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왕하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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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25장

===예루살렘의 멸망

1.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2.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3.  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 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4.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가 아라바 길로 가더니

5.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그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6.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들이 그를 심문하니라

7.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성전 붕괴

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  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13.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4.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15.  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16.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17.  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다

18.  ○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19.  또 성 중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과 또 성 중에서 만난 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과 성 중에서 만난 바 백성 육십 명이라

2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21.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유다 지도자 그달리야

22.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23.  모든 군대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를 지도자로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24.  그달리야가 그들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25.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6.  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여호야긴이 석방되다

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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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25장


1.  Now it came about in the ninth year of his reign, on the tenth day of the tenth month, that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came, he and all his army, against Jerusalem, camped against it, and built a siege wall all around it.

2.  So the city was under siege until the eleventh year of King Zedekiah.

3.  On the ninth day of the [fourth] month the famine was so severe in the city that there was no food for the people of the land.

4.  Then the city was broken into, and all the men of war [fled] by night by way of the gate between the two walls beside the king's garden, though the Chaldeans were all around the city. And they went by way of the Arabah.

5.  But the army of the Chaldeans pursued the king and overtook him in the plains of Jericho and all his army was scattered from him.

6.  Then they captured the king and brought him to the king of Babylon at Riblah, and he passed sentence on him.

7.  And they slaughtered the sons of Zedekiah before his eyes, then put out the eyes of Zedekiah and bound him with bronze fetters and brought him to Babylon.

8.  Now on the seventh day of the fifth month, which was the nineteenth year of King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Nebuzaradan the captain of the guard, a servant of the king of Babylon, came to Jerusalem.

9.  And he burned the house of the LORD, the king's house, and all the houses of Jerusalem; even every great house he burned with fire.

10.  So all the army of the Chaldeans who [were with] the captain of the guard broke down the walls around Jerusalem.

11.  Then the rest of the people who were left in the city and the deserters who had deserted to the king of Babylon and the rest of the multitude, Nebuzaradan the captain of the guard carried away into exile.

12.  But the captain of the guard left some of the poorest of the land to be vinedressers and plowmen.

13.  Now the bronze pillars which were in the house of the LORD, and the stands and the bronze sea which were in the house of the LORD, the Chaldeans broke in pieces and carried the bronze to Babylon.

14.  And they took away the pots, the shovels, the snuffers, the spoons, and all the bronze vessels which were used in [temple] service.

15.  The captain of the guard also took away the firepans and the basins, what was fine gold and what was fine silver.

16.  The two pillars, the one sea, and the stands which Solomon had made for the house of the LORD-- the bronze of all these vessels was beyond weight.

17.  The height of the one pillar was eighteen cubits, and a bronze capital was on it; the height of the capital was three cubits, with a network and pomegranates on the capital all around, all of bronze. And the second pillar was like these with network.

18.  Then the captain of the guard took Seraiah the chief priest and Zephaniah the second priest, with the three officers of the temple.

19.  And from the city he took one official who was overseer of the men of war, and five of the king's advisers who were found in the city; and the scribe of the captain of the army, who mustered the people of the land; and sixty men of the people of the land who were found in the city.

20.  And Nebuzaradan the captain of the guard took them and brought them to the king of Babylon at Riblah.

21.  Then the king of Babylon struck them down and put them to death at Riblah in the land of Hamath. So Judah was led away into exile from its land.

22.  Now [as for] the people who were left in the land of Judah, whom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had left, he appointed Gedaliah the son of Ahikam, the son of Shaphan over them.

23.  When all the captains of the forces, they and [their] men, heard that the king of Babylon had appointed Gedaliah [governor,] they came to Gedaliah to Mizpah, namely, Ishmael the son of Nethaniah, and Johanan the son of Kareah, and Seraiah the son of Tanhumeth the Netophathite, and Jaazaniah the son of the Maacathite, they and their men.

24.  And Gedaliah swore to them and their men and said to them, "Do not be afraid of the servants of the Chaldeans; live in the land and serve the king of Babylon, and it will be well with you."

25.  But it came about in the seventh month, that Ishmael the son of Nethaniah, the son of Elishama, of the royal family, came with ten men and struck Gedaliah down so that he died along with the Jews and the Chaldeans who were with him at Mizpah.

26.  Then all the people, both small and great, and the captains of the forces arose and went to Egypt; for they were afraid of the Chaldeans.

27.  Now it came about in the thirty-seventh year of the exile of Jehoiachin king of Judah, in the twelfth month, on the twenty-seventh [day] of the month, that Evil-merodach king of Babylon, in the year that he became king, released Jehoiachin king of Judah from prison;

28.  and he spoke kindly to him and set his throne above the throne of the kings who [were] with him in Babylon.

29.  And Jehoiachin changed his prison clothes, and had his meals in the king's presence regularly all the days of his life; 

