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6장....[249.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292.주없이 살 수 없네] [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 [23장 “만입이 내게 있으면” ] [206 “주님의 귀한 말씀은”] [405.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406. 곤한 내영혼 편히 쉴 곳과 407.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408. 나 어느 곳에 있든지 409. 나의 기쁨은 사랑의 주님께 410. 내맘에 한 노래 있어 411. 아 내 맘속에 412.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내삶은주의것..우리주는위대하며..거리마다기쁨으로..정결한마음주시옵소서...하나님이시여하나님이시여주는나의..하나님께로더가까이..은혜아니면..내주님없이는못살아
#무엇보다도 먼저 [매순간마다 주 임재 앞에서 사랑-기쁨-감사 가득한, 약동하는 생명의 순전한 영감으로 경배하는]참 예배자 됨이 중요하다!!....[주 임재 앞에서!!] 지금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 사랑함, 오늘 내가 하는일이 가장 소중함...
...[영과 진리의, 계시하심따라 -예배에로의 초대와 부름은 주님의 은혜로 친히 하신, 은혜의 일/ 사람인 그대는 십자가 보혈 믿고 나아가 합당하게 사랑/믿음-생생한 감사로 반응하라...그대여 그대는 예배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임재에 전존재를 열어 맡겨드리는가...주님 보혈의 사죄-정결케 하심의 능력 믿고.. 죄를 깨닫는 것마다 고백하라... 구주 JC 이름 힘입어 나아오게 하심 감사하며, 이제 그분의 임재 100% 알고 사랑하며 누리며 주님께 완전히 하나되어 몰입하도록 기도하고 찬양드리며 감사-감동으로 하나되심 기대하라...말씀 전하는 이에게 기름부음으로 임하시도록 주님께 대언자를 올려드리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축복하며 주께 최상-최선의 선물되도록 그를 위해 기도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의 전존재를 주님 임재로 감싸주시고 친히 그의 마음과 입술에 , 그 자신이 준비한 것 보다도 더 큰 은혜로, (또한 즉각적 임재로) 친히 나타나 임하시는 주님의 마음과 말씀으로 채워주시도록...말씀 받은 그대로 믿음으로 구하고 간구하라...모든 예배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를 드림인 영적 참 제사 드림임을 기억하고 가져온 제물(=경험 체득한 그리스도 크기) 미리 준비하여 드리기를 잊지말라...
::: [예배는 그 자체가 !! 임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적이다!!] 감사로 나아가 찬양(예배 그 자체임) - 죄 고백- 말씀 선포(선포자를 위해 사랑 안에서 기도하라..그를 사랑하는 자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법이다) - 간구/기도 - 봉헌(모든 예베마다) :: 이것이 제사=예배의 5 요소이다....
**[참 예배의 참 성공자 되기]
.....아이의 아빠만큼 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이가 없기에-매일 한번씩 머리에 안수 축복할 것,... 아이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고 매일 한 구절 생명 양식인 말씀 먹임 준수하라(이해하든 못하든 무관함..주께 맡기라)-충만한 은혜의 사랑과 다정함으로 적셔주라..예배시간에는 (떠들든 말든...!!) 항상 옆에 앉혀 엄마의 산 믿음-생명-사랑따라 찬양하며 열어드리며 전 존재로 듣기를 배우는, 주님과의 친밀함 안에 두도록 하라**
##그대는 오늘 어떤 예배자인가.
....다윗인가(마치 오늘이 주어진 인생의 마지막날인것처럼, 전심으로 전존재 다 기울여 은혜와 진리로, 은혜 위에 은혜로 임하신 주님께 합당한 믿음-사랑-감격-감사로 찬양하며 춤추는, 하나님 경외하는, 경건한 참 예배자 = 예배의 성공자),...웃사인가(Q이 하시는 일에 대해"그러시면 안되죠"하며 Q을 관리하려 하며 예배를 관리하려함,, 예배자로서의 경건과 경외함을 잃어버리고 무의식화 된 매너리즘따라 자기 방식대로 주관하려 함),....아니면 미갈인가([집안에 우상을 들여놓고 있었던바, 다윗 침상에 다윗 대신 다윗인척 자기의 우상을 갖다 눕혀두고 있었다...끝까지 조롱하며 비웃는 관찰자 역할함] 그녀는 처음부터 우상 숭배자였다 :: 아비가일의 [생생한 산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 경외함으로 축복함의] 반응과는 전혀 달랐던바, 그 대척점에 서 있는 하나님 대적자의 화신이었다.....예배를 구경하는 구경꾼이자 관찰자였을 뿐....결국 생명 산출 능력 박탈 당하여 재앙과 저주 아래 놓임),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다 [(274장)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롬12:1-2, 고전3:16, 17에 따르면!! 나는 오늘, 어찌할까요?
......[롬12:1,2...*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전3:16-23(16, 17)...*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8.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삼상6:1-7:2....[블레셋인들은 법궤에 대한 주님 명령을 알지 못하였기에, 젖나는 암소가 이끄는 새 수레로 벳세메스로 법궤 옮겨감에 대해 주님은 용납하셨음] ==> 벳세메스 거쳐 기럇여아림 산중의, 고핫자손인 아비나답-엘리아살(-웃사와 베레스..)의 집에 20년간 머무르게 됨**그러나, 살아계신 주님은, 주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자라고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중심으로 참되게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그분 경외함 안에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자초케 됨을 경고하고 계셨음...
......(날마다 신앙생활의 참된 출발은 주님 임재 알고 친밀히 동행하며 주님의 주 되심을 전적으로 위함 + 주님을 [그분의 말씀따라!! 성령의 기쁨으로] 순종하여 중심으로 따름에 있어야 함).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이스라엘나라의 제2차 총회로서...1차때는 35만명 회합으로 헤브론에서 있었음)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 = 바알라..20년간 머무른)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하나님의 임재 보좌"의 거룩함이니...법궤 옮길 때 정말 주의하고 준수하라신 주님 명령이 계셨다!!]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 (그런데!! 함부로!! 말씀따라 =신령과 진정의!! 아무런 참된 마음 준비 점검없이)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효율성/편리성 의미...법궤에 대한 규례와 그 의미, Q의 직접 명령하신 말씀[=생명 문제임]에 대한 무지-무감각 상태로 ..그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존중하는 바 가치 정도는 의식화 되어 나타나고, 이는 어느덧 습관화 되어 표현되는 것임....진정한 기적으로서 주께 드리는 ."예배"의 참 가치와 그 예배 받으시는 분이 누구신지에 대해 합당하게 존중하며 전 존재 기울여 자신을 열어주시는 분의 영광에 합당하게 전 존재를 드림으로써 영생의 영원한 순간 되도록!!, 전존재가 깨어있어서 산 믿음과 사랑으로 반응하는가, 아니면 매너리즘으로 행하고 있는가) 산에 있는 [고핫 자손 레위인]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20여년간이나 오래도록 섬겨오던 아비나답-엘리아살-웃사와 아효 일가였음...그럼에도 불구하고 Q의 생생한 임재 그 자체인 법궤에 대한 참 지식 따른 합당한, 살아 생동하는 전존재 다하는 섬김과 감동-존중함이 전혀 없었다!! 그 어떤 희노애락-사랑/감사/안타까움의 감정이라곤 전혀 없이 단지 습관적으로 "죽어 싸늘해진 자로서!!) 관리하고 있었음을 의미..."나는 어떤가!!" 조심하라-완전하라!!)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이는 아론의 아들들 중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범한 바 "Q의 말씀 어겨, 그분의 거룩하심을 만짐 인해" 그들에게 발생한 죽음과 동일함!!...그보다 20여년 전에 벳세메스 사람들도 동일한 범죄-"법궤 안을 들여다 봄" 인해 5만70명을 치셨음]
......[Q 마음과 그분의 임재!!, 참되게 아는, 주님을 경외함 배운 자마다에게는 그만큼 [그분을 합당히 높여야 하는] 엄중하고도 큰 책임이 뒤따름!!....Q이 지시하사 가르쳐 주신 방법 그대로를 마음 중심으로 그대로 따르며 전심으로 준수함(고핫 자손, 고리를 꿰어 둔 채 그대로를 어깨에 메고[결코 만져서는 안됨] 옮겨야 함)]
......[대상15:2-4..11-15..*2.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고 *3.다윗이 이스라엘 온 무리를 예루살렘으로 모으고 여호와의 궤를 그 마련한 곳으로 메어 올리고자 하여 *4.다윗이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을 모으니.... *11.다윗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부르고 또 레위 사람 우리엘과 아사야와 요엘과 스마야와 엘리엘과 암미나답을 불러 *12.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13.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14.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15.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너무나도 주님의 임재를 목말라하여 주께 합당한 처소로 옮겨오려고 그토록 간절히 고대하고 원하였던바!!...시132:2-4] 다윗이 [=주 보시기에 더 이상 진행되어서는 안될만큼 그분의 거룩하심을 손상케 하는 큰 문제가 있다 여기심 인해 웃사를 치심으로써 멈추게 하고 계셨음 = 주의 얼굴을 숨기심이었다!!....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바, 주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 여겨 실행 중인 그 어떤 일 진행중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겉보기에 심대한 국격과 정체성 손상 발생한 상황으로 느꼈기에!!--주님의 의로운 분노로!! 매너리즘으로 행하고 있었던 스스로에게 자책하며 통분하며 통회하고 있는바....사탄마귀원수대적, 마땅히 죽어야 할 옛사람 다윗-온 이스라엘의 총체적 재난/죽음으로 여기고 있다!!]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그 안에 자기 옛사람 죽음이자 JC십자가죽음 기념]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의 스스로 자책하며 가슴치며 통회하며[다름 아니라 (명령자로되, 심령과 몸을 깨끗이 하고 세심한 배려, 사랑과 경외함의 철저한 준비와 점검을 소홀히 한!!) 다윗 그 자신이야말로 죽었어야 할 죄인됨 자각하고 있었음!!], 한 생명 거두시기까지 엄위하고도 크신 주님의 거룩하심을 새삼스레 깨닫고 합당하게 회개하는 심정을) 주님의 기뻐하셨지만, 그분의 영광을 온전-완전케 하시기 위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주님의 기름부으신 바 성령을 거두시지 마시고 내게로 돌아오소서]하며 마음 졸이며 기다리게 하고 계심을 느껴보라!! [민25:11-13...*11.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주님 임재 앞에서 "[그냥 열심만 앞섰고, 미리 이미 주신 말씀따라 주 임재의 평강 안에서 세심하게 점검하고 합당히 준비하여 진행하지 아니하였음은, 결코 얼굴 들 수 없을만큼 엄위하신 주님 거룩하심을 크게 손상시킨 것이었음을] 가슴치며 철저히 통한하고 자책하며 자복하고, 그러나 회개한 다음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씀하신 그대로 참되게 나아갈 것을 다짐하고 세밀히 준비하면서 [동시에 주목-기대-앙망-몰입하여 기다림으로, 산 믿음의 절대 확신 가운데!1]주님의 허락하심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 영광에 초점 맞춤[시24:1-10...*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가드림몬 태생 고핫 자손)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Q 임재 다정+친밀 + 열납/감사 자체가 복!!)
.......[대상26:1, 4-8...*1.고라 사람들의 문지기 반들은 이러하니라 아삽의 가문 중 고레의 아들 므셀레먀라......*4.오벧에돔의 아들들은 맏아들 스마야와 둘째 여호사밧과 셋째 요아와 넷째 사갈과 다섯째 느다넬과 *5.여섯째 암미엘과 일곱째 잇사갈과 여덟째 브울래대이니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6.그의 아들 스마야도 두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다스리는 자요 큰 용사라 *7.스마야의 아들들은 오드니와 르바엘과 오벳과 엘사밧이며 엘사밧의 형제 엘리후와 스마갸는 능력이 있는 자이니 *8.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286장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315.내주되신주를참사랑하고]...내마음에주를향한사랑이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준행하기 위해!! 명심하여, 주 앞에서 제사장과 함께 순서대로 하나하나 진지하게 점검하고 난 후]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대상 15:11 ::: 법궤를 어깨에 맨 사람들..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레위인 우리엘, 아사야, 요엘, 스마야, 엘리엘, 암미나답 8명//대상 15:26 ::: 당시 성내로 법궤 귀환 당시 드린 제물은 총 수송아지 일곱, 수양 일곱 마리로 기록됨))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시온산에]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 생전에는 시온산 임시 성막과 기브온 성막의 두 성막 체제로 있다가, (솔로몬은 기브온에서 일천번제 드렸음) 솔로몬 성전 완공 후에는 모두 거두고 더 이상 성막은 사용 않게 됨..
