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왕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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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2장  [354.주를앙모하는자] [440.어디든지예수나를이끌면] [433.귀하신주여날붙드사] [425.주님의뜻을 이루소서]

.....왕상19..엘리사..참고!!..소금..마5장 참고

[주께가오니] 날새롭게하시고 주의은혜를 부어주소서

내안에 발견한 나의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곁에 날이끄소서

독수리 날개쳐올라가듯 나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내안에 발견한 나에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곁에 날이끄소서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엘리야 승천 언덕이 위치한 요단 동편 베다니 =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요단강가---[벧산, 애논-살림, 요단 동편 베다니] @@

---벧산 = 벧스안 =스키토폴리스(데가볼리 중 하나), 여기는 이스르엘골짜기와 요단 골쩌기가 만나는 곳이기에 평지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동남쪽에 위치한 애논과 살림은 ((사마리아 지경 경계지점...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 받으시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실 때에, 이곳을 통해서 요단 동편의 데가볼리나 베뢰아지역으로 건너가셨고 요단동편 베다니 거쳐 여리고로 들어가셨다고 여겨짐)) 세례요한이 주로 세례를 베풀었던곳, 즉 요단강 세례터로서 요한이 주로 세례를 베푼 지역은 벧산 돵남쪽 12km지점인 요단강 서편, 하지만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으신 곳은 요단강의 동쪽  세례터인 요단 동편 베다니((여리고에서 요단강 건너에 보이는 요단 동편 베다니))였는데, 여기서 엘리야가 회리바람 타고 승천했던 곳이었고, 엘리야 승천 언덕이 위치한다....세례 받고 나오시자마자 하늘로부터 내려와 머무르시는, 비둘기같은 형상의 성령에 이끌려 여리고 광야 시험산에서 40일 금식후 마귀의 시험 이기신 직후 요단동편 베다니로 복귀하사 제1, 2일은 온종일, 그리고 제3일 아침 나절 머무르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갈릴리 가나로 향하고 계신다..(5명의 제자를 부르고 계셨다)..

---분명히 알아둘 것은, 물세례+성령세례 받으신 직후 성령께 이끌려 요단을 건너오셔서 여리고 아래 시험산에서 40일 금식에 들어가셨다는것!!...영적 금식의 의미를 명심하라..40이란, 하늘영역=영혼-마음을 의미한다


@@왕하2:1-14, 길갈(육체/옛자아=거역과우상숭배 그자체인 불순종과고집/편안나태방탕---생존안정+애정존중+자아성취욕구=죄성/육체의 정욕!!  명확히 인식..육체의 정욕 벗음은 성령의 검인 Q말씀으로 베어냄/할례)-->벧엘(세상=안목의정욕과 세상 자랑, 곧 세상가치/패러다임= 등짐 + 영광의 주HS와 하나, 교통/예배의 Q나라 삶)-->여리고(사탄/마귀 분별-대적-멸절-이김=주임재안/앞에 굳게섬 --Q나라 확장증대, 영적 후사/자녀 산출-양육-훈련)-->요단강(사망 돌파/부활생명능력-휴거)네 단계의 중요한 영적 노정 의미@@

----Q 말씀, 그 참생명을 호흡함 인해 전존재가 Q 영광의 어떠하심으로 영혼몸이 들림 받기에 합당케 변화되었다 여기심의 정도에까지 그리스도화 이룬바 그 엘리야 :: 부활하신 후 이 땅에 40일 동안 머무시는 바 모든 차원과 영역을 넘어, 가시적-비가시적 임재를 연습시키고 계셨음을 기억하라..---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흔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선지자의 생도 오십 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섰더니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의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열왕기 하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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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의 말씀에는 네 단계의 노정, 즉 길갈에서 떠남, 벧엘에 이름, 여리고에 이름, 요단 강을 건넘이 있다. 

엘리야가 곧 하늘로 들림 받으려 하고 엘리사가 곧 갑절의 성령을 얻으려 할 때(계시록의 보좌 앞 Q의 영은 일곱영이다!!), 그들 둘은 바로 이 네 곳을 거쳤다. 

그러므로 여기의 중요한 교훈은 (1)엘리야같이 하늘로 들림받거나 (2)엘리사처럼 겉옷인 성령(겉옷을 그의 몸에 입은 것처럼 성령이 그의 몸에 임했음을 가리킴)을 입으려면, 이 네 단계의 노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들림받으려 하든 성령의 능력을 얻으려 하든, 모두 길갈의 떠남부터 요단 강을 건넘까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네 지명(地名)이 나타내는 의미를 보기로 하자.

Ⅰ. 길갈(1절)-육체에 대하여

각 명칭의 뜻을 해석하려면 성경에서 처음 해석된 것을 기준 삼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여호수아 5장 9절을 볼 때, 길갈이 곧 「구르다」를 뜻함을 알게 된다. 

만약 이 장의 성경 2절부터 9절까지를 읽으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은 할례를 받았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은 할례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그들은 즉시 가나안에 들어가고, 즉시 기업을 얻으려 했다. 그러므로 옛 육체를 굴러 보내고 애굽의 수치를 굴러보냄으로 새로운 생활로 바뀌어야 했다. 할례의 의미는 바로 육체의 정욕을 벗는 것이다(골2:11).

무엇을 육체라 하는가? 육체를 처리하고, 육체를 심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죄를 이기면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죄가 나오는 육체가 있는 줄을 어찌 알겠는가? 육체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정죄하신 것이며 가장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다. 육체는 바로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 우리가 나면서부터 있는 모든 것이 다 육체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는 죄악, 더러움, 패괴(敗壞)가 있을 뿐 아니라 천연적인 선량함, 재능, 열심, 지혜와 능력도 있다. 믿는이들이 일생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공과가 바로 자신의 육체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여러 가지 실패와 손해를 겪게 하심으로 비로소 그 자신(육체)이 어떠한가를 알게 하신다.

믿는이들의 영적인 노정과 사역 가운데에서 믿는이들의 완전한 전진을 가장 막는 것은 바로 그의 육체이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들이 모든 육체를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모른다. 그는 도리어 죄악을 없애기만 하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찌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의 자신의 재능과 열심과 지혜, 그리고 영적인 생활 가운데서의 자신의 선량함과 능력 이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임을 알겠는가?

우리가 육체를 따라 좋다고 여기는 것, 하려고 작정하는 것, 아주 교묘하게 계획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모두 거절되어야 하고, 죽음에 내어주어야 하며, 심판을 거쳐야 한다. 영적인 생활에서든 일을 하는 데에서든, 사람의 육체는 그분을 돕는 데 사용될 수 없다.

길갈은 육체를 심판하는 곳,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시어 육체를 심판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육체는 벗어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곧 하나님과 뜻이 같음을 표시해야 한다. 하나님이 할례를 하라고 하시면 우리는 곧 할례를 해야 한다. 어떠하든지 반드시 길갈에서 떠나야 하고, 반드시 육체를 거절해야 한다. 이는 할례를 어느 정도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를 심판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의 잘못은 바로 사람들이 어떻게 열심내고, 선행하고, 일할 것인가만 주목할 뿐 육체를 거절하는 것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를 심판-하나님과 같이 육체를 심판함-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배운 것에 따르면, 거듭남, 성결, 완전함, 죄를 이김, 능력 등은 모두 영적 생활의 가장 높은 표시가 아니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이 영적인 길이요, 육체를 거절하는 것이 또한 영적인 생활의 목표이다. 무릇 길갈에서 떠나지 않은 이는 다 영적인 노정 가운데서 떠나보지 않은 사람이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무엇이 참된 영적 생명인가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이 열심이 있을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기쁠 수 있지만, 그러나 참된 영적 생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Ⅱ. 벧엘(2-3절)-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벧엘에 왔다. 벧엘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벧엘을 말한 곳을 보고 벧엘의 의미를 단정해야 한다. 

창세기 12장 8절을 보기 바란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곳이다. 제단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과 왕래하는 곳이요,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오는 곳이다.

창세기 12장 9절부터 14절은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을 기록한다. 거기에는 제단이 없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고,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마음도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벧엘과 애굽의 다른 점이다. 벧엘과 애굽은 상반된다. 그러므로 벧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벧엘은 곧 애굽의 의미와 상반되는 것이다.

창세기 13장 3절부터 4절은 의미심장하다. 『그(아브라함)가 남방(애굽은 남방에 있음)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하나님과 교통이 없었다. 후에 원래의 곳, 바로 벧엘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거기에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사람은 오직 벧엘에서만 하나님과 교통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다. 길갈은 육신을 이긴 것을 말하고 벧엘은 세상을 이긴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애굽은 세상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김은 들림 받음과 성령의 능력을 얻는 조건이다. 

우리의 생활은 반드시 세상이 우리의 마음을 만질 수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도대체 세상과 어떤 분별을 갖고 있는가? 우리의 행위와 됨됨이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분별되어 나온 사람임을 표명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태도와 언어는 우리가 이미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표명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아직 약간의 은밀한 욕망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사람들의 칭찬에 대하여 속으로 좋아하는가? 사람들의 훼방에 대하여 은근히 받기 어려워하는가? 우리에게 득실(得失)이 있을 때 득실이 있다고 느끼는가? 우리의 세상에 대한 느낌은 세상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느낌과 얼마나 다른가?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세상을 이기지 않았다면, 세상의 사람과 일과 사물이 우리 마음 안에서 지위를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앞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한 믿는이가 참으로 성령이 충만하기를 바라고 참으로 들림받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대가를 지불하고 주님의 길을 걸으며, 주님이 그분의 영을 그에게 주실 수 있는 곳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헌신한 제단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러한 헌신과 교통은 부족해서는 안 된다.

애굽 땅에는 기근이 없다. 있더라도 구제할 묵은 곡식이 있다. 가나안 땅은 오히려 항상 기근이 있는 것을 면치 못했다. .....이는 우리에게, 세상에는 기근이 없지만, 주님께 순복하는 길 가운데 있다면 기근이 있는 때를 면키 어려움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시련(試鍊)이 없지만 하나님을 순복하는 길에는 시련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들림 받음과 능력 얻음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시련이 얼마나 큰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는 분명히 출구(出口)가 있다. 우리는 마땅히 신실해야 하며 또한 깨어야 한다. 만약 깨어 있지 않아 타락하면, 애굽에 이르기까지 타락하게 된다! 헌신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없다. 잠시 애굽에 머물면 잠시 죄를 범하게 된다. 더욱 가련한 것은 바로 오래도록 애굽에 머무는 것이다. 시련은 면할 수 있지만 애굽에는 제단이 없다.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이 즉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먼저 가나안 땅에 이르렀는데 방향은 애굽을 향하고 있으며, 아직 애굽에 이르지도 않았다. 이렇게 가나안에 머무는 것은 반은 세상에 속하고 반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는 제단이 없다. 교통이 없다. .....벧엘은 하나의 절대적으로 분별된 곳이다. 세상인 애굽이 아니며 세상과 섞인 남방도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 이백만의 무리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애굽에서 제단을 쌓는 것을 용납지 않으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애굽에서 사흘 길 떨어진 곳에 가야만 했다. 애굽에서 유월절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악의 형벌-죽음-에서 벗어나도록 구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 아래 돌아가 주님께 경배하려면 반드시 애굽을 떠나야 한다.

Ⅲ. 여리고(4절)-사탄에 대하여

우리는 여리고를 가장 분명하게 말한 곳이 여호수아서임을 안다. 여호수아서에서 우리는 온 여리고 성이 함락당하는 이야기를 본다.

여호수아 6장 26절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당할 것이라...』. 그러므로 이 명칭은 저주받음을 뜻한다. .....이 단락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이 처음으로 가나안에서 대적을 이긴 것을 말한다. 가나안의 원주민은 악한 영을 대표한다. 곧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서, 에베소서 6장 13절에서 말하는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다. 우리는 바로 그들과 싸운다.

우리는 육체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며 또한 대적을 이겨야 한다. 대적을 이김에는 두번째의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행하며,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행함으로 얻게 되는 결과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충분하다.!!! 

여리고 사람이 우리에게 성(城)이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말한다. 여리고 사람이 그들의 성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다고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말한다. 여리고 사람이 모든 성 주변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사 우리가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영과 육체의 싸움만을 알고,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한바 우리 믿는이들과 악한 영과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실제적인 영적 싸움은 우리와 사탄과 그의 악한 영과의 싸움이다. 이는 모든 성숙한 믿는이들이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땅에서 항상 악한 영의 공격을 받는다. 어떤이는 환경(-상황-형편-처지) 안에서, 어떤이는 몸 안에서, 어떤이는 생각 안에서, 어떤이는 느낌 안에서, 어떤이는 영 안에서 공격받는다. 

특별히 이 마지막 세대에 악한 영은 활동을 강화시켜 믿는이들로 주님을 잘 섬길 수 없게 하고, 그들로 많은 일들에서 심한 곤란을 느끼게 한다. (지루함/답답함, 사랑희락화평안에서 넘쳐흐르는 부활생명능력인 맑고밝고가볍고분명명료화창시원향기로운, 바로 그 생명력 결핍-손상-저하의 느낌 등) 그들은 그들이 악한 영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결국 이상하다고 느낀다. 왜 모든 것이 그들을 반대하고 다 「잘못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다 천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어찌 그들이 악한 영에게 (방심한결과!!, 내어준 틈으로 들어와 활동중인바) 영혼의 잠듦 인해 무지무각의 눈가림 당해 속임/기만/미혹-우롱((조롱/비아냥))당함 안에 처했다는 것을 알겠는가? ((참되게 영 안에서 깨어 기도함으로써 경계하며 인식함, 곧 제대로 알아야 JC이름으로 꾸짖고 대적하는바, 그 주예수 이름의 그 영광을 높임 이루며 예비하신 전진 이룰 수 있음이다!))

