각과 마음-심정 일러주시며 보이시며 깨닫게 하소서,,, 친히 주장하사 이끄시며 일하시며 행하소서...나의 그리스도 주님께서 친히 거듭난 내 안에 사심 이루사, 그리스도 주님을 살며 주님의 입의 말씀으로 내 입에 채우시는 바 감동따라 하게 하시는 말씀만 담대히 하도록 이끄소서 ::::
@@먼저 참되게 믿는자, 거듭난 그대는 (주를 합당하게 섬기는 주께 합당한 제사장-선지자-사사인) 영적 사무엘이 되어야 하며 [그 때, 마치 (극도로 사랑 받고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 마음 알아드림 인해) 모세로 하여금 자원하여 전존재 내거는 중보기도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바 (그리스도의 마음 가진자 = 자기 희생 기꺼이 감수함!!) 인간중보기도자 역할을 주실 것...바로 그렇게까지 역할해 주기를 바리시는 Q 마음을 사무엘은 참되게 알아드리고 있었기에 미스바 기도회로 오라 초청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그대가 누린 그리스도가 교회이자 왕국이 되는 정도까지 그리스도를 누리는 영적 다윗이 되어야 하고...더 나아가 아버지 마음 그대로 아버지께서 당신을 부어주사 오로지 하나됨의 교통 안에서 보며 듣게하시는 그대로만 순종하여 행하시던 성육신 하여 오신 그리스도의 행하심처럼!!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참 믿음-소망-사랑으로 그분과 하나됨으로써 이 땅에 보내심 받은 자의 삶 살기를!!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다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하존, 마하제 :: = 열린 비전 open vision, 묵시/계시 rvelation, 여호와의 말씀 임함, 신적 전달(신탁 oracle)으로서의 예언 prophecy...그 즉시 주께 여쭙고 더 명확히 해 주시도록 보혈의지하고 주 안에서 기다리라)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청각적으로 생생하게 들려주시는 바 Q께서 주시는 말씀 받고 하나된 그분 심정따라 그분의 입 되어 [왜곡됨이나 왜곡시킴 없이]그대로 전달하는 전달자/대언자=선지자(나비)....[**때때로 Q의 말씀을 귀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건 전개나 어떤 그림 또는 광경으로 나타내 보이심의] 환상<언제 어디서든지, 꿈-비몽사몽간-일상 속-예배중이든지..말씀하시는 Q이 그 말씀과 함께 뚜렷이 기억하고 전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생생한 열린 이상vision, = 하존, 마하제..(동)하자>을 주관적으로 (자기만) 생생하게 영으로 보는 예언자=선견자(호제, 로제, 로에...(동)마르아) ...내적 음성 깨달음, 곧 영적 깨달음의 음성으로도 말씀하심...야곱에게서처럼 꿈속에서 말씀과 생생한 장면 연속으로도 주님이심을 선포하고 말씀 베푸시기도 함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히>메노라의 니르, 헬>뤼크니아...등잔대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동 트기 전 시각)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따로 붙은 자기처소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사무엘만 듣는 생생한 음성으로)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가시적, 열린 환상이 함께 전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이미 조상때부터 하신 말씀과 약속, 곧 기록된바 언약 말씀 당부와 더불어, 근자에 Q의 사람을 보내어)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정한)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그러므로 반드시 오늘 지금부터 새로이 관계 정립위해!! 회개하고 주께 돌이켜야 하리라, 더 그길로 행해서는 안될지니!!)
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15.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17. 이르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8.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30세 즈음, 선지자로 세우심 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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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적인 꿈과 환상의 유형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행 2:17).
마지막 때에는 예언과 더불어 꿈과 환상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 예언적인 꿈과 환상에는 어떤 유형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1. 환상의 유형들
환상은 꿈과 달리 잠이 든 상태가 아닌 의식이 깨어 있는 중에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환상에는 ‘내적 환상’과 ‘열린 환상’, 이렇게 두 가지 기본적 유형이 있다. ((Q말씀, 깨달음 주시는 주님 음성이 동반됨 인해 그 의미가 뚜렷해 진다))
==내적 환상
내적인 환상은 주변에 있는 사물들 같이 실제로 보이는 것처럼 강력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마음에 그려보는 어떤 것과 같다.
내적 환상에는 ‘영적인 환상’과 ‘비몽사몽간의 환상’ 두 가지 형태가 있다.
(1) 영적인 환상[육체적 감각은 생생하게 살아있음]
이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영적인 세계에서 환상을 갖거나 어떤 것을 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환상의 한 예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이 겪었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로 작정하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갑자기 대낮의 해보다 밝은 빛이 나타나 자신의 주위를 비추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자신을 향하여 말하는 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4,5).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적인 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으나 영적인 영역에서 그분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환상’으로서 환상의 첫 번째 유형이다. 가장 하위 형태의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비몽사몽간의 환상 [육체적 감각 정지 상태]
‘영적인 환상’보다 좀 더 높은 차원의 환상이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환상이 그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예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처음 갔을 때의 체험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행전 2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니라 하시거늘”(행 22:17,18).
사람이 비몽사몽간에 빠지면 육체적인 감각은 일시정지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가 신체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것들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의식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다만 육체적인 것보다 영적인 의식이 더 깨어 있는 것일 뿐이다.
다음은 이민 교회인 아틀란타제일장로교회의 서**목사님의 간증이다.
“6/25전쟁 때 피난처에서 고향에 돌아온 직후였다. **군들이 마을 뒤 개천변에 주둔해 있던 어느 날 밤, 어머니와 잠깐 누웠다가 **군 세 명을 환상으로 보았다. 가운데 사람은 키가 조금 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어머니에게 환상을 이야기 했다. 어머니는 급히 일어나 건넌방으로 건너갔고, 잠시 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환상에서 보았던 그 군인 세 명이었다. 환상에서 본 대로 가운데 군인이 키가 컸다. 당시 **군들은 밤마다 젊은 여자들을 찾아다녔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위기를 모면한 것이었다.”(서**,「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예수 믿는 맛이 난다」, 두란노, P.50) 서 목사님이 경험했던 환상은 (일종의) 비몽사몽간의 환상이었다.
사도 베드로 역시 비몽사몽간에 나타나는 환상을 체험하였다.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라고 말씀을 하셨던 때이다.
베드로가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서 그는 ‘비몽사몽간에 빠지게’ 되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베드로가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행 10:9~11).
그는 영적인 세계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이러한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베드로와 바울이 비몽사몽간에 빠져 영적인 세계를 보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들이 경험한 비몽사몽간의 환상은 두 번째로 높은 형태의 환상이다.
==열린 환상 = 이상 OPEN VISION
열린 환상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환상으로서 ‘눈을 뜬 상태에서 보는 환상’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체적 감각기능이 정지되는 것도 아니고 눈도 감지 않은 상태이다. 즉 모든 육체적 기능을 ((생생하게 그대로 느끼면서도!!))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적인 세계를 맛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열린 환상은 주위의 다른 어떤 것과 똑같이 실제적으로 보이는 환상이다. 천사의 방문과 같은 것이 이 범주에 해당된다. 우리는 천사들을 실제의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주의 천사가 기드온을 방문했던 것 등이 이에 대한 예이다(삿 6:11).
고넬료는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느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체험했다(행 10:3).
케네스 해긴(Kenneth E. Hagin)은 그가 체험한 눈을 뜬 상태에서 본 환상을 다음과 같이 간증한 바 있다.
“…눈을 뜬 상태에서 나타난 환상 속에서 평상시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분명하게 (예수께서) 나의 방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내 침대 옆에 그분이 앉는 것을 보았으며 또한 나는 내가 평상시에 들어왔던 여느 사람들의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케네스 해긴, 예태해 역,「나는 환상을 믿는다」, 목양세계선교회, P.161)
이처럼 ‘눈을 뜬 상태에서 보는 환상’은 나의 육체적 기능이 모두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영적인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는 아주 높은 차원의 환상이다.
이러한 환상을 열린 환상이라고 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내적 환상은 물론 열린 환상과 같은 높은 차원의 환상도 체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언적 꿈의 유형들
꿈의 효능은 의식의 방해가 최소화된 가운데 -잠이 든 상태이므로- 하나님께서 빠른 동영상/파노라마처럼 그분의 뜻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꿈은 대개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별할 수 있다.
(1) 생각나게 하는 꿈
어느 날 당신이 휴가를 떠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당신은 여권을 갱신하지 못했고 챙겨야 할 소지품도 잊고 떠났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확인해 보라”는 신호이다. 이렇게 나의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꿈을 무시해 버린다면 어려움이 닥친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난관에 처한 모습의 영적지도자나 지인(知人)을 꿈에서 만날 때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잊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라는 신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면 내가 꿈에서 본 그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만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라는 약속을 생각나게 하였다(창 15:1~6, 12~16).
하나님은 솔로몬의 두 번째 꿈에서 불순종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생각나게 했다(왕상 9:2~9, 왕상 3:5~15).
(2) 경고하는 꿈
꿈속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하거나 계단에서 넘어져 다치는 경험을 했다면, 나에게 닥칠 수 있는 사고를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누구에게나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꿈에서 체험한 것을 무시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대처를 해야 한다.
즉 계단을 오르내릴 때 조심하고 운전하는 습관이 나쁘다면 그것을 고치는 지혜가 필요하다.
창세기 31장 24절에 하나님은 야곱의 외삼촌 라반에게 나타나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고 했다.
또 마태복음 1장 20절에도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이 아비멜렉 왕에게 경고한 꿈이 있다(창 20:2~7).
(3) 예언적 꿈
미래에 성취될 사건을 꿈에서 경험하였는데, 실제로 자신의 생애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창세기 37:5~11에 어린 요셉의 꿈이 결국 이루어졌다.
나단 선지자가 잠자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다윗 왕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했다(삼하 7:4~17). 분명 그것은 나중에 성취될 사건이었다.
따라서 예언의 꿈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놓고 말하기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원 원장이었던 모 목사는 별세하기 수년 전에 자신의 장래에 대한 예언적 꿈을 꾸었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큰 나무에 원숭이 한 마리가 높이 올라가는 것을 쳐다보면서 “아이고, 저 놈 좀 봐라. 엉덩이가 빨갛구나!” 하며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원숭이가 나무에서 뚝 떨어져 죽었다. 그가 가까이 가서 땅에 떨어져 죽은 원숭이를 살펴보니 원숭이가 아니고 자기였다. 그는 이 섬뜩한 꿈을 꾼 지 얼마 후 건강에 문제가 생겨 모든 사역을 중단하고 몇 년간 투병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프게도 그가 꾸었던 꿈은 교만으로 말미암아 추락할 것이며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 꿈이었다.
