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5.1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왕하15
첨부파일 :

왕하15장  [543..어려운 일 당할 때] [366..어두운 내 눈 밝히사] [283 '나 속죄함을 받은 후' ] [484..'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25:1-7] [287.예수앞에나오면] [70. 피난처 있으니]


@요아스 = 예호아쉬 = <예호와..요드-헤이-바브(상)> +<에쉬..알렙-쉰(우)> ..여호와는 강하시다.   

@아마샤.. <아메츠..알렙-멤-체데> + <야흐..요드-헤이>..여호와는 강하시다 

@여로보암.. יָרָבְעָם <:: 요드-레이시, 베이트, 아인-멤..성곽있는 성, 거처, 백성/무리.....왕국과 백성의 중다-번성/번영을!!> @요나..יוֹנָה..<요드-바브(상)-눈-헤이..=여호와의 참생명, 그 실존!!> 

@아사랴..아인-자인-레이시-요드-헤이 = 아자르<아인-자인-레이시> + 야흐<요드-헤이>...여호와께서 도우셨다. @웃시야...아인-자인-요드-헤이 =오즈<아인-자인>+야흐<요드-헤이>...여호와는 나의 힘 @요담 = 요탐= 예호와<요드-헤이> + 탐<타브-멤>..여호와는 완전하시다.


===유다 왕 아사랴..웃시야..16세 등극--52년간 치리..

1.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41년간 치리) 제이십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아사랴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4.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아마샤와 공동통치는 24년-->단독 통치 17년 경과 시점((스가랴 선지자의 영향으로 선정 베풂))...제사장을 무시하고, 그를 대신하여 직접..성소 분향단에 분향하려 하였음] 그가 [그사건 발생후 10년 자난 시점 사망]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을 다스리며 그 땅의 백성을 치리하였더라

6.  아사랴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7.  아사랴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0년간 공동통치-->6년 단독통치]

......[북이스라엘왕들..(예후왕조..4대..102년)예후28년 -->여호아하스17년--->요아스16년-->여로보암2세41년....여로보암2세 사후 44년 지난 즈음 앗수르 살만에셀에게 멸망]..**41년통치, 여로보암2세의 아들, 스가랴(6개월)-->**야베스의 아들, 살룸(1개월)-->**가디의 아들, 므나헴(10년)-->**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2년)-->**르말랴의 아들, 베가(20년) ::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왕 베가<등극17년째 시점부터>는 요담 말년 시점에 이르러서부터 주님의 징계의 도구로서 역할 개시.....요담의 아들, 유다왕 아하스[20세에 등극, 16년 통치] -- 르신에게 엘랏(에세온게벨 근처..아마샤가 수복했었음)을 빼앗김....+ 르신-르밀랴의 애루살렘 공략 공동전선 형성 ::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구원 요청..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예물로 보냄..(이때 앗수르에 의해 아람 멸망-백성들을 이주-흩어버림) --베가는 3년후 [유다의 요담20년째<이때 요담 사망>, 호세아의 반역으로]사망...아하스12년째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 등극(12년 통치) --앗수르 살만에셀에게 조공하다가 9년째에 이르러 중단, 애굽을 의지하는 친애굽정책 채택 =앗수르의 정벌 야기-->북이스라엘 멸망/백성들을 이주-흩어버림..

===이스라엘 왕 스가랴

8.  ○유다의 왕 아사랴의 제삼십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여섯 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9.  그의 조상들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10.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1.  스가랴의 남은 사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2.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사 대 동안 이스라엘 왕위에 있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이스라엘 왕 살룸

13.  ○유다 왕 웃시야 제삼십구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 달 동안 다스리니라

14.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5.  살룸의 남은 사적과 그가 반역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6.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그들이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그 곳을 치고 그 가운데에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이스라엘 왕 므나헴

17.  ○유다 왕 아사랴 제삼십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 년간 다스리며

1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그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20.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강탈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되돌아가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21.  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  므나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이스라엘 왕 브가히야

23.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년에 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간 다스리며

24.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5.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26.  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이스라엘 왕 베가

27.  ○유다의 왕 아사랴 제오십이년에(아사랴 사망-요담 단독통치<6-7년>로 옮겨간 시점..대략 치리기간은 총16-17년으로 보고 있음 )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간 다스리며

2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아직 북이스라엘 멸망까지는 아니고, 숨만 겨우 붙어있는 상태로 만듦]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 요담의 아들 아하스 등극으로부터는 3년째 시점..요담은 3년전에 병사]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1.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유다 왕 요담

32.  ○이스라엘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웃시야의 전반기24년은 아마샤와 공동통치..단독통치는((스가랴 선지자의 영향..수성-방어용 투석기 제작-농업 진흥..부국강병 정책)) 17년(40세-57세--10년후 사망), 17년 지난 시점에!! 나병 걸린 그때부터 요담이 통치권 인수(공동 통치)....웃시야 사망후, 단독통치 6-7년 지난 시점에 요담도 사망..

.....**유다왕들((요아스등극-->히스기야.등극 시점까지.144년))..요아스(40년 통치..반역사건..)-->아마샤(29년..엘랏 회복시도<웃시아때 완전 점령>..반역사망..) -->웃시아(52년..병사)-->요담(공동10년-단독6년..병사)-->아하스(단독 16년)-->히스기야(29년)--히스기야 사후 100년 지난시점에 이르러, 바벨론에 멸망

33.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리니라[41세에 사망..선한 왕의 일찍 죽는것은 일종의 심판 예고!!]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34.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하니라

36.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그의 시대에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 곧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대항하여 동맹을 결성. 이 사실은 아하스 왕 통치 초기에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38.  요담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 다윗 성에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NASB]제15장


1.  In the twenty-seventh year of Jeroboam king of Israel, Azariah son of Amaziah king of Judah became king.

2.  He was sixteen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fifty-two years in Jerusalem; and his mother's name was Jecoliah of Jerusalem.

3.  And he did right in the sight of the LORD, according to all that his father Amaziah had done.

4.  Only the high places were not taken away; the people still sacrificed and burned incense on the high places.

5.  And the LORD struck the king, so that he was a leper to the day of his death. And he lived in a separate house, while Jotham the king's son was over the household, judging the people of the land.

6.  Now the rest of the acts of Azariah and all that he did, are they not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Judah?

7.  And Azariah slept with his fathers, and they buried him with his fathers in the city of David, and Jotham his son became king in his place.

8.  In the thirty-eighth year of Azariah king of Judah, Zechariah the son of Jeroboam became king over Israel in Samaria [for] six months.

9.  And he did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as his fathers had done; he did not depart from the sins of Jeroboam the son of Nebat, which he made Israel sin.

10.  Then Shallum the son of Jabesh conspired against him and struck him before the people and killed him, and reigned in his place.

11.  Now the rest of the acts of Zechariah, behold they are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

12.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which He spoke to Jehu, saying, "Your sons to the fourth generation shall sit on the throne of Israel." And so it was.

13.  Shallum son of Jabesh became king in the thirty-ninth year of Uzziah king of Judah, and he reigned one month in Samaria.

14.  Then Menahem son of Gadi went up from Tirzah and came to Samaria, and struck Shallum son of Jabesh in Samaria, and killed him and became king in his place.

15.  Now the rest of the acts of Shallum and his conspiracy which he made, behold they are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

16.  Then Menahem struck Tiphsah and all who were in it and its borders from Tirzah, because they did not open [to him,] therefore he struck [it;] and he ripped up all its women who were with child.

17.  In the thirty-ninth year of Azariah king of Judah, Menahem son of Gadi became king over Israel [and reigned] ten years in Samaria.

18.  And he did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he did not depart all his days from the sins of Jeroboam the son of Nebat, which he made Israel sin.

19.  Pul, king of Assyria, came against the land, and Menahem gave Pul a thousand talents of silver so that his hand might be with him to strengthen the kingdom under his rule.

20.  Then Menahem exacted the money from Israel, even from all the mighty men of wealth, from each man fifty shekels of silver to pay the king of Assyria. So the king of Assyria returned and did not remain there in the land.

21.  Now the rest of the acts of Menahem and all that he did, are they not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

22.  And Menahem slept with his fathers, and Pekahiah his son became king in his place.

23.  In the fiftieth year of Azariah king of Judah, Pekahiah son of Menahem became king over Israel in Samaria, [and reigned] two years.

