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삿15..삼손-사사 인정.20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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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5장  [ 337.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분명히 구분해야만 한다.. 그 영적 성숙도는 은사에 달려 있지 않고 실지로 그리스도를, Q말씀을, 말씀대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냄에 있음을 잊지말라..


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레18:18...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의 자매를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여 그로 질투하게 하지 말지니라]

3.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

6.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형평성의 문제!!]사회적 약자에게만 감당케 하고 있다..

7.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8.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Etham인가, Etam인가

[출13:20-22.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Etham..애굽말에서 유래..뜻 = 그들과 함께..즉 지금의"임마누엘, 그 품에"의 뜻)에 장막을 치니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삿15:8...*8.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Etam..="맹금의 처소...세상")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


===삼손이 블레셋을 치다

9.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10.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12.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백성들은 아직 [Q뜻을 따라, 그들을 구원하는 역할 맡은] 사사에 대한 필요나 그 사명에 대한 자각과 회개-동참이란 전혀 없었고 귀차니즘 정도로만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삼손은 이 때 주님 마음으로 바르게 (너그러이!!) 반응하고 있다.

13.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응급 구조 위해!!)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7.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턱뼈의 언덕)라 이름하였더라

18.  삼손이 (비록 돕는자가 없이(???..실지로는 주님이 하셨다!!) 그 홀로 용력을 내어 대군을 무찌르고 자화자찬하며 노래하고 있으나, 갑자기 밀려드는 목마름은 스스로 아무런 힘 없고 오직 도우시는 주 임재 필요의 절박감에 압도되고 있었다!!)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오만불손 죄 범한 자 됨 인정하며 자백하나이다, 그러나, 도우소서..나는 전혀 무익하여도, 오직 주님 이름의 영광 위하여 그리하소서!!)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주 사랑 입고, 그분을 사랑하며 의지하는 자마다 순전-단순-합당한 자세로 겸손히 도움 요청할 필요 있다1!) 하니

19.  (자비와 긍휼..온유와 친절)하나님이 레히(턱뼈..죽은 나귀의 새 턱뼈 = 죽음)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아인-카라 :: 부르는/부르짖는 자의 샘)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우묵한 곳= 절구 mortar..마크데쉬...마크테쉬(명남)는 카타쉬(vt'K; , 3806: 강타하다, 두들겨 부수다, 곱게 빻다)에서 유래했으며, '절구'를 의미한다.[穴이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오며, '절구'(잠 27:22), 절구를 닮은 '우묵한 곳'(삿 5:19)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BDB). ...말씀-보혈, 생명수 흐름이 막혀 정체되었던 곳을 터뜨려 주심으로써 터져 나옴으로 새로이 주 안에서 살고 있음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무엇을 하며 지냈다..는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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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제15장

1.  But it came to pass within a while after, in the time of wheat harvest, that Samson visited his wife with a kid; and he said, I will go in to my wife into the chamber. But her father would not suffer him to go in.

2.  And her father said, I verily thought that thou hadst utterly hated her; therefore I gave her to thy companion: is not her younger sister fairer than she? take her, I pray thee, instead of her.

3.  And Samson said concerning them, Now shall I be more blameless than the Philistines, though I do them a displeasure.

4.  And Samson went and caught three hundred foxes, and took firebrands, and turned tail to tail, and put a firebrand in the midst between two tails.

5.  And when he had set the brands on fire, he let them go into the standing corn of the Philistines, and burnt up both the shocks, and also the standing corn, with the vineyards and olives.

6.  Then the Philistines said, Who hath done this? And they answered, Samson, the son in law of the Timnite, because he had taken his wife, and given her to his companion. And the Philistines came up, and burnt her and her father with fire.

7.  And Samson said unto them, Though ye have done this, yet will I be avenged of you, and after that I will cease.

8.  And he smote them hip and thigh with a great slaughter: and he went down and dwelt in the top of the rock Etam.

9.  Then the Philistines went up, and pitched in Judah, and spread themselves in Lehi.

10.  And the men of Judah said, Why are ye come up against us? And they answered, To bind Samson are we come up, to do to him as he hath done to us.

11.  Then three thousand men of Judah went to the top of the rock Etam, and said to Samson, Knowest thou not that the Philistines are rulers over us?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us? And he said unto them, As they did unto me, so have I done unto them.

12.  And they said unto him, We are come down to bind thee, that we may deliver thee into the hand of the Philistines. And Samson said unto them, Swear unto me, that ye will not fall upon me yourselves.

13.  And they spake unto him, saying, No; but we will bind thee fast, and deliver thee into their hand: but surely we will not kill thee. And they bound him with two new cords, and brought him up from the rock.

14.  And when he came unto Lehi, the Philistines shouted against him: and the Spirit of the LORD came mightily upon him, and the cords that were upon his arms became as flax that was burnt with fire, and his bands loosed from off his hands.

15.  And he found a new jawbone of an ass, and put forth his hand, and took it, and slew a thousand men therewith.

16.  And Samson said, With the jawbone of an ass, heaps upon heaps, with the jaw of an ass have I slain a thousand men.

17.  And it came to pass, when he had made an end of speaking, that he cast away the jawbone out of his hand, and called that place Ramathlehi.

18.  And he was sore athirst, and called on the LORD, and said, Thou hast given this great deliverance into the hand of thy servant: and now shall I die for thirst, and fall into the hand of the uncircumcised?

19.  But God clave an hollow place that was in the jaw, and there came water thereout; and when he had drunk, his spirit came again, and he revived: wherefore he called the name thereof Enhakkore, which is in Lehi unto this day.

20.  And he judged Israel in the days of the Philistines twenty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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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5장 (개요)

본 장에서 삼손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수를 가한다. 

여기서 벌어진 일들은 모두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삼손이 싸움을 일으키고 놀라운 힘을 발휘한 것은 곧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힘을 주셨기 때문이다.

1. 삼손은 아내와 장인의 배반으로 곡식 밭을 불살랐다(1-5).

2. 아내와 장인에 대한 블레셋 민족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본성에 노한 삼손은 블레셋 사람을 많이 살해했다(6-8).

3. 동족 이스라엘 사람의 배신으로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힌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죽였다(9-17).

4. 삼손이 갈증으로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을 주셨다(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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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의 횃불(삿 15:1-8)

Ⅰ. 삼손은 자기를 불쾌하게 한 여자였지만 그의 아내에게 돌아갔다. 

분노를 식히고 다시 찾아갔을 때 그는 아마도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 그는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녀를 찾아갔다(1절). 

이 염소 새끼는 진귀한 선물은 아니었으나 화해를 청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서로 다투었을 때 화해한다는 표적으로 이렇게 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염소 새끼를 가져와 그녀와 함께 음식을 먹으며 다시 화해하고 친구가 되고자 했다. 

불쾌한 일을 당한 쪽은 삼손이었으므로, 먼저 그 여자 쪽이 화해를 표해야 옳은 일이었지만 삼손은 너그럽게 자기가 먼저 용서했다. 

가까운 처지에 서로 다투었을 때에는, 서로의 화해를 위해 먼저 상대방을 용서해 주고 그가 내게 준 상처를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좋은 방법이다.

Ⅱ. 삼손은 거절당했다. 장인은 그녀를 만나 보지 못하게 했다.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결혼시킨 것은 바로 장인이기 때문이었다(2절).

1. 장인은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려고 애썼다.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하였노라.” 

나실인 삼손이 블레셋 사람과 같은 기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단지 삼손이 아내에게 화를 내고 아버지 집에 잠시 돌아간 것을 보고, 그를 의심해 그가 아내를 심히 미워했다고 결단 내리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말은 장인이 삼손에게 준 상처에 대한 사과의 전부였다. 그는 강탈자들을 후원하기 위해서 극악의 질투를 내뱉었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이 악을 계획하고 있는 줄로 알았노라”고 말하며 악을 저지르도록 지원해 줄 수는 없다.

2. 장인은 자기의 작은딸을 줌으로써 잘못을 보상하겠다고 제의했다. 

작은딸이 예뻤기 때문에 삼손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삼손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도외시했다. 