30.  and for his allowance, a regular allowance was given him by the king, a portion for each day, all the days of his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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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5장 (개요)
다윗 시대 이래로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장소요, 온 땅에 기쁨에 기쁨을 더하는 곳이었다. 그러는 동안 시편은 줄곧 그 이름이 위대해질 것을 노래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서에서도 예루살렘에 관한 많은 기사를 읽게 된다. 그런데 신약에서도 본장에서처럼 다시 예루살렘은 파멸로 치닫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성경의 끝에 가서는 새 예루살렘에 관해서 읽게 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지 일고의 가치가 있다. 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갈대아 사람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완전 파괴. 즉 그 도성은 노략과 포위를 당하고(1-4), 집들이 불타게 되고(8-9), 성벽이 무너지며(10), 거민들이 포로로 잡혀갔다(11-12).
   (1) 예루살렘의 영광은 그 도성이 왕성이었다는 데 있었다. 거기에는 “다윗의 집의 보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이제 사라졌으며, 왕은 아주 비참한 포로가 되었고, 왕손은 멸망했고(5-7), 주요 신복들이 죽음을 당했다(18-21).
   (2) 예루살렘의 영광은 그 도성이 거룩한 성이었다는 데 있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증거가 있었다. 그러나 그 영광은 떠났으며, 솔로몬의 성전이 불타 버렸고(9), 남아있던 거룩한 그릇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졌다(13-17). 그래서 예루살렘은 과부와 같이 되어버렸다(애 1:1). 이가봇―그 영광은 어디에 있는고!
2. 그달랴의 통치 아래 유대에 남아 있던 자들은 혼란을 당하고 분산된다 (22-26).
3. 포로가 된 유다 왕 여호야긴은 37년 동안 감금 생활을 한 후 호의를 받게 된다(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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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몰락(왕하 25:1-7)
우리는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을 거슬러 반역하게 됨을 보았었다(24:20). 그것은 자기의 멍에를 벗으려고 은밀히 계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올바른 방법을 취하지도 않았었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시도가 가져온 치명적인 결과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된다.
Ⅰ.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1절). 그 나라가 이미 그들의 수중에 들어 있는데, 무엇이 그들을 방해했는가?(24:2) 그들은 “그 성읍을 치려고 사면으로 토성을 쌓았다.” 그들은 그 당시의 각종 전술을 사용하여 그 도성을 맹공하였고, 그 성 안을 죽음의 손아귀에 몰아넣으면서, 생명을 부지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필수품을 차단하였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방패와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쌌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보호가 떠나자 그들의 원수들이 그들의 사면을 둘러쌌다. 죄로 하나님을 분노케 하고 떠나게 하는 자들은, 결국 “무수한 죄악이 자기들을 둘러싸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2년 동안 이 포위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애굽 왕을 두려워하여 바벨론 군대가 물러났었다(렘 37:11).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그 도성의 주인이 될 때까지 결코 그 도성을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Ⅱ. 이 포위 기간 중에 기근까지 덮쳤다(3절). 그래서 오랫동안 그들은 “그들의 떡을 달아서 조금씩 먹었다”(겔 4:16). 그래서 그들은 결국 그들의 폭식과 무절제, 즉 “떡의 풍족과 무절제한 섭식”으로 인한 형벌을 받았다. 마침내 “그땅의 백성들을 먹일 양식이 없게 되었다.” 즉 일반 백성들과 군인들을 먹일 양식이 없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약화되었고, 군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양식이 부족하여 자기 자녀들을 잡아먹었다. 이 사건은 한 선지자가 예언했고(겔 5:10), 다른 한 선지자가 슬퍼한 것을 보라(애 4:3 이하). 예레미야는 왕에게 항복할 것을 간절히 권고했다(렘 38:17). 그러나 왕의 마음은 이미 파멸에로 굳어져 있었다.
Ⅲ. 드디어 그 성읍은 폭풍우에 휩쓸렸다. 즉 “무너졌다”(4절). 포위자들은 성벽에 구멍을 뚫고, 그들이 성 안으로 들어갈 길을 내었다. 그리고 포위 당한 자들은 더 이상 그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는 그 성읍을 떠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칼에 쓰러졌고, 승리에 찬 군사들은 그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매우 분격하였음이 분명하다.
Ⅳ. 왕과 그의 가족과 그의 모든 대신들은 밤에 도망하였고, 그들이 도망간 비밀통로들은 그 포위자들에게 들키지 않았다(4절).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용감히 대적하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물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 달아나는 자의 발은, 하나님의 심판과 대항하여 싸우는 손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실패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는, 항상 그가 이기실 것이다.
갈대아 사람들에게 왕의 도주 정보가 들어왔다. 즉 어느 길로 도망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 그를 뒤따라가 잡았다(5절). 유다 왕을 지키던 호위병들은 모두 흩어졌다. 각자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달아난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자신을 맡겼더라면, 그 보호는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여 그는 곧 적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들이 그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알아보자.
1. 그는 바벨론 왕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자기를 왕으로 세워준 자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충성을 맹세해 놓고 도중에 배반하고 만 사실 때문에 그는 전쟁 회의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 문제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합세하여 그와 다투었다(겔 17:16 이하 참조).
그때에 바벨론 왕은 (유다와 바벨론 사이에 있는) 립나에 있었다. 그것은 그가 대내적으로는 그의 왕궁에, 그리고 대외적으로 그의 군대에다가 명령을 내릴 태세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2. 비록 아직 어린아이들에 불과했지만 “그의 아들들이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 참혹한 마지막 광경을 그는 자기 눈으로 목격해야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줄곧 그의 정신에 커다란 비탄과 전율을 남겨 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의 자식들을 살해함으로써, 그들은 그의 어리석음에 분노한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시드기야에게 속한 자는 누구든 믿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살려 두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3. 그의 눈이 뽑혔다. 이로써 그는 “불행한 자들에게나 고뇌하는 영혼을 가진 자들에게도” 주어지는 공통적인 인간 생활의 위안, 곧 태양의 빛을 박탈당했다. 이로써 그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조롱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권고를 받고도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렘 38:19). 그러나 그가 두려워했던 바로 그것이 한 증인과 더불어 그에게 다가왔으며, 분명코 그의 불행은 더해졌을 것이다. 벙어리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 얘기를 한다고 의심하듯이, 장님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을 비웃는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서로 모순된 것 같았던 두 예언들이 모두 성취되었다. 예레미야는 예언하기를,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렘 32:5, 34:3). 에스겔은 예언하기를, 그가 바벨론을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겔 12:13). 그러므로 시드기야가 그곳으로 데려감을 당했으나, 그의 양 눈이 뽑힘으로써 그 나라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생명이 끝나기도 전에 자기의 날을 끝냈다 하겠다.
4. 그는 “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는 눈이 멀었으므로 결박할 필요가 없었다(그의 보지 못함이 이미 그를 결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치욕을 더욱 주기 위해서, 그들은 그를 결박하게 했다. 보통 악인들은 쇠로 된 사슬로 매었다(시 105:18, 107:10). 그러나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놋사슬로 결박했다. 그러나 그 금속이 보다 고귀하고 보다 가벼운 것이라 하여, 그것이 차꼬에 매여 있는 한은, 그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불의의 고리에 매인 자들이 “재앙의 고리에 매이게 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욥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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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의 파괴(왕하 25:8-21)
갈대아 군대는 그 도성이 그렇게 완강히 저항한 사실에 대하여 대단히 분노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그 도성을 취하면서 즉시 불사르거나 칼을 휘두르지 않았고(이런 때는 흔히 그런 일이 있는 법이다), 약 1개월 뒤(8절과 3절을 비교하라) 느부사라단을 파견하여 예루살렘의 파괴를 마무리지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나님은 이미 오랫동안 참으셨으나, 다시 그들이 회개할 여유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헛된 일이었다. (하여튼 나타난 바에 의하면)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완악했고, 그에 따라서 심판의 실행은 극도에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Ⅰ. 그 도성과 성전이 불탔다(9절).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거주시키려고 어떤 거류민단을 이주시킬 계획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그 도성을 도둑들의 보금자리마냥 잿더미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의 궁전과 “대신들의 집”이 불탈 때는(그 집 거주자들이 그들의 죄 때문에 그 집들을 불타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조금도 의아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전”이 이 불길 속에서 사라져야 하며,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이 불에 타야 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사 44:11). 다윗이 준비하여 솔로몬이 막대한 경비를 들여 지은 그 성전(왕상 9:3)―그 위에 항상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자리잡고 있던 그 집― 그것은 이 화재에서도 타다 남은 부지깽이처럼 화재를 면할 수 없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그것도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을 막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웅장한 건축물은 재로 변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마 그 안에 있던 법궤는―블레셋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다가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렀는가를 적군들도 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감히 적군들도 노획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법궤의 지지자들 중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관하려고 관심을 쏟지도 않은 것 같다. 만일 그러했더라면, 우리는 제2의 성전에서 그 법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경 저자들 중의 한 사람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 법궤를 성전에서 내어다가 요단 맞은 편 느보 산 동굴로 옮겨서 숨겼다고 말한다(마카비하 2:4-5). 그러나 당시 예레미야는 철저히 감금된 포로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성전이 불타게 함으로써, 신앙의 생명과 권능이 무시되는 때에는 하나님도 그의 예배의 외형적 허위에 거의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 백성들은 성전을 신뢰했다. 그래서 마치 그것이 자기들을 죄에서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렘 7:4).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그 성전을 모독하면, 그것은 한낱 거짓된 피난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게 하셨다. 이 성전은 약 420년 혹은 430년 간 서 있었다.
그 백성들은 그 성전에 관한 약속들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므로, 그 약속들은 복음의 성전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음의 성전은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처이다. 제2의 성전도 제1의 성전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서 불탄, 그달 그날에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 불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이것은 조세푸스(Josephus)의 견해이다. 그날은 8월 10일이라고 한다.
