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14장 [290..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1-16] [287. '예수 앞에 나오면..17-29']
===유다 왕 아마샤
1.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제이년에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된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호앗단이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4. 오직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5.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그의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6.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7.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아마샤의 문제..*1)산당 제사 지속..*2)에돔정벌후 거기 우상들을 가져다가 분향..이에 대해 Q말씀으로 권고하며 그 행사를 말리던 선지자를 조롱..
8.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9.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유다의 왕 아마샤에게 사람을 보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전갈을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10.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왕궁에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11.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그와 유다의 왕 아마샤가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1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13.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14.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북이스라엘 요아스에 대해서는, [여전히 단-벧엘 우상숭배허용한] 악한자로 기록되었으나..[아비 여호아하스의 기도 대로]Q이 일시적으로 쓰신바 구원자 역할 + 엘리사를 존중했고 영광스럽게 하였음..
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의 업적과 또 유다의 왕 아마샤와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6.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유다 왕 아마샤가 죽다
17.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오 년간을 생존하였더라
18. 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9.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한 고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20.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하니라
21.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그 때에 그의 나이가 십육 세라
22. 아마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 후에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더라
,,@요아스 = 예호아쉬 = <예호와..요드-헤이-바브(상)> +<에쉬..알렙-쉰(우)> ..여호와는 강하시다. @ 아마샤.. <아메츠..알렙-멤-체데> + <야흐..요드-헤이>..여호와는 강하시다. @ 여로보암.. יָרָבְעָם <:: 요드-레이시, 베이트, 아인-멤..성곽있는 성, 거처, 백성/무리.....왕국과 백성의 중다-번성/번영을!!> @요나..יוֹנָה..<요드-바브(상)-눈-헤이..=여호와의 참생명, 그 실존!!> @아사랴..아인-자인-레이시-요드-헤이 = 아자르<아인-자인-레이시> + 야흐<요드-헤이>...여호와께서 도우셨다. == @웃시야...아인-자인-요드-헤이 =오즈<아인-자인>+야흐<요드-헤이>...여호와는 나의 힘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23.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하맛 : 동쪽으로는 메소보다미아, 남쪽으로는 애굽을 연결하는 중요한무역로에 위치..[이상적인 이스라엘 영토를 "애굽강에서 하맛까지"..로 표현하셨었다..민34:8]..오론테스 강을 끼고 있는 수리아의 중부 성읍으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북쪽 경계로 언급하셨었다...시리아 북부 변경...다윗왕때부터 유다에게 속함((하맛왕 도이가 예물을 가져와서 다윗에게 드림))..다메섹에서 북방214km지점, 유브라데 강 서편지역이다....---북이스라엘와 여로보암2세 때의 영토확장....왕하14:25절에서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여기서 '애굽 강'과 '아라바 바다'는 둘 다 홍해를 가리킴. --좀 더 정확히는 요단 동편 전역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홍해의 북동쪽 끝에 있는 항구 도시 에시온 게벨까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음-=--여로보암2세의 영토확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스스로의 계획에 따라 치른 바 정복전쟁이었으니!!]] 차라리 파라오의 질서의 확장에 가까웠다. -((삼하8, 10, 12에서는!!}} 다윗왕국의 영토확장을!! 단순한 정복 과정으로만 서술하지 않는다...다윗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제국을 세우려 하지 않았으며, 그보다 그를 도왔던 다른 나라들과 공존하며 함께 잘 살고자 했으나!! 다윗의 의도를 곡해한 암몬이, 다윗에게 도발했고 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리아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싸운 결과가 결국 시리아의 정복으로 이어진 것...삼하7:1절의 표현에 따르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변 국가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여 평화롭게 살게 하고자' 하신 것이지 제국을 세우고자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국을 확장시켜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주시고, 또 성취하게 하셨다면.... 그 결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는가, 아니면 그저 나의 영역이 확장되고 나의 이름이 높아졌을 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복으로 인해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고 있는가, 다윗의 성공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 것처럼 우리의 번영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가 되기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가정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또 우리의 이름을 높여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 가시기를..
28. ○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싸운 업적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 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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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14장
1. In the second year of Joash son of Joahaz king of Israel, Amaziah the son of Joash king of Judah became king.
2. He was twenty-five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twenty-nine years in Jerusalem. And his mother's name was Jehoaddin of Jerusalem.
3. And he did right in the sight of the LORD, yet not like David his father; he did according to all that Joash his father had done.
4. Only the high places were not taken away; the people still sacrificed and burned incense on the high places.
5. Now it came about, as soon as the kingdom was firmly in his hand, that he killed his servants who had slain the king his father.
6. But the sons of the slayers he did not put to death, according to what is written in the book of the law of Moses, as the LORD commanded, saying, "The fathers shall not be put to death for the sons, nor the sons be put to death for the fathers; but each shall be put to death for his own sin."
7. He killed [of] Edom in the Valley of Salt 100000 and took Sela by war, and named it Joktheel to this day.
8. Then Amaziah sent messengers to Jehoash, the son of Jehoahaz son of Jehu, king of Israel, saying, "Come, let us face each other."
9. And Jehoash king of Israel sent to Amaziah king of Judah, saying, " The thorn bush which was in Lebanon sent to the cedar which was in Lebanon, saying, 'Give your daughter to my son in marriage.' But there passed by a wild beast that was in Lebanon, and trampled the thorn bush.
10. "You have indeed defeated Edom, and your heart has become proud. Enjoy your glory and stay at home; for why should you provoke trouble so that you, even you, should fall, and Judah with you?"
11. But Amaziah would not listen. So Jehoash king of Israel went up; and he and Amaziah king of Judah faced each other at Beth-shemesh, which belongs to Judah.
12. And Judah was defeated by Israel, and they fled each to his tent.
13. Then Jehoash king of Israel captured Amaziah king of Judah, the son of Jehoash the son of Ahaziah, at Beth-shemesh, and came to Jerusalem and tore down the wall of Jerusalem from the Gate of Ephraim to the Corner Gate, 400 cubits.
14. And he took all the gold and silver and all the utensils which were found in the house of the LORD, and in the treasuries of the king's house, the hostages also, and returned to Samaria.
15. Now the rest of the acts of Jehoash which he did, and his might and how he fought with Amaziah king of Judah, are they not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
16. So Jehoash slept with his fathers and was buried in Samaria with the kings of Israel; and Jeroboam his son became king in his place.
17. And Amaziah the son of Joash king of Judah lived fifteen years after the death of Jehoash son of Jehoahaz king of Israel.
18. Now the rest of the acts of Amaziah, are they not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Judah?
19. And they conspired against him in Jerusalem, and he fled to Lachish; but they sent after him to Lachish and killed him there.
20. Then they brought him on horses and he was buried at Jerusalem with his fathers in the city of David.
21. And all the people of Judah took Azariah, who [was] sixteen years old, and made him king in the place of his father Amaziah.
22. He built Elath and restored it to Judah, after the king slept with his fathers.
23. In the fifteenth year of Amaziah the son of Joash king of Judah, Jeroboam the son of Joash king of Israel became king in Samaria, [and reigned] forty-one years.
24. And he did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he did not depart from all the sins of Jeroboam the son of Nebat, which he made Israel sin.