한 딸을 결혼시키고는 그 딸을 곧 다른 자에게 주고, 한 남자에게 딸을 주었다가 곧 다시 그에게 다른 딸을 주려 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참람한 일인가! 

그는 장인의 제의를 비난했다. 그는 “아내의 여형제를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레 18:18).

Ⅲ. 삼손은 그를 모욕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수를 했다. 

그가 그것을 자기에게만 가해진 모욕으로 생각했다면 적수를 찾아가 그와 장인만을 징벌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자기에게 준 모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들은 삼손이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를 모욕하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을 혼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하는 일이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3절).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삼손은 그의 아내와 화해하기 위해 그의 할 바를 다했으나, 그녀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분노를 터뜨린다 해도 그들은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불화가 생겼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 우리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그리하고 난 후에라야 어떤 결과가 오든 우리로서는 비난받을 것이 없게 된다. 

삼손이 그들을 복수한 방법은 곡식 밭에 불을 놓아 그 나라를 황폐하고 메마르게 하는 것이었다(4, 5절).

1. 삼손이 복수하기 위해 취한 방법은 매우 이상한 것이었다. 그는 150쌍의 여우를 짝을 지어 꼬리를 나무토막으로 묶고 이 나무토막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이 여우들은 피신처를 찾기 위해 곡식 밭으로 뛰어들었고 곡식 밭에는 불이 당겨져 순식간에 불이 붙고 사람들은 미처 불을 끌 수 없었다. 

그 일이 밤에 행해진 것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을 구했으나 그것을 할 만한 용기를 지닌 이스라엘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일이 방해받지 않게 하기 위해 단지 한 장소에서 한 번에 일을 행했다. 

삼손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 하인이나 병사와 같은 사람을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는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동조자로 여우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삼손을 교활하고 악랄하게 속였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교활한 여우와 횃불의 재앙을 받게 되었다. 

이런 전략은 가끔 교회 안의 적들(포도원을 해치는 작은 여우들)과 비유되기도 한다. 즉 그들은 그들 안에서도 서로 다른 관심과 목적을 갖고 있어 서로 반대의 길을 가려고 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그르치거나 그 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저주스러운 일을 하기 위해 가끔씩 서로 불타는 나무로 그들의 꼬리를 묶는다.

2. 여기서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준 피해는 매우 컸다. 그 때는 밀을 거둘 때였으므로 마른 짚단에 붙은 불은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않은 곡식과 감람원을 태워 버렸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피조물이 황폐케 되었다. 그러나 적개심에 의한 행동으로 합법적인 파괴가 자행되는 곳에서는, 마초까지도 당연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간주해야 한다. 

삼손이 그들의 곡식을 없애버렸다면, 그들의 생명이 또한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레셋이 다곤 신을 위해 준비했으며, 그 신에게 소제물로 바치게 될 “그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때가 되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번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이다.

Ⅳ.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간교한 아내와 장인에 대해 격분했다. 

그들의 잘못으로 삼손이 노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블레셋 사람의 무리는 그들을 불살라 죽였다(6절). 아마도 그의 집을 불살라 죽였을 것이다. 

그들은 감히 삼손을 공격할 수 없었으므로, 삼손을 화나게 만든 그의 아내와 장인에게 복수를 했다. 

그러나 삼손은 그 스스로는 친족으로서의 예의를 지켜 그의 아내와 장인에게 직접 복수하려 하지 않았다. 

“보수하는 일은 누구에게 속하는지”(시 94:1, KJV)를 보라. 배반하는 자는 배반으로 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심판에 의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신다.” 

특히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적을 자기네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복수하도록 만드신다. 

야비한 블레셋 사람이 배반한 자를 불살라 죽였을 때 “의인은 악인이 보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을” 것이다(시 58:10, 11). 

이와 같이 “사람의 분노는 장차 하나님을 칭송하게 될 것이다”(시 76:10). 

블레셋 사람들은 만일 삼손의 아내가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어 그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고 위협했다(14:15).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들에게 아첨함으로써 남편을 배반한 그녀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가 두려워하고 죄를 범하고서라도 위협을 모면하려던 바로 그 블레셋 남자들이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를 불살라 죽였다. 

부당한 방법으로 재앙을 피하려는 자는 도리어 화를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마 16:25).

Ⅴ. 이 때 삼손은 또 이들의 혈족을 쳐 죽여서 큰 타격을 주었다(7, 8절). 

“너희가 그들에게 이같이 행하여 나를 위하는 것같이 보이려 하나, 그것으로 너희에 대한 내 복수심을 없애지 못하리라.” 

또 “너희가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너희로부터 받은 모욕을 잊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요 너희가 이스라엘에 대해 잘못을 저질렀으니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으리라. 또한 이스라엘이 너희로부터 풀려나고 너희가 못된 짓을 하지 않을 때 나도 그치리라.” 

그래서 그는 원래의 문자 그대로 “그들을 엉덩이와 허벅지로 크게 쳤다.” 

삼손이 그들에게 준 상처는 매우 치명적이었을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크게 도륙했다고 번역해 놓았다. 

절름대는 말처럼 이들이 절름발이가 되었거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이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삼손은 이들을 전력을 다해 쳤으므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그의 손이나 팔로 치지 않고 엉덩이와 허벅지로 그들을 쳤다는 것은, 전력을 다해 치고 발길질했다는 것을 말한다. 

삼손은 이렇게 그들을 모욕했으며 “노함을 인하여 그들을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짓밟았다”(사 63:3). 

그런 후 그는 에담 바위 꼭대기에 있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그가 행한 행동에 대해 블레셋 사람이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를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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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사람에게 붙잡힌 삼손(삿 15:9-17)

Ⅰ.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맹렬히 추격받았다. 삼손이 전에 그들을 쳐 죽인 것보다 더욱 엄청난 힘을 갖고 그들은 쫓아왔다. 

삼손이 이쪽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유다에 삼엄하게 진을 치고서 삼손을 찾고 있었다. 

블레셋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다인들이 이것을 보고 유다 지파는 그들에게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그들을 잘 받들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물었을 때, 그들이 여기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단지 삼손을 잡기 위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들은 “큰 자나 작은 자를 대항하여”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들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즉 “눈은 눈으로” 갚으라 했듯이, 삼손이 한 것처럼 그들도 그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침으로써 이스라엘을 심판하러 온 것뿐이라(10절)고 말했다. 

그들은 삼손 한 사람을 잡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삼손이야말로 바로 한 군대와 같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삼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잡으려 할 때도 많은 무리가 왔었다. 

그러나 그 때는 정한 시간이 되었으므로 그 10분의 1의 인원으로 충분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굴복하지 않으시면 그들의 10배의 인원이 와도 그리스도를 잡는 일은 불가능했었다.

Ⅱ. 유다 지파는 야비하게 삼손을 배반하고 그를 넘겨주었다(11절). 

이들은 유다 지파의 출신이었던가? 그 용맹스러운 지파들 중에 섞여 있는 타락한 족속들! “유대 지파의 사자”(계 5:5)를 그들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었다. 

아마도 삼손이 그들의 지파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들은 그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단 지파 사람에 의해 구원되기보다는 차라리 예전대로 블레셋 사람의 지배 아래 있으려 했다. 

가끔씩 교회는 이런 시기와 거짓된 영예로 해서 그 구원을 방해받곤 했다. 

더욱이 이들은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어찌되든 삼손과 같은 사람을 그들 나라에서 몰아내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만일 이들이 죄와 고통 속에서 비겁해지거나 무기력해지지 않았다면 이 기회를 잘 이용해 블레셋 사람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예전의 슬기와 용맹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었다면 삼손과 같이 용맹한 자를 선두로 해서 그들의 자유를 찾기 위해 한번 대담하게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쓰레기 같은 신을 숭배할 정도로 스스로를 음부까지 낮추었으며(사 57:9), 자신을 더럽히면서까지 굴욕적인 지배에 복종했다. 

죄는 사람의 정신을 빼어버리고, 얼빠지게 만들며, 눈을 멀게 하여,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한다. 

삼손은 모세와 같이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여”(행 7:25), 

그 나라의 국경으로 가서 일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다 지파 사람들은 삼손을 자기들에게서 쫓아내고,

1. 그가 블레셋 사람에게 행한 일이 유대 민족에게 큰 상처를 준 것처럼 그를 마구 비난했다. 

