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22장 [286..주예수님내맘에오사] [73.내눈을들어두루살피니] [70. 피난처 있으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시 46:1....영국 태생의 작곡가이고 음악교사였던 헨리 카레이(1687-1748)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카레이 그는 찬송가 작곡 외에 공연을 위한 작품도 많이 만들었다.
이 곡조인 AMERICA는 1745년 발행된 에 실려 있었다. 헬리 캐리가 이것을 발췌하여 영국 국가 가사에 이 곡을 붙여 국가를 만들어 처음 사용하였다. 영국, 덴마크, 러시아 그밖에 북부 독일 여러 곳에서 애국 가요곡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전래 멜로디이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불리우는 곡이다.
가사해설....이 시편은 하나님께선 창조주이시며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성도들에게 환난의 시기에 피난처가 되시며 보호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환난을 당하여도 염려할 것이 없고 이 세상이 요동하여도 안전하리라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이 찬송가는 더 나아가서 진정한 평화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지진이나 홍수같은 자연의 이번 가운데서도 성도들의 피난처가 되시며(시 34편 1-3절)(1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주변 국가들의 위험과 침공의 와중에서도 피난처, 보호자가 되시며(시 34편 4-7절)(2절), 세상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난처가 되심(시 34편 8-11절)(3절)을 찬양한다.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동시에 환난의 때에 성도들에게 피난처가 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와 평안을 준다.
피난처 (1) : 성채, 안전한 고지, 피난 장소를 가리킨다. ...이방인 (2) : 대체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사 42장 1절, 말 1장 11절).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적대감은 로마의 통치를 받던 신약 시대에는 극에 달했다. 예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 가운데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동일한 자녀가 되게 하는데 있다(롬 1장 16절, 엡 2장 14절).
[아둘람 굴의 고난, 그대는 체험한 적 있는가...시57편, 시 142, 시18편을 읽어보라]
[롬8:1-39(28)...*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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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때,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신호로, [징계의 다루심]하나님의 채찍으로 오는 고난..... 자녀들이 속을 썩일 때 부모님들이 잘되라고 매를 드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회개의 신호로 고난을 주신다. 그 고난을 통해 우리는 깨닫게 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으므로 우리의 죄값으로 받는 고난도 우리에게 유익하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여 살아가는 중에 [반대/적대하는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고난.....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가 바로 그것으로서,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하다가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고난의 십자가로 다가오는 것.... 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오히려 복된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기꺼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에게 복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고난은 그 성격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일지니... 죄값으로 주어지는 고난이든지,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이 받는 고난이든지, 모든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이해하고-깨닫고-붙들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하늘의 복을 누리게 하신다. ......바울은 이러한 놀라운 진리를 고린도전서1장18절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쉽게 말해 ‘고난이 하나님의 변형된 축복’이라는 것.... 하나님의 모든 복은 고난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오는 것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
.... 그런데 거꾸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이 오면 낙심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는데, 그것은 고난을 하나님의 저주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니, 그것은 바로 사탄 체계인 세상 패러다임 안에서 사탄의 가스라이팅 당함으로 볼 수 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요.... 또 그렇게 가르치며 오도하는 교회도 때때로 있는 법이다. 십자가의 도를 부정하고 고난을 저주라고... 예수믿으면 고난은 없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것이야말로 . 타락한 교회요 병든 교회요 썩은 교회임을 스스로 인정함이다..
===결코 그렇지 않으니...참 기독교는 십자가를 통한 영광, no cross no crown.... 십자가의 도가 진리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둘람 굴이 저주의 장소, 낙심의 장소, 절망의 장소일 뿐이지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아둘람 굴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복된 장소인 것이다.
===다윗의 앞날에 무서운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앞날이 탄탄대로인 줄 알았는데... 사울이 다윗을 정치적 라이벌로 여기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여 이긴 전쟁영웅에게 돌아온 것은 사울의 질투에 찬 칼날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은 무려 10년 동안이나 도피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다윗이 도피생활을 하던 중 아둘람 굴에 있을 때를 기록한 것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고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곳’이라는 것은 다윗이 처음 도망쳤던 블레셋의 가드 땅을 말합니다. 가드 땅은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도망친다고 도망친 곳이 골리앗의 고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곳 사람들이 다윗을 가만 두겠습니까? 다윗은 거기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 앞에 붙잡혀 갔을 때 다윗은 지혜를 발휘해서 갑자기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척을 해서 간신히 살아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도망친 곳이 오늘 본문말씀의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고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니, 화병이 생길 법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무려 400명 정도가 다윗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전부 사울의 통치 밑에서 다윗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도망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환란 당한 자들, 빚진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이심전심으로 다윗에게 몰려왔는데 그 숫자가 무려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울이 통치하는 사회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살아갈 수 없는 사회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부 환란을 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원통하게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사실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남자들만 400명이 몰려들었으니까 여자들까지, 또 자식들까지, 부모님들까지 합하면 거의 천 명 정도 되는 큰 무리가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혼자 몸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천 명 정도 되는 식솔들을 데리고 도피생활을 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둘람 굴의 현장에 가보았는데, 놀랍게도 현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굴 앞에는 400여명의 군사들이 훈련했을 법한 넓은 땅이 펼쳐져 있고, 굴은 나무로 교묘히 위장되어 있습니다. 굴 입구는 개구멍 같았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굉장히 넓습니다. 어림잡아 100평 정도는 되어 보어 보이는 굴이 두 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굴 벽은 단단한 바위로 되어 있고, 천정은 뻥 뚫려 있어서 환기가 잘 되고 동굴 벽들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습니다. 다윗 식솔들이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어 먹은 흔적이 있습니다. 또 어둠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켰던 흔적들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 다윗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하다고 한탄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다윗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아둘람 굴은 오히려 축복의 땅이요, 아둘람 굴의 고난은 축복의 기회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둘람 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다윗이 누렸던 모든 복은 사실 아둘람 굴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났습니다. 다윗이 그 때의 심경을 시로 써서 기록을 했는데, 그것이 시편 57편입니다. 여기 시의 맨 앞의 제목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 굴에 있던 때”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어보면, 아둘람 굴의 다윗의 마음과 결의가 어떠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억울하게 도망쳐야 했고, 습하고 컴컴한 굴에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마음에 평안이 가득함이 느껴집니다. 또 4절에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으르렁 거리면서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사자들 뿐 이었습니다. 사울의 군사들이 집집마다 가택수사를 하고, 다윗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집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시시각각 사울의 칼날이 옥조여 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시편57편9절 이하의 말씀에서 다윗을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지금 다윗이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고 있는데, 그 때 거기는 비단이불 덥고 배부르고 등 따스운 왕궁이 아니었습니다. 허기지고 춥고 음습한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다윗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아둘람 굴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훗날 다윗은 10년 만의 도피생활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그 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시를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18편입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습니다. 시편18편을 보십시다. 거기 제목에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10년 동안의 도피생활을 끝내는 날 지은 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18편은 10년 동안이나 지켜주신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감사기도였습니다. 1절에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10년 동안이나 자신의 반석이 되어 주시고, 요새가 되어 주셔서 사울의 모든 칼날에서 건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피할 바위가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구원의 뿔이 되시고, 산성이 되신다.’고 고백하면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날마다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아둘람 굴의 체험이 없었더라면 다윗은 훗날 왕이 되었을 때, 사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교만해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둘람 굴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정금같은 믿음으로 교만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아둘람 굴은 다윗의 신앙을 정금같이 단련시켰던 제철소였던 것입니다.
