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24장 [446. 주음성외에는] [484 내맘의주여소망되소서]
[[하나님의 구원 영생, 그 은혜]]..Faithful and True이신 JC, Q의 의이신 그리스도는그분 영광의 모든 것, 곧 Q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누림의 은혜를 주셨음..
구속과 구원 두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다시 구속은 세부적으로 히브리어 파다(פדה)와 가알(לאג)로서 뜻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파다(פדה)는 속죄금을 지불함으로서 생명을 구원하는 구속의 행위이고, 그리고 가알(לאג)은 현재 능동태 분사형으로 가족법에 속하는 구속행위로서 페두트(פדות),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구속했다는 의미이다.
@@대(구)속하다, 속량하다, 구원하다...6399.파다(פדה) ..."예슈아 = 여호와 = 구원"..예수 그리스도 = 우리 구원이신, 구세주-구원주 하나님, 그분과의 하나를 완전히 이루셨음을 의미.
파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대(구)속하다, 속량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를 의미한다.
파다의 기본의미는 값을 지불하거나 그에 상당하는 대체물을 줌으로써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을 뜻한다.
이 어근은 앗수르어에서 '아끼다, 용서하다' spare를, 우가리트어에서 '속량하다' ransom을 의미한다(UT 19: no. 2013).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9회 나온다.
(a) 파다의 의미의 발전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원래 이 단어는 소유권의 이전을 위해 요구되는 대금을 지불하는 것과 관련된 상업적인 용어였다. 그러나 삼상 14:15을 보면 이러한 금전적 개념이 이 단어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울이 요나단의 본의 아닌 잘못에 대한 대가로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으나 "백성이...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셨다". 노예 상태란 '속량'(ransom)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출 21:8과 레 19:20에서 결혼을 위한 노예 소녀의 속량을 언급하고 있다.
(b) 파다는 초태생에 관한 율법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실 때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에 있는 모든 첫태생을 죽이는 대가로 그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출 4:23, 출 12:29). 하나님께서는 이로서 이스라엘의 사람과 짐승의 모든 첫태생의 생명에 대한 영원한 권리를 소유하시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 사건은 여호와께 사람과 짐승의 모든 첫태생을 바침으로써 이스라엘에서 영구히 기념되었다(출 13:12).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할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을 대신하여 예배의식을 집행할 목적으로 레위 족속을 구별시키시고(민 3:40 이하), 백성들의 가축대신 레위인들의 가축을 자기의 몫으로 성별하셨다(민 3:44 이하).
레위인들의 수를 초과한 장자들의 수는 따라서 1인당 5세겔의 값으로 속량 되었으며 이 돈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
(c) 후대에서 사람이나 부정한 짐승들의 초태생은 속량 받아야 했지만 소, 양, 염소의 첫 새끼는 속량될 수 없었다.
이는 그것들이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었으므로 희생으로 드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귀의 첫새끼는 어린양으로 대속하든지 도살되어야 했다.
여호와께 거룩한 것 즉 소나 양, 염소는 대속될 수 없었다(출 13:11-16, 출 34:19-20, 민 18:8-32).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바쳐진", 즉 금지를 당해 사람이 소유하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물이나 사람은 모두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였으므로 속량될 수 없었다(레 27:28-29).
(d) 대속에 관한 문제가 단지 이스라엘의 초태생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자체도 하나님의 초태생이었으며(출 4:22) 여호와의 구속을 받았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신 15:15, 신 24:18).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구원 받았으며 속량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 후 수세기를 통해 히브리 사상의 특징을 형성시켰다(삼하 7:23, 시 78:42, 시 111:9, 미 6:4).
이사야는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받은 하나님의 소명을 대속으로 보기까지 하였다(사 29:22, 참조: 벧전 1:18). 마찬가지로 그는 시온의 장래 구원을 그와 동일한 대속적 행위의 결과로 보았다(사 35:10, 사 51:11, 슥 10:8).
(e) 대속의 개념은 '구원하다'는 의미로 나아간다.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은 다른 어려움으로부터 또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음을 확언할 수 있었고(삼하 4:9, 왕상 1:29), 따라서 그는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시 25:22).
시편은 종종 하나님께서 어떤 위험(시 26:11, 시 31:5, 시 34:22, 시 44:26, 시 71:23) 또는 인간의 압제로부터(시 55:18, 시 69:18, 참조: 욥 6:23) 생명을 구원 내지 구속하는 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이나 재난은 사망, 스올, "구덩이"다.
시편 기자는 시 49:8, 시 49:9에서 인간의 부적격성을 날카롭게 표현하지만 하나님의 구속 능력은 한이 없다고 결론 짓는다(시 49:16).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 구속은 부활이다.
(f) 파다는 오직 한번 죄나 불의로부터 해방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 130:8). (참조: BDB; Gesenius; W. B. C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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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존전Coram Deo에서 어떻게 완전<타밈תמים<할 수 있을까요))
[수24:14..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야레) 온전함(타밈)과 진실함(에메트)으로 그를 섬기라(아바드) ]
[마5: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시18:25...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시26: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101 : 2,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6...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창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히브리어 <타밈תמים<은 흠잡을 데가 없는, 비난할 데가 없는, 완전한-순전한-깨끗한-성실한-순결한-건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을 뜻하며, 조금의 허물과 과실이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뜻하며(JC는 Faithful and True... 신실과 참이시다).. 사람에게 <타밈תמים<이 사용될 때는 "성실한 온전한"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사람이 어떻게 Coram Deo주님 존전에서 완전할 수 있을까요...스스로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요.. 이는 결코 사람 스스로의 노력과 힘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주께서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다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연합>할 때만 가능함을 주님은 아시기에.. 곧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 때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마치 "아버지와 하나이신" 주예수님이 땅을 걸으심처럼요))..
<연합>을 헬라어로 <쉰비바조συμβιβάζω>라고 합니다... "가르치다--알리다--지도하다"의 뜻이 그 안에 있습니다. "함께"의 의미를 가진 전치사 <쉰σύν>+ 앞으로 한 걸음의 뜻인 <바시스βάσις>가 합쳐진 말입니다.... "함께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걸어 주시며 인생의 모든 것을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며 인도해 주신다", 이것이 <연합>의 의미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길을 걸으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영혼,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영혼, 그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들으려고 합니다, 그 길을 따라 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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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고전2:16...누가 주의 마음(=누스)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누스)을 가졌느니라...For who hath known the mind of the Lord, that he may instruct him? But we have the mind of Christ.]
##연합하다=상합하다..sumbibavzw..결합하다, 논증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쉼비바조(Hdt. 이래)는 쉰($4862: 함께, ~와 함께, ~와 더불어)과 비바조(%805: 가게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함께 결합시키다, 함께 모으다, 조화시키다',|(b) '숙고하다, 고찰하다',|(c) '비교하다, 추론하다, 논증하다, 설명하다',|(d) '가르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쉼비바조는 70인역본에서 10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라(3384: 가르치다, 알리다, 보이다, 출 4:12; 출 4:15; 레 10:11; 삿 13:8; 시 32:8), 야다(3045: 알다, 이해하다, 출 18:16; 신 4:9; 사 40:13), 빈(995: 분별하다, 가르치다, 이해하다, 사 40:14), 사칼(7919: 분별력이 있다, 총명하다, 단 9:22)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가르치다, 보이다, 알게하다, 총명하다'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쉼비바조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쉼비바조는 골 2:2; 골 2:19과 엡 4:16에서 "결합하다, 하나로 연합하다"를 의미한다.
몸은 머리와 결합되어 있다. 머리는 몸에 생명을 준다. 그리고 자기 본위적인 경건심은 머리와의 이러한 결합에 기여한다. 사랑을 통한 교회의 연합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지식은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골 2:19과 엡 4:16을 따르면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연합한다. 그 문맥에서 강조점은 공동체의 생명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며, 하파이에 의하여 구성원들에 전해진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서 일치가 공동체에게 주어진다. 독단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신앙으로 천사들을 숭배하는 사람은 머리로 이루어지는 연합을 깨뜨린다(골 2:19). 아마도 이것은 골 2:2에서도 지니는 그 의미일 것이다.||
(b) 쉼비바조는 행 9:22에서 "결정적으로 증명하다"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들어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을 완전히 당황스럽게 만든다(굴복시킨다). 이러한 바울의 논증은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연속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용어들에 관해서는 행 17:2-3을 참조하라. 한편 행 16:10-11에는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자신이 할 일에 대하여 결단을 내렸던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c) 쉼비바조는 행 19:33에서 '지시하다'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더를 "권하였다". 한편 고전 2:16은 사 40:13에 근거한다.
[고전 2:16..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고전 2장은 사 40:13을 단축시켜서(롬 11:34은 세 번째 요소를 생략한다) 그 말씀을 날카롭게 만든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
하나님을 가르칠 사람은 먼저 그의 누스($3563)을 꿰뚫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이전의 상황에서 이 말씀은 특히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깊은 틈을 나타내는데 적합하다. 그러나 고전 2장에서의 그 말씀의 사용은 그리스도 이후의 상황의 근본적인 특징을 표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누스($3563)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다. 사 40:13과 고전 2:16 모두에서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신비이다; 고전 2:6-16에서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의 신비이다.|(참조: G. De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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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4:8...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출23:25...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삼상12:24...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섬기다>의 히브리어가 <아바드 בדַעָ<입니다 ....."이롭게 하기 위해서 봉사하다 헌신하다 정성을 다하다"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섬기다>는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 <아바드>의 깊은 의미 중에는 예배하다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최고의 섬김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는 마음 중심이 담겨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전인격적인 예배 곧 지성과 감성 의지를 다 드려서 하나님만 기뻐하는 그 예배는 하늘 문을 여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바드>가 발음은 똑같지만 정반대의 의미도 있습니다 <아바드בדַאָ<의 또 다른 뜻에는 "망하다 --무너지다-- 수렁에 빠지다-- 헤매다-- 방황하다-- 깊은 갈등 속에 들어가다"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모습에서 오는 대가를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가지 태도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섬기는 <아바드 בדַעָ<인지? 하나님을 떠나서 깊은 수렁에 들어가는 <아바드בדַאָ ?<인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모습이라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예배 드리는 <아바드 בדַעָ<의 인생이 되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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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1:9하 -23 ...*..9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여호수아가 세겜에 모인 백성에게 이르다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6. 내가 너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의 조상들을 홍해까지 쫓아오므로
7. 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들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
8.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9. 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10. 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11.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주민들 곧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었으며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스스로, 혼자서는)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23.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25.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28.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죽다
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3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33.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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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제24장
1. And Joshua gathered all the tribes of Israel to Shechem, and called for the elders of Israel, and for their heads, and for their judges, and for their officers; and they presented themselves before God.
2. And Joshua said unto all the people, Thus saith the LORD God of Israel, Your fathers dwelt on the other side of the flood in old time, even Terah, the father of Abraham, and the father of Nachor: and they served other gods.
3. And I took your father Abraham from the other side of the flood, and led him throughout all the land of Canaan, and multiplied his seed, and gave him Isaac.
4. And I gave unto Isaac Jacob and Esau: and I gave unto Esau mount Seir, to possess it; but Jacob and his children went down into Egypt.
5. I sent Moses also and Aaron, and I plagued Egypt, according to that which I did among them: and afterward I brought you out.
6. And I brought your fathers out of Egypt: and ye came unto the sea; and the Egyptians pursued after your fathers with chariots and horsemen unto the Red sea.
7. And when they cried unto the LORD, he put darkness between you and the Egyptians, and brought the sea upon them, and covered them; and your eyes have seen what I have done in Egypt: and ye dwelt in the wilderness a long season.
8. And I brought you into the land of the Amorites, which dwelt on the other side Jordan; and they fought with you: and I gave them into your hand, that ye might possess their land; and I destroyed them from before you.
