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15장 [461.십자가를질수있나] [439.십자가로가까이] [217.주님의뜻을이루소서] [495.내주여뜻대로] [455.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 [459.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303.날위하여십자가의]
말씀이신 Q, 말씀하시는 Q, 전존재가 말씀과 하나!!, 마음이 말씀의 이루시며 이끄심따라 하나되어 동행함...그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온전히!!] 이루도록..바로 그렇게 살아감!!...아멘!!...오늘 거듭난 참 믿는이 그대는 진정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말씀)으로 살고 있는가....그게 아니라면, 무엇 바라며 살고 있는가..세상 가치따라 입신 양명 위해 (그대 스스로의 고군분투 노력 기울여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그것 성취하여 얻고자 = 이것이 바로 타락한 사람의 실체인 "육체"이다) 다른이들을 짓밟아 누르고 스스로 왕 되려 함이란...다름아닌 아말렉의 영으로[ "아말렉"이란 단어를!! 이렇게 분해하고 싶다..아말렉=암 + 말렉/멜렉 = 나는 왕 족속이기에 왕이요, 왕이라야 한다!!...왕으로 대접하라..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행하고 있음이니..(("나는 왕이다...나야말로 유일한 왕이다"라며...오로지 부정적 의미에서...생명 가진 존재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독차지하기 위해 완전한 파괴-진멸을 서슴지 않는 잔인한 폭력 통해 [궁극적으로] 창조주 영생하시는 영원하신 주재 Q을 대적하여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지존자 왕 되려 함)) ... 까닭모를 분노와 변덕스러움 그대로 폭력과 학대 가하며..이유없이 공격하고 적대시하며 투쟁적으로 살아감은 바로 그대는 또 하나의 사울로서 살고자 함인 것을 명심하라
##['정저지와(井底之蛙)', '좌정관천(坐井觀天)'의 관념체계로서의 신념belief이냐 참 생명 신앙faith이냐 ....그대의 존재 기반은??]
......신념은 참 신앙이 결코 아님!!...신념(=belief,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에 비추어 "참되다"고 여기고 붙들어 취하는 객관적 관념 체계).....반면에 신앙(= faith...그리스도와 하나..실생활에서 그대로 작동되는 바 영원 자존 영생 유일무이의 참 생명 빛, 참 근원자, 창조주 하나님이자 그분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죽음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고 동시에 거듭난 참 믿는이 안에 내주하여 하나로 사시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실지로 누림으로써 그리스도로 살며,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분을 누림)
......신념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그래서 토론-논쟁 끝에 감정 다툼-시기-미움-살인조차도 발생한다]]....심지어 세인들이 "우믈안 개구리"로 여겨버리는 무시해버리는 사람에게조차..... 그것 없이는 삶의 행동 가치 결정 기준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 어느누구고간에 이 세상에서는 자기와 자기 관점에서 보고듣고 이해하여 결론 지은바 의견 제시할 자유는 있는 셈이다.. [[((Q을 대적하여 떠나버린...제아무리 인류사회 유익-공존-번영을 위한다는.)) 세상의 모든 -ism은 궁극적으로는 (사탄마귀에게 이용-조종 당하는) 아말렉으로 그 정체가 드러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난 믿는이에게서 주 보시기에 [영생의 유일무이한 창조주, 주재께서 모든 자비와 긍휼로 불쌍히 여겨 부분 부분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시면 유한한 피조물인 사람은 결코 아무것도 스스로 참되게 발견하여 알 수 없음을 인정하고나서야 참 실제/실체가 드러나는 법이니, 세인들은 그 적용 결과 혜택을 보게 된다....그러므로, 옛사람들이 발견해 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겸손히 재평가하기를!!] ....신념(belief)의 유용성이란...글자 구성 그대로...belief -->be life into {Him, JC]--곧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주님의 경이로움 안에서, 열어보여주시도록 끝까지 추구하는 믿음 발휘하여)) 하나 되어 들어가 그분 자신을 생명 역동 근원 삼아 그분의 공급하심으로 사는 존재됨 안에서....바로 그 지점에서라야 신념의 참 가치가 드러나게 될 것!!..... ((어떤이는 하나님 없다고 그 관점에서만 보려 하며, 그대는 그대 안에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있기에.....이미 발견되어진 사실에 대한 소모적 논쟁은 그만 두고(인생이란 그토록 짦다.."임종때까지도 제한받지 않으시는 창조주 하나님 존재하심을 그토록 저주하며 조롱하며 부정하였던 유한한 정저지와, 니이체의 종말을" 기억하라!!)...다만 주님이 친히 그에게 말씀하사 바르게 인도해 주시도록 (사무엘이 주께서 최종 결정 내리신바 사울 버리심에 대해 그토록 울었던 심정으로!!) 중보기도하며, 그대는 주만 바라며 ...침묵함이 옳다!!))
.....심지어 거듭난 참 믿는이라해도 주께서 "이것은 참되니, 이 길로 행하라"라고 일러주셨던바를 토대로 [지난날에 그랬으니 지금도 그러는 게 맞겠지]하며 새로이 여쭈고 확인함 없이 그냥 행동하려는 경향이 몸에 배어있게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생명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생명은 죽어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날마다 새로이 참 생명 주님 그분께 새로이 듣고자 해야 한다!!))....이른 바 바로 오늘 새로이 깨우쳐 더해주시는 생명말씀이 오늘 적용할 바 참 신앙 생활의 준거요 틀인 셈이다... 그러나 영생의 사람아, 거듭난 참 믿는이여!! 고개들어 시선을 그대의 영원유일무이한 머리-주인-주님이신 분께 집중하여 듣고 또 보라....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주권적인 뜻을 가지고 계신 주권자 되심을 진정으로 인정해 드리고 있는가?.....그분에게만 주권적, 참 결정권이 있다....지극히 크고 광대하신 분, 참 자유의 근원이시며 제한 받지 않으시는 그분을 [그대 나름의 선입관과 틀-규격에 맞추어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보자면, 이래야만 하는거 아닌가요??...꼭 그래야만 해요...나 화낼거예요--하고] "앙탈부리며 떼쓰며 고집부리며" 제한하려 하고 있는 모습은 없는가...((거듭난 참 믿는이라 해도 피조물인 그대의 시야는 우물 바닥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 개구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가장 좋은 것 주시려 하는 그분의 선하고 기쁘고 온전하신 뜻 열어주시기를 구하되, 오직 주뜻 이루시도록 주께 전적인 순종의 ((오늘 합당한)) 걸음으로 "비록 죽음-절망 뿐인 황경에 밀어넣으시더라도!!, 바로 거기에 주님이 친히 계셔서 함께 하며 홀로 두지 않으시기에] 절대 신뢰하며 동행하자..완전하신 그분의 판단과 지식, 지혜를 신뢰하자.... 세상이 그대에게 무어라 말하며 시비걸고 박해하든지 주님이 처리하시도록 일일이 대응하려 말고 침묵하고 그냥 내버려두라 ...다만 십자가 아래에 거듭난 전존재 두기를 관심하자... 진정 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아버지의 뜻 이루심에 순종하여 끝까지 올인하셨음을 기억하라...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17:11)”...주님의 믿음 = 에무나
비록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는 이적을 경험한 백성들이지만 목이 마르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모세를 통하여 들어 주시자, 이번에는 다시 배고픔의 문제가 그들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추격하는 애굽의 최첨단 전차부대를 유례가 없던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따돌리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래 (출15장)가 채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원망이었다.
그러나 430년 기간 동안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이제 막 태어난 이 신생국가 백성들의 배고파 우는 소리에 여느 다른 부모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먹을 음식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처신에 필요한 기본 규칙에 대해서 알려주셨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시간(time)에 대한 자연의 질서였다 : 각각의 날에는 그 날에 할당된 만나가 주어 졌으니, 각각의 날은 그 전 날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날이라는 것이다. 월요일은 일요일 다음의 날이고 화요일은 월요일 다음의 날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날을 위하여 만나를 저축해 둘 필요가 없었다.
이 가르침의 초점은 안식일은 주중의 다른 날과는 다른 성질의 날이니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안식일에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창조되는 날이 아니므로 한 주의 일은 그 전 날 끝내야 한다는 말이다.
창세기에서도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2:1)”라고 안식일 전 날의 상황을 묘사하였다.
여기“다 이루어지니라(finished, Vayekhlu= וּלּכֻ יְוַ“(의 히브리어 원 뜻은 다소 난폭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파괴(destruction)”라는 뜻의 “Klaya”에서 온 단어이다.
문장 전체를 원 뜻에 맞추어 재해석하면, 안식일 전날까지 철저하게 소모하고 파괴하여 이제 새로운 안식일 부터의 한 주는 폐허 위에서 새롭게 싹을 내어서 시작하라는 뜻이 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만나를 통해서 가르치시고자 한 원칙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수적이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듣도 보도 못한 경이로운 현상들을 체험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의 현장들을 연이어 목격하게 되었다.
그런 승리는 너무도 완벽하여 그 어떤 휴유증도 그 어떤 반대급부도 요구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기뻐,“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출15:1~18)”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승리를 노래(the song of the sea)했다.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승리들에만 취해있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를 주시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삶의 순환성(cyclicality)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다.
그래서, 풍요라는 것은 언제나 빈곤으로 자리가 바뀌어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그 풍요는 파괴로부터 새롭게 싹을 낼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들에서 검고 희고가 하루 사이에 뒤바뀌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만나의 이야기(출16장)가 곧바로 아말렉과의 전투이야기(출17장)로 이어졌던 것이다.
아말렉군이 르비딤에서 이스라엘을 갑작스럽게 공격하였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전장에 보내고, 자신은 산 위에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께 팔을 들어 기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모세의 팔이 내려오면 지고 들고 있으면 전세가 다시 역전되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아말렉과의 전쟁은 애굽의 바로와의 전쟁에 대한 반대 거울상이라 하겠다.
애굽과의 전쟁에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고 멋진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아말렉과의 전쟁은 오름이 있고 내림이 있었다.
그것도 그 승리를 노래(the song of the sea)로 기쁘게 부른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말이다. 그러나 그래도 시간은 새롭게 가고, 그들은 생존하여 나라를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 전장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이 기록되어 있으니... 곧 하늘로 두 팔을 다 들어 올려 중보기도에 들어가는 모세...그 모세의 믿음의 신실함과 참됨(=에무나..믿음), [이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에 자기를 내어주는 메시아의 표상의 그림]이 나오고 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흉포한 아말렉 족속과 맞서 싸운다. 이스라엘의 병력만으로 그들과 맞설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모세는 전장 위에 우뚝 솟은 언덕에 올라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중보기도에 들어가고 있다.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모세는 그의 팔을 하늘로 올려 유지하는데..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동안, 여호수아는 전장에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극도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애굽기 17:12).
“내려오지 않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에무나 אֱמוּנָה 라고 적혀 있다.
이 단어는 “(주님JC, 그분의 믿음”을 뜻하며 여기서 거듭난 참 믿는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어 “아멘 = 진실로!!...계시록에 등장하시는 주님 다리에 FAITHFUL AND TRUE라 쓰여있다...”이 유래되었다.
아말렉 부족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우세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가 취했던 팔의 자세가 아니라 ((주와 합한...주님의 믿음 그대로!!)) 모세가 가지고 있는, 발휘되는 생생한, ((이를 위해서는 두세사람이 함께 동일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 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셨다..“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 믿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오직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언덕 위에서 팔을 밖으로 뻗고 있는 모세의 모습은 성경의 또 다른 믿음의 장면을 상기시키는데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다.
모세가 팔을 들어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물리치게 도왔듯이, 예수님(예수님의 히브리어 이름은 예슈아 혹은 여호수아)께서는 두 팔을 들어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
아말렉과의 전쟁을 이기고 나서 하나님께서는“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 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출17:14)”라고 명령하셨고, 이에“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17:15-15)”.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와 갈증과 배고픔으로 시달리던, 어찌 보면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취약했던 광야시절 초기에 그들을 공격했던 아말렉의 죄성의 근원은 아각(삼상15장:사울왕)과 하만(에스더) 때로 계속해서 대를 이어 나타나 그때마다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려 시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더불어 싸우셨다.
그래서...하나님은 그것을 기록하라고, 기억에서 지우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기록의 목적은 말소의 목적의 반대라 하겠다. 말소가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을 잊기 위함이라면, 기록은 정확히 그 반대로 잊지 않고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다.