그것 뿐 아닙니다. 아둘람 굴은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주변에 ‘환난 당한 자들, 빚진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이 사람들처럼 억울한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내가 세우리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충신이 역적으로 몰리고, 역적이 충신으로 둔갑하는 불의한 세상!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고, 사람을 함부로 잡아 죽이는 세상! 권력 있고 돈 있으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다 빠져 나가고, 돈 없고 빽 없으면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곳 하나 없는 세상! 환란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이 넘쳐나는 이런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새 세상을 열어 가리라!’ 다윗은 그 칙칙한 아둘람 굴에서 이런 꿈을 소중히 간직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꿈을 안고 시편57편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기 나오는 새벽은 물리적인 새벽이 아니라 역사의 새벽입니다. 아둘람 굴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살아 숨쉬는 세상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다는 결심을 안고 눈을 떠보니까 저 밖의 동창에서 아침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벅찬 가슴을 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렇게 노래했던 것입니다. 아둘람 굴은 시련의 장소였습니다. 고난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장소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전을 품을 수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아둘람 굴이 다윗에게 끼친 유익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아둘람 굴은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룰 평생 동지를 얻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둘람 굴에서 만난 400명의 사람들이 훗날 다윗 휘하의 장수가 되어서 다윗 왕국을 떠받치는 기둥들이 되었습니다. 사무엘하23장8절 이하를 보면 그 장수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한결같이 일 당 백이었습니다. 요셉밧세벳이라고 하는 장수는 팔백 대 일로 싸워 이겼습니다. 또 브나야라는 장수는 사자를 쳐 죽일 정도로 장사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삼십칠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뛰어난 장수들이었고, 다윗에게 생명받쳐 충성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그 유명한 나단 선지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충신 중의 충신 우리아도 있었습니다. 이런 충신들이 다윗 주변에 떡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다윗은 거대한 다윗왕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다윗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거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한번은 다윗이 베들레헴 근처에서 블레셋 군대와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유대 땅은 물이 귀한 곳입니다. 그런데 마침 다윗의 진영이 산위에 있었던 까닭에 그만 물이 떨어졌습니다. 성안에 마실 물이 동이 났습니다. 얼마나 심했던지 왕이었던 다윗조차도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장수들에게 물을 떠 오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물을 떠오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물을 떠오려면 블레셋 군대의 진영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장수 세 명이 자원했습니다. 화살이 빗발치고 칼과 창이 번뜩이는 블레셋 진영을 통과해서 천신만고 끝에 물을 떠 가지고 왔습니다. 자기의 주군이 목말라하는 것을 보고 ‘죽으면 죽으리라’ 목숨걸고 물을 떠 왔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물을 받아든 다윗은 마시지 않고 여호와의 제단 앞에 부어 버렸습니다. 그 위험한 상황에서 물을 떠오라고 한 것은 언제고, 기껏 죽을 힘을 다해 떠오니까 마시지 않고 여호와의 제단 앞에 부어 버렸습니다. . 아니 떠오란 때는 언제고 죽을 고생을 해서 떠오니까 그냥 버려 버립니까? 그 물이 어떤 물인데.. 다윗이 왜 이렇게 행동합니까? 다윗은 갈증을 견디다 못해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죽기 살기로 물을 떠오는 장수들을 보면서, 도무지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장수들의 피와 땀”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다윗은 도저히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다윗와 장수들 간에는 이러게 끈끈한 정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장수들을 자기 생명처럼 아끼고, 장수들은 다윗을 신뢰하고 존경하면서 생명바쳐 충성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끈끈한 관계를 맺게 했습니까? 그것이 바로 아둘람 굴입니다. 그들은 아둘람 굴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꿈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 체험이 훗날 위대한 다윗왕국을 세우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왕국은 아둘람 굴에서 잉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둘람 굴은 다윗 왕국의 요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둘람 굴은 다윗에게 축복의 장소였습니다. 세상사람들에게 아둘람 굴은 고난의 장소요 시련의 장소일 뿐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아둘람 굴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복된 장소였습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정금같은 신앙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위대한 비전을 얻었습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사역했던 평생 동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시글락 : 뜻-굴곡 가드에서 남서쪽...가사와 브엘세바 사이 대략 중간에 위치.. 서남서쪽 8km에 족장시대 블레셋의 왕도였던 그랄이 위치, 이삭의 우물들은 그랄 골짜기를 따라 파서 얻었음..(시글락을 약탈한 뒤 아말렉이 머물렀었고, 다윗이 급습하여 모두 되찾아 왔을 뿐 아니라 습격에 가담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분배물을 공평하게 나누어주었었음) 브솔시내는 그보다 더 남쪽에 있음...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피난처]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아둘람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곧 가드 남동쪽 약 14-16km 지점으로, 본래는 유다의 영토였으나 그 당시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다...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기에 블레셋조차도 점령하기는 했어도 그냥 버려둔 땅이었음..
.....다윗의 삶을 보면 그의 인격과 신앙 성장을 질적으로 분리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아둘람 굴이다.
다윗과 관계된 성경을 찬찬히 살펴보면 다윗이 아둘람 굴에 들어가기 전에는 기도했다는 내용을 좀체로 찾을 수 없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도(라마나욧에서도, 놉에서도) 주님 이름 부르며 코람데오의 단독자로서 주 앞에 섬으로써 토로-토설하여 쏟아내고 경청하는, 주님과 상호 교통함의 기도는 없었음을 보게 된다.
.....블레셋에 속한 가드에 갈 때도 문짝에 기대 침까지 흘려가며 미치광이인 척해 목숨을 구걸했지만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기도하지 않았다....그러던 다윗에게 기도의 문이 열린다.
.....사방이 다 막혀, 이제는 세상이 쓰레기로 취급하며 버러지처럼 여겨 조롱하는 듯한 느낌 가운데서 전적으로 홀로...아둘람 굴에 들어갔다 나온 [주 앞에 선 단독자로서 주님과 만남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느덧 영을 따라 행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해 있었고....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지 다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후, 그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여러 질문을 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 나아가서 싸워야 할 때인가요. 하나님, 용기를 주셔서 저들을 이기게 해 주시겠습니까.”....
-----다윗에게 아둘람 굴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그토록 견뎌내기 어려운 좌절과 낙심, 조롱과 비아냥으로 추락하는 느낌뿐이었던 그를....한순간에 기도의 사람으로 변모시켰던 것은 그 무엇이었을까.
.....다윗이 홀로 자신을 직면한 공간이 바로 아둘람 굴이었다. ....혼자였던 다윗이 드디어 주 이름을 부르짖으며 자신을 쏟아 토로하며 통곡하던 중, 주 앞에서 말씀의 거울로!! 정면으로 응시한 곳이 바로 굴이었다. 그곳에서 자신과 씨름하면서 몸부림쳤고, 주님의 기름부으심의 의미를 여쭈었고, 주 이름 부름으로써 다가와 품어주시는 분을 새로이 경험하였으리라......아둘람 굴은 다윗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시켰다..... 그러자 ((자기장 원리에서처럼..영광의 에너지 중심에로 주변 사물들이 점점 더 이끌려오듯이))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또 대화했다. 일생 묻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다.
가장 추한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한다.....
아름다운 사람은 언제든 혼자 있을 수 있다. 믿음과 신념이 확고한 사람은 홀로 있어도 늘 빛이 난다. ...
그렇지만...적지 않은 사람이 고독을 받아들이더라도 모두가 성숙의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오히려 고독한 곳에서 은밀한 욕망을 몰래 실현하려는 게 인간의 민낯이다. ....남들과 같이 있을 때 많은 사람은 주변을 의식해 거짓되고 포장된 행동과 말을 한다. ...그러다 혼자가 된 순간 아무도 보지 않으니 누르고 있던 욕망의 찌꺼기를 모두 털어 댄다. ....게을러지고, 때론 음흉한 욕망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부류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추해진다. 그리고 연약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자기 파괴의 시간이 되고 만다.
그러기에...홀로 있되 잘 있어야 한다. ....하루를 살다 보면 수많은 더러운 것들이 묻어 더러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흙탕물처럼 혼탁한 것도 언젠가는 맑아진다.... 바로 가만히 내버려 둘 때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두면 부유물이 다 가라앉고 맑은 물이 드러난다. ....그럴 때는 참모습이 드러난다. 흐트러졌던 마음도 마찬가지다. 혼자 있는 그 순간 복잡한 마음이 가지런해진다. 자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순간 성숙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독은 그래서 선물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하시려는 선물이다. ....아둘람의 어두운 굴에서 다윗의 영혼은 오히려 빛났다. ....홀로 있는 고통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됐다. ....삶이 변화하는 순간이었던 셈이다.....혼자된다는 것은 외로움 속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그 안에 밝게 빛나는 우리의 모습, 실존이 담겨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단독자로 세우신다. .....고독이라는 선물을 피하면 안 된다. ....거절해서도 안 된다. ....혼자되는 걸 피하고자 또 다른 것들에 집착하고 의지하려는 마음의 욕심을 끊어버려야 한다.
