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삿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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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9장 [311. '내 너를 위하여][252. 나의 죄를 씻기는][280.천부여의지없어서][274. 나 행한 것 죄뿐이니 ]


===어떤 레위 사람과 그의 첩

.....제사장-레위인, 강도 만난 이웃을 (주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아마도 안식일 준수 위해 바삐 걷다가..분명히 보았으나) 그냥 못본체 지나쳤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 이해일 것..그러나, 주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자비와 긍휼, 곧 사랑으로, 순종의 기회를 놓치지말고!!) 선대/환대하는 마음이 진정 주님의 마음임을 말씀하고 계셨다..

....."나는 당신들 중에서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 23:4)

'나그네'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이다. 

나그네는 자신의 본래 고장이 아닌 다른 곳에 와 있는 사람이며, 그곳에 머물러 있는 기간이 항구적이지 않고 임시적인 사람을 지칭한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도 나그네들이었다. 그들은 본래 고장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외지에서 지냈다(창 3:23). 

가인은 더욱 혹독한 나그네 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땅이 가인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그 효력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인으로 하여금 그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창 4:11-12).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도, 그 일로 인하여 온 지면에 흩어지는 불행을 자초하였다(창 11:9). 

그로 인하여 나그네 삶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이들의 나그네 생활에는 모두가 범죄로 인한 결과라는 공통점이 있다.

성경에서 긍정적 의미의 ((쫓겨남 때문이 아니라 Q의 부름과 지시에 의해))나그네 삶을 산 첫 인물은 아브라함이다. 

그는 사라의 매장지 막벨라 굴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헷족속에게 자신을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고 소개했다.

아브라함의 나그네로서의 삶은 하란에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나안으로 이주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범죄나 잘못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과 지시에 따라 고향을 떠났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안정적인 삶을 살던 아브라함에게 나그네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로 인하여 새로운 차원의 나그네 인생관이 태동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소개하는 데 사용한 표현 '나그네'와 '거류하는 자'는 히브리어로 각각 '게르'와 '토샤브'이다. 

'게르'는 '일정 기간 동안 머물다'를 의미하는 '구르'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리고 '토샤브'는 '거주하다'를 의미하는 '야사브'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게르'와는 동의적 관계다. 

이 두 단어는 타지에서 유입되어 기존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새로운 이주민을 지칭하는 전문용어다. 

이들에게는 거주 권한만 허락되었을 뿐, 토지 매입과 같은 재산권 행사는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와 함께 이방 나그네가 최하류 빈민층에 속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아브라함은, 땅을 소유할 수 없는 이방 나그네의 신분이었다. 

그가 기존 주거지의 중심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외곽을 떠돌며 생활 터전을 옮긴 것도, 그런 신분적 제한과 관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자신의 불리한 사회적 신분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의 법과 관습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항구적인 삶의 어떤 근거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장차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철저히 믿었다. 

그런 믿음의 배경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그분에게 모든 땅의 소유권이 있다는 신앙고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가나안 사람들의 땅 소유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 있을 뿐이었다. 

그런 하나님과 늘 동행하였던 아브라함에게 토지의 소유 유무는 전혀 개의할 문제가 아니었다.

비록 이방 나그네의 신분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늘 삶의 당당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점은 헤브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창 23:6)라고 평가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지도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시'는 '들어 올리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곧 지도자란 남에게 높임, 곧 추앙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방에서 새로 이주해온 나그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시민권을 갖고 있던 본토인들에게까지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점을 발판으로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매입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방 나그네에서 토지소유권자로 신분이 상승되었음을 의미한다.

믿음의 사람은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신앙의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천국의 나그네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보여 준 것처럼, 우리들 역시 그 약속이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여야 한다. 가나안 전체 땅에 비하여 아브라함이 구입한 막벨라 굴과 그 주변 토지는 너무도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열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 역할을 하였다.

우리도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위임된 영역에서만큼은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실제적으로 구현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기다림도 미덕이지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1:12).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에브라임 산지(히브리어: הר אפרים)는 에브라임 지파가 한때 점령했던 이스라엘의 중앙 산악지대의 역사적 이름...베냐민 땅의 북쪽에 위치한, 체노만 조의 단단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험준한 지역...가장 높은 곳은 바알하솔 산으로 고도는 1016미터이며 벧엘 북동쪽 약 8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후에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알려지게 되었다....강수량이 풍부하여 분수령 서쪽 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76cm가 넘으며. 비옥한 테라로사 토양으로 포도, 무화과, 올리브, 석류, 아몬드 등 풍성한 농작물을 생산해 낸다

2.  그 첩이 행음(whore)하고((첩을 둔 것도 이상하고, 행음에 이르게 된 것도 그러함..첩도 아내임..레위기 법을 엄격히 적용하자면 사형감...물론, 다양한 속사정이 있을 수 있지만))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3.  그의 남편이(여전히 그녀를 연연하며...포기하지 않고 있었음)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다시)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세상적 기준 따르는, 레위인의 명성 지위, 장인의 부요가 맞물려 있고, 하나님 말씀, "성결과 의"를 따라 사는 순종의 삶은 상대화 되어 버려졌음을,....그 레위인의 행동 결정과 행함은 자행자지함이요, 곧 주님께 여쭈거나 말씀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암시))

4.  그의 장인 곧 그 여자(damsel..히브리어 "나아라" 젊은 미혼 처녀..이 단어를 쓴 것은 그녀 혼자 독수공방하도록 초야 치름 없이 그냥 방치해 둔 것 아닌가?? 그녀 스스로는 심지어 그렇게 여겼음을 의미..)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5.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7.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8.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9.  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10.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이제 곧 안식일이었다..그나마 안식일 지키기 위함 아니었을까..!!))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11.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2.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13.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예루살렘에서 북서쪽8km지점)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안식일 준수>여부에 대한 타인의 눈을 의식함...자괴감으로 초조하다!!))

14.  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여부스 곧 예루살렘에서 북쪽 6km지점)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15.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기브아 : 베냐민 기브아는 히브리어로 구릉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벧엘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기브아는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의 고향이다(삼상 10:26). [1] 유대 남쪽 도시로서 옛적에 성소가 있던 곳이므로 하나님의 기브아라 함 (삿19:6)

......암흑기요 영적 혼란기였던 사사 시대의 윤리적인 타락상..베냐민 기브아<.레위인 첩 사건>...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한 레위인이 첩을 두었는데 그 첩이 다른 남자와 간음하고 고향으로 도망갔고,, 그러자 레위인은 도망간 첩이 있는 장인의 집에 가 그녀를 데리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기브아의 한 노인의 집에 들려 하룻밤을 쉬어 가게 되었고, 그곳 불량배들이 몰려와 레위인과 동성애를 요구하였고, 막무가내인 그들에게 레위인은 결국 자기 첩을 (아무 말 없이,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그리고 손수 강압적으로 그녀를 이끌어!!) 넘겨 주어야 했고, 결국 밤새도록 윤간 당한 레위인의 첩은 처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러자 (분노-격정에) 레위인은 죽은 자기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각지에 보내어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을 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이 일로 이스라엘은 4만명, 베냐민지파는 2만5천명이 죽고 600명만 남게 되고...<주님 말씀 무시하고 여쭈어 행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함의 결과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이 사건에서 사사 시대의 타락상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는데...레위인이 첩을 둔 일, 그 첩의 간음행위, 만연한 동성애, 불량배들의 만행, 경악할 만한 <분노와 격정에 싸여..레위인 스스로!!, 절반의 진실만 드러내고 선동 위해!!> 사체 절단하여 12지파에 각각 보냄의 행위...<백성 전체의 통렬한 회개 없이, 어찌할 바를 주께 제대로 여쭙지도 않았음> 등등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들의 삶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삶은 결국 처참한 악행과 심각한 부도덕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다(롬 1:24-32)

.....<이웃 안에서 주님 대하듯 환대> 이웃 사랑, 고아-과부-가난한 자 돌아봄<긍휼> 및 나그네 <환대/대접> 위한 마음의 여지 없음은 존재 가치 전도-생명 경시의 암울한 시대상 반영

16.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러나!!)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거류자...구르..시민권 없는, 불법 난민, 불법 체류자..]]

....히브리어 "게르 גר (어근 구르 גור)"에 해당하는 가장 좋은 우리말 번역어는 "난민(refugee)"입니다. "게르"는 (기근 등의 이유로) 자신의 땅에서 더이상 살 수 없어서 남의 땅에 얹혀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떠돌아 다니는 게 아니라 반쯤은 정착생활이라 할 수 있기에 "나그네"나 "여행"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또한 옮겨간 지역에서 본토 사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도 못하고, 땅을 소유하는 등의 동등한 권리도 갖기 어렵습니다. 대부분 땅 소유권이 없이 살아가거나, 어느 정도 자신의 땅을 일구더라도 그 지역 본토사람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쫓아내면 쫓겨날 수 밖에 없는 신세입니다(이삭의 우물). 가끔은 세력이 커져서 본토사람들과 계약을 맺고 상호존중과 불가침조약을 맺는 경우도 있지만(아브라함과 이삭), 이런 경우는 성경에 실릴 만한(요즘 식으로, 뉴스에 나올 만한)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입니다.

남의 땅에서 성경의 난민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자신의 것(배우자를 포함해서)을 빼앗길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이집트에서의 아브라함이나 그랄에서의 이삭 등). 

"손님(객)" 대접을 받는 게 아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순례"의 길을 가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21세기에도 자신의 터전을 떠나 사는 것이 힘든데, 인간과 땅의 거리가 훨씬 가까웠던 고대 사회에서 한 인간과 그 인간을 둘러싼 공동체가 뿌리를 내려왔던 터전을 떠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남의 땅에 난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몇 십 배, 몇 백 배나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낯선 이(stranger/KJV, NIV, NAS, JPS, TNK)"나 "이방인(aliens/NRSV), 외국인(foreigner/CJB)," 혹은 단순한 "이민자(immigrant/CEB)"가 아닙니다. 우리말 번역의 나그네/객(손님), 혹은 영어번역의 "순례자(pilgrim)" 등도 "게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번역입니다. 

동사로서 이 단어는 영어번역에서 "여행하다(travel)" 혹은 "잠시 머물다(sojourn)"의 의미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번역들은 정치-경제적 이유로 자신의 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빌붙어 살 수밖에 없는 “난민” 상태의 일부분만을 포착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게르는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하자면 "외국인 노동자"나 "불법체류자(undocumented )"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기록을 근거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이 일정 정도 가나안 땅에서 정착생활을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정착생활이기 때문에 “난민”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서의 "정착생활" 역시 난민으로서 남의 땅에 얹혀 사는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합니다. 그 근거는, 1) 롯이 소돔에 거주할 때 그 본토민들은 롯이 "구르"하러 이곳에 온 주제에 자기들을 가르치려 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고(창19:9), 2) 아브라함도 어느 특정지역에 완전 정착이 아니라 그랄에 상당기간 머무는데(창20-21), 그 땅을 성경은 "블레셋 족속의 땅"(창21:34)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그 지역에 "구르"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3) 이삭의 경우도 기근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집트로 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속해 있는 그랄에 "구르"하라고 명령하십니다(창26:3). 4) 야곱의 경우, 라반에게 얹혀 살던 시절을 "구르"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창32:5), 동시에, 헤브론에서 아버지 이삭과 함께 머무는 것 역시 "구르"로 표현됩니다. 즉, 야곱이 라반의 집에 20년을 가족을 이루며 살았지만 "자기 땅"에 산 것이 아닌 것처럼, 아브라함과 이삭의 헤브론의 "정착생활" 역시 난민으로 남의 땅에 얹혀 사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몇 살이냐(창47:8)"고 묻는 파라오의 질문에 대한 야곱의 대답은 이렇게 읽는 게 좋습니다: "제가 난민으로 살아온 인생이 백삼십 년 가량입니다. 제 삶이 정말 끔찍했지만, 제 조상들이 난민으로 산 세월에는 비할 바가 못됩니다(창47:9)."

17.  노인이(소돔 성문에 앉아 있던, 나그네를 맞아 환대하였던 롯을 떠올리게 한다)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18.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19.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20.  그 (자원하여 나그네 대접+친절함이 특징!!)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21.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남색-동성간 성관계) 하니

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죽으면 죽으리라"의 절대각오 해야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될 때 , 나는??)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레위인) 자기 첩을 붙잡아(!!..배반함이다..후안무치의 냉혈한이자 이기적 겁쟁이)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보호받아야 할 약자, 게다가 자기 배우자!?를 오히려 강제로 붙잡아 비류들에게 넘겨주었고 그 자신은 <다행히 여기며> 잘잤을까??..다른 표현 생략!! 그저 무심하게 푹 잘잤다는 것을 암시!!...뒤에도 그의 무정함과 간악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험악한 일을 당하고도 그집을 찾아와!! 도움 요청하였음을, 거절감에 자포자기하여 차라리 죽음 선택했을 가능성 시사!!...정황이 그러한데..밤새 문밖에 서서 초조해 하며 기다렸음직한데도.. 그가!! 문을 닫아 걸었었고.....염려하여 다가와 그녀의 상황 살피려는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28.  그에게 (그날이 안식일이라 그녀를 돌보는 일이 그에게는 수치스럽고 더럽고 번거로운 일로 여겨졌을까??)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얼마나 추악-잔인한 짓 벌였는지!!)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주님 앞에서 통렬한 회개와 자기 성찰과 고백은 전혀 없었다...그냥 분에 못이겨서 절반의 진실만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을 선동하고 있었음)

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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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인"과 "그의 첩" 사건… 경고 기억하라!!]]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속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사사기 19장과 20장에 기록돼 있는 레위 사람의 첩 사건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섬뜩하고 기괴한 사건이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던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으로부터 첩을 맞아들였다. 첩으로 들어온 여자는 바람을 피웠고 바람을 피운 뒤에 친정으로 돌아가 넉 달을 지냈다. 