18. 다윗이 (제사장에게 기록된 말씀따라 그대로 참되게 시행하도록 일임하였던바)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화목제 축복 참여]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 (주님 사랑과 체험면에서) 아비가일과 미갈은 완전히 반대였다..(결국, 미갈의 우상숭배자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예배 대상이신 하나님 임재 의미하는 법궤의 참 의미, 즉, 하나님 경배의 기쁨을 전혀 모르는) 미갈은 이미 또 다른 웃사(그는 죽음 맞기전에 이미 죽은자)였다..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영원히 사시는, 내 평생의 최고 기쁨-생명-힘과 능력이신...시132]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그후에라도 회개하고 돌이킴의 기록은 없음!!....미갈은 살았으나 죽은자였다)
.......[시 132....*1.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2.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4.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5.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6.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7.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8.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9.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10.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11.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12.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13.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5.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16.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17.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18.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그들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다”(즉, 에브라임 지파에 속해 있는 실로에). ----그들은 거기에 법궤가 있었다고 들었지만, 그것은 거기에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것을 “나무 밭에서 찾았다.” 즉, “나무의 도시”를 뜻하는 기럇여아림에서 찾았다. 거기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통치 시대 초기에 장엄하게 그것을 가져왔다(대상 13:6). ---그리하여 법궤를 위한 성전을 지음으로써 솔로몬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들은 이제 더이상 법궤를 찾아나설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그들은 거기에 참여하기를 결심했다. 아늑한 장소로 가서,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우리의 경의를 표하자. 백성으로서, 기도하는 자로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로다.” 우리는 “사울 때에는”(대상 13:3) 그런 장소가 없어서 소홀히 했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다시 세우실 주님-----
[암9:11, 12...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고, 그 터진 울타리를 고치면서 그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집을 옛날과 같이 다시 지어 놓겠다. 12. 그래서 에돔 족속 가운데서 남은 자들과, 나에게 속해 있던 모든 족속을,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하겠다." 이것은 이 일을 이루실 주의 말씀이다. //NKJV) 11 “On that day I will raise up The [i]tabernacle of David, which has fallen down, And [j]repair its damages; I will raise up its ruins, And rebuild it as in the days of old; 12 That they may possess the remnant of Edom,[k] And all the Gentiles who are called by My name,” Says the Lord who does this thing.]........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겠다!!”라고 아모스 말씀을 통하여서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의 장막"이 "예배"이고, "다윗의 장막의 회복"이 "예배의 회복"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말세에 살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이 "예배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누구이며, 다윗의 장막이란 무엇인지, 다윗의 장막의 특징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행 13:22)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를 좇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겠다는 결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그의 열정에 대한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오랜 세월 후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후, 가장 신경을 써서 추진했던 사업은 “언약궤 찾아오기 프로젝트”였습니다.
언약궤를 찾아오는 과정에서 한 번의 실패를 맛본 다윗은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시 한번 언약궤를 찾아오게 됩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오벧에돔의 집은 예루살렘 성에서부터 11km 내지 22km 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거리를 16km라고 가정해 본다면, 우리는 이 제사의 행렬이 예루살렘까지 올라가는데 어떤 그림이었을지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행진이 시작되기 시작할 무렵 레위인들은 살찐 소와 송아지를 죽여 제사를 지낸 후 여섯 걸음을 떼는 식으로 행진을 계속해 나갔습니다....다윗은, 주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에,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다. When those who were carrying the ark of the LORD had taken six steps, he sacrificed a bull and a fattened calf. (삼하 6:13)
만약에 다윗과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이 여섯 걸음마다 희생제사를 드렸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가지고 오기까지 엄청난 수고와 대가를 지불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언약궤를 가져왔다고 생각을 하면 적어도 수개월 동안의 행렬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섯걸음 걷고서 [언약궤 운반 허락 감사의 ] 희생 제물 드린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 성내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극도로 조심스럽기만한!! 긴 여정의 시간을(!!) 마치고 마침내 다윗과 레위인들, 제사장들 그리고 예배자들이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할 때에, 특히 지엄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은 펄펄 뛰며 춤을 추었습니다. 행렬에 참여한 일부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이 감사했기 때문에 환호를 지르고 기뻐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예언의 영이 충만하여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하여 태어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배, 휘장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우리들까지를 바라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가운데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임재와 영광, 그 우주적인 영광을 영으로 바라보고 경축하기에 그에게 춤을 추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교회의 영광을 기뻐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신적인 기쁨이 폭발적으로 임한 것입니다. --- 광야에서 양을 치던 다윗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가장 추구하는 자였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은 임한 것입니다. (한편 다윗 왕의 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는 다윗 왕이 단지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이 기뻤기 때문에 춤을 췄을까? 생각했지만, 그보다 좀 더 깊게 생각해보니까 에봇이 흘러내리면서까지 췄던 다윗의 춤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기름 부음을 이스라엘 전체에 풀어놓는 예언적인 춤이 아니었을까 라는 것을 조심스레 추측해 보았습니다.) 성도들이 전심을 다하여서 추는 춤에는 성령님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이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의 춤을 보고 무척이나 부끄러워하는 엉뚱한 짓을 했습니다. 그 결과 미갈은 어떻게 되었나요? 미갈은 평생 태의 열매를 갖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윗은 언약궤가 도착한 즉시로 레위인들을 모집, 선발하여서 대규모 찬양단과 관현악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24시간 365일 끊임없이 찬양의 제사를 올려드리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온 산에 마련된 임시처소, "다윗의 장막"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장막"의 특징은 무엇인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다윗의 장막의 특징은 "허름한 장막"이었습니다.
임시처소였던 "다윗의 장막"은 언약궤와 성물들을 햇빛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저 기둥 좀 세우고 그 위에다가 방수천 하나 덮은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초라하기 짝이 없었던 "다윗의 장막"을 재건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중심이나 본질이 아니라 외적인 부분들이라면... 인간이 드려야하는 경배의 형태가 180도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장막"보다도 화려함의 극치였던 "솔로몬의 성전"을 회복시키시겠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은 비록 천막이었지만 하나님께선 다윗의 장막을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다윗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볼품 없었던 다윗의 장막일지라도 우리 하나님께는 너무나도 소중했던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외적인 부분보다 예배의 본질이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두 번째 특징은 다윗의 장막에는 휘장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토미 테니가 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다윗의 장막” 앞부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모세의 장막, 다윗의 장막, 그리고 솔로몬 성전이 나온다, ... "세 곳에 모두 등장하는 기구는 언약궤다. ... "언약궤에는 시온좌가 있고,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러 있었다. ... "셋 중에 하나님이 가장 선호하신 지상의 집은 다윗의 장막이었을 것이다. ... "왜냐면 휘장이 걷히고 궤가 눈에 보이고 영광이 명확히 드러나고 ... "예배자들이 밤낮으로 경배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장막은 모세의 성막과는 달리 휘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장막 안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언약궤가 노출되었다는 것은 장막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성막에서는 일년에 단 한 차례, 그것도 오직 대제사장 단 한사람만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까이 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언약궤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의 영광(쉐카이나 글로리)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장막에서는 장막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장막에는 휘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휘장이 없는 장막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더욱 더 강력하게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 앞에 다 노출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는 휘장이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더욱 더 친밀한 관계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분리와 막힘"이라는 의미의 휘장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에 휘장도 성막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과의 친말함은 최고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막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의 벽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죄라는 것을 해결하고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인간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늘 그리워하셨습니다. 다윗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알았던 것 같습니다. 휘장이 없는 장막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신선하고 획기적인 시도였지만,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그러한 시도는 목숨을 건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용감한 행동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장막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이 성소의 휘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성소와 지성소의 막힘이 뚫리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그 지성소에 들어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하며,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과 같이 막혔던 것의 뚫림이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길을 “새롭게 산 길”이라 표현하며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다”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대제사장이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서야 이 휘장을 지날 수 있듯이, 우리도 반드시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장막이 휘장이 없으므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다윗의 장막은 “피를 드리는 제사” 대신에 “찬양의 제사”가 하나님께 올려졌습니다.
다윗은 신약이 시작되기 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짐승 제사가 아니라 찬미의 제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또 찬미의 제사가 결국은 "신약의 경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 13: 15)
다윗은 이 진리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깨달은 진리대로 신약적 의미의 찬양과 경배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성막에서는 소나 양과 같은 동물의 희생이 엄청났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장들은 살아있는 동물을 잡아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이 밤낮으로 해야 했던 것이 동물을 잡아서 죽이고, 각을 뜨고, 태우고, 피를 쏟아내는 등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장막에는 동물의 피 대신에 찬양과 경배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도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예배를 위하여 대규모의 찬양단과 관현악단을 조직하였습니다. 다윗은 레위인들을 모집하여 38,000명을 선발, 제사를 돕는 제사장들로 삼았으며, 이들은 전적으로 찬양분야를 담당하였고, 찬양을 인도하는 등의 직무를 맡았습니다. 다윗은 또한 레위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들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역상 15:16) 그들 중에서 악기를 사용하여 찬송하는 음악 연주가들은 4,000명이나 되었으며 이들은 "기쁜 소리들을 높이기 위하여 현악기들과 수금들과 타악기들과 같은 악기들을 연주해야 했던 직분자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연주자들은 함께 모여서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때로부터 조직적인 찬양이 히브리 예배에 영구적 특색이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다윗의 장막에서는 동물의 피가 아닌 찬미의 제사가 흘러 넘쳤습니다.
((다윗에게 나단을 통해 주신 바 다윗의 아들에 의한 성전 건축 + 다윗에 대한 축복 말씀- 삼하7장-, 그 말씀을 전해듣고 다윗은 시온산 다윗장막 언약궤 곧 여호와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음)) ((솔로몬의 경우에서는, 기브온산당의 일천번제 드리기를 마친 그날 밤 꿈에, 여호와께서 물으심에 대해 백성들을 올바른 선악분별 판단으로 제대로 다스리기 위해 듣는 마음 달라 구하였을 때, 주신 바 축복과 권고 말씀을 듣고는 시온산 다윗 장막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감사제물드림의 잔치를 배설하였음..왕상3장))
넷째로 다윗의 장막은 연중무휴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단 1분도 끊이지 않았던 것이 바로 다윗의 장막의 예배였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는 24시간 365일 끊임없이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의 예배의 모형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하늘나라는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찬양과 경배가 성도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다윗의 장막의 특징은 "중보기도"였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는 찬양과 경배의 제사와 더불어 중보기도의 향도 같이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주의 율법에 기록된 그대로, 번제단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계속하여 주님께 번제를 드렸다 (역상 16:37~ 40) 이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자들을 세워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고 또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번제는 [살아낸 그리스도를 드림의] 기도를 가리킵니다. 다윗의 장막은 하늘나라의 모델 하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보면 하늘나라의 예배가 나옵니다.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 5:8)
24 장로들 양손에는 거문고와 금대접이 있습니다. 금대접에는 향이 가득합니다.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이 장면은 찬양과 경배 그리고 중보기도가 같이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 거문고는 ‘하프’를 뜻하는 것으로서 찬양을 가리키고 금대접은 성도들의 기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에서는 하나님께 경배가 드려졌고, 번제가 드려졌다고 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태워서 연기로 하나님께 예배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장막은 요한계시록의 하늘나라에서 드려지고 있는 예배를 모델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와 기도가 같이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들, 남은 자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다 합하여 하나님의 전에서 기도하게 하실 것 (사 56:8절)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장막에서 이와 같이 찬양과 경배와 번제를 하나님께 24시간 드렸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찬양과 경배와 기도가 같이 갔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보좌에서 지금, 하늘나라에 예배 가운데 찬양과 경배와 기도가 같이 가고 있습니다.
한 손에는 거문고, 한 손에는 금대접, 이것이 같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세에 다윗의 장막이 세워질텐데, 다윗의 장막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는 다윗의 장막처럼 하나님 백성들이 수시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중보기도 하는 곳으로 이곳을 가리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다윗의 장막의 특징은 “성령의 기름 부음과 신령한 노래”들로 가득 찼습니다.
다윗의 자손 중 3대 음악가는 아삽, 헤만 및 여두둔이었습니다. 그들은 찬양하고 예언했습니다.
역대상 25장 1절, 2절에 “신령한 노래" 가 나옵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나바’라는 말로써 “노래로 예언하다”는 뜻입니다.
