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왕상1..무엇따라 그대는 오늘을 사는가..영원한 주님의 언약말씀+부활신앙+부활 생명의 성령인가, 세상 스펙과 세상가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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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서가 판단하는 "선한" 나기드(대리왕)의 평가 기준] =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함 + 다윗의 길로 전심으로 행함......부가적 요소>산당 철폐 

..... 그 기준에 따라 살펴보면....북왕국 이스라엘에는 합당한 왕들이하나도 없었고, ....그나마 남왕국 유다의 열왕중 '정직히 행하여'란 평가를 받은 선왕은 아사--여호사밧--요아스--아마샤--웃시야--요담--히스기야---요시야 이렇게 8명뿐...그러나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란 칭찬을 받은 왕은 8명에서 오직 3명,. 여호사밧---히스기야---요시야... 이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 신앙의 정도를 걸어갔다는 극찬의 말이다.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산당 철폐까지, 요시야는 유월절 준수까지 기록되고 있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산당인가냐, 이방신을 섬기는기기 위한 산당인가 :: 주 임재 앞에서/주 임재따라 하나됨의 산 믿음.. 코람 데오-솔라 피데, 솔라 스크립투라, 솔라 크리스토스, 솔리 데오 글로리아!! .... 곧, 마음의 근본동기가 어떠하냐//분수령적/전환기적 회개-회심 + 날마다/매순간 십자가 보혈-말씀-성령 의지함으로써 교통하며!! 주안에 머무름의 영적 민감성으로 깨어 있어 생명 삶=회개로 하나됨의 삶 살기 " 일편단심, 전심으로!! 거듭난 믿응니와 하나되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령, 곧 (주 이름 부르며, 말씀으로 교통하며, 인도/이끄심따라 주와 하나됨으로 매순간 살아감 통해 그분의 증인된 삶 살기의 문제"===

 ---성경을 읽으며 같은 듯 다른 단어를 만나게 된다. 그 단어를 살펴보며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가령 “그러나 산당은 없애지 않아 백성들은 여전히 여러 산당에서 제사 드리고 분향했습니다”(왕하 14:4)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올 때 산당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곳 같은데, 선지자 사무엘과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것을 보면 이방신 섬기는 곳이 아닌 곳으로 보인다. ......동일한 산당이라는 단어로 다른 성격의 장소가 기술되어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개정개역이나 우리말성경 구약성경에는 ‘산당’이라는 단어가 77회 나오는데 이 중에서 59회가 사무엘상부터 역대하까지 역사서에 집중해서 나온다. 

---.산당(high place)은 높은 산에 설치한 제단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제단과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제단이 있는 곳으로 아래 4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사무엘 때의 라마 산당과 솔로몬 성전 건축 전의 기브온 산당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곳이었으나 나머지 산당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제사와 이방신을 섬기기 위한 산당이었다.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는 장면의 산당

 사무엘상 7장 17절에서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는 장면의 산당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 산당은 라마에 있었을 가능성 있다. 그리고 9장과 10장에서 이 산당이 계속 등장한다(삼상 9:12, 13, 14, 19, 25, 10:5, 13).  ...“그리고 언제나 자기 집이 있는 라마로 돌아와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그곳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삼상 7:17).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당신들보다 앞서가셨으니 서둘러 가 보세요. 오늘 산당에서 백성들의 제사가 있어서 지금 성에 도착하셨습니다’”(삼상 9:12). ...다윗이 다스리던 성전 건축 전에는 여호와의 장막(성막)을 기브온 산당에 두고 율법에 따라 번제를 드렸다(대상 16:39~40, 21:29).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그 형제 제사장들을 기브온의 높은 곳에 있는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번제단에 번제를 드리게 했습니다”(대상 16:39-40). ...솔로몬도 왕이 된 직후 일천번제를 기브온 산당에서 드렸는데 성경 번역상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는 일이 약간 부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왕상 3:2~4, 대하 1:3, 13). ...“그때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성전이 그때까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례를 따라 살긴 했지만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는 일은 계속했습니다. 왕은 제물을 드리러 기브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큰 산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그 제단에서 1,000마리 짐승을 번제물로 드렸습니다”(왕상 3:2~4).

 ==북 이스라엘에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세운 산당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남유다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 제사로 인한 민심 이탈을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웠다(왕상 12:27~29). 이 산당은 하나님께 제사는 드리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자신의 선조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낸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기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다(왕상 12:31~2, 13:32~3).   ...“‘이 백성들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면 이 백성들의 마음이 그들의 주인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여로보암 왕은 조언을 구한 뒤에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너희에게 큰일이다. 이스라엘아, 여기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너희 신들이 있다.’ 그리고는 금송아지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습니다(왕상 12:27~29). ...여로보암은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사람들을 제사장들로 세웠습니다. 그는 유다의 명절처럼 여덟째 달 15일을 명절로 정하고 제단에서 제물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그는 벧엘에서 자기가 만든 금송아지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또한 벧엘에서 자기가 만든 산당에 제사장들을 두었습니다(왕상 12:31~32).

 ===남 유다에 세운  예루살렘 성전 이외의 산당들

 히스기야 당시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 외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산당이 존재했으나 히스기야가 제거했다(대하 32:12). ... “이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다만 한 제단 앞에서 예배하고 그 위에 분향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대하 32:12). ...므낫세가 히스기야가 허문 산당들을 다시 세웠으나(대하 33:3~5) 회개 이후 이방신 섬기는 산당은 모두 제거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산당은 그대로 두었다(대하 33:15~17). ... “므낫세는 자기 아버지 히스기야가 무너뜨린 산당들을 다시 지었고 또 바알의 제단을 세웠으며 아세라 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또한 하늘의 별들을 경배하고 섬겼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원히 두겠다’라고 말씀하신 그 여호와의 성전에 우상을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 안팎의 뜰에 하늘의 모든 별들을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대하 33:3~5).  ...“그는 이방 신들을 없애고 여호와의 성전에서 자기가 성전 산과 예루살렘에 지어 놓은 모든 제단들을 비롯한 우상들을 없앴습니다. 므낫세는 여호와의 제단을 보수하고 그 위에 화목제물과 감사제물을 드렸으며 유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 여호와께만 제사를 드리되 계속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대하 33:15~17).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

 민수기,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하에 나오는 나머지 대부분의 산당은 가나안의 이방신들인 바알, 그모스, 아스다롯, 밀곰과 아세라를 섬기기 위한 산당들이다(민 22:41, 33:52, 왕상 11:7, 14:23, 15:14, 22:43, 왕하 12:3, 14:4, 15:4, 35, 16:4, 17:9, 11, 29, 32, 18:4, 22, 21:3, 23:5, 8, 9, 13, 15, 19, 20, 대하 11:15, 14:3, 5, 15:17, 17:6, 20:33, 21:11, 28:4, 25, 31:1, 33:3, 19, 34:3).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왕상 11:7).   ...시편, 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 호세아, 아모스, 미가에도 산당이 나오는데 대부분 이방 신을  섬기는 제단이지만 일부 드물게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도 있어 앞뒤 문맥을 살펴 이해하면 된다 (시 78:58, 사 15:2, 16:12, 렘 17:3, 19:5, 26:18, 32:35, 48:35, 겔 6:3, 6:6, 16:16, 20:29, 호 10:8, 암 7:9, 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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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해보면 가나안 정착 이후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의 산당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한 산당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분열 이후 산당들은 일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장소와 방법이 아닌 제사나 이방신에게 제사 드리기 위한 산당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 받으신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나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만들어드릴 수 없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다. == 하나님만 모시는 마음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보시며 기뻐하시지만, 하나님 외에 돈, 명예, 쾌락 등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게 되면 더는 그 마음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성경에 나온 산당이 좋은 곳인지 나쁜 곳인지 판별하기 전에 그곳이 하나님을 모시는 곳인지 아니면 이방신에게 제사 드리기 위한 곳인지를 살펴야 한다.


왕상1장

...아무것도 겉보기엔 진행됨 없어 보이며, 둘러싼 환경상황형편처지가 나날이 점점 더 악화 되어가는 것 같으나!!, 오히려 주님 일하심 보여주실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그대 자신의 영혼을 정결케 더욱더 주와 합하며 주님 신뢰하기를 실행할지니!! -롬8:28을 기억-명심하고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을 열고 주 임재 안에 머물러 있어서 온전히 주께 합하라!!--주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며, 예비하신 그 때 반드시 오게 하시리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거하리라,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나 여호와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네게 주리니-네 소유가 당끝까지 이르리로다, 내가 반드시 행하고 성취하며 임마누엘로 행하는 바 너를 물댄 동산같이 만족하게 하리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할수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못할일이 전혀 없느니라

...성경적 역사관 = 종말론.  ***시온산, 시온산성(다윗성) 혼동 말것


##기혼샘 : 기드론 골짜기에 위치...이 기혼샘이 있었기에 시온산성이 세워질 수 있었음..이사야 7장 3절에 나오는 ‘윗못 수도’( 水道)는 예루살렘의 기드론(Kidron)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과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수도 시설을 뜻함...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이 샘 때문에 시온 산성이 오벨(Ophel) 언덕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펠 언덕 북쪽이 모리아 산(성전 산)이고, 오펠언덕 하부 지역과 시온산 사이에  다윗 성이 위치... 이 샘은 시온 성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다윗이 이 지역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이곳 원주민들은 적의 공격으로 인해 물 공급이 차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오펠 언덕의 바위 밑으로 굴을 뚫어 기혼 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여 사용했다. 아마도 다윗은 바로 이 수구( 水口....워렌이 발견해서, 워렌 수구라 칭함)를 통하여 성 안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쉽게 시온 성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참조, 삼하 5:6-9). 훗날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는 의식을 기혼 샘에서 행하였는데(왕상 1:32-39), 이는 다윗 자신이 시온성의 주인된 것이 기혼 샘 수로(水路) 덕분이었음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히스기야(Hezekiah, B.C. 725-697) 왕은 앗수르 왕 산헤립 (Sennacherib)의 침공에 대비하여 기혼 샘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수로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실로암’(Siloam) 수로이다(참조, 대하 32:1-4, 30)....원래 실로암 못은 없었던 것인데 전에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산헤립의 침공을 대비하여 성 밖에 있던 기혼 샘을 메워버리고 대신 바위 밑으로 500여m 터널을 뚫어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실로암 못을 만든 것. 즉 솟구치는 싱싱한 기혼 샘물을 성 안으로 흘려 보냈으니 여기서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실로암’ 못이라 이름 붙여졌다....실로암 못은 기드론 골짜기와 중앙 골짜기(티로페온 골짜기)가 만나는 다윗성 남단에 위치한다..

 

#엔로겔 샘 : 베냐민 지파와 유다지파 사이의 경계.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가 만나는,  다윗성 남단 실로암 보다 더 밑에서 더 남쪽으로 나아간, 50m 정도 더 떨어진 지점(세탁자 샘)


**두 제사장과 두 장막 체제 ::: 시온산 장막(언약궤 안치 + 아비아달이 주관) ---기브온 산당(큰 번제단 + 사독이 주관[모세의 성막과 제반 기구들을 보관])**


.......주님 보시기에 형통은 하나님의 말씀 언약 따라...참된 영적 질서 아래서만 존재함.....이 원칙을 JC께서도 지키고 계셨음(세례요한에게 겸손히 요단강에서 세례받으심) ...다윗의 형통은 [임마누엘 하나님 경외함 인해!! 눈물 골짜기-15광야를 겸손과 경외함-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지남 인해]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주님과의 친밀함의 뛰어남 인해] 형통한 자였고, 그에 비하면 솔로몬의 형통은 [여디디아]란 이름에 부합하지 못한바,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삼하7:12-16, 대상22:5, 삼하12:24, 25에서도 솔로몬이야말로 여호와의 성전 지을자요,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자임을 분명히 해 주셨고, 다윗 그 자신도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주께서 친히 택하신 바, 자신의 뒤를 잇는 자요 주님의 성전 건축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전해주고 확약했음에도!! 즉, 솔로몬이야말로 분명히 주께서 언약하신 자임을 알면서도!!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에 대해 애통하며 회개함으로 사해주신 주님 마음과 시선에 굳건히 머물러 있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때때로  오히려 세상의 도덕적 관점따라 "불륜-살인"을 돌아볼 때마다 올라오는 이상한 거리낌때문에 '정말..솔로몬을 후계자로 내세우것이 합당한 걸까--이로 인해 후세 사가들에 의해 내 명성에 계속 흠잠힘 되는 것은 아닐까는 잡생각에....다음 후계자는 솔로몬이라는 공표를 머뭇거리고 있었다....게다가 어찌보면 너무나도 완벽한 왕의 재목이요, 흠잡을 데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아도니야(뜻-나의 주는 여호와)는 그 얼마나 준수하고 그 어미 학깃(-뜻 : 축제)은 이스라엘 사람이라서, 압살롬과는 또 다른 귀염둥이/금수저로서 그야말로 스펙도 최고라서 학식-성경지식-예의범절-외모/호감도 그 어느측면에서도 당연히 최고의 왕재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 아닐까...바로 이런 점에서 요압과 아비아달은 함께 왕위찬탈 음모에 합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때.주님은 나단을 통해 그분의 일을 이루고 계셨다....그것을 깨닫고는 분연히 주님 뜻 실행하는 다윗이었다!!

......이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했던 바, 요셉~, 요셉~하며 그들이 마치 구세주처럼 그동안 내세우고 있던 관점에서 마지막 임종 직전에 주신 바 유언이자 예언적 축복 시점에 이르러서는!! 돌연히 시아비-며느리의 불륜사건의 흠이 있으되 회개한 유다에게로 영적 후사 계보가 옮겨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 세상의 도덕적 관점이나 외모/스펙/예의범절과 도덕적 무결성 등 사람의 관점을 넘어서서 보고 계시며 예비해 두신!! 완전하신 주님의 택하심을 신뢰하고 붙드는 초월적 믿음/신앙의 일편단심과 은혜위의 은혜 관점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섣부르게 짐짓추정하며 차별-홀대함으로써 범죄하지 않도록 하자!!


===다윗이 늙은 때....[301.지금까지 지내온것]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나이가 들었다 생각된다면, 주 앞에서 돌아보라!!)) 말씀 주신 바 (자기연민에 빠지지말고!!) 주님 마음따라서만 생각하도록 하라..주 보시기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 Q나라를 어떻게 유업으로 순조로이 남기며 넘길까!!

......[고후4: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 뜻 : 내 아버지는 방랑객"..당시 천하제일미녀..아도니야까지도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그 미모를!! 탐낼 정도] 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 합당한 절제와 예의로!! 그러나 동시에 다정다감함으로 대하고 있음...성접촉 결코 시도하지도 않음을 의미(오직 곁에서 잔 심부름과 동시에 몸 시중 들며, 추위 타는 다윗의 체온 유지 위한 온돌 용품 대용 역할)]...볼썽 사나운 세상적 처방:: 쉬나미티즘::이 아님을 의미...압살롬 사후에는 오직 중심으로/일심으로 밧세바만 총애하고 친밀히 대함을 견지....비로소 음란중독에서 벗어나고 있음!!)

.......열왕기상의 관점.....[사람이 전적으로 무력해질 그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언약 이루시려 일하시는 시간임!!! ]....약할때 강함 되시네..나주님의기쁨되기원하네

===아도니야가 왕이 되고자 하다 

......[사람 용모따름이나 사람 생각 따름 아니라!!] Q의 언약 말씀에 대한 순종/복종 의무와 책임이 나단/사독-밧세바/솔로몬-브나야에게 주어지고 있음

5.  ○[이제 아비 다윗은 70세에 가까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단지 서서히 죽어가는 뒷방노인네에 불과 하다고 생각하면서(착각이지만)...여호와의 언약을 받은 (아직은 유약해 보이는, 아직 20세 되기전) 솔로몬이 언약적 계승자 됨을 주장하여 나서기 전에 거사해야한다고 계책 제시하는 이들의 간언이 일어나고 있었던 그 때]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이 때에도 다윗은 망설이고 있었다!!..역시 압살롬에게 대하였듯 바로 그렇게 금수저 + 심히 준수함 + 스펙 짱짱 :: 학식 교양 성경지식 교육 두루 갖춘 영재 교육 --왕 후계자/말 잘 듣고 상대방 경청함 인해 능력있는 /실력 두루 갖춘 귀공자 대접 받음 + 동시에!!, 한편으로는 압살롬에 대한 냉대를 후회하였던 듯 = 너그럽게만 대하고 있었음....그 결과는 !!자식 교육 완전 실패!!...그 경건한 사무엘조차도 자녀교육은 엉망아었고, 그 결과 대리왕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었음!!) .......이 시대에 있어서 [공공 유익 관점에서] 진정한 애국이란 주님 말씀 따라 사는, 고난과 역경 아는, 주 앞에서 말씀따라 나아가는 자 됨에 있으니!!, 자녀 교육 제대로, 예의범절-질서 의식  갖춘 자녀 제대로 잘 키우는 것!!...학대/폭력 행사하는 부모 치하에서 (무의식적 반발/저주함으로써 동성애 경향성 가진, 치우친 자녀로 성장케 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음란 중독은 아비가 어미를, 또는 그 반대로 어미가 아비를 지나치게 학대할 그때, 그것을 본 아이에게 보호본능이 작동되어 보호하고 안아주려는 마음이 자라나게 되는 바 음란중독에로 가울어짐이 알려졌다..그러나, 이 모든 치우침은 거듭남으로써 다 끊어진다!!........[잠6:23..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전7:5..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22:6...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솔로몬이 왕이 되다...누가 오늘날, 주 앞에 그분 임재 앞에 깨어 구함으로써!!, 주님 마음 알아드리며, 그분의 지혜와 타이밍 따라 그분의 행하시는 손발 되어드리는 영적 선물 "나단"인가!!..(언약말씀 그대로 일하시는, 결코 식언함 없으신 하나님을 보라!!)..이제야 비로소!! 솔로몬이 바로 말씀하신 그대로 예비해두신 영적 후사 됨을 알아보고 인정하고 왕으로 세우고 있음!!...이것은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서, 요셉~, 요셉~하며 요셉을 최우선시 하다가 죽지전에 이르러 예언적 유언 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유다의 영적 후사됨을 알아보게 되었고, 야곱은 그 때 소스라치게 놀랐으리라!!..[368. “주예수여은혜를내려주사”] [255.너희죄 흉악하나]

11.  ○[오늘, 누가 주 임재 안에 깨어 주님 나라 도래함을 구하는 "나단" 역할 할 것인가!!..주 앞에 깨어 구함으로써!! 주님이 일깨어 깨닫게 해 주신 그대로, 성령의 일하심 그 절차대로 순종하는 바, 주님의 일하시며 가리키는 손!!, 주님의 "선물"]나단이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말하여 이르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음을 듣지 못하였나이까 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12.  이제 내게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을 구할 계책을 말하도록 허락하소서[그리고 부디 경청하시고 심사숙고하여 주님이 마음에 일깨우시는 바 그 말씀대로 말하며 행동해 주소서!!]