우리 모두는 고독 속에서도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고독 속에서 각자의 빛나는 실존을 찾게 되기를.... 또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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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둘람은 히브리어로 ‘은신처, 피난처, 격리된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가드 남동쪽16km/베들레헴 남서쪽15-20km지점, 황야지대로서 블레셋은 쓸모없다 여기고 버려두었었다...((2. 야곱의 아들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살았다(창38:1).....3.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성읍이었다(수15:35).....4.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한 왕들 중에 압둘람 왕이 포함된다(수12:15)))......5. 아둘람 굴(The cave of Adullam):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때 (의탁하러 찾아간) 블레셋 가드로부터 내쫓긴바, 다윗이 아둘람 굴에 피하였으며..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자,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모였는데 그 수는 400명 가량[전체적으로 보면 남녀노소1000명 정도] 되었다(삼상22:1-2)......6. [다윗 통일 왕국 초기에, 기선 제압하기위한 블레셋의 선공으로 베들레헴은 이미 점령되어 블레셋 군영이 거기 있었고] 블레셋 주력 군대는 예루살렘 남서쪽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을 때, [즉 바알브라심 + 뽕나무 위에서 발자국 소리 들리면 기습하라는 주님 명령 따름 인해 두 번의 대승을 거두게 하셨던 그 르바임 골짜기] (베들레헴은 이미 점령되어 있어서 블레셋 군영이 거기 있었고!!), 다윗의 세 용사가 요새화 되어 있었고 다윗의 주력군을 주둔시켰던 아둘람 굴 근처 성채에 있는 다윗을 찾아갔다(삼하23:13).....((7. 남 유대 왕 르호보암이 유대 땅을 방비하기 위하여 세운 요새들 중에 아둘람 성읍이 포함된다(대하11:7).....8.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 유다 자손이 아둘람에 거주하였다(느1130).....9. 미가 선지자는 장차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고 말하였다(미1:15).....10. 아둘람은 텔 에쉬 쉐이크 마드쿠르(Tell esh Sheikh Madhkur)와 동일시되며, 이 지역에는 많은 석회암 동굴들이 산재하고,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에는 거주지였고 철기 시대 이후의 토기들이 발견되었다))......11. 필자가 들어가 본 동굴 중에는 600-700명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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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57편과 142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을 때 지은 시이다.
<시편 57편, 다윗의 믹담 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3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6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0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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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2편,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그때 다윗이 머문 모압땅의 요새가 맛사다일 것이라고 추정--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스라엘이 로마군과 최후의 항쟁을 펼친 곳으로 유명 ::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는 실바 장군에게 10군단을 이끌고 맛사다로 가 대규모 포위 작전을 펼치게 했으나 2년 동안 번번이 공격에 실패했고, 공성퇴를 끌고 올라갈 수 있는 대규모 경사로를 6개월에 걸쳐 축조한 후에야 겨우 함락시킬 수 있었다... 다윗이 머문 곳이 맛사다라면 그곳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피난처였을 것. ..지리적 위치상 그의 양친이 머물고 있는 모압과도 가까워서 종종 부모를 찾아뵙기에도 좋았을 것이니..그에게는 모처럼 누리는 안정감과 쉼이었을 것...그렇지만!!.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왔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말씀하시길 이 요새에 머물지 말고 이곳을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하신다. (사래의 학대를 피해 수르 광야길로 도망간 하갈을 찾아와 다시 그 학대 밑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신 그분이 다윗을 찾아와 다시 유다 광야로 돌아가라 하신다)... 다윗은 망설임 없이 요새를 떠나 유다 광야로 돌아가 헤렛 수풀에 거한다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베들레헴과 헤브론 사이)에 이르니라
......주님의 말씀은, 곧 새로운 상황에 대비케 함이었음(ㅡ블레셋이 그일라 땅 침탈 소식 전해지고, 다윗은 주께 여쭙고 있다)
.....::: 헤렛의 뜻은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푸른 나무(눅 23:31), 큰 나무(마 13:31-32)로 비유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품기에 부족함이 없는 크고 울창한 생명의 숲이다.....훗날 그의 시편은 그날의 결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 당신께서 친히 나의 요새가 되십니다."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내가 그 안에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
6.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창21장, 삼상31장 참조]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7.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9.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10.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11. ○왕이 사람을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12. 사울이 이르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https://moyha.tistory.com/69 [성경역사..아비아달, 아히멜렉 족보 정리]
1.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
(사무엘상 22:20)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이하 생략)
(사무엘상 23: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2.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
(사무엘하 8:17)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역대상 24:6) 레위 사람 ... (중략) ...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과 및 제사장과 ...(이하생략)
▲ 성경의 오류인가? No
아히멜렉의 아들이 아비아달이며, 사독과 함께 다윗시대의 제사장이었다. 이 아비아달은 두 아들을 낳았다. 한 명은 요나단이며, 다른 한 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아히멜렉이다. 즉, 아히멜렉(할아버지) -> 아비아달(아들) -> 아히멜렉(손자)..Rockefeller, Jr. 처럼 조상의 이름을 사용하는 형태이다
.***[당시 제사장 계보 이해] 아론의 네 아들 중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불을 담아드리다가 성소에서 즉사하였음...남은 두 아들은 엘르아살과 이다말.....[엘르아살 계열]엘르아살의 아들은 비느하스(-->아비수아-->북기-->웃시-->스라히야-->므라훗-->아마랴 :: 어느시점까지는 이다말 계열과 함께 섬기다가...이다말 계열의 엘리 시대에 이르러서는 엘리가 두드러지게 활약하게 된듯함-->아히둡-->사독((다윗 시대 제사장...아히멜렉보다 더 활동적)) ///...[이다말 계열]이다말의 아들(....엘리-->홉니와 비느하스-->비느하스의 아들 : 아히둡과 이가봇-->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아히야로도 불렸을 수 있고, 또는 형제인 아히야가 따로 있었을 수도 있음)-->아비아달((다윗 시대 제사장...대제사장의 에봇을 가져옴))--요나단과 아히멜렉
13.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 하니
14.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15.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하건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16.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17.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20.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놉 장막에 있던중, 학살 소식 듣고 대제사장의 에봇을 가지고)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21.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알리매
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23.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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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22장
1. So David departed from there and escaped to the cave of Adullam; and when his brothers and all his father's household heard [of it], they went down there to him.
2. And everyone who was in distress, and everyone who was in debt, and everyone who was discontented, gathered to him; and he became captain over them. Now there were about four hundred men with him.
3. And David went from there to Mizpah of Moab; and he said to the king of Moab, "Please let my father and my mother come [and stay] with you until I know what God will do for me."
4. Then he left them with the king of Moab; and they stayed with him all the time that David was in the stronghold.
5. And the prophet Gad said to David, "Do not stay in the stronghold; depart, and go into the land of Judah." So David departed and went into the forest of Hereth.
6. Then Saul heard that David and the men who were with him had been discovered. Now Saul was sitting in Gibeah, under the tamarisk tree on the height with his spear in his hand, and all his servants were standing around him.
7. And Saul said to his servants who stood around him, "Hear now, O Benjamites! Will the son of Jesse also give to all of you fields and vineyards? Will he make you all commanders of thousands and commanders of hundreds?
8. "For all of you have conspired against me so that there is no one who discloses to me when my son makes [a covenant] with the son of Jesse, and there is none of you who is sorry for me or discloses to me that my son has stirred up my servant against me to lie in ambush, as [it is] this day."
9. Then Doeg the Edomite, who was standing by the servants of Saul, answered and said, "I saw the son of Jesse coming to Nob, to Ahimelech the son of Ahitub.
10. "And he inquired of the LORD for him, gave him provisions, and gave him the sword of Goliath the Philistine."
11. Then the king sent someone to summon Ahimelech the priest, the son of Ahitub, and all his father's household, the priests who were in Nob; and all of them came to the king.
12. And Saul said, "Listen now, son of Ahitub." And he answered, "Here I am, my lord."
13. Saul then said to him, "Why have you and the son of Jesse conspired against me, in that you have given him bread and a sword and have inquired of God for him, that he should rise up against me by lying in ambush as [it is] this day?"
14. Then Ahimelech answered the king and said, "And who among all your servants is as faithful as David, even the king's son-in-law, who is captain over your guard, and is honored in your house?
15. "Did I [just] begin to inquire of God for him today? Far be it from me! Do not let the king impute anything to his servant [or] to any of the household of my father, for your servant knows nothing at all of this whole affair."
16. But the king said, "You shall surely die, Ahimelech, you and all your father's household!"
17. And the king said to the guards who were attending him, "Turn around and put the priests of the LORD to death, because their hand also is with David and because they knew that he was fleeing and did not reveal it to me." But the servants of the king were not willing to put forth their hands to attack the priests of the LORD.
18. Then the king said to Doeg, "You turn around and attack the priests." And Doeg the Edomite turned around and attacked the priests, and he killed that day eighty-five men who wore the linen ephod.
19. And he struck Nob the city of the priests with the edge of the sword, both men and women, children and infants; also oxen, donkeys, and sheep, [he struck] with the edge of the sword.