또 영어성경에서는 “for the ministry of prophesying” 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예언의 사역을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신령한 노래는 예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들은 예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신령한 노래를 불렀다는 말입니다. 여기 구절들에서 찬양하는 자들이 다 예언하는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장막의 예배는 찬양하는 사람들이 예언의 영이 임하도록 성령의 기름 부음에 상당히 개방적인 예배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곱 번째, 다윗의 장막은 전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맛본 우리는 다윗의 장막 안에서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만 영적인 황홀경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죽어가는 영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맛본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몰고 다니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줘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끔 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말세 중에 말세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수많은 영적지도자들이 주목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독립했다는 것은 정말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의 문턱에 서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정말 급박합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여기저기서 이상기온이 발생하고 또 강력한 태풍과 지진 그밖에 수많은 자연 재해들이 발생합니다.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기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10년 전만해도 미전도 종족이 12,000여 개 있었지만 지금은 6,000종족밖에는 안 남았다는 통계를 보았습니다. 이대로 가면 15년도 채 안돼서 모든 종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예수님의 재림이 30년에서 50년 정도 남았다고 보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인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암튼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에 정말로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본다면 지금 저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정말 말세 중에 말세인 것 같습니다.
아모스서 9장 11절은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예배에 대한 회복이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저희로 에돔의 남은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을 기업으로 얻게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키시면서 또한 전무후무한 대추수를 거두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신약의 성도들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경배 드리며 예언하며 다윗의 계시로 받았던,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회복하였으며 이 회복의 불길은 더 거세어져 24시간 중보와 찬양으로 결국은 이방의 대추수를 몰고 올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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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4 : 10-26]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믿는 이가 그리스도의 이름-주님!!-을 전존재의 중심으로 부르며, 영을 사용하여, 영으로 그리스도를 접촉할 때] 주님은 친히 선물[=곧, 영생,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의 물]이시요, 그 영생수를 주시는 분이요, 그 선물을 받는 길이심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 지금 샘물 내는 기적을 손수 일으키렵니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이 우물물...늘 새로운 참생명 샘물 아닌, 종교 유업-일시적, 옛것))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다시는!!]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참되게 믿는자마다 참 생명샘된 내게 받아마시는 물마다!! - 항상 새롭게]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이미 선물 생명수, 선물 주시는 분, 선물 받는 길이심을 재 강조. :::말씀을 참되게 믿고(=즉,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을 사용하여 영으로 접촉함)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영접한 마음은, 곧 자신의 영의 보좌에 성령께서 내주하게 되심으로써 그 자체로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샘을 가지게 됨을 의미함 ::: 날마다 경험 통해 새로이 체득할 바 영생구원 생명샘이신 주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충만한 참생명 넘쳐남으로 충만히 새겨져야 함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네 남편과 바꾸자..공짜로는 곤란하다!!..대가 지불해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일리 있다...솔직한 오픈-나눔 참 고맙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어찌 보면 남편중독!!, 진정한 참생명 교통 누림 없으니, 만족이 없구나]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습관적 무기인 선악지식으로 돌아가고 있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사랑하는 자여, 영을 사용하라, 영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라!!] 내 말을 믿으라[=생명나무 취함,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것은 대가 지불의 첫걸음이요 마지막이다...네 존재를 네 모든 문제와 함께 온통 내게 맡겨라, 참진리인 내 말을 영으로 들으라, 영을 사용하라, 그 말씀하시는 바 하나님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아람어 메쉬하..히브리어 마쉬아흐...기름부음 받은자)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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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자((=성경은 모든 거듭난 이로 구성된 단체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여성성 지닌,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로 보고 있음을 기억하라.....돕는 배필인 아내는, 남편이 느끼는 바 아내가 필요하다 느끼는 정도보다 연약함-무력함-결핍을 더 크게 느끼며, 참 만족으로서의 남편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더 크고 깊은 정도로 가지게 하셨다))의 만족 그리스도/그리스도<유일한 남성성 지닌 분>의 만족은 참된 새 사람((신부인 새예루살렘))...참사람 얻기를 갈망하시는 그리스도/남편, 참 만족에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을 보라..
**그리스도의 반쪽, 너는 내게 오라.. 너의 모든 문제들, 모든 필요와 갈망의 참된 해결은 바로 나, 그리스도이니... 너의 목마름<만족없음>은 곧 나의 목마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너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나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지금의 네 남편<네게 만족준다고 여기고 있는 바, 육체적 또는 종교적, 전통적, 물질적 남편들>을 내게로 가져와서 내가 주는 [유일한 만족을 주는] 생명수와 바꾸는 것은 어떨까 **변론하는 네 말도 옳다<반쪽만 그렇긴 하다만>, 지금 있는 남편들은 그 어떤 것도 너의 참된 만족이 아니구나 **영을 사용해서, 영으로 그리스도를 접촉, 그래야 영이신 하나님, 곧 생명수이신 분을 참되게 먹고 마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상호간에 영을 사용하고 영으로 접촉할 때, 바로 그 때에야 진정 하나가 됨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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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6장
1. Now David again gathered all the chosen men of Israel, thirty thousand.
2. And David arose and went with all the people who were with him to Baale-judah, to bring up from there the ark of God which is called by the Name, the very name of the LORD of hosts who is enthroned [above] the cherubim.
3. And they placed the ark of God on a new cart that they might bring it from the house of Abinadab which was on the hill; and Uzzah and Ahio, the sons of Abinadab, were leading the new cart.
4. So they brought it with the ark of God from the house of Abinadab, which was on the hill; and Ahio was walking ahead of the ark.
5. Meanwhile, David and all the house of Israel were celebrating before the LORD with all kinds of [instruments made of] fir wood, and with lyres, harps, tambourines, castanets and cymbals.
6. But when they came to the threshing floor of Nacon, Uzzah reached out toward the ark of God and took hold of it, for the oxen nearly upset [it.]
7. And the anger of the LORD burned against Uzzah, and God struck him down there for his irreverence; and he died there by the ark of God.
8. And David became angry because of the Lord's outburst against Uzzah, and that place is called Perez-uzzah to this day.
9. So David was afraid of the LORD that day; and he said, "How can the ark of the LORD come to me?"
10. And David was unwilling to move the ark of the LORD into the city of David with him; but David took it aside to the house of Obed-edom the Gittite.
11. Thus the ark of the LORD remained in the house of Obed-edom the Gittite three months, and the LORD blessed Obed-edom and all his household.
12. Now it was told King David, saying, "The LORD has blessed the house of Obed-edom and all that belongs to him, on account of the ark of God." And David went and brought up the ark of God from the house of Obed-edom into the city of David with gladness.
13. And so it was, that when the bearers of the ark of the LORD had gone six paces, he sacrificed an ox and a fatling.
14. And David was dancing before the LORD with all [his] might, and David was wearing a linen ephod.
15. So David and all the house of Israel were bringing up the ark of the LORD with shouting and the sound of the trumpet.
16. Then it happened [as] the ark of the LORD came into the city of David that Michal the daughter of Saul looked out of the window and saw King David leaping and dancing before the LORD; and she despised him in her heart.
17. So they brought in the ark of the LORD and set it in its place inside the tent which David had pitched for it; and Davi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before the LORD.
18. And when David had finished offering the burnt offering and the peace offering, he blessed the people in the name of the LORD of hosts.
19. Further, he distributed to all the people, to all the multitude of Israel, both to men and women, a cake of bread and one of dates and one of raisins to each one. Then all the people departed each to his house.
20. But when David returned to bless his household, Michal the daughter of Saul came out to meet David and said, "How the king of Israel distinguished himself today! He uncovered himself today in the eyes of his servants' maids as one of the foolish ones shamelessly uncovers himself!"
21. So David said to Michal, "[It was] before the LORD, who chose me above your father and above all his house, to appoint me ruler over the people of the LORD, over Israel; therefore I will celebrate before the LORD.
22. "And I will be more lightly esteemed than this and will be humble in my own eyes, but with the maids of whom you have spoken, with them I will be distinguished."
23. And Michal the daughter of Saul had no child to the day of her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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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장 (개요)
사울의 재임 중에는, 법궤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처박혀 있었는데, 그것이 블레셋인들의 모욕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 크게 걱정거리였었다.
다윗은 블레셋인들을 굴복시키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법궤를 주신 은총에 감사하여서, 그리고 축복을 위한 자기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 법궤를 자기가 있는 성읍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운다.
법궤를 자기에게 가까이 두고, 자기의 기초를 새로 장식해 주고 힘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1. 법궤를 옮길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유산되고 만다. 계획은 잘된 것이었다(1,2). 그러나
(1) 그들은 법궤를 수레에 실어 나르려는 오류를 범한다(3-5).
(2) 그래서 웃사의 급살로써 그들의 실수는 처벌을 받는다(6,7). 이것은 다윗을 크게 겁나게 했다(8,9). 그리고는 일을 중단하게 되었다(10,11).
2. 마침내 옮겨 오기를 다하자 큰 기쁨과 만족이 있었다(12-15). 그리고
(1) 다윗과 그 백성 간에는 기쁨과 좋은 이해가 성립되었다(17-19).
(2) 이 일로 인해 다윗과 그의 아내 사이에는 불화가 있었다(16, 20-23).
그리고 법궤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요, 동시에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잘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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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를 옮기려는 시도(삼하 6:1-5)
법궤가 블레셋에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직후, 기럇여아림에 머무르게 된 이래로는(삼상 7:1, 2) 사울이 한번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삼상 14:18)는 얘기 외에는, 법궤에 대해서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전날에는 그렇게 유명하던 것이 이제는 수년간 무시된 채 버림을 받고 있었다.
법궤가 이렇게 수년 간을 어떤 집에 놓여 있었다고 하면, 교회가 그토록 오랫동안 광야에 있었던 것을 안다고 하여 놀랄 것은 없으리라(계 12:14).
항상 사람의 주목을 끈다는 자체가 참된 교회의 징표는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외적 표적이 없는 때에도,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그들의 심령 속에 함께 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제 다윗이 보좌에 좌정하게 되자, 법궤의 명예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법궤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심도 다시 꽃피기 시작했다.” 분명히 지금까지 선한 자들이 “염려를 해 왔지만 기회가 없어서”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빌 4:10 참조).
Ⅰ. 법궤에 대해서 영예로운 말이 나와 있다.
오랫동안 법궤 얘기가 나오지 않았으니, 여기서 법궤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를 살펴보자(2절). 그것은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하나님의 법궤”이다. 즉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조차도 거기에서는 불리워진다. 혹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불려진다.” 혹은 “선포된 그 이름, 곧 만군의 여호와란 이름으로 인해서 불리는 것이다” (즉 법궤 앞에서 일어난 기적들 때문에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셨다). 또는 “그 이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의 법궤” , “그 위에 있는 그룹들 위에 좌정해 계신 분” 의 법궤라고 했다.
여기서 이런 것을 배우자.
1. 하나님을 귀히 생각하고 찬양하는 법을 배우자.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그는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다스리고 있으며, 그들 모두에게서 충성을 받으시며, 그러면서도 그룹들 사이에, 곧 속죄소, 자비의 보좌에 앉으시나 자기 백성에게 자기를 기꺼이 나타내 보이시며, 한 중보자를 통해서 화해하시고, 그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2. 거룩한 규례를 존경스럽게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배우자.
그런 규례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런 것들은 이스라엘에게서의 법궤처럼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요(마 28:2), 그와의 교재의 방편이 된다(시 27:4).
법궤는 그것이 하나님의 법궤라는 데서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질투하시며, 그것을 통해서 찬양받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그 이름이 불리워진다.
하나님의 제도는 거룩한 규례들에다가 미와 장엄함을 부여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것들은 모양도 맵시도 없는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법궤이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그의 사랑이 전달되며, 우리의 관여와 기도를 받으신다.
Ⅱ. 궤를 옮기는 데에 영예로운 행차가 뒤따른다.
다윗이 제의를 했고(대상 13:1-3), 장로들이 동의를 했기 때문에, 그 일은 시행되었다(4절). 이스라엘의 택함받은 모든 사람들이 이 의식을 장엄하게 하기 위해 소집되었고, 그래서 궤에 대한 저들의 존경의 열을 표하면서, 궤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게 되었다. 귀족들과 명사들, 장로들과 관원들이 왔는데, 그 수가 3만이었다(1절). 그리고 많은 서민들이 그 옆에 섰다(대상 13:5). 그러므로 혹자는 이 일이 3대 절기 중의 어느 하나에 있었던 일로 본다. 아마 이것은 고귀한 행렬이 되었을 것이요, 그 나라의 청년들에게 궤에 대한 존경의 염을 고무했을 것이다(아마 그 청년들은 궤에 대해서 한 마디도 못들었을지 모른다). 왕과 고관들이 직접 수행하여 지키는 이것은 필경 무한한 가치의 보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Ⅲ. 궤의 이동에 대한 큰 기쁨의 표현이 있다(5절).
