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3장 (개요)
여호와의 제사장들의 피에 취한 사울은 이 장에서 다윗의 생명을 계속 노린다. 다윗은 좋은 일을 하건만 계속 고난을 받는다.
1. 다윗은 그일라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함으로 왕과 그리고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1-6).
2. 다윗은 그가 도와준 왕의 완악함과 그리고 그가 구해준 그일라 사람들의 배반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지마는 하나님의 지시로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7-13).
3. 다윗은 수풀 가운데 있었고, 그의 친구 요나단의 다윗을 찾아와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14-18).
4.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와서 다윗이 잘 나타나는 곳을 알려 주었고,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해 토벌의 길에 나섰다(19-25).
다윗이 간신히 사울의 손에서 피할 수 있었다(26-29).
“의인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나, 오직 여호와께서 그들로부터 저를 구원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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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일라를 구원한 다윗(삼상 23:1-6)
이제 우리는 선지자 갓이 왜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가라고 명령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게 되었다(22:5).
사울이 나라의 안전에 대해서는 등한시했기 때문에 다윗은 비록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을지언정 나라의 안전을 돌봐야만 했다.
다윗은 선으로 악을 갚았으며, 원수들을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리신 분의 유형이 되어야만 했다.
Ⅰ.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로 내려와서 그 성읍을 약탈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달되었다(1절).
다윗을 그 나라의 수호자로 생각하고 이런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아마 하나님과 다윗이 사울을 떠났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침략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왕들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의 종들을 핍박하면 사방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마련이다.
한 나라가 평온하고자 하면, 그 나라에 있는 교회가 평온하게 하여야 한다. 계속해서 사울이 다윗과 싸우는 한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나라와 싸울 것이다.
Ⅱ. 다윗은 그들을 구원해 주기 위해 오고 싶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 먼저 여쭈어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다음과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1. 우리는 다윗의 관대함과 애국심을 볼 수 있다.
다윗은 비록 그의 머리와 그의 손이 자신의 일만을 하기에도 부족하고 적은 병력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에 부족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라의 안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나라가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라를 마땅히 지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사울이 그를 미워하고 그의 목숨을 노리건만, 다윗은 그의 힘을 다해 그런 사울을 돕고 공동의 적과 싸웠다.
다윗은 개인의 복수심 때문에 공공의 복지를 저버리기를 몹시 싫어했다.
자기가 일한 것 만큼의 상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선을 행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
2. 다윗의 경건함과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을 볼 수 있다.
다윗은 직접 여호와께 물었다. 왜냐하면 (6절에 의해서 볼 때) 다윗이 그일라로 내려가기 전에는 아비아달이 에봇을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라고 다윗은 물었다. 다윗은 자기의 임무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서, 두 가지를 다 아울러 물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의 할 일을 그가 대신해도 좋으며 더욱이 그의 허락 없이 해도 좋은 가를 물었고, 또 한 줌의 무리밖에 안 되는 적은 군사로 그렇게 많은 블레셋 군사들과 싸우며 더구나 자기 배후에는 사울이라는 위험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에서 안전하게 승리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또 그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지시를 받는 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에게 크신 위로가 된다.
Ⅲ. 하나님은 다윗에게 한 번 그리고 다시 또 한 번 그에게 블레셋 사람들과 맞서 싸우라고 지시하셨으며, 또 반드시 성공한다고 약속해 주셨다.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2절).
다윗은 자기의 군사들을 다스리기 시작하자 (성장 배경과 가치관, 마음과 생각이 제각각인) 그들을 간단히 다룰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보라, 먼저 !!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여든바) 그의 사람들이 그의 계획에 반대하고 나섰다(3절).
다윗의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 사람들 사이에도 그들을 죽이려는 원수들이 많은데, 블레셋 사람들까지 상대해서 싸우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해서 반대했다.
그들은 사울의 쫓는 손에서 피하기조차 어려운데 또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겁을 먹었다.
다윗은 그러한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여호와께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울의 명령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는 허락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4절)는 승리의 확신까지 얻게 되었다.
이 하나님의 확증의 응답은 능히 자기 휘하에 있는 비겁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었다.
Ⅳ. 다윗은 이에 블레셋과 싸워, 그들을 도륙하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출했다(5절).
이때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까지 원정을 갔던 것으로 보인다. ....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 사람들에게 대해 그들의 타작마당까지 탈취하는 악을 행한 것에 대한 보복책으로서 그들의 가축을 끌어온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주께서 확증 주심따라) 헤렛 수풀에 머물러 있는 동안이었는지 아니면 거기서 출발하여 블레셋사람들을 그일라에서 내쫓는 동안이었든지 불확실하지만, 아비아달이 에봇을 손에 들고 그에게 찾아왔다.(그일라 전투 결정은 다윗이 직접 주께 묻고 재차 확증 받았음을 수하들에게 설득시킨 후 주님 명령에 순종하여 과감히 행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이 기록되었다(6절).
