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삿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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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4장  [85.구주를생각만해도]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보혈을지나..은혜로만들어가네...나의사랑너는어여쁘고참귀하다...오소서진리의성령님...은혜아니면살아갈수가없네...나의마음을정금과같이....주를위한이곳에/아무도예배하지않는..이시간주님께기도합니다...불길같은주성령간구하는우리게...성결-은혜-생명....에하드=헨=메노!!(다바르-다바크-미드바르-드비르)//거듭남의새로움(네오스-카이노스-아나네오오-쉼모르포스)


===사사 드보라

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납달리 게데스 =  갈릴리 게데스 = "게데스" 뜻: 거룩하다)

훌레 호수 븍서쪽에 위치한 지역과 구약시대의 성읍...(1) 게데스 납달리(삿4:6).갈릴리 게데스(수20:7,21:32)게데스(수12:22 19:37)등으로 불림 (2) 가나안의 도피성으로 적합한 지방(수20:7). (3) 사사 바락의 출생지(삿4:6,10). (4) 레위 지파의 게르손 자손에게 주어짐 (수21:27-33, 대상6:71-76) (5) 바락의 고향,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 중 일만명 군사 동원(삿4:4-11) (6) 앗수르 왕 디글렛 빌레셀에 의하여 함락됨(왕하15:27-29)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11.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12.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시스라에게 알리매

13.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 병거 구백 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을 하로셋학고임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14.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15.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16.  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

17.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19.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게 하라 내가 목이 마르다 하매 우유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게 하고 그를 덮으니

20.  그가 또 이르되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22.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

23.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24.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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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제4장

1.  And the children of Israel again did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when Ehud was dead.

2.  And the LORD sold them into the hand of Jabin king of Canaan, that reigned in Hazor; the captain of whose host was Sisera, which dwelt in Harosheth of the Gentiles.

3.  And the children of Israel cried unto the LORD: for he had nine hundred chariots of iron; and twenty years he mightily oppressed the children of Israel.

4.  And Deborah, a prophetess, the wife of Lapidoth, she judged Israel at that time.

5.  And she dwelt under the palm tree of Deborah between Ramah and Bethel in mount Ephraim: and the children of Israel came up to her for judgment.

6.  And she sent and called Barak the son of Abinoam out of Kedeshnaphtali, and said unto him, Hath not the LORD God of Israel commanded, saying, Go and draw toward mount Tabor, and take with thee ten thousand men of the children of Naphtali and of the children of Zebulun?

7.  And I will draw unto thee to the river Kishon Sisera, the captain of Jabin's army, with his chariots and his multitude; and I will deliver him into thine hand.

8.  And Barak said unto her, If thou wilt go with me, then I will go: but if thou wilt not go with me, then I will not go.

9.  And she said, I will surely go with thee: notwithstanding the journey that thou takest shall not be for thine honor; for the LORD shall sell Sisera into the hand of a woman. And Deborah arose, and went with Barak to Kedesh.

10.  And Barak called Zebulun and Naphtali to Kedesh; and he went up with ten thousand men at his feet: and Deborah went up with him.

11.  Now Heber the Kenite, which was of the children of Hobab the father in law of Moses, had severed himself from the Kenites, and pitched his tent unto the plain of Zaanaim, which is by Kedesh.

12.  And they showed Sisera that Barak the son of Abinoam was gone up to mount Tabor.

13.  And Sisera gathered together all his chariots, even nine hundred chariots of iron, and all the people that were with him, from Harosheth of the Gentiles unto the river of Kishon.

14.  And Deborah said unto Barak, Up; for this is the day in which the LORD hath delivered Sisera into thine hand: is not the LORD gone out before thee? So Barak went down from mount Tabor, and ten thousand men after him.

15.  And the LORD discomfited Sisera, and all his chariots, and all his host, with the edge of the sword before Barak; so that Sisera lighted down off his chariot, and fled away on his feet.

16.  But Barak pursued after the chariots, and after the host, unto Harosheth of the Gentiles: and all the host of Sisera fell upon the edge of the sword; and there was not a man left.

17.  Howbeit Sisera fled away on his feet to the tent of Jael the wife of Heber the Kenite: for there was peace between Jabin the king of Hazor and the house of Heber the Kenite.

18.  And Jael went out to meet Sisera, and said unto him, Turn in, my lord, turn in to me; fear not. And when he had turned in unto her into the tent, she covered him with a mantle.

19.  And he said unto her, Give me, I pray thee, a little water to drink; for I am thirsty. And she opened a bottle of milk, and gave him drink, and covered him.

20.  Again he said unto her, Stand in the door of the tent, and it shall be, when any man doth come and inquire of thee, and say, Is there any man here? that thou shalt say, No.

21.  Then Jael Heber's wife took a nail of the tent, and took an hammer in her hand, and went softly unto him, and smote the nail into his temples, and fastened it into the ground: for he was fast asleep and weary. So he died.

22.  And, behold, as Barak pursued Sisera, Jael came out to meet him, and said unto him, Come, and I will show thee the man whom thou seekest. And when he came into her tent, behold, Sisera lay dead, and the nail was in his temples.

23.  So God subdued on that day Jabin the king of Canaan before the children of Israel.

24.  And the hand of the children of Israel prospered, and prevailed against Jabin the king of Canaan, until they had destroyed Jabin king of Can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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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4장 (개요)

본 장에는 드보라와 바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한다(1).

2. 이스라엘은 야빈에게 학대를 당한다(2, 3).

3. 이스라엘은 드보라에게 재판을 받는다(4, 5).

4. 이스라엘은 야빈의 손에서 해방된다.

   (1) 그들의 구원은 드보라와 바락에게 의뢰된다(6, 9).

   (2) 그것은 그 둘의 공동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바락이 출전한다(10).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그를 만난다(12, 13). 드보라가 바락에게 용기를 준다(14).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완전한 승리를 주신다. 그 군대는 패주당한다(15, 16). 군대장관은 겨우 도망하게 된다(17). 그가 자기의 생명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 생각한 그 곳에서 잠자는 동안에 야엘에게 죽게 된다(18-21). 이것으로 완전한 바락의 승리(22)와 이스라엘의 구원이 완성된다(2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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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이스라엘 자손(삿 4:1-3)

Ⅰ.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다. 그들은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 

그들은 여호와 예배를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다. 이것이 그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죄다(1절). 여기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보자.

1. 타락이 지니고 있는 이상한 힘이 있다. 그것의 파국적인 결과를 자주 경험하면서도 사람들은 또다시 그 죄에 빠진다. 타락의 성향은 막아 내기가 극히 어려운 것이다.

2. 오랜 평화는 흔히 악의 만연을 초래한다. 그 땅은 80년간 태평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마땅히 신앙을 공고히 해야 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 평화가 그들로 하여금 방심하고 방탕케 했으며, 거짓 신들 숭배가 만족을 준다는 욕정에 탐닉했다. 

이와 같이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잠 1:32).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신 32:15).

3. 선한 통치자들의 죽음이 백성들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에훗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악을 행했다”고 했다. 본문은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 

에훗은 그들에게 엄격한 눈으로 살피어 우상 숭배로 보이는 모든 것은 금하고 벌을 내렸으며, 그들을 하나님 예배에 전념하도록 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오히려 에훗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가 떠난 후에는 하나님을 반역했다.

Ⅱ. 이스라엘은 그들의 원수들에게 학대를 당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다. 그러자 그들은 모든 노략자의 손쉬운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듯이 하나님을 멀리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그들을 멀리하셨다. 

하나님 예배에서 떠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도 떠나게 되는 법이다. 

나의 사랑받는 자가 이렇게 행음하게 되었을 때 “그가 나의 집에서 무엇을 행하는고?”(렘 11:15) 하나님은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다”(2절). 

하솔에 도읍한 야빈은, 아마 이전에 여호수아가 침략해 베어 죽이고 그의 도성을 불태운 사람과 동명이인이며 그의 후손인지도 모른다(수 11:1, 10).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도성은 재건되고 세력은 재규합되어 점차 실지를 회복하고 마침내 야빈은 하솔의 왕이 되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모든 이권을 상실해 버린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속박의 생활은 이전의 어떤 것보다 더 오랜 것이었고 훨씬 더 비참한 것이었다. 야빈과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지독하게 이스라엘을 억압했다. 

그 억압이 한층 가혹했던 것은,

1. 이 원수의 군대들은 이전의 어떤 적보다 이스라엘과 더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피해의 기회가 더 많았던 것이다.

2. 이 원수들은 그 땅 원주민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는 타협할 수 없는 적개심을 갖고 있는 자들이다. 즉 이스라엘이 그 땅에 침입해 그 땅을 빼앗았으므로 그들이 이스라엘을 자기들의 지배하에 둘 수 있게 될 때는 옛날 싸움에 대한 보복으로 훨씬 더 잔악하게 대했다.

3. 전에는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에게 정복되어 복종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리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선고된 예언이었다(창 9:25).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의 발 아래 있어야 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무런 불안을 끼칠 수 없어야 마땅했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의 태만, 비겁 그리고 불신앙만 아니었더라면 가나안 족속들은 그렇게 큰 세력을 획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상들이 정복했던 자들을 자기들이 어리석게도 남겨 두었다가 그들에 의해 압제를 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Ⅲ.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께 돌아갔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통이 하나님께로 자기들을 몰고 가게 되고, 다른 아무런 구제책이 없게 되자 비로소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자기들이 번영할 때 하나님을 무시한 자들은, 곤고를 당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될 때를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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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와 바락의 계획(삿 4:4-9)

드디어 이스라엘이 야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어 구원받을 때가 왔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 억압자들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극심한 학대를 받고 있던 북쪽의 지파들이 특히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이제 일어나실” 것이다(시 12:5).

Ⅰ. 드보라의 예언자로서의 활약과 치리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좋은 준비였다(4, 5절). 

그녀의 이름은 꿀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이름처럼 부지런하고 지혜로웠다. 즉 그녀의 백성들에게는 부드러웠고 적에게는 날카로웠다. 그녀는 “랍비돗의 아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이름은 남자들의 이름 중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으므로 지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랍비돗의 여자”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랍비돗을 보통명사로 보아 ‘등들(lamps)’을 뜻한다고 본다. 

유대의 율법학자들에 의하면, 그녀는 성전의 등의 심지를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하나님을 위한 극히 보잘것없는 일을 했던 그녀가 후에는 이렇게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혹은 드보라는 매우 지식이 많고 지혜로운 자로서, 그 백성들을 밝혀 주는 조명 또는 광채의 여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 드보라가 행한 일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녀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맺고 있었다. 

그녀는 여선지자로서 성령의 감화로 인해 거룩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었고, 지혜의 은사를 받은 자였다. 

이 모든 것은 결코 평범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아마도 “전능자의 이상을 보았을” 것이다.

2. 그녀는 이스라엘을 섬기는 일에 전념했다. 

야빈이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던 시기에 그녀가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아마도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에 야빈은 그녀가 하는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여군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변자인 여선지자로서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계하고 그들의 재난을 수습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사방에서 그녀에게로 와서 재판을 받았다. 그것은 인간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관계된 일들 중에 있었던 어떤 잘못을 시정하는 조언을 주는 일이었다. 