다윗 자신과 음악인들이 함께 하여 자기들의 기쁨을 악기로써 표현했다. 아마 궤가 한적한 곳을 떠나 공적인 자리로 옮겨지는 것을 보면 그들은 기쁨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없는 것보다는 외딴 집에라도 궤가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 다곤의 신전에 포로로 되어 있는 것보다는 집에 궤를 두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궤를 위해서 마련한 장막에 궤를 두는 것이야말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거기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밀한 예배는 은밀할수록 좋듯이 공중 예배는 공적(公的)으로 되면 될 수록 더 좋은 것이다.
그리고 제한이 없어지며, 하나님의 궤가 다윗 성에 무사히 들어오고, 시민의 권력을 보호 지원해 줄 뿐만 아니라, 대변해 주고 격려해 준다는 것을 알면 기뻐함이 당연하다.
이 기쁨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유희했다.” 공적 기쁨은 언제나 “여호와 앞에서” 있는, 그를 염두에 두고 그에게서 끝나는 그런 기쁨이어야 하며, 육욕적인 쾌락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라이프푸트(Lightfoot) 박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때에 다윗이 시편 68편을 지은 것 아닐까 추측한다는 것이다. ...그 시편은 모세가 궤를 옮겨갈 때 드렸던 옛 기도문,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대적을 흩으소서” 라는 구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그 시편의 25절에는 “가수와 악기 다루는 자”가 수행했다는 이야기 및 지파들의 여러 방백이 수행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그리고 아마 그 마지막 구절, “오, 하나님이여, 주는 주의 거룩한 처소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나이다” 하는 것은 웃사가 죽었을 때 추가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것이다.
Ⅳ. 이 일로 인해서 죄를 짓는 실수가 생긴다. 즉 그들이 수레로 궤를 날랐다는 점이다. 실상은 제사장들이 매어서 날라야 했던 것이다(3절).
고핫 자손들은 궤를 맡게 되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수레가 할당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임무가 자기들의 어깨로 궤를 나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민 7:9).
궤는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시온 산까지 어깨로 메어 나를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세속된 물건처럼 수레에 실어나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렇게 했는데도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잘 몰랐고, 궤를 나를 만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없었다. 그래서 다곤 신전의 제사장들이 나르기보다는 차라리 수레에 실어 나르는 게 더 나았었다.
블레셋인들이 혹 건방진 자세로 궤를 수레에 실어 날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그런 짓을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잃는 위험한 일이 된다.
그 궤를 새 수레로 날랐다고 하여 사태를 조금도 호전시키지는 못했다. 새 것이건 낡은 것이건 수레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니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율법에 능통하고, 지혜가 많으며 선량한 사람이 어떻게 그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됐는지 알 수 없다.
아마 그가 이 의식의 내용에만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외부적 사정에 대해서는 등한히 했을 것이라고 좋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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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사의 불상사(삼하 6:6-11)
웃사가 궤를 만지자 즉사하게 된다. 이 일은 궤가 다윗성을 향해 막 떠났을 때에 일어났다. 그들의 즐거움을 꺼버린 슬픔의 섭리가 궤의 행진을 중단시켰다.
그래서 잠시 동안 이 큰 회중들은 슬픔에 찼다. 그들은 모두 궤에 수행하던 자들인데, 이제 급히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Ⅰ. 웃사의 죄는 겉보기엔아주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
아비나답의 아들들, 웃사와 그의 동생 아효가 궤를 뒤따르고 있었다. 궤가 그들의 집에 묵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따라간 것은 궤를 자기 집에다가 두고 자기들만이 영예와 혜택을 받는 것보다는 공공의 이익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자기들도 좋아한다는 표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궤를 나르는 수레를 몰았다. 아마 이것이 저들이 행할 수 있는 궤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궤가 다윗 성에 들어가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궤를 돌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효가 앞서 갔다. 길을 치우고, 필요하다면 소를 인도해 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웃사는 수레 옆에 바짝 따라갔다. 그런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다(6절). 여기에 쓰인 원어의 뜻이 무엇인지 비평가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고 있다.
“소들이 (흠정역 난외에 있듯이) 걸렸다.” “그들이 발길질을 했다” (혹자는 그렇게 본다). 아마 웃사가 소를 모는 그 몰이 막대기를 향해서 걷어찼을 것이다. 또 혹자는 “그들(소)이 진창에 빠졌다”고 읽기도 한다. 어쨌든 궤가 전복될 위험에 빠졌다. 이리하여 웃사가 궤를 붙들었다. 넘어지지 않게 하려함이었다. 그것은 좋은 의도였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궤의 명예를 보존하고 악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범죄의 행동이었다.
율법은 고핫 자손들에 대해 명백히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이 비록 궤의 채를 잡고 날라야 할 때에도, “성물에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된다. 죽을까 함이라”(민 4:15).
웃사는 궤에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다. 늘 궤에 시종했었다. 그래서 이런 무례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Ⅱ. 이 범죄로 인해 받은 그의 벌은 지극히 중해 보인다(7절). “여호와의 진노가 그를 향해 발하니라” (하나님은 성물을 위해서는 질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보면, 하나님이 그의 경솔함을 인해서 거기서 그를 쳤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하나님의 궤 옆에서” 죄를 짓고, 거기서 죽었다. 속죄소도 그를 구해 주지 못했다. 왜 하나님은 그에게 이토록 가혹했는가?
1. 궤를 만지는 것은 레위인들에게도 분명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이 죽을까 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가혹한 실례를 통해서 하나님은 같은 형벌을 주겠다고 하여 금지하셨던 열매를 먹은 첫 조상들에게도 이렇게 정당히 대우하셨을 수도 있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들에게 “죽을까 하노라”고 하시면서 금지하셨었다.
2. 하나님은 웃사의 마음 속에 있는 교만과 경솔을 아셨다.
웃사는, 이 큰 회중 앞에서, 자기가 지금까지 궤에 친밀히 지냈으므로, 궤에 대해서 담대히 처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을 것이다.
친근성이란 것은 비록 가장 경외해야 될 것에 대해서도 경멸로 대하기가 쉽다.
3. 나중에 다윗은, 자기들 모두가 저지른 잘못, 곧 궤를 수레로 나른 잘못 때문에 웃사가 죽었다고 시인했다.
궤를 레위인의 어깨로 나르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치신 것이로다” (대상 15:13).
그러나 웃사만이 표본이 되었다. 아마 웃사가 그런 식으로 나르는 방법을 가장 적극적으로 제안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이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아마 오소리 가죽으로 덮지 않았을 것이다(민 4:6).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더욱 분노케 했다.
4. 이로써 하나님은 수 천 이스라엘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셨을 것이다.
궤가 아무리 오랫동안 비천한 처지에 놓여 있었더라도 결코 그렇게 하찮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려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지닌 채 즐거워하는 것을 가르치며, 성물은 언제나 신중하고 경외의 염으로 대하도록 가르치려 하셨던 것이다.
5. 이로써 하나님은 선한 의도가 악한 행실을 정당화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 하셨다.
잘못된 일을 보고, 그것은 사실 좋은 뜻으로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의 궤를 안보할 수 있으며, 또 안보하실 것임을 알리려 하셨다. 그래서 궤를 안보하는 데 무슨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님을 밝히려 하셨다.
6. 권리가 없는 자가 궤를 만진 것이 이렇게 중한 범죄라면,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자가 계약의 특권을 주장하고 나서는 일은 오죽하랴.
그런 악한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네가 어찌하여 내 계약을 입에 오르내리느냐?”(시 50:16) “친구여, 그대가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궤가 그렇게 신성한 것이라면, “계약의 피”야 얼마나 신성하랴!(히 10:29)
Ⅲ. 이 사고로 인한 다윗의 감정은 매우 예민했다. 아마 너무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님의 손길에 부복하여,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의를 시인하며, 더 이상 불쾌감을 내지 않기로 하고, 자기가 착수한 그 선한 사업을 계속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 기분이 나빴다. 그것이, 웃사가 하나님께 불경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웃사를 쳤기 때문이라고 했다(8절). “다윗이 분하였다.”
그런데 이 때의 단어가 하나님의 진노를 표하는 단어와 같은 것이다(7절). 하나님이 노하셨기 때문에 다윗도 노한 것이고, 기분을 잡친 것이지만 조금 과하였던 것 아닐까..그리 여겨질 수도 있겠다.... 마치 다윗의 허락 없이는, 하나님이 이 궤의 영예를 주장하거나 거기에 함부로 손대는 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거기서 회개하고 그 길 진행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될 여지도 있겠으니)... 죽을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수 있단 말인가!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쫓는 사람”답지 못했다. 즉 그답지 못했다.
아무리 부당하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고 해서 인간인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웃사의 죽음은 다윗이 지금까지 자기를 생각하고 있던 그 엄숙한 의식의 영예를 실족시킨 것이요, 다윗을 좋아하지 않던 자들은 하나님이 다윗을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는 그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옳고 지혜로우심을 표명해야 했지, 불쾌하게 여겨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잊지말자, 하나님의 진노를 받더라도, 우리가 따라서 분을 내서는 안 되며, 돌아보아 자기 죄를 자백하고 회개한 후 우리가 마땅히 동행해야 할 길을 계속 행해야 함을!! 기억하자.
======하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분노로) 후끈 달아오르다, 성내다, 노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불을 태우다' cause fire to burn를 의미하는 드물게 나오는 아람어 어근과 관련되어 있으며 목구멍 등에서의 '뜨거운 느낌'을 의미하는 아랍어의 어근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 히브리어 동사는 항상 '분노' anger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 4장 6절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합니다. "어찌됨이냐?"를 두 번 반복하십니다. 분을 내거나 안색이 변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시고 자신의 악한 마음가짐을 질책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너 열 받을 필요없다. 너는 이미 나와 영적으로 소통이 되지 않고 있어! 회개해야지!" 하시는 것입니다.....창세기 4장 7절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고 하십니다. 낯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상태에 있는 가인에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의 악한 마음을 돌이키시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지 않습니까?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할 때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만남이라면 어떤 마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린 마음이 있습니까? 열린 마음은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것입니다.......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했던 것은 가장 먼저 죄를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행위가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제사만 드린다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가? 얼마나 깊은 죄악의 뿌리가 있는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 은혜, 봉사를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는 단번의 제사를 드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교회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주님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성령이 임할 때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어떻게 죄의 욕망을 이기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마음을 고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편 10절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정결하고 깨끗한 하나님을 향한 열린 마음을 요청했던 것입니다......열린 마음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우리가 끊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관계의 대상이 될 때 이루어집니다. 그 말씀에 즐거이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배는 자신의 종교적 감정을 통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순종의 삶이 있을 때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그는 겁을 먹었다(9절). [주께서 웃사를 치심 인해 = 이는 (동시에!!) 명령하여 주관하는 머리된 자인 디윗 자신을 경고하고 계심임을!! 문득 깨달은 바]그는 심히 놀라서 겁을 먹었음에 틀림 없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라고 말한 것을 보아 분명하다.
마치 하나님이 다윗에 관한 모든 일을 훼방하시며, 궤를 너무 사랑하시는 나머지 아무도 손 못대게 하시며, 따라서 다윗은 멀리서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 같은 일이었다.
차라리 “궤를 내게로 가져오라. 그리하면 내가 이 일로 경고를 받았으니 앞으로 더욱 신중히 다루리라” 고 말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렘 25:6). “나를 노하게 하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상하지 아니하리라.”
아니면, 이 놀라운 심판을 다윗이 잘 선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웃사는 확실히 누구보다 큰 죄인이었도다. 그런 일을 했으니……”라고 말하지 아니했다.
오히려 다윗은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었다.((자기연민!!)) 마치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호의를 받기에 부당한 자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기분 나쁜 점만을 아는 자 같았다.
“하나님은 웃사처럼 나를 죽였어야 옳았으리라. 나의 육체는 주 앞에서 두려워 떨었나이다”(시 119:120).
하나님이 이 심판에서 의도하신 바는, 남들도 듣고 두려워하게 함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수용 준비가 더 갖추어지기까지 궤를 자기 도읍으로 가져오지 아니했다(10절).