Ⅱ. 예루살렘의 성벽을 파괴했다(10절). 그것은 승전한 군인들이 예루살렘이 그토록 오랫동안 저항한 사실에 보복하려는 듯한 행동이었고, 적어도 또 다른 기회에 있을지도 모를 그러한 반항을 미리 방지하려는 작전과도 같았다. 죄는 사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버리며, 그들의 방어책을 제거한다. 이 성벽들은 느헤미야 시대까지는 조금도 수리되지 못했다.
Ⅲ. 그 백성의 잔류자들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되었다(11절). 주민의 대부분이 이미 칼과 기근으로 죽었거나 그들의 왕이 도망할 때 도망갔다(5절에 기록된 바대로 “모든 군사가 저를 떠나 흩어졌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 수효는 도합 832명에 불과했다(렘 52:29). 그리고는 단지 “그땅의 빈천한 자만 남겨 두었다”(12절). 그들은 갈대아 사람들을 위해 그땅을 경작하고 포도원을 손질하게 했다. 때로는 빈곤이 하나의 방패막이 된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자들은 아무것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을 억압했던 부유한 유다인들이 이제 나그네들, 아니 죄수들이 되어 적국에 가 있었을 때, 그들의 멸시를 받고 억압을 받던 빈천한 자들은 자기 나라에서 평화와 자유를 누렸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때로 이런 식으로 교만한 자들을 현저히 낮추시고 낮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Ⅳ. 놋그릇과 성전의 부속물들이 옮겨졌다. 금은 그릇들은 대부분이 그 이전에 가져가 버렸던 것이다. 하나님의 전의 안정과 힘을 상징하는 “야긴”과 “보아스”(왕상 7:21; 대하 3:15-17)라는 두 개의 유명한 기둥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 기둥의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13절). 상징의 내용이 되던 실체들이 죄를 지어 사라져버린 때에, 상징들만이 버티고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아하스는 불경하게도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내고” “놋바다를 돌판 위에다가 두었다”(16:17). 그러므로 곧 물두멍과 놋바다가 원수의 손에 넘어간 것은 정당한 일이다. 하나님의 규례를 업신여기고 악용하며 못쓰게 만드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도로 그 규례를 빼앗아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는 정의로운 일이다.
또 금과 은이 섞여 있던 것들도 옮겨졌다(15절). 그러나 이번에 가져간 약탈품의 대부분은 놋이었고, 그 양이 막대하여 “중량을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16절). 사역자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쓰던 그릇들을” 옮겨감으로써 그 사역자들의 집무는 중단되고 말았다(14절). 하나님 예배의 은덕을 오랫동안 경시해 왔고, 그보다는 거짓된 예배를 더 좋아한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예배에 필요한 기물들을 빼앗아버리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정당한 일이었다. 많은 제단을 가지려는 자들은 하나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Ⅴ. 신분이 높은 사람 몇 사람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대제사장 스라야(에스라 7장 1절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에스라의 아버지인 듯하다), 부대제사장(기회가 오면 대제사장을 대행할 제사장), 그리고 세 사람의 성전 문지기, 군대장관, 왕의 시종 다섯 사람(이후 그들을 일곱 명으로 늘였다. 렘 52:25), 전쟁의 서기관 혹은 군대의 주계관(主計官), 그리고 그 도성에 숨었던 일반인 60명이 살해되었다. 상당한 지위에 있던 사람들은 바벨론 왕에게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19-21절). 그러므로 이제는 죽음의 고통이 지나갔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벨론 왕의 보복심은 그들이야말로 자기를 가장 괴롭힌 자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그들이야말로 이러한 폐허에 의해서 처벌받게 된 불경과 우상숭배의 장본인들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으로 그 재앙은 종결되었다. 여호수아가 그땅을 차지하게 된 지 약 860년 후에, “유다는 사로잡혀 그땅을 떠나게 되었다”(31절). 이리하여 성경이 이루어졌다. “여호와께서 너희가 알지 못하는 나라로 너희와 너희가 세울 왕을 끌어가실 것이다”(신 28:36). 죄가 그들의 조상들을 40년 동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 이제 또 죄가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여호와는 그가 집행하는 심판을 통해서 그가 한 말씀을 이루신다(암 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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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백성의 분산(왕하 25:22-30)
위의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보게 된다.
Ⅰ. 남은 사람들의 흩어짐. 예루살렘 도성은 완전히 황폐케 되었다. 그땅에는 그 난국을 빠져나가 “노략물 대신으로 자기들의 생명을 얻은”(이것은 별로 은총이랄 게 못되었다) 자들이 다소 있었다(렘 45:5).
1. 이제 그들이 얼마나 좋은 처지에 놓였는지를 살펴보자. 바벨론 왕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인 그달리야를 택하여, 자기 밑에서 일하는 그들의 통치자와 보호자로 지명했다. 아마 그는 매우 선한 사람이었을 것이며, 최악의 사태를 최상으로 이용하려는 자였을 것이다(22절). 그의 아버지 아히감은, 왕들이 예레미야의 죽음을 맹세했을 때에, 예레미야에게 호의를 베풀고 보호했던 사람이다(렘 26:24). 아마 예레미야의 권유로 인해, 이 그달리야는 갈대와 사람들에게 가서 항복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로 바벨론 왕은 그를 신임하여 정권을 맡긴 것 같다. 그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사무엘 시대에 유명했던 곳인 베냐민 부족의 땅 미스바에 머물러 있었다. 시드기야를 떠나 도망했던 자들이 그리로 와서(4절), 그의 보호를 받았었다(23절). 그리고 그는 그들이 만일 마음을 돌이켜 바벨론 왕의 통치 아래 평화롭게 지낸다면 그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확약했다(24절). 그달리야에게는 제왕의 위풍과 권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달리야는 역대의 유다 왕들 중의 많은 왕들보다는 그들에게 더 큰 축복이 될 수가 있었다. 특별히 그에게는 예레미야와 같은 추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당시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들의 일에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렘 40:5-6).
2. 그달리야가 통치권을 인수한 지 2개월도 못되어 그가 죽음으로써, 그들에게는 곧 매우 치명적인 불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현재로서는 유다인들의 완전 근절이 이미 작정되어 있으므로, 그 유다인들이 스스로 다시 그땅에다 뿌리를 내리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었다. 온 땅이 송두리째 뽑혀야 한다(렘 45:4). 그리하여 이 기대에 넘친 정착은 산산이 좌절되었다. 그것도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들 중의 몇몇 사람에 의해서였다. 그들에게 평화가 될 길이 그들의 눈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 다시 잘 지낼는지 그때를 알지 못했고, 그것을 듣고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1) 그들에게 자기들 자신의 선한 통치자가 있었으나, 갈대아 사람들에 대한 증오에서 그를 살해했다. 즉 그 왕은 느브갓네살이 지명한 자였기 때문이었다(25절). 왕족이었던 이스마엘은 그달리야의 출세와 그의 밑에서 백성들이 행복하게 정착하는 것을 시기해서, 비록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제안할 수는 없었지만, 그달리야를 파멸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달리야와 그의 모든 친구들, 즉 유다인들과 갈대아인들까지 모두 죽였다. 느브갓네살도 다윗가(家)의 타락한 이 후손처럼 그렇게 유다인의 평화에 악한 원수 노릇을 하려 하지는 않았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2) 아직은 그들이 자기들의 그 좋은 땅에 있었지만, 그들은 이제 그것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다. 그것은 갈대아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26절). 갈대아 사람들은 그달리야가 살해된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분이 상했을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남았던 자들이 그것은 다만 이스마엘과 그 일당의 행위였다고 주장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항변을 했더라면―생각건대 그들은 결백했던 자들이요, 아니 오히려 그 사건으로 인해 크게 고통을 당했던 자들이다― 그들이 그 사건 때문에 처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갈대아인들을 두려워한다는 핑계로 예레미야의 충고에 반대하여, 모두 애굽으로 갔다. 아마 그들은 거기에서 애굽 사람들과 점차로 동화되어서, 다시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철저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애굽이 그들의 최후를 맡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저 경고의 장(章)의 마지막 구절이 성취되기 위해서였다(신 28:68). 즉 “여호와께서 다시 너희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다”라는 경고였다. 이 사건은 선지자 예레미야에 의해서 더욱 자세히 기록되었다(렘 40-45장). “그는 자기가 보아야만 했던 그 장면 속에서, 우울한 역을 맡았다”(Quaeque ipse miserrima vidit, et quorum pars magna fuit).
Ⅱ. 포로가 된 왕을 회복시켜 주었다. 시드기야에 관하여는, 그가 눈이 멀어져서 바벨론으로 데려간 뒤로는 더 이상 듣지 못한다. 그러나 아마 그가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죽었을 때는 다소 영예롭게 장사되었던 것 같다(렘 34:5). 여호야긴 혹은 여고냐는 항복했다(24:12). 그래서 에윌므로닥은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죽자 곧 왕좌에 오르고,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석방하여(그는 거기서 37년을 갇혀 있었으므로, 이제 55살이 되었다), “그에게 친절히(선히) 말하였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가 포로로 잡아왔던 다른 어떤 왕들보다도 그를 더욱 존경하였고(28절), 그에게 죄수복 대신 왕복을 주고, 그를 자기 궁전에 두면서(29절), 그와 그의 가족에게 그의 지위에 어울릴 정도의 은급을 지급하였다. 곧 “날마다 받는 정수(定數)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그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자.
1. 여호야긴의 처지에 매우 행복한 변화였다.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감금과 불명예 가운데서 지낸 뒤에 명예와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과 그가 오랫동안 죄인의 궁핍과 비참에 익숙하게 된 후에 왕궁의 풍성함과 열락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매우 어둡고 지루한 밤이 지난 뒤에 아침이 돌아온 것과 같았다. 어떤 사람이 장기간 동안 불행만을 보고 살아왔다 하여 그가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하지는 말자. 즉 가장 비참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의 일에 어떤 축복을 주실지는 모르는 일이요, 그들이 “곤고히 지낸 날수대로”(시 90:15) 그들이 어떤 위안을 받게 될지,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고통받던 성도들의 죽음은 그 성도들에게 마치 여호야긴이 당한 그런 변화를 준다. 즉 죽음이 그 성도들을 감옥에서 석방할 것이고, 그 몸에서 죄수복을 벗기고, 그들의 장래를 위해 앞길을 열어줄 것이다. 또 죽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랑스런 자유인 왕 중 왕의 보좌와 신탁으로 그 성도들을 내보낼 것이다.
2. 에윌므로닥은 매우 관대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포로 된 자들에게 멍에를 너무 무겁게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으로서의 다정한 마음과 왕으로서의 명예로써 그 멍에를 보다 가볍게 해 주었다. 에윌므로닥은 그의 권력 아래 있던 모든 왕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특히 그중에서 여호야긴이 더 큰 은혜를 입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그 이유가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유명한 조상들의 명예와 그의 가문의 유구한 역사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민족들의 왕들은 아무도 한 집안에서 유다 왕가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유다 전승에 의하면, 에윌므로닥 자신도 당시에 어떤 실수로 자기 아버지에 의해서 투옥되었었는데, 그때야 그는 제 정신이 들었고, 그 감옥 안에서 여호야긴과 친교를 맺었고, 그 결과로 그가 권좌에 오르자마자 고통받는 자에게, 그것도 함께 고난을 받던 그 여호야긴에게 이러한 친절을 보인 것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에윌므로닥이 좋은 감화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여호야긴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3. 유배 중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격려를 보내며, 적당한 때가 오면 그들이 석방되리라는 그 믿음과 소망을 지지해 주는, 하나님의 섭리의 자비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그들이 유배를 당한 바로 한밤중에 일어났다. 70년 중에 36년이 지나갔으나, 아직 거의 같은 연한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때에 자기들의 왕이 그렇게 진출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적당한 때, 곧 정해진 그 시간이 돌아오면 그들도 석방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고무적인 전조였을 것이다. “정직한 자에게는 암흑 중에서도 빛이 일어나서”(시 112:4), “구름이 낀 어두운 날”에도 희망을 지닐 수 있도록 격려를 주게 될 것이니, 그들은 “어두워 가는 때에도 빛이 있으리라”(슥 14:7)는 희망 속에 살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곤경이 닥치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말자.