이전에는 이웃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고 불경건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어디에 이 일을 호소해 막아야 할지를 몰라 한탄하던 자들이 이제는 드보라에게 와서 이런 일들을 고했다. 

이에 대해 드보라는 성령의 검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판결을 알려 줌으로써 많은 잘못을 시정했으며, 각 지방 치리자들은 율법을 엄중히 실행하도록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다. 그녀는 종려나무 아래에 거했으며, 어떤 학자들의 말대로는 그 아래 앉았다. 그 후 이 나무는 드보라의 종려나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이 나무 아래에 보잘것없는 거처를 마련해 살고 있었거나, 아니면 정의를 상징하는 이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마련해 놓고 옥외에서 재판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억압받고 있는 종려나무와도 같이 모든 악조건을 이기고 점점 번성해졌을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드보라에게 와서 이스라엘이 야빈의 손에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요청을 이스라엘에서 받은 어느 특정 시기에 미스바에서 이스라엘을 판결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그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였다(삼상 7:6, 8).

Ⅱ.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그에게로 나아가 재판을 받을 때에 그들은 그녀에게서 구원을 찾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자는 은혜와 평화, 은혜와 위로, 그리고 은혜와 영광을 얻을 것이다. 

그녀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녀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기에 적합치는 않았지만 납달리 지파 출신인 바락을 그 일에 합당한 인물로 지명할 수는 있었다. 

바락은 그의 주위에 있는 적군들을 여러 번 무찔러서(하솔과 하로셋은 납달리 지파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백성들로부터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용맹한 자는 압제자들의 굴레를 떨쳐 버리기 위해 열심히 싸웠으나 드보라의 명령이나 지시 없이는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바락은 드보라의 머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녀 역시 바락의 손 없이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둘이 힘을 합했을 때, 그들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할 수 있었다. 자급자족이 아니라 상부상조가 가장 위대하고 좋은 일이다.

1.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바락에게 명해 군사를 일으키고 시스라가 지휘하고 있는 야빈의 군대를 물리치도록 했다(6, 7절). 

바락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적을 물리치는 큰 일을 해내기 위해 줄곧 깊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결한 불꽃이 그의 가슴속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행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일로 인해 주저하고 있었다.

(1) 그에게는 군사들을 모을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러므로 드보라는 여선지자의 권능으로써 그에게 하늘의 옥새를 주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확실히 명하셨다. 그러니 나의 말대로 행하라.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바락을 충동하기 위해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네 자신에게 은밀히 그의 목적을 알리시고 너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구원할 도구로 쓰시리라는 것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느냐? 너는 네 자신의 영혼에 이런 충동을 느끼지 못하였느냐?” 만일 느꼈다면, 드보라의 예언의 영이 바락에게 있는 군사의 영을 확신시켜 주었을 것이다. “다볼 산으로 가라.”

① 그녀는 바락에게 몇 명의 군사들을 모아야 할지 알려 주었다. 

그녀는 그로 하여금 1만 명의 군사를 모으도록 하고, 이 수가 적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을 약속해 주셨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② 어디에서 그들을 모아야 할 것인지도 알려 주었다. 

그는 자기 지파와 스불론 지파에서만 군사들을 모아야 했다. 그는 이 두 지파의 군사로 충분했으며, 더 많은 군사를 모으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③ 그녀는 그가 어디에 군사들을 집결시켜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었다. 즉 그는 이웃에 있는 다볼 산에 기지를 마련해야 했다.

(2) 그는 군사들을 일으켰으나 어떻게 적을 무찌를 기회를 얻어야 할지 몰랐다. 

만일 적을 칠 수 있는 용기만 갖고 있다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는 소문을 들은 적군은 아마도 싸우려 하지 않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했다. “내가 시스라와 그 무리를 네 손에 붙이리라.” 그녀는 그에게 이 싸움은 오래 걸리지 않고 일격에 끝이 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① 적군의 명장 시스라는 용감하고 노련했으며, 훌륭한 철병거를 갖고 있었고, 거대한 군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적군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만큼 그녀는 그에게 단단히 마음의 무장을 하도록 일러 두었다. 최악의 경우를 예상해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② 시스라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어느 곳에 이를 것인지를 알려 줌으로써, 드보라는 바락으로 하여금 싸움에 임할 때에 그의 믿음을 확고히 하도록 해 주었다. 

시스라가 집결한 곳은 시스라 자신의 의지에 따른 우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후에 드보라가 말한 대로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바락은 그녀가 말한 그 나머지 일들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며, 특히 그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위로받을 수 있었다.

③ 즉 그녀는 그에게 확신에 찬 약속을 들려주었다. “내가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네 손에 붙이리라”고 했다. 

그래서 바락은 드보라의 말대로 시스라가 그의 무리를 이끌고 그 곳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이 곧 패하게 되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오직 그들을 그의 손에 붙이기 위해서만 그들을 이끄셨다는 점을 주목하라. 

시스라는 이스라엘을 멸하기 위해 그의 군사들을 이끌고 오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들을 멸하시기 위해 곡식단을 타작마당에 모음같이 모으신 것이었다(미 4:11, 12). “너희 민족들아, 모이라. 그러나 필경 패망하리라”(사 8:9; 계 19:17, 18).

2. 바락의 요청에 그녀는 그와 함께 싸움터에 나가 줄 것을 약속했다.

(1) 바락은 그녀가 함께 있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가 동행하는 것은 실상 그에게는 어떤 전략 자문보다 더욱 든든한 것이었으리라(8절). “내게 충고해 주고 지시해 주며 어려움에 처할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기 위해 당신이 나와 함께 간다면 내가 가려니와, 그렇지 않다면 나는 가지 않겠나이다.” 

어떤 자들은 이 말이 그의 약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즉 이 일을 하기 위해 그가 그녀를 담보로 잡지 않는 한 그녀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의 끊임없는 지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드보라가 함께해 줄 것을 진지하게 간청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증거로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고 모든 경우에 신탁으로 의논해 주는 그 여선지와 함께하는 것보다 더욱 만족스러운 것은 없었다.

(2) 드보라는 그와 함께 갈 것을 약속해 주었다(9절). 

그녀는 자기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았고, 어떤 두려움에도 낙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에는 그도 보내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러 일을 명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을 도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드보라는 약한 그릇(여인)이었지만,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그녀가 바락과 함께 가는 것을 동의하긴 했지만 그녀는 바락에게 이 일을 자신의 영광으로 주장하지 않도록 미리 충분한 암시를 주었다. 

“네가 이제 가는 일(여행: 字意)로는(그녀는 이 일이 성공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싸움터로 가는 것을 단순히 여행하는 일에 견주고 있다)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비록 너 혼자 간다 해도 그 영광은 네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2절에서는 이스라엘을 그의 손에 팔았지만, 이제는 그 보복이 시스라에게로 돌아왔다)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① 드보라는 그녀에게 승리가 주어질 것을 암시해 바락 자신이 미리 알도록 했다.

② 하나님은 (그의 연약함을 바로잡으시기 위해) 야엘의 손에 의해 승리를 완성토록 하셨으며, 그로 인해 바락의 영광은 다소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락은 이 말에 만족했고 그의 영광보다도 이 일의 승리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결코 그의 임무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게 명령을 주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는 드보라가 함께하려 하지 않는 한, 감히 싸우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말은 그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므로 이 고귀한 여주인공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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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라를 무찌름(삿 4:10-16)

Ⅰ. 바락은 지원병을 모집했다. 그러자 곧 할당된 인원이 다 찼다(10절). 

그들은 주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사람들이었으나, 드보라의 노래를 보면, 다른 지파에서도 온 것 같다(5:14-17). 

그리고 남부 유다 광야에 살던 겐 족속 중 헤벨가(家)의 이사를 말하고 있는 11절은 그 집안의 야엘이란 여인이 세울 공적 때문에 미리 나온 것이다.

Ⅱ. 시스라는 무수히 많은 막강한 군사들을 집결시켰다(12, 13절). 

당시 야빈과 헤벨의 집이 서로 화친해 친분이 두터웠으므로(17절), 그들은 시스라에게 바락이 군사들을 집결시켰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들이 시스라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이 일을 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것은 하나님이 드보라를 통해 말씀하신 일을 이루는 역할을 해 주었다. 

“내가 시스라를 붙이리라”(7절). 시스라는 주로 그의 병거들에 대해 큰 자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9백 대의 “철병거”가 특기되어 있다. 

이 철병거의 굴레에는 낫을 끼워 바락의 보병들을 추격해 잔인하게 죽이려 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람들의 독창력은 서로를 멸하는 방안을 만들어 내어 “싸움이나 분쟁”의 근원이 되는 욕정을 만족시킨다(약 4:1, 표준새번역).

Ⅲ. 드보라는 교전 명령을 내렸다(14절). 

요세푸스에 의하면, 시스라가 자기의 군사들을 몰고 와 산꼭대기에서 진을 치고 있는 바락의 군사들을 포위하려는 것을 본 바락은 아주 낙심해서 보다 안전한 장소로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드보라는 이 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치는 승리의 날로 예정되었음을 확신시켜 줌으로써, 바락을 격려해 시스라를 급습하게 했다. 

“그래서 매우 위협적인 태세를 갖추고 출현한 그들에게 멸망의 때가 왔다. 앞으로 되어질 일은 과거지사처럼 명확했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셨노라.” 이 큰 일을 해내기 위해 드보라와 바락이 어떻게 업무를 분담하고 있는지를 보라. 즉 드보라는 머리로서 “명령을 하고,” 바락은 손으로서 “일을 행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은사를 골고루 분배해 주신다(고전 12:4 이하).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긴 하지만(고전 11:3), 성령의 임재를 받은 자는 서로 손을 맞잡는 것을 기뻐하며, 드보라가 바락과 함께한 것은 그에게 퍽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바락에게 부족된 것을 보충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1. 드보라는 그에게 “오늘이 그 날이다”라고 말해 줌으로써, 바락의 행동에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보충해 주었다.

2. 드보라는 그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시켜 줌으로써, 용기를 보충해 주었다.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하나님께서 너의 인도자가 되시는데 네가 용감히 따르지 않겠느냐?”

(1)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는 중에 겪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앞서가시며 우리는 그 분의 인도하심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만족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행하신다는 소망을 지닌 자는 용감하게, 그리고 기쁘게 그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탄과 싸워 고통당하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더라도 결코 당황해서는 안 된다.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라.

Ⅳ. 하나님께서 친히 그 적군을 패하게 하셨다(15절). 

비록 싸움터에서는 철병거가 바락을 위협했지만, 그는 거룩한 권능을 의지하고 산에 있는 그의 요새를 떠나 드보라의 명대로 골짜기로 내려갔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 3:23).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패하게 하셨다”고 했으니, 바락의 신뢰는 기만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무서운 힘이 적군들의 영혼을 잡아 이상한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으니 바락이 적진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사기가 죽고 도망치려 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별들”도 하늘에서부터 그들의 편을 들어 싸운 것 같다(5:20). 