20. But one son of Ahimelech the son of Ahitub, named Abiathar, escaped and fled after David.
21. And Abiathar told David that Saul had killed the priests of the LORD.
22. Then David said to Abiathar, "I knew on that day, when Doeg the Edomite was there, that he would surely tell Saul. I have brought about [the death] of every person in your father's household.
23. "Stay with me, do not be afraid, for he who seeks my life seeks your life; for you are safe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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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2장 (개요)
아기스에게서 쫓겨난 다윗은 이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거기서 다시금 사울에게 쫓김을 받게 되었다.
1. 다윗은 아둘람 굴에 숨었으며, 그의 친척들을 이끌어 왔고(1), 군인들을 모병했다(2). 그러나 그는 나이 많은 이들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난 보냈다(3, 4).
그리고 선지자 갓을 자기의 자문으로 모셔 들였다(5).
2. 사울은 다윗을 쫓기로 결심하고 그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의 신하들과 요나단에게 불평과 불만을 표시했다.
또 도엑이 전해 주는 말을 듣고,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히멜렉과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85명의 모든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자가 죽임을 당했다(9-19).
3. 그런 야만적인 학살 속에서 아비아달이 피하여 다윗에게로 갔다(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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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둘람 굴의 다윗(삼상 22:1-5)
Ⅰ. 다윗은 아둘람 굴에 자기 몸을 피했다(1절).
그곳이 자연적인 요새인지, 또는 인공적으로 만든 요새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아마 그 굴 속으로 출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윗은 혼자서도 능히 사울의 많은 군사들을 골리앗의 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말한 대로―3절)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알 수 있도록 기다려 보는 동안 그 안에 몸을 숨기고자 했을 것이다.
왕국에의 약속은 그 왕국을 보존하도록 하여 주신다는 약속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방법을 선택했다. ((주께 여쭈었던걸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시험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사울을 멸망시킬 어떤 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오직 그 자신을 보호하는 데만 힘썼다.
자기 조국을 위해서, 사사로서 또는 장군으로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여기 한 굴 속에 갇혔으며, 아무 소용이 없는 그릇처럼 버림을 받고 있다.
때로 빛나는 광명이 이처럼 등경 밑에 숨겨지며, 그 빛이 가리워진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마 히브리서의 저자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들에 대해 말하며,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8)라고 말했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때의 다윗의 경우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다윗은 시편 142편을 지었다. 그 제목은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기도”라고 되어 있다.
그 시편에서 다윗은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다”고 불평했지만 곧 이어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라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Ⅱ. 그의 친척들이 다윗을 찾아 그곳까지 갔다.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그의 보호를 받으며, 그를 돕고, 그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찾아왔다. “형제란 어려운 때 도와주기 위해 태어났다.”
이제 요압과 아비새와 그리고 남은 그의 친척들이 잠시 그와 함께 고난을 같이하면 곧 크게 성공할 것을 바라고 그에게로 왔다.
과연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다. 과연 다윗의 신하들 가운데 처음 세 사람은 그가 그 굴 속에 있을 때에 제일 먼저 그에게 찾아온 사람들이다(대상 11:15 이하).
Ⅲ.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2절).
그는 도망다니는 것만으로는 자신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최근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힘으로 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절대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왕을 공격하거나 왕국의 평화를 유린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힘을 가지고 자신을 방비하는 데만 사용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사람들이 다윗을 지켜 주는 군사들이라고 하여도 그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여든 사람들이란 위대한 사람도, 부자도, 그리고 건장한 사람도 또 좋은 사람들도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모여든 사람들이란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였다. 다시 말해서 불행한 자와 불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찌할 바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본부를 정했을 때 그들은 다윗을 찾아왔으며,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4백 명가량 되었다.
하나님은 때로 이처럼 약한 자를 들어 자기의 뜻을 펴신다. 다윗의 후손도 이런 고난 받는 사람들을 맞아들이시고, 그들의 대장이 되시매 그들을 다스리신다.
Ⅳ. 다윗은 그의 부모를 안전한 곳에 계시게 했다.
사울이 살아서 다윗과 그리고 다윗에게 속한 모든 자의 생명을 악착같이 노리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땅 안에 다윗의 부모가 안전하게 거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부모를 모시고 모압 왕에게 가서 그의 보호를 받게 했다(3, 4절).
1. 그는 나이 많은 부모를 위해 자상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다윗이 사울과 싸우는 동안 받게 될 여러 가지 놀라운 일과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그것은 그들의 나이가 이미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우선 부모님께 안전한 곳을 마련해 드리는 일을 했다.
모든 자녀들은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며 부모에게 보답하기를”(딤전 5:4) 다윗에게서 배워야 한다. 자녀들은 결코 부모의 마음을 불안케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마음에 들게 해 드려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았거나 부리는 종이 많아도 먼저 나이 많은 자기 부모를 잊지 말아야 한다.
2. 그는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이 문제가 쉬 해결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부모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 바가 있다.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자답게 겸손하게 자신의 희망을 표시했다.
그는 문제가 잘 해결되리라는 것을 기대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자신의 기술이나, 무력이나 또는 공로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그리고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룩된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다윗의 부모는 그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시 27:10).
Ⅴ. 다윗은 선지자 갓의 충고와 도움을 받아들였다.
그는 사무엘 밑에서 성장한 선지자의 생도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사무엘로부터 다윗의 군복과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로 지명받은 사람일 것이다.
선지자로서 갓은 다윗을 위하여 기도했으며,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다윗 자신도 선지자이지만 그의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갓은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했다(5절).
그는 다윗에게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며, 또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현재의 환경이 매우 어렵다고 하나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 인간은 자신의 주장을 부끄럼 없이 내세울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제공되는 협조를 거절하지도 말아야 한다.
갓의 말에 용기를 얻고 다윗은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기로 작정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명을 받은 의인의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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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인 사울(삼상 22:6-19)
우리는 다윗의 고난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울의 악한 일들을 볼 수 있다.
그는 다른 모든 일들은 온전히 제쳐 놓고 전적으로 다윗을 추격하는 일만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사울은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다(다시 말해서 다윗이 얼굴을 내밀고 여러 사람들이 그를 도왔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사울은 그의 신하들을 불러 옆에 세우고, 자기는 기브아 높은 곳에 있는 한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단창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그의 통치력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현재의 그의 불안한 심령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길에 방해가 되는 자는 모두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Ⅰ. 사울은 이런 핏발이 서린 심판대에 앉아서 다윗과 요나단에 대한 정보를 듣고자 했다(7, 8절).
사울은 그의 주변에 있던 가장 훌륭한 두 사람에 대해 자기의 적의를 퍼붓기 위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싶었고 또 그것이 사실임이 증명되기를 원했다.
1. 사울은 그의 신하인 다윗이 “매복하였다가” 자기를 “치려 한다”고 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사실은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노렸다. 그리하여 다윗이 자기의 생명을 노린다고 꾸며댔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어떤 혐의를 씌울 만한 다른 허물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도록 선동하고 그와 함께 왕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고 말했다.
이것 역시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우정의 맹세는 있었다. 그러나 어떤 악을 행하고자 하는 공모는 없었다.
그들이 세운 언약 속에는 사울에 대해 어떤 해를 가하고자 하는 조항이 하나도 없었다.
사울이 죽은 뒤에 다윗이 왕권을 계승하여야 한다고 동의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사울을 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과 나라에 대해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때로는 원수로 여김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혐의를 받으셨다.
사울은 다윗과 요나단이 틀림없이 자기를 죽이고 자기의 왕위와 권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신하들에게 그들이 틀림없이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던 일이다. 질투의 악독한 본성과 그리고 없는 사실도 있다고 꾸며대려고 하는 그 가련한 술수를 보라.
사울은 자기가 말한 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원수처럼 여겼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1) 저들은 지혜롭지 못하여, 그들의 지파와 가족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고 말했다(왜냐하면 그들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인데 만일 다윗이 성공하면, 현재 베냐민 지파가 가지고 있는 영광과 권세가 유다 지파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다윗은 결코 그들이 다윗에게 해 준 일에 대한 보상을 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즉 다윗은 그들에게 “밭과 포도원을” 주지 않을 것이며, “천부장과 백부장을” 삼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2) 그들은 불실한 신하라고 말했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였다” 고 사울은 말했다.
질투의 영에게 사로잡힌 자의 끊임없는 동요와 괴로움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라! “관원이 거짓말을 신청하면 그 하인은 다 악하다”(잠 29:12). 다시 말해서 관원의 눈에 모든 사람이 악한 사람으로 보인다.
