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룻2
첨부파일 :

룻2장  ..[183.빈들에마른풀같이][478.주날개밑내가편안히쉬네] [309. 목마른 내 영혼].[368.주예수여은혜를내려주사]...[433.귀하신주여 날 붙드사]..


...(영생의) 주여, 허락하여 주신 오늘, 매순간 보혈로 정결케 하신바, CJ 의지하는 마음을 주소서, 부어주시는 은혜따라, 주님 뜻 이루소서, 주만 바라보며 앙망-의지하도록  내 맘 붙드소서!! 오직 성령충만 안에서 (깨어 있어..하나님과 사람 앞에..신실함과 참됨으로) 진실하게 하시고, 내 마음에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 움직이심따라 말할 때, 오직 넘치는 영광의 주님만 나타나옵소서, 오늘 하루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임마누엘!!) 주여 나를 진실하게 하소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다

1.  나오미(하나님의 모든 선하심, 노암)의 남편 엘리멜렉(하나님은 나의 왕)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그 안에 능력이 있다)더라

....유력자= (하일 깁보르 = 힘strength-능력efficiency-강력army/power-재산wealth and riches -a mighty man of wealth = a man of standing, > a man of great wealth...오늘날, 진정하고도 참된한 유력자는 참생명의 유력자, 곧 거듭남 안에서 참 믿는이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유력자임을 진실로 깨닫고 있어야 한다!!...우리안에 거하시는 주 JC야 말로 진정 그러하시다)) 

.....보아스 Boaz...보아즈(명남)는 '민첩, 재빠름'을 의미한다. 한글 개역 성경은 '보아스'로 음역한다.

(a)   보아스는 유력한 베들레헴 사람이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룻 2:1)...(b)  여호와 신앙으로 사는  보아스는 여호와 경외하는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친족이며, 룻의 두번째 남편이다(룻 4:10-룻 4:13).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한 부유한 농부였다. 그는 성경에서 모압 여인이며 전에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의 아내였던 룻에 대한 대우 때문에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나오미는 극심한 기근 때(사사 시대 동안)에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갔었다. 모압에 있는 동안 두 아들이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였으나 이 후 두 아들과 남편이 모두 죽었다. 나오미는 그녀의 며느리들에게 그들 자신의 백성에게로 돌아가도록 권고하였으나 룻은 돌아가기를 거절하고 시모 나오미를 끝까지 붙좇았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룻은 그녀와 동행하였다. 그 두 사람은 가을 추수 때에 도착하였으므로 룻은 이스라엘의 관습을 따라 이삭을 주으러 나갔으며... 그녀의 행운은 그녀가 추수 기간 동안 머물도록 지시받은 보아스의 밭에서 시작되었다...나오미는 그녀의 며느리에게 죽은 남자의 이름과 기업을 지키기 위해 고엘(goel) 또는 기업 무를 자에 대해 규정한 '수혼법(아들이 없는 미망인이 남편의 형제나 친족과 결혼하는 법)'에 관한 관습을 가르쳤다. 그 의례는 여인이 고엘의 발치에 누움으로 시작된다. 그 호소는 순위가 두 번째로 밝혀진 보아스에게 행해졌다. 다음 날 아침 그는 그러한 문제들이 결정되는 성문에서 그 문제가 처리되도록 조처하였다. 그 우선순위 가진 연장자는 모압 여인과 결혼함으로 인해 "그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거절하였다. 그래서 보아스는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들에게 속한 모든 소유를 사고 룻과 결혼하였다....보아스는 경건과 자비의 모범으로, 룻은 미덕과 헌신의 모범으로 제시된다. 10세대 동안 모압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룻은 나오미를 따름으로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과 관습을 받아들였다.  보아스는 사실상 엘리멜렉의 친족이었으므로 나오미와 결혼할 책임이 있었지만, 말론에게까지도 책임이 확대됨을 알고 그의 과부와 결혼하였다. 이 이야기의 행복한 결과는 이들 부부가 사울에게서 도망하여 모압에서 준비된 피난처를 찾았던 다윗의 증조부모가 되었다는 것이다.(참조: J. J. Edwards).  (c)   보아스는 삼마의 아들이며, 이새의 아버지이며, 다윗의 증조부이다(대상 2:11, 12; 룻 4:17; 룻 4:21). 보아스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 예수님의 조상으로 나타난다.  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② 눅 3:32,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J. Edwards).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의 이름은 야긴(우측)과 보아스(좌측)입니다.
.....‘야긴’의 뜻은 ‘저가 세우리라’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하신다는 뜻이며, 영구한 안정, 정립(定立)의 뜻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 만에 안정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것은 솔로몬 성전의 안정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신약시대의 교회운동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반석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영원한 승리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8). 그것은 영원한 주님의 십자가 기둥으로 세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사람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마침내 그 교회는 영원한 천상교회, 즉 하늘나라의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아스’의 뜻은 ‘그 안에 능력이 있다’로,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는 말입니다(시 18:1-2,32).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능력, 말씀의 권세를 받아야 죄악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힘이시요 힘의 근원이십니다. 창조의 힘, 통치의 힘, 구원의 힘, 심판의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2.  모압 여인 룻(일편단심, 일심의, 충성스럽고 신실한, 마음 알아주는, 친밀한 우정의 평생 친구)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그늘막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 마음 정한바)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내가 그녀를 그리 대하노니, 너그러이 친절하게 대하고 존귀히 여겨)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

[KJV]제2장

1.  And Naomi had a kinsman of her husband's, a mighty man of wealth, of the family of Elimelech; and his name was Boaz.

2.  And Ruth the Moabitess said unto Naomi, Let me now go to the field, and glean ears of corn after him in whose sight I shall find grace. And she said unto her, Go, my daughter.

3.  And she went, and came, and gleaned in the field after the reapers: and her hap was to light on a part of the field belonging unto Boaz, who was of the kindred of Elimelech.

4.  And, behold, Boaz came from Bethlehem, and said unto the reapers, The LORD be with you. And they answered him, The LORD bless thee.

5.  Then said Boaz unto his servant that was set over the reapers, Whose damsel is this?

6.  And the servant that was set over the reapers answered and said, It is the Moabitish damsel that came back with Naomi out of the country of Moab:

7.  And she said, I pray you, let me glean and gather after the reapers among the sheaves: so she came, and hath continued even from the morning until now, that she tarried a little in the house.

8.  Then said Boaz unto Ruth, Hearest thou not, my daughter? Go not to glean in another field, neither go from hence, but abide here fast by my maidens:

9.  Let thine eyes be on the field that they do reap, and go thou after them: have I not charged the young men that they shall not touch thee? and when thou art athirst, go unto the vessels, and drink of that which the young men have drawn.

10.  Then she fell on her face, and bowed herself to the ground, and said unto him, Why have I found grace in thine eyes, that thou shouldest take knowledge of me, seeing I am a stranger?

11.  And Boaz answered and said unto her, It hath fully been showed me, all that thou hast done unto thy mother in law since the death of thine husband: and how thou hast left thy father and thy mother, and the land of thy nativity, and art come unto a people which thou knewest not heretofore.

12.  The LORD recompense thy work, and a full reward be given thee of the LORD God of Israel, under whose wings thou art come to trust.

13.  Then she said, Let me find favor in thy sight, my lord; for that thou hast comforted me, and for that thou hast spoken friendly unto thine handmaid, though I be not like unto one of thine handmaidens.

14.  And Boaz said unto her, At mealtime come thou hither, and eat of the bread, and dip thy morsel in the vinegar. And she sat beside the reapers: and he reached her parched corn, and she did eat, and was sufficed, and left.

15.  And when she was risen up to glean, Boaz commanded his young men, saying, Let her glean even among the sheaves, and reproach her not:

16.  And let fall also some of the handfuls of purpose for her, and leave them, that she may glean them, and rebuke her not.

17.  So she gleaned in the field until even, and beat out that she had gleaned: and it was about an ephah of barley.

18.  And she took it up, and went into the city: and her mother in law saw what she had gleaned: and she brought forth, and gave to her that she had reserved after she was sufficed.

19.  And her mother in law said unto her, Where hast thou gleaned to day? and where wroughtest thou? blessed be he that did take knowledge of thee. And she showed her mother in law with whom she had wrought, and said, The man's name with whom I wrought to day is Boaz.

20.  And Naomi said unto her daughter in law, Blessed be he of the LORD, who hath not left off his kindness to the living and to the dead. And Naomi said unto her, The man is near of kin unto us, one of our next kinsmen.

21.  And Ruth the Moabitess said, He said unto me also, Thou shalt keep fast by my young men, until they have ended all my harvest.

22.  And Naomi said unto Ruth her daughter in law, It is good, my daughter, that thou go out with his maidens, that they meet thee not in any other field.

23.  So she kept fast by the maidens of Boaz to glean unto the end of barley harvest and of wheat harvest; and dwelt with her mother in law.

-----

Ruth 2...Amplified Bible

===Ruth Gleans in Boaz’ Field

1 Now Naomi had a relative of her husband, a man of great wealth and influence, from the family of Elimelech, whose name was Boaz. 

2 And Ruth the Moabitess said to Naomi, “Please let me go to the field and [a]glean among the ears of grain after one [of the reapers] in whose sight I may find favor.” Naomi said to her, “Go, my daughter.” 

3 So Ruth went and picked up the leftover grain in a field after the reapers; and she happened to stop at the plot of land belonging to Boaz, who was of the family of Elimelech. 

4 It was then that Boaz came back from Bethlehem and said to the reapers, “The Lord be with you!” And they answered him, “The Lord bless you!” 

5 Then Boaz said to his servant who was in charge of the reapers, “Whose young woman is this?” 

6 The servant in charge of the reapers answered, “She is the young Moabite woman who came back with Naomi from the country of Moab. 

7 And she said, ‘Please let me glean and gather after the reapers among the [b]sheaves.’ So she came and has continued [gathering grain] from early morning until now, except when she sat [resting] for a little while in the [field] house.”

8 Then Boaz said to Ruth, “Listen carefully, my daughter. Do not go to glean in another field or leave this one, but stay here close by my maids. 

9 Watch which field they reap, and follow behind them. I have commanded the servants not to touch you. And when you are thirsty, go to the [water] jars and drink from what the servants draw.” 

10 Then she kneeled face downward, bowing to the ground, and said to him, “Why have I found favor in your eyes that you should notice me, when I am a foreigner?” 

11 Boaz answered her, “I have been made fully aware of everything that you have done for your mother-in-law since the death of your husband, and how you have left your father and mother and the land of your birth, and have come to a people that you did not know before. 

12 May the Lord repay you for your kindness, and may your reward be full from the Lord, the God of Israel, under whose wings you have come to take refuge.” 

13 Then she said, “Let me find favor in your sight, my lord, for you have comforted me and have spoken kindly to your maidservant, though I am not as one of your maidservants.”

14 At mealtime Boaz said to her, “Come over here and eat some bread and dip your bread in the vinegar.” So she sat beside the reapers; and he served her roasted grain, and she ate until she was satisfied and she had some left [for Naomi]. 

15 When she got up to glean, Boaz ordered his servants, “Let her glean even among the sheaves, and do not insult her. 

16 Also you shall purposely pull out for her some stalks [of grain] from the sheaves and leave them so that she may collect them, and do not rebuke her.”

17 So she gleaned in the field until evening. Then she beat out what she had gleaned, and it was about an [c]ephah of barley. 

18 She picked it up and went into the city, and her mother-in-law saw what she had gleaned. Ruth also took out and gave to Naomi what she had saved after she [had eaten and] was satisfied. 

19 Her mother-in-law said to her, “Where did you glean today? Where did you work? Blessed be the man who took notice of you.” So she told her mother-in-law with whom she had worked and said, “The name of the man with whom I worked today is Boaz.” 

20 Naomi said to her daughter-in-law, “May he be blessed of the Lord who has not ceased His kindness to the living and to the dead.” Again Naomi said to her, “The man is one of our closest relatives, one who has the right to [d]redeem us.” 

21 Then Ruth the Moabitess said, “He also said to me, ‘Stay close to my servants until they have harvested my entire crop.’” 

22 Naomi said to Ruth, “It is good, my daughter, for you to go out [to work] with his maids, so that others do not assault you in another field.” 

23 So she stayed close to the maids of Boaz, gleaning until the end of the barley and wheat harvests. And she lived with her mother-in-law.

===Footnotes

Ruth 2:2 Gleaning was a right granted to the poor and to strangers by God—a kind of divinely-appointed welfare system. Farmers were instructed not to glean their fields or vineyards, that is, not to collect the excess stalks of grain or grapes left over by reapers, and not to have the extremities of their fields reaped (Lev 19:9, 10).

Ruth 2:7 I.e. bundles of stalks bound together for transport to the threshing floor where the grain would be separated.

Ruth 2:17 This was about one bushel, enough food for several days. 

Ruth 2:20 According to OT law (Lev 25:25), if an Israelite became so impoverished that he sold his property, his closest relative was to buy it back, so that the land would remain within the family. Such a person was called a redeemer. Another law stated that if a married man died childless, his brother was obligated to marry his widow and raise a son in the deceased brother’s name, so that the name would be carried on in Israel (Deut 25:5-10; cf Gen 38:8-10). Being aware of these laws and their applications by the scholars of that time, Naomi conceived of a plan (see ch 3:1-4) that might bring Ruth and Boaz together by having Boaz serve as a redeemer both to purchase a field that Naomi owned, and to fulfill the obligation of Deut 25:5 ff by marrying Ruth.

=======

=========

룻기 2장 (개요)

성경 중에서 이 부분처럼, 보잘것없는 인물과 하찮은 일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곳은 또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혈통과 그 조상들을 알리기 위한 준비였다. 룻은 그리스도에게 시집 가는 이방 교회의 신부들을 상징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사 54:1). 이 사실 때문에 룻의 이야기가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여기 나오는 많은 구절은 교훈적이고 매우 가치 있는 것들이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1. 곡식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의 겸손과 근면, 그리고 그녀를 보아스의 밭으로 이끌어 간 하나님의 섭리(1-3).

2. 여러 가지 모습으로 룻에게 커다란 호의를 보낸 보아스(4-16).

3. 시어머니에게 돌아온 룻(18-23).