그것은 대제사장의 에봇인데, 그 속에 우림과 둠밈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다윗의 망명 생활에 크신 위로를 주는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집에 가지 못할 때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귀한 보배가 그에게 찾아왔다. 그것은 대제사장과 그의 판결 흉배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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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일라로부터 도망한 다윗(삼상 23:7-13)
Ⅰ. 사울은 다윗을 없앨 계교를 생각했다(7, 8절).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다윗이 무엇을 가지고 그일라로 왔다는 소식은 못 들었단 말인가? 소식을 전하는 자가 다윗이 그일라를 해방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했다는 말은 전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 소식을 들었다면 사울은 다윗을 높이고 치하할 기회를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사울은 그것을, 다윗을 해치는 기회로 삼았다.
사울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기에게 베풀어 준 친절과 은혜에 대해서 보답할 줄 몰랐다.
다윗은 그래서 자기의 원수들에 대하여 그들은 “자기의 선을 악으로 갚고, 그는 원수들을 사랑하건만 원수들은 자기를 대적한다.”고 불평만 했다(시 35:12; 109:4).
그리스도께서도 근본 취지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요 10:32).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알아보자.
1. 사울은 하나님의 섭리가 자기의 악독한 계획을 도와주었다고 말하며, 그 일에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다”고 사울은 말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돌보심을 받고 있으며, 반대로 다윗은 얼빠진 상태에 있는 듯이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번 다윗을 공격했으나 그때마다 번번히 실패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승리를 얻기도 전에 공연히 승리감에 도취되고 있었다.
그는 다만 조그마한 실마리를 얻었다고 하여 하나님을 자기 편에 끌어들이는 경건치 못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다(시 140:8).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가 자고할까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의 조그마한 섭리의 실마리가 옳지 못한 일을 정당화하여 주신다거나 그 일이 성공하도록 도와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사울은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윗을 향한 자신의 악독함을 나타내는 종으로 삼음으로써 그들을 욕되게 했다.
사울은 모든 백성들을 속히 그일라로 모이라고 했다. 그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해하고자 하는 계획을 비밀로 하고 마치 블레셋 사람들을 대항해서 싸우는 것 같이 하여 그들을 불러모았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아서(9절) 그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사울은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계교(비밀 계획)를 세웠다.”
폭군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어떤 사람은 그 폭정의 희생자가 되거니와 또 다른 사람들은 (더욱 불쌍하게도) 그런 폭정의 도구가 되고 그 종 노릇을 한다.
Ⅱ. 다윗은 자신의 보전책을 위해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9절).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위대한 보호자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방향을 문의했다.
에봇이 그에게 오자마자 그는 곧 그것을 사용했다.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의 손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이 들려져 있다. 우리도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자. “성경을 이리로 가져오라”고 말하자.
1.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었다.
(1) 크신 위엄과 외경심을 표시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두 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불렀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세 번 그의 “종”이라고 일컬었다(10, 11절).
하나님께 자기의 사정을 아뢰는 자들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거리를 알며, 그들이 어떤 분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매우 구체적이고도 명확하게 아뢰었다.
다윗은 자기의 문제를 이렇게 하나님께 설명했다(10절). “주의 종이 확실한 소식통으로부터 분명히 들었나이다.”(그는 확실치 못한 풍문을 듣고는 에봇을 가지고 하나님의 신탁을 구할 수가 없었다). 사울은 “나의 연고로 (최근에 놉에서 그가 행했던 것과 같이) 이 성을 멸하려고 하나이다.” 다윗은 “그가 나를 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윗은 자기 자신의 안전보다도 그들의 안전을 더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들 사이에 있음으로써 어떤 어려움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어디로든지 가서 자기가 위험한 지경에 놓이기를 원했다. 관대한 도량의 소유자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마음을 쓴다.
문제에 관한 그의 질의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아뢰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여 지금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이 문제에서 나의 갈길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다윗은 그의 질문의 당연한 순서를 뒤집어서 질문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서에 맞게 대답하여 주셨다. 물음을 먼저 말하면 대답도 먼저 들려진다. “당신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에 대해 하나님의 식탁은 이렇게 대답하여 주셨다. “그렇다. 그가 올 것이다. 네가 이 성읍에서 떠났다는 말을 듣지 않는 한, 사울은 이리로 올 것이다. 그는 이미 이리로 오기로 결심을 했으며, 준비도 했다.” 다윗이 다시 물었다. “좋습니다. 사울이 내려온다면 내 옆에 있는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과 맞서 싸울 것입니까? 아니면 성문을 열고, 나를 저의 손에 붙일 것입니까?”
만일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방백이나 장로들)에게 그런 경우에 그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직접 물었다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는 그를 보호해 주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나중에는 그를 배반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금도 거짓이 없이 그에게 말씀하여 주신다.
“사울이 그들의 성읍을 에워싸고 너를 내어 달라고 하면, 지금은 너를 구세주처럼 떠받들지만 사울의 진노 앞에 견디기보다는 너를 넘겨 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그 인간 자신들보다도 더 잘 아신다.
그들의 성격도, 그들의 능력도 그리고 그들의 생각도 그리고 또 이러저러한 환경에서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도 확실히 알고 계신다.
②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경건한 성도들로 하여금 그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방법도 알고 계신다.
2.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 다윗은 그일라를 떠났다(13절).
