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21장
[이스르엘 성읍은 사마리아 성읍 기준으로 보면 북북동쪽, 이스르엘 골짜기 끝나는 지점, 길보아산 북서쪽 기슭에 위치 ::: 이스르엘 근처 동편에 하롯샘이 발원하여 동편으로 흐르는 하롯강은 요단으로 이어짐, 이스르엘 근처 서편에는 서쪽으로는 기손강이 발원하여 이스르엘골짜기 따라 흐름] 갈멜산정상-->이스르엘 성읍 직선거리=26km ...갈멜산~사마리아성읍 직선거리 43.5km..사마리아성읍~이스르엘 성읍 직선거리38km
===나봇의 포도원 [280. 천부여 의지 없어서]
.....([아합이 먹기를 거절함에 대해 단식하는 그 까닭을 이세벨에게 말하고 있는바, 교활함이 묻어난다]동산에서 뱀이 하였던 그대로, 부지불식간에 [탐냄] 속내를 감추며) 진실한 사정/이유를 말함 아니라 제멋대로 생략해버리고 있다.... 자기가, 그리고 상대방이 말한 바를 있는 사실 그대로 속사정까지 참되게 말함 없이 임의대로 거두절미 생략해버리거나, 또는 첨가하여 본뜻을 왜곡시킴은 그 모든 경우가 정직에서 벗어난것--동산에서 행한바 뱀의 작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정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는 그대가 스스로를 보기에, (자존심따라)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 왕이 맞느냐..(= 대리왕 나기드 자리를 떠나서 세상 군주 위치를 지키도록? 부추기고 있음) .내가 그대를 도와 확실히 그대가 원하는바 이뤄지도록 처리할테니 그냥 내게 맡기고 밥먹으라!!며] 양심을 무뎌지도록 충동질하여 (타는 숯불에 기름붓듯, 흉계 꾸며 차도살인-강탈의 악행을 실행함 조차도 용인하도록) 공범을 만들고 마는 이세벨
1. [아벡 전쟁후, 3년간 아람과는 전쟁 없었음--아합이 회개하기를 기다려주시는 Q]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싹틔워 열매맺다]에게 이스르엘[-씨뿌리다]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사용 단어가 이스라엘의 왕에서 사마리아 왕으로 바뀜] 아합의 왕궁[= 별궁인 상아궁...사마리아에서 38km위치]에서 가깝더니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어쩌면 로또 맞은것처럼 부자 되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땅-기업-은 Q이 (제비뽑기 통해 언약의 주님께서 직접 분배하여)주신 것으로서 영속적 주인이신 Q께서 결코 팔아서는 안된다고!! 팔지 말라 하셨다....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영혼몸의 Q 말씀과 하나됨 지킴, 그리스도화!! -- 이미 죽을 각오로!! 목숨걸고 Q의 언약말씀 붙들고 있다] 하니
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단식)
.......그 누구든지, 누구에게서라 할지라도!!, NO라는 대답 듣을 수 있는바 ::: 그 대신 개선책 제시를 요구받거나 또는 이대로는 안된다며 거절당할 그때, ((정당한 근본적 해결책 찾는 물음을 주께 묻기!!)) 주님의 마음을, 말씀따라 들여다 보는자가 진정 복됨을 알라!! --즉, 그대로 주님 앞에서 머물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런데(엘리야의 갈멜산 승리때도 그리하더니!!) 그것을 차단하려!! 사단적 만능 해결사 이세벨이!! 아합의 주께로 돌이킴, 그 길을 막고 있다!!
5.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6.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나봇이 제시하였던바, [아합이 미처 생각지못했던? 것이어서 부끄러웠던걸까]..기독자가 마땅히 선택하여 행할바 정말 타당한 그 이유는 생략해버리고 있음 + 완강한 거절, 그 자체만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 사탄이 그리 말하였듯이, 고의적 거짓말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왜곡시키고 있다)
7.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니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10.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하였더라
.......그 그룹이 악을 짓는 줄 알면서도 조그만 유익 때문에!! 그 그룹 안에 그대로 남아있는것은 아닌가 진정 참되게 돌아보라,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떠나야 함
11. ○그의 성읍 사람 곧 그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이 이세벨의 지시 곧 그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12.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13.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
14.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15. 이세벨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소서 나봇이 살아 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425.주님의뜻을 이루소서]
17.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키르아, 카라 --- 찾아가 만나라+ 대적함의 말씀 전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스스로, 사단에게, 종으로]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사단에게]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26.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이토록 주님은 기다리고계셨다!!--그의 집에 닥칠 재앙을 아들대에로 늦추시려고!!]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보라, 주님은 너무나 아합을 끔찍이 아끼고 계셨다...아합 주변의 선지자들을 두루 살펴보라...거짓 선지자850+400, 그런 한편, 영적 참 선지자 엘리야-무명의 선지자-미가야- 여호사밧왕...(아합 주변엔 특별히 엘리야-무명의 선지자- 미가야- 여호사밧까지 쟁쟁한 YHWH선지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그러나, 아합은, 아쉽게도.... 분수령적 회개에로 나아가 돌파 이루었더라면 얼마나 그 돌파를 바라셨을까...그러나 거기까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은(악하고 음란한 세대, 세상에서는) 공공유익 위한 법이 권력 가진 악한 리더에 의해 공공연히 개인의 사익 위하는 악한 도구가 될 수 있음 = 유권무죄/무권유죄현상....그러나, 그대는 어떠한가....주님 보내심 받아 가는바, ."JC처럼!! 아합의 죄악 을 목숨걸고 지적하는 엘리야요, 영적 나봇인가??!!" ......영원유일무인, 영생자존하시는 분 YHWH는 다바르(Fathful & True)이시며, 참되게 믿는이마다 성경이 그대 자신을 읽으시도록 ("YHWH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그 자체가 작동되도록!! 말씀이신 심판주 그분 앞에 열어드려야 함...[히4:12-16(12).....*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정이 있으면 토지를 일시적으로 타인에게 팔 수는 있었다..그러나, 희년에는 근족에게 토지무르기를 허락해야만 했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레위기 25장 23~28절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기업 회복의 법에 기초가 되는 진리이다.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께서 그 주인이시요 소유주이시다. 그러므로 토지 곧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소유권은 위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인생은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에 불과하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모든 것을 다 놓고 떠날 것이다.
다윗도 후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대상 29: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라고 명하신것이며, 희년이라는 기업 회복의 제도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무르기’라는 원어(게울라 ה(는 ‘되사기, 되찾기’(redemption)라는 뜻이다.
가난한 사람이 그의 기업의 일부를 팔았을 경우, 가까운 친족은 그를 위해 그것을 사서 되찾게 해야 하였다.
또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판 사람이 그것을 살 여유가 생기면 그것을 되살 수 있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살 힘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도 희년이 되면 팔았던 기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신 복된 규례이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룻기 4장 1절 ~ 12절
보아스는 성문으로 가서 거기에 앉았다. 옛시대에 성문 앞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고 토론하며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공적인 재판을 처리하기도 하는 곳이었다(왕상 22:10). 그때 마침 보아스의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보아스는 그에게 아무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고 말하니 그가 와서 앉았고 또 성읍 장로 열 사람도 청하여 앉게 하였다. 보아스는 그 기업 무를 자에게 말하였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자가 없느니라.”
3절에 ‘관할한다’고 번역한 원어(마케라 ה(는 ‘팔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현재시제로 번역하고 있지만(KJV, NASB, NV), 원문의 완료형 동사는 보통 과거시제로 번역된다. 나오미는 엘리멜렉 소유의 땅을 모압으로 가기 전에 팔았던지 혹은 모압에서 돌아온 후 팔았던 것 같다. 비록 그 땅의 소유권은 미망인인 나오미에게 있어서 희년이 되면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지만(레 25:28), 그 동안 그들이 살아가려면, 친족 중에 누가 그 땅을 사주어야 했던 것 같다. 레위기 25:25-27,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보아스의 말을 들은 그 기업 무를 자는 “내가 무르리라”고 말하자 보아스는 또 말했다.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기업 무르는 일은 가정의 끊어진 대를 잇는 일도 포함했고, 이것은 신명기 25:5-6의 수혼(嫂婚) 제도에 근거한것 같다(NBD). 나오미, 즉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려면, 나오미의 며느리 룻을 아내로 취해 자녀를 출산케 함으로써 엘리멜렉의 집의 대를 이어주어야 했다. 그러자 그 기업 무를 자는 말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7-10절]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
옛적에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해 사람은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었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되었다. 그 기업 무를 자는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고 말하며 그 신을 벗었다. 보아스는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했다.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들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11-12절]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은 말하였다.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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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21장
1. Now it came about after these things, that Naboth the Jezreelite had a vineyard which [was] in Jezreel beside the palace of Ahab king of Samaria.