자기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행한 자는 이처럼 때로 비난받기도 한다. 우리 주 예수도 많은 선행을 하셨지만 그 대가로 돌던짐을 당하셔야 했다.

2. 유다인들은 그에게 와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잡기를 원하니 그를 그들에게 넘겨주어야 겠다”고 말했다. 

속박받기를 좋아하고, 지배하는 자들에게 아첨하는 이 자들은 얼마나 비겁하고 배은망덕한 인간인가! 

이처럼 유대인들은 로마 사람들이 그들의 나라를 빼앗으러 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핑계삼아 우리의 구주를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삼손을 만난 유다인들은 못된 노예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채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항의의 말을 퍼부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들은 자기들이 블레셋 사람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고, 자기들이 먼저 “스스로 팔려 악을 행하지”(왕상 21:25) 않았더라면 블레셋 손에 넘어가게 되지도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Ⅲ. 삼손은 유다 백성의 권고에 온순하게 복종해 분노하고 있는 블레셋 수중에 넘겨졌다(12, 13절). 

유다인 3천 명을 처치하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 숨는 일쯤은 삼손에겐 쉬운 일이었다. 

아무도 그를 찾아내 잡을 수 없었고, 그에게 감히 손을 대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침착하게 항복했다.

1. 이런 그의 태도는 큰 힘과 용기를 지닌 자로서 그의 지극한 온화함을 보여준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을 잘 통제하던 자이며 적을 정복하는 법뿐만 아니라 적에게 항복하는 방법까지도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2.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진 삼손은 그들을 죽일 기회를 갖게 되었다.

3.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 그는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항복하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사 53:7) 순순히 따르는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에게 행한 자기의 일에 대해 이렇게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그들이 먼저 시작했으므로 내 행동은 정당하고 그들은 내게 보복할 이유가 없노라.” 

삼손은 유다인들에게 자기가 그들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자기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그들을 치게 될 것이다. 삼손으로선 그런 일을 지극히 싫어했던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다(13절). 그래서 그는 항복했다. 

그러나 삼손을 배반한 유다인들은 실질상 그를 죽인 살인자나 다름없었다. 

유다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삼손을 죽이려 하진 않았지만 그를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그보다 더 나쁜 일을 하고 있었다. 

유다인들은 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그냥 쉽게 죽이지 않고 욕하고 심하게 괴롭히다가 고통스럽게 죽일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이 유다 사람들도 아마 삼손이 그의 힘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유다인들에게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좀 더 신중히 생각했더라면 그들이 삼손을 선두로 블레셋과 싸워서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Ⅳ. 삼손은 두 줄로 꽁꽁 결박되어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졌지만 곧 그들을 처치했다. 

삼손이 그들에게 끌려왔을 때, 블레셋인들은 승리를 기뻐하며 그를 욕했고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질렀다”(14절). 

만일 유다인들이 삼손을 결박한 것처럼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결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삼손을 활로 쏘아(그들의 궁수가 사울에게 그랬듯이) 즉시 죽였을 것이고, 이렇게 그를 맞아 소리를 지르거나 하며 삼손이 여유를 가질 만한 틈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삼손이 끌려온 것을 보고 모든 승리는 그들의 것인 양 소리쳤지만, 바로 그 때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시어” 삼손에게 특별한 힘과 결단을 주셨다. 그래서

1. 삼손은 곧 속박된 것을 풀었다. 그가 첫 번 움직였을 때 두 가닥의 새 줄은 끊어져 그의 손에서 (원래의 단어의 뜻처럼) “녹아버렸다.” 

이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공포와 놀라움에 질렸을 것이며 그들의 외침은 비명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 팔 위의 줄이 떨어졌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자유함이 있으며 이렇게 해서 자유함을 얻은 자는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것은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망의 결박과 줄을 풀었고, 나사로의 경우와는 달리 수의가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전능하신 구주께서 사망의 권세에 결박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손은 그를 잡은 것을 기뻐하여 소리치던 암흑의 권세를 이기게 되었다.

2. 삼손은 그를 조롱해 모였던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쳐부수었다(15절). 

삼손은 무기로는 나귀의 턱뼈밖에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해낸 일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가! 그는 그것으로 무려 1천 명을 죽였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잘 이루어졌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라”(수 23:10). 나귀의 턱뼈는 손에 쥐기에도 불편한 것이었으며, 손에서 빠져 버리기도 쉬운 것이었다. 

또한 그리 튼튼치 못해 얼마 안 가 부러져 버릴 것이었지만, 그것은 끝까지 견고하게 남아 있었다. 

만일 전에 그가 잡은 사자의 턱뼈를 무기로 삼았다면 그것은 나귀의 것보다는 훨씬 튼튼하고 좋은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잘것없는 짐승의 뼈를 갖고서도 그는 놀랍게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고전 1:27) 쳐부술 수 있었으며, 이것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이었다(고후 4:7). 

다윗의 한 용사는 즉석에서 3백 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였으나, 그는 무기로 “창을 갖고” 있었다(대상 11:11). 

또 한 용사는 손이 피곤해 칼을 휘두를 수 없을 때까지 블레셋 사람을 쳤다(삼하 23:10). 그러나 이들은 삼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해내기에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신이 삼손에게 임했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라”(시 60:12). 

그가 싸울 때 유다 사람들이 그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홀로 포도주를 밟은”(사 63:3) 자의 한 모형이 되어야 했다.

Ⅴ.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무찌른 후 유다 사람은 (그저 멍하니 서서 관망만 할뿐) 축하마저 해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혼자 승리를 자축했다. 

그 후에 사울이 승리했을 때 그를 환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딸들이 나와 “일천 명을 죽인 삼손”을 축하해 주지도 않았으므로 삼손은 짧은 노래를 지어 그 자신이 직접 노래하며 자축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16절). 

히브리어 r/mj}(chamor)는 나귀와 더미(heap)의 두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훌륭한 말의 기교로서 블레셋 사람이 나귀처럼 쉽게 패배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는 “턱뼈를 들어올렸다”는 뜻으로 라맛 레히라는 블레셋 사람에게 치욕적인 이름을 그 곳에 남겨 두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나귀의 턱뼈를 가져가지 않고 싸움이 끝나자 그것을 버렸다. 값있는 유물이 되기에는 너무도 하찮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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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된 삼손의 갈증(삿 15:18-20)

Ⅰ. 큰 일을 치르고 난 후 삼손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는 “심히 목말랐다”(18절). 

큰 일을 하느라고 열을 냈던 그가 이렇게 갈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너무도 열중해 있었으므로 그 자신을 잊고 있었으나, 일이 끝나고 잠시 쉬게 되었을 때 지독히 심한 갈증을 느껴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싸울 때 하나님의 손이 특별히 돌보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아마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삼손이 그 자신의 힘과 위대한 성과를 자랑하지 않게 하고, 그 자신이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평범한 인간이기에 어떤 고통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셨을 것이다. 

(요세푸스의 의견), 그것은 삼손이 승리를 거둔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이 얻었다고 생각하고는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하며 자만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신 것이었다. 

이제 그가 심한 갈증으로 죽게 되었을 때 싸움에서 이긴 것은 그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손과 팔 때문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피를 흠뻑 마셨으나, 그 피로 인간의 갈증을 채울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의 명령에 의해 그 가까이에는 물이 없었고 그는 너무 지쳐서 물을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 

그가 일을 끝낸 후, 유다 사람은 그에게 준 상처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떡과 술을 가지고” 그에게 왔을 것이나, 그들은 삼손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라는 것은 거의 생각지도 못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도 때로 커다란 곤경이 닥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도 “내가 목마르다” 하고 호소하셨다(요 19:28).

Ⅱ. 삼손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자만으로 하나님을 잊고 있는 자들도 그들의 기도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게 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고통은 때로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내려진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두 가지 일을 탄원하고 있다.

1. 삼손은 최초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분의 권능에 대한 체험을 말하고 있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옵나이다.”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했다는 것을 말한다. “주여, 당신의 일을 행한 불쌍한 당신의 종을 돌봐 주시지 않겠나이까?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시 119:94). 

