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4장 [545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549장 (내 주여 뜻대로).][421. 내가 예수 믿고서] [405.주의친절한팔에안기세][528.예수가우리를부르는소리]
.....Q나라 이미 맛본 다윗이었기에!!..**내안의 사울(자립하려 함) --이스보셋 = 기름부은자를 존귀히 여김(덮어줌) ::: 스스로가 판단하고 처리함 아니라 주님께서 처리하시도록 (원수 사랑하며) 인내하며 기다려야 함 **내안의 스루야의 아들(괴롭히는 유혹과 핍박 :: 여전한 약점들...힘들게 하는 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Q나라 기다리며 바라 봄...+ 기회주의적 공명심/교활함/책임 전가/배신)--아브넬 ::: (주께서 도와주시도록!! 구하며) 합당한 시점까지 포용하고 품어야) **내안의 아말렉청년/레갑과 바아나(경건을 이익의 재료 삼음..생색 냄) = 쳐내야 함....
....전심전력 다 기울이는 목자 다윗의 양 돌보기.....그 양의 임자가, 그 본래 소유자가 누구였든지 무관하게!!..다윗은 일단 자기에게 맡겨진 양은 (서두르지 않고 먼저 부드러이 대하며, 안돈시키며, 친해지고, 아껴주며, 비록 [자기연민에서 아직 헤어나오지못하여] 낯설어 땡깡부리며 속 썩이더라도 오래참아주고 긍휼-친절-온유함으로 기다려주고) 한 마리 한 마리마다에 대해 [사랑과 깊은 관심, 곧 생명 가치 크기를 절감하며 용감대담무쌍함 안에서!! 정성 기울여] 그 특성을 잘 파악하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격려하며 다독여 주고 평강 안에 잘 살아가도록 주위를 잘 살피고 명철-기지와 지식과 지혜를 발휘하며 주께 여쭈며 문제를 해결하고 찬송하며, 그들을 보호-인도-양육하기를 목숨 걸고 싸워 이겨 퇴치시키며 지켜 왔던바 주님은 그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왕"이라 말씀하고 계셨다...쟁투 거쳐 취한 세상 권력의 속성은 (벌거벗은)폭력이요, 영적 참 권위는 진정한 깨달음과 기쁨 가운데 [그의 양무리에 들기를]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백성의 권한의 위임으로 오게 됨.
[롬2:6-16...*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12.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마7:12-14...*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6. who WILL RENDER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DEEDS: 7. to those who by perseverance in doing good seek for glory and honor and immortality, eternal life; 8. but to those who are selfishly ambitious and do not obey the truth, but obey unrighteousness, rath and indignation. 9. [There will be] tribulation and distress for every soul of man who does evil, of the Jew first and also of the Greek, 10. but glory and honor and peace to every man who does good, to the Jew first and also to the Greek. 11. For there is no partiality with God. 12. For all who have sinned without the Law will also perish without the Law; and all who have sinned under the Law will be judged by the Law; 13. for not the hearers of the Law are just before God, but the doers of the Law will be justified. 14. For when Gentiles who do not have the Law do instinctively the things of the Law, these, not having the Law, are a law to themselves, 15. in that they show the work of the Law written in their hearts, their conscience bearing witness, and their thoughts alternately accusing or else defending them, 16. on the day when, according to my gospel, God will judge the secrets of men through Christ Jesus.]
[마7:15-20...*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21-23...*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 하나님을 정말 참되게 알고 동행하자!!]]....왕이 백성의 삶과 됨됨이를 알고 인정하고 맞아주어 친 백성으로 선택하는 것이지 백성이 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님....왕이 어떤분인지 참되게 연구하여 알며, 왕의 뜻과 행한 길 알며 그 뜻대로 살 때 "내 백성"이라 하신다!!..[이스보셋]..Q의 보내심 받은 자리에서 깨어 있어 돌이켜 주님의 얼굴을 구했었더라면..[레갑과 바아나]..다윗왕을 참되게 알았었더라면....
***[이스보셋 = 수치(보셰트)+사람(이쉬)]의 어릴 때 이름은 에쉬바알("바알의 사람") = 이스라엘인인데 "바알의 사람"? = [아무데도 쓸데없는] "무용지물"이란 의미.....[므비보셋 = 보셰트(수치..타파)+ 메피(우상)]의 어릴적이름은 므립바알 = "바알과 싸우는자 = 은혜로 사는자"..5세 때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한 후 유모가 품에 안고 도망치다가 떨어뜨려 두 다리를 다친후부터 다리저는 장애가 평생 남았다. *** 바아나와 레갑은 다윗을(다윗의 행적-성품-신앙-가치관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오해하고 있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JC를 아는것!!"
===이스보셋이 살해되다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2.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지휘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3. 일찍이 [사울 생전에 기브온 사람들을 잔멸할 때에 살아남은]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우거함이더라
......바아나와 레갑은 브에롯 출신..... 브에롯은 가나안 족속 중 히위 족속에 속한 기브온에 딸린 성읍....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화친한 후 브에롯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에 속해 살다가 사울 왕이 생전 어느시점에 자의적 결정으로!! 이곳 사람들을 극심하게 탄압-멸절될 정도까지 (삼하21:1-2) 많은 사람을 살해하여 브에롯 사람들은 깃다임이라는 오지로 피신해야만 했다. 브에롯 출신인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에게 선발되어 군 지휘관까지 오르기는 했지만 사울 왕가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복수심을 지니고 있었을 것.
.....기브온 사람들은 아모리 사람들 중 히위족속의 남은 자.(삼하21:2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공당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책략으로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도모했던 사람들이다. 어찌되었든지간에 그들의 안전을 위해 여호수아가 그들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호와신앙으로 평화 언약을 맺었고, 그리하여 성전에서 잡무 맡은 섬김이로 역할 할당받아서 400여년 동안 함께 동화되어 평화로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아모리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 주었으나 그들의 토지와 자유를 박탈하고 그들의 신분을 종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여호수아 9장 23절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잃은 토지와 자유를 회복하려 하지도 않고 그들의 성전 봉사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모든 언약 중의 일부분도 어기지 않았다. )
그런데, 사울왕 때에 이르러 유다와 이스라엘의 영광을 구실 삼아 사울은 임의로 많은 기브온 사람을 거의 멸절에 이르기까지 죽여 근절시키려 했다. 사울은 [아마 신성한 언약도 폐지할 수 있고 어떤 행위도 무시할 수 있는] 왕으로서의 특권을 전횡함으로써 이런 일을 자행했던 것 아닐까..어찌보면 충동적이면서도 편파적이었던 그는... 기브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혹사하면서도 아말렉 왕 아각에게는 관대하게 사형을 면제해 주려는 모습으로 인해 사무엘의 꾸지람과 함께 "왕을버리셨다" 선언을 듣게되자, 뒤늦게라도 속죄하는 뜻으로(과도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그랬던 그였기에, 사무엘이 죽고나서 라마에 묻힐 그때, 애도하는 의미로 그 땅에서 그가 박수와 신접한 사람들을 다 쫓아낼 때(삼상 28:3 참조), (사무엘과의 소원해진 관계의 빌미가 되었던 아말렉족속을 떠올렸고...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서 [이 기회에] 이방족속들을 다 죽여 없애버리려 지나치게 열심 낸 나머지.. 더불어서) 기브온 사람들도 그렇겠거니 여겨 마구 죽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미 400여년 동안 성전의 물 깃는자, 나무하는자로 봉사해 왔었고, 이미 이스라엘에 동화되었던 차였기에, 아마 그들 중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지만...결국 자기 거처 브에롯을 떠나 깃다임으로 피신하여 거기서 우거하는 이방인이자 나그네로서 살고 있었는데, 요행히 이스보셋 휘하로 들어갔던 것 같고, 사울은 죽었기에 이스보셋에게 복수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리라.) [혹자는 아히멜렉과 함께 놉의 제사장들을 멸절시킬때로 보기도 한다....그의 제사장들이 학살당할 때 성전 봉사의 일을 하고 있었던 그들도-기브온 사람들도- 함께 죽였다는 것이다.] ...어떻든간에, 순전한 자의 피를 흘릴 뿐만 아니라 나라가 그들을 보호해야 할 신성한 법을 교란시키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죄를 짓는 일이다. 사울의 집이 왜 망했는가를 보라. 그것은 피를 많이 흘린 집이기 때문이다.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끝까지지켜, 조부-부친 잃고 두 다리 절룩거리는(외톨이) 장애자 므비보셋을 [그의 아들 미가의 재산에 대해서는 도중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므비보셋의 일편단심을 알고는 원상회복시켜주었을뿐아니라]왕의 식탁 참여로 공궤하며 평생 돌보고 있음..