2. And Ahab spoke to Naboth, saying, "Give me your vineyard, that I may have it for a vegetable garden because it is close beside my house, and I will give you a better vineyard than it in its place; if you like, I will give you the price of it in money."
3. But Naboth said to Ahab, "The LORD forbid me that I should give you the inheritance of my fathers."
4. So Ahab came into his house sullen and vexed because of the word which Naboth the Jezreelite had spoken to him; for he said, "I will not give you the inheritance of my fathers." And he lay down on his bed and turned away his face and ate no food.
5. But Jezebel his wife came to him and said to him, "How is it that your spirit is so sullen that you are not eating food?"
6. So he said to her, "Because I spoke to Naboth the Jezreelite, and said to him, 'Give me your vineyard for money; or else, if it pleases you, I will give you a vineyard in its place.' But he said, 'I will not give you my vineyard.'"
7. And Jezebel his wife said to him, "Do you now reign over Israel? Arise, eat bread, and let your heart be joyful; I will give you the vineyard of Naboth the Jezreelite."
8. So she wrote letters in Ahab's name and sealed them with his seal, and sent letters to the elders and to the nobles who were living with Naboth in his city.
9. Now she wrote in the letters, saying, "Proclaim a fast, and seat Naboth at the head of the people;
10. and seat two worthless men before him, and let them testify against him, saying, 'You cursed God and the king.' Then take him out and stone him to death. "
11. So the men of his city, the elders and the nobles who lived in his city, did as Jezebel had sent [word] to them, just as it was written in the letters which she had sent them.
12. They proclaimed a fast and seated Naboth at the head of the people.
13. Then the two worthless men came in and sat before him; and the worthless men testified against him, even against Naboth, before the people, saying, "Naboth cursed God and the king." So they took him outside the city and stoned him to death with stones.
14. Then they sent [word] to Jezebel, saying, "Naboth has been stoned, and is dead."
15. And it came about when Jezebel heard that Naboth had been stoned and was dead, that Jezebel said to Ahab, "Arise, take possession of the vineyard of Naboth, the Jezreelite, which he refused to give you for money; for Naboth is not alive, but dead."
16. And it came about when Ahab heard that Naboth was dead, that Ahab arose to go down to the vineyard of Naboth the Jezreelite, to take possession of it.
17. Then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Elijah the Tishbite, saying,
18. "Arise, go down to meet Ahab king of Israel, who is in Samaria; behold, he is in the vineyard of Naboth where he has gone down to take possession of it.
19. "And you shall speak to him, saying, 'Thus says the LORD," Have you murdered, and also taken possession? "'And you shall speak to him, saying, 'Thus says the LORD," In the place where the dogs licked up the blood of Naboth the dogs shall lick up your blood, even yours. "'"
20. And Ahab said to Elijah, "Have you found me, O my enemy?" And he answered, "I have found [you,] because you have sold yourself to do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21. "Behold, I will bring evil upon you, and will utterly sweep you away, and will cut off from Ahab every male, both bond and free in Israel;
22. and I will make your house like the house of Jeroboam the son of Nebat, and like the house of Baasha the son of Ahijah, because of the provocation with which you have provoked [Me] to anger, and [because] you have made Israel sin.
23. "And of Jezebel also has the LORD spoken, saying, 'The dogs shall eat Jezebel in the district of Jezreel.'
24. "The one belonging to Ahab, who dies in the city, the dogs shall eat, and the one who dies in the field the birds of heaven shall eat."
25. Surely there was no one like Ahab who sold himself to do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because Jezebel his wife incited him.
26. And he acted very abominably in following idols, according to all that the Amorites had done, whom the LORD cast out before the sons of Israel.
27. And it came about when Ahab heard these words, that he tore his clothes and put on sackcloth and fasted, and he lay in sackcloth and went about despondently.
28. Then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Elijah the Tishbite, saying,
29. "Do you see how Ahab has humbled himself before Me? Because he has humbled himself before Me, I will not bring the evil in his days, [but] I will bring the evil upon his house in his son's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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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1장 (개요)
아합은 성경 역사에서 보면 불행한 인물이다. 본 장은 그의 왕국이나 야영지에서 있었던 큰 일들로부터 그의 농지로 우리를 이끌고 가, 거기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실로 그에게 좋지 않은일임이 입증되었다).
1.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이 탐낸다(1-4).
2. 이세벨의 계략으로 나봇이 죽고 포도원은 아합이 몰수한다(5-14).
3. 아합이 포도원을 갈취하러 간다(15, 16).
4.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 그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선언한다(17-24).
5. 아합이 수치를 깨달으므로 그에 대한 처벌이 유예된다(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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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는 아합(왕상 21:1-4)
Ⅰ. 아합은 불행히도 자기 궁전 가까이에 있는 편리한 이웃 사람의 포도원을 욕심냈다. 나봇은 그의 포도원이 왕궁의 정원이 될 수 있을 전망과, 그의 포도원의 수확물을 왕궁에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을 것이나, 이 환경이 그를 죽이게 했다. 만약 포도원이 없었든가 혹은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그의 목숨만은 부지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재산이 그 주인의 올가미가 되었고, 왕궁에 가까이 있음으로 해서 치명적인 결과를 빚었다.
아합은 이 포도원에 눈독을 들였다(2절). 이 포도원은 자기 소유지에 훌륭한 부가물이 될 것이고, 궁전의 편리한 출구(出口)가 될 수 있었다. 특별한 생산물이 없다 해도 그 포도원은 반드시 그의 것이 되어야 했다. 포도원의 과일을 즐길 수 있었고, 산책을 할 수도 있었다. 나봇은 포도원을 자기의 생활을 위해 임대해 줄 수도 있었으나, 아합은 포도원을 완전히 자기 소유로 하고, 그와 그의 후손이 영구히 소유하지 않는 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도원을 강제적으로 빼앗을 만큼 폭군은 아니어서, 그 포도원의 가치에 맞먹는 돈을 주든가 더 좋은 포도원과 교환할 것을 나봇에게 제의했다.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 승리로 그의 영토를 확장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리한 점을 줏대 없이 포기하고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어리석은 자처럼, 이제 와서 자기 저택의 편의만을 위해서 정원을 확장하려 했다. 소유지의 편의성을 희망하는 것 자체는 악이 아니다(구입하려는 의사가 없다면 구입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정숙한 부인은 “전답도 신중히 생각하고 산다”). 그러나 법적 수단 방법을 통해 터무니없이 요망하는 것은―우리가 모든 편의성을 독점해야만 한다는 것으로서―지나친 이기심의 결과다. 만족의 율법, 즉 십계명의 말씀인 “너희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구절을 어기면서까지 편안히 살려 해서는 안 된다.
Ⅱ. 아합의 욕망은 거절되었다. 나봇은 결코 포도원을 넘기려 하지 않았다(3절). “여호와께서 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합 왕에게 주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봇이 이러한 사소한 일로 자기의 군주 아합을 기쁘게 해 주지 못할 만큼 그렇게 거칠거나 무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나안 땅은 아주 특이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땅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작인으로서 희년이 오기까지(레 25:28), 또는 극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자기들의 땅은 누구에게나 또 상호간에도 양도할 수 없다는 임대 조건하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봇은 그의 포도원이 왕에게 팔려 버린다면 희년이 오더라도 그 상속인에게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아합을 기쁘게 해 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므로, 이 일에 있어서는 변명을 요했다. 아합은 율법을 알고 있었고, 또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죄를 범하고서야 승낙할 그런 조건을 내세운 것은 악을 범한 것이다.
혹자는 나봇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그 유업은 하늘의 가나안에서 가질 그의 몫의 보증으로 여겼으므로, 하늘의 가나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지상의 가나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고 본다. 나봇은 양심적인 인간이었던 것 같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느니보다는 왕을 불쾌하게 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 아마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7천 명 중의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마 아합이 나봇에게 원한을 가졌을 것이다.