13.  당신은 다윗 왕 앞에 들어가서 아뢰기를 내 주 왕이여 전에 왕이 여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런데 아도니야가 무슨 이유로 왕이 되었나이까 하소서

14.  당신이 거기서 왕과 말씀하실 때에 나도 뒤이어 들어가서 당신의 말씀을 확증하리이다

15.  ○밧세바가 이에 침실에 들어가 왕에게 이르니 왕이 심히 늙었으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이 시중들었더라

.......이미 밧세바와 아비삭은 주 안에서 서로 정중/다정하게 대하면서 아껴주는 바 상호 고마움과 상호 귀히 여겨 존중하는 한 팀처럼 마음이 하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16.  밧세바가 몸을 굽혀 왕께 절하니 왕이 [다정하게] 이르되 어찌 됨이냐

17.  그가 왕께 대답하되 내 주여 왕이 전에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여종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거늘(..삼하7:12-16, 대상22:5, 삼하12:24, 25)

18.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도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19.  그가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사령관 요압을 청하였으나 왕의 종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나이다

20.  내 주 왕이여 온 이스라엘이 왕에게 다 주목하고 누가 내 주 왕을 이어 그 왕위에 앉을지를 공포하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1.  그렇지 아니하면 내 주 왕께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나와 내 아들 솔로몬은 죄인이 되리이다

22.  ○밧세바가 왕과 말할 때에 선지자 나단이 들어온지라

23.  어떤 사람이 왕께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 나단이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왕 앞에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왕께 절하고

24.  이르되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25.  그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사령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그들이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였나이다

26.  그러나 왕의 종 나와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왕의 종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사오니

27.  이것이 내 주 왕께서 정하신 일이니이까 그런데 왕께서 내 주 왕을 이어 그 왕위에 앉을 자를 종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28.  다윗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밧세바를 내 앞으로 [다시]부르라 하매 그가 왕의 앞으로 들어가 그 앞에 서는지라

29.  왕이 이르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30.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31.  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내 주 다윗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대상22: 5-10(9, 10) .. *5.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   *6.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부탁하여   *7.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8.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9.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10.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삼하7:8-16(12,13, 16)...*8.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12: 24, 25...*24.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549.내주여뜻대로행하시옵소서] [338.내주를가까이하게함은] [368장 주 예수여 은혜를]...하늘의문을여소서..내안에가장귀한것

32.  ○다윗 왕이 이르되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니 그들이 왕 앞에 이른지라

3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34.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너희는 뿔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35.  그를 따라 올라오라 그가 와서 내 왕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그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지명하였느니라

36.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과 왕을 신뢰하여 하나된 우리도 적극 찬동하오며, 왕의 지명 그대로 여호와께서도 확증하며 행하심으로]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37.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 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의 왕위를 내 주 다윗 왕의 왕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 “아멘”(하고 브나야는 진정으로 말했다). “왕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도 말하리이다. 우리는 왕위 지명에 전적으로 만족하며 그 선택에 찬동합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만장일치로 지지합니다(nemine contradicente). 우리는 하나님의 순조로운 섭리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더구나 그것을 완성할 수도 없나이다. 내 주 왕의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나이다(36절).” 이것은 솔로몬의 왕권이 수립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다. 

38.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 가서

39.  제사장 사독이 성막[사독이 주관하는 기브온 산당에 성막과 기구들을 (솔로몬성전 완공 때까지) 보관 중이었음...언약궤는 아비아달이 관리하는 시온산 장막에 있었음 --시온산 장막을 "여호와의 장막", 기브온 산당 장막을 "성막"으로 기술하고 있음에 유의하라 --번제단은 두 곳 모두에 있었음]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40.  모든 백성이 그를 따라 올라와서 피리를 불며 크게 즐거워하므로 땅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갈라질 듯하니

***

41.  아도니야와 그와 함께 한 손님들이 먹기를 마칠 때에 다 들은지라 요압이 뿔나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어찌하여 성읍 중에서 소리가 요란하냐

42.  말할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오는지라 아도니야가 이르되 들어오라 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도다

43.  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과연 우리 주 다윗 왕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셨나이다

44.  왕께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솔로몬과 함께 보내셨는데 그들 무리가 왕의 노새에 솔로몬을 태워다가

45.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무리가 그 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읍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

46.  또 솔로몬도 왕좌에 앉아 있고

47.  왕의 신하들도 와서 우리 주 다윗 왕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더 아름답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왕이 침상에서 몸을 굽히고

48.  또한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내 왕위에 앉을 자를 주사 내 눈으로 보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 하니

49.  아도니야와 함께 한 손님들이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

50.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언약궤 안치한 시온 산 장막 제단의]제단 뿔을 잡으니

51.  어떤 사람이 솔로몬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 왕이 오늘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52.  솔로몬이 이르되 그가 [추후에 주 임재 앞에서 삼가며 살아가는 바가, 그 행동으로 드러날 바!!] 만일 선한 사람일진대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그에게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 하고

53.  사람을 보내어 [솔로몬의 말 그대로 전하여 (회개 촉구하고!!)] 그를 제단에서 이끌어 내리니 그가 와서 솔로몬 왕께 절하매 솔로몬이 이르기를 네 집으로 가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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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신명기 29:14~29절)== 

>>하나님의 염려(14~21절)

자, 오늘도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감사한 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오늘도 건강하게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아버지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는 복된 아침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야 할 본문은 하나님의 염려입니다.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있지만 저는 그렇게 제목 삼고 싶었습니다. 

이 제목은 18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할까 함이라는 말씀도 하나님의 염려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16~17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았던 것과 너희가 여러 나라를 통과한 것을 너희가 알며,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야다([d'y:)입니다. 애굽 땅에서 살았던 것은 이스라엘의 과거가 노예였다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를 통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냥 안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구체적으로 알았습니다. 

애굽의 열 재앙과 홍해를 건너던 그 순간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듯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은 시절의 경험은 그냥 지나치면서 안 것이 아닙니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험하여 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말은 라아(ha;r;)입니다. 이 말은 검사하다, 인지하다, 숙고하다, 발견하다, 관찰하다, 주목하다, 분별하다 등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본 것이 아니라 주목해서 본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애굽과 가나안의 우상들을 주목해서 보았는지 참 답답한 대목입니다.

애굽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여러 나라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들이 섬기는 우상이 얼마나 헛되고 힘없는 존재들인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만나고 우상들의 덧없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떠나서 죽은 신들을 섬길까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할까 염려하시는것일까요? 

앞 단락에서 등장했던 사람들, 여기서는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모든 사람!!.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이 보는 것의 영향을 받아 바뀐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핵심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온몸과 마음을 다해 경험해서 안 것이 우상숭배 하는 나라들의 풍속을 보고 그들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염려는 기우가 아닙니다. 

이미 역사를 살펴본 것처럼 하루 이틀 이렇게 우상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800여 년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우상을 따른 결과, 저주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레위기 26장에서는 우상숭배가 거룩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그 우상숭배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즉 그침의 원리, 성회의 원리, 나눔의 원리는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그 안식일이 제대로 지켜지면 안식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의 문제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닌 모양입니다. 구약 성경을 살피다 보면 우상숭배가 일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기 때문입니다. 

17절에 출애굽을 하면서 본 우상들을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그런 우상들을 섬길까 염려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독초와 쓴 뿌리가 생겨서 이 저주의 말씀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독초와 쓴 뿌리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아 보입니다. 인간을 해치는 나쁜 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향력이 큽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독초와 쓴 뿌리라고 표현한 것은 이것의 해악이 독초와 같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오면서 다른 나라들이 섬기는 우상의 하찮음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마음에 독초와 쓴 뿌리가 자라는 것일까요? 

저는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탐욕이라고 봅니다.

이 부분의 번역은 다른 번역 성경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 번역입니다. 19~21절까지를 읽어 보겠습니다. “당신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역겨운 것과, 나무와 돌과 은과 금으로 만든 우상을 보았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가, 주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을 멀리하여, 다른 민족의 신들을 섬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 가운데 독초나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런 저주의 말을 들으면서도 속으로 자기를 달래면서 '내 고집대로 하여도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그런 사람을 그대로 두면, 맹렬한 재난을 만나서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퍼부으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저주를 그에게 내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려서,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서 구별하여, 이 율법책의 언약에 나타나 있는 온갖 저주대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과 19절의 스스로 하는 위로는 같은 것입니다. 19절에서 이 저주의 말은 28절에 길게 언급하셨던 축복과 저주 가운데 저주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우상숭배에 빠진 독초나 쓴 뿌리를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달래면서 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마음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긴장입니다. 그 긴장 사이에 하나님의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것이 보는 것의 영향을 받아 흘러 떠내려갈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분노하시고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려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염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과 모든 것들을 경험했지만 우상숭배에 빠져서 여호와를 떠나는 것입니다. 

저주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나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평안할 것이라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이미 일어난 일입니까? 아닙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0절에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주저를 그에게 더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21절에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 버리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염려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서 여호와를 떠나게 되어 그들을 심판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언약하시는 언약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입니다. 그리고 15절에 의하면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란 자에게까지”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오고 오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주의해서 보셔야 할 것은 수령과 장로들, 지도자와 모든 남자가 누구와 동일 선상에서 취급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유아들, 아내들, 객들, 나무패는 사람들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빈부귀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분의 귀천과 고하가 어디서 차별이 없어집니까? 여호와 앞에 서 있을 때입니다. 11절에서 여호와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핵심은 [모든 백성,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믿는이들마다!!] 여호와 앞에 서 있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누구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며 언약의 당사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도 이 언약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 당사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의 출신 성분이나, 직업, 직분을 초월해서 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입니다.

15절에는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오늘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한 미래에 태어날 사람까지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들까지를 바라보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의 대상은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대상은 어쩌면 오늘 우리들 까지를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염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오늘을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의 의미(29절)

하나님의 인도라는 주제로 성경 공부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나, 국가의 흥망성쇠, 이른 비와 늦은 비 같은 영역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대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사진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경우를 만납니다. 날씨에 대한 체크를 꼼꼼히 합니다. 며칠 전부터 바람이며 습도며, 구름을 살피고 또 살펴서 출발합니다. 그런데요? 막상 도착하면 전혀 다른 풍경이 우리를 맞아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 법성포에 사진을 담으러 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는 내내 날이 흐립니다. 분명히 일기예보는 구름 많음이었는데 하늘은 온통 시멘트 색입니다. 가다가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다가 어찌어찌 대덕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부지런히 장비를 챙겨서 올라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내려옵니다. 상황 종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뒤늦게 올라가는 저를 조금은 한심하게 바라보고 내려갑니다. 그래도 저는 야경이라도 담아보겠다고 올라갔습니다. 가장 낮은 포인트에서 몇 컷을 담습니다. 신통치 않습니다. 야경을 담으려고 하는데 포인트가 너무 낮아 조금 더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요? 올라가서 다리를 펼치고 1분이 지나지 않아 하늘이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약 40분간 환상적인 일몰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이런데 인용하는 것이 죄송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날씨입니다. 멀리 수원에서 부산에서 온 사람들이 다 내려갔는데 불과 서너 명이 남아 그 장관을 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요사이 묵상하고 있는 나훔 선지자의 앗수르에 대한 심판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 인간으로 하여금 장래를 알지 못하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입니다. 장래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성경 말씀 전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제사장 나라 백성들이 이렇게 살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들은 순종할 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신명기도 온통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 정확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생활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순종하며 살아가느냐가 관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은 더 배우고 살펴서 내 삶의 빛이요 등이 되도록 해야 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상한 현상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윤리적인 뜻, 즉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나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도록 해 놓은 장래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보았다느니 환상을 보았다느니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더 나아가 장래 일에 대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희한한 기독교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 사이의 긴장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한 것이 다릅니다. NIV성경입니다. “The secret things belong to the LORD our God, but the things revealed belong to us and to our children forever, that we may follow all the words of this law.”

새 번역 성경도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 secret things에 해당하는 것이 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속하는 것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영역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things revealed, 즉 이미 역사를 통해 나타난 일들, 계시 된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을 나타내 주신 것은 우리와 우리 자손이 길이길이 이 율법에 순종하도록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히브리어로는 싸타르(rt's;)로 ‘숨기다’, ‘감추다’라는 의미입니다. 나타난 일은 가라(hl'G:)로 ‘발가벗기다’, ‘누설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 말씀을 어렵게 생각해서 감추어진 것들은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즉 하나님이 어떤 명령을 하는 이유이고, 나타난 일은 이스라엘이 다 모르더라도 그들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합니다. ... 또 다른 분들은 감추어진 일은 숨겨진 죄인데 이것들은 하나님께 다 드러나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벌하실 것이고, 나타난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의 책임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감추어진 일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것이 아니라, 나타난 일, 즉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을 따라서 사는 성도들의 삶이라고 해석합니다. (이게 더 자연스럽고 문맥에도 맞아 보이는데 학자들은 왜 저런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도 새 번역 성경의 해석이 옳아 보입니다. 물론 NIV 성경도 동일한 견해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9절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를 아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일, 즉 계시 된 언약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이 정말 중요한 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일, 즉 주권적인 하나님의 뜻을 엿보아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미 말씀해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에는 무관심하거나, 하찮게 여기고, 신비만 좇습니다. 

그것이 훨씬 종교적이고 고상해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의 삶에서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터전으로 주셨습니다. 그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기를 아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런데 감추어진 Q의 뜻에만 관심이 있고 정말 살아내야 할 Q의 뜻은 하찮은 것이나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교만을 떠는 것은 기독교를 더 하찮은 종교로 전락시키는 주범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묘한 일은 Q께 속하였습니다. 아멘. 그것은 Q의 영역입니다. 그것에 관심 둔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안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일, 우리에게 허락된 것을 따라서 살 뿐입니다. 그것이 Q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Q의 뜻입니다. 아멘.

그래서 29절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감추어진 일을 알기 위해 마음을 쓰기보다 이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Q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입니다.

>>오늘과 같다 하리라(22~28절)

자, 그러면 여기서 주의해서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핀 29절은 앞 단락의 인과 절입니다. 다시 말해 22~28절에 대한 결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우상숭배가 감추어진 일을 알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자, 우선 22~28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24절을 보는 것에서 시작해 봅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고 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옛날 번역에는 “열렬하게 노하실 것이라.”입니다.

Q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질문 거리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었는데 그렇게 Q의 교회가 모욕당하는 상황을 Q께서 맹렬하게 노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Q께서 맹렬하게 노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22~23절입니다.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의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그럽니다.

자손과 객들이 재앙과 질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질병과 재앙의 출처가 여호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재앙이요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즉 징계라는 말입니다. 온 땅이 유황이 되고 소금이 되었다는 말은 앞서 하늘이 놋이 되고 땅이 철이 되었다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황폐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후손들도 알고 세상 사람들도 아는데 Q의 징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왜 Q께서 이렇게 맹렬하게 노하시느냐는 것입니다. 

25~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여기서 그때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 된 이유를 사람들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맹렬하게 진노하시는 이유를 사람들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서 있는 너희, 즉 언약 갱신에 참여한 보배로운 신부 같은 백성들이 언약을 저버리고, Q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않을 때 Q께서 맹렬히 진노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이미 여러 번 말씀하신 것처럼 Q께서 어린양의 피와 홍해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만나와 구름 기둥, 불기둥과 반석의 물 등등을 체험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설득하신 뒤에 드디어 약속을 맺으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Q이 염려하셨습니다. Q께서 말씀하시는 저주의 말씀을 듣고도 우상숭배에 빠지고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과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29:12절 말씀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하시는 언약입니다. 

즉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처럼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시고 인간들에게는 그 언약에 동참하라고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은혜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25절에 언약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Q과의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알지도 못하고 주시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에 Q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고 누가 말합니까? 사람들이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점검해 보겠습니까? 24절의 열렬한 진노, 맹렬한 진노는 지금 이루어진 일입니까? 아닙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따라서 29절 말씀을 다시 살피는 일은 중요합니다.