요세푸스에 의하면, 거센 우박 줄기가 그들의 얼굴을 때려 그들은 꼼짝없이 도망가야 했다. 

그들은 쉽사리 이스라엘군의 희생물이 되었고, 드보라의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붙이셨도다. 그러니 이제 너는 권능으로 그들을 치게 될 것이다.”

Ⅴ. 바락은 이 기회를 용감히 이용했다. 

확고한 결단과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가지고 적군을 패주시켰으며, 적장의 숙소인 하로셋까지 추적해,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붙여 주시어 멸하게 될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였다. “남은 자가 없었더라”고 했다. 

우리의 영혼이 싸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가신다면, 우리도 분발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 영혼의 적을 이기도록 해 주실 때, 우리는 신중한 결단력을 가지고 이 기회를 이용해 용맹스럽게 거룩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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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라의 죽음(삿 4:17-24)

우리는 가나안 사람들의 군대가 완전히 패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땅에 거름”처럼 되었다고 말해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적군을 패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할 때 이 전례를 들어 후손들이 탄원했다(시 83:9, 10).

Ⅰ. 적장 시스라는 완전히 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왕 야빈은 그들이 이기리라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이 싸움터에 나오지도 않은 것 같다. 

이제 이 장수로 유력한 시스라가 몰락한 행적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1. 시스라는 병거도 버리고 도보로 도망했다(15, 17절). 

그는 병거에 대해 큰 자만과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사가 자기의 군대처럼 말이나 병거를 하나도 갖지 않은 보병인 것을 알고 무시하고 경멸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자신의 교만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으며, 그 교만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됨은 당연한 일이다. 

그 누구의 것보다도 시스라의 병거는 잘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이제 그것을 버리는 편이 안전하고 편하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처럼 피조물에 기대를 건 자는 실망하게 된다. 그것은 부러진 갈대처럼 그들의 손에 의해 부러질 것이지만, 그 손을 꿰뚫고 많은 고통을 줄 것이다. 

우상은 즉시 무거운 짐이 되며(사 46:1), 우리가 신으로 추구하던 것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리라. 

시스라가 이제 병거에서 내린 모습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의 얼굴이 수치로 인해 붉어졌는지 아니면 분노로 인해 떨고 있었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얼마 전에는 자기의 팔을 깊이 신뢰하다가 잠시 후에는 간신히 자기의 발뒤꿈치를 믿어야 하는, 그런 군주들을 결코 신뢰하지 말라.

2. 시스라에게는 어떤 요새도, 자기 몸을 숨길 만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겐 사람들의 장막으로 도망갔다. 그는 전에 이 보잘것없고 고적하게 살고 있는 겐 사람들을 비웃었고, 더욱이 그들이 신봉하고 있는 종교를 조소했지만, 이제 그는 이런 자들의 장막 속에 숨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헤벨의 아내 장막에 숨게 되었는데, 다른 곳보다 덜 의심받는 곳이기 때문이다(17절). 

그가 이 곳으로 올 용기를 가진 것은 그 때 그의 주인과 헤벨의 집이 서로 화목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공수 동맹은 없었으나 그가 숨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여기밖에 없었다. 

야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것과는 달리 겐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학대하지 않았다. 

그들의 단순하고 조용하고 해함이 없는 생활은 의심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나님은 참된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신 것인지도 모른다. 

시스라는 그들이 비록 야빈에게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그들 가운데로 숨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3. 야엘은 시스라를 안으로 맞아 매우 환영해 주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싸움의 결과를 군사들에게 묻기 위해 장막 문간에 서 있었을 것이다.

(1) 그녀는 그를 맞아들였다. 

어쩌면 그녀는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군사가 지나가면 친절을 베풀어 주고자 이렇게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급히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시스라를 보자 그녀의 장막으로 맞아들여 쉬게 했다. 

그녀가 이렇게 시스라를 쉬게 한 것은(18절), 그로 하여금 그 장막에 더 지체하게 한 다음, 그를 추격해 올 바락의 손에 시스라를 넘겨주려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부터 시스라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후에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 그렇게 하도록 했는지는 알 수 없다.

(2) 그녀는 마치 초대한 손님처럼 그를 정성을 기울여 대했고,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지쳐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기운을 회복할 때까지 푹 쉴 수 있는 편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시스라가 갈증을 느끼고 목을 축이려고 시원한 물을 좀 달라고 할 때, 그녀는 자기 장막 안에 마련해 둔 최상의 음료를 제공했다. 그것은 곧 우유였다(14절). 

아마 시스라는 이 우유를 정신없이 들이켜 숨을 돌린 후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그는 추위를 느꼈거나 감기에 걸릴 것을 염려했는가? 아니면 그를 추격하는 자들이 이 장막을 탐색할 것을 염려해 숨고자 했는가? 아무튼 그녀는 그를 담요로 덮어 주었다. 

이렇게 그녀는 그의 안전을 위해 성의를 표해 주었다. 

그러나 시스라가 그녀에게 누가 자기를 찾거든 이 곳에 없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일렀을 때(20절), 그녀는 그런 약속을 거절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슬러 죄악을 범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거슬러 세상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어서도 안 된다.

끝으로, 우리는 그녀가 그를 빨리 잠들게 하기 위해 주위를 될 수 있는 한 아주 조용히 했을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시스라는 지금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가장 위험한 때에 처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란 얼마나 불안정하고 불분명한 것인가? 우리가 믿는 자도 쉽게 우리를 배반할 수 있고, 우리를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자들도 우리를 파괴하는 자들임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인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하나님을 우리의 친구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분은 결코 우리를 속이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4. 그가 깊이 잠들었을 때 야엘은 장막의 말뚝으로 그의 살을 꿰뚫어 죽였다(21절). 

이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5장 26절에 의하면, 그녀는 이 일을 더 확실히 해 두기 위해 그 말뚝으로 그의 목을 잘라 놓았다. 

그녀가 그를 맞아들였을 때부터 이런 계획을 품고 있었는지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그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을 때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생각은 살인자이며 파괴자인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의로운 심판자이시며 복수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찬란하고 거룩한 빛줄기가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이 일을 하도록 인도했을 것이며, 거기에는 어떤 사악함이나 미움, 그리고 개인적인 복수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 그녀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그녀에게 남자보다도 더 큰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었다. 

만일 그녀 혼자의 힘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라면, 말뚝으로 그의 살을 꿰뚫는 일을 못 했을 것이다. 

또 그녀가 이 일을 하려 할 때 그가 깨어날 수도 있지 않은가? 만일 그의 부하가 그를 따라와 이 일을 목격하게 된다면 그녀와 그녀의 식구들이 이것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신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행할 수 있었다.

(2) 그녀의 행동을 정당화해 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근거였다. 

따라서 이것은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웃에 대한 우애와 친절을 명하는 율법은 경건하게 잘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초대하고 우리를 신뢰하고 있는 자들을 배반하는 생각들은 결코 가지면 안 된다. 

그러나 야엘의 이 행위에 대해(앞 장에서 나온 에훗의 행위와도 같이), 우리는 그녀가 거룩한 충동에 의해 이 일을 행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매우 만족스럽게 여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심오하다. 하나님의 판결을 집행하는 도구로 쓰여진 것은 장막을 고정시키고 있던 하나의 말뚝이었다. 

그들은 자주 장막을 옮겼으므로 그녀는 이 말뚝들을 뽑아내는 데 익숙했다. 그러므로 이 같은 큰 일을 당해 민첩하게 해낼 수가 있었다. 

철병거로 이스라엘을 멸하려던 시스라 자신이 또 하나의 철말뚝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것들이 강한 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야엘의 영광과 시스라의 수치를 볼 수 있다.

① 이 위대한 적장은 자는 도중에 죽어 버렸다. 

그는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므로 반항하기는커녕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는 잠의 사슬에 묶여 있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당하였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시 76:5, 6). 

그 잠 속에서 그들은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강한 자라도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라. 잠들면 그의 힘은 약하게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는 어린아이도 그를 모욕할 수 있고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가 있다. 또 비록 잠들지 않더라도 그 힘은 곧 소비되고 그는 피로하게 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곤비하여”라는 구절을 모든 옛 사본들은 달리 해석하고 있다. 아람역과 아랍역에는 “그는 몸부림치다 죽었다”고 했으며, 시리아역에는 “그는 기절하여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70인역에는 “그는 혼미하여 죽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라틴어 벌게이트역에 따르면, 그가 잠과 죽음이 얽힌 상태에서 죽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② 그를 죽인 말뚝은 그의 머리를 꿰뚫고 땅에 박혔다. 

이것은 그가 속세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홀(Hall) 주교의 견해에 따르면, 그의 귀는 땅에 밀착되어 있어서 마치 그의 몸이 그 영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③ 그는 여인의 손에 의해 죽었다. 

이 사실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죽음을 더욱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아비멜렉(9:54)처럼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아마 매우 분개했을 것이다.

Ⅱ. 이 승리는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기쁨이었다.

1. 바락은 적장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고(22절), 적이 혼비백산함으로써 그의 일이 잘 행해져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자기의 명예에 집착했다면, 적장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살해된 것을 모욕이라고 생각해 매우 분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드보라에게 같이 가자고 고집했을 때 자기의 일의 영예가 감소되고 말리라고 했던 선언(“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라”)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는 그전까지는 그 예언이 이렇게 실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왕 야빈의 손에서부터 완전히 구원받게 되었다(23, 24절). 

그들은 이 날의 승리로 인해 그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야빈과 그의 백성들을 공격해 한 사람의 군사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전에 이스라엘은 어리석은 동정 때문에 이 일을 행하지 못해 그들 자신이 고통을 받았지만, 이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 준 자비에 배반당한 백성이므로,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백성이므로 더 이상 적들의 만행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적의 이름이 3번이나 나오며 그를 “가나안의 왕”이라고 칭했다. 그것은 아마 그들의 행적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철저히 멸망되고 말았으므로 이 일 후에는 가나안 왕들에 관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시어 그들에게 쳐부술 수 있는 힘을 허락해 주셨을 때 빨리 가나안을 멸했다면 큰 재난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하지 않은 것보다는 늦게라도 행해 경험 속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었으니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호크마

=====4:1

에훗의 죽은 후에 - 에훗의 죽음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능력을 대행한 지도자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또 다시 이스라엘이 타락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니 에훗의 치하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평화(3:30) 역시 끝나게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또...악을 행하매 - 사사 시대의 일반적 사회 현상(2:19)을 다시 한번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던 이스라엘(3:9)이 이처럼 또다시 죄악의 길에 빠져 든 것은 마치 방금 목욕한 돼지가 다시금 오물탕 속에서 뒹구는 것과 같이 어리석고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는 한번 빠져 들면 헤어나기 어려운 죄의 속성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삼가 자신을 살펴 무릇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살전 5:22).

=====4:2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 - '하솔'(Hazor)은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속하는 북부 가나안 성읍 중 하나(수 19:36)로서 가장 강력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에 해당하였다(A.E. Cundall).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이곳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메롬 호수(수 11:5,7)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이전에 이미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 후 납달리 지파의 지배하에 있었다(수 11:1-14). 