24.  And he did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he did not depart from the sins of Jeroboam son of Nebat, which he made Israel sin.

25.  Then Pekah son of Remaliah, his officer, conspired against him and struck him in Samaria, in the castle of the king's house with Argob and Arieh; and with him were fifty men of the Gileadites, and he killed him and became king in his place.

26.  Now the rest of the acts of Pekahiah and all that he did, behold they are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

27.  In the fifty-second year of Azariah king of Judah, Pekah son of Remaliah became king over Israel in Samaria, [and reigned] twenty years.

28.  And he did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he did not depart from the sins of Jeroboam son of Nebat, which he made Israel sin.

29.  In the days of Pekah king of Israel, Tiglath-pileser king of Assyria came and captured Ijon and Abel-beth-maacah and Janoah and Kedesh and Hazor and Gilead and Galilee, all the land of Naphtali; and he carried them captive to Assyria.

30.  And Hoshea the son of Elah made a conspiracy against Pekah the son of Remaliah, and struck him and put him to death and became king in his place, in the twentieth year of Jotham the son of Uzziah.

31.  Now the rest of the acts of Pekah and all that he did, behold, they are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

32.  In the second year of Pekah the son of Remaliah king of Israel, Jotham the son of Uzziah king of Judah became king.

33.  He was twenty-five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sixteen years in Jerusalem; and his mother's name [was] Jerusha the daughter of Zadok.

34.  And he did what was right in the sight of the LORD; he did according to all that his father Uzziah had done.

35.  Only the high places were not taken away; the people still sacrificed and burned incense on the high places. He built the upper gate of the house of the LORD.

36.  Now the rest of the acts of Jotham and all that he did, are they not written in 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Judah?

37.  In those days the LORD began to send Rezin king of Aram and Pekah the son of Remaliah against Judah. 

38.  And Jotham slept with his fathers, and he was buried with his

=======

..열왕기하 15장 (개요)

본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1. 유다 임금 중 두 사람의 이야기가 간략히 기록되었다.

   (1) 아사랴라고도 하는 웃시야에 대해(1-7).

   (2) 웃시야의 아들 요담에 대해(32-38).

2. 동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많은 임금들의 이야기가 제시되었다. 대(代)를 이은 다섯 임금 중에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모두 살해되었으며, 그리고 그 살해자들이 그들의 후계자가 되었다.

   (1) 스가랴는 예후 가계의 마지막 임금이다. 그는 6개월 동안 통치했고, 살룸이 그를 살해하고 위를 계승했다(8-12).

   (2) 살룸은 1개월 동안 통치했고, 므나헴에 의해서 살해되고 계승되었다(13-15).

   (3) 므나헴은 10년 동안 통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통치라기보다는 학정이었다. 그 학정이란 그의 야만적인 잔인한 행위들과(16절), 터무니없는 강제 징수금(20절)이었다. 므나헴은 자기 침상에서 죽었고, 처음으로 그의 왕위를 그의 아들로 계승하게 했고, 아들로 인해서 고통도 받았다(16-22). 브가히야는 2년 동안 통치했다. 그는 베가에 의해서 살해되고, 왕위가 계승되었다(23-26). 베가는 20년 동안 통치했다. 호세아가 베가를 살해하고, 왕위를 계승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열왕 중에 마지막 임금이다(27-31). 이때 왕국은 파멸을 향하여 줄달음질치고 있었다.

---------

아사랴의 통치(왕하 15:1-7)

본문의 이야기는 아사랴 왕의 통치에 대한 간결한 기록이다.

Ⅰ. 이 기록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다른 것들과 같은 형식의 것이다. 아사랴는 어려서 즉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통치했고(2절),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했다(3절. 선한 통치가 오래 계속된 것은 그 왕국으로서는 행복한 일이었다). 그는 산당들을 제거할 만큼의 열심과 용기는 없었다(4절).

Ⅱ. “하나님이 그를 문둥병으로 치셨다”(5절)는 특별한 사실은 역대하 26장 16절 이하에서 그 이유와 함께 보다 자세히 언급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의 통치 전반기의 영광과 후반기의 불명예를 보게 된다. 아마샤가 행했던 바와 같이 그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했다. 아사랴 왕은 아마샤를 좋아했고, 처음에는 잘 해나갔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1. 그것은 그가 문둥병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재난과 인간의 연약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것들은 인간의 본성에 공통된 요소다. 

만일 그들이 극악한 죄를 범한다면, 그들은 가장 고통스런 징계의 채찍 앞에서 아주 처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2. 하나님께서 문둥병으로 그를 치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가 제사장의 성소에 무례하게 침입한 일을 징계하시기 위함이었다. 

위대한 자라도 교만하면, 하나님은 어떻게든지 그를 낮추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보다 높으시다는 것과, 그가 그들을 대적하는 것은 그들이 교만하기 때문임을 알게 하실 것이다.

3. 그가 “죽는 날까지” 문둥병자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그가 회개하고 그 죄사함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타인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 그는 생명이 있는 한 계속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 아래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가 그러했던 것은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유익한 일이었을 것이다.

4. 그가 “별궁(別宮)에 홀로 거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가 비록 왕이라도 따라야 하는 규율이다. 즉 그는 율법에 따르면 의식상 부정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전에 무례히 들어가서 제사장인 체한 일로 인해 이후 자기 궁전에서 쫓겨나 죄수로서 혹은 은둔자로서 감금되어 지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별궁”은 쾌적하고 안락한 곳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어떤 이는 그곳을 “자유로운 집”이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자기 욕구대로 할 자유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명예롭고 활동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사회에서 단절되어 “별궁”에서 항상 거하는 것은 하나의 큰 굴욕이었다.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하위의 사람들과 사귀도록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생활 자체를 하나의 짐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가장 명상적인 사람들조차도 곧 지쳐 버릴 생활이다.

5. 그의 아들이 그의 궁정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왕국에 대한 두 가지 일에 있어서 부왕(副王)이었다는 사실이다. 

“궁전에 대하여”라는 것은 그가 그 “궁전을 다스렸기” 때문이고, “그 왕국에 대하여”라는 것은 그가 “그땅의 거민(居民)을 재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샤라 왕에게는 하나의 위로였다. 그리고 그의 자리를 맡을 아들을 가진 그의 왕국에게는 하나의 축복이었다.

--------

사가랴와 살룸의 통치(왕하 15:8-31)

이스라엘 왕국의 가장 좋은 시대는 통치권이 예후 가계에 있을 동안이었다. 

예후 왕과 다음 3대에 걸쳐, 이스라엘에는 많은 극심한 타락과 비탄이 있었다 할지라도, 왕위는 계승되고, 왕들은 편안히 죽었다. 그리고 공사(公事)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날들도 끝이 나고, 우리가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약 33년의 역사는 그 왕국의 일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도의 혼란 상태를 맞이했다. 

이때에 어린아이 밴 자들에게, 그리고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로다(16절). 그리고 그때 반드시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이땅의 임금들의 많은 범죄”로 인함이다.

Ⅰ. 이러한 불행한 혁명과 거기서 오는 참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자―그 시대는 아마 패역한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공의와 자비로 시험하였고,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주고 또 강조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뉘우침이 없었고 개심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공정하게, 모세가 경고했던 바와 같이, 그들에게 이러한 재앙을 내리셨던 것이다. 

“만일 너희가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레 26:21 이하).

2. 하나님은 예후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셨다. 

그래서 그의 자손은 4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았다. 이것은 그의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왕가(王家)에 나타났던 은총보다 더 큰 은총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이 그렇게 되리라고 이미 말씀하셨었다(10:30). 그래서 이 장(章)에서는 그것이 실현된 것을 보게 된다(12절). 하나님이 그의 약속에 대하여 얼마나 엄격하신가를 보라.

이 재난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이미 이스라엘에게 내리기로 구상하셨던 것이요, 그들은 그들의 재난을 겪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실현되기 전까지는 벌을 받지 않았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아합의 집과 그리고 바알 숭배를 훼파하는 예후의 열심에 보상하셨다. 

그러나 예후의 집의 죄가 가득 찼을 때는 피흘림으로써 그 죄를 보복하셨다. 그 피를 “이스르엘의 피”라고 불렀다(호 1:4).

3. 모든 왕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9절). 

서로 달랐지만 이 점에서는 그들이 일치하였다. 즉 왕들이 우상숭배를 계속했다는 점과 백성들도 그것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졌을지라도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다”(렘 48:11). 

