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7장
1.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아람 군대가 도망하다...[366.어두운내눈밝히사] [559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일심으로-일편단심으로, 절대긍정-절대기쁨-절대신뢰-절대 감사> 기름부으심따라 주예수 이름 불러 아뢰며 기도할때!!, 그 때 "메누체흐", 질서-균형-조화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에하드"됨 작동하사 마땅히 할 일 알게/생각나게 하실것이요 기름부으심의 인도따라, 이끄시는 그대로 임재따라 이땅을 걸으라!!
3.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4.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5.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6.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7.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8. 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9.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10. 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하는지라
11. 그가 문지기들을 부르매 그들이 왕궁에 있는 자에게 말하니
12. 왕이 밤에 일어나 그의 신복들에게 이르되 아람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그들이 우리가 주린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 진영을 떠나서 들에 매복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그들이 성읍에서 나오거든 우리가 사로잡고 성읍에 들어가겠다 한 것이니라 하니
13. 그의 신하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아직 성중에 남아 있는 말 다섯 마리를 취하고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하소서 그것들이 성중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무리 곧 멸망한 이스라엘 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하고
14. 그들이 병거 둘과 그 말들을 취한지라 왕이 아람 군대 뒤로 보내며 가서 정탐하라 하였더니
15. 그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병기가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알리니
16.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18.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말한 바와 같으니 이르기를 내일 이맘 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한즉
19.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20.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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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7장
1. Then Elisha said, "Listen to the word of the LORD; thus says the LORD, 'Tomorrow about this time a measure of fine flour shall be [sold] for a shekel, and two measures of barley for a shekel, in the gate of Samaria.'"
2. And the royal officer on whose hand the king was leaning answered the man of God and said, "Behold, if the LORD should make windows in heaven, could this thing be?" Then he said, "Behold you shall see it with your own eyes, but you shall not eat of it."
3. Now there were four leprous men at the entrance of the gate; and they said to one another, "Why do we sit here until we die?
4. "If we say, 'We will enter the city,' then the famine is in the city and we shall die there; and if we sit here, we die also. Now therefore come, and let us go over to the camp of the Arameans. If they spare us, we shall live; and if they kill us, we shall but die."
5. And they arose at twilight to go to the camp of the Arameans; when they came to the outskirts of the camp of the Arameans, behold, there was no one there.
6. For the Lord had caused the army of the Arameans to hear a sound of chariots and a sound of horses, [even] the sound of a great army, so that they said to one another, "Behold, the king of Israel has hired against us the kings of the Hittites and the kings of the Egyptians, to come upon us."
7. Therefore they arose and fled in the twilight, and left their tents and their horses and their donkeys, even the camp just as it was, and fled for their life.
8. When these lepers came to the outskirts of the camp, they entered one tent and ate and drank, and carried from there silver and gold and clothes, and went and hid [them]; and they returned and entered another tent and carried from there [also,] and went and hid [them.]
9. Then they said to one another, "We are not doing right. This day is a day of good news, but we are keeping silent; if we wait until morning light, punishment will overtake us. Now therefore come, let us go and tell the king's household."
10. So they came and called to the gatekeepers of the city, and they told them, saying, "We came to the camp of the Arameans, and behold, there was no one there, nor the voice of man, only the horses tied and the donkeys tied, and the tents just as they were."
11. And the gatekeepers called, and told [it] within the king's household.
12. Then the king arose in the night and said to his servants, "I will now tell you what the Arameans have done to us. They know that we are hungry; therefore they have gone from the camp to hide themselves in the field, saying, 'When they come out of the city, we shall capture them alive and get into the city.'"
13. And one of his servants answered and said, "Please, let some [men] take five of the horses which remain, which are left in the city. Behold, they [will be in any case] like all the multitude of Israel who are left in it; behold, they [will be in any case] like all the multitude of Israel who have already perished, so let us send and see."
14. They took therefore two chariots with horses, and the king sent after the army of the Arameans, saying, "Go and see."
15. And they went after them to the Jordan, and behold, all the way was full of clothes and equipment, which the Arameans had thrown away in their haste. Then the messengers returned and told the king.
16. So the people went out and plundered the camp of the Arameans. Then a measure of fine flour [was sold] for a shekel and two measures of barley for a shekel, according to the word of the LORD.
17. Now the king appointed the royal officer on whose hand he leaned to have charge of the gate; but the people trampled on him at the gate, and he died just as the man of God had said, who spoke when the king came down to him.
18. And it came about just as the man of God had spoken to the king, saying, "Two measures of barley for a shekel and a measure of fine flour for a shekel, shall be [sold] tomorrow about this time at the gate of Samaria."
19. Then the royal officer answered the man of God and said, "Now behold, if the LORD should make windows in heaven, could such a thing be?" And he said," Behold, you shall see it with your own eyes, but you shall not eat of it. "
20. And so it happened to him, for the people trampled on him at the gate, and he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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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7장 (개요)
사마리아와 거기에 있던 이스라엘 왕에게 이제 구원이 베풀어진다. 그러나 실상은 어느 정도 절망적이다. 사마리아에 있던 이스라엘 왕은 절망에 빠져 있다.