25. He restored the border of Israel from the entrance of Hamath as far as the Sea of the Arabah, according to the word of the LORD, the God of Israel, which He spoke through His servant Jonah the son of Amittai, the prophet, who was of Gath-hepher.
26. For the LORD saw the affliction of Israel, [which was] very bitter; for there was neither bond nor free, nor was there any helper for Israel.
27. And the LORD did not say that He would blot out the name of Israel from under heaven, but He saved them by the hand of Jeroboam the son of Joash.
28. Now the rest of the acts of Jeroboam and all that he did and his might, how he fought and how he recovered for Israel, Damascus and Hamath, [which had belonged] to Judah, are they not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
29. And Jeroboam slept with his fathers, even with the kings of Israel, and Zechariah his son became king in his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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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14장 (개요)
본장은 유다와 이스라엘 양국의 왕위 계승사를 계속한다.
1. 유다 왕국에 있어서는,
(1) (그 대부분의 역사가 본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아마샤의 재위 전(全) 역사가 나와 있다.
① 그의 훌륭한 성격(1-4).
②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자에게 가해진 정의의 집행(5-6).
③ 에돔을 쳐서 승리함(7).
④ 요아스와 싸워서 패함(8-14).
⑤ 마침내 음모자에 의해서 살해됨(17-20).
(2) 아샤라의 역사가 시작됨(21-22).
2. 이스라엘 왕국에 있어서는, 요아스의 통치 종결(15-16)과 그의 아들 여로보암(동명이인이다)의 전 역사(23-29)가 나와 있다.
수많은 위인들의 역사가 하나님의 책에서는 얼마나 간략히 취급되고 있는가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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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 아마샤(왕하 14:1-7)
아마샤는 요아스의 아들이요, 그의 뒤를 이은 왕이다. 여기서는 그에 관한 기록을 살피게 된다.
Ⅰ. 성전에 관해서 살펴보자.
그는 거기서 다소 잘 행동했다. 물론 다윗과 같이 잘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요아스와 같이 행했다(3절). 시작은 잘했는데,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참여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그렇게 잘 하지는 못했다.
우리의 선배들이 경건하다고 하여, 우리가 그들의 실행을 그대로 본받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직 그들의 신앙과 헌신과 신실성과 결단력에서 우러나왔던 바로 그 원리와 정신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전과 같이 “산당은 제거되지 아니하였다”(4절)는 사실이 여기에 지적되고 있다. 오랫동안 인정을 받아오고 좋게 여겨져 오던 부패상을 일시에 완전히 일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Ⅱ. 왕좌에 앉아 있는 아마샤를 살펴보자.
거기에서는 그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반역자들에게 정의를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 일을 행하지는 않았다. 다소의 소란이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나라가 자기의 손에서 굳게 서게 될” 때까지 그 일을 미루어두는 현명함을 발휘했다(5절).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파당은 점차적으로 약화시켜 나가는 것이 때로는 가장 효과적인 파멸책이 된다. 정의란 서서히 발휘되나 필경 발휘되고야 만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시행되지 아니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슬기로운 정의의 실현이 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일은 지혜의 통제를 받는 것이 좋다.
아마샤는 이렇게 처신했다.
1. 법, 곧 “피를 흘린 자는 피를 흘릴지로다”라고 하는 저 옛부터 있어 오던 율법에 따라서 행했다.
반역자들이나 살인자들이 남들과 똑같은 꼴로 무덤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말아야 한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들을 막지 말라”(잠 28:17).
2. 율법의 한계 내에서 행동했다. “살인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말라”는 법에 따른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지니라” 하는 규정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었다(6절). 물론!!, 아마샤 주위에 있던 자들은, 복수에 있어서나(살인, 특히 왕을 살해했다는 죄는 중한 죄이므로) 정책적으로나(그들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다시 계획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엄격해야 한다고 충고해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암시에 맞서, 그는 명백한 하나님의 율법(신 24:16)을그들앞에 제시하고 원칙 그대로 집행했다.
그는 마땅히 그 율법에 따라 재판을 집행해야 했으며,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여 그 결말을 맡겼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비들의 죄악을 자식들에게 갚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할 죄책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비들의 죄 때문에 자녀들의 생명을 요구하신다 해도, 그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이미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라도 목숨을 잃고 말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제왕들에게는 (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에게 대해서나!! 그리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치는 않으셨다. 자녀들은 왕 앞에서는 무흠하며,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Ⅲ. 전장에 나가 있는 아마샤를 살펴보자. 거기서는 그가 에돔인들을 쳐 이긴 것을 보게 된다(7절).
에돔인들은 요람의 시대에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난” 반역자들이었다(8:22). 그러나 이제 아마샤는 그들과 전쟁을 일으켜 다시금 그들을 굴복시킨다.
1만 명을 죽였고, 반석같이 튼튼한 아라비아의 수도(셀라라 불렸는데, 반석이라는 뜻이다)를 탈취하여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이 원정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역대하(25:5 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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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에게 패한 아마샤(왕하 14:8-14)
왕국이 분열된 이후 여러 왕들의 재위 기간 동안 유다는 이스라엘의 증오를 많이 받아왔다. 또 아사 왕 시대 후로는 여러 왕대 동안 이스라엘의 우의를 크게 받아왔다. 그들과 서로 혈족으로나 정치적으로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그들 사이에 적대감이 발동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전 여러 시대 동안 결코 본 적이 없는 그런 큰 적대감이었다.
Ⅰ. 아마샤는 싸워야 할 별다른 이유가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요아스를 전장으로 끌어들였다.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우리의 힘을 전장에서 겨루어보자”(8절).
아마샤가 요아스에게 개인적인 결투를 신청한 것이라면, 잘못은 그 자신에게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편이 모두 자기들의 군병을 이끌고 나가야 했었다.
양편에서 각각 수천 명의 목숨이 그의 변덕스런 기분에 제물이 되어야 했다. 이로써 아마샤는 자기의 교만과 허세와 방탕성을 입증한 것이다.
어떤 자들은 생각하기를, 얼마 전 그 기분 나쁜 이스라엘인들이,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해고되자, 돌아가면서 범한 피해(대하 25:13)에 아마샤가 복수를 꾀한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을 전복시켜 다시 유다 왕국의 통일을 꿈꾸는 망상을 한 것이라고 본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잠 8:6).
그러한 도전은, 마치 물구멍이 생기는 것처럼, 장차 큰 싸움이 될 다툼의 전초전으로 번질 수 있다. 싸우기를 즐기거나 법정에 나가기를 즐기는 자들은 싸움을 만나게 될 것이요, 후회도 먼저 하게 될 것이다.
Ⅱ. 요아스는 그들의 도전에 대해 돌아가라고 충고를 함과 동시에 신랄하게 책망을 했다(10절).
1. 요아스는 아마샤의 교만에 심히 분개했다. 위풍당당한 나무인 백향목이 자기라면, 아마샤는 초라한 잡초에 불과한 가시나무라고 했다.
아마샤가 자기를 두렵게 하기는커녕, 자기가 그를 경멸한다고 말했으며, 도대체 자기가 그와 어떤 결연을 맺고 관계를 한다는 것은 백향목이 자기 딸을 가시나무에게 시집보내는 격이라는 식으로 조소했다.
그는 그 유서 깊은 다윗의 집이 예후의 집안(비록 벼락부자처럼 일어났지만)과 더불어 명명할 가치도 없다고 본 것이다. ==오십보-백보 다 똑같다!!