이때에 그를 따르는 무리의 수가 육백 명가량으로 늘었다. 다윗은 이 사람들과 함께 그일라를 떠났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는지를 몰랐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며, 그의 보호하심에 자신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다윗은 그일라를 떠남으로 사울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기의 손에 붙이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를 구해 주듯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오히려 건져 내셨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울은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가려고 했던(8절), 당초의 계획을 중단하고” 다만 자기의 시위자들만을 데리고 계속 다윗을 추격하기로 결심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원수들의 악한 계획을 좌절시키시며, 그 생각을 엎어 놓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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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황무지의 다윗(삼상 23:14-18)
Ⅰ. 다윗은 이리저리로 도망쳤다. 그는 “황무지에도 있었고, 산골에도 있었고(14절), 수풀 속에도 있었다(15절).”
1.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고매한 덕과 그의 겸손과 왕에 대한 그의 충성심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그의 인내심 또 사울과 적대하여 싸우지 않은 점, 어떤 술책을 써서 사울을 놀라게 하지 않은 점, 자기와 자기에게 온 여호와의 제사장들의 원수를 갚지 않은 점, 사울의 폭정하에 있는 나라지만 그 재난을 막아 준 일에 대해 그를 칭찬하여야 한다.
그는 절대로 그런 악한 일들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한때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그의 용기를 저버린 것 같은 인상을 줄지라도, 수풀과 황무지 속에 숨어서라도 자기 몸의 안전을 도모했다.
2. 우리는 무죄한 사람이 그처럼 위협을 당하며,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을 헤매야 하는 것과,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 그처럼 멸시를 받으며, 공로가 많은 사람이 그처럼 그 수고를 인정받지 못하고 ,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그처럼 기쁘게 섬긴 사람이 이들을 섬기지 못하도록 제한을 받으며, 구속을 받는 사실을 보고, 다윗의 서글픈 운명을 한탄하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가끔 의로운 사람을 악하게 대하는 이 세상의 악함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자.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한 운명을 정해 주셨다면 아무리 위대하고 활동적인 인간이라도 이를 조용히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심이 영광을 누리며, 거룩함이 존귀함을 입으며, 의로움이 태양처럼 빛나고, 말 아래 가리워지지 않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자.
Ⅱ. 사울은 다윗을 전혀 용서할 수 없는 원수로 생각하고 계속 추적했다.
사울은 다윗을 매일 찾아나설 정도로 그의 원한은 그처럼 부단한 것이었다(14절). 사울은 다윗의 목숨을 꼭 빼앗으려고 했다(15절).
그만큼 그의 원한은 지독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은”(갈 4:29)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Ⅲ. 하나님은 능력 있는 보호자로서 다윗을 지켜 주셨다. 하나님은 사울이 원하는 대로(7절), 다윗을 사울의 손에 붙여 주지 않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시면 사울은 다윗을 도저히 해할 수가 없다(요 19:11).
Ⅳ. 요나단은 그의 충실하고 꾸준한 친구로서 다윗을 위로했다.
참된 친구는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다윗이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제안하고, 요나단은 다윗을 만난 사실이 발각될 때 목숨을 버리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안에 따랐던 것으로 보여진다. 참다운 우정은 위험 때문에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극복할 수 있고, 자기를 낮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 준다. 그리하여 친구를 돕기 위해서는 궁전을 떠나 수풀 속으로 갈 수 있다. 요나단을 보는 것만으로도 다윗에게는 생기가 솟아올랐다. 그런데 거기에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런 말로 그의 용기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1. 요나단은 경건한 친구로서 다윗에게 그의 확신의 기초시며, 그의 위로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했다.
요나단은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다.” 다윗은 비록 강한 믿음의 소유자였을지라도 그의 신앙 가운데 부족한 점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그의 친구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그가 부음을 받은 거룩한 기름과,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던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 주신 많은 선하신 경험들을 기억하게 하여 줌으로 그를 도와주었다.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의 마음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함으로 그의 손에 힘이 솟아오르게 해 주었다.
요나단은 그를 힘있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는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2.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친구로서 요나단은 다윗이 그 자신의 생득권이라고 할 수 있었던 영광의 자리, 즉 다음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을 알고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17절). “너는 분명히 살아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며, 나는 네 다음이 되겠지마는 그러나 결코 너와의 경쟁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이 차지할 왕의 자리를 요나단은 결코 노리지 않는다는 자기의 입장을 밝힌 것은 다윗을 크게 만족하게 해 주었고, 그의 가는 길을 보다 뚜렷하게 해 주었다.
요나단은 자기의 아버지 사울도 이 사실을 알고 자주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다윗에게 말해 주었다. 하여간 이 말은 사울이 매우 악한 사람임을 나타내 주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사람을 핍박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사울이 매우 어리석은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틀림없이 실현될 일을 자기 힘으로 막고자 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3. 꾸준한 친구로서 다윗과의 우정의 맹세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했다.
그들은 세 번째로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우정을 언약했다(18절). 참된 사랑은 반석같이 굳은 우정의 확신을 언제나 신실하게 주고받기 위해, 거듭거듭 언약을 갱신하기를 즐겨 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언약도 때로 갱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가 계속될 수 있다.