1. 이 구원 사건은 엘리사가 예언한 것이며, 이것을 믿지 못하던 한 장관은 그 구원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1, 2).
2.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일로 인해 일어난다.
(1) 하나님이 수리아 군대를 기적적으로 도주하게 함(6). 즉 그들이 갑자기 철수하게 됨(7).
(2) 때마침 네 문둥이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왕궁에 보고함(3-5, 8-11).
(3) 왕은 그들의 보고가 사실인지 조심스럽게 알아봄(12-15).
3. 그로 인해 갑자기 식량이 풍성해지고(16), 그것을 믿지 못하던 장관이 죽음(17-20)으로써, 그 예언은 실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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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예언(왕하 7:1-2)
Ⅰ. 사마리아 성읍은 지금은 비록 극심한 궁핍에 빠져 있지만 24시간 내에 많은 식량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엘리사가 예언했다(1절).
1. 이스라엘 왕은 궁핍을 보고 절망에 빠져, 기다리는 데에도 진력이 나 있었다. 이 최악의 사태를 당하여 엘리사는 그 예언을 했다. 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을 보여 주시는 기회가 된다. “인간의 힘이 사라진 그 때”가 하나님의 때다(신 32:36). 그들이 도움을 포기해 버렸을 때에, 그 때에 도움이 왔다.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 18:8) 이스라엘 왕은 “내가 아직도 여호와께 기대할 것이 있습니까?” 하고 말했다. 아마 백성의 장로들 중에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들의 말을 듣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시오. 그가 뭐라고 말씀하는지, 듣고 경청하시오. 이 말씀을 듣고 믿으시오. 곧 내일이면 사마리아 성문에서 곡물이 평상시와 같은 값으로 팔릴 것이오”라고 엘리사가 말했다. 또한 포위가 풀리게 되어 사마리아 성문은 다시 열릴 것이며, 시장은 전과 다름없이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평화의 회복은 이런 식으로 표현된다. 즉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삿 5:11)라고 했으니, 거기에서 곡물을 사고팔기 위함이었다.
2. 그 결과는 매우 곡물이 풍성해지리라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가다 보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삽시간에 곡물의 값이 싸지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까지도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의 생명을 계속 위협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왕의 생명과 그의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기로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풍성하다.”
Ⅱ.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한 이스라엘 귀족이, 이 예언에 대한 자기의 불신앙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2절). 그는 이스라엘 왕이 아끼던 한 장관이었는데, 왕의 오른팔과도 같았으며, 왕이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즉 왕은 그의 분별력을 매우 신뢰했고, 그를 깊이 신용했다. 그 귀족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만나를 내리셨듯이 구름 위에서 곡물 비를 내리지 않는 한, 그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모세의 기적이 늘 모세를 뒤따랐듯이, 설사 엘리야가 과거에 통 속의 식량을 늘리는 그런 기적을 베풀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예언이 실현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Ⅲ. 그의 불신에 대한 공정한, 운명적 심판이 그 위에 내려졌다. 그리하여 그가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이 큰 풍요를 목격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먹고 평안을 찾지는 못했다. 보라, 불신앙이 곧 죄이니,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지극히 불경(不敬)함이요 기쁘시게 하지 않음이라.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계획하셨던 당신의 호의를 빼앗아 가 버린다.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눈으로 보기는 했어도, 불신앙 때문에 거기에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패트릭 주교의 말과 같이, 영생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이 차지할 것이란 그런 것일 것이다. 즉 그들은 영생을 멀리서 바라보지만―아브라함도 멀리 있었다―결코 그것을 맛볼 수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약속의 혜택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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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들의 지략(왕하 7:3-11)
Ⅰ. 사마리아의 포위가 어떻게 저녁, 곧 황혼에(6, 7절) 풀렸는가? 그것은 힘이나 군대에 의해 된 일이 아니요, 만군의 주의 영이 포위군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함으로써 된 일이었다. 여기에는 그들을 대항하는 어떤 검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 천둥이나 우박으로 그들이 패주하게 된 것도 아니며 천사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 앞에 있던 산헤립의 군대처럼, 그들이 살해됨으로 된 일도 아니었다.
1. 그것은 오직 “주께서 병거 소리와 말 소리를 아람 군대가 듣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도단을 포위하고 있던 군사들은 그들의 시각을 속임당했다(6:18). 이들은 이제 청각에 속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감각이 어떻게 하면 당신 자신의 뜻에 맞게 적용되도록 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즉 “그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을 만드심”과 마찬가지로 “귀머거리와 소경”도 만드신다(출 4:11 참조).
천사들을 통해 공중에서 정말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지, 아니면 다만 그들의 귀에 한 음성이 들렸는지 그것은 불확실하다. 설사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든,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었다. 즉 “그의 보물 속에서 바람을 끄집어내시며” 또한 “인간 속에 영을 만드신” 그 분께로부터 난 것이었다. 말과 병거의 모습을 봄으로써 엘리사의 종은 용기를 받았다(6:17 참조). 말과 병거의 요란스러운 소리가 수리아 군사들을 겁나게 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소식이,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있느냐 전쟁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매우 위안이 되기도 하고 큰 공포를 주기도 한다.