특별히 이 아말렉과의 전쟁을 기록하라 하신 이유는 이 전쟁처럼 악한 것들과의 전쟁에서는 승리와 패배가 가까이 있다는 순환성(cyclicality)과 함께, 결국 이런 전쟁의 최종은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난다는 언약을 영원히 기억시키시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 기록된 말씀은 악한 것들과의 싸움으로 지속되는 우리네 인생의 긴 여정에서 하나님 나라,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는 만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친히 방문하여 찾아오사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 안위하시며 함께 행하시는 [=파카드] 주님은 기억하고 권념하시는[=자카르] 분이시다
....우리는 또한 주님 말씀과 메시지, 사건을 떠올려주시는 분을 따라 기억을 더듬어 회상하고 진정한 에무나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기억하라, 권념하라’는 말은 히브리어 ‘자카르’(zakar)이다. 이 단어의 기본 개념은 ‘기억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등의 뜻으로 사람의 정신적 활동을 의미한다. 하지만, 때로 이 단어가 ‘권고하다’의 뜻으로 쓰일 경우에는 사람들의 망각을 일깨워 잊어버렸던 사실들을 떠올리고 기억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주님께서 ~에게[주님 자신이든지, 그대에게든지 이미 발생케 하시어 일으키신 사건 관련 말씀과 메시지를] 기억나도록 하여주신다))함이다. 이 경우는 주로 히브리어 ‘사역형’인 ‘히필’(Hiphil) 형태가 쓰였다. 따라서 ‘기억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자카르’는 단순히 과거의 어떤 사실을 기억하고 암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묵상하고 회상하고, 스스로를 권면하여 일깨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영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창세기 8:1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라는 말씀에서 ‘권념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권념’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짐승들을 ‘생각해 주신 것’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모세는 옛날을 ‘기억하라’고 명령형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기억에 대한 당위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과거의 수많은 사건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교훈을 깨닫기 위해 성도들은 옛날의 일들과 과거 인물들의 삶을 묵상하고 회상해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거나 나에게 말씀하시는 영적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결과는 때로는 ‘회개’를 불러오는 원동력이 된다. 에스겔 6:9은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라고 하였다. 또한 민수기 15:40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라고 말씀하였다. 이는 올바른 ‘기억’이 참된 회개를 불러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서게 해 줌을 일깨워 준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상고하려는 자는 성경을 통해 ‘옛날’을 잘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이 나의 과거의 삶을 회상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떠올리게 하고 회개할 수 있는 은혜의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5)... "Where is your faith?" = (히브리 성경..이대로가 아니라 거꾸로 순서를 바꾸어 읽음..,,"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 = 마 에무나 케타네이 (("케타네이 에무나 마")) 요15장 묵상!!.... "거듭난 나의 영 안에 내주하여 계신, JC의 바로 그 믿음 " = 에무나!!!....이것이 이미 그분께서 이루어주신 그대로!! 그분과 하나 된 내 안에 있기에((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내가 너희안에, 너희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믿음"은 전적으로 모두 히브리 단어"에무나"를 사용하고 있음을 명심하라...거듭난 믿는 이마다 이미 TUQ과 하나 안에 있으니...그리스도는 친히!!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자, 양의 문 되심으로써 하나되게 하셨고 이제 부활 생명의 그영으로서 거듭난 참 믿는이마다 그의 영 안에 들어와 내주하고 계시기에.. 주님의 물음은 "네 믿음이라 여기고 있는 그것이 바로 너와 하나이신 하나님의 전능한 믿음, 주관적 체험 통해 구체적으로 정말 생생하게 체험-확증된 임마누엘 구주 JC의 믿음이 맞느냐, 아니면 무력무능한 피조물이자 타락한 사람, 곧 육체의 피상적이며 막연한 믿음 그대로냐" 를 묻고 계심이다..
=== 생생하게 발휘되는 살아 생동하는 산 믿음인[절대 기쁨, 절대 긍정, 절대 신뢰, 절대 감사, 절대 감격!!] 진정한 에무나!! .....헬레크 예호와 에트 암 헤벨 나할라 예호와 = 세굴라....((여호와의 전존재를 쏟아부어 소유 삼은바, 둘도 없는 가치의 보배/보물 ...특별한 소유이자 줄로 재어 놓은 그분의 기업, 그분의 백성이요 동행/동반자/반쪽 = 선민, 더 나아가 완전한 하나 안에서 막힘 없이 교통하여 완전히 친밀한 앎-사랑-섬김 가운데...상호 거함-상호 소유-상호 기업-상호 감상/맛봄/음미하며 찬송하며 춤추며 기뻐하며 누림 (신32:9)
===사울이 아말렉을 치다(BC1025..믹마스 전투 후 23년 경과 시범 .사울.65세...사무엘88세...15세 다윗 베들레헴에서 기름부음 받음)
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에서의 후예 중 한 족속)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르비딤에서의 기습 사건]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파카드)
.......@@파카드...두가지 의미!!
......[세상 불신자, 하나님 대적자] 상벌 판단 위한 깊고 세밀한 감찰 결과, 징벌 판결 그대로 집행 처리할 집행자를 임명하여 보내어 집행하다....세다, 계수하다, 돌보다, 시찰 혹은 방문하다, 임명하다
.....[거듭난 참 믿는자] .(부르짖는 자-절규하는 자에게) 방문하여-친히 만나 사랑스레 친절과 너그러움으로 감싸며 다정히 위로 격려하며 끝까지 예정된 그 길을 끝까지 산 믿음으로 다 임마누엘 주님과 하나 되어 걸어갈 수 있도록 권고하다
===최고의 응답은 찾아와 만나 위로하시며 하나 안에 동행인도하심..<파카드קדַפָּ<의 축복..JC==
[사66: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욥10:12...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시106:44...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권고하다>의 히브리어가 <파카드קדַפָּ<.... 방문하다 간섭하다 찾아가다 깊이 생각하다.... 하나님께서 친히 방문하셔서 깊이 들여다 보시는 것을 의미...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것...돌보다 주목하다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파카드קדַפָּ<에 녹아 있다.
. ...<파카드קדַפָּ<의 뜻에 가장 가까운 것이 직접 찾아 가시다....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의 부르짖음에 친히 찾아 가셔서 만나 주시는 것.... 그 연약함을 어루 만져 주시며 기억하시며 돌봐 주시기 위해서 ...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며 그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시기 때문.... 고통 가운데 있는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부르짖는 것이니, 기도로 절규하는 것 ... 마음 속의 모든 것을 주께만 아뢰어 토로하는 것 .
...... 하나님의 가장 큰 응답은 친히 함께 해 주시는 것 ... 찾아 가셔서 그 길을 함께 걸어 주시는 것 ...그 안에 모든 응답이 다 있다 ... 곧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 ...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으니 .. 그분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파카드קדַ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파카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세다, 계산하다, 돌보다, 시찰 혹은 방문하다, 임명하다'를 의미한다. 기본 의미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감독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검사의 형태를 띨 수도 있고 또는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그 종속된 자의 환경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조처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스파이저(speiser)는 이 어근이 '주의하여 돌보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사실상의 원래 의미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용례의 절반이 종속된 자와 관련된 윗사람의 적극적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행위가 이 단어의 의미에 있어서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70인역본이 이 단어를 '에피스켑토'나 그와 유사한 단어로 번역한 예가 가장 많다는 사실도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a) 파카드는 '세다, 계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KJV에서는 이 단어를 110회나 "계수하다"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70인역본에서는 이 용례 중 8회만을 아리드메인(arithmein) 으로 옮기고 보통은 에피스켑테인(episkeptein) 또는 그와 관련된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용법에 있어서 이 단어의 실제 의미가 병력을 소집하거나 동원 가능한 인력을 확인하는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이 용어는 보통 군사나 레위인 또는 제사장들과 관련되어 있다. 단순한 셈이나 계수의 개념을 표현하는 여타의 히브리어 단어들도 많다.
주목해야 될 사실은 소위 민 1장의 인구조사는 것은 단지 "싸움에 나갈만한"(민 1:20) 성인 남자들만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인구조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즉 그것은 "그 군대대로"(민 1:3) 싸움을 위해 병력을 조직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모세가 가데스바네아로부터 가나안을 침공할 준비를 하면서 병력을 소집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민 26장의 계수 행위는 중복되는 기사가 아니며 별개의 자료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이는 동편으로부터 여호수아가 침공하기 위해 실시한 또 한번의 병력 소집이었다.
삼하 24장에 나오는 다윗의 "인구조사" 역시 왕의 자만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머릿수 헤아림이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모종의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였을 가능성이 짙다. 군대장관 요압이 소집의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과 그가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는 점에 유의하라(R. L. HARRIS).
(b) 파카드는 KJV에서는 57회를 "visit"(시찰하다, 방문하다)로 번역하였는데(RSV도 이 용례의 다수를 이 단어로 번역) 이 경우 본 단어는 거의 언제나 "시찰(방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현재는 영어의 visit에서 이 의미가 크게 퇴색되었다. 그리고 이때 또한 좋은 방향이나 나쁜 방향으로 종속된 자의 위치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을 뜻하기도 한다.
바로왕이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다루면서 한 사람은 왕궁에서의 그의 직위에 복직시키고 한 사람은 교수형에 처하였는데 이 기사 중의 창 40:13, 창 40:19에서 사용된 "머리를 들다"라는 문구가 본 단어와 밀접한 대등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스파이저 (Speiser)가 말한바 있다.
단어 파카드는 렘 23:2에서 두 개의 상반된 의미처럼 보이는 개념으로 상기와 유사하게 사용되었다. "시찰(방문)하다" visit가, 많은 용례에서 상해를 주거나 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RSV는 이들 중 다수를 "벌하다" punish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수의 용례에 있어서 '시찰(방문)' visitation이라는 것이 유익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예를 들면 창 50:24-25, 룻 1:6, 삼상 2:21, 시 8:4, H5, 렘 15:15, 렘 29:10 등이다. 사 24:22에서는 악한 세력들이 잠시 동안 하나님에 의해 갇힌 바 되었다가 여러 날 후 하나님에 의해 "시찰을 받는다"(한글개역: "형벌을 받을").
---학자들 간에는 이 구절의 "시찰하다"가 징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방면을 의미하는가의 여부에 대해 의견이 대략 반반으로 나뉘는데 델리취(Delitzsch)와 칼빈(Calvin)은 후자의 해석으로 기울어진다. "시찰하다" visit라는 단어가 현대의 의미(make a call: 방문하다)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경우는 한 곳 뿐이다(삼상 15:2, 한글개역: "추억하노니"). 여기의 모든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꽤 다른 개념으로 나타나는 수 많은 용례에 비추어 볼 때 이 구절이 일반적 용법으로부터의 예외가 아님을 추론할 수 있다. 이 단어가 "빠뜨리다" miss, "없다" lack, "결핍하다" want 등이나 그 수동태로 번역되기도 하는데(도합 약 16회) 이러한 의미가 언뜻 보기에는 상당히 다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나 면밀히 고찰해보면 이 동사의 일반적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따라서 삼상 20:6, 삼상 20:18, 삼상 20:25, 삼상 20:27에서 다윗의 자리가 비었다든가 다윗이 없다고 언급한 것은, 자기 부하에 대한 사울왕의 감독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삼상 25:7, 삼상 25:15, 삼상 25:21에서는 가축 또는 양떼들을 잃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발의 가축떼에 대한 다윗의 보호와 연관된다.
렘 23:4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하나도 축나지 않을 것을 언급하고 있다.
민 31:49과 삼하 2:30에서는 행방불명된 자들의 숫자 점검과 아울러 전쟁의 생존자들을 조사한 내용이 나온다. 왕하 10:19에서는 왕이, 바알 제사장들을 조사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모으라고 명령한다. 삿 21:3에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한 지파라도 없어지면 안될 그 심각성에 대해 말하였다.
(c) 파카드는 히필형에서 종종 왕이 관리들을 임명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를 감옥에 '두었다'고 말하면서(렘 37:21),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자기의 영을 '부탁한다'고 말할 때도 히필형을 사용하였다(시 31:5, H6).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헤렘<자취조차 남김없이 싹쓸이 처리!!> 명령...여리고 성에서의 진멸명령과 동일)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4. ○사울이 [주 명령에 의거하여]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그당시 브엘세바와 함께 유다 남방 경계를 이루는 성읍.<그 아래 에돔과의 사이에도 바란광야로 불리는 작은 규모의 광야가 있음 :: >..사무엘 닫시 이동 약탈 유목 생활하던 아말렉 거주지역은 주로 유다 남단에서 다소 가까운 광야 주변지역,.. 즉, 애굽 앞 수르에서 가데스바네아/애굽시내를 거쳐 에시온게벨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시내반도와 가나안 사이의 광야 지역 대부분....이스라엘은 가데스바네아 불순종사건으로 38년간 그 지역을 맴돌았었다)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5.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
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시다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아말렉 정복 명령에 대한 불순종...분명히 인식해 둘 바는 오직 성령께서 주관하사 인도하시며 이끄실 것을 신뢰하며, 청종할 바 듣는이 나는 어찌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여쭘으로써 한걸음씩 전적 신뢰하는 믿음으로 동행하는것이 하나님 경외함일진대...하나님 말씀을 첨삭하여 [타락한 사람, 곧 한낱 육체에 지나지 않는바] 주제넘게 제멋대로 자행자지함, 제 소견에 좋은대로 행하는바 "허울좋은 겉치레의 순종"이란 절대적이신 분에 대한 불순종일뿐이요. 참생명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감 = 버려짐, 밟혀짐을 선택하는 영적 자살일뿐이요, 기름부음이자 영적 촛대를 옮겨버리심을 당하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는것 ::: 사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대적 아말렉을 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을 보자면...완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여기서 사울은 그의 영적 실상/실체를 ((그 자신이 하나님의 뜻 이룸을 막아서는 아말렉 되었음을!!)) 완전히 철저하게 드러낸바, 하나님과 사무엘에게 (하나님 왕국의 대리왕의 그릇으로서는 전혀 자격 없음, 단지 전쟁수행용도로만 쓰일뿐) 버림받았고 그에게서 촛대를 옮기고 계셨다.