다음은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의 꿈이다. 때는 1865년이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백악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 꿈에서 사람들이 흐느끼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소리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갔고 한 사람이 죽어 관에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링컨은 궁금해서 옆에 서 있는 경호원에게 관 속에 죽어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경호원이 대답하기를 관 속에 있는 사람은 총에 맞아 죽은 미국의 16대 대통령이라고 했다. 이 꿈을 꾼 후 얼마 있다가 아브라함 링컨은 암살되었다.
(4) 반복적인 꿈
잠자는 가운데 이례적으로 반복되는 꿈을 꿀 때도 있다. 이 꿈이 내용에 따라 기쁨을 주기도 하고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창세기 41:1~7에 바로 왕은 임박한 기근에 대한 꿈을 반복적으로 꾸었다. 느브갓네살 왕 또한 반복적인 꿈을 꾸었다.
이것은 세상 지도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할 시기라는 신호이다(단 2:1).
때는 1912년, 타이타닉(the Titanic)호라고 하는 배가 영국에서 뉴욕으로 떠날 때였다. 그 때 한 소녀가 꿈을 꾸었다. 거대한 배가 가라앉는 꿈이었다. 그 소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다시 잠을 청하였다. 같은 꿈을 다시 반복하여 꾸었다. 또 타이타닉 호를 타기 위해 예약하여 놓은 사람이 꿈을 꾸었다. 그는 자기가 타려고 하는 배가 꿈에서 기울어져 물속에 잠기는 것을 서너 번 꾸었다. 그 때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이 꿈으로 인해 그는 예약을 취소하고 그 배를 타지 않았다. 이러한 꿈이 있은 지 며칠 후 타이타닉 호는 침몰하였고 1500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5) 악몽
꿈에는 보통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두려움과 불안을 주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꿈이다.
악몽은 기분 좋은 꿈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의 유형엔 ‘악몽’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욥기 7장 14절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고 했다.
느부갓네살 왕 역시 꿈을 꾸고 나서 두려움과 번민에 휩싸였다(단 4:5).
빌라도의 아내 또한 마음에 괴로움을 주는 꿈을 꾸었다.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예수)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 27:19).
이처럼 꿈은 기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괴로움을 주는 것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꿈을 주의 깊게 생각하며 나 자신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언적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든 때에나 꿈에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 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5~17).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 분의 모든 의사소통 수단에 익숙해지기를 원하신다.
꿈과 환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며 그러한 방법들 가운데 한 가지로 어떤 때는 꿈을, 때로는 환상을 선택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꿈과 환상의 여러 가지 유형들에 관해 배울 필요가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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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비전, 꿈, 환상의 개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묵시(하나님의 뜻을 나타냄=계시, 신탁, 경고의 말씀, 일깨움= Oracle, Revelation>때로 Vision)는 그것을 직접 듣고 보는 자와 선포된 그것을 듣는 이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냐 아니냐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 공동으로 이루어 가야 할 대 위임령, 곧 곧동의 사명을 주셨고, 또한 믿는 이 한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해서도 특별한 계획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주 독특한 하나밖에 없는 그것들은 함께 모여 영광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하는 모자이크를 이루는 조각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분과 실재가(Identity, Reality)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나는 십자가에서부터 주와 합한 한 영된 하나님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녀요, 종이요, 친구며 동역자>라고 고백하는 믿는 이들은 그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께 갈망하며 신뢰와 사랑의 믿음으로 나아가면, 얍복강에서의 야곱처럼 기꺼이 개인적으로 만나주십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꿈에 대해 주께 나아가 묻고 직접 들어서(하나님 음성들음인 레마의 말씀과 예언과 꿈과 환상vision으로) 확인하고, 개인적으로 확증해 주심을 따라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일단 자신의 삶을 그 뜻에 헌신하여 죽기까지 순종하기로 결단할 때, 순종하기로 결단한 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DESTINY=천명, 하나님의 꿈, 부르심의 목적과 소망) 바로 자신의 사명이(삶의 목표와 의미가 되는, 보냄받은 자의 수행할 명령=미션Mission, Appointed Task, individual, unique ->개인적 소명) 됩니다. 삶속에서 주께서 맡기고 명하시는 작은 일들(missions)을 믿음과 인내로 순종하며 잘 해나갈 때 이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영적체력이 길러집니다. 비전Vision이란 최근들어 사명자의 순종의 삶을 통해 장차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완성된 삶의 미래상 자체에 대해 쓰입니다. 즉 인생을 불러내어 구원해주시고 세상에 파송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부르심의 목적) 보고 들어 잘 이해하며 깨달아 알고 그것을 자신에 대한 사명으로 확증해 주심에 따라 그것을 받들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인해 나타내어질 삶의 완성된 개인의 최종적 미래상인 것이지요. 그것은 그 인생에 대한 하나님이 계획으로 인한 것이기에 하나님과 당사자에게 있어서 지고지선의 영광과 기쁨이 됩니다. 비전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개인적인 야망이나 포부가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서 또한 소원과 비전의 차이를 잘 이해하고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은 그와 평생 동행하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로 부어주셔서 그뜻을 온전히 이루게 하시며 더불어 주안에서 (은혜를, 곧 하나님 경외함-이웃사랑-경건-하나님나라 이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인 친밀-축복과 부요- 예수이름의 영광과 권세들을- 넘치도록 공급함과 더불어) 주님 뜻을 행하는 그 길에서 (세상이 전혀 눈으로 보지도 귀로 듣지도 못하고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까지 크나큰 -고전2:9-10) 소원Desires(원어적 의미로는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적인 뜻을 깨우쳐 주셔서 그 이룸을 갈망하게 하시고 그 일을 이룸으로써 당신의 자녀를 영광스럽게 하시려는, 하나님께서 넣어주시는 소원)을 품게 하시며 또한 그 개인적인 모든 소원과 도모를 이루도록 허락하십니다. ( -시81:10<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또한 그 사명을 일상의 삶속에서 수행하는 과정에 즉 무엇에 종사함으로써, 어떻게 이루어나갈 지에 대해 잠잠히 신뢰로 주께 나아가 물을 때, 지도하시는 성령님의 생동하는 음성인 레마(자연스러운 내적 평강, 직관적 깨달음 등)와 환상vision(꿈속의 환상과, 보통 예배 중에 체험되는 비몽사몽간의 또는 생시의 열린환상이 있음), 꿈, 예언을 통해서 미래지향적인 인도하심인 신적 통찰력(=영적 지혜와 총명, 분별력)을 얻게 되는데 이것 또한 비전(=Vision)으로 불리워집니다. 실은 이것이 본래적 의미의 비전이지요. 또한 이로써 매일매일 사랑과 긍휼, 성실과 정직 인내로 순종하며 동행하는 경건의 삶가운데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행하심과 말씀해주심을 본 그대로만 사역하셨던 예수님처럼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은 기록되기전에는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레마였습니다. 따라서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은 마음의 눈과 귀, 지성과 감성 의지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인도와 조명하에 <렉티오 디비나>, 곧 기도로 말씀읽기(Lectio)와 묵상을(Meditatio) 통해서 기도(Oratio)와 관상(Contemplatio)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이윽고 삶속에서 직접 보고 듣는 생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레마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살아계시며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알며 사랑하며 누리기>인 관상은 사명을 이루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계시하며 일깨우는 통로가 되기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또한 실상을 말한다면 묵시와 사명, 그에 따른 비전이 없는 백성은 제멋대로 행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진실을 말한다면 믿는 이에게 있어서 성공이란 세상사람들처럼 개인적인 바램, 포부나 야망을 이룸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투명하고도 정결한 주님의 성전이요 그릇인 동역자로서 진정한 종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주님 영광을 넘쳐나게 표현함 그자체인 주님과의 연합(UNION with GOD,참된 경건)의 온전함으로 판단되어야합니다.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주님을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도구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자신과 세상을 해롭게 하는 끝이 비참한 파괴적인 성공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시37:9, 34)(렘17:6-11)<5*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삶을 살아가면서 마음의 중심이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살아계신 주님을 자신의 보배요 모든 것으로 고백하며 범사에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온맘과 정성, 뜻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며 앙망하고 그분에게 묻고 들은 바대로 그분이 주시는 무한한 능력과 공급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Tips>
1. 보여주시는, 생동하는 레마로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국가, 민족, 개인에게 두루 헌신의 결단을 내리도록 이끕니다. 또한 신자 개인에게 있어서의 사명은(=Mission)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는 바탕위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인생의 지상명령으로서 그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뜻하는데,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생계획(천명:Destiny)을 묻고 확인받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사명은 주님께로부터 온 천명을 내 것으로 삼음이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개인적인 포부나 야망(Ambition=본질적으로 허망하고 파괴적인 탐욕적 인생목표)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생동하는 인도하심과 지시 (곧 레마Rehma)로서, 파노라마적 환상이라는 의미의 비전이나 미래지향적인 신적 통찰력을 의미하는 비전과는 그 의미가 좀 다르지요. 2.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과정에 또한 꿈과 환상은 성도들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에서 말씀하는 꿈과 환상은 물론 하나님의 모략과 그 계획을 드러내시는 묵시요 계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서는 신자의 삶의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의 행하심과 깨닫게 하심으로 행하도록 지도하심과 하나님의 레마의 말씀의 인도하심인 계시의 일환으로서 주시는, 믿는 이가 실제로 자고 있는 동안 꾸는 꿈과, 수면중이든 생시든 마음의 눈으로 보는 환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여기에서의 영어로 비전vision 이라고 쓰기도 하는 환상은, 다름아니라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뜻- 곧 하나님 경외함과 이웃사랑, 경건의 삶, 하늘나라를 이땅에 이룸-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의 일환으로서 ,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께 드려 영광의 주님을 마음에 그리며 주님께 집중할 때, 생명의 성령의 생수의 강의 원천인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주어지는, 파노라마적인 주님의 행하고 말씀하심의 환상으로 그 흐름을 운행하시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행하심과 말씀하심을 보고 듣게 하셔서, 예수께서 아버지의 하시는 일과 말씀하심을 보고 듣는 그대로만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현실에서 사는 것을 우리로 가능하게 하며 그 과정에 예언의 은사를 비롯한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비전이란? ---내용출처 : <비전의 사람>(이재철/홍성사)
---- 하나님께서는 잠언 29장 18절을 통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묵시’(khaw-zone)란 ‘비전’을 말하며,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파라’(paw-rah)는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뜻합니다. 따라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계시-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경거망동한다’ 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좀더 살펴보면, 비전이란 미래지향적인 통찰력입니다. 위대한 비전의 사람이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참되게 열어보여주심따라 Q을 주관적으로 경험하여 알며, Q 마음의 영원 경륜[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처, 곧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께서 친히 머리 되시며 교회는 그분의 하나된 몸, 곧 하늘의 시온성이자 새 예루살렘, 그리스도의 신부-어린양의 아내를 억도자 하심] 따른 갈망과 심정을 공유-교통하며 동행-순종-동참하며 그 이룸을 함께 갈망하고 오직 "나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으로서!! = 가장 큰 자로 주님은 인정하십니다)) 위대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비전을 지닌 자의 시선은 언제나 오늘을 뛰어넘어 보다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 흔히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가리켜 “비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지금부터 미래의 자신을 스스로 일구어 가기에 그에게는 장래성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비전이 없는 인간이 방자해 지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방자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목사든, 교인이든, 그 누구든 방자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크리스천은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전과 관련하여 우리가 혼동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 첫째, 비전은 (실현불가능한 일시적 망상으로서의) 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때로 미국인들은 비전과 드림(dream, 꿈)을 구별없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링컨 기념관 앞에 운집한 흑인들을 향해 “I have a dream 이라 설교할 때, 그 때의 꿈(드림)이란 곧 비전을 뜻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미래를 향한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미국인들 역시 “꿈깨라” 고 말합니다. 이 경우의 꿈은 (실현불가능한)공허한 망상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비전과 드림(꿈)을 구별없이 사용하지만,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이 양자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영국 수상을 역임했고 누구보다 명문장가로 알려져 있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대처 여사가 오래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전과 드림의 차이를 명쾌하게 풀이해 준 적이 있습니다. 즉 비전이란, 반드시 그 비전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반하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일반적인 꿈(망상)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둘째, 비전은 야망(ambition)이 아닙니다. 야망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한다는 면에서 망상과 구별됩니다. 또 야망을 가진 자는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무엇인가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면에서 야망이 비전과 동일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전은 오늘을 뛰어넘어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자기 계발과 자기를 가꿈이기에, 비전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야망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아무리 높은 곳에 야망을 설정했더라도 그 근본은 욕망입니다. 따라서 야망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 참되거나 바를 수 없습니다. 야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기에, 야망은 성취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비전의 왜곡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비전을 망상과 혼동하거나 야망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비전이라는 미명하에 망상과 야망을 부추겨 왔다는 것입니다. 2천 년의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천년왕국이니 지상천국이니 하며 크리스천들이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외면, 현실을 도피하고 허황된 망상을 좇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폄하했겠습니까? 마르크스가 인민의 아편이라 단정한 종교는 불교가 힌두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한 종교는 바로 기독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구 크리스천들은 비전과 야망을 동일시, 자신들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을 강탈하고 그곳 흑인들을 노예로 팔거나 부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중동 땅마저 앞다퉈 훔쳤습니다.