....[삼하5:6-8.(("대적원수마귀사탄체계하의 그의 수하들로 상징되는, 영적 눈 감겨 있고 손발 마비된 줄 모르는 세인들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극심한 모욕이 닥쳐 올 때...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여부스 사람들이 그들을 공략하러 온 다윗을 (존재가치가 없는,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병신 중에 병신 = 맹인+다리저는자에 불과하다고 놀려대며 극단적으로 조롱하였던 바, 속담이 되어 회자될 만큼 그의 마음 깊이 상처가 되었을 수 있었으나, 임마누엘 주님은 그들 자신이야말로 그런자였음을 여부스점령 통해 확증하셨으며 + 그 조롱의 말은 삼하9장, 시 23:5,6에서 치유-극복되었음을 밝히 드러내고 있음 = JC를 얻었음을 암시하고 있음 묘사)) ...*6.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7.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8.그 날에 [여부스족속이 내뱉은 능욕-조롱의 말에 마음 상했었을 수 있지만, ((나는 비록 맹인이요, 저는자...진정 나 홀로는 그러한 자이나, 나의 치료자-구속자, 내 영광, 내 머리를 드시는 주님은 무적/승리의 용사-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흔들림 없이 주님 의지함의 산 믿음으로 주께 구하여 보게 하신 바 발견된 그 길 따라 점령-극복할 수 있었던 바]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여기서는 대적원수마귀사탄)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다윗의]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삼하9:1-13..*1.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2.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3.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4.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5.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6.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9.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10.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11.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12.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13.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시23:5,6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마21:13, 14...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5.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정신차리고 참되게 깨어나야함)
6.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7.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헤브론-마하나임 직통 연결, 사해 횡단길)로 가
8.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극히 단편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신학적 사고 오류-오해-착각 결과, 주께 확인 없이!! 그대로 실행 :: 그 결과는 홀로코스트!!) 하니
9.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구속하신..값 치르고 되사오셔서 당신 소유 삼으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0.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JC의 나라는 이땅에서부터 복음 전파와 실행 통해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곧 생명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나라임을 드러냄,,.그 어떤 인생에 대해서도, 심지어 원수의 생명 상실조차 아파하며!! 스스로는 결코 원치 않고 모든 이마다 복음 듣고 영접하며 회개하고 고유한 생명의 유일무이하신 주인이신 JC께 돌이키기를 원함..
11.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12.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
NASB]제4장
1. Now when Ish-bosheth, Saul's son, heard that Abner had died in Hebron, he lost courage, and all Israel was disturbed.
2. And Saul's son [had] two men who were commanders of bands: the name of the one was Baanah and the name of the other Rechab, sons of Rimmon the Beerothite, of the sons of Benjamin (for Beeroth is also considered [part] of Benjamin,
3. and the Beerothites fled to Gittaim, and have been aliens there until this day).
4. Now Jonathan, Saul's son, had a son crippled in his feet. He was five years old when the report of Saul and Jonathan came from Jezreel, and his nurse took him up and fled. And it happened that in her hurry to flee, he fell and became lame. And his name was Mephibosheth.
5. So the sons of Rimmon the Beerothite, Rechab and Baanah, departed and came to the house of Ish-bosheth in the heat of the day while he was taking his midday rest.
6. And they came to the middle of the house as if to get wheat, and they struck him in the belly; and Rechab and Baanah his brother escaped.
7. Now when they came into the house, as he was lying on his bed in his bedroom, they struck him and killed him and beheaded him. And they took his head and traveled by way of the Arabah all night.
8. Then they brought the head of Ish-bosheth to David at Hebron, and said to the king, "Behold, the head of Ish-bosheth, the son of Saul, your enemy, who sought your life; thus the LORD has given my lord the king vengeance this day on Saul and his descendants."
9. And David answered Rechab and Baanah his brother, sons of Rimmon the Beerothite, and said to them, "As the LORD lives, who has redeemed my life from all distress,
10. when one told me, saying, 'Behold, Saul is dead,' and thought he was bringing good news, I seized him and killed him in Ziklag, which was the reward I gave him for [his] news.
11. "How much more, when wicked men have killed a righteous man in his own house on his bed, shall I not now require his blood from your hand, and destroy you from the earth?"
12. Then David commanded the young men, and they killed them and cut off their hands and feet, and hung them up beside the pool in Hebron. But they took the head of Ish-bosheth and buried it in the grave of Abner in Hebron.
=====
사무엘하 4장 (개요)
아브넬이 살해되었을 때, 아직 이스보셋의 휘하에 있던 지파들을 한 친구가 완전히 몰락시킴에 대해서 다윗은 당황했다. 그런 일을 위하여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다윗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에 섭리자께서 이스보셋을 제거함으로써 그 일을 이루신다.
1. 이스보셋의 두 종들이 직접 그를 죽여서, 그 목을 다윗에게로 가져간다(1-8).
2.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상 주기는커녕 처형해 버렸다(9-12).
--------
이스보셋의 피살(삼하 4:1-8)
여기서 살펴 볼 내용은 이러하다.
Ⅰ. 사울가(家)의 연약함. 사울의 집은 계속 약화일로에 있었다.
1. 보좌에 앉아 있던 이스보셋의 손이 연약해졌기 때문이다(1절).
이스보셋이 지금까지 강했던 것은 아브넬의 뒷받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죽자 이스보셋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아브넬이 비록 홧김에 자기를 버렸지만, 결국에는 다윗과 좋은 협약을 맺어 주기를 이스보셋은 은근히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희망도 좌절되고, 이스보셋은 자기가 친구의 저버림을 당함과 동시에 원수의 손에 떨어져 버린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나아오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랐고, 다윗과 어떤 협정을 맺어야 할지, 또는 그냥 있어야 할지 전혀 몰랐다.
2. 자기 아버지 요나단의 권한에 의해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므비보셋은 절름발이가 되어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4절).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죽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의 유모는 블레셋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결과적으로 그들이 사울의 집안을 멸절시키기 위해 일단의 군사를 보낼 것을 알았다. 특히 이제 그 왕관에 대한 후계자인 자기의 젊은 주인(어린 므비보셋)을 노리고 올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유모는 어떤 안전한 장소에 숨기기 위해, 또는 아무도 추적 해올 수 없는 요새로 가기 위해 그를 품에 안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런데 필요 이상으로 서두른 나머지 그녀가 아이를 놓쳤고, 그 결과로 뼈를 다치고 일생 불구자로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궁정이나 전장에도 적합하지 않은 자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 때에도 큰 슬픈 사건이 발생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그들이 일생 동안 불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방백들, 위인들, 그리고 요나단과 같이 선량한 자의 자식들, 게다가 잘 기르고 돌보는 아이들도 늘 안전한 것은 아니다.
유아기에 우리가 많은 위험을 당했지만 우리의 사지와 감각기관이 멀쩡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그리고 아무런 위험도 없는 세계로부터 천사들을 보내사 그 품으로 우리를 안게 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자(시 9:12).
Ⅱ. 사울의 아들 살해. 여기서 이런 얘기를 듣는다.
1. 살인자가 누구인가, “바아나와 레갑”이다(2, 3절).
그들은 시므온과 레위처럼 친 형제들인데, 악의 반려가 되었다.