그는 그의 승리를 구원, 큰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만일 하나님이 그를 돌보지 않았다면 그는 블레셋 사람을 이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붙잡혀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승리를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자만에 젖어 있던 마음을 고쳐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런 곤경에 처해 그것을 탄원했다.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에 대한 지난날의 체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기도로 구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탄원이다. 

“주여, 이전에 우리를 구해 주시던 주께서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구해 주시지 않겠나이까?(고후 1:10) 주께서 이렇게 큰 일도 행하셨으니 그보다 작은 일인들 행하시지 않겠나이까?”(시 56:13)

2. 삼손은 자기가 이제 적에게 잡힐 위험에 있음을 탄원하고 있다. 

“만일 내가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게 되면, 그들은 의기양양해 아스글론의 거리와 가드에 가서 그것을 말할 것이옵니다. 주의 용사가 이렇게 쉽게 할례받지 못한 자에게 붙잡히게 되면 하나님께 영예롭지 못한 일이 아니겠나이까?” 가장 훌륭한 탄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찾기 위한 탄원이다.

Ⅲ. 하나님은 삼손에게 시기에 알맞은 위로를 주셨다.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뼈에서 나온 것이나 혹은 땅에서 나온 물을 그 턱뼈에 담아 그에게 주셨다(19절). 

하나님의 일을 위한 무기로 삼았던 그 턱뼈를 그의 갈증을 채워 주는 도구로 만드셨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레히의 한 웅덩이를 터치셨다.” 이 장소는 그가 턱뼈로 싸웠기 때문에 레히라고 불렸으나, 그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도 이 곳은 레히로 불리고 있었다(9, 14절). 

그리고 그 곳에서―그 곳이 들이었든 혹은 언덕이나 밭이었든지 간에―하나님은 갑자기 물줄기를 터치시어 때맞게 그에게 물을 주시고, 그 곳에서 흘러나온 풍부한 물이 그 후에도 계속 나와 하나의 우물을 이루게 하셨다. 그는 이 물을 마시고 기운을 회복했다. 이런 일을 볼 때, 우리는 충족한 물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응답하시어 높은 산에 강을 여시는 것(사 41:17, 18)을 보며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께 간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Ⅳ. 이런 일을 기억해 삼손은 그 우물을 “엔학고레”, 즉 “그의 외침에 응답한 우물”이라 이름 붙여, 갈증으로 소리쳐야 했던 일과 그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다같이 기억하도록 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의 외침에 응답한 우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삼손은 처음에 그의 힘과 승리를 나타내기 위해 라맛 레히─턱뼈를 들어올렸다─라는 이름을 그 곳에 붙였지만 갈증에서 회복된 후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의지했던 일을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을 붙여놓았던 것이다.

Ⅴ. 이런 일이 있은 후 삼손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다(20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삼손을 배반하긴 했지만 그들은 드디어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싸우게 하셨지만, 이제서야 그들은 삼손을 인정하고 그를 그들의 사사로 받들게 되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마 21:42).

“블레셋 사람의 때에” 이스라엘이 지배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비참한 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다. 

비록 그들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 억압받긴 했지만 이제 사사가 나타나 그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멸망에서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내려진 축복이었다. 

사사들이 다스리는 풍습대로 삼손은 2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러나 본 장에 있는 삼손의 통치의 시작과 다음 장에서 나오는 통치의 끝을 제외하고는 그의 통치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다.

======호크마

=====15: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 팔레스틴 지방의 밀 추수는 대개 양력 5월 경에 있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추수 시기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보리는 유월절(양력3, 4월)에, 밀은 오순절(양력 5,6월)에, 그리고 무화과나,포도, 올리브 등은 장막절(양력 9, 10월)에 거두어 들인다(성경 총론, '성경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그러므로 삼손이 다시 그의 아내와 동거하기위해 아비 집 소라 땅(13:2 ; 14:19)에서 딤나(14;1, 5)로 돌아온 시기는 5월에서 6월 초순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Cundall).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 염소는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귀한 재산이었다. 13:15주석 참조. 

때문에 이는 화해의 예물이나, 약조물(約條物) 또는 처가에 찾아갈 때의 선물등으로 곧잘 이용되었다(창 38:17, 20, 23). 

본절에서도 삼손이 그의 아내와 화해하고 다시 동거하기 위해 귀한 선물인 염소를 가지고 처가를 방문한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이로 볼때 삼손의 결혼은 사디카(Sadiqa) 결혼이었던 것 같다.사디카 결혼이란 우리 나라의 데릴 사위제도와 비슷한 것으로, 고대 근동에서 유행되었던 가모장적(家母長的) 혼인의 한 형태이다. 이 혼인에는 (1) 결혼 후 신랑이 신부집에 계속적으로 거주하는 비나(beana)혼과 (2) 신랑이 신부 집에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모타(Mota)등 두 종류가 있다(R. de Vaux).

내가...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 이로 보아 삼손은 아내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과거 그녀와 동족들이 저지른 잘못(14:15-18)을 용서하고 아내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살려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계획과 호의(好意)는 곧 그의 장인에 의해 산산이 부숴지고 만다(2절).

=====15:2

본절에서는 삼손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 동생을 아내로 취할 것을 권고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장인의 행동은 삼손의 급한 성격때문에 임시 조치로 급하게 제시된 방안이거나, 아니면 삼손으로부터 다시 혼수감을 받기 위한 그의 탐욕에 기인한 잔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삼손의 마음은 블레셋 족속 전체에 대한 증오심으로 재차 불타게 된 것이다.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 만일 삼손의 장인이 삼손과 그의 딸이 하나님앞에서 엄숙히 맺어진 사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러한 변명은 도저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삼손으로부터 병폐(病幣)를 받고서 그의 딸을 내주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렸으니(14:20) 그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있다. 1:1-20 강해, '병폐와 빙물' 참조.

그 동생이...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 얼핏 생각하면 삼손 장인의 이같은 제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삼손의 권리를 인정한 데서 나온 제의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 라반이 레아를 라헬인 양 꾸며 야곱을 속이고 그에게서 노동력을 착취한 것과 같은 행위이다(창 29:15-30). 즉 이같은 제의는 다름 아닌 삼손의 장인이 삼손에게 또 다른 병폐를 기대하고서 제시한, 탐욕적 저의가 깔린 제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삼손은 그러한 장인의 간악한 면모를 한 눈에 간파하고서 일언지하에 그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Pulpit COmmentay).

=====15:3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 삼손은 장인의 간악한 처사(2절)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블레셋 사람의 일반적인 태도로 간주하고 장인의 가족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전 블레셋인들에게 복수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모독한 족속들에게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앞에서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민 32:2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삼손을 사용하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시작하셨는가(13:5)를 발견하게 된다.

=====15: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 여기서 '여우'로 번역된 '슈알'(* )은 '승냥이'(jackal)를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Wycliffe, Hervey, Keill &Delitzsch). 왜냐하면 여우는 보통 군거(群居)하지 않고 단독으로 다니며, 곤충, 과일,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는 반면 승냥이는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독 생활을 하는 여우를 300마리나 잡는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만보더라도 삼손이 잡은 300마리 짐승은 승냥이임에 분명하다.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 여기서 '홰'란 흡수력이 강한 나무 막대기에기름을 듬뿍 묻혀서 불에 잘 타게끔 만들어 놓은 막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전체 여우 수가 300마리였으니 여우 2마리씩을 연결한 후 한 개의 채를 꽂았다 해도 최소한 150개의 채가 필요했었음을 알 수 있다.

=====15:5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 고래(古來)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역사성(歷史性)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 왔다. 그러나 본 사건은 상식적인 견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즉 약 150개의 홰에 불이 붙자 300마리의 여우들은 뜨거움에 놀라서 내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우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온통 불바다를 이루자 여우들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곳만을 찾아내 숨어들려고 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곡식 밭은 순식간에 전소(全燒)하게 되었을 것이다(Matthew Henry). 

이와같이 곡식단을 불사르는 방법은 고대 농경 사회에는 흔히 있던보복 방법이었는데, 이러한 보복 행위는 그 지역의 한 해 경제를 송두리째 파괴하는것으로 매우 치명적이다.