이 마지막 세대에 믿는이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우리의 대적을 인식하고 또한 어떻게 그들과 싸워 이기는가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와 세상을 이겼다 할지라도 대적을 이기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또한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여리고의 함락은 능력을 의지함에 있지 않고 (1)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과 (2)그들이 서 있는 분명한/정확안 위치에 있었다. 악한 영의 공격을 이기는 것은 바로 (1)모든 상황과 느낌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성취하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대적을 패배시키는 것이며 (2)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주신 위치 곧 하늘의 위치에 서서 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탄과 그의 악한 영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이 주신 위치를 취하는 믿음을 사용함이 없다면 대적을 이길 수 없다.

Ⅳ. 요단 강(7절-14절)-사망에 대하여

요단 강은 죽음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단 강을 건너는 것은 곧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들림받음이다.

이것은 주님과 특별히 관계가 있었다. 주님은 요단 강에서 침례받으셨다. 주님이 침례받으신 것은 죽음을 나타내고 물 속에서 올라오신 것은 부활을 나타낸다. ...... 주님은 그때 이미 부활의 능력을 통해 사망을 이기셨다. 사탄의 가장 큰 능력은 죽음이다. 

주님은 마치 대적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내게 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히 2:14). 사탄은 그가 할 수 있는 바를 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은 부활이었다. 사탄은 주님을 완전히 죽음에 넣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이 만지지 못하는, 잡아두지 못하는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은 마른 땅을 걸어서 건너신 것이다.

죽음을 이김은 주님의 부활 외에는 다른 능력이 없다. 우리가 거듭날 때 얻은 것이 바로 이 부활의 생명이다. 부활 생명의 능력은 모든 사망-모든 죽음에 속한 것-을 돌파한다.

홍해를 건너는 것과 요단 강을 건너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홍해를 건넌 것은 시간이 긴박해서 건너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대적의 몰아붙임 때문에 건너가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요단 강을 건너는 것은 사람의 자발적인 원함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람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요단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큰 능력을 원하는 것이 없다. 바울은 거듭 부활의 큰 능력을 생생하게 경험-체득하여 보았으므로 힘을 다해 추구했다(빌 3:10-12). 그래서, 적극적-자발적으로 요단강 건넘을 추구했던/하는 이들마다 모두 이미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영적 미성숙함은 여전히 남아있으니!! .. 중단없이 부활승천 안에서 우리에게 [이미 모든것 이기신 분 CJ의] 그 영을 분배해 주시기를 기뻐하는 구주로 인해 살아감을 이땅에서부터 연습-훈련-실행하되, 자연스러워지도록까지 익히고 그리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의 큰 능력의 완전함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는) 아직 알지 못하기에.. 그러므로 아직 그들에게는 사망을 이기는 체험이란 전혀 없을 수도 있지만, 결코 포기하지말라...주님은 그분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셨음을 기억하라.

이 들림 받음에 가까운 때에 믿는이가 마지막으로 가장 이겨야 할 하나의 대적은 바로 사망이다. 신체에 있어서의 죽음이든, 생각에 있어서의 죽음이든, 혹은 영적인 면에서의 죽음이든 모두 이겨야 한다. 

지금의 세상은 실로 죽음의 공기가 가득 퍼져 있다. 한면으로 주님이 쓰시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몸의 연약함과 질병을 갖는다. 한면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력(知力)이 마비된 듯하다. 생각, 기억력, 집중력이 모두 예전처럼 그렇게 민첩하지 않다. 한면으로 많은 사람들의 영이 죽음의 포위를 받은 듯하다. 활발하지 않고 능력이 없으며 반신불수처럼 많이 마비되어 그의 영이 요구하는 환경을 지배하거나 대응할 수 없다.

믿는이는 들림 받음을 예비하는 날들 가운데서 반드시 어떻게 요단 강을 건너고 사망을 이기는가를 배워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서나 환경 가운데서 죽음의 세력과 맞서고, 많은 일들에서 부활의 큰 능력을 나타내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갈수록 우리 주님이 이미 부활하신 분임을 증명해야 하고, 동시에 그분과 연합한 우리들도 이미 부활한 자들임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엘리야의 들림 받음을 얻으려 하고, 엘리사의 취한바, 엘리사 그 자신의 것 삼은! 엘리야의 겉옷인 성령을 얻으려 한다면, 어찌하든지 반드시 길갈에서 떠나 요단 강을 건너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성령은 부활 생명이 충만한 사람에게만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기만 하면 들림받을 수 있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비되지 않은 사람을 들어 맞이할 수 없으시다.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 강 모두는 우리가 마땅히 거쳐야 할(엘리야의 그날처럼 들림받기 전에 거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들림 받으려면 당신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길갈에서 떠나 요단 강을 건넘에 이르는-을 걸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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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9:19-21..사마리아/이스르엘-->[브엘세바-광야-호렙]-->아벨므홀라((8년간 동행-양육-훈련으로 하나 됨 연습중))-->길갈-->벧엘-->여리고-->요단가(도하)-->요단 동편에 이르기까지!! ......아벨므홀라에서 부름받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그의 승천 바로 그 시점까지) 결코 떠나지 않음!!, 그 결단을 기록하심은 무슨 까닭인가..엘리사의 하나됨의 동행-붙좇음은 오로지 말씀하시는 주님 임재!!, 바로 그것 붙듦이었기 때문이니...거듭난 믿는이 부부간에도 반드시 있어야 할 바는 바로 그것임을 깨달으라 하심이다!!

[왕상19:19-21....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더라]

==계승>>....사람의 복 중에 하나는 좋은 제자나 후배를 두는 것. .....일례를 들자면,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1대에 그치지 않고 2대, 3대에 걸쳐 계속해서 좋은 후임 목회자가 들어와 사역을 하는 것... 예수님의 사역도 제자들이 잇지 못하였다면 고독한 한 영웅의 생애로 끝났을것... 열두 사도들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바울은 제2의 기독교 창시자라 불릴 정도로 예수님의 사역을 이방지역으로 확대시켰다. ....종교개혁사에서도 다른 식의 발전을 해나갔지만 루터의 사역을 칼빈이 이어받지 않았다면 개혁교회의 확대는 어려웠을 것이다. 스위스 종교개혁에서는 츠빙글리를 이어서 블링거라는 후임의 계승이 종교개혁을 안정화시켰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 중 하나는 사역 계승의 실패를 들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기를 이끌었던 카리스마적 지도자, 소위 교회 개척의 1세대들이 물러나면서 2천 년대를 기점으로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그 사역을 계승하였다. 선배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윤리성이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그분들의 열정과 헌신은 경탄할 만 했으나 그 뒤를 이은 후임들이 여러 모로 부족했는데 그 모습이 현재 대형교회 2세대 목회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선배들이 부족했던 윤리성이나 거룩성을 보충하며 교회의 신앙을 뿌리내리는 방향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이 문제를 극복함에 실패하고 있다. 열정이나 헌신은 부족하고, 단지 목회의 테크닉이나 언변, 미국 유학파라는 타이틀만 자랑하며 선배들의 열매를 따먹고 있는 모습... 여러 곳에서 그 밑전이 드러나고 있는 차세대 지도자들의 부족이나 실패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수 있다. 

----엘리야의 인생 결론이 복됨은 엘리사란 후계자를 두었다는 것... 이전의 사사시대의 카리스마적 사사들은 당대의 사역으로 끝났던 반면에 엘리야의 사역은 엘리사에게로 계승되고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엘리야는 홀로 행동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엘리사는 항상 선지자의 무리가 함께 하고 있다. 야훼 신앙을 수호하는 예언자 무리들이 형성이 되고 이들에 의해서 남북 왕조기의 위기에 처한 야훼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 엘리야가 엘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행동은 그의 겉옷/외투를 엘리사에게 던지는 것이었다. 외투를 던진다는 것은 그를 수제자로 인정하고 [그의 인생 전부에 걸쳐 하나되어 이루고 계신 Q 임재로 말미암은 모든 권위와 능력을 주겠다는 스승의 초청이니... 나중에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면서 엘리사에게 남겼던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그의 외투였고,엘리사가 엘리야의 외투를 집어들고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며 요단강물을 치자 요단강이 이리저리 갈라졌다. 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넘어건 것이다. 

...... 자기 외투를 잘 벗어서 넘겨주어야 하리라.... 종려주일의 예를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펴거나 자신들의 외투를 벗어서 길에 폈다. 자기들의 외투를 던지며 그들은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지만 결국 예수님의 겉옷을 벗기는 어리석은 길로 떠나 빗나갔다. 그 어떤 외투도!! 충동적 감정으로 던지면 안되리니... 반드시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의 외투를 지켰던 바울은 결국 죽인 자들의 몫을 대신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야 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이기에!!, . 옷을 입는 순간 그 능력과 권위가 우리에게 전가됨이다.

부르심>>....엘리사는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갑작스럽습니다. 어떤 계획이나 설명도 없이 갑작스럽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각성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전혀 예상도 소망도 피력한 바 없는데 밤중의 도적처럼 임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부르심을 받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갈릴리 해변 가를 거닐다가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1:17)고 다짜고짜 따라오라 명하셨습니다. 

우리 운명의 순간은 급작스럽게 다가옵니다. 우물쭈물 망설이다 그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급작스런 부름으로 서술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도성을 드러내며 동시에 우리의 단호한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앞에 엘리사가 보였던 반응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엘리사는 자기 삶에 성실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농부였습니다. 단순한 농부가 아니라 부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그 중에 열두 번째 겨릿소를 몰고 있었습니다. 한 겨리는 소 두 마리이니 24 마리의 소가 밭을 갈고 있었다면 대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밭이 엄청 컸고 여기에 동원된 농부라기보다는 제일 마지막에서 지휘하던 대농장주의 아들이었던 듯싶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고, 주어진 일에 충실했습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은 자기 일에 충실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아니면 병이 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결단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분야에 열심하고 여기서 성공적이거나 성실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는 농사일을 열심히 하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모스는 드고아의 목자로 뽕나무를 재배하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밀을 포도주 틀에 타작하는 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로서 양을 지키고 있던 중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사울 왕도 아버지의 명령을 좇아 암나귀들을 찾으러 갔다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았던 사람 중에 게으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는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마태는 세관에서 열심히 세리 일을 하고 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은 소중합니다. 자기가 주어진 것에 성실히 일하는 사람 중에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둘째, 엘리사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이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대화에서 잘 나타납니다. 엘리사가 자기 부모와 작별할 시간을 달라고 하니 엘리사는 허락을 합니다. 20절의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는 말씀은 번역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작별 인사를 허락하면서도 이 부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떻게 행했는지 똑똑히 기억해라’ 정도의 의미입니다. 부름 앞에는 즉각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망설이거나 여러 사정 때문에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더 심각하게 그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8:21)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가 가족의 일을 등한히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셨는데(마15:4) 그 중 장례를 잘 치르는 것보다 더한 부모공경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자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기 위한 극단적인 대조입니다. 제자의 사역은 살리는 사역이며, 또 장례식보다도 더 우선순위를 앞세워야 할 정도로 시급하고 중요한 일임을 깨우치려는 의도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 싸우기 위해서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한 예라 할 것입니다.  

또 제자 중 하나가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9:61)고 청하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제자는 뒤를 돌아보는 자가 아니요 주어진 사명을 좇아 앞을 향해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마 미련 때문에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가라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엘리사보다 더 즉각적인 순종과 결단을 요구받았던 것이 제자의 길이었습니다.

셋째, 엘리사는 부름을 받았을 때 과거의 것을 단호하게 끊었습니다.

엘리사는 앞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엘리사는 부호의 아들이었지만 그 부마저도 다 버리고 엘리야의 뒤를 좇았습니다. 젊은 부자가 예수님의 초청을 받았을 때 망설이다 슬피울며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엘리사는 단호히 그 부를 끊고 엘리사를 따랐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젊은 부자의 뒷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막10:22). 복음서에서 기록된 여러 만남들 중에 가장 쓸쓸한 뒷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부자의 모습인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진리를 따라사는 삶이 이 세상의 부요함을 누리는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꾀나 길이나 자리에 따르고 서고 앉는 것보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고 따르는 삶이 더 소중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고 복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이 부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사마리아의 한 부농의 이름 없는 아들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순종하자 그는 엘리사란 위대한 이름을 남긴 대선지자가 되었습니다. 20절의 “소를 버리고”와 21절의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는 말씀에서 에리야의 결연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자기에게 익숙했던 것들, 자기를 먹여 살려 주던 것들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고 배를 불살라 버린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때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1:18)고 말씀합니다.

