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왕상18.*진실한 동역자 오바댜(선지학교 생도 구원), 갈멜산대결_바알의허상 드러내시다. 킹메이커<->트러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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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8장

...... 아합왕의 치세는 BC874-853, 갈멜산 대결은 아마도 BC860, 즉 총22년 통치기간에서 2/3 경과한 15년째 시점,  이렇게 추정해 보면 기근의 기간은 아합 치세 11년-15년 사이에  걸쳐서 총 3년반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그랜드 종합주석의 아합시대 기근 시점 다르게 제시 ::: ((BC.872..아합(사마리아)에게 직대/통고-자취 감춤::아마도 초막절 직후, 이른비 내릴 시점부터 기근 시작-->만3.5년, BC868.유월절 즈음에 이르러서야, 아합 다시 직대(오바댜 거쳐)/갈멜산 대결......늦은비 주심.))**....아합 왕때 발생한 아람(연합군)의 1차 침공 시점은  BC857년,(2차는 다음해인BC856년 (....북이스라엘 오므리 때 아람 벤하닷1세의 영토 확장 시도로, 아람과 북이스라엘 경계 (본래는 레위지파 므라리 자손의 도피성) 길르앗 라못을 빼앗김 --->이제, 벤하닷2세의 1,2차 침공(BC857, 856) 패전 결과로 길르앗 라못을 북이스라엘에 반환키로 약정했으나 [BC853.벤하닷2세(여기에 함께 참전한 아합외 11왕) 연합군과  살만에셀의 신 앗수르군 사이의 카르카르 전투(앗수르의 남진 방어목적) 원조 지원에도 불구하고]..반환을 미적거림 인해 아합은 여호사밧과 함께 [길르앗 라못 탈환] 원정에 나서게 되었고, 이 전쟁에서 아합은 전사하고(BC.853),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 건지게 되어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의 꾸지람을 기꺼이 감내하고 겸손히 인정했다)), 그후 국내질서 회복 유지-여호와 신앙 중흥 위해 전국 순례 등 전력 다해 내치에 힘쓰고 있었다(2차 개혁) ::: .1차개혁(대하17:3-9)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바알-아세라상을 유다에서 제거(산당 철폐는 아직!)_유다성읍 곳곳에 주의 율례와 법도 교사들을 세워 가르침 ==>..길르앗 라못에서 복귀,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의 꾸중 감수하고 회개, 시행하는바 2차 개혁 : 전국(에브라임~브엘세바) 순회, 신앙 권고(대하19:4) + Q 나라의 공의와 정의로 통치 추구 = 성읍마다 (하급)재판관 임명(5-7), 예루살렘 (종교-민형사 사건) 재판관(레위인+ 제사장들) 임명(8-11)....그러는 와중에  여호사밧의 남유다는 BC.852.모압-암몬-에돔-마온(모압은 아합 사망직후인 BC.852,독립하여 크게 세력을 급속히 확장, 암몬-에돔-마온을 규합하여 사해남동부를 건너와서 엔게디까지 이르러 침공...한편, 미온족속은 에돔+비에돔 족속으로 구성:: 에돔에서 사해 건너 서편 엔게디-갈멜-마온까지 거주 왕래)으로 구성된 다민족 연합 군대의 거대한 세력의 침입을 맞게 됨...여호와의 전 뜰에 모여 함께 기도드리는 가운데 레위사람 야하시엘에게 주의 영이 임하는바, 이것은 "여호와께 속한바  여호와의 싸움이니, 너희는 맞서 나아가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하나님 됨을 보라"하고 계셨다....((여호와의 영원한 인자하심 찬양하는!! 찬양대를 앞세운 여호사밧 군대는, 여호와의 전 뜰 예배 통해,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해 베푸신 주님 약속 말씀따라!! 예루살렘에서 질서정연하게 행진-진군하여 16km남쪽 지점, 드고아 성읍이 위치한 고지로 오르기 직전, 골짜기 들망대 지점에 도달하였다))

 [대하20:15-30....*15.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6.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17.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18.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19.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20.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23.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24.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25.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탈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으므로 각기 탈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이고   *26.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27.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다시 여호사밧을 선두로 하여 즐겁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적군을 이김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28.그들이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니라   *29.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30.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  [대하20:1-15...*1.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2.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   *3.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4.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5.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6.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7.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8.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9.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10.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돌이켜 그들을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11.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12.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13.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14.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에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그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15.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 #여호사밧의 승리 = 브라가 골짜기..(대하20:1-30)

.......#@브라가[=송축] 골짜기 valley of Beracah --요엘 서에 언급되는 '여호사밧 골짜기'와 동일한 지명일 수도 있지만... 이 지역은 여호사밧 왕이 사해 남동쪽에서 엔게디를 거쳐 드고아에 이른, 모압, 암몬, 에돔, 마온의 연합군을 격파한 후 하나님께 찬양하기 위해 백성과 함께 모인 곳이다(대하20:20-26). 그 위치는 예루살렘에서남쪽 16km, 베들레헴 남쪽10km 떨어진, 해발 1000미터 고지대에 (아모스선지의 고향) 드고아가 위치하고, 고지에 이르기전, 들망대가 있었던  그 골짜기(평지...모압동맹군 주둔지)를 "브라가 골짜기"라 칭함 .

1. 오직 주(主:God)만 바라보고 의지하였다(12절).

하나님의 ‘다윗의 언약’(삼하7:16)에 근거한 남 유다는 순수한 다윗의 혈통으로 하나님의 선민(選民:the chosen people)으로서의 정통성을 이어가게 되지만.... 이때 남 유다의 제4대왕으로 25년간 재위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던 여호사밧의 치적, 특히 그 중에 모압 등 4대 연합군의 침공을 대승리로 이끈 여호사밧의 모범된 삶이 기록된 본문의 말씀은 이 말씀을 접하는 신불신간의 모든 분들이 내우외환(內憂外患:troubles both at home & abroad)의 격동 속에서도 여호사밧처럼 우리 모두에게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유다왕 여호사밧은 일대 국난(國難:a national crisis)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이는 제 2차의 종교개혁을 실시한 후임에도 불구하고 모압, 암몬, 마온 및 에돔 족속 등 네 족속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침공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어려운 난관에 처하게 되면 두가지 중 하나에 머무르고마는 경향이 있다..①일찌감치 포기해버린다. 또는 ②주위의 다른 사람을 의지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나보려고 발버둥치고만 있다. -->결국 전심으로 여호와 사바오트, 엘 깁보르이신, 살아계신 영생유일무이의 전능 하나님의 도움을 입기를 잊어버리고 패배 겪는 어리석음을 경험한 후에야 뼈저리게 뉘우치고 만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오직 주만’ 바라보았다. [물론,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패하여 겨우 예루살렘에 복귀하였고 그 이후로는 비록 국내/사회 질서 확립 등 내치와 여호와 신앙중흥에만 전심전력 기울여 몰두하고 있을 당시였지만... 여호사밧에게는 116만이라는 대군이 있었기에(대하17:13-19). 스스로 대적할만한 능력이 전무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only Look at the Lord)라고 고백한 것, 이는 곧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지-무각, 무능-무력-연약함 인정함] = nothing-NoBody일뿐임을 전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자신을 부인하는 신실한 신앙고백이요, 특별히 모압 동맹군의 침입이 자신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았기에(대하19:2)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달은 철저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겸손의 사람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국제적이고 국가적이며 사회적으로 혹은 가정적으로 닥쳐오는 크고 작은 모든 위기는 오직 주만 바라보는 위대한 신앙의 힘으로 승리하게 되는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자이시요 주관자이시며 복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습3:17a) 아멘

2. 하나님의 언약(covenant)을 굳게 믿고 간구하였다(3-9절).

여호사밧 그는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며(대하7:6),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왕상22:43), 제사장 및 레위인을 유다 여러 성읍에 파송하여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게 하는 등(대하17:7-9) 여호와 신앙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케 하셨고,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치게 하셨으며(대하17:3-5), 유다 사방의 모든 나라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므로 블레셋, 아라비아 사람들이 예물과 조공을 바치기도 했었다(대하17:10, 11).

그러나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길르앗 전투에서 살아서 돌아온 여호사밧을 찾아와서 여호사밧을 책망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북 이스라엘과 아람과의 전투에서 북 이스라엘 아합왕을 도운 것은 악한 자를 도운 것이요,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한 것이기 때문임을 지적하자, 바른 마음과 태도로 자인하고 있었다.(대하19:2) .....이것을 기억하고 명심하고 있었던 바였기에!! 지금 받는 하나님의 징계인 모압 연합군의 침공은 오직 여호와만 바라보고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며 인도하시고 앞장서서 도와주시도록 주님 받으시기에 합당한 두려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결심했다. 그러므로 온 유다 백성에게는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게 했으며, 자신은 여호와의 전 뜰에서 회중 가운데 서서 기도했다. 

이는 전적으로, 솔로몬에게 약속해 주신 말씀을 따름이었다...솔로몬이 성전 완공 후 봉헌예배 시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했을 때 약속하신 그 응답의 언약을(대하6:12-42) 믿고 기도하였던 것이었다. 언약의 하나님은 지도자 여호사밧의 겸손한 믿음의 기도와, 유다 모든 백성들,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까지 합심된 금식기도를 즉시 응답하셨다.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내리신 하나님. 신약에서도 예루살렘교회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드로를 옥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며 부르짖는 자들에게 역사하심을 믿고 바로 그분께 하나되어 동행하기를 실행함이 그터록 중요하다. ===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아멘

3. 강하고 담대하게 전진하였다(14-23절)

여호사밧왕의 간구와 온 유다 민족의 합심된 금식기도는 지체되지 않고 여호와께서 즉시 응답하셨다. 레위 사람 선지자 야하시엘을 통하여 분명히 일러주심으로써 계시하셨다. ---①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②그들에게로 내려가라 ③그들을 맞서 [일심으로-담대히!!]나아가라 --- 여호사밧과 모든 백성은 이미 주신바!! 이 승리의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전진하였다.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감사 찬송을 부르며 나아갔다. 그 결과를 보라!!

찬송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시22:3)께서는 약속대로 그들과 함께 하셨다. 찬송이 시작될 때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치게 하여 완전히 패하게 하셨으니, 이는 암몬과 모압이 세일주민(에돔)들을 쳐 멸하고 모압 동맹군은 스스로의 욕심과 의심으로 분열을 일으켜 서로 치며 자멸하고 말았다. 이는 여호와께서 약속하신대로 여호사밧의 완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그러므로 그 속에는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으며, 구원의 약속이 있다.  여호사밧왕에게 완전 승리를 주신 여호와께서 더불어 주신 축복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은혜였다. --①전리품(재물, 의복, 보물)이 너무 많아 사흘 동안 거두어들이는 물질의 축복과 ②온 백성이 즐거워하도록 기쁨의 축복을 주셨고 ③이방 모든 나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함과 동시에 여호사밧과 그 백성에게는 평강의 복을 주셨다. 이는 완전한 승리요 하나님의 백성의 넘치는 축복이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신뢰함으로 전진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승리의 축복을 안겨주신다. 기드온이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승리하고 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21:31) 아멘.

-----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요 비전론(非戰論:a pacific) 제창자인 우찌무라간죠는 승리(성공)의 비결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스로 세상에서 이기고 하나님께 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여 세상을 이길 것이며, 스스로 의인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여 의인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 의지하여 지자(智者:a wise man)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용사가 된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 바로 그렇게!! 모압 등 네 나라의 연합군의 침공. 그러나 작은 나라 유다의 여호사밧왕은 승리했다. 그는 •오직 주만 바라보았다. •언약을 믿고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간구했다. •주신 말씀대로 믿고 전진했다.

---- 이처럼 여호사밧과 같은 신앙의 삶, 기도의 삶, 강하고 담대한 삶으로 영적으로 자칫 해이(解弛:relaxation)해지기 쉬운 삶의 모든 고난의 시기마다에, 영적인 방심(放心:absence of mind)은 금물이니...... 부디 최후까지 승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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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에서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내시는 바, 사르밧 과부에게서 엘리야라는 선지자야말로 살아계신 Q, 그분 말씀이 [영육 구원 을 가져오는 바] 진리(말씀 그대로 틀림없이 이루시는 바 신실하고도 진실함)임을 입증하였다고 확증 받았기에...이제, 비로소 Q경외하는 궁내대신 오바댜에게로 보내고 계셨다.

.....기억하고 명심하라!!, 오늘 그대 통해 이루고 계신 바  일하시는 주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사 친히 하나로서 그 가운데 거하실 그리스도의 교회,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지체들인 거듭난성도로 구성된 새예루살렘 얻기 위한 경륜 이루고 계심이라....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땅의황무함을..[391. 오 놀라운 구세주] [392.주여 어린 사슴이] [393. 오 신실하신 주] [425.주님의 뜻을이루소서]

......오늘날의 부흥이란 주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 안에서..."살아계신 거룩한 사랑의 주 하나님과 하나"를 참되게 사는 자 됨만 바라는...다름 아닌 [하늘로부터!!] 주께서 주님이심을 확증해주심= 주님만 구하며 그외의 주님 원하심 아닌 것을 다 살라버리는 소멸하는 불 내림 = 회개의 심령을 정결케 하심의 불 + 은혜의 큰 비 !!(주께로 돌이켜 완전한 하나됨에로의 회복-멈추지 않는 주님의 새롭게하심따라 새로와짐의 행보) 그 자체요 그것이어야 할지니!!...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솔로몬이 사용하던 민간력으로 제3년, 곧 초막절 즈음....가뭄기간은 실제로는 3년반, 사르밧과부에게 간지 제삼년 지난 시점으로 본다, 즉 성력으로는 제4년 개시 시점) 비로소!! 부활생명이 참되게 나타나려면 3년째 경과 시점이라야 했다...갈멜산 대결 위해!! 시돈-두로에서 3년 머묾, 당시는, 사르밧과부와 아들만을 만 3년 동안 목회중임  BC860]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 임함, 오늘 지금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부활승천 안에서 성도에게 분배되고 부어지심으로써 각자 안에 친히 살고 계심으로써 그분의 경륜 이루고 계시는, 초월적 하나님)께서 친히 "내니라"하며 일러주시는바, 분명-명확한 지시의 말씀!!, 그 임하심의 지도는 비춰 열어주시는 빛처럼 분명하니, 알게 하실 것을 신뢰하라

.....***..[말일이 아직 오지 않아서, 남북 모두 회개하여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는 바, 그 말일이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여전히)) 북한은 한사람의 패역 + 우상화 + 절대독재로, 남한은 수많은 [죄악-음란]우상숭배/이단-불신결혼/이혼/태아살인-음란/외도 + 낙태(임신기간에 무관하게 무제한 허용)법 + ("소수의 인권 보호"라는 허울 쓴-오히려 다수의 공공이익과 국가 존망 위태롭게 함에 이르도록 만드는 , 실제적 반헌법적) 동성애 허용 (조장) 및 (동성애 반대 표명을 절대금지관철목적) 포괄적 차별금지법 추진 등으로 입증되듯이, ---구원받을만한 믿음, [자기 목숨 아끼지 않고!!] 절대적으로 여호와 섬기는 생생한 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에 직면해 있음...여호와의 손이 짧아서가 결코 아님!! ]

2.  엘리야가 (즉각,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어찌보면 -인간적 측면에서는- 정말 구역질 나도록!! 피하고 싶은자)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그야말로!! 바알숭배 본거지 시돈보다 더 극악무도한 성읍이 되어버린바....Q.말씀 극도 고갈!! = 대조적으로 -아합보다 3년 후에 등극한 여호사밧이 등극한지 8-12년 경과 시점((그랜드종합주석의 견지에서 볼때는 남유다 여호사밧 등극 치세 초기))인데,  당시 남유다엔 기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음!!) 기근이 심하였더라..[영육간에, 바벨론포로들의] 영적 갈망 겨운 그 터져나오는 외침, 그 소리를 발하라!!,,, 주님 백성아!! 여호와께 돌아가자!!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궁내대신, 비서실장..3인자] 오바댜(= 아바드+야..여호와의 종)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오직 중심으로부터 일편단심/일심으로 Q 사랑함 배워 알고 광대하사 초월적인 그분의 두려우심 알기에 전심으로!! 따라 동행하며 그분 품에 머무르며 목숨 걸어야 할 때 아는]자라

.....(주께서 숨기신 존귀한 자.!!.느부갓네살 밑의 다니엘, 바사왕 아닥사스다 치세때의 예루살렘 총독 느헤미야, 바로 치하의 모세, 보디발-바로 밑의 요셉....참고 견뎌내고 버티는 바, [오직 주바라기의 동행/순종으로!! 의를 위해 핍박 받고 죽음까지 각오함] 순교만큼이나!! 이다지도 어려우니...혁명가의 삶보다 더 고달플 수 있음을 명심하라..) ::: **이들은 바로!!, 주께서 오늘 내게 해달라 부탁하신 지극히 작은 일 하나를!! 진정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로 만들어 드리는자들이니**

......여호와의 선지자들100명을 숨겨 공궤한 오바댜의 행동 시점은 아합과 이세벨이 분기탱천하여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북이스라엘 전역을 샅샅이 수색하여 여호와 신앙자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찾아 잔멸하던 시점,  아마도 엘리야의 가뭄 선포로 인해 본격적으로 가뭄이 계속 이어지고, 즉 적어도 엘리야가 그릿시내에서 6개월여 지내고 시돈으로 이동하고난 다음일듯...  

***여기. 오바댜의 행보는 결코!! 가변적 상황 윤리(=상황하 윤리, 상황하 논리) 따름의 행동이 아님에 주의하라... 상황하 윤리란(상황에 따라 상대적 최선 = 마귀적 권고 = 을 선택한다 함이니).....상황따라 스스로에게 최선으로 보이는 선택 그 자체란-- "살아계신 말씀 Q을 거역함이 될 수도 있음"이다.. 말씀하시는 Q, 그분을 절대 순종하기를 실행하라..궁금한 점은 여쭈어 보라..순종하기 위해 여쭈어야 한다!!....거역하기 위한 빌미 찾으려 묻고자 함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신다!! = 침묵하시리라!!.....절대기준이신 하나님, 유일무이한 참생명의 교통 열어주신 그분의 전능하심과 일하심을 부정함-포기함이니..절대적 주권자 살아계신 Q을 부정하는 것이니..[다른 선지자들은 여로보암을 떠나갔지만!!, 여로보암을 떠나지 않고  벧엘에 남아 있었던 늙은 선지자를 보았는가..그도 그러했지만..물론, 그 늙은 선지자의 행보는 부정적 측면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었지만, 주께 쓰임새가 분명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주님의 이끄심대로 순종하며, 오늘 만나게 하는 사람에게, 하게 하시는 그 일에 전심전력으로 목숨 걸고 올인하고 있었다........Q의 사명따라 받는바 각자 그 역할이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엘리야처럼 목숨 걸고 고생하는 역할만(?) 감당케 하실 수도 있고, *오바댜처럼 (애통해 하면서 Q 뜻 조용히 이루는 통로로 쓰실 수도 있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불신세상에서 고난 통과 하면서 빛을 발하게 하실 수도 있음

......"기록된 .말씀"조차도 오늘, 그대는 어떻게 읽고 듣는가에 주의하라..:::성경 안에 쓰여진 말씀 읽되, 풍부한 표현들의 창시자인 주님 심정을 다 드러내도록 참되게 읽으라!! Literal and figurative language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아합 몰래, 조바심 내며, 죽을 각오로]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아합의 최고 가치는 (단지) 잘먹고 잘사는 것 =다산-풍요에 있으니, 여호와든 바알이든 상관없다 <--말씀의 부재의 악순환 결과임] 짐승을[사람을 소중히 여김이 아니라, 자기 승용차 기름 확보 위함이었다]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Q 경외함으로써 산 믿음  발휘한, 그 오바댜를 주목하고 계신바, 주님 작정따라)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택자에게는, 모든 만남마다 주님의 작정 안에 있음!! --엘리야여, 너 혼자만 남아있는 것 아니다!!-기운내자!!]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주께서 오늘 주예수 섬김이인, 내게 해달라 부탁하신 지극히 작은 일 하나를!! 진정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로 만들어 드리는자로 살기..** 아내들이여 그대는 천적인가, 천사인가...(주님은, 그 복음으로 변화시킨 바 천적마다 천사로 바뀌게 하시며, 역경속에서도 보석 같이 빛나는 이들을 드러내시리라..

......[약1: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27 Pure and unblemished religion [as it is expressed in outward acts] in the sight of our God and Father is this: to visit and look after the fatherless and the widows in their distress, and to keep oneself uncontaminated by the [secular] world]

..**경건godliness = genuine spiritual relationship with the Lord, 하나이신 Q을, 다함없는 사랑!! 그분에 이끌려, 그분을 참되게 삶, 그 순간마다  온존재에 충만 넘쳐 묻어남 **

8.  그가 그에게 [위로의 말이라고는 한마다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주님 주신 말씀으로만]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9.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선지생도들 은닉 공양 사실 노출될까 천신만고중인! 살 떨리는 나날 겪고 있는 지금, 이세벨의 박해 강도가 약간 꺾여 조금 편해졌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을까-주와 하나!! 깨달음/인식 잠깐 놓친, 자연인의 그 반응 ="두려움-떨림"이었을까!!]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 문득, (자기의 그 어떤 죄로 인해!!) 죽음 당할 수도 있겠다는 한계상황의 위기 느낌이 엄습해 온바, 오바댜에게는 (마치 아이의 급사사건 통해 한계상황 직면한!!, 사르밧과부가 -자기 죄가 생각나서-두려움에 떨었듯이!!) Q의 사죄 은총 + 친히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 약해졌던걸까??]

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11.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3년반 전에 아합에게 나타나서 가뭄 예언하고서는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오므리가 죽고나서 뒤이어 등극한 아합은 시돈 엣바알(바알 사제로서 반역 모살 통해 왕이 됨?)의 딸 이세벨과 혼인, 혼수로 갈멜산 인근지역까지 손에 넣게 됨....그대신 [스스로 바알 선교사로 자칭하고 있던] 이세벨의 바알-아세라 숭배-전파를 공공연히 허용해 주기로 함으로써,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여호와 유일신 신앙에 큰 위기를 불러옴 = 선지학교 생도들 은닉/공양 사건(끝까지 숨겨졌음?) + 공공연히 여호와 선지자들을 잔멸함 인해 그들의 은둔을 불러옴/여호와 경배를 바알 제의로 대치.......오므리와 아합의 이러한 YHWH신앙 떠남 + 인본주의적 자행자지함 등, "여로보암의 길로 행함의 죄업 쌓임이 극에 달한바, 엘리야를 통한 "기근 재앙"심판 내리고 계심.