감람원 - 이에 해당하는 '케렘 자이트'(* )는 '포도원과 감람원'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같은 번역을 취하는 성경으로는 70인역(LXX), KJV, NIV, 공동번역등이 있다. 한편 이는 당시 딤나 지방에 포도원이 많았던 점(14:5)에 비추어 볼 때 그리 무리한 번역은 아니다.

=====15:6

블레셋 사람 - 딤나 주민은 물론 그밖의 다른 지역에 거하던 블레셋인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딤나 주민들만이 삼손을 응징하려 들었다면 그들이 삼손의 장인을 가리켜 굳이 '딤나 사람'이라고 표현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라든가 아니면 '우리 지역에 사는 사람' 등으로 표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 삼손의 보복 행위로 말미암아 한 해 수확물을 몽땅 소실(燒失)당한 블레셋인들은 극도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정작 삼손을 잡아 처벌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신 그의 처가 식구들을 처벌하는 것이 쉬웠으므로, 이에 그들은 삼손의 장인과 그의 아내를 잡아 불로 태워 죽였던 것이다.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 - 고대 근동에서 불로 태워 사형시키는것은 간간이 있던 일로서 성경에서도 간음한 자에게 이같은 형벌을 내릴 것을 명하고 있다.(창 38:24 ; 레 20:14 ; 21:9). 신 25:1-4 강해. '성경에 나타난 형벌의 종류'참조. 한편 어떤 헬라어 사본이나 시리아어 사본에는 이 부분을 '그녀와 그녀의 아비집을 불살랐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8:15에 기록된 블레셋 청년들의 협박과 그내용이 일치한다(Cundall). 아무튼 삼손의 아내와 장인은 자기 동족들의 손에 의해 이처럼 끔찍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그들이 일신상의 안일만을 도모하여 삼손을 배신하고 일종의 간음죄를 저지른 데 대한 당연한 형벌이다. 특히 삼손의 아내는 블레셋 청년들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남편을 배신하고 동족의 편에 붙기까지 하였지만(14:15-17), 결국 그 협박의 내용대로 죽임당하고 말았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참으로 오묘함을 엿볼 수 있다.

=====15:7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 블레셋사람들이 삼손의 처가에 행한 처사(6절)에 대한 삼손의 태도 표명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간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견해는 곧 다음 두가지이다. (1) KJV는 본절을 '비록 너희가 이 일을 하기는 했으되'(though ye have done this)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딤나여인의 간음 행위에 대한 블레셋인들의 응징에 대해서는 삼손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2) 개역 성경에서처럼 '이것이 너희가 나를 대하는 것 이라면나도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행하겠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이다(Henvey). 그런데 사실 블레셋 사람들이 특별히 삼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비록 그들이 삼손의 처가를 징벌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응징이지 삼손에게 호의를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4-6절). 따라서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더 타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블레셋의 처사는 오히려 삼손의 증오심만 자극한 결과를 빚고 만 것이다.

=====15:8

크게 도륙하고 - 삼손의 처가에 대한 블레셋의 처사는 이처럼 삼손으로 하여금 블레셋을 칠 빌미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한편 여기서 '도륙하고'에 해당되는 원문은 문자적 으로 '넓적다리 위의 다리'(쇼크 알 야레크, * )를 쳤다는뜻이다. 즉 직역하면 '넓적다리 위의 엉덩이'(hip on thigh)를 쳤다는 뜻이다. 그러나이는 어디까지나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상대방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역 성경의 의역(意譯)이 적절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Wylciffe,pulpit Commentary).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 - 대하 11:6에는 베들레헴 근방에 위치한 에담(Etam)이 나온다. 그러나 그곳은 딤나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본절의 사건과 무관한 것같다. 

한편 대상 4:32에 따르면 시므온 지파내에도 에담이란 지역이 있는데 본절의 에담은 바로 이곳인 것 같다. 더욱이 9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시므온 지파가 함께 거하고있는 유다(수 19:1)에 진을 친 것으로 보아 그곳이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로 보아 삼손은 자기 고향 소라에서도 안전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것 같다. 아니면 자기로인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이곳 에담으로 피신한지도 모른다.

=====15:9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편만한지라 -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당한 일(8절)에 대하여 보복하기 위하여 삼손이 숨어 있는 유다지역을 칠 작정으로 레히(Lehi)에 진을 쳤다. 그런데 이곳 레히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딤나나 소라, 에담 그리고 블레셋 접경(接境)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이곳을 브엘세바에서 6.4Km 지점에 있는 요새 엘 레히(el lechieh)인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2 p, 415).

반면 또 어떤 이는 벧세메스 부근에 있는 오늘날의 '킬벳 에시아그'(Khirbet es - Siyygh)일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15:10

유다 사람들이 가로되 - 여기에서 우리는 블레셋의 압제하에서 그들의 눈치만 살피며 삼손의 모험의 결과들을 두려워하는 비참한 유다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갈렙을 필두로 하여 가나안 정착 초기에 보여준 유다 지파의 용맹성에 비해 볼 때(1장) 본절에 나타난 이러한 유다 지파의 모습은 가히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갖는 전형적인 실태라고 볼 수 있다.

=====15: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삼손에게 이르되 - 5절에 따르면 당시 블레셋 군대는 약 1천명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삼천 명이 동원되어 삼손을 잡으러 나섰다. 이는 당시 삼손의 힘이 어느 정도로 세었는지를 잘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당시 유다 지파가 얼마나 노예적 근성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유다 사람들이 삼손과 힘을 합쳐 블레셋에 대항했더라면 블레셋으로부터 독립할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삼손을 잡아 원수들에게 내어주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범하고만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단지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기만 하는것이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배반 행위까지도 종종 범하게 된다(마12:30).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있긴 했으나 굳이 저항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은 현실 안주내지는 무사 안일(無事安逸)을 지향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위대한 사명을 망각해 버렸던 것이다(출 19:6). 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진취적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그리워했던 광야 노정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흡사하다(출 16:2, 3).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노예적 굴종읕 벗어 던지고자 했던 삼손의 궐기(蹶起)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성가신 만용 정도로 여겨졌던것이다. 본절에서 유다인들이 삼손을 다그치는 것도 곧 '왜 쓸데없이 부스럼을 긁어 상처를 크게 만드느냐'는 무사 안일적 힐난이었다.

=====15:12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왔노라 - 이처럼 이제 삼손이 동족들의 손에 묶임을 당해 이방 대적에게 넘기어지게 된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이다. 그런데 이는 무릇 경건한 자기핍박을 받으며(딤후 3:12),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사실(마13:57)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삼손을 묶어 블레셋인에게 넘긴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허다하게 발견된다. 

마치 안일한 생존이 최상의 행복인 양 몸을 사리기만 하며, 보다 숭고한 진리를 위해 봉사하는 일을 조소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에도 부지 기수인 것이다. 그러나 영원을 사모하는 귀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존재하되, 종속되지 아니하고 진리로 세상을 극복하는 진취적 신앙을 늘 유지 함양해야 할 것이다(전 3:11 ; 요 16:33 ; 18:36).

너희는 친히 나를 찾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 여기서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는 삼손의 위대한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비열한 유다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분노하며 책망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삼손은 오히려 그 마음을 블레셋에게로 돌려 자신의 동족으로 하여금 그토록 비굴해지도록 만든 블레셋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불태웠다.그래서 삼손은 동족의 손에 순순히 이끌리어 블레셋인들에게 넘기어진 후 여호와께서 주신 완력으로 블레셋인들을 쳐부수기로 마음먹고 이와같은 맹세를 유다 사람들에게 촉구한 것이다.

=====15:13

새 줄 둘로 결박하고...그를 끌어내니라 - 그토륵 엄청난 힘을 소유한 삼손은 마치 어린 양처럼 순순히 동족에게 포박되어 블레셋 사람들 앞에까지 끌려 간다. 이는 곧 그가 대적할 대상이 동족이 아닌 블레셋 족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원수 로마인의 손에넘겨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행 8:32 ; 롬 8:36).