다윗과 요나단이 여기서 헤어지고나서는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요나단이 다윗에게 다윗의 나라에서, 자기가 다윗 다음이 되리라고 한 약속과 기대는 이 땅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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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황무지로 다윗을 추격한 사울(삼상 23:19-29)
Ⅰ. 십 사람들이 사울을 도와주기 위해 다윗을 배반하고 그의 손에 넘겨 주겠다고 했다(19, 20절).
십 사람들은 자기 지파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윗은 그들을 더욱 믿고 십 황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14, 15절).
그들은 그를 지파의 자랑거리요, 그의 군사들이 자기들의 땅을 약탈하거나 소요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들을 지켜 주는 그런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던 그들이 사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에게 찾아가서, 다윗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알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19절), 다윗을 잡으러 군사들을 이끌고 오라고 청하기도 했고, 다윗을 그의 손에 붙이겠다고 약속까지 했다(20절). 사울이 이를 알아보거나 그들을 위협한 일도 없건마는 그들은 자격지심에서 (“내게 얼마를 주려느냐”고 물었던 유다와는 달리)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다윗의 피에 굶주린 사울을 위해, 다윗을 배반하겠다고 제안했다.
Ⅱ. 사울은 그들의 정보를 고맙게 받아들였으며, 드디어 다윗을 잡을 수 있는 호기가 돌아왔다고 기쁘게 생각했다.
사울은 그들에 대한 자기의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21절),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라고 했다(이처럼 그의 입술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나,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멀리 떠나 있었다). 사울은 스스로를 가련한 인간이며, 동정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자신의 시기와 악한 본성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동정을 받을 만큼 불안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사울은 대부분의 그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지 않은 것에 대한 자기의 불만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건마는, 너희는 나에게 긍휼을 베풀었도다.”
사울은 그들에게 다윗에 관한 정보를 보다 더 확실하게 알아보고, 이를 알려 줌으로 그를 잡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22절).
사울은 “그가 심히 공교히 행동한다는 말을 내가 들었다.”고 말함으로써 다윗은 해를 가하기가 어려우리 만큼 지혜가 있으며, 그의 지혜가 능히 그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울이 그들을 따라서 즉시 다윗을 잡으러 가지 않고, 보다 더 확실하게 하고자 하여 그들의 도움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다윗이 하나님의 섭리로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왜 그렇게 했는지 이상스럽다.
그러나 십 사람들은 다윗이 나올 만한 모든 곳에 정탐꾼을 배치했기 때문에, 다윗이 그곳에 있는 한 사울이 와서 쉽게 다윗을 찾아낼 수 있었다(23절).
Ⅲ. 다윗은 매우 위급한 정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 십 사람들이 그를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윗은 하길라 산으로부터 마온 황무지로 옮겼다(24절).
그리고 시편 54편의 제목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다윗은 이때에 그 시편을 노래했다. 여기서 다윗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임에도 “외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윗을 잔인하게 대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 아래 맡기고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니, 내가 안연히 구하리이다”라고 했다.
다윗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사울은 그를 매우 가까이까지 추적할 수 있었으며(25절), 그들은 산을 하나 사이에 두고(26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이편에 그리고 사울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에서 다윗을 추격할 수 있었다. 이때 다윗은 두려움에 떨었고, 사울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애굽인 사이에서 구름 기둥이 가로막아 주었듯이, 다윗과 사울 사이에는 산이 그들을 가로 막아 주는 가리개가 되었다. 다윗은 산이 그를 가려 주었지만 사울은 이 때문에 혼미함을 받았다.
다윗은 “산새같이 산으로 날아다니며” 하나님의 그늘에서 숨을 곳을 찾았다(시 11:1). 사울은 그의 많은 군사들을 시켜 다윗을 포위하려고 계획했으나 지세가 이를 허락지 않음으로 실패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명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되었다(28절).
새로운 지명이란 “셀라하마느곳”인데, “갈라놓는 바위”란 뜻이다. 왜냐하면 바위 산이 다윗과 사울의 사이를 갈라 놓았기 때문이다.
Ⅳ. 다윗이 이 위험에서 구원을 받았다. 사울이 거의 다윗을 잡으려는 찰나에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의 분수령을 만들어 주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땅을 침노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7절). 침략자들의 침공을 받은 그 땅은 사울의 재산이 있는 땅이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23장의 처음 부분에서 사울은 그일라 땅이 역시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을 받고, 다윗이 그들을 구출하여 주었다는 소식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건만, 이번에는 관심을 나타내고 다윗을 추격하는 일까지 중단한 것으로 보아서 능히 그곳은 그의 개인적인 재산과 관련이 있는 땅이라고 추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여간 사울은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가야 할”(28절) 필요를 느꼈으며, 이로 말미암아 다윗은 거의 파멸 직전에 구출받을 수 있었다.
사울은 그의 노획물을 포기했고, 하나님은 다윗의 놀라운 보호자로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땅을 침공한 것은 전혀 다윗을 도와주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때와 장소에 따라서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섭리가 그 사건으로 하여금 다윗에게 도움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지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돕는 데 있어서 결코 실수나 소홀함이 없으시다.