그들의 정권은 자주 바뀌었으나, 결코 보다 나은 정부는 없었으며, 그러면서도 그들 중 아무에게도 송아지 우상을 파괴하는 일에 대한 열의가 그 우상을 보존하려는 열의보다 컸던 자가 없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4. 이 왕들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들의 선왕을 반역하고 살해했다. 

살룸, 므나헴, 베가 그리고 호세아는 모두 반역자들이었고 살해자들이었다. 또한 모든 왕들은 잠깐 동안만 통치했고, 10년, 20년, 그리고 9년을 각각 통치했다. 

하나님은 잠시 동안 사악한 자들의 부귀영화를 묵인하지만, 조만간 피는 피를 부르게 되고, 배신자는 배신을 당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악한 자 하나가 다른 악인에게 채찍 노릇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모든 사악한 사람들이 스스로 멸망의 원인이 되고 만다.

5. 요인들의 야심은 그 국가를 불행하게 만든다. 

여기에 이스라엘 성읍인 딥사를 보자. 딥사는 연안을 끼고 있었는데, 왕위를 노리는 한 찬탈자에 의해서 잔인한 파멸을 당했다(16절).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 찬탈자들은 모두 피를 흘림으로써 왕위에 올랐을 것이고, 이 왕들 중 어느 누구도 혼자서 조용히 죽어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국가의 복리와 안정이 자기들의 복수심과 지배욕에 얼마나 크게 희생되는지를 생각지 않는 그러한 사람보다 나라에 더 큰 재앙은 없으며, 그보다 더 어려운 곤경은 이스라엘에 일찍이 없었다.

6. 그 나라가 국내에서 분열로 산산조각이 날 동안, 앗수르의 왕들이 그 나라를 차례로 쳐서(19, 29절), 자기들 마음대로 행했다. 

내란과 지배권의 쟁탈은 국가를 적에게 손쉬운 먹이로 내어주는 가장 큰 원인이다. 안정된 나라야말로 복될 것이다.

7. 이것은 그들이 완전히 멸망당하고 포로로 보내지기 직전의 이스라엘의 상황이다. 그것은 마지막 찬탈자인의 호세아 통치 제9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런 혼란과 분규의 시대에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겸비했더라면, 또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더라면, 그 최후의 파멸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는 모든 것을 물리치실 것이다. 그들 가운데 보내어진 악령의 열매인 이 분열들은 포로가 되는 운명을 재촉하였다. 스스로 분열하는 왕국은 곧 폐허가 되기 때문이다.

Ⅱ. 그 자세한 왕대(王代)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사가랴는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유다 왕 웃시야 혹은 아사랴 38년에 통치하기 시작했다(8절). 

가장 비판적인 몇몇 연대학자들은,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 사가랴 사이의 22년 혹은 11년 동안은 그 왕국에 있었던 혼란과 불화 때문에 왕위가 공석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가랴가 왕위에 제대로 자리잡기도 전에 폐위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불과 6개월 동안 통치했을 때에, 살룸이 “백성들 앞에서 그를 살해했다.” 아마 시저가 원로원에서 살해되었던 것과 같은 꼴이었을 것이다. 

범죄인으로서 그를 공공연히 처형했고, 백성들의 시인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증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예후의 가계는 끝났다.

2. 그러나 자기의 상전을 살해했던 살룸은 평화를 소유했는가? 전혀 평화를 소유하지 못했고(13절), 한 달 동안이 그의 통치 기간이었고, 그후 그는 제거되었다. 

아마 그때 살았던 선지자는 이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한 달에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호 5:7). 피와 거짓으로 세워진 지배권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그의 범죄를 보고 분노를 느꼈거나 그의 행실을 보고 힘을 얻었을 므나헴은 살룸이 그의 상전을 대하였던 그대로 그를 대하였다. 즉 므나헴은 “그를 살해하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14절). 

아마 그는 군대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디르사에서 야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살룸의 배반과 찬탈의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서 그를 처벌하려 했다. 이것은 마치 오므리와 시므리의 관계와 비슷하다(왕상 16:17).

3. 므나헴은 10년 간 통치했다(17절).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왕상 20:31)는 말을 들을 수 있지만 (그의 나라의 수치거리인) 이 므나헴은 자기에게 항복하기를 다소 주저했던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너무나 잔혹해서, 한 성읍과 그 해안을 파멸시켰을 뿐 아니라, 자기도 여인의 자식임을 망각하고 “아이 밴 모든 여인을 갈랐다”(16절). 

우리는 그토록 야만스럽고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런 마음씨가 인간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응당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이런 잔인한 방법을 써서 그는 스스로를 강화하고, 자기 주변의 모든 자들을 놀라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 앗수르 왕이 그를 대항해 왔기 때문이다.

(1) 그는 자기 백성을 거의 신뢰하지 않았던 고로 앗수르 왕을 대적하여 부닥쳐 볼 생각도 못했다. 결국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평화를 얻지 않을 수 없었다.

(2) 그는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잡게 해 줄 그런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앗수르 왕과의 흥정 계약의 일부로 삼았고(앗수르 왕은 다른 기회에 이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불만을 품은 자기 백성들을 치는 일에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그가 앗수르 왕의 우의(友宜)를 흥정한 돈은 막대한 액수로서, 은 1,000달란트에 달했다(19절). 그리고 므나헴은 군대의 강제 집행을 통해 “모든 유력한 부호들에게서” 이 돈을 토색했다. 그러나 사려 깊게도 가난한 자들은 제외하였다. 그리고 가장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들에게 (적절하게) 부담을 지웠다. 그래서 그것이 조달되자 “앗수르 왕에게 주었다.” 그것은 그의 군대에 대한 급료였고 매 사람마다 은 50세겔씩에 해당된다. 그래서 그는 잠시 동안 앗수르 왕을 피할 수 있었다. 앗수르 왕이 그땅에 머물러 숙영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부하 군대는 별 어려움 없이 너무나 풍부한 노획물을 얻었으므로, 그후 얼마 안 되어 노략물이 떨어지자 다시 쳐들어오는 용기를 얻었고, 그래서 나라의 보호자가 되기로 했던 “그는” 반역자가 되었다.

4.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했지만, 겨우 2년 동안만 왕 노릇하였다. 그러다가 베가의 반역으로 살해되었다. 그것은 브가히야 자신과 그의 아버지의 악행의 죄과였다. 그에 관해서는 전과 같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24절)는 말씀이 반복되어 있다. 이런 말씀이 계속 언급되는 것은 그들이 돌이키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머지 않아 멸망이 오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24절). 아마 베가는 몇몇 뛰어난 인물들을 관심에 두었던 것 같다. 그들 중의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그들의 도움으로 베가는 그의 계획을 완성했다.

5. 베가는 반역으로 왕국을 얻었지만, 20년 동안 왕권을 유지했다. 그의 폭력 행위가 자신의 머리에 되돌아오기까지는 매우 긴 기간이 있었지만, 결국 그 시간은 돌아왔다.

(1) 르말랴의 아들인 베가는 국외적으로 다른 어느 찬탈자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비록 말년에 가서도(즉 그의 통치 제17년에 시작된 아하스의 시대에도) 유다 왕국에 큰 위협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사 7:1 이하).

(2) 그는 자기 나라의 상당한 부분을 앗수르 왕에게 잃었다. 

그가 잃어버린 여러 성읍들의 이름이 나온다(29절). 요단 저편의 길르앗의 모든 땅과 그리고 납달리와 스불론 족속들이 사는 북부 갈릴리이다. 그리고 그런 성읍들의 주민들은 앗수르로 사로잡혀 갔다.

이 심판으로써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베가의 시도를 벌하신 것이다. 그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공략할 시도를 벌인 뒤 2-3년 이내에, 곧 당시에 태어난 아기가 “아빠,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사마리아의 재물은 “앗수르 왕에게로 옮긴 바 될 것이니라”고 미리 예언되어 있었는데(사 8:4), 여기서는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게 된다.

(3) 이후에 곧 그는 동족의 울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아마도 베가가 유다를 치는 동안 자기들을 외적의 침략에 내어버려 두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증오했을 것이다. 