이 두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헐뜯는 말을 겸손한 자들이 들었다면, 그들은 얼마나 미소를 지었을 것인가?
2. 아마샤의 운명을 예고해 주었다. 즉 “들짐승이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고 했다. 그래서 결국 백향목과 가시나무의 관계는 종말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요아스는 자기 군병들이 아주 쉽게 아마샤 군을 무찌를 것으로 생각했듯이, 아마샤는 아마 아무런 저항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3. 요아스는 아마샤의 도전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다. “너는 과연 연약하고 힘도 없으며 훈련도 잘못된 병사들, 에돔을 쳐서 파하였도다. 그렇다고 하여 너는 네 앞에 있는 모든 나라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스라엘의 정규군조차도 그렇게 쉽사리 멸하리라고 감히 생각하는도다. 네 마음이 교만해졌느니라.”
모든 죄의 뿌리가 어디에 깃들어 있는지를 보라. 죄의 뿌리는 마음 속에 있으며, 거기서 자라나나니, 마음이 비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인간을 교만하게 하거나 방심케 하거나 불만을 품게 하는 것은 섭리자나 어떤 사건 자체나 어떤 기회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짓을 하는 그 마음이다. “네가 에돔을 물리쳤다고 하여, 마치 온 인류가 두려워하고 있는 양, 그것을 자랑하는도다.” 자기들의 공적을 자랑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비참하게 속이는 것이요, 약간의 성공과 명성을 얻었다 하여 자기들은 무슨 일에나 적합하며 무슨 일이든 자신 있다고 결론짓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한 자기 기만자들이다.
4. 요아스는 아마샤가 이미 얻은 그의 명예로 만족하고 새로운 모험을 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고 충고했다.
새로운 모험이란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한계 밖의 일이라고 했다. “어찌하여” 미련한 자들처럼(잠 20:23) “화를 자초하느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이미 충분한 명예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더 많은 부귀영화를 가지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면, 아마샤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가 마땅히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 나라에게까지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일러주었다.
Ⅲ. 아마샤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결국 사태는 악화되었다.
요아스가 아마샤에게 모욕을 준 것과 같이, 차라리 집에나 앉아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흔히 도전자가 지고 마는 수가 많다.
1. 아마샤의 군대는 패하여 도망쳤다(12절). 조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그들이 전장에 나가자 그 공격이 너무 극심하여, 결국 저들은 한 사람도 칼을 휘두르지도 못한 채 모두 도망갔다는 것이다.
2. 아마샤 자신은 이스라엘 왕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하여 그는 “그(요아스)를 면전에서” 흡족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아마샤의 계보(“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가 갑자기 튀어나와 있다. 아마 그도 자기 선조들의 존엄성을 영광스럽게 자랑해 왔거나, 이제는 자기의 죄악 때문에 징계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3. 정복자 요아스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아마 예루살렘은 순순히 문을 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성벽을 헐어버렸다(그리고 조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그 폐허 속으로 자기의 수레를 타고 달렸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모독하는 처사였다. 또한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그 왕성까지 소유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4. 그는 예루살렘을 약탈했다. 값나가는 모든 것을 탈취하여 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다(14절).
요아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한 자라고 했고, 아마샤는 “정직한” 일을 행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아스가 아마샤에게 이겼다. 왜 그리하셨던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마샤의 운명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교만한 자를 물리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하심이요, 남들이야 어떻든 요아스는 근래에 하나님의 선지자 한 사람[임종 앞둔 엘리사!!]을 존중한 일이 있으나(13:14), 아마샤는 선지자 한 사람을 학대한 적이 있었다(대하 25:16...에돔 정벌후 그곳 우상들을 가져다가 섬김..그것에 대해 Q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선지자의 발언을 조소-힐난하며 중단시킴).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들을 존경한 자에게 영예 주시기를 기뻐하시나, 그들을 멸시한 자들은 역시 멸시받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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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 아마샤의 종말(왕하 14:15-22)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세 사람의 왕이 무덤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Ⅰ.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죽음(15-16절).
그의 장례식 얘기는 이미 나왔었다(13:12-13). 그러나 요아스의 생애와 활동을 더 자세히 언급해야 될 경우가 생겼기 때문에, 성경 저자는 그의 죽음과 장례를 다시 한 번 언급한 것이다.
Ⅱ. 유다 왕 아마샤의 죽음.
그는 자기를 정복한 왕보다도 15년이나 더 살았다(17절). 어떤 사람들은 치욕을 겪으면서도 완전히 죽지 않고 오래 살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로 굴욕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이다(아마샤도 필경 그런 부류였다). 그의 행적이 그의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18절). 그러나 그것이 그의 존귀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에돔을 정복했을 때 발휘한 잔인성과, 이스라엘 왕에게 무모한 도전을 벌인 그의 무례함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의 정치를 증오하던 자기의 신복에 의해서 살해되었다(19절). 예루살렘은 그에게 반역했다. 그가 어리석었고 허세를 부렸던 연고로 수치스런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라기스로 도망갔다. 그가 얼마나 오래 숨어 살 수 있으랴! 그는 마침내 라기스에서 살해되었다(19절).
그 반역도들의 분노는 더 이상 연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시체를 수레에 태워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왕실 묘소에 장례 지냈기 때문이다.
Ⅲ. 아사랴가 아마샤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죽은 지 12년이 지나서야 그렇게 되었다(23절과 2절을 비교해 보면). 아마샤는 여로보암 15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사랴는 여로보암 27년(15:1)이 되어서야 비로소 통치권을 잡았던 것이다. 아사랴는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에 겨우 4살이었다. 따라서 12년 간, 즉 그가 16세가 되기까지는 정권이 그의 보호자들의 손에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다스렸다(15:2). 그러나 그의 치세에 대한 이야기는 껑충 뛰어서 생략되어버렸다. 단지 “아마샤가 그 열조와 함께 잔 후에, 그는 엘닷을 세웠다”(이 성은 에돔에 속해 있었으나, 아마 그의 아버지가 탈환했을 것이다. 7절)고 말했다(22절). 마치 아사랴의 치적 중에는 그 사건이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사실이란 얘기다. 그는 아버지가 죽자 곧 엘닷 성읍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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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왕하 14:23-29)
본문은 여로보암 2세의 치세 이야기다. 이스라엘인들이 왕위 계승자의 이름을 여로보암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1세)”의 죄악에 대해 예후의 가문이 애착과 집념을 가졌다는 표시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책에서는 악명이 높고 오명으로 낙인찍힌 이름이었는데, 그들은 그 이름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Ⅰ. 그의 통치 기간은 길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을 재위했다. “그는 41년 간 위(位)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시대인인 유다 왕 아사랴는 그보다 더 오랜 기간인 52년 동안 다스렸다. 이 여로보암 왕은 아사 왕과 똑같은 기간을 다스렸다(왕상 15:10). 그러나 한 왕은 선정을 했는데, 다른 한 왕은 악정을 했다. 우리는 인간의 수명이나 외형적 번영으로 그 사람의 성품을 판단할 수 없다. “의인과 악인의 당하는 일이 일반이니라”(전 9:2).