14.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짐짓 추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미소짓고 계신다)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월드컵 대표로 뽑혔어도, (성경에 쓰인바, 신혼 1년간은 전쟁에도 소집말라 기록되었다고) 신혼이란 바고 그 이유로  "나가지 않을래" 하는 것과 비슷한..다소 억지스러운 투정??..

15.  [내가 너를 안다, 잘 알았다, 네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하며 인정해 주는 엘리야와 Q]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오바댜, ((행동하는 산 믿음 참되게 살아내고 있는)) 이 사람을 보라!!]-----

###열왕기상 18장에 딱 한번 등장하는 인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궁내대신 오바댜의 모습을 곰곰이 기도하는 가운데 살펴보도록 하자.

..... 오늘,  우리에게 큰 질문이 하나 떠 오름을 느낀다.... 악한 불신세상에서 크리스챤이 과연 믿음으로, 성경대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을 싫어하는 불신자 상전에게 인정받으며 사는 것이 가능한가? 궁내대신 오바댜의 대답은 뭘까? 가능하다! 결코 쉽지않지만 가능하다! 이것을 오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궁내대신 오바댜의 직장환경이 어땠는가를 보도록 하자... 1,2절 오바댜는 아합왕의 신하, 궁내대신.. 궁내대신이란 궁중의 일을 총괄하는 대신.., 한편, 아합왕은 하나님을 대단히 싫어하고,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왕,. 총 22년동안 통치했는데 바알신앙 신봉자로 살고 있었다. 왕비가 이세벨, 시돈의 공주, 시돈은 바알숭배 종주국. 이세벨이 아합에게 시집올 때, 바알의 제사장들을 8백명 넘게 데리고 와서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의 활동 배후 세력으로 자처하고 있었으니... 오바댜 혼자 여호와 신앙생활 하기에는 최악의 상황인셈....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와서 (스스로 바알-아세라 선교사로 자임했던바) 자기의 미션이, 여호와신앙을 박멸하자, 씨를 말려버리자, 이것이었고, 그래서 이세벨이 왕비로 있을 때 여호와의 선지자들에 대한 핍박이 크게 벌어졌기에!! 그래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3년간 하늘을 닫으셨으리라 여겨지는 것은 합당한 추론일터였다. 

하늘을 닫았다는 것은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 기근 연 3년이니, 오늘날로 말하자면 경기가 장기침체 상황, 2절에 그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했다. 땅이 쫙쫙 갈라지고 메마르고 시냇가까지 다 말라붙었다.. 북이스라엘 어디에도 빗방울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 모습이니까 오바댜가 살았던 시대는 영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기근상태였던 셈.... 오바댜에게 직속상관이 누군가하면 아합왕, 이세벨, 그런데 상관이 하나님을 너무 싫어한다.... 아합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안믿은 게 아니고, 본래 하나님을 믿었다가 멀리 떠난 안티 크리스챤인 셈이다. 

오바댜의 직장환경은 상당히 암울했다. 경기침체도 심했지만, 특히 신앙생활 하기가 너무 어려워진셈.... 이런 상황에서 성경이 오바댜를 뭐라고 소개했는가... 3절 오바댜는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사람!!? 아니 뭐라고요?! 시대가 아주 악하다 해도,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살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아주 싫어하는 아합왕의 신임도 받고 살았다! 성경은 이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오바댜 궁내대신은 진실로!!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믿음으로 살아요. 첫째, 믿음으로 사는 자는 악한 상전에게 신뢰를 받는다! 둘째,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자신의 것을 쏟아부어 하나님나라를 세운다!---

첫째, 믿음으로 사는 자는 세상에서도 신임받는다.

다같이 3절을 읽어보도록 하자. 오바댜라는 사람에 대하여 참 놀라운 설명이 나온다. 오바댜는 왕의 확실한 참모이자 궁내대신.... 궁전의 모든 살림 책임을 맡은자이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부터 계속되는 반란과 암살로 궁중이 바짝 긴장상태였다. 그러니 궁내대신, 경호실장, 이런 사람은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지않고는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없을텐데 오바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를 깊이 경외하는 자. NIV에 devout believer, 헌신된 성도라고!!. 3년 기근이 나라에 계속된 싯점에서 아합왕은 오바댜를 찾고 있다. 왜 오바댜를 부를까? 가장 신임하니까! 아합왕에게 있어 그 나라의 위기상황을 깊이 논의할 사람이 누군가 했을 때 그 사람이 오바댜라니....그러니까 3절을 보면, 신자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면서도 얼마든지 악한 상전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다. ...보라,잠언 3장에도 나온다.. 가장 큰 축복이 하나님과 사람앞에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하고 계신다. 여호와를 깊이 경외하지만, 동시에 아합왕에게 깊이 신임을 받는 사람이 오바댜! .....진실로!! 세속적 세계에 흠뻑 빠져 있어서 YHWH신앙, 그 절대신앙을 나몰라라 하며 살아가기에 바쁜 나머지, 마치 이 세대의 세속이 하늘나라인 것처럼 살고 있는 세속속의 거짓그리스도인으로 가득찬!! "세상의 대안이 되는 사람"이다!!. 불신자들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도 철저히 믿는, 그런 사람이 대안이 되는 사람.... 이집트 바로왕 앞에 요셉, 바벨론왕 앞에 다니엘, 페르시아왕 앞에 느헤미야 등을 보라!!, 다 불신자 상전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다... 오바댜도 그런 경우인데!!,. 그들은 왕이 긴급하고 위급한 나라의 일을 의논코자 할때 왕의 마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합왕은 나라경제 문제로 고민중이었다. 3년씩 계속된 이 위급한 기근을 어찌 해결할꺼나, 고민을 하는데, 누가 떠올라요? 아! 오바댜! 그래 이 친구를 불러서 상의해보자. 그러면, 오바댜는 무슨 대안이 나오겠지! 왜 오바댜인가? 무엇 때문에 오바댜인가?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의(그가 꼭 붙들어 삶의 근간 가치 삼은바 여호와신앙에서 비롯된, 범사에) 신실함이었으니... 오바댜가 궁내대신으로 평소에 보여줬던 신실함은 바로 그것이었다.

......오바댜가 아합의 신임을 받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합의 신임도 받는 이 일이 가능하단 것이다... 무엇이 있으면? 신실함! 악한 세상에서, 거기서 성도가 대안적 인물이 될 수 있다! 믿음을 버려야 되는가? 아니다. 다니엘, 앞으로 30일간 기도하는 자는 사자굴에 집어넣는다, 왕의 칙령에 도장이 찍힌 것을 보고, 기도를 한달 쉬어야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하고 있다.... 다니엘 오바댜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깊이 경외했다.... 그리고 불신세상의 왕들에게 두터운 신임!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이다. 비결이 뭔가? 그것은 성품과 실력, 겸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사람 성품을 깊이 자주 관찰해 보고서는 자기에게 가장 도움될만한 신실한 사람을 찾아내고, 또 정말 그러한지 시험해보고 선별해서 그제서야 평생 옆에 둘 자로 기용하는 법이다.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성품이라는 것은, 오래 겪어보면 그 신실함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법이니... 악한 세상에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천만의말씀이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을 처음에는 핍박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사람들이 누구를 찾을까? 믿을만한 사람이다. 신실함이라는 성품, 하나님의 성품, 신임받는 비결인것이다....거짓에 치우치지 않고 성급하게 일처리를 하지 않고, 자신의 유불리를 따져 유리한 길로만 가지 않고, 불이익이 오는 시간에도 묵묵히 견디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오바댜는 아합왕이 오랫동안 지켜볼 때 그런 사람이었으니... 이게 중요하다.. 세상은 지금도 사람을 찾는다,. 하나님도 지금 사람을 찾고 계신다. 신실한 사람! 믿을만한 사람, 신실함은 한결같은, 일관된, 믿을만한, 안좋은 환경에 마음이 바뀌지 않는, 그런 사람, 그 사람은 신뢰의 저금통장에 잔고가 쌓이고 있는것이다. ........실제로 AD 1세기부터 4세기 초까지, 복음이 로마제국의 상층부에 복음이 들어가게 된 중요한 통로가 크리스챤들의 신실함 때문이었다. 로마의 귀족장교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믿는 자매의 순결한 태도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내로 받아들였던것은,. 로마 장교들의 경우 먼나라에 원정나갔다가 돌아오는 긴 시간동안 로마 불신 여자들은 정조를 지키지 않고 방종의 시간을 보내는 반면, 크리스챤 여자들은 남편을 기다리며 정조와 절제된 삶을 살더라는 것이었다. 크리스챤들은 믿을만한 하다!

===또 하나의 비결은 실력 구비함이니,. 오바댜는 궁내대신, 궁전을 책임맡은 사람이었다. 왕이 재정문제, 경제문제가 생길 때 가장먼저 오바댜를 부를 정도였다... 실력이 없는 부하직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면 그 사람 윗사람에게 참으로 부담스럽다. 민망한 경우가 뭐냐하면 추천을 해달라 부탁하는데 그 사람 자녀가 실력이 없다면.... ‘저기 우리 애좀 써주시면 안될까요? 댁의 아이가 영어가 어느정도 됩니까? 영어가 가장 취약점이예요. 그럼 무슨 자격증이 있나요? 이제 앞으로 따야죠. 그럼 운전은 합니까? 지금 필기시험 준비!! 그럼 뭘 잘하는데요? 시켜만 주면 열심히 할겁니다! 정말 서로 민망하지않을까.... 잠언에 네가 자기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앞에 설 것이요 비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이말은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 하는 일에 실력을 키우는 것과 동의어란 뜻이니.... 자기 일에 근실해야 함을 말한다는 것이요,. 뭘 하느냐 보다, ((아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그가 그 일에 숙달이 되었는가?..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바댜는 아합 왕이 볼때 궁전책임, 나라 경제 이 문제에 있어서 다른 인물이 생각나지 않았다는 것,. 5절에 보면 아합은 오바댜와 함께 나라를 살리고 (어찌보면...) 경제회생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 땅의 물 근원을 찾아 두사람이 나선 것이다. 아주 지독한 상사 밑에서 일하면서도, 내가 마음으로부터 존경이 안되는 상전 밑에 있으면서도 그 상사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것이다. .....저 친구의 전문성과 실력을 잃으면 내가 손해야! 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인정받는 전문가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이들이여!! 신실한 성품, 근실한 실력을 만들고 키워나가셔야만 하리라... 그러면 이렇게 악한 시대에 악한 상전의 신임과 신뢰를 받는 오바댜로 살 수가 있다.

둘째,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 

4절 다같이 읽어보라. 3절에 오바댜는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4절에 오바댜에 대하여 한가지 더 설명을 덧붙이고 있으니... 이런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오바댜의 이 모습을 하나님이 매우 의미있게 보셨음을 의미한다. ......오바댜는 위험하고 비상한 결단을 하고, 매일 매일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한 시대에 남다른 결단을 하고 사는 법.... 그는 내가 이 악한 시간에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뭘 할까를 고민하며, 때때로...주님 주시는 감동따라 순종함으로써 목숨을 거는 시도를 하기도 하는 법이다.... 오바댜가 가만히 보니까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 모두를 학살하는 계획을 세웠으니....오바댜가 자기의 위치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어떻게 활용하였고 기여하였는가? 이세벨이 여호와신앙을 공공연히 핍박하기 시작하여 이윽고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잡히는대로 죽이는 처참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때 내린, 목숨 건 오바댜의 결단, 내가 가진 것을 총동원하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살리자! 아주 위험한 일이었고, 혹시 발각되면 오바댜는 이세벨의 손에 죽을수도 있었지만.... 자기 목숨이 끊어지고 자기 가족 전체가 몰살당할만큼 위험하고 섬뜩한 시간이었으리라...(상상컨데) 그는 자기 가족, 자기 부하들, 모두 모아놓고 이 말을 했을것이요,. 놀랍게도 오바댜의 가족모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오바댜의 결정에 기꺼이 따르고 그의 밑에 있는 이들 모두가 이 은밀한 계획에 기꺼이 순종하여  목숨을 기꺼이 걸고 있다...그리고 오바댜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에게 기별하여... 군사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선지자들을 오십명씩 두 그룹으로 나눠 산속 둥굴에 숨기고,. 음식을 배달아였다.. 사람을 살리는 이런 엄청난 일은 대단한 결단이 없으면 할 수 없는법이니,. 오바댜같은 궁내대신의 위치가 아니면 시도하기 어렵고, 하고싶어도 할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50명씩 나눠 백명을 이동시키려면 자신의 권력과 모든 인맥을 동원하지 않고는 시도할 수 업었을것.... 얼마동안인지 모르지만 나라 전체에 여호와 신앙을 박멸하고, 선지자를 모두 잡아 죽이는 핍박이 한두 주에 끝나지는 않았을 것.... 그들을 산속 굴에 숨기고, 자신의 집에서 음식과 물을 배달하려면 자기 재산, 자기 집 식구 전체와 하인들이 모조리 목숨 거는 일에 동원되지 않고는 불가능하였으리라... 이것은 오바댜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악한 시대에 내가 가진 것들을 동원하여 사람을 살리는 것을 증언하고 있음이다... 하나님의 일에 몸을 사리지 않는 모험, 이것을 기꺼이 즐거이 쏟아붓는 실제적 헌신이 뒤따르는 것이다...

5절을 일도록 하자... 오바댜가 이 일을 시작하여 한참 진행하여 가고 있는 도중에 아합왕에게 긴급호출을 받는데,... 지금 궁전으로 급히 들어오라! 전갈을 받은 오바댜와 그 가족들과 그 부하들, 얼마나 두려웠을까! 다들 가슴이 철렁 했을 것.... 아. 혹시..탄로난것은 아닐까?! 오바댜가 궁전으로 들어가 왕을 뵐 때에 안색이 어떠했을까? 물론, 그때 분명 왕의 안색도 어두웠으리라.... 위기에 빠진 나라 기근문제 어찌 해결할 것인가! 근심하니까 얼굴이 어두웠을 것이니... 그날 오바댜는 왕궁 들어갈 때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으리라...7-15절까지 찬찬히 읽어 보라. 나중에 엘리야를 만난 오바댜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그 절절한 심정 표현이 나오고 있다.... 엘리야가, 오바댜, 당신 왕에게 가서 엘리야가 여기 있더라고 말하라고 하자, 너무너무 무서워하면서 내가 엘리야 당신을 만난 사실을 왕이 알면 난 죽습니다! 그러니까 오바댜는 두렵지 않은 게 아니라, 그야말로...목숨을 내놓고 한 것이요, 뭔가 댓가를 지불하고 있는것이니!!,.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인 것이다.

.......오늘 오바댜의 길이 있으니,.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를 받는 줄 믿는다.

첫째로, 악한 상전에게도 신임받을만큼 계속해서 신실함을 저축하시라.. 오바댜는 아합에게 절대신임을 받을만큼, 신실함과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여호와를 깊이 경외하는 사람은 그렇게 사는법이다... 나는 내 주변에서 믿을만한가? 어느 정도인가? 이것을 한주 내내 생각해보시라

둘째,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몇 명을 살리기 위해서 내 무엇인가를 쏟아붓고있나?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내가 얼마의 재산이 있거나, 남들이 갖지 않은 기술과 재능과 경험이 있을 때, 그것을 갖고서 내가 어떻게 쓰는지 자신을 살펴보시라.... 오바댜를 기억하시라.... 연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죽을 사람을 살리는 것일지니... 믿음의 공동체를 살리는 일에 내것을 쓰는가. 가진 것이 많거나 적거나,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작은 것에 충성되는법이다. 작은 것에 연습을 해야 큰 것도 할 수 있는법이다... 믿는 내가가진 것이 주님 나라를 위하여 뭔가 쓰여지면,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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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오바댜가 [이에 힘을 얻고 담대히]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다급히, 서둘러]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문제아, problem maker]이스라엘을 괴롭게[아카르..= 시끄럽게/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적반하장!!..네탓!!..세상의 실상)

.......@@아카르) 소란케 선동하다, 자극하다, 화를 끼치다, 괴롭히다

아카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자극(선동)하다, 혼란(소란) 시키다, 불안하게 하다, 화를 끼치다, 괴롭히다'를 의미한다.

아카르는 개인 행동의 사회적 차원의 영향(카오스 이론에서의 나비효과 처럼)을 반영한다. 어떤 사람의 부정적인 행동(이 단어는 항상 부정적 개념을 지닌다)은 자신과 타인에게도 해로운 영향력을 끼치는바 다른 사람 혹은 전체 민족을 '괴롭힐' 수 있으며, 그리하여 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나 인간의 심판을 초래할 수 있다.

1. '화를 끼치다, 괴롭히다'를 의미한다.

(a)  시므온과 레위의 살인 행위는 야곱으로 가나안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하였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4:30).

(b)  아합과 엘리야는 상대방이 이스라엘에 현재의 고통(가뭄)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면서 서로를 비난한다.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하였고(왕상 8:17), 엘리야는 아합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 하였다(왕상 18:18).

(c)  아간은 여리고에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하는 명령을 무시하고(수 6:18)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패배를 가져다 주었다(수 7:25, 대상 2:7).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아간에게 그 죄로 인하여 고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수 7:25).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아간을 제거하셨다.

(d)  사람은 자기 집에 해를 끼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괴롭힐 수도 있다.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하며(잠 15:27), 자기 집을 해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다(잠 11:29). 잔인한 사람은 스스로를 해친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잠 11:17).

(e)  입다는 자기 딸에게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라고 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삿 11:35).

2.  '자극을 받다, 화가 나다'를 의미한다. 시 39:2에서 근심이나 고통이 자극을 받는 것, 즉 더 심해진 것을, 잠 15:6에서 악인의 소득은 화가 되는 것이다.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참 Q- 유일무이하신, 영생자존의 창조주]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헛된 기복 우상-사람이 지어낸 거짓신 곧]바알들(진정 명심할 바!!, 삶의 모든 차원과 영역에서...그 어떤 기복신앙적 흔적/요소/잔재가 남아있는지를 점검하여 JC십자가 능력으로 잔멸해야함)을 따랐음이라

19.  그런즉 [서로 여기서 더 구차히 갑론을박 필요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본론-핵심만 얘기합시다 :: 영생하시는 분.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이 과연 누구인지, 즉 바알인지 아니면 여호와인지 가려내고 처단하여 온 백성으로 추구하며 따르게 할 바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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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 산

갈멜 산은 길이 약 24㎞ 되는 일련의 구릉지대.. 서북단은 지중해로 돌출한 갑(岬)을 이루고, 동남단은 사마리아 산지와 연결되는데,. 그 갑 부분은 동북쪽이 험하고 남서쪽은 느릿한 완경사를 이루고 있다. 팔레스틴의 해안 평야를 가르는 쐐기모양의 장벽과 같이 북쪽에 악고 평야, 남쪽에 샤론 평야 사이에 위치하며 갈멜산 북쪽 기슭을 따라 기손강이 흘러간다..   갈멜은 하나의 긴 산맥 전체를 일컫는다. 갈멜은 폭은 10km, 길이는 대략 26km로서 하이파 부근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비스듬하게 길게 퍼져 있는 산맥을 통틀어 지칭한다. 산맥 북쪽에는 스불론 평야가 있고, 산맥의 오른쪽에는 이스르엘 평야가, 산맥의 왼쪽에는 유명한 해안 쪽 샤론 평야가 있는, 삼면이 평야로 둘러싸인 풍요로운 곳.  갈멜의 이름은 ‘카르멜’로 ‘포도원’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케렘’과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에서 유래하는 단어[ = Q의 비옥한 포도원]이다케렘은 포도원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비유적으로는 땅의 ‘비옥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하이파 부근 갈멜 지역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비교적 비가 많은 오는 지역이어서, 년 평균 800mm 정도의 비가 내리고 있다. 따라서 갈멜은 자연적 조건이 좋은 곳으로서 아름다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갈멜 숲'은 유명하다. 높은 지대에는 올리브와 포도가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샤론 평야, 레바논, 바산, 길르앗과 더불어 이것들의 결실이 풍요로웠다(사 35:2, 렘 50:19, 미 7:14).  문학작품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아 7:5, 사 35:2). 또 샤론, 레바논, 바산 등과 함께 이와 같은 국토를 주신 분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특별한 은총을 나타내는 팔레스틴의 한 지역으로서 기록되고 있다(렘 50:19, 미 7:14). 하나님의 심판은 풍성한 갈멜을 마른 들로 만드신다(사 33:9, 나 1:4). 또 갈멜산은 지중해로부터 이동한 비구름이 산중턱에 걸림으로써 비가 내리는바, 팔레스틴에 처음 우기의 시작을 알리는 땅으로서 알려져 있다(왕상 18:41-45).

......바알-아세라 숭배는 [페니키아의 두로-시돈이 그 중심지] 전형적 기복 신앙의 가나안 토착 종교였는데, 음란한 교접이 포함되는 제의가 큰 특징... 즉, 바알(주신...폭풍우를 주관한다 함)-아세라(바다를 주관하는 여신, 바알의 아내)의 교접이 잦을수록, 성적 흥분이 최고도에 도달하여-사정이 충분할수록 (한해 작물 수확에 직결되는) 강우량이 많게 된다는 속설이 통용되고 있었고, 내려오는 그 습속따라 신전을 방문한 남자들의, 신전 창기들과의 공인된? 교접을 신전 사제들은 적극 권장했는데, (때때로 남자사제들은 주문을 외면서 춤을 추며, 또는 자기몸에 피가 낭자할만큼 상처를 내어  자해함으로써 바알 교제의 황홀경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 까닭은 남녀의 성적 흥분이 최고조에 달한 교접 순간이야말로 직접? 보고 있는 바알-아세라를 그만큼 더 자극-흥분-사정케 함으로써 더 많은비를 오게 하려 함이었다.. 

......[왜, 갈멜산에서 대결이 펼쳐졌는가] ....거리상으로 보자면!!, 시돈과, 동시에 사마리아-이스르엘에서도 가까웠다...YHWH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은혜, 풍성한 수확의 대표적 고장으로 ((동풍은 초목과 곡식을 말라비틀어지게 하지만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풍은 습기가 많아서 제일 먼저 갈렘산에 부딪혀서 비를 뿌린 다음에야 팔레스타인 전역에 비를 뿌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점....실은, 바로 그 갈멜 산상에는 여호와의 제단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아합과 결혼한 [자칭 바알 선교사] 이세벨에 의해 여호와 유일신앙, 즉 여호와 경배 제사를 폐하고 대신 바알-아세라 제의를 강요하면서 여호와의 제단은 파괴되고 돌보는 이 없이 그냥 버려진 상태였던 것...[그래서, 바로 그 갈멜산상에서 누가 야곱, 곧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인지를 가리는 대결이 펼쳐진 것임]-- 바알 대 여호와의 대결 때, 엘리야가 희생을 드리기 전에 여호와의 그 제단을 [야곱의 12아들들 수 대로 돌기둥을 세워 수복하였는데,(왕상 18:30). 엘리야의 기도외 함께 하늘에서부터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서 제단의 돌들까지도 다 태워 열납하심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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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아합이 이에(절호의 죽일 기회가 왔다고 내심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시돈과 사마리아의 중간지점...지중해 구름이 맨처음 갈멜산에 걸려서 비를 내림)으로 모으니라

......엘리야는 ((그 자신이 목숨걸고 섬기는 바)) 주님의 설득 대상이 백성임을 분명히 한다!!