호세아가 그 틈을 타서 왕위를 빼앗고 그의 생명을 취했다. 즉 “그를 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당시의 반역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운에 맡기고 모험을 하는, 아마 왕관을 사랑하는 자였음에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왕관은 이제 가장 정수인 꽃들과 보석들을 상실했고, 전보다 더욱 가시덩굴 속에 던져졌고, 근년에는 그것을 쓰는 자의 모든 머리에 치명적 운명을 가져왔고, 마침내는 흙 속에 버려지게끔 되었다. 현자라면 길거리에 있는 왕관 따위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것을 얻으려고 모험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값비싼 대가를 지불토록 했다.

------

요담의 통치(왕하 15:32-38)

유다 왕 요담의 통치에 대한 간략한 기사다. 여기서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그는 매우 잘 다스렸다. 즉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34절)는 사실이다. 조세푸스(Josephus)는 그가 매우 높은 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즉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똑같이 사람에게도 그랬고,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맡겼다고 했다. 즉 그는 잘못된 것이 무엇이든 고치려고 애썼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훌륭한 일꾼이 되기에 충분한 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비록 산당을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의 관심을 산당에서 돌려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해 그는 성전에다 깊은 존경심을 표했고, 성전으로 드나드는 문을 더 높게 세웠다. 치리자들은 자기들이 악덕과 불경건을 막는 일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만큼 덕성과 경건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 보다 많은 일을 하여 덕성과 경건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치리자들은 자기들이 직접 죄악 된 산당들을 허물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집의 문을 높이 세우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해야 한다.

Ⅱ. 그는 한창 때에 죽었다(33절). 유다 왕들 중의 대부분의 왕들에 관하여는 그들이 몇 살 때 통치하기 시작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 몇 살 때에 죽었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스라엘 왕들 중 아무도 그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통치”한 연한이 기록되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다른 가계의 왕들보다 뛰어났던 다윗의 집안의 왕들에게는 그런 영예를 주시고자 하셨다. 그리고 이 기록에 의하면, 사람의 보통 나이인 70세, 곧 다윗의 나이에 이른 왕은 유다 왕들 중에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아사 왕의 나이는 찾아볼 수 없다. 웃시야는 68세까지 살았고, 므낫세는 67세, 여호사밧은 60세까지 살았다. 이들이 가장 나이 많았던 세 왕이다. 연한이 기록된 왕들 중 많은 사람들이 50세에도 이르지 못했다. 여기에 나오는 요담도 41세에 죽었다. 그는 너무나 큰 축복을 받았으므로 그렇게 무익한 자가 되기까지 오래 살 수는 없었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심판이었다. 특히 그의 아들과 후계자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그렇다.

Ⅲ. 그의 시대에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곧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대항하여 동맹을 결성했다. 이 사실은 아하스 왕 통치 초기에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그래서 그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과 같이 흔들렸다”(사 7:2)고 했다. 동맹국들의 의도는 부정했다. 

그러나 여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다”고 했다(37절). 마치 여호와께서 시므이에게 다윗을 저주케 하고, 소바 사람들을 시켜 욥의 재산을 약탈케 하셨던 것과 같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손이다―곧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칼이요 채찍이다. 인간들의 의도야 어떠하든, 하나님은 당신의 원대로 당신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그 손을 사용하신다. 

이 폭풍우는 경건한 요담의 통치 때에 일어났지만, 그는 편안히 죽음에까지 이르렀고, 타락한 그의 아들에게 가서야 들이닥쳤다.

--------

===호크마===

열왕기하 15장

1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이십 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ㅇ여로보암 이십 칠 년에. - 연대기 문제에 있어서 본절은 14:23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여로보암이 아마샤 15년에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14:23) 아사랴는 그의 아버지 아마샤가 29년간 통치한 후인 여로보암 14년이나 15년에 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본절에는 27년으로 나와 있으니 무려 12-13년 정도나 차이가 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본절의 '27년'을 '15년'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본절 뿐만 아니라 8, 13, 23, 27절도 함께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awilnson, Keil& Delitzsch). 그러나 이렇게 고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장 강해, '왕하 13-15장의 연대기'를 참조 하라. 한편 이 14장 강해에 의하면 '여로보암 27년'이란 표현은 그의 아버지 요아스(B.C.798-782)와 함께 통치하기 시작한 때부터 산출한 기간임을 알 수 있다.

ㅇ아사랴가 왕이되니. - 아사랴는 웃시야(B.C.791-739)라고도 불려 지는데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14:22 주석을 참조하라.

2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륙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이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ㅇ오십 이 년을 치리하니라. - 아사랴는 B.C.791-767까지 약 24년간 그의 부친 아마샤와 섭정을 했다(Thiele, Mysterious Numbers). 그러므로 그가 정식으로 등극한 해는 아마샤가 죽은 해인 B.C.767년이며 그가 단독으로 통치한 기간은 약 28년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16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가 처음 섭정하기 시작한 때의 나이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도 그가 16세에 등극하여 52년간 다스린 후 68세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 역시 그가 16세에 섭정을 시작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사랴가 24년간이란 장기간 동안 부친 아마샤와 함께 섭정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찾기 힘들다. 단지 학자들은 아마샤가 북이스라엘의 요아스(B.C.798-782)와 싸울 때에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웠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부친 아마샤의 실정(失政)에 대한 반감 때문에 섭정했으리라 추정된다(14:1-20).

ㅇ여골리야라. - 대하26:3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왕의 부친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모친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능하시다', 혹은 '여호와께서 정복하신다'로 주의 전능하심과 공의로움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Josephus)는 그녀를 '아기알라'로 칭하고 있다.

3 아사랴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ㅇ아사랴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그의 부친 아마샤에 대한 평가(14:3)와 유사하다. 그런데 본서에서 유다 왕들의 치적을 평할 떼 그 기준은 항상 다윗 왕이었다. 그러나 다윗에 비길만한 칭찬을 들은 왕은 히스기야와(18:3) 요시야(22:2) 뿐이다. 한편 역대기 기자는 아사랴, 즉 웃시야가 스가랴 선지자가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께 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대하26:5). 이는 그가 우상 숭배 때문에 여호와의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교만에 의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임을 반영한 것이다(5절; Bahr).

4 오직 산당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ㅇ산당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 유다 열왕들의 치적을 평가함에 있어서 여호와

신앙에 대한 배교적인 행위를 일삼던 장소인 산당을 제하지 않는 것은 왕의 선악 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왕상15:14; 22:43; 왕하12:3; 15:35). 한편 산당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6:1-9 강해, '산당 예배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 일을 다스리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

ㅇ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3절)라는 표현 뒤에 본절과 같은 말이 나옴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역대기의 저자는 왜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즉 대하 26장을 보면 아사랴(웃시야)가 이방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해 많은 영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대하26:2-7) 그의 권세가 널리 알려져 그는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부왕 아마샤와 같이 자신의 능력과 힘에 돌리는 교만을 나타냈던 것이다(대하26:16). 그중에서도 특히 그는 제사장의 직무를 침범하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대하26:16-18).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교만은 영적 타락을 가져와(호7:9,10) 하나님을 부인하고(시10:4) 자기 도취에 빠지게 되어(렘43:2) 결국은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잠16:18).

ㅇ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 아사랴가 문둥병에 걸린 것은 그의 통치 말년이기 때문에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아사랴가 문둥병자가 된 후 별궁에 거하고 있는 동안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의 일을 돌보았는데 이 때 요담은 적어도 15세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담은 왕위에 오른 때의 나이가 25세이므로(33절) 아사랴(B.C.791-739)가 문둥병에 걸렸던 기간은 10년 이하일 것이다.