........예표론에서 아말렉은 육체--타락한 사람---을 상징함 ::: 아말렉은 예표론에서 육체, 곧 타띾한 사람[=옛사람 나, 옛자아]을 상징한다.(출17:8-16, 창6: 3.상 롬3:20 상) ...성경의 신성한 계시는 하나님이 육체를 창조하시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은 뱀의 유혹에 미혹되어 넘어가 타락하여 결국 육체가 되었고, 창6:3절은 사람이 육체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어떤 것도 하실 수 없으심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 롬 3:20절 상반절은.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육체]는 육체에 속한 사람 그 자체를 뜻한다. 모든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 안의 믿는이들은 구원받았지만, 우리 중 대부분이 여전히 (주 보시기에는 멸절판결하신바 이미 죽었고 그 최종처리만 기다리고 있다!!) 육체 안에( 육체로!!) 살고 있을 수 있기에 !! " 성령을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말씀하고 계신다. ((바울은.."[십자가보혈/말씀/성령을 누림으로-항기쉬기범감!!--이를 통해서 주 하나님의 뜻 이루는바!!]..나는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노라, (거듭난 존재인 내 안에 사는 이는) [옛사람, 육체로서, 심지어는 거듭난 존재로 볼 때도]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고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충만하여 넘쳐나는 성령께서 주도하시며 이끄시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시는 삶의 모본을 보여주고 있다..))...((오직 주께 붙어 있어!! 하나 됨 안에 머물러 그리스도를 살아갈 때)) 성령따라 하나되어 그리스도로 살 때..육체 안의 사단-죄성은 신진대사적 변화를 통해 저절로 처리되고 밀려나 진멸되었음을 알게되리라!!
.......온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의 실지 대적은 사단이 아니라 "육, 곧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에 종노릇하며 육체에 머물러 육체에 속한자로 사는 한, (거듭났다 해도!!)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임을 명심하여야 한다!!(롬8:7) ...[회복(주님께 돌이켜 JC를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함으로써 부활생명의 성령이 그의 영에 내주하고 계시는바) 안에서 교회 생활 하는 거듭난 믿는이라해도 여전히] 우리의 육체는 타락한 사람, 곧 죄의 몸이니, 완전히 사단과 하나이다. 육체가 없다면 사단은 하나님을 거스려 싸울 길이 없을 것이다. 보라!!, 교회 생활 안에서 모든 문제는 육체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이 가장 다루시기 어려운 것이 육체이다!!
.......거듭난 믿는이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영 안에 있거나(성령따라, 그영따라 하나로 행하거나) 육체 안에 있을 수 있다. 그 중간이란 없다...우리가 우리 영을 사용할 때, 이상이(vision = 빛 되신 주님이 비추심따라 보게 하시는 바 영적 시력, 곧 영적 분별력) 분명하며 교회와 인도자 장로들과 함께 기쁨 안레서 주님의 놀라우심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 안에 머물고 있다면, 이상은 흐려지게 될 것이요, 비판과 갈등이 교회 내에 가득하고, 우리 육체가 너무괴롭힘 당해서 정말 교회 생활로부터 떠나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바로 이 문제들의 근원인 육체 안에 있음을 인식할 때마다, 우리는 [결코 베들레헴에 닥친 1년 흉년동안 그리스도의 생명 산실을 섣부르게 지레짐작으로 떠나 모압으로 가버렸던 엘리멜렉처럼!! 떠나서는 안된다...견디고 버티고 인내로 기도하면서 주님의 용서를 구함이 마땅하고 회복 안으로 이미 우리를 이끌어 한 되게 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출17:8-16절까지 그림을 되짚어 보라....중보기도자 모세는 보조자 아론(제사장)-휼(왕)과 함께 하나되어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산꼭대기에 서서 기도하고 있었으며, 그 기도를 들으시고 주께서 친히 앞장서서 싸우는 군대로서 힘과 능력 공급하시는 바 여호수아는 택한자들과 함께 아말렉과 싸워 패배시켰다....그후 하나님은 그분이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루리라"고 선포하셨다(16절)...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말렉이 야기시킨 2좌절을 얼머너 엄중하게 여기셨는가를 분명히 부여준다. 삼상15:2절의 때에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것으로 인해 아말렉을 진멸-멸절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사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나기드)로 기름부음 받은후, 암몬과 블레셋족속을 패배시켰고...결국 아말렉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을 방해-좌절시키고 있었으며, 이제 사울은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분명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다 죽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유일한 대적인 육체를 대표하는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사울에게 명령하실 때, 하나님은 지혜롭게 사울을 시험하시기 위해 그를 한 지점((선택적 자유의지 발휘 가능한 지점))에 두고 계셨다.
.........결과적으로, .사울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으며, 변명에 급급했고 참 회개에 둘어가려 하지도 않았다!!...사울은 아말렉을 치고 그들의 왕 아각을 사로잡았다(7-8상).. 그들의 백성을 멸했지만,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8-9상)"...사울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그가 스스로 부요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진정!! 타락한 사람, 곧 육체의 소욕을 이루려 함이었는데, 오해와 착각 가운데 빠져 있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망할 생각으로!! 그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자신의 군주국을 세우려 했고 그것을 결코 끝까지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사무엘은 분명히 그의 어떠함을 그대로 행하여 자기를 폭로한바 그릐 행함에 대해 주님의 입의 말씀으로 명쾌하게 지적하여 드러내고 있었으니...그것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분명히 깨닫게 된 바 정신차려 회개하며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주께 자복하고 다 쏟아내버려라..진정으로 돌이켜 회개하고 거듭나야만 하며, 거듭난 자의 영에 속한 자의 생명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심이었다!!(다윗은 [나단을 통해 일깨워주신바]그 말씀 듣고서 주께로 돌이켜 새 삶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고집하며 자복-회개함 그 자체를 거절하고 있었기에..."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선포하기에 이르고 있었다....그제서야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비로소 범죄를 인정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백성 탓으로-백성을 말씀보다 더 두려워 하였다!! =백성이 하나님인가?...하나님 없이는 백성이 없다!!...그대가 주 보시기에 참되다면..백성은 주님이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붙여주신다..- 돌리고 있었다!!)) ... "*24.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25.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26.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29.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30.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여호와 하나님께 자복하여 용서를 구해야 함에도 ((방향이 여전히 주께 향함이 아니요..그냥 다만 면피용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용서해 달라 구하고 있었으며!!,(장로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만은.. 그와 함께 돌아가서 여호와께 경배드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해 달라 하고 있었던 바, 사무엘은 아각을 처리해야 하기에...(그리고, 주님 백성들의 혼란을 염려하고 있었기에...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사무엘은 여호와의 엄중하신 말씀이 이미 주어졌기에!! 분명히 여호와는 당신께서 뜻하신 바를 변개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그대로 선포하고 있었다..((그대에게도 !! 미혹된 바 그러한 유혹에 넘어갔었음을, 그런 경험 분명히 있으되..주께서 [주께서 주신바 아닌것마다!!] 그것을 nothing으로 여기고 잊어버리라, 그리고 너의 참 의미요 생명 근원인 구원자 하나님, 내게로 돌이키고 바로 너의 모든 공급원천인바 나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와 회복 = 부활 생명 삶 안에 머물라" 권고하심따라. 주께 나아가 전 존재를 쏟아 통곡하며 주님의 눈물을 흘리게 한 죄마다 전적으로 자복하고 돌이킴으로써 새롭게 하여 주셨던 지난날의 쓰라린 아픔의 경험 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보라, 사무엘을 사울에게 보내시기전에..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다 철저히 행하여 이루지 않았으며 다만 그럴듯하게 변명하며 결코 돌이키려 하지 않고 있기에!! 그분이 사울을 왕으로 임명하신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셨고...사무엘은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울 수 밖에 없었다(10-11절)
12. [하나님 마음과 하나로 그분의 지시따라...주님 말씀 하신바 분명한 뜻 드러내 전달하고, 아각 처리를 위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433.귀하신주여]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동상이몽, 화이부동의 "지극히 어색한!!" 침묵의 동행)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사무엘이 아각을 처형하다
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다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아침 일찍 사울을 찾아가는 사무엘은, 갈멜에 자기를 위해(자신의 군주국을 부요케 한) 승리 기념비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무엘을 만난 사울로부터 그 자신은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였노라고 말하였고, 사무엘은 "그렇다면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바 양과 소 울음소리는 무엇이냐" 묻는바, 백성들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가장 좋은 소와 양을 따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멸하였으며 아말렉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변명하며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던바, 사무엘은 거기서 중단시키고...여호와께서 전날밤 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를 전해준 다음..."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었던바 왕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분명히 명하신바 가서 죄인 아말렉사람을 진멸하여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신 그대로 청종하지 않고 탈취하기에만 급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다고 말했던 바, 사울 자신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했지만 백성들이 (길갈에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려) 양과 소를 전리품으로 취했다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었다.
. ...그 때 사무엘은, 15:22-23절에 가록된 매우 강한 말을 사울에게 했다 [삼상15:22-23... *22.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은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사울, 당신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었다고 말하지만..하나님은 당신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아말렉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얼마의 소와 양을 간직해 두었고, 오늘 아침 당신 자신을 위해 승전 기념비를 세웠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세우지 않았으니....보십시오,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사울, 당신은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했고, 반역은 사술의 죄와 같으며 또한 무당의 죄와도 같습니다. 당신이 행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악한 영의 뜻을 수행하려는 목적으로 앇한 영을 접촉한 것과 똑같이 악합니다....당신은 당신의 머리이신 하나님께 복종치 않고, 주제넘게 당신의 방식과 당신의 뜻에 따라 행했습니다. .... 이제 당신의 왕권은 끝났습니다.... 당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했으므로, 그분은 당신이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사울은 그리하여 하나님을 거스리는 반역자로, 하나님의 원수로 그 정체가 드러났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우리의 육체로는 그 어떠한 것도 하지 않도록 이러한 :사울의 불순종 이야기"에서 경고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분께 합당하도록!! 그분을 경외하고 사랑함으로써 두려워하고, 우리 육체란 다만 "지옥불의 불쏘시개 감이자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할 무용지물" 뿐임을 반드시 !!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보라!! ((전적으로 무죄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이땅에 오셔서 역사상 모든 인류의 죄를 전가 받고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통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우리 영을 거듭나게 하시려고 우리 안으로 오셨고, 이제 그분은 우리 영 안에서 친히 사시고, 움직이시며, 행동하시어 그분의 생명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거듭난 우리를 생명 노선으로 인도하는데 앞장서고 계신다.. 이 유기체,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이며,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공과를 배워야 하고, 그 정과 욕심을 우리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며, 항상 그리고 모든 것을 십자가 위에 두어야 한다(갈5:24).... 우리는 신실하게 우리와 하나이신, 생명주는 그영, 완결되신, 우리 영 안에 재주하시는 영이신 주님을 좇아 우리의 영을 훈련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왕국, 곧 내재적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건축될 것이다....이것이 거듭난 참 믿는이인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자신을 위한 군주국을 세우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
---
--------
[NASB]제15장
1. Then Samuel said to Saul, "The LORD sent me to anoint you as king over His people, over Israel; now therefore, listen to the words of the LORD.
2. "Thus says the LORD of hosts, 'I will punish Amalek [for] what he did to Israel, how he set himself against him on the way while he was coming up from Egypt.
3. 'Now go and strike Amalek and utterly destroy all that he has, and do not spare him; but put to death both man and woman, child and infant, ox and sheep, camel and donkey.' "
4. Then Saul summoned the people and numbered them in Telaim, 2000000 foot soldiers and 100000 men of Judah.
5. And Saul came to the city of Amalek, and set an ambush in the valley.
6. And Saul said to the Kenites, "Go, depart, go down from among the Amalekites, lest I destroy you with them; for you showed kindness to all the sons of Israel when they came up from Egypt." So the Kenites departed from among the Amalekites.
7. So Saul defeated the Amalekites, from Havilah as you go to Shur, which is east of Egypt.
8. And he captured Agag the king of the Amalekites alive, and utterly destroyed all the people with the edge of the sword.
9. But Saul and the people spared Agag and the best of the sheep, the oxen, the fatlings, the lambs, and all that was good, and were not willing to destroy them utterly; but everything despised and worthless, that they utterly destroyed.
10. Then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Samuel, saying,
11. "I regret that I have made Saul king, for he has turned back from following Me, and has not carried out My commands." And Samuel was distressed and cried out to the LORD all night.
12. And Samuel rose early in the morning to meet Saul; and it was told Samuel, saying, "Saul came to Carmel, and behold, he set up a monument for himself, then turned and proceeded on down to Gilgal."
13. And Samuel came to Saul, and Saul said to him, "Blessed are you of the LORD! I have carried out the command of the LORD."
14. But Samuel said, "What then is this bleating of the sheep in my ears, and the lowing of the oxen which I hear?"
15. And Saul said, "They have brought them from the Amalekites, for the people spared the best of the sheep and oxen, to sacrifice to the LORD your God; but the rest we have utterly destroyed."
16. Then Samuel said to Saul, "Wait, and let me tell you what the LORD said to me last night." And he said to him, "Speak!"
17. And Samuel said, "Is it not true, though you were little in your own eyes, you were [made] the head of the tribes of Israel? And the LORD anointed you king over Israel,
18. and the LORD sent you on a mission, and said, 'Go and utterly destroy the sinners, the Amalekites, and fight against them until they are exterminated.'
19. "Why then did you not obey the voice of the LORD, but rushed upon the spoil and did what was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20. Then Saul said to Samuel, "I did obey the voice of the LORD, and went on the mission on which the LORD sent me, and have brought back Agag the king of Amalek, and have utterly destroyed the Amalekites.
21. "But the people took [some] of the spoil, sheep and oxen, the choicest of the things devoted to destruction, to sacrifice to the LORD your God at Gilgal."
22. And Samuel said, "Has the LORD as much delight in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As in obeying the voice of the LORD? Behold, to obey is better than sacrifice, [And] to heed than the fat of rams.
23. "For rebellion is as the sin of divination, And insubordination is as iniquity and idolatry. Because you have rejected the word of the LORD, He has also rejected you from [being] king."