그들은 당시 또는 과거에 이스보셋 자신의 종들이요, 그에게 고용되어 있던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의 두목을 처치한 것은 그만큼 더 비열하고 배신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스보셋과 같은 지파, 곧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고향은 브에롯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삽입구적으로)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브에롯이란 도성은 원래 기브온 족속 거주지로서 정체를 숨겼지만- 참되게 항복한 그들을 성전 위한 봉사자로서의 역할이 맡겨졌고 그 땅은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준 바 되었으나 (수 18:25 에서 보다시피), 왜 그런지는 몰라도 사울이 기브온 주민들을 고의적으로 학살했고 거기서 살아남은자들은 천연적으로 더 은밀한 곳 깃다임으로 옮겨가서 부리내려살았으니... (만일 풀러씨의 지도를 따른다면) 그 도성은 보제스와 세헤라는 두 산악 중간에 자리잡은 곳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씌어진 당시에 브에롯 사람들은 바로 그곳에 살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뿌리를 박았고 다시는 브에롯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의 한 도성이었던 브에롯(수 9:17)은 잊혀졌고, 깃다임이 그후 오랫동안 유명해졌다(느 11:33).
2. 살인은 이렇게 진행되었다(5-7절).
(1) 이스보셋의 나태성을 보라. 그는 대낮에 침상에서 잠을 잤다.
스페인에서처럼, 대낮의 그 지방은 너무나 더워서 일터에서 물러나야 할 만한 그런 때는 연중 그 어느 때에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스보셋은 게으른 사람이요, 편안을 좋아하며 일을 싫어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난세지국에 그는 의당 전장의 선봉에나 다윗과의 협정을 위해 참모회의를 주제하고 있었어야 했을 그 때에, 침상에 누워서 잠을 잤다.
그것은 그의 손이 약해졌고(1절), 따라서 머리와 가슴도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원기를 돋우고 노력을 더하게 해주어야 할 난관이 오히려 우리의 사기를 저하시키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왕관도 생명도 저버리고 만다. “잠을 사랑하지 말라. 가난과 파멸이 임할까 함이니라.” 나태한 사람은 쉽게 멸망의 포로가 된다.
(2) 바아나와 레갑의 배신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군대에게 줄 밀을 가지러 간 체하며, 이스보셋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왕의 곳간이나 침실에 드나들기가 용이했다.
그래서 그것이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밀을 가지러 갔다가 누워 자고 있는 그를 죽인 것이다.
우리도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 모른다. 누워 잠자고 있을 때, 우리가 깨어나기 전에 죽음의 잠을 자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어떤 예기치 않는 운명적 사건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이스보셋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바로 그의 신하들이 그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3. 살인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실을 두고 개선가를 불렀다.
마치 어떤 지극히 영예로운 일을 했으며, 다윗을 유리하게 한 일이므로 정당화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칭찬 받을 일로 생각하고,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로 가져갔다(8절). “보소서, 당신의 원수의 머리이니라.” 그들은 이것보다 더 다윗의 마음에 드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정의의 도구가 되었고, 하나님의 칼을 찬 일군들이 되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께서 오늘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당신의 복수를 갚으셨나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하나님도 다윗의 명예도 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들의 출세와 다윗 궁정의 자리만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다윗의 생명에 관심이 있으며, 그의 왕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가 통일 국가의 보좌에 앉게 되기를 열렬히 바라는 듯 가장했던 것이다. 예후도 자신과 자기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는 야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만군의 여호와를 향한 열심”을 핑계댔던 것이다.
------------
살인자들 처벌(삼하 4:9-12)
여기서는 이스보셋을 죽인 살인자들에 대한 처벌을 보게 된다.
Ⅰ. 그들에게 선고가 내려졌다.
증거가 필요 없었다. 그들의 입이 스스로를 고발한 셈이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자랑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들에게 범죄의 극악성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대법관이 된 자기의 손에 피의 호소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직능상으로 다윗은 그 피의 복수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더 단호한 처형을 주장했을 것이니, 그 이유는 요압을 살려 둔 일로 인해서 당한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살인자의 손에서 피살자의 피를 구하지 않느냐? 보상할 수 없으니, 그들의 피를 대신 취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다음을 살펴 보자.
1. 그가 그 범죄를 얼마나 악하게 여겼는가(11절).
이스보셋은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요,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지도 않았고 그들을 해하려고 음모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대해서 다윗은 만족히 여겼다.
이스보셋이 자기에게 반대를 하더라도 그것은 악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왕관에 대한 권리를 오해했기 때문에 오는 실수와, 남들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고 다윗은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은 우리의 친구뿐 아니라, 원수들까지도 최대한으로 호의적으로 생각해 주라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점에서는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자들도 의로운 사람들일 것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현재의 내 생각 때문에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다윗은 비록 그에게 부당한 많은 고난을 끼쳐 주었지만, 이스보셋이 정직한 자임을 시인한다.
그 방법이 범행을 더욱 가증시킨다. 그의 생활이 되어야 했던 바로 그의 집에서 그를 살해한다는 것, 또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는 침상에서 살해한다는 것, 그것은 배신적이요, 야만스런 일이며, 아주 비열한 짓이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양심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생각만 해도 분개할 일이다.
암살이란 살인 중에서도 가장 혐오스럽고 악질적인 방법이다. “자기 형제를 은밀히 살해하는 자에게 저주 있으라.”
2. 그는 전례를 인용했다(10절).
그는 사울이 죽은 것이 다윗에게는 희소식이리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알려 온 자를 처형했던 것이다.
아말렉 사람이 사울이 자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는 말은 전혀 없다. 단지 그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 왔다고만 했다.
따라서 조사해 본 결과 아말렉 사람이 그의 죽음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거짓으로 판명되었고, 결국 자기의 거짓말 때문에 목을 잃게 되었던 것 같다.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내가 그를 범인으로 여기고, (자신이 기대했던 대로) 충신으로 여기지 않았노라. 내게 사울의 왕관을 가져 온 자들을 말이다. 그러니 내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온 자들을 죄없다 할 수 있겠느냐?”
3. 다윗은 맹세로써 이 선고를 비준했다(9절).
“내 생명을 여러 환난 중에서 구해 주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그래서 다윗은 자기 주변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 자를 위해 중재에 나서지 못하도록 단호한 말을 한 것이요, 자기가 약속된 보좌에 앉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덕분일 뿐이며,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불법적인 길로 가지 않겠다는 심사를 잘 표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를 온갖 역경 중에서도 구해 주셨고,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도록 도우셨다.
따라서 자기의 왕관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이요, 자기 자신의 일을 해 나가려 할 것이다.
아직 그에게 남은 폭풍이 많이 있었지만, 이미 하나님이 모든 역경에서 구해 주신 것처럼 말했다.
그것도 다윗이 하나님은 지금까지 구해 주셨듯이 앞으로도 구해 주시리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이리하여 그는 그 사람들의 처형을 위한 근거를 마련했다(12절).
이 일은 다윗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한 일이므로, 사형을 시키는 것은 가혹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 다윗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는 악행을 몹시 혐오한다는 것을 보이려 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감사드렸다”(삼상 25:38, 39). “그는 복수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인들이 이스보셋을 쳤다면, 그들은 사형을 받아야 한다.
(2) 이리하여 자기들이 이 일로 인하여 보상을 받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자들이 저지른 큰 무례를 다윗은 분개했던 것이다.
그들이 다윗을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 곧 왕관을 위해서는 피 흘림도 개의치 않는 그런 인간으로 보았으니 이보다 더 다윗을 모욕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Ⅱ. 형이 집행되었다. 살인자들은 법에 따라서 처형되었다.
그들의 손과 발은 묶였다. 온 몸을 묶은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은 율법이 금하고 있었다.
단지 그들의 손발만 묶었으니, 그것은 in terrorem―즉 남을 겁 주기 위해서, 다윗의 정의의 기념비를 위해서, 그리고 다윗은 통치자가 되기에 적합한 자임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또 나아가 다윗은 자기 자신만의 권세를 생각하고 있는 자가 아니며, 사울의 집에 대해 조금도 원한이 없으며, 단지 공공의 안녕만을 진실로 염원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이 두 살인자들을 얼마나 당황하게 했으랴! 얼마나 무서운 실망이었으랴!