ㅇ별궁에 거하고. - 이방에서는 나아만의 경우처럼 문둥병에 걸렸어도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5:4).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에서의 문둥병자는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레13:46; 민5:2,3; 12:10,14,15). 그런데 아사랴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풍습 뿐만 아니라 그 병의 정도가 아주 심하여 그가 왕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격리 수용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편 '별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트 하하프쉬트'에 관하여 학자들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한다(W.Rudolph, Zeitschrift fiur die alttestamentliche Wissenschaft, p.418). 이에 대한 몇가지 해석을 살펴보면, (1)어떤 신분상의 '욕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과, (2)'장소적으로 어떤 격리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을 달리하게 된 이유는 히브리어 '하프쉬트'의 해석 때문이다. 즉 이 단어는 (1)'신분적 예속이나 책무 등으로부터의 자유'(출21:2,5,26,27; 신15:12,13,18; 삼상17:25)라는 뜻과, (2)'공간적인 분리'(KJV, RSV, NIV)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아로니(Aharoni, Biblical Archaeologist, p.116-117)는 아사랴 왕이 예루살렘에서 약 5km정도 떨어진 라맛 라헬(Ramat Rachel)에 있는 굴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를 긍정적으로 볼 때 '별궁'의 의미는 (1)과 (2) 둘 다 동시에 수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둥병자들은 성 밖에 따로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레13:46). 그리고 왕이 격리된 상황 내면에는 왕에 대한 '욕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왕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성 밖으로 추방되지 않고 그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마련되었을 것이다(Bahr). 한편 아사랴의 이런 저주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죄 가운데서 고독하게 사는 인생들에게도 적용된다. 왕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지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 가운데서 살았던 아사랴와 같은 인생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육체적으로 안락하다 할지라도 그의 영혼은 이미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롬2:9). 왜냐하면 죄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키기 때문이다(눅16:19-31).

ㅇ요담이 궁중 일을 다스리며. - 섭정 왕 요담은 명목상으로 왕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국사(國事) 전반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리고 요담은 이때 섭정을 시작해서 웃시야(아사랴)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왕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6 아사랴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ㅇ모든 행한 일. - 앗수르 왕 다글랏 빌레셀의 원정 기사에 보면 그의 통치 3년(B.C.743년, 혹은 742년)에 앗수르 군주가 '야우다아사랴우(Azaryau of Iauda)'로부터 공물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Luckenbill).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 나타난 이 인물을 아사랴 왕과 동일인으로 생각한다(Montgomery), 그러나 성경에서는 유다 왕이 그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에 앗수르의 속국으로서의 예를 행했다는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아사랴가 원정을 갔던 곳은 앗수르와 접한 북쪽을 제외한 유다의 남서방향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대하26:6-15). 더욱이 오늘날 아사랴우가 북쪽 아랍에 있는 야유다(Iauda)의 아사랴유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공물을 바친 인물이 아사랴가 아님을 더욱 확증해 준다(Herrmann, History, p.246).

7 아사랴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 이사야서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를 선지자 이사야가 부름 받은 해와 일치시켜 기록하고 있다(사6:1). 한편 역대기 기자는 본절의 언급보다도 훨씬 더 구체적으로 웃시야가 '열왕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 열조의 곁'에 장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대하26:23) 그가 문둥병에 걸린 채로 죽었음을 나타내 준다. 즉 그는 문둥병자였기 때문에 열조들의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열조들의 무덤곁에 묻힌 것이다. 또한 요세푸스(Josephus)도 아사랴가 단순히 자신의 땅에 홀로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역대서의 기록과 본절의 기록은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 2성전에 있는 아람어 비문을 보면 아사랴(웃시야) 왕의 뼈들을 후에 왕의 묘실로 이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두 기록의 모순점을 해결해 준다(Y.Yadin, Jerusalem Revealed).

ㅇ요담이...왕이 되니라. - 여기서 사용된 동사 '이믈로크'는 5절에서 '다스리며...치리하였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페트'와는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이는 히브리어 '마라크'에서 온 말인데 그 의미는 '다스리다', '보좌에 오르다', '참으로 왕이 되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5절에서는 요담의 섭정을 지칭하는 것임에 반해 본절에서는 그가 실제적인 왕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본서의 연대기 문제를 해결할 때는 이러한 동사의 사용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195).

8 유다 왕 아사랴의 삼십 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여섯달을 치리하며

ㅇ이사랴의 삼십 팔 년에. - 여기서 말하는 '아사랴의 38년'이란 그의 부친, 즉 아마샤(B.C.796-667)와 함께 섭정한 24년을 합하여 계산한 것이다. 이러한 연대기 문제에 대해서는 14:23-29 강해, '왕하13-15장의 연대기'를 참조하라.

ㅇ스가랴가...왕이 되어. - 여기에 나오는 북왕국의 왕 스가랴(B.C.753-752와 대하 26:5에 나오는 스가랴 선지자는 동명 이인(同名異人)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스가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경건한 뜻을 가지고 있으나 6개월 동안의 그의 치적을 살펴보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9절).

9 그 열조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ㅇ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 북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은 백성의 종교심을 묶어 놓기 위해 우상 정책을 쓴 장본인이다(왕상12:25-33).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재위 22년에 죽고 그 아들 나답도 재위 2년 만에 죽고 만다(왕상14:13-20; 15:25-28). 특히 그가 만든 금송아지 우상은 매우 가증스러운 것이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왕상12:28-33). 그래서 그후부터 그는 금송아지 우상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편 스가랴도 단(Dan)과 벧엘(Bethel)에서 송아지 숭배를 했기때문에(Wycliffe, Keil & Delitzsch)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10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저를 모반하여 백성앞에서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야베스의 아들 살룸. - 여기서 아베스는 인명이 아니라 지명(地名)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살룸이 요단 동편의 야베스-길르앗 출신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Hobbs).  그리고 이쉬다(Ishida)의 논문(Royal Dynasties, p.173-176)을 보면 그 당시 요단 동편 지역(Transjordan)과 서편 지역(Thiele). 따라서 살룸이 스가랴를 모반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에 의하면 살룸이 스가랴의 친구였으나 왕위 계승 문제로 스가랴를 죽였다고 한다(Rawilnson, Bahr). 그리고 본절에 언급된 지명 야베스는 오늘날의 '야습'(Yasuf)에 해당되는 곳이다(Gray).

ㅇ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 본절의 '백성 앞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발 암'의 해석에 대하여 학자들에 따라 그 견해가 아주 다양하다. (1)대다수의 중세 맛소라 사본에는 그냥 한 단어로 '카발암'으로 쓰여 있으며 70인역 바티칸 사본(Septuagint; G MS, Codex Vaticanus)에도 '케블라암'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2)맛소라 사본(Masoretic Text)과 다른 헬라어 역본에는 '백성들 앞에서'(카테난티 투 라우)로 기록하고 있으며 KJV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3)루시니안 헬라어 역본(Septuagint; Lucianic recension)에는 '엔 이블라암'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것을 옳게 보고 있다(T.R. Hobb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3, p.195-196). 그리고 학자들이 그렇게 보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히브리어 '카발암'이라는 명사에 대해서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2)이것이 '백성들 앞에서'라는 뜻의 '카발 암'이라면 '백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암'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거나 아니면 이 단어가 부사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부사로 볼 때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는다. (3)따라서 '카발암'은 9:27에 나오는 '이블르암'에 대한 오기(誤記)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블르암'은 유다 왕 아하시야가 예후의 칼을 피해 도망하다가 시해된 곳이다(9:27).  그래서 스가랴는 아하시야가 죽은 그곳에서 처형당했다고 본다. 한편 본절의 표현을 (2)의 경우와 같이 보는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사형시켰다는 말이다(Keil & Delitzsch, Vol. III, p.389; Wycliffe). 그런데 스가랴를 공개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이 동요하거나 복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죄악성과(Wycliffe) 스가랴의 행악을 잘 나타내 준다.

11 스가랴의 남은 사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12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이스라엘 위를 이어 사대까지  이르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 니라

ㅇ본절은 10:28-31에 기록된 예언에 대한 성취 부분이다. 이와같이 예언의 성취를 언급함으로써 본서 기자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키고 있다.

ㅇ네 자손이 이스라엘 위를 이어 사 대까지 이르리라. - 북쪽 이스라엘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종교 개혁을 시도했던 왕은 예후다(10:15-27). 그러나 그도 다른 이스라엘 열왕과 같이 여로보암이 범한 금송아지 숭배의 길에서는 떠나지 않았다(10:29).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후 왕가가 지속되지 못하고 예후 이후 4대째만에 끝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10:30).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적인 예언은 스가랴가 즉위한지 6개월만에 성취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는 한 가지 특징적인 사실은 예후가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신실하게 행하였으므로, 4대(代) 8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후 한 사람의 적은 선행을 기억하시고(갈6:7-10; 히10:24)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셨다.

13 유다 왕 웃시야 삼십 구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 달을 치리하니라

ㅇ살룸이...한 달을 치리하니라. - 이와 같이 살룸이 한 달 밖에 왕위에 있지 못한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정국이 얼마나 불안정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 즉,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할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통해 인간의 부질없는 권력욕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백성들의 의사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서까지 인간이 말들어낸 이러한 자리는 아침이면 사라질 안개와도 같은 권력인 것이다(약4:14).