----지난 3월 2일은 이슬람교 최대 명절인 ‘하지’였습니다. 그때 성지순례를 위해 온 세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모인 이슬람 교도의 수는 무려 200만 명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또 다른 손으로는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을 강탈했던 서구 크리스천들이 도리어 이슬람 교도들을 똘똘 뭉치게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게 크리스천이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은 폭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인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성경이 들려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야망은 역설적이게도 이슬람교의 단결을 초래하는 촉매가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백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아메리카 신대륙 경영은 자신들의 새로운 야망 경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수없이 많은 인디언들을 죽이고 그 땅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인디언들을 사람으로 대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미국을 여행하면서 인디언 집단거주지역을 한 번이라도 찾아가 본다면,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이 백인에게 반드시 임할 것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세기 일본 삿포르에 농업학교를 세운 클라크 박사는 그 학교에 입학한 일본 학생들에게 설교하던 중 이렇게 말했습니다.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으라)” 이 말이 훗날 미국으로 역수입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중심엔 항상 ‘be ambitious'란 구호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신앙이 야망인 것처럼, 야망을 품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풍조를 지금까지 미국 크리스천 사이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국은 어떤 사회가 되어 있습니까? 불과 30년 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거짓말다운 거짓말도 아닌 거짓말로 인해 탄핵의 위기에서 스스로 사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 현직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성적 관계를 갖고서도 거짓말했음이 백일하에 밝혀졌음에도, 여전이 대통령직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미국의 도덕성이 그만큼 붕괴되었다는 예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서도 자기 자기를 지키는 판에 어느 공직자가 정직하게 일하겨 하겠습니까? 그런 사회 속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이 어떻게 정직을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덕목으로 삼으려 하겠습니까? 미국 사회는 이렇듯 내적으로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미국을 여행하다 보면 대부분의 대도시에서는 밤거리를 걸을 수 없습니다. 여행객뿐만 아니라 미국 백인 역시 밤거리보행을 피합니다. 흑인들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입니다. 미국이 갖고 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온 세계를 초토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력한 무기와 세계 유일의 슈퍼 파워를 지닌 미국 대통령의 권력도 자국 밤거리의 안전을 지키지 못합니다. 자기 야망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잡아다 짐승처럼 혹사시켰던 죗값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밤거리를 흑인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작년 8월 미국 콜로라도 검찰이 열한 살 된 소년 라울로를 아무런 법적 절차없이 체포, 형무소에 수감했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라울로를 경찰에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인인 라울로의 부모는 미국 이민 후에 라울로를 낳았기에, 라울로는 법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그 라울로에게 다섯 살 된 여동생이 있었는데, 라울로가 여동생을 ‘터치’(touch)했다고 옆집 할머니가 고발한 것입니다. 이 동사가 성적인 의미를 지니면 추행이 된다고 합니다. 열한 살짜리 소년이 다섯 살짜리 여동생을 어떻게 추행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옆집 할머니의 전화 한 통에 경찰은 즉시 라울로를 체포하여 수감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유럽에 전해지자 미국의 처사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즉각 콜로라도 법정의 부당성을 지적했고, 라울로 부모의 조국인 스위스는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수감하려면 소년원에 보내야 하고 그것도 정확한 죄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콜로라도 법원은 73일 만인 작년 11월 10일 면소(免訴)판결을 내려 라울로를 석방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의 조건을 달았습니다. 첫째 라울로는 부모와 함께 미국이 아닌 스위스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 스위스 도착 즉시 정신과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미국이란 사회는 할머니의 전화 한 통에 열한 살짜리 소년을 즉각 체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청소년 성문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사회가 더 이상 청소년의 성범죄를 막지 못합니다. 이 불행한 현실이 대체 어디에서부터 유래되었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비전과 야망의 혼동입니다. 야망의 성취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하는 사이, 미국 사회는 모든 면에 걸쳐 자정능력을 스스로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라고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촌, 오대양, 휴거 등 별의별 이단이 다 창궐한 것은, 한국 크리스천 중에 그만큼 망상을 좇는 자가 많다는 반증입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부흥회는 인간의 야망에 불을 지르는 집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1천만 크리스천이 있다고 하면서도 날로 타락 일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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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제3장
1. And the child Samuel ministered unto the LORD before Eli. And the word of the LORD was precious in those days; there was no open vision.
2. And it came to pass at that time, when Eli was laid down in his place, and his eyes began to wax dim, that he could not see;
3. And ere the lamp of God went out in the temple of the LORD, where the ark of God was, and Samuel was laid down to sleep;
4. That the LORD called Samuel: and he answered, Here am I.
5. And he ran unto Eli, and said, Here am I; for thou calledst me. And he said, I called not; lie down again. And he went and lay down.
6. And the LORD called yet again, Samuel. And Samuel arose and went to Eli, and said, Here am I; for thou didst call me. And he answered, I called not, my son; lie down again.
7. Now Samuel did not yet know the LORD, neither was the word of the LORD yet revealed unto him.
8. And the LORD called Samuel again the third time. And he arose and went to Eli, and said, Here am I; for thou didst call me. And Eli perceived that the LORD had called the child.
9. Therefore Eli said unto Samuel, Go, lie down: and it shall be, if he call thee, that thou shalt say, Speak, LORD; for thy servant heareth. So Samuel went and lay down in his place.
10. And the LORD came, and stood, and called as at other times, Samuel, Samuel. Then Samuel answered, Speak; for thy servant heareth.
11. And the LORD said to Samuel, Behold, I will do a thing in Israel, at which both the ears of every one that heareth it shall tingle.
12. In that day I will perform against Eli all things which I have spoken concerning his house: when I begin, I will also make an end.
13. For I have told him that I will judge his house for ever for the iniquity which he knoweth; because his sons made themselves vile, and he restrained them not.
14. And therefore I have sworn unto the house of Eli, that the iniquity of Eli's house shall not be purged with sacrifice nor offering for ever.
15. And Samuel lay until the morning, and opened the doors of the house of the LORD. And Samuel feared to show Eli the vision.
16. Then Eli called Samuel, and said, Samuel, my son. And he answered, Here am I.
17. And he said, What is the thing that the LORD hath said unto thee? I pray thee hide it not from me: God do so to thee, and more also, if thou hide any thing from me of all the things that he said unto thee.
18. And Samuel told him every whit, and hid nothing from him. And he said, It is the LORD: let him do what seemeth him good.
19. And Samuel grew, and the LORD was with him, and did let none of his words fall to the ground.
20. And all Israel from Dan even to Beersheba knew that Samuel was established to be a prophet of the LORD.
21. And the LORD appeared again in Shiloh: for the LORD revealed himself to Samuel in Shiloh by the word of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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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amuel 3 Amplified Bible
===The Prophetic Call to Samuel
1 Now the boy Samuel was attending to the service of the Lord [a]under the supervision of Eli. The word of the Lord was rare and precious in those days; visions [that is, new revelations of divine truth] were not widespread.
2 Yet it happened at that time, as Eli was lying down in his own place (now his eyesight had begun to grow dim and he could not see well).
3 and the [oil] lamp of God had not yet gone out, and Samuel was lying down in the temple of the Lord, where the ark of God was,
4 that the Lord called Samuel, and he answered, “Here I am.”
5 He ran to Eli and said, “Here I am, for you called me.” But Eli said, “I did not call you; lie down again.” So he went and lay down.
6 Then the Lord called yet again, “Samuel!” So Samuel got up and went to Eli and said, “Here I am, for you called me.” But Eli answered, “I did not call, my son; lie down again.”
7 Now Samuel did not yet know [or personally experience] the Lord, and the word of the Lord was not yet revealed [directly] to him.
8 So the Lord called Samuel a third time. And he stood and went to Eli and said, “Here I am, for you did call me.” Then Eli understood that it was the Lord [who was] calling the boy.
9 So Eli said to Samuel, “Go, lie down, and it shall be that if He calls you, you shall say, ‘Speak, Lord, for Your servant is listening.’” So Samuel went and lay down in his place.