그리고 어떤 부도덕한 행실, 전쟁과 박해, 사기와 약탈로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의 권세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를 종교를 빙자하여 방백을 살해하고 엄숙한 계약을 파기하며, 나라를 황폐하게 하며, “자기 황제를 미워하여 내어 쫓으며, ‘여호와께 영광이로다’라고 말하면서 죽이며, 자기들은 하나님께 좋은 일을 했노라”고 생각하는 자들, 이런 모든 자들도 그런 일을 당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교회와 교회의 명분을 위해 일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그리스도는, 기독교는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늘의 공적을 얻으리라고 생각하던 자들은 지옥의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다.
...=====
==호크마==
사무엘하 4장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ㅇ헤브론 -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즉위한 왕도(王都)이다.2:1 주석 참조.
ㅇ손 맥이 풀렸고-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푸 야다우'는 '손이 약하여 졌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약하여졌다'는 동사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 곧 쇠진(衰盡)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렘6:24;50:43;겔 21:7).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 그는 아브넬의 반역 행각과 비참한 죽음의 소식에 접하고선 이중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ㅇ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 사실 아브넬의 피살 소식은 온 이스라엘을 당혹감과 두려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영웅적인 한 인물에게 국가의 운명을 의존하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는 그러한 인물의 급작스런 죽음은 전국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2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장 두 사람이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바아나요 하나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지파에 속하였으니
ㅇ군장 - 이에 해당하는 '사리 게두딤'은 2:8에 나오는 군장, 즉 '사르 차바'와는 다른 말이다. 왜냐하면 '사르 차바'는 '군대 사령관'(chief of army)이란 뜻이지만 '사리 게두딤'은 단순히 '무리들의 우두머리'(captains of bands)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여기서의 '군장'은 군 전체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총사령관이 아닌 그 휘하에서 한 단위를 책임지던 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공동 번역은 이를 '특공대 대장'으로 번역하고 있다.
ㅇ바아나...레갑 - '바아나'(Baanah)의 뜻은 '낙타를 타는 사람'이다. 이들은 친형제로서 악을 행하는 데 서로 손을 적시었다(5-7절).
ㅇ베냐민 족속...림몬의 아들들 - 바아나와 레갑의 혈통이 소개된다.그들은 이스보셋과 같은 베냐민 지파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울 왕가를 무너뜨리는 반역의 선봉이 되었음은 비열한 공명심과 사악한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8절 주석 참조.
ㅇ브에롯 - 이스라엘이 기브온과의 조약(條約)을 맺을 때 얻은 네 성 중 하나이다(수9:17).후에 이 성읍은 베냐민 지파의 14성읍 중 하나로 편입되었다(수 18:25).한편 많은 학자들이 이 '브에롯'(Beeroth)을 예루살렘 북방 15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황폐한 도시'엘비레'(el Bireh)와 동일시여긴다(Josephus,Robinson,Wycliffe).
3 일찍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 우거함이더라
ㅇ일찍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 '깃다임'(Gittaim)이 어디인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느 11:33에 의하면 바벧론 포로 귀환 후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 중의 하나로 '깃다임'이 언급되어 있는데 동일 지명 인지도 확실치 않다. 그런데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이주해 우거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두 견해로 나뉘고 있다. (1) 길보아 전투 (삼상 31장)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을 습격하자 브에롯을 버리고 깃다임으로 피신했다고 하는 견해이다(Keil,Patrick). (2)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21:1,2)그곳을 떠났다고 하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벧하우젠(Wellhausen)은 깃다임의 블레셋 '가드'(Gath),또는 '림몬(Rimmon)이라고 주장하였다(Lange).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1)번의 견해는 모순된다. 왜냐하면 블레셋의 지경인 깃다임에 다시 들어간 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증명할 길은 없지만,(1)번의 견해보다 (2)번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 같다.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ㅇ절뚝발이 아들...므비보셋 - '므비보셋'(Mephibosheth)의 뜻은 '부끄러움을 없애 버리는 자'이다. 그런데 다른 성경에 보면, 그의 본명은 '므립바알'(Meribbaal)인 것으로 나와 있다(대상 8:34;9:40). '므립바알'은 곧 '바알로 만족하는 자'란 뜻이다. 따라서 이같은 이름이 므비보셋으로 바뀌게 된 동기는 아마 에스바알이 이스보셋으로 바뀐 그것과 똑같을 것이다. 즉 바알 우상 숭배와 관련'바알'이란 이름을 혐오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름 속에 철저히 '바알'이란 말을 배격한 것이다(Keil &Delitzsch,Lange).2:8 주석 참조. 한편,여기에서 저자가 므비보셋의 신상을 자세히 소개한 이유에 대하여선 다음과 같은 두 견해가 있다.(1)단순히 뒤에 벌어질 사건(9장)의 배경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Rust).이 견해는 므비보셋의 불구상태(절뚝발이 상태)가 사울가의 몰락(이스보셋의 죽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다.(2)사울가의 완전한 몰락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하였다는 견해이다(Keil &Delitzsch,Matthew Henry,Hertzberg,Pulpit Commentary).즉 이스보셋이 죽은 후(5-7절)에 사울가의 유일한 후계자로 므비보셋이 남으나,그는 절름발이어서 도저히 왕위를계승할 수 없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이다.따라서 사울가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몰락했음을 본 구절이 보여준다는 주장이다.우리는 1-4장까지의 문맥이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몰락을 다루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위 두 견해 중 두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ㅇ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올 때에 - 길보아 전투에서의 블레셋과의 싸움 중 요나단이 전사하고 사울은 자결한 소식(삼상 31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된 때를 가리킨다.
ㅇ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 아마도 블레셋군의 승전(勝戰)소식을 접한 므비보셋의 유모는 블레셋인들이 사울 왕가를 멸절시킬 목적으로 므비보셋마저 제거할 군사를 보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리하여 심각한 위기 의식에 젖어 므비보셋을 안고 은신처를 찾아 도피하였을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464).
5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행하여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저가 낮잠을 자는지라
ㅇ볕이 쬘 때 즈음에...낮잠을 자는지라 - 여기서 '볕이 쬘 때 즈음'이란 '정오','대낮'을 의미한다.
팔레스틴 지역의 풍습으로 볼 때,이때는 이 지역 사람들이 오침(午寢)을 즐기는 시간이었다(2:29,32;3:26).이러한 습관은 사막 지대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보셋이 이때에 낮잠을 잔 것은 헨리(M.Henry)가 해석한 대로 이스보셋의 극단적인 나태를 보여 주는 행위는 아니었다.
한편,이스보셋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가 이때에 이스보셋의 집에 온 것은 그가 잠들고 있는 동안 그를 암살하려고 했던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6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ㅇ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 두 군장이 어떻게 해서 이스보셋의 침실에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여기에서 밀은 병사들에게 줄 군량(軍糧)을 의미한다(Keil,Lange).이렇게 볼 때 그들은 군량,곧 밀을 가지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이스보셋의 침실에까지 무사히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들은 이러한 군량 수송의 일을 자주 맡아 했기 때문에 문지기들의 의심을 조금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 구절을 엉뚱하게도'그 집의 문지기가 밀을 까부수다가 조는 동안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라고 해석해 놓았다. 영어 성경 중 이같은 해석을 따르는 것으로는RSV와 Jerusalem Bible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가장 오래된 성경이자 전통적 권위를 지닌 맛소라 사본(Masoretic Text)과 상충된다. 그리고 그같은 개역(改譯)의 근거도 어디서 취하였는지 알 수 없다.따라서 그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KJV,NIV,Living Bible 등도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을 취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7 저희가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상 위에 누웠는지라 저를 쳐 죽이고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
ㅇ집에 들어가니 - 5,6,7절에서 두 군장이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갔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그 집에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출입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중복적(重複的)표현법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점진적으로 세밀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Erdmann,Keil & Delitzsch,Lange,Philippson). 즉, 5절은 두 군장이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간 단순한 사실만을 보여주며,6절은 5절보다 더 상세하게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갔는가를 보여 준다.그리고 7절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 저지른 잔인한 범죄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복된 말들은 한 가지 사실을 점진적으로 확대 설명해 주기 위한 표현들이다. 이렇게 볼 때, 6절에서 두 군장에게 배를 찔리운 자는 어떤이의 견해처럼 그 집의 문지기가 아니라 본절에서 두 군장이 쳐죽이고 목을 벤 바로 그 이스보셋인 것이다.한편 같은 맥락에서 6절의 '도망하였더라'는 말은 본절에서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라는 말로써 확대설명되어 있다.