레위 사람은 첩을 잊지 못하고 첩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베들레헴에 있는 친정집으로 갔다. 

그는 첩을 설득해 첩을 데리고 바로 돌아오고자 했으나 장인의 간청으로 두 차례 머문 후, 세 번째 머물다 가라는 간청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나섰다. 

귀환 여행 중에 베냐민 지파 땅인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맞아들이는 사람이 없어서 거리에 유숙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 노인의 배려로 그의 집에 유숙하게 됐다.

레위 사람 일행이 노인의 집에 유숙하기 위해 들어 온 것을 알게 된 기브아 성읍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에 몰려들어 자신들이 레위 사람을 관계할 테니 내어놓으라고 위협했다. 

사사기 19장 22절 “관계하리라”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야다’는 사사기의 문맥에서 명백히 “성관계를 갖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불량배들은 레위 사람과 동성 간 성관계를 갖고자 했다.

노인은 동성 간 성관계를 이성 사이의 불법적인 성관계보다 훨씬 더 악한 행위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줘 성관계를 갖게 함으로써 “이런 망령된 일” 곧, 동성 간의 성관계만은 막아 보려고 발버둥 쳤다. 

레위 사람은 애꿎은 노인의 처녀 딸까지 망가뜨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자기의 첩만 불량배들에게 내줬고,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윤간, 아침결에 죽음에 이르게 했다. 

레위 사람은 첩의 시신을 열두 덩이로 잘라 열두 지파에게 보냈다.

시신 덩이를 받은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는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다”(삿 19:30)는 말로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한 다음, 40만 대군을 동원해 베냐민 지파와 담판에 들어갔다. 

열한 지파 연합군은 문제를 일으킨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으나 베냐민 지파가 거절하자 바로 전쟁에 들어갔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의 허락하에” 세 차례 진행됐는데, 처음 두 번은 베냐민이 승리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 2만2000명, 두 번째 전투에서 1만8000명, 합해서 4만명의 열한 지파 연합군이 전사했다. 

세 번째 전투에서는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가 하나님의 허락하에 매복과 유인 작전을 전개해 베냐민 지파 2만5000명을 죽였고 베냐민 지파는 겨우 600명만 살아남았다.

레위 사람의 첩 사건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두 가지 중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첫째로, 교회는 교회 안에서 동성 간의 성교가 확인되는 경우에 엄중한 출교와 치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Q은 이스라엘 6만5000명의 희생을 감수하시면서까지 동성 간 성행위에 대한 징계와 제거를 허락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순결을 유지하도록 하셨다.

동성 간의 성관계는 왜곡되고 부패한 인간의 성적 탐욕의 마지막 정점이며 모든 포르노 산업의 가장 깊은 핵이자 타락한 인류 문화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교회가 동성 간 성관계를 아름다운 사랑의 한 유형으로 용납한다는 것은 예쁘게 포장된 독버섯을 먹는 것과 같고,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에 곧 퍼지는 것(고전 5:6)과도 같아서, 조만간 교회 전체를 영적이고 도덕적으로 마비시킬 것이다.

교회의 담임목사는 교회 안에서는 동성 간의 성관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천명해야 한다. 

그래야 동성애의 유혹에 직면해 있거나 동성애 중에 있는 성도들을 상담과 교육과 돌봄을 통해 탈동성애로 이끌 수 있는 안전한 터전이 마련될 수 있다. 

둘째로, 만일 특정한 교단이나 교회가 동성 간 성관계를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동성애자들에게 직분과 교회 봉사를 허용한다면 그 교단이나 교회로부터 탈퇴하거나 관계를 중단함으로써 교회와 교인 개인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순결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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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제사장의 민낯==

사사기 19장 말씀기도를 하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 시대가 사사 시대와 같아진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3장부터 16장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사사들이 타락해 가는 이야기라면 사사기 17장부터는 종교 지도자인 레위 제사장들의 타락 이야기입니다.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인 사사들이 타락했다 하더라도, 신앙의 지도자들인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깨어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지도자들 마저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에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대규모의 내전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던 영향력 있는 한 레위 제사장에게 첩이 있었습니다. 

레위인은 제사장, 또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이며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을 어떻게 적용해야하는가를 알려주는 율법 교사이기도 했고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판단하는 재판관이기도 했고, 율법 어긴 사람들에게 내린 형벌을 집행하는 집행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첩이 있었고, 이 첩이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행음했습니다.  

율법에는 이 여자와 그와 동침한 남자 모두를 죽이라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신 22:22).  이 여자는 그것이 두려웠는지 자기 친정 베들레헴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해야 할 레위인이 첩을 데리러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것은 (추측컨데)그 여인의 집 안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레위인들의 삶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법 사이에 큰 틈이 생겼으며, 레위인들의 가정부터 문제들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레위인은 장인의 집에서 닷새를 지낸 후 계속 붙잡는 장인의 권유를 뿌리치고 떠납니다. 여섯째 날 저녁은 안식일이 시작 되기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너무 늦게 출발하여 도중에 해가 지게 되었는데, 가까운 여부스의 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 시간 더 가야 하는 기브아로 갔습니다. 

여부스 사람의 성읍이 이방인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이 레위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름 애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끔찍한 죄도 지은 것입니다. 

이것이 위선적인 신앙이고 형식적인 신앙, 율법주의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합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 영적 함정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경건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이 도착한 기브아에서 기대와는 달리 아무도 집으로 맞아들여 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 그 성에 와 살던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다가 이 레위인을 자기 집에 맞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기브아 사람들이 그 노인의 집에 몰려들어 레위 사람을 끌어내어 성관계를 하겠다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사사 시대는 이처럼 음란하고 동성애가 만연한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사사 시대와 같습니다. 

음란이 세상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음란이 부부가 자는 침대에 들어왔고 자녀들의 손에 들어왔고 친구와 동료들 사이의 대화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동성애 풍조가 만연한 시대가 되었고 우리 자녀들이 동성애를 조장하는 문화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레위 제사장은 자기 첩을 기브아 사람들에게 내 주었습니다. 그에게 이 여인은 그 정도의 가치 밖에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밤새도록 여러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 노인의 집 문 앞에서 쓰러져 죽었는데, 밤새 잠을 자고 일어난 레위 인이 아침에 문을 열고 나와서 쓰러져 있는 첩을 보고 태연히 "일어나라. 이제 가자."(삿 19:28)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이렇게 까지 타락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레위 제사장은 죽은 첩의 시신을 칼로 토막을 내고, 이스라엘 온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자신이 당한 위협과 손해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표출한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 메세지를 받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순식간에 미스바에 모여들었습니다. 아마 이 레위 제사장의 서열이 상당히 높았던 모양입니다. 

토막 여인의 시체를 받아들고 백성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30) 라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두렵습니다. 우리 시대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경고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목회자들과 이 시대에 가정과 일터에서 레위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회개하고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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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제19장


1.  And it came to pass in those days, when there was no king in Israel, that there was a certain Levite sojourning on the side of mount Ephraim, who took to him a concubine out of Bethlehemjudah.

2.  And his concubine played the whore against him, and went away from him unto her father's house to Bethlehemjudah, and was there four whole months.

3.  And her husband arose, and went after her, to speak friendly unto her, and to bring her again, having his servant with him, and a couple of asses: and she brought him into her father's house: and when the father of the damsel saw him, he rejoiced to meet him.

4.  And his father in law, the damsel's father, retained him; and he abode with him three days: so they did eat and drink, and lodged there.

5.  And it came to pass on the fourth day, when they arose early in the morning, that he rose up to depart: and the damsel's father said unto his son in law, Comfort thine heart with a morsel of bread, and afterward go your way.

6.  And they sat down, and did eat and drink both of them together: for the damsel's father had said unto the man, Be content, I pray thee, and tarry all night, and let thine heart be merry.

7.  And when the man rose up to depart, his father in law urged him: therefore he lodged there again.

8.  And he arose early in the morning on the fifth day to depart; and the damsel's father said, Comfort thine heart, I pray thee. And they tarried until afternoon, and they did eat both of them.

9.  And when the man rose up to depart, he, and his concubine, and his servant, his father in law, the damsel's father, said unto him, Behold, now the day draweth toward evening, I pray you tarry all night: behold, the day groweth to an end, lodge here, that thine heart may be merry; and to morrow get you early on your way, that thou mayest go home.

10.  But the man would not tarry that night, but he rose up and departed, and came over against Jebus, which is Jerusalem; and there were with him two asses saddled, his concubine also was with him.

11.  And when they were by Jebus, the day was far spent; and the servant said unto his master, Come, I pray thee, and let us turn in into this city of the Jebusites, and lodge in it.

12.  And his master said unto him, We will not turn aside hither into the city of a stranger, that is not of the children of Israel; we will pass over to Gibeah.

13.  And he said unto his servant, Come, and let us draw near to one of these places to lodge all night, in Gibeah, or in Ramah.

14.  And they passed on and went their way; and the sun went down upon them when they were by Gibeah, which belongeth to Benjamin.

15.  And they turned aside thither, to go in and to lodge in Gibeah: and when he went in, he sat him down in a street of the city: for there was no man that took them into his house to lodging.

16.  And, behold, there came an old man from his work out of the field at even, which was also of mount Ephraim; and he sojourned in Gibeah: but the men of the place were Benjamites.

17.  And when he had lifted up his eyes, he saw a wayfaring man in the street of the city: and the old man said, Whither goest thou? and whence comest thou?

18.  And he said unto him, We are passing from Bethlehemjudah toward the side of mount Ephraim; from thence am I: and I went to Bethlehemjudah, but I am now going to the house of the LORD; and there is no man that receiveth me to house.

19.  Yet there is both straw and provender for our asses; and there is bread and wine also for me, and for thy handmaid, and for the young man which is with thy servants: there is no want of any thing.

20.  And the old man said, Peace be with thee; howsoever let all thy wants lie upon me; only lodge not in the street.

21.  So he brought him into his house, and gave provender unto the asses: and they washed their feet, and did eat and drink.

22.  Now as they were making their hearts merry, behold, the men of the city, certain sons of Belial, beset the house round about, and beat at the door, and spake to the master of the house, the old man, saying, Bring forth the man that came into thine house, that we may know him.

23.  And the man, the master of the house, went out unto them, and said unto them, Nay, my brethren, nay, I pray you, do not so wickedly; seeing that this man is come into mine house, do not this folly.

24.  Behold, here is my daughter a maiden, and his concubine; them I will bring out now, and humble ye them, and do with them what seemeth good unto you: but unto this man do not so vile a thing.

25.  But the men would not hearken to him: so the man took his concubine, and brought her forth unto them; and they knew her, and abused her all the night until the morning: and when the day began to spring, they let her go.

26.  Then came the woman in the dawning of the day, and fell down at the door of the man's house where her lord was, till it was light.

27.  And her lord rose up in the morning, and opened the doors of the house, and went out to go his way: and, behold, the woman his concubine was fallen down at the door of the house, and her hands were upon the threshold.

28.  And he said unto her, Up, and let us be going. But none answered. Then the man took her up upon an ass, and the man rose up, and gat him unto his place.

29.  And when he was come into his house, he took a knife, and laid hold on his concubine, and divided her, together with her bones, into twelve pieces, and sent her into all the coasts of Israel.

30.  And it was so, that all that saw it said, There was no such deed done nor seen from the day that the children of Israel came up out of the land of Egypt unto this day: consider of it, take advice, and speak your mi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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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9장 (개요)

앞으로 남은 3장에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 사람들의 사악한 일을 기록해 놓았다. 그들은 무서운 징벌을 받게 되었으며, 다른 지파 사람들에 의해 거의 전멸되고 말았다. 이 일은 여호수아가 죽은 직후의 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이나 사사가 없었기 때문이며(19:1; 21:25) 그 때에는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이었다. 단 지파 사람들의 우상 숭배, 베냐민 사람들의 음행, 또 그 밖의 죄악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3:7). 또한 여기에는 한 레위인의 첩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이야기가 특별히 언급되어 있다.

1. 한 레위인의 첩이 음행을 저지르고 달아났다(1, 2).

2. 화해하고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레위인은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3).

3. 장인은 그를 환대해 주었다(4-9).

4. 돌아오는 길에 그들 일행은 기브아에서 봉변을 당했다.

   (1) 기브아 사람들은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한 에브라임 사람이 그들을 불러들였다(10-21).

   (2) 기브아 사람들은 그들이 묵고 있는 집을 포위했다(22-24).

   (3) 기브아 사람들은 그의 첩을 능욕해 죽게 했다(25-28).