2. 이 요란한 소리를 듣자, 그들은 이스라엘 왕이 어떤 외국 군대의 원조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6절). 잘 알 수는 없지만, 애굽에는 왕이 한 사람밖에 없었으며, 헷 사람의 왕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귀에 그 공포의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해석하도록 속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들이 만일 유다의 왕이 합세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면, “헷 사람과 애굽의 왕들”에 대한 연상보다는 훨씬 납득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이 공포의 사건에 대해 어떤 공상이라도 해 보았더라면, 그들의 이성은 즉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즉 “철저히 포위되어 있는 이스라엘 왕이 어떻게 그렇게 멀리 있는 왕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겠는가? 무엇을 치르고 그들을 고용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큰 무리가 움직이기 전에 어떤 생각이 미쳤더라면 도망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전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그들은 깊은 공포에 싸였다.”
3. 그리하여 수리아 군대들은 목숨을 건지려고 황급히 도주했으며, 진을 그대로 버려두고 가 버렸다.
말이 있었지만 그들은 말을 탈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황급하게 도주했을 것이다(7절). 그들 중에 아무도 그들이 생각했던 적군을 확인해 보려고 정탐꾼을 보낼 생각을 못 했다. 그들은 긴 행군으로 지쳐 있었고, 적군을 마주 대할 만한 용기조차 없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느니라.”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면, 가장 용감한 자, 가장 담대한 자도 낙담케 하실 수 있으며, 가장 용기 있는 자도 떨게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공포에 떨게 만드실 수 있다.
Ⅱ. 아람군의 도주가 어떻게 네 문둥이들에게 발견되었는가? 사마리아 성은 해방되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성 위의 파수꾼들은 적군의 철수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 적군들이 그만큼 감쪽같이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성문 밖에서 유숙하고 있던 네 문둥이들―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이들은 부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을 정보 제공자들로 삼았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그들 네 문둥이들은 바로 게하시와 그의 세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또는 아마 게하시도 그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며, 나중에 왕이 그를 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8:4 참조).
1.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 문둥이들이 어떻게 하여 그 날 밤에 수리아의 진영을 찾아갈 방안을 강구했는가를 알아야 한다(3, 4절).
그들은 굶어 죽게 되었다. 아무도 그들을 구출하려고 성문을 나오는 자들이 없었다. 그들이 설사 성 안으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그 성 안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그 사마리아 성 안의 거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냥 앉아 있었다면, 그것은 자기들의 오두막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적군에게 투항하기로 결심하고 그들의 처분에 자신들을 맡겨 버렸다. 적군들이 자기들을 죽인다고 해도, 칼에 죽는 것이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며, 한 번 죽는 것이 천 날을 굶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이들을 동정하여 살려 두고자 했을 것이다. 상식적 분별력만 있어도,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보다 좋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더 악화시킬 수는 없는 그런 방법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신약성경의 탕자는 자기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먼 타국에서 굶어 죽느니 아버지의 노여움에 대한 공포를 선택했다. 이들 문둥이들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만일 그들이 우리를 죽이면 우리는 죽을 따름이다.” 사실 다른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음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우리는 죽게 될 따름이다. 그것은 최악의 경우다. 우리는 죽는 것이거나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며, 제2의 죽음의 피해를 받지는 않으리라”고 말했다. 이 결심에 따라서, 그들은 그 날 밤이 시작될 무렵에 수리아 진영으로 갔다. 그들은 결국 크게 놀라게 되고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진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5절).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게 만들었다. 즉 그 문둥이들은 수리아군이 도망가자마자 곧 거기에 갔다. 수리아군은 그 날 저녁, 황혼에 도망갔고(7절), 또 그 날 황혼에 문둥이들이 갔기 때문이다(5절). 그러므로 시간이 조금도 지체되지 않았다.
2. 어떻게 그들이 이 소식을 사마리아 성에 전해 주기로 결심했는지 그 추론 과정을 살펴보자. 그들은 자기들이 도착한 첫 천막에서 실컷 먹었고(8절), 그러고 나서 노획물을 감추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을 고쳐 먹었다(9절). “그들이 우리를 사회에서 추방했다고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이러한 좋은 소식을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게 숨긴다면, 우리가 선치 못하도다. 우리를 추방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율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그것이 그들의 잠을 깨운다고 할지라도, 그 소식은 그들에게 죽음에서 구하여 생명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이 독단적으로 행하여 자기들의 목숨만 구하려 한다면 어떤 벌이 내릴 것이라고 그들 자신의 양심이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이기적이고 편협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 가장 좋은 유익은 우리의 형제들과 우리가 함께 나누는 유익이다. 이렇게 결심한 그들은, 성문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발견한 사실을 파수병에게 알렸다(10절). 파수병은 즉시 이 소식을 왕궁에 알렸다(11절). 그리고 그 소식은 문둥이들이 전해 왔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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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된 사마리아 성읍(왕하 7:12-20)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Ⅰ. 왕은 수리아군의 철수에 대하여 경계심이 많은 책략을 썼다(12절).