===호크마===
열왕기하 25장
1 시드기야 구년 시월 십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사면으로 토성을 쌓으매
ㅇ시드기야 구 년 시월 십 일 - 본서기자는 열왕기서 전체에서 처음으로 년, 월, 일까지 정확히 밝히고 있어 본 사건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대 위기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렘 39 : 1과 겔 24 : 1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로 이날짜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시월 십 일이 민간력을 의미하는지, 혹은 태양력을 가리킨 것인지, 그리고 종교력을 사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그래서 이에 대해 대부분의 영역본은, 즉 KJV, NIV, RSV은 단순히 시월 십 일(tenth dah, tenth mo-nth)로 순서를 나타내는 서수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영역본 중 유독 Living Bible에서 만이 이때를 '3월(March) 25일' 로 나타내고 있으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충분치 못한듯 하다. 그리고 혹자는 이 시점을 B.C. 588년 1월 15일로 잡고 있으나 (Wycliffe)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도 미약한 듯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이 포위된 때가 B.C. 588년인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은 B.C. 586년 5월 10일까지 (렘 52 : 12) 만 1년 7개월 동안 계속된 후 멸망당했기 때문이다(8절).
ㅇ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올라와서 - 몽고 메리(Montgo-mery)의 생각에 따르면 느부갓네살(B.C. 605-562)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다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6절을 보면 분명히 그 당시까지만 해도 바벨론 왕은 리블라(립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절은 바벨론이 팔레스틴을 원정할 때 느부갓네살 왕이 직접 진두에서 지휘를 한 것이아니라 단지 그 배후 조종자이며 총책임자임을 시사할 뿐 그가 실제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Hobbs). 그리고 렘 38 : 17에는 당시 바벧론의 군대 통솔자는 바벨론 왕의 방백들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잇어 이를 더욱 뒷받침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때에 바벨론 왕이 '립나'에 본부를 세운 이후 예루살렘을 공격했다고 한다(R.D. Patterson, Hermann J. Austel).   한편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경로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렘 34 : 7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과 함게 라기스와 아세가를 먼저 공약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세벨라 지역(왕하 18 : 13-17 ; 19 : 8)을 통과했던 것 같다. 여기서 '세벨라'(Shephelah)는 팔레스틴의 연안 평지와 유대 및 사마리아의 중앙 고산 사이에 놓여 있는 저지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벨론이 이지역을 통과하여 산헤립과의 전쟁으로 유명한 라기스와 아세가(18 : 14, 17 ;렘 34 : 7)를 먼저 함락한 것은 남유다의 시드기야로 하여금 애굽을 향해 구원병을 요청하는 연락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렘 37 : 5).  그러나 렘 37 : 5과 겔 17 : 17을 근거로 해서 볼 때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고 있을 시기에 애굽왕이 시드기야를 도우러 왔다가 느부갓네살에 의해 퇴각한 사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벨론이 유다를 친 것은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시드기야가 등을 돌려 배반한 때문이었다(Wycli-ffe, 24 : 20).
ㅇ토성을 쌓으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예크'를 RV에서는 '성벽' 또는 '요새'를 쌓다고 번역하고 있다(Thenius, Hitzig). 그리고 70인역(LXX)에서도 이와 동일한 뜻의 단어 '페리타이코스'를 쓰고 있다. 또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이것과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그가 로마인들이 포위하는 방법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여기에 나타난 히브리어 '다예크'의 문자적인 의미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근거로 해서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바벨론이 토성을 쌓은 것은 성벽보다 더 높은 곳에서 성안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공성용(攻城用) 망대들을 쌓았음에 틀림없다. 즉, 여기에 나타나 있는 '토성'은 일렬로 된 성벽이나 (겔 17 : 17)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파수대, 다시말해서 '망대' 혹은 '공성용 망대'를 말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 p.511-512). 한편 바벧론이나 앗수르가 적의 성을 포위할 때 사용하던 망대는 두꺼운 널판으로 만든 이동식 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때로는 공성퇴(攻城退)를 싣고 다니면서 공격했기 때문에 그 파괴적인 힘은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2 성이 시드기야왕 십 일년까지 에워싸였더니
ㅇ본절의 표현을 볼 때 예루살렘이 포위당했던 기간은 약 2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 요세푸스(Josephus)는 이보다 더 정확하게 예루살렘이 18개월 가량 포위당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렘52 : 5, 6을 보면 바벧론의 포위는 그해 4월 9일에 끝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예루살렘 성은 성(城) 주위에 있는 언덕이 성보다 더 높아서 기혼 생물을 성안으로 쉽게 끌어들일 수 있어 살기에는 좋았으나 전쟁시에는 쉽게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R. Hum-ble). 그래서 이러한 지형적 조건 때문에 예루살렘 성은 견고한 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이방인의 손에 함락된 것이다.
3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진하였고
ㅇ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 '기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부족', '결핍', '기근'을 나타내는 '라아브'이다. 그런데 이말은 '시장하다', '갈망하다'란 의미의 '라에브'에서 왔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극도의 허기진것'을 나타낸다. 한편 성이 포위되어 있는 가운데 '기근'과 같은 천재 지변이 내린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이다.  왜냐하면 본래 이성은 히스기야의 관개 사업(灌漑事業)에 의해서 물 공급이 잘 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근으로 인하여 물조차도 갈하게 되어 돈을 주고 물을 사먹어야 할 형편이 된 것이다(애 5 : 4). 그리고 본래 예루살렘 성의 식량공급은 보통 때에도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포위를 당함으로 인해 식량난은 더욱 심하여졌던 것이다. 그래서 귀부인들이 음식 찌꺼기를 찾기 위해 거름더미를 뒤지거나(애 4: 5) 부모들이 자식을 잡아 먹는 경우까지 생겼다(애 2 : 20 ; 4: 3, 4, 10 ; 겔 5 :10).  이러한 전쟁의 참상은 이미 6 : 25에서도 다루었었다. 한편 예루살렘에 대한 기근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범죄 결과로 주어질 예언된 것이었다. 즉 일찍이 모세(신 28 : 53-57), 예레미야(렘 27 : 8, 13), 에스겔(겔 4 :16, 17) 선지자 등이 예언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근은 아브라함(창 12 : 10), 이삭(창 26 : 1),요셉(창 41 :53-56), 다윗(삼하 21 : 1), 아합 왕(왕상 17 : 1), 엘리사 시대(4 : 38)에 있던 것으로 이것의 대부분의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법과 범죄(겔 14 : 13), 그리고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생긴'(창 41 : 1-57) 것이었다.
4 갈대아 사람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성벽에 구멍을 뚫은지라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가더니
ㅇ성벽에 구멍을 뚫은지라 - 갈대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뒤 야음(夜陰)을 틈타서 성벽에 구멍을 내었다. 즉, 그들은 경사가 없이 평평하여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북쪽 성벽을 뚫고 성 안으로 침투하였다(Josephus). 그런데 이 구멍난 성벽은 히스기야와 므낫세가 세운 제 2성벽에 해당된다(Keil & Delitzsch).
ㅇ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 시드기야가 수비하던 군사들과 함께 도망한 길은 다윗 성의 남쪽 끝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가 서로 맞닿는 두로베온의 입구 문이었다. 이 왕의 동산 곁문은 실로암(셀라) 못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느 3 : 15)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면 여리고로 가는 길과 연결된다.
ㅇ아라바 길 - 이길은 삼하 4 : 7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아로니(Aharoni)에 따르면 아라바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가리킨다.  또한  이길은  일명 '요단 계곡'이라고도 하는데 이 계곡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요단 계곡과 사해를 포함하여 멀리 아카바만까지 이르는 대계곡을 가리킨다. 한편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해서 가면 모압과 암몬 땅이 나온다. 그런데 이두 나라도 본래 시드기야와 함께 바벨론에 대해 모반을 일으키려 했으므로(렘 27 : 3) 시드기야가 그 길로 계속 가면 도피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5 갈대아 군사가 왕을 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 미치매 왕의 모든 군사가 저를 떠나 흩어진지라
ㅇ왕의 탈주는 바벧론 군대에 즉각적으로 발견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ㅇ여리고 평지 - 이곳은 여리고의 동쪽 요단 계곡 입구 쪽에 있는 넓은 건조지로서 여리고 주위의 지방을 형성한 요단 평야의 한 부분이다(수 4 : 13). 그런데 많은 군사와 함께 이 넓은 지역을 갈대아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통과하여 도망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모압이나 암몬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통과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드기야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곳을 통과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이것은 이미 에스겔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것(겔 12 : 3-7)으로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다.