9. Then Balak the son of Zippor, king of Moab, arose and warred against Israel, and sent and called Balaam the son of Beor to curse you:
10. But I would not hearken unto Balaam; therefore he blessed you still: so I delivered you out of his hand.
11. And you went over Jordan, and came unto Jericho: and the men of Jericho fought against you, the Amorites, and the Perizzites, and the Canaanites, and the Hittites, and the Girgashites, the Hivites, and the Jebusites; and I delivered them into your hand.
12. And I sent the hornet before you, which drave them out from before you, even the two kings of the Amorites; but not with thy sword, nor with thy bow.
13. And I have given you a land for which ye did not labor, and cities which ye built not, and ye dwell in them; of the vineyards and oliveyards which ye planted not do ye eat.
14. Now therefore fear the LORD, and serve him in sincerity and in truth: and put away the gods which your fathers served on the other side of the flood, and in Egypt; and serve ye the LORD.
15. And if it seem evil unto you to serve the LORD, choose you this day whom ye will serve; whether the gods which your fathers served that were on the other side of the flood, or the gods of the Amorites, in whose land ye dwell: but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16. And the people answered and said, God forbid that we should forsake the LORD, to serve other gods;
17. For the LORD our God, he it is that brought us up and our fathers out of the land of Egypt, from the house of bondage, and which did those great signs in our sight, and preserved us in all the way wherein we went, and among all the people through whom we passed:
18. And the LORD drave out from before us all the people, even the Amorites which dwelt in the land: therefore will we also serve the LORD; for he is our God.
19. And Joshua said unto the people, Ye cannot serve the LORD: for he is an holy God; he is a jealous God; he will not forgive your transgressions nor your sins.
20. If ye forsake the LORD, and serve strange gods, then he will turn and do you hurt, and consume you, after that he hath done you good.
21. And the people said unto Joshua, Nay; but we will serve the LORD.
22. And Joshua said unto the people, Ye are witnesses against yourselves that ye have chosen you the LORD, to serve him. And they said, We are witnesses.
23. Now therefore put away, said he, the strange gods which are among you, and incline your heart unto the LORD God of Israel.
24. And the people said unto Joshua, The LORD our God will we serve, and his voice will we obey.
25. So Joshua made a covenant with the people that day, and set them a statute and an ordinance in Shechem.
26. And Joshua wrote these words in the book of the law of God, and took a great stone, and set it up there under an oak, that was by the sanctuary of the LORD.
27. And Joshua said unto all the people, Behold, this stone shall be a witness unto us; for it hath heard all the words of the LORD which he spake unto us: it shall be therefore a witness unto you, lest ye deny your God.
28. So Joshua let the people depart, every man unto his inheritance.
29. And it came to pass after these things, that Joshua the son of Nun, the servant of the LORD, died, being an hundred and ten years old.
30. And they buried him in the border of his inheritance in Timnathserah, which is in mount Ephraim, on the north side of the hill of Gaash.
31. And Israel served the LORD all the days of Joshua, and all the days of the elders that overlived Joshua, and which had known all the works of the LORD, that he had done for Israel.
32. And the bones of Joseph, which the children of Israel brought up out of Egypt, buried they in Shechem, in a parcel of ground which Jacob bought of the sons of Hamor the father of Shechem for an hundred pieces of silver: and it became the inheritance of the children of Joseph.
33. And Eleazar the son of Aaron died; and they buried him in a hill that pertained to Phinehas his son, which was given him in mount Ephra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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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hua 24 Amplified Bible
===Joshua Reviews Israel’s History
1 Then Joshua gathered all the tribes of Israel to Shechem, and called for the elders of Israel and for their heads and for their judges and for their officers; they presented themselves before God. 2 Joshua said to all the people, “This is what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s, ‘Your fathers, including Terah, the father of Abraham and the father of Nahor, lived beyond the [Euphrates] River in ancient times; and they served other gods. 3 Then I took your father Abraham from beyond the [Euphrates] River and led him through all the land of Canaan, and multiplied his descendants, and I gave him Isaac. 4 To Isaac I gave Jacob and Esau, and to Esau I gave [the hill country of] Mount Seir to possess; but Jacob and his sons went down to Egypt. 5 Then I sent Moses and Aaron, and I plagued Egypt by what I did in its midst; and afterward I brought you out. 6 Then I brought your fathers out of Egypt, and you came to the sea; and the Egyptians pursued your fathers with chariots and horsemen to the Red Sea. 7 When they cried out to the Lord [for help], He put darkness between you and the Egyptians, and brought the sea upon them and covered them; and your own eyes saw what I did in Egypt. And you lived in the wilderness [a]a long time (forty years). 8 Then I brought you into the land of the Amorites who lived on the other side of the Jordan, and they fought with you; and I gave them into your hand, and you took possession of their land and I destroyed them before you. 9 Then Balak the son of Zippor, king of Moab, arose and fought against Israel, and he sent and called Balaam the son of Beor to curse you. 10 But I would not listen to Balaam. Therefore he had to bless you, so I saved you from Balak’s hand. 11 You crossed the Jordan and came to Jericho; and the citizens of Jericho fought against you, as did the Amorite and the Perizzite and the Canaanite and the Hittite and the Girgashite, the Hivite and the Jebusite; and so I gave them into your hand. 12 I sent the hornet [that is, the terror of you] before you, which drove the two kings of the Amorites out before you; but it was not by your sword or by your bow. 13 I gave you a land for which you did not labor, and cities which you did not build, and you live in them; you eat from vineyards and olive groves which you did not plant.’
14 “Now, therefore, fear the Lord and serve Him in sincerity and in truth; remove the gods which your fathers served on the other side of the [Euphrates] River and in Egypt, and serve the Lord. 15 If it is unacceptable in your sight to serve the Lord, choose for yourselves this day whom you will serve: whether the gods which your fathers served that were on the other side of the River, or the gods of the Amorites in whose land you live; but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16 The people answered, “Far be it from us to abandon (reject) the Lord to serve other gods; 17 for the Lord our God is He who brought us and our fathers up out of the land of Egypt, from the house of bondage, and who did these great signs (miracles) in our sight and kept us safe all along the way that we went and among all the peoples among whom we passed. 18 The Lord drove all the peoples out from before us, even the Amorites who lived in the land. We also will serve the Lord, for He is our God.”
19 Then Joshua said to the people, “You will not be able to serve the Lord [if you serve any other gods], for He is a holy God; He is a [b]jealous God [demanding what is rightfully and uniquely His]. He will not forgive your transgression [of His law] or your sins. 20 If you do abandon (reject) the Lord and serve foreign gods, then He will turn and do you harm and consume and destroy you after He has done you good.” 21 The people said to Joshua, “No, but we will serve [only] the Lord.” 22 Joshua then said to the people, “You are witnesses against yourselves that you have chosen for yourselves the Lord, to serve Him.” And they said, “We are witnesses.” 23 “Now then, remove the foreign gods which are among you, and incline your hearts toward the Lord, the God of Israel.” 24 The people said to Joshua, “We will serve the Lord our God and we will listen to and obey His voice.” 25 So Joshua made a covenant with the people that day, and made for them a statute and an ordinance at Shechem. 26 And Joshua wrote these words in the Book of the Law of God. Then he took a large stone and set it up there under the oak that was in [the courtyard of] the sanctuary of the Lord. 27 Joshua then said to all the people, “Look, this stone shall serve as a witness against us, for it has heard all the words of the Lord which He spoke to us; so it shall be a witness against you, so that [afterward] you do not deny your God.” 28 Then Joshua sent the people away, each to [the territory of] his inheritance.
===Joshua’s Death and Burial
29 It happened after these things that Joshua the son of Nun, the servant of the Lord, died, at the age of a hundred and ten years. 30 They buried him in the territory of his inheritance in Timnath-serah, which is in the hill country of Ephraim, on the north side of Mount Gaash.
31 Israel served the Lord all the days of Joshua and all the days of the elders who outlived Joshua, and had known all the works of the Lord which He had done for Israel.
32 Now they buried the bones of Joseph, which the children of Israel brought up from Egypt, at Shechem, in the plot of land which Jacob had bought from the sons of Hamor the father of Shechem for a hundred pieces of money; and it became the inheritance of the sons of Joseph. 33 And Eleazar [the priest], the son of Aaron died; and they buried him at Gibeah [on the hill] of Phinehas his son, which had been given to him in the hill country of Ephraim.
===Footnotes
Joshua 24:7 Lit many days.
Joshua 24:19 I.e. intolerant of unfaithfu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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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4장 (개요)
이제 여호수아의 생애와 통치가 모두 끝난다.
1. 자기가 죽은 후에도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앙과 예배를 더욱 굳게 지켜나가게 하기 위해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회중의 족장들의 총회를 또다시 불러 모았다(1).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다시 열거함(2-13).
(2) 여호와를 경외하며 진정으로 섬길 것을 부탁함(14).
(3)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과 협정을 맺음.
① 종교를 신중히 선택하게 함(15-18).
② 그것을 확고부동한 선택으로 만들고 거기에 전념하도록 함(19-24).
(4) 이 협정에 대해 언약 형식을 취함(25-28).
2. 여호수아가 통치하던 가나안 정복 역사의 종결.
(1) 여호수아와(29, 30) 엘르아살(33)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이 기회에 요셉의 뼈를 매장한 이야기(32).
(2) 당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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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2차 고별 설교 (1)(수 24:1-14)
여호수아가 앞 장에서 “나는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거니와”라고 말했을 때, 이스라엘에게 한 엄숙한 부탁에서 그의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예기했던 것보다 더 오래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며 그의 힘을 새롭게 하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해서 선용하려고 했다. 그는 “나는 이미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니 그것으로 다 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더 오랜 삶이 허락되었을 때, 온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모으고 그들이 하나님께 전심하도록 할 수 있는 일을 더 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생명이 끝날 때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일을 다했다고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 분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많은 날들을 연장해 주신다면 우리에게 할 일이 아직 더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총회는 앞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로 이루어졌다(1절). 그러나 이 총회는 앞 장의 것보다 무언가 더 엄숙했다.
Ⅰ. 그들의 모임이 지정된 장소는 세겜이었다.
이 곳은 실로보다 여호수아에게 더 가까이 위치했다. 따라서 지금 노쇠해 여행하기 어려운 여호수아를 위해서 보다 편리한 곳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 백성과의 언약의 첫 번 체결자였던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와서 정착한 곳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곳이며(창 12:6, 7), 그 가까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으며, 여기서 백성들은 처음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한 곳이기(수 8:30) 때문이기도 했다.
이 곳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과 맺은 약속과 자기들 스스로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생각나게 해 줄 수 있는 곳이었다.
Ⅱ. 그들은 이 총회에서 여호수아 앞에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나타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로 나아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생각으로 엄숙한 종교적인 의식을 갖추고 모여들었다.
아마도 이 의식은 기도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주석 학자들은 이런 큰 기회에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을 시켜 세겜으로 법궤를 메고 와서 자기들의 회의 장소에 설치하도록 명령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세겜은 실로에서 약 10마일 거리이며, 당시 그렇게 설치된 법궤가 세겜에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성소”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이 일은 제전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거기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취해진 조처였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어떤 감각적인 현현을 보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마 18:20) 그리스도께서도 그 가운데 계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도 계셨으리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현신하는 것임을 또한 믿어야 한다.
Ⅲ.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선지자의 말로 그들에게 이야기했다(2절).
“여호와의 말씀에, 여호와 곧 위대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너희의 언약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듣고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자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사자가 위대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돋보이게 할 수 없고, 그 사자의 천박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소시키지도 못한다.
여호수아의 설교는 교리와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1. 교리적 부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그들의 선조들을 위해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의 역사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옛날의 기사들을 다시 열거하신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했다.”
그들은 이러이러한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행하셨다는 것까지 알고 묵상해야 한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기이한 일들의 연속이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더 많은 이야기들을 언급했겠지만 간결하게 하느라고 여기서는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해 내셨다(2, 3절).