5. 그는 이 일을 온 이스라엘 지파에게 알렸다(2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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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레위인의 첩(삿 19:1-15)

여기에 나오는 레위인의 가정생활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레위인이 다음과 같은 피해를 입게 된 계기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홀 주교는 이 이야기에 대한 서두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그 나라에는 공적으로 고소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가 없었으므로, 한 레위인이 피해자이며 또한 고소자로서 한 사건을 들고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레위인은 미가의 우상 숭배를 따르는 일에는 적극적이었으나, 기브아 사람의 사악한 행위에 반기를 드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 

레위 사람들보다 더욱 시급하게 통치권이 필요했던 지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기 전체를 통해 이 두 가지 사건 외에는 레위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 사람이었다(1절). 그는 유다 베들레헴의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그녀가 그의 “첩”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남편에게서 재산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는 아직 정착하지 못해 그녀에게 줄 돈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에게 다른 부인이 있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여기서는 그녀를 “첩”이라 부르고 있다(1절). 

그녀는 미가의 집에 있던 레위인과 같은 성읍에서 왔다. 마치 유다 베들레헴은 에브라임 산지에 이중적인 재앙을 가져온 것처럼 되었다. 

즉 미가의 제사장이던 레위인도 그랬거니와 그녀도 레위인의 아내로서는 온당치 못했기 때문이다.

Ⅰ. 이 레위인의 첩은 음행을 저지르고 달아났다(2절). 

시리아역은 그녀가 “그에게 오만해져” 혹은 “그를 경멸하여 행음하였고”, 이에 대해 그가 불쾌히 여기자 “그녀는 그를 떠났다”고 했다. 

그러나 온당치 못하게도 그녀의 아버지의 집에서는 그녀를 받아들이고 환대해 주었다. 

만일 남편이 그녀를 부당히 취급해 집에서 내쫓았다면 분명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괴로움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기 위해 사악하게도 남편을 떠나왔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죄를 묵인해 주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녀가 아버지는 언제나 그녀를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면, 이렇게 무례하게 자기의 의무를 팽개쳐 버리고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들의 지나친 관용으로 자식들의 버릇을 그르치는 수가 허다하다.

Ⅱ. 그 레위인은 직접 아내를 데리러 갔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이나 사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음행한 연고로 처형되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피해를 입은 남편이 그녀와 화해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와서 그녀에게 다정히 말했다(3절). 

만일 그가 그녀를 버렸다면 다시 돌아오도록 요청하는 것은 죄악이 되었을 것이다(렘 3:1). 

그러나 그녀가 도망간 것이라면 그가 이전처럼 그녀와 다시 화목하기 위해 그녀의 잘못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관대하고 간절히 간구한 것은 위로부터 내리는 지혜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다정히” 또는 “온화하게” 타일렀으며(히브리어로는 “내심에 호소했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런 그의 태도로 보아 아마도 그녀는 그가 데리러 왔다는 것을 알고는 잘못을 회개하며 슬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하나님도 음행한 이스라엘인에 대해 “내가 저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리라”(호 2:14)고 말씀하셨다.

Ⅲ. 장인은 그를 매우 반겨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가 그녀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는 특별히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1.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보고 환영했으며”(3절), 3일 동안 그로 하여금 머무르도록 환대해 주었다(4절). 

레위인은 그가 그녀와 완전히 화해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장인의 친절을 받아들였으며, 조금도 그녀나 그녀의 아버지의 잘못을 책하지 않았다. 

그 날은 마치 혼례 첫날처럼 즐겁고 편안하게 지냈다. 모든 사람은, 특히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이렇게 모여 미래에 대한 평온과 행복을 꿈꾸었다. 

그러나 이 모든 그들의 즐거움이 이 3일 후에 슬픔과 재앙으로 바뀔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우리 집안이 번성해 지극한 기쁨에 젖어 있을 때, 또 한편으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곧 어떤 고통이 닥쳐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곁에 어떤 재난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대비하고 있어야 하며,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사 56:12)고 생각해 방심해서는 안 된다.

2. 장인은 진심으로 그의 방문을 환영하는 뜻을 표하며 그가 머무르고 가도록 진지하게 간청했다. 그는 사위에게 애정을 갖고 대했으며 함께 있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

(1) 그러므로 그를 자기의 사위로서, 그리고 그의 집에 뿌리박은 하나의 나뭇가지로서 정중히 대우해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골육지친과 마찬가지로 결혼으로 한 집안 식구가 된 자들에게도 의무와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이 레위인처럼 먼저 친절을 베푼 자는 역시 남에게서 친절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 장인은 그를 하나님의 집의 종인 레위인으로서 경건한 존경심을 품고 대해 주었다. 

그가 이렇게 존경을 받을 만한(그가 존경받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레위인이라면, 그를 머무르도록 간청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배우게 되고 “레위인을 얻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리라”고 기대했다는 것은 퍽 칭찬할 만한 일이다.

① 그녀의 아버지는 넷째 날에도 그에게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이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므로 머무를 수 있는 데까지 함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이 레위인은 갈 길이 급했다. 

선한 사람의 마음은 항상 자기의 일에 몰두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이”(잠 27:8) 그의 자리에서 떠나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하는 일도 없이 오랫동안 밖에 나다니기를 즐기는 자는, 집에서 할 일이 없거나 또는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 피우는 사람들이다. 

특히 이 레위인은 광야에 있는 그의 몇 마리의 양을 돌보기 위해 그의 집으로 서둘러 가고자 했다. 그러나 끈질긴 간청에 의해 그가 예정했던 것보다 더 오래 머물렀던 것이다(5-7절). 우리는 너무 쉽게 권유에 항복해 우리의 의무를 등한히 한다든가 또는 친구의 호의를 무시해 퉁명스럽게 거절해 버린다든가 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피해야겠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친구의 권유로 그가 처음 계획하셨던 것보다 더 오래 머무르셨다(눅 24:28, 29).

② 그는 할 수 없이 다섯째 날의 오후까지 머무르게 되었으며, 이것은 후에 증명되었듯이, 결과적으로 불친절한 일이 되었다(8, 9절). 

장인은 빨리 식사를 준비해 올 테니 식사를 들고 떠나도록 간청했는데, 이것은 하룻밤을 더 묵고 가도록 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18절)에 할 일이 많았으므로, 마음이 조급해져 더 이상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좀 더 일찍 떠났다면 더 좋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실로에 도착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친구들의 다정한 친절이 때로는 이처럼 재난을 초래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즉 우리의 행복을 위해 계획한 것이 때로는 함정이 되어 버린다.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아는가?”(전 6:12) 레위인이 그렇게 늦게 출발한 것은 현명치 못한 처사였다. 

그 전날 떠났든가 아니면 좀더 참고 그 다음 날 떠났더라면 그는 훨씬 편히 집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Ⅳ.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브아라는 곳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으로 후에 “사울의 기브아”라고 불렸으며, 실로와 에브라임 산지로 가는 길 도중에 위치하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오려 하자, 그들은 어디에 머무를 것인지를 생각했다. 밤이 오면 그들은 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기”(요 12:35) 때문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야 하듯이, 이들은 안식처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1. 레위인의 종이 그에게 여부스(후에 예루살렘이 된 곳이다)에 머무를 것을 제안했다. “청컨대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유숙하사이다”(11절). 

만일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서 묵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타락하고 방탕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보다도 더욱 악하고 위험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그 주인은 하룻밤이라도 결코 외인의 성읍에서 지내려 하지 않았다(12절). 

그것은 신변의 안전을 염려했기 때문이 아니라, 될 수 있으면 그들과 접촉을 피하고 그들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이 저주받은 사악한 이방 사람들과 어떤 교제도 갖지 않으려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레위인들은 “이방인들”과 사귀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일행은 베들레헴에서 5~6마일 떨어져 있는 여부스를 지났으나 라마에 도착하기 전에 해가 지므로 기브아에 머무르게 되었다(13-15절). 

거기서 길에 앉아 그들을 재워 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아무도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시 그 곳에는 여관이나 주막집들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 레위인처럼 식량과 그 밖에 필요한 물건을 돈 대신 가지고 다녀야 했으며(19절), 그들이 숙소를 얻는 것은 전적으로 그 곳 주민들의 친절과 호의에 의존해야 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은 아무리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간다 하더라도 돈으로 알맞은 숙소를 얻을 수 있고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그러나 자기 집보다도 더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머무를 수 있는 숙소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이 여행자는 레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레위인을 환대하도록 명하셨다) 기브아에서 냉대를 받았다. 즉 “그를 집으로 영접하는 자가 없었다”(15절). 만일 그들이 그가 레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들은 더욱 그를 꺼려 했을 것이다. 

이런 자들은 심판의 날에 “너희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마 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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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브아에 머무른 일행(삿 19:16-21)

곤경에 처해 있어 그 곳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이 레위인에게 호의를 보여 준 자는 기브아 “안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 사악한 백성들이 날이 어두우므로 그와 그의 첩을 초대하는 것처럼 가장하고서 그들에게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이 도리어 의문이다. 

아마도 이들은 음모를 계획할 만한 재치를 갖고 있지 않았거나 또는 그들을 속일 만큼은 사악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혼자서는 할 수 없으므로 밤이 으슥해 오자 서로 모여 어떻게 처리할까 공모했는지도 모른다. 

혼자서 죄를 행하는 것보다 여럿이서 공모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욱 나쁜 재앙을 초래한다. 

레위인과 그의 아내, 그리고 종이 길에서 밤을 새울까 봐(그것은 마치 사자의 굴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두려워하고 있을 때, 마침내 한 사람이 그들을 초대했다.

Ⅰ. 그들을 초대한 친절한 사람은 누구인가?

1. 그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온 사람으로 단지 기브아에 거하고 있을 뿐이었다(16절).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들은 초라한 여행자들에게 친절히 해 주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조상인 베냐민이 그의 어머니와 여행하는 도중 이 곳 가까이에 있는 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창 35:16, 17). 그러나 그들은 곤경을 당한 여행자에게 냉담했다. 

한편 이 성실한 에브라임 사람은 그들을 동정해 주었고, 그 여행자가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그의 고향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더욱 친절히 대했다. 

기브아 사람보다도 기브아에 단지 체류하고 있던 외지인인 그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동정해 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나그네의 정경을 알기” 때문이었다(출 23:9; 신 10:19). 선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이 세상에 잠시 거하는 나그네라 생각해,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대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더 좋은 나라에 속해 있으며 이 세상은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소멸되어 가고 있던 덕행을 지니고 있던 노인이었다. 

당시 자라나는 세대들은 모두 타락해 있었고, 그나마 미덕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늙거나 죽어 버렸다.

3. 그는 밭에서 일하고 저녁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녁은 수고하는 자들을 집으로 부른다(시 104:23). 

그러나 기브아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는 바로 그 사람뿐이었던 것 같다. 

나머지 사람들은 소돔과 같이 쾌락과 나태에 빠져 있었으며 그들의 악이 또한 소돔에서와 같이 많이 행해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은(겔 16:49) 의심해 볼 여지가 없다. 

낮 동안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한 자는 이렇게 밤에 만난 불쌍한 나그네에게 너그러운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사람들은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해야 한다(엡 4:28). 21절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어느 정도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들에서 그 자신이 손수 일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자라고 해서 게을러야 하는 특권을 누릴 수는 없다.

Ⅱ. 그는 얼마나 관대하고 후하게 그들을 맞아들였는가! 그는 그들이 하룻밤 재워 줄 것을 간청할 때까지 세워 놓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만났을 때(17절), 상황을 묻고 친절하게 영접했다. 이처럼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기 전에 응답해 주신다. 

자비로운 사람은 구태여 도울 일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되며, 그 때마다 남을 돕는다. 여기서 우리는 “선한 눈을 가진” 자(잠 22:9)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기브아를 소돔으로 비유한다면, 이 늙은 사람은 성문에 앉았다가 나그네를 맞아들인 롯(창 19:1)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욥도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행인에게 그의 문을 열어 주었다”(욥 31:32). 다음의 일을 관찰해 보자.

1. 그는 레위인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기꺼이 그들을 신뢰했다. 

사랑은 남을 의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라며(고전 13:7), 다윗에게 인색해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많은 종들을 떠나게 했던” 나발(삼상 25:10)의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레위인 일행은 지금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으며(18절), 자신들이 거기에 머무르게 된 것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만일 기브아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영접하기를 더욱 꺼려 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눅 9:53). 

그러나 이 선한 노인은 그가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가는 길이라는 것을 듣고는 더욱 기뻐하며 많은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종인 이 레위인을 “제자의 이름으로”(마 10:42) 영접했다.

2. 그는 마음을 터놓고 그들을 대접했다. 

레위인 일행은 모든 필요한 물건들을 빠짐없이 가지고 있었지만(19절), 이 관대한 주인은 자기의 물건으로 그를 대접하려 했다.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라”(20절) 하고는, “그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21절).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나 사역자들이 버림받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여러모로 도와주는 친구들을 보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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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브아의 죄악(삿 19:22-30)

Ⅰ. 기브아 사람은 아주 사악한 일을 행했다. 

우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더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이 이렇게 극악한 일을 행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다윗은 “주여, 인간은 어쩌면 이리도 비열한 존재이나이까?” 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통탄했다. 

우리는 기브아 사람의 악행을 읽고 “주여, 자기들의 욕정에 빠져 버린 자는 얼마나 사악한 인간입니까!”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본문에는 악행을 저지른 죄인들을 비류들(벨리알의 아들들, 영문)이라 했다. 즉 그들은 무절제하고 통제를 싫어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마귀(그는 벨리알이기 때문이다)의 자식들이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반역하는 데 마귀와 동조하는 자들이었다. 