24. Then Saul said to Samuel, "I have sinned; I have indeed transgressed the command of the LORD and your words, because I feared the people and listened to their voice.
25. "Now therefore, please pardon my sin and return with me, that I may worship the LORD."
26. But Samuel said to Saul, "I will not return with you; for you have rejected the word of the LORD, and the LORD has rejected you from being king over Israel."
27. And as Samuel turned to go, [Saul] seized the edge of his robe, and it tore.
28. So Samuel said to him, "The LORD has torn the kingdom of Israel from you today, and has given it to your neighbor who is better than you.
29. "And also the Glory of Israel will not lie or change His mind; for He is not a man that He should change His mind."
30. Then he said, "I have sinned; [but] please honor me now before the elders of my people and before Israel, and go back with me, that I may worship the LORD your God."
31. So Samuel went back following Saul, and Saul worshiped the LORD.
32. Then Samuel said, "Bring me Agag, the king of the Amalekites." And Agag came to him cheerfully. And Agag said, "Surely the bitterness of death is past."
33. But Samuel said, "As your sword has made women childless, so shall your mother be childless among women." And Samuel hewed Agag to pieces before the LORD at Gilgal.
34. Then Samuel went to Ramah, but Saul went up to his house at Gibeah of Saul.
35. And Samuel did not see Saul again until the day of his death; for Samuel grieved over Saul. And the LORD regretted that He had made Saul king over Israel.
-----------
사무엘상 15장 (개요)
본 장에는 사울이, 아말렉을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왕위에서 탈락되는 내용이 있다. 사울은 그의 전쟁과 승리를 통해서 그의 이름을 자랑하며 영원히 빛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잘못된 처사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을 멸망의 길로 떨어뜨렸으며, 자신의 명예를 진토 속에 버림받게 했다.
1. 사울은 아말렉을 완전히 섬멸하라는 명령과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1-3).
2. 이 원정을 위한 사울의 준비(4-6).
3. 사울의 성공과 부분적인 사명 성취(7-9).
4. 사무엘에게서 받은 심문 그리고 그가 내놓은 많은 너절한 자기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내려진 선포(10-31).
5. 아각의 처형(32, 33).
6. 사울과 사무엘의 마지막 이별(34, 35).
-----------
아말렉을 진멸하되 아각을 살림(삼상 15:1-9)
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울에게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라고 엄중히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사울이 순종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가지고 그를 시험하고자 한다고 명백히 가르쳐 주었다(1절).
이처럼 그의 순종을 시험하고자 한다는 것을 밝혔으니 만큼 그의 불순종의 죄는 더욱 큰 것이 되었다.
1.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다.” 하나님은 왕에게 왕의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왕이 하나님을 위해 그 권세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왕을 영광스럽게 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왕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그대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왕은 이스라엘의 분쟁들을 해결하고 질서를 지켜 나가야 한다. 왕은 이스라엘을 명령할 수 있다. 그러나 왕도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속한 자며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다른 사람들보다 높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께 대해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이런 명령을 사울에게 전해 줄 만한 사람이다.
2. 사무엘은 사울에게 일반적인 면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그에게 내리시든지 그는 꼭 순종하여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할 강력한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시켜 주신다. 우리는 마땅히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시 116:12).
Ⅱ. 사무엘은 사울에게 지금까지 그가 행한 어떤 것보다도 더욱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했다.
사무엘은 그 명령의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전제를 달았다.
사무엘은 또 그 명령의 엄중함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을 내가 기억하는가”(2절)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셨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그들을 해하였기 때문에 아말렉과 싸우신 일이 있다.
그 싸움의 이야기는 출애굽기 17장 8절 이하에 있고 그들의 죄에 대한 책망은 신명기 25장 18절에 있다.
그들은 비열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은 아말렉과 대대로 싸울 것이며, 아말렉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셨다. 이러한 일이 이제 사울에게 부과되었다(3절).
“가서 아말렉을 치라. 이제 이스라엘은 강하여졌고, 아말렉의 불의도 극도에 이르렀다. 이제 가서 그 저주받은 백성을 일소하라.”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남녀와 소아와 젖먹이”를 죽이되 동정을 해서 남기지 말고,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진멸하되 욕심 때문에 한 마리라도 남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분명한 명령을 받았다.
1.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특히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그들에게 해를 끼친 자들은 조만간에 분명히 그 일이 계산되었다.
2. 하나님은 멸망시키고자 한 자에 대해서도 오래 기다리신 일이 있다. 그 선포가 즉시 시행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3. 그러나 그 시행이 늦어지기는 하되 아주 지연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 대항해서 싸운 일에 대한 보복의 날은 드디어 온다. 하나님의 정의는 서서히 작용하시지만 틀림없이 작용하신다.
4. 심판이 늦어지면, 그만큼 그 심판은 가혹하다.
5. 하나님은 그의 일을 시행할 가장 좋은 도구를 선택하신다. 이 일은 피를 보아야 하는 처절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 일을 해야만 하는 거칠고 지독한 사람이었다.
Ⅲ. 사울은 여기에서 그의 군대를 소집하고 아말렉 땅을 습격했다. 사울이 전쟁터로 이끌고 간 군사의 수는 보병이 20만 명이라는 거대한 숫자였다(4절). 그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며, 그 승리가 모험에 가까웠을 때 그를 따랐던 군사의 수는 6백 명에 불과했다(13:15).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말렉과 싸우기 때문에 그 승리가 확실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몰라도 이번 경우에는 유다 지파에게는 퍽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전체 모인 수의 20분의 1인 1만 명이라는 극히 적은 수밖에 모이지 못했다. 한편 (레위 지파는 제외한) 다른 열 지파에서는 20만 명이 모였다. 유다 지파의 영광의 날은 가까이 왔다. 그러나 아직 이르지 못했다. 사울은 군사의 수를 들라임에서 계수했다. 그 지명은 어린양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양처럼 세었다고 보기도 하며, 훗날 유다 사람들이 숫자를 세는 방법과 같이 유월절 어린양을 세듯, 다시 말하면 열 명에 대해 어린양 하나를 쳐서 세듯이 세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사울은 군사들을 이끌고 아말렉의 수도인 아말렉 성으로 이끌고 갔다. 그것은 사울이 그들을 약올려 전쟁을 일으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Ⅳ.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 중에 살고 있던 겐 사람들에게 이제 아말렉을 칠 터이니 너희는 그들 중에서 떠나라고 다정한 충고를 했다(6절). 이때 사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정성을 다해서 그들에게 충고했는데 아마 사무엘의 지시를 따라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겐 사람들은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의 가족이나 친척들이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쉽사리 다른 곳으로 옮길 수가 있었다. 그 당시 그들의 대부분이 아말렉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장막을 치고 살았지만 자연적인 요새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서든지 살 수 있는 용감한 족속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바위 위에 두고 있었다”(민 24:21). 발람은 그들이 쇠미하리라고 예언한 바가 있다(민 24:22). 그러나 사울은 그들을 진멸할 수가 없었다.
1. 사울은 그들의 조상이 애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친절을 기억했다.
이드로와 그의 가족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그들에게 크게 도움을 주었으며, 그들의 눈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런데 이제 오랜 후에 그들의 후손에 대해 이 일이 기억하신 바 되었다. 이처럼 선한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유산으로 남겨 놓는다.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무덤에 들어간 뒤에 우리의 선행의 열매를 거두어 가진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베푼 친절을 몰라보는, 불친절한 분이 아니시다. 그들은 마지막 큰 날, 의로운 자가 부활할 때에 기억하신 바가 되며, 보상을 받게 된다. “내가 굶주렸을 때에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칭찬을 듣는다.
겐 사람들의 조상들이 베푼 온정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아말렉 사람들의 조상이 행한 악행을 벌하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뚜렷이 나타내셨다. 좋은 일을 후손에게 물려주게 하시는 하나님이 왜 궂은 일도 후손에게 물려주게 하시지 않겠는가? 그의 백성들을 돌봐 주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그들을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신다”(민 24:9; 창 12:3). 그들은 그들이 받은 친절에 대해서도 이로 갚을 수 없고, 그들이 받은 상해에 대해서도 스스로가 보복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두 가지를 모두 하여 주신다.
2.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 가운데 있는 그들의 장막을 옮겨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말렉 사람들 중에서 떠나 내려가라”고 했다.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을 땅에 내리고자 하실 때에, 귀한 자와 타락한 자를 구분하시며, 온유한 자들을 그의 노여움에서 가려 주시기 위해 애쓰신다. 하나님의 원수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그것은 그들의 죄에 참예하지 않고 그들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계 18:4). 유다인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
“악인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리고 악인의 이웃에게도 저주가 있을지어다.”
Ⅴ. 사울은 아말렉과 싸워 이겼다.
그것은 전쟁에서의 승리라기보다는 악인에 대한 단죄를 처형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이유가 정당하고, 그 소명이 분명한 만큼 그 문제는 조금도 애매모호한 점이 없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을 치고”(7절), 그 모든 백성을 진멸했다(8절). 이제 그들은 그들의 조상의 죄의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었다. 하나님은 때로 죄의 대가를 보류했다가 그 자손들에게서 물으신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였고, 그 밖의 다른 죄들도 많이 범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해서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물으시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땅을 전쟁터로 만들었던 그들의 죄까지도 함께 물으셨다.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심판은 신비한 것이오며! 당신의 정의는 너무나 뚜렷하옵나이다!
Ⅵ. 그러나 사울은 그의 일을 반밖에 시행하지 못했다(9절).
1. 사울은 아각을 살려 두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과 같은 왕이었기 때문이며, 아마 상당한 양의 몸값을 받아내기를 바라서 그랬는지 모른다.
2. 사울은 소와 양의 좋은 것들은 남기고, 가치 없는 것들만을 진멸했다. 그 때 많은 아말렉 사람들이 그들의 재산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도망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후에도 아말렉에 대한 말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사울은 자기 수중과 자기의 세력 하에 들어온 아말렉 사람과 그 재산들을 모조리 진멸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보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만큼 사실상 진멸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희생물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이 이때 상처나고, 병들고, 다리를 절며 그리고 파괴한 것들만을 진멸하면 족하고, 자기의 목장과 식탁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을 남겨놓은 것은 실로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
---------
하나님의 버림받은 사울(삼상 15:10-23)
사무엘은 아말렉을 진멸하는 문제에 대해 사울에게 명령한 그의 명령이 잘 시행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사울을 방문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엄격하다는 것과 이에 반대인 인간의 마음은 배반하기 쉽고 속임수가 많다는 확실한 실례를 볼 수 있다.
Ⅰ.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과 사무엘 사이에 은밀히 말을 주고 받은 것을 볼 수 있다(10, 11절).
1.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를 사무엘에게 알려 주었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라.”
하나님의 후회는 우리의 후회와 같은 마음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방법과 처분의 변화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변경하지 않으신다.
다만 방법의 교체를 원하실 따름이다. 그 변화는 사울에게 있었다.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사울의 이지러진 복종과 지나친 욕심에 대해 내리셨다. 그리하여 사울은 스스로 하나님을 그의 적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왕국을 맡기고, 왕국에 속한 영예와 권세를 그에게 주신 것에 대해 후회하셨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은 어떤 한 인간에게 지혜와 은혜 그리고 그의 두려움과 사랑을 주신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의 이런 은사와 소명은 후회가 따르지 않는 것들이다.
2. 사무엘은 애통했으며 그런 일이 없기를 원했다.
사울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은혜가 몰수당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기로 결심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사무엘은 근심하고, 그러한 명령이 사울에게 실현되지 않도록 그를 위해 중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온 밤을 새워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다른 사람들은 침상에 누워 잠자고 있을 때, 사무엘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하나님께 매어달렸다.
사무엘은 그 자신이 정권에서부터 밀려 나온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들처럼 그의 뒤를 이은 사울이 그처럼 속히 물러나게 되었다고 은근히 좋아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사무엘은 사울의 안정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으며, 그에게 비참한 날이 이르지 않기를 원했다.
죄인이 버림받는 것을 선인들은 슬퍼한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Ⅱ. 사무엘과 사울 사이에 공공연히 말을 주고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이 무거운 소식을 가지고 길갈로 갔다. 아마 사울이 출전하기 전에 길갈에서 만나기로 악속했던 것인지 모른다.
사울이 길갈로 내려갔다(12절). 그곳은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곳이다(11:15).
이제 사울은 자기가 순종을 잘 했다는 것이 인정받음으로써, 다시 한 번 그곳에서 왕위가 더욱 확고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이 유다 산지에 있는 도성인 갈멜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자기 영광을 구해서 승전비를 세웠다는 말을 들었다.
사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념비를 (혹은 손을) 세웠다. (사실 그는 자신의 승전을 과시하는 일보다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그가 화려한 행렬을 지어 길갈로 “돌이켜 행하여 내려갔다”라는 표현을 보아서 위세 당당하게 길갈로 개선 행진해 들어간 것 같다. 그러한 곳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만났다.
1. 그리고 거기서 사울은 사무엘에게 자기의 순종을 자랑했다.
이것을 사울은 다음과 같은 인사로 표시했다(13절).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당신이 보내온 전갈을 나는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그때 그는 철면피가 되지 않았다면 자기가 순종했노라고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울은 사무엘의 책망을 막아보려고 했다. 이처럼 죄인들은 그 자신을 정당시함으로 “여호와의 심판”을 피해 보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의 심판을 피하는 길은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길 뿐이다. 자기의 신앙을 극구 자랑하는 자에게는 편견과 위선이 없지 않다고 보여진다.