.......오직 진리의 성령 따라 행하는 교회라면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과 윤리는 이미 한참 넘어선 상태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21.  엘리야가(그의 안에 계신, 말씀하시는 Q께서 친히 함께)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파사흐. 절뚝거리다. 방방뜨며 뛰놀다.[마치 야곱이]발을 절뚝거리는것처럼..왔다갔다, 취한자 처럼 비틀거리다]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일편단심. 일심으로, 화끈하게, 전심으로]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마음에 확정-결단하지 못했기에 "무응답"....우상들의 특징이자, "긴가 민가" 세상유익따라 눈치만 보는 우상숭배자들의 특징임]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이세벨의 박해때) 오바댜가 숨겨주었던 일백명 + 여호와께서 남겨두신(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7천명이 아직 여전히 있음 :: 그대는 홀로 남아있는 것이 결코 아니요,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방관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며 함께 체휼하시며 친히 일하시는 분이시다!!

.......갈멜산에 소집된 바알선지자는450명, 아세라선지자들은(임마누엘 주님과 함께 하는 엘리야를 경시하여) 참석하지 않았음..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문제 안에서는 결코 문제를 볼 수 없음.. 오직 문제 밖에서 봐야 진단 가능함...결국, 예배-경배의 참된 시간은 [보좌에 앉히셨음 알고!!]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CJ 곁에서 + 영원 안에서!! 전개되어 가고 있는 현 시점 상황을 보고 알게 되는 것.. 그렇게 볼 수 있을 때라야 그 의미와 나아갈 바를, 그 실상을 파악 가능함..@@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실은 거짓신 바알을!!...사람을 조롱함 아니다!!]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신앙은 용기(::진정한 용기, 그것은 바로 근원적 사랑이신 Q, 그분이 공급하시는 바로 그 사랑으로!! 죽기까지 사랑함의 초월적 용기이다!!...날선 칼/영속적 날선 칼, 그 기름부음 + 인내(칼집)의 양면성이 핵심인바....절대적으로 합당한 때에 명하시는 주님 명령따라 쓰여야 한다..((약4:7-8..*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꾸짖으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우상 숭배 특징은 ..고해뿐아니라, .자살에까지 이르는 자해 행위도 서슴지 않음]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30. [그 누가!! 목숨걸고 주님 만나기를 구하는 자 누구인가..오늘, 지금, 바로 그대가!! 그렇게 Q구함으로 예배하여야 함을 기억-실행하라!! *영육간의, 무너진 예배 제단 수축 + 합당한 전심의 참된 예배/ Q께 돌이킴-만남 -->만나주사 응답하시는 Q = [전심으로 축복!! 신용+정직+상대방의 최상/최선의 유익/구원 추구] -->Q 뜻 이룸*] 

엘리야가(그의 안에 계신, 말씀하시는 Q께서 친히)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속고 기만당하여 상처받고 범죄한 사람은 이미 마음(Q 섬김 위한, 마음의 제단)이 무너져 있는 상태이기에 !!. 오직 언약하신 말씀따라!! 믿음으로 한걸음 나아가서 수축해야 함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철저히!! 오직 레위기의 제단 수축 규례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창32:28)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약15리터)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갈멜산 아래는 지중해 바다, 그 바닷물을 떠왔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해안절벽지형이다)..물론, 갈멜산 근처에는 연중내내 (용천샘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갈수기에조차도!!) 물이 마르지 않는 기손시내가 있었는데, 거기서 떠왔을 수도 있다...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백성들이 개인식수용으로 지참하고 있었던 물이라고 봐야한다!!]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심지어!! 그대 목숨 위해 남겨둔!!, 마실 물조차 아끼지 말고 부어드리기를 :: 그대와 주변 사람들의 삶의 전후 사정 상관 말고=사르밧 과부처럼!!= 이순간이 절체절명의 마지막 기회, 목숨걸고!! 주님 신뢰함으로써 아낌없이!!!))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4x3=12...4통씩 3번, 그대로 시행하고 있음--바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 임재가 중요!!)

---그대여!! 생명 걸린 일에 있어서는 체면이 전혀 중요한 것 아님을 알라....주와 함께 하는 삶, 오직 그것만이 최우선인바, 삶의 우선 순위 따르라, 무거운 것 다 내어버리라--다른이들의 눈을/평판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 솔직/정직하라--자동차?, 운행 보류하라-- 자금 사정 풀릴때까지!!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에스드렐론 계곡 따라 이스르엘 평야로부터 갈멜산 아래를 돌아 하이파 만쪽으로 흘러 지중해로 유입되는 기손강의 수원지는 엔-간님[=예님]이 주류이다((성령의 생명 강수를 누리라!!)), 그러나 갈멜산맥 주행방향으로 (땅 밑을 흐르는) 저류들[샘]이 격자모양 이루며 기손강으로 유입되고 있다(.와디 엔-누스프(en Nusf), 와디 무웨일리(Muweili), 와디 엘-멜렉.).....우기에는 범람하여 넘칠 만큼수량이 풍부하지만 건기에는 물이 줄어들면서 폭이 대개1m이하까지로도 좁아지기때문에, [기손 시내로 부르기도 할 정도로 건기근때는 흐르는 수량이 줄기도 하며....당시, 극심한 기근에도 저류들이 유입되어 흐르고 있었기에 식수로 쓸만큼까지는 안될정도의 실개울이 되어 흐르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무크라카 갈멜산에서는 50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일종의 와디"의 특성을 보이지만 지중해로 유입되는 강이요, 요단강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2대강으로 꼽고 있다...주변의 중요한 성읍들은 욕느암-다아낙-므깃도가 있음....하여, 드보라-바락 때는 폭우로 [하나님의 강 = 기손 강이!!] 진창을 이루어 곁에 주둔했던 야빈-시스라의 병거를 이동 불가능 상태로 만들어 [결국 시스라는 걸어서 나약한 여인에 불과한 야엘의 장막에 들어가게 하여 처리하심으로써]승리케 하셨었다(삿5: 19, 21, 38. 시83:9, ), 

...어찌보면!!, 하늘에서 불이내려온다 하더라도 제단에는 전혀 불이 붙을것 같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졌음!!, 그러나 주님은 창조주-전능 하나님이시다!!.

...그대여, 생명을 내놓되, 오직 그대 자신과 구원 받아야 할 사람만 바라보고 그대의 목숨 내놓아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라, 주님께 도전해 보라!!..나아온 이들마다 먼저 주님께 철저히 돌이킴(관계 회복) ==>각자마다 주와 하나됨, 비로소 제단 수축(화해-연합한 하나로 상호 연결됨, 공동 기도) ::: 아낌 없이 전적으로 (가장 귀한 것) 아낌없이 부어드림으로써!! -->오직 주님 이름만 부르며, 응답하시기를 구하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제단으로)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기적 보이심의 목적은 살아계신 Q, 곧 말씀의 비추는 빛 아래에서 자기를 돌아봄의!!, 회개를 위함인것을 명백히 선포하고 있음...회개/자기 죄를 보는 것 없는 것은 전혀 무의미함을 명싱하라!! --몸을 치심으로써, 형제나 자매의 몸 아플때 찾아가서 Q의 일하심을 선포하고 나사렛 JC이름으로 진정 마음을 주께 돌이킴의 참 회개 통해 주님 자신의 살아계심 영광 나타내시기를 간구하라!!--나머지는 오직 주께 맡기라!!]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히12;29..소멸-정결케 하는)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 여호와의 제단까지 (우상 삼지 말도록) 소멸시키심 => 거듭난 성도, 참되게 믿는 지체 영혼마다 친히 내주하시는 바, 진정한 제단, 하나 이신 그리스도-성령,  부활승천안에 계신 CJ 대망하도록!!]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진정한 불이란, 다름아닌 여호와 Q이 살아계시며 영원히 함께 하실 주님이심 자각하고 돌이켜 하나됨 외의 것마다 처리하고 그분과 하나되는 것]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모든 죄 중에서 Q을 대적하는 죄가 가장 악하고 극히 혐오스럽기에 Q을 대적하는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잡으라- 죽이라 명령하고 있음을 진실되고 참되게 이해하고 실행해야 함!!

===가뭄이 그침

41.  ○엘리야가 [고집스레, 기근 임한 까닭과 해소됨의 의미에 대해 = JC영접함에로 나아감의 초청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는-해석이 안되는]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은혜!!..."여호와께 돌아가자"고--Q의 긍휼로 [사탄마귀에게 속아넘어간]원수를 초청하고 있음)가 있나이다

........절대절명의 중보기도 해 온 사람에게는 그 전조 사인이!! Q 응답하심임을 아는바!!, (다른이들은 결코 모름) 순식간에 오는 응답을 절대 놓치지 않음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묵상 = Quiet Time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Question time이라야 하리니!! 반복적 말씀 읽기(소리내어) + 말씀따라 적용하고,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함 -- 수년후에라도 반드시 이루심..**명심하고 기억할지니...내가 진짜 신자라면. 거듭난 참신자인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주변에 반드시 있음을, 오직 사랑의 진정한 용기와 인내로 대하라

........절대절명의 중보기도 해 온 사람에게는 그 전조 사인이!! Q응답하심임을 아는바!!, (다른이들은 결코 모름) 순식간에 오는 응답을 절대 놓치지 않음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갈멜산 정상에서 이스르엘성읍 입구까지직선거리 26km)아합 앞에서 [빗길 진창에 왕의 마차 막히지 않도록 안내하며]달려갔더라...한편, 갈멜산 정상에서 사마리아까지 직선거리는43.5km임, 이스르엘과 사마리아 사이 거리는 38km..

.....갈멜산 역사까지 주님만 바라보는 엘리야....영적인 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나도 좀 하지 않았나요..하면서) 너무 빨리 변질될 수 있다. 3.5년동안 [그 어떤 능력 주시더라도] 주께 대한 마음이 변치 않았던 엘리야, 그리고 사무엘...주님 영광만 바라보고 달려왔기에 끝까지 사용하고 계셨다..

.....이스르엘은*Q이 뿌리신다*는 뜻, 평야지대 서북단은 헬카트, 동북단은 다볼산,  동남단은 벧하간, 비옥한 골짜기와 평원지역으로 이곳은 사통발달된 교통 요지여서  고래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거기 이스르엘 성읍이 있었음..사마리아까지 직선거리는 38km. [이스르엘성읍은 사마리아성읍 기준 북북동쪽, 길보아산 북서쪽 기슭에 위치함, 근처에 하롯샘이 발원하여 동편으로 흐르는 하롯강은 요단으로 이어짐, 길보아산 서쪽으로는 기손강이 발원하여 흐름] 갈멜산정상-->이스르엘성읍 직선거리=26km ...갈멜산~사마리아성읍 직선거리 43.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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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산 중심, 산지와 평야]

이스라엘은 지중해에 접한 해안선 약 270km를 차지하고 있다. ..갈멜산 중심으로 볼때...동북쪽은 악고평야, 동남쪽은 이스르엘 평야, 남쪽은 샤론 평야,  남서쪽은 블레셋 해안평야...이스르엘 평야 중심으로 볼때 그 상부는 갈릴리산지, 하부는 사마리아 산지라 할수 있다

해안 평야는 해안선에 접하여 그 폭이 북은 10km 미만이며 남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넓어져서 32km가 되는 지역도 있다. 

이 평야는 토사가 퇴적해 형성한 평야로, 극히 단조로운 전체 해안선에 걸쳐 사구((沙丘)가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지중해 영향으로 강우량이 비교적 풍부하고 잘 발달한 해안 도로를 따라 고대로부터 큰 도시들이 건설되어 이스라엘 전체 인구 절반가량이 해안 지역에 살고 있다. 

해안 평야 지역은 모래와 사암이 대부분이어서 농작물 재배가 잘 되고, 특히 포도, 사과, 오렌지 등 과일 재배에 적합하다. 

이곳에는 키부츠(국영농장)와 모샤브(개인농장)가 많이 들어서 있다. 해안에 인접한 평원은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악고 평야, 이스르엘 평야, 샤론 평야, 블레셋 평야로 이어져 있고 고대로부터 매우 기름진 곡창지대다.

① 악고 평야는 이스라엘 최대 항구도시며 공업도시로 발전한 하이파에서 북으로 뻗어 있다. 

평야의 폭이 북단은 3km이나 남하할수록 점점 넓어져 남단은 13km 정도 되는 비교적 협소한 평야다. 기손 강과 기타 소하천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퇴적한 충적평야이기 때문에 토질이 매우 비옥하다.

② 이스르엘 평야는 갈멜 산을 끼고 남동쪽으로 평원이 펼쳐져 있어 기손 강과 하롯 샘이 연결되며 지중해와 요르단 계곡을 연결하는 큰 계곡 평원으로 동서 간을 잇는 유일한 횡단로를 제공하고 있는 교통상 요지다. 또 이스르엘 평야에 이어지는 계곡은 이스라엘 중앙 고지를 가로지르는 회랑(回廊) 지대다. 이곳은 애굽에서 해안 지방으로 올라가 수리아와 갈릴리 방면에 이르는 해변 길, 악고와 베니게로 통하는 길, 헤브론과 예루살렘 방면에서 북상하는 길 등 3대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상 최대 요지로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데 전략적 가치가 대단히 컸다.

③ 샤론 평야는 갈멜 산 남쪽으로부터 욥바에 이르는 약 50km, 동서 폭이 3~5km에 이르는 평원이다. 샤론(Sharon)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의미로 ‘평평한 지방’이라는 뜻이다. 성경에,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라(사35:2),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아2:1) 등 주님을 샤론에 피는 들꽃에 비유하여 참사랑의 향기와 겸손을 상징했다. 이 평원의 소택(沼澤)과 습지는 양 떼와 소 떼가 풀을 뜯는 안전한 방목지로 이용하였다. 샤론은 양 떼 우리가 되었고(사65:10), 샤론 사람 시드래는 샤론에서 먹이는 소 떼를 맡았고, 우들래 아들 사밧은 골짜기에 있는 소 떼를 맡았다(대상27:29)는 사실로 보아 샤론은 좋은 목축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때는 상수리나무 숲이 많았고 얄곤 강을 비롯한 5개 소하천에서 흘러들어와 사구를 형성하여 욥바에서 가이사랴 사이에는 늪지대가 많았다. 상수리나무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터키가 철도용으로 베어 사용했다. 그 후 오래 내버려두던 샤론 평원은 현재 크게 변모하였다. 소택과 늪지는 배수 시설을 잘하여 좋은 농토로 전환했고, 고대에 농사에 적합지 않던 붉은 모래밭은 오렌지 재배 적지로 변해 ‘황금 오렌지 지대’로 바뀌었다. 오렌지는 이스라엘 중요 수출품으로 ‘욥바 오렌지(Jaffa Orange)’라는 상호를 붙여 수출하고 있다. 

④ 블레셋 평야는 욥바로부터 가자(가사)까지 최남부 해안 지대인데 블레셋 사람의 땅이라고 한다. 블레셋 평야의 동쪽은 유다 산지에 연속한 쉐펠라 구릉지대에 접해 있으며, 남쪽 길이 70km, 동서 폭은 북단 21km 남단이 32km나 된다. 블레셋 평야가 북쪽 샤론 평야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은 해안에 있는 사구 발달이다. 이 평야는 아스글론에서 라기스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 땅이 낮은 북부와 땅이 높은 남부 두 지구로 구분된다. 북부는 밀, 남부는 보리가 잘 재배된다. 남부는 사막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적당한 강우량으로 옛날에는 산림이 우거졌고 목축이 활발하여 양 떼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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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산 중심 주변 주요성읍들]

두로-갈멜산 56km 북방, 두로에서 시돈은 북방 약30-40km...두로와 시돈은 "레바논의 옛 영광"으로 불림...시돈에서 갈멜산은 80-90km 떨어져 있음..((아마도 시돈 사렙다 과부에게 3년간 가 있도록 한 까닭은...바로 영적 대결 펼쳐질!! 갈멜산 환경과 생태, 역사적-지정학적 중요성을 숙지케 하실 의도도 있었으리라))...두로-갈멜산 56km 북방, 두로에서 시돈은 북방 약30-40km...두로와 시돈은 "레바논의 옛 영광"으로 불림...두로는 베니게(페니키아)의 수도요, 시돈 왕은 이세벨의 아비 엣바알이었고, 두로와 시돈은로서 바알-아세라 신앙의 본거지였으며, 그 영향력은 이스르엘 골짜기를 통해 사마리아로 파급되었다...구약성서시대의 가장 중요한 국제도로였던 ‘해안길’ 은 당시 세계의 두 강대 세력이었던 바벨론과 이집트를 연결시켜 주었던 대로였는데,  갈멜산은 이 도로 중에서 특히 이즈르엘평야를 지나 샤론평야로 넘어가는 중요한 통과지점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갈멜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갈멜산 위에는 이즈르엘 평야에서 샤론평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적어도 세 군데가 있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욕느암계곡’(수12:22), 남쪽으로 조금 내려온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론계곡’ 그리고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다아낙계곡’(수12:21) 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이론계곡’은 해안길이 통과하는 국제도로상에 있었으며, 이 해안길과 갈멜산이 마주치는 이즈르엘 평야쪽의 산기슭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던 므깃도성이 자리하고 있다. **갈멜 수도원(무흐(크)라카) 전망대에서 동북은 갈릴리 산지, 동남은 이즈르엘 평야, 남쪽은 사마리아 산지가 보임..

[바알숭배와 갈멜산]

바알은 ‘주인’ ‘소유주’ 혹은 ‘남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지만, 구약성경에서는 가나안 신들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치지하고 있었던 폭풍우의 신 ‘하다드’를 지칭하는 이름이요, 바알은 인간의 생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비옥과 풍요 곧 다산의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아세라’는 바알의 아내이자 바다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우가릿 문서에서는 아세라가 가나안의 주신인 ‘엘’의 배우자 여신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구약에서는 바알의 여신으로만 언급이 되고있다 (삿 3:7).]   [시돈-두로는 바알숭배 본산지라 할 수 있고, 갈멜산은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한 이후 사마리아-이스르엘과 더불어 그 중심지라 할만큼 성행하게 되었다] 음란의 극을 달리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 제의 실행 장소는 가나안 족속인 경우는 주로 신전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처음에 사무엘 당시부터 솔로몬 등극-치세초끼지는 산당은 여호와 신앙 제의가 드려지는 곳이었으나, 솔로몬 성전 완성-헌당 그 직후부터는 산당은 처음엔, 시돈의 아스다롯, 모압의 그모스-암몬의 몰렉(밀곰) 등, [뒤이어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과 제단을 만들어 세웠고, 오므리때부터는 바알-아세라를 포함한] 우상 숭배 장소로 변질되었기에(아합은 이에 더하여 바알 신전을 사마리라 왕궁 옆에 건립했다), 열왕기에서 산당 철폐는 그토록 큰 이슈가 되었고, 요시아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유다 전역의 산당은 완전히 철폐되었다... ((북이스라엘은 BC722.에 북이스라엘이 망한다음, 남유다 요시아 치세는 BC.640-609년 사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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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행적: 가뭄을 선포한 후 그릿시냇가를 거쳐 사르밧으로 이동 한 후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하여 승리한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로 비를 내려 불과 물을 모두 내리는 선지자가 된다.>

갈멜산은 갈릴리 산지와 에브라임 산지 사이에 있던 산이 지각변동으로 서쪽 지중해 쪽으로 밀려나 바다에서 이블르암까지 북서쪽으로 50km 뻗은 산맥에 가깝다. 

예루살렘 기준으로 했을때, 예루살렘에서 서쪽 해변으로 34km 내려오다 보면 푸르른 지중해가 보인다. 현대 해변 고속도로인 6번 도로가 고대의 해변 길처럼 서해안으로 쭉 뻗었다. 이를 따라 83km 북쪽으로 향하면 이스르엘 골짜기 입구인 욕느암이 나온다. 

욕느암 길은 해변에서 북쪽으로 나갈 때 넘어야 하는 갈멜산 통로 중 하나다. 북쪽에 있는 도단 길은 요셉이 팔려간 길이며, 므깃도는 요시야 왕이 전사한 후 아마겟돈 전쟁과 관련된 길이 되었고, 욕느암은 엘리야가 불을 내인 사건과 관련된 길이다. 

욕느암에 이르기 5km 전 북서쪽을 쭉 뻗은 갈멜 산지 능선을 따라 10km 정도를 올랐을까 아랍어로 ‘불’이라는 뜻을 가진 ‘무크라카’라는 엘리야 수도원이 있다. 올라가는 길에 길 좌우의 상수리나무들이 가득하다. 다른 이스라엘 산지에 비하여 많은 나무는 갈멜 산지가 바닷가 근처에 위치하면서 수분을 충분히 공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갈멜산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 본거지다. 엘리야는 갈멜산 대결 후에 갈멜산에서 머물렀고, 엘리사도 엘리야 승천 후에 갈멜산으로 왔다(왕하 2:25). 왕들이 제 역할을 못 할 때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는 열왕기상하의 주인공이 되었다. 

무크라카 수도원을 들어서자 좌측에는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의 목을 밟고 있는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모든 순례 객은 자동적으로 수도원 지붕으로 향한다. 수도원 지붕에 올라서니 동쪽은 갈릴리 산지, 남쪽은 사마리아 산지, 동남쪽 이스르엘 골짜기 전체와 서쪽 지중해 바닷가 쪽이 보인다. 이스르엘 골짜기 방향으로 풀이 돋아 푸르는 욕느암 성이 갈멜산 바로 아래 보이고, 넓은 이스르엘 골짜기가 보인다.

우리 개념으로는 평야지만 히브리어는 산과 산 사이의 땅을 모두 골짜기라 부른다. 골짜기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는 왼쪽부터 여사사 드보라가 대결했던 다볼산, 기드온과 사울 왕의 전투가 있었던 모레산과 길보아산이 솟아 있다. 정말 많은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다.

수도원 바로 아래 북서쪽 이스르엘 골짜기 보이는 방향으로 150미터만 내려가면 넓은 평지가 보이는 데 이곳이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가 불을 내리는 대결을 했던 장소라고 한다. 이 대결에서 불의 신 바알은 불을 내리지 못하고, 여호와의 종 엘리야가 불을 내렸다. 