베냐민의 자손들에 대해 모세는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신 33:12)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이렇게 악한 비류의 자식들이 되어 정직한 자들을 괴롭혔다. 그들이 괴롭힌 자들은 레위인과 그 아내, 그리고 이들을 대접한 친절한 노인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그네로서 예기치 않은 낯선 사건들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재난이 그들에게 닥쳐왔다고 쓰여져 있다(22절). 

즐거움 그 자체는 순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모든 위안과 즐거움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친구들과 어울려 기뻐하고 있을 그 때에 우리의 대적이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 모르고 있으며, 재난이 우리에게 닥치는 그 순간까지도 그것이 그렇게 가까이 왔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만일 그 즐거움 자체가 죄악이요 방탕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즐거움으로 인해 무절제해지거나 무례해지지 않도록 우리들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즐거움의 끝에는 근심이 있기”(잠 14:13)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웃음을 울음으로, 기쁨을 비애로 바꾸실 수가 있다. 그러면 이제 이 베냐민 사람들이 얼마나 사악한 일을 저질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기브아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서 조용히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읍을 축복되고 영예롭게 하는 이 정직한 노인의 집을 밤중에 습격해 오만하고 거친 행동을 취했다. 

이 비류들은 그 집을 포위했고 안에 있는 사람을 위협하기 위해 문을 힘껏 두드렸다(22절). 집은 우리들 각자의 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안전하고 편안히 거할 수 있어야 하며, 법이 있는 한 우리의 가정은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들을 이 악한 자들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킬 수가 없었다.

2. 기브아 사람들은 단지 하룻밤 숙소를 얻기 위해 성읍으로 들어온 이 나그네들에 대해 특별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모든 예의 바른 백성들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을 냉대했으며 이에 대해 그 집주인은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23절) 무례한 짓을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의지할 곳 없는 자를 짓밟고 악을 모르는 나그네를 괴롭히는 자들은 정말 천하고 비열한 인간이다.

3. 기브아 사람들은 가장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태도(그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두려움이나 증오는 느끼지 않고 있었다)로 레위인을 모욕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레위인이 젊고 잘생긴 남자라는 것을 이미 살펴보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우리가 그를 알 수 있도록 그를 끌어내라”고 우겼다. 

이런 태도로 보아 단지 낯선 나그네들이 어디서 왔으며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 무리지어 몰려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선량한 그 집주인은 무리들의 속셈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모세가 “가증한 일”이라고 지적하며 율법에서 특별히 금해 놓은(레 18:22) 짐승의 욕정보다 더욱 사악하고 그릇된 일을 행하려고 한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는 그들에게 애원했다. 이런 죄를 범하는 자를 가장 극악하고 사악한 죄인들로 들어 신약성경에 열거해 놓고 있으며(딤전 1:10),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전 6:9)고 지적하고 있다.

(1) 이런 죄는 소돔의 죄(sodomy: 男色)라고 불리고 있다. 

소돔 사람이 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고 이로 인해 사해(死海)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 사해는 가나안의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기브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기브아 사람들은 자주 이 곳을 지나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기서 주는 어떤 경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돔보다 더 악하게(겔 16:48) 행했고 그들과 “같은 죄를 지었다”(롬 5:14). 

홀 주교의 말대로 야곱의 자손이 이렇게 추악한 죄를 범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가장 악한 우상 숭배자조차도 그들에 비하면 성자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쳐 놓고서 마귀를 그들 마음에 받아들이고 길거리에서는 남색을 행하면서, 그들이 실로에 하나님의 집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옥이라도 타락한 이스라엘보다는 나을 것이다.

(2) 이 같은 타락은 그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처벌이었고 그들은 무엇보다도 이 우상 숭배에 매우 집착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사악한 길로 빠졌고,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고 하나님을 욕되게 했듯이, 그들 자신도 서로 욕되게 했다(롬 1:24, 2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알 수 있으며, 거기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이 벨리알의 아들들을 소돔 사람들처럼 눈멀게 하시지 않았는가? 왜 하늘에서 그 성읍에 유황불을 쏟아지게 하시지 않았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칼로 그들을 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후에 하나님께서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도록”(유 1:7) 남겨 두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4. 기브아 사람들은 그 노인의 비난과 간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23, 24절). 

그 노인은 소돔과 롯의 이야기에서 롯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9장 6-8절의 내용과 비교해 보라. 그는 롯과 같이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고 공손히 말했으며, 그의 집에 온 손님들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고 간청했다. 또한 그는 그들의 계획이 사악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런 악한 일을 행하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는 또한 그것을 “망령된 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 롯과 너무나 일치하고 있다(우리는 훌륭한 사람들의 일이라면 잘못된 일까지도 모방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그는 그들의 욕정을 채워 주기 위해 자기의 딸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롯은 그의 딸을 매음시킬 권리도 없었으며, 결과가 선하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악한 일을 행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노인의 나약한 제안은 한편으로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였으며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먼저 염려한 나머지 깊이 숙고할 시간이 없어서였다고 생각하면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가 이렇게까지 제안하면, 비류들은 자기들의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있는 기생들에게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리가 듣지 아니하였다”(25절). 강한 욕정은 귀마개와 같이 우리의 귀를 멀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양심을 무디게 하고 마비시킨다.

5. 기브아 사람들은 거기에 있는 레위인의 아내를 취해 그녀를 욕보여 죽게 했다(25절). 

무리들은 그 노인이 자기 딸을 그들의 정욕을 위해 바치겠다는 의견을 묵살해 버렸는데, 그것은 아마 그녀가 아름답지 못한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그녀가 매우 정숙하고 품위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위인이 그의 첩을 무리에게 데려다 주었을 때, 그들은 그녀를 억지로 끌고서 욕보이기에 적합한 곳으로 갔다. 

요세푸스가 이 이야기에 대해 해설해 놓은 내용에 의하면, 기브온 사람들이 이 집을 포위한 의도는 레위인을 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녀를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레위인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를 보고서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으며, 그녀 역시 남편과 화해했다 하더라도 그리 단정하게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방종한 몸가짐이나 행동으로 이런 재난을 겪게 되는 수가 많다. 작은 불씨가 큰 화재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이 레위인이 그들을 쫓아가 그의 아내가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야 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 자신마저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감히 가려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통해 우리는 그녀의 남편을 떠나 음행을 저질렀던(2절) 그녀의 예전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손을 볼 수 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환대해 주었고 그녀의 남편 역시 그녀를 용서해 주어 그녀의 죄가 잊혀진 듯 생각되었지만, 하나님은 죄를 기억하시어 이 사악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욕보여 고통을 겪게 하셨다. 무리들이 그녀를 다룬 것은 매우 의롭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그 일 전체를 통해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 

그녀의 죄는 값을 받았다. “욕정은 그녀의 죄였으며 또한 그녀의 형벌이었다”(Culpa libido fuit, poena libido fuit).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그녀는 음행을 한 연고로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람의 형벌은 피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형벌은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을지라도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못을 행하고서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는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사죄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이 보는 것같이 그 일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이 때로 그러는 것처럼 죄를 가볍게 다루시지 않는다. 

이 일에 있어서도 의로우신 하나님은 기브아 사람들의 악한 행위를 결코 소홀히 보시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이들의 악행보다 더 야비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없었다.

Ⅱ. 기브아 사람들의 사악한 행위는 온 이스라엘 지파에 알려졌다. 

날이 밝아 비류들이 그녀를 되돌려 보냈을 때(악한 일은 빛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가련한 여인은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려 했다(25절). 

그녀는 예전에 저질렀던 죄를 회개해 용서를 비는 듯한 자세로 문턱에 손을 얹고 얼굴을 땅에 댄 채 쓰러져 죽었다. 

레위인은 그녀를 그 곳에서 발견하고(26, 27절) 그녀가 아직 잠들어 있거나 아니면 그녀가 당한 수치와 혼란 때문에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처음엔 생각했으나, 곧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28절). 아마도 그녀의 몸은 손자국과 매자국으로 멍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슬픈 일을 당해 그는 실로로 가는 것을 보류하고 바로 집으로 갔다. 

희망에 차서 집을 나섰던 그는 우울과 실의에 젖어 돌아왔고 “이 일을 묵인할 수 있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소돔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았던 사자들처럼, 기브아 사람을 태워 죽일 불을 하늘에 요구할 수도 없었다.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고 억울한 일을 공평하게 해 줄 만한 평의회나 큰 협의체 같은 것도 없었던 것 같다.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있긴 했지만, 그는 너무 성전의 일에 매여 있어서 이런 재판관의 일은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레위인은 백성들에게 그의 억울한 일을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즉 회중이 그의 일을 재판해 주어야 했다. 

비록 모든 지파가 모이는 정치적인 회합은 아직 없었지만, 각 지파의 우두머리끼리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그가 당한 참상을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게 하고 그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아내의 시체를 조각내어(29절), 특별한 전달인을 각 지파에 보내어 탄원하게 했다. 

그가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로 나누어 각 지파에 보냈을 때, 베냐민 지파에도 역시 보냈는데 그것은 그들 가운데 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지파에 속한 사람이 이런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해 더욱 격분해 그렇게 사악한 사람을 벌하는 데 동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비참하게 욕보여진 시체를 조용히 묻지 않고 이렇게 조각을 냈다는 것은 매우 잔인하게 보였으나, 이 레위인의 의도는 확실한 물증을 보임으로써 그들이 행한 극악한 일을 알릴 뿐만 아니라 그의 지극한 고통을 드러내 각 지파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의도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 시체를 본 모든 사람은 그 일이 행해진 데 대해 놀라며 한결 같은 분노를 표했다.

1. 기브아 사람들은 그 사악한 일을 자기 지파 사람이 행했다는 것을 알고 죄의식을 느꼈다. 

이와 같은 일은 전에 이스라엘에서 저질러진 적이 없었다(30절). 

그것은 매우 중한 죄로써 모든 사람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이 죄를 보고는 조롱하지도 않았으며, 이 일을 가볍게 농담으로 넘겨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2. 이 사악한 일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총회가 열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극악한 일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경고를 가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이스라엘 지파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일은 결코 예사로운 죄악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며 서로 모여 논의했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중대한 일을 맡은 자는 회합의 자리에 참석하기 전에 해야 할 세 가지 큰 일이 있다.

(1) 의견을 발표하기 전에 그 자신이 혼자 충분히, 공명정대히 생각해 보고 또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도 신중하고 조용히, 그리고 어떤 편견 없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2) 자기의 생각을 충분히 발표하고 친구들의 의견과 이론을 들은 후 그것을 다시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

(3) 모든 사람의 의견을 말하게 한 후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투표를 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모든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안전하다.

======호크마====

=====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 17:6 및 18:1과 유사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때에'라고 한 것은 본장의 배경이 17, 18장과 동일한 시대임을 암시해 준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이미 왕정 제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점으로 보아 본장의 사건을기록하던 시기는 사사기 시대 이후로 상당 기간이 지난 때임을 알 수 있다(Goslinga).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 전장(前章)에 이어 본장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레위인이란 점은 당시 극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한편 여기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 실로(Shiloh)의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Keil). 그런데 레위인이 그곳에 '우거'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레위인도 전장(前章)에 나오는 게르손의 아들인 요나단(18:30)처럼 에브라임 산지를 떠도는 나그네였음이 틀림없다(Pulpit Commentary).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 17:7에 나오는 레위 소년도 유다 베들레헴에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그곳에는 레위인들의 거주지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이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했는데, 고대 사회에서 첩을 취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첩 때문에 기드온의 가정이 파멸된 것처럼(8:31) 본장에서도 이 레위인이 첩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창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을 참조하라.

=====19: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 여기서 '행음하다'에 해당되는 원어 '자나'(* )는 주로 창기와 같은 직업적인 음란 행위나 또는 그와 같은 성향의 행음(行淫)을 가리킨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는 '자나'뒤에 '그에게 대항하여'라는 뜻의 전치사'알라이우'(* )가 있어서 이 여인이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그같은 행음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아마 이 레위인이 먼저 동일한 행음을 범하므로서 자기 첩으로 하여금그렇게 행음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Moore).다음으로 여기서 '남편을 떠나'라는 말은 그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양자 간에 불화(不和)하여 서로 헤어진 것을 가리킨다(Cassel). 한편 레 21:7에 따르면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인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못하도록 엄격하케 규정되어 있다.그런데도 이 레위인이 이같이 행한 것은 당시의 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19:3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맡하고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녀의 마음에 말하고'이다. 이것은 레위인이 진정으로 그녀와 다시 화해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Wycliffe). 한편 율법상으로 살인죄(민 35:31), 간음죄(레 20:10) 부모를 치는 죄(출 21:15) 등은 어떠한 제믈로도 속(贖)할 수 없다.

그런데도 본문의 레위인은 자기 첩이 넉 달 동안(2절)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오히려 그녀를 연모하므로 다시 그녀를 데려오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거의 무시되고 있어 사회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음이 분명하다(Matthew Henry).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 나귀 두 필 중에 한필은 그의 첩을 태워 데리고 오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그 여자가 다시금 남편을 따라 나서게 된 것도 그 같은 남편의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동해서였을 것이다(Hervey).