호렙에서 모압까지의 시간은 경험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겪게 될 일들은 경험의 시간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야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타난 일들을 교훈 삼아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빛이라고 고백하며 살아내는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 사이에서

자,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버리고,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감추어진 것입니까? 나타난 일입니까? 나타난 일입니다. Q께서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뜻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히 지키고 따라야 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감추어진 Q의 뜻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게 어디로 간 것입니까?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주시지도 않은 다른 신들을 따라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이 무당을 많이 찾아갔습니다. 그때 무당에게 묻는 것은 거의가 감추어진 일에 속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사업장을 어디에 내야 하는지, 결혼 날을 언제 잡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에서부터 집에 생기는 크고 작은 우환이 왜 일어났는지 별의 별 것들을 다 가지고 가서 물었습니다. 

그런 것들 가운데는 대부분 감추어진 것들이 많았습니다. 즉 Q께서 알지 못하도록 하신 것들입니다. 그렇게 찾아가서 묻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염려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입니다. 그런데 우상 숭배는 근본적으로 탐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 즉 Q의 주권적인 영역들을 왜 알고 싶은 것입니까? 단순히 궁금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뭔가 필요한 것이 있고 염려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복술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당들이 기독교 내에도 존재합니다. 이름만 기독교로 바뀌었지 과거 무당들이 하는 짓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은 인격적인 Q이 아니라 무당 종교의 신과 비슷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기도했더니 보여주셨다고 하면서 오만 것들에 다 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Q은 나타난 일, 즉 Q께서 말씀하시고 이렇게 살라고 하신 것 외에 인간은 Q의 형상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수많은 영역에서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결정은 지나봐야 결과를 알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책임이 따릅니다. 

그런데 무당에게 물으면 내 책임은 빠지고 무당책임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이런 기독교는 오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 되는 기독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늘 진노를 받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들처럼 예배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율법을 준수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다만 우상도 겸하여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저울추가 우상에게 더 기울어진 것입니다. 

Q은 그런 종교에 기만당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묘하게 무당 종교와 기독교를 섞어서 기독교 무당이 되는 것은 사실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감추어진 것들은 Q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 영역을 자꾸 말하고 안다고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은 우상숭배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29절이 말씀하고 있는 감추어진 일, 즉 Q의 영역을 우상 종교는 자꾸 침해하고 거짓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를 Q은 끔찍하게 싫어하셔서 그들을 향해 진노하시고 멸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아야 할 그들의 삶에 대해서 Q께서 미리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나타난 일이 아니라 장차 곧 있게 될 일입니다. 장래에 속한 일이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이렇게 살지 말라고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호와께서 맹렬하게 노하시는 상황은 사실은 감추어진 일입니다.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것도 아닙니다. 

Q의 주권적인 뜻이 아닙니다. 그 삶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Q은 그 일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그때 그때의 결정을 나타난 일에 의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을 살아갈 때 나타난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그것에 관심 두기보다 나타난 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더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안다고 치부하지 마십시오.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면서 이론만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매일 그 말씀 때문에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놓아두어야 합니다. 탐욕을 그치고 우상숭배를 그쳐야 합니다. 그래야 Q께서 말씀하신 나타난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생활과 지금 우리의 미래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니, 우리가 살아야 삶도 다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면서 나타난 말씀, 우리에게 영원히 주신 Q의 말씀을 사랑하고 깨닫고 순종하는 일에 매일 헌신하는 귀한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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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1장

1.  Now King David was old, advanced in age; and they covered him with clothes, but he could not keep warm.

2.  So his servants said to him, "Let them seek a young virgin for my lord the king, and let her attend the king and become his nurse; and let her lie in your bosom, that my lord the king may keep warm."

3.  So they searched for a beautiful girl throughout all the territory of Israel, and found Abishag the Shunammite, and brought her to the king.

4.  And the girl was very beautiful; and she became the king's nurse and served him, but the king did not cohabit with her.

5.  Now Adonijah the son of Haggith exalted himself, saying, "I will be king." So he prepared for himself chariots and horsemen with fifty men to run before him.

6.  And his father had never crossed him at any time by asking, "Why have you done so?" And he was also a very handsome man; and he was born after Absalom.

7.  And he had conferred with Joab the son of Zeruiah and with Abiathar the priest; and following Adonijah they helped him.

8.  But Zadok the priest, Benaiah the son of Jehoiada, Nathan the prophet, Shimei, Rei, and the mighty men who belonged to David, were not with Adonijah.

9.  And Adonijah sacrificed sheep and oxen and fatlings by the stone of Zoheleth, which is beside En-rogel; and he invited all his brothers, the king's sons, and all the men of Judah, the king's servants.

10.  But he did not invite Nathan the prophet, Benaiah, the mighty men, and Solomon his brother.

11.  Then Nathan spoke to Bathsheba the mother of Solomon, saying, "Have you not heard that Adonijah the son of Haggith has become king, and David our lord does not know [it?]

12.  "So now come, please let me give you counsel and save your life and the life of your son Solomon.

13.  "Go at once to King David and say to him, 'Have you not, my lord, O king, sworn to your maidservant, saying," Surely Solomon your son shall be king after me, and he shall sit on my throne "?Why then has Adonijah become king?'

14.  "Behold, while you are still there speaking with the king, I will come in after you and confirm your words."

15.  So Bathsheba went in to the king in the bedroom. Now the king was very old, and Abishag the Shunammite was ministering to the king.

16.  Then Bathsheba bowed and prostrated herself before the king. And the king said, "What do you wish?"

17.  And she said to him, "My lord, you swore to your maidservant by the LORD your God, [saying,] 'Surely your son Solomon shall be king after me and he shall sit on my throne.'

18.  "And now, behold, Adonijah is king; and now, my lord the king, you do not know [it.]

19.  "And he has sacrificed oxen and fatlings and sheep in abundance, and has invited all the sons of the king and Abiathar the priest and Joab the commander of the army; but he has not invited Solomon your servant.

20.  "And as for you now, my lord the king, the eyes of all Israel are on you, to tell them who shall sit on the throne of my lord the king after him.

21.  "Otherwise it will come about, as soon as my lord the king sleeps with his fathers, that I and my son Solomon will be considered offenders."

22.  And behold, while she was still speaking with the king, Nathan the prophet came in.

23.  And they told the king, saying, "Here is Nathan the prophet." And when he came in before the king, he prostrated himself before the king with his face to the ground.

24.  Then Nathan said, "My lord the king, have you said, 'Adonijah shall be king after me, and he shall sit on my throne'?

25.  "For he has gone down today and has sacrificed oxen and fatlings and sheep in abundance, and has invited all the king's sons and the commanders of the army and Abiathar the priest, and behold, they are eating and drinking before him; and they say, '[Long] live King Adonijah!'

26.  "But me, [even] me your servant, and Zadok the priest and Benaiah the son of Jehoiada and your servant Solomon, he has not invited.

27.  "Has this thing been done by my lord the king, and you have not shown to your servants who should sit on the throne of my lord the king after him?"

28.  Then King David answered and said, "Call Bathsheba to me." And she came into the king's presence and stood before the king.

29.  And the king vowed and said, "As the LORD lives, who has redeemed my life from all distress,

30.  surely as I vowed to you by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ing, ' Your son Solomon shall be king after me, and he shall sit on my throne in my place ';I will indeed do so this day. "

31.  Then Bathsheba bowed with her face to the ground, and prostrated herself before the king and said, "May my lord King David live forever."

32.  Then King David said, "Call to me Zadok the priest, Nathan the prophet, and Benaiah the son of Jehoiada." And they came into the king's presence.

33.  And the king said to them, "Take with you the servants of your lord, and have my son Solomon ride on my own mule, and bring him down to Gihon.

34.  "And let Zadok the priest and Nathan the prophet anoint him there as king over Israel, and blow the trumpet and say, '[Long] live King Solomon!'

35.  "Then you shall come up after him, and he shall come and sit on my throne and be king in my place; for I have appointed him to be ruler over Israel and Judah."

36.  And Benaiah the son of Jehoiada answered the king and said, "Amen! Thus may the LORD, the God of my lord the king, say.

37.  "As the LORD has been with my lord the king, so may He be with Solomon, and make his throne greater than the throne of my lord King David!"

38.  So Zadok the priest, Nathan the prophet, Benaiah the son of Jehoiada, the Cherethites, and the Pelethites went down and had Solomon ride on King David's mule, and brought him to Gihon.

39.  Zadok the priest then took the horn of oil from the tent and anointed Solomon. Then they blew the trumpet, and all the people said, "[ Long] live King Solomon!"

40.  And all the people went up after him, and the people were playing on flutes and rejoicing with great joy, so that the earth shook at their noise.

41.  Now Adonijah and all the guests who were with him heard [it,] as they finished eating. When Joab heard the sound of the trumpet, he said, "Why is the city making such an uproar?"

42.  While he was still speaking, behold, Jonathan the son of Abiathar the priest came. Then Adonijah said, "Come in, for you are a valiant man and bring good news."

43.  But Jonathan answered and said to Adonijah, "No! Our lord King David has made Solomon king.

44.  "The king has also sent with him Zadok the priest, Nathan the prophet, Benaiah the son of Jehoiada, the Cherethites, and the Pelethites; and they have made him ride on the king's mule.

45.  "And Zadok the priest and Nathan the prophet have anointed him king in Gihon, and they have come up from there rejoicing, so that the city is in an uproar. This is the noise which you have heard.

46.  "Besides, Solomon has even taken his seat on the throne of the kingdom.

47.  "And moreover, the king's servants came to bless our lord King David, saying, 'May your God make the name of Solomon better than your name and his throne greater than your throne!' And the king bowed himself on the bed.

48.  "The king has also said thus, 'Blessed be the LORD, the God of Israel, who has granted one to sit on my throne today while my own eyes see [ it.]'"

49.  Then all the guests of Adonijah were terrified; and they arose and each went on his way.

50.  And Adonijah was afraid of Solomon, and he arose, went and took hold of the horns of the altar.

51.  Now it was told Solomon, saying, "Behold, Adonijah is afraid of King Solomon, for behold, he has taken hold of the horns of the altar, saying, 'Let King Solomon swear to me today that he will not put his servant to death with the sword.'"

52.  And Solomon said, "If he will be a worthy man, not one of his hairs will fall to the ground; but if wickedness is found in him, he will die."

53.  So King Solomon sent, and they brought him down from the altar. And he came and prostrated himself before King Solomon, and Solomon said to him, "Go to your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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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장 (개요)

본 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피게 된다.

1. 다윗의 병세 악화(1-4).

2. 아도니야의 왕위 찬탈 기도와 그 일당에 대한 처벌(5-10).

3.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대해 다윗의 명을 얻기 위한 나단과 밧세바의 시도(11-31).

4. 솔로몬의 기름 부음 받음과 백성들의 환호(32-40).

5. 아도니야의 찬탈 행위의 실질적인 종식과 그 일파의 분산(41-49).

6. 선행을 위해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떠나게 함(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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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야의 야심 (1)(왕상 1:1-4)


사무엘서 마지막 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다윗은 한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파멸케 하는 천사의 칼을 모면한 일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질병이나 위험으로부터 구조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집행 유예)에 불과하다. 촛불은 바람을 불어 끄지 아니하면, 저절로 다 타 버리게 마련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고령이라는 약점 때문에 몰락해 가고 있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무덤의 문턱에까지 이끌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자는 “덫에 빠지게 된다.” 어차피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Ⅰ. 이처럼 연약해진 다윗을 본다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다. 

그의 몸은 늙었고 체온마저 다하여 어떠한 옷으로도 그의 몸을 따뜻하게 보온할 수가 없게 되었다(1절). 다윗은 과거에 원기 있는 활동가이자 사업가였고, 맹렬한 불길이 언제나 그의 가슴속에서 불일듯 타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그의 피는 싸늘해지고 순환이 불순하여, 침상에만 틀어박혀 있기만 하는데도 체온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이제 70세가 되었다. 허다한 사람들이 그 나이에는 아직까지 박력 있게 사업을 수행하기에 알맞은 때라고 하겠다. 

그러나 다윗은 이전에 범했던 자신의 죄, 특히 우리아의 사건을 통해 범했던 죄에 대하여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겪은 예전의 여러 가지 수고와 역경을 당시에는 예사로이 여겼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더욱 악화됨을 깨닫게 되었다. “힘센 자들아, 너희의 힘을 자랑 말지니라.” 

그 힘은 질병으로 곧 쇠잔해질 수 있으며, 또 마침내는 노령으로 약화되고야 말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이러한 불행한 날이 이르기 전에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우리의 손이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그리고 우리의 세대를 위해 할 일을 발견했다면, 우리의 온 정성과 힘을 다해 그 일을 하자. 왜냐하면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 곧 연륜이란 밤이 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정력이 다 사라지고 났을 때, 그 정력을 선용했다는 사실을 회상하면 큰 즐거움이요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Ⅱ. 다윗의 의사들이 너무나도 무력하고 기술이 없어서 외형적인 처방으로밖에는 시술할 수 없음을 보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강장제라든가 활력소가 아니라, 단지

1. “그들이 이불로 그를 덮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윗에게 체온이 다소 있었다면, 그 체온을 보존하여 온기를 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몸에 온기가 없었다면, 온기를 전달해 주는 데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것이니, 왕실의 침구로서는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엘리후는 “우리의 의복이 우리에게 따뜻한 까닭”을 알기 어렵다고 했다(욥 37:17). 

그러나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면 “사람이 옷을 입어도 따뜻하지 아니한데”(학 1:6), 다윗이 지금 그러했다.

2. 어리석게도 그들은 그의 장례식을 준비해야 했는데도 혼례를 권하였다(2-4절).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자기들의 타락을 충족시킬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 다윗의 건강을 진단한다는 미명하에 다윗의 타락(된 마음)을 만족시키는 일에 급급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그의 의원들에게 처방을 물었듯이, 그의 선지자들에게도 뜻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선량한 사람들까지도 아내를 많이 거느리는 것이 묵인되던 그 당시였던지라, 이러한 일도 변명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같이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한 남자는 한 아내를 취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마 19:5). 

나아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전 7:1)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기 전에 먼저 다윗과 혼인하여, 그의 둘째 아내가 되었다. 

그것은 아도니야가 자기 아버지 다윗이 죽은 후에(2:22) 그녀와 결혼하려 했음을 그의 크나큰 범죄로 돌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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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야의 야심 (2)(왕상 1:5-10)

다윗은 자녀들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암논과 압살롬은 그의 슬픔의 대상이었으니, 전자는 장자요, 후자는 셋째였다(삼하 3:2, 3). 

[아비가일이 낳은 그의 둘째 아들-길르압, 다른 이름은 다니엘-에게서는 위안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일찍 죽었다고 여겨짐] 

넷째가 아도니야였다(삼하 3:4). 그는 헤브론에서 출생한 자 중의 하나다. 지금까지는 그에 관한 말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나타난 바로는, 그는 풍채가 준수하여, 연령이나 기질에 있어서 압살롬 다음가는 인물이다(3절). 

그리고 줄곧 그의 아버지의 눈에는 보배 같은 존재였으나, 이제 와서는 하나의 가시가 되어 버렸다.

Ⅰ. 그의 부친은 그를 애지중지했다(6절). 

지금까지 그는 아버지 다윗을 조금도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혀 그의 부친을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 종종 그의 부친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의 부친은 그의 악한 소행으로 은근히 속이 썩어 하나님 앞에서 탄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아도니야로 하여금 그의 웃음도 자제하게 하고, 그가 마음먹고 있는 것을 거절하거나, 그가 무엇을 했고 어디를 갔다 왔느냐를 대답하도록 부르고, 책이나 일에 집착하게 하거나, 잘못된 것을 보고들은 것을 꾸짖음으로써 섭섭하게 하지는 않았다. 단 한 번도 “네가 어찌하여 그런 짓을 하였느냐?” 하고 말한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런 일이 아도니야에게 불쾌한 일이며, 아도니야가 그것을 화를 내지 않고 참고 들을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꾸짖음을 불쾌하게 느끼고,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들의 잘못이다. 그는 꾸짖음에서 오는 유익을 상실하고 말았다. 

반면 꾸짖음이 아들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들을 꾸짖지 않으면, 그것은 그 아비의 잘못이다. 따라서 이제 그는 아들을 버릇없이 기름으로 인해 징벌을 받는 것이니, 그것은 정당한 일이다.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을 더 사랑하는 자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시키지 아니하는 자와 매한가지로, 그것 때문에 자기의 아들들로부터 능히 기대할 수 있는 영예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Ⅱ. 거꾸로, 아도니야는 자기 부친을 우롱했다. 

부친이 노쇠하여 침상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무시해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여, “자기 스스로를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5절)고 했다. 

버릇없이 자라난 애들은 교만하고 야심이 생기게 마련이어서, 허다한 젊은이들이 파멸로 이끌리게 된다. 젊은이들을 겸손하게 기르는 방법은 저들을 잘 통제하는 일이다.

아도니야의 무례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는 솔로몬이 하나님과 다윗이 지정해 준 왕위 계승자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부친의 장례가 눈앞에 가까웠다고 생각하여, 그를 계승하려고 채비를 차렸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다윗 자신이 이미 선포하였으므로, 왕위 계승권은 확정된 것이었다. 