그 왕에게는 수리아군이 포위를 풀고 매복을 했다가 보다 전략적으로 자기들을 다시 습격하지나 않을까 공포가 생겼다. 그 왕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놀랍게 나타나리라는 것을 기대할 아무런 이유를 몰랐다. 결국 그는 자기의 불신앙과 조급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잃고 만다. 그는 수리아군이 도주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왕과 그의 신하들 중 어느 누구도 수리아군이 듣고 놀랐던 그 병거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과 같이 자기의 가는 길이 항상 불안정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것도 받을 기대를 하지 말라. 아니 그보다는, 가책을 받는 양심은 최악의 사태를 두려워하고, 인간에게 회의를 일으킨다.
Ⅱ. 이스라엘인들이 어떻게 하여 자기들의 만족을 누리고, 함정의 희생물에서 모면되었는가?
그들은 수리아군의 형편을 알아보려고 정탐꾼들을 내어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과연 모두, 일반 병사들은 물론 지휘관들까지도 도망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탐꾼들은 그들이 매우 황급히 도망가느라고 길가에 벗어던지고 간 옷을 발견하고 그들의 뒤를 추적해 갈 수 있었다(15절). 이러한 제안을 낸 그 신하는 그 백성들이 처해 있는 처참한 상황에 대해 매우 민감했던 것으로 보인다(13절). 왜냐하면, 그가 성 안에 있는 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 말들 중의 많은 수가 이미 죽었고, 그 나머지도 굶어 죽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형편을 다음과 같이 반복해 말했다. “그들(말들)은 이스라엘의 온 무리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무리를 영광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적은 수효가 되었고 비참해졌나이다.” 그는 그 마병 다섯 명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보낼 만한 말은 두 필밖에 없었음이 분명했다. 그 말이 병거를 끌었다(14절). 이제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의 힘이 사라진 것을 보시고 그 종들로 인해 후회하셨다(신 32:36 참조).
Ⅲ. 아람 진영에서 노획해 옴으로써, 사마리아에 곡물이 풍성해졌다(16절). 수리아군이 만일 현대적인 전쟁법을 알았더라면, 그들이 자기들의 짐과 천막을 가지고 떠날 수 없을 경우에는, 적군의 손에 들어가게 하느니 차라리 그것들을 불태워 버렸을 것이다(흔히 적국의 약탈물을 처분할 때 하듯이). 그러나 사마리아의 패망을 계획했던 그 포위가 오히려 사마리아의 이득이 되도록 한 것과, 이스라엘인들이 옛날 애굽인들의 전리품으로 인해 부유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수리아군의 전리품으로 인해 부유해지도록 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일이었다.
1. 그러므로 죄인들의 재물이 의인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욥 27:16, 17 참조). 또한 노략질하는 자들은 강탈을 당했다(사 33:1).
2. 이스라엘의 궁핍은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채워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가장 궁핍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의지할 용기를 주는 사건이다.
3. 엘리사의 말은 정확히 실현되었다. 즉 “고운 가루 한 스아가 한 세겔에 팔렸다.”
수리아 진영의 전리품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식량에 충분했을 뿐 아니라,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싼값으로 팔 수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집에 머물러 있던 자들도 그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다”(시 68:12; 사 33:23 참조).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결코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Ⅳ. 엘리사의 말의 진위성을 의심하고, 믿지 않던 장관이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도 분명히 성취된다. “믿는 자는 저주를 받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믿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확고해졌다.
1. 이스라엘 왕은 이 장관에게 성문지기의 책임을 맡겼다(17절).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평화를 유지하게 했고, 전리품의 분할과 분배에 소요와 무질서가 없는지 살피게 했다. 왕은 그를 지극히 믿었다. 그의 판단력과 신중성을 믿었고, 그를 기꺼이 대우했다.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하고자 하는 자는 백성을 섬기게 하라.
2. 이 장관은 성문에서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이고 곡물 분배로 싸움이 치열해졌을 때 우연한 사고로 죽었든가, 아니면 그가 자기의 권력을 남용하고, 그것 때문에 백성들이 자기들의 굶주림을 채우는 데 그가 위험스러운 방해 인물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밟아 죽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나님의 정의가 영화롭게 되었고, 엘리사의 말은 실현되었다. 그는 풍성한 곡물을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자기의 불신앙 때문에 침묵을 지켰고, 부끄러움을 당했다. “하늘의 창문이 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곡물의 값이 싸졌고, 결국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데에서 범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풍요함을 보기는 했어도 먹지는 못했다. “그가 자기의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진노를 내리셨다”(욥 20:23). 그리고 그 진노는 잔과 입술 사이에 떨어졌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희롱을 당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 사망의 약속으로도 희롱을 당하는 법이다. 믿음은 보는 것이 아니었듯이, 보는 것은 즐거움이 되지 못하리라. 이 내용은 반복되어 나온다. 이 사건은 엘리사의 예언과 매우 독특하게 비교되었다(18-20절). 여기에는 특별히 주목하고 배워야 할 바가 있을 것이다.