3. 다윗은 그곳에다 새로 이름을 붙임으로써 이 사건을 영구히 기억하려 했다. “베레스 웃사” 곧 “웃사를 침”이란 뜻의 이름이었다(8절).
그는 얼마전 자기의 원수들을 쳐 승리를 거두고 나서, “바알―베라심” 곧 “침의 장소” 라는 이름을 그 전장에다 붙였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자기의 친구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우리는 한 사고를 만나면, 그 다음에는 어디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사고에 대한 추억은 후손들로 하여금 온갖 성물(聖物)을 다룰 때 조심하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것들 속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4. 다윗은 레위 지파인, 고핫 사람 오벧에돔의 훌륭한 집에 궤를 안치했다. 그 집은 이 사고가 난 근처에 있던 집이다. 거기서는
(1) 궤를 친절히 영접하여 “석 달간” 머물게 했다(10,11절).
오벧에돔은 궤를 나포해간 블레셋인들, 그리고 그것을 들여다본 벧세메스인들의 궤가 어떤 화근이 되었던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웃사가 그것을 만지다가 즉사한 것도 보았다. 다윗도 이 일에 개입되기를 무서워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쾌히 궤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고는, 두려움 없이 문을 열었다.
그는 궤를 잘못 다루는 자들에게만, 그 궤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냄새”인 것을 알았던 때문이다. 홀(Hall) 주교는 말한다.
“오, 정직하고 신실한 자의 거룩한 용기여! 그밖에는 아무 것으로도 하나님을 친구로 삼을 수 없도다.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사랑이 되는도다.”
(2) 궤를 환대한 대가를 받았다.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주시니라.”
웃사의 경거망동을 처벌하신 바로 그 손이 오벧에돔의 겸손한 용기에 보상을 주었고, 그 궤로 하여금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게 했다.
아무도 복음을 거부한 자에게 심판이 내린다 하여 복음을 업신여기지 말라. 오히려 그것을 잘 수용한 자들에게는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어느 때고 간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헛되도다”는 말을 하지 말라. 가장들은 자기 식구들에게 신앙을 육성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 나라의 권세를 위해 집안 전체가 재산을 드려 노력하도록 하게 하라. 그것이 바로 그들 모두가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궤란 그것을 영접한 자가 결코 손해를 보지 아니하는 그런 손님이다.
오벧에돔이 이전에는 가난했으나, 그 석달 동안 갑자기 부자가 되어,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다고 요세푸스(Josephus)는 말한다.
신앙심은 번영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지혜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다.
오벧에돔의 집안이 모두 그 축복을 받았다. 궤를 영접하는 것은 가문의 복이 된다. 그 주위의 모든 일이 더 잘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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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재도전과 미갈(삼하 6:12-19)
다윗은 여기서 다시 한 번 궤를 자기의 도성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벌인다. 그리고는 이전과는 달리 성공을 거둔다.
Ⅰ. 다윗이 다시금 도전을 하도록 하게 된 주요 원인은, 오벧에돔이 궤 때문에 받은 축복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12절), 다윗은 즉시 사람을 보냈다. 그 이유는
1. 그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화해하시사 노를 돌이키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웃사의 죽음에서 자기들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읽었듯이, 이제는 오벧에돔에게 내린 번영을 보고 저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화해해 주시면, 우리는 즐거이 우리의 계획을 밀고 나갈 수 있다.
2. 궤란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그 가까이에 있는 자들에게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불복종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걸림돌이요 훼방의 반석”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그가 “모퉁이 돌이요, 세워 주는 귀중한 돌”이 된다(벧전 2:6-8).
다윗은 오벧에돔이 그토록 궤의 은덕을 입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것을 도성으로 가져오려 했다.
남들이 복을 받는 경험을 보면, 우리도 더욱 신앙심을 굳게 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궤가 어떤 집에 축복의 근원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 집으로 가져오라.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서 빼앗지 않고도, 가지게 되고, 복을 받게 되리라.
Ⅱ. 이번에는 다윗이 어떻게 일을 처리했는지 보자.
1. 그는 이전의 실수를 시정했다.
이번에는 궤를 수레에 싣지 않았다. 그 일을 맡을 임무가 있는 자들에게 시켜서, 그것을 어깨로 매고 가게 했다.
그 사실이 여기서는 암시만 되었지만(13절), 역대상 15장 15절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전의 실수를 교정하고 났을 때에야, 우리에게나 남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선용한 것이 된다.
2.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시작했다(13절).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의 실수를 속죄하고, 오벧에돔에게 내려 준 축복을 감사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서 일을 시작하고, 그와 화해를 하는 데에 부지런했을 때에야, 우리의 계획을 급속히 진행시킬 수 있는 법이다.
거룩한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받을 때에는, 저 대희생 제물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
그 제물을 통해서 우리가 계약을 맺을 수 있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시인해야 한다(시 50:5).
3. 다윗 자신이 최대한의 기쁨을 표명하면서 그 식전에 참례했다(14절). “그는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그는 마치 도취된 사람처럼 기뻐서 뛰었다. 더구나 지난 번에 당한 일로 인한 좌절이 컸기 때문에, 이번엔 그만큼 기뻤던 것이다.
잘못이 시정되고 자기가 의무를 이행하게 되는 것을 아는 일은 선한 자들에게는 즐거움이다.
생각건대, 그가 아무렇게나 춤을 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는 일정한 규칙을 따라서 춤을 추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와 함께 춤을 추지 아니했다. 그러나 그의 춤은 최대의 기쁨과 환희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런 표현이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종교적 행사를 최대한의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해야 한다. 실상 온갖 힘을 다한다 해도, 그것은 거룩한 의무를 다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이 때를 당하여 다윗은 자기의 왕복을 벗어치우고, 평범한 베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 베옷은 가벼워서 춤추기에 편리했으며, 제사장이 아닌 자들이 종교적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사무엘도 그런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삼상 2:18).
이 위대한 임군은 자기가 궤를 받드는 일군의 관습을 따르는 것을 조금도 품위 하락으로 생각지 않았다.
4. 이 제가 진행되자 모든 사람들이 나팔을 불었다(15절). “그들은 소리를 치며 나팔을 불어서 궤를” 왕성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박수갈채를 보내어 자기들의 기쁨을 표했고,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같이 즐거워한다는 뜻을 알렸다.
일반 시민 권력의 보호와 또 웃음 아래 규례가 공적으로 자유로이 집행되었다는 것은 모든 민중에게 실로 즐거움거리였다.
5. 궤는 미리 준비된 장소에 안전하게 인도되어, 영예롭게 안치되었다(17절).
그들은 궤를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다가” 두었다.
모세가 쳤던 장막은 아니다. 그것은 기브온에 있기 때문이다(대하 1:13).
그것은 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랜동안 낡아졌기 때문에 이동하여 다니기에는 부적합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궤를 맞이하기 위해서 새로운 장막을 마련했던 것 같다.
다윗은 궤를 자기의 사저나 궁궐로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필경 다윗이 지나치게 그것을 독점하는 것이요, 백성들이 그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나아오는 출입이 부자유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궤를 위해 집을 짓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면 시기가 되어서 보다 견고하게 건축될 성전 건축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분간 모세의 회막을 본떠서 만든 장막 속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궤가 정돈되자마자 다윗은 번제와 화제를 드렸다.
더 이상 아무 실수도 없이 그 업무를 하게 된 데 대한 하나님께 감사를 위해서요, 계속하여 은혜를 내려 주십사고 비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의 뜻이었다.
우리도 기쁨이 있을 때는 언제나 찬미와 기도를 수행해야 한다. “그 같은 제사를 하나님이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아마 이 때를 당하여 시편 132편을 썼을 것이다.
6. 그러자 백성들은 크게 만족한 태도로 돌아갔다. 다윗은 이렇게 하여 그들을 돌려 보냈다.
(1) 은혜로운 기도를 해 줌으로써. “그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18절).
그것은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늘과 특별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한 것임과 동시에 그들을 다스리는 군주의 권위로 한 것이었다.
“더 작은 자는 더 큰 자의 축복을 받는 법”이기 때문이다(히 1:7).
다윗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특별히 그같은 여행이 자기들에게는 조금도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기들의 가사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감당키 어려운 것이 되리라는 확신 밑에서, 그들이 궤에 대해서 표한 그 존경심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 있기를 기도했다.
다윗은 이 기도로써 그들의 복리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입증했고,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사랑해 주는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 셈이다.
(2) 관대한 대접을 하여 보냈다.
사실 상당한 자선을 베풀어 보냈기 때문이다. 귀빈들은 아마 자기 집에서 대접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무리에게 남녀를 불문하고” (요세푸스는 아이들에게까지라 한다) 한 가지로 “떡 한 개, 고기 한 점, 그리고 (요세푸스에 의하면) 화목 제물 한 조각”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다윗과 같이 “제물과 포도주” 를 즐기게 했다(19절:한글 성경과는 다소 다름―역주). 아마 다윗은 그들을 각각 지방별로 나눠서 이 같은 대접을 할 수 있도록 조처했을 것이다.
① 그것은 다윗 자신의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의 표시였다. 마음이 즐거움으로 커지면, 손은 후대로써 열려져야 한다. 부림절은 “서로 예물을 주면서”(에 9:22) 지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는 용서의 자비를 남에게 베푸는 데에 자비로와야 하듯이, 하나님의 관후한 대접을 받은 자들은 역시 남에게 주는 데에 관후해야 한다.
② 백성에게 자신을 천거하며, 자기와 그들과의 이해 관계를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예물을 주는 자는 모두 친구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기도에는 관심없던 자도 그의 후한 인정 때문에 다윗을 사랑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사실 때문에, 앞으로 언제든 다윗이 부르면 그들은 기꺼이 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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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미갈(삼하 6:20-23)
다윗은 축복을 하여 회중을 돌려 보내고 나서, “자기 가족을 축복하려 돌아갔다”(20절).
집안 식구들과 같이,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이 국가적 축복을 맞아 가족들의 감사제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사역자들은 공적 의식이 가정 예배를 대신해 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들은 강이나 기도로써 의식에 참례한 회중들을 축복하고 난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그와 비슷한 식으로 그들을 축복해 주어야 한다.
사역자들은 그 집 식구들에게는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는 그를 대신해 줄 제사장, 예언자, 레위인들이 자기 주위에 있었으나 그들에게 일을 맡기지 아니하고 친히 “자기집 식구들을 축복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천사들의 직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아무리 위대한 인물에게라도 인격적 손상은 절대로 주지 않는다.
다윗이 궤를 인근에다 옮겨 놓았을 때와는 달리,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집안의 영적 분위기로 인해서 조금도 기뻐하거나 만족해 하지 못했다.
이 즐거운 날이 고민과 역정으로 가득 찬 그의 부인 때문에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궁성도 가정 불화에서 제외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윗은 이스라엘 대중 모두를 기쁘게 해 주었지만, 궤 앞에서 [하체가 드러나도록까지 정신없이 황홀경 가운데] 춤을 추었다는 것으로 인해서 미갈은 다윗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일 때문에, 미갈은 멀리서 보다가 다윗을 경멸했으며, 다윗이 집에 들어오자 그를 꾸짖었다.
그녀는 백성에 대한 다윗의 후대를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다윗이 백성들을 후히 대접했다는 사실에 인색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다윗이 궤 앞에서 (엉덩이를 드러낼 정도로)춤을 춘 것은 다윗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갈을 역정나게 한 것은 그녀의 탐심이 아니라 교만이었다.
Ⅰ.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며 길거리에 있는 것을 미갈이 보았을 때, 그녀는 “심중에 저를 업신여겼다” (16절).
그녀는 하나님의 궤를 향한 다윗의 강렬한 열심, 그리고 궤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고 황홀해 한 그것은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며 무사와 정치인, 더욱이 다윗 같은 임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윗이 남들의 신앙심을 조장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친히 열성을 내는 것은 다윗으로서는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미갈은 생각했다. “내 남편이 이렇게 스스로 바보가 되다니! 지금까지 그토록 오래 버려두었던 궤는 그대로 제자리에 놓아두어도 될텐데, 그것을 이토록 좋아하다니! 필경 신앙심이 지나쳐서 미친게로군.”
신앙의 행사도 신앙심이 거의 없거나 아주 없는 자들에게는 비천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Ⅱ. 다윗이 한창 기분이 좋아서 집에 돌아오자, 그녀는 다윗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경멸심과 노기가 가득찼던지, 다윗이 사저로 들어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길거리에 나가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1. 그녀는 다윗을 얼마나 조롱했던가!(20절) “오늘 이스라엘 왕이 얼마나 영화로우셨던고! 폭도들의 한 가운데 낀 당신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출중했던고! 그것 모두 지위와 품격에 어울리지 않도다!”