Ⅲ. 아합은 이에 큰 불만과 불안에 빠졌다. 그는 그전과 같이(20:43) 근심하고 답답하여(4절) 우울해지며, 침상에 누워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방문객도 접견하지 않았다. 그는 모욕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나봇이 자기의 요구를 거절한 냉대를 생각할수록 왕은 분통이 터졌다. 나봇의 양심의 까다로움에 대해 아합은 실컷 욕설을 퍼부었는데, 겉으로는 평화에 대해 의논하는 듯이 보이면서도 실은 비밀리에 복수를 한 것이다. 아합은 그가 받은 실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분통으로 병이 들었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불만족이란 그 자체가 처벌이 되는 그런 죄요, 인간들을 스스로 고통을 당하게 만든다. 불만은 정신을 슬프게 하고, 신체를 병들게 하고, 모든 즐거움을 쓰디쓰게 하고, 가슴이 무겁고 뼈가 부패하게 한다.
2. 불만족은 죄의 근본이다. 그것은 외부 조건에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바울이 감옥에서 만족한 반면, 아합은 궁중에서도 불만족이다. 그는 행복한 땅 가나안의 모든 기쁨과 나라의 부귀, 왕궁의 즐거움, 왕관의 명예와 권력 등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함에도 나봇의 포도원이 없는 한 아무것도 그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욕망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번민케 하고, 아무리 과거에 행복했다 해도 욕망을 채우려는 초조함에 걸려들면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서 애를 태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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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벨의 계략(왕상 21:5-16)
여기에서는 이세벨, 즉 “저주받은 여인”(왕하 9:34)에 대해 듣게 된다.
Ⅰ. 병이 든 남편을 위한다는 구실로, 그녀는 남편의 교만과 정욕을 만족시켜 그의 타락에 부채질을 했다. 그녀는 남편의 비통함을 알게 되고 그 원인을 캐냈다(5절). 서로간에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들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은 부부간의 사랑과 의무마저 망각한 것이다. 아합은 아내에게 그가 고통을 받고 있는 원인을 말해 주지만(6절), 나봇이 거절한 이유는 비위에 거슬려서 감추어 둔다. 실은 나봇이 양심적이었는데도, 아합은 나봇이 나쁜 사람인 양 말했다. 나봇은 “주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는데, 아합은 “주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이세벨은 놀랐다. “뭐라고요!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서 식사를 하십시오.” 이세벨이 왕을 열심히 설득하니 우울증이 떨어지고 괴로움 속에 빠지지 않게 되어, 마음이 안락하고 즐겁게 되었다. 어떤 이유에서 비통해하거나, 슬퍼한다고 해서 그 비통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즐겁게 지내는 것이 그 슬픔을 덜어 주리라.
그녀의 촉구는 “왕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나이까?”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좋은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위대하신 왕께서 이렇게 사소한 문제에까지 시선을 돌려야 할 만큼 낮아지셨습니까? 왕 자신에게 창피한 일이며, 왕관을 모독하는 일이외다. 그런 무가치한 일에 유의하시는 것은 왕답지 않소이다. 왕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기에 적임이십니까? 당신은 당신의 정욕의 정부보다 더 좋은 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부유한 왕국을 다스리는 자이온데, 포도원 하나 없이 지내실 수 없습니까?” 하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십자가 밑에서라도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행운과 특히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잠잠히 지내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이세벨이 말하는 의도는 악의에서 나온 것이다. “왕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왕께서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왕에게 주기를 거절하는 백성이 있다는 말인가요? 당신이 왕이십니까? 물건을 팔고 사고 하는 것은 왕답지 못하외다. 더더구나 청원을 하고 기도를 하다니 말도 아니외다. 왕의 대권을 발동하시어 정당하게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강제로 얻으십시오. 모욕에 대해 분개하지 말고 몰수를 하십시오. 왕의 위신을 지키실 줄 모른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왕의 이름만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시면 곧 나봇의 포도원을 왕에게 드리겠습니다. 잘했건 못했건 포도원은 왕의 것이 됩니다. 돈은 한 푼도 들이지 않고요.” 주변에 폭군의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며 권력의 남용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는 왕들은 이렇듯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다.
Ⅱ. 왕을 기쁘게 하고자 이세벨은 나봇을 살해할 것을 계획했다. 아합 왕에게 준 모욕을 보상시키도록 함에 있어, 적어도 나봇의 피만큼은 흘리게 해야겠고, 더욱이 나봇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율법을 고수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의 복수심은 커졌다.
1. 포도원만을 목표로 삼았다면, 그녀의 엉터리 증인들의 조작으로 포도원 주인이 그 땅을 내놓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녀가 제기한 소장의 이유는 매우 빈약했을 것이나, 장로들은 그것을 만족할 만한 것으로 인정했을 것이다). “음란한 계집이 귀한 생명을 사냥할 것이다”(잠 6:26). 복수는 달콤한 일이다. 나봇은 그 복수심을 충족하기 위해 죽어야 했고, 악인으로서 죽었다.
(1)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장관들에게 보낸 명령은 이 때까지 왕이 발송한 어떤 명령보다도 더 사악한 것이었다(8-10절). 그녀는 옥새를 빌리지만, 왕은 그녀가 그 옥새로 무엇을 할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옥새를 빌려 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선지자를 살해하는 영장에 옥새를 찍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왕의 이름으로 이렇게 하는데, 일이 끝나면 왕이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왕이 그녀의 그 방법을 꺼릴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었다. 그러나 그녀는 위증자들에게는, 그들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하여, 나봇을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그녀가 나봇에 대해 위증을 했다면, 법관들은 (증거와 진술에 따라) 아마도 기만당했을 것이고, 그러한 그들의 선고는 그들의 죄라기보다는 불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법관들로 하여금 증인들, 곧 벨리알의 아들들을 찾아오게 했고, 증인들을 매수했으며, 그 거짓 증언에 따라 재판케 했다. 이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뻔뻔스러운 신성모독이요, 정의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녀가 이 명령은 분명 지켜질 것으로 알았다는 것은, 그녀는 이스르엘의 장로들이야말로 정직하고 명예로운 모든 일에는 완전히 눈먼 자들로 간주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뱀의 교활한 계략으로, 그 장로들을 조종하려 했다.
① 신앙의 이름으로 이 일이 진행되도록 했다. “금식을 선포하라. 너희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닥쳐오고 있다. 이것을 피하려면 기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주받은 것을 찾아서 치워 버려야 한다. 아직 찾지 못한 백성 중에 대범죄자가 있는 사실을 무서워하라. 그 범죄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너희들 사는 도시에 대해 분노하시는도다. 마침내는 나봇에게 의구심을 가지게 하라. 아마 그는 이웃 사람들과 함께 예배에 참례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것은 나봇을 피고석에 앉히기 위해서 그를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는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누군가가 법정에서 나봇에 대해서 그가 아간이라고 증언하면, 모두 그것을 들을 수 있게 선포하라. 그 후 증인들이 그 증거를 제시하게 하라.”
이렇게 고약하고 지독한 사악이 드물겠지만, 종교는 이따금 가면과 허식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금식과 기도가 남용된 것이 나쁜 짓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더욱 나쁜 것은 사악한 계획들이 기도와 금식의 미명하에 언제든지 진행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② 이 사악한 계획은 법적 절차의 형식을 밟아 “정의의 이름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그녀가 만약 나봇이 밤거리를 거닐 때 그를 찔러 죽이거나 암살할 흉악한 악당이나 잔인한 자를 불렀다면, 그 일은 참 졸렬했을 것이다. 그러나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순진하고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데 있어 법의 힘을 이용하고, 법의 경로를 밟아 나봇을 멸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와 법도에 대한 묵과할 수 없는 악용”이요, 극악무도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놀라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고 있다(전 5:8).
포도원 주인에게 부과할 죄는, 그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것”―매우 중대한 불경죄―이었다. 물론 그녀는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한 것 자체가 불경스러웠다고 생각하지는 못하는데, 나봇이 그의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주기를 거부한 것은 왕에게 불손한 것이요, 그 이유로 하나님의 율법을 들먹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라고 얽어 대는 것이다. 아니, 그녀의 논고에는 전혀 진실이란 것이 없지만, 증인은 거기에 대해 서약을 해야 했고, 나봇에게는 변명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증인들에게 반대 심문을 해서도 안 되며, 즉시 범죄에 대한 모든 백성의 미움이라는 구실하에 무리들이 “그를 반드시 끌어내어 돌로 쳐야 한다.” 나봇은 하나님에게 불경했다는 이유로 포도원이 아닌 목숨을 빼앗기고, “아합 왕에게 불경했고”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므로 포도원도 몰수되었다. 결국 아합이 포도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2)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에 의해 사악한 명령이 이토록 사악하게 집행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들은 분명히 공정치 못한 명령이었는데도 논박하거나 반대를 하지 않았으며, 그 명령의 각 조항을 꼼꼼히 준수한 것은 이세벨의 잔학성을 두려워했거나, 나봇의 경건함을 미워했거나, 혹은 양쪽 모두의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재판관들은 이세벨이 “쓴 편지대로”(11, 12절) 행했고, 아무 장애가 되었거나 장애물에 부딪힘이 없이 나쁜 짓을 현명히 처리했다. 그들은 나봇을 돌로 쳐 죽였다(13절). 그리고 그의 자식들도 죽였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피에 대하여 심문하셨을 때, 이 설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왕하 9:26). “내가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아마 그 아들들을 살려 두면 그들의 아버지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거나 아버지에게 가해진 박해에 대해 불평을 할 것이 분명하므로, 비밀리에 살해되었을 것이다.