아브라함과 그의 조상들은 거기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 곳은 학문으로는 훌륭한 곳이었지만 우상을 섬기는 나라였다.
어떤 이들은 그 곳이 우상의 발상지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전 1:21).
아브라함은 후에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천국의 위대한 총아가 되었는데, 그도 우상 숭배 속에서 양육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그를 불 가운데서 끄집어낸 막대기같이 끌어낼 때까지는 그런 환경 가운데서 살았다. 그러니 이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반석에서 자기들이 빚어져 나왔음을 기억하게 하고, 그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무상의 은총의 기적으로 떠나온 그 죄악으로 다시 퇴보하지 않도록 하라. “내가 그를 이끌어 냈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 죄 많은 나라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사도에 따르면,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한 본보기를 이루었다(롬 4:5).
(2)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이끌어 내사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세겜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스마엘을 통해서 그의 씨를 번성케 하시고(그는 열두 방백을 낳았다), 마침내 그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사 그를 통해서 그의 씨를 번창케 하셨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 두 아들을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위해 세일 산에 기업을 마련하시고, 가나안 땅은 전적으로 야곱의 자손을 위해 남겨 두셨으며, 에서의 후손이 이것을 나누어 갖자고 주장할 수 없게 하셨다.
(3) 하나님은 높은 손으로 야곱의 후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고(5, 6절), 홍해에서는 바로와 그의 군대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셨다(6, 7절).
똑같은 물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수호자가 되었지만 애굽인들에게는 무덤이 되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 이야기에서 그들이 당황해 하나님께 대해 불평을 쏟아 놓았지만(출 14:11, 12), 여호수아는 그것을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기도하는 그들을 받아주시고 그 분과 다투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간과해 주셨다.
(4)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보호해 주셨다.
본문에 따르면 이 광야에서 그들이 “방랑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다”(7절)고 되어 있다.
그들의 모든 움직임을 현명하게 지도하시며 그들을 너무나 안전하게 지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도 마치 성벽 있는 마을에 살고 있는 것같이 안전한 거주지를 향유했다.
(5)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요단 강 저편 아모리 족속의 땅을 주셨다(8절).
그리고 그들을 대적하는 발락과 발람의 음모를 무너지게 하심으로써, 발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수 없었고, 자기가 계획했던 대로 감히 싸우려고 하지도 못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그의 혀를 돌려놓으신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두드러짐을 보여 주는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로 이야기된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지금도 그렇고, 또 그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정신까지도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을 증명하셨다.
(6) 하나님은 그들을 안전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가나안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가나안 족속을 그들의 수중에 붙이셨다(11절).
“왕벌을 그들 앞에 보내어”
그들이 실제로 원수들과 싸움에 임했을 때 왕벌의 독침으로 원수들을 괴롭히고 이것들의 요란한 소리로 원수들을 두렵게 했기 때문에, 원수들은 이스라엘에게 손쉬운 노략물이 되었다.
이 무시무시한 벌 떼는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과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나타났고, 그후로 다른 전쟁에서도 계속 그랬다(12절).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기로 미리 약속하셨다(출 23:27, 28).
여기서 여호수아는 이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유념하고 있다(출 23:27, 28; 신 7:20).
이 왕벌들은 이스라엘의 무기보다도 더 원수들을 괴롭혔음이 틀림없고, 따라서 여호수아는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한 것이 아니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순수한 여호와의 행위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지금 아름다운 땅을 평화스럽게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노동의 결실을 가지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2. 이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의 적용으로, 그 분의 사랑에 대한 보답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며 그것이 계속되도록 하라고 권면했다(14절).
그러므로 이제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1) “여호와, 즉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경외하라(호 3:5). 이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를 노하게 하는 일과 그의 선하심을 빼앗기는 일을 두려워하라. 그의 위엄에 대한 경외와 그의 권위에 대한 존경과 그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과 그리고 너희를 향하여 끊임없이 살피시는 그의 관심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라”고 했다.
(2) “이 원칙을 끊임없이 실천하며, 종교적인 예배의 외적 행위로나 너희의 모든 대화에서 언제나 순종의 증거를 보임으로써 그를 섬기라. 그리고 이것을 곁눈질하지 말고 정직한 마음으로 성실과 진정으로 하고, 그리고 내적 충동과 외적 표현이 서로 일치될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중심에 진실함(시 51:6)이다.”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이간시켜 놓는 것이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3) 갈대아인이나 애굽인들의 우상과 같은 “이상한 신들을 제하여 버리라.”
이런 것들은 대부분이 하나님을 저버리게 하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탁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23절), 그들이 비록 이 우상들을 섬기지는 않지만, 자기 가족의 가보로서 그들 선조 때로부터 자기들의 수중으로 전수되어 온 이런 불결한 신상의 그림이나 조각품들을 은밀하게 골방에 숨겨 두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여호수아는 간절하게 그들에게 이것을 버릴 것을 강권했다. “그것들을 부수어 버리라. 그것들을 깨뜨려 버리라. 그래서 그것들을 섬기는 유혹을 받지 않게 하라.”
야곱도 자기 가족에게 바로 이 장소에서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이 가진 작은 신상들을 야곱에게 주었을 때, 그는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다”(창 35:2, 4). 상수리나무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데(26절), 그것이 동일한 “상수리나무”인지 혹은 같은 장소에 있는 다른 나무인지 알 수가 없다.
우상 숭배의 상수리나무도 있었듯이, 이것을 “개혁의 상수리나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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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2차 고별 설교 (2)(수 24:15-28)
여호수아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한 이 언약보다도 더 잘 체결된 언약이나 혹은 더 좋은 결과를 낸 언약은 세상에 없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다룬 그 태도는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데 대한 온갖 의무들, 특별히 선택과 언약의 의무를 그들에게 부과시키는 일에 얼마나 진지했으며 마음을 깊이 쏟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Ⅰ.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선택한다면, 그들에게 어떤 의무가 부과될 것인가?
여호수아가 여기서 백성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든 섬기지 않든 아무런 관계가 없다든가 혹은 그들이 임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결단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들의 신앙생활의 견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두 가지 일을 하게 한다.
1.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그리고 이지적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합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는 그 의지의 천부적인 자유에서 빛날 수 있으며 그 의지의 자랑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 자유로 선택한 것에는 즐겨 따르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므로 예배가 우발적인 일이거나 우리에게 강요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1) 따라서 여호수아는 이 일을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게 했다(15절).
① 여기서 여호수아는 이 선택을 위한 후보자를 내세웠다.
한쪽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다른 한쪽은 자기 조상들로부터 전수되어 온, 그리고 어쩌면 옛날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섬기고 싶어할지도 모르는 자기 조상들의 신들이거나 혹은 “그들의 이웃들,” 즉 “그들이 거하는 땅” 아모리 족속의 “신”이었다.
이런 것들은 이웃과 친교를 좋아하거나 친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정을 이용해 교묘하게 파고들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② 여호수아는 그들 가운데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 가운데는 세상과 정욕으로 기울어 종교에 대해서 편견과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부정하고 정욕을 억제하며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며 어렵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견습의 위치에 있을 경우에는 그 길에 약간의 난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 도리어 적합하다. 그렇지 않다면 시련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만다.
③ 여호수아는 이 일을 그들 스스로에게 맡겼다.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오늘 택하라. 지금 바로 그 문제가 너희들 앞에 명백하게 놓여 있다. 빨리 그것을 판단하라. 그리고 망설이지 말라.”
엘리야는 이보다 오랜 후에 여호와와 바알 사이의 논쟁에 대한 결단을 자기가 접하고 있는 백성들의 양심에 의뢰했다(왕상 18:21).
여호수아가 여기서 이 문제를 결단하도록 제기한 데는 두 가지가 분명하게 암시되고 있다.
첫째로, 우리 각자가 진지하고 사려 깊게 우리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공정하게 스스로 따져 보고, 그것을 저울에 달아보며, 그러고 나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참으로 진실과 선을 발견할 때에 결단해야 한다.
우리가 진지하게 경건의 생활을 결단할 때는, 우리가 그 외의 다른 길을 모르기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탐구한 후에 실제로 그보다 더 좋은 길이 없기 때문에 결단해야 한다.
둘째로, 종교는 너무나 자명한 이유와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택하든 거부하든 개인의 자유 사상에 따라 하도록 일임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진가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사려 있는 사람은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하게 함으로써 이토록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을 때, 그들 가운데 대답을 하기 전에 생각해 볼 시간을 원한다든가 혹은 친구들과 의논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지 어떤지 알아보려고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일 이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는 그들을 따로 세우고 나머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을 피하도록 경고하려고 했을는지도 모른다.
④ 여호수아는 자기 자신의 결단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선택을 지시했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너희들이야 어떻게 하든,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나는 너희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서 그는,
첫째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결단한다. “나는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아무리 위대한 사람에게라도 면제되지 않는다.
신앙적이 된다는 것은 왕들이나 명사들을 위축시키거나 경멸당하게 한다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것은 도리어 그들의 최대의 존귀이며, 그들에게 가장 찬란한 영광의 면류관을 덧입혀 주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적극적인지 살펴보라. “나는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의 언약에 속박시키는 것은 절대로 우리들의 자유에 대한 방해가 아니다.
둘째로, 그는 자기 집을 위해서, 다시 말해 가족과 자식과 종들, 즉 직접 자기의 눈과 관심 아래, 또 자기의 관리와 영향 아래 있는 그런 자들을 위해서 결단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통치자요 재판자였다. 그러나 그는 피할 수 없는 공공 업무에 대한 자기의 열심을 자기 가족 신앙에 대한 태만의 구실로 삼지 않았다.
통치자나 교역자로서 많은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자들은 자기 가족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딤전 3:4, 5).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섬기겠노라.
a. 이것은 “나는 빠지고 나의 집만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는 자기는 하지 않고 자기 가족만 그 일에 종사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자식이나 종들이 착하게 되기를 원하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그렇게 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천국에 가게 되기를 원하면서 스스로는 지옥에 빠져드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b. “나의 집은 빠지고 나만이”라는 말도 아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집안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집안에서는 그의 권위가 보다 크고, 보다 직접적이며, 거기서는 그가 임의로 지배했을 것이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많은 사람을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고,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그 마지막 부분에까지 노력을 펼쳐 나가야 한다. 우리가 만일 그 땅을 개혁할 수 없다면 우리의 장막 주변에서라도 악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c. “내가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 나의 가족”이라는 말이다.
다른 일들을 지도하고 통치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앞장서야 하고 최선의 일을 선행해야 한다.
셋째로, 그는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지 간에 이 일을 하기로 결단한다.
비록 이스라엘의 온 가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게 된다고 해도 여호수아와 그의 가족은 변함없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친근히 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한 사람들은 혼자라는 것 때문에 염려해서도 안 되며 군중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저버린다고 해서 개의해서도 안 된다.
천국을 향해서 결심한 자들은 기꺼이 강물을 거슬러 헤엄쳐야 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따라 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2) 이 일이 이와 같이 선택하도록 놓여지자 그들은 즉시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지성적인 선언을 통해서 모든 경쟁자(그것이 어떤 경쟁자든 간에)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편으로 결단한다(16-18절).
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그토록 위대한 축복이 되어온 이 훌륭한 한 인간의 본보기의 감화를 받아 여호수아의 결단에 동의한다(18절).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이 종교에 열심이 있다면 그 아랫사람들에게 끼치는 그들의 영향으로 얼마나 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라.
② 그들은 하나님을 배신한다는 생각에 경악한다(16절).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라.” 이 말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두려움과 증오를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나 우리의 자손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일 조금이라도 이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건 정의와 은총과 명예를 완전히 상실당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떠나게 하는 온갖 유혹에 대항해서 분발해야 한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
③ 그들은 자기들의 선택에 대해 아주 실제적인 이유를 내세운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순전히 여호수아에 대한 묵종에서가 아니라, 이 일에 대한 당위성과 공정함에 대한 충분한 확신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들이 이것을 선택한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사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들인, 자기들을 위해서 행하신 그 위대하고도 너무나 친절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서였다(17, 18절). 이와 같이 그들은 스스로가 여호수아의 설교를 반복하며, 이런 취지에 따른 그들의 성실한 순종을 표현한다.