다윗에 대한 그녀의 경멸심이나 다윗의 심중에 시작된 신앙심은 모두 그 입에 가득한 것을 입 밖으로 발설했다.
미갈을 불쾌하게 한 것은 궤에 대한 다윗의 열성이었다. 미갈은 자기가 궤에 대해 갖는 마음보다는 다윗의 궤에 대한 마음이 더 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미갈은 다윗의 처신을 비천하다고 말했다. 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다윗의 존귀를 가리는 일이라서 싫어해 놓고도, 그런 일은 다윗의 덕성에 욕이 된다 하여 싫어하는 듯이 말했다. “계집종들의 눈 앞에서 자기 몸을 드러냈다”고 했다.
그런 것은 염치심이 없는 “방탕한 자들”의 짓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갈의 말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분명히 다윗은 예의범절을 지켰을 것이고, 자기의 열성도 신중히 자제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심을 비난하는 자들이 그 같은 거짓 구실을 붙여서 나쁜 행실로 누명을 씌우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어떤 자를 그의 신앙심을 들어 비난한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불경한 일이며, 게다가 자기 남편을 그렇게―실상은 지극히 존경했어야 했던 자를―모욕한다는 것은 아주 비열하고 사악스런 일이다. 특히 신중성과 덕성이 남달리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녀를 데려오기까지는 왕관도 수락하려하지 아니했던(3:13) 그토록 애정이 넘치는 남편에게 대한 그런 행동은 가장 악랄한 짓이며, 그녀 자신은 자기가 다윗의 아내나 요나단의 누이라는 사실보다는 사울의 딸이라는 사실을 실증해 주는 것이었다.
2. 다윗은 그녀의 비난에 어떻게 응수했던가?
다윗은 그녀가 자기를 떠나 낯선 자의 품에 안기는 부정한 짓에 대해서도 비난하지 아니했었다. 그 일을 용서해 주었다. 잊었다.
비록 양심은 그런 여인을 다시 맞은 자신을 비난하고 있었을지 모르나(그 같은 일은 땅을 더럽힌다고 했기 때문이다. 렘 3:1), 다윗은 이번의 처신을 옳게 생각했다.
(1) 다윗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했던 것이다(21절).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로다.”
그리고 그분을 생각해서 한 일이라고 했다. 비록 미갈은 아무리 악한 해석을 붙이더라도, 다윗의 양심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여 신실히 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이 그녀의 아버지의 집을 버리사 자기가 왕좌에 오르도록 해 주신 일을 상기시켰다.
그래서 그렇게 잘된 것은 미갈의 덕분이라는 생각을 그녀 자신이 지닐 수 없도록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아버지 앞에서 나를 택하사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지명하셨도다. 그러니 내가 이제 영예의 근원이 된 것이로다.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신앙심의 발로가 당신 아버지의 뜰에서는 천박한 일이였을지 모르나, 나는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그리하여 그 같은 발로는 훌륭한 일임을 알리려 하노라. 또 비록 이 일이 천하다면(22절), 나는 더욱 천해지기를 원하노라.”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①남들이 우리 기분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들의 신앙심을 힐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수락하는 자들을 멸시하는 우리들은 누구인가!
② 우리가 신앙으로써 하나님께 봉사했음을 실증할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된 일임을 말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비난에 개의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다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비록 천박하게 보이더라도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③선행을 했기 때문에 천해지면 천해질수록, 우리는 선행에 그만큼 더 단호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더욱 돈독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신앙에 더욱 다가 가야 한다.
사탄의 부하들은 우리를 삼키려고 애쓰고 있으며, 신앙을 부끄러워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더욱 천해지리라.”
(2) 다윗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낮추려 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보기에도 천해지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면 아무 것도 천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리라.”
심판의 보좌에서,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아무도 다윗보다 더 근엄하고 권위로와 보일 수 없으리라. 그러나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높은 자의 생각을 온전히 물리치고, 여호와 앞에서는 티끌처럼 자기를 낮추며, 궤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비천한 일에도 가담하며, 그러면서도 그 모든 행실이 자신의 품위 손상을 가져온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람의 위대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규례의 지극히 작은 것보다 더 작다.
(3) 그러한 일이 미갈은 비난을 살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가 비난하리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들에게서도 존경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계집종들에게서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서민들은 이 경건한 겸양 때문에 다윗을 업신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그만큼 더 존경할 것이다. 진실로 경건한 자들은 때로 그들을 비난하는 자들의 “양심 속에도 드러난다”(고후 5:11). 남의 비난을 겁내서 의무를 게을리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끊임없이 굳은 각오로 의무를 이행하다 보면, 오히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명성도 얻게 된다. 경건심은 찬양을 받을 것이다.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무관심하지도 말자.
이로써 다윗은 자기를 정당화시켰다. 그리고 미갈의 무례를 더 이상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하나님이 그녀를 벌하셨고, 그 후로 자식이 없게 하셨다(32절).
미갈이 부당하게도 다윗의 신앙심을 비난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에게 무자(無子)의 비난을 당케 하셨으니, 그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높이시리라.” 그러나 그를 멸시하는 자들, 그의 종이나 일을 멸시하는 자들은 “경히 여김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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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사무엘하 (6 : 1~23)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ㅇ뺀 무리 삼만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3:1-5에 의하면 '뺀 무리 삼만'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골고루 뽑은 자들일 것이다(Keil). 왜
거기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올려 오기 위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의 온 이스라엘'(대상 13:5)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곧 이스라엘 전체에서 골고루 뽑은 수행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뺀 무리 삼만'은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다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일종의 군사들이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당시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던 바알레유다(2절)는 블레셋 지경(地境)에서 가까웠으므로 그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작은 법궤 하나를 운반하기 위해서 삼만이란 대군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 혹자의 견해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The Interpreter's Bible). 이와 관련 70인역(LXX)은 본절의 3만이란 수를 7만으로 기록하고 있음도 기억하라.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골고루 수행자들을 뽑은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법궤에 대한 온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켜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꾀하기 위함이다. 각 지파간의 유대감을 조성하며 통일 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ㅇ다시 모으고 - 이 말은 이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총회는 지난번 다윗의 즉위식 때 35만명이나 모였던 1차총회(5:1-3;대상 12:23-40)에 이은 제 2차 총회임을 보여 준다.
2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ㅇ바알레유다 - 혹자는 '바알레유다'(Baale of Judah)를 '유다의 방백들', '유다 백성들'로 해석하였다(LXX, Vulgate, Luther, J. W. Wevers). 그러나 이 해석은 구문법상(構文法上)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한 문장 안에 지명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거기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거기서'가 지시하는 지명을 의미하며, 혹자들이 해석한 대로 일반명사는 아니다. 한편, 바알레유다는 '숲의 성읍'이란 뜻의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의 옛 명칭이다. 이곳은 본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였으며 '바알라'(Baalah)로 불리웠다(수 15:9;대상 13:5, 6). 그 후 이곳이 유다 지파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다의 바알라'(Baalah of Judah), 곧 바알레유다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목, 곧 예루살렘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했었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 궤는 이제 다윗에 의하여 온 이스라엘의 관심이 집중되기 전까지 이곳에 70년 이상 동안(B.C. 1075년-B.C. 1003년, 이 기간은 아벡 전투 때부터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때까지의 기간이다;Leon Wood) 머물러 있었다(삼상 7:1, 2).
ㅇ그 궤는...이름하는 것이라 - 이 구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 문구, '아론 하엘로힘 아쉐르 니크라 쉠 솽 여호와 체바오트 이쉐브 하케루빔 알라우'를 직역하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그 위에서 불리워지는 하나님의 언약궤'이다. 여기에서 해석상 중요한 낱말은 '그 위에서' (알라우)이다(우리말 성경에는 '사이에'로 번역되었음). 과연 '그 위에서'는 어디를 의미하는 걸까? (1)혹자는 '그 위에서'를 '그룹 위에서'로 해석한다(Cleri-cus). 이 경우 본절은 '그룹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룹 사이에' 계시기 때문이다(삼상 4:4). (2) 또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서'를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 위'로 해석한다(Keil,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이렇게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바로 그 위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啓示)이며 그의 능력과 속성에 대한 표현이며, 그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 그분의 능력, 그분의 성품, 그분의 영광이 임재하여 있다는 말이 된다.
즉, 하나님의 언약궤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寶座)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궤를 '주의 권능의 궤'라고 한 표현과 일치한다(시 132:8).
따라서 이 해석은 비교적 타당성을 갖는다 하겠다.
한편, 다윗이 이와같이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 한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정왕국(神政王國)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Ce Graaf).
ㅇ그룹들 -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의 일단(一團)이다.
이들의 전체 수효가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들의 직무에 대해서는 성경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들은 창세초(創世初)에 아담이 쫓겨난 에덴 동산에서 생명 나무를 지켰으며(창 3:22-24) 하나님의 보좌 병거를 끄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겔 1:20).
그러나 이들의 형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 다만 성경 곳곳의 기록들(겔, 1, 10장;계 4:6-8)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날개를 지녔으며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출 25:18, 19 주석 참조.
ㅇ만군의 여호와 - 5:10 주석 참조.
3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ㅇ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헌 수레가 아닌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존중한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분명히 법궤 운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민 4:15;7:9). 그런데도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이래(삼상 25:1) 다윗의 통일 왕국이 성립되기까지의 혼란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는바 다윗도 율법에 정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2)당시 블레셋족이나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였는바 다윗이 이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다(Lange). 아무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뜨거운 열심은 있었으나 그 방법면에서 그릇됨을 볼 수 있다.
ㅇ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 - 블레셋으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삼상 6장)가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운반되기까지 안치되어 있던 기럇여아림 사람 아비나답(Abinadab)의 집을 가리킨다(삼상 7:1, 2).
ㅇ아비나답의 아들 -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 )는 복수형으로 '아들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복수 형태 '아들들'은 때로 '손자'(grandson)를 의미하기도 한다(민 16:1;왕하 25:22;대상 8:40;에 2:5;스 7:1). 이렇게 볼 때 본절의 '아비나답의 아들'은 아비나답의 손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은 이미 70년 전부터 그 집에서 법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7:1, 2). 그러므로 이제는 엘르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들인 웃사와 아효가 이 일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ㅇ아효 - 이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이 말은 '그의 형제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법궤는 웃사와 그의 형제들이 운반한 것이 된다. (2)사람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1)번의 경우처럼 '그의 형제들'로 해석하면, 본서 저자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웃사의 형제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되니 이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2)번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ㅇ이스라엘 온 족속 - 이는 이스라엘 온 지파에서 뽑힌 자들을 의미한다. 1절 주석 참조.
ㅇ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주악하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큰 역사들과 관련하여 음악을 연주하곤 하였다(수 6:4-20;왕상 1:39;대하 5:11-14).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며 음악을 연주한 사실은 그들이 이 행사를 지극히 거룩한 의식으로 여겼음을 입증한다. 한편, 여기서 '주악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하크'는 본래 '뛰놀다', '즐거워하다'는 의미이다(삼상 18:7;대상 15:29;잠 8:30, 31;렘 30:19).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잔치 분위기에 젖어 기뻐하면서 연주한 것을 의미한다(Lange,Keil). 본절의 평행 구절인 대상 13:8에는 '뛰놀며 노래하며...주악하더라'고 되어 있다.
ㅇ수금 - 히브리어로는 '킨노르'라고 하는데 6줄로 이루어진 현악기이다. 대개 노래를 부를때 반주(伴奏)를 넣는 악기로 사용되었다.
ㅇ비파 - 하아프의 일종이다. 역사서(삼상 10:5;왕상 10:12;대하 9:11)와 시편(시33:2;57:8;92:1-3)등에 자주 언급되는 악기로 그 용도는 수금과 같다.
ㅇ양금 - 히브리어로 '므나아느임'이라고 하는 이 악기는 탬버린(tambourine)의 일종이다.
ㅇ제금 - 히브리어로 '첼츨림' 또는 '므칠타임'(대상 13:8;대하 5:12)이라고도 하는 이 악기는 심벌즈(cymbals)dml 일종이다.
ㅇ여호와 앞에서 - 그 당시 언약궤 앞에 있다는 것은 곧 여호와 앞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민 10:35;수 6:8).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출 37:1-5 주석 참조.