Ⅱ. 그의 성품은 다른 왕들의 성품과 같았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24절). 그것은 “그가 여로보암의 악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송아지 예배를 계속했다. 그게 아무런 피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며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송아지 예배는 모든 자기 선조들과 선왕들이 지켜오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모든 죄악 중에서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큰 죄악이었다. 오히려 옛부터 관습이 되어 온 죄이기 때문이다. 악이 관습으로 되고 말았다는 하찮은 변명은 조금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Ⅲ. 그러나 다른 모든 왕들보다는 영화를 누렸다. 그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에게도 어떤 선한 요소가 있었을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예언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나님은 갈릴리 사람, 아밋대의 아들 요나(그러므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큰 오해다. 요 7:52)를 일으키사,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겠다는 뜻을 알리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분노케 했지만, 하나님은 여로보암과 그의 나라를 강화시키셔서, 잃어버렸던 옛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싸움을 일으킬 것이며(이것은 조금도 그들의 성공 탓이 아니다), 그들이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확신케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신실한 사역자들을 끊임없이 세우신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아직 그 백성을 저버리시지 않으셨다는 표적이다. 즉 엘리사가 요아스의 손을 강화시켜 주다가 사라지니, 다시금 요나를 보내어 그의 아들을 강화시켜 주시는 것은 은총의 증거이다. 왕이 계속하여 자리를 이어가듯이, 선지자들이 계속하여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토록 들려지는 그런 나라는 실로 행복한 나라이다.
이 요나에 관해서는 그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은 책(요나서)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는 그 원정은 요나가 젊었을 때였을 것이다(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또 그가 도망을 가고 불안해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환상을 깊이 체험하지 못했었던 그런 때의 일이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그가 나중에 이스라엘의 자비를 전하는 사자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실수와 어리석음을 용서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위임 명령은 용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자기에게서 발견한 자는, 비록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용서하신다는 자비의 희망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더 큰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자들은 자기들이 어리석었고 화가 나서 처음에는 잘못해 버린 일들이, 나중에 가보면 도리어 잘된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수가 있다. 아무리 잘못이 있더라도 인간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된다.
2. 섭리로 인정해 주셨다. 그 사건은 “여호와의 말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군대는 이길 수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해변을 회복했다.” 그는 북쪽 하맛에서부터 남쪽 평원의 호수(소돔 호수)―이 모든 땅은 아람이 점령하고 있었다(25절)― 변방 지역을 회복한 것이다.
왜 그들이 승리하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는지, 거기에 대한 두 가지 이유가 나와 있다.
(1) 그들의 곤경이 대단히 심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정심을 자아내게 되었다(26절). 그들에게는 아무런 후회와 개심의 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극심한 고난을 보셨다”고 했다. 원수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처참한 억압을 받고 노예 생활을 하면서, 자기들의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머지의 땅도 그 원수들이 침입하여 약탈해 갔기 때문에 형편없이 황폐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도회지나 시골이 모두 황폐해지고 온갖 재물을 잃게 되었고, 아무런 조력자도 나타나지 않게 되자, 마침내 그땅에는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게 되었다.” 여로보암이 통치를 시작할 무렵, 나라의 상황은 이토록 극한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부르짖는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여기에는 저들이 고통을 인해 기도했다는 말이 전혀 없다), 여로보암의 손을 빌어 그들을 해방시키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가엾은 처지에 놓인 자들은 하나님의 동정심을 바라자. 우리는 하나님께는 자비의 그릇이 있다는 점을 읽을 수 있으며(사 63:15; 렘 31:20), 그는 동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시 86:15).
(2) 아직 그들의 완전 파멸을 선고하는 포고령은 공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의 이름을 지워버리리라”(27절)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한 그렇게 하시지 않겠다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이 열 지파(이스라엘 왕국)의 분산을 뜻한다면, 하나님은 이미 그런 말씀을 하셨고, 그때는 멀지 않았던 것이다(유예는 용서가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완전 근절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하지 않으시리라.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복음의 이스라엘”에 그 이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로서는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므로―이 마지막 영예를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이름이 지녀오던 옛적부터의 영예를 생각하사(13:23) 이러한 은총을 보이신 것이다.
Ⅳ. 여로보암 치세의 종결이 나와 있다. 우리는 그의 힘과 전쟁에 대해서 읽었다(28절). 그러나 이제 그는 “그의 열조와 더불어 잤다”(29절)는 것을 읽게 되었다. 아무리 권력을 지닌 자들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며, 그 싸움에는 면제받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각 시대를 걸쳐 이스라엘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계속 있어 왔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글로써 자기들의 예언을 남긴 적은 없으며, 이때에 비로소 문서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예언이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호세아”(아주 오랜 기간을 선지자로 활동했다)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여로보암 왕의 재위 중이었다. 그는 자기의 예언을 문서로 남긴 첫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의 시작”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호 1:2). 그때부터 “여호와의 말씀의 부분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대에 “아모스”도 예언하고 저작을 했고, 그 직후가 “미가”, 그 다음이 “이사야”인데, 그는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증인들이 이땅에 끊어지게 하신 적이 없으시다. 교회가 가장 어둡고 부패했던 시대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몇몇 증인들을 일으키사,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말씀 선포와 삶을 통해서 그 시대의 교회에 등불을 켜고 비추는 사명을 계속케 하셨으며, 그들 중 어떤 자들은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 끝날에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그것을 전해 주게 하신 것이다.
===호크마===
열왕기하 14장
1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년에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ㅇ요아스 이 년에. - 본절에서도 13:1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연대기 문제가 학자들 간에 빈번히 제기되고 있다. 즉 북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는 유다 왕 요아스의 37년에 왕위에 올랐다(13:10). 그렇다면 유다 왕 요아스가 40년간 통치하였으므로(12:1)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는 최소한 북이스라엘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의 제 4년 또는 5년 이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본절에는 이를 요아스 2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학자들 간에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중복되는 2-3년 간은 유다의 요아스와 그의 아들 아마샤의 공동 섭경 기간이라는 것이다(Hobbs, Gray). 그러나 이것은 전체 문맥에 대한 설명에서는 용이하지만 분명한 성서적 근거, 혹은 역사적 기록이 없으므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2) 유다 왕 요아스의 통치 기간은 실제로 만 39년이며 40년 초에 죽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요아스는 유다 왕 요아스의 37년 후반에 왕위에 즉위하였다. 즉 이것은 왕의 즉위가 니산월(가나안식 옛 이름은 아빕월, 종교적으로는 제 1월) 한 두 달 전에 있었고 볼 때 그 한 두 달을 1년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Keil &Delitzsch, Vol. 3, p. 379). 이렇게 본다면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위에 오른 것은 이스라엘의 요아스 제 2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후반기 연대가 이렇게 많은 혼란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 전반기의 연대 계산법과는 후반기의 연대 계산법이 상당히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본다(E. R. Thile, Mysterious Number, p. 103-124).
2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ㅇ여호앗단. - 요세푸스(Josephus)는 이를 '요다데'(Jodade)로 부르나 70인역(LXX)에 서는 이보다 더욱 정확하게 '요다딤'(Joadim)으로 지칭한다(Rawilnson). 그런데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기쁨'이라는 의미이다.
3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ㅇ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 역대기에는 이 부분을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대하 25:2)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아마샤 이전의 유다 와들 가운데 '다윗과 같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였다는 칭찬을 받은 왕은 단지 3대 왕 '아사'뿐이었다(왕상 15:11). 한편 아마샤는 비록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지만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즉 그는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는 우상 숭배에빠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앙 생활에서 '적당 주의'는 통용될 수 없는 것이다(계 3;15).