14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가디의 아들 므나헴. - '므나헴'이란 이름은 '슬퍼하다', '후회하다', '위로받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나함'의 피엘형(Piel:강조형 능동) 분사 형태로서 '위로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장군', 혹은 '총사령관'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자인 듯하다(Josephus, Keil & Delitzsch), 그런데 그가 살룸에 대한 반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1)이스라엘 왕국은 '군사 군주제'(military monarchy)이다. (2)살룸 또한 왕위 찬탈자이다. (3)예후 왕가가 멸망했기 때문에 왕위는 군대 장관에게로 돌아가야 한다(Wycliffe, p.354). 한편 '가디의 아들'이란 가디가 그의 출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아버지의 이름이 '가디'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가디'라는 이름은 '가디야후'(Gaddiyahu)의 단축형으로서 주로 사마리아 지역에서 발견되던 인명(人名)이다(Gibson).

ㅇ살룸을 거기서 죽이고. - 요세푸스(Josephus)가 전하는 유대 전승에 의하면 므나헴은 스가랴의 군대를 이끌고 살룸에게 보복했다고 한다(Hobbs). 한편 이것은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그가 므낫세 지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지파 간의 전쟁이 치열했다는 논증의 좋은 증거가 된다.

15 살룸의 남은 사적과 그 모반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ㅇ본절에서 살룸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비록 그의 통치가 짧은 기간 동안이기는 하지만 그의 통치는 합법적이었던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가 공식적으로 역대 왕들의 사적을 기록한 역대 지략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16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저희가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치고 그 가운데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ㅇ딥사. - 왕상4:24에 따르면 '딥사'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는 한 성읍이다(Keil &Delitzsch, Rawilnson).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은 므나헴이 그곳까지 정복의 손길을 뻗쳤다고는 보지 않는다(Bahr). 그래서 본절에 언급된 '딥사'는 유프라테스 강변의 딥사(Thapsacus)가 아니라 '디르사 근처에 있는 딥사'라고 주장한다(Septuagint; Lucianic recension)에도 '딥사'가 '타푸아'(Tappuah)로 수정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견해를 옳다고 본다(Hobbs). 그리고 수16:8에 보면 '타푸아'(답부아)는 북쪽 에브라임 지경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디르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여로보암 2세가 정복하여 되찾은 북방 경계선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14:25,28) 그 지역을 이스라엘 땅으로 수호하기 위하여 므나헴이 원정을 한것으로 보인다(Ishida). 그러나 '성문을 열지 않았다'는 본절의 표현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므나헴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음을 보여 준다(Bahr).

ㅇ아이 벤 부녀를 갈랐더라. - 이와 같은 잔인한 행위는 고대 근동의 전쟁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의 승리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한 것 같다. 한편 '갈랐더라'는 말은 히브리어 '빅케아'인데 이는 '갈기갈기 찢다'란 뜻의 '바카'에서 온 말이다. 즉 이것은 임신한 여인의 몸을 칼로 난도하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나타낸 표현으로 그들의 잔인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런 잔인한 풍습에 관해서는 8:12과 사13:18; 호13:16; 암1:13을 참조하라.

17 유다 왕 아사랴 삼십 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년을 치리하며

ㅇ아사랴 삼십 구 년에. - 이 부분의 연대기 문제에 대해서는 본장 강해를 참조하라.

1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ㅇ므나헴(B.C.752-742)의 행적에 대한 본절과 같은 주석은 아주 전형적인 것이다. 즉 이러한 방식의 기술과 표현은 북이스라엘의 말기에 와서 규칙적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ㅇ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 9절에 나타난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았음을 나타낸다. 특히 우상 숭배 중에서도 금송아지 숭배에 의한 죄악을 범했을 경우에 이렇게 표현했다(왕상12:28-30). 그리고 이러한 말은 북왕국의 초대왕 여로보암으로부터 멸망의 전조가 나타나는 말기까지 대부분의 열왕들이 악한 왕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ㅇ평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콜야마이우'인데 그 뜻은 '그의 모든 날들 중에'란 의미이다. 그런데 BHS(Bibkis hebraica stuttgartensia)의 본문 비평에는 이것을 '베야마이우'로 수정하여 18절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단어를 19절의 초두에 위치시키고 있다. BHS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19절에 접속사가 없기 때문에 문장 구성상 매우 어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19절은 '그의 때에 앗수르 왕 불이...'로 되어 자연스럽게 된다. 그러나 맛소라 본문의 이 단어는 특정한 사람의 생애를 가리키는 관용적인 용어이므로 그러한 수정을 억지라고 볼 수 있다(Hobbs).

19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와 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ㅇ앗수르 왕 불이 와서...치려하매. - 앗수르 왕 '불'(Pul)의 정체에 대해서는 바벨론 열왕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를 보면 '불'왕은 바로 디글랏 빌레셀(Tiglath-Pileser,III세; B.C.745-727)과 동일 인물로서 그는 바벧론을 2년간 지배했었다. 그런데 그때 그에게 바벧론식으로 붙여진 이름이 '불'인 것이다. 또 디글랏 빌레셀의 비문을 보면 앗수르가 사마리아의 므나헴으로부터 공물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더욱 뒷받침해 준다(Luckenbill). 그리고 북이스라엘 왕 므나헴이 앗수르에 공물을 바친 때는 B.C.743년 쯤으로 디글랏 빌레셀 제 3년에 해당하는 것 같다(Thiele). 한편 앗수르의 불 왕이 사마리아에 온 것이 침략인지 아니면 므낫세의 초청에 의한 것인지에 대하여 견해가 다양하다. 그런데 이렇게 견해를 달리하게 된 것은 '와서...치려하매'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의 해석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1)침략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쓰일 수 없다고 보는 반면에(Hobbs), (2)다른 사람들은 이 단어가 침략을 표현하는 경우로 쓰인 예가 있다고 보아(창34:25) 이를 침략을 나타내는 행위로 본다(Bahr). 그러나 본서 기자는 침략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주로 '알라'를 썼으며(6:25; 12:17; 17:3,5), 본절에 나타난 것과 같은 '바'를 쓰지는 않았다. 따라서 불 왕이 온 것을 '침략'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방문이 므나헴의 초청에 의한 것인지(Thenius) 므나헴을 정당한 왕으로 인정해 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한 것인지(Ewald)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한편 성경에서는 본절에서 최초로 앗수르 제국에 대한 언급을 함으로 인해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팽창하는 과정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Wycliffe). 그리고 본절에 나타난 앗수르 왕 불 왕위를 찬탈하여 제국을 새롭게 부흥시킨 자였다. B.C.743년이거나 B.C.738년에 일으킨 디글랏 빌레셀의 전쟁은 북이스라엘에게까지 파급되어 므나헴에게서 공세를 내게 했다. 앗시리아 왕에게 공세를 바침으로써 므나헴은 앗시리아 통치자의 신복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디글랏 빌레셀이 바벨론 왕이 되었을 때 므나헴은 '불루'라는 이름을 얻었다(바벨론 왕 명부에도 그렇게 기록되었음).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므나헴'보다도 그의 바벨론식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ㅇ은 일천 달란트. - 드라크마(Drachma)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눅15:8)이라고 할 때 은 한 달란트(Talent)는 약 6,000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돈이다(출38:27; 마18:24). 그렇기 때문에 은 일천 달란트라고 하면 6백만 드라크마이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약 2만원으로 계산할 때 이는 약 1,200억원에 해당된다. 이처럼 많은 돈을 주고 므나헴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시켰던 것이다.

ㅇ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하여. - 므나헴이 앗수르 왕에게 많은 공물을 바친 것은 요단 동편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해 주도록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성공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25절). 한편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게 조공을 주어 자신의 불안정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그의 행위는 성전의 은과 금으로 전쟁에서 벗어나려했던 남유다의 아사(왕사15:18), 아하스(16:8), 히스기야(18:15)에 버금가는 악행이었다.