둘째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는 관계와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를 생각해서였다.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18절). 그는 자비롭게도 스스로 우리와 약속을 맺으셨으며 또한 우리도 엄숙히 맹세함으로 그와 약속했습니다.”
2.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확고부동하게 자기들의 신앙을 받들고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 위해 온 마음을 쏟아놓게 했다.
이제 그는 그들이 선한 마음을 품게 되자, 할 수 있는 한 정해진 곳에 못이 박혀 있도록 하기 위해 그 못을 계속 두드려 머리까지 때려박는다.
단단히 단속하면 잃는 법이 없다.
(1)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여호수아는 그들 앞에 신앙의 역경과 그들을 실망시킬지도 모르는 어려움들을 설치한다(19, 20절).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 말에 따르면,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들이시다”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의미한다.
“거룩, 거룩, 거룩”은 거룩하신 아버지, 거룩하신 아들, 거룩하신 성령을 의미한다. “그는 너희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다.” 그리고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면 너희에게 화를 내리실 것이다.”
여호수아가 여기서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비실제적이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려고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① 그러나 그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들의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자기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떠나도록 유혹하는 유혹자들의 제안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 것 같다. 유혹자들은 하나님이 완고한 주인이며, 그 분이 요구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며, 그 분은 결코 기뻐하지 않는 신이며 또한 기분이 나빠지면 달랠 수도 없고 복수심이 강렬한 분이 되신다고 속삭인다. 그래서 그는 오직 자기만을 경배하도록 강요하며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털끝만치의 친절도 보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데서 그 분은 다루기가 쉽고 거룩하지도 질투하지도 않는 다른 나라의 신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신이라고 하는 등등의 교묘한 말을 가지고 유혹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실제로 당시 유대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의견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것은 역사 이래와 언제나 그렇게 해온 사탄의 술책인데, 사탄은 우리의 첫 조상에게도 하나님과 그 분의 율법은 사납고 혹독한 것이라고 왜곡시켜 유혹했다. 여호수아는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의 태도와 목소리에서 이것이 반대 의견을 의미하는 것임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지각하게 하고 이 반대 세력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자기 위치를 지킬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혹은,
② 그는 이와 같이 해서 백성들에게 자기의 경건한 질투와 비록 그들이 하나님과 그 분을 섬김에 대한 열심을 고백하기는 했지만 후에 물러설지도 모른다는 그들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표현하며,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이 일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며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들로 깨닫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혹은,
③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과 얼마나 엄격한 언약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지 앉아서 그 대가를 따져봄으로써 이 일의 최악의 경우를 알게 한다.
“너희가 너희 모든 다른 신들을 버리지 않으면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 그는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분이며 절대로 경쟁자를 허용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버린다면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너희들은 이 일보다 더 좋은 것을 안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주님도 “내 멍에는 쉽다”(마 11:30)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해 주시면서도,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태만하고 지각 없이 굴게 될까 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해서 우리가 단순히 찾는 것뿐만 아니라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다면 너희는 하나님과 경쟁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너희 자신의 어떤 의로도 너희 잘못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의와 힘은 여호와에게만 있나니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사 45:24, 25).”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능력의 모든 신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목적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혹은,
④ 여호수아는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이 외관상의 난관들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결단을 더욱 뚜렷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보다 확실하고 엄숙한 약속을 얻어 냄으로써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들의 신앙에 대해 신실해지기를 원했다.
그가 백성들로부터 이런 약속을 이끌어 낸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간절하게 이 일에 집착하고 보다 굳게 이 일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 이런 신앙의 역경에 대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확고부동한 결단과 이 신앙에 대한 성실을 선언한다(21절).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우리는 그가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의 종들로 하여금 자기만을 예배하도록 구속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를 더 나쁜 분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땅히 그는 자기를 저버리는 자들을 소멸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그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그를 섬길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떠나며 그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는 어떤 강권도 참고 들을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룻 1:16).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은 이 결단에 해석을 덧붙여 반복한다(24절).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종으로 불리며 그의 종의 옷을 입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종교가 모든 일에 우리를 지배할 것이며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우리가 만일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그의 말하는 것은 행치 아니하는(눅 6:46) 것이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부과한 의무에 대해 그들이 응답한 이 마지막 약속은(23절) 견인을 위해 다음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① 그들이 자기들을 “지으신 자를 남편”으로(사 54:5) 삼기로 결단하므로, 다른 애인을 일체 버리고 이방 신들의 화상과 유물을 모두 버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음성에 순종할 것을 약속했다.
② 자기들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께 전념하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애정만을 지키도록 마음을 다스리겠다고 했다.
이런 조건에 그들이 동의했다. 또한 여호수아가 이 협정을 설명함으로써 그들은 그 협정을 확정짓는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겠나이다.”
Ⅱ.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이와 같이 신중한 선택으로 이루어지자 여호수아는 그들과 엄숙한 언약을 체결했다(25절).
모세는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이 언약을 두 번 인준했는데, 한 번은 시내 산이고(출 24장) 한 번은 모압 평지였다(신 24:1).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로 이 일을 한 번 했고(8:31-35), 지금이 두 번째다. 여기서는 언약이 “율례와 법도”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이것이 지니는 위력과 그것에 대한 의무의 지속성 때문이며, 또한 이것이 하나의 언약에 불과하지만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체결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여호수아는,
1. 그들 자신을 증인으로 부른다(22절).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이 날의 의식을 결코 잊지 말라고 다짐한다. 만일 이후로 이 언약을 파기한다면 그들이 지금 한 이 약속과 고백은 분명 그들을 향한 심판으로 나타나서 정죄할 것이라고 확신시킨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에 대해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라고 동의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게 거짓을 저지른다면 우리 입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2. 여호수아는 이것을 기록하고 우리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거룩한 경전에 이것을 끼워 넣는다.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율법책에 기록했다”(26절).
그래서 그 원본은 법궤 옆에 두고, 아마도 몇 부를 복사해서 각 지파에서 족장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기록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과 자기들 스스로의 약속에 따른 신앙에 대한 책임이 함께 기록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3. 여호수아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것은 이 기록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한 것이었다(26, 27절).
그는 이 언약의 기념비로서 “큰 돌을 취하여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아마도 (돌들이 말하게 되는)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해 그 돌 위에 비문을 새겼을지도 모른다. 마치 이 돌이 그들 중의 몇몇 사람처럼 언약의 참뜻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 돌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들었다”라고 여호수아가 말한 것은, 은근히 백성들의 완악함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지금 있었던 일을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이 돌들은 오래오래 이 사실에 대한 기억을 유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둔과 경솔을 책망할 것이며, 그들을 고발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일이 타결되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귀인들의 총회를 해산시키고(28절)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이토록 그가 할 일을 만족하게 잘 끝냄으로써, 그는 자기 영혼을 구원했다. 만일 그들이 망한다면 그들의 피는 각자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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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죽음(수 24:29-33)
이 책은 승리로 시작해서 모든 사람의 영광을 얼룩지게 하는 장례식으로 끝난다.
Ⅰ. 요셉의 장례(32절).
그는 애굽에서 2백 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다”(히 11:22).
그의 유해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무덤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애굽으로부터 유해를 채운 관을 메고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계속해서 이것을 메고 왔으며(아마도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두 지파가 이 유해를 특별히 맡아 보살폈을 것이다), 이것을 가나안이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 자기들의 진영에 두었다가, 이제 마침내 그의 조상이 그들에게 준 세겜 근처의 땅에 매장하게 되었다(창 48:22). 아마 이 기회에 여호수아는 요셉의 관을 무덤에 장례지내는 데 온 이스라엘이 참석하도록 세겜으로 불러 모았을는지도 모른다(1절). 그리고 본 장에 나오는 설교는 바로 이 곳에서 한 요셉의 장례 설교와 자기의 고별 설교일지도 모른다.
만일 이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해에 이루어졌다면 이 때에 그는 자기의 죽음이 임박해 있음을 잘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이 때에 그는 그의 유명한 조상 요셉이 죽을 때의 나이와 동일한 “110세”였다(29절. 창 50:26과 비교하자).
Ⅱ.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례(29, 30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약 17년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의 연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약 27년 혹은 28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여기서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가 죽었을 때에도 주어졌던 동일한 칭호다(1:1). 비록 여호수아가 여러 면에서 모세보다 못하기는 하지만 이 칭호에 있어서는 모세와 동일했는데, 그는 자기 일에 관한 한 하나님의 근면하고 신실된 종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자기의 두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해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한 사람과 동일한 인정을 받았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23)
여호수아의 장례지는 “지진”이란 뜻이 있는 “가아스 산 북이었다”고 했다. 이 위대하고 선한 사람 여호수아의 장례 때에, 마땅히 슬퍼해야 될 이스라엘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우매를 견책해 이 산이 진동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유대인은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에도 땅이 흔들렸다.
학자인 패트릭 주교는 모세와 아론의 경우와 같이 여호수아를 위한 애곡의 날들이 지켜진 데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 사실에 대해 그는 성 히에롬(Hierom)이나 기타의 교부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어떤 신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생명과 불멸이 오늘날과 같이 빛 속에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던 율법 아래서는 자기들의 친구들의 죽음을 애곡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여셨으니 우리는 오히려 기뻐할 뿐이다.
Ⅲ.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과 장례. 그는 아론이 모세와 같은 해에 죽은 것처럼 여호수아와 같은 해에 죽었을 것으로 본다(33절). 유대인들은 엘르아살이 죽기 직전에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여호수아가 했던 부탁을 그들에게 다시 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속한 산에 매장되었다. 그 땅은 그의 아버지에게 속했다가 유산으로 그에게 전수된 것도 아니고 제사장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소유하고 있던 땅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혼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졌거나 혹은 제사장에게 굉장히 사랑을 베푸는 어떤 경건한 이스라엘인이 주택을 짓고 살라고 그에게 아낌없이 기증한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본문에 그 땅을 “그가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장사지냈다.
Ⅳ. 이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상황(31절).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동안은 그의 관심과 영향하에서 그들 가운데 신앙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당대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는 곧 신앙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한 지도자가 버텨 나가는 힘은 큰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항상 함께하시며 “세상 끝날까지”(마 28:20) 함께해 주실 복음의 교회는 얼마나 행복한가!
===호크마
=====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 23장에 이어서 여호수아는 다시한번 고별 연설을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각 지파지도자들을 세겜에 소집하였다. 특별히 소집장소를 세겜으로 정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큰 역사적 의의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세겜'(Shechem)은 (1) 일찍이 하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성스러운 곳이며(창 12:6, 7) (2) 하란에서 돌아온 야곱이 '디나 사건'(창 34장) 이후 크게 각성하고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묻어버린 개혁의 장소일 뿐 아니라(창 35:4) (3)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대로 계약을 새롭게 한 맹세의 장소였기 때문에(8:30-3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집하여 언약을갱신하기로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족장 시대 이후 줄곧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우상 척결 맹세를 중심으로 언약 갱신이라는 신성한 일을 한다는것은 그 자체로서 큰 효과가 있었다"(Hengstenberg, Keil & Delitzsch, Vol. 2. p. 226-227).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 - 23:2주석 참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 여기서 '하나님 앞'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즉 (1) 언약궤가 세겜으로 옮겨져 18:6;19:51에서처럼 '언약궤 앞'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는 견해. (2) 제단이 세겜에 세워져 있음을 뜻하는 견해 등이다. 그러나 카일(Keil)은 헹스텐베르그(Hengstenberg)의 입장을 따라 이러한 견해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즉 여기서 '여호와 앞'이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수아에게 임한 것을 볼 때, 본절의 '여호와의 앞'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거룩한 종교적 의식을 치루는 신전 사상(神前思想)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Ibid)는 것이다.