구약 성서의 이 사울이 이때에 그의 방향을 전환한 것과 같이 신약 성서의 다른 사울도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살기가 등등하던 데서” 돌이켰다(행 9:1).
Ⅴ. 사울의 손에서 피한 다윗은 엔게디 황무지에 있는 자연 요새지를 발견하고 거기 거하였다(29절).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유다 광야에 있으면서 지었다고 하는 시편 63편이 이때에 지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 시편은 다른 어느 시편보다도 경건미가 흐르고 전편에 신앙심이 두텁게 깔려 있다. 왜냐하면 그곳의 모든 장소와 환경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언제나 깊은 교제를 가지게 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호크마===
사무엘상 23장
1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ㅇ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 '그일라'(Keilah)는 헤브론 북서쪽 약 13km, 아둘람 남쪽 약 5km 지점으로서, 가나안 정복 후 여호수아에 의하여 유다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이었다(수 15:44). 이곳은 당시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헤렛 수풀'(forest of Hereth)에서는 북쪽으로 약 9km의 거리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둘람' 지역이 그당시 블레셋의 영토였다는 점에서 볼 때(22:1), 그곳과 인근했던 '그일라'는 블레셋과의 국경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였을 것이다(Keil, Smith, Tobler).
ㅇ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침공한 목적 및 이유를 보여 준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1) 추수된 양곡을 탈취할 목적으로, (2) 전투 상대가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들이라는 이유에 따라 그곳에 침공했을 것이다.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ㅇ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 당시 이러한 문의는 대제사장의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출 28:30)을 통한 질문 방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Keil, Smith). 문장 내용과 순서를 찬찬히 살펴본다면...'아비아달'이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 온 것은(6절; 22:20) 그 이후이기에, 그일라 출전 여부에 대해서는 다윗이 기도로 직접여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어떻든간에, 아비아달이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 온 것은 특히 다윗에게 대단한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ㅇ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 여기의 '이'는 14:6에서 '할례 없는 자들'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된 인칭 대명사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이 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그가 블레셋 족속의 약탈 행위에 의분(義憤)을 느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Klein).
아무튼 다윗은 그때 블레셋을 두려운 존재로 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ㅇ그일라를 구원하라 - 여기서 '구원하라'(야솨)는 말은 이스라엘을 침략자들의 손에서 구출했던 사사들에게 많이 적용되었던 단어였다(삿 2:16; 3:9; 6:15;7:7).
결국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사사가 수행했던 직능을 행하게 하는 등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강력히 부각시키려고 한 것이다(Klein, Keil, Fay). 한편 하나님의 이같은 뜻은, 당신께서 요단 건너 모압 땅에 있던 다윗을 유다 땅으로 불러내신 의도와 완전히 부합된다(22:5).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ㅇ다윗의 사람들 -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모여들은 인물들<22:2> 을 가리킨다.
ㅇ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 다윗 추종자들의 이 말은 그 당시 그들은 사울을 자신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사울의 추격이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치 못한 상황에서 사울보다 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요 굉장한 부담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ㅇ블레셋 사람의 군대 - 여기서 '군대'(마아르코트)는 잘 정렬된 군사의 '대열'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의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훈련이 매우 잘된 강력한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문구이다. 한편 여기의 이같은 '군대'라는 단어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17장에서는 무려 10회나 사용되고 있다.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ㅇ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 이처럼 다윗의 재차 문의는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믿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2절)에 따라 행하기를 두려워하며 주저하는 부하들을 격려하며 확신시키려는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ㅇ네 손에 붙이리라 - 이같은 표현은 여호와의 전쟁 곧 성전(聖戰)과 관련된 문맥에서,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가 신적(神的)으로 보장될 때 종종 사용되었다(14:10;17:47; 수 6:2; 8:7; 10:8; 11:8 등). 따라서 다윗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이같은 응답은 다윗의 부하들을 안심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ㅇ크게 도륙하고 - 이 문구는 다윗이 사울의 휘하에 있으면서 블레셋에 대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때에도 사용되었다<19:8>.
본 저자는 바로 이같은 문구를 여기서도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열심이 결코 식지 않았으며, 또한 왕이 될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군사적 능력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계속 함께 하심에 따라 결코 쇠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ㅇ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 이것은 그일라(Keilah)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것들을 다시 찾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타작 마당에서 건조시키던 중 빼앗겼던 곡식들(1절)도 틀림없이 되찾아 왔을 것이다(Smith).
ㅇ다윗이 이와 같이...구원하니라 - 여기서 '구원하니라'(야솨)란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2절)을 성실히 이행했음을 보여 준다.
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ㅇ시간적으로 볼 때 22장의 후반부(20-23절)에 언급되어야 할 본절이 여기에 놓여진 까닭은 다윗이 그일라에 침범한 블레셋과의 싸움에 앞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ㅇ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 본 문구는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헤렛 수풀'(22:5)에 있던 다윗에게로 도망했을 것으로 언급하는 22:20과는 분명히 모순된다.