2. 이 기회에 이 슬픈 얘기에 대해 살펴보자. 그러면 우리는,
(1) 사악한 자들의 사악성과 불순종의 자식들 사이에 역사하는 사탄의 권능에 놀라게 된다.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도다”(전 3:16). 그러니 하나님의 의분은 얼마나 크시겠는가!
(2) 학대받는 무고한 자의 혹독한 처지를 슬퍼하게 된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는데,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나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도다”(전 4:1).
(3) 우리의 생명과 즐거움을 하나님께 위탁하게 된다. 결백 그 자체가 항상 보장책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4) 심판이 있으리라는 믿음에 기뻐하게 된다. 그 날에 이와 같은 옳지 못한 재판은 일일이 가려내어질 것이다. 우리는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음(전 8:14)을 알지만, 모든 것은 심판 날에 바로 될 것이다.
Ⅲ. 나봇이 떠나갔으므로, 포도원은 아합이 차지했다.
1. 이스르엘 장로들은 태연하게 이세벨에게는 기분 좋은 소식,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14절)을 알려 주었다. 잠시 살펴보자. 나봇을 살해하기 위해 사마리아에서 이세벨이 보낸 명령에 이스르엘의 장로들은 얼마나 잘 맹종했던가! 그러나 그 후에 사마리아의 장로들은 아합의 자식 70명을 죽이라고 이스르엘에서 보낸 예후의 명령에 또한 잘 순종했다. 그 때 아합의 자식들은 법에 의하지 않고 죽게 된다(왕하 10:6, 7). 사악한 명령으로 하급 법관들의 양심을 타락시킨 폭군들은 결국 운명의 수레바퀴가 자신들에게 돌아오고, 한 가지 잔학한 짓을 하는 자들은 또 한 번 잔학한 짓을 쉽사리 하게 된다.
2. 이세벨은 자기의 계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자, 아합에게 “나봇은 살아 있지 않고 죽었도다” 그러니 “일어나 그의 포도원을 차지하시오”(15절)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관원을 시켜 차지할 수도 있으련만, 자기 토지가 새로이 불어나게 된 사실에 너무나 기뻐서 포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마치 큰 승리를 거둔 자처럼 위풍 있게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후 훨씬 후에 예후는 이 때에 자기와 빗갈이 아합을 수행한 사실을 회상하기 때문이다(왕하 9:25). 아합은, 만약 나봇의 아들들이 모두 살해되었다면, 그 토지는 왕인 자기가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땅의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봇이 범죄자로서 죽고 없는 마당에, 아합은 “그의 죄로 인하여 토지가 몰수되었으므로” 떳떳이 권리를 주장했다. 만약 아무것도 충분한 권리를 그에게 주지 않는다 해도, 이세벨이 그에게 준 절대적 권력을 살필 때, 감히 누가 그녀의 뜻에 반대한단 말인가? 권력은 이따금 권리를 물리친다. 그런데 권리가 짓밟히게 하는 하나님의 인내야말로 놀랍기만 하다. 하나님은 부정을 단지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고 “분별하는 정결한 눈을” 가지셨다. 그런데도 “사악한 자가 그보다 정당한 자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시고도 침묵을 지키시는 것이다”(합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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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받은 아합(왕상 21:17-29)
이 대목에서는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아합이 나봇에 대한 죄를 저질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중형을 가하셨다. 그러나 아합이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지만 않았어도(25, 26절),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심한 벌을 내리시지는 않았을지 모른다(우리아의 문제로 다윗은 더 중한 죄를 지은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악한 성품은 하나님의 이 가혹한 처벌을 정당화해 준다. 반면에 다윗은 그 일을 “제하고는 옳은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합에게는 “다윗과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죄를 지음에 교묘하고 부지런했고, 죄와 거래를 했다. 그는 “사악한 일을 하는 데에 자신을 팔았다.” 즉 자기 욕망의 완전한 노예가 되어, 마치 하인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듯 움직였던 것이다. 그는 완전히 죄에 빠져서, 쾌락을 얻는 조건이면 어떠한 응보도, 죽음까지도(롬 6:23) 달게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바울은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 하고 불평했지만, 아합은 자진해서 그의 선택과 행동으로 “자신을 죄에 팔아” 넘기는 것이다.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로 하여금 사악한 짓을 하게 했다. 그러나 아내가 그를 나쁘게만 유도하지 않았더라면, 사악하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의 범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마음속에 이토록 부패한 정신을 가지고 거기에 불을 붙인 자들이야말로 얼마나 불경스러운 것인가! 많은 못된 짓 중에서도, 가나안 사람처럼 “우상을 숭배한 것이 가장 가증한” 짓이었다. 그의 비도덕성은 하나님을 노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우상 숭배는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성격의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Ⅱ.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고 갔을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갔다(17-19절).
1.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의 편지에도, 이스르엘의 장로들이 하는 일에도 침묵하면서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제 아합은 책망을 받고, 그의 “죄는 하나님 앞에 가지런히 드러난다.”
(1) 보내진 자는 엘리야다. 그보다 지위가 낮은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친절한 말을 전하는 일을 맡았다(20:13). 그러나 이제 선지자의 선생이 그의 살인을 재판하고 판결하기 위해 보내어진다.
(2) 장소는 나봇의 포도원이고, 때는 아합이 그 포도원을 취하려 하는 때다. 바로 그 때 그 곳에서 아합은 자기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듣는다. 포도원을 점유하자 곧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공언하며, “사후(事後)의 종범이 되어”(ex post facto) 스스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는 전에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이제 이전보다 더 큰 죄책이 닥쳐왔다. “이 포도원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 피로써 사들인(합 2:12) 포도원에서 그 주인의 목숨을 빼앗고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욥 31:39) 악의로 뺏은 땅으로 기뻐하면서 포도원으로 그의 정원이 되게 하니, 이제 그의 “뱃속의 음식이 올라온다. 그는 안정을 누릴 수가 없다. 그가 자기 배를 채우려 하자, 하나님께서는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한다”(욥 20:14, 20, 23).
2. 아합과 선지자 사이에 오고간 말들을 살펴보자.
(1) 아합은 선지자를 보자 겸손해야 했으나 오히려 그를 보자 화가 나서 마주 대놓고 분노를 쏘아붙였다(대하 36:12).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20절) 이 말은 다음 사실을 말해 준다.
① 아합은 선지자 엘리야를 미워했다. 한때는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친구로 지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왕상 18:46). 그 때 아합은 개혁을 찬성했고, 선지자와 그의 모든 일은 순조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합이 타락하고 그전보다 나빠졌다. 그의 양심은 그가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말해 주었고, 그러므로 엘리야가 자기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원수로 삼은 자들의 처지는 실로 비극적이고, 또한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갈 4:16) 사역자들을 원수로 여기는 자들의 처지란 너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음을 명심하자. 죄 속에 자신을 팔아 버린 아합은, 자기의 거래에 충성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제 자신을 회복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② 아합은 선지자가 두려웠다. “네가 나를 찾았느냐?” 이것은 될 수 있는 한 아합이 선지자를 피해 왔는데, 이제 그 선지자를 보게 된 것이 공포가 됨을 암시한다. 그가 선지자를 만나게 됨은 벨사살이 벽의 글씨를 보는 것과 같았다. 선지자를 보자, 아합은 “안색이 바꿔지고, 허리가 풀어지며, 무릎이 서로 맞닿게 되었다.” 가난한 채무자나 범인이라도 자기를 체포하러 온 관리를 보고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들이 공포심을 갖게 되는 사실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2) 엘리야는 아합에 대해 하나님의 격노하심을 선언했다. “내가 너를 찾았노라. 네가 스스로 팔려 악을 행하였음이니라”(20절). 죄에 빠져 든 자는 조만간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놀람 속에 있게 된다. 나봇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아합이 피고석에 앉아 나봇보다도 더 떨게 된 것이다.