ㅇ아라바 길 - 아라바 길(the way of the Arabah)은 당시 이스보셋의 왕도(王都)마하나임(2:8)에서 헤브론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이곳은 아브넬과 그 군대가 기브온 전투에서 요압과 휴전한 후 마하나임으로 퇴각할 때 거쳐갔던 길이기도 하다. 2:29주석 참조. 그런데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의 거리는 약 95km였다. 따라서 레갑과 바아나는 밤새도록 쉬지않고 약 20여 시간 동안 시속 5km 이상의 속력으로 걸어 헤브론에 도착했을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을 향한 악인의 열심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롬 3:13-17).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이러한 열심은 자신들의 죽음을 재촉하였을뿐임을 유의해야 한다(8-12절).
8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ㅇ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 이 말은 두 군장, 곧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 바치면서 이스보셋을 비난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와 같은 비난의 말은 근거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보셋 진영과 다윗 진영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보셋이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고 다윗을 살해하고자 했던 흔적을 우리는 조금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러한 말은 다윗의 후한 보상을 바라고 저지른 자신들의 잔인한 범죄(5-7절)를 마치 당연한 처사인 양 미화시켜 보이려 했던 비열한 언사(言辭)였음을 알 수 있다(Lange).
ㅇ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 이처럼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사울의 아들' 임을 강조한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 옛날 사울로부터 당한 생명의 위협을 회상토록 함으로써 사울 왕가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삼상18:10,11;19:8-17;23:14).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는데(9-12절)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간의 의식(意識)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
ㅇ여호와께서...같으셨나이다 - 바아나와 레갑이 이렇게 말한 동기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국을 반드시 세우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그들이 상당한 보상을 바라고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목을 가져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그들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호도(糊塗)하기 위해 이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인 것이 분명하다(Keil,Lange,MatthewHenry).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이스보셋을 거명할 때,단순히 이스보셋이라고 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그들은 자신들의 잔인한 범죄를 다윗 앞에서 감추기 위해 이와 같은 얕은 꾀로 공정한 마음을 혼란케 하려 하였던 것이다.
9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ㅇ내 생명을...건지신 여호와 - 다윗이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은 레갑과 바아나의 범죄 행위가 다윗의 생명 유지에 아무런 필요도 없었던 것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즉, 다윗 자신이 지금까지 여러 환난 가운데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누구의 도움때문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 따라서 이는 바아나와 레갑이 말한 대로 실제로 이스보셋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 할지라도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 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무마(撫摩)해 보려 한 그들의 말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10 전에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사울이 죽었다 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저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
ㅇ여기에서 다윗은 레갑과 바아나아게 일전에 사울 왕의 죽음의 소식을 보고한 아말렉소년을 자신이 시글락에서 처벌한 사실(1:1-16)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목적은 곧 바로 이 두 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정당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즉, (1)과거 죽임을 당한 사울 왕은 실제로 무고한 다윗을 죽이려 했던 죄인이었고 (2)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 아말렉 소년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중에 그렇게 했다고 사려(思慮)됨에도 불구하고(1:9,10)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함부로 죽였다는 이유로 아말렉 소년을 처벌하였다(1:14-16). 따라서 이제 (1) 다윗을 살해하려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는 무죄한 이스보셋을 (2)그것도 무자비하게 고의로 목을 벤 레갑과 바아나의 행위(5-8절)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인 것이다.
ㅇ시글락 -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 하사 받았던 은신(隱身) 성읍이다.1:1 주석 참조.
ㅇ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 - 여기서 '갚음'에 해당하는 '베소라'는 본래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악한 소식에 대한 죽음의 보상을 의미한다.
11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저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ㅇ악인이 의인을...죽인 것이겠느냐 - 여기에서 다윗은 신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법적인 차원(the legal sphere)에서 악인(wicked man)과 의인(righteous person)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즉, 이스보셋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볼 때는 죄인일지 모르나,법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사울의 왕권을 찬탈하거나 혹은 어느 누구를 죽이려 한 죄인은 아니었다.반면 바아나와 레갑은 법적으로 무고한 이스보셋을 잔인하게 살인한 악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살인 행위는 법적으로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분명한 범죄 행위였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 p.311).
ㅇ피흘린 죄 - 1:16 주석 참조.
12 소년들을 명하매 곧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
ㅇ수족을 베어...머리를 가져다가...장사 하였더라 - 다윗의 공정한 심판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다윗이 바아나와 레갑의 수족(手足)을 벤 것은 그들이 손과 발로 무고한 자의 목을 베어 헤브론까지 가져왔던 까닭이다(Keil & Delitzsch,Pulpit Commentary). 또한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장사지낸 것은 그가 법에 저촉될 만한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아말렉 소년을 죽인 그 사건(1:1-16)과 마찬가지로 (1)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2)의와 불의를 공정하게 가리어 처단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의로운 통치의 결정적인 요소, 곧 공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다윗이 바아나와 레갑의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 달은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백성들에게 악인의 처참한 말로(末路)를 보여 줌으로써 범죄치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함이다. (2)다윗 왕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공의(公義)를 널리 증거하기 위함이다. (3)아브넬의 죽음의 경우 (3:31-37)와 마찬가지로 이번 이스보셋의 죽음의 경우에도 전혀 무관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Lange,Keil & Delitzsch).
ㅇ아브넬의 무덤에 - 이처럼 다윗이 이스보셋의 시신을 아브넬의 무덤에 합장(合葬) 한 것은 생전에 저들의 관계를 고려해서였을 것이다. 즉 그들은 생전에 사울 왕가의 왕과 군장 간이었으니(2:8,9)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Lange).
===
==="창조 과학" 논란.....돌아보라, 그대여, ["창조 과학"을 주장함으로 야기하는 그 논란의 가치와 의미가 주님께 드리는 경배인지를 되짚어보라!!] 그대가 붙들고 주목-앙망/동행-거하며 누리며 사는 바 참생명 그리스도를 위함인가 == Q으로 Q 되시게 하라...
그대가 믿는다 함은 그 정의는 무엇이며, 그 내용은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믿는 것인가...천지만물과 우주, 모든 차원과 영역을 창조하신 분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JC(=하나님의 말씀, 말씀이신 하나님-유일한 참 생명이요 근원적 생명-사람들의 빛) 그분과 그분에 관한 성경의 진술들을 마음에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참생명-말씀이신 그분을 주관적으로 날마다 실지로 교통하여 알며 누림인가, 진리따라 깨닫게 하시는 바를 상호 설득-공급하여 몸을 세움 위해 [그 어떤 거리낌이나 편견도 없이] 말씀하시는 분을 듣고 공통의 고백으로 함께 주 앞에 기꺼이 서고자 함이 있는가......"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와 주님의 창조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만큼 신묘막측하며 "참되게 믿고 거듭난 제자-증인으로서 유한한 우리는 주님의 창조가 현재(와 아마도, 미래에서도...과학은 그 자체로서 스스로 제한을 두는 바, 엄정한 과학자라면 드러난 현상만을 그 대상으로 하여, 실험 증명 통해 설명 가능한 부분만을 과학적 [상대적] 사실-그것도 차후에 뒤집어질 수 있음을-로 정의하고 받아들인 그 바탕 위에서 더 나아가려 하며, 그것을 응용하여 삶의 편리를 도모하려한다는 목적과 제한을 두고 있기에)의 과학적 사실 증명과 그 기술적 방법론적 범주만으로는 도저히 다 드러내고 묘사하거나 설명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함을 ((신중하게 접근해 보는 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다.