---------

보아스의 밭으로 간 룻(룻 2:1-3)

나오미는 이제 그녀의 옛 친구들이 살고 있는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Ⅰ. 그녀의 부유한 친족 중에 보아스라는 유력한 자(1절)가 있었다. 

시리아역은 이 구절을 “율법에 있어서의 유력자”라고 해석하고 있다. 만일 보아스가 재물과 성경에 있어 다같이 유력한 자라면, 그것은 가장 귀하고 훌륭한 결합이었다. 그런 자야말로 참으로 유력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아스는 광야에 있을 때 유다 지파의 한 방백이었던 나손의 손자였고, 여리고의 기생 라합에게서 나온 살몬의(아마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보아스, 곧 그 안에 힘이 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 몰락되어 비천해진 엘리멜렉의 가문에 속한 자였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보아스는 위대하고 부유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가난한 친족들을 갖고 있었다. 

모든 나뭇가지가 다 꼭대기 가지가 될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비천해 보잘것없는 친족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되며, 이들에게 거만하거나 경멸을 품거나 이들을 부당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나오미는 가난하고 비천한 과부이긴 했지만 부유한 친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뽐내지도 않았고, 그에게 부담을 끼치지도 않았으며, 고통을 당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자기들은 가난하나 부유한 친척을 가진 자들은, 서로 다르게 하시는 것이(우리는 그것을 묵인해야 한다) 현명하신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친족을 가진 것을 뽐내는 것은 커다란 죄이며, 그들을 의지하는 것은 크게 어리석은 일이다.

Ⅱ. 나오미에게는 룻이라는 가엾은 며느리가 있었다.

1. 룻의 형편은 매우 비천하고 가난했다. 

그것이 유대교인으로 개종한 이 젊은 여자의 믿음과 지조에 큰 시련을 주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나오미와 그 며느리를 좋은 집으로 초대했다면 좋았을 것이다(그것은 나이 많은 과부 나오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이 새로운 개종자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진미를 맛보기는커녕 이들은 필요한 식량을 얻기 위해 보이는 대로 이삭 같은 것들을 주워야 했으며, 이것마저 없다면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유의하자(약 2:5). 그러나 비록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다 하더라도 그들은 계속 가난하기가 일쑤다.

2. 이런 형편에 처했으면서도 룻의 성품은 매우 착했다(2절).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여기서는 궁핍해 살아갈 수가 없으니 나로 하여금 모압 땅에 다시 돌아가게 하옵소서. 여기에는 식량이 없으나 나의 아버지의 집에는 식량이 풍족히 있나이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룻은 “나온 바 본향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히 11:15).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이 바로 돌아가기에 알맞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녀의 하나님이었으며 비록 하나님이 룻을 죽인다 하더라도 그녀는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고, 결코 그 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요청이란 단지 “나도 밭에 가서 이삭을 줍게 하옵소서” 하는 것뿐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라난 자라도 나중에는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는지 또 식량을 얻기 위해 어떤 천한 일을 하게 될는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애 4:5). 이렇게 우울한 상황에 처할 때에는 룻을 생각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본을 보였다.

(1) 겸손의 본. 

하나님이 그녀를 빈곤하게 했을 때, 룻은 “구걸하면서 이삭 줍는 것이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비천한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녀의 운명에 순응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굽히고 구걸하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룻은 그렇지 않았다. 룻은 자기가 비천하게 자라나지 않았다는 말을 시어머니에게는 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천하게 키워지지 않았지만 이제 그녀는 초라한 형편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나오미의 훈계 때문이 아니라, 룻 자신의 마음이 그랬기 때문이다. 젊은이에게 있어서 겸손은 가장 찬란한 장신구이며, 가장 좋은 전조라 할 수 있다. 룻을 영예롭게 한 것은 바로 이 겸손이었다. 이삭을 주우러 가려던 그녀가 얼마나 겸손한 말을 하고 있는지 주시해 보자.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룻은 “내가 가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그러나 아무도 내 자유를 막지 못할 것이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누군가 내게 이삭 주울 자유를 허락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내가 나아가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빚을 독촉하듯이 남에게 친절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겸손하게 요구해야 한다. 또 극히 작은 친절이라도 그것을 호의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간청하는 것이 좋다.

(2) 근면의 본. 

그래서 그녀는 나오미에게 “내가 이 마을의 처녀들을 만나러 가게 해 주옵소서. 아니면 들에 나가 맑은 공기를 즐겁게 마시게 해 주옵소서. 나는 온종일 찌푸린 얼굴로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을 수 없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룻이 원하는 것은 오락이 아니라 일이었다. “나로 가서 이삭을 줍게 하옵소서.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겠나이다”라는 것이었다. 룻은 정숙한 여자라 놀고먹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고하는 것을 즐겼다. 이것은 젊은 사람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젊은이는 늙기 전에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해야”(전 9:10) 한다. 부지런한 성품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저 세상을 위해서도 좋은 징조가 된다. 잠자는 것이나 오락이나 빈둥거리는 것을 삼가고 오직 일을 사랑하라. 이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비록 천한 직업일지라도 정직하게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떤 일도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죄악은 우리가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은 어떤 것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3) 시어머니를 존경하는 본. 

비록 나오미는 그녀의 시어머니였지만, 이제 그녀의 남편은 죽었으므로 아내의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따라서 시어머니에 대한 의무도 또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룻은 충성스럽게 나오미를 보살폈다. 룻은 나오미에게 알리지 않거나 허락받지 않고 외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젊은이는 그의 부모와 어른에게 존경심을 가져야 하며, 이것이 마땅히 그들에게 표해야 할 공경이다. 룻은 “어머니, 만일 어머니가 나와 함께 간다면 나도 이삭 주우러 가겠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어머니는 집에서 쉬시옵소서. 제가 가서 일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일해야 한다(Juniore ad labores). 젊은이는 나이 든 사람들의 충고를 들어야 하며, 그들을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

(4)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본. 

이것은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라는 룻의 말에 나타나 있다. 룻은 어디에 가야 할지 또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울 사람을 보내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선한 생각을 늘 갖도록 노력해야 하며, 우리가 올바로 한 그것은 우리를 도우리라는 것을 항상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룻에게도 도움을 주셨다. 그래서 안내자나 동행인 없이 룻이 홀로 이삭 주우러 나갔을 때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3절). 그녀에게 이것은 우연한 일 같았다. 그녀는 이 밭이 누구의 것인지 몰랐고, 다른 사람들보다 유별난 목적을 갖고 그 곳에 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에 우연히라는 단어를 넣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이 밭으로 인도해 주셨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까지 지혜롭게 명령하신다. 전혀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의 선함을 나타내는 데 이바지한다. 우리에게는 우연인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섭리가 계획해 일어나게 하신 작은 일로부터 많은 중대한 일이 발생한다.

=======

이삭을 줍는 룻(룻 2:4-16)

이제 보아스 자신이 마차를 타고 와서 그의 하인과 이 초라한 이방인에게 품위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Ⅰ. 익은 곡식을 추수하기 위해 고용된 보아스의 하인들에게 보아스가 찾아왔다. 

추수할 때는 분주한 시기로 많은 일손들이 필요하다.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유력자 보아스에게는 할 일이 많았고, 따라서 많은 하인이 필요했으며 그들의 생활을 돌봐야 했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 5:11). 보아스는 여기서 훌륭한 주인의 한 본을 보인다.

1. 보아스에게는 곡식을 베는 일꾼들을 거느린 한 사환이 있었다(6절). 

큰 집안에서는 하인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그는 하인들의 일과 식량을 분배해 주어야 한다. 교역자들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사환과 같은 종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슬기롭고도 충성스러워야 하며, 여기 나오는 사환처럼 주님께 모든 일들을 고해야 한다(6절).

2. 그러나 보아스는 직접 곡식을 베는 일꾼들에게 왔다. 

얼마나 일이 진전되었는지를 살피려고 온 것이다. 만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다시 명령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유익한 일이었다(자기의 일을 전적으로 남에게 맡기는 자들은 일을 절반도 제대로 못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꾼들에게 격려가 되는 일이었다. 그 종들은 주인이 찾아와 자기들을 돌보는 것을 보게 될 때, 더욱 흥겹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안한 생활을 하는 주인들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인들의 노고와 이들에게 짊어지워진 짐과 고통을 생각해 주어야 한다.

3. 보아스와 그의 추수꾼들은 친절하고 경건한 인사를 나누었다.

(1) 보아스는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인사했으며, 그들은 보아스에게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4절) 하고 답례했다.

① 이들은 서로를 존경해 주었다. 

보아스는 이들을 좋은 하인으로 생각했으며, 이들은 보아스를 훌륭한 주인으로 섬겼다. 보아스가 그들에게 왔을 때, 그는 단지 그들의 잘못이나 들추어내고 자기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들을 꾸짖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셔서, 너희들을 번성케 하고 너희에게 건강과 힘이 깃들고 여호와께서 너희들을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을 듣고서, 이들은 주인의 눈을 피하는 못된 종들이 하듯이 그 주인에게 저주의 욕설을 하지 않고 정중한 경의를 표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복 주시어, 우리들의 노동이 당신의 번성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인과 하인들 사이에 좋은 유대가 이루어지면 그 집안의 일들은 모두 잘 될 것이다.

② 이들은 합심해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줌으로써 그들의 친절을 나타냈다. 이들은 서로 상대방에게 정중히 대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동정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사 베풀어 주시는 그 모든 축복─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값있게 소망한 가장 귀한 것이다─을 감사했다.

(2)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의를 친구들에게 말해 주는 정중한 인사.

② 이처럼 짧은 기도 속에서도,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하는 경건한 간구. 

이것이 하나의 형식에만 그쳐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출 20:7)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리들의 마음이 진지하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비와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추수꾼들에게 이런 축복을 기원하는 것은 평상적인 관습이었던 것 같다(시 129:7, 8).

4. 보아스는 추수꾼들 가운데서 한 낯선 여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사환으로부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에게 건드리지 말고(9절) 꾸짖지도 말라(15절)는 지시를 내렸다. 주인은 종들을 괴롭히지 않아야 될 뿐 아니라 종들이 또 다른 종들이나 남을 해치지 않도록 살피고 돌보아야 한다. 보아스는 그의 종들이 그녀에게 친절히 대하도록 명했으며,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도록 했다. 주인이 곡식을 허비하는 종을 꾸짖고 제재하는 것이 타당하나, 보아스는 오히려 그런 제재를 풀고 그들이 자비를 베풀 것을 신중하게 명령했다.

Ⅱ. 보아스는 사환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룻에게 매우 친절히 대했으며, 그녀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마음을 움직여 이런 일을 행하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곡식 베는 자들 가까이에 왔을 때, 그들 사이에 이 낯선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고, 사환으로부터 그녀가 누구라는 것을 들었다. 

여기에 그녀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1. 사환은 보아스에게 그녀의 훌륭한 태도를 들려주었고,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기를 부탁했다(6, 7절).

(1) 타국인인 룻은 하나님의 율법에 적힌 “추수기에 이삭을” 주울 수 있는 자(레 19:9, 10) 중의 하나였다. 룻은 모압 여자였다.

(2) 룻은 보아스의 집안과 관련이 있었다. 즉 그녀는 나오미와 함께 왔는데, 나오미는 보아스의 친족 엘리멜렉의 아내였다.

(3) 룻은 모압 땅을 떠나 이스라엘 땅에서 살려고 왔으므로 개종자였다.

(4) 룻은 매우 정숙한 여자였다. 허락을 받고 나서야 이삭을 주웠다.

(5) 룻은 아침부터 이제껏 줄곧 이삭을 주울 정도로 부지런했다. 가난하지만 부지런하며 노력을 아끼지 않는 자는 당연히 위로를 받아야 한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낮에 룻은 집이나 들판에 세워 둔 조그마한 오두막집에 들어가 잠시 머물렀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기도를 드리려 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짧은 휴식 이외에는 곧 일하러 돌아와 비록 전에 해 보지 않던 일이었지만 온종일 열심히 이삭을 주웠다. 종들을 감독하는 사람은 그의 주인에게 올바르게 상세히 보고해야 하며, 그가 잘못 보고해 어떤 종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사환으로부터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은 보아스는 그녀에게 매우 친절히 대했다.

(1) 그는 그녀에게 일꾼들이 베는 밭을 따라 이삭을 줍고, 다른 집의 밭에 가도 별 유익이 없으니 그의 밭에서 계속 있을 것을 지시했다.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8절). 소년들보다는 소녀들이 그녀에게는 더 적합한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 그는 종들이 그녀에게 친절과 존경으로 대해 줄 것을 명했는데, 물론 주인의 친절을 본 그의 종들은 그녀에게 그렇게 행했을 것이다. 

룻이 타국인이었으므로 말이나 의복, 태도 등이 아마 그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3) 보아스는 그의 종들에게 베풀었던 대우를 그녀에게도 기꺼이 해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종들이 길어 온 물을 마시게 했는데 아마도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저 유명한 우물(이것은 다윗도 동경하던 우물이다. 삼하 23:15)에서 길어 온 음료수를 말하는 것 같다(9절). 그리고 “식사할 때에는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라”(14절) 하며 그녀를 맛있는 음식에도 초대했다. 맛을 돋우기 위해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과 함께 풍미를 돋울 수 있도록, 즉 필수적인 것으로뿐만 아니라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음식을 주신 것이다. 보아스는 룻을 격려하기 위해, 또 그의 종들이 그의 명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 곡식을 베는 자들이 식사를 할 때에 직접 자기도 참석해 “볶은 곡식을 그녀에게 주어” 먹도록 했다.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미는 것”(잠 31:20)과 가난한 자를 위해 일하는 것은 지위 높은 자의 불명예가 되지 않는다. 보아스는 그의 종들에게 인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먹고 낯선 사람까지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주었다는 점을 주목하자. 이처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다”(잠 11:24).

(4) 보아스는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들은 바 있는 룻의 시어머니를 룻이 극진히 모시는 것을 알고 그녀를 칭찬했다.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11절). 

행실이 바른 자는 칭찬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을 특별히 칭찬한 것은 그녀가 자기 나라를 떠나와 유대의 신앙으로 귀의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시리아역은 다음과 같이 풀이해 놓고 있다. “네가 와서 개종을 하고 알지 못하던 백성들과 함께 사는도다.” 

참된 신앙을 갖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들은 갑절의 영예를 받기에 합당하다.

(5) 보아스는 룻을 위해 기도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노라”(12절). 