[제단에 물 공급] 그런데 삼 년 육개월 동안 계속된 가뭄에 도랑을 다 채울 물은 어디서 났을까? 어떤 이는 바닷가에서 가져왔다고 하지만 그곳은 직선거리로도 15km가 넘으니 온종일이 걸릴 테고, 수도원 측에서는 갈멜산에 숲이 많아 그곳이 한샘에서 물을 얻었다고도 하나, 그도 턱없이 부족할 터, 십중팔구 백성들이 가뭄 중에 소중히 보관한 물주머니를 드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스라엘 백성은 엘리야의 지시에 따라 당시 무엇보다 귀한 물을 예물로 삼아 정성껏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자, 응답의 불이 내렸다. 그냥 불이 아니라 제단 위의 제물, 나무, 제단 돌, 그 아래 흙과 주변 도랑에 부어 놓은 물까지도 모두 태워버렸다. 엘리야와 이스라엘이 원하는 불 이상의 응답이었다

[제단까지 사른 여호와의 불] 갈멜산의 돌은 세노마니안이라는 강한 석회암이다. 수 천도의 불에나 탈 수 있는데 그만큼 강력한 불이 내렸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은 타거나 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 불은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은 태우되 사람을 해치지 않는 응답의 불이었다. 

대결이 끝나고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갈멜산 동쪽, 오백여 미터 아래 기손시내로 끌고 내려갔다. 갈멜산 위에서 죽이면 간단할 것을 이렇게 멀리까지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은 베니게의 바알 선지자가 들어온 길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들을 죽여 베니게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이 지역부터가 여호와의 땅임을 경고를 했다.

[바알선지자 차리] 갈멜산 대결이 끝나고 기손강까지 내려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인 엘리야는 다시 갈멜산에 올라 무릎 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고 간절히 기도한다. 무릎 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넣을 수 있는 자세는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다. 굶고 몸이 유연하며 간절하게 자신을 움츠릴 때 나오는 자세다. 이렇게 간절한 자세로 기도한 후 엘리야는 시종에게 서쪽에 있는 바다를 쳐다보고 오라 한다. 왜 서쪽 바다를 보고 오라고 했을까?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왕 때 또 한 번의 불과 관계된 사건이 갈멜산에서 일어났다. 이번에 내린 응답의 불은 아합 때와는 반대로 사람만 태웠다. 열왕기하 1장에 아하시야 왕은 신하에게 블레셋의 에그론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에 관하여 물으러 보냈다. 그 길에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가 아닌 이방신에 의지하였으니 죽을 것이라 예언했다. 아하시야 왕은 자기 죽음을 예언한 엘리야를 잡으러 50 부장을 세 번이나 보낸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함부로 취급했던 두 50 부장과 군사들은 하늘에서 내린 불로 죽었다. 그러나 마지막 50 부장은 엘리야 뒤에 계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여 겸손히 행함으로 죽지 않고 왕의 명령을 전할 수 있었다. 그는 엘리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 뒤에 계시는 하나님의 보고 그의 권위를 인정할 때 살 수 있었다.))

이스라엘 지형은 동쪽은 광야고 서쪽은 바다다. 그러므로 동풍은 풀과 꽃을 말리고, 서풍은 소나기를 가져온다(눅 12:54). 그래서 바다 쪽에서 구름이 일어나야 비가 온다는 것을 그 지역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불을 단번에 내렸던 엘리야는 비를 내리게 하기는 힘들었다. 야고보 사도는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기에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삼 년 육 개월 동안 내리지 않았고, 또한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늘이 비를 주었다고 한다(약 5:17-18). 엘리야는 갈멜산9 에서 한 번, 두 번,... 일곱 번 간절한 기도를 하고야 바다에서 손바닥만 한 구름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엘리야는 서쪽 하늘에 손바닥만 한 구름을 보아도 큰비가 올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구름은 갈멜산에 부딪히며 소낙비를 내려 삼 년 반 동안의 가뭄을 해소했다. 비가 올때 엘리야는 여호와의 권능으로 아합의 병거를 앞서 달릴 수 있었다. 비가 왔다면 병거는 더디게 달렸을 것이고, 엘리야는 축복과 응답의 비를 맞으며 기쁨에 넘쳐 마라토너처럼 달려갔으리라. 

갈멜산에 서서 엘리야의 기도와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야고보 사도가 말한 엘리야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사람이라는 말씀이 힘이 된다. 우리도 간절한 기도로 갈멜산의 기적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준다. 기도하는 자에게 물불을 안 가리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모두 바알에게 넘어가 나밖에 없는 것 같아도 하늘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기도는 하늘로부터 불과 물을 내리게 했다. 

[가이사랴..37km] 동서남북 탁 트인 사방을 보자니, 해변 쪽 화력발전소 굴뚝이 있는 가이사랴 항구가 보인다. 그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베드로의 말씀을 듣던 백부장 고넬료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불로 응답하셨다. 진정한 불, 성령을 받은 이방인 고넬료야 말로 엘리야의 불을 이어받은 후예라 할 수 있다. 그가 받은 뜨거운 불씨는 가이사랴 항구를 통해 로마로 전해지더니, 얼마 후 빌립 집사님의 중재사역을 통해 이어졌다. 결국, 이 불씨 결정적인 항해는 갈멜산 아래 가이사랴 항구에서 복음을 들고 이방을 향해 나갔던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과 로마호송을 통해 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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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르엘 평야 = 서부지역은, 역삼각형의 삼각지대(북쪽 경계--욕느암, 나사렛, 다볼산//좌측 경계-욕느암, 므깃도, 이블르암//우측경계-다볼산, 모레산, 수넴, 이스르엘 ::: 역삼각형의 우측 경계가 바로 이스르엘 평야의 동서 경계를 이루고 있음..... :  이스르엘 평야/계곡을 흐르는 하천은 길보아산 바로 북쪽에서 두 방향으로 흐르는데, 서쪽은 이스르엘을 거쳐 하이파까지 기손강이 흐르고 있으며 동쪽은 벧산을 거쳐서 요단으로 유입되는 하롯강이 있음...

1. 유래 - 이스르엘(Jezreel)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신다' 는 뜻이다. 이곳의 이름은 이스르엘 골짜기의 한가운데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인 이스르엘에서 유래한 것이다. 

2. 비옥한 평야 - 이스르엘 평야는 곡물과 면, 해바라기 옥수수를 생산하는 비옥한 땅이다. 뿐만 아니라 대량의 양과 소가 방목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스르엘은 지형상 동부와 서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벧산과 이스르엘 지역이 동부이고,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욕느암-다볼산-이블르암이 서부이다

---동부 지역... 동부지역은 이스르엘 폐허와 벧산 사이의 지역으로 약 18km정도이다. 남북간의 폭은 길보아산과 모레산의 약 5km가 해당되는데 길보아산 아래(북쪽) 하롯강이 이 계곡의 중심부를 지나고 있어서 하롯 계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서쪽의 시작 지점은 해발 40m인 반면 벧산 근처의 남동쪽 끝부분은 해저 (지면이 해수면보다 낮음) 115m로 그 편차가 크다. 이 계곡은 북부지역의 현무암 토양과 남부지역의 석회암 성분의 토양이 섞인 아주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으며 하롯샘으로 인해 물 공급도 원활한 곳이다. 성경에서는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친 곳(삿 7:1)이며, 사울이 블레셋을 맞아 싸우다 죽은 곳이기도 하다(삼상 29-31장).

--- 서부 지역....서부지역은 나사렛 산지의 부분과 욕느암-다볼산-이블르암의 삼각형 모양의 부분으로 이루어 지는데 각 길이는 32km정도씩이다. 이곳을 '므깃도 골짜기' 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유는 이 골짜기 가운데에 므깃도 성읍이 있었기 때문이다(수17:11). 평균 해발 20-50m의 낮고 평평한 지역이 있고, 주변 산지에서 씻겨온 검은색 충적토의 점토질 토양이 형성되어 있는데 특히 가운데 부분에 더욱 두터운 층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항상 천(川)에 물이 있고 풍부한 강우량으로 비옥한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이스라엘의 빵 바구니' 라고 표현한다.

D. 주변의 산들과 강

1. 산지 ---이스르엘 계곡의 북쪽에는 나사렛 산지가 있으며 서쪽에는 갈멜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사마리아 산지가 있고 동쪽으로는 다볼산, 모레산, 길보아산이 있다.

2. 하천 ---길보아 산 밑에서 발원하는 두 개의 강이 있는데 서쪽 방향에는 지중해로 흘러 가는 기손강(삿 5:21)이 있고 동쪽 방향에는 벧산을 지나 해저 225m의 요단계곡으로 유입되는 하롯강이 있다.

3. 융기 --- 이스르엘 골짜기는 한때 골짜기의 남동쪽에 위치한 사해와 지중해를 연결시키는 통로역할을 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자들은 약 2백만 년 전 일어난 지중해 지역의 융기로 인해 지중해와 사해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추정한다. 그 결과 사해와 지중해와의 연결은 단절되었고 원래 바다였던 지역에 대대적인 증발이 발생했다. 증발 후에 남은 지표면의 염분은 지표수와 함께 사해로 유입되어 사해에 높은 염도(鹽度)를 가져왔다.

Ⅱ. 이스르엘 평야 주요 지역 ---이스르엘의 평야의 주요 지역으로는 므깃도, 이스르엘, 벧산, 다볼산, 모레산, 길보아산이 있다.

A. 므깃도

1. 전쟁 요충지 - 이 도시는 가나안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고대 도시이며 앞쪽으로 해안길이 이어지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많은 전쟁들이 있었는데, 가장 오래된 전쟁으로는 BC 15세기 가나안 군대를 패배시킨 투트모세 3세(이집트 제 18왕조의 파라오)의 전쟁이다. 므깃도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시기에는 점령하지 못했던 곳이었으나(삿 1:27),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으며 후에 솔로몬은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였다(왕상 9:15). 이후 북 이스라엘의 아합은 므깃도를 더욱 요새화 하였는데 그 때 므깃도의 지하수로시설이 건설되었다. BC 733년에는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고, BC 609년에는 요시야 왕이 이집트 왕 느고와 싸우다 이곳에서 전사하였다.(왕하23:29) 

2. 아마겟돈 - 이렇게 수많은 전쟁이 치러진 곳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이곳을 마지막 전쟁이 일어나는 장소로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히브리어 ‘하르 메기도’가 이후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으로 변하게 된다. 

B. 이스르엘 --- 이스르엘은 그 이름이 말해 주듯 비옥할 뿐만 아니라 전략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성읍이 발달하였다....갈멜산에서 22km지점이자, 사마리아에서 38km지점

C. 벧산

1. 위치 - 이 도시는 하롯 계곡과 요단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요단 계곡을 지나는 남북의 교통로와 이스르엘을 지나는 동-서의 교통로가 교차되는 지점이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점령하지 못했던 도시(삿 1:27)였으며, 사울 시대에는 블레셋 통치에 있었고, 또한 사울의 시체가 매달렸던 성벽이 있던 곳(삼상 31:10-12)이다. 솔로몬은 이곳을 5번째 행정구역에 포함시키기도 했다(왕상 4:12).

2. 벧산의 번영 - 벧산은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원지와 온화한 날씨로 풍성한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던 곳이며, 이스라엘 랍비 중 한 사람은 ‘만약 에덴 동산이 이스라엘 땅 안에 있다면, 벧산은 그 문이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풍요로운 도시였다. 이렇게 전략적이고 경제적인 곳이었음에도 BC 700년 이후에는 폐허가 되었다. 이후 헬라시대에 이곳은 '스키토폴리스' 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으며, 폼페이우스가 BC 63년에 이 도시를 점령한 때부터 부흥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로마시대의 원형극장과 목욕탕, 신전 등이 발견되었다.

D. 다볼산

1. 지형 - 나사렛 산지의 지맥인 다볼산은 해발 580m이며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주위 산들과 이어지지 않는다. 구약시대에 이곳에는 잇사갈과 스블론의 경계를 이루던 '다볼' 이라 불렸던 도시가 있었다(수19:22). 다볼산은 가까이에 도로가 있어서 전략적으로도 이용되었는데 바락은 이곳에서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물리쳤다(삿 4:6-7).

2. 어원 - '다볼' 의 어원적 의미는 '배꼽' 또는 '중심' 이라는 뜻인데 이것에서 경배의 중심지라는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5세기 제롬은 '경이롭고 둥글고 높은 산' 이라고 칭송하였고, 성경에서도 다볼산을 중요한 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을 "산들 중의 산 다볼 같이" (렘 46:18)라고 표현하였으며, 시편에서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산으로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나이다" (시 89:13) 라고 표현하였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 다볼산은 하나님께 다볼산 정상에서 율법이 주어지도록 간청하였다' 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다볼산은 예수님께서 변형된 산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에 유대인 못지 않게 기독교인들에게도 중요한 장소이다. 

E. 모레산

1. 모레산은 해발 540m 정도 높이의 화산활동으로 생긴 산으로 현무암과 백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산 앞쪽으로 지나는 티베리아스로 통하는 남쪽 도로를 통제할 수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이었다. 사사 기드온 때에 미디안 족속이 이곳에 진을 쳤고, 사울왕 말기에는 모레산 남쪽에 있는 도시 수넴에 블레셋군이 진을 쳤었다(삼상 28:4). 근대에 이르러서도 나폴레옹 군대가 투르크군과 이곳에서 치열한 전쟁을 하였다.

2. 성경은 모레산 남쪽 기슭에 있던 수넴에서 살았던 여인이 엘리사를 극진히 접대하던 일과 그녀의 죽은 아들이 엘리사에 의해 다시 살아난 일을 말해주고 있다.(왕하4:33-37) 또한 북쪽 기슭에는 신약시대의 도시인 나인이 있었는데 이곳 역시 예수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준 장소였다(눅 7:11-17). 

F. 하롯샘

기브온 300용사- 300명이 군사작전에 가장 이상적이다. 게릴라전이기 때문이다. 사사기 7장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한가지는 물가로 내려가라고 한 것이다. 블레셋은 산 아래에 있었다. 이스르엘 평원이다. 그들은 메뚜기처럼 몰려왔다. 뒤가 길보아산이다. 이곳(하롯샘)에서 영국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독립운동가 Hankin 부부의 무덤이 여기에 있다(1884-1945). 앞에 보이는 산이 모레산이고 그 밑에 수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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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ings 18...Amplified Bible

===Obadiah Meets Elijah

1 Now it happened after many days that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Elijah in the third year, saying, “Go, show yourself to Ahab, and I will send rain on the face of the earth.” 2 So Elijah went to show himself to Ahab. Now the famine was severe in Samaria. 3 Ahab called Obadiah who was the governor of his house. (Now Obadiah feared the Lord greatly; 4 for when Jezebel destroyed the prophets of the Lord, Obadiah took a hundred prophets and hid them by fifties in a cave, and provided them with bread and water.) 5 Then Ahab said to Obadiah, “Go into the land to all the sources of water and to all the streams; perhaps we may find grass and keep the horses and mules alive, and not have to kill some of the cattle.” 6 So they divided the land between them to [a]survey it. Ahab went one way by himself and Obadiah went another way by himself.

7 As Obadiah was on the way, behold, Elijah met him. He recognized him and fell face downward [out of respect] and said, “Is it you, my lord Elijah?” 8 He answered him, “It is I. Go tell your master, ‘Elijah is here.’” 9 But he said, “What sin have I committed, that you would hand over your servant to Ahab to put me to death? 10 As the Lord your God lives, there is no nation or kingdom where my master has not sent messengers to seek you; and when they said, ‘He is not here,’ Ahab made the kingdom or nation swear that they had not found you. 11 And now you are saying, ‘Go, tell your master, “Behold, Elijah [is here].”’ 12 And as soon as I leave you, the Spirit of the Lord will carry you [b]to a place I do not know; so when I come to tell Ahab and he does not find you, he will kill me. Yet your servant has [reverently] feared the Lord from my youth. 13 Has it not been told to my lord [Elijah] what I did when Jezebel killed the prophets of the Lord, how I hid a hundred of the Lord’s prophets by fifties in a cave, and provided them with bread and water? 14 And now you are saying, ‘Go, tell your master, “Elijah is here”’; and he will kill me.” 15 Elijah said, “As the Lord of hosts (armies) lives, before whom I stand, I will certainly show myself to Ahab today.” 16 So Obadiah went to meet Ahab and told him; and Ahab went to meet Elijah.

17 When Ahab saw Elijah, Ahab said to him, “Are you the one who is bringing disaster on Israel?” 18 Elijah said, “I have not brought disaster on Israel, but you and your father’s household have, by abandoning (rejecting)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and by following the Baals. 19 Now then, send word and gather to me all Israel at Mount Carmel, together with the 450 prophets of Baal and the 400 prophets of [the goddess] Asherah, who eat at [Queen] Jezebel’s table.”

===God or Baal on Mount Carmel

20 So Ahab sent word to all the Israelites and assembled the [pagan] prophets together at Mount Carmel. 21 Elijah approached all the people and said, “How long will you [c]hesitate between two opinions? If the Lord is God, follow Him; but if Baal, follow him.” But the people [of Israel] did not answer him [so much as] a word. 22 Then Elijah said to the people, “I alone remain a prophet of the Lord, while Baal’s prophets are 450 men. 23 Now let them give us two oxen, and let them choose one ox for themselves and cut it in pieces, and lay it on the wood, but put no fire under it. I will prepare the other ox and lay it on the wood, and I will not put a fire under it. 24 Then you call on the name of your god, and I will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and the god who answers by fire, He is God.” And all the people answered, “It is well spoken.”

25 Elijah said to the prophets of Baal, “Choose one bull for yourselves and prepare it first, since there are many of you; and call on the name of your god, but put no fire under it.” 26 So they took the bull that was given to them and prepared it, and called on the name of Baal from morning until noon, saying, “O Baal, hear and answer us.” But there was no voice and no one answered. And they leaped about the altar which they had made. 27 At noon Elijah mocked them, saying, “Cry out with a loud voice, for he is a god; either he is occupied, or he is out [at the moment], or he is on a journey. Perhaps he is asleep and must be awakened!” 28 So they cried out with a loud voice [to get Baal’s attention] and cut themselves with swords and lances in accordance with their custom, until the blood flowed out on them. 29 As midday passed, they played the part of prophets and raved dramatically until the time for offering the evening sacrifice; but there was no voice, no one answered, and no one paid attention.

30 Then Elijah said to all the people, “Come near to me.” So all the people approached him. And he repaired and rebuilt the [old] altar of the Lord that had been torn down [by Jezebel]. 31 Then Elijah took twelve stones in accordance with the number of the tribes of the sons of Jacob, to whom the word of the Lord had come, saying, “Israel shall be your name.” 32 So with the stones Elijah built an altar in the name of the Lord. He made a trench around the altar large enough to hold [d]two measures of seed. 33 Then he laid out the wood and cut the ox in pieces and laid it on the wood. 34 And he said, “Fill four pitchers with water and pour it on the burnt offering and the wood.” And he said, “Do it the second time.” And they did it the second time. And he said, “Do it the third time.” And they did it a third time. 35 The water flowed around the altar, and he also filled the trench with water.

===Elijah’s Prayer

36 At the time of the offering of the evening sacrifice, Elijah the prophet approached [the altar] and said, “O Lord, the God of Abraham, Isaac, and Israel (Jacob), let it be known today that You are God in Israel and that I am Your servant and that I have done all these things at Your word. 37 Answer me, O Lord, answer me, so that this people may know that You, O Lord, are God, and that You have turned their hearts back [to You].” 38 Then the fire of the Lord fell and consumed the burnt offering and the wood, and even the stones and the dust; it also licked up the water in the trench. 39 When all the people saw it, they fell face downward; and they said, “The Lord, He is God! The Lord, He is God!” 40 Then Elijah said to them, “Seize the prophets of Baal; do not let one of them escape.” They seized them; and Elijah brought them down to the brook Kishon, and [as God’s law required] killed them there.

41 Now Elijah said to Ahab, “Go up, eat and drink, for there is the sound of the roar of an abundance of rain.” 42 So Ahab went up to eat and to drink. And Elijah went up to the top of Carmel; and he crouched down to the earth and put his face between his knees, 43 and he said to his servant, “Go up, look toward the sea.” So he went up and looked and said, “There is nothing.” Elijah said, “Go back” seven times. 44 And at the seventh time the servant said, “A cloud as small as a man’s hand is coming up from the sea.” And Elijah said, “Go up, say to Ahab, ‘Prepare your chariot and go down, so that the rain shower does not stop you.’” 45 In a little while the sky grew dark with clouds and wind, and there were heavy showers. And Ahab mounted and rode [his chariot] and went [inland] to [e]Jezreel. 46 Then the hand of the Lord came upon Elijah [giving him supernatural strength]. He [f]girded up his loins and outran Ahab to the entrance of Jezreel [nearly twenty miles].

===Footnotes

1 Kings 18:6 Lit pass through.

1 Kings 18:12 Lit where.

1 Kings 18:21 Lit limp on two crutches.

1 Kings 18:32 I.e. about twenty-two quarts.

1 Kings 18:45 I.e. the king’s winter home.

1 Kings 18:46 This phrase is related to the type of clothing worn in ancient times. To keep from impeding the wearer during any vigorous activity, e.g. battle, exercise, strenuous work, etc., the loose ends of garments (tunics, cloaks, mantles, etc.) had to be gathered up and tucked into the girdle. The girdle was a band about six inches wide that had fasteners in front. It was worn around the loins (the midsection of the body between the lower ribs and the hips) and was normally made of leather. Expensive or embroidered girdles were also worn and were made of cotton, flax or silk. The girdle also served as a kind of pocket or pouch and was used to carry personal items such as a dagger, money or other necessary things. The commands Gird up your mind or gird up your heart are examples of variants of this phrase and call for mental or spiritual preparation for a coming challe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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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8장 (개요)

엘리야의 행태가 오리무중인 채, 우리는 본 장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양식을 늘게 하거나 아이를 살린 일로 인해 그가 사렙다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랬더라면 그는 아합에게 발견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행으로 알려지기보다는 선행을 더 원했다. 본 장에서 그는 공개적으로 출현하는데, 이는 전에 그의 잠적이 아슬아슬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은신의 연한이 마감되었으므로(그의 잠적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일부였다), 그는 이제 아합에게 직접 현신하고 지면에 비가 내릴 것을 기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 이 명에 잇따라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합의 신복 중 하나인 오바댜와 면담하는 엘리야. 그는 오바댜를 보내어 아합에게 자신의 내도를 알린다(2-16).

2. 엘리야가 아합과 직접 회담함(17-20).

3.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대면함. 

이것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 공식적인 시합을 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우열과 선악을 가리는 극히 유명한 승부의 제전이었다. 이 일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바알과 그 선지자들은 혼란을 겪었다.

   (2) 하나님과 엘리야는 존귀함을 받았다(21-39).

4. 엘리야가 바알 선지들을 처형하였다(40).

5. 엘리야의 말에 비가 자비롭게 다시 내림(41-46).