ㅇ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 아마샤와 그의 부친 요아스가 행한 행위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둘 다 처음에는 여호와께 열심이었다. 2) 그러나 나중에는 우상을 숭배하였다(대하 24:18; 25:14). 3) 양자 모두 선지자들의 경책을 거부하였다(대하24:19; 25:16). 4) 그리고 두 사람 공히 모반자들에 의해 피살당했다(19절; 12:21).5) 또한 둘 다 적군에게 성전의 많은 보물들을 내주었다(14절; 12:18).
4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ㅇ본절의 주석에 관해서는 12:3의 주석을 참고 하라.
5 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서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ㅇ나라가 그 손에 곧게 서매. - 이 말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 왕상2:46에서 솔로몬의 번영기에 쓰였던 것처럼 정권이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15:19;Rawilnson, Keil & Delitzsch). 아마샤는 집권 초기에 부친 요아스를 암살한 세력(12:20, 21)에 의해 여러가지로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해 정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아마샤의 통치권 확립과 더불어 국력이 신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유다는 아하시야(8:25-29;9:27, 28; 10:12-14)와 악녀 아달랴의 집권(11:1-3), 아람 왕 하사엘의 공격(12:17,18; 대하 24:23, 24) 등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졌었다. 그러나 아마샤는 에돔과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 국력 신장의 계기를 잡은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본절 전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1) 아마샤의 부친친 요아스가 죽은 후 어떠한 혼란기가 있었다(12:19-21)는 사실을 함축한다. 실로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정권의 교체가 이뤄질 때는 언제나 혼란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부왕(父王)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 혼란은 더욱 심각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도 그러한 혼란기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2) 요아스를 살해한 자들과 모반자들은 아마샤가 제거하기 이전까지도 여전히 어떤 주요 관직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즉 그 모반자들은 요아스의 행위에 대한 복수나 나라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모반을 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정권욕에 의한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록 역대기기자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요아스가 여호야단의 아들을 죽인 그 피로 인하여 암살을 당한 것이지만(대하24:25) 본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모반이 순수한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6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ㅇ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 본절은 신 24:16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구절의 내용은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는 말씀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수 7:1-26과 왕하 9:26에서와 같이 아비의 죄로 인하여 자식들이 죽임을 당한 경우와도 엄격히 상치(相馳)된다. 이것은 본서 기자가 신명기를 얼마나 존중했는가를 보여줌과 더불어 신명기 후기 비평주의자들의 주장(Riehm)을 뒤집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기록은 요시야 왕이 신명기서를 발견하기 약 200년 전의 것이기에 신명기서가 요시야 왕에 의한 편집이거나 포로시대 이후의 편집이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때문이다(Rawilnson). 한편 고대 동양의 전례에 의하면 반역자를 사형에 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까지도 죽였다(Wycliffe).
7 아마샤가 염곡에서 에돔사람 일만을 죽이고 또 셀라를 쳐서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ㅇ염곡에서. - 염곡은 '소금 골짜기'란 뜻인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두 견해가 있다. 1) 오늘날의 '나할 말타'(Nahel Malhata)로서 네게브 사막에 위치한 아랏(Arad)의 남쪽 지역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아마샤 왕이 에돔 사람을 격퇴시켰다는 것이다(Y. Aharoni,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2) 남아라비의 사해 바다 남쪽 지역으로서 페드라 서쪽 약 30km 지점에 있는 '아일 밀흐'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오늘날의 '에스 삽카'(Es Sabkah)일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 두 견해 중에서 후자에 언급된 '에스 삽카'는 '카슴 우스툼'(Khasm Usdum)이라는 소금으로 된 능선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염곡'이라는 히브리어 명칭이 썩 잘 어울린다(Rawilnson). 그러나 역시 '염곡'이라는 명칭에 정관사가 없어서 그 위치는 불분명하기만 하다. 한편 다윗은 바로 이곳에서 에돔과 싸운 적이 있는데(삼하 8:13) 그 싸움 이후로 에돔은 이곳에 요새를 만들었다(Hobbs).
ㅇ셀라를 쳐서. -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셀라' 앞에 관사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에돔의 수도를 가리키는 별칭인 것같다(Keil, Rawilnson). 그런데 70인역(LXX)에서는 이곳을 오늘날의 '페트라'(Patra) 또는 '움바야라'(umm-Bayyara)로 보고 있다(S. Cohen,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4 p. 262-263).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셀라'는 '부세일'(Buseir)의 북서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에스 셀라'(es-Sela)인 것으로 밝혀졌다(A. F. Rainey). 그리고 이 곳은 '바위'라는 의미의 지명(地名)으로 아라바 광야에서 에돔의 서쪽으로 통하는 좋은 길목이 된다. 한편 본구절과 평행 구절인 대하 25:11, 12에서는 아마샤의 군대가 포로 10,000명을 이 바위 꼭대기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ㅇ욕드엘이라 하였더니. - 이 지명(地名)은 '하나님에 의해 정복되다'란 의미로 일찍이 수 15:38에서 언급되었으나 여기서 언급한 지명의 위치와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햐면 '셀라'는 여전히 이사야(사 16:1), 오바댜(옵 3절), 예레미야(렘 49:16) 등의 선지자에 의해서 셀라로 나오는 반면 수 15:38의 '욕드엘'은 라가스 근처로 유다 족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한편 에돔은 에서가 그 조상으로서(창 36:9) 다윗의 지배를 받던 나라이다(삼하 8:13, 14). 그런데 이 에돔은 이스라엘의 요람 왕 때 유다로부터 독립하였다(8:20-22). 아마 에돔은 아람 왕 하사엘이 유다를 괴롭히는 틈을 타(12:7, 18)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조금씩 차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유다의 아마샤는 이 지역으로부터 에돔을 몰아내고 아라바 지역으로 부터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다(Hobbs,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 179-180).
ㅇ오늘까지 그러하니라. - 이 말은 본서의 저자가 기록할 당시까지 그러한 상황을 계속적으로 유지했다는 뜻이다. 즉 이 표현은 본서의 저자가 참고한 원사료(原史料)에 나타나 있던 것이 아니라 저자가 본서를 기록하면서 첨가한 말이다(Bahr, Rawilnson).
8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ㅇ아마샤가...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 대하25:13을 보면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러한 도전장을 보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즉 그 이유는 에돔과의 전쟁때 고용되었다가 돌려보내진 이스라엘 군사들의 적대적인 행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고(Keil & Delitzsch) 내적 이유는 아마야가 교만해졌기 때문이다(Wycliffe). 이러한 사실은 아합 이후 이스라엘보다 군사력에 있어서 열세에 있던 유다가 에돔과의 승리로 인하여 아마샤가 교만해졌음을 암시하고 있는(10절) 본문을 통해서 더욱 증명된다.
ㅇ오라 우리가 서로 대변하자. - 문자적으로는 '낯과 낯을 마주 대하자'라는 의미로 선전 포고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 아합 이후 유다는 계속해서 북이스라엘의 기세에 눌려 지냈는데 이제 아마샤는 요아스에게 정식으로 같은 지위에서 지내자고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샤는 단순히 정치적인 담화를 원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군사적인 충돌을 피할려고 했던 것 같다(대하25:17).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북이스라엘의 요아스왕은 그것을 정식 선전 포고로 받아들였던 것이다(Hobbs).