익숙했던 것들은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편안하지만 발전이 없습니다. 낡은 것을 버려야 새 것을 입을 수 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라 하였습니다. 새 술을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술도 부대도 망치고 맙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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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전지전능 Q께 합당한 경배-의뢰-순종/청종으로, 그대의 집 곧 부부/자녀들은 합당한 교통/대화-친밀/배려/반려-동반/동행의 걸음으로, 맡기신 피조세계는 다스림/관리로, 오늘을 살아감..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의 미묘한 차이는 무엇인가.....외로움은 타인에게서 (배제/배척당함의 느낌 인해 = 상호 동행자와 감정 교류 및 대화가 안됨) 고립된 부정적 감정이라면 고독은  타인의 존재와는 상관없이(주위에 군중이 둘러싸 있더라도) 오로지 자신에게만 (내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긍정적 감정 상태( = 상호 동행자 간에 이해하며 감정 교류 및 대화가 됨) ---외로움loneliness의 동기는 타인과 연결되지 못하고 세상에 나 홀로 떨어져 있다고 인식하는 정서라면 고독solitude의 동기는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여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과정..... 외로움은 타인에게서 감정적으로 고립되었다면 고독孤獨은 타인과 얼마든지 교감이 가능하나, 스스로 나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김이다 -- 철학자 폴 틸리히는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함이 외로움이고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은 고독이라고 정의했다...... 인생은 혼자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고는 하지만, 외로움은 평생 끝까지 따라다는 외톨이의 그림자와 같고, 반면에 고독은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인생 대본을 써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바, 외로움과 고독은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외로움은 배제됨의 고립감에 몸부림치는 것이로되, 고독은 나 홀로 내면을 느끼는 것이기에! 이런 깊은 순간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수 있음이다!!  외로움은 누군가에게 거절당한 타인 소외라면 고독은 스스로 자발적인 자기 격리인 것...

.....사명의 인생 산다함은 곧 구원 이룸이니, "믿음으로 산다" 함은!! 고난의 떡과 쓴 물 마심이로되!!, "주님 자신이 그 사람, 자체의 영광 되어주고 계심"을 알라! 엘리야의 사명-<말씀 대언/전함>..그때마다 실지로 쫓겨다니며 박해가 뒤따랐음을 기억/명심하라!!

.....한편, 에녹은 " 자신 그 자체인" 자녀들을 낳았고, 그래서인지 그냥 "주와 동행했다"고만 기록하심으로써 [자녀 고난]이야말로 그 얼마나 위대한 고난인지, 주님 자신이 증거하여 주고 계시는 듯 하다!!  머물러서는 안될 때와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는, 그 자리가 있음을 아는자, 주와 참됨 교통 안에 머물러 있음 인해 주께 반드시 여쭈어야 한다. ---자의든 타의든 자녀를 잉태-출산-양육 기회가 전혀 없이 이 땅에 거하는 자의 그 외로움은 이 땅에 혼자 있음 인한 절대적 고통이기에 결코 타인을 배려할 수 없지만, 진실한 고독자란 [자신의 분신이랄 수 있는 자녀가 그 대표라 할 수 있는데, 타인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를 배워 실행하되, 타인을 배려하고 그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원하며, 동시에 단독자로서 주와 함께 교통하는 바] 혼자 있는 즐거움까지도 누리는 사람이라 할지니.., 오늘 그대는 어떠한가..

.....시대를 꿰뚫어서 영으로 보좌에 앉게 해 주신 CJ와 하나된 마음눈을 열어주신다면...((진정, Q과 하나로서 Q 마음 눈과 심정 안에서 그대가 바라볼때!!)), 엘리야의 요단 건넘은 다름아니라!! 제2의 출애굽 그 자체인 가나안 땅 진군 사건에 대해 되돌리고 싶어하시는!! (말라기에서 정말!! 바로 그렇게 나타내고 계신다)  하나님의, 당신의 빗나간 자녀들에 대한!! 너무나도 속상하고 섭섭한 마음의 단면을 (엘리야-..YHWH는 하나님이시다-란 미릉을 들어) 보여주고 있는것 아닌가 생각해 볼수 있다...한편!!, 반면에 엘리사는 신약을 여시려 "엘리야 그 자체나, 엘리야에게 부어진 그 영감자체가 아니라!!, 엘리야에게 임한 그 영감의 갑절 = 두 배의 루아흐[아버지와 끝까지 항나이신 성육신하여 오신 아들의 신비여!!]"를 끝까지 구하고 있는바, 바로 그럴때라야 제3의 요단 도하 거쳐서!! 그리해야만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새로이 열어 완수할 수 있습니다--말하고 있는, 성육신하여 오시는 JC-그리고 그분을 참되게 믿어 하나 이루는 자CJ의 반쪽인 그대-의 표상이었다!! 

......참되게 믿는 거듭난 성도, 그대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이다..그런데!! ((기록된 말씀=고로스=에 근거하여 베푸실바 그리스도를 살며 그분의 장성하신 분량까지 그분의 어떠하심(성/거룩-의/CJ의사심-진/에메트-선/토브)을 넘치게 공급하도록 영감을 갑절이나 더 하소서!!,라고 날마다!! 주께 구하는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다[루아흐!!]

1.  [호렙산에서 기름부어 선지자직분을 잇게하라신 주님 명령따라 엘리사에게 기름부음, 곧 겉옷 벗어 던져 후계자로 삼은 스승 엘리야와 부름받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영접-하나되어 머물며 떠나지않고 전적 의탁 교육 통해 잘 배워 동행-양육-훈련/연습-실행에 참여한지 이제 8-10년째에 이르렀을무렵..]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어느덧, 선지학교가 형성되어 있다!!....주님 말씀에 언급하셨던 남은자7000명들을 교육훈련 중이다!!)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4.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매

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

7.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8.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오직 한가지!!]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나주님의기쁨되기원하네).....스승을 극도로 합당하게 존경함!! 자기의 경쟁 대상으로 삼는것 아니라!! 영혼몸 전존재 기울여 참되게 배우려((그 스승안에 계신 참 힘과 능력 근원으로 임재하시는 Q을 얻고 동거함을 배워 익힘 통해!!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로 임함을 원하고 있다--정말 기가막힌 절묘하고도!! 참된 추구였다!!)) :: 오직 그 목적은!! 이 세상/이 세대 왕인 강한 자 사탄을 결박하고. 머리를 깨뜨림, 목을 짓밟아 멸절함으로써 이룰바 뭇 영혼 구원하려 함!!....즉, 절대적 무신론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포로된바, "네 자신이 신이다, 네 맘대로 네 멋대로 (혼자서만!! 먹고-토해내고-자고싶을때 자고, 잘먹고 잘살다가 원할 그때 캭 죽어버림으로써 세상 뜨면 그만이니..남 생각 말고 네 눈에 좋아 보아는대로 이혼하고 한 번뿐인 인생 멋지게 살라"하는, 극단적 이기주의--포스트모더니즘에 사로잡힌바 된 뭇영혼 깨어나 주께로 돌이키게 하려 함!!...오늘날, 신약을 사는 거듭난 참 성도는 그누구라도!! ...엘리사가 구하여 받은 정도-엘리야의 두갑절-보다 더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아버지께서 주 예수님과 함께 하심 인해 곱하기 2, 성령 함께 하심 인해 곱하기 3.(산술적으로 각각 두갑절씩이면 6)..그러나 계시록에는 분명히 보좌 앞 일곱 영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3갑절, 6갑절이 아니라..7배나 강화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장사지냄-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최종 완성 이루신 "유일무이하신그 영, THE SPIRIT" 되심을 나타냄이니, 적어도 6에 7 곱한 수 곧 무려 42 갑절만큼이나!!.. TUQ의 제한없는 전능의 강력을 준비해 두셨음을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그렇게 여기고 믿음으로 구할지어다!!...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전에 말씀하셨듯이...("나를 믿는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셨다)

10.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나 엘리야의 승천을 친히 목도하고!! 보아 이해하여 그 의미 깨닫고 진정 Q의 지고지선의 뜻 이루심과 이루실 것 감사함이 무엇인지 알며 그 안에 거하기, 곧 나 엘리야 없이도 참 믿음의 홀로 서기 할 수 있다면]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내 스승이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한 사람의 참선지자야말로!! 그가 거주하고 있는, 나라의 진정한 자랑이요 참생명 공급 원천의 통로!!, 곧 영적 국력이요 참 수호자요, 동시에 (멈춤없이 계속될바 그의 중보로 영원토록 혜택 입음 인해) 그의 휴거-승천은 Q 나라와 주께 영광임을 암시하고 계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스스로는 무지무각/무능무력/연약부패한 존재 뿐임을 인정 + 믿음으로/중심으로 존경하는 영적 아버지-주님의 사람 엘리야, 그의 겉옷 취함]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근원자 여호와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해 엘리야+엘리사의 Q, 그 영감((=루아흐))이 두배로 임하였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15.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16.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17.  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그들이 오십 명을 보냈더니 사흘 동안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18.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그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엘리사의 기적

19.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0.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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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2장

1.  And it came about when the LORD was about to take up Elijah by a whirlwind to heaven, that Elijah went with Elisha from Gilgal.

2.  And Elijah said to Elisha, "Stay here please, for the LORD has sent me as far as Bethel." But Elisha said, "As the LORD lives and as you yourself live, I will not leave you." So they went down to Bethel.

3.  Then the sons of the prophets who [were at] Bethel came out to Elisha and said to him, "Do you know that the LORD will take away your master from over you today?" And he said, "Yes, I know; be still."

4.  And Elijah said to him, "Elisha, please stay here, for the LORD has sent me to Jericho." But he said, "As the LORD lives, and as you yourself live, I will not leave you." So they came to Jericho.

5.  And the sons of the prophets who [were] at Jericho approached Elisha and said to him, "Do you know that the LORD will take away your master from over you today?" And he answered, "Yes, I know; be still."

6.  Then Elijah said to him, "Please stay here, for the LORD has sent me to the Jordan." And he said, "As the LORD lives, and as you yourself live, I will not leave you." So the two of them went on.

7.  Now fifty men of the sons of the prophets went and stood opposite [ them] at a distance, while the two of them stood by the Jordan.

8.  And Elijah took his mantle and folded it together and struck the waters, and they were divided here and there, so that the two of them crossed over on dry ground.

9.  Now it came about when they had crossed over, that Elijah said to Elisha, "Ask what I shall do for you before I am taken from you." And Elisha said, "Please, let a double portion of your spirit be upon me."

10.  And he said, "You have asked a hard thing. [Nevertheless,] if you see me when I am taken from you, it shall be so for you; but if not, it shall not be [so.]"

11.  Then it came about as they were going along and talking, that behold, [there appeared] a chariot of fire and horses of fire which separated the two of them. And Elijah went up by a whirlwind to heaven.

12.  And Elisha saw [it] and cried out, "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s of Israel and its horsemen!" And he saw him no more. Then he took hold of his own clothes and tore them in two pieces.

13.  He also took up the mantle of Elijah that fell from him, and returned and stood by the bank of the Jordan.

14.  And he took the mantle of Elijah that fell from him, and struck the waters and said, "Where is the LORD, the God of Elijah?" And when he also had struck the waters, they were divided here and there; and Elisha crossed over.

15.  Now when the sons of the prophets who [were] at Jericho opposite [ him] saw him, they said, "The spirit of Elijah rests on Elisha." And they came to meet him and bowed themselves to the ground before him.

16.  And they said to him, "Behold now, there are with your servants fifty strong men, please let them go and search for your master; perhaps the Spirit of the LORD has taken him up and cast him on some mountain or into some valley." And he said, "You shall not send."

17.  But when they urged him until he was ashamed, he said, "Send." They sent therefore fifty men; and they searched three days, but did not find him.

18.  And they returned to him while he was staying at Jericho; and he said to them, "Did I not say to you, 'Do not go'?"

19.  Then the men of the city said to Elisha, "Behold now, the situation of this city is pleasant, as my lord sees; but the water is bad, and the land is unfruitful."

20.  And he said, "Bring me a new jar, and put salt in it." So they brought [it] to him.

21.  And he went out to the spring of water, and threw salt in it and said, "Thus says the LORD, 'I have purified these waters; there shall not be from there death or unfruitfulness any longer.'"

22.  So the waters have been purified to this day, according to the word of Elisha which he spoke.

23.  Then he went up from there to Bethel; and as he was going up by the way, young lads came out from the city and mocked him and said to him, " Go up, you baldhead; go up, you baldhead! "

24.  When he looked behind him and saw them, he cursed them in the name of the LORD. Then two female bears came out of the woods and tore up forty-two lads of their number. 