6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ㅇ나곤의 타작마당 - 이에 대해 대상 13:9에서는 '기돈의 타작 마당'(the threshing floor of Chidon)이라고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이 두 기록의 차이를 원문 파손으로 인한 두 저자의 실수로 보는 견해이다(The Interpreter's Bible). (2)'기돈'(Chidon)을 타작 마당의 주인 이름으로 보고 '나곤'(Nachon)을 타작 마당의 수식어로 보는 해석이다. 즉, 나곤이란 말의 의미는 '예비된'이란 뜻으로 나곤의 타작 마당은 곧 '기돈의 예비된 타작 마당'이라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나곤을 '쿤'(예비된, 준비된)의 파생어로 본 데서 나온 견해이다. (3)'나곤'을 '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수식어로 봄은 물론 '기돈' 역시 타작 마당을 수식하는 말로 보는 견해이다. 즉, '기돈'은 '파괴', '재앙'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예비되었던 타작마당'은 하나님의 재앙이 웃사에게 내린(7절) '재앙의 타작 마당'이었다고 해석한다(Lange). (4)세번째 견해와 같이 '기돈'을 사람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재앙'으로 해석하긴 하나 '나곤'을 '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말로 보지 않고 '나카'(치다)의 분사로서 '충돌하는'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Keil). 따라서 이 견해는 이 타작 마당을 '충돌의 타작 마당이며 재앙의 타작 마당'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네 견해 중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중 (3)번이나 (4)번을 지지하는 것이 비교적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1)번은 해설이 너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23:1-7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그리고 (2)번은 본문의 문맥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3)번과 (4)번은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여(8절) 웃사에게 재앙이 임했다고 한 본문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상의 제(諸) 견해에도 불구하고 '기돈'이 '나곤'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 역시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ㅇ소들이 뛰므로 - '뛴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트'는 본래 '미끄러지다', '걸려 넘어질 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소들이 돌뿌리에 걸리거나 미끄러져 비틀거리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Keil & Delitzsch, PulpitCommentary). 그런데 이러한 소들의 실수는 앞서 블레셋 백성들이 암소 두 마리에 법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운반했을 때에는 없었던 불길한 흉조(凶兆)였다(삼상 6:12). 그러므로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블레셋인들도 법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긴 하였다. 그러나 블레셋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행위는 묵인될 수 밖에 없었다(삼상 6:10-16).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ㅇ웃사의 잘못함 - 웃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댄 것을 가리킨다(6절). 그런데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잡으려했던 웃사의 행위는 인간적으로 또는 상황 윤리적으로 볼 때에는 전혀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하나님 말씀에 의거할 때 엄연한 신성모독(神聖冒瀆) 행위였다. 18:19-33 강해, '기독교 윤리와 상황 윤리'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법궤의 신적 특성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어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 중 심지어 고핫 자손일지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민 4:15).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로서 거룩한 것이니 아무도 들여다 보지도 말라고 명하셨으며(민4:20;삼상 6:19),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싸서 (민4:15) 채(pole)를 궤의 고리에 꿰어(출 25:14) 운반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매우 엄하게 법궤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웃사가 그것을 만진 것은 그만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겼으며, 하나님을 가볍게 여겼다는 증거인 것이다.
ㅇ그곳에서 치시니 저가...죽으니라 - 이처럼 구약 시대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자를 향하여 급속한 진노를 발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선 그 모든 진노가 영원히 유보된 것이다(롬 5:8, 9). 그러니 이 같은 영생의 축복을 얻은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엡 2:8).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ㅇ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 여기서 '충돌'로 번역된 '페레츠'의 원동사 '파라츠'는 '무너지다', '파괴하다', '분산시키다'등의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사 저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하신 것(7절)을 가리킨다. 공동 번역은 본절을 '야훼께서 우짜를 치신 일이'로 번역하고 있다.
ㅇ다윗이 분하여 - '분하여'에 해당되는 원어 '하라'는 단순히 괘씸한 마음을 품거나 섭섭한 감정을 지니는 것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의 기본 뜻은 '타오르다', '심히 뜨거워지다', '빨갛게 되다'로서 온 몸과 심장이 타버릴 듯한 극도의 분노를 가리킨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아니면 무엇에 대하여 이처럼 분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바 크게 두 견해로 나뉘어진다. (1)다윗은 웃사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이나 그의 백성들 그리고 웃사는 무슨 큰 불경죄(不敬罪)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경솔한 행동을 한 것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처럼 준엄한 형벌을 가하시니(7절) 이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지금껏 하나님을 대해온 다윗의 신실한 태도(2:1;5:12, 23)에 비추어 볼 때 수긍하기 어렵다. (2)다윗은 자신과 웃사의 불찰로 인하여 빚어진 비극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시는 계획이 자신과 웃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중단되게 되었음을 크게 분해 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견해는 그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구절(9절)에 의거할 때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다윗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분을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ㅇ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 여기서 '베레스'로 번역된 '페레츠'는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곧 '갑작스런 공격', '뜻하지 아니한 재난'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사항에 대한 '위반', '범법'이다. 따라서 '베레스웃사'(Perez-uzzah)란 말은 '웃사를 치심' 또는 '웃사의 위반'이란 뜻이다.
아마 다윗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웃사가 율법을 어기고선 법궤를 만진 것(6절)과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일로 인하여(7절) 그곳을 이렇게 명명(命名)하였을 것이다.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ㅇ다윗이...여호와를 두려워하여 - 아직 미처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자신들이 율법에 명한 방법대로 법궤를 운반치 아니한 데 있음을 깨닫지 못한 다윗(3, 4절 주석참조)은 우선 법궤로 인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재앙이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시는 역사(役事)를 중단한 채 황급히 법궤를 변방으로 이송(移送)시켰을 것이다(10절).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또 하나의 경솔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법궤를 맡아 관리하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11절).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를 접하였을 때 무조건 두려워하기 보다는 그 원인을 규명한 후 올바른 방법에 따라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어야 마땅했다(Matthew Henry).
10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ㅇ다윗 성 -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성'에 새로이 명명한 이름이다. 5:7주석 참조.
ㅇ가드 사람 오벧에돔 - 대상 26:1-4에 의하면, 오벧에돔(Obededom)은 고핫의 자손이며 후에 예루살렘 성문의 문지기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그를 가리켜 가드 사람(the Gittite)이라고 한 것은 그가 단 지파 지경 내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 가드림몬(Gathrimmon)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Keil, Clericus, Wycliffe, Pulpit Commentary).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ㅇ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 아마도 이 말은 그의 가족, 가축, 밭의 소산 등이 풍성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 다윗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 이제 하나님의 진노(7절)가 깨끗이 풀린 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Hertzberg, Matthew Henry).
12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
ㅇ다윗이 가서...올라갈새 - 같은 내용을 더욱 자세히 기록한 대상 15장에는 다윗 왕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순종하여 법궤를 운송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는 이번에는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레위인들로 하여금 몸을 성결케 하고 모세의 법대로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대상 15:14, 15).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이 베레스웃사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상고(詳考)한 후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 위에 굳게 선 것을 보게 된다.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ㅇ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 - 대상 15:11에 의하면 이들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레위인 우리엘, 아사야, 요엘, 스마야, 엘리엘, 암미나답 이렇게 8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ㅇ여섯 걸음을 행하매 - 혹자는 '여섯 걸음을 행할 때마다'로 해석하나(Pulpit Commentary)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이 견해를 따를 경우 다윗이 드린 제물의 총수는 엄청난 것이 될 것인데 대상 15:26에는 그 수가 모두 수송아지 일곱, 수양 일곱 마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증거가 아니더라도 이 견해는 다윗이 약 5m 간격으로 제물을 잡아드렸다는 주장이 되므로 그 제물의 수로 볼 때 너무나 상식 밖이다. 따라서 본절은 '여섯 걸음을 행한 후'를 의미함에 분명하다(Lange, Wevers, Keil, Hertzberg).
그런데 다윗이 여섯 걸음을 행한 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즉 이번에는 출발부터 하나님이 레위인들과 함께 하심을 본 까닭이다(대상 15:16). 다시 말해서 다윗은 궤를 멘 레위인들이 처음 여섯 걸음을 아무 탈 없이 옮기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법궤 운반을 허락해 주신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Bottcher, Wycliffe).
ㅇ다윗이...제사를 드리고 - 혹자는 본절과 관련, 다윗이 직접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집전(執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ange).
그러나 구약 시대 당시 하나님께 대한 공적 제사를 집전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제사장뿐이었다(레 1-6장). 그러므로 이는 다윗이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제사를 드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절의 평행 구절에 '무리가...제사를 드렸더라'(대상 15:26)는 언급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분명하다. 더욱이 과거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게 된 결정적 이유도 사무엘의 직분을 월권(越權)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때문임을 기억한다면(삼상 13:8-14) 이는 보다 명백해진다.
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ㅇ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 다윗의 종교적 열정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고 넘치는 감격적인 기쁨을 잘 드러내 주는 행동이다.
즉 그는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를 수도 예루살렘에 모시게 된 데 대하여 감격하며 온 몸과 마음으로 이를 기뻐한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한편 국경일이나 종교 절기, 기타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여 춤추며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5, 15절)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몸에 배인 풍습 중 하나였다(출 15:20;삿 11:34;시 149:3;150:4).
ㅇ베 에봇을 입었더라 - 베 에봇(linen ephod)은 본래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할 때 입던 것으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소매가 없는 일종의 겉옷이다. 출 28:4 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입은 베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이었다기 보다 제사장이 아니라도 특별한 종교 의식에 참여할 때 입었던 예복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사실 때문인데 곧 다음과 같다. (1)당시 다윗 뿐아니라 법궤의 운반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세마포 겉옷이나 베 에봇을 입었기 때문이다(대상15:27). (2)제사장의 적령(適齡)에 이르지 못한 어린 사무엘도 세마포 에봇을 입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삼상 2:18).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ㅇ즐거이 부르며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트루아'는 '환호성을 지르다', '갈채를 보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을 추며 환호성을 지르는 행위는 특별히 새로운 왕을 환영할 때 보여 준 행위였다(왕상 1:34, 39;왕하 11:12, 14;삼상 10:24).
따라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행동은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그들 신정 국가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ㅇ나팔을 불고 - 대상 15:28에 의하면 이때 백성들은 비단 나팔(trumpet) 뿐아니라 이미 5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제금, 비파, 수금 등을 함께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ㅇ사울의 딸 미갈이...저를 업신여기니라 - 혹자는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긴 까닭에 대해 그녀가 아직도 전 남편인 발디엘(3:15, 16)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이는 지나친 억측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기게 된 동기를 그녀가 다윗의 철부지 같은 행동을 본 탓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갈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다윗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업신여기게 된 까닭은 아마 여호와의 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울 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대상 13:3). 본서 저자가 미갈을 다윗의 아내로 소개하지 않고 '사울의 딸'로 소개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Keil&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p. 336 f).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ㅇ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 여기에서 장막은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까지(7:1-17;왕상 6장) 임시로 하나님의 궤를 모셔놓기 위해 ((예루살렘 성 내에!!))만든 것이다.
이는 모세 당시 만든 성막(출 40장)과는 다르다. 다윗 당시 이 성막은 기브온(Gibeon)에 설치되어 있었다(대상 16:39;21:29). 그러나 솔로몬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된 후에는 이 성막과 다윗이 만든 임시 장막은 모두 해체되고 만다(대하 5:2-10). 수 18:1-7강해, '성막의 역사' 참조.
한편, 여기서 '장막 가운데'란 장막의 중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일종의 지성소(至聖所)와 같은 곳이었다(Keil).
ㅇ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드리니라 - 이 역시 다윗이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제사를 드린 것을 의미한다. 13절 주석 참조.
아무튼 이처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은 법궤를 모실 장소를 성별하기 위한 일종의 봉헌식(奉獻式)이었다(Keil, Lange).
한편 여기에서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의미를 가지며(레 1:3-17), 화목제는 그동안 소원(疎遠)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가 하나되게 해달라는 간구의 의미를 지닌다(레 3:1-17).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참조.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ㅇ다윗이...백성에게 축복하고 - 백성에게 축복하는 것은 제사장의 고유 권한이자 임무 중 하나였다(민 6:22-27).
따라서 일국(一國)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다윗 역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백성들의 평강을 간구하였겠지만 어디까지나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축복하는 것은 제사장들을 시켜서 하였을 것이다. 즉 이는 제사 집전의 경우와 마찬가지 경우였던 것이다.