(3) 그들은 친절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사울은 신하들에게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가 없다고 말하면 이 말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나 위하여 염려하는 자”가 없다는 말로 읽기도 한다. 사울은 이런 말을 가지고 신하들로 하여금 자기의 악의를 실천에 옮겨 줄 도구로 삼고자 했다.
Ⅱ. 사울은 신하들로부터 다윗과 요나단에 관한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도엑으로부터 제사장 아히멜렉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1. 도엑이 아히멜렉을 고발했고, 그 자신이 증거를 제시했다(9, 10절).
도엑은 나쁜 사람이었던 만큼 사울이 이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그 말을 사울에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도엑이 이를 자진해서 사울에게 말하고자 했으면, 벌써 말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사울의 신하들이 아무도 다윗과 요나단에 대하여 고발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모두 반역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목격자의 입장에서,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행한 일을 고해 바쳤다.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보통 제사장은 공적인 일이나,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식물과 칼”을 그에게 주었다고 도엑은 사울에게 말했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실은 아니었다.
도엑은 다윗이 아히멜렉으로 하여금 그가 왕의 일을 하기 위해 간다고 믿게 만든 사실도 말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한 일은 곧 사울의 명예를 인하여 행한 일이었음을 밝혀 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 사울의 수중에 들어 있는 아히멜렉의 잘못은 벗겨지고 모든 허물은 사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다윗에게만 씌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2. 아히멜렉은 사울의 소환을 받아 그의 앞에서 이 고소의 내용에 관해서 문초를 받았다.
왕은 아히멜렉과 그리고 그때 성전에 있던 모든 제사장들을 전부 데려오게 했다. 왕은 그들이 모두 다윗을 돕는 일을 방조했다고 추측했다.
그들은 조금도 잘못한 생각이 없었으며 따라서 위험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그들이 다 왕께 이르렀으며”(11절), 누구 한 사람 도망치거나 다윗에게로 피하려 하지 않았다.
사울은 가장 그를 멸시하며 분하게 여기는 말로 아히멜렉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라고 했다(12절).
사울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으며, 그의 높은 직위의 명칭을 부르지도 않았다.
이로써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의 제사장들을 전혀 존경치 않고, 다만 그들을 멸시하는 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히멜렉은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나이다. 내가 책망받아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란 말 한마디만 하고 그대로 피고석에 들어섰다.
그는 사울의 재판권에 대해 반대하지도 않았고, 제사장으로서의 면책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에게 부여된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가지고 비록 대제사장이라도 일반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그를 다루고자 했다.
“각 사람은 (비록 성직자라도)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
3. 그에 대한 고소장을 읽어 주었다(13장). 즉 아히멜렉은 반역자로서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왕을 대적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다윗의 계획은 나를 치려는 것인데 네가 그에게 떡과 칼을 주어 이 일을 도와주었다”고 사울은 말했다.
조금도 잘못이 없는 행동에 대해서 어쩌면 그렇게도 잘못된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폭군의 통치하에 사는 사람들의 불안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공정한 헌법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을 참으로 다행하게 생각해야 한다.
4. 이러한 고소에 대해 아히멜렉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14, 15절). 그는 그러한 행위 자체는 시인했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반역적으로, 그리고 적의를 가지고 왕을 해하기 위해 한 행동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히멜렉은 사울과 다윗의 사이가 불화하게 된 것을 전혀 몰랐으며, 따라서 다윗을 전과 똑같이 대해 주었다고 말했다.
사실 다윗이 아히멜렉을 속였건마는 그는 다윗이 그를 속였으며, 거짓말을 했노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찌하든지 다윗의 생명을 노리고자 하는 사울 앞에서는, 더욱더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기 위하여 의로운 자의 약함을 들어내 줄 수는 없었다.
반면에 다윗의 명성을 추켜세웠으며, 그가 사울의 충실한 신하였음을 말했고, 왕이 그를 자기의 사위로 삼을 정도로 그를 높인 사실도 말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니이다. 그러므로 그를 죄인으로 보지 않고 존경을 표시한 것은 왕실에 대해 경의를 표시한 훌륭한 행동으로 누구나 볼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사울의 보냄을 받아 왔을 때마다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었던 것”과 같이 이번에도 그를 위하여 물은 것은 조금도 잘못이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왕을 해치고자 하는 음모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역설했다.
“아무것도 나에게 돌리지 마소서. 나는 다만 나의 일에 충실했을 따름이며, 나라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아히멜렉은 왕의 자비를 호소했다. “왕은 종에게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자기의 무관함을 분명히 밝혔다.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이 대소 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라고 했다. 인간이 이 이상 더 확실한 증거를 댈 수 있겠는가? 그가 만일 정직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배심원으로 세워 판결을 받았다면 틀림없이 무죄 방면을 받았을 것이다. 누가 그에게서 잘못을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나 사울은 그에게 해로운 판결을 내렸다(16절). “아히멜렉이여, 너는 반역자로서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고 했다.
이 이상 더 불의한 재판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내가 해 아래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다”(전 3:16).
(1) 이 판결은 사울 자신이, 다만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판결했기 때문에 공평치 못한 판결이다.
그는 어떤 사사나 선지자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으며, 자기의 참모들에게 의논하지도 않았다.
(2) 정당한 항변에 대해서는 정당한 이유가 제시되지 못하거나, 이를 반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는 도저히 거절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처사는 오직 독단적인 처사일 따름이다.
(3) 그 판결 선고는 사사로 하여금 자세히 검토하며, 사사가 직접 조사를 해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가 없을 정도로 성급히 조급하게 선고되었다.
(4) 그 선고는 도엑에 의해 무고를 당한 장본인인 아히멜렉에게만 선고된 것이 아니라, 아무 관련이 없는 “그의 아비의 온 집”이 함께 선고를 받았다.
아버지의 잘못 때문에 자녀들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5) 그 선언은 정당한 법적인 근거도 없이 자기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며, 자기의 야만적인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6. 사울은 그를 즉시 사형하라는 명령을 (다만 구두로만) 내렸다.
(1) 사울은 자기의 시위자에게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거절했다(17절).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제사장들을 더욱 욕되게 하고자 했다. 그들은 군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는 없었다.
만일 사울의 시위자들이 그를 죽였다면 그들은 그들의 손을 제사장들의 피로 물들여야만 했다.
① “여호와의 제사장을 죽이라”고 하는 왕의 명령만큼 잔인한 명령은 또 없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무자비한 명령이었다.
사울은 제사장들의 성스러운 직무와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를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리고 또 그렇게 말함으로 하나님의 제사장 전체에 대해 자기의 불쾌감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한편 그의 시위자들에게 그들의 목을 치라고 명령할 때 그들을 일컬어 “여호와의 제사장들”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그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그의 뒤를 이을 다른 사람을 기름 부으셨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에게는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제사장들에게 이를 복수하고자 그 기회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악령이 인간을 사로잡으면 어떤 악한 일이라도 시키지 못할 것인가! 사울은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면서 그들이 다윗이 도망친 사실을 알고도 자기에게 고하지 않았다고 엉터리 주장을 되풀이했다. 악독과 살육은 언제나 거짓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② 시위자들이 왕의 명령을 거역한 것은 참으로 명예로운 행동이었다.
시위자들은 그들의 주인보다 더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은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사장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들의 지위가 박탈당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오든지, 제사장의 직분을 존경하며 또 그들이 무죄하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는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2) 사울은 (고발자인) 도엑에게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했고, 도엑은 그 명령을 실행했다.
어떤 사람은 시위자들의 거부가 사울의 양심을 일깨워 주었으며, 그래서 시위자들에게 그 일을 계속 강요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은 맹목적이었으며, 매우 강퍅해졌기 때문에 그들이 하지 못한다면 “증인으로 하여금 먼저 손을 대게 하자”(신 17:7)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에 굶주린 폭군들은 그 자신처럼 사나운 도구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악독함을 실행시킨다.
도엑은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자마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으로 그날에 제사장 팔십오 명을 죽였다.
그들은 “세마포를 입은” 제사장들로서 한창 일할 나이인 25세에서 50세까지의 제사장들이었다. 그들은 습관에 따라 사울 앞에 나왔던 사람들이었다.
이만하면 아무리 피에 굶주렸던 자라도 충분했을 것이다(라고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 그러나 핍박자의 말거머리는 계속해서 “더, 더 달라”고 소리친다.
도엑은 제사장들을 죽이고 또 사울의 명령을 받아, 제사장들의 성읍인 놉에 가서, “남녀와 아이들”과 그리고 소와 나귀들을 칼로 쳤다.