타국인이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강한 애착을 품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룻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시어, 보아스로부터 보응을 받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날개 밑에 거해 그 은총 안에서 확신과 만족을 얻는 자들은 그것에 대한 충분한 상급을 분명히 받으리라. 이런 표현법을 빌려서 유대인들은 개종자들을 “주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 모이는 자들”이라고 일컫고 있다.

(6) 보아스는 룻이 이삭을 줍는 것을 격려했으며 그 곳을 떠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우리가 가난한 친족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친절은 그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돕고 격려하는 것이다. 보아스는 룻이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고 그 곳에서는 룻 이외에 아무도 줍지 못하게 하라고 그의 종들에게 명령했으며, 줍도록 한 양보다 더 많이 주웠다고 그녀를 의심하거나 도둑이라고 불러 책망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15절). 이 모든 것들을 볼 때 보아스는 타국 사람을 이해해 주는 관대한 마음을 지닌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룻은 그의 호의를 매우 겸손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였으며, 보아스와 마찬가지로 그 곳에서 매우 예의 바르게 행했다. 

그러나 이제 곡식을 줍는 밭에서 그녀가 여주인이 되었다는 생각은 잠시라도 결코 갖지 않았다.

(1) 룻은 이 나라의 관습대로 보아스에게 큰 경의와 존경을 표했다.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10절). 훌륭한 예의범절은 믿음을 더욱 빛나게 하며, 우리는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 한다(롬 13:7).

(2) 룻은 자기가 보아스의 총애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노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이방 여인으로(10절),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옵니다(13절). 그리하여 변변히 입지도 못하였고 가르침을 잘 받지 못하였으며 그리 단정하지도 또 손재간이 있지도 못하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게 평가해야 하며, 우리들에게 부족한 점이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3) 룻은 보아스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비록 그것이 보아스에게 힘든 일이 아니었고, 단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것뿐이었지만 룻은 그것을 찬미하고 우러렀다.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나이까?”(10절)

(4) 룻은 그의 호의가 지속될 것을 요청했다.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13절). 

그리고 룻은 보아스가 그녀에게 한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위대한 사람이나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못한 사람들을 친절히 보살피고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모른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때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5) 보아스가 룻에게 곡식 베는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도록 했을 때, 룻은 먹을 만큼만 먹은 후 일하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14, 15절). 

룻은 궁핍을 가장하기 위해 지나치게 먹지도 않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척하기 위해 억지로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았다. 절제는 근면의 좋은 친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원활히 하기 위해 알맞게 먹고 마셔야 하며, 부적당하게 먹어 우리의 건강을 해쳐서는 안 된다.

=======

시어머니에게 보고한 룻(룻 2:17-23)

Ⅰ. 이제 룻은 하루의 일을 끝냈다(17절).

1. 룻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저녁때까지 열심히 이삭을 주웠기 때문이다. 

적당한 시기에 거두어들여야 하므로 우리는 열심히 일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룻은 오랫동안 앉아 쉬거나 저녁이 되기 전에 집으로 가 버리지 않았다. “때가 아직 낮이매 우리를 보내신 자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 9:4). 룻은 보아스의 친절을 결코 그릇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보아스가 그의 종들에게 명해 그녀를 위해 한줌씩 떨어뜨려 주도록 했지만 그녀는 계속 흩어져 있는 이삭들을 주웠다.

2. 룻은 주워 모은 것들을 흘리지 않도록 조심했고, 그것들을 그녀 자신이 타작해 집으로 쉽게 날랐으며, 곧 그것으로 식사를 마련했다.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며” 이득을 취할 수가 없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 12:27). 

룻은 이삭을 하나씩 하나씩 주웠으나 그것을 다 모았을 때는 한 에바로 약 20되 정도가 되었다.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 모든 노력, 곡식 줍는 일에도 이득이 따른다는 것은 근면한 자에게 격려가 된다. 그러나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 14:23). 룻은 할 수 있는 만큼 알맞게 이삭을 주워서 자기가 직접 성으로 날랐다. 아마 보아스의 한 하인에게 부탁했더라도 기꺼이 날라 주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룻은 그녀가 주운 이삭들을 가지고 성읍으로 돌아왔을 때 자기가 한 일이 힘들거나 천박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오히려 열심히 일해 얻은 것을 기뻐하며 그것을 잘 간수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자(요이 8).

Ⅱ.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를 존경했으므로 일이 끝난 후 보아스의 종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달려와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였다. 

이것을 보고 나오미는 룻이 열심히 일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1. 룻은 보아스가 그녀에게 베풀어 준 훌륭한 식사에서 남긴 것으로 시어머니를 대접했다. 

즉 룻은 그녀가 배불리 먹은 후 남은 것을(14절) 나오미에게 주었다(18절). 룻은 이보다 더 귀중한 어떤 것이 있었더라도 기꺼이 시어머니와 나누어 가졌을 것이다. 이렇게 밖에서 근면한 룻은 집에서는 효성이 지극했다. 이처럼 자식들은 그들의 부모를 공경해야 하며(딤전 5:4), 이것이 그들이 행해야 할 제5계명이다(마 15:6).

2. 룻은 나오미에게 그 날 있었던 일과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은총을 내리셔서 그녀를 어떻게 즐겁게 해 주셨는지를 이야기했다. 

의인이 주운 이삭은 많은 악인들의 수확보다 더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1) 나오미는 룻에게 오늘 어디에서 일했는지를 물었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부모는 자녀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들이 어떤 친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의 방종을 막고 그들 자신이나 부모에게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우리가 형제를 지키는 자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자식들을 지켜야 하는 자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다윗 왕의 한 아들 아도니야가 유례없던 한 악한 자식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를 잘 살피되, 그들을 무섭게 하거나 위축당하게 하여 집을 싫어하고 거짓말을 하게끔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들이 잘 했을 때는 칭찬해 주고 그렇지 못했을 때에는 부드럽게 주의를 주어 고치도록 해야 한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좋다. “오늘 어디서 내가 주웠는가? 내가 내 지식과 은혜를 얼마나 올바르게 활용했는가? 내가 행하고 얻은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

(2) 룻은 보아스가 그녀에게 베푼 친절을 나오미에게 상세히 알려 주었다(19절). 

그리고 추수기 동안 계속 그의 종들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 준 보아스의 호의를 희망에 차서 들려주었다(21절). 아이들은 부모나 어른들이 그들을 돌보아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부모들에게 꾸지람 듣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선행을 행하도록” 하라.

룻은 보아스의 친절과 그에 대한 감사함을 나오미에게 이야기했으나, 보아스가 룻을 칭찬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11절). 겸손한 마음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게 한다.

(3) 이제 나오미가 한 말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나오미는 그녀의 며느리에게 은혜를 베푼 자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에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렸다(19절).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고, 즉시 기도의 화살을 던졌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를 알았을 때 나오미는 다음과 같이 축복했다.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20절). 가난한 자는 그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자들을 위해 보답할 수 없을 때 기도로 보답해야 한다. 곤경에 처한 자는 그들에게 활기를 불어 준 자들을 축복하자(욥 29:13; 31:20). 불쌍한 자가 그를 억압하는 자에게 외치는 울음을 들은 사람은(출 22:27) 이 불쌍한 자가 은인을 위해 기도하는 소리도 들을 것이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전에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이전에 베푼 호의를 잊은 것같이 보이는 자들에게도 변함없이 친절히 행한다면, 죽어 매장된 것같이 보이던 일까지도 기억나게 될 것이다.

②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가 그들의 가족과 친족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도다.” 

나오미는 오랫동안 모압 지방에 있었으므로 하나님이 그 분의 섭리로 그녀에게 생각나게 할 때까지, 이스라엘 땅에 그녀의 친족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사실이 젊은 개종자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었지만 나오미는 룻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겸손한 나오미와는 달리, 비록 자기들은 망했을지라도 훌륭한 친족을 가진 것을 뽐내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시어 룻에게 목적하신 일을 행하신 것을 관찰해 보라. 룻이 그녀에게 친절했던 사람이 보아스라는 것을 말했을 때에야 나오미는 비로소 보아스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로다.” 

계속 나오미는 말했다. “그는 우리의 기업을 무를 자이므로, 저당한 우리의 재산을 찾아줄 권리가 있으니 우리가 그의 친절을 좀더 기대할 수 있도다. 그는 모든 베들레헴 사람 가운데서 우리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도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어떤 일을 갑자기 생각나게 하시어, 그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가 되게 하신다.

③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의 밭에서 계속 일할 것을 명했다(22절).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다른 밭에 가 일하는 것은 곧 그의 친절을 경멸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거룩한 구주도 우리의 대속자(기업을 무를 자)이시다. 그 분은 우리를 대신해 값을 치를 권한이 있는 분이다. 우리가 그 분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그 분과 그 분이 소유한 밭, 그리고 그 분의 집을 좀더 가까이하자. 그 분의 소유가 아닌 곳이나 밭에는 가지 말고 우리를 격려해 주고자 하는 그 분을 따르자. 주께서 우리를 너그러이 대해 주시지 않았느냐? 다른 사람 밭에 들어가지 말고 피조물 속에서 결코 우리의 행복이나 만족을 찾으려 하지 않도록 하자. 상인들도 그의 가게에 책을 사러온 사람이 다른 책방으로 가는 것을 언짢게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면, 그 은혜를 잃게 된다. 나오미가 룻에게 말없이 책망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룻은 보아스가 그녀에게 그의 소년들과 가까이 있으라고 했다는 것을 말했다(21절). 

이에 대해 나오미는 이렇게 말했다(22절). “아니니라.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는 것이 좋으니라. 소녀들이 너에게는 그 젊은 남자들보다는 더 적합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니라.” 그러나 소녀들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룻은 그 젊은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보아스의 주요한 일꾼들이요, 그가 이들에게 그녀를 잘 대해 줄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룻이 소년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 그녀에게 적합한 소녀들과도 사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룻은 충성스럽게 나오미의 지시대로 행했으며, 보리 추수뿐만 아니라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계속 이삭을 주워 겨울 동안까지라도 먹을 수 있을 양식을 모았다(잠 6:6-8). 룻은 또한 소녀들과 가까이 있었고 그들과 점차로 사귀었으며, 아마 이것은 그녀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23절). 룻은 정숙한 여자였으므로 항상 저녁 적당한 시기에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것은 즐거운 밤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다음 날 또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추수기가 끝났을 때는 패트릭 주교의 해석처럼, 룻은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항상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디나는 모압 처녀들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그녀의 허영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을 행했다. 

룻은 양식을 구하러 나가는 일 외에는 언제나 집에 있어 어머니를 도왔다. 우리는 이런 그녀의 겸손과 근면이 어떻게 축복받았는지를 뒤에 알게 될 것이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그 앞에는 명예가 있느니라(잠 22:29).