ㅇ만군의 여호와 - 5:10 주석 참조.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ㅇ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 여기에 언급된 음식물들은 모두 제사용 음식이다(출 29:23;레 8:26;아 2:5;호 3:1).
이처럼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고 난 후 함께 그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은 화목 제물과 관련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화목 제물을 드린 후에는 제사 참여자들로 하여금 그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도록 규정하신 것이다(레 7:15-18).
한편 백성들이 이처럼 제사드린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그들이 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연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Wenham). 이는 곧 이제 이스라엘 온 백성이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정으로 하나된 통일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ㅇ방탕한 자가...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 여기서 '방탕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크'는 '공허한', '가치없는' 또는 '가난한'이란 의미이다(삿 7:16; 느 5:13;사 29:8). 바로 이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 곧 신약의 '라가'(*, '어리석은 자'란 뜻)이다(마 5:22). 또한 '그 신복의 계집종'이란 '그 종들의 종년'이란 말로서 가장 천한 자들이란 뜻이다. 이렇게 볼 때, 미갈의 말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왕인 다윗이 마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처럼 가장 낮고 비천한자들 앞에서 품위를 잃은 행동을 했다는 내용의 불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그녀가 하나님의 언약궤와 관련된 다윗의 순전(純全)한 기쁨을 이해치 못한 데서 나온 불평에 다름아니다. 16절 주석 참조.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ㅇ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 이 말은 다윗의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14, 16절)이 미갈의 말처럼 비천하고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지극히 순전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행동임을 천명한 것이다. 즉, 그는 (1)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는 동시에 (2)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신 일(5:1-3)을 기억하며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지극히 겸손한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시 131:1;마 23:12).
ㅇ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 하나님께 범죄한 사울을 내치고 대신 다윗을 택하신 결과(삼상 13:8-14;15장) 사울 가문은 몰락하고 대신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은 지금껏 우리가 충분히 살펴본 바이다(1-5장).
ㅇ주권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5:2; 7:8; 삼상7:16; 10:1; 13:14;25:30). 그러므로 다윗 자신을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라고 표현한 것은 곧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자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봉직(奉職) 되었다는 철저한 소명 의식을 드러내 주고 있다.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ㅇ내가...천하게 보일지라도...높임을 받으리라 - 다윗의 행위가 미갈의 말처럼 저질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낮아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대답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겸손한 자만이 참으로 높아질 수 있다는 그의 확고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삼상 2:7;마 23:12).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ㅇ그러므로...미갈이...자식이 없으니라 - 혹자는 미갈이 이처럼 무자(無子)한 까닭에 대하여 [미갈이 잘못을 인정-용서를 구하고 그녀의 말을 취소함으로써 화해하기 원치 않았거나]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Dake, Wycliffe)....이는 미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였음이 분명하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1)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였고,(2)하나님의 가견적(可見的) 보좌인 법궤에 대하여 무지하였으며 (3)자기의 입술을 가볍게 놀린 결과로 자식이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만한 자, 영적으로 무지한 자, 그리고 자기의 감정 따라 [충동적으로] 말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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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벧에돔 = 이름의 본 뜻은, "에돔의 종"...이 사람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말하여지고 있다...#1)"가드 사람"이라고 명시한 바, 그 출신이 블레셋 사람으로 봄이 가장 합당하다...".[삼하15:18, 19...18.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19.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가드에서 이스라엘로 6백명의 블레셋인들이 이주해 왔다..그중에 잇대도 가드 사람에 포함된다... ::Six hundred Gittites came with David from Gath into Israel ( 2 Samuel 15:18 2 Samuel 15:19 ).임에도 불구하고 (법궤가 석달동안 머무르는 중에, 주께 합당히 행함 인해 평강이 넘친 바) ...주님의 넘치는 복 받은 바, 이 사람과 그 일가들은 뒤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서 주님을 섬기고 있음(시84편!!)...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의 진정한 바램을 기억하라 #(2) 본래 고핫족속으로서, 가드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견해가 있음
...... “오벧에돔은 누구인가?”....관련 본문들...
>>삼하 6:10~12
10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대상 13: 13-14
13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 메어들이지 못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대상 26:4~11
4 오벧에돔의 아들들 맏아들 스마야와 둘째 여호사밧과 세째 요아와 네째 사갈과 다섯째 느다넬과 5 여섯째 암미엘과 일곱째 잇사갈과 여덟째 브울래대니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며 6 그 아들 스마야도 두어 아들을 낳았으니 저희의 족속을 다스리는 자요 큰 용사라 7 스마야의 아들들은 오드니와 르바엘과 오벳과 엘사밧이며 엘사밧의 형제 엘리후와 스마갸는 능력이 있는 자니 8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저희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 이명이며 9 또 므셀레먀의 아들과 형제 십 팔인은 능력이 있는 자며 10 므라리 자손 중 호사가 아들들이 있으니 그 장자는 시므리라 시므리는 본래 맏아들이 아니나 그 아비가 장자를 삼았고 11 둘째는 힐기야요 세째는 드발리야요 네째는 스가랴니 호사의 아들과 형제가 십 삼인이더라
====[[세밀한 분석]]...오벧에돔에 대한 주된 견해===
“오벧에돔”(Obed-Edom)이란 이름의 뜻은 '에돔의 종' '에돔 신의 예배자'라는 의미.
.#1).... 오벧에돔은 가드 사람(Gittite)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블레셋 가드에서 태어났거나 거기서 다윗왕 때 이주해 온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바...그렇게 그대로 받아들여도 크게 상관은 없을 듯 하지만, 법궤에 관한한 고핫사람만이 모실 수 있었음을 반드시 염두에 두는 것이 옳으리라))....가장 가능성 높은 견해는 가드림몬(레위 사람의 성읍) 출신으로 본다....아마도 그는 기럇여아림과 예루살렘의 중간인 가드림몬에서 태어나 나곤의 타작마당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웃사(사울왕 때의 고핫 자손 아비나답의 손자)가 언약궤에 손을 대었다가 죽은 근방이었고, 웃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법궤의 예루살렘 향한 행렬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고 그 인근에 있는 오벧에돔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3개월이었다.(대상13:13-14)
......."가드"(the Gittite)는 단 지파의 지경에 살고 있던 레위인의 성읍 "가드림몬(Gath Rimmon)"을 가리키기도 한다.(수21:24) 또한 오벧에돔은 레위 지파 고핫 자손으로 고라의 후손이었다고.(대상26: 1, 4) 보기도 하며!!, 예루살렘 성전의 문지기였다. 따라서 오벧에돔이 "가드사람"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가드림몬"에서 출생한 까닭이었다 (삼하 6:10~11, 수 19:45; 21:20-24; Lange, Keil). 그는 웃사가 죽은 나곤의 타작마당 근처 단 지파 경계 내에 살고 있었다. 율법에 의하면 언약궤를 섬기는 사람은 레위 자손 중에서도 고핫 자손이어야 했다. 그래서....오벧에돔은 레위 족속이었고, 그 중에서 고핫 자손인 고라 자손에 속했기에 그는 언약궤를 보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역대상 26장에는 성전 문지기를 맡은 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오벧에돔과 그의 아들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 우리는 본문에서 오벧에돔이 세 가지 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받았다.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명이며”(8절)라는 본문 말씀을 통해 오벧에돔이 자손번성의 복을 받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둘째, 자손들 중에서 큰 인물이 나왔다. “그 아들 스마야도 두어 아들을 낳았으니 저희의 족속을 다스리는 자요 큰 용사라”(6절)는 말은 지도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자손들 모두 능력이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저희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니.....”(8절). 여기서 ‘능력이 있다’는 말은 ‘재력이 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오벧에돔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손의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집안이 두루 형통하고 번성하는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오벧에돔이 어떻게 이처럼 귀한 복을 받았는지를 역대상 13장에서 알 수 있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죽는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꺼려하고 두려워하고 멀리할 때, 오벧에돔은 기꺼이!! 담대하게 (아마도 자원하여) 궤를 자기 집으로 모셔서 잘 받들었다. 그 결과 오벧에돔이 하나님께로부터 큰 복을 받았던 것이다.....“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대상 13:14).......참고로 오벧에돔이라는 동명이인으로는 레위 자손 여두둔의 아들인데 다윗이 약대를 조직하는 중 저는 비파와 수금을 탔고 겸하여 궤 앞에서 문지기를 한 자가 있고(대상15:18-24, 대상16:5), 또 유대국 아마샤 왕 때 성전기명을 간수하는 자인데 그때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 성전의 금은과 기명과 왕궁의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다.(대하25:21- 24)
......다윗왕은 레위인들로 하여금 거룩한 음악을 연주하게 하는 동시에, 레위 자손 제사장들로 하여금 법궤를 어깨에 메도록 했다.
(그런데) 대상 15:18,21을 보면 이때에 음악을 연주한 사람 중에 오벧에돔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벳에돔이 성막의 문지기였으며, 수금을 연주하는 레위인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후에 오벧에돔은 언약궤를 지키는 유명한 문지기의 조상이 되었다.
대상 16:38을 보면 음악을 연주하던 오벳에돔과 또 다른 오벧에돔(여두둔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위 족속 중에서 문지기를 맡았던 사람들 중에는 오벳에돔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둘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벧에돔과 그 형제 육십 팔인과 여두둔의 아들 오벧에돔과 호사로 문지기를 삼았고(대상 16:38)..."
.....앞에 언급된 오벧에돔은 지난 3개월 동안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관했던 사람이다. 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문지기의 직분과 악사의 직분을 수행했다. ......그러나 뒤에 언급된 오벧에돔은 여두둔의 아들인 오벧에돔으로 앞에서 나온 오벧에돔과는 동명이인이다. 앞에 언급된 오벧에돔은 그핫의 후손이었고, 뒤에 나온 오벧에돔은 (므라리의 후손인) 여두둔의 후손이었다(대상 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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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증거자 ::: 완전한 절대 진실/진리(시종여일/내외일치...100%총체적...시공초월하는 특징 가짐 --오직 주 하나님)
<--->불완전한 상대적/부분적 진실(제한적 관점...객관적 관찰 거쳐 나온 세상의 그 어떤 진실이라 해도 그 진실은 결국 부분적-단편적-상대적-일시적-객관적-과학적 사실에 불과 ::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음) ==....발설([어떤 fact 실상 경험이 (그 정체의 참-거짓과는 상관없이)..곧 발생된 것을 증인이 (직접) 보고듣고 경험/친히-또는 간접적으로 경험하였다 분명히 말하였을 때...그렇게 증언한 바 있음을 인정함[두 세 사람의 증인 + 객관적 증빙...이 모두는 거짓 증인 내세움과 증빙 위조일 수도 있지만.(그 제한적 참됨 여부는 목숨과 맞바꿀 수 있어야함)] 그것을 reality(사실, 사실적 실제)이라고 정의하고는 있지만.. = 증언함이란 진실 여부와는 무관함....
**판단 : (오직 완전하신 주님의 꿰뚫어 아심의 통찰/감찰 아래 마음 눈 열린자라야 겨우) 증언 내용 자체의 진위-증언의 진위여부 및 사실/조작 분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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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벡전투에서 패하여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고, 엘리제사장도 실로에서 죽은 후, 실로는 짓밟혔고...(놉으로 성막 옮김)... 블레셋에 빼앗긴 여호와의 궤가 일곱달 동안(삼상6:1) 블레셋 땅에 전전하다가 벧세메스로 옮겨짐, 곧 이어 기럇여아림 산중의 고핫자손 아비아달아달의 집에 (다윗 왕이 시온산 장막으로 옮겨 모시기까지) 20년 동안 머무르시게 됨...
@@@[사무엘 사망(83세) 후 7년째에, 길보아 전투 당시 사울80세-요나단50세-므비보셋5세-다윗30세...사무엘이 그때까지 생존했다면 90세였을것]
:::: (나이 차이)사무엘과 사울 10년 차이, 사울과 요나단 20년 차이, 요나단과 다윗 30년 차이
**사무엘 ::: 45세 [영적 대각성 운동 --미스바 전투] =
==>사무엘 53세 때 , [사울 (30세)]에게 기름부음/왕으로 등극은 10년 지난 뒤 40세때 -- 암몬 전투, 믹마스 전투, 아말렉 전투
==>사무엘 75세 때, 다윗(15세) 기름 부음 [사울65세-요나단35세].....엘라골짜기 전투 20세 호위대장--군대장관
==>사무엘 83세 때 사망..[다윗 23세...엔게디에 머무를 때] [사울73세-요나단53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