=====19:4

그 첩 장인 곧 여자가 아비의 그를 머물리매 - 여기서 '머물리다'에 해당하는 '하자크'(* )는 붙잡다', 제지하다'는 뜻으로 강권(强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레위인의 장인은 금방 그를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강권하여 몇 일 처가댁에 머물도록종용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집에 머물도록 권하는 것은 대단한 예우이며 친절의 표시이다(창 18:5). 이로 볼 때 레위인은 처와 화해하는 일 뿐만 아니라 장인의 사랑을 얻는 데도 성공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삼일 동안 그녀와 함께 먹고 마시며 편히 쉴 수 있었다.

=====19:5

그대의 기력을 도운 후에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당신의 마음을 쾌활케 한 후에'가 된다(창18:5). 여기서 `쾌활케 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세아드'(* )는`(마음을) 신선케 하다'라는 뜻의 동사 `사아드'(* )의 명령형으로서, 여기에는 강한 권고의 뜻이 담겨 있다. 한편 고대 근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부를 데려올 때 일정 기간 동안 처가댁에서 머문 후에 데려오는 풍습이 있었다(창24:55). 따라서 레위인의 장인이 어떻게든 레위인을 그의 집에서 하루라도 더 유숙케 하려 한 것은 아마 이같은 풍습에서였을 것이다.

=====19: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 이처럼 레위인의 장인이 그를 떠나지 못하게하고 연일 잔치를 베푸는 이면(裏面)에는 사위에게 자기 딸을 부탁하는 당부의 마음이크게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과년한 딸이 아비의 집에 계속 머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근심거리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레위인의 첩은 행음하고서 남편과헤어진 상태였으니(2절) 그 아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 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장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위가 자기 딸을 버리지 아니하고 잘 살아주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19:7

그 사람이...다시 유숙하더니 - 레위인 장인의 과민한 노파심과 레위인의 우유 부단한 성격을 보여 주고있는 구절이다. 즉 레위인의 장인은 아직도 자신이 사위의 환심을 살 정도로충분히 대접치 못하였다고 생각하였기에 계속사위를 집에 머물게 하려했을 것이다. 반면 레위인은 장인의 호의틀 떨쳐 버릴 정도로 심지(心志)가 굳지 못하였기 때문예 계속 장인에게 이끌림 당했을 것이다.

=====19:8

일찌기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해가 기울도톡 머물라 - 여기서 `해가 기울도록'이란 말은 `한낮이 지나도록'이라는 뜻이다(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Vol.2,p.443). 대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고 아침 일찍이 떠나는 법이다. 그런데도 레위인의 장인은 낮 동안 층분히 휴식한 후 오후에 길을 떠나라고 말한다. 추측컨대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베들레헴에서 래위인이 거주하는 에브라임 산지 까지는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늦게 출발해도 괜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19:9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 오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레위인은 그의 장인과 먹고 마시는 동안 그만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밤이 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라 - 문자적 뜻은 `장막으로 돌아가라'이다. 한편 `장막`(Tent)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이다(20:8;왕상 12:16).

=====19:10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아니하여 일어나 떠나서 - 이처럼 레위인이 밤중에라도 집으로 돌아가려 한 것은 아마 그 다음날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종교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였으므로 안식일에는 성소에서 봉사하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Lang).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 여기서`여부스 맞은편'은 예루살렘의 서쪽을 가리킨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까지는 걸어서 약 1시간 반 거리이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세겜 쪽의 에브라임 산지로 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서쪽에 있는 도로를 반드시 지나야 한다. 한편 여부스(Jebus)라는 이름은 여부스 족이 다욋 시대까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삼하5:6).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11:4-9 강해, `예루살렘'을 참조하라.

=====19:11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 레위인 일행이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렀을 때이미 날이 어둑어둑 해졌다. 그러자 레위인의 종은 이처럼 레위인에게 여부스 사람의성읍에 들어가 밤을 지내자고 간청한다. 왜냐하면 밤 에는 들짐승이나 도적때의 공격을 받기가 쉬우므로 더이상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인은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부터 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종의 청을 거부했다.

=====19:12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 -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가나안을정복 하였지만 아직 미 정복지가 남아 있었듯이(1:19-21,27-36) 예루살렘 역시 다윗시대까지 가나안 후기 원주민인 여부스족(Jebusites)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던 것을 일컫는 말이다. 1:21 주석참조.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 기브아(Gibeah)는 예루살렴 북쪽 약6.4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베냐민 지파의 지경이다(수 18:28).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삼상 10:26).

=====19:13

라마 -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약 3.2km 가량 떨어진 곳(수 18:25). 현재의 엘람(er-Ram)으로서, 과거 여사사 드보라의 고향이자(4:5)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이기도 했다(삼상 7:17).

=====19:14

해가 진지라 - 레위인 일행이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해가 완전히 져버려 더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라마까지 가지 못하고 베냐민 땅 기브아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19:15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 레위인 일행이 앉아 있던 거리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공회(公會)를 열거나 재판을 행하기도 하며 장사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 창 19:1 주석 참조.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 레위인 일행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들을 환대하는 기본적인 예절을 보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는 것은 기브아 사람들의 성품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보여준다(창18:3-8;19:2,3; 마25:43;벧전4:9). 즉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것이 율법의가르침 이었는데도(신10:19) 그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레위인과 그의 첩과 하인은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에서 머물기를 마다하고 이스라엘사람들이 사는 성읍까지 오면서 가졌던 기대를 한꺼번에 잊어버리고 낙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Wycliffe).

=====19:16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레위인 일행에게 친절을 베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 한사람을 소개하면서, 기브아 성읍에는 타지(他地)에서 온 이 한 사람 외에는 정직한 사람이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거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 )는 '나그네(손님)로서 체류(거주)하다'는 뜻의 '구르'(* )에서 온 말로, 타지에서 온 사람을 가리킨다.

=====19:17,18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 노인이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때 레위인은 이처럼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중'이라고 대답을 했다. 

당시 `여호와의 집` 즉`회막'은 실로에 있었다(수 18:1;삼상4:3,4). 그런데 실로는 레위인의 집이 있던 에브라임산지(1절)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본절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학자간에 서로 견해가 다르다. 먼저 혹자는 본절을`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그의 첩과 화해하였기 때문에 화목제를 드리러 실제로 `여호와의 집'으로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한다(Cundall). 반면, 또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단지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Cassel). 그런데 70인역(LXX)에서는 이를 `나의 집으로'로 번역하고 있어서 카일(Keil)의 주장이 옳음을 반증해 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위인이 `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간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의도를 가졌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레위인 일행은 그 노인으로부터 크게 환대를 받았었기 매문이다(19, 20절).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 여기서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사프'(* )는 `받아들이다'는 뜻으로. 가벼운 선심을 쓰거나 계산에 의거하여 일정한 혜택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뜨거운 마음으로 열렬히 환영하는 것'을 가리키는 `카라'(* )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로 보아 레위인 일행은 기브아에서 숙박비를제공하려 해도 유숙할 장소를 얻지못했던 것 같다(15절).

=====19:19

우리에게는...부족함이 없나이다 - 레위인은 노인이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도륵 하기 위하여 나귀 두 마리와 자신과 자기 첩과 종이 먹을 양식과 짚은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말 속에는 기브아 사람들에게 단지 하룻밤 묵고 갈 숙소만을 요구했는데도 그들이 받아주지 일았다는 탄식이 내포되어 있다(Pulpit Commentary).

=====19:20

그대는 안심하라 - 이 노인은 레위인의 염려를 이해하고 안심시켰다. 여기서 `안심하라'에 해당하는 원어는 `솰롬'(* )으로서, 평안을 기원하는 히브리인의 인사이다. 

이러한 히브리 인사에서 우리는 지난날 애굽의 종살이나 광야의 방황생활 중에서히브리인이 얼마나 평안을 희구(希求)했는지를 알 수있다.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 옛부터 거리에 앉아 있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가 후히 대접하는 것이 히브리인의 관습이었다(창18:1-8;19:1-3). 만일 그렇지 않을때는 공회 앞에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신10:19;욥 31:32). 따라서 그 노인은 전통적 관습대로 나그네가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상관없이 자기 양식으로 그들을 대접하려고 했던 것이다.

=====19:21

이 노인은 레위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귀도 잘먹였다. 이는 곧 그가 진정한 마음으로 나그네들을 사랑하고 대접하였음을 잘 드러내준다.

발을 씻고 - 고대 근동에서는 여행자들이 주로 샌달을 신고 흙먼지 길을 다녔다.그러므로 손님을 영접하는 주인은 반드시 발씻을 물을 내어놓는 것이 예의였다(창18:4;24:32;43:24;요13:5-14).

=====19:22

레위인과 노인의 만남(16:21절)을 다룬 본장의 이야기는 룻이 소돔 성에서 천사를만난 이야기(창 19장)와 유사하다. 특히 본문22-24에 기록된 기사는 창19:4-8절의 기사와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혹자는 본서 기자가 창9장의 기사를 인용하여 본문 속에삽입한 것(interpolation)이라고도 주장한다.(Wellhausen). 그러나 전후 문맥이 엄연히 다를 뿐 아니라 또한 시대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으므로 본문의사건을 결코 삽입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Cassel).

그 성읍의 비류들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베네 벨리알'(* )로서 `벨리알의 자손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벨리알'은 `무익한', `무가치한'이라는 뜻의 형용사로서 주로 사람과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삼상 1:16에서는 `악한 여자'로, 삼상25:25에서는 `불량한 사람', 삼하 16:7에서는`비루한 자'로각기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 벨리알을 사단이나 거짓 예언자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 여기서 `두들기며'에 해당되는 원어 `미테두페킴'(* )은 강조행 동사로 `스스로 흥분하여 매우 세게 문을 두드리는'모습를 묘사한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이렇게도 번역했다. "그 비류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갈 모양으로 문에 달려들어 두들기고 있었다"(G. R. Driver). 이와 같이 기브아 비류들이 온건한 태도로서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레위인을 끌어내리려 했기 때문에 집주인은 문을 열고 그들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23,24절). 그런데도 그들은 이를 듣지 않았는데(25절), 이런 일이 후에 기브아와 통치자들에 의해 어떠한 정죄함이나 책벌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브아 성읍 백성들 전체가 암묵적으로 이 일에 동참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 여기서 `상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 )는분명 `성 관계를 가지다'는 뜻이다. 즉 기브아 비류들은 레위인을 끌어내어 남색(男色)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소돔 사건의 재현인 둣한 인상을 준다. 과거 소돔인들의음란한 행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멸망을 초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사해(死海)가 형성되었다(창 19:4-26). 한편 이 사해는 기브아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기브아 사람들은 자주 그곳을 지나다녔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아무런 경고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소돔보다더 악하게 행하려 하였던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2, p.239).

=====19:23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하네발라'(* ) 역시 남색(sodomy)과 같이 수치스러운일(창 19:5,7)이나 비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창 34:7;신 22:21)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로 성적범죄를 지칭한다(삼하 13:12).

=====19:24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있은즉 - 노인은 기브아의 비류들이 워낙 완악하여 말로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자기 딸과그 레위인의 첩올 그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말했다.이는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를 잘 반영해 주는 실례이다. 당시에는 남성의 권위로 말미암아 여성이학대받거나 능욕을 당한다 해도 여성은 말없이 순종하여야 했다(11:39,40). 그러나 노인이 취한 방책은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 즉 하나의 악을 막기 위해 또다른 악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진정하나님의 공의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상황논리에 급급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며 끝까지 비류들을 대항했어야 옳았던 것이다.

=====19: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 자신의딸을 내어 놓겠다는 노인의 제안은 비류들에 의해거절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같은 경내(境內)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는 해를 끼치려 하지않은 것 같다. 아니면 그들은 남녀간의 성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비정상적인남색(男色) 행위에만 관심을 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레 18:1-5 강해, `성경에나타난 성범죄의 이해'를 참조하라.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그사람'은노인을 가리킨다고 본다(Keil, Goslinga).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여기서 `그사람'이란 분명히 `그 레위인'을 가리킨다. 그 레위인은 노인의 제안이 거절 되는 것을 보고 그들이요구하는 것이 자신과 자기의 첩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은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즉 비록 사랑을 고백하며 설득하여 장인에게 데려온아내 였지만 (3-10절) 이 레위인은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를 비류들에게 내어주고말았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들의 극한적인 이기주의 성향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반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사랑은 없을 것이라고 교훈 하셨다(요15:13).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 기브아 비류들이 요구 한것은 레위인의 첩이아니라 레위인 이었다(22절).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그의 첩에게만 행음하고 만족하였는지 의문시된다. 아마 그 비류들은 그의가 첩의 뛰어난 미모에 만족하였을 지도 모른다(Cassel).

욕보이다가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알랄'(* )은 `지나치게 하다' `철저히 실행하다'는 뜻이다. Living Bible은 이를 `교대로 겁탈했다'(taking turns raping her)로번역 하고 있다.

=====19:26

그 주인의 우거한...문에 이르러 - 밤새도록 비류들에게 욕을당한 그 첩은 거의 초죽음이 된 자신의 육신을 끌고 가까스로 자신의 남편이 있는 집 문 앞에까지 기어와서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비록 이 여인이 남편에대한 분노 때문에 행음하였으나(2절주석 참조),여기서 볼 때 그녀가 그 레위인보다 더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였음을 알 수있다. 즉 비록 자신을 내어버린 남편이지만 그 여인은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이같이 사력을 다했던 것이다(Hervey).