===호크마
=====2:1
친족 - 여기서 이 말은 원문상 흔히 '케티브(모음 부호를 붙이기 이전의 원문 그대로의 자음) 독법'(讀法)을 따라 '메우다'(* )로 읽는데, 그 뜻은 '잘 알고 있는(자)', '가까운(자)'라는 의미를 지닌다(시 55:13;88:8,18). 여기서는 특별히 기업 무를 의무를 가진 '혈족 관계'(kinship)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확실치는 않지만 유대전승에 의하면,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조카라 한다(Keil, Cassel).
유력한 자 - 이 말은 히브리어로 '이쉬 깁보르 하일'(* )인데, '깁보르'는 주로 '용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수 1:14;10:2;삼상 2:4). 그리고 '하일'은 '재산이 많은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며(신 33:11), '재물'을 의미하기도 한다(사 8:4). 뿐만 아니라 '현숙하거나 능력있는 사람'에게도 사용되었다(3:11). 따라서 본절에서 보아스(Boaz)를 유력한 자라고 칭한 것은 재물이 많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으며, 그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영역본들은 각각 '유력한 자산가'(a mighty man of wealth, KJV),'명망있는 유지'(a man of standing, NIV)등으로 번역했다.
보아즈(* ,Boaz) - 히브리 어근상 그 이름의 뜻이 분명치 않다. 따라서 (1)혹자는 '벤 아즈'(* )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힘센(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assel). (2)혹자는 '바아즈'(* )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며, 그 뜻은 곧 '민첩한(활동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eil). (3)그리고 혹자는 이 말의 어근을 산스크리트어(Sanskrit, 梵語)의 '부안티'(bhuvanti)에서 찾아, 그 뜻을 '복된(자)'로 보기도 한다(Raabe).
=====2:2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 동서 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추수기가 되면 가난한자들은 추수를 한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했다. 특별히 히브리 사회에서 모세 율법은 이러한 자들을 위해 밭이나 포도원, 그리고 감람원에서 추수하는자들로 하여금 밭의 가장 자리에 있는 농작물의 일부를 남겨놓도록 규정하고 있다(레19:9,10;23:22;신 24:19). 룻은 이러한 율법의 혜택과 관습을 좇아 자신과 시어머니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밭으로 나갔다.
뉘게 은혜를 입으면...이삭을 줍겠나이다 - 모세 율법은 분명 가난한 자의 생계를 보장키 위해 추수 후에 그 떨어진 이삭을 줍는자들의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레 19:9,10;23:22;신 24:19). 그러나 백성들은 그 규정을 무시했다. 즉 여호수아사후(死後)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과 번영을 누리게 되자,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견대로 사리 사욕을 취하는 사사 시대의 타락상을 연출했다. 따라서 당시 가난한 자들은 율법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밭주인의 냉대와 멸시를 받기 일쑤였고 심지어 이삭 줍는 일을 금지당하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모압 여인 룻(Ruth)으로서는 모압에 대한 이스라엘의 좋지 못한 감정을 고려할 때, 결코 이삭 줍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룻의 이 말은 이방인으로서의 당할지도 모를 온갖 어려움과 냉대를 감수하고, 또한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하루종일 허기를 참아가며 일해야 할 육체적인 고통을 기꺼히 감수하고 '내가 누군가의 눈에서 호의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in whose eyes I shall find favor) 그를 좇아 열심히 이삭을 줍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지극한 효성이 구체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로써 룻은 신실한 신앙을 소유한 여인일 뿐 아니라(1:16,17),홀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현숙한 여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여인으로 부각된다.
=====2:3
베는 자를 따라...이삭을 줍는데 - 후대의 유대 랍비들은 '이삭 줍기'에 대해 나름대로의 규정을 정했다. 그중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즉 '만일 추수하는 자가 보리나 밀등을 벨 때 한 줄기나 두 줄기를 놓쳐버리면 그것은 이삭 줍는 자의 몫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줄기 이상 베지 않았다면 그것은 주인에게 다시금 돌려져야 했다'(Pulpit Commentary).
우연히...이르렀더라 -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 보아스의 밭으로 갔을 때, 그녀는 당시 그 밭의 주인에 대해서나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나 분명코 이것은 룻의 입장에서는 우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기회였다(Gillis Gerleman). 따라서 본서의 저자가 본절에서이 말을 한 것은 앞으로 발생되는 일이 인간의 계획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2:4
본절은 보아스와 그의 일꾼들간에 인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 히브리인들이 나누었던 인사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이웃의 안부를 물을 때(삼하 8:10;11:7;왕하 4:26) 혹은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나 헤어질 때(삼상1:17) '샬롬'이라는 인사말을 나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평강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가 축약된 인사로서, 히브리인들에게는 가장 보편적인 인사법이다. 그리고 이같은 인사말과 더불어 그들은 서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창27:26;출 18:7;삼상 20:41). (2)존경과 충성을 표시하는 인사로서 땅에 엎드려 절하는 방식(창 50:18;삼하 9:6;14:4;왕하 4:37;대하 20:18)과 무릎을 꿇어 절하는 방식(창42:6)이 있었다. 그런데 본절의 인사법은 이러한 관습적인 것과 퍽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즉 보아스는 자기 일꾼들에게 매우 자상하게 인사했으며, 일꾼들도 그에게 매우 친밀한 말로 화답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아스의 평소 신앙 인격을 잘 증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2:5
사환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 )는 '젊은 사람', '심부름꾼', '시종'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아르'는 '노예'나 '종'을 의미하는 '에베드'(* )와는 매우 다르다. 즉, '나아르'는 대체로 독립된 가정을 가지며, '에베드', 즉 '종'들을 관장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도 사용된다(삼하 9:9,10). 본절에서 사용된 '나아르'도 추수하는 일꾼들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아(6절), 단순한 종이나 사환이아니라 보아스의 가사를 책임맡은 감독관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이는 뉘 소녀냐 - 사실 룻은 그동안 유력한 엘리멜렉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유복하게 생활해 왔기 때문에, 여느 이삭 줍는 가난한 여인네와는 다른 고상한 기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룻은 훌륭한 신앙과 고매한 덕성을 지닌 현숙한 여인으로서 그 단정한 몸가짐으로 다소곳하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금방 보아스의 눈에 띄인 것 같다.
=====2:6
이는...모압 소녀인데 - 주인의 질문에 즉각 응하여 룻을 소개하는 사환의 대답을 볼 때, 그리고 룻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보아스가 한 말(11절)을 볼 때 당시 베들레헴 성내에서는 룻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것 같다. 더욱이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룻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과 시모(媤母)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고 있었던 것 같다.
=====2:7
잠시 집에서 쉰 외에 - 커버데일(Coverdale) 역에서는 본절을 '잠간 동안 집에 가곤 했던 것 외에'라고 하여 '집'이란 말이 성읍에 있는 나오미의 주택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본문에 사용된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아트'(* )는'집'이란 뜻 말고도 '임시적인 오두막', '장막', '움막'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룻이 점심 식사를 밭에서 한 것으로 보아(14절), 그녀가 쉰 곳은 성읍에 있는 집이 아니라 더위를 피하기 위해 임시로 지은 장막이나 오두막이었을 것이다(JamesMorison). 아무튼 본절에서 저자가 이러한 표현을 쓴 것은 그녀가 어디에서 쉬었느냐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룻이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2:8
내 딸아 들으라 - 이 한 마디 말 가운데서 우리는 보아스의 따뜻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그는 룻을 단순히 값싼 동정심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룻이 수치심이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매우 친밀한 말로 이야기를 건넸던 것이다. 한편 '내 딸아'(* , 빗티)라고 부르는 관습은 비단 자기 딸 뿐 아니라, 지체 높은 어른이 젊은 여인에게 이야기를 건넬 때나 충고를 할 때도 흔히 사용된다.
여기서...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 '나의 소녀들'이란 추수하는 자들의 바로 뒤를 따르면서 그 베어 놓은 줄기를 단으로 묶는 여인네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아마도 보아스는 어떤 특정한 위치를 룻에게 지정해 주면서 그 권리를 인정해 준 것 같은데, 바로 단 묶는 여인들 틈에서 마음껏 이삭을 줍도록 했던 것 같다.
=====2:9
소년들의 길어 온 것 -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물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그 지방에서는 우물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 발전되었다. 따라서 들로 일을 하러 갈때에는 성읍 우물에서 하루 종일 마실 물을 길어가야 했다. 그런데 들에 일을 하러 나오는 룻의 입장에서 볼 때 하루 종일 마실 물을 가져오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렇다고 소년들이 성읍까지 가서 애써 길어온 물을 마신다는 것은 이삭 줍는자의 처지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소년들이 힘들게 길어 온 물을 마실 수 있는 특권을 주었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때 소년들이 물을 길어 왔던 우물을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 중 마시기를 원했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삼하 23:14,15)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A.C.Hervey, Dean Stanley)
=====2:10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 전신을 땅에 엎드려 절하는 행동은 원래 하나님 앞에서(수 7:6;삿 13:20), 혹은 왕 앞에서(삼하 14:4,22) 취하던 자세였다. 그러나 단순히 아주 깊은 겸손을 표시하기 위해 그러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여기서 룻은 외모만을보고 판단하지 않는 보아스의 사려 깊은 인격에 대해 심심한 존경의 뜻을 표함과 아울러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여 깊은 겸손을 표했던 것이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 전통적으로 히브리인들은 이방인들을 천하게 여겼다. 
이같은 관습은 율법의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켰던데서 연유되었다(신 7:3). 
그러나 본질적으로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간의 결혼을 금지시킨 것은 종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함이 아니라, 종교적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즉 이방인과의 결혼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기 때문에'(왕상 11:1,2) 금지된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이 정신을 오해하여 나중에는 자기 동족인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후 앗수르인과 혼혈되자 그들(사마리아 사람들)과도 상종하지 않게 되엇다. 아무튼 여기서 룻도 아마 이러한 점을 의식하고서, 자신이 히브리인들이 천하게 여기는 이방 여인이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11
본절에 나타난 바, 우리는 존경받는 유력한 인물 보아스의 대답을 통해 룻의 두 가지 뛰어난 품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이란 말을 통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시모(媤母)를 극진히 받들어 섬기는 룻의 '효성'(孝誠)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란 말을 통해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향한 순수하고도 충직한 룻의 '신앙'(信仰)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룻이 복을 받아 머지않아 보아스(Boaz)의 아내가 되고, 후일 성군 다윗(David)의 증조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때문이었지만, 나아가 룻의 고결한 품성도 그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12
여호와께서...보응하시기를 원하며 -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일가 친척, 본토를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곧 "나는...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는 말을 연상케하는 보아스의 축복이다. 
실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온 이 이방 여인에게 보아스의 이 말은 큰 위로의 말이 되었을 것이다(13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이 명칭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에 언약을 맺은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여기서 보아스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율법을 통해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출 6:2;19:3;20:1-26).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 이 표현은 출 19:4과 신 32:11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즉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가 마치 어미 독수리가 그 넓고 강한 날개로 새끼를 안전하게 인도하고 보호해 주는 것과 같은 행위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보아스가 룻에게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룻이 언약의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그녀가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시 91:4). 보아스의 이 말은 앞에서 룻이 자신을 가리켜 '이방 여인'으로 말한 것(10절)에 대한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2:13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 - 룻은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란 말과 같이 자신에게는 최대의 비하와 겸손으로써, 그리고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란 말같이 보아스에게는 최고의 존경과 감사로써 자신이 받은 큰 위로와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즉 모압 땅을 떠나온 이래로, 이처럼 따뜻한 인정을느껴본 적이 없었던 룻은 그 무엇보다도 이방 여인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맞이해 주는보아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 어떤 호의 보다도 더욱 큰 힘과 위로 및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2:14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메츠'(* )는 포도주에서 난 '초'(민 6:3)를 의미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빵과 함께 식사할 때 양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근동 지방에서는 갈증을 푸는 음료로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Goslinga).
볶은 곡식 - 이것은 아직 덜 여문 밀을 모닥불 등에 살짝 볶은 것으로(레 2:14), 아직도 근동 지방에서는 빵에 곁들여 사용되거나 빵대신 주식으로 애용되기도 한다.
=====2:15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 여기서 '곡식 단 사이'(between the sheaves)란 말은 분명 곡식 단들을 세워 놓은 바깥과는 구별되는 말로서, 곧 곡식 줄기를 한웅큼씩 모아들인 소녀들이 크게 단(sheaf)으로 묶는 지점일 것이다(J.Morison). 따라서 그곳은 그 묶는 과정에서 자연히 곡식 이삭들이 주변에 많이 널려지는 곳이었다. 따라서 만일 여기서 룻이 이삭을 줍는다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충분한 양을 쉽게 모아들일 수 있었다.
=====2:16
뽑아 버려서 - 이 말을 좀더 정확히 옮기면 '떼어 내어서'가 된다. 즉 단을 묶을때 그 단에서 흘린 것처럼 떼어 내어 룻으로 하여금 그 곡식을 줍게 하라는 의미이다.특히 보아스의 이 말 속에는 룻이 곡식을 주울 때, 동정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 아무튼 일하는 소년들에게 내린 보아스의 이 지시는 분명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이나 긍휼의 정도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분명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의 효성과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고, 그로 인해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p.480).
=====2:17
그 주운 것을 떠니 - 아마도 룻은 그 주운 보리 이삭을 편편한 바닥이나 또는 멍석위에 올려 놓은 후 적당한 막대기나 돌로서 두들겨 떨었을 것이다.
한 에바 - '에바'(Ephah)는 구약 시대 부피의 단위로서 대략 23리터 즉 약 12되 정도의 분량이다. 이처럼 룻이 하루 동안 23리터 정도의 이삭을 주웠다는 것은 보아스가 그녀에게 보여 준 호의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즉 보아스는 룻에게 점심 식사를 줄 때, 그녀가 먹고 남을 만큼 풍족히 제공했을뿐 아니라(14절), 곡식 단을 묶을때 조금씩 흘리도록 함으로써 그녀가 풍성히 거둘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16절). 그러므로 룻은 이러한 보아스의 호의 때문에 넘치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2:18
보이고...드리매 - 이 한 구절 속에 시모에 대한 룻의 효성이 함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즉 룻은 자신을 보내놓고 걱정하시는 시모를 위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하루동안 한 일을 죄다 보여 드렸을 뿐 아니라, 또한 대접받은 음식을 자기만 배불리 먹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14절) 집에 홀로 있는 시모를 생각하여 정성껏 남겨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룻의 행동은 끝까지 시모를 공경하며 따르겠다고 약속한 것(1:16,17)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이라 볼 수 있다.
=====2:19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 연속되는 나오미의 질문 속에서 나오미의 궁금증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즉 나오미의 생각에 여인이 하루 동안 보리이삭을 한 에바 정도 줍는다는 것도 예사 일이 아닐뿐더러, 준비해 가지 않은 점심을 먹고 남겨 가져온다는 것도 누구의 호의를 입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오미는 젊은 과부인 룻의 신변이 염려되어 그녀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을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분명 오늘 룻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그 일의 자초 지종을 듣고 또한 알기 원했던 것이다. 이에 룻은 시모의 궁금증을 풀어 드리기 위해 그날 일어났던 일의 자초 지종을 예의 그 자상함으로 이야기 했을 것이다.
=====2:20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 여기서 '생존한 자'란 나오미와 룻을 가리키며, '사망한 자'란 모압 땅에서 죽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말한다. 그런데 본절에는 한 가지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즉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를 베푼 '그가' 곧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1)혹자는 본절의 주어 '그'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Keil, Goslinga). 이러한 주장은 사람이 '사망한 자'에게까지 은혜를 베풀 수 없기 때문이라는 추론에 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영역 성경 중 NIV와 Living Bible에서도 본 구절의 주어를 구체적으로 '하나님'으로 밝히고 있다. (2)그러나 혹자는 본절의 주어를 문장 그 자체에서 보여주는 대로 '보아스'로 주장한다(Matthew Henry, A.C.Hervey). 이 주장을 따라 본절을 해석해 보면, 나오미는 보아스가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이 살아있을 때에도 자신의 가정에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 살아 있는 자신들에게 베풀고 있는 보아스의 호의를 그때의 상황과 연결시켜 말했다는 의미가 된다. 결론적으로 무엇보다 여기서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好意)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접한 나오미가 보아스의 호의를 칭송하면서 그 호의를 강조하고자 이 말을 사용했다고 볼 때, 본절의 주어는 '보아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기업을 무를 자 - 이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엘'(* )은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그리고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고엘(Goel)이 된 자는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는데, 그것은 곧 (1)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했고(레 25:25,26), (2)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져야 했으며(민 35:12,19,21), (3)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代)를 이어주어야 함은 물론, 심지어 그 친족의 죄값을 대신 받기까지 했다(민 5:8). 
그리고 '고엘의 자격'으로서는 (1)혈연적 관계에 있을 것(신 25:5-7), (2)자원해야 할 것(3:13),(3)그리고 고엘로서의 능력을 구비할 것 등을 들 수 있다(레 25:25 주석 참조).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베들레헴성에서 유력한 자(2:1)이며, 친족에게 호의를 베풀 줄 아는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정의 고엘로서 가장 합당하였다<레 25:8-55 강해, 근족의 의무>
=====2:21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 보아스의 큰 호의에 룻 또한 감격하여 시모 나오미에게 보아스가 자신에게 베푼 호의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세히 말해준다.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 여기서는 보리 추수만을 의미하지 않고, 곧바로 이어지는 밀 추수 때까지를 의미한다(23절).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나 - 여기서 '소년들'(* , 네아림)은 비록 남성형으로 표기되었지만 엄밀히 '소녀들'과 구분하고자 그리 사용된 것은 아니다. 다만 룻으로 하여금 벼 베는 소년들 뒤를 따라가며 단을 묶는 소녀들 틈에서 추수기가 다 끝날 때까지 부담없이 이삭을 주우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8,22,23절).
=====2:22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 나오미의 이 말 속에는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정의 '고엘'이 될 자격이 있다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즉 앞절에서(21절) 룻이 보아스의 말(8절)을 나오미에게 전해 줄 때,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친족의 고엘이 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했고, 따라서 룻에게 다른 사람의 밭으로가서 보아스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을 삼가하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룻이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려다 자칫 거칠게 다루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2:23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 팔레스틴 지방에서 보리는 밀보다 먼저 익어서 대개 태양력으로 4월 중순경에 거둬들인다. 그리고 약 2주일 후에밀 추수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 내내 룻의 겸손하고 근면한 품행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것이고, 보아스는 이러한 룻의 행동을 계속해서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보아스와 룻의 관계가 점차로 무르익어 가서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Morison, Cassel).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 이 짧은 한 마디의 말은 곧 시모(媤母)에 대한 룻의 변함없는 효성을 암시해 준다. 즉 18절에서 보여지듯, 그 근면하고 순결한 성품으로 하루 일을 마친 다음 그날의 좋은 것들로 시모를 봉양하고, 아울러 시모에게 하루의 일과를 자상하게 이야기하는 등 물심 양면으로 시모를 편하게 받들어 모시는 룻의 한결같은 모습이 이 짧은 한 구절 속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