이같은 모순의 해결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시된다. 즉 (1) 아비아달은 최초에 다윗이 피신했던 아둘람 굴로 도망갔으나(22:1), 다윗이 모압으로 가는 바람에 그와 헤어져 있다가 다윗이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와 블레셋을 치기 위하여 그일라로 갈 때에 그리로 함께 갔다고 보는 견해(Smith), (2) 아비아달은 다윗이 헤렛 수풀에 있을 때 그에게 도망했고(22:5),
다윗이 그일라로 향할 때 그와 함께 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Klein, Keil, Lange, Hertzberg, LXX) 등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1)의 견해를 취할 경우 다윗이 모압으로 간 것은(22:3, 4) 사울이 제사장을 몰살시킨 직후로 봐야 하는등, 22, 23장의 순서를 극도로 혼란케 한다. 따라서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으로 (2)의 견해를 택함이 타당할 것이다.
ㅇ에봇 - 소매 부분이 없는색.흰색 등 다섯 가지 색상의 실로 만들어진 대제사장의 의복이다(21:9). 출 28:6-14 주석 참조.
7 다윗이 그일라에 온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ㅇ내 손에 붙이셨도다 - 이것은 성전(聖戰)에 임함에 있어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완벽한 승리를 예상할 때 사용되는 술어 '나탄'( 4절; 14:10, 37)과는 다르다. 여기의 '붙이셨도다'(나카르)는 원래 '거부하다', '따돌리다', '소원하게 하다'란 의미이다(Davidson). 결국 이 단어는 여기서 수동형으로 사용되어, 다윗이 지극히 위태한 상황에 떨어졌음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70인역(LXX)은 이 말을 '파셨다'(페프라켄)란 말로 의역하였다.
ㅇ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갇혔도다 - 사울이 다윗을 체포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自信)하게 된 이유를 말해 준다. 한편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은 그일라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임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유다 광야와는 달리, 다윗이 그 성(城)안에 들어가 있는 이상 사울의 추격망을 벗어나기 힘들 것은 당연하였다.
더구나 사울에 의하여 그 성이 장기간 포위 공격될 경우(8절), 그 성의 주민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버릴 것이 뻔한 이치였다(12절).
8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ㅇ사울이...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 이러한 징병 행위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적(모압, 아말렉, 블레셋 등)을 치려고 할 때마다 취했던 행동이다(11:7; 15:4). 따라서 여기서도 사울은 아마 외적을 치려한 것처럼 징병의 명분을 거짓으로 세웠을 것이다(Fay). 결국 사울은 하나님의 군대를 악용하여,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다윗을 대적하는 사악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9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ㅇ다윗이 사울의...계교를 알고 - 사울이 거하던 궁성(宮城) '기브아'로부터 당시 다윗이 임시 머물고 있었던 '그일라'까지는 약 35km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사울의 군대가 그일라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사울의 군대가 그일라로 향한다는 소문이 먼저 다윗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ㅇ에봇을...가져오라 - 이는 대제사장의 '에봇'(출 28:6-14) 안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Urim & Thummim, 출 28:30 주석 참조)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한 명령이다(2, 4절).
10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ㅇ여호와여...주의 종이...들었나이다 -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경건과 의뢰심이 잘 나타나 있다(Klein). 실로 다윗은 모든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경건한 신앙적 기도를 잊지 않았다. 한편, 이처럼 에봇의 '우림과 둠밈'을 통한 문의(問議)는 진솔하고도 경건한 기도와 함께 드려졌던 것 같다(Keil, Fay).
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 오리라
ㅇ그일라 사람들 - 여기서 '사람들'(바알)은 '주인', '지도자'란 의미이다(사 16:8). 따라서 이는 곧 그일라의 장로들을 의미함이 분명하다(16:4).
ㅇ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 여기의 '붙이겠나이까'(하야 세기루니)는 '닫다', '가두다'란 의미를 갖는 '사가르'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붙이겠나이까'는 강제로 감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레 13:4; 시 31:8). 결국 이같은 행동은 다윗으로 인하여 결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계산에 근거하여, 의로운 다윗을 사악한 사울에게 넘겨주기를 서숨치 않았던 그일라 사람들의 이기주의적인 인간성을 잘 보여 준다.
ㅇ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 이같은 하나님의 명칭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의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실 것을 강조.소원하는 의미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 (2:30; 20:12; 25:32; 삼하 7:27; 왕상 1:30, 48). 즉 다윗은 이같은 신(神)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신실한 답변을 주셔서 자신을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ㅇ그가 내려오리라 - 본절에서 다윗은 (1) 그일라 주민들이 자신의 일행을 해롭게 할 지의 여부, (2) 그리고 사울이 그일라로 쳐들어올 지의 여부 등 두 가지 질문을 하나님께 했지만, 이처럼 다윗은 한 가지의 대답만을 듣는다. 이와 같이 다윗이 한가지 대답 밖에 듣지 못한 것은 다윗은 한꺼번에 두 가지의 질문을 하나님께 한 반면, '우림과 둠밈'은 한 사안(事案)에 대하여 '예'(yes)와 '아니오'(no)로 한 가지만 대답하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eil).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질문 중 논리적 우선 순위를 갖는 사울의 침공 여부에 대해서 먼저 답을 주셨다.
12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ㅇ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 11절에서 이미 언급된 이 질문은 하나님께로부터 이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으므로 본절에서 다시 되풀이 되고 있다.