25.  And he went from there to Mount Carmel, and from there he returned to S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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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장 (개요)
본 장의 내용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 엘리야의 승천이라는 비상한 사건. 앞 장 말미에 보면, 한 사악한 왕이 불명예스럽게 죽는 사건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거룩한 선지자가 명예로이 세상을 하직하는 사건이 있다. 전자의 하직은 그의 최대의 비극이나, 후자의 하직은 그의 최대의 행복이다. 사람은 그 종말을 보아야 안다.
   (1) 엘리야는 그의 친구들과 선지자들의 아들들과 또 엘리사를 작별하는데, 엘리사는 그와 가장 밀접한 사람이며, 요단 강 건너까지 그를 좇아간 자다(1-10).
   (2) 엘리야는 천사들의 수고에 의해서 승천한다(11). 그리고 엘리사는 이 세상에서 그를 잃게 된 것을 슬퍼한다(12).
2. 엘리야를 대신하여 엘리사가 선지자로 등장한다.
   (1) 요단 강을 가르는 기적을 행하고(13, 14),
   (2) 선지자들의 아들들이 그에게 비상한 존경을 표하고(15-18),
   (3) 비위생적이던 여리고의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기적을 베풀고(19-22),
   (4) 그를 놀려 대던 벧엘의 어린아이들을 죽여 버리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등장했다(23-25).
예언 속에 나타난 이러한 혁명은 한 나라의 혁명보다도 더 위대한 표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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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승천 (1)(왕하 2:1-8)
엘리야의 시대와 또 그에 관한 사건의 연대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모든 주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언급이 없다. 우리는 그의 나이에 대해서도 들은 바 없다. 그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아합의 재위 몇 년인지도 모른다. 또한 요람 왕 재위 몇 년에 그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가 몇 년간이나 일을 했는지도 추정할 수 없다. 다만 도합 20여 년이 되리라고 상상할 뿐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런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Ⅰ. 하나님은 회오리바람을 통해 그를 하늘로 올려 가시기로 작정하셨다(1절). 하나님은 그것을 작정하시고 나서, 아마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본인에게 그런 사실을 미리 알려 주셨을 것이다. 즉 그는 머지 않아 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할 것이나, 죽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에녹과 같이 몸과 혼이 그대로 하늘로 옮겨져 가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들이 사는 저 세상의 주민이 되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는 데에 필수적인 그러한 변화,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생존한 채 세상에 있을 자들이 겪어야 될 그러한 변화만을 그에게 일어나게 하시는 사건이었다. 우리는 왜 하필 모든 선지자 중에서 엘리야만 그런 유별난 영광을 차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없다. 그도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은” 사람이었다. 죄를 알았으나, 죽음을 맛보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왕 중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존귀하게 하셨으며, 남과 다른 영광을 주시기를 기뻐하셨을까? 우리는 이렇게 가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 하나님은 엘리야의 봉사를 돌아보셨다. 그의 지난날의 봉사는 아주 훌륭했고 특별히 뛰어났다. 그래서 엘리야의 봉사를 보상해 주며, 또 그의 열성과 신앙을 본받아서, 어떤 희생이 따르든지 자기들 세대의 죄악을 저지하는 증인들이 되려는 선지자들의 아들들을 격려해 주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은 교회의 당면한 암흑과 부패상을 굽어보시고서, 이 세상 외에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자 하셨으며, 그리하여 신실한 소수의 무리들의 마음을 당신 자신과 저 세상으로 향하도록 유도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3. 하나님은 복음의 시대를 예상하셨다. 그리고 엘리야의 승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승천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개방된 하늘나라”의 모형과 상징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엘리야는 믿음과 기도로써 하나님과 많은 교제를 나누었고, 마침내는 그리로 데려감을 입었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한다면, 우리가 지금은 비록 지상에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우리의 영혼(곧 우리 자신)이 하늘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을 확신케 해 주려는 것이다.
Ⅱ. 지상에서 엘리야와 늘 동행하던 엘리사는 엘리야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류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길갈, 벧엘, 여리고 등에 머물러 있기를 기대했다(2, 4, 6절).
어떤 사람은 이것을 겸양의 행동으로 생각한다. 즉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기로 작정하신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하지도 않았다(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들은 지상의 군왕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들처럼, 자기들이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광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한 엘리사는 더욱 그것을 알고 싶어했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룻을 설득시키려는 나오미의 경우에서처럼, 더욱 엘리야와 친밀히 있고 싶어하는 충동을 받았을 것이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이곳저곳에 머물러 달라고 애걸했으나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엘리사는 자기의 주인이 없이는 어디에서도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엘리야는 그를 지상에 남겨 두고 하늘로 가 버리고 만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으리이다.” 왜 그랬는가? 엘리사가 엘리야를 사랑해서만은 아니다.
1. 엘리야가 지상에 살아 있는 한, 그와의 거룩한 대화를 통해 좀더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은 언제나 유익을 주어 왔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때에는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상에 함께 살고 있는 동안, 서로 협력하여 영적 선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시 동안만 같이” 있기 때문이다.
2.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확실한 사실을 알고 싶었고, 직접 목격하고 싶었다. 그래야 자기의 믿음이 더욱 돈독해질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더욱 성장하겠기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엘리야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이제는 작별의 축복을 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지기를 싫어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은 결단코 피곤치 않으리라.
Ⅲ. 작별에 앞서 엘리야는 선지자 학교를 방문하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에, 심지어는 사마리아에도 그러한 학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본문에 보면 “선지자들의 아들들(한글 개역에는 “생도들”이라고 되어 있음)”이 있는데, 그들의 수효는 상당했고, 벧엘에도 있었다. 벧엘이란 송아지 우상이 서 있던 곳이다. 여리고에도 있었는데, 그 곳은 얼마 전에 하나님의 저주를 무시하고 재건된 도시다.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성전 예배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이러한 학교를 세워 주셔서, 각종 종교 예식과 예배 의식을 위해서 사람들을 훈련하여 임용할 수 있도록 하셨고, 선량한 사람들은 거기에 모여서 기도와 말씀으로써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절기를 지킬 수 있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희생 제사와 분향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신앙을 변절하는 그런 시기에도 그들의 신앙은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이 선지자들 중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었고,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더욱 많았다”(사 54:1 참조). 그 어느 대제사장도 이 두 거인 엘리야와 엘리사보다 훌륭한 자는 없었다. 생각건대,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에는 한 번도 참예한 일이 없는 것 같다.
신앙과 덕을 가르치는 이들 신학교는 아마 엘리야의 수고로 창건되었을 것이다. 이제 엘리야는 작별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교훈을 주고 용기를 주며 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들을 방문한 것이다. 하늘나라에 갈 때가 된 자들은 지상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들에게 자기들의 경험과 증언과 조언을 들려주며 기도를 해 주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벧후 1:15). 그리스도께서도 승리한 어조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난 후, “그러나 이들이 여기에 있나이다. 아버지여, 저들을 지키소서” 하고 계속 말씀하셨다.
Ⅳ. 선지자들의 아들들은 그 소식을 들었거나(엘리야 자신에게서거나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예언의 영을 받아 말했거나) 아니면 엘리야의 인사가 엄숙한 것을 보고 그가 머지않아 떠나가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1. 그러고는 그 사실을 엘리사에게 알렸다. 그리고 벧엘(3절)과 여리고(5절)에도 알렸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라고 했다. 이러한 말은, 그들이 엘리야를 잃는 일 때문에 엘리사에게 질책을 가하는 것이거나, 그의 선생이 없어지고 나면 엘리사도 자기들과 같은 수준으로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바라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신중히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였을 뿐이요, 이 사건을 크게 주목하고 있다는 뜻임과 동시에, 엘리사더러 엘리야가 없어지고 났을 때의 상황에 대해 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간언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아주 가까운 친척, 아주 사랑하는 친구도 머지않아서 우리 곁을 떠나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데려가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면 그 때는 그들을 잃고 말 것이니, 그가 “빼앗아 가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랴!”(욥 9:12) 하나님은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상급자들이나 우리 발 밑에 있는 하급자들, 그리고 우리 곁에 있는 동급자들, 그 누구든 데려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가 친척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 이행에 힘쓰자. 그러면 그 날이 오더라도 평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엘리사도 역시 그러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이와 비슷한 상황에서의 제자들처럼. 요 16:6) 이 일 때문에 “그 마음에 슬픔이 가득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새삼스레 그러한 말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이 큰 근심에 대한 명상이나 자기 선생을 수종하는 일에서 잠시라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말했다. 엘리사가 이렇게 말한 것은, 역정이 나서거나 선지자들의 아들들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며, 그들도 안정을 되찾기를 바라면서, 이 사건의 결과를 주목하면서 무서운 침묵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나도 아느니라, 조용히 있으라”(슥 2:13).
2. 그들은 자기들도 비록 바싹 따라가지는 않더라도 멀리 서서 그 사건의 증인이 되겠다고 했다(7절). “그들 중 50인이” 자기들의 호기심을 채우려고 “멀리 서서 바라보았다”(7절)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다른 것을 의도하셨다. 즉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거부당한” 그 선지자가 하늘에게서는 얼마나 큰 영광을 받는지를 자기들의 눈으로 보는 목격자로 삼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 “하늘에 문이 열릴” 때에, 한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오라. 와서 보라”고 했던 것이다.
Ⅴ. 엘리야가 기적적으로 요단 강물을 가른 것은 그의 승천의 서두였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와 같은 경우다(8절). 엘리야가 승천하기 위해서는 요단 강 건너편까지 가야 했다. 거기가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래야 모세가 죽었던 장소에 더 가까이 이를 수 있고, 가장 멸시를 받고 있던 요단 강 건너편의 땅도 영광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행인들과 마찬가지로 엘리야와 엘리사도 배를 타고 요단 강을 건너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입국할 때 요단 강을 가르게 했듯이(수 3:7), 이제 엘리야가 출국할 때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존귀케 하고자 하셨을 것이다. 모세가 자기의 지팡이로 바다를 갈랐듯이, 엘리야는 자기의 겉옷으로 요단 강을 갈랐다. 지팡이나 겉옷은 둘 다 그들의 직무의 “표지”(insignia)였기 때문이다.
옛적에는 이 강물이 법궤에 굴복했고, 지금은 선지자 엘리야의 겉옷에 굴복했다. 선지자들이야말로 법궤가 없었던 자들에게는 법궤와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의 징표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자들을 하늘로 데려가실 때에는, 죽음이 바로 요단 강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승천에 앞서 이 강을 건너야만 하고, 그 강을 통과할 수 있는 안전하고 평안한 길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 강물을 이미 갈라 놓으셨으니, 주의 구속받은 백성들은 그리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가시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찌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공포를 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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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승천 (2)(왕하 2:9-12)
Ⅰ. 엘리야는 유서를 작성하여 자기의 상속인 엘리사에게 주었다. 즉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를 대신하는 선지자가 되게 했다. 그러나 실상은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그(엘리사)에게 던졌을” 때에 이미 그것은 이루어진 것이다(왕상 19:19).
1. 엘리야는 엘리사의 한결같은 관심과 시종에 크게 만족했다. 그래서 그가 엘리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즉 이제 작별에 임하여 어떤 축복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홀 주교가 주장하는 대로, 엘리야는 “내가 하늘에 가 있을 때에 내게 구하라. 그 때는 네게 더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느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가기 전에 구하라”고 말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들은 우리에게 답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에 가서는 그리스도와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어떤 친구와 가까이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른다.”
2. 엘리사는 자기의 능력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 나서, “그의 영의 갑절”을 구했다. 그는 재물이나 명예나, 또는 어떤 곤경에서의 해방을 구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자기 세대들에게 해 줄 봉사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해 달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것을 구했다.
(1) 엘리야의 수중에 있는 어떤 능력이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을 구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 하지 않고(그는 성령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내게 임하게 하소서. 이 일을 위하여 나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해 주소서”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나 구하라고 했다.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모든 것을 구하라고 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엘리야 이상의 권위와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셨다.
(2) “그(엘리야)”의 정신(영)을 구했다. 그것은, 그가 엘리야를 대신할 선지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하던 일을 계승하고, 그 선지자들의 아들들(생도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원수들과 대적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접했던 바로 그 난관과 그 타락된 세대들과 대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엘리야의 정신을 갖지 않는다면, “그 날에 맞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3) “그의 정신(영)의 갑절”을 구했다. 이것은 엘리야의 정신의 두 배가 아니라 다른 선지자들의 정신(영)의 두 배를 뜻한다.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는 엘리야 밑에서 자란 엘리사에게서처럼 큰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거룩한 열망이다. 그러한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지극히 잘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다. 우리는 모두―일반 신도든 성직자든―우리의 선배들의 좋은 본을 거울삼아야 하며, 그들의 정신을 따르고, 그들이 그들의 사업을 수행해 나갈 때 함께해 주셨던 그 은총을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여, 우리도 그들의 일을 완성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엘리야는 허락했다. 그러나 두 가지 단서를 붙였다(10절).