한편 여호수아가 그곳을 점령할 때도 '야빈'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으나(수 11:1), 본절의 야빈은 그 당시의 왕과 동일 인물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때로부터 벌써 1세기가 훨씬 넘은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솔을 다스렸던 '야빈'이라는 칭호의 또 다른 왕으로 보아야 한다. 

아마 '야빈'(Jabin)이란 말은 애굽 왕의 공식 칭호인 '바로'(Pharaoh)나 블레셋 왕의 공식 칭호인 '아비멜렉'(Abimelech)처럼 하솔 왕을 가리키는공식 칭호였던 것 같다. 

한편 그가 여호수아 군대로부터 하솔성을 어떻게 되찾아 세력을 키웠는지는 알수 없으나 아마도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남아 있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을(1:33) 중심으로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것 같다.

이방 하로셋 - '이방'에 해당하는 원어 '고임'(* )은 '열국'(nations)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어떤 백성이나 지명에 대한 고유 명사인지, 아니면 여러 족속의 집단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개역 성경 창 14:1과 수12:23에서는 이 단어를 고유 명사로 생각하여 문자 그대로 '고임'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 9:1에서는 '고임'을 '갈릴리' 지역과 동의어로 보고 '갈릴리'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고임'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으므로 이는 고유 명사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임'이란 당시 '하로셋'에 거하던 가나안 여러 족속을 지칭하는듯하다. 

한편 하로셋(Harosheth)이란 지명은 성경 중 이곳에만 나온다. 따라서 이곳역시 그 위치가 분명치 않은데, 디베랴 호수 남쪽의 갈릴리 평원 어느 한 지점이었던것 같다.

=====4:3

철병거 - 고대 전투에서 철제 병기의 사용은 전략 전술에 못지 않게 승리의 관건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 무기를 가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철병거를 지닌 가나안 거민 중 많은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1:19).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가나안 평야 지대를 많이 점령치 못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철병거'는 산악 지대에서는 사용될 수 없고 오직 평야 지대에서만 사용되는 전투 장비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 당시 가나안인들이 향유했던 철제 문화에 관해서는 1:19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이란 전체 12지파를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하솔을 중심한 일대(2절)의 납달리지파 내지 그 지파를 중심한 북부 지역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6,10절). 

왜냐하면 당시 야빈이 철병거 900승으로 이스라엘 12지파 전체를 점령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학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라하츠'(* )는 '비틀어 짜다'는 뜻이다.  

이는 곧 포도즙을 짜기 위해 밟아 으깨듯 이스라엘에 대한 야빈의 압제가 매우 혹독했음을 시사해 준다.

=====4:4

랍비돗의 아내...드보라 - 랍비돗이 어떠한 자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상에 언급이 없다. 

다만 그 이름의 뜻은 밝혀졌는데 곧 '번개' 또는 '횃불'이다. 때문에 일부 유대주석가 및 몇몇 학자(Wellhausen, 1844-1918, 독일의 신학자)들은 '랍비돗'이 바로'바락'(6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바락'이란 이름의 뜻 역시 '번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드보라는 곧 바락의 아내인 셈이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서도 드보라가 바락의 아내로, 바락이 드보라의 남편으로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상의 견해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 

한편 또 다른 학자(Lange)는 '랍비돗'의 뜻이 '횃불'인 점을 중시 '랍비돗의 아내'란 말을 '드보라'를 수식해 주는 수식어로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를 '불꽃과 같은 여인...드보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역시 '아내'란 말을 '여인'으로 대치하는 등 지나치게 의도적인 해석이 강하다. 

따라서 우리는 랍비돗을 문자 그대로 드보라의 남편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성경상에서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까닭은 그가 이미 죽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여선지 - 성경에서 여자로서 선지자직을 감당한 자로는 드보라 외에도 모세의 누이 미리암(출 15:20)과 훌다(왕하 22:14)을 들 수 있다. 

즉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자적 기능을 은사로 받았던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 당시 선지자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등에 관해서는 삼하 12:1-14 강해, '선지자의 사명'을 참조하라.

=====4:5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왕 야빈에게 20년 동안 학대를 받고 있었다. 그때 랍비돗의 아내인 여선지자 드보라(רהָוֹדבְּ] 데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삿 4:4), 그녀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으로 <에브라임 산지 라마에 거주하였다> 그 이름의 뜻은 '(꿀)벌'이다. ..

드보라는 그 즈음에 ((마치 모세 때 미리암이 여선지로서 사역하였던 것처럼))  사사로 부름 받아 다스리고 있었는데, 주님의 마음을 알아드림으로써,  납달리지파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רקָבָּ] 바라크]) 과 그가 이끄는 일만의 군사와 함께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지휘하는 가나안 군대와의 전투에 출전해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삿 4:10-). 

이를 기념하기 위해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찬송했다(드보라의 노래, 삿 5장). 이후로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삿 5:31).

에브라임 산지 라마 -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속한 '라마'(수 19:36)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곳이다. 

본절의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수 18:25) 예루살렘 북쪽 약9km지점에 위치해 있다. 

훗날 예레미야 선지자가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들리니 라헬이...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 31:15;마 2:18)라고 읊었던 라마이다.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 '드보라의 종려나무'란 이름은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서 재판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본서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때에도그 나무가 '드보라의 종려나무'로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여 그렇게 칭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드보라가 그 종려나무있는 곳에서 살았다는 것인지, 그곳에 앉아 재판만을 주관했다는 것인지 하는 점에 있다. 본문의 문맥만으로서는 잘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솨브'(* )가 '거주하다'란 의미와 '앉다'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려나무'가 드보라의 재판과 관련하여 언급되었으므로, 이는 그녀가 재판시마다 그곳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더 낫다.

재판을 받더라 - 사사 시대 당시 재판하는 일은 사사의 임무 중 하나였다. 2:16 주석 참조. 

사사는 전쟁시에 자기 민족의 구원자 역할을 담당했지만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시행될 수있도록 했다. 

특별히 드보라는 여자로서 사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대언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저자는 드보라의 이름을 언급할 때에 '여선지'(* , 이솨 네비아)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4절).

=====4:6

그런데 그녀가 멀리 북쪽 지방인 납달리 게데스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바락을 부른 것은 곧 지파간을 초월한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 준다. 

드보라는 비록 자기 지파가 아니었지만 당시 납달리 및 북쪽 지방의 지파들이 야빈의 압제하에 당하는 고통을 간과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납달리 출신의 사사 바락을불러 문제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납달리 게데스 - 납달리 지파가 얻은 견고한 성읍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성중 하나이다(수 19:37). 

이것은 유다 지파에 속한 '게데스'와 구별되는데(수 15:23), 야빈의 도성인 하솔 성에서 동북쪽 4.8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너는...가라 - 이처럼 드보라가 바락을 불러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을수행토룩 한 까닭은 그 자신이 여자였기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때문일 것이다.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 추측컨대 이들은 하솔 왕 야빈으로부터 가장 많은 괴로움을 당한 지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대적을 치는 데 선봉장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5장의 드보라의 노래에는 이 두 지파 외에 다른 지파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전투에는 납달리, 스불론 지파와 인접한 잇사갈 지파도 참여했음에 분명하다(5:15).

다볼 산 - 해발 약 528km 되는 산이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에서 남서쪽으로 약16km 떨어진 이스르엘 골짜기에 속해 있다. 

초대 교회 전승(A.D. 4세기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그 모습이 변형되셨던 변화산(마 17:1-8;막 9:2-8;눅 9:28-36)이 바로 이 다볼 산이라고 하는데 분명치 않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p.302). 드보라가 야빈과의 접전지(接戰地)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마 그곳이 하솔 왕 야빈의 철병거(3절)가  다다를 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4:7

기손 강 - 다볼 산과 그 부근 지역에서부터 발원하여 이스르엘 꼴짜기를 따라 흐르다가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따라서 이 강은 잇사갈, 스불론 그리고 아셀 지파의 지경(地境)을 모두 거쳐 흐른셈인데, 총 연장 길이는 약 40km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겨울의 강우기에는 풍부한 수량으로 인해 이곳 물이 범람하므로 행인들의통행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한다. 특히 이 강 주변에는 넓은 평야인 이스르엘 평지가있어 철병거가 움직이기 용이하였으니 시스라가 이곳에 그의 군대를 집결시키리라는것은 쉽게 예상되어진 것이었다.

그를 네손에 붙이리라 - 여기서 '붙이다'에 해당하는 원어 '나탄'(* )은 '꼼짝못하게 하다' 또는 '패하게 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대적에게 내어 주시어 패하고 종노릇하게 한 것을 '팔다'라는 말로써 나타낸것과 같은 표현이다(3:8). 즉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완전히 패하였듯이 이제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가 꼼짝없이 이스라엘에게 패하고 말리라는 강조적 표현이다.

=====4:8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 이와 같이 바락은 반드시 전쟁에 드보라와 함께 출전(出戰)하겠다고 고집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견해가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견해로 압축된다. 

(1)바락이 드보라의 예언을 믿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Bertheau). 

(2)바락은 대적들과 전쟁하는 것이 두려워 예언의 능력을 지닌 여선지 드보라와 동행하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G. Bush). 

(3)바락이 하나님께 받은 소명에 대하여 자신이 그 소명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드보라와 동행하기를 요청했을 것이다(Keil, Lange). 

이상과 같은 세 견해 중 가장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견해는 세번째 해석이다. 왜냐하면 모세도 과거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 약점을 앞세워 거절하고자 시도했으며(출 4:10), 사사 기드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 자신의 비천함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6:15). 

사실 만약 바락이 불신앙적이거나 대적들을 정말로 두려워 했다면 결코 하나님과 드보라에 의해 야빈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선봉장으로 선택될 수 없었을 것이다.

=====4:9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 이처럼 드보라가 순순히 바락과의 동행을 허락한 까닭은 물론 바락을 격려하며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함이었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아마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지시와 명령을 받아 바락에게 대언하기위함이였을 것이다(Matthew Henry).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그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 어떤 이는 드보라가 바락의 요구(8절)로 인해 불쾌하여 본절과 같이 말했다고 주장한다(A.E. Cundall).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본절 전후 문맥 어느 곳에서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본절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와 싸워 승리할 것이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여인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7-2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패는군사의 많고 적음이나 훌륭한 병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는믿음에 달려 있음을 바락에게 깨닫게 해주시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삼상 17:47).

게데스로 가니라 - 혹자는 여기에 언급된 '게데스'는 '납달리 게데스'(6절)와 동일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A.E.Cundall). 왜냐하면 드보라와 바락이 현재 만나서 이야기 하고 있는 장소가 바로 이 '납달리 게데스'인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라마와 벧엘 사이에 거하고 있던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납달리 게데스에 살고 있던 바락을 불러온 것으로 되어 있다(6절). 따라서 이 드보라와 바락이 군사를 모아 다볼 산으로 출전하기 위해(12절) 우선 납달리 게데스로 올라간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4: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부르니 -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바락은 가나안 북부지방의 이스라엘 지파를 통치하였으며 많은 추종자들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바락의 권위는 분명 군사를 모집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그를 따라 올라가고 - '올라가다'에 해당하는 알라(* )는 군대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에는 전투가 예상되는 어떤 장소로 그 군대가 진격하는 것을 가리킨다(수 7:2;삼상 24:22;왕상 9:16;14:25;20:1;대하 35:20).