본 장은 관찰할 만한 일이 매우 많은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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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댜의 인격(왕상 18:1-16)

Ⅰ. 당시 이스라엘은 두 가지 이유로 매우 슬픈 상황에 놓여 있었다.

1.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하고”(4절) “죽였다”(13절). 

이세벨은 우상 숭배자였으므로 경건한 신앙인을 박해하는 자였고, 아합도 그런 자로 만들었다. 

금송아지들을 숭배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유기하던 악한 시절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선한 백성이 다소 남아 있었고,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그들에게 교수하며 저들의 신앙생활을 도와준 선한 선지자들도 더러 있었다. 

비록,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가 버렸지만(대하 11:13, 14) 하나님은 그 대신 이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이들은 사사로운 모임이나 자기 순전성을 보지(保持)하던 가정에서 율법을 읽고 설명했다(우리는 이 때에 회당이 있었다는 말씀을 읽은 적이 없으므로). 

그들은 엘리야처럼 예언의 영을 소유하지는 못했고 제사를 드리거나 분향하지도 않았지만, 백성에게 잘 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세벨은 이들의 박멸을 꾀했고 그중 많은 자를 살해했다. 이것은 대중의 죄에 못지않을 만큼 큰 재난이었고, 이스라엘에 가냘프게 남아 있는 신앙의 무리를 뿌리부터 흔드는 위협이 되었다.

칼날을 피한 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그들은 도망하여 동굴 속에 은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목숨은 부지했지만 (세상이 보기엔) 전혀 무가지한/쓸모 없는 인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각사람을 아시는바 "남은자"로 여겨주고 계신다] (세상이 보기엔) 하나님과 백성에 대한 기여도와  유용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는것처럼 보이기에, 생매장당하고 멸절되어 있었던 셈인데, 유용성이야말로 그들이 평가하는바 삶의 목적이자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을 때, 그들의 친구들 곧 그 땅에 있던 선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마찬가지의 학대를 받았을 것이다.

(1) 그러나 사태는 악화되어 있었지만, 매우 선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궁내에서 세력이 큰 오바댜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그의 이름에 어울리는 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충실한 자이면서 다윗 집안의 청지기였다. 그의 인품을 관찰하자. 

그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다(3절).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열성적으로, 그리고 현저하게 선하기도 했다. 

그의 높은 지위는 그의 선함에 광채를 입혔으며,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다(12절). 그는 적시에 신앙을 갖기 시작하여 신앙생활을 오래도록 계속해 왔다. 

일찍부터 경건 생활을 익힌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로서, 유명한 경건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적시에 선하게 되는 자는 아주 선하게 될 가망이 크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는 크게 그를 경외하게 되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듯, 융성하기를 바라는 자는 늦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그토록 훌륭한 선인이 아합 집의 궁내대신, 곧 존귀와 권력과 신임이 두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① 아합 같은 악인이 오바댜를 그토록 중용하고 그 자리에 계속 앉혀 둔다는 것은 이상하다. 

확실히 그것은 오바댜가 정직과 근면과 재간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합이 신뢰할 만한 자였고, 5절에 나타난 대로, 아합은 그의 눈을 자신의 눈만큼이나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요셉과 다니엘이 발탁된 것은 그들이 기용된 자리에는 그들만큼 적격인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성실성과 충성된 마음과 일에 대한 열성이 없는 자들한테서까지도 존중을 받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② 오바댜 같은 선인이 우상 숭배와 온갖 악에 탐닉하는 조정의 높은 관직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상하다. 

우리는 오바댜가 승진하는 데 있어서 왕의 종교와 같은 종교를 가져야 하며 오므리의 율례나 아합가의 법령에 순응해야 한다는 게 필수 요건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서는 그 자리를 얻을 수 없다고 했다면, 오바댜는 그 자리를 사양했을 것이다. 

아합 또한 단지 자기 종교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를 안성맞춤으로 섬길 수 있는 자를 제외시킬 만치 무모하진 않았다. 

자기 하나님께 진실된 자야말로 자기 군주에게도 신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바댜는 양심에 거리낌없이 그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는 (자의적으로) 그 자리를 거절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자기가 바라는 선을 행할 수 없을 수도 있음을 예견했지만, (결코 스스로) 포기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세상이 아무리 악하더라도 세상에서 나갈 필요가 없다.

③ 그가 아합을 개선시키지 않았고 아합이 그를 타락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들은 둘 다 고정되었던 것같이 보인다. 추악한 자는 여전히 추악하려고 했으며, 거룩한 자는 계속 거룩하려고 했다. 

악한 시기와 악한 장소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유지하는 자는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자다. 오바댜가 그러했다. 

하나님께서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사람 가운데 당신의 남은 무리를 소유하고 계신다. 네로의 집안과 아합의 궁중에도 성도는 있었던 것이다.

(2) 이 위대한 선인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호하는 데 자기 권력을 이용했다. 

그는 박해가 치열해지자 선지자 중 백 사람을 두 개의 동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그들을 먹였다”(4절).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들을 도울 만한 재력과 권력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돕고 후원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에게 잘 해 주는 자기의 친절 때문에 그 자신은 선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 양자를 다 행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후견인이 되기도 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자들과 백성을 위해 조력자를 일으키시며, 그 누구도 일말의 희망조차 기대하지 못할 어려운 시기에도 그들을 피난케 하시는 솜씨는 얼마나 놀라운가? 

그 때는 기근이 우심하던 때라서 떡과 물이 귀했다. 그러나 오바댜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이 양자를 공급할 능력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그 때는 일선에서 밀려나 있지만 나중에는 역사할 일꾼들이었다. 오바댜는 그들이 후일 하나님께 쓸모가 있도록 그들을 연명시키려고 했다.

2.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멸절시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극도의 한발로써 필수품인 양식을 끊어 버리셨다. 

아마 이세벨은 엘리야가 심판을 예언했기 때문에 선지자가 그 심판의 일원이라는 구실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했을 것이다. 

“기독교인은 사자한테 주어서 없애 버려라”(Christianos ad leones).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에게 그 반대임을 알리셨다. 

기근은 바알의 선지자들이 희생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왕과 오바댜가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목초를 찾을 정도로 가뭄은 심했던 것이다(5, 6절). 

이것은 섭리가 그렇게 명하신 것이었다. 

이는 아합으로 하여금 이 심판의 결과가 얼마나 나쁜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그럼으로써 그가 엘리야의 말에 보다 잘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야는 이 심판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었다. 

아합이 염려하는 것은 “짐승을 다 잃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많은 가축을 잃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고 영혼을 잃게 될까 봐 염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꼴을 찾으려고 고심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기 위해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은 알아보지 않고 결과만 가지고 막아 내려고 했다. 

유다 땅은[아합 통치시기는 남유다의 아사-여호사밧의 통치시기 = 평강의 시기] 이스라엘 지경에 가까이 붙어 있었으나, 우리는 유다에서 가뭄을 호소한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유다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렸고 성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신실했던” 까닭이다(호 11:12; 한글 개역에는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정함이 없도다”라고 되어 있음).

하나님께서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리시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셨을 때(암 4:7, 8), 그들은 이 차별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들과 다투신다는 근거를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눈을 가리며 자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Ⅱ. 엘리야는 “디셉인” 즉 이스라엘의 “개종자” 또는 “개혁자”로 행세하기 위해(디셉인이란 칭호는 그런 의미라고 혹자는 생각한다) 여기에 재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진일보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반역했다. “그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라. 그러면 만사가 단시간 내에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해야 할 일이었다(눅 1:16, 17 참조).

1. 아합은 엘리야를 열심히 수색했다(10절). 

그는 엘리야를 발견하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혹자가 이해하는 대로, 아합은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족속과 영지에” 정탐꾼을 보내었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듯, 아합은 자기와 동맹을 맺은 모든 인접국가에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게 했을 것이다. 

그들이 엘리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노라고 부인할 때에도, 그는 그들이 그것을 맹세하지 않는 한 믿지 않으려고 했다. 

동시에 그는 그 맹세로써 만약 그들이 엘리야를 발견한다면 곧 내사하여 자기에게 인도해 주리라는 것까지 기대한 듯이 보여진다. 

아합이 그를 이렇게 열심히 찾는 것은, 심판을 통고할 때 행한 일로 그를 벌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이 심판을 철회케 하기 위함이었다. 

엘리야는 “내 말이 없으면(‘내 말대로’)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했기 때문에 아합은 판결을 번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마녀에 대해 어리석은 생각을 품듯, 아합도 엘리야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거나(마녀로 하여금 자기가 마술을 건 대상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축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다시 성하게 된다는 생각을 품는다), 아니면 모압이 발람에 대해 품었던 그런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나는 후자의 경우가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는 대로, 그들이 함께 만났을 때 엘리야는 아합이 자기한테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갈멜 산에서 만나도록 지정했으며, 아합은 이 약속에 순순히 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아합이 아마 거의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방법으로 심판을 철회시키고 그 땅을 축복했다.

2.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모습을 드러내라고 엘리야에게 지시하셨다. 

이제 “비를 지면에” 혹은 “그 땅에 내릴”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1절).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일 년을 숨어 지냈고, 그 뒤 2년 이상이나 사렙다의 과부 집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의 체재 제3년은 기근 제4년째를 말한다(1절). 그 기근은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보듯, 만 3년 6개월간 계속되었던 것이다(눅 4:25; 약 5:17). 

의심할 여지없이, 바알 숭배에 대항하는 엘리야의 열심, 그리고 그 백성을 향한 그의 열심은 그렇게 한 모퉁이에 숨어 있는 것을 오랜 시간으로 여기게 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이제는 네 시간 곧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 때가 이르렀음이라”고 명하시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Q이 자기의 사역자들을 그들의 모퉁이에서 불러내시고 그들에게 보이라고 명하실 때는 어떤 백성에게든지 그것은 좋은 전조―하나님이 “지면에 비를 내리시리라”는 징조―가 된다... 

적어도 “우리가 우리 스승을 눈으로 보는” 한, 우리는 환난의 떡에 보다 잘 만족할 수 있다(사 30:20, 21).

3. 엘리야는 먼저 오바댜에게 자수했거나 스스로 그의 눈에 띄게 했을 것이다. 

그는 성령에 의해 오바댜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았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를 읽게 된다.

(1)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시하면서 인사했다. 

그는 엎드렸다. 그리고 겸손히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니까?” 하고 물었다(7절). 엘리야가 선지자들의 자녀들에게 아비의 정을 보였던 것같이, 오바댜는 선지자의 아비 된 엘리야에게 아들로서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 사실로써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자 된 자를 명예롭게 했다는 것과 천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2) 이 말에 대한 엘리야의 대답.

① 그는 오바댜가 자기에게 붙인 명예로운 칭호를 아합에게 전가시켰다. “나를 주라 부르지 말고 아합을 네 주라고 불러라.” 그것은 선지자보다 제왕에게 더 어울리는 칭호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서 존귀를 구하지 않는다.” 선지자는 통치보다 의무에 더 전념하는 자로서 주라고 불리기보다 선견자, 목자, 파수꾼이라 불린다.

② 엘리야는 오바댜더러 왕에게 가서 자기가 그와 말을 나누겠다 하더라고 전하기를 명했다. “보소서, 엘리야가 오고 있나이다 하고 네 주에게 고하라”(8절). 

엘리야는 왕에게 먼저 자기의 출현을 알리기를 원했다. 

이는 자신의 출현이 왕에게 뜻밖의 놀라움이 되지 않도록 하고, 왕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선지자 자신의 행위임을 그로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함이다.

(3) 오바댜는 아합 왕에게 전갈을 가지고 가는 일 만큼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엘리야에게 간청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①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아합이 얼마나 대대적으로 그를 수색했으며 그를 찾아내는 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지를 설명했다(10절).

② 오바댜는 엘리야가 당연히 재차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12절).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이다.” 

아합이 틀림없이 엘리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때, 그는 연기처럼 종적을 감춘 때가 더러 있었던 것 같다(왕하 2:16 참조). 

오바댜는 아합에게 가서 자기의 소재를 이야기하라는 엘리야가 매우 진지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리야의 의사를 무산시키려고만 들었다. 

이는 아합이 선지자로부터 온정을 받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과 선지자가 아합으로부터 해를 입는다는 것도 온당치 못한 일임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③ 오바댜는 엘리야가 없으면 틀림없이 아합이 격노하여 그를 조롱했다거나 엘리야가 지척에 있을 때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를 사형에 처하리라고 믿었다(12절). 

폭군이나 박해자들이 격노하면 흔히 자기 친구나 막역한 벗에게조차 터무니없이 횡포를 부리는 법이다.

④ 그는 자기가 이와 같이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악하지는 않았다고 자기 변호를 했다. “내가 잘못 말한 게 무엇이니이까?”(9절) 아니, “내가 선지자들을 어떻게 숨겼는지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13절) 그는 이것을 자랑이나 허세로 말하는 게 아니다. 비록 아합의 신복이기는 하지만 아합의 이익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박해하는 데 아합의 수족이 되기라도 한 양 조롱받을 일은 없다는 것을 엘리야에게 납득시키려고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아주 많은 선지자를 보호했던 자가 위대한 선지자 때문에 목숨이 위태하게 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4) 엘리야는 오바댜가 안심하고 이 전언을 아합에게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흡족하게 해 주었다. 즉 그는 바로 그 날 아합에게 보이겠노라고 맹세함으로써 그를 안심시켰다(15절). 엘리야는 자기 말이 진심에서 하는 말이며 실제로 그렇게 할 예정임을 오바댜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오바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 말을 아합에게 전달할 터였다. 

엘리야는 “만군의 여호와”로 맹세했다. 여호와는 모든 권세를 자기 수중에 잡고 계신 분이므로 음부와 땅의 모든 권세로부터 자기 종들을 능히 보호하실 수 있으시다.

(5) 아합은 엘리야가 모처에서 즉시 만나자는 제의를 보내왔다는 통지를 받고 이 제의를 수락했다.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갔다”(16절). 

우리는 아합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도 종적을 알 수 없던 엘리야가 절로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아합은 풀을 찾아 길을 나섰다가 그의 말로부터 비를 기대치 않으면 안 될 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죄에 찌든 양심 때문에 그럴 필요성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고, 외려 보다 두려운 다른 심판을 두려워하기만 했다. 만일 그가 정탐꾼으로서 엘리야를 덮쳤더라면, 그는 엘리야에게 의기양양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와 같이 엘리야에게 기습을 당하고 보니 아합은 그를 쳐다보고 떨기까지 했으며, 헤롯이 세례 요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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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와 아합의 면담(왕상 18:17-20)

우리는 여기서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을 보게 된다. 그것은 세상이 지금까지 겪어 왔던 왕 중 가장 악한 왕과 교회가 축복으로 누려 왔던 선지자 중 가장 훌륭한 선지자의 만남이었다.

Ⅰ. 아합은 생긴 그대로 엘리야를 비열하게 고소했다. 

그는 감히 엘리야를 직접 치려고 하지 못했다. 여로보암 왕이 선지자에게 손을 대려 했으나 그 뻗쳤던 손을 거둘 수밖에 없게 되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는 엘리야에게 지극히 모독적인 언사를 가했다. 그가 첫마디에 엘리야를 헐뜯은 그 불평은 지극히 조잡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너냐?”(17절) 

이 말이야말로 아합의 종 오바댜가 한 인사말과는 참으로 먼 거리에 있지 않은가? “당신이 나의 주 엘리야이니까?”(7절) 오바댜는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다. 그러나 아합은 악행을 함부로 하는 자였다. 그들은 둘 다 그 선지자에게 건넨 그들의 말씨를 통해서 자기들의 품격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과 일꾼들에게 얼마나 애착을 가지느냐를 보아서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야는 지금 비가 오리라는 축복의 소식을 이스라엘에게 전해 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무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가 정말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면,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당연히 그를 책망해야 한다. 

공안을 유지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는 자들의 악행 때문에 이스라엘이 괴로움을 겪는 수도 많이 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복지에 원수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복지의 지주였다. 즉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던 자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유용한 일을 하는 자들도 때로는 “국가의 방해꾼”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고 공안을 침해하는 자라는 낙인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도 그런 말을 들었다(행 17:6).

Ⅱ. 엘리야는 역시 그답게 아합 왕에게 대담한 힐책으로 역공을 하고, 진실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는 바로 그라고 말했다(18절). 

엘리야는 아간이 아니었다. “나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거니와 그런 일을 계획한 일도 없도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하는 자들이 피해를 입히는 자들이다. 심판을 예고하고 경고하여, 회개하면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는 피해를 끼치는 자가 아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고치려 했으나, 저희들이 원치 않았도다.”

아합이 바로 아간이었다. 그는 금지된 바알을 좇음으로써 괴로움을 가져오는 장본인이다. 

제왕과 그 집안의 부정함 및 불경스러움 이상으로 그 나라에 더 큰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도 없다.

Ⅲ. 엘리야는, 왕 중 왕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받은 자로서, 갈멜 산에다 국사(國事)대회를 소집할 것을 명했다. 

갈멜 산은 하나님의 제단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30절). 아마 그 산 위에는 유명한 산당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곳은 예루살렘 이외의 곳에서도 예배가 가능했던 이전 시절에는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가 드려지던 곳이었을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리야를 만나러 그 곳으로 나아와야 했다. 

그리고 이세벨의 집안 종무관(宗務官)들인 아스다롯 선지자들과 전국에 흩어져 있던 바알의 선지자들도 각기 출두해야 했다.

Ⅳ. 이에 따라서 아합은 이 대회를 위해 영장을 발부했다(20절). 아마 그가 엘리야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든가(사울은 하나님보다도 사무엘 앞에 서는 것을 더 무서워했다), 아니면 엘리야가 그 나라를 축복해 주고, 비를 오도록 해 주며, 그러한 조건으로 그의 말을 모두 따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엘리야의 조언을 경시하고 미워하던 자들이라도 그가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을 쾌히 기뻐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로 와서 그의 발 앞에 절하게 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실” 것이었다(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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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 산의 대결(왕상 18:21-40)

이 엄숙한 집회를 통해서, 아합과 그 백성들은 엘리야가 “그 나라를 축복해” 주고 비가 오도록 기도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백성이 회개하고 개심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 심판의 제거를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른 순서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예비하시고”, 그 다음에야 “들을 귀를 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먼저 “그에게 향하게” 하신 후에 그가 “우리를 향하신다”(시 10:17; 80:3). 

도망자는 다시 돌아와 충성을 다하기 전까지는 결코 하나님의 호의를 바랄 수 없다.

엘리야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일을 정당한 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3년 반 동안의 기근도 그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지 못했다. 엘리야는 그들의 심판을 깨우쳐 주려고 노력했다. 

그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공개적인 시험을 붙인 사건은 하늘로부터 각별한 허락과 지시가 있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바알을 자기의 적수로 여기고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게까지 된 일은 하나님으로서는 지극히 겸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모든 입이 그 앞에서 침묵케 되고 모든 육체가 그 앞에서 조용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유는 이렇듯 언제나 쟁론의 여지없이 정당하므로, 그 공평성에 대한 증거를 수사한다고 해도 결코 겁낼 것이 없다.

Ⅰ. 엘리야는 하나님 예배와 바알 예배를 혼합시킨 데 대해 백성들을 힐책했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어떤 자들은 바알을 예배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이 두 신을 동시에 섬기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가리켜 그는 “두 사이에서 머뭇거림”이라고 했다(21절). 

그들은 선지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이세벨의 비위를 맞추고 조정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바알을 섬겼던 것이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왕하 17:33)처럼 기회를 엿보면서 양편을 다 편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엘리야가 그들의 부조리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그들이 여호와와 맺은 관계를 주장하지 않았다.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이며, 바알은 시돈 사람들의 신이 아니더냐? 어느 백성이 자기들의 신을 바꾸더냐?(렘 2:11)”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의 법적 권리를 포기하고, 이 사건의 공과를 따졌다. “한 분 하나님, 무한하시고 거룩하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한 분, 전능하신 한 분 외에는 하나님이 필요하지도 않다. 이미 완전한 것에 무엇을 더하려는가? 이제 시험하여, 바알이 유일하고 무한하며 전능한 존재요, 유일한 지고의 주님이며, 모든 것에 넉넉히 은혜를 베푸는 자라면, 너희는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만을 섬겨라. 그러나 만일 여호와가 유일한 분이면, 바알은 거짓 신이니, 이제는 더 이상 바알과 관계는 없느니라.”

1.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매우 나쁜 일이다. 

“조화시킬 수 있는 차이점에 있어서는 실제적으로도 의견상으로도 모두 무관심해 버리는 것 이상으로 안전한 것도 없다(고 홀 주교는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알의 사이처럼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는 하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그를 대적하는 자다”(막 9:38; 마 12:30을 비교하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죄를 섬기는 일, 그리스도의 통치권과 우리의 정욕의 통치권, 그 사이에서 머뭇거린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으나 결단하지 않으며, 뜻을 세움에 있어서 불안하고, 좋은 약속을 하나 실행은 하지 않으며, 시작은 잘 하나 끝을 맺지 못하고, 자기 주장이 시종일관하지 못하며, 선한 일에 뜨뜻미지근한 자들은 모두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이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다”(호 10:2). 그러나 하나님은 전부가 아니면 전혀 가지지 않으신다.

2. 우리는 “우리가 섬길 자”를 선택하는 것이 정당하다(수 24:15). 어떤 자가 하나님보다도 우리에게 더욱 옳게 보이거나 앞으로 더 좋은 우리의 주인이 될 가망이 있는 자를 발견했다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 그를 취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가 우리에게 입증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권한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지 않는다.

엘리야가 제시한 이 정당한 제의에 대해, 백성들은 할 말을 잃었다.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그들은 자기들을 변명할 줄도 몰랐고, 또 자신들을 정죄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엘리야가 할 말을 하도록 버려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Ⅱ. 엘리야는 공정한 심판을 하자고 제의했다. 

외적인 유리한 조건은 바알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심판은 그만큼 더 공정했다. 왕과 조정은 모두 바알 편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란 집단도 그러했다. 바알을 변호하는 기름지고 잘 먹은(22절) 450명의 실행위원이 있었고, 그 외에 그들을 지원하고 후원해 주는 400명이 있었다(19절). 

하나님을 변호하는 자는 단 한 명이었고, 게다가 가까스로 불쌍한 유배에서 돌아왔고 거의 굶어 죽을 뻔한 자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입장은 그 자체의 정당성 외에는 아무것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실험을 하기로 했다. “각 희생 제사를 준비하고, 자기편의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리고 불로 그 제사를 응답하는 그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인 것으로 알자. 만일 어느 쪽도 그런 응답이 없으면, 계속 그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라.”

엘리야는 필경 이런 실험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시험하고 신앙을 모독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비상했고, 그 결과로 인한 판결은 유용했을 것이로되, 그 때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유용했을 것이다.

그가 막강한 권력자들과 숫자 앞에 단신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사유를 대변했다는 것은 그의 용기를 보여 주는 한 사례다. 