즉 국무회의로 가결되고 난 문제였다(대상 22:9; 23:1). 아도니야는 하나님과 그의 부친을 무시하고서 이 왕위 계승을 억압적으로 끊어 버리려고 획책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왕국도 반대를 받는다. “결코 그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2. 그는 자기 부친이 노쇠하여 폐물이 되었으므로,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즉시 왕좌로 나아갔다. 그는 자기 부친이 죽기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다”(18절)고 하며, “아도니야 왕 만세를” 불렀다(25절). 

그의 부친은 나이 들어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통치하기에 부족하고,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아직 어리고 통치할 능력이 없어 부적합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드디어 정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노쇠함을 기회로 그 부모를 모욕하는 것은 야비하고도 악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이러한 야심에 가득 찬 계획을 추구하기 위해,

(1) 아도니야는 자기를 수종하고 그를 위해 싸울 힘세고 위용 있는 “병거와 기병” 등 많은 시종을 취했다(5절).

(2) 그는 장군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에게 큰 호의를 받았다(7절). 

그가 교회와 군부 내에서 큰 영향력을 구사하여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책략 때문에 그들이 아도니야를 추종하고 조력하게 되었는지,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한때 다윗이 당면했던 난국을 가장 충성스럽게 이겨 나갔던 지각과 경륜이 많은 노련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쉽게 감언이설에 미혹당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아도니야를 지지한다고 하여, 그것이 자기들에게 어떤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가장 높은 지위에 확고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관이 솔로몬에게 상속되어 씌워질 것을 모르고 있을 수 없는 자들이다. 또 그 권한을 저지하는 것은 그들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솔로몬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그들의 이득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멋대로 버려두셨다. 

아마 그들 자신이 만든 채찍으로 이전에 그들이 범한 어떤 비행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독과 브나야 및 나단 같은 사람들은 다윗에 대한 충성심에는 지극히 정평이 나 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아도니야로서는 자신의 궤계를 이들에게 제시할 만한 자신조차 없었다(8절). 선한 일에 철저한 신념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은 악한 일을 행하도록 유혹당하지 않는 법이다.

(3) 아도니야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느로겔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9절). 

손님은 왕자들과 왕의 신복들이었는데, 그것은 저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자기 일당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무마하기 위함이었으나, 솔로몬은 여기에 청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를 멸시해서든가 체념해서였을 것이다(10절).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배를 섬기는 자들과 같아서, 어느 편에 속하든 간에 자기들에게 향응을 베풀어 주는 자를 위하게 된다. 

이러한 자들이야 말로 용이하게 유혹자들의 희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롬 16:18).

아도니야가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은 것은 희생 제사를 위함이요, 나아가 그가 하나의 종교적 축제를 연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흡사 압살롬이 맹세를 구실 삼았듯이(삼하 15:7), 제사장을 자기편에 가담시키면, 일이 더 잘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떤 경우는 “즉 주님의 이름으로 온갖 사악이 시작된다”(In nomine Domini incipit omne malam)고 하거나, 모든 종교 의식이란 온갖 종교적인 관습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노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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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즉위(왕상 1:11-31)

우리는 여기서 나단과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찬탈 행위를 분쇄함으로써 다윗에게 솔로몬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게 하는 유효 적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 다윗 자신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불순종하는 자식들은, 자기들의 인자하고 연로한 부모에게 자기들의 악행을 숨기기만 한다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공중의 새가 말을 전하는 법이다.”

== 밧세바는 물러나 있었으므로, 나단이 일러 줄 때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거의 모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매우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 솔로몬은 이러한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도, 귀머거리인 양 못 들은 체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도 들었고, 또 그 나이에 비해 지혜가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를 반대할 만큼 흥분하지도 않고, 조용히 침착하게 있으면서, 하나님과 그의 친구들에게 이 사건을 해결하도록 맡겨 버렸다. 그리하여 다윗은 솔로몬을 위한 그의 시편 가운데서, 사람들이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여 헛되게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나”,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그의 “여디디야”)에게 잠을 주시어” 평안함을 주시며, 동요함이 없이도 목적을 달성케 하신다고 술회하고 있다(시 127:1, 2).

그렇다면 이러한 의도가 어떻게 실현되는 것일까?

Ⅰ. 나단 선지자는 밧세바에게 이 사건의 전말을 알려 줌으로써 그녀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그리고 밧세바로 하여금 솔로몬의 왕위 계승권을 확약하는 왕명을 얻는 일에 나서게 만들었다. 

나단은 하나님의 뜻과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며, 다윗의 이익과 이스라엘의 이익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신 것도 바로 이 나단을 통해서였다(삼하 12:25). 

따라서 사람을 승진케 하시는 자의 뜻에 따라서 왕위 계승은 솔로몬의 권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단이, 그 권리가 찬탈당하는 것을 좌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왕권이 하늘로부터의 직접적인 영에 의해서 정해지던 때에는, 선지자들이 그러한 일에 관여하고 개입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일반 섭리가 인간 나라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고 보니(단 4:32), 그에 따른 기능도 일반인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선지자들은 그 문제에는 간여하지 않게 되었고, 오직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만을 살피게 되었다.

나단은 솔로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자이므로, 밧세바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다윗에게도 지극히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밧세바에게 아도니야가 의도하는 바, 그 실상을 알려 주었다(11절). 그것은 다윗이 동의한 바도 아니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는 또 밧세바에게, 솔로몬이 왕관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도니야의 세력이 커지면 솔로몬과 밧세바 자신의 생명도 위험하다고 일러 주었다. 

비천한 사람은 왕권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며, 왕관을 쓸 전망이 있다손 치더라도, 왕관 없이 그냥 주저앉아 있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보존의 법칙과 제6계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과 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능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제 나단은 “나로 하여금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라고 말했다(12절).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로 하여금 “누구든 우리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계 3:11), 우리가 우리의 생명과 곧 영적 생명까지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라고 조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밧세바로 하여금 왕에게 가서 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가 되어야 함을 맹세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또 가장 정중한 태도로 “무슨 연고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나이까?” 하고 묻도록 지시했다. 

나단은, 다윗은 그다지 냉담한 사람이 아니므로 이 말이 자극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예심은 물론이요 양심도 이런 경우에 다윗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단은, 밧세바가 왕에게 이 일을 설득하고 있는 동안, 자기가 우연히 들어온 것처럼 들어가서 밧세바를 후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14절). 

그렇게 되면 왕은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다윗은 그러한 증거를 알아챘던 사람이다. 삼상 25:32, 33)라고 생각하여, 적어도 다윗을 깨우치는 데 더없이 유익하리라고 일러 주었다.

Ⅱ. 밧세바는 나단의 권고와 지시에 따라, 때를 놓치지 않고 곧 왕에게 가서 간청했다. 

그것은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가서 자기 생명을 위해 중재한 심부름의 경우와 흡사하다. 

밧세바는 에스더가 부름을 기다리던 것과 같이 부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며, 언제 들어가도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밧세바가 왕에게 나아갔을 때 아비삭이 왕을 시중들고 있었으나(15절), 그녀는 왕이나 아비삭에게 불쾌감을 갖지 않고(16절) 자기의 군왕이며 또 남편인 다윗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써 “몸을 굽혀 왕께 절하였다”(16절)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와 같이 정직한 사라의 딸이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복종한 여자다. 

어른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자는 어른을 존경해야 하며, 친절히 대함을 받고자 하면 먼저 그들에게 공손해야 한다.

이 때 밧세바가 왕에게 한 간언은 매우 신중했다.

1. 밧세바는 다윗이 자기에게 한 언약을 상기시키고, 솔로몬이 그를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 엄숙한 맹세로 확인시켰다(17절). 

그녀는 이렇게 하면 다윗과 같은 양심적인 사람을 재빨리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 그녀는 다윗이 알고 있지 못하던 아도니야의 간계를 알려 주었다(18절). “아도니야가 왕위에 오른 것은 오늘날 왕과 경합하려 함이요, 장차 왕의 언약을 파기하려 함이옵니다. 왕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그 허물이 왕의 것은 아니옵니다. 이제 왕께서 알고 계시오니, 왕의 언약을 위해서도 이 왕위 찬탈을 진압토록 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밧세바는 다윗에게 아도니야의 손님과 그의 편에 서 있는 자들이 누구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그리고 아도니야가 “왕의 종 솔로몬을 청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솔로몬이 그의 경쟁자라 여김을 나타내는 것이며, 솔로몬을 몰래 없애 버리려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19절). 그리고 솔로몬이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왕권 안정을 과중히 보아서가 아니라 멸시해서 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3. 그녀는 이러한 불행을 근절하는 것은 왕 자신의 권력에 크게 달려 있는 문제라고 탄원했다(20절). “온 이스라엘이 주를 다 주목하고 있나이다”라고 했다. 

그들은 그를 “왕”으로서 주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왕들이 자기 백성들을(마치 자신의 가재 도구인 양) 자신이 좋아하는 자에게 유언에 따라 유증(遺贈)하는 것이 그의 특권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선지자”로서도 주목하고 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야말로 야곱의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그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삼하 23:1, 2). 

따라서 이같이 중대한 일을 당해서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기다리고 이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말은 곧 그들에게 있어서는 신탁이요 율법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밧세바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말이야말로 그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며, 아도니야의 자칭 왕 됨을 유효 적절하게 분쇄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다”(잠 16:10). 

사람이 아무리 권력과 권세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메시아의 왕국을 잘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솔로몬의 왕국은 메시아의 나라의 한 모형이었다.

4. 밧세바는, 이 사건이 다윗의 생존시에 해결되지 않으면, 자신과 자기의 아들은 급박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리라는 것을 시사했다(21절). “아도니야의 세력이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자기편에 거느리고) 번창하기만 하면―지금 상태 또는 그럴 가능성이 많다―빨리 진압시키지 않는 한 솔로몬과 그의 모든 부하들은 반역자로 인정받아 처단될 것입니다” 하는 것이다. 

찬탈자는 지극히 잔인하다. 아도니야가 만약에 왕위에 오르면, 솔로몬이 그를 신사적으로 대우해 준 것처럼, 그가 솔로몬을 신사적으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한 힘에 거역하여 사람이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는 사람은 무슨 일이나 위태롭게 한다.

Ⅲ. 나단 선지자는 약속에 따라서 적시에 들어가서 밧세바를 후원했다. 

그 때 그녀는 왕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아직 왕이 답변을 하지는 않은 때였다. 그것은 왕이 밧세바가 하는 말만 들어서는, 그 대답이 지연될 것이요, 그 문제를 생각만 해 보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증인의 말은 뜻을 이룰 수 있고, 즉각 왕이 적극적인 명령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왕은 나단 선지자가 왔다는 말을 들었다. 나단은 왕이 불편하거나 왕의 생각에 큰 문젯거리가 있을 때면 언제나 자기를 기쁘게 맞아들이는 것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지자는 위의 두 경우 중 어느 한 경우에라도 왕을 특별히 돕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단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존경을 돌려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에 왕이 왕좌에 있을 때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이제 왕이 병상에 있음을 알고도 동일한 존경을 왕에게 표했다.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왕께 절을 했다”(23절).

그는 밧세바보다는 좀더 분명하게 왕에게 상의했다. 이 때에 나단의 인품이 다윗을 크게 지원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윗이 원기가 떨어지고 있으므로 원기가 회복되도록 함이 필요했다.

1. 그는 밧세바가 설명한 것과 똑같이 아도니야의 궤계를 설명하고(25, 26절), 마치 다윗 왕이 이미 죽은 것처럼 아도니야 일파는 “하나님이 아도니야 왕을 도우신다”고 외치는 확신의 극치에 이르렀음을 덧붙여 말하면서, 그들이 자기를 잔치에 초대하지 않았음(“주의 종 나를 청하지 않았나이다”)을 알리고, 그것으로써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나 다윗에게 상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 주었다. 사실 나단은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secretioribus consiliis) 때문이다.

2. 그는 이 문제에 다윗 자신이 얼마나 개입되어 있는지를 밝히라고 했다.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내 뒤를 이어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24절) 

그리고 또 “이것이 내 주 왕께서 하신 일이니이까?”(27절) 만일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자신의 말에,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충실하지는 않은 자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찬탈 행위를 단호히 고발하고, 솔로몬을 후계자로 선포할 유일무이한 시기다. 만일 그렇다면, 왜 보통 때에는 다윗의 신복이요, 이런 문제에는 특별히 관계되어 있는 자이던 나단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는가? 

나단은 왕권 계승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다윗에게 통고해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주 왕께서 이 일을 알지 못한다면 아도니야와 그의 일파는 얼마나 감히 무엄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나단은 다윗이 그들에게 분노하여, 솔로몬의 권익을 강력히 지원하도록 했다. 

명심할 것은,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무를 깨우침 받아 그것을 알게 되고, 또 자기들이 나서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자기의 의무를 다하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깨우쳐 주는 사람은 그들에게 참된 호의를 베푸는 것이 된다. 여기서 나단이 다윗에게 그와 같이 했다.

Ⅳ. 이에 다윗은 전에 굳게 결심한 대로 솔로몬이 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엄숙한 선포를 하게 되었다. 밧세바가 불려들어 갔다(28절). 

왕은 그녀의 아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대신하여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확증을 다시 해 주었다.

1. 그는 전에 하던 언약과 서언을 반복하고,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그녀에게 맹세하기를, 솔로몬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으리라”고 고백했다(30절). 

그는 늙었고 기억력도 쇠했으나,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서약은 너무나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파기되어서는 안 되며, 서약은 너무나 엄숙한 일이기 때문에 망각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하자.

2. 그는 필요에 따라서, 다시 한 번 맹세하여 그 약속을 비준했다. “여호와는 살아 계시사 내 영혼을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셨으니 내가 오늘날” 논란 없이, 주저 없이, “이를 정녕코 행하리라.” 그가 서약하는 모습은, 엄숙한 의식이 있을 때 늘 하던 모습과 흡사했다(삼하 4:9). 

다윗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고난과 환난으로부터 자기를 구하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에게 나타났음을 감사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야곱이 죽을 때도 그랬다. 창 48:16). 그리하여 여호와의 영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의 체험에 비추어 보아 다 옳다고 인정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구원하신다”(시 34:22). 임종을 맞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한 증인이 되어야 하며, 자기들이 겪은 바대로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한다.

Ⅴ. 밧세바는 왕 자신에게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이 확약을 받았다(31절).

1. 그녀는 왕을 존경했다. 반면에 아도니야와 그 일당은 무례하게 대결했다.

2. 왕의 건강을 마음 깊이 바라면서 밧세바는 “다윗 왕은 만세수를 하소서” 했다. 

그녀는 다윗이 너무 오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는커녕, 가능하면 왕이 만세 수를 하여 그가 쓰고 있는 왕관을 찬란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도 축복이 되기를 기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리 손해가 오더라도 쓸모 있는 사람의 생명이 오래 연장되기를 진정으로 바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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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대관식(왕상 1:32-40)

여기에서 다윗이 아도니야의 계획을 초기에 분쇄함으로써, 솔로몬의 계승권을 보존함과 동시에 사회 평화를 유지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을 볼 수 있다.

Ⅰ. 다윗은 솔로몬의 계승권을 명백히 선언했다. 

다윗이 이 사건을 위탁한 사람들은 사독과 나단과 브나야인데, 이들은 다윗이 항상 신임하며, 자기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한 유력한 사람들이었으며, 아도니야는 언제나 그들을 자기의 초대에서는 제외시켰다(10절).

다윗은 즉각적으로 솔로몬의 계승권을 선포하면서, 가능한 한 엄숙한 의식을 가지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의 종들”과 호위병들과 그리고 왕실의 일을 돕는 모든 사람을 동원해야 했다. 그들은 솔로몬을 왕이 타고 다니던 노새에 태워야 했다. 

다윗은 그의 아들 이후에 가지고 있었던 그런 말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갈 곳(33-35절)과 할 일을 명령했다.

1. 사독과 나단, 두 성직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왕으로 기름 부어야 했다. 

솔로몬은 사울과 다윗처럼, 장자는 아니고 나이 어린 자였지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왕이 되었다. 

또 그의 왕위는 비록 경쟁이 되었으나, 그것 때문에 오히려 왕위는 확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됐다.

이 기름 부음(성별식)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위임과 자격을 말해 주는 전형적인 것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는 성령, 곧 즐거움의 기름이 무한히 부어진다(시 89:20; 히 1:9). 그리고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약 2:5),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다”(요일 2:27).

2. 고관들은, 문관이든 무관이든, 이 사실을 널리 반포하기 위해 나팔을 불어 이 기쁨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나팔 소리는 모세의 율법이 큰 행사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명령한 바이다. 그뿐 아니라 백성들의 환호성이 이에 더해져야 한다. “솔로몬 왕 만세. 솔로몬 왕은 번창하소서. 그의 왕국이여, 영원 무궁하여 기쁨 속에서 영존하소서.” 이로써 솔로몬에 대한 약속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생존하리라”(시 72:15).

3. 그들은 솔로몬을 위풍당당하게 다윗 성에 인도해야 했고,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야 했다. 

그는 이제 그 아버지의 대리인이요, 다윗 왕의 부왕(副王)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윗의 병중에는 대신 공무를 수행하고, 사후에는 그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다. “저가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왕이 죽어갈 때에도 국사의 논란이나 선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 일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윗 자신에게나 거기에 관계된 모든 일파에게 있어서는 크게 만족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윗은 그의 계승자가 자기 생전에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을 조금도 나쁘게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병상에서 자기의 경건 생활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만일 누군가가 그 일을 상기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안정에 절대 필요한 이 위대한 사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방치될 뻔했다.

Ⅱ. 브나야가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명령에 커다란 만족을 표했다. 