그 잔악함에 무서워 떨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인간의 마음속에 그처럼 비정스런 마음과 비인간적인 마음이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볼 수 있다.
①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서 떠나가자, 사울은 매우 악독한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욕심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 한 인간은 이 이상 더 악독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아각과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의 소떼를 살려 주었던 사울이 여기서는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들에게 속한 자들을 하나도 살아 남게 하지 않았다. 그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사울을 떠났던 것이며 이러한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② 오래 전에 엘리의 집에 내렸던 형벌에 대한 경고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아히멜렉은 엘리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울은 그의 불의함 때문에 이런 악행을 행했지마는, 하나님은 당신의 정의 속에서 이를 시행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그의 집을 영영히 심판하겠으며”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고 하셨다(3:11-13).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③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심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때가 이르면 한 왕을 내려 주시고자 하셨건마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왕을 구했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징벌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상태는 얼마나 한심스러운 것이었을까! 비록 하나님의 궤의 존재가 희미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하나님의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거기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제사장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그들의 피 위에 뒹굴게 되었고, 제사장의 성읍은 폐허가 되었다. 이제 찾는 자가 없어 하나님의 제단이 다시금 더 버림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자기의 야만적인 복수심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왕의 가혹한 명령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무엘과 그의 아들들에 의한 통치를 얼마나 그리워했을 것인가? 아무리 그들의 지독한 원수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가혹한 일을 결코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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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아달이 다윗에게 도망침(삼상 22:20-23)
Ⅰ.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성읍을 살육하는 가운데서 도망했다.
아마 그의 아버지가 사울의 부름을 받아 사울에게 갔을 때, 그는 제단을 섬기기 위해 집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의 화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엑과 그의 사냥개들이 놉에 오기 전에 그는 위험을 알고 재빨리 자기 몸을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다윗에게로 갔을까?(20절).
다윗의 자손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자는 “그의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 지어다” (벧전 4:19).
Ⅱ. 그 슬픈 소식을 듣고 다윗은 울분에 떨었다.
아비아달은 사울이 시켜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인 사실을 다윗에게 말했다(21절). 세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가서 고했던 것”과 같다(마 14:12).
재난의 소식을 듣고 다윗은 크게 한탄했다. 더욱이 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22절)라고 다윗은 말했다.
의로운 사람이 자기 때문에 교회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이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다윗은 도엑의 사람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성전에서 보았을 때, 그가 이런 잘못을 범하리라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알았노라”라고 말했다.
다윗은 “에돔 사람 도엑”이라고 그를 일컬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이스라엘의 신앙을 고백하고, 이스라엘 사람의 표적을 외모로는 가지고 있으나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는 에돔 사람의 기질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Ⅲ. 다윗은 아비아달을 지켜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비아달이 두려워 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다윗은 그를 자기 몸처럼 돌봐 주겠다고 했다.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23절)라고 다윗은 말했다.
냉정을 되찾은 다윗은 자기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고, 그가 아비아달도 틀림없이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약속했다.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에게 “그를 자기의 손 그늘에 숨겨 주시겠다”(사 49:2)고 약속하셨으며, 그와 함께 그의 사람들도 모두 안전하리라고 약속하셨다(시 91:1).
다윗은 이제 한 사람의 선지자뿐만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제사장, 그것도 대제사장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게 했다. 다윗은 그들의 축복이 되었고, 그들 역시 다윗에게 축복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의 성공을 위한 좋은 징조가 되었다.
그런데 사울에게도 대제사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8:6에 의해서 볼 때 그렇다). 왜냐하면 우림으로 하나님의 신탁을 구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은 엘르아살의 가문인 사독의 아버지 아히둡을 발탁한 것으로 추측된다(대상 6:8).
왜냐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미워할지언정 전혀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윗이 이때에 시편 52편을 썼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시편의 제목에 그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그 시편에서 다윗은 도엑이 악독한 자이며, 간악한 자일 뿐만 아니라, 거짓된 자요 남을 속이는 자라고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본질적인 면에서는 사실이기는 하나, 남을 해하고자 하여 거기에 거짓된 색깔을 입혔기 때문이다.
다윗은 제사장의 직분이 메마른 가지처럼 되었을 때에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보았다(시 52:8).
이런 다급한 소란 속에서도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며, 거기서 크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
===호크마===
사무엘상 22장
1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ㅇ다윗이...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 '아둘람'(Adullam)은 '피난처', '보호처'란 뜻이다. 이곳은 성경 다른 곳에서 가나안 족속의 왕도(王都)중 하나로 언급된다(창 38:1, 2; 수 15:35). 그 위치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곧 가드 남동쪽 약 14km 지점으로, 본래는 유다의 영토였으나 그 당시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같다(Hertzberg, Stoebe). 한편 최근의 성서 고고학자들은 그곳을 탐사하던 중 아둘람성(城)의 한 산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살기에 적합할 듯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고 한다(Conder, Robinson). 이러한 '아둘람'은 현재 '텔 에쉬 - 세이크 마드쿨'(Tell esh - Sheikh Madhkur)로 추정된다(L. Wood). 그리고 여기의 '도망하매'란 말은 앞장의 사건(21:10-15), 곧 '아기스 왕 앞의 거짓 광인(狂人) 사건'의 결과로, 본장이 앞장과 밀접히 연결되어있음을 잘 보여 준다.
ㅇ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그에게 이르렀고 - 역모(逆謀)에 관한한 한 사람의 범죄때문에 온 가족이 처벌당하는 일은 고대의 흔한 관습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사울의 보복을 피하여 다윗의 가족이 이같이 도피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Keil, Smith,Clericus). 한편 '아둘람 굴'은 다윗의 가족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졌다는 점에서, 다윗의 가족들은 적어도 약 네 시간 정도 걸려 그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ㅇ내려가서(야라드) - 이 단어는 베들레헴에 비하여 아둘람 지역이 상대적으로 저지대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ㅇ환난당한 모든 자 - 여기서 '환난당한'(마초크)은 '억지로 시키다', '강요하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추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단어의 어근이 갖는 의미를 통하여 추론해 볼 때, '환난을 당한 자'는 그 당시 사울의 학정(虐政)으로 인하여 주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사 51:13).
ㅇ빚진 자 - 이들은 사울 왕국의 부당한 세정(稅政) 또는 채주의 강압적인 고리(高利) 등으로 인하여 주로 경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Fay, Smith).
ㅇ마음이 원통한 자 - 이와 같은 성구가 무자(無子)로 인해 브닌나로부터 애매히 고통당했던 한나의 경우에도 적용되었다(1:10). 따라서 아마도 이들은 사울 왕국의 비도덕성 또는 비종교성 등으로 인해 심적.영적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끼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ㅇ모였고(이트카베추) - 이말은 '모이다'(카바츠)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자신들 스스로 모여들었다'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수 9:2; 삿 9:47; 삼하 2:25). 한편, 이처럼 스스로 뜻을 세우고 다윗에게로 모여든 여러 사람들 중에는 많은 용사들과 선지자, 그리고 지사(志士)들이 있었다(5절;대상 12:1-18).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점점 타락하고 쇠퇴해가던 사울 왕국에서 침묵하고 안주하기 보다는 장차 이스라엘을 새롭게 할 자로 부름받은 다윗과 더불어 고난당하기를 기뻐하여 이처럼 모여든 것이다.
ㅇ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 - 고대 이스라엘의 관습으로는 여자와 어린 아이는 항상 계수(計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기의 이 '사백 명'역시 전투에 참여할 만한 용사들만을 의미함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 숫자는 얼마 안가서 결국 육백 명으로 불어난다(23:13; 25:13; 27:2; 30:9, 10).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ㅇ다윗이...모압 미스베로 가서 - 다윗이 '아둘람 굴'<1절>로 간 것은 일시적으로 피신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추종자가 많아짐에 따라 블레셋 사람들과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가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다윗은 보다 안전한 피신처를 찾아 '모압'으로 간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과 자신의 부모들의 피신처로 모압을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증조모 룻이 모압 여인이었으므로(룻 1:22), 다윗은 모압 민족과 어느 정도 혈연적 연관성을 갖고 있었으며(룻 4:13-22; 마 1:5, 6), (2) 당시 사울 왕국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모압민족이 사울 왕의 경쟁자인 다윗 자신을 후원할 것으로 기대했으며(14:47). (3) 일단 피신하였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기에 적당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미스베'(Mizpeh)는 '망대'(watch-tower)란 뜻으로, 현재까지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지명이 갖는 의미로 볼 때, 사해(死海, Dead Sea) 동쪽에 있는 모압 평지 가운데의 비스가 산(신 3:27; 34:1) 근방 혹은 그 인근의 고지대로 추정할 수 있다(Fay, Smith,Keil).