=====15: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소리 지르는 동시에 -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결박된 채 오는 모습을 보고선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는 장면이다. 즉 그들은 이제까지 겪어 본 중에 가장 힘센 사람이므로 어떻게 손 써 볼 수 없었던 삼손이 꽁꽁 묶여서 오는 모습을 보자 그의 주변으로 몰려 들며 환호성을 지른것이다(Wycliffe,Matthew Henry)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 여기서 '여호와의 신'은 곧 성령을 가리킨다. 3:10주석 참조. 즉 원수 블레셋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 승리의 환호성을 지를 때 삼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였고, 포박된 줄은 불탄 삼과 같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결박을 푸시고 죄의 사슬을 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습을 상기하게 된다(히 2:14).

=====15:15

라맛 레히 사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 여기서 '나귀의 새 턱뼈'라는 것은 죽은 지 얼마 안된 나귀의 턱뼈를 가리킨다. 이것은 오래되고 마른 턱뼈보다 더 단단하여 부서지지 않으므로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서 무기로 사용하기에는안성마춤이었다(Lange).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 실로 피 튀기는 대학살이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과단 한 줄로 요약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포박된 삼손을 보고서 환호하며 뛰어오던 모습(14절)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즉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오던 대적들은 순식간에 고통의 절규를 부르짖으며 죽어갔던 것이다.

=====15:16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 삼손이 혼자몸으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무찌르고서 이제 자신의 승리를 2행시로 노래하는 장면이다. 이 시에서 '나귀'(* , 하모르)와 '더미'(* , 하모르)는 동의어로서 언어 유희를 담은 시이다(MatthewHenry). 이것은 신 32:30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삼손이 자신의 승리로 인해 이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있는 것이다.

=====15:17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여기서 '라맛 레히'(Ramath -Lehi)는 '턱의 산'이라는 뜻이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나귀의 턱뼈를 던져 떨어진 곳을 '라맛 레히'라고 불렀던 것이다. 아마 9, 14절에 언급된 '레히'라는 지명도 이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15: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 이로 볼때 삼손이 블레셋 일천 명과 대항하여 싸울 때(15절)에 유다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삼손이 싸우는 동안 모두 도망가 버렸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일천명과 상대하여 싸운 삼손은 이제 지치고 갈증이 나서 기진 맥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갈증으로 인하여 죽음 직전에 이른 삼손은,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만이 참 삶을 얻는다는 진리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 이 때의 삼손은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을 이기고 이스라엘 광야에까지 도망갔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하던 그러한 심정이었을 것이다(왕상 19:4). 그렇지만 그는이제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자신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1) 삼손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한 위대한 구원의 체험을 상기함과 동시에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시30:10 ; 39:4). (2) 그는 스스로를 종으로 표현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고 계심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에 더불어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갔다(롬 6:13). (3)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다. 만일 삼손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죽게 된다면 라맛 레히에서 빛나게 했던 하나님의 명예까지도 더럽히는 일이 되고마는 것이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시 23:3)을 간구하였던 것이다.

=====15: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 여기서 '한 우묵한 곳'에 해당하는'함마크테쉬'(* )는 '절구' 또는 '절구형태로 된 구멍'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고대의 주석가들LXX, Vulgate, KJV, Luther)은 나귀 턱뼈(15-17절) 모양이 이 절구모양과 비슷하므로 하나님께서 턱뼈의 우묵한 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란 단어에는 구체적인 대상을 나타내는 정관사가붙어 있다는 점과 엔학고레라는 이름이 본서 저자의 시대에까지 알려져 있다는 사실등을 볼 때 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옳지 않음이 분명하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나귀턱 뼈와 같은 모양의 뾰족한 절벽 사이 구멍에서 물이 흘러 나오게 하여 삼손의 갈증을 해갈해 주셨을 것이다(Keil, Lange, Studer).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위를 가르셔서 물이 흘러나오게 한 사건은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출 17: 6 ; 민 20:8, 11).그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하는 이적들이다.

=====15:20

라맛 레히 사건 본절에서는 '레히'에서 대승리를 거둔 삼손이 이제서야 비로소 동족의 냉대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인정받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건축자들에 의해 버려진 들처럼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과 같이 승귀(昇貴)되신 것을 연상케 한다(시 118:22).

블레셋 사람의 때에 - 사사기의 기록은 엄격하게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기 보다는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연대별 순서가 무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사들의 활동 범위가 국지적(局地的)이었기 때문에 연대적으로 둘이상의 사사들이 동시대에 활동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삼손의 경우에도 그 활동 연대를 추정하기가 몹시 어려운데, 그에 관한 기록들과 본절을 참고할 때 삼손의 사사직은 블레셋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과 결부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B.C.1080-1060년에 걸쳐 활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Cundall). 

이렇게 볼때 삼손은 입다와 동시대인이면서 사무엘의 활동 시기와도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이다. 한편 그의 활동 반경은 단 지파와 유다 지파에만 국한되었다.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 '레히'에서 블레셋족을 격멸한 일로 인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의 사사로 정식 인정받은 삼손이 이후 20년 동안 사사로서의 공적 활동을 하였음을 부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20년간은 블레셋의 이스라엘 압제 기간 40년(13:1)의 절반 밖에 못 미치는 기간이므로 삼손이 블레셋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3:1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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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前章)은 아내의 배신으로 인해 수수께끼 게임에 진 삼손이 크게 분노한 채 아비 집 소라 땅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났었다(14:19).  

그런데 이제 본장은  삼손이 아내에 대한 연정을 품고 다시 블레셋 땅 딤나로 돌아왔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것에 분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1-4절).  

그리하여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로 블레셋의 논밭을 불사르며(4,5절) 자기 처가집을 해안 블레셋인들을 크게  도륙(屠戮)한다(6-8절).  

그리고 자기를 잡으려는 것에 맞서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쳐죽이는 대활약을 펼친다(9-20절).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삼손의 행동은 다음 두가지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 인간들의 감정 대립에서 야기되는 온갖 비참한 인간사(人間事)의 저변에도  구원자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섭리가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고 한 말씀을  근거로  한 해석이다.  

즉 한갖 여인에 대한 연정(戀情)으로 인해 폭발해 버린  삼손의  복수극은 단순히 삼손 자신만의 복수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복수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을 욕되게 하는 블레셋 사람들을 삼손을 통해 징계하신 것이다.

 둘째, 문란한 사생활로 부도덕하게 보이는 삼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민족을 향한 사명감이 불타고 있었다는 것이다(3절 ; 14:4).  

그러기에 삼손은 본장에서도 자신이 당한 모욕을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고 블레셋인들과 격전을 벌인 것이다.  

이로 볼 때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했다'(14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삼손을 강요하여 구원의 도구로 사용한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설령께서는 결코 사람을 돌이나 막대기로 취급하지  않으시며  도덕적 인격체로 대우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혹자들이 생각하듯이 삼손을 고대의 신화속의 초인적 인간이나 21세기의 초능력 소유자와 같이 만드셔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성령은 인간의 지성을 깨우치고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의 의지가 하나님의  선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작용하시며 거기에다 육체적인 능력까지 공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자들을 오직 믿음의 사람들, 즉 하나님을  향하여 열정을 가진 사람들 뿐이라고 하겠다.  

히브리서 11:38에선 이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이런 사람은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평하고 있다.

1. 삼손의 보복적 활동(15:1-8)

장인이 자기 아내를 블레셋 사람에게 준 것(14:20)을 단순히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응징하는 장면이다.  먼저 분노한 삼손은 여우를 이용하여 블레셋인의 곡식단과 밭을 불사른다(1-5절).  그러자 블레셋인은 도리어 삼손의 장인과 처를 죽임으로써 보복을 가해 온다(6절).  이에 극도로 분노한 삼손은 블레셋인을 크게 도륙하고나서 에담  바위 틈으로 피신한다(7, 8절).  이상과 같은 본문은 부정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긍정적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이제 이를 생각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2. 동포의 손에 포로가 된 삼손(15:9-13)

삼손으로 인하여 블레셋으로부터 크게 위협을 받게 된 유다 사람들이(9, 10절)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장면이다(11-13절).  

즉 앞서 삼손이 블레셋인을 크게 도륙한 데 대하여(8절) 원한을 품은 블레셋족은 유다 사람을 상대로 삼손을 결박, 그들에게 넘겨 준다.