왕은 “솔로몬은 나를 위해 내 뒤를 이어 왕이 되리라”고 했다. “아멘”(하고 브나야는 진정으로 말했다). “왕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도 말하리이다. 우리는 왕위 지명에 전적으로 만족하며 그 선택에 찬동합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만장일치로 지지합니다(nemine contradicente). 우리는 하나님의 순조로운 섭리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더구나 그것을 완성할 수도 없나이다. 내 주 왕의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나이다(36절).” 이것은 솔로몬의 왕권이 수립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이 말씀에 신실하듯 우리도 우리의 말에 신실하면, 하나님도 그의 섭리에 의해서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말씀하시기를 바랄 수 있다. 

브나야는 여기에 솔로몬을 위한 기도를 첨부했다(37절). 즉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솔로몬과도 함께하시고, 그의 왕좌가 더 크게 되기를 기원했다. 

브나야는, 다윗이 자기 아들들이 위대하게 되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이런 기원을 께름칙하게 여기거나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진정으로 “아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아들들이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훌륭하게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현재의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훌륭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혜로움과 선한 마음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Ⅲ. 이 명령은 즉각 집행되었다(38-40절). 

때를 놓칠세라 솔로몬은 지정한 장소에 위풍당당하게 인도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사독(추측건대 대제사장은 아니나 대제사장 차위자, 유대인들은 현자 또는 둘째 제사장이라고 불렀다)이 나단 선지자와 다윗 왕의 지시에 따라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 

사독은 여러 가지 성물과 함께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던 [기브온 산당의] 성막에서, 권세와 풍요를 상징하는 “기름 뿔” 곧 모든 종교 의식에 쓰이는 거룩한 기름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부었다. 

우리는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에게 기름을 붓는 주제넘은 짓을 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즉 아도니야는 기름 부음으로써가 아니라 잔치에 의해서 왕이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르시는 자를 인정하며, 그 인정은 기름 부음으로 표시되는데, 찬탈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하며,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뜻에 따라 “시온의 거룩한 산에 세운” 왕이다(시 2:6, 7). 

그리스도인도 역시 우리 하나님이 세우신 왕들이며, 그들은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요일 2:20). 

이에 백성들은 솔로몬이 높아진 것을 크게 기뻐하고 만족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솔로몬 왕을 구원하셨다”고 호산나를 부르며, 그를 얼싸안고 노래와 춤으로 그를 맞았다(40절). 

이로써 그들은 솔로몬의 책정에 찬의를 선언했고, 나아가 솔로몬은 억지로가 아니고 백성들에 의해서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표했다. 

왕은 자기의 권력이 자기 백성들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왕 자신에게도 조금도 기쁨이 될 수 없다. 

참으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다윗의 아들(예수)의 등극을 기뻐 찬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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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야의 좌절(왕상 1:41-53)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솔로몬이 취임했다는 소식이 아도니야 및 그의 일파의 주흥이 한창일 때 그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먹기를 마쳤다”고 했다. 아마 그들이 먹기를 마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갔던 것 같다. 

아도니야 일파가 향연을 즐기고 있는 동안 솔로몬의 성별식이 시작되고 마쳐졌기 때문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반대하는 자들은 보통 “자기 배만 섬기는 자”(롬 16:18)요,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빌 3:19) 자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오랜 향연은, 자기들의 권세를 지극히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옛 세상과 소돔은 멸망의 때가 가까운 줄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먹고 마셨다”(눅 17:26 이하).

그들이 먹기를 마치고 그들의 왕을 선포하면서 개가를 부르며 왕을 성중으로 인도하려던 때에, “나팔 소리를 들었다”(41절). “그 소리는 그들의 귀에 놀라운 소리였다”(욥 15:21). 

요압은 나이 많은 사람이므로, 그 성중이 소동함을 알고 깜짝 놀랐으나, 아도니야는 자기의 사신이 “용사이므로 좋은 소식을 가져오리라”고 확신했다(42절). 

찬탈자들은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스스로에게 아첨했다. 그들은 평소 자기들의 조건이 아주 난처하게 되어도 조금도 겁을 내지 않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악행을 하는 자들이 어떻게 좋은 소식 얻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제사장의 아들이 여기서 아도니야에게 그랬듯이, 제일 귀한 자가 제일 악한 소식을 그들에게 가져오고야 말 것이다(43절). “진실로, 내가 가져와야 할 제일 좋은 소식은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요, 따라서 당신의 교만은 모두 분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매우 자세히 말해 주었다.

1. 지극히 엄숙하게 “솔로몬이 왕이 되었고”(44, 45절), 이제는 “왕좌에 앉아 있다”(46절)고 했다. 

아도니야는 자기가 솔로몬보다 먼저 왕좌에 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솔로몬은 그에 비해 너무나도 빨랐다.

2. 또 솔로몬은 너무나도 백성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되어진 그 일은 다시는 허물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고 했다.

(1) 그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환호로써 입증했다(45절).

(2) 궁궐이 기뻐했다. 즉 왕의 신복들은 이 때를 당하여 그를 둘러싸서 송축하는 소리를 질렀다(47절).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송축하는 말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다윗 왕에게 축복하고, 공공복지를 위한 사려 깊은 조치를 칭찬하고, 그의 집권하에서 누리는 행복을 예찬하고, 그의 병 회복을 기원했다. 그들은 또 솔로몬을 위해서도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그의 부친의 이름보다 더 크게 해 주시고, 그 부친이 견고하게 닦은 기반이 더 잘 되게 해 주기를 기원했다. 

어린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으면 거인 자신보다 더 높은 것이다.

(3) 다윗 왕 자신도 기뻐했다. 그는 침상에서 몸을 굽혔는데, 그것은 그의 신복들의 송축에 답을 표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송축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이었다(48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의 선을 위하여 이 일을 좋게 매듭지어 주셨으니, 그것을 내 눈으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하직하려 할 때에, 자기들의 가족이 잘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다시없는 기쁨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Ⅱ. 아도니야의 기도(企圖)는 효과적으로 분쇄되었다. 

그 낭패로 인해 아도니야 일파의 무모한 일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 일파는 분산되었으며, 급기야 각자는 자기 안전을 구하여 각기 갈 길을 찾게 되었다. “악인의 승리는 짧다.”

그들은 기반이 없어 곧 무너지고 깨어질 누각을 공중에 세웠다. 그들은 반역죄를 기도하는 동안, 그 사건에 말려들까 봐 각자 자기의 길을 서둘렀다.

Ⅲ. 아도니야 자신이 빠진 공포와 그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취한 조처. 그는 지금까지 높이 앉았던 것에 반비례하여 그만큼 비참한 구렁에 빠졌다(42, 50절). 

그는 솔로몬이 자기의 귀빈으로 합당치 않다고 멸시했으나(10절), 지금은 그를 자기의 심판자로 두려워했다. 그는 솔로몬을 인해 두려워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반대하는 자는 머지 않아 그의 앞에서 벌벌 떨게 될 것이며, 공연히 그의 진노에서 피할 바위와 산을 찾게 될 것이다.

그는 제단 뿔을 굳게 잡았는데, 이것은 언제나 지성소 또는 피난처(출 21:14)로 간주되어 왔다. 그는 감히 재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 이외의 다른 수단에는 의지할 수 없음을 알고, 자기 자신을 왕의 처분에 맡겼다. 그 하나님의 자비란 제단 위에 바쳐진 희생 제물의 제도, 그 제물의 용납 및 그에 따른 속죄 속에 나타나 있다. 아마도 아도니야는 전부터 제단 섬기기를 경홀히 여겼던 것 같으나, 지금은 그 제단의 보호를 간청하고 있다. 태평한 날에 위대한 구원을 부인하는 자들도, 여호와의 진노에 잡힌 바 되며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를 입게 되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때가 너무 늦어지면, “제단의 뿔을 잡게 될” 것이다.

Ⅳ. 솔로몬의 자비를 구하는 아도니야의 겸손한 언사. 솔로몬의 소식을 전해 준 사람들을 통해 아도니야는 자기 생명을 구해 달라고 탄원을 전했다(51절). 즉 “솔로몬 왕이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나에게 맹세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는 솔로몬을 자기의 군왕으로, 자기 자신은 신복으로 자인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는커녕 “자기의 심판자에게 간구했다.” 이는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변화였다. 아침에 왕관을 잡은 자가 밤이 오기 전에 자기 생명을 애걸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아도니야가 이제는 벌벌 떨고 있다. 그는 솔로몬이 자기를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로 약속하지 않는 이상 무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Ⅴ. 솔로몬이 아도니야에게 한 명령. 

그는 아도니야에게 선한 행위를 하라고 명했다(52, 53절). 그는 아도니야가 자기 형이며, 더구나 이번 일이 첫 번째 범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그는 아도니야가 자기 과오를 깨닫고 있으며 반역 행위를 고집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평화적이고도 신실한 신하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그가 앞으로 잘만 행동하기만 하면 지나간 일은 용서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모반심을 품고 있다면, 그의 죄는 그를 고발하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며 그의 (지금 법의 말하는) 전과를 다시 환기시켜 형벌이 집행될 것이다.

이렇게 다윗의 아들(예수)은 반역자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인다. 

만일 그들이 돌아가 충성하고 그들의 주권자에게 신실하면, 그들이 지은 이전의 죄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되지 않을 것이나, 만일 그들이 계속 이 세상과 육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이는 그들의 파멸이 될 것이다.

아도니야에게 사람이 보내졌다. 그래서 어떤 마음인지를 물었다. 그런데 그는 기꺼이 복종하겠다는 대답을 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 거기서 은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솔로몬이 그의 생명뿐만 아니라 재산까지도 구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왕위는 자비심에 의하여” 견고하게 되었다.


 