2. 사무엘은 사울의 명백한 불순종의 표시를 가지고 그에게 죄가 있다고 선포 했다.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완전히 준행하였나이까? 그렇다면 저 양들의 소리를 어찜이니이까?”(14절). 사울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도 그의 행한 바에 의해 크게 신세 지는 바가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이 사울의 신세를 져야 할 분이 아니시라는 것과 사울이 하나님께 거스르는 행위를 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양들과 소들의 울음소리”를 내세웠다. 아마 사울은 자기의 승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 짐승을 행렬의 후미에 붙여서 이끌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것들이 그를 해하는 증거품들이라고 호소했다. 그것만을 가지고도 사무엘은 사울의 거짓을 완전히 반증한 셈이다. 짐승들의 울음소리는 (금과 은의 녹과 같이, 약 5:3) “그를 반박하는 증거” 가 되었다.
그럴 듯한 거짓이나 위선은 언제나 그리고 여러 번 가장 뚜렷하고 거절할 수 없는 증거에 의해 반박받고 반증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증거를 반박하고 있는 그들의 육체에의 탐닉과, 세상에의 사랑과 그들의 욕정과 무자비 그리고 거룩한 의무에 대한 태만 등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3. 사울은 이러한 책망에 대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했다(15절).
아말렉 사람들의 양과 소들을 그가 끌고 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1) 그것은 자기의 잘못이 아니요, “백성들이 남긴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사무엘의 특별한 명령인 줄을 알면서도 사울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 백성들이 감히 그런 일을 했다는 투로 말했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그 잘못을 자기 탓으로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죄란 자기의 자식이면서도 누구나 자기 집 문 앞에 세워 두기는 싫어한다. 그 잘못을 유혹자나 동료나 또는 단순히 일한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의 죄과로 고백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회개치 않는 마음을 속이는 것뿐이다.
(2) 좋은 계획이 있어서 그랬다고 이를 정당화했다.
“그것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그랬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은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인 만큼 당신은 이 일에 대해서 나무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짐승들을 남겨 놓은 사울과 백성들의 궁색한 변명이었다. 또 설사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들의 처사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둑질한 것으로 번제를 드리는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짐승들을 전쟁터에서 그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제단에서 제물로 드리려고 가져왔다고 해서 고마워하실 것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방법과 하나님 자신이 지시하신 법대로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잘못된 방법을 정당화하여 주지 않으신다.
4. 사무엘은 그의 변명을 무효화 내지 무시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심판을 내렸다.
사무엘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만을 전했다(16절).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도저히 그처럼 심한 책망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사가 자기에게 너무 심한 말씀을 한다고 불평하는 자들은 이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한 그는 다만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며, 그에게 주어진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기서 사울이 말한 것과 같이 다만 “말씀하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사무엘은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했다.
(1) 사무엘은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게 했다(17절).
하나님은 그의 상태가 낮을 때 그를 기억하여 주셨고, 그의 심령이 낮은 것을 보시고 그에게 보응하여 주셨다. 귀하게 되거나 부하게 된 자들은 때로 그들의 비천한 출발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처럼 귀하게 되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그를 그처럼 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알아보아야 한다.
(2) 사무엘은 사울이 실시해야 했던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쉬운 명령이었던 것인가를 밝혀 주었다(18절).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셨다”라고 했다. 그 일이 그처럼 쉽고 그 성공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일을 전쟁이라고 하지 않고 길로 보낸다, 즉 여행을 보낸다는 말로 표현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를 멸절시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다. 사울이 만일 그 자신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아말렉에 속한 모든 것을 진멸했다면 그는 실패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 싸움 때문에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3) 그러므로 사무엘은 이 싸움에서 스스로의 이익을 도모했으며, 스스로를 부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일인가를 보여 주었다(19절).
“어찌하여 탈취하기에만 급하였으며, 왕 자신을 위해 기를 쓰고자 하는 다른 마음을 지님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켰나이까?” 돈을 사랑함이 악의 뿌리가 됨을 보라. 그리고 또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은 가장 큰 죄가 됨을 보라. 그것은 불순종이다.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셨나이다.”
5. 사울은 자기에게 내려질 단죄를 모면하기 위해 여러 번 자신에 대해 변명했다(20, 21절).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였으며, 내가 하여야 할 일을 다했습니다.” 하고 변명했다. 그는 자기 생각으로 볼 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보았다. 그처럼 그는 자기 자신이 볼 때 하나님보다는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렇지만 그는 명령을 수행하면서 아각을 살려 두었다. 그는 아각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처럼 육체에 속한 악한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의 생각과 같은 정도로 생각한다.
사울은 그 싸움의 주요 목적이었던 “아말렉 사람들을 완전히 진멸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탈취함으로 “완전히 진멸하여야 할” 것들을 자기 것으로 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그 명령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 진멸한다는 것은 지나친 허비라고 생각했다. 모세의 때에 미디안 사람들의 짐승을 가지고 기도의 제물로 삼은 일이 있다(민 31:31 이하). 그런데 이제 와서 아말렉 사람들의 짐승으로는 왜 안 된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하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보고 그는 백성들이 그것들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도 묵인했다. 그것은 백성들이 한 일이지 그가 한 일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여기 길갈에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기 위한” 것이며, 그래서 여기로 이끌고 왔다고 했다. 불순종의 자식들에게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이 입은 무화과 나뭇잎을 벗겨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보라.
6. 사무엘은 사울의 변명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박하기 위해 이렇게 주장했다(22, 23절).
사무엘은 그의 양심에 호소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사울이 비록 아무리 신앙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하여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1) 번제와 희생 제물과 그리고 수양의 기름보다 순종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어떤 일에 힘써야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그리고 우리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사 1:11).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겸손과 성실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우리의 양심적인 순종을 “모든 번제와 기타 제사”보다 하나님께서 더 기쁘시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배웠다. 윤리적인 생활 규범을 준봉하는 것이 모든 의식에 참예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하나님께 가까이 인도하여 준다(미 6:6-8; 호 6:6).
순종은 영원한 자연 법칙에 의하여 부과된 명령이며, 제사는 다만 하나의 실정법(實定法)에 의한 명령일 따름이다. 순종은 무죄 시대의 법이며, 제사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을 전제로 한 법이다. 그리고 제사는 능히 순종으로 막을 수 있었던 죄를 없애고자 할 때 필요한 차선책이다. 제사보다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자신을 거부할 수 있다. 황소와 어린양을 제단에 가져다가 번제를 드리는 것이 “모든 고상한 생각을 하나님께 순종시키며”,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다. 순종은 천사들의 송축이요(시 103:20), 우리의 송축이 될 수 있다.
(2) 불순종은 하나님을 가장 노엽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경쟁시키는 것이다.
불순종을 여기서는 “거역”과 “완고”라고 했으며, “사술의 죄와 우상 숭배의 죄”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23절). 참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생활은 다른 거짓 신에 따라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자기의 타락된 성품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우상이나 점쟁이에게 모든 것을 묻는다. 불순종은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만든다(롬 5:19). 죄의 악독은 율법을 범하게 하며, 종말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롬 8:7). 사울은 왕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으면 그의 왕실의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도 거역과 완고의 죄를 면할 길이 없다.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이 그들의 왕에 대해서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한 왕이 하나님께 대해 거역하는 것이다.
7. 사무엘은 사울에 대한 판결문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선고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멸시하였으므로(아람역), 무시하였으므로 (70인역), 하나님도 왕을 버렸으며, 왕을 멸시하고 무시하여,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그대를 왕으로 만드신 분이 다시금 그대를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스리게 하고자 하지 않는 자들은 사람들을 다스릴 만한 자격도 없고 가치도 없는 자들이다.
------------
사울의 불철저한 회개(삼상 15:24-31)
사울은 회개하는 척했다. 그러나 그는 다만 행동뿐이요, 또 불철저한 회개임이 분명했다.
Ⅰ. 사울은 너무나 천박하게 회개했다.
그는 그의 잘못을 아노라고 법석을 떨기는 했지마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무서워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다.
사무엘이 그에게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라는 말을 한 뒤에야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24절).
그의 고백은 자유롭고도 솔직한 것이 못 되었다. 고문이나 폭력에 의해 강제된 고백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회개가 위선적이었다는 표시를 몇 가지 찾아 볼 수 있다. 아합의 경우도 그렇게까지 심한 것은 아니었다.
1. 사울은 사무엘에게만 좋게 보이려고 했으며 그의 덕을 보려고 했다.
그는 백성들의 평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사무엘을 신처럼 떠받들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사무엘이 선지자이며 사울을 왕으로 발탁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쁘게 하고, 그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 그의 고백 속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겼나이다”라고 말했다(24절).
그것은 마치 사무엘을 하나님 대신인 것처럼 여기는 말투였다.
다윗은 비록 나단의 책망을 들었지마는, 그의 고백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했지 결코 나단을 의식한 일이 없다. 그래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51:4). 그러나 사울은 무식하게도 그의 죄가 사무엘의 말을 거역한 것으로 고백했다. 그때의 그의 말은 “여호와의 명령”을 나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또 사울에게 용서를 빌었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25절).
하나님만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투였다.
자기를 속이는 자들은 소문이 흔히 좋지 않게 난 죄를 범했을 때, 눈에 보이는 그럴 듯한 회개의 모양을 하는 것으로 교회와 그리고 목사하고만 화해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성실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사울에 대해 가장 관대한 해석을 내린다면, 그가 사무엘을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중보자라고 여겨서, 사무엘을 통해서 모든 것을 호소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약하다.
2. 사울은 고백을 하면서도 자기의 잘못에 대해 변명했다(24절).
그것은 결코 참다운 회개의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라고 했다. 그와 같은 행동은 그 자신의 행동이지 결코 백성들의 행위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백성들이 아무리 그런 일을 하고자 하여도, 전에 읽어본 바에 의하면,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권세가 사울에게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그의 변명은 거짓되고 경박한 것이었다.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든 그는 사실 백성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면서, 그것은 그 자신의 마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변호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생각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까지 살피시는 분이심을 잊어버리고 있다.
3. 사울이 관심을 가진 것은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며, 백성들 사이에서의 자기의 이권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를 반역하거나 기만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처럼 열심히 사무엘에게 자기와 함께 가서 공적인 승전 기념제를 도와달라고 매어달렸다(25절).
사울이 사무엘을 붙잡아 그 겉옷자락이 찢어지도록까지 성가시게 한 것은(27절), 사무엘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자기를 버릴 때 백성들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버릴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다만 그들 자신들의 이익과 명성을 위해서 훌륭한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에게서 열심히 영향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울이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들 앞에서 나를 높여 주소서”(30절)라고 한 것은 매우 천하고 야비한 표현이었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의 말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 정반대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부끄럽게 여겨 주소서. 내게 속한 것이 모두 부끄러운 것뿐이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미워하나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도 얼마나 많이 사울의 위선을 따르고 있는가?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일수록 사람들 앞에서의 그들의 명예를 걱정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다.
순결하다는 명예를 잃어버린 자는 다만 회개의 모양을 함으로 그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데 그런 자의 회개는 그에게 오히려 부끄러움을 더 가져다 줄 뿐이다.
Ⅱ. 이러한 천박한 회개의 모양으로 사울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한 회개를 통해 사울이 얻은 바가 무엇인가?
1. 사무엘은 앞서 말했던(23절) 선포를 되풀이할 뿐 그 선언이 취소될 수 있는 희망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았다(26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한다”(잠 28:13). 사무엘은 사울과 함께 돌아가기를 거절하고, 자기 갈 곳으로 “가려고 돌이켰었다”(27절).
왜냐하면 사무엘이 우선 볼 때, 하나님께서 내친 사람을 따라가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울의 탐욕을 만족시켜 준 그 승전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갔다(31절).
그것은 아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다른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백성들 사이에 폭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 제사가 사울에게 영광을 돌리는 제사가 되지 못하게 하며 또 나가서 아각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실시하고자 했기 때문에(32절) 돌아갔을 것이다(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였지만 31절, 사무엘이 그 예배를 주관했다는 말이 없다).
2. 사무엘은 그의 선언의 내용에 알맞는 하나의 상징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 상징은 사울의 난폭함이 계기가 되어 나타났다. 사무엘이 그를 떠나가려고 할 때 그는 사무엘을 붙잡으려고 하다가 사무엘의 옷을 찢었다(27절).
사울은 그만큼 선지자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사건에 대해 선지자만이 내릴 수 있는 해석을 내렸다.
사무엘은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왕국을 그에게서 떼어 내리라”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이 그것이 사울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란 다윗을 의미했다.
그 후에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어 내게 되었는데(삼상 24:4), 이에 대해서 사울이 말하기를(삼상 24:20),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아노라”라고 했다. 아마 사울은 자기가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찢어지게 했던 것을 기억했을 것이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언은 변개치 못한다는 말을 통해 그 준엄함을 재천명했다(29절).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말이 없으시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란 말이 영어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힘(Strength)”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이스라엘의 영원하신 자 또는 승리하신 자”라고 읽는다. 아람어역에서는 “거룩하신 분”, 시리아역에서는 “가장 고귀하신 분”이라고 번역했다.
패트릭(Patrick) 주교는 이 말을 “이스라엘의 승리의 왕”이라고 읽었다. “하나님은 그대를 내치시기로 결심하셨는데, 그는 결코 그의 뜻을 변개치 않으시리이다.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인간들은 변덕이 많아서 쉽사리 그들의 마음을 변개시킨다.