9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ㅇ본절에 나오는 우화는 과거 요담이 세겜 사람들에게 말한 우화와 아주 비슷하다(삿9:7-15). 그런데 일반적으로 비유나 우화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재를 취하여 교훈적인 내용을 풍자적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문학의 한 표현 형태이다. 한편 여기서 가시나무는 유다를, 백향목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갑자기 교만해져서 백향목에게 딸을 달라고 하는 요구는 당시 동등한 신분간이라야 성사될 수 있었던 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가시나무'는 비천한 신분, 불신앙(사32:13-15), 심판(호2:6), 고난(잠26:9)을, '백향목'은 의인의 번영(시92:12), 아름다움(아1:17)을 상징하기 때문이다(왕상5:9-11). 그리고 우연히 지나가던 레바논의 들짐승들에게 이 가시나무가 짓밟히고 말았는데 이것은 가시나무인 유다가 백향목인 북이스라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 멸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러한 요아스의 비유가 유다의 아마샤의 비위를 매우 상하게 했을 것이다.
10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ㅇ본절은 유다가 가시나무와 같이 교만하게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마샤의 도전을 순전히 그의 교만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군사들이 유다 성읍을 엄습하고 3천명의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한 것(대하25:13)에 대한 일언 반구(一言半句)의 사과도 없는 요아스의 태도에 대해 아마샤는 더욱 분개하였음이 틀림없
다.
ㅇ한편 본절에게 '마음이 교만하였으니'라는 말은 '네 마음이 너를 치켜 올렸다'라는 의미로 교만케 된 아마샤의 심적 태도를 잘 나타내준다.
ㅇ스스로 영광을 삼아. - 문자적으로는 '영광을 받아라', 혹은 '그 영광으로 만족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네가 에돔으로부터 얻은 명성으로 만족하라'(Keil & Delitzsch), 또는 '네가 얻은 것으로 자랑을 하고 다른 것으로 위험을 부르지 말라(Rawilnson)는 것이다.
ㅇ화를 자취하여. - 문자적으로는 '당신은 어찌하여 불행을 초래하려고 하는가!', 혹은 '고통이나 전쟁에 끼어들려고 하는가!'이다.
11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왕 아마샤로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ㅇ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 화해적인 의미가 아니라 도발적인 의도를 내포한 듯한, 그리고 아마샤를 우롱하는 듯한 소식을 들은 아마샤가 요아스의 경고를 들었을리가 만무하다.
ㅇ요아스가 올라와서. - 아마샤의 선전 포고를 들은 북왕국의 요아스는 아마샤가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Bahr) 오히려 남왕국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곳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한편 본절에서 '올라갔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어근 '아라'를 번역한 것으로 '오르다','출발하다','깨어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요아스의 군사가 행군한 지리적 상황을 반영함과 동시에 요아스가 먼저 진영을 갖춰 출발했음을 반영한 말이다.
ㅇ베세메스. - 수19:38에 의하면 벧세메스는 유다 땅으로 '태양의 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땅은 예루살렘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헤브론에서 욥바로 가는 도로상에 있다. 그리고 이곳은 오늘날의 '아인 셈스'(Ain Shems)와 동일한 곳이다. 한편 요아스가 이 곳으로 올라간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한 장소였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직접적으로 공격하기에 매우 험난하고 힘든 곳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벧세메스의 고지와 부근에 있는 소렉(Sorek)계곡은 유다의 중심부를 치는데 매우 유리한 위치가 되기 때문이다(Hobbs). 한편, 이곳은 납달리 자손들에게 할당된 성읍이다(수19:38).
1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ㅇ유다가...패하여. - 대하25:20에 의하면 아마샤가 패한 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다.
ㅇ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 문자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그 장막으로 도망했다'란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군대가 패배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역사서의 전형적인 표현이다(삼상4:10; 삼하18:17; 왕하8:21).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진 이후(B.C.931;왕상11:43-12:20) 처음으로 발생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간의 전쟁이었다. 한편 베가와 아하스 시대에도 또 한번 이러한 전쟁을 치루었는데(대하28:6-8), 그 때에는 유다가 지금보다 훨씬 더 참패했었다.
13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ㅇ아마샤를 사로잡고. - 북왕국의 공격에 의해 아마샤의 군대가 모두 도망감으로 인해 아마샤는 요아스의 포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후에 아마샤가 모반자들의 공격을 받게되는 중요한 한 요소가 된다(Hobbs).
ㅇ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 '에브라임 문'은 다른 말로 '베냐민 문'이라고 불리웠는데(렘37:13; 38:7; 슥14:10), 이 문은 예루살렘 성읍 북쪽에 위치해서 베냐민 지파나 에브라임 지파의 땅으로 통하는 통로가 되었다. 또한 '성 모퉁이 문'은 옛 성벽의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하였는데(렘31:38; 슥14:10) '다마스커스 문'의 서쪽이 이에 해당된다(Bahr, Rawilnson). 그 뿐만 아니라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해 언급된 '탑'이 놓여 있는 자리가 곧 '모퉁이 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 모퉁이 문은 후에 아사랴(웃시야)에 의해 더욱 견고하게 되었는데(대하26:9) 느12:38-43에서 언급된 성벽 보수 공사에서는 이상하게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또한 느헤미야서에서 보면 성벽에는 약13개의 문이 있었으며(느3:1-31; 12:31-39; 슥14:10) 이쪽 문에서 저쪽의 다른 문까지는 보통180m-270m 정도였다고 한다(Rawilnson). 이것을 당시 수치로 표현하면 약400규빗이 된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벽은 후일 히스기야 왕에 의해 기존 성벽보다 조금 북쪽에 다시 건립되었다(대하32:5). 그래서 새로 건립된 성벽이 '제 2성벽'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이 벽은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다시 좀더 북쪽에 건립되었는데 이것을 '제 3성벽'이라고 칭한다(G. A. Smith). 한편 유다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마샤가 요아스에게 포위당함으로 인해서 유다 군대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예루살렘 성문을 열어 주었는데 그 결과 이스라엘 군대에 의하여 이같이 비참한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고 한다. 한편 요아스가 성을 헌 것은 성을 점령했다는 외형적인 표시로서 나타낸 것이다(Bahr).
14 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 갔더라
ㅇ본서의 기자는 아람 왕 하사엘이 유다 왕 요아스 시대에 성전 보물을 뇌물로 받아갔던 일(12:18)과 함께 북왕국 요아스가 성전 약탈을 한 사실을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ㅇ볼모로 잡아가지고. - '볼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네 하타아르보트'는 '교환하다', '담보로 주다'라는 뜻의 어근 '아라브'에서 파생한 말로 문자적으로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아들'(Vulgate, obsides)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파생형 단어는 본절에서와 병행구인 대하25:24에서만 나타난다. 한편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에는 포로된 왕을 놓아 주어 자유를 주는 대신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에는 아마샤 왕을 놓아주지 않고 그를 볼모로 잡아갔다(13절). 그래서 아마샤는 여호아스(요아스)가 죽은 후 15년간 생존했고, 유다에 돌아와서 그 15년 동안을 다시 다스린 것이다(17절).