그리고 이 사건의 결과는 하나님의 모든 증인과 변호자들에게 사람의 얼굴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는 격려가 된다.

엘리야는 “물로 응답하는 신”이 아니라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고 말했다(실상 당시 그 나라에는 물이 간절히 필요했다). 

이와 같이 된 이유는, 심판이 자비롭게 물러가게 되기 이전에 먼저 속죄가 제사를 통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신, 또 속죄 제물을 소멸함으로 그 용서를 입증할 수 있는 그 신이 우리를 이 비극에서 구출할 수 있는 하나님임이 틀림없다. 

불을 주실 수 있는 그가 물도 주실 수 있다(마 9:26 참조).

Ⅲ. 백성이 그와 합의했다. “그 말이 옳도다”(24절). 

그들은 엘리야의 제언이야말로 정당하고 틀림이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종종 불로 응답하셨도다. 만일 바알이 그리할 수 없다면, 그는 가짜이니 추방을 시켜야 하리라.”

그들은 이 실험이 검증되기를 몹시 원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거기에 따르기로 각오했다. 

하나님의 편에 확신을 둔 자들은 이러한 결과가 결국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할 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냉담한 자들도 결단을 내릴 채비를 했다. 

그리고 아합과 바알의 선지자들은 백성이 두려워서 감히 반대를 제기하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하늘에서 불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랐으며(그들은 결코 그런 적이 없었지만), 또 혹자가 생각하듯 그들은 바알을 통해 태양을 숭배하고 있었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엘리야”는 그럴 수 없게 되기를 바랐는데, 그것은 지금 그 곳이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불로 나타내던 성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시합에서 그들이 이 사건을 무승부로만 할 수 있다면,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들 때문에 승리는 그들의 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시합을 살펴보자.

Ⅳ.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자기들의 신을 시험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들은 먼저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먼저 하는 것이 영예롭기도 하거니와, 만일 조금이라도 점수를 확보하는 것이 보이기만 하면 엘리야는 더 이상 시험을 해 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허락을 했다(25절). 그들이 더 큰 혼란을 당하도록 우선권을 준 것이다. 

그는 사탄의 역사는 거짓 이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그들의 속임수만을 막으려고 애썼다. 분명히 “그 밑에 불을 놓지 않았는지” 확인하라고 했다. 

이제 그들의 실험에서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바알의 선지자들은 바알에게 지극히 안달을 하고 법석을 피웠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물을 준비했다. 450명이 하나같이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으니, 얼마나 시끄러웠는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오 바알이여! 들으소서. 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그들은 여러 시간을 이렇게 소리쳤다. 아데미 숭배자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고 두 시간 동안 소리쳤는데, 그들은 그 이상 소리쳤다(행 19:34).

그들이 자기들의 바알에게 한 말을 보면, 얼마나 무지각하고 짐승 같은가!

(1) 바보같이 보였다. 

송아지와 함께 자기들이 직접 제물이라도 되려는 듯이, “그들은 그 단 주위에서 뛰놀았다”.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열망을 표명했을 것이다. 

“그들이 뛰놀았다”는 것은 제단 주변에서 춤을 춘 것이다(라고도 본다). 

그들은 자기들이 춤을 춤으로써, 헤로디아가 헤롯을 즐겁게 해 주고서 자기의 소원을 성취했듯이, 자기들의 신을 기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2) 마치 미친 자들 같았다. 

그들은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했다(28절). 

아무런 응답도 없어서 화가 났든가, 아니면 일종의 선지자적 광란으로서 자기들의 피를 바침으로써 신의 은총을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송아지의 피가 뜻을 못 이루자 자기들의 피로 소원을 이루려는 심산이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기를 섬기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악마의 일은 때로는 몸을 즐겁게 해 주지만, 또 때로는 질투나 술 취함같이 몸을 잔인하게 만들고 만다.

아마 이러한 짓은 바알을 경배하는 자들의 습관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몸을 해치지 말라고 명하셨다(신 14:1). 

하나님은 우리의 정욕과 죄악을 죽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가톨릭 교도들의 관습인 육체적 참회와 고행―이것은 정욕이나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누가 이런 것들을 네게서 원하더냐?”

2. 엘리야는 그들에 대해 얼마나 통렬했던가?(27절) 

그는 그들 옆에 서서, 그들이 장시간 동안 우상에게 기도하는 소리를 인내성 있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은근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정오가 되자, 태양은 가장 뜨겁게 되었고, 그들은 (지금까지와 같이) 여전히 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야는 자기의 직책이 이제 중하고, 해야 할 일이 심각했지만, 그들을 조롱했다. “크게 외쳐라. 너무나 경건하여 크게 소리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그가 신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는 이야기하고 있거나 명상하고 있을 것이며(문자적 뜻은 그렇다), 또는 어떤 깊은 생각에 빠져서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하느라고, 너희들의 위신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권세가 달려 있는 이런 판국에 자기의 일을 잊은 모양이로다. 그가 빨리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그의 새로운 점령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상을 예배한다는 일은 지극히 조소거리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조소하는 자들을 정당화할 수는 결코 없다. 그 예배는 우상의 예배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엘리야가 퍼부은 정당한 비난으로 확신을 얻기는커녕 수치를 맛보게 되었다. 그 비난은 그들을 더욱 난폭하게 만들었고, 더욱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게 만들었다. “미혹된 마음은 스스로 미혹되어서”, “나의 오른손에 거짓이 있지 아니하냐?”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사 44:20 참조).

3. 바알은 그들의 말에 얼마나 귀가 멀었던가! 

엘리야는 그들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그들이 지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아주 절망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마침내 “저녁 제사의 시간이” 되었다(29절). 

그동안 줄곧 어떤 자들은 기도를 하고, 어떤 자들은 예언을 하고, 찬송을 불렀다. 아마 바알을 찬양했을 것이다. 혹은 마침내는 바알이 응답해 주리라고 그들을 위로하는 격려의 노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응답하는 자도, 돌아보는 자도 없었다.” 

우상은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공중 권세 잡은 자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에만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오게 할 수 있으며, 자기의 바알을 위해 기꺼이 그런 일을 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미혹하는 짐승이 이런 일을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그들을 속인다”(계 13:13, 14).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악마에게 그런 허락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 결과에 따라 그의 권리가 양 당사자들 간에 판결이 나고 말기 때문이다.

Ⅴ. 엘리야는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불의 응답을 받았다. 

이제 바알주의자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엘리야가 자기의 시험을 할 차례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신속히 처리했는가를 보자.

1. 그는 한 제단을 수축했다. 

그는 바알에게 보내는 기도 때문에 더러워진 그들의 제단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이전에 여호와를 예배하는 데 사용되던 제단은 완전히 황폐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제단을 고쳐 쓰는 길을 택했다(30절). 

이것은 그가 어떤 새로운 종교를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고, 단지 그들 조상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신앙을 소생시키려 하며, 그들의 첫사랑, 처음 일을 복구시키려고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두 나라를 다시 연합시키기 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에다 제물을 바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하나님은 두 나라를 징계하기 위해서, 당장 두 국가의 통합은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선지자의 권위를 가지고 갈멜 산상에다 제단을 세웠고, 그것은 이전에도 사용되어 오던 것임을 시인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개혁을 이룰 수 없을 때에라도, 어떤 타락된 일에 순응할 것이 아니라, 바알을 근절시키기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는 “열두 지파의 수효를 따라서 열두 돌”을 세워 그 제단을 수리했다(31절). 

비록 그중 열 지파는 바알에게로 반란해 나갔지만, 그들의 조상들과의 옛 언약에 힘입어 그들도 역시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비록 정치적 이권 때문에 불행히도 열 지파와 두 지파가 나뉘었지만, 이스라엘 하나님의 예배에 있어서는 서로 교통하여 열두 지파가 하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야곱을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룸”이라는 뜻으로 불렀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31절). 

이것은 자기들이 신으로 알았으나 응답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자를 섬겼던 그의 타락한 후손들에게 수치를 주기 위함이요, 또한 이제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었듯이 용감히 그 선지자가 하나님과 싸워야 한다고 격려해 주기 위함이었다. “오 야곱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시 24:6) “거기서 그는 우리와 말씀하시는도다”(호 12:4).

2.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기의 제단을 건립한 엘리야는, 그의 지시를 받아, 그리고 그를 염두에 두고서, 그리고 자기의 영예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제물을 준비했다(33절). 

“보라, 송아지와 나무는 있는데 불은 어디 있는가?”(창 22:7, 8)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준비하시리라.”

우리가 우리 마음을 정직히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은혜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거룩한 불을 붙여 주실 것이다.

엘리야는 제사장도 아니었고, 레위인 수행자도 없었다. 그리고 갈멜 산에는 회막도 성전도 없었다. 또 증거의 궤와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와는 굉장히 먼 곳이었다. 

또 그 제단은 예물을 성별케 한 그 제단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제사보다 더 잘 하나님께 열납된 제사는 없었다.

그와 같은 특별한 레위적 제도들은 종종 면제되었다(사사 시대, 사무엘 시대, 그리고 지금의 경우 등이다). 

그러므로 어떤 자는 그러한 제도들은 율법처럼 복음 속에서 엄격히 실현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형으로서, 복음의 원형 속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사용이 폐지된 것에 대해서 바울 사도가 한 말(골 2:22)은, 머지않아 그 모든 제도 등이 완전히 사라질 것을 뜻한다(히 8:13).

3. 그는 도랑을 파고 자기 제단 주위에 물을 많이 부었다(32절). 

혹자는 그 제단도 우묵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2배럴짜리 통 넷의 물(아마 바닷물이었을 것이다. 바다가 가까웠고, 당시에는 신선한 물이 너무나 귀했는데, 그가 그렇게 물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을 세 번이나 제물 위에 부었다. 그래서 제물 밑에다 혹시 불이라도 놓아두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제거했다(그렇게 했더라도 이렇게 하면 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올 기적을 더욱 찬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4. 그러고 나서 자기의 제단 앞에 서서 엄숙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 번 제물이 재가 되게”(시 20:3과 같이)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것은 그 제사의 열납을 입증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기도는 길지 않았다. 그는 헛된 반복을 하지 않았고, “말을 많이 해야 듣는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지극히 엄숙하고 침착했으며, 자기의 마음을 조용히 내어 보이는 것이요, 바알의 선지자들이 보였던 광란과 무질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36, 37절). 

엘리야는 지정된 “장소”를 택하지는 못했지만, “저녁 소제를 드릴 때”, 곧 지정된 때를 선택했다. 

그것은 이것을 통해 그가 예루살렘의 제단과 통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인 것이다.

그는 지금 불의 응답을 구하고 있지만, 담대하게 제단에 가까이 왔다. 그리고 조금도 그 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옛 언약을 믿으면서, 또 하나님과 족장들에 대한 백성들의 관계를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아뢰었다.

여기서 그는 두 가지 점을 탄원했다.

(1) 하나님의 영광이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응답하소서. 주가 이스라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소서(그것이 지금 극도로 부정되고 망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충성과 헌신은 주께만 합당하옵니다. 또 내가 주의 종임을 알게 하소서. 내가 주의 일꾼으로서 행한 것, 하고 있는 것, 앞으로 해야 할 모든 것이 주의 말씀에 따라 하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의 기분이나 감정을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고용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그리하심을 알게 하옵소서”(민 16:28, 29 참조). 

엘리야는 자기의 영광을 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될 것과 자기에게 필요한 변호를 위해서 빌었다.

(2) 백성의 교화를 탄원했다. 

“주가 여호와이심을 저들이 알게 하시고, 주의 은총을 체험하게 하시며, 이 기적에 의해 저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옵시고, 그들이 다시 주께 돌아오게 됨으로써, 하나님은 다시 저들에게 자비를 내리게 되기를 원하나이다.”

5. 하나님은 즉시 불로 그에게 응답했다(38절). 

엘리야의 하나님은 담화를 하거나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며, 일으켜 깨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아직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여호와의 불이 떨어졌다.” 

다른 경우에서처럼(레 9:24; 대상 21:26; 대하 7:1) “제물과 나무를 소멸하여”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신 표시를 했을 뿐만 아니라, “도랑에 있던 물을 모두 핥았다.” 

즉 그 물을 수증기로 증발시켜 버림으로써, 이 제사와 기도의 결실로 올 그 비가 자연의 소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말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시편 135편 7절을 보라. “그는 증기(안개)를 일으키시며, 비를 위해 번개를 만드시도다.” 이 비를 위해서 하나님은 증기와 번개를 모두 만드셨다.

여호와의 진노의 희생물이 되어 버리는 자들은, 어떠한 물도 그 불을 막아 줄 수 없을 것이며, 어떠한 장벽이나 보좌도 그 불을 막아 줄 수는 없다(사 27:4, 5).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기적을 완수하기 위해, 그 불은 “제단의 돌과” 바로 “그 티끌”까지 소멸함으로써, 이 불은 비상한 불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 어쩌면 하나님이 이 특별한 제사를 이 제단에서 열납하셨지만, 앞으로는 그들의 산장에 있는 모든 제단을 훼파해야 하며, 그들의 제사를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 제단만을 사용하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리라.

모세의 제단과 솔로몬의 제단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성별되었다. 그러나 이 제단은 그 불로 파괴되었다.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불은 아합과 바알 숭배자들에게 무서운 죄책감을 주었을 것이며, 그들은 최선을 다해 도망치면서 “우리도 타 죽을까 하노라”고 말했을 것이다(민 16:34 참조).

Ⅵ. 이 공정한 재판의 결과는 무엇인가? 

바알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증명에 실패했고, 자기들의 신을 빙자한 그 허실을 증명해 낼 아무런 증거를 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엘리야에 대한 고발은 완전히 취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가장 신빙성 있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입증했다.

1. 배심원격이던 백성들은 이 재판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되었고, 그 판결에 대해서는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시비가 이렇게 분명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법정에서 떠나서 다시 재고해 보고 판결을 의논해 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보고 엎드렸다.” 

그러고는 일제히 “여호와가 하나님이시요, 바알은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그 점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 확증을 얻었노라.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로다”라고 말했다(39절). 

이것을 보고 어떤 자는 이렇게 추측하리라. “그가 만일 하나님이시면,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야 하며, 우리는 오직 그만 섬기리라”(수 24:24과 같이)고 그들이 결론을 내렸으리라고. 우리가 바라건대, 혹자들은 그렇게 자기들의 마음을 고쳐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다수는 깨닫기만 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그와의 언약에 대한 동의는 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을 보지 못하고도 믿어, 그것으로써 본 자들보다 더 큰 일을 하는 자들은 복을 받으리로다.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시요”, 그만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모든 거짓된 자들을 막아내는 요점으로 알아야 한다(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까지 받아 온 도전 중에서도 가장 대범하고 위협적인 적들을 모든 사람이 듣는 가운데서 물리쳐 주었기 때문이다).

2. 범인들격인 바알의 선지자들은 체포되어 정죄받고,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40절). 

여호와가 참하나님이라면, 바알은 거짓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 신에게로 갔으며, 하나님 예배자들을 꼬여서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명시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의거해서, 그들은 사형되어야 했다(신 13:1-11).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필요치 않았다. 이스라엘 모두가 그 증인이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그들은 나라를 괴롭게 한 자들이므로 즉각 살해하라고 명령했다(이 일은 전례가 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비상한 위탁을 받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합은 하늘에서 온 불 때문에 심히 떨었고 그래서 엘리야의 명령에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바알의 선지자들 450명이었다. 그리고 아세라의 선지자들 400명(이들은 시돈 사람들일 것이라고 한다)은 소환을 받았으나(19절), 출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아합과 이세벨은 자기들도 다행스럽게 화를 면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세라 선지자들은 곧 아합을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고 독려함으로써, 그를 파멸케 하는 도구 노릇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만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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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이 풀리다(왕상 18:41-46)

이스라엘은 개심해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자인하게 되었고, 이 이상 자기들을 속이지 못하도록 바알의 선지자들을 처형시키는 일에 동의하게 되었으니, 비록 이러한 것이 충분한 개심에는 훨씬 못 미치는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 받으셨다. 

그래서 이들이 이와 같이 선한 일을 행한 바로 그 날 저녁에(아무래도 그러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그 땅에 한량없는 축복을 부어 내리셨으니, 이는 그들의 개심을 더욱 공고히 했음이 틀림없다 할 것이다(학 2:18, 19 참조).

Ⅰ. 엘리야가 아합을 보내며 “먹고 마시라”고 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한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고, 또 비가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서였다(전 9:7 참조). 

아합은 온종일 금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 날이 기도하는 날이므로 경건을 위해서였든지, 또는 놀라운 기대의 날이므로 여가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먹고 마시라”고 하고 있으니, 이는 비록 남들은 아무런 징조도 깨닫지 못하나 엘리야는 믿음으로 “큰 비의 소리”를 이미 듣고 있기 때문이다(41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되시는 선지자들에게 그 신비로움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가 없어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그러하시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가 있다. 비는 “하나님의 강”이다(시 65:9).

Ⅱ. 엘리야는 몸소 물러가서 기도하고(하나님께서 비를 약속하셨다 하더라도 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슥 10:1), 불로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다시금 물로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 그가 무슨 말로 간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 그는 생소한 곳으로 물러갔다. 

즉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갔는데, 이는 매우 높기도 하고 지극히 은밀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은” 자들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된다(암 9:3). 

그 곳에는 엘리야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러 사람 앞에 나서서 일하라고 하는 부르심을 받은 자는 더욱 더 하나님과 은밀히 지내고 홀로 그와의 교제를 유지하는 시간을 찾도록 애쓰지 아니하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 곳에서 그는 선지자로서 “그의 파수대”에 섰던 것이다(합 2:1).

2. 그는 이상한 자세를 취했다. 

그는 겸손하고 경외하고 끈질기게 조르는 표로 땅 위에 꿇어 엎드렸으며,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이는 곧 머리를 너무 숙여서 무릎에까지 닿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비천함을 나타내는 뜻에서 이처럼 스스로를 낮추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이같이 그를 영예롭게 해 주셨다.

Ⅲ. 엘리야는 자기 사환에게 바다에서, 즉 지중해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식별하게 되면 곧 자기에게 알리라고 명했는데, 그는 갈멜 산 꼭대기에서 이미 그것을 크게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항해사들은 이 곳을 “갈멜봉(Cape Carmel)”이라고 부른다.

그 사환은 여섯 번이나 언덕 끝까지 가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주인에게 희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계속해서 기도를 드리며, 가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까지는 마음을 돌리지 않을 듯이, 계속해서 희망에 가득 찬 구름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여 그 종을 보냈다. 그동안 엘리야는 조상 야곱의 결심, 즉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는 결심을 한 것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에만 전념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명심해 두어야 할 사실은 비록 열렬하게 믿고 의지하는 우리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약해진다거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 순간 순간을 기도에 힘쓰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결국 들어 응답하시지,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Ⅳ. 급기야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나타나서, 곧 온 하늘을 뒤덮고 땅을 적셨다(44, 45절). 

놀라우리만큼 큰 축복이란, 흔히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기게 되며, 한 뼘이나 되는 길이의 구름에서 풍성한 소나기를 얻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작은 일의 날이라고 얕볼”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에서 큰 것을 바라고 기다려야 할 일이다. 

이 구름은 곧 소멸되고 마는(비록 이스라엘의 미덕이 그와 같기는 했지만) 아침에 이는 구름과 같은 것이 아니라, 흡족한 비를 일으키되(시 68:9) 보다 더 많이 본격적으로 내리게 하는 그러한 구름인 것이다. 

Ⅴ. 여기에서 엘리야는 서둘러 집으로 가라고 아합을 재촉하고 자신도 그를 수행했다. 

아합은 편안하고도 당당하게 마차를 타고 갔다(45절). 그러나 엘리야는 아합 앞에서 도보로 달려갔다. 