10 Then the Lord came and stood and called as at the previous times, “Samuel! Samuel!” Then Samuel answered, “Speak, for Your servant is listening.”
11 The Lord said to Samuel, “Behold, I am about to do a thing in Israel at which both ears of everyone who hears it will ring.
12 On that day I will carry out against Eli everything that I have spoken concerning his house (family), from beginning to end.
13 Now I have told him that I am about to judge his house forever for the sinful behavior which he knew [was happening], because his sons were bringing a curse on themselves [dishonoring and blaspheming God] and he did not rebuke them.
14 Therefore I have sworn to the house of Eli that the sinful behavior of Eli’s house (family) shall not be atoned for by sacrifice or offering forever.”
15 So Samuel lay down until morning. Then he opened the doors of the Lord’s house. But Samuel was afraid to tell the vision to Eli.
16 But Eli called Samuel and said, “Samuel, my son.” And he answered, “Here I am.”
17 Then Eli said, “What is it that He said to you? Please do not hide it from me. May God do the same to you, and more also, if you hide from me anything of all that He said to you.”
18 So Samuel told him everything, hiding nothing from him. And Eli said, “It is the Lord; may He do what seems good [b]to Him.”
19 Now Samuel grew; and the Lord was with him and He let none of his words [c]fail [to be fulfilled].
20 And all Israel from Dan [in the north] to Beersheba [in the south] knew that Samuel was appointed as a prophet of the Lord.
21 And the Lord continued to appear in Shiloh, for the Lord revealed Himself to Samuel in Shiloh by the word of the Lord.
===Footnotes
1 Samuel 3:1 Lit before.
1 Samuel 3:18 Lit in His eyes.
1 Samuel 3:19 Lit fall to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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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장 (개요)
전 장에서는 어린 사무엘이 레위 족속의 출신이기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어린 제사장으로 여호와 앞에서 섬기는 것을 보았다.
본 장에서는 어린 선지자인 그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며,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기능을 회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1.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처음으로 계시하심(1-10).
2.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엘리에게 전하게 하신 통보(11-14).
3. 엘리에게 전해 준 사무엘의 충실한 전달과 이에 대한 엘리의 순복(15-18).
4.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심(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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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을 부르심(삼상 3:1-10)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사무엘에게 나타내시기 위해 아래와 같은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사무엘은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1절).
이것이 엘리의 아들들을 부끄럽게 했으며, 그들의 죄가 더욱 악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들은 여호와를 반역했지만 사무엘은 여호와를 잘 섬겼다.
그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무시했지만 사무엘은 이를 엄수했다.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그의 감독을 받으며, 그의 지시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다.
사무엘이 그들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고 바른 길로 행하였다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이러한 준비가 있기에 하나님은 그를 높이고자 하신 것이다.
그는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곧 이어 더욱 큰 일이 맡겨졌다. 젊은이들은 겸손하며 또 부지런하여야 한다.
그리하여야 그는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순종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훌륭하게 다른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다.
--- 당시는 예언자의 활동이 매우 드물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것이 사무엘 자신에게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거니와, 이스라엘에게는 큰 은혜가 되었다. “그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한다.
지금이나 그때나 하나님의 사람은 특별한 일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부름을 받는다(2:27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문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알아 볼 수 있는, 생각하는 예언자는 없었다.
예언자들의 활동이 드물었기에 그 참다운 가치를 아는 자들은 이를 매우 귀하게 여겼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은 더욱 귀한 것이다.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성막에서 횡행하던 그 숱한 불신앙과 부정이 온 나라를 멸망케 하고 하나님을 노엽게 함으로 예언의 영을 불러 가셨다가, 이제 보다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기 위해 그러한 처사를 돌이키사 충실한 예언자를 먼저 일으키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무엘에게 나타내신 방법은 매우 특수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매우 흔치 않은 방법이었다.
Ⅰ. 엘리는 물러가 있었다.
사무엘은 엘리의 침대 곁에서 그를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성전의 예배에 참석했던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방으로 물러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2절).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엘리는 일찍 자리에 누웠다. 왜냐하면 이제는 일을 잘 할 수가 없고 쉬 피로를 느꼈기에 편하기만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는 자기 처소에 처박혀 있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자행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일찍 물러가고자 했는지 모른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그 고통은 그의 아들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Ⅱ. 사무엘은 밤에 그 노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갈 수 있도록 엘리의 방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잠을 자려고 하였다.
아마 엘리가 잠이 들지 못하면 그를 위해 책을 읽어 드리려고 했는지 모른다. 엘리는 사무엘이 그의 말에 순종을 잘 하기 때문에 자기 집 식구 가운데 누구보다도 이 사무엘에게 이런 일을 맡겼을 것이다. 엘리에게는 그의 아들들이 그에게 큰 슬픔이 되었지만 이 어린 부하가 기쁨이 되었다.
비록 자녀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을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에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채 꺼지지 아니하였을 때에 자리에 누웠다”(3절). 아마 사무엘은 지성소와 매우 가까운 곳에 누웠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가운데 등불은 결코 꺼지는 일은 없지만) 곁가지에 있는 등불들이 꺼지기 전에 자리에 눕고자 한 것을 보아서 그 시각이 한밤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각까지 사무엘은 책을 읽거나, 기도하거나 아니면 성전 안을 청소하며 다음 날을 위한 제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리에 눕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열심히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Ⅲ.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러나 그는 엘리가 부른 것인 줄 알고 그에게로 달려갔다(4, 5절). 사무엘의 마음은 (다윗의 경우와 같이. 시 63:6) 잘 정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를 부르실 때에 즉시 깨어 일어났다. 그러나 가까이 있던 엘리는 그 음성을 듣지 못했다. 아마 어떤 특별한 방법의 부르심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만한 점이 있다.
1.엘리가 언제 부를지 몰라서 항상 대기하고 있는 사무엘의 근면함을 볼 수 있다.
그 음성이 엘리가 부르는 음성인 줄 알고 사무엘은 따뜻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기 위해, 또는 어떤 불편한 일이 생기지나 않았는지 궁금히 여기면서 속히 엘리에게 달려갔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사무엘은 말했다. 윗사람에게 부름을 받아 온 모든 사환들은 이런 말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단지 노인들의 말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항상 그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분들을 잘 모셔야 한다.
2. 전능자의 환상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무엘의 부족함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엘리의 부름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잘못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주 저지른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단지 목사들의 부름으로만 여기고 이에 응대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적으로만 생각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널리 울리건만, 단지 지혜 있는 사람만이 여기 저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이해한다.
엘리는 그가 사무엘을 부르지 아니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를 괴롭혔다고 하여 꾸짖지 아니하였으며, 그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가 꿈을 꾼 것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상냥하게 다시 가서 자리에 누우라고 말했다. 사무엘이 하여야 할 일이 없었다.
종이 주인의 부름에 응할 태세를 언제나 갖추고 있다면 주인 역시 종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남종이나 여종도 주인의 안식을 누려야 한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가서 누웠다.”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을 당신의 말씀으로 부르신다. 그 음성을 듣고 그들은 사무엘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음성을 곧 잊어 버리는 수가 많다. 그들은 다시 자리에 눕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모처럼의 결단이 허사가 되어 버린다.
Ⅳ. 똑같은 부르심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같은 잘못도 두 번, 세 번 거듭되었다(6-9절).
1. 하나님은 “다시 사무엘을 부르셨으며”(6절), 또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다”(8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자 부르시는 그 부르심은 은혜를 주실 때까지, 다시 말하면 부르심을 받은 자가 응답할 때까지 계속 반복된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사무엘은 여전히 그것이 여호와의 부르심인 줄 알지 못했다(7절).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씌어진 말씀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종과 선지자들에게 여전히 “세미한 음성”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전혀 새롭고 낯선 방법이었다.
아마 그는 얼마 안 있으면 꿈이나 환상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오는 이런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있다는 말을 들어본 일도 없었다.
하나님께 대한 위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가진 것은 대부분 어렸을 때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시절의 일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난외의 주에 따라서 읽으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그때에 “사무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사무엘이 둔해 빠진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기의 의무를 잘 깨달을 수 있었다.
충실한 신앙인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증거도 때로는 이처럼 실패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위로가 되지 못한다.
또 죄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성령의 노력도 잘못 이해되어 회개시킬 기회를 잃어버리는 수가 간혹 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욥 33:14).
3. 그 소리가 엘리의 목소리를 닮았으며 또 사무엘이 그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두 번째도 그리고 세 번째도 소리를 듣고 엘리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것이 틀림없이 엘리의 목소리인 줄 믿고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엘리의 목소리로 잘못 안 것이기는 해도, 사무엘이 부름을 받자 곧 달려오는 것은 평소의 그의 책임감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택하신다.
그러나 사무엘이 엘리에게로 몇 번씩이나 간 것은 그 나름대로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이로써 엘리는 드디어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게 되었다”(8절).
(1) 엘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셨을 때 그를 제쳐 놓고, 그의 앞에서 그를 섬기는 그의 종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고, 이는 매우 억울하고 분한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을 멸망시키고자 하시는 첫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리고 엘리는 그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을 어린아이를 통해서 주신 것을 깨닫고는 더욱 겸손해야만 했던 것이다. 엘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나타낸 것임을 알아야만 했다.
(2) 이리하여 엘리에게는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는 사무엘에게 전달된 말씀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충분히 믿게 되었을 것이며, 그것이 사무엘의 착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만한 마음은 도무지 가질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 메시지가 전달되기 전에도 이미 엘리는 하나님께서 뭔가 자기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사무엘이 바로 그것을 자기에게 전달해 주기까지는 엘리는 그 내용을 모르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이 고용한 자의 약점과 실수도 무한한 지혜이신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고야 마는 것이다.
Ⅴ. 드디어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차비를 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나온 메시지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한 예언자가 될 수 있도록 공개적 시상을 공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1. 엘리는 사무엘이 들은 음성이 분명 하나님의 음성인 줄을 알고, 그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잘 가르쳐 주었다(9절).
엘리는 이 일을 정직하게 행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자기를 제쳐 놓고 직접 사무엘에게 갔다고 하는 것은 매우 망신스러운 일이지만 엘리는 사무엘에게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잘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명예가 사무엘에게 간 것을 만일 엘리가 시기하였다면 , 사무엘 자신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 사무엘에게 그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가서 잠을 자라고 명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단지 꿈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는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였기에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엘리는 사무엘이 잘 될 수 있는 좋은 길을 그의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 주었다.
이처럼 노인들은 뒤따라 오는 젊은이들 때문에 그들의 장래가 암담해지고 가치가 떨어질는지 모른다고 하여도 인색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젊은이들의 진보를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뒤에 오는 이가 우리보다 앞선다고 해도 결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요 1:30).