ㅇ왕의 모든 군사가 저를 떠나 흩어진지라 - 왕을 호위하던 모든 군사가 왕과 함께 여리고 평지를 지나려다가 갈대아 군사에게 발각되자 모두 왕을 버리고 도망하고 말았다. 이것은 또한 에스겔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겔 12 : 14). 한편 본절에 표현된 '흩어진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포추'로 이는 '산산이 부수다', '사방으로 던지다', '스스로 흩어지다'란 의미의 '푸츠'에서 온 말이다. 이는 사발이나 유리 그릇이 깨어질 때 그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듯이 다시 모을 수 없을 정도로 분산되는 유다 군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원인에 대해 일부의 학자들은 여리고 평지가 기름진 곳으로 곡식과 열매가 풍성한 곳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성 안에서 굶주렸던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양식을 구하려고 농가에 제각기 흩어졌다고 생각한다(G. Rawlinson).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럴듯하지만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조금은 지나친 상상인 듯 하다.
6 갈대아 군사가 왕을 잡아 립나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저에게 신문하고
ㅇ립나 바벧론 왕 - 시드기야 왕은 갈대아 군사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히브리어 원문에는 '리블라')에 있는 바벧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끌려 갔다. 립나(리블라) 의 위치나 지형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23 : 33을 참조 하라.
ㅇ저에게 신문하고 - 여기서 '신문(訊問)하다'(미쉬파트)는 단어는 전문적인 법정 용어이다(렘 52 : 9). 즉, 이말은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 중에서도 언도나 공식적인 선언을 나타낸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모반했기 때문에(겔 17 : 16, 18) 느부갓네살의 법적인 심판을 피할수가 없었던 것이다(렘 52 : 9).
7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
ㅇ본절에서 언급되 시드기야에 대한 형벌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우 잔인하게 보인다.시드기야는 결국 느부갓네살과 맺은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이 같은 곤혹(困惑)을 치룬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갈대아 군대에 항복하는 길만이 자신과 그 백성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예레미야의 끈질긴 호소(렘 21 : 8-10)를 거부한 탓에 받는 하나님의 형벌이다(렘 38 : 18).
ㅇ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 희생물들을 '목전에서' 죽이는 일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에서 주로 사용되던 행위이다(레 6 : 25). 그런데 시드기야의 아들들이 이렇게 죽음을 당한 것은 언약을 깨뜨린 자들이 맞는 최후가 죽음인 것을 시사한다. 한편 이렇게 아들까지 죽음을 당한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즉 그의 아들들이 원수의 손에 잡히리라고 한 말(렘 38 : 17-23)이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느부갓네살이 시드기야의 아들들까지 죽인 것은 그가 다루기 힘든 유다 왕가의 종식(終熄)을 위해서 였다고 한다(Wycliffe).
ㅇ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 이것은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렘 32 : 4 ; 34 : 3)에 대한 성취임과 동시에 겔 12 : 13에서 "그가 거기서(갈대아땅에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예언의 성취이다. 이와같이 죄수의 눈을 빼는 것은 동양의 보편적인 관례이긴 하지만(삿 16 : 21) 특별히 이러한 행위를 적의 왕에게 행하는 것은 바벨론(Babylonians)과 파사(Persians)에서 흔히 볼수 있었던 광경이다(Keil & Delitzsch,Vol. p. 514).한편 두눈을 빼는 행위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있다. 즉, 지성과 의지의 관문인 눈을 제거하는 행위는 완벽하게 무기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M. Douglas).
ㅇ사슬로 결박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네후쉐타임'은 성서에 단 한번 밖에 쓰이지 않은 단어로서 '한 쌍의 구리 차꼬로 결박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차꼬'는 중죄인을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이다. 그런데 앗수르와 바벨론의 차꼬는 두 개의 철사 고리가 하나의 긴 사슬로 되어 있는 것이다(Ba-tta). 그래서 행동하기에 무척이나 거추장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한편 시드기야에게 이처럼 행한 것은 그가 왕이라는 중요 인물이었기도 하지만 32세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엄격한 단속이 필요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느부갓네살이 시드기야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다고 증언하고 있다(렘 52 :11).
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십 구년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ㅇ느부갓네살의 십 구년 오월 칠일에 -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B.C. 605년 여호야김 제 4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 8년에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유다 왕 여호야긴을 치고 그를 대신하여 여호야긴의 삼촌 시드기야를 왕위에 앉혔다(24 : 10-17). 그후 그는 자기를 배반한 시드기야를 징계하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 하여 포위 공격 2년 만인 시드기야 11년(B.C. 586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바로 이때가 느부갓네살 즉위 19년이었다. 그리고 4월 9일에 예루살렘이 멸망했으니까 본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은 예루살렘 멸망 후 약 한달 만에 발생한 것이다.
ㅇ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 여기서 '시위대 장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브타바힘'이라는 단어가 삼상 9 : 23에서는 '요리인'(料理人)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또 창 40 : 4에서는 보디발의 직책, 즉 '시위 대장'으로 나타나 있다.  이로 볼 때 느부사라단은 왕의 명을 받아 궁내부의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사형 집행하는 직책을 가졌음을 본절을 통해 알 수 있다(Keil & Delitzsch). 한편 본절에서는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날이 5월 7일로 나타나 있는데 렘 52 : 12에는 5월 10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필사자가 10을 뜻하는 어미인 '요드'를 7을 뜻하는 어미 '자인'으로 잘못 본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되나 어느 것이 더 정확한 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G. Rawlinson, Keil & Delitz-sch).
9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ㅇ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사르고 - 성전은 솔로몬 왕 제 11년 8월에 완공되었고 (왕상 6 : 38) 그후 13년 후인 솔로몬 제 24에 왕궁이 완공되었다(왕상 7 : 1 ;대하 8 :1). 그리고 이때가 B.C. 946년 경이었다. 그런데 이성전과 왕궁이 불살라진 것은 시드기야 11년 곧 B.C. 586년이다. 따라서 성전은 건축된지 453년 만에, 그리고 왕궁은 440년 만에 파괴된 셈이다. 한편 이 사건은 하나님께 솔로몬에게 경고하신 예언의 성취이며(대하 7 : 20) 요시야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이름을 거기 두리라한 이 전을 버리리라"(23: 27)고 경고하신 예언(20 : 17 ; 호 8 : 14 ; 암 2 : 5)의 성취이기도하다. 그러므로 본절에 언급된 성전과 왕궁의 파괴는 지금 까지 계속해서 언급 되던 신명기적 교훈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신명기적 형벌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뽑아 낼 뿐만 아니라 엄격히 심판하시겠다는 경고를 그대로 이행하신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루실 성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ㅇ예루살렘의 모든 집 - 이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집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안에 있는 '큰 집 모두'를 가리킨다(Keil & Delizsch).   왜냐하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는 '모든 큰 집'이기 때문이다.
ㅇ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 여기서 '귀인'이란 '재물이 많은 부유한 사람들'을 가리키며(4 : 8) 12절의 '빈천한 국민'과 대조를 이룬다. 한편 역대서에서는 갈대아인들이 '모든 구실'을 불살랐다고 말해 귀인들의 큰 집까지도 이에 포함시킨 듯하다.
10 시위대 장관을 좇는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ㅇ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 이것은 예루살렘 성벽 전체를 헐었다는 뜻이 아니라 성벽의 중요 부분들을 파괴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느헤미야 시대에 까지도 성벽의 상당 부분이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느 2 : 13, 15; Rawlinson). 한편 성벽은 하나님의 보호, 무한한 능력(시 18 : 29), 평강(시 122 : 7), 피난처(잠 18 : 11), 구원(사 26 : 1 ; 60 : 18-21),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성벽을 헐어내린 것은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멸망하였음을 상징한 것이다.
11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는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다 사로잡아가고
ㅇ성전과, 그리고 귀인들의 저택까지도 불사른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의 백성들과 유다의 거민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의 통상적인 분류 방법인 사회의 신분에 의해 사람들을 분류했다. 그런데 본절에서 느부사라단이 잡아간 포로들은 모두 세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다. 1) 왕과 군사들이 모두 도망하고 예루살렘 성이 멸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성안에 남아 있던 백성들', 2) 7 :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 그런데 유다의 시드기야 왕은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이들을 자신이 두려위한다고 예레미야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렘 38 : 19). 3) '무리의 남은자들', 여기서 '무리'(헤하몬)는 렘 52 : 15에 나오는 '무리의 남은 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아몬'과 동의어로서 '기술공'을 의미한다(Hobbs, Hitzig). 혹자는 이것을 단순히 불필요한 중복 단어라고 생각하지만(Rawlinson, Gray, Bahr) 이와는 달리 이것은 전쟁에 쓰이는 공장(工匠)이나 대장장이들(25 : 14 주석 참고)는 따로 한 부류로 잡아 갔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사실상 그 성중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바벧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1차 (B.C. 605, 단 1 : 1-5)와 2차(B.C. 597, 24 : 8-16)로 침공당한 남유다는 많은 백성을 포로로 잃어 비천한 자만 남았었다(24 : 14). 그런데 이제 제 3차 침략에 의해(B.C.586) 유다는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다. 다음 지도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경로를 추적한 것이다.