=====4:11

모세의 장인 호밥 - 성경상에서 혼란을 일으켜 주기 쉬운 구절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곳에는 모세의 장인의 이름이 '르우엘'(출 2:18;민 10:29) 또는 '이드로'(출3:1;4:18:18:1)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르우엘이 본명이며 이드로는 모세의 장인이 제사장이 된 후에 얻은 공식 존호(尊號)라고 주장한다. 

그러면'호밥'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 대개의 학자들은 모세의 처남인 것으로 본다. 그 근거는 '장인'과 '처남'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모두 동일한 '호텐'(* )이기 때문인데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민 20:29 주석을 참조하라.

겐 사람 헤벨 - 모세의 장인이 바로 이 겐족 출신인데(1:16), 성경 다른 곳에서는미디안 출신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출 2:16;3:1;민 10:29). 이로 볼 때 겐족과 미디안족은 일찍부터 상호 친밀한 유대 관계를 이루었거나 아니면 서로 동화되어 한 민족을 이룬 것 같다. 아무튼 '겐 사람'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6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드보라와 바락에 관한 기사 도중 갑작스레 겐 사람 헤벨이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이후 전개되는 시스라와의 전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자가 바로 이 '헤벨'의 아내인 '야엘'이기 때문이다(17-24절). 즉 본절은 헤벨의 아내 야엘의 가문과 신원을 미리 소개할 목적으로 삽입된 것이다.

자기 족속을 떠나 -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자손들은 팔레스틴으로 이주 후 유다 지파의 경내에서 거주했다(1:16). 그런데 헤벨은 그 가족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납달리지파의 경내인 '사아난님 상수리 나무' 곁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등지고 이스라엘의 압제자 하솔 왕 야빈과 손을 잡았다(1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러한 헤벨의 아내를 들어 쓰사 시스라를 죽였으니 인간이 미처 헤아리기어려운 깊고 오묘한 섭리를 잘 드러내 준다.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 문자적으로 이 말은 '사아난님에 있는 상수리 나무'란 뜻이다. 무슨 사연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나무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한편 '사아난님'(Zaanaim)은 납달리 지파의 남쪽 변경에 위치한 한 장소이다(수 19:33). 오늘날 '칸 엣 투잘'(Khan et Tujjar)로 불리우고 있는데 아다미(Adami) 남동쪽 약 6.4km 지점의 '벧스안-다메섹 도로'의 중도에 위치해 있다.

=====4:12

다볼 산에 오른것 - 바락과 그의 군사 일만 명이 다볼 산을 거점으로 전투 태세를 취한 것을 가리킨다.

=====4:13

시스라가...온 군사를...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 이것은 드보라의 예언이(7절)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기손 강'은 겨울 우기를 제외하고 다른 때에는거의 말라 있는 건조천(Wadi)이며, 그 주위에는 평지가 형성되므로 시스라가 철병거를 배치시키기에 적당하였을 것이다. 7절 주석 참조.

=====4:14

일어나라 - 이것은 '마음을 굳게 하여 전투에 임하라'는 의미이다(수 8:7). 

일반적으로 이 말은 어떤 일로 인해 심령이 위축된 사람에게 '힘을 내라'는 격려의 의미로사용되었다(수 7:10). 

그런데 드보라가  이처럼 바락에게 담대히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친히 인도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즉 드보라는 과거 출애굽 노정에서도 이스라엘을 위해 앞장서서 싸우시고 앞길을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시스라와의 싸움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해 주시리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출 13:21;14:14).

이는...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 즉 오늘이 20년 동안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받았던 압제(3절)에서 해방되는 날이며, 그 위대한 역사는 바락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시스라를 죽인 자는 바락이 아닌 야엘(21절)인데 이는 이미 드보라가 예언한 바이다(9절).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제적인 장군은 바락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을 대행하여 전쟁을 수행하던 자인 바락에게 큰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또한 바락이 수행하는 전쟁에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그 전쟁이 단순히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하솔을 징계하기 위한 전쟁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하솔의 죄악을심판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임을 시사해 준다(신 9:3;삼하 5:24;시 68:7;사 52:12). 이와 관련해서는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을 보다 참조하라.

바락이...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 드보라와 바락의 탁월한 전략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즉 그들은 시스라의 군대가 기손 강 평지에 집결한 것을 보고서는(13절) 다볼산 고지에 매복시켜 두었던 일만 명의 군사들로 하여금 일시에 기습 작전을 감행토록 한 것이다.

=====4:15

패하게 하시매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와야함'(* )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에 의해 그 군대가 참패당하는 것을 의미한다(출 23:27;수 10:10;시 144:6). 즉 이는 과거 하나님께서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홍해에 수장(水葬) 시키셨듯이(출14:23-31) 이적적으로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신 것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Commentary, Vol.II.p.304). 이같은 사실은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행하시고 있다는 드보라의 말(14절)과 매우 잘 어울린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 - 이처럼 시스라가 병거를 버리고 도망친 까닭에 대해서는 5:21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기손 강을 범람케하사 그 주변 평지에 집결해 있던 시스라의 철병거와 군사들을 휩쓸어 버리게 하신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니 자연 진흙탕이 된 평지에서 철병거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버렸고 시스라는 도보로라도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초자연적 방법으로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셨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4:16

바락이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 기손 강이 범람한 물로 인하여 바닥이 질펀해지자 기동력이 떨어지고 만 시스라의 군대와 그 철병거들을 바락의 군대가 일일이 추격하여 다 격멸시키려 한것을 가리킨다.

이방 하로셋에 이르니 - 시스라의 패잔병들이 도망간 곳은 '이방 하로셋'으로 시스라가 거주하던 장소였다. 2절 주석 참조. 

이로 보건데 시스라의 군대는 자기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도망쳐 원군과 합세하여 바락의 군대와 싸울 작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바락의 군대를 대항한다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었다.

=====4:17

시스라가...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 헤벨의 가정이 거주한 사아난님 상수리 나무 곁은 게데스와 인접해 있었으므로(11절) 당연히 야빈이 거주하던 하솔과도 매우 근접해 있었을 것이다. 6절 주석 참조. 따라서 시스라가 이곳까지 도망한 것은 하솔 왕 야빈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시스라가 헤벨의 가정을 찾아갔을 때 헤벨의 아내 야엘이 그를 알아본 점으로 미루어 보아 헤벨의 가정은 하솔 왕 야빈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유력한 인물들과도 늘 알고 지낼 만큼 그 지역에서 세력있는 집안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헤벨은 자기동족 겐 족속을 보호해 주고 가나안땅에 기업을 준 이스라엘 백성(1:16)과 나아가서는 그 기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만을 위해 간사하게도 이스라엘의 대적 야빈과 손을 잡고 살았음에 틀림없다. 11절 주석 참조.

화평이 있음이라 - 비록 공수 동맹(攻守同盟) 관계는 아니지만 야빈과 헤벨 사이에두터운 친교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서로 다툼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II.p.143).

=====4:18

나의 주 - '주'에 해당하는 원어 '아돈'(* )은 '주권자', '최고 통치자' 또는 '주인'이란 뜻으로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 말이다(신 10:17;시 136:3;사1:24). 여기서 야엘이 시스라를 가리켜 '나의 주'라고 말한 것도 그가 곧 자신의 생명까지 관장할 수있는 자기 집안의 최고 통치자라는 뜻이 있는 바 이는 시스라에 대한최고의 호칭이 아닐 수 없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 이러한 말만으로써는 야엘이 처음부터 시스라를 속이려 든 것인지 아니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시스라를 환대하며 그의 처지를 위로하였으나 뒤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마음을 돌이켜 먹고 시스라를 죽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야엘은 시스라를 안심시키며 그에게 최상의 접대를 베풀었는데 이는 결정적으로 시스라가 방심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II.p.143).

=====4:19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 바락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느라 시스라가 얼마나 기진한 채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가 범죄한 결과 이 땅에서도 이처럼 갈증을 느꼈는데, 하물며 죽은 후에 겪을 영원한 갈증이 어느 정도일런지는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눅 16:24).

젖부대 -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부대 속에 있는 우유는 상한 것 즉 이미 변하여시큼한 맛이 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탄훔(R. Tanchum)은 이 젖부대 속에 있는 우유는 완전히 지쳐 있는 사람이 먹을 때 그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p.305). 그러나 드보라의 노래에 나타나있듯이(5:25) 이것은 엉긴 우유 곧 반쯤 '버터'가 된 최고급 우유임에 틀림없다(A.E.Cundall). 그리고 그 우유를 담은 부대는 유목민들이 여행시 포도주나 물, 우유 등을넣어 가지고 다니던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인 듯하다.

=====4:20

장막문 - 헤벨은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장막을 지어 거주했는데(11,18절),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직업이 유목이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본절의 '장막문'은 아브라함이 유목 생활을 할 때 장막을 치고 장막문 앞에서 쉬었듯이(창 18:1) 유목 생활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네게 묻기를...없다 하라 - 이처럼 시스라가 헤벨, 즉 남자의 거실을 피해 야엘의 장막(17절) 곧 여자의 거실에 숨어 들고서도 또다시 보안을 지켜 주도록 부탁한 것은그가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있음을 반증해 준다. 그러나 정작 그가 안심하고 몸을 의탁한 야엘의 거실이 바로 그의 사형 집행대가 될 줄이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나(롬 8:28) 

반대로 하나님의 미움을 입은 자는 모든 일이 엉켜서 악을 낳기 마련이다. 즉 시스라는 야엘을 통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찾아내어 심판하신 것이다(시 139:7,8).

=====4:21

본절에서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자기들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시스라를 죽인 것은그의 남편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인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속죄하는 의미가 내포된 행동이라고 여겨진다.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 127:2). 그러나 여기 시스라의 잠은 평안한 휴식을 취하는 잠이 아니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의 잠을 앞에 놓고서 육신의 잠을 자고 만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낯을피해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가 배 밑창에서 곤히 잠을 잔 것과 흡사하다(욘 1:5).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 혹자에 따르면 고대 근동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장막 세우는 일은 주로 여인들이 하던 일이므로 여인들은 망치로 말뚝을 박는것에 익숙해 있었다고 한다(G.F.Moore). 그렇다면 야엘이 장막 말뚝으로 시스라의 살쩍, 즉 머리의 관자놀이(temple) 부분을 꿰뚫은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나 그다지 힘든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야엘은 시스라를 추격하는 바락에게 잠든 시스라를 넘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직접 그를 죽인 까닭은 아마 바락의 도착이 지연되는 동안 시스라가 원기를 회복하여 도망친 후 다시금 힘을 규합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할 것을 염려했던 데서 비롯되었음에 틀림없다.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 여기서 '기절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에프'(* )는 '탈진하다'는 뜻이다. 즉 시스라는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힌 즉시로 까무러쳤으며 그 후 발악과 더불어 죽어 갔던 것이다. 이로써 드보라의 예언(9절)은 온전히 성취되었다. 