(1) 즉 그가 그러한 은사를 마땅히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했다. 엘리야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칭함으로써 그 값어치를 엘리사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못하실 만큼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한 것이다. 신령한 축복의 진가를 잘 앎과 동시에 자기들은 그러한 축복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자야말로, 신령한 축복을 받을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자들이다.
(2) 엘리사가 그의 선생을 끝까지 바짝 좇아다녀서, 그의 최후를 목격해야 된다고 했다. “내가 데려감을 당하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의 선생의 교훈에 부지런히 참예하고 듣고, 그의 모범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특히 그의 최후의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 바로 갑절의 영을 받을 조건이었다. 사실 그러한 조건이야말로 그의 영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한 방법이 되기에 적합한 것이다. 엘리야가 승천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떠나가는 성도들이나 그들의 체험이 가져다 주는 위안은 우리의 기쁨을 더욱 고조시켜 주며 우리의 결심을 더욱 굳세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러한 것은 하나의 신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즉 “만일 내가 승천할 때의 모습을 네가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네게 은총을 베푸시거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네게 그 일을 이루어 주신 표시인 줄로 믿고 그대로 의지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머지않아 자기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던 것이다(행 1:8). 아마 엘리사는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여호와여, 내게 복을 베푸실 이 표징을 보여 주옵소서.”
Ⅱ.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11절). 에녹과 같이, 그도 “죽음을 보지 않고” 그대로 들려 올라갔다. 그리고 카울리(Cowley)가 말하는 바와 같이 “모든 인류가 빠지고 마는 그 구렁을 뛰어넘어, 하늘로 올라간 두 번째 사람”이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호기심 어린 질문이 가해질 수 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해답이 없다. 우리는 단지 본문에서 알 수 있는 얘기로만 만족을 누리자.
1. 여호와 그의 주님께서 오셨을 때, 엘리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는 엘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에게 교훈을 들려주고, 격려를 해 주며, 사업을 지시해 주고 촉구하는 얘기였다. 그것은 남아 있는 자들의 선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엘리야는 이제 자기가 갈 저 세상에 홀린 사람처럼 묵상이나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면서 담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리는 묵상과 예배를 행하는 것만이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 요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잘못이다. 다른 일도 그러하거니와 남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도 우리의 선행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신성한 것을 생각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러한 것이 마음에 떠올랐거든) 그것을 서로 이야기하는 일은 더욱 좋은 일이다. 그것은 교육적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고전 14:4).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축복해 주시면서 승천하셨다.
2. 그의 주님 여호와는 엘리야를 위해서 어떤 호위병을 보냈는가? “불수레와 불말을” 보냈다. 아마 불말과 불수레가 구름을 타고 그들 위에 내려오는 것이 보였거나, 패트릭 주교의 말대로, 땅 위에서 그들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천사들은 흔히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실한 자들의 영혼은 모두 보이지 않는 천사들의 호위로 아브라함의 품에 인도된다. 그러나 엘리야는 몸이 함께 들려 올라갔고, 이 거룩한 호위병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통례적인 어떤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를 팔로 안았든가 또는 독수리같이 날개 위에 그를 태워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엘리야를 어린아이나 어린양 같이(사 40:11, 31) 데려갔다. 그 호위병들은 수레와 말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제왕이나 정복자처럼 위엄 있고 승리에 찬 모습으로 말을 달릴 수 있었다. 아니, 그는 “정복자 이상”의 모습이었다.
성경에서는 천사들을 “그룹들”과 “스랍들”이라 부른다. 그리고 오늘의 모습은,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들의 존엄성에는 못 미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이름에는 모두 합당하다. 이유는 이렇다.
(1) “스랍들”이란 “불”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꽃”으로 만드셨다고 했다(시 104:4).
(2) (많은 학자들의 견해대로) “그룹들”이란 “수레”(병거)를 의미한다. 그래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수레”라고 불린다(시 68:17).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룹을 타신다”(시 18:10)고 되어 있다. 아마 이러한 사실은 에스겔이 본 생물과 바퀴들, 곧 말과 병거를 연상하는 말일 것이다. 스가랴의 환상에도 그렇게 나타나 있다(슥 1:8; 6:1; 계 6:2 이하 참조).
하나님의 천사들은 구원을 상속받을 자들을 위한 일이라면―비록 아무리 미천한 일이라도―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엘리야는 천사들의 세계로 옮겨 가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엘리야가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면서, 그들 중 몇이 마중 나왔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다. 수레와 말이 불처럼 보였으나, 태우지는 않았고 단지 밝은 빛만 내었다. 엘리야를 괴롭히거나 태워 버리려는 불이 아니라, 멀리 서서 엘리야의 승천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에게 그 모습이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엘리야는 일찍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성으로 그 마음이 불타 올랐었는데, 이제는 그가 하늘의 거룩한 불에 의해서 세련되었고, 옮겨졌다.
3. 그는 어떻게 엘리사를 작별했는가? 그 수레가 그들 사이를 갈라놓아 버렸다. 아무리 친한 친구들끼리라도 헤어져야 한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홀로 남게 되었다.
4. 그는 어디로 갔는가? 그는 “회리바람에 의해서 하늘로 올라갔다.” 불은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그리고 회리바람은 엘리야가 대기권을 통과하여 지구의 자력권을 벗어나도록 도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수한 에테르층을 벗어나서 거룩하고 복된 영들이 사는 세계로 얼마나 순식간에 승천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설사 그가 어느 곳에 머물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피닉스처럼 영영 살았으리라.
그는 더 좋은 존재가 되기를 열망했고,
산들도 그와 같이 불 속에서 영원에 이르기를 사모했느니라.”
―카울리(Cowley)―
엘리야는, 한때 화가 나서 죽고 싶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지극한 은총을 베푸사, 그 때 그의 소망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특유의 특권으로 그에게 영예를 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건이나 에녹의 사건을 통해,
(1) 사람이 죄를 짓지 않으면,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승천을 통해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다.
(2) 하나님은 복음에 의해서 분명히 드러난 저 세상과 인간의 불멸성을 어렴풋이 보여 주신 것이다. 그 불멸성은 성도의 몸이 입게 될 영광이다. 그리고 엘리야 시대와 같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밝혀 주신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그리스도 승천의 한 상징이기도 하다.
Ⅲ. 엘리사는 저 위대한 선지자의 상심을 가끔 깊이 슬퍼했다. 그러나 그에게 찬미를 보냈다(12절).
1.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엘리야의 영의 갑절을 요구한 자기의 요청이 분명히 허락되었다는 징표를 얻은 셈이다. 그는 하늘 쪽을 계속하여 바라보았다. 제자들처럼, 그리로부터 그 은사가 오기를 기대한 것이다(행 1:10). 그가 잠시 동안 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으나, 곧 그 장면은 그의 시계(視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
2. 그는 자기 자신과 민중이 엘리야를 잃은 것을 슬퍼하는 뜻으로 자기의 옷을 찢었다. 엘리야가 비록 승리에 넘쳐서 하늘로 올라갔지만, 이 세상은 그를 아까워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잔존자들에게는 그의 승천이 큰 통한을 가져다 주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고 쓸모 있는 자들을 데려가심으로써 사람들의 눈물과 애통을 요구하는데도, 그 눈에 눈물이 없는 자라면 그런 자들의 마음도 역시 굳은 것이다. 비록 엘리야가 떠남으로써 엘리사가 능력이 더해지게 되고, 특히 이제 엘리사가 그의 영을 갑절이나 받은 것이 분명하기는 해도, 그는 엘리야를 잃은 사실을 슬퍼했다. 그가 엘리야를 사랑하여 영원토록 그를 받들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3. 그는 엘리야를 매우 존경스러운 인물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엘리야를 잃은 것에 대해 그토록 슬퍼한 이유이기도 하다.
(1) 엘리사 본인으로서는 자기의 젊은 날의 안내자를 잃은 것이다. 그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라고 했다. 엘리사는 마치 자기의 꼴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여읜 자식과 같다고 생각하여, 심히 슬퍼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남겨 두고 떠나실 때는, 그들을 고아와 같이 저들끼리 있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셨다(요 14:15). 그러나 엘리야는 어쩔 수 없었다.
(2) 민중은 자기들의 최대의 안내자를 잃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수레요 그 마부”였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잘못만 없다면, 이 수레와 같이, 그들을 모두 하늘로 데려가고 싶어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할 때 수레(병거)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엘리야가 충언과 견책과 기도―이런 것은 가장 힘센 수레와 말보다 더 나은 것이다―로써 이스라엘에게 수레와 말 노릇을 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그들 군대의 참패요, 만회될 수 없는 대손실과 같았다. “이 하나님의 사람을 잃느니 차라리 우리의 온 군대를 잃는 것이 좋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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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을 받은 엘리사(왕하 2:13-18)
본문은 엘리야 승천 직후에 일어났던 일에 관한 기록이다.
Ⅰ. 하나님께서 엘리사와 함께 계신다는 징표와 엘리사가 엘리야의 자리로 승진했다는 표징을 받았다.
1. 그는 엘리야의 직무의 상징이었던 그의 옷을 물려받았다. 아마 그는 그의 선생을 위해서 그 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13절).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갈 때, 일반인들처럼 자기의 몸을 지상에 남겨 두고 가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자기의 겉옷을 떨어뜨리고 갔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옷을 벗어버린 것은 아마 불멸성으로 옷 입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자기의 몸을 단장해 줄 옷이나 기후에서 몸을 보호해 줄 은신처나 얼굴을 가릴 수건 따위는 필요 없는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왕상 19:13 참조).
그는 자기의 옷을 엘리사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그 옷 자체로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었지만, 성령께서 엘리사 위에 강림하셨다는 표징이기 때문에, 수천만 금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 엘리사는 그 옷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숭배하려는 신성한 유물로서가 아니라 입고 다녀야 할 중요한 의복으로서, 그리고 그가 찢어 버린 자기 옷 대신에 그에게 주어진 보상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그 외투가 자기에게 처음으로 씌워졌던 이래로 줄곧 그 옷을 사랑해 왔다(왕상 19:19). 그 때는 쾌히 엘리야의 부름에 따라나섰다. 그래서 엘리야의 종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옷이 그에게 존귀를 더하게 해 주었으니, 그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옷과 마찬가지로 중요 위치에 있는 선한 사람들의 유품이 있다. 그럴 때는, 그 후계자들이 모아서 보존해야 한다. 즉 그들의 어록이나 저작들 또는 그들의 모범적 행실들로서, 후계자들이 선임자들을 존경하는 뜻에서 그러한 사업들을 좇아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그 선임자들의 은덕 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그는 요단 강을 가를 수 있는 엘리야의 권능을 이어받았다(14절). 그의 아버지를 작별하고, 이제는 그 선지자들의 학교, 그의 아들들(생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엘리사와 그들 사이에는 요단 강이 놓여 있었다. 엘리야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그 강을 가른 적이 있었다. 이제 엘리사는 자기의 직임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 자기도 그 강을 가를 수 있을는지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것으로써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해 주시는지, 그리고 자기가 과연 갑절의 영을 받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행한 마지막 기적이 엘리사가 행하는 처음 기적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엘리야가 멈춘 바로 거기서부터 일을 해 나갔다. 그 사이에는 아무런 여백도 없었다.
(1) 물을 가름에 있어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이용했다. 그는 자기가 직접 그 일을 해내는데(8절), 자기 선생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 했고, 어떤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려 하지 않았다. 즉 그는 자기의 선임자들보다도 자기들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2) 그는 엘리야의 하나님께 구했다. “여호와,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이까?” 그는 이제 엘리야가 없어서 편안할 수 없는 자처럼, 엘리야의 상실에만 신경을 쓰고서, “엘리야는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또는 남아 있는 선지자들의 생도들처럼 자기의 결과를 알지 못한다는 듯이, 자기의 행복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또는 엘리야가 어디에 가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에 관해 자꾸만 질문을 던진 것도 아니다(즉 우리에게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숨은 세계의 삶에 대해서). 또한 그는 엘리야가 도와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니, 물론 엘리야는 적절한 사람이지만, 전지(全知)하거나 전능한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구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엘리야가 하늘로 가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엘리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스스로 충분히 입증하신 셈이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위해 하늘 도성을 예비해 놓으셨으나, 만일 그 도성이 그가 이 세상에서 누리던 그 어떤 성보다도 좋은 곳이 아니라면, 그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라 불리기에 부끄러울 것이다”(히 11:16; 마 27:31, 32). 이제 엘리야는 하늘로 들려져 가고 없으므로,
① 엘리사는 하나님께 물었다. 피조물에게서 얻는 우리의 위안이 끝나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신다.
② 그는 “엘리야의 하나님”, 곧 엘리야가 섬기고 영광 돌리고 간구하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버리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집착하던 그 하나님께 구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을 변절하는 그런 시대에도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미에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영광이 부여된다. “엘리야를 인정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물자를 공급해 주시던 그 하나님, 그리고 여러모로 그에게 영예를 부여하시되, 이제 마지막에 더욱 그를 존귀하게 해 주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여호와여, 내게 엘리야의 영을 약속하지 않으시렵니까? 그 약속을 지금 이루소서”라고 한 것이다.