① 엘리야가 아합을 기소하고, 사실(19절)에 대한 악명 높은 증거를 대며, 유죄를 선고했다. “너는 사람을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이렇게 하여 아합은 나봇을 살해한 죄를 쓰게 되었다. 법에 따라 나봇을 살해했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악용된 재판은 최고의 불법이다). 설사 나봇이 불법으로 처형되었어도, 자기가 직접 한 일이 아니었고 거기에 대해 아는 바 없었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합을 기쁘게 하려고 처형이 이루어졌고, 나봇의 처형에 아합이 기뻐했으므로, 나봇의 불법 처형에 대한 모든 것은 아합에게 죄책이 있다. 아합은 살해하고, 포도원을 빼앗았다. 포도원만 취했어도 죄가 되는 것이다.
②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아합에게 통고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가족을 멸하고 뿌리까지 뽑으리라는 것이다(21절). 후대도 끊기며 그의 집은 선조인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며(22절),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의 밥이 되며, 들에서 죽은 자는 새의 먹이가 되게 하리라는 것이다(24절). 여로보암의 집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고(14:11), 바아사의 집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16:4). 또 특히 이세벨은 개가 먹어 치우고(23절)―실제 개가 먹어 치웠지만(왕하 9:36)―아합 자신에 대해서는,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그 곳에서 그와 똑같이 “그의 피도 핥게” 되리라(19절)고 말씀하셨다. “네 피, 네 자신의 피가―그것이 비록 왕의 피요, 또 교만으로 네 혈관 속에서 팽창되거나 네 가슴속에서 노여움으로 끓는 피라고 해도―머지않아 영원히 개들의 밥이 되리라.” 실제 이렇게 되었다(22:38). 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합이 비명에 죽으며, 잔인하게 묻히고, 치욕이 그를 따르리라고 암시한 것이다. 그런 교만한 자에게는 이런 치욕이 합당하다. 여기에는 죽음 후의 형벌이 강조되고 있는데―물론 육체에 대한 영향만 말하고 있으나―아마도 죽음 후에 받는 영혼의 고통을 말하려는 것이리라.
Ⅲ. 선고받은 후 아합은 겸비해졌고, 이에 따라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1. 아합은 일종의 참회자였다. 하나님 이름으로 엘리야가 아합에게 전한 말씀은 아합을 놀라게 하여,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27절). 아직도 아합은 교만하고 완고한 죄인이었으나, 이제 많이 고쳐졌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용기 있는 사람조차도 낮아지게 하시며, 가장 의기양양한 자라도 보잘것없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빠르고 힘이 세며, 원하실 때에는 그 말씀이 불과 방망이 같아진다(렘 23:29). 말씀은 벨릭스 총독을 두렵게 만들었다.
아합은 옷을 입고 참회자인 척하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도 겸손해지거나 고쳐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가 선지자를 미워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왕상 22:8). 진실성과 내용이 결핍된 채, 참회를 거짓 꾸미고 겉으로만 참회함을 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라. 아합이 회개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여질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기를) “아합이 겸손해하는 것을 보라”고 하셨다. 옷을 찢었지만 마음은 찢지 않았으니, 겉으로만 겸손해하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 위선자는 종교상의 의무의 외형적 실행에는 열심일 수 있으나 그것은 부족한 것이다.
2. 아합은 여기서 형의 유예를 받는데, 나는 이것을 일종의 용서라고 부르겠다. 아합이 겉으로만 참회했고(심판에 대해서만 슬퍼하고, 죄에 대해서는 진실로 회개하지 않았으니), 우상을 버리지 않았으며, 포도원을 나봇의 후손에게 되돌려 주지도 않았으나, 아합은 하나님께 영광을 조금은 돌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엘리야에게 눈여겨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아합이 스스로 겸손해하는가를 보라”(29절)는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 파멸시키기로 되어 있었던 그의 집은 “그의 자식의 시대에까지” 연기되었다. 그에게 내려진 선고가 무효가 된 것이 아니라 집행이 연기된 것이다.
(1)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인자성과 자비를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심판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완전성의 다른 속성들이 위험해짐에도 불구하고 이 사악한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이것은 샌더슨(Sanderson) 주교의 견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지 않다고 하기보다는 성스럽지 않고(샌더슨 주교의 말), 진실하지 않고, 공정하시지 않은 것(사실 해당되는 것은 없음)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이것은 별로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점이 있음을 유의하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좋은 일을 하는 한 칭찬해야 한다.
(3) 사악한 사람이 이따금 오래도록 번영을 누리게 되는 사실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사람들이 겉으로만 하나님께 봉사하면 하나님께서도 겉으로만 자선을 베푸시는 것이다.
(4) 이것은 진실로 참회하고 성실하게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을 격려해 준다. 겉으로만 참회하는 자가 유예를 받은 자기 집으로 가게 된다면, 진심으로 참회하는 자는 “의롭게 된 자기 집으로 가게” 된다.
----호크마------
열왕기상 21장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ㅇ본절은 나봇 사건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암시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아람과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아합(20장)은 당시 이스라엘에 별궁을 지어 두고 사치와 방탕 생활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로 그 즈음에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신의 유흥지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탐욕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ㅇ이스라엘 - 므깃도와 벧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제린(Zerin)으로 추정되는 성읍이다. 구약 시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아합은 특별히 이곳에 별궁을 건설, 종종 거처하였던 듯하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8:46 주석을 참조하라.
ㅇ나붓 - '나봇'(나보트)은 아마도 '싹트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Ward). 나봇의 조상들은 이스라엘에서 대대로 포도 재배를 해왔을 터이니 그러한 직업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졌음직도 하다.
ㅇ포도원 - 팔레스틴의 가장 특징적 식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와 이를 재배하는 포도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정의 원천이 되었다(Ross). 신20:6은 포도원을 만들고서도 그 첫 수확을 보지 못한 자에게는 병역 의무를 면제하여 귀가 조치케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팔레스틴에서 포도원이 갖는 경제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다. 신7:13주석 참조.
2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ㅇ나물 밭 - 여기서 '나물'(야라크)이란 녹색의 풀 종류 일반을 말한다. 그리고 '밭'(간)은오히려 '뜰' 또는 '정원'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므로 '나물 밭'이란 '푸른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다(공동 번역). 보통 이러한 정원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는 장소로 고안되곤 했다. 그리고 또한 종종 우상 숭배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사1:29;65:3;66:17).
ㅇ만일 합의하면 - 이에 해당하는 원문(토브 베에이네이크)은 문자적으로 '눈에 좋거든'이란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상대방의 의사를 한껏 존중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비록 왕이라도 남의 토지를 무작정 몰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데서 비록 초기의 이상(理想)은 많이 빛바랜 것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한 땅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권력자라도 그 소유관계를 함부로 변경할 수는 없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구속력을 보게 된다(레25:23).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제한일 뿐 왕정 시대가 개막된 이래 왕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토지 소유톨 확장하려 들었다. 사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모두 대지주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돌조차 이를 흉내냈다는 현실적 사실은, 조건은 어떠하든지간에.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던 삶의 형태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아합이 시도하는 토지 소유의 확대는 일찍이 사무엘이 경고했던 바에 부합한다(삼상8:12,14). 즉 백성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왕의 토지를 경작해야 하며, 거기서 거둬 들인 농산물은 더이상 생산자인 백성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왕은 자꾸 백성들의 포도원과 감람원을 빼앗아 자기 신복(臣僕)들의 손에 넘겨 준다. 이러한 경고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봉사자여야 하나 실제로는 모든 백성이 도리어 왕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타락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합이 나붓의 포도원을 소유하려는 표면적 구실은 무엇이든 그 실제적 동기는 왕권의 극대화를 위한 토지 소유의 확대 도모로 보아야 한다.
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ㅇ열조의...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 나봇(Naboth)의 이 같은 대답은 그가 여호와 신앙가이며 율법에 충실하려는 인물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물론 아합이 후한 보상을 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봇이 이를 거부한 것은 그 포도원이 선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유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자손들에게 대를 이어 전해야 할 분깃인 선조의 유업을 매각하는 것이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넘께서는 (1)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근족이 무를 것, (궁핍하여 무를 날짜를 연기할 때는 연기된 기한을 계속하여 무를 것, (2)무를 힘이 없을 때 그 토지를 산 자가 희년(禧年)에 돌려 줄 것 등을 율법으로 명시하셨다(레25:23-28). 그러나 나봇처럼 전통의 신앙과 이상에 충실하려는 인믈이 아합시대와 같은 변질된 시대에 얼마나 더 있었는지는 자못 의문스럽다.