한편 혹자는 야엘이 시스라를 안심시켜 깊이 잠들게 한 후 아주 잔인 무도한 방법으로 그를 죽였다 하여 그녀의 행동이 사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본문의 문맥과는 상치되는 주장인데 곧 야엘의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야엘의 마음을 주장하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구원, 악인에 대한 심판을 위해 이 일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따라서 거기에는 어떠한 미움이나 사악함 그리고 개인적인 복수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그러기에 드보라와 바락도 그의 '감사 노래'(5장)에서 야엘의 신앙과 용기를 칭송한것이다(5:24-27).

=====4:22

바락이 시스라를 따를 때에 - 즉 바락이 시스라가 도망친 것을 알고서는 그 뒤를 추격, 이방 하로셋과 그 일대를 수색하던 때를 가리킨다(16절).

바락이...보니 시스라가 죽어 누웠고 - 이로써 바락 역시 드보라의 예언(9절)대로 시스라를 죽이는 영예는 자신이 취하지 못하고 한갓 여인에 불과한 야엘에게 넘어갔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4:23

하나님이...패하게 하신지라 - 전쟁의 모든 과정에서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야엘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활약 때문에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방인을 징계하며 언약의 백성을 구원한 장본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니 그분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서 저자는 본절을 삽입시켜 그 사실을 강조했던 것이다.

=====4:24

마침내...진멸하였더라 - 이스라엘이 정확히 언제 가나안 왕 야빈을 완전히 격멸시켰는지는 성경상에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후로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는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보아 가나안 왕 야빈의 진멸 사건은 가나안인들이 힘을 잃고 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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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훗 사후 다시금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원주민인 하솔 왕 야빈의 압제를 받던 중(1-3절) 여선자자이면서 동시에 사사인 드보라(4-10절)와  그의  조력자  바락(11-16절)  그리고 하벨의 아내 야엘(17-24절) 등의 활약으로 그  압제에서  구원받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장에서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드보라나 야엘과 같은 여인들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4-6, 17-24절).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자들은 항상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여겨졌다(출 21:7-11).  

그래서 심지어  여자는 남편의 집에 있을 때 곧 결혼하여 남편의 보살핌을 받을 때 평안을 얻은  것으로까지 여겨졌다(룻 1:9 ;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 드보라는 여선지자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사 직위를 얻었으며, 연약한 여자 야엘은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이는 대활약을 보여 주었다.  

이 외에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그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기도 하였고, 에스더도 그녀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에스더 8, 9장).  

물론 이상과 같은 사실은 성경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특별한 경우들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남녀 평등의 원리를 귀하게 여기시며 필요에 따라서는  본문에서처럼, 여성을 들어 쓰시어 큰 일을 이루신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남자는 여자의 머리'(엡 5:23)라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위계 질서(位階秩序)를 부정하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며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자라는 점에서  서로가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창2:18-25 강해 , 창조론에 나타난 성경적 남녀 관계>.

(2) 여성이 남성에 비해 신체적, 기능적 여러 면에서 연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 쓰인 바 되면 감히 남자도 할 수 없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 하나님의 장중에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럴 때 우리들은 분명 이 세상이 능히 감당치 못할 놀라운 주의  일꾼들이 될 것이다(히 11:38).

1. 야빈의 압제(4:1-3)

이스라엘 백성은 사사 에훗 치하에서 80년 동안 대적의 시달림 없이 평안을 누렸으나(3:30). 그들은 에훗이 죽자 다시금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다(1절).  결국 이스라엘은 그 죄의 대가로 일전에 가나안 정복시 한번  격멸했던 적이 있는 하솔(수 11:10)의 야빈 왕에 의해 다시금 20년 동안이나 압제를 당해야  했다(3절).

이러한 본문은 죄악의 뿌리가 얼마나 깊으며 강한가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죄의 권세에 얼마나 쉽게 복종하며, 반복적으로 죄의 유혹에 빠져들며, 더욱이 반복적으로 죄를 짓기 쉬움을 시사해 준다.  사실 인간은  평안해지면 그가 일전에 겪었던 어려울 때의 일을 잊기 쉽다.  

80년 동안 대적으로부터 아무런 어려움도 받지 않고 살아왔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으로 해이해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성향을 아시고 가나안 땅에 열국을 남기시어(2:21)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할 때 그들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코자 의도하셨던 것이다(3:1-4). 본문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는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절실케 되었다(3절).  

이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구원자를 보내  주셨는데,  곧 여사사 드보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한 백성을 끝까지  버리시지 않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할  때에는 언제든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장  뿐만  아니라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이것이 본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성도의 고난

사사 시대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계  그리고 그에 따른 이스라엘의 회개 및 하나님의 구원 등이 반복되는  악순환으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사사 시대 이전 출애굽 역사에 있어서도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 반복되었었으며, 사사 시대 이후 왕정 시대에도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지 않고 회개할 때에는 언제든지 구원하셨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그 구원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 회개할 때 주어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품을 떠날 때 그들에게 고난을 주셔서 회개하도록  인도하시며(신 8:5)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그 길에서 돌이키도록 고난의 풀무 속으로 성도들을 던지신다.

이와 달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은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종종 고난을 주시는 경우가 있고((="애매히 받는 고난"으로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악인들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하시는 때도 있다.  

그 한 예로 요시야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자기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죄우로 치우치지 아니한 사람이었으며(왕하 22:2).  

모든 우상의 산당을 제하고 성전을 수축하기도 하며 성전 수축 때 발견한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며 회개했던 인물이었다(왕하 22:11).  

이와 같이 전 인격을 다해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이스라엘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왕하 23:25).  

그런데도 그는 애굽 왕 느고와의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왕하23:29).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은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비참한 고난을 다 당했다(욥 1:13-2:13).  

또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은 안수하여 낫게 하였으나 자신은 사단의 가시로 인해 고생해야만 했다(고후 12:7).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들에게도 고난이 따라온다.  차이가  있다면 각자에 따라 그 고난의 의미가 다를 뿐이다.  

요시야의 전사(戰死)가 새 언약시대 곧 더 이상 인간 통치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 통치자가 되시는 영적 이스라엘의 도래를 예시한 것이라면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욥 42:5).  

그리고 바울의 고난은 그로 자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며(고후 12:7), 하나님의 능력으로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고후 12:9).

아무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주신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므로 어떠한 형태의 고난이든지 서로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자라고 선언했던 것이다(히 12:8).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기에 징계하며 채찍질하기 때문이다(히 12:6 ; 계 3:19).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고난을 받을 때, 당장 그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원망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39:7-18 강해, '애매히 받는 고난'을 참조하라.

2. 여사사 드보라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바락(4:4-11)

야빈의 압제로 인해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구원자로  선택된  여사사 드보라의 예언을 따라 바락이 군사를 데리고 다불 산으로 올라가서(6, 9, 10절)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일전(一戰)을 벌일 준비를 마치는 장면이다.

 이처럼 바락은 여선지이자 사사인 드보라의 예언을 무시하지 않고 압제받는 자기  백성을 위해 나서기로 결정함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케  된다(12-16절).   

즉 그가 압제에 시달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 없는 무기와, 전쟁을 위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백성들을 데리고 병거 900승을 갖춘 시스라의 군대와 싸운다는 것은 오합지졸(烏合之卒)과 정예 부대의 싸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락은  드보라의 예언, 곧 하나님께서 시스라의 군대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리라는  예언을 믿음을 믿음으로써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바로 이 믿음과 자기 백성을 위한  희생정신의 결과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엘라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징계하고자 물맷돌 다섯 개와 막대기만을  가지고(삼상  17:40) 투구와 갑옷을 입고 칼과 활, 방패로 무장한 거인 골리앗에게로 나아갔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너무도 무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는 다음으로 골리앗과  대적했기에(삼상 1:47)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복 주시고 그들의 신앙 성장을 이루기 위하여 신앙의 결단을 요구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요구는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무지 합당치 않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결단하는 참된 지혜를 발휘한다면 우리는 그 요구를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의 크신 일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순종의 축복

바락은 여선지 드보라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구원한 영웅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은 성경에 무수히 많이 나온다.  

노아는 방주를 지어 장차 올 대홍수를 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였기에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다 (히 11:7).  

또한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 땅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한(히 11:8, 9) 믿음의 조상이었다.  심지어 그는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 했을 때도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었다(창 22:7-14).  

이외에도 모세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지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수 11:15).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성경에는 불순종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자들도 언급되어  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여호와 앞에 드린 결과로 여호와의 불에 타서 죽임을 당했다(레 10:1, 2).  

그리고 유다 지파의 아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한 뒤 여호와께 바쳐진 것을 아무도 취할 수 없다는 여호수아의 말을 불순종함으로써 죽임을 당했다(수 7:12-15). 또한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왕위를 다윗에게 빼앗기고 말았다(삼상 15:23).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사상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저주를 받은 자들은 역시  출애굽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들은 출애굽 노정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므로 당시 순종의 본을 보인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있는 축복에서 제외되었다(히 3:16-19).   이상의 불순종하는 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무시했으며, 심지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반면 순종하는 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잠 3:6).  

그런데 불행히도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는 죽음과 멸망, 심판과 징계하였지만 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이었다 (출 19:5, 6 ; 신 5;29 ; 수 1:8 ; 왕상 3:14 ; 마 12:50 ; 요 14:23 ;  벧전  1:22).  

결국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방편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남은 것이라곤 우리 스스로가 순종과 불순종 이 두 가지 중 어느것을 선택하느냐는 것 뿐이다.  과연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길을 택하는 어라석음을 범할 것인가 ?

3. 이스라엘의 승리와 여걸(女傑) 야엘(4:12-24)

사사 드보라의 예언대로 순종한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파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야빈의 압제에서 구원하는 장면이다(12-16절).  

이러한 전쟁은 연약한 한  여인에 불과한 야엘의 의해 시스라가 피살당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17-24절).  

하지만 이 사건은 이미 드보라가 예언하였던 바이니(9절) 결코 우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중에 계획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여기서 야엘의 행위와 관련,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1)그녀는 시스라를 속였고(20, 22절), (2) 그를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기  때문이다(21절).  

사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을 기독교 윤리의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쉽게 생각해서 그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일한 것이므로 그녀의 잔인한 행동과 속임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어떤 사람이 성도들을 위해 세상 사람을 속이거나 곤경에 처하게  하며, 심지어는 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도 그 사람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 있는가 ?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5장에서 드보라는 야엘의 행동을 극찬하면서 그녀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다(5:24).  

뿐만 아니라  드보라는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과정에 대해서도 노래했다(5:25-27).

.....곰곰히 생각해보시기를!!...결국 이 문제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따른 Q 나라 위함의 전쟁관을 이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 전쟁을 할 때, ((교만과 탐욕따라 행하는 세상 나라들처럼!!)) 결코 단순히 영토 확장이나 무력 시위를 목적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다.  