엘리는 사무엘에게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사무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저에게 말씀하옵소서, 지금 말씀하옵소서.”라고 말하여, 들을 준비를 해야 하며, 그대로 시행하겠다는 것을 약속하여,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를 갖추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시 85:8; 합 2:1).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그 말씀을 설교하고자 하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빛과 능력 앞에 자기를 드러내고, 이에 순복하여야 한다.
즉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네 번째로 말씀하실 때는 전번과는 약간 다른 식으로 사무엘을 부르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하나님은 사무엘의 이름을 불러 그를 부르셨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임하여 서서” 부르셨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사무엘 앞에 이제 서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욥에게 하는 엘리바스의 말에 의하면 “그 형상을 분별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고 한다(욥 4:16).
사무엘은 그때에 자기를 부르시는 분이 엘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계 1:12).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셨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즐거우셨던 것 같았으며, 또는 이번에는 반드시 누가 그를 부르고 있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해 주고자 하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한 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다”(시 62:11)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름으로 그를 아신다는 것은 매우 큰 영광이며(출 33:12), 그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시는 것은 매우 능력이 있고 효과가 많은 부르심이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신 경우와 같이 현저하게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름을 불러 아브라함을 부르셨다(창 22:1).
3. 사무엘은 엘리의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의 입에는 제때에 좋은 말을 넣어 주며, 경건한 마음을 표현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잘 알 수 있으며, 경건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훈련을 쌓을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말하여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라. 무지한 마음으로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하여야 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사무엘이, 전번에 엘리가 부르는 것으로 알았던 때와 같이 일어나 뛰어가지 않고 조용히 누워서 귀를 기울였다.
보다 조용하고, 보다 차분한 마음은 하늘의 일을 보다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된다.
우리의 모든 소란한 생각과 감정을 진정시키고 모든 것이 조용히 마음속에 가다듬어지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사무엘은 말 한마디를 빼놓았다. 그는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만 말했다.
패트릭(Patrick) 주교는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지 아닌지 아직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한 대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워질 수 있었으며, 전능자의 이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을 때”(3절)에 일어났으며, 엘리가 멸망하여 우림과 둠밈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그에게 신탁을 내리셨다. 이런 경우를 두고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말하기를 “해는 뜨고, 해는 진다.”(전 1:5)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한 의인의 태양이 지기 전에 또 다른 의인의 태양이 떠오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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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와 그의 집에 내린 두 번째 위협(삼상 3:11-18)
Ⅰ. 서론적인 이야기가 끝나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엘리의 집에 관한 선언을 말씀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그에게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 얼마나 축복된 인간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여 주지 않으셨다.
젊은이들은 대개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무엘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다른 사람에게 보낼 심부름꾼으로 삼기 위해 찾아오셨다.
실은 이것이 더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 선포가 그 자신에게도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그의 아들들이 엘리의 아들들처럼 그렇게 악하지는 않았지만 기대만큼 훌륭한 인물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을 때 매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8:3).
그 선포의 내용은 전에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전해 준 것과 비교할 때(2:27) 짧은 것이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렇게 긴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Q이 보셨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라고 하여도 어린아이들의 기억력을 지나치게 과신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전 장에서 선포한 경고를 재가하고 그 선언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는 것은 매우 슬픈 소식이요, 진노를 발하는 선포이다.
아마 그 경고를 듣고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디어 이런 재차의 경고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하늘의 경고를 무시하면 할수록 이는 더욱 확실히 임할 것이며 그들의 멸망이 더욱 심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미 선포한 경고 가운데서 그 죄악과 이에 따른 형벌이 재확인되었다.
1. 그 죄에 관해서 이는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13절)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이미 말한 바가 있고, 여러 번 그 자신의 양심이 자기 자신에게 이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죄악이며, “우리 스스로도 이를 알고 있노라”고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죄악은 얼마나 큰 것이며, 우리가 받을 멸망 또한 역시 얼마나 극심한 것이 되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그 죄악은 “그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그가 이를 금하지 않은 것이다.”
또는 히브리어의 표현 그대로 “그들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지 아니한 것이다.” 만일 엘리가 그의 노여움을 아들들에게 나타내 보였던들 그 정도까지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리는 그의 아들들을 나무라기는 하였으되, 그들의 잘못에 대해 벌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대제사장과 사사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인데도 그들의 잘못 사용되는 권력을 빼앗아 버리지 못했다.
(1) 죄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자청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타락시킨다(왜냐하면 각 사람은 자기의 욕심에 끌려 미혹될 때 시험을 받기 때문이다. 약 1:14).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려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성도들과 천사들로부터도 미움 받는 존재가 된다. 죄악은 멸망을 자청하는 것이며 인간을 가장 비열하게 만드는 것이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였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사람들 앞에서 유린하였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이 그들 스스로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저주를 자청한 셈이다.
(2) 다른 사람들의 죄를 중지시킬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중단시키지 못한 사람들은, 남들의 죄악에 스스로를 동참시킨 결과가 되며 따라서 책망을 함께 받아야 한다.
만일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응하여야 할” 칼을 가지고 있는 당국자가 이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2. 그 형벌에 관하여 “이는 내가 그의 집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하셨다(12, 13절).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집에 대해 두고두고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뜻이다.
그 자세한 형벌의 내용은 전에 이미 말씀되어진 바가 있다. 그것들이 여기서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가지가 보충되었다.
(1) 그 형벌이 선포될 때 온 이스라엘이 무서움에 떨며 놀라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11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라고 하셨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의 아들들이 쓰러질 때, 엘리의 목이 부러지고 엘리의 집이 흩어지리라는 소식을 듣게 될 때 크게 두려워하며 놀랄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이 어찌 그리 무서운지요! 하나님의 심판이 푸른 나무에 떨어지면 이를 당장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사람에게 내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시 119:120).
(2) 이 무서운 형벌의 결과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며 끝까지 실현될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라고 하셨다(12절).
그 일이 실현되기 시작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기간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말씀되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어떤 용서를 빌 수 있는 회개 기간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닐수도 있음을, 즉 회개란 지금 오늘 당장!!이라는 긴박성이 요구됨을 명심하라. ..내일이면..너무 늦다!!
아무리 오래 있다 시행되어도 드디어 그 일을 시작하시면 그 일을 완전히 끝맺을 것이며 그 집을 멸망시킬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이 선포가 취소되거나 그 형벌의 시행이 지연되거나 경감되리라는 희망을 전혀 주시지 않았다(14절).
① 하나님은 결코 그 선포를 취소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였다”고 그 선포에 뒷받침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일이나 심판을 내리시는 일에 있어서 한 번 맹세하신 일은 결코 돌이키지 않으신다.
② 하나님은 결코 속죄물 같은 것 때문에 타협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그 죄가 속량받지 못하며, 그 형벌이 감소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희생의 제도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그것으로써 도저히 미치지 못하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악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신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죄의 삯인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신다.
Ⅱ. 이 선포가 엘리에게 전달되었다.
1. 사무엘은 그 선포를 조심스럽게 잘 간수하였다(15절).
(1)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워 있었다.”
아마 사무엘은 자기가 들은 바를 여러 번 숙고하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자리에 누워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인 양식을 받아 먹게 되면, 이를 우리 자신 속에 한동안 간직하며, 잘 소화시키는 것이 좋다.
(2) 사무엘은 언제나처럼 아침에 제일 먼저 성전으로 올라가서,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다.”
다른 때에 그가 성전을 연다는 것은 어린 그에게 있어서 매우 자랑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만은 그러한 일이 보잘것없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당시의 어떤 어린이들보다 그를 더 높여 주고 명예를 씌워 주셨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명예를 자랑하거나 우쭐대지 않았으며, 또 이런 보잘것없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기쁘게 성전으로 올라가서, 성전의 문들을 열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 보여 주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라도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낮은 자로 여겨 주기를 원하신다.
사무엘은 놀라운 이상을 본 그 감격이 지나쳐서 일상적인 일을 잊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흔히 황홀경에 들어갔던 사람들 모양으로 동료들에게 가서 지난 밤에 하나님과 나눈 이야기를 즐겨 털어 놓고 싶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을 조심스럽게 자기 속에만 간직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자기 일에만 정신을 쏟았다.
하나님과 가졌던 우리의 은밀한 사귐을 지붕 위에서 떠들어대서는 안 된다.
(3) 사무엘은 자기가 본 바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였다.”
만일 엘리가 그에게 화를 내고 그를 꾸짖을까 두려워했다면, 우리는 평상시에도 엘리가 그 자신의 악한 아들들에게는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이 착한 아이에게는 엄중하게 대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랬다면 이것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이 이 착한 늙은이를 근심하게 하고 괴롬을 알게 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만일 사무엘이 이 소식을 듣자마자 금방 엘리에게로 달려갔다고 하면, 마치 그가 엘리의 집이 속히 망하기를 바라고, 자기 자신의 집이 엘리의 집이 멸망한 그 폐허 위에 속히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그 이상의 내용을 밝히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선한 사람은 악한 소식 전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특별히 사무엘은 제자로서 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 엘리에게 악한 소식 전하기를 싫어했다.
2. 엘리가 그 이상의 내용을 상세히 물었다(16, 17절).
엘리는 사무엘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를 불렀다. 아마 그의 침상 곁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으리라고 보고 이를 말하라고 명령했다.
엘리는 이를 알기 위해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고 말함으로) 사무엘에게 간청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움츠러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만일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면서 위협적으로 명하기도 하였다. 엘리는 그 말씀이 그에게 관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예언일 것이라고 능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만큼 모르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든 또는 해롭게 하는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익히 알기를 원한다.
“만일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한 엘리의 엄포는 충실치 못한 파수꾼에게 내려질 무서운 저주를 가리킨다고 보여진다.
만일 그들이 죄인들을 경고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범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이 탄핵하여야 할 그 진노와 저주를 그들 스스로가 받아야 한다.
3. 드디어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포를 충실하게 전달해 주었다(18절). “사무엘이 세세히 말했다.”
사무엘은 일단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였으며, 보다 좋게 꾸며서 말하지도 않았고, 또는 그 예리한 날을 무디게 하거나 그럴 듯하게 도금을 해서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가 받은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전달해 주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도 이처럼 말씀에 충실하여야 한다.
4. 엘리는 신앙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엘리는 사무엘의 기억이 완전한가를 묻지 않았으며, 그에게 꼬치꼬치 따지지 않았고, 그 선고가 틀림없는 것인가를 묻지 않았다.
그는 그 형벌이 지나친 것이며 또 감당키 어려운 것이라고, 가인처럼 불평하지 않았으며, 묵묵히 이에 순복했고, 그의 죄과를 받아들였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라고 엘리는 말했다.