12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ㅇ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두어 - 여기 '빈천한 국민'(달란트)에 대해서는 24 : 14을 참고 하라. 여기서 말하는 히브리어 '달란트'는 아무 소유가 없는 가난한 자들일 뿐만 아니라(렘 39 : 10) 계층적으로 낮은 천민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 나와 있는 '비천한국민'은 '평민', 혹은 '가난한자들'을 가리킨다.
ㅇ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 여기서 '농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게빔'은 '구멍을 파다'란 뜻의 동사 '가바브'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들이 샘이나 개천을 파는 사람들임을 암시하고 있다(3 : 16). 그리고 70인역(LXX) 중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도 동일한 뜻의 단어 '타바인'을 사용함으로써 이를 지지해 주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학자들은 난외주에서 '경작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가브'에서 파생한 이 단어 '레요게빔'을 기록하여 이 단어가 본래는 '농부'를 뜻하는 단어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당시 바벨론이 유다에 이러한 농부들을 남겨 놓음으로 인해 계속해서 농사일을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벨론의 정책에 의한 농사는 포로 시대 이후 까지도 계속되었다(Hobbs). 특히 바벨론은 정책적으로 총독 그달리야를 유다에 보내어 경작을 활성화하도록 했는데 (렘 40 : 10, 12) 그것은 그들이 식민지 유다로부터 계속해서 조공을 거둬들이기 위함이었다.
13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전의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ㅇ여호와의 전의 두 놋기둥 - 본절에 언급된 놋기둥과 물두멍의 받침들에 대해서는 왕상 7 : 15-39을 참조하라. 여기서 성전 입구에 서 있는 두 놋기둥은 솔로몬의 명에 의해 히람이 만든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을 가리킨다(왕상 7 : 15-22). 그런데 기둥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창 28 : 18 ; 35 : 14),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출 13: 21, 22), 그리고 그분의 위엄과(시 104 : 3) 영광(왕상 8 : 10, 11) 등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기둥을 깨뜨렸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함께 하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파괴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는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한편 이것들을 그대로 운반하지 않고 깨뜨려 갖고 간 것은 기둥이 너무 거대해서 운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Rawlinson, Keil & Delitzsch, Vol. , p.517).
ㅇ놋바다 - 이것은 반구형의 놋대야로서 성전의 제단과 입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이 놋바다는 솔로몬이 만든 것으로 제사장의 목욕 재계(ablution)을 위한 성구(聖具)였는데 직경 4.5m, 깊이 2.28m, 원주 13.68m로 300배럴(barrel)의 액체를 담을 수 있는 거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세마리씩 황소가 사방을 향하여 서 있는 상태 위에 얹혀져 있었다. 즉, 12마리의 황소 등 위에 떠 받쳐져 있었던 것이다(대하 4 : 1-6).
14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불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ㅇ가마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시로트'가 출 27 : 3에는 '재를 담는 통'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희생제물을 끓일 때 사용하는 '가마'(다에다)나 요리된 고기를 담는 그릇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성전의 기구들에 대해서는 왕상 7 : 40-50을 참조하라. 한편 성전 기구들 가운데 금으로 된것과 귀한 기구들은 이미 두 번에 걸친 느부갓네살의 성전 약탈때, 모두 빼앗겼고(24 :13 ; 단 1 : 1,2) 그 이후로 쓰이던 제사 도구는 거의 놋으로 된것들이었다(Rawlinson).
15 시위대 장관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으며
ㅇ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 좀더 구체적으로는 '불똥 그릇(출 37 : 23 ; 민 4 :9)과 주발들', 혹은 '대접들'(왕상 7 : 50)을 가리킨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이와 같은 성전의 기구들을 일백 개나 만들었다(대하 4 : 8).
ㅇ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 갔으며 - 24-13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느부갓네살이 가져간 금기명들 외에 금물이나 은물은 약간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와같이 기명들을 옮겨가는 군인들의 모습이 앗수르의 조각들 가운데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고 바벧론도 앗수르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종교 말살 정책을 수행했음이 틀림없다.
16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취하였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중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ㅇ이 모든 기구의 놋 중수(重數)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 놋의 양 뿐만 아니라 기둥의 부피에 대해서는 왕상 7 : 15-20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한편 본절에서는 이때 약탈된 놋이 너무 많아서 저울로 달아볼 수 없을 정도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놋은 금이나 은과는 달리 착복이나 횡령의 염려가 적어 특별히 그무게를 달아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Rawlinson).
17 그 한 기둥은 고가 십팔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머리가 있어 고가 삼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ㅇ놋머리가 있어 고가 삼 규빗이요 - 왕상 7 : 16과 렘 52 : 22에서는 다같이 이를 '다섯 규빗'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기둥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렘 52 : 22을 참조하라.
18 시위대 장관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ㅇ대제사장 스라야 여기서 '대제사장'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코헨히로쉬'의 문자적인 뜻을 '수(首)제사장'이다. 이러한 표현이 구약에서는 처음이지만 12 : 7에 나오는 '대제사장'(코헨 하가돌)과 같은 직무를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스라야는 '여호와께서 주장하심'이라는 의미의 인명(人名)으로 힐기야의 손자이며(대상 6 : 13, 14)에스라의 조상인 것으로 추측된다(스 7 : 1).
ㅇ부제사장 스바냐 - 렘 21 : 1 ; 29 : 25에 따르면 스바냐는 시드기야 왕의 사자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보냄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직책은 혹자의 주장대로 '제 2계급의 제사장', 즉 대제사장 밑에서 단순한 역을 담당했던 '평 제사장,(Keil &Delitzsch, Bahr)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부(副) 제사장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대제사장의 대리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렘 27 : 3). 한편 예루살렘 함락 후 그는 다른 지도자들과 함게 느부사라단에 의하여 바벨론 왕에게 끌려가 립나에서 죽임을 당했다(21절).
ㅇ전 문지기 세 사람 -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레위인으로서 모두 24명이었다(대상 26 : 17, 18). 그런데 붙잡힌 세 사람은 아마도 성전을 돌보는 관리들로서 문지기들을 지휘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Keil). 그래서 혹자는 이들을 '성전 수비대장'이라고 일컫는다(Wycliffe).
19 또 성중에서 사람을 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하나와 또 성중에서 만난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국민을 초모하는 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성중에서 만난바 국민 육십명이라
ㅇ본절에서는 성전의 주요 관리들을 다 잡은 바벧론 시위대가 시드기야가 포로로 잡혀간 후 불안정한 성내(城內)의 일을 돌보던 관리들을 잡아가는 장면이다.
ㅇ군사를 거느린 내시 하나 - 내시가 군사를 거느렸다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원래 내시는 왕실의 잡무를 맡아 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왕상 22 : 9 ; 에 2 :3, 14). 그러나 그들은 왕의 측근에서 왕을 경호할 뿐만 아니라(창 39 : 1 ; 에 6 :2) 왕후의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에 4 : 4, 5) 그것을 기회로 큰 권력을 획득한 예가 많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권력자나 지역의 세도가로 분류되어 바벧론에서 볼 때 제거의 대상이 된 듯하다.
ㅇ왕의 시종 다섯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왕의 얼굴을 본 다섯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5 : 1에도 나오는데 거기서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에 1 : 14에서 보는 바와같이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폈던 것 같다. 한편 렘 52 : 25에는 이 시종의 숫자를 다섯 명이 아니라 일곱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 표현이 왕실 시종들의 수효가 아니라 단지 '성읍에서 만난 사람들'을 지칭할 뿐이라고도 주장한다. 즉, 이들은 도망칠 수 없어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Pa-tterson, H.J. Austel).그러나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ㅇ국민을 초모(招募)하는 장관의 서기관 하나 - 군사를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그 명부를 작성하는 일은 서기관의 직무 중하나였다. 그런데 본절은 이 서기관이 일시적으로 군대의 지휘관 일까지 맡아 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이 서기관은 아마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에 군대를 조직하여 바벨론에 대항하려고 했던 것 같다.