ㅇ하나님이 나를...어떻게 하실 것을...알기까지 -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길을 밝히 보여주사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확고히 믿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다윗은 자신의 고난이 결코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와 능력으로써만 해결된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시 27:10).
ㅇ나의 부모로...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 다윗은 노쇠한 부모와 함께 자신의 험난하고 고달픈 도피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같은 요청을 한 것이다.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 '다윗의 요새'에 대해서는 (1) 모압이나 이스라엘 땅을 막론하고 다윗이 돌아다녔던 여러 요새라는 견해(Smith), (2) 자신의 앞날을 관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던 모압 땅의 한 요새라는 견해(Keil, Lange)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여기의 '요새'(메추다)가 단수라는 사실 둘째, '갓' 선지자가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했다는 사실<5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2)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왕과 함께 있었더라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ㅇ선지자 갓 - 성경 주석가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이 선지자의 출현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들을 제시한다. 즉 (1) 갓은 그때 다윗에게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하나님의 뜻만 전했다는 해석(Lange), (2) 갓은 사무엘이 지도하는 선지 학교 출신으로서, 사무엘의 명을 받아 다윗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는 해석(Smith, Keil),(3)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때 모여든 사백 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모압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다윗에게 전했다는 해석(Wood) 등이다. 그런데 본서가 사무엘을 통한 다윗의 왕국 건설을 대주제로 하는 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하지는 않지만 (2)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한편 '갓'은 '행운'이란 뜻인데, 이와 동일한 명칭의 지파 즉 갓 지파가 있다는 점에서, 이 선지자는 그 지파 소속의 사람인 듯하다. 향후 이 선지자는 다윗의 도피 생활 중 그의 조언자 역할을 한 것 같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궁전 선지자로 봉사하면서(대상 21:9)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기도 하고(삼하 24:11-19), 다윗의 행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대상 29:29).
ㅇ유다땅으로 들어가라 - 이같은 명령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애굽 땅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다시 불러내셨던 사건과 신학적 동일선상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창 12:1, 10).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언약의 땅 가나안을 지켜야 했듯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다윗도 어떠한 위험과 역경이 기다린다고 하지라도 언약의 땅과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다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사실 다윗은 유다로 돌아가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등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백성들로부터 지속적인 인정을 받을수 있었으며(18:7, 28-30), 바로 이같은 일이 왕좌(王座)로 나아가기 위하여 다윗 자신이 준비해야 할 일이었다.
ㅇ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 '헤렛'(Hereth)은 오늘날 '카라스'(Kharas)와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된다(Smith, Fay). 그 위치는 '십'(23:15) 남쪽 약 3.2km, 헤브론 남서쪽 약 8-9km지점으로 '그일라'(Keilah, 23:1)와 인접 지역이다(Hertzberg).
6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ㅇ사울이 다윗...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 본서 저자는 놉의 제사장들이 대량 학살을 당하는 사건의 초두에서 이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유다에 나타난 이 사실이 대학살 사건이 벌어지게 된 한 요인이었음을 암시하려고 했다. 한편 여기의 '나타났다'는 '야다'의 수동형으로서, '알려졌다'로 번역함이 타당할 듯하다(시76:1; 잠 31:23; 전 6:10).
ㅇ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 여기의 '높은 곳'은 산당(山堂)을 의미치 않는다. 다만 자신의 왕적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사울에 의하여 선택된 높은 곳의 자리를 가리킬 뿐이다(Keil, Fay).
ㅇ손에 단창을 들고 - '단창'은 사울이 항상 소지하던 것으로서(18:10; 19:9, 10;26:7, 8, 11, 12, 16; 삼하 1:6), 왕들이 흔히 지참하는 홀처럼 왕의 위엄을 상징(히1:8)하는 것이다(Fay). 그런데 사울이 홀 대신에 '단창'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수행하던 왕직(王職)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9:16, 17).
ㅇ에셀 나무 아래 앉았고 - '에셀나무'(tamarisk tree)는 보통 사막 지역의 와디(Wadi, 건천)에서 자생하는 연질(軟質)의 나무이다. 이 나무는 수많은 가느다란 가지에 비늘과 같은 잎이 달려있으며, 꽃의 색깔은 하얗다. 그런데 이것은 고지대에서 특히 귀하다는 사실때문에, 대부분 산지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히 여겨졌다.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이 에셀 나무 아래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Klein). 더구나 여호와 숭배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이나무를 브엘세바에 심었다는 사실 또한 이 나무를 소중히 여기도록 한 한 가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창 21:33). 또한 후일 사울이 이 나무 아래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은(31:13), 그가 이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다는 증거도 된다.
ㅇ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 이것은 '어전 회의'(御前會議)에 대한 묘사로서, 사울은 중대한 국사(國史)는 이러한 어전 회의를 통해 이견을 듣고, 또한 명령을 시달한 것 같다.
7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ㅇ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 사울의 신하들이 이처럼 사울의 지파와 동일한(9:1, 2)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즉 (1) 사울의 민족 단합 정책이 거의 실패로 돌아갔으며(Smith), (2) 사울이 자신의 병적인 피해 의식에 따라 편증된 인사(人事) 정책을 실시했음을 깨닫게 해준다(Fay, Keil).
ㅇ이새의 아들 -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호칭이다<20:30>.
ㅇ너희에게...밭과 포도원을 주며 - 여기의 '밭과 포도원'은 왕에 대한 봉사.충성의 대가로 하사받는 토지를 가리킨다(8:14). 그런데 사실 여기의 '밭과 포도원'은 왕권(王權)을 이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의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임이 분명하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경고했던 바(8:11-18), 곧 왕이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라는 예언이 사울에 의해 그대로 성취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8:14>.
ㅇ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 사울의 이 말도 역시 사무엘이 예언했던 왕의 직권 남용이 사울에 의하여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8:12>
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ㅇ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 이것은 실제로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을 모해(謀害)하기로 음모를 꾸몄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신하들이 다윗을 체포하고 처치하는 데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나아가 이 말은 자신의 신하들이 다윗과 공모하여 고의적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피해 의식에 서 비롯된 의심의 말이기도 하다(Lange).
ㅇ맹약하였으되 - 당시 다윗과 요나단 간의 우정과 사랑의 맹약은 너무도 진솔하고 탄탄한 것이었으므로, 사울 뿐만 아니라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다윗의 도피 생활에 분명 요나단이 개입되었을 터인데, 그러한 정보를 신하들 중 한 명도 자신에게 고발하지 않고 있다고 사울이 격노하고 있는 것이다.
ㅇ내 아들이...나를 치려 하는 것 - 이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피해 의식이 점차 심화되어, 신하들은 물론 자신의 아들까지도 자신을 죽이려 하는 모해자(謀害者)로 의심하는 사울의 병적 증세를 보여 준다.
9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10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ㅇ도엑이...신하 중에 섰더니 - 여기서 '신하'(에베드)는 '종이 되다', '종노릇 하다', '섬기다'란 의미를 갖는 '아바드'에서 온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의 이 '신하'는 고관 대작만을 의미치 않는다. 즉 상당히 넓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한 =데, 아마도 여기의 '도엑'은 사울의 목자장 또는 사울의 근위대장 정도의 지위였던 것 같다(21:7 주석 참조).
ㅇ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 - 21:1 주석 참조.
ㅇ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 이것은 실제로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을 언급하고 있는 21:1-9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엑의 이말은 사실이다(15절). 즉 도엑이 사울에게 고발한 바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하여 여호와의 뜻을 묻고, 식물도 주고, 칼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엑은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왕명(王命) 수행을 핑계로 그러한 요구를 했다는 사실(21:2)은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러한 사실까지 말했다면, 정황을 모른 아히멜렉은 무고히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놉 제사장 대학살 사건'(18절)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엑은 혀가 지닌 간사성과 위험성을 가장 잘 보여 준 대표적인 악인이었다(시 52:3-5; 약 3:2-6).
ㅇ식물 - 성소의 떡상에서 물려냈던 진설병(21:5, 6)을 말한다.
11 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ㅇ아히둡 - 대제사장 엘리의 손자이며, 사악한 제사장 비느하스의 아들이다(14:3).