20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ㅇ토색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요체'는 '나가다'라는 뜻의 동사 '야차'의 히필형(Hiphil:사역형 능동)이다. 그래서 '세금을 징수하다'라는 뜻의 동사 '에리크'와(23:35)는 다르다. 그리고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나오게 하다'라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므나헴이 어마 어마한 돈을 세금으로 징수한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동원하여 부자들에게서 돈을 빼앗은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자기 동족 중 딥사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를 정도로 잔인했던 므나헴은(16절) 바닥난 재정을 메우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부자들에게 토색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매우 심각했음을 의미한다. 사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악한 통치자와 관원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지만 선한 통치자와 관원은 자기 것을 희생해서라도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한편 므나헴은 당시 정치와 경제의 지주였던 부자들에게서 토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바, 공의를 행하기 보다는 자신의 배만 채우고자하는 불한당같은 지도자에 불과했다. 어느 나라든지 지도자들이 이런 상태에 빠져 있으면 결코 부흥될 수 없다. 성도들은 이 같은 지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입각하여 통치를 하도록 권면하여야 한다.

ㅇ은 오십 세겔. - 은 한 세겔(Shekel)은 일반 노동자 4일의 품삯에 해당된다(출30:24; 삼하24:24). 그렇기 때문에 은 오십 세겔은 200일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품삯이다. 만약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2만원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400만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그런데 은 오십 세겔로 은 일천 달란트를 만들려면 3만명 정도의 사람에게 강제로 거출해야 했을 것이다.

21 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2 므나헴이 그 열조와 함께 자고 그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3 유다 왕 아사랴 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치리하며

ㅇ브가히야. - '브가히야'라는 이름은 '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파카흐'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여호와께서(눈을) 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B.C.742-740) 역시 2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북왕국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편 그의 2년 동안의 통치는 아사랴(B.C.791-739)의 마지막 2년과 부합된다(Thiele, Mysterious Numbers, p.73-74)는 혹자의 주장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25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명으로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ㅇ그 장관.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리쇼'는 '그의 장관'이란 뜻으로 23절의 브가히야와 연결되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브가히야의 장관'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한편 요세푸스(Josephus)는 이 사람을 '천부장'이라고 하고 혹자는 이 사람을 '전속 부관'이라고 한다(Keil & Delitzsch).

ㅇ베가. - 이 이름도 '브가히야'와 같은 어근인 '파카흐'에서 파생하였다.   그런데 하조르(Hazor)에서 발견된 그의 비문에는 그의 이름이 '페가 삼다르'로 기록되어 있다(Y. Yadin). 한편 본절에서 '르마랴의 아들 베가'라고 표현한 것으 베가 보다도 그의 아버지 르말랴가 당시에는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사7:4; 8:6)인 듯하다(Rawilnson). 그리고 호위대의 대장이었던 베가가 왕을 반역하였다는 것은 그 군대의 기강이나 충성심이 얼마나 해이(解弛)해졌는지를 잘 나타내 준다(Wycliffe).

ㅇ왕궁 호위소에서. - 이것은 왕궁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요새' 또는 '높은 망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반대로 이곳에서 왕궁을 공격하기는 매우 용이했을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브가히야 왕은 베가에 의해 살해되기 전에 이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ㅇ아르곱과 아리에를. - 여기서 대부분의 역본들은 이 구절을 생략하거나 29절에 삽입시킨다. 왜냐하면 아르곱은 신3:4,13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요단 동편 상부에 위치한 지역의 지명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이것이 불확실하게 나타나 있어서 아르곱과 아리에가 인명(人名)인지 지명(地名)인지 의문을 남겨준다. 만약 두 이름이 인명(人名)이라면, 이들은 베가와 함께 공모한 사람들이었는지 또는 브가히야와 함께 살해된 사람들이었는지 결론지을 수 없다. 1886년 쉬타데(Stade)는 맛소라 사본의 아르곱과 아리에라는 어구가 25절과 가까운 29절에 대한 주석이었다고 시사한 바 있다. 이는 '길르앗'이 두 절에 나오기 때문에 필사자가 실수하여 이 두 지명의 주석을 29절 대신에 25절에 포함시킨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아르곱은 '60개의 성읍'을 포함하는 옥의 나라 바산에 있었던 지방이지만(신3:4,113,14;왕상4:13), 길르앗(왕상4:13; 민32:40; 삿10:4; 대상2:22)에 속해 있는 '야일의 고을들'(하봇)과는 구별된다. 아르곱의 위치는 신3:4,13,14에 의해 정해져 있는데 그 서쪽 변경에는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의 영토(즉, 오늘날의 골란 고원)가 있다. 한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를 인명(人名)으로 간주하고 이 사람들을 왕의 친구들로 추측한다(Rawilnson).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일부 학자들도 이를 인명으로 보고 이 사람들을 '고관'으로 생각한다(Bahr, Keil & Delitzsch, Vol.III, p.393).

ㅇ길르앗 사람 오십 명으로 더불어 죽이고. - 길르앗 사람들은 건장했기 때문에(대상26:31; 수17:1) 왕의 호위를 맡아서 담당했다. 특히 그들은 베가의 명령을 받는 전속부관, 즉 장관의 명령을 받는 직속 부하였다. 한편 혹자는 본절의 표현을 부정하고, 대신 길르앗 50명이 베가를 도운 것으로 이해한다(Keil & Delitzsch, Vol.III, p.393).

26 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27 유다 왕 아사랴 오십 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년을 치리하며

2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ㅇ베가가...이십 년을 치리하며 - 디글랏 빌레셀(Tiglath Pileser III)의 비문을 보면 앗수르가 B.C. 732년에 베가를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9절). 그리고 이 앗수르 왕은 B.C. 745년부터 727년까지 약 18년간 통치했기 때문에 이 중에서 므나헴의 통치기간 10년과 브가히야의 통치 기간 2년을 제외하면 베가에 해당되는 통치 연수는 불과 6년 남짓하다(Thiele). 그러므로 베가가 20년간 북왕국을 통치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딜리(Thiele)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말하는 20년이 북왕국 내의 지파 간에 전쟁이 일어난 햇수를 가리킨다고 본다.   한편 이러한 국내 분쟁이 발생한 기간은 유다 왕 아사랴 38년 즉, 북이스라엘 왕 스가랴(B.C. 753-752) 때부터(8절) 남왕국 아사랴 52년까지 약 14년 정도 된다. 그러므로 베가가 왕으로 단독 통치한 햇수는 6년에서 8년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달리(Thiele)는 요담 12년까지 약 8년 정도를 베가의 단독 통치 기간으로 보고 있다. 또한 본절에 나타난 베가의 20년간의 톤자치 기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의심을 품는 학자들도 있다. 즉 이 연대는 30절, 16:1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17:1에 의하면 베가의 후임 왕 호세아의 통치 기간은 9년인데, 이렇게 되면 베가의 즉위 연도인 B.C. 740년부터 '사마리아 함락'까지의 기간은 29년이 되는 셈이고, 사마리아 함락의 시기도 B.C. 711년경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사마리아 함락은 B.C. 711년경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사마리아 함락은 B.C. 722년에 이루어졌으므로 베가가 20년간 왕위에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인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연대 문제는 본문을 수정하지 않고도 해결될 수 있다. 즉 베가는 B.C. 740-732년까지 9년 동안 정식으로 왕으로서 통치했으나, 그 이전에도 길르앗 지방을 11년간 다스렸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25절). 다시 말해서 그는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나서 B.C. 752년경 길르앗 지방을 장악했으며,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통치권을 잡고자 기회를 넘보다가, B.C. 740년경 앗수르의 후원에 힘입어 쿠데타에 성공했고 이스라엘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길르앗 통치 기간까지 합한다면 그의 통치 기간은 B.C. 752-732의 20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절을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이십 년을 치리했다'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치리했고 또 한 이십 년을 다스렸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과 맞는다. 그러므로 전자에 대한 의심의 해결 방법과 후반부에 언급된 회의에 대한 해결책을 종합하면 비교적 정확한 해답이 나온다. 즉 베가가 북왕국을 통치한 정확한 기간과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ㅇ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이 이끄는 이 전쟁은 B.C. 739-732년에 일어났다. 앗시리아 침략의 직접적인 이유는 유다왕이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에 대항하기 위해서 앗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16:17).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디글랏 빌레셀은 이스라엘로 진군하여 갈릴리와 갈르앗 주변의 모든 성읍들을 파괴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는 마침내 디메섹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아람왕 르신을 처형시켰다(16:9).