엘리는 그 형벌이 다만 일시적인 것이며 그의 후손들에게 망신을 주고 가난하게 하는 것으로만 이해했고, 그의 후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게 하는 것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고 기꺼이 순복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집안의 과오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결코 돌이키지 않으시겠다고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 형벌이 취소되도록 중재 기도를 드리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엘리는 이와 상당히 비슷한 경우에 아론이 취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겸손히 내맡겼다. 그때 아론은 “잠잠하였다”(레 10:3).
(1) 그의 짧은 말 가운데는 진리가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여호와시다. 그가 이 심판을 내리셨다. 그의 몽둥이에 대해서는 항거할 수 없고, 그의 선고에는 예외가 없다. 그는 반드시 그 심판을 실현하실 것이며, 그의 힘을 대항할 수가 없고, 그의 정의에 대해서는 도저히 규탄할 수가 없으며, 그의 주권은 쟁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여호와시다. 그는 스스로를 성별하시며,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는 분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이는 여호와시다. 그에게는 불의가 없으시며 그분은 그의 피조물에 대해 조금도 잘못된 일을 행하시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행하지 않으실 분이시다. 그분은 또 조금도 피조물들에게 그들의 잘못 이상을 묻지도 않으시는 분이시다.”
(2)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다.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나는 그분의 처사에 대해서 아무 할 말이 없다. 그의 하시는 방법은 의로우시며,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그분에게 죄를 범하였으니 만큼 여호와의 노여움을 받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책망을 달게 받아야 하며, 결코 우리의 조물주와 대항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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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로 세움 받은 사무엘(삼상 3:19-21)
이처럼 사무엘은 하나님의 이상을 잘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가 보다 더 성장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명예로운 기사가 여기에 실려 있다.
Ⅰ. 하나님은 사무엘의 명예를 높여 주셨다.
사무엘에게 은혜를 끼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당신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며 이를 빛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사무엘이 자랐다”(19절).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의 지혜와 은총이 성장한다. 우리의 성장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1. 하나님은 자신을 사무엘에게 더욱 많이 나타내심으로 그의 명예를 높여 주셨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말씀의 선포를 충실하게 전달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시 사무엘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셨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21절). 은혜롭게도 하나님은 자기를 바르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거듭거듭 자기를 나타내신다.
2.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신 당신 자신의 말씀들이 그대로 실현되게 하심으로써 사무엘의 명예를 높여 주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19절).
선지자로서 사무엘이 한 말은 진실한 것으로 나타났고, 제때에 실현되었다. 아마 몇 가지 사무엘의 예언이 확실히 진실한 것으로 증명된 바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났던 것 같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의 사명에 대해 인식을 바르게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말을 응하게 하시며 그의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신다”(사 44:26).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현시키신다.
Ⅱ. 이스라엘이 그의 명예를 높여 주었다. 그들은 모두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받은 것을” 알았으며 이를 시인했다(20절).
1. 그는 유명해졌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실로에 온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목하여 보았으며, 그를 존경했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에 관해 서로 말을 많이 주고받았다.
어렸을 때의 경건한 생활은 젊은이의 명예를 크게 높여 주며 그들의 소문을 매우 좋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를 하나님은 영화롭게 해 주신다.
2. 사무엘은 사람들을 위해 매우 소용 있는 인간이 되었으며, 그들을 잘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때를 맞추어 선한 사람이 된 그 사람은 곧이어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확고한 사명과, 백성들로부터 받은 그의 확고한 소문은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빛으로 빛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늙은 엘리가 사라지게 되자, 젊은 사무엘이 세우심을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위한 증인이 없이 홀로 계시거나, 그의 교회를 위한 인도자를 없애거나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호크마
=====3:1
아이 사무엘 - 여기서 '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 )는 넓은 의미로는 유아(infancy)의 나이로부터 청년기(adolescence)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나, 대체적으로는 '소년(boy)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때의 사무엘의 나이를 12세로 보았다(Antiquities, V.10, p4).
한편 히브리 사회에서는 12세부터를 성년으로 간주했으므로(눅 2:42), 하나님께서는 그 통념을 인정하셔서 그때 사무엘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토록 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 '엘라 앞에서'는 '엘리의 감독을 받으면서'란 뜻이다. 그리고 '섬긴다'(* , 솨라트)란 말은 구약 성경에서 성전 봉사 활동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출 28:35, 43 ; 29:;30 ; 민 16:9 ; 신 10:8 ; 대상 15:2 ; 대하 8:14).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사무엘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희생 제사의 직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여호와의 말씀 -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던 신적 계시 (神的 啓示, divine revelation)을 일컫는 일반적 명칭이다(사 38:4 ; 렘 1:2, 4 ; 6:10).
희귀하여...보이지 않았더라 - 이 표현은 그 시대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적 상황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즉 계시의 희귀는 성경 전반의 가르침에서 볼 때,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종이었다(암 8:12).
한편 여기서 '보이지'(* , 니프라츠)란 말은 '크게(널리) 퍼지다'(* , 파라츠)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곳곳에 충만히 퍼지다'의 뜻이다(Driver, 잠 3:10).
따라서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의 의미는 (1)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았고(시 74:9), (2)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에 지극히 무관심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마 7:6).
이상 - (* , 하존). 또는 '환상'(사 29:7)으로도 번역되는 이 말은 정상적인 시각(視覺)이 아닌 꿈과 황홀경 등의 특수한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되는 묵시(默示, revelation)를 가리킨다(Lower). 그러나 이것은 아예 오감(五感)이 완전히 마비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자아 의식은 분명한 가운데 다만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신적 계시의 전달 방법 중 하나이다.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 이와같은 사실은 나이 100세를 바라보는 엘리의 고령(4:15)을 감안할 때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본절의 표현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노쇠 뿐만 아니라, 그와 비례하여 점점 약해져가는 엘리 제사장의 영적 무감각을 암시해준다. 그러므로 본절은 또한 엘리 제사장이 왜 4-9절의 내용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자기처소에 누웠고 - 대제사장 엘리의 '처소'는 분명치는 않으나 사무엘이 잠자던 곳과는 다소 떨어진 곳 곧, 성막의 입구쪽 별관 정도였을 것이다(Klein). 당시 성막은 실로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제반 부대(附帶) 시설들 - 예를 들면 당직 제사장들의 처소, 사무엘처럼 성소에 헌신한 자들 및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처등 - 이 성막 주변에 세워지고 준비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R. Payne Smith).
=====3:3
하나님의 등불 - 이것은 매일 저녁마다 성소(the Holy Place)의 안을 밝히기 위하여 켜지는 일곱 가지로 된 등잔의 등불이다(출 27:21). 이 등불은 저녁에 점등되어 등의 기름이 완전히 떨어지는 새벽까지 계속 켜져 있었다(출 30:8 ; 레 24:2). 출 27:20, 21 주석 참조.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 그러므로 이 말은 때가 아직 완연한 새벽이 되지 않았음을 암시해주는 말이다(Keil).
사무엘은...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 이 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성막(taberna-cle)안에 머물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여기서는 '여호와의 전'(* , 헤칼 예호와)은 법궤 또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the Ho;y of Holies)나 분향단이 있는 성소(the Holy Place)를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건물로서의 성막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시 11:4).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맛소라(Masoretic Text)는 1:9에 이어 여기서도 성막을 '궁전' 또는 '궁궐'이란 뜻의 '헤칼'(* )로 취한 듯하다(Keil Delitzsch, Vol. -ii, p. 49).
하나님의 궤 있는...전 안에 누웠더니 - 이것은 사무엘이 지성소(支聖所, the Holies)안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언약궤가 지성소 안에 안치된 것은 사실이지만(출 26:33), 그 언약궤는 넓게 생각하면 또한 '전'(殿, * ,헤칼) 안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차례씩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전 뜰 주변에 제사장, 레위인, 헌신자들을 위해 지어놓은 거처에서 잠을 잔 것이다(Keli, Fay). 한편 여기서 저자가 본절에 '하나님의 궤' 라는 말은 본절에 특별히 삽입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다음 절에서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상으로 인해 여화와의 말씀이 휘귀하던 때에, 마침내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본절은 나실인으로서 레위 지파의 헌신자에 불과했던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소명받는 순간이요'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는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총과 은혜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3: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 밤중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사무엘은 엘리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부르는 줄로 착각하고 즉시 일어나 엘리의 눈이 어두워서 거의 보지 못했다는 2절의 언급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이는 당시 사무엘이 대제사장 엘리의 인정을 받고, 그의 개인 시종의 역할도 감당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 이때 엘리는 사무엘이 깊은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헛 것을 들은 줄로 생각해버린 듯하다.
=====3:6
내 아들아 - (* , 베니). 본래 이 말은 나이나 신분상의 차이가 현격할 때,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다정하게 부르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에 덧붙여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난감한 심정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한편 이같은 표현은 특히 본서에 많이 나온다(16절 ; 2:24 ; 4:16 ; 24:16 ; 26:17).
=====3:7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 본절은 사무엘이 세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 있었음에도, 하나님께 제대로 응답치 못했던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그 이유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지 못했다'란 말의 의미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와 전인격적인 개인적 교제가 아직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다'(* , 야다)란 말은 단순한 지식적 깨달음 뿐만 아니라, 남녀가 동침하듯(창 4:1) 체험적으로 아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 '알지 못하고'는 사무엘이 율법을 배움으로써 여호와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으나,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은 아직 없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처럼 사무엘이 그때까지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경험하지 못한 탓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3:8,9
엘리가...깨닫고 - 당시 엘리 제사장은 영육이 노쇠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계시도 희귀(稀貴)한 상황 탓으로 처음 두 번은 사무엘의 행동을 단순히 착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세번째 사무엘의 행동을 보고,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줄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튼 사무엘을 세번씩이나 부르신 이가 여호와인 줄 늦게나마 깨달은 엘리 제사장은 이제 동일한 부르심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사무엘에게 가르쳐 주었다.
말씀하옵소서...듣겠나이다 - 이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대한 존경과 겸손,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태도이다(Klein).
=====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 '임하여' (* , 야보)는 '오다'(come)란 뜻이다. 그리고 '서서'는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서서 계실 육체를 갖고 계시지 않은 영(營)이신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람과 같이 서 계신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본절이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 앞에 실제로 임재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창 28:13 ; 출 34:5 ; 욥 4:16). 그러므로 본절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무엘아 사무엘아'와 같은 반복적인 부르심의 표현이 성경 여러 곳에서 신현(神顯)의 장면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에서 또한 증명될 수 있다(창 22:11 ; 46:2 ; 출 3:4).