또 연약하여서 그들의 목적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다. 그들의 방법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데도 이를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때로 죄인의 회개를 보시고, 그에게 내리려고 하셨던 벌을 돌이키기도 하신다.
그러나 여기 사울에게서는 회개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도 저를 거들떠 보지 않으셨다.
---------
아각의 처형과 사울과의 결별(삼상 15:32-35)
선지자로서 사무엘은 여기서 왕들의 위에 세움을 받았다(렘 1:10).
Ⅰ. 사무엘은 아각 왕을 진멸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실행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따른 것이었다. 그는 “아각을 찍어 쪼갰다.”
어떤 사람은 사무엘이 다만 명령만 했다고 보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손상받은 공의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33절), 그 제물을 찍어서 쪼개는 것과 같은 양식대로, 사무엘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찍어 쪼갰다고 보기도 한다.
1. 아각의 헛된 희망이 사라졌다.
“아각이 즐거운 낯으로 왔다.” 그는 그가 왕이었음을 나타내며, 그러므로 자기를 존경해 주고 정중하게 다루어 달라는 뜻으로 당당한 모습으로 왔다.
그리고 고생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않은 것처럼”(신 28:56) 걷기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확실히 전쟁의 열기도 식고, 사망의 괴로움이 지나갔도다(32절).”
아각은 이제 군인인 사울의 칼에서 벗어나자, 평화의 사람인 늙은 선지자 사무엘로부터는 어떤 위험도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1) 죽음은 괴로운 것이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무서운 것이다. 어떤 사본들은 아각의 말을 “참으로 죽음은 괴로운 것이다”라고 읽는다. 따라서 70인역은 먼저의 구절에서도 “아각이 두려워 떨면서 왔다”라고 읽는다. 죽음은 아무리 용감한 마음도 낙담시킨다.
(2)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무서움이 지나가지 않았는데도 이것이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음이 그들 가까이에 있건만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참다운 신자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죽음 자체가 지나간 것도 아니며, 그 괴로움 자체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2. 지난날 아각이 행한 악행이 여기서 벌을 받았다.
사무엘은 그의 조상들의 죄만 아니라, 그 자신의 죄까지도 묻기 위해 아각을 불렀다. “그의 칼이 여자들로 무자케 하였던” 것이다(33절). 그는 그의 조상들의 잔인함을 그대로 본받았으며, 그의 밑에 있는 자들도 똑같은 일들을 행했다. 그러므로 아말렉에 의해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이 세대에 돌아갔던 것이다(마 23:36).
자기 자신에 대해 너그럽고 관대했던 아각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잔인했으며 지독했다. 사람들은 흔히 그렇다. 그들의 욕망에 대해 관대한 사람들은 그들의 욕정에 대해서도 엄격하지 못하다. 그러나 흘린 피는 반드시 기억이 된다. 왕들도 그들의 흘린 죄 없는 피에 대해서 왕 중 왕이신 분에게 책임 추궁을 당한다. 므낫세 왕의 이러한 죄에 대해 여호와께서 용서치 않으시겠다고 하셨다(왕하 24:4; 계 13:10 참조).
Ⅱ. 사무엘은 사울 왕을 떠났으며(34절), 다시는 그가 당하는 문제에 대해 충고를 하거나 도와주기 위해 “그를 가서 보지 아니하였다”(35절).
왜냐하면 사울이 사무엘의 도움이나 충고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도 사울을 버렸다. 어떤 때 (19:24의 경우와 같이) 우연히 사울을 만나는 일은 있었어도, 결코 일부러 그를 만나러 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사무엘은 “사울을 위해 슬퍼하였다.” 그것은 그처럼 위대한 일을 잘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스스로 어리석은 짓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멸망받게 된 것을 생각하고 애달파했기 때문이었다. 사무엘은 사울과 같이 위대한 축복을 받을 수있었던 사람이 그처럼 저주와 천벌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그 나라의 형편을 슬퍼하였다.
사무엘은 또 사울을 회개시킬 기회가 없게 된 그의 영원한 상태를 슬퍼하였다. 사무엘이 사울을 위해 슬피 운 것은 그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왕을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 그리고 사무엘로 하여금 그의 할 일을 하도록 하는 결심을 가지게 했다.
그리하여 사울을 위한 사무엘의 기도는 아무런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했다.
1. 비록 우리는 버림 받은 죄인들에게서 손을 떼며, 그들과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되겠지마는 그런 버림 받은 죄인들을 위해서 슬퍼해야 한다.
그리하여 선지자는 그의 백성을 떠나가기로 결심했지만 “그들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라고 했다(렘 9:1, 2).
2. 비록 버림 받은 죄인들이 스스로를 위해서 슬퍼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
사울은 자기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노여움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고 있었지만 사무엘은 그를 위해 밤낮 슬퍼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애곡했을 때에도 예루살렘은 안연히 서 있었다.
====
===호크마
=====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 선지자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사울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에게 다시 온 때는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13:15)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듯하다. 대략 당시의 시점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 때인 B.C. 1010년 경에 왕위에 올랐는데, 만일 다윗이 최초 기름 부음 받은 때를 대략 15세 때로 본다면(16:11, 12) 그때는 아말렉 전투 직후였으므로(16:1), 아말렉 전투는 B.C. 1025년 경에 벌어졌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사무엘이 사울에게 다시 온 이때는 믹마스 전투 때(B.C. 1048년)이므로 사울과 헤어진 지(13:15) 약 23년 후라는 계산이 나온다(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기름을 부어 -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열방의 왕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왕임을 보여 준다. 즉 선민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열방의 왕과는 달리 신적(神的)인 기원을 가지며, 따라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왕이었다. 한편, 여기서 '기름을 부었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말은 10:1의 사건과 연관되는 말이다(Keil, Fay).
이제 왕은...말씀을 들으소서 - 이말은 사울이 전에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의 직무를 침범했던 제사 사건(13:8-14)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사울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일차 시험을 통과치 못했었다. 그러므로 여기 사무엘의 이 언급은 사울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새로운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질 것을 예시한다. 이로 볼 때 믹마스 전투 개시 직전,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에 대해 심판적 경고(13:13, 14)를 내린 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그 선언 이후 사무엘이 다시금 사울을 찾아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킬 것을 당부한 것은 여호와께서 아직 사울을 버리지 아니하사, 그로 하여금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계심을 의미한다(13:14 주석 참조). 이것은 마치 니느웨 성에 대한 요나의 심판 선언도 최종적인 선언인 것 같았으나,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욘 3:4-1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사 죄인이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겔 18:23 ; 33:11 ; 롬 2:4). 그러나 사울은 금번 아말렉 전투에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거역과 반역의 죄를 범함으로써(9절), 마침내 하나님께 버림받고 만다(26절 ; 16:14).
=====15:2
만군의 여호와 - 이 표현은 특별히 성전(聖戰)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1:3, 11 ; 4:4 ; 17:45 ; 삼하 5:10). 따라서 사무엘은 여기서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아말렉과의 전투 명령의 엄숙성을 더욱 강조한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 아말렉 족속(the Amalekites)은 에서의 손자 아말렉의 후손들로서(창 36:12, 16 ; 대상 1:36), 유다 남부 광야 지역을 거점으로 유목과 약탈로 살아간 호전적인 족속이다. 이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직후 르비딤 광야에 이르렀을 때, 교활하게 이스라엘 후미(後尾)를 기습 공격했었다(출 7:8-13). 그런데 그때는 이스라엘이 오랜 노예 생활 끝에 해방된 직후였으므로 아무런 전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신 25:17-19). 따라서 그때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입은 타격은 실로 막대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은 바로 이러한 아말렉의 기습 공격 사건을 뜻한다. 아말렉의 이 공격 사건이 특히 용서받지 못할 사건이 된 것은 이것이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베푸신 크신 출애굽의 은총을 무시한 채 가나안 여정을 방해했던 사건이고, (2)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의 후미를 공격하는 비겁한 전술을 구사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을 선민(選民)이스라엘의 제 1의 대적국으로 간주하시고, 그 족속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진멸할 것을 선언하시고 명령하셨는 바(출 17:14 ; 신 25:19), 이러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는 이방의 술사(術士) 발람의 예언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민 24:20).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형벌 하에 놓여진 아말렉 족속은 비단 이 사건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이 요단을 통하지 않고 네게브(Negeb, 유다 남부 사막 지대) 지역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것도 방해하였다(민 14:43-45). 그리고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잔인하고 난폭한 침입은 결코 중지되지 않았었다(삿 3:13 ; 5:14 ; 6:3, 33 ; 7:12 ; 10:12 ; 12:15). 이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울을 통해 아말렉 족속을 진멸코자 하셨던 것이다. 출 17:14 ; 민 24:20 ; 신 25:19 주석 참조.
내가 추억하노니 - '추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 )는 '방문하다', '생각하다'란 뜻으로서, 곧 어떤 일에 대해 잊지 않고 내내 기억하고 있다가 때가 되어 찾아가는 행위를 뜻한다. 물론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행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아말렉의 적대 행위 자체만을 기억하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1)아말렉 족속에게 복수하라고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던 사실(출 17:14 ; 신25:19), (2) 그리고 아말렉에 대한 복수를 위한 성전(聖戰)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사실(출 17:16) 등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15:3
지금 - 출애굽 직후 가나안 행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 복수해야 할 때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러 측면에서 안정을 이룩했을 시기로 지정하셨었다(신 25:19).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 치하에서 정치적인 안정을 이미 구축하고 있었다(14:47, 48). 즉 아말렉을 칠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가서(* , 얄라크) - '진군하다', '쫓아가다'란 뜻이다(출 13:21 ; 24:5, 8). 곧 총공격을 하라는 의미이다.
아말렉을 쳐서 - 여기서 '치다'(* , 나카)란 말은 '때리다', '쳐죽이다'란 의미로서,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해(傷害)를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13:4 ; 14:14 ; 17:35 ; 수 10:20).
그들의 모든 소유를...진멸하되 - '그들의 모든 소유'는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란 뜻으로, 곧이어 언급되는 '남녀...나귀' 등 모두를 가리킨다. 한편 '진멸하되'(* , 하람)는 원래 '금지하다' 혹은 '바치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될 경우 '분리시키다', '금지시키다'란 의미가 된다.특히 이 단어는 성경에서 사역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부정한 것을 제거하거나 저주받은 물건을 제사장에게 바치는 행동을 나타낸다(Lange).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헤렘'(바쳐진 것, 금지된 것)으로 지정된 것은 결코 다른 용도로는 쓰여질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헤렘의 법칙'대로 시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만일 이 '헤렘'이 산 것이면 죽여야 했고, 그 밖의 물건들은 불로 다 태워버려야 했으며, 불로 태워지지 않는 금.은 등은 성소에 귀속시켜 하나님께 봉헌되어야만 했다(레 27:28 ; 신 13:16 ; 수 6:17). 한편, 이와 비슷한 법칙은 성경 외적 문헌들에도 나타난다. 곧 어떤 고대 문헌에는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의 장년, 소년과 소녀, 하인 등을 잡아간 후 그들을 모두 죽여서 자신의 신 그모스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Pritchard). 따라서 여기의 '진멸하되'는 단순히 정치.군사적 행동이 아닌 영적.종교적 행위라는 점에서, 사울로서는 반드시 그대로 이행해야 될 사항이었다. 레 27:28 ; 신 13:17 ; 수 6:17 주석 참조.
남기지 말고 - 여기서 '남기다'(* , 하말)는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 '아까워하다'란 뜻이다(23:21 ; 삼하 12:6 ; 대하 36:15, 17).
=====15: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 여기서 '소집하다'(* , 솨마)는 원래 '듣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불러 모으다', '듣게 하다'란 뜻이 된다(시 66:8 ; 렘 51:27). 결국 이것은 전투의 필요성을 알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전투하기 위하여 모여 들도록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 '들라임'(Telaim)은 유다의 한 성읍으로서 '델렘'(수 15:24)과 동일 지역인 듯하다(Kimchi, Keil). 그런데 '델렘'(Telem)은 여호수아서에서 유다의 또 다른 성읍 '십'과 같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그곳에 인근한 지역일 것이다. 한편 '십'(Ziph)은 헤브론 남쪽 약 51km지점에 위치해 있다. 결국 '들라임'은 유다 남방의 국경 지대에 있는 장소로서, 곧 아말렉과의 경계 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아말렉 경계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여건상, 아말렉 전투를 수행키 위한 군사들의 집결 장소로 이곳이 채택된 것 같다(Fay). 한편 '계수하니'는 오히려 '소집하다'란 의미로 봄이 좋다(11:8).
보병이 이십만...유다 사람이 일만 - 여기서 '유다 사람'만 유독 구별되어 있는 것은, 여기에는 본서 기록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의도적으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11:8). 즉 이 아말렉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와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Klein). 한편 '이십만...일만'은 야베스 길르앗 전투때 소집된 병력 '삼십만...삼만' 보다는 적은 숫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유다 지파는 병력 소집 장소인 '들라임'에 가까이 거주했으면서도 참여율이 다른 지파에 비하여 훨씬 적었다는 사실이다(11:8). 이것은 결국 유다 지파가 사울의 왕국에 대하여 특별히 도전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 유다 사람들은 그때 자신의 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창 49:10).