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
ㅇ근심하고 답답하여 - 이에 앞장에서도 언급된 구절로서 내적 격동으로 인해 속이 타거나 기분이 언짢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20:43 주석 참조. 그런데 아합의 심리 상태에 대해 거듭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에서 우리는 그의 완악함과 패역(悖逆)함을 엿볼 수 있다.
ㅇ침상(寢狀)에누워...식사를 아니하니 - 본절에서 아합은 마치 투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나타난다. 즉 그는 갖고 싶은 것을 못갖게 하자 심통난 아이처럼 식사를 거절하고 누워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혀 성인다운 면모롤 보이지 않는 아합에게서 독자(讀者)들은 그가 왕으로서 너무 졸렬한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 이스라엘에 외국의 우상 숭배가 도입되고 번창되게 된원인(16:29-33)에는 아합의 이처럼 줏대없고 성숙치 못한 사람됨이 한몫을 차지하였다. 한편 아합의 소유욕이 빚어낸 이 우스갯거리는 결국 나봇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악으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5-16절). 여기서도 우리는 죄가 죄를 유발한다는 죄의 속성(약1:15)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5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나아와 가로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ㅇ이세벨이 저에게 나아와 가로되 - 아합의 무기력하고 유치한 면은 도리어 이세벨의 강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을 부각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본절에서도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마치 후견인 같은 자세로 등장한다. 즉 그저 드러누워 끙끙앓는 아합에 비해, 질문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려는 이세벨은 훨씬 적극적이다. 그래서 아합과 이세벨의 관계에 있어 늘상 끌려 다니는 쪽은 아합이었던 것이다. 19:1 주석 참조.
6 왕이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저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않겠노라 함을 인함이로라
ㅇ아합이 일의 자초 지종(自招至終)을 이세벨에게 고하고 있는 본장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1)대체로 이스라엘에 비해 훨씬 전제 군주적(專制君主的)성격이 강한 두로 출신의 이세벨(더구나 이 여자는 잔혹한 폭군 아버지 밑에서 자랐음을 기억해야 한다)에게 아합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렸을까 하는 문화적 차이점이다(16:31). (2)아합은 마치 어머니에게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시시콜콜히 이르는 어린 아이처럼 처신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부 관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일찍이 자신이 신봉하던 우상 종교 도입을 요청하는 이세벧에게 아합이 여호와 신앙의 바람막이가 되기에는 분명히 역부족이었을것이다(16:31-33). 아합이 펼친 종교 정책에는 언제나 이세벨의 입김이 작용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7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이르되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ㅇ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 본절은 의문문이 아니다. 히브리 원문상 이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왜 그 모양입니까'라는 힐난조의 말이다. Modern Language Bible은 이를 '당신은 이스라엘에 대해 왕권을 행사하지 않을 겁니까? '(Do not exercise the kingship over Israel?)로 좀더 풀어 번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세벨이 가진 왕권 개념은 이스라엘인들의 전통적 개념과는 다른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세벨은 고대 근동의 전제군주가 일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염두에 두면서 본절과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의 왕권은 보다 제한적이다. 2절 주석 참조. 즉 왕이라 하더라도 그는 다른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율법 준수의 의무를 져야 했다(신17:14-20). 이점은 고대 근동의 거의 무제한적 왕권에 비해 훨씬 행동의 제약을 받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아합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부모의 유업 외에 타인의 유업을 함부로 탈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세벨의 눈에는 그같은 아합의 행동이 어리석기 짝이 없고 왕답지 못한 처사로 비쳤을 것이다.
ㅇ내가...드리리이다 - 나봇의 말 중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3절)을 '내가' 주겠다고 말하는 이세벨의 언동에서, 그녀가 정녕 이스라엘을 해치는 대적임이 극명(克明)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이세벨은 아합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격려하여, 하나님앞에서 마땅히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왜곡하도록 부추긴 암적(癌的) 존재였다.
8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쳐서 그 성에서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보내니
ㅇ아합의 이름으로...그 인(印)을 쳐서 -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인장(印章)의 용도 역시 다양했다. 즉 인장은 의식서 날인, 재산 증서의 신빙성 보장,공문서의 권위보증 등 여러 효능을 띠었다. 본절에서 이세벨이 거짓 편지를 쓴 후 아합의 도장으로 인친 것도 그 내용이 의심할 바 없는 것임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즉 이세벨은 백성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 넘기기 위해 왕의 인장을 도용(盜用)하는 짓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한편 당시의 도장은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외에도 굴려서 인을 찍는 원통형 인장, 그리고 인장 반지도 있었다. 창41:42 주석 참조.
ㅇ쳐서 - 이에 해당하는 '하탐'은 그 자체로 '인을 찍다','봉인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서를 '하탐'하는 것은 남이 그 내용을 알 수 없게끔 비밀에 붙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친서는 비밀리에 이스르엘의 장로와 귀인(貴人)들에게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ㅇ귀인 - 이에 해당하는 '호르'는 성경에 '귀족'으로도 번역되어 있다(전10:17;렘27:20). 그러나 이들의 지위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카일(Keil)은 이들을 행정관들(the members of the magistracy)로 보고 있다.(Keil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270)
9 그 편지 사연에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ㅇ금식을 선포하고 -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공적인 금식 선포는 공동체 내의 악행 및 죄에 대해 집단적 참회를 촉구하는 것이다(삼상7:6;14:24). 즉 한 개인의 죄는 그 사람만을 단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회개와 관계 개선이 요구된다는 사고 방식이 담긴 행위이다. 에스더 4:1-3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본절의 금식 선포는 도리어 악행을 짓고자 하는 음모에서 발단된 그릇된 성격의 것이다. 즉 이세벨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성읍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블러 일으키려고 이스라엘 성읍에 금식을 선포한 것이다. 여기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이란 물론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날조된 죄를 의미한다(10,13절).
ㅇ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앉힌 후에 - 즉 나봇을 피고인(被告人)의 신분으로 재판정에 앉히운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도 모르는 체 이처럼 재판정에 끌려나온 나봇은 필시 어리둥절하였을 것이다. 13절 주석 참조.
10 비류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저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 하였더라
ㅇ비류(匪類) - 이에 해당하는 '베네벧리야알'은 문자적으로는 '무가치함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타인에게 잘못없는 존재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삿19:22주석과 삼상10:27 주석을 참조하라.
ㅇ두사람을 - 사람을 사형에 처하려면 두세 사람의 증언이 요구된다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다(신 17:6). 이 규정을 최소한도로 만족시키기 위해 이세벨은 두 명의 비류를 포섭해 두도록 지시한 것이다.
ㅇ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저주함은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움을 입은 지도자들조차 저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20:7;22:28). 우리는 이러한 규례를 어긴 탓에 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사형에 처해진 사례를 레24:10-1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였다(레 24:15). 그런데 이세벨은 바로 이 규정을 이용하여 나봇을 사형에 처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ㅇ돌로 처축이라 - 율법상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우상 숭배자(신13:10), 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 20:2,27),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한 자(레24:14), 간음한 여인(신22:21)등에게 가해졌다. 이러한 형 집행 절차는, 먼저 사형수의 옷을 벗기고 손을 묶어서 밖으로 끌고 나가 처형대 위에 올려 두면, 한 증인이 그를 밀어 뜨리고 이어 두번째 중인이 큰 돌로 먼저 쳤다. 그 후 들러 선 무리가 함께 돌을 들어 쳤는데 이때 죽은 자를 위한 애곡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개적,공동적 돌 처형법은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경각심과 연대(連帶) 의식을 심어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13:10,11 주석 참조.
11 그 성 사람 곧 그 성에 사는 장로와 귀인들이 이세벧의 분부 곧 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
ㅇ장로(長老)와 귀인(貴人)들이...쓴대로 하여 - 이스라엘의 장로와 귀인들이란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권익 수호와 율법 준수를 위해 모범적으로 행동해야 할 위치에 있는 계층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세벨이 율법을 악용하는 범죄에 별 저항없이 동조하였다. 이는 곧 법관이 법을 악용(惡用)하는 것과 같은 형국인바 아합 시대 수뇌부들의 타락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사례이다.
ㅇ이세벨의 분부 - 본절은 장로와 귀인들이 받은 밀서(密書)가 비록 아합의 명의와 낙인으로 되어 있지만(8절), 그 모의 주체는 이세벨임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이런 사실은 편지를 받은 장로와 귀인들도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세벨의 잔혹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장로와 귀인들은 왕비 이세벨에 영합하여 기왕에 누리던 사회적 지위와 이익을 보존하려던자들 일지도 모른다. 즉 이런 부류들은 세태의 흐름에 영합하여 이세벨에 협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변화(사실은 변질이라 해야 할)를 가져오는 진보주의자를 자처했을 것이다.