KJV는(한글 개역도) 원문에 나와 있는 “그까지도”(Aph-his)라는 말을 “그도 물을 치매……” 하고 그 다음 문장에다 포함시키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이 “엘리야의 하나님, 어디 계시나이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그는 여전히 계시느니라(Etiam ille adhuc superest). 바로 네 가까이에 말이다. 우리에게 엘리야는 없지만, 엘리야의 하나님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는 땅을 저버리지 않으셨느니라. 아직도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은 역시 그 분이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첫째, 지상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찾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리고 앞서서 하늘에 가 있는 성도들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그 분께 의뢰해야 한다. 즉 “우리 열조의 하나님”이라고.
둘째,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되면 큰 위로를 받는다. “그의 거룩한 성전에 계신” 분은 역시 그 분(시 1:4)이요, “그에게 나아가는 모든 자들 가까이에” 그가 계신다(시 145:18).
셋째, 경건하고 신실한 선임자들의 정신과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은 선임자들이 체험한 것과 같은 은혜를 분명코 체험하게 된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리사의 하나님도 되신다. 거룩한 선지자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다. 우리가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앞서 간 자들의 옷이나 장소나 서적을 가진들 무슨 소용 있으랴?
3. 엘리사는 선지자들의 생도들에게 대한 엘리야의 권한을 이어받았다(15절). 요단 강까지 따라갔던, 여리고의 어떤 생도들은 그 사건의 전말을 보았고, 엘리사가 돌아올 때 그 앞에서 강물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그것으로써 “엘리야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는 확증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난날 엘리야에게 보냈던 것과 같은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엘리사를 대면하자, 그가 불과 물을 무사히 통과한 사실에 대해서 축하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예를 베풀어 주신 사실을 같이 기뻐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렸다”고 했다. 그들은 선지자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사는 농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바로 이 사람이 “그가 영예롭게 하시기를 기뻐하는 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즉각적으로 그를 자기들의 우두머리요 아버지로서 대하여 복종했다. 마치 모세가 죽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복종한 것과 같다(수 1:17).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난 자들에게는, 그들의 출신과 교육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최대의 경의와 사랑을 보내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영예를 주든, 우리도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선지자들의 생도들이 이렇게 즉각 엘리사에게 복종하자, 이 사실은 필경 그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을 것이고, 그가 맡은 소명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Ⅱ. 선지자들의 생도들은 불필요하게도 엘리야를 찾으려 했다.
1. 그들은 엘리야가 살았거나 혹은 죽어서 산이나 어느 계곡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엘리야를 찾으러 용사들을 내보내 보았으면 만족했으리라(16절). 아마 어떤 생도들은 이 일로써 엘리사를 지명한 일에 대해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먼저 엘리야가 정말로 사라졌는지를 확인해 봅시다. 어떻게 그렇게 선택받은 그릇(엘리야를 말함)이, 그 안에 기분 좋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릇처럼 버림을 받고, 하늘의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나섰던 것이다.
2. 엘리사는 그들의 동의(動意)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자꾸만 간청하자 마침내 허락했다(17절). 엘리사가 자기의 옛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다거나 그의 의복을 내어 주려는 마음이 없다고 하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부끄러워서도 그들의 의견에 반대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그들은 간청했다. 지혜로운 자들은 남들의 판단이 소용없고 불필요한 줄을 알면서도, 평화를 위해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양보를 한다.
3. 그들은 결국 엘리사가 부끄러워서 그 의견에 반대할 수 없었던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다. 쓸데없이 애를 썼으나, 그 심부름꾼들은 “그는 찾을 수 없다”(non est inventus)고 하는 답변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엘리사에게 그들의 우행을 진심으로 책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내가 가지 말라고 이르지 않던가?”(18절) 결국 이 일로 인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엘리사의 판단에 보다 기꺼이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산과 골짜기를 가로질러 찾아다니더라도 엘리야에게 이를 수 없다. 단지 그의 거룩한 신앙과 열성을 모방하는 길만이, 때가 되었을 때, 그에게 이르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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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먹게 된 우물물(왕하 2:19-25)
엘리사가 엘리야보다는 더욱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의미에서 보면, 그는 영을 갑절이나 받은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사가 기적을 행한 수는 엘리야에 비해 꼭 두 배가 된다고 생각한다.
본문에는 두 가지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즉 여리고에 자비를 베푼 기적과 벧엘에서 심판을 행한 기적이 그것이다(시 101:1).
Ⅰ. 여리고의 물이 축복을 받게 된다. 즉 그들의 물을 좋은 물로 바꿔 주었다. 여리고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또 그 성읍을 재건하는 자들의 자녀들이 죽는 희생을 치르고서 재건된 마을이다. 그러나 일단 건설되고 나자, 그 성읍을 철폐하라는 명령이 다시 내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나 백성들에게 거기에 거주하지 말라는 금지령도 내려지지 않았다. 물론 그 성읍을 재건한 자들은 악을 행했지만, 그 성읍에는 경건을 낳는 산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이 들어가 살 집을 짓는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보면, 죄인들의 재물이 의로운 자들의 거처를 마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리고에 가신 적이 있다(눅 19:1).
이제 엘리사가 바로 그 곳으로 온 것이다. 그는 선지자들의 생도들이 밀파한 정탐꾼들이 멀리에서 보고 들려주는 것보다는 더 자세히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 용사 50인들이 엘리야를 수색하는 동안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1. 그 때 여리고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의 고통을 말한 것이다(19절). 신실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남의 일을 기꺼이 돌본다. 선지자들의 빛이 아직 잠시 우리에게 함께 있을 때,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들은 그 문제를 엘리야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 엘리야는 엘리사보다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신학교의 감화를 받아 그 마을에도 개혁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 마을의 지리적 형편은 쾌적하여 좋은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먹기에 좋은 물이나 식물을 생산해 낼 옥토가 없었다. 전망이 아무리 좋은들 이런 곳에서 무슨 낙이 있으랴? 물은 일반 자비이다. 물이 부족하거나 먹을 수 있는 물이 없을 때 당할 극심한 곤경을 생각하고, 우리는 물로 인해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이는 여리고 땅 전체가 불모의 땅이고 물도 나쁜 지역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부만 그러했는데, 바로 “거기에” 선지자 생도들의 숙소가 있었으며, 그들이 여기서는 “그 성 사람들”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2. 그는 곧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정신을 수양하기 위해서 적당한 곳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불모의 사람들을 옥토의 사람들로 만드는 일에 전념해야 했다.
엘리사는 그들의 물을 고쳐 줄 것이다. 그러나,
(1) 그들은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지고 엘리사에게 주어야 했다(20절). 소금이 물을 순화시키는 작용을 한다면, 그렇게 소량의 소금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왜 하필 새 그릇에 담긴 소금이라야 되겠는가? 그러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스스로 힘써야 하며, 신앙과 복종을 단련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어떤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을 준수함으로써 가능해진다.
(2) 엘리사는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던졌다. 그래서 물줄기와 그 근원을 치료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활을 개혁하는 길은 곧 그들의 마음을 갱신시키는 것이다. “생명의 과실을 맺고자” 하는 자들은 이렇게 은총이라는 소금으로 (자기 자신을) 간을 맞추어야 한다. “나무를 좋게 하면, 그 열매도 좋아지리라.” 마음을 정결케 하라. 그리하면 손도 깨끗해지리라.
(3) 엘리사는 이 기적을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듯 가장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 물을 고쳤느니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의 도구였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치유의 효험을 기꺼이 내어 보내고자 하신 그 통로에 불과했다.
그가 이렇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이후로는 그들이 그와 같은 서두로 시작되는 그의 견책과 충언과 명령을 더욱 기쁜 마음으로 좇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면,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통솔해야 될 것이다. 이후부터는 엘리사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하고 말하면, 그들에게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4) 그 치유의 효과는 영속적이었다. 잠시 잠깐의 일이 아니었다. “그 물이 고쳐져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22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영원토록 있으리라”(전 3:14).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으로 “영혼(사람)을 치유하시면”, “다시는 죽음이나 불모성이” 있지 아니하리라. 그 성질이 변경된다. 무용하고 악하던 것이 고마움을 알게 되고 쓸모가 있게 된다.
Ⅱ. 벧엘의 어린아이들에게 저주가 임한 기록이 있다. 그 저주는 실상 그들을 죽여 버렸다. 그 저주는 이유 없는 저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벧엘에도 선지자 학교가 하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엘리사가 그리로 갔다. 이것은 그의 처음 방문이었다. 아마 거기에 있던 생도들은 최대의 성의를 다하여 그를 환영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다. 여로보암의 송아지상 하나가 벧엘에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자랑하며 좋아했고, 그것을 비난하는 자들을 미워했다.
율법이 이 경건한 학원 폐쇄의 권한을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이 거리에 나오면 별명이나 기타 다른 이름을 부르면서 그들을 놀려 대곤 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멸시하고, 청년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해 반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으며, 가능하다면 그 선지자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도록 충동질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엘리사에게 욕을 퍼부은 것이 그런 짓의 첫 사례였다면, 그렇게 지독한 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들을 조롱하는 것”과 “선지자들을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께 그 복수를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죄” 중 하나였다(대하 36:16 참조). 이에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러한 죄의 실례를 보라. “벧엘의 아이들” 곧 거리에서 놀고 있던 소년 소녀들(아마 그들은 엘리사가 오는 것을 보고 그 마을로 내려왔을 것이다)이 엘리사를 만났다. 그들은 당연히 “호산나” 하면서 영접해야 했지만, 욕설로 맞이했다. 그들은 마치 엘리사가 바보인 양, 또는 그렇게 놀림을 받을 사람인 양 생각하여 그 주위에 모여들어 그를 놀려 댔다. 그들은 다른 때에도 여러 가지 농담으로 선지자들을 놀려 대곤 했는데, 엘리사를 이렇게 놀려 댔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사람이 자연적으로 타고난 어떤 약점이나 기형을 가지고 비난을 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의 경우 대머리는 결국 흠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이 다른 이유를 품지 않았던들, 결코 그를 그런 식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비난한 것은 그가 선지자라는 이유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러한 영예를 주셨다면, 그것은 그가 대머리라는 사실을 감싸 주기에 넉넉하며, 그러한 비난을 막아 주기에도 넉넉함이 틀림없다.
그 아이들은 “올라가라”고 엘리사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마 엘리야의 승천을 비꼬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너의 선생이 올라갔는데, 왜 너는 그를 좇아 올라가지 않았느냐? 불수레는 어디 있지? 너도 언젠가 없어지겠지?” 하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 아이들은 배운 대로 지껄인 것이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부모들에게서 그렇게 별명을 부르며 욕설을 퍼붓고, 특히 선지자들을 놀려 대는 것을 배웠다. 말하자면, 이 아이들은 새끼 닭으로서 어미 닭이 울면 같이 우는 것이다. 아마 이때 그들의 부모들이 그들을 그 곳으로 내어 보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선지자들을 쫓아낼 심산으로 말이다.
2. 마침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학대한 이스라엘 위에 내릴 패망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정당한 경고를 주려는 것이었다. 엘리사는 잠시 동안 그들의 조롱을 참고 들었다. 그러나 이윽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성의 불이, 그 계속되는 자극으로 인해 그의 가슴에서 불타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돌이켜 저들을 보았다.”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면 행여나 그들을 누그러뜨릴 수 있거나 물러가게 할 수 있을까 해서였으며, 혹시 그 아이들의 얼굴에 어떤 순진한 표정이라도 있는지 확인하려 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워하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앞으로 내릴 심판을 불러서 선포한 것이다. 자기 개인에게 가해진 일로 인해 사적인 보복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입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가해진 치욕을 벌한 것이다.
그의 저주는 즉각 실현되었다. 두 마리의 암곰(아마 자기 새끼들을 빼앗긴 곰들)이 근처의 숲에서 나와 아이들 42명을 현장에서 죽여 버렸다(24절).
(1) 이 사건에서 볼 때, 선지자 엘리사는 정당하다. 그는 거룩한 충동을 받아서 저주했기 때문이다. 그 저주가 어떤 나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그 저주에 “아멘”(긍정)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그 두 마리의 곰을 그 아이들을 죽인 곰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을 징계한 두 개의 채찍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마땅할 것 같다. 그는 이들이 얼마나 악질적인 독사의 자식들인지 알았고, 이렇게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나면 그 선지자들에게 얼마나 악랄한 원수들이 될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그들 부모들을 벌하고, 그 부모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이다.
(2)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셔야 했다. 그는 죄를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를 헤아리는 분이기 때문이다. 비록 어린아이들에게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악의에 가득 찬 병아리들의 소름끼치는 비명을 듣는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자. 아이들도 나쁜 말을 삼가게 하자. 하나님은 그들의 말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정신이나 신체에 결함이 있는 자라고 하여 조롱하지 말자.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나 사역자들을 놀리고, 그들의 선행을 비방하는 것은, 목숨에 위험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녀들로 위안을 얻고자 하는 부모들은 그들을 잘 교육시키고, 그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어리석음을 몰아내기 위해 일찍부터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홀 주교의 말과 같이, “교육을 소홀히 한 자녀들에게서 선을 기대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돌보았더라면 예방할 수 있었을 불행을 당해 탄식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벧엘에 왔다.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의 보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했을 뿐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떠나 갈멜 산으로 갔다(25절). 아마 거기에 휴양과 묵상에 적합한 예배 처소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다음에는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그 곳은 선지자들이 모이는 공적 장소였다. 그는 거기에서 선지자들의 아버지(선생)로서 최상의 봉사를 할 수 있었으리라. 홀 주교는 이 사실에서 이러한 사실을 주목했다. 즉 “항상 홀로 있거나, 또는 결코 홀로 있어 본 적이 없는 자는 유능한 선지자가 될 수 없다.”