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권력과 또 유다 왕 아마샤와 서로 싸운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6 요아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이 구절들은 13:12,13절과 그 내용 뿐 아니라 서술 방법이 거의 일치한다. 한편 요아스의 죽음과 사적에 대한 기록이 두번씩 반복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북이스라엘의 요아스와 유다의 아마샤와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17절)으로 보인다(Bahr). 왜냐하면 17절에서 요아스의 죽음 후에 아마샤가 15년을 더 생존한 사실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17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십 오년을 생존하였더라
18 아마샤의 남은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ㅇ북이스라엘 왕 요아스 제 2년에 아마샤가 왕위에 올라(1절) 29년을 치리하였다(2절). 그리고 요아스는 사마리아에서 16년을 치리하였다(13:10) 때문에 아마샤는 요아스보다 15년을 더 산 셈이 된다.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연대기 문제는 정확한 것이다. 한편 아마샤의 나머지 행적에 관해서는 대하25장에서 에돔과의 전쟁, 우상 숭배, 그리고 선지자로부터 받은 경책 등을 더 기록하고 있다.
19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저를 모반한고로 저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모반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저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ㅇ무리가 저를 모반한 고로. - 본문 가운데는 무리가 일으킨 모반에 대한 원인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약탈당한 이후부터 아마샤가 죽기 이전까지 약 15년 동안 모반자들이 왕위를 빼앗은 뒤 이때 왕을 죽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 이에 대한 분명한 근거가 전혀 없다. 한편 또 다른 학자는 모반의 원인이 당시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왕과 제사장들 간의 충돌에 있었다고 한다(R. de Vaux). 그러나 제사장들이 오히려 왕의 진노로 희생당한 예는 있으나 반대로 제사장들이 왕을 시해한 예는 없으므로 그러한 추측은 불가능하다. 한편 역대기 저자는 아마샤가 피살당한 것은 그가 '여호와를 버린' 때문이라고 한다(대하25:27). 그래서 어느 정도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그러나 모반의 원인을 왕과 제사장들간의 충돌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아마샤의 패역과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Bahr, Keil & Delitzsch, Vol. III, p.383).
ㅇ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 아마샤 왕이 라기스로 도망한 것은 그만큼 생명에 대한 위협을 여러 곳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기스는 오늘날의 '텔 엘 두웨일'(Tell el-Duweir)로서 예루살렘의 남서쪽 약 48km에 위치한 요새화된 성읍으로 유다에서 두번째로 큰 도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수12:11) 유다 지파에게 기업으로 준 지역이었다(수15:39). 한편 이곳이 요새화된 것은 르호보암 때로서 애굽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였다(대하11:9). 따라서 왕은 이곳이 요새화된 성이기 때문에 모반자들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왕은 라기스 백성들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Wycliffe)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20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예루살렘에서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하니라
ㅇ모반자들은 격식을 갖추어 아마샤 왕의 장례를 치루었던 것 같다(Hobbs). 왜냐하면 모반자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1)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가장하고, (2)백성들로부터의 비난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ㅇ말에 실어다가. - 히브리어 원문은 '그 말들 위에', 혹은 '말에 올려서'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아마샤가 라기스로 도망할 때 사용한 왕실 마차에 실어서 예루살렘에 왔음을 가리키는 것이다(Keil & Delitzsch, Rawilnson).
ㅇ다윗 성. - 이곳은 족장 시대(당시에는 살렘으로 불리워짐)와 가나안 시대부터 있던(창14:18; 시76:2) 시온의 요새이다(삼하5:7). 이 성은 동쪽의 기드론 시내와 서쪽의 두로베온 계곡에 있는 급한 경사의 능선을 점유하면서 북쪽 힌놈 골짜기까지 닿아있다. 그런데 이 성은 다윗이 B.C.1003년에 여부스 족으로부터 빼앗아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다윗 왕국의 수도로 삼은 곳이다(삼하5:9). 그리고 이곳에 장지(葬地)도 마련해 놓고 있어서 다윗(왕상2:10)과 솔로몬(왕상11:43)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다 왕(대하12:16; 14:1; 16:14; 21:1등)과 귀인(貴人)들도 묻힌 곳이다(대하24:16).
ㅇ장사하니라. - 근동 지방에서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를 사망 당일에 매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시체 처리 방법은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는 매우 달랐는데 그 개괄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가족들이 시체에 입을 맞춤(창50:1). (2)시체를 물로 깨끗이 씻고 염을 함. (3)시체를 정한 세마포로 운반함(삼하3:31; 눅7:14). 한편, 시체를 미이라로 만드는 방법과 시체를 불로 태워 화장하는 풍습을 유대인에게서는 대체적으로 찾아 볼 수가 없다.
21 유다 온 백성이 아사랴로 그 부친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을 삼으니 때에 나이 십륙세라
ㅇ유다 온 백성이...왕을 삼으니. - 본절과 같이 왕이 옹립하는 데 유다 온 백성이 모두 관여했다는 표현은 매우 생소하다. 그렇게 때문에 학자들간에 '유다 온 백성'에 대한 해석을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당시 온 백성이 떠들썩했음을 의미한다(Rawilnson). (2)유다의 전 백성이 환호했음을 뜻한다(Keil). (3)'유다 백성'은 유다의 모든 군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Thenius,Hobbs). 그런데 왕을 시해한 모반자들이 하는 일에 온 백성이 동조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1)과 (2)의 해석은 온당치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본절에 나타난 '온유다 백성'이라는 말은 '모반한 군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아마샤는 군대의 봉기로 폐위되고 아사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의 '아사랴로'가 히브리 원문에는 '아사랴를 취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취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크후'는 모반자들이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아사랴를 택한 것을 의미한다(Bahr, Hobbs). 즉 이것은 12:21절과는 같이 다윗의 가문에서 왕을 세웠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ㅇ아사랴. - 유다 왕 웃시야의 이름으로 '아사랴'와 '웃시야' 이 두 이름이 계속 혼합되어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 설명은 학자들에 따라 무척 다양하다. (1)두 이름의 히브리어 자음이 오직 하나만 다르다는 데에 착안하여 '웃시야'는 필사자의 오류로 인해 '아사랴'에서 자음 '레쉬'가 탈락된 형태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서와 역대하에서는 이 두 이름이 병행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가정이 옳다면, 적어도 한 작품 안에서는 하나의 이름만 일관성 있게 쓰여졌을 것이다. (2)'아사랴'는 왕명이며 '웃시야'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붙여진 별명이라는 견해가 있다. (3)앞의 주장과 반대로 '웃시야'가 왕명이고 '아사랴'는 본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4)이 두 이름이 무차별하게 함께쓰였다는 주장이 있다(Keil). 히브리어로 '아사랴'는 '여호와는 도움이 있다'를, '웃시야'는 '나의 힘은 여호와시다'를 뜻하는데, 전자는 본서와 대상에서만 9번 나오고 후자는 본서와, 역대하, 호세아, 아모스, 스가랴 등에서 모두 22번 나온다. 이렇게 쓰여진 회수로 미루어 볼때 보다 많이 사용된 '웃시야'는 공식적인 왕명이고 '아사랴'는 본명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역대의 많은 왕들이 등극한 이후 그 이름을 바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추측의 개연성은 더욱 높아진다(삼하12:24,25).