........하나님을 믿는!! 그대가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이 내게 영생을 얻게 하셨노라" 할 때, 그 정의는 무엇이며, 그 내용은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믿는 것인가...천지만물과 우주, 모든 차원과 영역을 창조하신 분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JC(=하나님의 말씀, 말씀이신 하나님-생명-빛) 그분과 그분에 관한 성경의 진술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분을 주관적으로 날마다 실지로 교통하여 알며 그대의 생명으로서, 존재 양식과 패러다임의 근원과 기준으로서 삼아 실지로 누림의 진복으로 살고 있음인가, 아니면 단순한 지적 동의인가... 물론 주와 하나됨의 교통(교제, 사귐) 통한 참 신앙의 주관적 체험과 체득이 그토록 중요한 선결요건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새 사람] 그리스도의 교회, 곧 생명 그리스도의 유기체적 몸의 건축 위해 함께 상호 그리스도를 공급함의 목적으로서 설득-교통하고자 함이라면 신앙 고백-신학적 공동 이해의 관점에 서야 함은 당연하리라......"창조주 하나님을 성경대로 믿는다" 함은 영원이전부터 계시며 영존하시며 영생하시며 완전한 지식-지혜를 가지고 갈망하신 그대로 창조하신 시공간 과 역사의 방향성 따라 이루어 가고 계심을 믿는다 함이요, 그분은 바로 절대 영생하시는 창조주-주권자-영원유일무이한 Faith and Truth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은 그분 자신이시요 그분은 식언함 없으심을 붙들 때, 삼위일체 하나님 안으로 하나 되어 들어가 그분을 누리며 친밀한 앎의 생명 삶을 영위한다...절대유일무이하게 식언하지 않는 Faithful and true이시기에 창조에 관해 그분이 선언하신 바를 그대로 붙들 때 신앙은 시작된다...그분이 유한한 세계에 대해 열어두신 은총을 특별 은총과 일반은총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일반은총이란 햇빛과 비를 주심처럼 [주님 주신 생명/목숨 받은 자라면 그누구라도 차별없이 **주님은 그 누구한 사람도 예외없이 특별은총 안으로 들어오기를, 즉 JC를 참되게 믿는 믿음을 통해 거듭남/구원/영생 얻기를 바라고 계신다**]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베풀고 계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명심하여야 하는 것은...그분의 절대적 유일무이와 주님의 창조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만큼 크고도 신묘막측하며 "참되게 믿고 거듭난 제자-증인으로서 유한한 시공간을 사는 우리는 무한하신 주님의 창조가 현재(와 아마도, 미래에서도...과학은 그 자체로서 [너무나도 좁고 또 작아서!!, 게다가 스스로 드러난 피상적-객관적 현상을 실험 증명 통해 설명하고 입증하여 "객관적 사실로 규정하여(이것조차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언제라도 그 진술은 다른 증거에 의해 바뀔 수 있는 바 상대적임을 인정하며) 실생활 영역에 도움 주고자 한다는 그 나름대로의 제한된 목적을 자체에 설정하여 두었기에, 과학적 사실 증명과 그 기술적 방법론적 범주만으로는 참진리이신 주님을 믿는 이가 보는 바 주님의 창조는 [과학이라는 그릇 안에 담아보려할수록] 도저히 다 담을 수도 드러내고 묘사하거나 설명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함을..... 신중하게 접근해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이다.
.....나름대로 거듭난 참 믿음 가졌고 그로 인해 산다 하는 이라도, 주의해야 할 것은...그 누군가가 있어서 그가 발견해 낸 바에 대해 "자의적으로" "창조 과학"이라 말하며 특화시켜 다른이들의 신중한 견해를 "타협"이라 폄하-폄훼하면서 동시에 절대화 하고자 주장할 때에는, 그 범주와 한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거듭난 믿는이들이 보기에는], 또 하나의 [단지 부분과 조각들의 모음들을 나름대로 모아 재배열-구성하여 만들어 낸...(고전13:9, 13..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사이비 신학-사이비 과학에 불과한 기괴한 우상을 내세우고자 함이 될 수도 있음이다.
....간략하게 돌아보자면, ."다위니즘[종의 기원...종에서 종으로의 대진화]"은 실지로 허구임이 만천하에 이미 드러난 상태가 아니던가??.......유독 과학에서 도발적인 무신론자들의 농간에 말려들어 무용한 논쟁에 함께 휩쓸려들어가려는가..?? ....그들 입장에서 볼 때, [개체에 있어서의 소진화 영역을 설명하려 하여] 종종 사용하는 "진화"라는 단어는 일종의 증명 불가한 또 하나의 거짓 믿음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전자학에서 볼 수 있다...유전자, DNA는 사슬형태로서 사슬을 늘어뜨려보면 아미노산 단백질ATGC(아데닌-데아닌-구아닌-시토신)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놀랍게도 (유전정보 관련 DNA스위치가켜져서 활성화 되어 목표단백질 생산해 내어 발달단계로 발현되도록 유전정보가 활성화되는 것을 전사라 한다) 그 안에 유전정보가 들어있고, DNA사슬이 패킹된 것을 염색질, 그 묶음을 염색체라 하고 몸과 관련된 것을 상염색체, 성과 관련된 것을 성염색체라 하여 사람의 염색체는 44+XY로 표현하고 있다.
......유전학의, 분자 생물학 영역에서 유전자 풀(gene pool)개념이 이미 정립되어 있다.... 사람의 유전자(DNA)는 2만개, 침팬지는 6% 모자라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가축들은 몇 십개 정도...사람의 유전자의 작동을 볼 때 임신 되어 태중의 발생부터 임종때까지... DNA는 대개 정해진 순서대로 발현되고 있으며 간혹 켜지지않던가 약간 변형되었다가 원상회복되었다가 소멸되거나 다음 대로 그 형질이 넘어가기도 하는데...) 유전학 연구자들중 무신론자라면 그들은 종종 "자연"이 마치 인격을 가진, 스스로 생각하며 선택하며 무엇이든지 원하는 바 만들어낼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과 능력 지닌 그 어떤 능력 가진 조물주처럼 [그들 마음에 상정한 바] 여김으로써 ("진화"란 개념에 필수적인 바 "자연"을 이끌어들여 설명하는 사람 그 자신이 자각-자인하고 있든 아니든간에)교묘히 신격화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이라는 개념보다 오히려 그 단어 대신 "영원히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전지전능-유일무이하신 창조주"를 넣어 설명할 때라야 과학적 사실 증명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사정이 이렇기에 먼저 이 부분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주 앞에서 기도하며 숙고해 오던 믿는이들이 "조직신학"으로 발전시켜 왔던 것 아닐까...이제, 신학과 과학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이 즐겨 쓰는 "자연 선택", "진화"란 말 대신 다른 용어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과학신학의 영역인 것이다.
====
'과학'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경험론에 의하면 과학적 이론은 객관적이고,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경험적인 결과들이 가능한 한 반론되거나 확인되어야함을 의미한다.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분명히 그 정의와 범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는 과학적 방법만이 참된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환원주의[= 과학주의 = 무신론]에 기반하고 있다.
인식론적 환원주의(혹은 과학주의)의 독단주의적 편견은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는 유신론과 절대 양립 불가능한, 자연적 존재를 부정한다..
.......반면에,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대하여 살펴본다면, 방법론적 자연주의 란 근대과학과 현대과학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는데, "무신론-유신론 양자에 대해 모두 열려있으며" "다루는 바 그 범위란 부분적 지식임을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드러난 자연 현상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가설을 세워 실험적으로 증명해 나가는 입장이요, 거기서scientia = 지식이란 말이 나왔다.. ^^바울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내가 어렸을 때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이라고 분명히 거듭난 참신앙인이로되 유한한 사람의 지식의 한계((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을뿐임))를 겸손히 인정하고 있음을 명심하라..