=======호크마===

열왕기상 1장
1 다윗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ㅇ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 다윗은 30세 왕이 되어(삼하 5:4,5)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도합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므로(2:11;대상29:27).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한편 히브리 원문상 '나이 많아'(바 바야밈)와 '늙으니'(자켄)는 종종 같이 연결되어 나타나는 관용어이다(창18:11;24:1;수 13:1).
ㅇ이불 - '이불'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가드'는 원래 '덮개'(covering)란 뜻을 가진 단어로서 의복, 겉옷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창39:12;왕상 22;10) 침상이나 탁자를 덮는 이불로 사용되었다(Hammond, Keil). 왜냐하면 다윗은 쇠약하여 침실의 침상에서 줄곧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15, 47절).
ㅇ따뜻하지 아니한지라 - 몸의 온기가 떨어진 것은 단순히 나이 많음에서 오는 것 뿐만 아니라 다윗의 젊은 날의 고생 때문이기도 하다(Keil). 혹 병이 들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Hammond). 여하튼 다윗은 초기에는 외부적으로 망명 생활, 숱한 전쟁 등으로 인해 온갖 풍파를 겪었으며, 말년에는 내부적으로 집안의 불화, 반란, 살인, 음모 등으로 인해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다. 더욱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이후 하나님의 징계로 겪었던 집안의 불화는 결정적으로 다윗을 노쇠케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이 말년에 노환(老患)이 되어 다윗을 쇠약케 만든 듯하다(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한편, 본서 초두에서 이처럼 다윗의 몸의 증세를 상세히 알리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나라를 통치하기에는 너무 쇠약해졌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2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ㅇ원문에는 초두에 '그러므로'(와)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하의 내용은 앞의 다윗의 노쇠를 해결하려는 의도 외에 다름 아니다. 즉 향락이 목적이 아니라 치료가 목적이다.
ㅇ그 신복들이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 원문에는 단수, 즉 한 사람의 말로 되어 있다. 곧 '우리 주' 대신 '내 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상 그의 말은 다른 모든 신하들의 견해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수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다윗의 상태가 다윗의 모든 신하들을 근심케 하는 심각한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당시 뚜렷한 후계자가 부각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윗 왕의 쇠약은 국가적인 중대사였던 것이다.
한편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여기서 신복들은 왕의 궁중 시의(侍醫)들을 가리킨다고 한다(Antiquities of the Jews).
ㅇ고하되 구하여 봉양하고 - 히브리 원문에서 이 말은 허락을 요청하는 형태이다. 즉 '구하도록, 봉양하도록 허락하소서'란 뜻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를 허락하였다(3절). 이것은 신하들 뿐만 아니라 다윗 자신도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봉양하고'(소케네트)란 말은 '친숙하다','일하다'란 뜻의 기본 동사 '사칸'에서 파생된 말로 곧 곁에서 간호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ㅇ젊은 처녀(나아라 베툴라) - 남자 관계가 전혀 없는 나이 어린 동녀(童女)를 가리킨다. 이처럼 특별히 젊은 처녀가 요구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다윗 왕의 체온 저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젊은 동녀의 온기(溫氣)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2) 또한 그녀는 다윗 왕의 후궁(後宮)으로 간주되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처녀여야만 했다(Hammond, Pattersonm, Austel).
ㅇ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뚱하시게 - 젊은이의 온기를 받아 늙음 몸의 기운을 회복하는 방법은 고대 치료 의술 중 하나로서 갈렌, 그로티우스 등 고대 의사들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고대 헬라의 명의(名醫) 갈렌(Galen)에 의하면, 젊고 건강한 사람의 체온으로 노쇠한 사람의 체온 저하를 방지하는 치료 의술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다(Galen, Mathus medicus, 8.7). 그러므로 젊은 처녀로 다윗의 품에 눕게 한 것은 분명 눕게 한 것은 분명 그같은 치료 방법을 통하여 다윗의 원기를 회복시켜, 그로 하여금 통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목적한 것이 확실하다.
3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ㅇ동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라'는 '젊은', '나이 어린'이란 뜻의 '나아르'에서 파생된 말로, 곧 젊은 처녀를 가리킨다. 2절 주석 참조.
ㅇ수넴 - 수넴(Shunem)은 나사렛에서 대략 11.2Km 떨어진 소(小) 헬몬산(Mt. Little Hermon)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잇사갈 지파의 고을로 현재의 '술렘'(Sulem) 또는 '솔람'(Solam)이란 곳이다. 한편 에스드라엘론(Esdraelon) 평야 지대에 위치한 이 곳은 넓고 비옥한 농토와 숲으로 둘러싸인,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다(수 19:18;삼상28:4).
아비삭 - 간호와 온기(溫氣)로써 다윗 왕의 봉양할 의무를 띠고 이스라엘 중에서 뽑힌 수넴 출신의 아리따운 동녀이다.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방랑자'이다. 여기서 '아브' 또는 '아비'는 '아버지'란 의미로서, 히브리인들의 이름 중에서 흔히 발견되는 합성어이다. 예컨대 아비야, 아비아달, 아비멜렉, 아비가일, 아비새 등이 있다. 한편, 여기의 '수넴 여자 아비삭'이 솔로몬의 애인 '술람미 여인'(아6:13)과 동일하다는 설(說)이 있으나,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4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ㅇ본문은 다윗 왕의 노환(老患)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본서 저자가 본서 초두에 다윗 왕의 노환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다윗 왕이 노환으로 인해 더이상 국정(國政)을 돌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아도니야가 다윗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반란을 꾀하게끔 되는 배경을 제공해 준다. (2) 같은 맥락에서 다윗 왕의 서거(逝去) 이전에 솔로몬이 급히 즉위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제공해 준다(J. Hammond). 한편 노환으로 인한 다윗의 나약한 모습을 다루고 있는 본문은 인생의 무상감(無常感)을 느끼게 해준다.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목동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다윗은 실로 파란 만장한 세월을 경험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이된 이후에도 다윗은 많은 날들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하고 성정 건축의 기반을 다지는 등 명군(名君)과 성군(聖君)으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 그러나 그 영화로웠던 세월들도 유수처럼 흘러 지나가고, 이제 다윗은 칠십 노인이 되어 바야흐로 인생의 황혼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ㅇ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 다윗이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해석으로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즉 (1) 아비삭은 다만 간호의 역할을 하는 시녀였으므로 다윗이 동침하지 않았다는 견해(Bahr, Keil). (2) 다윗이 노쇠하여 무기력했기 때문에 동침할 수 없었다는 견해(Michaelis, Josephus) 등이다. 첫째 견해의 경우, 이 구절은 후에 솔로몬의 이복형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요구할 수 있었던 배경을 제공해 준다(2:13-18). 그러나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요구를 부왕(父王)의 후궁을 요구하여 왕위까지 노리는 불측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를 죽인다(2:22-25). 한편 70인역은 아비삭의 봉양을 '함께 누워 흥분케 하는 것'으로 번역하므로 두번째의 견해를 지지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느쪽으로 해석하든 본문은 다윗의 노쇠함이 심각할 정도임을 강조하고 있다.
5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니
ㅇ학깃의 아들 아도니야 - 아도니야(Adonijah)는 헤브론 통치 시절에 다윗이 학깃(Haggith)을 통해 낳은 넷째 아들이다. 첫째는 암논(Amnon)인데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을 통해 낳은 아들이며, 둘째는 길르압(Chileab)인데 갈메 여인 아비가일을 통해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셋째는 암살롬(Absalom)인데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를 통해 낳은 아들이며, 넷째가 바로 이 아도니야(Adonijah)인 것이다.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로부터 37세 때까지 헤브론 통치 시절 도합 6명의 아들을 낳았다(삼하 3:2-5). 따라서 아도니야 역시 헤브론에서 태어났으니(삼하3:5;대상3:4). 당시 아도니야의 나이는 33세로부터 40세 사이였을 것이다(Hammond).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 3:1-9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ㅇ스스로 높여서 - 히브리어 '미트나세'(* )는 분수에 맞지 않는 교만한 행동, 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독자적 행동을 가리킨다(민 16:3;잠 30:32). 그런데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인 까닭은 6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중 장자의 권리가 가장 기초적인 이유였다. 왜냐하면 암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남은 아들들 중에서는 아도니야가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이다(삼하3:2-5;6절 주석 참조). 따라서 때마침 다윗이 늙고 무기력해졌으므로 아도니야가 왕권에 대한 욕심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 있어서는 장자권 보다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었다(신17:15).그리고 이 선택은 이미 솔로몬에게 주어졌었다(삼하 7:12-17;12:24,25;대상22:6-10). 또한 아도니야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Keil, Bahr, Patterson).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 한 것은 분수를 넘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행동이 된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왕의 찬탈 시도에는 '스스로 높여서'라는 부정적 표현이 사용되었다.
ㅇ내가 왕이 되리라 - 당시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했던 동기는 다음과 같다. (1)왕자 중 아도니야의 연장자였던 암논은 다말 사건으로 인하여 피살되었고(삼하 13:29) ,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을 반역했을 때 군대 장관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18:24), 길르압(다니엘)은 어렸을 때 죽은 것으로 보인다(대상 3:1). 따라서 아도니야는 당시 생존한 왕자들 중 최연장자였으므로 순서대로라면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다. (2) 또한 아도니야는 용모가 준수한 자로 다윗의 총애를 받도 있었다(6절). (3) 그리고 아도니야는 주위의 인물들 특히 군대 장관 요압이나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같은 사람들을 포섭할 만한 정치력이 있었고, 또한 그 같은 사람들에 의해 사주(使嗾)를 받았다(7절).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아도니아는 교만해져서 왕이 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과 다윗 왕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의 모든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시 107:10, 11). 하물며 메시아의 가게로 선택받은 다윗 집의 사건에 관해서야 더 말할나위 없는 것이다.
ㅇ전배 - 직역하면 '앞서 달리는 자'란 의미인데, 이는 곧 왕이나 방백의 행차에 앞서 달리면서 호위 및 길을 정리하는 일종의 경호원을 가리킨다. 일찍이 압살롬도 반역에 앞서 이처럼 병거와 기병과 전배를 준비한 적이 있다(삼하 15:1). 한편 A.D. 1세기경의 유명한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따르면, 수리한 용모하며 야심만만한 기질, 그리고 용의 주도한 정치력 등 모든 면에서 아도니야는 형 압살롬을 닮았다고 한다.
6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ㅇ아도니야가 교만해져 왕이 되고자 한 원인이 설명된다.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 - 이 말은 당시 아도니야가 다윗의 아들들 중 최연장자임을 밝히기 위해 기록되었다. 즉 다윗의 맏아들 암논은 근친 상간으로 인해 압살롬에게 죽고(삼하 13:28), 셋째 아들인 압살롬 역시 반역하다 죽었다(삼하 18:14,15). 그리고 둘째인 길르압(혹은 다니엘, 대상 3:1)은 이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어려서 일찍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Keil, Hammond). 따라서 이제 남은 아들들 중에 최연장자는 아도니야 자신이었던 것이다.
ㅇ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 -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도 준수한 용모를 가졌으며(삼상9:2), 아비 다윗 왕에 대해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도 그러하였다(삼하 14:25). 그리고 다윗도 준수한 용모를 가졌던 것으로 나타난다(삼상 16:12). 사실 지도자에게 있어 준수한 용모는 백성들의 인기를 끄는 데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요인이다. 그러나 육체의 아름다움 보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더 중요한 자격이다(삼상16:70.
ㅇ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더라 - '한번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야마우'는 '그의 모든 날들로부터'(from his all days)란 뜻이다. 즉 아도니야가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책망을 들은 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5절의 방자한 행동에 대한 감시 소홀 내지는 후계자로 생각해서 내버려 둔 것이다. 다만 아도니야의 교만한 행위의 원인 중 하나가 다윗이 그를 적절히 훈계치 못한데에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잠 22:6). 여기에 더하여 다윗이 노쇠해지자 아도니야는 부친을 무시하고 동의도 없이 멋대로 왕이 되려 하였던 것이다(18절).
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ㅇ스루야의 아들 요압 - 다윗의 군대 장관으로 전공을 많이 세운 인물이다. 비록 요압은 다윗에게 충실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자주 다윗을 거스렸다(2:5;삼하 3:27;20:10). 그래서 다윗에게 잘못 보인 그는 다윗과 선지자 나단의 영향하에서 자란 경건하고 온유한 성격의 솔로몬 보다는 야심 만만하고 준수한 용모의 아도니야에게 가담하여 다윗 사후에도 계속 권세를 확보하려 했다. 즉 요압은 다윗의 바램이나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실리를 좇아 행동했던 것이다.
ㅇ제사장 아비아달 -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할 때 피하여 다윗의 보호를 받다가(삼상22장), 이후 다윗 통치 하에서 사독과 더불어 대제사장이 된 인물이다(삼하20:25). 오랜 역경의 세월 동안 다윗과 동거 동락해 온 그가 다윗의 뜻을 거스리고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추측컨대 아비아달은 당시 공동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을 시기한 끝에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 해석된다(Keil,Rowland). 즉 성경 기록상 엘르아살 계통의 사독의 이름이 항상 이다말 계통의 아비아달의 이름보다 앞서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삼하8:17;15:29,35;20:25). 당시 사독이 아비아달 보다 주도적인 위치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Keil, Bahr). 따라서 아비아달은 자신의 대제사장적 가문의 회복을 위하여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것 같다(Hammond). 그러므로 혹자(Thenius)의 견해처럼, 군대 장관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왕위 찬탈 음모 가담은 아도니야가 최연장자로서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이라는 대의 명분을 좇아서가 아니다(Keil). 다만 그들은 다윗 사후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실리적 목적으로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했다. 결국 요압의 처형(2;28-35)과 아비아달의 추방(2:26,27)이라는 비극적 결과가 이들의 그러한 사욕을 입증해 준다고 볼 수 있다.
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ㅇ제사장 사독 - 사울이 죽은 후 헤브론에 있던 다윗에게 가담한 무리 중 한 사람으로(대상12:28),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 아히둡의 아들이다(삼하8:17). 압살롬의 반란 때 그는 다윗을 편들어 왕궁에 머물면서 후새를 도와 첩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삼하 15:28,29;17:15). 한편 사독(Zadok)은 다윗시대에 아비아달(Abiathar)과 더불어 공동 대제사장으로 있었는데, 이처럼 다윗 시대에 2명의 대제사장이 있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다윗은 도피시절에 사울의 손을 피해 에봇을 가지고 자신에게로 도망쳐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거느리고 있었다(삼상23:6). 그런데 이후 사울 사후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 이미 아론의 집 족장 여호야다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사독이 사울의 나라를 다윗에게 돌리기 위해 헤브론의 다윗에게서 나아왔다(대상12:23,27,28). 그리고 이때 다윗은 또한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맞아들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다윗의 통치하에서는 2명의 대제사장이 존재케 된 것 같다(Pulpit Commentary).
ㅇ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 브나야(Benaiah)는 다윗의 전성기에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했던 인물이다(삼하8:18).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은 외국인 용병으로 왕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있었고(38절), 브나야는 이들의 대장이었다(대상 18:17). 본래 브나야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서(대상 27:5) 레위인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무용(武勇)으로 인해 다윗 왕의 시위대장으로 발탁된 것 같다(삼하 23:20-23;대상11:22-25). 그러다가 브나야는 솔로몬의 명령을 받고 아도니야의 반란 사건에 가담한 요압을 죽인 후 대신 군대 장관이 된다(2:28-35).
ㅇ선지자 나단 - 다윗의 신임을 받는 왕궁의 조언자였다. 당시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나단은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을 솔로몬에게 넘겨주도록 하였고(삼하 7:4-170, 밧세바를 취한 일로 다윗을 꾸짖기도 하였다(삼하12:1-14). 그리고 나단은 솔로몬 출생시 하나님의 명으로 솔로몬에게 '여디디야'(Jedidiah,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라는 이름을 붙여 준 일이 있으므로, 일찍부터 나단은 솔로몬이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암시받은 바 있었다(삼하 12:24,25).
ㅇ시므이 - 이 사람이 누군지는 확실치 않다. 학자들(Keil, Bahr)은 솔로몬의 열두 관장 중 하나로 임명받은 엘라의 아들 '시므이'(4:18)와 동일시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발트(Ewald)와 같은 학자는 시므이를 다윗의 형인 '삼마'(삼상 16:9;삼하 21:12) 도는 '시므아'(삼하 13:3)로 보기도 하나 근거는 희박하다.
ㅇ레이 - 역시 미상의 인물이다. 요세푸스는 '다윗의 친구'로 보기도 하고, 에발트는 '다윗의 형제'로 보기도 하나 타당성은 없다(Hammond).
ㅇ다윗에게 속한 용사들 - '용사들'의 히브리어 '깁보림'은 두목, 수령의 뜻을 갖는다. 특별히 다윗의 37인의 용사들에게 사용되었다. 그들은 주로 가드 족속, 그렛 족속, 블렛 족속 등으로 구성된 용병들로서 다윗의 직접적인 통솔하에 있던 다윗의 오랜 전우들이다(삼하 23:8-39;대상 11:10-12:18).
ㅇ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 요압과 아비아달이 구세력의 세력이라면, 사독과 나단등은 후기 예루살렘에서 기반을 잡은 신흥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브나야를 비롯한 다윗의 용사들은 요압의 영향권하에서 벗어난 다윗의 친위 세력이었다.  따라서 아도니야는 이들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고, 이들 역시 다윗의 뜻을 좇아 예루살렘에서 자라난 새 인물 솔로몬을 지지하는 것이 옳을 뿐 아니라 유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에 가담치 않았다.
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ㅇ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 '에느로겔'(삼하17:17) 또는 '엔로겔'(수15:7)은 '정탐의 우물'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기드론 골짜기에 있다. 이곳은 잔치를 벌이기에 적당하며 지금도 예루살렘 주민의 휴양지이다 (Robinson, Schultz). '소헬렛'은 '뱀'이란 뜻인데(Gesenius), 느헤미야 2:13의 '용정'(龍井)과 동일시된다(Benzinger). 이곳 소헬렛의 돌은 자연 그대로 제단이 될 수 있었다(Hammond).
ㅇ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고 - 이것은 단순히 잔치 음식이 아니고 제사에 쓰이는 희생 제물이다(참고, 민 28-29장), 그런데 일찍이 사울이 왕이 될 때도 제사를 드렸고 (삼상11:15), 압살롬도 제사를 가장하여 반역을 자행한 바 있었다(삼하 15:7,12). 마찬가지로 아도니야 역시 제사 잔치를 베풂으로써 반역 거사를 도모한 것이다. 이처럼 반역 거사에 제사 형식을 도입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이다. (1) 제사 형식을 갖춤으로써 종교계 및 군부 실력자들의 회합 의도를 자연스럽게 은폐시킬 수 있으며 (2) 자신들의 거사 행위에 신적(神的) 근거 및 정통성을 부여하고 (3) 거사에 가담한 자들 상호간에 정신적, 종교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한편, 거사 장소로서 아도니야는 수도 예루살렘 남동쪽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에느로겔 근방을 택했는데, 이로 미루어 아도니야는 자신의 거사에 상당히 많은 세력의 지지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으며, 따라서 거사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군대 장관 요압의 동조와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아도니야는 그러한 확신을 굳혔던 것 같다. 하지만 아도니야는 신정 국가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하나님의 뜻'에는 유념치 않았다.
ㅇ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 - 다윗은 여러 왕비로부터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있었다 . 대상 3:1-9에 의하면 아들만 대략 19명 가량 되는데, 그중 아도니야는 넷째였고, 솔로몬은 열째 아들이었다. 그리고 첫째 암논과 둘째 길루압(혹은 다니엘)과 셋째 압살롬 모두 죽었다(6절 주석 참조). 따라서 당시로서는 아도니야가 최연장자였으며, 솔로몬을 제외한 그의 동생은 모두 14명이었다(이외 많은 다윗의 첩의 아들들도 있었다). 이들 아도니야의 동생들도 아마 솔로몬 보다는 최연장자인 아도니야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아도니야는 이들도 자신의 거사 잔치에 참여시켰다.
ㅇ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 - 다윗 왕의 근친이거나 또는 다윗 왕의 신복으로서 궁중에 출입하는 유다 지파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일찍이 이들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아도니야는 이들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거사 잔치에 초대한 것 같다. 따라서 이들 중에는 아도니야의 음모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없이 초대에 응한 자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삼하 15:11, J. Hammond)
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하였더라