=====19:27

그의 주인이 일찌기 일어나 -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내어 몰았던 이 비정한 레위인은 간밤에 당한 공포스런 일을 생각하며 일찌기 그 성읍을 떠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의 행방이나 생사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최소한의 관심 조차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이 레위인에게는 그의 첩에 대한 육적인 사랑은 있었을지 모르나 진정한 사랑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앞서 그의 장인이 계속해서 떠나려는 이 레위인 사위로 하여금 자기 집에 하루라도 더 묵도륵 한 것도 아마 자기 딸에 대한 이 레위인 사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8절).

그 두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 새벽 미명에 홀로 도주하려고 허겁지겁 하던레위인은 그의 아내가 엎드러져 그 두 손을 문지방에 올려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문지방에 손을 올려 놓는 행위는 당시 고대 근동의 미신적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즉 당시 가나안 인들은 문지방 밑에 그 집안 사람들을 보호하는 여러 종류의 귀신들이살고 있다고 믿었었다. 따라서 이런 미신을 잘알고 있던 레위인의 첩은 거의 초죽음이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잡는 심정으로, 두 손을 문지방 위에 올려놓으면서 자신이 소생(蘇生)하기를 바랬을것이다. 삼상 5:4 주석 참조.

=====19:28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 레위인은 눈으로 보아 그의 아내가 죽은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아내와 동일한 미신적 사고 방식에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깨웠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가 비참한 모습으로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에 블타 자기 아내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

=====19:29

그 마디를 찍어 열 두 덩이에 나누고 - 집에 도착한 레위인은 즉시 아내의 시신을각을 뜨듯이 열 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냈다. 이같이 시체를 절단하여 지파들에게 보내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온이스라엘 앞에 공개하며 응당한 징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Keil and delizsch). 사울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소 한 겨리를 각을 떠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성을 촉구한 적이 있다(삼상 11:7). 이와같이 이것은 당시 중앙 통제 기구가 없었던 시절에 본문과 같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즉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고대그리이스에서 볼 수 있었던 인보 동맹(隣保同盟)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지파 간의 결속이 해이해지고 중앙 통제 기구가 결여된 상태였기 때문에본문의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고소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따라서 그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12등분하여 각 지파에게 보내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류들의 죄상을 강력히고발하고 전 민족적 차원의 징계를 호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의 이같은 끔찍스러운 행동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저버리는 죄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허물에 대한 적개심에만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마7:3-5).

=====19: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 레위인이 전한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는 전이스라엘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이런 엄청난 죄악은 소돔 성에서 일어난 사건(창19장)과유사 하였기에 더욱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에 보다 신중하고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의 총회(總會)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상의한 후에 말하자 - 혹자는 이 구절을 레위인이 이스라엘 각 지파에 사자들을 보낼 때 그 사자들이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같은 해석은 본문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본절은 어디까지나 레위인의 사자들에게서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말로 보아야 한다. 한편 여기서 '말하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베루'(* )는 복수 명령형으로서 권고의 뜻이 있다. 그리고 이것의 원형 동사 '다바르'(* )의 기본 의미는 '말하다'이지만 파생적인 의미로 종종 '파괴하다','인도하다'라는, '심판'의 뜻도 가진다. 따라서 여기서의 '말하자'는 베냐민 사람에 대한 거국적차원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무튼 기브아 사람들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회개 운동을 일키지 않으면 안되었다(20장). 훗날 선지자호세아가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를 타락의 극치로 까지 들고 있는 것을 볼때(호9:9;10:9) 기브아 사람들의 행악의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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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으로써 미가의 우상과 돤련된 이야기는 끝나고 이제 본장에서부터 21장까지는 레위인의 첩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내분(內紛) 사건이 언급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본장은 발단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레위인과 그의 음행한 첩에 관련된 이야기가 소개된다(1-15절). 

그리고 기브아 비류(匪類)들이 레위인의 첩을 윤간(輪姦), 첩이 죽게 되자 이스라엘 지파간의 내분에 도화선이 당겨지게 됨을 언급한다(16-30절).

 전장(17, 18장)에 기록된 미가의 이야기와 이러한 본장의 이야기는 연대적으로는 직접적으로 연속되지 않으나 내용상, 주제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연결점이 있다. 

(1) 두 사건이 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1절 ; 17:6 ; 18:1)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전반적으로 만연되어 있었던 타락상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2) 두 사건이 다 레위인과 연관된 타락의 일면이라는 점이다. (3) 두 사건이 모두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레위인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이다(1절 ; 17:1). 

아마 이러한 연관성으로 인하여 본서 기자는 이 두 사건이 서로 시차(時差)를 두고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란하게 기록하였을 것이다.

 한편 본장에 기록된 사건은 시대 초기(사사 옷니엘의 활동 당시로 추정됨)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이때엔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20:28). 2장에서 이미 사사기 시대 전반에 걸쳐 펼쳐질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에 대하여 암시된 바가 있으나(2:7, 11-15) 결국 본장은 그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함으로써 타락의 심각성을 지적해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특히 본서 기자가 사사기 초기에 발생한 본장의 사건을 본서의 맨 끝에 배치한 것은 사사기 시대 전체가 이러한 부패한 양상들로 전개되었음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부패한 사건의 책임의 절반은 여호와의 신앙으로 전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야 할 레위인에게 있었다는 점(1절)은 사태의 심각성을 한층 고조시켜 준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神政) 시대에 그분의 백성들은 거의 모든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고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악으로 물들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출애굽 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인들이 섬기는 우상과 그들의 도덕과 관습을 그대로 비판없이 수용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결 의무(출 19:5, 6 ; 20:1-17)를 저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인 레위인들조차도 가나안의 풍습에 따라 행하는 범죄가 무감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백성들에게 새롭고 독특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법도 도덕과 삶의 체계를 교육시켜야 할 당위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시야 53:6의 말씀은 아주 적절하다. "우리는 다 양 같아고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2) 따라서 본장 초두에서도 암시되고 있는 것과 같은 왕정 제도(1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의 백성으로서 바로 살게끔 교육하는데 적절한 장치로서 도입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18:1-10 강해, 이스라엘 왕정 제도의 필요성과 부정성(不正性>. 한편 선지자 호세아는 사사기 시대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한 전초기로서 사사기 시대를 거친 백성들이 그제서야 비로소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고 말했다. 

여기서 '그 왕 다윗'은 본서 기자가 17:6과 18:1, 그리고 본장 1절에서 희구한 '왕'의 표본이며 다윗이 다스리던 나라도 그 당시에 희구하던 이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1. 도망간 레위인의 첩(19:1-15)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레위인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 레위인이 본처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다만 그의 첩과의 삶이 소개되고 있다.

 본문에서 두 등장 인물이 레위인과 첩이라는 데서부터 이미 긍,가 파생적인 가장 구조가 암시되고 있지만(1절) 그 첩이 다른 남자와 행음한 뒤 남편에게서 달아났다는 사실(2절)에서 이 레위인은 대단히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친정으로 달아난 첩이 무려 넉 달 동안이나 머물 수 있었다는 사실(2절)에서 이 첩이 레위인의 아내로서 온당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첩의 아버지, 즉 그의 장인도 정상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하에서 레위인은 장인 집으로 찾아가 며칠을 머문뒤 첩과 함께 귀가 길에 오른다(3-10절). 

그리고 도중에 날이 저물자 여부스족의 성읍인 예루살렘에서 유숙자는 그의 종의 간청을 뿌리치고 자스라엘 백성이 사는 기브아 성읍에까지 힘들게 여행한다(10-14절). 

그러나 그곳에서 아무도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맞이하는 사람이 없는 어려움에 봉착한다(15절). 

이는 곧 당시 도덕적 붕괴가 한 레위인의 가정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며 전체 민족에 만연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한 가정의 삶은 당대의 전체 사회적인 삶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을 중요시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이다. 따라서 건전한 가정이 있는 사회는 그만큼 더 건전하기 마련이다. 신약 시대에도 가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이와 관련 사도 바울은 특히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는 단정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하낟고 교훈하였다(딤전 3:12).

 (2) 올바른 가정 교육이 시행되지 않은 한 건전한 가정의 존립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넉 달 동안이나 친정에 돌아와 있어도(2절) 한번도 딸을 책망하지 않고 시댁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지 않은 레위인 첩의 아버지는 가정 교육에 실패한 대표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잘못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책망하기 보다는 지나친 관용으로 방임해 두었기 때문에 그의 딸은 자신의 가정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배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경멸하는 어리석은 아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3) 한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의 건재(建在)는 도덕성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이다(신 1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브아 사람들은 이 레위인 일행을 냉대하므로 그들의 도덕성의 실상을 드러냈다(15절). 예수님께서는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는 기본적인 윤리조차 없는 자들을 저주하셨다(마 25:43). 이러한 윤리의 부재(不在)가 이방인인 여부스 사람들(10-12절)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인 기브아 사람들에 의해 드러났다는 점에서 당시대의 타락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가정 윤리의 성서적 기초 - 성경에서 가르치는 가정 윤리의 기본 지침은 우선적으로 일부 일처제(一夫一妻制)에서 시작된다. 즉 가정은 한 남자가 그의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때 비로소 성립된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창 1;27 ; 2:24 ; 5:21). 그리고 계속해서 남편은 다스리는 자(창 3:16)로서, 그리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할 자(출 20:12 ; 신 5:16)로서 언급되어 있다.

 한편 신양 성경에서는 구약에 비해 보다 엄격한 가정 윤리가 제시되고 있다(골 3:18-21 ; 엡 5:22, 23).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허락한 이혼은(신 24:1-3)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일 뿐이니, 보다 수준 높은 윤리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셨다(마 5:27-32 ; 19:1-12). 

이러한 성경의 가정 윤리를 생각해 볼 때 부당하게 첩을 거느리거나<창 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 간음함으로 가정을 파괴하는 본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행위는 반드시 지탄받아야 마땅하다(1, 2절). 

사실 가정은 단순히 개인의 인간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고 그리하여 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근간을 이루는 가장 신성한 삶의 터로서 마땅히 책임과 의무를 다해 지켜야 하는 것이 곧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 윤리가 이 땅에 정착될 때 그곳에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사회가 형성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흥왕할 것이다.

 2. 기브아 비류(匪類)의 죄악(19:16-30)

 마침내 레위인이 당한 비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어렵게 기브아에 도착하였으나 유숙지를 얻지 못하고 있던 레위인과 그 일행(10-15절)은 우연히 같은 고향의 노인을 만나 그의 집으로 인도된다(16-21절). 

그런데 그날 밤 기브아 비류둘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니 그로 인해 레위인 첩이 윤간(輪姦) 당하여 죽고 마는 비극이 발생한다(22-26절). 

이에 레위인은 고향으러 돌아와서 첩의 시신을 열 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어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을 고발한다(27-30절).

 이상과 같은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은 마치 소돔 사건의 재현인 듯한 인상을 준다(창 19:1-11). 

더욱이 소돔이 멸망한 자리인 사해(死海)와 가까운 기브아에서 이러한 음행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상을 더욱 짙게 한다. 

과거 소돔인들의 음란한 행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오늘날의 사해 바다가 이를 생생히 증거해 주고 있다(창 19:4-26). 

본서 기자가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을 증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악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아무튼 이 같은 당시의 시대적 부패상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1) 사단의 나라는 기본 윤리의 파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기브아 비류들이 행하려던 악행(22절)은 소위 남색(男色)이라고 하는데이는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성관계를 갖는 추악한 성행위를 가리킨다<창 19:5 주석>. 

이처럼 기브아 성읍은 나그네를 영접하는 기본적인 윤리의 부재(不在)는 두말할 나위 없고(15절)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간의 기본 윤리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비류들, 즉 벧리알의 아들<22절 주석>이라는 말에서 암시해 주듯이 그들의 사단과 동조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깨뜨리므로서 결과적으로 사단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인간의 기본 윤리를 준수하고 수호하는 데도 솔선 수범하므로써 세상의 악의 세력에 잠식당하는 것을 막는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마 5:13).

 (2) 사회악을 대처함에 있어서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집주인인 노인은 기브아 비류들의 욕정을 채워 주기 위해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겠다고 말했다(24절). 

과거, 롯도 이와 동일하게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 놓겠다는 어리석은 제안을 한 적이 있다(창 19:8).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옳은 것이 아니었다. 사회의 악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책망의 대상이지(엡 5:11) 결코 타협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악에 대해 타협의 자세가 되면 사단은 도리어 더욱 거세게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말것이다(25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로지 자신을 거룩히 함에 힘써야 할 것이며 악에 대해서 강하게 맞설 수 있도록 성령의 검과 방패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엡 6:13-17).

한편 이상에서처럼 레위인이 당한 비극은 그 자신의 축첩(蓄妾)행위와 첩의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겠다(1, 2절). 

그런데 기브아 비류들의 만행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심판받아야 마땅한 죄악이었으니 이제 다음 두 장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결국 이 같은 사실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여하한 죄악도 간과되어질 수 없음을 우리들에게 교훈해 준다(욥 34:10,11). 

그런즉 우리는 매사에 삼가 행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에 손을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경성해야 할 것이다(히 10:31).