ㅇ성중에서 만난 바 국민 육십 명이라 - 이들 역시 바벨론에 대항하던 부류들 중의 일부 핵심 세력들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지방의 유지들로서(Keil & Deiltzsch) 바벨론에 대항하기 위해 반란을 주도한 지도자들이었다(Wycliffe).
20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저희를 잡아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ㅇ저희를 잡아 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 지금까지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B.C. 605-562)앞에 끌려간 포로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1) 시드기야와 그의 아들들을 포함한 유다의 주요 관리들(6, 7절), 2) 성전의 관리들과 예루살렘 성에 남아있던 자들로서 끝까지 바벨론에 대항하던 자들(18, 19절), 그리고 나머지 포로들도 느부사라단에 의해 립나로 끌려갔으나 성중에서 만난 국민60명과 같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왕의 앞에까지는 인도되지 않았다(Rawlinson, Keil & Deli-tzsch).
21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ㅇ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 - 앗수르인들은 포로들을 처형시킬 때 십자가에 매달든지, 목을 베든니, 아니면 껍질을 벗기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용광로에 넣어 태워 죽이거나 맹수에게 먹이로 주든지, 아니면 잔인하게 사지(四肢)를 자르기도 했다. 그리고 바벧론에서도 이런일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기록이 베히스툰 비문에서 발견된다. 한편 성경의 기록에 대한 역사성을 고증(考證)하거나 설명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돌이나 점토판에 새겨져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비문들이다. 이 비문들 중에 성경의 역사와 관련된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 이전의 비문들 까)애굽어 : 애굽에서 발견된 것은 족장 시대와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착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의 고증을 위해 사용되곤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저주문서(Execration texts)이다. 다) 수메르 및 아카드어 : 수메르와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했으므로 이스라엘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발견된 것은 함무라비 법전을 위시한 여러 법전과 족장 시대의 관습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포함하는 마리 토판, 그리고 창조와 홍수 설화가 실린 에누마 엘리쉬와 길가메쉬에픽, 또한 B.C. 15C 가나안 지방의 사회적, 정치적인 구조를 반영해 주는 텔 엘 아마르나 토판 등이 있다. 2)가나안 정착 이후의 비문들 까)애굽어 :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애굽 문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메르넵타 문서와 잠언 22:17-23 : 14까지의 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담은 지혜 문서, 그리고 르호보암의 통치와 관련하여(왕상 14:25,26;대하 12:2-9) 시삭이 카르낙 신전에 새긴 비문 등이다. 다) 아카드어 : 여기에는 살만에셀 3세와 디글랏 빌레셀 3세, 그리고 사르곤 1세와 산헤립이 새긴 비문들이 있는데 이스라엘과 직접 관련된 것들이다. 또한 에살핫돈과 앗술바니팔의 연대기도 유다와 직접 관련이 있는 중요 자료들이다. 따 아람어 ; 왕상 15 : 18과 관련된 벤하닷의 비문이 아람어로 되어 있으며 이외에 아람어로 새겨진 비문들은(수진, 젠질리, 네랍, 앗술) 아람 왕국의 역사와 아람어와 역사 연구에 중요하다.
ㅇ이와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 이와 같은 표현은 사실상 본절이 본서의 마지막 절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17 : 23에 서도 똑같이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이구절이 본서의 마지막 구절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또 이것은 이미 경고한 바와같이 유다가 이스라엘과 같이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본절에서 '유다'가 사로잡혀 갔다는 것은 1) 유다를 다스릴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잡혀갔으며, 2) 실질적으로 유다라는 나라가 사라졌음을 가리킨다.   한편 이 사건(B.C. 586)은 여호수아에 의해 약속의 땅에 가나안을 정복한 후 (B.C.1405, 수 3 : 1-17)약 820여년이 경과된 시점에 일어난 불행스러운 일이다(John Wesley, Wesley's Notes on the Bible, p. 232).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7년에 3,023명, 제 18년에 832, 제 23년에 745명 등 총 4600여명이 사로잡혀 간 것으로 알려진다(렘 52 : 28-30). 그 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약 18,000여명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부녀자와 아이들은 계수하는 데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22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로 관할하게 하였더라
ㅇ본절 이후로부터는 느부사라단에 의해 유다 땅에 남겨진 자들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앗수르와 달리 바벧론은 정복지에 자국민의 이민 정책을 펴지 않고 그곳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자치제를 실시해 세금과 조공을 받아 갔던 것 같다. 그래서 유대인 가운데 명문 출신인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우고 새로운 형태의 행정을 유다에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처사에 대해서 그땅에 남아있던 많은 사람들은 불만을 품어 그달리야를 몰아내고 다른 유다인으로 총독을 삼기 위한 시도가 발생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때 암몬과 동맹을 맺는 새로운 변화를 보기도 하였다(Hobbs).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고 그후로 약 50년간 바벨론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ㅇ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들 - 이때 유다에 남아있던 백성들은 어떤 특정한 기술도 없고 바벨론에게 전혀 유익하지 않다고 판명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외에도 이 땅에는 상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유다 각지에 숨어 있던 사람들로서(렘 40 : 11-12) 예레미야와 바룩, 그리고 몇몇 왕족 등이었다(렘 43 : 6).
ㅇ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 - 여기서 서기관 '사반'에 대해서는 22 : 3절과 렘 26 : 24을 참고하라. 그리고 '아히감'은 22 : 12과 렘 26 : 24에 언급되어 있다.  한편 '그달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렘 40 : 10에 따르면 그달리야는 당시에 어떤 재정적인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달리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 따라 바벨론을 섬기는 길만이 살길임을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러한 충고를 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해 주었다(렘 29장). 결국 그가 바벨론의 신임을 받고 유다의 총독이 된것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그 같은 생각을 철저히 믿고 따랐기 때문인 듯하다(Keil & Delitzsch, Vol. ,p.519 ; Wycli-ffe).
ㅇ관할하게 - 여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아프게드 얄레헴'이다. 그런데 이는 '방문하다', '감사하다', '보살피다',란 뜻의 '파카드'와 '오르다'란 의미의 '아라'의 함성어로 지방을 순회하며 감시하고 보살피는 것을 가리킨다.
23 모든 군대 장관과 그 좇는 자가 바벨론 왕이 그달리야로 방백을 삼았다 함을 듣고 이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느도바 사람 단후멧의 아들 스라야와 마아가 사람의아들 야아사니야와 그 좇는 사람이 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ㅇ본절에서는 총독이 된 그달리야가 유다가 멸망된 후 각지에 숨어 있던 그 땅에 남은 자들을 불러 모았음을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달리야는 수도를 새로 미스바에 정했으며, 자신의 요청에 따라 바벨론을 떠났던 예레미야도 새로운 통치자 그달리야를 충고할 수 있는 새로운 수도 미스바에 거처를 정했다(렘 40 : 1-6 ; 42 : 1-43 : 13).   그리고 이스마엘과 다른 사람들이 바벧론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나와 유다로 돌아왔을 때에 그들은 그달리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달리야의 군사 고문인 요하난은 그달리야에게 그들의 맹세가 거짓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달리야는 요하난의 이러한 경고를 믿지 않았다(렘 40 : 13, 14).
ㅇ모든 군대 장관 - 문자적으로는 '부대의 장들'을 가리킨다. 즉, 이들은 예루살렘을 방어하던 수비대의 지휘관들이다(Rawlinson).  이들은 왕이 도망할 때 흩어졌던 군사들(5절)과 바벨론으로부터 탈출한 군사들, 그리고 들에 있던 군사(렘 40 : 7)들과 함께 그달리야에게 갔다(Keil & De-lizsch, Vol. , p. 519).
ㅇ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 - 아버지의 이름 느다니야나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당시에 상당히 흔한 이름이었다(Gibson).
ㅇ가레아의 아들 요하난 - 렘 40 : 8에는 가레아의 두 아들 요하난과 요나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ㅇ느도바 사람 단후벱의 아들 스라야 - '느도바 사람'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당시에 그 사람의 출신지를 인명(人名) 앞에 붙이는 것으로 '느도바 출신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느도바라는 지역은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오늘날의 키르벱 베드 팔루(Khirbet Bedd Falu)이다(Grid). 한편 여기에 언급된 스라야는 단후멧의 아들로서 18절에 언급된 제사장 스라야와는 다르다.
ㅇ마아가 사람의 아들 야아사니야 - 마아가는 북쪽 아람 지역의 땅으로서 오늘날에는 아벨벧 마아가(Abelbeth-Maacah)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야아사니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귀를 주신다'라는 뜻으로 여호와 신앙에 근거한 이름인 듯 하다. 그러나 겔 8 : 11에도 이이름이 언급되긴 하지만 비성경적인 문헌에 더 많이 나타난 이름으로(Gibson) 아마도 그는 유다인 계통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를 호사야의 아들'여사냐'로 부르고 있다(렘 42 : 1). 한편 혹자는 여기 언급된 군대 장관 넷이 유다 최후의 날에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R.D. Patter-son,Hermann J. Austel).