=====3:11
내가...한 일을 행하리니 - 여기서 '한 일' (* , 다바르)은 앞에서 상세하게언급된바 엘리 가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실제로 성취시키는 일을 가리킨다(2:27-36).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들어 앞에서 예언하신 대로 엘리의 집안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두 귀가 울리리라 - 이 말은 곧 '사건의 충격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안에 내리실 심판이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그 소식을 접한 자가 공포와 전율로 인해 귀가 멍멍할 정도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Smith, Fay, Keil). 구체적으로 제사장 엘리 집안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1) 법궤가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기고,실로 성소가 파괴된 사실(4:11, 17 ; 5:1), (2) 엘리의 두 아들이 전쟁터에서 한 날에 죽은 사실(4:18), (4) 엘리의 며느리가 해산하다가 죽은 사실(4:19-22) 등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런 의미에서 '두 귀가 울리리라'(* , 테칠레나 쉐테 아즈나우)는 말은 성경 다른 곳에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파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리킬 때 역시 사용되었다(왕하 21:12 ; 렘19:3).
=====3:12
본절은 엘리의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예언한 대로(2:31-36) 반드시 있을 것임을 다시 확증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 이는 어떠한 일을 진행함에 있어 그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세심하고도 철저히 이루어가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3:13
이는 그가...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본절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엘리의 직무 유기죄(職務遺棄罪)와 아비로서의 엘리의 방조죄(幇助罪)를 고소하고 있다. 즉 엘리는 자기의 두 아들이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무슨 죄를 범하는지 알면서도(2:23), 그들을 적극적으로 징계치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2:29).
저주를 자청하되 - '스스로를 타락시키되' (amsde themselves vile, KJV; made htesmelves contemptible, NTV란 뜻이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이 제사장의 심분으로서 성소에서 그처럼 타락한 행동을 일삼은 것은(2:13-16, 22)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따라서 70인역(LXX)을 비롯, 일부 영역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되'(were blasphe-ming God, RSV, Living Bible)로 번역했다.
=====3:14
내가 ...맹세하기를 - 이하 선언되는 내용과 같은 하나님의 맹세는 구체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엘리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2:27)의 엄중한 심판적 예언(2:27-36)은 하나님의 맹세와 결코 다를 바가 없다.
엘리 집의 죄악은...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 이 말은 엘리의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 이유는 (1) 엘리 집안의 죄악이 엄중한 경고 후에도 계속되었고, (2) 그러한 죄악을 속하는 거룩한 제사마저도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었다(2:12-17). 제물이나 예물로나 - 여기서 '제물(* , 제바흐)은 피흘림이 있는 희생 제사를 가리키며, '예물(* , 민하)은 소제와 같은 피흘림 없는 곡식 제사를 가리킨다(R.P. Smith). 한편 이 두 가지는 구약 시대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여호와께 속죄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3:15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으나 - 여기서 '문'(門)은 히브리 본문에는 '문들'(doors)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성막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고, 그 문들을 열고 닫는 일이 사무엘의 중요한 임무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문'(* , 델레트)은 나무로 만들어진 '두짝 문'(a tow - leaved door)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다'는 말은 성막의 휘장들(출 26:36 ; 36:37)을 열어젖혔다는 뜻이 아니라, 성막에 부속된 여러 별관 건물들의 문들을 열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성막이 실로(Shlioh)에 오래 머무는 동안 성막 뜰 주변에는 제사 업무상 필요한 여러 부대(附帶)건물들이 고정적으로 지어졌던 것 같다(Keil Delitzsch, R, Payne Smith). 2절 주석 참조.
그 이상을...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 사무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상(異像)은 엘리 가문의 멸망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하나님께로부터 에리 가문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고도 즉시 엘리에게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무엘은 그같은 비극적인 예언으로 인하여 대스승 엘리 제사장이 심히 괴로워 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년 사무엘의 사려깊은 신중함이 엿보인다.
=====3: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 지난 밤 사무엘에게 어떠한 내용의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는지 엘리가 무척 궁금해 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내 아들 사무엘아 - 이것은 평소 엘리와 사무엘의 관계가 부자(父子)관계와 같이 밀접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내 아들아' 라는 호칭은 애정과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난감한 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6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이것은 엘리에 대한 사무엘의 존경심과 겸손한 마음, 그리고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말이다(8, 9절)
=====3:17
개역 성경에는 잘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엘리는 보절에서 '다바르'(* , '말씀하다')를 어근(語根)으로 하는 동사 및 명사를 도합 5회씩이나 사용함으로써, 사무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 말씀에 대하여 자신의 깊은 관심을 강력히 표명한다.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벌을...내리시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나오는'...하면 하나님이...하시기를 원하노라'와 같은 맹세적 표현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진다(14:44 ; 20:13 ; 25:22 ; 룻 1:17 ; 삼하 3:9, 35 ; 19:13 ; 19:13 ; 왕상 2:23 ; 왕하 6:31). 그런데 본래 이와 같은 맹세적 표현은 중근동 지역에서 짐승을 잡아죽이는 의식적(儀式的) 행위와 함께 이루어졌었다(Klein). 즉 이같은 맹세는, 맹세자가 원하는 행동을 상대방이 신실히 실행하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한 짐승과 같은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을 암시해 주는 맹세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짐승을 죽이는 의식 행위가 생략되어 있지만, 위와 같은 당시대의 배경 하에서 본절을 이해 해야 할 것이다.
=====3:18
사무엘이...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 사무엘은 엘리의 엄숙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고, 또한 선지자적 소명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에 엘리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무엘의 메시지 전달은 다음 두 가지 목적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1) 메시지 전달로 부터 실제 심판이 임하기까지 약10-15년의 기간이 있었다는 것은 다시 한번 사무엘을 통해 엘리 집안을 각성시키고 회개시키기 위한 목적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2) 소년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어 대제사장 엘리에게 메시지를 선언하도록 했다는 것은 향후 사무엘의 예언자적 기능을 강화시키고, 동시에 그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F.R. Fay.Smith).
이는 여호와시니 - 사무엘의 모든 말이 틀림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임을 엘리가 겸손히 인정하는 말이다.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 이 말은 엘리가 하나님의 의지를 순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즉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집안의 멸망과 죽음에 관한 무서운 심판의 내용이었지만, 엘리는 강퍅하게 거부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일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엘리는 이처럼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듣고도 옷을 찢고 통회하며 재를 무릅쓰고 회개한 참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으로 우리는 엘리의 신앙 면모를 얼핏 살펴볼 수 있는데, 즉 그는 개인적으로는 후덕(厚德)하고 어느정도 신앙적이었지만, 공적으로는 죄에 대처함에 있어 유약하고 미온적인 우유부단한 이물이었던 것 같다.(Keil, Smith).
=====3:19
본절의 내용은 사무엘의 선지자적 사역이 하나님께로 말마암았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사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특별한 약속을 받은 인물이었다(2:21, 35).
따라서 본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는 사실(11-14절)과 함께, 사무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받은 선지자임을 증명해 주는 증거인 것이다(신 18:22 ; 23 :14 ; 왕상 8:56 ; 왕하 10:10). 그리고 본절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前)의 모습만을 가리키는 않는다.
이것은 선지자로서 사무엘의 전생애 동안의 모습을 반영해 준다.
그 말로...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 이는 사무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예언의 말은 헛된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시사, 그의 입에 직접 예언의 유효성은 참 선지자됨의 증표였다(신 18:22). 이런 의미에서 후일 지혜자는 말하기를,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과 같다고 하였다(전 12:11).
=====3:20
본절의 내용은 19절 내용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즉 선지자로서의 사무엘의 예언이 말한대로 모두 성취되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사무엘을 의심할 나위없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우심을 입은 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에만'(* )은 민 12:7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의 경우와 관련되어 '충성됨'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그 직무상의 충성되고 신실함을 통해서, 하나께로 말미암아 세움받은 그의 선지자 직의 정통성이 입증된다는 의미이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dAN)은 이스라엘 북쪽 변경의 한 성읍이름이다. 그런데 이곳의 원래 지명은 '라이스'(삿 18:29)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단 비파의 사람들이 이주, 정착해 살면서 자신들의 조상 이름을 따라 이와 같은 지명을 붙였던 것이다. 단 지파는 원래 여호수아로부터 약속의 땅 중 남쪽 부분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분배 받았었다(수 19:40-48). 그러난 그들은 그 땅의 원주민을 몰아내지 못함으로, 그 따을 자신들의 것으로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삿 18:1). 그러던 중 정착지를 찾아다니다가 머무른 곳이 바로 이 단 지역이었던 것이다(삿 18:27). 한편 '브엘세바'(beer-sheba)는 팔레스틴 최남단 곧 헤브론 서남쪽 55km 지점에 위치하였다(창 21:14 ; 26:23 ; 삿 20:1). 따라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란 말은 이스라엘 전 국토를 가리키는 관용적이 표현이다(삿 201).
선지자 - (* , 나비). 어원적으로는 '부름을 받은 자'란 뜻이다(Klein) 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어원적인 의미와 더불어 이 단어의 문맥적인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본장의 문맥은 선지자의 의미가 (1) 여호와께서 임하신 바 된자(10, 21절), (2) 여호와의 계시를 받은 자(17, 21절)임을 시사한다.
=====3:21
본절의 내용은 사무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부각시키려는 저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
실로 - 하나님의 성막이 세워져 있던 곳으로, 사무엘이 머물던 것이다(1:3 ; 2:11). 1:3 주석 참조.
여호와의 말씀으로 - 이 말은 혹자들의 생각처럼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 2위의 출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여호와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되, 당신의 말씀을 매개체로 사용하셨음을 뜻한다(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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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대언자, 선지자..
나비(명남)는 '대변인, 말하는 자, 선지자(예언자)'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의 기능에 대하여 학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은 계시들을 말하는 것(무아경 상태에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강조점은 나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의사 소통의 받아들임이다.
1. 선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나비는 일반적으로 '부르다 call', '선포하다 proclaim'라는 뜻의 아카드 동사 나부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과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어원을 헬라어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하였고, 이 단어를 능동태형, 즉 부르는 자, 예언하는 자, 설교자로 이해하였다(참조: H. J. Kraus, Worship in Isrel, 1966, 102).
이에 상응하는 아카드어 발전 형태를 보면, 나비는 능동형이 아니라 수동형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즉 '부름받은 자, 임명된 자'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가라킨다(W. F. Albright,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1940] 1957, 303).
수동형의 뒤에는 집행자, 곧 여기에서 부르시는 자로서의 하나님이 서 계시다. 후대에 와서 나비는 전문 용어가 되었고, 문자대로의 의미는 잊혀졌다.
이 명사로부터 동사 나바(aybin: , 5030)가 파생되었다.