ㅇ놉에 있는 제사장들 - 원래 '놉'은 제사장의 성읍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이 성읍에서 집단 거주하게 된 까닭은, 실로가 블레셋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에서 엘리 제사장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던 바로 이 성읍으로 거주지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때 엘리의 후손들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성막을 다시 재건했을 것이다(21:1).
12 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13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ㅇ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이 말은 아히멜렉이 불길한 예감을 갖고 두려운 마음으로 사울의 호출에 응했음을 잘 보여 주는 표현이다.
ㅇ네가 어찌하여...공모하여 - 간신 도엑의 말(9, 10절)에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사울왕은 정황을 자세히 살피기에 앞서 먼저 제사장 아히멜렉을 반역 공모죄로 몰아붙이고 있다. 그런데 사실 모세 율법에 따르면(신 19:15; 민 35:30) 판결에는 반드시 두사람 이상의 증인(證人)이 요구되었는데, 사울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자기 심복이었던 도엑의 증언만을 듣고 재판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ㅇ오늘이라도...나를 치게 하려 - 다윗에 대한 사울 왕의 피해의식과 강박 관념이 잘 드러난 말이다. 사실 사무엘로부터 폐위 선언(13:13, 14; 15:23, 26)을 듣고 곧이어 다윗이 출현하게 되자, 사울은 다윗으로부터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14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ㅇ충실한 자 - 여기서 '충실한'(네에만)은 '신뢰하다'(아만)의 수동형 분사이다. 따라서 '신임을 받는'이란 뜻이다(사 33:16; 렘 42:5).
ㅇ왕의 모신 - 여기의 '모신'(미쉐마아트)은 어원학상으로 볼 때 '순종해야 되는 자', '듣는 자', '청중'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시종' 즉 '옆에서 모셔서는 자'란 말로서, 왕의 개인 보좌관 내지는 조언자를 가리킨다(Klein,Keil, Smith; 삼하 23:22, 23; 대상 11:24, 25).
15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것이 없나이다
ㅇ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처음이니이까 - 성경은 다윗이 사울의 중신(重臣)이 된 이래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경우를 언급치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 있을 때마다 대제사장이 전장(戰場)으로 나아가서 전투 최고 지휘자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관례였다는 점에서 볼 때(14:3). 다윗이 지휘했던 전투에 아히멜렉도 함께 가서 다윗의 요구에 따라 '우림과 둠밈'(출 28:30 주석 참조)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16 왕이 가로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ㅇ본절의 내용은 사울이 그릇된 재판을 행하는 등 하나님의 공의를 파기한 불의한 폭군임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신 16:18). 즉 사울의 재판은 (1) 모세 율법에 명시된 바 두사람 이상의 증인을 세우지 않았으며(신 19:15), (2) 간결 명료한 진술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던 아히멜렉의 증언을 오히려 자신의 독단으로써 일언지하에 무시하였으며(14, 15절; 신 19:16-19), (3) 분명한 이유도 없이 온 가문(家門)을 몰살시켰다는 점(신 24:16)에서 볼때 분명 폭군(暴君)의 불의한 횡포일 뿐이었다.
17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ㅇ좌우의 시위자 - 여기의 '시위자'(루츠)은 '달리는 자'란 의미이다. 즉 이것은 왕의 병거를 호위하는 근위병을 가리킨다.
ㅇ왕의 신하들이...죽이기를 싫어한지라 - 사울의 신하들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죽여야 하는 대상이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며, (2) 이들 제사장들에 대한 사울의 재판이 완전한 독단과 조작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ㅇ여호와의 제사장 - 본서 '저자는' '제사장'앞에 계약적 의미를 강조하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을 첨부함으로써, 사울의 신하들이 왜 제사장들을 도륙하라는 사울의 명령을 이행치 아니했는지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한다. 즉 사울의 신하들은, (1)자신들이 여호와의 계약 백성임을 믿고 있었으며, (2)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자신들 간의 게약적 관계를 제사 의식을 통하여 연결.유지해 주는 중요한 직분자들이었음을 깨닫고 있었으므로 제사장들을 죽이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ㅇ왕이 도엑에게...죽이라 하매 - 사울은 자신의 다른 신하들이 제사장을 죽일 수 없는 필연적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 '이방인' 도엑(21:7)을 시켜 제사장을 죽이려고 했다.
ㅇ에돔 사람 도엑 - 여기서도 '도엑'이라는 인물이 '에돔 사람'(the Edomite)임이 강조되고 있다. 21:7 주석 참조.
ㅇ그날에 - 무고한 제사장들을 죽이는 일이 지체없이 시행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ㅇ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 인을 죽였고 - '놉 제사장 학살 사건'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즉 (1)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 직무를 맡고 있는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무고한 혐으로 가혹하게 처단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독한 처사요, 따라서 그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8:7)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였다.
(2) 일찍이 대제사장 엘리의 가문에 내려졌던 심판적 예언의 성취였다(2:31-36;3:11-14). 즉 제사장 아히멜렉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써 심판적 경고를 받았던 엘리의 증손자로서(14:3). 조상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의 불의한 재판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대소사(大小事) 및 길흉(吉凶)의 사건들이 모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하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한편 여기의 '세마포 에봇'은 일반 제사장들이나 성막 봉사자들이 입던 옷으로서, 대제사장들이 입는 에봇과는 분명히 구분된다(2:18).
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ㅇ제사장들의 성읍 - '놉'(Nob)은 분명히 모세나 여호수아에 의하여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되지 아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놉'은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그당시 놉이 제사장들의 거주지였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었다.
ㅇ남녀...젖 먹는 자들과 소...양을 칼로 쳤더라 - 제사장을 죽이라는(17, 18절) 사울의 명령보다 더 심하게 이처럼 행한 것은 분명 '도엑' 자신의 독단적 판단에 따른 행위로는 볼 수 없다. 틀림없이 이것은 '놉'이라는 성읍 전체를 '진멸'해야 하겠다고 판단한 사울의 또다른 명령에 따른 행위였을 것이다.
일찍이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15:3)을 제대로 이행치 않음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15:18, 19, 23).
그러나 이제 사울은 그때 휘둘렀어야 했을 '진멸의 칼날'을 오히려 선량한 놉의 제사장들에게 사용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20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ㅇ아히멜렉의 아들 중...아비아달 - 여기의 '아들 중'이라는 말은 당히 '아히멜렉'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또한 여기서 '아비아달'(Abiathar)은 '아버지는 뛰어나시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아비아달은 제사장들이 모두 사울에게 호출됐을 때에 성막에 혼자 남아 있다가, 사울에 의한 비극적 학살 사실을 전해 듣고 급히 도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Smith).
특히 이처럼 아비아달이 성막에 있다가 도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가 '에봇'(21:9)을 갖고[=대제사장의 에봇, 판결흉패(우림, 둠밈이 들어있는)] 다윗에게로 도망갔다는 사실에 의하여(23:6) 그 정확성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ㅇ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 '아비아달'이 이같이 다윗에게로 도망간 까닭은, 다윗이 사울에 의해 쫓기는 등 사울과는 적대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역시 사울에게 쫓기는 자신을 기꺼이 받아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21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ㅇ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 '놉 제사장 대학살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되는 다윗의 시편으로는 17, 35, 64, 109, 140편 등이 있다.
즉 후일 다윗은 이러한 시편들을 통해 악인의 잔인성과 그 말로(末路), 자신의 범죄및 여호와의 긍휼 등을 진솔히 읊었다.
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ㅇ반드시...고할 줄...알았노라 - 다윗은 바로 이같은 판단에 따라, 황급히 '놉'을 떠나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갔었다(21:10).
그러나 그때 다윗은 자신으로 인하여 제사장들이 엉뚱하게 다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ㅇ네 아비 집...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같이 유감을 표명한 까닭은, 아비아달의 아비 아히멜렉의 가문이 사울로부터 화를 당하게 된 것은 자신이 그에게 거짓말을 해서 그로부터 도움을 받게된 사실이 주요한 원인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21:2>.
따라서 다윗은 이처럼 아히멜렉을 위시한 제사장들의 죽음의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었음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시 32:5).
더욱이 그는 자신의 거짓말 범죄(21:2)에 대한 인정과 회개의 표시로 긴급 구조를 요청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을 자신의 무리 안에 받아들이기까지 하였다.
이같이 비록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기는 했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참된 회개를 통하여 신앙을 회복하는 행위야말로 다윗을 다윗답게 한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삼하 12:13).
23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
ㅇ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 아비아달을 확신시키는 다윗의 이 말 속에는 (1)하나님께서 자신과 늘 함께 계실 것이라는 신앙과 (2) 이스라엘의 왕권은 결국 자신에게로 넘어올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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