ㅇ모두 미스바로 가서 그달리야에게 나아가매 - 당시 그달리야는 예루살렘에게 가까운 미스바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미스바'는 '망대'(watch-tower)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의 '텔 엔 나스베'(Tellen Nasbeh)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 미스바는 그 이름의 의미와 잘 맞는 장소인 듯하다. 왜냐하면 당시에 미스바는 파괴되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삿 20 : 1과 삼상 7 : 16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시기에 항상 이곳으로 피난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미스바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과 경계지의 표시로 돌을 쌓아 놓았던 곳(창 31 :49)으로 가나안 정착 시기에 유다 지파에 할당된 성읍들 중 하나로 미스베로도 표기되던 곳이다(수 15 : 1, 38).
24 그달리야가 저희와 그 좇는 자들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너희는 갈대아 신복을 인하여 두려워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니라
ㅇ본절에 기록된 그달리야의 충고는 예레미야의 충고와 매우 유사하다(렘 27 : 8). 그런데 그의 충고는 당시 식민지 유다에 대한 바벨론의 정책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달리야와 예레미야의 충고는 바벨론이 완전히 황폐한 유다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필요없이 바벨론에 대항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 '바벨론에 충성하자'는 그달랴의 주장은 강대국을 의지하고 그의 뜻과 풍조에 따르자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인 것 같다. 그러나 그 통치 이념 속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보존키 위한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어 있다.
ㅇ저희와 그 좇는 자들에게 - 이것은 전쟁이 끝난 당시에도 유다 각 지방에 떠돌아다니는 군대의 잔당들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달랴의 계획 속에는 이 무리들을 한데 모으고 무기를 해제하여 보다 생산적인 삶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달랴가 그 군대의 잔당들에게 농업에 종사해 안착할 것을 권했음을 밝히고 있다(렘40 : 10).
ㅇ맹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싸바'는 '일곱 번 되풀이하면서 맹세하다'란 뜻의 '쉐바'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래서 이말은 철저한 이행을 전제로 한 맹약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25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십인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저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ㅇ칠월에 - 그달리야가 총독으로 임명 되고 새로운 행정이 시작된 지 불과 2개월만에 이스마엘을 중심적으로 한 격렬한 무리들이 반정(反政)을 일으킴으로 인해 그달리야의 행정은 붕괴되고 말았다.
ㅇ왕족 - 렘 40 : 14에 따르면 이스마엘이 암몬 왕 바알스의 자극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통치자의 지위를 요구하였을 것이다(렘 41 : 1 ;Wycliffe). 한편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스마엘은 매우 간교한 자로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당시에는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 피하여 있다가 이제와서 왕위를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ㅇ십 인을 거느리고 - 여기서 '십 인'이라고 정확한 수치를 밝히고 있는 것은 이것이 군대의 한 단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당시 가장 작은 군대 단위이다(출 18 : 21-25).
ㅇ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 이로 볼 때 당시 그달리야의 행정에는 갈대아 인(바벨론 사람)들이 많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스마엘의 살인 사건과 그의 도망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렘 40 : 13-41 :18).  특히 이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그달리야의 새로운 지배권과 이스마엘 사건, 또한 그가 애굽으로 도주하게 된 것 등에 때해서 요하난의 입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렘40 : 7-43 : 7).
26 대소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ㅇ대소 백성과 군대 장관들 - 이것은 그달리야의 미스바 행정에 조금이라도 협력하거나 그것에 관련있는 모든 사람들을가리킨다. 이로 볼 때 23절에서 그달리야 앞에 모인 무리는 이스마엘 측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 측의 두 부류로 갈리웠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요하난 측은 그달리야의 의사(意思)를 따르는 무리들이었는데 렘 41 :15에 따르면 요하난은 그달리야를 죽인 이스마엘을 공격하여 암몬 족속에게로 쫓아 내고 그다음에 느부갓네살로부터 미칠 화를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도망갔다. 왜냐하면 그달리야가 살해당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자신들에게도 그화가 미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하난은 자신이 앞장을 서서 애굽으로의 피신 행렬을 주도했던 것이다(렘 41 : 15-17 ; 43 : 1-7).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들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 것을 충고하였으나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충고를 무시하고 말았다(렘 43 : 7). 한편 당시 애굽의 바로 호브라(Hophra, B.C. 588-568)는 반바벧론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요하난은 애굽으로 피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의 증언에 의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때 유다의 많은 백성들과 함께 애굽으로 갔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의 견고한 성 다바메스에 도피했던 것이다(렘 43 : 1-7 ; 44 : 1 ;46 : 14)
27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한 원년 십 이월 이십 칠일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ㅇ선히 말하고 - 이것은 6절에 '저에게 심문하고'라는 말과 대조적인 문구로서 그를 불쌍히 여기며 친절한 말로 위로하여 기쁘게 해주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아름답다', '기쁘게 하다', '친절 하다'란 뜻의 '토브'를 사용했던 것이다.
ㅇ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 당시 바벧론 감옥에는 포로로 잡혀온 다른 나라의 왕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왕족이었기 때문에 일반 죄수들과는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서 '위'(키쎄)는 중요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Hobbs). 그리고 에윌므로닥은 그 왕족들 중에서 유다 왕 여호야긴을 특별히 대우했던 것같다(Rawlinson, Hitzig, Thenius). 그리고 유다 왕에 대한 이러한 호의적인 태도는 유다 민족에게 어떤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게끔 했을 것이다. 이와같이 본서 기자가 열왕기 기록을 다 마친후 추신의 형태로 여호야긴의 포로 생활을 간략하게 묘사한 것은 바로 유다의 미래에 어떤 소망이 밝아옴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R.D. Patterson, Hermann J.AUSTERL, Wy-cliffe). 그리고 실제로 이 때부터 70년 후에 포로생활에서 본국으로 돌아오리라고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렘30 : 3)이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9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ㅇ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 이것은 여호야긴이 죄수복을 벗고 '말쑥한 옷' (Rawlinson), 혹은 '다른 왕복'(Keil & Delitzsch, Vol. , p. 522)을 입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호야긴이 받은 이러한 대우는 멀리 요셉(창 41 : 14)이 받았던 대우나, 가깝게 다니엘(단 5 : 29)이 받았던 대우에 비길만하다. 그리고 에윌므로닥은 여호야긴 뿐만 아니라 다른 유다 포로들까지도 더불어 잘 대우해 주었던 것 같다(Albeight)>
ㅇ그 일평생에 - 렘 52 : 34은 '죽는 날 까지'라고 했다.
ㅇ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 왕의 앞에서 먹는다는 것은 그가 왕의 손님으로 왕의 식탁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동 지방의 왕들은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큰 잔치를 베푸는 것(에 1 : 3-9) 외에도 특별한 손님을 자신의 식탁에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했다(Rawlinson).
30 저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ㅇ본문은 느부갓네살(B.C. 605-562)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에월므로닥(EvilMerodach) 왕이 유다 포로들에게 호의를 얻으려고 유다 왕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융숭한 대우를 한 기록이다.  
ㅇ저의 쓸 것은 - 이것은 혹자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Keil & Delitzsch)이 아니라 여호야긴이 가신(家臣)들을 거느리며 한 나라의 왕으로 사는 데 '필요한 경비'를 가리키는 말이다(Rawlinson). 비록 그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포로지에서도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여전히 왕으로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경비가 필요하였을 것이다(Hobbs).
ㅇ종신토록 끊이지 아니 하였더라 - 이와같이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이 포로지에서나마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언젠가는 유다 백성들을 자기 고토(故土)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소망의 증표와 같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Keil & Delitzsch, Wycliffe).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비록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호의로 편히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왕의 신분으로 전국에 잡혀간 볼모의 신세라는 사실이다. 바벨론 왕이 진정으로 여호야긴을 생각했더라면 그를 예루살렘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돌려보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그는 마음속에 사무치는 회한(悔恨)을 품고 고향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렘 22 : 24-30)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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