22 아마샤가 그 열조와 함께 잔 후에 아사랴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ㅇ엘랏을 건축하여. - 평행 구절인 대하26:6에서는 아사랴(웃시야)가 건축한 성읍이 여럿 나오는데 유독 본절에서 '엘랏'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 '엘랏'이 갖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그 성의 기능에 대한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랏'(Elath)은 '작은 숲'이란 의미의 지명(地名)으로 솔로몬이 이용하였던 에시온게벧 항구 근처(왕상9:26)에 있는 현재의 아카바만에 위치한 곳이다. 그리고 엘랏은 아카바만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항구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무역과 상업에 관심이 있는 여러나라들이 탐을 냈었다. 그래서 한 때는 에돔의 점령하에 있었던 것이다(8:22). 그리고 이 엘랏이 유다의 웃시야 왕에 의해 남왕국의 영토가 된 후에도 아람과 앗시리아의 여러 왕들에 의해 점령되기도 한 사실(16:6-9)을 보더라도 그곳이 얼마나 경제적인 요지(要地)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엘랏을 건축'한다는 표현은 그곳을 '수축하거나', 아니면 문자 그대로 '건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ㅇ돌렸더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쉬베하'는 '돌아가다', '기뻐하다', '지불하다'는 뜻의 '슈브'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어가 여기에서는 엘랏의 건축에 대해 '기쁜 마음을 갖고 자신의 땅으로 삼았음'을 가리킨다.
23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십 오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 일년을 위에 있으며
ㅇ여로보암이 아마샤 15년에 즉위했다는 것은 남유다 왕 아마샤(B.C.796-767)가 29년간 통치했으므로 북이스라엘의 요아스보다 아마샤가 15년 더 살았다는 17절의 진술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로보암(혹은 여로보암II세, B.C.793-753)이 41년간 통치했다는 것은 그의 아들 스가랴(B.C.753-752)가 아사랴(B.C.791-739) 38년까지는 왕이 되지 않았다는 15:8의 진술과 다르다. 이에 대하여는 15:8의 주석과 본장의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여로보암II세는 이스라엘 왕들 중에서 영토 확장에 가장 성공적인 통치자였다. 이스라엘과의 극성스러운 경쟁국이었던 아람이 앗시리아의 아다드니라리III에게 침략당하여 수도 다메섹까지도 정복되는(B.C.805년) 틈을 타서 여로보암II세는 이스라엘의 잃은 땅을 모조리 되찾았던 것이다.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ㅇ느밧의 아들로서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과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일명여로보암II세)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에 있어서 그 맥을 같이 한다. 한편 여로보암II세의 죄악이 사회에 미치는 결과로 인하여 그는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된다(암2:6; 5:27; 6:14).
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벧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ㅇ가드헤벧. - 이것은 '우물가의 포도주틀'이란 의미의 지명인데 이곳은 스불론 지파의 한 성읍으로서 다볼 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수19:13). 또한 이곳은 나사렛 북동쪽4.8km지점으로 요나의 무덤이 이 곳에 있다고 전해진다(Rawilnson). 한편 오늘날에는 여기를 '엘-메세드'(el-Meshed)라고 부른다.
ㅇ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 - 선지자 '요나'에 관한 기록은 '요나서'외에 오직 여기에만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통하여 요나 선지자의 활동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 그는 B.C.780년경의 인물(Wycliffe), 즉B.C.793-753(?)에 활동했던 사람으로 호세아, 아모스와 동시대인이며 미가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본절에 기록된 요나로 하신 말씀이 '요나서' 본문에는 들어 있지 않다.
ㅇ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 하란(M. Haran)의 말에 따르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한 것은 그의 통치 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요아스왕이 전쟁에서 승리만 하는 상승세를 탔다고 본다면(13:25 주석 참고)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이유는 없다.
ㅇ하맛 어귀에서부터. - '하맛 어귀'라는 지명은 구약에서 자주 언급된다(민13:21;34:8; 수13:5; 삿3:3; 왕상8:65).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는 이곳이 이스라엘의 북쪽 변방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하맛의 남쪽으로 간주해 일반적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가까운 곳으로 보고 있다.
ㅇ아라바 바다까지. - 여기서 말하는 바다는 '사해 바다'이다. 그리고 '아라바'(Arabah)라는 지명은 요단 계곡에서 홍해의 아카바만에 이르는 저지대를 가리킨다(신3:17; 수3:16; 12:3). 그런데 이때에 여로보암이 확장시킨 이스라엘의 지경(地境)은 흡사 다윗의 왕국 절정기의 경계선과 같다. 한편 암6:14에서도 이때의 경계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ㅇ여호와께서...보셨고. - 본절은 13:5과 출3:7, 신26:7과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극심한 고난에 대한 정확한 당시의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본절에 기록된 열왕기서 기자의 주석이 뜻하는 바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즉, 여호와의 구원은 환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분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은 아직까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신 적이 없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사55:3; 렘32:40; 겔16:60).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ㅇ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 이것은 13:23에 언급된 언약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본서 기자의 이러한 언급은 그가 신명기적 역사관에 충실하였다는 증거가 된다(G. Von Rad).
ㅇ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 우리는 여기서 우상 숭배 자이며 여호와 앞에서 범죄한 여로보암이 어떻게 이스라엘에 번영을 가져오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여로보암의 개인적 능력이나 그를 보좌하는 신복들의 탁월한 술수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여로보암을 통해 죄인들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호5:15; 히10:13; 벧전3:20). 그러나 이러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이 행한 죄를 묵과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Bahr).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왕의 악행으로도 결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분의 정한 시기에 가장 올바른 공의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시103:6; 사45:21; 습3:5).
28 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그 권력으로 싸운 일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ㅇ본절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원문을 직역해 보면 "그가 유다의 다메섹과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이 된다. 그런데 학자들은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1)다윗 시대 이후로 다메섹과 하맛이 이스라엘에 복속된 적이 없는데 여로보암이 이 두 성읍을 '회복'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왜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동시에 언급되고 있는가? (3)'이스라엘에 돌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이스라엘'에서 전치사 '베'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4)이스라엘이 이와같이 동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을 몇가지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다윗과 솔로몬이 정복했던(삼하8:6; 왕상11:24; 대하8:4; 9:26). 다메섹과 하맛(당시에는 유다 지파에 속하였음)을 여로보암이 회복한 것이다. 그리고 '다메섹'과 '하맛'은 좁은 의미에서의 '성읍'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다메섹은 아람을 지칭한다고 한다(Keil, Rawilnson, Bahr). (2)이것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차지한 영토를 합병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Haram, Hobbs). 이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로서 여로보암과 동시대인인 유다의 웃시야(아사랴)가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번영을 이루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대하26:6-15). 그리고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앗수르는 앗술 니라리 5세(Assur-nirari V, B.C.754-745)의 치하에서 국력이 약화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영토 확장을 위한 전투도 이스라엘과 상관없는 남동쪽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적절한 상황과 여건을 맞았던 것이다(Hobbs). 그러나 (1)과 (2)해석이 서로 상치되는 것은 이니다. 왜냐하면 상기(上記)된 두 가지의 견해는 서로 상호 보충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서 기자가 본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로보암의 활약상이기 때문이다.
29 여로보암이 그 열조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스가랴는 예후의 4대손으로서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약속하신 예언(10:30) 즉 예후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서 성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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