ㅇ디글랏 빌레셀이 - 이 이름은 19절에 나타난 '불'이라는 바벨론식 이름과 동일한 앗수르 왕으로서의 정식 왕명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앗수르 왕이 정복을 목적으로 원정한 해가 B.C. 733년 경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B.C. 743년 경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B.C. 743년 1차 출정(29절)과 B.C. 735년 2차 출정(사 7:1-9)이후 세번째 출정이다. 그리고 이때에 디글랏 빌레셀은 팔레스틴 전역을 공격하여 이스라엘 도시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다시 B.C. 732년경 다메섹을 주목표로 재침공 했다(Jerusalem Bible).

ㅇ이욘 - '폐허'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이욘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벧벱마아가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곳은 벤하닷의 침략을 받은 납달리 자손의 마을(왕상 15:20)로서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한다.

ㅇ아벨벧마아가 - '압제하는 집의 초원'이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기럇 세모나 (Qirvat Shemona)의 북쪽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아빌'(Tel Abil)과 동일한 곳이다. 한편 이곳은 팔레스틴 북부 갈릴리 상부의 훌레 계곡에 위치했던 성읍(삼하 20:14, 15)으로 정치 선동가 세바가 요압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던 장소이다(삼하 20:14-22). 또한 이곳은 아람 왕 벤하닷에게 점령당했던 곳이기도 하다(왕상 15:20).

ㅇ야노아 - '나머지'란 뜻을 지닌 이 도시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대개 (1) 세겜의 남동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길벱 야눈(Khirbet Yanum)이거나 (2) 악고의 북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야노아(Janoah)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견해가 있으나 최근에는 (2)의 견해가 큰 지지를 받고 있다. 한편 이곳은 납달리에게 배당된 성읍인데 에브라임의 경계 지역으로도 알려진 곳이다(수16:6,7).

ㅇ게데스 - '성소'란 뜻을 지닌 이 도시는 아벧벱마아가와 하솔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두로 동쪽 약 36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텔 게데스'(Tel Kedesh), 혹은 '가데스'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은 납달리 지파에 속한 레위인들의 도피성(수 19:37 ; 21:32)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락의 고향이며(삿 4:6) 그가 드보라를 돕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킨 장소이기도 하다(삿 4:1-10).

ㅇ하솔 - '울타리 마을'이란 뜻을 지닌 이곳은 고대 훌레(Hulh)호수의 남쪽 약 8km지점에 위치한 큰성읍이다. 이곳은 가나안의 수도로서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당했다(수11:1-13). 그후 재건되어 납달리 지파에게 할당된 후(수 19:32, 36)솔로몬에 의해 요새화되었다(왕상 9:15). 한편 이 지역은 1950년 야딘(Yadin)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 큰 건물들이 불타 파괴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아마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

ㅇ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 - 이 지명들은 성경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요단 동편의 중부 고원지역에 위치한 길르앗 지방과 갈릴리 지역이 첨가된 것은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에 미친 재난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디글랏 빌레셀은 이 지역들을 장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북쪽과 갈릴리 방향인 서부지역을 쉽게 얻을 수 있었은 뿐만 아니라 하솔을 장악함으로 인해 다메섹까지의 진출이 용이하게 되었다.

ㅇ앗수르로 옮겼더라 - 앗수르의 공식적인 기록들에는 포로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복자로서 포로들을 납치해 가는 것은 앗수르의 정책상 정당한 것이었다(M. Cagan). 아마도 앗수르는 대외적인 명예를 생각해서 포로에 대한 기록을 생략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본 구절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주는 역대서에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속한 지명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어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대상 5:26). 또한 그후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7-722)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번째로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는 모두 신 28:36의 성취이다(Wycliffe).

30 웃시야의 아들 요담 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ㅇ요담 이십 년에 - 사 7:1-8:8을 보면 베가와 아람, 즉 소위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하여 남왕국 왕 요담의 후계자인 아하스와 싸웠다(16:5). 그런데 본절에서 베가가 요담 20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리고 요담이 예루살렘에서 16년을 통치했다는 33절의 기록과도 이 연대는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딜리(Thiele)는 베가 17년부터 아하스와 요담이 섭정한 것으로 본다(16:1). 그렇게 되면 요담과 아하스는 4년을 넘게 섭정을 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는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간접적인 증거로 아람 왕 르신(B.C. 750-732)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친 전쟁이 마치 요담과 아하스 때 두 번 있었기 때문에(15:37 ;16:5) 두 왕의 섭정 기간 동안에 치루어진 전쟁이라 보면 된다. 한편 본절에는 단순히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앗수르의 비문에 나타난 내용과 공식 문서들을 참고할 때 당시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디글랏 빌레셀3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디글랏 빌레셀은 북이스라엘의 내정까지 깊이 간여해 베가를 죽이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던 것 같다. 그러므로 디글랏 빌레셀이 호세아의 반역을 승인한 것으로 추측된다(Rawlinson, Wycliffe).

31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32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ㅇ베가 이 년에...요담이 왕이 되니 - 27절에서 베가가 요담의 아버지 아사랴의 52년 즉, 그의 마지막 통치 연도에 왕이 되었다는 기록과 본절의 연대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요담'은 여호와의 이름과 '안전한', '경건한', '순결한'이란 의미의 '타맘'이라는 동사가 합성된 형태로서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그는 웃시야(아사랴, B.C. 791-739)와 공동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아하스(B.C. 735-716)와도 공동으로 섭정했다는 일부의 주장(Thiele, Wycliff)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실제로 므나헴 2년부터 통치한 것이다(17절).

33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ㅇ십 육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말하는 16년은 요담이 그의 아버지 아삿랴(혹은 웃시야)와 함께 섭정하기 시작한 해부터를 말한다(Rawlinson, 대하 26:23 ; 27:1). 그리고 요담의 통치 16년은 북이스라엘 왕 베가 17년에 해당한다(16:1).

ㅇ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 여기서 '여루사'라는 이름은 매우 특이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루사'의 여성 능동 분사 형태인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동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레이(Gray)는 '예루살'이 이 말의 본래 형태라고 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요세푸스(Josephus)는 그녀를 '예리사'(Jerasa)라고 불렀고 역대기 기자도 본서와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어(대하 27:1) 그레이의 견해를 의심케 한다.

ㅇ사독의 딸이더라 - 사독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요담은 제사장 계열과 왕족 계열의 맥을 동시에 이은 자임이 분명하다. 한편 34절을 보면 요담에 대한 평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에 비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나 대하 27:2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제사장의 딸이라고 간주되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부친보다는 성전의 규례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34절 참조).

34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ㅇ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 본절과 평행 구절인 대하 27:2에서도 요담의 행위에 대해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서에서는 그가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가하고 있어 불경건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준다.

35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ㅇ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 '윗문'은 안마당, 혹은 윗마당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서(대하 27:3 ; 겔 9:2) 제물로 바쳐질 것들을 잡는 곳이다. 그러나 이 문은 북쪽 지방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세워진 듯하다. 그리고 이 문은 예루살렘 성전의 북쪽문을 말하는데 일명 '베냐민의 윗문'이라고도 했다(슥 14:10). 한편 대하27:3을 보면 요담이 오벧 성을 많이 증축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성읍을 많이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가 수도를 요새화하고 성읍을 건축한 것은 당시의 혼란한 국제 상황을 반영하는 것임과 동시에 여호와께 대한 그의 신앙의 자세를 반영하는 것이다(대하 27:6). 한편 역대기 기자는 이 뿐만 아니라 요담과 암몬과의 전쟁에 대해서 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대하 27:5).

36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ㅇ아람 왕 르신과 북왕국 왕 베가와의 동맹은 사 7:1-8:8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암몬과의 전쟁은 언급하면서도(대하 27:5) 본절과 같은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한편 이사야의 기록을 보면 베가와 르신은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위에 앉혀서 유다를 자신들의 동맹에 가담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일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르신과 베가를 저주했던 것이다(사 7:7-9).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믿음에 대한 예언이 주어졌던 것이다(사 7:10-14). 한편, 아람이 다브엘의 아들을 유다의 왕위에 앉히려고 한것은 그를 유다의 왕위에 세움으로 유다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르신과 베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경멸과는 달리 본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유다를 징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들의 기록 관점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한편 르신과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것이 두 번인지(16:5) 아니면 한 번인지, 그리고 한 번인지(16:5)아니면 한 번인지, 그리고 한 번이라면 왜 같은 사건을 두 번 기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대하 27:5 주석을 참조하라.

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38 요담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조상 다윗성에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이전글 : 왕하14
다음글 : 왕하16