1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ㅇ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 여기의 '육백 명'은 다윗이 아둘람 굴에 피신했을 때 그의 주변에 모여들은 숫자 '사백 명'(22:2)보다 약 '이백 명'이 늘은 숫자였다. 그러나 이 숫자의 병력은 사울의 대군에 비하면 지극히 보잘것 없었다. 한편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육백명'이라는 숫자를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1) 다윗이 그때 이리저리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암시하고 (2) 아울러 그러한 도피 생활 가운데서도 다윗의 세력이 점차 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ㅇ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 14절의 언급을 통해 볼 때, 이것은 특별한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을 뜻한다. 즉 당시 사울에게 쫓기고 있던 다윗이 일정한 노정(路程) 없이 그때 그때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여호와께서 이끄시는대로 일행과 함께 이곳 저곳으로 방랑하는 생활을 하였음을 가리킨다.
14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ㅇ황무지 요새 - 여기서 '황무지'는 유다 광야를 뜻한다(Keil, Fay). 즉 유다 지역 중앙의 산지와 사해 사이에 있는 광야를 가리킨다(수 15:61, 62). 그리고 '요새'는 산과 수풀 등 자연적 지형 지물(地形地物) 등으로 형성된 안전한 은신처를 가리킨다(Smith).
ㅇ십 황무지 산골 - '십'(Ziph)은 오늘날의 '텔 짚'(Tell Zif)과 동일시 되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 성읍이다(수 15:55). 그 위치는 그일라 남동쪽 약 21km, 헤브론 동남쪽 약 8km 지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산악 지대에 있는 산 중의 하나가 19절에서 언급되는 '하길라(Hachilah) 산'이다.
ㅇ사울이 매일 찾되 -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실(15, 25, 26절; 24:2; 26:2)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사울이 평생에 다윗의 대적(對敵)이 되니라'라는 19:29의 기록과 일맥 상통한 다. 실로 다윗에 대한 시기와 증오심을 버릴 수 없었던 사울은 그가 죽을 때까지 하루도 평안과 휴식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ㅇ하나님...붙이지 아니하시니라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경건한 성도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시 31:20; 46:1; 145:20). 즉 그들을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시 17:8). 진정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허락없이 인간은 참새 한마리의 생명 조차도 어찌할 수 없다(마 10:29-31).
15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ㅇ십 황무지 수풀 - 여기서 '수풀'(호레솨)은 '숲' 혹은 '숲으로 덮인 높은 곳'이란 뜻의 '호레쉬(Horesh)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이 '수풀'(호레쉬)은 '십' 남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키르벱 코레이사'와 동일한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 곧 지명(地名)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lein, Smith, Lange).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ㅇ요나단이...다윗에게 이르러 - 요나단의 이같은 행동은, (1) 사울에게 쫓겨 심한 곤경에 빠져있을 다윗을 위로하며, (2) 다윗과 자신간에 맺어진 언약(20:12-16)을 재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ㅇ수풀 - 말할 나위없이 '호레쉬'를 가리킬 것이다(15절).
ㅇ그로 하나님을...의지하게 하였는데 - 요나단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한 위로와 격려의 말은 구체적으로 17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그말의 핵심은 다윗의 왕권(王權)에 대한 인정과 보장(保障)이었다.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ㅇ두려워 말라 - 이 문구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적극적으로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사용된다(수 1:9; 사 41:10). 마찬가지로 오늘날 온갖 세속과 사단의 위협, 그리고 불의한 세력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성도를 향해서 주께서는 동일한 평안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다(마 10:31; 14:27; 17:7; 행 18:9; 27:24).
ㅇ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 결국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사울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다(15:26; 18:15). 그러나 여기 요나단의 이 표현은 위와 같은 부친 사울의 생각이 점차 굳어져서 확신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ㅇ나는 네 다음이 될 것 - 요나단의 이 말은 다윗이 등극한 후 자신에게 제 2인자의 지위를 보장해 달라는 소망이나 부탁이 결코 아니다. 요나단의 이 말은 단순히, 자신에게 부친 사울의 왕권이 승계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 이같이 보아야 할 까닭은, 왕조가 바뀔 경우 전(前) 왕조의 후예들은 추방 내지는 죽임을 당하는 풍습이 보편화 되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20:14), 사울은 자신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갔을 때 자신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의 은총을 입어 제 2인자로서 존립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ㅇ두 사람이...언약하고 - 다윗과 요나단 간에 이미 맺었던 언약(20:12-17)을 새롭게 갱신한 사실을 가리킨다.
ㅇ여호와 앞에서 - 저자는 계약적 측면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 '여호와'를 사용함으로써 다윗과 요나단 간의 언약의 공고성을 부각시키려 한다(20:13, 14, 16). 한편 둘 사이에 맺은 이와 같은 언약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전사한 요나단(31:2)에게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요나단의 후손들에게는 다윗에 의하여 그대로 성취되었다(삼하9:11).
19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ㅇ십 사람들이...사울에게...가로되 - 십 사람들의 이같은 밀고(密告) 행위의 동기는 (1) '놉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1-19)에 겁을 집어먹은 그들이, 사울로부터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누명을 쓰지 않고 오히려 사울로부터 칭찬을 받을 목적과(21절), (2) 다윗이 사울의 손에 결코 붙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14절>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靈的無知) 때문이었다.