 그리스도인의 성윤리(性倫理) 

- 본문에 나오는 기브아 사람들의 음란한 행위를 보면서 우리는 성(性)에 대한 올바른 기독교적 입장을 정립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물론 성(性)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여(許與)하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이는 결코 남용될 수 없다. 이제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성경에서 성(性)은 상호간의 관계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를 곤고히 하기 위해서 당신 백성들에게 성적 순결을 요구하셨다(신 5:18).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나 가족의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 많은 성에 관해 규례를 말씀하셨다(출 20:13-17).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관계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비들은 자기 딸들이 매춘에 빠지지 못하도록 지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레 19: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문제를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관계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2) 성경에서 성(性)은 올바른 인간상 정립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성 문제는 반드시 거룩성과 성실성의 문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성적 타락은 어떤 타자(他者)외의 관계성의 포기임과 동시에 자신의 인격에 대한 자포 자기이다. 

왜냐하면 탐욕과 충동적인 욕구는 이와 같은 관계와 인간성을 파괴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 지어다"(레 20:7)라고 명령하고 있다. 또한 간음한 자에게는 사형을 내릴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레 20:10).

 이러한 성경적 견해에서 볼 때 기브아 사람들의 비행은 크게 두 가지의 악한 결과를 초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회의 사회적 관계나 서로에 대한 신뢰성에 파괴를 가져왔고, 둘째는 레위인의 첩인 한 개인의 인간성을 파멸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악한 결과가 연발해서 일어날 때 사회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혹자는 성(性)에 대해 상황 윤리를 적용하여 성적 타락을 방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방임해 둘 것이 아니라 그 자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권면 또는 징벌에 의해서 근절해야 할 문제이다. 

또 다른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방을 정죄하여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 역시 관계성을 파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요 8:11)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관계와 인격을 정립하는 차원에서 성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여성관 

- 본문에는 기브아 비류들이 레위인을 상관하기 위하여 협박하자 노인이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놓겠다고 사정하는 장면이 나온다(24절). 이와 유사하게 소돔성의 롯도 자기 두 딸을 소돔 사람들에게 내어 놓아 겁간(劫姦)케 하려 한 적이 있다. 

또 입다는 자기 딸을 서원의 번제물로 바치기로 했다(11:39). 

언뜻 보기에 이와 같은 사례들은 엄격한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구약 시대에 여자들의 역할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위와 같이 그렇게 무조건 여자의 인격이 부정되거나 무시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여자들에게는 결혼에 있어서 남자를 선택할 궈닐도 있었고(창 24:58 ; 민 36:6), 기업을 물려받을 수도 있었다(민 27:1-8). 

또한 여자의 권리와 순결은 율법에 의해 엄중하게 보호받았다(출 20:14, 17 ; 레 18:20 ; 19:29 ; 20:10-14, 18-21 ; 신 22:22-30 등). 

그리고 남편의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에 이혼 당해서도 안 되었다(신 24:1-4). 더욱이 여인은 가정에서는 어머니로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에 의해 존경도 받았다(출 20:12 ; 21:15 ; 레 19:3 ; 신 27:16 ; 잠 1:8). 특히 메시야가 여자의 몸에서 날 것이라는 후기 예언서의 예언(사 7:14)은 여자를 구속사의 특별한 위치에 두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간간이 목격되는 여성에 대한 무시 현상은 축첩제 및 일부 다체제와 함께 고대 근동의 이방 풍습에서 온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첩을 거느린것(창 16:1-3)은 종족의 번성이나 그 당시 사회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그것 역시 엄연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한 것으로 긴장과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창 4:16-24 강해, 일부다처제>. 

성경은 분명히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배필로 창조된 점을 들어 차별없는 인격체임을 강조하고 있다(창 1:27 ; 2:21-24). 

그러기에 드물긴 하지만 미리암(출 15:20), 훌다(왕하 22:14 ; 대하 34:22) 같은 이가 여선지자로, 드보라(4:4-5:31)가 여사사로 활동하여 뭇사람의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구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본적 여성관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스 있다. 

이와 관련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2:18-24 강해, '창조론에 나타난 성경적 남녀 관계'를 보다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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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9:1-9 어둠 속으로

사사기 에필로그에 에피소드 2개가 나온다. 동일하게 서론부분에서 레위사람 이야기가 간략히 소개된다. 인물의 이름은 설명하지 않고 레위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레위인은 본래 24개(또는 48개)의 성읍에 나눠져서 율법을 가르치고 성전제도와 관련된 직무를 감당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여기 레위인들은 24개의 성읍 중에 거하지 않았다. 이 레위인은 자기 위치를 이탈한 레위인이었다. 

두 번째 레위인도 산지에 구석에 거류하는 레위인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성막봉사의 자신의 역할을 이탈하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첫 레위인과 두 번째 레위인이 다 자기 위치를 이탈한 레위인이다. 다소 의도적으로 보인다. 

결국 레위인이 시대 당시에 역할과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가? 당시의 성전제도가 유명무실했다는 것이다. 무력화되었다는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 성전제도는 중심이었다. 신앙의 중심 근본이었다. 그러니까 사사시대는 신앙의 근본이 무너지고 상실되어 있는 시대였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신앙이 무너지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현상이 뭔가? 

....레위인이 첩을 들였다. 사사기 본문 저자의 관점에서 첩은 부정적이다. 개망나니 같은 아비멜렉은 첩이 낳은 자식이다.

....첩 맞아들이는 게 불법은 아니었다. ...본처가 불임이면 가능하다. 

에필로그에서 반복하는 문구 “그때에 왕이 없으므로” 그런 맥락에서 자기 욕구에 충족되는 그런 방식으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성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맞이한 것이다. 

레위인만이 아니라 근본적 윤리가 무너져 있다. ....첩이 행음했다. 

....레위인도 성적 윤리가 안 좋게 보인다. 첩을 얻었다. 첩도 행실이 불량했다.... 남편 있는 아내가 행음하면 레위기법에 의하면 사형을 당해야 하는데 이 레위인 남편은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데려오려 한다. 

남편이 아량이 크고 배려심이 있구나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 사사기의 관점에서 보면 가나안 문화가 침투해 오는 상황이었고 레위인들의 역할은 그 맡겨진 성읍에서 율법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유지시켜야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가나안의 비윤리적이고 타락한 문화를 율법으로 저항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레위인이었다. 

그렇다면 이 레위인은 행음안 자신의 첩을 레위기법에 의해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남편은 법대로 처리하려 하지 않고 첩을 데려오고자 하여 첩의 집에서 무려 나흘 밤 동안을 지냈다. 

레위기법을 가장 잘 지켜야 할 사람이 행음한 아내를 다시 데려 오고자 한다. 이 레위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법이란 무용지물이었다. 

이 첩의 윤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남편도 거의 똑같은 행음하고 성적으로 방종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윤리가 무너져 있다. 

그는 사사기 저자의 관점에서 분별력을 상실한 어둠의 상태에서 자기 욕구충족을 위해서 낙타 2마리를 이끌고 먼 길을 떠난다. 

이 레위인의 모습과 삶의 방식이 우리가 사는 방식과 비슷하다 

아이폰 신제품이 출시되면 스토아에서 사람들링 밤새도록 기다린다. 그 장면이 연출된다. 제일 먼저 빨리 기계를 써 보고 싶은 욕망이다. 맛집 탐방 달려간다. 현대인들은 욕구충족을 위해서는 손해도 불편도 감수한다...... 반면 진실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 복음을 위해 자발적 불편을 감수하는 데서는 불평불만을 한다.....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자발적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싫어한다. 가나안화된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편하고 폼 나 보이고, 자기 욕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손해를 감수한다. 

자발적 불편함을 용기를 진리를 말하는 게 편하지는 않다. 복음을 말하는 게 불편하다. 복음으로 사는 것은 당연히 불편하다. 

성도는 진리를 말할 뿐 아니라 사는 자들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욕구충족과 주장이 아니라 부인하고 진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게 우리의 삶이다. 

가나안적 방식, 자기 욕구 충족적 방식, 도덕적 해이가 찾아온다. 가나안화 현상이 나타난다. 

레위인은 첩이 사는 곳까지 찾아간다. 장인이 극진히 대접한다. 돌아오려 하는데 장인이 붙잡고 잔치하고 술을 먹인다. 5일째 아침에 일어나 가려는데 또 잡는다. 

행음한 첩을 다정하게 말하고 데려오려는 남편과 다정다감한 장인어른의...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장인의 지나친 환대는 행음한 딸이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지나친 환대를 베풀면서 사위를 누그러뜨리고 자기 딸이 지은 죄를 무마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레위인의 분별력을 계속 흐리게 만든다.

오늘 나에게 이런 방식으로 장인어른 역할을 하는 게 누구인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게 만들고 나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습관이 무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날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 무언가? 그것 때문에 나의 윤리적 감수성이 느슨해지고, 신앙을 향한 갈망을 누그러뜨리며 떠 복음대로 살고자 하는 용기를 꺾고, 타협하며 살자, 뭐 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우리를 점점 무뎌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사사기19:10-21 어두운 시대에 빛나는 말씀

‘필름 포럼’이라는 기독교영화 상영관이 있다. 거기서 “씽 오브 미”라는 좀 특별한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미국 복음성가 가수 중에서 데니스 저니건이라고 하는 복음성가 가수가 동성애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데니스 저니건이 지은 것 중에 유명한 것이 “약할 때 강함 되시네”이다. 그 외 다수의 복음성가를 불렀다. 

이 사람은 10살 때부터 성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람들한테 여자 같다, 너무 예쁘다 이런 소리를 많이 들어서 내가 정말 여자인가 남자인가, 누구인가 성정체성의 혼란을 많이 겪었다. 이 사람이 동성애를 극복하는 데는 척킹이라고 하는 친구의 도움이 굉장히 컸다고 한다. 

척킹은 데니스 저니건이 다른 친구들을 꺼려하고 왕따시키고 미워하고 막 혐오스러워하고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선뜻 다가갔다고 한다. 

정성껏 보살펴 주고 데니스를 탓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발끈 해서 “동성애는 죄다”부터 시작해가지고 탓하다가 끝날 텐데..... 그렇게 몰아붙이지 않고 곁에 머물면서 계속 끊임없이 기도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그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친구를 위해 손을 내밀어 준 것 때문에, 데니스 저니건이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고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 준 것 때문에... 나중에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켰다.”라고 고백했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데 연루되어 있지 않나?....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돕고 말씀으로 다시 세우는 일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라고 하는 영화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같은 예수님을 믿고 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만 데니스 저니건같이 동성애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굉장히 꺼려서 손을 내밀기가 어렵다. 

본문에 대조적인 두 사람이 나오고 있다. 한 사람은 첩을 둔 레위인, 레위인 나그네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인 기브아 타향살이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등장한다. 

기브아 사람들은 어느 정도로 타락했나?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지만 저녁이 될 때까지 그들을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그네를 돌아보라. 너희들도 나그네였음을 기억하고 돌봐주라(신10:19)”는 게 거룩한 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행하지 않는 성읍이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레위인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굉장히 무감각해지고 해이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첩을 데리고 그와 함께하였다. 첩이 행음하여서 유다 베들레헴 장인 집에 갔다. 레위인이 첩을 둔 것도 모자라서 또 그 아래서 또다른 성적인 범죄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도자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지도자와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 타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세우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다. 

이 레위인은 자기 딸의 문제를 무마하려는 장인의 접대를 끊지 못한다. ...노는 것 못 끊는다. 

예배를 도와야 하는데 더 이상 끌 시간이 없어 다시 밤을 지새우지 않으려고 임박한 시간에 나섰다. ...해가 지려 하는 저녁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상태를 반영한다. 레위인에게도 영적으로 밤이 내리고 있다. 걸어서 여부스에 이르려면 빨리 결정을 해야 한다. 

나그네에게 밤은 위험하다. 도적, 짐승, 추위의 위험이 있다. 

레위인은 자기는 하나님 앞에 순결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면서도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않은 이방성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 외적인 것만 생각한다. 예루살렘은 베냐민 지파가 약해서 당해내지 못하고 여부스 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자, 동족 이스라엘 공동체가 있는 땅이니까 그래도 우리를 잘 대접하고 말씀대로 잘 하겠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그 밤에 6~10km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다.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렀다. 벌써 해가 떨어졌다. 

영적 감각이 떨어져 모든 결정을 유리하지 못하게 자꾸 일을 만들어낸다. 밤이 되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만약 기브아에서 맞아주지 않았다면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는데 더 이상 결정할 수 없는 지경으로 자신을 계속 몰아간다.

우리가 깨어있어야 할 이유가 뭔가? 영적 무감각이 우리를 위함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성읍 넓은 거리에 맞아주기를 바라면서 갔으나, 나그네 사랑의 거룩한 명령이 있어 마땅히 도와 줘야 하는데 아무도 이들을 영접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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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7.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18.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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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는 한 노인이 밭에서 돌아오다가 관심을 갖고 묻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기꺼이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고 있다. 

그런데...레위인, 이 사람은 자기 편리만 생각한다. 기도했다는 말이 전혀 없고.. 잔머리만 굴린다. 도와줄 것 같으니까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간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간다”고 말하면서.. 이 사람은 자기가 레위인이라는 사실을 어필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은 먹을 양식이 있다며 자기를 낮추고 있다. 

이런 식이야말로 상대에게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사용하던 고대근동의 어법이다. 보라,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려고 할 때는 잘 움직인다. 