===그 어떤 학문도 주님 통치의 빛 아래에서 조명 받도록 하라...심지어 신학조차도 유일무이한 참생명 근원이시요 모든 에너지의 근원자이신 하나님 말씀, 빛되신 주님 살기의 참신앙 아래에서 살펴보고 그 학문적 태도를 주 앞에서 겸손히 점검해보지않으면 남용-오용-악용하여 홀로코스트 같은 참사 유발의 빌미가 될 수 있음에 유의하라....===
작금의 진화론과 다위니즘을 혼동해서는 결코 안되며, 유일한 점검기준은 말씀의 빛이어야 한다.."햇빛이 아니다!!".
.....곰곰이 창1:1과 1:2사이의 시간을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라!!..
.....과학에게 창조과학은 과연 무엇인가......영원유일무이의 무한-영생하시는 분, 창조주-주관자-전지전능하신 주님의 빛 아래서 상호간에 충돌 포인트들 점검해 보되, [참 믿음의, 주관적 체험 추구하며 하나이신 그분과의 교통 안에 걷는, 산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더욱 힘쓰라.
-------
창조과학은 과학인가? ....창조 '과학'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처음부터 창조과학은 신학이기보다는 과학이고 싶어했었나 보다. 그러니, 창조과학이 과학이려면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은 스스로가 과학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을 이러한 과학의 기준에 내어 주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에, 진화론이 엉터리이고 틀린 것이라는 자신의 [고집스런] 주장을 스스로 입증함으로써 진화론을 현대 과학의 세계에서 내쫓고, 그 빈 자리를 대체할 과학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쟤가 틀리면 저절로 내가 맞는가? 정확하게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창조과학과 진화론 사이의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예컨대, 만에 하나 진화론이 정말로 엉터리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져서 과학의 세계에서 쫓겨났다고 하자.
그럼, 진화론이 과학 분야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비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저절로 창조과학이 그 빈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하나의 결정적인 절차가 더 필요하다.
......상대성이론이 어떻게 기존의 과학 이론을 대체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기존의 과학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을 때 상대성이론이 등장한 건 분명한 일이다. 하지만, 꽤 긴 시간이 지나도 상대성이론은 쉽게 기존 과학 이론을 대체하진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당대의 과학자들에게서 쉽게 인정받지 못했고, 그래서 과학 전문 학술지에 그 이론이 실리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이 이론이 기존 과학 이론보다 더 정확하게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한다는 사실이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입증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제서야 기존의 물리학 이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론으로 상대성이론이 과학 분야에 수용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는 데 수년의 세월이 걸렸다. ((과학적 사실이란 그 자체의 한계로 인해 상대적-부분적 사실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말라..우리가 믿는 바 주 하나님 JC, 주님은 절대적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이시다!!))
이건 창조과학도 마찬가지다. 진화론이 물러난다고 해도, 창조과학은 스스로 얼마나 설명력과 예측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이 검증 절차를 통과하지 못하면 창조과학은 과학의 세계로 진입할 수 없다. 다른 이론이 틀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이론이 내실 있고 알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지만, 창조과학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더 추구했다. 내실 있는 과학이 아니라 외부의 적이 틀렸다는 점을 지적하는 과학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과학이 되기 위한 기준이나 그런 건 없었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창조과학이 구사하는 이런 전략이야말로 딱 근본주의자가 취하는 전략이다.
근본주의는 보통 자신의 정체성이 위기에 놓여 있다는 감이 올 때 자라난다. ((나찌즘으로표출된 근본주의는, 그 바탕에 신학적 오남용과 편견을 깔고 홀로코스트를 낳았었다))
그 방식은 외부의 적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건 정치적 권력 취득 위한 폭력 행위다. 다시 말해, 힘을 차지하려는 멸살 행위다.
타자의 붕괴를 통해 자신이 지켜질 뿐만 아니라 더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는, 외부에 가상의 적을 만들어 공격해서 국가의 내적 결속을 도모하려는 것과 같은 전형적인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다.
=====
과연 창조 및 창조 신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우선적으로 창조를 이해함에 있어 [조심하고 깨어있어서] 경계해야 하는 과학주의적 관점을 다루어 보고, 이어서 (2) 이 창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필요성과 그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자연과학의 방식을 통해서 진술 가능한 것만이 참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말하며 주장하는 관점과 태도를 일반적으로 과학주의(Scienticism..::: "거의 모든 -ism은 우상일 수 있음"에 반드시 깨어 있어 분별하며 주의하라)라고 한다.
.......언뜻 참으로 설득력 있는 관점이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숙고해 보고 역질문을 던져 보자.
세상의 모든 것들, 심지어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과 인식 행위 및 감정들, 그리고 여러 신앙 경험은 과학적으로 검증이 가능할까?
자연과학이 우리 일상의 모든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은 가설과 실험을 통한 검증이라는 논리 구조를 통해서 세상의 한 단면을 설명하고자 할 뿐이다.
그런데 ("창조 신앙"이나 "창조 신학"은 불충분하고 반드시!!) "창조 과학"이라고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엄연히 있으니... 왜, 무엇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보다 객관적인]자연과학적 증명을 요구하려 하는지 자문해야 한다.
아마도 ...분명히 그것은 우리의 신앙 내용의 객관성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주장함이요, 그 객관성은 반드시!!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그 누군가의 서툰 사고방식 고집함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믿는 바 신앙 전반, 그 내용들 중에서 일부는 자연과학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결코 가능하지 않은 부분(특히 창조 신앙, 창조 신학)도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적 증명을 통해서 창조 신앙의 객관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면, 이는 신앙으로 둔갑한 과학주의에 불과하다.
만일 과학의 진술 내용이 바뀌면, 창조 신앙의 내용도 바뀌어야 할까?
과학적 증명을 통해 창조 신앙의 내용이 객관화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창조에 대한 몰이해를 야기한다.
창조과학을 필두로 한 이 과학주의적 신념이 건강한 신앙의 장으로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한 그리스도인이자 신학자로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측면에서의 고찰과 교훈으로 한번 되짚어보도록 하자....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이전, 과학주의(당시에는 실증주의 및 자연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에 맞서 유럽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현상학(Phänomenologie)이라는 철학이 탄생했다.
현상학은 에드문드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신학뿐 아니라 다양한 철학과 인문 사회 과학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후설 그 자신도 하나님에 관한 관심이 많았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가 말하는 "현상(Phänomen)"의 정의는 우리의 눈앞에 물리적으로 펼쳐지는 피상적 감각적 현실이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활동 안에서 떠오른 그것들의 "본질"을 의미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우리가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집 한 채를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의 인식의 대상은 실제 그 길 위에 있는 그 집이라는 물리적인 대상인가, 의식 속에서 구성된 그 어떠한 집인가?
이 질문이 뚱딴지 같아 보이지만, 우리의 인식 활동이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전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심지어 물리적 대상조차도 우리는 100% 다 전체를 완전히 인식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보는 방향 및 관점에 의존해서만 부분적으로 대상을 파악할 뿐이다. 언제나 자신의 의식이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바에 따라서 세상을 이해할 뿐이다. ....한마디로 의식이 언제나 '무엇에 관한 의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후설은 의식의 근원적인 특징을 "지향성"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는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자연과학적 실증주의가 참된 인식의 문제를 자연 곧 물리적인 사실에 한해서만 다루고, 그렇게 도출된 사실만을 객관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주관성과 삶의 의미 문제를 철저히 외면했다고 비판했다.
(자연)과학적 실증주의는 모든 학문을 사실에 관학 학문으로 환원하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삶의 의미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 신학 등의 학문들은 철저히 배제했던 것이다.
후설에 따르면, 자연과학적으로 객관화할 수 없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적 관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명증적인 본질 인식을 통해서이다.