===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 룻2:1-3.(스데반 황)==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친히 인도하십니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베들레헴 땅의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믿음의 공동체가 너무나 그리운 나머지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이는 사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 앞에 내려놓고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주만 의지하며 나아가겠다는 철저한 순종의 의사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녀가 믿는 주 여호와 하나님을 호흡이 마치는 그 날까지 믿고 따르겠다는 룻의 고백을 듣고 룻을 데리고 함께 베들레헴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두 여인을 철저히 보살피기 시작하십니다. 
주의 보살핌은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시기까지 주관하는 섭리로 나타납니다. 
즉, 그들이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그 때는 초실절이었던 것입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 1:22).
초실절이 예표하는 바는 우리가 잘 알듯이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유월절이 지난 후 초실절에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가운데 나오미의 비참은 부활의 아침과 연결됩니다. 이는 나오미의 마라와 같은 자기 연민이 이제 곧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부활의 소망으로 이어지면서 믿음의 확신과 함께 영원한 나오미가 될 것을 전조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주의 뜻에 따르고자 할 때 하나님의 호의적인 섭리가 펼쳐집니다. 이때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인간의 계획을 훨씬 초월하는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진행됩니다.
두 과부가 베들레헴에 도착한 때가  “보리 추수 시작할 때”가 아니었다면 룻기의 기록은 대단히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실 룻기 전체는 “보리 추수 시작할 때”라는 배경 가운데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두 과부의 이사 시기를 섭리 가운데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두 과부가 도착하게 됨으로 인하여 “보리 추수”와 관련해서 사건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제 본문 1절을 보니 새로운 인물이 한 사람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보아스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라”(룻 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는 유력한 자였습니다. 여기서 유력하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이쉬 깁보르 하일)인데 깁보르는 일반적으로 용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일은 돈이 많고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보면, 용사, 부자, 그리고 영적으로 믿음이 강한 경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단어를 모세의 언약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한다면 보아스가 유력한 자였다라는 의미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재물에 있어서 매우 안정되어 컸고, 또한 사사 시대의 잦은 전쟁에서 매우 뛰어난 용사의 역할을 하였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두 과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시기적으로는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그들을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이주케 하신 것으로 나타났고 또한 베들레헴 에브랏에서는 유력한 자 보아스를 준비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역사와 모든 각 개인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과 섭리는 얼마나 신비하고 기묘한지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조금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인간이 고작 사용하는 단어는 ‘우연’입니다. ‘우연’이라는 말은 ‘나는 어떤 일들에 대한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대해 전혀 모르겠다(즉, 주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룻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우연히’라는 말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의 순간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연히’와 비슷한 용어로 4절에서는 ‘마침’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 즉, 룻이 그 밭에 이르렀더라도 마침 보아스가 그곳에 없었다면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보아스의 밭에 우연히 이른 그 때에 마침 보아스도 그곳에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섭리 중에 하나는 만남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이 땅에 실현하는데 쓰임 받게 될 사람들의 만남은 창세 전부터 주의 마음 속에 있던 작정이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이 우연입니다. 그런데 그 우연을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섭리는 주의 백성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마치 각 신자들이 한 분 하나님과 교재하는 것 같은데 사실 한 분 하나님은 수백수천만의 신자들과 교재하시면서 모든 만남과 환경과 때와 시기를 주장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 신비하여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진행하는 섭리는 그 어느 것 하나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가 한 부부의 만남에 대해 확률을 가지고 인류 역사 가운데 계산해 보니 불가능이라는 답변 밖에 나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확률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라고 알려주며 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제 5장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알려줍니다.
[1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와 능력과 의와 선함과 자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 그분의 무오한 예지 및 그분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경륜에 따라 그분의 지극한 지혜와 거룩한 섭리로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모든 피조물들과 움직임과 사건들을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신다.
2. 모든 일들은 제 1 원인 되시는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변함없이 그리고 틀림없이 발생한다. 하지만 동일한 섭리에 의해 하나님은 제 2 원인들의 속성에 따라 그 일들이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도록 정하신다.
3. 하나님은 그분의 일반적 섭리를 위해 여러 수단들을 사용하신다. 하지만 그분은 그가 원하시는 때에는 그 수단들 없이 그것들을 초월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역행하여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4.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하심이 그의 섭리에 너무나 자명하게 나타난다. …
7. 하나님의 섭리가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장 특별한 방식의 섭리를 따라 그분의 교회를 돌보시며, 모든 일들이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처리하신다.]
하나님은 룻과 보아스가 만날 수 있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룻을 택하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또한 그녀를 모든 이방인을 대표로 하는 인물로 삼아 주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전달될 것을 구약 시대에 미리 알려주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모압 여인 룻을 통해 다윗을 낳게 하시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편 보아스는 룻을 만나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따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품적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의해 온전하게 성장하였고, 모세의 언약에 따라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강하고 힘센 유력한 자였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자상함을 온전하게 갖추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온전하였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써 주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장 4절과 12절을 보면, 우리는 보아스의 생각을 주관하는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룻 2:4).  
“보아스가 룻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룻 2:11-12).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주장하셔서 룻과 보아스가 만나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이제 곧 그 둘은 서로 만나게 될 것이며 주의 섭리와 역사에 의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사건이든 큰 사건이든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는 훈련을 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위해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움직이고 온 우주를 흔들어서라도 주의 뜻을 행하려는 자들을 지키고 보호하고 돕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뜻에 무관하게 사는 자들을 향해서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의 섭리는 그에게 허무와 슬픔과 비참과 멸망을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기도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기 바랍니다. 인생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만남은 말과 고백과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룻이 만일 나오미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이생과 내세에서 영원토록 찬란하게 기억되는 이러한 성경의 인물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가장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이방 여인이 말론이라는 병약한 유대인을 만나게 된 그 만남은 사람들이 볼 때는 남편을 일찍 잃은 과부로서 비참의 극치일지 모르나, 사실 가장 비참하고 슬퍼 보이는 그 만남 때문에 룻은 복음을 들을 수 있었고 나아가 말론 및 나오미를 통해 그 이방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 듣고 믿음으로 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쓰임 받은 어떤 성도와의 만남은 얼마나 위대하며 얼마나 소중합니까?
저는 모태신자이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 한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삼위일체와 복음에 대해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를 만나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를 맛보고 또한 로마서를 함께 공부하게 되면서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복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인생에게 삶의 방향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만남이 있다면 그 친구와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서로 다른 고향, 서로 다른 대학 등, 뭐든 달랐는데 대학 졸업 후 같은 연구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연구소에서 제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고향이 전주인지라 인천에서 자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성경을 묵상하는 친구였기에 제게 로마서를 공부하자고 제의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성경에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신학을 하게 되고 이렇게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과 삶을 통해 복음으로 인도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가장 귀합니다.
또한 복음이 정확하게 제대로 선포되는 바른 교회와의 만남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람이 구원 받으려면 온전한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거룩함인데, 거룩에 이르려면 이 역시 온전한 복음을 듣고 믿음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는 사실 신자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습니다. 
......지금 이 땅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님의 영광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왜 세상 사람만도 못한 부패한 신자들은 그렇게도 많은 것입니까? 그 이유는 복음의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바르게 배우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을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며 기도하면 게으르게 놀고 먹어도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배웠으니 어찌 거룩함을 향한 도전과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른 교회를 만나 그 교회에서 성장하는 자들은 복음 안에서 한없이 깊어가며 그리스도를 닮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생의 영원한 의미와 보람을 차곡차곡 쌓는 것이 되니 복된 교회를 만남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진실하고 정직한 복음적인 목사를 만남은 또한 얼마나 큰 복입니까? 주의 양들을 자기의 욕심과 영광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주 예수님처럼 희생하며 섬기면서 아비의 마음을 지닌 목자를 만난다면 이보다 더 복된 양들이 어디 있습니까?
하물며 복된 아내, 복된 남편을 만나는 그 복은 얼마나 무한합니까? 평생 피부를 맞대고 시도 때도 없이 함께 하는 평생의 동반자가 참으로 아름다운 성품을 지난 자라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마음이 통하는 진실한 친구를 만나서 평생 친구가 되는 복은 어떠합니까? 같은 믿음을 지닌 동료를 만나는 복은 어떠합니까? 저는 우리 교회의 복된 지체들을 만나 함께 사역함이 참으로 큰 복인 것을 늘 주께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 태어나는 자녀들과의 만남은 어떠합니까? 사랑스런 자녀를 대할 때마다 이 가정에 태어나 주어 얼마나 고맙다고 노래하면서 사랑하는지요! 그러한 가정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이 넘칩니까?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만남입니다. 아무리 못된 아이들이라도 천사 같은 주일학교 선생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감옥에 들락 달락 거리던 죄수가 신령한 주의 종을 만나서 새사람된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이들에게 그러한 만남이 없었다면 마귀처럼 살다가 지옥에 떨어졌을 텐데, 새 사람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고 천국에 들어갔으니, 이 얼마나 복된 만남입니까?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섭리는 만남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귀한 책 한 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주의 섭리이며 복인지요. 사실 우리의 삶 전체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오직 그분의 긍휼과 자비가 우리에게 복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은 무엇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신비한 만남을 허락하심으로 실현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한편, 우리는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로 인하여 영원한 감사와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룻과 나오미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보아스가 되어야 합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서 평생에 가장 큰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아스가 되어 우리를 만나는 자들에게 복의 채널이 된다면 우리의 가치와 보람은 얼마나 대단하고 귀한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보아스가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전달하는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서나 온 세상에 복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시대의 보아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아스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그분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들에게 무한하고 영원한 복이 되시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다면 보아스처럼 우리는 우리를 만나는 모든 룻과 나오미들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 가운데 주의 복을 흘러나가게 하는 위대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2절을 보겠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동서 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추수기가 되면 가난한 자들은 추수를 거두는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히브리 사회에서는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이 있었는데, 그 율법 안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율법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참조, 레 23:22; 레 19:9-10; 신 24:19-22).
자, 생각해 봅시다. 지독하게 가난한 헐벗은 두 과부는 아마도 베들레헴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어떤 작은 집에서 무료로 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나 며칠 정도 지난 후에 전혀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나오미는 모세의 율법을 며느리 룻에게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혹은 그 이전에 말론이나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이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배려하는지를 미리 듣고 알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먹을 것이 없는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룻이 먼저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밭으로 가서 이삭을 줍겠습니다. 저는 비록 객이지만 행여 혹시 누가 제게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의 밭에서 이삭을 줍겠습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는 지독하게 가난한 한 모압 여인이 오직 유대인들로만 똘똘 뭉쳐있는 전혀 생소한 이방 땅 베들레헴 에브랏 마을에서 이삭을 줍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어떤 원칙이 담겨 있습니다. 주의 율법은 일반 사회 속에서 반영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즉, 한 나라가 복지 제도를 운영할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지를 알려줍니다.
분명한 것은 이미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밭의 주인이 추수를 할 때 떨어진 이삭을 줍지 못하도록 한 법은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 즉 나그네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또한 밭 모퉁이의 곡식을 다 거두지 못하게 한 법도 가난한 자들과 집 없이 방황하는 거류민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즉,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불행을 당해 어쩌다가 가난하게 된 자들을 배려한 법입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적어도 가난한 자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밭에 나가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만일 가난한 자가 이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로운 공급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몇몇 나라의 복지 제도 중에는 집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방탕 가운데 인터넷에서 게임만 하며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저 돈과 먹을 것을 주는 제도도 있습니다. 이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제도입니다. 따라서 악한 제도입니다.
지금은 매우 줄었는데 몇 년 전에는 교회를 찾아오는 노숙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토요일이 되면 적어도 2-3명 이상의 노숙자가 교회를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성경을 읽어주거나 소책자를 읽어 준 후 축복 기도와 함께 도움을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노숙자들 중에는 자신들이 마치 교회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돈을 요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노숙자에게 3천원을 주었더니 그 돈을 제게 집어 던지면서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도와 주시려면 만원 이상 주셔야지요. 쩨쩨하게 3천원이 뭡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민을 하니까 제 앞에서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돈 만원을 주고 보낸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도움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움을 달라는 자세가 자비를 구하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자기와 같은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하는데 왜 머뭇거리냐며 호통을 치고 싸우자고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곁에 있던 집사님이 그를 데리고 나가서 약간의 돈을 주고 해결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대도시의 길을 걷다 보면 노숙자가 다가와 손을 내밉니다. 그런데 돈으로 도움을 주면 곧바로 마약을 사서 먹습니다. 문제는 도움을 거절하면 눈 빛이 악해지면서 어디서 총이라도 꺼낼 것 같은 자세를 취하는 노숙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비는 베푸는 자의 주권에 속합니다. 
사악한 인간들의 마음이 가장 착각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사악한 인간들은 자비를 받는 것이 그저 감사로 받아야 하는 것을 망각합니다. 가령, 사악한 자들은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은 자비를 받으면 자비를 베푸는 사람에게 대항하고 욕하고 심지어 죽이려는 심보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심보는 교만한 사람들과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된 자들의 그릇된 논리에서 나옵니다.
이를 알려주기 위해 주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품꾼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을 하고 일을 시켰습니다. 오전 9시에 다시 그 주인이 시장에 나갔다가 거기서 빈둥거리며 서있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적당한 품삯을 주기로 하고 포도원으로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또한 12시에 오후 3시에도 시장에 나가서 동일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오후 5시에도 시장에 나갔다가 거기서 빈둥거리며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포도원에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녁 6시에 품꾼들에게 품삯을 줍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품삯을 주되 한 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한 없이 감사했습니다. 한편, 이른 아침에 온 품꾼들은 자기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도록 약속되어 있지만, 주인이 자비가 많으니 한 데나리온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예수님의 비유 내용은 이렇게 전개됩니다.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15)