=====24:2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 - 창 11:26에 따르면 데라(Terah)는 아브라함, 나홀, 하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하란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일찍이 죽었기 때문에(창 11:28) 본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나홀만이 언급되었다. 한편, 아브라함과 나홀의 부친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그의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였으며, 205세를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창 11:31, 32).
강 저편에 거하여 - 여기서 '강 저편'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으로,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거주했던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 지방을 가리킨다(창 11:31).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 여기서 '다른 신(神)'은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섬겼던 우상으로, 당시 갈대아 우르 지방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섬겼던 월신(月神, moon-god)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전 당시 이러한 우상 숭배에 빠졌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비록 우상 숭배에 빠지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역시 우상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Keil). 이러한 사실은 결국 이스라엘이 만백성 중 선택받게된 것이 결코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그들도 옛적 조상 때에는 우상을 섬기고, 그 영향권 하에 있었던 똑같은 이방 족속이었으나,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소명(부르심)에 의해 구별된 민족, 언약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지금 이 은혜로운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던 것이다.
=====24: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 본 구절에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것이 아브라함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때문임이 강조되고 있다. 다시말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결코 자발적 의사로 된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의 도시 우르(Ur)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오로지 그 부르심을 따라 행한 것 뿐이다(창 15:7).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은총의 역사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은 신약 시대에도 적용이 되는데, 즉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게 된 것은 오직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지(엡 1:6, 7) 결코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닌 것이다(롬 3:23, 24).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 때에 본처인 사라를 통해 얻은 이삭은 실로 하나님의 오래고 깊은 경륜 하에 태어난 '약속의 씨'였다(창 15:4;17:19, 21;18:14).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창 16:15)은 언급되지 아니하고, 이삭만이 언급된 것은 바로 그만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약속의 자녀였기 때문이다(갈 4:28-31). 한편 여기서 '주었다'(* , 에텐)란 표현은 이삭의 출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창 21:1-7).
=====24: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 이삭은 나이 60세에 리브가로부터 쌍동이인 두 아들 야곱과 에서를 낳았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출생 역시 간절한 간구 끝에 얻어진 기도의 열매로(창 25:21),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따라 이삭에게 주어진 자녀들이었다(창 25:23).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 세일(Seir)은 에돔의 산악 지대로서 아라바 저지대 동쪽에 위치해 있다. 즉 이 세일 산 지대는 남쪽으로 아르논 저지대에서부터 지금의 아라바 근처에까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험준한 에돔의 산악 지대를 가리킨다. 한편, 가나안 땅에서 분리된(창 36:6-8) 에서와 그의 자손들인 에돔(Edom) 족속은 당시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인 호리 족속을 쫓아내고 이곳에 거주하였다(창32:3;33:14, 16;신 2:22).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기사는 창 46:1-7에 잘 설명되어 있다. 당시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창 46:2-4), 마침내 애굽으로의 이주를 결행하게 되었는데(창 46:5-7), 이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창 15:13-17)가운데 그의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었다. 아울러 야곱 일행의 '입(入)애굽 사건'은 역설적으로 '출(出)애굽 사건'의 전조가 되며, 결국 '가나안 입성'을 위한 준비 기간이 된 것이다. 결국 이는 야곱 일행의 '입(入)애굽 사건' 역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의 결과였음을 역력히 보여 준다.
=====24:5
내가 -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히 회고하는 내용(2-13절) 중 이 '내가'(I)라는 말이 원문상 16번이나 나오는데, 이는 이스라엘 역사를 홀로 주관 섭리 역사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생히 드러내 보여 준다.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 이 내용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섯 번에 걸쳐 사양과 변명(출 3:11-13;4:1, 10, 13)을 하였지만, 결국 그의 대변자 아론과 함께 애굽 왕 바로에게 가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출 4:14-17).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 출 7:14-12:36에 기록되어 있는 (1) 피 재앙 (2) 개구리 재앙 (3) 이 재앙 (4) 파리 재앙 (5) 가축의 악질 재앙 (6) 독종 재앙 (7) 우박 재앙 (8) 메뚜기 재앙 (9) 암흑 재앙 (10) 장자의 죽음 재앙 등 10가지 재앙을 가리킨다<출 12:29-36 강해, 여호와의 10대 재앙>.
내가...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대로(창 15:14;출 3:8-10) 초자연적인 10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치심으로, 실제로 그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내신 사실을 뜻한다(출 3:20).
=====24:6
애굽 사람이...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 이 구절과 7절 상반절의 내용은 출애굽 직후로부터 홍해 도하(渡河)까지에 관한 내용으로, 이에 대해서는 출 14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모든 사건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되어진 것임이 강조되고 있다.
=====24:7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 여기서 '부르짖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아크'(* )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다'란 뜻으로, 여기서는 위험한 위기 상황에 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뜻한다. 출 14:15 주석 참조. 출애굽기에는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이러한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출애굽을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가능케 하셨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까지 추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 진(陳) 앞에 서있던 여호와의 사자가 뒤로 옮겨가자 구름기둥도 앞에서 뒤로 옮겨져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게 되었다. 그러자 구름과 흑암이 그들 사이에 임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진에는 광명이, 그리고 애굽 군대의 진에는 흑암이 내려 덮은 사실을 가리킨다(출 14:19, 20).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 이 내용은 출 14:21-31에 잘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다물을 물러가게 하심으로 홍해를 좌우로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로 무사히 건너게 하셨으나, 애굽 군대가 건너갈 때는 그 물을 도로 합쳐 그들을 바다속에 수장시켰던 것이다. 실로 출애굽을 종결짓는 이 홍해 도하 사건은 그 시종(始終)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적적 사건의 연속이었다.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 여기서 '여러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낸 40년 기간을 가리킨다(Keil).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방랑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순종과 죄 때문이었다(민 14:33, 3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24:8
요단 저편에 거하는 - 여기서 '요단저편'은 곧 '요단 동편 지역'(Transjordan)을 가리킨다(민 32:19). 즉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기 전에는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을 가리켰지만(신 3:20), 요단 강을 건넌 후에는 요단 동편 땅을 가리키게 되었던 것이다(2:10;7:7;20:8).
아모리 사람의 땅...멸절시켰으며 - 이 요단 동편 땅은 본래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의 땅이었는데, 이 땅은 결국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다(민 21:21-35). 그리고 나중에 기업 분배시 이 땅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어진다(13:8). 이와같이 이스라엘이 강력한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진멸시키고 그 땅을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거듭 강조된 바 오로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 때문에 가능했다(신 2:24;3:2).
=====24:9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 '발락'(Balak, '약탈자', '파괴 자'란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 쳤을 당시의 모압 왕이었다. 때에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두려운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 이방의 유명한 술사(術士) '발람'(Balaam)을 고용했었다(민 22:1-6).
=====24:10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고로...축복하였고 - '발람'(Balaam)은 그 이름의 의미가 '탐닉하는 자', '멸망시키는 자'를 뜻하는데, 이러한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고자 했던 그의 행동과 잘 부합된다. 즉 그는 하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탑욕에 눈이 어두워(벧후 2:1-22;계 2:14), 결국 발락의 제의를 받아들여 3번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민 23:1-24:9). 이와갈이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하지 못하고 축복을 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때문이었는데, 결국 이로 인해 발람의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을 패망시키려 한 모압 왕 발락의 계획을 좌절시켰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르는 사이 그 막후에서 일어난 이 발람의 사건에까지 하나님께서 적극 간섭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주위의 온갖 사악한 세력들의 손으로 부터 건져 내었던 것이다.
=====24:11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너희의 손에 붙였으며 - 본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한 사실에 대해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요단 강 도하 후 이스라엘이 강력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진멸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나안의 여러 족속들에 관해서는 서론, '가나안의 여러족속'들 및 9:1-2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부분을 참조하라.
=====24:12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 여기서 '왕벌'(* , 치르아)은 사해(死海) 주변의 사막을 포함하여 팔레스틴의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곤충으로, 그 침은 큰 피해를 줄수 있는 독(毒)을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침을 가진 왕벌이 사방에 있을 때 군인들이 이를 잘못 건드려 큰 어려움을 당하곤 했다. 이런 이유로 이 왕벌은 전쟁의 승패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여기 언급되어 있는 왕벌이 문자 그대로의 '왕벌'(hornet)을 가리킬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여기의 왕벌을 애굽 왕 바로를 가리키는 상징물로 간주하여, 이 구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도착하기 이전에 왕벌, 즉 애굽 왕이 가나안 족속을 먼저 침으로써 가나안 세력을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도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왕벌을 은유적으로 해석하여, 가나안 족속에게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재해 현상'으로 보기도 하며, 또는 가나안 족속들의 마음 속에 주입시킨 왕벌과 같은 '공포심'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왕벌'을 문자 그대로의 '왕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던 '하나님의 모든 도움'을 또한 가리킨다고 봄이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출 23:28;신 7:20 주석 참조.
두 왕 -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진멸하였던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 왕 시혼(Sihon)과 바산 왕 옥(Og)을 가리킨다(민 21:21-25). 이 두 왕의 진멸 사건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하신 여러 기적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자주 등장한다.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것이 아니며 - 이와 동일한 표현이 시 44:3에도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가나안 정복이 결코 이스라엘 군대의 군사력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성취된 것임을 직접적으로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칼이나 활 등의 군장비를 사용해서 이긴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군장비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군장비 면에선 철병거까지 보유한 가나안 족속이 훨씬 우세하였다. 따라서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때문이었다.
=====24:13
건축지 아니한 성읍...심지 아니한...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 본절은 신 6:10, 11에서 인용된 말로, 여기서도 가나안 정복 전쟁결과 그 승리의 열매를 향유함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고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임이 강조되어 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과 성읍을 그저 취하기만하면 되었다. 따라서 비록 그들이 몸소 전쟁을 하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얻은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24:14
그러므로 이제는...여호와만 섬기라 - 2-13절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열거한후에, 이 사실에 근거하여 이제 그들에게 우상숭배를 포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것에 대한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결단 촉구는 백성들에게 맹목적으로 종교적 굴레를 씌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를 통해 생생히 역사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깨달으며 감사한 후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러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결단은 백성들 각자가 지나온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과 우상의 존재 및 역할을 엄밀히 비교한 후 지정의(知情意)를 포함하여 전인격적으로 냉철히 내려야 할 엄숙한 결단이어야 했다.
성실과 진정으로 - 여기서 '성실'(* , 타밈)은 '온전함' 또는 '순수함'이란 뜻이다. 그리고 '진정'(* , 에메트)은 '견고함' 또는 '확실함'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되 다른 잡다한 생각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는 순수한 마음과, 또한 어떠한 유혹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마음가짐으로 섬기라는 의미이다.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 -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족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갈대아 우르에서 월(月)신을 섬겼으며(2절),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애굽에서 수염소를 비롯한 여러 음란한 우상을 섬겼었다(레 17:7;겔 20:7). 아울러 여호수아의 이 말은 여호수아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우상의 영향을 여전히 받고 있고, 또한 그러한 우상으로부터 완전히 떠난 상태가 아님을 암시한다.