...===호크마===
열왕기하 2장
1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ㅇ여호와께서...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 - 선지자 엘리야 (Elijah, B.C.875-848)가 자신의 공적 사역을 모두 마친 후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왕 아합의 통치 초기에 등장, 숱한 역경을 이기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역을 완수한 엘리야에게 이제 남은 일이라곤 엘리사(Elisha, B.C. 848-797, 왕상 19:19-21)를 차기 후계자로 굳건히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면 그는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이하게 될 터인데 곧 에녹(창 5:24)처럼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昇天)하는 것이었다(11절). 한편 성경상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므로 이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이같은 엘리야 승천 사건은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Ahaziah, B.C. 853-852)가 죽고난 뒤에 일어났던 것만은 분명하다(1:17,18).
ㅇ길갈에서 - 성경에 나오는 길갈(Gilgal)은 두 곳이다. 하나는 여호수아의 정복사에서 언급된 곳(수 4:19)으로 여리고에서 북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질질리아(Jiljiliya) 또는 칼킬리야(Khalkiliya)에 해당하는 곳(신 11:30)으로 벧엘에서 북서쪽으로 약 13km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해 있다(T.R.Hobbs).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동한 경로(1-11절)와 2절의 '벧엘로 내려가니'란 말로 미루어 볼 때 본절의 길갈은 후자의 길갈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며 엘리사의 중심 활동지이다(4:38). 그러나 후에 이곳은 우상 숭배지로 변하여 아모스, 호세아등의 선지자에게 규탄을 받았다(암4:4;호4:15;9:15).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다음 지도를 참조하라.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ㅇ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 본장에서 세번씩이나 언급된 말로(2, 4, 6절) 엘리야가 엘리사를 자신에게서 떼어 놓으려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처럼 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엘리야가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알고 마지막 지상 생활을 홀로 지내기 위해(Pulpit Commintary), 2)자신이 승천하는 영광을 엘리사와 생도들에게 나타내지 않으려는 겸손에서(Keil & Delitzsch), 3)엘리사의 충성과 사랑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Wycliffe)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한 가지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모든 견해를 두루 섭렵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하다.
ㅇ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것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맹세의 일반적인 형식이다(삼상 14:39; 20:3;삼하 11:11). 라기스 문서(Lachish Letters)에서도 동일한 맹세 형식을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자신의 맹세나 말의 신실성을 확증, 강조하려 할 때 대개 이같은 표현을 썼다. 이는 곧 하나님과 상대방의 전인격 및 전존재를 건 것으로 '여호와와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이 확실하듯-도 확실하다'는 뜻이다. 삼상 25:26 주석 참조.
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ㅇ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 - 구약 성경 중 사무엘서나 열왕기에는 '선지자의 무리'(삼상 10:5;19:20;왕상 20:35)또는 '선지자의 생도'(5,7,15절; 4:1,38; 5:22; 6:1)란 말이 종종 나온다. 이들은 영적으로 지극히 암울했던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도덕적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당대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의 수하에 몰려든 자들이다. 이런 무리를 가리켜 우리는 소위 원시 형태의 '선지자 학교'라고 부르는데 곧 벧엘, 여리고(5절) 등에 있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상 10:1-16 강해, '선지자 학교'를 참조하라.
ㅇ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직접 엘리야에게 나아가기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권위가 너무 컸다(Pulpit Commentary). 또 그들은 엘리사를 자신들과 동일한 생도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와 접촉하기가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ㅇ여호와께서...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 본절 및 5절과 같은 말로 볼 때 벧엘과 여리고 생도들도 엘리사와 같이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나이까?"라는 질문은 어떤 사실에 대해 확인하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취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카흐'로서 '돈을 주고 사다', '결혼하여 데려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수동형(Niphal)으로는 '포로로 잡혀가다', '죽음에 의해서 옮겨지다'(겔 33:6)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러나 이 단어 '라카흐'가 여기서는 '엘리야의 승천'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의 승천에 대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계시해 주고 엘리야가 엘리사와 선지자들의 생도들에게 그 계시의 내용을 알려준 것으로(Wycliffe) 행 1:9,10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감람 산에서 승천하실 때의 모습과 같이 하늘로 올리움을 생생히 나타낸 것이다(Keil & Delitzsch). 또한 본절의 '머리 위로'라는 구절이 이 의미를 더욱 강화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메알'은 '...로부터'라는 뜻의 비분리 전치사(메)와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알)가 합성된 것으로 엘리야가 하늘 나라로 옮기게됨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생도들이 본절에서 언급한 말은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에 대한 질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단순히 엘리야가 엘리사를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Bahr). 즉 엘리야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에 대한 언급으로서 엘리사의 마음에 슬픔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벧엘에 있는 성도들이 엘리야의 승천에 관해 알 리가 없기때문이라는 것이다(K.W.Bahr). 그러나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히브리어 '라카흐'와 전치사 '메알'의 용법, 그리고 당시 상황등을 고려해 이 구절을 엘리야의 승천에 관한 질문으로 보고 있다.
ㅇ너희는 잠잠하라 - 이것은 "그가 하늘로 올라 가는 것을 큰 소리로 말함으로써 백성들을 소란시켜서는 안 된다"(J. Lange)는 의미가 아니다. 또 "엘리야의 겸손을 위해서 그의 영광을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Keil)는 의미도 아니다. 즉 이것은 "너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Wycliffe) 내 사랑하는 주를 이별하려고 하는 이 순간에 말을 많이 함으로써 내 마음을 격동시키지 말라"(Bunsen)는 뜻으로 엘리사 자신의 내적 심정을 토로한 것이며(Matthew Henry) 거룩한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엄중한 요구이다(Pulpit Commentary).
4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ㅇ엘리야와 엘리사의 여행은 길갈-벧엘-여리고-요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험한 여행에서 스승에 대한 엘리사의 인내와 충성심은 명백하게 증거되고 있다. 이러한 훈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결국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다.
ㅇ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 엘리사는 마침내 스승 엘리야의 반복된 시험을 통과하였다. 이러한 그의 결단은 스승에 대한 깊은 애정과 불타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엘리사의 고백은 그의 전 인생을 엘리야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7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ㅇ선지자의 생도 오십 인이 - 여기에 언급된 오십 인이라는 숫자는 1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잡으러 왔던 병사들의 수와 동일하다(1:9). 오십 명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최후를 목격한 증인들로서 그의 승천을 전파하게 될 사람들이다. 한편 선지자의 생도들이 50명이라는 것은 그들이 단체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바 이러한 사실은 암살의 위험에서 도피하는 다윗의 사건 등 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도 볼 수 있다(삼상 10:5,6,10; 19:20).
8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ㅇ겉옷을 취하여 - '겉옷'은 히브리어로 '에데르'로서 소매없는 외투 또는 양가죽으로 되어 어깨를 감싸는 망토를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70인역(LXX)에는 '톤 멜로텐'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양가죽'을 의미한다. 한편 모세의 지팡이가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권위의 상징인 것과 비교해서 여기에 나타난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의 직분을 상징한다. 그리고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가 일하는 곳에다 던진 일(왕상 19:19)이 있는데 이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선택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선지자직을 위임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들 앞에서 엘리야의 겉옷을 보인 것은 엘리사가 그의 후계자임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외투를 말면 모양이 어느 정도 지팡이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ㅇ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 이 사건은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사건(출 14:16,21)과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른 사건(수3:13)에 상응한다. 또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처럼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지도자 위임의 관계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이적이다. 왜냐하면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기 때문이다(시 62:11). 따라서 겉옷을 취하는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와 이 이적의 사건은 이것을 지켜보는 생도들에게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그분의 목적을 알게 했을 것이다. 한편 '육지'는 히브리어로 '하라바'로서 '마른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 공동 번역과 영역본들에서는 모두 '마른 땅'(dry ground)이라고 번역했으며 70인역(LXX)도 이와 비슷하게 '에레모스'즉 '사막', '광야'란 의미로 옮겼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요단 강을 건널때 '마른 땅'(출 14:21;수 3:17)이라고 말했던 그 표현으로서 성경에서는 드물게 사용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강물과 바닷물을 갈라 놓을 수 있는 분일 뿐만 아니라 갈라서 드러난 땅을 마르게도 하셔서 백성들의 불편함을 알고 조처 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한편 이 두 선지자가 요단 강을 건너 당도한 곳은 모압 땅이었는데 이곳이 바로 모세가 죽음을 맞이했던 곳이다. 신 34:6을 보면 "오늘까지 이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묘가 없는 엘리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17절에서 무리들이 엘리야의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한 사건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에녹과 연관시키려고 하지만 오히려 모세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무덤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두 기사 뿐이기 때문이다.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ㅇ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 '영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로서 '영', '호흡', '영혼'이라는 뜻이나 여기서는 '선지자적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문의 '갑절'이라는 말은 신 21:1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용어로서 맏아들의 분깃을 강조한 표현이다(Keil & Delitzsch). 즉 이 말은 일반의 형제 들보다 장자가 받는 두 몫의 유산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합법한 계승자로서 충분한 지도자의 역량을 엘리야에게 요구한 것이다. 만일 이 구절이 엘리야보다 두배의 능력을 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때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긴다(Bahr). 1)실제로 엘리사가 받은 능력은 엘리야의 두 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산 생애의 길이나 그가 나타낸 기적의 수나 양은 엘리야가 행한 것보다 두 배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인 것이다. 2)그러한 요구는 주인을 모시는 종된 자로서 가장 겸손치 못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종이 결코 그 주인만 못하다고 했던것이다(마 10:24). 따라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을 나타낸 표현으로 엘리야같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다(Matthew Henry, The Interpreter's Bible).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사역자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 먼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간구하는 경건의 훈련이 절실히 요청된다(히4:16).
10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ㅇ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 엘리야의 이 말은 엘리사가 요구한 일의 중요성의 정도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9절에서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고 할 때 엘리야는 자신이 쉽게 줄 수 있는 것을 의미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엘리사의 요구는 엘리야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닐 뿐만 아니라(Matthew Henry Commentary) 자신이 행할 수 없는 하나님께만 속한 일 즉, 신령한 축복을 원한 것이기에 그 일은 어렵다고 한것이다.  또 엘리야는 후계자를 임명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의식은 만인이 보는 가운데서 치룰 수 있으나 이에 대한 신적인 증거는 자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그렇기에 엘리야는 엘리사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엘리사의 신앙심 깊은 요청이 허락되도록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ㅇ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 신 31:23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지도권을 양도받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직접 임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적이 곧 엘리사의 선지자적 직분에 대한 증거가 되리라고 했다. 즉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의 승천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그리고 그 승천의 영적 의미를 깨닫는다면(Wycliffe) 그의 요청이 성취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6:17;눅 24:16,31). 그래서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어느 정도 부정적인 면을 암시하는 말을 첨가해서 엘리야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나타냄과 동시에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바라보면서 그분의 뜻을 신뢰하였으며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선지자적인 태도의 모범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ㅇ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이에 그들이 걷기를 계속하면서 계속해서 말했다'란 의미로 이것은 두 사람이 요단 강을 건너 걸어가고 있을 때 (Wycliffe) 하늘로 부터의 징조를 기다리면서 한참동안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무슨 증거를 보이시도록 기도하였을 것이며 또한 엘리사는 스승의 최후를 맞이하면서 엘리야가 남긴 교훈을 하나라도 더 듣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유사한 예로서 눅 24:50,51에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시기 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서 축복해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ㅇ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 이 구절은 1장에서 말한 '하늘에서 내려온 불'과 연관됨이 분명하다(1:9-16). 엄밀하게 말하면 실제로 '불수레와 불말'에 관한 언급은 엘리야의 생애 중에서 불의 역사로 말미암은 그의 승리를 연상시켜 준다(왕상 18:24-38;왕하 1:10-12). 실제로 구약에서 말과 병거는 군대의 전쟁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며(출14:7; 삿 4:3;욜 2:5;나 3:2), 불이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출 3:2;24:17;신 33:2;합 3:3-5)이 '불수레와 불말'이 하나님의 권능과 의지를 나타내는 구름을 의미(Lange)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ㅇ회리바람을 타고 -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회리바람 안에' 또는 '회리바람 가운데'이다. '회리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세아라'로서 검은 구름과 번갯불을 동반한(Wycliffe) '태풍' 상태를 의미한 말로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회리 바람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욥 38:1;행 2:2). 그리고 원문을 보면 엘리야가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승천했는지 분명치가 않다. 단지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태풍가운데 사라진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말 4:5,6;마 11:14) 폭풍 중에, 즉 주께서 임재하시는 가운데 승천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Wycliffe). 그래서 17절에서 오십인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오게 한 것도 이와 같이 그의 사라짐이 묘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에녹(창 5:22-24), 예수(눅 24:50-53)와 같이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모든 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일에 대한 예표이기도 하다(고전 15:51;살전 4:17). 한편 후대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지 직전에 먼저 엘리야가 나타나리라(말 4:5)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대 문헌 가운데 기록하고 있는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엘리야가 갑자기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하며, 개들이 즐겁게 짖으면 그것이 엘리야가 오는 소식이라 하여 가슴을 두근거렸다는 것이다(Bahr).