혹시라도 여물 부담 가질까 봐 모든 게 다 있다면서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이 사람은 레위인, 지식을 지켜야 하는 레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안전지대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순간 순간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여정을 원하신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없이 계속 자기의 것들을 어필하고 있다. 

노인은 사랑이 변질된 것이 많고 사랑이 지금처럼 소멸되어가는 시대에 상황과 환경에 유념치 않고 하나님을 말씀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대의 쓸 것 감당하겠다. 거리에서 유하지 말라”면서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킨다.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빛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 가장 어둠을 빛낼 수 있는 방법이다. 

종교 혼합주의, 어두움 가운데 할아버지 한 사람이 타향살이하는 사람이 인정 있게 말씀따라 법대로 받아들이고 영접한다. 

영적 무감각, 도덕적 해이, 어둠을 밝게 비치는 자는 하나님 말씀 따라 사는 것이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자가 있느니라(히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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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수아 21:1-45]
<序言>
  이스라엘 지파에 대한 가나안 땅에 대한 분배를 마치고 도피성을 선정했습니다. 그리고고 이젠 레위 지파의 성읍을 선정하게 됩니다.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처럼 가나안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막 봉사를 전담하는 지파로서 하나님이 기업이 되어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최소한의 거주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에서 제비 뽑아 48성읍을 선정하여 레위인의 거주지로 삼게 됩니다. 레위인의 성읍은 이미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민35:1-8). 본 장의 내용은 레위 지파의 성읍 분배 (1-7절), 레위인이 얻은 성읍 명단 (8-42절),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 (43-45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레위 지파의 성읍 분배 (1-7절)
  이스라엘 각 지파의 기업 분배가 끝나자 레위 사람들의 족장들이 기업 분배의 책임자인 대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각 지파의 족장들에게 자신들이 거할 성읍과 가축을 먹일 목초지를 요구했습니다. 최소한의 경작지와 목초지는 민수기에 보면 그 성읍들 사면 주위로 2,000규빗씩이었습니다 (민35:2-5). 개역 성경의 '2천 규빗'은 히브리어 성경상으로 보면 '엘레프 암마'로서 '1천 규빗'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KJV,RSV)에서도 1천 규빗 (a thousand cubits)으로 번역했습니다. 1,000규빗은 500m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1규빗은 45,6cm입니다. 레위 자손들의 요구는 이미 모세가 언급한 내용이었습니다 (민35:1-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들 기업 가운데 제비를 뽑아 성읍과 들을 레위 지파에게 주었습니다 (1-3절). 이는 야곱이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는 예언한 내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49:7).
  레위 지파는 성막 봉사를 맡은 자들로서 하나님이 친히 기업이 되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막 봉사를 전무하는 대신에 이스라엘이 드리는 십일조와 헌물로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레위 지파의 전 인원이 성막 봉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주할 최소한의 성읍이 필요했고 생활을 위해 최소한의 경작지와 목초지가 필요했습니다. 레위 자손이 성막 봉사 업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우월성을 가지고 제일 먼저 요구할 수 있으나 다른 지파들이 땅을 다 분배 받은 다음에 요구하는 것은 공동체 의식과 섬기는 지도력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수아에게서도 볼 수 있는 면모였습니다 (19:49-51). 
  레위 지파는 각 지파에서 제비 뽑은 성읍을 분배받았는데 가속별로 받았습니다. 그핫 자손 중 아론(Aaron)의 자손은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와 베냐민 지파에서 13성읍, 그 남은 그핫(Kohath) 자손은 에브라임 지파와 단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서 10성읍, 게르손(Gershon) 자손은 잇사갈 지파와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에서 13성읍, 므라리 (Merari) 자손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스블론 지파에서 12성읍을 얻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받은 성읍은 도피성을 포함하여 모두 48성읍이었습니다 (4-6절).
  레위(Levi)의 아들은 게르손, 고핫, 므라이입니다. 고핫(Kohath)의 아들은 아므람, 이스할, 헤브론, 웃시엘입니다. 아므람(Amram)의 아들은 아론과 모세입니다 (이스할의 아들은 고라, 네벡, 시그리). 아론(Aaron)의 아들은 엘르아살과 이다말입니다. 레위 자손들이 가속별로 성읍을 받으면서 레위의 아들인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 가속만 받은 것이 아니라 고핫의 손자 아론 가속이 고핫 자손과 별도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받았습니다. 그것은 레위의 아들 고핫의 아들 아므람의 아들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셨고 아론의 계통만을 제사장직을 얻게 했기 때문입니다 (민18:1-7).
  레위인들에게 각 지역에서 48성읍과 그 주변 땅을 주신 것은 ①생활 근거지를 확보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레위인들에게는 가나안 땅에서 기업이 없기 때문에 생활 근거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생활 터전은 48성읍이 되고 생활비는 백성들이 낸 십일조와 헌물로 충당하게 했습니다 (레7:31-34, 민18:19-29). ②하나님 섬기는 일에 전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레위인들에게 성전 봉사와 제사 수종과 율법 교수 등을 맡은 족속입니다. 그래서 그 일들을 전무할 수 있도록 농사할 수 있는 땅을 주지 않는 대신에 48성읍과 주변 들을 주고 십일조와 헌물을 받게 한 것입니다. ③이스라엘 족속 전체가 통일성을 가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넓은 땅에서 흩어져 살게 되면 중앙 성소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식어질 수 있고 율법 해석과 준수에 대한 기준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각 지파의 수에 비례하여 흩어져 거주하면서 율법에 대해 가르치게 되면 하나님 섬기는 일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지게 되어 신앙의 바른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에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모른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9:13-14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왕상17:3-6, 눅9:2-4, 막6:7-11, 마6:26-34).
     2. 레위인이 얻은 성읍 명단 (8-42절)
  레위 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민18:20-24, 26:62, 신10:9, 18:1-2). 그들은 성막 봉사와 율법 교수 사역이 맡겨진 지파로서 그 일에 전무하도록 기업을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지파들이 드린 십일조와 헌물을 받았습니다 (민18:21). 그리고 그들이 거주 할 수 있는 성읍과 그 주변 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민35:2-5).
  레위 지파가 얻은 성읍은 모두 48개였습니다. 그들은 대신 12지파에서 제비를 뽑아 성읍과 주변 들을 얻었습니다 (4절). 12지파로부터 평균 4성읍과 주변 들을 얻은 것입니다. 그핫 자손 가운데 아론 자손은 13성읍을 얻게 되고 (8-19절), 그 남은 그핫 자손은 10성읍을 얻게 되고 (20-26절), 게르손 자손은 13성읍을 얻게 되고 (27-33절), 므라리 자손은 12성읍을 얻게 되었습니다 (34-40절). 아론 자손이 받은 성읍은 헤브론, 립나, 앗딜, 에스드모아, 홀론, 드빌, 아인, 윳다, 벧세메스, 기브온, 게바, 아나돗, 알몬이고, 그핫 자손이 받은 성읍은 세겜, 게셀, 깁사임, 벧호론, 엘드게, 깁브돈, 아얄론, 가드림몬, 다아낙, 가드림몬이고, 게르손 자손이 받은 성읍은 골란, 가시온, 디브랏, 야르뭇, 언간님, 미살, 압돈, 헬갓, 르홉, 게데스, 함못돌, 가르단이고, 므라리 자손이 받은 성읍은 욕느암, 가르다, 딤나, 나할랏, 베셀, 야하스, 그데못, 므바앗, 라못, 마하나임, 헤스본, 아셀입니다. 레위 지파가 각 지파의 성읍을 얻어 흩어져서 살게 한 것은 각 지파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신앙을 인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12지파에서 성읍을 받은 것은 12지파가 자기들이 기업 중에서 레위 지파를 위해 내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12지파에서는 성전봉사와 율법교수에 전무하기 위해 기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 지파에 대해 자기들의 기업을 내어 놓아야 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구약의 레위 자손들이 성전에 드려지는 십일조와 헌물을 받았고 각 지파에서 성읍과 들을 받은 것처럼, 교회 공동체에서 예배인도와 성경공부인도와 기도인도와 상담 등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돕는 사역에 전무하는 사역자들에게 생활의 필요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역이 잘되고 성도들의 신앙이 잘 성장하게 됩니다.
  바울은 사역자가 육신의 필요를 공궤 받을 수 있는 근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고린도전서9:7-14에서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복음 사역자가 육신의 필요를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전도 명령을 근거로 증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사명을 주면서 전도 여행을 할 때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10:10에서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복음 사역자는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신다는 의미이고 하나님께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통해 공궤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눅10:7). 둘째, 율법을 근거로 증명했습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자는 성전에서 나는 것을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자는 제단과 함께 나누게 했다고 했습니다 (레7:6-14, 10:12-15). 또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신25:4). 셋째, 일반적인 원리로 증명했습니다. 병정(군사)가 자비량으로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대에 입대하여 전투에 참여하는 자가 자기 돈을 들이지 않고 군대에서 의식주를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양떼를 기르고 양의 젖을 먹지 못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 열매를 얻지 못하거나 밭 가는 자나 양식을 얻을 소망을 가지고 가는 것이고 곡식을 떠는 자도 양식을 함께 나눌 소망을 가지고 떤다는 것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딤후2:6).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준 자는 육신의 것을 얻는다고 해서 과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6:6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원리를 제쳐 두고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잘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육신적인 최소한의 필요는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세상 염려 없이 사역에 전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 (43-45절)
  가나안 땅 분배가 완료되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열조에게 맹세한 언약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당할 대적이 없게 해 주셨고 안식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약속한 모든 일이 다 이루어 진 것입니다 (43-45절).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창12:1-3, 17:8), 이삭(창26:2-3), 야곱(창28:13) 등 족장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출3:8)와 여호수아(수1:2-4) 등 지도자들에게도 끊임없이 가나안 땅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에베소서3:6에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고 했고, 골로새서1:12에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이 있습니다. 천국이 약속되어 있고, 영적인 나라가 허락되어 있고, 진리의 말씀을 세울 것이 허락되어 있고, 성령께 쓰임 받을 것이 허락되어 있고, 사역을 통해 영광을 나타낼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계11장). 그것들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많으므로 힘든 가운데 있을 지라도 (계12-13장)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신앙적인 매진을 해야 합니다 (계14장). 
  성전봉사와 율법교수에 대한 사역에 전무하는 레위지파 자손들은 12지파처럼 땅을 분배받지 못했으나 12지파로부터 거할 성읍을 제공받았습니다. 이는 복음 사역자들이 사역에 전무해야 할 것을 알게 하는 동시에 복음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를 제공해야 할 것을 알게 합니다. 그것은 서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섬기는 자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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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체를 받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일을 알고자 하여 미스바로 모였고 거기서 레위인은 자신이 당한 일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전하였고 레위인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하였고, 군대를 일으켜서 이런 악행을 행한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했고, 기브아가 속해 있는 베냐민 지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런 악행을 행한 사람을 내놓으라, 그들을 심판함으로 이스라엘에서 악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베냐민 지파는 이런 이스라엘 온 백성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대신 군사들을 모아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전쟁을 하려고 준비하였는데,. 이 때 모인 베냐민 군인의 숫자가 2만 6천명이었고, 기브아 사람이 700명, 총 26,700명...그들이 상대해야 할 이스라엘 군대 숫자는 40만 명으로,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베냐민은 악행을 행한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는데, 막상 전쟁을 해 보니 베냐민 지파가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어. 베냐민 지파가 무려 2만 2천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을 죽였다. 전쟁에서 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기도하면서 베냐민 지파와 싸워야 하냐고 물었던바, 하나님은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런데 두 번째 전투에서도 이스라엘 군대가 큰 패배를 당하여 이번에는 만 팔천 명,.. 두 번에 걸친 패배로 말미암아 4만 명의 군사가 죽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면서 금식하고, 제사를 드렸고 베냐민과 싸워야 하느냐고 또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내일은 너희 손에 베냐민을 넘기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으며,. 그리고 그 약속대로 세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베냐민 군대를 완전히 소탕하여, 무려 2만 5천 백명의 베냐민 군사가 죽임을 당하였고 천 여명의 군사가 실종되었고, 남은 군사가 고작 600명만 남게 되었는데, 베냐민 군인들뿐만이 아니라 그 외에 모든 베냐민 사람들을 멸절해버렸기에,.. 오직 600명의 남자만이 베냐민 지파로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서 하나님께 일방적인 맹세,.. 어느 누구도 베냐민 사람에게 자신의 딸을 줘서는 안 된다는 맹세를 하고 말았지만, 주 말씀에 비추어 합당하지 않은 맹세는 취소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후회만 할 뿐 맹세를 취소하지는 않았으며....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 중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만 살려서 베냐민 남자들에게 아내로 주었던 바, 자신들의 맹세를 취소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악한 고집 그대로 사람들을 학살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야베스 길르앗의 처녀만으로는 베냐민 남자들에게 아내를 다 구해 줄 수 없어서, 이번에는 실로의 여자들이 축제를 맞아 춤을 출 때, 그 여자들을 납치할 수 있도록 베냐민 남자들에게 허락해 주었던바,. 결국 학살과 납치라는 <제멋대로, 주님 없는 자처럼> 베냐민 지파의 남은 남자들에게 아내를 모두 구해주어서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지 않게 하였다.  이것이 19~21장에 나오는 이야기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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