ㅇ다윗이 우리와 함께...숨지 아니하였나이까 - 이말은 다만 다윗 일행이 십 사람들의 고장에 머물고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ㅇ광야 남편 - 이는 유다 광야의 남쪽, 즉 사해(死海)의 서쪽 황무지를 가리킨다(Keil). 한편 흠정역(AV)은 여기의 '광야'(예쉬몬)를 유다 광야의 한 부분에 위치한 특정 지역으로 본다(민 21:20; 23:28). 아무튼 이곳은 후일 세례요한이 머물던 곳으로서(마 3:1), 그 동쪽으로는 사해로 내려갈 수 있는 석회암 절벽이 있어 가히 천연적 요새지라 할 만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오늘날에도 각종 피난처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Smith).
ㅇ하길라 산 수풀 요새 - '하길라'(Hachilah)는 '건조한 언덕'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하길라 산'은 '십 황무지 산골'(14절)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하길라 산'은 15절에 언급된 '십 황무지 수풀'의 구체적인 또다른 명칭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산은 약 30km 정도의 높이로 서있는 관계로, 이 산에서 기거하던 다윗의 일행은 이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평지에서 생활하던 십 사람들에 의하여 쉽사리 발견될 수 있었다(Keil & Delitzsch, op. cit. p. 231).
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대로 내려 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ㅇ내려오소서 - 이 말은 당시 사울의 궁성이 있던 기브아는 고지대에 위치한 반면 십황무지는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다.
ㅇ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 - 여기서 '붙일 것'(하스기로)은 '닫다', '가두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사가르'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는 상대방을 강제로 감금함으로써 궁지에 빠뜨리는 것을 가리킨다(레 13:4; 시 31:8). 또한 이 단어는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에 대해서 취하려 했던 행동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다(11절). 본서 저자는 본장 안에서 이 단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성읍 거민의 무지한 밀고와 배반등으로 위기 상황에 계속 봉착되는 안타까움을 암시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21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ㅇ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 사울은 그때 자신이 다윗의 음모와 계교에 의해 왕권을 상실하게 될 동정받을 만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따라서 여기의 '긍휼히 여겼으니'는 십(Ziph) 사람들이 자신의 그러한 불쌍한 처지를 동정했다는 뜻이다.
ㅇ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 그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서 떠나셨고<16:14>, 그리고 사울도 그의 행위로써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십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하고 있다. 성경은 이같은 자를 가리켜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도다'(사 29:13; 마15:8)라고 기록하였다.
22 혹이 내게 말하기를 그가 심히 공교히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 은적하였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ㅇ심히 공교히 행동한다 - 여기의 '공교히 행동한다'(아람)는 '경계를 하다', '경성하다', '간계를 꾀하다'란 의미이다(시 83:3; 잠 15:5; 19:25). 구체적으로 이것은 행동의 민첩성, 그리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준비성 등을 가리킨다
ㅇ더 자세히 살펴서 - 이것은 '라아', 즉 '보다'라는 의미의 동사를 확대 번역한 것이다. 이는 문맥상 상당히 잘 된 번역이다(창 31:42; 레 13:3; 시31:7).
ㅇ그가 어디 은적하였으며 - 문자적으로는 '그의 발이 있는 장소'이다. 즉 다윗의 발자취를 철저히 살펴 추적.확인하라는 말이다.
ㅇ알아보고(야다) - 다윗에 관한 첩보 수준이 아닌 정보를 입수하라는 뜻이다. 즉 이것은 다윗이 십 사람들에 의해 목격된 곳 이외의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실상을 내게 회보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천천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리라
ㅇ탐지하고 - 22절의 '더 자세히 살펴서'와 동일한 단어이다.
ㅇ그가 이 땅에 있으면 - '이 땅에'(바아레츠)는 '그 땅에'로 번역해야 정확하다. 그런데 여기의 '땅'(아레츠)은 (1) '지구'(창 1:1), '세상'(수 23:14), '나라'(삼하 24:8)등 상당히 넓은 범위의 지역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며 (2) 이 단어뒤에 '유다 천천 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리라'라는 말이 있다는 점에서, 십 황무지 지역만이 아닌 유다 땅 전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ㅇ유다 천천 인 중에서...찾아내리라 - 이 말은 다윗이 유다 땅에 있는 한 체포하고 야 말겠다는 사울의 단단한 각오이다. 그런데 여기의 '천천'은 많은 수효의 백성을 상징한다(민 1:16). 즉 유다 지파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찾아내리라' (히파스티)는 '보물을 찾듯이 구석 구석 살피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잠 2:4> '하파스'의 강조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반드시 다윗을 잡고야 말겠다는 사울의 강력한 결의를 엿보게 해준다.
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더니
ㅇ일어나 - 특별한 일을 행하기에 앞서 그 일을 해하는 데에 대한 각오를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
ㅇ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 - 이것은 '광야 남편으로 아라바의 근처에 있는 마온 황무지'로 번역함이 좋다. 그런데 여기의 '광야 남편'은 19절에서 언급된 '광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