=====24:15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임 라 베에네켐'(* )은 직역하면 '만일 너희의 눈에 악하다면'(if it is evil in your eyes)인데, 곧 이말은 '내키지 않거든'(if you are unwilling to-, RSV, Living Bible). '바람직스럽게 보이지 않거든'(if-seems undesirable to you, NIV)등의 뜻으로 의역될 수 있다. 이와같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는것이 내키지 않거든'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되 결코 억지로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실과 진정으로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 임종을 목전에 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을 새롭게 다지기 위하여 분명한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즉 그는 언약을 갱신함에 있어서, 어중간한 태도를 단호히 배격하고 이방의 우상이냐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냐를 확실히 결정하도록 백성들에게 촉구하였던 것이다. 사실 신앙에 있어서 어중간한 중립(회색)지대란 있을 수 없다(왕상 18:21). 또한 양쪽 다 택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마 6:24). 왜냐하면 우상을 섬긴다면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것과 같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곧 모든 우상을 배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빛과 어두움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고후 6:14-16).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의 종교는 유일신교(唯一神敎)이지, 결코 일신교(一神敎)가 아닌 것이다(신 6:4 주석 참조). 즉 다른 많은 신들 중에 '여호와'도 하나의 신이며, 그중 비교적 뛰어난 신이란 의미가 아닌 것이다. 오직 '여호와'(Jehovah) 그만이 홀로 참신이시고, 다른 나머지 모든 우상들은 한낱 돌이나 나무, 쇳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적 유일신교인 것이다(사 45:20;렘 10:5).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한 뒤 지체없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것은 결코 백성을 선동하려거나 또는 위협하려는 목적에서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 몸소 체득한 바 스스로 우러나온 신앙고백일 뿐이다. 즉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비교할 가치나 머뭇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14-28절 강해, '여호수아의 촉구와 결단'을 참조하라.
=====24:16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 결단을 호소하는 여호수아의 촉구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즉 그들은 결코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굳게 결의 하였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호히 신앙적 결단을 하게 된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르는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생히 경험했기 때문이요, 또한 그들의 지도자 여호수아의 신앙적 자세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24:17,18
이스라엘 백성들은 2-13절에서 여호수아가 술회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여기서 다시 한번 간략히 언급하면서, 이 은혜의 역사를 친히 이끄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서약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결단은 단순한 감정적 결단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동의한 데서 비롯된 전인격적 결단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 동안 친히 경험하고 느낀 확신에서부터 우러나온 체험적 결단이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 - 이 표현은 십계명 서문에 나타나는 말로(출 20:2;신 5:6), 곧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구속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역과 관련하여 자주 쓰인 말이다. 출 20:2 주석 참조.
아모리 사람 - 이는 곧 가나안 족속 전체를 대표하여 지칭하는 말인데, 그 이유는 가나안 여러 민족 중 아모리 족속이 가장 강력한 족속이었기 때문이다(창 15:16).
=====24:19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것은 -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1)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것임을 여호수아가 미리 예견했다는 견해(Pulpit Commentary), (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다 강력한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여호수아가 이 말을 했다는 견해(Keil & Delitzsch Commentary) 등이다. 이 가운데 후자의 견해가 더 일리 있는 듯하다. 즉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인간적 연약성 때문에 쉽게 우상 숭배에 빠져들 우려가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보다 강한 어조로 그들의 신앙을 철저히 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본장 14-28절 강해, '하나님의 거룩성' 부분을 참조하라. 거룩하신 하나님이란 피조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분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께서는 당신 이외의 다른 신을 절대 허락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신 6:15 주석 참조.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 여기서 '허물과 죄'는 일반적인 죄악이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는 죄악을 가리킨다. 이러한 죄는 결코 용서를 받을수 없다. 십계명 가운데 제 2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므로 우상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 것을 명령하시면서, 이 죄를 범한 자에게는 그 죄를 반드시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할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출 20:4-6).
=====24:20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너희를 멸하시리라 - 여호수아가이와같이 강한 위협적인 말을 사용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결단이 결코 변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정복한 가나안 땅에는 이방의 우상 문화가 뿌리 깊이 잠재해 있어, 늘 올무와 덫으로 작용할 소지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잘 섬길 때는 축복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면 어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했다.
=====24:21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면서 다시 한번 굳게 여호와 신앙을 다지는 장면이다. 사실 전체 이스라엘 역사를 놓고 볼 때 이때만큼 백성들의 신앙 열기가 뜨거웠던 때도 드물었다.
=====24:22
스스로...증인이 되었나이다 - 이 말은 백성들 스스로가 그들이 고백한 의 증인(證人)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말로, 곧 그들이 했던 고백을 전적으로 시인한다는 뜻이다(Rosenmuler). 따라서 이 말에는 만일 그들이 이 고백과는 달리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지면, 다른 증인까지도 필요없이 자신들 스스로가 그 유죄(有罪)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4:23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 혹자는 이 말을 근거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여전히 '드라빔'(teraphim, 창 31:19 주석 참조)과 갈은 류(類)의 여러가지 깎아 새겨 만든 우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카일(Keil)은 어거스틴(Augustine)과 칼빈(Calvin)의 견해를 따라 여기서 '너희 중에'를 '너희 마음에 있는'으로 해석하여, 여호수아 저자가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나무, 돌, 철 등으로 만든 외면적인 우상이 아니라, 내면적인 마음의 우상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즉 전적으로 여호와만을 향한 마음가짐의 상태가 아닌, 아직껏 남아 있는 우상에로의 경향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반드시 형상(形象)을 가진것만이 우상이 아니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 외에 섬기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 역시 우상에 해당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성경 골 3:5에서는 '탐심 그 자체가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24:24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것은 곧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고백은 어떤 가식적인 고백이 아니라 진실한 신앙적 고백이었다. 그것은 그 후에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내용(31절)이 잘 입증해 준다.
=====24:25
여호수아가...언약을 세우고 -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된 서약(16-18, 21,24절)은이 언약 체결로 완전히 확증된다. 한편, 여기서 '언약을 세우다'는 직역하면 '언약을 자르다'이다. 이와같이 '언약'과 '자르다'가 결합되는 것은 언약 체결시 양이나 송아지 같은 짐승을 죽여 쪼개어 놓기 때문이다(렘 34:18-20). 이와같이 짐승을 쪼개놓은 이유는 만일 체결한 언약을 이행치 않으면 쪼개어진 짐승처럼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 위함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 29:16-29 강해, '언약의 어원적 고찰'을 참조하라.
세겜 - 1절 주석 참조.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 출 15:25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쓴 물을 달게 하신후에 이와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푸신 일이 있었다. 한편, 여기서 '율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크'(* )는 어떤 제정된 '법규'를 뜻하며, '법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 )는 '판단하다', '심판하다'를 뜻하는 '솨파드'에서 유래된 말로, 곧 판단의 근거가 되는 '지시', '계명'들을 뜻한다. 그러나 이 양자는 엄밀히 구분할 수 없다(신 4:1). 여하튼 본절을 성문법(成文法)이나 불문법(不汶法)을 막론하고 여호수아가 이전의 모세 율법을 다시금 새롭게 갱신(更新)하였음을 뜻하는 말이다.
=====24:26
이 모든 맡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 여기서 '이 모든 말씀'이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했던 고별사의 내용(1-13절)을 중심으로 당시 행해졌던 전반적인 의식(儀式) 행위(14-25절) 모두를 가리킨다.
큰 돌을 취하여 - 여호수아가 이와같이 큰돌을 취한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 갱신(16-18, 21, 24절)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돌은 여러 기념물 중 가장 오래된 형태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기념하기 위해 종종 기념비가 세워졌다(4:9;삼상 7:12).
여호와의 성소 - 카일(Keil)은 여기 '여호와의 성소'(the Sanctuary of Jehovah)를 단지 '성스러운 장소'(the holy place, NIV)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성막(Tabernacle)은 당시 '실로'에 있었기 때문에(18:1) 성막도 아니고, 또한 당시에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도 아니며,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장소(창 12:6, 7)였을 뿐만 아니라, 후일 야곱이 또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였던 그 정결의 장소(창 35:2, 4)라는 의미에서 거룩한 곳이라는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2, p. 223).
상수리 나무 - 약 10m 높이까지 자라는 이 나무는 팔레스틴에 널리 퍼져 있으며 매우 강하고 단단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이 상수리 나무(the oak)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사건과 연관있는 유서 깊은 그 상수리나무로, 곧 그러한 역사를 일깨워 주는 기념수(記念樹)일 가능성이 크다.
=====24:27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 본절에는 돌을 취하여 세운 목적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즉 그것은 이 돌이 변치않는 영원한 기념비가 되어,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릴 경우 이 돌이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후손들은 이 기념비를 볼 때마다 그들 조상들이 맺었던 언약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그들의 지은 죄를 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돌이 들었음이라 - 여호수아는 이 기념비가 말을 듣는 귀를 가진 것처럼 의인화(擬人化) 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칼빈(Valvin)은,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영적인 뜻을 전달하는 데 큰 효력이 있는 표현이라고 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무생물인 돌까지도 이 말씀을 들었는데, 하물며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못한 양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의 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 여기서 '배반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하쉬'(* )는 '거짓말하다', '부정하다', '부인하다'를 뜻하는 말로, 하나님을 속이거나 부인하는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24:28
백성을...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 마지막 고별사를 한 후, 언약 갱신을기념하기위해 큰 돌로 기념비를 세워 증거를 삼음으로써, 여호수아는 자신의 공적(公的)인 모든 임무를 끝마쳤다. 따라서 그는 이제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각자 분배받은 기업의 땅으로 돌려보냈고, 자신도 역시 자신의 기업의 땅인 담낫세라로 돌아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거기서 임종을 맞이했다(3절).
=====24: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여호수아가...죽으매 -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에 관한 기록은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모세의 죽음과 장사에 관한 기록과 유사성이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에서는 이 구절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모세와 여호수아가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홍해 도하와 요단 강 도하, 그리고 그들의 초기 사역에 있어서의 여러 이적들과 현상들이다(1:17;4:14).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모세에게 주어졌던 여호와의 종이란 명예로운 칭호(1:1)가 여호수아에게도 공히 주어졌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여호수아서 저자가 구속사적 관점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라는 점을 의식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백 십세에 죽으매 - 여호수아가 죽은 나이는 32절에 언급되어 있는 그의 조상 요셉이 죽은 나이와 일치한다(창 50:26). 구약 시대에 있어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서(시 91:16), 이와같이 여호수아도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은혜롭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24:30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장사하였으니 - 나그네로서 가나안 원주민에게산 무덤에 장사되었던 초기 족장들(창 23:19, 20;25:7-10;35:27-29; 49:29-32;50:12-14)과는 달리 여호수아는 자신이 정복한 자신의 기업에 장사되었다.
딤낫 세라 - 19:50 주석 참조.
=====24:31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여호와를 섬겼더라 - 이 말 속에는 이스라엘이여호수아와 여호수아 당시의 장로들이 모두 죽고 난 후에 결국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지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지도자 여호수아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그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던 세대들은 변함없이 여호와 신앙을 유지하였지만, 그 다음 세대에 이르자 곧바로 우상 숭배에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삿 3:5, 6).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삿 2:6-15에 잘 나타나 있다.
=====24:32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셉의 뼈를 가나안 땅 세겜에 장사한 것은 창 50:25에 나타나 있는대로 요셉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같이 요셉이 자신의 유해가 가나안 땅에 매장되기를 원했던 것은 가나안 땅을 주마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은 강한 신념 때문이었다. 결국 그 믿음대로 요셉의 유해는 그의 사후 대략 415년후에 그리던 약속의 땅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더딜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요셉의 유언을 좇아 출애굽시 요셉의 유해를 함께 가지고 나왔었다(출 13:19).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 -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약간의 땅을 산 후 그곳을 단(壇)을 쌓음으로 그곳을 정결케 한 적이 있는데(창 33:18-20), 그 땅은 결국 요셉의 매장지가 되었다. 한편, 여호수아의 기업 분배시이 땅은 요셉의 자손에게 할당되었는데(21:20, 21), 요셉의 자손들은 땅을 분배받은 후 곧 바로 요셉의 유해를 이곳에 안치한 것 같다(Keil).