만일 아합이 엘리야가 받아 마땅한 존경을 표시했더라면, 내시가 빌립에게 했듯이 엘리야를 자기 마차에 동승시켰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존경을 표명하고 왕정개혁에 대한 문제를 그와 협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타락이 뉘우침을 능가하여, 벨릭스가 바울을 물러가게 하고 보다 형편 좋을 때 다시 협의하자고 연기한 것과 같이, 일부러 엘리야를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합이 엘리야로 하여금 동승하도록 하지 아니했으므로, 엘리야는 아합의 마부 가운데 한 사람인 양 “그 앞에서 달려”가고자 했다(46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 주신 큰 영광으로 교만해진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그가 비록 신실하게 문책했지만 시정 문제에서는 조금도 왕에 대한 존경이 감해지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에는 비록 누구보다도 위대해 보이지만, 세속적인 풍모에 대해서는 전혀 애착이 없다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한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임금들에게 맡겨 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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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Q은 엘리야를 다른 길로 돌려보내기로 하셨는가...회복의 징표로 비를 내리시고))갈멜산 대결 후 9년간 더 사역하게 하고 계심
===호크마==
열왕기상 18장
1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ㅇ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 년에 - '많은날'(야밈 라빔)이란 표현은 어감상(語感上) '세월이 제법 많이 흘렀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언제로부터 계산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말인가? 아마도 이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체류하기 시작한 때(17:8-16)로부터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본절에서 '제 삼 년에'라는 설명이 곧 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적 시간 계산 방법에 의거할때 '제 삼 년에'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실지로 만 3년이 못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신약성경에 의하면, 엘리야 시대의 가뭄은 3년 반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4:25; 약 5:17). 
따라서 본절의 '제 삼 년에'는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을 선포한 때(17:1)를 기점으로 잡고 계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Prlpit Commentary, Lange, Keil & Delitzsch).
ㅇ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 '보이라'(라아)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물론 '가서 만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보다 폭넓고 깊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단어가 '제시하다', '증명해 보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동사에 의해 표현되는 행동은 앞서 선행된 어떤 예시, 예견에 대한 결정적 증거 제시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본장에서 엘리야의 행적은 이러한 의미에 부합된다. 즉 엘리야는 일찍이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바 있다(17:1).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가뭄 종식의 예언을 위해 다시 아합과 만나도록 명령받는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 같은 선포를 하여야만 가뭄과 같은 자연력의 고삐를 쥐고계신 분은 바알(Baal)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17:1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제 아합에게 '보이러'가는 엘리야의 행동은 여호와의 하나님되심을 '증명해 보이러'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ㅇ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 사마리아(Samaria)는 아합에 의해 소위 자연의 풍요로움과 생산의 풍부를 보장한다는 바알 신을 섬기는 중심지가 된 곳이다(16:29-33).
그런데 바로 그곳이 기근(饑饉)으로 허덕였다는 점은 본서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다름아니라 바로 바알 숭배의 허구성을 폭로해 주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심하였더라'(하자크)는 말은 '아주 맹렬하였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곧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가뭄이 사마리아를 덮쳤다는 말이다.
3 아합이 궁내 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ㅇ궁내 대신 오바댜 - '오바댜'(오바드야후)는 '여호와를 섬기다'는 뜻이다. 특히 이 이름 속에 담긴 동사 '아바드'는 '노예처럼, 종처럼 섬기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이름 그대로 오바댜(Obadiah)는 지극한 열심으로 여호와를 섬긴 사람이다. 즉 당시 바알 숭배의 심장부라 할 아합 궁중의 고위직에 있었던 자 였음에도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 일백 인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4절)은 가히 그 신앙의 열성과 순수함을 짐작케해준다. 한편 '오바댜'는 구약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대상3:21; 7:3; 8:38; 9:16; 대하 17:7; 34:12; 스 8:9). 따라서 동명이인(同名異人)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할 것이다.
ㅇ크게 - '크게'(메오드)는 '대단히', '지극히' 등의 뜻을 갖는 부사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구약에서 약 300회) 사용되었다(신 6:5; 왕하 23:25). 한편 신약에서 이 단어는 '마음과 힘(mind and strength)을 다하여'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말이 갖는 심도를 잘 드러내 준다(막 12:30; 눅 10:27).
ㅇ여호와를 경외하는 -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야레'에는 '두려워하다'. '놀라워 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접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체험적 신앙을 은연중 강조해 준다.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인을 가져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
ㅇ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대에 - 이때가 언제인지 정확치 않으나 학자들은 대개 엘리야의 가뭄 선포(17:1) 이후로 본다(Hammond). 그것은 두어 가지 가능한 추측 때문인데 곧 다음과 같다. (1) 엘리야의 정면 도전(가뭄 선포)에 대한 보복 조처였으리라는 추정(Hess, Menken)이다. 한편 이세벧(Jezebel)에게 박해를 당한 '선지자들'이란 아마도 선지학교의 생도들일 것이다(Bahr, Hammond, Keil, K. Austel). 이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삼상 10:1-16 강해, '선지자 학교'를 참조하라.
ㅇ선지자 일백 인을...굴(窟)애 숨기고 - 사마리아 서북방 약 60km 지점에 위치한 갈멜산(Mount Carmel) 주변에는 당시 약 2,000개의 석회굴이 있었다고 한다(Montgomery). 따라서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긴 곳도 이 지역 어느 곳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갈멜산 일대는 피난자들의 은신처였는바 신약 시대에는 일명 '은자(隱者)의 고장'이라 불리울 정도였다.
ㅇ가져 - 원래 '가져'에 해당하는 '라카흐'는 '취하다', '움켜 쥐다', '채어 가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대단히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이세벨의 마수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절박한 시점에서 재빠르게 선지자들을 빼돌리는 오바댜의 스릴있는 움직임을 연상시켜 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한글개역 성경처럼 '가져'라고 번역하기보다 '빼돌려'라고 번역함이 보다 바람직하다.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러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ㅇ물 근원(根源) - 이 말은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좀 어색한 표현이다. 그런데 '근원'에 해당하는 '메에'는 본래 '창자', '생식기' 등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인가를 산출해 내는 내부의 근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물 근원'은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곳'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는 '수원지'(水原地)라는 보다 널리 쓰이는 말로 표헌하는 것이 더 낫다.
ㅇ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 극심한 가뭄과 기근 중에 아합의 관심이 이처럼 말과 노새 보호에 쏠려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혹자는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우리 속의 짐승을 위한 불가피한 처사로 변호하지만(Hammond), 아합의 일차적 관심이 백성에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아합의 권력 기반이 말과 노새가 상징하듯 군사력과 상업력에 있었지, 여호와로부터 위탁받은 백성들로부터의 신망(信望)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6 두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ㅇ아합은 홀로 길로 가고 - 아합이 왕의 신분으로써 호위 군사나 수행원도 없이 홀로 탐색에 나섰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홀로'(레바드)란 말은 '따로', '별개로'의 뜻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한편 사막 지대의 군주나 족장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당시 극심한 가뭄 상황하에서 아합왕이 직접 수원지 탐색에 나선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한다(Pulpit Commentary).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저를 만난지라 저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ㅇ저가 알아보고 - 오바댜와 옐리야가 이전부터 교분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로의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오바댜 편에서 볼 때 엘리야를 식별하기란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항간에는 엘리야의 명성과 함께 그의 옷차림과 특이한 용모가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8).
ㅇ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이여. 오바댜가 취한 이러한 태도와 언사(言辭)에서 그가 엘리야를 향해 품고 있는 존경심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오바댜는 당대의 고관이고(3절) 엘리야는 일개 야인(野人)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가인 오바댜가 고군 분투하는 신앙의 전사(戰士) 엘리야에게 존경심을 품지않았을리 만무하다. 더욱이 엘리야가 행하는 권능은 놀라운 것이며(17:13-24) 오바댜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혀다(12절). 따라서 오바댜는 지금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아돈'('주인', '소유자'라는 뜻)의 강조형으로서 오직 인간과 만물의 소유주이자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런데도 오바댜가 엘리야를 '내 주'라고 칭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에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엘리야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8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하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 원문에는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말이 단지 '힌네 엘리 야후'로 되어 있다. 이때 '힌네'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감탄사로서 '보라 !'(behold !)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본절은 '보라, 엘리야다 !'란 단순하면서도 생생한 표현이 된다. 한편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엘리야에게는 전국적인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던 듯하다. 그런 시점임을 감안할때 본절은 대단한 박력의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 엘리야가 이 같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아합을 만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1절,약 5:17).
9 가로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붙여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ㅇ무슨 죄를 범하였기에...붙여 - 여기서 '붙여'로 번역된 '나탄'은 '주다'(give)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약 2,000회 정도 사용되는 이 동사는 의미 또한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즉 이는 '만들다', '지불하다', '놓아 두다' 등 번역상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띨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본절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라는 문구가 이미 의미 파악의 열쇠로 주어져 있다. 즉 여기서 '붙여'는 죄의 대가로 인한 응징, 형벌의 개념으로 사용된것이다(8:32 등). 한편 오바댜가 아합 왕에게 엘리야 발견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곧 죽음과 동일시된 까닭은 10절이하, 특히 12절에서 발견된다. 즉 오바댜는 자신이 엘리야를 찾았다고 아합에게 알린 때에 만약 엘리야가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저희가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ㅇ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는 앞서 사르밧 과부의 맹세와 동일한 표현이다(17:12). 그러나 이는 당시 아직 여호와 신앙에로 개종하지 아니하였던 사르밧 과부의 말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오바댜는 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물이고 여호와 역시 오바댜의 하나님이시지만 여기서는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리야의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왕하 2:14).
ㅇ당신을...나라가 없었는데 - 이 말은 일종의 과장법적 표현이다. 비록 아합 통치하의 이스라엘이 강력했다지만, 당대 근동의 패권을 온통 거머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모든 나라와 족속을 속속들이 뒤졌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노릇이다. 16:29 주석참조. 여하튼 본절은 당시 아합이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아합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한껏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합이 당시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의 저주(17:1) 탓으로 생각했기 때문인듯하다(Hammond, 17절). 그러므로 그 저주를 해소하려는 주술적 조처와 적개심 때문에 아합은 그토록 열심히 엘리야를 수배했을 것이다.
11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ㅇ네 주 - 여기서 '주'라는 말은 '아돈'으로 일반적인 군주(君主)나 주인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7절 주석 참조. 본절에서는 오바댜가 섬기던 당시의 이스라엘왕 아합(Ahab. B.C. 874-853)을 지칭한다.
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ㅇ여호와의 신이...이끌어 가시니라 - 오바댜가 '여호와의 신', 즉 하나님께서 돌연하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엘리야를 그 어느 곳으로 이동시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바댜의 염려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믿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靈)이 이와 같은 돌연하고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빌립(Philip)을 옮긴 사실을 볼 수 있다(행 8:39).
ㅇ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 여기서 '어리다'는 말의 기본형인 명사 '나아르'는 이유기(離乳期)에서 사춘기를 지난 청소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폭넓은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에서 이제 겨우 젖뗀 유아 모세와 다 자란 압살롬을 똑같이 '나아르'로 부르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출 2:6; 삼하 12:16; 14:21; 18:5). 그러므로 '나아르'는 한 인간의 개체적인 틀이 거의 완성, 고정되는 중요한 시기를 지칭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바댜는 바로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훈련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신앙이 가진 안정성, 확고성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인을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ㅇ내가...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 오바댜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려고 이와 같은 말을 하는게 아니다. 더군다나 오바댜가 선지자들에게 피신처와 음식을 공급한 것은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었지 않은기(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엘리야와 한 편에 속하는 사람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엘리야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여실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오바댜는 엘리야가 여호와의 계시로 말미임아 그러한 비밀스러은 일조차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14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저가 나를 죽이리이다
ㅇ이제 당신의 말씀이...나를 죽이리이다 - 이러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오바댜의 당혹감과 불안감을 엿볼 수 있다. 즉 당시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과 맞닥뜨리는 죽음의 위협에서 분명히 빼돌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2).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바댜의 그 같은 염려는 아직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빚어진 기우(杞憂)임(15절)이 이내 드러나고 만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673).
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
ㅇ모시는 - 이에 해당하는 '아마드'는 문자적으로 '...앞에 서다'(stand before) 뜻이다. 그런데 본절에서처럼 '여호와앞에 서다'와 같이 쓰이는 경우. 신학적으로 (1) 중보 기도를 위해 선다는 의미와 (2) 헌신과 충성의 표시로 선다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이 중 (2)의 의미를 채택하여 '모시다'로 번역한 것이다. 기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삶이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意識)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ㅇ만군(萬軍)의 여호와 - 여기서 '만군'(체바오트)이란 곧 '군대들'(armies)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호칭하는 경우는 구약에서 261회나 된다. 본래 이 명칭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 17:45)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점차 천군 천사를 다스리는 하나님(22:19)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말은 강한 군사적 의미와 함께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삼상 1:3 주석 참조. 한편 '만군의 여호와'란 호칭은 열왕기에서는 처음으로 본절에 등장하였다. 이 호칭은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서에 많이 등장한다(사1:9; 2:12; 8:13; 렘 6:6; 20:12; 32:14).
ㅇ오늘날 - 학자들 간에는 여기서의 '오늘날'(하욤)이 꼭 문자대로의 오늘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다(bahr). 물론 '하욤'을 문맥과 함께 '지금' 혹은 '이번에는'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합을 꼭 만날것이라는 엘리야의 결의에 찬 표현으로서의 본절은 그대로 '오늘'의 의미로 두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영역본들도 이를 '오늘'(today)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Living Bible 등).
ㅇ보이리라 - 1절 주석 참조.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ㅇ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 여기서 '만나다'에 해당하는 '카라'는 의도적인 만남을 말한다. 이는 곧 7절의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과 같이 분명한 목적을 지닌 만남을 의미한다.
ㅇ고하매 아합이...만나려 하여 - 아합이 만만찮은 중대사인 '꼴 구하는 일'(5절)을 간단히 포기하고 이처럼 즉각 엘리야를 만나려 한것을 보면, 엘리야의 비중이 대단했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그 비중이란 실상 아합이 엘리야를 어떤 식으로든 가뭄의 원인으로 결부시켜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 10절 주석 참조. 그런 점은 다음 절에서 아합이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troubler of Israel)로 부른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 출현소식을 접한 아합은 이제야 가뭄의 원인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Hammond). 그렇다면 그보다 더 서두를 일이 어디 있겠는가 !
17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ㅇ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는 자 - '괴롭게 하다'에 해당하는 '아카르'는 대개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아합은 지금 엘리야를 나라 전체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국적(國賊)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동은 오로지 아합 편에서의 논리만을 반영한 것이다. 우상 숭배 장려 정책을 펴 나가는 아합 왕조(16:29-33)에 대한 엘리야의 평소 행동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훼방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은 가뭄은 그의 저주(아합이 보기엔) 이후에 시작되었다(17:1).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엘리야는 아합에게 불길하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자기 바깥의 척도(즉 하나님)로 비쳐 볼 수 있었다면, 문책의 대상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받을 자는 엘리야가 아닌 바로 아합 자신인 것이다(18절).
18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ㅇ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 엘리야는 가뭄의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아합의 비난에 대하여 이처럼 똑같이 '아카르'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을 힐난한다.
17절 주석 참조. 즉 가뭄이라는 국가적 재난에 책임이 있는 편은 자신이 아닌 바로 아합과 그의 왕조라는 반박이다. 여기서 '당신의 아비의 짐'은 곧 오므리(아합의 아버지) 왕조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 가문은 아합의 부친 오므리(Omri, B.C. 885-874)가 왕조를 연 이래 더욱 가증한 우상 숭배 정책을 시행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다(16:25, 26, 30-33). 따라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민족사의 정도(正道)를 가르치는 오므리 왕조에 대하여 호평(好評)할리 만무하다. 본절에서 엘리야가 단지 아합 개인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아비의 집'까지 함께 공박하고 있음도 그 같은 연유에서이다(Matthew Henry).
ㅇ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 물론 오므리 왕조 이전의 왕 중에도 금송아지 숭배 등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한 여로보암(Jeroboam, B.C. 930-910) 같은 악왕(惡王조)이 있다(12:25-33). 그러나 아합의 가증한 죄악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바알(Baal) 숭배를 도입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6:31, 3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9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ㅇ그런즉 - 원문은 '왜 잇타'(and now)이다. 그 뉘앙스는 이렇다. 지금 서로를 재난의 원인으로 비난하니(17, 18절) '이제 기필코'(앗타, now) 시비를 가리도록 하자! 그런즉 이는 대단한 박력의 도전이 행간(行間)에 넘쳐 흐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ㅇ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 '상에서 먹는다'는 말은 본문의 문맥상 '공급과 지원을 받는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Pulip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왕비의 식탁에서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함께 식사했다는 것은 있음직 하지 못하기 때문다. 사실 '상'(슐한)은 그 식탁에 둘러 앉은 자들 사이의 '교제'를 은유하는, 보다 중요한 용법을 갖고있다(시 69:22; 128:3: 단 11:27). 한편 본절로 미루어 이세벧은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교사처럼 이스라엘에 바알 및 아세라 숭배 이식을 위해 인력을 양성했음을 알 수 있다.
ㅇ갈멜산 - 갈멜산의 위치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한편 '갈멜'(카르멜)은 '정원' 또는 '과수원'을 의미한다. 이 산은 지중해 쪽에 위치한 갈멜 산맥(Mountains Carmel)의 일부로서 각종 식물이 무성하고 또한 석회 동굴이 많은곳이다. 4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 갈멜 산이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결 장소로 선택된 이유는 다음과같다. (1) 갈멜 산은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에서 보듯 여호와 신앙인돌에게도 특별한 장소였지만(왕하 2:25; 4:25), 동시에 바알에게 바쳐진 성소이기도 한 때문이다. (2) 갈멜 산은 이스라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두로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때문이다.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ㅇ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모으니라 - 여기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콜-베네이 이스라엘)이란 이전의 세겜 총회(12:1)에 상응하는 말이다(Montgomery). 즉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집단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12:1 주석 참조. 그런데 21절 이하의 내용으로 보아 갈멜 산에는 이 대표자 집단들이 집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본절은 당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전국 각지에 퍼져 활동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아합이 이들을 집합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기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무렵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전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을 모두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ㅇ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 원문에서 '두 사이에서'는 '알 쉐테이 하세입핌', 즉 '두 의견(opinion)으로(혹은 사이에서)'이다. 그리고 '머뭇머믓 하려느냐'는 '파사흐', 즉 '절뚝거리다'이다. 그러므로 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어느때까지 두 의견으로 나뉘어 절뚝거리려느냐'는 뜻이 된다. 이는 곧 단순히 당시 백성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하기 보다는 분열상을 지적, 그 해소를 촉구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승배를 혼합하려는 세력과 순수 여호와 신앙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것이다(Bahr, Keil). 그런데 이세벧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그 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백성들은 왕실의 강압적 우상 숭배 정책에 눌린 나머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내팽개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스그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를 격발(激發)시켰던 셈이다(마 6:24; 계 3:16). 한편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을 향해 과감한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계시니 우리는 스스로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중용(中庸)이라는 말로 미화시켜서는 아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참된 중용의 도(道)란 애매한 중간치기 내지는 비굴한 기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높고 더 경건한 제 3의 길을 따름인 것이다.
ㅇ백성이 한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 이 장면을 수 24:16 이하와 비교해 보면 아합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즉 여호수아 당시 '하나님과 다른 신 중 과연 누구를 섬길 것인지 결정하라'는 요구에 그 시대의 백성들은 즉각 '다른 신을 섬기다니 말이되는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아직껏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마 6: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항상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가 아닌가?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ㅇ나만 홀로 남았으나 - 나만 홀로 남았으나! 이 말은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가 정말 단 한 명만이 남았음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다만 지금 여호와 선지자로서 활동하는 자는 엘리야 자신 홀로이며, 이제 그 홀홀 단신으로 다수의 바알 선지자와 맞서게 되었다는 극적인 대조에 강조점이 있을 뿐이다(Hammond, Montgomery).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여야만 앞서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4절)가 그 동안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리라는 불필요한 추측(Thenius)을 삼갈 수 있게 된다.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탓이다. 즉 19절에는 이교(異敎) 선지자들의 총수가 850인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본절에는 오직 450인만 언급되어 있는 탓에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군다나 25절과 40절에서도 오직 '바알의 선지자'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 정리될 수 있다. (1)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 산의 대결에 참예하지 않았다(25절). 따라서 그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40절).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들은 모두 '바알의 선지자'로 통칭(通稱)될 수 있다. (3) 그렇다면 아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세벧이 일부(아세라의 제사장? )를 보내지 않은 탓에 갈멜 산 대결에는 450인의 바알 선지자만이 참석하였을 것이다(Bahr, Keil 등).
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ㅇ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 신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희생 번제(犧牲燔祭)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들 모두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희생 번제는 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막론하고 고대 팔레스틴에 있어서 예배의 기본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다(Lange).
ㅇ각(脚)을 떠서 - 이에 해당하는 동사 '나타흐'는 '잘라서 조각 조각으로 나누다'(cut in pieces)는 뜻이다. 이는 곧 희생(犧牲) 제사에 쓰일 제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말한다(출 29:17; 레 1:6, 12; 삿 20:6).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ㅇ이름을 부르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한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그 인격의 본질과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즉 이름과 존재는 불가 분리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창 25:19-26 강해, '이름짓기' 참조.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그 존재의 응답을 기대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때 그 이름의 존재가 실존(實存)한다면 필연코 응답이 있을 것이다. 본절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알이 허구 존재가 아니라면, 그 이름을 부르는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밝히리라는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ㅇ불로 응답(應答)하는 신 -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의 희생 제의는 제물을 불로 사르는데 초점이 있다. 즉 신이 불태워진 제물을 흠향할 때 비로소 인간의 성의가 가납(嘉納)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곧 신이 있어서 차려진 제물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불로 응답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그런데 바알은 (바람-불-지진-비 등)자연력을 지배하는 신이자 태양과 불의 신이었다.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신들' 참조. ---바알의 신격은 다른 초기 농경 사회의 신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폭풍우와 비, 번개, 풍요/다산의 신이자 태양신이었다.---그러므로 불로 응답하는 일은, 바알이 참신이라면, 그의 전문 분야와도 같다. 그런데도 바알은 끝내 침묵하고 말았으니(25-29절)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한편 이처럼 그 신의 가장 핵심 요소를 공략하여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찍이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써 애굽의 거짓 신들을 무색하게 한것과 비견된다(출7:4-12:34).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ㅇ너희는 많으니 먼저...부르라 - 본절은 결과적으로 엘리야의 승리(30-40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즉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해 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차고한 자신감을 드러내어 보였다. 다시 말해 우선권을 잡은 바알 선지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던 반면(26-29절) 엘리야의 승리를 더욱 값지고 위대한 것으로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하여 준 셈이다.
26 저희가 그 받는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ㅇ아침부터 낮까지 - 여기서 '아침'(보케르)은 '이른 아침', 즉 동이 트고 난 직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회합을 갖은 이유는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무대 팔레스틴' 참조. 다음으로 '낮'(초하르)은 다음 절에서 '오정'으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그러므로 바알 선지자들은 이미 5-6시간 정도를 바알의 이름을 르며 뛰논 셈이다.