대신 하나님을 머르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징계하며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기 위한 목적에서 행하였다(신  7:1-5).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시 그 땅의 모든  족속을  진멸시키거나  쫓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모압을 쳐서 사로잡은 자를 매우 잔인하게 죽였다(삼하 8:2).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수행한 전쟁은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 불리운다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  

그리고 야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여걸(女傑)로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영적인 전쟁을 하는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  즉 성도들은 사단의 세력과 싸움에 있어서 죄악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살전 5:22)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킨다는 의미에서 날마다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假裝)된 친절 - 본문에는 야엘의 친절한 방심에 시스라가 불의의 일격을 받고선 죽임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세상 역사에서 뿐 아니라 성경 역사에서도  사람들이 본래 의도를 숨기기 위해 가장된 친절을 베푸는 장면이 가끔 목격된다.  

기브온 거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위장  전술로써  여호수아를  속였다(수9:3-15).  

이때 여호수아는 그들과 화친을 맺는 문제에 대하여 여호와께 묻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결정함으로써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수 9:14).  

그리고 다윗과 군대장관 요압은 아브넬을 속여 그가 안심하고 있을 때 그를 살해 했다(삼하 20:10)  

이  외에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 역시 가장된 친절의 표, 곧 입맞춤으로써 제 스승을 원수에게 팔아 넘겼다(마 26:47-50).  

그런데 이와 관련 우리가 명신해야 할 것은 거짓의 아비인(요 8:44)  사단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고후 11:14) 하나님의 자녀를 미혹하여 넘어뜨린다는 점이다.  

사단은 하와로 하여금 범죄케 했을 때와 같이 죄악의 요소들이 매우 아름답고 이로운 것처럼 가장을 해 인간들에게 접근한다(창 3:6).  

이러한 예는 분열  왕국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의 정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아들 로호보암의 학정(虐政)에 반항하여 이스라엘 11지파를 데리고 따로 북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그 다음 그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왕상 12:28)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신'이라 하며 섬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레위 지파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고(왕상 12:28, 31), 절기도 유다 절기와 비슷하게  정했다(왕상 13:33).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선 진정한 여호와 신앙의 소산인 것처럼 보였었다.  

이상에서처럼 사단의 거짓된 가르침은 모든 좋은 것으로 위장되어 있다.  

사단은  그러한 것들로 서서히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의 노예로 삼으려 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영적 무장을 하고 영안(靈眼)을 깨쳐  그러한 사단의 위장 전술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요일 4:1-6).

======https://m.blog.naver.com/ahav_yeshua/50086825974
 하나님께 붙어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 당신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이 두 개의 단어는 해석상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원어는 한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있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현실적인 동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원전을 자세히 보면 더 정확하고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어있다는 것, 하나님 안에 내가 거하고 그 분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을 모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이 두 가지 개념을 살펴봄과 동시에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붙어있다’는 의미를 함께 살펴봄으로 더 명확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보길 원합니다.
1. “붙어있다”와 “거하다”의 신약적 원어와 동의어
 “붙어있다”는 것과 “거하다”는 것은 해석상 말은 다르지만 같은 원어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의미하는 단어의 원어와 그 동의어를 알아봄으로서 더 자세한 의미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원어)
1. “붙어있다”(mevnw : 메노) - ‘머무르다 remain.’
<동사 메노의 사용법>
① '떠나는 것'의 반대로 '어떤 장소에 머무르다, 체재하다, 살다, 존재하다, 남아있다'..     비유적으로 '어떤 영역에 남아있거나 머무르다'를 의미한다.
② 메노는 '흔들리거나 달아나는'(도피)에 반대로, '반대에 맞서다, 굴하지 않다, 견디다,   굳게 서다, 굳게 지키다'를 의미한다. 법적 논쟁 또는 협정에 사용되었다.
③ 이동이나 변화되는 것'의 반대로, '변함 없이나 여전히(…의 상태로) 있다, 그대로 지속하   다, 계속 머무르다'를 의미한다.
④ 파멸, 파괴되거나 소멸되는 것의 반대로, '남아있다, 존속하다, 계속 살아가다', 특히 '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를 의미한다.
<신약 성경적 용법으로서의 메노>
① 문자적으로 '머무르다' 즉 한곳에, 혹은 누구와 함께 머물다, 특정한 때를 위해 계속 존   재하다, 살다를 의미한다.
② 은유적으로 '꼭 붙잡다, 확고부동하게 머물다'를 의미한다.
③ '기다리다'를 의미한다.
<메노의 동의어들>...“메노”(붙어있다, 거하다)     
엠메노  ejmmevnw  ~에 머무르다 남아있다 참다, 견디다 ~을 지키다
에피메노ejpimevnw 머무르다 남아있다 (~안에) 존속하다
모네monh 머무름  체재함  거주, 거처
파라메노paramevn 남아있다 머무르다 계속 머물러있다 ~안에 존속하다 ~에 체제하다
페리메노 perimevnw 기다리다
프로스메노prosmevnw 남아있다 ~와 함께 머무르다 오래 머무르다 유하다
<구약에서 표현되는 머무르다>
(원어)
1. “거하다”(bv'y: : 야샤브) -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
 구약에 나타난 ‘야샤브’라는 단어는 우리가 실제로 살고, 거주하며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삶을 살기위한 실천적인 부분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방법이며, 기준이 되어진다.
===신약과 구약 연결하기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요한복음 15장 1절 ~ 13절을 중심으로)
2. 요한복음 15장에서의 ‘붙어있다’와 ‘거하다’ 구조
메노(거하다, 붙어있다, 머무르다)==>열매(칼포스...열매, 새끼, 생명의 후사) :::친히 알게 하실 바, 사랑의 계명 지킴 안에서 구함 그대로 이룸 = 사랑(아가파오)-기쁨 충만(카라...플레로오)
(본문) (요 15장 1절 ~ 17절)
1. 하나님 안에 붙어있음과 머무름
(요 15장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2. 붙어있고 거하는 자의 결론 - “열매를 맺음 / 구하는 대로 주심”
(요 15장 5절, 7절)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      하면 이루리라
3. 게명을 지킴 / 사랑 안에 거함 - 친구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
(요 15장 10절 ~ 13절)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주님께서 명하는 대로 행하는 자를 친구라고 부르셨다. 주님은 친구가 된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시는 사랑을 실천하셨다. 우리도 주님을 본 받아 그의 사랑 안에 거하고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 나의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것은 내가 바로 말씀 그 자체가 되어 지는 것이다. 즉, 자아가 말씀이 되어 버린 사람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 붙어있고, 그 말씀이 그의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말씀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요구사항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즉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을 행하고 순종할 때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된다. 그 열매는 바로 사랑이라는 열매이다. 이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친구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의 수준으로 성숙한다.
3. 룻기서의 룻(친구, 우정)을 통해 본 붙어있는 자의 모습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붙어있고 머물러 있는 것을 신약은 물론이고 구약 속에서도 숨겨놓으셨다. 그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바로 구약의 인물 ‘룻’이다.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어도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르고 붙어있던 이방인 룻은 보아스라는 인물을 만나고 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순종함으로 다윗왕의 조상 오벳을 낳게 되는 신앙의 결과를 얻게 된다. 구약의 룻의 모습에서 붙어있는 자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1) 룻기서에 나타난 붙 쫓는 자의 모습(친구의 모습) / 룻의 이름의 의미 : “친구, 우정”
①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②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습니다. ③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④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 입니다. ⑥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길 원합니다.
2) 룻의 굳은 결심 - 굳게 붙어있음 “다바크”
(룻 1장 14절)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원어)
1. “붙좇았더라”(qb'D; : 다바크) - ‘달라붙다, 굳게 결합하다(밀착), 충실히 대하다, 접근하다’
3) 어머니 나오미의 말씀(명령)에 순종한 룻 / 순종과 행함의 사람
(룻 3장 1절 ~ 5절)
1절)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절)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절)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      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절)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      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원어)
1. “행하다”(hc;[; : 아사) - ‘일하다, 행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이루다’
4) 순종으로 얻은 열매 - 오벳
(룻 4장 13절 ~ 17절)
13절)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        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절)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       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절)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절)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원어)
1. “기업을 물다”(la'G: : 가알) -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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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 4:1-10 우리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네 번째 사사 드보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4-5장에 걸쳐 꽤 길게 언급된다. 동일 사건을 4장은 서술체로, 5장은 구원사건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가체로 한 사건을 두 장이 보완해주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사사들은 평범에도 이르지 못한 사사가 많다. 에훗 왼손잡이, 삼갈은 소치는 사람,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다. 드보라는 특이하게 여자사사였다. 계수에도 포함되지 못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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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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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또 여호와를 버리고 악을 행한다. 사람은 자꾸 잊어먹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눈앞에 바로 있다. 이스라엘이 편안해지자 하나님 의식하지 않고 또 죄를 짓는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다가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면 형벌하신다. 
하나님이 하솔을 통치하고 있던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이스라엘을 팔아버리신다. 이 이름을 여호수아에서 본 적이 있다. 이 시대에서 150년 전이 여호수아시대다. 북쪽의 왕을 칠 때에 규합해서 여호수아를 대항했던 왕이 하솔의 왕이다. 하솔을 통치하던 왕을 대대로 야빈이라고 불렀다.(수11:10-11) 당시 하솔은 가나안 땅의 머리였다. 그가 여호수아의 손에 죽고 호흡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불타버린 땅에 하솔 땅이다. 150년이 지난 이 시점에 그곳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솔을 다시 일으키셨다. 그곳에 왕 야빈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왕은 전부 이방왕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들이 정복했던 가나안왕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특별하게 아픔이 가중된 것이다. 자기들이 진멸시킨 국가의 왕이 다시 힘을 얻어서 이들을 다시 다스리고 괴롭히니까 더 괴로울 것이다.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이스라엘을 팔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을 이끌어가실 때 그의 생명을 살리고 온전케 하실 때 사용했던 방법들이 그를 대적의 손에 파는 일이었다. 성경에서 “판다”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본문은 요셉 사건에서이다. 형들이 동생 요셉이 미워서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아버린다. 그는 종의 신분으로 떨어졌지만 요셉을 하나님이 형통케 하셔서 애굽에서 국무총리 자리에 오르게 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자 역할을 감당하게 한다.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이스라엘을 파신 것은 이스라엘을 형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삶에 고통, 고난,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쳐올 때 하나님이 나에게 위대한 계획을 실행하시는구나 하고 기대하라. 그를 통해 나를 성장시키실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솔왕 야빈은 굉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철병거가 900승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K1 탱크 1000대 보유하고 있다. 한 나라가 가진 게 1000대인데 조그만 도시국가에 900대의 탱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막강한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학대하기 시작하고 무참히 짓밟아버린다. 압제가 20년간 지속된다. ‘학대, 쥐어짜다, 짓눌러서 터뜨리다’는 뜻이다. 그냥 통치한 게 아니라 원한과 억울함을 가지고 공박하고 괴롭혔다. 이에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하나님이 구원자 사사 드보라를 일으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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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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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하면 “드보라, 여선지자, 랍비돗의 아내 그 여자가 이스라엘의 여 사사가 되었다.” 여자라는 말이 5번이나 명백하게 나온다. 왜 강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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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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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직무와 직무대행이 나온다. 나무가 이름으로 칭해져 “드보라의 종려나무”로 불릴 정도로 그녀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덕망이 있었고, 이스라엘을 판단하는 판결, 재판을 잘해 사사 역할을 굉장히 잘 수행했다.
 