(a) 명사 나비는 구약에서 309회 나오며, 그 중에서 예레미야에서만 92회 사용되었다.
복수형은 역사서들에서 선지자 무리를 의미한다.
단수형은 초기 본문들에서는 광범위하게 여러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가리켰으며, 후대의 본문에서만 오직 여호와(야훼)를 대신하여 말하는 자를 가리켰다.
초기 본문들에서 선지자는 또한 이쉬하엘로힘(하나님의 사람), 혹은 로에나 호제(선견자)라는 직함을 지니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은 훌륭한 지도자들에게도 주어지던 귀한 존칭인 것처럼 보인다.
모세 Moses(신 33:1), 다윗 David(느 12:24, 느 12:36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엘리사(29회)와 왕상 13:1-31에서는 유다의 익명의 한 선지자(15회)를 가리킨다.
이 직함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사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선견자는 숨겨진 비밀과 미래의 사건들을 드러내 보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삼상 9:6-20).
선견자에게 있어서는 환상에 강조를 하는데 반해 선지자는, 그의 말에 강조점을 둔다(사 30:10).
(b)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에게 나비의 직함이 주어졌다.
그 중에는 아브라함(창 20:7), 모세(신 34:10), 아론(출 7:1)도 포함된다.
미리암은 여선지자라는 직함을 받았다(출 15:20). 이는 틀림없이 예배 의식의 찬미가로 사용되던 홍해에서의 모세의 노래와 연관된 것이다(아래의 2(c)를 보라).
2. 소위 기록하는 선지자들(writing prophets)의 완숙한 예언이 형성되기 이전의 어떤 초기 형태들이 구약에서 발견된다.
(a) 이들 중의 하나는, 전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악기를 사용하여 황홀경의 상태로 자신들이 빠져들며,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메시지를 떠듬거리며 지껄이는 황홀가 무리의 등장이다(참조: 고전 14장에서 신약성경 시기에 나타난 현상들).
이러한 → 황홀(경) Ecstasy은 전염성이 있는 것이라서, 사울도 또한 '선지자들 축에' 들게 되었다(삼상 10:5 이하, 참조: 삼상 19:18 이하).
바알의 선지자들 역시 황홀가들이었다(왕상 18:19-40). 일시적으로 '다른 사람'(삼상 10;6)으로 변할 수 있었던 황홀가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관심을 끌게 하였다(삼상 10:5). 그러나 또 다른 경우에는 이 '미친 어리석은 자들'(호 9:7)은 그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민 11:10-30에서는 70명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황홀경에 빠졌는데 여호수아는 비판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9)라고 답변하였다.
몇몇 학자들은, 엘로힘 기자(Elohist)가 모세의 전승 속에 이 이야기를 포함시킴으로써, 낯설고, 불쾌한 비이스라엘적 현상인 무아경의 예언을 여호와의 예배 속에 도입시키고자 시도한 것이라고, 이를 해석하였다. 따라서 폰라드(G. von Rad)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단다. '이 이야기가 의도한 목표는, 따라서 정통파를 매우 당황하게 만들 수 있었던 이러한 새로운 종교 현상을 정당화하는데 있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황홀경의 활동을 여호와이즘(Yahwism)의 관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로서, 혹은 적어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예언적 운동의 한 원인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Old Testament Theology, Ⅱ, 1965, 19).
(b) 또 하나의 초기 형태는 금욕적인 공동체들 안에서의 선지자 무리이다.
이 무리들은 탁월한 인물 주변으로 모여든 자들이다(예: 엘리사, 왕하 2:3 이하, 왕하 4:38, 왕하 6:1). 이들은 그 인물을 '선생 master' 혹은 '아버지 father'라 불렀으며, 그의 발 근처에 앉아 배웠으며, 그와 함께 공동의 숙소에서 살았다. → 엘리야와 엘리사는 각각의 선지자 무리들의 우두머리들이었다(왕하 2:1 이하).
이와 같은 무리들은 언제나 성소와 관련하여 나타난다(왕상 13:11, 베델; 왕하 2:1, 왕하 2:4, 왕하 2:5, 길갈, 여리고). 여기에서는 황홀경의 역할이 눈에 띄게 감소되어 있다(왕하 3:15에서 그 흔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신에 성령의 은사가 → 이적(Miracles)의 역사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명백해진 것처럼 보인다(왕하 2:19-22, 왕하 2:23-25, 왕하 4:1-7, 왕하 4:18-37).
그러나 이적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이러한 유명한 기사들 조차도 엘리사가 또한 영적(왕하 4:1-7, 왕하 4:8-37, 왕하 5:1-14), 정치적 조언(왕하 13:14 이하,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참조: 왕하 6:12, 왕하 8:7-15)을 주던 말씀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c) 보다 초기 형태라 할 또 하나의 무리를 언급해야 겠다.
이들은 국가의 성소에 관리로서 고용된 예배 의식의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분명히 기록하는 선지자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반대 의견 S. Mowinckel, The Psalms in Lsrael's Worship Ⅰ-Ⅱ, 1961). 왜냐하면 후자는 강력하게 예배 의식을 비판하였기 때문이다(예: 성전, 호 8:14 Rvmg., 막 3:9-12, 렘 7:1-15; 희생제, 암 3:14, 호 5:6, 사 1:10-17; 제사장들, 호 4:4, 막 3:11, 렘 2:8). 게다가 그들은 어느 정도 예배 의식과는 이질적인 말과 행동을 하였다(G.von Rod,op.cit.,Ⅱ,54 이하).
예배의 선지자는 예배 의식에서의 제사장과 같이 자기의 자리가 있었다.
그의 임무는 사람들의 애도에 대해, 그리고 특히 왕께 응답하여 신탁을 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그는 궁전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왕상 1:8).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매우 엄격하게(삼하 12:1 이하) 말하였다(왕상 22:24 이하).
예배를 맡은 선지자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유력한 →말이 Word이 성공을 가져오기도 하고 재난을 가져오게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16:4, 왕상 17:18). 구원에 대한 그들의 말은 금언 형식으로 나타났다. 사 33:1-24에는 예언적 기도문이 보존되어 있다(H. Gunkel, "Jesaia 33, eine prophetische Liturgie," ZAW 42, 1924, 177-208).
이 구절을 우리에게 이러한 선지자들의 언어에 관한 통찰력을 준다. 예배를 맡는 선지자들로서, 우리는 시므이(왕상 1:8), 시드기야(왕상 22:24) 그리고 나단(삼하 12:1 이하, 왕상 1:11 이하)도 꼽을 수 있다. 나단은 왕궁과 깊이 관련을 맺으며 활동하였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독립을 누렸다. 이러한 선지자들과 적어도 약간의 유사성을 지닌 나훔과 하박국을 제외하면, 이들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책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스가랴와, 이보다는 학개에 제의적 선지자들에 관한 뚜렷한 흔적이 있다.
3. 구약성경의 예언서 문학과 독특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 예언은, 이스라엘 내에서 군주 정치와 함께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명확한 구분선을 그어놓을 수는 없다. 황홀경, 점(占), 이적 행사는 배후로 사라져갔고 점차적으로 →말 Word이 전면에 부상하였다.
예배 의식이나, 관례, 군주 정치와 맺어져 있던 끈이 점차적으로 느슨해졌다. 아모스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말이 선포의 주요 수단이었다.
선지자들의 유일한 행위란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것들은 엄격히 말해 예증이 아니라, 말의 내용을 행위로써 표현한 것이었다(호 1:4, 호 1:6, 호 1:9, 사 7:3, 사 8:3 이하, 사 20:2, 렘 16:2, 렘 16:5, 렘 16:8).
고대의 선지자들은 세 시기 동안에 활동을 하였다. 북왕국의 붕괴 시대(기원전 721년경), 남왕국의 붕괴 시대(기원전 597-587년경), 바벨론 포로 시대(바벨론 패권의 마지막 시기인 기원전 539년경). 역사와 관련하여 그들의 메시지는 수평적 차원(이스라엘 국가와 열방)과 수직적 차원(과거, 현재, 미래)을 지녔다.
미래의 차원은 경고의 성격을 띠었는데, 미래는 듣는 자의 현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점치는 일에서 처럼, 관심을 현재로부터 미래의 어느 한 지점으로 옮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미리 얘기하는 예언이 아니었다. 그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a) 심판에 대한 예언.
특히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백성과 그들의 대표자들 혹은 백성의 무리에게 다가오는 심판 Judgment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임무였다. 심판은 여러가지 형태, 가령 가뭄, 지진, 전쟁과 같은 모습을 취하기도 하였다. 한편 선지자들도 백성들에게 권고하고 조언해야할 책임이 있고, 회개시킬 목적으로 설교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위협에는 심판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 수반되었다. 예를 들면 심판은 나라, 국왕, 혹은 나라 안에 있는 어떤 무리의 죄 Sin 때문에 일어난다.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죄란 하나님의 행위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 인간 행위를 말한다. 자세히 보자면, 이것도 이사야서에서는 백성들이 여호와(야훼) 만을 신뢰하고 있지 않는 점을 뜻하여, 아모스서와 미가서에서는 백성들이 여호와(야훼)의 법과 계명을 무시하는 것을 뜻한다. 호세아, 예레미야, 에스겔서에서는 오히려 헛점이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의 불성실함에 있다.
(b) 구원에 대한 예언.
구원에 대한 예언들은 하나님의 심판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뜻에 근거한 것이다(이와 대조적으로 심판에 대한 예언은 인간들의 그릇된 행위에 의하여 초래되었다). 이는 게다가 구원의 말씀이나, 약속이 취할 수 있는 여러가지 형태로 말미암아 지적된다. 서약은 분명히 그 이전의 불평에 대한 응답이며, 그러므로 은혜로운 예언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사 43:2 이하). 공포(announcement)는 하나님의 미래의 도우심을 약속한다(사 41:17 이하, 렘 28:2 이하). 목사는 하나님의 장차 일으키실 구원에 대한 미래의 실재를 그린다(사 11:1 이하, 슥 8:4 이하). 구원 Salvation에 대한 예언은 포로 시대와 그 이후에 우세하였다. 구원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간의 관계 갱신에서, 종말론적인 왕(메시야) 안에서, 예배 의식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그리고 국가의 상태와 정치적 자유의 갱신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구원에 관한 웅대한 묘사에는 종종 구원의 근거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 나온다. 즉 하나님과 계약에 대하여 열심인 백성들의 성실성과 거룩함이 아니라, 하나님만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 열심,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 근거이다.
요약해 보면, 구약성경의 선지자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묶여 있는, 그러므로 독특한 자유를 즐기면서, 하나님에 의하여 경고와 권고, 위로, 가르침과 조언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말씀의 선포자이다.(C.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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