12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매
ㅇ시대를 막론하고 금식은 개인적로나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신앙 훈련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도덕성, 윤리성이 결여된 종교적 의무로서의 재반 의식(儀式)은 본래의 취지와 순수성이 왜곡당하기 쉽다. 즉 알맹이가 빠진 형식이란 불의와 거짓을 가리워주는 잘못된 도구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금식의 오용(誤用) 역시 자주 예언자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던 주제 중 하나이다(사 58:4-6). 본절 역시 금식의 순수성을 해쳤던 역사적 사건 중 일례(一例)이다. 9절 주석 참조.
13 때에 비류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앞에 앉고 백성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거를 지어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저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고
ㅇ본절에 나오는 재판은 무엇인가 졸속(拙速) 진행의 냄새가 난다. 정상적인 재판절차에서는 피고의 유죄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뿐만 아니라 피고의 혐의를 벗겨 줄 증인도 동석하는 게 보통이다(시 109:31;잠14:25). 그러므로 나봇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무뢰배들의 무고(無告)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 줄 증인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통상있게 마련인 원고(고발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수상하다. 따라서 나봇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와 순전히 형식적인 재판 끝에 희생된 것임이 분명하다. 한편 참고로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 절차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소송 사건은 고발자(원고)로 등장한 어느 개인에 의해 시작되었으며(신25:7), 고발은 대부분의 경우 구두로 하였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서류상으로도 가능하였다(사 65:6;단7:10). 그리고 법정에는 재판관과 원고외에도 피고와 중인들이 동석하였다. 한편 재판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원고와 피고는 각각 사실 증명을 위한 증거품들을 제시했으며 (출22:13;신 22:13-17), 재판관은 그것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기타 고발 사항 및 변호사항들을 모두 심리(審理)한 후 최종적으로 중인들을 세웠다. 이때 형(刑)의 확정, 선고를 위해서는 최소한 2명의 증인이 요구되었으며, 거짓 증인으로 판명된 자는 도리어 피고에게 뒤집어 쐬우려고 했던 만큼의 형벌을 대신 받아야 했다(신19:15-21).
14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나이다 하니
ㅇ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비록 아합의 명의로 편지는 왔지만 나봇 살해 음모는 이세벨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장로와 귀인들은 알고 있었다. 11절 주석참조. 그래서 그 결과는 이처럼 이세벨에게 통보된 것이다.
ㅇ나봇이...죽었나이다 - 왕하 9:26에는 본 사건과 관련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가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나봇의 처형 당시 아들들도 함께 몰살당했음이 틀림없다. 사실 이때 나봇만 죽였다면 그 아들들이 조상의 유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민16:27; 수 7:24,25).
15 이세벧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함을 듣고 아합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그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싫어하던 포도원을 취하소서 나봇이 살아있지 아니하고 죽었나이다
ㅇ그 이스르엘 사람...포도원을 취하소서 - 혹자는 이 말에서 이세벨의 득의 만만하고 표독(慓毒)한 감정을 읽어낸다(Hammond). 즉 '그 멍청이가 돈을 준대도 거절하더니 고스란히 뺏기게 되었다'는 이세벨의 고소해 하는 표정을 연상해 내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 말에는 '당신이 돈을 제안하고도 갖지 못한 것을 나는 거저 뺏을 수 있었다'는 악한 자랑도 들어 있는 것이다. 한편 '취하소서'는 '이어받다', '상속하다'는 뜻의 '야라쉬'에서 온 말이다. 당시 우상 숭배자의 성읍이나 뒤로부터의 탈취들은 모두 여호와께 바쳐졌듯이(신 13:16) 피정복자나 범죄자의 소유는 모두 왕의 재산으로 귀속되었다(Lange, Keil & Delitzsch). 그러므로 아합은 이제 외견상 합법적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상속(?)하게 된 것이다.
16 아합이 나봇의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 갔더라
ㅇ곧 일어나 - 70인역(LXX)은 이 같은 행동에 앞서 아합이 옷을 찢고 베를 두르는 동작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세벨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합법적으로 탈취할 수 있도록 보다 교묘히 일을 꾸몄음을 알수 있다. 즉 나봇의 죽음은 외견상 일국의 통치자에게 안타까움을 주는 한 백성의 비극으로 꾸며질 필요가 있었다. 이에따라 이세벨은 아합이 공식석상에서는 그같은 제스처를 취하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그러나 거짓은 항상 이율 배반적인 양면성을 노출하게 마련이다. 즉 옷을 찢으면서 애통해 하는 척하던 인물이 서둘러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 일어서는 행위는 아무래도 조화되지 않는다. 여하튼 이제 아합은 원하던 것을 갖게 된 어린아이처럼 얼씨구나 하고 일어나 이스라엘로 내려 간 것이다.
17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거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그리로 내려 갔나니
ㅇ사마리아에 거하는...아합 - 이 말은 독자들에게 좀 혼란스러음을 안겨 준다. 왜냐하면 아합은 현재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이스르엘로 내려갔다고 해놓고(16절) 다시금 '사마리아에 거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인간이 한 장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다론 장소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흑자는 이 말을 그저 '사마리아에 보좌가 있는...아합' 식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Hammond). 그러나 본절과 관련 우리는 우선 현재 엘리야가 있는 장소가 사마리아 아닌 다른 곳임을 기억하자. 또한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은 불과 30여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임을 기억하자. 18:45 주석 참조. 이렇게 볼 때 먼 데 떨어진 엘리야에게 '사마리아에 사는 아합에게 가봐라. 그가 지금 나봇의 포도원에 가 있다'는 말은 모순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마리아에 거하는'이라는 말이 삽입되므로써 19절의 예언의 정확성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19절은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는 곳'(즉 이스라엘)에서 아합의 피도 핥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22:38에 의하면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는 곳은 '사마리아 못'이다. 이러한 차이는 외견상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절의 기록으로 미루건대, 아합의 왕궁이 위치한 곳과 나봇의 포도원이 위치한 곳을 통틀어 '사마리아'라 불러도 무방한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절의 예언의 신빙성은 손상되지 않는 것이다.
19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ㅇ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 이 말속에는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비분(悲憤)과 탄식의 어감이 어려 있다. 즉 이는 아합의 범죄에 통탄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본 번역은 자칫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즉 살인과 탈취를 거듭해 온 아합의 계속적인 악행을 비난하는 말같이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네가 살인을 하였고 거기다 탈취까지 하였다'는 뜻이다. Living Bible은 이를 '나봇을 죽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악하지 않은가? 그런데 강도짓까지 해야 했는가?'(Isn't killing Naboth bad enough? Must you rob him, too?)로 옮기고 있다. 한편 참고로 나봇 살혜사건 외에도 아합이 저지른 죄상들을 나열해 보면 우상 숭버(16:32), 음란한 이방 여인과의 혼인(16:31), 여호와 선지자들 핍박(19:1-3),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벤하닷을 놓아줌(20:42) 등을 들 수 있다. 응당 여호와 신앙의 수호자였어야 할 이스라엘 왕 아합이 도리어 이같이 참람한 죄악들만을 저질렀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더 컸음은 지극히 당연하다(20-26절).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나의 대적이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ㅇ나의 대적(對敵)이여 - '대적'이란 '적의가 있다'는 뜻인 '아야브'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서로 중오와 적의를 품는 관계에 사용되는 말이다. 이러한 단어를 아합이 구사하고 있는 데서 그가 평소에 얼마나 엘리야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는지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아합의 눈에 엘리야는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반대하는 것으로 업(業)을 삼는 최악의 인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대적 태도가 갈멜산 사건 이후로도 계속되었다는것은 놀랄 만하다(18:17).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은 셈이니 그러한 태도가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향하여 표출되기 마련이다.
ㅇ네가 나를 찾았느냐 - 한글 개역 성경의 본 번역은 엘리야가 마치 점잖게 아합에게 알현을 요청한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찾았느냐'에 해당하는 '마차'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갑자기 나타난 대적에게 들켰다는 어감(語感)이 서린 말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이 말은 '아이구 이 원수가 또 나타났구나' 또는 '하필 이 작자에게 걸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괴롭게 되었구나'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 하겠다.