ㅇ승천하더라 - 여기서 히브리 원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알라'인데 이것은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질문할 때(3,5절) 사용한 단어 '라카흐'와 다른 뜻이다. 즉 '라카흐'는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심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알라'는 그 원형인 '번제'라는 뜻의 '올라'에서 보듯이 완전히 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확실히 에녹이 승천한 경우와 연관되는데(창 5:24) 창세기의 기록에서는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해석할 때 엘리야의 승천 방법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그의 모습을 사라지게 하심으로써 에녹과 모세와 동일하게 취하셨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의 일부는 본 엘리야의 승천 기사를 하나의 전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그 현장을 목격한 당시의 선지 학교 학생들과 엘리사의 증언에 의해 또는 승천 전에 언급된 사실(3,5절)을 미루어 볼 때 그리고 변화 산상에서 모세와 같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엘리야의 기사를 살펴볼 때 그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과 객관적 사실성은 충분히 입증 되었다고 할 수 있다(마 17:3,4;눅 9:30). 이러한 엘리야 선지자의 승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대한 확실성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불멸성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불멸성은 성도의 몸이 입게 될 영광이고, 이러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것에 대한 한 상징인 것이다(Matthew Henry Commintary).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ㅇ엘리사가 보고 - 10절과 비교해 볼 때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엘리야의 승천 사실을 엘리사가 목격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엘리사가 제시해 주었던 상황(3, 5절)이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때 엘리사는 자신이 요청한 '갑절의 영감'이 응락된 것을 알았다.
ㅇ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 엘리사의 이 외침은 2장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13:14에서 요아스 왕의 입을 통하여 이 문구가 다시 말해진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 자체가 갖는 독특한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지자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요아스 왕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을 문맥과 독립시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아버지여'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존경을 나타낸다. 즉 종들이 자기 주인에게(5:13), 또는 젊은 생도들이 나이든 선지자에게 이와같은 존칭을 사용했다. 둘째, 이것은 선지자들의 지도자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외에도 혹자는 이것을 '엄마,마마' 등과 같이 어린 아이의 근심된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T. H. Gaster).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엘리사가 자신을 엘리야의 영적 아들로 인식하고 엘리야를 '아버지'라고 호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는 외침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참 보호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Wycliffe). 왜냐하면 특히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뿐이심을 증명했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또 엘리사의 이러한 외침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요아스 왕이 엘리사에 대하여 이 구절의 내용과 똑같은 말을 사용한 것(3:14)도 엘리사를 엘리야와 같은 이스라엘의 보호자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병거와 마병은 그당시 최고로 강력한 병기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왕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안전을 의존했던 것(Keil &Delitzsch, Vol. . p.296-297)으로 싸울때(욜 2:5;나3:2), 물건을 나를 때(9:28), 여행할 때(행 8:29)등에 사용된 것이다.
ㅇ엘리사 - 히브리어로 '엘리솨'로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리'와 '그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예솨'가 합쳐진 말이며 '나의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때는 이스라엘 왕국의 7대 왕 아합(B.C. 874-853)의 통치 말년이거나(왕상 19:1-7), 또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B.C.853-841)의 통치 초반으로 본다(3:1). 이때부터 제 12대 왕 요아스(B.C.798-782) 통치 초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 활동을 하였다(13:14-19).
ㅇ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 '둘로 찢고'라고 해야 바른 번역이 된다. 여기서 엘리사가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은 스승과 이별하는 슬픔을 나타낸 행동이었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던 엘리야가 사라진 것은 엘리사에게 큰 슬픔과 더불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그의 이러한 심적 상태가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5:7;수 7:6). 이밖에도 재를 뒤집어 쓰는 것(욥 2:8), 얼굴과 가슴을 치는 행위(눅 18:13), 정수리의 머리털을 면도해 버리는 것(렘 7:29)등은 모두 극도의 애통을 표시하는 관례적인 행동들이다.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ㅇ이제 엘리사는 다른 생도들, 즉 위의 모든 사실을 목격한 증인들에게로 되돌아 오기 시작한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줍는 후계자 계승의 상징적 행위는 왕상19:19에서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처음 부름을 받던 행위와 서로 연관된다. 한편 엘리야의 떨어진 겉옷은 엘리사의 요구가 성취되었다는 하나의 증표(Keil & Delitzsch)임과 동시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외적 증거이다(15절, Wycliffe)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ㅇ물을 치며...물을 치매 - 여기서 '물을 치다'라는 표현이 두번 거듭해서 언급된 것은 스승 엘리야가 행했던 능력을 상기시켜 줌(8절, The Bible Knowledh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과 동시에 홍해를 가르던 모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출14:21,22;수 3:17).
ㅇ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 - 히브리어 원문은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더욱이 그는?'으로 표현되어 있어 마지막의 두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엘리사가 이렇게 외친 것은 엘리야에게 능력을 주셨던 하나님께 자기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간구했던 기도였다(Wycliffe). 그러나 이것을 엘리야와 함께 그 하나님의 능력이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닐까하는 근심의 표현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와는 반대로 엘리사는 질문의 강조 형식을 빌어서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심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신앙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게 하셨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확증시켜 주셨던 것이다(Keil & Delitzsch, Vol.3 , p. 297).
15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여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
ㅇ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사의 기적을 목격하고서 그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그의 권능을 이어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요 17:18;행 14:23). 그래서 그들은 엘리사의 영적 권위를 인정해 주는 뜻에서 그의 발앞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였다. 한편, 엘리야가 요단 강을 건넌 후 얼마되지 않아 승천하였고 이것을 목격한 이후 엘리사도 겉옷을 취하여 곧바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요단 서편 언덕에서는 여리고의 선지 생도들이 엘리야의 일을 궁금하게 여기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 모두 확신케 되며 이제부터는 새로운 선지자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한편, 본절에서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는 말은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일한 능력과 은사를 부여받았다고 하는 선지 생도들의 고백이다(Wycliffe).
16 가로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하나
ㅇ용사 오십 인 - 문자적으로 '용사'라는 단어는 '힘의 아들'이란 뜻으로(Pulpit Commentary) 주로 군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꼭 그렇치만은 않다. 여기서 '용사'는 사흘 밤낮 엘리야를 찾아 험하고 가파른 산중을 헤매어 다닐 수 있는 건장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들이 수색한 결과 엘리야의 시체를 찾지 못하므로(17절) 엘리사의 말에 더욱 더 큰 신임을 갖게 되었다.
ㅇ청컨대...던지셨을까 하나이다 - 여리고에 있던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영혼만 하늘로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엘리야의 육체가 어느 높이만큼 올라간 후에 필연적으로 지상 어디엔가에 떨어졌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동안 선지자로서의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육체를 찾으려 하였다.
ㅇ여호와의 신 - 여기서 회리 바람과 여호와의 신에 대한 연관성이 나타난다. 즉 11절에서 엘리야가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한 것은 여호와의 신이 그를 인도해 가신 것으로 볼 수있다. 왜냐하면 회리 바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능력의 도구이기 때문인 것이다(H. W. Robinson). 한편 왕상 18:12에도 여호와의 신이 엘리야 선지자를 인도하심으로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즉 선지자의 생도들은 이전과 같이 하나님의 신이 엘리야의 영을 인도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루아흐'는 '영'을 의미하므로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엘리야의 영육 전부가 아니라 육신과 분리된 영이라고 선지 생도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사상은 유대 묵시 문학(黙示文學)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난다(Ascension of Isaiah 6:14).
ㅇ보내지 말라 - 히브리 원문은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Pulpit Commentary)라는 의미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엘리사의 확신에 찬 신앙을 나타낸다.
17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 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ㅇ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强請)하매 - '부끄러워하도록'은 '...까지'를 뜻하는 '아드'와 '실망하다'를 의미하는 '부쉬'에서 온 말이기 때문에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그들이 그가 부끄러워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Gesenius, Keil &Delitzsch). 그러나 70인역(LXX)은 이것을 '그가 자기의 거절을 더이상 고집하기 어려울 때까지'로 번역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8:11에도 나타난다. 이와 같이 선지생도들의 강청에 못이겨 엘리사가 "보내라"고 말했을 때는 그는 단지 그들의 불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엘리사의 충고 대로였다. 이러한 것을 살펴볼 때 본절은 단지 엘리사가 '만일 너희가 그것을 고집한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의 민족을 위해서 보내라'라는 의미로 허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18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ㅇ본절은 다른 선지자의 생도들보다 영적 통찰력이 뛰어난 엘리사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영적 능력과 더불어(14,15절) 이같은 통찰력을 구비함으로써 엘리사는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영적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본절에서는 엘리야의 사라짐에 대한 확실한 역사적 사실성과 그의 후계자 엘리사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공식화되고 있다.
19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ㅇ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 여기서 말하는 성읍은 구체적으로 어느 성읍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여리고 성 일것이라고 생각한다(Hobbs). 왜냐하면 여리고는 광활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경치가 좋고 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리고에는 유대 산지에서 저지대로 흐르는 강이 있었으며, 종려 나무(신34:3)와 무화과 나무(눅 13:6-9)가 었고 방향(芳香)의 관목들과 향기로운 수지를 내는 나무 등이 많아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이 이야기는 텔 에스술탄(Tell es-Sultan)의 서쪽에 위치한 '엘리사의 샘'의 전설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ㅇ물이 좋지 못하므로 - 본절에서는 물에 독소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성의 사람들은 물이 나쁘기 때문에 토산물(土産物)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Wycliffe). 한편 혹자는 이러한 환상이 여리고성에 대한 여호수아의 저주(수 6:26)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Blake).
ㅇ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 여기서 '토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아레츠'인데, 이것은 '땅', '육지', '나라', '주민'등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땅'을 의미(Keil & Delitzsch)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땅의 '주민들'도 함께 의미(The Interpreter's Bible)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레 19:29). 또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솨켈레트'로서 사람이나 동물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다'라는 뜻의 동사 '솨콜'의 분사형이다. 또 이 단어는 특별히 비유적으로 포도원에 '결실이 없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적인 의미는 결국 자손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호 9:14). 그래서 루시니안 헬라어 역본은 이를 '아이가 없는'(be childless)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하면서 본절을 원문에 따라 해석하면 1)'그 땅에는 소산이 없다', 2)'그 거민은 유산한다'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공동번역과 Living Bible은 70인역(LXX)과 마찬가지로 '주민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란 의미로 해석한 반면 대부분의 영역본들(KJV, RSV, NIV)은 '그 땅에 소산이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땅의 소산이므로 본절에서는 1)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토산을 맺지 못하던 땅이 변화된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변화된 성도들에 비유될 수 있다. 즉 토산을 맺지 못하던 여리고 성읍과 같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하겠다(마 13:23).
20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ㅇ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 '소금'은 음식물의 양념으로(욥 6:6), 제사용품으로(레2:13;겔 43:24), 그리고 신생아의 소독제와(겔 16:4), 방부제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다양한 용도와 관련하여 '페허'(삿 9:45;신29:23), '생명'(마5:13), '언약'(민18:19;대하 13:5)등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는 엘리사가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신(출15:23)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러한 확신하에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한 기적을 연출해 냈던 것이다(4:41;출 16:25;요 9:6).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소경을 치료하실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든 다음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발라서 낫게 하신 사실과 비교될 수 있다. 한편 본절에서 새 그릇은 전적으로 깨끗하고 정결한 수단, 즉 새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Matthew Henry, Vol. , p. 717) 소금은 정결을 상징한다(Pulpit Commentary, The Bible Knowledge Commintary).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ㅇ오늘날에 이르렀더라 - 이 말은 본서의 저자가 열왕기서에 관한 사료를 편집해 기록할 그 당시까지 여리고의 물이 청결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뿐 아니라 소산에 대해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본절은 엘리사의 이적에 대한 기록을 실증해 줌과 동시에 21절에 예언했던 엘리사의 말에 대한 권위를 대변해 주는 말이다.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ㅇ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 여기서 '젊은 아이들'이란 히브리어로 '나아르'로서 십 이 세부터 십 오 세의 '소년들'을 가리킨다(G.Rawlinson). 이들은 선악에 대한 충분한 인식력을 지니고서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행동을 해야 할 자들이었다(Wycliffe).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낯선 나그네인 엘리사를 보고서 도움을 베풀기는 커녕 오히려 조롱하고 비웃는 짖궂은 짓을 일삼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엘리사가 그들에게 그렇게 잔인한 저주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ㅇ대머리여 올라가라 - 율법에는 인공적으로 머리를 깍아 대머리가 되게 하는 것은 불법으로 되어 있다(신 14:1). 또 대머리는 문둥병에 의한 것으로(레 13:42-44)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의 표징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천민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엘리사의 대머리는 자연적인 특징으로서 결코 사람들의 조롱이나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사의 외모는 스승 엘리야의 외모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1:8). 한편 본절의 '올라가라'는 히브리어 '아래'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높이 오르다', '도약하다', '능가하다'는 뜻으로 '네 길을 계속 가라'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여기서는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라가라'는 의미로(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엘리야의 승천을 비꼬는 말이다(Matthew Henry, Vol. , p. 718).
24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ㅇ본절에 기록된 저주와 그에 대한 성취 방법은 매우 잔인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의 윤리 기준을 가지고 설명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당시 여호와를 떠나 우상 숭배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 엘리사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는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인 자신을 조롱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엘리사는 간주했던 것이다(대하 36:16;눅 23:36).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젊은 아이들에게 저주를 선포했는데 이는 율법하에서 하나님의 일꾼들이 불순종하는 자에게 저주하도록 하는 모세오경에 근거한 것이다(신 27:14-26). 그리고 아이들 중에 사십 이 명을 찢었다는 본절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조롱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그 조롱의 행위가 미리 의도된 것이었음을 암시할 수도 있다(Wycliffe).
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ㅇ갈멜 산으로 가고 - 갈멜 산은 휴양과 명상에 적합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Matthew Henry) 엘리야의 주된 활동지였기 때문에(Ewald) 그곳은 특별히 선지자들의 거주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엘리사가 갈멜 산으로 간것은 그곳에 있는 엘리야의 친지들이나 선지자의 생도들에게 그가 승천한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G.Rawlinson, Pulpit Commentary).
ㅇ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 엘리사는 은둔 생활을 한 자기 스승 엘리야와는 달리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에서 살았다. 거기서 사람들과 사귀고 교제하며(5:9;6:32), 왕의 친밀한 상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6:9). 그리고 그는 왕에게로부터 상당한 존경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8:4). 한편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엘리사가 사역한 중심지이다(Wyclif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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