=====15:5
아말렉 성에 이르러 - '아말렉 성'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곳으로서, 지금도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때 사울의 군대는 국경을 넘어 아말렉의 영토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 여기서 '골짜기'는 건기(乾期)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와디'(Wady)를 가리킨다. 그리고 '복병'(伏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정복전을 치를 때 이미 전술의 한 형태로서 사용되었다(수 8:2 ; 삿 20:29). 그러나 여기의 '복병'은 아말렉을 기습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말렉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겐 사람들(the Kenites)을 대피시킬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5:6
사울이 후대의 다윗처럼(27:10 ; 30:26-30),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던 겐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겐 사람 - '겐'(* , 케니)은 '금속 세공업자' 혹은 '대장장이'란 의미이다. 이와 같은 명칭은 그들이 살던 아라비아 지역에 질이 좋은 동광석(銅鑛石)이 풍부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당시 유목민으로서 가나안 땅에 거주한(창 15:19) 겐 족속의 일파는, 모세 당시에는 미디안 지역에 거주했었으며(출 2:16-21 ; 18:1 ; 민 10:29),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때에는 그 족속의 한 사람이었던 모세의 처남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길 안내자가 되면서(민 10:29-32) 이스라엘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그 민족은 이스라엘의 남부 브엘세바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삿 1:16). 그리고 이때로부터 점점 남부로 내려가, 사울 시대에는 아말렉 족속들의 지역에 함께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겐 사람들 모두가 이스라엘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언급된 '겐 사람' 이외의 또 다른 '겐 사람'의 일파는 아라비아의 페트레아(Petrea) 지역에 살면서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등,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의를 갖고 있었다(Lange). 그러나 여기 언급된 겐 사람은 이후 다윗 시대까지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30:29).
선대하였느니라 - '선대'(* , 헤세드)는 '인자', '긍휼' 등의 의미로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킬때 사용되었다(창 19:19 ; 시 23:6 ; 106:45). 그러나 여기 언급된 겐 사람들의 '선대'는 구체적으로 그들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행 길 안내자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이다(민 10:29-32). 출애굽 당시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대(敵對) 행위를 한것에 비하면, 겐 사람들의 이같은 태도는 '선대'(善待)라고 하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삿 4:11-22 ; 5:24-27). 한편 혹자(Hengstenberg)는 이처럼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겐 족속이 구별되어 보호 받을 것이란 사실은 이방의 술사 발람의 예언(민 24:20, 21) 속에서 이미 나타난다고 한다. 민 24:21 주석 참조.
떠나니라 - 이것은 겐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영원히 떠났음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투를 피해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 대피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후 사울 왕 말기에도 겐 사람들이 네게브(Negeb) 지역에 계속 살고 있었다는 사실로써 확증될 수 있다(27:10 ; 30:26-30).
=====15:7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 - '하윌라에서부터~술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은 당시 아말렉 족속들이 흩어져 살던 거의 모든 영역을 가리킨다(창 25:18). 한편 '하윌라'(Havilah)는 '광황한 모래 사장'이란 의미로서,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 쯤에 위치한 한 지역 정도로만 추측된다(S.Cohen). 카일(Keil)과 스트라보(Strabo)는 현재 이곳을 아라비아의 페트레아 경계 지점에 위치한 '하우로테안'(Chaulotoeans) 지역으로 본다. 그리고 '술'(Shur)은 딤사 호수 동쪽에 위치한 시나이 광야를 뜻하는 일반적 명칭인 듯하다(창 16:7). 즉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최초로 도달한 지역으로(출 15:22), 애굽과 팔레스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일부이다(Keil).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이팔'(Jifar) 광야이다(Fay). 한편, 위의 언급을 통해 우리는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유다 국경 지대로부터 애굽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족속의 거의 전지역을 초토화(焦土化) 시켰음을 알 수 있다(Smith).
=====15:8,9
본문은 사울이 하나님의 진멸 명령을 부분적으로만 이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일반 백성들과 짐승의 열등한 것들은 명령대로 모두 진멸했지만, 자신에게 실리적으로 유용한 짐승 또는 우수하고 질 좋은 것들은 진멸치 아니했다.
아각을 사로잡고 - 사울이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처럼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Agag)을 살려둔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아각'을 통하여 큰 실리(實利)를 얻기 위한 목적(왕상 20:31-42), (2) 혹은 '아각'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목적(12절)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아각'(* )은 애굽 왕을 '바로'라고 하듯이, 아말렉 왕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불려지던 명칭이다(민 24:7 주석 참조). 그리고 '아각'의 의미는 '맹화'(猛火)란 뜻이다(Lange).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 이 말은 아각을 제외한 모든 아말렉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진멸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거의 모든 아말렉 족속을 쳐죽였다는 뜻이다(Fay). 사실 아말렉 족속이 거주하던 유다 남부 광야 지대는 광활했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 족속은 유랑 생활을 하던 족속이었으므로 이들을 완전 진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Smith). 따라서 당시 일부는 피해 달아났거나 또는 발각되지 않았던 관계로 살아 존속했을 터인데(27:8 ; 30:1 ; 삼하 8:12). 결국 이들은 히스기야 시대에 시므온 사람들에 의해 전멸되었다(Keil, 대상 4:43). 한편, 여기서 진멸하였으되(* , 헤헤림)란 말의 개념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기름진 것(* , 미쉐님) - 직역하면 '두번째로 태어난 것'이란 뜻이다(D. Kimchi, R. Tanchum). 그러나 이는 다른 것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것보다 좋다는 의미이다(Keil, Fay). 사실 고대인들은 동물의 태(胎)에 있어, 첫번째 태보다 두번째 태를 더 좋은 것으로 간주하였다(Smith).
=====15:10,11
사무엘의 제사권 침해 사건(13:9)에 이어 여기서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된 두번째 시험, 곧 아말렉 진멸 사건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1절 ; 13:8-14).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 여기 하나님의 '후회'는 인간의 후회와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후회는 당신의 어떤 특별한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여, 거기서 돌이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29절). 이것은 다만 죄인의 거역에 대한 신적(神的)인 슬픔을 의인법적(擬人法的)으로 묘사한 표현일 뿐이다(창 6:6, 7).
돌이켜서(* , 슈브) - 성경 용례상 이 말은 종종 여호와께 대한 반역 및 배교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민 14:43 ; 32:15 ; 수 22:16, 18 ; 렘 3:19). 사무엘이 근심하여 - 여기서 '근심하다'(* , 하라)란 말은 '(분노로) 타오르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 이 말은 오히려 '진노하여'로 번역함이 타당하다(창 4:6 ; 민 11:33 ; 신 7:4 ; 삼하 24:1). 아마도 이때 사무엘은 자신의 간곡한 권면(1절)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자신의 이기적 충동을 따라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왕을 세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 손상되고 파괴되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거룩한 의분(義憤)을 느꼈을 것이다(Keil, Fay).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 사무엘의 이같은 태도는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각오(12:23)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자신의 각오처럼 이때 사무엘은 (1) 하나님께로부터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사죄받기 위하여, (2) 그리고 무엇보다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습은 이전에도 수차 나타나는데(7:8, 9 ; 12:18), 이로 보아 진정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있으니, 곧 당사자인 그 죄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사울은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만다. 한편, 유대 학자 아바르바넬(Abarbanel)은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그처럼 간절히 중보 기도한 것은, 사무엘이 개인적으로 사울을 그 용모와 용감성 때문에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15:12
사울이...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사울의 이기적 행동 원리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한편 '기념비'(* , 야드)는 원래 '손'(hand)이란 뜻이나,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다는 효과 때문에 '기념비'란 의미로 전의(轉義)된 듯하다(삼하 18:18 ; 사 56:5). 한편 여기서는 아말렉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勝戰碑)를 가리킨다.
갈멜에 이르러 - 여기의 '갈멜'(Carmel)은 헤브론 남동쪽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으로서, 원래 갈렙에게 주어졌었다(수 15:55). 이곳은 또한 나발과 아비가일의 고향이기도 하였다(25:2-40). 현재의 '쿨물'(Kurmul) 지역으로 추정된다(Fay, Keil).
돌이켜...길갈로 내려갔다 - 사울이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인 기브아(10:26)로 가지 아니하고 '길갈'로 간 까닭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이 있는 여러 곳(7:16) 중 가장 가기에 용이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1절). 한편 '내려갔다'(* , 야라드)라는 말은 길갈(Gilgal)이 요단 골짜기 저지대에 위치했었다는 지리적 특성을 잘 반영해 준다(10:8 ; 창 43:20 ; 수 16:7 ; 18:16). 즉 사울은 갈멜에서 승전비를 세운 뒤 유다 산맥을 가로질러 요단 계곡의 길갈로 향했던 것 같다(13:4). 한편 '길갈'(Gilgal)에 대해서는 수 4:19 주석을 참조하라.
=====15:13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 '여호와의 명령'은 분명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이었다(3절). 그러나 사울이 이같은 여호와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치 않았으면서(8, 9절), 명령을 온전히 이행한 듯 묻기도 전에 말한 것은 죄의식(罪意識)의 소산이요, 외식(外飾)의 결과였다.
=====15:15
그것은 무리가...끌어 온 것인데 - 여기서 '무리가'란 말은 13절의 '내가'란 말과 너무나도 대조된다. 즉 13절에서는 자신을 내세워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다가, 이제 상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무리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회개 및 죄의 고백으로부터 점점 멀리 떠나가는 사울의 위선이 애처롭다. 이는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 죄를 하와에게 떠넘기려는 책임 전가와 다를 바 없다(창 3:12).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사울의 허락이나 묵인 없이는 결코 짐승들을 끌고 올 수 없었다(14:24-26).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남김이요 - 사울의 이 말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범죄와 이기심을 합리화 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비록 사울이나 백성들이 짐승들을 실제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진멸치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짐승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린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바로 이같은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제사'를 빙자하여 짐승들을 진멸치 아니한 것이었다(Keil).
=====15:16
가만히 계시옵소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레프'(* )는 문자적으로 '중지하라!'(Stop!)란 뜻이다. 결국 이 말은 핑계와 변명, 책임 전가 등을 이제 그만두라는 의미로서, 사울의 구차한 변명을 더이상 듣지 않겠다는 사무엘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하는 말이다.
간밤에...이르신 것 - 이 계시는 사무엘이 철야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신 사울에 대한 말씀인 듯하다(11절).
=====15:17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사를 보였을 때에 사울이 취했던 겸손한 행동을 가리킨다(9:21).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 권력이 생기자 사울은 점차 교만한 자가 되어, 결국은 비천한 자신을 들어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의 명령까지 무시하는 패역한 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여호와께서...기름을 부어...왕을 삼으시고 - 이것은 (1)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2) 따라서 사울의 왕권은 이방의 그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실행할 의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15:18,19
여기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달된 여호와의 신성한 명령을 사울이 전적으로 이행치 아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사울의 주장(13, 15절)이 자기 변명과 외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길로 보내시며 - 여기서 '길'(* , 데레크)은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주어 내보낸 원정의 길을 뜻한다(Fay). 죄인 아말렉 -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아말렉' 족속들이 마땅히 진멸됐어야 할 합당한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 아말렉 족속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멸절시키려 했던 죄이다(2절 ; 출 17:8-13).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탈취물에게로 날아갔다'(flew on the spoil, KJV)란 뜻이다. 이 말은 아말렉과의 전투시 사울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보고 그 마음에 탐심이 생겨, 그것을 간절하고도 열정적으로 원했다는 뜻이다. 결국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남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15:20
아각을 끌어왔고 - 사울은 여기서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거역하고 '아각'을 살린 자신의 사악한 행위(8, 9절)를 전혀 죄로 인정치 않고 있다. 오히려 여호와의 명령을 좇아 아말렉과 전투를 수행했다는 그 실제적인 증거로서 아각을 사로잡아 왔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15:21
사울은 15절에 이어 여기서도 아말렉의 짐승을 진멸치 않은 자신의 범죄를, (1) 하나님의 제사를 빙자하고 (2) 또한 백성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정당화시키려 한다(15절).
=====15:22
번제와 다른 제사 - '번제'는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다(레 1:3-17). 그리고 '다른 제사'(* , 제바힘)는 문자적으로 '희생'(sacrifices)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수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번제 이외의 다른 희생 제사 모두를 가리킴이 분명하다<레위기 서론, 7.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아말렉 족속에 대한 여호와의 진멸 명령(3절)을 무시한 채, '여호와께 제사드릴 목적으로'(15, 21절) 그 족속의 가장 좋고 기름진 짐승들을 끌고 왔노라고 극구 주장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명쾌히 선포한 이 말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외적 의식(儀式) 행위 보다는 내적 마음의 순종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금언적(金言的)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무엘 이후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여호와께 대한 합당한 예배의 기본 자세로 거듭 강조되었다. 즉 시편 기자(시 50:8-15 ; 51:16, 17), 이사야(사 1:11-17), 예레미야(렘 6:20), 호세아(호 6:6), 미가(6:6-8), 그리고 마침내 참 선지자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사실이 다시금 확증되고 강조되었다(마 9:13 ; 12:7).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을 다시 요약하면, (1) 예배의 형식 보다는 예배자의 마음 자세가 더욱 중요하며(전 5:1 ; 미 6:6-8), (2) 영(靈)이신 하나님께서는 수양의 피나 기름보다 인간의 전인격적 마음을 원하시며(시 51:17 ; 요 4:24), (3)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모든 신앙 생활의 척도가 된다(딤후 3:16, 17)는사 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사 행위는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제단 위에서 태우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인간이 그 행위 속에 담긴 참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즉 '제사'는 그림자요, '순종'은 실체인 것이다. 벧렌베르겔 성경(Berlenberger Bible)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제사(sacrifices)로는 인간이 단지 비이성적인 짐승의 고기만을 드릴 뿐이지만, 순종(obedience)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뜻을 바친다. 그러므로 순종이야말로 이성적이고 영적인 제사인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156). 한편, 그러나 사무엘의 이 말은 '제사'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사무엘이 여기서 강조한 근본 사상은 제사 행위 속에는 반드시 순종의 자세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요, 제사로 말미암아 순종이 거부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말은, 후대의 예언자들이 합당한 예배에 앞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언급하면서 많이 사용하였다.(사1:10, 11, 13 ; 렘7:21-26 ; 호6:6 ; 암5:21-24 ; 미6:6-8 ; 막12:28-34)
수양의 기름 - 여기서 '기름'(헬레브 ; fat)은 희생 제사에서 하나님께 태워지던 부분으로서, 주로 가축의 내장 및 꼬리 주위의 '기름진 부분'을 가리킨다(레 3:16, 17 ; 7:23-25).