(1)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와 말씀을 불신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이 분노하시는가를 인간은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께서 식량을 공급하실 수 있을까?”라고 말했을 때, “주께서 그것을 들으셨다면, 하나님은 진노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목적을 달성할 수단을 강구할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단코 어떤 목적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2) 인생과 그 즐거움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영예와 권력이 돌연한, 불명예스러운 죽음에서 인간을 구해 줄 수 없다. 왕이 의지했던 그 사람을 백성들은 짓밟았다. 자기 스스로 국가의 지주(支柱)요 받침목이라고 환상을 가지고 있던 자가 길거리의 진흙처럼 사람의 발에 밟혔다. 인간의 영예에 대한 자랑은 때때로 오욕으로 물들게 된다.
(3)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확실한가를, 그리고 그 진노가 죄인과 하나님께 불순한 자의 머리 위에 얼마나 분명히 임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군왕들을 “회반죽같이 밟으시며, 땅 위의 모든 왕에게 두려움이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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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7장
1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ㅇ혹자는 본절 이후의 사건을 앞장의 기사와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T.R.Hobbs). 왜냐하면 6:33에는 등장 인물이 '사자'인데 반해 2절에서는 그 등장 인물이 '한 장관'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상으로 보거나, 사건의 연결상으로 볼때에 앞장의 사건과 본절에는 긴밀한 연결 관계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7:1, 2절은 앞 사건의 한 구성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 기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G.Rawlinson).
ㅇ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예언을 선포할 때 사용되는 고전적인 서론 형식을 엘리사가 이처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서론 형식은 공공의 집회에서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 시키기 위하여 흔히 사용되던 것이다(Pulpit Commentary;렘2:4;10:1;미 3:1;암 7:16,17). 그리고 '들을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마'는 단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고(렘 2:4) 혹은 복수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는데(미3:9) 일반적으로는 복수 형태로 사용되는 것이 정상이다(Hobbs). 그러나 이 단어가 단수로 사용될 때는 '듣는 무리를 하나로 취급할 때'나 '무리 속에 있는 개개인을 하나하나로 간주해 그 설교의 대상으로 삼을 때'이다(렘 22:2).
ㅇ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이러한 표현은 사마리아 성이 아람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가라사대'란 말은 히브리어 '아마르'의 번역으로서 '대답하다', '확인하다', '명하다'란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여호와의 확신적 선언임을 알 수 있다.
ㅇ내일 이맘때에 - 여기서 '때'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카에트'는 명사 '에트' 앞에 전치사 '카'가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가 구약에서는 아주 드문 예로서(민 23:23;수 11:6;삼상 4:20;왕하 4:16), 이것은 어떤 특별한 시점(時點)을 가리킨다. 즉, 바울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말한 바로 그 '때'(카이로스)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ㅇ사마리아 성문에서 - 고대의 성들에는 큰 성문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넓은 뜰이 함께 있어 그 지역 사회의 공적인 장소가 되기도 했다. 즉, 공적인 연설의 장소(창34:20), 공무 집행소(왕상 22:10), 재판이 열리는 곳(신 17:5;행 7:58), 사열하는 곳(삼하 18:4) 뿐만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렘 17:19,20)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성문이 곡물을 파는 시장으로 사용된 듯하다(17,18절).
ㅇ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 여기에 언급된 한 '스아'는 한 '에바'의 약1/3에 해당되는 부피로서 약 7.33l 정도이다. 한편 이것이 평상시보다는 고가에 해당되지만 당시의 형편으로 볼 때는(6:25) 엄청난 가격 절하이다. 즉, 고운 가루 한 스아의 값이 당시에 거래되던 합분태 사분 일 갑(* ,kab)에 해당하는 가격의 1/5밖에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갑'(약 1.3l)은 한 '스아'의 약 1/6에 해당되므로 이것을 통해서 고운 가루의 가격 절하 정도가 얼마만한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따라서 이 예언이 기근으로 허덕이던 사마리아 성 안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선포로 들렸을 것이다. 한편 '한 세겔'이 금인지, 혹은 은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금 한 세겔은 은 한 세겔의 15배에 해당되고(대상 21:25) 은 한 세겔은 일반 노동자의 4일에 해당하는 품삯이다(출 30:24;삼하 24:24).
2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ㅇ한 장관 - 여기서 '장관'을 뜻하는 히브리어 '솰리쉬'는 '셋'을 의미하는 '솰라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BDB(F.Brown, S.R.Driver, and C.A.Briggs,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에서는 '병거에 탄 세번째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혹자는 이를 '셋째 관리'로 번역하기도 한다(Thiele, Mysterious Numbers, p.114). 한편, 거니(Gurney)에 따르면 헷족(Hittite)의 전차는 세 사람이 몰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은 전시에 가능한한 빨리 많은 사람들을 수송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라암세스 2세와 가데스에서 전쟁할 때 헷족(Hittite)은 바로 이러한 삼륜 전차를 이용했다(Yadin, Art of Warfare 1:104-105),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는 '솰리쉬'라는 단어가 군대와 관련해서 번역된 적은 전혀 없다(T.R. Hobbs). 오히려 출 15:4에서는 '택한 장관'(RSV)으로, 겔 23:23에서는 '귀인'으로 번역되어 왕의 측근에서 왕을 보필하는 자를 나타낸다(Pulpit Commentary, Keil & Celitzsch).