ㅇ응답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아나'는 본래 '보다', '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들을 외면치 말고사 랑과 관심을 갖고서 '쳐다 봐 달라'는 간절한 염원(念願)의 말임을 알 수 있다.
ㅇ뛰놀더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사흐'는 본래 '절뚝거리다'는 뜻으로 이미 21절에 나온 단어이다. 2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이 의견이 나뉘어 있다. (1)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광란(狂亂)의 춤(28절)을 비꼬아 표현한 것이다(Pulit Commentary). (2)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춤의 형태가 실제로 절뚝거리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Davis). 이상의 두견해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큰 문제는 없다.
ㅇ그러나 엘리야가 계속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으로 보아(27절) 첫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상 춤은 자주 예배 의식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나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의 처녀들이 포도밭에서 춤춘 것, 법궤앞에서 춤을 춘 다윗 등 많은 예를 찾아 볼 수있다(출15:20; 삿 21:16-24; 삼상 18:6; 삼하 6:14). 그러나 이러한 춤도 참된 찬양의 대상자에 대한 진솔한 경외의 표현이 아니라면 본절에서 보듯 이는 한갓 광란의 몸칫에 불과하고 마는 법이다. 출 15:20 주석 참조.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ㅇ저는 신인즉 - 이처럼 '바알은 신이니까'로 서두를 연 본절은 그러나 신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즉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오정에 이르기까지 간절히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바알 우상의 허구성을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조롱조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ㅇ묵상하고 있는지 - 바알 선지자들이 그토록 발버둥치고 있는 마당에(26, 28절) 바알은 멀찌 감치 물러 앉아 묵상에 잠겨 있다고만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장면은 없을 것이다.
ㅇ잠간 나갔는지 - '나가다'에 해당하는 '수그'는 '옮기다', '이동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잠깐 자리를 옮겼는지'의 뜻이다. 그런데 이는 '좀 쉬려고 물러갔는지' 정도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라 한다(Rashi). 하지만 신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시며 곤비치 않으시지 않는가(사 40:28)!
ㅇ길을 행하는지 - 여기서 '길'(데레크)은 '여행'(대개 수일이 걸리는)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이 여행을 떠나서 자신의 경배자들의 청원을 듣지못한다는 것은 곧 그 유한성(有限性)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시 139:7-12)
ㅇ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무더위로 인해 한낮에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성경 총론, '성경의 고대 팔레스틴' 참조. 엘리야의 조롱은 바로 그러한 습관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3, 4).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ㅇ그 규례를 따라...상하게 하더라 - (신 14:1; 렘 16:6; 41:5; 47:5). 그런데 본절에서 처럼 피가 흐르기까지 자해하는 습속은 피가 신비한 효능으로 신을 감동시킨다는 이교적 관념 때문이다(Plutarch). 즉 당시 이교도들은 자해와 고행이 신에 이르는 길을 여는 일종의 공로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한편 본절은 바알 선지자들의 한낮, 팔레스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의 광란을 묘사함으로써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 바알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해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지나친 금욕주의적 태도 또한 자의적(恣意的) 숭배의 소산으로 간주하여 참된 경건에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라하였다(골 2:20-23).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ㅇ진언을 하여 - 이에 해당하는 '네부아'의 문자적 뜻은 '미친듯이 예언하다'이다. 따라서 이 예언이 참된 예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실 이러한 예언은 광란에 찬자해 행위자들이 한숨과 신음을 토로하는 현상에 다름아니다Movers). 그리고 이러한 예언이란 대개 비인격적인 외적 조작, 즉 주문(呪文)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려는 주술적 성격이 짙게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의 진언은 일종의 주문, 신비한 웅얼거림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ㅇ저녁 소제(素祭) 드릴 때까지 - 요세푸스의 기록(Josephus, Antiq., XIV, 65))에 따르면 이스라엘 인들이 저녁 소제를 드리던 시간은 오늘날의 오후 3시 쯤(유대력의 9시)에 해당한다고 한다(A. Edersheim, Pulit Commentary). 이때 신약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과도 일치한다(행 3:1). 한편 '소제'(민하)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비교적 간단한 제사이다. 이 제사에는 희생 제물이 아닌, 떡과 과자가 바쳐졌다(출 29:28-41; 민 28:3-8). 이 소제의 의미는 백성들이 자신의 일상적이고 전체적인 삶을 하나님께 위탁한다는 뜻이다. 레 2:1-3 강해, '소제에 대하여' 참조.
ㅇ아무 소리도...돌아보는자도 없더라 - 이 부분에는 '전혀 없다'는 뜻인'아인'이 세 번이나 거듭된다. 이 단어는 26절에도 두 번이나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점층법적 강조의 효과를 준다.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ㅇ내게로 가까이 오라 - 엘리야가 이처럼 백성들을 가까이 오라고 부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1) 이제까지 바알 제단 근처에 모여 있던 백성들을 여호와의 제단 주위로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2) 이제부터 시도하려는 자신의 모든 행위(32-39절)에 어떠한 협잡도 없음을 명백히 증거키 위함이다(Hammond).
ㅇ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 '수축하다'에 해당하는 '예라체'# 빻#란 )는 '고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을 세우는것이 아니라 부서졌던 것을 고쳐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갈멜 산상에는 일찍이 여호와의 제단이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서는 아합의 아내 이세벧이 여호와의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음을 증거해 준다(4절; 19:10). 따라서 갈멜 산의 여호와 제단도 이때 헐렸다고 봄이 홈음직하다.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ㅇ열 두 돌을 취하니 - 여기서 엘리야의 행동은 약속의 땅 입성시의 여호수아의 행동과 비슷하게 보인다(수 4:9). 그런톄 북왕국의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엘리야가 이처럼 '열 두 돌'을 취하여 돌단을 쌓은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12:24)) 그들 모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음을 엘리야는 바로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왕국분열 이래로 멸망에 이르기까지 두 왕국은 한번도 재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더욱이 앗시라아에 포로로 잡혀간 북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부분은 영원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이스라엘 집안의 '잊혀진 열 지파'로 사라져갔다. 하지만 '열 두 지파 온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열 두 사도'의 터전 위에 건축된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던 것이다(창 35:9-12; 삼하 7:16; 계 7:4-8).
ㅇ이 야곱은...하신 자더라 -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을 각성케 하는 여러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야곱, 이스라엘, 여호와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야곱'(Jacob)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한 조상에서 비롯된 헐통적 단일성을 가진 존재들임이 부각된다(창 35:22-26). 그리고 그 야곱이 '이스라앨'(곧 민족의 이름이 된)로 불리은 것(창32:24-28)에서는 이스라엘(Israel)민족이 여호와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백성임이 강조된다. 즉 이스라앨 민족은 소명의 주체이신 '여호와'를 섬길 때에만 민족적 정기를 흐리지 않는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출 19:5, 6).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 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ㅇ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 원문 '브쉠 여호와'는 단순히 '여호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hovah)라는 뜻이다. 즉 '의지하여'는 해석상 추가된 말이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굳이 '여호와의 이름'과 관련 엘리야의 단 쌓는 행위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단이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여호와께만 드려지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름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들과 구별케 해주는 기능을 한다. 24절 주석 참조.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쌓은 단은 다른 어떤것과도 동일시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된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본절은 '여호와께만 봉헌하기 위해', 혹은 '여호와만을 기념하기 위한'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겠다.
ㅇ곡식 종자 두 세아 - '세아'(Seah, 창 18:6에는 '스아'로 번역되어 있음)는 구약시대 당시 고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다. 1세아는 1/3에바(Hphah)로서 약 7.6리터 이다. 그러므로 '두세아'는 약 15리터 정도의 양임을 알 수 있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ㅇ용납할 만한 - 이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결정하기 어렵다. 즉 두 세아 정도의 곡식을 부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두 세아의 곡식 종자를 심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자(前者), 즉 용량을 의미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Bahr, Hammond 등).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부으라 하고
ㅇ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 레 1:3-9에는 소(혹은 송아지)를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경우에 관해 수록되어 있다. 즉 그때에는 제단에 장작을 펴 놓고 그 위에 각을 뜬 제물을 벌여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엘리야는 그 같은 율법의 규정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ㅇ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부으라 - 여기서 말하는 '통'(카드)이 얼마 만한 용량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괄팔스틴 여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물 항아리(17:12, 14, 16; 창 24:43, 45; 삿 7:16, 19, 20)를 가리키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음절까지 살펴 보면, 번제물과 나무위에는 무려 열 두 통의 물이 부어진 셈이 된다. 그런데 율법 규정에 있지도 않은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명확하다. 즉 엘리야는 이로써 인위적인 협잡의 여지가 없음을 명백히 백성들에게 인상지우려 향 것이다. 30절 주석 참조. 또한 이처럼 온통 물로 적셔진 제물에 점화시키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써만 가능함을 주지시키려 한 것이다(38절).
한편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대의 이교 제사장들 중에는 제단밑에 빈 공간을 판 뒤 그 속에서 불을 붙이고서 이를 이적이라고 속이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고한다(Pul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49).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ㅇ세 번 그리하라 - 한글 개역은 자칫 두 번 물을 부은 뒤 다시 세 번, 즉 도합 다섯 번의 물붓기가 행해진 걸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원문은 '솰로쉬'(three), 그러므로 '쉈리쉬'(third)이다. 그러므로 물붓기는 도합 3회 실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동일한 행동이 반복되는 것은 최종적이고 결론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면 레아는 3명의 아들을 낳자 비로소 야곱의 완전한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창 29:34). 또한 전장(前章)에서 엘리야가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린 것도 3회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의혹을 없애기 위한 물 붓기는 3회로 그 의미롤 충분히 달성한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 혹자는 4통씩 3회의 물 붓기로 도합 열 두 통의 물을 사용한 것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기 위한 의도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Bahr). 3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하튼 극심한 가뭄 중에(17:1, 7) 이러한 열 두 통의 물은 과연 어디서 길어 온걸까? 혹자는 이를 지중해에서 길어 온 바닷물로 추추하지만(Mattew Henry), 그보다는 갈멜산 옆을 통과하는 기손 시네(Kishon Brook)에서 길어 왔으리라는 추측이 더 유력하다. 19절 지도 참조. 왜냐하면 수많은 지류에서 물을 공급받는 기손은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물줄기이기 때문이다(Beek).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ㅇ단으로 두루 흐르고 - 원문에는 '단 으로'란 말에 '주위', '주변'을 의미하는 '사비브'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단 주위에(물이) 두루 흐르다'는 뜻이다.즉 많은 물을 들이부은 결과(꼬, #줘) 돌로쌓은 제단(33, 34절)이 온통 물이 줄줄 흐르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형편에서는 이교 제사장들이 제단 밑에 한 사람을 숨겨 불붙이는 것과 같은 속임수는 참으로 불가능하다(Stanley).
36 저녁 소제 드릴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ㅇ저녁 소제 드릴 때에 -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말이다. 29절 주석 참조. 그런데 29절에서의 시점이 본절에 중복되는 탓에 독자들은 약간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30절 이하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모든 행동이 바알 선지자들의 광란이 계속되는 중에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별 무리가 없다.
ㅇ아브라함과...이스라엘의 하나님 -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라 할 조상들이다. 그런데 그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를 각별히 호칭하는 이유가 의미 심장하다. 즉 여호와는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으로 자신을 선포하셨다(출3:6). 그 결과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계약 관계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라고 믿는 한 파기(破棄)될 수 없다. 즉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무엇이 되지 않는 한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 뿐이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야는 본절에서 야곱의 이름조차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된'이스라엘'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31절 주석참조.
ㅇ주께서...알게 하옵소서 - 엘리야의 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으로 구성되어있다. 즉 (1)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2) 엘리야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라는 고백, (3) 엘리야 자신의 모든 행위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특징을 띤다. 사실 엄청난 이적이란 이적 자체와 그것을 행하는 자가 크게 부각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애초에 이적도, 이적을 행하는 자신도 단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제한하고있다. 이러한 겸손과 공손함은 그가 본절에서 사용한 '종''빡 , 에베드)이라는 단어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원래 '에베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겸손히 옆으로 비켜 선 엘리야의 참된 선지자적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Mattew Hanry).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ㅇ여호와여...내게 응답하옵소서 - '응답하옵소서'는 26절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아나'이다. 그런데 본절은 '아나'가 두 번 반복되어 기도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사실 바알 신지자들의 광란의 기도(26-29절)에 비하면 엘리야의 기도는 서운할 정도로 짧다. 그러나 그 간명(簡明)한 기도 속에는 진실되고 순전한 정열과 굵직한 뚝심이 들어 있다. 아무튼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분은 아니시다(마 6:7). 마치 사랑하는 자식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진 어버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단한 한 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는 진심이 깃들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본절의 엘리야의 기도는 중인 부언하지 않고 하나님께 꼭 아뢸 것만 진실하게 구한 기도였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삼상 1:9-18강해, '기도와 기도의 응답'을 보다 참조하라.
ㅇ돌이키게 - 이에 해당하는 '사바브'는 마음이나 자세의 변화를 뜻하는 단어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된 변화의 상태를 지시하는데 자주 쓰인다(대하 29:6). 본절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은총의 회복, 즉 백성들의 회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ㅇ알게 - 이에 해당하는 '야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 외에도 보다 폭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참신이든 우상이든 신과 간련될 때는 '관계'에 역점이 주어지는 말이다(신 13:3; 삼상 2:12; 렘 4:22). 따라서 본절에서 이 말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는 청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ㅇ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의 '여호와의 불'이란 '번개'와는 다른 초자연적인 불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Lange, Keil & Delitzsch, H. Austel).
한편 구약시대 당시 하나님께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불을 내리셨다. (1) 당신의 언약을 보증하실 때(창 15:17), (2) 하나님께서 친히 현현하실 때(출 3:2),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실 때(출 9:24) (4) 인간의 제사를 열납하실 때(레 9:24)등이다.
ㅇ번제물과...흙을 태우고 - 여호와의 불에 의해 살라진 것은 번제물 뿐 아니라 이처럼 나무, 돌, 흙까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점을 강조해 준다. (1) 여호와의 불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2) 동시에 거기애는 어떠한 협잡의 여지도 없었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이다. 사실 제단 밑에 사람을 숨겨 불을 붙이는 협잡으로서는 도저히 이만한 화력(火力)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33주석 참조.
ㅇ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 여기서 '핥은지라'(라하크)는 불길이 혀처럼 널름거리며 도랑물을 증발시키는 장면을 잘 표현해준다.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ㅇ본절에는 '여호와의 불'의 이적을 접한 당시 백성들의 경악과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요소가 두가지 있는데 (1) 즉각 엎드린 점. (2)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명쾌한 시인을 거듭 반복한 점이다. 이러한 백성의 모습을 21절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선명히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졸음이 쏟아지는 한낮에 느닷없이 떨어진 폭탄의 광음을 듣는 충격과도 같다.
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ㅇ바알(Baal)이 거짓 신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백성들은 엘리야의 명령에 따라 바알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기손 시냇가에서 죽여 버렸다. 이러한 행위는 일견 지나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호와의 공의(公義)를 나타내는 일이었기에 필요 불가결하였다. 즉 이 일은 하나님의 계명(신 13:6-9; 17:2-7)에 대한 순종 행위였던 것이다.
ㅇ저희에게 이르되...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 엘리야의 승리는 너무도 완벽혀여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로서도 항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엘리야로부터 달아나려 했을 터인데 이들을 막기위해서 이제 엘리야는 백성의 무리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기손 시내 - 여기서 '시내'(나할)는 '강'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한편 기손 강(Kishon Brook)은 므깃도 근처의 여러 샘들로부터 발원하여 갈멜 산맥과 나란히 걸쳐진 에스드렐론 광야를 흐른다. 보통37-40킬로미터의 긴 강이다. 이 강은 갈멜 산 근처에서 평소 5미터 전후로 제법 넓은 폭을 유지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에는 연중내내 물 흐름이 있는바 바싹 말라버리지는 않았고) 대개 건기(乾期)에는 폭 1미터 전후의 작은 시내(여울)이지만, 우기때는 범람하는 전형적인 와디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Beek). 따라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당시는 극심한 가뭄 중이었던 점(5절 ; 17:1-7)을  고려하면 '시내'란 표현이 매우 적절하다. 한편 기손 강은 과거 사사 시대 당시 바락이 시스라를 무찔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곳으로도 유명하다(삿 5:19-21).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ㅇ올라가서 - 이 말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기손 시내에서 갈멜 산 어디 쫌엔가 설치되어 있을 왕의 장막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아합은 갈멜산상의 대결 현장과 기손 시내의 바알 선지자 처형 현장에 내내 동참했던 모양이다.
ㅇ먹고 마시소서 - 아합은 대결의 긴장감 때문에 온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야가 음식을 권하는 이 말에는 '이제 더 이상 근심하지 마십시오'하는 어감(語感)이 들어 있다(Pulpit Commentary). 원래 사람이 음식을 끊는것은 슬픔, 근심 등을 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아합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은 그러한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그 동안 아합에게 직접적인 근심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가뭄일 것이다(5절). 그러나 엘리야가 보기에 그 가뭄이란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계일 뿐이다(17:1). 따라서 우상 숭배자들을 처단한 현시점에 있어서는 곧 가뭄이 끝나리라고 엘리야는 확신한것이다.
ㅇ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 여기서 '소리'(콜)란 말은 원래 '음성' 혹은 '목소리'라고 해야 더 적절한 단어이다. 즉 이는 '누구의 음성에 귀기울이다'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는 말이다(창 4:23; 21:12; 삼하 22:7). 아무튼 본절은 엘리야가 믿음의 귀로써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보여 준다(43-45절).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 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ㅇ땅에 꿇어 엎드려 - 야고보는 본절과 관련, '엘리야는...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약 5:17, 18)라고 언급하였다. 사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절)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의 실현을 위하여 다시금 기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기다리는 행동(롬 4:19, 20)과 기도함으로써 그 실현을 응답받은 행동의 두 가지가 있음을 보여 준다.
ㅇ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 엘리야는 이처럼 땅에 무릎을 꿇는 정도에서 지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는 깊숙한 자세로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두가지로 풀이한다. (1) 복종을 표현하는 무릎꿇음과 겸손을 표현하는 깊숙한 머리숙임이 결합된 자세로서 그 기도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행동 동이다. (2) 외부에 대한 시각(視覺)을 차단함로써 보다 깊숙한 내면의 기도의 경지에로 몰입해 가기 위한 행동이다(Bahr).
43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 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ㅇ바다 편 - 갈멜 산 정상에서는 서쪽으로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Gate). 여기서 '바다 편'이란 바로 그 지중해 쪽을 의미한다.
ㅇ일곱 번 - 히브리인들의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 '7'은 하나님의 수이자 완전한 승리의 수로 쓰인다. 따라서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 차인확인해 보라 지시한 것은 곧 기도의 씨름에서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결의의 표시이자 하나님께서 끝내는 응답하시리라는 완전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하다.
44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ㅇ사람의 손만한 - '손'(KJV, RSV, NIV,Living Bible; hand)으로 번역된 '카프'는 오히려 '손바닥'(palm)으로 번역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손'을 가리키는 단어는 '야드'이다.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손바닥 만한'으로 적절히 번역하고 있다.
ㅇ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 '막히다'에 해당하는 '아차르'는 '꼭 닫다', '기다리게 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많은 비로 인해 보행을 방해받는 광경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손바닥 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양의 비를 예상하는 것은 그만치 확고한 엘리야의 확신을 보여준다. 한편 기손 강은 갈멜 산 바로 아래로 흐르며 여러 갈래의 시내가 합류되어 있다. 40절 주석 참조. 따라서 큰비가 내릴 때에는 기손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 일대는 통행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엘리야는 아합을 염려하여 길이 막히기 전에 갈멜 산에서 떠나도록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과 그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고들을 위하는 자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17절). 따라서 아합은 이제 지난 날의 과오를 깨끗이 청산하고 여호와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본분으로 돌아와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아합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집요하게도 고집하였으며 끝내는 참혹한 말로 맞기에 이르렀다(22: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함으로써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아가는' 패역한 자의 전형을 발견케된다(롬 2:4, 5).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ㅇ조금 후에 - 이에 해당하는 '아드 코 웨아드 코'는 '손이 앞뒤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안'이라는 뜻이다(Ewald). 이는 곧 큰비가 올 것에 대비해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다 저편의 손바닥만한 구름(44절)이 얼마나 급속도로 폭우로 변했는지 알 수 있다.
ㅇ이스르엘 - 과거 솔로몬의 다섯번째 행정 구역에 속하였던 성읍으로서 아합, 아하시야, 요람 당시 왕의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이다(왕하 9:15). 이곳은 갈멜 산 동남방 20여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곧 길보아 산 부근이다. 그런데 당시 이 성읍은 이스르엘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다(Beek). 한편 훗날 아합은 이곳 이스르엘(Jezreel)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음으로 더욱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다(21장). 4:12 주석 참조.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ㅇ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 원문을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여호와의 손이 엘리야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즉 원문에는 '여호와의 능력'이란 말이 '여호와의 손'(야드 예호와)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를 '주님의 손'(the hand of the Lord)으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Modern Language). 그러나 Living Bible은 의미를 충분히 살려 본절을 '주께서 엘리야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다'(the Lord gave special strength to Elijah)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호와의 손'이란 다름아닌 엘리야를 아합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게 한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ㅇ허리를 동이고 - 달리는 데 지장이 없도록 긴 옷의 아래부분을 묶었다는 말이다(출12:11). 한편 비유적인 의미로 '허리를 동이다' 말은 어떤 행동을 위해 자신을 긴장시킴으로써 준비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렘 1:1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12:11 주석을 참조하라.
ㅇ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 엘리야는 이스르엘 성읍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그 어귀에 머물렀다. 이는 아합의 반응을 면밀히 주시하기위해서였던 동시에 이세벧의 격노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아합이 홀로 도회하기에 급급한데서 우상 숭배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그의 의도가 이미 여실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아합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존경하였다면, 그는 에디오피아의 내시처럼 엘리야를 마차에 동승시켰을 것이다(행 8:31).
ㅇ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 갈멜 산에서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질러 이스르엘 성읍 어귀까지 이르는 길의 거리는 대략 22.4km이다. 이 거리를 엘리야는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린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이나 마차 앞에서 달리는 것은 시종(侍從)이나 심부름꾼의 위치를 자처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본절은 엘리야 역시 아합의 종으로 처신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이제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이 증명되었음을 시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때 아합은 그 인물 자체의 도덕적 평가롤 떠나서 이스라앨의 통치자라는 상징적 의미로서만 기능하다. 즉 갈멜 산 대결 현장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전령의 위치에 앞세웠다면 그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신인가를 결정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이심이 판결났다는 뜻이 아닌가? 바로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아합의 앞에서 달리면서 나름의 축하 행진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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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3차 다니엘 기도 :: 3시(오전9시 : 십자가에 못박힘)--6시(정오)--9시(오후3시 = 저녁 소제 드림 =운명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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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인영, 딸 인혜)) ...아빠-엄마가 참되게 만났고 지금도 아침마다 주 이름 불러, 보혈에 씻김 받은  단독자로서 실지로 날마다 새로이 경험하여 아는바 살아계신 하나님, 바로 그 사랑의 무궁하심을 참되게 알기를 구하며 주 이름 부르며 힘써 구할 때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이심을 절절하게 알게 해 주시기를 바람
....... ((인영이나 인혜에 대해, 기도하는바는!!.... 겉으로 보고 느껴지는 대로만 피상적으로 냉소적으로 대하는 불신세상인바, 가까운 친지-지인들, (심지어 가족도 때때로 그럴 수 있음) 주변이나 일터(곧 불신세상)에서 경험케 되는 바 고통스러운 조롱-비아냥-히죽거림-손가락질 가운데 처하도록 주께서 [정말 마음 아프시지만] 허락하심은 그분의 사랑하는자로 하여금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만나주시는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사랑-참기쁨의, 안아주며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며 받아주심이 있음을 알게 하시려 함이요 .......주님 이름 부르며 믿음 발휘하여 먼저 주께 "어찌할까요"하며 주께 묻는 적극적 하나됨의 대화 통해 내 마음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한걸음 더 근심-두렴-염려없이 (짐짓추정-섣부른 생각 내려 놓고....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내려놓고, 앞날을 주께 맡겨드리고) 나아감으로써 이루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평강안에 살아감으로써 소망 이룰바 진정한 오래참음의 인내를 배우며 주님만 바라보며 정신차리고 깨어나도록, 일깨워 주심이기에)) 
.......고통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져서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랄 수도 있지만....오히려 그럴때마다 더 절대 긍정-절대 신뢰-절대 신뢰-절대 기쁨-절대 감사로 주 바라보기를 연습하여 자연스럽게 되며, 부드러움-탄력성-융통성 넘침으로 다른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생각하고...이 기회에!! 참되게 주님을 깨달아 알도록,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그것, 곧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 자신을 목숨 걸고 추구하여 만남!! 그 가운데, 그동안 회개하지 못한 죄들을, 생각나게 하시는 때마다 하나하나 주 예수님 이름 불러 진정으로 자복하여 회개하며, 주님 앞에 기도하며 머물러 있어 알게 하시는바 인생의 참 목표가 재정랍되기를...., 주님이야말로 유일무이한 목적이시요 결코 (기복적) 이용 수단이 아니심을 제대로 알고 주 성령과 날마다 새로이 함께 대화하며 걷는 인생 되기를....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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