사실 일자리가 없어서 굶게 된 품꾼들에게 충분하게 약속대로 공급하신 분은 자비를 베푸신 분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많은 자비를 받는 것을 보자, 그들은 시기하며 “원망하며” 분노합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푸신 분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한국도 비슷한데, 미국에는 Animal Shelter 라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주인이 버린 유기견들이 잠시 머물게 되는 곳입니다. 만일 그 유기견들 중에 새 주인을 만나게 되는 개는 입양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나머지 유기견들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안락사를 당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자비로운 사람들이 일부러 Animal Shelter 에 찾아와서 그곳에 있는 개를 입양합니다. 이때 입양하는 사람들의 개성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그곳에서 가장 귀엽고 예쁘고 건강한 개를 찾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오히려 가장 연약하고 불쌍한 개를 데려가 입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일반적으로 Animal Shelter 의 직원들은 개를 입양하는 사람들을 자비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마리를 입양하든, 두 마리를 입양하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입양 되는 개들 역시 좋은 주인을 새로 만나게 된다면 매우 다행입니다. 
하지만 만일 Animal Shelter의 직원들이 한 마리를 입양하는 사람에게 분노하면서 “왜 한 마리만 입양합니까? 전부 입양하든지 아니면 관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불공평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직원은 자비에 대해 크게 오해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만일 그 직원이 화가 나서 한 두 마리를 입양하는 사람에게 개들을 전부 풀어놔서 물게 한다면 그 직원은 참으로 악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죄악된 인간들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악행을 행할 때가 대단히 많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복지 제도 아래 이러한 불의한 일들이 발생하곤 합니다.
이러한 어리석고 악한 자세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에도 도전합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전부 멸망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공의였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은 멸망 받는 인류 가운데 얼마를 택하여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도전합니다. 그들은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 다 구원하시든지 아니면 한 사람도 구원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입니다.”...우리는 결코 이러한 알미니안적인 악한 궤변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류는 이미 멸망 받도록 정해져 있는 죄인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의 자비가 우리 주변의 구원 받지 못한 자들에게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합리적이며 겸손한 자세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자비는 두 종류로 나뉩니다. 인간의 참여가 전혀 필요 없는 자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태어남, 공기, 물, 모든 바탕 등,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비입니다. 따라서 거듭남 등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운 역사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후에는 그에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얻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지정의와 자유의지를 사용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여지기 위해서는 온 힘과 노력을 다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가난한 자를 위한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 역시 가난한 자에게 도움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가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만일 주의 자비가 아니라면 가난한 자들은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운 이 법으로 인해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 같은 자들도 굶어 죽지는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비는 그들이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에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과정에서 성실과 노력을 배울 수 있도록 하려는 깊고 선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즉, 성실하게 이삭을 주우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어느 정도 끼니를 채울 수 있고 그 과정을 통해 일을 배울 수 있으며 또한 성실과 노력이 가져다 주는 결실을 맛보게 되고, 나아가 나눔의 사랑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무튼 룻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이삭을 주우러 밖으로 나갈 때 열심히 이삭을 주우면 자기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의 먹을 것까지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한편, 룻의 시대는 사사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이 매우 무시되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즉, 자기 멋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비록 베들레헴 에브랏이라도 그들 중에는 곡식이 아까워서 떨어진 이삭까지 다시 챙겨서 주워가는 밭 주인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밭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등, 누구든지 들어와서 이삭 줍는 것을 금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불법임에도 이삭이 아까워서 그렇게 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젊은 아낙네가 홀로 이삭을 줍는 것은 안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모압 여인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은 모압 민족을 멸시하고 경계하는 유대 사람들 사이에게 언제든지 몰매를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오미와 자신을 위해 이삭을 주우러 나갑니다. 분명히 그녀는 나오미를 통해 동네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람의 도움을 기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법을 의지하는 가운데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기특한 결심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위해 그 어떠한 위험과 멸시와 조롱과 고통도 감당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또한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허기를 참아가며 일해야 합니다. 이삭을 줍지 않던 여인이 이삭을 줍게 된다면 온 몸, 특히 허리가 휘어지도록 아프게 될 것입니다. 사실 호기심에 하루 정도 도전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삭을 줍던 첫날에 집에 돌아갈 때 아마도 룻의 허리는 제대로 펼 수 없도록 뼈저린 근육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룻이 만일 진실한 신앙과 나오미를 향한 참된 사랑이 부족하였다면 그 다음 날에는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의 처음 결단은 이삭을 줍는 길이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합법적인 삶의 길인 것을 확신하고 나간 것이기에 중도에 포기는 없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모세의 법에 따른 합법적인 생계 유지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 법에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일어서려는 진실한 노력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룻의 중심을 아시고 룻을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신비로운 도움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즉, 룻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 자비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아스와의 만남의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보아스는 부요하였고, 유력하였고, 강하였고, 배려가 많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중심을 보고 그 중심을 외적인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롯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는 현재 지닌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나의 진실한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섭리에 연결되는 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그 날 매우 졸리고 피곤했는데, 하나님과의 약속된 시간이라 자신을 쳐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날 남쪽에서 출장 온 어떤 형제가 그 예배에 참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예배 마친 후에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고 대화를 하게 되면서 마음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고, 평생 서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랑과 기쁨과 행복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만일 그 날 그 자매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집에서 자버렸으면, 영원히 그 형제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매우 작은 사건에서 주를 의식함으로 주께 충성했는데, 그 충성이 어떤 주의 섭리와 연결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섭리는 오직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충성하며 그분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가장 보람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2절을 보니, 이에 나오미가 대답합니다. “내 딸아 갈지어다.”
감사와 사랑이 담긴 답변입니다. 룻의 마음을 알게 된 나오미는 얼마나 룻이 고맙고 기특했겠습니까? 그래서 “내 딸아!”라고 말하며 사랑을 표현하였고, 그리고 룻의 제안을 승락했습니다. “갈지어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룻의 안전과 형통을 주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는 일용할 양식을 주께 의지하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룻!
3절에 보니, “룻이 가서 (곡식)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완전합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요셉이 바로 왕을 만나게 될 때도 그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입니다. 떡 굽는 관원과 술 따르는 관원이 요셉이 있는 감옥에 들어온 사건, 만일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빠졌다면 그 자리에서 그 두 사람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8-9)
그러나 도리어 요셉이 성적인 더러운 유혹을 거절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래서 두 관원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고,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되고, 술 관원장이 풀려 난 후에 요셉을 잊고 있다가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자 그때에 요셉에 생각이 나서 요셉이 바로 왕 앞에 알현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 모든 사건 속에서 그 어떤 것 하나 우연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이 다 우연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하나도 우연이 아니라 완벽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아말렉 족속의 하만이 주의 백성 모르드개 및 그의 민족을 말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새 에스더를 아하수에로의 왕비로 만들어 놓으신 상태에서 하만으로 하여금 승승장구 하도록 하십니다. 심지어 하만은 하나님의 신실한 믿음의 사람 모르드개를 25미터나 되는 나무를 세워 그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로 계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미 지독히 교만한 하만은 멸망 당할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멸망은 아주 신비한 작은 사건에 의해 시작됩니다.
[1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2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3 왕이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하니 측근 신하들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4 왕이 이르되 누가 뜰에 있느냐 하매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뜰에 이른지라 ](에 6:1-4)
그리고 하만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인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든 그 나무에 달려죽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의 반전은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않은 우연한 사건입니다.
열왕기상 22장을 보면, 하늘의 하나님의 어전에서는 하나님께서 악한 아합 왕을 죽이시기로 정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선지가 미가야를 통해 아합 왕에게 계시됩니다. 그럼에도 완고한 아합 왕은 아람과의 전쟁에 나갑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적이 쏜 화살에 ‘우연히’ 맞아서 죽게 됩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왕상 22:34).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화살에 맞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주의 섭리 가운데 아합은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통 사고로 죽었는데, 그가 만일 1초 더 누웠더라면, 하품 한번 더했다면, 나올 때 개를 한번 더 쓰다듬어 주었다면, 길에서 돌에 걸렸다면, 그는 결코 그 날 그 차에 치어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어찌 내가 머리털 하나라도 다스릴 수 있습니까? 개미 한 마리라도 내 뜻대로 주관할 수 있습니까? 한 나라의 전쟁이 개미 한 마리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작정과 섭리를 믿어야만 든든히 평안히 자신 있게 담대히 기쁨 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도 온 우주를 다스리고 주장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앞으로 남은 삶을 철저하게 주께 의탁하는 가운데 오직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에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살아가시기를... 그래서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와 복이 되는 이 시대의 보아스가 되시기를.... 
===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룻기 2:4-13
나오미가 10년 전에 베들레헴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온 나오미는 베들레헴 에브랏의 화제거리였습니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베들레헴 주민들은 나오미와 룻에 대해 말하며 그 두 사람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면, 이곳 저곳에서 곡식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던 룻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보아스가 그의 일꾼들에게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들이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지금 보아스와 일꾼들의 인사와 대화는 모세의 언약에 신실한 사람들의 일상 대화로서 그들의 신앙은 일터와 구별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경건은 일상 생활에서 나타났습니다. 특히 경건에 있어서 보아스는 두드러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는 이원론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헌금으로 십일조를 바치면 십의 구는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 멋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또는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정한 시간을 드리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내 맘대로 살아도 되는 줄 착각하는 신자들이 그들입니다. 물론 십일조도 내지 않고 하나님과의 대화 시간을 내지 않는 자들은 이들만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재물과 시간을 주께 드리는 자세가 이원론적이 될 때 그들은 위선적이고 모순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린 후 나머지 시간들과 날들을 내 멋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일에 반드시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그 예배에서 받은 말씀과 은혜로 한 주간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 앞에 거룩한 헌물을 바칠 뿐만 아니라 나머지 나의 모든 재물과 재능과 기회도 평소에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사용함으로 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경건은 결코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예배 때나 일터에서나 심지어 휴가 기간에도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휴가 철에 마음이 느슨해져서 여러 가지 죄를 범하곤 합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을 이원론적인 생각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휴가를 떠나는 순간부터는 “주님, 저를 간섭하지 마세요”라고 하며 마치 죄를 지어도 되는 면허증을 받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한 신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자세 때문에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신자가 늘 제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휴가철에 지은 죄악으로 인해 휴가가 마친 후에는 죄의 종이 되어 돌아오는 신자들도 더러 있습니다. .
우리는 물질과 시간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가진 물질과 시간과 모든 재능과 은사와 사람들과의 관계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늘 청지기의 의식을 갖고 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 모두에게 질문합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세례 요한이 선포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지 않으시면 절대적으로 궁핍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늘 주의 공급을 감사하며 주께서 주신 모든 것으로 주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보아스와 그의 일꾼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식하는 가운데 서로 아름다운 인사를 나눕니다. 그런데 인사의 내용이 서로 다릅니다.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한 인사 내용은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이는 주 하나님의 도움이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이 힘과 건강과 위로를 얻도록 복을 빈 것입니다. 이에 그의 일꾼들이 화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아스는 그들에게 공급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아스에게 풍성하게 복을 내려 주셔야 일꾼들에게도 그 복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아스의 일꾼들의 인사는 보아스의 밭에서 항상 풍성한 추수가 이루어지기를 빌어준 것이며 이를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풍부하고 적절하게 공급되기를 주께 빈 것입니다.
우리는 보아스와 그의 일꾼들의 인사를 보면서 그들은 일터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들은 진심으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여 주실 것을 바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존중과 사랑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보아스와 그의 일꾼들이 사용했던 경건하고 복된 구약의 인사는 신약 시대에서는 바울이 알려준 인사로 대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매일 사람을 만날 때마다 새언약의 주인공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준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부모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녀들을 축복하고, 자녀들은 부모님들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축복하고, 회사에서는 종업원들이 경영자를 위해 축복하고, 경영자는 하나님의 위로와 공급이 일꾼들에게 넘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며 행정을 처리해 나가고, 교회에서도 목사는 성도들을 위해 매일 기도 가운데 복을 빌고, 성도들은 목사님이 하늘의 풍성한 양식을 맘껏 주의 양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도록 복을 빌어준다면, 그러한 가정과 교회와 일터와 사회는 주의 영광과 사랑과 임재와 질서가 넘치는 복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늘 주의 양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는 바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풍성하게 증거되어 주의 양들이 큰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라”(엡 6:18-19)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 4:2-4).
“형제들아 (너희는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
그러므로 우리는 풍성한 영적인 공급을 위해 늘 말씀 선포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5절은, 보아스가 그의 삶 가운데서 룻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순간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보자마자 일꾼을 거느린 사환에게 묻습니다. “이는 누구의 소녀냐”
여기서 사환은 원어로 (나아르)인데 노예나 품꾼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보아스의 집사 또는 보아스의 대리인으로서 추구하는 일꾼들을 관장하는 감독으로 여겨집니다. 이에 그에 대해 성경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한편 개역개정은 원어 (나아라ㅎ)를 소녀라고 번역하였는데, 젊은 여인으로 번역하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에 사환이 대답합니다. “이 젊은 여인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온 모압 여인입니다. 그런데 저 여인이 내게 와서 ‘(곡식) 베는 일꾼들을 따라 그 뒤에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잠시 움막에서 쉰 것 말고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보아스와 룻이 직접 연결되기 전에 사환의 평가가 먼저 제시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사환의 평가를 통해 그 동안 룻에 대해 들은 소문을 확인합니다.
사실 룻은 그 날 이른 아침에 모세의 율법에 따라 처음으로 이삭을 주우러 나올 때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룻의 이 말은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데, 첫째는 룻의 결정은 나오미의 뜻에 의해 진행될 수도 있고 포기될 수도 있다는 권위 질서에 대한 순종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점이고, 둘째는 내 멋대로 이삭을 줍지 않고 이삭을 줍도록 허락하는 곳에서 이삭을 줍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에 순응할 것을 말한 것이고, 또한 밭에서는 곡식을 베는 자들의 권위 질서를 따르겠다는 순종의 자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삭을 줍는 것이 모세 법으로 허용된 사실을 감안한다면 룻이 사환의 허락을 받고 이삭을 주운 것은 사회 질서 및 공동체의 예의를 고려한 행위입니다. 한편, 이삭을 주울 기회가 허락되자 성실함으로 일한 것은 그녀의 부지런함뿐만 아니라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한 한없는 책임감과 진정한 사랑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에 사환으로부터 이 말은 들은 보아스는 마치 룻에 대한 선한 소문을 친히 확증한 것처럼 곧바로 룻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선대합니다. 그리고 룻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을 룻에게 알려줍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룻 2:11).