ㅇ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 왕의 전속 부관(the kings aide-de-camp,Keil &Delitzsch, Vol. , p.330), 즉 나아만과 같은 직급에 속한 이 사람은 이스라엘 왕이 신임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ㅇ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 이것은 창 7:11에 기록된 홍수 사건을 의식한 말로서 엘리사 선지자의 예언의 진실성을 의심한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선지자를 심하게 조롱한 것이다(K.W.Bahr). 따라서 그는 정죄를 받아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20절).
3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ㅇ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 문둥이들은 게하시의 아들들이라고 하는데(T.R.Hobbs)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존재라 하여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성 밖에서 살았으며(레 13:46;민 5:3) 친지들이 공급해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당시에는 성 안의 거주자들도 목구멍에 풀칠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음식 공급이 단절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문둥이들이 '성문 앞' 혹은 '통로'(hateway)에 있었다고 한다(Keil & Delitzsch, Vol. ,p.330).
4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지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앉아 있어도 죽을지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 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
ㅇ주리니 - 이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은 '라아브'로서 '시장하다', '갈망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표현은 약간의 갈증이나 시장기가 아닌 배가 고파서 속이 쓰리며 기운이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ㅇ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 즉, 네 문둥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적군에게 항복하는 길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 길을 택했다. 여기서 '항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팔'은 '탈주하다', '떨어지다', '눕다'라는 뜻 외에 '넘어가다' 라는 뜻도 지닌다(삼상 29:9;렘 39:9). 이에 따라서 70인역(LXX)에서는 '들어가자'란 뜻이 헬라어 '에이셀데인'으로 번역되어 문둥이 네 사람이 아람에게 항복하러 간것이 아니라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들어간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KJV과 RSV도 70인역(LXX)의 이러한 번역을 지지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에 가고자 한 행위를 반드시 항복하러 가는것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단순히 양식을 구하러 들어갔던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듯 싶다.
5 아람 진으로 가려하여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 가에 이르러 본즉 그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ㅇ황혼에 일어나서 - 본절에서 '황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네쉐프'는 '해뜰때' 나 '해 질 무렵'의 엷은 태양빛(twilight)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명', '황혼'등을 뜻한다. 그리고 본문의 9절과 12절을 근거로 해서 볼 때 '황혼'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Keil & Delitzsch, Lang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6 이는 주께서 아람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ㅇ이는 주께서...듣게 하셨으므로 -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으로 향해 가는 것과 동시에 병거 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큰 군대의 소리를 아람 군대에게 듣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역사였다. 그 뿐만 아니라 3:22에서도 아람은 이와 유사한 방법에 의해 속임을 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가 되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나아만을 통하여 아람에게 승리를 주시기도 하셨으나(5:1) 또한 이와같이 패하게도 하시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소리의 근원을 산골짜기에 밀어닥친 바람에 기인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K.W. Bahr, Wycliffe). 그러나 '소리'(soun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콜'로서 '인간의 음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억측에 불과하다(G.Rawlinson).
ㅇ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 여기서 언급된 '헷 사람의 왕들'을 초기 헷(Hittite)제국의 제왕들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B.C.1200년경 오늘날의 터어키(Turkey) 전역을 차지하고 있던 헷 제국은 앗수르와 해안에 퍼져있던 소수 민족들에 의해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왕상 9:21에는 솔로몬이 헷제국이 멸망한 뒤에 남아있던 헷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헷 문화는 아람 북쪽에 남아 소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헷족의 여러 왕들 또는 장군들에 의해 전해져 오다가 후에는 점차적으로 셈 문화에 병합되고 말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헷 사람의 왕들'은 바로 소규모 집단의 우두머리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Gelb,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2:612-615; O.R. Gurney, The Hittites, 39-46). 그리고 당시에 이들은 소규모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여 갈그미스 부근의 북 아람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니느웨 왕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왔었다. 그래서 이들이 이스라엘을 돕기 위하여 왔다고 아람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도망한 것은 당연하였다(G.Rawlinson). 또 본절의 '애굽 왕들'이라는 복수 형태의 표현에도 상당한 논란점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은 언제나 단일 왕 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당시 애굽 왕조의 분열로 부바스티스(Bubastis), 타니스(Tanis), 멤피스(Memphis) 지역을 각기 다른 왕들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들'이라는 복수 표현을 썼다는 해석이 있다(G.Rawlinson). (2)히브리 본문에서 '애굽'을 뜻하는 '미츠라임'을 '무스리'(Musri)를 뜻하는 '무츠림'으로 읽을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T.R.Hobbs, Wycliffe). 왜냐하면 당시 무스리는 소아시아의 실리시아(Cilicia)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다수의 왕들이 복수제로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Gurney, The Hittites, p.42-43). 그리고 앗수르의 기록들을 보면 종종 애굽을 무스리라고 칭했는데 이렇게 명칭을 서로 바꾸어 혼용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무리없이 '애굽왕들'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무스리가 애굽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아람은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도와 자신들을 치려고 한다는 소문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으니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Herzog and Gichon, Battles of the Bible, p.233).