ㅇ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 아도니야는 의도적으로 솔로몬을 초청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것은 아도니야가 솔로몬이 약속된 왕위 계승자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음을 뜻한다(Keil, Bahr, Hammond, Patterson). 즉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명을 좇아, 다윗의 범죄에 대한 사죄의 징표로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들 솔로몬에게 붙여준 이름 '여디디야'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삼하 12:24,25). 그러므로 이 이름이 암시하듯 다윗의 왕위 계승자로 일찍부터 솔로몬이 선택받은 자임이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삼하 7:12;대상 2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가 연장자임을 내세워 왕위를 노린 행위는 하나님과 부왕 다윗의 뜻을 정면 거스린 모반(謀叛)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신정적(神政的) 왕정 국가인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위의 정통성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이다. 한편 아도니야가 솔로몬과 더불어 선지자 나단, 시위 대장 브나야, 데제사장 사독, 그리고 다윗의 (삼십)용사들을 초청해서 제외시킨 것은, 그가 다윗의 의중(意中)을 따르고 있는 솔로몬의 핵심 추종 세력을 익히 간파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11 나단이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말하여 이르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음을 듣지 못하였나이까 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ㅇ나단이 밧세바에게 고하여 가로되 - 선지자 나단은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음모를 분쇄하고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런데 나단이 곧장 다윗에게 달려가지 않고 먼저 밧세바에게 찾아간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노약한 다윗 앞에 반역 사건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가지고 자신이 먼저 나서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고, (2) 따라서 아도니야의 반역이라는 충격적인 보고를 다윗에게 전함에 있어서 당시 다윗의 총애를 받고 있던 밧세바가 그 적격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아울러 밧세바는 다윗의 침실에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는 왕비의 신분이고(15절), (4) 또한 친아들인 솔로몬의 일에 가장 헌신적일 수 있는 인물이며, (5) 그리고 다윗의 맹세를 받았던 당사자로서(17절)다윗에게 행동을 촉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도니야의 반역 인물을 진압하고 분쇄하는 데 있어, 선지자 나단의 역할은 결정적일 뿐 아니라 나단의 주도면밀한 지혜가 드러나는 바, 나단은 매우 지혜롭고 신중하게 일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나단의 지혜는 일찍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관련된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고 일깨우는 데 있어서도 잘 나타난다(삼하 12:1-15).
ㅇ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 부왕(父王)인 다윗 조차도 모르게 은밀히 아도니야가 왕위 계승식을 추진한 것으로 보아 아도니야의 행위는 분명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인 솔로몬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코자 시도한 쿠데타였다고 볼 수 있다.
12 이제 나로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
ㅇ당신의 생명과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자 -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에게 한 이 말은 단수니 위협적인 말이 아니다. 고대 근도의 군주체제하에서 반란, 찬탈, 쿠데타 등으로 왕권(王權)을 잡은 자는 자시늬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변의 위험 인물들을 가차없이 처형시키는 예가 허다하였다. 특히 전왕(前王)이나 경쟁자의 왕족들은 참화를 면할 길 없었다(15:29;삿9:5;왕하10:7,14;11:1). 다라서 만일 이번 아도니야의 반역 거사가 성공할 경우, 제일 먼저 솔로몬과 솔로몬의 인척들 및 그의 추종 세력들이 진멸될 곳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나단은 바로 이 사실을 정확히 지적함으로써 소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사태의 긴박성을 각성시킨 것이다.
ㅇ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 - '계교'(計巧)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차'는 '모략', '흉계' 등의 부정적인 뜻을 지니기도 하나, 여기서는 '상담', '의논' 이란 의미가 짙다. 즉 '에차'는 남을 해하는 계교(욥 5:13) 등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노인의 가르침(12:8)이나 지혜로운 자가 듣는 권고(잠 12:15) 등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 아도니야의 반역 거사를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행해지는 나단의 계교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행해지는 긍정적인 의미의 계교라고 볼 수 있다.
13 당신은 다윗왕 앞에 들어가서 고하기를 내 주 왕이여 전에 왕이 계집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런데 아도니야가 무슨 연고로 왕이 되었나이까 하소서
ㅇ전에 왕이 계집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 본절에 나타난 것처럼 다윗이 구체적으로 밧세바에게 맹세한 내용을 성경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일부 고등 비평가들은 나단의 이 말을 늙어 기억이 희미한 다윗에게 덮어 씌우려는 계략의 일환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즉 (1)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이 이미 있었음을 분명하고(대상 22;9), (2) 또한 다윗의 즉각적인 수긍과 대응 태도(28-30절)로 볼 때 당시 다윗은 그렇게 흐리멍텅 하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언제인가 다윗은 본절과 같은 내용의 맹세를 밧세바에게 한 바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그러한 맹세를 나단을 비롯한 궁중의 다른 사람들도 익히 듣고 알고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위기의 상황에서 나단은 그러한 왕의 맹세를 재확인하며, 동시에 그 사실이 공식 선포되도록 밧세바를 통해 시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ㅇ솔로몬이 정녕 내 위에 앉으리라 - 다윗은 솔로몬을 낳기 전, 성정 건축을 위하여 기도할 때 이미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대상22:9), 솔로몬을 낳은 후 밧세바에게 그 말씀대로 솔로몬에 대하여 맹세한 바 있다(30절). 그러므로 선지자 나단이 신앙의 사람 다윗으로 하여금 이 약속을 회상하게 하도록 지시한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근거하여 호소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응답을 받는 길이라고 하겠다(창 32:9, 12;출 32:13, 14).
14 당신이 거기서 왕과 말씀할 때에 나도 이어 들어가서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리이다
ㅇ증거하리이다 - '증거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말라'는 '채우다', '가득하게 하다'의 뜻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부족한 것을 더 보충하는 게 아니라, 말씀이 '응하다'(2:27), 또는 말씀이 '이루어지다'(8:24)란 용례에서 보듯 결과로 확정짓는 것(fulfillment)을 뜻한다. 그러므로 나단의 이 말은 밧세바가 다윗에게 한 말이 사실로 확정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Keil, Hammond).
15 밧세바가 이에 침실에 들어가 왕에게 이르니 왕이 심히 늙었으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이 시종하였더라
ㅇ밧세바가 이에 침실에 들어가 왕에게 이르니 - 이는 다윗이 어전(御殿)에서 집무를 보지 못하고 항상 침실에만 있었음을 말해 준다. 아울러 이를 통해 (1) 다윗이 바깥 소식에 어두웠던 까닭과(11절) (2) 나단이 먼저 밧세바를 통하여야 했던 까닭이 설명된다.
ㅇ수넴 여자 아비삭이 시종하였더라 - 왕의 거동이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였음이 나타난다. 따라서 다윗이 침실에 머문것이 일시적이 아니고 장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47절). 한편 본문과 같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다윗 왕의 궁중 기록의 전거(典據)는 분명 '선지자 나단의 글'(대상 29:29)이었을 것이다(J. Hammond).
16 밧세바가 몸을 굽혀 왕께 절하니 왕이 이르되 어찜이냐
ㅇ몸을 굽혀 왕께 절하니 - 이것은 왕궁의 예절임과 동시에, 비록 늙고 쇠약해졌지만 아지고 다윗이 엄연한 이스라엘의 통치자임을 말해 준다. 그런데도 아도니야는 다윗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 된 후 다윗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고자 했다.
ㅇ어찜이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 라크'는 의미상 '무엇을 원하느냐'(what do you want?. Living Bible;what do you desire?, RSV)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윗의 이러한 관심은 그가 여전히 밧세바를 총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17 저가 왕께 대답하되 내 주여 왕이 전에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계집종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셨거늘
ㅇ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시기를 - 다윗은 왕이지만 그 보다 높은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가리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밧세바의 이 말은 다윗에게 그러한 맹세를 지킬 의무가 있음을 일깨우는 말이다. 한편 이것은 (1) 신정적(神政的) 왕정 국가 체제인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왕은 단지 하나님께 임명받은 대리자일 뿐이며, (2) 따라서 이스라엘의 절대적 군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믿음을 반영하고 있는 말이다.
18 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도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ㅇ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 왕비인 밧세바 조차도 '내 주 왕'(아도니 하멜렉)이라는 경칭을 사용할 정도로 당시의 왕은 신하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J. Hammond). 또한 다른 왕들에 비해 이 표현은 자주 사용되고 있다(참고, 12:4;13:8;20:8). 그러므로 이 경칭이 거듭 반복됨(18, 21, 24, 27절)은 상황의 긴급성과 호소의 간절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존경받는 지도자 다윗의 엄연한 위치를 상기시키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므로써 최고 통치자 다윗의 뜻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아도니야의 방자함과 불법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도 노렸다고 볼 수 있다.
19 저가 수소와 살진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장관 요압을 청하였으나 왕의 종 솔로몬은 청치 아니하였나이다
ㅇ본절의 내용은 나단의 지시 사항(11-14절)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이 역시 밧세바가 당시 나단으로부터 권고받은 내용일 것이다. 아무튼 본절의 증언에서 보여지듯, 아도니야의 모반 행위는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졌다. 즉 그는 (1) 병거와 기병과 전배 50인을 예비하고(5절), (2) 군대 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거사 핵심 인물로 포섭하고(7절), 93) 에느로겔 근방에서 대관식(戴冠式)을 하려고 거사 장소까지 에비하며(9절), (4) 제사 잔치를 빙자함으로써 거사 모임을 은폐하는 한편(9절), (5) 자신의 추종 세력과 솔로몬의 추종 세력과 정확히 분간하여 차질없이 행동하였다(9, 10절). 하지만 이같이 치밀한 준비를 통한 아도니야의 거사도 결코 하나님이 예정하신 왕 솔로몬의 즉위를 막지는 못했다. 인간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대적할지라도 그의 예정하신 뜻은 호리(毫釐)도 어김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단 4:35).
20 내 주 왕이여 온 이스라엘이 왕에게 다 주목하고 누가 내 주 왕을 이어 그 위에 앉을 것을 반포하시기를 기다리나이다
ㅇ온 이스라엘이 왕에게 다 주목하고 -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었어도 백성들은 최종 판단을 보류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연장자가 반드시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믿음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희박했음을 알 수 있다(Bahr). 오히려 그들은 다윗의 공식 선포를 기다린다. 이것은 단순히 동방의 왕들에게는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는 권리와 관습이 있었기 때문(J. Hammond)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임명권에 대한 이스라엘의 믿음 때문이었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다윗을 통해(17절) 다윗의 아들들 중 하나님이 뽑은 인물이 선포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압살롬의 반역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삼하 15:13,14).
ㅇ반포하시기를 기다리나이다 - 여기서 밧세바는 자신의 진술을 확대시켜 다윗이 왕위 계승자를 지목하는 일은 자신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대한 관심사라고 밝힌다. 사실 밧세바의 이 말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밧세바가 이 사실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능변가(能辯家)였다.
21 그렇지 아니하면 내 주 왕께서 그 열조와 함께 잘 때에 나와 내 아들 솔로몬은 죄인이 되리이다
ㅇ열조와 함께 잘 때에 - '열조와 함께 잔다' 도는 '열조에게로 돌아간다' 등의 표현은 통상 위대한 인물이나 어진 왕 또는 지혜로운 자의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할 때 종종 사용하는 성경의 독특한 관용어이다.
ㅇ죄인이 되리이다 - '죄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핫타'는 영적, 도덕적 과오를 나타내기도 하지만(창 20:9;애 5:7)읽거나 놓침, 또는 틀림이나 빗나감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욥 5:24;삿20:16).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왕위 경쟁에서 실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몰리게 될 역적 또는 반역자를 뜻한다(Clericus, Bahr, Hammond).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미 솔로몬이 왕위 후보자로 알려져 있었음을 입증한다(13, 17절). 그런데 그것은 다윗에 의해 생긴 위협이므로(17절) 다윗이 끝까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의무였다. 지금 밧세바는 그러한 점을 다윗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22 ○밧세바가 왕과 말씀할 때에 선지자 나단이 들어온지라
ㅇ밧세바가 왕과 말씀할 때에 선지자 나단이 들어온지라 - 히브리 원문에서는 이 장면이 "보라, 나단 선지자가 들어오는 것을!"과 같은 식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아연 긴장과 활기가 다윗의 왕궁에 감돌게 되었다.
23 혹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선지자 나단이 여기 있나이다 하니 저가 왕 앞에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어 왕께 절하고
ㅇ혹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성지자 나단이 여기 있나이다 - 선지자 나단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윗 왕의 부름을 받기 전에 다윗 왕에게로 나아왔다. 그러자 밧세바는 물러갔다(28절). 즉 충격적인 소식의 사실 여부가 문제일때 나단은 약속대로(14절) 적절히 밧세바를 이어 곧 들어왔다. 한편 여기서 '혹이'는 원문상 복수이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일 수 없다(15절). 아마도 침실로 들어가는 문 입구에 대기하고 서있는 궁중 신하일 것이다.
ㅇ얼굴을 땅에 대어 왕께 절하고 - 이것은 왕비 밧세바의 인사와는 좀 차이가 있다(16절).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들이 이토록 예의를 다하고 있음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다른 왕들의 기록에서는 이와 같은 것을 찾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자세는 일찍이 나단이 다윗을 책망하기 위해 왔을 때와도 판이하게 다르다(삼하 12:1) . 아마도 이는 다윗 왕에게 존엄한 통치자로서의 직무를 다할 것을 호소하려고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24 가로되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ㅇ앉으리라 하셨나이까 - 원문상 이 말은 오히려 강한 긍정문이다. 즉 "앉으라고 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그렇지 않고서야)"라는 의미이다. 다라서 이 말은 실제로는 그렇게 한일이 없는 다윗의 강한 부인을 이끌어 내려는 선지자 나단의 역설적 긍정의 말인 것이다(J. Hammond). 이처럼 역설적 긍정, 의문, 비유와 같은 말로써 상대방의 의견을 이끌어내는 형식은 선지자 나단의 독특한 메세지 전달 방식이었다(삼하 12:1-6).
25 저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진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대장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저희가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왕 만세를 불렀나이다
ㅇ아도니야 왕 만세를 불렀나이다 - 여기서 '만세'에 해당하는 히브이러 '예히'는 직역하면 "살게 하소서"(Let live !)란 뜻이다. 이것은 왕의 즉위식 때 왕을 찬양하는 일종의 기원문이다(39절;삼상10:24;왕하 11:12;대하 23:11). 한편, 그런데 아도니야에게 이러한 만세가 불리워졌음은 밧세바의 말(15-21절) 속에서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단이 그것을 말함으로써 아도니야의 반역 사실이 보다 확연히 드러난 셈이다.
26 그러나 왕의 종 나와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왕의 종 솔로몬은 청치 아니하였사오니
ㅇ왕의 종 나와 왕의 종 솔로몬은 청치 아니하였사오니 - 나단이 자신을 표현한 말은 히브리어 원문상 "나 곧 당신의 종인 나"와 같이 강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솔로몬 역시 "솔로몬 곧 당신의 종" 하는 식으로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이는 24절의 강한 역설적 긍정과 연결되어 "(왕이) 틀림없이 그랬는데도 우리를 제외시켰단 말입니까"하는 항변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 은근히 아도니야의 초청의 불법성과 반역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아도니야의 초청에서 제외된 자들(나단, 사독, 브나야 등)과 특히 솔로몬을 다윗의 편으로 암시하고 있다.
27 이것이 내 주 왕의 하신 일이니이까 그런데 왕께서 내 주 왕을 이어 그 위에 앉을 자를 종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ㅇ내 주 왕이 하신 일이니이까 - 선지자 나단은 이미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를 간파하고 있었다(11절). 그러나 지금 다윗 왕 앞에서는 아도니야의 사건을 전혀 모르는 자처럼 오히려 다윗 왕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단은 만일 그렇다면(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줄 알고 있지만) 그러한 결정에 자신을 도외시한 다윗 왕의 처사에 대해 지극히 섭섭한 감정을 표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ㅇ종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 같은 맥락에서 이 말 역시 사실 여부를 묻는 의문(Keil)이 아니라 나단이 뛰어난 화술이다. 즉 나단은 아도니야의 음모를 알면서도 다윗 앞에서는 그 자초지종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므로써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예언을 전한 바 있는(삼하 7:12) 자신을 제외시키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느냐는 투의 항의조로 다윗을 자극한 것이다. 이러한 나단의 화술은 즉각적이고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28 다윗 왕이 명하여 가로되 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저가 왕의 앞으로 들어와 그 앞에 서는지라
ㅇ다윗 왕의 명하여 가로되 - 이제까지 줄곧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던 다윗이 갑자기 명령하는 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15절의 늙고 무기력한 인상의 다윗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한편 27절의 선지자 나단과의 말 사이에 아무런 설명 없이 곧장 다윗의 행동을 기록함으로써 다윗의 결정이 단호하고도 신속했음을 보여 준다.
ㅇ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 나단이 말하는 동안(22-27절) 밧세바는 물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밧세바가 온 다음엔 나단이 물러가 있었다(32절), 이것은 혹자들(Clericus, Thenius)의 견해처럼 나단과 밧세바가 상호 공모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취한 행동이 아니라, 왕이 허락 없이는 제 삼자가 함께 할 수 없는 궁중 예법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29 왕이 가로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ㅇ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실을 가리켜 -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형식이나(J. Hammond), 특별히 여기서 다윗의 이러한 맹세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즉 (1) 평생동안 겪은 수많은 환난들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이며(삼하 4:9), (2) '여호와의 사심'(하이 예호와)이 변할 수 없이 확실한 것처럼 솔로몬이 왕이 될 것도 확실하다는 후계자 선언이기도 하다(30절). 물론 다위스이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엄연하신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다(대상 22:9).
30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
ㅇ내가 이전에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 솔로몬의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하여 다윗이 밧세바에게 맹세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13, 17절) 다윗 왕은 성전 건축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대상 22:6-19). 그 사실을 소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언젠가 맹세로써 약속한 것 같다.
ㅇ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 - 여기서 '오늘날'(하욤하제)은 단순한 시간적 의미의 오늘(today)이라기 보다는 특별한 성취의 날로서의 오늘(this today)의 의미가 크다(참고, 신 6:6;9:3). 한편 히브리 원문상 '키'란 말이 본절에서 세번 나오고 있는데, 이는 '정녕', '진실로'(surely)란 뜻으로서, 곧 진술하는 내용에 강조를 주고 있다(Ewald). 또한 '그대로'(켄)란 말은 다윗의 행동이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지시된 내용을 따르는 순종의 행동임을 보여준다.
31 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며 내 주 다윗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ㅇ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며 - 16절과 비교할 때 여기서의 밧세바의 절은 왕의 아내로서가 아닌, 왕께 최대의 예의를 갖춘 왕의 신하로서의 모습이다(23절).
ㅇ만세수를 하옵소서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히 레올람'은 직역하면 '영원토록 사시옵소서'(Let live forever, KJV ; May live forever, NIV)란 뜻으로서, 이 역시 신하가 왕께 드리는 기원문이다(25절). 이 같은 형식의 기원문은 히브리 왕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경우에 한해 사용되었으나, 바벧론과 페르시아에서는 그들의 왕들에 대해 자주 사용하고 있다(단 2:4;3:9;5:10;6:21;느2:3 등). 한편 본절에서 밧세바의 이 말은 다윗 왕의 내린 명령에 깊은 감사를 표시함과 동시에 그것이 존엄한 왕명으로 받들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Keil).
32 ○다윗왕이 가로되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니 저희가 왕 앞에 이른지라
ㅇ다윗 왕이 가로되 내 앞으로 부르라 - 이 장면은 앞의 내용과 비교할 때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준다. (1) 사람들이 찾아가야만 했던 상황에서(15, 22절) 이제 다윗이 능동적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으며, (2) 또한 아도니야에게 청함 받지도 응하지도 않았던 인물들(8, 10, 19, 26절)이 이제 청함받고 또 이에 응하고 있다.