우리들의 평소의 삶은 분명히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되어 있고, 또한 평소의 삶의 모습은 어떤 새로운 환경을 접하더라도 다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평가는 동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의식 가운데 나타나는 삶의 결단 및 여러 평소의 삶의 태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룻기 2장에서 룻의 성품은 평소의 삶의 태도로 나타났고, 그녀의 그러한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보아스 역시 룻의 성품에 대해 듣고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성품은 믿음에 의해 빚어진 성품을 뜻합니다. 이는 룻의 신앙이 참으로 진실하였으며 그녀는 그녀가 아는 만큼 철저하게 순종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품입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만일 성품이 못나고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한편, 성경이 소중하게 여기는 성품은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새생명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분량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제시하는 성품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평소의 삶을 어떻게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이 바로 성품의 성장의 바탕입니다. 즉, 평소에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서 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경외하며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만이 얻게 되는 가장 귀한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입니다. 성경은 이를 얻기 위해 경건의 훈련을 하라고 권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시 4:3).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
“형제들아, 선함을 추구하며 가치가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으라.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순결하며,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스데반 황 역).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딤전 3:16).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경건을)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돈을 사랑함)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4:5-10; 딤전 6:11-12)
무엇보다 하나님은 경건한 룻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경건한 자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예수)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리라”(벧후 2:9).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한 감사하자”(히 12:28).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경건할 수 있도록 생명과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에 힘쓰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새 우리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있을 것이고, 그 성품은 언제 어디서든 룻처럼 평소에 자연스런 향기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보아스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해 룻에 대한 칭찬을 들은 것이고, 그리고 자기의 충성스런 사환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보아스는 경건한 룻을 한 눈에 알아본 후 그녀를 마음에 품게 됩니다.
순종하며 부지런하고 경건한 여인이 얼마나 위대한지 아십니까? 지금 룻에게서 나타나는 세 가지 특징, 곧 순종과 성실과 경건은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여성의 자질입니다.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1-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는 삶, 그것은 다름 아닌 성실과 경건의 삶입니다. 경건한 삶을 통해 주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매들께 나타나는 것은 온유와 따스함과 안정과 평안이며 그러한 자매를 아내로 둔 남편이나 자녀들, 그리고 그러한 자매들이 있는 교회의 복은 이루 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경건하고 성실한 여인의 모습을 잠언 31장에 담았습니다.
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11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12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27 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28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29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10-12, 27-30)
이러한 여인을 아내로 둔 남편, 이러한 여인을 며느리로 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이러한 여인을 어머니로 둔 자녀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이러한 여인들을 교회의 지체로 둔 교회는 참으로 든든한 지원군을 얻는 복된 공동체입니다.
주 하나님께는 가난하든 부요하든, 잘 생겼던 못생겼든, 학식이 많든 부족하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께 중요한 것은 주를 경외하는 경건한 마음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러한 여인을 찾아내어 룻처럼 높이십니다.
[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룻과 같은 경건한 여인을 찾아) 가난의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영광스러운)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시 113:7-9, 일부분을 설교에 맞게 수정)
하나님의 나라에서 위대하게 쓰인 인물들의 특징을 보면 한 가지 복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어머니가 경건한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약 언약의 중보자이며 하나님을 직접 뵈었던 모세의 어머니는 요게벳으로써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하고 성실한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사사 사무엘을 낳은 어머니 역시 기도 생활에 철저했던 경건하고 성실한 한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는 디모데에게 거짓 없는 믿음을 유산으로 남길 만큼 경건과 성실함에 있어서 탁월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분명한 것은 경건하고 성실한 참으로 복된 여인은 늘 기도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역시 어머니를 닮아 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품에 안고 늘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눅 2:19).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주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었고, 또한 그 믿음에 따라 항상 기도하던 여인이었습니다(참조, 눅 1:45-44).
아무튼 하나님은 룻의 경건을 보시고 그녀를 선대하셨습니다. 이에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평소에 살아가던 보아스 역시 하나님의 경건한 사람인지라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룻의 경건한 성품을 곧바로 알아보고 그녀를 선대하였습니다. 룻의 경건함과 내적인 아름다움을 확증한 보아스는 룻에게 최대한으로 선대합니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보아스는 룻을 “내 딸아”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미 룻을 향한 따스하고 순결한 사랑이 보아스의 마음에 생겨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보아스는 룻에게 선대하되 룻이 그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밭으로 가면 위험할 수 있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룻에게 선대하려는 마음을 지난 경건한 주인을 쉽게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면서 복음을 전하는 그러한 밭에 머무셔야 합니다. 온전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만이 그리스도를 통해 흐르는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반드시 이미 복음으로 인한 풍성함을 맛본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은 얼마나 안전하고 풍성하고 감사한지요.
9절을 보니 보아스가 계속 룻에게 선대합니다. “나의 일꾼들이 있는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 내가 그 일꾼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라. 목이 마르거든 이미 준비된 그릇, 곧 나의 일꾼들이 길어온 것을 마시도록 하거라.”
보아스와 그의 일꾼들은 말씀으로 훈련된 경건한 신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룻이 그 밭에 머무는 한, 매우 안전할 것입니다. 또한 보아스의 일꾼들이 길어다 놓은 풍성한 생수가 있었는데 룻은 이제 그 생수를 임의대로 맘껏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재 새언약 시대 가운데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 맘껏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성령 안에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 누리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보아스는 유력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력하다는 뜻은 그 당시에 맘껏 좋은 것들을 베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 가운데 가장 유력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으셨기 때문에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무한하게 베푸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맘껏 하늘의 신령한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아스의 호의를 받게 되자 룻은 깜짝 놀라며 그 앞에 엎드립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룻 2:10).
여기서 룻은 보아스의 경건과 사랑과 위엄을 함께 보면서 그 앞에 절합니다. 이는 순종을 마음 속에 정한 행위입니다. “즉, 저는 당신을 믿으며 당신께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뜻을 전한 것입니다. 다른 여인들처럼 보아스를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룻은 이삭을 주우러 나온 첫째 날에 이렇게 큰 호의와 사랑을 받게 될 줄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와 그녀의 먹고 사는 문제가 이렇게 순식간에 해결될 줄 몰랐습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인식하면서 그럼에도 나타나는 놀라운 보아스의 호의로 인해 감사와 기쁨으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지금 시대의 표현으로 하면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하며 믿기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이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을 나타낸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방 여인인데, 그것도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모압 여인인데, 어찌 내게 ‘은혜’를 베풀며 나를 돌보신다는 것입니까? 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합니까?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을 통해 나타난 이 은혜는 그저 망극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호의(은총) 및 사람을 통한 호의는 겸손하고 감사하는 자세를 지닌 자에게 풍성하게 임한답니다. 그러므로 주 앞에서 룻과 같은 겸손과 감사를 결코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겸손을 잃고 교만해지거나, 감사를 잃고 불평으로 나아갈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호의 및 주의 사람들을 통한 은혜를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매우 특이한 교훈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은 나병 환자 10명을 깨끗하게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1-19)
이 사건을 보면 깨끗함을 얻은 목적은 구원인데, 오직 한 사람만이 겸손과 감사 가운데 주의 은혜를 계속 입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나병은 나았지만 과연 구원 받은 은혜를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열 사람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를 잃을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겸손 가운데 감사하는 소수는 계속 주의 은혜를 받아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와 복과 생명을 계속 받아 누리는 비결은 겸손과 감사입니다. 아쉬운 것은 겸손과 감사의 마음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겸손하며 감사하는 자들은 귀한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호의와 사랑과 보호와 공급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룻을 향한 보아스의 선대가 멈추지 않은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일을 찾든지, 또한 어떤 만남을 갖게 되든지, 또한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든지, 혹은 건강을 잃고 병에 들었든지, 겸손한 마음을 갖고 주께서 베푸신 복을 세어보면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존귀하게 여기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인도하여 주실 것이고, 우리의 만남을 주관하셔서 복을 베푸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리라”(시 37:4-5).
이에 보아스가 겸손과 성실, 그리고 나아가 감사를 표현하는 룻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우리 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일에 보답하는 분이십니다. 또한 주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상을 주십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위에서 무엇보다 그녀가 과거의 신을 버리고 주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온 사실을 강조하며 그 결단에 주의 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히브리 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큰 복을 받게 된 계기는 떠남이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더라](창 12:1-4)
그 후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합니다.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보아스의 위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주 하나님의 위로처럼 룻에게 매우 컸습니다.
12절을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는 명칭은 모세의 언약이 주어지면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그 명칭은 특히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주어진 언약의 이름이었습니다(참조, 출 3:15-18).
그런데 보아스가 그 특이한 명칭으로 룻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2절).
룻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날개 아래 숨을 때 주께서 선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보아스가 룻에 대해 가장 고상하게 여긴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담대하게 주 하나님께 삶을 던진 이 부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기 위해 삶 전체를 던진 참 신자를 향해 하나님께서 온전한 보상을 베푸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룻에게 복을 빌 수 있는 이유는 보아스 자신이 주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의탁하여 보았더니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에 따라 큰 상으로 보상하신 것을 친히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을 신속하게 여호와 날개 아래로 던지기 바랍니다.
룻은 언약의 주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고 그분의 날개 아래 ‘숨었습니다.’ 이에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안전과 공급과 쉼과 풍성함과 복락을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하물며 새 언약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머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과 공급과 안식이 얼마나 차고 넘치도록 부어지겠습니까!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2, 35, 37-39)
무엇보다 주의 한량 없는 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까지 자라나게 할 것입니다.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넉넉하여질 것이다.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4-11)
13절을 보니, 이러한 아름답고 은혜와 긍휼로 충만한 보아스에게 룻이 답변합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룻은 보아스가 주는 특권을 받게 되면서 스스로 자만해지기보다 더욱 겸손한 자세를 취합니다. 도리어 보아스의 큰 은혜를 맛볼수록 룻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면서 보아스에게 최고의 존경과 감사를 표현합니다. 물론 이 표현은 형식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경건한 룻이 보아스를 향해 ““내 주여” 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이미 룻은 보아스가 하나님의 경건한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벌써 순종과 충성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룻은 보아스의 말로 인하여 한없는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보아스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가운데 룻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주변의 수많은 룻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나누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참조, 고후 1:3-5).  
룻은 보아스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얻고 그 마음은 더욱 보아스를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은 어느새 진정한 사랑으로 변할 것이니 이제 그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보아스는 룻을 한 눈에 알아보고 자기의 아내로 삼고자 사랑하였고 룻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만나게 된 경건한 보아스가 주께서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남편이라고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없는 진정한 겸손 가운데 감사를 표현합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볼보시나이까?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내 주여 내가 당신의 은혜를 계속 입기를 원하나이다.”
이 고백을 들은 보아스의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생명을 바쳐 가엽고 궁핍한 룻을 구할 것이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녀에게 줄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렇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만나기 전부터 큰 관심을 갖고 있다가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보아스를 만남으로 시작된 룻의 복은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시작되는 참된 복의 가장 작은 일부분을 보여준 것입니다. 누구든지 영원한 구속자이며 영원한 보아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 피하는 자는 룻이 누린 모든 복락과 영광과 공급과 쉼과 기쁨과 위로를 차고 넘치도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룻기 2:14-23)
우리 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일에 보답하는 분이십니다. 또한 주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상을 주십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위에서 무엇보다 그녀가 과거의 우상 신을 버리고 주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온 사실에 감동하여 주의 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2절).
이에 룻은 큰 감격 가운데 겸손히 감사를 표합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13절).
그 날 아침만 하더라도 룻은 그 날에 발생할 일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룻은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섭리 가운데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되고 심지어 보아스를 만나게 되더니 그 밭에서 맘껏 이삭을 주울 수 있게 되었고, 생수를 마시게 되었고, 또한 안전한 보호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자신의 삶을 던진 모압 여인 룻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실 룻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였습니다. 즉, 룻이 믿음으로 얻은 복은 이 땅에서의 안정되고 풍성한 삶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얻은 최고의 영원한 복은 본인 자신도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뱀의 머리를 때리실 여인의 그 씨인 메시아의 조모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복을 룻에게 베푸신 이유가 룻이 어떤 큰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매일 진행되는 평소의 삶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나타내자 이러한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날개 아래 머물기를 힘쓰며 평소에 주의 뜻을 찾아 행하기에 온 힘을 다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우리를 통해 주의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매일 주와 동행함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토대인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이에 바울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이제 어느새 점심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룻에게 자기 식탁으로 올라오라고 권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룻 2:14).
룻은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자기 식탁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이는 보아스가 룻을 자기 가족처럼 대우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초청은 보아스의 편에서 대단히 큰 은혜와 자비를 보여주는 초청이었습니다.
신구약을 배경으로 할 때 함께 식탁에 앉는다는 것은 같은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 대해 언급할 때 “나와 함께 (식탁에서) 먹는 자”(막 14:18)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 역시 함께 식탁을 나눔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이 되자 친구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의 아들 므비모셋을 선대합니다. 이때 그 선대는 왕의 식탁에서 함께 떡을 떼는 것입니다.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더라](삼하 9:6-7).
즉, 보아스는 룻을 그의 식탁으로 초청함으로 그녀를 드높여준 것이고 또한 자신의 영적인 공동체에 속하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도 보아스의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수많은 룻들에게 그분의 식탁으로 초청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지혜 그 자체가 되시는 주 예수께서는 하늘 잔치를 마련하시고 누구든지 초청하십니다.
[1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잠 9:1-6)