7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ㅇ황혼에 일어나서 - 5절과 비교해 볼 때 아람 군대가 달아난 시각과 문둥이들이 아람진으로 출발하기 시작한 시간이 거의 일치한다.
ㅇ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 그들이 왜 좋은 말과 나귀를 그대로 버려두고 달아났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들은 너무나 공포에 질려서 군장을 꾸릴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기드온의 300용사의 외침에 놀란 미다안 군사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였던 상황과 유사하다(삿 7:19-23).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은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으로 작용한다(시 76:12;요 2:11;습2:11). 그러나 당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도움이 되시고(시33:20;46:1;121:1;146:5;사 50:7;고후 6:2), 피난처가 되신다(시 14:6;46:1;렘 17:18; 욜 3:16). 또 혹자는 작전상 적으로 하여금 그들이 진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G.Rawlinson). 한편 나귀는 고대의 군대에 있어서 짐과 사람을 운반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으로 사용된 동물이었다.
8 그 문둥이들이 진 가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9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ㅇ본절에는 네 명의 문둥이가 아람 진영에 들어가서 취한 행동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1) 식욕을 채움:이 식욕은 수면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문둥이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목숨까지 건 위험을 감행했다. (2) 재물욕을 채움:일단 식욕이 채워지고 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문둥이들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구를 위해 온 신경을 쏟으나, 그럴수록 탐욕으로 인한 공허감과 불만은 더욱 가중되어 간다(시 39:6;합 2:9;딤전 6:9-11). 이와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를 말씀하신 바 있다. 즉,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을 듣기는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에 비유된다(마 13:22). 그러나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같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아야 한다(마 6:25,31).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기본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마 6:32). (3) 뉘우침:문둥이들은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소위(所爲)를 뉘우치고 성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기 형제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둥이들의 행위는 엄청난 구원의 복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우리들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복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추어 두기만 한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도 빼앗길 것이다(마 25:29).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9:16). 한편 9절에 표현된 '아름다운 소식'은 히브리어 '베스라'를 번역한 말로서 항상 좋은 소식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삼하 18:20). 그러나 여기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문둥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단순한 조국애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성 안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이때에 자기들만의 욕심을 채운다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벌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91). 그래서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선치 못하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히브리어 '로켄'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자신들의 행위가' 적절치 못하다'는 뜻으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죄라기 보다는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자기 점검을 의미한다.
10 드디어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11 저가 문지기들을 부르매 저희가 왕궁에 있는 자에게 고하니
ㅇ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 여기서 '문지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에르'(* )는 성문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Keil). 여기서 문둥이들은 자신들이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당시의 규례(레 13:46;민 5:3) 때문에 성안으로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아람군이 도망했다는 기쁜 소식을 문지기에게 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살리는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여러 단계의 명령 계통을 거치게 됨으로 시간적으로 상당히 지체되었을 것이다(11절). 한편 10절의 '아람진에...있더이다'라는 표현은 문둥이들이 직접 자신들의 결정을 실천에 옮긴 사실을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즉, 그들은 직접 목격한 사실을 조금도 과장하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사실대로 전했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도 귀로 듣고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진 바된 복음을 조금도 변개함이 없이 그대로 전한 것과 같다(요일 1:1-3). 이와 반대로 하와는 뱀의 유혹시에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자신의 생각으로 바꿔 말했다(창2:17;3:3). 그래서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던 것이다(창 3:16).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사단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고 말했다.
12 왕이 밤에 일어나 그 신복들에게 이르되 아람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저희가 우리의 주린 것을 아는고로 그 진을 떠나서 들에 매복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저희들이 성에서 나오거든 우리가 사로잡고 성에 들어가겠다 한 것이니라
ㅇ이스라엘 왕은 문둥이들이 전한 소식을 즉시 믿지 않고 이것을 아람 사람들의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장에서는 공직자들의 회의적인 태도를 공통적으로 보여 주게된 것이다(2절). 그렇지만 왕의 추측이 전혀 황당 무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공동체와 격리되어 살던, 문둥이에 지나지않은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해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격할 때(수 8장)도 이와 같은 수법을 사용했었으며 아비멜렉이 세겜 성을 탈취할 때(삿 9:30절 이하)도 동일한 책략을 사용했었기 때문에 왕은 쉽게 그렇게 판단했을 수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경험과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서 복음이 배척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마 15:3;막 7:13;요 11:24). 한편 신약에서도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인위적인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이 두고 그 전통으로써 모든것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마 15:3;막 7:13)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도 믿지않으려고 했다(요 9:1-34). 이와 유사한 예를 마리아와 마르다 두 자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수와 아주 밀접한 사이였으며 그분의 말씀도 열심히 들었던 자들이다(눅 10:38-42). 그런데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리라고는 믿지 못하고 마지막 부활만을 고집하고 있었다(요 11:24). 이때에 예수께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꾸짖으셨다(요 11:40).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나 교리에 집착해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2절).