=====24:33
엘르아살도 죽으매...장사하였더라 - 여호수아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엘르아살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다. 여기서 엘르아살이 여호수아보다 먼저 죽었는지 아니면 후에 죽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어쩌면 같은 해에 죽었는 지도 모른다(Matthew, Henry). 여하튼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은 모세 시대에 이어 여호수아 시대도 그 막이 내려졌음을 암시하고, 따라서 이후 사사 시대의 전개를 예고해준다. 한편 헬라어 70인역(LXX)은 본절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 기사를 덧붙이고 있으나, 그것은 단지 사사기의 초기 기록(삿 2:6-15;3:7, 12)을 발췌하여 부가한 것에 불과하다(Keil).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 - 곧 옐르아살이 장사된 곳으로 '비느하스의 언덕'(the hill of Phinehas)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 언덕은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한 공로(민 25:7, 8)의 대가로 특별히 부여받은 그의 세습적 기업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곳을 베냐민 지파 중에서 레위인에게 할당된 '게바'(18:24)로 추정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2. p. 235). 한편, 엘르아살의 아들이요 후계자인 제사장 '비느하스'(Phinehas)에 대해서는 22:13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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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장은 본서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여호수아의 생애와 통치에 관해 종결짓고 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수많은 가나안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또한 땅을 각 지파들에게 분배했던 여호수아는 그의 임종을 앞두고서 이미 앞에서 한차례 고별 연설을 하였었다(23장). 그에 이어 여호수아는 본장에서 다시 한 번 고별 연설을 하고 온 백성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엄숙한 서원을 한다(1-28절).
그 연설의 요지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위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이방 신들을 섬기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는 것이었다.
이제 백성들은 일심으로 여호와만을 섬기리라 맹세하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호수아는 '증거의 글'을 세운다(26, 27절).
이상으로 모세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여호수아의 공식적인 사역은 모두 끝난다.
본장의 나머지 부분은 여호수아의 죽음과 그의 장례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29-31절).
그리고 그에 덧붙여 과거 애굽에서부터 운구(運柩)해 온 요셉의 유골을 가나안 땅 세겜에 안장한 사실(32절)과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에 관하여 증거한다(33절).
이처럼 본서의 기자가 본서의 대미(大尾)에서 요셉의 유골이 가나안 땅에 장사되었음을 굳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히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창 15:16). 그리고 여호수아의 죽음 뿐 아니라 엘르아살의 죽음에 대해서까지 언급한 것은 이로써 여호수아의 동년배 시대가 끝나고 바야흐로 또 다시 새로운 한 시대가 시작됨을 시사하기 위함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와 정착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여호수아와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은 가나안 정복 역사가 주제인 본서의 결론을 맺는 데 아주 적절하다.
1. 하나님의 구원 역사 회고(24:1-13)
전장에서 이미 유언적 고별사를 행한 여호수아는 이제 그의 마지막 기력과 마지막까지 남은 시간을 다하여 온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고취시키려 힘쓴다. 여기서 먼저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주역인 하나님을 강조한다. 즉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은 순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사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1) 아브라함의 소명(2절), (2) 믿음의 자손 이삭 출생(3절), (3) 야곱의 애굽 이주(4절), (4) 모세와 아론을 통한 애굽 심판(5절), (5) 홍해 도하의 기적(6, 7절), (6) 아모리 족속 격파(8절), (7) 발람 사건(9, 10절), (8) 헤스본과 바산 정복(11, 12절), (9) 가나안 정복 및 정착(13절).
이상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해 준다.
즉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간섭하시고 사랑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실로 인류의 모든 역사(History)는 바로 하나님 그분의(His) 이야기(story)이다.
온 우주와 인류의 역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념(眷念)하심을 확신하며 기쁨과 소망 중에 살 수 있는 근거가 있다.
2. 백성들의 맹세(24:14-28)
지금껏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하여 회고한 여호수아는 이제 마지막으로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집은 이처럼 이스라엘을 권념하신 하나님을 섬길 터인데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다. 그러면서 하나님만을 섬기고 이방신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이방신을 따르고 하나님을 버릴 것인지 결단하라고 촉구한다. 이에 백성들은 자신들도 여호수아처럼 이방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길 것이라고 굳게 맹세한다(14-18절).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러한 백성들의 맹세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순간적인 결단은 쉽게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나안 땅에는 이방 종교와 풍습이 뿌리 깊게 산재해 있던 터라, 이들이 늘 유혹과 위협의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불순종에 따르는 저주에 대하여 경고를 발하면서까지 맹세의 신중성을 강조한다(19-23절).
그런데도 백성들은 한결같이 하나님만 섬기리라 맹세하니 이에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증거한다.
그리고선 백성들의 맹세를 기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막 곁 상수리나무 아래에 증거의 비석을 세운다(24-28절).
이상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호소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할 것을 굳게 결의한 것은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왜냐하면 그들의 결의는 여호수아가 들려준 회고담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전심으로 공감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신앙은 단순한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직접 피부로 절감하고 눈으로 목격함으로써 체득한 것과 다름없는 확신에서 비롯된 신앙 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우리들도 우리의 전존재가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성숙된 신앙을 견지해야지 결코 관념적, 일시적 감정에 치우친 절름발이 신앙을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호수아의 촉구와 결단 - 본문은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길 것을 권면한 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생각들면 이방신과 하나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촉구하는 장면이다(14-16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얻릉 수 있다.
(1)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세상 중 양자 택일만 있다는 사실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우상도 섬기지 않는 종교적 중용의 길이나 혹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종교적 혼합의 길을 허락지 않았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곧 우상을 섬기는 자이다. 이왕 하나님을 섬길 바에는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고 당신을 섬기는 자를 원치 않으신다(마 6:24 ; 고후 6:15-18).
(2) 그 선택은 지금 이 시간에 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호수아는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15절)고 하였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면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미루면 그만큼 자신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택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지금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지 못한다면 또 다시 지금과 같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바로 오늘 이 시간이 참 종교를 선택할 최선의 시기이다(고후 6:2). 사람의 마음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선택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토기장이는 진흙의 반죽 상태가 가장 좋을 때 자신의 원하는 모양대로 토기를 만든다. 진흙이 굳어 버린 다음에 모양을 만들려고 할 때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만사에는 때가 있다(전 3:1). 선택해야 할 시기에 선택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선택하려고 할 때는 이미 때가 늦다.
(3)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단력이 없이 우유 부단하고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주위의 상황을 보아가며 눈치껏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올바른 인간으로 성자애려면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주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스스로를 움직일 능력이 없어서 바닷물이 흘러가는 대로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해파리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늘 주저하거나 머뭇머뭇 하기만 하는 사람은 결단력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 환한 대낮이 되었는데도 어디로 여행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면 그는 결코 유익한 여행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항해사가 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면 1등항해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선택해야 하낟. 주위 환경에 좌우되거나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자신의 이성과 신앙의 소리에 길을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늘 두 갈래 길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정진할 때 인생의 진보가 주어지는 것이다(빌 3:13, 14).
(4) 여호수아는 올바른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방신과 하나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집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였다(15절). 그는 백성들이 자신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나서 자기의 생각을 표명하지 않고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었다. 그의 결심은 단호하고도 엄숙했다. 그의 말은 마치 백성들이 모두 우상 섬기는 것을 선택하고 자기에게까지 우상을 섬기라고 권유해도 나는 끝까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이와 같이 과단성 있게 결단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였다. 이 사실은 여호수아의 지도자로서의 일면을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의사, 목사, 스승, 부모의 행동은 그들의 지도와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한 국가의 통치자들이 어떻게 결단하여 행동하느냐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크게 영향을 받는다. 통치자가 악한 길을 가면 백성들도 악한 길로 걸으려 할 것이고 선한 길로 가면 백성들도 선한 길로 걸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여호수아의 바른 선택과 결단력은 모두 지도자들과 사람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기독교 가정에서의 부모의 책임 - 우리가 본문에서 유의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여호수아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절)고 말한 것이다.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라면 누구든지 이 여호수아와 같이 그의 가족의 신앙 생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한 몸이 되게하여 가정 제도를 세우신 이래 가정은 인간 사회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그 가운데 특히 가장(家長)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창 2:18-25 강해, 창조론에 나타난 성경적 남녀 관계>.
온 가족은 아버지가 결정하고 행하는 대로 따르게 된다. 만일 가장이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면 가족들도 그를 본받아 신앙 생활을 착실히 하게 되지만 가장이 우상을 섬기면 가족들 역시 우상을 섬기게 된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가 가정을 포함시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한 것은 가장으로서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전체적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가정이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가르친다.
가정은 사회에 있어서 가장 작은 기본 구성 단위이며 또한 가장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으며(눈 2:41-51). 모세가 그토록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의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출 2:1-10).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성한 장소이다. 이 가정이 작은 교회로서의 역할을 잘 담당하여 모든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충만한 생활을 하게 되면 태양이 빛을 비추듯이 그들 모두는 세상에 빛을 환하게 비추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부모된 자들 특히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그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자라나도록 지도해야 하는 신성한 책임이 있다 하겠다<삼상 2:11-26 강해, 부모의 자녀 교육>.
하나님의 거룩성 - 브라이첸(Vreichen)에 의하면 '거룩'이란 개념은 구약에서 가장 중심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코데쉬'(* )는 항상 거룩한 하나님이나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거룩하게 된 사람들과 때와 장소와 사물들에만 사용된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도 본래는 거룩하지 않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거룩하게 된다'(Ringgren).
이제 여기서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개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거룩은 단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아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낸다. 거룩은 하나님 당신의 신분(Selfhood)이며 당신 주장이다. 다시 말해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거룩을 따를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유일 무이한 지존자이신 것이다(삼상 2:2 ; 6:20 ; 욥 25:5).
(2) 이 거룩은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별성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은 당신을 천사들과 구별시킨다(욥 4:17, 18 ; 15:14). 이러한 거룩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의 죄에서 분리되는 것 뿐만아니라 죄에 대한 그의 증오와 적대감을 나타낸다(신 32:4 ; 합 1:15). 인간이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보았을 때이다(사 6:3-8).
(3) 그러나 이 거룩이 피조물에 속한 것과의 구별을 뜻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그분의 초월성과 동등시하는 것과 그분의 내재성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어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은 그의 거룩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이 지고하게 나타난 것이 그의 사랑이다. 호세아 예언서에서 우리는 거룩의 개념이 사랑의 개념으로 숭고하게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자기의 부정한 아내를 사랑하고 그녀를 다시 따뜻한 가정으로 데려오고 싶어하는 호세아의 지극한 애정은 길잃고 헤매이는 죄많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반영한다(호 1:1-3:5).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의 죄악과 반대되면서도 이 거룩하지 못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3. 여호수아의 임종(24:29-33)
본서 전체를 마감하는 결론부이다.
여기에는 먼저 하나님의 용감한 군사로서 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을 위해 용맹스런 싸움을 싸웠던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葬事)가 언급된다(19-31절). 다음으로 요셉의 유골이 가나안 땅 세겜에 안장된 사실과 대재사장 엘르아살의 죽음이 언급된다(32. 33절).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의 죽음이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었을 뿐임을 보게 된다.
이는 곧 본서가 여호수아의 전기(傳記)가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록한 책임을 증거해 준다.
또한 본문은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여호수아 사후(死後), 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는 곧 여호수아 이후 비롯되는 사사 시대의 특징을 은연 중에 암시해 준다.
즉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 부르심을 받아 여러 사사들이 지도자로 등장, 활동하게 될 뿐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카리스마(Charisma)적 대지도자가 없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상으로 이스라엘 족장 시대 때부터 주어진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온전히 구현되고 이후로는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첫문을 여는 장이 곧 사사기인데 그 역시 마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 강조된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여호수아 - 본서에서 여호수아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우선 그의 이름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으로 헬라어로 '예수'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인 우리를 하늘 가나안인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예표한다.
또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후 그 땅을 분배한 것 역시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여 기업을 분배해 주시는 것들의 예표가 된다(요 14:1-3).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게 되었을 때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렸던 것(수 7:6-15) 역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준다(롬 8:4). 그 밖에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휘하여 그들의 원수들에 대해서 이기도록 하신다(요 16:33). 이처럼 여러 면에서 여호수아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해 준다.