ㅇ네가 스스로 팔려 - '스스로 팔려'(히트마케르카)란 '스스로 자신을...의 노예 상태가 되게하다'는 뜻이다. 즉 아합은 죄를 범하는 일에 완전혀 몰두하여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사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하면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 물론 그 일은 이세벨의 층동질과 계교를 통해 저질러졌으나 아합의 욕심 때문에 추진된 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합은 탐욕에 이끌려 자신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였고 그 결과 살인과 탈취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고 말할수 있다(롬 7:14).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ㅇ매인 자나 놓인 자 - 종이든 자유인이든을 막론하고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4:10 주석을 참조하라.
22 또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의 노를 격동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ㅇ네 집으로...되게 하리니 - 여로보암(Jeroboam)과 바아사(Baasha)는 각각 자신의 왕조를 열었으나 불과 2대째에 가서 부하의 모반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인물들이다(15:25-31; 16:8-14). 그런데 이들이 동일한 운명을 걸어야 헹던 이유는 한 국가와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우상 숭배에로 이끄는 동일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이방의 우상을 도입한 아합이(16:31-33) 같은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별로 놀라온 일이 아니다. 한편 훗날 실제로 아합의 아들 여호람(흑은 요람)은 부하 예후의 모반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고, 아합의 가문은 모두 무참한 참살(慘殺)을 당하고 만다(왕하 99:21-26; 10:1-17; 대하 22:8).
ㅇ나의 노(怒)를 격동(激動)하고 - '격동하다'에 해당하는 '카아스'는 점차로 격분에 이르도록 자극한다는 뜻이 있다. 즉 참으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거듭 자극을 가함으로써 마침내 분노케 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실 인간들의 계속적인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마침내 절정의 분노를 발하게 하는 죄이다(츨20:3-6). 그러나 실상 이러한 분노는 당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설적 표현과 다름없다. 출 20:5 주석 참조.
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ㅇ개들이...먹을지라 - 임종을 평안히 맞이하여 조상들의 무덤에 같이 묻힌다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죽음의 방식이다. 반면 객사(客死)를 당해 시체가 짐승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저주받은 죽음으로 여겨졌다. 14:11 주석 참조. 그런데 이세벨에게 예고된 죽음의 방식은 이보다 처참하다. 즉 생전에 부귀, 영화와 권세를 누누리던 이세벨에게 이스라엘 성 곁에서 개들의 먹이가 되는 죽음이 예고된 것이다. 그것은 곧 이세벨의 전 삶을 송두리째 저주 아래 둔다는 부정적 상징성이 강하게 암시된 죽음이다. 그리하여 그 죽음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자의 생전의 삶의 방식과 모든 행적이 저주받아 마땅한 그릇된 것임을 생각케 할 것이다. 사실 이세벧은 아합을 층동질하여 온갖 죄악 가운데 놀아나게 한 장본인이었으니 그 삶이 욕된 것이었다고 밖에 달리 평가할 수 없다(25절). 한편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훗날 정확하게 성취되었는바 그녀는 예후(Jehu)의 반역시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이 으깨지고 개에게 뜯어 먹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였다(왕하 9:30-37).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ㅇ개들이 먹고...새가 먹으리라 - 아합 가문에 속한 자들이 당할 치욕스러운 죽음과 하나님의 강렬한 노여움을 강조해 주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11 주석을 참조하라.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ㅇ본절은 죄의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절이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인간을 그 아래 노예처럼 두려 하는 죄의 권세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죄에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약 1:13-15), 다음으로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판별 기준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에 달려 있음을 확인케 된다. 사실 죄에 대해 주관적이고 자의적(恣意的)인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 죄짓는 자의 일반적 성향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입각할 때 죄인은 자신의 처지를 죄로 자각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죄를 짓도록 권유하는 자기 외부의 객관적 조건 또한 무시할 수 어사싸다. 사실 아합의 새애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을 일관하게 된 주유요 원인은 악독한 이사벧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16:31)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상과 같이 죄의 주관적, 객관적 조건들은 서로 맞물려 그 열매를 산출해 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반 요소들을 함께 경계해 나가는 것이 죄의 예방에 효과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 성경은 우리들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비라"(살전 5:22)고 충고하고 있다.
ㅇ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 '충동하다'에 해당하는 '수트'는 '꾀다', '유혹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고 선동(煽動)하는 교활한 행위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의 처지를 이보다 더 정확히 요약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음란한 계집의 호림에 넘어간, 그리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여인의 간교한 치맛자락에 놀아난 전형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합도 우매한 결점을 소유하고는 있었지만,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렇듯 비참한 말로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26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ㅇ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 '아모리 사람'(Amorites)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이주하기 전의 거민을 가리킨다(창10:16; 출 3:8; 따상 1:14; 겔 16:3). 수9:2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 참조. 그런데 '아모리 사람'이라는 종족적 호칭만 갖고 는 팔레스틴 역사에서 명멸(明滅)한 여러 족속, 국가들과의 관계를 밝혀내기란 어렵다. 아마도 성경 밖의 역사자료들을 추적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과 관련하여 '아모리 사람'이 던져 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즉 그들은 우상을 섬겼고 음란하고 부정한 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이다(수24:15; 삿 6:10; 레 18:28; 20:22,23). 그리고 그들이 팔레스틴을 이스라엘에 내줘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견해이다(창 15:16). 그렇다면 '아모리 사람'의 땅을 인수한 이스라엘은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지금까지 일삼아 온 아합의 우상 숭배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축출당한 아모리인들의 운명에 이스라엘마저 동일하게 몰아놓은 행위라는 것이 본절의 준론(峻論)이다.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ㅇ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은 아합(17-26절)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악함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자세를 취한다. 본절과 29절을 통해 판단하건대 아합의 회개는 비록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순간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가식적이거나 표면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포하신 재앙을 아합 당대에서 그의 아들대에로 연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합이 이처럼 회개하고 나서도 다시금 악을 행했다는 데 있다(22:8, 26,27). 즉 아합은 일시적으로는 회개하였으나 지속적으로 회개의 참된 열매를 맺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회개는 다윗의 회개(시 51편)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하겠다.
ㅇ옷을 찢고...굵은 베에 누우며 - 본절에 열거된 행위는 모두 회개와 겸손 또는 극한 슬픔을 표시하는 것들이다(스9:3; 에4:1). 29절은 이 모든 행위의 성격을 '겸비함'으로 요약하고 있다. 즉 겉옷을 찢는 행위는 자신의 능력과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의 훼손을 통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추는 행위이다. 그리고 '베'(사크)로 만든 옷은 종종 슬픔과 자기 비하(卑下)의 표시로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시신(屍身)을 베로 감싸는 관습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창37:34; 사37:1; 막 15:46; 눅 23:53), 그 뿐 아니라 금식 역시 생명 현상을 지속케 하는 음식을 끊음으로써 자신을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기는 자기 부인(否認)의 행위이다.
ㅇ행보(行步)도 천천히 한지라 - '천천히'에 해당하는 '아트' 는 '부드럽게'또는 '상냥하게'라는 뜻이다. 원래 걸음걸이란 그 사람의 성격과 마음자세를 드러내 준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걸음을 천천히, 부드럽게 걸었다는 것은 곧 겸손의 자세를 보이려고 무진 애를 썼음을 뜻한다.
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ㅇ겸비함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나'는 '꺾이다', '복종하게 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새가 날개를 접다'이다. 여기서 새가 날개를 접는다는 것은 곧 사신의 최대 강점을 포기하는 모습이다. 대개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강한 면모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전의(戰義) 상실과 굴복을 표시하곤 한다. 그러므로 아합이 겸비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적하기를 멈추고 할복을 표하였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블 수 없었던 모습이긴 해도 아합의 이러한 태도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타락에 끼친 이세벧의 영향에 눈을 돌리게끔 한다. 즉 비록 우매(愚昧)한 자로 묘사되긴 해도 이세벧과의 결혼만 아니었다면 아합도 그토록 배도(背道)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본문을 통해 암묵리(暗黙裡)에 독자들에게 주는 인상이다.
ㅇ그 아들의 시대에야 ...내리리라 - 여기서 그 아들이란 아합의 아들이자 아하시야의 형제인 여호람(또는 요람)을 가리킨다. 22절 주석 참조. 한편 이기주의적,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본절은 당혹감을 안겨 준다. 즉 왜 첵임있는 당사자를 비껴간 징벌이 애꿎은(?) 타자에게 떨어져야 하는가 하는 난제(難題)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다루기란 쉽지 않다. 죄, 기질, 성향의 유전, 교육적 환경, 즉 가치및 태도의 후천적 습득 등 여러 가지 합리적 설명의 노력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연대성(連帶性), 즉 서로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돌리는 신앙적 사고 방식에 입각해 본절을 대한다면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출20:5,6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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