이로 보건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의 압제하에 있었으나 굳이 그들이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략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현실 도피 또는 무사 안일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선민 의식을  망각한  결과였다.  

결국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식민지로서  허덕이게 되었는데(13: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진취성을  발휘하기 보다는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그리워함으로 40일 광야 길을 40년 동안 헤매인  것과 유사하다(출 16:2, 3).

또한 본문은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노예적  굴종을 벗어 던지고자 했던 삼손의 궐기를 오히려 성가신 만용 정도로 여겼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특별한 선민 의식이 없는 그들에게는 삼손과 같은  지도자의  필요성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는 단적인 중거가 된다.  

즉 그들이 실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21:25) 행한 자들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르기 위해 단합심을 보이기 보다는 뿔뿔이 자기 이기심을 좇아갔던 것이다.  

그결과 삼손과 같이 민족 의식이  살아있는 사람은 오히려 동족에 의해 이방대적에게 넘기워지게 되었는데 이는  무룻  경건한 자가 핍박을 받으며(딤후 3:12)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을 받는다는 사실(마 13:57)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와같이 동족의 손에 잡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가는 삼손의  모습은 일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모습을 예표해 준다(사 53:7).  그리고 죄로 인하여 올바른 신앙적  양심까지 상실한 채 굴욕적인 삶을 끝까지 고집한 간사한 유다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죄의 사슬에 매여 안일한 삶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어라석은 현댕인의 모습을 투영해  준다.  따라서 과거 얽매였던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삼손과  같은 깨어있는 의식하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엡2:1-10).

3. 삼손의 승리(15:14-20)

동족의 손에 의해 결박당해 대적 앞에 끌려간 삼손이 밧줄을 끊고서  마침  주위에 있던 나귀 턱뼈 하나를 주워 그것으로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쳐죽이는 장면이다(14-17절).  

그리고 그로 인한 피로와 심한 갈증을 호소함으로써 삽손이 새로운 구원을 체험하는 장면이다(18-20절).  이라한 번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삼손을 결박한 굵은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끊어졌다는 것(14절)은  죽음의 밧줄을 끊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망의 권세가 잠시 그리스도를 결박할 수는 있었으나 종국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온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눅 24장).

(2) 삼손은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했을 때 사슬에서 놓임을 받고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14절).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 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요 16:7-13).  즉 구원은 진리 가운데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자유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삼손이 나귀 턱뼈 하나로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15, 16절)도 하나님의 능력과 자유  안에서  가능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들어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고전 1:27).

(3) 이스라엘을 구원한 삼손이 정작 그 자신은 갈증으로 목말랐던 것(18절)은 각  성도 개개인의 진정한 구원체험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즉3, 7절에서 민족을  구원하는 구세주처럼 사기가 등등했고, 16절에선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삼손이지만 정작 목마름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체험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이  구원이 여호와에게서 비롯된 것인 줄 깨닫게 된다(18절).  

그리고 그의 기도에서도 자신의 죽음보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 것을 염려하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보여 준다(18절).  

이와 같이 진정한 구원은 여호와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만이 그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고후 1:9, 10).

민족주의와 신앙의 관계

- 본서에서 삼손은 바록 개인적으로는 문란한 사생활의 일각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지만(14:1 ; 16:1, 4)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당대의 큰 위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신앙인으로서 보여 준  그의 민족적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민족주의와 신앙의 바른 관계에 대한 깊은 교훈을  안겨 준다.  그리고 과거 3.1 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우리로서는 참된  기독교의 민족주의적 운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손에게서 그에 대한 몇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신앙인으로서의 민족 운동은 한 민족 안에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극복해야 된다는 것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삼손과 다른 유다인 간에는 어느  정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있었음을 감지하게 된다.  즉 유다인들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인들에게  넘겨 준 것(11-13절)은 그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삼손과의 이견에서 나온 충돌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손은 자신의 견해를 동포들에게 고집하므로서 내부의 분란을 야기시키기 보다는 그러한 의견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실현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 행동함으로써(14-17절) 장차 동족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하나님께서 한분이시고 성령도 하나이시고 교회도 하나이듯 민족을 향한 마음도 하나로 뭉쳐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결실을 맛볼 수 있다. 

 둘째, 신앙인으로서의 민족 운동은 진정 신앙 운동과 병행함으로써만 민족주의와  신앙을 서로 접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앞서 언급한 첫번째 요소만을  생각한다면 누구든 신앙인으로서의 민족주의자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께로 부름받은 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18절) 이후  주체적  의식하에 20년 간이나 민족의 사사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20절).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민족주의적 운동운 우선적으로 하나님안에서 부름받은  그분의 일꾼이라는 자각 의식에서 시작될 때 비로소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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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5:1-20

삼손에 대한 해석은 신학자들간의 논란이 분분하다. 삼손의 모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좋은 하나님의 일꾼의 모습과 거리가 먼 것 같아서 여자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나실인으로서의 소명과 관계없이 살았던 방탕한 한 사람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한쪽 극단이 있고, 또 히11:32에 그를 사사의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시킨 것을 보면 여전히 훌륭한 인물이라고 보는 한쪽 극단도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그 배경 안에서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삼손을 지금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고, 삼손이 살았던 그 시대의 콘텍스트 안에서 삼손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해석이 먼저 되고 그다음에 우리에게 적용을 해야 바른 교훈을 얻게 된다. 

삼손이 우리에게 주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삼손이 살았던 그 시대의 특수성이 도드라진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사기 시대 자체가 전체가 특별한 시대기도 했지만 삼손 시대는 사사시대와 다른 부분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사사기 삼손 앞에 나오는 사사들은 이방나라와 싸울 때 사사가 일어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일어나 함께 싸웠다. 

삼손은 싸우지 않는 백성들 가운데 홀로 싸웠다. 

삼손은 이상하게 싸움이나 행로가 고독하게 홀로 간다. 누구랑 같이 누구의 힘을 빌려 싸운 적이 없다. 

성도와 교회는 이 땅에 피스메이킹하는 화평의 도구로 부름받았다.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고 영혼을 잘 살려내는 게 영혼들의 부름이다. 동시에 믿음의 선한 싸움이 남아 있다. 

끊임없이 믿음을 위한, 믿음에 의한, 선하고 바른 싸움을 싸우는 것이 성도들의 중요한 특징이다. 

싸우기를 멈춘 시대에 삼손은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싸운 고독하고 외로운 사사였다. 

그런 관점에서 삼손의 삶을 해석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윤리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거나 삼손을 옹호하는 쪽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 싸워야 할 시대에 싸우지 않는 백성들 틈에서 싸움을 싸우는 하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의 사사 삼손의 생을 다루어야 성경이 던지는 메시지를 바르게 들으면서 삼손을 통한 교훈을 받게 된다. 

삼손 이야기에 석장이 넘게 많은 부분이 할애되고 있다. 

성경에서 삼손만큼 문무를 겸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와 능력을 입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역사적인 인물이다. 

거기에 비해서는 그 은혜와 은사와 능력을 개인적인 복수에만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오늘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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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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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번기다. 일손이 분주할 때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삼손의 마음이 다 다루어지고 어린 염소새끼 하나 갖고 염소새끼를 소지한 걸로 보아 격분된 마음이 누그러지고 화해하고자 아내를 보러 왔다. 

이 정도 되면 상식적으로 가능하면 화해 키려고 할 텐데 방에도 못 들어오게 하고 보여주지 않는다. 엉뚱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삼손 아내를 블레셋 친구에게 그 사이에 넘겨버린 것이다. 마치 라반 같은 짓을 한 것이다.

장인은 당황해서 궁여지책으로 동생이 더 인물이 낫다면서 동생을 취하라는 제안을 한다. 

삼손은 화해를 하러 갔다가 돌아버려 선전포고를 한다.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려는 결혼이었으므로 기회가 온 것이다. 

틈이 완전히 벌어진 것이다. 마음껏 자기가 당한 고통만큼 되갚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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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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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둔한 동물이 아닌데 300마리나 잡다니 대단하다. 꼬리에 불 붙은 줄 알면 물가에 담글 테니 여우를 두 마리씩 꼬리를 묶어 그 사이에 횃불을 매달았다. 블레셋 사람들이 한 해 동안 잘 농사지어서 추수할 때였다. 