ㅇ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 - 이들은 솔로몬의 대관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인물들이었다. 즉 제사장은 왕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자로(39절),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자로서 대관식을 진행해야 했다. 또한 군부 실력자인 브나야는 그 예식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했을 것이다. 한편 로린슨(Rawlinson)교수는 위에 열거된 이름의 순서가 곧 왕국 내 지위의 차서(次序)라고 보나 확실치는 않다.
33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복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나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ㅇ너희 주의 신복들 - 이들은 구체적으로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로 구성된 다윗 왕의 근위대를 가리킨다(38절).
ㅇ나의 노새에 태우고 - 히브리 원문상 '나의 노새'에 해당하는 '하피르다 아쉐르 리'는 직역하면 "나에게 속한 그 노새"이다. 구체적으로 알 순 없으나 누가 봐도 그것이 다윗 왕의 노새인 줄 알아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로 그 노새에 솔로몬이 탔다는 것은 솔로몬이 곧 다윗 왕의 후계자임을 널리 알리는 상징적 표시인 것이다(Keil, Bahr, Hammond). 한편 여기서 '노새'(피르다)는 여성형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암노새를 가리키는데, 이는 숫노새 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다윗 당시에만 해도 노새는 수입해 들여온 것으로서(10:25;겔27:14). 귀족 계급들이 주로 사용했던 교통 수단이었다.(삼하 13:29;18:9). 일반 평민은 대부분 나귀를 사용했다. 그러나 후에는 노새가 보다 일반적으로 보급되었고, 동시에 운송 수단으로써도 널리 사용되었다(W. S. McCullogh).
ㅇ기혼으로 - '기혼'(Gihon)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1) 본문에서 기혼이 예루살렘 보다 낮은 지형으로 나타나고 있고(33, 40절), (2) 이러한 표현은 흔히 예루살렘 동편의 기드론 골짜기를 지칭할 때 사용되며, (3) 갈대아 사본, 수리아 사본 등 여러 고대 사본 등이 기혼을 이 골짜기의 실로암 못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미루어 기혼은 곧 실로암일 것으로 추정된다(J. Hammond). 당시 이곳은 예루살렘성의 주요 수원지(水源池)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Patterson). 더구나 이곳은 아도니야의 잔치 장소인 에느로겔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도니야의 음모를 분쇄하려고 일부러 기혼을 택하였을 것이다. 한편 데니우스(Thenius)는 여기 '기혼'을 '기브온'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대제사장 사독이 기브온 성막에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부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순한 추측일 뿐 타당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과 기브온과는 약 3시간이나 떨어진 먼 거리이므로 아도니야의 대관식보다 늦게 거행된 솔로몬의 대관식이 아도니야의 대관식이 다 마치기 전에 벌써 끝나 예루살렘까지 돌아오기애는 (41절) 시간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 p. 23).
34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저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고 너희는 양각을 불며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고
ㅇ저에게 기름을 부어 - 당시 '기름 부음'은 주로 통치의 직분에 취임하는 왕의 대관식 의식에서 행해진 공식 행사였다(삼상 10:1;삼하 12:7). 그리고 이 기름 부음의 의식은 (1)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자로서 그에게 권위가 주어지며, (2) 도한 이 권위를 부여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속에 내포된 사상은 신정(神政) 국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린다는 사상이다.
ㅇ양각을 불며 - '양각'(쇼파르)은 양의 뿔로 만든 나팔로 갑작스럽게 찢어지는 듯한 높은 소리가 난다. 이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나(레 25:9;암 3:6), 특히 왕의 즉위식 때에 사용되었다(삼하 15:10;왕하 9:13;11:14). 따라서 다윗 왕은 솔로몬의 대관식 때에도 이것을 무리들에게도 그 소리가 들리도록하여 솔로몬의 왕위 즉위가 만천하에 공식 선포되고 드러나도록 조처하였던 것이다.
35 저를 따라 올라오라 저가 와서 내 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저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주권자가 되게 하기로 작정하였느니라
ㅇ이스라엘과 유다의 주권자 - 여기서 특별히 '이스라엘'과 '유다'로 표기된 것은 당시 국가의 세력 판도가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하는 '유다'로 양분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처음 다윗도 얼마동안은 '유다'만을 통치하다가 나중에 사울 가문을 추종하던 '이스라엘' 지파들을 통합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삼하 5:3-5). 그러므로 다윗의 여기 이 말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솔로몬은 현재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지파들을 통치하는, 명실 상부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것이라는 선포이다. 한편, 그러나 솔로몬 사후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을 다시금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분리되고 만다(11:43-12:20).
36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ㅇ아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 '참으로', '진실로'의 뜻을 갖는 '아멘'(Amen)은 보통 이미 말한 것에 대한 확언, 응답을 나타낸다<신27:11-26 강해, 아멘 연구>. 그러므로 브나야의 이 말은 하나님의 사후 승인을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말씀하시면 꼭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시 33:9)처럼 다윗의 말이 그대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다(Keil).
37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 위를 내 주 다윗 왕의 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ㅇ이 부분에 나오는 브나야의 말은 3가지 내용으로 요약된다. (1) 다윗의 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를 원한다는 것(36절), (2)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함께 계시기를 바라는 것(37a절). (3) 솔로몬의 왕위가 다윗의 그것보다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는 것(37b절)등이다. 이와 같은 브나야의 3가지 소원은 결코 아첨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경건한 소원으로서, 그가 비록 무관(武官)이었으나 매우 투철한 여호와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ㅇ내 주 다윗 왕의 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 이 말은 일종의 기원문 형식이다. 그러나 다만 형식 뿐만이 아니고 이 말 속에는 브나야의 경건한 소원이 깊게 반영되어 있다(Keil, Hammond). 즉 다윗 왕의 위(位)가 영원토록 보다 견고하게 되기를 소원한 브나야의 이 바램은 하나님의 약속과 맞아(3:10) 실제로 솔로몬의 통치는 이스라엘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3:13;대하 9:22).
38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 가서
ㅇ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 - 이들의 명칭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하여 크게 두가지 해석이 있다. 즉 (1) '그렛'을 그레데 섬으로 보는 해석으로서, 블레셋 사람이 유래하였다는 '갑돌'(암 9:7;신 2:23)이 바로 이곳과 일치하는 것으로 본다(J.Hammond). 따라서 그렛 사람들(the Cherethites)은 대부분 이방인들인 블레셋 사람들일 것으로 본다. (2) '그렛'과 '블렛'의 어근이 각각 '자르다'(카라트)와 '신속하다'(펠레트)란 의미일 것으로 보고 곧 이들이 사형 집행인과 전령일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Gesenius, Keil). 한편, 그러나 이들의 직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일치된다. 즉 이들은 외국인 용병들로 구성된 왕의 친위 부대라는 것이다.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이들을 '소마토퓔라케스'(*,'왕위 근위병' 혹은 '신변 보호자'란 뜻)라고 불렀다(삼:18;15:18;20:23) . 자세한 내용은 삼하 8:18 주석 참조.
39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양각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니라
ㅇ성막 가운데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 여기서 '기름 뿔'(the horn of oil)은 뿔로
만들어진 기름을 담는 뿔 그릇을 가리킨다. 그리고 '기름'은 제사장, 선지자, 왕, 그리고 성전의 기물들을 거룩히 구별할 때 특별히 사용하는 거룩한 기름(sacred oil, Living Bible) 곧 '관유'(灌油, 출 30:22-33)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거룩한 기름은 언약궤(법궤)가 보관된 성막 안에 보존되어 있었으며, 당시 이 성막은 시온산에 있었다(대상 15:1;삼하 6:17). 한편 만일 아도니야가 제사장 아비아달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다면, 그때 기름 뿔은 응당 에느로겔에 가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본절에는 그것이 시온 산 위의 성막안에 그대로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추측케 한다. (1) 아도니야가 도유식(塗油式)을 거치지 않고 왕위 즉위를 선포했다. (2)성막에 기름뿔이 여러 개 비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성이 많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본서 기자는 솔로몬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도니야의 도유식을 생략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비록 사독이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장으로 임명받았지만, 그의 신분상 시온 성막의 출입도 자유로었을 것이기 때문에(keil), 당시 다윗의 명을 좇아 시온 성막에 비치되어 있었던 여러 개의 기름 뿔 중 하나를 취하여 솔로몬의 도유식을 거행했던 것 같다. 그리고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기름 뿔은 바벧론 포로 전까지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J. Hammond).
ㅇ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 이 기름 부음의 의식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성별하셨다는 의미(34절 참고) 외에도 하나님께서 또한 여호와의 신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Bahr ; 삼상 16:13). 실제로 사울과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은 후 곧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삼상 10:9,10;삼상 16:13).
40 모든 백성이 왕을 따라 올라와서 피리를 불며 크게 즐거워하므로 땅이 저희 소리로 인하여 갈라질듯하니
ㅇ모든 백성이 왕을 따라 올라와서 - 솔로몬의 대관식에 참석한 모든 백성이 만세를 부른 이후(39절) 솔로몬은 명실 상부한 저들의 왕이 되었다(25절과 비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의 명과 뜻을 좇아 솔로몬을 따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순종과 신하들의 충성을 통해 결국 백성들의 황영에서 완성된 것이다.
ㅇ땅이 저희 소리로 인하여 갈라질 듯하니 - 여기서 '갈라지다'(바카)란 말은 '찢다', '쪼개다', '부수다' 등의 뜻을 가지는 바, 위의 표현은 그 소리가 땅을 진동시킬 만큼 솔로몬을 추종하는 백성들의 무리가 많았고 또한 즐거움으로 사기 충천한 사실을 가리키는 과장법적 표현이다(45절).
41 아도니야와 저와 함께 한 손들이 먹기를 마칠 때에 다 들은지라 요압이 양각 소리를 듣고 가로되 성중 에서 소리가 어찌하여 요란하뇨
ㅇ함께 한 손들 - 여기서 '손들'은 '초청받은 자들'이란 뜻으로서, 곧 왕위 찬탈을 위한 아도니야의 제사 잔치에 초대받아 응함으로써 반역 거사에 가담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 핵심 인물은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 장관 요압이다(7, 19절).
ㅇ요압이 양각 소리를 듣고 - 전쟁터를 많이 경험한 노련한 군인 요압이 특히 민감하게 나팔 소리에 반응하고 있다(Hammond, Bahr). 일찍이 요압은 압살롬이 반역하여 왕이 될 때에 이러한 나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삼하 15:10). 그러나 지금은 반역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에게 들린 나팔 소리로 인해 요압은 그 의미를 예감하고 불안해 하였을 것이다.
42 말할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오는지라 아도니야가 가로되 들어오라 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도다
ㅇ말할 때에 요나단이 오는지라 - 성경 기록에서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은 특별한 일의 전달자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삼하 15:27;17:17). 한편 그는 아버지 아비아달과는 달리 아도니야의 잔치에 참석치 않았다. 그 이유는 (1) 아직 연소하여 초청을 받을 만한 지위가 되지 못했거나 (2) 궁중의 전령자(傳令者)로서 항시 바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당시 아도니야 측에서 왕궁의 동정을 탐지키 위해 요나단을 대기 시켜 놓은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Bahr).
ㅇ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도다 - 이와 비슷한 표현이 삼하 18:27에서도 나타난다. 즉 '좋은 사람은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이라는 다윗의 말이다. 아마도 이 같은 말은 그 무렵 속담처럼 통용되었던 것 같다(삼상 24:13). 따라서 여기서 '용사'란 말은 '좋은 사람'의 의미를 가진 인사말일 것이다(J. Hammond). 한편 성경에서 '용사'와 '아름다움'은 흔히 결부되어 등장한다(참고, 삼하 1:17 이하의 다윗의 노래). 여하튼 아도니야는 성중에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와 나팔 소리에 내심 불안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짐짓 자신과 무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처럼 허세 섞인 말을 한 것이다(Keil, Hammond).
43 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과연 우리 주 다윗왕이 솔로몬으로 왕을 삼으셨나이다
ㅇ과연 솔로몬으로 왕을 삼으셨나이다 - '과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발'은 '그러나', '오히려'와 같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대하19:3;33:17). 따라서 여기서의 사용도 내용상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Not at all,NIV), 혹은 '아니올시다'(No, RSV)라는 부정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왕이 된 소식이 아도니야에게는 결코 아름다운 소식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것은 앞에서 아도니야가 한 말(42절)이 그 표현과는 달리 짙은 불안과 의혹을 담은 말이므로 불핼히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의미에서의 '과연'이기도 한다.
44 왕께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솔로몬과 함께 보내셨는데 저희 무리가 왕의 노새에 솔로몬을 태워다가 
45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고 무리가 그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중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
ㅇ본문은 38, 39절 내용의 반복으로서, 곧 솔로몬의 즉위식이 거국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었음을 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사실 그대로를 보고하는 장면이다. 따라서 본문은 19절과 25,26절에 나타난 바 아도니야의 즉위식 장면과 비교된다. 비교해 보면, 아도니야에게 결핍된 요소들이 솔로몬의 즉위 장면에는 많이 나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예를 들면 왕의 노새, 기름 부음, 백성의 환영 등이 그것이다.
46 솔로몬이 나라 위에 앉았고
ㅇ솔로몬이 나라 위에 앉았고 - 여기서 '위'(키세)는 '왕위'(王位)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 말은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한 나라의 주권자임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출 11:5;삼하 7:13;대하 29:1 등). 한편 솔로몬은 부왕(父王)인 다윗이 아직 죽기 전, 왕으로 여전히 있을 때 왕위에 즉위했다. 이처럼 노환, 질병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선왕(先王)의 생전에 후왕(候王)이 왕위에 올라 외형상 두왕이 한 나라를 공동 통치하는 경우를 '섭정 제도'(the system of Co-regency)라고 하는데, 이 제도는 당시 애굽, 앗수르, 바벧론 등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 흔히 발견되는 제도였다. 이스라엘에서는 다윗과 솔로몬 때를 기점으로 후대 왕국의 역사에서 자주 나타나게 된다<서론, 11. 열왕기서의 연대기 문제>.
47 또 왕의 신복들이 와서 우리 주 다윗 왕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아름답게 하시고 그 위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왕이 침상에서 몸을 굽히고
48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내 위에 앉을 자를 주사 나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 하니
ㅇ본문은 솔로몬의 즉위에 관한 좀더 구체적인 요나단의 보고이다. 히브리어 원문상 여기서 요나단의 말은 '그리고 또한', '더욱이'와 같은 부가, 축적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웨감'(and also)이 매절 초두에 거듭됨으로써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요나단이 전하는 사실의 확실성이 점점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아도니야의 거사는 실패하였음도 점점 확실해져 간다. 한편 여기서 본문이 보여 주는 구도(構圖)는 솔로몬이 확실히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ㅇ여호와께서 나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 왕이 생존해 있는 동안 양위(讓位)하는 일은 매우 특이한 예에 속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왕들은 죽을 때까지 통치를 했고, 따라서 그 후계자들은 선왕(先王)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즉위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생전에 솔로몬의 즉위식을 직접 목도하게 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성전 건축과 더 큰 번영을 이룰 약속된 후계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되었으니, 다윗으로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크게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3:13;대하 9:22).
49 아도니야와 함께 한 손들이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
ㅇ아도니야가 함께 한 손들 - 여기서 '손들'(하케루임)이란 말은 직역하면 '초대받은 자들'(those who were invited)이란 뜻이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과 다윗 왕의 뜻이 솔로몬에게 있는 줄을 알면서도 아도니야의 역모 책동에 솔깃하여 훗날 한자리 차지해 보려는 얄팍한 계산 하에 몰려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이 그르치게 되자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황급히 도주해 버렸던 것이다.
ㅇ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 - 아도니야의 불의한 반역 거사 초대에 응했던 무리들(9절)이 솔로몬의 즉위 소식을 듣자 생명에 위협을 느껴 뿔뿔이 해산하는 광경이다. 여기서 (1) 그들이 그토록 쉽게 공포에 사로잡힌 것은 애초부터 확신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2) 또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당황하여 급히 일어남은 용기가 없었음을, (3)그리고 각기 제멋대로 처음부터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모인 무리들인 것을 보여 준다.
50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ㅇ제단 뿔을 잡으니 - 제단 뿔은 곧 번제단의 네 모퉁이에 튀어나온 돌기 부분이다(출 38:1-7 주석의 그림을 참조하라). 제사를 드릴 때 여기에 짐승을 매기도 앴고, 또 희생 제물의 피를 바르기도 하였다(출 29:12;시118:27). 그런데 성경에서 '뿔'(케렌)은 주로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신 33:17;삼상2:10;시18:2;75:10;112:9). 그러므로 제단의 뿔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아울러 그러한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약자와 억울한 자 및 죄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제단 뿔을 잡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호소하는 상징적 행위이다(Keil). 그런데 이처럼 제단 뿔을 도피처로 삼는 행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단지 출애굽 이후 오살자(誤殺者)의 도피 제도(출 21:13)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왜냐하면 출애굽 시대 이후부터 성소의 제단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범죄자의 피신처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출21:12-14). 이후 모세 율법은 이러한 자들을 위한 사회적 보호제도로 도피성(逃避城) 규례를 만들었고(민 35:9-34), 그 규례는 가나안 정착 후 그대로 실시되었다(수 20:1-9). 여하튼 그때 이후 성소의 제단은 도피성과 아울러 범죄자가 하나님의 보호와 긍휼을 호소하고 바라는 피신처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반역 거사를 주도한 아도니야도 사형 집행을 두려워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로 이처럼 제단 뿔을 잡은 것이다(Bahr). 한편, 그런데 아도니야가 피신하여 붙든 제단 뿔은 분명 예루살렘의 시온 성막 내에 있는 번제단 뿔일 것이다(Keil, Hammond).
51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 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52 솔로몬이 가로되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될진대 그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저의 가운데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 하고
ㅇ솔로몬이 가로되 - 아도니야의 요구와 달리 솔로몬은 맹세는 하지 않고 다만 말로써 약속할 뿐이다. 오히려 조건부로 약속한다. 그러므로 다음장의 아도니야의 죽음(2:25)은 이러한 조건부 약속을 어긴 결과인 것이다.
ㅇ선한 사람이 될진대 - 문맥상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이제 아도니야가 왕권에 대한 불의한 욕심을 버리고, 더이상 선동적인 역모를 꾀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사적인 생활을 보낸다면 그의 생명은 확실히 보장될 것이란 뜻이다(Patterson, Bahr).
ㅇ악한 것이 보이면 - 여기서의 '악함'(라)이란 도덕적 악함이라기 보다 왕이 되려는 '불측한 의도'를 말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 악함의 성격은 '비겁함'이다. 왜냐하면 본절에 '악함'에 대비되는 '선함'(벤 하일)의 원어적 의미는 '용감성'이기 때문이다(공동 번역은 실제로 '용감한 사람'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는 처음부터 떳떳하지 못하게 몰래 솔로몬과 그의 세력을 해치우려 했던 비겁한 행위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솔로몬은 만일 아도니야가 왕권에 대한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비겁한 역모를 꾀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엄중히 경고하면서 조건부로 아도니야의 목숨을 살려 주었던 것이다.
53 사람을 보내어 저를 제단에서 이끌어 내리니 저가 와서 솔로몬 왕께 절하매 솔로몬이 이르기를 네 집으로 가라 하였더라
ㅇ네 집으로 가라 - 솔로몬의 이러한 처분은 그의 관용을 나타낼 뿐 아니라, 경고의 의미가 크다(J. Hammond). 왜냐하면 이와 비슷한 명령을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면 언제나 징계, 연금의 의미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2:36;삼하 14:24). 그러므로 최소한 왕궁을 노리던 아도니야에게 사적(私的)인 개인으로서 이제 제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앞으로는 분수에 넘는 짓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경고가 충분히 담겨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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