그러나 교만한 인간들은 영원한 왕이며 주이신 그리스도의 초청을 멸시하고 거절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존귀하게 될 수 있는 최고의 초청을 거절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합니다.
[18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눅 14:18-20)
예수께서 주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눅 14:24).
이처럼 룻을 향한 보아스의 식탁 초청은 룻에게 복을 주려는 보아스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에 의한 것으로서 지극히 자신을 낮춘 겸손에서 나온 초청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직접 룻에게 볶은 곡식을 주었습니다. 매우 시장한 가운데 있던 룻은 그 음식을 받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배불리 먹고 볶은 곡식을 남겼습니다. 룻은 그 남은 음식을 나오미에게 가져다 줄 생각을 하고는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사실 모세의 법이 정한 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밭에 이삭을 남겨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모세의 법을 훨씬 뛰어넘어 룻에게 자비와 은혜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호의는 모세의 율법의 강령이기도 합니다. 즉, 모세의 법은 율법주의자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 등 어려움 당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은 율법 조문을 뛰어넘어야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율법 조문을 지키는 것은 공의와 정의를 이루지만 그 법이 가리키는 사랑까지 이르려면 반드시 자비와 긍휼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긍휼은 모든 법을 성취하고도 남는 것이 됩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이제 룻은 보아스의 식탁에 함께 앉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립니다. 즉, 룻을 향해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아스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보아스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룻에게 흘러 넘치게 하는 멋진 채널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받은 룻은 진실하고 한없는 감사를 주 여호와 하나님과 보아스에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삭막한 이 시대에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오직 보아스의 마음을 가져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과 사랑과 베풂과 나눔의 정신을 배워 서로에게 보여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더욱이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베풀며 나누는 자녀들에게 친히 풍성히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10; 고후 9:6, 8)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들로부터 흘러 넘쳐 불신자들에게도 이르게 됩니다.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라](겔 47:8-9)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풍성하게 나타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아스의 정신을 따라 교회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풍성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이방 여인 룻이 보아스의 공동체에서 받은 선대와 긍휼과 친절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누구든지 교회를 찾아오는 자들에게 관심과 친절과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맞이할 수 있어야 하고, 맞이하더라도 오직 은혜 가운데 풍성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맞이해야 합니다. 심지어 보아스가 모압 여인을 그의 공동체에 맞이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는 혈통과 종족을 넘어서서 사람들을 영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혈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이방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그 이방 여인이 믿는 우상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기에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한 것입니다.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4).
도리어 민족들에 대한 성경의 본질적인 개념은 서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의 선포에서 잘 나타납니다.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6-27)
즉, 온 인류는 민족이 어떠하든 다 아담 안에서 한 혈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민족이나 피부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성경은 사람의 외모에 관심이 없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어둠과 교통하는 사람인지, 그 둘로 구분합니다. 즉, 참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는지 아니면 새생명이 없는 불신자인지, 오직 이 두 부류로 나눕니다.
아무튼 모세의 법이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금한 본질적인 이유는 혈통 때문이 아니라 신앙 때문입니다. 만일 민족에 대한 금지였다면 보아스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자기의 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모셨기 때문에 보아스는 자유롭게 룻을 여호와 하나님의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후에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책망이 아니라 도리어 영원한 복이 되었음을 성경 전체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피부가 어떠하든 민족이 어떠하든 주의 공동체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불신자와의 결혼입니다.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4-16)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만 하나님 앞에서 엄중하게 확인해야 할 뿐 다른 것들은 다 포용하여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는 인종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모든 민족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가 하나가 되어야 하며, 사회에서 유명하고 지위와 권력이 있는 자가 아무 것도 없는 연약하고 미천한 자들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문제 외에 그 어떤 것도 결코 교회의 하나됨을 막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취하지 않습니다. 즉,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을 본 받아 결코 사람들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됩니다.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 3:25).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9).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느니라”(갈 2:6).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심지어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간음죄 및 살인죄를 범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알려줍니다.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1-4, 8-9)
이처럼 참된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세상에 속한 이생의 자랑으로, 또는 피부색이나 혈통 등으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0-11, 14)
만일 보아스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가치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가난한 이방 모압 여인 룻을 그의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보아스의 초청에 의해 룻은 그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룻이 보아스의 식탁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으로 보아스의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기준에 의한 공동체가 아니라 오직 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된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중심에 단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왕으로 모신 자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의롭게 되고 또한 새생명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임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경건과 거룩이며 주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일한 목적은 새언약에 근거한 동일한 신앙 고백 및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함께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 목적 외에 다른 이유로 분리되는 것은 당을 짓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 좋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파가 나뉘어도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성에 의해 교회를 찢지 않기 바랍니다. 정치 성향에 의해 교회를 찢지 않기 바랍니다. 학벌이나 재력이나 이생의 자랑으로 교회를 찢지 않기 바랍니다. 물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참 교회는 거짓 교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정당한 예로는, 중세 교회 때에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된 개신교이며, 20세기에 와서는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복음을 지키기 위해 프린스턴 신학교로부터 분리하여 나온 그래함 메이첸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수많은 교회가 동성애 및 종교 다원화에 물들 것인데, 이러한 거짓 교회로부터 참 교회는 분리되어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분리나 차별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가령, 가난한 자가 올 수 없는 교회, 흑인들이 올 수 없는 교회, 못 배운 자가 올 수 없는 교회 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교회입니다. 이는 사람을 세상 기준으로, 또는 피부나 혈통으로 차별하는 것으로서 복음의 정신에 크게 위배 되는 것입니다.
한편, 세대주의 신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심각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그들은 유대교 민족을 우월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 민족을 축복해야 복을 받고 유대 민족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며 유대 민족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주장하길, 천년 왕국 시대가 오면 유대인들이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매우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정신을 오해하여 유대 ‘민족’이라는 외모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에 차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복음에 위배되는 매우 그릇된 신학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의 하나됨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놓쳐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누구든지 오직 복음과 함께 하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그리스도의 몸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룻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께 나의 남은 삶을 의탁하기 바랍니다.
보아스가 이방 모압 여인 룻을 구원한 것은 보아스의 씨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모든 족속으로부터 주의 백성이 구원 받을 것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한편, 15절에 보니 보아스는 룻에게 풍성히 이삭을 거둘 기회를 줍니다. 그것은 자기 일꾼들에게 명하여 곡식 다발에서 곡식을 뽑아 땅에 떨어뜨리고 룻으로 하여금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룻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고 도리어 룻의 성실을 통해 풍성하게 거두도록 하기 위한 매우 지혜로운 조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량 없는 하늘의 양식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양식을 풍성히 얻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성경에서 이삭을 주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영의 말씀을 받으면서 마치 내 자신의 수고를 통해 영의 이삭을 주웠다고 생각하고 만족합니다. 하지만 사실 주께서 우리가 풍성히 거두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풍성하게 거두려면 반드시 열심히 기도하며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배려와 섭리의 역사는 얼마나 기묘하고 깊은지요!
자, 이제 저녁이 되었고, 일꾼들은 어둠 때문에 일을 멈추었습니다.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주운 것을 채로 떨어보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룻은 곧바로 먹을 수 있는 보리를 가져가기 위해 이삭을 떨었습니다. 얼마나 착한 여인입니까? 저녁 어둠 속에서 대단히 피곤했을 텐데 시어머니가 고생하지 않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놓는 충성과 자상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한 에바는 22리터의 부피를 말하는데, 대략 1리터 콜라병 22개에 보리가 가득 찼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달 이상은 보리 걱정 안 하고 둘이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분량입니다. 정말 엄청나게 많은 양을 단 하루 동안에 수고하여 얻어낸 것입니다. 이에 룻은 비록 신체적으로는 대단히 피곤할지라도 그 마음은 한없이 신난 상태에서 보리 자루를 등에 지고 돌아옵니다.
아침 일찍이 나간 룻이 어떻게 되었는지 염려하며 기다리던 나오미가 드디어 저녁 늦게 즈음에 저 멀리서 돌아오는 룻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등에 큰 보리 자루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우울했던 나오미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룻은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시어머니에게 점심에 먹다 남은 볶은 곡식을 드립니다. 그러자 배가 고팠던 나오미는 너무 신이 나서 그 곡식을 먹으며 모든 것이 궁금합니다. 우울증은 어느새 물러가고 아침까지 ‘마라’였던 나오미가 이제 다시 ‘나오미가 되더니’ 신이 나서 질문합니다. 그리고 룻 역시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이때 그 둘의 대화는 감동과 신이 남과 호기심과 들뜸 등의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룻은 감사와 사랑의 여러 감정을 섞으면서 자기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밤 늦게까지 시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시어머니 역시 실컷 대화를 하는 가운데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워서 내일을 향한 기대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나오미에게 있던 마라의 슬픔과 우울함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찾으며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또한 은혜를 받은 후에도 또 더 많은 은혜를 받기 위해 쉬지 말고 계속 찾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무한하신 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고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주께서는 주의 약속을 믿고 행하면서 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룻처럼 하나님을 계속 믿고 의지하며 충성한다면 주께서는 하늘의 신령한 것들과 이 땅의 기름진 것으로 차고 넘치도록 부으실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마 7:11).
그리고 마침내 나오미와 룻이 한참 대화를 나누고는 그 남자가 누군지에 대해 말하게 됩니다.
“어머니! 그런데 그분 이름이 보아스라고 하던데요.”
그러자 나오미가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보아스! 아니, 이럴 수가! 그 사람은 네 시아버지의 친척이란다. 아, 그 분 너무나 훌륭하고 귀한 분인데, 아! 여호와께서 그 분에게 복 주시기를 빈다. 그 분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구나. 아! 너무 놀랍다. 며느리, 룻아. 보아스는 우리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우리 가문의 이름을 살려내고 또한 우리 가족의 땅을 사서 되돌려 줄 구속자란다.”
여기서 나오미가 보아스에 대해 사용한 단어는 (헷세드)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단어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가 주로 주 여호와 하나님께 사용되기에 몇몇 성경은 보아스가 아니라 여호와로 오역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분명하게 이 단어를 보아스에게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친절과 자비와 긍휼이 차고 넘치도록 흘렀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그녀의 남편과 아들들이 살아있을 때에도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을 기억하며 또 다시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好意)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보아스의 호의를 “헤세드”라고 칭송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한 가지 사실을 더 밝히는데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척으로써 엘리멜렉의 가문을 (가알)할 자라고 알려줍니다. 개역 개정은 히브리어 (가알)을 “기업 무를 자”로 번역되었고 권위 있는 영어 성경들은 kinsman-redeemer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주신 기업을 영원히 보존하고 또한 혈족을 유지하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고엘이 된 자는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했고(레 25:25,26), 대가 끊어지면 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代)를 이어 주어야 했습니다. 한편, 고엘의 자격으로는 혈연 관계에 반드시 있어야 하며, 충분한 재력이 있어야 했고, 고엘하겠다는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했고, 친족의 대를 잇기 위해 죽은 자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해야 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설명하기 전까지는 자신과 보아스가 어떤 관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경건하고 자비가 많은 귀한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엘 제도를 설명하면서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고엘이 될 수 있다고 말하자 룻은 보아스가 자신을 아내로 삼을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값을 치러줄 구속자를 만나셨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리디머, 곧 구속자이십니다.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만일 공의로운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값을 치르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 저주는 영원한 멸망이며 지옥 형벌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은 자들은 가알, 곧 구속, 속량,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5-17)
그러나 만일 가알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심판을 받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8-19)
그러므로 우리의 죄값을 위해 영원한 고엘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속히 믿고 영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힘써 남은 삶은 주 예수님께 순종하기 바랍니다.
룻은 보아스가 그들의 고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시어머니에게복된 소식을 알려줍니다.
“시어머니, 보아스는 저에게 자기 일꾼들 가까이에서 계속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의 추수가 다 마칠 때까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21절).
지금 룻이 한 말을 보면 룻은 초실절부터 오순절까지 이삭 줍기를 하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칫 큰 복이 굴러들어왔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당장 처음의 마음을 버리기 쉬운데 룻은 무엇보다 겸손을 유지하는데 훈련되어 있었고 이에 현재의 이삭을 풍성히 줍는 상태에 대해 끊임 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룻에게 분명하게 못을 박아줍니다.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22절).
이 권면은 룻을 가장 사랑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깊은 믿음의 체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즉, 지금부터는 자나깨나 보아스에게 마음을 두며 보아스만 바라보고 보아스에게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에게 속한 사람들과 함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이 말씀을 연결해 본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맛본 참 신자라면 항상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바라보며 소망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참된 교회 공동체에 늘 속하여 있으라는 권면입니다.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서 이삭을 주었습니까?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삶의 변화를 맛보았습니까?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사랑을 맘껏 누린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밭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씨가 있는 그 밭을 결코 떠나서는 안 됩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따라서 룻은 계속 보아스의 밭에서 풍성한 이삭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룻 2:23).
여러분의 삶의 길을 주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하기 바랍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의 삶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 하나님을 따라는 자들마다 반드시 안전한 진리의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떠나 다른 고엘을 찾지 않기 바랍니다. 보리 추수와 밀 추수가 다 마칠 때까지, 항상 우리의 보아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리 추수에 해당하는 초실절에 우리 주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으신 것을 압니다. 또한 밀 추수인 칠칠절 곧 오순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심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모압 여인과 같은 수많은 룻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고엘의 복음으로 택한 자들을 구원하여 내시고 또한 믿어 순종케 함으로 거룩함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보아스를 알기 전에 이미 자신이 룻을 고엘하게 될 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룻도 이제 보아스가 그녀를 고엘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보리 추수에서부터 밀 추수 때까지 대략 50일 동안 보아스와 룻은 서로를 더욱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룻의 겸손과 감사와 근면한 성품은 더욱 깊어갔을 것이며, 보아스의 자상함과 그의 공급과 보호와 사랑 역시 한없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둘은 이제 곧 사랑으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 룻은 그녀에게 맡겨진 시어머니 나오미를 늘 가까이 모셨습니다. 이는 권위 질서에 대한 바른 인식 및 하나님을 향한 룻의 경외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 모두가 룻처럼 여호와의 날개 아래 피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남은 삶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와 긍휼을 계속 누림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지날 때에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전글 : 룻1.다바크..다바르..헤세드
다음글 : 룻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