그런데 주의할 사실은 위대한 삶을 살다간 신앙 선조들에게선 모두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각기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중 여호수아만을 또는 모세만을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성도란 이름에 걸맞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를 드러내고 내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발견될 수 있도록 부단히 자신을 연마해야 할 것이다(고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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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제 24장 강해: 여호수아의 죽음===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구속사는 한 시대의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세의 죽음으로 출애굽 시대에서 가나안 정복 정착 시대로 바뀌고,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사사 시대로 한 시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여호수아는 다근 그 무엇보다 과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회고하면서 미래 백성들의 순종을 위한 신앙 서약을 진행합니다. 여호수아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전 시대를 두고 태초부터 종말까지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곧 구속사의 실체를 깨달은 한 위대한 종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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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절: 백성들을 향한 여호수아의 최후 권면과 그의 죽음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대표들을 세겜으로 부른 다음, 과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맺은 사실과 이삭의 출생, 야곱과 그 자손의 애굽 이주 등에 대하여 회고합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및 광야 생활, 요단 동편 아모리인의 멸절, 발람의 저주 사건, 가나안 땅의 정복 및 정착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지난날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순차적으로 회고했습니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주권적 통치자이심을 깨닫게 하고 저들로 자긍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조상 역시 우상을 섬기던 죄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불러 언약 백성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러 자녀로 삼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여기에서 ‘모든 지파’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말합니다. 마지막 설교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모은 것입니다. 세겜은 에발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 온 직후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대로 이 두 산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곧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엄숙히 낭독한 적이 있습니다(수 8:30-35). 그러므로 다시금 이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의 행한 바를 교훈한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후 단을 쌓았던 곳이며(창 12:6, 7), 야곱이 이방 신상을 묻었고(창 35:4), 또한 요셉의 뼈를 묻은 곳(32절)으로,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주는 곳입니다.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광야 시대에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언약궤’ 앞에 즉 성막 앞에 나오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성막이 실로에서 세겜으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며, 어떤 행위와 의미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서 수행될 경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상 여호수아에 의해서 실로에 세워진 성막(수 18:1)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해 실로가 함락되기까지(삼상 4:1-11) 계속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며, 자기의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 자들은 그 말씀을 들을 때 전하는 자의 말솜씨에 의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실상 아무리 유창한 인간의 말보다 유창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감을 입어 전하는 말이 인간의 심령을 감화시킬 수 있습니다. ‘강 저편’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의 메소포타미아 지방, 곧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살던 ‘갈대아 우르’를 가리킵니다.(창 11:31; 행 7:2-4) ‘다른 신’은 어떤 종류의 신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만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이 ‘드라빔’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창 31:19, 34)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신이었던 ‘월신(月神)’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브라함 개인이 이러한 우상들을 섬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 섬겼던 우상 숭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소명이나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들의 공적이나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브라함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따른 것임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습니다.(창 15:7)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오늘날까지 모든 성도들에게 흠모할 만한 위인으로 인정 되고 있으나 그러한 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우상 숭배 풍습과 세속적 생활 속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의거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이 은혜로써 건짐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도 은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으므로, 다시는 죄의 종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난 ‘약속의 씨’(창 15:4)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기로 작정하신 계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 간 것입니다.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두 백성들의 조상이 될 야곱과 에서를 주셨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셨습니다(창 36:6). 그러나 본 절에서 야곱에게는 무엇을 소유로 주셨는지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와 그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사실만을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의 역사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일 산’은 사해로부터 아카바 만까지 이어지는 아라바 동쪽에 남북으로 뻗은 산맥입니다. 그 기슭에는 석회암이나 점토질의 바위들이 널려 있고, 그 위에는 사암으로 된 불규칙한 봉우리와 절벽들이 있는 거의 황폐화 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의 원주민인 호리 족속을 내어 쫓고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창 32:3; 36:20).
5-7: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 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여호수아가 출애굽 사건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은 그 중요성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권적 은혜로 인도해 내었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애굽 재앙’ 출 7:14-12:36 참고하세요. ‘여러 날’은 광야에서 보낸 40년 기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광야에서 단순히 방황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거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뜨겁고 황량한 광야였지만 이스라엘은 마치 성 중에 거하는 것처럼 신도 닳지 않고 옷도 해어지지 않는 은혜 속에서 생활하였습니다(신 29:5). 마찬가지로 성도는 비록 세상의 삭막함 속에 있지만 항상 주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요 17:15,16).
8: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편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요단 동편에 거하는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서 멸한 사건을 가리킵니다(수 12:1-6 참고).
9,10: 때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내가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 고로 그가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비록 발람이 이방사제로 악한 자이기는 하였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허락했다면 그 저주는 실제로 효력을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저주를 오히려 복으로 바꾸셔서 이스라엘을 발람의 악한 궤계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발람의 악한 마음을 바꾸시고 오히려 축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입니다. 어두움의 권세를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까지도 간섭하시고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1: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붙였으며
‘손에 붙였으며’ 이는 승리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수 3:10과 6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왕벌’은 사해 주위와 사막 지방 또는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서 자생하는 ‘큰 벌’로서 숲이나 덤불 사이를 지나는 군인을 습격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힐 뿐만 아니라 전쟁의 승패에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종종 ‘공포와 원수’로 상징되기도 합니다(신 1:44; 시 118:12).
그러나 여기에서 ‘왕벌’은 단순히 자연적인 곤충이 아닌 가나안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기에 충만한 그 어떤 존재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3: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본 절은 신명기 6:10, 1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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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절: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회고하고 최종적으로 신앙적 결단을 촉구한 여호수아의 요구에 이제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잘 섬기겠다고 결단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든지 우상을 섬기든지 가부간에 결정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에 백성들은 이방신을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가운데 은혜로 섭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한 여호수아는 지금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순종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로 인한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처럼 역사상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 회중이 충동으로나 억압이 아닌 충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너희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이 말은 우상 숭배를 금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을 그대로 숭배하는 자들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처럼 많은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수차례의 경고와 징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애굽과 광야의 우상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물질문명의 우상과 사고방식과 가치관 등으로 신앙을 저울질하는 정신세계의 우상들이 성도들 속에 있는 것을 볼 때 여호수아의 이러한 권면들은 우리 모두가 가슴 아프게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앞 절에서는 ‘여호와만 섬기라’고 촉구하고 있지만, 본 절에서는 ‘섬길 자를 택하라’고 함으로써 백성들 스스로 섬길 자를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참다운 경배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하기 때문이며, 명령이나 금령으로 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우상 둘 다 섬길 수는 없었습니다. 신앙에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누구도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고후 6:14-16).
엄밀히 말해서 신자와 불신자의 가치관은 정반대입니다. 아주 적은 분야에서 함께 발을 맞출 수는 있지만, 서로 지향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가치관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세상을 두고 선택해야 하는데 하나를 선택한 사람은 다른 하나를 결단코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로 하여금 합리적이고 이지적으로 판단하게 하였습니다.
순종에 따르는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강제규정으로 오해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인간의 근본 도리이자 약속된 복을 받는 길임을 깨닫는 자들은 어떠한 역경 중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입니다(마 16:240. 여호수아에게도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억압하여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은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가족의 결단도 선언함으로써 주의 종의 위치에 있을지라도 가족의 신앙심을 돌보는 것에 대하여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배울 점은 신앙을 결단할 때는 고독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중에 의하여 휩쓸리는 신앙은 이방 신을 섬기는 자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관게에서 올바른 신앙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16-18: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 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진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여호수아의 촉구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답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큰 이적으로 보호하시며 가나안 땅에 거하던 이방 족속들을 물리쳐 주신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결단하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여호수아의 신앙에도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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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절: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는 여호수아의 요구에 백성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했지만,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여전히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짐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언약을 세우고 기념비를 세워 증거를 삼습니다.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이는 너희의 현재 마음 상태로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다는 말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도 없고 모든 죄악에서 단호하게 돌아서는 참된 회개도 없는 감정적 결단만으로는 올바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신하는 듯 한 말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상기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감정만이 아니라 강한 의지와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참된 신앙은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결심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열심, 순간적인 각오, 이러한 것을 여호수아는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이 말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약 1:17)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관성이 없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는 것은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 지지만 해는 여전히 한 자리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지만 선하시고 참된 하나님에게서 인간이 스스로 떠나 거짓되고 악하고 부패한 자리로 나아갈 때에는 인간 스스로 복을 저주로 바꾸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정녕(로 키: לא כי)’은 ‘확실히’와 ‘아무리 ~일지라도’가 결합된 단어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뜨거운 신앙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말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시인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스스로 자신들을 정죄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의 죄를 직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롬 14:12).
23: 여호수아가 가로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아직까지 이스라엘 중에는 우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우상이 있다면 제한 후에 온전히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말입니다. 마음속의 우상이나 외적인 우상이나 모두 성도가 제거해야 할 것들입니다.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한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3번째로 자신들의 약속 이행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동안은 그 약속대로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31절).
25: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백성들의 다짐을 들은 후에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율례(호크:חק)’는 제정된 법규, 곧 ‘성문법’을 의미하며, ‘법도(미쉬파트:משׁפת)’는 ‘지시, 명령’으로 ‘불문법’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엄밀하게 구분되지는 않으며,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모든 규례를 뜻합니다.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하나님 앞에’(1절)라는 표현과 함께 성막이 실로에서 세겜으로 옮겨졌다는 가정을 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막이 사사 시대에도 계속해서 실로에 머물러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삿 18:31; 21:12), 성막이 세겜으로 옮겨졌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성소’는 여호수아가 제단을 쌓았던 곳(수 8:30-35)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이 돌이 들었음이라.’ 여호수아는 돌이 마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돌은 기념비로 세워졌기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모든 말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으며, 추후에도 이 사실들을 증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8: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여호수아는 고별사를 한 후, 언약을 갱신하고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그의 공적인 모든 활동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을 해산하여 기업으로 돌아가게 했고, 그 또한 자기의 땅 딤낫 세라로 돌아가 그곳에서 임종을 맞았습니다(29, 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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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3절: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서를 최종적으로 마감하는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여호수아와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과, 과거 출애굽 시 갖고 나왔던 요셉의 유골(출 13:19)을 가나안 땅 세겜에 안장한 사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녕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기업이 되었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백성들에게 기업을 분배하는 등 그 맡은 바 직임을 충실히 감당하고 11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29절).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와는 달리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는 여호수아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지만, 여호수아에게는 후계자에 대한 언급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여호수아의 잘못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중요한 지도자에 대한 선택 여부를 여호수아에게 단독으로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동년배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 엘르아살도 임조하였습니다.
이는 그들 사후에 특정지도자가 없는 사사 시대가 도래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사사 시대는 여호수아의 잘못으로 지도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29: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 세에 죽으매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칭호는 여호수아가 고귀하고 빛나는 삶, 곧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여 놀라운 사역을 감당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는 일백 십세에 죽었습니다.
30: 무리가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이었더라.
딤낫 세라는 여호수아가 받은 기업으로(수 19:50 참고) ‘딤낫 헤레스’(삿 2:9)와 동일 지역입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산간 지대였으므로 여호수아의 직분에 대한 대가로는 보잘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후계자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명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영광이었을까요!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본 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동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호수아와 당시의 장로들이 죽은 뒤에는 백성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버리고 죄의 길로 달려갔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삿 2:6-15).
3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요셉은 죽어서 본래 애굽에 장사되었습니다(창 50:2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유언대로 출애굽할 때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출 13:19). 그리하여 광야 유랑 기간과 가나안 정복 기간에도 메고 다니다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장사된 세겜에 이르러 그곳에 장사된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이 가나안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은 믿음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창 13:14, 15)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약속의 땅에 이장되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창 50:25).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은 창 33:19 참고하세요.
33: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무리가 그를 그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여호수아서는 엘르아살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역사는 이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엘르아살은 아론의 셋째 아들로, 아론에 이어 제2대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모세의 후계자로 삼은 직분을 감당했으며(민 27:22, 23),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지도했습니다. 엘르아살이 장사된 산은 아마도 그의 자손 대대의 기업일 것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