그 밭에 거두어 놓은 추수더미, 덜 추수한 밭 농작물이 많았을 텐에 그 밭에다 여우를 내 몬다. 

여우가 꼬리가 묶여 있어 제대로 못 뛴다. 한 놈을 이쪽으로 한 놈은 저쪽으로 가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가 잡아당기니 멀리 달아나지도 못하고 밭에 불이 붙어 블레셋 사람들의 밀, 포도원, 감람나무 굉장히 중요한 3대 농작물이 싹 불에 탔다.

딤나 온 땅이 난리가 났다. 블레셋의 신이 다곤이다. 추수의 신, 곡식의 신이다. 2중적인 의미가 있다. 

추수를 망쳤다는 것만이 아니라 다곤에게 보란 듯이 다곤에게 징계를 내려서 그 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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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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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 사람들이 원인규명에 나서서 조사하여 삼손의 장인이 원인임을 알고 딸과 함께 불태워버린다. 

블레셋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했다. 

14장에서 삼손이 수수께끼를 냈을 때 풀지 못하자 “수수께끼를 알아내지 못하면 네 아버지 집과 너를 불살라버리겠다” 삼손의 아내를 협박한 내용이 그대로 이 집안에 응한다. 그리고 사건의 장본인인 삼손을 잡으러 나선다.

그 소식을 들은 삼손은 한층 더 얹어서 사고를 친다. 

본격적으로 아내와 장인을 불태워 죽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대놓고 전쟁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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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8.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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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이 더 기회를 얻어서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에담바위 틈에 숨어버린다. 본격적인 싸움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에담은 유대에 가까운 지역이다. 블레셋인들이 삼손을 잡으러 유대인근까지 포진을 하게 되었다. 

평온한 유대땅에 블레셋 군대가 전쟁 차비를 하고 들어와 있는 것이다. 얼마나 놀랐겠는가. 

사정을 알아보니까 이 근처에 동족인 삼손이 우리 땅에 와서 몹쓸짓을 하고 여기 숨어 있으니 그 사람만 내 주면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코지가 하나도 안 간다. 지금 삼손 개인의 문제처럼 보이므로 이스라엘에 블레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워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안 싸우니까 삼손이 혼자 싸우고 에담 바위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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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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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사람들이 블레셋이 왜 자기들 코앞에 진쳤는지 그 이유를 알고 삼손 한 명 잡으려고 병력 3,000명을 동원한다.

이 그림이 맞나? 유다에게는 동족이다. 블레셋은 원수지간이다. 마땅히 척결해야 상대편에 서서 삼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원래 그림대로 하면 이런 상황이라면 이참에 유다가 3천명을 동원해서 포진해 있는 블레셋과 맞설 생각을 해야 옳지 않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자기 동족을 잡으려고 3천명 병력을 풀어 삼손을 수색 나선 것이다.

유다지파는 사사기가 열리면서 제일 먼저 전쟁하러 간 제일 용맹스럽고 머리 같은 지파다. 

유다지파가 제일 먼저 전쟁에서 이긴 대상이 블레셋인데 그 블레셋이 3천 명을 끌고 와서 자기들의 평화를 깨뜨리고 있는 삼손을 잡아서 블레셋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이 유다지파다. 

레히땅에 블레셋 사람들이 몇 명이나 올라왔는지 모르지만 3천명을 데리고 그들과 싸울 생각은 안 하고 손에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삼손을 잡아서 블레셋에게 넘기려는 것이 오늘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주소이다.

싸워야 할 대상이 블레셋인데 블레셋과 안 싸우고 하나밖에 없는, 제대로 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삼손을 성가셔하면서 자기들의 평화를 깨뜨린다고 하면서 삼손을 블레셋에게 넘겨주면서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어처구니없다. 신앙을 떠나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면 성도들이 이렇게 추해지고 겁쟁이가 된다,

중요한 대화 하나 놓치면 안 된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 알지 못하느냐?”....삼손에게 “너 정신 나갔니? 블레셋이 우리 주인 국가야. 우리 통치하고 다스리는데 왜 그 심기를 건드려? 아무래도 널 넘겨야겠어.”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게 유다가 빠져있는 정신세계의 상태다. 40년간 블레셋의 통치를 받다보니까 의식이 병들어 있는 것이다. 

감히 블레셋에게 저항할 생각조차 갖지 못하고 동족을 잡아다가 넘기려고 3천명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삼손만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정신적 공황상태, 신앙의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 

삼손도 여기서는 사고쟁이로밖에는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렇게 주신 능력과 지혜를 처절하게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데 다 소진하고 만다. 

삼손 속에 어떤 그림이 담아져 있다고 생각하나? ......마치 한국교회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지난 20-30년간 하나님께서 한국사회에 크기로나 물질로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셨다. 그런데 지난 20년간 짧게는 10년간 한국교회는 그 어마어마한 은혜를 가지고 대표적으로 개인적인 치부를 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마치 삼손이 하나님이 부어준 은혜와 능력을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데 다 쓰고 말았듯이 그런 형국이 되지 않았는가? 삼손의 모습 속에서 한국교회에 우리가 처한 모습을 부끄럽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삼손은 유대와 협상 끝에 순순히 결박을 당한다. 튼튼한 새 밧줄 두개로 묶어 블레셋이 처단하도록 넘겨주려는데 이때 갑자기 하나님의 영이 일방적으로 임한다. 

기도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자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같이 풀어진다.

이스라엘은 넘겨주었는데 하나님이 신실하게 홀로 싸우는 삼손에게 임한다. 아무도 도움이 안 된다. 

3천명이나 끌어 모았는데 기껏 하는 것이라고는 삼손을 묶어서 넘겨주는 것이다. 

삼손이 밧줄에 묶여서 레히까지 오자 블레셋 사람들이 좋아서 “저놈 죽이라!”하면서 뛰쳐나온다. 

변변한 무기가 없던 삼손은 근처에서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들고 몰려오는 블레셋 병사를 무려 1000명이나 죽인다. 

온전한 무기라 하기 어려운 나귀의 턱뼈 하나로 중무장한 병력 1000명을 때려죽인다. 기가 막히는 장면이다. 

그때라도 3000명이 합세에서 전쟁을 했으면 다른 그림이 그려질지 몰랐는데 여전히 3000명은 참여하지 않는다. 

아무도 삼손과 함께 싸우지 않았다. 삼손은 승리에 도취되어 시를 하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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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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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가만히 보면 시의 스타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노래한다." 이런 거 없다. 오히려 승리에 도취되어 자아도취형 시어를 고백한다. 

삼손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시로 보면 정확하다. 삼손의 영적인 상태이기도 하다. 

삼손이 힘이 센 결과도 아니고 삼손의 지혜로 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그게 가능했는데, 그는 자아도취적 시를 쓰는 데 머물지 않고, 전투 현장의 이름까지 바꾸어 자기를 기념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한다. 

원래 이름이 레히인데 ‘라맛레히’라고 바꾸어버린다. 자기를 기념하는 개명을 한 것이다. 

‘라맛레히’는 ‘턱뼈의 단’, ‘턱뼈의 무더기’라는 뜻이다. 

나귀턱뼈 하나로 블레셋을 1000명을 죽였으니까 기념비적인 승리의 탑에 명명한 것이다. 

이때 삼손에게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삼손이 갑자기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인간이란  존재가 참재미있다. 방금 전까지 내가 1000명 죽였다고 시까지 쓰고 지명까지 바꾸었는데 바로 목이 마르니까 그때야 눈이 열어지고 의식이 열려져 곧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라맛레히 승리에 도취된 현장에서 삼손에게 일침을 가하는 지적이다. 

하나님이 우묵한 곳을 터쳐 물을 내시매 그곳 이름이 ‘엔학고레’가 된다. ‘부르짖음의 샘’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은 부르짖어야 사는 존재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사는 존재라는 의미도 된다. 

하나님은 엔학고레의 샘터가 되게 부르짖어야 살 수 있는 운명으로 우리를 택하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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