그는 대상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지금 나에게 드러나고 있는 그 대상의 본질로 돌아 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는 이를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칭했다.
그는 물리적 대상 그 자체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로지 우리의 의식 속에 현상하고, 의식 속에서 구성된 그 대상의 본질이 인식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이 인식 대상을 "노에마"라고, 그리고 그 노에마를 구성하는 의식 활동을 "노에시스"라고 불렀다.)
그는 주관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자연과학적 실재로 환원함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방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과 의식 활동 속에서 획득된 대상의 명증적인 본질로 환원함으로써 구성된 대상의 의미에서 객관성을 확보해야 함을 강조했다.
대상 자체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의식 내적으로 구성하는 의식 활동과 그 구조를 철저히 파악하고자 했던 후설의 작업은 성경 해석, 신앙적 사유 및 하나님 경험과 관련하여서는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현상학적 환원은 [존재나 물질을 파악함에 있어서] 피상적-표면적 사실 = 실증주의적 사실도 중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참 앎" 위해서는 동시에 추구해야 할 바가 있으니 주관적 참 실제=실재적 "진실"....정수 :: 근원과 본질, 곧 생명과 그 에너지를 놓치지 않아야 함을 말하는 바, 오직 그것을 존재케 하신, 만들고 지으신 분, "영원 생명의, 무궁하시며 제한 받지 아니하시는 분, 영생의 창조주 하나님만이 꿰똟어 알고 계신다...주님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참생명 호흡으로 살기를 바라시며, 그 참되게 그리스도를 믿고 붙들어 하나됨으로써 [하나님이 분배해 주신] 참생명 얻음이 바로 구원이요 거듭남이라 하셨음을 잊지말라..
2. 이 현상학적 인식은 비단 물리적 대상뿐 아니라, 감각 경험과 신앙 경험에 이르기까지 의식 활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경험으로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이제 주제를 신앙으로 확장해 보자.
한 세기 이전 후설이 [자연과락적] 실증주의의 위협 속에서 감지했던 유럽 학문에 대한 위기의식이 오늘 창조 신앙을 둘러싼 창조 과학의 비판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그 위협은 과학적 진술이 창조 신앙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주의적((=과학 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실은!!) 창조 과학 진영에서는 (무신적 자연과학자들이 흔히 . "과학적, 진화론적 측면에서 적용해서 살펴본다면 [창1-2장의 기술대로] 세계는 창조주에 의한 피조가 결코 아니요 그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 창조주의 지적 설계 통한 창조를 부정하는 것을 통틀어서 "과학주의"라고 치부해서 무시해버혀도 되지만...., 오히려 거꾸로 (상당한 정도로 비과학적 내용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실험적 측면에서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곧 증명 불충분한, 다소 추상적 이론인) 진화론적 토대를 결코 함부로 폐기해 버릴 수 없는 과학의 약점을 들추어 냄과 동시에 널려 있는 창조의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엄밀한 의미에서 뒤집어 보면.... 성경 말씀을[특히 창세기 1-2장의 말씀의 사실성을] 어떻게 해서든지 과학주의자들조차도 창조주의 지적 설계 통한 창조를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해 보려는 것 아닐까....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관점이야말로 어느 누구보다 이 과학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연과학적인 관점에서 해명 가능한 것만을 우리의 삶의 현실이라고 여기는 [무신론적 과학주의자 = 우상숭배자들의] 극단적인 환원주의뿐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의 작품, 곧 창조의 현실을 이미 살며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족하게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바), 유한한 크기의 그릇에 결코 다 담을 수 없는 무한하신 그분의 창조를 구태여 자연과학적인 진술 가능성으로 환원하려는 것 역시 지양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오히려 우리의 의식 활동은 문자적으로 기록된 성경이라는 물리적 대상을 넘어,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로 돌아 들어가야 한다.
신학이 해야 할 일은 이 본질을 향한 보다 유의미한 길을 신앙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제 자연과학적 사실만을 객관적이라고 주장한 실증주의에 맞섰던 후설의 현상학을 창조 신앙의 질문으로 바꾸어 보자.
과연 창조의 객관성은 자연과학적 관찰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실제 삶 속에서 이 창조의 객관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소위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ex nihilo)를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왜 이토록 이 "무"의 정체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을까?
무는 물리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사실적이고 실체적인 범주의 것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무로부터의 창조는 단순히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떠한 전제 조건에도 얽매이지 않으시고서 이 세상을 만드셨음을 선언하는 메타포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3장의 이야기는 결단코 이 세상의 시간적 기원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창조주와의 관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신앙고백이다. 이는 과학적인 세상의 기원을 믿는 것 그 이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창조의 사건을 추적할 것인가, 아니면 피조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창조의 본질을 질문할 것인가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집중해야 한다.
이렇기에. [창조 과학]을 모토로 내거는 이들의, 창조에 대한 [과학적] 실증주의적 설명 시도는 창조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창조 이해를 심각히 왜곡한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신학자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은 <과학으로 신학하기>라는 저서에서 "우주의 질서 이전에 자리하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이를 지시하는 힌트들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창조는 증명이 불가하기에 자연과학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창조신학의 핵심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의 본질을 서술하고 해석하는 것에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과학을 양자택일로 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학문적으로 해명하는 와중에 자연과학적인 객관적 자료들이 신앙적 이해를 위해 활용될 수는 있다.
그런데 왜 일부 신앙인들은 창조의 6000년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다는 "창조과학 작업"은 반기면서, 자연과학적으로 이미 해명된 진화의 신비는 신앙의 이름으로 거부하는가?
잣대는 동일해야 한다. 어설픈 취사선택을 한편으로는 과학적이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적이라고 얼버무리면 안 된다.
필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찬미하는 자세를 견지하되, 과학적 연구 성과들이 그분의 창조 세계를 노래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란다.
스위스 바젤대학교의 조직신학자였던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는 창조 신앙과 자연과학은 학문적으로 서로 다른 영역에 정초되어 있기에 굳이 과학을 통해서 신앙이 증명 및 해명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 역시 자연과학적 진술들이 창조 신앙을 내용적으로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자연과학이 하나님과 세계 간의 관계성의 다층적인 면모를 설명해 주는 도구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19세기 초반, 독일 베를린의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신앙론>을 통해서 창조 속에서 자연과학적 소재를 찾는 일련의 학문적 혼동을 엄중히 주의하라고 가르쳤다.
20세기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설명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그는 창조론은 세상이 단번에 만들어진 그 사건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자신의 실존 속에서 제기하는 유한성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학문적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조직신학자 빌프리드 헤를레(Wilfried Härle) 역시도 <교의학>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단순히 세상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도 단순한 답변 시도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는 만물의 기원에 대한 사실적이고 물리적인 증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헤르만 도이저(Hermann Deuser)는 <조직신학 입문>에서 창조 신앙을 둘러싼 질문들은 우주 곧 세상의 근원과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경험을 넘어선 우주적이고 시간적인 시작에 관한 질문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오토 베버(Otto Weber)라는 조직신학자도 그의 저서 <교의학 기초>에서 창조론의 올바른 강조점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그분께서 창조주시라는 신앙고백'에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 밖의 저명한 20세기 조직신학자들의 이야기도 이들이 설명했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많은 신학자들은 창조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설명이 불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결단코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하나같이 창조에 대한 자연과학적 설명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창조 신앙은 결코 세상의 물리적 기원에 대한 과학적 믿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신앙고백으로부터 출발되어야만 함을 강조한다.
창조는 실증주의적으로 환원 가능한 대상으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창조를 자연과학적 증명이라는 검증대에 세우기보다, 진솔한 신앙고백의 장으로 옮겨 두어야 한다.
이는 창조에 대한 자연과학적 설명을 포기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며, 그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된다.
오히려 자연과학의 학문적 한계를 인지하면서, 이를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하고 찬미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 신앙은 세계의 시초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이 될 수 없다. 지금까지 어떠한 최신의 물리학 이론조차도 창조를 증명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창조는 증명이 아니라, 지속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