13 그 신복중 하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아직 성중에 남아 있는 말 다섯 필을 취하고 사람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소서 이 말들이 성중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무리 곧 멸망한 이스라엘 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하고
ㅇ나아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5:13) 본절에서 왕은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신하에 의해 문제의 해결점을 모색하게 된다(3:11;6:12). 즉, 한 신복의 제안은 네 명의 문둥병자와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리자는 것으로 결국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ㅇ이 말들이...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 이것은 '이 마병들이 성중에서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아직 생존해 있는 모든 이스라엘 무리와 같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마병들은 성중에 남아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사(餓死)를 당하게 될 것이며, 설혹 적진에 들어가 붙잡히더라도, 싸울 힘이 없어 점령당할 사마리아 성민과 같이 죽게될 것이니,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14 저희가 병거 둘과 그 말을 취한지라 왕이 아람 군대 뒤로 보내며 가서 정탐하라 하였더니
ㅇ저희가 병거 둘과 그 말을 취한지라 - 여기서 왕이 아람을 정탐하러 보내면서 마병이 아닌 병거를 보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리고 병거 둘에 말 다섯 마리(13,14절)를 취한 것도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 병거에 두 마리의 말이 쓰인 경우가 있고 세 마리가 쓰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후자의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나 전자의 문제 즉, 왜 마병 대신에 병거를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색한 점으로 남는다. 한편 히브리 성경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본문 비평에는 '병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켑'을 '리케비'로 수정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이 단어는 분명히 '마병'이라는 뜻이 된다(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p.91). 그러나 그렇게 본문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병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켑'은 다양하게 번역되기 때문이다(13:7;신 24:6;삿 9:53;삼하 8:4). 그리고 왕이 두 병거를 동시에 보낸것은 하나가 적에 잡히더라도 나머지 하나가 급히 돌아와 보고를 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Lange Commentary).
15 저희가 그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군물이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고하매
ㅇ저희가 그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 아람이 요단을 통과하여 자신들의 본국으로 도망간 것은 성경에서 잘 알려진 경로를 통해서였다. 실제로 아람의 퇴각로는 두 길이 있었다. 하나는 와디 파리아(Wadi Faria) 사막을 통과하여 '아담의 다리'(Bridge of Adam)가 있는 요단 강쪽을 지나 얍복 강으로 도망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6장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로 왔던 길, 즉 도단 계곡(the Valley of Dothan)의 북쪽 제닌(Jenin)을 지나 야무크(Yarmuk)로 도망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외의 길은 모두 적지를 통과하는 길이므로 퇴각로서는 부적합한 길이었다(T.R.Hobbs). 한편 요단 강까지 따라간 정찰병들은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에 대한 공격 의지를 완전히 버리고 도망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ㅇ버린 의복과 군물이 길에 가득하였더라 - 이것을 볼 때 12절에서 왕이 의심한 것과 같이 아람 군대가 도망간 것처럼 꾸민 책략으로 보기에는 너무 실제적이다. 한편 여기서 '군물'(軍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켈림'은 일반적으로 '그릇'(Vessel)으로 번역되지만 본절에서는 '무기'나 군인들이 사용하던 '물건'으로 번역해도 좋은 것 같다(T.R.Hobbs).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아람 군대가 얼마나 황급히 도망했는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16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ㅇ본문에는 두 가지 예언의 성취가 기록되어 있다. (1)경제의 회복:엘리사는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1절)고 왕에게 예언했던바, 이것은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자기 아들을 삶아 먹을 정도로 기근이 심했던 사마리아 성의 경제가 하룻밤 사이 이렇게 거의 정상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이적이었다. (2) 장관의 죽음:엘리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장관에게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2절)고 심판적인 예언을 했다. 이 예언도 정확하게 이루어졌으니, 곧 그가 성문의 출입을 통제하던 중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음으로써 그 곡식들을 맛보지 못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 했던 장관은 사마리아 성이 구원되는 그 순간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출애굽 노정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를 반역했다. 그 결과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히 3:17-19;4:5,6).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롬 11:11). 하나님께서는 본절에 기록된 것보다 더 큰 이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밟혀 죽은 장관과 같이 구원의 소식만 듣고 그것에 참예하지도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한편 엘리사의 예언에 대해 불신앙을 나타냈던 한 장관을 백성이 '밟으매'라는 말은 매우 엄격하고 잔인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말은 히브리어 '이르메수후'를 번역한 것으로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기기 위해 짓밟은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18 일찌기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한즉
19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20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
ㅇ본문은 본장 전체의 요약으로 볼수도 있고 단순한 부차적인 설명으로 볼 수도 있다(Montgomery). 그러나 그레이(Gray)의 말처럼 본문을 통해서 열왕기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의 말씀의 성취를 강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부가시켜준다. 또한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문둥이 네 사람과 아람 군대를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가장 미천한 것을 들어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을 주관하심으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