=====15:23
사술의 죄 - 여기서 '사술'(* , 케셈)은 점(占)을 치는 행위를 뜻하며, 이같은 행위는 당시 이방 세계에서 보편화 되었었다(6:2 ; 민 22:7 ; 신 18:14 ; 수 13:22). 그리고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행해졌었다(렘 14:14 ; 27:9 ; 29:8 ; 겔 13:6, 23 ; 미 3:7).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우상 숭배죄로 규정되어 성경에서 절대 금지되었다(신 18:10 ; 왕하 17:17).
사신(邪神) 우상 - '사신'(* , 아웬)은 '악함', '무가치함', '허탄한 것' 등의 의미로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우상'으로 번역되었다(사 66:3). 그리고 '우상'(* , 테라핌)은 중근동 사람들이 가신(家神)으로 섬기던 우상의 한 종류인데(창 31:34, 35 ; 삿 17:5 ; 18:14),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점(占)을 치는 수단으로써 언급되기도 한다(겔 21:21 ; 호 3:4). 창 31:19 주석 참조.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 여기서 '버려'(* , 이므아스카)는 미완료형이므로 미래형의 의미로 번역해야 된다는 점에서, 사울의 왕권이 머지않아 끊어질 것을 시사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나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그 말씀을 제대로 좇았다면, 그의 왕권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세습될 수 있었을 것이다(13:13). 한편 여기의 '버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척했던 그 행위를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단어이다<8:7>. 그러나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그 말씀을 제대로 좇았다면, 그의 왕권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세습될 수 있었을 것이다(13:13). 한편 여기의 '버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척했던 그 행위를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단어이다<8:7>.
=====15:24
사울은 사무엘의 날카로은 심문과 경고에 의하여, 변명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꿔이제 자신의 죄를 시인했지만, 그 시인한 죄조차도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백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 사울의 이 고백은 진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범죄하였는지를 깨닫고 뉘우치는 참된 회개라고 볼 수 없다(Keil, Fay, Smith). 그 이유는 (1) 계속 자신의 죄를 시인치 않고 변명과 책임 전가로만 일관하다가, 사무엘의 무서운 심판적 선언(22, 23절)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시인했기 때문이며, (2) 또한 죄의 고백 후에, 다시금 백성들의 탓으로 그 죄의 원인을 책임 전가하는 말(24b)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3) 나아가 고백 후에도 계속 왕위 보존과 왕권의 명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30절). 결국 라피데(C.V. Lapide)가 정의한 것처럼, "사울의 이 고백은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통회의 회개가 아니라, 단지 왕국의 상실과 명예의 실추를 두려워한데서 비롯된 '입술의 회개'(repentance of the lips)였다"(Keil & Delitzsch, op. cit. p. 157).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 사울의 이 변명은 어느정도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당시 사울의 왕권은 웬만큼 백성들로부터 인정은 되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실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30절). 바로 이 사실이 사울 왕권(王權)의 한계요,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고, 당신께로부터 비롯된 마음에 합당한 한 인물(다윗)을 따로 세울 필요가 있었다(13:14 ; 행 13:22).
=====15:25
지금 내 죄를 사하고 - 사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기서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 용서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사울이 아직까지도 그가 지은 죄의 근본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인간에 대한 범죄 정도로 가볍게 인식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돌아가서 - 이때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길갈 제단이었을 것이다(21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 사울의 이 '경배' 허락 요구는, 사울이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갖고자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울은 그때 사무엘이 집전하는 제사의 현장에 사무엘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이 왕으로서 건재함을 만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따라 사무엘에게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요청했던 것이다<30절>.
=====15:26
사울의 심중(心中)을 간파한 사무엘은 여기서 사울의 폐위된 왕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단호히 선포한다. 여기에 왕권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참 선지자로서의 절개가 돋보인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왕직 박탈은 단순히 사무엘의 제사직 침해 사건(13:9)과 아말렉 왕과 짐승을 살려둔 사건(15:9)의 두 가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이 두 가지 불복종 사건은 사울이 저지른 유일한 불복종 사건이 아니라, 많은 반역적이고 불순종적인 사건들 중 대표적인 경우라는 점이다(Leon Wood).
=====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 사무엘의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사울에게 그의 폐위가 확정적임을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다. (2) 사울의 반복되는 간청 때문에 인정에 얽매여 혹시 범할지 모르는 인간적 실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겉옷 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 여기의 '겉옷'(* , 메일)은 몸에 꽉붙는 옷을 가리킨다(R. Payne Smith). 따라서 사울이 붙잡았다는 것은 그가 사무엘에게 극렬히 매달렸음을 뜻한다. 한편 사무엘의 옷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임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옷이 찢어지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사울의 왕권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sign)로 삼으셨던 것이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찢어진지라'는 말이 28절의 '떼어서'(* , 카라)란 말과 동일한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15:28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 여기서 '이웃'(* , 레아)은 비한정적인 용법으로 사용된 말로, 곧 '누구든 간에 어떤 다른 사람'(an other)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여기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곧 다윗을 가리킨다(13:14 ; 행 13:22).
주셨나이다(* , 네타나흐) - 여기서 이 단어는 13:14에서처럼, 다윗이 이미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과거 완료형의 의미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었다(16:3, 6-13).
=====15:29
사무엘은 인간의 가변적(可變的) 속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불변적(不變的) 속성을 소개함으로써, 사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기 불가능함을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지존자(* , 네차흐) - 하나님의 신적(神的) 속성을 시사하는 명칭 중의 하나로서, '영광스러우신 분', '영원히 계시는 분', '승리하시는 분', 그리고 '변함이 없으신 분'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Klein).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 여기서 '변개(變改)하다'(* , 나함)란 말은 11, 35절의 '후회하다'란 말과 같은 어근(語根)의 말이다. 그렇지만 본절의 '변개함이 없다'란 말과 11, 35절의 '후회하셨다'라는 말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1, 35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후회(변개)는 사람의 후회나 변개처럼 그 마음의 변덕이나 어떤 계획의 차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타락에 대해 가지는 신적 긍휼과 슬픔을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 , 안드로포파도스)으로 묘사한 것 뿐이고(창 6:6, 7), 본절에 묘사된 바 '변개(후회)함이 없다'란 표현은 신적 섭리와 경륜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순수하게 신성론적(神性論的, * , 데오프레포스)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Keil, Fay). 실로 스스로 계시는 영원자 하나님께서는 과거.헌재.미래가 동일하신 분이시다(출 3:14). 다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맞물려 역사가 진행될 때,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마치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뿐이고, 또한 11, 35절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묘사했을 뿐이다(R. Payne Smith). 민 23:19 주석 참조.
=====15:30
범죄하였을지라도...나를 높이사...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서 사울은, 하나님의 작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줄 것을 사무엘에게 다시금 요청한다<25절>. 이로써 사울은 죄의 고백(24절)이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실로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 6:5)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끌 왕의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 백성미 장로들 - 여기서 '내 백성'이라는 말은 사울이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앞에서 갖는 언약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15:31
하나님의 최종적인 폐위(廢位) 선언으로 말미암아(23, 26절), 사울은 이후 왕위에는 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닌 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무엘은 함께 제단으로 가서 여호와께 제사드리자는 사울의 간절한 요청(25, 30절)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사무엘이 사울의 요청을 허락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차기 이스라엘 왕이 등극할때까지 그래도 사울을 통하여 외적인 정치 질서를 유지시켜 나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O.V. Gerlach). (2) 사울과 함께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죽임으로써, 사울이 완수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마저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C.F. Keil).
=====15:32
아각이 즐거이 오며 - 여기서 '즐거이'(* , 마아단노트)는 '부드럽다', '느슨하다'의 의미를 갖는 아랍어 어근 '아단'(*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기쁘게', '기꺼이' 등의 뜻이다. 아마도 아각은 자신이 왕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됨을 알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이 부지될 줄로 확신했던 것 같다(Clericus). 한편 '아단'이라는 동사에서 '복락', '기쁨', '환히' 등의 의미가 있는 '에덴'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창 2:8 ; 시 36:8).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 벌겟역(the Vulgate)과 수리아역(the Syriac)은 아각의 이 말을, 그가 자신의 죽을 운명을 예견하고 불안과 체념으로 한 말이라고 보고 "실로 죽음은 괴롭도다"란 의미로 번역했다(R. Payne Smith). 그리고 혹자는 아각의 이 말을, 죽음을 앞둔 전사로서의 영웅적 용기로 치켜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 아각의 이같은 언급은 자신이 사무엘에게 넘겨짐을 알고, 여호와의 선지자 특히 노년의 선지자는 적어도 왕이나 군대 보다는 긍휼이 풍성할 것이라는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공동번역)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Lange).
=====15:33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무자하리라 - 사무엘은 '동해 복수법'(Lex Talionis , 출 21:24, 25 ; 신 19:21)에 근거하여 아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편 사무엘의 말을 통해 우리는 아말렉 왕 아각(Agag)이 수많은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란 말은 아각이 여인들을 애기 못낳는 불임 여성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여인들의 자식을 죽여 없앴다는 뜻이다.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쪼개니라 -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제단 앞을 가리킨다.
본서 저자가 여기서 특별히 이같은 언급을 한 까닭은, 사무엘의 아각 처형이 단순히 정치 보복적 차원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3절)에 근거하여 영적.공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한편 선지자의 이같은 직접적인 형 집행은, 왕이 합당한 형 집행을 게을리하는 경우에 대신 이뤄졌었다(왕상 18:40).
찍어 쪼개니라 - 기본 동사 '솨사프'(* )는 '여러 조각내다'(cut in pieces) 또는 '토막토막 끊다'(hew in pieces)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아각의 비참한 죽음을 연상시켜 주는데, 우리는 이를 단순히 잔인하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포악한 아말렉 족속의 아각 왕에 의해 더욱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수많은 자들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그 백성을 파멸시키고자 끝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말렉 족속의 극한 죄악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 왕국의 우두머리에 대한 신적(神的) 공의의 정당한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15:34
사무엘은 라마로...사울은 기브아 본집으로 - 길갈에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아각의 처형을 마친 후, 사무엘과 사울은 각자의 거처로 각각 돌아갔다. 이 사실은 단순히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의미 외에, 이후 두 사람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한편 사무엘의 고향 '라마'(Ramah)에 대해서는 1:1주석을, 그리고 사울의 고향 '기브아'(Gibeah)에 대해서는 10:26 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15:35
사무엘이...사울을 다시...보지 아니하였으니 - 이 말은 사무엘과 사울이 죽기까지 서로 상면조차 아니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19:24),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 선지자로서의 권고를 더이상 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결국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신정(神政) 왕국의 왕으로 더이상 인정치 아니했음을 뜻한다.
신정 왕국의 특성은 왕에 대한 선지자의 신의(神意)의 전달 및 권고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선지자가 왕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왕의 폐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을 때는 그를 진정 위하는 마음으로, 사울의 왕직(王職) 수행을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계속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하자,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왕직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23, 26절). 따라서 이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폐위시켜버린 왕을 위해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사울을 위해 슬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무엘이 사울의 회개를 위해 개인적으로는 계속 기도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 11절 및 29절 주석 참조.
====
===
[[날 세우시네]] You Raise me UP..소향
-----------
나 지치고 내영혼 연약할때 근심 속에 마음 무거울때 주 오셔서 함께 하실때까지 나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
날 세우사 저 산에 우뚝서리 날 세우사 풍랑 가운데도 함께 하심 나 강하게 하네 날 세우사 모든 것 할 수 있네
열망 없는 그런 삶은 없으리 끊임없이 고동치는 가슴 주 오셔서 경이로 날 채우고 영원한 삶 나에게 주시네
날 세우사 저 산에 우뚝서리 날 세우사 풍랑 가운데도 함께 하심 나 강하게 하네 날 세우사 모든 것 할 수 있네
날 세우사 저 산에 우뚝서리 날 세우사 풍랑 가운데도 함께 하심 나 강하게 하네 날 세우사 모든 것 할 수 있네
날 세우사 저 산에 우뚝서리 날 세우사 풍랑 가운데도 함께 하심 나 강하게 하네 날 세우사 모든 것 할 수 있네
------You Raise Me UP--------
1.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2.There is no life - no life without its hunger; Each restless heart beats so imperfectly;
But when you come and I am filled with wonder, Sometimes, I think I glimpse eternity.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
1.나 지치고 영혼 헤메이며 곤고하여 내 맘 무거울 때 그 언제나 늘 함께 하시는 목자 예수 그 이름 부르네
2.갈급함 없는 인생길 없다네 쉼은 없고 심령은 설렐 때 주 부르면 경이로 날 채우사 생명말씀 먹여주신다네
II:날 일으켜 저 산 오르게 하며 날 세우사 풍랑 건네시네 주 어깨에 기대어 있으니 주 안에서 능치 못함 없네 :II
===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그러나)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11:19-36....*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