이런 본문을 우리는 예사로, 아주 익숙한 관점으로, 우리의 습관대로 읽는다. 성경을 성경이 원하는 그림으로 읽지 않는다. 드보라가 예쁘고 가정에서 살림잘하고 호리호리하고 칼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그런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하고, 여자지만 어깨가 딱 벌어지고 약간 부리부리하게 생겨서 칼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는 어떤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쉽게 읽는다.
드보라는 여자인데다가 랍비돗의 아내다. 평범한 가정주부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부르시고 세우신다. 우리는 범사를 이런 본문을 읽을 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읽는다. 함직했겠지. 뭔지는 모르지만 특별하고 도드라진 어떤 부분이 있었던 여자이겠지 자꾸 이렇게 생각한다.
드보라는 여선지이기 때문에 전투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바락이라는 장수를 붙여준다. 대부분의 사사는 사사 하나로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바락을 붙여주신다. 바락과 드보라가 사사이다.
드보라는 사람을 보내 납달리 게데스에 있는 바락을 불러온다. 바락에게 스불론 자손과 납달리 자손 중에서 만 명을 데리고 다볼산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을 전한다.(6-7절) 갈릴리 북부에 있는 하솔은 원래 납달리지파의 땅이었다. 그 옆에 바로 붙어있는 스불론 지파가 야빈에게 가장 많은 압제를 당했던 것 같다. 두 지파의 만 명을 데리고 장정들과 함께 시스라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내리자 바락이 망설인다.
‘바락’은 ‘번개’라는 뜻인데 ‘주저하는 번개’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가기만 하면 승리한다. 드보라의 입으로 말을 전해주셨는데 드보라가 함께가면 가고 함께 안 가면 안 간다고 말한다. 전쟁터에 가서 적을 궤멸시켜야 될 장수가 여자의 치마폭 뒤로 숨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해가 간다 하나님이 드보라를 통해서 말씀하시니까 하나님이 드보라에게 응답하실 거라고 느껴지니까 바락이 여호와의 약속과 말씀이 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약속과 말씀보다 드보라를 붙들고 있다.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신앙적으로 성숙해 보이고 괜찮아 보이는 드보라와 함께 가면 하나님의 도움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드보라를 붙들고 있다. 
이 시대는 남성들을 통해 주되게 일하는 시대다. 지금과 다르다. 3000년 이전의 이야기이다. 전쟁을 위해 바락을 세웠는데 “당신이 가야 나도 간다”고 말한다. 
바락은 전쟁을 잘하는 용사이지만 믿음이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뭔지를 모르고 사람을 붙들고 있다. 이 바락의 모습은 이방종교 같고 샤머니즘 같다. 이방종교나 샤머니즘은 더 신령해 보이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기도해 주면 더 잘 들어주실 것 같은 존재가 있어 보이지만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그 순종이 열매를 맺혀내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 붙들고 딱 나가면 일이 되게 되는데 어리석은 바락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세상종교처럼 어리석게 드보라의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하나님,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 딱 붙들고 한 걸음 나가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텐데 여자의 치마 두에 숨어있다. 바락의 이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의 보편적인 영성을 보여주는 모습이고 오늘 여러 형태로 조국교회 남성들이 영성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조국교회 많은 남성들이 신앙생활을 아내에게 맡긴다. 
바락의 반응이 일면 이해가 간다. 철 탱크 900대가 진치고 있으니 전쟁에 능통한 자일수록 뻔한 싸움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가? 수17:16을 보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철병거로 인해 자기에게 주어진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면이 나온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철병거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청동기 문화라 철을 다루는 기술이 없었다. 둘이 싸우면 당연히 철이 이긴다.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말 900마리가 따그닥따그닥 소리를 내며 철병거를 끌고 갈 때 말발굽소리, 철병거 바퀴 도는 소리까지 나 이스라엘은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자기들은 정규군대가 아니라 민병대다. 평소에 군대가 있는 게 아니라 위기상황에 끌어다 쓰는 예비군 같은 개념이다. 900승은 공포스럽고 도무지 싸워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최첨단 무기였다. 
그러나 바락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호와께서 승리를 준다는 것이다. 드보라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가라! 이길 것이다.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하지만 바락은 쉽사리 안 나간다.
가나안 여리고성 첫 전투는 강대한 무기가 아닌 다만 일곱 바퀴 돌고 양각나팔을 부는 것으로 치렀다. 순종하면 이긴다는 걸 경험한 민족이다. 그 1세대가 다 죽고 없어 그 사실을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 전해 들었다. 바락은 이스라엘 전체 모습을 대변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머리속으로는 아는데 가슴 가운데에는 박혀 있지 않았다. 마음에 믿음으로 그것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드보라가 질책도 하고 동행을 약속한다. 그 영광을 한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다. 장수의 목을 치는 영광을 바락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인 드보라를 주목하라. 시스라의 목을 친 여인도 헤벨의 아내다. 왜 여성에게 집착하고 부각시키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셨을까? 사사기 전체의 주제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암흑기였다. 가장 암흑기에 가장 경건한 여성 드보라를 세워 역사하신다. 
랍비돗의 아내는 ‘횃불’이라는 의미이다. 드보라는 ‘횃불의 여자’이다. 하나님이 빛을 허락하셨다. 전쟁은 강인한 힘의 대결이기에 그 시대의 지도자는 강한 남성,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왕의 직분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드보라를 통해서 그 능력이 힘에 있지 않다. 계수에도 포함시키지 않고 천히 여기던 그 여인을 통해서 내가 한 나라를 경영하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바락은 강한 자인가 약한 자인가? 한 나라의 군대장관으로서 전투를 지휘하는 사람이 약할 리가 없다. 그는 강자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강자를 통해 적군의 머리를 베게 하지 않고 한 여인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어간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다. 
강한 힘이 통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취되는 나라다. 얼마나 신뢰하고 있나? 사역지, 직장, 캠퍼스, 영적 전투의 현장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바락과 같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 약한 여인을 쓰신 하나님이 승리를 약속하셨다. 
삿4:11- 24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바락은 주저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승을 거둔다. 
주저하였기에 적장의 목을 베는 명예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다. 이기면 되지 목을 누가 베든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이 큰 명예였다. 
야엘은 ‘산염소’, 드보라는 ‘꿀벌’이라는 이름 뜻을 갖고 있다. 드보라는 종려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지도했다. 당시 종려나무에서 나오는 시럽을 꿀로 사용했다고 한다.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서 가르쳤는데 그 나무에서 꿀이 나오고 드보라는 꿀벌이다. 꿀은 말씀이다. 야엘은 ‘산염소’다. 산염소 야엘이 시스라 적장에게 우유를 먹여 재운다. 산염소가 젖을 낸다. 이 젖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회복되어진다. 벌의 꿀과 산염소의 젖이 큰 역할을 한다. 
바락이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볼산에 진을 친다. 철병거 900대를 갖춘 시스라가 보기에 만 명은 어떠했을까? 인구에 비해서 적은 수다. 20년 동안 시스라의 막강한 군사력에 지배를 당하고 있다. 만 명이 반역했다. 바락 옆에 계속 만 명이라는 숫자를 붙인다. 승리가 수에 달린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호수아 정복 전쟁의 메시지다.
삿3장....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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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고 가나안 정복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다음세대에게 하나님의 전쟁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기 위해 남겨두신 이방민족들을 사용하신다.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은 4절이다.
하나님의 전쟁의 한 방법은 순종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크고작은 많은 일들도 똑같다.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긴다. 그런데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만 명이니까 군사 2~3만명, 철병거 200대 갖고 나오나? 시스라는 모든 철병거, 모든 군대를 동원한다. 대충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동원되어 우리를 맞선다. 싸워봄직한 시험은 없는 것 같다. 대체로 다 싸워보기도 전에 겁부터 덜컥 나는 시험이다. 대부분 싸울 생각도 못하고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의식을 주어 절망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겁부터 지레 먹게 말씀을 순종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든다.
주저하는 바락은 바로 우리다. 드보라가 “일어나라” 하고 용기를 준다. 바락이 순종의 발걸음을 뗀다. 이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
삿5장....--------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기손강은 옛날부터 있던 강이다. 그런데 강인 줄 모르고 시스라가 다볼산 바로 밑의 기손강까지 철병거 900승을 끌고 의기양양하게 왔다. 와디이기 때문에 건기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우기에는 엄청난 물이 흐른다.
시스라의 군대가 그곳에 구름떼같이 개미떼같이 주둔했다. 건기라 비가 올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여기를 지나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철병거가 무용지물이 된다. 시스라가 철병거를 버리고 내려서 걸어서 도망간다. 강이 범람하고 땅이 질척거릴 때 이스라엘은 다볼산 쪽에 높은 데 있어 보이는 대로 처단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다. 
다볼산이라는 지명은 므깃도라는 높은 산의 다른 이름이다. 므깃도의 산이라고 불린다. 히브리말로 하르므깃도, 헬라어로 아마겟돈이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지막 전투지다. 다볼산 전투는 쉽고 편한 전투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투였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나갔을 때 그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전투를 기적같이 이긴 전투가 다볼산 전투이다. 아마겟돈이다.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위험한 선택이지만 게데스를 거쳐서 하솔로 도망하려고 했다. 야벨의 집과 화친을 맺었기에 야엘이 웃는 낯으로 영접하자 시스라는 상처 입은 맹수처럼 경계를 했다. 야엘이 들어오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스라가 물을 달라니까 야엘이 우유부대를 열어 발효된 우유를 주어 깊이 잠들게 한 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아 죽인다. 공포스러운 반전이다.
철병거 900대, 군대장관 20년간 공포정치의 실세가 여인의 손에 허무하게 죽는다. 시스라 군대는 힘이 꺾이고 이스라엘은 힘을 길러 가나안 땅을 회복하게 된다. 
전쟁은 바락의 완성으로 끝났다 전쟁의 꽃은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락에게 그 기회를 주셨지만 바락이 머뭇머뭇하자 하나님이 그 영광을 야엘이라는 이방여인에게 주신다. 
가나안 땅을 회복하려면 꿀이 필요하고 젖이 필요하다. 젖이 뭐냐? 젖은 용기 있는 순종이다. 내 앞에 닥친 시험과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실 때에 바락처럼 주저하지 않는, 야엘처럼 단행하는 용기 있는 순종을 뜻한다.
야엘은 칼을 잡아본 적이 없는 여자다. 그래서 자기가 평소에 잘 쓰는 말뚝과 방망이로 적장의 목을 취한다. 야엘은 용기있게 순종을 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오늘날에도 어떻게 일하실까? 이 땅은 우리에게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어떻게 우리에게 기업을 주시고 내리실까? 순종하느냐 여부다. 크기가 아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에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신다. 우리에게 꿀과 젖이 필요하다. 드보라는 꿀 같은 말씀 가르쳤고 야엘은 용기 있게 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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